胡新生《乡饮酒礼与食犬风俗 - 《仪礼》酒会用牲制度的地域特征和文化渊源》《文史哲》2009年第5期。

후신셩(胡新生)은 현재 산동대학교 역사문화학원교수로 계시는 나름 유명하신 학자분. 그런데 이런 민속학이나 인류학적인 논문을 쓰실 줄이야…^^:::

내용 요약 : <의례-향음주례>와 관련 사료에서 나오는 개고기를 먹는 연회는 춘추전국시대를 포함한 주나라의 예가 아니며, 산동지역에서 행해졌던 상나라의 예를 이어받은 특수한 예법이다.

1-  향음주례의 처음에만 딱딱한 예법이 있을 뿐, 뒤에서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것은 향음주례가 예법으로 다듬어지기 전의 원형을 나타내준다.

2-  주나라의 6대 희생품은 중요도순으로 말, 소, 양, 돼지, 개, 닭이고, 사계급이 먹었던 것이 개였던 만큼 그리 중요한 취급을 받지는 않았다.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흔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의례에는 개고기를 중요시한다.

3-  춘추시대에 노나라에서만 두 가지 장례풍속이 함께 있으며, 사료적으로 은나라의 후손이 노나라로 흘러들어왔다고 볼 수 있고, 주나라의 보편적인 희생품과는 다르며, 의례가 노나라를 본거지로 하는 공자와 그 제자들이 집필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향례에서 개고기가 예로까지 승격된 것은 노나라 및 인근지역의 특수한 모습이다.


솔직히 전공하고 그리 상관없는데 심심풀이로 읽은 글이라서 특별히 문제를 찾아가면서 읽지 않았다. 위의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지 않은가? 더 자세한 내용을 원하시는 분은 직접 찾아서 보시기를….재미있다^^ (…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역사학도로서의 즐거움은 아닐는지 살짝 고민;;)



  1. hojai 2009.10.02 23:59

    혹시 상나라-제나라/노나라 와 우리나라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 지요. 제가 산동을 살짝 다녀와본 느낌으로는 제나라의 동이족은 우리나라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이 되는데요. 이런 점에 대한 글이 많지는 않은 것 같더군요. 아닌가요? 혹은 너무 자료가 많은 편일까요?

    • Favicon of https://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바로 2009.10.04 04:53 신고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억지로 말을 하면...관계가 있기는 할 것이라고 봅니다. 다만 한국에서 말하는 동이니 머니 하면서 같은 민족으로 놓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한국에는 그런글이 넘쳐흐른답니다^^:::: 자료도 그럭저럭 많다고 해야되려나요...제가 볼때는 억지로 연결시키는 면이 많지만요.)

      저로서는 문화적으로 같은 원류라고 할 수 있지만, 이후의 일은 문화의 전파로 해석해야된다고 봅니다. 나중에 이에 대한 글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2. hojai 2009.10.05 21:00

    국내 재야 사학꼐도 동이족에 대한 얘기는 적지 않았는데, 예를들어 제나라 환공(강태공)을 한국인들이 자신의 선조이자 씨족의 뿌리로 여기는 점도 꽤 인상적인 대목입니다. 전 처음에 그것을 소중화사상으로 폄훼했었는데, 직접 제나라를 구경하고 오니 그것이 아니더군요. 진시황이 가장 나중에 복속했다던지, 제나라의 뿌리가 중국과 꽤 다르다는 것도 그렇고요. 실제 당시 황해와 발해를 중심으로 적잖은 사람 이동이 있었다는게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제나라가 망하고 진시황이 통일 제국을 세운 이후...짧은 공백 뒤에 백제가 한반도에 세워지고, 훗날 산동과 요서 지방에 진출하기도 하는데..이는 이른바 산동과 한반도간의 특수 관계가 아니면 해석되지 않는 대목으로 비쳐집니다.

    특히 산동지방 동이족들이,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짝수가 아닌 홀수를 좋아한다던지, 삼족오 신화나 태양신 신화를 갖고 있는 모습도 흥미롭고, 심지어는 중국인들이 제나라를 무시하고 노나라를 산동지방의 대표국가로 인식하고 있는 점도 제-한반도 연계설에 제 상상력의 나래를 달아주더군요.

    쓰다보니 무슨 환빠 처럼 썼는데...^^; 발해의 요동반도 산동반도 그리고 평양을 품고 있는 해주가 바닷길로 멀지 않다는 점에서 꽤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요령을 중심으로 한 홍산문화도 뜨고 있으니까요. 당시 중국의 중심은 시안 쪽이 아니었나 생각하더군요. 아무쪼록 좋은, 날카로운 글 부탁드립니다.

    • Favicon of https://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바로 2009.10.08 21:50 신고

      흐음....해당 사항은 어느 정도의 문화적 연관성을 증명할 수는 있지만,같은 민족이나 전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증명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보통 알고 있는 것보다 동이족이라는 것이 복잡한것이라서....나중에 한번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3. 선진(先秦) 2009.10.12 16:00

    상나라가 동이족에 의해 건설되었고, 산동, 회하 지역에 많은 동이족이 진출해 살았고, 고대 중국의 여러 영웅들이 동이족이라는 말을 할 때, 중국인들은 이상한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선진 시대의 동이족은 다른 시대의 동이족과는 다르다느니 하도 해괴한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던데, 그 선진이 요 선진이었군요.

    • Favicon of https://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바로 2009.10.12 22:16 신고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님에게는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선진시대의 동이와 그 이후의 동이의 개념이 상당히 다른 것이 사실이고, 굳이 다르지 않다고 가정하더라도 선진시대의 동이 내부의 차이가 얼마 남지 않은 사료에도 보일 정도로 분명히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상나라 동이족설은 중국학계내에서도 많은 수가 긍정하고 있습니다.(물론 동이족이라고 해도 한국에서 말하는 "조상으로서의 동이"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산동 회화 지역에 많은 동이족이 "진출"해 살았다는 것은 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군요. 이 부분은 추후 따로 쉽게 풀어서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 2009.10.13 12:28

      틀린 말은 아니죠,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 마치 몽골의 식민지배 이전의 중국인과 그 이후의 중국인은 다르다는 소리와도 같구요, 마치 중화민족이라는 짝퉁종족 개념을 만들어 놓구는 중화민족 이전의 중국인과 중화민족 이후의 중국인은 다르다고 하는 소리와도 같죠. 그런 맥락의 연장선에서 보아 선진시대 동이 나부랭이는 동이족이 자신들을 식민지배한 진실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중국인의 망상에서 나온 허구일 뿐입니다.

      마치 몽골의 중국 식민지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원나라 역사를 훔치기 위해 쿠빌라이칸 이전의 몽골 제국과 쿠빌라이 칸이 국호를 원나라로 정한 이후의 몽골 제국은 다르다고 하는 헛소리와 일치하는 맥락이죠.

    • Favicon of https://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바로 2009.10.13 17:30 신고

      대체 무슨 말씀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틀린 말입니다. 하다못해서 제 덧글조차 제대로 읽지 않으신듯 하군요.

      중국학계는 상나라 동이설을 일정정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다만 상나라에 대한 사료자체가 많이 부족하기에 단정을 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닙니다. 가능성이 높다고 말할 수 있는 단계입니다. 그러므로 동이족이 자신들을 식민지배를 하였다는 진실을 숨기려고 한다는 말 자체는 헛소리입니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상나라 동이설 자체가 중국학계에서 먼저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숨기려 한다라...-_-;;


      역사관의 차이
      님은 한국의 역사관 그대로 중국의 역사를 분석하기에 님이 볼때에는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중국의 역사과는 한국의 역사관과 다릅니다. 이 부분을 인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역사관에서는 무엇이 맞고 틀린 것이 없습니다. 서로 다를 뿐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님이 거론하신 원나라의 역사문제만 해도, 중국의 역사관이 다민족역사관인 이상 문제가 없습니다. 어찌되었든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을 구성하고 있는 민족중에서는 몽골족이 있으며, 이러한 소수민족들의 역사를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로 인정하는 것은 오히려 논리적인 모순은 없습니다.

      이 모든 문제는 한국인들은 한국사의 단일민족사관 혹은 한민족사관에 세뇌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단일민족이라는 학계에서 이미 끝장난 허구를 가지고 이야기를 구성하다보니 쉽게 모순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실제로 님이 언급하신 동이를 굳이 현대의 민족개념으로 나누면 최소 9개 이상의 다양한 민족들입니다. 서양권에서 그냥 동양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한국, 중국, 북한, 일본, 인도네시아등등 다양한 국가가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중에서 일부의 동이가 한반도에 영향을 주었긴 합니다만, 그것을 전체 동이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서양권 사람들이 동양=중국 혹은 동양=일본이라고만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입니다.


      또한 반대로 중국의 역사관으로 보면 한국의 역사을 살펴보는 문제행위를 하면, 분명한 사실로서 외부에서 들어온 (중국대륙에서 온 사람, 동북쪽에서 온 사람, 일본에서 흘러온 사람, 중앙아시아 평원에서 흘러온 사람등) 사람들이 한국사에 미친 영향을 부정하는 독선적이고 폐쇄적인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역사관에 우열은 없으며 서로 다른 각도로 보는 것입니다. 단지 님이 행한 자신만의 역사관으로 상대방의 역사관을 바라보는 행동이 얼마나 문제가 있는 행동인지를 말씀드리려고 예시를 보여드렸을 뿐입니다.


      어떤 문제를 비판하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지식과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없는 비판은 혼자만의 말로 끝날 뿐입니다.

  4. 카멜레온 같은 중국의 역사관 2009.10.13 23:40

    머, 중국의 역사관이 다르다고 하지만, 그건 중국이 자신들의 역사를 자꾸 왜곡하기 위해 만든 논리가 기존의 정통 역사관과 다르기 때문일 뿐일 뿐인 것 같구요. 뭐 중화민족이라는 짝퉁민족 만들어 남의 민족 역사 훔치려고 하구, 탐원공정 등을 통해 자신들의 역사관을 자기들 정치적인 목적에 맞게 이리저리 고치는걸 보면, 소위 '중국의 역사관'이라는게 중화민족 만큼이나 허상이라는 걸 개념인들이라면 충분히 비추어 알 수 있죠.

    그리고 제가 중국이 무얼 숨기려고 한다고 식의 언급을 했던 기억이 없구요, 단지 자신들이 당한 역사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들을 당하게 만든 주체의 역사를 훔치려고 한다고 한 기억은 있네요.

    • Favicon of https://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바로 2009.10.14 00:15 신고

      님의 말을 그대로 한국 역사관에 도입해보겠습니다.

      한국의 역사관이 다르다고 하지만, 그건 한국이 자신들의 역사를 자꾸 왜곡하기 위해 만든 논리가 기존의 정통 역사관과 다르기 때문일 뿐일듯 하군요. 뭐 한민족이라는 짝퉁민족을 만들어 남의 민족 역사 훔치려고 하고, 동북공정에 대항한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역사관을 자기들의 정치적인 목적에 맞게 이리저리 고치는 걸 보면, 소위 "한국의 역사관"이라는게 한민족 만큼이나 허상일는 걸 개념인들이라면 충분히 비추어 알 수 있죠.

      중화민족이 허구라면, 한민족은 허구가 아닐까라는 역지사지의 정신을 발휘한 사고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전 중화민족도 허구고 한민족도 허구라고 봅니다. 또한 한국은 과연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이리저리 고치는 것이 없을까라고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아야됩니다.

      그런것을 다 떠나서 님의 말 그대로 제가 반박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역사관을 서로 건드릴 수는 없다는 말과 일맥 상통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르고 그것을 가지고 싸우는 것 자체는 기본적인 학문의 규칙도 지키지 못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물론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맞고 틀리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해석에서는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면 맞고 틀리고가 아닌, 같거나 다르고 입니다.


      그리고 위에서도 분명히 말했지요? 중국의 주류역사학계에서도 은나라의 지배민족이 동이라고 추측하고 있으며, 한국학계보다 몇 십년은 빨리 나온 이야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어쩐다라는 말은 설득력이 약하군요. 그리고 당하고 말고라고 판단을 하시는데, 교류에는 적대적인 관계만(보통 동화)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융화라는 요즘말로는 WIN-WIN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5. 중국단오절과 강릉단오제 2009.10.14 07:46

    문제는 어떤가요 한쪽은 중국의 것을 한국이 등록했다. 한국쪽에서는 한국 고유의 단오제와는 다르다. 제가 알기로는 중국의 단오절도 이번에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두 가지를 모두 인정한다는 것은 중국의 괜한 오해라고 생각해도 되는 것인지 그와 더불어 조선족의 전통무용도 같이 등록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조선족의 전통무용은 한국의 전통무용 분명 겹치는 바가 있을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점점 늘어나는 중국계 한국인,다른 아시아계 한국인의 문화유산등록은 어떻게 될것인가에 대해 궁금합니다. 역사학도로서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 Favicon of https://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바로 2009.10.14 08:10 신고

      단오제에 대한 글도 이미 과거에 구체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가장 간단하게 말해서 단오제와 단오절은 서로 다른 개념입니다. 이 둘을 등록하는 것은 결코 모순된 것이 아닙니다. 고로 서로 충돌할 것도 아니고, 각자의 특색이 있는 것에 문제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과거 중국에서 단오제로 문제가 있었던 것은 번역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단오제를 단오절로 본 것이지요. 번역자가 제대로 이해도 못한 것이지요-_-;;

      강릉 단오제는 중국의 단오절이 한반도로 유입해서 강릉에 정착하여서 강릉 현지의 민속문화와 융합하여서 만들어진 독특한 일련의 행사를 지칭합니다. 이것과 중국에서 말하는 단오절이 충돌할 일은 없다고 보는군요. 단오절은 어디까지나 동양권의 절기개념이니까 말입니다.


      또 다른 문제가 고구려 고분군등록입니다. 북한과 중국이 공동등재를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북한과 중국에 고분들이 남아 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은 과거의 역사를 현재의 것으로 해서 누구것이다라고 말하기 힘들다는 예시기이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을 떠나서 핵심은 위에서 등록한 문화유산이라고 말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세계유산이며, 세계인들이 같이 보호하고 지켜나가야될 유산이라는 뜻입니다. 단일민족 역사관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일이며, 다민족 역사관에서나 긍정받을 수 있는 이념입니다. 그리고 전 그 이념을 긍정합니다.

      그래서 한국이 세계문화유산에 몇 개를 등록했다고 하면, 그 문화유산 자체야 세계인들이 같이 유지 보호해야될 것이고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니 특별히 자긍심을 느끼지 않습니다. 제가 자긍심을 느끼는 부분은 그렇게 잘 유지 보호해온 한국의 문화유산 보호 시스템인 것입니다.

  6. 질문이 있습니다. 2009.10.14 07:48

    중국이 다민족 역사관이 이기때문에 원나라 역사가 중국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중국에도 몽골소수 민족이 있기때문에 원나라를 계승한) 그럼 중국에는 우리와 같은 민족인 조선족이 있는데 최소한 해방되기전(조선족이 한반도를 떠나기전의 역사)의 역사도 중국 역사에 포함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도 될까요. 석사학위 준비중이시니 아시는 바가 많을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한국에도 소수민족인 귀화한 중국계 한국인들이 있습니다.(결혼이민과 화교귀화자로 인해 수 만명에 달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다 민족역사관을 가지게 되면 중국의 역사를 공유할 수 있는건가요)
    청나라와 원나라(몽골이라는 계승한 나라가 있는)는 다르다고 생각이 되어서 질문드립니다.
    예전 중국 네티즌들이 원나라의 역사가 중국역사라는 말을 듣고 말이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을 다수 보았습니다. (젊은층은 아니고 나이가 상당히 많더군요) 한족을 그렇게 핏박햇던 나라가 어떻게 중국의 역사냐고. 한국의 역사교육을 받은 저로서는 오히려 이 의견이 와 닿더군요
    한국의 역사인식과 중국의 역사인식을 모두 겪어 보신 바로바로님이 명쾌하게 설명 좀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국과 중국의 고구려 역사인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다민족역사관이라면 분명 중국의 말이 틀린것이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예전부터 쭉 궁금했었던 겁니다. 블러그님이 생각할때 말도 안되는 글 일 수도 있겠지만 답변 부탁드립니다.
    다민족 역사관 어디까지 확대되어야 되는지 그리고 그 문화를 어디까지 공유할 수 있는지가 궁금하네요 지금 이것이 세계적으로 주류 역사관인가요

    • Favicon of https://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바로 2009.10.14 08:02 신고

      간단한 문제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1) 원나라나 청나라문제
      악비 문제가 바로 원나라가 중국의 역사이냐에서 결정적으로 들어났던 단일민족 역사관과 다민족 역사관의 차이였습니다.

      악비는 남송의 장군으로서 원나라의 대륙진출을 막는 민족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민족 역사관에서는 몽골 역시 중국 역사의 일부분이기에 한족만의 민족의 영웅일뿐인 악비는 민족의 영웅이 아닌 송나라의 명장으로만 불리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몇몇 중국네티즌이 반발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중국정부에 제대로된 판단입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명확하게 나옵니다.

      악비를 계속 민족의 영웅으로 놔두면, 몽골족은 민족의 영웅과 싸운 "적"이 됩니다. 또한 몽골족도 같은 교과서로 교육을 받는데, 그들은 중국의 역사에서 자신들이 "적"이었다고 배우게 됩니다. 그들 스스로의 정체성이 문제가 될 수 있는 조그마하게 보이지만 나름 큰 모순이 되어버립니다. 몽골족과 한족이 서로 싸우라는 말로밖에 안들리는군요.

      그리고 한국에서 바로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좀 극단적이지만, 두 외국인이 한국이 좋아서 한국에 와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는 한국의 문화를 태어나면서부터 "느끼면서" 한국의 교육을 받고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역사관에서는 같은 "민족"이 아니기에 어디까지나 이방인일 뿐입니다. 현실적인 이야기로 다문화가정이 늘어가면서 점차 이러한 이방인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계속 단일민족 역사관을 유지하면 그들은 평생 이방인일뿐입니다. 또 다른 문제로 한국에서는 조선족들이 3D 업종에서 일하는데, 사실 조선족 중에서는 상당한 인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상 한국에 가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조선족을 "이방인"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에서 고소득을 올리며 편히 살 수 있는데 모멸과 멸시를 당하는 한국에 오고 싶을리가 없습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역사관과 현실의 충돌문제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중국 정부의 민족정책이 말만 아름답고, 실질정책에서는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역사관과는 상관 없는 문제이니 패스)


      2) 다민족역사관
      현재 중국이 채택하고 있는 다민족역사관을 도입하면 현재 한국에 있는 화교뿐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중국대륙에서 유입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국사를 전개할 수 있습니다.

      다만 님은 이것을 "우리 역사에 포함시킨다"라는 측면에서만 바라보시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상을 바라보아야된다고 봅니다.

      역사라는 것을 왜 공부하느냐? 라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봅니다. 저희는 역사를 왜 공부할까요? 가장 보편적인 대답은 "과거의 경험을 배워서 미래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라는 것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국사"뿐만이 아니라 중국사 그리고 서양사에서도 다양한 과거의 경험을 배울 수 있고, 배우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민족역사관이 발전하면 우리는 더 이상 "국사"가 아닌 "세계사"를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는 현실정치를 최대한 배재한 이야기이며, 실제로 실현되는 것은 앞으로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파생된 쉬운 생각할 거리가 있을만한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은 분명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왜 링컨의 위대함에서 우리가 교훈을 얻을 수 없으며, 나폴레옹의 위대함에서 교훈을 얻고, 그의 시대적 한계에서 지금 현재의 우리를 반성할 수는 없을까요?

      "우리것"이라면서 지키려고만 하지 않고, 넓게 다 포옹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더 넓게 확장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굳이 내것 니것이라고 해야될 이유는 무엇일까요?


      3) 국사라는 것.
      국사라는 것은 국가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명확하게 말해서 대한민국은 어디까지나, 임시정부를 기준으로는 191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는 1948년부터 시작했습니다. 그 전의 것은 명확하게 말해서 현재 국가의 역사는 아닙니다.

      하지만 정치에서는 역사를 이용해서 우리는 위대한 민족이라고 말을 하면서, 허구적인 민족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이용하여 현재의 국가를 유지하려고 합니다.(중국의 중화민족이든, 한국의 한민족이든 동일합니다.) 한국의 경우 은근히 현재 북한지역을 포함하지 않는 "한韩"이라는 용어를 도입하여서 일부러 일정정도 대립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세부적인 정치가 역사를 어떻게 이용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가지 물음입니다.

      국가가 중요하느냐? 아니면 개인이 중요하느냐?

      만약 국가가 더 중요하다면, 국가의 유지를 위해서 역사를 이용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국가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개인이 모여서 만들어진 공동체에 불과하며, 더욱 중요한 것은 개개인이기에 국가의 유지를 위해서 개인을 희생하는 역사을 긍정할 수 없습니다. 한국의 단일민족 역사관에서는 개개인의 다양성은 부정되며, 우리는 하나여야만 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 가치 판단의 문제이기에 결론은 님 스스로에게 있습니다. 전 제 생각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고구려인식문제라던지와 같은 나머지 질문들은 제가 과거에 여러번 썻군요. 귀찮으시더라도 역사관련 카테고리를 살펴봐주시기 바랍니다.

  7. 댓글을 보고 2009.10.14 10:35

    우리가 남의 역사를 훔친다 공자가 한국인, 손문이 한국인 이런 소리를 말하고 비판하시는 건가요 솔직히 블러그의 글을 보고 공자가 한국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환빠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이 주장했다고 하셨더군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부끄럽군요 그렇지만 대 다수가 한국인이 그런 주장을 하는 걸 보지를 못했습니다. 극우주의자가 하는 말 아닌가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중국의 일부학자가 주장한 중국에서 골프와 축구가 시작되었다. 피자도 이태리가 아닌 중국에서 만들었다와 같이 그냥 튀고 싶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요

    • Favicon of https://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바로 2009.10.14 08:21 신고

      한민족이라는 짝퉁민족을 만들어 남의 민족 역사를 훔치려고 하고 있고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해당 글을 그대로 패러디한 것입니다. 왜 그런가라고 물어보신다면, 제가 패러디한 원문글의 논리를 적용하면, 한민족도 분명히 만들어진 짝퉁민족이며, 어디까지나 한반도 남부에 거주하던 삼한의 사람들이 고구려 민족의 역사까지 먹으려고 한 짓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해하실까봐 하는 말이지만, 전 민족자체를 부정합니다. 고로 위의 말은 저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단지 원문글의 논리적인 모순을 그대로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공자자체야 극우들이 하는 말 맞습니다. 그런데 역사학 책중에서 가장 잘 나가는 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고구려-신라-백제가 중국대륙에 있었다라던지 과거 환국이 세계를 지배했다는 식의 소위 환빠들의 글입니다. -_-;; 이것이 농담이 아닌 것이 더 씁쓸하군요.

      그리고 이런 모습은 현실에도 반영이 됩니다. 태왕사신기 드라마에서도 위에서 말한 "일부 극우"들의 이야기가 그대로 받아들여져서 쓰여졌고, 그리고 이것은 역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서 사실로 받아들여집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같은 문제가 중국에도 있습니다. 중화민족이라는 삽질도 있습니다. 그리고 부풀려지고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역사책도 많이 있고, 드라마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전통 역사학이 튼튼하게 있으며, 저런 책들은 기본적으로 판타지와 드라마로 받아들여집니다. (물론 아닌 사람도 많습니다만-_) 또한 드라마 자체도 상당한 사료고증이 되어있습니다. 학술적으로 인정도 받지 못하는 한국의 환빠들의 내용을 기본으로 "사극"이라고 만드는 한국보다야 몇 배 훌륭합니다.(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_- 어디까지나 비교적으로)

  8. 버림받은 악비 2009.10.14 11:06

    악비 문제는 간단합니다. 중국이 자신들의 역사를 왜곡하려다 보니 중화민족이라는 종족을 만들고 다민족 역사관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죠. 그러다보니, 악비같은 충신이 졸지에 반통일분자가 되어버린거죠. 이건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대한민국이 일본에 식민지배 당한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다민족 역사관 개념을 도입하는 거죠. 그래서 이제는 단일민족으로는 안된다. 우리도 다민족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이제는 다민족이 대세. 이에 맞추어 우리의 역사관도 이제는 다민족 역사관을 도입하겠다. 그러므로 이제 대한민국은 일본에 식민지배 당한게 아니라 일본도 한국사의 일부로 봐야 된다는 것이다. - 자 그러다보니,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장군은 민족의 영웅에서 졸지에 반통일분자가 될 수도 있다는 거죠.

    지금 중국 하는 짓이 바로 이런 행동이죠. 중국이 이민족에게 짓밟혔던 자신들의 역사를 왜곡하려다 보니, 자민족의 충신을 폄훼하는, 이런 말도 안되는 상상이 현실이 되버린 거죠.

    • Favicon of https://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바로 2009.10.14 16:42 신고

      충신을 폄훼한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역사관으로 보는 모습일 뿐입니다. 그는 여전히 충신입니다. 단지 민족의 영웅이 아닌 단지 송대의 충신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역사적 사실에 가깝습니다.

      만약 앞으로 동북아시아가 통일이 된다면, 안중근 의사는 민족의 영웅이 아닌 당시의 충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민족의 영웅이라는 허구적인 이야기보다, 당시의 충신이라는 것이 더 객관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시나봅니다.

      중국은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여러 민족자체가 중국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 몽골족이 대륙을 지배했던 역사를 왜곡하지도 않았고, 한족만이 중국의 민족이 아니니 자민족을 폄훼하지도 않았습니다.

      맨 처음부터 말했지만, 한국의 역사관만으로 그리고 중국사가 "한족만의 역사"라는 관점으로 현재 중국의 역사관을 파악하면 님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단일민족이 아닌 다민족입니다. 제 덧글들을 다시 봐주시기 바랍니다.

  9. 오해 2009.10.14 11:18

    아무래도 바로님께서 제 댓글을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네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상나라가 동이족에 의해 세워졌다는 사실을 중국이 숨기려고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구요. 그런데 왜 제가 말하지도 않은 내용을 가지고 설득력이 약하다느니 이런 소리를 하시는거죠?! 물론 역사를 잘 모르는 중국인 가운데서는 그 자체를 부정하려고 하는 이도 보았지만..

