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막론하고 다양한 사상과 집단들은 등장하였다가 사라졌다. 어떤 사상은 사람들의 멸시를 받으며 사라졌지만, 어떤 사상은 천하를 뒤 흔들었다. 문제는 천하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황제라는 것이다.


역사상 유명한 황건적과 같은 종교집단은 물론이고 단순히 병을 치료하는 여길(于吉)조차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손책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명태조는 충심으로 국가사업에 자신의 돈을 쓰는 심만삼(沈万三)에게 반역죄의 명목으로 운남으로 유배를 보낸다. 중국이 비록 독존유술(独尊儒术)의 사상으로 유가가 지배사상으로 자리 잡기는 하였으나, 민간에서 지속적으로 지지를 받아오던 도가조차 남송 대에는 사교로서 배척당하였다. 이 모든 것이 황제의 권위에 도전을 하였기 때문이다.

 


통치자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다중심"이며, "권력의 분산"이다. 다양한 사상이 난립하는 백가쟁명(百家争鸣)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때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인재를 확보하는 것이 시대의 과제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참은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공자조차 임시재상이 되자마자 노나라의 학계를 양분하던 자신의 경쟁자 소정묘(少正卯)을 죽여 버리지 않았는가?!

 


하나의 산에는 두 명의 호랑이가 살 수 없다. 자신의 권위와 명성을 높이면서 황제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오직 황제를 이름을 빌리는 수밖에 없다.

 

원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였을 당시 지식인들의 상황은 처참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었다. 한족은 3등급 혹은 4등급에 불과하였고, 그 중에서도 지식인들은 오직 거지보다 등급이 높은 최하위였다. 이에 장덕휘(张德辉)와 유병충(刘秉忠)등의 지식인들은 원세조 홀필렬(忽必烈)에게 "유교대종사 儒教大宗师"라는 칭호를 올리게 된다. 홀필렬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칭호를 받아들였고, 원나라 통치 아래서 지식인들의 생활은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황제가 유교의 대종사이며, 세상의 지식인들이 황제를 모시고 있는 상황에서 황제로서도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여 지식인들에 대한 대우를 개선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당태종의 잦은 공격으로 당나라 주변의 민족국가들은 끊임없는 전쟁을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에 당태종에게 모든 유목민족의 지도자라는 의미의 "천극한 天可汗 (하늘의 칸)"이라는 칭호를 올리게 된다. 그 이후 당나라에게 있어서 주변 민족국가들은 자신이 돌봐야 될 사람들이 되었음으로 비교적 평안한 삶을 살게 된다. 송대의 도사 임영소( 林灵素)는 불교를 제압하기 위하여 송휘종(宋徽宗)을 도교의 장생제군(长生帝君)으로 모시고, 그의 애첩을 구화옥진안비(九华玉真安妃)에 모셨을 뿐만이 아니라, 총신들에게조차 한 자리를 차지하게 한다. 그 결과 송휘종은 불교의 재산을 몰수하여 도교에게 나누어주게 된다.

 


황제의 이름을 빌리니 어떤 일이든 가능하지 않은가?! 황제의 이름을 빌리는 것은 "다중심""단일중심"으로 만들고, 천하가 원하는 목소리가 바로 황제의 목소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으로 인하여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이 오히려 추진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황제도 바보가 아니기에 당신이 자신의 이름을 빌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황제에게 어떠한 피해를 주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해야 된다. 송대의 임영소(林灵素)처럼 가뭄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하다가 천하백성들의 원망을 받게 되면 죽음밖에 남은 길이 없게 된다.

 


본 글에 관련된 내용은 역사에서 처세술을 배운다 : 황제접대학 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환영합니다. 
본 글은 한국인에 적합하도록 의역하였습니다.

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 ...오늘 분은 하기 싫어서 죽는줄 알았습니다. 쿨럭...번역을 하면서도 그다지 흥이 나지 않아서...또한 요즘 이것저것 좀 정신이 없어서....계획대로 계속 가면 다음주면 번역이 끝날텐데....가능...하겠지? ㅠㅠ

 





세상의 누가 승진을 싫어할까? 지금뿐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승진은 모두의 꿈이었다. 누구나 천인지상 만인지하의 재상이나 황제의 어머니인 황태후가 되고 싶어 한다. 황제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분명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황제 주변에서 벌어지는 승진 경쟁 중에서 가장 격렬한 것은 황궁 여자들 사이의 경쟁이다. 물론 대신들도 재상이 되어서 천하를 통치하고 싶어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 외의 선택지도 많이 있기에 그다지 승진에 연연하지 않는다. 대신들은 천하를 유람할 수도 있고, 문학작품을 남겨서 몇 천년동안 이어질 이름을 남길 수 있다. 그래서 스스로 은퇴를 자청해서 고향의 삶을 향유하는 대신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황궁의 여자들은 대신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황궁에서 살고 황궁에서 죽을 운명이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자신이 가질 수 있는 황제의 어머니라는 황실 여자에게 있어서 최고의 자리인 황태후의 자리를 마다하고 그 다음 자리인 황태비가 된다. 그녀는 왜 그랬을까?



유(刘)씨는 후당(後唐)을 건국한 이존욱(李存勖)의  아버지 이극용(李克用)의 큰마눌님이었다. 비록 이존욱의 친어머니는 조(曹)씨이지만, 그녀는 유씨의 시비에 불과하였다. 훗날 이존욱이 황제가 된 이후 자신의 친어머니인 조씨를 황태후의 자리에 모시고, 정실인 유씨를 황태비의 자리로 격하시킨다.

그런데 유가의 전통에서 이러한 행동은 용납 받지 못하는 행동이다. 질투와 전횡으로 유명한 자희태후 조차 정실이었던 자안태후와 공동으로 태후의 자리에 있었을 정도였다. 설령 친어머니라고 할지라도 가문의 정실만이 최고의 권위를 가질 수 있었기에 이존욱도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를 마주치게 된다. 심지어 친어머니 조씨조차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황제에게 결정을 바꾸라고 편지를 쓴다. 그런데 정작 유씨는 아무런 말도 없이 황태비의 자리에 올랐을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조씨에게 황태후가 되라고 권유를 한다.

유씨는 해탈을 할 정도로 마음이 넓었을까? 아니면 황제의 말도 안 되는 행동에 화가 났을까? 혹은 황제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실마리는 조씨에게 황태후가 되라면서 권유했던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재 우리 아들이 황제가 되어서 후량(後粱)과의 일전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긴다면 황태후든 황태비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패배한다면 관직이 높은 사람부터 목숨을 잃게 될 터인데 굳이 싸울 필요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공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위험한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혼란한 나라에는 살지 않는다.危邦不入,乱邦不居"의 진리이다. 만약 당신이 소국에 있다면 고위관직에 올라가려 노력하지 마라. 나라가 위태로운 순간 당신의 관직이 당신의 목숨을 노리게 될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진(晋)나라는 조(曹)나라를 멸망시키고서 300명의 고위관료를 죽여 버렸다. 남북조시대의 유유(刘裕)도 산동의 소국 남연(南燕)을 멸망시키고 200명의 고위인사를 죽이고서야 특별사면령을 내린다.

오히려 고위인사가 아니었기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예시가 적지 않다. 금(金)나라는 북송(北宋)을 멸망시키고서는 휘종(徽宗)과 흠종(钦宗)을 비롯한 수천 명의 황족과 궁녀들을 인질로 데려간다. 오직 송철종(宋哲宗)의 황후였던 맹씨만이 어떤 이의 간섭도 받지 않고 황궁에 남아 있었다. 왜냐하면 맹씨가 몇 번이나 황후에서 폐위되었기에 황실인사 명단에서 지워져있었고, 어디까지나 여도사로서 황궁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맹씨는 본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여도사가 된 것일 뿐이다. 그에 비하여 유씨는 명확하고 지혜로운 안목으로 황태후의 자리를 양보했으니 놀랍지 않은가?



위험한 곳에 가지 않는다는 간단하고 당연한 말을 승진이라는 허울에 속아서 쉽게 망각하고는 한다. 태평천국 후기, 청나라 군대가 태평천국의 수도의 턱 밑까지 진격을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평천국의 대신들은 끊임없이 승진을 원하였다. 그 결과 2700여명의 왕과 100여명의 승상이 멸망과 동시에 처형을 당한다. 왕망(王莽)이 함곡관(函谷关)을 잃고 멸망을 기다리고 있을 무렵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왕망이 "나를 위해서 울어주는 사람에게 관직을 내리겠다."라는 말에 따라서 열심히 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은 승진을 사랑한다. 자신의 노력과 능력이 인정받는 것인데 싫을 이유는 없다. 다만 어떤 관직을 맡기 전에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인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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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아무 생각 없이 인사청문회에 나와서 온갖 비리가 까발려지는 분들의 사례를 생각하면…….






오삼계(吴三桂)는 운남을 평정한 이후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의 대신이 되어서 승승장구를 하고 있었으나 언제 청나라가 자신을 숙청할지 몰라서 두려웠다. 그래서 오삼계는 사부 홍승주(洪承畴)을 모셔서 자문을 구한다. 홍승주는 조용히 단 한 마디를 그에게 말해주었다.

"운남을 단 하루도 평안하게 하지 마라"

오삼계는 사부의 말에 따라서 운남의 사회적 모순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정치적 혼란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 오삼계는 10 여년을 운남을 통치하며 평안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강희제 시대에 들어오면서 그의 운남 통치는 막을 내리고 만다.


어떤 이유로 똑같은 방법으로 흥성하고 쇄락을 했던 것일까?

오삼계가 운남을 혼란스럽게 해서 자신을 유지할 때에는 천하가 역시 혼란스러웠다. 호북(湖北)과 사천(四川)일대에 남명(南明)과 이자성(李自成)의 잔존세력들이 남아 있었고, 동남연안 일대에서는 정청공(鄭成功)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황제에게 있어서 오삼계가 혼란을 조장하거나 심지어 스스로 왕을 자처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천하를 부정하는 반란세력보다는 중요하지도 않고 위협적이지도 않다. 비록 짜증나고 불쾌해도 어디까지나 "내 사람"이니까 말이다. 아무리 짜증나는 쥐새끼라도 자신에게 대드는 개새끼보다는 우선순위가 떨어지지 않는가?!


그러나 천하가 태평해지면 상황은 급변한다.



오대십육국시기의 소국 남평국은 천하가 혼란스러운 것을 이용하여 주변의 모든 국가에 신하를 자청하였다. 주변의 대국들도 비록 이 쥐새끼 같은 소국을 사뿐히 즈려밟아 버리고 싶었지만 다른 국가들이 간섭하거나 뒤통수를 칠까 걱정하여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송(南宋)이 강성해졌을 때 남평국 최후의 왕 고보융(高宝融)은 자만심에 빠져서 남송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다시 말해서 천하가 혼란할 때에는 지방에서 당신이 어느 정도 "해 먹는 것"은 황제에게 있어서 중요하지도 않으며 참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황제의 권위와 통치를 직접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이상 황제는 당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천하가 태평해지면 여유가 생긴 황제로서는 당신이 그 동안 "해 먹은 것"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할 것이다. 이 순간부터 그 동안 천하를 혼란스럽게 한 행동은 단순한 "애교"가 아닌 "반역"으로 변하게 된다. 천하가 평안해진다고 생각하면 그 동안 "해 먹었던 것"에 만족하고 황제의 뜻에 따르는 것은 현명하다.



난세가 영웅을 부르고, 영웅이 난세를 부른다. 천하가 혼란하고 당신에게 충분한 힘이 없다면, 힘이 있는 사람에게 적당히 빌어 붙어서 자신의 이익을 탐하라. 천하의 혼란이 당신의 행동을 덮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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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하루 전에 번역을 해서 예약을 걸어두는데 오늘은 오전에 했습니다....위험하군요.





황제에 곁에 있는 것은 호랑이 옆에 있는 것과 같다. 황제를 모실 때에는 모든 말과 행동을 조심하여야 한다. 잘 못 하면 명예퇴직은 고사하고 죽을 수도 있는데 어찌 감히 말대꾸를 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문관은 간언으로 죽고, 무장은 전쟁으로 죽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상당한 사망률을 보이는 것이 바로 말대꾸이다.

그러나 국가를 경영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황제와 의견이 다를 경우가 생겨난다. 당신이 황제의 모든 말에 순종하는 간신배가 아닌 이상 세상에서 가장 모시기 어려운 사람에게 말대꾸를 하여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해결 방법은 말대꾸의 기술을 배우는 것이다. 



수(隋)나라에서 지금으로 따지면 자문위원이라고 할 수 있는 간관(谏官)이었던 유행봉(刘行本)의 사례를 언급해보자. 그는 수문제가 화가 나서 대신을 공개적으로 매질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자 곧장 달려가서는 "죄가 없는 사람에게 벌을 주시면 안 된다. 설사 벌을 주신다고 하더라도 공개적으로 매질을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한다. 이미 상당히 화가 나 있던 수문제였기에 당연히 유행봉을 죽일 듯이 노려본다.


그런데 유행봉은 겁을 상실했는지 또 다시 말대꾸를 한다. "저는 자문위원으로서 황제에게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제 일입니다. 만약 제 의견이 맞는다면 그 의견을 채택하셔야 하고, 제가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한다면 저를 명예퇴직 시키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를 그렇게 바라보시면서 저를 자르지 않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입니다." 수문제도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웃으며 사과를 하게 된다.



사실 황제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도 말대꾸를 듣고 싶지 않아한다. 문제는 일반인들은 더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억지로 참고는 한다. 그러나 황제는 제멋대로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황제에게 당신 따위는 없어도 그만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제멋대로 해도 어떤 문제나 피해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황제에게 어떤 피해가 있는 지 명확하게 인지시킬 수 있다면 황제조차 일반인들처럼 더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참지 않을 수 없다. 방금 전에 말대꾸를 한 유행봉의 사례에서도 유행봉을 자문위원에 임명한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황제 자신이며, 유행봉은 자문위원의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다. 만약 유행봉을 처벌한다면 자신의 사람을 보는 능력에 먹칠을 할 뿐만이 아니라, 대체할 우수한 자문위원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황제 자신에게 피해가 오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은 분명히 황제에게 미치는 피해를 인지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참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황제에게는 "우주 최강의 체면"이라는 것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설령 당신의 의견이 100% 맞는다고 생각하더라도 체면을 유지하기 위하여 당장에는 당신에게 호통을 치고 난장판을 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관직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사를 지을 계획을 세울 필요는 없다. 황제도 바보는 아니기에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에는 당신의 말을 은근슬쩍 받아들인다. 그 뿐만이 아니라 당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게 되어 보상을 해주는 경우도 많다.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당태종 시기의 형법상서 장량의 사례가 바로 그러하다. 당태종(唐太宗)은 지금으로 따지면 법무부 장관의 형법상서 장량(张亮)의 모반혐의에 분노하여 처형을 해버리지만, 이를 말리려고 했던 청와대 수리공 이도유(李道裕)에게 나중에 법무부차관이라는 관직을 내려준다. 그 자리에서는 장량에 대한 분노 혹은 필요성으로 인하여 이도유의 말을 무시하고 죽여 버렸지만, 그런 자리에서 합당한 말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이도유가 자신에게 유용하다는 것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에게 말대꾸를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황제에게 황제 자신의 피해를 분명히 인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황제의 체면을 생각해서 너무 과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황제의 체면을 상하게 하여서 될 일도 안 되게 할 것이다.



본 글에 관련된 내용은 역사에서 처세술을 배운다 : 황제접대학 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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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서한(西汉)의 성제(成帝)시대의 공광(孔光)은 황제의 전속비서까지 하면서 고위관직에 십여 년이 넘게 앉아 있었다. 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매일 황궁으로 출근을 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황궁은 신비로운 곳이 아니라 산책을 가는 뒷동산과 같이 구석구석을 알고 있는 것이다.


하루는 그가 휴가를 얻어서 집에서 쉬고 있었다. 특별히 할 일도 없었던 것인지 마눌님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 때 마눌님이 황궁에는 어떤 나무가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공광은 매우 당황하며 좌불안석의 상태가 되었다가 한참의 정적이 지난 이후에나 "오늘 날씨가 좋지?!"라는 엉뚱한 말을 꺼낼 뿐이었다.


