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한 해동안 중국을 방문한 한국인이 무려 450만명에 달하며,  중국에서 장기거주하는 한국인이 60-70만명으로 추산되는 상황에서 중국은 더 이상 먼나라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살다가 외국땅에 오면 가장 힘든 것이 의식주, 그리고 한국인에게는 더이상 사치품이 아닌 필수품 - 휴대폰이다.


현재 중국의 휴대폰 사용은 상당히 발전해있으며, 다양한 휴대폰 상품들이 범람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이 자랑하는 통신인프라에 비하면 초라해 보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고, 한국과는 다른 휴대폰 사용방법과 문화를 가지고 있기에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많이 혼란스러워 한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준비했다.


중국에서는 휴대폰을 手机(쇼우지 shouji)라고 부른다.

한국어로 직역하면 "손기계" ^^



1) 중국의 통신회사 - 무슨 서비스를 사용할 것인가?

한국에 SK텔레콤, KTF, LG텔레콤이라는 회사가 있다면, 중국에는 联通(리엔통)과 移动(이동)이라는 휴대폰 회사가 있다. 한국사람들에게 익숙한 CDMA을 중국에 도입한 것은 리엔통이지만, 중국 사람들에게 더 잘 터진다라는 소리를 들으며 사실상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것은 이동(移动)이다.

이 두 회사에서는 다양한 방식의 요금 체계를 내 놓고 있다. 하지만 한국분들이 절대적으로 주의해야될 부분이 있다. 중국에는 유럽표준인 GSM방식이 먼저 도입이 되어서 휴대폰 기본 요금은 어디까지나 거는 전화와 받는 전화 모두 돈을 지불한다. 요즘은 받는 전화를 무료로 제공해주는 옵션이 등장했으니 한국분들은 해당 옵션을 꼭 선택하는 것이 좋다.


이동의 요금체계 : http://www.cnii.com.cn/20040423/ca258686.htm

리엔통의 요금체계 : http://www.cnii.com.cn/20040423/ca258687.htm


       VS    


간단하게 요약하면 사실상 차이가 없다. 거의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며,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그게 그것이다. 하지만 미세한 차이는 있다. 예를 들어서 动感地带(똥간띠따이)라고 불리우는 서비스의 경우 무려 200개의 문자메세지를 꽁짜로 더 준다. 그런 이유로 학생들이 자주 이용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몇가지 독특한 서비스가 있다. 더 구체적으로 추천해 드리자면 :

** 전화번호

联通(리엔통) 은 130,131,132,133 로 시작하는 전화번호를 사용.

移动(이동)은 135,136,137,138,139 로 시작하는 전화번호를 사용.


1 - 회사원의 경우 :

회사원들은 거는 전화도 많고 받는 전화도 많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동이 훨씬 더 잘 터진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회사원의 입장에서는 안정적인 서비스가 최우선이니만큼 移动(이동)의  神州行(션조우싱)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来电畅听100(받는 전화 100분 무료. 매달 12원)나 畅听无限(받는 전화 500분 무료. 매달 30원)과 같이 받는 전화를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싸게 서비스 받을 수 있다. 꼭 신청하는 것이 좋다.


2 - 활발한 학생의 경우

이런 분들에게는  移动(이동)의 动感地带(똥간띠따이)을 추천한다. 무료 문자 메세지 매달 300통에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는 매달 30분의 무료통화를 제공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학생들을 위한 서비스인 것이다.


3 - 조용한 학생의 경우

전화를 잘 걸지도 않고, 문자도 잘 걸지 않는 내성적인 분들은 联通(리엔통)의 如意133을 추천한다. 해당 서비스는 한국인들이 제일 많이 사용하는 서비스중에 하나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휴대폰 서비스과 사실상 동일하기 때문이다. 만사 귀찮고 한국과 똑같을 것을 원하시는 분은 이 서비스를 이용하시면 된다.


4 - 반드시 피해야되는 서비스 - 小灵通(샤오링통)

网通(왕통)에서 서비스하는 小灵通(샤오링통)은 결코 사용해서는 안되는 지옥이다. 왠만한 곳에서는 사용을 할 수가 "없다". 예전의 시티폰 서비스를 생각하면 된다. 전화번호만 만들어두고 다른 사람과 연락을 하고 지내기 싫다는 분들은 즐겁게 이 서비스를 선택하시면 된다.


5- 햅틱에 어울리는 서비스

햅틱의 정확한 중국판매일정이 나오지 않은 상태이고, 현재 중국의 이동통신회사들이 한창 흡수-합병중이어서 정확하게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햅틱의 다양한 인터넷 로밍서비스 기능을 사용하려면 移动(이동)의 서비스를 사용해야된다고 생각한다. 移动(이동)은 로밍서비스을 위한 다양한 요금 옵션을 이미 준비해놓고 있으니, 자신의 사용량에 따라서 선택하면 된다. 무엇보다 삼성과 이동은 베이징올림픽에 대한 협력을 이미 약속했고, 이런 협력은 올림픽 관련 사항 뿐만이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계속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2) 휴대폰 기기

현재 중국에서 제일 많이 팔리는 기기는 노키아의 기기이다. 노키아의 주요 목표는 아시아 지역, 아니 중국이 최대목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국 지역에 많은 역량을 투자하고 있다. 그에 반하여 삼성휴대폰은 유럽과 미국지역에 그 힘을 투자하고 있어서 중국에서는 겨우?! 2위의 순위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삼성 휴대폰에 대한 중국인들의 이미지는 상당히 좋은 편이다.

혹자는 한국에서 휴대폰을 가지고 와서 개조를 하면 된다고 한다. 해당 방법을 사용하면 한국에서 나오는 최신식 휴대폰을 금방 사용할 수는 있지만 이미 세계화 시대에 한국과 중국의 휴대폰 기기발매는 길어야 6달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며, 이런 방법을 사용하면 제한된 서비스를 사용할 수밖에 없으며, 무엇보다 이런 개조를 하면 정식 AS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한국에서 가지고 온 휴대폰이기에 중국어 문자가 지원되지 않는다. 이 말은 중국애들과 놀지 않겠다는 말이라고 해도 다를바가 없다. 어떻게 생각해도 좋은 점보다는 나쁜 점이 너무나 많다.

중국에서는 GSM방식이든 한국의 CDMA방식이든 기본적으노 SIM 카드라는 전화번호 카드를 사용한다. 또한 대부분의 요즘 휴대폰은 자동적으로 GSM방식과 CDMA방식에 모두 대응할 수 있게 나와있다. 사용하고 싶은 서비스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에 드는 상품을 고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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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에 악명을 떨치고 있듯이, 다양한 중국기업의 짝퉁폰들 이 있다. 하지만 이런 짝퉁폰들은 품질이 너무나 떨어지는 관계로 사용하면 깊이 후회하게 된다. 또한 가짜 배터리도 많이 있다. 가짜 배터리는 정품 배터리에 비하여 가격이 30%정도밖에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 폭팔할지 모르는 스릴넘치는 생활을 할 수 있다.

중국에는 다양한 휴대폰 대리점이 있다. 물론 몇몇 더 싸게 살 수 있는 지역들이 있지만 중국어가 어느정도 되지 않는 분이 가시면 오히려 더 비싸게 휴대폰을 구입하게 된다. 그냥 근처에 있는 대리점에서 정가에 구매하시는 것을 추천한다.



3) 핸드폰 번호 구매하기 - SIM카드

한국과는 다르게 휴대폰 안에 전화번호가 내장되어있지 않다. 반드시 SIM 카드라는 전화번호를 구매해야된 다. 그럼으로 인하여 쉽게 휴대폰 기기를 바꿀 수 있다. 또한 한 휴대폰으로 여러 번호을 이용할 수도 있게 된다. 하지만 SIM카드만 바꾸면 휴대폰을 사용하는데 지장이 없기에 한번 휴대폰을 잃어버리면 99% 다시 찾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어찌되었든 이제 SIM카드를 구매해야된다. 휴대폰을 사면 그쪽에서 책자를 넘겨 줄 것이다. 그 안에 숫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그것이 바로 전화번호들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전화번호마다 가격이 다르다. 주의 또 주의하셔야 한다. 예를 들어서 뒷자리가 8888인 번호는 중국어의 의미로 "때돈을 번다"라는 의미이기에 만원(한국돈 130만원정도)에 거래되기도 한다.

반대로 4444와 같은 경우는 "죽다 죽다 죽다 죽다"라는 의미이기에 50원(한국돈 7000원)정도면 구매할 수 있다. 본인의 예전 번호도 9994로서 "오래오래오래 죽어" 정도의 의미이기에 싼 가격에 구매할 수 있었다. 의외로 1414와 같이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좋은 번호들이 나쁜 번호라는 이유로 싸게 판매되고 있다. 자세히 살펴서 마음에 드는 번호를 구하기를 바란다.



4) 휴대폰 충전하기

한국에서는 휴대폰의 비용을 나중에 지불한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보통 충전카드를 사서 돈을 충전하고 사용한다. 이러한 방식은 특히 "세월아 흘러라~"라면서 통화를 하는 분들에게는 자신의 통화요금을 조절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충전카드는 길거리 곳곳에서 판매한다. 그곳에 가서 전화번호의 앞자리 "133" 를 말하면 알아서 카드를 챙겨준다. 충전카드는 50원짜리 133원 짜리 등등 다양한 액수의 충전카드가 있다.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구매하시면 된다. 보통 한번 충전한 돈의 유효기간은 6개월 정도이다. 아무리 전화통화를 안하는 분들이라도 해당 기간내에는 대부분 사용을 다 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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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전카드를 사면 충전방식이 뒷면에 적혀 있다. 중국말을 아예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설명을 덧 붙이면, 크게 적혀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하시면 "1) 중국어" "2) 영어"중에서 영어를 선택하시면 된다. 더 친절하게 설명을 하면 보통 처음에는 언어를 선택하고, 두번째에는 충전할 핸드폰 "1) 해당 기기" "2) 핸드폰 번호입력"을 하게 된다. 그 다음은 카드에 적힌 번호를 입력한다. 그 뒤에는 복권처럼 은색으로 덮혀 있는 부분을 긁어서 나오는 암호를 입력한다. 다시 살포시 #(우물정)자를 눌러준다. 이제 충전이 완료되었고 현재 충전된 금액과 현재 있는 금액을 말해준다. 다시 #(우물정) 눌른다. 이제는 그냥 끊으셔도 된다. 그리고 다시 문자로 해당 사항을 알려준다.



5) 휴대폰 사용 팁팁팁!

1- 중국은 국내에서도 로밍 서비스을 해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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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국에서는 漫游(만요우 manyou)가 로밍 서비스라는 의미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로밍서비스는 국외로 나갔을 때에나 사용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땅 넓기로는 누구 하나 부럽지 않은 중국에서 로밍 서비스의 개념은 좀 더 복잡하다. 만약 본인이 베이징에서 휴대폰 번호를 구매했다. 그렇다면 본인에게 베이징 지역은 사용지역이 된다. 만약 이 휴대폰을 가지고 칭다오나 심천을 갔다고 하자. 그렇다면 자동적으로 베이징에서 사용하는 가격보다 더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된다.

예전에는 이 국내로밍서비스 가격이 상당히 비싸서 이곳저곳으로 출장을 자주 다시는 회사원분들은 각 지역의 휴대폰 번호를 따로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하지만 2008년부터 정부와 소비자들의 압력으로 중국 국내 로밍 서비스 가격이 많이 떨어졌다.



2- 아껴야 잘산다. - 광고를 듣고 싸게 통화하자.

한국에서도 이러한 서비스가 있다고 들었던 것 같다. 중국에서도 통화전에 광고를 듣고 싸게 전화통화를 할 수 있는 서비스가 있다. 전화번호 앞에 리엔통은 "96531" 이동은 "12593"을 붙여주면 된다. 최신형 휴대폰은 이러한 번호를 위하여 앞에 자동으로 번호를 붙여주는 기능이 있다. 햅틱도 당연히 설정할 수 있다.


3- 중국에서 한국으로 문자를 보내자.

해당 서비스는 리엔통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중국 휴대폰에 별도의 프로그램을 다운 받아서 한글문자를 보낼 수 있게 한다. 가격도 기존의 국제 SMS에 비하여 매우 싼 가격이다. 한국에 애인을 놔두고 온 불우한 장거리 커플들에게는 매우 유용한 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 더 자세한 사항은 http://www.easy8682.com/ 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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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애니콜 햅틱폰 블로그 마케팅에 참여하면서 작성한 글입니다>> 애니콜 햅틱폰 관련 블로그 마케팅에 참여하면서 시리즈로 7개의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혹시나 걱정하실 분들을 위하여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절 믿어주십시오.

1) 중국에서 핸드폰을 사용하는 방법
2) 중국의 통신시장. 그 전쟁 속으로...
3) 절대명제 : 살아남아라! - 2008년 중국 핸드폰 시장 전망
4) 한중일의 휴대폰 문화
5) 중국의 짝퉁 휴대폰에서 미래를 본다.
6) 중국 통신 시장에 뛰어들다! (중국진출 한국휴대폰기업 인터뷰)
7) 중국인이 말하는 삼성 핸드폰
(해당 사항은 조금 변동이 될 수도 있습니다.)



Anycall Haptic People

《代歌》《代记》和北魏国史 - 国史之狱的史学史考察

《拓跋史探》

田余庆


이 글을 읽는 이유

1) 티엔 선생님이 편하게 쓴 글이다.

2) 史风에 대한 이야기(정치의 역사에 대한 영향)에 대한 이야기 : 티엔선생님의 시대의 특수성

3) (60年代)三大才子 : 田余庆,剪伯赞,戚本禹 이 문장은 티엔선생님의 아름다운 글이 있다.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는 "늙었기에-_;;" 같은 말을 반복하고는 하는데, 이 글은 그렇지 않다. 이미 사료나 기타 증거로 할 수 없을때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모범적인 대답이 있다. 하지만 본인은 일단 사료나 기타 증거로 제대로 쓰는 것부터 잘 해야지 저런 경지를 바라보지. 으휴...


요약 :

이 글은 책의 맨 마지막 종합이다.

처음에 투르크의 역사를 서술한다. 이 글의 핵심은 투르크 역사는 원래 생각했던것과 다르게, 다양한 내부적인 정치권력투쟁(투르크의 외척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정치권력투쟁)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다. 선비와 오환으로 발전하게 된 투르크는, 특히 외척세력인 오환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이 건국을 하는 시기에는 외척(모후)의 세력이 너무나 강해서 정치적 권련 배분에 문제가 생긴다. 이런 상황에서는 외척세력을 없애버리는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적 전통이 생겨서,  원래의 모후를 다 죽여버리는 전통이 창조된다.

오환이 투르크의 초기발전에 끼친 영향은 처음으로 서술한 책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위서 역사서"에 어떻게 기술이 되는지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 한다. 특히 위서와 같은 경우 소수민족의 역사서 중에서 매우 상세하다. 그렇다면 魏收은 어떤 기준으로 이 글을 적었을까? 아마도 구전된 내용을 기준으로 작성이 된 것이것이다.

그 예로서 崔浩을 든다. 그는 역사서를 잘못?! 서술했다가 최강막강의 권력에서 밀려난다. 역사서를 쓰고 돌에 새겨넣어서 도로에 전시하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인터넷에 올린 것인데, 문제가 되어서 난리가 난다. 이 돌도 아무곳에 묻어버리는데( ...이거 발견하면 최고일터인데....)이 문제에 대해서 周一良선생님이 이론을 내놓는다. 수집혼으로 인하여 도광에게는 조카이자 친동생인 사람이 있었다. 혹시 이 사실을 적어놓은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서 외척에 대한 서술을 주의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어찌되었든 이러한 최호에 대한 처리가 이후의 북위의 역사 서술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래서 티엔선생님은 정치에 의한 역사간섭은 인류의 손해이자, 역사학자로서는 자신도 경험했던 괴로운 이야기이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代歌 --》 代记가 되는 이러한 과정에서 이상한것이, 왜 같은 내용인데 선비어 代歌는 가능하고 崔浩가 역사로 남기는 것은 왜 안되는 것일까? 여기에는 汉化의 문제도 포함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한화를 원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孝文帝는 반대하는 아들까지 죽이기까지 한다.) 중국 주변민족은 건국과 동시에 汉化라는 문제를 안게 된다. 자신의 것을 완전히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화를 안할 수도 없고...

우리가 기존에 한화를 이야기할때, 관료화라던지 복장과 같은 물질상의 것을 토론했다. 그런데 우리가 제대로 서술하지 않은 것이 당시 사람들의 정신상의 반응이다. 이 문장은 그러한 면에서 좋은 의견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서 댕기나 족발과 같은 것들은 중국사람들에게 이미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자신의 노인배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서양의 것을 받아들이는 과도기에 있기 떄문이다. 그러기에 서양인들이 이러한 댕기나 족발을 거론을 하면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이와 같이 북위초기 시대에도 이러하여서, 과거의 선비의 도덕관과 새로운 세대의 한족의 도덕관은 충돌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崔浩의 경우는 이 중간에서 희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과도기에 현재의 관점에 보아서 나쁜 과거의 것을 서술하지 않거나 모호하게 서술한다. 그리고 그래야 과도기의 고통이 적어진다. 상당히 슬픈 결론이다. 요즘 있는 티베트관련 중국인 시위와 같은 경우는 과거의 망령과 같은 무력탄압을 잊고, 없애고, 가리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생활을 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과도기가 슬프기만 한것은 아니고 기쁨도 있다. 하지만...후...

그리고 반대로 지금까지의 외래 민족이 중국에서 그러하였듯이 다음세대의 티베트인들은 이제 과도기를 지나서 중국을 추종하지 않을까? 머...지금까지의 역사적 예로는 그럴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의 독특한 문화가 점차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되지 않을까? 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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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구성호와 투르크문화에서 보면 서역의 이민족들은 쉽게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당말이 되면 샤만-불-불교의 3대 파벌로 나누어졌을 뿐이다. 만약 이민족들이 쉽게 다른 문화를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 아닐까? 혹은 당시 서역의 투르크가 일정정도의 문화를 보유한 것이라는 소리가 되는데,그렇다면 샤마니즘이나 불숭배도 문화라고 하면, 이러한 문화를 공유했던 북방이민족도 문화가 있다는 논리모순이 되어버린다.


한국의 족보에서는 여성을 서술하느냐 안하느냐?기억에는 하는것 같은데...으음...

내가 본 것은 근대의 족보이니 최소 조선시대 이전의 족보를 찾아봐야될듯.



中国北方民族与蒙古族祖源 1979年

중국학자중에서 북방민족의 대역사를 심도 있게 이야기한 몇 안되는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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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提要】流传于北魏宫掖与鲜卑贵族间的《代歌》,是拓跋族的民族史诗。道武帝时修撰的北魏早期历史《代记》,主要当是依据《代歌》。《魏书·序纪》大体是以《代记》为本。辑集《代歌》和修撰《代记》的重要人物是邓渊。由于邓渊冤死,崔浩死于国史之狱,北魏一代史学衰微,史官视修纂北魏前期历史为畏途。考察《序纪》的来历,可以看出拓跋族面对其民族早期历史的某些问题时陷入的痛苦与窘境。这是中古时期民族融合浪潮中值得重视的一个案例。
【关键词】北魏 代歌 代记 邓渊 崔浩

