북경대학교에 새로운 유학생 기숙사가 들어오는 것은 모두가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 온갖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는데, 오늘 현장을 방문하여 하나부터 끝까지 알아보았습니다. 그 동안 궁금했던 사항을 한 번에 풀어드리겠습니다.

돈 덩어리를 환영합니다로 보이는 건 나뿐일까나...



1. 현재 유학생 기숙사로 들어갈 수 있나요?
새로운 유학생 기숙사는 다 완공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단지 6호동만 완성이 되었으며, 약 240개의 침대가 준비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입주자격은 1년 이상 북경대에서 공부를 하는 자비 신입생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럼으로 반년이나 3개월의 단기어학연수는 입주할 수 없고, 재학생들 역시 입주할 수 없습니다. 또한 기숙사를 포함하는 장학금을 받는 사람들 역시 입주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나머지 기숙사가 완공되면 수용 가능 인원이 2000여명으로 늘어나기에 재학생도 받을 계획이라고 합니다. 이 경우도 장기위주로 받을 것으로 보이며, 장학금은 받지 않을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기숙사는 내년(2010년) 9월 이후에는 입주가 가능할 것이라고 합니다. 단지 현재 6호동 옆에서 거의 완성단계에 있는 4호동은 조금 일찍 받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 정확하게 결정된 사항은 없습니다.

확실히 신상은 다르다. 예쁘긴 하다.





2. 가장 중요한 방에 대한 정보들
A형은 방 2개에 거실 하나 그리고 화장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방 하나에 2명이 살게 됩니다.그러니 총 4명이서 사는 것입니다. 지금 샤오위엔 8호동 보다 조금 더 크지만, 한 방에 2명씩 살게 됨으로 사실상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줄고, 비용은 비싸지는 상황입니다.

A형 전경. 딱 봐도 좁아보이지 않는가?

창문 옆에서 자면 기분이 좋으려나. 아님 아침마다 괴로우려나.


정확하게 평수는 모든 것을 다 합쳐서 44평방미터이지만 한 크기가 약 14평방미터이고, 그것을 2명이서 나누어서 쓰는 것이기에 한 사람당 7평방미터밖에는 사용하지 못합니다. 사진으로 보셔도 비좁다는 느낌이 드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가구는 그래도 설계가 잘되어 있다. 하지만 상당히 부족해보인다.

겉보기는 예뻐보이나 실제 공부할때에는 그리 유용하지 않을 책상과 의자.


가구는 신상이라는 느낌이 팍팍 들고, 옷장은 나름 괜찮은 수준입니다. 그러나 책상과 의자가 상당히 문제가 심각합니다. 책상의 높이는 상당히 낮아서 공부하기 불편한 수준이고, 의자는 무슨 생각인지 색도 맞지 않는 야시장 의자입니다. 여기서 공부하는 것은 글렀습니다.

거실의 모습입니다. 4명이서 쓰기에는 너무 좁아보입니다. 솔직히 샤오위엔 6호동의 거실보다 더 작은 듯도 합니다.

대략적인 크기를 아시라고 모델역할을 해주신 삼국지의 유표님~~ 감사감사~


이 곳의 한 사람당 가격은 하루에 64위엔(약 만삼천원)이며, 한달(30일)로 계산을 하면 1920위엔(약 40만원)이나 됩니다. 그리고 방을 혼자서 쓸 수도 있으며, 이 경우 정확하게 2배 가격인 하루 128위엔을 내야 합니다. 아예 모르는 분을 위해서 잠시 설명을 드리자면, 샤오위엔勺园의 꾸린 1,2,3호동은 하루에 30위엔이어서 한달에 900위엔이며, 사실상 새로운 기숙사와 시설이 비슷하고 오히려 좋은 6,7,8호동은 한달에 1800위엔정도입니다.

화장실이다. 심히 비좁다. B형도 동일한 화장실이다.

4명이서 한 화장실을 쓰는 거나 공동화장실이나 머가 다른걸까?







B형은 방 하나에 화장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방 하나에 2명이 살게 됩니다. 방의 크기는 위에서 설명한 A형 방과 거의 비슷하고, 정확하게 말하면 조금 더 작습니다. 이 방의 크기가 샤오위엔의 1,2,3호동의 방의 크기와 거의 비슷합니다. 단지 폭이 좀 좁은 길죽한 모양입니다.

더 좁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가구배치를 이따구로 했을까? 차라리 2층 침대는 놔두지..후...

사람과의 비교를 위해서 희생해주신 삼국지의 유표님께 감사를...


정확하게 평수는 모든 것을 다 합쳐서 22평방미터이지만 한 크기가 화장실을 제외하면 실제 생활공간은 약 14평방미터이고, 그것을 2명이서 나누어서 쓰는 것이기에한 사람당 역시 7평방미터밖에는 사용하지 못합니다. 이곳도 사진으로 보시면 아시겠지만 비좁죠?

높이가 큰 것과 재질이 좋은 것은 마음에 드나 기본적으로 설계자체가 꾸려서 공부하기에는 에러.

의자에서는... 난 침묵하고 말았다. 허허허;;;;


가구는 기본적으로 A형과 동일합니다. 단지 가구 배치가 조금 다른 모습입니다만, 어차피 가구배치야 입주한 사람들이 마음대로 변동할 수 있기 때문에 별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구석에 쳐박혀 있는 책상이여. 일사광선 제대로 받으며 공부를?;;;

아... 한숨만이 나오는구나.


이 곳의 한 사람당 가격은 하루에 70위엔(약 만사천원)이며, 한달(30일)로 계산을 하면 2100위엔(약 42만원)이나됩니다. 그리고 이곳도 역시 방을 혼자 다 쓸 수 있습니다. 가격은 A형처럼 2배 가격인 하루 140위엔을 내야합니다.





3. 부대 시설
각 층의 양쪽에는 다용도실이 있어서, 빨래와 요리를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샤오위엔과 거의 비슷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샤오위엔과 비교해서 비교적 까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세탁기가 한 층에 4개밖에 없다는 것은 세탁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하이얼세탁기~~~

유료다. 가격은 그럭저럭.


세탁기는 한 층에 양측에 2대씩, 총 4대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무료가 아닌 유료입니다. 표준 세탁은 동전으로 3원을 넣어야 합니다. 그렇게 비싼 금액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역시 걱정이 되는 것은 이불빨래를 널을 수 있는 공간이 없고, 방도 비좁아서 특별히 세탁물을 놔둘 곳이 없으리라는 점입니다.

이 주장은 정말 부러웠다. 나 가정주부 다 된건가?

싱크대도 상당히 깔끔하고 좋았다^^ 잇힝~


상당히 마음에 드는 조리구역입니다. 다용도실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깔금하게 되어있어서 편안하게 요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귀차니즘에 시켜먹거나 학교식당에서 먹는 상황에서 한층에 2개씩 있는 요리구역은 충분해 보입니다.

안전을 위한 비상구의 모습입니다. 머...특별히 예쁜 것은 없군요.




지하 2층에는 식당이 있습니다. 아직 식당이 들어와 있지는 않으나 10월중순정도부터는 영업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방식은 학교식당식이 될 것으로 예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맛은 학교식당급에 가격은 몇 배 부르는건 아니겠지요?

예쁘지 않은가? 식당으로 가는 길이다. 참고로 기본 출입구층은 B1, 즉 지하1층이다. 계단 말고 엘레베이터도 당연히 있다.

아직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은 식당전경.





4) 총평
가능하면 신 기숙사로 들어가지 마시고, 왠만하면 샤오위엔(勺园)의 6,7,8호동을 들어가기를 강력추천합니다. 새로운 기숙사는 비용은 비싸고, 개인 공간을 줄어들었고, 공간배치도 엉터리이며, 법학과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경우에서 수업하는 교실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또한 내년 초까지는 계속 공사가 진행되기에 조용하지도 않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직원분은 친절하게 대응해주고 참 좋았으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기숙사보다 좋지도 않은 시설과 구조로 더 비싼 돈을 받는 것 때문에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없습니다.




5) 그 외의 사진들.

전설의 철문이 열린다~~ 두둥. 농담이고, 현재 이미 입주한 사람들도 있다.

요것이 6호동.


북경대학교 박사후(포스닥) 숙소.

현재 열심히 만들어지고 있는, 1,2,3,4,5호동. 참고로 가운데 있는 1호동은 유학생기숙사가 아닌 호텔임.


많은 한국 사람들은 뉴스에 해외에서 한국 사람들이 인종 차별을 받았다고 하면 발끈하고는 한다. 그런 뉴스의 덧글들을 보면 한반도의 모든 욕을 집대성해놓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그러나 정작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인종 차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본인은 현재 북경대학교에 다니고 있다. 중국에 있는지도 상당히 오래되었고, 패션도 한국에서 다닌 중고등학교때부터 꾸미는 것을 몰라서 그냥 적당히 손에 잡히는대로 입고 다닌다. 그러다 보니 재미있는 일을 많이 목격하기도 하고 당하기도 하였다.


1) 본인이 한국인에게 인종차별 당한 이야기.
지금은 학교 기숙사로 이전했지만, 과거에는 우다오코우(五道口 오도구)에서 지하철을 타고 가야되는 롱저(龙泽)라는 곳에서 살았다. 당시만 해도 지하철 13호선을 타는 한국인은 매우 소수였고, 롱저에 살고 있었던 한국인도 소수였다.

언제나처럼 지하철에 탔다. 그 날은 이미 저녁 8시도 지나있어서 사람이  많지는 않았으나 자리에 앉을 정도는 아니었다. 본인은 문자중독증을 그대로 들어내며 당시 나의 사랑스러운 1.1kg의 초경량 도시바 r150 노트북을 꺼내서 한국 소설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앞에서 한국 여성 3분이서 열심히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하며 그냥 소설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그 때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여성 3분이서 본인을 타켓으로 수다를 떨어주시는 것이었다.

"어머~ 별 꼴이야. 지금 노트북 있다고 자랑하는거야?" (그냥 문자중독-_)
"하여간 짱깨들은 이래서 안된다니까. 예의가 없어" (앞에서 욕하는건 예의고? -_)
"노트북 들고 있으면 있어보인다고 생각하나보지?" (별로 겉모습에 신경 안쓰는데-_)
"옷을 저따구로 입어놓고 잘도 있어보이겠다." (입고 있던 옷...개량한복이었다.-_)

순간 어이가 저 멀리 날아가는 줄 알았다. 사람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으면 화도 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고개를 올려서 바라보니 내 눈을 피한다. 그러나 "짱깨가~~~ 어쩌고~~~저쩌고~"는 끊나지 않는다. 짜증이 나서 노트북을 덮고 한숨을 한 번 내쉬어 주고 말았다. 나중에 여친님이 그 이야기를 듣고는 그 자리에서 자기한테 전화해서 한국말로 그 상황을 설명하지 그랬냐고 한다. 그래야 그런 애들은 정신 좀 차린다는 것이었다.

상대방이 한국말을 알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일까? 본인이야. 그런 모습을 보고서 그냥 한숨을 쉬고 말았지만, 만약 한국이 좋아서 한국말을 배우고 있는 중국인이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과연 그 다음부터 그 중국인은 한국인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될까?


2) 한국어를 아는 "깜둥이"
실제로 본인이 시즐먼(西直门 서직문)에서 13호선을 타고 오는 길에 벌어진 또 다른 일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본인은 당시 노트북을 가지고 가지 않아서 조용히 벽에 기대어서 인간관찰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인 여성 2분이서 마주보고 있는 흑인을 보며 열심히 입방아를 내려치고 있었다.

"아우~~ 깜뚱이. 냄새 졸나나"
"그치그치. 깜뚱이 냄새 진짜 독하다."

본인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마디 하려는 순간에 그 "깜뚱이"분이 비록 정확하지는 않지만, 또렷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말로 이야기하였다.

"저 한국에서 공부했습니다. 깜뚱이는 안 좋은 말입니다. 쓰지 말아요."

그 이야기를 듣을 본인은 두 한국인 여성에 대한 살기가 저도 모르게 뿜어져 나오는 동시에 낯 뜨거워서 몸둘 바를 모를 상태가 되었다. 그러자 그 여성들은 조용히 사과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여성들과 본인이 같은 곳에서 내리게 되었는데 그 사람들은 그 흑인분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깜둥이가 한국말도 하네. 왠일이니!" 본인 황당함에 얼음이 되어서 무엇이라 할말도 없었다. 당시 머리 속에는 수 많은 욕설과 살의로 마비되어있었다. 허허허...


3) 한국에서 영어를 제외한 외국어를 사용해 보시길 권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외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다. 아니면 말도 안되는 말을 진지하게 할 수 있다면 역시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 경험을 단 한번만 해보시면 한국에 대한 자랑스러운 이미지가 쓰레기통으로 쳐박히는 참~~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신이 평소에 한국인이어서 느끼지 못했던 외국인으로서의 한국인을 알 수 있게 된다. 싸늘한 눈빛은 기본이고 대놓고 욕하는 사람까지 참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물론 친절하게 응대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극소수에 불과하다.

만약 위에서 거론한 이야기가 한국인이 당했던 인종차별이라면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우 화를 내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에서는 너무나 무관심하다. 한국만큼이나 짱깨, 깜뚱이, 쪽발이 같은 말을 일상에서 쉽게 이야기하는 곳은 없다고 생각된다. 물론 어떤 나라에나 인종차별적인 발언은 있다. 그러나 한국만큼 자주 사용하는 곳은 본적이 없다. 본인이 당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자.


본인은 단지 내가 받기 원하는 대접만큼 상대방을 존중하라는 초등학교 수준의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정도의 상식만을 실천하며 살았으면 하는 것이다.



의외로 중국에 관련된 일을 하시거나 전공자임에도 인터넷 중국어 사전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각주:1]. 인터넷 사전은 매 순간 갱신되고, 기존의 종이사전으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것들을 해낼 수 있기에 알아두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각주:2].


1. 汉典 - 현재까지 최고의 중중 사전[각주:3]. http://www.zdic.net/
중국어가 대략 HSK6급이 되면 이제 중중 사전을 보아야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 때부터는 중국어를 외국어로 배우는 것이 아닌 모국어로 배우는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HSK 6급정도는 대략 초등학교정도의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중중사전을 보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무지막지 힘들지만, 나중에는 진정한 "중국어"을 구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중사전부터 추천합니다.


제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인터넷 사전입니다. 현재 인터넷에 있는 인터넷 사전중에서 가장 높은 완성도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강희자전과 자형까지 같이 모아둔 것은 관련 전공자들에게는 매우 쉽게 관련 항목을 검색할 수 있게 해주기에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알아두셔야 될 곳입니다.


검색을 하면 나오는 기본 화면입니다. 간자체와 번체자가 같이 나오며, 그 외에 글자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들이 모두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자료는 많지 않지만 방언계열의 발음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해당 글자의 뜻과 활용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왠만한 종이사전정도의 내용은 모두 있기에 굳이 종이사전을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사원(辞源)이나 사해(辞海)와도 비교할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래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위키처럼 네티즌 스스로가 계속 보충-수정할 수 있게 되어있으니 앞으로 점차 더욱 더 강력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강희자전(康熙字典)의 내용입니다. 이 부분을 활용하실 분들은 다들 전공자들이니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듯 합니다. 강희자전에는 기존의 중국의 자전등의 내용이 합쳐져 있습니다. 고대의 한자 해석에 대해서 간편하게 알 수 있는 곳이며, 귀찮게 종이사전들을 들고다니며 찾고 있지 않아도 됩니다[각주:4].


지금은 통일한자체를 쓰고 있지만, 과거에는 한자가 통합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지금도 중국대륙-타이완-한국-일본 각지에서 쓰이는 한자가 다릅니다. 그렇기에 서로 다르게 쓰인 글자를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사전은 그런 다른 글자들의 자형들을 통합적으로 보여줍니다. 제가 韩자를 골라서 비교적 적습니다만, 자형의 변화가 많은 글자에서는 더욱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각주:5].



 2. CNKI 翻译助手 - 최고의 학술전문 번역 도우미 (중영 - 영중) http://dict.cnki.net/
CNKI는 National Knowledge Infrastructure(국가지식기초설비)의 약자로서, 한국의 KSI KISS(학술데이타베이스)와 비슷한 성격의 곳이라고 보시면 됩니다[각주:6]. 그리고 이곳에서는 자체적으로 학술전문의 인터넷 사전이 존재합니다. 학술관련 전공단어들은 중한-한중 사전에는 아직 등록이 되지 않은 것이 넘쳐흐르기에 일단 영어로 번역하고 그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을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3. nciku - 네이버가 만든 유용한 중영-영중 사전   http://www.nciku.com/
Nciku은 한국 포털의 절대자 네이버가 서비스를 하고 있는 중영-영중 사전입니다. 현재 영어를 공부하는 중국학생들과 중국어를 공부하는 영어권학생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방문자를 늘려가고 있습니다. 특히 초보자를 위한 다양한 배려(상세히 발음을 명시해주는 등)는 여러분들에게 상당히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러나 열심히 데이타베이스화를 하고 있지만 전문단어에서는 아직 부족하고[각주:7] 네이버를 운영하는 NHN이 만든 서비스인데도 한중-중한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히 아쉬운 일입니다.



4- 百度知道 - 바이두 지식인. 사전이 아니라고? 이것이야 말로 살아숨쉬는 사전!
바이두즐다오는 네이버의 지식인과 같은 존재입니다. 한국의 지식인계열의 서비스를 벤쳐마킹해서 만들어낸 서비스인데, 사전 이야기를 하면서 갑자기 왠 지식인냐고? 어떻게 보면 바이두즐다오야말로 진정한 살아쉼쉬는 사전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나라 사람이든 결코 표준어만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다양한 은어를 사용하고, 욕도 사용하게 됩니다. 그런데 발행되는 사전에는 이러한 말들이 올라가지 않는다. 표준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 언어사용에서는 이러한 표준어가 아닌 말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바이두 즐다오입니다[각주:8].

"囧"이라던지 "信春哥,得永生"과 같은 유행어들은 바이두 즐다오를 통해서 알아보셔요^^



5- Daum사전 VS Naver사전 - 누가 한중-중한 사전의 강자인가?
결론부터 내리면, 초보자에게는 네이버사전을 추천하며, 한자에 대해서 잘 아시는 연배의 분들에게는 다음 사전을 추천합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는 제가 비록 네이버까이지만 냉정하게 분석해서 네이버 사전이 더 좋습니다.



네이버 사전은 마우스를 통한 필기인식을 제공합니다. 사실 초보자들은 해당 한자의 발음을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인터넷에 해당 한자를 입력하는 것 자체를 위해서 종이사전을 찾아야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런데 네이버 사전은 마우스를 통한 필기인식을 제공합니다. 이것은 초보자들에게 어마어마한 차이입니다. 다음 사전! 반성하세요!

다음 사전은 검색 결과가 통합적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이미 중국어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 번역작업을 위해서 검색을 하는 경우 미묘한 표현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좋습니다[각주:9]. 또한 중국어변환기를 제공하기에 한글발음이나 독음등은 이미 알지만 중국어를 모르는 경우나 번체를 간체로 혹은 간체를 번체로 바꾸는 등의 고급툴이 제공되기에 상당히 유용합니다.



6- 그외의 전문 인터넷 사전 목록 :
이 부분은 진정 전공자들만을 위한 부분이기에 더욱 더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전공자라면 아래의 제목만 보고도 필요한 여부를 판단하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궁금하신 것이 있거나 보충하실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덧글을 통해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异体字字典(繁体)(전공자들에게 필수!)
东东错别字词典(繁体
한자 중고음과 상고음 쉽게 찾아보기
快典网(영-한국어-일본어-티벳어-아랍어-러시아어등 다국어 멀티사전 및 다양한 도구)

* 快典网에는 악성코드가 있기에, 직접 검색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구글이나 바이두에서 “快典网" "검색하고자하는 단어"의 형식으로 검색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또한 IE 전용에 가깝기에 저로서는 자주 이용하지 않는 곳입니다. 단지 활용도가 엄청낮은 단어의 경우 이곳을 통해서 검색하시는 하면 다른 외국어를 통해서 한국어 단어를 검색 혹은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인문사회계열(인문,정치,종교) 사전
青铜辞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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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药词典
农业词典
涂料词典
农药英汉词典
香港小食小字典(繁体)



7- 간략 실전 번역 테크닉.
중국어-> 한국어의 경우, 중국에서는 번역하는 원문을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이를 다운받아서 그것을 기반으로 번역을 하다가 모르는 한자가 나오면 검색하면 된다. 기본적으로는 汉典으로 중국어뜻 자체를 파악하고 마음 속에 떠오르는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합당하다. 차선책은 다음사전을 통해서 검색을 하고, 다양한 예시중에서 적합한 것을 고른다. 번역을 하다보면 전문계열의 단어가 나와서 汉典이나 다음사전에 없는 경우가 의외로 많이 발생한다. 이 때에는 소개해드린 중영 싸이트에 검색을 하거나 전문사전싸이트에서 해당 단어를 찾아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사전을 만드는 것이다. 기존의 한국에서는 "한글"에 있는 사전 기능을 자주 이용하였다. 본인의 경우 전문적인 번역의 길로 나갈 생각이 없기에, 특별히 사전을 만들지는 않고, 중국어원문을 보며 전체 문장에 그때 그때 합당한 한국어를 고민하지만, 전문번역의 길로 가시려면 결코 이러하여서는 안된다.

한국어 -> 중국어의 경우는 설명할 필요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한국인이 한국어->중국어를 한다는 것은 무서울 정도의 중국어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굳이 조언이 필요가 없을것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조언을 하자면 한국에서는 영어를 그대로 도입한 표현이 많음으로(특히 IT   에서는..-0-), 이를 번역할 시에는 해당 말의 원래 영어단어를 찾고 그것을 중국어로 검색해보는 것이 더욱 정확한 번역이 될 때가 많다.

