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족은 흉노인인가?

역사-歷史/역사잡담 2009. 8. 30. 11:51 Posted by 바로바로
일단 결론부터 내리자면 본인도 모르겠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현재의 사료로는 해석불가능에 가깝다. 굳이 개인적인 판단을 하자면, 거칠게 말해서 신라왕족이 김일재의 후손이라는 것에는 부정적이고, 신라왕실에 흉노의 영향을 받은 동호계열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고 본다. 일단 현존하는 사료만을 토대로 이야기를 해보자. 

참고로 아래쪽의 글은 그리 정리가 되어있지 않다. 본인도 고민중이기에 마구잡이로 사료와 증거을 나열하고 해석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또한 머리속으로만 생각하고 쓰지 않는 부분도 있다. 이점 염두에 두고 보시기를.....

1- 大唐故金氏夫人墓銘
(화질이 너무 안 좋아.ㅠㅠ 화질 좋은 것이나 판독문있으신분? ㅠㅠ)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 하니,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世祖)시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서 온천하에 만연하니 이미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제<石+單>)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황제께서) 그를 발탁해 시중(侍中)과 상시(常侍)에 임명하고 투정후(투<禾+宅>亭侯)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京兆郡)에 정착하게 되니 이런 일은 사책에 기록되었다. 견주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몇 세대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한(漢)이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

문선왕(文宣王.공자의 시호)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에는 성실함과 신의가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독실하고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비록 오랑캐 모습을 했으나 그 도(道)를 역시 행하니, 지금 다시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듯 번성했다.

부인의 증조는 이름이 원득(原得)이시니 황실에서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추증되셨고, 할아버지는 성함이 충의(忠義)시니 한림대조(翰林待詔) 검교좌산기상시(檢校左散騎常侍) 소부감(少府監) 내중상사(內中尙使)라는 벼슬을 지내셨다. 아버지는 성함이 공량(公亮)이시니 한림대조 장작감승(將作監丞) 충내작판관(充內作判官)을 역임하셨다.

조부께서는 문무의 예리함에 여유가 있어 평자(平子.유명한 천문학자)를 궁구하여 관상(觀象)의 규모를 관찰하셨고, 공수자(公輸子.저명한 기술자)를 궁리하여 신과 같은 기술을 갖추셨다. 이에 기예로 천거받아 금문(金門.황실 혹은 조정)에 들어가 여섯 조정을 섬겨 봉록과 직위를 갖고서 처음부터 끝까지 훌륭한 삶을 살다 아름답게 마치셨다.[각주:1]

-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 번역 (원문 전문이나 쫌..ㅠㅠ)


위에서 나오는 김씨부인의 할아버지인 김충의는 신당서[각주:2]와 구당서[각주:3]에서 명확하게 신라인으로 말해지고 있고, 시대도 거의 동일하고, 관직도 부합하여 사실상 동일인물로 판단된다. 또한 당시에는 아직 성씨제도가 제대로 도입되지 않았기에 성씨위조의 가능성도 별로 없다. 그럼으로 신라에서 온 김씨는 신라왕족의 김씨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신라왕족은 흉노의 후예일까?


2- 신라문무대왕릉비(新羅文武大王陵碑)
侯祭天之胤傅七葉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신라문무대왕릉비를 보면 위에서 나오는 신라왕가 흉노설의 원류를 볼 수 있다. 투후는 바로 흉노 김일재이며 제천지윤은 금인을 바치고 하늘의 제사를 하고 관직에 봉해져서 7대동안 내시로 있다.[각주:4]

그럼 이 것으로 신라왕가의 흉노설이 완벽해졌느냐? 이 증거로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문제는 고고학적으로 김일재가 어떻게 신라로 유입이 되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시에 신라로 무조건 찾아오는 것은 문제가 있고, 분명히 여러번 이동과 거주를 반복하면서 왔을 터인데 그런 흔적이 최소한 지금으로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1-2번 통합적 의문 : 문제의 핵심은 사료 증거가 오직 위의 두 비문뿐이고, 묘지명은 온갖 구라들의 조합이라는 것이 다. 조상이 아님에도 과거의 먼 옛날의 위대한 사람을 끌어와서 억지로 조상으로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혹자는 조상을 속일까라고 하지만, 만약 위로의 몇대 부분이라면 믿을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위의 비문의 "부인의 증조는 이름이 원득(原得)이시니 황실에서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추증되셨고, 할아버지는 성함이 충의(忠義)시니 한림대조(翰林待詔) 검교좌산기상시(檢校左散騎常侍) 소부감(少府監) 내중상사(內中尙使)라는 벼슬을 지내셨다. 아버지는 성함이 공량(公亮)이시니 한림대조 장작감승(將作監丞) 충내작판관(充內作判官)을 역임하셨다."와 같은 부분은 충분히 믿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조상이나 먼 과거의 조상이 쌩뚱맞게 나오는 경우. 구라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많이 언급을 하면 할 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런 이유로 본인은 위의 사료에서 처음부분에 조상이라고 하면서 몇 줄이나 나와버리는 흉노 김일재와 그 후손이 너무나 의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신라라는 당시의 명칭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계속 요동에 머물렀다고만 쓰여진 것은 그런 의심을 더욱 크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설령 김일재가 실제 조상이 아니더라도 신라왕실이 흉노의 김일재를 조상을 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두가지 가능성을 검토할 수 있다. 한가지는 신라에서 자생적으로 金씨 성이 만들어졌고, 훗날 중국땅에 김씨 성을 가진 유명한 사람이 있으니 따온 가능성[각주:5]과 실제로 흉노의 일파가 내려와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고, 그들이 중국에 있는 김일재를 보고 성을 가져다 붙였을 가능성이 있다.