一、《真人代歌》释名

读魏收书,留意到《乐志》所载《代歌》问题[1]。《乐志》谓“凡乐者乐其所自生,礼不忘其本。掖庭中歌《真人代歌》,上叙祖宗开基所由,下及君臣废兴之迹,凡一百五十章,昏晨歌之,时与丝竹合奏。郊庙宴飨亦用之。”我不懂音乐和音乐史,但是觉得代歌内容从“上叙祖宗开基所由,下及君臣废兴之迹”看来,应该就是拓跋史诗,很有史料价值,值得读史者探究。只是歌词散失殆尽,研究《代歌》本身已不可能,只好当作史学史上的一个话题来对待,看看能否发掘出一点有用的东西。
《乐志》所说的“时”,意指代歌进入北魏乐府之时。因为代歌本是鼓吹乐,马上奏之,只有入乐府后始“与丝竹合奏”,才能脱朔漠土风而登进于庙堂宴飨。北魏始设乐府,年代甚早。魏平中山,晋伶官乐器屡经转徙遗散之后而得留存者,多入代北,理当设官司理,但只是草创而已,乐工、器物、乐谱、歌词都远不完备。辑集代歌之事似乎与设乐府大体同时,有代歌之辑即有乐府。《乐志》叙代歌事于天兴元年至天兴六年(398—403)之间。以后拓跋破赫连,平凉州,通西域,所得稍广,乐府渐有规模。孝文帝务正音声,搜求古乐,乐府始盛。乐府音声审定,器物调适,歌词取舍,编撰次第诸事,魏初邓渊首居其功,以后续成者则有高允、高闾等人。
代歌,《隋书》卷14 《音乐志》未曾特别言及。但《隋书》卷32《经籍志》小学类有《国语真歌》十卷,无解释,姚振宗《考证》亦无说。我认为应当就是指代歌一百五十章。国语即鲜卑语,代歌是用汉字写鲜卑语音而成。至于真歌之名,下面再作解释。《经籍志》还有《国语御歌》十一卷,不知是否与代歌有关系。
《旧唐书》卷 29《音乐志》、《新唐书》卷22《礼乐志》都有代歌资料,又称北歌。这是由于两唐乐志在有关部分列叙四夷之乐,入代歌于其中的北狄乐中,故有北歌之名。北魏迁洛以后对于拓跋旧物都以代、以北为称,所以北歌、代歌同义。两唐乐志都说北歌是“燕魏之际鲜卑歌”。狭义地说,所谓“燕魏之际”,当以道武帝皇始元年(396)建天子旌旗、取并州、夺中山,至天兴元年(398)克邺、灭后燕、定都平城为基准,北歌辑集当在此时;而所谓“鲜卑歌”是总括此时鲜卑各部之乐而言,包括以拓跋为主的代歌在内。广义地说,它也可能泛指十六国至北魏后期的胡歌胡乐,在燕魏之间以至魏末较长的时间之内陆续辑成。魏志所叙大体符合狭义的要求。两唐志所叙燕魏之际鲜卑歌,在这两方面都显得混乱,只能从广义方面来理解。
两唐乐志都说北魏乐府代歌,到周、隋之世与西凉乐杂奏,原有的代歌一百五十章由于只有鲜卑音而无汉译,理解者越来越少,以至逐渐失传,至唐时只存五十三章,而名目可解者只有六章。两唐乐志录有六章名目,即“慕容可汗”、“吐谷浑”、“部落稽”、“钜鹿公主”、“白净王太子”、“企喻”。郭茂倩《乐府诗集》卷25《横吹曲词》录载了几章汉译歌词。从这几章汉译歌词看来,两唐乐志所说到的代歌内容与发展情况,大大超越了《魏书·乐志》所说的代歌,所叙可解者六章与《魏书》不能吻合,时代较晚,也不是道武帝先人有关事迹。证据如下。“部落稽”,十六国时称山胡,魏时只一见,称步落坚,在《北史·尔朱荣传》中;至于正式见到步落稽的称呼,已是北周之事了[2]。“钜鹿公主”,《旧唐书·音乐志》说似是姚苌时歌,其词华音,与北歌也不合。“企喻”,据《乐府诗集》卷25引《古今乐录》,其四曲之一是苻融诗,不涉及鲜卑。所有这些,与《魏书·乐志》所说代歌“祖宗开基”、“君臣废兴”的鲜卑史实都不是一回事。不过,旧志又说“其不可解者咸多可汗之词,此即后魏世所谓簸逻廻者是也。其曲亦多可汗之词”。此事在隋志中也有相应记载,可以确认为魏世之作。隋志谓“天兴初吏部郎邓彦海(渊)奏上庙乐,创制宫悬,而钟管不备,乐章既阙,杂以簸逻廻歌”。簸逻廻即是大角及其所奏,北狄鼓吹之乐,马上用之。所谓“不可解者多可汗之词”,似内容为历代鲜卑君主言语行事,这与魏志所谓 “祖宗开基”、“君臣废兴”或者可以合辙。
以上的资料和解析,使我理解到唐乐府中的北狄乐、鲜卑乐、代歌,是三个大小范围不一的名称。北魏代歌一百五十章,唐以前多半陆续散失,也有新章羼入,所以唐志所说的代歌已不全是北魏时的原貌了。所谓唐时尚存而又可解者六章,其中的“步落稽”一章属于大范围的北狄乐(步落稽族属来源主要是南匈奴),“慕容可汗”和“吐谷浑”二章属鲜卑乐范围。只有严格意义的代歌才是拓跋歌,但也不能完全排除其它鲜卑歌包含其中,因为拓跋在推寅(即追谥宣帝的所谓前推寅)时还曾是鲜卑檀石槐势力的一部分,称西部鲜卑。唐志成书,距代北拓跋年代已远,乐府歌词变化很大,最重要的是鲜卑语言已鲜为人知,所以难于区分乐府各部分来源演变,以至于对代歌的叙述混淆不清,产生了上列的矛盾。
也许还可以这样认定,代歌是经过拓跋君主有意筛选甚或部分改造的燕魏之际鲜卑歌。筛选是按照道武帝个人意志进行的,目的是用口碑资料中的拓跋(也不排除鲜卑它部如慕容等)传说,编成歌颂先人功烈的歌谣,于代人中广为传播,为道武帝的帝业制造舆论。《乐志》所说代歌中“祖宗开基”“君臣废兴”的具体内容,道武帝正需借鉴,是他在创业时期朝夕思虑的大问题。《魏书》卷24《崔玄伯传》说其时道武帝“历问故事于玄伯”。又说“太祖常引问古今旧事,王者制度,治世之则。玄伯陈古人制作之体,及明君贤臣,往代废兴之由,甚合上意。”道武帝满心关注的有关治道的掌故,崔玄伯等人所能提供的,只限于汉人典籍所载,非拓跋旧事,而拓跋开基废兴诸事,却正是代歌的核心内容,而为此目的替道武帝筛选辑集代歌的人,从文献查找,只能找到邓渊一人。只有邓渊一人,于天兴元年冬奉命定律吕,协音乐,这势必涉及代歌;也只有邓渊一人,几年以后又受诏撰修代记,这也势必要以代歌所涉为主要资料。两唐乐志都说代歌是“都代时命宫人朝夕歌之”,所歌又尽代人之事,因而有代歌之称,迁洛以后不一定还有此需要,而且鲜卑语音大多既被遗忘,代歌也不再具备原来的意义了。
我还想用拓跋人爱歌的风习,来加强代歌是拓跋史诗,是拓跋古史资料来源的看法。拓跋爱歌的风习是历史上早已形成的,到了平城和洛阳已有汉字可供使用的年代,这种风习仍然依旧。《序纪》说拓跋先人“世事远近,人相传授,如史官之记录焉。”所谓人相传授,当是有言有歌,基本上都是口述的拓跋历史资料。一个部族,一个部落,甚至一个家庭,都有这种口述传授的资料。北魏皇帝是爱歌的。太武帝神三年(430)行幸广宁温泉,作温泉之歌以纪其事,见《世祖纪》。他令乐府歌工历颂群臣,赞美“廉如道生,智如崔浩”,见《长孙道生传》。其它臣工当各有诗歌赞颂。《文明冯太后传》载,冯太后曾与孝文帝幸灵泉池,孝文帝率群臣上寿,“太后忻然作歌,帝亦和歌,遂命群臣各言其志,于是和歌者九十人”。耆宿之臣元丕(422—503)为烈帝翳槐后人,历仕太武、景穆、文成、献文、孝文、宣武六朝,以能言“国家旧事” [3]见重于时。《北史》卷15《元丕传》:“丕声气高朗,博记国事,飨宴之际,恒居座端,必抗音大言,叙列既往成败。”孝文帝说他“亲歌述志”,当然是又说又唱了[4]。
北魏墓志中也有一些歌唱家族史传的例证。永熙二年(533)元肃墓志,记肃父扶风王怡“道勋出世,列在歌谣”[5],这种赞颂歌谣可能是乐府歌工奉命所作,如赞长孙道生、崔浩之例;也可能是贵族家传自编之作。正光五年(524)元子直墓志,说到其家世业绩“故已播在民谣,详之众口”[6]。永熙三年(东魏天平元年,534)张瓘墓,自矜其家世“吟诵两穗”[7]。这些可吟可唱的歌谣,其内容大概相当于汉人大族的家传。还可注意的是,武定八年(550)穆子岩墓志赞美先人事迹说:“家图国史,可得详言”[8]。然则贵族家世记录除歌谣以外,还有家图相配。
有一种文化现象曾令我不得其解,就是当拓跋人已进入高速汉化轨道之后,拓跋皇族人物自记其先人名字,仍旧任意用汉字写鲜卑音,而不遵循官方规范,与今本《魏书》所见多异。这也是从墓志材料中看出来的。永平四年(511)元侔墓志志阴铭文,谓墓主的六世祖为昭成皇帝;五世祖为昭成第八子受久[9];高祖常山王遵[10],字勃兜;曾祖常山康王素连;祖河涧简公于德;父悝,字纯陁。案以墓志核对《北史》卷15《常山王遵传》及《魏书》15《常山王遵传》,名字异处甚多。一,受久,本传作寿鸠;二,遵,字勃兜,本传不载其字,元昭墓志[11]则作字兜;三,素连,本传作素,元昭墓志则作连;四,于德,本传作德;五,悝字纯陁,本传不载其字。
显然,墓志所见名字当是据家传歌谣,有真实性,为常所使用者;《魏书》则当据官府文书。北魏有宗正[12],宗室人员名字,宗正必有文书记录,是在官的正式名称,却并不被本人及家族重视,因而有如上歧异出现。从这里也可推知,直到魏末,拓跋人仍不重视汉字汉语,记事仍以歌谣为准,风习未改。前引元肃墓“道勋出世,列在歌谣”,歌谣作用甚过文字叙述。顺便论及,甚至连汉字拓跋作为国姓,也未被普遍认同,西魏北周恢复胡姓,民间写拓跋为 拔。北周武成二年(560)《合方邑子百数十人造像记》所刻邑子姓名中,拓跋全作 拔,共有十余人[13],初疑这是民间讹写,一方流俗。后见镌刻精美的北周大将军李贤墓志[14],拓跋也作 拔。李贤墓志立于公元569年,此时魏收《魏书》早已修成了。从这种文化现象推知,甚至到迁洛以后,拓跋人对其祖宗开基及先人事迹的记忆,恐怕还是靠歌谣传诵为主,而不是依赖汉字记述。
现在还是回头来讨论乐府代歌本身的问题。
代歌的来源、内容,姑且作了上述的探讨。在《魏书》、《旧唐书》里,代歌叫做“真人代歌”。《新唐书》叫“真人歌”,当系省称。只有《隋书·经籍志》称之为“国语真歌”。真歌之“真”和真人代歌之“真人”,不像是同一含义。这又是怎么一回事呢?
汉音所读真字,鲜卑语中是表明人物身份称谓的字眼。《南齐书》卷57《魏虏传》中说到此语,列举了称为真的人物职称身份语词甚多,近年所出北魏文成帝南巡碑、孝文帝时司马金龙及其妻墓表刻石、北魏诸多墓志铭,以及《周书》怡峰传、薛弁传,《北史·斛律金传》等处,所举人物职称身份中均带“羽真”[15]。其它墓志中也另有带真字之例[16]。但是真歌之真与人物身份之真,似乎看不出任何关系。所以,“真歌”很可能是隋志为图简便而形成的误写,而“真人歌”和“真人代歌”才是正式的名称。

人代歌名称,我认为与真人一词有密切关系。真人自来就是道家方士一类人物时常提及的称谓。王逸注《楚辞·九思》,以真人为仙人。《魏书·官氏志》天兴三年(400)“置仙人博士官,典煮鍊百药。”天兴是辑集代歌的年代,煮鍊百药又是供道武帝服用。可见代歌冠以真人二字作为正式名称,具有道武帝的时代特征。至于这与道教有无直接关系,可能另有文章可做,这里不细究了。
《魏书·天象志》皇始元年(396):“先是有大黄星出于昴、毕之分,五十余日,慕容氏太史丞王先[17]曰:‘有真人起于燕代之间,大兵锵锵,其锋不可当’。其冬十月,黄星又见,天下莫敌。”自注:“是岁六月,木犯哭星。木,人君也,君有哭泣之事。是月,太后贺氏崩。至秋,晋帝殂。”[18]《魏书·灵徵志》记天兴四年(401)吏上言昔句注老父谓某曰:“自今以后四十二年当有圣人出于北方。时当大乐,子孙永昌,吾不及见之。”某遇老父之年为二十二岁,当前燕元玺二年(353)。以此推之,后四十二年,正当道武帝破慕容宝之岁。这些资料都说明,道武帝之兴,曾经动员不少方术之士为他制造舆论,其中最起作用的,还是王先借天象所言“真人起于燕代之间”。
皇始元年对北魏道武帝说来是个极具意义的年份[19],王先所言的这一年天象所示,就是人间变化的朕兆,真人代歌正是从此后二年邓渊着手辑集的。用拓跋正朔记后燕慕容太史丞所见天象,所言人事与拓跋帝纪又若合符契,这明明是道武帝周围之人所编造的痕迹。“大兵锵锵,其势不可当”,正是指拓跋平并州、出幽冀之兵,起于燕代之间的真人只能是道武帝。恰恰在此时出现的真人代歌,所歌颂的不是道武帝又能是谁呢?所以北魏乐府昏晨演习代歌,就是为了歌颂开国之君道武帝,以及拓跋“祖宗开基”的功业。
这些就是我认为代歌的正式名称是真人代歌的理由。代歌是拓跋史诗,又是道武帝帝业的舆论工具。同时它也承载了拓跋部人的感情,因而获得了它在这个时代应有的价值。这种文化现象,值得研究拓跋史者重视。

二、《代歌》、《代记》及其与《魏书·序纪》关系的推测

《代歌》素材来源于拓跋部民的口耳传闻。按照民族学所示的通则,这类素材总是越积越多,能说能唱,但却是杂乱芜蔓,内容矛盾。把这些长期积累的素材裁剪整理,配以合适的乐声,提升为史诗般的《代歌》,是在道武帝创建帝业的短时间里完成的。留存于《代歌》中的内容以“祖宗开基”、“君臣废兴”诸事为主,是适应道武帝本人创业治国的要求,而《代歌》的这些主要内容又正是邓渊撰修《代记》的资料依据。道武帝时拓跋部的《代歌》和《代记》这两项重大文化成果,都与邓渊有密切关系。
在道武帝以前的漫长岁月里,拓跋部社会发展缓慢,基本上停滞在“言语约束,刻契记事”[20]状态,开拓帝业的道武帝自己,也是出自结绳的野蛮人。力微以来,拓跋与外界也有接触很多的时候,所接触者或者是自幽州西渐的乌桓人,或者是以代郡、雁门郡人居多的汉人。汉人与乌桓人文明程度较高,但数量比拓跋人少,不足以在较短的时间内对拓跋部起太大的带动作用。拓跋部内缺乏各项文明制度,与道武帝经营的事业极不适应。所以当皇始、天兴的几年中,随着军事形势的大发展,拓跋部在社会、政治、文化、经济诸方面都面临转轨的急迫要求。魏收书诸《志》中多有这几年间诸项制度建树更革记载,一般都依靠人数不多的汉士的帮助。汉士如燕凤、许谦、张衮、崔玄伯等人作用最大,但除崔玄伯以外,事绩以军事谋略、政治运作居多;至于涉及文化的诸多方面,则往往另有它人专任。如音乐、官制,由邓渊司其事,史事记注也是责在邓渊。邓渊“明解制度,多识旧事”[21],是一个知识型的人才,是帮助道武帝向文治迈步的重要人物之一。
邓渊,雍州安定人,祖、父历仕苻秦,渊随父在冀州。道武得冀,以渊为著作郎、吏部郎。天兴元年(398)入代,与吏部尚书崔玄伯“参定朝仪、律令、音乐;及军国文记诏策,多渊所为”。《魏书·太祖纪》天兴元年十一月改制诸事,首列邓渊典官制,主爵品,定律吕,协音乐[22],其中前二类详见《官氏志》,当是就皇始元年“始建曹省,备置百官,封拜五等”诸事而整齐之;后二类见于《乐志》,其中重要一项当为创制庙乐,辑集《代歌》。《乐志》在邓渊定律吕、协音乐之后连叙庙乐和《代歌》,可知《代歌》辑集功在邓渊是可以肯定的。北齐时祖珽曰:拓跋初有中原,“乐操土风,未移其俗”,意指唯有鼓角,未识其它。皇始元年(396)破慕容宝,“于中山获晋乐器,不知采用,皆委弃之。天兴初,吏部郎邓彦海(邓渊)奏上庙乐,创制宫悬,而钟管不备。乐章既阙,杂以簸逻廻歌……。”[23]这就是邓渊协音乐之事。
邓渊在文化上更重要的成就,是他在戎马倥偬之际受命修史。他“明解制度,多识旧事”,具有基本的修史条件;而道武帝又是深具历史感的人,在创业兴国阶段百事俱需史鉴,而拓跋旧事比起汉典来更容易为他所理解。邓渊“性贞素,言行可复”,这也是修史人选应具有的史德条件。道武帝的“军国文记诏策,多渊所为”,其中所谓“文记”当包括今昔史料记注在内。汉士中有意搜罗记录拓跋旧事,邓渊应是第一人。
《北史》卷56《魏收传》:“始,魏初邓彦海撰《代记》十余卷”云云,这是修魏史之始。《北齐书》卷37《魏收传》全同。《魏书·邓渊传》:“太祖诏邓渊撰《国记》,渊造十余卷,惟次年月起居行事而已,未有体例。”此时北魏开国伊始,国史记注暂时只能是大事编年,全书体例还谈不到。
邓渊正式受命修史之事,本传系于邓渊与崔玄伯参定朝仪诸事之下,中隔渊“从征平阳”及赐爵加官诸语。案道武征平阳,是天兴五年(402)七月事,见卷二《太祖纪》及卷九五《姚兴传》。所以邓渊奉诏撰修国记,当在从征平阳之后,距他天兴元年入代已有四年之久[24]。邓渊株连于和跋一案赐死,而和跋被刑在天赐四年(406)四月[25],所以他兼领史职时间可以确定在402年七月以后至406年四月以前,前后不足四年。史不载道武帝命崔玄伯监修,可见当时并不理解修史是个难题,没有由崔玄伯监修的必要。
邓渊撰史,规模只有十余卷[26],属草创性质,其基本情况,有关载籍所记都一样,只是书名微异。《北史》、《北齐书》称之为《代记》,《魏书·邓渊传》、《史通·古今正史》则作《国记》。前所言及的邓渊修史以“记”为称,即邓渊所典“文记诏策”之“记”。《史通·史官建置》:“书事记言,出自当时之简;勒成删定,归于后来之笔。”《代记》年代早,自然都是根据“当时之简”,准确地说是以当时口述传闻记录为“当时之简”,所以称之为“记”是准确的,《代记》应是原始名称。《魏书》以魏为统,是北魏国史,故改《代记》为《国记》,《史通》则以唐代所见魏收书为准,亦袭称《国记》。这种差异是比较好解释的[27]。
邓渊《代记》记事包括的年代究竟有多长,载籍所见并不明确。《魏书》48《高允传》:崔浩之狱以后“世祖召允,谓曰:‘《国书》(案指崔浩监修的国史)皆崔浩作不?’允对曰:‘《太祖记》,前著作郎邓渊所撰;《先帝记》(案指《太宗明元帝纪》)及《今记》(案指《世祖太武帝纪》),臣与浩同作……。”这里把邓渊所撰之史称作《太祖记》,举以与下述《先帝记》及《今记》并列,不是用邓渊书的本名。邓渊死在道武死前三年,其时还无太祖庙号,更不可能撰成完整的《太祖记》[28],一定是后人据邓渊所撰编年记事续有斟酌增删而成。但高允所称都是诸帝之“记”,说明邓渊书名本称为“记”,或《代记》,或《国记》,这也是一证。
高允所称的《太祖记》,是严格限于道武帝本人的事迹呢,还是包括了像其它国史那样于开国之君中追叙其族姓世系以及开国以前的历史内容?我想,按中国历来修史成法,应当是后者。以邓渊其人博学而又“多识旧事”的特点,以他辑集《代歌》所获知的拓跋史诗资料,他是可以把拓跋历史梗概整理成文字的。我确信北魏之时经汉士之手保存了一些拓跋祖先资料,供以后崔浩以至魏收修史使用。最早整理拓跋祖先资料的汉士从现有资料看来,只有邓渊。
《十七史商榷》卷66“追尊二十八帝”条,谓二十八帝中惟猗 、猗卢、郁律、翳槐、什翼犍名通于晋为可据,其余凡单名者与猗等不同,疑皆道武帝时所追撰。我觉得王鸣盛所列数人以外,还有非单名者,如力微、推寅、诘汾等,其中力微之名亦见于晋代文书,所以不能一概而论。但道武帝时其先祖之名有代歌可作根据,所以断定其先祖之名大部分是邓渊辑集代歌时从鲜卑音记录而来,则是可相信的。
《魏书》卷57《高祐传》孝文帝时秘书令高祐与丞李彪等奏曰:“惟圣朝创制上古,开基《长发》,自始均以后,至于成帝,其间世数久远,是以史弗能传。臣等疏漏,忝当史职,披览《国记》,窃有志焉。愚谓自王业始基,庶事草创,皇始以降,光宅中土,宜依迁、固大体,令事类相从,纪传区别,表志殊异,如此修缀,事可备尽。……著作郎已下,请取有才用者参造国书,如其得人,三年有成矣。”
高祐等所言,是一段简略但却比较准确的拓跋先祖历史,从“披览国记”主要即邓渊《代记》而来,其内容与以后编成的魏收《魏书·序纪》所见一致,颇可窥见《国记》、《序纪》的因缘。我们且取这两者加以比较:
一,“创制上古,开基《长发》”,说的就是《序纪》黄帝后人封大鲜卑山、统幽都之北这一拓跋远古传说,如同《诗·商颂·长发》所叙殷人发祥的史诗内容。
二,“始均以后至于成帝”,世数久远,史弗能传,说的就是《序纪》始均入仕尧世,其裔不交中夏,载籍无闻,以迄于成帝毛的历史。以后道武帝追尊拓跋二十八帝,自成帝毛始,可见毛已经是道武帝认为其祖先中可信的人物,而成帝毛“统国三十六,大姓九十九”之说,也为拓跋后人所认同了。
三,“王业始基,庶事草创”,说的是《序纪》自成帝毛至圣武帝诘汾共十四帝时期。毛既可以追封,自然就是王业之始。不过人物虽然可信,事迹却是不详。只有自幽都两度南移,“九难八阻”之说,大体有今知考古材料,参照地理方位,可作印证。高祐上奏之中对此未作解释,只用“庶事草创”一语带过,说明其时除了口耳传闻以外,能见到的刻木结绳资料,未必皆能准确解读。而口耳传闻的代歌,比刻木结绳所记,应当更为可靠,更为具体。这一类拓跋祖先史实,都经过邓渊记录整理,加上他记注的道武帝事迹,共同构成邓渊《代记》,后来就基本包含在由崔浩总揽的国史之中。崔浩国史除崔浩之狱已毁的一部分以外,余下的当即高祐所说的《国记》,有三十卷之多。这种种资料,应当就是《魏书·序纪》的蓝本。
神元帝力微以下,迄于376年代国之灭,还有十四帝,高祐似皆归入“庶事草创”阶段,未作描叙。大概邓渊、崔浩所记这段历史已较详备,编年差可,不必更张[29]。这就是后来魏收书的《序纪》范围。皇始以降,北魏立国,记事日繁,制度日备,所以高祐等建议国史宜纪传表志兼备,不可仍依编年之旧。后来魏收书的全书规模就是这样,其中必定有很大的继承关系,可惜今天已无从说起了。
邓渊《代记》虽被高允称作《太祖记》,当是兼具魏收书《序纪》的全部内容,这里还有一个证据。魏收书十二帝纪,其中《序纪》在目录中排列为“本纪第一”,《太祖道武帝纪》排列为“本纪第二”,可见《序纪》是自有系统的独立存在的一纪,在魏收书中地位重要,不是附

带叙述性质。《序纪》列举的人物就是道武帝追尊的二十八帝[30]。二十八帝名字具在,世系清楚,间有大事可述,多少不等,而神元帝以后且有甲子纪年,可述大事较多。可见在邓渊书中,道武以前之事是独立成为段落的,以后就顺理成章地成为国史的前纪,也就是魏收书的《序纪》。
《序纪》应当主要就是根据《真人代歌》中“祖宗开基所由”,“君臣废兴之迹”的内容,经过邓渊《代记》的译释解读整理,才得以流传下来。《代歌》中的大事不被《代记》搜罗以致为后来《序纪》所遗的,恐怕不会很多。这也就是魏收书《序纪》在北魏史学史上极具价值的所在。根据这个事实,我认为《代歌》与《代记》同源,《代记》主要出于代歌。我还认定,辑集《代歌》、撰成《代记》的邓渊,也是《序纪》实际上的第一作者。
但是代歌是歌,代记是史,两者毕竟还有不同之处。代歌虽经筛选,难说没有一点违碍内容保存其中。但它不是直接叙事,不完全是真人真事的写实,又有音乐配制的影响和限制,所以是拓跋历史的升华。加以它用鲜卑语音,传播限于宫廷之内,汉人无从理解,所以它的内容稳定,未受政治非议。《代记》则不然,它首在实录,首在直笔,否则无以称史。正由于此,它容易受到挑剔,被当轴者疑忌,所以其作者邓渊就先于崔浩成为国史之狱的第一个牺牲者。不过邓渊人微,又值国初秩序初定,未至构成大狱,不像崔浩之狱那样引人注意,引人研究。
在思考邓渊《代记》撰写的多种细节时,我觉得邓渊之书不称《魏记》也值得一究。如前所论,邓渊撰史时间是在天兴五年至天赐四年(402—406)。据《太祖纪》,登国元年(386)元月道武帝即代王位,四月由代王改称魏王,而没有说明原因;天兴元年(398)六月经过朝臣议论,道武帝裁定国号不称代而称魏。这就是说,邓渊修国史之前已有两次明令改代为魏,而国史之名理应用国家正式名号[31],称为《魏记》才算合理,但事实并非如此。
拓跋先受晋封称代公、代王,后有实土,百余年孳生蕃息于代北之地,没有整体迁动。所以拓跋珪复国之后先称代王,符合习俗民情,是很自然的事。天兴元年(398)正式定国号称帝,经过朝议,群臣主张称代本无异议。只有崔玄伯以拓跋奄有中土,且将报聘江左为由,用旧邦维新之义,主张称魏。这很可能是崔玄伯揣度道武心意,以问作答。道武帝裁定以魏为称,并以魏帝名义昭告天地。但是代人习用旧称,而且反对向中土迁徙,连崔玄伯之子崔浩都是如此。官私称谓,都是代、魏兼用,到孝文帝迁洛之前,称代更为多见,称魏较少。何德章君《北魏国号与正统问题》[32]一文举例甚多,毋烦赘叙。所以国史以代为称而不曰魏,并不难于理解。何况邓渊于国初修史,所记尽代人代事,与整理《代歌》相近,如不称代而改称魏,反而不协于时了。
何文对于道武称魏的理由,已有论证。事实上当年曹操称魏的理由,拓跋也都考虑到了。何文留下两个他所不解的问题,一个是崔玄伯为什么以“慕容永亦进奉魏土”作为他所持称魏的理由之一,另一个是登国元年四月拓跋珪何以在甫称代王后数月即匆匆改称魏王。这两个问题是互相关联的。我现在把二者揉合在一起,试作回答。
拓跋珪复称代王,是前秦灭代十年以后的事。灭代的十年中,代北草原各部族部落经历了长期的混乱,刚复国的代王一时不可能把秩序恢复过来。其中拓跋珪最感困难的问题,是他的代王地位得不到普遍认同。与拓拔部最亲近的贺兰部和独孤部内,各自都有拥护的部落和反对的部落,拓跋珪随时要进行对反叛者的战争。最急迫的战争挑衅更是来自拓跋部内,因为拓拔部内并没有较稳定的君位传承制度,昭成帝以前,兄终弟及和父死子继总是交错出现,夹杂着残酷而复杂的斗争。拓跋珪是昭成帝的嫡孙,但珪父寔(献明帝)并未正式履位即死,昭成余子即献明诸弟存者尚多,按照兄终弟及的部族习俗,他们都有继承君位的权力。昭成幼子窟咄,是珪的季父,国灭时被掳徙长安,后因前秦之乱而随慕容永东迁并州闻喜、长子。慕容永称西燕,以窟咄为新兴太守。新兴,以地理位置言,与代北只有一山之隔;窟咄,以个人身份地位言,有继承已死的昭成帝而为代王的权力。而且他此时还有一定的实力。看来,他受慕容永命出为新兴太守,目的就是为了注视代北,相机进取。这种危殆形势,初即位的代王珪是不可能不觉察,不能不警惕的。
以《魏书》、《通鉴》等史籍互参,可以略见皇始元年正月拓跋珪即代王位以后的代北局势和代北周边局势是极为复杂多变的。皇始元年正月,可以看到三股势力同时活动。一,拓跋珪于牛川称代王;二,慕容垂在邺称帝,是为后燕;三,慕容永由长安东出,中途闻垂称帝而止驻河东闻喜,此处与邺皆为旧魏地。三足鼎立,都谋求前秦崩溃后并、幽、冀区域的统治权力。窟咄被委以新兴太守,独孤刘亢泥迎窟咄入代北与珪争位,都是此年春季的事。四月,珪由代王改称魏王;六月,慕容永遂称藩于后燕慕容垂。这暗示慕容永、慕容垂有可能联合共击拓跋珪。十月,慕容永进驻长子,是为西燕。长子和闻喜一样为旧魏之地。这表明拓跋周边彼此戒备的力量,全是驻在旧魏之地。拓跋珪其所以在此时匆忙改称魏王,意在表示代地魏地都应当由他统辖,既警告慕容永,也警告拓跋窟咄,不许插足其间,不得侵犯代北。至于慕容垂,他不能容忍自长安外奔的慕容永以及附属于永的拓跋窟咄染指幽、并。是冬,拓跋珪联络慕容垂大败入侵的拓跋窟咄,代北局势才得以初步稳定[33]。
慕容永等东来时颇有军力,但无退路。当慕容永求入冀、幽不成,北上代北受阻,只得龟缩于长子一隅,还不时受到后燕压力之时,处境是艰难的。所以可以理解,《太祖纪》登国七年(392)十二月所载“慕容永遣使朝贡”之事,就是西燕怵于后燕压力,求代为与国以图存的表示[34]。同时也可以理解,天兴元年(398)道武帝在邺再议国号时崔玄伯所说“慕容永亦进奉魏土”,所指即此。至于“进奉魏土”,虚词而已,并无实事。所谓魏土,即指闻喜、长子。崔玄伯所谓奄有中土,旧邦维新,也是此义,只是地面更广而已。
综观前后,皇始元年,拓跋窟咄随慕容永入闻喜,拓跋珪敏锐地感到来者不善,立即表示他自己是魏土之王,改国号曰魏;登国七年,慕容永遣使北魏,也许真有过愿以长子魏土“进奉”的口头表示;天兴元年,拓跋珪又获得了旧魏要地邺城。把这些资料合起来看,研究所谓代、魏之辩问题,岂不是多了一重思路吗?何文遗下他所不解的两个问题,到此是不是算解决了呢?
以上,由探索《代歌》、《代记》同源及其与《魏书·序纪》关系,进入到所谓代、魏之辩的疑难之点及其解决门路。从这里我又想到,正史中对本朝先世历史追溯能做到像《序纪》这样既相当久远又比较准确,还以其“得体”[35]而受到四库馆臣的称赞,是少见的。追根溯源,拓跋古史中的这一特异之处,不能不归于国初邓渊同时完成辑集史诗《代歌》和记注古史《代记》的开创性成就。

