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결론부터 내리자면 본인도 모르겠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현재의 사료로는 해석불가능에 가깝다. 굳이 개인적인 판단을 하자면, 거칠게 말해서 신라왕족이 김일재의 후손이라는 것에는 부정적이고, 신라왕실에 흉노의 영향을 받은 동호계열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고 본다. 일단 현존하는 사료만을 토대로 이야기를 해보자. 

참고로 아래쪽의 글은 그리 정리가 되어있지 않다. 본인도 고민중이기에 마구잡이로 사료와 증거을 나열하고 해석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또한 머리속으로만 생각하고 쓰지 않는 부분도 있다. 이점 염두에 두고 보시기를.....

1- 大唐故金氏夫人墓銘
(화질이 너무 안 좋아.ㅠㅠ 화질 좋은 것이나 판독문있으신분? ㅠㅠ)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 하니,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世祖)시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서 온천하에 만연하니 이미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제<石+單>)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황제께서) 그를 발탁해 시중(侍中)과 상시(常侍)에 임명하고 투정후(투<禾+宅>亭侯)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京兆郡)에 정착하게 되니 이런 일은 사책에 기록되었다. 견주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몇 세대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한(漢)이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

문선왕(文宣王.공자의 시호)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에는 성실함과 신의가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독실하고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비록 오랑캐 모습을 했으나 그 도(道)를 역시 행하니, 지금 다시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듯 번성했다.

부인의 증조는 이름이 원득(原得)이시니 황실에서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추증되셨고, 할아버지는 성함이 충의(忠義)시니 한림대조(翰林待詔) 검교좌산기상시(檢校左散騎常侍) 소부감(少府監) 내중상사(內中尙使)라는 벼슬을 지내셨다. 아버지는 성함이 공량(公亮)이시니 한림대조 장작감승(將作監丞) 충내작판관(充內作判官)을 역임하셨다.

조부께서는 문무의 예리함에 여유가 있어 평자(平子.유명한 천문학자)를 궁구하여 관상(觀象)의 규모를 관찰하셨고, 공수자(公輸子.저명한 기술자)를 궁리하여 신과 같은 기술을 갖추셨다. 이에 기예로 천거받아 금문(金門.황실 혹은 조정)에 들어가 여섯 조정을 섬겨 봉록과 직위를 갖고서 처음부터 끝까지 훌륭한 삶을 살다 아름답게 마치셨다.[각주:1]

-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 번역 (원문 전문이나 쫌..ㅠㅠ)


위에서 나오는 김씨부인의 할아버지인 김충의는 신당서[각주:2]에서 명확하게 신라인으로 말해지고 있고, 시대도 거의 동일하고, 관직도 부합하여 사실상 동일인물로 판단된다. 또한 당시에는 아직 성씨제도가 제대로 도입되지 않았기에 성씨위조의 가능성도 별로 없다. 그럼으로 신라에서 온 김씨는 신라왕족의 김씨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신라왕족은 흉노의 후예일까?


2- 신라문무대왕릉비(新羅文武大王陵碑)
侯祭天之胤傅七葉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신라문무대왕릉비를 보면 위에서 나오는 신라왕가 흉노설의 원류를 볼 수 있다. 투후는 바로 흉노 김일재이며 제천지윤은 금인을 바치고 하늘의 제사를 하고 관직에 봉해져서 7대동안 내시로 있다.[각주:3]

그럼 이 것으로 신라왕가의 흉노설이 완벽해졌느냐? 이 증거로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문제는 고고학적으로 김일재가 어떻게 신라로 유입이 되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시에 신라로 무조건 찾아오는 것은 문제가 있고, 분명히 여러번 이동과 거주를 반복하면서 왔을 터인데 그런 흔적이 최소한 지금으로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1-2번 통합적 의문 : 문제의 핵심은 사료 증거가 오직 위의 두 비문뿐이고, 묘지명은 온갖 구라들의 조합이라는 것이 다. 조상이 아님에도 과거의 먼 옛날의 위대한 사람을 끌어와서 억지로 조상으로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혹자는 조상을 속일까라고 하지만, 만약 위로의 몇대 부분이라면 믿을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위의 비문의 "부인의 증조는 이름이 원득(原得)이시니 황실에서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추증되셨고, 할아버지는 성함이 충의(忠義)시니 한림대조(翰林待詔) 검교좌산기상시(檢校左散騎常侍) 소부감(少府監) 내중상사(內中尙使)라는 벼슬을 지내셨다. 아버지는 성함이 공량(公亮)이시니 한림대조 장작감승(將作監丞) 충내작판관(充內作判官)을 역임하셨다."와 같은 부분은 충분히 믿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조상이나 먼 과거의 조상이 쌩뚱맞게 나오는 경우. 구라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많이 언급을 하면 할 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런 이유로 본인은 위의 사료에서 처음부분에 조상이라고 하면서 몇 줄이나 나와버리는 흉노 김일재와 그 후손이 너무나 의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신라라는 당시의 명칭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계속 요동에 머물렀다고만 쓰여진 것은 그런 의심을 더욱 크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설령 김일재가 실제 조상이 아니더라도 신라왕실이 흉노의 김일재를 조상을 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두가지 가능성을 검토할 수 있다. 한가지는 신라에서 자생적으로 金씨 성이 만들어졌고, 훗날 중국땅에 김씨 성을 가진 유명한 사람이 있으니 따온 가능성[각주:4]과 실제로 흉노의 일파가 내려와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고, 그들이 중국에 있는 김일재를 보고 성을 가져다 붙였을 가능성이 있다.



