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은 국군의 날을 하루 앞둔 30일 울산 특수선 야드에서 박병택 구축함 인수단장(준장)을 비롯한 해군 및 국방품질관리소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전투함으로는 국내 최대규모인 4500t급 문무대왕함 인도식을 갖기로 했다.
문무대왕함은 길이 150m, 폭 17.4m, 높이 7.3m에 최대 29노트(시속 54km)의 속력을 낼 수 있으며 항속거리가 1만200km에 달한다.
이 구축함은 300명이 탑승하며 5인치포와 대함(對艦) 및 대공(對空) 유도탄 수직 발사대, 대함 유도탄 방어용 무기, 잠수함 공격용 어뢰, 해상작전 헬리콥터 등을 갖추고 있다.
대잠(對潛), 대지(對地), 전자전(電子戰) 수행능력까지 갖춘 이 구축함은 국내 최초로 전자파와 적외선, 소음 노출을 감소시키는 스텔스(Stealth) 기술을 적용, 생화학 및 방사선 무기로부터 승조원과 함정을 보호할 수 있다.
문무대왕함은 현대중공업이 지난 98년부터 건조하기 시작, 지난해 4월 진수식을 갖고 시범운항했다.
‘문무대왕’의 함명은 역사상 최초로 국토를 통일, 민족 통합과 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 “바다로 쳐들어오는 적을 물리치기 위해 동해바다에 묻히겠다”며 해중릉에 묻힌 문무대왕의 호국의지를 계승하기 위해 명명됐다.
<출처 : 대전일보>
등록일 2004.09.30
바로의 중얼중얼
해군이 KDX에 정말 독한마음을 먹고 있다. 언제나 육군에 밀려서 서러운 모습 많이 보이는 해군이 대양해군으로 발돋음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지금 KDX시리즈로 명명되고 있는 차세대 한국형 구축함사업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 (사실 구축함이라고 부르긴...쫌..) 자! 여기서 문제 한번 날리겠다.
"한국해군이 가장 위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필이 딱 오지 않는가?!
이.순.신.장.군.님.이다.
그런데 해군이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KDX-Ⅱ에서 함급을 "이순신급"이라고 정하고 1번함에 이순신장군함이라고 떠억하니 붙여놨었다. 당시 경악 속에서 허둥거릴 수 밖에 없었다.....
원래 이 KDX계획은 KDX3탄(영화시리즈냐-_) 까지 나올 계획으로 알고 있다. 이지스함 만드신단다.해군에 대해서 조금이라고 하시는 분은 이 계획이 얼마나 어이없는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독한맘 먹고 있는지 설명 안하셔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된다.이지스함은 그 돈지랄의 극치인 일본도 딸랑 4대 보유하고 있다. 이게 뭔데 그따구로 비싸냐고?! 간단히 말해서, 이론상으로는 어떠한 공격도 다 막을 수 있는 마법의 방패시스템이다. 그런데 이 시스템에 쳐다밖는 전자장비의 라이센스비용이 상상을 초월한다. 대충 10억달러~
하지만! 끝이 아니다. 이제 고대하시는 해군의 마지막 비장의 계획이 있다. 사실 KDX니 이지스함따위는 이 마지막 계획을 위한 사전 단계일 뿐이다. 그럼 그 마지막 계획이 무엇인고 하니..
항공모함
농담처럼 생각될지는 모르겠지만 농담이 아니다. 비록 계획상으로는 소형에 중고항모를 구입할 계획이라고는 하지만, 이넘의 항공모함의 군사적, 특히 정치적 특수성은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한다.
군사적
한국해군이 진정한 "대양해군"이 될 수 있다. 이른바 작전반경이 어마어마하게 증가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비행기가 있잖수~~) 항공모함 그 자체보다는 항모와 딸려 가게 될 호위함들.(여기서 KDX(구축함)과 이지스함이 필요한거다. 항모 혼자 딸라 보내면 침몰하는거 시간문제다) 그들이 모인 함대는 왠만한 단독작전이 가능하게 한다. 지구 바다의 어디서나...겠지만, 일단은 한반도 주위만을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항모가 있으면 육상에 있는 비행장이 폭격으로 싹다 파괴된다고 하더라도 바다에 있는 항모는 유유히 위치를 이동하니까 보다 안전할 수 있죠. 그것 말고도 일본이나 중국을 가상 적국으로 했을 시에는 항모의 위력은 몇 배로 증가하게 됩니다.
정치적
우리나라 주위에는 4대 강국이라고 할 수 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
그런데 씁씁한 것이 그들은 모두 항모를 운영중입니다. 자주국방이라는 말이 여기서 쓰이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비록 소형이라도 항모가 있다면, 국제정치에서 나름대로 힘이 있을 수 있는 것이죠. 에휴..
그래서 우리나라 최고의 항모이름은 당연히 "이순신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악스러운 일이 있나! 고작?! 구축함에 이순신장군님의 이름을 붙이고, 그 2번함에 문무대왕님의 이름을 붙이다니...(문무대왕님도 수중릉이라는 특수성으로 해군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는 분인데...)
그럼 대체 항모이름은 무엇으로 할 생각인가?!
심히 궁금해진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보시라^^
(...솔직히 이것에 대한 여러분들의 의견이 듣고 싶었다^^)
그래! 좋다! 한국이여! 한국해군이여!!
그대의 대양해군의 기치를 높게 펼쳐라!!!!
뱀다리 : 해군에서는 통역병모집 안하나? 하면 복무기간 3년이라도 반드시 할텐데....
(참고로 영어가 아니고, 중국어, 일본어를 말한다. 이건 일반병으로 지내다가 해당국가 방문시에만 통역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통역병이라고 하기에는 쫌...^^::)
Wiki는 언제 최초로 중국어권에 들어왔을까? 이것은 여러분들이 아직 한번도 탐구해 보지 않았던 화제이다. 나는 다만 내가 알고 있는 한도내에서의 중국내의 초기 Wiki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한다.
내가 아는 바로는, 최초의 Wiki는 비밀탐색소프트웨어작업실(索秘软件工作室)(Softme Studio)의 WebPM프로젝트의 세부항목이었던 jWiki이다. WebPM프로젝트(Project Management On Web)는 중문프리소프트웨어의 개발자, 사용자와 보급자들이 인터넷상에서 개방식관리장치환경을 만들기를 주요목표로 하고 있다. 그 중에서 Wiki세부프로젝트는 2001년 12월 27을 최초로 시작되었고, 2002년 01월 14일에 문을 닫았다. 듣기로는 이 단계에서 장호(浆糊)형님이 대단한 활약을 했다고 한다. 첫번째 단계가 끝난뒤 얼마되지 않아서, 그들은 다시 측정용 홈페이지 softme.org(현재 접속안됨)을 개발하여 그들의
Wiki시스템을 평가해보았다. 나는 전에 그 시스템에 등록했던 적이 있다. WebPM프로젝트는 개발그룹은 국내에서 비교적 초기의 XP사용자들이었다. jWiki프로젝트는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으며, 올해 7월 6일에 jWiki-v2.0.1-rc1판을 발표하였다.
내가 생각했을때 위의 경험자들과 교류를 통하여, 그들이 어떻게 Wiki를 생각하는지 들어보는것도 좋을거 같다.
내가 알기로 그 다음에 등장한 Wiki는 중루다잡원(中蟒大杂院)이었다. 그것은 2002년 5월달에 개통되었다. 중루다잡원은 비교적 재미있게도 중문타자프로그램을 구현하였다.
(이 부분에서 잠시 설명, 한국으로 예를 들면, 대충 완성형과 조합형에서 조합형으로 넘어갔다고 생각하는게 속편합니다.-_-; 사실 그것보다 복잡하지만..)
그 다음에는 중문위키백과사전(中文维基百科)이 2002년 10월 말에 개통되었고. 현재 제일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중국어권에서 가장 큰 Wiki페이지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무대Wiki(贸大Wiki, 무역관련인듯..)로 대략 2002년 11월초에 개통되었다.
정확한 시간은 조금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대체적으로 비슷할 것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계신분이 계십니까? 우리 한번 토론해 보자고요.
바로의 중얼중얼
근데...한국에는 위키가 언제 상륙했죠? 고수님들의 분석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제가 아는 위키라고는 "눈마새"밖에 없는지라...^^:::
그리고 한국최초의 블로그는.....좀 찾기 힘들겠죠? ^^:::
중국 축구의 약점은 무엇일까. 일단 몸싸움을 꺼린다. 또 패스가 원활히 이뤄지지 않는다. "중국 축구를 보면 모래알 같은 느낌이 든다. 조직력이 떨어지고 선수 개개인이 공을 차지하는 시간이 길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평이다. 한국 축구를 좋아하는 한 중국인은 "공을 몰 때 한국 선수는 우선 패스를 생각하는 것 같다. 반면 중국 선수는 갈 데까지 가 본 다음 더 이상 몰 여력이 없다고 판단될 때 비로소 패스할 곳을 찾는다"고 말했다.
- 중앙일보의 유광종기자님의 [다시 보는 중국 중국인] 9. 혼자 할 땐 짱 함께하면 꽝 중에서..
기자님의 본문내용은 상당히 훌륭하다. 그리고 내가 딴지를 거는 것은 그 본문의 내용중에 단지 한 마디일뿐이니, 유광종기자님을 뭐라고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중국축구는 몸싸움을 꺼린다고 유광종기자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전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나라의 축구나 잔반칙기술들이 있습니다. 상대 얼굴에 침뱉기나 옷살짝 잡아당기기 정도는 이미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그런데 이넘의 중국축구는 그 반칙기술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입니다. 잡고 늘어지기는 거의 필수옵션이고, 뒤에서 치기, 심판 안 볼때 복부가격등등...
이 정도는 애들 장난이란 말이지.
대체 애네들이 왜 그럴까? 하는 의문들은 제가 중국에 와서 경험한 두가지의 x같은 상황을 예로 들면 여러분들도 짐작하시리라 생각됩니다.
1. 축구수업시간에...
저희 학교는 무조건 운동을 4학점(한 학기에 1학점임)을 들어야합니다. 평소부터 축구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일단 축구를 선택했습니다.
여러가지 일이 있지만 이 이야기와 관련된 이야기만 하자면...
어느 하루, 드리블와 페인트에 대해서 선생님이 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드리블이 있고, 이런 페인트가 있다라고 설명하던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다 안되면 붙잡고 늘어지면 되는거야!!"
........어이 없는 얼굴로 변해버린 저였는데....
주위의 중국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끄떡 거리더군요.
이게 쉽게 나온것이 아니란 거지. <br />영제교육을 받아서 저렇게 되는것이지..+_+
2.학교축구시합
저희 학교에서는 매 학기에 학과대항으로 축구시합이 있습니다. 역시 참가를 했습니다. 나름대로 발이 빠른지라 열심히 오버랩핑을 번번히 시도했습니다. 그러다가 짜증나서 응룡타를 날려버릴뻔 했습니다.
오버랩핑하러 공도 없이 달려들어가는데 끝까지 뒤에서 잡아 당깁니다. 뒤에서 발로 제 다리를 거는건 일쌍다반사였지요. 팔꿈치로 명치도 맞아보고, 완벽한 빽태클에 당했는데 심판은 본척도 안하고.. 더 열받는건 제 팔을 잡길래 뿌리치고 달려가는데 심판이 "삐익~!".....
제가 밀었다는군요. 그넘은 제가 뿌리치니까 헐리우드액션(멀티)는 저리 가라는 듯이 무려 5바퀴를 뱅뱅 구르고 쓰러져 있더군요.-_-;;
이응룡선수의 심정이 절실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 게임있고서 한참뒤에 전설의 응룡타가 등장했습니다.)
저 두가지의 사례를 가지고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것은,
중국축구는 몸싸움을 꺼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반칙기술이 너무 환상적이라는 것이죠. 중국축구는 제대로 된 기술을 익히기 전에 반칙을 어떻게 하는지부터 배운답니다.(...+_+)
중국축구야. 평생 그렇게 하려므나, 그럼 너희는 절대 공한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리~~
바로의 중얼중얼
그런데 말입니다. 중국축구의 더욱 나이스한 면은 그넘들의 일명 拉拉队(라라대, 응원대)에 있답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인터넷에서 유언비어 같이 떠돌아 다녔던, 중국축구응원단의 진정한 모습을 확실히 까발려 드리겠습니다. 그 중에 반이 저의 실제경험이고 나머지 반이 저의 친구들의 경험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언비어나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경악의 그들의 응원행태. 집어보겠습니다.(으윽...pd수첩같다는...)
이 뜻깊은 시간을 맞이하여, 저는 당중앙과 국무원을 대표하여, 전국각민족인민과 각계인사들에게 명절인사를 올립니다. 홍콩특별행정구와 마카오특별행정구의 동포, 타이완동포 및 해외화교여러분들에게 친근한 문안인사를 드립니다. 이 자리에 출석해주신 각국의 친구여러분과 본국의현대화 건설에 관심과 지지를 보내주시는 세계의 친구여러분들에게 진실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바입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그 탄생을 알리며 중국역사발전의 신기원을 이룩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전세계에 장엄하게 선언하였다 : "중국인은 스스로 일어나서 중국인민 스스로의 권리를 얻었으며, 초유의 창조적 활력을 발산하였고, 고난과 나약함의 옛중국을 휘황찬란한 중국으로 변하였다. 종합국력의 상승에 따라, 인민생활의 개선과 국제교류의 확대, 중국의 국제지위의 현격한 향상은, 해내외중화자녀들에게 깊은 자신감을 싶어주었다!
55년동안 마오저동,떵샤오핑,쟝저민을 주요대표로 하는 중국공산당원들은 전국각민주인민을 이끌어 좌절뒤에 또 다시 좌절이 밀어닥치는 힘겨운 싸움을 하였으며, 세계가 놀라워하는 위대한 성과를 이루어내었다. 55년의 빛나는 과정은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결론을 일깨워주었다. : 반드시 중국공산당의 강력한 영도하에 우리나라의 진정한 모습을 알고 세계흐름속에 적응하여 독립자주적으로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이룩해낼 수 있다.
이번 세기의 첫 20년은, 우리나라에게는 반드시 굳건히 잡아야되는 중요전략기회의 시기이다. 우리는 자신감, 명료함과 용기를 가져야한다. 유리한 조건을 보며 미래에 대한 당당한 신념을 가져야한다. 충분한 준비로 미리 예상했거나 예상하지 못한 고난들을 극복해야한다. 앞으로 전진하며 강력하게 결집하여 계속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노선에서 전진하여야한다.
--- 우리는 발전을 행정의 최우선목표로 삼아야한다. 우리나라는 13억 인구의 개발도상국이며, 장기간 사회주의초보단계에 있었던 나라이다. 우리는 언제나 반드시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적인 방법으로 경제성장의 문제를 해결해야한다. 발전에는 새로운 생각이 필요하다. 과학발전관에 대한 확고한 수립이 필요하며, "오대총괄(五个统筹)"를 끈기있게 유지하여 새로운형태의 공업화노선을 향해야하며, 경제사회의 전면적이고 유연한 지속적인 발전을 이룩해야한다. ; 인간을 최우선으로하여 인민의 다양한 요구를 만족시키며, 전면적인 발전을 이루어내야한다.
(오대총괄(五个统筹) 이란? : 도시와 농촌의 발전, 지역발전, 경제사회발전, 인간과 자연의 조화된 발전, 국내발전과 대외개방을 각각 총괄한다는 개념으로, 지금 현재 중국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인 문제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다. 조금만 생각해봐라. 이렇게 하겠다는건 이렇게 안되고 있다는 말과 동일하다.)
--- 우리는 개혁개방을 끈질기에 유지해야한다. 개혁은 끝이 없으며, 개발은 세계을 향해있다. 개혁개방은 현대화건설의 전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경제시스템의 개혁, 정치시스템의 개혁과 기타방면의 개혁을 계속 실천하여, 모든 이로운 요소를 조절하고, 개방과 생산력을 발전시킬때, 사회공평과 정의가 실현될 것이며, 모든 노동자과 건설자가 모두 경제발전과 사회진보의 과일을 나누어가질 수 있을것이다. 대외개방을 확대하여, 경제세계화와 세계과학혁명의 새로운 형세에 적응하며, 당대인류문명의 훌륭한 성과를 배우고 참고하여야 한다. 개방을 통해서만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이 끊임없이 진보할 수 있다.
-- 우리는 민주법제건설에 힘을 기울여야한다. 민주가 없을때 사회주의도 없다. 사회주의민주를 확대하기 위하여, 민주의 제도화,규범화,프로그램화 및 인민의 참여보장를 이루어야한다. 보다 안정된 법제를 위하여, 법을 통해서 나라를 통치하며, 사회주의법제국가를 건설하여야한다. 사회이익의 조절, 사회모순의 해결, 사회안정의 유지를 통하여 사회주의의 화목한 사회를 건설하여야한다.
-- 우리는 문화건설에 힘을 기울여야한다. 문화는 민족정신의 상징이다. 문화의 힘은 민족생명력,창조력과 응집력중에 깊이 녹아들어있다. 선진문화의 전진방향에 맞추어, 민족정신의 교육과 홍보에 온 입을 기울이며, 교육과학문화사업을 발전시켜야하며, 사상도덕을 굳건히 하고, 새로운 중화문화의 빛나는 업적을 위하여 모두가 노력하여, 인민이 용기있게 전진할수있는 강력한 정신동력과 지식체계를 만들어야한다.
-- 우리는 오랜기간동안 힘든 싸움을 하여야한다. "일하면 흥하고, 놀면 망하리" 각계 지도자간부들은 반드시 앞장 서 고난의 투쟁을 하여야하며, 살지행동을 통해서 당과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합쳐, 수많은 군중을 인도하여, 전진중의 고난을 극복하여야 한다. 반부폐투쟁의 깊고 오랜 투쟁을 위하여, 부폐분자를 강력히 처단하여야한다. 종합적으로 체계적으로 제도상으로 또한 근본적으로 부폐현상을 억제 예방하여야한다.
-- 우리나라는 각 민족인민의 대결집을 공고히 하여야한다. 결집은 곧 힘며 결집은 곧 승리다. 사회주의현대화건설은 반드시 수 많은 공인, 농민과 지식분자들을 의지하여야하며, 이 모든것이 결집되었을때 결집의 힘이 생긴다. 각민족의 결립을 강조하여야한다. 우리당과 각민주당파, 각인민결집체의 결집을 강화하여야한다. 전체사회주의노동자, 사회주의사업의 건설자, 사회주의 애국자와 조국통일의 애국자들이 대결집하여야한다. 전국 각 민족이 결립되어일어난가면 우리의 사업은 영원히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오랜 고찰과 시대에 맞춘 마르크스주의 정당이다. 당의 영도를 개선하여야만, 중국특생의 사회주의건설의 근본적인 보장할 수 있다. 우리는 당의 16회4중전회의 정신을 관철하여, 전면적으로 당의 행적능력을 향상시키고, 인문군중과 혈육과 같이 친밀하게 지내며, 중국현대화건설을 책임지고 영도하는 위대한 사명을 완수하여야한다.
내빈여러분, 친구여러분, 동지여러분 :
중국은 평화발전노선을 견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전과 같이 평화, 발전, 합작의 기치를 내걸고, 독립자주의 평화외교정책을 추구하며, 세계각국과 우호협력을 통해서 같이 발전해나갈 것입니다. 중국은 영원히 패권을 추구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세계의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패권주의와 강권정치 및 어떤 형식의 테러리즘도 반대합니다. 우리는 세계평화을 통해서 스스로 발전하며, 또 스스로 발전하여 세계평화를 촉진할 것입니다.
홍콩, 마카오특별행정구역 과 타이완동포여러분, 우리는 혈육입니다. 우리들은 계속 "일국양제(一国两制-하나의 나라지만 다른 제도를 운용한다)""강인치강(港人治港-홍콩인이 홍콩을 지도한다)""오인치오(澳人治澳-마카오인이 마카오를 지도한다)"의 고도의 자치방침을 관절하여, 특별행정구역의 기본법 보장 및 홍콩,마카오의 장기번영과 안정을 보장할 것입니다. 우리는 "평화통일(和平统一)、일국양제(一国两制)"의 기본방침과 "팔항주장(八项主张-장저민이 제출한 주장으로 홍콩 마카오 타이완등에 대한 주장입니다. 전문이 너무 길어서 생략하겠습니다^^:: )을 관절하며, "타이완독립"분열세력을 강력히 반대하며, 결코 흔들리지 않는 국가주권과 영토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조국의 완전한 통일이라는 신성을 목표를 반드시 실현하며, 반드시 실현됩니다!!
내빈여러분, 친구여러분, 동지여러분 :
올해는 우리나라의 발전과 개혁의 성과가 선명한 한해였습니다. 국가의 거시적인 조절을 통해 개혁개방을 확대하였고, 경제생활중에서 발생한 모순들을 효과적으로 해결하였으며, 경제의 안정되고 빠른 발절을 이루어냈으며, 앞으로의 발전과 개혁에 훌륭한 기초를 마련하였습니다.
앞으로 45년뒤, 우리나라가 건국 100년을 맞때가 되면, 세계 총인구의 40%의 국가가 기본적으로 현대화를 이루게 되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이룰 것입니다. 이것은 중국인민이 인류발전사업에 대한 중대한 공헌이 될 것입니다. 미래를 살펴보면, 일은 많고, 길을 멀리만 합니다. 우리는 후진타오동지를 총서기로하는 당중앙의 영도하여, 등소평이론과 "삼대대표(三个代表-장저민이 만든건데, 중국쪽에 관심있는 분은 다 아시겠고, 관심없는 분에게야 별 상관없으니..생략^^)"중요사상의 위대한 깃발 아래, 당의 16대정신을 관철하여, 시대에 부끄럽지 않은, 전대의 위대한 업적에 부끄럽지 않게 합시다!
지금, 저는 건의합니다 :
중화인민공화국성립 55주년을 위하여
조국의 번영과 각민족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중국인민과 세계인민의 우정화 협력을 위하여
이 자리에 오신 내빈, 친구 동지. 여러분의 건강을 위하여
건배!!!
바로의 중얼중얼
백수처럼 이것 잡고 번역하고 있었군요.(으윽! 생각보다 양이 많아서 시간이 좀 걸렸다는.ㅠㅠ) 사실 한국인들이 봐야될 대목은 딸랑 이 부분입니다.
중국은 평화발전노선을 견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전과 같이 평화, 발전, 합작의 기치를 내걸고, 독립자주의 평화외교정책을 추구하며, 세계각국과 우호협력을 통해서 같이 발전해나갈 것입니다. 중국은 영원히 패권을 추구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세계의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패권주의와 강권정치 및 어떤 형식의 테러리즘도 반대합니다. 우리는 세계평화을 통해서 스스로 발전하며, 또 스스로 발전하여 세계평화를 촉진할 것입니다.
1)중국은 테러리즘을 반대해서 반대하는 것만은 아니다.
--> 중국에는 수 많은 소수민족들이 있으며, 특히 티벳과 위구르족들의 경우, 아직도 민족독립국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심하면 테러행위를 하고는 합니다. 테러행위는 민간인을 살상한다는 면에서는 나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독립투사라고 불리우는 많은 분들 중에서 테러리스트가 아닌 분들이 있었습니까?
김구선생님은 지금으로 따지면 알카에다의 빈라덴입니다. 수 많은 테러행위를 배후에서 지원하고 조정한 인물이죠. 안중근의사사의 하얼빈사건도 어떻게 보면 테러행위일뿐입니다. 물론 안중근 의사님은 자신이 전쟁포로라고 주장하였지만, 당시 일본에서는 범죄행위라고 했죠. 지금의 소수민족들은 어떨까요? 우리의 과거를 생각하고, 지금 중국 소수민족의 심정을 생각해보시라는 의미입니다. 힘은 없지만, 자신의 입장을 말해야겠고....방법은 테러밖에......