군사기밀도 아니고, 황궁의 미녀들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라 단지 황궁에 어떤 나무가 심어져 있냐는 마눌님의 질문에 이렇게 긴장하고 대답을 회피할 필요가 있을까?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 모두가 공광의 행동을 배워야 한다.



황제는 변태이다. 그는 신하의 온갖 비밀을 알아내려고 노력한다. 신하의 발꼬랑내부터 여자취향까지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한다. 그에 반하여 자신에 관한 사항은 그 어떤 것도 비밀로 하려고 한다.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황제라는 특수한 신분 때문이기도 하다.


황제는 일반인들과는 다른 성스러운 존재이다. 하늘의 뜻을 받들어서 천하를 운영하는 최고 권력자이다. 황제의 소소한 일들이 외부로 전해진다면 황제에 대한 무지에서 나오는 권위가 사라질 수도 있다. 권력 유지수단으로서의 황제라는 가면이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황제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생활공간인 황궁의 출입을 금지한다. 하상주(夏商周) 시대에는 악사나 사관과 같이 어쩔 수 없이 외부인을 고용해야 될 때에는 맹인만을 고용하였다. 역사가 흘러갈수록 황궁을 유지하기 위해서 외부 인력이 필요하였고, 환관이나 궁녀와 같이 평생을 궁에서 사는 사람들을 늘린다. 설령 어쩔 수 없이 출입을 해야 되는 고관들에게는 강도 높은 비밀유지를 강요하였다.


당조의 지방정권인 사천왕(四川王) 위고(韦皋)는 자신의 수족과 같은 수하들도 결코 중앙관직으로 불러오지 않고, 어디까지나 인접 지역을 담당하는 관직으로만 배정한다. 만약 더 이상 승진을 할 수 없다면, 명예퇴직을 시키고 원로로 대접을 할 뿐이었다.


당조의 만수공주(万寿公主)는 당대의 천재라는 정호(郑颢)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녀는 정호에게 자신이 데리고 온 궁녀들을 첩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였다. 이는 자신이 데리고 온 궁녀들이 다른 사람들과 결혼을 하게 되면 황실의 비밀이 새어나갈까 우려를 하였기 때문이다.



황제의 마음을 헤아려보자. 황제의 자리는 속 편한 자리가 아니다. 수많은 일을 처리하면서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실수는 곧 천하를 빼앗기는 결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사가 만사"라는 말처럼 모든 것은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고 처리하느냐로 정해진다.


만약 자신과 매우 가까운 신하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면, 암살과 같은 신변상의 안전뿐만이 아니라, 황제로서의 신성함도 사라져버리게 된다. 황궁에 심어진 나무가 무엇인지는 정말 조그마한 일이다. 그러나 설령 조그마한 일이라도 새어나간다는 것을 황제가 알게 된다면 그 외에 다른 이야기도 하지 않았을까 의심을 하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과도하다고 생각되는가?! 남한(南汉)의 황제는 자신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환관과 궁녀만이 황궁에 들어올 수 있도록 규정한다. 태평천국(太平天国)의 천왕(天王) 홍수전(洪秀全)은 비밀 유지를 위하여 황궁화원을 고칠 때 오직 궁녀들로만 공사를 하도록 하였다.


황제에게 자신의 비밀을 지키는 것은 생명을 지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한 그루의 나무도 황실에 있는 나무라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본 글에 관련된 내용은 역사에서 처세술을 배운다 : 황제접대학 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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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생각과 마음을 읽는 것은 대신들에게는 필수능력이다. 문제는 황제는 세상에서 자신의 사생활을 가장 중요시 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타인의 사생활을 알고 싶어 하는 스토커이다.


황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천하를 지키기 위해서 대신들의 생각을 알아야 한다. 누가 자신의 천하를 가로채려고 하는지 끊임없이 의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청나라의 황제는 아무리 자신이 좋아하는 의심이라도 절대 3번을 넘어서 젓가락질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조차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태종 시절 대신 방현령(房玄龄)은 조정으로 출근하는 길에 황궁 북문에서 공사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황궁경비에게 무슨 건물을 건축하고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당태종은 분노하며 당장에 방현령의 목을 치려고 하였다. 재상 위정(魏征)이 달려와서 구원을 했기 망정이지 그 자리에서 세상과 이별을 할 뻔하였다. 방현령은 감히 황제가 만들고 있는 황궁의 건물에 대해서 "스토킹"한 혐의인 것이다.


황제는 방현령이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서 황궁의 건물에 관심을 갖는다고 오해한 것이다. 그만큼 황제는 대신들 중에 반역을 꿈꾸는 야심가가 있지 않을까 항상 노심초사하고 있다. 물론 대다수의 대신들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하고 있을 뿐이며, 운이 좋으면 부귀영화를 누리면 충분히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황제를 스토킹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아서 자리를 보전하기 위함이다. 문제는 황제를 스토킹 하는 방법으로는 자리보전은 고사하고 멸문지화를 당하게 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진나라의 재상 이사(李斯)는 진시황의 심기를 읽기 위해서 자신의 "눈"을 진시황 근처에 배치하였다. 한번은 진시황이 이사가 개선축제를 화려하게 여는 것을 보고서 몇 마디 욕을 하였다. 그리고 그 소식은 "귀"을 통해서 이사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이사는 당장 개선축제의 규모를 최소한으로 줄여버린다.


어떻게 되었을 것 같은가? 진시황은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누가 자신이 한 말을 유출하였는지 찾아다녔다. 누가 이사의 눈인지 찾아내지 못하자 자신이 그 말을 했을 당시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죽여 버린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미움을 받게 된 이사도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된다.

만약 내가 이사였다면 결코 개선축제의 규모를 대폭 축소하는 바보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진시황이 자신을 미워하지 않도록 변화하고 싶다면 어디까지나 매우 천천히 변화하여서 어디까지나 다른 이유로 변화한 것으로 위장하였을 것이다. 변화하는 속도조절에 자신이 없었다면 아예 변화하지 않고 다만 황제의 마음을 이해하는 수준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자신이 황제의 주위에 사람을 심어놓은 증거를 결코 노출하지 않았을 것이다.



황제 접대학에서 "비밀유지"는 상당히 중요한 핵심이다. 당문종의 대신 송신석(宋申锡)은 황제의 총애를 받는 대신이었으나 비열한 환관의 음모에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런데 이 환관의 음모는 다름이 아니라 "황제의 사생활"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다닌다는 무고였다.


용정제는 "쪽지"을 통해서 다양한 관리들에게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지방부시장인 유곤(廖坤)은 "쪽지"을 황제에게 올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은 뒤에 동네방네 이를 자랑하고 다녔다. 그 소식이 전해지면서 유곤의 "쪽지" 권한은 완전히 박탈되고 만다. 황제가 누구에게 "쪽지"을 쓰게 했는지는 황제의 비밀이다. 어디서 감히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닌단 말인가?!



우리는 "비밀유지"에 대해서 한나라의 부평후(富平侯) 장안세(张安世)을 배워야 한다. 대장군과 재상을 모두 역임했던 장안세는 자주 황제와 국가대사를 긴밀하게 상의하고는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분명 자신이 황제와 같이 결정한 사항에 대한 공문이 내려와도 다른 대신들과 같이 처음 본다는 듯이 행동하였다. 장안세의 이런 처세론을 전수 받은 장안세의 가문은 서한이 무너지고, 왕망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동한이 건국되는 과정에서도 무려 6대 동안 정부대신의 자리를 유지한다.



황제의 마음에 들겠다고 스토킹을 하다가 본전도 못 찾는 법이다. 그냥 편안하게 황제의 비밀을 지켜라. 그것이 부귀영화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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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 슬슬 번역하는 시간과 업로드예정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어......




공자는 "귀신을 공경하지만 멀리해야한다.(敬鬼神而远之)"라고 말했다. 최소한 표면으로는 유가 논리가 지배하는 동양사회에서 황제의 대신으로서 신선이니 풍수와 같은 황당무계한 헛소리를 믿지 않는 것은 분명히 현명한 방법으로 보인다.


그런데 황제는 스스로를 하늘의 아들인 천자라고 하였다. 하늘과 뜻이 통하는 황제는 어떤 의미에서 미신의 최고봉이며, 미신의 최고 권위의 해석자이다. 수 많은 대신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미신의 최고 해석자에게 감히 도전하여 죽어나갔다.



당조의 사법부장(형법상서刑部尚书) 장량张亮은 취미생활로 점을 보았다. 문제는 심심풀이로 감히 어떤 이에게 황제가 될 수 있는 복이 있는지 점을 보았다가 목이 날아가고 만다. 어디서 감히 황제의 자리를 가지고 점을 치는가?! 남조의 대장군 장경측(张敬则)은 과거 꿈에서 어깨가 뜨거워진 덕분에 대장군이 될 수 있었다고 떠벌리고 다녔다. 그러다가 어제 꿈에 상반신이 모두 뜨거워졌으니 큰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함부로 지껄였다가 온 가족이 죽어나가게 된다. 그 뿐만이 아니라 한무제의 태자 유거(刘据)나 양무제의 태자 소통(萧统)도 미신을 믿었다가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역시 미신을 믿을 것이 못 된다고 생각되는가?

하지만 미신을 믿어야 할 때도 있다.



강희제(康熙)는 중국에서는 세종대왕 급의 명군으로 손꼽힌다. 그는 중국전통학문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을 뿐만이 아니라 서양의 과학에도 정통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대신 연경요(年羹尧)에게 장님점술사를 데려오라고 한다. 연경요는 장님점술사의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데리고 올 수 없다고 한다. 강희제는 장님점술사의 품성이 떨어지는 것은 알고 있으나 그의 점술 능력은 훌륭하다면서 은근히 화를 낸다.


명군이라고 불리우는 강희제가 미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없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리고 오라고 하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는 것인데 감히 어디서 황제의 명령에 거부하는 것인가?!



사실 연경요(年羹尧)의 목숨까지는 뺏기지 않았으니 가벼웠다고 할 것이다. 한나라의 광무제(光武帝) 유수(刘秀)에게는 유가제일학자라고 하는 정흥(郑兴)이 있었다. 한번은 광무제가 점을 보는 기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다. 유가제일의 학자인 정흥은 당연히 유가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기에 당당하게 "그런 장난에 관심 없다"라고 한다.


그러나 광무제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최대한 화를 참는 것이었다. 정흥도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채고 자신은 유가학문만을 공부하였기에 미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면서 미신은 미신전문가에게 물어보라고 서둘러 대답한다.


광무제 유수는 다른 것도 아니고 세상에 "유수의 천하가 올 것이다"라는 미신적인 유언비어를 바탕으로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라간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를 "장난"으로 취급하면 뭐가 되겠는가?



조선의 태조 이성계도 개경에서 한양(지금의 서울)로 천도를 할 때 내세운 이유가 풍수지리라는 미신적인 이유였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대신들이 결사적으로 반대를 하였고, 피의 소나기가 내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성계는 단순히 미신적인 이유로 천도를 한 것이 아니라 문벌귀족들의 개경세력을 억제하기 위해서 이었다. 그렇기에 유가가 사상적 기반 역할을 하였던 신흥사대부가 오히려 천도를 찬성하며 한양천도를 찬성하였던 것이다.




황제 접대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황제의 마음을 짐작하는 것이다. 미신에 대한 모든 판단은 어디까지나 황제의 의도에 따라 정해진다. 당신이 아무리 미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황제가 미신을 거론하는 것에 어떤 이유가 있지 않는지 신중하게 생각하여야 한다. 설령 단순한 황제의 취미생활 이었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그의 심기를 상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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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계 이야기는 제가 마음대로 넣은 겁니다. 그 동안 원문을 "한국인에 적합하게 한다"면서 충분히 마음대로 변조하고 있었지만...그냥 심심해서 한국 이야기까지 넣어봤습니다. 원문도 보시는 분들은 점차 원문과 멀어지는 글에 경악하실지도....





황제는 보통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세상의 주인이고, 신하는 언제든지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쓰레기이다. 그러나 가끔은 신하가 모든 권력을 손에 넣고 황제를 단순한 꼭두각시 인형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은 이 꼭두각시 인형을 다루는 법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 한 방!"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기회가 오면 빨리 세계를 통치하는 황제가 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방해되는 꼭두각시 인형은 그냥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그러나 북위(北魏)의 고환(高欢)은 꼭두각시 인형을 소중히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낙양을 점령하고서는 황제를 갈아 치운다. 그 뿐만이 아니라 전 황제의 마누라를 자기 첩으로 만들어버린다. 드라마에 나오는 전형적인 악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환은 자신이 만든 가짜 황제에게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를 드리며 공송하게 대하였다. 심지어는 자신이 첩으로 만든 과거 황후에게조차 자기 자신을 낮추었다.


어쩔 수 없이 예전 황제를 몰아냈지만 천하가 혼란스러워졌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천하의 악당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이 상황을 안정시키지 못하면 그의 적수 중에서 누군가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할 것이다.



꼭두각시에게 "황제"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꼭두각시가 쓸 데가 없을 뿐더러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의 꼭두각시는 매우 중요한 도구이다.


꼭두각시에게 있는 "황제"라는 이름을 통해서 당신은 자신이 명령하기 곤란한 일을 처리할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꼭두각시는 적의 공격을 막아주는 안전모인 것이다. 난세의 간웅 조조(曹操)나 당나라를 세운 이원(李渊)등도 모두가 꼭두각시 황제를 이용하였다.



물론 당신의 힘을 충분히 키워서 꼭두각시 황제가 없어도 세상을 통치 할 수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꼭두각시 따위는 쓰레기통에 쳐 박아 버리고 당신이 직접 "황제"가 되면 된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대로 준비가 되지도 않았는데 꼭두각시를 버린다는  점이다.


수(隋)나라 말기 왕세충(王世充)은 사실상 천하의 모든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자 꼭두각시 황제를 모시기 귀찮아졌고, 자신이 황제가 되려고 하였다. 주변에서는 힘이 충분하지 않으니 위험하다고 만류를 하였지만, 인생 한방의 정신으로 스스로 황제가 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황제에 대한 연민을 등에 업고 힘을 키운 이세민(李世民)에게 천하를 빼앗기에 된다.



꼭두각시라는 것은 세상에서 인정하는 공통된 권위와 존엄이다. 당신에게 이를 대체할 만한 권위와 존엄이 없다면, 오히려 당신의 경쟁 상대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천하가 혼란스러운 동주(东周)시대 초기 정장공(郑庄公)은 힘도 권력도 모두 읽어버린 황제의 군대를 물리치고 심지어 황제의 어깨에 화살까지 맞추어버린다.


그러나 천하를 지배할 힘이 없었던 정나라는 천하 제후들의 공격을 받아서 처참한 지경에 빠지고 만다. 그 뒤로 춘추오패를 비롯한 수많은 천하영웅들이 등장하고 결과적으로 진시황에 의해서 천하가 통일되지만 정나라는 약소국으로서 끊임없이 고통 받을 뿐이었다.



황제라는 꼭두각시는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된다. 세상은 비록 꼭두각시라도 "황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에게 100% 황제가 될 수 있다는 자신과 능력이 없다면 함부로 꼭두각시를 버리지 마라. 오히려 인형을 예쁘게 꾸며서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 당신에게 훨씬 이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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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엄청나게 내렸군요. 이번 주중에 한 번 더 내린다고 합니다. 군대에 있었으면 하늘에 온갖 저주의 말을 퍼부었을 듯하군요. "악마의 똥-_-+" 다들 조심하셔요~




청명절 혹은 한식은 보통 개자추(介子推)에서 유래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개자추는 진나라의 왕자 중이(重耳)가 망명 생활을 할 때 곁을 지켰던 충신이다. 한번은 양식이 떨어져서 모두 허기에 지쳐있을 때 자신의 허벅지를 베어서 중이(重耳)에게 바칠 정도였다. 훗날 중이는 진나라로 돌아가서 진문공(晋文公)이 된다.   


이런 상황이 되면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공을 내세우며 부귀영화를 원하겠지만, 개자추는 모든 포상을 거부하고 면산(绵山)으로 숨어들어간다. 진문공은 개자추를 산에서 나오게 할 생각으로 불까지 지르지만, 개자추는 끝까지 산에서 나오지 않고 타 죽어 버린다.

많은 사람들이 개자추야 말로 청렴결백한 선비이며, 진문공의 행동이 과도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문공이 온 산에 불을 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닌 "모든 포상을 거부한 청렴결백"때문이었다.