사실 번역시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자주 이용하는 것이다. 번역을 하면 할 수록 외국어 수준뿐만이 아니라 모국어인 한국어에 대한 자괴감에 몸부림칠 것이라 장담한다. 한국어 너무 어려워!!! ㅠㅠ


위의 내용에 대한 어떠한 수정-보충도 환영합니다.
덧글을 통해서 많은 정보를 주셔요^^

  1. 특히 어느 정도 나이가 있으신 분들은 종이로 된 사전을 찾는 것에 익숙하시고, 인터넷 사전에 대한 불신이 있기에 배척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어느 정도 남아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본문으로]
  2. 전공논문작업을 할 때에는 인터넷 사전"만"을 참고하면 당연히 안됩니다. 반드시 재확인이 필요합니다. 어디까지나 검색의 용이성과 유용한 도구로서 활용을 해야됩니다. 인터넷 사전은 아직 분명히 정확성의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라고 해도 종이 사전도 그런 문제가 없는것이 아니지만...) [본문으로]
  3. 중국어 수준이 약 HSK 6급 정도가 되시면 무조건 중중사전을 보라고 권해드립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의미의 도약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어를 중국어 자체로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고 없고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번역이나 통역은 중국어 자체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몇가지 기술만 추가하면 쉽게 해결될 문제입니다. [본문으로]
  4. 강희자전을 옮겨놓은 것인데, 인터넷 사전의 가장 큰 문제인 오타를 네티즌의 참여로 최소화하였습니다. 거의 오타가 없다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본문으로]
  5. 어차피 이런건 전공자만 사용할 것인데 왜 굳이 이런 설명을 하고 있는건지-_;; [본문으로]
  6. 나중에 꽁짜로 이곳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올려보겠습니다. 땡기시죠? 킥킥.. [본문으로]
  7. 현재 투자를 하고 있고, CNKI쪽의 데이타도 계속 보충을 하고 있으니 조만간 이쪽 데이타가 더 강력해질수도 있다.(친구가 이 작업 하고 있음.-_;;........본인도 몇가지 전공관련 용어를 알려준...쿨럭....) 다만 네이버는 직원들에 보충이 아닌 사용자들의 참여을 통한 보충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시점이라고 본다. [본문으로]
  8. 그런 단어가 왜 바이두지식인에 있냐고요? 당신은 "품절남"이라던지 "정ㅋ벅ㅋ"의 유래에 대해서 물어보는 한국사람을 본적이 없으십니까?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본문으로]
  9. 네이버도 당연히 이런 기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클릭을 하고 들어가야된다는 치명적인 번거로움이^^:: [본문으로]
일단 결론부터 내리자면 본인도 모르겠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현재의 사료로는 해석불가능에 가깝다. 굳이 개인적인 판단을 하자면, 거칠게 말해서 신라왕족이 김일재의 후손이라는 것에는 부정적이고, 신라왕실에 흉노의 영향을 받은 동호계열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고 본다. 일단 현존하는 사료만을 토대로 이야기를 해보자. 

참고로 아래쪽의 글은 그리 정리가 되어있지 않다. 본인도 고민중이기에 마구잡이로 사료와 증거을 나열하고 해석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또한 머리속으로만 생각하고 쓰지 않는 부분도 있다. 이점 염두에 두고 보시기를.....

1- 大唐故金氏夫人墓銘
(화질이 너무 안 좋아.ㅠㅠ 화질 좋은 것이나 판독문있으신분? ㅠㅠ)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 하니,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世祖)시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서 온천하에 만연하니 이미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제<石+單>)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황제께서) 그를 발탁해 시중(侍中)과 상시(常侍)에 임명하고 투정후(투<禾+宅>亭侯)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京兆郡)에 정착하게 되니 이런 일은 사책에 기록되었다. 견주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몇 세대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한(漢)이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

문선왕(文宣王.공자의 시호)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에는 성실함과 신의가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독실하고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비록 오랑캐 모습을 했으나 그 도(道)를 역시 행하니, 지금 다시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듯 번성했다.

부인의 증조는 이름이 원득(原得)이시니 황실에서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추증되셨고, 할아버지는 성함이 충의(忠義)시니 한림대조(翰林待詔) 검교좌산기상시(檢校左散騎常侍) 소부감(少府監) 내중상사(內中尙使)라는 벼슬을 지내셨다. 아버지는 성함이 공량(公亮)이시니 한림대조 장작감승(將作監丞) 충내작판관(充內作判官)을 역임하셨다.

조부께서는 문무의 예리함에 여유가 있어 평자(平子.유명한 천문학자)를 궁구하여 관상(觀象)의 규모를 관찰하셨고, 공수자(公輸子.저명한 기술자)를 궁리하여 신과 같은 기술을 갖추셨다. 이에 기예로 천거받아 금문(金門.황실 혹은 조정)에 들어가 여섯 조정을 섬겨 봉록과 직위를 갖고서 처음부터 끝까지 훌륭한 삶을 살다 아름답게 마치셨다.[각주:1]

-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 번역 (원문 전문이나 쫌..ㅠㅠ)


위에서 나오는 김씨부인의 할아버지인 김충의는 신당서[각주:2]에서 명확하게 신라인으로 말해지고 있고, 시대도 거의 동일하고, 관직도 부합하여 사실상 동일인물로 판단된다. 또한 당시에는 아직 성씨제도가 제대로 도입되지 않았기에 성씨위조의 가능성도 별로 없다. 그럼으로 신라에서 온 김씨는 신라왕족의 김씨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신라왕족은 흉노의 후예일까?


2- 신라문무대왕릉비(新羅文武大王陵碑)
侯祭天之胤傅七葉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신라문무대왕릉비를 보면 위에서 나오는 신라왕가 흉노설의 원류를 볼 수 있다. 투후는 바로 흉노 김일재이며 제천지윤은 금인을 바치고 하늘의 제사를 하고 관직에 봉해져서 7대동안 내시로 있다.[각주:3]

그럼 이 것으로 신라왕가의 흉노설이 완벽해졌느냐? 이 증거로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문제는 고고학적으로 김일재가 어떻게 신라로 유입이 되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시에 신라로 무조건 찾아오는 것은 문제가 있고, 분명히 여러번 이동과 거주를 반복하면서 왔을 터인데 그런 흔적이 최소한 지금으로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1-2번 통합적 의문 : 문제의 핵심은 사료 증거가 오직 위의 두 비문뿐이고, 묘지명은 온갖 구라들의 조합이라는 것이 다. 조상이 아님에도 과거의 먼 옛날의 위대한 사람을 끌어와서 억지로 조상으로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혹자는 조상을 속일까라고 하지만, 만약 위로의 몇대 부분이라면 믿을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위의 비문의 "부인의 증조는 이름이 원득(原得)이시니 황실에서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추증되셨고, 할아버지는 성함이 충의(忠義)시니 한림대조(翰林待詔) 검교좌산기상시(檢校左散騎常侍) 소부감(少府監) 내중상사(內中尙使)라는 벼슬을 지내셨다. 아버지는 성함이 공량(公亮)이시니 한림대조 장작감승(將作監丞) 충내작판관(充內作判官)을 역임하셨다."와 같은 부분은 충분히 믿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조상이나 먼 과거의 조상이 쌩뚱맞게 나오는 경우. 구라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많이 언급을 하면 할 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런 이유로 본인은 위의 사료에서 처음부분에 조상이라고 하면서 몇 줄이나 나와버리는 흉노 김일재와 그 후손이 너무나 의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신라라는 당시의 명칭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계속 요동에 머물렀다고만 쓰여진 것은 그런 의심을 더욱 크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설령 김일재가 실제 조상이 아니더라도 신라왕실이 흉노의 김일재를 조상을 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두가지 가능성을 검토할 수 있다. 한가지는 신라에서 자생적으로 金씨 성이 만들어졌고, 훗날 중국땅에 김씨 성을 가진 유명한 사람이 있으니 따온 가능성[각주:4]과 실제로 흉노의 일파가 내려와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고, 그들이 중국에 있는 김일재를 보고 성을 가져다 붙였을 가능성이 있다.



3- 고인돌 유전자 친연성

최 근 고인골의 유전자 정보를 가지고 고대 인종들 간의 친연성을 찾아보려는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유라시아 지역의 흉노 무덤에서 발굴된 유골과 우리나라 고인골 간의 연관성을 추적한 결과는 놀라웠다. 인골들간의 상호관계를 실험한 결과 스키타이와 흉노, 신라가 하나의 그룹으로 묶인 것이다. (역사스페셜)

본인도 북방민족이 많이 넘어왔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위의 그래프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우선 신라와 흉노사이의 간격이 상당히 먼데 같은 그룹으로 묶는 것은 너무나 자의적이다. 연관관계가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나 흉노의 직접유입을 말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고로 이 자료는 잘해봐야 방증이고, 사실상 증거가 되지 못한다. (또한 중국북부의 동시기 인골들의 DNA나 다른 쪽의 DNA 분석과의 비교가 되어 있지 않다. 이는 분명히 문제가 된다.)



4- 김일제(金日磾)와 김알지(金閼智)의 연관성
저자의 신라어 해석 중 김알지를 '금(金) + 금(金)'이라고 본 것은 탁견으로 알지란 Alt(금)에 i가 첨가되어 구개음화(Alt+i 〉 Alji)가 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인용된 알씨(閼氏)는 몽골어 카톤(왕비)에 대비되는 흉노어 아씨(Assi)의 음역이다.(박원길 '새끼 중국인'들 득세하는 사학계에 '통쾌한 도발')


日의 고대 발음은 M이 포함된 "미"와 비슷했으리라 여겨지고 있다[각주:5]. 그래서 현재 중국에서도 김일재의 일만은 mi 로 발음되고 있다[각주:6]. 그리고 알지의 알의 고음은 이와 확연히 다르다[각주:7]. 문 제는 김일제의 일은 분명히 흉노어의 음역이지만, 알지의 알은 흉노어의 음역일 가능성의 증거자료가 부족하며, 설령 흉노어의 음역이라고 하여도 김일제와 김알지가 동인인물이라는 것은 무리가 있는 해석이고, 서로 연관이 있다고 하는 것도 언어의 전파성을 생각하면 하나의 설일뿐이다.

무엇보다 위의 해석은 언어학적으로 너무나 위험하다. 차용어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몇몇 단어만을 가지고 추론하기에는 현재까지 남겨진 고구려-신라-백제의 언어자료가 너무나 빈약하다. 고로 위의 말은 하나의 "설"로 존중 받을 만 하지만,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또한 위의 말을 완전히 믿는다고 가정하여도 문제는 남는다. 또한 김알지 신화는 탈해왕 때 나온 것인데, 탈해왕은 AD 57~80년 사이의 인물로 김일제의 후손이 왕망의 신나라에서 나온 시기가 23년 이후인데, 개인적으로 시기가 그리 맞지 않는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쪽의 7번 항목에서...



5- 무덤 양식
신라는 평지형 무덤이나 구릉형 무덤의 시기가 명확히 구분[각주:8]되고 또 평지형 무덤에서 출토되는 유물이 동방계열보다는 서방계열 유목민족의 유물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에서 그간 많은 학자들의 고뇌를 유발시킨 미스테리의 국가다. (박원길 '새끼 중국인'들 득세하는 사학계에 '통쾌한 도발')

황금 유물과 적석목곽분 그리고 새 토템 : 왕권을 강화하고 신라의 발전을 이룬 내물왕의 무덤을 경주 고분군들 중에서 가장 큰 황남대총으로 보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그런데 이 황남대총의 독특한 무덤 양식, 화려한 황금 유물들, 그리고 신라 김씨 왕족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설화에 등장하는 새. 이 세 가지는 모두 금을 숭배하고, 적석목곽분을 묘제로 사용하며, 새를 토템신으로 여기는 유목 민속의 풍습과 일치한다. 이를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봐야할 것일까?(역사스페셜)

새토템 자체는 북방민족뿐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 퍼져 있던 태양 숭배 사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니, 새토템으로 이 사실을 판단하기는 곤란하다. 무덤양식부분에서는 본인 지식의 한계로 위에서 나온 말을 따른다면, 흉노는 모르겠으나 북방민족의 유입은 확실시 된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북방민족이 흉노였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는 현재 유물 자체만으로는 판단 불가능이다.



6- 당대 사람들의 인식은 어떠하였을까?
(宋)鄧名世撰,王力平点校《古今姓氏书辩证》
出自匈奴休屠王,太子日磾,字翁子,是(汉)武帝。。。。。。帝以休屠作金人,为祭天主,因赐姓金氏。。。。。。。唐贞观所定益州蜀国郡三姓,一曰金氏。汾州河西郡四性,一曰金氏。又唐新罗国王姓金氏。。。。。。

일단 위의 책은 송대에 만들어진 중국에서는 가장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는 성씨고증책이다. 또한 현재 문제가 되는 당대와 가장 가까운 시대이기도 하다. 문제는 해당 책에서 김씨의 유래는 분명히 흉노 김일재(日磾)로 잡고 있지만, 신라의 왕족과는 완전히 분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신라의 왕씨인 김와 흉노의 김씨와는 서로 다른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당대에 수 많은 신라인들이 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료를 통해서 보면 흉노와 신라왕가가 서로 관련이 없다고 판단된다.



7- 흉노의 후예라고 가정했을 시.
1- 유입 시기의 문제
김일재가 BC134이니, 1대를 20년으로 잡으면 120년 이후, BC 14년이고, 1대를 25년으로 잡으면 AD24년이고, 1대를 30년으로 잡으면 AD 76년이 된다. 그럼 대략 왕망의 신나라[각주:9]가 망하고 나서 요동으로 갔다. 그리고 비문에는 안나오지만 다시 한반도로 갔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신라 탈해에서 김알지 신화가 나온다. 탄해왕의 재위기간은 보통 57~80년인데, 왕망의 신나라가 망하고 24년만에 원거주지와는 머나먼 곳에 와서 왕이 된다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물론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김일재 직계후손들의 유입가능성은 상당히 줄어든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직계가 아닌 방계 흉노들이 들어왔을 가능성인데, 개인적으로 이와 같은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본다. 그 이유는 신라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서방계 유물들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이론도 상당한 문제가 있다. 서방계 유물이 흉노계라고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신라는 인도쪽에서도 왔었다. 다시 말해서 인도를 경유한 서방계 유물일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냥 흉노라고 하지만, 그 안에는 수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 말도 서로 통하지 않을 정도의 사람들이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방계가 들어왔다고 그 영향력이나 흉노의 핵심과 얼마만큼의 영향력이 있는지 이야기하는 것 자체도 상당히 힘든 문제이다.

2- 고대 민족 이동에 대해.
고대의 민족 이동은 지금과 같이 4명 가족 정도가 비행기를 타고 이민을 가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거대한 씨족 사회로서 그 구성원이 모두 동시에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각주:10]. 그런 의미에서 김일재 후손이 신라로 유입된 것을 믿는 사람들은 김일재 유입 이전부터 신라에 일정한 근거지가 있었기에 그 후손들이 신라로 넘어온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신라가 상당한 국제화 사회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반대로 신라에 근거지가 없었기에 후손이 아예 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의 증거가 된다. 하지만 어느쪽인지는 판단불가.ㅠㅠ

3 - 그런데 흉노는 위프를 한것이냐?
흉노가 신라에 왔다. 대흥안링부터 시작해서 내려왔다고 하더라도, 요동과 한반도를 완전히 가로지르는 길이다. 또한 초원지대와는 다른 산악지대를 지나야 되는 코스이다. 그래. 흉노가 미쳐서 길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초원이 아닌 산악지대로 내려왔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중간에 흔적이 있어야 한다.

지금과 같이 한두명이 움직이던 시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별 영향력이 있을 수가 없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동반을 한 씨족-부락단위의 이전인 것이다. 그럼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흔적"이 발생해야된다. 문제는 흉노가 비행기를 타고 온 것처럼 고구려나 발해에는 어떤 흔적도 없고 오직 신라에만 서양식 유물이 있다.

사실 이 문제는 지금도 계속되는 한국사학계의 골치거리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배를 통해서 왔다는 것인데, 흉노는 기본적으로 유목민족이다. 그들이 갑자기 말을 버리고 배를 타야되는 이유에 대한 타당한 설명이 없다.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일단 본인이 생각하는 교류의 단계를 말해야될듯 하다. 1단계는 느슨한 교류로서 마치 소문이 퍼지듯이 느리게 주변 사람을 통해서 서서히 서로간의 정보가 교류되는 단계이다. 당연히 조금만 멀리 있는 정보는 전달 받는 것도 느리고 정확성도 적다. 2단계는 상업의 단계이다. 상업행위를 통해서 정교교류가 이루어진다. 3단계는 기술의 단계이다. 기술의 이전을 통해서 교류가 일어난다. 4단계는 결혼의 단계이다. 서로간의 결혼을 하면 상당한 교류가 발생한다. 특히 2세대는 그 교류의 결정체이다. 그러나 결혼은 알지 못하는 사람과는 하지 않기에 앞전의 단계가 선행되어야 한다. 5단계는 외교의 단계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각 일정한 집단체를 형성하고 있어야한다. 6단계는 전쟁의 단계이다. 이것보다 더욱 강렬한 교류는 없다.

그래서 신라로의 흉노의 직접적인 유입보다는 몇몇 기술자집단의 이주가 있지 않았나....생각되기는 하지만, 이 경우도 사실 위프설을 피할 수가 없다. 기술의 연결선이 없는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고구려인데....흠.......기술사쪽은 본인의 전공이 아니라서 일단 판단보류이다.


흉노인의 후예라고 한 것이 단지 자신들의 조상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었는지. 아니면 진정 후예인지는 지금으로서는 판단할 수 없다. 다른 증거 사료가 나오기 전까지는 일단 신라왕족이 흉노인의 후예라는 것은 판단 보류이며, 그 전까지는 흉노의 후예가 아니라고 판단할 것이다.




* 논문 쓰기 바쁜 녀석이 이거 머하는 짓이냐고? --;;
사실 본인 논문의 핵심은 소그드의 한반도 유입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라왕족이 흉노인가 아닌가는 상당히 중대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서 처용은 보통 춤과 괴기한 용모로 서역인으로 보는데, 만약 신라왕족이 흉노였고, 당시가 그리 국제화 사회였다면, 괴기한 용모라고 말할 정도는 되지 못한다는 둥. 혹은 최치원이 소그드의 대표적인 무용인 호선무를 향악이라고 해서 신라에서 오래동안 내려오는 춤으로 말했는데, 만약 신라왕족이 흉노라면 이거 골치아파진다는 것...

본인 논문은 신라왕족이 흉노든 아니든 큰 영향은...있기는 있지만, 없다고도 해야겠고.... 단지.....가장 큰 문제는.....어떻게 써야될지 갈피가;;; 참고로 본인은 소드그인의 유입을 말하는 것처럼 한국의 고대에 많은 이민족들이 유입되었을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단보류인것이다.


그 외에 관련 된 정보를 아시는 분은 언제든지 덧글로 제보부탁드려요^^

  1. 중국쪽에서는 해당 비문을 大唐故金氏夫人墓銘 라고 부르지 않는듯 하다.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봐도 없다. 그렇다고 논문준비하면서 중국쪽 금석문 하나하나 뒤지고 다닐 수도 없고;;; 그래서 본인으로서는 원문 자체를 보고 싶은데 구할 수가 없어서 답답하다. 혹시 있으신분??! [본문으로]
  2. [/footnote]와 구당서[footnote]新罗人金忠义以机巧进,至少府监,荫其子为两馆生......(旧唐书 卷一百五十八 列传第一百八) [본문으로]
  3. 이 비석 자체가 손상이 너무 크다. 그래서 다른 이야기를 볼 수 없으니...에휴... [본문으로]
  4. 혹자는 김일재는 단지 흉노일뿐인데, 실제조상이 아니라면 오랑캐따위를 가짜 선조로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나라는 실질적으로 활발한 다민족 사회였고, 김일재로 대변되는 남흉노는 명목상으로 한왕실과 형제관계로 같은 일가라는 명목이 있다. 고로 오랑캐를 왜?라는 의문은 합당하지 않다고 본다. [본문으로]
  5. 굴원이 빠져 죽었다는 물 이름이 汨罗인데, 우리발음으로는 멱라, 중국발음으로는 miluo, 日자에 m음가가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겠지~ (by 孟元文이라는 익명의 사나이 킥킥...) [본문으로]
  6. http://blog.yam.com/wenshi/article/19776020 [본문으로]
  7. 원래 일과 알의 언어학쪽 각각 학자들의 복원음을 올렸는데, 특수기호쪽인지라 충돌해버린다. 증거 패스. 궁금한 분은 http://www.eastling.org/OC/oldage.aspx 에서 직접 검색을. [본문으로]
  8. 이는 보통 통일신라 전후로 보는 견해가 주도적이다. 그럼으로 이 말을 여기서 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지 않을까? [본문으로]
  9. AD8~23 [본문으로]
  10. 물론 개개인이 움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파편적이고 큰 영향이 있을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 [본문으로]
중국에서 백두산 일대에 3조7000억원(200억 위엔)을 투자하여 4계절 관광지로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28일부터 본격적으로 착공한다는 소식이 있다. 이는 중국 관광지 개발 사상 최대의 규모라고 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중(中), 백두산 일대 대규모 휴양지 착공)

문제는 기자조차 "한민족의 영산, 중국의 관광지 돼버릴 수도"따위의 제목을 붙여놓고 한국인들의 민족적인 감정을 이용하여 낚시질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백두산 관광지 개발은 중국에 대한 반감을 생각하기 전에 깊이 고민해보아야 될 문제가 있다.

본 글은 현실주의적인 입장에서 쓰겠다. (근데 다 써놓고 보니 독설....)
(일단 쓴 글이니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1) 3조 7000억원으로 사상 최대의 규모인 이유는?
가장 간단한 자본주의적인 결론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듯 싶다. 3조 7000억원을 투자한다는 것은 최소한 그 만큼은 뽑아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본인이 생각하여도 그 3조 7000억원은 충분히 뽑아낼 수 있다. 적당한 고객층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나라의 사람들은 중국측에서 홍보비용을 내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TV매체에서 특별프로그램까지 만들어서 홍보를 하고[각주:1], 사람들은 중국에 오면 반드시 가야될 곳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바로 한국인들이다.