三、国史狱事造成的史风问题

我留意考察邓渊之狱对北魏一朝修史的长远影响,是受到台湾青年学者陈识仁《北魏修史略论》[36]一文的启发。陈文看重邓渊之死是道武帝猜疑的结果;又提出崔浩国史之狱对北魏修史造成影响。这两点立意我都赞成,只是觉得两者之间似乎有某种关系,而陈文未曾措意。我现在进一步思考的是,第一,邓渊一介书生,不涉权势,要是真有什么事引起道武帝猜疑的话,最可能是修史中出现了敏感问题;第二,国史之狱影响北魏一百余年,历来把这笔帐从崔浩之狱算起,我看应以邓渊之狱为始。邓渊是受命修史的第一人,其狱事内容与崔浩基本一致,崔浩之狱正是邓渊之狱滥觞所及的结果。
《魏书》卷24《邓渊传》,渊从父弟晖坐和跋案,“太祖疑渊知情,遂赐渊死”。和跋[37],代人,世领部落[38],与拓跋部关系久远,随道武帝,以武功显。天兴元年(398)和跋以行台尚书镇邺;邓渊从弟晖为行台尚书郎,与和跋“厚善”。道武杀和跋,罪名是修虚誉,性奢淫。“修虚誉”云云,罪名空泛,可重可轻,毕竟不是犯上作乱一类死罪。邓渊是新附文臣,一直“谨于朝事,未尝忤旨”,史臣叹其“贞白干事,才业秉笔,祸非所罪,悲哉!”邓渊之死不但时人愍惜,道武本人也是“既而恨之”。由此可见邓渊之冤昭然在人耳目,但冤情底蕴却迄今无人探究。
《魏书》卷 125之二《天象志》,天赐四年(406)四月“诛定陵公和跋”。邓渊赐死当是紧接其后之事。邓渊《代记》记事,最晚当止于此年,下距道武帝之死还有三年半的时间。道武帝死于天赐六年(409)十月,年三十九,算是盛年之君。但他自幼多艰,历经波折,从复称代王到建立帝业,历二十四年之久,在政治上已到晚期,是嚆矢之末了。天兴五年(402)阳平之役获胜,道武帝驰骋疆埸生活从此结束,此后他思虑所及,多是“追思既往成败得失”,以及穷思如何跳出拓跋历史争位斗争的老路,实现帝位的平稳传承。这是一个非常棘手,很难决断的问题。道武晚年多猜疑忌妒,当与此有密切关系。而邓渊奉命修史,恰恰就在这个时候。
无力执政的道武帝,寄情校猎于新筑的犲山离宫,有时一年行幸三次之多,每次长达数月。他嗜服寒食散,药动颠狂不已。天灾变异使他恐惧,但更多的恐惧是政治性的事件。这种身心状态加重了他喜怒乖异,杀戮无节。邓渊之死也就是在道武帝这种心态下发生的。
据《官氏志》,天兴四年(401)九月“罢外兰台御史,总属内省”。可知邓渊天兴五年居馆职之时,是内省官员,修史事务,包括史实的搜求、翻译、斟酌、取舍,巨细无遗,都是在道武帝眼下进行。道武帝是一个深具历史感的人,对于拓跋旧事之可资借鉴者是非常留意的。崔玄伯对他谈论的许多汉典故事,虽然对他有启迪之处,但毕竟是隔了一层。而拓跋故事中本有许多可以资治者,道武帝更易理解,可以产生联想,直接利用。但这些保存于刻契结绳中的拓跋旧事,需要专门的人来解读;拓跋先人的口碑歌谣在史官中编辑使用,也先得翻译成汉文。所以《史通·史官建置》中说:“当代都之时,史臣每上奉王言,下询国俗,兼取工于翻译者,来直史曹。”邓渊供职史馆,必然也是“上奉王言”,即听取道武指授;“下询国俗”,即了解拓跋旧事,包括寻绎《代歌》,经过翻译由汉字记录,备国史采用。《邓渊传》史臣谓渊“才业秉笔”,这正是史臣的日常职分所在,也正是道武帝不时指授检核之处。道武帝喜怒乖常,史实中疑窦之生,全在乎他一念之萌,而史臣也许并未经意,它人更难理解。我推定邓渊死于修史之狱,就是从这里出发的。这是一场所谓腹诽之狱,一场不动声色的文字狱。它以诬枉之词定谳,后人不能确指原因,又不信坐和跋案的谰言,只能让它成为一樁不明不白的公案。邓渊人物不显,其死事又在国初,魏史中论及者少,后来又被更大的崔浩之狱遮掩,所以后世留意及此的人就少而又少了。
邓渊《代记》可能包含什么样的敏感问题,以至形成北魏头一樁国史之狱呢?据《邓渊传》,渊造《国记》(案当时的本名是《代记》)十余卷,“惟次年月起居行事而已,未有体例。”按史官修国史成例,这只是一种草创,后人谓之长编,今人所称初稿。刘知几之言曰:“书事记言,出自当时之简;勒成删定,归于后来之笔。然则当时草创者资乎博闻实录,若董狐、南史是也;后来经始者,贵乎儁识通才,若班固、陈寿是也。”邓渊之书显然只是史实排比的实录,以待后之儁识通才删定勒成,一般不会有雌黄褒贬。连所谓“当时之简”,也只是临时自鲜卑语翻译而成,并无现成简牍可用。如果此中出现口实,不过是译文中事实取舍而已。邓渊主持而成的译文中,不大可能有所谓“春秋笔法”问题,因为如前所说,邓渊贞白干事,未尝忤旨,亦无权势背景,遇到敏感问题,一定是小心处理,以避嫌忌。

而且,《代记》虽被称作《太祖记》,当包括拓跋先世事迹,相当于魏收书中的《序纪》;而真正的《太祖记》部分最多只记到天赐四年,并未完成。如果邓渊书被认定有问题,只能是出在拓跋先世和道武帝本人至天赐四年为止的这个时间段里,而此时间段内道武之史是当世之事,道武亲自过问,估计难产生嫌疑;而道武先人事迹,相当于魏收书的《序纪》部分,则其事其言已久历时日,滋生嫌疑的可能要多一点。现在就来看能否找到一些蛛丝马迹。
不少学者认为崔浩国史之狱所谓“备而不典”、“暴扬国恶”,是指国史所录的一些拓跋故事,在昔本为旧俗使然,无关风化,在今则不合常道,有悖人伦。史臣直笔招祸,最易在此方面产生。周一良先生《崔浩国史之狱》[39]判断献明帝死后贺后被其父昭成帝收娶,所以贺后先后所生既有献明帝之子,又有昭成帝之子,诸人行辈既为兄弟,又为叔侄。这在北俗中蒸报之事本无所嫌,如果《代歌》中有此等内容,也不一定会受到注意,可是记入《代记》,诸人行辈混乱所涉人伦问题就暴露出来了。我自己在考察北魏后宫子贵母死之制时,对此现象也有所发现,有所议论。国史所记这类本无足异的拓跋旧事,在道武帝成为专制帝王以后极易成为定罪口实,崔浩国史中的“不典”、“国恶”,的确可以从此得到解释。进一步说,这些口实,当以道武建国以前所传而迻译所得者居多,记载这些事的国史,并非崔浩新撰而是已有的邓渊《代记》。因为邓渊有《代歌》参考而崔浩则不可能有新的资料可据,不能凭空造成。我认为崔浩之狱滥觞于邓渊之狱,这是一个重要理据。至于在两次狱事中究竟是哪一个具体问题形成道武帝和太武帝的痛点,是否每次还有更为直接的兴狱的政治需要,由于资料缺乏,本文不拟探讨。
还有一个值得思索的现象,就是太武帝恢复史馆以后,修史之事与以前邓渊相比较,进展非常缓慢,似乎有某种障碍存在。案邓渊死在天赐四年(406),太武帝恢复史馆在神二年(429),其间二十余年国史“废而不述”;崔浩书成而大狱兴,在太平真君十一年(450),其间又是二十年有余,新纂成者除补足的《道武纪》以外,不过是《明元纪》、《太武纪》(未竣)而已。时日迁延太久,令人生疑。其中原由,我们先从太武帝修国史二诏试作分析。
据《崔浩传》,太武事功有成,神二年“诏集诸文人撰录国书,浩及弟览、高谠、邓颖、晁继、范亨、黄辅等共参著作,叙成《国书》三十卷。”此为前诏。太延五年(439)太武帝平凉州,完成了大功业,于是诏崔浩监修国史,大意说神后戎旗仍举,而“史阙其职,篇籍不著,每惧斯事之坠焉”。所以采取特别措施,“命公留台综理史务,述成此书,务从实录。”此为专门给崔浩之诏,我称之为后诏。二诏不同之处,一是后诏崔浩留台监秘书事,综理史务,并以中书侍郎高允、散骑侍郎张伟参著作,这就是专人专责,提高史臣档次,务期于成,而不是像前诏那样,诸人共参著作,崔浩只是参与者之一厕列其间而已;二是后诏提出特别的编纂要求,这就是“务从实录”,这是前诏所没有的。至于前诏所说“叙成《国书》三十卷”或是预期之词,实际上当时未曾完成而完成于后诏之后,所以后诏才说此前“史阙其职,篇籍不著”。
细审二诏,我认为修史难成,障碍在于史臣趑趄不前。太武帝前诏以一般事务看待修史之事,并未特予重视,对障碍也没有估计。趑趄不前的原因,我认为是邓渊史狱遗留下巨大影响,其中关键又是史臣不敢直笔实录。所以后诏才强调“务从实录”,实际上是太武帝亲自承诺不会重复出现邓渊史狱,以安史臣之心。
邓渊“祸非其罪”,必修史有所违碍,只是谁都不便明言。这是史臣寒心之事,是明元帝一朝史事“废而不述”,太武帝时仍然“篇籍不著”的真正原因。太武帝前诏所命史官,邓渊之子邓颖就在其中,这可能是太武帝故作无事的一种姿态,但事实上会产生负面影响。太武帝后诏正是针对此中问题,针对史臣缄口裹足,惟恐愆失心态而发。后诏特命有地位、有担当、有能力的大臣崔浩总监其事,也是表示有事可由崔浩负责,不致牵连史臣。一般说来,修史中是非得失的评骘,惶惶中的文士或可藏而不露,但是据实录文,文士逃避责任的余地很小。所以“务从实录”一语,加上崔浩总监,应当能释史臣重负,让他们安心著述。
崔浩本来是有德于太武帝的,太武帝得以早为储君,抚军监国,以至于为国副主,就是出于崔浩向明元帝的力荐。崔浩极富军国智谋,迭有大功,太武帝令歌工历颂群臣,有“智如崔浩”之颂。而且崔浩在朝谨敬避嫌,“以示不敢犯国”,甚至早在道武帝杀戮无节,左右力求逃隐之时,崔浩随侍左右,“独恭勤不怠,或终日不归”。他是邓渊之狱的目击者。所以用他综理史事,应该是最合适的人选,是推动史臣尽力著述的重要一步。他本人应该是深知太武帝对他的知遇之恩的。
崔浩不负所托,受命十年,国史告成。道武纪及拓跋先人追叙部分以邓渊《代记》为蓝本而有所加工,所谓“删定勒成之笔”,当出崔浩。邓渊死后道武纪所缺部分自然也由崔浩续成。太宗明元帝及世祖太武帝纪由崔浩、高允同撰。三纪的注疏高允居多,总裁在崔浩[40]。从后来崔浩罹大狱而高允无罪的情节看来,除了景穆极力保护高允以外,也许还有别的原因,例如所谓“备而不典”问题不出在太宗、世祖二纪,而出在崔浩续成太祖纪中;不出在各纪注疏而出在选材综理方面,等等。前有邓渊之狱,崔浩又蹈覆辙,我看只能从崔浩当真执行“务从实录”寻求解释。
崔浩总裁史事,首在破邓渊狱后史臣裹足局面,一切惟“务从实录”是崇,显示自己忠于太武帝的付托。而竞趋之士为了迎合崔浩,更以国史刊石立衢,“欲彰浩直笔之迹”。古来权势宠幸者于臣君相与之际,有时未达一间,酿成事端,自贻伊戚。智如崔浩,也不免忘乎所以,竟不思伴虎之谚。所以高允议论刊石诸事,“分寸之间,恐为崔浩万世之祸”。希君之旨以实录为依归,以直笔相标榜者,终于栽倒在直笔之下!人主的复杂心态使希旨者祸福无常,给史学造成祸害,问题不正是出在“分寸之间”吗?
古书所见,有一类智者以“揣摩之才”见长。赵国虞卿作《虞氏春秋》八篇[41]“以刺讥国家得失”,其中有“揣摩”一篇。隋代杨素称赞封伦善于揣摩,史臣称封“多揣摩之才”[42]。崔浩盖亦封伦之俦,揣摩人主之意而遭反噬,成为千古史坛话题。崔浩以直笔、实录获谴,不悖于史德。但他并不理解太武帝所言“务从实录”,除了有惩于邓渊狱事外,还有他的理解与需要。诚如《史通·序传》所说:“苟能隐己之短,称其所长,斯言不谬,即为实录。”“盛矜于己而厚辱于先”,那就难保不取祸了。当拓跋君主尚生活在名教以外之时,先人事迹无涉荣辱,无大违碍,而当皇权在握,礼法人伦成为衡量准则之时,所谓实录也就是另有尺寸了。如若不然,皇权就要裁剪史法,约束史家。这也是研究中国史学史的一个值得思考的问题。
实录之说始自刘向等人赞誉太史公书之“其言直,其事核,不虚美,不隐恶”,从此实录被尊崇为史德之首。至于著史冠实录之名,唐宋定实录之制,明清开实录之馆,历代相仍,有保存史料之功,但难说都能遵循太史公之所界定。刘知几以张俨《默记》、孙盛《晋阳秋》为例,“以验世途之多隘,知实录之难遇也”。[43]他感叹“古来唯闻以直笔见诛,不闻以曲词获罪” [44],这似乎就是暗指崔浩狱事。
史馆再开以后,直笔仍然是修国史中的大问题。孝文帝尝谓史官当“直书史实,无讳国恶”[45],但史官自有忖度,趋避在己,再也不会出现邓渊,更不会出现崔浩。韩显宗答孝文帝之问,自诩“直笔而无惧”[46],但实际上却无寸进。近一个世纪中史官备位,少有著述,崔光直云“但须记录时事,以待后人”[47];崔鸿撰《十六国春秋》,以其涉国初事,惧其言多失体,迟不敢行[48]。邓渊、崔浩事件阴影难消,国史之学难振。尔朱荣入洛后竟有山伟、綦儁等倡言“国书正应国人(案指代人)修缉,不宜委之余人”,以至二十余年中代人掌史事,一无所成。及至东魏魏收受修史之命,执政者所关注议论,忧心所在仍是直笔问题。他们自然知道不许直笔则无史可言,允许直笔又惧扇扬褒贬。高欢戏语魏收“我后世身名在卿手”;魏收言志,故意标榜“臣愿得直笔东观”[49]。高洋效法孝文帝之意,直言“好直笔,我终不作魏太武,诛史官”[50]。诛史官之始作俑者实际上是道武帝,此时其事已被人淡忘了。这些资料陈识仁的文章都已引用,无烦多说。只是附加一句话:修国史引出如此纷纭,历代少见,追根溯源,还是北魏史风造成,这种史风正是国史狱事不可避免的后果。
魏收著史,时过境迁,拓跋先人行事已失去敏感性,所以收书中得以保留一篇《序纪》,分量虽然不大,迄今仍为研究拓跋先人历史唯一重要资料,而且是基本上经得起验证的资料。经过邓渊、崔浩两案以后,《序纪》中的资料一定有不少磨合删削,在相当程度上已失去从鲜卑语迻译时的原始面貌。但是五胡诸载记之中,还不见有保存先人历史资料像《序纪》那样系统准确之例。只是自邓渊、崔浩以来百余年中史风污染,当途者既求誉于国史,又畏国史之毁;既不能不标榜直笔实录,又吹毛求疵于直笔实录之中。风气积久,洗之愈难。不止是帝王干预修史,连权势之辈都想利用国史巩固家族地位,多求史官为先人作佳传。这就是《史通·直书》所说史臣也只有“宁顺从以保吉,不违忤以受害。”魏收的一部《魏书》,虽不远于是非,但亦难免无疵,未行时已多纠纷,刊布后被指责为“秽史”,以至于历代学者屡起为魏收辨诬。在我看来,这也是北魏史风污染的一种后果。

行文既竟,还有几句赘语。近年我所作拓跋早期历史研究的几篇文章,某些环节找不到确证,因而有推测成分,论述难得周全准确,大体都随处注出了。本文也是如此。对邓渊狱事性质的判定,旁征颇有,但迄今找不到直接证明,而以下行文与此点关系较大。这在逻辑上是犯了“丐词”的毛病。我想,古史中有大量“待垦荒地”,由于直接资料缺乏,研究难于下手,历史的空白点难于填充,杂乱的现象难于作出说明。出于这种考虑,我把此文(以及其它相关文章)作为研究拓跋历史的一种思路,一种探寻,而不是作为确凿的结论奉献给读者,希望能起到一点从空白处、从杂乱中探索拓跋历史问题的促进作用。果能如此,此文本身即令言而不中,我觉得还是值得的。也许,这可以从“得鱼忘筌”、“得意忘言”之义来理解吧。

[1]拙著《北魏后宫子贵母死之制的形成和演变》曾出一长注解释“代歌”问题,但未细究。
[2]参唐长孺《魏晋杂胡考·步落稽》,《魏晋南北朝史论丛》。
[3]《魏书》卷108之三《礼志》三。
[4]阎步克教授见告,北魏的太常乐户,属杂户之一种,数量不少,可以视为拓跋朝野崇尚乐舞的佐证。我同意这个说法。
[5]赵超《汉魏南北朝墓誌彙编》(以下简称《汇编》),天津古籍出版社,1992年, 303页。元怡、元肃,景穆帝之后,《魏书》卷19下有传。本文所用赵超《汇编》资料,均分别与中州古籍出版社1989年版《北京图书馆藏中国历代石刻拓本汇编》第3、4、5、6册所刊拓本对勘。
[6]