2) 중국은 영원히 패권을 추구하지 않을 거라고?!
패권이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헤게모니아. 신현실주의나 신자유주의 모두에서 기본이 되는 단위는 국가입니다. 그리고 국가의 패권추구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중국은 패권을 추구하지 않겠다고?! 웃기고 있네+_+ 우리는 이 말을 오히려 더욱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현재 중국이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주위국가의 경계심이 올라가자 이 말을 꺼내서 어떻게 분위기 조절해보겠다는 것입니다.
일단 타이완의 독립을 공공연하게 지지할 수는 없겠지만, 되도록이면 타이완독립쪽으로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 좋을듯 싶습니다. 어쩔 수 없이 통일쪽으로 가야된다면, 그 과정에서 한국과 북한의 통일의 완전한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어야할겁니다.
역사쪽에서야 동북공정의 이야기로 시끄럽기는 하지만 여러분이 할 일은 중국 욕을 하는 것보다는 더욱 정확한 역사를 스스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중국인들이 뭐라고 하였을때, 사료까지 들어가면서 당당하게 반론할거 아닙니까?!
3) 중국이 적이냐고?!
글세요. 적인지 아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지금 현재 상당한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와의 위치적 관계나 역사적 관계를 통하여 생각해 보았을 때도 결코 놓쳐서는 안되는 시장입니다.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아군은 없습니다.
우리는 중국을 연구하여 현금보유량 세계최대라는 최강 스쿠루지 쫌쌩이 중국인들의 손에서 돈을 왕창왕창 긁어모아야죠!!
추석때문에 조금은 늦게 나온 32챕터가 나왔습니다.
좀비들의 강력한 능력으로 이미 추리되어나왔던 가설들이 맞아서 별로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던 모닝스타는 딸랑 하나!!팔리탐하고 라보태위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것도 설마 둘이 합쳐서 군령자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1)
제 2의 하늘누리의 존재 : 말리
세 번째 벽난로방이라는것이 말리의 존재였다니......
그것이 은하철도999의 합체열차처럼 하늘누리 옆에서 따라다녔다니..
2)
팔리탐+라보태위(팔태위)가 보낸 지원군이 원래는 사라티본부대였다니...
(그럼! 그 하늘치는 어디서 나타난거야! 우연?! 뭔가 이상해...)
3)
백화각의 냉동실 정체가 아라짓전사의 휴식처였고...
아라짓 전사가 나가들이었다니.....
엘시의 표현대로 "전통에 대한 공격 중 이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것은 없는 것 같다."
31화의 모닝스타들은 대부분의 좀비를 경악상태로 몰아넣어버렸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냥 좋게 좋게 모닝스타로 좀비들의 뒷통수만 쓰다듬어 줄 영도님이 아니었다.ㅠㅠ
일단 가장 간단하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몇개가 있다.
1) 칼리도 백작부인 : 라세가 직접 말했다. 아니란다.
2) 정우 : 라세가 언제 정우를 인질로 잡았지? 그건 아닌거 같은데..
3) 제국 : 인질이라고 해서 인간일 필요는 없다. 평소 엘시의 소원이 평화로운 제국
(그래야 자기가 고향으로 돌아가니...)
4) ............그 다음은 뭘까?
다만 "하지만 의혹을 해소하지 못한 엘시는 문이 닫힐 때까지 치천제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문장을 통해서 엘시자신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추측해볼뿐...(당연하잖아!!)
데라시는 이성적인 나가다. 바깥에 있는 하늘치의 등을 보고서 하늘누리의 모습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대신 대담하게도 이곳이 하늘누리가 아니라고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엘시는 아직까지도 하늘누리의 모습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려는 유혹을 떨치기 어려웠다. 사실 말리와 하늘누리는 닮은 점이라곤 없다. 하지만 하늘누리 외에는 그런 물체를 본 적이 없었던 엘시는 자꾸만 하늘누리와 말리를 비교하게 되었다.말리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엘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데라시가 옳다. 말리는 하늘누리와 다르다. 움직인다는 어처구니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하늘누리는 사람을 키우고 역사를 품을 수 있는도시였다. 말리는 그렇지 않다. --피마새 31챕터중..
사람을 키우고 역사를 품을 수 없다는 설명에 집중을 하자면, 건물이 없다고 하려고 했으나, 백화각 비슷한 곳도 있었고, 그리고 냉장고?!로 가는 길은 분명 건물내부였다. 그렇다면 대체 보통의 (하늘누리위의 도시가 보통이라고 말하긴 뭐하지만..) 도시와는 대체 뭐가 어떻게 다른 것일까?
근데 우리가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 원래 하늘치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는 단지 고대유적만이 있었다. 혹시 그 고대유적이 많이 남아있는?! 일리도 없는데....그럼 고대유적을 이용한 환상?! 이라면 각각 개인마다 달리보이는데 그것도 이상하고...
영도님 미워!!!!
말리라는 이름에서 발리를 생각한건....문제가 있을지도...
혹시 좀비를 말려죽인다는 의미로 말리?!
뱀다리 : 이젠 승천한 티나한이 하늘치부대를 이끌고 내려와서 슈퍼하늘치전함대전이 벌어지고 이라세오날과 정우가 서로 드레곤블레스를 날리며 케이건이 엘시였다고 하더라도!! 플러스 타이모랑 갈로텍이 합체해서 아실에게 뽀뽀를 해도.....
별로 놀라지 않을거 같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건지.....ㅠㅠ
근년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에서 2002년부터 막대한 인원과 예산을 투입하여 동북변강의 역사와 현장에 대한 연속 연구공정(東北工程)이라는 국가적 프로젝트를 5년계획으로 추진 중에 있다. 그 내용은 고구려를 비롯한 고조선, 발해 등 한국 고대사를 왜곡하여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공작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평양 천도 이전은 중국 역사이며 평양 천도 이후는 한국사라고 하였으나 이제는 고구려 역사 모두를 중국사로 주장하려고 한다. 그들은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결론을 내어놓고 억지로 이를 증명하려고 자기 주장에 맞는 사료만 나열하면서 附會하려고 한다. 그 내용을 보면 종족문제, 조공책봉문제, 영토계승문제 등을 들고 있다.
중국인들은 주변국가가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다 하여 모두 종주국과 복속국 관계이며, 중앙정권과 지방정권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역대 중원국가 중에는 주변 변방국에 奉表稱臣한 일도 있고, 또 形式은 조공관계가 아니더라도 내용적으로는 조공을 바친 예가 한두 번이 아니다.
본고에서는 중원왕조가 북방계 왕조에 대하여 奉表稱臣한 예와 이에 준하는 宗室公主許嫁, 物貨의 納貢등의 事實을 時代別 또는 分類別로 나누어 기술하려고 한다.
1. 조공의 의미
조공의 뜻을 우리말 사전에는 '전날 속국이 종주국에게 때맞추어 예물로 물건을 바치던 일'이라 하였고, 또 『國事大事典』에는 '종주국에게 때맞추어 예물로 물건을 바치는 일로 종주국에서는 이에 대한 답례로서 下賜, 賞賜란 뜻으로 많은 恩典을 가하여 보답하였다. 조공은 주로 동양사회에 있어서 중국을 중심으로 행하여졌는데 이것은 고대로부터 정치적 이상 즉 왕도사상에서 나온 대외정책의 한 형식으로 국가간의 공식적인 물품교환을 의미하는 일종의 관무역이라 할 것이다.'라 하였고, 『中文大事典』에서는, '諸侯或屬國定期朝拜天子, 貢獻方物, 謂之朝貢.'(제후 혹은 속국이 정기적으로 천자를 배알하고 방물을 바치는 것을 조공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자구해석에 불과하다. 그 실상은 明王愼德, 四夷咸賓이 아니라 약소국이 무력적 약세에 의하여 불가피하게 朝覲之禮를 이행하게 되었고 그 관례는 정치적 복속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국제정세에 따른 자국의 이해관계에서 출발한다는 이론이 설득력 있다 하겠다.
중국의 수 천년 역사의 전개과정에는 한 민족만이 중원을 지배하였던 것도 아니었고 주변 다른 민족도 여러 차례 중원의 주인이 되기도 하였다. 대개는 중원왕조의 주인은 한족이고 그 주변의 다른 민족은 조공이나 바치며 명맥을 유지 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중국의 서북, 북방, 동북의 유목민족과 반유목민족이 중원의 주인이 되기도 하고 혹은 공생관계 혹은 전쟁관계에서 여러 방면에 영향을 끼친 바 크며, 그 업적과 역사상의 지위는 한족 못지 않았다.
북방민족이 중원 일부 또는 전 지역에 왕조를 건설하여 한족왕조를 대신하여 중원을 통치하였다. 예컨대 북위, 요, 금, 원, 청이 바로 그들이다. 때로는 남북 대치상태에 있을 때에는 중원왕조가 북방민족에게 신사하기도 하고 혹은 형식상은 아니더라도 실질내용 면에서는 조공하였다고 할 수 있는 예들이 많았다.
2. 형식 및 실질조공
1) 漢帝國과 匈奴
한 고조 6년(BC 201년) 太原郡 31縣을 韓國으로 삼아 韓王 信을 옮기고 晉陽을 都邑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 해 9월 흉노가 韓王 信을 馬邑에서 포위하자 馬邑을 가지고 흉노에 항복하였다. 이에 한 고조는 그 다음 해(고조 7년, BC 200년) 겨울 고조 스스로 將이 되어 韓王 信을 銅 에서 격파하고 그 장수를 베었다. 信은 도망하여 흉노로 달아났다. 그 부하 장수 曼丘臣과 王黃이 옛 趙의 후예 趙利를 왕으로 삼아 信의 흩어진 병사를 수습하여 흉노와 같이 한에 거전하였다. 고조가 晉陽에서부터 여러 차례 전쟁을 하여 계속 승리하며 북으로 진격하였다. 樓煩에 이르렀을 때 큰 추위를 만나서 士卒의 20∼30%가 동상에 걸리게 되었다. 平城에 이르렀을 때에는 흉노에 포위되어 7일간이나 진퇴양난에 빠졌는데 陳平의 秘計를 써서 겨우 빠져 나왔다. 그 후 흉노의 세력에 무력대항은 불가능함을 깨닫고 화친을 제의하였다. 이후 양국은 흉노의 산발적인 도발도 있었지만 무제 즉위까지 대략 60년간은 무양하였다. 고조 9년(BC 198년) 劉敬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흉노와 화친하고 宗室女子를 冒頓에게 출가시키고 매년 일정수의 솜과 명주, 酒食을 보내고, 兄弟로 약속하였다. 모돈은 세력이 점점 강대하여져서 고조가 죽은 후에는 더욱 한을 경시하여 呂后에게 글을 보내어 求婚까지 하였다.
이러한 공주의 혼가는 고조이래 惠帝, 文帝, 景帝 때까지 이어졌으며 財貨도 계속 보내어 졌다. 이것은 비록 용어를 조공이라 하지 않았을 뿐 실질적으로는 조공이며 신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賈誼도
라 하여 한의 흉노에 대한 歲幣奉獻은 納貢으로 보았고 한과 흉노와의 관계는 上下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어쨌든 한과 흉노의 초기관계는 한이 흉노에 納貢하였지만 무제이후 한의 세력이 신장되면서 흉노가 한에 稱臣入朝하는 형국으로 바뀌었다.
2) 後晋과 契丹
後唐 明宗의 양자인 李從珂가 군사를 이끌고 京師에 들어가 스스로 帝位에 올라 廢帝가 되었다. 그는 명종의 사위인 石敬 과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淸泰 3년(936년) 폐제는 석경당을 天平節度使(지금 山東省 서북부를 다스림)로 옮기고 張敬達에게 군대를 이끌고 가서 부임을 재촉하게 하였다. 이때 석경당의 幕僚인 桑維翰이 석경당에게 명을 거역하고 군사를 일으키도록 권하고, 또 거란에 군사원조를 청하도록 건의하였다. 석경당은 이에 따라 거란 太宗에게 奉表稱臣하고 父禮로 섬기기를 청하면서 성공할 것 같으면 盧龍節度使區域과 雁關以北의 諸州를 거란에 주겠다고 약속하자 거란은 크게 기뻐하면서 仲秋때까지 기다렸다가 傾國赴援하겠다고 하였다. 935년(天顯 10년) 그해 9월 거란 태종(耶律德光)은 5만기를 이끌고 揚武谷에서 晉陽에 도착하였다. 그해 11월 晋陽 남쪽에 壇을 쌓고 石敬 을 皇帝로 삼고 나라 이름을 晉, 天福이라 改元하였다. 이에 대하여 『契丹國志』에는
이라 하여 그 卽位에 대한 情況을 자세히 전하고 있다.
진은 幽(지금의 大興縣), ( 縣), 瀛(河間縣), 莫(任邱縣), ( 縣), 檀(密雲縣), 順(順義縣), 新( 鹿縣), 爲(懷來縣), 儒(延慶縣), 武(宣化縣), 蔚(蔚縣), 雲(大同縣), 應(應縣), (朔縣 동쪽), 朔(朔縣) 16州를 거란에 할양하고, 매년 帛 30만필을 바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비록 한족이 세운 王朝는 아니더라도 중원에 건국한 황제로 거란에 대하여 ① 거란 태종을 父禮로 섬기고 ② 燕雲 16州를 거란에 할양하고, ③ 매년 帛 30만 필을 바치는 것으로 하였다. 이와 같은 일은 일찍이 역사상 없었던 일이다. 『契丹國志』에
이라 하였다. 후진 고조는 이렇게 성심성의껏 받들고 貢物도 끊임없이 바쳤다. 그러나 거란은 조금이라도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가차없이 사신을 보내어 문책하였다. 이러한 거란의 행위에 대하여 成德節度使 安重榮이 매우 부끄럽게 여기고 거란과 여러 차례 싸우기도 하였다. 天福7年(942년) 고조는 안중영을 사로잡아 죽이고 거란에 사죄하였으나 거란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걱정을 하다 죽었다.
후진은 형의 아들 石重貴를 계위시키고 고조의 崩御를 거란에 告哀할 때 奉表稱臣하자는 의견이었으나 景延廣이 稱孫은 하되 稱臣은 안 된다 하여 그대로 하였더니 거란 태종이 대노하여 남침하였다.
景延廣의 이론을 『契丹國志』에서 보면
이라 하여 出帝는 中國인이 세웠으니 稱臣奉表할 수 없고 稱孫이면 족하다 稱臣하지 않은 것으로 분노한다면 쳐들어 와라 우리의 10만 횡마검이 기다린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고조의 奉表稱臣은 인정하고 있었다 하겠다.
3) 南宋과 金
조공제도는 중국이 그 주변의 국가와의 사이에 지녀온 전통적 대외관계의 가장 특징적인 것이다. 전해종은 본질적 조공관계로 a) 경제적 관계(조공(歲幣•方物, 請求, 賜物, 免), b) 의례적 관계(封典, 告哀, 進賀, 陳慰, 賜除, 賻恤, 謝恩), c) 군사적 관계(중국 측 요청, 조선측 요청), d) 정치적 관계 및 기타(臣稱, 年號採用, 曆採用, 內政干涉, 陳奏, 倭政報告, 洋舶情形報告, 人質, 通婚, 기타)로 규정지었다. 한족왕조로써 북방민족왕조에 대하여 전형적인 조공을 바친 예는 바로 남종 고종이다.
靖康 2년(1127년) 정월 금은 欽宗을 金 陣營에 구금하고 금은을 요구하였다. 송은 京師를 수색하여 금 30여만 량, 은 700여만 량, 비단 100여만 필을 모았으나 금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 해 2월 徽宗과 諸王后妃들도 금진에 포로가 되었으며 4월에는 徽•欽宗 父子와 皇后, 太子, 親往, 妃嬪, 宗戚 및 諸臣 등 3,000여 명이 북으로 잡혀갔다. 뿐만 아니라 남녀 백성 중 강제로 끌려간 사람이 10여만 명에 달하였다 한다.
1127년(天會 5년) 금 태종은 徽宗•欽宗 父子를 강등시켜 서인으로 삼았다가 그 다음 해에는 上京(吉林 阿城縣 남쪽)으로 옮겼다. 그 다음 달에는 素服으로 太祖廟를 배알케 하고 徽宗을 昏德公, 欽宗을 重昏侯로 봉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 二帝는 韓州로 옮겨졌다.
한편 1127년(靖康 2년) 3월 금은 宋臣 張邦昌을 楚帝로 삼았었다. 그러나 금이 북으로 돌아가자 스스로 退位하고 天祐皇后(哲宗廢后孟氏)가 궁으로 들어와 垂簾聽政하였다. 그해 5월 康王(趙構 徽宗 第9子)이 南京(應天府 지금 河南 商邱縣)에서 卽位하니 이가 高宗이다. 開封에서 善戰하던 宗澤이 죽자 主和派 세력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금이 압박해오자 고종은 양자강을 건너 杭州(臨安府로 승격)로 옮겨 수도 건설을 준비하였으나 사태가 위급하게 돌아가자 越州(浙江 紹興縣)로 도망하였고, 또다시 明州(浙江 縣 동쪽)로 도망하였고, 금군이 臨安을 점령하고 동시에 浙江으로 추격해 오자 고종은 바다로 도망하였다. 1130년(建炎 4년) 고종은 溫州(浙江 永嘉縣)로 도망하였다. 금군이 물러난 후에 越州로 돌아왔다가 1138년(紹興8) 정식으로 임안에 수도를 정하였다.
이때 岳飛, 韓世忠, 張浚 등은 모두가 중원회복을 주장하였다. 그중에서도 岳飛는 고종의 신임도 상당하였다. 그는 누차 중원회복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중원회복에는 흥미가 없고 다만 和議에만 마음이 있었다. 그는 여러 차례 패전으로 금에 대한 두려움이 많아 쉽게 전쟁을 일으킬 수 없었다. 이외에도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한다.
첫째는, 主戰派의 구호대로 兩宮(徽宗•欽宗)을 모셔오고 疆土를 수복한다면 皇位問題가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므로 皇位를 위협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꼭 금과 화의하여 2帝를 귀환하지 못하게 하여야 했으며 둘째, 主戰派는 대부분이 무인들이기 때문에 전쟁에 승리하면 무인이 발호할 것이고 그러면 통제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고종은 화의를 주장하는 秦檜를 믿고 금과 화의코자 하였다. 여러 차례 사신의 내왕이 있은 후 드디어 1141년(紹興 11년) 11月에 화의가 성립되었다. 그 내용을 『宋史』에는
같은 내용을 시기적으로도 조금 달리 적고 있고 또 내용도 조금 달리 기술하고 있다. 이 화의 내용을 傅樂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① 宋은 金에 臣이라 칭하고 金에게 表를 바치며 金은 宋主를 皇帝로 冊封한다.
② 宋은 해마다 銀•絹 각 25만兩匹을 봄에 泗州(지금 安徽, 縣 동북)에서 교부한다. ③ 宋은 金主의 生辰과 正旦에 사신을 보내어 치하한다.
④ 金은 徽宗의 梓宮(紹興 5年에 徽宗은 崩御)과 韋太后(高宗의 生母)를 귀환시킨다.
⑤ 宋•金은 동으로 淮水, 서로는 大散關(지금의 陝西 寶鷄縣 서남)을 국계로 삼는다.
이 誓盟의 내용을 살펴보면 형식상으로나 내용상 완전한 주종간의 조공이었다.
3. 실질적 조공
1) 北宋과 契丹간의 淵盟約
송 태종이 979년(太平興國 4년) 정월 北漢을 親征하자 거란에서 북한을 도와주어서 실패로 끝나고 그 해 5월 송이 북한을 급습하여 멸망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燕•雲을 회복코자 거란을 정벌하였다. 東易州와 州를 함락하고 幽州에 이르러 10여 일이나 대치하였다. 거란이 耶律休哥를 보내 원조하자 송군은 高梁河에서 대패하였다. 태종도 流矢를 맞아 도망하여 겨우 생명을 보존하였다.
이 전투 이후 송•거란 국경에는 충돌이 그치지 않았다. 송 태종은 986년(雍熙 3년) 거란을 다시 정벌하였다. 이때 거란은 景宗이 崩하고 聖宗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으므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대거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결과는 岐溝關에서 耶律休哥에게 크게 패하였다. 이 전역 이후 거란은 보복정책을 취하여 송의 河北•河東에 군대를 보내어 여러 차례 침략을 하였다. 송은 두어 차례 和議를 청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하였다.
송은 997년(至道 3년) 태종이 崩하고 眞宗이 즉위하였다. 진종 즉위 초부터 主和論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004년(景德 元年) 거란 성종은 蕭太后의 뜻을 받들어 대거 송을 침입하여 전연에 바로 다다랐다. 전연은 首都 開封에서 불과 300리 밖에 되지 않는 곳이어서 진종은 물론 조야가 크게 놀랐다.
당시 재상 寇準과 畢士安이 親征을 주장하고 나서자 할 수없이 州로 나갔다. 송군의 사기는 크게 진작되었으나 진종은 줄곧 화의만 생각하고 있었다. 거란도 승승장구하였으나 전연에서 蕭撻覽이 궁노에 맞아 죽자 진격을 멈추고 물러났다. 그리고 곧 和議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누가 먼저 화의를 제의했는가는 사서마다 다르다. 『宋史』에는 그해 11월 甲戌에 王繼忠이 두어 차례 달려와서 請和를 상주하자 진종은 宰相들에게 이르기를
繼忠言契丹請和, 雖許之, 然河 已合, 且其情多詐, 不可不爲之備
라 하면서 거란에 대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거란이 먼저 和議를 청해 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遼史』에는 南院大王 耶律善補가 상주하기를 宋人이 사람을 보내어 왕계충에게 弓矢를 주고 몰래 和議를 청구하였습니다 하니 조서를 내려 계충에게 宋使와 만나서 화의를 허락하도록 하였다고 하니 송이 먼저 화의를 청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양국 간의 맹약은 그 해 12월 戊子에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遼史』에
宋遣李繼昌請和, 以太后爲叔母, 願歲輸銀十萬兩, 絹二十萬匹. 許之. 卽遣閤門使丁振持書報聘
이라 하였으며 『宋史』에는
遣監西京左藏庫李繼昌使契丹定和, 戒諸將勿出兵邀其歸路. …乙未, 契丹使丁振以誓書來.
라 하였다. 이 두 사료중 『遼史』에는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나 『宋史』에는 자세히 적시하지 않았다. 이는 더 없는 치욕으로 여겼기 때문이라 생각하였기에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契丹國志』에는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라 하였다. 결국 송은 ① 매년 비단 20만 필, 銀 10만 량을 거란에 보내고, ② 거란 성종은 송 진종을 형이라 호칭하는 화의가 성립되었다. 이것을 단연( 淵)의 盟이라 한다.
聖宗誓書에 의하면 歲幣는 軍旅의 費用을 돕는 것으로 명목을 정하였으며 統和 23年 10月癸卯부터 보내져서 매년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 兄弟로 呼稱하는 것은 關南誓書에 보인다.