92년 한중수교 이후로 얼마나 많은 한국사람들이 백두산을 방문하였는지는 구체적인 통계가 나와있지 않다. 그러나 중국에 여행 온 한국인 중에서 백두산을 가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실제로 백두산 인근 지역은 한국인들의 백두산 관광으로 인하여 상당한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또한 조선족들도 가이드를 비롯한 다양한 방식으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이번 관광지 개발 프로젝트는 어디까지나 한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국제적으로 백두산이 아닌 장백산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라는 정치적인 목적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 가능성이 높지 않다.


2) 중국에 가지 않고도 백두산에 갈 수 있건만...
중국에 가지 않고서도 백두산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이야기를 꺼낸 핵심이다. 이에 대해서는 우선 김영수 현대아산 부장의 발언부터 시작했으면 한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백두산을 자국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지만 우리는 남북 관계 악화로 종합개발계획조차 만들지 못한 상태"이며 "중국이 '창바이산'이라는 브랜드로 백두산을 선점해 버리지 않을까 우려된다"

현대아산쪽에서도 예전에 백두산관광단지를 개발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그것은 금강산 관광의 뒤를 잇는 2차프로젝트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정치적인 이유로 인하여 백두산관광은 오래전에 자빠졌고, 기존의 금강산 관광조차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다. 그래서 뒤쪽에서 중국이 챵바이샨이라는 브랜드를 선점한다느니 어쩌느니 해서 똑같이 민족감정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비록 현대아산의 이익을 위해서 도와주는 듯 싶으나.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통해서 한국인들이 중국쪽에서 백두산에 접근하지 않고, 북한을 통해서 접근한다면, 북한의 입장에서는 일정한 수익을 얻기에 한국과의 관계를 소홀히 할 수 없는 현실적인 이점과 추후 통일을 대비하여 북한의 경제수준을 올릴 수 있는 하나의 간접투자 방식이 된다. 관광을 함으로서 실질적인 인적교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은 굳이 거론하지 않겠다.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보아도, 같은 민족인 북한을 도와줄 수 있으며, "남의 나라"에 외화를 낭비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한국과 북한이 win-win 할 수 있는 백두산 프로젝트는 정치적인 문제로 막혀 있고, 그 사이에 중국을 통한 백두산 관광이 더욱 그 규모를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3) 남북교류의 활성화 다시 말해본다.
조금 있으면 남북이산가족이 상봉하게 된다. 본인의 외할머니도 이산가족이시기에 그 마음을 알고 있고,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산가족 상봉과 같은 단기 이벤트가 아닌,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백두산관광등의 방식으로 인한 교류의 증진이 더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잠시 보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계속 같이 사는게 중요한가?

경제시장에서 최소 내수시장은 1억이다. 남북통일 이후에만이 튼튼한 내수시장을 기반을 가질 수 있다. 또한 전쟁이라는 위험요소로 인한 경제신뢰도 하락이 없어진다.  뭔가를 공부하는 사람의 주인장님이 쓰신 논문에 따르면[각주:2] 통일비용도 조금이라도 빨리 될 수록 줄어든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를 바탕으로 생각한다면 좀!


남북교류 좀 증진시키자! 안 되겠니??? 왠만하면 통일로 달려가자고. 아님 챵바이산으로 백두산을 뺏긴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결국은 중국가서 민족의 성지 백두산을 구경하시던지요.

  1. 개인적으로는 특히 1박 2일을 거론하고 싶다. 백두산편은 구역질이 나왔다. 민족감정 팔아서 장사하는 그 모습에... [본문으로]
  2. 무슨 이유인지 지금은 비공개상태입니다. 전 rss로 전문을 가지고 있고요^^::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었던 글이라 다시 공개해주시면 ㄳㄳ ^^:: [본문으로]
三人行 必有我師焉 삼인행, 필유아사언《论语·述而》
3명이 길을 가다보면, 그곳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너무나 유명한 이 말을 우리는 과연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이 글에 대한 가장 간단한 해석은 "3명이서 길을 가다보면 어떤이는 훌륭하여, 그것을 본받아서 자신을 발전시키니 나의 스승이고, 어떤 이는 쓰레기이니, 자신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는지 돌아보고 반성하여 고치므로 나의 스승이다." 이다. 여기까지는 인문학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도 모두가 아는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이 최근 가장 마음에 와 닿는 글이라며 트위터에 위의 글을 올리자 @bujiwibuji 님이 완전히 다른 각도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고문 번역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나, 기존의 해석각도을 완전히 반대로 해버린 이 해석을 잠시 소개해볼까 한다[각주:1].


3인이 길을 가면, 한 명은 훌륭하고, 다른 이는 쓰레기이다. 그렇다면 남은 한명은 무엇일까? 공자 자신일까? 그러나 해당 고문은 "3명이서 같이"와 "3명과 같이"로 각기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공자 자신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각주:2].

그렇다면 잘하는 것도 아니고 쓰레기도 아닌 한 사람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도 될 것이다. 그는 누구일까? @bujiwibuji님은 이에 대해서 "잘한다고 뻐기기에는 민망하고, 못한다고 빠지기에는 억울한... 그러니까 보통 우리 같은 사람들. 이들은 본받기엔 만만하고, 개선하기에는 큰 하자가 없어서, 투명인간으로 처리."라고 해석하였다. 어느 정도 타당하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잘하지도 못하고, 못하지도 못한 언급되지 않은 존재와도 같다. 우리네들에게는 그렇게 잘난 사람도 없고, 그렇게 못난 사람도 없고, 그 중간에 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런 평범한 사람들은 타인의 아픔을 나눌 줄 알고, 타인과 기쁨을 같이한다. 비록 거창한 "배움"이나 "가르침"은 없지만, 그런 모습이야 말로 인생이며, 배워야될 것 중에 하나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공자 자신이 그런 사람들을 투명인간으로 처리했다기 보다는 그런 평범한 모습도 가능하다는 것을 후대의 해석자들이 무시한 것이 아닐까?


이를 바탕으로 다시 해석을 하자면 : "3명과 같이 길을 가다보면, 어떤 이는 훌륭하여, 그것을 본받아서 자신을 발전시키니 나의 스승이고, 어떤 이는 쓰레기여서, 자신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는지 돌아보고 반성하여 고치므로 나의 스승이다. 또한 어떤 이는 그리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았지만, 그 역시 인생을 살아가는 존재이기며, 우리네 이웃이기에 나와 함께 해주는 친구와 같은 스승이다."



* 고문의 즐거움.
고문은 표점을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변하고, 단어 하나에도 여러가지 뜻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고, 무엇보다 글자수를 최대한 압축을 해놓았기에 다른 해석이 나올 여지가 풍부하다. 그것이 고문의 매력이자 저주이다. (저주라고 여길때 고문이 고문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말장난을 하고는 한다.) 그래도 가끔 이렇게 기존의 고문을 다르게 해석한 내용을 보면 참 재미있다.......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문 독해능력이 없음을 생각하면, 변태스러운 자위행위라고도 생각된다. 쿨럭;;;

* 트위터의 즐거움.
평소에는 서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서로와 더욱 쉽게 교류를 하며 자극을 줄 수가 있다. 비록 140자의 한정된 공간이지만, 그런 제약성은 최대 압축의 고문처럼 그 나름의 매력으로 다가오기에 자주는 못 올리지만, 생각의 단편들을 오늘도 트위터에 올리고 흘려보내어 다시 돌아온다.

* 焉 : 어조사 언을 뺴면 안돼요 -0-
가끔 마지막의 "焉"을 빼놓는 분이 있다. 고대한어에서 한자 한자는 결코 그냥 쓰이지 않는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컴퓨터 타자도 없었고, 인쇄도 불가능했고, 복사도 불가능했다. 일일이 손으로 옮겨 적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필요 없는 단어는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焉은 한국에서 어조사 언이며 별 의미가 없다고 알고 계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데 焉은 감정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 곳에" 혹은 "이 곳에"(此地)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위의 문장으로 예를 들면, 3명이서 길을 가는 (바로) "그곳에" 나의 스승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1.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즐거움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보시기 바란다. 이는 철학논문이 아니다. -_-;;; [본문으로]
  2. 또한 공자 스스로가 이미 성인에 근접한 단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보다 훌륭해서 배울 자가 많아야 얼마나 많을까? 이 말을 주석 처리한 이유는 감정적이고 객관적이지 못하여^^;; [본문으로]
예치(礼治 예로서 백성을 다르린다.)와 법치(法治 법으로서 백성을 다스린다.)는 중국정치사상사의 두 가지 큰 흐름이다. 거대한 농업국가인 중국의 상황을 인식하고, 중앙정부로서 거대한 국가를 통치해야되는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보편적이고 공평한 법률이 있어야지만 전국 각지를 통치할 수 있다. 그리고 농업사회는 비교적 안정적으로서 변화가 크지 않다. 이는 법률의 지속성과도 서로 맞아떨어진다.

이런 중국정치를 객관적인 조건을 놓고 보면, 중국은 대단히 쉽게 법치의 길로 향할 수 있다. 통일되고 지속성이 강한 법율을 통해서 정치시스템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사상계는 오히려 예치를 소리 높여 외쳐오고 있었고, 법치를 배격하고 있었다. 특히 유가가 그러하였다. 이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예와 법을 비교하였을 때 예는 외면적으로 등급을 나누는 듯하다. 그러나 사실은 매우 평등하다. 법은 외면적으로 평등한듯하나, 사실은 등급을 나눈다. 예를 사람들을 자유로 인도하고, 법은 오히려 사람들의 행동을 제한하고 속박한다. 예를 일종의 사회성이고, 법은 정치성이다. 예가 사회에서의 정부로의 올라감이라면, 법은 정부로부터 사회로의 내려옴이다. 어찌되었든 예는 필연적으로 타자의 존재가 필요하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상대방에 대한 어느 정도의 존경을 필요로 한다. 법은 오직 법만을 논할 뿐이고 사람을 논하지 않는다. 살인을 한자는 죽어야 하며, 타인을 다치게 한자나 도둑질을 한자에게는 그 죄를 책임지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죄를 저지른 사람만을 고려한다. 그렇기에 예는 개인들의 상호간의 일이며, 법은 대중을 통치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예치의 정신은 사회 구성원 개개인에게 있으며, 개개인의 평등과 자유를 보장하여서 점차 풀어지고 가벼워진다.[각주:1] 법치의 정신은 국가정부에게 있으며, 권리를 중심으로 개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깍아내리며, 점차 강제적인 제재로 흘러간다.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예치를 주장하였기에 사회가 비교적 풀어져 있다. 이것은 자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자유가 많은 것이다. 정치는 오직 무의미한 구조물일뿐, 사회에 어떠한 강압이나 속박을 실행할 수 없었기에 정부 지도자들이 설정한 목표대로 나아갈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는 하였다[각주:2].


좀더 깊게 말을 하자면, 법은 인간의 권리를 보호하는 중요성을 가진다. 예는 인간의 감정[각주:3]을 인도하고 전달함에 중요성을 가진다. 권리는 물질적인 차원이며, 감정은 정신적[각주:4] 차원에 있다. 인류가 더불어 살아가는데 자신의 것에 대한 권리를 지킬 수 없다면 매우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고,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권리는 대립이고, 감정은 교류이다.  대립이기에 보호를 할 수 있고, 뺏을 수도 있다. 교류이기에 전달할 수 있고, 화합할 수 있다. 예는 언제나 부드럽고, 법은 언제나 딱딱하기 때문이다.

중국사회는 예를 으뜸으로 생각하는 풍토에 젖어 있어서, 모든 것에서 교감을 말하고, 화합을 주장하여 마치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약자는 그 속에서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얻게 된다. 그렇기에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간다. 가볍고 부드럽게 변화해간다. 만약 법을 으뜸으로 생각하는 사회라면,  법률은 비록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졌으나, 쌍방의 권리가 서로 충돌을 할 때가 문제이다. 갑을 보호할 수는 있을 지는 몰라도 동시에 을을 보호하지는 못한다. 만약 을이 자신의 권리를 계속 유지하기를 원하고, 법률로서 해결할 수가 없다면, 법률을 바꾸기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법률은 정부의 손에 있다. 그럼으로 법률을 바꾸기 위해서는 정부를 밀어내고 새로운 정부를 새우는 수 밖에 없다[각주:5].

그래서 법을 으뜸으로 하는 사회는 발전을 해나아가는 중에 계속되는 혁명을 피할 수 없다. 예를 으뜸으로 생각하는 사회는 혁명을 할 수도 없고, 혁명이 필요하지도 않다. 그래서 법을 으뜸으로 생각하는 사회는 언제나 급변하고, 예를 으뜸으로 하는 사회는 급변할 수도 없고, 급변할 필요도 없다. 중국사회는 비교적 농촌경제를 기반으로 만들어졌기에, 원래부터 급격하게 변할 필요가 없었고, 거대한 통일정부 아래서의 급격한 변화는 이익보다 파생되는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중국인은 부드러운 예를 으뜸으로 생각하려 하지, 딱딱한 법을 으뜸으로 삼으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면에서 먼 미래를 바라보며 깊이 생각하였다고 볼 수 있다[각주:6].


본래 정치는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인류에게는 사회가 없을 수 없지만, 정치는 반드시 필요한 것만은 아니다[각주:7]. 인류는 사회를 위해서 정치가 있어야 하는 것일뿐, 정치를 위해서 사회가 있는 것이 아니다. 법율은 정치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렇기에 정치와 같은 한계점을 가지게 된다. 만약 최소한의 권력만 가지고 있는 정부가 있고, 정치가 사회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가벼운 사회가 있다면, 어찌 이상적이지 않을까? 이보다 더욱 이상적인 사회는 무정부의 사회가 아닐까? 이에 대해서는 일단 더이상 언급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중국의 예치사상의 최종적인 목표는 역시 위와 같은 이상을 향하고 있다. 최소한 정치를 사회에 동화시키려 하고 있고, 정부로 하여금 사회를 통치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 중국인들은 중국정부의 무능을 원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치를 거부하고 법치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중국인이 말하는 예치는 바로 정부의 무능이다. 많은 책임을 사회에 맡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풍속으로 하여금 법률을 대신하게 하려는 것이고, 교육을 하여금 행정[각주:8]을 대신하게 하려는 것이었고, 선생님으로 하여금 관리를 대신하려고 했다. 그리고 감정으로 하여금 권리와 이익을 대신하려고 하였다.


중국 도가 사상 역시 무정부주의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들은 넓은 영토의 수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사회에 대해서 부정적이며, 사람이 적은 조그마한 나라(小国寡民 소국과민)의 조그만 사회를 희망한다. 그들은 법을 반대하면서 동시에 예도 반대한다. 그들은 인류가 정치가 없이 있을 수는 있어도 사회가 없이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각주:9]. 그래서 도가는 예치를 반대하면서도 정부를 도무지 없애지 못하고 반대로 법치의 길로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도가사상과 법가사상은 같이 어울어지고는 하고, 도가가 예치 사상을 반대하는 물결이 일어난 이후에 법치 사상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사마천[각주:10]은 신불해와 한비자[각주:11]의 사상적인 원류가 노장에서 나왔다고 더욱 심화되었다고 한 것이다.[각주:12].


서방의 최근 무정부주의자들은 공산주의와 떨어지지 않고는 한다. 크로포트킨[각주:13] 역시 그러하였다. 만약 공산주의가 법치주의의 테두리에서 벌어진다면 반드시 계급투쟁을 외쳐야 한다. 반드시 무산계급이 무장하여 정권을 탈취하여야 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무산계급에 의해서 법이 만들어져 세워지게 된다. 그러나 이상적인 공산사회에 도달하게 된다면, 모두가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할 필요가 없어진다. 누구도 타인의 권리와 이익을 뺏을 필요가 없어진다. 법률의 최대효율 역시 존재하지 않고, 정부 역시 법률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어찌 무정부가 아니겠는가[각주:14]?

그리하여 인류는 무정부일 수 있으나 사회가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가 존재한다면 예치가 없을 수 없다. 그래서 유가는 도가보다 더 깊고 멀리 내다본 것이다. 크로포트킨도 중국의 도가보다 뛰어나다. 그는 위에서 말한 것을 이해하고 인류가 무정부 있수나 동시에 사회가 없을 수는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유가는 크로포트킨 보다 더 뛰어나다. 왜냐하면 사회에 예치정신을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예치정신으로 나아가면 정부에서 점차 무정부상태로 나아가게 된다. 오늘날 서방인들이 추구하려는 사회주의와 공산 주의 역시 포괄하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예기, 예운편>(《礼记·礼运篇》)에서 말하는 대동세계[각주:15]에 대한 이상추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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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모든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과 환영합니다.  본 글은 의역식 번역입니다.
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저 개인적으로 이 글은 그리 찬성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나름의 논리체계가 있고, 저와는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것이 오히려 스스로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에 번역을 해보았습니다. 당시의 시대 상황과 쳔무(전묵)선생님의 성향상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문제가 있는 글이라고 평가해 봅니다.

간단한 반박 :
1) 도가의 소국과민은 사회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본인도 도가가 단순히 무위자연이 아닌 상당한 고도의 통치술이라고 생각을 하나, 사회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사회 뿐만이 아니라 자연까지 포괄하는 진정한 의미에 무정부주의일수도 있다고 여긴다.
2) 도가가 통치사상이었을 때의 한초에는 약법삼장으로 법률이 간단했는데, 한무재 이후 유가가 떠오르면서 점차 법치적인 요소가 늘어났다. 한마디로 말하면 유가는 사실상 법가가 양의 탈을 쓰고 있는 통치술이다.
3) 유가가 다시 흥하고 있어서 소강(小康)이 이야기되어지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이야기 되는 것은 법치이다. 예치가 아니다.

역시 논문 막혔을 때 번역작업을 잠시 하면 머리가 풀린다랄까? ^^:::

  1.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도가의 "소요유 하게 된다." 혹은 "자유롭게 거닐게 된다"라고 하고 싶었으나, 전묵선생님의 원래 주장을 생각하였을 시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본문으로]
  2. 이와 같은 분석에는 개인적으로 완전히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중국은 결코 예치가 아니었고, 표면적으로만 예치를 말했을 뿐, 실질적으로는 법치였다고 판단한다. (이명박 대통령님이 친서민정책이라고 말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친대기업정책인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보다 쉽게 이해하시리라 본다.) [본문으로]
  3. 원문은 情感(정감)이며, 이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고, 보다 깊은 의미가 있으나, 현대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뜻으로는 감정이라고 생각된다. (더 좋은 단어가 생각나시는 분은 언제든지 덧글^^) [본문으로]
  4. 원문은 性灵(성령)이다. 이 나름대로의 철학적인 뜻이 있으나, 현대한국어로는 그냥 "정신"으로만 번역을 하였다. (보다 좋은 단어는 언제든지 환영^^) [본문으로]
  5. 이 글이 쓰여질 당시를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되지만, 삼권분립으로 입법-행정-사법이 각자 독립된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극단적인 발언에 가깝다. 단. 입법-행정-사법이 한 집단에 장악되어서 독재를 하는 상황이면 이는 타당하다. 혹자는 한국이 현재 독재라며 정권을 바꾸어야 된다는 과격한 말을 하지만, 한국은 현재 독재가 아니다. 비록 수 많은 문제가 있으나 그 모두가 국민이 뽑은 결과이다. [본문으로]
  6. 근대에 들어와서 서양법이 더욱 발전해서 사람들이 흔히 착각을 하지만, 중국의 법제도는 거의 완벽함에 가까울 정도였다. 이를 다시 말하자면 중국인은 결코 법을 멀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도 경국대전이라는 것이 있다. [본문으로]
  7. 현재에는 정치의 개념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든 행동으로 넓어졌고, 사회와 정치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란 "통치"계열의 좁은 의미의 정치를 말한다. 예를 들어서 우리의 생활 모든 것이 정치이지만, 국회를 보며 "정치권"이라고 말하는 것에서의 정치이다. [본문으로]
  8. 원문은 治权. 영어로 right of administration나 managing power정도의 의미. [본문으로]
  9. 본인이 가장 반대하는 부분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쪽 잡담에서... [본문으로]
  10. <사기>의 작가. 환관이 되면서까지도 아버지의 유지에 따라서 역사서를 편찬. [본문으로]
  11. 원문에서는 申韩이라고 언급된다. 신불해(申不害)와 한비자(韩非)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 [본문으로]
  12. 이 말이 나온 이유는 특히 <사기>의 한편이 《老庄申韩列传》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위는 노자, 장자, 신불해, 한비자의 앞글자를 따서 한꺼번에 모아 둔 것이다. 그러나 노자의 사상이 권과 세 법가에 영향을 주었을지 모르나, 노장사상 자체가 법가의 원류라고 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본다. [본문으로]
  13. Peter Kropotkin 정식 이름은 Pyotr Alekseyevich Kropotkin.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http://en.wikipedia.org/wiki/Peter_Kropotkin [본문으로]
  14. 본인도 이상은 공산주의이다. 그러나 20세기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의 처절한 실패를 통해서 배우지 못할 바보는 아니다. 인간은 욕심덩어리이다. 비록 선의가 있을지라도 욕심덩어리이다. 그것에 눈을 돌리는 공산주의가 바로 이 글에서 나오는 당시의 공산주의이다. [본문으로]
  15. 대동은 大同이다. 그 전 단계가 소강(小康)이다. 바로 현재 중국에서 기본적으로 완성했다는 그 소강이며, 중국은 앞으로 대동으로 나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본문으로]
이 글은 간도소송이 철저한 현실적인 문제라는 점을 감안하여 이 글에서는 이상적인 모습이 아닌 현실정치적인 면에 집중하여서만 들을 쓸 생각입니다. 백날 A라는 이성을 사랑한다고 생각을 하여도, 직접 고백을 하는 것이 다른 문제인 것과 같습니다.