황제에게 있어서 천하의 문무백관은 필히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주위에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명성을 원하고, 어떤 이는 돈을 원한다. 또 어떤 이는 여자를 원할 것이고 다른 어떤 이는 자식의 승진을 원할 것이다. 부귀영화를 누리기를 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만약 부귀영화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두려움과 의심의 대상이 된다.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管仲)이 제환공(齐桓公)에게 남긴 유언에도서 같은 이치를 찾아볼 수 있다. 관중은 위(卫)나라의 태자 자리를 벗어던지고 제나라로 와서 관직을 하고 있는 개방(开方)을 조심하라고 한다. 제환공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이유를 물어보았다.


"에휴! 태자도 벗어던진 것이 문제입니다! 태자도 벗어던졌으니 분명 제환공에게서 더 큰 것을 원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해가 되었는가?! 황제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것은 대신들이 어떤 것을 원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부귀나 여자 등을 원해야만 정상이며 안심을 할 수 있다.



양무제(梁武帝)을 원래 자신의 동생 소굉(萧宏)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항상 노심초사하였다. 그런데 한 번은 동생의 집에 공금횡령을 통하여 금은보화가 쌓여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다. 그리고 양무제는 너무나 기뻐서 말춤이라도 출 기세가 된다. 동생이 공금횡령을 했는데 뭐가 그렇게 기쁘냐고?! 드디어 동생의 "탐욕"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하여 개자추는 진문공이 가장 어려운 시절을 함께 했던 공신이면서도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고 산으로 숨어버린다. 관직도 필요 없고 돈도 필요 없다고?! 그럼 대체 뭐가 필요한데?! 19년이나 고난의 길을 걸어온 진문공에게 있어서 개자추의 "탐욕"은 결코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였다. 그렇기에 의심과 두려움이 끊임없이 생겨났던 것이다.



황제를 모실 때에는 결코 "욕망이 없는 고결함"만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당(唐)나라의 이필(李泌)은 당숙종, 당대종, 당덕종 3대를 모두 모신 왕가와 절친한 사이였다. 황제가문이야 그를 완전히 신임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국가에는 황제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부귀영화의 욕망이 있는 대신들도 국가시스템 안에 있었다. 원래 세상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 도사가 되고자 했던 이필이지만, 고위 관직을 가지며 결혼까지 하며 "일반적인 사람"처럼 행동한다. 만약 이필이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청렴결백의 모습만을 보여준다면 국가 대신들과 같이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탐욕도 전략이다. 탐욕하지 않으면 당신은 의심받고 목숨까지도 위험하다.


전국시대 말기 진(秦)나라의 노장군 왕전(王翦)은 60만 대군을 이끌고 초(楚)나라를 공격하러 가는 길에 극단적인 "탐욕"을 보여준다. 그는 출정을 가는 길에 심심하면 진시황에게 사람을 보내서 저 땅을 달라~ 이 땅을 달라~ 돈을 달라~ 집을 달라~ 심지어는 28세의 공주까지 새색시로 달라고 했다. 부장이 탐욕이 지나치지 않냐고 비웃자 왕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탐욕은 무슨… 어쩔 수 없다네. 진나라의 총병력이 78만인데 나 혼자 60만을 지휘하고 있다네. 탐욕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황제의 의심을 받게 될 텐데 전쟁을 무슨 수로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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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든 이번 주 분량도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이로서 황제접대학의 반을 끝냈습니다. 박사 입학전에 마무리가 될 듯은 합니다. 저의 귀차니즘이 발동하지 않으면 말이지요......사실 귀차니즘보다 집문제부터 시작해서 이래저래 번잡한 일들이 쌓여있는지라.....~.~





 

오자서(伍子胥)는 춘추전국시대에 활동한 정치가이다. 그는 복수를 맹세하고 자신의 고향인 초나라를 떠나서 오나라로 떠나온다. 그 뒤로 그는 오왕 합려(阖闾)를 모시며 오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합려의 아들 부차가 등극한 이 후, 월나라의 위험을 몇 번이나 강력하게 경고하다가 억울한 누명으로 죽게 된다. 그런데 정말 억울한 죽음이었을까?

 


정사와 야사를 막론하고 오자서가 오왕 합려의 아래에서 관직을 지낼 때에는 결코 합려에게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합려에게 아부를 하며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예를 들어서 오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하기로 했을 무렵, 원정군의 총사령으로 능력 면에서는 어디까지나 오자서가 최고였다. 그러나 오자서가 초나라 출신이었기에 일부러 손무(孙武)을 총사령관으로 추천한다. 그 뿐만이 아니라 분명 제나라로부터 온 이민자인 손무(孙武)을 오나라의 전통귀족인 것처럼 열심히 포장한다.


오자서는 굳건한 믿음을 주고 싶었던 것인지 초나라를 정복하고서는 원한을 이유로 초나라 왕의 묘를 파헤치고 시체에 300번이나 채찍질을 하였다. 그런데 오자서는 합려의 아들 부차(夫差)시대에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조금만 문제라도 일으키지 않도록 순종하고 조심했던 오자서는 사라지고 온갖 의견을 당당하게 밝히며 왕의 의견에 반대하는 인물이 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오자서의 마음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합려시대에는 그는 외부에서 유입된 지위가 낮은 선비에 불과했다. 합려에게 완전한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었기에 언제 잘려도 신기하지 않은 계약직과 같이 불안정하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합려는 사랑하는 딸의 장례를 위하여 수천 명을 생매장해버리기도 할 정도로 포악한 중년의 군주였다. 오자서가 조심하지 않는다면 관직이나 부귀가 문제가 아니라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부차 시대에 오자서는 이미 오나라의 큰 기둥으로서 존재하였다. 그랬기에 어린놈의 부차 따위가 감히 자신을 어떻게 할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문제는 설령 "어린놈"이라도 분명 제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다. 대신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황제인 것이다. 포악한 늙은 황제가 사람을 죽일 것 같으니 조심하고, 만만한 어린 황제라고 무시하는 행동은 죽으려고 환장을 한 행동이다. 오히려 만만해 보이는 어린 황제가 더욱 위험하기 때문이다.



합려는 포악하기는 하였지만, 풍부한 경험과 뛰어난 두뇌로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한다. 오자서가 설령 실수를 하였다고 해도 그의 능력을 아껴서 죽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만해 보이는 어린 황제에게 경험 따위가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젊음의 혈기로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당신이 누구이든 다 죽여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만만해 보이는 어린 황제는 오히려 일종의 자만심에 가득 차 있는 경우가 많다. "나는 황제인데! 감히 대들어?! 너 죽어!!!" 유아적인 자기증명의 유혹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그들의 곁에서 당신이 공신이고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매일 매일 "아버지는 이랬는데...저랬는데..."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XXXX! 아버지가 그렇게 좋다면 아버지 곁으로 보내주지!!!"

 


핵심은 "늙은 황제""젊은 황제"을 동등하게 대접해야된다는 것이다. 남조 유송(刘宋)의 왕족 유의공(刘义恭)은 자신의 조카 유준(刘骏)이 황제가 되자 조심에 조심을 하면서 "나는 병신이요!!!"라면서 벌벌 떨었다. 그렇기에 유준도 유의공에게 어떠한 위해를 가하지 않았고, 행복한 반평생을 누리게 된다.


문제는 유준이 죽고 그의 아들인 유자업(刘子业)이 제위에 올랐을 때였다. 유의공이 보기에 유자업은 15살밖에 안된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꼬맹이에 능력도 없어 보였다. 그렇기에 안심을 하고 매일 매일 연회를 베풀어서 즐겁게 놀았다. 결과는 여러분이 지금 생각하는 것과 동일하다.

 


황제를 모실 때에는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된다. 늙은 황제이든 어린 황제이든 능력이 뛰어난 황제이든 바보 같은 황제이든 모두가 황제이다. "황제 곁에 있는 것은 호랑이 곁에 있는 것과 같다"라는 말을 언제나 명심하라. 황제는 세계 최악의 초특급위험물이다!!

 



본 글에 관련된 내용은 역사에서 처세술을 배운다 : 황제접대학 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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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제(北齐)의 대신 조정(祖珽)은 흔히 말하는 좀도둑 같은 인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실제로 좀도둑질을 했을 뿐더러 관직에 올라서도 다른 집 잔치에 가서 금잔을 훔쳐오는 정신 나간 인간이었다. 초절정의 아부능력을 바탕으로 북제 세조(世祖)의 총애 아래 지금으로 따지면 국무총리라고 할 수 있는 재상의 위치까지 올라갔다. 섭섭하지 않게 북제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대장군 곡율광(斛律光)을 음해해서 일가족을 몰살시키는 행동도 해주었다. 간신배의 모범이라고 할 만하다.



사실 조정은 단순히 아부능력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지금의 비서와 같은 일을 했을 때, 기억력만으로 수십 가지 명령을 한자도 빠짐없이 기억을 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몇 개의 외국어를 유창하게 하였고, 공문서 작성부터 군사전략까지 나름 천재류의 인물이었다.


말년에 눈이 거의 먼 상태에서 위험한 변경의 요지 서주 시장으로 좌천당했을 때의 이야기는 거의 기적과 같다. 그는 자신의 휘하에 병력으로는 적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제갈량의 공성계를 사용하여 적에게 후퇴를 강요하였다. 인간성에 문제가 심각하기는 하지만 이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황제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을 것 같지 않은가?



문제는 이 천재류 아부꾼이 제상이 된 이후에 관직에서 몇 번이나 쫓겨나고, 공개적으로 엉덩이를 쳐 맞고, 황제가 “싸다귀”를 날려주시고, 눈까지 멀어서는 변방의 군사요지로 쫓겨나기까지 한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 영향이 아들에게까지 미쳐서 재상을 배출한 명문세가의 장남이 고작 마을이장 정도밖에 못하는 처참한 지경에 이르고 만다.



여러분들은 조정이 재상의 자리에 올라서 정치를 엉망진창으로 해서 그럴 것이라고 추측할 것이다. 하지만 조정은 재상이 되어서는 이전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국가행정을 재정비하고, 자신이 이끌던 간신배들을 몰아내려고 했으며, 황제의 지시를 "바른 정치"을 이유로 반대하는 등 명재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문제는 간단하다. 조정이 간신배 캐릭터를 명재상 캐릭터로 변화시킨 것 자체가 문제이다. 절대 캐릭터를 바꾸어서는 안 된다. 선비 캐릭터이면 끝까지 선비 캐릭터로 가야되고, 고집불통 캐릭터는 끝까지 고집불통 캐릭터로 가야된다. 간신배 캐릭터로 시작했다면 끝까지 간신배 캐릭터를 유지하여야 한다.



어째서 캐릭터를 바꾸면 안 될까?



황제에게 있어서 넘쳐나는 것이 인재이다. 황제의 주변에는 능력형, 오락형, 터프형, 고집불통형, 아부형 등등 모든 캐릭터기 존재하고 있다. 설령 자기 자신들은 모를지 몰라도 황제의 마음에서는 분명히 구별되어 있다.


황제가 어떤 이유로 조정을 재상으로 임명했을까? 설마 조정의 인간성이 좋아서? 어디까지나 조정이 자신의 뜻을 잘 이해하고 따라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상으로 만들어놨더니 갑자기 자신의 뜻을 뻔히 알면서 "국가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지시에 반대를 해버렸다. 조정 스스로는 자신이 "좋게 변했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황제의 입장에서는 "변한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또한 조정은 재상이 된 이후에 자신이 이끌던 간신배들을 몰아내고 현명한 재상이 되려고 하였다. 그 결과 그를 믿고 따르던 간신배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선비형의 사람들도 간신배들의 수령이 갑자기 착한 척하는 것에 대해서 어떠한 함정을 파고 있다고 생각하여 경계에 경계를 아끼지 않았다. 조정의 모든 대신들이 그와 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캐릭터는 반드시 사수해야한다. 물론 캐릭터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마음만 변화해야하며, 결코 태도로 나타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서 진평(陈平) 역시 개망나니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한고조(汉高祖) 유방(刘邦)에 의해서 관직에 오른 이후에도 결코 개망나니 같은 모습을 버리지 않았다. 다만 큰 문제와 방향성에서만큼은 "좋은 인간"을 유지하였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몇 년의 시간에 걸쳐 천천히 자신의 캐릭터를 변화시켜서 마침내 개망나니에서 대정치가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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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 머...그냥그냥.......~.~

 


 황제가 누구인가?! 당신을 고위관직에 오르게 할 수도 있고, 당신의 목숨줄을 끊어버릴 수도 있는 세계의 주인이다. 그런데 그런 주인에게 감히 말대꾸를 한다고?!그런데 실제로는 말대꾸로 목이 날아간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오히려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는 케이스가 의외로 많다



한고조(汉高祖) 유방(刘邦)는 말년에 정실부인인 여황후(吕后)을 버리고 탱글탱글한 첩 척부인(戚夫人)에게 빠져 있었다. 척부인을 과도하게 사랑한 나머지 척부인의 아들인 유여의(刘如意)을 태자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황제가 하겠다는데 감히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그런데 주창(周昌)이 겁도 없이 공개적으로 결사반대를 외쳐버렸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주창의 모가지가 날아갔을 것 같은가?


오히려 유방은 유언으로 주창이 유여의를 보좌하는 관직에 오르도록 한다. 유방의 입장에서는 감히 나에게 대들 정도면 유여의가 보좌에 오른 이후에 정실부인 여황후로부터 유여의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비록 주창이 최선을 다해서 막았으나 여황후는 유여의를 죽여 버리고 자신의 아들을 황제로 만들어버렸다. 이제 자신의 아들을 황제로 만들 정도의 권력을 손에 넣은 여황후가 주창을 죽여 버렸을 것 같은가?! 여황후는 과거 자신의 아들이 태자에서 쫓겨났던 것을 결사적으로 막았던 공을 치하하며 오히려 주창의 관직을 높여준다.


황제가문의 권력이동은 대신들에게 있어서는 생존의 기로이다. 그러나 주창은 오히려 말대꾸 한 번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안전한 보호막을 얻게 되었다.



당태종에게는 지금으로 따지면 법무부장관정도가 되는 형부상서(刑部尚书) 장량(张亮)이라는 신하가 있었다. 그런데 장량은 일은 하지도 않으면서 매일 점이나 보면서 성공하기는 틀렸다고 한탄이나 하였다. 그러고서는 사병을 조직하지 못하게 되는 법을 정면으로 어기면서 몇 백 명이나 되는 "호위무사"을 만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당태종은 법을 수호해야하는 법무부장관이 법을 어기면서 사병을 육성하는 것은 반역행위와 다름이 없다면서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한다.


누가 봐도 장량의 행위가 잘못인 상황에서 절대 권력인 황제의 명령에 감히 말대꾸를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으로 따지면 청와대 전속 수리공쯤 되는 이도유(李道裕)가 감히 "증거가 부족합니다! 주관적인 판단으로만 사형은 언도해서는 안 됩니다!"라면서 소리치며 달려왔다. 그러나 당태종은 듣는 척도 하지 않으며 장량을 죽여 버린다.


그 뒤로 1년이 지났을 때 지금의 법무부 차관인 형부시랑(刑部侍郎)을 뽑을 때였다. 황제는 적당한 인재가 없자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한다. "작년에 증거가 부족하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였지? 그 녀석 보고 법무부 차관을 하라고 해. 생각해보니 그 녀석 말도 일리가 있었지. 지금은 그 때 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조금은 후회하고 있어."



황제도 사람인지라 아부를 듣기 좋아한다. 대체 누가 말대꾸를 듣기 좋아한단 말인가?! 그러나 황제는 분명 황제이다. 황제는 자신에게 말대꾸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주관이 명확하고 능력이 출중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비록 말대꾸를 하는 사람들이 짜증나기는 하지만 천하를 경영하는데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말대꾸를 하는 사람들이 경영에 유용하다는 것은 훌륭한 황제뿐만이 아니라 황제가 되어보지 못한 사람조차 알고 있다. 동진의 왕돈(王敦)은 모반이 성공하기 직전에 갑자기 병사하고 만다. 이에 따라서 왕돈의 형인 왕함(王含)은 자신의 아들 왕응(王应)을 황제로 추대하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만다. 이제 실패한 반란자가 된 부자에게 두 가지 선택지가 남아 있었다. 하나는 평소 자신의 비유를 잘 맞추어주었던 동생 왕서(王舒)와 모반에 반대하면 계속 말대꾸를 하던 동생 왕빈(王彬)이었다.