이러한 양국관계는 대략 117년간(1005∼1121) 평화를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그 기간 계속 무양했던 것은 아니었다. 1041년(慶曆 元年) 12월 거란 興宗이 송이 關河를 設置하고 壕塹을 수리하고 하니 邊患이 있을까 두렵다는 말을 듣고 南樞密 蕭孝穆과 北樞密 蕭貫寧과 關南 10縣地를 취하려는 모의를 하고 蕭英과 劉六符를 송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해(1042) 정월 南院宣徽使 蕭特末, 翰林學士 劉六符를 송에 보내어 晉陽 및 瓦橋이남 10縣地를 취하겠다고 하고 또 군사를 일으켜 서하를 정벌한 것과 沿邊의 水澤을 넓히고 깊이 판 것과 兵戌을 늘인 이유를 물었다. 그 해 6월에 송의 富弼이 다녀가고 또 8월에 와서 歲幣銀絹을 增額토록 하는 것으로 매듭 지우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9월 北院樞密副使 耶律仁先과 漢人行宮副部署 劉六符가 송에 사신으로 가서 和議를 약속하였다. 이때 富弼이 興宗에게 송과 거란의 和議의 大意를 말하기를 가만히 앉아서 歲幣를 얻으면 利는 국가에 있고 신하에게 주지 않아도 되며, 송과 싸움을 한다면 利는 신하에게 있고 해는 국가에 돌아온다고 하자 흥종이 그 말에 감화되어 비로소 和好를 정하였다. 그 해 윤9월 耶律仁先이 사람을 보내어 보고하기를 송이 매년 은과 비단 10만량필을 증가하고 文書에 "貢"이라 하며 白溝에서 보내 준다고 하자 흥종이 기뻐하여 군신들과 잔치를 베풀었다. 文書에 獻이라 하느냐 納이라 하느냐를 두고 爭論을 벌린 듯 하나 결국 "貢"으로 귀착된 듯 하다. 이렇듯 무력의 강약에 의하며 부득이 매년 물화와 돈을 바친 것이라면 이는 조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 靖康年間 北宋과 金의 講和
1125년(宣化 7년) 금은 마침내 송을 침범하였다. 금군은 두 갈래로 남하하였다. 東路는 斡離不(宗望 金太祖의 子)이 지휘하였는데 平州를 거쳐 燕京으로 들어가고, 西路는 粘罕(宗翰)이 雲中(지금의 山西省 大同)으로부터 太原(지금의 山西省 太原)을 공격하였다. 太原을 지키던 童貫은 도망하고 知府 張孝純의 善防으로 금군이 더 나아가지 못하였다. 東路軍은 郭藥師의 항복을 받고 그를 선도로 하여 黃河를 건너게 되었다.
1126년(靖康 元年) 정월 금군이 開封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李綱의 善戰으로 쉽게 점거하지 못하였다. 사방의 援軍이 패하여 부득이 금과 강화하게 되었다. 和議를 청한 것이 어느 쪽이냐 하는데는 사료가 서로 엇갈린다. 『宋史』에는 靖康元年(1126년)정월 甲戌에 金人 吳孝民을 보내어 議和하였다고 하였고, 『金史』에는 天會4年(1126년)정월 甲戌 宋使 李절이 와서 謝罪하고 修好를 청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和議의 내용도 조금씩 달리하고 있다. 『金史』에는
라 하였다. 두 사료가 조금씩 다르게 기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금이 제의한 講和條約은 매우 가혹하였다. 그 요점은
① 송은 금 500만 량, 은 5000만 량, 表緞 100만 필, 소말 10,000두를 금에 주고,
② 金主를 伯父로 禮優할 것과
③ 송에 있는 燕•雲人을 돌려보내고,
④ 太原, 中山, 河間 三鎭을 할양하며,
⑤ 宰相과 親王을 인질로 한다.는 것이었다. 欽宗은 이를 수락하고 京師의 민간 소유 금 20만 량, 은 400만 량을 모아서 금에게 주고 張邦昌을 금 진영에 보내어 화의하자 斡離不은 포위를 풀고 북으로 돌아갔다.
이 화의의 내용도 비록 奉表稱臣은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내용적으로는 그 이상의 굴욕적인 것이라 하겠다.
3) 隆興年間 南宋과 金의 講和條約
1161년(紹興 31년) 금 海陵王이 스스로 60만군을 이끌고 淮水를 건너 南進하였다. 그때 金人들은 海陵王의 포악함에 분개하여 이 기회를 틈타 族弟 烏祿을 遼陽에서 옹립하여 世宗이 되었다. 海陵王은 이 소식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瓜州에서 신하에게 살해당하고 금군은 물러났다. 宋은 이 기회에 본토를 회복하고자 하여 淮北의 수개 주를 취하였으므로 위세가 진작되었다. 그러나 高宗은 帝位에 더 이상 미련이 없어서 太子 신에게 전위하고 스스로 太上皇이라 하였다. 太子가 즉위하니 곧 孝宗이다. 그는 즉위 후 중원을 회복하고 조종의 치욕을 씻을 생각을 하여 岳飛의 관직을 추가 복직하고 또 중외에 조서를 내려 조정의 잘못을 고치려 하는 등 상당한 희망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秦檜가 15년간이나 專橫하는 동안 忠臣과 良將은 거의 죽임을 당하고 士大夫들은 안정을 바라는 터라 失土回復은 쉽지 않았다.
孝宗 즉위 때 宋•金은 전쟁 중에 있었다. 그러나 금은 송이 稱臣하지 않는다 하여 大將 僕散忠義를 京에 보내어 전쟁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1163년(隆興 元年) 5월 張浚이 금을 공격하여 한때 성과가 있었으나 금군의 공격으로 소강상태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조신중 主和者 들이 張浚을 공격하여 효종도 할 수없이 그의 관직을 면하였다. 일반적으로 분위기가 舊疆回復보다 講和쪽으로 기울자 효종도 부득이 강화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내용에 대하여 『宋史』에는
① 金•宋은 叔姪間의 국가관계로 宋主가 金主를 叔父라고 부를 것
② 양국 왕래문서는 國書라 부를 것(이전의 양국문서는 君臣의 예로서 金主는 '下詔'라 하 고, 송은 奉表라 하였다.)
③ 송은 매년 은과 비단 각 5만냥필씩 감하고 歲貢을 歲幣라 고쳐 부를 것.
④ 쌍방의 疆界는 高宗 紹興 때와 같게 한다.
송이 이 和約에서 臣이라 부르지 않고 평등지위를 얻은 것이지만 이는 형식논리이고 여전히 물하증여와 숙질간의 국가라는 관계는 청산하지 못하였다.
4) 嘉定年間 南宋과 金의 講和條約
1204년(嘉泰4) 韓 胄는 금을 정벌하고자 결의하고 岳飛를 鄂王이라 追封하여 군사들을 격려하고 吳曦에게 명하여 蜀에서 군사를 훈련시켜 전쟁준비를 하였다. 그 다음해 송은 출병하여 금을 정벌하였는데 다소의 성과를 내었으나 宿州, 壽州 등지를 공격하다 패하였다. 더구나 吳曦마져 금에 항복하여버렸다.
이런 가운데 금의 僕散揆가 남하하여 淮南의 重鎭을 함락하고 곧바로 江北에 도달하였다. 이에 韓 胄는 스스로 실책을 후회하고 사신을 금군에 보내어 화의를 교섭하였으나 금은 한탁주의 首級을 요구하였다. 한탁주의 화의 내용을 『金史』에
宋韓 胄遣左司郎中王枏以書來乞和, 請稱伯, 復增歲幣, 軍錢, 誅蘇師旦函首以獻.
이라 하였다. 그러나 금군은 韓 胄의 首級을 요구하였다.
寧宗皇后 楊氏와 禮部侍郞 史彌遠이 평소 한탁주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차에 금이 한탁주의 수급을 요구하자 이에 寧宗에게 상주하여 한탁주의 수급을 금에 보내어 사죄하자고 하니 영종도 이를 받아들이었다. 이에 사미원이 密旨를 받아서 殿前司公事 夏震에게 명을 내려서 玉津園에서 주살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嘉定元年) 3월에 한탁주의 수급을 兩淮에 효수토록 詔書를 내렸다. 그리고 그해 3월 庚寅에 和議가 이루어 졌다. 그 내용은
① 靖康故事에 따라서 금•송의 帝室은 伯姪관계로 할것.
② 歲幣를 銀絹 각 30만량필로 증가할 것.
③ 송은 별도로 軍銀으로 300만량을 금에 주고 금이 점령한 淮陜지방을 송에 귀환시킬 것으로 하였다.
이 역시 명목보다 내용은 以小事大의 조공이라 하겠다.
4. 기 타
위의 두 범주(형식 및 실질조공, 실질 조공)에는 들지 않으나 이와 유사한 경우도 있었다.
隋末 북방의 군웅들이 모두 돌궐의 원조를 바랬으며 李淵도 거병 후 곧 劉文靜을 돌궐에 보내어 始畢可汗에게 稱臣하고 맹약을 맺었다. 이후 당이 세력이 커지면서 돌궐이 도리어 당에 칭신하게 되었다.
또 1146년(皇統 6년)의 경우 金 熙宗이 蒙古의 合不勒可汗을 정벌하려 하다가 도리어 패하여 부득이 和議하여 西平河 이북의 땅을 할양하여 주고 매년 소, 양, 쌀, 콩 등을 보내었다. 이 두 나라는 같은 북방계민족이지만 강약이 부동일때에는 이러한 질서로써 해결하였다.
南宋 理宗때에는 蒙古의 忽必烈이 長江을 건너 鄂州를 포위하자 宋 右丞相 賈似道가 몰래 宋京을 軍中에 보내어 蒙古에 稱臣하고, 江南을 경계로 삼고, 매년 은과 비단 각 20만냥필을 줄 것을 제의한 일도 있었다.
이것은 賈氏의 사적인 뜻이겠으나 관직이 우승상이였다면 전적으로 私意로 치부하기에는 문제가 있는 대목이다.
5. 結 論
어쨌든 奉表稱臣하고 朝貢을 바친 것은 북방민족이 중원 한족국가에 대한 의례정도로 이해하기 일수였다. 그러나 중원의 통치자가 북위, 요, 금, 원, 청일때도 있었고, 또 중원에 자리잡은 한족국가가 북방민족에게 稱臣하고 朝貢을 바친 예도 있었다. 혹은 형제나 숙질간의 관계로 맹약을 하면서 물화를 바치거나 영역을 떼어 주는 등 국가존립의 위기에 몰린적이 여러차례 있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한제국의 건국 초기에는 흉노의 세력에 밀려서 공주를 婚嫁시키는가 하면 재화도 정기적으로 보내었다. 그리고 후진은 그 건국부터 거란의 후원하에 이루어졌고 책봉도 거란 태종이 직접 하였을 뿐 아니라 군신관계, 부자관계로까지 발전되었었다.
남송 고종은 금에 대하여 奉表稱臣하며 매년 歲貢을 바치고 正旦에 사신을 보내어 치하는 등 군신의 예를 다하였다.
형식요건은 다 갖추지 않았어도 실질적으로 조공을 바친 예는 매우 많다. 우선 북송과 거란사이에 맺어진 淵盟約은 송이 매년 거란에 비단 20만필과 은 10만냥을 보내고, 거란 성종은 송 진종을 형이라 호칭하도록 서약하였다. 또 정강연간 북송과 금이 강화할 때에도 강화내용이 지극히 굴욕적이였다. 송은 수많은 물화를 금에 주고 金主를 백부로 대우하고 三鎭을 할양하고 재상과 친왕을 인질로 한다는 것이었다.
隆興年間에도 남송과 금사이에 강화조약을 맺었는데 이때도 역시 굴욕적이였다. 송주는 금주를 숙부로 부를 것, 송은 매년 歲幣를 금에 바칠 것으로 되어있다.
嘉定年間 남송과 금사이의 강화조약도 정강고사에 따라 금•송제실은 伯姪관계로 할 것, 歲幣를 은견 각 30만냥필로 할 것, 송은 별도록 軍銀 300만냥을 금에 줄 것 등이다.
이 밖에 당 고조 이연이 돌궐의 始畢可汗에게 칭신한 것이나, 금 희종이 몽고에 땅을 떼어 주고 가축과 곡물을 몽고에 매년 보낸 일이나, 賈似道가 몽고에 칭신하려던 일 등이 있다.
위의 예를 본다면 주종관계이던 조공관계이던 국가 세력의 강약에 의한 질서였지 군왕의 덕화에 감화되어 스스로 조공을 바치고 조근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
설령 주종관계가 성립되었더라도 시대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었으므로 성격규명도 달라야 할 것이다. 또한 宗藩관계라는 용어의 宗이 반드시 한족국가만이 아니였음도 알 수가 있다.
뱀다리 : 한마디 하고 싶은것이 있습니다. 이른바 한국학계(역사학계든 다른 학계이든)에서 자행되고 있는 어이없는 행위에 대해서입니다.
왜? 그들은 한글을 이용할 생각을 안 할까요?
물론 몇몇의 역사용어들은 그 의미의 정확한 전달을 위해서 반드시 한자를 활용해야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結論"(결론)같은 말은 한글로 하여도 그 의미전달에 문제가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納貢와 같은 경우도 납공(納貢)와 같은 식으로 하여서, 비전문가들의 접근성을 높일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이런 관행들은 되도록 빨리 고쳐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면, 한자공부해라따구의 말을 하는 것들아. 나 중국땅에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생활이 한자이다. 한자 많이 쓰면 폼나보이냐? 딴 사람이 못 읽으면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냐? 웃기는 넘들.--> 잠시 흥분했음-_-;;)
10월 1일은 중국의 국경절이다. 중국인민은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 100년넘는 인민혁명에서 위대한 승리를 하였다. 그리하여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식성립을 선포하였고, 중국역사상의 위대한 전환점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1949년 9월의 정협(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全国委员会,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전국위원회)1차1회회의상에서 10월 1일을 국경절로 정하였다.
바로의 중얼중얼 :
국경절은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새워진 날을 기념하려고 만든 날이다. 한국과의 차이점을 말하자면, 이들은 10월 1일부터 근 10일간을, 다시 말해서 10월 10일까지, 내리 공휴일이다. 그런데, 이런 명절이 두개 더 있으니, 그것은 구정연휴와 노동절이다. 중국에서는 보통 구정연휴때 시골로 내려가기 때문에, 국경절은 여행의 황금기이다.
추석(중추절)과 같은 경우, 국경절과 기간이 겹치거나 혹은 조금 빠른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월병(한국의 전통한과와 비슷한 과자)를 대충 사먹고 넘겨버린다.
특히 이번 국경절의 경우, 후진타오체계로 완전 이양된 후의 처음 맞이하는 국가행사인만큼 신중을 기하고 있다. 일단 이 기간만 되면, 맨 위에 사진에 보이는 천안문광장으로 출입하는 것은 엄청나게 힘들게 된다. 왜냐하면, 중국에 산재되어있는, 특히 티벳과 위구르, 소수민족들이 독립을 위하여 테러행위를 자행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저 천안문광장 주변에는 온갖 국가중요시설 및 요인들이 머물고 있다. 더도말고 반경 5km만 초토화되면 중국은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그 외에도 중국이 개혁개방을 외칠 수록 벌어지고 있는 빈부격차 역시 큰 문제점으로 이로 인한 범죄행위도 심히 문제시되고 있다.
중국은 지금 변하고 있다. 세계의 강대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수 많은 문제점들도 산재되어있다. 중국인들은 이 모든 고난을 이기고 당당하게 오성기를 휘날릴 수 있을까?
마오저동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발표한 장면
무식하게도 많이 모인다.
"中华人民共和国正式成立了!“
...이번에도 TV에서 마오저동의 이 말이 나오겠지...
뱀다리 : 한국인 유학생들은 저 기간에 뭐하냐고? 일단 왠만하면 여행다닌다. 10일연휴면 못 갈 곳이 없다.+_+ 물론 한국갔다 오는 넘들도 있다.그리고 저처럼 돈 없는 넘들은 그냥 북경에서 방콕을 하거나 알바찾아서 댕긴다....본인...돈만 충분했어도 여행가고 싶다!!!
저는 신고와 의고의 논쟁을 정리하던중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는 지금 중국인이 아니지만 북경대학교역사과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런 특수한 상황하에서, 문화국외자의 입장에서, 결론을 내리자면, 지금 현재 중국사학계에서 유행하고 있는 신고학풍은 중화사상의 낙인이 찍혀 있는 상태로 중국의 문화패권주의로 변질되고 있는것이 아닐까요? 중국사학계는 과학적인 분석을 포기하고, 중국문화패권주의의 건설을 위하여 역사를 이용하고 있는것은 아닐까요?
다만, <좌전>이 없다면 어떻게 중국선진시대를 연구할 수 있을까요? 이런 개념속에서 생각한다면, 서방의 문헌무시풍조의 중요한 문제를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건의한다. 내부자는 가능한한 자신의 역사전통에 대한 객관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며, 외부자는 그 전통을 중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같은 중간자들의 노력도 필요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바로의 중얼중얼
2000자도 안되는 1시간만에 다 적어버린 심심파적식 레포트였습니다. 그리 큰 내용은 없습니다. 단지, 지금 현재 중국의 사학계의 학풍이 조금 무서워서, 그들이 문화패권주의로 나아가기 때문에, 그것을 경계하고 싶은 마음에서 적어내려간 것입니다^^ (볼 사람도 없는 이딴 글은 왜 올리는거야!! -_;;)
xiaoxuan - Blog for 小玄子家
校园博客里人气越来越旺一点了!不过看的多了,评论交流的少了,看最新评论,还是有数的那几条。这似乎大大降低了博客的效用。我们博客的,就是要参与,每一个人都是博客的思想者。只有汇总我们的意思,从而产生一个总体的意义。
번역 : 학원블로그(블로그코리아같은 곳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에서의 새글 숫자는 많아졌지만! 보는 사람만 많지, 덧글을 다는 사람은 적습니다. 새로운 덧글은 몇개밖에 보이지 않는군요. 이것이 블로그의 효용을 줄이는거 같습니다. 우리 블로거들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한명 한명의 블로거들은 모두가 사상가(참여자)들입니다. 우리의 의견을 모여야 전체적인 의의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우리 의견이 모이고 모여야 진정한 블로그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것입니다.)
(역시 막가파 직역번역^^)
바로의 중얼중얼
이것을 보면서 "태터 멤버 답글달기 운동"이 생각난것은 우연일까요?
중국블로그나 한국블로그나 참여도의 문제는 존재하는거 같습니다.
저도 RSS로 구경만 하지 말고 답글달기를 생활화해야될거같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하루 기본 100명접속인 제 블로그는 대체 왜!
덧글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거죠? 슬퍼요 저... (...사실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지! 답글 달아달라고!!)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이영도님의 피마새(피를 마시는 새)가 지금 현재 연재중입니다. 중간에 하이텔이 푸른인가 퍼런인가 뭔가로 변하면서 유료화가 되는 둥, 이런 저런 일이 있었지만, 지금 현재 31쳅터까지 나와있습니다.
(혹시나 아직 못 보신 분은 "네이버피마새" 혹은 "눈마새"로 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피마새는 전의 이영도씨 작품과는 전혀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전의 작품이 이른바 로드무비식이었다면, 이번편은 멀티스토리라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방식입니다. 피마새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전에, 이영도님의 이전 작품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지요.(단편은 일부러라도 빼겠습니다 지금도 많~~이 길죠.)
이영도님의 데뷰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1)
"나는 단수가 아니다."
2)
"엘프는 닮아버려, 엘프 가까이 있는 것을. 인간을 닮아버려, 인간 가까이 있는 것은."
3)
"인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이 뭔지 아십니까?"
"뭐?"
제레인트는 엄숙하게 말했다.
"짝사랑이지요."
윽.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제레인트는 여전히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인간들 사이에서 가장 무서운 병이 뭔지 아십니까?"
"난, 난…"
"상사병이올시다."
도저히 못참겠다. 난 맹렬하게 입을 틀어막으며 몸을 돌렸다. 내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눈물을 찔끔거리는 동안에도 제레인트는 계속 웃지도 않은 채 말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짝사랑과 상사병은 상대를 변화시키지 못하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슬프고 아프지요. 참 글러먹은 문제입니다. 짝사랑을 하면 그냥 그 사랑을 소중히 여기면 될 문제인데 말입니다. 상대에게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기 때문에 꼭 그것 때문에 슬퍼하고 아파해야된단 말입니다. 상대도 날 봐주었으면, 날 생각해주었으면, 날 사랑해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고, 그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고장이 나버리지요. 고약하다면 고약한 것이고, 동정하려고 들면 정말 동정받을 일이라고 생각되는군요."
전 위의 3개의 문장이 드레곤라자를 대표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인간의 변화, 특히 상호관계속에서의 상호간의 변화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드레곤라자라는 말 자체가 그런 상호관계속의 상호간의 변화를 지징하는 고유명사라고 할 수도 있지요._
이영도님의 두번째작품입니다. 세계관은 드레곤라자와 동일하지만, 좀비들의 열화와 같은 요구에도 끝까지 우리의 후치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후치야~~ 보고싶어~~!!)
1)
"쳉 줘."
"응? 뭐라고?"
"쳉을 달라니까. 쳉을 선물해."
"……그거 좀 보편타당하고 다른 사람들도 알아듣기 쉬운 말로 다시
해 줄래?"
"결혼해. 미의 생일이랑 결혼기념일이랑 같은 날이니까 편하잖아. 미가 쳉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멘스할 땐 히스테리 팍팍 부리며 바가지도 복복 긁어줄 테니까 미랑 결혼해."
"쳉은 미랑 결혼해서 평생 밥 짓고 빨래 하고 애 돌보며 돈 벌어오고
미만을 섬기고 미만을 생각하며 미만을 그리며 미가 히스테리를 부리면 달래주고 미가 심심하면 재롱 떨어주고 미가 졸리면 자장가 불러줘야 해."
"응."
"미가 졌어." (.....이런말 해줄 여자 어디 없나~~ )
2)
"무, 무엇을 못견디지. 사람은 무엇을 못견디지."
"……심심한 것을 견딜 수 없죠."
3)
"무슨 짓이오!"
"간지럼 타네요, 뭐. 살아있는걸?"
"간지럼 타는 것이 생존의 조건이면 생활의 조건은 뭐요!"
신차이는 아일페사스가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 예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아일페사스는 참 이상한 것도 다 물어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 몰라? 웃는 거지. 이렇게. 하하하!"
4)
네리아는 혀를 조금 낼름한 다음 고개를 돌려 파하스가 가리키고 있
는 언덕을 바라보았다. 언덕 위의 돌집은 이제 눈에 익은 모습이었고 그 앞에는 쳉이 뛰고 있는 모습이…… 응? 뛰고 있어?
네리아는 눈썹 위에 손바닥을 세운 다음 언덕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쳉은 언덕 위를 펄쩍펄쩍 뛰어다니고 있었다. 왜지? 자세히 본 네리아는 그가 아달탄과 함께 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둘은 저 헐벗은 언덕 위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그 목적을 알기 어려운 동작들이었다. 네리아는 저들이 뭔가 위험에 처해서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저러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했다. 하지만 파하스는 핏 웃었다.
"정말 재미나게 놀고 있군요."
"놀고? 어, 놀고 있는 거에요?"
"그렇습니다. 쳉은 이제 거의 짐승 비슷한 꼴이 되어있으니 저건 두
마리 짐승의 즐거운 놀이라고 해야겠군요. 두 마리의 강아지가 그러듯이 그냥 유쾌하게 뛰어다니고 있는 겁니다."
이영도씨는 퓨쳐워커라는 글에서도 인간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듯 합니다. 다만, 이번에는 관계과 관계속에서의 변화가 아닌, 시간의 변화속에서 인간의 적응과 행복을 이야기하는듯합니다.
이 퓨쳐워커는 이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좋아하는 편입니다.