3- 고인돌 유전자 친연성

최 근 고인골의 유전자 정보를 가지고 고대 인종들 간의 친연성을 찾아보려는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유라시아 지역의 흉노 무덤에서 발굴된 유골과 우리나라 고인골 간의 연관성을 추적한 결과는 놀라웠다. 인골들간의 상호관계를 실험한 결과 스키타이와 흉노, 신라가 하나의 그룹으로 묶인 것이다. (역사스페셜)

본인도 북방민족이 많이 넘어왔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위의 그래프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우선 신라와 흉노사이의 간격이 상당히 먼데 같은 그룹으로 묶는 것은 너무나 자의적이다. 연관관계가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나 흉노의 직접유입을 말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고로 이 자료는 잘해봐야 방증이고, 사실상 증거가 되지 못한다. (또한 중국북부의 동시기 인골들의 DNA나 다른 쪽의 DNA 분석과의 비교가 되어 있지 않다. 이는 분명히 문제가 된다.)



4- 김일제(金日磾)와 김알지(金閼智)의 연관성
저자의 신라어 해석 중 김알지를 '금(金) + 금(金)'이라고 본 것은 탁견으로 알지란 Alt(금)에 i가 첨가되어 구개음화(Alt+i 〉 Alji)가 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인용된 알씨(閼氏)는 몽골어 카톤(왕비)에 대비되는 흉노어 아씨(Assi)의 음역이다.(박원길 '새끼 중국인'들 득세하는 사학계에 '통쾌한 도발')


日의 고대 발음은 M이 포함된 "미"와 비슷했으리라 여겨지고 있다[각주:6]. 그래서 현재 중국에서도 김일재의 일만은 mi 로 발음되고 있다[각주:7]. 그리고 알지의 알의 고음은 이와 확연히 다르다[각주:8]. 문 제는 김일제의 일은 분명히 흉노어의 음역이지만, 알지의 알은 흉노어의 음역일 가능성의 증거자료가 부족하며, 설령 흉노어의 음역이라고 하여도 김일제와 김알지가 동인인물이라는 것은 무리가 있는 해석이고, 서로 연관이 있다고 하는 것도 언어의 전파성을 생각하면 하나의 설일뿐이다.

무엇보다 위의 해석은 언어학적으로 너무나 위험하다. 차용어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몇몇 단어만을 가지고 추론하기에는 현재까지 남겨진 고구려-신라-백제의 언어자료가 너무나 빈약하다. 고로 위의 말은 하나의 "설"로 존중 받을 만 하지만,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또한 위의 말을 완전히 믿는다고 가정하여도 문제는 남는다. 또한 김알지 신화는 탈해왕 때 나온 것인데, 탈해왕은 AD 57~80년 사이의 인물로 김일제의 후손이 왕망의 신나라에서 나온 시기가 23년 이후인데, 개인적으로 시기가 그리 맞지 않는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쪽의 7번 항목에서...



5- 무덤 양식
신라는 평지형 무덤이나 구릉형 무덤의 시기가 명확히 구분[각주:9]되고 또 평지형 무덤에서 출토되는 유물이 동방계열보다는 서방계열 유목민족의 유물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에서 그간 많은 학자들의 고뇌를 유발시킨 미스테리의 국가다. (박원길 '새끼 중국인'들 득세하는 사학계에 '통쾌한 도발')

황금 유물과 적석목곽분 그리고 새 토템 : 왕권을 강화하고 신라의 발전을 이룬 내물왕의 무덤을 경주 고분군들 중에서 가장 큰 황남대총으로 보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그런데 이 황남대총의 독특한 무덤 양식, 화려한 황금 유물들, 그리고 신라 김씨 왕족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설화에 등장하는 새. 이 세 가지는 모두 금을 숭배하고, 적석목곽분을 묘제로 사용하며, 새를 토템신으로 여기는 유목 민속의 풍습과 일치한다. 이를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봐야할 것일까?(역사스페셜)

새토템 자체는 북방민족뿐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 퍼져 있던 태양 숭배 사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니, 새토템으로 이 사실을 판단하기는 곤란하다. 무덤양식부분에서는 본인 지식의 한계로 위에서 나온 말을 따른다면, 흉노는 모르겠으나 북방민족의 유입은 확실시 된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북방민족이 흉노였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는 현재 유물 자체만으로는 판단 불가능이다.