    상나라가 동이족에 의해 세워졌다는건 비단 중국 학자를 뿐만이 아니라 사서를 읽어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인 것 같네요. 아무튼 제 말씀은 상나라가 동이족에 의해 세워졌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왜곡하기 위해 선진시대의 동이족은 이후의 동이족과는 다른 민족이라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다는 거죠. 마치 몽골의 중국 식민지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원나라 역사를 훔치기 위해 쿠빌라이칸 이전의 몽골 제국과 쿠빌라이 칸이 국호를 원나라로 정한 이후의 몽골 제국은 다르다고 하듯이요.

    사실 한편으로 이렇게 해서라도 자기 역사를 왜곡미화하고 남의 역사를 훔치려고 하는 중국인들의 심정이 참 안쓰럽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중화민족이 어쩌고 다민족 역사관이 어쩌고 하면서 남의 민족의 역사까지 왜곡하고 훔치려고 하는 행위에 대해 눈감아 줄 수는 없는 일이죠.

    • Favicon of https://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바로 2009.10.14 16:50 신고

      상나라가 동이족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은 학자들도 확정할 수 없습니다. 사료 자체가 심히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확정된 사실처럼 이야기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왜곡한 적도 없습니다. 제가 이해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님이 이해를 못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상나라를 세운 동이족과 진한대 이후의 동이족은 정말로 다릅니다. 100% 다른 것이 아니지만 90%이상이 다릅니다. 이에 대해서는 위의 덧글에서도 충분히 설명했군요.

      간단하게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선진시대의 동이는 단순한 외래민족에 대한 용어이며, 마치 서양에서 동양인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정도입니다. 동양인 중에서는 중국인도 있고 한국인도 있고 일본인도 있습니다. 그냥 넓은 범위의 호칭입니다. 그리고 진한대에는 선진시대의 동이라고 불리는 그룹중에서 상당수가 융화되었거나 융화되어 갔고, 기존의 동이에서 변방에 속하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동이라고 불린 것입니다. 지금의 터키가 스스로를 투르크의 후손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혈연-문화-종교적으로 거의 상관은 없고, 그 이름만 이어받은 것과 같습니다.

      대체 무슨 근거로 선진시대 동이와 진한시대의 동이가 같다고 하시는지 그것이 궁금할 뿐입니다. 또한 똑같은 이야기 계속 하게 하지 마시고, 제 덧글을 좀 봐주시기 바랍니다.

  10. 아이러니 하군요 2009.10.14 16:54

    이제 영웅은 악비가 아니라 이젠 진회인가 한족을 그렇게 멸시하던 징키스칸이 몽골의 영웅이 중국의 가장 위대한 영웅인가? 역사라는 것이 서로의 이해관계에 얼마든지 바뀔 수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례인것 같네요

    • Favicon of https://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바로 2009.10.14 16:54 신고

      그래서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민족의 영웅이나 영웅이라는 말에 집착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별 의미자체가 없는 말일 뿐입니다.

      악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였다. 칭기즈칸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민족의 영웅이니 수국의 영웅이니 혹은 충신이니 어쩌고 하는 것은 모두가 현재의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통치의 수단으로서 나오는 바보스러운 행동의 소산일 뿐이라고 봅니다.

      가장 간단하게 "저 인간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를 버렸으니, 너도 그렇게 해라!"라고 암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전 국가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찬성할 수 없군요.

  11. 개인적으로 느끼는 거지만 2009.10.14 17:16

    글쎄요 영웅이라는 말에 크게 집착하지는 않습니다 중국 최고의 영웅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 네티즌한테 들은 말이고요
    궁금해서 질문합니다. 바로바로님이 주장하는 동북아시아 통일론이 뭔가요 예전 일본이 주장하는 대동아공영권과 비슷한 맥락인지 아니면 지금 중국이 주장하는건가요 약간 무섭네요
    조심스런 말이지만 역사의식에서 중립적이려고 노력하신다고 하시는데 여러 블러그글을 보면 제가 볼땐 중국학계 의견 입장에서 글을 많이 쓰시는 것 같은데요

    • Favicon of https://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바로 2009.10.14 17:19 신고

      일제이 주장했던 대동아공영권과 이론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실제 적용에 있어서 일제가 행했던 이론과 실제가 달랐던 모순, 다시 말해서 같은 민족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차별적인 대우를 행한 것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얻어야 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중국의 다민족역사관 아래서 벌어지는 실제적인 차별적인 대우에도 그대로 적용되며, 이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저에게 중국학계의 의견을 대표한다고 하셨지만, 실제로는 이 블로그는 중국정부에 의해서 접속이 차단당해 있습니다. 또한 오히려 과거에는 중국학계의 의견을 전면적으로 부정했습니다. 이제야 그나마 중립적인 위치에서 그나마 볼 수 있는 수준입니다. 최소한 한국이나 다른 외국에 있는 전공자쪽에서는 저를 보고 중국학계의 의견을 대변한다고 하지는 않는군요.

      만약 제 의견이 중립적이 아니라고 느껴지셨다면, 반대로 님이 너무나 한국중심적인 생각에 경도가 된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전 한중의 양국 네티즌들에게 친중과 반중이라는 소리를 다 듣습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정도로 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李浩《民间信仰的屈服与融合-以魏晋南北朝为例》《民俗研究》2009.2,P97 : 본 논문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북방민족의 민간신앙을 서술한 이후, 북방왕조들이 점차 자신들의 민간신앙을 없애고, 한족의 신앙으로 대체해가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일단 간단한 심정을 밝히면, 제목에는 융합이라고 해놓고, 정작 써놓은 내용은 싹다 한족의 문화에 굴복을 했다고 서술하는 행태에 대해서 냉소를 날리고 싶다. 맨 마지막에야 융합을 이야기하면서 정리되는 과정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융합의 기본적인 뜻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1) 상층부의 정책과 실제 민간신앙의 전파는 구별이 필요.
본 논문은 상층부에서 본래 북방민족의 제사를 금지하였기에 한족의 신앙에 굴복했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수 많은 역사적인 사례에서 알수 있듯이. 상층부의 금지와 실제적인 민간신앙의 존폐와 융합여부는 그리 관련이 없다. 오히려 상층부에서 강력하게 막는 민간신앙일수록 실제로는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해당 내용에서 마치 대단하게 거론되는 위문제(魏文帝)의 조서도 본인이 볼 때에는 그만큼이나 강력하게 민간에서 한족 외의 제사가 범람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2) 민간신앙은 민간신앙끼리의 내용변화에서 찾아야…
위진남북조. 정확히는 동한말부터 시작된 북방민족의 대거 남하로 중원문화는 많은 변화를 겪는다. 본인으로서 이번 일에서 거론하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도교의 대유행이다. 현존하는 사료가 기본적으로 유가에 의해서 집필되었기에 많은 부분에서 무시당하지만, 실제로는 도교가 가장 강력한 종교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직 고증까지는 해보지 못했지만, 아마 이 시기의 도교는 상당부분 북방민족의 샤마니즘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았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왜냐하면 위진남북조 도교의 사상이 기본적으로 샤마니즘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을 비롯하여 다양한 신령의 존재여부부터 시작해서 너무나 닮아있다. 그런 면에서 북방민족의 샤마니즘과 중원의 도교가 자연스럽게 결합하였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또한 훗날 전파되어서 도교의 자리를 위협한 불교의 경우도 북방민족에 의해서 먼저 믿어지고, 중원지방으로 전파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융합의 개념을 좀 제대로 잡자.
문화끼리도 굴복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서 동북아시아에서 우리는 모두가 서양식 복장을 입고 있다. 한복을 입으면 오히려 이상하게 보는 상태이다. 그러나 완전한 굴복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서양에서 점차 증가하고 있는 동양철학에 대한 탐구는 바로 이러한 것을 대변한다. 고로 본 논문처럼 옷보다도 더욱 고차원적인 민간신앙에 있어서, 한족의 민간신앙이 북방민족의 민간신앙을 굴복시켰다는 식의 전개는 기본적인 개념이나 현상파악을 제대로 못했다고 혹평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속이...죽을거 같아;;;;;;;;;;;;;;;;;;;;;; 아버지..ㅠㅠ 이 정도의 술은..아니여요.ㅠㅠ

  1. 시골 2009.08.12 00:43

    일상복만 놓고 본다면, 지금의 세계는 서양복식의 시대라고
    후세에서 말하겠죠..?

  2. 현무지신 2011.04.13 01:18

    철학이나 종교학 쪽에서는 도교 자체가 요동 등 동북방계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고, 한국에도 자체적인 도교/도교문화가 존재했다는 자생도교 이론(혹은 선도, 고신도 존재설)이 있습니다. 이 주장은 상당히 기원이 많이 올라가는데, 조선시대에도 이에 기초한 문헌인 <청학집>과 <해동이적>이 나오는지라;;; 한국 도교학의 대가인 정재서 교수님의 경우 초기 도교는 요동 지역 샤머니즘의 영향이 컸고,(초기 도교 기록인 한대 저술 태평경에도 선대 종사들 대부분이 요동 출신이라 기록되었다고 저서에 적어 놓으셨더군요.) 이후 한국으로 중국 도교가 역수입되어 기존 자생도교 문화와 섞이면서 현재까지 이르렀다는 주장을 하시지요. 보통 한국은 자생론을, 중국은 자국 전파론을 집중적으로 펴는데 비하면 대조적입니다.(요즘은 양측 학자들도 많이 학회를 가지면서 많이 중도화되었지만...) 시중에 나온 도교 관련 대중서도 특정 종교단체에서 나온 게 아니면 이분 게 많고, 가장 학술적이면서 대중적이죠. 근데 문제는 정재서 교수님은 철학과가 아니라 중문학과라는 거;;;

彭卫《汉代女性的工作》《史学月刊》2009年第七期,P80

현재까지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한대의 여성은 유교사상의 규범에 따라서 일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해당 논문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을 하고 있다.

1) 한대 여성의 일은 “남자는 농사를 여성은 방직물을”싸는 것, 다시 말해서 안과 밖이 분리되어서 “안쪽의 일”만을 했던 것이 아니다.

1- 여성들이 배제된 활동영역
마차부(驾车), 사공(刺舟), 장인(造车), 염전(制盐), 채광(采矿), 제련(冶金), 도기(制陶), 사냥(狩猎), 어부(捕鱼), 건축(建筑), 회화(绘画), 창녀(性劳动), 군대(兵战),

# 창녀(性劳动) : 해당 논문은 사료에 나오는 기녀(妓女)의 妓는 技와 같아서 후대의 창녀와는 다르다고 했다. 물론 이 주장도 일견 틀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본인으로 상식으로는…없었을리가 없을터인데~?! 당신이라면 믿어지십니까? 저는 인간을 믿습니다. 고로 없었을리가 없었다고 확신합니다.

# 군대(兵战) : 문제의 핵심은 “女子从军” 해당 논문은 자신의 고향에서 군인을 위해서 노동을 하는 일에 대해서 지칭한다는 점과 실제로 이루어졌어도 워낙에 특수한 현상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단어구사일뿐이라는 것. 이 부분에서는 동의를 하면서도, 군대 위안부들은 없었을까? 그리고 위진남북조에는 심심하면 나오는 여자투사?!들이 한대에는 없었을까? 음…좀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 있음.

 
2- 여성들도 가능한 활동영역
방직(纺绩), 농업(农耕), 가축사육(家畜饲养), 수공업(手工业), 상업(经商), 집안일(땔감, 밥하기), 비정규직(킥킥;;), 유모, 무속인, 여의사, 비녀, 무녀(舞女,歌舞伎)

2) 여성의 활동영역이 넓다는 것은 남자와 비슷한 혹은 동등한 지위와 권리를 누렸다는 것이 아니다.  3) 일반 가정에서 여성의 노동은 중요한 가정수입의 원천이었다. 만약 여성이 가정경제의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으면 발언권이 올라가는듯 하다. 4) 상업활동이 한대 여성의 지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5) 왕에서 황제로 변화해가는 선진부터 진한시대의 국가시스템 변화는 한대여성의 사회와 가정중의 위치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은듯 하다.

무엇인가 많이 허전한 논문이었다. 용두사미의 기분이 든다. 앞부분에서는 그 결론에 본인이 찬반을 놔두고라도 나름 열심히 자료조사와 분류작업을 했다고 생각되는데, 뒤쪽에서 구체적인 시스템과 상황개괄부분에서는 논문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좀 더 광범위한 자료조사를 실행하지 않고, 좌전이나 국어까지 이용해가면서 한대의 여성에 대한 개괄을 한다. 개인적으로 좀 문제가 있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 의외로 재미없는?! 역사 논문 정리를 좋아하는 분들이 계셔서 올려봅니다.
  1. nomadism 2009.08.07 13:13

    IT에 주력하시다가 가끔은 비전공인 역사 분야를 통해서 머리를 좀 식히셔야 하니깐요...응? 그런데 어떤 사료들을 통해서 이런 결론을 내리는 논문인가요? 직접 찾아보시라고 하시면...;;;

    • Favicon of https://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바로 2009.08.07 13:19 신고

      그렇죠. 가끔은 취미생활인 역사로 머리를 식혀야...큭......사료는...그냥 나중에 해당 논문의 PDF로 뜨면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저것 나름 방대하게 인용....

      사실은 그것까지 타자치기는 귀찮아요. (이제 가을이려나...) 어디까지나 간략 요약과 생각정리만 했을 뿐. 그리고 나중에 찾아볼 용으로 출처만 밝혔을뿐.ㅠㅠ

      역시 나중에 PDF버젼 나오면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단지. 한대의 여성활동을 논하면서 춘추전국쪽의 사료가 틈틈히 박혀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답니다.-0-;;

  2. Favicon of http://kieuns.pe.kr BlogIcon 문기은 2009.08.07 14:12

    한자가 보여서 기겁하게되지만 처음 보는 내용인지라 읽다보면 재밌어요.

    • Favicon of https://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바로 2009.08.08 09:38 신고

      한자만 보이면 두렵죠^^ 저도 그것을 생각해서 최대한 한자를 버렸답니다^^

  3. こまれる 2009.08.08 02:25

    학술지 이름이 "史学月刊"인 걸 보니 매달 출간되는 모양이군요. 그런 학술지가 있다니 놀라울 뿐입니다.

  4. 시골 2009.08.12 00:47

    대체로. 이동이나 교통수단에 관련된 거에서는 여성들이 배제되었군요.

    무엇을 의미하는지.. 좋은 쪽과 나쁜쪽으로 생각이 왔다갔다합니다.

张其凡、惠冬《金朝“南人”胡化考略》《史学集刊》2009年7月第四期,P47

금나라가 중원에 들어온 이후에 중원지역은 남송과 단절되고, 통치계층인 여진문화의 유입으로 인하여 교차문화지대가 형성된다. 이러한 다문화는 중원의 한인(汉人=南人)이 북방민족화(胡化)가 되게 한다. 이러한 북방민족화는 의복이나 머리모양 그리고 습속등등에서 나타나서 심리적으로 남송과 멀어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남인의 북방민족화로 오래전부터 한인과 북방민족간의 중간지역이 되어오던 연운(燕云-지금의 베이징일대)지역과의 정치-문화적 차이가 줄어드는 결과를 가지고 왔고 이는 원나라의 4등급제의 현실적인 기초로 작용하게 된다.

남인의 북방민족화 원인 및 과정
1) 남송과의 단절
2) 여진인 집단이주 : “悉迁女真土人散居汉地”
3)북방의복의 유행 : 북송부터 이미 북방의복이 유행하였고, 남송에서도 유행했는데?
4) 강제적인 두발 북방민족화
5) 한인(汉人)그룹의 관방진출

남인의 북방민족화의 구체적인 사례
1) 옷과 머리모양의 변화 – 북방식으로. 특히 머리모양의 변화는 주목할만함.
2) 언어와 예의의 변화 – 이른바 북방언어의 창조. 북방음악의 유입
3) 심리적인 태도 변화 – 여진과 한 그룹이라는 생각들이 늘어남.


* 한국에는 아직 그리 크게 다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되는데, 연운(燕云)지역이 참 재미있는 곳이다. 한족과 북방민족의 교차하는 곳으로서 사실 위진남북조에도, 춘추전국시대에도 계속적으로 융합의 지점으로서 작용해온 곳이다. 연운지역의 융합사를 집필하는 것만으로도 평생 숙원사업이라고 할 수 있을듯 하다.

* 위의 글을 보면서 쉽게 연상이 되는 것이 일본제국의 대한제국합병 이후의 민족융합정책이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고는 한다. 역시 당시의 일제는 상당한 연구를 한 상태에서 한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을 하는 것은 개그이지만, 재미있음으로 해본다면^^;; 만약 식민지였던 기간이 50년만 더 유지가 되었더라면 사실상 현재의 한민족이라는 민족의식보다는 제국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조금 높다. 다만 일제의 방식은 동등한 대우가 아니라 차별적인 대우였고, 그러한 차별적인 대우가 결국 대립을 이끌어내기에 그것을 일제가 수정하지 않는 이상 분명 금방 분열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현재의 중국에서 이루어지는 민족정책도 제도상으로는 소수민족에게 많은 혜택을 주지만, 실질적으로는 융합이 제대로 안되고 있다. 역시 상당한 문제가 발생중이며, 앞으로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 눈치 채신 분도 있겠지만, 본글에서 나오는 용어는 최대한 소위 "학계용어"를 배제하고 모르는 분도 이해하실 수 있는 쉬운 단어를 선택하였다. 그래봤자. 내용 자체가 재미없어서 안 볼.....
  1. Favicon of http://redmedusa.net BlogIcon ColorFilter 2009.08.06 02:50

    음...-{_-

  2. Favicon of http://kieuns.pe.kr BlogIcon 문기은 2009.08.06 09:20

    rss로 긁어보다가 처음 쓰는 댓글인데요, 이번꺼 재밋었어요. 전 일본에서 잠시 체류 중인데 누가 뭐 물어보면 잘 몰라서 설명 못하거든요. 하지만 바로바로님은 대단하세요. 이런 것까지설명하실 수 있고.

    • Favicon of https://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바로 2009.08.06 10:10 신고

      .....제가 매일 매일 IT나 생활이야기를 올려서 그렇지...저 전공이 고대사랍니다;;;;;; 대단한게 아니라;;;; 못하면 안된답니다. 하하;;;하하;;;;;

  3. 충굴 2009.08.06 10:35

    잼있슴돠.ㅋ 중국역사에 관심이 꽤 있는 1인으로서.. 이런류의 글 많이 포스팅 해주삼.ㅎㅎ
    저같은 경우는 특히 중국 무협지,무협영화를 좋아해서 그 가상의 역사가 진짜 역사인듯한 착각에 빠져살고있어요.-_-;;

    • Favicon of https://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바로 2009.08.06 11:08 신고

      아..음;;; 아;;;; 전 머..따로 쓴 글이 없어서.....
      ..........하루에 하나 올리자는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려고...논문 독후감 중에 간략한 것을 올린 건데....이런 반응이 있을줄은;;;; 논문 독후감들 좀 올리겠습니다. (제 독후감들의 대다수가 한국어+중국어라서 한국어만 있는 것으로 골라서;;; )

李大龙《汉唐藩属体制研究》中国社会科学出版社 2006年
程尼娜 古代中国藩属体制的探索-读《汉唐藩属体制研究》 史学集刊2008年5月 第3期

 
武帝以前 :藩臣(闽越、东瓯类型的民族或民族政权)- 外臣(南越,朝鲜等政权)- 敌国(匈奴政权)

武帝后 : 郡县(对前期某些藩臣和外臣实行郡县统治的地区)- 属国(设置属国都尉的地区)- 特设机构(设置诸护某校尉,西域都护府地区)- 外臣(又作外围藩属,西汉匈奴、东汉南匈奴地区)

唐代 : 藩臣(初隶属边州都督府,后为羁縻府州) - 舅甥(吐蕃)- 敌国(唐初突厥)

藩属体制作为保护王朝核心地区(中原地区)的安全而出现的一个特殊的统治体制,它的发展、变化的根本原因在于中央王朝国力的强与弱。


程尼娜之想
敌国纳入藩属体制
郡县改为初郡
唐代划为 : 羁縻府州 - 藩臣- 舅甥 - 敌国



원본책을 좀 구해서 읽어보는게 좋을듯하다. 해당 내용은 청니나의 서평부분을 살짝 요약해 놓은것일뿐, 원문 글이 무엇인지 모르니 말이다. 생각해보니 민족사 연구에는 이러한 중앙-지방의 외교체계을 통한 분석도 있는데 그동안 이쪽으로는 조공책봉체계 이론만 대충보고 더 깊에 공부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반성해야겠다. 끙...;;

주의깊게 볼 것은 "조공책봉체계"라고 부르던 "번속체계"라고 부르던, 이러한 제도의 유지는 중앙왕조의 국력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이 이론으로 지금을 보면 현재 중국의 국력이 일정이상 강하기에 티벳에 대한 강도높은 통치가 가능하지만 만약 중국의 국력이 떨어지면 이러한 변방의 공동체가 이탈하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계속 중국의 국력이 유지된다면 티벳의 독립은 조금 힘든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반대로 이 이론으로는 지금 현재 티벳사태가 발생한 것이 중국의 국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예가 될수도 있다.

본인이 생각할때 해당 주장이 단지 중앙정부의 능력만을 생각하고 주변국가 혹은 민족 스스로의 변화를 무시하거나 피하고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남흉노의 경우가 더욱 그러한데, 여기서는 한나라의 국력 증가라는 요인도 있지만, 흉노 내부의 분열이라는 면도 작용을 하는데 이것을 일괄적으로 중앙왕조의 실력문제로 처리하는 것은, 혹은 중앙왕조의 실력문제에 집중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은가 싶다.

개인적으로는 중앙정부의 능력에 따른 주변국가 혹은 민족들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그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탐구하고 균형잡힌 시각을 가져야 할것 같다. 음....근데 말은 쉽지-_-;;



저의 미천한 지식으로는 이 논문이 정식적으로 발표된 중국학자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행된 《至正條格》교주본에 대한 첫 논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당 논문은 文史 2008年第1輯에 수록되어 있으며, 북경대학교의 張帆이 쓰신 評韓國學中央研究院《<至正條格>校注本》라는 제목입니다. 사실 작년에  張帆선생님 수업이 바로 이 《至正條格》이었습니다. 교실 수업에서 말씀하신 사항과 큰 차이는 없어 보였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직접 책으로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해당 논문의 PDF버젼이 아직 안나온 관계로 올려드리지는 못하겠군요. 문제점 부분으로 요약하겠습니다. (칭찬이야...여기서 문제시 않은 다른 부분이 칭찬이라고 생각하면 될터이니 말입니다.--)



표점 : 상당히 높은 점수를 주고 있습니다.

교감 부분 : 수업때도 말한 사항이지만, 타교(他校)부분에서는 상당히 불만족하시더군요. 그에 비해서 이교(理校)쪽에서는 긍정적인 표현을 하셨군요. 그리고 해당 사항의 몇가지 예시를 드셨습니다. 그리고 條目劃分부분에서 2가지 문제를 지적하셨는데, 지정조격의 조격 59조은 서로 분리되어야 된다고 생각하셨고, 반대로 斷例 233과 234는 합쳐져야 된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주석부분은 완벽한 주석량은 아니지만, 일반독자에게는 괜찮을 정도의 주석이라는 평가를 내렸는데, 일반적인 관명이나 지명의 주석을 안 한 부분은 쉽게 찾을 수 있으나, 원대공문에 나오는 특수한 서술어등에 대한 주석이 아쉽다는군요. 하긴-_ 那般者같은건....

그 외에 通制條格 元典章 元史 經世大典 과 기타 공문과의 연계성에 많은 투자를 했고 성공적이지만, 내용이 더욱 많았으면 하는 아쉬움...대신 같은 소스 뿐만 아니라 관련내용도 분류하여서 기술한 방법에 대해서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고...특히 사고전서의 원사부분에 5개의 지정조격의 내용이 있는 부분은 원래 학자들이 주의하지 못한 큰 발견이라고 했고...연대색인부분에서는 많은 불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이제 연구부분에서는 흐음...

지정조적의 서명이 정해진 계기나 지정조격의 내용부분에 대해서 한국학자들의 생각을 반박하는데, 지정조격은 한국학자들이 강조하는대로 전통몽고세력과 한화된 몽고세력간의 싸움이 아니고 단지 그동안의 복잡한 법치체계를 가다듬을 생각으로 만들어진 내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흐음.....자세한 내용은 직접 보시면 되겠고...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원순제 제위전기에는 상층통치계급사이에서의 충돌이 선명하지만, 이러한 충돌은 지정조격의 내용에 영향을 준지는 않았다. 지정조격은 원조 통치 계급이 원조의 통치를 계속 유지하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혹시 궁금해하시는 분이 있을지 몰라서 대충 적어보았습니다.
이정도 적어 놓으면 관련 분들은 다 알듯 해서 이만 줄입니다.(귀찮아서--;; )
더 자세한 사항은 역시 직접 논문을 보시는편이^^::


《代歌》《代记》和北魏国史 - 国史之狱的史学史考察

《拓跋史探》

田余庆


이 글을 읽는 이유

1) 티엔 선생님이 편하게 쓴 글이다.

2) 史风에 대한 이야기(정치의 역사에 대한 영향)에 대한 이야기 : 티엔선생님의 시대의 특수성

3) (60年代)三大才子 : 田余庆,剪伯赞,戚本禹 이 문장은 티엔선생님의 아름다운 글이 있다.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는 "늙었기에-_;;" 같은 말을 반복하고는 하는데, 이 글은 그렇지 않다. 이미 사료나 기타 증거로 할 수 없을때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모범적인 대답이 있다. 하지만 본인은 일단 사료나 기타 증거로 제대로 쓰는 것부터 잘 해야지 저런 경지를 바라보지. 으휴...


요약 :

이 글은 책의 맨 마지막 종합이다.

처음에 투르크의 역사를 서술한다. 이 글의 핵심은 투르크 역사는 원래 생각했던것과 다르게, 다양한 내부적인 정치권력투쟁(투르크의 외척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정치권력투쟁)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다. 선비와 오환으로 발전하게 된 투르크는, 특히 외척세력인 오환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이 건국을 하는 시기에는 외척(모후)의 세력이 너무나 강해서 정치적 권련 배분에 문제가 생긴다. 이런 상황에서는 외척세력을 없애버리는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적 전통이 생겨서,  원래의 모후를 다 죽여버리는 전통이 창조된다.

오환이 투르크의 초기발전에 끼친 영향은 처음으로 서술한 책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위서 역사서"에 어떻게 기술이 되는지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 한다. 특히 위서와 같은 경우 소수민족의 역사서 중에서 매우 상세하다. 그렇다면 魏收은 어떤 기준으로 이 글을 적었을까? 아마도 구전된 내용을 기준으로 작성이 된 것이것이다.

