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논문주제보고를 위해서 삽질중입니다. 저의 능력의 한계와 끊임없는 욕심들의 파도에 휘말려서 어디론가 표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패턴도 참 아름답게 변해버렸습니다.
8시 기상 및 식사. 9시 공부. 11시 운동 및 샤워. 12시 공부. 2시 식사. 다시 공부. 8시 식사. 다시 공부. 11시 식사. 다시 공부. 2시 취침.
상당히 아름다운 삶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공부만 죽도록 하니 미친 것이냐고요? 그것보다는 맨 처음 기상하는 8시가 저녁 8시인겁니다. 남들과는 정확하게 정 반대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것도 정확하게 12시간을 말이죠.
사실 전 밤에 집중이 안되는 스타일이기에 어쩔 수 없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런 생활은 폐인과 다를 바가 없기에, 20일에는 저녁까지 밤샘을 계획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녁 6시쯤에 너무 피곤해서 자버렸지만 말이죠. 그래도 나름 아침까지 잠들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잠들기 전에 든든하게 밥도 먹었고 말이죠.(음....잠자는 것이 무슨 운동도 아니고-_)
그러나!! 7시 43분. 한국에서 A의 전화. 9시 25분 다시 한국에서 B의 전화.
11시 24분. 인터넷에 들어오라는 어떤 분의 연락을 받은 중국에 있는 녀석의 전화.
위의 저 사람들이 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다들 나름 복잡한 용건이었다면? 사실 가장 큰 문제는 그 피곤한 와중에도 과거 어떤 누님 덕분에 길들여진 습관으로 순간 정신을 번쩍 차리고 전화를 받고, 용건 처리 후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는 것이다.
점차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지금! 울음이 나올 것만 같다. 역시 나는 낮의 세계와는 인연이 없는 것 같다.
밤의 나라 아그들아. 역시 나는 너희들을 떠날 수 없는가봐.ㅠㅠ
덧 : 논문주제보고서 진행사항.
참고서적목록 완성. 목차완성. 연구목적완성. 연구방법완성. 한반도쪽 연구성과...일단 완성(사실 한줄로 소그드 연구는 개뿔! 이라고 하고 싶었다. 한반도에 소그드가 도래했을 것이라고 정확하게 꼭 집어 쓴 논문 제로. 서역인과 소그드를 구별하고 있지도 않다. 동북쪽도 한국학계의 논문은 제로. 일본과 중국학자의 발해쪽 시론정도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한반도쪽은 억지로 서역교류쪽까지 밀어넣어서 써버렸다. 개인적으로는 역시나 다 지워버리고 개뿔도 없다라고 하고 싶다. )
이제 가장 쉽고도 어려운 기존의 전체 소그드 연구정리만 하면 끝...이지만...어차피 본인 스스로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시 다 뜯어 고치고 어쩌고 하면서 다음주에나 완성되려나. (사실 논문주제보고서만 쓰는것도 아니고, 관련 사료도 계속 폭식하고 있다. 욕심을 버려야돼!!)
위의 내용은 부여의 지배구조를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로 사용되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표점을 찍을 것인가인데, 개인적인 의견을 밝혀본다.
기존의 학설은 王-诸加-豪民-民=下户-奴僕로 파악한다. 하지만 이는 皆為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싶다. 皆為은 "앞의 사항이 모두 뒤와 같다"라는 의미로서 민이나 하호를 모두 노예로 파악해야 정확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 박경철은 당시의 자유민으로서의 민의 존재여부를 고도의 군사수행능력과 소정의 외교-행정능력은 물론 사법제도까지 운용하고 있는 국가로서 엄존하고 있었다는 이유로서 민의 존재여부를 강조한다. 그래서..
