孫子曰:凡用兵之法,馳車千駟,革車千乘,帶甲十萬,千里饋糧,則內外之費,賓客之用,膠漆之材,車甲之奉,日費千金,然后十萬之師舉矣。

손자 가라사대 :
군대를 운용하게 되면 경전차 1000대와 중전차 1000대 그리고 병사 십만이 필요할뿐더러 그들을 위한 천리길의 먹거리 수송이 필요하다. 이렇게 밖으로 소비되는 돈 이외에도 외교전과 전차와 갑옷의 수리에 들어가는 비용이 막대하다. 이런 비용을 감당할 수 있어야만 10만군대를 일으킬 수 있다.

1. 차
장기에서 차를 빼앗기면 게임에 진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차가 얼마나 중요한지 쉽게 알 수 있다. 춘추시대에는 전차는 전쟁의 핵심중에 핵심이었다. 전차는 현대전의 탱크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 무게와 돌격력으로 적진을 밀어버리는 무기이다. 전차의 시작은 당연히 말을 사육하게 된 이후에나 가능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기원전 4000년전부터 말과 같이 했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기원전 2000년전에는 마차도 만들어졌으리라 생각되고 있다. 말의 사육과 마차의 발명은 전쟁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상나라시대의 군사책임자는 말马이라고 불렀고, 주나라에서는 군사책임자를 사마司马라고 불렀을 정도로 말을 중시하였다. 고대에 전쟁과 관련된 제사의 이름도 마제祃祭로서 말과 관련이 되어 있다.

현재 우리는 말이라고 하면 유럽의 기사들이 두꺼운 철갑을 두르고 말을 타는 것을 연상하고는 한다. 그러나 고대에는 말을 타는 것이 아니라 영화 벤허에 나오는 것처럼 말로 수레를 끄는 전차를 위한 동물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세계 각 지역의 전차의 모습은 각기 조금씩 달랐다. 서아이사형 전차는 바퀴살의 숫자가 적었고, 가마가 바퀴의 앞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스-로마의 전차는 바퀴와 가마가 수직으로 되어 있지만, 바퀴가 작았고 가마가 낮았으며 서아시형처럼 바퀴살의 숫자가 적었다. 중국의 전차는 바퀴살이 많았으며, 바퀴와 가마가 수직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의 전차는 중앙아시아 전통의 마차의 흐름을 이어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소가 말보다 먼저 언제 사람에 의하여 가축으로 키워졌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정확한 시기나 바퀴가 언제 발명되었는지등은 아직까지도 고고학계의 뜨거운 화두이다. 라틴어계열에서는 일반적인 수레는 cart라고 불렀으며, 소가 끄는 말을 ox cart로 불렀다. 전쟁에 사용되는 마차에 대해서는 chariot라고 불러서 중시하였다. 마차의 기동력과 돌파력은 전쟁에서 매우 중요하였다.

중국에서 전차는 춘추전국시대에는 전쟁에서 없어서는 안 될 병기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전차는 넓은 평지를 제외한 지형에서는 기동성과 돌파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결정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기마궁병을 통한 빠른 이탈공격방식이 생겨나면서 전차의 지형적 제한성으로 인하여 진한시대를 기점으로 점차 줄어들었갔다.


1.1. 경전차와 중전차 (벌쳐와 시즈탱크)
손자는 전차를 치거(馳車) 혁거(革車)로 나누었다. 치거는 경전차로서 스타크레프트의 벌쳐라고 생각하면된다. 혁거는 반대로 중전차로서 스타크레프트의 시즈탱크라고 생각하면 된다. 경전차는 춘추전국시대의 서적에서는 그리 자주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중전차는 많은 고서에서 나오게 된다. 중전차가 경전차보다 먼저 탄생을 하였는데, 중전차가 혁거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전차을 피혁으로 감쌓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중전차는 경전차보다 훨씬 더 오래전에 탄생했으나 한대부터는 오히려 거의 출현하지 않게 된다. 송대 이후에다시 부활하는 것처럼 보이나 이것은 이름만 딴 것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 경전차는 기존의 중전차를 개조한 신형 전차로서 기동성이 훨씬 더 뛰어나서 공격용으로 좋았다. 그에 반하여 중전차는 움직임이 둔하여 방어용도로 효과적이었다. 마치 스타크레프트의 벌쳐와 시즈탱크을 연상하면 거의 다르지 않다.

