科技时代_北京地铁10号线暂无手机信号

이번에 새로 열린 10호선에서는 휴대폰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 5호선이 생기고 나서 곧장 모든 지역에서 휴대폰 신호가 잡힌것과는 대비되는 현상이다.

베이징 지하철 운영회사 통신 사업부에 따르면 사실 10호선과 올림픽지선의 휴대폰 설비는 이미 구축되어있다고 한다. 또한 검사 역시 끝났다고 한다. 문제는 차이나 유니콤과 차이나 모바일이 서비스를 정식으로 시작하지 않고 있는 것일 뿐이다.

중국의 두 거대 이동통신 서비스 회사들이 서비스를 시작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이유이든 20일도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아직도 휴대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준비 부족이라고 비판해도 할말이 없을 것이다.


 

출처 : 바이두    http://game.baidu.com/zt/2008070501/



10대 인터넷 게임
1) 카트라이더
2) 오디션
3) WOW
4) 천용팔부
5) 주시엔(诛仙)
6) 환몽서유(梦幻西游)
7) 쩡투(征途)
8) 원따오(问道)
9) 열혈강호
10) 모위(魔域)
카드와 오디션의 파워가 강하게 보이는군요. 제가 아는 한도로서는 전체 순위권중에서 카드, 오디션, 열혈강호가 한국게임이군요. 그리고 WOW야 세계 어디서나 기본적인 파워가 있기에 3위를 차지하고 있군요. 그 외에 중국게임들을 살펴보면 모두가 MMORPG 계열의 게임인듯합니다.
중국에서 게임 컨텐츠의 부족이라는 소리가 나올 만도 합니다. 물론 한국도 만만치 않기는 하지만 말이죠. 개인적으로 친구가 일하고는 있지만 던젼앤파이터와 같은 식의 캐쥬얼 단순 노가다 게임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 시장에서는 그런 게임이 더 잘 팔리는 현실을 생각해보기는 해야겠군요. 그런 생각에서 던젼앤파이터를 중국 텅쉰(QQ)에서 WOW보다 비싼 가격에 계약을 했겠지요. 조금 있으면 정식 서비스에 돌입할 터인데 어찌 될런지 궁금합니다.



한국에서 홀짝제를 시행하듯이, 중국 베이징에서도 올림픽을 대비하여 홀짝제를 시행합니다. 이로 인하여 우선 지긋지긋한 스모그가 상당량 감소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리고 베이징의 고질병인 정체현상이 많이 풀리게 될 것이라 예상됩니다.

하지만 한국과는 다르게 모든 기관과 단체 및 개인에 대한 "의무 사항"으로 지정해 버렸기 때문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활동할 공간을 주지 않았다는 점은 매우 염려스러운 점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해당 정책이 나왔을 때, 베이징 시민들은 불평불만을 꿍시렁거리면서도 올림픽이 있으니 이해해야지의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얼마전 구체적인 시행규칙이 나오면서 한가지 점이 운전자들을 어이없게 만들었습니다. 홀짝제는 밤 0시를 기준으로 변하게 되어서, 만약 야근을 하고 늦게 귀가할때 0시가 지나면 해당 번호의 차를 이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럴때에는 택시를 타고 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서 정체현상으로 0시가 되었습니다. 그럼 이 사람은 고속도로 혹은 기타 도로의 주변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서 혹은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와야하는것인가요? 특히 밤 0시부터 새벽까지는 차량이 거의 다니지 않는 시간대인데도 말이지요.

이 점에 대해서는 말이 많았고, 많은 네티즌들이 지적을 했고, 항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전 베이징시 교통관리국은 0시부터 3시까지는 완충시간대로 만들어서 해당 시간에는 모든 차량이 통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될 것은 많은 네티즌들의 참여입니다. 물론 네티즌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계층에서 위 사항을 문제시 하였지만, 이런 "정부의 정책"을 네티즌이 직접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금씩 영글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중얼중얼 : 예전에 중국은 이미 사이드카 운영중 을 올렸을 때, 어떤 사람들이 너무 과도한 추측이고 예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하하하......한나라당님들아^^ 작작하세요. 사람 진짜 열받기 전에 말이지요. 아님 중국의 인터넷 통제 노하우를 싹다 공개해드릴까요? 물론 동시에 중국 네티즌이 그런 통제를 뚫기 위한 프로그램과 방법들도 모두 공개해드리겠습니다^^



满洲如何演变为民族 - 论清中叶前满洲认同的历史变迁

北方民族史十论

姚大力

 

만주의 실제적인 연원보다는 그 관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연구.