그 예로서 崔浩을 든다. 그는 역사서를 잘못?! 서술했다가 최강막강의 권력에서 밀려난다. 역사서를 쓰고 돌에 새겨넣어서 도로에 전시하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인터넷에 올린 것인데, 문제가 되어서 난리가 난다. 이 돌도 아무곳에 묻어버리는데( ...이거 발견하면 최고일터인데....)이 문제에 대해서 周一良선생님이 이론을 내놓는다. 수집혼으로 인하여 도광에게는 조카이자 친동생인 사람이 있었다. 혹시 이 사실을 적어놓은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서 외척에 대한 서술을 주의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어찌되었든 이러한 최호에 대한 처리가 이후의 북위의 역사 서술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래서 티엔선생님은 정치에 의한 역사간섭은 인류의 손해이자, 역사학자로서는 자신도 경험했던 괴로운 이야기이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代歌 --》 代记가 되는 이러한 과정에서 이상한것이, 왜 같은 내용인데 선비어 代歌는 가능하고 崔浩가 역사로 남기는 것은 왜 안되는 것일까? 여기에는 汉化의 문제도 포함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한화를 원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孝文帝는 반대하는 아들까지 죽이기까지 한다.) 중국 주변민족은 건국과 동시에 汉化라는 문제를 안게 된다. 자신의 것을 완전히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화를 안할 수도 없고...

우리가 기존에 한화를 이야기할때, 관료화라던지 복장과 같은 물질상의 것을 토론했다. 그런데 우리가 제대로 서술하지 않은 것이 당시 사람들의 정신상의 반응이다. 이 문장은 그러한 면에서 좋은 의견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서 댕기나 족발과 같은 것들은 중국사람들에게 이미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자신의 노인배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서양의 것을 받아들이는 과도기에 있기 떄문이다. 그러기에 서양인들이 이러한 댕기나 족발을 거론을 하면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이와 같이 북위초기 시대에도 이러하여서, 과거의 선비의 도덕관과 새로운 세대의 한족의 도덕관은 충돌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崔浩의 경우는 이 중간에서 희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과도기에 현재의 관점에 보아서 나쁜 과거의 것을 서술하지 않거나 모호하게 서술한다. 그리고 그래야 과도기의 고통이 적어진다. 상당히 슬픈 결론이다. 요즘 있는 티베트관련 중국인 시위와 같은 경우는 과거의 망령과 같은 무력탄압을 잊고, 없애고, 가리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생활을 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과도기가 슬프기만 한것은 아니고 기쁨도 있다. 하지만...후...

그리고 반대로 지금까지의 외래 민족이 중국에서 그러하였듯이 다음세대의 티베트인들은 이제 과도기를 지나서 중국을 추종하지 않을까? 머...지금까지의 역사적 예로는 그럴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의 독특한 문화가 점차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되지 않을까? 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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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구성호와 투르크문화에서 보면 서역의 이민족들은 쉽게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당말이 되면 샤만-불-불교의 3대 파벌로 나누어졌을 뿐이다. 만약 이민족들이 쉽게 다른 문화를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 아닐까? 혹은 당시 서역의 투르크가 일정정도의 문화를 보유한 것이라는 소리가 되는데,그렇다면 샤마니즘이나 불숭배도 문화라고 하면, 이러한 문화를 공유했던 북방이민족도 문화가 있다는 논리모순이 되어버린다.


한국의 족보에서는 여성을 서술하느냐 안하느냐?기억에는 하는것 같은데...으음...

내가 본 것은 근대의 족보이니 최소 조선시대 이전의 족보를 찾아봐야될듯.



中国北方民族与蒙古族祖源 1979年

중국학자중에서 북방민족의 대역사를 심도 있게 이야기한 몇 안되는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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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提要】流传于北魏宫掖与鲜卑贵族间的《代歌》,是拓跋族的民族史诗。道武帝时修撰的北魏早期历史《代记》,主要当是依据《代歌》。《魏书·序纪》大体是以《代记》为本。辑集《代歌》和修撰《代记》的重要人物是邓渊。由于邓渊冤死,崔浩死于国史之狱,北魏一代史学衰微,史官视修纂北魏前期历史为畏途。考察《序纪》的来历,可以看出拓跋族面对其民族早期历史的某些问题时陷入的痛苦与窘境。这是中古时期民族融合浪潮中值得重视的一个案例。
【关键词】北魏 代歌 代记 邓渊 崔浩

一、《真人代歌》释名

读魏收书,留意到《乐志》所载《代歌》问题[1]。《乐志》谓“凡乐者乐其所自生,礼不忘其本。掖庭中歌《真人代歌》,上叙祖宗开基所由,下及君臣废兴之迹,凡一百五十章,昏晨歌之,时与丝竹合奏。郊庙宴飨亦用之。”我不懂音乐和音乐史,但是觉得代歌内容从“上叙祖宗开基所由,下及君臣废兴之迹”看来,应该就是拓跋史诗,很有史料价值,值得读史者探究。只是歌词散失殆尽,研究《代歌》本身已不可能,只好当作史学史上的一个话题来对待,看看能否发掘出一点有用的东西。
《乐志》所说的“时”,意指代歌进入北魏乐府之时。因为代歌本是鼓吹乐,马上奏之,只有入乐府后始“与丝竹合奏”,才能脱朔漠土风而登进于庙堂宴飨。北魏始设乐府,年代甚早。魏平中山,晋伶官乐器屡经转徙遗散之后而得留存者,多入代北,理当设官司理,但只是草创而已,乐工、器物、乐谱、歌词都远不完备。辑集代歌之事似乎与设乐府大体同时,有代歌之辑即有乐府。《乐志》叙代歌事于天兴元年至天兴六年(398—403)之间。以后拓跋破赫连,平凉州,通西域,所得稍广,乐府渐有规模。孝文帝务正音声,搜求古乐,乐府始盛。乐府音声审定,器物调适,歌词取舍,编撰次第诸事,魏初邓渊首居其功,以后续成者则有高允、高闾等人。
代歌,《隋书》卷14 《音乐志》未曾特别言及。但《隋书》卷32《经籍志》小学类有《国语真歌》十卷,无解释,姚振宗《考证》亦无说。我认为应当就是指代歌一百五十章。国语即鲜卑语,代歌是用汉字写鲜卑语音而成。至于真歌之名,下面再作解释。《经籍志》还有《国语御歌》十一卷,不知是否与代歌有关系。
《旧唐书》卷 29《音乐志》、《新唐书》卷22《礼乐志》都有代歌资料,又称北歌。这是由于两唐乐志在有关部分列叙四夷之乐,入代歌于其中的北狄乐中,故有北歌之名。北魏迁洛以后对于拓跋旧物都以代、以北为称,所以北歌、代歌同义。两唐乐志都说北歌是“燕魏之际鲜卑歌”。狭义地说,所谓“燕魏之际”,当以道武帝皇始元年(396)建天子旌旗、取并州、夺中山,至天兴元年(398)克邺、灭后燕、定都平城为基准,北歌辑集当在此时;而所谓“鲜卑歌”是总括此时鲜卑各部之乐而言,包括以拓跋为主的代歌在内。广义地说,它也可能泛指十六国至北魏后期的胡歌胡乐,在燕魏之间以至魏末较长的时间之内陆续辑成。魏志所叙大体符合狭义的要求。两唐志所叙燕魏之际鲜卑歌,在这两方面都显得混乱,只能从广义方面来理解。
两唐乐志都说北魏乐府代歌,到周、隋之世与西凉乐杂奏,原有的代歌一百五十章由于只有鲜卑音而无汉译,理解者越来越少,以至逐渐失传,至唐时只存五十三章,而名目可解者只有六章。两唐乐志录有六章名目,即“慕容可汗”、“吐谷浑”、“部落稽”、“钜鹿公主”、“白净王太子”、“企喻”。郭茂倩《乐府诗集》卷25《横吹曲词》录载了几章汉译歌词。从这几章汉译歌词看来,两唐乐志所说到的代歌内容与发展情况,大大超越了《魏书·乐志》所说的代歌,所叙可解者六章与《魏书》不能吻合,时代较晚,也不是道武帝先人有关事迹。证据如下。“部落稽”,十六国时称山胡,魏时只一见,称步落坚,在《北史·尔朱荣传》中;至于正式见到步落稽的称呼,已是北周之事了[2]。“钜鹿公主”,《旧唐书·音乐志》说似是姚苌时歌,其词华音,与北歌也不合。“企喻”,据《乐府诗集》卷25引《古今乐录》,其四曲之一是苻融诗,不涉及鲜卑。所有这些,与《魏书·乐志》所说代歌“祖宗开基”、“君臣废兴”的鲜卑史实都不是一回事。不过,旧志又说“其不可解者咸多可汗之词,此即后魏世所谓簸逻廻者是也。其曲亦多可汗之词”。此事在隋志中也有相应记载,可以确认为魏世之作。隋志谓“天兴初吏部郎邓彦海(渊)奏上庙乐,创制宫悬,而钟管不备,乐章既阙,杂以簸逻廻歌”。簸逻廻即是大角及其所奏,北狄鼓吹之乐,马上用之。所谓“不可解者多可汗之词”,似内容为历代鲜卑君主言语行事,这与魏志所谓 “祖宗开基”、“君臣废兴”或者可以合辙。
以上的资料和解析,使我理解到唐乐府中的北狄乐、鲜卑乐、代歌,是三个大小范围不一的名称。北魏代歌一百五十章,唐以前多半陆续散失,也有新章羼入,所以唐志所说的代歌已不全是北魏时的原貌了。所谓唐时尚存而又可解者六章,其中的“步落稽”一章属于大范围的北狄乐(步落稽族属来源主要是南匈奴),“慕容可汗”和“吐谷浑”二章属鲜卑乐范围。只有严格意义的代歌才是拓跋歌,但也不能完全排除其它鲜卑歌包含其中,因为拓跋在推寅(即追谥宣帝的所谓前推寅)时还曾是鲜卑檀石槐势力的一部分,称西部鲜卑。唐志成书,距代北拓跋年代已远,乐府歌词变化很大,最重要的是鲜卑语言已鲜为人知,所以难于区分乐府各部分来源演变,以至于对代歌的叙述混淆不清,产生了上列的矛盾。
也许还可以这样认定,代歌是经过拓跋君主有意筛选甚或部分改造的燕魏之际鲜卑歌。筛选是按照道武帝个人意志进行的,目的是用口碑资料中的拓跋(也不排除鲜卑它部如慕容等)传说,编成歌颂先人功烈的歌谣,于代人中广为传播,为道武帝的帝业制造舆论。《乐志》所说代歌中“祖宗开基”“君臣废兴”的具体内容,道武帝正需借鉴,是他在创业时期朝夕思虑的大问题。《魏书》卷24《崔玄伯传》说其时道武帝“历问故事于玄伯”。又说“太祖常引问古今旧事,王者制度,治世之则。玄伯陈古人制作之体,及明君贤臣,往代废兴之由,甚合上意。”道武帝满心关注的有关治道的掌故,崔玄伯等人所能提供的,只限于汉人典籍所载,非拓跋旧事,而拓跋开基废兴诸事,却正是代歌的核心内容,而为此目的替道武帝筛选辑集代歌的人,从文献查找,只能找到邓渊一人。只有邓渊一人,于天兴元年冬奉命定律吕,协音乐,这势必涉及代歌;也只有邓渊一人,几年以后又受诏撰修代记,这也势必要以代歌所涉为主要资料。两唐乐志都说代歌是“都代时命宫人朝夕歌之”,所歌又尽代人之事,因而有代歌之称,迁洛以后不一定还有此需要,而且鲜卑语音大多既被遗忘,代歌也不再具备原来的意义了。
我还想用拓跋人爱歌的风习,来加强代歌是拓跋史诗,是拓跋古史资料来源的看法。拓跋爱歌的风习是历史上早已形成的,到了平城和洛阳已有汉字可供使用的年代,这种风习仍然依旧。《序纪》说拓跋先人“世事远近,人相传授,如史官之记录焉。”所谓人相传授,当是有言有歌,基本上都是口述的拓跋历史资料。一个部族,一个部落,甚至一个家庭,都有这种口述传授的资料。北魏皇帝是爱歌的。太武帝神三年(430)行幸广宁温泉,作温泉之歌以纪其事,见《世祖纪》。他令乐府歌工历颂群臣,赞美“廉如道生,智如崔浩”,见《长孙道生传》。其它臣工当各有诗歌赞颂。《文明冯太后传》载,冯太后曾与孝文帝幸灵泉池,孝文帝率群臣上寿,“太后忻然作歌,帝亦和歌,遂命群臣各言其志,于是和歌者九十人”。耆宿之臣元丕(422—503)为烈帝翳槐后人,历仕太武、景穆、文成、献文、孝文、宣武六朝,以能言“国家旧事” [3]见重于时。《北史》卷15《元丕传》:“丕声气高朗,博记国事,飨宴之际,恒居座端,必抗音大言,叙列既往成败。”孝文帝说他“亲歌述志”,当然是又说又唱了[4]。
北魏墓志中也有一些歌唱家族史传的例证。永熙二年(533)元肃墓志,记肃父扶风王怡“道勋出世,列在歌谣”[5],这种赞颂歌谣可能是乐府歌工奉命所作,如赞长孙道生、崔浩之例;也可能是贵族家传自编之作。正光五年(524)元子直墓志,说到其家世业绩“故已播在民谣,详之众口”[6]。永熙三年(东魏天平元年,534)张瓘墓,自矜其家世“吟诵两穗”[7]。这些可吟可唱的歌谣,其内容大概相当于汉人大族的家传。还可注意的是,武定八年(550)穆子岩墓志赞美先人事迹说:“家图国史,可得详言”[8]。然则贵族家世记录除歌谣以外,还有家图相配。
有一种文化现象曾令我不得其解,就是当拓跋人已进入高速汉化轨道之后,拓跋皇族人物自记其先人名字,仍旧任意用汉字写鲜卑音,而不遵循官方规范,与今本《魏书》所见多异。这也是从墓志材料中看出来的。永平四年(511)元侔墓志志阴铭文,谓墓主的六世祖为昭成皇帝;五世祖为昭成第八子受久[9];高祖常山王遵[10],字勃兜;曾祖常山康王素连;祖河涧简公于德;父悝,字纯陁。案以墓志核对《北史》卷15《常山王遵传》及《魏书》15《常山王遵传》,名字异处甚多。一,受久,本传作寿鸠;二,遵,字勃兜,本传不载其字,元昭墓志[11]则作字兜;三,素连,本传作素,元昭墓志则作连;四,于德,本传作德;五,悝字纯陁,本传不载其字。
显然,墓志所见名字当是据家传歌谣,有真实性,为常所使用者;《魏书》则当据官府文书。北魏有宗正[12],宗室人员名字,宗正必有文书记录,是在官的正式名称,却并不被本人及家族重视,因而有如上歧异出现。从这里也可推知,直到魏末,拓跋人仍不重视汉字汉语,记事仍以歌谣为准,风习未改。前引元肃墓“道勋出世,列在歌谣”,歌谣作用甚过文字叙述。顺便论及,甚至连汉字拓跋作为国姓,也未被普遍认同,西魏北周恢复胡姓,民间写拓跋为 拔。北周武成二年(560)《合方邑子百数十人造像记》所刻邑子姓名中,拓跋全作 拔,共有十余人[13],初疑这是民间讹写,一方流俗。后见镌刻精美的北周大将军李贤墓志[14],拓跋也作 拔。李贤墓志立于公元569年,此时魏收《魏书》早已修成了。从这种文化现象推知,甚至到迁洛以后,拓跋人对其祖宗开基及先人事迹的记忆,恐怕还是靠歌谣传诵为主,而不是依赖汉字记述。
现在还是回头来讨论乐府代歌本身的问题。
代歌的来源、内容,姑且作了上述的探讨。在《魏书》、《旧唐书》里,代歌叫做“真人代歌”。《新唐书》叫“真人歌”,当系省称。只有《隋书·经籍志》称之为“国语真歌”。真歌之“真”和真人代歌之“真人”,不像是同一含义。这又是怎么一回事呢?
汉音所读真字,鲜卑语中是表明人物身份称谓的字眼。《南齐书》卷57《魏虏传》中说到此语,列举了称为真的人物职称身份语词甚多,近年所出北魏文成帝南巡碑、孝文帝时司马金龙及其妻墓表刻石、北魏诸多墓志铭,以及《周书》怡峰传、薛弁传,《北史·斛律金传》等处,所举人物职称身份中均带“羽真”[15]。其它墓志中也另有带真字之例[16]。但是真歌之真与人物身份之真,似乎看不出任何关系。所以,“真歌”很可能是隋志为图简便而形成的误写,而“真人歌”和“真人代歌”才是正式的名称。

人代歌名称,我认为与真人一词有密切关系。真人自来就是道家方士一类人物时常提及的称谓。王逸注《楚辞·九思》,以真人为仙人。《魏书·官氏志》天兴三年(400)“置仙人博士官,典煮鍊百药。”天兴是辑集代歌的年代,煮鍊百药又是供道武帝服用。可见代歌冠以真人二字作为正式名称,具有道武帝的时代特征。至于这与道教有无直接关系,可能另有文章可做,这里不细究了。
《魏书·天象志》皇始元年(396):“先是有大黄星出于昴、毕之分,五十余日,慕容氏太史丞王先[17]曰:‘有真人起于燕代之间,大兵锵锵,其锋不可当’。其冬十月,黄星又见,天下莫敌。”自注:“是岁六月,木犯哭星。木,人君也,君有哭泣之事。是月,太后贺氏崩。至秋,晋帝殂。”[18]《魏书·灵徵志》记天兴四年(401)吏上言昔句注老父谓某曰:“自今以后四十二年当有圣人出于北方。时当大乐,子孙永昌,吾不及见之。”某遇老父之年为二十二岁,当前燕元玺二年(353)。以此推之,后四十二年,正当道武帝破慕容宝之岁。这些资料都说明,道武帝之兴,曾经动员不少方术之士为他制造舆论,其中最起作用的,还是王先借天象所言“真人起于燕代之间”。
皇始元年对北魏道武帝说来是个极具意义的年份[19],王先所言的这一年天象所示,就是人间变化的朕兆,真人代歌正是从此后二年邓渊着手辑集的。用拓跋正朔记后燕慕容太史丞所见天象,所言人事与拓跋帝纪又若合符契,这明明是道武帝周围之人所编造的痕迹。“大兵锵锵,其势不可当”,正是指拓跋平并州、出幽冀之兵,起于燕代之间的真人只能是道武帝。恰恰在此时出现的真人代歌,所歌颂的不是道武帝又能是谁呢?所以北魏乐府昏晨演习代歌,就是为了歌颂开国之君道武帝,以及拓跋“祖宗开基”的功业。
这些就是我认为代歌的正式名称是真人代歌的理由。代歌是拓跋史诗,又是道武帝帝业的舆论工具。同时它也承载了拓跋部人的感情,因而获得了它在这个时代应有的价值。这种文化现象,值得研究拓跋史者重视。

二、《代歌》、《代记》及其与《魏书·序纪》关系的推测

《代歌》素材来源于拓跋部民的口耳传闻。按照民族学所示的通则,这类素材总是越积越多,能说能唱,但却是杂乱芜蔓,内容矛盾。把这些长期积累的素材裁剪整理,配以合适的乐声,提升为史诗般的《代歌》,是在道武帝创建帝业的短时间里完成的。留存于《代歌》中的内容以“祖宗开基”、“君臣废兴”诸事为主,是适应道武帝本人创业治国的要求,而《代歌》的这些主要内容又正是邓渊撰修《代记》的资料依据。道武帝时拓跋部的《代歌》和《代记》这两项重大文化成果,都与邓渊有密切关系。
在道武帝以前的漫长岁月里,拓跋部社会发展缓慢,基本上停滞在“言语约束,刻契记事”[20]状态,开拓帝业的道武帝自己,也是出自结绳的野蛮人。力微以来,拓跋与外界也有接触很多的时候,所接触者或者是自幽州西渐的乌桓人,或者是以代郡、雁门郡人居多的汉人。汉人与乌桓人文明程度较高,但数量比拓跋人少,不足以在较短的时间内对拓跋部起太大的带动作用。拓跋部内缺乏各项文明制度,与道武帝经营的事业极不适应。所以当皇始、天兴的几年中,随着军事形势的大发展,拓跋部在社会、政治、文化、经济诸方面都面临转轨的急迫要求。魏收书诸《志》中多有这几年间诸项制度建树更革记载,一般都依靠人数不多的汉士的帮助。汉士如燕凤、许谦、张衮、崔玄伯等人作用最大,但除崔玄伯以外,事绩以军事谋略、政治运作居多;至于涉及文化的诸多方面,则往往另有它人专任。如音乐、官制,由邓渊司其事,史事记注也是责在邓渊。邓渊“明解制度,多识旧事”[21],是一个知识型的人才,是帮助道武帝向文治迈步的重要人物之一。
邓渊,雍州安定人,祖、父历仕苻秦,渊随父在冀州。道武得冀,以渊为著作郎、吏部郎。天兴元年(398)入代,与吏部尚书崔玄伯“参定朝仪、律令、音乐;及军国文记诏策,多渊所为”。《魏书·太祖纪》天兴元年十一月改制诸事,首列邓渊典官制,主爵品,定律吕,协音乐[22],其中前二类详见《官氏志》,当是就皇始元年“始建曹省,备置百官,封拜五等”诸事而整齐之;后二类见于《乐志》,其中重要一项当为创制庙乐,辑集《代歌》。《乐志》在邓渊定律吕、协音乐之后连叙庙乐和《代歌》,可知《代歌》辑集功在邓渊是可以肯定的。北齐时祖珽曰:拓跋初有中原,“乐操土风,未移其俗”,意指唯有鼓角,未识其它。皇始元年(396)破慕容宝,“于中山获晋乐器,不知采用,皆委弃之。天兴初,吏部郎邓彦海(邓渊)奏上庙乐,创制宫悬,而钟管不备。乐章既阙,杂以簸逻廻歌……。”[23]这就是邓渊协音乐之事。
邓渊在文化上更重要的成就,是他在戎马倥偬之际受命修史。他“明解制度,多识旧事”,具有基本的修史条件;而道武帝又是深具历史感的人,在创业兴国阶段百事俱需史鉴,而拓跋旧事比起汉典来更容易为他所理解。邓渊“性贞素,言行可复”,这也是修史人选应具有的史德条件。道武帝的“军国文记诏策,多渊所为”,其中所谓“文记”当包括今昔史料记注在内。汉士中有意搜罗记录拓跋旧事,邓渊应是第一人。
《北史》卷56《魏收传》:“始,魏初邓彦海撰《代记》十余卷”云云,这是修魏史之始。《北齐书》卷37《魏收传》全同。《魏书·邓渊传》:“太祖诏邓渊撰《国记》,渊造十余卷,惟次年月起居行事而已,未有体例。”此时北魏开国伊始,国史记注暂时只能是大事编年,全书体例还谈不到。
邓渊正式受命修史之事,本传系于邓渊与崔玄伯参定朝仪诸事之下,中隔渊“从征平阳”及赐爵加官诸语。案道武征平阳,是天兴五年(402)七月事,见卷二《太祖纪》及卷九五《姚兴传》。所以邓渊奉诏撰修国记,当在从征平阳之后,距他天兴元年入代已有四年之久[24]。邓渊株连于和跋一案赐死,而和跋被刑在天赐四年(406)四月[25],所以他兼领史职时间可以确定在402年七月以后至406年四月以前,前后不足四年。史不载道武帝命崔玄伯监修,可见当时并不理解修史是个难题,没有由崔玄伯监修的必要。
邓渊撰史,规模只有十余卷[26],属草创性质,其基本情况,有关载籍所记都一样,只是书名微异。《北史》、《北齐书》称之为《代记》,《魏书·邓渊传》、《史通·古今正史》则作《国记》。前所言及的邓渊修史以“记”为称,即邓渊所典“文记诏策”之“记”。《史通·史官建置》:“书事记言,出自当时之简;勒成删定,归于后来之笔。”《代记》年代早,自然都是根据“当时之简”,准确地说是以当时口述传闻记录为“当时之简”,所以称之为“记”是准确的,《代记》应是原始名称。《魏书》以魏为统,是北魏国史,故改《代记》为《国记》,《史通》则以唐代所见魏收书为准,亦袭称《国记》。这种差异是比较好解释的[27]。
邓渊《代记》记事包括的年代究竟有多长,载籍所见并不明确。《魏书》48《高允传》:崔浩之狱以后“世祖召允,谓曰:‘《国书》(案指崔浩监修的国史)皆崔浩作不?’允对曰:‘《太祖记》,前著作郎邓渊所撰;《先帝记》(案指《太宗明元帝纪》)及《今记》(案指《世祖太武帝纪》),臣与浩同作……。”这里把邓渊所撰之史称作《太祖记》,举以与下述《先帝记》及《今记》并列,不是用邓渊书的本名。邓渊死在道武死前三年,其时还无太祖庙号,更不可能撰成完整的《太祖记》[28],一定是后人据邓渊所撰编年记事续有斟酌增删而成。但高允所称都是诸帝之“记”,说明邓渊书名本称为“记”,或《代记》,或《国记》,这也是一证。
高允所称的《太祖记》,是严格限于道武帝本人的事迹呢,还是包括了像其它国史那样于开国之君中追叙其族姓世系以及开国以前的历史内容?我想,按中国历来修史成法,应当是后者。以邓渊其人博学而又“多识旧事”的特点,以他辑集《代歌》所获知的拓跋史诗资料,他是可以把拓跋历史梗概整理成文字的。我确信北魏之时经汉士之手保存了一些拓跋祖先资料,供以后崔浩以至魏收修史使用。最早整理拓跋祖先资料的汉士从现有资料看来,只有邓渊。
《十七史商榷》卷66“追尊二十八帝”条,谓二十八帝中惟猗 、猗卢、郁律、翳槐、什翼犍名通于晋为可据,其余凡单名者与猗等不同,疑皆道武帝时所追撰。我觉得王鸣盛所列数人以外,还有非单名者,如力微、推寅、诘汾等,其中力微之名亦见于晋代文书,所以不能一概而论。但道武帝时其先祖之名有代歌可作根据,所以断定其先祖之名大部分是邓渊辑集代歌时从鲜卑音记录而来,则是可相信的。
《魏书》卷57《高祐传》孝文帝时秘书令高祐与丞李彪等奏曰:“惟圣朝创制上古,开基《长发》,自始均以后,至于成帝,其间世数久远,是以史弗能传。臣等疏漏,忝当史职,披览《国记》,窃有志焉。愚谓自王业始基,庶事草创,皇始以降,光宅中土,宜依迁、固大体,令事类相从,纪传区别,表志殊异,如此修缀,事可备尽。……著作郎已下,请取有才用者参造国书,如其得人,三年有成矣。”
高祐等所言,是一段简略但却比较准确的拓跋先祖历史,从“披览国记”主要即邓渊《代记》而来,其内容与以后编成的魏收《魏书·序纪》所见一致,颇可窥见《国记》、《序纪》的因缘。我们且取这两者加以比较:
一,“创制上古,开基《长发》”,说的就是《序纪》黄帝后人封大鲜卑山、统幽都之北这一拓跋远古传说,如同《诗·商颂·长发》所叙殷人发祥的史诗内容。
二,“始均以后至于成帝”,世数久远,史弗能传,说的就是《序纪》始均入仕尧世,其裔不交中夏,载籍无闻,以迄于成帝毛的历史。以后道武帝追尊拓跋二十八帝,自成帝毛始,可见毛已经是道武帝认为其祖先中可信的人物,而成帝毛“统国三十六,大姓九十九”之说,也为拓跋后人所认同了。
三,“王业始基,庶事草创”,说的是《序纪》自成帝毛至圣武帝诘汾共十四帝时期。毛既可以追封,自然就是王业之始。不过人物虽然可信,事迹却是不详。只有自幽都两度南移,“九难八阻”之说,大体有今知考古材料,参照地理方位,可作印证。高祐上奏之中对此未作解释,只用“庶事草创”一语带过,说明其时除了口耳传闻以外,能见到的刻木结绳资料,未必皆能准确解读。而口耳传闻的代歌,比刻木结绳所记,应当更为可靠,更为具体。这一类拓跋祖先史实,都经过邓渊记录整理,加上他记注的道武帝事迹,共同构成邓渊《代记》,后来就基本包含在由崔浩总揽的国史之中。崔浩国史除崔浩之狱已毁的一部分以外,余下的当即高祐所说的《国记》,有三十卷之多。这种种资料,应当就是《魏书·序纪》的蓝本。
神元帝力微以下,迄于376年代国之灭,还有十四帝,高祐似皆归入“庶事草创”阶段,未作描叙。大概邓渊、崔浩所记这段历史已较详备,编年差可,不必更张[29]。这就是后来魏收书的《序纪》范围。皇始以降,北魏立国,记事日繁,制度日备,所以高祐等建议国史宜纪传表志兼备,不可仍依编年之旧。后来魏收书的全书规模就是这样,其中必定有很大的继承关系,可惜今天已无从说起了。
邓渊《代记》虽被高允称作《太祖记》,当是兼具魏收书《序纪》的全部内容,这里还有一个证据。魏收书十二帝纪,其中《序纪》在目录中排列为“本纪第一”,《太祖道武帝纪》排列为“本纪第二”,可见《序纪》是自有系统的独立存在的一纪,在魏收书中地位重要,不是附