폴라리스랩소디 " less="키 크고 검은색 코트를 걸치고 침착하게 돌아버린 듯한 얼굴의
남자 없어요?"
">
이영도씨가 한국판타지역사상 처음으로 신문에 연재했던 작품입니다. 드레곤라자보다 이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도 상당수 되더군요.
1)
"새장의 문을 열어본 적이 있소?"
"예?"
"새장의 문을 열어 새로 하여금 그 메마른 날개에 자유의 공기를 적
시도록 해본 적이 있소?"
"아름다운 새를 소유한 자는 그 새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입니다. 새
장을 만들고 먹이를 줘야 하고 관심을 보내야 합니다. 깃털을 가다듬고 발톱을 깎아줘야겠지요. 새가 들려주는 노래에 대한 복수로써… 그는 많은 대가를 치뤄야 합니다. 그는 새의 노예입니다. 주인이 되고 싶다면, 진실로 주인이 되고 싶다면 새장의 문을 열고 새를 날려보내줘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그는 소유의 속박에서 벗어나 새의 주인이되고 그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겠지요."
오스발은 빙긋 웃었다.
"그렇다면 진정한 주인은 어떤 이겠습니까?"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자…"
"그렇습니다."
오스발은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나는 손끝부터 감각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곤 흠칫했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오스발은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말에 맞장구를 치듯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세상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저는 세상의 주인이기때문입니다."
"세상의 주인…"
2)
"연대기 작가라고 자칭할 때가 더 많지. 연대기 작가가 뭔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역사와 현실 중 현실 쪽에 더 관심이 많다는 점에선 야심가와 같지만, 관찰하고 해석할 뿐 참여할 수는 없다는 점에선 역사가와 같은 사
람을 말하네."
"왜 참여하시지는 않습니까?"
바탈리언 남작은 잉크병을 열었다.
"관찰자로 우수한 이가 있고 행동가로 우수한 이가 있네. 난 전자야.내겐 재능과 행운이 있거든. 내 행운이야 오늘 일어난 일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겠지. 이 굉장한 사건 속에 휩쓸리지는 않지만, 관찰하고 있네. 그리고 이렇게 기록도 남길 수 있잖나."
(...이건 폴라리스렙소디를 관통하는 문장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아닙니다. 단지, 제 마음속에 많이 와 닿는 이야기 입니다. 역사만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현실에 참여할 능력이 없는 바보...쩝..)
3)
"사효적효력(事效的效力)ex opere operato이라는 말을 아느냐?"
"대충."
파킨슨 신부는 데스필드의 대답에 조금 놀랐다.
"안다고? 그럼 인효적효력(人效的效力)ex opere operantis이라는 말
은?"
"역시, 대충. 서로 반대 의미죠, 아마? 성사의 효과는 그 성사를 주관하는 당신이 성총을 받았느냐가 아니라 그 법도와 규칙의 올바른 수행에서 나온다는 말일걸. 그 반대가 인효적효력이고. 교회는 인효적효력을 부정하고 사효적효력을 인정하지요. 그러니까… 급한 상황에서 살인강도범 당신이 해준 세례라도 그 행위가 정확한 규칙을 지켰으면 그 세례 성사는 유효한 것이지요. 사효적효력이니까."
"사효적효력이란 말이 때때로 꽉 막힌 말처럼, 어쩌면 규칙 자체에 대한 숭상처럼 보인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 아무리 훌륭
한, 예를 들어 성 페이루스가 강림하셔서 집전한 미사라도 그게 규칙에서 틀리면 엉터리 미사인 것이고 포악한 살인강도가 집전한 미사라도 올바르게 행하여졌으면 효력이 있는 미사라… 이상하게 들리지?"
"그렇소."
"왜냐하면 사람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람을 구원
하기 때문이다."
"흐음."
"어떤 주인이 노예에게 일을 시킨다고 하자. 착하고 똑똑한 노예가
엉터리로 일하는 것과 못되고 어리석은 노예가 주인이 시킨대로 일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올바른 것이겠느냐?"
"착한 노예 당신이 한 일이 결과적으로 잘한 일일 수도 있잖소. 주인
당신이 시킨대로 한 건 아닐지 몰라도."
파킨슨 신부는 킥킥 웃었다.
"그렇지. 그 주인이 보통의 사람이라면. 하지만 만일 그 주인이 절대로 틀릴 리가 없는 사람이라면?"
"아아. 주님 당신 말이군요."
"그래. 성사를 수행하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정의로운 사람이고 비할데 없이 선량하고 일개 군단 쯤의 성령이 임하고 있다 하더라도- 역시
사람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틀릴 가능성이 있는 사람 말이다. 무
류의 인간이란 건 없는 법이다. 따라서 그런 '사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독신이다."
"너는 답을 만들 수 있다."
"알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인간
은 선을 창조할 수 없습니까?"
4)
"선택한 길에 대한 긍정도 있겠지만,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부정
도 하겠지요."
5)
"복수?"
"복수의 사전적 의미를 아십니까? 해를 받은 본인이나 그 친척, 혹은
친구들이 똑같은 방법으로 가해자에게 해를 돌려주는 행위입니다. 똑같다는 점에 주의하십시오. 눈에 눈, 이에 이.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랑에 사랑, 자비에 자비. 욕망에는 성취."
"입버릇처럼 그 분을 증오한다고 말하는 이 많아도 그것은 모두 말
그대로의 뜻이 아닙니다. 입버릇처럼 자유를 원한다고,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는 이들도 사실은 자유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들 중 자유를 원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자유를 원하는 이가 없다고요?"
"자유는 타인에게 간섭받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무간섭을
견딜 수 있을까요? 아무도 사람을 간섭하지 않는다면 그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미쳐버릴 겁니다. 자유를 원한다고 말할 때, 그는 간섭을
받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간섭
만큼 자신도 남을 간섭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자신의 자유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자유를 뺏겠다는 것입니다. 받은만큼 돌
려주는 것. 그들은 복수의 권리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 폴라리스랩소디 역시, 제 분석으로는 인간의 변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이영도씨도 정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거 같습니다. 대충 봐도, 종교와 자유(혹은 그 반대항이자 동일항인 복수). 그리고 후회. 어떻게 보면 인간의 변화라기보다도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실려있습니다.
특히 종교쪽에서의 "인간은 선을 창조할 수 있다"라는 말과 "자유를 원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라는 말은 이 소설을 관통하는 말 같습니다.
이영도님이 주제의 전달을 위해서 택하였던 정통환타지설정을 버리고, 이른바 한국식 판타지를 찾아나선 첫 소설입니다.
인간, 도깨비, 나가 레콘.
그들의 개성을 완벽하게 끌어내어버렸던 소설입니다.
1)
"네 마리의 형제 새가 있소. 네 형제의 식성은 모두 달랐소. 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 독약을 마시는 새, 그리고 눈물을 마시는 새가 있었소. 그 중 가장 오래 사는 것은 피를 마시는 새요. 가장 빨리 죽는 새는 뭐겠소?"
"독약을 마시는 새!"
고함을 지른 티나한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 보자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케이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물을 마시는 새요."
티나한은 벼슬을 곤두세웠고 륜은 살짝 웃었다. 피라는 말에 진저리를 치던 비형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의 눈물을 마시면 죽는 겁니까?"
"그렇소. 피를 마시는 새가 가장 오래 사는 건, 몸밖으로 절대로 흘리고 싶어하지 않는 귀중한 것을 마시기 때문이지. 반대로 눈물은 몸밖으로 흘려보내는 거요. 얼마나 몸에 해로우면 몸밖으로 흘려보내겠소? 그런 해로운 것을 마시면 오래 못 사는 것이 당연하오. 하지만."
"하지만?"
"눈물을 마시는 새가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고 하더군."
2)왕이란?!
"북부에는 곧 많은 눈물이 흐르게 될 거야. 그걸 마실 자가 필요해. 나가가 그들로 하여금 눈물 흘리게 할 테니 또다른 나가가 그 눈물을 마셔야 된다는 식으로 생각해줄 수 없겠나?"
"너는 왕이 되기 위해 이곳에 왔어."
"나는 죽기 위해 온 거야."
"같은 말이야."
"같다고?"
"죽기 위해 북부로 온 너는 북부의 왕이야. 의심할 필요도 없이."
"사람들의 집단은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일부를 죽일 수밖에 없어. 다른 모든 구성원들을 살리기 위해 죽어야 하는 이 개인은 놀랍게도 모욕과 혐오, 심지어 폭력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 왜 그런가 하면, 집단의 구성원들이 위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공격하기 시작하면 그 집단이 와해되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들은 서로 공격하는 대신 만장일치하에 한 명을 공격하지. 이것을 희생양이라고 부르지. 다시 나무로 돌아가볼까. 겨울이 왔을 때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이 서로 공격한다면 나무는 죽고 말 거야. 그래서 뿌리와 줄기와 가지는 만장일치하에 잎을 공격해서 떨어뜨리는 거야. 잎의 희생으로 나무는 살아남게 되지. 사람들의 집단도 마찬가지야. 희생양이 죽었을 때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은 더 이상 서로에 대해 공포와 증오를 가지지 않아. 그 공포와 증오는 희생양이 죽었을 때 같이 죽었으니까."
"조금 전 희생양이 죽었을 때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은 더 이상 서로에 대해 공포와 증오를 가지지 않는다고 말했어. 질서와 평화가 도래하는 거지. 이것은 집단에겐 신비롭기까지 한 경험이야. 구성원들이 서로 공격하면 무질서와 혼란이 오는데, 그 희생양을 공격하니까 질서와 평화가 온 거지. 그런 놀라운 차이는 집단을 당황하게 하고 결국 집단은 그 희생양에게는 다른 자와는 다른 특별함이 있다고 믿게 되지. 그래서 집단은 그런 희생양에게 특별한 숭배를 바치고 다른 자들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 떨어지기 직전의 나뭇잎이 가장 아름다운 것과 마찬가지야. 나무의 경우 그건 단풍이라고 부르지. 집단의 경우에는 뭐라고 불리는지 짐작할 수 있을 거다."
"…왕이라 부르는군."
3)
"어디에도 없는 신이 인간에게 준 것이 무엇이지?"
"나늬들이 특별한 거야 전통이지만 이번 나늬는 정말 특이해."
"나? 나는 보늬야. 보늬와 나늬가 닮은 거야 당연하지. 자매잖아. 그리고 내가 보늬인 것도 이상할 것이 없지. 보늬는 모든 종족에게 다 태어나니까. 우리 어머니도 보늬였어. 유료도로당의 당주는 이름도 보늬였다지? 하지만 나늬는 인간에게서만 태어나지. 그리고 데오늬 달비는 이 시간의 나늬야."
그리미는 마침내 케이건이 두려워하며 꺼내지 못했던 말을 꺼내었다. 케이건은 떨리는 눈으로 그리미를 바라보았다. 그리미는 빙긋 웃었다.
"그래. 어디에도 없는 신이 인간에게 준 것은 나늬지."
눈마새를 관통하고 있는 이야기는 두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왕은 무엇인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건 무엇인가?
일단 왕이란 것은 눈물을 마시는 새로 나옵니다. 자세한 설명은 2)번을 보시면 아실겁니다. 왕은 무엇일까요? 갑자기 드레곤라자에서 후치가 길시언의 등을 보며 했던 말이 생각나는군요. "나의 왕이여.."
전작과 다른 점이라면, 이 작품부터는 변화보다는 현상파악쪽으로 더 기울고 있습니다. 물론 나늬라는 설정으로 미래에 대한 자신의 희망을 표현하고 있는 듯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과거와 현재를 더욱 파악하겠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듯 합니다.
사실 그의 전작과는 다르게, 주변부 이야기가 너무 많고,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조차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아직 끝이 나지 않았으니 뭐라 할 수는 없지만.......
무엇보다, 모.닝.스.타!가 너무 많습니다.ㅠㅠ (좀비들도 울고 가는 모닝스타들이라니.....ㅠㅠ)
1)
바람이 불었다.
"피를 마시는 새가 가장 오래 살지. 누구도 내놓고 싶지 않은 귀중한 것을 마시니. 하지만 그 피비린내 때문에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아."
"독은 가장 부드럽고 물은 가장 날카롭대요. 독을 주면 잠이 들지만 물을 끼얹으면 벌떡 일어나지요. 이게 무슨 뜻인지는 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렇대요. 그런데 가장 빨리 나는 새는 독을 마시는 새고 가장 느리게 나는 새는 물을 마시는 새라고 하더라고요. 왜 그렇죠?"
"버섯의 꽃말은 유혹."
2) 분리주의와 통합주의
"……와 같이 타이모의 실로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요약해 볼 수 있다. 간략히 살펴보더라도 그 논리의 맹점들은 쉽게 포착된다. 첫째, 같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보다 적은 단계를 거치는 쪽이 더 효율적이다. 이것은 공리다. 타이모의 제안을 염수 얻기라는 일에 비유해 보면 다음과 같다. '염전건설 - 소금 채취 - 물에 소금 용해 - 염수 얻기'. 하지만 염수가 필요하다면 그냥 바닷물을 한 그릇 떠오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내 견해로는 그것이 염수를 얻는 훨씬 간단한 방법이다. 타이모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소금이 아니라 염수임을 명백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왜 제국에서 분리되었다가 다시 제국에 융합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인가. 레콘들은 제국 내부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
둘째, 사람의 숫자가 많을수록 그들 모두가 똑같은 소리를 내는 것은 점점 어려워진다. 이것 또한 공리다. 백 보 양보해서 레콘 독립국의 건설이 가능할 수 있다고 가정하자. 우리 모두가 아는 레콘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아마도 지배자가 되는 것을 숙원으로 삼은 레콘이 그 독립국을 지배하려 할 것이다. 좋다. 나는 자신이 상정한 목표를 전력으로 추구하는 레콘들의 태도를 비웃지는 않겠다. 그러나 지배 행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지배받기를 원하는 자들이 존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치적 정통성의 획득이다. 지배자보다는 피지배자의 숫자가 월등히 많으며, 따라서 정치의 문외한들이 착각하기 쉽지만, 더 중요한 쪽은 지배자의 의사가 아니라 피지배자의 의사다. 지배자가 되길 원하는 한두 명의 레콘은 존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피지배자가 되길 원하는 절대다수의 레콘 집단을 구성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안됐지만 타이모가 제안하는 국가는 성립할 수 없는 정치 집단이다.
셋째……" - 쥐딤 대학에서 개최된 강연회에서 비스그라쥬백 데라시가 강연한 '타이모의 실수' 中.
"……아마도 이런 오해에는 레콘에 대한 비스그라쥬백의 잘못된 선입견 또한 작용한 바가 클 것이다. 나는 비스그라쥬백 데라시의 무지몽매함에 유감스러워하며 다음과 같이 그의 주장을 논박한다. 비스그라쥬백 데라시의 첫번째 실수는 아무런 논리적 근거 없이 타이모의 최종 목표와 자신의 최종 목표가 동일한 것이라 단정한 것이다. 타이모가 원한 것은 비스그라쥬백이 그러리라 믿는 것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것이다. 백작이 타이모의 철학을 일부라도 이해했다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염수의 비유는 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타이모의 목표를 잘 차려진 요리상에 비유하고 싶다. 타이모가 원한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도깨비가 도깨비답게, 그리고 레콘이 레콘답게 행동하면서 그 모든 행위가 조화를 이루는 제국이다. 절대로 비스그라쥬백이 상상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한데 뒤섞어버려 뭐가 뭔지도 모르게 되는 잡탕 찌개 같은 것이 아니다. 보다 적은 단계를 지향하는 것이 공리라고 말하는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는 요리사에게 하나의 솥에 모든 음식 재료를 집어넣고 한꺼번에 요리하라고 조언 할 사람이다. 그를 이해못하는 바는 아니다.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는 나가이며, 그가 태어나 자란 사회에는 요리사가 없다.
비스그라쥬백 데라시의 두번째 주장을 보자. 지배권은 지배자가 아닌 피지배자들에게서 나온다는 그의 분석에는 이의가 없다. 피지배자의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인 동의 없이는 어떤 자도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수 없다. 그런데 비스그라쥬백 데라시는, 고의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능동적 동의만을 전제하고 있다. 비스그라쥬백은 지배자가 되길 원하는 한두 명의 레콘은 존재할 수도 있지만 피지배자가 되길 원하는 절대다수의 레콘 집단을 구성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 타이모를 비웃었다. 물론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전술했듯이 동의에는 능동적인 동의뿐만 아니라 수동적인 동의도 있다. 레콘이 왜 수동적인 동의를 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능동적이라는 말의 예로서 부족함이 없는 레콘들도 자신의 숙원에 관계된 일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수동적일 수 있으며, 실제로 현재 레콘들은 치천제의 지배권을 수동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만약 비스그라쥬백 데라시가 능동적인 동의만을 동의로 인정하겠다면, 나는 그에게 충성 서약에 대한 치천제의 반감을 설명해보라고 말하겠다. 충성 서약이야말로 황제의 지배권에 대한 영주들의 능동적인 동의 수단이다. 하지만 치천제는 그런 능동적 동의를 부정하고 있으며 오히려 수동적인 동의만을 요구하고 있다.
셋째……" - 쥐딤 선언문 中 일부. 쥐딤 선언문에 따르는 전설은 다음과 같다. 비스그라쥬백 데라시의 강연이 있은 날로부터 닷새 뒤 쥐딤 대학 출판부는 지멘과 아실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책상 하나와 지필묵을 요구한 아실은 한 시간 만에 선언문을 써버렸고 지멘은 출판부원들에게 정중히 인쇄를 요청했다. 이틀 뒤 제국군이 쥐딤 대학 정문에 도착할 때까지 오천 매 가량의 선언문이 인쇄되었다. 지멘과 아실은 두툼한 선언문 묶음과 함께 사라졌고 이후 제국 곳곳에서 쥐딤 선언문이 발견되었다. 덧붙여 말한다면, 쥐딤 대학장은 쥐딤 선언문이라는 이름의 원인이 된 '쥐딤 대학 출판부의 도움으로 인쇄되었음'이라는 문구를 빼지 못한 출판부원들에게 어떤 견책 처분도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지멘의 정중한 요청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동쪽 끝을 막고 있는 처용 산맥 너머는 어떤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네번째 바다가 아니다. 그곳에는 넓은 미답지가 있다. 분리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바로 그 땅이다. 레콘이 배타적 독립국을 만든다면 기존의 제국민들과 마찰을 일으킬 거라는 우려는, 따라서 무의미하다. 분리주의자가 바라는 특권은 해가 떠오르는 땅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햇빛을 맞이한다는 것뿐이다. 그외에는 미답지를 새로 개간하는 고통이 있을 뿐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땅에서 나라를 만드는 것이 누군가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전술했듯이 레콘 독립국은 그 종말이 정해져 있는 특이한 정치 단위다. 제국에서 분리되어 나온 레콘 독립국은 장차 제국에 다시 편입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제국민들은 레콘들이 개간해 놓은 광활한 땅을 선물받게 될 것이다. 부디 단순하게 생각하라. 먼 곳으로 떠나서 자기들끼리 살겠다는 사람들을 그냥 보내주면 안될 것 없잖은가? 더군다나 여러분의 도움 없이 그 땅을 개간해놓고는 여러분의 후손에게 개방하겠다는데? 후손에게 주는 선물로 이만한 것도 없을 것이다. - 쥐딤 선언문 中
3) 전쟁
"전쟁의 진선미는 힘, 승리, 빠른 종전이다." - 엘시 에더리.
이야기의 중심을 흐뜨러트리면서까지 장시간 등장한 이 캐릭터는 그 이름으로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군요.
en
killed
er
로 쉽게 나누어지는 데요. en은 영어에서 "~하게 된"이라는 뜻을 주는 접두어이고, killed는 "죽인", er은 "~한 자"이니까, 합치면 "죽임을 당한 자"로군요.
아무래도 시사성을 무시할 수 없겠죠. 전쟁로망과 같이 보이기도 하는 장대한 서사시를 써가시는 작가님은 그 과정에서 고통당하고 가치없는 취급을 당하게되는 사람 하나 하나의 의미에 대해 상기할 것을 독자들에게 요구한 것이 아닐까요?
고 김선일 씨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눈마새 게시판의 나의 마음음 파리조님의 글
기계(奇計)에 의지하는 자가 맞이하게 되는 비참한 말로에 대한 무수한 조언에도 불구하고, 지휘관들은 흔히 기계의 유혹에 빠진다. 전쟁은 최후의 외교이고 그 이후에 다른 것은 없다. 무엇을 해 볼 기회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이상 모든 것을 시도하게 된다. 그리고 엘시 에더리의 말처럼 전쟁의 선은 승리다. 그것은 전쟁에서도 선을 추구하라는 자기모순적인 망발이 아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무슨 짓을 하건 상관없다는 의미다. 물론 엘시 에더리의 말 전체를 보면 전쟁의 잔인함과 비정함에 대한 혐오감을 읽어낼 수 있지만 - 엘시는 전쟁의 아름다움으로 뛰어난 무용이나 불굴의 용기, 기상천외한 지략 따위를 거론하지는 않았다. 오직 빠른 종전만이 아름답다고 말했다. - 전후 맥락을 빼고 그 대목만 바라보면 그것은 꽤나 무시무시한 말이다. 엘시는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엘시가 알지 못했던 것은 그외에도 많았다. 다른 누구보다도 그 어둠 속에 벌어지는 일들을 많이 알고 있었지만 엘시는 그 속에서 무수한 영웅담과 비극, 혹은 기이한 이야기들 이 놀라운 속도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은 짐작만 할 뿐 알지 못했다. 소화차와 함께 분사한 시모그라쥬 병사들의 이야기는 그 일부에 불과했다. 엘시는 서로 적이 되어 만난 남매 병사가 그 어둠 속에 나란히 앉아 전투의 끝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 영리한 남매는 진 쪽이 이긴 쪽의 포로가 되기로 하고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엘시는 연인이 준 목걸이 때문에 목이 졸려 죽은 불쌍한 부위의 이야기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 연인은 화살을 막아주기를 기원하며 목걸이를 주었을지도 모르지만. 엘시는 부러진 칼로 세 명이나 되는 적과 싸우다가 그 중 두 명과 함께 죽어간 용맹한 수전사의 이야기는 알지 못했다. 그 수전사가 쓰러지며 집어던진 칼은 주인을 잃고 방황하던 군마를 찔렀고 놀란 군마가 날뛰는 동안 위험에 빠진 수전사의 분대원들은 도망칠 수 있었다. 엔거 평원을 뒤덮고 있는, 여기 저기가 그을려 있고 곳곳에 피가 묻은 그 어둠 속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태어나고 또한 영영 끝났다. 엘시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아직 결론도 나지 않은 글에 뭐라고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볼때는 이 글의 맥락은 정치와 전쟁으로 통합할 수 있을거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이 전의 글들과는 다르게 너무 현실적인 문제이고, 구성방법도 좀비들에게는 상당히 생소한지라 이런저런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정치에서 분리주의와 통합주의는, 저의 생각으로는 나라가 먼저인가? 개인이 먼저인가? 라는 주장으로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유명한 말이지만) 나라는 국민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지만, 국민은 나라가 없어서 살아갈 수 있다.라는 말이 더 마음에 드는 사람입니다^^
전쟁이라는 것이 이 글의 다른 기둥을 이루고 있는 것도, 그것도 전쟁을 일반 판타지처럼 아름답게 묘사하는것이 아니고 전쟁의 현실을 되도록이면 잔인하도록 자세히 묘사를 하려고 합니다. 이 글이 시작한 때가 9.11이후라는 것을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는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이영도님의 글을 보고 있으면, 전쟁은 사람들을 불우하게 만들지만, 어쩔 수 없이 필요는 하다. 라고 생각하시는거 같습니다. 휴..
