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만화의 원작 저작권은 Neku에게 있으며, 본인은 어디까지나 본 만화를 소개하는 목적으로 번역을 하였으며, 한국에 정식으로 출판되거나 원작자의 요청이 있을 경우 본 번역판을 비공개로 변경하도록 하겠습니다. 단, 번역판의 저작권은 본인에게 있으며, 번역판은 비상업적인 원칙으로 수정없이 출처(ddokbaro.com)을 명확하게 밝히고 가지고 가실 수 있습니다
三人行 必有我師焉 삼인행, 필유아사언《论语·述而》
3명이 길을 가다보면, 그곳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너무나 유명한 이 말을 우리는 과연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이 글에 대한 가장 간단한 해석은 "3명이서 길을 가다보면 어떤이는 훌륭하여, 그것을 본받아서 자신을 발전시키니 나의 스승이고, 어떤 이는 쓰레기이니, 자신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는지 돌아보고 반성하여 고치므로 나의 스승이다." 이다. 여기까지는 인문학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도 모두가 아는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이 최근 가장 마음에 와 닿는 글이라며 트위터에 위의 글을 올리자 @bujiwibuji 님이 완전히 다른 각도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고문 번역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나, 기존의 해석각도을 완전히 반대로 해버린 이 해석을 잠시 소개해볼까 한다[각주:1].
3인이 길을 가면, 한 명은 훌륭하고, 다른 이는 쓰레기이다. 그렇다면 남은 한명은 무엇일까? 공자 자신일까? 그러나 해당 고문은 "3명이서 같이"와 "3명과 같이"로 각기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공자 자신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각주:2].
그렇다면 잘하는 것도 아니고 쓰레기도 아닌 한 사람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도 될 것이다. 그는 누구일까? @bujiwibuji님은 이에 대해서 "잘한다고 뻐기기에는 민망하고, 못한다고 빠지기에는 억울한... 그러니까 보통 우리 같은 사람들. 이들은 본받기엔 만만하고, 개선하기에는 큰 하자가 없어서, 투명인간으로 처리."라고 해석하였다. 어느 정도 타당하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잘하지도 못하고, 못하지도 못한 언급되지 않은 존재와도 같다. 우리네들에게는 그렇게 잘난 사람도 없고, 그렇게 못난 사람도 없고, 그 중간에 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런 평범한 사람들은 타인의 아픔을 나눌 줄 알고, 타인과 기쁨을 같이한다. 비록 거창한 "배움"이나 "가르침"은 없지만, 그런 모습이야 말로 인생이며, 배워야될 것 중에 하나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공자 자신이 그런 사람들을 투명인간으로 처리했다기 보다는 그런 평범한 모습도 가능하다는 것을 후대의 해석자들이 무시한 것이 아닐까?
이를 바탕으로 다시 해석을 하자면 : "3명과 같이 길을 가다보면, 어떤 이는 훌륭하여, 그것을 본받아서 자신을 발전시키니 나의 스승이고, 어떤 이는 쓰레기여서, 자신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는지 돌아보고 반성하여 고치므로 나의 스승이다. 또한 어떤 이는 그리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았지만, 그 역시 인생을 살아가는 존재이기며, 우리네 이웃이기에 나와 함께 해주는 친구와 같은 스승이다."
* 고문의 즐거움.
고문은 표점을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변하고, 단어 하나에도 여러가지 뜻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고, 무엇보다 글자수를 최대한 압축을 해놓았기에 다른 해석이 나올 여지가 풍부하다. 그것이 고문의 매력이자 저주이다. (저주라고 여길때 고문이 고문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말장난을 하고는 한다.) 그래도 가끔 이렇게 기존의 고문을 다르게 해석한 내용을 보면 참 재미있다.......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문 독해능력이 없음을 생각하면, 변태스러운 자위행위라고도 생각된다. 쿨럭;;;
* 트위터의 즐거움.
평소에는 서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서로와 더욱 쉽게 교류를 하며 자극을 줄 수가 있다. 비록 140자의 한정된 공간이지만, 그런 제약성은 최대 압축의 고문처럼 그 나름의 매력으로 다가오기에 자주는 못 올리지만, 생각의 단편들을 오늘도 트위터에 올리고 흘려보내어 다시 돌아온다.
* 焉 : 어조사 언을 뺴면 안돼요 -0-
가끔 마지막의 "焉"을 빼놓는 분이 있다. 고대한어에서 한자 한자는 결코 그냥 쓰이지 않는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컴퓨터 타자도 없었고, 인쇄도 불가능했고, 복사도 불가능했다. 일일이 손으로 옮겨 적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필요 없는 단어는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焉은 한국에서 어조사 언이며 별 의미가 없다고 알고 계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데 焉은 감정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 곳에" 혹은 "이 곳에"(此地)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위의 문장으로 예를 들면, 3명이서 길을 가는 (바로) "그곳에" 나의 스승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즐거움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보시기 바란다. 이는 철학논문이 아니다. -_-;;; [본문으로]
또한 공자 스스로가 이미 성인에 근접한 단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보다 훌륭해서 배울 자가 많아야 얼마나 많을까? 이 말을 주석 처리한 이유는 감정적이고 객관적이지 못하여^^;; [본문으로]
당(唐)조의 황제는 기존의 황제와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특수한 이름으로 불리었다. 하늘칸(天可汗)이라고 하늘 지배자로 불리었다. 당조의 황자는 여러가지 옥쇄를 가지고 있었고, 그중에 전문적으로 국외에 보내는 편지에 이용했던 도장에는 "하늘칸의 도장 天可汗之印" 이라고 쓰여 있다.
당조의 꿈은 바로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渊)에게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는 정작 하늘칸을 얻지 못하였다.
수(隋)나라말기 고구려 공략으로 인하여 민심히 흉흉해지고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원은 그러한 수나라의 고위관리였을 뿐만이 아니라, 황제와 긴밀한 혈연관계을 맺고 있었다. 당시 아무도 당이 수나라를 이어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였고, 더군다나 이원이 반란을 일으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이연의 어머지는 수양제(隋炀帝)의 어머니와 친자매였다. 이연이 어려서 부모님을 잃자, 수양제의 어머니인 독고황후(独孤皇后)의 보살핌을 받게 된다. 이연은 아버지의 작위인 당국공(唐国公)을 어린나이게 이어받게 되었고, 그의 출세도 수문제(隋文帝)와 황후의 후광 속에서 탄탄대로를 달리게 된다. 또한 수양제와 이연은 아마도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자주 같이 뛰어놀면서 친분을 쌓았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러나 이연은 반란을 잃으겼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악을 했을 것이다.
대체 이연은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일까? 이연은 제왕 운명을 타고 나서? 이씨가 양씨를 대체한다는 유언비어때문에? 주위의 심복들이 부추겨서?
614년 태원으로 돌아가보자.
수나라는 몇 백년동안 분리되었던 중국을 통일하였다. 하지만 더욱 강대하기를 바랬던 수나라는 고구려를 공략하였고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의 거대 제국의 꿈은 날로 산산히 부서지기 시작했다.
617년의 중국은 수나라 붕괴의 전야였다. 전 국토의 산천이 불타고 민중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역사의 갈림길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누가 역사의 선택을 받을 것인가?
1. 꿈과 현실 - 이원
617년, 이연은 태원으로 파견을 나가서 잠시 머물렀었다. 당시의 관직은 태원지방의 제독(最高军政长官)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지방실력자로 성장한다. 그런데 이연이 속으로 가장 기뻐했던 것은 실제 권력이 아닌 어둠 속에서 생겨난 하나의 미묘한 생각이었다. 태원은 고대 전설 속 당요(唐尧)가 관장했던 지역이었다. 요는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천하를 다시르게 되었다. 천상천아 유아독존. 이연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작위도 당국공(唐国公)이었다. 당국공이 당요의 옛땅으로 온 것이다. 이것이 천명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아주아주 오래전, 어떤 사람이 이연의 관상을 본적이 있다. 그는 이연의 골상이 부귀하니 스스로를 아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 이연의 마음속에서는 어떤 꿈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연이 태원에 도착한 뒤, 그 꿈에서 깨어난 것은 아닐까? 이제는 꿈만이 아닌 현실로 실현시키고자 하는 충동을 느낀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런 꿈만으로 이연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일 것이다.
대업구년(大业九年) 바로 수양제가 고구려로 친정을 나갔을 때, 예부상서(礼部尚书) 양현감(杨玄感)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연은 양현감이 친지들을 온갖 이유를 가져다 붙이며 전선에서 돌아오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의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곧장 전선에 있는 황제에게 보고를 하게 된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 수양제는 이연의 충성에 감사하며, 전방주력부대를 돌리고, 다른쪽으로는 이원에게 홍화군(弘化郡)의 군사를 맡게 하고, 지관우주군사(知关右诸军事)에 임명한다. 이는 장안(长安)의 북방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이연이 처음으로 군사력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양현감의 반란중에 이연이 보여준 충성은 매우 깊어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두항(窦抗)은 이연 부인의 당형이었다. 또한 이연 본인과도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두항은 이연에게 이 기회를 이용하여 천하를 손에 넣으라고 조언을 한다. 그때 이연은 "문제를 일으킬 발언을 하지 마세요(无为祸始,何言之妄也。)"라고 대답한다. 당시의 법률을 생각하였을 때, 두항의 발언은 모반의 증거가 된다. 다시 말해서 이연은 이 사실을 보고해야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연은 비록 두항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정작 두항을 고발하지는 않는다.
이연은 당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야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이연이 태원에 도착하였다. 그는 조정세력의 대표가 되어 군대를 이끌고 각지의 폭동을 진압하였다. 그는 심지어 70발의 화살을 연달아 발사해서 70명을 죽인 기록이 있었고, 조직적이지 않은 군중들이 군대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이상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그의 야심과 꿈이 합쳐졌을까? 그가 진정 꿈을 위해서 노력을 시작했을까? 그의 일련의 모습을 보면 그러한 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사실 그는 아직 웅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지금 당장의 반란과 침입을 막는 것만을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속 됩니다.)
멍쉬엔슬(孟宪实)의 晋阳:梦开始的地方이 괜찮은 내용이어서, 직역식이 아닌 의역위주로 번역한 글입니다. 오역이나 오타에 대해서 강력한 비판을 부탁드립니다. 또한 저의 "귀차니즘"을 생각하면 어차피 덧글도 달리지 않아서 압력도 별로 없는 이런 종류의 글의 업데이트는 조금 느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덧글을 달아달라는 말을 참 아름답게 돌렸군요! 우훗-_)
"연대기 작가라고 자칭할 때가 더 많지. 연대기 작가가 뭔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역사와 현실 중 현실 쪽에 더 관심이 많다는 점에선 야심가와 같지만, 관찰하고 해석할 뿐 참여할 수는 없다는 점에선 역사가와 같은 사람을 말하네."
"왜 참여하시지는 않습니까?" 바탈리언 남작은 잉크병을 열었다. "관찰자로 우수한 이가 있고 행동가로 우수한 이가 있네. 난 전자야.내겐 재능과 행운이 있거든. 내 행운이야 오늘 일어난 일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겠지. 이 굉장한 사건 속에 휩쓸리지는 않지만, 관찰하고 있네. 그리고 이렇게 기록도 남길 수 있잖나."
"남작님께서 죽은 과거보다 살아있는 현실을 더 사랑하시는 것은 짐작합니다. 역사가가 아니라 연대기 작가가 되시기로 결심하셨으니까요. 그리고 남작님께서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지 못하신 것도 압니다. 예. 언어는 말해진 순간부터 고정되겠지요. 어떻게든 이 아름다운 지금을 표현해 보려 해도, 그것은 표현된 순간부터 죽은 과거가 되겠지요." 남작은 졸음에 취하여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은 어쩌면 자신이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거기에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오스발의 목소리는 이제 산들바람처럼 들려왔다. "하지만 그래도 남작님은 훌륭한 연대기 작가이십니다." "어째서-?" "지금을 사랑하시니까요."
-- 이영도의 폴라리스 랩소디 중에서...
요즘 자주 생각나는 문장이다. 나는 역사를 공부한다. 관찰하고 해석할 뿐 과거에는 내가 참여를 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기에는 나는 "지금"을 너무나 사랑하나보다. 그렇다고 나는 행동하는데 필요한 능력이 없다. 그리고 용기도 없다. 그렇지만 언제나 아련하다.
관찰하자. 그리고 운이 좋으면 나의 조그마한 관찰로 현실에 조금이라도 참여할 수 있겠지. 관찰하는 능력부터 제대로 기르자.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일이다.
기대했었다. 본인보다 나이 어린 후배 한명 안 들어오나 말이다. 사실 현재 본과에 다니는 한녀석이 들어왔어야 되었는데, 나보다 훨씬 더 역사 공부에 어울리는 녀석인데 말이다. 결국 본과 출신의 석사인생 2명의 모습을 보고 살포시 포기해주시더라. 좋은 모습 보여주러 그리 노력했는데 말이다. 큭....