6- 당대 사람들의 인식은 어떠하였을까?
(宋)鄧名世撰,王力平点校《古今姓氏书辩证》
出自匈奴休屠王,太子日磾,字翁子,是(汉)武帝。。。。。。帝以休屠作金人,为祭天主,因赐姓金氏。。。。。。。唐贞观所定益州蜀国郡三姓,一曰金氏。汾州河西郡四性,一曰金氏。又唐新罗国王姓金氏。。。。。。

일단 위의 책은 송대에 만들어진 중국에서는 가장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는 성씨고증책이다. 또한 현재 문제가 되는 당대와 가장 가까운 시대이기도 하다. 문제는 해당 책에서 김씨의 유래는 분명히 흉노 김일재(日磾)로 잡고 있지만, 신라의 왕족과는 완전히 분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신라의 왕씨인 김와 흉노의 김씨와는 서로 다른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당대에 수 많은 신라인들이 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료를 통해서 보면 흉노와 신라왕가가 서로 관련이 없다고 판단된다.



7- 흉노의 후예라고 가정했을 시.
1- 유입 시기의 문제
김일재가 BC134이니, 1대를 20년으로 잡으면 120년 이후, BC 14년이고, 1대를 25년으로 잡으면 AD24년이고, 1대를 30년으로 잡으면 AD 76년이 된다. 그럼 대략 왕망의 신나라[각주:10]가 망하고 나서 요동으로 갔다. 그리고 비문에는 안나오지만 다시 한반도로 갔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신라 탈해에서 김알지 신화가 나온다. 탄해왕의 재위기간은 보통 57~80년인데, 왕망의 신나라가 망하고 24년만에 원거주지와는 머나먼 곳에 와서 왕이 된다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물론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김일재 직계후손들의 유입가능성은 상당히 줄어든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직계가 아닌 방계 흉노들이 들어왔을 가능성인데, 개인적으로 이와 같은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본다. 그 이유는 신라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서방계 유물들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이론도 상당한 문제가 있다. 서방계 유물이 흉노계라고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신라는 인도쪽에서도 왔었다. 다시 말해서 인도를 경유한 서방계 유물일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냥 흉노라고 하지만, 그 안에는 수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 말도 서로 통하지 않을 정도의 사람들이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방계가 들어왔다고 그 영향력이나 흉노의 핵심과 얼마만큼의 영향력이 있는지 이야기하는 것 자체도 상당히 힘든 문제이다.

2- 고대 민족 이동에 대해.
고대의 민족 이동은 지금과 같이 4명 가족 정도가 비행기를 타고 이민을 가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거대한 씨족 사회로서 그 구성원이 모두 동시에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각주:11]. 그런 의미에서 김일재 후손이 신라로 유입된 것을 믿는 사람들은 김일재 유입 이전부터 신라에 일정한 근거지가 있었기에 그 후손들이 신라로 넘어온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신라가 상당한 국제화 사회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반대로 신라에 근거지가 없었기에 후손이 아예 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의 증거가 된다. 하지만 어느쪽인지는 판단불가.ㅠㅠ

3 - 그런데 흉노는 위프를 한것이냐?
흉노가 신라에 왔다. 대흥안링부터 시작해서 내려왔다고 하더라도, 요동과 한반도를 완전히 가로지르는 길이다. 또한 초원지대와는 다른 산악지대를 지나야 되는 코스이다. 그래. 흉노가 미쳐서 길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초원이 아닌 산악지대로 내려왔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중간에 흔적이 있어야 한다.

지금과 같이 한두명이 움직이던 시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별 영향력이 있을 수가 없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동반을 한 씨족-부락단위의 이전인 것이다. 그럼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흔적"이 발생해야된다. 문제는 흉노가 비행기를 타고 온 것처럼 고구려나 발해에는 어떤 흔적도 없고 오직 신라에만 서양식 유물이 있다.

사실 이 문제는 지금도 계속되는 한국사학계의 골치거리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배를 통해서 왔다는 것인데, 흉노는 기본적으로 유목민족이다. 그들이 갑자기 말을 버리고 배를 타야되는 이유에 대한 타당한 설명이 없다.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일단 본인이 생각하는 교류의 단계를 말해야될듯 하다. 1단계는 느슨한 교류로서 마치 소문이 퍼지듯이 느리게 주변 사람을 통해서 서서히 서로간의 정보가 교류되는 단계이다. 당연히 조금만 멀리 있는 정보는 전달 받는 것도 느리고 정확성도 적다. 2단계는 상업의 단계이다. 상업행위를 통해서 정교교류가 이루어진다. 3단계는 기술의 단계이다. 기술의 이전을 통해서 교류가 일어난다. 4단계는 결혼의 단계이다. 서로간의 결혼을 하면 상당한 교류가 발생한다. 특히 2세대는 그 교류의 결정체이다. 그러나 결혼은 알지 못하는 사람과는 하지 않기에 앞전의 단계가 선행되어야 한다. 5단계는 외교의 단계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각 일정한 집단체를 형성하고 있어야한다. 6단계는 전쟁의 단계이다. 이것보다 더욱 강렬한 교류는 없다.

그래서 신라로의 흉노의 직접적인 유입보다는 몇몇 기술자집단의 이주가 있지 않았나....생각되기는 하지만, 이 경우도 사실 위프설을 피할 수가 없다. 기술의 연결선이 없는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고구려인데....흠.......기술사쪽은 본인의 전공이 아니라서 일단 판단보류이다.