서방에서는 이미 유행하는 연구방법이지만, 중국에서는 그리 유행하지 않는 방법.

 

-金“元”女真 得改为 金“源”女真

 

이런 이론은 그대로 몽고에 도입을 하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온다. 몽고의 구전설화를 이용해서 황제시대까지 그 근원을 찾아가는데, 기존에는 이러한 것이 구전설화의 정확성을 이야기하지만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 

만주전공 학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연구를 사용해놓고, 그 사람을 다시 부정했다. 부분에서 야오따리를 비평하였다. 그의 대부분의 내용은 다른 사람의 연구내용을 듣고서 그 구조를 이용하면서 더욱 발전된 이야기를 서술한다. 그의 결론을 가지고 문제삼는 학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그의 연구방법에 대해서 그리 좋은 감정이 없다.

터키는 스스로 오스만제국에서 분리되어 나왔다고 생각하는데 비하여, 중화민국의 손중산은 스스로를 청나라를 계승했다고 한다. 그런데 로마의 경우 많은 유럽의 나라들이 계승했다고 한다. 흐음...이런 차이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중국의 역성혁명적인 관념에서 내려온 것일까? 이건 중국의 특색인듯 한데?? 예를 들어서 몽고를 몰아내고서 몽고의 역사를 "지금에는" 스스로의 역사로 여기지 않는가?

 

민족주의 관련 저서

상상의 공동체

 

쓸만한 논문 생각 :

고구려나 발해의 불교유입과 그로 인해서 형성된 혹은 통치계급에게 이용되서 형성된 민족의식을 연구해볼 수 있지 않은가?

중국에 대해서 공부를 하다보면 정말 신기한게 하나가 있다. 분명히 이 땅의 역사는 심심하면 분열을 하고, 다양한 "유전학상의 민족"들이 서로 융합되어서 구성되는듯하다. 그런데 마지막의 승리는 언제나 화하족이 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에 대해서는 역사 왜곡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문화로서 민족을 구성하는 중국의 특색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나라나 북방이민족들은 단지 문화의 힘에 눌려서 물러나가거나 융합된 것일까? 그런데 조금 다르게 보는 것은 어떨까?

이 글을 진지하게 듣지 말라.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가정위에 다시 한번 가정을 하는 글이다. 다시 말하지만 진지하게 듣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가정의 가정으로 적는 글이니 정확한 고증은 일단 패스하겠다. 그러니 이 글을 농담으로 받아들이기 바란다.



1) 이명박 대통령에게 감사를...

최근 10년사이에 한국에서는 국민에게 "법률"과 "과학"공부를 시키려는 것 같다. 수도이전, 황우석사태, 탄핵 그리고 광우병까지 말이다. 역사학도로서 전혀 상관없는 두 가지를 공부해야되니 조금 짜증나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하나는 건졌다. 학문쪽으로 건진것이 아니라서 조금은 슬프지만, 술자리 안주용으로 쓰기에는 그럭저럭 괜찮은 "상상"인듯 하다.

이번 광우병사태 덕분에 해당 이론을 접할 수 있게 해주었으니 감사를 보낸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2) 각기 다른 유전자마다 잠복기가 다르게 나타난다.

출처 : Phenotype-genotype studies in kuru: implications for new variant Creutzfeldt-Jakob disease. (Proc Natl Acad Sci U S A. 1998 Oct 27;95(22):13239-41) 광우병과 사회적비용 중에서...


해당 그림을 이미 본 분도 있을 것이다. 간단하게 현재 영국의 대다수의 광우병 발병자가 MM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해당 논문은 쿠루병이라는 식인풍습이라는 광우병과 유사한 병에 대한 연구 결과이다. 결론적으로 이종간의 전염에서 MM은 비교적 빠르게 발병을 하고, MV는 비교적 늦게 발병을 한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영국에서 광우병 발병자가 줄어들고 있지만, 영국인의 유전자는 대다수가 MV이고, 앞으로 15년이후에 대규모 발병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이다. 이것도 이번 광우병 문제에서 광우병으로 중요한 문제이긴 하다. 해당 사실을 아시려면 광우병과 사회적비용 으로 가보셨으면 한다. 개인적으로 해당 홈페이지의 글들이 이번 사태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중에서 가장 타당성과 신뢰도가 높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본인이 주목한 것은 이부분이 아니다. 다시 한번 도표를 보자.