1) 간도문제의 발단 :
간도가 중국에 공식적으로 넘어가게 된 것은 1909년 9월 4일 청나라와 일본제국이 "간도협약"을 맺은 다음부터다. 일본제국은 당시에 간도지역에 철도부설권을 얻기 위해서 청나라의 땅이라기에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이씨조선[각주:1]의 영토라기에도 애매한 간도를 국제적으로 청나라의 영토로 인정을 했던 조약인 것이다. 그리고 국제법상의 관례로 100년이 지난 이후에는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각주:2]. 그리고 2009년 9월 4일이면 정확하게 100년이 되는 것이다.

* 간도은 왜 애매한가?
간도는 한자로 间岛라고 쓴다. 중간에 있는 섬이라는 의미이다. 현재에는 영토의 분계가 선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과거는 결코 그러하지 않았다. 이 부분 때문에 간도에서 대해서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것이다. 간도는 이씨조선과 청나라의 "국경면"이었던 것이다. 이 지점은 서로의 영토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토가 아닌것도 아닌, 지금의 예로 따지면 비무장지대와 같은 곳이다[각주:3].

* 당시 각 국의 생각
일본제국 : 아직 만주국에 대한 계획은 없었다고 알려져 있다. 단지 철도부설권들의 경제적 실익을 얻어야 되는데, 그 소유가 애매하였고, 당시 이씨조선을 사실상 지배하던 일본제국으로서는 직접 영토분쟁을 해도 되지만, 그냥 영토를 주는 대신 경제적 실익을 선택.

청나라 : 청나라의 입장에서는 제 1차 청일전쟁(갑오청일전쟁)에서 객관적으로는 분명 월등한 전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개쪽이 나고, 조선땅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뺏겨서 짜증나는 동시에 조선외의 영토에 일본이 들어올까 불안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간도라는 조선땅과 청나라땅의 분계선을 자신들에게 준다고 하니, 경제적 이권을 일본에게 넘기는 것을 알면서도 덥썩!

이씨조선 : ...................................할 말도 없다. 이미 일본제국의 꼭두각시같은 존재일뿐.


2) 지금의 현실
1- 대한민국(이하 한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은 다른 나라다.
국제사회에서 한국과 북한은 명확하게 다른 나라이다. 비록 한국의 헌법이 현재 북한의 영토와 주권을 포함하는 조항을 가지고 있고, 한국전쟁이 단지 한국이 참가하지 않은 휴전형태[각주:4]로 끝나 있다고 하더라도 국제사회의 기본적인 바탕은 실질영유권이다[각주:5]. 그리고 북한에 대한 한국의 실질영유권은 모두가 알다 싶이 없다.

2- 북한은 이미 중국과 국경조약을 체결하였다.
북한은 이미 중국과 소위 "백두산 조약"이라고 불리는 것을 체결하였고, 백두산 천지를 기점으로 두만강과 압록강을 기준점으로 해서 국경선을 그었다. 다시 말해서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한국의 권리는 사실 없다. 실질 영유권이 없으니까 당사자가 아닌 것이다[각주:6].

3- 북한과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국)을 자극해서는 안된다.
사대주의가 아니다. 북한의 경우 자국의 권리를 타인이 쓰려는 것에 당연히 민감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경우도 권리도 없는 한국이 자국의 영토에 대해서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에 기분이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동북쪽에서 러시아와의 영토분쟁을 끝내서, 남은 영토분쟁이 거의 남쪽으로 집중시킨 이 상태에서 다시 거론되는 동북쪽 영토분쟁은 기분이 좋을리가 없다.

왜 그렇게 북한과 중국의 신경을 써야하냐? 통일을 하려면 강대국들에 샌드위치 당해 있는 한국으로서는 알아서 설설 기면서 눈치를 봐야한다. 요즘 북한과 사이가 멀어졌다는 중국이지만, 그 영향력은 아직 막강하며, 자체 정치-경제-군사력만으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대이다. 억울한가? 힘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이것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최선의 해결책을 찾는 수 밖에 없다.

4- 영토분쟁위에서 중국의 손을 들어준 다음은 어떻게 하실겁니까?
소송을 한다면 100년 기간 연장이라느니, 훗날 다시 주장할 때 근거가 된다는 분도 있다. 일단 소송을 하더라도 영토분쟁위원회에서는 사실상 중국의 편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다. 과거의 역사문서보다도 실질점령 혹은 실효점유을 더욱 우선시 하기 때문이다.[각주:7] 물론 지금 중국이 가진 정치-경제-군사의 강력함도 한 몫을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떤 문제가 있는가?

한국은 국제적으로 다시는 간도의 일을 언급하기 힘들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는 "위대한 한국"을 꿈꾸는 몇몇 분들에게는 완전히 꿈이 꺽이는 것이다. 이 지점을 생각하지 않는 "위대한 한국"을 꿈꾸는 분들. 패소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결론적으로 지금 소송을 해봤자 이득될 것 없다. 괜히 애국심과 같은 허망한 이야기를 거론하면서 우리의 생활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투표를 하지 말고,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경제정책과 미디어정책에나 신경 쓰는 것이 100배는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부록) 이 순간에까지 저를 너무 즐겁게 하는 환빠(유사 역사학)분들에게^^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위의 내용보다는 이 것에 대해서 다 같이 즐겁게 웃자는 의미가 더 강할 수도 있다고 내 마음 속에서 외치고 있다. 미안하지만 잠시 시니컬모드로 들어가겠다^^
 
왜 주류역사학계, 강단에서 간도 문제를 다루지 않을까? 나는 그들이 진짜 역사를 알기 때문이라고 본다. 간도 문제의 본질은 역사왜곡의 약점을 노출시킬 수 있기 때문에 역사조작의 장본인들이 극히 꺼려하는 것이다. 이는 발해사 전문가가 국내에 거의 없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발해라는 나라는 서아시아와 북아프리크 등지에서 흔적을 찾아야 하는 나라인 데 그걸 한반도 북부에서 찾자니 난감하니까 연구자체를 안하는 거다. (중략)

만약 간도가 두만강 이북이 아니라면? 분명 간도는 전 조선땅이고 일본이 강제로 뺏어서 팔았다. 근데 간도가 두만강 이북이 아니라 구 만주.... 몽골 지역이라면? 문제가 아주 심각해지는 거다. 거의 100년 동안 작업해 온 날조사가 한 큐에 무너지는 거야.

출처 : 간도소송 급할 거 전혀 없다 (이런 글이 구글검색 최상위라니...)

이거 보고 웃겨서 배꼽빠질 뻔 했다. 장난하냐? 장난해?? 장난해????

1- 주류 역사학계와 강단에서 간도문제를 다루지 않는다고?
인터넷을 검색해보기 바란다.  KSI KISS - 학술 데이터베이스 검색사이트 에서 검색을 해보면 "간도"에 대해서만 78건의 내용이 나온다. 그렇다면 간도에만 집중하지는 않았지만, 간도 내용을 언급했을 논문은 이에 몇십배는 있다는 소리가 된다. 이것이 간도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인가? 검색이나 좀 해보고 안한다고 하시죠.

2- 발해사 전문가가 국내에 없는 이유.
요즘에서야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시대라고 부르며, 발해도 한민족의 범주에 넣으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발해사를 한국사로 보려는 움직임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주는 익숙한 용어가 "통일신라"이다. 발해가 있는데 왜 "통일신라"인가? 그래서 만들어진 말이 "남북국시대"이다. 그러나 통일신라라는 말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을 정도이다.

관심이 없었고, 한국사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발해사 전문가가 소수일뿐인 것이다. 본인의 지금 쓰는 논문은 소그드이다. 이에 대해서만 연구하는 한국연구가는 본인이 알기로 한명도 없다. (물론 간접적으로 거론되는 경우가 있지만.) 좀 제대로 알고 이야기를 하던가 ㅋㅋㅋ

3- 발해라는 나라가 무려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라고....ㅋㅋㅋ
그래. 니가 짱이다. 음하하하...그래서 증거가 먼데? 증거는?? 님하 증거는?! 이런 사람들의 예시를 보면 언제나 증거나 사료는 전혀 없이 무조건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 있었다고 한다. 그럼 상식적으로 서아이사와 북아프리카에서 관련 유물이 발견되는 것이 맞다. 또한 관련 사료가 이를 증명해주어야 된다. 그런것 본인이 무식한지 본적이 없다. 반대로 서아시아의 것들이 발해에서 영향을 받아 변형된 형태로 발견된다. 그런데 저쪽은 그따위 것 없이 무조건 있었다고 말한다. 어쩌라고-_

그리고 한반도 북부에서 찾기 힘들다고? 수 많은 발해관련 유물과 유적이 쏟아지고 있다.아. 이렇게 말하면 거대한 발해제국의 동쪽 끝에서 남아 있는 조금의 유물일뿐이라고 하려나? ㅋㅋㅋㅋ 후..작작해라. 중국학계에서도 점차 초기문명단계에서 서역 혹은 서쪽으로부터의 문화전달이 큰 영향을 행사했다고 인정하는 판에 왜 굳이 거대한 한국을 우기실까나?


4- 100년동안의 조작...
크하하하...음모론이구나. 음모론...킥킥...다시 말하지만 증거는? 당신은 학자라는 사람을 개뿔로 알고 계시나본데, 수 많은 어용학자들이 있지만, 끝까지 학자의 고집으로 살아가고 있는 당신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 학자들이 사실과도 다른 내용을 같이 숨겨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아! 양심있는 학자들은 다들 환단고기를 통해서 진실된 역사를 연구한다고?! 우습게 보지 마! 학문이라는 것은 거짓의 토대에서 세워질 수가 없다. 만약 그런 거짓의 토대라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서 정당한 비판과 반박을 했을 것이다. 또한 본인도 성격상 그런 꼬라지는 결코 보지 못하기에 이미 예전에 그에 대해서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런데 대규모 역사조작은 없다.

덕분에 아침 공부 전에 실컷 웃었다. 감사하옵나이다. 그리고 이제 작작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다 보고서도 간도가 "우리땅"이라고 생각을 하신다면 아고라에서 진행되는 곳에 투표를 하시기 바란다. 하지만 본인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소송은 국가적으로 한국에 이익이 없다고 판단하기에 이 투표를 반대하며, 그 시간에 정치-경제-미디어에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아고라의 투표쪽 링크를 올릴까 하다가 올리지 않도록 하겠다.)



추가 :
제 글은 따지자면 국제관계식 분석이었습니다.(나...사학전공인데...난 왜이럴까..큭...) 역사적인 분석을 보고 싶으시면 슈타인호프님의 어째 올해가 2009년인데 이 떡밥이 안 나온다 했어.을 추천해드립니다.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슈타인호프님의 몇몇 해석은 저의 해석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내용이 훼손될 정도는 아닙니다. 역사학쪽의 분석을 보고 싶으시면 위의 링크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1. 이씨조선은 어디까지나 정확하게 왕조를 밝히기 위한 표현일뿐. 어떠한 비하적인 요소도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한반도의 역사에는 수 많은 "조선"이 있습니다. 명확한 구별을 위해서는 이씨조선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본문으로]
  2. 어디까지나 관례이고, 마카오를 비롯한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관례의 힘은 의외로 무서운 것이다. [본문으로]
  3. 백두산 정계비에 의하면 정확하게는 청나라 영토이다. 그러나 사실상 청나라도 관리 안하던 곳이었다는 것은 사료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고....개인적으로 역시 "국경면"과 "비무장지대"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고 본다. (물론 근대화의 영향으로 간도협약쯤 되면 이미 청나라 영토인증.) [본문으로]
  4. 휴전협정은 북한과 미국간에만 맺어져 있다. 한국은 휴전협정에 반대하며 참석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5. 이렇게 하지 않으면 A라는 나라가 갑자기 B나라를 먹고 싶어서, 저기도 내 땅!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실질영유권부분은 최소한 명목상으로는 약소국을 지키는 무기인 것이다. [본문으로]
  6. 간도가 중국에 ‘공식적으로’ 넘어간 것은 1909년 9월4일 당시 청나라가 일본과 '간도협약‘을 맺고 이 지역의 철도부설권을 받는 조건으로 조선땅 간도를 넘겨주었다. 당시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조선 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한 상태에서, 외교권을 불법적으로 사용, 그 자체가 무효인 것은 사실이다. 또한 1965년 일본 정부가 간도협약을 무효로 한다는 국제사회에 선언하기도 했다. [본문으로]
  7. 같은 이유로 한국도 독도에 대해서 일본이 제소를 한다든둥 국제사회에 따져보자는둥 하여도 그냥 살포시 무시해주는 것이다. 그냥 냅두면 실효지배권 인정으로 끝나는데 왜 싸우는가? [본문으로]
자유는 서방사상의 핵심이다. 그러나 그들은 개인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타당성이 없는 말이다. 만약 너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에 의한 한계를 가진다면, 너는 자유롭지 못한것이다. 만약 타인의 자유가 너의 자유에 의한 한계를 지닌다면, 그는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그들이 내세우는 자유주의는 현재 흔들리고 있다. 상호간의 자유의 충돌에서 명확한 선을 그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유는 반대는 간섭이다. 이 하늘 아래 2개 이상의 사물이 존재한다면 그들 사이의 간섭은 결코 피할 수 없다. 하나의 간섭이 있으면 하나의 자유가 손해를 본다. 간섭이 늘어나면 자유가 줄어든다. 외부의 간섭에 대응은 3가지를 넘지 않는다. 하나는 강력한 힘을 사용한 억압이며, 두번째는 조화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굴복이다. 모든 사람들의 자유를 타인의 자유까지로 한정한 것은 조화를 추구한 것처럼 보인다. 안타깝게도 타인과 자신사이의 선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기에 조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

무한한 발전 역시 서방사상에서 요구하는 특징이다. 만약 무한대로 발전하여 자신의 자유를 쟁취하려고 한다면, 타인과 자신 사이에는 억압과 굴복이라는 두가지 선택밖에는 남지 않는다. 한 쪽에서는 억압을 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결코 굴복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억압과 굴복의 과정에서 투쟁이 생겨난다. 현실에서 끊임없이 간섭을 통해서 자유를 구하려 한다. 그렇기에 가장 자유를 사랑하는 것은 가장 간섭을 사랑한다는 말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것을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할 수 있을까?


"도는 같이 가며 서로 어긋나지 않고, 만물은 같이 자라며 서로 상처입히지 않는다."(道并行而不相悖,万物并育而不相害 - 中庸 ) 이것이 중국인의 생각이다. 그러나 어떤 존재과 다른 존재 사이에서 서로 간섭하지 않고 충돌하지 않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아니면 상호간의 간섭중에서 결국 이상적인 조화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일까? 자연에 대해서는 일단 접어두고, 우선 인간에 대해서만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세상에 오직 너 하나만이 있을 수는 없다. 너와 누군가가 이 세상에서 같이 살아간다면, 분명히 타인의 간섭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이것을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천지간에 오직 홀로 있어야만 진정한 자유를 향유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이 살아가면서 혼자만이 존재할 수 있을까? 나는 인간은 오직 마음 속에서만 혼자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찌하여 오직 인간의 마음 속에서만 혼자일 수 있느냐?

먼저 앎을 거론해 보겠다. 앎은 알게 됨(피동)과 알 수 있음(능동)이 서로 연결되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는 능동과 피동을 초월하여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또한 알게 됨과 알수 있음의 조화를 이루어 중도을 이루게 된다. 알 수 있음이 알게 됨에 접근한다. 다시 말해서 알게 됨이 알 수 있음에 대해서 간섭을 하게 된다. 그러나 만약 앎의 면에서 살펴보자면, 이러한 간섭은 결코 간섭을 받은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각주:1].

춥고 배고픈 사람은 물질 생활면에서 보았을 때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앎에서는 배고 고픈 것을 알게 되고, 추운 것은 알게 되는 것은 자유롭지 않다라고 말할 수 없다. 앎은 물질과 나의 대립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물질과 나의 대립의 조화로 생겨나기에 앎은 절대적며, 그리하여 자유롭다. 앎이 자유라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사실 당신이 모른다는 것도 앎이다. 지식의 정면과 반면 모두가 앎이며, 그래서 인간 내면의 앎은 절대적이며 자유롭다.


이번에는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즐거운 다양한 감정에 사람들은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고는 한다. 사실 희노애락의 감정은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절대적으로 자유롭다. 앎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피동과 능동을 초월하여 독립해 있고, 피동과 능동을 초월하여 중립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쁨은 자유로운 기쁨이고, 화남은 자유로운 화남이다. 슬프고 즐거운 것도 모두 자유로운 슬픔이고 즐거움이다. 좋으면 좋다고 하고, 싫다면 싫다다고 한다. 외부에서의 좋음이 나를 간섭하여 좋아하게 만들어 나의 자유를 빼앗겼다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또한 외부의 싫음이 나를 간섭하여 싫게 만들어 나의 자유를 잃어버렸다라고 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너 자신이 좋기에 그것을 보고서 좋은 것이고, 너 자신이 싫기에 그것을 보고 싫은 것이다.

"그윽하고 정숙한 숙녀는 군자의 좋은 짝이로구"(窈窕淑女,君子好逑 - 《诗经》第一篇《诗经•关雎》[각주:2])나 역시 자유이고, "잠들지 못하는 것도"(辗转反侧《诗经·周南·关雎》[각주:3]) 역시 자유이다. "절박하게 원하는 것"(求之不得《诗·周南·关雎》)을 아는 것 역시 너의 마음 속의 자유이다. 얻고 얻지 못하는 것은 외부의 일이다[각주:4]. 외부의 일은 당연히 우리의 자유 속에 있지 않다. 그러나 절박하게 원하고 잠들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 속의 자유이다. 너의 마음 속의 희노애락을 포함한 모든 감정만을 놓고 본다면 당연히 자유이다.


위에서 말한 것 처럼, 자유는 내부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간섭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간에 어떠한 조화와 융합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마음의 앎과 감정은 모두 이미 밖과 안이 조화가 된 것이고, 물질과 나의 대립을 초월한 중립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과학, 예술, 문학, 종교, 도덕등에 속하는 것들은 모두 마음에서 살아있고, 앎과 감정의 연장선에 포함된다. 이것들은 모두 최대한 자유롭게 하여야 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최대한의 자유를 얻을 수도 없다. 그러나 외부의 사물의 간섭은 자주 자유를 초월하기도 한다. 물질자연부분에 관하여 앎은 곧 권리이다. 앎이 커질 수록, 권리도 커진다. 권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란 바로 외부의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 압력을 행사하고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자연물질계까지만 영향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이 권리는 인문사회에서는 모든 인류 자신에게 있는 것이기에 물질자연계와의 관계에서의 방법과 과정을 사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 물질자연계에서는 앎이 중심이다. 혹은 앎을 더욱 중요시한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인문사회에서는 감정이 중심이다. 혹은 감정을 더 중시한다고 할 수 있다. 깊은 앎과 진실된 감정은 모두가 일종의 권리이며, 모두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의 대로를 걸을 수 있게 해준다. 중국에서 오래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말을 소개할까 한다[각주:5]. 천왕께서는 현명하시니, 소의 죄는 죽어 마땅하옵나이다.(天王圣明,臣罪当诛(唐韩愈《羑里操》[각주:6]),이나 천하에 부모가 아닌 자가 없다(天下无不是的父母[각주:7]" 이 말은 사실이다. 일가친척이 화목하지 못하고 국가가 혼란하더라도, 충신이나 효자가 자유롭게 그 효와 충을 완성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인문역사상의 모든 예술, 문학, 종교, 도덕의 최고의 경지는 바로 일종의 마음의 자유를 발현시키는 것이다.


과학의 지식은 일종의 사물과 나 사이를 앏을 융합하여 외부로 발현시킨 무상의 자유이다. 예술,문학,철학, 도덕은 일종의 인간과 나 사이의 감정을 융합하여 외부로 발현한 무상의 자유이다. (사실 예술도 사물을 대산으로 하고, 과학도 인간을 대상으로 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괄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이 모든 것들이 안에서부터 발현되는 것이다. 정치상의 권력이나, 경제상의 재력은 모두 마음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외부의 사물 속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중요한 조건이 따라 붙는다. 만약 권력이나 재력과 같은 것에서 자유를 요구한다면, 얻을 수도 없거니와 타인에 대한 간섭이 될 것이다. 진정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것에 대해서는 냉담해야될 것이다.


중국 전통 사상은 마치 마음과 감정부분에만 집중되어 있고, 앎의 자유에는 방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근대 서방에서 이야기 되었던 자유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각성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무절제하게 정치와 경제에도 적용이 되었다. 그 결과 수 많은 문제를 유발하게 되었다. 영국의 철학자 루소는 제 1차세계대전 때 창조적 충돌과 점유적 충돌을 구분하였다. 이것 역시 대략 위에서 언급한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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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모든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과 환영합니다.  본 글은 의역식 번역입니다.
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따깡을 만들다가 기분 풀이식으로 답답할 때마다 번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안 다듬었습니다.  출판할 것은 아니기에 굳이 다듬지는 않았습니다. 글에서의 문제는 덧글을 통해서 지적해주시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위의 글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일단 한 작업이기에 공개는 합니다만...에휴...)

이번 편은 제가 잠들기 전에 적당히 손에 집어서 적당히 펼쳐서 본 부분입니다. 볼 때에는 아무 생각없이 봤는데, 번역을 하면서 보니 온갖 고문들이 다 있었군요. 그것보다 문제는 문체 자체였습니다. 중국어의 특징을 극단적으로 살린 문장들이 많았습니다. 볼 때야 이것이 오히려 더 편하고 중국어의 맛을 느낄 수 있지만, 번역할 때는 극악이군요.  이정도 분량이면 30분에 끝내는 것이 당연한데, 몇 일 동안 몇 문장 하다가 다시 따깡 쓰고;;; 이렇게 했답니다.