내년을 기대해 보리라. 한 녀석 있다. 그나마 살아있을 한명의 생존자가...
그녀석 이름에는 아예 석사의 석자도 있다!! 자!! 와라!! "원래 석사여!"
왜 굳이 한국인이냐고? 외국에 있으면서 중국애들하고 안 노냐고? ...지도교수님이 소수정예(본인 빼고) 주의라서 현재 박사생 2명에 석사생 1명(이게 본인)만 있다. 맨날 3명이서 노는데도 지쳤다. 좀 데리고 놀?! 후배가 있어야되는데 말이다. 새로 들어오는 후배 없다. 아...새로 한명이 들어오긴 한다. 본과에서 박사로 점프해서 말이다. 후....
없다. 없다. 없다. 그래서...
외롭다....이것이 소위 인문학의 위기인가? (........)
자기 얼굴에 침 뱉기 : 올해 전공과목 시험이 생겼더라.작년에는 연구생 시험 개혁한다고 딸랑 면접만 보았는데 말이다. 으음...지금까지 시험운이라고는 개뿔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시험운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역사가 나를 부른다라는 폼나는 말도 있겠지만...안 불렀으면 좋았을걸이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새벽이다. 자치통감. 사마광님아~ 조금 짦게 쓰지 그러셨어요? ㅠㅠ
김용덕 : 현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서울대학교 동양사 교수, 하버드대학교 석박사, 일본근현대사 전공.
김용덕 교수님은 한국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몇가지 역사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분명히 존재했던 조선조의 사대주의를 일부러 무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서울대 교수가 북경대에서 강의를 한다는 특수상황을 감안하면 이해는 할 수 있다.
그가 보는 현재 한국의 4대 문제는 한중, 한일, 그리고 남북한 관계가 있다. 더욱이 중일간의 역사적 문제를 중간에서 어떻게 처리하는냐도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그러기에 말할 수밖에 없는 점이다.
일반인들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기준으로 상대방의 국가를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일반인의 역사적 사실은 매우 좁은 범위에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완전한 타자가 되어서 바라보아야 진정한 실체를 알 수 있다. 그는 임진왜란과 임오군란을 예로 들어서 한국의 중국과 일본에 대한 역사관의 정립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소중화의식은 민족의 독립성을 나타내주기도 하지만 기본은 사대주의가 아니던가? 흐음...
전근대에서는 동북아의 기본적인 가치가 유교(성리학)였지만, 근대부터는 서양의 가치가 중심적인 기준이 된다.
교수님은 한국의 중국과 일본에 대한 관점을 사람들이 잘 알것이라는 이유로 건너 뛰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강의의 가장 핵심이 되어야될 부분을 건너뛰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사람의 입장에서 듣는 한국의 중국과 한국에 대한 관점은 매우 중요한 것이 아닐까?
교수님은 조공책봉제(朝贡册封体制)을 현재 미국과 다른 나라와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비슷하다.
그렇다면 교수님의 현재 역사전쟁 해결 방법은 무엇인가?
1) 역사가 정치에 이용되지 않아야 한다.
본인의 생각으로 이론적으로, 이상적으로는 무조건 맞는 소리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교수님도 분명히 알지 않은가? 그래서 본인이 고대사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동북공정과 같은 몇가지 문제는 있지만 사실상 모든 문제가 정치와 연결되는 근대사보다는 상황이 좋다고 할 수 있다.
2) 서로의 "역사주권"을 존중하여야 한다.
마치 영토와 같이 역사도 그 나라 범위안에서 보호되어야된다는 소리인데, 솔직히 이상하다. 그렇다면 국제적인 학술교류는 왜 하며, 국제적인 주류 역사해석은 어떻게 해야되는것인가? 무엇보다 이것 역시 역사가 정치에 이용되는 현실의 한 모습에 불과하지 않은가?
** 열린 민족주의 开放的民族主义(Internationalized Nationalism)
재미있는 개념이다.
3) 동아시아 공동체
교수님는 중국의 파워가 홀로 너무 강하여서 이런 공동체의 실현이 매우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경제실력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군사력으로보아도 일본은 중국에 그리 떨어지지 않으며, 그 중간에서 한국이 충분한 중간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교수님은 공동체의 실현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매우 모호한 개념으로만 설명하고 있다. (싸가지 없게 말하면, 이런 내용은 나도 예전부터 주구장창 이야기해놓았던 이유다. 구체적인 방법이 정말 없는 것일까...?)
동아시아안의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고, 공통의 가지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동아시아 가치(East Asian Value)가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가치로 만들면, 이런 가치는 소프트파워(Soft Power)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는 정치 군사 문화적으로 세계를 지배하기보다는 세계를 평화적으로 모두 함께 발전하는 길을 열어야 될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이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간의 문화를 존중한다면 자동적으로 해소될 것이다라니...;;
** 유럽공동체가 생겨난 이유는 그동안 죽어라 서로 전쟁을 해서 이제 합치자는 분위기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동아시아 공동체가 생겨날려면 동아시아도 죽어라 전쟁해야 된다!!! 당연히 교수님도 농담으로 한말이다.
문답 :
역사 주권이라는 개념은 미국의 학술상에서는 기본적인 주권중에서는 하나로 포함된다. 전통적인 주권에서는 국토, 국민, 지배체계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 중에서 역사라는 것은 빠져 있다. 하지만 한국의 일제시대와 같이 전통적인 주권을 모두 상실한 가운데, 역사주권만은 남아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Q : 역사가 정치에 이용되서는 안된다고 하시면서, 뒤에서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위해서 역사를 이용해야된다고 말씀하셨는데 모순 아닌가요?
그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공동체를 위해서 먼저 역사전쟁을 해결해야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동북아시아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한국이 주도적으로 중립적인 위치에서 동북아시아 역사연구센터를 만들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사실 영향력을 보면 한국은 영향을 행사하기보다는 받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너무 치열한 역사 전쟁상태를 생각하면 한국이 그 중간자 역할을 할 수 없을까?
그 외 잡상 :
한국과 일본의 지배자는 같은 민족에서 나온 사람들이지만, 중국의 지배자는 다른 민족에서도 나온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물론 이런 다른 민족지배자들도 중화사상에 빠져들지만 말이다. ---> 일단 한국과 일본은 단일민족도 아니고 한나라나 몽고와 같은 외부세력도 많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예전의 민족관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 사람 모두가 남북한의 통일을 바라고 있다. --> ....솔직히 반대파가 예전에 비해서 많이지지 않았나?
통역자에 대해서 :
북경대학교 한국어과 연구생이라고 한다. 중국인이다. 이번에 역사과 박사시험을 보고 면접만 남았다고 한다. 그럼 머...들어오겠지. 현재까지는 한->중 번역만 하고 있음으로 정확한 실력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원래 말에서 어려운 말들을 조금씩 빼놓고 있다. (예를 들어서 역사적 구체적인 사실이나 속담같은 말은 번역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빨간옷을 입은 한국분. 박사생으로 알고 있는데, 죄송하지만 중국어 실력이 부족한듯 하다. 더 열심히 하셔야 될듯...
牛大勇
동북아시아의 통합
1) 강력한 초거대국가
내부 집단들이 공통적으로 합쳐야겠다는 인식 -- 적대할 국가
2) 현재 복작한 정치외교 상황 - 분리주의문제
조선, 한국, 타이완, 중국, 일본이 서로 너무 얽혀 있다. 일단 조선과 한국 그리고 중국과 타이완간의 문제가 해결되야지 동북아의 통합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3) 전쟁책임과 역사책임
일본과 반일본간의 일제시대의 전쟁 책임과 역사책임을 포함한 문제. 다시 말해서 일본을 믿을 수 있으냐는 점.
어떤 사람을 한국인이라고 부르는가? 어떤 사람을 중국인이라고 부르는가? 일본인이라고 부르는가? 현재 한국, 중국, 일본의 국가 안에 사는 사람들을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이라고 한다.
-- "The Peoples of Asia" - Science and Politics in the Classification of Ethnic Groups in Thailand, China, and Vietnam By CHARLES KEYES 중의 문장을 살짝 패러디한 것.
어마어마하게 단순하고 당연한 말이지만, 곰곰히 씹어보면 너무나 씁쓸한 문장.
CHARLES KEYES는 민족이란 허구적인 개념에 불과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민족의 개념과 범위는 정치적인 목적에 따라서 너무 쉽게도 변한다. 그리고 이렇게 변한다는 것 자체가 영원한 민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리이다. 실제로 한국인들이 한민족이라고 하는 공동체의 틀은 과거 정신문화연구원이 피나게 만들어낸 역사관의 결정체일 뿐이다.
지금 내가 느끼는 한민족이라는 자긍심이 누군가에 의해서 세뇌된 하나의 상상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곰곰하게 되돌아보자. 그리고 "한민족 짱!" "한민족이 세상에서 최고"라는 생각을 버리고, "짱깨는 드러워"나 "쪽발이는 키작은 병신"과 같은 이야기를 하지 말고, 민족이나 국가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단지" 인간으로서 세계를 바라보았으면 한다.
본인 역사를 공부한다. 그리고 저 지도를 보는 순간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학문적인 가치는 0%에 가까운 쓰레기이다. 물론 한가지의 가설로서 존중 받을 수 있지만, 해당 가설의 증거가 너무나 부족하다.
고구려의 영토 표시가 지 마음대로다. 해당 영토 표기는 태왕사신기에서 봤던 그 영토 표기였다. 그것을 보면서도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했을까라는 생각을 했지만, 어디까지나 "판타지" 드라마라는 생각에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이건 뉴욕타임즈에 광고를 올려서 많은 외국사람들이 보는 지도인데 여기에다가 이런 말도 안되는 짓거리를 했다는 것이 이해가 안된다. 대충의 문제만 말해도...
1) 백제의 산동반도설 통치설은 한마디로 증거자료가 너무나 부족하다. 한마디로 학문적으로 인정 못 받는다.
2) 거란의 위치도 훨신 아래쪽이어야 한다. 아니 고구려의 위대함?!을 말하려면 차라리 거란이 고구려에 통합되어있어야 정상이다. 실제로 중국대륙의 왕조들과 고구려의 사이에서 방랑을 하며, 한때는 고구려에 통치를 받았고, 다른 때에는 중국대륙 정부의 통치를 받았다. 해당 위치도 요서쯤에 배치하는게 합리적이다. 물론 시대마다 달라지긴 하지만 말이다.
3) 후연은 아무리 약해졌어도 최소한 요서정도까지는 지배했었다. 그런데 해당 지도에는 베이징(북경)도 점령 못한 것으로 되어있다. 한마디로 어처구니가 없다.
이렇게 홍보를 하면 일반 대중에게는 알려질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의 객관적인 증거를 갖추어야 되는데, 이것은 너무나 허무맹랑하다. 당장 위대한 고구려를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중일을 제외하고는 고구려는 단지 타국의 역사일뿐이다. 우리가 로마의 문화가 유렵의 여러 국가에 내려온다고 간략하게 말하는 것처럼, 타국의 입장에서는 고구려가 명망한 뒤 현재 한중일 모두에게 일정정도의 영향을 주었다.
중국어와 한국어는 닮은 점이 많습니다. 6~70%의 한국어 어휘가 한자에서 왔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요. 한국에서 쓰이는
한자를 기반으로 한 어휘들이 주로 고대 한어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현재 중국어에서 쓰이지 않는 것도 있지만, 더 많은 어휘는
지금도 그대로 혹은 약간의 변화만을 거친 채 쓰이고 있습니다. 특히 홍콩영화를
보
다 보면 한국어와 발음과 의미가 똑같은 어휘들이 자주 등장해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데요. 이는 북방유목민족의 남하와 관계가 있다고
하네요. 유목민족의 남하 전에 중원을 차지하고 한반도와 활발한 교역을 벌였던 한족 왕조에서 쓰이던 언어가 현재의 남쪽에서
통용되던 언어인 거죠. 허나 북방유목민족의 침입으로 중원을 상실하고 남쪽으로 밀려나면서 자연스레 한반도와의 직접적인 교류가
끊기고 그 후로 북방계통의 중국어가 표준으로 굳어져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답니다. 그래서 고대 중국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어는
현 남방계열의 중국어와 더 비슷한 점이 많게 된 거죠. ( 중국역사 전공하신 바로님이 확실하게 알려주시겠죠...ㅋㅋ )
아직 하얀눈님이 글에서 맘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_ http://www.oh-bang.com/11?TSSESSION=3550d39959032ac9108c6dab3ed2d15b
적으라고 적고 있는 나도 문제이긴 하다.후....-_- 그런데 본인의 전공은 어디까지나 중국 고대사라는 말이다!! 이건 언어학적 문제인데!!! 잘 몰라! -_-! 그냥 여기 저기서 들을 이야기를 종합해 놓은거니까 알아서!!! -_-
일단 한글과 한국어의 언어체계는 기본적으로 알타이어족의 기본을 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몇몇 학자들이 한국어와 일본어가
알타이어족이 아니라고 부정하는데, 그 이유는 현대 한국어와 일본어 속에서는 많은 "한자"요소가 포함되어있기 떄문이죠. 그래서
혹자는 알타이 어족에서 몽고계 언어로 한국어와 일본어를 분류하지 않고, 독립적인 한국-일본어 계열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 다음으로 북방 이민족의 유입과 한국과의 교역은 전.혀. 상관없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전부터 황해는 강력한 교역수단이
되었으며, 우리들에게 유명한 것은 신라방, 고려방, 표해록등을 참고로 할 수 있습니다. 더 궁금한 내용은 윤명철 교수님의 책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황해를 환지중해로 설정하는 재미있는 책들이랍니다. 어찌 되었든, 한반도와 중국 남부는 지속적인 교류를 해
왔고, 현재 한국에 있는 화교들의 대부분이 중국 남부에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고대 중국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남방계열이 한국어와 비슷하다기 보다는, 예전부터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여서 활용해오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고대 한어의 단어들이 들어간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언어를 구성하는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인데, 어법은
중국어와는 완벽하게 다른 알타이 어족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어의 교류대상은 중국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북방
민족들과도 빈번한 교류를 하여왔고, 고대 한국어와 현대 한국에서도 이런 흔적들이 남아있습니다.