MM의 주요 사망 연령을 보면 5살에서 14살 사이이다. MV는 비교적 광범위하게 나타나는데 20살 이상으로 생각하면 될것 같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유전자를 퍼트릴 수 있는 수단 - 곧 성적인 능력이 형성되는 시기는 보통 15세 이후의 일이다. 만약 같은 전염병에 MM과 MV 두 집단이 동시에 걸렸을 경우, MM집단은 자식을 남길 수 없는 반면에 MV집단은 자식을 남길 수 있게 된다.


3) 타부는 도덕이 아닌 생존.

현재 인류 보편적으로 타부라고 생각하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근친상간과 식인풍습이다. 그리고 혹자는 이를 인간으로서는 반드시 지켜야될 태생적인 도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본인이 볼때에는 스스로 생존을 하고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한 경험적인 생존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친상간의 경우 자식이 미숙아 혹은 정신지체아가 나올 확율이 높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식인풍습은 왜 막았던 것인가? 도덕적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인간을 본래 그런 존재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역사에서도 식인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자주 나온다. 특히 국가가 위태롭고 국민의 삶이 도탄에 빠지는 시기를 서술할때마다 나오는 것중에 대표적인 것인 "식인"이다. 인상에 남는 이야기는 자기 자식을 차마 잡아먹지 못해서, 서로 자식을 바꾸어서 잡아먹는다라고 서술한 부분이다.

핵심은 "인간은 인간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원죄라고 불러도 좋지만, 인간은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게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인간을 먹지 않게 되었을까? 혹시 근친상간과 같이 긴 시간을 걸쳐서 형성된 원시인들의 경험적 지식으로 식인을 하게 되면 쉽게 죽을 수 있다라는 생각이 자리 잡아갔던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어떨까?


** 여기서부터 본인이 잘 모르는 관계로 가정을 하나 하겠다.

화하족 혹은 한족은 MV형 유전자이다. 그 외에는 MM형.

4) 선진시대의 경우

선진시대에 식인의 문화가 보편적이느냐 아니면 특수하였느냐라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일정정도 식인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상나라의 경우 흔히 동이족이 세운 나라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주나라로 대표되는 화하족이 서쪽에서 밀고왔고 중원지방을 점령하고 점차 세력을 넓혀나간다. 이런 과정에서 식인으로 인한 전염병으로 정복이 쉽게 된 측면이 없었을까? 일단 이런 전염병의 능력?!이 점령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스페인과 포르투칼에 의한 남미점령이다.

쉽게 말해서 자연 환경이 급변할 시에는 농작물의 수확량이 줄어들고, 식인이 보편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하였을 때, 화하족은 식인을 해도 일단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연령에서 죽지만, 타민족은 자식을 낳기 전에 죽어버리게 된다. 특히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상주변혁기는 기후적으로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던 때로 기억한다. 특히 인구가 힘이었던 고대사회에서는 이런것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5) 위진남북조의 경우

위진남북조에서도 자연기후적인 변화로 농작물의 수확량이 줄어들고, 그 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알다 싶이 중국 전국이 전란으로 휩쌓이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식인에 대한 이야기가 보다 많이 나온다. 여기서 두가지 점.

북방유목민족에게 식인의 풍습이 남아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사료가 몇가지 있다. 석호가 사람을 죽이고 요리해서 먹었다는 말과 같은 경우이다. 물론 이것이 그의 포악성을 강조하기 위한 묘사일뿐인지 아니면 정말 그러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일단 식인풍습이 있다고 가정을 하자. 그렇게 되면 북방의 다양한 이민족 왕조가 쉽게 망하는 하나의 이유가 될수도 있다.

그리고 남조에 의한 남방영토 확대가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도 전염병에 의한 점령이 있지 않았을까? 이것은 식인이 아닌 왕래가 자주 있어서 여러가지 전염병에 면역이 있는 한족과 원래 영토에 머물러 있어서 다른 전염병에 약했던 원주민의 문제로 생각해도 되겠지만, 일단 식인만 중심으로 생각해본 것이다.