FONT>《汇编》,150页。
[7]《汇编》,314 页。张瓘并非代人,大概是受代风影响而作此说,也可能只是自饰家世而已,并非真有可吟可唱的歌谣。案墓主此年七月死,正朔在北魏,十一月葬,已属东魏正朔了。
[8]《汇编》,381页。此墓志《北京图书馆藏中国历代石刻拓本汇编》未收。
[9]元侔墓志见《汇编》60页。据《北史》卷15,“昭成帝九子,庶长曰寔君,次曰献明帝寔,次曰秦王翰,次曰阏婆,次曰寿鸠,次曰纥根,次曰地干,次曰力真,次曰窟咄。”此受久即寿鸠,居第五,而墓志则谓为第八子。按罗振玉《丙寅稿》已注意到《魏书·宗室传》所载此世系与墓志有异。岑仲勉《元和姓纂四校记》(1994年整理本,中华书局,401页)亦略有说。又,《元和姓纂》引此世系中有名翰者,即秦王翰,《北史》作地干。
[10]《魏书》此卷据《北史》及它书补,而《北史》与今本《魏书》又有世系歧异处。点校本《魏书》校勘记据赵万里说,以此歧异处《北史》是而《魏书》非。
[11]元昭为昭成帝玄孙,志见赵超《汇编》页146。
[12]《魏书·官氏志》,宗正,六卿之一,第二品上。《汇编》140页元斌墓志,斌为景穆帝曾孙,官宗正丞,“器识闲雅,风韵高奇,澹尔自深,攸然独远”,完全是汉人名士气质。这样的知识分子拓跋人中还很少见。
[13]马长寿《碑铭所见前秦至隋初的关中部族》。页57—59,中华书局,1985。碑在陕西渭北下邽镇。
[14]据《原州古墓集成》,文物出版社,1999。
[15]近见日本学者松下宪一提交北朝史国际学术会议论文《北魏內朝制度考略》,所辑史籍及墓志中带有羽真号者有十六例。羽真一词迄今尚无确解。松下认为系北魏爵名以赐内附者。但上举各例多有于羽真之外另有爵名,而且还有皇族人物,则羽真之义毕竟难于确认。
[16]文成帝南巡碑尚有折纥真、斛洛真。另外,《汇编》267页比和真, 294页他莫汗真,365俟勤真,是否都是人物职称身份之词,不敢肯定。
[17]王先《魏书》只此一见。《晋书·苻坚载纪》记淝战中苻融陷寿春,执晋安丰太守王先。二王先年代相近,不知是否一人。
[18]《天象志》此卷魏收书亡,后人取张太素书补入,参点校本校勘记。此年天象志既记北事(贺太后崩),又记南事(晋帝殂),盖此时已开始有了南北两分认识,参见下注。
[19]《魏书·乐志》释皇始为开大始祖之业;《通鉴》胡注认为“南北之形”定于此年;正光二年杨氏墓志有“皇始之初,南北两分”之语(见赵万里《集释》及赵超《彙编》)。《天象志》(三)天兴元年(398)十二月“群臣上尊号,正元日,遂禋上帝于南郊。由是魏为北帝,而晋氏为南帝。案初上尊号是皇始元年事,即帝位在天兴元年,大抵北帝、南帝之形定于皇始,制度确定实施则在天兴。
[20]《魏书》111《刑罚志》。
[21]《魏书》24邓渊传。
[22]其下还列仪曹郎中董谧撰郊庙、社稷、朝觐、宴飨之议,三公郎中王德定律令、申科禁,太史令晁崇造浑仪、考天象。连同邓渊在内,都是当时各有专长的汉士。吏部尚书崔玄伯则总而裁之。
[23]《隋书》14《音乐志》中载北齐祖珽上书之言。
[24]陈识仁《北魏修史略论》(见《结网编》,台湾东大图书公司1998)237页文中,参考杨翼骧编《中国史学史资料编年(一)》(南开大学出版社,1987),断邓渊受命修史在天兴元年(398),似可酌。
[25]见《魏书·天象志》。事详后。
[26]《史通·古今正史》作十卷。
[27]《南齐书·魏虏传》谓平城“西三里刻石写五经及其国记”。此盖南人据传闻崔浩刻国史事,其国史亦称“国记”。称史书为记,《史记》、《东观汉记》都是例证。
[28]太武帝时,太祖这一庙号还是指平文帝;道武帝从烈祖之称改称太祖,是孝文帝太和十五年事。高允在太武帝时何得用太祖之号称呼道武帝?所以这整段文字都是经过后人改写的,不是太武帝时的原状。
[29]《魏书》卷62《李彪传》“自成帝以来至于太和,崔浩、高允著述《国书》,编年序录,如《春秋》之体,遗落时事,三无一存。彪与秘书令高祐始奏从迁、固之体,创为纪传表志之目焉。”修史人物不列邓渊,只能说明邓渊《代记》内容已被崔浩、高允之书吸收了。“三无一存”之说是笼统估计,以情理言,当是年代愈早,存者愈少。
[30] 参《十七史商榷》66“追尊二十八帝”条。《序纪》中只有二十七帝之名,是由于昭成帝之子、道武帝之父寔,未立早死,只附见于《序纪》昭成三十四年而未独立立目之故。
[31]例如《礼志》(一)天兴元年道武帝即帝位祭天地,理当用正式国号,故祝辞用“惟神祇其丕祚于魏室”之语。
[32]《历史研究》1992.3.何文着重分析拓跋力求争神州正统,改代为魏,守旧者则仍以代为称。称魏称代,何文举证甚多,文献墓铭均有。
[33]《通鉴》记永入长子即位在前,窟咄败亡在后,《本纪》记二事先后相反。实际上这大致是同时发生的事。
[34]代国无力助西燕抗衡后燕,西燕终于在394年为后燕所灭。
[35]《四库全书总目提要》史部《三国志》条。
[36]见《结网编》,台北市东大图书公司出版,1998。
[37]《魏书·官氏志》神元时内入诸姓有“素和氏,后改和氏”,和跋历代当世领素和部落。《元和姓纂》卷8去声十一暮,素和氏:“后魏有尚书素和跋。”
[38]和跋部落所驻,可以考知。《和跋传》太祖校猎豺山,“群臣佥言跋世居此土,祠冢犹存”。据《读史方舆纪要》卷40,豺山在善无,今山西右玉境,但有异说。
[39]见周著《魏晋南北朝史札记》,中华书局,1985。
[40]与高允同参考作的张伟,从其本传看,不但未罹刑罪,甚至未提及参预修史之事。大概张伟在后诏中虽有其名,而实际上未尝参与。
[41]《史记》卷76《虞卿列传》。《汉书》卷30 《艺文志》著录《虞氏春秋》十五篇,另有《虞氏微传》二篇。
[42]《旧唐书》卷3《封伦传》。
[43]《史通通释·直书》。
[44]《史通通释·曲笔》。参同书《疑古》引《孟子》和汉景帝、魏文帝之言。
[45]《魏书》卷7《高祖纪》(下)
[46]《魏书》卷60《韩麒麟传》附显宗传。
[47]《魏书》卷67《崔光传》附崔鸿传。
[48]同上。
[49]《北史》卷56《魏收传》。
[50]同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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胡宝国:读《拓跋史探》

田余庆先生新作《拓跋史探》已于2003年3月由三联书店出版。全书24万字,主要讨论了三个方面的问题。第一,北魏子贵母死制度与离散部落的关系。第二,拓跋与乌桓共生的问题。第三,《代歌》、《代记》与《魏书》序纪的关系。我认为,其中第一部分是全书最为重要、最为精彩的部分。以下的讨论主要围绕这部分展开。 
关于北魏子贵母死这一现象,前人早已注意到。赵翼说:“立太子先杀其母之例,实自道武始也。”(《廿二史札记》卷一三“《魏书》纪传互异处”。)周一良先生说:“拓跋氏入中原前之旧制,凡其子立为太子者,母妃先赐死,至孝文帝母犹因此而被杀。但北方其他少数民族未闻有此风俗。且游牧部落亦不如封建王朝之易于发生母后专权之例,其来源尚待研究。”(《魏晋南北朝史札记》)韩国学者朴汉济对此提出过一个解释。他认为,子贵母死既非拓跋旧法,也非汉制,而是北魏胡汉体制中的特殊事物,其目的是为了加强皇权。(朴说见田书所引)这个解释是不错的。 
关于北魏离散部落,《魏书》中一共有三条记载。《魏书》卷一一三《官氏志》:“登国初,太祖散诸部落,始同为编民。”《魏书》卷一○三《高车传》:“太祖时,分散诸部,唯高车以类粗犷,不任使役,故得别为部落。”《魏书》卷八三上《贺讷传》:“其后离散诸部,分土定居,不听迁徙,其君长大人皆同编户。”对于道武帝离散部落,分土定居之举,研究者多从拓跋社会由部落联盟向国家转变这个大的时代背景下求得解释。这个解释也是不错的。 
总之,不论是子贵母死,还是离散部落,都是老问题了,而且也都有了不错的解释。不过事情常常是这样的,不错的解释往往对我们妨碍最大,因为它使得我们有理由停下来,不再进一步思考。田余庆先生的可贵之处却恰恰是不满足于此,而是按他惯常的思考习惯,在一般人停下来的地方继续穷追不舍。他指出:“拓跋鲜卑,相对于先后兴起的其他胡族说来,是一个发展缓慢的部族。东汉桓帝时拓跋南迁,‘统国三十六,大姓九十九’,群体庞大松散。汉末建安年间拓跋诘汾再次南迁,部落联盟更扩大了。《魏书·官氏志》所谓‘七族’、‘十姓’,是拓跋部落联盟新形成的核心,血统亲近,‘百世不婚’。拓跋部作为联盟领袖,其后妃必取之于七族、十姓以外的部落,其女子也必于七族、十姓以外择偶。因此,在一定的时间内,可能出现一些与拓跋部世代为婚的部族,形成于拓跋部的特殊关系;由于君权不张,拓跋后妃也就自然而然地居间起着联络作用,甚至有可能成为维系拓跋部落联盟的关键人物。”(24-25页)在本书的另一处,作者明确写道: “道武帝建国,并没有强大的外界敌人要去认真对付,真正棘手的倒是他的母族部落和妻族部落,甚至还有他自己的母、妻。这一现象令我恍然大悟,原来道武帝用战争手段”离散部落“,首当其冲的竟是母族贺兰和妻族独孤,这并不是偶然的现象。打破部落联盟的束缚,建立帝国,是此举直接的,急切的原因。至于更为根本的社会原因,如部落役使之类,在当时似乎是第二位的。……离散部落之举和子贵母死制度看似无涉,却是内蕴相通,后者是前者的后续措施。”(3页)至此我们看到,作者从他独特的思考角度出发,终于把本来属于皇室内部的子贵母死制度与看似毫不相干的离散部落问题结合了起来。两个问题的结合真可谓互相发明,相得益彰。如果没有联系到离散部落,关于子贵母死的问题实际上已经无话可说;如果没有联系到子贵母死,离散部落的问题就难以落到实处,而只能是国家形成理论的一个具体例证而已。 
诗歌语言中有所谓“陌生化”之说。一位诗人朋友曾就此向我解释说,“形式主义”批评家们提出过一个概念。他们认为文学,这里主要指诗歌,目的就是要把语言“陌生化”,也就是说,让语言能够给人以新的刺激,提供看待世界的新角度。借用这样一个概念,我们不妨说,田余庆先生也是把我们熟悉的问题陌生化了。在原本已经题无剩义之处开掘出了新的局面,提供了新的思考动力。不过我这里要强调的是,诗歌语言的“陌生化”是诗人的有意追求,而田余庆先生的“陌生化”却并非刻意为之,而只是他研究工作的客观结果而已。 
与陌生化的结果相反,对于熟悉他研究特点的人来说,作者在书中所使用的研究方法是一点也不陌生的。这个方法是什么呢?其实就是政治史的方法。我们知道,在《东晋门阀政治》一书中,作者曾研究了南方几大家族的政治关系,而在《拓跋史探》一书中,作者研究的则是北方几大部族的政治关系。这本书的各个部分总括起来说,实际上就是一部拓跋早期政治史。众所周知,年鉴学派重视长时段,而对于属于短时段的政治史则比较轻视,认为是“转瞬即逝的尘埃”。这个思想对我影响很大,所以在以前写的《读<东晋门阀政治>》一文中,较多地指出单纯政治史的缺陷。但是读了《拓跋史探》,我却感到政治史的方法也有它不容忽视的长处。政治史虽然不能解释一切,但从此入手,却也可以发现并解释民族史上的很多重要问题。具体到早期拓跋史,政治史的方法显得尤其必要。如果从传统的民族学的角度去研究,除非有更多的考古发现,否则已经没有多少可以利用的资料了,而一旦从政治史的角度切入,就会发现还有不少值得我们分析的素材。正是借助于政治史,作者才描绘出了一个早期拓跋族的隐约身影。由此,拓跋早期的历史不再只是一种部落→国家的理论概念的演进,而是变得具体了、生动了、活泼了。 
研究政治史,不只田余庆先生一人。但他的政治史研究却别具一格,颇有值得论说之处。我们知道,研究政治史,既可以依据政治学的某种理论框架展开,也可以不要这些框架。在我看来,田余庆先生属于后者。我们看作者在本书前言中的一段话:“五胡十六国这一破坏性特别突出的时代得以结束,归根结柢是五胡日趋融合,其主要部分终于陆续积淀在农业地区而被汉族文明逐渐同化之故,这可说是今天史界共识。但是,在这漫长过程行将结束而又尚未结束的时候,为什么是拓跋部而不是别的部族担当了促死催生的任务呢?”(1-2页)我们再看作者在《东晋门阀政治》中就“王与马共天下”说的一段话:“为什么江左会出现这种政治局面呢?总的说来,偏安江左是八王之乱和永嘉之乱的产物,而江左政权依赖于士族,则是门阀制度发展的结果。士族高门与晋元帝‘共天下’,归根到底可以从这里得到解释。但是这还不能说明为什么是琅邪王氏而不是别的高门士族与晋元帝‘共天下’的问题。”(3页)这两段话充分反映了他对历史的认识。这个认识简单地说就是:当时的事情必有当时的原因。由此,他自然不会满足于理论框架给出的解释,也不会满足于一般性的说明,而是一定要找出一个具体的历史原因。受这种认识的引导,他在本书中又有如下的一段话:“我不排除道武帝曾在某个时候发布过离散部落号令的可能,也不排除某些具有定居条件的部落俯首接受号令的可能,但不认为所谓离散部落主要就是如此而无其他更直接、更急迫的原因和具体的过程。”(62页)把问题具体化的思路会很自然地诱导出新的疑问:道武帝究竟是在什么时间?在什么地点?离散了哪些部落?道武帝母后究竟又是来自于哪些部落?回答了这几个问题,离散部落与子贵母死之间的关系就自然地呈现了出来。在解释历史现象时,研究者很容易急切地求助于“规律”、“趋势”来加以说明,他却反其道而行之,一再向“具体”索要答案。与众不同的思考方法使他更像是一位旷野中的孤独旅行者。在他不断的追问中,泛泛的解释愈来愈显得苍白无力,而我们原本熟悉的问题也终于变得陌生了。 
研究早期拓跋史,面临的最大困难是资料太少。作者虽然竭尽全力钩沉索隐,但很多地方还是不得不以推测来弥补资料的不足。这之中有的推测极有道理,给人以启发,但也有的推测难免令人生疑。 
在《<代歌><代记>与北魏国史》一文中,作者指出《魏书·乐志》中《真人代歌》“上叙祖宗开基所由,下及君臣废兴之迹”,应该就是拓跋史诗。根据有限的记载,作者进而推测,在当时替道武帝整理、辑集代歌者只能是汉族士人邓渊。以后邓渊又奉命修《代记》,《代歌》中的内容应是《代记》的主要资料依据。因此《代歌》、《代记》同源。邓渊之后,又有崔浩修国史。记录了早期拓跋史的《代记》基本包含在了崔浩的国史之中。这些资料以后又成为魏收《魏书·序纪》的蓝本。因此辑集《代歌》、撰成《代记》的邓渊应是《魏书·序纪》的第一作者。由此,作者就勾勒出了《代歌》→《代记》→ 崔浩国史→《魏书·序纪》这样一条史学发展线索。我认为这条线索不仅清晰而且很有道理。其中尤为可贵的是作者意识到《代歌》与《代记》之间可能的联系。《代歌》早已不存,根据有关的只言片语而注意到它的价值,并将其纳入史学史的发展线索中是很不容易的。 
与上述合理的推测相比,接下来的推测就不那么合理了。关于邓渊之死,史书中是有明确记载的。《魏书·邓渊传》载,渊从父弟晖坐和跋案,“太祖疑渊知情,遂赐渊死”。但作者不相信这条材料,反而认定邓渊与以后的崔浩一样,也是死于国史之狱。在毫无材料依据的情况下,作者为什么一定要做出这样的推测呢?我想,这或许是因为作者不自觉中已经被前面自己发现的《代歌》、《代记》的线索束缚住了。我们先来看崔浩国史之狱。崔浩因修史“备而不典”、“暴扬国恶”而遭祸。《通鉴》也说崔浩国史“书魏之先世,事皆详实,……北人无不忿恚。”。由此可知崔浩国史当是记录了一些有悖人伦、有伤风化的早期拓跋故事,因此惹怒了皇帝,引来杀身之祸。但是,崔浩所记拓跋早期历史是从哪里来的呢?根据《代歌》、《代记》线索,这些内容应该都是从邓渊所撰《代记》那里来的。既然如此,既然崔浩已经死于国史之狱,那么更早的邓渊能不死于国史之狱吗?看来,为了符合这个逻辑,作者只能让邓渊死于国史之狱了。 
更为值得商讨的问题还不是邓渊之死,而是关于离散部落的史料依据。根据作者的统计,贺兰部被离散的经过是这样的: 
第一次:据《资治通鉴》记载,北魏登国三年(388年)三月,“燕赵王麟击许谦,破之,谦奔西燕。遂废代郡,悉徙其民于龙城。”作者指出:“显然,慕容麟尽徙代郡民于龙城,当包括三十年前的前燕时期由贺赖头率领居于代郡平舒城的数万贺兰部民在内。”(67页) 
第二次:登国五年,道武帝与慕容麟合击贺兰、高车诸部于意幸山。稍后,铁弗刘卫辰又袭贺兰,贺兰部请降于拓跋,“遂徙讷部落及诸弟处之东界。”(70页) 
第三次:登国六年,贺讷兄弟内讧,后燕“兰汗破贺染干于牛都”,慕容麟“破贺讷于赤城,禽之,降其部落数万。燕主垂命麟归讷部落,徙染干于中山。”(70页) 
第四次:作者在叙述皇始三年贺讷之弟贺卢逃奔南燕后说:“至此,道武帝舅贺讷、贺染干、贺卢三人,只剩下贺讷一人,据《贺讷传》,此时贺讷已无所统领,而且后嗣无闻。道武舅氏中还有一个贺讷的从父兄贺悦,待道武‘诚至’有加,得到道武善遇。贺讷、贺悦的部民,自然也被强制离散,分土定居了。这是第四次离散贺兰部落,也就是现知的最后一次。”(70-71页) 
以上离散贺兰部事例中,第一次、第三次都是被慕容部离散的,真正被拓跋部离散的只有第二次、第四次。我们再看独孤部被离散的情况。 
第一次:《资治通鉴》登国二年记“燕王(慕容)垂立刘显弟可泥(亢泥)为乌桓王,以抚其众,徙八千余落于中山”。作者指出:“刘显八千余落徙中山,这是独孤部的主要部分第一次被强徙,是孤独部落离散之始。”(80页) 
第二次:刘亢泥降于慕容氏,《太祖纪》皇始元年(396年)六月“遣将军王建等三军讨(慕容)宝广宁太守刘亢泥,斩之。徙亢泥部落于平城。”作者指出:“这是《魏书》所见独孤部民第二次被强制迁徙。”(83页) 
独孤部被离散两次,一次是慕容氏所为,一次是拓跋氏所为,这与贺兰部被离散的情况类似。作者在59页曾分析说:“部落离散,就其实质说来,本来是部落发育的自然过程,它之所以在道武帝时比较集中地出现,却也是由于道武帝创建帝业的特别需要。这可以解释为什么离散部落只留下这几家外戚部落的个案,而大量的对道武帝帝业无害的部落却得以保存下来。”显然,作者十分关注、十分强调的是道武帝拓跋珪离散贺兰、独孤部落,而不是别人的离散行动。但是,根据他提供的事实,不论是对贺兰部还是对独孤部,离散部落的发动者都是不仅有拓跋氏,而且也有慕容氏。两家各占一半。既然如此,恐怕就不能把离散部落很特殊地仅仅看成是道武帝为打击外戚部落,“创建帝业的特别需要了”。应该说,作者也意识到了慕容氏在离散过程中所起的作用,所以在35页又补充说:“看来,贺兰部破败主要是拓跋部借慕容部之力,得利的是拓跋部。”这个补充其实没有太大用处。这里所谓“借慕容部之力”一说,给人的感觉似乎慕容氏只是前台的表演者,而拓跋氏才是幕后操纵者。如果真是这样,那么上述由慕容部发动的离散事例就不构成对本书观点的反证了,但遗憾的是,实际上并没有这样的材料可以证明。所谓 “得利的是拓跋部”云云,其实只是一种客观效果而已,并不能因此把慕容氏离散贺兰、独孤部归结为拓跋氏操纵的、有预谋的行动。 
这里还涉及到一个概念问题。究竟什么是离散部落?按书中多数场合的表述,所谓“离散部落”就是指强制迁徙部落。但十六国时期某个部族强制迁徙另一个部族从甲地到乙地是常有的事情。如果仅在此意义上来理解离散问题,那道武帝离散部落还有什么特殊意义好说呢?作者似乎也认识到这个问题需要解释,所以在 75页又说:“强徙部落自十六国以来就是常有的事,包含离散部落,但并非都离散。道武帝在完成帝业的过程中,从总体上意识到离散部落的深层意义,理解其必要性和可能性,因而采取更主动更连续更强烈的措施,不只是迁徙部落,而且还要离散部落。这是他与十六国君主的不同之处。”按这个表述,似乎强制迁徙部落又不等同于离散部落了。 
按我的理解,强制迁徙部落不等于离散部落。前引《官氏志》说:“登国初,太祖散诸部落,始同为编民。”《贺讷传》说:“其后离散诸部,分土定居,不听迁徙,其君长大人皆同编户。”按离散的结果既然是“同为编民”、“君长大人皆同编户”,因此所谓“离散”应该是指打破部落内部旧有社会等级结构而言的,唐长孺先生也是这样理解离散部落的,他说“部落的解散使贵族、人民都成为单独的编户。”(唐长孺:《拓跋国家的建立及其封建化》,载《魏晋南北朝史论丛》205页。)而所谓强制迁徙部落,即只是把某部落从甲地强制迁徙到乙地是不可能起到这种作用的。按作者上面的表述,似乎道武帝不只是迁徙部落,而且还离散了部落,但根据前面提到的有关贺兰、独孤部的史料,我们见到的还只是迁徙而不是离散。总之,如果我的理解不错,如果强制迁徙部落真的不等于道武帝登国年间的离散部落,那么本书所有有关于此的讨论就值得重新考虑了。 
写到这里,我不想再就作者的种种可疑推测说更多的话了,因为作者本人早就认识到了这个问题。他在前言中说:“我衰年涉入拓跋史题,颇感力不从心、步履维艰,更感到资料不足,结论难下。”他还说:“基于以上认识,我把本书所见主要作为窥探拓跋史的一种思路,而不一定是作为确切结论,奉献给读者,希望起到促进思考、共同探求的作用,以期尽可能把古史的这一模糊区域一点一点加以辨识。”凭借着几十年的研究经验,田先生当然知道要尽量避免过多推测,本书诸多推测实再是出于无奈,正所谓巧妇难为无米炊。史料的极度缺乏制约着每一个研究者。他已经竭尽全力了,尽管有些推测还需要再斟酌,但他毕竟已经给我们描述出了一个以前未曾见过的、精细的历史过程。这是我们要十分感谢他的。 
《汉书》卷六二《司马迁传》载,西汉刘向、扬雄“皆称迁有良史之材,服其善序事理,辨而不华,质而不俚,其文直,其事核,不虚美,不隐恶,故谓之实录。”本传又载司马迁语:“所以隐忍苟活,函粪土之中而不辞者,恨私心有所不尽,鄙没世而文采不表于后也。”“实录”之说、“文采”之说,正反映了史学的两个特点,一方面,史学是求真的学问,另一方面,史学也是展现史家思想、才华与魅力的手段。换言之,史学不仅是科学的,而且也是艺术的。从求真的角度看,我对《拓跋史探》多有疑惑;从展现史家个人才华与魅力的角度看,我又认为这是一部成功的著作。这种矛盾的态度或许就说明了这样一个浅显的道理:真与美有的时候并不能完全统一。 
(载《读书》2004年第6期,题目被编辑改为《在题无剩义之处追索》)
学术批评网(www.acriticism.com)转发 2005年11月20日

일단 이번에 시험에 참가하신 학생 여러분. 그리고 그 학생들의 뒤에서 뼈를 깍는 수고를 하신 부모님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사실상 의미가 없는 면접시험만 남았으니 편안하게 쉬시면 될듯 합니다. 단! 비리로 들어오는 인간들은 그냥 지금 당장 나가죽어버려. ^^

 在9月见哦~(9월달에 봐요~)

이번 시험장 앞은 한마디로 부끄러운 한국인들이 너무나 많이 보였다.  이제 시험이 끝난지 일주일. 그 동안 죽어라 술 마시거나, 죽어라 인터넷을 하거나, 다른 학교를 공부를 하거나, 어찌되었든 이미 시험 후유증은 없어졌으리라 생각한다. 이제 칼날을 들어보겠다. 그 부끄러운 한국인들의 현장으로 들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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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유학생회가 학교의 "허가"을 받아 설치한 현수막. 당연히 중국말로 제작되었다. 내용은 "시험 잘보셔요!"


2008년 4월 12일과 13일은 북경대학교 본과 입학시험이 있는 날이다.  예전부터 그러하였지만 학원들이 점차 입시의 필수코스처럼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적으로는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단지 시험만을 위해서 공부를 하는 분들 중에서는 기본적인 중국어 실력이 안되는데, 시험 기술만으로 입학하시는 분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현실에서 어쩔 수 없는 모습일 것이다.

문제는 그 학원들이 북경대학교 입학시험 현장에서 벌인 어이없고 부끄러운 모습들이다.