흉노인의 후예라고 한 것이 단지 자신들의 조상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었는지. 아니면 진정 후예인지는 지금으로서는 판단할 수 없다. 다른 증거 사료가 나오기 전까지는 일단 신라왕족이 흉노인의 후예라는 것은 판단 보류이며, 그 전까지는 흉노의 후예가 아니라고 판단할 것이다.




* 논문 쓰기 바쁜 녀석이 이거 머하는 짓이냐고? --;;
사실 본인 논문의 핵심은 소그드의 한반도 유입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라왕족이 흉노인가 아닌가는 상당히 중대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서 처용은 보통 춤과 괴기한 용모로 서역인으로 보는데, 만약 신라왕족이 흉노였고, 당시가 그리 국제화 사회였다면, 괴기한 용모라고 말할 정도는 되지 못한다는 둥. 혹은 최치원이 소그드의 대표적인 무용인 호선무를 향악이라고 해서 신라에서 오래동안 내려오는 춤으로 말했는데, 만약 신라왕족이 흉노라면 이거 골치아파진다는 것...

본인 논문은 신라왕족이 흉노든 아니든 큰 영향은...있기는 있지만, 없다고도 해야겠고.... 단지.....가장 큰 문제는.....어떻게 써야될지 갈피가;;; 참고로 본인은 소드그인의 유입을 말하는 것처럼 한국의 고대에 많은 이민족들이 유입되었을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단보류인것이다.


그 외에 관련 된 정보를 아시는 분은 언제든지 덧글로 제보부탁드려요^^

  1. 중국쪽에서는 해당 비문을 大唐故金氏夫人墓銘 라고 부르지 않는듯 하다.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봐도 없다. 그렇다고 논문준비하면서 중국쪽 금석문 하나하나 뒤지고 다닐 수도 없고;;; 그래서 본인으로서는 원문 자체를 보고 싶은데 구할 수가 없어서 답답하다. 혹시 있으신분??! [본문으로]
  2. [본문으로]
  3. 新罗人金忠义以机巧进,至少府监,荫其子为两馆生......(旧唐书 卷一百五十八 列传第一百八) [본문으로]
  4. 이 비석 자체가 손상이 너무 크다. 그래서 다른 이야기를 볼 수 없으니...에휴... [본문으로]
  5. 혹자는 김일재는 단지 흉노일뿐인데, 실제조상이 아니라면 오랑캐따위를 가짜 선조로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나라는 실질적으로 활발한 다민족 사회였고, 김일재로 대변되는 남흉노는 명목상으로 한왕실과 형제관계로 같은 일가라는 명목이 있다. 고로 오랑캐를 왜?라는 의문은 합당하지 않다고 본다. [본문으로]
  6. 굴원이 빠져 죽었다는 물 이름이 汨罗인데, 우리발음으로는 멱라, 중국발음으로는 miluo, 日자에 m음가가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겠지~ (by 孟元文이라는 익명의 사나이 킥킥...) [본문으로]
  7. http://blog.yam.com/wenshi/article/19776020 [본문으로]
  8. 원래 일과 알의 언어학쪽 각각 학자들의 복원음을 올렸는데, 특수기호쪽인지라 충돌해버린다. 증거 패스. 궁금한 분은 http://www.eastling.org/OC/oldage.aspx 에서 직접 검색을. [본문으로]
  9. 이는 보통 통일신라 전후로 보는 견해가 주도적이다. 그럼으로 이 말을 여기서 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지 않을까? [본문으로]
  10. AD8~23 [본문으로]
  11. 물론 개개인이 움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파편적이고 큰 영향이 있을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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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흥미롭네요!! 설마 이런 글에도 악플이 달리진 않겠죠^^ 앞으로도 좋은연구 부탁드려요!

    2009.08.31 00:00
    • Favicon of https://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바로  수정/삭제

      글쎄요. 저 자신도 아직 고민하고 있는 내용이라, 제대로 된 악플은 저로서도 환영입니다. ^^::: 감히 연구라고 할 수는 없고, 그냥 고민정도의 수준입니다.

      2009.08.31 09:00 신고
  2. Favicon of http://purmeice.tistory.com BlogIcon 푸르메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는 오묘하고 흥미롭습니다. 앞으로도 건필하시고^^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__)

    2009.08.31 01:08
    • Favicon of https://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바로  수정/삭제

      역시...제일 좋은것은 타임머신이 발명되서 휘잉~하고 날라가서 그 당시의 것을 정확하게 적어서 오는 것일지도요....이건 머...ㅠㅠ

      2009.08.31 09:01 신고
  3. S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문무왕릉비 윗부분이 발견되었으니 더 밝혀질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다른 이야기지만 물리적으로 타임머신은 타임머신이 만들어진 시간보다 과거로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미래에 타임머신이 발명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현재에 미래인이 없다죠 ㅋㅋ

    2009.09.04 13:36
    • Favicon of https://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바로  수정/삭제

      새로 발견되었는데, 그거 분석하고 그러려면 좀 걸리겠죠. 새로운 정보를 원하기는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탁본급정도까지만이라도 볼 수 있는 훼손이 없었으면 합니다.

