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서방사상의 핵심이다. 그러나 그들은 개인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타당성이 없는 말이다. 만약 너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에 의한 한계를 가진다면, 너는 자유롭지 못한것이다. 만약 타인의 자유가 너의 자유에 의한 한계를 지닌다면, 그는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그들이 내세우는 자유주의는 현재 흔들리고 있다. 상호간의 자유의 충돌에서 명확한 선을 그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유는 반대는 간섭이다. 이 하늘 아래 2개 이상의 사물이 존재한다면 그들 사이의 간섭은 결코 피할 수 없다. 하나의 간섭이 있으면 하나의 자유가 손해를 본다. 간섭이 늘어나면 자유가 줄어든다. 외부의 간섭에 대응은 3가지를 넘지 않는다. 하나는 강력한 힘을 사용한 억압이며, 두번째는 조화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굴복이다. 모든 사람들의 자유를 타인의 자유까지로 한정한 것은 조화를 추구한 것처럼 보인다. 안타깝게도 타인과 자신사이의 선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기에 조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

무한한 발전 역시 서방사상에서 요구하는 특징이다. 만약 무한대로 발전하여 자신의 자유를 쟁취하려고 한다면, 타인과 자신 사이에는 억압과 굴복이라는 두가지 선택밖에는 남지 않는다. 한 쪽에서는 억압을 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결코 굴복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억압과 굴복의 과정에서 투쟁이 생겨난다. 현실에서 끊임없이 간섭을 통해서 자유를 구하려 한다. 그렇기에 가장 자유를 사랑하는 것은 가장 간섭을 사랑한다는 말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것을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할 수 있을까?


"도는 같이 가며 서로 어긋나지 않고, 만물은 같이 자라며 서로 상처입히지 않는다."(道并行而不相悖,万物并育而不相害 - 中庸 ) 이것이 중국인의 생각이다. 그러나 어떤 존재과 다른 존재 사이에서 서로 간섭하지 않고 충돌하지 않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아니면 상호간의 간섭중에서 결국 이상적인 조화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일까? 자연에 대해서는 일단 접어두고, 우선 인간에 대해서만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세상에 오직 너 하나만이 있을 수는 없다. 너와 누군가가 이 세상에서 같이 살아간다면, 분명히 타인의 간섭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이것을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천지간에 오직 홀로 있어야만 진정한 자유를 향유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이 살아가면서 혼자만이 존재할 수 있을까? 나는 인간은 오직 마음 속에서만 혼자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찌하여 오직 인간의 마음 속에서만 혼자일 수 있느냐?

먼저 앎을 거론해 보겠다. 앎은 알게 됨(피동)과 알 수 있음(능동)이 서로 연결되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는 능동과 피동을 초월하여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또한 알게 됨과 알수 있음의 조화를 이루어 중도을 이루게 된다. 알 수 있음이 알게 됨에 접근한다. 다시 말해서 알게 됨이 알 수 있음에 대해서 간섭을 하게 된다. 그러나 만약 앎의 면에서 살펴보자면, 이러한 간섭은 결코 간섭을 받은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각주:1].

춥고 배고픈 사람은 물질 생활면에서 보았을 때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앎에서는 배고 고픈 것을 알게 되고, 추운 것은 알게 되는 것은 자유롭지 않다라고 말할 수 없다. 앎은 물질과 나의 대립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물질과 나의 대립의 조화로 생겨나기에 앎은 절대적며, 그리하여 자유롭다. 앎이 자유라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사실 당신이 모른다는 것도 앎이다. 지식의 정면과 반면 모두가 앎이며, 그래서 인간 내면의 앎은 절대적이며 자유롭다.