** 북경대학 한국 유학생회를 그냥 학생회로 쓴 점 죄송합니다. 평소에 그냥 학생회로 칭하기에 저도 모르게 실수를 했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 몇몇 사진은 초상권침해문제로 다시 한번 더 불투명하게 조정했습니다. 대신 사진의 효과가 조금 떨어졌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본인은 12일 아침 7시 반에 시험 현장으로 나갔다. 그리고 어이없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고려학원의 대형버스가 시험현장 앞의 2차선 도로의 한 부분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시험장 앞은 빠져나가려는 차들과 수험생들의 물결로 정신이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시험장 문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판을 벌린 청산학원을 위시한 수많은 학원들. 무엇보다 어이가 없었던 것은 "한글로만" 만들어진 수 많은 현수막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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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서 있는 고려학원 버스.그리고 아래쪽에 맘대로 부스를 설치한 청산학원.잘들 하는 꼬.라.지.다.


이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한국의 수능시험장 앞에서는 당연히 있는 일이 아니냐고?

1) 부스 설치는 미리 허가를 받아야된다.

북경대학교 안에서 모든 부스는 사전 허락을 받아야만 설치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시험장 앞에 당당히 붙어있는 "부스를 설치하면 안됩니다"라는 안내문구를 보기만 하여도 이 점은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든 자신들을 홍보하려는 학원들에게 이 점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북경대학교 학생회는 유학생처나 학교 보안관계자들과 아는 사이임에도 매번 행사가 있을 때마다 공문을 보내고 허가를 받는 것이 심심해서 그런 것 같은가? 학교의 규칙을 따르겠다는 의미이다. 여긴 북경대학교이다. 당신들의 학원이 아니다. 여긴 여기의 규칙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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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가? 저 한자로 써있는게 "시험장 앞에서는 부스 설치를 금합니다.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안내문이다. 하지만 그 바로 옆에서 대 놓고 판벌려놓은 청산학원. 물론 그 외에 다른 학원도 다른 쪽에 판벌려놓았다. 잘한다. 잘해.


결국 그 다음날 시험장 입구 앞에 부스 설치를 못하도록 차단되었다. 단지 한국유학생회는 미리 허락을 받았음으로 편안하게 부스를 만들고 학생들에게 물과 초코렛을 나누어주었다. 이에 대해서 한국 유학생회가 학교측에 일러바친 것이 아니냐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첫날을 생각해보라. "누가 봐도" 어지럽고 혼잡스러웠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스스로 반성해 보아라!


2) 현수막도 허가를 받아야한다.

북경대학교 내에서 현수막도 허가를 받고 걸어야 한다. 물론 학원들이 그딴 허락을 신경 쓸리도 없다. 또한 한국어로 현수막을 만들어서도 안된다. 여긴 중국 학교이다.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물론 한국어가 필요할 때에는 허락을 받으면 된다. 물론 이런 허락이 있는 것을 학원이 모르지 않는다. 그냥 일단 걸고 본 것이다.

그리고 북경대 시험을 보는 것이 한국인 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도 있다. 단지 수험생들을 응원하는 목적이라면 다른 나라 학생들을 위해서 중국어로 현수막을 만드는게 기본 아닐까? 그 점에서 역대 대대로 중국어로 된 응원문구를 제작하는 한국유학생회에 박수을 보낸다.

결국 12일 10시경. 열받은 학교 관계자들에 의하여 모든 현수막이 내려졌다. 그 다음날도 현수막을 걸지 못했다. 그것 가지고 무엇이라고 뒤에서 꿍시렁 거린 학원관계자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쫌!


3) 시험장 앞에 버스를 세워놓다니...

고려학원의 만행은 생각 하지 않아도 알것이다. 무슨 생각으로 좁은 시험장앞의 길에 고려학원의 글자가 당당히 적혀 있는 대형버스를 주차할 생각을 했을까? 나중에 학교 관계자가 차를 뺴라고 요구하자 운전기사를 찾지 못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변명이나 하고 말이다. 처음부터 그런 곳에 주차할 생각을 한 것 자체가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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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빨간 색이 고려학원 버스이다. 2차선 도로인데 그중 하나를 점령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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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차가 막히게 되는거다! 알겠냐 고려학원!!!

결국 12일 8시 40분쯤에서야 해당 차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다. 한심하다. 고려학원.


4) 시험장 앞에서 난리치는 청산학원. 니들 잘났다.

이제 입장할 시간이 되었다. 그러자 청산학원은 "인간 통로"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응원하려고 했다. 하지만 왜 한필이면 입구 바로 앞의 좁은 곳에서 "그 지랄"을 하느냐는 것이다. 안 그래도 좁은 입구가 양측에 학원들이 벌려놓은 책상들로 더 좁아졌는데, 그곳에 인간 통로를 만들면 청산과 관련 없는 학생들은 어떻게 들어가라는 것인가?

청산이 차지하는 공간을 때문에 더욱 더 복잡해진 것은 알고 있는가? 생각이 있나 없나? 자기 학원생들만 챙기면 끝이라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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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에는 청산의 부스가 2)번에는 청산이 만든 라인이 4)에는 다른 학원들의 부스가 있었다. 청산 혼자 반을 점령했다. 결국 청산이 아닌 입시생들은 3번의 좁은 통로로 들어가야 했다. 그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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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보이는 라인 안으로 들어가는 청산. 그리고 남은 좁은 길로 들어가려는 다른 수험생들. 청산아. 이거 보면서 느껴지는거 없느냐?



5) 중국 학생들이 무엇이라고 했는지 아는가?

해당 시험장의 위치는 북경대학교 도서관의 북쪽이자, 본인도 이번학기에 수업이 2개나 있는 건물이다. 한마디로 수 많은 중국 학생들도 자주 지나다니는 그런 곳이다. 본인의 아는 녀석들도 지나갔다. 이게 먼 "난리"라고 하더라. 북경대학교 학생이면 나중에 중국의 핵심 요직들에 들어갈 녀석들이 쌓여있는 곳이다. 그런 사람들이 이런 "난리"를 보면서 한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 것 같은가? 참 좋게도 생각하겠다.




학원들. 정신 차려라. 당신들이 이미 유학생처의 선생님들과 모종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람들 모두 알고 있다. 어떤 관계자는 본인에게 "이런글 계속 적다가는" 학교 짤릴 수도 있다고 경고까지 해주셨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모종의 관계를 믿고 막나가겠다는 것인가? 아니 그럴 수록 자중해야되는 것 아닌가?

부족한 부분을 보충할 수 있는 학원의 순기능을 부정하고 있는게 아니다. 하지만! 비리를 중계해준다는 소리를 듣고 있는 학원들이 이제는 대놓고 한국 망신을 시키니 조용히 있기 힘들어서 이렇게 중얼거려 본다. 정신 좀 차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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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에는 온갖 허가를 다 받았은 한국유학생회임에도 학원에 밀려 쫒겨난 불우한 것들. 다음날에는 경비원들이 학원을 제지하였고, 덕분에 허가를 받은 한국유학생회는 편안하게 학생들에게 음료수와 간식을 나누어주었답니다.




 

짦게 추가 : 청산과 고려만을 죽도록 씹은 거 같다. 물론 그 외에 학원들도 잘한거 없다. 하지만 이 두 학원이 씹힐짓을 워낙 강렬하게 해서 다른 학원은 언급하지 않았다. 비젼교회와 학원로교회분들. 특별한 홍보 목적보다는 수험생들을 응원한다는 의미가 강해서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다음부터는 허가를 받고 하셨으면 좋을듯 싶다.

왜 이제서야 이 글을 올리냐는 분. 만일에 학원에 다니는 수험생이 이 글을 보고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흔들릴까봐 지금에 올리는 것이다.


추가 : 죄송합니다. 가끔 테터가 오작동을 할때가 있는데, 덧글 금지을 해놨군요. ㅠㅠ
정말 죄송합니다. ㅠㅠ   지금은 마음대로 덧글을 다실 수 있습니다.



홍보 한마당!
북경대학교를 준비하시는 분들은 아래의 주소로 들어가보시길 바랍니다. 해당 카페는 북경대학교 재학생들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만들어졌고, 어떤 학원이나 유학원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정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방이나 한국에서 북경대에 대한 정보을 전혀 모르시는 분들에게는 좋은 곳이 될듯 합니다.

http://cafe.daum.net/pekinguniversity


추가 : 한 분이 덧글로 명예훼손의 문제가 없지 않으냐고 하셔서 알아보았습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한국은 "사실"을 말해도 명예훼손이 성립하는 반면 중국은 "사실"을 말할 경우 명예홰손이 성립되지 않는군요. 중국 언론의 자유를 지적하던 저로서는 조금 부끄러운 결론이었습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중국의 명예훼손법은 이렇다. 에 올려놓았습니다.




현재 중국인들이 MSN에 있는 분들은 발견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중국에서는 급속도로 MSN의 이름에 위와 같이 "♡ China"을 다는 애국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방법은 (L) 을 이름에 넣으면 자동적으로 하트로 변합니다.

하트는 중국말로 红心(홍신 hongxin)
 

이제 그것을 본 몇몇 한국분들은 "♡ Korea"의 형식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MSN과 같은 실시간 메신져가 대단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계 어느 곳에 있던지 간에 서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상대가 어느 나라 사람이든, 황인종이든 백인종이든 흑인종이든 상관없이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 World"라고 달아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자신의 국가에 속박당하지 말고, 세계을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민족주의! 이 동영상을 보며 뜨거운 눈문을 흘렸을 중국인들.
그리고 내용만 조금 바꾸면 똑같이 뜨거운 눈물을 흘릴 한국인들.
아아! 너무나 위대한 민족주의여!


현재 중국과 CCN과의 모습은 참 재미있다. CCN은 사과를 했다. 하지만 중국은 CCN사과를 하지 않았다고 다시 하라고 한다.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 아닌가? 한국과 일본간에 지겹도록 반복되는 일이다. 해당 일은 정확하게 어떻게 된 것인지 몰라서 말하기 힘들지만, 사과 안한다고 중국 정부는 중국주재 CNN 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 중국아...이건 니가 잘못하는거다.(안 그래도 언론통제로 말 많은데 압력이라니...)

위 동영상의 내용요약은 다음과 같다
1) 상대 방송국이 오보였음을 사과했다는 건 결코. 절대. 말하지 않는다.
2) 주식폭락등의 다양한 일들이 외국자본떄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그럼 서브프레임을 당해서 경제가 휘청거리는 미국은 어떤 외국자본의 침공때문에 그러는가--)
3) 물가 상승도 싹다 외국 자본의 문제다. (그동안 국가에서 억지로 물가를 잡고 버텨서 그렇지. 상승하는게 당연한 거다. --)
4) 일어나라! 중국 청년이여! 뭉쳐라! 중국인들이여! 외국과 싸우자!

이런 글들 어디서 많이 본 것이 아니던가? 왠지 어디서 본거 같지 않은가? 이렇게 말하시면 일부 극단주의자들이나 위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라고 한국분들을 이야기 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도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어이없는 민족주의적 선동을 하고 있다고 해야될까?



일단 티베트 승려들도 절대 선인이 아니다. 그들도 분명한 사람이고 폭력행위를 할 수 있다. 티베트 독립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무시하고는 한다. 하지만 그들도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그리고 꺼꾸로 중국인들은 왜 간디의 아래에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 수 많은 폭력행위를 했음에도 간디가 존경을 받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본인 진실로 제대로 해결되기를 바란다. 원나라시대부터 티베트는 완전한 독립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한 속국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있어왔다.

종교와 풍습의 자유를 원하는 티베트와 실질적인 통치권을 원하는 중국간에는 행복하게 잘 살 수 있게 함께 노력할 수 있는 부분이 보인다. 가능하기만 한다면, 21세기의 재미있는 실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아쉽게도 본인조차 실험이 성공하리라는 확신이 없다. 이러한 실험은 결국 힘쎈 자가 이기는지라...


그리고 한국분들. 이것이 민족주의다. 다른 이성적인 부분을 모두 무시하는 민족주의가 이것이다. 위의 동영상을 보고 역겹고 웃기다고 생각하는 만큼! 한국의 민족주의도 그 정도로 심하다. 먼 헛소리냐고? 본인도 이런 말이 본인만의 착각에서 나온 말이기를 바란다.


한국인들아! 우리 이 기회에 중국 현재 모습을 참고해서!
한국의 민족주의를 벗어버리는것은 어떻겠는가?
한국인이 아닌 인간이 되어보지 않겠는가?



이 동영상의 제목은" 做人别太CNN"
한국말로 "CNN처럼 살지 말아요."


위의 동영상은 현재 중국에서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는 티베트 사태관련해서 CNN을 필두로 한 타국 매체들이 거짓과 과장을 하고 있다는 노래가사이다. 개인적으로 몇몇 사건은 분명한 오보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오보는 다 합쳐서 2개. 그리고 얼마전에 있었던 CCN기자의 GOON(개쉡정도로 번역됨?!) 발언같은 경우는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해당 매체는 사실확인 뒤 빠르게 사과보도를 하였다.

오보와 잘못된 발언 목록
1) 중국 영화의 한 장면을 가져다 온 부분. : ....장난하냐. 이거 독일이었던가의 매체였던것으로 기억하는데...정신차려! 이건 어딜봐도 고의잖아! 물론 사과했다. 안하면 자국에서 더 난리가 나겠지.

2) 과거의 티베트 독립운동 사진 가져오기 : 이건 착가일수도 있으나 고의성이 농후하다. 물론 사과했다.

3) CCN 기자가 "중국 제품은 50년동안 쓰레기였으니, 그것을 만드는 중국인도 쓰레기다"정도의 발언을 했다. 당연히 중국정부 차원의 항의가 있었고, 사과를 했다.



그런데 말이다. 그렇다면 해당 몇몇 오보 말고 다른 건 맞다는 소리 아니겠는가?! 아...그것은 과장이라는 소리인데 말이다. 이 쯤에서 이 글의 제목으로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CNN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CCTV을 믿을 것인가?"

더 쉽게 말하자면, 지금까지 오보도 있고 미국편에 들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최대한 공정하게 보도하려고 노력하는 CNN과 중국인들도 믿지 못하는 중국 정부에 조정당한다고 모두가 생각하는 CCTV 중에서 어떤 것을 믿겠는가?




후....진심으로 베이징 올림픽 잘 좀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잘 되려나...후...무엇보다 진정한 테러급의 "진정한" 독립운동을 할 위구르쪽은 아직 시작도 안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해서 신장 위구르쪽에서 벌인 큰 테러가 아직 없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물론 몇몇 작은 일들은 있었지만 그 동안 위구르쪽의 성향을 생각하면....)





현재 중국인들 사이에서 돌고 있는 글 하나를 소개해드린다. 이에 대해서 "짱깨 새끼들 개쉡들!"이라고 하기 전에 자세히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일단 이런 글은 한국에서는 없었을까? 다시 말해서 민족주의로 똘똘 뭉친 글들은 한국에 없는가? 잘 생각해보아라. 그 다음으로 이런 중국인들의 글이 왜 돌고 있을까? 이에 대해서 중국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까?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단지 욕으로 배설하지만 말고 생각을 해보셨으면 좋겠다.


올림픽 성화 봉송이 계속 방해를 받고 있다. 특히 파리에서 많은 방해를 받았다.
파리시정부는 감히 티베트 독립 표어를 시정부 청사에 걸어놓았다.
유럽의회는 티베트 독립을 지지하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미국하원은 중국의 올림픽을 저해하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독일 총리는 공개적으로 티베트 독립을 지지하고 나서면서 올림픽에 보이콧을 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
21세기의 중국의 팔국연합군에 맞서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세계에 중국인들의 단합된 힘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5월 1일, 전국의 까르푸 매장에 가지 말자!
6월 1일, 전국의 KFC매장에 가지 말자!
이 내용을 10사람에게 보내면 당신은 우수한 중국인이다!
이 내용을 20사람에게 보내면, 당신을 최고의 애국자이다!
중국인들 모두가 힘을 합쳐 일어나는 모습을
타이완넘들/한국인/일본인/전세계에 보여주자!


-- 몇몇 참고사항 --

1) 파리 : 한 도시에서 성화를 2번이나 꺼버렸다. 그것이 파리다. 시민단체들이 일단 들어오면 온갖 방해를 할 것이라고 경고를 해서 경비가 장난이 아니었는데도 2번이나 꺼버렸다. 용자들이다. 이제 기대되는 곳은 미국일 것이다. 한번 두고보자.

2)  팔국연합군 : 청나라 말기, 8개국이 천진을 거쳐 북경으로 쳐들어와서 작살을 내놓는다. 한마디로 중국 근대에 외국세력에 침입을 당한 사례이다.

3) 까르푸 : 까르푸 대주주가 티베트 단체에 거액의 후원금을 지불했다.


이 글에 대해서는 최대한 본인의 의견을 밝히지 않을 생각이다. 사실 이런 글을 소개 안 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북경대 역사학과라고 하는, 중국의 막강한 대학인 북경대에 그것도 다른 학과도 아니고 "역사"를 배우는 사람이 올려놓은 글이라서 소개시켜 본다. 끙...차라리 역사적 지식 없는 사람들이야 그렇다고 하고, 분명히 알거 다 알면서 저렇게 적어 놓은 저 인간!!! 그것도 이름이 익숙하지 않은것으로 봐서 근현대사쪽인듯 한데...후...님하. 역사 왜 배우셔요?

그냥 조용히 "한국인의 입장에서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자면, 중국사람들이 세계에 보여주어야 되는 것은 니가 말하는 그런 일들이 아니라, 티베트 사람들과 평화롭게 사는 모습이다"라고 적었습니다.


--- 원문 ---

奥运圣火不断受到骚扰,尤其在巴黎。
巴黎市政府竟把藏独标语挂上市政大厦!
欧洲议会通过决议支持藏独为北京抹黑
美国众议院通过决议要抵制中国奥运!
德国总理公开支持藏独,不参加奥运!
面对21世纪的中国八国联军想干什么?
让全世界看看中国人团结的力量!
5月1日,让全国的家乐福冷场!
6月1日,让全国的肯德基冷场!
每人转发10个,你就是优秀的中国人!
每人转发20个,你就是最爱国的中国人!
中国人万众一心,团结起来,
让小台湾/韩国人/日本人/全世界看看,
本来我是不发这种信息,不过这几天老外们忒猖狂

본인 흡연자다. 언제나 드럽고 치사해서 끊는다라고 말하면서 담배를 입에 무는 흡연자다. 그런 본인에게 중국은 지금까지 흡연자의 천국이었다. 사실상 모든 곳에서 마음대로 흡연을 할 수 있었다. (주의하라.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다.ㅠㅠ)

 
베이징시는 "베이징시 공공자소 금연구역 범위에 대한 규정《北京市公共场所禁止吸烟范围的若干规定》"을 발표해 주셨다. 해당 규정이 포함하는 범위는 기관, 단체 및 기업의 회의실과 사무실은 모두 공공장소로 규정하고 금연지역이 된다. 그리고 체육과 병원등도 역시 공공장소에 포함이 된다.  어차피 이런 곳에서는 한국의 습관대로 담배를 잘 피우지 않으니 그러다고 치자.

이제는 식당과 화장실에서도 담배를 필 수 없게 되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식당은 무조건 비흡연자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야만 하게 되었다. 덕분에 식당업계에서는 비상에 걸려있다. 그리고 택시에서도 담배를 피울 수 없게 된다. 오호~~ 통제라!

이번 규정은 그넘의 잘난 베이징 올림픽을 대비해서 제정된 것이다. 먼저 베이징에서 실시가 되고 그 다음에 전국으로 확대해 나갈 생각이라고 한다. 틀리지 않은 생각이다. 아니 당연히 해야되는 일이다. 슬프기만한 흡연자의 입장을 벗어나서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번 법률이 과연 현실적인 효력이 있을것이냐는 점이 의심스럽다.

대부분의 경찰들도 이제 경찰서에서 흡연이 불가능해진다. 이것을 제대로 지킬 경찰부터나 있을지 궁금하다. 또한 수 많은 택시기사들이 담배를 피는데 과연 지켜질 수 있을까? 그것을 다 떠나서 사실 지금 지정한 지역은 예전에도 금연구역이라는 표시가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런 법률을 새로 만든다고 갑자기 잘 지킬 것으로 생각되는가?


자세한 목록을 살펴보면

1. 의료기관의 실내지역

2. 탁아소와 유치원

3. 초등학교와 중학교 및 중등직업학교

4. 고등학교와 기타 교육기관

5. 영화관, 전시관,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과학관, 당안관, 기념관등의 문화 예술 장소

6. 상업, 금융업, 우편업과 통신업의 영업장

7. 버스, 택시, 지하철등의 공공 교통기관 및 매표소

8. 개방된 유적보호 단체

9. 체육관과 경기장

10.  체육관의 경기장의 시합지역과 관람석


이에 대한 중국인들의 반응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국에서 위의 지역을 금연지역으로 만들었을때의 반응과 완전히 일치한다. 다시 말해서 드럽고 치사해서 담배를 끊는다부터 시작해서 이럴거면 차라리 담배를 마약으로 지정하고, 담배 공장을 닫아버리시지? 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다.

한국에서는 이미 다 실행되고 있는 지역이라 말하지 마라. 본인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에 반하여 예전의 베이징은 담배를 피어도 큰 상관이 없기에 흡연자의 천국이었던 것이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피흡연자의 권리도 보호되어야된다. 그리고 위의 지역은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



하지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천국이 지옥으로 변해간다..역시 드럽고 치사해서 담배를 끊어야 되는 걸까?.....일단 담배 한대 피면서 생각해봐야겠다. 후...

북경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짱시앙롱(张祥龙)은 북경대학교 개교 110주년을 맞아서 공자상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북경대에 받아들여지기 힘든지 아시는가? 북경대는 민주와 자유 그리고 자유로운 사상의 명분으로 공자를 배격한 대표적인 학교이다. 그런데 그런 북경대 77 학번으로 현재 철학과 교수를 하는 신세대(문혁다음에 학교를 들어간 세대)가 공자상을 세우자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렇다면 짱시앙롱교수는 어떤 이유로 공자상을 세우자고 하는 것일까? 우선  다른 수 많은 철학자들의 동상을 세우면서 중국의 위대한 철학자로 당연히 이야기 되는 공자상을 세우지 않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한다. 이 의견에는 동감하는 바이다. 솔직히 소크라테스의 동상이 있으면서 공자의 동상이 없는 건 코메디에 가깝다.

두번째로 북경대의 시초를 이야기 한다. 북경대학교는 청나라 말기에 조선의 "성균관"과 같은 역할을 하던 곳이다. 그래서 북경대의 인문학. 특히 고문에 대해서 강력한 힘을 아직도 발휘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엇보다 현재 세계화의 과정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북경대의 뿌리인 "경사대학당 京师大学堂" 그리고 그 시초인 2000년전의 "서한태학 西汉太学"을 확실히 하자는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북경대가 지금은 유명무실해졌다고 비난을 받지만(공산당 비판하다가 짤린 선생님이 한분 계셔서 그런다-_) 속을 들여다 보면 유구히 내려오고 있는(북경대 교수중에서는 반공산당이 상당히 많다...반골정신이 정통비슷한것이라서...) "모두를 받아들이는 兼容并包" 정신을 이야기 한다.이 부분에서는 1번과 같은 이유로 동감을 한다. 모든것을 받아들이면서 공자는 못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이유를 들으면 북경대에 공자상을 세워야되는 것이 마땅하다.


문제는 공자가 단지 이것으로 끝난다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공자는 기본적으로 유교의 상징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라고? 문제는 유교의 기본적인 외교방침은 중화주의이다. 자신만이 세상의 중심이고, 주위의 국가는 이민족 혹은 미개인으로 간주한다. 뻔한 소리라고?

그런데 이러한 유교가 현대에 적용이 되면 더도 말고 "패권주의"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몇몇 학자들은 "유교패권주의"을 상당히 경계하고 있다. (어떤 한국 교수님은 중국의 학술대회에서 중국의 한 교수와 목소리를 높여서 싸우기도 했다.)


본인이 문제로 지적한 정치외교적인 이유을 최대한 줄일 수만 있다면 북경대학교에 공자상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 찬성이다. 하지만 안 그래도 "애국과 민족"을 마음에 품고, 자긍심을 가득히 가지고 있는 북경대학교 학생들에게 공자상이 "유교패권주의"로의 방향판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고민해보자. 중국이 유교패권주의로 달려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될까?




--- 아래쪽은 혹시 보고 싶은 분을 위한 원문기사이다.