  1. 잡담 : 이 부분은 도무지 원문을 제대로 "번역"했는지 스스로도 의심스럽다.-_;; 이 글을 보는 한국어 사용자들이 제대로 이해가 되셨는지 궁금하다. 끙... [본문으로]
  2. 여기서는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 감정을 표현하는데 활용되었다. [본문으로]
  3. 보통 님을 생각하거나 고민때문에 잠들지 못하는 것을 나타낸다. [본문으로]
  4. 잡담 : 이 글은 정말 중국인..그것도 일정한 교육을 받은 중국인을 위한 글이다....시경 연타로구나... [본문으로]
  5. 잡담 : ....지금까지 위에서 넘쳐 흐르는 시경같은 말은 오래된 말이 아니더냐!!! [본문으로]
  6. 주문왕이 은걸왕의 손에 잡혀 있을때, 주문왕의 심리가 걸왕이 자신을 해하려 하든 말든 자기 자신은 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고 해석한 것. (왠만하면 보충 해석 필요 없을 정도로 하려고 했건만..) [본문으로]
  7. [/footnote])와 같은 말들은 진실된 감정의 발현이다. 순임금(大舜)의 효도나 굴원의 충성은 결코 외부을 향한 굴복이 아니다. 마음의 감정이 밖으로 뻗어나간 무한한 자유이다. 외부의 간섭과 융화된 일종의 내재적인 자유인 것이다.

    고수(瞽瞍)나 초회왕(楚怀王)은 분명히 순임금과 굴원의 마음이 요구하는 것에 강력하게 간섭을 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순임금과 굴원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고수(瞽瞍)나 초회왕(楚怀王)을 압박하여 이기지도 않았다. 순임금과 굴원의 효와 충은 인간을 넘어서 중도에서 일원화된 일종의 감정의 완성적 표현이다. 노자가 말하기를 "일가친척이 화목하지 못하면 효도와 사랑이 있고, 국가가 혼란하면 충신이 있다.六亲不和有孝慈,国家昏乱有忠臣(道德经)[footnote] 만약 모두가 화목하게 잘 살고, 모두가 효를 행한다면 특별히 효자라고 할 사람은 없겠지요. 모두가 국가에 충성을 한다면 특별히 충신이 있을 수 없겠지요. 사실 굳이 주석을 다는 이유는 저는 전묵선생님의 해석이 틀린것은 아니지만, 이 글의 원뜻과는 좀 다르다고 생각되서입니다.^^:: [본문으로]
我可是觉得在北京仿佛没有春和秋。老于北京的人说,地气北转了,这里在先是没有这么和暖。只是我总以为没有春和秋;冬末和夏初衔接起来,夏才去,冬又开始了。

鲁迅《鸭的喜剧》里。。。

나는 베이징에는 마치 봄과 가을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베이징 토박이들은 지세가 북으로 휘돌아서 전에는 (봄과 가을의) 따사로움이 없었다고 말하고는 한다. 단지 나는 언제나 봄과 가을이 없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겨울의 끝과 여름의 처음은 서로 이어져 있고, 여름이 떠나가자마자 겨울이 다시 시작된다.

루쉰 "거위의 희극" 중에서...


베이징에는 여름과 겨울만이 있고, 가을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30도를 넘는 더위에서 어느 순간 영하로 기온이 뚝 떨어지고 만다. 영하의 기온에서 어느 순간 반팔을 입지 않으면 땀이 온 몸에 흘러내리는 여름이 된다.

사실 베이징에도 순식간에 사라지는 봄과 가을이 있다. 너무나 빨라서 오래된 토박이들만 알 수 있는 이 순간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 선선했던 아침에서 살며시 냉기가 묻어오기 시작하였다. 비록 추위를 싫어하고 더위를 사랑하는 본인이지만, 올해의 베이징의 여름은 겨울을 기다리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이제부터 잠시동안 시작되는 베이징의 가을. 짦은 만큼 아름다운 그 계절에 또다시 들어오는 신입생들의 생기발랄한 모습들이 벌써부터 그려진다. 그리고 그 만큼의 시간을 나는 이곳에서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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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만에 생각나는대로 쓴 다음 곧장 올렸다. 그리고 다시 보니 떨어지는 낙엽에도 수백만가지의 이유와 슬픔을 느끼는 10대의 감수성같은 야시꾸리한 글이 된듯도 하다. 돌려서 말하지 않고 직접 말하자면...왠지 무지막지 부끄럽고 낯 간지러운 글이 되었다. 머지.....감수성 제로에 도전하던 본인인데;;;;


한국에서의 교수라는 직업은 참 대단하다. 한국에서 사실상 명예직로만 따지면 최정점중에 하나이다. 유교사상의 여파일수도 있고, 그만큼 존경스러운 교수님들이 있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교수라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국회의원이나 대통령도 한수 접고 들어간다. 그것이 한국의 교수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참 한심한 작태들이 널려 있다.

본인 개인적인 사정으로 교수사회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안다고 자부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런 본인에게 있어서 교수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인 모순들의 결합이다. 너무나 존경해서 감히 어떤 말도 하지 못하는가 하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적당히 시간과 돈 그리고 인맥으로 졸업장 따와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쓰레기 새끼들이라는 정반대의 생각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는 사실 뒤쪽의 쓰레기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인간들이 더 많다. 물론 현재는 사립대는 물론 국공립대까지 통폐합되고 있고, 교수에 대한 평가항목들도 늘어나서 능력 없는 교수는 점차 사라지고는 있지만...


사실 한국에서 교수에게 요구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무리이다. 한국에서의 교수는 학자의 모습과 교사의 모습 모두가 완벽하기를 강요받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서 이것은 무리에 가깝다. 왜냐하면 연구는 기본적으로 더 깊게 빠져드는 것이다. 그리고 강의는 가장 깊은 것을 넓게 할 수 있어야 된다. 먼 소리냐고? 연구는 무섭도록 논리적이어야 된다. 그러나 강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재능을 다 가지고 있는 경우는 매우 희귀하다.

본인이 직접 겪은 실례를 알려드리자면 쳔라이(陳來 질래)선생님이라는 중국 북경대 철학과의 유명한 교수님이 계시다. 중국철학...아니 중국학쪽을 하시는 분은 이름 한번 쯤은 들어봤을 분이시라고 장담한다. 본인도 대학생 시절 이 분이 수업을 개설한 것을 보고, 행복감에 젖어서 수업을 들으러 갔다. 그리고 좌절했다. 당신이 쓰신 책을 토시 하나 안 빠트리고 읽고 계셨다. 당신이 쓰신 책이니 그 동안 변한 생각이라던지, 혹은 책에서는 말하지 못한 것이 있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2시간 내내 조용히 책만 읽고 계신다. 하지만 이 분의 연구는 세계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다고 관련 전공자들은 말하고는 한다. 본인도 그분의 책을 읽으면서 감탄했었는데 말이다. 이 이야기를 쳔라이 선생님 님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형에게 이야기했더니 킥킥 웃으시면서 그 분 수업은 정말 못한다고 하셨다.


사실 이러한 연구자타입은 교수보다는 연구소에서 연구만 하고 지내는 것이 훨씬 더 좋다. 그것이 그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고, 타인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국의 문제점이 있다. 지금은 조금씩 괜찮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연구원에 대한 대접과 교수에 대한 대접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돈은 기본이고, 밖에서 받는 대접들도 말이다. 그런데 사실 연구원이나 교수나 학력이나 재능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특히 한국에서는 오히려 연구원의 재능이 뛰어난 경우도 상당히 자주 목격을 했다.

그러나 교수는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연구원들은 무시하는 풍조가 아직도 만연해 있다. 사실 교수는 연구도 중요하지만, 가장 쉽게 가장 짦게 학문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느냐가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연구가가 아니라 기본은 어디까지나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칠 것을 가장 열심히 깊게 연구하는 것이 연구원들인 것이다. 최소한 이 글을 여러분들이라도 연구원에 대한 개념을 조금 바꾸어 주셨으면 한다. 연구원들은 교수가 되지 못한 쓰레기들이 결코 아니다.



-------
잡담-잡담--
자! 계속 이렇게 말도 안되는 잡담으로 질주해보는거야!

이상한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본인이 생각했을 때....본인은 자체는 연구자 타입이 아니다. 그러기에는....너무 나댄다고 해야될려나...폼나게 말하면 현실을 사랑하는거고...냉정하게 평가를 하면 깊이 접근할 능력이 안되는 것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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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대학교의 유학생 기숙사인 勺园(샤오위엔 shaoyuan) 2호동의 4층에는 열람실이 있습니다. 사실 저 자신은 열람실에서 공부하기보다는 침대에 들어누워서 책을 보는 스타일입니다. 그러나 올해 베이징의 기온은 더위에 강한 저로서도 버티지 못할 정도였기에, 에어콘이 빵빵 나오는 이곳으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찍은 것입니다. 작업중의 자리는 지저분의 극치...)

비록 열람실이라도 저는 최적의 작업환경?!을 추구하기에 어느 사이에 아름다운?! 저만의 자리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더위가 가시면 다시 방으로 돌아가서 작업을 하겠지만, 그 전까지 있었던 추억의 자리로 이렇게 기록에 남겨둘까 합니다.


열람실로 들어오셔서 왼쪽 모서리에 저의 자리가 있습니다. 심심하면 음료수 들고 찾아오셔요.

반대쪽에서 보면 이렇게 배치가 되어있습니다. 나름 제 영역만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실 북경대 열람실에는 따로 전용자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맨날 죽치고 있는 사람들이 저처럼 만들어놓은 각자만의 공간이 몇몇 군데 있답니다.

자세히 보시면 파란색 인터넷 선이 연결된 것이 보이시죠? 잘 기억해두십시오. 나중에 설명 들어갑니다^^


사실 작업중에는 보조 키보드를 꺼내서 작업을 합니다. 안 그러면 손목이 아파요-0-;; 또 제가 노트북을 끄지 않다보니...열에 녹았는지 노트북의 키보드의 몇몇 버튼이 잘 안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보조키보드도 좀 작고 키감도 좋지 않아서, 대형크기의 키보드를 살까 생각중에 있습니다.

지저분해보인다고요? 사실 책은 치워놓은 거랍니다. 책까지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보시면 주위로 접근하기 싫으실지도....--


정면에서 찍은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듀얼모니터를 강력추천합니다. 그러니까 노트북 화면과 확장모니터 화면이 같은 것이 아니라, 이어지듯이 연결되는 듀얼모니터를 추천합니다. 이렇게 되면 작업을 할 시에 자료를 보기가 좋습니다.


바로 오른쪽에 있는 캐비넷의 한 줄을 제 전용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사실 여기 캐비넷은 슬슬 정리할때가 온것 같습니다. 이미 2년전에 졸업한 제 친구녀석의 책까지 아직 있더군요. 수북히 쌓여있는 포스트잇은 제가 이런저런 잡상이 떠올랐을때 적어두고, 일단 버려둔 거랍니다. 나중에 어떻게든 쓰이더군요--

요즘은 나름 몸도 생각해서 비타민에 홍삼정까지--



열람실 역사상 최초의 삽질입니다 음하하...기념으로 놔두기 위해서 따로 찍었습니다. 이 선은 인터넷 선입니다. 열람실에서는 유표형님이 가져다 둔 공유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공유기는 입구에서 오른쪽에 있으며, 무선은 지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선택한 자리는 왼쪽 끝자리. 그래서 바닥을 통해서 인터넷 선을 연결해버렸습니다. 제가 알기로 열람실 역사상 저 같이 한 인간은 없습니다. 음하하하;;;; 삐질...



사실 열람실에서 이렇게 자리를 잡는 것은 그리 잘하는 짓은 아닙니다. 다른 분의 공부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 미안한 마음에 저도 몇가지 물건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위에 사진에 있는 것은 음이온정화기. 나름 몇 만원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을 열람실에서 작동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기모기향 장비도 제가 가지고 온 것입니다. 쓰고 싶은 분은 마음대로 써주시기 바랍니다.


오랜만에 잡담글이었군요. 요즘 저는 이러고 살고 있습니다. 하하하^^:::

* 여친님께서는 이 글을 보시고는 포스팅할게 그리도 없었냐고.....방정맞게 왜 이런걸 자랑하냐고........하십니다....흑....자....자랑이라기 보다는.......나름 예쁘게 꾸며놔서 뿌듯함에 올린건데...올린건데......흐흑..방정 맞게...방정맞게...ㅠㅠ 미워!!!

최근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대화를 할 때, 본인이 가장 거슬리는 것이 "다르다"를 그냥 "틀리다"라고 말해버리는 일이다. 물론 언어는 살아있기에 얼마든지 자유롭게 변형될 수 있고, 자연스럽게 그러하고 있다. 그래서 본인도 인터넷 언어에 대해서 강력하게 사용하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르다"와 "틀리다"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같다 - 다르다
맞다 - 틀리다.

다르다는 것은 나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자동차와 비행기가 다르고, 밥과 빵이 다르다. 그리고 틀리다는 어느 한 주장이 틀리다. 혹은 정답이 틀렸다로 쓰이는 말이다. 문제는 한국인들이 이 두가지를 혼용하면서 서로 생각이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인식해버리고, 틀린 것을 그냥 다른 것이라고 주장해버리는 논리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다르다와 틀리다는 아래와 같이 사용되어야 한다.

다르다 : A라는 여성을 보고 나는 예쁘다고 생각하지만, 너는 못생겼다고 생각한다. 너와 나는 다르다.

틀리다 : 만약 A가 물고기를 보고 우주선이라고 하면 틀린 것이다. 물고기는 어디까지나 물고기이고, 우주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A는 틀렸다


개인의 주관으로 변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서로 다른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인 사실 자체에 대한 문제라면 그것은 맞고-틀리고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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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분이 MSN으로 "한국의 주류층은 민족주의인가요?"라는 질문을 해주셔서 그에 대한 답변으로 쓴 것입니다. 제가 논문관련 작업을 하다가 아무 생각없이 적당히 타자를 쳤는데, 솔직히 상당히 마음에 드는군요. 살짝 보충해서 올립니다. 역시 무의식의 힘은 강했습니다 ^^


한국에서 민족주의는 완전한 주류라고 봅니다. 단지 중국과는 좀 다른것이. 중국은 처음부터 다양한 민족이어서 중화민족이라는 새로운 민족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물론 이런 과정은 매우 불안하고 실패의 연속으로 보이지만, 최소한 중화민족의 개념만 포기하면 기본적으로 다민족을 인정하였기에 의외로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소수민족에 대한 명목상의 우혜보다는 실질적인 대우개선이 필요하지만 말이죠.

그에 비하여 한국의 경우 민족주의로 단일민족만 강조하다가, 점차 외국인노동자는 물론 국제결혼까지 증가하기에 기존의 단일민족관이 상당한 충격을 받게 되죠. 오히려 어떻게 보면 중국보다 더 나쁜 방식으로 민족끼리의 대결이 실현될 가능성이 더 높은 곳이라고 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민족끼리의 대결이라기 보다는 절대수가 "한민족"이 많으니 일방적인 억압과 탄압이 들어가겠고, 그에 반항으로 일어나는 폭력 그리고 파생될 국제사회에서의 고립.

그러지 않기를 바라며 빨리 민족주의...아니 최소한 단일민족주의는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솔직히 많이 불안하군요. 미국의 민족갈등이 한국에서 재현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으니까요.



 옛날 어떤 곳에 한 그루 교목(喬木)이 있었는데, 그 나무 아래에는 항상 천상의 선녀(仙女) 한 사람이 내려와 있었다. 선녀는 그 목신(木神)의 정기로 잉태하여 한 미남자를 낳았다. 목신의 아들이므로 그를 목(木) 도령이라고 불렀다.

 목 도령이 칠팔 세 되었을 때, 선녀가 천상으로 돌아가 버리자, 큰 비가 몇 달 동안 계속 내려 온 세상이 물바다가 되었다. 교목이 넘어지면서 목 도령에게,

 "어서 내 등에 올라타거라."

하였다. 목 도령은 그 나무를 타고 정처 없이 표류(漂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목 도령은 목신에게 부탁하여 홍수에 떠내려가는 개미 떼와 모기의 떼를 구출해 주었다. 개미 떼와 모기 떼를 싣고 지향 없이 가는 교목을 향하여 구원을 요청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 도령과 같은 연배의 남자였다. 목 도령이 이 사람을 구해 주려고 하였지만 교목은 반대하였다.

 "사람은 구하지 말아라."

고 하였다. 그러나 목 도령은 아버지인 교목에게 애원하여 그 남자를 구해 주었다. 그때에 교목은 말했다.

 "너의 애원을 못 이겨 구해 주었지만, 다음에 반드시 후회할 날이 있으리라."

 교목은 마침내 어느 조그만 섬에 표착(漂着)하게 되었다. 홍수로 인하여 모든 세상이 물에 잠겼으나 오직 이 높은 봉우리만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두 아이는 그 섬에 내렸다. 개미와 모기들은 목 도령에게 치사(致謝)하고 각각 제 갈 곳으로 가 버렸다.

두 아이는 그 섬에 단 하나 있는 일간 두옥(一間斗屋)을 발견하였다. 거기에는 한 노파와 두 처녀가 살고 있었다. 두 처녀는 또한 두 아이와 동년배였는데, 한 처녀는 노파의 친딸이었고 다른 처녀는 그 집의 수양딸이었다.

 비가 그치고 홍수는 물러갔으나, 산 아래 세상에는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노파의 집에서 사는 동안 두 쌍의 소년 소녀는 성년기에 이르렀다. 노파는 이들을 부부로 하여 세상에 인종(人種)을 퍼뜨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두 청년이 서로 수양딸을 취함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파는 고심하였다.

 하루는 구조된 청년이 친딸을 차지하기 위한 모략으로 노파에게 가만히 말하였다.

 "목 도령은 한 섬의 좁쌀을 모래밭에 흘리더라도, 순식간에 그 좁쌀을 모래 하나 섞이지 않게 도로 주워 내는 재주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재주는 좀처럼 친한 사람이 아니면 보이지 아니합니다."

 노파는 그 신기한 재주를 보고 싶어 목 도령에게 청하였다. 목 도령은 그런 재주가 없다고 사실대로 말하였다. 그러나, 노파는 다른 청년의 말을 믿고 목 도령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하며 크게 노(怒)하였다. 그래서 그 재주를 보여 주지 않으면 딸을 주지 않겠다고 하였다.

목 도령은 할 수 없이 한 섬의 좁쌀을 모래밭에 흩어 놓고 그것을 들여다 보며 탄식만 하고 있었다. 그 때 난데없이 개미 떼가 와서 좁쌀을 하나씩 입에 물어다가 원래의 섬에 넣었다. 순식간에 좁쌀은 모래 한 알 섞이지 않고 원래의 한 섬이 되었다.

 개미 떼는 저희 갈 곳으로 가고 저녁때가 되어 노파는 다른 청년을 데리고 모래밭에 나타났다. 노파는 감탄하면서 친딸을 목 도령에게 시집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다른 청년이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므로 노파는 한 계책을 세웠다. 어느 어두운 밤에 노파는 두 청년을 밖으로 내보내고 두 처녀를 동쪽과 서쪽의 두 방에 들어가게 하였다. 그리고 두 청년에게 서로 들어가고 싶은 방에 들어가서 배필을 취하라고 하였다.

 그때 한 마리의 모기가 목 도령의 귀 옆으로 지나가면서, '동쪽 방으로 들어가라.'고 하였다. 목 도령은 그 말대로 하여 노파의 친딸을 얻게 되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이 두 쌍의 부부의 자손이라고 한다.

출처 : http://www.ojirap.com/technote/read.cgi?board=sulhwa&y_number=9


해당 이야기는 손진태(孙晋泰)의 <조선민담집 朝鮮民譚集>, 동경 東京 향토연구사 鄕土硏究社, 1930에 수록되어 있다 손진태의 연구에 따르면 해당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삼국시대 오나라 三国时代 吴】강증회 康僧会가 집필한  <육도집경六度集經>에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해당 이야기에서는 나무가 모체로 등장하지 앟는 것으로 보았을 때, 나무 숭배 사상이 한반도에 존재하였다는 것에 대해서 일정이상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보인다.

사실 본인도 본과졸업논문으로 솟대(神竿)에 대해서 쓴 것과 같이 한반도에는 오래전 부터 우주나무에 대한 숭배가 분명히 이루어지고 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우주나무 숭배가 중국대륙에서 유입이 되었느냐. 아니면 북방계열을 통해서 유입이 되었느냐. 혹은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이냐는 문제가 남는다.

일단 나무도령(목도령)의 이야기는 육도집경의 이야기가 한국으로 전래되면서 한국의 토착문화에 녹아든 사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해당 불경이 이야기가 오나라에서 먼저 나무숭배사상이 있어서 변형이 된 후에 유입되었을 수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나라 사람이 집필을 하였다면 변형된 것을 집필했을 가능성이 높고, 중국대륙에서의 나무숭배는 하늘에 대한 숭배측면이 약하다는 것(본인 본과졸업논문에서 언급) 그러나 귀찮아서 구제적인 사례는 패스....어차피 이건 내 잡담인걸....하하하;;;)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솟대나 나무숭배가 북방민족을 통해서 전래되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한반도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났을 가능성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지금까지는 중앙아시아 일대에 더 오래된 나무숭배 사상의 흔적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북방민족으로부터의 유입이 더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정리하자면 목도령(나무도령)설화는 북방유목민족의 나무숭배사상의 영향 속에 있었던 한반도에 육도집경에 포함되어 있는 인도계(혹은 중국계)설화가 전래되면서 기존의 나무숭배사상과 융합이 되어서 만들어진 설화이다.


사실 여기서 글이 끝나야 정상이지만...
위의 글로서 말하고 싶은 것을 대놓고 말하면 다음과 같다.
한반도의 문화는 중국대륙의 문화외에도 북방유목계열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한마디로 다문화라는 소리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현대에 쓸데 없는 단일민족주의로 외부의 문화에 대한 탄력을 잃어버리지 말자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중국의 어떤 논문을 보다가 목도령 설화라는 것을 보고서야. 서둘러 위의 내용을 찾아보았다. 본인이 어릴 때에 저런 설화를 들은 기억이 없는데...혹시 어린 시절 목도령(나무도령) 설화를 들어보신분????