아마 아직하얀눈님은 북방민족들은 낙후되고, 덜 떨어졌다는 생각으로 교류의 가능성을 조금 무시하지만, 사실상 북방 민족들은 세계의
다양한 문화 유산들을 받아들이고, 다른 곳에 전해주었던 전달사의 역할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물론 그 방법이 가끔은 약탈과
침입이긴 했습니다만, 그것도 문화 전파의 한 모습이죠) 이러한 예시로는 한국어에서 "강"이라고 말하는 단어를 예로 들 수
있겠군요. 강의 고대 한국어는 "가람"으로서(한가람 서점이 이것이죠^^ 한가람은 한강이라는 뜻이랍니다.), 표기 방법에서는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가람을 빨리 여러번 말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강이나 가람이나-_-; 그게 그 발음입니다. 그리고 이
가람은 알타이어 계열에서 강을 의미하는 보편적인 발음으로 통용됩니다.
정리하자면, 한국어는 어디까지나 기본적으로 알타이 어족에 속하는 북방계열 언어체계입니다. 하지만 오랜 기간동안의 중국과의 교류로
인하여 많은 단어들이 흘러들어오게 되었고, 지금 현재의 한국어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혹자는 이러한 교류를
무시하고, 가장 순수한 한국어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벌이는데, 이는 분명한 오류입니다. 그것은 다양한 교류를 아예 무시하는
방식이기 떄문입니다. 물론 단순히 무조건적으로 받아 들이기만 한다면 하나의 문화가 사멸되는 것이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긴 합니다만...이건-_ 별로 이야기 안해도 될 말이라서.....패스~
유목사회의 구조 - 서울대학교동양학강의총서 10
하자노프 (지은이) / 김호동 (옮긴이) / 지식 산업사
출간일 : 1990-03-01 | ISBN : 8942329446
양장본 | 484쪽 | 210*148mm (A5)
정 가 : 15,000원
1. 서론:유목, 그 신화의 문제점
2. 식량생산 경제의 독특한 형태로서의 유목
3. 유목의 기원
4. 유목민과 외부세계와의 관계의 사회적 전제조건들
5. 외부세계에 대한 유목민의 적응양식
6. 유목민과 국가
7. 외부세계와 유목민
바로바로의 중얼중얼
인류학자가 역사학이라는 학문의 연구방법을 빌려서 만든 인류학책이다. 많은 부분에서 사료의 인용과 적용의 흔적이 보이지만 그 기본적인 개념은 인류학에 기인하였다. 또한 이 책은 다양한 역대 유목에 대한 저작들을 망라하고 그 주요 논점들을 설명 비교 해 주어서 유목에 대한 입문서로는 최고라고 평가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에반스 프릿차드가 말했다 싶이. "결국 인류학은 역사학이 되느냐 아니면 무가 되느냐는 선택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명언이 새삼 생각이 난다. 인류학은 종합적인 학문이라고 스스로 자랑하지만 그 속에는 중심이 되는 연구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맹점이 숨겨져 있다. 현지 조사라는 것 자체도 억지로 끼워 맞춘 것이다. 그럼 역사학자는 현지 조사를 아예 안한다는 말인가?!
또한 역사학-인류학-민속학-사회학은 각기 너무나 중첩되는 부분들이 많다. 그 뿌리가 과거에 대한 분석를 통한 미래 제시라는 점이 이런 결과를 도출해 내는 듯하다. 이미 이 학문은 서로간의 연구 대상, 연구 방법, 연구 목표등에서 매우 유사한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서로간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서로 모두 흡수하였다. 이제 앞으로 이 학문들이 어떻게 발전하고, 어떻게 스스로의 자리를 찾을 것인가는......나와는 상관없다. ㅋㅋㅋ -_-;;
그리고 이 책의 번역자인 김호동씨는 머랄까...한국 중앙아시아학에서 거의 선두주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앙아시아나 유목사회에 대한 책을 구하고 싶다면 다 필요 없이 김호동이라고만 검색을 하여도 양질의 책들이 있다. 대단한 분+_+;;
책에 밑줄긋기
정주국가가 흔히 과거에 그리고 현재까지도 취하는 또 다른 정책은 국가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유목민에 대해 자발적인(물론 장려적인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것에서부터 강제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다양한 정주화 정책이 이루어 진다. --- p299
유목민에 대한 정주사회의 의존형태
1) 비정규적이고 무절제한 직접약탈
2) 공납 : 공납이란 피정복집단이 자신의 경제적, 사회정치적인 조직을 보존하는 대신(완전한 형태는 아닐지라도), 정복집단에 대하여 생산물의 일부를 포기하거나 다른 종류의 의무를 수행하는, 대외적인 의존과 착취의 형태를 의미
3) 직접적인 징세 : 조공과는 달리 이것은 보다 발전되고 중앙집권적인 형태의 착취
4) 유목사회내에 농업과 수공업경제 부문을 창조하는 방법
5) 토지를 장악하고 농민을 소작민이나 분익소작민으로 만들어 소작료나 기타 형태의 직접적인 착취를 취하는 경우 --- p300 - 305
경제적인 관점에서 유목은 자급자족적이지 못하기 떄문에, 목축이 유목적인 상태로 머무는 한 농경, 도시세계의 정주민들로부터 경제적인 물자를 필요로 한다. 이렇게 볼 때 자신들이 생산해 내지 못하는 산문들을 경제 외적으로 획득하는 방법, 특히 정주집단, 사회, 국가의 복속이 유목민에게는 가장 좋았던 것이다. 정복은 복속을 도출해 낼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유목민 사이에서 "자생적인"(즉 내적인 발전의 결과로서만) 사회적 분화의 발달과 국가의 출현이 제약.
유목이 환경에 대한 경제적인 면에서의 적응만이 아니라 외부세계의 경제, 사회, 정치, 문화적인 조건들에 대한 적극적인 적응이라고 한다면, 복속과 정복은 그중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적응의 한 양식. --- p 311 - 312
유목국가의 출현과 발전의 주요형태와 경향
1) 정주민의 복속과 정복이 기본적으로 공납관계나 기타 원시적인(항상 절제된 것도 아닌) 형태의 집단적 의부, 착취관계를 낳는 경우.
2) 유목민과 농경민 그리고 도시민이 하나의 정치사회적, 심지어 하나의 경제적인 체제 속에 통합.
3) 단일한 사회, 경제, 정치체제를 갖되, 목축민과 농경민간의 분업이 그 기초를 이루는 것이 특징. --- p314 - 316
소련의 중세사가 구레비치의 봉건제 정의
봉건적 구조는 대규모적인 토지소유와 소규모적인 농민 생산간의 갈등, 그리고 이러한 기본적인 갈등에서 연유하는 경제 외적인 강요 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농민들은 자급자족적인 가구를 영위하기 때문에 잉여생산물의 수취는 어떠한 현태로든 힘의 사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생산관계의 체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 봉건적 토지소유의 조건부적인 성격이라든가 그 구조의 위꼐성, 그리고 지배계급의 위계성 등의 봉건제적 특징들이다. 봉건제에 대한 이같은 이해는 중세사의 특수한 문제들에 대한 연구에 확고한 기반을 마련해 줄 것이다. --- p388
역사는 더이상 진실이 아니다. 단지 현재의 해석일 뿐이다. 역사라는 것을 공부하면 공부 할수록 마치 "오언절구"와 같이 일정한 규격속에서 풀어나가는 이야기 같은 느낌이 든다. 과거는 완전하지 못하고, 완전해 질 수도 없다. 마치 지금의 우리 현재도 완전히 구현하고 표현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로웬덜은 완벽한 역사를 포기하라고 말한다. 그런것은 환상이며 오만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되도록 완벽한 역사를 위해서 노력하라는 어정쩡한 결론을 제시한다. 신이 죽고, 더이상 절대적인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 우리의 시대에 영원히 닿지 않을 지평선을 향해서 나아가나는 것이 옮은 것일까?
또한 일반인이 역사를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게 됨으로서, 역사에 대한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인 존재가치를 너무나 귀중하게 생각하는 로웬덜 자신도 말했던 역사학의 치명적인 단점을 어떻게 처리해야 되야 된다는 말인가? 역사가 역사 이상의 것이 되었을 때, 민중을 선동하는 도구가 될 뿐인데 말이다.
어마어마하게 두꺼워서 접근을 금지하고 있는 듯한 책. 그러나 역사학도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또한 역사에 관심이 있는 우리의 애국적인 국민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환단고기를 즐겨 보는 것을 말릴 생각은 없으나, 역사학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과 이론을 이 책을 통해서 이해하고 다시 한번 환단고기를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런데 진실이라는것은 있긴 있는건가?
책에 밑줄 긋기
이 새로운 과거는 비교를 통해 교훈을 제공하던 역할을 점차 그만두게 되었지만, 현재를 정당화하고 찬양하는 유산. --- p14
과거는 끊임없이 확장하고 있는 현재에 삼켜져 없어진다. --- p15
인식의 친숙함, 신념과 행동의 재확인, 사례가 제공하는 지침, 개인적-공동체적 정체성 인식, 현재 경험의 통시적 풍요로움, 지금 당장의 속도와 압박으로부터 잠시 쉬거나 벗어남, 이것들은 과거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익들.
즉 과거는 끝났고 그렇게 때문에 현재와는 달리 요약이나 요점 정리가 가능하다고 보는 사실.
유해하거나 상처를 덧나게 할 역사는 잊어버리거나 삭제해버리고 싶은 충동 --- p22
과거에 접근하는 방식들로서 기억, 역사, 유물.
기억이란 속성상 개인적.
공유된 자료와 결론이 공적인 정밀조사를 거칠 수 밖에 없는 역사.
모든 역사는 기억에 의존. --- p27
역사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현재의 견해에 의존.
기억과 역사는 둘다 물질적 잔존물로부터 중요한 것을 추론해내고 강조점을 얻는다 --- p28
과거란 그때 일어났던 그대로가 아니라 일련의 지속적인 구성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경직된 전설처럼 웃자란 관념이나 시대착오적인 행동을 포기하게 되고, 그리고 그러한 전설을 다시 만드는 행위가 불가피할 뿐 아니라 유익하기도 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될 것 --- p30
과거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변경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불안을 야기한다. 조작에 노출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된 과거는 가정된 역사의 진실성을 손상시킬 뿐 아니라 망가지기 쉬운 현재를 함축하고 위태로운 미래의 전조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고색창연한 문서들이 상습적으로 위조된 것이며, 오래된 그림들이 모방된 것이고, 유물들이 날조된 것이고, 고대의 건물들은 현대화되고 새로운 건물들이 구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둘러싼 모든 것의 정체성은 의심스러워진다. 우리가 유산과 연속성을 위해 의존하고 있는 과거가 완전한 가짜는 아닐지라도, 원본과 차우의 사고와 행위에 의해 확대 되고 변경된 잔재들의 복합물임이 판명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각에 대한 신념을 상실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과거를 왜 그리고 어떻게 변화시키는 지를 아는 것은 예전의 인식을 구속하던 신화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데 이바지한다. 그러한 탈신비화를 달성하기 위해 정신분석학은 우리에게 개인의 과거를 재조사 하도록 - 그래서 재구성하도록 - 고무한다. 종종 강박관념적 행위는 너무 커버린 과거에 매몰된 앞선 시기의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오래 숨겨온 감정이나 사건을 소생시키는 것은 과거에 대한 의존을 떨쳐내는 데 이바지하고 자유롭게 선택된 미래에 이르게 한다. 잘못 해석된 생활사에 사로 잡히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현재의 용어로 일관되고 믿을 수 있는 생활사를 재형성한다. 그러나 오늘의 상황이 우리가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재구성할지를 경정한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각각의 새로운 생활사가 더욱 더 수정될 것임을 알게 된다. 우리의 새로운 과거는 예전의 것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것이 아니다. --- p856 - 857
말을 시작하기 전에, 전 지금 중국땅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선후가 반대로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현재와 미래를 논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역사학이 사회학의 닮은 꼴이기 보다는 사회학이 역사학의 닮은 꼴이라고 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이론적인 부분을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문사철
이른바 "문사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각각 문학, 사학, 철학을 나타내며, 위의 3가지 학문의 문과의 기본이며 기초라는 것을 강조할 때 자주 쓰이는 말입니다.