无孔子之北大无灵魂

——北大校园立孔子像的建议

作者:张祥龙

编者按:

“国学热”的热点还在扩散,又出现“北大立孔子像”之争。就在5月4日北京大学110周年校庆日即将到来之际,北大哲学系教授张祥龙先生撰文《无孔子之北大无灵魂》,称北大是“中华文明教育的正脉嫡传”,因此建议北大立孔子像,并期望北大能“引领中华文艺复兴潮流”。

在曾提出过作为当时中国人民追求民主、自由和思想解放之号角的“打倒孔家店”的北大,现在有人提出“在北大立孔子像”的建议,也许会让很多人无法接受。而“无孔子之北大无灵魂”一说却让我们想到当今大学的灵魂问题。尤其是在经济飞速发展和全球化的今天,我们的大学在快速壮大的过程中,大学精神的流失有目共睹。梅贻崎先生曾说过:“大学者,非有大楼之谓,而是有大师之谓也”,而现在的大学却有越来越向“大楼”靠拢之嫌。

设立孔子像就能重塑北大之精神与灵魂吗?我们今天的大学当有怎样的精神与灵魂?本报今日发起关于“大学灵魂”的讨论,欢迎读者朋友参与。(陈美寿)

北大校园的塑像渐多了。以前有一些现代中国人的像,和外国人的像,如文学家塞万提斯像。近日散步,发现静园草坪边的一院中立了西方古代哲人苏格拉底的半身像,让我这个搞东西方哲学比较的人受到触动。既然立新像是可以的,立哲学家的像也可以,那为何不立我中华民族第一圣哲孔夫子的像?我以前在多个场合提议北大应该立孔子像,比如当着各位校领导的面,在“校园规划座谈”时提过,但马上有人说“要谨慎”,于是也就不了了之。今天实在是觉得不能不从情理上申诉一番了,希望在北大110周年校庆之前引起关注,特别欢迎持不同意见者来讨论。

为什么要在北大立孔子像?首先,孔子是塑造中华文明的最伟大哲人和至圣先师,也是历史上最有影响的教育家,在一所力求体现中华人文精神的中国最高学府中,立自己所从事事业的创立者和精神导师之像,可谓天经地义。

其次,北京大学不是一般的学府,她是传承中华古文明的最后一个王朝,为了应对西方侵略造成的文化危机,在其变法维新之际,采取的一个教育变革措施的成果。当时称她为“京师大学堂”,具全国最高学府和最高教育行政机关的功能,是古来“太学”、“国子监”的直接传承。可以说,北大是国子监的现代版,是中华文明通过教育来承接自家道统、赢得时代机遇的正脉嫡传。就此而言,北京大学的校史要比现在讲的长得多,今年要庆祝的不只区区110周年校庆,而应该上溯起码数百年(有清一代),乃至两千年(西汉太学),并追溯到孔子的杏坛施教及西周之辟雍设学。在此具有文化神圣历史性的地方,竖立使这个文化得以神圣、得以历时弥久的圣人之像,是绝对必要的正名之举,义不容辞之举。不然这个学府就会流于一所随全球化潮流漂泊的university。此大学非彼大学,这里除了要学习西方之外,更有“明明德,亲民,止于至善”的“大学之道”。

第三,北大素有宽容、多元的传统。为了让此宽容多元成为真实的、全面的,就绝不可搞反向宽容,也就是只对西方学术与文化宽容,而对自己的学术与文化缺少宽容;只对西方古人开放,而对自家的古人不开放。既然有了苏格拉底像、塞万提斯像,就没有任何理由不立孔子像。我们哲学系立了北大校园中可能唯一的中国古代圣人像,那就是治贝子园前的一尊老子像,但可怜他的手指已然尽断。有人曰:“这无指才是大指、道指。”自嘲一番也就罢了。但孔子像不但不可不立,亦不可草率而立,必选校园最中心和要害处,以最精当耐久之材料,嘱最有水准和儒心之雕塑家来立不可。西门华表之间东边的花坛,或许适宜。

因此,我作为一北大教师、北大校友,出自对北大深切挚爱之情,呼吁校方郑重筹备竖立孔子像。如若资金不足,可在校庆之际向千万校友募捐。我所在的七七级北大校友,八二年初毕业之际捐款塑了蔡元培像;今天全校历届校友,共同捐款来竖立中华民族暨我北京大学之至圣先师孔子像,正是继往开来的一大盛举,何乐而不为也?北京大学既可以推动新文化运动,又可以引领我中华文艺复兴的潮头,此所谓大学之为大者也!

(作者系北京大学哲学系教授、博士生导师)

http://news.sina.com.cn/pl/2008-04-15/133715360301.shtml

"他钵可汗의 불교 도입에 대해서"는 唐代九姓胡与突厥文化(蔡鸿生 中华书局 p147)에 나오는 글에 의문이 들어서 작성한 글이다. 木杆可汗의 동생인 他钵可汗(572-581)은 불교를 도입했다. 하지만 1기 투르크제국에서는 불교를 받아들인 다른 칸은 없었다. 그렇다면 他钵可汗은 어째서 불교를 받아들였을까?


우선 불교를 비롯한 종교의 전파는 두가지의 경우로 나눌 수 있다. 민간에 먼저 유포가 되고, 그 세력이 일정정도 이상이 되었을 때 압력을 받은 지도자가 해당 종교를 수용하는 경우이다. 기독교의 로마에서의 발전양상이 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지도자가 해당 종교를 "현실적 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런 종교가 지도자의 비호아래서 점차 민간에 유행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백제에서의 불교유입을 생각하면 비슷하다.

그렇다면 他钵可汗의 경우는 어떤 경우라고 판단해야될까? 他钵可汗이후에 해당 종교가 민간에 지속적으로 유지가 되는지 아닌지를 알아보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他钵可汗사후 불교는 순식간에 사멸한 것은 他钵可汗 개인적으로 해당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해석해야될 것이다.


문제는 他钵可汗은 왜 불교를 수용했을까? 蔡鸿生은 이에 대해서 부국강병을 원했던 他钵可汗와 불교를 받아들이므로서 突厥가 약화되기를 원했던 北齐왕의 현실적인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으로 해석한다. 북제와의 생각은 현실과 매우 비슷할 것이다. 그가 투르크에 전달한 열반경(涅磐经)의 내용을 보아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다. 문제는 他钵可汗의 입장이다.

지도자는 바보가 아니다. 단지 불교를 받아들이면 부국강병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믿는건 어떤 현실적인 근거도 없다. 분명히 일정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오래동안 투르크 세계의 주류 종교인 샤마니즘도 부국강병을 이룩할 수 있다고 말하는 점에서는 동일하기 떄문이다.


혹시 他钵可汗은 투르크의 전통종교인 샤마니즘의 사제집단과의 일정한 충돌을 하였고, 불교를 이용하여 이러한 사제집단과의 알력싸움을 할 생각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는 이러한 알력싸움에서 패하게 되고(9년의 짦은 통치), 그의 뒤를 잇는 沙钵略可汗은 오히려 "从天生"이라는 샤머니즘적인 가치를 더욱 강조했던 것이 아닐까?




추가적인 사료 조사가 필요한 점

1) 他钵可汗의 사망이유

2) 他钵可汗과 샤만집단간의 충돌에 대한 증명사료

3) 他钵可汗 계승에 대한 문제가 없었나?





교과서와 참고서가 한국 출판시장을 먹여 살린다는 소리가 있다. 사실 "쓰잘데기 없는" 시집이나 소설책은 사지 않더라도, 내 자식 볼 책은 어떻게든 사야되는 것이 한국의 교육열이다. 이런 점은 중국도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이런 교과서의 출판에는 어마어마한 이익이 걸려 있다. 그런데 이런 교과서의 출판에 문제가 있다면 어떨까?

너무나 중국다운 문제여서 무엇이라고 간략하게 설명하기는 힘들다. 마치 예전에 한국에 각 지방별로 소주가 있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될듯 하다. 그런 면에서 아래글을 보면, 앞으로 어떻게 해결해야나갈지 고민이 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지방화를 풀어버리면 한 회사의 독점이 될 가능성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남방주말다운 세세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글이다. 중국 출판계를 알지 못하는 독자에게도 쉽게 다가갈 수 있게 설명되어있는 글이다. 이러니까 남방주말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에는 믿고 즐거워 할 수 있는 잡지가 나올 것인가? 본인은 그나마 "말"을 좋아하지만, 정치적 편향성이 없다고 하면 웃긴 말이겠지?



谁动了教材出版的奶酪?
——多家出版社联合反对发改委强制中小学教材租型招标


□本报记者 张英 实习生 林怡静 发自北京
多家出版社在义务教育教材的出版上投入了几十亿元人民币,而现在面临血本无归的风险。他们联合起来,把矛头指向了教材租型招标政策:你主编教材,却必须把印刷、发行和销售的利益转让给他人
2008年,由国家发改委主导、新闻出版署、教育部参与的中小学教材出版发行施行招投标的方案将在全国推行。这个已经试点试行4年的方案,却遭到了众多出版中小学义务教育教材的出版社的坚决反对。
一家出版社的老总在给南方周末记者的报料电话里说,“我们已经到了生死存亡的关头,这个荒唐的租型招标将把几年来义务教育教材多元化改革成果毁掉,可能导致人教版教材几十年一家垄断教材出版的局面重现。”
目前,这些出版社正以会议、上书中央领导的方式,反对国家发改委系统主导的这次全国范围内的教材租型招标。他们在义务教育教材的出版上投入了几十亿元人民币,而现在却面临血本无归的风险。

人教版教材垄断被打破了
在北京师范大学出版社副总编叶子眼里,2001年是一个美好的开始。和另外几十家出版社一样,北师大出版社从这一年开始介入教材出版。此前,作为惟一的教材出版社,人民教育出版社的中小学教材已经在全国范围内使用了三十多年。
2001年6月7日,当时的教育部部长陈至立下发了11号部长令,颁布《中小学教材编写审定管理暂行办法》。该办法打破了教材出版垄断,全国所有的出版单位、个人、团体都可以参与中小学教材的编写,获得教育部全国中小学教材审定委员会审定通过以后,即可以出版投入使用。
据统计,近几年全国教材和教辅的出版产值达三百多亿。因此,所有的出版社都把眼睛盯住了有近2亿名中小学学生的教材出版。不管是国有的北师大出版社还是民营出版策划人赵勇,他们无一例外地把组织教材编写当作一个难得的机遇。
和其它图书不同,教材的编写、出版不容易。根据教育部的规定,中小学教材的编写、出版必须经过立项审批、编写、审定、实验、试用、修订这样几道关。
在教育部规定的时间里,赵勇的北京仁爱教育研究所迅速聘请了300人完成了立项表的填写和样章编写。“立项表的填写就两部分:一是投标单位资格审查——有没有能力和资格编教材;二是投标教材内容审查——教材特点特色和体系结构说明。”
因为担心民营企业受歧视,赵勇在48小时内把3000万元人民币存到银行,拿着存折找到教育部负责教材编写审定的官员,表示愿意把钱作为押金存在教育部,希望获得教材编写资格。他的行动感动了教育部的负责官员,最后,他成了一百多家出版社里惟一获得教材编写资格的民营机构。

钱砸出来的教材
在第一次申报立项时,所有的出版社都看着人教社。人教社申报了中小学各个学科的教材编写方案。赵勇申报了中小学19个学科的教材编写,3个月后,只有化学(9年级)和地理(7、8年级)两科被通过。北师大出版社5门课获得立项通过。
“整个立项淘汰率相当高,但审批程序相当公正。”赵勇回忆。2002年3月,是教育部规定的第二次申报时间。这回他报了16个学科教材编写方案,最后只过了一门《英语》(7至9年级)。北师大出版社也有两门课程获得通过。
赵勇在朋友的帮助下组建了教材编写组,通常,写作组主编一般都是大学里的著名教授,副主编是教委系统里的优秀教研员,再加上一些有着丰富教学经验的优秀教师。
获得立项,编写完毕,还未必能获得全国中小学教材审定委员会的审定通过。审定通常是出版社最担心的时刻:有的教材直接通过;有的教材没能通过,需要按照审读专家的意见修改;有的教材就直接写明“不予再审查”,被当场“枪毙”。
通过改革,教材编写、选用多元化局面形成。目前,已有82家出版社获准参与中小学教材编写,2400种小学教材、1200多种初中教材进入教育部全国九年义务教育阶段“用书目录”。
对出版社来说,教材完全是用钱砸出来的。“每科教材的启动经费在30到40万左右,编写经费按册数算,每册教材编写经费在30万左右;比如小学语文一共 12册,编写经费就得360万,加上启动经费60万,投入420万;在教材投入使用时,北师大还将支付2%的版税给编写者;最后是后期培训费,每年都是千万以上。”叶子给南方周末记者算了笔账。
和赵勇出版的其它书不同,国家对教科书成本进行了详细核算,设置了定价上限,只准在核定价格内下浮,不得上涨。这样特殊的严格准入,是赵勇们所没有想到的。但无论如何,相比那些花了上千万重金最后却没有任何教材通过的出版社,赵勇已经够幸运了。


冲着新华书店来的改革
通过的教材被统一列入教育部的《教学用书目录》。这意味着,凡是被列入该名录的教材都可以出版、印刷、发行。就在赵勇组织140人的销售和服务队伍时,一场由国家体改委和原国家计委主导教育部、新闻出版总署参与的中小学教材的出版发行改革也拉开了帷幕。
2001年6月4日,国务院办公厅转发原国务院体改办、原国家计委、教育部和新闻出版总署《关于降低中小学教材价格深化教材管理体制改革的意见的通知》,打破中小学教材发行由新华书店一家垄断的局面,决定于2002年9月-2004年9月在福建、安徽和重庆三省市进行第一轮教材出版发行招投标试点,教材出版发行要实行“招投标”,教材的出版发行机构由竞标方式产生。
四部委通知的下发,在出版行业内引发了一场大地震。《中国图书商报》副总编张维特对南方周末记者介绍,此前我国的中小学教材出版、发行都是行政垄断的——教育部委托人民教育出版社出版,新闻出版署委托各地新华书店发行。因为垄断,教材品种单一,教材价格虚高不下,加重了家长和学生的经济负担。打破行政垄断是必要的。
另一方面,教材发行招标也有让主要依靠教材发行利润过日子的新华书店系统进行深度变革的意图。一项调查表明,各地省级新华书店70%以上的利润来自教材发行,在很多县级的基层新华书店,这一比例甚至高达90%以上。
2003年,因国务院机构调整,国务院体改办和国家计委被撤销,有关职能并入国家发改委。教材招投标试点工作由国家发改委牵头,新闻出版总署和教育部参加,具体工作由发改委体改司负责。
当时负责这项工作的国家发改委体改司官员公开表示,发改委在教材出版发行上没有部门利益和利害关系,作为牵头改革的负责部门更合适。
2005年3月14日,国务院批复同意三部委扩大教材招投标试点,并明确了“试点工作最迟从2006年春季开始”的要求;从2008年秋季开始“面向全国进行”。


被利益扭曲的招投标
“这个招投标把教材发行搞复杂了。”北师大出版社负责发行的经理马朝阳说。在发改委的招标改革之前,原创出版社在研发、出版教材之后,由各地教育部门选定使用教材,再由新华书店代为发行销售,通过进入学校试用、反馈、修订。
改革之后,根据招标规定,凡是参与了投标手里有教材的出版社,在自己没有中标以后,必须把自己的教材出版胶片交给那些中标的当地出版社,由他们负责印制生产,再交由当地中标的发行机构面向学校发行。作为回报,当地出版社按照教材定价的3%,向北师大出版社支付“租型”的使用费。
所谓 “租型”,指的是中小学教材租型,这个出版界的特有说法起源于2001年以前。那时全国只有人民教育出版社一家出版社受国家投资委托指定编写出版中小学教材。由于我国地域辽阔,地处北京的人教社无法在同一时间内满足全国各地的教材需要。为了保证每年全国中小学学生在开学前拿到教材,人教社索性把教材的印刷胶片分给各地方的省新闻出版局,地方新闻出版局再指定当地出版总社或者人民出版社出版、印刷,新华书店独家发行销售。地方人民出版社按照教材总定价的3%-4%付“租型”费用给人教社。
对人教社来说,它的教材是国家经费投入的,它只承担编写和出版,每年可以在全国几十个省份收取租型费;地方出版集团也欢迎这样的合作——通过教材租型取得的收入成为它们赖以生存的经济支柱。因此,出于地方利益考虑,地方新闻出版局和出版集团千方百计想保留计划经济时代的“租型”。
于是,就出现了马朝阳不理解的怪现象。教育部[2005]15号文件明文规定各省级教育行政部门要完整转发教育部《教学用书目录》,不得删减或增加,并严格规定全国各地市要在教育部《教学用书目录》内选用教材。
但在实际招标过程中,一些省市的教育厅为保证地方利益,对教育部《教学用书目录》进行了大量的删减,有些省市教育厅做出了不给本省市出版集团租型的出版社教材就不准列入本省《教学用书目录》,不准进入本省教材市场的荒谬规定,从而把那些不愿意被租型的出版社教材拒之门外。
为保证自己的既得利益,一些试点省份在制定招投标政策和评分标准时设置了一些特殊要求。比如四川的招标要求,中标出版社,要与该省印制单位有三年以上稳定印制业务关系,要在该省有三年以上的教材发行供货经验,甚至要在该省实现纳税等等。
“像这些荒唐的要求我们根本不可能达到,这就意味着我们不可能参与这个省的投标。”这让叶子觉得这些试点省份根本就不想让外地的出版社中标。招标结果也证实了她的判断:凡是参与投标、手里有教材的外地出版社,没有一个中标。中标的都是当地的出版社,但他们手里并没有教育部批准使用的教材。
对这些原创出版社来说,如果按照人教社与地方社的合作模式,它将面临高额投入血本无归的可能。为维护自己的利益,绝大多数原创出版社拒绝向中标的当地出版社提供教材租型胶片,结果这场招标以流产告终。僵持到最后,四川省只得与北师大这些没有中标的出版社重新谈判,由他们在当地直接印制,交由新华书店发行销售。
“地方实际上想保留与人教社合作获得的经济利益。”一家出版社的发行经理对南方周末记者说,他向记者提供了一份广西教育厅去年 4月25日颁发的(2007年8号)文件。该文件里称:“根据自治区领导的指示,要使人民教育出版社出版的新课标实验教材在广西的市场份额接近或达到 50%,以确保广西出版总社继续获得人教版教材租型权。”
在文件后的附录版本调整情况也显示,从2007年秋季起,在广西境内使用的江苏教育、北师大、四川、仁爱等近十家出版社的教材被全部调整为人教版教材。

我的教材是我的吗?
“电脑生产商可以自己设计、生产、销售电脑,我自己主编、被教育部认可的教材,却不能自由地印刷、发行和销售,这是不是变相剥夺搞出版最基本的权利?”华东一家出版社的副总编辑张非对南方周末记者感叹说。
这样的疑问,从国家发改委2001年的教材招投标试点时就有了。只不过那次在福建、安徽和重庆招标试点只占上述3省学生总人数的10%,人数不多,涉及的利益不大,出版社能够在全国大部分地区实现直接供货新华书店实现销售,因此无人出来抗议。
到了2005年,11省开始招标试点,让各出版社感到了巨大的压力,“强制租型”导致出版社的利润大幅度下降。而到了2008年,这个让他们活不下去的教材招投标即将在全国范围内推广。面对可能的灭顶之灾,本来不愿意站出来面对政府部门的出版社,选择了呐喊和抗议。
“招投标侵犯了我们的著作权。因为教材是我们投资编写的,版权是我的,你凭什么强制我租型?不经过我同意就拿我的教材去招投标?为了打破教材编写出版垄断,教育部已经搞过一次教材编写招标了。如果发改委这个制度在旨在打破发行垄断,可以直接搞发行权招标,为什么还要出版社参加印制权的招标呢?”马朝阳对南方周末记者说。
经过8年市场开发,北师大教材全国市场占有率为25%,仅次于人教版教材。最让他们气恼的是,自己的教材被强制租型后,他们只拿到3%的租型费,而他们还要给编写人员2%的版税,而剩下1%,根本就不够支付被租型的地区教材的维护、修订、培训费用。“如果被租型,我们一分钱不赚还要赔钱。所以我们宁愿停租。”叶子说。
一些小出版社没有北师大这样硬气。“胳膊怎么扭得动大腿呢?如果我不租型,等于我就退出教材市场。我拿着教材又有什么用呢?”西部某出版社的发行经理说。
张维特对南方周末记者说,打破行政垄断,降低教材价格,招标的动机是好的,但这几年实施效果不佳。
江苏教育出版社教材部主任杨九诠经过调查发现,非试点地区教材价格降幅反倒比试点地区高——在11个试点地区,通过招标方式教材平均降幅8%,只有江西省降幅高达16%以上。而在非试点地区,教材平均降幅为11%,北京、天津地区降幅为13%至15%。
作为图书出版和发行的主管部门,新闻出版署面临两难处境:如果彻底打破教材出版和发行垄断,整个出版行业和新华书店系统的经济收入将锐减,没有人敢对此负责。因此,地方政府在教材招标程序上采用各种办法,维护自己的既得利益,千方百计试图保留租型制和教材发行垄断的现实。
一直试图染指教材发行的中国邮政报刊发行公司很失望。早在发改委推动的教材招投标试点工作刚启动时,邮政报刊发行公司就跃跃欲试,但在第二轮发行招标试点中,各地邮政企业虽然参与了投标,但多数地方未能中标。个中原因和教材招标相似,他们被一些地方的招标细则挡在了门外。
而制定招标方案的国家发改委也容忍了这个现实。对这个程序不完美的招标,国家发改委体改司副司长王强在2007年11月的一次会议上表示,发改委将坚定不移地推动全国范围内的招标。
而更早的时候,王强在接受《财经》杂志采访时解释:“试点之所以没有一步到位,是考虑到教材出版市场的现有格局和实际情况,避免给地区经济发展和社会稳定带来更大冲击。但有一点应该明确:行政性的租型出版迟早会被取消。”
但是,这些出版社已经等不及了,他们甚至怀疑,自己能否看到那一天。
(在发稿前夕,南方周末记者获悉,因为众多出版社的反对和上书,在高层领导的批示下,原拟于2月底进行的全国中小学教材招标工作已被中止。但“租型”制度和发行垄断的问题却依然存在,针对这一问题,本报将继续保持关注。)

全国有两亿多名中小学生,教材教辅产值三百多亿,改革后原垄断单位如何生存,是一个现实问题 张莉/图


http://www.nanfangdaily.com.cn/zm/20080306/wh/200803060050.asp


<중국기본고적고 中国基本古籍库>는 북경대학교를 중심으로 전국의 각 대학교들이 참가해서 만들어낸 중국 중점 전자출판 사업중에 하나입니다. 선진시대부터 중화민국시대까지 (기원전 11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의 역대 서적 1만여종, 총합 16만여권을 전산화시켰습니다. 사실상 현재 나온 모든 고적의 전문과 1~2개의 영인을 제공합니다. 총 합쳐서 17억이 넘는 자이고, 판본이 1만2천여개, 영인이 1천여만항목에 이르며, 용량만 320G에 달합니다. 이 분량은 <사고전서 四库全书>의 3배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분량입니다. 다양한 검색으로 편안하고 쉽게 원하는 항목을 찾을 수 있습니다.

 

image 기존의 사고전서와 또다른 점은 한국어를 지원하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런 프로그램에서 한국어 지원이라고 해도 메뉴 몇개 한국어로 만든것 뿐이지만,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 그냥 중국어판으로 설치했기 때문에 실제로 사용은 안해봤습니다.) 앞으로 한국을 비롯하여 일본, 서양권에 판매할 목적이라고 여겨집니다. 사실 중국학을 하시는 분들에게는 필수라고 해도 될 프로그램입니다.

 

개인적으로 사용해본 느낌은 기존의 사고전서 프로그램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입니다. 기존의 프로그램에서 데이타량만 늘린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팍팍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원래 사고전서 프로그램이 잘 만들어졌기에 불만은 없습니다.