공자가 한국 사람이라는 분들이 있다. 중국을 이기고 싶은가? 그것보다 더욱 확실한 방법을 알려주겠다. 그러니 공자가 한국 사람이라는 헛소리는 그만 했으면 한다. 그래서 본 내용은 최대한 쉽고 간단하게 적었다. (그래서 더 자극적일수도...)


1. 공자는 한국 사람인가?
공자가 한국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보통 다음과 같은 논리를 가지고 이야기 한다.

공자가 태어났던 산동성 곡부는 당시에 동이(东夷)라는 사람들이 살던 곳이다. 한민족은 동이(东夷)의 후손이다. 고로 공자는 우리의 조상이다.

말이 되는 것 같은가? 미안하지만 위의 말은 억지에 불과하다. 명확하게 틀린 말이다.

1) 공자는 동이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당시의 산동성이 동이들이 모여살던 곳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는 말이지만, 정확하게는 당시의 동이와 화하족들이 같이 모여 살던 곳이다. 고로 동이라고 확정할 수 없다. 물론 화하족이었어도 동이라는 민족그룹의 문화적인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혹자는 공자의 족보를 따지며, 공자의 조상은 원래 은나라사람이었고, 송나라로 갔다가 다시 노라나로 왔기 때문에 공자가 동이족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 의견을 채택해서 공자가 당시의 동이였다고 가정을 해보자. 그래도 문제는 남아있다.


2) 당시의 동이와 나중의 동이는 다르다.
춘추전국시대의 동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폭넓은 개념이었다.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을 보면서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당시의 중국이라는 개념은 지역적으로는 매우 좁은 곳에 한정이 되어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산동성부터 시작해서 동북쪽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동이라고 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혹자는 동북쪽까지 가지도 않고, 잘해봐야 요서라고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동이의 개념은 변한다. 산동성의 경우 진시황의 진나라 통일 이후에 동이가 아닌 중국의 개념에 포함이 된다.

원래 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중국의 동쪽에 있는 이민족이라는 상대적인 개념이었기에, 중국이라는 것이 확장됨에 따라서 얼마든지 유동적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고조선을 운운하면서 한반도로 동이가 유입되었다고 말한다면, 중국으로도 그정도의 동이는 충분히 녹아들었다고 반박을 할 수 있는 것이다.


3) 동이는 하나의 민족이 아니었다.
지금은 보통 동이(东夷)라고 하지만 사실 동이는 구이(九夷)라고 불리기도 했다. 9종류의 동이(东夷)라고도 할 수 있고, 구의 뜻은 단순히 "9"가 아닌 "수 많은"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어떤 경우더라도 당시의 동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매우 다양했었다. 산동쪽의 동이와 동북쪽의 동이가 달랐던 것이다. 단순히 당시에 동쪽에 있다고 하여서 문화적으로도 연결점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그냥 동쪽의 이민족(东夷)으로 불렀던 것이다.

(참고로 전국시대의 초나라도 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현재의 중국 남부지역에 위치한 초나라에는 도가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노자도 있었다. 만약 공자가 동이라면 노자도 동이인가? 너무 거리가 머니까 왠지 거부감이 생기는가?)


4) 동이만이 한국인의 조상이 아니다.
한국은 동이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수 많은 민족들의 융합으로 생겨난 것이다. 이미 학계에서는 정리가 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민족주의적 세뇌에 의해서 아직도 단일민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벌어진 코메디인 것이다. 한국은 동이의 후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수 많은 민족의 후손인 것이다.

고로 "공자가 동이임으로 우리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코메디일 뿐이다.



2. 중국인들을 누르고 싶은가? 그 방법을 알려주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을 입닥치게 하고 싶은가? 공자를 이용해서 말이다. 그럼 쓸데 없이 공자가 한국인의 조상이니 머니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는 확실하고 중국인들이 반박도 하지 못하는 제대로 된 방법을 알려주겠다. 중국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면 된다.

"공자의 정신을 제대로 이어받고 있는 곳이 어디라고 생각합니까? 중국은 문화대혁명으로 과거의 것들을 잃어버렸지만, 한국은 아직도 다양한 문화유산들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공자에 대한 제사(석전대제) 역시 중국에서는 이미 그 방법을 몰라서 한국의 성균관(대)[각주:1]에서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효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으며 인의예지를 높게 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이야 말로 진정한 공자의 후손입니다."

조용히 위와 같이 말을 한다면 배웠다는 중국인일 수록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한다. 어떤 중국인들은 그 자리에서 열폭해서 헛소리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대로 논리적인 대답이 나올 수는 없다. 위에서 말한 것에서는 한마디 거짓이나 복잡함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현상이고 사실이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공자가 한국인과 핏줄로 이어졌는지가 아니다. 비록 예수에게는 자식이 없으나, 만약 예수의 자식이라도 살인을 하면 그것은 분명히 나쁜 것이고, 살인자의 자식이라도 선한 일을 행하면 칭찬 받아 마땅한 것이다.

단! 위의 말을 중국인들에게 한다면 당장은 무릎을 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점차 늘어간다면 과거의 것을 어떻게 지켜야한다는 의식이 생겨나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서 타이완쪽에 남아있는 과거의 것으로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다. 한마디로 당장의 날카로운 칼이지만, 중국인에게 깨닭음을 주는 말이다. 본인이야 한국이든 중국이든 옛것을 지키고, 그것을 바탕으로 전진해가기를 원하기에 위와 같은 말을 해주지만, 당신들이 그러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다.


3. 핏줄보다는 정신을 중요시 하여야 할 때.
본인은 특정종교를 믿지 않고 있다. 예수의 말도 옳은 부분이 있고, 부처의 말도 옳은 부분이 있고, 공자의 말도 옳은 부분이 있고, 노자의 말도 옳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사람들에 의해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말에 따라서 행동을 한다면, 종교를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성균관대 유학 동양학부쪽의 몇몇 분들은 공자를 우리 조상이라고 말하려고 힘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공자의 말씀을 배웠다는 분들이니 만큼 더욱 한심하게 생각한다. 공자가 주공을 꿈에서 만난 것은 주공이 그의 조상이어서 그랬던 것인가? 공자가 주공의 뜻을 이어받으려 한다고 말한 것은 조상이었기 때문인가?

중요한 것은 핏줄이 아닌 정신을 제대로 이어 받아서 제대로 행동을 하는 것이다.

* 참고로 본인은 공자가 한국에서 제대로 살아나던지. 아니면 완전히 죽어버려야된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공자의 말을 이어받는 인간이 없이 이상하게 왜곡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은 공자의 부활이 필요하다.을 참고.



공자에 대한 이야기이니 만큼 공자의 한마디 말로 끝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子曰, “周監於二代, 郁郁乎文哉! 吾從周 "공자가 말씀하시길 : 주나라는 하와 상 두 왕조를 거울 삼으니, 그 문화는 매우 찬란하구나!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

이를 본인이 현대적으로 바꾼다면. "한국인은 공자나 예수 혹은 다른 훌륭한 사람을 거울로 삼으니, 그 마음이 매우 찬란하구나."



추가--
잡담 : 이 글이 얼마나 무서운 중국현실 비판인지 아실 분은 아시리라 봅니다. 중국은 현재 무형유형의 전통자산을 잃어버렸고, 제대로 회복하려 노력도 안하고 있습니다. 또한 반대로 이 글이 얼마나 한국의 현재를 칭찬하고 있는 것인지 알 분은 아시리라 봅니다.

잡담2 : 한국이나 중국이나 옛것에 대한 쓸데 없는 집착을 하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실이며, 미래라는 것을 아셨으면 합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되었냐 혹은 우리 조상이 얼마나 위대하였느냐가 아니라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하면 위대해 질 수 있느냐에 대한 고민입니다.


  1. 추가 : 석전대제를 관장하는 기관은 성균관대가 아닌 성균관입니다. 그럼으로 성균관이라하겠습니다. 그러나 성균관대쪽과도 긴밀한 연관이 있으며, 많은 유교부분에서 성균관대의 역할이 컸기에 () 안에 대를 넣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비판과 비난은 분명히 다르다. 비판은 서로가 다음을 제대로 인정을 하고, 그 위에서 상대방의 생각의 기반이 되는 것들에 대해서 정확한 근거와 증거를 인용해서 논리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지켜지지 않을 떄가 많다. 마냥 자신만의 느낌으로 "그건 아니다!" "그건 틀리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물론 주관성이 들어 갈 수밖에 없는 수 많은 일들이 세상에는 널려 있다. 그러나 주관적인 일에도 그 기반이 되는 근거나 증거가 제시된다.

단순하게 말해서 마냥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 틀렸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왜? 어찌하여서 틀렸는지를 제시하여야 하는 것이다. 미디어법을 악법이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왜 어찌하여서 악법인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난에 불과할 뿐이다. (원래 이런 비판의 근거는 미디어에서 정리해서 보여주며, 사람들은 그것을 해석해서 받아들이면 되었다. 그러나 요즘은 신문매체를 제대로 읽는 사람이 점차 없어지는 기분이다. 후...)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큰 문제는 서로의 생각이 다른 것과 상대방의 논리나 근거가 틀렸다는 것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르다와 틀렸다를 구별하지 못하는 세태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본인도 맞춤법을 굳이 정확하게 해야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언어는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르다와 틀렸다는 논리적으로 완전히 다른 말이다. 영어로 하면 different와 wrong의 차이이다.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런데 왜 섞어 쓰는 건가?

비판은 소중한 것이다. 비판이 있기에 인류는 발전해 올 수 있었다. 그러나 비난은 99%의 상황에서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같은 편까지 적으로 돌리는 바보짓에 불과하다. 제발 타인을 이해하고, 정확한 근거와 증거로 "비판"을 하자. 길게만 쓴다고 비판이 아니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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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안리양랑 님에게 문답릴레이 : 최근 생각하는 "번역"이라는 릴레이를 받았습니다. 요즘 제가 좀 정신이 없어서 짦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너의 기준에서의 짦게잖아!!! 흠흠..;;;)

1. 최근 생각하는 ~
2. 이런 ~ 감동!
3. 직감적으로 ~
4. 좋아하는 ~
5. 이런 ~ 싫어
6. 다음에 넘겨줄 7명

daewonyoon님이 넘겨주신 주제는 중국이었습니다. 차라리 번역이었으면 더 좋았을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번역관련 분들 모아서 번역관련 릴레이? 킥킥;;;) 중국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처음 드는 기분은 막막함이군요. 중국이라...


1. 최근 생각하는 중국
저는 국가개념을 떠나서 생각하도록 노력했기에 오히려 "중국"은 어떠어떠하다라고 최근에는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이라는 나라를 알 수록 어떠어떠하다라고 정의하기가 매우 어렵게 느껴집니다. 결국 국가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다양한 사람들의 모임인데, 중국에는 한국과 비교해서 너무나 다양한 스팩트럼(계층)이 존재합니다. 자연환경적으로도 그렇고, 문화적으로도 그렇고, 종교적으로도 그렇고, 민족의식적으로도 그렇고 어떻게 통합해서 중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중국 정부는 중화민족과 중국인이라는 허구의 개념으로 이를 통합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만, 작년의 티베트와 올해의 위구르를 보면 알 수 있다 싶이 그리 성공적이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최근 제가 생각하는 중국은 물음표입니다.


2. 이런 중국 감동~
감정이 매마른 것인지 그리 감동이라고 할 것은 없습니다. 굳이 뽑자면 중국네티즌들의 국가에 대한 도전이 감동적입니다. 물론 한국도 수 많은 네티즌들이 정부에 대응하여 그 문제를 지적하고, 그것에 대해서 수정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잘못 말을 하다가는 한국의 미네르바를 뛰어넘는 구속이 "비공개적으로" 일어나는 곳입니다. 물론 용기 없이 분위기에 휩쓸리는 인간들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위험함을 인지하고도 잘못 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감동적입니다. 그리고 이런 감동이 없어지도록 하는 것이 중국정부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3. 직감적으로 중국
1번에서도 말했지만 모르겠습니다. 자칭 타칭의 중국전문가들이 중국은 이렇다라고 규정을 하지만 그것이 중국이라는 것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수 많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억지로 직감적으로만 말을 하자면 "중국은 없습니다. 중국이라는 말은 모든 것을 무식하게 통합적으로 녹여버리는 허구의 용광로일뿐입니다. 그 곳에서 살아가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4. 좋아하는 중국
저는 중국의 문화적 상위 10%을 좋아합니다. 중국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명 아직 질서의식이 부족하고, 더럽고, 시끄럽고, 짜증을 내게 합니다. 그러나 문화적 상위 10%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놀라운 것이 사실입니다. 엘리트 주의라고 비판받을 수도 있는 말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머..극단적으로 제 취향으로 간다면 무협지나 사극물을 상당히 제대로 고증해서 만드는 중국이 좋습니다. 하하^^:: (물론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엉터리 고증에 비하면!!)


5. 이런 중국 싫어.
80년대생을 중심으로 하는 신보수주의 세력에 의한 강도높은 애국주의를 뿜어내는 중국이 가장 정말로 저주스럽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한국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떠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민족이니 국가이니 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이 정체성이 애매할 때에나 강도높게 말하는 약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개인 개인일 뿐이지. 그것을 국가니 민족이니 하는 허구적인 개념으로 포장하는 모습은 정말 싫습니다.


6. 다음에 넘겨줄 7인.
제가 지금 제 일로 바빠서 넘겨드리고 가서 그것에 대해서 설명하기가 힘들군요. 이 글을 보시고 참여하고 싶은 분은 알아서 트랙백을 날려드리면, 이 부분에 추가하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좀 정신이 없어서^^::


어느 정치 개그맨이 있다. 과거에는 상당히 진지하였는데, 지금은 인터넷에서 최고의 웃음을 주는 인기스타가 된 어떤 인물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대선에서의 표로도 이어졌다. 비록 많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이 정치 개그맨 자체가 사실 한국의 정치적 성숙도를 알려준다고 할 수도 있다. 사람들이 이 정치개그맨을 좋아하고 심지어 표까지 던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그 자체가 인생은 한편의 비극과 희극이 뒤섞여 있는 것이라는 것을 절실히 나타내준다. 어떻게 보면 국민들의 정치의식에 한숨을 보낼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본인도 그 사람의 이름은 결코 거론하지 않는다는 마지막 자존심을 남겨두고 있다.

국민들의 정치의식 수준이 의심되는 상황에서도 그것을 비판하고 싶지 않다. 이 모든 상황을 만든 이들은 국민들이 아닌 정치에 대한 혐오감과 무관심을 만들어낸 "당신들"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이여. 정치 개그맨이 인기를 얻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인기영합(포퓰리즘)을 운운하면서 국민들을 비판하고 싶은가? 최소한 당신들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현재의 정치는 정말 재미가 없을 뿐더러, 국민들과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본인 이 정치 개그맨이 빨리 사라졌으면 한다. 그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현재의 정치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요즘 논문주제보고를 위해서 삽질중입니다. 저의 능력의 한계와 끊임없는 욕심들의 파도에 휘말려서 어디론가 표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패턴도 참 아름답게 변해버렸습니다.

8시 기상 및 식사. 9시 공부. 11시 운동 및 샤워. 12시 공부. 2시 식사. 다시 공부. 8시 식사. 다시 공부. 11시 식사. 다시 공부. 2시 취침.

상당히 아름다운 삶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공부만 죽도록 하니 미친 것이냐고요? 그것보다는 맨 처음 기상하는 8시가 저녁 8시인겁니다. 남들과는 정확하게 정 반대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것도 정확하게 12시간을 말이죠.

사실 전 밤에 집중이 안되는 스타일이기에 어쩔 수 없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런 생활은 폐인과 다를 바가 없기에, 20일에는 저녁까지 밤샘을 계획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녁 6시쯤에 너무 피곤해서 자버렸지만 말이죠. 그래도 나름 아침까지 잠들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잠들기 전에 든든하게 밥도 먹었고 말이죠.(음....잠자는 것이 무슨 운동도 아니고-_)

그러나!! 7시 43분. 한국에서 A의 전화. 9시 25분 다시 한국에서 B의 전화.
11시 24분. 인터넷에 들어오라는 어떤 분의 연락을 받은 중국에 있는 녀석의 전화.

위의 저 사람들이 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다들 나름 복잡한 용건이었다면? 사실 가장 큰 문제는 그 피곤한 와중에도 과거 어떤 누님 덕분에 길들여진 습관으로 순간 정신을 번쩍 차리고 전화를 받고, 용건 처리 후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는 것이다.


점차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지금! 울음이 나올 것만 같다.
역시 나는 낮의 세계와는 인연이 없는 것 같다.
밤의 나라 아그들아. 역시 나는 너희들을 떠날 수 없는가봐.ㅠㅠ



덧 : 논문주제보고서 진행사항.
참고서적목록 완성. 목차완성. 연구목적완성. 연구방법완성. 한반도쪽 연구성과...일단 완성(사실 한줄로 소그드 연구는 개뿔! 이라고 하고 싶었다. 한반도에 소그드가 도래했을 것이라고 정확하게 꼭 집어 쓴 논문 제로. 서역인과 소그드를 구별하고 있지도 않다. 동북쪽도 한국학계의 논문은 제로. 일본과 중국학자의 발해쪽 시론정도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한반도쪽은 억지로 서역교류쪽까지 밀어넣어서 써버렸다. 개인적으로는 역시나 다 지워버리고 개뿔도 없다라고 하고 싶다. )

 이제 가장 쉽고도 어려운 기존의 전체 소그드 연구정리만 하면 끝...이지만...어차피 본인 스스로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시 다 뜯어 고치고 어쩌고 하면서 다음주에나 완성되려나. (사실 논문주제보고서만 쓰는것도 아니고, 관련 사료도 계속 폭식하고 있다. 욕심을 버려야돼!!)

역사학은 기본적으로 역사 사료를 해석하여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조선왕조실록이나 삼국사기에서 나오는 문장을 기본으로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떤 자세로 똥을 싸고, 어떤 정책을 통과시키려고 어떻게 싸움박질을 했는지 알아보는 학문이다. 한국은 삼국시대부터 중국의 유교사상이라는 모든 사항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정신을 가진 이념과 한자라는 문자가 전래된 덕분에 일찍부터 국가차원에서 역사를 기록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역사사료는 믿기가 힘들다. 왜곡과 과장은 기본이고 삭제도 심심하면 일어나기 때문이다. 왜 그러냐고? 남자들이 허풍을 치는 것 중에 한때 10대 1로 싸웠냐느니. 100대 1로 싸웠냐느니. 내가 툭 치니까 옥수수가 우르르 쏟아진다는 웃기지도 않은 헛소리가 생각나시는가? 아니면 군대에서 북한에 넘어갔다 왔냐느니, 태권V가 국회의사당이 열리며 출동한다느니 하는 이러한 헛소리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신라가 만반의 준비를 해서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처절하게 깨지고 돌아왔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허벌나게 쪽팔리는 일이다. 그럼 "우리가 고구려를 공격해서 깨지고 돌아왔다."라고는 절대 기록하지 않는다. 그냥 "우리가 고구려를 공격해서 1000명을 사로잡아서 돌아왔다."와 같이 서술해 버리는거다. 참~~~ 쉽죠?~~잉~

삭제도 비일비재하다. 당신이 피임을 잘못 해서 임신을 해버렸다. 혹은 임신을 시켜버렸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정말 친한 주위의 사람들 외에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낙태를 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물론 속도위반 소리를 들으며 결혼할 수도 있다.) 물론 먼 훗날에 자서전에 한 줄 정도 언급할 수도 있지만, 사실상 평생동안 마음 속 깊이 묻어두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이런 일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벌어진다.

예를 들어서 만약 고구려가 신라를 사실상 속국으로 데리고 있으면서 시도때도 없이 공물과 여자들을 요구했다고 하자. 모두가 알다 싶이 나중에 신라만이 살아남아서 신라 사람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게 된다. 김부식이 볼 때 위의 사실은 무지막지 쪽팔리다. 해결방법은? 그냥 해당 사실을 삼국사기에 쓰지 않으면 된다. 참~~~ 쉽죠?~~잉~

이렇게 문제가 많은 역사사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타임머신이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료와의 교차분석과 고고학 및 다양한 학과의 방법론을 동원해서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한마디로 머리가 빠개지는 듯한 괴로움이다. 역사자료가 가장 중요한데, 그것을 믿을 수가 없으니 짜증나지 않겠는가? 그나마 A라는 나라가 있었고, B라는 나라가 있었다 정도는 불변하지 않는 사실이고, 그 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기에 그런 "분명한" 사실들을 늘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가 과학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인문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부분이 분석이 아닌 해석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적인 역사사료조차 쓰지 않고,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펴고 소설을 쓰는 분들이 계시다. 이미 근대에 작성되었다고 "확정"된 환단고기를 기반으로 온갖 판타지를 쓰시는 분들이다. 본인 얼마 전 발해 관련 자료를 수집하다가 우연히 이병화의 "발해강역고(渤海疆域考)"을 다운받게 되었다. 그리고 주화입마에 빠져버렸다. 대체 어떤 고대사 역사논문에 역사사료를 하나도 인용하지 않을 수 있을까? 대체 그의 말이 어떻게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는가? 증거도 없이 그냥 그 사람이 써 놓은 것을 진리라고 생각해야되나? 그냥 자신의 말이 진리다라는 과대망상에 불과하다.

사료는 분명히 불안정하고 위험하다. 그러나 그런 사료조차 쓰지 않는 사이비들아.
................그만해라. 쫌....ㅠㅠ


-----------------
덧 : 본인의 주변이 역사학도들이다보니 공자가 한국사람이라고 주장하는 바보들은 없다. 그런데...본인과 친하지는 않지만, 알기는 아는 한 사람이 이런 바보였다. 더 문제는 그 사람의 선배가 선진사(공자가 살던 시대) 전공이라는 것이다....그 사람은 대체 멀까?