이상...그냥 심심해서 적어내려간 글이었다. 설마 진지하게 이 글을 읽은 분은 없겠지? -_-;; 아는 분들이 보면 농담이고 잡상인지 알겠지만, 모르시는 분들이 보면 진지하게 생각할지도 몰라서 다시 한번 반복하지만 이 글의 내용을 믿지 말라. 이건 근거가 미미하거나 없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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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곳도 있더군요. 문화생활과는 거리가 먼지라 처음가봤습니다. 상당히 괜찮더군요.여친님이 계신분은 같이 가면 딱 좋을듯 합니다. 1층은 커피숍입니다....저처럼 솔로는....흑.


인텔 센트리노 2 프로세서 기술 발표 기념 블로거 선상 파티가 2008년 7월 15일(화), 한강 고수부지 잠원지구 내 FRADIA 2에서 열렸습니다. 인텔 코리아 사장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런 블로거 행사가 아태지역에서는 한국이 유일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반가운 현상이며 이번 행사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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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내부의 모습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상당수의 기자제와 식탁이 혼재해있습니다.


전반적인 진행은 링블로그의 그만님이 맡으셔서 특유의 거친?! 입담을 선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그만님과 만담?!을 나누면서 공동 진행을 사셨던 이희성 인텔코리아 사장님이 상당히 인상적이셨다. 45세라는 젊은 나이?!답게 상당히 심플하고 솔직하게 진행하려고 노력하신 면이 있었다. 더욱 솔직했으면 좋았겠지만, 그 나이에 그 정도 이상의 솔직함을 기대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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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랩퍼 희성~ 인텔 코리아는 나의 손아귀에~ 자 나를 따르라~~~ 풋쳐핸섭!


부폐는 상당히 맛있었다. 너무 맛있어서 열심히 먹느라 사진이 없다. 같이 참가하신 다른 분 블로그에 올라온 사진을 참고해주셨으면 좋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이번 "인텔 센트리노 2"는 대체 어떤 존재일까?


결론적으로 기존의 센트리노를 파워업한 모델이다. 본인이 눈여겨 본 점은 "배터리 사용량"과 "무선인터넷"부분이었다. 어떤 분은 기존의 인텔 내장그래픽칩이 쓰레기라는 발언을 하셨지만, (거기에도 동감하는 바이지만) 본인에게 노트북의 가장 핵심은 "이동성"이기에 그런 부수적인 점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블루레이가 끊기지 않고 돌아가든 말든 나랑 먼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난 노트북으로 그런걸 볼 인간도 아니고, dvd와 cd의 화질 차이도 못 느끼는 인간이다.)

일단 공식발표로는 무선 인터넷 부분은 확실히 파워업을 했다. 단지 칩셋이 북미에 최적화가 되어있어서 한국에서 사용은 가능하지만 한국 최적화는 2009년에나 될듯 하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이 주로 지내는 곳은 중국. 그리고 내 기억에 중국과 미국의 기술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고 알고 있다. 그러니 본인과는 상관없음. 음하하하..-_

배터리 부분의 공식발표로는 올라갔다고 하지만, 본인 조금은 의구심이 든다. 일단 2시간 가량 성능 향상이 되었다고 한다. 일단 2배 부풀리기가 기본 센스라고 생각하고 1시간 정도라고 생각해보면, 그리 나쁘지 않다. 아니 1시간은 노트북 사용자들에게는 매우 큰 시간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실제 제품이 나오고 난 뒤에 전문가들의 리뷰를 기다려 봐야겠다.

본인 테이블에서는 가격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리고 본인 테이블의 대표?!분이 이 부분을 발표했다. 이에 대한 인텔의 대응방식에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 분이 맨 처음 한 말이 "억울하다"라고 코믹하게 이야기했고, 이는 가슴과 가슴으로 블로그를 대하는 좋은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았나 싶다.

그 분은 TV의 예를 들면서 TV와는 다르게 CPU는 매년 업데이트가 되는데 가격의 변동은 더 크다고 이야기 하셨다. 예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TV는 한번 사면 최소 5년 이상 보는 소비제중에서도 장기성 소비제이다. 이와 반대로 CPU을 포함한 컴퓨터 상품은 최대 기간이 5년인 단기성 소비제로 구분된다고 알고 있다. (보통의 노트북은 3~4년이 교환주기이다.)

차라리 "가격은 하위 제품에 비해서 분명히 비쌀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돈가치를 한다고 당당히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돈값은 충분히 할 것입니다."와 같은 식으로 당당하게 말했던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이제 행사 진행에 관한 부분으로 넘어가보자. 인텔 관계자 분들도 아셨겠지만, 문제가 되는 부분이 조금 많이 있었다. 이런 행사가 처음이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긴 하지만...구설수에 오르기 쉬운 실수 연발이었다고 생각한다.