带叙述性质。《序纪》列举的人物就是道武帝追尊的二十八帝[30]。二十八帝名字具在,世系清楚,间有大事可述,多少不等,而神元帝以后且有甲子纪年,可述大事较多。可见在邓渊书中,道武以前之事是独立成为段落的,以后就顺理成章地成为国史的前纪,也就是魏收书的《序纪》。
《序纪》应当主要就是根据《真人代歌》中“祖宗开基所由”,“君臣废兴之迹”的内容,经过邓渊《代记》的译释解读整理,才得以流传下来。《代歌》中的大事不被《代记》搜罗以致为后来《序纪》所遗的,恐怕不会很多。这也就是魏收书《序纪》在北魏史学史上极具价值的所在。根据这个事实,我认为《代歌》与《代记》同源,《代记》主要出于代歌。我还认定,辑集《代歌》、撰成《代记》的邓渊,也是《序纪》实际上的第一作者。
但是代歌是歌,代记是史,两者毕竟还有不同之处。代歌虽经筛选,难说没有一点违碍内容保存其中。但它不是直接叙事,不完全是真人真事的写实,又有音乐配制的影响和限制,所以是拓跋历史的升华。加以它用鲜卑语音,传播限于宫廷之内,汉人无从理解,所以它的内容稳定,未受政治非议。《代记》则不然,它首在实录,首在直笔,否则无以称史。正由于此,它容易受到挑剔,被当轴者疑忌,所以其作者邓渊就先于崔浩成为国史之狱的第一个牺牲者。不过邓渊人微,又值国初秩序初定,未至构成大狱,不像崔浩之狱那样引人注意,引人研究。
在思考邓渊《代记》撰写的多种细节时,我觉得邓渊之书不称《魏记》也值得一究。如前所论,邓渊撰史时间是在天兴五年至天赐四年(402—406)。据《太祖纪》,登国元年(386)元月道武帝即代王位,四月由代王改称魏王,而没有说明原因;天兴元年(398)六月经过朝臣议论,道武帝裁定国号不称代而称魏。这就是说,邓渊修国史之前已有两次明令改代为魏,而国史之名理应用国家正式名号[31],称为《魏记》才算合理,但事实并非如此。
拓跋先受晋封称代公、代王,后有实土,百余年孳生蕃息于代北之地,没有整体迁动。所以拓跋珪复国之后先称代王,符合习俗民情,是很自然的事。天兴元年(398)正式定国号称帝,经过朝议,群臣主张称代本无异议。只有崔玄伯以拓跋奄有中土,且将报聘江左为由,用旧邦维新之义,主张称魏。这很可能是崔玄伯揣度道武心意,以问作答。道武帝裁定以魏为称,并以魏帝名义昭告天地。但是代人习用旧称,而且反对向中土迁徙,连崔玄伯之子崔浩都是如此。官私称谓,都是代、魏兼用,到孝文帝迁洛之前,称代更为多见,称魏较少。何德章君《北魏国号与正统问题》[32]一文举例甚多,毋烦赘叙。所以国史以代为称而不曰魏,并不难于理解。何况邓渊于国初修史,所记尽代人代事,与整理《代歌》相近,如不称代而改称魏,反而不协于时了。
何文对于道武称魏的理由,已有论证。事实上当年曹操称魏的理由,拓跋也都考虑到了。何文留下两个他所不解的问题,一个是崔玄伯为什么以“慕容永亦进奉魏土”作为他所持称魏的理由之一,另一个是登国元年四月拓跋珪何以在甫称代王后数月即匆匆改称魏王。这两个问题是互相关联的。我现在把二者揉合在一起,试作回答。
拓跋珪复称代王,是前秦灭代十年以后的事。灭代的十年中,代北草原各部族部落经历了长期的混乱,刚复国的代王一时不可能把秩序恢复过来。其中拓跋珪最感困难的问题,是他的代王地位得不到普遍认同。与拓拔部最亲近的贺兰部和独孤部内,各自都有拥护的部落和反对的部落,拓跋珪随时要进行对反叛者的战争。最急迫的战争挑衅更是来自拓跋部内,因为拓拔部内并没有较稳定的君位传承制度,昭成帝以前,兄终弟及和父死子继总是交错出现,夹杂着残酷而复杂的斗争。拓跋珪是昭成帝的嫡孙,但珪父寔(献明帝)并未正式履位即死,昭成余子即献明诸弟存者尚多,按照兄终弟及的部族习俗,他们都有继承君位的权力。昭成幼子窟咄,是珪的季父,国灭时被掳徙长安,后因前秦之乱而随慕容永东迁并州闻喜、长子。慕容永称西燕,以窟咄为新兴太守。新兴,以地理位置言,与代北只有一山之隔;窟咄,以个人身份地位言,有继承已死的昭成帝而为代王的权力。而且他此时还有一定的实力。看来,他受慕容永命出为新兴太守,目的就是为了注视代北,相机进取。这种危殆形势,初即位的代王珪是不可能不觉察,不能不警惕的。
以《魏书》、《通鉴》等史籍互参,可以略见皇始元年正月拓跋珪即代王位以后的代北局势和代北周边局势是极为复杂多变的。皇始元年正月,可以看到三股势力同时活动。一,拓跋珪于牛川称代王;二,慕容垂在邺称帝,是为后燕;三,慕容永由长安东出,中途闻垂称帝而止驻河东闻喜,此处与邺皆为旧魏地。三足鼎立,都谋求前秦崩溃后并、幽、冀区域的统治权力。窟咄被委以新兴太守,独孤刘亢泥迎窟咄入代北与珪争位,都是此年春季的事。四月,珪由代王改称魏王;六月,慕容永遂称藩于后燕慕容垂。这暗示慕容永、慕容垂有可能联合共击拓跋珪。十月,慕容永进驻长子,是为西燕。长子和闻喜一样为旧魏之地。这表明拓跋周边彼此戒备的力量,全是驻在旧魏之地。拓跋珪其所以在此时匆忙改称魏王,意在表示代地魏地都应当由他统辖,既警告慕容永,也警告拓跋窟咄,不许插足其间,不得侵犯代北。至于慕容垂,他不能容忍自长安外奔的慕容永以及附属于永的拓跋窟咄染指幽、并。是冬,拓跋珪联络慕容垂大败入侵的拓跋窟咄,代北局势才得以初步稳定[33]。
慕容永等东来时颇有军力,但无退路。当慕容永求入冀、幽不成,北上代北受阻,只得龟缩于长子一隅,还不时受到后燕压力之时,处境是艰难的。所以可以理解,《太祖纪》登国七年(392)十二月所载“慕容永遣使朝贡”之事,就是西燕怵于后燕压力,求代为与国以图存的表示[34]。同时也可以理解,天兴元年(398)道武帝在邺再议国号时崔玄伯所说“慕容永亦进奉魏土”,所指即此。至于“进奉魏土”,虚词而已,并无实事。所谓魏土,即指闻喜、长子。崔玄伯所谓奄有中土,旧邦维新,也是此义,只是地面更广而已。
综观前后,皇始元年,拓跋窟咄随慕容永入闻喜,拓跋珪敏锐地感到来者不善,立即表示他自己是魏土之王,改国号曰魏;登国七年,慕容永遣使北魏,也许真有过愿以长子魏土“进奉”的口头表示;天兴元年,拓跋珪又获得了旧魏要地邺城。把这些资料合起来看,研究所谓代、魏之辩问题,岂不是多了一重思路吗?何文遗下他所不解的两个问题,到此是不是算解决了呢?
以上,由探索《代歌》、《代记》同源及其与《魏书·序纪》关系,进入到所谓代、魏之辩的疑难之点及其解决门路。从这里我又想到,正史中对本朝先世历史追溯能做到像《序纪》这样既相当久远又比较准确,还以其“得体”[35]而受到四库馆臣的称赞,是少见的。追根溯源,拓跋古史中的这一特异之处,不能不归于国初邓渊同时完成辑集史诗《代歌》和记注古史《代记》的开创性成就。

三、国史狱事造成的史风问题

我留意考察邓渊之狱对北魏一朝修史的长远影响,是受到台湾青年学者陈识仁《北魏修史略论》[36]一文的启发。陈文看重邓渊之死是道武帝猜疑的结果;又提出崔浩国史之狱对北魏修史造成影响。这两点立意我都赞成,只是觉得两者之间似乎有某种关系,而陈文未曾措意。我现在进一步思考的是,第一,邓渊一介书生,不涉权势,要是真有什么事引起道武帝猜疑的话,最可能是修史中出现了敏感问题;第二,国史之狱影响北魏一百余年,历来把这笔帐从崔浩之狱算起,我看应以邓渊之狱为始。邓渊是受命修史的第一人,其狱事内容与崔浩基本一致,崔浩之狱正是邓渊之狱滥觞所及的结果。
《魏书》卷24《邓渊传》,渊从父弟晖坐和跋案,“太祖疑渊知情,遂赐渊死”。和跋[37],代人,世领部落[38],与拓跋部关系久远,随道武帝,以武功显。天兴元年(398)和跋以行台尚书镇邺;邓渊从弟晖为行台尚书郎,与和跋“厚善”。道武杀和跋,罪名是修虚誉,性奢淫。“修虚誉”云云,罪名空泛,可重可轻,毕竟不是犯上作乱一类死罪。邓渊是新附文臣,一直“谨于朝事,未尝忤旨”,史臣叹其“贞白干事,才业秉笔,祸非所罪,悲哉!”邓渊之死不但时人愍惜,道武本人也是“既而恨之”。由此可见邓渊之冤昭然在人耳目,但冤情底蕴却迄今无人探究。
《魏书》卷 125之二《天象志》,天赐四年(406)四月“诛定陵公和跋”。邓渊赐死当是紧接其后之事。邓渊《代记》记事,最晚当止于此年,下距道武帝之死还有三年半的时间。道武帝死于天赐六年(409)十月,年三十九,算是盛年之君。但他自幼多艰,历经波折,从复称代王到建立帝业,历二十四年之久,在政治上已到晚期,是嚆矢之末了。天兴五年(402)阳平之役获胜,道武帝驰骋疆埸生活从此结束,此后他思虑所及,多是“追思既往成败得失”,以及穷思如何跳出拓跋历史争位斗争的老路,实现帝位的平稳传承。这是一个非常棘手,很难决断的问题。道武晚年多猜疑忌妒,当与此有密切关系。而邓渊奉命修史,恰恰就在这个时候。
无力执政的道武帝,寄情校猎于新筑的犲山离宫,有时一年行幸三次之多,每次长达数月。他嗜服寒食散,药动颠狂不已。天灾变异使他恐惧,但更多的恐惧是政治性的事件。这种身心状态加重了他喜怒乖异,杀戮无节。邓渊之死也就是在道武帝这种心态下发生的。
据《官氏志》,天兴四年(401)九月“罢外兰台御史,总属内省”。可知邓渊天兴五年居馆职之时,是内省官员,修史事务,包括史实的搜求、翻译、斟酌、取舍,巨细无遗,都是在道武帝眼下进行。道武帝是一个深具历史感的人,对于拓跋旧事之可资借鉴者是非常留意的。崔玄伯对他谈论的许多汉典故事,虽然对他有启迪之处,但毕竟是隔了一层。而拓跋故事中本有许多可以资治者,道武帝更易理解,可以产生联想,直接利用。但这些保存于刻契结绳中的拓跋旧事,需要专门的人来解读;拓跋先人的口碑歌谣在史官中编辑使用,也先得翻译成汉文。所以《史通·史官建置》中说:“当代都之时,史臣每上奉王言,下询国俗,兼取工于翻译者,来直史曹。”邓渊供职史馆,必然也是“上奉王言”,即听取道武指授;“下询国俗”,即了解拓跋旧事,包括寻绎《代歌》,经过翻译由汉字记录,备国史采用。《邓渊传》史臣谓渊“才业秉笔”,这正是史臣的日常职分所在,也正是道武帝不时指授检核之处。道武帝喜怒乖常,史实中疑窦之生,全在乎他一念之萌,而史臣也许并未经意,它人更难理解。我推定邓渊死于修史之狱,就是从这里出发的。这是一场所谓腹诽之狱,一场不动声色的文字狱。它以诬枉之词定谳,后人不能确指原因,又不信坐和跋案的谰言,只能让它成为一樁不明不白的公案。邓渊人物不显,其死事又在国初,魏史中论及者少,后来又被更大的崔浩之狱遮掩,所以后世留意及此的人就少而又少了。
邓渊《代记》可能包含什么样的敏感问题,以至形成北魏头一樁国史之狱呢?据《邓渊传》,渊造《国记》(案当时的本名是《代记》)十余卷,“惟次年月起居行事而已,未有体例。”按史官修国史成例,这只是一种草创,后人谓之长编,今人所称初稿。刘知几之言曰:“书事记言,出自当时之简;勒成删定,归于后来之笔。然则当时草创者资乎博闻实录,若董狐、南史是也;后来经始者,贵乎儁识通才,若班固、陈寿是也。”邓渊之书显然只是史实排比的实录,以待后之儁识通才删定勒成,一般不会有雌黄褒贬。连所谓“当时之简”,也只是临时自鲜卑语翻译而成,并无现成简牍可用。如果此中出现口实,不过是译文中事实取舍而已。邓渊主持而成的译文中,不大可能有所谓“春秋笔法”问题,因为如前所说,邓渊贞白干事,未尝忤旨,亦无权势背景,遇到敏感问题,一定是小心处理,以避嫌忌。

而且,《代记》虽被称作《太祖记》,当包括拓跋先世事迹,相当于魏收书中的《序纪》;而真正的《太祖记》部分最多只记到天赐四年,并未完成。如果邓渊书被认定有问题,只能是出在拓跋先世和道武帝本人至天赐四年为止的这个时间段里,而此时间段内道武之史是当世之事,道武亲自过问,估计难产生嫌疑;而道武先人事迹,相当于魏收书的《序纪》部分,则其事其言已久历时日,滋生嫌疑的可能要多一点。现在就来看能否找到一些蛛丝马迹。
不少学者认为崔浩国史之狱所谓“备而不典”、“暴扬国恶”,是指国史所录的一些拓跋故事,在昔本为旧俗使然,无关风化,在今则不合常道,有悖人伦。史臣直笔招祸,最易在此方面产生。周一良先生《崔浩国史之狱》[39]判断献明帝死后贺后被其父昭成帝收娶,所以贺后先后所生既有献明帝之子,又有昭成帝之子,诸人行辈既为兄弟,又为叔侄。这在北俗中蒸报之事本无所嫌,如果《代歌》中有此等内容,也不一定会受到注意,可是记入《代记》,诸人行辈混乱所涉人伦问题就暴露出来了。我自己在考察北魏后宫子贵母死之制时,对此现象也有所发现,有所议论。国史所记这类本无足异的拓跋旧事,在道武帝成为专制帝王以后极易成为定罪口实,崔浩国史中的“不典”、“国恶”,的确可以从此得到解释。进一步说,这些口实,当以道武建国以前所传而迻译所得者居多,记载这些事的国史,并非崔浩新撰而是已有的邓渊《代记》。因为邓渊有《代歌》参考而崔浩则不可能有新的资料可据,不能凭空造成。我认为崔浩之狱滥觞于邓渊之狱,这是一个重要理据。至于在两次狱事中究竟是哪一个具体问题形成道武帝和太武帝的痛点,是否每次还有更为直接的兴狱的政治需要,由于资料缺乏,本文不拟探讨。
还有一个值得思索的现象,就是太武帝恢复史馆以后,修史之事与以前邓渊相比较,进展非常缓慢,似乎有某种障碍存在。案邓渊死在天赐四年(406),太武帝恢复史馆在神二年(429),其间二十余年国史“废而不述”;崔浩书成而大狱兴,在太平真君十一年(450),其间又是二十年有余,新纂成者除补足的《道武纪》以外,不过是《明元纪》、《太武纪》(未竣)而已。时日迁延太久,令人生疑。其中原由,我们先从太武帝修国史二诏试作分析。
据《崔浩传》,太武事功有成,神二年“诏集诸文人撰录国书,浩及弟览、高谠、邓颖、晁继、范亨、黄辅等共参著作,叙成《国书》三十卷。”此为前诏。太延五年(439)太武帝平凉州,完成了大功业,于是诏崔浩监修国史,大意说神后戎旗仍举,而“史阙其职,篇籍不著,每惧斯事之坠焉”。所以采取特别措施,“命公留台综理史务,述成此书,务从实录。”此为专门给崔浩之诏,我称之为后诏。二诏不同之处,一是后诏崔浩留台监秘书事,综理史务,并以中书侍郎高允、散骑侍郎张伟参著作,这就是专人专责,提高史臣档次,务期于成,而不是像前诏那样,诸人共参著作,崔浩只是参与者之一厕列其间而已;二是后诏提出特别的编纂要求,这就是“务从实录”,这是前诏所没有的。至于前诏所说“叙成《国书》三十卷”或是预期之词,实际上当时未曾完成而完成于后诏之后,所以后诏才说此前“史阙其职,篇籍不著”。
细审二诏,我认为修史难成,障碍在于史臣趑趄不前。太武帝前诏以一般事务看待修史之事,并未特予重视,对障碍也没有估计。趑趄不前的原因,我认为是邓渊史狱遗留下巨大影响,其中关键又是史臣不敢直笔实录。所以后诏才强调“务从实录”,实际上是太武帝亲自承诺不会重复出现邓渊史狱,以安史臣之心。
邓渊“祸非其罪”,必修史有所违碍,只是谁都不便明言。这是史臣寒心之事,是明元帝一朝史事“废而不述”,太武帝时仍然“篇籍不著”的真正原因。太武帝前诏所命史官,邓渊之子邓颖就在其中,这可能是太武帝故作无事的一种姿态,但事实上会产生负面影响。太武帝后诏正是针对此中问题,针对史臣缄口裹足,惟恐愆失心态而发。后诏特命有地位、有担当、有能力的大臣崔浩总监其事,也是表示有事可由崔浩负责,不致牵连史臣。一般说来,修史中是非得失的评骘,惶惶中的文士或可藏而不露,但是据实录文,文士逃避责任的余地很小。所以“务从实录”一语,加上崔浩总监,应当能释史臣重负,让他们安心著述。
崔浩本来是有德于太武帝的,太武帝得以早为储君,抚军监国,以至于为国副主,就是出于崔浩向明元帝的力荐。崔浩极富军国智谋,迭有大功,太武帝令歌工历颂群臣,有“智如崔浩”之颂。而且崔浩在朝谨敬避嫌,“以示不敢犯国”,甚至早在道武帝杀戮无节,左右力求逃隐之时,崔浩随侍左右,“独恭勤不怠,或终日不归”。他是邓渊之狱的目击者。所以用他综理史事,应该是最合适的人选,是推动史臣尽力著述的重要一步。他本人应该是深知太武帝对他的知遇之恩的。
崔浩不负所托,受命十年,国史告成。道武纪及拓跋先人追叙部分以邓渊《代记》为蓝本而有所加工,所谓“删定勒成之笔”,当出崔浩。邓渊死后道武纪所缺部分自然也由崔浩续成。太宗明元帝及世祖太武帝纪由崔浩、高允同撰。三纪的注疏高允居多,总裁在崔浩[40]。从后来崔浩罹大狱而高允无罪的情节看来,除了景穆极力保护高允以外,也许还有别的原因,例如所谓“备而不典”问题不出在太宗、世祖二纪,而出在崔浩续成太祖纪中;不出在各纪注疏而出在选材综理方面,等等。前有邓渊之狱,崔浩又蹈覆辙,我看只能从崔浩当真执行“务从实录”寻求解释。
崔浩总裁史事,首在破邓渊狱后史臣裹足局面,一切惟“务从实录”是崇,显示自己忠于太武帝的付托。而竞趋之士为了迎合崔浩,更以国史刊石立衢,“欲彰浩直笔之迹”。古来权势宠幸者于臣君相与之际,有时未达一间,酿成事端,自贻伊戚。智如崔浩,也不免忘乎所以,竟不思伴虎之谚。所以高允议论刊石诸事,“分寸之间,恐为崔浩万世之祸”。希君之旨以实录为依归,以直笔相标榜者,终于栽倒在直笔之下!人主的复杂心态使希旨者祸福无常,给史学造成祸害,问题不正是出在“分寸之间”吗?
古书所见,有一类智者以“揣摩之才”见长。赵国虞卿作《虞氏春秋》八篇[41]“以刺讥国家得失”,其中有“揣摩”一篇。隋代杨素称赞封伦善于揣摩,史臣称封“多揣摩之才”[42]。崔浩盖亦封伦之俦,揣摩人主之意而遭反噬,成为千古史坛话题。崔浩以直笔、实录获谴,不悖于史德。但他并不理解太武帝所言“务从实录”,除了有惩于邓渊狱事外,还有他的理解与需要。诚如《史通·序传》所说:“苟能隐己之短,称其所长,斯言不谬,即为实录。”“盛矜于己而厚辱于先”,那就难保不取祸了。当拓跋君主尚生活在名教以外之时,先人事迹无涉荣辱,无大违碍,而当皇权在握,礼法人伦成为衡量准则之时,所谓实录也就是另有尺寸了。如若不然,皇权就要裁剪史法,约束史家。这也是研究中国史学史的一个值得思考的问题。
实录之说始自刘向等人赞誉太史公书之“其言直,其事核,不虚美,不隐恶”,从此实录被尊崇为史德之首。至于著史冠实录之名,唐宋定实录之制,明清开实录之馆,历代相仍,有保存史料之功,但难说都能遵循太史公之所界定。刘知几以张俨《默记》、孙盛《晋阳秋》为例,“以验世途之多隘,知实录之难遇也”。[43]他感叹“古来唯闻以直笔见诛,不闻以曲词获罪” [44],这似乎就是暗指崔浩狱事。
史馆再开以后,直笔仍然是修国史中的大问题。孝文帝尝谓史官当“直书史实,无讳国恶”[45],但史官自有忖度,趋避在己,再也不会出现邓渊,更不会出现崔浩。韩显宗答孝文帝之问,自诩“直笔而无惧”[46],但实际上却无寸进。近一个世纪中史官备位,少有著述,崔光直云“但须记录时事,以待后人”[47];崔鸿撰《十六国春秋》,以其涉国初事,惧其言多失体,迟不敢行[48]。邓渊、崔浩事件阴影难消,国史之学难振。尔朱荣入洛后竟有山伟、綦儁等倡言“国书正应国人(案指代人)修缉,不宜委之余人”,以至二十余年中代人掌史事,一无所成。及至东魏魏收受修史之命,执政者所关注议论,忧心所在仍是直笔问题。他们自然知道不许直笔则无史可言,允许直笔又惧扇扬褒贬。高欢戏语魏收“我后世身名在卿手”;魏收言志,故意标榜“臣愿得直笔东观”[49]。高洋效法孝文帝之意,直言“好直笔,我终不作魏太武,诛史官”[50]。诛史官之始作俑者实际上是道武帝,此时其事已被人淡忘了。这些资料陈识仁的文章都已引用,无烦多说。只是附加一句话:修国史引出如此纷纭,历代少见,追根溯源,还是北魏史风造成,这种史风正是国史狱事不可避免的后果。
魏收著史,时过境迁,拓跋先人行事已失去敏感性,所以收书中得以保留一篇《序纪》,分量虽然不大,迄今仍为研究拓跋先人历史唯一重要资料,而且是基本上经得起验证的资料。经过邓渊、崔浩两案以后,《序纪》中的资料一定有不少磨合删削,在相当程度上已失去从鲜卑语迻译时的原始面貌。但是五胡诸载记之中,还不见有保存先人历史资料像《序纪》那样系统准确之例。只是自邓渊、崔浩以来百余年中史风污染,当途者既求誉于国史,又畏国史之毁;既不能不标榜直笔实录,又吹毛求疵于直笔实录之中。风气积久,洗之愈难。不止是帝王干预修史,连权势之辈都想利用国史巩固家族地位,多求史官为先人作佳传。这就是《史通·直书》所说史臣也只有“宁顺从以保吉,不违忤以受害。”魏收的一部《魏书》,虽不远于是非,但亦难免无疵,未行时已多纠纷,刊布后被指责为“秽史”,以至于历代学者屡起为魏收辨诬。在我看来,这也是北魏史风污染的一种后果。