덧2 : 여전히 논문주제발표 준비중.....핵심은 욕심을 버리는 것인데, 욕심에 나를 맡기고 있다.
일요일부터 지금까지 글을 못 올렸군요. 요즘 제 자신의 미래에 대한 일로 정신이 없습니다.
일단 마땅히 해야 될 일을 먼저 처리하고 그 다음에 복귀하도록 하겠습니다.
빠르면 3일. 늦으면 한달이 걸릴지도요^^::

틈틈히 간단한 이야기는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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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가 최근 Ddos 공격을 받으면서 다운이 되면서, 많은 사용자들이 트위터에 접속하지 못하는 답답함에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이미 트위터에 대한 접속이 차단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몇몇 직장에서도 트위터를 막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트위터 중독이신 당신은 어떻게든 트위터에 접속을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당신을 위한 프로그램입니다.




홈페이지 : http://bage.me/

중국 트위터인 @cyido 에 의해서 개발된 Adobe AIR기반의 프로그램입니다. 이름이 빠거(八哥)인 해당 프로그램은 자체적으로 API 프록시를 내장하여서 중국이나 몇몇 직장처럼 트위터를 막아버린 곳에서도 자유롭게 Twitte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해당 프로그램은 아직 베타단계((현재 1.5.8 버젼)이기에 글의 로딩속도가 느리며, 창의 크기를 조절할 수 없습니다. 현재 제작자가 곧 처리할 예정이라고 하니 천천히 기다리시면 될 듯합니다. 또한 해당 프로그램은 중국형 트위터인 판포우(밥먹었니? 饭否)을 지원하지만, 현재 판포우는 중국정부에 의해서 사실상 서비스중단이 되어있습니다.

메뉴는 중국어로 되어있지만 사용하는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필요하신다는 분이 있으시면 덧글로 요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3명정도 있으시면 제작자쪽과 협의해서 한국어버젼을 만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설치방법 :
1) http://bage.me/  갑니다.
2) 立刻免费下载(무료 다운로드)라고 적힌 오른쪽 위의 녹색띠를 클릭합니다.
3) 打开(열기)는 곧장 설치 :  保存(저장)은 일단 저장해서 설치 : 取消(취소)


간단 번역 :
시골 发表于 1 (秒 分 小时)前 通过 Web
시골님이 1(초, 분, 시)전에 Web을 통해서 발표했습니다.

将信息同步到我的饭否帐号
글을 판포우와 동기화 합니다. (한국분들은 쓸일이 없음)

설정부분 :
设置自动更新的频率 자동업데이트 빈도설정
* 기본세팅은 1분에 한번씩 입니다. 여러분 마음대로 고치시면 됩니다.
是否要声音通知 소리로 업데이트를 알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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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浩《民间信仰的屈服与融合-以魏晋南北朝为例》《民俗研究》2009.2,P97 : 본 논문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북방민족의 민간신앙을 서술한 이후, 북방왕조들이 점차 자신들의 민간신앙을 없애고, 한족의 신앙으로 대체해가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일단 간단한 심정을 밝히면, 제목에는 융합이라고 해놓고, 정작 써놓은 내용은 싹다 한족의 문화에 굴복을 했다고 서술하는 행태에 대해서 냉소를 날리고 싶다. 맨 마지막에야 융합을 이야기하면서 정리되는 과정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융합의 기본적인 뜻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1) 상층부의 정책과 실제 민간신앙의 전파는 구별이 필요.
본 논문은 상층부에서 본래 북방민족의 제사를 금지하였기에 한족의 신앙에 굴복했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수 많은 역사적인 사례에서 알수 있듯이. 상층부의 금지와 실제적인 민간신앙의 존폐와 융합여부는 그리 관련이 없다. 오히려 상층부에서 강력하게 막는 민간신앙일수록 실제로는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해당 내용에서 마치 대단하게 거론되는 위문제(魏文帝)의 조서도 본인이 볼 때에는 그만큼이나 강력하게 민간에서 한족 외의 제사가 범람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2) 민간신앙은 민간신앙끼리의 내용변화에서 찾아야…
위진남북조. 정확히는 동한말부터 시작된 북방민족의 대거 남하로 중원문화는 많은 변화를 겪는다. 본인으로서 이번 일에서 거론하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도교의 대유행이다. 현존하는 사료가 기본적으로 유가에 의해서 집필되었기에 많은 부분에서 무시당하지만, 실제로는 도교가 가장 강력한 종교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직 고증까지는 해보지 못했지만, 아마 이 시기의 도교는 상당부분 북방민족의 샤마니즘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았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왜냐하면 위진남북조 도교의 사상이 기본적으로 샤마니즘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을 비롯하여 다양한 신령의 존재여부부터 시작해서 너무나 닮아있다. 그런 면에서 북방민족의 샤마니즘과 중원의 도교가 자연스럽게 결합하였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또한 훗날 전파되어서 도교의 자리를 위협한 불교의 경우도 북방민족에 의해서 먼저 믿어지고, 중원지방으로 전파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융합의 개념을 좀 제대로 잡자.
문화끼리도 굴복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서 동북아시아에서 우리는 모두가 서양식 복장을 입고 있다. 한복을 입으면 오히려 이상하게 보는 상태이다. 그러나 완전한 굴복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서양에서 점차 증가하고 있는 동양철학에 대한 탐구는 바로 이러한 것을 대변한다. 고로 본 논문처럼 옷보다도 더욱 고차원적인 민간신앙에 있어서, 한족의 민간신앙이 북방민족의 민간신앙을 굴복시켰다는 식의 전개는 기본적인 개념이나 현상파악을 제대로 못했다고 혹평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속이...죽을거 같아;;;;;;;;;;;;;;;;;;;;;; 아버지..ㅠㅠ 이 정도의 술은..아니여요.ㅠㅠ

彭卫《汉代女性的工作》《史学月刊》2009年第七期,P80

현재까지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한대의 여성은 유교사상의 규범에 따라서 일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해당 논문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을 하고 있다.

1) 한대 여성의 일은 “남자는 농사를 여성은 방직물을”싸는 것, 다시 말해서 안과 밖이 분리되어서 “안쪽의 일”만을 했던 것이 아니다.

1- 여성들이 배제된 활동영역
마차부(驾车), 사공(刺舟), 장인(造车), 염전(制盐), 채광(采矿), 제련(冶金), 도기(制陶), 사냥(狩猎), 어부(捕鱼), 건축(建筑), 회화(绘画), 창녀(性劳动), 군대(兵战),

# 창녀(性劳动) : 해당 논문은 사료에 나오는 기녀(妓女)의 妓는 技와 같아서 후대의 창녀와는 다르다고 했다. 물론 이 주장도 일견 틀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본인으로 상식으로는…없었을리가 없을터인데~?! 당신이라면 믿어지십니까? 저는 인간을 믿습니다. 고로 없었을리가 없었다고 확신합니다.

# 군대(兵战) : 문제의 핵심은 “女子从军” 해당 논문은 자신의 고향에서 군인을 위해서 노동을 하는 일에 대해서 지칭한다는 점과 실제로 이루어졌어도 워낙에 특수한 현상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단어구사일뿐이라는 것. 이 부분에서는 동의를 하면서도, 군대 위안부들은 없었을까? 그리고 위진남북조에는 심심하면 나오는 여자투사?!들이 한대에는 없었을까? 음…좀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 있음.

 
2- 여성들도 가능한 활동영역
방직(纺绩), 농업(农耕), 가축사육(家畜饲养), 수공업(手工业), 상업(经商), 집안일(땔감, 밥하기), 비정규직(킥킥;;), 유모, 무속인, 여의사, 비녀, 무녀(舞女,歌舞伎)

2) 여성의 활동영역이 넓다는 것은 남자와 비슷한 혹은 동등한 지위와 권리를 누렸다는 것이 아니다.  3) 일반 가정에서 여성의 노동은 중요한 가정수입의 원천이었다. 만약 여성이 가정경제의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으면 발언권이 올라가는듯 하다. 4) 상업활동이 한대 여성의 지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5) 왕에서 황제로 변화해가는 선진부터 진한시대의 국가시스템 변화는 한대여성의 사회와 가정중의 위치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은듯 하다.

무엇인가 많이 허전한 논문이었다. 용두사미의 기분이 든다. 앞부분에서는 그 결론에 본인이 찬반을 놔두고라도 나름 열심히 자료조사와 분류작업을 했다고 생각되는데, 뒤쪽에서 구체적인 시스템과 상황개괄부분에서는 논문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좀 더 광범위한 자료조사를 실행하지 않고, 좌전이나 국어까지 이용해가면서 한대의 여성에 대한 개괄을 한다. 개인적으로 좀 문제가 있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 의외로 재미없는?! 역사 논문 정리를 좋아하는 분들이 계셔서 올려봅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과학원에서 만들어낸 <조선말사전>에는 한자어가 너무 많아서 마치 중국의 옥편 같습니다. 앞으로는 사전을 이렇게 만들지 말아야 하겠습니다.>>(<김일성저작집>제18권 25페지)
해방 후 50년동안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동지의 세심한 지도와 보살핌 속에서 날로 발전하여온 사전편찬의 성과에 대해서.....

안종천"사전편찬연구사" "주체의 조선어 연구 50년사" 김일성 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 1996년


# 개그.
우리가 지금 보면 개그와 같은 이것. 그런데 한국도 60~80년대에 대통령의 말씀을 하늘과 같이 여기며 이딴식으로 공부하고 따라했었다고 한다. 이 무슨 꼴통짓인가? 그리고 이러한 웃기는 과거를 회상하고 되돌리려는 사람들이 있는듯하다. 그 사람들은 그때가 그리도 아름답고 즐거웠을까?

# 중국의 옥편 같습니다.
개그이지만, 배울 부분도 있다. 한국어에 중국과 일본에서 온 수 많은 한자어가 포함되어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어사전까지 한자로 도배를 해서 중국의 옥편과 같은 이런 상태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한국어 사전은 한국어로 한국어를 가장 간단하고 정확하게 서술해야하지 않을까?

# 레어템
인용한 "주체의 조선어 연구 50년사"는 레어템이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는 책이라고 자부한다. 본인도 중국의 서점에서 놀다가 구석에 쳐박혀 있는 것을 보고 "아싸!" 라고 하며 구매한 것이다. 전공과 아무런 상관도 없지만, 가끔 오늘과 같은 날 집어서 읽으면 너무나 즐겁다. 너무나 진지하게 김일성동지을 찬양하는지라 너무나 웃기다. 킥킥....


张其凡、惠冬《金朝“南人”胡化考略》《史学集刊》2009年7月第四期,P47

금나라가 중원에 들어온 이후에 중원지역은 남송과 단절되고, 통치계층인 여진문화의 유입으로 인하여 교차문화지대가 형성된다. 이러한 다문화는 중원의 한인(汉人=南人)이 북방민족화(胡化)가 되게 한다. 이러한 북방민족화는 의복이나 머리모양 그리고 습속등등에서 나타나서 심리적으로 남송과 멀어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남인의 북방민족화로 오래전부터 한인과 북방민족간의 중간지역이 되어오던 연운(燕云-지금의 베이징일대)지역과의 정치-문화적 차이가 줄어드는 결과를 가지고 왔고 이는 원나라의 4등급제의 현실적인 기초로 작용하게 된다.

남인의 북방민족화 원인 및 과정
1) 남송과의 단절
2) 여진인 집단이주 : “悉迁女真土人散居汉地”
3)북방의복의 유행 : 북송부터 이미 북방의복이 유행하였고, 남송에서도 유행했는데?
4) 강제적인 두발 북방민족화
5) 한인(汉人)그룹의 관방진출

남인의 북방민족화의 구체적인 사례
1) 옷과 머리모양의 변화 – 북방식으로. 특히 머리모양의 변화는 주목할만함.
2) 언어와 예의의 변화 – 이른바 북방언어의 창조. 북방음악의 유입
3) 심리적인 태도 변화 – 여진과 한 그룹이라는 생각들이 늘어남.


* 한국에는 아직 그리 크게 다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되는데, 연운(燕云)지역이 참 재미있는 곳이다. 한족과 북방민족의 교차하는 곳으로서 사실 위진남북조에도, 춘추전국시대에도 계속적으로 융합의 지점으로서 작용해온 곳이다. 연운지역의 융합사를 집필하는 것만으로도 평생 숙원사업이라고 할 수 있을듯 하다.

* 위의 글을 보면서 쉽게 연상이 되는 것이 일본제국의 대한제국합병 이후의 민족융합정책이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고는 한다. 역시 당시의 일제는 상당한 연구를 한 상태에서 한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을 하는 것은 개그이지만, 재미있음으로 해본다면^^;; 만약 식민지였던 기간이 50년만 더 유지가 되었더라면 사실상 현재의 한민족이라는 민족의식보다는 제국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조금 높다. 다만 일제의 방식은 동등한 대우가 아니라 차별적인 대우였고, 그러한 차별적인 대우가 결국 대립을 이끌어내기에 그것을 일제가 수정하지 않는 이상 분명 금방 분열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현재의 중국에서 이루어지는 민족정책도 제도상으로는 소수민족에게 많은 혜택을 주지만, 실질적으로는 융합이 제대로 안되고 있다. 역시 상당한 문제가 발생중이며, 앞으로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 눈치 채신 분도 있겠지만, 본글에서 나오는 용어는 최대한 소위 "학계용어"를 배제하고 모르는 분도 이해하실 수 있는 쉬운 단어를 선택하였다. 그래봤자. 내용 자체가 재미없어서 안 볼.....
한국은 동의보감을 등록함에 따라서 세계기록문화유산 총 7개가 등록되게 되었다. 아시아에서는 1위이고 세계에서도 6위라고 한다. 지금까지 등록된 세계기록문화유산은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직지심체요절(하권), 승정원일기,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 조선왕조 의궤이다. 본인으로서는 한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어?? 중국하고 일본은??


1 - 세계기록유산 하나도 없는 중국
중국쪽에서는 지금까지 단 하나의 세계기록문화유산도 없다. 아예 신청자체가 없다. 사람들도 세계기록문화유산과 세계문화유산의 차이점을 인지하고 있지조차 못하다. 이 부분은 중국정부의 한심함을 격렬하게 말하여도 괜찮은 부분이다. 이러니 중국의 민속사쪽 학자들의 원성이 자자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유명한 당시집 한두권은 등록되어있을 줄 알았는데...아니 돈황문서라도.... (일본쪽은 모르겠다. 관련 정보 아는 분이 추가해주시길-_)

현재 중국에서는 세계기록유산(世界记忆工程 Memory of the World)은 총 5개가 등재
전통음악녹음당안 (传统音乐录音档案 Traditional Music Sound Archives) (1997년 지정)
청대 내각비본당 (清代内阁秘本档(有关17世纪在华洋传教士活动)的档案 Records of the Qing's Grand Secretariat) (1999년 지정)
납서족 동파고적 (纳西东巴古籍文献 Ancient Naxi Dongba Literature Manuscripts) (2003년 지정)
청조과거대금방 (清代科举大金榜 Golden Lists of the Qing Dynasty Imperial Examination) (2005년 지정)
청조 양식뢰 당안(清代样式雷档案 Qing Dynasty Yangshi Lei Archives(2007년 지정)

일단 귀찮아서 Memory of the World 홈페이지로 직접 가지 않았던 것 반성. 귀찮아서 제대로 된 이름을 생각하지 않고 한국의 엉터리 번역인 "기록유산"을 믿고, 그대로 "记录遗产"이라고 번역한 점에 반성. 그리고 조선일보를 위시한 신문에서도 그따위로 번역했음에 비판!!! 믿은 내가 바보였다.

"세계기억유산"은 분명히 중국에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찾으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정말 관심이 없다. 현재 중국쪽 인터넷에 떠도는 중국목록에서 무려 2년전인 2007년에 등재된 "청조 양식뢰 당안"이 아예 빠져 있었다. 정말 홍보 개뿔도 안하고 있다. (왠지 동의보감으로 또 지랄이 나고, 그 덕분에 관심이 좀 늘어나는 꼬라지가 반복되려나) 또한 중국의 등재목록을 보면 기본적으로 청조 이후의 것들이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그 전의 것들은 왜 안할까?


2- 중국 내의 세계기록문화유산급 문서
그렇다고 중국에 세계기록문화유산 수준의 기록물이 없는가? 그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한국보다 더 무서운 곳이 중국이다. 사실 등록되어 있는 한국의 문서들은 대부분이 불교계열이거나 유교의 영향을 받은 기록문화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나마 훈민정음과 동의보감만이 이 영역에서 벗어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불교와 유교 모두가 중국대륙에서 넘어 온 것이다. 이쯤이면 중국쪽의 상황을 모르는 분들도 논리적으로 추측하실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기록문화는 이미 기원전부터 시작되어서 유구히 내려오고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4서5경부터 시작하여서 25사쯤되면 이미 할말이 없을 것이다.(물론 판본문제라던지 이런저런 문제가 있지만, 이건 전공논문이 아니므로 패스-_) 그 외에도 출토된 자료도 널리고 널렸다. 단지 중국정부가 아직 문화재보호에 대한 의식이 심히 부족하여서 신청도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고, 홍보도 못하고 있는 바보상태일뿐..중국정부. 븅신~

한마디로 "한국의 기록문화 만세!" 라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한국의 기록문화보호 수준 만세!"라고 하여야 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본다.


3- 그러나 유교 기록은 위험하다.
문제는 한국이나 중국이나 대부분의 기록들이 유교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쓰여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학에서 보았을 때 매우 위험하다. 유교적인 기록사상에 대해서는 "춘추필법"에 대해서 검색해보기 바란다. (가장 간략하게 말하면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사실"을 변조해되 된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현재용어로 말하면 "역사왜곡") 물론 문헌이 많으면 그 속에서 거짓을 구별해서 춘추필법등으로 왜곡된 내용이 아닌 사실을 얻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매우 위험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특히 해당 사료 이외에는 다른 기록이 없을 때, 곤혹스럽기 그지 없다.


4- 세계유산은 인류의 보물이라는 소리다.
한국이든 중국이든 세계유산에 대해서 이상한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실제로 세계유산에 등록이 되면 관광수입이 느는 등의 혜택이 있기는 하다만, 세계유산의 기본적인 개념부터 생각을 했으면 한다. 세계유산은 어디까지나 "인류 모두의 보물"이라는 뜻이다. 한국이라는 국가, 혹은 한민족이라는 만들어진 개념의 민족의 보물이 아니라, 인류 모두가 보존하고 유지해야하는 모두의 보물인 것이다.

세계유산에 등재가 되었다고 "한국 짱"이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으면 한다.



어찌되었든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를 한 것은 한국에서 문화재보호가 어느 정도 성숙했고, 그것을 세계에 알리는 것도 잘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부분은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그리고 중국정부의 이 부분에서의 한심함은 마음대로 비판해도 된다. 진짜 한심하니까-_) 그러나 세계기록유산을 가지고 "위대한 한국"을 말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세계기록유산은 "인류 전체가 보존유지 해야되는 인류 모두의 재산"이지 "한국만의 재산"이 결코 아니다.


* 대놓고 말하겠습니다. 이 글은 한국정부의 국제기관 등록은 칭찬받을 만 하지만! 중국과 일본이 아직 등록조차 하지 않았거나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한국이 짱! 한국 최고!를 외치는 것은 바보짓에 불과하다라는 전체적인 은유였습니다.


-- 잡담의 향연.(트위터에 익숙해져 가는듯. 글에 넣는 것보다 조그마하게 쪼개는 것에 익숙해져간다. 음...왠지 그러면 안될듯 한데...)

% 동의보감
중국의 중의학대사전에는 동의보감과 허준에 대한 내용이 단 한줄만이 적혀 있다. 혹자는 이것을 가지고 부러워서 일부러 그런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중의학공부중인 한 분의 글에 따르면 중국에는 "동의보감"정도의 수준이 되는 책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중의학대사전에서 허준과 동의보감 항목) 물론 사람들에 따라서 판단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본인으로서는 이에 공감이 된다. 그렇다고 한반도의 기운에 맞추어서 만들어진 동의보감의 가치가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한 사물에 대한 절대적인 숭배는 편견일 뿐, 실제적인 자유로운 생각에 도움이 안된다고 본다.

% 고려시대 이전은?? - 그냥 개인적인 폭발.
크게 상관은 없다만, 한국의 대부분의 사료는 고려시대 이후에 있다. 그 이전의 사료라고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정도뿐이고, 이것도 사료상의 문제가 쫌...(물론 금석문을 비롯하여 몇가지 더 있다. 일단 패스) 혹자는 이것을 가지고 일제나 다른 외세가 강탈을 해가서 그렇다고 한다. 중국도 수 많은 강탈을 당했지만, 춘추전국시대의 문헌을 간직하고 있다라고 하면 좀 치사한 비교일수도 있지만....개인적으로 고려시대 이전의 사료가 필요하단 말이다!!!! 왜 이렇게 사료가 없냐고!!!! (라는 개인적인 폭발일 뿐이었다.) nomadism의 말씀처럼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나중에 다른 사료로 수정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된다. 그래도 아쉬운건...어쩔 수 없다.

% 일본쪽은 잘 모르지만...긁적...
본인이 알기로 일본은 신사을 중심으로 상당히 많은 수의 사료가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로 신라사 연구가들이 미치고 환장하는 "신라 민정문서"라는 것(현지에서는 제 1신라문서, 제 2 신라문서)은 쇼소원이라는 일본 신사에 보관중이다. (참고로 강탈해간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음. 오히려 화엄경을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섞여 들어갔을 가능성이...;;;) 이런 케이스는 넘치고 넘친다. 현재 대부분의 신사는 자신들의 창고에 있는 것을 거의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 한국쪽도 잘은 모르지만...긁적...
사실 한국에도 신사와 같은 수준의 곳이 있다. 이른바 아직도 살아 있는 사대부가문들의 창고이다. 이미 유실되었을 것이라고 전세계적으로 생각했던 원나라의 법관련 서적 "지정조격"이 발견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수 많은 자료가 묻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본인도 직접 본 적이 없어서..긁적긁적....굉장하다고 하던데......