      근데 물리적으로 타임머신은 그 전으로 갈 수 없다고요??;; 죄송합니다. 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타임머신이면 과거로도 갈 수 있지 않나요????

      2009.09.04 19:28 신고
  4. :)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 따스했던, 그래서 지금보다 훨씬 살기 좋았던 북방 유라시아에서 로마와 대등하거나 더 강력했던 국가를 형성한 훈(흉노)이 형제의 정쟁으로 최종적으로 한나라에 멸망하고, 동북부에 흩어진 훈족의 상당수가 한반도에 유입되어서 한민족의 구성원에 포함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본문과 다른 이야기지만, 독일이나 터키 등에서는 훈족의 후예로서 한국인을 보는 시각도 있다던데 어떤지 모르겠군요.
    또, 흉노는 한족이 '훈'을 낮추어 부르려 의도한 말이라고 하는데, 민족적 연관성을 지닌 우리까지 '흉노'라고 칭해야하는지도 조금 의문입니다.

    2009.09.09 02:50
    • Favicon of https://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바로  수정/삭제

      무력으로는 비슷했을것입니다. 문제는 소위 말하는 문명이란 무력뿐만이 아니라 인문문화를 높게 산다는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훈의 문명화 수준은 그리 높다고 말하기가 힘듭니다.

      당시의 훈족은 동호와 동화된 계층이 있었지만, 사실 많은 부분이 남하해서 한나라의 북쪽지역에 거주하였고(남흉노) 그 외의 사람들은 거의 가 서쪽으로 가서 유럽까지 갔습니다.(이른바 흉노의 대이동)

      문제는 당시의 흉노는 하나의 버스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름은 흉노이지만, 혈연-언어-종교-풍습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흉노라는 버스에 타고, 내리는 것을 반복하면서 유럽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이름만 흉노"이고 원래 흉노와 다른 부분이 점차 압도적으로 많아지게 됩니다.

      흉노는 현재까지는 한국에서의 표준적인 용어입니다. 말씀하신대로 흉노가 비하적인 표현이 있기에 훈으로 바꾸어야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일반인들에게 훈보다는 흉노가 더 가까이 다가간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고민해보겠습니다.

      2009.09.09 10:27 신고
  5. 에레광따  수정/삭제  댓글쓰기

    종이쪼가리 보다 유전자 검사가 더 확실합니다. 제 예상대로 스키타이 흉노가 맞군요. 스키타이는 흉노계통중 특수부족입니다. 미추왕이 백인이라는 설이 있던데 맞군요. 유럽침공한 훈족도 스키타이인입니다. 김일제 인묘사도 서양인과 닮았습니다. 서방적인 스키타이 황금유물이 대초원을 통해 후대 보통 흉노족으로 로 이어지죠.

    2009.10.23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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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에서 분명히 유전자검사는 비교대상의 폭이 북방민족으로만 한정이 되었으며, 그 외의 비교대상이 분명하지 않아서 명확한 판단자료로 삼기에는 확실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과학도 명확히 한정된 조건 안에서만 완성이 되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외의 것은 허황된 주장에 가깝고, 별로 증거가 불충분하기에 이야기하기 곤란한 부분입니다. 저도 님처럼 무엇인가를 "쉽게 무조건적으로" 믿었으면 좋겠군요. -_-+ 무엇이든 끝까지 의심해보셨으면 합니다. 그냥 적당히 자기 입맛에 맞으면 이거 믿을래라고 하지 마시고요.

      2009.10.23 21:57 신고
  6. 뭐이런 짱개냐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말 하는 짱개냐 진짜 네가 하는말은 남이 해놓으 하나하나 반대대는 의견을 들이대며 말꼬리 잡는거 밖에 안된다 망할놈아 네가 그렇게 잘났으면 역사스폐셜에서 널 썼겠지 ㅋㅋ 조용히 동북공정이나 해라 중국이라 조선족놈아

    2010.03.28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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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주장에 대한 반박은 어디있죠? 지금 당신의 글은 단순한 매도일뿐. 어떤 설득력도 없습니다. 그리고 전 한국인입니다. 제 글을 조금만 보아도 알 수 있죠. 한마디로 독해능력과 분석능력에도 문제가 있어 보이시는군요.^^

      2010.03.28 16:23 신고
  7. 박구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로형 저 카자흐스탄 친구한테 신라황금보검에 대한 연관성에 대해서 설명해 줄려다가 갑자기 신라왕족 흉노설 다시 한번 잘 알아보고 알려주고 싶어서 인터넷 돌아다니다가 형 글이랑 만나네요. 형의 그 고민 이해가요!!! 이럴가능성 저럴가능성! ㅋ 좀 쌩뚱맞지만 박씨는요??? 박씨는 뭔 종족일까요? ^^

    2010.06.15 19:16
  8. 김씨는 크게2종류로 나뉘죠  수정/삭제  댓글쓰기

    중국금나라와 같은 흉노성씨김씨인 경주김씨와

    조선 토박성씨 쇠를 만들어서 심(금)씨가된 김해김씨 가있습니다.