行文既竟,还有几句赘语。近年我所作拓跋早期历史研究的几篇文章,某些环节找不到确证,因而有推测成分,论述难得周全准确,大体都随处注出了。本文也是如此。对邓渊狱事性质的判定,旁征颇有,但迄今找不到直接证明,而以下行文与此点关系较大。这在逻辑上是犯了“丐词”的毛病。我想,古史中有大量“待垦荒地”,由于直接资料缺乏,研究难于下手,历史的空白点难于填充,杂乱的现象难于作出说明。出于这种考虑,我把此文(以及其它相关文章)作为研究拓跋历史的一种思路,一种探寻,而不是作为确凿的结论奉献给读者,希望能起到一点从空白处、从杂乱中探索拓跋历史问题的促进作用。果能如此,此文本身即令言而不中,我觉得还是值得的。也许,这可以从“得鱼忘筌”、“得意忘言”之义来理解吧。

[1]拙著《北魏后宫子贵母死之制的形成和演变》曾出一长注解释“代歌”问题,但未细究。
[2]参唐长孺《魏晋杂胡考·步落稽》,《魏晋南北朝史论丛》。
[3]《魏书》卷108之三《礼志》三。
[4]阎步克教授见告,北魏的太常乐户,属杂户之一种,数量不少,可以视为拓跋朝野崇尚乐舞的佐证。我同意这个说法。
[5]赵超《汉魏南北朝墓誌彙编》(以下简称《汇编》),天津古籍出版社,1992年, 303页。元怡、元肃,景穆帝之后,《魏书》卷19下有传。本文所用赵超《汇编》资料,均分别与中州古籍出版社1989年版《北京图书馆藏中国历代石刻拓本汇编》第3、4、5、6册所刊拓本对勘。
[6]

FONT>《汇编》,150页。
[7]《汇编》,314 页。张瓘并非代人,大概是受代风影响而作此说,也可能只是自饰家世而已,并非真有可吟可唱的歌谣。案墓主此年七月死,正朔在北魏,十一月葬,已属东魏正朔了。
[8]《汇编》,381页。此墓志《北京图书馆藏中国历代石刻拓本汇编》未收。
[9]元侔墓志见《汇编》60页。据《北史》卷15,“昭成帝九子,庶长曰寔君,次曰献明帝寔,次曰秦王翰,次曰阏婆,次曰寿鸠,次曰纥根,次曰地干,次曰力真,次曰窟咄。”此受久即寿鸠,居第五,而墓志则谓为第八子。按罗振玉《丙寅稿》已注意到《魏书·宗室传》所载此世系与墓志有异。岑仲勉《元和姓纂四校记》(1994年整理本,中华书局,401页)亦略有说。又,《元和姓纂》引此世系中有名翰者,即秦王翰,《北史》作地干。
[10]《魏书》此卷据《北史》及它书补,而《北史》与今本《魏书》又有世系歧异处。点校本《魏书》校勘记据赵万里说,以此歧异处《北史》是而《魏书》非。
[11]元昭为昭成帝玄孙,志见赵超《汇编》页146。
[12]《魏书·官氏志》,宗正,六卿之一,第二品上。《汇编》140页元斌墓志,斌为景穆帝曾孙,官宗正丞,“器识闲雅,风韵高奇,澹尔自深,攸然独远”,完全是汉人名士气质。这样的知识分子拓跋人中还很少见。
[13]马长寿《碑铭所见前秦至隋初的关中部族》。页57—59,中华书局,1985。碑在陕西渭北下邽镇。
[14]据《原州古墓集成》,文物出版社,1999。
[15]近见日本学者松下宪一提交北朝史国际学术会议论文《北魏內朝制度考略》,所辑史籍及墓志中带有羽真号者有十六例。羽真一词迄今尚无确解。松下认为系北魏爵名以赐内附者。但上举各例多有于羽真之外另有爵名,而且还有皇族人物,则羽真之义毕竟难于确认。
[16]文成帝南巡碑尚有折纥真、斛洛真。另外,《汇编》267页比和真, 294页他莫汗真,365俟勤真,是否都是人物职称身份之词,不敢肯定。
[17]王先《魏书》只此一见。《晋书·苻坚载纪》记淝战中苻融陷寿春,执晋安丰太守王先。二王先年代相近,不知是否一人。
[18]《天象志》此卷魏收书亡,后人取张太素书补入,参点校本校勘记。此年天象志既记北事(贺太后崩),又记南事(晋帝殂),盖此时已开始有了南北两分认识,参见下注。
[19]《魏书·乐志》释皇始为开大始祖之业;《通鉴》胡注认为“南北之形”定于此年;正光二年杨氏墓志有“皇始之初,南北两分”之语(见赵万里《集释》及赵超《彙编》)。《天象志》(三)天兴元年(398)十二月“群臣上尊号,正元日,遂禋上帝于南郊。由是魏为北帝,而晋氏为南帝。案初上尊号是皇始元年事,即帝位在天兴元年,大抵北帝、南帝之形定于皇始,制度确定实施则在天兴。
[20]《魏书》111《刑罚志》。
[21]《魏书》24邓渊传。
[22]其下还列仪曹郎中董谧撰郊庙、社稷、朝觐、宴飨之议,三公郎中王德定律令、申科禁,太史令晁崇造浑仪、考天象。连同邓渊在内,都是当时各有专长的汉士。吏部尚书崔玄伯则总而裁之。
[23]《隋书》14《音乐志》中载北齐祖珽上书之言。
[24]陈识仁《北魏修史略论》(见《结网编》,台湾东大图书公司1998)237页文中,参考杨翼骧编《中国史学史资料编年(一)》(南开大学出版社,1987),断邓渊受命修史在天兴元年(398),似可酌。
[25]见《魏书·天象志》。事详后。
[26]《史通·古今正史》作十卷。
[27]《南齐书·魏虏传》谓平城“西三里刻石写五经及其国记”。此盖南人据传闻崔浩刻国史事,其国史亦称“国记”。称史书为记,《史记》、《东观汉记》都是例证。
[28]太武帝时,太祖这一庙号还是指平文帝;道武帝从烈祖之称改称太祖,是孝文帝太和十五年事。高允在太武帝时何得用太祖之号称呼道武帝?所以这整段文字都是经过后人改写的,不是太武帝时的原状。
[29]《魏书》卷62《李彪传》“自成帝以来至于太和,崔浩、高允著述《国书》,编年序录,如《春秋》之体,遗落时事,三无一存。彪与秘书令高祐始奏从迁、固之体,创为纪传表志之目焉。”修史人物不列邓渊,只能说明邓渊《代记》内容已被崔浩、高允之书吸收了。“三无一存”之说是笼统估计,以情理言,当是年代愈早,存者愈少。
[30] 参《十七史商榷》66“追尊二十八帝”条。《序纪》中只有二十七帝之名,是由于昭成帝之子、道武帝之父寔,未立早死,只附见于《序纪》昭成三十四年而未独立立目之故。
[31]例如《礼志》(一)天兴元年道武帝即帝位祭天地,理当用正式国号,故祝辞用“惟神祇其丕祚于魏室”之语。
[32]《历史研究》1992.3.何文着重分析拓跋力求争神州正统,改代为魏,守旧者则仍以代为称。称魏称代,何文举证甚多,文献墓铭均有。
[33]《通鉴》记永入长子即位在前,窟咄败亡在后,《本纪》记二事先后相反。实际上这大致是同时发生的事。
[34]代国无力助西燕抗衡后燕,西燕终于在394年为后燕所灭。
[35]《四库全书总目提要》史部《三国志》条。
[36]见《结网编》,台北市东大图书公司出版,1998。
[37]《魏书·官氏志》神元时内入诸姓有“素和氏,后改和氏”,和跋历代当世领素和部落。《元和姓纂》卷8去声十一暮,素和氏:“后魏有尚书素和跋。”
[38]和跋部落所驻,可以考知。《和跋传》太祖校猎豺山,“群臣佥言跋世居此土,祠冢犹存”。据《读史方舆纪要》卷40,豺山在善无,今山西右玉境,但有异说。
[39]见周著《魏晋南北朝史札记》,中华书局,1985。
[40]与高允同参考作的张伟,从其本传看,不但未罹刑罪,甚至未提及参预修史之事。大概张伟在后诏中虽有其名,而实际上未尝参与。
[41]《史记》卷76《虞卿列传》。《汉书》卷30 《艺文志》著录《虞氏春秋》十五篇,另有《虞氏微传》二篇。
[42]《旧唐书》卷3《封伦传》。
[43]《史通通释·直书》。
[44]《史通通释·曲笔》。参同书《疑古》引《孟子》和汉景帝、魏文帝之言。
[45]《魏书》卷7《高祖纪》(下)
[46]《魏书》卷60《韩麒麟传》附显宗传。
[47]《魏书》卷67《崔光传》附崔鸿传。
[48]同上。
[49]《北史》卷56《魏收传》。
[50]同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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胡宝国:读《拓跋史探》

田余庆先生新作《拓跋史探》已于2003年3月由三联书店出版。全书24万字,主要讨论了三个方面的问题。第一,北魏子贵母死制度与离散部落的关系。第二,拓跋与乌桓共生的问题。第三,《代歌》、《代记》与《魏书》序纪的关系。我认为,其中第一部分是全书最为重要、最为精彩的部分。以下的讨论主要围绕这部分展开。 
关于北魏子贵母死这一现象,前人早已注意到。赵翼说:“立太子先杀其母之例,实自道武始也。”(《廿二史札记》卷一三“《魏书》纪传互异处”。)周一良先生说:“拓跋氏入中原前之旧制,凡其子立为太子者,母妃先赐死,至孝文帝母犹因此而被杀。但北方其他少数民族未闻有此风俗。且游牧部落亦不如封建王朝之易于发生母后专权之例,其来源尚待研究。”(《魏晋南北朝史札记》)韩国学者朴汉济对此提出过一个解释。他认为,子贵母死既非拓跋旧法,也非汉制,而是北魏胡汉体制中的特殊事物,其目的是为了加强皇权。(朴说见田书所引)这个解释是不错的。 
关于北魏离散部落,《魏书》中一共有三条记载。《魏书》卷一一三《官氏志》:“登国初,太祖散诸部落,始同为编民。”《魏书》卷一○三《高车传》:“太祖时,分散诸部,唯高车以类粗犷,不任使役,故得别为部落。”《魏书》卷八三上《贺讷传》:“其后离散诸部,分土定居,不听迁徙,其君长大人皆同编户。”对于道武帝离散部落,分土定居之举,研究者多从拓跋社会由部落联盟向国家转变这个大的时代背景下求得解释。这个解释也是不错的。 
总之,不论是子贵母死,还是离散部落,都是老问题了,而且也都有了不错的解释。不过事情常常是这样的,不错的解释往往对我们妨碍最大,因为它使得我们有理由停下来,不再进一步思考。田余庆先生的可贵之处却恰恰是不满足于此,而是按他惯常的思考习惯,在一般人停下来的地方继续穷追不舍。他指出:“拓跋鲜卑,相对于先后兴起的其他胡族说来,是一个发展缓慢的部族。东汉桓帝时拓跋南迁,‘统国三十六,大姓九十九’,群体庞大松散。汉末建安年间拓跋诘汾再次南迁,部落联盟更扩大了。《魏书·官氏志》所谓‘七族’、‘十姓’,是拓跋部落联盟新形成的核心,血统亲近,‘百世不婚’。拓跋部作为联盟领袖,其后妃必取之于七族、十姓以外的部落,其女子也必于七族、十姓以外择偶。因此,在一定的时间内,可能出现一些与拓跋部世代为婚的部族,形成于拓跋部的特殊关系;由于君权不张,拓跋后妃也就自然而然地居间起着联络作用,甚至有可能成为维系拓跋部落联盟的关键人物。”(24-25页)在本书的另一处,作者明确写道: “道武帝建国,并没有强大的外界敌人要去认真对付,真正棘手的倒是他的母族部落和妻族部落,甚至还有他自己的母、妻。这一现象令我恍然大悟,原来道武帝用战争手段”离散部落“,首当其冲的竟是母族贺兰和妻族独孤,这并不是偶然的现象。打破部落联盟的束缚,建立帝国,是此举直接的,急切的原因。至于更为根本的社会原因,如部落役使之类,在当时似乎是第二位的。……离散部落之举和子贵母死制度看似无涉,却是内蕴相通,后者是前者的后续措施。”(3页)至此我们看到,作者从他独特的思考角度出发,终于把本来属于皇室内部的子贵母死制度与看似毫不相干的离散部落问题结合了起来。两个问题的结合真可谓互相发明,相得益彰。如果没有联系到离散部落,关于子贵母死的问题实际上已经无话可说;如果没有联系到子贵母死,离散部落的问题就难以落到实处,而只能是国家形成理论的一个具体例证而已。 
诗歌语言中有所谓“陌生化”之说。一位诗人朋友曾就此向我解释说,“形式主义”批评家们提出过一个概念。他们认为文学,这里主要指诗歌,目的就是要把语言“陌生化”,也就是说,让语言能够给人以新的刺激,提供看待世界的新角度。借用这样一个概念,我们不妨说,田余庆先生也是把我们熟悉的问题陌生化了。在原本已经题无剩义之处开掘出了新的局面,提供了新的思考动力。不过我这里要强调的是,诗歌语言的“陌生化”是诗人的有意追求,而田余庆先生的“陌生化”却并非刻意为之,而只是他研究工作的客观结果而已。 
与陌生化的结果相反,对于熟悉他研究特点的人来说,作者在书中所使用的研究方法是一点也不陌生的。这个方法是什么呢?其实就是政治史的方法。我们知道,在《东晋门阀政治》一书中,作者曾研究了南方几大家族的政治关系,而在《拓跋史探》一书中,作者研究的则是北方几大部族的政治关系。这本书的各个部分总括起来说,实际上就是一部拓跋早期政治史。众所周知,年鉴学派重视长时段,而对于属于短时段的政治史则比较轻视,认为是“转瞬即逝的尘埃”。这个思想对我影响很大,所以在以前写的《读<东晋门阀政治>》一文中,较多地指出单纯政治史的缺陷。但是读了《拓跋史探》,我却感到政治史的方法也有它不容忽视的长处。政治史虽然不能解释一切,但从此入手,却也可以发现并解释民族史上的很多重要问题。具体到早期拓跋史,政治史的方法显得尤其必要。如果从传统的民族学的角度去研究,除非有更多的考古发现,否则已经没有多少可以利用的资料了,而一旦从政治史的角度切入,就会发现还有不少值得我们分析的素材。正是借助于政治史,作者才描绘出了一个早期拓跋族的隐约身影。由此,拓跋早期的历史不再只是一种部落→国家的理论概念的演进,而是变得具体了、生动了、活泼了。 
研究政治史,不只田余庆先生一人。但他的政治史研究却别具一格,颇有值得论说之处。我们知道,研究政治史,既可以依据政治学的某种理论框架展开,也可以不要这些框架。在我看来,田余庆先生属于后者。我们看作者在本书前言中的一段话:“五胡十六国这一破坏性特别突出的时代得以结束,归根结柢是五胡日趋融合,其主要部分终于陆续积淀在农业地区而被汉族文明逐渐同化之故,这可说是今天史界共识。但是,在这漫长过程行将结束而又尚未结束的时候,为什么是拓跋部而不是别的部族担当了促死催生的任务呢?”(1-2页)我们再看作者在《东晋门阀政治》中就“王与马共天下”说的一段话:“为什么江左会出现这种政治局面呢?总的说来,偏安江左是八王之乱和永嘉之乱的产物,而江左政权依赖于士族,则是门阀制度发展的结果。士族高门与晋元帝‘共天下’,归根到底可以从这里得到解释。但是这还不能说明为什么是琅邪王氏而不是别的高门士族与晋元帝‘共天下’的问题。”(3页)这两段话充分反映了他对历史的认识。这个认识简单地说就是:当时的事情必有当时的原因。由此,他自然不会满足于理论框架给出的解释,也不会满足于一般性的说明,而是一定要找出一个具体的历史原因。受这种认识的引导,他在本书中又有如下的一段话:“我不排除道武帝曾在某个时候发布过离散部落号令的可能,也不排除某些具有定居条件的部落俯首接受号令的可能,但不认为所谓离散部落主要就是如此而无其他更直接、更急迫的原因和具体的过程。”(62页)把问题具体化的思路会很自然地诱导出新的疑问:道武帝究竟是在什么时间?在什么地点?离散了哪些部落?道武帝母后究竟又是来自于哪些部落?回答了这几个问题,离散部落与子贵母死之间的关系就自然地呈现了出来。在解释历史现象时,研究者很容易急切地求助于“规律”、“趋势”来加以说明,他却反其道而行之,一再向“具体”索要答案。与众不同的思考方法使他更像是一位旷野中的孤独旅行者。在他不断的追问中,泛泛的解释愈来愈显得苍白无力,而我们原本熟悉的问题也终于变得陌生了。 
研究早期拓跋史,面临的最大困难是资料太少。作者虽然竭尽全力钩沉索隐,但很多地方还是不得不以推测来弥补资料的不足。这之中有的推测极有道理,给人以启发,但也有的推测难免令人生疑。 
在《<代歌><代记>与北魏国史》一文中,作者指出《魏书·乐志》中《真人代歌》“上叙祖宗开基所由,下及君臣废兴之迹”,应该就是拓跋史诗。根据有限的记载,作者进而推测,在当时替道武帝整理、辑集代歌者只能是汉族士人邓渊。以后邓渊又奉命修《代记》,《代歌》中的内容应是《代记》的主要资料依据。因此《代歌》、《代记》同源。邓渊之后,又有崔浩修国史。记录了早期拓跋史的《代记》基本包含在了崔浩的国史之中。这些资料以后又成为魏收《魏书·序纪》的蓝本。因此辑集《代歌》、撰成《代记》的邓渊应是《魏书·序纪》的第一作者。由此,作者就勾勒出了《代歌》→《代记》→ 崔浩国史→《魏书·序纪》这样一条史学发展线索。我认为这条线索不仅清晰而且很有道理。其中尤为可贵的是作者意识到《代歌》与《代记》之间可能的联系。《代歌》早已不存,根据有关的只言片语而注意到它的价值,并将其纳入史学史的发展线索中是很不容易的。 
与上述合理的推测相比,接下来的推测就不那么合理了。关于邓渊之死,史书中是有明确记载的。《魏书·邓渊传》载,渊从父弟晖坐和跋案,“太祖疑渊知情,遂赐渊死”。但作者不相信这条材料,反而认定邓渊与以后的崔浩一样,也是死于国史之狱。在毫无材料依据的情况下,作者为什么一定要做出这样的推测呢?我想,这或许是因为作者不自觉中已经被前面自己发现的《代歌》、《代记》的线索束缚住了。我们先来看崔浩国史之狱。崔浩因修史“备而不典”、“暴扬国恶”而遭祸。《通鉴》也说崔浩国史“书魏之先世,事皆详实,……北人无不忿恚。”。由此可知崔浩国史当是记录了一些有悖人伦、有伤风化的早期拓跋故事,因此惹怒了皇帝,引来杀身之祸。但是,崔浩所记拓跋早期历史是从哪里来的呢?根据《代歌》、《代记》线索,这些内容应该都是从邓渊所撰《代记》那里来的。既然如此,既然崔浩已经死于国史之狱,那么更早的邓渊能不死于国史之狱吗?看来,为了符合这个逻辑,作者只能让邓渊死于国史之狱了。 
更为值得商讨的问题还不是邓渊之死,而是关于离散部落的史料依据。根据作者的统计,贺兰部被离散的经过是这样的: 
第一次:据《资治通鉴》记载,北魏登国三年(388年)三月,“燕赵王麟击许谦,破之,谦奔西燕。遂废代郡,悉徙其民于龙城。”作者指出:“显然,慕容麟尽徙代郡民于龙城,当包括三十年前的前燕时期由贺赖头率领居于代郡平舒城的数万贺兰部民在内。”(67页) 
第二次:登国五年,道武帝与慕容麟合击贺兰、高车诸部于意幸山。稍后,铁弗刘卫辰又袭贺兰,贺兰部请降于拓跋,“遂徙讷部落及诸弟处之东界。”(70页) 
第三次:登国六年,贺讷兄弟内讧,后燕“兰汗破贺染干于牛都”,慕容麟“破贺讷于赤城,禽之,降其部落数万。燕主垂命麟归讷部落,徙染干于中山。”(70页) 
第四次:作者在叙述皇始三年贺讷之弟贺卢逃奔南燕后说:“至此,道武帝舅贺讷、贺染干、贺卢三人,只剩下贺讷一人,据《贺讷传》,此时贺讷已无所统领,而且后嗣无闻。道武舅氏中还有一个贺讷的从父兄贺悦,待道武‘诚至’有加,得到道武善遇。贺讷、贺悦的部民,自然也被强制离散,分土定居了。这是第四次离散贺兰部落,也就是现知的最后一次。”(70-71页) 
以上离散贺兰部事例中,第一次、第三次都是被慕容部离散的,真正被拓跋部离散的只有第二次、第四次。我们再看独孤部被离散的情况。 
第一次:《资治通鉴》登国二年记“燕王(慕容)垂立刘显弟可泥(亢泥)为乌桓王,以抚其众,徙八千余落于中山”。作者指出:“刘显八千余落徙中山,这是独孤部的主要部分第一次被强徙,是孤独部落离散之始。”(80页) 
第二次:刘亢泥降于慕容氏,《太祖纪》皇始元年(396年)六月“遣将军王建等三军讨(慕容)宝广宁太守刘亢泥,斩之。徙亢泥部落于平城。”作者指出:“这是《魏书》所见独孤部民第二次被强制迁徙。”(83页) 
独孤部被离散两次,一次是慕容氏所为,一次是拓跋氏所为,这与贺兰部被离散的情况类似。作者在59页曾分析说:“部落离散,就其实质说来,本来是部落发育的自然过程,它之所以在道武帝时比较集中地出现,却也是由于道武帝创建帝业的特别需要。这可以解释为什么离散部落只留下这几家外戚部落的个案,而大量的对道武帝帝业无害的部落却得以保存下来。”显然,作者十分关注、十分强调的是道武帝拓跋珪离散贺兰、独孤部落,而不是别人的离散行动。但是,根据他提供的事实,不论是对贺兰部还是对独孤部,离散部落的发动者都是不仅有拓跋氏,而且也有慕容氏。两家各占一半。既然如此,恐怕就不能把离散部落很特殊地仅仅看成是道武帝为打击外戚部落,“创建帝业的特别需要了”。应该说,作者也意识到了慕容氏在离散过程中所起的作用,所以在35页又补充说:“看来,贺兰部破败主要是拓跋部借慕容部之力,得利的是拓跋部。”这个补充其实没有太大用处。这里所谓“借慕容部之力”一说,给人的感觉似乎慕容氏只是前台的表演者,而拓跋氏才是幕后操纵者。如果真是这样,那么上述由慕容部发动的离散事例就不构成对本书观点的反证了,但遗憾的是,实际上并没有这样的材料可以证明。所谓 “得利的是拓跋部”云云,其实只是一种客观效果而已,并不能因此把慕容氏离散贺兰、独孤部归结为拓跋氏操纵的、有预谋的行动。 
这里还涉及到一个概念问题。究竟什么是离散部落?按书中多数场合的表述,所谓“离散部落”就是指强制迁徙部落。但十六国时期某个部族强制迁徙另一个部族从甲地到乙地是常有的事情。如果仅在此意义上来理解离散问题,那道武帝离散部落还有什么特殊意义好说呢?作者似乎也认识到这个问题需要解释,所以在 75页又说:“强徙部落自十六国以来就是常有的事,包含离散部落,但并非都离散。道武帝在完成帝业的过程中,从总体上意识到离散部落的深层意义,理解其必要性和可能性,因而采取更主动更连续更强烈的措施,不只是迁徙部落,而且还要离散部落。这是他与十六国君主的不同之处。”按这个表述,似乎强制迁徙部落又不等同于离散部落了。 
按我的理解,强制迁徙部落不等于离散部落。前引《官氏志》说:“登国初,太祖散诸部落,始同为编民。”《贺讷传》说:“其后离散诸部,分土定居,不听迁徙,其君长大人皆同编户。”按离散的结果既然是“同为编民”、“君长大人皆同编户”,因此所谓“离散”应该是指打破部落内部旧有社会等级结构而言的,唐长孺先生也是这样理解离散部落的,他说“部落的解散使贵族、人民都成为单独的编户。”(唐长孺:《拓跋国家的建立及其封建化》,载《魏晋南北朝史论丛》205页。)而所谓强制迁徙部落,即只是把某部落从甲地强制迁徙到乙地是不可能起到这种作用的。按作者上面的表述,似乎道武帝不只是迁徙部落,而且还离散了部落,但根据前面提到的有关贺兰、独孤部的史料,我们见到的还只是迁徙而不是离散。总之,如果我的理解不错,如果强制迁徙部落真的不等于道武帝登国年间的离散部落,那么本书所有有关于此的讨论就值得重新考虑了。 
写到这里,我不想再就作者的种种可疑推测说更多的话了,因为作者本人早就认识到了这个问题。他在前言中说:“我衰年涉入拓跋史题,颇感力不从心、步履维艰,更感到资料不足,结论难下。”他还说:“基于以上认识,我把本书所见主要作为窥探拓跋史的一种思路,而不一定是作为确切结论,奉献给读者,希望起到促进思考、共同探求的作用,以期尽可能把古史的这一模糊区域一点一点加以辨识。”凭借着几十年的研究经验,田先生当然知道要尽量避免过多推测,本书诸多推测实再是出于无奈,正所谓巧妇难为无米炊。史料的极度缺乏制约着每一个研究者。他已经竭尽全力了,尽管有些推测还需要再斟酌,但他毕竟已经给我们描述出了一个以前未曾见过的、精细的历史过程。这是我们要十分感谢他的。 
《汉书》卷六二《司马迁传》载,西汉刘向、扬雄“皆称迁有良史之材,服其善序事理,辨而不华,质而不俚,其文直,其事核,不虚美,不隐恶,故谓之实录。”本传又载司马迁语:“所以隐忍苟活,函粪土之中而不辞者,恨私心有所不尽,鄙没世而文采不表于后也。”“实录”之说、“文采”之说,正反映了史学的两个特点,一方面,史学是求真的学问,另一方面,史学也是展现史家思想、才华与魅力的手段。换言之,史学不仅是科学的,而且也是艺术的。从求真的角度看,我对《拓跋史探》多有疑惑;从展现史家个人才华与魅力的角度看,我又认为这是一部成功的著作。这种矛盾的态度或许就说明了这样一个浅显的道理:真与美有的时候并不能完全统一。 
(载《读书》2004年第6期,题目被编辑改为《在题无剩义之处追索》)
学术批评网(www.acriticism.com)转发 2005年11月20日

  1. Favicon of http://www.bestsunglassesbrand.com BlogIcon Discount sunglasses 2011.07.08 17:39

    구글 서비스는 다 좋은데 감성적인 면은 영 꽝입니다. ^^

《生成哲学》原名叫《事物生成共源根》(Ghob dongb soudjanx jidjios oddel jiongx)。全篇共三章四十九句。第一章一十九句,论述事物生成的源根和人类进化的历程;第二章十六句,论述事物生成基本要素,关系和结果;第三章一十四句,论述“生”和“成”的辩证关系。

是湖南花垣县猫儿乡苗学大师龙玉六先生口授,源自《古老话-后换篇》中的一章,相传出自苗族先民哲人与部落领袖阿濮补僮。这篇文献共339字,以朴素的唯物主义历史观讲述了万物生成的根源和人类进化的历程:

“先出现天,后出现地。从那时起,盘古就分开了天和地。先安好日月,后装齐星斗,山水风雨都齐备。天气罩着地,地气映着天,天气化成了搜媚若,地气化成各薄港搜。从那时起,什么东西都具备生成条件,仡索才来造生命,陆地水域有生物存,先起苔藓生鱼虾,后有蛆虫蛇蟒鸟雀虎狼牛马;接着才有猿猴类人猿,最后才育原始人。人用脑想用手做,从古代直到如今,归他来掌管乾坤。干万事物同一理,事物生成共源根。”

出自于:东人达《试论中国少数民族史学》史学理论研究 2008年第1期。

278 279禁娶樂人

딴따라와 결혼할 수 없다. 만약 한다면 곤장을 내리리라!

n 元典章 戶部四 (禁取樂人為妻)(通制條格校注 63)

n 元典章 戶部四 (樂人嫁女體例)(通制條格校注 62)

教坊司來管理樂人?

n 明 :娶樂人為妻妾

(唐明律合編 引 集解)(大清律輯注)(唐明律合編)

 

280 281 職官娶倡

관원은 창기를 처나 첩으로 모두 데려올 수 없음

n 元史 刑法志

n 元典章 戶部四 (哈迷與張德榮爭房地)

창녀에 대하여서 입는 옷까지 규정될 정도로 확실한 규정이 되어있었다. 사는 집도 동류와 살 수 있었다. 같은 호구이던가 혹은 포주이지 않았을까?