저도 동감하는 부분이고요.
이제 31쳅터로 좀비들이 예상하기로는 바둑판이 자주나오는지라, 바둑판판에 사용되는 돌인 361개라. 36챕터에서 끝날것이라 예상 중입니다. 이제 거의 크라이막스에 다가가고 있죠. 피마새가 끝나면 독후감 제대로 한번 써봐야겠습니다.
"이-라-세-오-날-의-부-활-을-경-배-하-라-!"
(31쳅터에서도 모닝스타 제대로 맞았다...설마설마했는데..설마.ㅠㅠ)
종합 : 그의 작품관을 보다보면, 어느 이야기에나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키워드가 있습니다.
"변화"
그가 생각하는 변화가 무엇일까요? 어쩌면 작가 본인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찾아가는 과정이죠. 그리고 작가의 글이 독자에게 읽혀진 순간 그 글은 독자의 것이 되는 것이죠. 곧 저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죠.
저요? ......글세요......
무근수(無根樹). 뿌리 없는 나무.
뱀다리 : "드레곤 자라~", "미쳤어? 챙한테 죽을려고?","키 크고 검은색 코트를 걸치고 침착하게 돌아버린 듯한 얼굴의 남자 없어요?","엄마한테 물어봐야 해요! 대수호자님!","나 잡아봐라!" 가 누가 어디서 한 말인지 다 알고 웃을 수 있는 당신-_-;; 네크로맨서님에게 충성하는 좀비대열에 있을 자격이 충분이 있으십니다.
(이건 초급인가..쿨럭-_)
뱀다리 : 그런데 갑자기 든 생각은..."이라세오날". 전통적으로 용의 이름은 5글자.그렇다면 지금 부활했다는 이라세오날은 부활이 아니라, 라세가 마련해둔 보조용이었다. 다시 말해, 라세는 죽었고, 라세는 몰래 키우던 용을 자신의 모습 그대로 키운 것이다.(용은 무엇이라도 될 수 있으니까.)
용이라면 천년만년 제국이 유지될 것이고, 그렇다면 후계자문제도 없을 것이다......(안 죽는데 뭔 후계자-_)거기에 강력한 힘도 있겠고.......(설마...이딴 모닝스타는 시러!!! 크헉!~)
"두 번째 요구 자체가 첫 번째와 세 번째를 내포하고 있으니까. 아아. 왜 세 번째뿐만이 아 니라 첫 번째도 내포하냐고? 하나밖에 없을 땐 처음이라고 하지 않아. 그냥 하나지. 심지어 하나라는 말조차 생략할 때가 많아. 베로시 토프탈이 하나라고 말할 필요는 없잖아. 두 번째가 있을 때만 첫 번째가 만들어지는 거야. 두 번째는 그렇게 위험한 거지. 첫 번째와 세번째를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그리고 넌 그걸 했어." (그을린 발)
-- 영도님. 눈마새에 이어서 피마새. 이미 2번째!!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3번째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음하하!! 다음은 물을 마시는 새? 독을 마시는 새?? 음헤헤헤...
모으는 재미! 생각하는 재미!
혼자서도 할 수 있고, 모여서 하면 더 재밌는 카드 게임을 찾으시나요? 그 해답을 SET이 드립니다. SET은 정말 간단한 룰로 혼자서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즐겨도 재미있는 카드 게임의 고전이랍니다.
심리분석카드?
SET은 영화나 마술에서 자주 등장하는 무늬의 카드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일단, 카드는 뽀대가 나는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카드 자체는 종이로 만들어져 있어, 진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단순하면서도 고전적인 친숙한 무늬를 띄고 있어서, 익숙해지는데 어려움이 없는 무난한 디자인을 보여줍니다.
4가지 특성, 무한한 조합
SET의 카드들은 다음과 같은 4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숫자 : 카드에 그려진 도형들의 숫자입니다(1,2,3).
2. 심벌 : 다이아몬드, 타원, 물결무늬가 있습니다.
3. 무늬 : 채워진 모습, 스트라이프, 빈상태가 있습니다.
4. 색 : 빨강, 녹색, 퍼플이 있습니다.
이 특성들을 잘 생각해서 SET을 만드는 것이 목표랍니다. 일단, 게임은 12장의 카드를 펼쳐 놓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플레이어들은 펼쳐진 12장의 카드에서 SET을 만들어야 합니다.
모두 같거나 혹은 모두 다르거나
SET은 무조건 3장으로 이루어지며, 3장의 특성이 4가지 특성중에서 모두 같거나 모두 틀리거나 해야합니다.
예를 들어 3장 중에서 3장이 모두 다이아몬드에 숫자가 모두 틀리며, 모두 다른 색에 모두 다른 무늬라면 이 것은 SET이됩니다. 하지만, 이 중에서 하나라도 틀리거나 같은 것이 없다면, 이 카드들은 SET이 될 수 없습니다. 왼쪽의 예제를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게 SET이 만들어지면, SET을 만든 플레이어는 그 카드들을 가져가고, 덱에서 카드를 채워 넣습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SET을 만들어 나가 덱에 있는 카드를 모두 없애면 게임이 끝나게 됩니다.
혼자서도 즐기고, 모두 함께 즐기고
게임이 자체는 무척이나 심플하죠? 하지만, 의외로 SET을 만든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일단 처음하는 사람도 쉽게 적응은 하지만, 만든다는 것은 상당한 집중을 필요로 하죠. 두뇌를 트레이닝하는데 그만이죠.
또한 혼자서도 청승맞게 SET을 만들 수도 있어, 사람들이 없어도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이 게임이 지닌 장점이라 생각합니다.
단순함 속에 감추어진 깊은 게임의 세계... 남녀노소 모두 즐겁게 즐길 수 있는 카드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의 중얼중얼 : 저도 셋게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혼자서도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폐인게임입니다. 혼자서도 잘해요를 실천한답니다. 주위에 있는 몇몇 넘들도 좋아해서, 지금은 머리쓰는 게임이 아니고 할리갈리처럼 순발력게임이 되어버렸습니다. 무서운 것들이죠. 어떤넘은 이거 가지고 확율로 계산하던데.....-_-;;;
이게 인터넷으로 돌릴 수 있을지 고민중입니다. 가능하다면 가능할텐데, 한번 구현해볼렵니다. 물론 프로그래밍따구는 저와는 영영 만날 수 없는 슬픈 인연이기에 난 수학이 싫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습니다.^^
윤명철 교수님의 논문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동아지중해(東亞地中海)(Eastasian-mediterranean-sea)라는 개념을 보았을 때, 상당히 인상에 선명한 낙인이 찍혀오더군요.^^ 원래부터 광대토왕급 구축함이니, 이순신급 구축함이니해서 KDX사업에 관심이 많았고, 해군을 상당히 좋아하는지라....^^::
하지만 윤명철교수님도 논문에서 밝혔듯이, 해양에서의 일은 유물로 증명하기도 힘들고(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힘들다는 것입니다^^;;) 사료로 증명하자고 해도 애로사항이 꽃피우는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래도 한국의 앞으로 미래에 제일 중요시 해야될 것이 해군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해양성의 과거모습과 그 변천과정의 논문을 발표함으로 인하여 파생되는 국민정서의 변환에 높은 가치를 두고 싶습니다.
고구려(Koguryo)는 중국, 북방의 遊牧種族들, 한반도의 백제(Paekche)와 신라
(Shilla) 및 왜(Wa)의 세력이 마주치는 접점에 있었다. 또한 대륙과 해양을 공유
하였고, 중국지역 및 遼東(liaotung)지역 등과는 황해북부, 百濟와 황해중부 이북
을 경계로, 왜와는 동해를 가운데 두므로써 해양질서의 영향이 강했다. 필자는 이
러한 특성에 주목하여 東亞地中海(Eastasian-mediterranean-sea)개념을 모델로
설정하였다.
고구려는 이러한 특성을 살려 국가의 발전전략을 수립하고 실천하였으며, 국제
질서와 대외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는데 이용하였다. 특히 동서남북 동시
진출정책을 펼쳤으나, 특히 남진정책을 중요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인 특
성상 해양활동도 활발하였다. 그런데 남진정책과 해양활동은 깊은 상관관계를 맺
고 있었다.
고구려의 존속기간 내내 추진한 정책들은 몇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단계성을
지녔다. 일정한 시대, 특정한 왕의 정책으로 추진된 것이 아니다. 전기부터 장수왕
대까지 국내적 조건과 국제질서의 상황 속에서 장기정책으로 추진된 것이다. 특히
광개토대왕(King Kwanggaeto)은 국제질서의 재편과정 속에서 능동적인 대응전략
을 수립하기 위하여 본격적인 해양활동이 필요했다. 장수왕(King Changsu)은 수도
를 평양성(Pyungyang Castle)으로 이전하고, 남진정책을 과감하게 실천하여 한반도
의 패자가 되었다. 또한 경기만을 장악하여 황해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확보하고, 동
아지중해의 해양질서에 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고구려는 국제질서의 중심부에서 국
가의 장기전략으로서 해양활동과 남진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장수왕대의 성공으로
多重放射狀 外交가 전개되는 국제질서 속에서 동아지중해의 중핵(core)국가로서 조
정역할을 수행하였다.
1. 서론
고구려는 華北지방의 중국세력과 북방의 遊牧種族들, 한반도 중부 이남의 백제와 신라
및 왜의 세력이 마주치는 힘의 접점에 있었다. 또한 대륙과 해양을 공유하였고, 중국지
역 및 遼東지역 등과는 황해북부를, 百濟와는 황해중부 이북을 경계로, 왜와는 동해를 가
운데 두고 있어서 해양질서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필자는 이러한 특성에 주목하여 東亞
地中海(Eastasian-mediterranean-sea)개념을 모델로 설정하고,이와 관련된 글들을 발표
하고 있다.
고구려는 이러한 특성을 살려 다양한 국가의 발전전략을 수립하고 실천하였으며, 국제질
서와 대외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는데 이용하였다. 특히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동
서남북 동시진출정책을 펼쳤으나, 남진정책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
인 특성상 해양활동도 활발하였다. 그런데 남진정책과 해양활동은 매우 깊은 상관관계를
맺고 있었다.
본고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이 존속기간 내내 일관성을 지닌채 추진된 것으로 보며 어떠
한 단계와 과정을 거쳤으며, 주요한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해양활동과의 관련성 속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따라서 남진정책을 주로 국제정세와 관련하여 분석하였으며, 시대는 해
양과의 관련성이라는 본고의 주제와 논리의 전개상 전기, 광개토대왕기, 장수왕기의 3단
계로 나누었다.
2 전기의 해양진출과 국가전략
고구려는 해양과 남진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초기 단계부터 바다로의 진출을 꾸준히 모색하
였다. 大武神王 15년(32)에 후한과 긴장된 상태 속에서 好童은 낙랑을 쳐서 항복시켰
고 5년 후에 고구려는 樂浪을 멸망시켰다 그 후에 낙랑의 해양활동 능력을 수용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44년에는 後漢 光武帝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伐하
고, 그 땅을 取하여 군현으로 삼았다. 고구려가 낙랑을 점령하였며, 후한은 해양작전을
한 것이다. 이 후에 태조대왕은 서안평을 공격했다. 이것은 중원및 요동과 낙랑 등 남쪽의
중국세력의 연결을 끊어 협공위협을 감소시키고 낙랑세력을 구축하려는 것이었다. 특히 서
안평을 공격한 행위는 해양전략의 입장에서 볼 때 고구려의 황해연안 진출을 위하거나 중국
세력의 해양활동을 방해하기 위한 據點 確保의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요동에서는 公孫氏정권이 수립되었고, 그들은 樂浪郡의 일부를 분리해 帶方郡을 설치하였
다. 이 때 등장한 東川王은 군사전과 외교전을 병행하면서 변모하는 국제질서의 중심부로
진입하고자 하였다. 공손씨정권과 위,선비족 등의 군사적인 압력을 받고, 남으로는 낙랑 대
방군에 의해 배후를 위협당하고 있었다. 이 때 吳와의 외교관계는 국제적 지위를 상승시키
고,魏의 위협을 분산시키는 외교적 잇점이 있었다. 그런데 우연하게 맺어진 吳와 교섭하면서
해양활동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해양을 매개로 다국간의 이해관계가 격돌하는 동아지중해의
역학관계에 직접적으로 진입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고구려와 오는 정치적, 경제적인 이익을 위하여 교역을 활발하게 하였다. 吳에게 貂皮 1000
枚와 鷄皮 10具 등과 角弓 등 군수물자를 보냈다. 孫權은 衣服珍寶 등 사치품을 보냈
다. 고구려는 말 수백필을 주었으나 吳의 사신은 타고온 배가 적어 80필만 싣고 갔다.
고구려는 해양문화가 가장 발달한 吳와 관계를 맺음으로서 해양발전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 때 양국 간에 교섭이 이루어진 항구는 서안평이었다.
서안평은 압록강하구에 있으며, 고구려가 황해로 나가는 유일한 出海口이다. 서안평은 중국
세력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한반도 남부의 小國들 및 일본열도의 일부세력과 중국
과의 교섭은 樂浪을 중간거점으로 삼았다.그런데 고구려가 성장하고서해안 연안으로 진출
하면서 沿岸 혹은 近海航路를 이용하는데 어려움이 생겼다. 때문에 낙랑보다는 그 아래에
대방군을 설치하여 고구려의 해상봉쇄와 저지를 피하고자 했다. 魏는 수군활동능력을 바탕
으로 중간에 고구려를 포위한 형국으로 황해북부항로를 장악하고 일본열도를 연결하는 광범
위한 영향권을 형성한 것이다.
고구려는 南과 西의 양 방면에서 중국세력이 압박을 가할 경우에는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
다. 그러므로 한군현의 잔재세력과 북쪽에 있는 위를 연결시켜주는 교통로인 육로와 해로를
중간에서 장악하므로써 상호교통을 막아야만 했다. 따라서 고구려가 당면한 외교 군사적 목
표는 遼東沿岸 혹은 近海航路의 해상권을 장악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西安平은
고구려의 생존이 걸린 지역이었다.233년 이후 237년까까지 吳의 孫權과 교섭할 때 서안평
유역은 고구려의 세력하에 있었다. 그런데 東川王이 242년에 서안평을 공격했고, 이어 위와
고구려의 전면전이 벌어졌다.
그런데 3세기 말 부터 국제관계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晋은 夫餘 馬韓 辰韓 등과 외교관계
를 맺었고고구려는 肅愼을 정벌하는 등 동북지방으로 진출하였다. 한편 북방에선 鮮
卑의 段氏 宇文氏 慕容氏 등이 등장하여 쟁패전을 벌였으며 高句麗와 晋 사이에서 복잡한
역학관계를 연출하였다.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는 중국세력이 요동지방을 중심으로 행정권
을 상실할 정도가 되었다.
이 때 고구려의 美川王은 한편으로는 요동을, 다른 한편으로는 남진정책을 취하는 남북동
시전략을 취했다. 304년에는 백제가 낙랑군의 西縣을 공격하여 탈취하였다. 역시 해안가까
히에서 작전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미천왕 3년(302)9월에 3만명의 군사로서
玄兎郡을 공격하고, 이때 사로잡은 8000명을 평양으로 옮겼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미천
왕은 마침내 12년(311)에 서안평을 점령한 후 완전히 서해안에 진출한다. 압록강의 하구
지역과 황해북부의 해상권, 황해북부의 연근해항로의 물목을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13년
(313)에 낙랑을 완전히 구축하고 2000여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그 다음해인 314년에는 대
방을 멸망시켰다. 대동강 하구 및 예성강유역의 일부를 영향권하에 넣었다. 이로서 고구려
는 황해중부이북의 해상권과 연근해항로를 완전하게 장악하였다.
樂浪 帶方이 멸망한 데에는 고구려가 중간교통로를 장악한 것이 효과적으로 작용했을 것이
다. 특히 311년에 西安平 지역을 수복하여 西韓灣과 황해북부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해상활
동이 가능했고, 이러한 해양상황의 변화가 낙랑 대방의 대중통로를 막아 약화와 멸망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낙랑 대방을 둘러싼 대결은 한반도 뿐만 아니라 倭까지 연결한 동아지중해 동방의 이익을
고수하려는 중국세력과 그것을 탈취하여 중국세력의 협공에서 벗어나며 교역상의 이익은 물
론 남부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고자 하는 고구려 간의 싸움이었다. 따라서 전 시대
에 발생했던 朝漢戰爭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영토팽창전보다는 교역권의 싸움, 그리고 해양
질서의 대결이란 성격이 강했다. 이 때 특이한 경험을 했던 美川王은 국제질서의 본질을 인
식하고, 해양질서의 중요성과 그것이 가지는 경제적인 잇점 등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통찰력
을 지녔다. 그는 남북 동시전략을 추진했고, 남진에 비중을 두어 고구려가 실제적으로 남쪽
에 뿌리를 내리는 토대를 만들었다.
전기에 추진된 해양활동은 주로 고구려 국가전략이라는 입장에서 서안평 쟁탈전과 남쪽의
낙랑 대방을 축출하는데 두어졌다. 그 결과 요동반도 이남의 海上權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낙랑과 대방이 가졌던 해양능력과 교역상의 이익을 흡수했다.이렇게 추진된 고구려의 남
진은 백제의 성장 및 북진과 서로 부딪혀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된다.
4세기는 북쪽은 五胡十六國시대, 남쪽은 東晋의 건국이라는 대혼란시기가 도래하여 東아
시아 전체에 질서의 변동, 즉 분열과 질서의 변동을 야기시켰다. 북부지역의 여러나라들
과 남부의 동진은 정치 외교 경제적인 입장에서 교섭을 하였는데, 이는 육지와 해양의
공유라는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북중국에서의 혼란은
황해북부의 해양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황해를 內海(inland- sea)로 중
국의 남북지방과 한반도의 국가들, 그리고 일본열도로 연결되던 東亞地中海 질서권
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약화ㄷ을 것이다. 5胡 16國시대에 남북이 대치상태에 들어갔을
때 海路는 외교교섭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고구려와 요동반도 남부의 연, 화북의 후조와 남방의 동진은 각각 해양을 통해서 외교
및 군사교섭을 추진하였다. 고구려와 後趙는 연을 견제하는 외교 군사관계를 맺고 있었
다. 330년에 고구려는 후조에 사신을 보내고 같은 해에 矢를 보내어 군수물자를 교
환했다.이 때 고구려는 이미 장악한 압록강하구 유역을 출발하여 중간의 燕을 피해서
해로를 이용해 山東지방으로 잠입한 것이다. 한편 336년 3월에 해로를 통해서 동진에
사신과 공물을 보냈다. 해양을 통한 사신왕래가 빈번했고, 해양은 적대국가의 국경을
피해서 교섭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338년에는 후조가 300척을 동원해서 고구려에게
곡식을 보급하였다.이처럼 4세기 전반에는 각 나라간에 역학관계가 해양을 매개로 복
잡하게 전개 되었다.
고구려는 황해북부에서 활동을 하는 한편 남진정책을 취하였다. 낙랑군이 멸망한 이후에
도 잔존토착세력들은 동진 등 남조세력들과 교섭하면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대방군의 옛 땅인 황해도 지역에서도 토착호족세력들은 東晋의 연호인 元興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들은 해양능력을 바탕으로 대외교역과 정치적 활동을 하는데 약간의 독자성
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이 지역의 정치적인 공백을 메꾸고, 대외교섭에서
발생하는 정치 외교 경제적 잇점을 확보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진출을 시도했다.고국원
왕은 334년(2년)에 평양성을 증축하였다. 343년(17년)에는 평양 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겼
다. 물론 이러한 남진정책은 국제질서를 재편하는데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또 북진하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서이며, 해양활동과 불가분의 관련이 있다.
그런데 백제는 해양활동 능력이 뛰어났다. 근초고왕은 북진정책을 취하면서 평양성을 공격
하므로써 남진해오는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이 결과로 경기만을 완전하게 內海化하고, 그
배후인 황해도 지방을 장악하였다. 이 시대 백제의 해양활동 능력은 왜와 관계하는데서
도 나타난다. {日本書紀} 神功紀 기사에 의하면 백제와 왜의 교섭은 近肖古王 20년
(366)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馬韓을 병합한 후에 백제는 남부지역의 海洋能力을
보강하여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宋書(488)에는 백제가 중국지역에 진출한 듯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南齊書(6세기 전반) 梁書(7세기 전반) 南史(7세기 전반) 등 남조의 사서
들에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백제가 대방지역을 확보할 경우에는 위가 전에 대방을 중간거점으로 일본열도에서
화북지방 까지 구축해놓은 황해연안 교역권을 차지할 수 있다. 때문에 백제는 1차적으로 대
방의 땅을 차지하고, 黃海中部海上權을 확보해야했다. 그러기 위해선 북방진출을 꾀해야 했
다. 결국 고구려의 남방진출 기도와 북방진출을 하는 백제 近肖古王의 의도는 정면충돌을
하였으며,이는 주로 경기만 쟁탈전의 양상을 띄웠다.
고구려는 한강북부의 雉壤지방을 선제공격하였으나 패하고, 오히려 平壤城 전투에서
고국원왕이 전사를 당하여 남진정책은 좌절되었다. 이 후에도 양국의 충돌은 산발적으로
계속되면서 공방전을 폈다.
백제는 평양성 전투에 승리하므로써 옛 帶方郡 地域의 일부를 탈취하였으며, 그들의 사
회 경제적인 능력과 함께 해양활동능력을 상당부분 흡수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경기
만은 중부의 모든 강이 몰려드는 곳으로서 河系網과 내륙수로를 통해서 중부지방을 통합
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이곳을 장악하면 중부해상권의 장악은 물론 그 주변, 즉 甕
津半島 長淵郡의 長山串 등 이북지역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百濟는 이후에 해양활동
권이 황해중부이북으로 확대되었으며,일본열도에서 제주도, 한반도 남부를 거쳐 북부까
지 항로로 이어지는 物流體系를 장악하였다. 외교적으로 고구려를 압박하였으며, 여러나라들
과 동시에 교섭을 하였다.
평양성을 공격한 다음 해인 372년 정월에 晉으로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같은 해 6월에는
東晋이 사신을 보내어 近肖古王을 鎭東將軍令 樂浪太守로 책봉하였다. 백제는 이때에
비로소 중국과 통교를 하고, 그 질서 속에 진입하였다. 이 후에도 양국의 관계는 빈번하
게 지속되었다. 이러한 관계를 '高句麗는 前秦과, 東南으로 新羅와 연맹하고, 이에 대응
하여 百濟는 前秦과 대립한 東晋과, 그리고 東으로는 日本과 연결하였다'고 표현하는 견
해도 있다. 이러한 연결이 실효성이 있는지는 물론 해양을 전제로 해야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고구려는 동진과 海路로 연결되고, 백제 등의 남부지역 역시 해양을 매개로만
연결되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에 경기만 유역의 북부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각각 해양방어체제를 구축하
여 본격적인 경기만 쟁탈전을 벌였다. 백제는 386년에 대대적인 관방시설을 설치하여, 靑
木嶺에서 북으로는 八坤城,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렀다. 그 후 고구려가 394년(광개토
왕 3)에 國南 7성을 축성한 것은 황해도 남부해안지대를 강화할 목적인 것으로 추측된
다.