    2010.08.28 21:16
  9. 중국유학생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라왕족이 흉노족이라는 설보단 스키타이 시카족이라는 설이 있는데 고고학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 굉장히 유력하다봄 금관에 구조 문화상에 여러 유사점 책 신랑의왕족 한번 보시기 바람

    2010.09.13 21:01
  10. Favicon of http://kr.blog.yahoo.com/suesuexp BlogIcon 혁신한국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둘러보니,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군요. 김씨 성을 쓰는 사람이라면 줏어온 자식이 아닌 이상은 대부분이 신라왕가의 혈통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그 신라왕가가 대제국의 혈통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 그냥 대충 짚고 넘어갈 문제는 아닌 것이지요.

    그리스의 역사학자였던 헤르도투스는 사람과 말이 하나가 되어도 그들처럼 하나가 될수는 없을 것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말을 다루는 것에 있어서는 가히 인마일치의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표현되는 기마민족이 바로 훈족이었습니다.

    사실 신라는 우리 나라 역사에 있어서도 굉장히 미스테리한 종족으로 구별을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왕가의 고분에서 나온 "일반적이지 않은 부장품"들에 의해서라고 할 것입니다. 많은 사학자들과 전세계 사학자들을 경악케 할만한 기가 막힌 부장품들이 많이 나오는데,

    "왜?" 이 나라에서 "이런 것들이" 나오냐 하는 것이죠. 도대체가 어디 다른 나라의 고분을 통째로 들어다가 갔다 놓은게 아닐까 할 정도로 "너무도 뜬금없는" 부장품들.. 그것이 바로 말의 안장에 올리고 다니며 썼었던 동복이고, 황금보검이며, 하얀 자작나무이고, 적석목곽분이며, 금관, 금귀고리, 금허리띠와 같은 금세공품들이었습니다.

    왕의 고분에 거짓을 남길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초는 사관의 의도와 왕조의 의중에 따라 얼마든지 거짓을 기록할 수 있겠지만, 왕의 고분은 그렇게 하기가 힘들었겠지요. 그래서 더더욱 미스테리하다는 것입니다.

    도대체가 어떤 과정을 통해 경상도 지방에 떡하고 못박혔는지, 중앙 아시아에서 바로 신라쪽으로 말뚝을 뚝 박아버리는 이 과정은 도대체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전적으로도 영남인들의 유전이 스키타이 유전과 많이 닮아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증명을 해야 하는지..

    사실 저도 원문을 쓰신분처럼 육로를 통한 것이 아니라, 해상을 통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신라와 로마제국의 교류관계가 사실이라 한다면 당시의 로마제국의 해상력이 막강했다는 사실로 비추어 볼 때, 기마민족이라 하더라도 배를 통해 들어올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 않았겠느냐 하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김수로왕의 사초에서는 김수로왕이 500여척의 함선을 가지고 들어왔었다는 기록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즉, 배를 통해 흉노족이 유입이 되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지요. 기마 민족이니 말타고 왔었을 것이라는 것에만 집중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알면 알수록 미스테리한 지역이 신라이고, 경상도 지방인 것 같습니다.

    2010.10.27 15:25
  11. 비둘기물고기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라의 편두와 흉노와의 어떤 가능성이 있지 않을 까요?

    2011.07.18 02:21
  12. 흉노=신라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제점이 있는 DNA자료를 역사스페셜이란 간판에 떡하니 써서 내겠습니까? 바로바로의 중얼중얼님께서 전공과는 다른 DNA연구 결과로 제시된 사진에 대한 안목이 있으신지도 모르겠고, DNA 결과에 대해 오류를 지적하는건 찾아볼 수 가 없네요..

    2011.11.21 23:42
  13. ryu  수정/삭제  댓글쓰기

    경상도와 흉노의 상관관계에 대한 악플은 한쪽 지역이 다른 한쪽 지역을 이유없이 헐뜯기 때문에 그 반발로 나오는 것이지, 사실, 우리나라가 북방계 아시아인 주류의 피를 이어받은 것임에는 틀림이 없죠..

    2012.01.09 12:23
  14. 꼬끼오  수정/삭제  댓글쓰기

    西汉 말기의 황제 哀帝와 그의 젊은 동성애인 董贤의 러브스토리를 보면, 동현은 어사(御史)董恭의 아들로서, 哀帝가 황태자이던 시절에 동현은 太子舍人으로 황궁을 출입하여 면식이 있던 관계로서, 황제 즉위후, 수려한 모습으로 성장한 동현을 보고 한 눈에 반하여 사랑에 빠지게 된다. 어느날 황제와 동현이 동침을 하다 잠이 들어 황제가 먼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용포 소매자락이 동현의 몸 아래 깔려 있었고, 이를 당겨서 빼내면 그 기척에 동현이 깰까 우려한 나머지 황제는 시종을 불러 용포의 소매자락을 잘라내도록 함으로써 총애하는 동현이 단잠을 계속 자도록 하였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断袖의 고사이고, 오늘날에도 “断袖”, “断袖之欢”、“断袖之癖”는 남성간의 동성애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이와 같은 동성애를 바탕으로 董贤은 벼락출세를 하여 당시 大司马(오늘날의 총리에 해당)이던 왕망을 밀어내고 大司马가 되어 국정을 농단하는 바람에 한조 몰락을 초래하였고, 왕망이 신나라를 건국하자 哀帝刘欣이 죽은 이틑날 董贤도 자결하였는데, 그의 나이 22세이다.
    한황실에서의 男色은 보편적인 현상이었지만, 哀帝는 그 중에서도 유별나게 집착한 경우라고 한다.(西汉皇帝好男色是有传统的。汉哀帝则达到了登峰造极的地步,将后宫佳丽弃诸一旁,独宠董贤一人。....在人类历史发展的长河中,同性之爱的宽容态度,到中国大唐盛世时人们口无遮拦地对此进行谈论并亲身实践,直到现在西方国家从社会观念方面,法律方面,对此所作出的宽容调整,我们可以看出,这样的爱情,在漫长的历史发展过程中,没有得到理应得到的宽容。http://baike.baidu.com/view/83961.htm)