왕함이 왕서에게 가려고 하자 왕응은 결사적으로 반대하였다. "왕서는 비록 평소에 저희의 비유를 맞추어주었지만, 어디까지나 시대에 영합하는 사람이니 권력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목을 지금의 황제에게 받칠 겁니다. 오히려 비록 계속 저희를 반대하였지만 자신만의 식견과 강한 의지를 가진 왕빈은 위험을 무릅쓰고 저희를 지켜줄 것입니다." 그러나 왕함은 아들 왕응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아부꾼 왕서에게 갔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왕빈은 실제로 왕함과 왕응을 살리기 위해서 모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말대꾸는 주화입마에 빠질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초식이다. 황제도 말대꾸를 하는 사람이 국가경영에 유용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으나 인간인지라 감정적으로 움직일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황제를 잘 살펴보고 말대꾸를 하자.

 


본 글에 관련된 내용은 역사에서 처세술을 배운다 : 황제접대학 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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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위험했습니다. 하기 귀찮아서........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어거지로......




 

황제의 아래에는 중정(中正), 사예(司隶), 이부(吏部)등 관리를 선발하고 평가하는 인사부문과 관원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어떠한 관직도 모두가 결과적으로는 황제에 의하여 결정된다.

 

현실적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는 것은 힘들 일이기에 일반적인 관리들은 온갖 노력 끝에 겨우 겨우 승진을 하고는 한다. 설령 황제의 입맛에 맞는 정책으로 총애를 받고 싶어도, 황제가 원하는 것을 확실하게 파악하기 쉽지 않기에 역시 쉬운 방법은 아니다.

 

무엇보다 결과가 나쁘면 승진을 고사하고 퇴직을 강요받게 되지만, 반대로 결과가 너무 좋아도 동료들의 질투와 시기뿐만이 아니라 황제로부터 자신의 자리를 강탈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의심까지 받게 된다. 너무나 능력이 좋아도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망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럼 단순한 아부꾼이 되는 것을 어떨까? 주위 사람들에게 무시를 받게 될 뿐만이 아니라, 아부를 하다가 아차 하는 순간에 황제의 총애를 잃고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단순한 승진조차 이렇게 어려운데 황제를 협박해서 승진을 한다고?!

 

육법화(陆法和)는 남조 양원제(梁元帝)아래에서 지금으로 따지면 지방도시 시장정도가 되는 관직에 있었다. 그는 큰 명성도 없었고, 이렇다 할 능력조차 없었다. 특이할 것은 취미생활로 점을 본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하루는 지방관리주제에 황제에게 직접 보고서를 쓴다. 내용은 더 가관으로 자기를 "사도(司徒)"로 임명해야 된다는 말이었다. 사도(司徒)는 지금으로 따지면 국무총리 정도로 지방도시의 시장이 감히 노릴 자리가 아니었다. 어떻게 되었을 것 같은가?


육법화는 능지처참을 당하고 그 가족의 목이 날아가야 정상일 것 같지만 결과는 정 반대였다. 황제는 "육법화가 점을 볼 줄 아니까. 자신이 사도가 될 수 있는 복이 있다고 생각했나 보군."이라면서 지방도시의 시장을 곧장 국무총리로 임명해버린다.


 

그러나 육법화가 시골도시 시장에서 단숨에 국무총리가 된 이유는 결코 이상한 황제를 만나서가 아니다. 당시 양원제는 반란으로 혼란해진 사이에 군대를 일으켜서 황제가 되었다. 그렇기에 아직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육법화가 있던 곳은 매우 중요한 군사요충지였다. 그렇기에 육법화에 대해서 황제는 채찍보다는 당근을 주어야 할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사도라는 관직은 현재의 국무총리와 비견되는 고위관직이기는 하지만, 황제의 입장에서는 돈 한 푼 들지 않고 줄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까짓 사도 따위 그냥 육법화에게 던져준 것이다.

 



황제에게 약점이 있고, 그 약점을 자신이 쥐고 있다면 황제를 협박해서 고위 관직을 얻을 수 있다. 만약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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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에서 많은 부분을 삭제했습니다. 필요 없어 보여서...결코 귀찮아서가 아닙니다.-_!!!

 



청나라 건륭황제(乾隆帝)는 유용(刘墉)에게 그 공로를 치하하며 황제의 신발과 옷 등을 하사하였다. 유용은 성은이 망극하여 가문의 사당에 모시고서는 가보로 삼았다.

대대로 수 많은 대신들이 황제의 하사품을 받아왔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은 황제의 하사품을 감히 사용하지 못하고 전속 관리인까지 두면서 고이고이 모셨다. 만약 조금이라도 하사품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 죄는 용서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건륭황제는 서예와 그림을 그리는 취미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때때로 대신들에게 나누어주고는 하였다. 대신들은 황제의 하사품을 전시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하고, 벌레라고 생길 것을 우려하여 조심히 보관할 뿐이었다. 강희제의 경우는 사냥을 좋아해서 대신들에게 자신이 잡은 동물들을 하사 하였다. 대신들은 황제가 하사한 동물을 먹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썩어가게 놔두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였다.


당나라의 의종(懿宗)황제는 황실악사 이가급(李可及)의 음악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이가급은 황제로부터 짐수레로 끌어야 될 정도의 하사품을 자주 받았다. 훗날 이가급이 황제의 눈 밖에 나서 하사품을 고스란히 반납하게 되었을 때 내시들이 비웃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기서 핵심은 이가급은 황제의 하사품은 감히 사용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럼 황제의 하사품을 이렇게까지 간직할 필요가 있을까?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바보짓이다.

황제가 하사품을 내린다는 것은 당신을 좋게 봤다는 것이거나 유용하게 쓰라는 의미이다. 만약 황제가 음식을 주는 것은 먹으라는 것이고, 돈을 주는 것은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런 하사품을 억지로 고이 모셔두는 것은 바보짓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당태종(唐太宗)은 대장군 이적(李勣)이 병에 걸리자 치료약을 하사하였다. 그런데 이적은 성은에 감사하며 하사품을 고이 모셔두기만 할 뿐이었고 결과적으로 저 세상으로 가버린다. 바보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 일이다.



황제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황제에게 음식이 부족한가? 돈이 부족한가? 어차피 세상 모든 것이 황제의 것인데 당신에게 하사한 것은 먼지 한 톨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무엇보다 당신이 하사품을 고이 간직하는 것은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인데, 정작 황제는 자신이 하사했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서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위에서 이야기하였다시피 이가급은 임금에게 미움을 산 뒤에 자신이 받았던 모든 물건을 반환하여야 하였다. 당신이 황제의 하사품을 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몇 십 년 동안 보호하고 아낀다고 하더라도 황제의 은총이 더 해지는 것도 아니고 덜 해지는 것도 아니다.  당신이 아무리 황제의 하사품을 아끼더라도 황제는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다.


그냥 황제가 음식을 하사하면 먹고, 돈을 주면 쓰고, 옷을 주면 입어라. 당신이 하사품으로 무엇을 하든지 황제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한나라 시대의 소광(疏广)과 소수(疏受)을 배우기를 바란다. 그들은 퇴직축하로 황제에게 어마어마한 퇴직금을 받아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그 돈을 성금으로 내기도 하고, 친구들과 파티를 하면서 1년이 되기도 전에 모두 써버렸다. 이들이야 말로 황제 접대학의 고수들이다.



황제가 하사품을 내리는 이유는 최종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이다. 이 하사품을 받고 열심히 나를 위해서 국토를 넓히거나 나라를 평안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적처럼 하사받은 약으로 자신의 병을 고치지 않고 고이 모셔두다가 죽어버리는 것이 대체 황제에게 어떤 도움이 된단 말인가?!

황제가 원하는 것은 하사품을 경건하게 다루는 당신의 모습이 아니라, 황제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당신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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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와와!! 이번주 끝이다!!!!!! 한 2일은 번역 안해도 되는구나~~~~ 우헤헤헹~ -_-;;;

자기 자신을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귀차니즘을 이기려고 노력중-_-;;





삼국시대의 종결은 서진(西晋)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두예(杜预)가 있었다. 그는 홀로 오나라 점령 전략을 구상하였을 뿐더러, 직접 원정군에 참여하여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런데 오나라를 멸망시킨 서진의 원정대의 사령관은 두예가 아니었다. 오히려 오나라 점령계획을 끝까지 반대했던 가충(贾充)이었다.


가충은 이미 원정대가 출발 준비를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에 반대하며 집에서 뭉그적거렸다. 결국 서진의 황제 사마염(司马炎)이 화가 나서 "계속 그러면 내가 직접 간다?!"라고 할 정도로 압박을 주자 어쩔 수 없이 원정군 사령관이 되긴 한다. 다만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과는 몇 천리가 떨어져 있는 수도 근처에 사령부를 설치하고는 "지휘"을 한다.


이딴 사령관 아래서 짜증나서 어디 일하겠는가? 그런데 꼴 같지도 않은 사령관을 추천한 것은 다름이 아닌 두예 자신이었다. 두예는 자신의 일에 처음부터 끝까지 반대하는 이런 사람을 왜 굳이 자신의 상관으로 모시려고 했던 것일까? 미친 걸까?


사실 두예는 가충을 자신의 안전모로 사용했던 것이다.



정치사는 언제나 배신과 배반으로 얼룩져 있다. 최고 권력자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것은 군대를 통솔하는 사령관의 반란이었다. 그래서 사령관들은 자신의 가족을 인질로 잡히고는 하였다. 사실 가족을 인질로 잡는 것도 그다지 합당하지 않다. 어차피 천하를 잡으려고 반란을 일으키는데 그깟 가족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그렇기에 황제는 힘을 가진 자를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북위(北魏) 말년에 “그림자 황제”로까지 불릴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지방반란세력을 토벌해야했던 하발악(贺拔岳)은 자신의 처지를 "이겨도 안 되고 져도 안 되는 지경"으로 묘사하였다.


지게 된다면 당연히 문제이겠지만, 만약 설사 이기더라도 황제의 자신에 대한 의심과 의혹은 더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발악은 자신의 정치적 맞수였던 이주천광(尔朱天光)을 사령관으로 강력하게 추천하고, 자신은 부사령관의 자리를 맡는다.


결과적으로 대승을 거두게 되었고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이주천광은 사령관이라는 이유로 다양한 포상을 얻게 된다. 하지만 하발악 역시 승진을 하였을 뿐더러 자신에게 집중되던 영광과 권력을 분산함으로서 황제의 의심을 줄일 수 있었다



다시 두예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서진이 천하를 통일하기 위하여 마지막 남은 오를 공격하려고 하고 있었다. 서진의 수도에서 몇 천 리나 떨어진 곳으로 대군을 보내야 되는 황제의 입장에서 완전히 믿는 사람이라도 의심을 할 수 밖에 없다.


가충은 비록 병신 같고 계속 전쟁자체를 반대해왔지만, 황제의 총신일 뿐더러 황제 가문과 혼약으로 맺어진 사이였다. 이런 믿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사령관으로 떠억 하니 모셔두면 황제라도 안심할 수 있게 될 뿐더러 그 후광을 이용하여 장군들을 조절하기도 쉽다. 무엇보다 사령부가 현장하고 멀리 떨어져 있기에 오히려 방해를 받지 않고 전략을 펼칠 수 있었다.



사실 아무리 현명한 황제라고 하더라도 코드인사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연소왕(燕昭王)은 인재를 아끼고 사랑한다고 유명하지만, 구름처럼 몰려온 인재들이 자신의 수도에서 음모를 꾸미는 것이 걱정이 되어서 수도와는 떨어진 곳에 그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오왕 합려(阖闾)는 오나라를 부흥시킨 명군이었지만, 초나라와의 전쟁을 결심하고서는 누가 봐도 최고의 인재이지만 초나라 출신인 오자서(伍子胥)와 백비(伯嚭)을 멀리하였다.


명군이라는 사람들도 코드인사를 할 수 밖에 없는데 일반적인 지도자들은 어떻겠는가? 그렇기에 당신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다름이 아닌 "안전모"이다.



물론 "안전모"도 괜찮은 것을 착용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더 위험할 수도 있다. 당대의 명장 곽자의는 당숙종(唐肃宗)의 아들 광평왕 이숙(李俶)을 자신의 안전모로 사용하였다.


문제는 군사전략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던 이숙이 갑자기 스스로가 천재군사전략가라고 된 것처럼 직접 나서서 지휘를 해버린다. 그 결과 천하의 곽자의라도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고 몇 십만 명의 당군은 패망을 하고 만다. 안전모는 어디까지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방어용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안전모가 자기가 명검이라도 되는 듯이 날뛰었으니 난장판이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물론 당신의 충분히 용감하다면 전국시대 제나라의 명장  사마양저(司马穰苴)의 사례를 배울 수도 있다. 그는 군기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황제가 하사한 표준형 안전모를 군법회의에 늦었다는 이유로 처형해 버린다. 황제가 특사를 파견해서 말리기까지 하였으나 "장군이 군중에 있을 때에는 비록 주공의 명령이라도 받지 않는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게 하였을 뿐이었다. 그 결과 황제의 총신도 군법 때문에 죽는 모습을 본 병사들은 군법과 사마양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게 된다.

하지만 안전모를 스스로 박살내는 행동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선택이다. 우선 안전모가 큰 잘못을 해야 함은 물론이고 황제도 당신을 이해해주는 현명한 사람이어야 된다.


웬만하면 그냥 "자나 깨나 안전모"을 생활화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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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귀찮아서 번역 안 할 뻔 했다...-_



전조(前秦)의 부견(苻堅)은 소수의 저족(氐族)의 수령으로 왕국까지 세우게 된다. 그러나 저족의 갑작스러운 인구팽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저족을 국경지역에 분산 배치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은 저족의 힘을 분산시키고, 타민족이 반역을 일으킬 가능성을 높인다는 이유를 내세운 저족 대신들의 강력한 불만을 가져오게 된다. 실제로 전진은 선비족과 강족의 반란으로 인하여 멸망하게 된다.


그 뒤로 많은 사람들이 "황제는 필히 자기 사람을 주변에 두어야 된다. 외부인들이 힘을 키우게 되면 반란이 일으킨다."라는 말을 믿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그런 한가?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부견보다 조금 일찍 갈(羯)족 국가를 세운 후조(後趙)의 석씨 일가의 예를 살펴보자. 석씨 일가는 자신의 민족 이외에 다른 이들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갈족들을 수도 부근에 밀집시키고, 두 명의 아들에게 각각 10만 가구씩 통솔하도록 하였다.


수도 주변을 "자기 사람"으로 채웠으니 안전할 것 같은가? 석호가 죽고 나자 수도 주변의 갈족끼리 내전이 벌어져서 몇 년 만에 나라는 물론 민족 자체가 사실상 없어지고 만다. 



누가 "내 사람"인가? 자신의 이익과 일치하는 사람이 "내 사람"이다. 네가 성공하면 같이 성공하고, 네가 패망하면 같이 패망하는 사람이 "내 사람"인 것이다. 만약 단순히 가족, 같은 지역, 같은 학교라는 이유로 "자기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편협할 뿐더러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행동이다.


세계를 뒤흔든 몽골제국도 같은 이유로 멸망의 길을 걸었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몽골인만을 "자기 사람"으로 취급하고 그 외의 민족은 차등을 두어서 대접하였다. 그 결과는 제국의 빠른 붕괴이지 않았는가?!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부견의 몰락은 단순히 "자기 사람"인 "자기 민족"을 분산 시켜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주변의 조언을 듣지 않고 동진(東晉)과 전쟁을 벌여 패배한 것이 원인인 것이다.


본래 "외부인"인 사람들도 부견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부스러기라도 얻기 위해서 부견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부견이 처참하게 패배한 순간 상황은 변하고 만다. 부견 밑에 있어봤자 어떠한 이익도 있을 수 없는데 무엇하러 계속 충성을 바쳐야 하는가?


사실 이런 상황에서는 "외부인" 뿐만이 아니라 "자기 사람"도 외부인으로 변해버리고는 한다. 실제로 부견과 동족이자 친구일 뿐만이 아니라 친척이기도 했던 여광(呂光)도 부견의 패배 소식을 듣고서는 반란을 일으켜서 후량(後涼)의 황제로 등극해버리지 않는가?