조조는 손자병법에 주석을 달면서 경전차와 중전차를 각각 전차와 보급차(치중차 辎重車)라고 해석하였다. 조조의 이런 해석은 사마법일문(司馬法逸文)에서 유래하였다. 사마법에서는 치거를 전차로 해석였고, 혁거를 사람이 인력으로 끄는 병기, 의류, 양식등을 운반하는 치중차로 해석을 하였다. 그러나 현재 사료상에서 보이는 치거와 혁거 모두가 말이 끄는 차로서 사람이 탑승하였다.


1.2. 전차와 보급차 (말과 소의 차이)
고대의 수레는 동력에 따라서 마차와 우차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말이 끄는 수레이며, 후자는 소가 끄는 수레이다. 마차는 보통 4필의 말이 끄는 수레였으며 사람이 탑승할 뿐 화물을 운반하지는 않았으며 속도가 빨랐다. 위에서 말한 경전차와 중전차 모두가 마차에 속한다. 그에 반하여 우차는 한 두의 소가 끌었으며 사람을 태우지 않고 화물을 운반하고는 했으며 속도가 느렸다. 다음 구절에서 나오는 구우대차(丘牛大車)가 바로 소가 끄는 마차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작은 차小車와 큰 차大車로 이를 구별하였다.

논어에는 "큰 수레에 끌채가 없고  작은 수레에 끌채 끝이 없다[각주:1]"라고 하였다. 포함(包咸)은 주을 통해서 큰 차는 소가 끄는 차이며, 작은 차는 말이 끄는 차라고 해석하였다. 이를 형병(邢昺)은 고공기考工記을 인용하며 말이 끄는 수레는 단순히 전차만이 아니었고, 사냥뿐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사용되던 수레도 작은 수레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현재까지의 고고학 발굴에 따르면 마차는 상대 말기에 쓰였다고 할 수 있다. 우차의 상황은 아직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상나라 시대의 성인 언사상성(偃師商城) 유적에서 발견된 바퀴자국을 가지고 어떤 이는 마차에 의한 자국이라고 말을 하고 어떤 이는 우차에 의한 자국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의 청동기 기물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바로 서주시대 말기의 사동정師同鼎이다. 사동정에는 주나라와 유목민족간의 싸우미 서술되어 있다. 주나라의 군사장관을 사동師同이라고 불렀는데 이 글에서는 그가 획득한 물건들이 적혀 있다. 그 중에서 마차와 우차 모두가 눈에 띄인다. 이것은 당시에 전쟁에 마차와 우차가 모두 동원되었다는 중요한 근거이다.


1.3.전차부대의 수량과 전쟁의 규모.
"경전차 1000대와 중전차 1000대 그리고 병사 십만이 필요[각주:2]"라는 말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 전쟁에 동원된 전차와 병력의 수량을 생각해볼 수 있다. 국력에 따라서 시기에 따라서 다르기는 했으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당시에 중요시 하던 병력은 경전차, 중전차 그리고 병사 순서였다는 점이다. 지금 현재 핵무기의 보유를 최우선적으로 생각하고 그 다음에 미사일의 숫자, 전투기의 숫자등으로 전쟁 수행시 중요도를 고려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조무왕은 상나라를 정벌하면서 전차 300량과 전사 3000명을 동원하였다고 한다[각주:3]. 지금 전쟁을 생각하면 상당히 조그마한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춘추시대 제후국들은 각자 1000량의 전차만를 보유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서 노나라가 처음 곡부曲阜에 봉해진 이후 전차(革車) 천 대도 보유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제齊나라, 진秦나라, 진晉나라, 초楚나라등은 모두가 1000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러하여 "전차 천대의 국가千乘之國"라는 이름으로 불리고는 하였다[각주:4]. 그러나 실제 전쟁에 출동했던 전차는 몇 백대에 불과하였다고 생각된며, 800대가 동원된 전쟁이 최고 동원 수량이었다.예를 들어서 성복전쟁(城濮之戰)에서 진晉나라는 700대의 전차를 내보냈으며[각주:5] 안전쟁(鞍之戰)에서는 800대를 동원하였다.  애릉전쟁(艾陵之戰)에서는 제齊나라가 800대를 동원하였다[각주:6].자산子產이 진陳나라를 공격할 때에는 정鄭나라는 700대의 전차를 동원하였다.[각주:7]

당시에는 전차와 사병이 같이 다녔으며, 보통 10명을 단위로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한 대의 전차와 전사 10명이 같이 다니는 것이다. 당시의 강국에게 붙여졌던 "전차 천대의 국가"에서조차 전사 1만명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사마법일문(司馬法逸文)에서 규정한 것과 동일하다. 설사 평민병사(徒)을 합친다고 하더라도 3만에 불과하였다. 