이번에는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즐거운 다양한 감정에 사람들은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고는 한다. 사실 희노애락의 감정은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절대적으로 자유롭다. 앎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피동과 능동을 초월하여 독립해 있고, 피동과 능동을 초월하여 중립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쁨은 자유로운 기쁨이고, 화남은 자유로운 화남이다. 슬프고 즐거운 것도 모두 자유로운 슬픔이고 즐거움이다. 좋으면 좋다고 하고, 싫다면 싫다다고 한다. 외부에서의 좋음이 나를 간섭하여 좋아하게 만들어 나의 자유를 빼앗겼다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또한 외부의 싫음이 나를 간섭하여 싫게 만들어 나의 자유를 잃어버렸다라고 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너 자신이 좋기에 그것을 보고서 좋은 것이고, 너 자신이 싫기에 그것을 보고 싫은 것이다.

"그윽하고 정숙한 숙녀는 군자의 좋은 짝이로구"(窈窕淑女,君子好逑 - 《诗经》第一篇《诗经•关雎》[각주:2])나 역시 자유이고, "잠들지 못하는 것도"(辗转反侧《诗经·周南·关雎》[각주:3]) 역시 자유이다. "절박하게 원하는 것"(求之不得《诗·周南·关雎》)을 아는 것 역시 너의 마음 속의 자유이다. 얻고 얻지 못하는 것은 외부의 일이다[각주:4]. 외부의 일은 당연히 우리의 자유 속에 있지 않다. 그러나 절박하게 원하고 잠들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 속의 자유이다. 너의 마음 속의 희노애락을 포함한 모든 감정만을 놓고 본다면 당연히 자유이다.


위에서 말한 것 처럼, 자유는 내부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간섭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간에 어떠한 조화와 융합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마음의 앎과 감정은 모두 이미 밖과 안이 조화가 된 것이고, 물질과 나의 대립을 초월한 중립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과학, 예술, 문학, 종교, 도덕등에 속하는 것들은 모두 마음에서 살아있고, 앎과 감정의 연장선에 포함된다. 이것들은 모두 최대한 자유롭게 하여야 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최대한의 자유를 얻을 수도 없다. 그러나 외부의 사물의 간섭은 자주 자유를 초월하기도 한다. 물질자연부분에 관하여 앎은 곧 권리이다. 앎이 커질 수록, 권리도 커진다. 권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란 바로 외부의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 압력을 행사하고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자연물질계까지만 영향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이 권리는 인문사회에서는 모든 인류 자신에게 있는 것이기에 물질자연계와의 관계에서의 방법과 과정을 사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 물질자연계에서는 앎이 중심이다. 혹은 앎을 더욱 중요시한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인문사회에서는 감정이 중심이다. 혹은 감정을 더 중시한다고 할 수 있다. 깊은 앎과 진실된 감정은 모두가 일종의 권리이며, 모두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의 대로를 걸을 수 있게 해준다. 중국에서 오래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말을 소개할까 한다[각주:5]. 천왕께서는 현명하시니, 소의 죄는 죽어 마땅하옵나이다.(天王圣明,臣罪当诛(唐韩愈《羑里操》[각주:6]),이나 천하에 부모가 아닌 자가 없다(天下无不是的父母[각주:7]" 이 말은 사실이다. 일가친척이 화목하지 못하고 국가가 혼란하더라도, 충신이나 효자가 자유롭게 그 효와 충을 완성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인문역사상의 모든 예술, 문학, 종교, 도덕의 최고의 경지는 바로 일종의 마음의 자유를 발현시키는 것이다.


과학의 지식은 일종의 사물과 나 사이를 앏을 융합하여 외부로 발현시킨 무상의 자유이다. 예술,문학,철학, 도덕은 일종의 인간과 나 사이의 감정을 융합하여 외부로 발현한 무상의 자유이다. (사실 예술도 사물을 대산으로 하고, 과학도 인간을 대상으로 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괄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이 모든 것들이 안에서부터 발현되는 것이다. 정치상의 권력이나, 경제상의 재력은 모두 마음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외부의 사물 속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중요한 조건이 따라 붙는다. 만약 권력이나 재력과 같은 것에서 자유를 요구한다면, 얻을 수도 없거니와 타인에 대한 간섭이 될 것이다. 진정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것에 대해서는 냉담해야될 것이다.