정리해보자. 황제에게 "자기 사람"은 형제도 아니고, 고향친구도 아니다. 황제에게 자기 사람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능력이다.


만약 당신의 능력이 뛰어나다면 어떤 사람이든 당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내 사람"이 될 것이고, 반대로 당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면, 설령 친 아들이라고 할지라도 당신의 자리를 빼앗으려 할 것이다.



본 글에 관련된 내용은 역사에서 처세술을 배운다 : 황제접대학 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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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의 한 호수에는 아주 유명한 누각이 있다. 바둑에서 이겼다는 의미인 승기(勝棋)라는 이름이 붙은 이 누각은 명조(明朝)의 대장군 허달(徐達)이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에게서 바둑을 이겨서 얻은 것이라고 한다그러나 노인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야사에서는 정반대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허달은 결코 주원장을 이기지 않았다. 오히려 주원장은 게임 내내 허달을 압도하였고, 게임도 일방적인 주원장의 승리였다. 다만 허달은 바둑판에 "만세(萬歲)"라는 글씨를 만들었고, 누각은 물론이고 주원장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주원장이나 허달 모두가 시골출신인데 바둑과 같은 고급취미에 익숙할 리가 없다. 누가 이기든 신기할 것은 없는 것이다. 다만 고향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대장군 허달 따위가 황제 주원장을 이길 수는 없지 않은가?! 만약 허달이 주원장과의 바둑에서 정말로 "승리"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황제는 세상에서 가장 예술에 흥미가 있는 인간이다. 절대적인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기에 심심풀이 땅콩으로 예술에 시간을 쓰게 된다. 오케스트라를 듣고 싶으면 언제든지 베를린 필 오케스트라를 부를 수 있고, 미술작품이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모나리자를 가지고 와서 자기 방에 걸어둘 수 있다.

그러나 황제는 세계상에서 가장 성깔이 더러운 예술가이기도 하다. 전문적인 뮤지션이나 예술가들이 자기보다 뛰어난 것은 어찌어찌 이해를 하고 넘어간다 하더라도 일반적인 대신들이 자신보다 뛰어난 것은 결코 참지 못한다. 황제는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하기에 자기가 최고인줄 알기 때문이다.



위문제(魏文帝) 조비(曹丕)는 당대 최고의 검객이라고 알려진 등전(鄧展)을 이긴 것을 너무나 기뻐하며 역사서에 기록하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자. 당대 최고의 검객이었다는 등전이 전쟁에서 후방지휘나 하던 조비에게 지겠는가? 등전이 마음만 먹었다면 조비 따위는 한 칼에 목을 베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조비가 누구인가! 당대 최고의 권력자 조조(曹操)의 후계자이지 않는가! 등전은 현명한 패배를 선택 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보자. 황제도 아닌 최고 권력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당대 최고의 검객이 일부러 지는 판인데 황제랑 공평하게 경쟁을 하겠다고?! 그 따위 것은 올림픽 경기장에서나 해라.



수양제(隋煬帝)는 스스로 천제 시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에게는 설도형(薛道衡)이나 왕주(王胄)와 같은 당대 최고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멍청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개뿔도 모르고 수양제 앞에서 자신들의 재능을 발휘하고 만다. 어떻게 되었을 것 같은가?


쪼잔한 황제는 별 거지 같은 이유로 그들의 목을 댕강하고 날려버린다. 그리고서는 "또 그 잘난 시를 써보시지"라는 밴댕이 소갈딱지에 어울리는 명언을 남긴다.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권력자를 이기는 것은 자기 목숨을 날리는 짓이다. 뭐? 그럼 너의 능력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당신의 자존심이 중요한가? 아니면 목숨이 중요한가?



주의해야될 것은 이겨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쉽게 져서도 안 된다는 점이다. 어디까지나 아슬아슬하게 지는 것이 중요하다. 황제나 당신이나 모두가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황제가 당신보다 조금 더 잘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황제는 기분이 좋고, 당신은 목숨을 이어나갈 수 있을 뿐더러 황제가 기쁨에 젖어 하사하는 선물을 얻을 수 있다



만약 적당히 질 수 없을 것 같으면 아예 그 자리를 피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전국시대의 진무왕(秦武王)은 지금으로 따지면 역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하루는 진나라 최고의 역사라는 오획(乌获)와 임비(任鄙)그리고 맹설(孟说)을 불러서 역기시합을 하자고 하였다.


오획과 임비는 자신들의 실력으로는 참가조차 하지 못한다면 그 자리를 피했지만, 맹설은 겁도 없이 대왕과 역기시합을 진행했다. 문제는 진무왕이 역기 시합 도중 역기에 깔려서 죽어버린 것이다. 그 결과 맹설은 자기 뿐만이 아니라 가족까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이쯤하면 다들 이해를 했으리라 생각한다. 황제에게나 대신에게나 바둑이나 예술은 일종의 취미생활이다. 당신이 능력을 보여주고 싶다면 어디까지나 본업에서 능력을 보여주면 된다. 굳이 취미생활에서 목숨을 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냥 "참가에 의의"을 두어라.


본 글에 관련된 내용은 역사에서 처세술을 배운다 : 황제접대학 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환영합니다. 
본 글은 한국인에 적합하도록 의역하였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막번역)
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당태종(唐太宗)은 위대한 군주로 불리운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그가 현명한 사람을 가까이 하고, 간신배를 멀리했다며 칭찬하고는 한다.

 
어문사지(宇文士及)는 아부의 달인으로 악명이 자자하였다. 당태종이 한 그루의 나무가 멋지다고 하자 어문사지는 그 나무의 주위를 빙빙 돌며 몇 십분이나 나무를 칭찬하는 것이었다. 당태종은 "다들 간신배를 멀리하라고 하지만 그 동안은 간신배가 누구인지 몰랐는데...오늘 니 놈을 보니 한번에 알겠구나!!"라고  욕을 하였다.


또 다른 예도 있다. 권만기(权萬紀)는 당태종에게 별의 별 쓸데 없는 일을 보고하고는 하였다. 정대신의 아들이 이번에 장가를 가는데 신부가 그렇게나 예쁘다는 이야기나 이 대신의 딸내미가 도통 시집을 가려고 하지 않는다라는 별 쓸데 없는 이야기를 할 뿐만이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는 대신들을 음해하고는 하였다. 결국 당태종에게 욕을 쳐 먹고서는 괜찮은 보직에서 물어나고 말았다.




역시 간신배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되는가? 잠깐만 기다려라.


어문사지와 권만기가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는가? 아부쟁이 어문사지는 관직을 박탈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 승진을 해서는 결국 공작이 되어서 행복한 말년을 보냈다.


간신배 권만기는 당태종의 비밀특사가 되어서 지방의 왕족들을 감시하고는 했다. 비록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당태종에 의해서 "열사"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비록 이놈의 간신배들은 욕은 먹을대로 먹기는 했지만, 웬만한 충신들보다도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황제는 왜 간신배를 그냥 놔두는 것일까?


우리는 황제가 얼마나 특수한 위치인지 생각을 하여야 한다. 황제의 삶은 일반인들과는 전혀 다르기에 고민이나 생각도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비록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자신의 마음의 빈곳을 채워주는 사람이 필요할 때도 있다. 혹은 일반적인 충신이나 대신들이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으려고 하는 더러운 일들을 처리할 사람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서 권만기는 대신들에게는 쳐 죽일 간신배일 뿐이지만 황제에게는 대신들에게서 들을 수 없는 정보를 제공해주는 눈과 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권만기가 병신짓을 하면 황제도 당장에는 욕을 하겠지만, 그것도 그 때 뿐인 것이다. 아부꾼 어문사기 역시 일종의 심리치료사이다. 매일매일 대신들과 국가대사를 논하며, 조금의 예의범절도 어기지 못하는 답답한 인생에 한 줄기 젖과 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간신배들을 어떻게 상대해야될까?


우선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황제라고 병신이 아니다.  황제도 간신배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만약 황제가 간신배를 주변에 남겨둔다면 그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함부로 황제에게 바락바락 대들며 저넘의 간신배를 당장에 족쳐야 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결코 해서는 안된다.


황제는 세상에서 가장 체면을 따지면서도 자기 멋대로인 생물이다. 당신이 누군가를 간신배이니 내쫒아야 된다고 매일매일 말하면 짜증이 날 수 밖에 없다. 개도 개주인이 누군지 보면서 때리라고 했는데 어찌 감히 황제의 개를 가지고 함부로 이야기한단 말인가. 


또한 비록 황제가 이해를 하더라도 간신배들은 결코 당신의 말에 행복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당신의 등을 찌르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할 것이다. 밝은 곳에서 싸우는 것이야 당신도 한 가닥 하겠지만, 간신배들은 어두운 밤거리에서 당신의 뒷통수를 노릴 것이다.




물론 간신배를 없애려고 노력은 해야겠지만, 눈에 들어간 모래를 빼내듯이 조심조심 상대하라. 그렇지 않는다면 간신배는 여전히 존재할 뿐이고, 당신은 몰락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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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때에는 손해가 곧 행복이다.


과거 돈 있는 사람들의 생일연회에서 가장 많이 공연된 것은 곽자의(郭子儀)의 이야기이다. 곽자의는 당(唐)황제들도 언제나 그를 공손히 대접하였다. 그는 관직이 높았을 뿐만이 아니라  그가 죽은 뒤에도 수 많은 자손들이 오랜 시간동안  부귀영화를 누렸다.

군주 곁에 있는 것은 호랑이 곁에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는데 곽자의같은 수십만 대군을 이끈 무장이 황제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고 이런 행복을 누렸다는 것은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곽자의가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비록 곽자의가 일개 무장에 불과하지만 황제접대학에 정통했기 때문이다.

사기(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곽자의는 자주 자신의 부하의 승진을 황제에게 신청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그의 요구를 완전히 무시하고는 했다. 곽자의의 아들들은 "곽가가 없었으면 황제의 성이 달랐을 것인데! 어찌 곽가의 체면을 이리도 무시하는가!!!"라며 화를 내었다.

그러나 곽자의만은 오히려 너무나 기뻐하였다. 황제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무장에 의한 반란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어떤 무장의 반란이 걱정이 된다면 그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곽가의의 요구를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은 황제가 곽가의를 완전히 믿고 있다는 것이니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황제는 권력은 어마어마하지만, 용기가 없는 졸장부이다. 비록 무한한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주위에 언제든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능력이 있는 모든 신하들은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그렇기에 곽자의가 자신의 추천이 통과되지 못할 것을 몰랐을까? 오히려 무리한 추천을 통하여 황제가 위엄을 발휘할 기회를 준 것이다.


당(唐)대의 대장군 혼감(渾瑊)도 황제에게 올린 보고서가 칭찬 일색이면 두려워하였고, 비평이 많으면 기뻐했다고 한다. 황제가 의심하고 말고는 그렇게나 중요한 것이다. 어떨 때는 손해가 곧 행복인 것이다.


욕을 한다는 것은 당신을 어렵게 보지 않고 자신의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몇 마디의 지적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상사가 당신에게 언제나 예의를 지키고 마땅히 지적해야 될 곳도 넘어가 버린다면 당신은 조심에 또 조심을 해야할 것이다.



어떤 이는 이런 도리를 알지 못하고 일말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고 한다. 진(陳)나라의 개국공신인 후안도(侯安都)는 체면을 위해서 억지로 황궁에서 가족연회를 열었다. 당시 황제는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 행동하였지만 기회를 잡아서 후안도를 죽여버렸다.


당현종(唐玄宗)의 심복인 대장군 왕모중(王毛仲) 역시 자신의 공로와 황제의 총신을 믿고서 어떠한 손해도 원하지 않았다. 한번은 그의 둘째 마누라가 아들을 낳자 100일도 지나지 않은 아이에게 관직을 달라고 하였다. 황제가 5품관직을 내려주었음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내 아들인데 3품관직정도는 받아야되지 않는가?!"라고 계속 졸랐다. 그리고 어떤 아부꾼 신하는 황제가 아직 윤허를 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3품관복을 벗어서 아이에게 덮어주었다. 황제도 "그 아이에게는 3품관리의 의복이 어울리는구나"라면서 결국 허락을 한다.


결국 어떻게 됐을 것 같은가? 그 뒤로 몇 달만에 왕씨가문은 몰락하고 왕모중 역시 자살을 강요당한다. 왕모중은 모반을 꿈꾸지도 않았고, 충성이 변하지도 않았지만 자신이 왜 죽는지도 모르고 끝을 맞이하였다.



당신이 설령 대신이고 대장군일지라도 천하에서 가장 체면을 필요로 하는 황제의 체면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라.


자신의 체면은 어떻게 하냐고? 체면을 지키고 싶은가? 죽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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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지면 근심하고, 가까워지면 고민이네

중국 고대 몇 천 년의 봉건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한번이라도 황제를 뵙기를 소망하였고, 황제가 하사한 성은이 넘치기를 원하였다. 만약 황제의 곁에 있게 된다면 가문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잠시만 잘 생각해보자. 군주 곁에 있는 것은 호랑이 곁에 있는 것과 같다. 황제의 권력은 분명 강력하여 그 반사이익을 누릴수 있다면 어마어마한 권세와 부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황제의 성격이 거지 같기 마련이기에 조금이라도 성격을 건드리면 큰일이 나고 만다.


그래서 황제와 자주 대면을 해야되는 사람들에게 "황제접대학"은 고위험 고수익의 필수과목이었다. 만약 황제를 잘 접대한다면 부귀영화가 굴러들어오게 되지만, 조금의 잘못이라도 있게 되면 목숨이 날아가기 마련이다. 부귀영화와 목숨이 달린 일인데 어찌 열심히 배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보통 황제와 멀어지면 나쁘고, 가까우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도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황제와 멀었을 때는 대접을 받아놓고서는 정작 황제의 곁으로 와서는 화를 당하고는 한다. 정말이냐고? 정말이다. 



예를 들어서 서한(西漢)의 가의(賈誼)는 능력이 출중한 인재였다. 그가 작성한 과진론(過秦論)은 그가 죽은 뒤에도 몇 십년간이나 정치-군사 형세를 좌지우지하였다. 물론 당시의 황제인 한무제(漢武帝)도 매일 매일 가의를 자신의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가의가 매번 황제를 볼 때마다 승진은 고사하고 병신꼴이 되어갔다. 한번은 어렵게 밤의 객잔에서 둘 만의 자리를 가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그에게 귀신이야기나 들려달라고 했으니 말이다. 답답해서 미칠 노릇이었을 것이다.



남북조시대의 북제(北齊)인 이덕림(李德林)도 괜찮은 예시가 될 것인다. 그는 문재가 뛰어날 뿐만이 아니라 군사적 재능도 있었다. 처음 북제(北齊)에서 관리를 하고 있을 때 훗날 중국을 통일한 당시 북주(北周)의 대신 양견(楊堅)은 언제나 그를 칭찬하면서 자신의 품으로 오기를 갈망하였다. 결국 이덕림은 양견의 수하로 들어오게 되고 천하를 통일하는데 크게 이바지 하게 된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양견은 천하가 통일이 되면 이덕림을 후대할 것이라고 공언 하여 천하의 부러움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덕림은 양견을 모시는 10년동안 월급은 한푼도 오르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결국에는 "공무원의 상업금지"이라는 명목으로 쫓겨나게 된다.



사실 그들도 나름 재수가 좋은 편이라고 해야될 것이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기 전에 자신은 한비자(韓非子)을 신하로 둘 수 있는 그릇이 아니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진시황은 한비자를 발탁하고서는 결국 옥에 가두고 죽여버렸다. 


황제를 제대로 접대하지 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상사를 잘 모시지 못해도 직장을 잃을 뿐이니 다행이라고 해야될까?



황제는 천하제일의 의심광일 뿐만이 아니라 자기만 아는 녀석이다. 무엇보다 천하에서 가장 탐욕스러운 인간이다. 어떤 물건이든 모두 그의 것이어야만 한다. 인재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가의나 한비자 혹은 이덕림 역시 자신의 품에 있지 않을 때에는 그들을 차지하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진짜 그들을 가지게 되면 의심병이 발동한다. 우선 "저녀석이 그렇게 잘났으면 난 먼데?"라는 질투심이 생겨난다. 그 다음으로 "저 녀석의 잘난 능력으로 지금은 나를 도와줄 수는 있지만, 결국 나를 해치려는 거 아냐?"라고 하는 두려움이 생겨난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황제 아래서 아무리 뛰어난 인재든 살아남기 힘들다.