3- 고인돌 유전자 친연성

최 근 고인골의 유전자 정보를 가지고 고대 인종들 간의 친연성을 찾아보려는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유라시아 지역의 흉노 무덤에서 발굴된 유골과 우리나라 고인골 간의 연관성을 추적한 결과는 놀라웠다. 인골들간의 상호관계를 실험한 결과 스키타이와 흉노, 신라가 하나의 그룹으로 묶인 것이다. (역사스페셜)

본인도 북방민족이 많이 넘어왔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위의 그래프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우선 신라와 흉노사이의 간격이 상당히 먼데 같은 그룹으로 묶는 것은 너무나 자의적이다. 연관관계가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나 흉노의 직접유입을 말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고로 이 자료는 잘해봐야 방증이고, 사실상 증거가 되지 못한다. (또한 중국북부의 동시기 인골들의 DNA나 다른 쪽의 DNA 분석과의 비교가 되어 있지 않다. 이는 분명히 문제가 된다.)



4- 김일제(金日磾)와 김알지(金閼智)의 연관성
저자의 신라어 해석 중 김알지를 '금(金) + 금(金)'이라고 본 것은 탁견으로 알지란 Alt(금)에 i가 첨가되어 구개음화(Alt+i 〉 Alji)가 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인용된 알씨(閼氏)는 몽골어 카톤(왕비)에 대비되는 흉노어 아씨(Assi)의 음역이다.(박원길 '새끼 중국인'들 득세하는 사학계에 '통쾌한 도발')


日의 고대 발음은 M이 포함된 "미"와 비슷했으리라 여겨지고 있다[각주:5]. 그래서 현재 중국에서도 김일재의 일만은 mi 로 발음되고 있다[각주:6]. 그리고 알지의 알의 고음은 이와 확연히 다르다[각주:7]. 문 제는 김일제의 일은 분명히 흉노어의 음역이지만, 알지의 알은 흉노어의 음역일 가능성의 증거자료가 부족하며, 설령 흉노어의 음역이라고 하여도 김일제와 김알지가 동인인물이라는 것은 무리가 있는 해석이고, 서로 연관이 있다고 하는 것도 언어의 전파성을 생각하면 하나의 설일뿐이다.

무엇보다 위의 해석은 언어학적으로 너무나 위험하다. 차용어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몇몇 단어만을 가지고 추론하기에는 현재까지 남겨진 고구려-신라-백제의 언어자료가 너무나 빈약하다. 고로 위의 말은 하나의 "설"로 존중 받을 만 하지만,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또한 위의 말을 완전히 믿는다고 가정하여도 문제는 남는다. 또한 김알지 신화는 탈해왕 때 나온 것인데, 탈해왕은 AD 57~80년 사이의 인물로 김일제의 후손이 왕망의 신나라에서 나온 시기가 23년 이후인데, 개인적으로 시기가 그리 맞지 않는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쪽의 7번 항목에서...



5- 무덤 양식
신라는 평지형 무덤이나 구릉형 무덤의 시기가 명확히 구분[각주:8]되고 또 평지형 무덤에서 출토되는 유물이 동방계열보다는 서방계열 유목민족의 유물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에서 그간 많은 학자들의 고뇌를 유발시킨 미스테리의 국가다. (박원길 '새끼 중국인'들 득세하는 사학계에 '통쾌한 도발')

황금 유물과 적석목곽분 그리고 새 토템 : 왕권을 강화하고 신라의 발전을 이룬 내물왕의 무덤을 경주 고분군들 중에서 가장 큰 황남대총으로 보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그런데 이 황남대총의 독특한 무덤 양식, 화려한 황금 유물들, 그리고 신라 김씨 왕족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설화에 등장하는 새. 이 세 가지는 모두 금을 숭배하고, 적석목곽분을 묘제로 사용하며, 새를 토템신으로 여기는 유목 민속의 풍습과 일치한다. 이를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봐야할 것일까?(역사스페셜)

새토템 자체는 북방민족뿐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 퍼져 있던 태양 숭배 사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니, 새토템으로 이 사실을 판단하기는 곤란하다. 무덤양식부분에서는 본인 지식의 한계로 위에서 나온 말을 따른다면, 흉노는 모르겠으나 북방민족의 유입은 확실시 된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북방민족이 흉노였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는 현재 유물 자체만으로는 판단 불가능이다.