    2012.03.22 16:01
  15. 꼬끼오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라와 흉노의 관계를 푸는 또 하나의 열쇠는, 경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가 아닐까요? 삼국유사 등의 기록과 그간의 연구에 따르면, 석탈해는 남해왕의 장녀 아효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다가, 남해왕의 아들 유리왕이 죽은 후, 62세가 되어서야 왕위에 오르지만, 그때까지도 아들이 없었고, 석탈해왕 8년 그의 나이 70세에 이르러 계림에서 금궤에 든 미동(美童)을 얻어 양자를 삼았고, 그 양자가 바로 김알지입니다.(석탈해는 85세인가에 사망하고, 그 무렵 후비의 몸에서 아들 구추을 얻었다고 하지만, 벌휴왕측에서 정당성을 얻기위해 벌휴의 아버지 구추가 석탈해의 아들이라고 자칭하였을 뿐이고, 연대상 사실일 가능성은 희박)
    그런데, 알지(閼智)의 중국어 발음은 '이엔쯔(yanzhi)'이고, 이는 흉노의 황후 혹은 왕비를 지칭하는 '이엔쯔(閼氏,閼支)'와 동일한 차자(借字)표기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선,閼智이라는 글자를 借字하는 것은 그 발음인 yanzhi를 빌려온 것이지, 이 글자를 당시 한반도의 사람들이 중국과는 달리 '알지'라고 발음해서 읽었다는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즉, '알지'라는 소리를 표기하기 위해 閼智라고 쓴 것은 아니고, 이엔즈 혹은 연지를 표기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당시 사람들은 閼智라고 써 놓으면, '이엔즈'라고 읽지, '알지'라고는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閼을 중국에서는 '이엔'으로 발음하지만, 우리는 '알'로 발음하자, 등등의 별도의 표기법은 없었을테니까.

    특히, 이엔즈(閼智,閼氏,閼支)라는 차자표기는 여타의 이두표기와는 달리 한반도에서 고안한 것이 아니라, 흉노족이 전부터 일상적으로 써 오던,그래서 당시 중국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던 차자 방식을 답습한 것이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후술하는 바와 같이 어쩌면, 이미 차자표기의 단계를 지나 당시 이미 보통명사로 굳어진 어휘를 사용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당시,한나라는 흉노와의 전쟁에서 수차 패하여 화친조약을 맺고, 공주를 흉노왕에게 계속 바쳐야 했던 관계로, 공주가 흉노로 시집가서 '이엔즈'가 된다는 것은 공주선발 때마다 문제되던 일이기에 이엔즈라는 흉노말의 한자표기(阏支,阏氏)는 일찌기 중국에서도 통용되고 있었고, 보통명사로 굳어져 현대에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황실과 흉노간의 중대한 외교문제인 阏支,阏氏는 이웃나라인 신라에도 이미 익히 알려져 있었다고 보아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흉노의 차자방식과 화장품이 중국에 역으로 전래되어, 여자들의 화장용품을 이엔쯔라고 부르다가, 동일한 발음의 뜻글자 표기방식인 (胭脂)로 거꾸로 변화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미동을 석탈해가 '양자'로 취하면서 왜 하필이면, '이엔쯔'로 불렀을까?
    혹시, 한고조 유방, 한무제 등이 남색을 즐겼고, 한황실의 大司馬였던 왕망이 哀帝 동성애 파트너였던 '동현(董賢)'에 의해 실각하였던 당시의 성풍속과 관련된 것은 아닐까?(신라의 성풍속도 고려한다면...) 김일제의 증손자를 비롯한 후예들이 친척(이종지간)인 왕망을 도와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가,왕망의 신나라가 멸망하면서 신라로 대거 피난왔다면, 美男計에 익숙한 그들이 낯선 땅 신라에서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위해서 , 미동을 70노인인 석탈해에게 바치고 사실상 외척과 같은 권세를 누렸던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그 美童, 즉 김알지는 흉노사회에서 왕의 愛妾 혹은 왕비를 지칭하였던 '이엔쯔'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석탈해가 죽었을 때 이미 장성한 양자 김알지는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을 것이고...
    덧붙여서, 美童을 발견해서 석탈해에게 소개해 준 호공은, 석탈해가 젊은 시절 소송사기극을 벌여 호공의 집을 빼앗았던 은원관계가 있기에 늙은 석탈해에게 이쁜 애인을 붙여주어 혼을 빼놓고자 했을 가능성이 있고, 남해왕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석탈해가 왕위를 유리에게 양보하고, 유리왕 사후 비로서 왕이 될 수 잇었던 사정등을 종합해 보면, ㅎㅎㅎ
    일연이 삼국사기를 집필하던 고려시대에는 경주김씨들이 사회의 주류세력으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반발을 의식하여 男色관계를 내놓고 기술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이엔쯔(閼智)라는 알듯모를듯한 명칭만 남겨 놓았던 것은 아닐까? (요즘말로 하면, 이쁜이, 자기, Darling, 뭐 이런 말이겠지...)
    요컨대, 김알지는 신라로 집단 이주한 흉노족 중에서 용모가 수려한 소년이고, 흉노족들이 왕실에 진출하기 위해 西汉에서 익히 보아왔던 술수를 써서(혹은 호공과 연합하여) 왕실진입 교두보를 마련했다면, 그 명칭은 흉노말인 '이엔즈'(어쩌면 '연지'일지도 모르겟다)였을 것이다.