1) WOW 접속 실패
실제 고사양게임을 플레이 저장이 아닌 실시간으로 보여주시겠다는 부분은 매우 인상적이었으나, 인터넷의 문제로 접속하지 못하였다. 이는 큰 잘못은 아니지만 신뢰성에 상처가 가지 않았다면 거짓말 일듯하다. 개인적으로 고사양게임 시연이라면 "둠3"부터 떠오르는데 왜 와우였는지, 그것도 레벨 1짜리 와우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2) WOW 시연시 스펙문제
두 개의 노트북을 통한 비교실험이었기에, 노트북간의 스펙정보를 미리 확실히 밝혀둘 필요가 있었는데 이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당연히 내컴퓨터로 들어가서 간단한 스팩정보를 보는 것도 없었다. 이는 분명한 문제이다. 또한 WOW 그래픽 설정에 들어가서 두 데모의 그래픽 설정이 같음을 확인시켰어야 한다. 그래픽 설정에 따라서 프레임 차이가 얼마나 나는데 그것을 아예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은 신뢰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고 본다.

3) 음식 문제
부폐가 지속적으로 지급되지 못하였고, 나중에 온 분들은 많은 음식을 드시지 못하였다. 이는 진행상의 문제인데, 인텔 정도의 기업에서 이런 실수가 나온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중얼중얼 :
음식 고르는 사진을 정면에서 찍어 버리신분...사진은 잘나왔지만....잊지 않겠습니다. +_+ 저희 테이블은 실제 IT 종사자들이 몇명이나 있었는데 처참한 OX 수준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저와 같은 브레인-_-;;; 을 갑자기 불러내서 인터뷰를 하신 어느 기자님에게 있습니다. 전 중국관련 이야기를 올리는 일개 블로거 일뿐이라고요! IT는 저에게 단지 취미생활일뿐...

끄루또이님. 님의 영원한 여자친구님 정말 아름다우시더군요. 부..부럽습니다. ㅠㅠ 근데 태터앤미디어에서 제가 막내더군요. 82년생인데...막내라니....허허.....이런 예상하지 못한 충격이 몰려오더군요. 한국어강사과정에서도 막내인데 말이죠. 82년생이면 나이가 어린게 아닌데 말이죠. 끙...

갑자기 일들이 밀려들어옵니다. 하여간 한가로울 때는 심심해 죽을려고 했는데, 바빠지기 시작하니 정신이 없군요. ㅠㅠ 아직도 2가지 일이나 남아있는데 언제쯤이나 잠들 수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내일도 7시에 일어나야되는데 말이죠. 흑...ㅠㅠ


이것에 대한 뉴스는 日 '독도영유권 명기' 강행..한일관계 급랭(종합2보) 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저의 잡상을 적어나가기 시작하겠습니다. 시작하기 전에 본인은 기본적으로 세계주의자이다. 하지만 이 글은 되도록 국가주의에 입각하여 쓰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1) 감정적인 부분을 배제하고 생각하자.
독도 문제는 그동안 국민들에게 상당히 감정적으로 다가왔다. 지금도 역시 감정적으로 다가가는 문제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정치적으로 상당히 쉽게 이용되어왔던 소재이다. 한국 사회를 보면 언제나 과격할 정도의 민족주의 감정이 있고, 그것을 이용하는 세력이 있다. 이를 명심하고 민족주의적인 감정이 아니라 실리적인 면을 먼저 생각해보자.

(조그마한 음모론은 이명박정부의 여론 조작용 카드가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독도 문제라고 하면 그곳에 관심이 몰려 버리는 국민들의 심리를 이용한 정치 카드가 아닌가라는 점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더욱 걱정인 것이, 이런 카드를 쓰기 위해서 일본이 뒤에서 요구했을 비밀스러운 이득은 무엇일까라는 점이다......후...)

독도는 민족적인 자긍심을 떠나서, 영해의 문제 - 더욱 직접적으로는 배타적경제수역문제와 깊숙하게 연관이 되어 있는 사안이다. 독도를 잃는 것은 경제적으로 상당한 문제로 다가온다. 이런 실리적인 면을 먼저 생각해보자. 그리고 일본이 독도를 차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과 이런 발표를 함으로서 생기는 손해를 생각해보자.