邑落有豪民, 民, 下户皆為奴僕
본인은 박경철의 견해에 대해서 심히 의문스럽다. 왜냐하면 이 역시 皆為와 연관시켜 보면 이상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皆為은 "앞의 다양한 항목들을" 통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철이와 순이는 모두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나는 모두 사람"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은 어디까지나 단수이고 복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인은 송호정의 의견이 더욱 사실에 근접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송호정은
汲古阁本판은 취해서 邑落有豪民, 名下户皆為奴僕 로 분석한다. 개인적으로 民은 어디까지나 名의 오기가 아닐까 생각된다.(이에 대해서는 차후 더욱 구체적으로 봐야겠지만.....名인 편이 더욱 문법에 맞는다고 할까?;;; 느낌;;;)
만약 이와 같을 시 박경철이 제시하는 부여 5만병력설을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 사실 간단하다고 본다. 비록 당시의 노예들은 어디까지나 전쟁지원만을 하였지만, 군대병력수는 때로는 전쟁지원분야의 병력까지 포함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의 사료에서의 병력은 쉽게 부풀려지거나 축소되고는 하기 때문이다.
또한 오영찬이 고고학적인 논증을 통하여 위의 사항을 논증하였으니 만큼 개인적으로 비록 부여전시기에 걸쳐서 송호정의 식대로의 분석이 효과적일지는 일말의 의심을 남겨둘 수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王-(诸加)-豪民-民=下户=奴僕 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나 싶다.
"他钵可汗의 불교 도입에 대해서"는 唐代九姓胡与突厥文化(蔡鸿生 中华书局 p147)에 나오는 글에 의문이 들어서 작성한 글이다. 木杆可汗의 동생인 他钵可汗(572-581)은 불교를 도입했다. 하지만 1기 투르크제국에서는 불교를 받아들인 다른 칸은 없었다. 그렇다면 他钵可汗은 어째서 불교를 받아들였을까?
우선 불교를 비롯한 종교의 전파는 두가지의 경우로 나눌 수 있다. 민간에 먼저 유포가 되고, 그 세력이 일정정도 이상이 되었을 때 압력을 받은 지도자가 해당 종교를 수용하는 경우이다. 기독교의 로마에서의 발전양상이 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지도자가 해당 종교를 "현실적 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런 종교가 지도자의 비호아래서 점차 민간에 유행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백제에서의 불교유입을 생각하면 비슷하다.
그렇다면 他钵可汗의 경우는 어떤 경우라고 판단해야될까? 他钵可汗이후에 해당 종교가 민간에 지속적으로 유지가 되는지 아닌지를 알아보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他钵可汗사후 불교는 순식간에 사멸한 것은 他钵可汗 개인적으로 해당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해석해야될 것이다.
문제는 他钵可汗은 왜 불교를 수용했을까? 蔡鸿生은 이에 대해서 부국강병을 원했던 他钵可汗와 불교를 받아들이므로서 突厥가 약화되기를 원했던 北齐왕의 현실적인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으로 해석한다. 북제와의 생각은 현실과 매우 비슷할 것이다. 그가 투르크에 전달한 열반경(涅磐经)의 내용을 보아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다. 문제는 他钵可汗의 입장이다.
지도자는 바보가 아니다. 단지 불교를 받아들이면 부국강병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믿는건 어떤 현실적인 근거도 없다. 분명히 일정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오래동안 투르크 세계의 주류 종교인 샤마니즘도 부국강병을 이룩할 수 있다고 말하는 점에서는 동일하기 떄문이다.
혹시 他钵可汗은 투르크의 전통종교인 샤마니즘의 사제집단과의 일정한 충돌을 하였고, 불교를 이용하여 이러한 사제집단과의 알력싸움을 할 생각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는 이러한 알력싸움에서 패하게 되고(9년의 짦은 통치), 그의 뒤를 잇는 沙钵略可汗은 오히려 "从天生"이라는 샤머니즘적인 가치를 더욱 강조했던 것이 아닐까?
해당 사건은 1) 이미 정혼자가 다른 남자에게 갈 수 없고. 2) 상중에 결혼을 할 수 없으며 3) 관리가 사건과 관련된 사람과 결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3)이었고, 이것이 가장 무거운 형벌이었다. 그러므로 해당 사건은 服内가 가장 큰 관건이었다.
의문 : 그런데 해당 사건의 관련자들은 몽고인으로 보이는데, 역시 상중에 결혼 할수 없었던 것인가? 물론 이름만 가지고 몽고인이라고 판단하기는 어려운 문제이긴 하다. 하지만 만약 몽고인이라고 가정한다면, 상중에 결혼하지 못하는 조항이 몽고인에게도 적용이 되었다고 가정한다면 몽고쪽에서도 해당 풍습이 있었다고 예측할 수 있다.