평양성 패배 이후에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일단 실패로 돌아가고 황해중부의 해상권이 위축
되어갔다. 고구려는 일종의 소강상태를 이루면서 내치에 주력했다. 그러다가 廣開土大王이
19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결국 이 시기까지의 남진정책은 황해로의 출해구를 확보한 다
음에 낙랑 및 대방의 구축,남진의 교두보 확보 등 주로 국가정책의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3 廣開土大王의 해양활동과 국제전략
廣開土大王은 제19대 왕으로 즉위하여 22년의 在位期間에 政治 軍事를 중심으로 飛躍的
인 발전을 하였다. 그의 최대의 업적은 南과 北으로 軍事的인 진출을 하여 일시적으로
위축된 고구려의 국력과 영토를 팽창시켰으며, 또한 동아시아의 秩序再編 과정에서 능동
적인 대처를 통해서 高句麗의 國際的 位置를 크게 향상시킨 데 있다. 4세기 초에 동아시
아 國家間에 형성되었던 力學關係는 4세기 말에 들어오면서 변동을 일으키고 그에 따라
서 해양활동의 질에도 변화가 왔다. 5세기는 4세기의 변화를 기조로 하면서도 새로운 상
황과 변화의 실체가 분명히 드러난 시대였다. 고구려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지정학적
인 위치를 최대한 활용하여 국제질서의 중심부로 진입해야 했다.
廣開土大王은 軍事的 優位性을 활용한 强攻策을 구사하며 동서남북의 全方位征服
活動을 감행했다. 軍事戰 위주의 이러한 대외정책은 在位年間 지속적으로 감행되었다.
먼저 북방의 경우를 보면, 385년에 요동과 현토를 점령하였고, 燕에게 遼東地域을 침략당한
다. 그러나 402년, 404년에는 연을 공격하여 정벌하였다. 그리고 406년에는 후연이 3000여
리를 행군해와 木底城을 침입하였으나, 이를 물리치므로써 요하 이동지역을 다시 완전히 장
악하였다. 이는 고구려가 遼東半島와 西韓灣, 大同江 하구, 그리고 京畿灣을 잇는 黃海중부
이북의 東岸 海上路를 확보한 데서 의미가 있다. 요동만의 장악은 山東 등 아래 지역과의
해양활동에 유리하였다. 한편 광개토대왕은 410년 東夫餘를 친정하여 복속시켰고, 북부여의
고지도 영토로 완전히 편입시켰다.
남방의 경우는, 廣開土大王 2년(392) 7월에, 4萬의 군사로 백제를 공격하여 石峴 등
10縣을 함락하고 10월에는 백제의 關彌城을 함락시켰다. 또 大王 2, 3, 4년에도
백제와 수차례 전투를 벌리는 등 초기에는 주로 백제와의 전투에 임했다. 물론 이는
고국원왕 말년에 상실한 禮成江유역의 지배권을 탈환하려는 조치이다.
廣開土大王은 활동영역을 점차 넓혀 396년에는 다시 水軍을 투입하여 백제를 쳐서 58城
700餘 村을 탈취하는 戰果를 올렸다. 그리고 8년에는 帛愼을 치고, 또 신라와 연합하여
百濟 倭 聯合軍을 격파한다. 물론 이때 고구려군은 동아지중해의 역학관계상 일본열도로
진출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엄청난 정복활동(東討西略 南征北伐)을 통하여 고구려의
영토는 동서남북으로 팽창되고, 마침내 大帝國을 건설하였다.
廣開土大王의 이러한 전방위정책은 外交面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외교정책에도 비중을
두어 對象을 多樣하게 하므로써 북방세력들과도 외교관계를 맺었다. 大王 9년(400)에는
燕에 사신을 보냈으며, 大王 17년인 408년에는 北燕에 사신을 보낸다. 또 대왕 20년
인 410년에는 南燕으로 使臣과 供物을 보내고 그 댓가로 燕王은 답례품을 보내면서 양국
은 공존관계가 된다. 이같이 명멸하는 북방국가들을 대상으로 다양하고 和戰兩面政策
을 구사한 것은 自主的이며, 탄력성있는 외교였음을 확인시켜 준다.
한편 광개토대왕은 남부의 국가들과도 외교관계를 적극적으로 맺었다. 實聖王子를 인질
로 하는 不平等外交를 통해서 신라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하는 한편 신라와 연합하여 百
濟 伽耶 倭聯合軍을 공동작전으로 물리쳤다. 이것은 백제의 세력을 약화시킨다는 목적
외에도 신라에 대한 宗主權을 강화시키려는 목적이 작용했을 것이다.
377년(光武帝 太元 2)에 고구려와 신라가 東晋에 같이 가고 계속해서 고구려와 같이
前秦에 간다. 신라는 일찍부터 고구려에 의존하여 국제사회에 편입하였고, 고구려는 이
를 통하여 신라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목적은 해양
을 연결고리로 새롭게 부상하는 百濟와 倭의, 南部中心의 外交를 신라를 이용하여 제
어하려는 것이다.
이처럼 大王의 재위 22년간에 발생한 대외적인 군사 외교활동을 분석하면, 광개토대왕은
특정지역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 全方位 攻略을, 외교적으로는 全方位 外交를 펼쳤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릉비문에 따르면 남진정책으로 이해될 만큼 남쪽을 향한 외교활동
과 군사작전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남진정책을 펼친 한 배경으로서 농경지의 확보를 통한 생산력 증대를 들고 있다.또한 육
지의 영토확대나 전략적 거점의 확보라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동아시아
세계는 질서의 측면에서 長期持續性을 가진 외교전략을 토대로 정책집행들이 이루어졌다.
또한 해양이 중요한 활동무대로 등장했고, 남북조의 分立은 주변 각국들로 하여금 외교활동
의 통로로서 해양의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시켰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의 남진정책은 대외관
계의 측면, 특히 본고의 목적상 해양활동의 측면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남진정책은 한반도의 정세와 백제와의 구원으로 볼 때 선차적으로 남부전선을 안정시키고,
백제를 제압하는 일이 중요한 목표였을 것이다. 백제는 근초고왕의 팽창정책 이후 광개토대
왕의 즉위 직전인 389년 390년에도 연속적으로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침입하였다. 이러한
양측의 공방전은 백제의 북진의도가 존재하고, 그만큼 군사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광개토대왕은 백제에 대해 지속적이고 전면적인 공격을 단행했다. 元年에 漢水 以北을 점
령하고,關彌城을 공함하였다. 그리고 王 6년(396)에는 水軍을 거느리고 백제의 50餘 城 700
餘 村을 함락하여 대승을 거두었다.이 성들의 위치와 남방한계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
해가 있다. 陵碑文 永樂 6년조의 기사에 의하면 강화도 혹은 한강水系 하류지역의 한 지점
인 關彌城과 通津으로 추정되는 沸城, 인천지역으로 비정되는 彌鄒城, 南陽灣 지역 등을 점
령한 사실은 서해안의 해상권 장악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또한 위치가 밝혀진
성들의 다수가 해안 가까히에 위치한 사실과 고구려가 수군을 이용해 공격한 사실은 해
양활동과 관련하여 강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대왕 元年({三國史記})과 6년 丙申
條({陵碑文})의 백제공격은 백제의 해상세력을 약화 또는 궤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해
양활동을 둘러싼 양국간의 치열한 접전이었다는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구려는 水軍
을 동원하여 黃海 中部沿岸의 海上權 掌握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것이다.
당시 양국이 해양활동에 비중은 둔 사실은 해양방어체제와 대왕의 수군작전에 의해 알수
있다. 백제는 373년에 청목령에 성을 쌓아 방어체제를 재정비하였다. 즉 백제의 세
력권은 북상했으나, 국경은 동쪽은 북으로 水谷城(新溪), 중간에는 靑木嶺(開城)윗쪽
인 예성강, 그리고 서쪽은 경기만에 접해있는 황해도 남부지역으로 추정된다. 이어
고구려는 375년에 水谷城을 점령하고 백제는 반격을 가하지만 탈환하지 못한다.
고구려는 다시 376년에는 백제의 북변을 침공하였는데 아마도 수곡성 아래이면서
청목령 윗쪽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386년, 廣開土大王이 공격한 8월 이전인 봄에 백
제의 辰斯王은 靑木嶺에서 八坤城, 그리고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기 까지 長城을
축조한다.
황해도 지역, 특히 해안에 방어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당시 양국간에 벌어진 싸움
은 水谷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해안선에서 100km 이내의 내륙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양국은 군사전략상으로 해안활동이나 해상권 장악에 힘을 기울였을 것이다.
더구나 이 지역은 경제적 잇점이나 양국의 대외교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결국
해양전의 발발이 예상되고 있었고, 해양방어체제를 구축하여 양쪽 모두 준비를 하
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고구려가 394년(광개토왕 3)에 國南 7성을 축성하였다.
이는 황해도 남부해안지대를 강화할 목적인 것으로 추측된다.이 지방에는 배천 치
악산성, 연안 봉세산성, 해주 수양산성, 옹진 고성 등 고구려 산성들이 있고, 그외에
시대를 알 수 없는 산성들이 많이 있다. 대부분 해양방어체제의 성격을 지닌 성들
이다. 최창빈은 이 성들을 당시에 쌓은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전쟁이 해양질서와 관련이 깊음은 전쟁과정에서도 나타난다. 고구려가 수군활동을 했
다는 것은 오로지 廣開土大王 陵碑文에만 나타난다. 이 기사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대규모의 수군을 투입하여 백제의 58城과 700 村을 탈취하였다. 다른 해의 기사와
는 달리 步騎의 사용과, 해전발생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고 있다. 수군을 동반한
작전을 한것이다. 그런데 50여 城을 공파하고, 그것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병력과 운
송선이 상당히 많거나, 1 척당 승선인원이 대량인 큰 배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6년
조의 기사는 고구려가 해양활동 능력이 뛰어났으며 본격적인 수전과 대규모 군사작
전의 감행능력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陵碑文} 14年條에는 왜의 해양활동과의 밀접한 관련 가능성이나오고 있다. '王
幢', '王躬率往討'이란 문구로 보아 대왕이 親征을 했으며 倭와 百濟가 공동작전
을 감행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또한 '連船 □□□' 이라는 문구로 보아 왜와 백
제는 船을 이용해서 帶方界를 습격한 것이 된다. 결국은 백제가 主가 되고 왜를
從으로 하는 연합군이었다.
결국 대왕은 수도인 한성을 공멸하고 서해연안의 요충지들을 점령하고 파괴하였다. 이처럼
大王의 황해 서부해안지대 공격은 국내적이고 경제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전개된
국제관계를 볼 때 백제의 정벌과 남진정책은 동아시아의 질서재편이라는 巨視的인 관점과
정치 외교적인 측면을 동시에 갖고 행해졌다. 고구려는 외교권의 독점을 위해 백제를 한반
도 내에 가두어놓고, 포위전략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연결고리를 적극적으로 차단
해야 했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배후를 교란케하고 운신의 폭을 제한하기 위하여
신라를 不平等外交의 틀 속에 편입시켰다. 신라를 동맹세력으로 하여 동남방에서 백제의 후
방을 견제하도록 하는 외교전략의 일환으로 신라의 使行에 깊히 간여하였다.
또한 보병 기병 5만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였다.신라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가야
까지 세력권하에 넣으려는 의도이다. 이로서 왜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백제의 배후를 위협
할 수 있는 전략적 잇점을 확보한 것이다. 이때 남진한 고구려는 동해남부나 남해동부
해안을 통해서 일본열도에 갔을 가능성을 생각케 한다. 특히 {陵碑文} 14년조에서
나타난 왜의 帶方界 침입과 대왕이 王幢을 보내어 격퇴한 사실은 東亞地中海의 역
학관계상 고구려군의 渡倭 가능성을 높혀준다. 이렇게 광개토대왕의 백제 공격과 남진
정책으로 인하여 한반도의 역학관계는 고구려와 신라를 한편으로 하고, 百濟와 倭, 加耶를
다른 한편으로 하는 힘의 軸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 관계는 중국지역 등 다른 지역에서
형성된 국제질서와 복잡하게 얽혀버렸다.
廣開土大王은 국제전략의 입장에서 지정학적인 위치를 활용한 각 나라들 사이에서 자국중
심의 거대한 網을 구성하였다. 지정학적인 조건을 활용하여 전통적인 육지위주의 질서를 기
본으로, 새롭게 성장하는 해양적 질서를 수용하면서 복합적인 정책을 구사했다. 이 때 본격
적인 남진책은 추진해야할 과제였으며, 해양활동능력의 확대, 황해해상권 확보 등과 불가분
의 관계를 가졌다.
4. 長壽王의 수도남천과 동아지중해 중핵조정론
5세기 이전에 동아시아 세계는 1∼2개의 중심부가 확고한 자리를 잡고, 정치 군사 경제적
능력에 따라 周邊部, 反周邊部, 그리고 邊方으로 편성이 되었다. 질서와 역학관계는 중국을
核으로 국가적인 능력을 기본으로 거리나 자연조건 등 교섭의 교통조건에 따라 영향을 받는
형태이었다. 즉 주변부의 각국들은 중국지역 고구려 등의 中心圈과 직접관계를 맺기 보다는
인접한 국가를 통해서 간접적인 외교관계를 맺는 點에서 點으로 이어지는 線의 외교이었다.
그런데 5세기의 질서는 주변부에서 3 내지 4 정도의 核을 중심으로 동시에 전개하는 多重
혹은 '多核放射狀 外交'형태가 되었다. 즉 중국의 남 북조와 고구려를 중심축으로 각국들은
매개국가가 없이도 동시에 여러국가들과 직접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또 중심국들 사이에도
복합적인 외교관계가 형성되고 주변국들간에도 인접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에 직접
교섭을 맺었다.이러한 외교형태의 질적인 변화는 황해연안지역에서 두드러졌다. 전 시대에는
해양교통의 한계로 직접교섭이 힘들었으나 이젠 가능해진 것이다. 고구려는 多重放射狀 外
交의 틀 속에서 對中外交를 등거리외교의 형태로서 추진하기 시작했다.
북방에서는 北燕 柔然 庫莫奚 契丹 吐谷渾 北魏 등이 복합적으로 갈등을 일으키고 黃海
에서는 해양세력이 질서형성에 요인으로 등장했다. 북방의 柔然은 424년(송 元嘉元年)에 6만
기를 거느리고 북위를 쳐들어 왔고, 반대로 다음 해에는 북위가 유연을 정벌하였다. 그 과정
에서 유연은 송나라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북위의 배후를 압박하였으며, 공동의 군사작전까
지 도모했다. 그러나 남조와 북조의 대결은 군사전에서 점차 외교전으로 양상이 변화되었다.
서부지역의 吐谷渾 역시 등거리 외교를 하면서 국익을 취하였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外交질
서 속에서 장수왕은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중심국가로 성장시켜야 했다.
고구려는 남북조와 함께 동아질서의 三角軸을 이루고 있어서 국제역학관계를 조정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중국과 등거리외교를 추진하고, 백제계 세력을 외교적 군사적으로 제압하며,
이를 위해서는 해양활동세력을 봉쇄하는 일이 필요했다. 이제 외교가 동아질서의 재편에 중
요한 요인으로 등장하였다. 고구려는 북연의 문제 때문에 위와 충돌하였고, 송과 전투를 벌
이기도 하였으나 외교에 치중하여 활발한 교섭이 있었다. 대중관계가 중요해져 분열된
중국을 대상으로 남북조 동시등거리외교를 추진하여 남북조시대인 약 300년간 매우
빈번하게 교섭을 하였다.
고구려에게 北魏는 지리적으로 가깝고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으로 실질적인 도움을 교환할
수 있는 반면에 假想敵國이기도 했다. 남조는 북조를 견제하는 잇점이 있고, 지리적으로는
군사적 충돌이 생길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반면에 문화 경제적으로 유리한 존재이었다.
{宋書}, {南齊書}, {梁書} 등의 高句麗傳에는 배로 바다를 건너오는 사신의 왕래가 항상 있
었다고 되어 있다. 당시 사신들의 왕래는 公的貿易의 한 형태였다. 장수왕이 宋에게 군
사적으로 필요한 말 800필을 준 사실은 실제적인 교역이 이루어졋음을 알수 있다. 고구려와
남조의 교섭 중에는 기록이 안된 민간인들에 의한 경제교역 불교승려와 민간인들의 교류
도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와 남북조는 상호필요한 존재로서 각각 등거리외교가 이루어졌다. {南齊書}
에는 '--太祖 建元 3년 사신을 보내와 공물을 바쳤고, 배로 바다를 건너오는 사신의 왕래
가 항상 있었다. 그들은 위 오랑캐에게도 사신을 보냈다.'라는 기사가 있다. 고구려가 남북
조의 갈등을 등거리외교로 적절하게 이용한 기록도 있다. '그들은 (魏)오랑캐에게도 사신을
보냈지만 세력이 강성하여 南齊의 제어를 받지 않았다고 하였다.또한 ---平南參官 顔幼明
과 冗從僕射 劉思斅가 (魏)오랑캐에 사신으로 갔더니, 오랑캐의 元會에서 고구려의 사신과
나란히 앉게 하였다.…' 모두 고구려의 위상과 등거리외교의 실상을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물론 북위와 유연 등과의 갈등 또한 고구려의 등거리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주었다. 그
런데 이것은 활발한 해양활동이 토대가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한편 장수왕은 질서의 재편과정에서 백제 신라 가야 왜 등과도 위상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
다. 즉 백제 신라의 힘을 약화시켜야 했고, 倭를 견제해야 했다. 백제는 해양을 활용한 외교
전을 펼쳐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므로써 고구려 중심의 한반도 질서에 도전이 가능했고,
한편 南朝를 통해서 정치적인 압력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성장하는 백제
세력을 견제하고 북조의 위협을 약화시키려면 남조와 관계를 긴밀히 해야했다. 그런데 고구
려는 백제가 남조와 교섭을 한 것 보다는 더 활발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적어도 공적인 使
行의 경우는 고구려가 월등하게 많았던 것으로 나타난다.어쨋든 백제는 해양력을 바탕으
로 대외로 진출하면서 다시 강국이 되었고, 점점 더 일본의 고대국가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
하였다.
왜는 이 시기에 이르러 국제질서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加耶 高句麗
百濟 등이 왜와 교섭을 가졌으나 동아시아 전체질서 속이 아닌 일본열도 내의 각개세력과
한반도 내의 각국과의 개별적인 관계였으며 형태 또한 능동적이거나 대등한 정도는 아니
었다. 그런데 5세기로 오면서 倭는 동아시아 질서에 참여한다. 국제적인 고립과 일방적인 종
속성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백제 및 중국과의 교섭을 원했다. 왜왕 부(武)가 바친 上表文의
기록은왜가 백제의 선박을 이용했고, 고구려가 그 교섭을 방해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이렇게 倭는 국제질서, 특히 한반도의 질서재편작업에 능동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
다. 황해남부를 무대로 南朝, 倭, 百濟를 연결하는 해양질서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고구려
등을 겨냥한 대북압력이 될 수 있었다. 해양세력의 활동은 역사발전의 변수가 아니라 이젠
역학구도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위와 같이 5세기에 일어난 국제관계와 외교상의 질적인 변모는 동아시아 각국간에 해양적
질서를 바탕으로 等距離와 多重放射狀 형태를 특징으로 하는 全方位 外交가 시작되었다. 그
리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군사력의 개발과 해양문화의 발달,해양활동 영역의 확보가 필
연적으로 요구되었다. 이렇게 국제정세가 질적으로 변화해는 과정에 있었던 장수왕은 더욱
본격적으로 남진정책을 추진했었다.
長壽王은 국제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대외적으로 多重放射狀 外交를 전개
하고,그를 위한 제반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였는데, 그것은 남진정책과 首都의 南遷으
로 표면화된다. 앞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는 이미 해양과 남진의 중요성을 인
식하여 1단계로 압록강 하구의 진출과 황해로의 진출을 꾸준히 모색하였다. 2단계인 광
개토대왕 시대까지는 요동지방과 해양의 영향력 확대, 대동강 하구 장악, 경기만에 대한
일시적인 점령이었다. 그러나 3단계인 장수왕시대에 주어진 과제는 남진정책을 새롭게
나타난 東亞地中海의 질서 속에서 고구려의 입지와 위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정책이었다.
즉 꾸준히 추진해온 남진정책의 완성이었다.
장수왕은 대동강 유역을 다양한 세력들간의 불안정한 각축장이 아니라 남진정책을 완성시
키고 더욱 남진하는데 필수적인 교두보이자 전진거점으로서 지배해야 했다. 그리고 대외교
섭 통로인 경기만을 완전하게 장악해야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장수왕은 수도의 남천과
한강 이남으로의 적극적인 진출을 시도하였다. 수도남천의 배경과 의의는 내부적 요인 및
국제질서의 재편과정에 대한 능동적인 대응정책의 소산이다.
4세기 이후에 한동안 고구려와 백제는 평양과 이남지역을 중심으로 공방전을 벌였다. 양국
간에 국경선이 불분명했고, 중앙의 통제력이 덜 미쳤으며, 상대적으로 지방 토호세력들이 어
느정도의 독자성을 가진 채 성장했기 때문이다.이러한 현실은 중앙집권화와 강력한 대국
가건설을 추진하는 장수왕에게 남진정책의 명분과 필요성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수도의 남천에는 이러한 국내적 요인과 함께 당시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질서의 재편과정
속에서 국제적인 요인이 더 강했을 것이다. 이미 동아시아는 해양질서가 강력하게 작용하
고 있었으며, 해양외교와 군사활동이 빈번했다. 또한 각 나라들 사이에 전개된 외교활동의
구도는 多重放射狀 構造로 변모되었고, 군사활동 영역 역시 多重構造로 변화되었다. 따라서
신속하고 능동적인 외교교섭과 활발한 해양활동을 통하여 중핵조정 역할을 하려며는 首都의
南遷은 적극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또한 對百濟活動을 염두에 둘 때 황해해상권을 장악하고, 對中國外交를 독점하고 통제하는
일은 필수적이었다. 백제와 중국 남조지역은 해양교섭 과정에서 오고가는 항로가 달랐다. 갈
때는 황해중부에서 직접 횡단하다가 중국근해에 접근한 다음에 다시 남진하는 항로를 취했
을 것이다. 한편 남조에서 백제로 올 경우에는 해류의 흐름이 양자강의 바깥 바다에서 한반
도의 서남부 해역으로 이동하므로 봄에 부는 남풍계열의 바람을 이용해서 양자강 이남에서
황해남부를 직항한 다음에 한반도의 서해남부 해안으로 진입하는 항로를 사용했다. 고구려
는 백제의 對中 교섭거점이 변하고 교통로가 이동한데 따른 현실 속에서 황해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장악하는 일 뿐 만 아니라 정치 외교의 중심을 점차 남쪽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수도의 선정과 이동은 군사적 측면, 즉 전략적 가치로 보아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長壽王代에 들어와서 변모한 군사적 환경과 전선개념의 변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구
려의 戰線은 크게 3개 전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북부와 서부에 각각 북방종족과 한족이라
는 부담스러운 상대를 두고 거대한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양대전선은 때때로 혼동을
일으키고 하나로 겹쳐지는 경우도 있었다. 만주지역이 가진 地政學的인 위치로 인하여 야기
되는 혼란이었다.
國內城은 만주지역에 힘의 중심을 두기에 적합한 膨脹據點都市이며 주변의 소국가들을 병
합하는 초기 성장과정에서는 정복국가의 군사도시로서 적합했다. 그러나 점차 북과 서쪽의
강한 외압을 받았으며, 때로는 首都가 위협당하거나 점령당하는 사례까지 있었다. 國內城은
외교전에도 불리하였다. 외교의 주요 대상은 중국이었고, 북방은 기본적으로 진출과 침략의
적대적인 관계이었다. 따라서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는 육로교통의 어려움 때문에 해
로를 통한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국내성은 그에 부적합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동천왕때
이후에 수도를 천도하자는 논의와 시도가 여러번 있었으며, 재차 수도를 이전하는 현실적
인 필요성이 조성되는 상황 속에서 長壽王代의 5세기가 되었다.