서주의 군사제도에서 사(帥)가 군대내 최고위 관직이었다. 춘추시대에는 군軍이 최고위관직이었는데 주례에 따르면 왕은 6군을 거느리고, 대국은 3군을 거느리며 차국은 2군을 거느리고 소국은 1군을 거느린다고 되었다[각주:8]. 이를 통해서 우리는 "천대의 전차"와 "3군"이 대략적으로 동일한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춘추시대 군사제도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자주 진晉나라의 예시를 들고는 한다. 기원전 678년 진무공晉武公은 1군만을 거느리고 있었다[각주:9]. 기원전 661년에는 진헌공晉獻公이 상하 2군을 만들었다[각주:10].  기원전 632년에는 진문공晉文公은 이미 상중하 3군을 거느리고 있었고, 진경공晉景公은 6군을 거느렸다[각주:11]. 그 밖에 진나라에서는 성복전쟁(城濮之戰)이전에도 독립보병부대가 나타났었고, 성복전쟁(城濮之戰)이후에는 상중하 3행(三行)으로 증가하였다. 전차 3부대와 보병 3부대를 합치면 6군이 되며, 이는 천자의 군사제도와 비슷하다. 만약 주례周禮에 따라서 1군을 12500명이라고 한다면, 6군은 75000명이 된다. 그렇기에 춘추시대의 전쟁규모는 몇 만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가면서 전쟁의 규모는 날로 커져간다. 예를 들어서 진晉나라는 총 49개현縣을 통치하고 있었는데, 매 현에서 100대의 전차를 징발하여 총 4900대을 운용하였다[각주:12]. 초楚나라는 단지 진陳, 채蔡, 동불갱東不羹, 서불갱西不羹의 변두리 4개 현에서만 각각 1000대의 천자를 징발하여 총 4000대였던 것을 생각하면 막강한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사항을 통해서 손자가 말한 "전투전차 1000대와 수비전차 1000대 그리고 병사 십만"은 춘추시대 말기의 전쟁 규모를 반영하고 있다. 과거에 일부 학자들은 손자의 시기에 전차 2천대나 전사 10만명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이 당시의 수준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이 들어나고 있다. 손자는 당시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던 것이다.

전쟁의 규모가 나왔으니 몇 가지 부언을 하고자 한다. 중국 고대 전쟁사 연구에서 전쟁 규모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8세기 이전의 유럽에서는 10만명 이상이 참여간 전쟁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대륙에서는 춘추시대부터 10만명이 동원된 전쟁이 일상적으로 벌어졌고, 시간이 흐를 수록 전쟁의 규모는 커져갔다. 당시에 쓰여진 다양한 서적에서는 "전차 만대의 황제과 전차 천대의 군주[각주:13]"이라는 기록되어 있어서 이를 증명한다. 전국초기의 상황은 아직 분명하지는 않으나, 춘추시대 후기와 비슷하리라 생각된다. 당시의 병력은 10만명 이하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서 진晉나라가 분리되어 성립된 위魏나라는 전국시대 초기의 최강국이었다. 명장 오기吳起는 위문후魏文侯와 위무후魏武侯을 모시며 그의 이상이 5만의 군사를 모아서 적을 멸망시키겠다[각주:14]"라고 했던 일을 보면 당시의 전쟁 규모가 비교적 적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국시대 중기를 넘어서 후기로 갈 수록 상황은 완전히 변한다. 기원전 303년부터 기원전 301년 제齊나라와 위魏나라 그리고 한韓나라가 초楚나라를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기원전 300년부터 기원전 296년 사이에 조趙나라는 중산中山국을 공격하여 멸말시킨다. 이 두차례의 전쟁 모두 20만명이 동원되었다. 당시에 7대국들은 몇 십만명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진秦나라는 심지어 백만명이 넘는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기원전 293년 이궐伊闕전쟁에서 진秦나라의 백기白起는 한韓나라와 위魏나라의 군대 24만명을 물리쳤다. 기원전 279년에는 언鄢전쟁에서 백기는 수공으로 성을 공격하여 물에 빠져 죽은 초楚나라 병사와 백성이 수십만이었다.  기원전 273년의 화양華陽전쟁에서 백기는 조趙나라와 위魏나라 군사 15만명을 죽였고, 기원전 260년의 장평長平전쟁에서는 항복한 조趙나라 군사 40만명을 생매장하였다. 언급한 4번의 전쟁만으로도 근 몇 백만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 현재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산동지방의 6개국의 병력은 진나라에 미치지 못하였고 약 50만정도의 병력만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전부를 합치면 약 400만명인 것이다. 당시의 인구는 지금만 하지 못하였지만 거대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사상자의 숫자도 거대하여 세계대전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중국에서 병법이 발달했던 원인이 된다.