문학이라는 것은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언어 자체를 연구하는 것이며, 언어자체가 없으면 어떠한 학문도 존재할 수 없음으로 기초중에 기초이겠군요. 어떠한 학문도 발전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시간이 경과가 되죠. 그럼 시간의 경과와 함께, 현재가 과거가 되며, 모든 과거는 역사학의 대상입니다. 역사학이 없으면 학문은 발생한 상태로 고정이 되겠지요. 그리고 모든 인간들의 생각을 연구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우리는 철학이 없이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철학이 없으면 단지 생존을 할 뿐,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현재 역사학이 문과에 있는 이유도 위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역사학이라는 것은 문과의 기.초.입니다. 그런데 응용문과라고 할 수 있는 사회과학의 범주에 넣는 다는 것 자체가 어불 성설입니다. 다시 말해서 분류체계가 어지러워집니다.
님이 제시하신 국어국문학이나 중어중문학과 같이 말씀하시면 마치 역사와 국어 국문학이 따로 놀고 있는 듯 하지만, 한국어를 연구해야 한국 근대사를 알 수 있고, 중어중문학을 해야 중국 역사를 연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중국 역사를 알아야 중어중문학을 제대로 연구할 수 있습니다. 또 철학이 여기에 추가됩니다. 다시 말해서 서로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사회학이 없어도 중어중문학을 연구하는데 문제가 없습니다. 물론 사회학에서 방법론을 빌려올 수 있지만 그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2. 사회학은 없다.
대학교에 들어와서, 사회학-인류학-민속학-문화지리학등의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엄청난 정체성의 혼란이 있었습니다. 대체 역사학과 위의 사회과학이라고 불리는 학문간의 차이는 대체 무엇인가?! 과연 차이가 존재하는 것인가?!
그 같은 고민들 대충 2년넘게 했군요. 그러던 중 폴벤느의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동안 고민하던 많은 문제가 풀려나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사회학에 대한 이야기만 하겠습니다.
1. 사회학에는 대상이 없다.
모든 과학은 대상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회학의 대상은 무엇인가요? 사회학자들은 사회에 대한 모든 것들이 그 대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회나 역사의 한 단면을 하나의 유기체처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나름대로의 특수한 설명을 요구하는 무수한 사건들이 존재하는데 그 요소들의 집합의 설명을 과학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표면 위에서 임의의 지역내에 매순간 일어나는 모든 장르의 엄청나게 많은 물리-화학적 사실들의 총체를 설명할 수 있는 과학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2. 사회학은 여러 학문의 집대성?! 혹은 쓰래기 처리장...
사회학에서는 온갖 학문을 이용합니다. 경제, 역사, 문학, 심리학등등.. 그 방법론의 확장에는 한표를 던져주고 싶지만, 사회학만의 연구 방법은 무엇인가요? 이런 온갖 학문의 방법을 이용하는 방법이라는 것은 말장난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 방식은 학문으로서의 정체성이 없다는 말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이 정도로 하죠. 괜히 사회학과 친구한테 뭇매를 맞겠습니다.-0-;;
3. 중국에서는 역사학은 사회과학입니다.
중국 역사학자들은 역사학을 사회과학이라고 말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공산주의이고,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르크스를 사회학에서는 사회학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마르크스는 경제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등등.. 수많은 명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죠. 또한 마르크스는 역사학에 대해서 그 당시 과학적인 요소들을 도입하려고 했으며, 그 영향으로 지금 중국에서는 역사학이 사회과학이라고 부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문과계열로 포함되어있습니다. 사회과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지 과학적인 요소를 많이 도입한다는 취지로 말한 것일뿐, 기본 속성은 문과계열로 만들어 놓았죠.
결론적으로 역사학은 문과계열임이 너무나 당연하며, 앞으로도 그렇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문과계열이니, 응용문과라느니, 사회과학이라니, 그런 구분자체가 웃기다고 생각합니다. 시스템때문에 이런 구분이 생겼을 뿐. 그것에 얾매이는 것은 별로 좋다고 생각되지는 않는군요.
사학개론이라는 과목의 유명한 싸이코선생님이 이상야리꾸리한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주제도 자유. 쓰는 방법도 자유. 그렇다고 레포트도 아니고, 숙제 마감 기간까지 매 번 말이 변하는지라, 중국애들도 과연 이것을 어찌 해야되냐고 서로 물어보게 만들어 버리는 숙제입니다.
한루님이 낙랑에 대해서 자료를 찾으시길래, 저도 어차피 주제는 잡아야되니까 일단 도서관 가서 쓸어모아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수업은 저녁 9시까지 있었는지라 지금 피곤해서 쓰러지고 싶군요.
일단 마주잡이로 관련 자료 다 복사해서 뭉그러진 낙랑관련 논문들만 올리겠습니다. 낙랑만을 연구한 연구논문은 거의 없군요. 그냥 낙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논문을 일단 다 끌어모아버렸습니다. 일단 자고 일어나서 정리해야겠군요.(정말 쓰러질 것 같습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9시까지 쉬지 않는 삽질...ㅠㅠ)
마음속으로 하고 있는 생각이 어차피 자유주제라고 했겠다!!
그냥 막가파로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였던가? 그것을 주제로 만들어 버릴까 생각중입니다. 뭐... 중국에서는 이런 이야기자체가 없으니까 이런 설화를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도 있을거라는 환상에 빠져 있습니다. 일단 자자...ㅠㅠ
일어나서 다시 목록을 보니까...아무거나 마구잡이로 긁어오면 안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소용돌이 친다.ㅠㅠ
이우혁씨의 소설을 즐겨보았고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좋아하는 작가들 중에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우혁씨의 글 중에서 간과하고 있는 몇가지를 적어볼까 합니다. 글의 내용을 일단 읽고 제 글을 보는 것이 좋을듯 합니다.
중국은 어떻게 생겨먹었는가.. 퇴마록저자 씀
중국은 그 자체의 역사가 대단히 복잡하고 민족이 많이 섞여 있습니다. 거기에 '모화사상'이라는 중화민족 제일주의를 역사적으로 추구해 왔으며 필요하면 역사왜곡도 서슴치 않는 전통(공자의 '춘추필법')이 있습니다. 그때문에 중국의 역사관을 논리적, 물증적으로만 대항하려 한다면 대번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중국은 원래 6500개 이상의 민족 혹은 부족이 융합되어 만들어진 국가입니다. 더우기 중국사 중에서 5호 16국,금,요,원,청 등은 중국 원래 민족인 한(漢)족이 정복당해 만들어진 국가들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식민지배를 받았다기 보다는 아예 멸망하여 흡수 되었으나 많은 인구와 '문화적' 흡수를 통해 도리어 타민족을 흡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요는 한족국가인 송이 고전 끝에 멸망시킬 수 있었고, 금은 원에 의해 망했으며 원은 지나치게 넓게 확장된 영토 때문에 역시 한족 국가인 명에 의해 물러 났습니다. 허나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청'입니다. 금의 후예이자 여진족에 의해 세워진 청은 현재 중국지도가 되어 있는 영토의 판도를 최대로 넓힌 왕조입니다. 중국 한족은 북방을 점령 경략해본 역사가 없습니다. 번번히 참패만 했을 뿐입니다. 가령 한고조가 북방 선우족에게 패하여 공주를 볼모로 보냈다거나 명 조 토목보의 변 (오이랏트 족과 싸움에 명 황제가 친정했다가 50만이 전멸당하고 황제가 포로로 잡힘) 등 이었고 현재의 중국영토를 만들어준 것은 바로 청, 만주족의 만주팔기군이었습니다. 팔기군은 최초로 몽골의 본토를 점령했고 신강, 청해 등의 서북 영역을 개척했으며 원래 만주족이었으므로 만주 땅을 최초로 중국 영토로 편입시켰습니다. 즉 현재의 중국은 오랑캐라 멸시하던 만주족에 의한 어부지리로 지금의 넓은 땅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의 넓은 땅 중에서 중국인들이 원래 지녔던 땅은 지금 영토의 1/3에 불과했고 그 나머지는 대부분 이민족에 의해 얻어진 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더구나 한족은 소수민족 탄압에 가장 앞장선 나라입니다. 중국 문화혁명이 일어난 때부터 30년 만에 소수민족 3000족이 전멸했고 독자적인 언어 2000개가 사멸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소수민족 융화책을 쓰지만, 모조리 한족에 의한 흡수론을 주장할 뿐입니다. (특히 50년대 전혀 무력이 없는 티벳을 침공하여 강제 점령했지요. 그 때문에 달라이라마가 해외를 떠돌며 아직도 호소하는 겁니다.)
중국의 역사관은 이런 기조 하에서 파악해야 합니다. 중국은 현재 너무 넓고, 너무 많은 소수민족들이 섞여 삽니다. 이들이 만약 분열된 러시아에 자극받아 민족주의를 표방하거나 독립의 목소리를 낼 경우, 중국은 조각조각 찢어져 버리게 됩니다. 이를 위해 중국은 '우리에게 유리하면 역사를 고친다'는 춘추필법적인 사고를 받아들여 여러 민족을 묶어 생각할 수 있는 역사관이나 가치관을 만들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입니다. 우선 고국가 개념인데, 간단히 말해 중국의 사관은 한마디로 유래가 없는 엉터리입니다. '현재의 중국 땅에 있었던 나라는 전부 중국이다' 가 그들의 개념입니다. 그들의 근거인즉슨, '중국은 다수 민족이 섞여 혼화된 나라다. 그러므로 고대부터 어떤 부족이 어느땅에 살아왔다고 해도, 현재는 우리 중국에 섞여 있다. 그러므로 그곳에 전에 살던 사람도 중국인이라 볼 수 있고, 그 나라는 중국의 복속국이었다 볼 수 있다' 입니다.
한마디로 해괴망칙하죠? 그러나 중국 학자들은 이것을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입니다. 논리적 설득은 거의 통하지 않습니다. 아예 개념을 굳게 그렇게 잡기 때문에 쓸데없는 원론만 이야기하다가 그칠 뿐, 정상적인 논리방식으로는 설득이 불가합니다. 근본 개념을 원천적으로 다르게 잡은 마당이라 다른 대책이 필요한 것이지요. 이런 개념은 현재 이스라엘(2000년 떠돌다 팔레스타인에 와서 살던 사람 몰아내고 자기가 주인 노릇하지요? 그 역겨운 민족과 마찬가지 OO입니다.)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야만적인 사고방식이라 볼 수 밖에 없지요.
현재 문제가 되는 동북공정은 이런 기반하에 있습니다. 중국측에서 골치거리인 민족이 둘 있는데, 하나는 몽골이요, 하나는 우리 한국입니다. 왜냐? 그들의 역사에서 문제가 되었던 금, 요, 원, 청 중에서 흡수안되고 독립상태로 남은 것은 몽골족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차지한 만주(대단히 중요한 땅입니다. 중국이 넓다하지만 만주가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값진 땅입니다.) 를 과거에 경략하고 있던 것은 우리 민족이며 우리 민족은 한족에 흡수되지 않고 지금도 독자적인 국가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는 자칫 그들이 근간으로 삼고 자랑스레 떠벌리는 '아시아 제일, 나아가 세계제일'의 자존심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고, 본의 아니게 중국이 분열되게 만들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중국인, 모두가 중국역사'라고 수많은 종족을 하나로 흡수통합, 유지 하려는데, 목에 걸린 가시처럼 우리나라는 나름대로 살고 있으며, 역사 의식을 지니고 있으니 속이 터지는 것입니다. 그때문에 중국은 아예 고대사를 말살하려 시도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역사말살시도와 조금도 다를바가 없는 짓이며, 이는 솔직히 피만 안흘릴 뿐이지 전쟁 선포나 마찬가지입니다. 아울러 티벳을 무력 점령하고 있는 중국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정당화할 구실도 필요 하겠지요. 그러므로 이 티벳문제까지도 생각에 두며 나아가서는 분열되고 있는 러시아 지방의 점유도 염두에 두고 흉계를 꾸미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기에는 한심한 공염불이나 외우고 있는 우리 사학자들의 수준도 크게 힘을 실어주었을 것입니다. 중국이 힘들고 어렵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우리 역사를 내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고구려를 우리 민족사로 볼 수는 없다'라는 소리나 해대는 인간들을 교수라고 키우고, 그런 사람들이 목에 힘주고 다니는 세상입니다. 중국은 분명 필요성에 의해 동북공정을 내세우는 것이며, 이는 고구텽O「?관련된 것이 아닌, 아시아의 흡수, 통합을 목적으로 한 패권주의적 정책의 일환입니다. 근래 중국관계가 좀 좋아졌다지만 절대 방심해서는 안되며, 이는 거의 선전포고에 해당된다는 인식을 지녀야 합니다. 이대로 방치될 경우 고역사가 넘어가는 것 정도가 아니라 민족의 본질마저 중국 측에 파묻혀, 질식되고, 아시아에는 중국밖에 없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잘난 학자님들이 못한다면 국민선에라도 이런 것들을 인식하고 애쓰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중국의 현 점유지 우선의 그릇된 역사관과 어설픈 '통합주의'는 세계적인 추세에 정면으로 배격되는 것이며, 극히 위험하고 침략적인 사관입니다. 더구나 기본적 개념 자체를 혼돈 시켜 논리적이고 평화로운 진행 자체가 불가능하게 교묘하게 조작된 사관입니다. 학문적인 양심이나 그 기법을 적용하면 공염불만 하다가 결론을 못보게 만드는, 애초부터 조작된 논리적 함정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막기 위해서는 (제잘난 맛에 사시는) 사학자 들의 수준으로는 절대 불가능이라 봅니다. 다행히 많은 움직임이 있는데, 이런 것을 크게 성토하고, 민중의 힘으로 대처하여 국가적 대처를 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보입니다.