장수왕은 首都의 남천을 통해서 전선과 수도와의 거리를 넓히고자 했다. 중국과는 육상전
뿐만 아니라 해상전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황해북부가 중국세력의
海上作戰圈안에 들어간 것은 이미 漢과 衛滿朝鮮과의 싸움에서 비롯된다. 後漢 光武帝의 낙
랑정벌과 魏明帝의 낙랑 대방 정벌은 해양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고구려의 낙랑 대방세력의
구축에도 해양활동이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더구나 중국세력의 해양능력이 확대되었으므로
해양전을 염두에 둘 경우에 고구려는 공격과 방어에 용이한 지점을 수도로 삼는 것이 필요
했다.
한편 남부전선은 북방이나 서부전선에 비하여 규모는 작으나 잦은 충돌이 발생하는 항상
긴장된 상태에 있었다. 高句麗는 한반도 내의 覇者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백제, 신라에
대한 꾸준한 압력과 함께 군사적으로 신속한 대응체제를 갖추어야 했다. 때문에 남방진출의
거점이나 전진기지를 국내성이나 국토북부에 두어서는 효과적인 진출을 할 수가 없었다. 남
쪽으로 수도를 전진배치하면서 압박을 강하게 하는 정책을 써야 했다.
그런데 남부전선의 전진배치 전략은 해양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고구려는 복구된 백제
의 해상작전능력을 제어하기 위한 해양작전반경의 확대가 필요했다. 수도를 옮긴 이후에 고
구려의 재공격이 이루어지고 영토가 서부해안의 牙山灣 유역까지 남하한 사실은 평양성 천
도배경과 해양활동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반증한다.결국 북방과 서방의 군사적 압박
을 완화하고, 외교전을 펼치며, 황해해상권을 확보하기 위하여는 수도의 남천이 필요했다.
백제와 신라를 제압하고, 그것의 성공을 위해서는 해상활동능력을 확대해야 한다.
한편 平壤지역은 내륙교통에 편리하므로 실질적인 중앙적 수도의 기능을 할 수가 있는데
육로교통과 내륙수로교통에도 적합한 곳이다. 평양을 중심으로 淸川江이 있고, 특히 남쪽으
로는 禮成江, 臨津江, 漢江이 하계망을 구성하면서 서해중부로 흘러들어가 경기만을 구성한
다. 따라서 서해중부 이북의 연안 해상권을 장악하면 사람과 물자의 수송체계 장악이 용
이하다.
그 외에 평양지역의 확보는 한강과 대동강으로 구분된 海岸活動圈을 하나로 통합하여 중부
이북을 완전히 활동영역으로 할 수 있게 된다. 강의 水路를 통해 바다와 內陸地方과의 연결
이 원활하여 교역에 활용할 수가 있다. 평양을 사신선 등의 발진기지로 함으로써 중국과의
교통, 특히 남조 교통로의 수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더구나 황해도 북부를 포함한 평양지역
은 중국문화, 요동문화, 한강이남문화와 심지어는 일본열도의 倭文化가 만나던 한반도 최
대의 국제문화 교차점이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국제적 발전을 위해서는 더없이 적합한 지역
이었다. 살펴본 대로 평양은 多重放射狀 外交 등 국제관계와 정책집행에 유리한 위치에 있
다. 평양성 천도는 해양활동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역으로 해양활동의 성장
은 고구려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끼쳤다.
결론적으로 장수왕의 수도남천과 남진정책은 백제, 신라를 겨냥한 영토팽창전의 성격이 아
니라 동아지중해의 세력재편 구도속에서 추진된 국가발전전략의 일환이었다. 역학관계의 중
핵에서 질서재편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륙은 물론 한반도 중부이북의 장악이 필
요했고, 해양활동능력의 강화 역시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남진정책과 수도의 남천은 시대적
욕구를 달성시켜줄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었다.
5 결론
고구려는 압록강의 중류지역에서 건국하였으나 지정학적인 조건과 존속기간 내내 전개된
주변의 국제정세로 인하여 동서남북으로 팽창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남진정책에 비중을
많이 두었으며, 해양활동도 활발하였다. 그런데 이 두가지 성격은 상호불가분의 연간성을 가
지고 있었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내륙국가의 한계를 극복할 목적으로 해양으로의 진출을 시도하ㅣ였으
며, 아울러 남진정책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본문에서 살펴본바아 같이 고구려의 이 정
책들은 몇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단계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일정한 시대, 특정
한 왕의 정책에 추진된 것이 아니라 존속기간 내내, 즉 장수왕이 남진을 완성하기까지 전
기부터 각 시대가 처한 국내적 조건과 국제질서의 상황 속에서 장기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다. 둘째, 첫 단계는 해양출구의 확보와 한군현세력의 축출이라는 국가정책의 수준이었
다. 두번째 단계는 광개토대왕이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속에서 능동적인 대응전략을 수
립하기위한 내부의 환경과 조건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본격적인 해양활동을 필요
로 했고, 이 능력이 국제질서를 변화시키는 주요한 인자로 등장하였다. 세번째 단계는 장수
왕 시대이다. 수도를 평양성으로 이전하고, 남진정책을 과감하게 실천하여 한반도의 패자가
되었다. 또한 경기만을 장악하여 황해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확보하면서 동아지중해의 해양
질서에 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고구려는 국제질서의 중심부에서 국가의 장기전략으로서 해
양활동과 남진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장수왕대의 성공으로 고구려는 다중방사상 외교가 전개
되는 국제질서 속에서 동아지중해의 중핵국가로서 조정역할을 수행하였다.
동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흥 313-06-257977
서울시 양천구 목 6동 목동 아파트 219-1405호
고구려의 남진전략과 해양활동 연구
( 동아지중해 중핵조정론을 중심으로)
윤명철 ( 동국대 사학과 교수)
고구려(Koguryo)는 중국, 북방의 遊牧種族들, 한반도의 백제(Paekche)와 신라
(Shilla) 및 왜(Wa)의 세력이 마주치는 접점에 있었다. 또한 대륙과 해양을 공유
하였고, 중국지역 및 遼東(liaotung)지역 등과는 황해북부, 百濟와 황해중부 이북
을 경계로, 왜와는 동해를 가운데 두므로써 해양질서의 영향이 강했다. 필자는 이
러한 특성에 주목하여 東亞地中海(Eastasian-mediterranean-sea)개념을 모델로
설정하였다.
고구려는 이러한 특성을 살려 국가의 발전전략을 수립하고 실천하였으며, 국제
질서와 대외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는데 이용하였다. 특히 동서남북 동시
진출정책을 펼쳤으나, 특히 남진정책을 중요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인 특
성상 해양활동도 활발하였다. 그런데 남진정책과 해양활동은 깊은 상관관계를 맺
고 있었다.
고구려의 존속기간 내내 추진한 정책들은 몇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단계성을
지녔다. 일정한 시대, 특정한 왕의 정책으로 추진된 것이 아니다. 전기부터 장수왕
대까지 국내적 조건과 국제질서의 상황 속에서 장기정책으로 추진된 것이다. 특히
광개토대왕(King Kwanggaeto)은 국제질서의 재편과정 속에서 능동적인 대응전략
을 수립하기 위하여 본격적인 해양활동이 필요했다. 장수왕(King Changsu)은 수도
를 평양성(Pyungyang Castle)으로 이전하고, 남진정책을 과감하게 실천하여 한반도
의 패자가 되었다. 또한 경기만을 장악하여 황해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확보하고, 동
아지중해의 해양질서에 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고구려는 국제질서의 중심부에서 국
가의 장기전략으로서 해양활동과 남진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장수왕대의 성공으로
多重放射狀 外交가 전개되는 국제질서 속에서 동아지중해의 중핵(core)국가로서 조
정역할을 수행하였다.
SUMMARY
Toward the south strategy and the Ocean Activity during
Koguryo kingdom
--The Eastasian-mediterranean-sea and the Core-Oriented
Arbitration--
Youn, Myung-chul
Department of History
DONGGUK UNIVERSITY
professorr
The Development of the East Asia with the Mediterranean-like characteristics
involved several-historical aspects including interrelationships on economic, cultural, and
socio-political dynamics. Subsequently the order of its land, and ocean interacted
simultaneously. The power-political dynamics of Kogury in the East Asia should be
regarded as a middle core, considering the oceanic aspects in this area.
First, the national activities and developments through the ocean may be verified in
context of historical facts and documents. It is, Therefore, natural that the inter-relation
ships between Kogury and its surrounding areas be studied complexly in general points
of view. The writer analyze the process and the occasion of the activity in early oceanic
period of Kogury in Ch. II. Kogury begined its activity in the ocean with the
negotiation with W (吳) dynasty of China and could be entered an international order
through this progress. The oceanic routes in this period were the variable- degreed
route of middle of the Yellow Sea and the port was Seoanpy ng(西安平). Kogury
occupied the Seoanpy ng, an important traffic route to expel the power of Han
(漢)dynasty of China(中國) from the Korean Peninsula and to command the maritime
power of the northern part of the Yellow Sea. Through these battles, the Seoanpy ng
was governed by Kogury and Lo-lang Commandary(樂浪郡) and Tai-fang Commandary
(帶方郡) were ruined.
The Kings who performed the activity in the ocean were King Kwanggaet'o(廣開
土大王) and King Changsu(長壽王). In the early stage of the 5th century, the traffic and
correspondence were developed by the development of the activity in the ocean and the
order in the ocean possessed the power of the diplomacy and the military. King
Kwanggaet'o extended the territory of Kogury and led international society through the
ex-defense strategy. To adopt swiftly for stability of the Southern battle and new order
of the ocean, King Kwanggaet'o tried the spread of the activity in the ocean. Namely,
in order to secure the initiative of the diplomacy and the military, he attacked the
mid-western seacoast of Paekche and secured the right of the ocean monopoly. The
battle of Kwanmi castle(關彌城) means Kogury 's attempts to secure a base of the
activity in the ocean of Paekche(百濟). A counterattack of Paekche was extended to
union of Kaya(加耶) and Wa(倭).
There were happened the reorganization of order of the Korean Penisula generally
through the union made struggle against Kogury and Silla. In the early of 5th
Century, the international standing of Kogury rised after a triumph of Kogury in the
process of the reorganization of the international order.
Kogury policed to follow a stable and a leap simultaneously. To accomplish the
reorganization of the international order, Kogury transferred its Capital to P'y ngyang
Castle(平壤城) at the era of King Changsu. King Changsu changed a policy to adapt the
military environment. One is a change of conception of battle and the other is the
emphasis on captal's function reflecting on public security, diplomacy, economy and
culture and military affairs. P'y ngyang Castle was suit to follow the activity in the
ocean. Kogury had become an axle of multiple radiate diplomacy in the order of the
East Asia.
본인 요즘 생리현상?!으로 인하여 상당히 기분이 안 좋았다.
하지만 정호갑기자님의 글을 읽고 밝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어.이.가.없.어.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선 중국
정호갑(mos0805) 기자
중국에 첫발을 디딘 후 몇 달만 지나면 중국에 대해 가졌던 선입견이 많이 바뀐다. 획일화된 사회주의, 못 사는 나라, 불안한 치안 등등. 이러한 선입견 가운데서 가장 크게 바뀌는 것이 한국보다 더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기사보러 가기
휴...몇달만 지나면이라. 본인 이미 몇 년지났다.-_-+
정호갑기자님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제부터 반말모드 들어가겠다.
1) 음식점에 가면 기본으로 나오는 먹을거리는 아무 것도 없다. 어떤 곳에서는 물 대신 차를 주는데 그것도 돈을 받는다. 음식을 먹다 조금 모자라는 부분이 있어 무심코 더 달라고 하면 어김없이 그것은 계산이 되어 있다. 우리보다 훨씬 더 자본주의에 철저하다.
-->장난하나....음식 더 달라고 하면 돈 받는게 자본주의라고?! 그게 아니겠지요. 중국에서는 아니 제가 아는 바로는 한국과 일본 빼고는 이른바 반찬의 개념자체가 없다. 그들에게는 모든게 주식인것이다. 그런거 더 달라고 하면 당연히 돈 받지.
그리고 말야. 물 대신 차를 주는데 차값을 받는다고 찡얼거리는데, 그럼 딴거 마시면 되잖아! 이 땅은 물이 안 좋아서 물값이 맥주값보다 비싼 나라다. 어쩌라고....
이건 그 나라의 문화차이지. 그게 왜 자본주의라는 말로 포장되는거냐!!!
2) 시장에 가면 과일을 비롯한 모든 먹을거리는 무게로 달아 판다. 1근(500g)을 기준으로 가격이 매겨진다. 물건이 저울에 올려졌을 때 550g이 되면 50g의 돈을 더 받는다.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 한국은 안 그러냐? 이게 한 기자라는 인간이 적은 글인지...에휴.
참고로 그냥 지나친다. 말만 잘하면, 그리고 그 저울을 믿는 자네는 바보다. 99%가 조작되어있는거다. 어차피 원가가 얼마인줄이나 알고 있는가? 난 자신할 수 있다. 똑같은 곳에서 사도, 난 자네가 사는 가격의 반값에 살 자신이 있단다.
그리고 이른바 자네가 그 가계를 잘 가지 않아서 그렇지. 단골만 만들어봐라. 이것저것 더 주기 시작한다.(물론 코딱지만큼 조금만 더 주는것이긴 하지만..) 그리고 이게 자본주의랑 무슨 상관이냐. 이건 인심문제가 아닐까?
3) 물과 전기 그리고 가스 사용료는 아파트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새로 지은 아파트는 모든 것을 카드로 충전시켜 쓰도록 한다. 금액이 다하면 물과 전기, 가스는 바로 끊긴다. 돈의 힘이 그대로 느껴진다.
--> 새로지은게 아니고, 왠만한 아파트는 전기만! 카드로 충전한다. 난 자네가 어디에 있는지가 더욱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전기만 충전식으로 먼저내고, 물과 가스는 메타기 보러 와서 측정하고 은행에 돈 내는 식이다.
참고로, 본인 물값과 전기 1년간 안 내보기도 했지만 전혀 문제 없이 잘~~ 썻다. 제발 과장보도 하지마라.
4) 교통수단의 경우 기차를 타면 이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기차 종류에 따라 가격 차이가 나는 것은 물론이고, 같은 기차를 타도 좌석 종류에 따라 가격 차이가 많이 난다. 앉아가는 좌석인 경우에는 경좌(硬座; 자리가 딱딱하다)냐, 연좌(軟座l: 자리가 안락하다)냐, 그리고 침대칸에서는 경와(硬臥)냐, 연와(軟臥)냐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
그래도 이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경와는 3층으로 되어 있고, 연와는 2층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 또한 1, 2, 3층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 1층이 비싸고 3층이 싸다. 같은 기차, 같은 침대에 누워 가는데도 높이에 따라 다르니 중국은 철저한 자본주의를 생활에 도입하고 있는 셈이다.
---> 난 기자 너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어디 아프지?
이건 마치 미국애가 한국 놀러와서, 무궁화열차와 KTX 가격이 다르니까 한국은 자본주의다 라고 말하는것과 뭐가 다르냐? 어이없는것..제공하는게 다르니 당연히 가격이 다르지. 그리고 예전에도 이런거 있었다. 단지 그때는 돈이 아니라 공산당원계급문제였지. 알어 이젠 돈으로 변했으니 자본주의 아니냐고?! 누가 아니래? 근데 저 기사는 너무 어이가 없잖아 저게 언제적 이야기인데 이제와서 말을 꺼내냐.
그리고 높이에 따라 다르다고 철저한 자본주의라....
....뭐라 할말이 멍해진다. 그럼 높이에 따라 똑같이 하랴? 그게 더 이상하다.
5) 기차뿐만이 아니다. 일반 버스에서도 이런 현상을 볼 수 있다. 가는 거리에 따라 버스 요금이 보통 3등분된다. 우리는 지하철의 경우에만 그런데 여기서는 지하철은 물론이고 버스까지 거리가 그대로 적용된다. 가까운 거리는 1위안 그리고 조금 먼 거리는 1.5위안 그리고 먼 거리는 2위안이며, 그 버스가 만약 에어컨을 갖추고 있으면 그 값은 2배이다. 분명 우리보다 더 자본주의 냄새가 짙게 풍겨온다.
---> 미안한데 명박이 욕먹는 교통개혁이 그 거리제인데?! 그리고 여기 지하철이 언제 거리제로 요금을 받았었냐?? 심히 어이가 없어져 온다.
여기 지하철 입장한다. 그리고 한바퀴를 돌던 10바퀴를 돌건 마음껏 돌다가 원래 위치로 가서 내려도 요금은 똑같다. 중국애들도 은근슥쩍 비웃는 이넘의 시스템이 자본주의 냄새냐.
그리고 버스도 그렇다 물론 거리제..라면 거리제이겠지만....뭔가 심히 황당해진다. 그게 제대로 측정이나 하고 체크나 되는줄 아는가 보다(카드따구 여기 없다. 그냥 사람이 일일이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어보고 표를 산다.속이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왜? 정액권(월표)가 있으니까 그것가지고 자본주의 냄새...아니 자본주의 복지정책이라고 하시지.
마지막으로 어어컨버스. 저..저기....너 떄리고 싶어진다. 그럼 에어콘따구 없고, 여름에는 땀냄새에, 겨울에는 틈새로 휭휭 들어오는 버스랑 어어콘 달아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버스랑..가격이 같기를 바라냐? 거기에 우리보다 더 자본주의 냄새.....어쩌고 하는 부분에서는 심히 어이가 없다..한국은 싹 다 에어콘버스다. 아니면 애들이 아예 버스 안 타니까..비교할걸 해야지! 자네! 무슨 생각이야!
6) 그리고 이 곳 사람들의 운전 습관은 보행자를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길을 건널 때는 늘 위험을 느끼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므로 이곳에서는 접촉사고도 자주 일어난다.
---> 마지막이다.
보행자를 우선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기자란 인간이 올해 5월달에 발표된 새로운 교통법규규정도 모르냐? 예를 들어주겠다.
강변대로상이다. 당연히 횡당보도따구는 없다. 어떤 차가 정상적인 속도로 가다가 무단횡당하는 사람과 붙이쳐 버렸다.
중국은 저 상황에서 아주 단순무식하다. 차운전자가 100% 책임이다. 다른 예시를 들어줄까?
차가 엔진을 끄고 멈춰서 있었다. 그런데 저기 멀리서 브레이크가 고장한 자전거가 와서 둘이 충돌했다. 자동차 찌그러지고, 자전거 당연히 고장나고 사람도 조금 다쳤다.
이건 어떻게 될거 같아? 역시 자동차운전자 100%다. 자전거 수리해주고 병원도 데려다 줘야 한다. 자기 돈으로......
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다.(사실 저거 욕 많이 먹는 법이다.) 그리고 이 길을 건너면서 늘 위험을 느낄 필요따구는 없다. 왜냐면 중국운전기사의 솜씨는 이미 달인이다. 옆에 중국인보행자들 걷는거 보이지? 그네들도 교통법규의 기본조차 없다. 지가 건너고 싶으면 건넌다. 그래서 운전자들도 이미 그런거에 익숙해서 사방정찰?!을 한다. 거기에 저 법까지 생겼으니, 더욱 나이스되겠다. 자네 중국에서 1년만 더 살아보거라. 아무 생각없이 4차선 십자교차로의 가운데를 횡단하고 있는 자네의 모습이 내 머리 속에는 생생히 떠오른다. 쿨럭...
난 저 인간이 정말 기자인지 심히 의심가기 시작했다.
중국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성분이 모두 융합되어 있는 혼란상태라는 것에는 동감하는 바이지만, 그것을 위하여 제출한 증거들이란 것들이 사람을 너무 어이없게 하는 것이다.
너야 말로 중국에 대한 잘못된 선입관을 심어주지 말그라.
(내 참...어이가 없어서...)
"마력의 시간이라는 것은 모든 장소에 각각 다르게 일어나. 분명 가을 어느 시기인 것은 확실해. 그런데 우연히 그 마력의 시간에 접어든 장소에 사람이 들어가면 그에게는 온갖 희귀한 일이 일어나지. 그 짧은 가을 동안, 낙엽이 대지를 덮기 시작하고 마침내 첫눈이 오게 될 때까지, 그 사람은 평생에 기억될 단 한 번의 가을을 가지게 되지. 때론 모를 수도 있어. 그저 그 가을에 일어났던 일만 기억하다가 몇 년 후에나, 혹은 늙어버렸을 때 겨우 알아차리게 되지. 하지만 자신이 마력의 시간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낙엽이 대지를 덮을 때부터 첫눈이 오기까지 놀라운 일을 이룩할 수 있지."
-이영도님의 [드레곤라자]중에서..
"마법의 생리라는 것은 모든 장소에 각각 다르게 일어나. 분명 가을 어느 시기인것은 확실해. 그런데 우연히 그 마법의 생리에 접어든 장소에 사람이 들어가면 그에게는 온갖 짜증나는 일이 일어나지. 그 짦은 가을동안, 낙엽이 대지를 덮기 시작하고 마침내 첫눈이 오게 될 때까지, 그 사람은 평생에 기억될 단 한 번의 가을을 가지게 되지. 때론 모를 수도 있어. 그저 그 가을에 일어났던 일만 기억하다가 몇 년 후에나, 혹은 늙어버렸을 때 겨우 알아차리게 되지. 하지만 자신이 마력의 생리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낙엽이 대지를 덮을 때부터 첫눈이 오기까지 놀라운 짜증을 발산할 수 있지."
.........에휴.....답답하고 짜증나니까 별의 별 짓을 다하게 되는구나.
뱀다리 : 다 시끄럽다. 밖에 나가기 싫다. 술 마시고 싶다. 나만의 사랑을 만나고 싶다.
이 모든 것이 꿈으로 돌아가는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다.
아직 제대로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논리는 너무 뻔할거 같다고 생각되는군요^^:: 같이 책 사러 갔던 넘이 한 말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습니다. "형. 그거 사봤자 뻔한 말이야. 한국논문하고 다른점은 고구려가 지네거라는 거 밖에 더 있겠어?!"
.....할말 없습니다. 단지 전 그 지네거라고 우기는 논리가 궁금했을 뿐입니다. 그것도 잘못 인가요? ㅠㅠ
뱀꼬리 : 그나저나 중국책값이 많이 비싸졌습니다. 1년전만 해도 100원(한국돈 1,5000원) 들고 나가면 들기 버거울 정도로 살 수 있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100원으로는 책 3~4권이 한계군요.ㅠㅠ
뱀꼬리2 : 어느 기사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어느 교수님이 중국에서는 고구려를 박사전공한 학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민족사 혹은 변방사계열이 고구려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심도는 떨어질지 모르지만, 중국은 인원빨로 먹고 살기때문에...그래도 조심하는게 좋지 않을까요? ^^
왜냐하면-_ 제가 쓴것이기 때문이죠.정확하게 말하면 여기저기서 배껴서 조합했다는 말이 더 어울릴거 같군요. 지금은 모두가 다 아는 조공책봉관계의 실제성질에 관해서 적은 것 입니다. 중국쪽 논문에는 그런것이 없어서 거의 대부분을 한국, 일본쪽에서 건져왔습니다.
거기에 플러스 중국어판입니다^^::::
혹시나 중문과여서 작문숙제용 대체물이 필요하시다면 마음껏 써주세요.(대신 따뜻한 답글..^^) 뭐..일단 어법상으로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조그마한 부분은.....저도 몰라욧!!