몽고인의 풍습중에 상중에 결혼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가? 할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수계혼이 성립하지 않는다. 아...어떻게 증명할가 머리 굴린 내가 바보다. 젠장-_ 깨닭고서 난 바보다라고 외쳐본다!!
《三国志·乌桓鲜卑东夷传》注引《魏书》)而“父兄死,妻后母、执嫂;若无执嫂者,则己子以亲之次妻伯叔焉。死则归其故夫。”수계혼에 대한 자료
1) 해당 사례의 인물이 몽고인이라는 것을 입증(당연히 몽고인이 아니다.)
元史類編卷九 (文宗) 許蒙古色目人居喪守制 이 조항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문종정도에 몽고인이 많이 한화가 되었고, 수계혼도 안하고, 상중결혼도 안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법률적으로 구속하지는 않았던듯...
다른 사례
張大榮 - 居喪成親 도 역시 상중결혼이 문제가 된다. 당연히 몽고인이 아니다.
元典章 禮部 【禁治居喪飲宴】延祐元年七月十二日承奉江浙
行省剳付準中書省咨御史臺呈淮江南諸道行御史
臺咨備監察御史王奉訓呈伏以父母之喪三年天下
之通喪也死歛葬莫不有禮禮曰披髮徒跣居於倚
廬讓枕塊哭泣於世時□粥朝一溢米夕一溢米又曰
始死充於有窮既殯瞿瞿如有求而弗得既葬皇皇如
有望而弗至經曰食旨不甘聞樂不樂此孝子哀慼之
情既歛既葬以其時期而小祥又期大祥三年禫
霜露既降春雨既濡懷愴怵惕如將見之此子終身所
不忘豈拘於三年哉去吉日遠風俗日薄近年以來江
南尤甚父母之喪小歛未畢茹█飲酒略无顧忌至于
送殯管絃歌舞導引循柩焚葬之際張筵排宴不醉不
已泣血未乾享樂如此昊天之報其安在哉㒷言及此誠
可哀憫若不禁約深為未宜莫若今後除蒙古色目合
從本俗其餘人等居喪送殯不得飲宴動樂違者諸人
首告得實示衆斷罪所在官司申禁不嚴罪亦及之不
惟人子所有懲勤抑亦風俗少復淳古宜從憲臺剳付
各道禁治相應具呈照詳得此本臺看詳國家以風俗
為本人道以忠孝為先可以移忠可以事上忠孝既立
則人道修而風俗厚為治之至要也三年之喪古今通
制送終營葬人子大故車芻靈禮亦有之至若忘哀
作樂張筵群飲敗禮傷俗宜從合干部分定擬通行禁
止相應咨請照詳準此具呈照詳得此送據禮部呈
詳父母之恩昊天罔極終身而不能報聖人定立中制
以為三年之喪送終葬當盡其禮若居喪飲宴殯葬
又動樂聲實傷風化如準御史臺所言除古色目人
各從本俗外其餘人等禁治相應得此送禮部行移刑
部議擬去後今據禮部呈移準刑部關議得父母之喪
至於哀慼其居喪飲宴殯葬用樂皆非孝道除蒙古邑
目宜從本俗余並禁止敢有· 違犯治罪相
應關請照驗準此本部參詳如準刑部所擬遍行照會
相應具呈照詳都省咨請依上施行
해당 사료는 직접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상중에 술마시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에서 몽고족과 색목인은 제외된다. 다시 말해서 몽고족과 색목인은 전혀 다른 사상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추측하면 샤머니즘으로 인하여 부모님이 천당에 간다는 것 정도? 라마교의 혼례 사상에 대한 조사가 더 필요.