부디 이 글을 사방에 널리 알리고, 가능하면 영역이라도 해서 사방에 중국의 검은 속셈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중국을 성토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를 같이 사는 동반자로서 그런 자기만 살겠다는 주의 주장은 제발 좀 걷어치우고 모두가 평화롭게 살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혁 -
2004.08.02
8권 집필을 향해 매진해야겠지만, 오늘 답변도 참 많이 달았고 (80여개를... 내가 무슨 방통이나 법정이라고.. 그러고 보니 그들도 중국사람들... ) 좀 하수상한 기분이 들어 조금 씁니다.
요즘 축구나 동북공정 등으로 인해 그간의 반일, 반미감정 못지 않게 반중감정도 악화되어 가는 것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참, 전에 누군가 제 후배 한 명이 해 준 이야기가 있죠. 그 친구 미국 유학가서 들은 이야기라는데, 어느 미국인친구가 그랬다고 합디다.
"너희 한국 사람들, 참 대단하다. 중국, 미국, 일본 , 러시아 같은 강국들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참 자존심이 세구나. 너희 나라 사람 말고는 다 사람취급도 안하는 듯 하다. 중국인은 떼OO이나 짱깨, 일본인은 왜OO, 미국인은 양키, 양OO, 흑인은 깜둥이. 하나도 제대로 대우받는 민족이 없는 것 같다. 한국인 자존심은 정말 대단하다."
뭐 오래된 이야기라 글자 그대로 옮긴것은 아닐지 모르고, 그 이야기의 당사자 또한 현재 한국으로 돌아와 모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사람이라 틀렸으면 낯부끄럽지만, 좌우간 비슷한 내용임은 분명합니다.
우리 집사람과도 이런 이야기를 간혹 나눕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존심에 대해 제가 말하면, 우리 집사람은 우리나라 전반에 팽배한 '일등주의'에 대해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도 하죠.
할 수 없는 것 같다고요. 워낙이 제일 센 OO들 주변에서 살려면 일등이 아니고서는 아예 살 수 조차 없었을 테니, 자연스럽게 누가 먼저다 할 것없이 다 강해지고, 잘나지려고 애를 쓰는 것이지, 무슨 체제나 그런 문제를 넘어선 것 같다는 말이었습니다. 저도 상당히 공감가는 말 같았죠.
뭐 서두가 길었습니다만, 지난번에 동북공정에 대해 간단한 글을 올린 바 있으니, 제가 아는 중국 이야기를 좀 하렵니다. 좀 편하지만 여러방면으로요.
일단 역사적으로 볼 때 저는 중국은 우리의 잠재적국 제 1호라고 봅니다. 북한이 중간에 끼어 있어서 많이 완충된 듯 하고, 중국이 많이 개방되고 사람들도 오가고 사업도 벌이고 하여 아주 가까와진 것 처럼 생각하는 분들도 많은 듯 한데... 결코 그렇지는 않다고 봅니다.
물론 제가 중국인들에게 무슨 감정이 있거나. 중국인 전체를 매도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뭐 멀리 나가 삼국지의 영웅호걸들이나 경전들을 논할 것은 없고, 간단하게 천안문 사태때의 목숨을 내버리고 외치는 중국 젊은이들의 모습에서만도 저는 그들 전부를 싸잡아 미워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항상 그렇듯, 정치 체제와 그 위에 있는 집단입니다. 특히나 중국은 인구가 많고, 통제하기 어텽O截매?수가 많은 집단입니다. 더구나 그 통제방법이 '무조건 하나'라는 역사적 전통적 강제를 기반하고 있어서,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자본주의화 되고 우리와 다를 것이 거의 없는 나라'라는 것은 실로 무서운 착각이라는 것부터 말씀드리고 싶네요.
더구나 우리나라의 못믿을 정부조차 노골적인 친중노선을 (그 지긋지긋한.. 얼마나 국민들이 더 책임져야 하는지 모르지만 끝없이 되풀이 되는)말실수로 한 이후부터는 아예 중국이 우리를 아래로 보고 집단적 광기에 휘몰려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며 공격해오는 마당입니다.
원래 상대를 알고 우리를 알아야 백전불패이며 (이것도 중국에서 배운거긴 하네요. 손자병볍이니) 상대를 이기려면 상대의 약점을 찔러야 한다고 하죠.
제가 이번 기회에 많은 분들이 잘 알지 못하는 중국의 약점에 대해 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남의 꼬투리를 잡는 건 좋은 일이 아니지만, 이미 최소한도의 싸움이 시작된 마당에 가만히 있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지요.
1) 중국의 동북공정 이야기는 지난번에 간략히 드렸습니다. 이 동북공정이란 것에서 고구려 역사와 치우등의 우리 역사를 자기것으로 만들기가 파생되었으며, 그 근본을 깨닫지 못하고 다만 역사적으로나 문헌적으로만 접근하면 낭패를 볼 것이라는 이유도 간략히 적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들은 아직 분명 '집단주의 전제정치를 펴는 공산국가'입니다. 우리는 뭔가 하나 목적을 지니고 일을 하려해도 여론이나 국회나 기타 등등 논의가 많고 그 정당성등을 거치는 최소한의 절차나마 거치는 형식인데 반해 중국은 그렇지 앟습니다. 우리나라보다 더 큰 각 성마다 소위 인민들이 말하는 '지도자'들이 잇는데, 모든 것은 그 '지도자들'에 의해 정해집니다. 의회나 논의나 청문회나 하는 것은 다 정해진 이후에나 열리는 것이지, 그 지도자들간의 밀담에 의해 중국은 흘러가고, 또 반대여론이 용납되지 않고 한 번 정해지면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 몰아붙여지는 것입니다.
이번 축구에서 중국관중들이 노골적으로 한국의 욕을 하며 적의를 취하는 것, 많은 분들이 '중국OO들이 왜 그래? OOOO들' 이라 생각하고 말 겁니다. 허나 아닙니다. 최소한 제가 아는 바로, 중국 사람들은 그렇게 다른 나라에 대해 적의도 많지않고, 그런 투쟁심을 무조건 불태울만큼 악하지도 않습니다. 무언가 중국 내부에 전반적인 기운이 감도는 것을 보여주는 일례입니다.
아까 말했습니다. 중국은 지도자에 의해 결정된 것이 무조건 내려가 전 인민이 하나처럼 움직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아직까지 전제주의적인 국가라고요. '새롭게 자본주의로 발전해나가는 민주화의 길을 걷는 국가' 라고 믿는 분들은 망상부터 깨십시오. 그 이유는 뒤에 구체적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좌우간 중국 국민들이 그렇게 일사불란, 찍어낸 듯 한국에 대한 반감을 보이는 것은 국민들 개개인의 생각으로만 그리 되기에는 (죄송하지만) 아직 중국의 국민수준은 깨이지 못했습니다. 북경, 상해, 심양 등을 가보니 중국, 엄청나게 발전하여 한국 저리가라라고요? 중국 여행 하는 대부분의 분들은 그런 대도시만 돌고 오시죠. 조금만 지방으로 가 볼까요?
제가 글 때문에 가야만 했던 탁록이란 곳, 북경에서 1시간 반 거리에 있는, 중국 입장에서 보면 아주 가까이 있는 곳입니다. 북경에서 1시간 반 가면 되는 이 곳에는 차 보다 나귀가 훨씬 많고, 나귀 똥을 집안에서 길에 뿌렸다가 (사람이 지나가건 말건) 나중에 걷어 비료로 씁니다. 탁록시는 인구 30만이 넘고 헌원 호텔(헌원대복 이라 씁니다.)같은 제법 큰 호텔도 있는데, 6시가 되면 인적이 없어집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뭐랄까...'해지면 잔다'는 생각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놀이나 유흥이나 문화향유나 오락이나 하는 것은 뭐 참는 것이 아니라 아예 '머릿속에 없습니다.' 6시가 넘으면 호텔말고는 인구 30만이 넘는(강릉시의 3배 됩니다.) 도시 네거리에서 밥을 사먹을 곳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여행을 가면 알려지지 않은 뒷골목 이나 시장통 같은 곳을 어슬렁거리며 다니기에 이것은 참 충격적이었습니다. 저는 한자는 그냥 조금 압니다만 중국의 간자는 잘 모르죠. 허나 며칠 보다보니 저절로 눈에 들어와서 가이드(당원입니다.--; 외국인 접촉자는 다 다원이거나 당원에 준해야 합니다.)도 몰랐겠지만 대부분의 글들은 다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페인트로 벽에 써놓은 선전문구가 알고보니 '초등교육을 시키는 것은 국민의 의무이니 안지키면 벌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뭐 낙후한 면을 들어 욕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만난 대도시에서 살지 않는 보통 중국인들은, 최소한의 외부에 대한 소식과 자극을 모두 '당'이나 정해진 매체를 통해서만 흡수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아주 작은 일례입니다만. 치우천왕의 묘로 추정되는 곳의 묘지기 할아버지도 제가 담배 한대를 권하자 '중국담배를 피우겠다'며 사양하더군요. 뭐 애국심이라면 애국심일 수도 있지만, 중국사람들은 그만큼 배타적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서양인 같지는 않지만 쓰는 말이 다르고 외국인이 드러남을 보는 순간, 그들이 보이는 것은 신기함이나 뭐 그런 것이 아니라 경게심과 자기 마음 감추기...입니다. 솔직한 심정입니다.
닳고 닳은 도시사람들보다 시골로 갈수록 이런 것을 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시골로 갈수록 순박하고 인간본연의 태가 남는 그런 모습들이 많아져야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 아닐까요? 인종차별이 심하다는 미국에서도 동부 시골로 가면 사람들이 동양인을 신기해하며 와서 구경을 할 지언정(실화입니다. 설마 미국이? 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아주 즐거워하고 무엇이든 그 새로보는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중국은 왜 정반대일까요?
중국이 강한 전제로 아직 뭉쳐 있다는 작은 증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중국은 전에 동북공정 이야기를 쓰면서 적은 대로, 하나의 중국을 강하게 원하고 또 힘있는 중국을 원합니다. 다만 그 방법이 적대적이고 페쇄적인 방법을 취하고 있으며 이는 그들이 오래전부터 지녀온 모화사상 이나 중화제일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뭐 자기가 잘났다는데는 우리나라도 못지 않지 않으냐?' 하실 분들.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그들은 우리이웃입니다. 이웃이 친하게 지내야 좋은 것은 알지만, 이웃이 뭔가 좋지 않은 꿍꿍이를 가지고 잇으면 가장 겁나기도 합니다. 나는 이웃을 나와 똑같이 생각하는데, 이웃이 나를 '자기보다 아래. 예전에 우리 종살이한 OO' 이라 생각하고 나온다면, 그냥 좋은게 좋으니 웃으며 내킨김에 종살이 해줘야 합니까?
그들이 중화제일 사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것만이 크게 잡아서 52개로 분할되어 있는 중국의 많은 민족들을 통합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민족을 통합시켜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거대한 권력유지'에 다르지 않습니다. 중국이 현재 나은 것은 냉엄한 현재의 정세로 볼 때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크고, 가장 많기 때문에 중국의 끝발과 힘이 먹혀드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중국은 거대함을 유지해야만 하고, 혹여나 구 소련처럼 갈기갈기 분열되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온갖 치졸한 짓이나 탄압, 심지어는 피를 흘려서라도 막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웃에 대해 악한 감정이나 무조건적인 반감을 가지는 것도 좋지 않겠지만, 멍하니 뜨고 있다가 된서리를 맞는 바보가 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2. 중국이 말하는 하나의 중국은 과연 정말 인가?