책봉조공관계
-고구려를 중심으로
바로(본명 맞습니다.-_;;)
내용 요약 :
조공책봉제도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고대동아시아세계에서 있던 하나의 외교시스템이었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그거 명목상으로만 군주와 신하의 관계였지, 실질적으로는 다 지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았다.-_;;
고구려는 비록 조공을 보내고 책봉을 받았지만, 실질적으로 완전한 독립적인 국가행위(내정,외교등등)을 정상적으로 수행하였다. 고로 고구려를 중국의 지배범위안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옮지 않다.(많이 들은 말이죠? ^^)
참고로 이 가설은 일본에서 먼저 제출되었습니다.
이번 여름방학때였다. 이제 중국으로 돌아올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때, 나는 중국에서 공부할 책을 사려고! (원래 목적은 진짜 이거였다-_;) 교보문고를 갔다. 그리고 문방구를 사려고 지하로 내려갔는데 나의 눈에 띄이는 그의 존재!! 두둥~~
일명 3Dpaper라고 불리는 것들이 있었고, 그 사이에서 완전 뽀대만빨의 중세기사를 보게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1,2000원이라는 거금을 쏟아 부으며 사버렸다. 그리고 안 그래도 오버차지가 걱정인 내 짐 속에 고이 모셔왔던 것이다.
그리고 신학기의 번잡함 속에서 점점 잊혀져 가는 그가 오늘 내 눈에 들어왔다. 그래! 고딩때는 프라모델반반장이기도 했는데! 장난 치면서 저거나 만들어야지......라며 처음을 시작하였다.
자부하건데, 지금 현재도 대부분의 고등학교에 프라모델반이 없으며, 있다고 하더라도 붓으로 색칠(컬러링)을 하는 경악스러운 집단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우리 프라모델반은 선배들의 혹독한 단련으로 인하여(많이 맞았다ㅠㅠ) 에어브러시를 사용하는 건 당연지사가 되어버렸고, 축제때면 디오라마를 뚝딱! 만들어내버리는 상당한 고급기술을 보유해버렸다.....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가 한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부분이 사포질이었다.ㅠㅠ 나중엔 휴지로 사포질까지 했었다는.ㅠㅠ(아카데미 미워!!)
고백하자면 본인 제일 실력이 딸려서 반장이 된거였다..ㅠㅠ
열어보았다. 많은 종이들이 있더라..-_;;;
순간의 모든 정신이 공백모드로 들어가면서 대책이 안 선다.
집에 굴러다니던 딱풀로 대충 조립모드에 들어갔다...
딱풀 면적으로 인하여 예쁘게 붙여지지가 않는다...-_;;;
짜증남에 혹시나 하고 홈페이지를 들어가봤더니....
라고 자상하게 적혀 있었다. 젠장!!!!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종이라고 무시했던게 폐인이었단 말인가.ㅠㅠ
집안에 목공용 딱풀이 있을리가 없다. 이렇게 되면 오기발휘다-_+
이번주 주말은 너에게! 투자해주마!!! 넌 내 밥이여!!!
후진타오 주석은 “양국 관계는 현재 몇가지 문제에 봉착했는데 가장 화급한 당면 과제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적절히 해결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기사전문보러가기
띱때들아-_+ 내가 이래서 니들이 싫어. 강력비난은 개뿔이!!
“以史为鉴、面向未来" 이건 왜 빼먹냐?
과거를 바탕으로 미래를 생각하자! 라고 후진타오가 말했다.
외교적 용어라고 할수는 있지만, 이런 말 한 사람에게 강력비난을 했다고 말하는건 조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냐? 그리고 중국신문의 대부분에서 신사참배문제는 거의 안 적혀 있고, 실제로는 경제교류쪽 이야기가 더 많다. 니들의 짜집기 능력-_+ 진짜 싫다.
제발 조그마한것을 확대시키지 마라. (혹시 중국원문 달라는분은...-_ 요청해 주세요. 없을거라고 생각되지만)
우리는 여기서 착각을 하면 절대 안되는 것이 있다. 국제정치에서 신사참배문제는 단지 장난질일 뿐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직접적으로 중국이라는 나라의 이익추구에는 방해를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중국이 왜 이렇게 주장하는가?!
난 이부분이 상당히 궁금하다.
현재 이곳의 대일분위기를 말하자면...
1. 평소에도 택시타서 한국인이라고 하면, 택시기사들은 그런다.
그래! 한국은 좋아! 난 일본이 싫더라....
2. 북경-상해,북경-홍콩. 이 두 노선에 초고속열차를 만들 계획을 가지고 현재 기술선정중이다. 프랑스, 독일, 일본이 입찰중인데, 어떤 중국인에게 물어보아도 일본은 안된다고 한다. 그냥 싫단다.
3. 아시안컵때 중국과 일본이 결승전을 한 것은 아실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어이없는 주장으로 일본국민들을 분노하게 했다.(솔직히 홈어드베이티지받으면서 패하니까 심판매수했다고 하면-_; ) 일본 친구들도 그 이야기를 꺼내더라. 내가 싱긋~ 상큼한 미소를 지어주니 같이 웃고 말아버렸다. 워낙 어이가 없는 이야기니까.
그런데 국제여론이 어찌 되었든, 중요한 것은 중국애들은 대부분이 정말 그랬다고 믿고-_;; 일본. 더 싫어하게 되었다.
4. 그러면서 전자제품 사는건 일본제를 좋아한다.(아..어느나라랑 비슷한거 같다.-_;; ) 그 뿐이 아니라, 직장선호도(국가별)에서 미국 다음이 일본계 회사이다. (참고로 한국은 거의 꼴찌다-_;)
그렇다, 안 그래도 중국인민들의 대일분위기는 기본적으로 안 좋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고지도자가 그것을 더 안 좋게 만든다. 그들은 무엇을 노리는 것일까? 단지 외교적인 용어이며, 상대방의 외교적 약점을 이용해서 더 높은 위치에 서려는 노림수인가? 확장해서, 앞으로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려는 중국의 장기적인 포석인가??
단순히 생각해서....
일본아! 돈만 투자하고 돈 벌 생각은 하지말그라~?!
인것인가? 멍청한 머리로는 더 이상 모르겠다. 누가 분석 좀 해주었으면 좋겠다.ㅠㅠ
뱀꼬리 : “以史为鉴、面向未来" 이거 무지막지하게 재미있는 말이다.
"과거의 역사를 본보기로 미래로 나아가자."
얼핏 생각하면 중일전쟁과 (대일본)중국독립전쟁의 역사를 떠 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이, 이넘의 중국인들은 고대에 일본이라는 나라가 자신들이 문화를 전.수.해줘서 겨우 미.개.인.이 되는 것을 면한 나라로 생각한다.
그들이 말하는 역사의 본보기가 고대인가 근대인가....둘..다...겠지?
(역사를 이따구로 이용하는걸 보면 화도 나면서 부럽기도 하다.)
로맨틱한 표현에 대해서 수줍어하는 면이 심해서 상대를 따뜻하게 해주면서도 불꽃이 되어 타오르기는 어렵다. 하지만 교제를 거듭해가는 사이에 점차적으로 과열되어 간다.
사랑의 성장은 접촉시간의 길이, 접촉 거리, 접촉 횟수 등에 비례하는 것 같다. 그 사랑의 발열하는 모습을 보면 시간적으로는 더 길게 거리는 더 까깝게 만나는 횟수를 더욱 빈번하게 하려고 한다.
사랑의 중심은 접촉욕이다.
따라서 평소에는 게으른 B형도 접촉을 실현하기 위해 별안간 상대에게 봉사를 시작하기도 한다.조용한 사랑에서 불꽃같은 사랑으로 가는 과정중에 위에서 말한 과열의 단계가 있다.
사랑의 열을 적당히 발산하고 있는 동안은 괜찮지만 상대와의 접촉이 생각대로 잘 안될 때는 가슴속에만 끌어안고 있떤 욕구를 단번에 불꽃으로 뿜어내는 수도 있다.
이미 많은 한국분들이 중국을 방문하셔서, 그나마 많이 이미지가 괜찮아졌지만, 아직도 이곳에서 인터넷할 수 있다고 하면 거의 경악의 오로라를 내뿜는 분들이 많습니다.(여기의 화장실 많이 괜찮아 졌습니다!! 문없는 화장실 몇개밖에ㅠㅠ 안 남았습니다.)
사실 이 곳에서 이른바 문화생활 하기란 참 힘이 들죠.
한국영화도 방송매체에서 보도하는 것처럼 굉장한 한류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인기가 있기에 이곳의 영화관에서도 상영이됩니다. 예를 들어서 전지현이 주연한 여친소같은 것은 동시개봉을 했습니다.여기에 있는 저희들은 보러 갔을까요?
죄송하지만 문화에 투자하지 않았습니다.-_-;;
그러나 자신이 전지현마누라라고 우기는 어떤 인간이 영화관에 갔습니다. 그리고 울어버렸습니다. 전지현 입에서 중국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저희에게 소리쳐 외치더군요.
"니들이 전지현 입에서 중국말이 흘러나오는 기분 알어?! 크어어어어!!!"
저넘한테는 정말 미안하지만-_ 그게 현실입니다.
일단 중국이라는 나라는 그 어느 나라의 영화든, 심지어 자국의 영화여도 무조건 자막은 일단 기본적으로 들어갑니다. 글자를 보는 것보다 듣는게 더 편하다는 것은 일단 기본적인 사실일테고, 이 중국이라는 나라가 청각장애인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는 죽어도 생각할 수 없고-_-;; 그럼 대체 왜 그러는지 저조차도 궁금합니다만, 무시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외국영화든 더빙을 해 버립니다. 한국에서 왠만한 이유로는 더빙을 하지 않는 것에 비하여, 이것들은 더빙이 필수입니다. 차라리 한국처럼 더빙능력이 좋으면 말도 안합니다.
일단 목소리와 화면이 따로 나오는것은 기본입니다. 이것은 두가지 문제가 있어서 그러는데, 일단 더빙기술자체가 엄청나게 후졌습니다.ㅠㅠ 차라리 더빙할려면 더빙할것이지. 원음을 제대로 못 지워서 겹쳐들릴때의 고통은 당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성우들! 어떻게 보면 또 하나의 연기자라고 할 수 있는 그것들의 연기수준은 김희선이 울고가는 수준입니다. 책을 읽어도 저것보다는 딱딱하지 않을겁니다.
정말 다행이었던 것은 매트릭스3가 개봉했을때, 원음상영과 중국어상영이 나누어져있었다는 것입니다. 본인 영어라면 죽어라 싫어하지만 엉터리 중국어를 듣느니 영어듣기평가를 한다는 심정으로 봤습니다. 휴....
사실 퇴직서라고 해봐야, 대중에게 발표되는것이라 별 내용 없습니다.
그래도 한 번 번역작업에 들어가겠습니다.
혹시나 국제정치나 외교쪽에 관심있는 분은 참고하세요^^::
장저민동지 중공중앙군사위원회주석직무 퇴직 요청의 서신
(...일단 제목부터 공산당의 포스가 느껴집니다...지금 번역할려고 한거 무지하게 후회하는 중입니다.ㅠㅠ 내용은 쓰잘데기 없이?! 길기에 보고 싶은 분만 보세요. )
(원문은 찾기 귀찮아서 생략-_;; ....해석이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습니다...솔직히 아무생각없는 직역이긴 하지만....이해하고 보는데는 문제가 없을......-_)
장저민동지의 중공중앙군사위원회주석직무 퇴직 요청서신
중앙정치국 :
나는 중앙에 지금까지 맡고 있었던 중공중앙군사위원회주석직무의 퇴직을 요청하는 바이다.
당이 16대(중공16회 전국공산당회의)를 열기 전에, 당과 국가는 장기평안을 위하여, 현실적으로 당과 국가고급지도자의 신구교체의 제도화, 규범화, 프로그램화를 생각하였고, 나는 중앙에 중앙지도자직무와 중앙위원회의 직무를 맡지 않겠다고 한적이 있다. 당시, 중앙은 나의 요구를 승락하였지만, 동시에 중앙은 국제형세의 복잡다변과 국방과 군인건설임무의 중요함을 생각하여, 대국을 위하여, 내가 당에 남아있으며, 국가의 군위주석직무(중공중앙군사위원회주석직무)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그 후, 나는 전심전력을 하다여 중앙이 내게준 나의 직무를 수행하였고, 언제나 중앙지도자집단의 활동에 존중과 지지를 보내었다. 당과 인민사업의 장기적인발전을 위하여, 나는 언제나 지도자자리에서 완전히 물러나기를 염원해왔었다.
단의 16대와 15회1중전회이후, 국제형세의 복잡다변화와 국내개혁발전임무가 매우 중대차한 형세하에서, 후진타오동지를 총서기로 하는 중앙지도자집단은 끊임없이 전진해왔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개발활동을 훌륭하게 수행했으며, 당과 국자 각각의 방면의 사업에서 모두 신기원을 이룩하였으며, 수 많은 간부들의 지지와 신임을 얻었다. 실천으로 증명해낸, 당의 14대와 15회1중전회가 뽑아낸 중앙지도자그룹은 개혁개방과 복잡국면을 고려할 수 있는 인재들이다. 신중한 고려 뒤, 나는 현직직무에서 퇴직을 생각하였다. 이것은 당과 국가와 군인의 사업발전에 모두 이익이 될것이다. 중앙이 나의 요구를 받아줄것을 간절이 희망하는 바이다. 나는 앞으로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중화인민공화국중앙군사위원회주석직무의 퇴직을 요구할것이다.
여기서 나는 정중하게 , 후진타오동지가 중국공산당중앙군사위원회주석의 자리를 맡기를 중앙에 건의한다. 후진타오동지가 이 직무에 완전히 적합하며, 당의 군인에 대한 절대적인 지도의 근본원칙과 제도에도 도움이 된다.
내가 혁명에 참가한지 60년이래로, 언제나 당의 교육을 받았고, 당을 위하여 일하였다. 당과 인민데 대하여 나는 언제나 깊고 두터운 감정을 안고 있으며, 당과 인민의 사업은 곧 나의 생명이다. 나는 영원히 당과국가의 사업에 충성을 다할 것이며, 영원히 중국공산당의 충실한 당원이다. 우리당지도의 위대한 사업은 몇대의 사람들의 장기간의 노력으로 인한 세계가 놀라는 위대한 업적이지만, 우리의 앞날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으며 앞으로도 이런 저런 위험과 시련이 닫쳐올것이다. 하지만 난 믿는다, 우리당의 사업을 필승할 것이며, 오직 우리가 이상을 견지하며, 신념을 공고이하고, 기회를 잡으며, 중요한 일을 잡으며, 언제나 공공하게 전당을 합쳐 발전시키며, 당과 인민을 합친다면, 혹시나 생길지 모르는 여러가지 문제에서 필승할것이며, 중국의 경제실력과 국방실력 그리고 민족의 응집력이 부단히 증가할 것이다. 우리의 당, 우리의 국가, 우리의 군대는 반드시 언제나 승리하여 승리할 것이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이루어낼 것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 난 할만큼 했다. 나머지는 니들이 알아서 잘해라. 정도입니다. 그가 잘한 일도 있고, 못한 일도 있지만, 그래도 이넘의 넓은 나라를 통치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위대한 사람이라고 불러야 될거 같습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중국인들의 현지 반응.
.......당연히 했어야지-_;;; 정도의 반응입니다. 나이도 많이 먹었고, 해 먹을만큼 했잖아?! 입니다. 왠지 장저민이 처량하다고 느껴지더군요. 쯔쯔쯔...막판에 잘했어야지....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얼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이 난다. "어학연수를 갈려면, 차라리 그 돈으로 여행을 떠나라!"
본인의 경우, 여행준비하고 뭐하고 하는 것을 상당히 귀찮게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날라가는 무대포여행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냥 잠을 자거나 무작정 돌아다니는 여행을 한다. 그것도 여행이냐고?! 가기 전에 그곳에 관해서 사전조사를 하고, 어디갈지 계획을 세우고 해야된다고?!
미안하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생각이 있는 것이다.
본인이 생각하는 여행의 최대 목표는 지금 나를 돌아보려 나의 흔적이 없는 곳으로 가는 도피이자 목욕제개라고 생각한다.
그 나라의 문화를 느끼고, 배워라지! 라고 호통을 치실 분들이 있을거 같다. 그런 분들에게는 어학연수를 떠나라고 말하고 싶다.
여행을 좋아하시는 분들중에서는 중국땅으로도 오셨던 분들도 많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다른 나라에 비하여 여행경비가 싸다는 장점으로 인하여 돈없는 배낭여행객이나 싼 값을 추구하는 아주머니들이 특히 많이 오시는게 현실이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느끼고 돌아가는 것을 우리에게 말한다면, 중국현지유학생들은 콧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너무나 겉모습만 바라보고 돌아가기 때문이다.
본인 역시 중국에 와서 이제 겨우 4년이지만, 그 동안 중국을 바라보는 눈이 점점 달라져왔다. 점점 그들의 겉모습보다는 속모습을 볼 수 있게 변해가고 있다. 그들의 말을 알게 되고, 그들이 그들끼리 말하는 것도 옆에서 모른척 들으면서 그들의 생각체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것이다. 여행하면서 이런 경험을 얻을 수 있을까??
어학연수의 최대목적은 그 문화속에서 살면서 그 문화자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있다.
특히 어학연수의 경우, 여행에서는 얻지 못하는 부수의 이익이 있다. 이른바 언어의 습득이다. 본인 한자라면 죽어라고 싫어하지만, 여기서는 생활이기에 어느정도 굶어죽지 않을정도는 하게 된다. 하지만 여행을 한다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어디까지나 여행이 더 좋다는 사람들을 반박하기 위해서 여행이라는 것을 조금 무시하듯 적었지만, 사실 난 여행이 더 좋다. 특히 혼자 떠나는 여행의 참맛은 느껴본 사람만이 알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행과 어학연수는 각각의 특징이 있다. 그것을 가지고 차라리 여행을 가라! 라고 한다거나, 어학연수를 가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행은 마법의 거울이다.
본인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거나, 친구와의 진정함을 평가해보고 싶거나 연인과의 앞날을 생각해본다면 여행을 가라. 정말 생각보다 더욱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어학연수는 판도라의 상자이다.
어느 나라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어학연수를 떠나라. 어느 문화가 생활이 된 순간에 그대는 느낄 수 있으리라. 다만 당신이 실망할지 행복해 할지는 책임질 수 없다.
본 글은 제가 감히 연구생과정을 듣는다면 반드시 그 밑으로 들어가고 싶은 엔부커선생님이 쓰신 글입니다.
일단 간략하게 엔부커선생님을 소개하자면, 26살까지 딴짓하다가^^:: 북대본과과정에 들어와서 10년만에 졸업하고, 그 뒤 10년만에 북대에서 정교수자리에 오른 황당한 인간입니다.(북대 역시 한국교수사회랑 비슷합니다.-_ 엔부커가 이상한겁니다.)
주전공분야는 위진남북조입니다. 기타외국어 구사가 8개국어였던가.-_-;;
같은 북대교수들도 고개를 설레설레 내두를 정도로 완벽한 정통파학자입니다.
(..그의 오로라를 느껴보면-_ 그 말밖에 안 나옵니다.)
현재 본과생수업 3개. 청화대초청강의1개. 연구생수업 2개, 국가상임정치위원회 역사지도담당까지 이미 한계인텐데 논문을 죽어라 많이도 씁니다. 수준이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제 박사졸업한지 14년인데, 책이 4권나왔습니다.
처음에는 동북무슨학술제단-->북경대-->삼리엔서점-->중화서국 이라는 완벽코스를 밟아버렸습니다.(참고설명 : 중국에서 책을 살때, 어느책을 사야될지 모르겠다고 하면, 두개의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사면 절.대. 후회없습니다. 중화서국과 상해고적. 그런데 상해고적은 역사문헌쪽을 주로 하기떄문에 학술적인것은 중화서국에서 거의 나옵니다. 오죽했으면, 중화서국에서 책 한권 나오면 학자인생에서 성공한거지-_; 따구의 말이 있겠습니까?!)
정말 슈퍼맨인 인간입니다. 단지 당뇨병이 있음에도 술을 작작마시고 담배도 죽어라 피는 인간이라는....쿨럭..-_;;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냥 중국어원문만 올려놓으면 이상할거 같아서 서론부분과 결론부분만이라도 번역해볼렵니다.
(사실-_ 중간은 다 고증부분이어서, 학자아니면 쓸모도 없습니다.)
북위와 북제의 사료 중에서 우리는 “직인(职人)”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의 신분에 대해서 학자들은 유외관(流外官), 곧 당대의 직장인(职掌人)과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로 보고 있다. 직인에 관한 사료는 매우 적고, 모두가 애매모호하다. 현재의 사료를 통해서는 직장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추론은 아직도 커다란 문제로 남아있다. 관련자료를 분석해서 내가 얻은 결론은, 일명 직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산가(散阶),산관(散官) 혹은 무실관(无实官)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이 사람들은 직사백관(职事百官)과 같이,관원들 중에서 큰 두 파벌를 이루고 있었다. 동시에, 위진 관리들 중에는 왕궁(王官)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들의 신분과 북조 직인의 차이는 많은 부분에서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직인과 왕궁의 존재는 당시의 관원들 중에서, 후선자(候选者)와 현임자(现任者)의 2종류의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직인과 왕궁의 고찰은 우리가 그 기간의 문관제도를 연구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 확실하다.
(솔직히 대충번역할 수밖에 없군요. 역사에서 쓰이는 고유명사를 하나하나 쉽게 설명할 능력은 미천한 저에겐 없답니다. ㅠㅠ)
종합하자면, 위진의 왕궁과 북위북제의 직인의 대다수는 후보(候补)한 사람들이었으며, 그 기간의 문관체계에서 대단히 중요한 지위에 있었다. 구조로 보았을 때,위진 남북조의 관리들은 후보자(候补者)와 직사관(职事官)이 있었으며, 공능으로 보면, 후보자는 상판직(相番直)과 사자(差使)의 역할을 맡았으며, 왕조정무에 반드시 필요한 일을 하였다. 이런 제도는 한대의 양서숙위(郎署宿卫)까지 거슬러 올라갔 수 있고, 아래로는 당대의 문무산관후선판(文武散官候选)의 리부(吏部),병부(兵部)의 제도를 볼 수 있다. 이전의 학자들은 이에 대한 논술이 적었다. 이 글을 초보적인 탐색을 통하며 더욱 더 심도 있는 연구가 진행되기를 바란다.
(간단요약 : 직인이라는 인간들이 있다. 이것들은 이른바 예비행정관으로서 일단은 명예직만 주다가(단, 전시(혹은 평시)에 일정한 나라에 대한 공헌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예 : 말의 공급, 쌀의 공급, 임시직) 필요시 예전의 공헌에 따라 실제 행정에 임용하였다.
생각해 볼 점 : 그렇다면, 조공책봉관계를 형성했던 당시 동아시아정세에서 고구려를 비롯한 동아시아국가에 내렸던 것도 명목상으로는 직인이었는데, 그런면이 어떻게 반영되었으며, 그 차이는 무엇인가?
....인데..-_; 졸업논문쓸때 한번 해볼까나..-_;; 위진쪽 자료가 워낙 없어서 무지막지하게 힘들텐데..ㅠㅠ)
엔부커 논문이 원래 그렇지만, 이건 역사용어?! 따로 하나하나 설명하기도 뭐하고, 그냥 여기까지 읽은 분들에게 일단 박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