 

물론 문제점이 있습니다. 실제 사고전사든 전자 사고전서든 오탈자의 천국이라는 명성을 휘날렸다싶이, 이런 방대한 분량은 아무리 감수를 하여도 분명히 수 많은 오탈자가 존재합니다. 정확한 학술논문에서는 무조건 제대로 된 원문을 찾아보아야합니다. (이거 귀찮다고 안했다가  딱 걸려서 죽어라 욕먹은 어떤 사람도 있습니다.-_) 하지만 너무나 방대한 중국 고적들에서 원하는 항목을 손쉽게 찾을 수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현재 북경대 내부에서는 접속이 되며, 몇몇 wn대학교에서도 서비스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외부에서는 절대 결코 접속을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조만간 불법 해적판이 생겨날듯 합니다. 하지만 320기가라는 놀라운 용량이 해적판을 막는 가장 큰 변수가 될듯 합니다. 왠만한 하드디스크로는 설치도 못하겠군요. DVD로 설치하다가는 어느 세월에나 설치가 될런지....

 

개인적으로 조선왕조실록과 같이 현대 한국어의 번역 버젼을 제공하는 것도 좋지만, 아직도 전자화되지 못한 수많은 한국의 고적들도 위와 같이 일단 데이타화하고 천천히 번역작업을 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이미 수 많은 고적을 체계적으로 정리는 해놓았지만 데이타 작업 소식이 안 들리는 일본. 일단 밀어붙여서 오탈자가 많지만 데이타화해버린 중국. 그리고 천천히 데이타화하고 있지만 진척이 느린 한국. 하지만 일본처럼 기존의 고적들도 제대로 발굴이 안되고 있는 한국의 입장에서 데이타화하랴 고적 발굴하랴 많이 힘드실듯 합니다.

아래글을 심심풀이로 씹으려고 가지고 왔습니다.

점점 취미가 이상해져가는 것은 저도 느끼고 있습니다.


졸저 『신시본토기』의 378쪽 원문에서 인용.
(원문)
桓公問管子曰, 吾聞海玉幣七莢
可得以問乎, 管子對曰 陰山之유혼一莢也
燕之紫山白金一莢也, 發朝鮮之文皮一莢也

(풀이)
환공(桓公)이 관자(管子)에게 물었다. "나는 천하에 일곱 군데의 보물이 있는 곳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보물을 어디서 구할수 있겠습니까? 그 위치를 자세히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관자가 대답하기를, "첫번째 보물의 위치는 월색(月色)의 보물이 있는 음산산맥(陰山山脈)이요 두번째는 은이 나는 자산산맥입니다. 그리고 발조선에서는 반점(斑點)이 있는 모피를 얻을 수 있으니 이것이 세번째 보물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문항 외에도 같은 책 속의 경중갑(輕重甲)이라는 항목을 통해서 조선과의 거리가 8천리라느니 조선의 문피를 교역하는 일에 말을 잘 듣지 않으니 많은 돈으로 잘 대접하면 표범가죽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원문에서 보다시피 호피(虎皮)라는 단어는 찾을 수가 없는데도 호랑이 가죽이란 해설이 등장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말로 호(虎)를 범이라고 하고 표(豹)를 표범이라고 하며 바다에 사는 해표(海豹)를 물범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원문에서 볼 수가 있는 "문피(文皮)"라는 단어의 뜻은 무늬있는 가죽을 통틀어서 한 말이므로 확실히 구분이 되지 않지만 경중갑에는 "豹之皮容金而金也"라는 말이 등장하므로 문피는 표범가죽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豹는 海豹, 즉 물범을 가르키는 말이라는 것이 정답이었다. 호랑이 가죽이란 말을 써서는 안 되는 이유는 우선 가죽과 털옷이라면 추운 지방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백두산을 위시한 만주대륙을 연상하게 되고 따라서 고구려의 수렵도를 상상하게 되면 물범 생각은 아예 달아나고 만다.
그러나 호피를 주요한 수출품으로 다룰만큼 많은 양이 생산되는 것은 아니고 더욱이 호랑이를 산신으로 모시는 풍속이 있어 두려워하며 당시의 사냥술로는 포획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 물범이라는 짐승이 우리 조상들의 귀중한 옷감이 되고 또 수출품으로서 외화를 흭득하는 효자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뒷날 발해국에서 일본으로 수출된 품목 중에는 약간의 호피도 있었다는 것을 참고할 수도 있다.
본래 이 물범이라는 짐승은 북위 42도 이상의 추운 지방인 추코트해나 베링해협에서나 볼 수 있는데 북위 38도 근방인 발해연안에 둥지를 마련하고 서식하는 것은 풀리지 않는 수수깨끼였다고 한다. 같은 물범 중에도 이곳 발해연안 묘도군도에서 서식하는 종류는 얼룩무늬 물범으로써 베링해의 물범과는 차원이 다르다. 큰놈은 크기가 1.3m 정도이며 몸무게는 160kg으로써 근래에는 백령도 근해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대략 3,000마리 정도가 묘도군도를 중심으로 서식하고 있다.
그러니까 물범 이야기만 가지고도 고조선은 발해해협의 묘도군도라는 것이 증명이 되는 것이다. 물범이라는 짐승이 평양이나 갈석산 근처에서는 살 수 없지 않은가? 물범의 활동한계는 요동만에서 백령도까지라고 KBS는 밝힌 바 있다.

출처 : 누르시면 날라갑니다~



토론 준비 때문에 글을 찾아보다가 우연히 접하게 된 문장이다. 얼핏 들어보면 말이 되는듯 하지만 솔직히 원문부터 엉터리로 해석한 부분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원문에 유혼은 礝碈이며 옥과 비슷한 류의 보석이다. 월색의 보물은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건지 모르겠다. 본인이 미숙한 탓인지 출처를 모르겠다. 그외의 해석도....왠 산맥이 튀어나오는건지 모르겠다. 어차피 반쯤 기분풀이로 하는것이니 패스--


일단 표豹를 물범으로 해석한것. 그럴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실제로 표범이 당시 아시아에 특히 동북지방에 많이 생존했었다는 것은 사료에서도 증명되는 것이다. 표가 호랑이 가죽이 아니라 표범 가죽일 가능성은 배제한 점이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물범의 가죽보다는 표범의 가죽이 반점이 있는 가죽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바다표범도 가죽에 줄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반점이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지 않은가?


또한 열심히 발해만에서만 나는 물범으로 고증을 했지만, 가장 간단하게 명대에 쓰여진 <朝鲜国治>을 보면 "鴨綠江爲大產, 金銀銅鐵水晶鹽細苧布細花布龍文簾席白硾紙狼尾筆紫花硯果下馬長尾雞貂豽海豹皮八稍魚昆布秔黍麻榛松人參茯苓薏苡,其餘不能殫載云." (표점 무시. 알아서 찍으시길--) 물범가죽을 이씨조선의 특산으로 소개해놓고 있다. 고대 전국시대야 정확하게 고증이 안된다고 하더라도, 이씨조선시대에는 분명히 한국의 영역이 발해만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물범가죽이 특산품이 될 수 있을까? 분명히 한반도 내, 당시 이씨조선왕조 범위안에서 물범이 잡혔다는 말이 된다.


이로서 위의 주장은 대충 깨진듯 하다.

아....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이런 쓸데 없는 글이나 적고 있으니...후..이제 즐거운?! 자치통감의 세계로 출발-_-! 이제 슬슬 前秦전진의 천하통일이구나! 전진! 전진하라!!! (...차라리 한국에서 이주일에 한단락 나가고 싶어.ㅠㅠ 무서븐 중국애들 속도로 읽어내려가야되다니.....가능할리가 없잖아!!! )

北京大学历史学系2008年硕士生拟录取名单公示

一、内地考生(共计19人)

丁 浩、邓 阳、刘玉群、刘乳滨、刘崇锤、何存金、余奕珠、张 寒、张曜光、李华程、罗 志、郑启芬、胡 宁、栗河冰、袁 鹏、高俊杰、韩 飞、韩 澍、韩基奭

二、推免生(共计21人,其中含学工选留1人,不占招生计划):

于  娜、丹筱彤、王  月、王  倩、王梦婕、冯  佳、冯立冰、吕  超、张心远、张宁芳、张成晗、李坤睿、李怡文、李梦岚、杜  乐、陈  捷、陈冠华、陈博翼、胡  珂、胡晓丽、聂溦萌

三、留学生(2 人)

马  硕、王  林


北京大学历史学系

    2008年4月9日


없다. 없다. 없다. 유학생은 2명인데, 이름으로 보아서는 화교이거나 서양애들이다.

최소한 한국 사람의 이름은 아니다. 없다. 없다. 없다.

(2차 시험에서 떨어지신 한국분이라고 추측되는 한 분. 애도를 표한다. 후....)


기대했었다. 본인보다 나이 어린 후배 한명 안 들어오나 말이다. 사실 현재 본과에 다니는 한녀석이 들어왔어야 되었는데, 나보다 훨씬 더 역사 공부에 어울리는 녀석인데 말이다. 결국 본과 출신의 석사인생 2명의 모습을 보고 살포시 포기해주시더라. 좋은 모습 보여주러 그리 노력했는데 말이다. 큭....

내년을 기대해 보리라. 한 녀석 있다. 그나마 살아있을 한명의 생존자가...

그녀석 이름에는 아예 석사의 석자도 있다!! 자!! 와라!! "원래 석사여!"


왜 굳이 한국인이냐고? 외국에 있으면서 중국애들하고 안 노냐고? ...지도교수님이 소수정예(본인 빼고) 주의라서 현재 박사생 2명에 석사생 1명(이게 본인)만 있다. 맨날 3명이서 노는데도 지쳤다. 좀 데리고 놀?! 후배가 있어야되는데 말이다. 새로 들어오는 후배 없다. 아...새로 한명이 들어오긴 한다. 본과에서 박사로 점프해서 말이다. 후....


없다. 없다. 없다. 그래서...

외롭다....이것이 소위 인문학의 위기인가? (........)




자기 얼굴에 침 뱉기 : 올해 전공과목 시험이 생겼더라.작년에는 연구생 시험 개혁한다고 딸랑 면접만 보았는데 말이다. 으음...지금까지 시험운이라고는 개뿔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시험운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역사가 나를 부른다라는 폼나는 말도 있겠지만...안 불렀으면 좋았을걸이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새벽이다. 자치통감. 사마광님아~ 조금 짦게 쓰지 그러셨어요? ㅠㅠ



외국땅에 있어서 투표권이 생긴지 1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한번도 투표를 참가해보지 못했다. 그리고 언제나 원통하고 가슴 아팠었다. 한국에 가서 투표를 하고 싶지만, 돈이 없는 것이다. 핑계이고 변명일지 모른다. 그런데 이번 선거는 그리 큰 감흥이 없다. 그 뜨거운 한표를 행사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아직도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한나라당이 과반수를 차지 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투표율에서 결과는 이미 나와있다. 언제나 60%가 넘는 투표를 보여주는 정치에 미친게 아니냐는 한국에서 50%도 넘지 못하는 투표율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내가 한국을 버렸다. 국민이 한국을 버렸다.

정치꾼들은 기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진정한 정치가라면 지금 피눈물을 흘려야 할 것이다.


국민은 한국을 버렸다. 희망을 버렸다.

이제 정치는 그들만의 리그로 접어들었다.

내가 한국을 버렸다. 대한민국 만세다!




지역주의 타파나 한나라당 집권과 같은 것은 부수적인 사항에 불과하다. 이 모든 것이 국민의 참여가 있을 때 바꾸어나가야 될 문제들이다. 국민의 참여자체가 없는데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대한민국 만세다! 음하하하....


해당 코너는 중국어로 된 좋은 문장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중국어와 중국을 배우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처음 중국어와 중국을 배우는 분들에게는 너무나 방대하게 쏟아져나오는 많은 글들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해서 읽어야 될지가 문제라고 생각하여 이런 코너를 만들었습니다.



3月中旬以来发生在拉萨、甘肃和四川等地的暴力事件令全球瞩目,其所激起的政治效应依然在发酵,而该事件对全球华人来说,所激起的愤怒,远超以往。
    3月28日,达赖喇嘛通过西方多家媒体发表“致中国兄弟姐妹的公开信”,同时他还声明:决不分裂,支持北京奥运。
    两天之后,正在老挝访问的中国总理温家宝受访时表示:“只要达赖喇嘛放弃独立的主张,特别是施加他的影响,停止西藏当前出现的暴力活动,承认西藏和台湾是中国领土不可分割的组成部分,我们就可以和他恢复对话。”
    之前的3月27日,国家主席胡锦涛在和布什总统的电话通话中也表示:“只要达赖真正放弃‘西藏独立’的主张,停止分裂祖国的活动,特别是停止目前在西藏等 地煽动策划暴力犯罪活动和破坏北京奥运会的活动,承认西藏和台湾是中国领土不可分割的一部分,我们愿意同他继续进行接触商谈。”
    中国两位领导人的表态反映了这样一个事实:藏传佛教在藏族民众中的影响,是现实存在的;达赖喇嘛作为宗教领袖在藏传佛教信徒中的影响力,也是事实。
    基于上述基本事实,一些现实的政策操作可能需要考虑。
    首先要把广大藏族信教群众和官方语境中的“达赖集团”区别开。由于藏传佛教事实上除达赖喇嘛以外再无其他为绝大多数信徒接受的宗教领袖,因此信徒们对达赖 在宗教上的信仰和膜拜,不能被理解为政治上必然的服从,更不能被理解为主张分裂国家,这是在实行民族区域自治的藏区必须坚持的一条底线。
    其次要把流亡国外的普通藏人和“达赖集团”上层区别开来。1959年追随达赖流亡国外的藏人成分复杂,半个世纪即将过去,应抱着“相逢一笑泯恩仇”的态度,只要他们不再主张分裂国家,就应翻过那不愉快的一页,向他们伸出欢迎之手。
    即便在“达赖集团”内,也必须要把主张“非暴力”手段的人和热衷于暴力手段的极端主义分子区别开来。不论何人,只要他不主张西藏独立,不主张暴力手段,中央政府就应把他和极端分子相区隔。
    据一位长期在西藏工作的中央驻藏机构官员介绍,北京市长、西藏自治区前任党委书记郭金龙在主持西藏工作时,曾提出并执行过这样的政策:在宗教信仰上,要把 中共党员和非中共党员区分开来,共产党员不得信仰宗教,而非中共党员则有信教自由;把正常的民族、宗教活动和利用宗教从事分裂国家的活动区别开来;一旦触 犯刑律,不管什么民族,一律依法办理。据不少在西藏工作过的人士反映,这些政策相当成功。
    事实上,国内不少专家都认为,藏传佛教和个别宗教极端主义有很大不同,它基本上表达温和诉求,对于今天中国要建立和谐社会来说,它事实上存在着合理的、积 极的成分。正因为如此,藏区的情况不同于其他民族自治区,别的民族自治区域的经验,也不能完全适用于西藏,民族区域自治政策,具备解决上述问题的制度基 础。
    一位欧洲大国驻华使馆的参赞几天前曾经私下对本观察员坦陈心迹:达赖喇嘛建立大藏区的想法在今天未免太不现实,但是同他(达赖)对话,我们欧盟都赞成,对话,无论如何总是好的和正面的。
    就今天来说,不分裂中国,以实际行动支持北京奥运,可能是双方对话的起点。


(责任编辑 林楚方 李小鸣




来自于 : http://www.infzm.com/enews/20080403/pol/200804/t20080402_41813.htm



해당 뉴스는 南方周末(난팡조우모 nanfangzhoumo)의 글입니다. 중국에 계신 분들은 반드시 해당 신문을 구독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중국 신문들중에서 가장 독립적이고 할말 하는 신문입니다.


이번 내용은 티베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비록 이번에 티베트에서 폭동이 일어났지만, 티베트 종교의 특성상 대화로서 해결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티베트의 무조건적인 독립을 말하지만, 실제 티베트인들의 생활을 생각한다면, 종교와 문화만 "제대로 보전" 된다면 중국이라는 국가 안에서 같이 공존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입니다.




 

중국정부는 작년말 공휴일을 변동하면서, 청명절과 같은 전통 명절을 국가 공휴일로 바꾸고, 기존의 노동절의 장기 휴일을 단축 시켰다. 이런 정책의 목적에는 점차 사라져 가는 전통을 지키고자고 하는 노력이 숨어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도 청명절은 기본적으로 조상의 묘에 가서 묘정리를 하는 명절이다. 그리고 정부는 모든 매체를 통해서 이러한 전통에 대한 내용을 홍보하고 있다. 문제는 한국과 같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청명절의 내용보다는 그냥 하루의 휴일이 생겼다는 것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아싸! 노는날 생겼다! 놀자! 청명절은 먹는건가?"

 

우리가 주의해야될 점은 이번 중국이 청명절을 국가공휴일로 지정한 것은 대문화(상층문화)가 소문화(하층문화 혹은 민간문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러한 대문화의 시도가 그동안 좌절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미래가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대문화의 시도를 무시해서는 안되겠지만, 일정정도의 한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소문화는 어디까지나 민간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만들어지는 문화이다. 전통문화라고 하지만, 그것을 반드시 지켜야 되는가? 어차피 소문화도, 전통문화도 계속 변해가는 현실의 반영일뿐인데 말이다. 과거의 일정 시점을 잡아매어서 억지로 유지하는게 과연 필요한 일인가 생각해본다.

 

 

2일전에 올렸어야 되는데 다 써놓고서는 올리는 것을 까먹어서 이제야 올리게 되었다.

역시 바로는 건망증의 황제라고 할까?!

김용덕 : 현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서울대학교 동양사 교수, 하버드대학교 석박사, 일본근현대사 전공.

 

김용덕 교수님은 한국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몇가지 역사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분명히 존재했던 조선조의 사대주의를 일부러 무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서울대 교수가 북경대에서 강의를 한다는 특수상황을 감안하면 이해는 할 수 있다.

그가 보는 현재 한국의 4대 문제는 한중, 한일, 그리고 남북한 관계가 있다. 더욱이 중일간의 역사적 문제를 중간에서 어떻게 처리하는냐도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그러기에 말할 수밖에 없는 점이다.

 

일반인들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기준으로 상대방의 국가를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일반인의 역사적 사실은 매우 좁은 범위에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완전한 타자가 되어서 바라보아야 진정한 실체를 알 수 있다. 그는 임진왜란과 임오군란을 예로 들어서 한국의 중국과 일본에 대한 역사관의 정립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소중화의식은 민족의 독립성을 나타내주기도 하지만 기본은 사대주의가 아니던가? 흐음...

 

전근대에서는 동북아의 기본적인 가치가 유교(성리학)였지만, 근대부터는 서양의 가치가 중심적인 기준이 된다.

 

교수님은 한국의 중국과 일본에 대한 관점을 사람들이 잘 알것이라는 이유로 건너 뛰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강의의 가장 핵심이 되어야될 부분을 건너뛰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사람의 입장에서 듣는 한국의 중국과 한국에 대한 관점은 매우 중요한 것이 아닐까?

교수님은 조공책봉제(朝贡册封体制)을 현재 미국과 다른 나라와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비슷하다.

 

 

그렇다면 교수님의 현재 역사전쟁 해결 방법은 무엇인가?

1) 역사가 정치에 이용되지 않아야 한다.

본인의 생각으로 이론적으로, 이상적으로는 무조건 맞는 소리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교수님도 분명히 알지 않은가? 그래서 본인이 고대사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동북공정과 같은 몇가지 문제는 있지만 사실상 모든 문제가 정치와 연결되는 근대사보다는 상황이 좋다고 할 수 있다.

 

2) 서로의 "역사주권"을 존중하여야 한다.

마치 영토와 같이 역사도 그 나라 범위안에서 보호되어야된다는 소리인데, 솔직히 이상하다. 그렇다면 국제적인 학술교류는 왜 하며, 국제적인 주류 역사해석은 어떻게 해야되는것인가? 무엇보다 이것 역시 역사가 정치에 이용되는 현실의 한 모습에 불과하지 않은가?

 

** 열린 민족주의 开放的民族主义(Internationalized Nationalism)

재미있는 개념이다.

 

3) 동아시아 공동체

교수님는 중국의 파워가 홀로 너무 강하여서 이런 공동체의 실현이 매우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경제실력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군사력으로보아도 일본은 중국에 그리 떨어지지 않으며, 그 중간에서 한국이 충분한 중간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교수님은 공동체의 실현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매우 모호한 개념으로만 설명하고 있다. (싸가지 없게 말하면, 이런 내용은 나도 예전부터 주구장창 이야기해놓았던 이유다. 구체적인 방법이 정말 없는 것일까...?)

 

동아시아안의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고, 공통의 가지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동아시아 가치(East Asian Value)가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가치로 만들면, 이런 가치는 소프트파워(Soft Power)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는 정치 군사 문화적으로 세계를 지배하기보다는 세계를 평화적으로 모두 함께 발전하는 길을 열어야 될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이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간의 문화를 존중한다면 자동적으로 해소될 것이다라니...;;

 

 

** 유럽공동체가 생겨난 이유는 그동안 죽어라 서로 전쟁을 해서 이제 합치자는 분위기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동아시아 공동체가 생겨날려면 동아시아도 죽어라 전쟁해야 된다!!! 당연히 교수님도 농담으로 한말이다.

 

 

문답 :

역사 주권이라는 개념은 미국의 학술상에서는 기본적인 주권중에서는 하나로 포함된다. 전통적인 주권에서는 국토, 국민, 지배체계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 중에서 역사라는 것은 빠져 있다. 하지만 한국의 일제시대와 같이 전통적인 주권을 모두 상실한 가운데, 역사주권만은 남아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Q : 역사가 정치에 이용되서는 안된다고 하시면서, 뒤에서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위해서 역사를 이용해야된다고 말씀하셨는데 모순 아닌가요?

그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공동체를 위해서 먼저 역사전쟁을 해결해야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동북아시아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한국이 주도적으로 중립적인 위치에서 동북아시아 역사연구센터를 만들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사실 영향력을 보면 한국은 영향을 행사하기보다는 받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너무 치열한 역사 전쟁상태를 생각하면 한국이 그 중간자 역할을 할 수 없을까?

 

 

그 외 잡상 :

한국과 일본의 지배자는 같은 민족에서 나온 사람들이지만, 중국의 지배자는 다른 민족에서도 나온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물론 이런 다른 민족지배자들도 중화사상에 빠져들지만 말이다. ---> 일단 한국과 일본은 단일민족도 아니고 한나라나 몽고와 같은 외부세력도 많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예전의 민족관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 사람 모두가 남북한의 통일을 바라고 있다.  --> ....솔직히 반대파가 예전에 비해서 많이지지 않았나?

 

 

통역자에 대해서 :

북경대학교 한국어과 연구생이라고 한다. 중국인이다. 이번에 역사과 박사시험을 보고 면접만 남았다고 한다. 그럼 머...들어오겠지. 현재까지는 한->중 번역만 하고 있음으로 정확한 실력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원래 말에서 어려운 말들을 조금씩 빼놓고 있다. (예를 들어서 역사적 구체적인 사실이나 속담같은 말은 번역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빨간옷을 입은 한국분. 박사생으로 알고 있는데, 죄송하지만 중국어 실력이 부족한듯 하다. 더 열심히 하셔야 될듯...

 

 

牛大勇

동북아시아의 통합

 

1) 강력한 초거대국가

내부 집단들이 공통적으로 합쳐야겠다는 인식 -- 적대할 국가

 

2) 현재 복작한 정치외교 상황 - 분리주의문제

조선, 한국, 타이완, 중국, 일본이 서로 너무 얽혀 있다. 일단 조선과 한국 그리고 중국과 타이완간의 문제가 해결되야지 동북아의 통합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3) 전쟁책임과 역사책임

일본과 반일본간의 일제시대의 전쟁 책임과 역사책임을 포함한 문제. 다시 말해서 일본을 믿을 수 있으냐는 점.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론과 서술에서 반박할 것이 몇개 있었음.


중국 포털 서비스 시나왕의 보도에 따르면, 3월 23일 "3개의 세력"이라는 단체가 신장 희어티엔에서 반국가적인 폭동을 일으키었다고 한다. 4월 1일, 현지 자치단체는 해당 독립운동을 빠르게 진압하였다고 발표하였다.


3월 23일 극소수의 "3개 단체" 독립분자들이 따바자라고 하는 희어티엔시의 최대시장에서 10만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소란을 일으키었다고 한다. 독립분자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시장의 정상적인 운영에도 문제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희어티엔시는 매우 조용하며, 시민들은 평안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 중국 시나왕


1) 중국 우루무치 폭탄테러는 낭설이다?? 라는 뉴스를 발표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해당 소식을 발표한다는 것 자체가 해당 독립운동이 매우 큰 규모로 이루어졌으며 뉴스 통제가 가능한 수준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3월 23일 발생한 일은 4월 1일에 정식으로 발표했다는 점은 중국정부가 사실상 시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식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될듯하다.