중국은 하나의 중국을 추구합니다. 그래야 더 커지고, 힘을 누려서 세계제일의 중국을 이룰 수 있다 여기니까요. 자, 뭐 그렇다고 일단 해둡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생각을 해봅시다. 치우천왕을 넘기고, 고구려사를 넘기고, 간도를 넘기고 뭐 지금 우리와 상관없다 해봅시다.
중국이 우리 땅을 탐낸다면 어쩌겠습니까? 그런 일이 어떻게 있냐고요? 세상 일은 모릅니다. 현재 다른 나라의 영토를 탐내는 일은 상당히 바보같은 짓 혹은 모험적인 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다릅니다. 간단히 대만 문제를 보십시오. 중국이 대만에 대해 얼마나 신경 쓰고 있으며, 그를 합병시키기 위해 자칫하면 전쟁도 불사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를. 그리고 티벳을 보십시오.
직접 겪은 일화 하나 소개합니다. 천안문 광장 바로 앞에 자금성이 있고, 그 자금성 위 다락같은 곳이 '현 중국 최고의 명소이자 역사적 장소'입니다.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고 현지인들의 말입니다. 그장소를 보기 위해 매일 수백, 수천명이 지방에서부터 몇십시간씩 차를 타고 옵니다. 뭐 으리찬란한 것을 기대하는 분은 실망일지 모릅니다만 그 장소는 다름 아닌. 마오 쩌뚱(모택동)이 중국공산화를 선언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중국 탁록 부근 방문 당시, 중국 전체를 뒤흔들던 드라마가 있었으니 한류 열풍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마오쩌뚱의 '대장정' 이었습니다. 한류? 제가 다니던 지방에서는 콧배기도 보인적 없습니다. 중국 도시 3-4개를 보고 온 사람들이 꼭 중국을 다 보고 중국 전체가 어떻다고들 떠듭니다. 인구로 따지면 2-3%도 안될 것이니 우리나라 예를 들면 무슨 군산이나 이리(음 모욕하고자는 의도는 아닙니다만 인구수가 비슷한 듯 하여 에서 누가 좀 알려졌다고 한국 전체가 떠들썩!!! 하다는 소문 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좌우간 그 장소에 커다란 그림이 하나 있어서, 중국인들이 거의 반은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데, 그것이 무슨 오래된 고서화나 명화가 아니라, 마오쩌뚱과 많은 사람들을 그린 그림입니다. 그 그림은 '현 중국의 상징'이라며 현지인들은 자랑스럽게 말하는데, 그 그림에는 뜻이 잇습니다. 그 그림에서 마오를 제외한 사람은 다 각양각색의 복식을 하고 있는데 그들 숫자는 52명, 중국을 지배하는 민족의 수라고 말합니다. 중국인 관광객들은 자금성의 영화나 골동품을 보러 오는게 아니라, 바로 그 그림을 보러 몰텽O윱?것입니다! 그리고 마오의 바로 뒤(!)에 한복을 입은 여성이 있습니다. 바로 조선족입니다.
'중국내 소수민족 중에서 조선족의 지위와 영향력은 매우 높은 편'이라는 부가설명도 들었습니다. 중국은 인구 문제 때문에 무조건 1가구 1자녀이지만, 조선족등은 특혜를 받아 7년차 이상 터울을 두면 2자녀도 낳을 수 있고, 소수민족을 중국정부는 아낀다는 이야기도 반드시 따라붙습니다.
중국은 정말 소수민족을 아끼고, 중국인과 같이 대하며, 같이 공영하려 할까요?
1900년대 초까지 중국내 소수민족은 2000-4000여개였으며 통용언어만도 2000여개가 넘어서, '인류학의 보고'였습니다. 문화혁명이 끝나가던 1960년대말, 소수민족의 수는 200여개로 줄고 언어는 140개로 줄었습니다. 더구나 소수민족의 숫자는 정확한 연구결과는 없습니다만 1/200정도로 줄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동화가 아니라, '말살' 이었다는 점입니다.
가장 비근한 예로 티벳의 예를 들겠습니다. 중국과 맞닿아 있는 작은 국가의 예를 잘 보여줍니다. 무협지에는 '포달랍궁'으로 나오는 새외 세력..그러나 티벳은 건국 이래 수천년간 단 한번도 외국을 침공한 사례가 없습니다. (무협을 쓰면서 중원을 지킨다고 포달랍궁의 만행이나 학살 장면을 생각없이 쓰시는 분들... 티벳의 라마 분들의 정신적인 도를 한번이라도 접해보시고 그런 허무맹랑한 글을 쓰시길 바랍니다. 티벳인들의 관점에서는 석가모니나 관음보살, 성 요셉이나 막달라 마리아가 중원을 침공하여 학살을 한다는 글이나 진배없을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나라분들이... --; )
중국은 1959년 아무런 경고없이 티벳을 침공했고. 근거(?)라고는 그곳도 중국땅이라는 중화제일 사상 뿐이었습니다. 당시 티벳의 인구는 600만 정도였는데, 그중 140만이 1년 안에 학살 당했습니다. 제가 직접 중국인의 입을 통해 그 때의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너무나 마음 깊이 새겨진 말이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당시 티벳인들은 너무나 평화롭게 살고 남과 다투는 일이 없어서, '분노'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허나 중국군인들에게 동족이 학살당하는 것을 보자, 그들은 그때서야 '분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티벳의 달라이라마가 지금도 유랑하고 잇는 것은 아실 것입니다. 저도 퇴마록에 판첸라마를 등장시켰죠. 그런데 그때는 저도 잘 몰랐던 (죄송합니다) 것이었는데, 판첸라마에 얽힌 이야기를 이후에 조사했습니다. 1995년 판첸라마는 이미 몇년 전에 돌아가셔서, 겐둔 최끼 니마 라는 당시 6살의 아이가 판첸라마로 선택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장제민 정부는 이 아이를 정치범으로 몰아 감금했는데, 이후 이 아이는 사라졌습니다. (분명 살해당했을 것이라 하며, 외국 언론에서 한때 '세계 최연소 정치범'이라 떠들썩했습니다. 그저 한국에 태어난 죄로 그것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리고 장 쩌민이 직접 열성 공상당원(중국에서 당원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계급조건, 출신성분, 고시를 방불케하는 시험까지 봐야 합니다.)을 부모로 둔 아이를 판첸라마로 '임명'했습니다.
판첸라마와 달라이 라마의 존재는 티벳 국민들에게는 예수님이나 석가모니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것이 정치적으로 '임명'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에 중국이 욕심을 낸다면 (그 전조는 충분히 보이지만) 그냥 중국국민으로 살아도 된다고 여기실 분들도 계실지요? 티벳의 예는 바로 역사의교훈입니다. 중국이 우리나라 사람을 더 우대할지는 모르지만, 저는 그런 희박한 확률을 기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 - 남한 은 그렇지 않더라도 붕괴 위기에 잇는 북한에 중국이 욕심을 낼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해외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이런 이때 누가 막을 수 있을까요? 아니, 감히 말이나 한 마디 하겠습니까?
3> 인정하기 싫지만 중국은 두텽O?나라. 공포의 나라다.
중국 여행이 활발하고 노인들도 중국 관광을 막 다니는 이때 무슨 소리냐고 하실 분도 많겠죠. 그러나 이건 사실입니다. 뭐, 천안문 사태때 대학생을 탱크로 밀어버린 일을 보세요. 우리나라 광주사태도 그랬다고 하겠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믿지 못할 분이 게실지 모르지만 중국은 지금도 천안문 사태로 인해 사람들이 납치, 감금, 살해 당하고 있습니다. 저 변두리 농촌에서까지요. 장 쩌민 주석만 봐도 그렇습니다. 뿔테 안경을 낀 신사처럼 보이지만 (개인적 감정은 없습니다만) 영어가 되시는 분, 언론 사이트 찾아 보십시오. 세계 언론의 적 5위 안에 항상 들어왔으며 (외국 언론인 구금, 납치 구타 사례가 1년에 22건 이상- 타 외국 전체를 합한 것보다 많다 합니다.) 인권 탄압자로 역시 세계5위 안에 들어갑니다. 유엔 인권위가 몇차례가 열리려 하자 제 3세계국가를 협박하여 무산시키는 행위도 유명합니다. 이건 제가 장 쩌민 주석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사실만 옮기는 것입니다.
뭐 파룬궁(법륜궁) 사태라고 아실지 모르겟습니다. 법륜궁이란 기공수련을 하는 단체였는데, 어찌보면 사이비종교성도 잇다고 하고, 순수한 수련단체라고도 하고 정확히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파룬궁에 대해 장 쩌민이 가하는 압력과 탄압의 경지는 예술적입니다.
중국 내에서 이미 2000여명이 고문, 투옥, 살해된 것 외에 (밝혀진 것만) 개종(?)하지 않는 부모의 앞에서 유아를 살해하기도 하고, 믿지 못할 것은 외국에 있는 수련자나 운동가들까지도 국적관계없이 살해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나라에 있어도 법륜궁 수련을 하면, 중국 요원이 다가와서 암살하고 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못 믿엇는데, 미국에서도 그러한 협박, 살해, 납치가 끊이지 않아서 한 주정부에 특별법이 제정되기까지 했답니다.)
뭐 법륜궁의 정통성이나 이런 것 문제가 아니라, 중국 정부는 한마디로 중화제일, 모화사상에 근거하여 다른 민족이나 다른 사랑은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집단이라는 뜻이고 증거들입니다.
우리나라 정부도 참 엄청나다고들 말 많지만, 외국에서 암살(무슨 정적도 아니었는데 무차별로)을 하거나 저렇듯 눈에 보이는 탄압을 가할 단계는 지났습니다.
법륜궁 따위 뭐 별거냐... 저도 의아했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중국은 지금 미국은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하나의 중국... 내지는 큰 힘과 권력'을 추구하려고 돌진 중입니다. 만약 돌격이 이루어질 경우, 거기에 1차적으로 깨질 나라... --;;; 가 어디겠습니까?
고구려사나 동북공정을 목표로 삼은 것이 바로 그 1차 증거입니다. 중국 전체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반한 감정이 어디선가 싹터서 중국 전체가 흘러가는 것이 바로 그 2차 징후입니다.
그런데도 정쟁이나 일삼고 모자라서 아우성인 돈 행정수도에 퍼부을 생각이나 하며, 절대 극우 파OO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좌경에 치우친 국정을 주장하며 민생과 국민의 소리를 부르짖었으면서 연금문제나 외국 인권 문제 등에 대해서는 귀닫고 앉아 있는 양반들이 이 일에 관심이나 둘지 모르겠습니다.
그 분들이야 선거에서 이길 수만 있으면, 중국의 주가 되거나 미국의 주가 되거나 상관 없다 여길지도 모르죠.
여기서 마지막 결론입니다. 2002년 이래, 장 쩌민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인터넷입니다.
2002년, 북경 시내 한 피씨방에 불이 난 것을 계기로, 2000여개 업소가 강제 철거되었고, 이후 모든 인터넷 기기에는 아이피 추적장치가 달렸습니다. 완벽한 통제사회로 들어간 것입니다. 구글 검색은 제가 아는한 얼마전까지 금지 사이트로 지정되어 중국내 접속이 봉쇄되어 있었습니다.
중국이 제일 두텽O置求?것은 '분열된 중국'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무서워 해야 하는 것은 '하나로 뭉친 중국'입니다.
중국인들과 싸우고, 적대하지 마세요. 그들에게 잘 말하고, 그들을 일깨우십시오. '당신은 자유롭고 싶지 않나요?' 같은 노골적 대사는 하면 안됩니다. 무슨 이야기를 지어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반한 감정을 보여도 참으며 그들에게 왜 그런 것일까 물으세요. 그리고 우리나라 이야기를 하고, 여러분이 사는 이야기를 하고 (정치가 욕도 해도 됩니다. 욕할 자유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들과 다른 나라로 살지만, 친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세요.
민족적 대결구도야 말로 중국정부의 술책이며, 그들이 바라는 함정입니다.
저는 제 모국과 입장 때문에 중국정부를 싫어한다고 할 수 있지만, 중국인을 싫어하지도 중국인을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비록 중화제일 사상이나 오랑캐 운운하는 선민주의에 갇혀 있지만, 그들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많은 난관을 극복한, 우리와 다름 없는 슬기로운 사람들입니다. 떼OO 이니 짱께, 중꿔 식으로 욕하면서 섣부른 민족적 자만심을 돌출시키는 것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 또한 자유를 원하며, 천안문 사태와 같은 활동을 일으킬 정도로 의식있고 자각 있는 사람들입니다. 중국이 하나로 뭉쳐지려는 행동을 노골적을호 해나간다는 것은 역으로 중국 내의 분열되는 많은 소수의견들을 묵살하기가 그만큼 힘들어진다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정부가 못하고 국가가 못하면 여러분들부터라도 할 수 있습니다. 하다못해 게임에서 만나면 떼OO이라고 PK부터 걸어 때려죽이기보다는, 비록 경계심은 풀지 않더라도 우리부터 그들이 같은 사람이자 인간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의식을 공유해야 합니다.