소동포(蘇東坡)는 가의가 주발(周勃)이 천평(陳平)과 같은 다른 공신들과 친하지 못해서 권력싸움에서 소외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틀렸다. 만약 황제의 마음에 일말의 틈이 없었다면 어떤 신하가 뭐라고 지껄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무엇보다 주발 역시 한무제의 눈 밖에 나서 옥에 갇히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오히려 가의가 주발과 친한 사이였다면 더욱 큰 일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황제의 입장에서는 "능력 있는 것들끼리 뭔 짓을 하려고 하려고 그렇게 친한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황제접대의 좋은 예인 사마상여(司馬相如)를 살펴보자. 사마상여 역시 처음에는 이덕림과 같은 처지였다. 발탁이 되기 전에는 황제가 직접 "왜 나에게는 이런 인재가 없느냐?"라고 해놓고 정작 정식으로 임용이 되자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자 사마상여는 직접 지방관리직을 신청하여 황제와 멀어진 뒤에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서는 다시 중앙으로 불려와서는 황제에게 태산에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큰 일을 건의해서 한무제(漢武帝)의 마음을 뒤 흔들어 놓는다. 그리고서는 빠르게 퇴직신청을 해서 자신의 집에서 떵떵거리고 산다.


이것이 바로 "멀어지면 근심하고, 가까워지면 고민이네"라는 원리이다. 사실 다 쓸데 없는 소리일수도 있다. 어떻게 황제의 의심을 받지 않느냐가 처세의 핵심이다!


본 글에 관련된 내용은 역사에서 처세술을 배운다 : 황제접대학 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환영합니다. 
본 글은 한국인에 적합하도록 의역하였습니다.(퇴....고...따위...훗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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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접대학은 어떻게 상사와의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할 것인가에 관한 학문이다. 중국은 몇 천 년동안 절대적인 황제의 지배를 받아왔고, 그 속에서 상사와의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예술적이라고 할 수 있는 방법들이 쌓여 있다.

어떻게 이익을 취하고 해악을 피할 것인가?
어떤 시기에 주동적으로 나설 것이고 어떤 시기에 수동적으로 피할 것인가?
어떤 때에 현명할 것이고 어떤 때에 멍청한 척 할 것인가?
어떤 것을 쟁취하고 어떤 것을 양보할 것인가?

그런데 중국 역사는 일반인들이 직접적으로 소화하기에는 규모와 깊이에 질릴 수 밖에 없다. 그런 현대인들을 위해서 황제접대학에서는 일반인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이 자리를 빌어 여러분들에게 소개해볼까 한다.





목차 :
1. 들어가는 말
2. 황제접대학을 시작하며
3. 멀면 근심하고 가까우면 고민이네
4. 어떤 때는 손해가 곧 행복이다.
5. 要学会眼睛里揉沙子
6. 真的"胜棋"就麻烦了
7. 给皇帝一个偷懒的机会
8. 谁是"自己人"
9. 得给自己的脑袋找顶钢盔
10.别把皇靴供起来
11.有时候高官厚禄也能硬讨
12. 顶嘴未必就吃亏
13. 混蛋就得一直混蛋下去
14. 羊有时比狼更可怕
15. 有时候该"贪"就得"贪"
16. 泥菩萨有时砸不得
17. 有时候方术也得信
18. 没事别当偷窥狂
19. 树也不是小问题
20. 顶嘴是需要技巧的 
21. 天下有事再生事
22.  帽子太大戴着累 
23. 扯来虎皮做大旗
24. 要弄清皇帝为啥不用您
25. 应聘CEO 您可想清楚了
26. 撒娇前先照照镜子
27. 舍得孩子也未必套得住狼



작가소개 : 타오두안팡(陶短房)

본명은 타오용(陶勇)이며, 캐나다에 거주하는 대중작가이다. 과거 장기간 아프리카에 거주한 경험을 살려서 현재 종헝주간(縱橫周刊)의 아프리카 문제 연구원으로 있으며, 취미생활인 태평천국사 연구로 이름을 알렸다. 소설, 수필, 문화평론등 다양한 글을 출판하고 있다. 그는 분명 전문적인 역사 연구가는 아니다. 그렇기에 대중을 대상으로 한 간략하면서도 유익한 글을 쓰고 있다.




번역에 대한 이야기

본 글은 원문에 충실한 직역번역은 분명히 아닙니다. 제 마음대로 문장을 늘리거나 요약해놓았습니다. 하지만 그 원문의 뜻은 벗어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어디까지나 한국인들에게 보다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제가 생각하는 허용한도 안에서 최대한의 의역을 했습니다


중국어를 하실 수 있는 분은 从历史掌故说相处的艺术:皇帝公关学로 가셔서 원문으로 즐기시기를 추천드립니다.

본 글은 상업적인 목적으로 번역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재미있는 글을 여러분들과 나누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덧글로 힘을 주지 않으시면 귀차니즘으로 번역 때려칠지 모릅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반응 없어서 때려친 것이 좀 있습니다.(먼산)


본 내용은 원저작권은 타오두안팡에게 있으며, 상업적인 목적으로 번역할 생각이 없기에 따로 번역 허락을 받지 않았습니다. 추후 본 서적이 정식으로 출판이 되면 이 시리즈를 비공개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단, 번역물에 대한 저작권은 저에게 있습니다. 당 번역물을 가지고 가시려면 명확한 출처표기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이야기는 무책임한 정부공사가 민초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전검찰관인 현직 기자 씨에차오핑(谢朝平)이 직접 관련 자료와 인터뷰를 조사하여 담담하지만 날카롭게 재구성하였다. 이 책의 가치는 씨에차오핑이 이 책을 출판한 이후에 섬서성(陕西) 경찰서에서 씨에차오핑을 말도 안되는 명목으로 강제연행하고 가두어서 문자옥의 소리를 듣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면 너무나 쉽게 알 수 있다.



1954 년 4월 중국 국가계획위원회는 황하개발계획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당시 큰 형님이었던 소련의 전문가들의 지도아래  중국 역대 모든 정권의 축복이자 고통이었던 황하치수를 계획한다. 그리고 고작 8개월 만인 12월에 <황하 수해를 다스리고 항하 수리를 개발하는 것에 대한 종합계획보고서>(보통 계획보고서로 약칭)이 만들어진다. 계획보고서의 핵심 내용이 바로 싼먼샤댐의 건설이었다.

1955 년 7월 전국인민대표회의 2차회의에서 현재 장강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싼샤댐과 같이 중국 역대 최고의 치수계획이라는 환호를 들으며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계획에 따르면 싼먼샤댐은 360미터의 높이로 건설되고, 그 안에 360억 입방미터의 물을 가둘 수 있었다. “계획 보고서"에는 중국 역대 어떠한 정권도 해내지 못한 황하 치수를 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싼먼샤 댐을 만듬으로서 90만KW의 전기를 공급할 수 있으며 5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농지에 물을 공급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몇 천년 동안 받아온 황사의 홍수 피해를 없앴을 수 있다고 보고하였다. 또한 황토가 섞여 있어서 흙탕물이었던 황하를 맑게 변화시킴으로서 황하 하류의 강바닥이 점차 높아져서 홍수의 가능성이 높아져서 계속 황하 하류 물길을 바꾸어주어야 되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싼먼샤댐 三门峡



그 러나 “계획 보고서"는 싼먼샤 상류에서 흘러나오는 황토가 쌓여 30년정도가 지나면 더 이상 댐이 아닌 최대 크기의 인공폭포가 된다는 기초적인 문제점조차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상류에서는 계속 황하 상류의 황토가 내려오는데 하류로는 흘려보내지 않는다면 댐에 쌓일 수 밖에 없다는 초등학생들도 생각할 수 있는 간단한 원리조차 무시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계획대로 360미터의 높이로 싼먼샤댐을 건설할 경우  1천평방 킬로미터 이상의 농지가 유실되고 90만명 이상의 주민들이 수몰지구로부터 이주를 해야되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세워져 있지 않았다.

실제로 1957년 4월 처음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1961년 2월 9일  싼먼샤댐의 물높이가 332.58미터가 되는 순간 밀려들어오는 황토들로 인하여 강바닥이 순식간에 높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계획은 강행되었고 1962년 2월 처음으로 15만KW의 발전기를 돌리며 맑은 황하물을 하류로 내보내면서 싼먼쌰댐은 성공적으로 완성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동관潼關과 싼먼샤댐 사이의 싼먼샤댐 상류에서는 단지 57년부터 62년 사이에 강바닥에 4.5M의 황토가 쌓이게 되었다. 또한 기존에는 아무 문제가 없던 황하의 가장 큰 지류인 위하(渭河)에 토사가 가득한 물이 덮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 책의 작가 씨에차오핑谢朝平



1965 년 싼먼샤댐은 “2개의 터널과 4개의 파이프"라는 1차 개조계획을 실행하게 된다. 2개의 터널과 4개의 파이프를 연결해 황토가 강바닥에 쌓이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방안이었고 실제로 1968년 8월에 해당 프로젝트가 완공됨에 따라서 일정부분 황토의 퇴적문제는 완화되었다.  또한 1971년부터 2차개조에 들어가서 8개의 유도수로를 건설하여 황토물을 배출하고 깨끗한 물을 남기려고 시도하였다. 그런데 이 모든 개조개획의 결과 발전기는 당연히 돌릴 수도 없었으며, 홍수를 막기보다는 댐의 수위가 315미터일때 배수량이 초당 9060 입방미터에 달하여서 하류의 홍수를 걱정해야될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상류의 황토 퇴적문제도 제대로 해결이 안되어서 1992년 8월 황하의 지류인 위하(渭河)와 낙하(洛河)에 큰 홍수가 나서 4백 평방킬로미터 이상의 전답이 유실되고 5만 명의 수재민이 발생하는 문제가 생겼다. 그 중 3만 명은 돌아갈 집을 아예 잃어버리는 큰 손실을 겪었다.

싼먼샤 댐은 상수도 확보, 홍수방지, 발전등의 온갖 화려한 미사여구로 시작되었지만, 현재 환경파괴의 주범이며 홍수방지나 발전에도 문제가 있음이 들어났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댐 건설로 인하여 발생하는 이주민들이다.

1954 년의 계획대로 360미터의 높이고 설계가 되었다면 5만평방킬로미터의 농지와 90만명의 이주민이 발생하게 되었다. 1958년 조우은라이(周恩来 주은래)총리의 의견에 따라서 335미터로 낮아졌지만 여전히 1.3만 평방킬로미터의 농지와 31.89만명의 이주민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댐 완공 후에 강변이 무너져 내려서 8.49만명의 이민이 추가적으로 발생하였기에 실질적으로는 40.38만명에 이르는 이재민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러한 이주민들중에 3.99만명은 “당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라는 말에 현혹되어 닝샤宁夏나 깐쑤甘肃등의 황량한 지역으로 이주를 하였고 수 만명이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오랜 투쟁 끝에 드디어 관중평원으로 돌아올 수는 있었으나 자신들의 농지는 이미 외부에서 들어온 다른 이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이주민들은 다시 황량한 근처 산악지대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뒤로 이주민들과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금까지도 끊임 없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이제부터 싼샤댐의 건설로 인하여 온갖 고행의 행군을 한 이주민들의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본 이야기의 저작권은 쎄에차오핑谢朝平에게 있으며, 본인은 해당 작품이 정식 판권을 받아서 한국에 출판되기를 희망하며 전체작품의 30%에 미치지 못하는 분량을 번역하여 소개하도록 하겠다. 다만 본 번역판 자체의 저작권은 본인에게 있으며 상업적 이용을 불허한다.

다시 말해서 상업적인 이용이 아니며 출처표기를 분명히 할 시에는 자유롭게 배포할 수 있다. 더 쉽게 말하면 출처표기를 명확하게 하고 유무형의 대가를 타인에게 요구하지 않는다면 자유롭게 펌할 수 있다.

* ...어차피 이런 종류의 글 읽을 사람 별로 없다는 것을 알지만, 중국에 대해서 깊고 재미있게 파해친 글이기에 조금이나마 번역해보도록 하겠다.............중국이 아웃사이더 주제라고 하니까 아니라고 했지? 중국"돈!!!"이야 다들 관심이 있지. 그러나 정작 중국 그 자체에는 다들 관심이 없다.


평양 - 북한여행기 (PYONGYANG A Journey In North Korea)는 2007년 3월, 37세의 캐나다 애니매이터인 Guy Delisle가  직접 평양을 방문해서 느꼈던 것을 만화로 담은 것이다. 북한에 입국하는 순간부터 출국까지의 여정 속에서 만난 평양 사람들의 얼굴과 표정, 도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어서 북한의 분위기를 잘 전달해주고 있다.

본 작품의 원작저작권은 가이 데리슬러에게 있다. 그렇기에 본인은 해당 작품이 정식판권을 받아서 한국에 출판되기를 바라며, 전체작품의 30%에 미치지 못하는 분량을 번역하여 소개하도록 하겠다. 다만 본 번역판자체의 저작권은 본인에게 있으며 상업적인 이용을 불허한다.

다시 말해서 상업적인 이용이 아니며 출처표기를 분명히 할 시에는 자유롭게 배포할 수 있다. 더 쉽게 말하면 출처표기를 명확하게 하고 유무형의 대가를 타인에게 요구하지 않는다면 자유롭게 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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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만화] 평양 - 챕터03 
[만화] 평양 - 챕터02
[만화] 평양 - 챕터01
[만화] 평양 - 인트로 
평양 - 북한여행기 (PYONGYANG A Journey In North Korea)




















제가 번역한 부분은 여기까지입니다. 왜냐하면 이 이상을 번역할 시 전체 작품의 30%을 넘어서 저작권 위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각주:1].  이 이상은 한국의 출판사가 정식 판권을 받아서 한국에 내놓아주기를 바랄 수 밖에 없군요.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비록 만화여서 출판비가 조금은 더 나오겠지만, 내용적인 면을 생각하면 최소한 본전치기는 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출판관계분들에게 말씀드려 봅니다.

그럼 저는 이런 작품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차원에서 이만 마무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제 주위에 있는 분들의 반농담이 실현된다면 저도 북한에 관한 다른 글을 올릴 수 있겠군요. 뭐 소리냐고요? 저는 조만간 국방의 의무를 다 하러 현역으로 군대에 가게 됩니다. 그리고 북한에 급변사태가 일어날 경우 가장 먼저 북한땅에 들어가거나 관련 실무를 맡게 될 주요인력은 분명히 군인입니다. 고로 저는 북한에 대한 일차사료를 남길 수 있는 사람 중에 하나가 되는 것이죠. 어디까지나 농담이긴 하지만...씁쓸하군요.

어찌되었든........저의 번역은 여기서 끝입니다. 즐거우셨나요?



  1. 물론 상황에 따라서 지금까지의 번역도 저작권위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소지가 있습니다만...전 좋은 의도라는 것을 명백히 밝혔기에 여기까지는 그래도 허용범위?!라고 할까요?? [본문으로]
평양 - 북한여행기 (PYONGYANG A Journey In North Korea)는 2007년 3월, 37세의 캐나다 애니매이터인 Guy Delisle가  직접 평양을 방문해서 느꼈던 것을 만화로 담은 것이다. 북한에 입국하는 순간부터 출국까지의 여정 속에서 만난 평양 사람들의 얼굴과 표정, 도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어서 북한의 분위기를 잘 전달해주고 있다.

본 작품의 원작저작권은 가이 데리슬러에게 있다. 그렇기에 본인은 해당 작품이 정식판권을 받아서 한국에 출판되기를 바라며, 전체작품의 30%에 미치지 못하는 분량을 번역하여 소개하도록 하겠다. 다만 본 번역판자체의 저작권은 본인에게 있으며 상업적인 이용을 불허한다.

다시 말해서 상업적인 이용이 아니며 출처표기를 분명히 할 시에는 자유롭게 배포할 수 있다. 더 쉽게 말하면 출처표기를 명확하게 하고 유무형의 대가를 타인에게 요구하지 않는다면 자유롭게 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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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평양 - 챕터03 
[만화] 평양 - 챕터02
[만화] 평양 - 챕터01
[만화] 평양 - 인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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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 북한여행기 (PYONGYANG A Journey In North Korea)는 2007년 3월, 37세의 캐나다 애니매이터인 Guy Delisle가  직접 평양을 방문해서 느꼈던 것을 만화로 담은 것이다. 북한에 입국하는 순간부터 출국까지의 여정 속에서 만난 평양 사람들의 얼굴과 표정, 도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어서 북한의 분위기를 잘 전달해주고 있다.