해당 사항을 보면 나중에 명대의 법률에서는 창녀와 딴따라가 거의 같은 수준이지만 원대에는 창녀보다는 딴따라에 대한 대접이 좋았다. 머..그게 그거이긴 하다만…

275 276 277 僧道娶妻

승려와 도인들은 결혼을 할 수 없다.(예전에 결혼한 것은 냅둔다-_;;)

단 고급 승려는 황제에게 재고를 부탁할 수도 있다.

 

n 元史 刑法志

결혼을 파기되며, 승려자격이 몰수된다.

n 元典章 禮部六(和尚不許妻室)

n 元典章 禮部六(道官有妻妾歸俗)

n 唐 : 해당 법률이 아예 없다. 원조에 들어오면서 밀종이 유행하였고, 기존 중원의 불교단체들도 그것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정혼을 한 상태에서 남자가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어떻게 해야될까?

273 定婚聞賤強娶

남자가 결혼비용을 내지 않으려 여자집에 쳐 들어가서 장인어른을 패고 강제로 데려와서 결혼할 경우에는 이혼이 가능하다.

n 元史 刑法志

n 元典章 刑部七 (定婚妻犯賤)

정혼녀가 딴 남자와 놀아날 경우. 남자는 결혼비용을 내지 않고 결혼을 할 수 있다.

n 元典章 刑法四

 

274 定婚夫為盜斷離

정혼을 한 다음에 남자가 살인죄를 저질렀다. 당연히 정혼을 취소할 수 있다.

n 通制條格 卷四 戶令 嫁娶 第六條(通制條格校注 73)

n 元史 刑法志

n 通制條格 卷四 戶令 嫁娶 第七條(通制條格校注 74)

那什么? --》 反問句

“不怕那什么?”

n 通制條格 卷四 戶令 嫁娶 第四條(通制條格校注 71)

唐律以后 :笞杖徒流死

徒流와 같은 경우 계속적인 나라에서 관리를 해주어야했기에, 최대한 줄였다. 하지만 몇몇 죄목에 대해서는(너무 낮으면 안되고 그렇다고 사형시키기에는 머한-_) 유형을 실시하였다.

원나라 시기의 多次盜竊,販賣私과 같은 몇몇 항목에 유형을 실시.

n 通制條格 卷四 戶令 嫁娶 第十七條 (通制條格校注 85)

n 大明令 戶令

본인이 원한다면 정혼을 파기할 수 있음.

266 男婦配驅

어린 남자를 데릴사위로 보냈는데, 이 어린 남자를 노예로 삼았다. 이것은 위법이다.

n 元史 刑法志

268 侄女嫁驅

양민은 노예신분의 아내로 보내는 것은 범법.

271 冒娶良人配驅

1- 만약 상대방이 노예신분인 것을 알면서도 결혼하는 것은 인정했다. 문제는 결혼을 한 순간 둘 다 노예신분이 된다. 이러한 규정은 오직 원나라시기에만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신분을 알지 못하고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특히 노예들은 세금을 내지 않기에 이런 경우는 국가에서 원하지 않는 행위이다.

n 元典章 戶部四 奴婢不嫁良人

n 通制條格[Baro1] 卷三 戶令 良賤為婚 第二條(通制條格校注65, 元典章 戶部四 驅口不娶良人) --- 元史 卷一零三 刑法志二 戶婚

보통 양민여자가 노예남자에게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의 경우는 매우 희귀하다. 두 경우 모두 그의 자식도 노예가 된다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북방의 관원이나 군인들이 남방에서 결혼을 하고 북방으로 돌아와서 팔아버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금지하였다.

n 元典章 戶部四 良人不得嫁娶驅奴(通制條格校注66)

결혼 전에 (상대방이 노예인지 아닌지) 정확하게 알아보지 않고결혼을 한 경우 법률적으로 권리가 없다.

n 元典章 戶部四 逃驅妄冒良人為婚

만약 상대방이 노예인지 모르고 결혼을 했다가 이혼을 한 경우에는 그 자식은 양민으로 인정된다.

n 通制條格 卷三 戶令 良賤為婚 第一條 (通制條格校注64)

至元十四年(1277)
근 40년 동안 노예신분에서 도망쳤다가 걸렸어도 무조건 노예로 돌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그 자식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현재 해당 마눌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봐서 이미 죽었을 것이고, 그렇다고 그 자식들은 일단은 노예신분이 된 다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다시 양민으로 회복된다.

n 元典章 戶部四 (犯賤妻轉賣為驅)

복작함의 극치. 정리하기도 힘들다. 후…

재미있는 것은 아버지가 죽기 전에는 노예신분이라는 것이다. 효도를 추구하는 상황때문인가? 그런데 이러한 일시적인 노예신분에서 결혼을 하는 경우는 어떻게 처리해야될까?

n 唐 奴妻良人為妻

원해서 결혼하는 것도 금지한다. 또한 그 자식의 경우 만약 원해서 결혼한 경우는 노비이고, 만약 속은 경우에는 양민이다.

n 唐 雑戶官戶與良人為婚

만약 노비가 그 딸을 양민에게 결혼을 시키면, 딸도 주인의 재산이기에 도둑질법으로 다스렸다.

n 明 良賤為婚姻

당사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해당 사항은 무조건 이혼임.


[Baro1]같은 내용이 통제조격과 원전장에 있을 경우 통제조격이 더 자세한 경우가 많다.

264 休妻再和

安牘=提控暗渡

1) 이혼을 한 뒤에, 다시 결혼한 남자가 죽고, 원래의 남자와 다시 결혼하는 것을 금지

2) 里邊有服內問題,시간이 흘러서 별로 중시 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단지 위의 규정을 위한것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3) 당시대의 법률에서는 결혼한 뒤에 장애인이 된 부인과 이혼할 수 있었지만(惡疾很可能與廢癡), 원나라 시대에 들어와서 이 사항이 없어졌고, 이는 명대로 이어진다.

 

n 元史 刑法志

n 元典章 戶部四 離異買休妻例(通制條格校注 86)

至元四年以前的舊例肯定是金律

七出和三不去(除犯賤)

法司 : 법률문서 보관 관리

n 通制條格 卷四 戶令 嫁娶 第十八條(通制條格校注 85)

 

n 唐 妻無七出而出之(唐律疏議): 注意義絕的概念(比較狹義)

惡疾很可能與廢癡

無子的定義是妻到50歲

n 唐 義絕離之

n 明 岀妻 《大明令 戶令》

義絕 :《大清律輯注》與元代不同的概念

265 擅嫁匠妻

공인이 도망을 친 뒤에, 그 책임자가 공장의 아내를 돈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결혼을 시켰지만 이것은 위법이다. 하지만 당시에 공인들은 나라에서 관리를 했고, 그 관리가 엄격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n 元史 刑法志

n 通制條格 卷四 戶令 擅配匠妻(通制條格校注 116)

一九〇〇年以来出土简帛一览

单育辰

来自 :http://www.bsm.org.cn/show_article.php?id=82

 

 

凡 例

一、本文收錄一九〇〇年至二〇〇五年十月間出土的隋之前有漢文文字的竹簡、木簡、竹牘、木牘、帛書,其他有漢文文字的木質出土材料如簽牌、削衣、謁、封泥匣等,亦酌情收入;
一、本文收錄出土簡帛按發現的時間先後排列,同時分開標明出土地點不同的簡帛;
一、本文收錄出土簡帛的體例爲:“出土時間”(出土時間不明者標明收繳或入藏時間)、“出土地點”(出土地點不明者標明收繳或入藏地點)、“出土簡帛的數量”、“出土簡帛的內容或名稱”、“發表出土簡帛材料的書、刊”;
一、簡牘出土時,多數已殘斷,本文多數情況下只能按出土簡牘時的考古編號標明,故“數量”後所附之“支”,絕大多數非指整簡之“支”;
一、本文“簡帛內容或名稱”系參考多家論著寫定,故有些名稱不能和發表出土簡帛材料的書、刊中論及的相一致;在名稱下標有     者表示出土簡帛原有篇題;
一、本文於“發表出土簡帛材料的書、刊”後無任何附加文字者,表明此書、刊已收錄了出土簡帛的全部釋文或圖版;若在“發表出土簡帛材料的書、刊”後標明“有介紹”或“有簡介”者,表明此書、刊未能收錄出土簡帛的全部釋文或圖版,或僅有出土簡帛情況的介紹性文字;
一、已公佈全部釋文或圖版的簡帛,本文只標明收錄出土簡帛全部釋文或圖版的書、刊,相關研究性著作概不收入;有些出土簡帛釋文或圖版爲多種書、刊完整收錄,本文儘量全面標明,因本文篇幅所限,不能全面標明的,選擇其中最重要的書、刊標明;
一、未公佈全部釋文或圖版的簡帛,本文儘量標明其出於何種考古發掘報告,若無考古發掘報告可引述,則擇要標明其出於何種論著、報紙、新聞;
一、本文的編成,參考了時賢的各種目錄、論著,限於篇幅及體例,恕不注明。

1901年 新疆古尼雅遺址(西晉)   50支   斯坦因第一次中亞考察獲
1、文書
Chinese documents from the sites of Dandan-Uilig, Niya and Endere, Ancient Khotan, 1vols, Oxford,1907(《古代和闐》第一卷後《丹丹烏裏克、尼雅、安得悅發現的漢文文書》);1985文物出版社《樓蘭尼雅出土文書》

1901年 新疆古樓蘭遺址(西域長史治所)(魏、西晉、前涼)   120支  斯文赫定第二次中亞考察獲
1、文書
Die Chinesischen Handschritfen und Sonstigen Kleinfunde Sven Hedin in Lou-lan, Stockholm, 1920(《斯文赫定在樓蘭發現的漢文寫本及零星物品》);1985文物出版社《樓蘭尼雅出土文書》;1999天地出版社《樓蘭漢文簡紙文書集成》

1906年 新疆古尼雅遺址(漢)  11支   斯坦因第二次中亞考察獲
1、文書
Les documents Chinois découverts par Aurel Stein dans les Sables du  Turkestan Oriental, Oxford,1913(《斯坦因在東突厥斯坦沙漠所獲漢文文書》);1985文物出版社《樓蘭尼雅出土文書》

1906年 新疆古樓蘭遺址(西域長史治所)(魏、西晉、前涼)  166支   斯坦因第二次中亞考察獲
1、文書
Les documents Chinois découverts par Aurel Stein dans les Sables du  Turkestan Oriental, Oxford,1913(《斯坦因在東突厥斯坦沙漠所獲漢文文書》);1931有正書局《漢晉西陲木簡彙編》,上海;1985文物出版社《樓蘭尼雅出土文書》;1999天地出版社《樓蘭漢文簡紙文書集成》

1907年 甘肅敦煌漢邊塞遺址(古敦煌郡玉門都尉、中部都尉、宜禾都尉)(兩漢)   709支(尚有近2000殘片未發表),帛書3件    斯坦因第二次中亞考察獲
1、文書
Les documents Chinois découverts par Aurel Stein dans les Sables du  Turkestan Oriental, Oxford,1913(《斯坦因在東突厥斯坦沙漠所獲漢文文書》);1931有正書局《漢晉西陲木簡彙編》,上海;1984文物出版社《疏勒河流域出土漢簡》;1990同朋舍《大英図書館蔵敦煌漢簡》,京都;1991年甘肅人民出版社《敦煌漢簡釋文》;1991中華書局《敦煌漢簡》

1909年 新疆古樓蘭遺址(西域長史治所)(魏、西晉、前涼)   4支   橘瑞超獲
1、文書
1915國華社《西域考古図譜》,東京;1985文物出版社《樓蘭尼雅出土文書》;1999天地出版社《樓蘭漢文簡紙文書集成》;1999學苑出版社《西域考古圖譜》

1914年 新疆古樓蘭遺址(西域長史治所)(魏、西晉、前涼)   60支  斯坦因第三次中亞考察獲
1、文書
1931有正書局《漢晉西陲木簡彙編》,上海;Les Documents Chinois de la troisième expédition de Sir Aurel Stein en Asie Centrale, London, 1953(《斯坦因第三次中亞考察所獲漢文文書》);1985文物出版社《樓蘭尼雅出土文書》;1993甘肅人民出版社《斯坦因第三次中亞探險所獲甘肅新疆出土漢文文書——未經馬斯伯樂刊佈的部分》又收入1支;1999天地出版社《樓蘭漢文簡紙文書集成》;2005上海辭書出版社《斯坦因第三次中亞考古所獲漢文文獻(非佛經部分)》

1915年 新疆吐魯番阿斯塔那六區一號前涼墓   木牘1枚  斯坦因第三次中亞考察獲
1、內容待考
Les Documents Chinois de la troisième expédition de Sir Aurel Stein en Asie Centrale, London, 1953(《斯坦因第三次中亞考察所獲漢文文書》);1997武漢大學出版社《斯坦因所獲吐魯番文書研究(修訂本)》;2005上海辭書出版社《斯坦因第三次中亞考古所獲漢文文獻(非佛經部分)》
1914~1915年 甘肅敦煌漢邊塞遺址(兩漢)(古敦煌郡中部都尉、宜禾都尉,酒泉郡西部都尉、北部都尉、東部都尉)   197支   斯坦因第三次中亞考察獲
1、文書
1931 有正書局《漢晉西陲木簡彙編》,上海;Les Documents Chinois de la troisième expédition de Sir Aurel Stein en Asie Centrale, London, 1953(《斯坦因第三次中亞考察所獲漢文文書》);1984文物出版社《疏勒河流域出土漢簡》;1990同朋舍《大英図書館蔵敦煌漢簡》,京都; 1991年甘肅人民出版社《敦煌漢簡釋文》;1991中華書局《敦煌漢簡》;1993甘肅人民出版社《斯坦因第三次中亞探險所獲甘肅新疆出土漢文文書—— 未經馬斯伯樂刊佈的部分》又收入4支;2005上海辭書出版社《斯坦因第三次中亞考古所獲漢文文獻(非佛經部分)》

1920年 甘肅敦煌漢邊塞小方盤城附近(兩漢)   17支     周炳南獲
1、文書
1990文物出版社《散見簡牘合集》;1991年甘肅人民出版社《敦煌漢簡釋文》;1991中華書局《敦煌漢簡》

1930年 新疆羅布泊默得沙爾漢邊塞遺址(兩漢)   71支    黃文弼獲
1、屯戍文書
1984文物出版社《疏勒河流域出土漢簡》;1989文物出版社《黃文弼歷史考古論集》;1998中央研究院歷史語言研究所專刊之九十九《居延漢簡補編》,臺北

1930~1931年 內蒙古額濟納河漢邊塞破城子A8、金關A32、地灣A33、大灣A35等地點(古居延都尉、肩水都尉)(兩漢)   10100支,帛書2件出於破城子,3件出於地灣
1、屯戍文書
1957 中央研究院歷史語言研究所專刊之二十一《居延漢簡·圖版之部》,臺北;1959科學出版社《居延漢簡甲編》;1960中央研究院歷史語言研究所專刊之四十《居延漢簡·考釋之部》,臺北;1980中華書局《居延漢簡甲乙編》;1987文物出版社《居延漢簡釋文合校》;1998中央研究院歷史語言研究所專刊之九十九《居延漢簡補編》,臺北,在《居延漢簡·圖版之部》、《居延漢簡·考釋之部》的基礎上,又收入1153支
附:裘善元舊藏居延漢簡歸屬:
(1)、臺北國家圖書館藏    30支    1959科學出版社《居延漢簡甲編》;1998中央研究院歷史語言研究所專刊之九十九《居延漢簡補編》,臺北
(2)、商承祚藏            6支     1959科學出版社《居延漢簡甲編》;1992《文物》第9期
(3)、中國國家博物館藏    6支     1959科學出版社《居延漢簡甲編》
(4)、南京博物院藏        1支     1959科學出版社《居延漢簡甲編》
(5)、上海博物院藏        1支     1959科學出版社《居延漢簡甲編》
(6)、香港金匱室藏        4支     1957《金匱論古綜合刊》第一期,香港
(7)、中國國家圖書館藏    2支     2005廣西師範大學出版社《簡帛研究二〇〇二、二〇〇三》

1931年 新疆古尼雅遺址(漢)   26支   斯坦因第四次中亞考察獲
1、文書
The British Library Journal, xxiv-1, Spring 1998(《大英圖書館館刊》);1998《敦煌吐魯番研究》第3卷;2001商務印書館《中國學術》第2輯

1931年 朝鮮平壤南井里東漢墓M116     1支
1、賵方
1934朝鮮古迹研究會《楽浪彩篋塚》,漢城;1972中央公論社《楽浪》,東京

1942年 湖南長沙子彈庫楚墓
1、楚帛書一件    1985中華書局《長沙子彈庫楚帛書研究》
2、商承祚舊藏十三殘片   1992《文物》第11期
3、其他帛書(美國賽克勒美術館藏)  1998廣西師範大學《李零自選集》有介紹

1944年 甘肅敦煌漢邊塞小方盤城附近(兩漢)   76支     夏鼐、閻文儒獲
1、屯戍文書
1948《歷史語言研究所集刊》第十九本;1961科學出版社《考古論文集》、1984文物出版社《疏勒河流域出土漢簡》;1991年甘肅人民出版社《敦煌漢簡釋文》;1998中央研究院歷史語言研究所專刊之九十九《居延漢簡補編》,臺北

1945年  甘肅武威南山剌麻灣(兩漢)    7支    夏鼐、閻文儒獲
1、屯戍文書
1998中央研究院歷史語言研究所專刊之九十九《居延漢簡補編》,臺北

1951年 湖南長沙五里牌楚墓M406   38支
1、遣策
1975《長沙發掘報告》;1995齊魯書社《戰國楚竹簡滙編》

1951~1952年 湖南長沙伍家嶺西漢墓M203   10支(僅1枚可識)
1、封泥匣
1975科學出版社《長沙發掘報告》

1951~1952年 湖南長沙徐家灣西漢(劉驕)墓M401   1支
1、有“被絝函”3字
1975科學出版社《長沙發掘報告》

1953年 湖南長沙仰天湖楚墓M167    42支
1、遣策  
1995齊魯書社《戰國楚竹簡滙編》;2000文物出版社《長沙楚墓》

1954年 湖南長沙楊家灣楚墓M569     72支
1、(內容待考)
1995齊魯書社《戰國楚竹簡滙編》;2000文物出版社《長沙楚墓》

1955年 湖北武昌任家灣六朝(鄭丑)墓     3支(僅一枚可識)
1、謁
1955《文物參考資料》第12期

1956年 河南陝縣劉家渠東漢墓M23    2枚
1、可見“□門一”三字
1957年《考古通訊》第4期

1957年 河南信陽長台關楚墓M1    148支
1、遣策
2、《墨子》佚篇或儒家著作
1986文物出版社《信陽楚墓》;1995齊魯書社《戰國楚竹簡彙編》

1957年 江蘇高郵邵家溝遺址(東漢) 1支
1、符簶
1960《考古》第10期

1959年 新疆巴楚縣脫庫孜沙來古城(漢?)
1959《文物》第7期有簡介

1959年 甘肅武威磨嘴子東漢墓M6 610支
1、《儀禮》(甲、乙、丙本)(或說爲慶氏或後氏本) 2、日忌雜占
1964文物出版社《武威漢簡》

1959年 甘肅武威磨嘴子東漢墓M15   1件帛書
1、鎮墓券
1964文物出版社《武威漢簡》

1959年 甘肅武威磨嘴子東漢墓M18 10支
1、王杖事例、詔書    
1960《考古》第9期;1964文物出版社《武威漢簡》

1962年 江蘇連雲港海州網疃莊焦山東漢墓   木牘2枚
1、衣物疏    
1963《考古》第6期有介紹

1963年 江蘇鹽城三羊墩東漢墓M1    木櫝1枚
1、衣物疏
1964《考古》第8期有介紹

1965年 湖北江陵望山楚(固)墓M1 207支
1、卜禱
1995中華書局《望山楚簡》;1995齊魯書社《戰國楚竹簡滙編》;1996文物出版社《江陵望山沙塚楚墓》

1965年 湖北江陵望山楚墓M2 66支
1、遣策
1995中華書局《望山楚簡》;1995齊魯書社《戰國楚竹簡滙編》;1996文物出版社《江陵望山沙塚楚墓》

1966—1969年 新疆吐魯番阿斯塔那西晉墓M53 1支
1、以練易棺交易文書
1972《文物》第1期

1971年 甘肅甘谷劉家坪東漢墓 23支
1、桓帝時有關宗室奏書、詔書
1984甘肅人民出版社《漢簡研究文集》

1972年 甘肅武威旱灘坡東漢墓 92支
1、醫藥書
1975文物出版社《武威漢代醫簡》

1972年 湖北雲夢大墳頭西漢墓M1 1支
1、衣物疏
1973《文物》第9期、1981文物出版社《文物資料叢刊》第4輯

1972年 山東臨沂銀雀山西漢墓M1 4942支及數千殘片
1、《孫子兵法》十三篇及五篇佚文(《吳問》、《四變》、《黃帝伐赤帝》、《地形二》、《見吳王》)1975文物出版社《銀雀山漢墓竹簡》(壹)(線裝本);1985文物出版社《銀雀山漢墓竹簡》(壹)(精裝本)
2、《孫臏兵法》(附下篇,爲《十陣》、《十問》、《略甲》、《客主人分》、《善者》、《五名五恭》、《兵失》、《將義》、《將德》、《將敗》、《將失》、《雄牝城》、《五度九奪》、《積疏》、《奇正》, 75年本有,85年本無)  1975文物出版社《銀雀山漢墓竹簡》(壹)(線裝本);1985文物出版社《銀雀山漢墓竹簡》(壹)(精裝本)
3、《尉繚子》  1975文物出版社《銀雀山漢墓竹簡》(壹)(線裝本);1985文物出版社《銀雀山漢墓竹簡》(壹)(精裝本)
4、《晏子》  1975文物出版社《銀雀山漢墓竹簡》(壹)(線裝本);1985文物出版社《銀雀山漢墓竹簡》(壹)(精裝本)
5、《六韜》  1975文物出版社《銀雀山漢墓竹簡》(壹)(線裝本);1985文物出版社《銀雀山漢墓竹簡》(壹)(精裝本)
6、《守法守令等十三篇》(《守法》、《要言》、《庫法》、《王兵》、《市法》、《守令》、《李法》、《王法》、《委法》、《田法》、《兵令》、《上篇》、《下篇》)  1975文物出版社《銀雀山漢墓竹簡》(壹)(線裝本);1985文物出版社《銀雀山漢墓竹簡》(壹)(精裝本)
7、《地典》
8、《唐勒》(《論馭賦》)
9、《十官》、《五議》、《務過》、《爲國之過》、《起師》等論政論兵類40餘篇
10、《曹氏陰陽》、《三十時》、《天地八風五行客主五音之居》等陰陽占候類10餘篇
11、算書、相狗方、作醬法等雜書
以上均見1985文物出版社《銀雀山漢簡釋文》,但此書所有竹簡皆未編綴

1972年 山東臨沂銀雀山西漢墓M2 32支
1、《漢元光元年曆譜》
1985文物出版社《銀雀山漢簡釋文》

1972年 湖南長沙馬王堆西漢(辛追)墓M1 361支
1、遣策
1973文物出版社《長沙馬王堆一號漢墓》;1980中華書局《文史》第10輯

1972年 內蒙古額濟納河漢邊塞遺址(兩漢)    21支     採集簡(具體出土地點不明)
1、屯戍文書
1990文物出版社《居延漢簡——甲渠候關與第四燧》;1994中華書局《居延新簡——甲渠候關》