비록 작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입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나라가 많을 수록, 우리가 미워하는 나라가 많을 수록 생각은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미워해야 하는 것은 분란과 투쟁을 선동하는 나라와 정부이며, 국가이지 그 나라의 개개인은 아닙니다. 그 어느때보다도 힘든 이 때에, 우리 좁쌀같은 민초들에게 남은 무기는 대화-(인터넷)밖에 없습니다.
섣불리 남의 욕이나 하고, 비판이나 하고, 흠집잡기, 편가르기, 장난이나 하고 다니는 사람은 그야말로 쓰레기 중의 쓰레기입니다. 정부가 못하고 답답하여 죽겟다는 분 너무도 많습니다. 뭐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큰 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인터넷을 씁시다. 순위권 놀이나 리플 놀이, 게임 들어가 사람죽이는 데에나 재미들리는 사이버 유*철같은 짓 하지 말고, 좀 더 넓은 세상도 볼 겸,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정보를 나눕시다. 영어공부도 될고, 정 안되면 널린게 번역기 입니다. 남을 설득하거나 무릎꿇리려 하지 말고, 그냥 들어주고, 그냥 편히 이야기합시다. 그게 최고 아닙니까?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이며, 가장 큰 일입니다.
좀 너무 일반적인 뒤끝으로 된 것 같지만... --;; 이만 줄입니다.
- 혁 -
우선 고국가 개념인데, 간단히 말해 중국의 사관은 한마디로 유래가 없는 엉터리입니다. '현재의 중국 땅에 있었던 나라는 전부 중국이다' 가 그들의 개념입니다.그들의 근거인즉슨, '중국은 다수 민족이 섞여 혼화된 나라다. 그러므로 고대부터 어떤 부족이 어느땅에 살아왔다고 해도, 현재는 우리 중국에 섞여 있다. 그러므로 그곳에 전에 살던 사람도 중국인이라 볼 수 있고, 그 나라는 중국의 복속국이었다 볼 수 있다' 입니다.
이우혁님은 이 관념에 대해서 말도 안되는 비논리적 엉터리일뿐이다라고 일축하셨지만, 그것이 그렇게 쉽게 단정을 지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만약 이것을 일방적으로 허황된 개념이라고 말하였다면, 현재 한국이 주장하고 있는, "현재 한국민족을 형성케 한 성분들은 모두 한국사의 주체이며 그들이 활동한 공간은 모두 한국사의 무대, 즉 한국"이라는 개념도 말이 안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개념은 다민족국가론이라는 개념으로서 그것을 인정해주어야합니다. 논리가 아닌 가설이 논리적이다 비논리적이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만큼 바보짓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민족역사론의 한국도 똑같은 이유로 비판받아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논리가 그렇다면 한국의 논리는 "한국은 단일 민족이다. 그러므로 고대부터 어떤 땅에서 어떤 문화를 배경으로 살아왔다고 해도, 현재의 우리 한국에 섞여있다. 그러므로 현재 한국인을 이루는 모든 민족들의 역사는 모두 한국사이다." 이것은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지금 한국이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런 식의 주장입니다. 일단 한국이 단일민족이라는 가설부터가 논리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이 지금 한국인과 같은 공동체성격을 갖기 전의 역사까지 한국사로 가정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고구려를 우리 민족사로 볼 수는 없다'라는 소리나 해대는 인간들을 교수라고 키우고, 그런 사람들이 목에 힘주고 다니는 세상입니다.
그런 교수라는 사람은 김한규교수님인거 같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이우혁씨가 김한규교수님의 논문이나 책을 정말 읽어보았나라는 것입니다. 김한규교수님이 주장하는 것을 신문기사에서 저렇게 왜곡한 것을 가지고 그 모든 논리를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입니다.
김한규교수님의 주요논지를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교수님은 요동지방을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독립시키는 가설아래에서 모든 논지를 설파합니다. 요동 지방이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독립한다는 의미는 "고구려가 우리 민족사로 볼 수 없다"라는 가설과 동시에 "고구려는 또 중국사도 아니다."입니다. 고구려는 다만 "요동사"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에 대한 논증을 제시합니다만, 그 부분은 직접 보시는게 좋을듯 합니다. 김한규교수님의 <한중관계사 1,2> 대우학술총서와 <요동사> 문학과 지성사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김한규교수님의 주장은, 본인도 인정했다싶이, 민족사학이 날립하고 있는 한국에서도 무시당하고, 국립사학이 날뛰는 중국에서도 소외받는 어찌 보면 불우한 이론입니다. 하지만, 전 이 책을 보면서 그 논리에서 상당한 공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의 주장은 학술적으로 반박을 당해야지, 단지 민족감정으로 인하여 박해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은 학자로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을 뿐입니다.
요동을 별개의 역사공동체로 보고 한중관계사를 한국이라는 역사공동체와 중국이라는 역사공동체가 요동이라는 제3의 역사공동체를 환절로 하여 서로 교섭하고 관계한 역사로 규정하는 것은 한중관계사를 보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서술하기 위해 필자 나름의 시각과 관점을 제시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이러한 시각과 관점을 제시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한국과 중국학계의 많은 지식인들을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1994년 가을에 중국 상해에 체류하고 있던 중에, 중화인민공화국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로부터 해남도에서 열리는 중국학국제학술회의에 발표자로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논문 한편의 발표를 준비하였다가, 회의참석 직전에 갑자기 해남도행을 포기했던 경험이 있다. 사전에 우송받은 발표 요약문을 검토한 주최측이 발표를 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해 왔기 때문이다. 그 떄 주최측이 밝힌 요청의 이유는 <그 논문이 회의장에서 발표되면 한중우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김한규교수님의 <한중관계사>의 머리말중...
학문적인 양심이나 그 기법을 적용하면 공염불만 하다가 결론을 못보게 만드는, 애초부터 조작된 논리적 함정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막기 위해서는 (제잘난 맛에 사시는) 사학자 들의 수준으로는 절대 불가능이라 봅니다. 다행히 많은 움직임이 있는데, 이런 것을 크게 성토하고, 민중의 힘으로 대처하여 국가적 대처를 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보입니다.
저는 제 잘난 맛에 사는 사학자를 지망하고 있습니다. 민중의 힘으로 대처하며 국가적으로 대응해야된다는 것에서는 찬성을 하지만, 이우혁님은 제 잘난 맛에 사는 사학자의 학문적 양심을 무시하고 계시는 듯 합니다. 학자에게 학문적 양심이 없다면, 지금 여러분이 욕하고 계시는 동북공정에 참가한 중국측 학자들과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그들의 몇몇 학자들이 학문적 양심을 버린다고, 한국의 학자들이 학문적 양심을 버리고 정치를 위하여 진실을 왜곡해야 되는 것입니까?
학자가 학자이고, 나름대로 사회적으로 존경받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놈의 학문적 양심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현실적으로 당장 밥줄이 끊기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말해야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학자이고, 학문이 학문인 이유입니다.
물론 위에서도 말했지만, 국민적인 지지가 없다면, 상대의 정치적 역사공세인 동북공정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해야될 일은 무엇일까요? 다른 것이 아니라 역사를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이우혁님은 "순위권 놀이나 리플 놀이, 게임 들어가 사람죽이는 데에나 재미들리는 사이버 유*철같은 짓 하지 말고, 좀 더 넓은 세상도 볼 겸,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정보를 나눕시다."라고 하셨지만, 그 정보를 나누기 전에 본인이 어느정도 기본이 되어있어야합니다. 여러분들 매번 고구려이야기가 나오면 화를 내시고, 짱깨짱꺠 라고 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그런 여러분들은 고구려에 관한 논문 단!한편이라도 읽어보셨나요? 전 중국에 있어서 동북공정에 관심이 많고, 중국인들에게 직접 몸으로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매번 화를 내더군요. 그런데 그들이 중국인과 하는 이야기의 한계는 뉴스보도에서 나오는 정도입니다. 사료적 이야기나 논증적 논리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니 단지 감정적이 될 뿐이죠.
알아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논문이라면 괜히 거부감이 드시나요? 사실 논문이라는 것이야 말로 제일 읽기가 쉽습니다. 읽기가 어렵다면 그것은 잘 못 쓴 논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도 보통은 10p정도 밖에 안 합니다. 일단 공부하는것이 어떨까요?
바로의 중얼중얼
이 외에도 저 글에서 몇가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많지만, 이미 너무 길어져서 더 길어졌다가는 돌 날라올거 같습니다.^^::
논문을 따로 구하기 힘드시다면, 제 블로그 왼쪽에 메뉴를 보시면 역사비웃기라고 있습니다. 그곳에 가시면 중국과 한국 논문이 있는데, 한국논문을 읽어보시는게 좋을거 같습니다.(중국논문은 그 요점만 제가 번역해 놓아서 본문의 논증부분은 중국어를 모르면 보시기가 애매해서 말이죠^^:: )
오랜만에 과거의 글을 보았더니....이 당시만 하더라도 저는 어마어마한 민족주의자였군요. 2004년 이후에 6년이 지난 지금 저는 이런 글을 쓰는 사람들을 비웃고 있습니다. 과거의 저를 비웃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의 자신에 대한 반성 차원에서 글은 남겨두겠습니다.
검정색 글은 모두 원문을 번역한 글입니다.
제가 첨가한 글은 파란색으로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공부해야 할거 같습니다. 짱꼴라가 저러면 왜 틀렸는지 설명해 줘야 하니까여.... 또 공부...-_-;;
고구려, 잃어버린 고대문명(사진 4장포함) {음…… 무슨 내용일까? 한국이 고구려를 언제 버렸나? 잃어버려? }
본지기자 송념신 {염신아, 니 메일주소 불러 볼래?}
학자들이 생각하기에 고대동아시아 국가체제와 현제 서방의 개념에 의해 형성된 국가 관계는 완전히 서로다른 개념으로 억지로 끼워맞춘 것이다. 반드시 역사적, 과학적태도에 근거해서 고구려 고대문명을 다루어야 하며, 문제를 현대정치로 끌어들여서는 안된다. {음.. 왜곡의 시작인가? 그래 현대정치로 끌어들이면 안되지… 짱꼴라들 중국이 힘세지고 있다고 그거 믿고 까부는 주제에… 이 문제를 보면서 중국이 대국이 되더라도 미국과 별반 다를게 없을거 같은 생각이 드는 건 왤까?}
7월1일, 중국 소주에서 거행된 제28회 세계유산위원회회의에서 중국이 신청한 고구려성과 왕릉, 고분은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이 유산의 등록성공은 특별한 의의가 있다. 오랫동안 소실되었고, 잘못이해된 옛나라 고구려를 새로운 모습으로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오에 한것이다. {그래, 역사 왜곡하니 자랑스럽니?}
중국동북지역과 한반도북부를 가로지르는 고대 변방정권. {고구려가 왜 변방정권이냐? 그냥 한국도 화교국가라고 해버리지.어? 웃기네..}
오늘날 중국학자들은 보통 생각하기를, 고구려는 서한에서 수당대까지 존재하였던 중국도북지방의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변방민족 정권이다. 동북지방은 일찍부터 고대 중앙정권의 관할구역이었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했을때 상나라의 후예 기자는 사랑들의 데리고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오늘날의 평양지방에 “조선”을 건립하여, 주나라의 한 지방정권이 된다. 학계에서는 보통 “기자조선”이라 칭한다. 서한 초기 위만의 연인(卫满的燕人)이라 함은 전쟁을 피해 이곳으로 와서 중원의 사람을 모아 통치권을 장악한 사람을 말한다. 학계에서는 이를 “위씨조선”이라 한다. 계속적으로 확장정책을 실행함에 기원전108년 위씨조선은 한무제에 통일되었고 서한이 관할지에 낙랑, 진번, 임둔, 현토4군을 설치하고 관리하였다. {웃기지마, 위씨조선이 중국이면 그냥 통일하면 끝이지 왜 사군을 설치하냐고… 사군이라고 해봤자 그냥 4개 작은 부락이었을 뿐이잔아.. 거봐 고조선이 중국이라는 말은 웃기지도 않는다… 참내..}
기원전37년 동북변방민족 부여의 한 왕자는 사람들의 박해로 남쪽에서 현토군의 고구려현(지금 료녕성의 신빈현 동남부)으로 도피한다. 활을 잘 쏴 “주몽”으로 불리었던 왕은 이곳에서 초기의 고구려정권을 건립한다. 사서에는 “고려”라는 약자로 기록된다. <삼국지>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당시 고구려의 호적은 서한 현묘군 고구려현의 관리하에 있었다. 서기3년 고구려의 제2대 왕인 유리왕은 수도를 오늘날 길림성 집안시에있는 “국내성”으로 옮긴다. 이후 400여년간 고구려정권은 이곳을 수도로 삼는다.