6- 당대 사람들의 인식은 어떠하였을까?
(宋)鄧名世撰,王力平点校《古今姓氏书辩证》
出自匈奴休屠王,太子日磾,字翁子,是(汉)武帝。。。。。。帝以休屠作金人,为祭天主,因赐姓金氏。。。。。。。唐贞观所定益州蜀国郡三姓,一曰金氏。汾州河西郡四性,一曰金氏。又唐新罗国王姓金氏。。。。。。

일단 위의 책은 송대에 만들어진 중국에서는 가장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는 성씨고증책이다. 또한 현재 문제가 되는 당대와 가장 가까운 시대이기도 하다. 문제는 해당 책에서 김씨의 유래는 분명히 흉노 김일재(日磾)로 잡고 있지만, 신라의 왕족과는 완전히 분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신라의 왕씨인 김와 흉노의 김씨와는 서로 다른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당대에 수 많은 신라인들이 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료를 통해서 보면 흉노와 신라왕가가 서로 관련이 없다고 판단된다.



7- 흉노의 후예라고 가정했을 시.
1- 유입 시기의 문제
김일재가 BC134이니, 1대를 20년으로 잡으면 120년 이후, BC 14년이고, 1대를 25년으로 잡으면 AD24년이고, 1대를 30년으로 잡으면 AD 76년이 된다. 그럼 대략 왕망의 신나라[각주:9]가 망하고 나서 요동으로 갔다. 그리고 비문에는 안나오지만 다시 한반도로 갔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신라 탈해에서 김알지 신화가 나온다. 탄해왕의 재위기간은 보통 57~80년인데, 왕망의 신나라가 망하고 24년만에 원거주지와는 머나먼 곳에 와서 왕이 된다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물론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김일재 직계후손들의 유입가능성은 상당히 줄어든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직계가 아닌 방계 흉노들이 들어왔을 가능성인데, 개인적으로 이와 같은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본다. 그 이유는 신라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서방계 유물들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이론도 상당한 문제가 있다. 서방계 유물이 흉노계라고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신라는 인도쪽에서도 왔었다. 다시 말해서 인도를 경유한 서방계 유물일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냥 흉노라고 하지만, 그 안에는 수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 말도 서로 통하지 않을 정도의 사람들이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방계가 들어왔다고 그 영향력이나 흉노의 핵심과 얼마만큼의 영향력이 있는지 이야기하는 것 자체도 상당히 힘든 문제이다.

2- 고대 민족 이동에 대해.
고대의 민족 이동은 지금과 같이 4명 가족 정도가 비행기를 타고 이민을 가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거대한 씨족 사회로서 그 구성원이 모두 동시에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각주:10]. 그런 의미에서 김일재 후손이 신라로 유입된 것을 믿는 사람들은 김일재 유입 이전부터 신라에 일정한 근거지가 있었기에 그 후손들이 신라로 넘어온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신라가 상당한 국제화 사회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반대로 신라에 근거지가 없었기에 후손이 아예 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의 증거가 된다. 하지만 어느쪽인지는 판단불가.ㅠㅠ

3 - 그런데 흉노는 위프를 한것이냐?
흉노가 신라에 왔다. 대흥안링부터 시작해서 내려왔다고 하더라도, 요동과 한반도를 완전히 가로지르는 길이다. 또한 초원지대와는 다른 산악지대를 지나야 되는 코스이다. 그래. 흉노가 미쳐서 길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초원이 아닌 산악지대로 내려왔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중간에 흔적이 있어야 한다.

지금과 같이 한두명이 움직이던 시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별 영향력이 있을 수가 없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동반을 한 씨족-부락단위의 이전인 것이다. 그럼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흔적"이 발생해야된다. 문제는 흉노가 비행기를 타고 온 것처럼 고구려나 발해에는 어떤 흔적도 없고 오직 신라에만 서양식 유물이 있다.