1972~1974年 內蒙古額濟納河漢邊塞遺址(兩漢) 19637支
1、屯戍文書
出土地點:
1、肩水金關A32     11000餘支
2、甲渠候關A8      7933支
3、甲渠塞第四燧P1     195支
1990文物出版社《居延漢簡——甲渠候關與第四燧》;1994中華書局《居延新簡——甲渠候關》收錄1972-1982年間獲居延漢簡,共8409枚

1973年 湖北江陵藤店楚墓M1     24支
1、遣策
1973《文物》第9期有介紹

1973年 河北定州八角廊西漢(中山懷王劉脩)墓M40      約2500支
1、《論語》 1997文物出版社《定州漢墓竹簡論語》
2、《文子》 1995《文物》第12期
3、《六韜》(原名《太公》)  2001《文物》第5期
4、《儒家者言》 1981《文物》第2期
5、《保傅傳》
6、《哀公問五義》
7、《日書》
8、蕭望之等人奏議
9、《六安王朝五鳳二年正月起居記》
其他1981《文物》第8期有介紹

1973年 江蘇連雲港海州西漢(霍賀)墓    7枚木牘(僅1枚有字)
1、衣物疏
1974《考古》第3期

1973年 江蘇連雲港海州西漢(侍其)墓     2枚木牘
1、衣物疏(另一支漶漫不清)
1975《考古》第3期

1973年 湖北老河口五座墳西漢墓M3    約30支(5枚可見字迹)
1、遣策
1976《考古學報》第2期

1973年 湖北江陵鳳凰山西漢墓M8     175支
1、隨葬物清單
1976《文物》第6期

1973年 湖北江陵鳳凰山西漢墓M9     83支
1、安陸守丞文書  共3枚木牘    1974《文物》第6期
2、遣策     1974《文物》第6期有介紹

1973年 湖北江陵鳳凰山西漢(張偃)墓M10    176支
1、記陪葬物的木牘(牘背爲告地策)  2、記出錢人名的木牘   3、中販共侍約   4、記算錢    5、記芻稿    6、記田租的大竹簡     7、記穀物的大竹簡    8、鄭里廩簿等
1974《文物》第7期;1992中華書局《古文字論集》

1973年 湖南長沙馬王堆西漢(軑侯利豨)墓M3 竹簡木櫝608支、楬54枚
1、遣策     2004文物出版社《長沙馬王堆二、三號漢墓——第一卷:田野考古發掘報告》
2、木櫝6枚    2004文物出版社《長沙馬王堆二、三號漢墓——第一卷:田野考古發掘報告》
(1)、衣物疏    1994《文物》第6期
(2)、隨葬驗對木牘   1994《文物》第6期
3、《十問》、《合陰陽方》、《雜禁方》、《天下至道談》     1985文物出版社《馬王堆漢墓帛書》(肆)(精裝本)
帛書、帛圖     30件
1、《喪服圖》(《喪制圖》) 1992湖南出版社《馬王堆漢墓文物》
2、《城邑圖》(《園寢圖》)     1990文物出版社《中國古代地圖集(戰國—元)》
3、《卦象圖》(《符簶》、《雜占圖》) 1992湖南出版社《馬王堆漢墓文物》
4、《老子》(甲本)及卷後佚書(《五行》、《九主》、《明君》、《德聖》)  1980文物出版社《馬王堆漢墓帛書》(壹)(精裝本)
5、《老子》(乙本)及卷前佚書(《經法》、《經》(《十六經》)、《稱》、《道原》) 1980文物出版社《馬王堆漢墓帛書》(壹)(精裝本)
6、《周易》:
(1)、《易經》 1984《文物》第4期(名爲《六十四卦》);1992湖南出版社《馬王堆漢墓文物》;1998四川大學出版社《易學集成》第3卷《馬王堆帛書周易經傳釋文》
(2)、《系辭》 1992湖南出版社《馬王堆漢墓文物》;1995華夏出版社《國際易學研究》第1輯;1998四川大學出版社《易學集成》第3卷《馬王堆帛書周易經傳釋文》
(3)、《二三子問》、《衷》(《易之義》)、《要》 1993上海古籍出版社《道家文化研究》第3輯;1994湖南出版社《馬王堆漢墓研究文集》中有《二三子問》;1995華夏出版社《國際易學研究》第1輯;1998四川大學出版社《易學集成》第3卷《馬王堆帛書周易經傳釋文》
(4)、《繆和》、《昭力》 1995上海古籍出版社《道家文化研究》第6輯;1995華夏出版社《國際易學研究》第1輯;1998四川大學出版社《易學集成》第3卷《馬王堆帛書周易經傳釋文》
7、《相馬經》  1977《文物》8期
8、《春秋事語》     1983文物出版社《馬王堆漢墓帛書》(三)(精裝本)
9、《戰國縱橫家書》 1983文物出版社《馬王堆漢墓帛書》(三)(精裝本)
10、《足臂十一脈灸經》、《陰陽十一脈灸經》甲本、《脈法》、《陰陽脈死候》(後三書即《脈書》)、《五十二病方》      1985文物出版社《馬王堆漢墓帛書》(肆)(精裝本);1992湖南科技出版社《馬王堆古醫方考釋》;2004文物出版社《長沙馬王堆二、三號漢墓—— 第一卷:田野考古發掘報告》
11、《卻榖食氣》、《陰陽十一脈灸經》乙本、《導引圖》      1985文物出版社《馬王堆漢墓帛書》(肆)(精裝本);1992湖南科技出版社《馬王堆古醫方考釋》;2004文物出版社《長沙馬王堆二、三號漢墓——第一卷:田野考古發掘報告》
12、《養生方》、《雜療方》、《胎産書》(前附《人字圖》、《禹藏圖》)    1985文物出版社《馬王堆漢墓帛書》(肆)(精裝本);1992湖南科技出版社《馬王堆古醫方考釋》;2004文物出版社《長沙馬王堆二、三號漢墓——第一卷:田野考古發掘報告》
13、《刑德》(甲本)   2001臺灣古籍出版有限公司《馬王堆帛書<刑德>研究論稿》
14、《刑德》(乙本)   1992湖南出版社《馬王堆漢墓文物》;2001臺灣古籍出版有限公司《馬王堆帛書<刑德>研究論稿》
15、《刑德》(丙本)   2001臺灣古籍出版有限公司《馬王堆帛書<刑德>研究論稿》
16、《隸書陰陽五行》    1996法律出版社《簡帛研究》第2輯有介紹
17、《篆書陰陽五行》(《式法》)  2000《文物》第7期有介紹
18、《長沙南部地形圖》  1977文物出版社《古地圖》;1990文物出版社《中國古代地圖集(戰國—元)》
19、《駐軍圖》  1977文物出版社《古地圖》;1990文物出版社《中國古代地圖集(戰國—元)》
20、《出行占》  2003湖北教育出版社《簡帛數術文獻探論》有介紹
21、《木人占》  2004文物出版社《長沙馬王堆二、三號漢墓——第一卷:田野考古發掘報告》有介紹
22、《辟兵圖》(《太一將行圖》、《神祗圖》)  1992湖南出版社《馬王堆漢墓文物》
23、《五星占》  1978科學出版社《中國天文學史文集》第1輯;1996上海書店《馬王堆帛書藝術》;2004中山大學出版社《馬王堆天文書考釋》
24、《天文氣象雜占》  1980文物出版社《中國文物》第1期;1992湖南出版社《馬王堆漢墓文物》;2004中山大學出版社《馬王堆天文書考釋》
25、《宅位草圖》(《築城圖》)   2004文物出版社《長沙馬王堆二、三號漢墓——第一卷:田野考古發掘報告》有介紹
26、《府宅圖》(《小城圖》)   2004文物出版社《長沙馬王堆二、三號漢墓——第一卷:田野考古發掘報告》有介紹
27、《物則有刑圖》   2004文物出版社《長沙馬王堆二、三號漢墓——第一卷:田野考古發掘報告》有介紹
28、《宅形宅位吉凶圖》   2004文物出版社《長沙馬王堆二、三號漢墓——第一卷:田野考古發掘報告》有介紹

1974年 北京大葆台西漢(燕王劉旦)墓        1支
1、有“樵中格吳子運”6字
1989文物出版社《北京大葆台漢墓》

1974年 江西南昌東湖東晉(吳應)墓M1    6支
1、刺 2、衣物疏
1974《考古》第6期

1974年 江蘇盱眙東陽西漢墓M7     1支
1、祈禱書
1979《考古》第5期

1975年 湖北鳳凰山西漢墓M167     79支
1、遣策
1976《文物》第10期

1975年 湖北江陵鳳凰山西漢墓M168    67支
1、告地策   1975《文物》第9期
2、遣策
1993《考古學報》第4期

1975年 湖北江陵鳳凰山西漢墓M169      83支
1、遣策
1987《文物》第5期有簡介;1982《農業考古》第1期有簡介

1975年 湖北雲夢睡虎地秦墓M4       2支
1、役卒黑與驚之信
1976《文物》第9期;1981文物出版社《雲夢睡虎地秦墓》

1975年 湖北雲夢睡虎地秦墓M11        1155支及80殘片
1、《語書》 2、《爲吏之道》(末附魏律二條) 3、《秦律十八種》 4、《效律》 5、《秦律雜抄》 6、《法律答問》 7、《封診式》 8、《日書》甲、乙種 9、《編年記》
1978年文物出版社《睡虎地秦墓竹簡》(未收入《日書》甲、乙種);1981文物出版社《雲夢睡虎地秦墓》;1990文物出版社《睡虎地秦墓竹簡》

1976年 廣西貴縣羅泊灣西漢墓M1      木簡9支、木牘5枚、封泥匣5枚
1、《從器志》 2、《東陽田器志》 3、封檢等
1978《文物》第9期;1988文物出版社《廣西貴縣羅泊灣漢墓》

1976年 江蘇連雲港海州小礁山漢(戴盛)墓     木方1支
1、衣物券
1982《考古》第5期有簡介

1976年 內蒙古額濟納旗居延都尉三十井塞次東燧(兩漢)   173支
1、屯戍文書
1990文物出版社《居延新簡——甲渠候關與第四燧》;1994中華書局《居延新簡——甲渠候關》

1977年 甘肅玉門花海漢邊塞遺址     91支
1、武帝遺詔 2、簿籍、書信
1984甘肅人民出版社《漢簡研究文集》;1991年甘肅人民出版社《敦煌漢簡釋文》;1991中華書局《敦煌漢簡》

1977年 安徽阜陽雙古堆西漢(汝陰侯夏侯竈)墓     6000余支
1、《倉頡》 1983《文物》第2期
2、《詩經》 1984《文物》第8期;1988上海古籍出版社《阜陽漢簡詩經研究》
3、《周易》(占卜家之易) 2000三聯書店《道家文化研究》第18輯;2004上海古籍出版社《阜陽漢簡周易研究》
4、《莊子》 2000三聯書店《道家文化研究》第18輯
5、《年表》 1991黃山書社《文物研究》第7期有介紹
6、《大事記》
7、《作務員程》
8、《行氣》
9、《萬物》(舊題《雜方》)  1988《文物》第4期
10、《呂氏春秋》
11、《天文曆占》
12、《算術書》
13、《相狗》
14、《楚辭》及佚辭賦
15、《儒家者言》章題木牘      2000北京大學出版社《國學研究》第7卷;2004上海古籍出版社《阜陽漢簡周易研究》
16、《春秋事語》章題木牘及相關竹簡   2004上海古籍出版社《阜陽漢簡周易研究》
1978《文物》第8期有介紹;1998中華書局《出土文獻研究》第4輯有介紹;2004湖北教育出版社《長江流域出土簡牘與研究》有介紹

1978年 湖北江陵天星觀楚(邸陽君潘勝)墓M1     70餘支
1、卜禱 2、遣策
1982《考古學報》第1期有介紹

1978年 湖北隨州擂鼓墩曾侯乙墓M1     240支
1、遣策
1989文物出版社《曾侯乙墓》;1997藝文印書館《曾侯乙墓竹簡文字編》,臺北

1978年 江蘇連雲港花果山雲台西漢墓      13支及17殘片
1、封診式類 2、曆譜 3、日書 4、商業文書
1982《考古》第5期

1978年 安徽南陵麻橋公社東風大隊東吳墓M2    1枚木牘
1、衣物疏
1984《考古》第11期

1978年 安徽南陵麻橋公社東風大隊東吳墓M3    2枚木牘
1、衣物疏
1984《考古》第11期

1979年 青海大通上孫家寨西漢(馬良)墓M115     240支
1、軍事操練、編制等文書
1981《文物》第2期;1987《考古學集刊》第5集;1993文物出版社《上孫家寨漢晉墓》

1979年 江西南昌陽明路吳(高榮)墓     23支
1、木刺 2、遣策
1980《考古》第3期

1979年 甘肅敦煌馬圈灣漢邊塞遺址(兩漢)   1217支,帛書1件
1、屯戍文書
1991年甘肅人民出版社《敦煌漢簡釋文》;1991中華書局《敦煌漢簡》

1979年 新疆吐魯番阿斯塔那北涼(武宣王沮渠蒙遜夫人彭氏)墓M383 帛書1件
1、衣物疏
1994《文物》第9期

1979~1980年 江蘇高郵神居山西漢(廣陵王劉胥夫婦)墓M1、M2    數量不詳
1、內容不詳
1980年7月18日《人民日報》有簡介;2000南京出版社《江蘇考古五十年》有簡介

1980年 江蘇邗江胡場西漢(王奉世)墓M5    26支
1、簶(神靈名位櫝) 2、日記櫝 3、文告櫝 4、喪祭物品櫝 5、木簽 6、木觚
1981《文物》第11期

1980年 四川青川郝家坪秦墓M50     2支
1、秦武王二年丞相甘茂爲田律   1982《文物》第1期
2、另一片文甚漶漫

1980年 湖南臨澧九里楚墓M1   100余支
1、遣策 2、占卜
1995湖北教育出版社《楚系簡帛文字編》有簡介;1999文物出版社《新中國考古五十年》有簡介

1980年 新疆古樓蘭遺址(魏晉)    63支
1、屯戍文書
1988《文物》第7期;1999天地出版社《樓蘭漢文簡紙文書集成》

1980年 湖北鄂城水泥廠吳(史綽)墓M1     6支
1、名刺
1982《考古》第3期

1980年 陝西西安西漢長安未央宮遺址前殿A區F26    115支
1、記錄新莽瑞應文書
1996中國大百科全書出版社《漢長安城未央宮:1980—1989年考古發掘報告》;2004上海古籍出版社《出土文獻研究》第6輯

1980年 江蘇連雲港唐莊高高頂西漢墓    木牘1枚
1、衣物疏
1995《東南文化》第4期有介紹

1981年 湖北江陵九店楚墓M56     205支
1、農作物數量 2、日書雜占 3、卜禱
1995科學出版社《江陵九店東周墓》;2001中華書局《九店楚簡》

1981年收繳  甘肅武威磨嘴子東漢墓    26支    村民袁德禮發現
1、王杖詔書令
1984甘肅人民出版社《漢簡研究文集》

1981年 甘肅敦煌酥油土漢邊塞遺址(西漢)     76支
1、屯戍類文書
1984甘肅人民出版社《漢簡研究文集》;1991年甘肅人民出版社《敦煌漢簡釋文》;1991中華書局《敦煌漢簡》

1982年   湖北江陵馬山磚廠楚墓M1     1支
1、簽牌    
1982《文物》第10期;1985文物出版社《江陵馬山一號楚墓》

1982年 內蒙古額濟納河漢邊塞甲渠候關、甲渠第四燧遺址(兩漢)   87支
1、屯戍文書
1990文物出版社《居延新簡——甲渠候關與第四燧》;1994中華書局《居延新簡——甲渠候關》

1983~1984年 湖北江陵張家山西漢墓M247      1236支
1、《二年律令》
2、《奏讞書》 1993《文物》第8期(上)、1995《文物》第3期(下)
3、《蓋廬》
4、《脈書》 1989《文物》第7期
5、《引書》 1990《文物》第10期
6、《算數書》 2000《文物》第9期
7、曆譜
8、遣策
2001文物出版社《張家山漢墓竹簡(二四七號墓)》

1983~1984年 湖北江陵張家山西漢墓M249     約400支
1、日書
1985《文物》第1期有介紹

1983~1984年 湖北江陵張家山西漢墓M258     58支
1、曆譜
1985《文物》第1期有介紹

1983年 江蘇揚州平山養殖場西漢墓M3    3支
1、木楬題署
1987《文物》第1期

1983年 湖南常德德山夕陽坡楚墓M2     2支
1、賞賜歲祿文書
1987《求索》雜誌社《楚史與楚文化研究》;2001嶽麓書社《早期文明與楚文化研究》

1984年 甘肅武威五壩山西漢(田升寧)墓M3     1支
1、墓主冥告文書
1990文物出版社《散見簡牘合輯》;2004敦煌文藝出版社《簡牘(遙望星宿:甘肅考古文化叢書)》

1984年 安徽馬鞍山吳(朱然)墓    17支
1、刺 2、謁
1986《文物》第3期有介紹

1984年 江蘇儀征胥浦西漢(朱淩)墓M101    20支
1、先令券書 2、賻贈記錄 3、衣物券
1987《文物》第1期

1985年 甘肅武威旱灘坡前涼(姬瑜)墓M19     木牘5枚
1、拜官版    2003重慶出版社《河西簡牘》
2、衣物疏
1990文物出版社《散見簡牘合輯》

1985年 江蘇連雲港海州陶灣村西漢(西郭寶)墓    5支
1、衣物疏 2、謁
1988《東南文化》第2輯

1985年 湖北江陵毛家園西漢墓M1        74支
1、遣策 2、碟書(告地策)
1988文物出版社《中國考古學年鑒1987》有介紹

1985年 湖北江陵張家山西漢墓M327      300餘支
1、日書
1988文物出版社《中國考古學年鑒1987》有介紹;1992《文物》第9期有介紹

1986年 湖北江陵張家山西漢墓M336      829支
1、《功令》 2、《卻榖食氣》 3、《盜蹠》 4、宴享 5、七年質日 6、律令十五種 7、遣策
1988文物出版社《中國考古學年鑒1987》有介紹;1992《文物》第9期有介紹

1986年 湖北江陵秦家嘴楚墓M1     7支
1、卜禱 
1988《江漢考古》第2期有介紹

1986年 湖北江陵秦家嘴楚墓M13    18支
1、卜禱 
1988《江漢考古》第2期有介紹

1986年 湖北江陵秦家嘴楚墓M99    16支
1、卜禱 
1988《江漢考古》第2期有介紹

1986年 甘肅天水放馬灘秦墓M1     464支
1、《日書甲種》   1989甘肅人民出版社《秦漢簡牘論文集》
2、古地圖7幅    1989《文物》第2期;1990文物出版社《中國古代地圖集(戰國—元)》
3、《墓主記》     1989《文物》第2期
4、《日書乙種》   1989《文物》第2期有介紹

1986年 湖北江陵岳山秦墓M36    木牘2支
1、日書
2000《考古學報》第4期

1986年 甘肅金塔地灣城(A33)肩水候關漢遺址    1000余支
1999文物出版社《文物考古工作十年1979—1989》有簡介

1986年 甘肅高臺晉(常封)墓      1支
1、內容待考
1990文物出版社《散見簡牘合輯》

1986~1988年 甘肅敦煌漢邊塞遺址(兩漢)      137支
1、屯戍文書
1991年甘肅人民出版社《敦煌漢簡釋文》; 1991中華書局《敦煌漢簡》;1991《文物》第8期(以上三書收錄1986-1988年間于敦煌後坑墩、敦煌馬圈灣墩、敦煌小方盤城、敦煌臭墩子墩、敦煌小方盤城南第一烽燧、敦煌小方盤城南第二烽燧、敦煌鹽池灣墩、敦煌小月牙湖東墩、敦煌懸泉遺址、敦煌大坡墩10個地點採集的137枚漢簡);1996 法律出版社《簡帛研究》第1輯(此書收錄1979-1989年間于敦煌鹽池灣烽燧、敦煌後坑烽燧、敦煌馬圈灣烽燧、敦煌小方盤城南第一烽燧、敦煌小方盤城外、敦煌臭墩子烽燧、敦煌蘆草井烽燧(即上三書所收之敦煌小方盤城南第二烽燧)、敦煌小月牙湖東墩烽燧、敦煌後坑墩烽燧、敦煌人頭疙瘩遺址、敦煌條湖坡烽燧、敦煌懸泉置遺址12個地點採集的147支簡)

1987年 湖北荆門包山楚(邵)墓M2       279支
1、文書 有:集書、集書言、受期、疋獄、貸金、案例、所投 2、卜筮祭禱 3、遣策
1991文物出版社《包山楚簡》;1991文物出版社《包山楚墓》

1987年 湖南張家界古人堤遺址(東漢)    90支
1、漢律 2、醫方 3、官府文書 4、書信及謁 5、曆日 6、九九乘法表
2003《中國歷史文物》第2期

1987年 湖南慈利石板村楚墓M36       4557支
有《國語·吳語》、《逸周書·大武》、《管子·霸形》、《寧越子》等
1990《文物》第10期有介紹;2004文物出版社《新出簡帛研究》有介紹

1987年 河北盧龍范莊西漢(蔡文)墓     數量不詳
1、內容不詳
1989文物出版社《中國考古學年鑒1988》有介紹,1994年7月12日《中國文物報》有簡介

1989年 湖北江陵九店楚墓M621          127支
1、殘古書
1995科學出版社《江陵九店東周墓》;2001中華書局《九店楚簡》

1989年 湖北江陵雲夢龍崗秦墓M6     284支
1、秦律 2、木牘1枚 免辟死爲庶人文書(用於地下)
1994《考古學集刊》第8集;1995科學出版社《雲夢龍崗秦簡》;2001中華書局《龍崗秦簡》

1989年  甘肅武威旱灘坡東漢墓 16支
1、王杖令 2、關於盜、蟲災、火災之律令
1993《文物》第10期;2000敦煌文藝出版社《中國簡牘集成》第一輯

1990年 甘肅敦煌清水溝漢代烽燧遺址(西漢)     41支
1、地節元年曆譜 2、屯戍類簡   
1996法律出版社《簡帛研究》第2輯

1990年 湖北江陵高臺西漢墓M6     53支,14支有字
1、遣策
2000科學出版社《荊州高臺漢墓——宜黃公路荊州段田野考古報告之一》

1990年 湖北江陵高臺西漢墓M18          4支
1、封檢 2、告地書 3、名數 4、遣策
1993《文物》第8期;2000科學出版社《荊州高臺漢墓——宜黃公路荊州段田野考古報告之一》

1990年 湖北江陵揚家山西漢墓M135       75支
1、遣策
1993《文物》第8期有介紹

90年代初 江蘇連雲港海州南門磚廠新莽/東漢墓   1枚        項劍雲採集
1、謁
1996《文物》第8期

1990~1998年 甘肅安西長城烽燧遺址     近100枚
2004敦煌文藝出版社《簡牘(遙望星宿:甘肅考古文化叢書)》有簡介

1991年 湖北江陵雞公山楚墓M48     數量未詳
1、遣策
1992《江漢考古》第3期有簡介

1991年收繳 甘肅武威新華鄉(前涼)   木牘6枚
1991年12月22日《中國文物報》有簡介

1990~1992年 甘肅敦煌懸泉置遺址(兩漢)     23000余支,帛書10件
1、郵置、郵置道里、郵書 2、過所、乘傳 3、詔書、官府文書 4、律令、品、司法文書 5、簿籍 6、信劄 7、古籍
2000《文物》第5期有介紹、2001上海古籍出版社《敦煌懸泉漢簡釋粹》收入部份簡帛

1992年 湖北老河口戰國墓 兩座  10餘枚
1、遣策
1993法律出版社《簡帛研究》第1輯有簡介

1992年 湖北荊州沙市區蕭家草場西漢墓M26     35支
1、遣策
2001中華書局《關沮秦漢墓簡牘》

1992年 湖北江陵磚瓦廠楚墓M370        6支
1、司法文書
2001廣西師範大學出版社《簡帛研究二○○一》

1993年 新疆古尼雅遺址(漢)    2支
1、《倉頡》
1998《西域研究》第4期;2001商務印書館《中國學術》第2輯

1993年 湖北荊州沙市區關沮周家臺秦墓M30     382支
1、曆譜 其中一部分(《秦始皇三十四年曆譜》)見1999《文物》第6期
2、日書
3、《病方及其他》
2001中華書局《關沮秦漢墓簡牘》

1993年 湖北江陵王家臺秦墓M15   814支
1、《效律》 2、日書 3、《歸藏》
1995《文物》第1期有介紹;2004文物出版社《新出簡帛研究》有介紹

1993年 湖北黃岡黃州區曹家岡楚墓M5      7支
1、遣策
2000《考古學報》第2期

1993年 湖北鄂州濱湖西路東吳墓M1、M2   數量不詳
1、名刺 2、遣策
1997文物出版社《中國考古學年鑒1994》有介紹

1993年 湖北荊門郭店楚墓       805支
1、《老子》甲、乙、丙本 2、《太一生水》 3、《窮達以時》 4、《唐虞之道》 5、《尊德義》 6、《忠信之道》 7、《成之聞之》 8、《六德》 9、《性自命出》 10、《緇衣》 11、《五行》 12、《魯穆公問子思》 13、《語叢》(一、二、三、四)
1998文物出版社《郭店楚墓竹簡》
14、《語叢三》遺簡1支   2002年5月3日《中國文物報》

1993年 湖北江陵范家坡楚墓M27       1支
1995湖北教育出版社《楚系簡帛文字編》有簡介

1993年 湖南長沙望城坡古墳垸西漢長沙王后墓   100餘枚
1、簽牌
1997文物出版社《中國考古學年鑒1994》有介紹

1993年 江蘇東海尹灣東漢墓M2       1支
1、遣策
1997中華書局《尹灣漢墓簡牘》

1993年 江蘇東海尹灣東漢(師饒)墓M6        168支
1、《集簿》 2、《郡屬縣鄉吏員定簿》 3、《長吏遷除簿》 4、《吏員考績簿》 5、《武庫永始四年兵車器集薄》 6、《六甲陰陽書》 8、曆譜 9、遣策 11、謁 12、《元延二年起居記》 13、《行道吉凶》 14、《刑德行時》 15、《神烏賦》
1997中華書局《尹灣漢墓簡牘》