고구려는 한의 현토군, 요동군 관할에 놓이고 지속적으로 자신을 신하라 칭하며 조공을 바쳤다. 역사상 이 정권은 흥망성쇠의 과정을 거친다. 왕망시대 흉노정벌에 징집되어 참가함에 도망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고구려왕의 말탄 신하(驺)는 왕망에 의해 유인되어 죽음을 당한다. 동한의 건립후, 고구려의 통치자는 다시 왕으로 책봉되고 계속해어 주위의 변방정권을 통일해 점점 강력해 진다. 위진남북조 후기에 이르러 중원에 전쟁이 발생하고 이게 고구려는 더욱 발전한다. 그때 고구려는 중원의 각왕을 신하라 명하여 조위와 막용선비정권에게 두번의 단멸성 공격을 받는다. 이후 고구려는 정책을 바꾸어 서쪽으로의 확장을 중지하고, 남쪽으로의 경영을 시작하며 한반도의 다른 두정권 백제와 신라를 통제한다. 서기427년 고구려는 다시 평양으로 천도한다.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가 제일 번성했을 때, 그영역이 동서로 이천리였고 남북으로 천리였다. 남쪽으로는 한반도 중부에 이르렀고 북으로는 길림중부, 동으로는 연길 동서로 요하에 이르렀다. {짜증나는 짱꼴라들 자기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저 중원이라는 말투와 아집에 짜증이난다. 그리고 정권이라는 애매한 용어로 고구려를 지칭하다니. 비겁한 자식들. 고구려는 엄연한 국가란 말이다. ㅋㅋㅋ 그리고 짱꼴라들 너희를 신하라 불렀다고? 그럼 너희 역사가 고구려 속국의 역사라는 말이네.}
수당시기에 이르러 중원은 통일되어 가고 할거상태의 고구려를 수복하는 것이 두나라 황제의 공통된 바램이었다. 통일에 대한 요구로 당태종은 수문제와 양제의 여러차례의 실패후 무력으로 고구려를 통일하려 한다. 역사서는 기록하기를 당태종이 전쟁에 나가기전에 “이제 아홉바다가 평정되었고, 모퉁이 하나만 남았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고구려수복을 통일의 최후의 전쟁으로 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기644년부터 24년의 전쟁으로 고구려는 당나라와 한반도 남부의 신라정권의 연합에 의해 멸망하고,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한다. 설인귀를 검교안동도호로 임명하여 군대를 통합하고 지키게 한다. 이때부터 705년동한의 고구려는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다. {수복? 고구려를 수복해? 언제는 너희 나라였냐? 그리고 두나라의 황제? 황제가 둘이면 것두 황제라 부르냐? 그냥 두나라 왕이라고 적어. 그리고 고구려가 중국에 속하면 그냥 통일하면 되지 무슨 도호부를 설치하면서 군대를 주둔 시키고 지키라고 그래. 고구려 힘이 세니까 세력억제시키려고 도호부 설치한거 아니야. 통일의 완성이라고 한것도 고구려가 자꾸 침략하니까 세력억제를 해야 통일 완성이라고 본거구. 아씨 그리고 헛소리가 넘 많아서 다 대답하기도 귀찬네… }
고구려 문화와 중원문화는 가까워서 구별하기 어렵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시려구 준비운동하시나?}
길림성 고고학 연구소의 부가흔(傅佳欣) 연구원은 오랬동안 고구려 고고학연구를 했다. 그가 기자에게 소개하기를 고고학적 각도에서 볼때, 고구려의 문화는 낮은 수준에서 갑자기 발전한 것이라고 했다. 어떤 시기의 귀족무덤 안에서 많은 량의 도자기, 철기가 발견된다. 하지만 동시대 일반 백성의 무덤안에는 석기가 발견된다. 이것은 분명하게 외래문명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구려 고적의 2/3은 중국의 국경 안에 위치하는데 고구려 초기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천도후 문화특징은 더욱 중원화되어 가며 원래의 특징은 줄어든다. 이 모든 현상은 고구려의 문화는 중원문화의 빛 아래서 발전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게 또 헛소리를 하는군. 고구려 문화유적지 왜 개방 안하냐고. 역사왜곡 하기전에 들통나면 곤란하니까? 욕나와도 참자…}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방사지(中国边疆史地) 연구센터의 이대용연구원은 기자에게 말하길, “고구려 문화는 동북아시아 문화중에서 하나의 매우 찬란한 문화입니다. 벽화, 산성, 고분, 모두 대단합니다.” 그가 보기에 고구려와 중원의 각 왕조는 경제 문화적으로 밀접한 왕래를 유지했는데, 이것이 많은 부분에서 찬란한 고구려문화탄생에 영향을 끼쳤다. {인접 국가간의 문화교류는 당연한거 아니야? 일본이 한자쓴다고 중국 속국이라고는 왜 안하니?}
이대용은 예를 들기를, 많은 고구려 무덤중 벽화무덤은 극히 진귀하다. 벽화의 내용으로 보면, 사회생활과 내가지 신(청룡, 백호, 주작, 현무), 장식도안등이 있는데 많은 것들이 중원의 건축물과 무덤에서 자주 나오는 내용이다. 이밖에 고구려벽화는 중원지역보다 발생시기가 조금 늦다. 이는 중원에서 변두리로 전해진 과정이라 하겠다. 그리고 고구려 멸망후, 이지역의 벽화무덤의 수는 줄어든다. {문화유적지 공개해서 공개적으로 연구하고 공식적으로 발표해야지. 자기들끼리 골방에서 일방적으로 그렇다고 하면 그게 믿기냐}
이와 같이 고구려민족과 중원민족의 교류는 빈번했다. 이대용은 이를 전면적교류라고 명했다. 예를 들자면, 고구려와 중앙왕조의 사자왕래는 매우 밀접했고, 쌍방문화교류의 중요한 전달자 중의 하나였다. 예절과 의식제도, 종교, 역법등 분야에서 넓게 교류하였다. 고구려민족은 자기만의 언어가 있었는데 이미 소실되에 찾기 어려우나 그들이 한자로 기록하였기에 오늘날 학자들이 그에대해 깊이 연구를 진행중이다. 고구려정권에는 많은 한인이 존재했다. 이와같이 당왕조안에도 적지않은 고구려인이 요직에 위치하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안서절도사를 담당했던 고선지가 있다. {지금도 한국에 한인 많아. 음… 그렇담 지금 한국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중 일부게…. -_-;; 참자. 욕나온다… 그리고 고구려에서 사용했던 고구려말 말인데 알고시으면 영화 “황산벌”을 보라구. 고구려어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될테니까.}
오랫동안 오해된 역사 {제목이 잘못 됐네. 역사를 왜곡하는 중국이 맞지.}
고구려 멸망후, 대부분의 후예들이 중원으로 옮겨져 중원민족과 융화되었고, 소수의 사람들이 주변 각민족에 융화되어 갔으며, 왕족은 멸망했다. 모든 영역은 당나라에의해 관할되었으며, 훗날 일부를 동북지방정권 발해에게 분할해 주었고, 일부는 한반도 남부 신라에게 분할해 주었다. 이후 점점 중원전통사학의 틀에서 벗어났다. 송대이후, 중원은 고구려역사를 인식함에 혼란이 생겼으며 잘못 이해하게 된다. 청대에 이르러 동북지방은 황실 “용흥의 땅”이라는 것에 의해, 청은 이지역에 “봉금정책”을 실행하고, 소수의 역사가만이 이에대해 고찰, 연구를 진행한다. 1877년에 이르러 고구려왕 고안(염덕이라고도 하고, 호태왕이라고도 칭함)사적이 기록된 “호태왕비”가 발견되어, 천여년간 소실되었던 옛나라가 다시 인식되기 시작한다. {다시 인식되는 건 너희 한족들한테겠지. 혹시 고구려의 발전된 문화가 중국에 퍼졌다는, 중국에 불리한 유적이 발견된거 아니야? 고구려 유적지 한국에 공개하라고!!}
길림성 고고학연구소 연구원 부가흔은 “매우 긴 시간동안 우리가 고구려 역사를 외국사로 본것은 실제로 오해일뿐이다”라고 말했다. 서기918년 고구려 멸망250년 후, 한반도에 “고려”라는 정권이 들어선다. 통치자의 성이 왕씨여서 고구려의 약칭인 고려와 구별하기위해서 학계에서는 “왕씨고려”라고 부른다. 비록 같은 이름을 베껴 사용했지만, 왕씨고려와 고씨고려는 아무런 계승관계도 없다. 왕씨고려는 935년 신라를 대신했고, 뒤날 백제가 멸망하고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을 통일한다. 1392년 대신 이성계가 왕을 폐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으며, 1393년 “조선합영등호주청”을 명에게 청했고, 명은 이성계에게 조선왕을 하사했다. 결국 왕씨 고려가 조선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씨조선 또는 이조라고 부른다. {이씨조선? 이조? 왕씨고려? 왕위하사? 오호~~ 그럴싸한데.}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방사지 연구센터 연구원 이대용은 예를 들어 말하길, 중원지역 역사상 많은 정권들이 “송”이라는 이름으로 출현했었는데, 이 정권간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왕씨고려와 고구려또한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왕씨고려는 신라를 직접적으로 계승한 것이며, 고구려는 당나라에 통일된 것이다. 그러나 사료가 부족하고 오도되는 등의 원인에 의해서, 송대이후 사서는 왕씨고려와 고씨고려를 혼동하고 있으며, <명사(明史)>는 심지어 이성계 책봉이 합리적임을 해석하는데 기자조선, 위씨조선, 한사군, 고구려를 모두 (이씨)조선사에 넣어 버린다. {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해서 한국역사는 모두다 중국사에 포함된다고 해버리지. 그리고 화교의 미국진출로 미국사도 중국사의 일부라고 해버리지 그러냐.}
이대용이 생각하기에, 왕씨고려와 고씨고려는 창립년대가 아주 멀며, 주체민족도 다르며(왕씨고려의 주요민족은 신라, 백제의 “삼한(三韩)”인 일뿐, 고구려인이 아니다) 정권건립자또한 계승관계가 없고 통치지역도 다르다. 이 네가지는 이둘이 서로 계승관계가 없음을 보여준다. {ㅋㅋㅋㅋㅋ. 말한번 잘했다. 그렇게 보면 중국사라는 것은 아예 없네. 몽골에 정복당했다가, 여진에 정복당했다가 고대국가는 우리 동이족이 세운 나라였잖아.}
중국은 큰힘을 쏟아 고구려 유산보호에 노력한다. {공개가 우선이 아닐까?}
광서3년, 금석학을 취미로하는 청나라 관원한명이 우연으로 풀밭에서 “호태왕비”를 발견하여 비문을 해석하는데 열기를 일으킨다. 그러나 1941년까지 고구려역사를 계통연구작품 <동북통사(상편)>(金毓黻)한편만이 나타날 뿐이다. 건국후 중국은 고구려 유적에대한 발굴과 보호를 확대하고 있으며, 1961년 호태왕비등은 전국중점보호문물로 지정된다. {그만 훼손하고 공개해 주세요.}
20세기 80년대 고구려역사에대한 연구가 점점 전개되었다. 2002년 국가문물국은 설계분야와 관계있는 조직을 만들어 일련의 보호규범계획 전문조항을 제작하고, 질서있고 효과있게 세계유산신청을 위한 필요기초를 닦았다. 그후 정부는 3억여원을 들여 환경정리, 문물보호, 발굴정리 업무를 시작했으며, 현대식 건물과 무덤조성에 대량의 기금을 사용하였다. 초기에 11개의 왕릉 유적을 정리하였으며, 2700여건의 문물을 출토하였고, 현재의 박물관도 보수하였다. 작년 기자가 집안을 방문할때 길림성과 통화지역에서 집안시까지 모두 협력하여 고구려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에 힘썼다. 집안시도 이미 여행업을 적극육성하여, 유산등록 성공후, 여행업을 인삼산업에 버금가는 둘째 중심산업으로 키울 계획을 세우고 있다. {유산 등록되었으니까 이제 돈벌어야지.}
방문중 모든 학자들은 반드시 역사적, 과학적태도를 가지고 고구려 고대문명을 보아야 하며, 현대 정치로 문제를 가져와선 안된다고 하였다. 실지로 중화민족과 한민족의 역사는 반드시 강제로 구분하거나 나누어서는 안되고, 그러수도 없다. 북경대학 국제관계학원의 우군교수는 생각하기를 고대 동아시아 국가체제와 현재 서방개념에 의한 국가관계는 서로다른 개념이기때문에 억지로 적용시켜서는 안된다. 고대 조공제도에 의한 관계는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현제 국제법체계의 인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래 억지로 중국역사에 끼워 놓지 말라고.}
세계유산에 등록된 항목 {중국이 등록한 한국의 문화유산 항목}
고구려 도성3채: 오녀산성(요녕헝인), 국내성(길림집안), 완도산성(길림집안)
왕릉12채; 귀족무덤26채; 장군총1호부장무덤; 호태왕비1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