중국 전통 사상은 마치 마음과 감정부분에만 집중되어 있고, 앎의 자유에는 방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근대 서방에서 이야기 되었던 자유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각성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무절제하게 정치와 경제에도 적용이 되었다. 그 결과 수 많은 문제를 유발하게 되었다. 영국의 철학자 루소는 제 1차세계대전 때 창조적 충돌과 점유적 충돌을 구분하였다. 이것 역시 대략 위에서 언급한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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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모든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과 환영합니다.  본 글은 의역식 번역입니다.
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따깡을 만들다가 기분 풀이식으로 답답할 때마다 번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안 다듬었습니다.  출판할 것은 아니기에 굳이 다듬지는 않았습니다. 글에서의 문제는 덧글을 통해서 지적해주시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위의 글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일단 한 작업이기에 공개는 합니다만...에휴...)

이번 편은 제가 잠들기 전에 적당히 손에 집어서 적당히 펼쳐서 본 부분입니다. 볼 때에는 아무 생각없이 봤는데, 번역을 하면서 보니 온갖 고문들이 다 있었군요. 그것보다 문제는 문체 자체였습니다. 중국어의 특징을 극단적으로 살린 문장들이 많았습니다. 볼 때야 이것이 오히려 더 편하고 중국어의 맛을 느낄 수 있지만, 번역할 때는 극악이군요.  이정도 분량이면 30분에 끝내는 것이 당연한데, 몇 일 동안 몇 문장 하다가 다시 따깡 쓰고;;; 이렇게 했답니다.


  1. 잡담 : 이 부분은 도무지 원문을 제대로 "번역"했는지 스스로도 의심스럽다.-_;; 이 글을 보는 한국어 사용자들이 제대로 이해가 되셨는지 궁금하다. 끙... [본문으로]
  2. 여기서는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 감정을 표현하는데 활용되었다. [본문으로]
  3. 보통 님을 생각하거나 고민때문에 잠들지 못하는 것을 나타낸다. [본문으로]
  4. 잡담 : 이 글은 정말 중국인..그것도 일정한 교육을 받은 중국인을 위한 글이다....시경 연타로구나... [본문으로]
  5. 잡담 : ....지금까지 위에서 넘쳐 흐르는 시경같은 말은 오래된 말이 아니더냐!!! [본문으로]
  6. 주문왕이 은걸왕의 손에 잡혀 있을때, 주문왕의 심리가 걸왕이 자신을 해하려 하든 말든 자기 자신은 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고 해석한 것. (왠만하면 보충 해석 필요 없을 정도로 하려고 했건만..) [본문으로]
  7. [/footnote])와 같은 말들은 진실된 감정의 발현이다. 순임금(大舜)의 효도나 굴원의 충성은 결코 외부을 향한 굴복이 아니다. 마음의 감정이 밖으로 뻗어나간 무한한 자유이다. 외부의 간섭과 융화된 일종의 내재적인 자유인 것이다.

    고수(瞽瞍)나 초회왕(楚怀王)은 분명히 순임금과 굴원의 마음이 요구하는 것에 강력하게 간섭을 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순임금과 굴원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고수(瞽瞍)나 초회왕(楚怀王)을 압박하여 이기지도 않았다. 순임금과 굴원의 효와 충은 인간을 넘어서 중도에서 일원화된 일종의 감정의 완성적 표현이다. 노자가 말하기를 "일가친척이 화목하지 못하면 효도와 사랑이 있고, 국가가 혼란하면 충신이 있다.六亲不和有孝慈,国家昏乱有忠臣(道德经)[footnote] 만약 모두가 화목하게 잘 살고, 모두가 효를 행한다면 특별히 효자라고 할 사람은 없겠지요. 모두가 국가에 충성을 한다면 특별히 충신이 있을 수 없겠지요. 사실 굳이 주석을 다는 이유는 저는 전묵선생님의 해석이 틀린것은 아니지만, 이 글의 원뜻과는 좀 다르다고 생각되서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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