    胭脂的起源,说为原产于中国西北匈奴地区的焉支山,匈奴贵族妇女常以“阏氏”(胭脂)妆饰脸面。

    연지의 기원은....중국 서북 흉노지역의 焉支에서 유래하는데,흉노의 귀족부녀들은 '阏氏이엔쯔'로 얼굴을 장식하였다

    “阏氏”音“焉支”yān zhī , 原为女性妆扮用的胭脂古称。后意义扩展为汉朝的公主、还有匈奴皇后号。

    阏氏는 이엔즈로 읽는다. 여성화장품인 연지(胭脂)의 옛 명칭이고, 후일 한왕조의 공주, 혹은 흉노의 황후를 지칭하기도 하였다.(한나라 흉노의 화친조약으로 한나라는 흉노왕에게 공주를 바쳤고, 흉노로 시집간 공주는 흉노왕의 '이쁜이, darling'이 되었기에 이엔즈는 이런 뜻으로 쓰였다)

    班固曰:‘匈奴名妻曰阏支, 言可爱如燕支。’。从“阏氏音焉支”、“匈奴名妻曰阏支,言可爱如燕支”的记录和汉语借用于匈奴语的“烟支、胭肢、焉支、燕支、阏支”虽然可能是译名的多个变化,但可以肯定,这些词的读音是很接近的。

    班固에 따르면, 흉노는 처첩을 '이엔쯔'(阏氏)라고 부르는데, 그 소리가 燕支만큼이나 사랑스럽다.' 阏氏는 이엔쯔(焉支)로 발음하고, 흉노가 처첩을 阏支로 부르며, 그 소리가 무척 사랑스럽스럽다'는 기록 및 한자를 차자해서 흉노말을 표기하는 烟支、胭肢、焉支、燕支、阏支 등 여러가지 변화가 있지만, 이런 용어들의 읽는 소리는 서로 비슷하다.

    2012.03.22 21:51
  16. BlogIcon 닷글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단고기를 이해하면 모두 이해됩니다

    2015.06.19 20:30
  17. 한말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라 왕능 고신라인골 디엔에이분석 왕능의 유물 모두가 북방 북방 스키타이 흉노를 가르키는데 그럼 그당시 상인들이 그 귀한물건을 물물 교환식은로 로마에서 사다가 신라왕실에 팔았다? 상식적으로 황금보검 ,신라왕관 , 금귀거리 그당시 일반상인이 서역에서 그걸 신라로 팔았다? 누가 믿겠습니까? 팔지도 않을뿐더러 상인들은 구경도 못하는 물건이 었을것입니다.
    분명한것은 신라에 유물량이나 세계적가치로 봐서는 분명이 신라는 스키나이 흉노의 핵심 그룹이 세운 나라가 맞는것 같습니다.
    배를타고 올수가 없다. 흉노는 말을타지 배를 안탄다? 김일제가 산둥반도 부근에 정착하면서 몇대를 내려오면서 한나라에서 상당한 조선기술을 배울수도 있지요.
    그리고 전라도 나주 김해에서 왕망이 세운 신나라의 주화가 발견되었다고 하더군요.
    그건 그당시 해상으로 한반도와 중국산둥반도 그리고 일본까지 해상 무역이 활발했다고 할수 있죠. 만약 신나라가 망할때 김일제 후손이 배를 타고 해상 무역으로 닦아놓은 해상루트로 피난을 가서 나라를 만들수도 있죠.아무리 망한 일제후손이라도 신나라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집단인데 작은 신라, 가야하나 접수 못하겠습니까? 물론역사는 단순 막연한 생각으로만은 상상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정도 유물 이정도 인골분석 정도라면 신라가 최소한 스키타이.훈의 방계가 아니고 핵심 세력일수 있습니다.

    2017.01.08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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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 IT의 융합을 추구하는 디지털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취미생활을 통하여 박학을 추구하는 잡학입니다. 개인적인 문의는 제 메일(ddokbaro@g메일.com)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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