사실 이 문제는 지금도 계속되는 한국사학계의 골치거리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배를 통해서 왔다는 것인데, 흉노는 기본적으로 유목민족이다. 그들이 갑자기 말을 버리고 배를 타야되는 이유에 대한 타당한 설명이 없다.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일단 본인이 생각하는 교류의 단계를 말해야될듯 하다. 1단계는 느슨한 교류로서 마치 소문이 퍼지듯이 느리게 주변 사람을 통해서 서서히 서로간의 정보가 교류되는 단계이다. 당연히 조금만 멀리 있는 정보는 전달 받는 것도 느리고 정확성도 적다. 2단계는 상업의 단계이다. 상업행위를 통해서 정교교류가 이루어진다. 3단계는 기술의 단계이다. 기술의 이전을 통해서 교류가 일어난다. 4단계는 결혼의 단계이다. 서로간의 결혼을 하면 상당한 교류가 발생한다. 특히 2세대는 그 교류의 결정체이다. 그러나 결혼은 알지 못하는 사람과는 하지 않기에 앞전의 단계가 선행되어야 한다. 5단계는 외교의 단계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각 일정한 집단체를 형성하고 있어야한다. 6단계는 전쟁의 단계이다. 이것보다 더욱 강렬한 교류는 없다.

그래서 신라로의 흉노의 직접적인 유입보다는 몇몇 기술자집단의 이주가 있지 않았나....생각되기는 하지만, 이 경우도 사실 위프설을 피할 수가 없다. 기술의 연결선이 없는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고구려인데....흠.......기술사쪽은 본인의 전공이 아니라서 일단 판단보류이다.


흉노인의 후예라고 한 것이 단지 자신들의 조상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었는지. 아니면 진정 후예인지는 지금으로서는 판단할 수 없다. 다른 증거 사료가 나오기 전까지는 일단 신라왕족이 흉노인의 후예라는 것은 판단 보류이며, 그 전까지는 흉노의 후예가 아니라고 판단할 것이다.




* 논문 쓰기 바쁜 녀석이 이거 머하는 짓이냐고? --;;
사실 본인 논문의 핵심은 소그드의 한반도 유입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라왕족이 흉노인가 아닌가는 상당히 중대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서 처용은 보통 춤과 괴기한 용모로 서역인으로 보는데, 만약 신라왕족이 흉노였고, 당시가 그리 국제화 사회였다면, 괴기한 용모라고 말할 정도는 되지 못한다는 둥. 혹은 최치원이 소그드의 대표적인 무용인 호선무를 향악이라고 해서 신라에서 오래동안 내려오는 춤으로 말했는데, 만약 신라왕족이 흉노라면 이거 골치아파진다는 것...

본인 논문은 신라왕족이 흉노든 아니든 큰 영향은...있기는 있지만, 없다고도 해야겠고.... 단지.....가장 큰 문제는.....어떻게 써야될지 갈피가;;; 참고로 본인은 소드그인의 유입을 말하는 것처럼 한국의 고대에 많은 이민족들이 유입되었을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단보류인것이다.


그 외에 관련 된 정보를 아시는 분은 언제든지 덧글로 제보부탁드려요^^

  1. 중국쪽에서는 해당 비문을 大唐故金氏夫人墓銘 라고 부르지 않는듯 하다.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봐도 없다. 그렇다고 논문준비하면서 중국쪽 금석문 하나하나 뒤지고 다닐 수도 없고;;; 그래서 본인으로서는 원문 자체를 보고 싶은데 구할 수가 없어서 답답하다. 혹시 있으신분??! [본문으로]
  2. [/footnote]와 구당서[footnote]新罗人金忠义以机巧进,至少府监,荫其子为两馆生......(旧唐书 卷一百五十八 列传第一百八) [본문으로]
  3. 이 비석 자체가 손상이 너무 크다. 그래서 다른 이야기를 볼 수 없으니...에휴... [본문으로]
  4. 혹자는 김일재는 단지 흉노일뿐인데, 실제조상이 아니라면 오랑캐따위를 가짜 선조로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나라는 실질적으로 활발한 다민족 사회였고, 김일재로 대변되는 남흉노는 명목상으로 한왕실과 형제관계로 같은 일가라는 명목이 있다. 고로 오랑캐를 왜?라는 의문은 합당하지 않다고 본다. [본문으로]
  5. 굴원이 빠져 죽었다는 물 이름이 汨罗인데, 우리발음으로는 멱라, 중국발음으로는 miluo, 日자에 m음가가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겠지~ (by 孟元文이라는 익명의 사나이 킥킥...) [본문으로]
  6. http://blog.yam.com/wenshi/article/19776020 [본문으로]
  7. 원래 일과 알의 언어학쪽 각각 학자들의 복원음을 올렸는데, 특수기호쪽인지라 충돌해버린다. 증거 패스. 궁금한 분은 http://www.eastling.org/OC/oldage.aspx 에서 직접 검색을. [본문으로]
  8. 이는 보통 통일신라 전후로 보는 견해가 주도적이다. 그럼으로 이 말을 여기서 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지 않을까? [본문으로]
  9. AD8~23 [본문으로]
  10. 물론 개개인이 움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파편적이고 큰 영향이 있을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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