2) 다른 법률 조항에서 해당 사항이 있는지 조사 및 검토
元典章 刑部卷 【居喪為嫁娶者徒】至元七年十二月尚書户部契
勘父母之喪終身戚夫為婦天尚無再醮今隨処節
次申到有於父母及夫喪制中往往成婚致使詞訟繁
冗為无定例難便歸斷檢會到舊例居父母及夫喪而
嫁娶者徒三年各離之知而共為婚姻者各减三等省
部議得若不明諭禁約引訟不已寔是亂俗敗政以此
詳比及通行定奪以來定立格限渤海漢兒人等擬
自至元八年正月一日為始已前有居父母夫喪内嫁
娶者準已婚為定格後犯者依法斷罪聽離如此庶免
詞訟似望漸厚風俗呈奉尚書省移準中書省咨依準
施行
3) 몽고 풍습에 관한 고문중에서 상중 결혼에 대한 항목이 있는지 조사 및 검토
(상중에 결혼하는 경우가 있는지를 2차 논증으로 삼고, 최고로 좋은 것은 직접적인 항목!인데 없을듯-_)
4) 특히 샤머니즘쪽에서 상중 결혼에 대한 금기가 있는지 조사(이건 몽고뿐만 아니라, 한국, 중국, 일본 및 중앙아시아 각국의 풍습을 검토해봐야하는 짜증나고 힘든 작업이 될듯-_)
열심히 쓰려다가 결국 말도 안되는 방향으로 빠져버린 레포트. 누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수 있는 코르치가 샤만킹이라는 사실을 마치 대단한 것마냥(그의 행적, 임명지, 우순노인과의 상관성등) 써놓은 다음에 이미 유명한 샤만킹 쿠쿠추와 비교를 해주고, 베키가 샤만킹의 몽고식 이름이라고 주장해보려고 발악중이다. 레포트를 쓸 때면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 이런 것을 증명해서 머하나라는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사실 위의 내용에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많이 집어넣으면 개인적으로 참 재미있어진다. 하지만 사료로서, 하다 못해서 현대 인류학과 민속학 혹은 종교학으로라도 간접적으로 증명이 안되는 사항을 내 상상대로 넣을 수는 없다. 하지만 추론적으로는 꽤나 그럴듯 하다고 생각된다. 한마디로 누구랑 누구가 사랑을 했을것 같은데, 흑백샤만 혹은 흑백적황샤만과 같은 논란이 되는 분류방법등등... 이런 것을 적으면 소설쓰고 있네라는 소리밖에 못 듣겠지.
제 블로그에 자주 오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얼마전에 아버지를 모시고 산동을 갔다 왔고, 13일에는 일본으로 날라가서 3월말에는 오는 관계로 방학내내 천천히 할 수 있는 논문들을 13일 전까지 모두 다 끝내야디는 부담감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포스팅도 잘 못하고 있군요. 오히려 일본을 가면 더 자주 포스팅을 할 것 같은 이 왠지 모르게 짜증나는 예상은 멀까요?;;;
중얼중얼 : ...왜 우리집은 어렸을 때부터 십삼경을 외우게 안했을까? 응응? 그때 외우라고 했으면 온갖 반항을 했을 터이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너무나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시간은 없고 고전을 읽을 시간을 없고 말이다. 그래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미래의 내 자식아. 넌 죽었다 -_-;;
중얼중얼 : 난 정말 천재가 싫다. 그것도 집안 환경으로 완벽하게 자라난 천재는 더 싫다. 그래서 난 천인취에가 싫다. 범재의 천재에 대한 질투는 언제나 이렇게 말도 안된다. 하지만 이것 해보면 어떨까 하면서 다른 자료 보고 있는데, 혹시나 하고 뒤져본 천인취에 논문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의 몇 백배를 뛰어넘는 내용과 고증이 나와버리면 사람이 안 질리고 어떻게 버티겠는가? 나는 단지 이럴 수 도 있지 않을까라고 맘대로 상상한 것을 50년도 전에 완벽하게 고증해 낸 사람. 이른바 大师이라는 사람의 그림자를 벗어나는 것은 무지막지하게 힘들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껴본다. 크흑...논문을 대체 멀 써야되는거야! ㅠㅠ
바로의 요약정리
본인이 쓴것을 번역할 생각을 하니, 정말 싫습니다!! 그냥 요약하겠습니다.^^::
이 레포트는 陈来(질래)선생님의 선진철학을 들으면서 작성했습니다. 질래선생님은 고대의 점복술이나 자연숭배, 샤먼등에서 유가가 생겨났다는 논지를 제출하고 있습니다.