병법이란 수 많은 피의 경험으로 얻어진 것이다.
 

본 글에 관련된 내용은 리링의 손자병법이란?을 참고해주십시오.
저는 여러분의 관심으로 번역을 한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제가 번역하면서 제일 짜증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실 일반 독자들에게는 생략해도 되는 출처와 원문들을 당연히 해야된다고 생각하면서 적어넣고, 그 뿐만이 아니라 지명과 인명과 같은 고유명사에 저도 모르게 한자를 다 넣어버린다는 점입니다. 이것만 안해도 절반 이하의 시간이 걸리겠지만......전 이미 세뇌되어서 별 수 없습니다. ㅠㅠ 그나마 최대한도로 줄인 것이 이정도랍니다.

다음에 해야되는 병사관련 부분도 좀 복잡한데..그래도 전차만 하리오~~~!
제일 짜증나는 것은 넘겼다~~~!!!





  1. 大車無輗,小車無軏(論語 為政) [본문으로]
  2. 馳車千駟,革車千乘,帶甲十萬 [본문으로]
  3. 革車三百兩,虎賁三千人<孟子 盡心下> [본문으로]
  4. 左傳 哀公十四年) [본문으로]
  5. 左傳 成公二年 [본문으로]
  6. 左傳 哀公十一年 [본문으로]
  7. 左傳 哀公二十五年 [본문으로]
  8. 王六軍,大國三軍,次國二軍,小國一軍 周禮·夏官·司馬 [본문으로]
  9. 左傳 莊公十六年 [본문으로]
  10. 左傳 閔公元年 [본문으로]
  11. 左傳 成公三年 [본문으로]
  12. 左傳 昭公五年 [본문으로]
  13. 萬乘之主,千乘之君(莊子,韓非子) [본문으로]
  14. 以五萬之眾,而為一死賊(吳子) [본문으로]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ukhoi25 BlogIcon 미키맨틀 2010.04.12 23:10

    번역 잘 봤습니다 ^^. 전차는 오늘날의 탱크보다 더욱 위력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손이 많이 가는 물건이었고요.
    뱀발:中山국이 국호가 참 특이하네요..

    • Favicon of https://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바로 2010.04.12 23:41 신고

      전차 만쉐~~ 참고로 다음편에서는 소위 "일기토"을 좀 까대줍니다. 전차 만쉐!! -0-;;


      ..아..질문이 변했군요^^:::::

      중산국의 경우 보통 "조금 다른 존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민족의 경우 정확한 사료를 알 수 없어서 잘 모르기는 합니다.

      다만 중산中山이라는 두 글자 나라명때문에 이민족이라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럼 초楚나라는 절대 이민족 정권이지 않겠지만, 실질적으로는 분명히 문화적 차이가 있었다고 생각되었으니까요.그리고 그것은 출토유물들과 사료를 토대로 추론한 것이지 이름이 2자라는 이유는 방증은 될 수 있지만....

      사실 "다른 존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금 생각하는 "민족"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것도 있습니다.

  2. Favicon of http://cosmopolitan815.tistory.com/ BlogIcon cosmopolitan815 2010.04.12 23:46

    오..간만의 업뎃이군요..ㅋ

  3. 털구 2010.04.15 11:32

    전 참 복도 많습니다. 편하게 앉아서 이렇게 좋은 글을 읽을 수 잇다니.. ㅎㅎ 흥미를 갖고 애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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