2) 중국정부는 요즘 티베트 사태를 각각의 포털에 전면에 배치하고 있다. 과거에 일단 숨기고 보자는 식에서 탈피해서, 반대로 적극적인 여론조작에 나오고 있다. 티베트 사태에 대한 대부분의 내용들은 해당 사실이 거의 대부분 사실과는 다르며, 서양 언론기관들이 확대 및 왜곡 보도를 하고 있다는 쪽으로 맞추어지고 있다. 단지 언론 통제부분에서 보면 과거에 비하여 분명히 발전한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제는 아예 안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을 중국정부도 느꼈다고 할 수 있다.


3) 해당 희어티엔 신장 독립사태는 사실상 이미 진압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혹은 도저히 소문을 막아두지 못할 정도로 강력하게 일어나고 있을수도 있다. 어느쪽이 진실인지는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을듯 하다. 하지만 본인도 몇번을 이야기 하듯이 위구르의 독립운동은 티베트에 비하여 국제적인 인지도는 없지만, 더욱 강력하고 더욱 폭력적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비교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계속 위구르의 독립운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앞으로 베이징 올림픽 전까지 이런 운동이 계속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짦은 기간의 관심으로는 독립을 이루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티베트와 위구르의 독립을 원한다면 천천히 그들의 역사와 현재를 천천히 파악하고 조용히 움직였으면 좋을 것 같다.

그런 생각으로 저는 글이나 덧글로 "티베트의 자유를!"이라고 외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티베트 독립 가능성 검토와 같이 독립에 대한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이야기를 더 하고 싶다. 그리고 냉정하게 이야기 해서, 지금 현재의 상황에서 티베트와 위구르의 독립은 요원한 일이다. 이 점을 먼저 생각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현재 더욱 가속화가 붙어버린 민족동질화 과정으로 형성될 티베트족1), 위구르족2), 한족간에 어떠한 결과가 벌어질지 두고봐야할 일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에서 이러한 민족공동체간의 충돌은, 특히 새로 떠오르는 민족 공동체 간의 충돌은 언제나 폭력적이었다. 후...


1) 혹자는 캄족을 티베트족으로 포함시키는데, 현재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30년전만해도 캄족과 라사의 티베트족은 서로 경멸하는 사이였다. 그 사이에 민족동질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2) 위구르 역시 하미파, 투루판파 그리고 카쉬미르파로 나누어서 서로 원수처럼 지내던 사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민족 동질화가 급속도로 이루어졌다.

Pre-modern Polyethnicity and Ethnic Homogeneity - William H. Mcneill

저자는 The Rise of the West: A History of the Human Community 을 쓴 서양에서도 보기 드문 포괄적인 역사연구가이다. 해당 논문도 역시 서양과 동양을 아우르는 거대한 역사체를 무대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저자는 특별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 하지만 글의 전반적으로 서술한 이야기에서 다양한 생각들을 읽어내릴 수 있다. 주의해야될 점은 저자는 특정 역사를 연구한 것이 아니라 이미 연구된 내용을 이용하여 연결시켜 놓은 것이다.

본인이 눈여겨서 본 부분은 중국과 일본을 비교하면서, 중국은 1000년(송대)전까지는 비교적 개방적인 사회였고 그래서 송대에 눈부신 발전을 이우러냈지만 그 뒤로 점차 폐쇄적으로 변해갔다. 반대로 고대에는 개방적이었던 일본은 점차 폐쇄적으로 되어가지만 나중에 서양의 압박으로 개방을 하고 발전을 이룩해 낸 부분이다.


해당 사항을 정리해보면, 개방을 하면 발전을 하게 되고, 그 발전의 정도가 일정 이상이 되면(아마 주변국에 비해서 높은 발전 정도), 반대로 점차 폐쇄적이 되어가고 발전의 속도도 줄어들어서 상대적으로 쇄락해간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폐쇄적으로 되어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해당 집단 내부의 기준으로 발전의 정도를 인식했을 때라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2차세계대전 전까지, 아니 버블경제 전까지만 해도 상당히 외국인에게 개방적이었다. 하지만 현재 일본은 누구보다 갇혀 살고, 이기적으로 자신들만 챙긴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물론 쇄락이 먼저인가 폐쇄적이 되는 것이 먼저인가라는 닭과 달걀의 문제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위의 말을 바꾸어 보면 아직 개방적일 때에는 아직 일정 수준의 발전을 이룩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폐쇄적인 한국은 이미 일정 수준이상 발전한 것인가? 그렇다. 한국인의 대다수가 현재의 발전 수준에 만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직 한국의 발전에 불만인 자들이여. 세계화를 외쳐라. 하지만 더욱 중요한건 다른 한국 사람들을 욕구불만으로 만드는 것이다. 아직 욕구불만이 부족하니 외국인을 외계인처럼 보는 한국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욕구불만인 본인부터 이야기 하겠다.

한국 발전하기는 개뿔!
제발 소원이다 욕심을 좀 가지자!
더 발전해야될거 아니냔 말이다!


《生成哲学》原名叫《事物生成共源根》(Ghob dongb soudjanx jidjios oddel jiongx)。全篇共三章四十九句。第一章一十九句,论述事物生成的源根和人类进化的历程;第二章十六句,论述事物生成基本要素,关系和结果;第三章一十四句,论述“生”和“成”的辩证关系。

是湖南花垣县猫儿乡苗学大师龙玉六先生口授,源自《古老话-后换篇》中的一章,相传出自苗族先民哲人与部落领袖阿濮补僮。这篇文献共339字,以朴素的唯物主义历史观讲述了万物生成的根源和人类进化的历程:

“先出现天,后出现地。从那时起,盘古就分开了天和地。先安好日月,后装齐星斗,山水风雨都齐备。天气罩着地,地气映着天,天气化成了搜媚若,地气化成各薄港搜。从那时起,什么东西都具备生成条件,仡索才来造生命,陆地水域有生物存,先起苔藓生鱼虾,后有蛆虫蛇蟒鸟雀虎狼牛马;接着才有猿猴类人猿,最后才育原始人。人用脑想用手做,从古代直到如今,归他来掌管乾坤。干万事物同一理,事物生成共源根。”

出自于:东人达《试论中国少数民族史学》史学理论研究 2008年第1期。

어떤 사람을 한국인이라고 부르는가? 어떤 사람을 중국인이라고 부르는가? 일본인이라고 부르는가?  현재 한국, 중국, 일본의 국가 안에 사는 사람들을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이라고 한다.

-- "The Peoples of Asia" - Science and Politics in the Classification of Ethnic Groups in Thailand, China, and Vietnam By CHARLES KEYES 중의 문장을 살짝 패러디한 것.


어마어마하게 단순하고 당연한 말이지만, 곰곰히 씹어보면 너무나 씁쓸한 문장.


 CHARLES KEYES는 민족이란 허구적인 개념에 불과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민족의 개념과 범위는 정치적인 목적에 따라서 너무 쉽게도 변한다. 그리고 이렇게 변한다는 것 자체가 영원한 민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리이다. 실제로 한국인들이 한민족이라고 하는 공동체의 틀은 과거 정신문화연구원이 피나게 만들어낸 역사관의 결정체일 뿐이다.

지금 내가 느끼는 한민족이라는 자긍심이 누군가에 의해서 세뇌된 하나의 상상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곰곰하게 되돌아보자. 그리고 "한민족 짱!" "한민족이 세상에서 최고"라는 생각을 버리고, "짱깨는 드러워"나 "쪽발이는 키작은 병신"과 같은 이야기를 하지 말고, 민족이나 국가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단지" 인간으로서 세계를 바라보았으면 한다.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은 없다.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


현재 아테네에서 베이징으로 와서 이제부터 앞으로 열릴 올림픽 전까지 계속 전달이 되어야될 올림픽 성화가 분실이 되었습니다. 현재 중국 매체들은 해당 사건에 대해서 은폐하려고 하고 있지만, 실시간으로 화면을 지켜보던 이들에 의해서 인터넷에 계속 해당 사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특히 이런 평화적인?! 테러는 티베트측에서 준비된 것이 아닐까 생각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는 현재입니다.





















.....이상 "만우절"에 베이징의 바로특파원이었습니다.


현재 올림픽 성화가 분실되었다고 빨리 TV을 보라는 만우절 전용 문자 메세지가 범람하고 있답니다. 잘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일인데, 처음 들었을때는 저도 모르게 "그럴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떠올려지는 일입니다.

만우절은 중국에서는 愚人节(yurenjie 위런지에) 라고 부른답니다.




드디어 길다면 긴 2달 반의 일본 생활을 마치고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갑니다. 그 동안 2차적으로만 접해오던 일본에서 생활을 한 기분은 한마디로 정리하기 힘들듯 합니다. 또한 일본 생활기간동안 저에게 생긴 많은 변화들도 한마디로 말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천천히 소화를 시키고 한중간의 비교에서 한중일간의 비교로 영역을 확장하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지금 현재로서 일본 생활의 경험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역시 사람 사는거 그게 그거다." 입니다.



1) 인터넷 접속 불가능

예상 : 27일 아침 10시부터 29일 저녁 6시까지

추가 사항 : 4월 5일까지는 절망일듯 싶습니다. 흐흑..ㅠㅠ

돌아가는 날은 28일(금)입니다. 그런데 27일날 기숙사 마무리 결제를 해야되서 27일부터는 인터넷을 할 수 없습니다. 베이징의 집도 전화비를 그동안 내지 못하여 29(토)일 아침에나 전화비를 내고 오후쯤에나 인터넷이 가능할듯합니다. 해당 시간동안 급한일이 있으신 분은....참으십시오! 특히 일본숙사 전화도 안됩니다. 3일간 현대의 정보통신에서 왕따를 당하는 것이죠.


2) 돌아가는 비행기에 대한 아쉬움.

파키스탄 항공회사여서 비행기 가격도 싸고, 일본시간 2시에 출발해서 베이징 시간 5시쯤에 도착을 하니 비교적 좋은 조건입니다.(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저녁전에 도착해서 집에가서 짐풀고 대충이라도 집정리를 할 수 있기에...) 단지 파키스탄 항공은 새로운 베이징 수도 공항 3청사가 아니라! 지겨운 2청사입니다. 너무나 아쉬운 것이 사실입니다. 슬프답니다. 새로운 3청사로 베이징에 들어오고 싶었는데 말이죠...ㅠㅠ


3) 청소에 대한 두려움.

...집안 꼴이 말이 아닐터인데 말입니다. 후....왠만하면 아줌마 부르는게 좋을듯 한데...돈이...생각해보니....전화비 낼 돈이 없어서 인터넷을 당분간 못하는 것은 아닐지 불안해지는 것을 무엇일까?


이렇게 잡다한 생각들을 하면서 일본에서의 생활이 끝나갑니다^^

무엇보다 기분이 조금 이상한 것이. 한국이 아닌 중국에 가는것인데 집에 돌아가는 기분이...-0-



1) 개도 동물이다.
개와 다른 동물의 차이는 없습니다. 그리고 개와 인간의 차이도 없습니다. 똑같은 동물일 뿐입니다. 개만 대단하다고 하는 생각은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뿐입니다. 개는 동물의 하나이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이시지 않는다면 아래글은 읽어보셔야 소용도 없으니 그냥 창을 닫아주시길 바랍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리플이 생각나는군요."나는 어릴때부터 소를 키워왔다. 그 눈망울을 보면 너무나 사랑스럽다. 그런 소를 어떻게 먹을 수 있는가?! 당신들 모두 소고기를 먹지 말라! 소는 우리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조용히 충성을 하는데 어떻게 소를 먹을 수 있단 말인가"! 한마디로 반대 상황이 되어보십시오. 그러면 개고기 중에서는 많은 순종개를 포함되어있다는 말이 얼마나 허황된 발언인지 아실것입니다. 그거 아십니까? 돼지에도 고양이에도 소에도 순종과 잡종은 있습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소나 돼지의 소위 순종은 더욱 더 비싼 값에 팔립니다.


2) 개만이 반려동물이다?

님에게 반려동물이지만,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시면 안됩니다. 타인에게는 반려동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애견인에게 개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한 적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개를 키워봤고, 고양이도 키워봤습니다. 병아리를 닭이 될 정도로도 키워봤습니다. 그렇지만 개를 먹어봤고, 고양이도 먹어봤고, 닭도 당연히 먹습니다. 음식과 애정을 주는 대상은 구별하시기 바랍니다. 애정을 준다면 인형에도 개와 동일하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습니다. 고로 개만 특별히 취급하는 것은 웃기다고 밖에 느껴지지 않습니다.


3) 생물의 기본 속성
더욱 더 큰 문제는 인간...아니 모든 생물은 기본적인 절대 법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과는 다른 존재를 섭취하여서 에너지를 만든다는 것이지요. 인간은 다른 생물을 섭취해야됩니다. 동물은 물론이고, 식물도 섭취해야됩니다. 물론 물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지요. 아! 산소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산소 속 에도 수 많은 미생물들이 살아있습니다.

냉혹하고 잔인해 보이지만, 인간도 생물이기에 타자를 섭취해서 자신을 구성해야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도록 되어있습니다. 인간은 같은 인간도 먹을 수 있는 잡식성 생물입니다. 이점을 잊지 않으셨으면 하는군요.

 
4) 개고기와 원조교제?
어떤 분은 개고기를 먹는 것이 개인 취향의 문제라면, 원조교제도 자유롭게 놔두어야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원조교제 자체는 개인의 취향이지만, 해당 행위를 함으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법률적으로 금지해놓은 것이지요. 하지만 개를 먹는 것에는 사회적인 금지가 없습니다. 두가지의 차이를 명확히 구별하기시를 바랍니다.

 
5) 서양숭배사상
개고기 반대론자분들이 자주 언급하는 것이 서양의 사례입니다. 하지만!

문화상대성이라는 말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각각의 문화에는 우월이 없고, 다름기만 하다는 것은 서양에서도 20세기에 결론이 나온 문제입니다.(혹은 "야생의 사고"라는 책이 한국에도 번역되어서 나왔는데 한번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더 간단히 정리하면 서양에서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저희까지 먹지 않아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물질적으로 풍요로우면서 동물에 대한 권익이라고 하셨는데, 서양의 애완동물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보셨으면 좋겠군요. 서양은 유기견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또한 동물의 대한 권익이라고 하시는데 그럼 서양사람들은 돼지고기도 먹지 않는가요? 돼지도 분명한 동물입니다. 현재 서양에서는 개를 먹지 않지만, 과거에는 서양에서도 개를 먹었습니다.(중세까지는 확실합니다.)

한마디로 제대로 된 현실 파악부터 하시길 바랍니다.

 
6) 진정한 애견인이라면!
마지막으로 정말 개를 사랑하신다면, 지금의 열악한 도축환경을 개선하실 방법에 정력을 투자하셨으면 좋겠군요. 곧 지금의 체계적이지 않은 도축시스템과 위생적으로 문제가 있는 도축환경 및 유통과정에 대한 이야기와 개선 방법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보신탕을 먹는 사람들도 받아 들입니다.



단순히 개가 인간의 친구이니 먹지 말라고 하시는 건 개그밖에 되지 않습니다.




개고기 이야기를 블로그에서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만, 어떤 분이 덧글로 자극하셔서 대답으로 쓴 글을 다시 정리해서 올립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전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분쟁이 일어날 글은 쓰기 싫습니다. 인기 없는 중국에 관한 이야기만 올리면서 살고 싶습니다.




추가 :

그냥 예입니다만...
합법화의 애견인으로서의 장점
1) 시골마당에서 두들겨 패서 먹는 개고기가 사라진다.
2) 기존의 개도축은 탈법적이어서 세금이 없지만, 이제부터는 세금이 생길 것이고, 개고기 가격이 오름으로 인하여 기존에 비하여 소비가 일정정도는 위축될 것이다.
3) 개를 납치해서 사적으로 도축해서 유통할 수 없기에 애완견들이 기존에 비하여 안전해진다.

개고기를 먹는 사람을 설.득. 할 수 있는 점.
개고기의 도축과 유통이 투명해짐으로 인하여 개고기를 안심하고 먹을 수 있게 된다.   

얼마전에 우루무치에서 폭탄테러가 있었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에 대해서 시나왕에서는 특별히 메인에 "우루무치 폭탄테러는 낭설이다"(중문) 기사까지 올리면서 폭탄테러에 대한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이정도로 강조 되는 것은 폭탄테러가 진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되는 것은 왜 우루무치 폭탄테러 설이 생겨났느냐라는 점이다.

우루무치는 중국 신장성의 성도이며 중심이다. 그리고 티베트와 비슷하게 독립을 외치는 위구르 사람들이 사는 곳이 이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인 것이다. 티베트의 독립을 원하는 목소리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반면에 위구루 독립의 목소리는 비교적 작다.  실제로  10년에 한번 씩은  신장에서 대규모 폭동이 벌어지며, 그럴 때마다  중국정부는 외국인의 통제와 강력한  무력통제를 해오고는 했다.

그러니 티베트만이 베이징 올림픽이라는 "기회"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독립움직임을 세계에 알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위구르족도 이 기회를 노리고 있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추측이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중국인들 사이에서 우루무치 폭탄테러 설이 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중국인들도 티베트 이야기를 다 알고 있고, 위구르족이 독립을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언로는 통제로 막을 수 없다는 한가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일은 낭설이라고 하더라도, 계속 위구르 족이 조용히 있을리는 없다고 장담한다. 분명히 한번 터질 것이다. 위구르족이 일으킨 사건이. 개인적으로 그 때 주의해서 보아야 될 점은 중국이 국제적으로 유명하지 않은 위구르족의 행동에 티베트와는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라는 점이다. 특히 위구르족의 방법이 기본적으로 테러에 가까우니, 반테러을 외치며 강한 압박을 보여주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五胡和六夷的出现 :

오호는 북방민족 스스로가 만들어낸 분류방법이고, 육이는 중원에서 만든 방법?

--》 就是自称和他称的问题

혹은 오호는 이족이 만들어낸 호족에 대한 분류이고, 육이는 호족이 만들어낸 이족에 대한 분류?

--》


1357 --> 夷所使用的或者所喜爱的数字

2468 --> 胡所使用的或者所喜爱的数字



오호와 육이의 원류에 대한 연구야 이미 많다. 하지만 그것을 숫자를 대입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지만 해당 내용은 논문으로 쓰기에는 힘들것 같다. 논문보다는 간단한 잡상으로 정리해서 나중에 블로그에 다시 올리는것이 좋을듯. 이런 건 논문으로서의 가치가 없으니..;;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국시간 3월 24일 18시(올림피아 현지 시간 오전 11시), 베이징 올림픽의 성화 채화의식이 그리스 올림피아 유적에서 거행됩니다. 그리고 이 행사는 중국 최대의 포털 중에 하나인 SINA(新浪网)에서 실시간으로 중계가 됩니다.

중국어로 된 홈페이지는 : http://torch.2008.sina.com.cn/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실시간 중계를 한다고 해 놓고, "对不起,本视频直播只针对中国大陆地区(不包括香港、澳门、台湾)用户。" --> "죄송합니다. 해당 영상물은 중국대륙 사용자들만이볼수 있습니다. (홍콩, 마카오, 타이완 역시 포함되지 않습니다.)" 라고 적어놓고 있다.

물론 해외까지 개방하면 트래픽이 장난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반대로 해외의 수 많은 화교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라고도 할 수 있다. 더욱 한심한 것은 홍콩, 마카오를 빼버린 것이다. 이것이 一国两制(한나라에 두제도)의 핵심이란 말인가?

더더욱 한심한 것은 타이완에 대해서도 막아버린 것이다. 하나의 중국을 외치며, 또한 지금처럼 티베트 문제가 타이완의 선거판에 이용되는 시점에서 이런 올림픽같은 행사를 같이 본다는 것은 어느 정도 민심에 좋은 영향을 미칠터인데, 이것은 무시하는 처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실수하는 거다. 시나왕!
(결코 본인이 보지 못한다고 이렇게 비평하는건 아니다...정말?! -_-)


중국정부는 3월 20일에 25개 동영상 UCC싸이트을 서비스 중지하였다. 또한 10개 싸이트에 대해서 경고 처분을 내렸다. 이것은 앞으로 중국 정부가 동영상 UCC에 대해서 더욱 강력하게 관리를 할 것이라는 의미이며, 특히 외국계 투자자들의 투자 심리를 꽁꽁 얼어붙게 하는 처사이다. 또한 티베트 사태와 무관하다고 하면 웃길 소리일 것이다.(티베트에 관한 사항은 티베트 독립 가능성 검토 을 참고.)


더욱이 이번 경고처분 명단에 중국 최대의 동영상 UCC 싸이트인 감자왕(Tudou.com) 도 속해 있다는 것이다. 사실 현재 많은 서비스들이 앞으로의 중국시장을 노리고 새로운 YouTube를 위하여 경쟁하는 시점에서 시장 전체에 살얼음이 맺혀 버린 것이다.


사실 이런 중국정부의 인터넷 통제는 작년말에 더 멋진 경우가 있었다. 인터넷에서의 모든 동영상 서비스는 국영기업이나 국가가 일정이상의 증권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만 서비스가 가능하다고 못을 박았던 것이다. 아시다 싶이 IT 기업은 그 속성상 느릴 수 밖에 없는 국영기업과는 매치가 될래야 될 수가 없다.


이런 중국 정부의 방침은 당장에는 언론의 통제용으로 유용하게 쓰일지는 모르나, 거시적으로 오히려 중국 정부의 목을 조이는 것이 아닐까 진심으로 중국 정부에 걱정의 눈빛을 던져본다.


福原愛(일명 아이쨩)을 처음 보고서 본인이 무의식적으로 한 말은 귀엽다라는 말이었다. 본인 쉬운 남자가 아니다. 쉽게 귀엽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일단 아이쨩이 누구인지 부터 알아보자.


아이쨩은 일본의 탁구대표이다. 나름 실력이 있다고 한다. 체육 선수임에도 괜찮은 외모로 인기도 있다고 한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CF까지 찍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리고 중국말도 잘한다.


이상이 본인이 아는 전부이다. 이상 낚시용 떡밥을 마치겠다. 낚였다고 하지 마시라. 나름 동영상까지 선사해드리지 않았는가?! 응?! 혹 심심한 분은 아래부분을 계속 읽어주셨으면 한다.



본인이 주목한 것은 다른 부분이다.일본에서는 한국과는 다르게 탁구도 인기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그런데 정작 일본에서는 쉽게 탁구할 수 있는 곳을 구하기가 어렵다. 중국이야 스스로 탁구가 국가스포츠라고 할 정도이니 비교가 불가능하겠지만, 한국만 하더라도 주위에서 쉽게 탁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넘의 일본의 탁구는 기본적으로 온천탁구이다. 온천가서나 탁구치는 것이다.

하지만 인기가 있다. 왜? 그 이유를 이곳에 와서 절실히 알게 되었다. 한국의 스포츠 방송처럼 무미건조한 선수 소개가 아니라 만화에서 주인공 등장씬과 같이 매우 재미있게 구성이 되어있다.하지만 중계는 자체야 별로 재미가 없지만, 사실 실제 경기할 때에는 중계에서 먼 소리를 하는지 잘 안 듣지 않는가?! 시합 전과 휴식시간, 그리고 시합 뒤가 중요한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로 한국도 스포츠를 조금 더 재미있게 포장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어서 선수 소개를 할 때에 : 드라이브의 마왕 김바로! 그의 필살기는 오늘도 폭팔할 것인가! 독일 분데스리가를 놀라게한 천재소년. 벼락과 같이 작렬하는 드라이브!

대충 이런 식이다. 처음 들으면 뭐냐 이건?!이라고 생각되지만, 은근히 재미있다. 한국도 이런 포장기법을 조금 더 살렸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서 축구 선수소개를 하여도..."산소 탱크 박지성! 그라운드의 모든 산소를 홀로 소비하며 끝까지 돌진하는 한국의 불도져! 그를 막는자! 지옥을 보리랏!" 정도면 어떻겠는가?





...그런데 말이다. 아이쨩....중국어도 잘한다. 의사 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보통 일본인보다 발음도 무지막지 좋고 말이다. 호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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