김백현교수님의 말에 따르면, 질래라는 사람은 분명히 실력이 있지만, 화사족(华夏族)의 입장에서만 분석하고 있으며, 한국인과는 다르게 샤먼을 모르기 때문에(한국인들이야 무당의 굿판을 자주 보지만, 중국은 그런것이 미신탈피라는 공산주의이념으로 현재 남아있지 않습니다.) 신명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 철학교수님이 한국인이고, 거기에 유가쪽이 아닌 도가쪽이라는 것은 염두에 두시고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나중에 김백현교수님이 시도하고 있는 "신명에 대한 고찰"을 올리도록 하죠.)
이 레포트의 결론은 위에 다 나와있습니다.-_-;; 고대의 샤머니즘(종교)가 어떻게 철학으로 변했느냐라는 것을 설명하며 논증하고 있습니다.^^
바로의 중얼중얼
질래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심히 짜증났던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연구생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마져 없고, 단지 연구만 하던 분이십니다. 그런데 갑자기 본과생을 대상으로 수업을 했으니 수업방식이 너무 엽기적이었습니다. 분명 본인이 쓴 책을 가지고, 토씨하나 안 뺴고 읽고 있는 모습은 저를 경악속으로 빠져들게 했습니다. .....유명하신 분이라서 일부러 무리해가면서 선택했건만...ㅠㅠ
마침 그 선생님 밑에서 박사를 마친 형님이 중국에 놀러오셨길래 물어보았습니다. 그 선생님 대체 왜 그러냐고!! 딱 한마디 하시더군요. "원.래.그.래." -_-;; 어찌하오리까..ㅠㅠ
저는 신고와 의고의 논쟁을 정리하던중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는 지금 중국인이 아니지만 북경대학교역사과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런 특수한 상황하에서, 문화국외자의 입장에서, 결론을 내리자면, 지금 현재 중국사학계에서 유행하고 있는 신고학풍은 중화사상의 낙인이 찍혀 있는 상태로 중국의 문화패권주의로 변질되고 있는것이 아닐까요? 중국사학계는 과학적인 분석을 포기하고, 중국문화패권주의의 건설을 위하여 역사를 이용하고 있는것은 아닐까요?
다만, <좌전>이 없다면 어떻게 중국선진시대를 연구할 수 있을까요? 이런 개념속에서 생각한다면, 서방의 문헌무시풍조의 중요한 문제를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건의한다. 내부자는 가능한한 자신의 역사전통에 대한 객관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며, 외부자는 그 전통을 중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같은 중간자들의 노력도 필요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바로의 중얼중얼
2000자도 안되는 1시간만에 다 적어버린 심심파적식 레포트였습니다. 그리 큰 내용은 없습니다. 단지, 지금 현재 중국의 사학계의 학풍이 조금 무서워서, 그들이 문화패권주의로 나아가기 때문에, 그것을 경계하고 싶은 마음에서 적어내려간 것입니다^^ (볼 사람도 없는 이딴 글은 왜 올리는거야!! -_;;)
왜냐하면-_ 제가 쓴것이기 때문이죠.정확하게 말하면 여기저기서 배껴서 조합했다는 말이 더 어울릴거 같군요. 지금은 모두가 다 아는 조공책봉관계의 실제성질에 관해서 적은 것 입니다. 중국쪽 논문에는 그런것이 없어서 거의 대부분을 한국, 일본쪽에서 건져왔습니다.
거기에 플러스 중국어판입니다^^::::
혹시나 중문과여서 작문숙제용 대체물이 필요하시다면 마음껏 써주세요.(대신 따뜻한 답글..^^) 뭐..일단 어법상으로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조그마한 부분은.....저도 몰라욧!!
책봉조공관계
-고구려를 중심으로
바로(본명 맞습니다.-_;;)
내용 요약 :
조공책봉제도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고대동아시아세계에서 있던 하나의 외교시스템이었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그거 명목상으로만 군주와 신하의 관계였지, 실질적으로는 다 지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았다.-_;;
고구려는 비록 조공을 보내고 책봉을 받았지만, 실질적으로 완전한 독립적인 국가행위(내정,외교등등)을 정상적으로 수행하였다. 고로 고구려를 중국의 지배범위안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옮지 않다.(많이 들은 말이죠? ^^)
참고로 이 가설은 일본에서 먼저 제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