본 작품의 원작저작권은 가이 데리슬러에게 있다. 그렇기에 본인은 해당 작품이 정식판권을 받아서 한국에 출판되기를 바라며, 전체작품의 30%에 미치지 못하는 분량을 번역하여 소개하도록 하겠다. 다만 본 번역판자체의 저작권은 본인에게 있으며 상업적인 이용을 불허한다.

다시 말해서 상업적인 이용이 아니며 출처표기를 분명히 할 시에는 자유롭게 배포할 수 있다. 더 쉽게 말하면 출처표기를 명확하게 하고 유무형의 대가를 타인에게 요구하지 않는다면 자유롭게 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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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평양 - 챕터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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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평양 - 인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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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 북한여행기 (PYONGYANG A Journey In North Korea)는 2007년 3월, 37세의 캐나다 애니매이터인 Guy Delisle가  직접 평양을 방문해서 느꼈던 것을 만화로 담은 것이다. 북한에 입국하는 순간부터 출국까지의 여정 속에서 만난 평양 사람들의 얼굴과 표정, 도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어서 북한의 분위기를 잘 전달해주고 있다.

본 작품의 원작저작권은 가이 데리슬러에게 있다. 그렇기에 본인은 해당 작품이 정식판권을 받아서 한국에 출판되기를 바라며, 전체작품의 30%에 미치지 못하는 분량을 번역하여 소개하도록 하겠다. 다만 본 번역판자체의 저작권은 본인에게 있으며 상업적인 이용을 불허한다.

다시 말해서 상업적인 이용이 아니며 출처표기를 분명히 할 시에는 자유롭게 배포할 수 있다. 더 쉽게 말하면 출처표기를 명확하게 하고 유무형의 대가를 타인에게 요구하지 않는다면 자유롭게 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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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평양 - 챕터03 
[만화] 평양 - 챕터02
[만화] 평양 - 챕터01
[만화] 평양 - 인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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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네티즌 1000만명이 본 명작! 이런 여자는 없었다! 최강의 여자 “달.이.”! 웬만해서는 쓸데 없는 것을 번역하지 않으려 했던 본인을 철저하게 무너트린 작품! 남자끼리의 AV 작품도 여유롭게 소화하는 본인도 경악을 금치 못했던 작품! 이제 그것이 다가온다.

본 그림은 东莞时报에서 가져 왔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여인 "달이"을 가장 잘 표현한듯합니다.


최.강.달.이.

아름다웠어야 할 국경일 황금연휴. 나는 최강의 친구 덕에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1박 2일을 보내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절대 허구가 아니며 일말의 과장도 섞이지 않았다. 혹자는 타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이 이야기를 이 곳에라도 하지 않는다면 당장 피를 토하고 죽을 것만 같아서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다.

일단 배경부터 설명을 해야될 것 같다. 본인은 현재 고향을 떠나 상하이에서 근무하고 있는 여자이다. 그리고 이 글의 주인공은 본인의 고등학교 친구로서 타인이 자신을 “샤오유에유에小月月”(아래부터는 한국 정서에 맞게 달.이. 라고 하겠습니다. 보름달할 때 그 달입니다.) 라고 부르길 좋아하는 여자이다. 키는 효모 수준으로 작아서 150이 조금 넘는데 반하여 체중은 보이기로는 대략 70kg 정도인데 그녀 스스로 80kg 라고 말했다.

달이가 방금 사귄 남자친구를 데리고 상하이 박람회에 오게 되었다.  그녀의 어머니와 내 어머니가 친한 친구인지라 내가 그들의 가이드를 해주기로 하였다. 그녀의 어머니도 전화를 통해서 눈물을 머금고는 “애야. 잘 부탁한다. 좋은 곳 많이 데려다 주렴.”이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달이도 나와 젊잖고 어른스럽게 통화를 하였다. 어찌되었든 타향살이를 하는 나에게 고향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이었다.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 때가 10월 1일이었다.

10월 2일 달이는 나에게 3일날 점심 때 상하이에 도착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대신 호텔을 예약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150위엔(한국돈 3만원정도)의 3성급의 호텔이어야 하고, 아침을 무료로 제공해야 될 뿐더러 상하이 박람회장과도 가까워야 한다는 것이다.

국경절 황금연휴에 박람회까지 열리고 있는 상하이에서 호텔방을 구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무슨 3성급에 150위엔 이하의 조건까지 만족 해야 된다는 것인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임무였다. 그래서 내가 머물고 있는 곳에서 머무는 것이 어떠냐고 말했다. 나는 그 때 방 두 개가 있는 집을 빌려 살고 있었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달이는 전화기에서 애교에 몇 번 담갔다가 꺼낸 목소리로 말했다.

“안돼. 남자친구를 데려가는데….밤에 소리가….호호호…호호호…아마….호호호..호호호……너무 클거양~……”

그 당시 그녀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닭살이 솟구쳐 오르는 느낌이다. 어찌되었든 별 수 없이 호텔방을 알아보겠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어렵게 그나마 박람회장에서 가까운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2성급 호텔을 찾아내었다. 단지 비용이 188위엔(약 3만 5천원)으로써 달이가 제시한 기준보다 조금 비싼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 이상 조건이 좋은 곳은 이미 예약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솔직히 나라면 이 정도에서 만족을 했을 것이다.달이에게 전화를 해서 객관적으로 호텔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와서 바꾸라고 했고, 그녀도 그럭저럭 수긍하는 말투였다. 그렇게 호텔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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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날 나는 도착시간보다 일찍 서둘러서 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그녀에게는 분명 역에서 기다린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10시 30분에 기차가 도착했건만 11시 10분까지 기다려도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는 것이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고, 문자를 보내도 대답이 없었다. 나는 무슨 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놀라서 허둥지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11시 15분에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축 늘어진 목소리로 어디 있냐고 물어왔다. 나는 당연히 기차역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달이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유유자적하게 말했다.

“어머! 너 못봤는뎅…..오호호호호..나랑 남편은 이미 택시 타고 호텔에 왔엉……나 호텔 어디 있는지 알거둥~”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인가?! 그래. 그래. 참자. 참자. 나는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갔다.

12시 20분이 넘어서야 호텔에 도착을 했다. 어떻게 이렇게 정확한 시간까지 기억을 하냐고? 앞으로 전개될 1박 2일을 알게 된다면, 이 놀라운 사건들의 시간들을 기억하는 것쯤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될 것이다. 이런 사건들이 발생한 시간을 잊는 다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다.

호텔에 도착하자 일남일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될까? 달이는 고등학교 시절 매~~우 동그랬는데 지금은 그냥 동그랗게 되었다 뿐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얼굴에 뾰두라지가 늘어난 정도의 변화밖에 없었다. 달이의 옆에 서 있는 남자는 정말 괜찮았다. 이제부터 W씨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W는 점잖고 깔끔한 사람이었지만 과묵했다.

달이는 원망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면 말했다. “미웡! 미웡! 사람을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다닝! 이제부터 널 미워할꺼양!!.....다리에 물집이 생기려고 하잖앙!!!....” 칼......칼로 심장을 쑤시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꾸욱 참으며 말했다. “일단 방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프런트에서 체크인을 하고 있을 때, 달이는 여관간판를 보더니 감격하며 말했다 “와우! 오성급이야! 좋아 좋앙!” 분명히 2성 호텔을 예약했는데 갑자기 왠 5성급이냐고 생각하며 여관간판을 보았다. 분명히 2성급이었다. 다만 장식으로 별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이봐…장식이잖아!!!!  그런데 안내원은 방문객도 신분증을 제시해야 된다고 해서 신분증을 건네주자. 달이는 격분을 하며 말했다.

“머야! 무슨 신분증을 제시하라는 거야! 머냐고! 이 사람들은 우리가 쓰리썸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거야? 에궁에궁…어쩌고 저쩌고……”

나는 못 들은 척 하면서 신분증을 안내원에게 주었다. 그런데 무슨 문제인지 신분증이 기계에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다시 시도를 하려고 하자 달이는 더욱 더 흥분을 하며 말했다. “머냐고! 무슨 지명수배범도 아니고 신분증이 왜 안 읽히냐고! 머냐~ 진짜! 너 언제 지명수배 됐어? 너 밤에 나랑 같이 자지마…..나 무서웡….어쩌고 저쩌고….”

안내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신분등록을 마치고 아침식사티켓을 나누어 주었다. 달이는 극도로 흥분해버렸다.

 “왜 아침식사티켓이 2장밖에 안돼! 이 것으로 어떻게 두 명이 먹으란 거야! 머? 뷔페? 뷔페가 먼데? 뷔페면 배불러? 어쩌고 저쩌고….”

프런트의 안내원은 잘도 참으며 천천히 뷔페는 먹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먹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제서야 달이는 행복감 가득 찬 미소를 지었고, 얼굴은 흥분으로 붉게 물들어 갔다.

방으로 올라가려고 하자, 달이는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프런트에 있는 사탕 바구니를 들어올리더니 자신의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는 위풍당당하게 바구니 속의 모든 사탕을 가방에 밀어 넣는 것이 아닌가!!!.......바구니를 적당히 치우고는 투덜거렸다. “무슨 오성급 호텔이 짐 들어 주는 사람도 없어……” 나와 W씨는 조용히 엘리베이터에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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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에서 달이는 또 다시 짜증을 냈다. “상하이 너무 더워! 땀이 줄줄 흐르잖아.” 그리고 W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왜 이렇게 더운 거야. 왜왜왜왜왜왜왜왜왜왜……” 그 장면은 마치 표효하는 말과 같았다. 문득 이상한 것이 보여서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을 자세히 살폈다.

털옷?????? 머?! 진짜 털옷? 그렇다.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은 분명히 겨울에나 입는 두꺼운 털옷이었다. 안 그래도 둥그런 그녀가 크고 두꺼운 털옷을 입어서 운동회에서나 쓰이는 큰 공 처럼 보였다.

하의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중요한 부위 쪽이 터져 있었다. 아마도 거대한 두 다리를 억지로 입고 움직이다 보니 마찰 때문에 터진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녀가 다리를 들어서 W씨에게 기댈 때마다 나는 자줏빛 팬티를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발은 15츠는 족히 넘어 보이는 선홍빛의 킬힐을 신고 있었다. 전체적인 감상은 거대한 공이 컴퍼스 위에 올라가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입는 옷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이유는 최초의 쇼크가 그녀가 입고 있는 옷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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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도착해서 나는 의자로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잘 도착했다고 문제를 보냈다. 그녀의 “남편” W씨는 매우 조용한 사람이었다. 조용히 자신의 짐을 풀어서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달이는……후…당시의 광경을 다시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극도의 공포가 밀려온다.
그녀는 처음에는 에어컨이 왜 없냐고 큰 소리로 떠들더니, 잠시 후에는 콘돔을 찾기 시작했다. 콘돔이 구비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서는 큰 소리로 “오성급 호텔에 왜 콘돔도 없어!!!!”라면서 큰 소리로 욕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당시를 회상하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녀는 나의 자아를 완전히 붕괴시키는 일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녀는 벗었다. 그렇다 옷을 벗었다!!! 정말 옷을 벗어 던졌다!!! 방 안에 몇 년 만에 만난 나와 만난 지 몇 일 안 되는 W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벗었다!! 정말 벗었다!!!!!! 그 순간 나와 W씨는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그 현장을 바라 볼 뿐이었다.

두꺼운 털옷을 벗자 우리는 더더욱 경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브라자가 없었다! 정말 없었다. 단지 배까지 늘어진 거대한 가슴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 다음에 바지를 벗더니…내….내복까지 벗는 게 아닌가?! 나와 W씨는 모든 사고를 정지하고 굳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단지 청바지를 벗으면서도 하이힐을 계속 신고 있어 신기하다는 생각뿐이었다.

호텔방은 일반적이 호텔방의 구조였다. 침대의 맞은편에는 티비가 있었고 오른쪽 창가에는 두 개의 의자와 테이블이 있었다. W씨는 내 근처에 있던 비어있던 의자로 와서 쓰러지듯 앉았다. 그러나 우리의 경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드러냈다. 그래. 당신이 생각하는 그 곳을 드러냈다.

그녀는 하이힐만 남기고 옷을 다 벗어버린 채로 비계를 출렁이더니 팔을 들어 머리를 풀어헤쳤다. 어?!!! 겨…겨드랑이 털이 무성하게 재배되고 있었다. 나는 급히 안경을 벗어서 닦는 척을 하였다. 그리고는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 말을 건냈다.

“달이야….옷..입어. 우리…나가야지…벌써 한시네…성황묘 가야지….”

달이는 나를 완전히 무시하며 침묵을 지키고 있는 W씨에게 혼을 사로잡는 걸음으로 다가갔다. 나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설마 18금인거야? 방에서 나가야되나? 아니면 막아야 되나? 아..그냥 빨리 집에 돌아가 버릴까?”

그 때 달이가 갑자기 잉어처럼 뛰어 올라서 침대로 떨어졌다. 이 민첩한 움직임을 보면서 뚱뚱한 사람은 운동능력이 떨어진다는 이론 따위는 헛소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천천히 굴러서 우리에게 접근을 하였다.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그 모습은 방금 만든 미트볼 같은 모습이었다. 달이는 교태로운 목소리로 신음하듯 말했다.

“아잉~~~ 남푠~ 나 발 아파~~ 아팡~ 아팡~”

-----------계속...........

이 다음부터가 더욱 더 압권입니다만...일단 여기서 쉬도록 하겠습니다. 반응 괜찮으면 계속 하고요. 무엇보다 계속 번역했다가는 제 정신세계가 붕괴될 것 같군요. 참고로 본 번역은 언제나 그렇듯이 제식대로 의역되어 있습니다. 본인도 인터넷 바닥에서 오래 구르면서 별의 별 인간들을 다 봤지만...이건...머................허허허..........................아직은 안나오는데 나중에 되면 이 글을 쓴 작가가 "본인의 상상력이 형편 없었다는 것을 깨닭게 되었다"라는 말이 나온다. 정말 절실히 동감을 한다. 달이는 우리들의 상상력 따위는 가볍게 넘어서는....-_

원문 주소 : 感谢这样一个极品的朋友给我带来了这样一个悲情的国庆,深度八做留恋。

+ 수정사항 : 주인공 이름을 "달이"라고 한다고 해놓고 정작 "막구이"에 전혀 수정을 하지 않고 그대로 "유에"라고 올려놨었군요. 전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모두 "달이"로 수정했습니다.



2007년 3월, 37세의 캐나다 애니매이터인 Guy Delisle  직접 평양을 방문해서 느꼈던 것을 만화로 담았다. 북한에 입국하는 순간부터 출국까지의 여정 속에서 만난 평양 사람들의 얼굴과 표정, 도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어서 북한의 분위기를 잘 전달해주고 있다. 그런데 정작 한국에는 이 책이 번역되어 있지 않다[각주:1].

이것도 번역할까도 생각중이다[각주:2]. 184쪽의 분량은 조금은 많기는 하지만 동생의 더블모니터만 사용할 수 있다면 일주일이내에 충분히 할 수 있을듯 하다. 문제는 판권문제를 해결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어차피 영리의 목적이 아니니 일단 번역해서 올리고 훗날 정식으로 판권계약을 하는 곳이 생기면 내리면 되긴 하지만....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만화번역에서 힘든것은 번역자체보다는 원래 글자를 없애도 번역한 것을 올려놓는 자막작업이다.