1994年入藏 上海博物館藏楚簡        1200餘支
其中 1、《孔子詩論》 2、《緇衣》 3、《性情論》(《性自命出》)    2001上海古籍出版社《上海博物館藏戰國楚竹書(一)》;
4、《民之父母》(《孔子閒居》) 5、《子羔》 6、《魯邦大旱》 7、《從政》(甲、乙) 8、《昔者君老》 9、《容成氏》    2002上海古籍出版社《上海博物館藏戰國楚竹書(二)》;
10、《周易》 11、《仲弓》 12、《恒先》 13、《彭祖》    2003上海古籍出版社《上海博物館藏戰國楚竹書(三)》;
14、《采風曲目》 15、《逸詩》 16、《昭王毀室·昭王與龔之》 17、《柬大王泊旱》 18、《內禮》 19、《相邦之道》 20、《曹沫之陳》    2004上海古籍出版社《上海博物館藏戰國楚竹書(四)》;
其他尚有《樂禮》、《武王踐阼》、《賦》、《子路》、《四帝二王》、《顔淵》、《樂書》等共80餘部書

1994年 河南新蔡葛陵楚(平夜君成)墓        1571支
1、祭禱 2、遣策
2003大象出版社《新蔡葛陵楚墓》

1996年 湖南長沙走馬樓平和堂吳井J22       140000餘支
1、其中2141支木簡    1999文物出版社《長沙走馬樓三國吳簡·嘉禾吏民田家莂》
2、其中10545支竹簡   2003文物出版社《長沙走馬樓三國吳簡·竹簡·壹》
其他1999《文物》第5期有介紹,內容大都爲券書、司法文書、長沙郡人名簿、名刺、官刺、賬簿

1996年 新疆古尼雅遺址(西晉)     9支     中日共同尼雅遺迹學術考察第八次調查
1、文書
1999《中日共同尼雅遺迹學術調查報告書》第二卷,京都

1997年 湖南長沙科文大廈古井J3、J4、J5、J18、J21、J25(東漢)   200餘支
1、官府文書 2、名刺 3、練字
2000文物出版社《中國考古學年鑒1998》有介紹

1997年 江西南昌火車站東晉(雷垓)墓M3      3支
1、衣物疏 2、名刺
2001《文物》第2期

1998年1月從英國收繳(據說入藏中國國家博物館) 2批漢簡
1998年8月26日《中國文物報》有簡介

1999年 湖南沅陵城關鎮虎溪山西漢(吳陽)墓M1   1336支
1、黃簿 2、日書(《閻氏五勝》) 3、《美食方》
2003《文物》第1期有介紹;2004文物出版社《新出簡帛研究》有介紹

1999年 甘肅敦煌小方盤城遺址    300餘枚
2004敦煌文藝出版社《簡牘(遙望星宿:甘肅考古文化叢書)》有簡介

1999~2002年 內蒙古額濟納旗居延遺址甲渠塞第7、9、14、16、17、18燧及察干川吉烽燧(漢)   500餘支
2005廣西師範大學出版社《額濟納漢簡》

2000年 湖北隨州孔家坡磚瓦廠西漢墓M8      785支
1、日書 2、曆譜 3、木牘(其中有告地策)
2001《文物》第9期有介紹;2004文物出版社《新出簡帛研究》有介紹

2000年 天津薊縣劉家壩鄉大安宅村古井(漢/魏)  木櫝1枚
1、道家方術文書
2000年9月24日《中國文物報》有簡介

2000年 甘肅武都琵琶鄉趙坪村漢簡    12枚
1、屯戍類簡
2003《文物》第4期

入藏年不詳 香港中文大學藏簡    共259支
1、書籍簡 楚 10支
2、日書簡 西漢 109支
3、奴婢廩食粟出入簿 西漢 69支
4、遣策 西漢
5、序寜簡 東漢 14支 1996《傳統文化與現代化》第6期
6、河堤簡 東漢 26支
7、松人解除木牘 前涼 1支
2001香港中文大學出版社《香港中文大學文物館藏簡牘》,香港

2001年 陝西西安南郊杜陵西漢墓M5   木櫝1枚
1、《日書·農事篇》  
2002《陝西歷史博物館館刊》第9輯,2005《收藏》第1期

2001年 甘肅高臺駱駝城前涼(胡運千)墓M5   木牘1枚
1、衣物疏
2003《考古》第6期

2002年 重慶雲陽舊縣坪漢遺址      20餘支,5支有字
1、記事等
2002年8月16日《中國文物報》有簡介

2002年 湖南龍山里耶鎮戰國古城J1   36000餘支
1、官署檔案
2003《文物》第1期有介紹

2002年 甘肅玉門花海畢家灘(前涼、西涼、後涼)墓    木牘9枚
1、衣物疏
2004文物出版社《中國考古學年鑒2003》有介紹

2002年 江蘇連雲港海州區雙龍村漢(淩惠平)墓         木牘1枚
1、衣物疏
2002年7月23日《新華每日電訊》有簡介

2002年 湖北棗陽九連墩楚墓M2      1000支
1、漆圖   
2003《考古》第7期有介紹

2002年 河南信陽長台關楚墓M7      數量未詳
1、遣策
2004《文物》3期有介紹

2002年 山東日照海曲西漢墓M106等墓      數量未詳
1、曆譜 2、遣策
2003年2月12日《中國文物報》有簡介;2003《文物世界》5期有簡介

2002年 江蘇泗陽大青墩西漢泗水王塚   數十枚木牘
1、遣策
2004文物出版社《中國考古學年鑒2003》有介紹

2002~2003年 湖北荊州岳橋岳家草場及印臺六座西漢墓    700餘支
1、文書 2、卒簿 3、曆譜 4、編年記等
2004文物出版社《中國考古學年鑒2003》有介紹

2003年 甘肅安西縣九墩灣漢代烽燧遺址        35支
2005文物出版社《中國考古學年鑒2004》有介紹

2003年 湖南長沙走馬樓湖南省供銷大廈西漢井J8    1萬餘支
2004年2月18日《中國文物報》有介紹

2003年 湖南郴州蘇仙橋下東門口龍門池古井J4(漢末三國)   500餘支,100餘支有字
2004年3月3日《光明日報》有簡介

2004年 湖南郴州蘇仙橋下東門口龍門池古井J10 (西晉)      700餘支
2004年3月3日《光明日報》有簡介

2004年 安徽天長安樂鎮漢墓    32枚木櫝
1、內容爲地理、醫藥、戶口、賬目
2005年6月15日《中國文物報》有介紹

2004年 江蘇南京皇冊庫遺址(吳~西晉)    40餘支
1、名刺、簽牌、米糧交納、道教符簶等
2005《書法叢刊》第3期有介紹

2004—2005年 廣東廣州南越國宮署遺址南越古井J264   100餘支
1、官署檔案
2005年7月20日《中國文物報》有介紹

此外,上海博物館(第二批楚簡)、湖北考古所、荊州博物館、甘肅考古所等單位亦有數量不詳藏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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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字迹無法辨識者

1975年 陝西咸陽馬泉西漢墓        3支
1979《考古》第2期有介紹

1978年 山東臨沂金雀山西漢(周寬等)墓M11、M13     8枚木牘
1、衣物疏
1984《文物》第11期有介紹

1983年 山東臨沂金雀山西漢墓M28     1枚木牘
1989《文物》第1期有介紹

1985年 江蘇儀征煙袋山西漢墓         26枚木牘
1、衣物疏
1987《考古學報》第4期有介紹

1989年 湖北江陵九店楚墓M411         2支
1995科學出版社《江陵九店東周墓》有介紹

1992年 河南洛陽淺井頭西漢墓CM1231    木牘1枚
1993《文物》第5期有介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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历史学系第四届研究生学术论坛

主办: 北京大学历史学系

承办: 北京大学历史学系研究生会

北京大学历史学系学生会

2007年12月9日

2007129

上午

800830 参加会议人员签到(静园二院历史学系)

830900 开幕式

主持人:历史学系研究生会主席王浩同学

历史学系学术委员会主席阎步克教授致辞

历史学系党委书记王春梅教授致辞

900945 李剑鸣教授主题学术报告:美国革命与民主问题

9451000 会议集体照(静园二院草坪),茶歇

10001200 第一时段分组报告与讨论

中午

12051330 午餐(吉野家工作餐)

下午

13301530 第二时段分组报告与讨论

15301545 茶歇

15451745 第三时段分组报告与讨论

17501810 闭幕式:

主持人:历史学系学生会主席谢婷同学

历史学系副系主任刘浦江教授总结发言

1830 晚宴(艺园二楼桌餐)

先秦史
丁一川老师  dingyc@vip.sina.com
考试时间 6月25日。 开卷

1. 试论中国文明起源的特征
2. 中国早期国体政体的演进
   1)从商周服制看中国早期国家形态
   2)春秋战国列国政体的演进
3.简述春秋战国商品经济的发展
4.举列说明出土资料与古史研究的关系(至少三例)

皇宫里是为了维护皇帝的权威和后宫的秩序才产生了所谓的性生活管理,但是这种管理是相当严苛的……

  皇宫内性生活的重要管理者之一:太监

  虽然从表面上看,皇帝的性生活决定于皇帝的意志,但是在名牌放置、准备工作、运送妃子、掌握时间、档案记录等具体环节上都可以钻空子,做手脚,妃子们如果得罪了敬事房太监就可能倒大霉,所以她们对敬事房太监都很巴结,常给太监们一些好处。


  皇宫内性生活的重要管理者之二:女官

  在内廷和宦官并列的是女官,她们的声势从表面上看虽然不如宦官,但是即使是身兼重职的宦官如果不和女官合作,也无法充分发挥其影响力,有许多坏事,都是女官和宦官勾结而形成的。

  明朝的公主下嫁后,就迁居宫内的十王府。

  这时,皇帝就会派给她一个贴身服侍的老女官,这个老女官被称为“管家婆”,对许多事有相当大的管理权。驸马如蒙公主召见,从皇城宅第前往宫中去叙夫妻之情时,面临的最大难关就是这个“管家婆”,必须重金贿赂。因为如果没有“管家婆”的传达,驸马就无法见到公主。

  这样,就出现了不少不幸事件。明神宗胞妹的丈夫就是因为对女官贿赂得不够,所以无法会见公主,最后患神 经衰弱症去世,公主也只好守寡一辈子。还有一次,神宗最宠爱的一位公主召驸马入宫,当时老女官正和她相爱的宦官饮酒作乐,驸马未经她的传达,就擅自入宫。 老女官知此事后,非常生气,便趁着醉意把驸马赶出宫外,又把公主狠狠地责骂了一顿。公主气愤难平,打算第二天去禀告母后,但想不到老女官已“恶人先告 状”,公主反被母后痛斥。被赶出宫的驸马想入朝替自己申辩时,那个和老女官相好的宦官和他的一伙人已守候在门外,把驸马打得浑身是血。这件事闹大了,最 后,驸马被冠以无礼之名,送入大学进修,并且罚他三个月内不准进入宫廷;老女官则转任他职;那个宦官却没有受到丝毫责备。从这件事也可以看到宦官与女官们 跋扈到了何种地步。

  皇宫内性生活的重要管理者之三:奶婆

  关于选养奶婆,明朝时北京东安门外稍北有礼仪房,是选养奶口以候内廷宣召之所,俗称“奶子府”,有提督司礼监太监管其事。每季选奶口40名,蓄养于内,称为“坐季奶口”;另选80名,仅注其籍,仍令其住在自己家中,称为“点卯奶口”。

  “点卯奶口”是候补人员,如果“坐季奶口”不够用了,即以“点卯奶口”补充。选奶口时,北京附近的宛平、大兴二县及各衙门广求军民家有夫之妇,年15以上、20以下,夫男俱全,形容端正,第三胎生男女仅3月者,作为候选人。

  奶婆对宫廷事务当然都有一定的作用,有作用就可能有一定的权势与影响。而且奶婆的作用则是较长期的,她 一旦哺皇子皇孙乳,皇子皇孙就会记她一辈子,所以奶婆一旦入宫,无有出理。如果奶婆所哺的皇子皇孙登基即位, 那么这个奶婆更是身价百倍,还会受爵册封。 例如,东汉安帝封奶妈王圣为“野王君”;顺帝封奶妈宋氏为“山阳君”;灵帝封奶妈赵娆为“平氏君”;唐中宗封奶妈干氏为“平恩郡夫人”,封奶妈高氏为“修 国夫人”;睿宗封其子(玄宗)的奶妈蒋氏为“吴国夫人”,封莫氏为“燕国夫人”;元朝时,世祖封皇子燕王的奶妈赵氏为“豳国夫人”,封奶妈的丈夫巩性禄为 “性育公”;成宗封奶妈的丈夫为“寿国公”;仁宗封奶妈的丈夫杨性荣为“云国公”;英宗封奶妈忽秃台为“定襄郡夫人”,封她的丈夫阿来为“定襄郡王”;明 朝时,成祖封奶妈冯氏为“保重贤顺夫人”;等等。

  皇帝所以待奶婆好,不仅由于从小吃她的乳汁而有感情,而且是为了符合封建礼教的规范需要,因为吃过奶婆 的奶,所以也要有一点孝敬之心。奶婆年纪轻轻就别夫别子而入宫,甚至终身不能再出,这实在是非常残忍的事;她们年纪轻(15岁至20岁),已有过性经验但 入宫后只能永远孤眠独宿,杜绝性生活,这也是十分残忍的事。但是,有的奶婆又会因所哺之皇子皇孙登基而权势倾人,能对皇帝施加种种影响,所以在中国历史上 奶婆在宫廷中与人私通、结党作乱的也非个别。例如汉安帝时,其乳母王圣母女和宦官江京、李闰等勾结在一起,诽谤太后,打击太后的家族,煽动内外,任性而 为,曾逼得宰相杨震服毒自杀,最后把太子也废了。

  皇宫内性生活的重要管理者之四:稳婆

  稳婆就是收生婆,平时也常叫“老娘”,按照蒋一葵《长安客话》卷二的说法,宫廷所需的稳婆都要在民间收 生婆里预选,然后把预选出来的稳婆的名字登记在册,以备需要时选用。被选进内廷的稳婆除了接生以及选奶口(乳娘)时看“乳汁厚薄,隐疾有无”之外,还在宫 廷 选美时起着重要作用,不仅要参预辨别妍媸,而且要对女性作裸体检查,如皮肤、乳房、阴部等,在贞节观十分盛行的明代,还要检查选入宫内的女子是否处 女。

  《汉杂事秘辛》中所讲的梁莹选后以前被吴姰裸体检查的事,则是一个比较著名的例子。

  稳婆也对政局和后宫权力产生一定的影响,但是其作用主要在选女入宫时和接生时,这些时机都比较短暂,事情过去了,一切就过去了。

  当时除宫廷外,官府也少不了稳婆,如办案时验女尸,常由稳婆出场以检验私处;对于女子遭人强奸,也总由稳婆进行探验。

  皇宫内性生活的重要管理者之五:医婆

  医婆就是卖药治病的女子。到了明代,由于贞操观念的影响,妇女有病不愿请男医治,如必要时,也只能隔帐 搭脉,观察病情,在这种情况下,医婆就应运而生。卖药治病本来无可非议,但在民间的医婆走家串巷,播弄是非;有时卖假药,卖春药,替一些妇女打胎;有的还 以揭露阴私相要挟而敲诈勒索。

  医婆被选入宫中的,一般素质较高,工作谨严,但以医术帮助有的嫔妃宫女治疗不可告人的隐疾,帮助她们压抑性欲、激发性欲以致打胎的也有。从历史上还没有发现医婆有什么参预政治、酿成大乱的事情。



http://dig.koogao.com/SrcShow.asp?Src_ID=341




中国边疆地区史
A History of the Border Regions of China
北京大学历史系 王小甫
Wang Xiaofu, Peking University
  email:  xiaofuw@gmail.com, xiaofuw@pku.edu.cn


第一讲  中国历代疆域的变迁
第二讲  东北地区史
第三讲  北方地区史(上)  
第四讲  北方地区史(下)
第五讲  西北地区史(上,新疆)
第六讲  西北地区史(下,河西)
第七讲  西南地区史(上,西藏)
第八讲  西南地区史(下,云贵川边)
第九讲  华南地区史
第十讲  近代边疆民族问题


主要内容与演进线索:
第一讲 中国疆域变迁:“历史中国”——历代疆域变迁——近代失地

第二讲 东北:红山文化——肃慎靺鞨系:肃慎—挹娄—勿吉—靺鞨——渤海//——夫余濊貊系-高句丽//——【契丹-辽朝】——女真-金朝——【蒙古-元朝——明朝】——满族-清朝

第三、四讲 北方:匈奴突厥系/戎、东胡蒙古系/狄——匈奴——东胡:乌桓——鲜卑——柔然——突厥——唐朝(单于、安北都护)——〖回纥/回鹘〗——契丹-辽朝——蒙古-元朝——鞑靼-北元——俺答汗——清代蒙古(盟旗制度)

第五、六讲 西北-新疆:西域南北古今人群不同——汉唐之际南部绿洲:西域都护——西域长史——西戎校尉//北部草原:塞人——月氏——乌孙——高车——嚈哒//——西突厥——唐朝(安西、北庭都护)——吐蕃//回鹘——高昌回鹘//黑汗王朝——西辽——蒙古-察合台汗国——亦力把里——叶尔羌汗国——西蒙古(瓦剌/卫拉特/厄鲁特)-准噶尔汗国——清朝伊犁将军——新疆建省

第六讲 西北-河西:西羌——后秦——五凉——吐谷浑——党项-西夏——回回/东甘

第七讲 西南-西藏:吐蕃——古格/后弘期教派:宁玛、噶当、萨迦、噶举——蒙元时期:总制院/宣政院-萨迦法王——帕竹政权——格鲁派——明代:三大法王与五教王——活佛转世制度——明清之际蒙藏关系——五世达赖受册封——噶厦成立——驻藏大臣的权力和地位

第八讲 西南-云贵川边:西南夷——初郡——南中大姓和叟帅——两爨蛮(西爨白蛮、东爨乌蛮)——南诏——大理——元明清时代:建立行省,设置土司,改土归流

唐研究近年论著目录

整理:荣新江


중국과 일본, 그리고 서양에서 연구한 논문만 있군요. 왠지 무시당하는 듯한 한국논문들이군요. 당나라는 한반도와 교류도 많았으니까 연구도 많을 듯 한데 말이죠. 그냥 무시당하는 건가......

출처 : 北京大学中国史研究中心





바로의 중얼중얼
관련 연구자용입니다. 쓰실 분은 반드시 있으리라 믿습니다. 물론 저도 백업용으로 저장해두는 것이고요. 이넘의 감기는 언제쯤 괜찮아 질까? ㅠㅠ
吴简研究论著目录

罗新 整理



중국과 일본에서의 연구목록이 있습니다. 한국연구목록은 안타깝게도 없습니다.

출처 : 北京大学中国史研究中心





바로의 중얼중얼
이것 역시 관련연구자들만이 필요한 정보입니다. 제 자료수집용으로 올렸으니 이딴거 왜 올리냐는 질문은......(후다닥~~)
隋唐长安研究文献目录稿

荣新江 王 静 编


小引:隋大兴城和唐长安城是隋唐帝国的都城,是隋唐帝国政治、经济、宗教、文化等许多方面的活动中心。长安作为当时国际的大都会,也是东西方各国、各族民众生活、学习、经商、娱乐的空间舞台,因此,对隋唐长安的研究,是隋唐史研究的重要课题。由于长安的博大与牵涉的问题非常复杂,有关长安的研究虽然十分丰富,但非常分散。近二十年前,妹尾达彦先生已经编出很好的《唐代长安城关系论著目录稿》,并且做了分类。他的工作给予我们许多启发。我们在从事隋唐长安的研究过程中,陆续积累了一些有关的研究目录信息,本来只是为自己的研究提供索引,但随着材料的增多,目录越编越长,也不时提供给其他学者使用,并且在我们的“《两京新记》读书班”的读书过程中,发挥过一定的作用。在一些学界同仁的鼓动下,我们把这个目录稿本略加整理,发表于此,目的是提供给大家一个工具,同时也希望能够把这个目录进一步完善。与二十多年前相比,有关长安的论著已增加了不知多少倍,故此我们不敢遽然分类编排,作为初稿,为便于学者增补自己的大作,采用以作者姓名的字母顺序排序,此实不得已而为之,亦故意而为之者。

此目只限专门研究长安的论著,兼收部分相关的研究论著;只限隋唐长安的研究论著,兼收研究后代但涉及到隋唐者。我们尽力据原发表书刊编目,并注各篇论文页码,然有些旧书及海外论著难以寻觅,而新书亦层出不穷,故有些论文页码暂付阙如。编者自知学力不逮,此稿体例、内容均不完善,敬请读者方家批评补正。(2003年10月16日)

출처 : 北京大学中国史研究中心





바로의 중얼중얼
관련 연구자외에는 전.혀. 필요없는 자료라는 거 인정합니다. 그냥 자료 수집용으로 올려놓은 포스트입니다.(먼산~~)

殷周制度论(王国维)
은주제도론(왕국위)


왕국위는 중국사학 근대화의 선두주자로서 대선생님의 칭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가 쓴 이 은주제도론은 중국정치와 문화의 변혁중에서 은나라와 상나라사이의 변혁만큼 거대한 것은 없었다는 주장이다. 그 근거로서 우리들에게도 상당히 익숙한 존존(尊尊), 친친(親親), 현현(賢賢), 남녀유별(男女有別)이 주나라때부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주장이 맞다 틀리다를 떠나서, 일단 이런 가정하에서 생각해서 중국 및 동아시아의 정치문화의 특색을 정의내리는 것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은과 주나라 사이의 변혁의 크기가 그리도 거대했다면, 은과 주가 각각 다른 문화환경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나라 일부 민족학자들이 주장하는 동이족의 고대중국지배론에도 힘을 실어줄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 모든것이 가정입니다.^^




바로의 중얼중얼
이 글은 한루님의 전공이 중국고대사중에서 춘추전국시대라고 하시길래, 한루님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한번 올려보았습니다. 물론 이미 보셨겠지만, 다른 분들도 읽어보면 재미있을듯 해서 올려보았습니다. 위 글의 중국어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끼신다면 정답입니다. 이건 현대중국어가 아니고 (그렇다고 고대중국어는 아니지만) 중국근대화시기의 글입니다. 중국어 공부하시는 분들도 저 글을 모두 번역하거나 독해해보신다면 중국어 실력이 놀라울 정도로 향상될거라고 생각합니다. 저 짜증을 다 독해하신다면 현대중국어가 훨씬 쉽게 다가올테니까요. ^^;;;
  1. Favicon of http://parhae.info BlogIcon 은신초 2004.10.12 01:27

    근대화기 중국어는 커녕 현대 중국어도 모르니 낭패입니다. 배우려고 생각은 하는데 이러저러한 이유로 계속 미뤄지네요.

  2. Favicon of http://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 2004.10.12 01:34

    중국으로 어학연수 오시는것도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됩니다. 지금이야 중국어학연수같은 것은 엄청 편하고 쉽게 올 수 있으니까요. (오시면 어차피 생활이 중국어여서 배울 수 밖에 없습니다.^^::)

    혹시 오시게 된다면, 술이라도 한잔 하도록 하죠.^^
    (......만성위염이 뭔 소리를 하고 있는건지 ㅠㅠ)

본 글은 제가 감히 연구생과정을 듣는다면 반드시 그 밑으로 들어가고 싶은 엔부커선생님이 쓰신 글입니다.

일단 간략하게 엔부커선생님을 소개하자면, 26살까지 딴짓하다가^^:: 북대본과과정에 들어와서 10년만에 졸업하고, 그 뒤 10년만에 북대에서 정교수자리에 오른 황당한 인간입니다.(북대 역시 한국교수사회랑 비슷합니다.-_ 엔부커가 이상한겁니다.)
주전공분야는 위진남북조입니다. 기타외국어 구사가 8개국어였던가.-_-;;
같은 북대교수들도 고개를 설레설레 내두를 정도로 완벽한 정통파학자입니다.
(..그의 오로라를 느껴보면-_ 그 말밖에 안 나옵니다.)
현재 본과생수업 3개. 청화대초청강의1개. 연구생수업 2개, 국가상임정치위원회 역사지도담당까지 이미 한계인텐데 논문을 죽어라 많이도 씁니다. 수준이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제 박사졸업한지 14년인데, 책이 4권나왔습니다.
처음에는 동북무슨학술제단-->북경대-->삼리엔서점-->중화서국 이라는 완벽코스를 밟아버렸습니다.(참고설명 : 중국에서 책을 살때, 어느책을 사야될지 모르겠다고 하면, 두개의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사면 절.대. 후회없습니다. 중화서국과 상해고적. 그런데 상해고적은 역사문헌쪽을 주로 하기떄문에 학술적인것은 중화서국에서 거의 나옵니다. 오죽했으면, 중화서국에서 책 한권 나오면 학자인생에서 성공한거지-_; 따구의 말이 있겠습니까?!)

정말 슈퍼맨인 인간입니다. 단지 당뇨병이 있음에도 술을 작작마시고 담배도 죽어라 피는 인간이라는....쿨럭..-_;;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냥 중국어원문만 올려놓으면 이상할거 같아서 서론부분과 결론부분만이라도 번역해볼렵니다.
(사실-_ 중간은 다 고증부분이어서, 학자아니면 쓸모도 없습니다.)







北魏北齐“职人”初探
북위북제"직인" 초탐


──附论魏晋的“王官司徒吏”

----위진의"왕관사도사"


阎 步 克

엔부커


출처 : 北京大学中国史研究中心












양이 양인지라-_; 한번에 안들어가서 아래쪽에 이어서 계속-_;;
위쪽에 한번에 담을 수 없는 관계로 부득이하게 분리-_-;;
뭐..사실 이 글을 읽을 사람이 있기나 있을지..

이거 다 읽고 덧글에 감상문 쓰면 밥 사줍니다.

조건1 : 북경에 계셔야됩니다.-_;;
조건2 : 한국이시라면 겨울때까지 주린배를 잡고 있음이...-_
조건3 : 북경대 역사과넘들은 자격없습니다.-_-+++


  1. cdhage 2004.09.20 17:26

    그때 나오라고 했을때 나왔음 내가 사는 술함 먹어보는 백만분의 1의 기회를 얻는건데...

  2. cdhage 2004.09.20 17:33

    내가 읽어볼것 같소 안읽어볼것같소?

  3. Favicon of http://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 2004.09.20 22:30

    엔부커 싫어하는 니가 읽어볼리가 없음-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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