% 이 글에 대한 정의
.....논지도 없고, 논리전개도 먼 소리인지 모르겠고.......쓴 사람인 저도 먼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음하하하하....가끔은 이런 글도 있어줘야되는거..음하하하;;;;; 더우니 뇌가 끊어오르는듯하기도....음하하하;;;;;;

%(추가) 동의보감에 등재사유.

An encyclopaedia of medical knowledge and treatment techniques compiled in Korea in 1613 and edited by Heo Jun with the collective support of medical experts and literati according to royal instruction. The work informs the evolution of medicine in East Asia and beyond. In terms of health care system, it developed the ideals of preventive medicine and public health care by the state, which was virtually an unprecedented idea up to the19th century.(Donguibogam: Principles and Practice of Eastern Medicine)

(바로 맘대로 번역) 이 작품은 동아시아의 의학을 혁명이었다. 의료시스템의 측면에서 놀랍게도 19C에나 출현하는 예방 의학과 공공의료서비스를 개발하였다.

등재사유는 예방의학측면과 공공의료서비스측면이다. 모르시는 분들은 알아두시길.(본인도 모르고 있었다. 공부공부-0-) 동양의학의 시스템을 만들거나 총결을 한 부분이 아니다. 그러나 본인의 가벼운 지식으로 예방의학의 개념은 사실 동양의학의 기본 개념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서 "밥이 보약"이라는 말처럼 미리미리 좋은 것을 먹고 병을 예방한다는 개념이다. 고로 예방의학의 개념은 동의보감의 혁명이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인다. 또한 본초강목은 민간의 치료행위를 위한다고 밝혔으니 공공의료서비스의 가치도 그리 높지 않다고 본다.

동의보감이 대단한 것은 국가단위에서 의학서를 만들어서 피통치자에게 제공을 했다는 "국가에 의한 국민에 대한 의료서비스"를 실현했다는 점이다.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좋은가보다라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냥 앞선 패러다임 어쩌고 하는것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자세히 스스로 찾아보자.

본 글은 주인장이 전자일보에 기고한 글입니다. 신문에서는 차마 하지 못했던 생생한 이야기들을 추가해볼까 합니다. 사실 기사에서는 많은 것을 쓰지 못한답니다. 저의 문제이지요. 머랄까...기사는 딱딱하게 확실한 사항만 적어야되며 함부로 예상을 써서는 안된다는 기분이랄까요?

바로 : 이 기사를 쓰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소스를 구할 수 없음이 아니라, 소스가 너무나 넘쳐흐른다는 것이었다. 단지 올해 1월 1일부터 지금까지의 일들만으로도 10권짜리 장편소설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을 3000자도 안되는 기사로 압축을 하려고 하니 죽을 맛이었다.

중국의 이동통신사들은 현재 절망에 빠져 있다. 올해 1월 7일 시작된 3G 서비스는 중국 이동통신시장에 거대한 폭풍을 몰고 올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반년이 훌쩍 지난 지금 아직 폭풍은 바다 저 멀리에 있을 뿐이다. 중국의 휴대폰 사용자들이 3G서비스에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 나름 관심을 끌기 위한 도입이었는데, 너무 문학적으로 쓴 것 같다. 본인은 수정될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그냥 원문 그대로 실으셨다.

◇싸늘한 3G 시장=중국의 이동통신사들은 각기 다른 3G 기술을 채택하고 있다. 2G 시장에서 제왕의 자리에 있었던 차이나모바일은 ‘G3’라는 서비스 명으로 중국 자체 기술인 TD-SCDMA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원래부터 CDMA 서비스를 하고 있었던 차이나유니콤은 ‘Wo∼’라는 서비스로 현재 한국에서도 채택하고 있고 가장 안정적이고 빠르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WCDMA을 채택하고 있다. 차이나텔레콤은 ‘e서핑(surfing)’이라는 CDMA2000(EVDO) 서비스로 대중성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바로 : 이러한 서로 다른 기술을 선택한 것은 중국정부의 의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적인 압력으로 인하여 벌어진 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두고 중국자체기술만으로 진행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행위인 것이다. 그래서 WCDMA 측과 CDMA2000에도 각기 자리를 내주었다. 그런데 중국고유의 TD를 현재 이동통신업계의 제왕인 차이나모바일에게 주워서 중국자체의 기술 밀어주기를 하는듯 하지만...현재 중국인들의 TD에 대한 평가가 최악으로 향하고 있으니, 이 기회에 차이나유니콤이 치고 나온다면 지각변동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아..말이 길어진다. 패스-_)

중국에서 각각의 이동통신사들이 서로 다른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초기 사용자 확보가 관건으로 떠올랐다. 이통사들은 6월까지 총 100억위안(약 1조8000억원)에 이르는 돈을 광고비로 지출했다. 그러나 정작 휴대폰 사용자들의 관심은 싸늘하기만 하다.

차이나모바일은 5월 말까지 TD 휴대폰 사용자는 74만명이라고 발표했다. 차이나텔레콤의 e서핑은 10만여명, 차이나유니콤은 10월 말까지의 목표를 20만 WCDMA 사용자라고 발표했다. 이 외에 이통사들이 판매한 3G 인터넷카드와 3G 넷북 사용자가 100만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중국의 이동통신사들은 현재 절망에 빠져 있다. 올해 1월 7일 시작된 3G 서비스는 중국 이동통신시장에 거대한 폭풍을 몰고 올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반년이 훌쩍 지난 지금 아직 폭풍은 바다 저 멀리에 있을 뿐이다. 중국의 휴대폰 사용자들이 3G서비스에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 중국의 3G 사용자는 낙관적으로 판단해도 300만명 정도에 불과하다. 전체 중국 휴대폰 사용자가 6억명이 넘는 상황에서 300만이라는 수치는 3G 시장에 사용자들의 관심이 없다는 것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바로 : 이유는 아래쪽에~ 참고로 본인도 지금 3G 신청하고 싶지 않다. -_-

◇ 비싼데다 서비스 품질도 엉망=휴대폰 사용자들의 냉담한 반응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지금까지 차이나텔레콤만이 7월 말쯤 주요 500개 도시를 포괄하는 네트워크를 구성할 뿐, 차이나모바일과 차이나유니콤은 각각 38개와 55개 도시에서만 서비스를 진행 중이다. 연말이 돼도 238개와 284개로 늘어날 뿐이다.

3G망이 설치된 곳에서도 영상통화가 지연되거나 연결 자체가 되지 않는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또 현재 이통사들의 3G 서비스 비용은 기본적으로 2G 서비스와 비슷하다. 단지 3G의 핵심인 영상통화나 인터넷 사용과 같은 경우 비교적 높은 비용을 지급해야 한다. 사용자 시각에서는 아직 전국망이 구축되지도 않았고, 안정화되지도 않은 3G 서비스를 비싼 돈을 치르면서까지 사용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3G 서비스를 활용할 수 있는 휴대폰 설비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단가도 매우 높다는 것이다. 현재 중국에서 유통되고 있는 3G 휴대폰은 3가지 기종이 2000∼3000위안(40만∼60만원)인 것을 제외하고 대부분 5000위안(약 100만원)에 육박하고 있다. 3G 휴대폰의 보급 역시 부족해 대형 전자센터에도 한 두 개의 브랜드만 입고된 상태다.

또 3G 넷북 시장 역시 지금까지 총 10만대도 판매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차이나모바일은 처음 PC제조업체와 3개월 내에 9만대 이상 판매하기로 계약했고, 17개 제조업체 29종의 넷북을 출시했지만 판매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스마트폰, 시장 견인차=이런 상황을 잘 반영하듯 7월 16일 중국인터넷데이터센터(CNNIC)에서 발표한 ‘24차 중국인터넷발전현황통계보고서”에서 6개월 이내에 3G 휴대폰을 구매하고자 하는 사용자는 단지 28.0%에 그쳤다.

휴 대폰 이용자들은 3G 서비스 선호도 조사에서 65.7%가 ‘메신저’ 기능을 꼽았다. 그 외에 음악·TV·동영상·검색·인터넷이 40%에 육박하는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스마트폰으로 비약적인 사용자 급증이 가능하다는 예견이나 다름이 없다.

스마트폰의 중요도가 증가할수록 중국의 이통사와 휴대폰 제조업체가 모두 어우러져 혼전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처 음 차이나모바일은 애플과 손을 잡는가 싶더니 대만 HTC에서 ‘매직(Magic)’이라는 제품을 선보였다. 매직은 차이나모바일이 자체 개발한 안드로이드 계열 OS인 ‘OMS’를 장착하고 5000위안대로 시중에 출시됐다. 중국 레노버에서 OMS를 탑재한 ‘01’을 3분기에 발표할 예정이며 TCL도 OMS를 장착한 휴대폰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차이나유니콤도 차이나모바일에 대항해 애플과 아이폰 공급 계약을 서두르고 있다. 자체적으로도 ‘유니플러스’라는 스마트폰 시스템을 개발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아이폰이 와이파이 지원 없이 중국시장에 진출하는 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현재 중국시장에 풀려 있는 밀수 아이폰의 재고를 고려할 때 그리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바로 : 이 부분 무지막지하게 줄인 것이다. 지금 완전 복잡함의 극치이다. 서로 엉키고 엉켜서 본인도 따로 이동통신회사와 휴대폰단말기업체 및 스마트폰 운영시스템을 각기 따로 놔두고 그림을 그려가면서 정리했었다. 그 중에서 핵심 중에 핵심만을 적어놓은 것이다.

◇ 가입자 유치전, 이제 시작=이에 비해 차이나텔레콤은 스마트폰 시장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차이나모바일의 3G 신호가 불안정하고, 차이나유니콤이 고급이미지로 승부해 대중과 멀어졌을 때 차이나텔레콤은 대중화 정책으로 저가제품을 공략, 100만개의 3G 카드와 9만3000대의 3G 휴대폰을 판매했기 때문이다.

계속 되는 이통사와 휴대폰 제조업체의 혼전 속에서 7월 28일 차이나유니콤과 애플의 3년 독점계약 소식이 흘러나왔다. 비록 차이나유니콤 측에서는 계약 성사를 부인했지만 곧 아이폰이 들어올 것은 부정하지 않았다.

또 차이나유니콤의 WCDMA는 기술적 안정성으로 아이폰 말고도 다양한 스마트폰을 보유해 약간의 우세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날 차이나모바일은 ‘0원 구매’라는 새로운 휴대폰 보상제 도를 발표했다. 이 보상제도는 매년 80억위안을 120억위안으로 상향조정한 것이다. 차이나텔레콤도 얼마 전 중국 CDMA 제조업체들과 만난 자리에서 조만간 중국 아이폰이 나오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학생층을 공략하기 위해 ‘3G 스쿨요금제’를 도입, 최소금액 19원으로 차이나텔레콤망에서 무료통화를 할 수 있게 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전자신문 [글로벌 리포트] 싸늘한 중국 3G 시장


바로의 마무리 정리!

현재의 상황을 간략하게 줄이면 : 안정된 WCDMA 기술을 바탕으로 아이폰을 끌어들여서 고급화전략으로 나가고 있는 차이나유니콤과 CDMA2000이라는 낙후된 기술을 바탕으로 저가보급형으로 나가고 있는 차이나텔레콤. 그리고 중국 자체기술인 TD을 바탕으로 중국자체적인 안드로이드 시스템 단말기를 통해서 제왕의 자리를 지키려는 차이나모바일이다.

본인의 생각을 간략하게 쓰자면 : 차이나유니콤의 정책은 현재 일반사용자들을 너무 멀리하고 있어서, 앞으로 고급화외에 대중화전략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이 된다. 차이나텔레콤의 저가보급형 전략은 기술적인 낙후로 어쩔 수 없이 나온 것이지만, 저가시장을 선점하여서 튼튼한 기반시장을 만든 것은 칭찬받을만하나, 앞으로 큰 도약은 기대할 수 없어 보인다.

중국자체적인 기술만으로 승부를 보려고 한다는 인상이 강한 차이나모바일은 차이나유니콤이 얼마나 잘하는지에 따라서 제왕의 자리까지 놓칠 수 있다고 본다. 현재 2G 시장에서 벌어놓은 신임과 지지도가 3G에서 상당히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사용자들이 대거 3G로 옮겨오는 타이밍까지 이런 상태가 계속 유지된다면, 사용자들의 냉정함을 알게 될 것이다.


잡담 ㄱㄱ!!
* 사진에 대해
원문 링크로 들어가보시면 남자 2명이 서 있다. 참고로 사진이 필요하냐는 물음에 중국쪽 이것저것을 보내드렸지만, 본인의 사진실력이 개꽝인 관계로 역시나....그나저나 저 사진의 모델분. 어디서 많이 본듯한데...

* 임시제목
본인이 정했던 임시제목은 실제로 나온 제목과 달랐다. 담당기자님...제목 그대로 써주신다면서....왠지 배신당한 기분이 팍팍 들고 있다....라기 보다는 본인은 예전부터 제목 같은 거 못만든다. 원래 본인이 생각했던 제목은 "중국의 정체된 3G 시장. 스마트폰이 희망이다."가 워드파일 안쪽에 있던 제목이고, 정작 파일이름은 "스마트폰 - 중국이통사들의 마지막 무기"

* 글쓴 시간.
이 글은 전체 시간은 약 8시간. 그러나 실제로 정보수집한다고 인터넷에서 놀던-_;; 시간을 빼면 대략 5시간 정도 걸린듯 하다. 이런식으로 계산하면 나름...나...고급인력이었던듯...응??;;

* 아무리 생각해도 말야...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본인의 전공은 고대사. 그 중에서도 말 타고 히히힝~~ 이 연상되는 북방민족인데 최첨담 IT 기사를 쓰고 있는것. 먼가 이상한듯한데,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고, IT 유랑민이니 어쩌니 하기는 하지만 말야......흠;;;


중국에 가면 전갈를 먹을 수 있어! 바퀴벌레도 먹는다던데?! 라는 말들이 많이 있다.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이 사실만은 정확하게 알려드려야 할 것 같다. 중국 사람이라고 모두가 전갈이나 바퀴벌레를 먹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상당 수의 중국사람들도 왕푸징에 있는 수 많은 먹거리를 보면서 저런 것을 왜 파는 것인지 이해가 안된다고 한다. 물론 본인의 중국친구 중에 한 명인 운남에서 온 녀석의 경우 왕푸징에 있는 희안한?! 음식을 먹는다. 우리는 여기서 중국은 넓고, 온갖 사람들이 다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1) 왕푸징 상설 먹거리거리

왕푸징에는 두가지의 먹거리 장터가 있다. 상시장터는 위의 사진에 있는 왕푸징먹거리길(王府井小吃街)이다. 이곳에서는 온갖 신기한 것을 다 팔고 있다. 여기에 있는 음식을 감히 먹기 힘들다고 하시는 분들에게는 이 말을 해드리고 싶다. 여기 있는 음식은 99% 문제가 발생할 수가 없다. 왕푸징은 한국의 명동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온갖 외국인들이 오는 이곳에서 먹거리로 문제가 생긴다면 보통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중국정부에서도 관리하고 있으니 걱정 마시고 먹으셔도 될 것이다.

그럼 왕푸징 먹거리길에 있는 특이한 음식들을 보자. (본인의 사진 실력은 개꽝이다.음하하…)

 

전갈이다. 실제로 발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다. 이것을 튀겨서 먹는 것이다. 사실 맛은 그리 특이하지도 않다. 과거에 메뚜기를 잡아서 먹은 경험이 있는 농촌 출신들은 그리 신기하지도 않을 맛이다. 그냥 모양이 좀 괴기스럽게 생겼지만..실제로는 그냥 고소한 과자맛이다.

기름에 튀긴 아이스크림이다. 슈크림이니 아이스크림을 기름에 튀겨서 식빵에 얹어서 먹는 것이다. 좀 느글느글하긴 하다. 그래도 튀겨 먹는 아이스크림은 독특한 맛을 내뿜는다. 다른 부분 안 먹고 아이스크림부분만 먹으셔도 무방하다.

해마다. 사실 별 맛 없다. 역시 바삭한 과자맛이랄까?

도룡용이라고 해야되려나. 남자 몸에 좋다. 맛은 역시 바삭한 과자맛?

불가사리다. 맛은 좀 비리다. 비린거 못드시는 분들은 금물.

     

베이징에서 몇 년을 굴렀는데 또 다시 왕푸징으로 나가게 만든 주범이다. 사촌동생넘. 현 외고1학년. 여친님 없으시다. 혹시 마음에 드시는 분이 있으려나? 다른 사진도 있으나. 이런 음식 먹는 것 인증사진 겸사겸사 올려봤다. 이녀석에게 부러운 것은 180이 훌쩍 넘는 키와 보조개뿐! –_-;; 그게 크구나…


2) 왕푸징 가설 먹거리 거리

이곳은 왕푸징 먹거리 골목보다 북쪽에 있는 간이 먹거리장터이다. 저녁부터 밤 10시까지만 한다. 이곳에 가면 좀 더 다양한 종류의 중국식 야참들을 경험할 수 있다. 또한 사슴고기를 비롯하여 타조고기등등 한국에서는 먹기 힘든 고기들을 즐길 수 있다. 개인적으로 그런 고기들에 큰 기대를 하지는 말라고 해드리고 싶다. 돼지고기와 소고기정도의 미묘한 차이일 뿐이다. 물론 그런것을 민감하게 잡아내는 분도 있지만 말이다.

  

중국식 달고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본적인 것은 빨간색인 것이다. 젊은층은 내용물에 씨가 많고 써서 싫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럴 때에는 옆에 있는 열대과류로 고르면 된다. 사실 중국의 젊은층들도 슬슬 열대과일류의 변형된 쪽으로 가고 있다.

 

  

즉석철판구이다. 무엇을 먹을 런지 고르면 바로 앞에서 구워서 준다.

 

중국식 순두부음식이라고 할까? 이것을 통해서 한가지 알려드리고 싶은 것은 중국의 향신료인 향채(香菜 샹차이)을 먹지 못하시는 분들이 있다. 이것을 가지고 타문화에 접근 못하신다는 분도 있는데, 그런 분들을 만나면 중국의 젊은이들도 현새 샹차이를 먹기 싫어하는 사람이 대다수를 차지해가고 있다고 전해드리기 바란다. 단! 샹차이를 한번도 먹어보지 않고 막연한 두려움에 거부를 하는 것은 도전정신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가?

     

샹차이에 이어서 모험용으로 딱 좋은 썩은 두부(臭豆腐 초우또우푸)이다. 한국의 홍어처럼 썩은 꼬린내와 맛을 즐기는 음식이다. 역시 중국의 젊은이들도 잘 먹지 않고 있는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나온 썩은 두부는 그 냄새와 맛을 확 줄이고 고소한 맛을 강조하고 있다. 왕푸징에서 파는 것도 외국인을 위해서 그러한 식의 맛을 내고 있다. 개인적으로 100M 밖에서도 느낄 수 있는 그 썩은 냄새를 사랑하기에 이런 변화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참고로 본인의 어머님은 임신하셨을 때 타이완에 계셨는데 입덧이 상당히 심하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썩은두부 먹고 한번에 완치…그래서 본인이 썩은 두부를 좋아하나;;; 음;;;

 

3) 왕푸징에 오셨으면 가야될 맛집.

  

위에서 소개해드린 것은 저녁으로 먹기에는 양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야시장에 가시기 전에 먼저 둘 중에 한군데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드시고 가시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럴 때 좋은 곳이 狗不理(고우부리)이다. 많은 한국사람들이 맞은편에 있는 베이징덕 요리점 췌엔쥐더(全聚德)로만 가는데, 고우부리도 상당한 명성을 가진 만두집이다.

 

고기를 좋아하는 본인은 “돼지고기”을 추천한다. 꼬옥 씹으면 주욱 흘러나오는 육즙의 맛은 말로 형용하지 못한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예전에 비해서 맛이 떨어졌다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기본은 어디로 가지 않는다. 아직 기본적인 맛은 보장하고 있다. 만약 다양한 맛을 보고 싶으시면 종합세트(40원)을 드시면 된다. 단! 2명이면 1인분만 주문하자. 금방 야식 먹으러 갈 것이 아니던가?!

 

이곳은 스스로 만두를 찾아야된다. 위에 사진과 같은 곳에 가서 영수증을 보여주면 만두를 준다. 괜히 탁자에 앉아서 왜 안가져다 주냐고 하지 말자. 반대로 다 먹었으면 치울 것 없이 그냥 일어서서 나가면 된다. 종업원들이 알아서 치운다.

 

이것이 종합세트. 사촌동생과 같이 왔기에 어쩔 수 없이 시켰다. 내 돼기고기세트!!! ㅠㅠ


4) 그러나 왠만하면 왕푸징에 가지 말자.

뒷통수를 치는 것 같지만, 왕푸징은 비싸다. 드럽게 비싸다. 다른 곳에 비해서 최소 2배 이상의 가격을 제시한다. 그리고 맛이 아예 좋은 것도 아니다. 왠만하면 왕푸징은 그냥 둘러보면서 구경만 하자. 먹는 것에 돈 아끼기 싫다는 분이 있다면야 마음대로 사먹으셔도 된다. 그러나 아무거나 먹으면 되지라는 분들은 그냥 보통 중국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들을 먹으시길 추천한다. 그것이 진정한 중국을 느끼는 것이라고 본다. 전갈은 중국에서도 보편적인 음식은 아니다.

 

주절주절 : 화풀이?

 

왕푸징에는 롯데백화점도 들어와 있다. 상당히예쁘다.요리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먼 소리냐고? 그냥 이 기회에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다. 본인의 친구 중에 두명이나 롯데백화점에 들어갔다. 그리고 본인이 석사를 할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한 녀석은 조만간 왕푸징 롯데백화점이 완성되면 들어갈 것이라고, 너라도 남아 있어야하지 않겠냐고 하셨었다. 그 분은 3개월전에 결혼. 얼마전에 임신. 중국은 개뿔이 잘도 오시겠다. 어찌되었든 임신은 경하드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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