  1. 본인이 구하지 못한것이면 말씀해주셔요^^ [본문으로]
  2. 사실 군대는 어디로 갈지 모르지만, 현역으로 가게된다면 본인이 없어서 올려놓을 것을 "저축"해두어야 하기에 한달동안 번역"질"을 좀 많이 해둘 생각인 것이다. 그러니 너무 많은 것을 걱정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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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평양 - 챕터01  (4) 201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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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无我는 "내가 없다"는 뜻으로서 무아지경에서의 무아를 말한다. 불후不朽는 "영원함"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전세계의 인생에 대한 모든 철학토론은 "내가 없음"과 "영원함"이 얼마나 동일한 것인지에 있는듯 하다. "내가 없음"과 영원함"은 언뜻 보기에는 서로 충돌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내가 없기"에 비로서 "영원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을 모두 내가 있다고 느낀다. 사실 내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면 어떤 이도 대답하지 못한다. 먼 옛날 사람들은 편의와 필요에 의하여 "나"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사람들은 "나"를 실제로 존재하는 말로 생각하고 세계에 정말로 "나"가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다. 마치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늘"이라는 실체가 비를 뿌리고 있는 것이 아닌것과 같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 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나는 나의 생각을 알 수 있을 뿐이며 나의 생각은 결코 내가 아니다. 마치 나의 몸이 "나"가 아닌 것과 같다. 만약 나의 몸이 "나"라면 나의 손톱이나 머리카락은 내가 아닌 것일까? 만약 손톱이나 머리카락이 "나"가 아니라면 나의 사상과 생각이 어찌하여 "나"일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의식하는 일상의 모든 것은 단지 "나의 것"일 뿐이지 "나"가 아니다.


그럼 "나의 것"은 어떠한가? 자세하게 살펴보면 "나의 것"이라는 것도 결코 "나의 것"이 아니다. 일상용품부터 살펴보자.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은 "나의 것"인가? 옷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재료와 디자인이다. 그런데 옷의 재료나 디자인 모두가 내가 발명한 것도 아니고 내가 만든 것도 아니다. 옷의 재료는 이미 자연에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이 공장에서 방직기를 돌린 뒤에 세계 각국에 판매하고 있는 것을 살 뿐이다. 디자인 역시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유행에 따라서 만들어낸 것이다.

이 옷의 재료나 디자인은 나와는 관계가 없는데도 이 옷을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나의 것"이라는 말을 왜 하는 것일까? 내가 입고 사용하고 그 소유권이 나에게 있기에 나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 뿐이 아니던가? 구두 가게에 들어가보면 온갖 디자인과 재료의 구두가 전시되어 있다. 이 때까지는 이 구두와 나는 어떠한 관계도 없다. 내가 돈을 지불하고 구두를 신어야만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내가 없어도 방직공장의 천이나 신발가게의 구두 자체는 변함이 없다. 나를 초월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인데 나와 어떤 관련이 있겠는가?

같은 이유로 요리의 맛과 향이나 건축물의 재료나 디자인 혹은 교통수단등의 물질생활에 속하는 모든 것들이 이미 나와는 독립되어서 먼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나와는 관계 없이 존재하며 나와 같이 없어지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나의 것”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인가? 외부의 모든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너는 단지 그 속에 들어간 것 뿐이다. 너는 “나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너야말로 “그들의 것”이다.


그 다음에는 나의 가족, 나의 학교, 나의 동네, 나의 국가라고 불리우는 집단사회생활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들은 모두 나의 것이라고 불린다. 사실 모두가 나의 것이 아니다. 가족만 놓고 살펴보자. 이전에는 대가족이였지만 지금은 핵가족이 되었다. 이전에는 일부다처제였지만 지금은 일부일처제이다. 이전에는 부모의 명령에 의하여 혼인을 하였지만 지금은 자유 연애시대이다. 이전에는 부모형제사촌오촌육촌등의 온갖 복잡한 관계가 형성이 되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변했다. 그런데 이 모든 변화가 나의 생각대로 변화한 것인가? 아니면 이미 그러한 가정이 있고 내가 그 속에 들어간 것일까? 위에서 말한 구두의 예와 같이 결코 내가 이러한 가정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주인이 될 수 있는가? 가족이든 신발이든 모두가 신발가게에서 사온 것과 같기에 너와 나는 주인이 될 수는 없다. 가족 제도에서 학교와 국가와 같은 모든 조직들도 어찌 내가 주인이 될 수 있고 어찌 내가 디자인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은 나보다 먼저 졵재하였고, 나를 초월하여 나의 외부에 존재하며 나와 같이 없어지지 아니한다. 세상은 오래 전부터 이러하였고, 그곳에 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신발에 신겨진 것이고, 이 가정에 태어나진 것이다. 나는 그들의 것이고, 그들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제는 나의 취미나 나의 신앙 혹은 나의 사상등과 같은 정신생활에 대해서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나는 오페라를 좋아한다. 나는 메이란팡(梅兰芳)의 경극을 좋아한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어찌 나의 취미일 수 있겠는가? 메이란팡의 노래라는 취미가 있었고, 내가 그곳에 들어간 것 뿐이다. 메이란팡의 노래는 마치 신발가게의 구두와 같이 나의 취미로 인하여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나의 취미가 없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내가 두보(杜甫)의 시를 좋아하거나 기독교도라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세상에는  두보의 시와 기독교의 신앙이 이미 존재하였고, 내가 그 속으로 들어가진 것 뿐이다. 어디 기독교는 나의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을 뿐이랴? 무엇이 기독교신앙이라고 말하기도 힘들다 . 당신이 만약 기독교 신앙을 자세히 분석을 하면 사실 기독교는 예수 이전에도 존재하였고, 예수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예수조차도 기독교를 나의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엄격하게 말하여 어떠한 한 사람의 사상도 “그의” 사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대체 어떤 사람이 홀로 “나의 사상”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엄격하게 말하여 이 하늘 아래 절대로 진정한 “나의 사상”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나의 것”도 없으며 “나”도 당연히 없다.


어떤 이는 인생은 연극과 같다고 한다. 이 말은 분명이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대본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 너는 무대의상을 입고 등장하여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연기하기만 하면 된다. 역할을 맡은 사람이 변하여도 공연은 대본대로 계속된다. 내가 이 세상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의식주부터 시작하여서 가정과 국가을 비롯하여 취미와 종교신앙이나 철학사상과 같은 모든 것들이 대본과 같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다양한 역할 중에서 한가지를 골라서 연기를 해야 된다. 그리고 내가 무대를 떠날 때 또 다른 역할로 변하면서 공연은 계속 된다. 당신은 무릇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인데, 어떻게 진지하게 "나"을 이야기 할 수 있는가? 당신이 말하는 모든 언어와 동작과 희로애락 모두를 어떻게 진지하게 "나"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기에 "연극의 인생관"은 "내가 없음"의 인생관과 비교적 근접해 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또 "영원함"을 말할 수 있는가? 이 모든 것은 위에서 말한 대로 "나"을 뛰어넘어서 "나"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영원함"이다. 그렇기에 만약 당신이 신발을 신기만 한다면 "영원한" 인생에 참가한 것이 아니다. 신발을 만드는 작업에 참가해야지만 비교적 "영원한 것"이다.


집에 사는 것보다 집을 만드는 것이 좋다. 연극을 보는 것보다 연극에서 연기를 하는 것만 못하며, 직접 각본과 음악에 참가하는 것이 더욱 좋다. 인생과 연극은 분명히 다르다. 인생은 배우인 동시에 제작자이기 때문이다. 한 편으로는 내가 존재하지도 않지만, 한 편으로는 영원토록 변함이 없다.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도 영혼이 계속 존재하기에 영혼 불멸 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중국의 선현들은 입덕입공입언(立德立功立言)이라고 하여 덕을 갈고 닦고, 공적을 쌓으며, 학술적으로 성공하는 것 을 영원 불멸한 3가지라고 말했다. 이 모든 것들은 모두가 사회공통의 것이고 보 잘 것 없이 조그마한 나와는 독립되어서 존재하며 객관적인 발전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죽은 자의 영혼이 바로 이곳에 의존하여 발현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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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모든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과 환영합니다.  본 글은 의역식 번역입니다.
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오랜만입니다. 최대한 쉽게 의역으로 해보았습니다. 혹시 기다리신 분 있으신가요? ^^....대충 번역해 놓고 보니 좀 문제가 있는 표현들이 좀 있군요. 정식 출판이 아니니 그냥 넘기겠습니다. -_;;

孫子曰:凡用兵之法,馳車千駟,革車千乘,帶甲十萬,千里饋糧,則內外之費,賓客之用,膠漆之材,車甲之奉,日費千金,然后十萬之師舉矣。

손자 가라사대 :
군대를 운용하게 되면 경전차 1000대와 중전차 1000대 그리고 병사 십만이 필요할뿐더러 그들을 위한 천리길의 먹거리 수송이 필요하다. 이렇게 밖으로 소비되는 돈 이외에도 외교전과 전차와 갑옷의 수리에 들어가는 비용이 막대하다. 이런 비용을 감당할 수 있어야만 10만군대를 일으킬 수 있다.


2. 전차병(사士)와 독립보병(병 徒, 兵)
최초로 출현한 병종은 당연히 보병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보병은 가장 기본적인 병종으로 남아 있다. 손자병법의 보병은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전차에 관련된 전차병이고, 다른 하나는 독립된 보병인 일반병사였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그리스와 로마의 병사가 바로 독립보병이다. 그들은 갑옷을 입고, 방패를 차고서는 긴 창으로 창날의 벽을 형성하였다. 당시의 농업민족은 선거권이 있는 공민만이 전사가 될 수 있었고, 그들은 모두 보병이었다. 기병은 북방의 게르만족을 고용하여서 유지하였다. 당시 로마인들은 말을 타고 전투를 하는 것은 겁쟁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북방유목민족이 남쪽으로 이동을 하면서 철저한 패배를 맛보게 되면서 기병의 중요성을 깨닭게 되지만 보병의 중요성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사와 병은 모두가 보병이다. 그러나 장기에서 사는 왕의 바로 곁에서 왕을 수호하지만, 병은 후퇴를 할 수 없고 특별한 공격력도 없는 허약한 존재인 것처럼 이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사는 전차병으로서 전차에 올라타서나 전차의 주위에 있던 갑옷을 입은 입은 보병을 의미한다. 그러나 병은 전차와 관련이 없이 갑옷을 착용하지 않은 보병이며 평시에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받지 않았다. 병사는 사실 전투를 보조하거나 전투물자를 운반하거나 음식을 만드는 등의 후방지원을 하던 인력이었다. 그러나 춘추시대 후기로 올 수록 병사의 숫자가 증가하였고, 독립적인 부대로 편성되기 시작하였다. 원래 비교적 신분이 낮았던 병사들이 정규병으로 편성되기 시작했고, 그들 역시 갑옷을 입기 시작하였다.

사실 현재에는 독립보병라는 말로 동일시 되는생 도徒와 졸卒은 사실 조금 달랐다. 도徒의 기본적인 뜻은 "걷는 사람步行也"이라는 의미이다. 군인은 걷고 또 걷는다. 졸卒는 의衣와 같은 의미로서 보급병이라고도 하고, 하급계층이 입는 옷에서 연유하였다고도 한다. 어찌되었든 군사학상에서는 도와 졸 모두가 비슷한 뜻으로 사용되거나 도졸徒卒라고 합쳐서 사용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졸은 단순히 하급병사를 의미할 뿐만이 아니라 군사편재단위를 나타낸다.

고대 군사의 편재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초기의 10인제와 후대의 100인제이다. 10인제는 정확하게 십오什伍제도로서 10명을 십什이며, 5명은 오伍라고 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서주시대부터 춘추시대 초기까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후대로 올 수록 병력의 숫자는 증가하였고 십오제도는 군대의 최하급 편성단위가 되었다. 100인제는 졸냥卒兩제도였다. 100명 단위를 졸이라고 말했고, 25명을 냥라고 하였다. 4개의 냥가 모여서 1개의 졸이 되는 것이다.

전차에는 전차에 타는 3명을 합쳐서 전차병은 총 75명이 동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독립보병 72명이 같이 행동하였다. 보급차에는 총 후방요원 25명이 배정되었는데,배식담당10명, 의복담당 5명, 사료담당 5명, 잡일담당 5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만약 전투요원만 생각한다면 75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후방요원까지 합친다면 정확하게 100인제가 되는 것이다. 100인제는 비교적 새로웠던 제도였다. 이런 100명에게는 한대의 전차가 주어졌는데 병력은 어떻게 배치되었을까? 조조의 신서新書에 따르면 아마도 전차를 중심으로 전후좌우에 배치되었으며 3냥(75인)이 실제로 전투를 담당하였고, 1냥(25인)은 후방에 위치하며 후방임무를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조조의 해석은 조금 다르다. 그는 사마법司馬法의 10인제를 근거로 치거(馳車)만을 말이 끄는 전차로 생각하였고 혁거(革車)을 소가 끄는 보급차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전차인 혁거에 전투요원 10명, 후방지원 5명이 같이 하였고, 보급차인 혁거에 보급요원 3명이 같이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는 1000대의 전차를 가지고 있어도 인원은 18000명에 불과하며, 10만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송나라의 장예張預는 조조의 해석을 사마법司馬法의 100인제로 재해석하였다. 장예는 치거는 공격전차이고 혁거는 수비전차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공격전차인 치거 3부대가 앞과 좌우에 있고, 후방에 수비전차인 혁거 1부대가 있으며, 각각의 부대는 25명이 배치되어있다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설명은 비교적 합당하나 이미 혁거가 소가 끄는 보급전차가 아니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가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아마도 실제로는 경전차인 치거 한 대가 전방에 위치하고, 중전차인 혁거 한 대가 후방에 위치했을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전차에는 좌우에 1냥(25명)씩 배치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보급차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보급차는 군대의 뒤쪽에서 따라오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나라의 군사제도는 관중管仲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보통 소융小戎이라고 불렀다. 소융은 전차의 또 다른 이름인데, 한 대의 소융에는 50명이 배당되었다. 이를 생각해 보았을 때 각각의 전차에는 50명씩 배치되어서 총 2대의 전차로 100인제가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3. 기마병
기마병은 전차보다 후대에 나타났다. 서아시아에서는 야수亚述 궁전 벽화를 놓고 보았을 때 약 기원전 800여년쯤에 처음 기병이 나타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조赵나라의 무령왕武灵王이 북방이민족의 옷을 입고 말을 타며 활을 쏘았다胡服骑射라는 말을 생각하면 기본적으로 전국시기 쯤 기병이 나타났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물론 혹자는 상나라시대에도 기병이 존재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아직 학문적으로 입증이 되었다고 하기는 매우 힘들다. 다만 흉노匈奴와 동호东胡가 모두 전국 말기에 몽골에서 시작되었으며, 조나라 역시 지금의 베이징 위쪽에 위치했던 국가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조나라가 북방민족에게 몸에 딱 붙어서 말을 타기 쉬운 복장과 말을 타고 화살을 쏘는 기술을 배웠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당시의 기병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기병이 결코 아니었다.

흔히 기병이라고 하면 삼국연의의 유비 삼형제와 여포가 말 위에서 싸우는 일기토전을 연상하고는 한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는 물론이고 삼국시대에도 그러한 기병싸움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설처럼 삼국시대에 일기토가 벌어졌다면 그들은 모두 말에서 굴러 떨어져서 부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등자가 존재하지 않았거나 단지 말을 탈 때 발을 디딜 수 있는 용도로 사용되는 한발 등자만이 존재하였다. 그렇기에 달리는 와중에 서로 칼을 겨누며 격투를 한다는 것은 말에서 떨어지겠다는 소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양발 등자는 사실상 몽골제국 초기에 완성이 된 것이다. 몽골이 대제국을 이룰 수 있었던 바탕에는 단순히 호전적인 성격과 공격적인 전략만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의 도움도 받았던 것이다.

원나라 시기 이전의 기병은 말을 타는 궁수의 개념이었다. 말을 타고 열심히 적에게 접근을 해서 말에서 내리거나 말을 안정적으로 정지를 시킨 이후 화살을 쏘고 적이 접근해오면 열심히 달려서 물러난 다음에 다시 화살을 쏘는 개념이었다. 그러하기에 장기에서도 말은 현란한 움직임을 보이면서도 멱이라고 하여서 일보 전진하는 자리에 장애물이 있으면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마병이라면 장애물을 뚫고 가야 할 것이지만 당시의 기마병은 궁병이었기에 멱에 걸려버리는 것이다.


본 글에 관련된 내용은 리링의 손자병법이란?을 참고해주십시오.
저는 여러분의 관심으로 번역을 한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전에 해 놓았는데 정신이 없어서 있는지도 몰랐군요. 너무 오래동안 글을 안 올려서 미완성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올려봅니다. 퇴고는 당연히 없었으니 알아서 봐주셔요. 저는 계속 졸업논문 작업을 하러 가겠습니다.

오탈자는 악몽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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