본인 경제학이나 국제정치로는 어두워서 무엇이라고 말하기 힘들지만, 이건 왠지 일본의 무리수로 생각된다. 굳이 문제를 만들 이유도 없고, 기존의 조약으로도 이미 그럭저럭의 수역관련 이익을 얻었다고 생각되는데 말이다.



2) 현재 국제정세를 생각해보자.
올해는 정말 시끄럽다. 일단 큰 것들만 생각해보자. 베이징 올림픽이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 북한의 핵문제 타결이 가시적으로 보인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에너지 문제로 인한 경제위기가 오고 있고 더욱 심각해지리라 생각된다.

위의 3가지가 본인이 생각하는 동북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일이다. 그 중에서 에너지 문제의 경우 섬나라이자 수출위주로 경제가 돌아가는 일본에게는 절대절명의 문제이다. 북핵문제의 타결에서 중국의 역할이 커져가면서 일본은 어느 정도 실리로 가는듯하나 동북아에서의 영향력이 중국에 밀리는 것이 아닌가라는 위기감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베이징 올림픽으로 인하여 중국과 관련되지 않은 문제는 묻힐 수 있다.(실제로 조어도 문제에서 일본은 발 빠르게 사과를 했고 사건을 무마시켰다. 그런데 독도에 대해서는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위의 상황분석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입장에서 좋지 않아 보이는 것을 대충 예로 든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일본의 입장에서의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한 계획을 상상해본다는 취지로 생각해주셨으면 한다.


3) 최악의 시나리오는?
이 최악의 시나리오는 나의 입장에서의 최악의 시나리오이다. 다른 분은 다르게 생각하실 수도 있을듯 하다. 어디까지나 본인의 생각이고, 예측이고, "최악의" 시나리오일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주시고 들어주셨으면 한다.

일본이 현재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에너지 확보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수단으로서 중국과의 남사군도에 대한 원유확보를 공동진행할 것을 밝혔고, 동해에 매장되어있는 석유에 대한 확보를 위한 외교적인 제스쳐일 수도 있다. 물론 가장 최악의 경우는 독도에 대한 무력 점령 및 국제정치무대에서의 압력행사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4) 중국 반응
1- 조어도 문제를 거론하면서 한국을 지지한다는 파
2- "개가 개를 무네" 한국과 일본을 모두 반대하는 파
3- 중국이 다 먹어버리자는 파

일단 1번이 아직 조금은 더 많은 것 같지만, 2번도 만만치 않게 많다. 3번이야 한국에도 있는 미친넘들이니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충격?!인 것은 2번의 숫자가 많아졌다는 점이다. 중국에 오래 있으셨던 분들이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아실 것이다.

중국의 반일정서, 특히 중국 네티즌들의 반일정서는 한국과 비슷하거나 혹은 더 높은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행동과 말과의 격차는 빼놓고 일단 말로만으로 생각해보자) 그런데 "절대악"인 일본에 한국이 따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허허...

물론 이런 것을 단지 네티즌의 문제로 돌리면 안될 것이다. 국내 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좋은 것은 외부의 적을 두는 것이고, 중국 정부로서는 산적해 있는 국내문제에서 네티즌들(젊은층)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 일부러 일본을 공적으로 설정했었고, 이제는 한국까지 공적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에 휘둘리는 것도 중국 젊은이들도 문제가 있지만, 한국은 과연 그렇지 않은가 조심스럽게 생각해보아야될 것 같다. (본인 근거는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사태가 이명박 정부의 정치카드라고 생각된다. 이것 참...)




5) 중얼중얼
모르겠다. 이런 일들이 일어날때마다 세계 통일이 꿈인 본인으로서는 좌절하게 된다. 세계 통일의 일차적 목표이자 현실적인?! 목표로 동북아통합을 생각하는 본인으로서는 좌절하게 된다. 현재 동북아의 영토분쟁이 대체 몇개란 말인가? 열거해 보자.

중국-타이완(여긴 미국도 깊숙히 개입) , 독도(한국-일본), 조어도(중국-일본), 사할린?일본-러시아), 신장위구르 및 만주지역북부(러시아-중국), 조차도?(중국-한국). 이건 어디까지나 역사적문제는 아예 접어둔 현실적인 분쟁만을 이야기한 것이다.


한숨이 나온다. 한숨이...
정말 유럽처럼 서로가 서로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아이와 노인은 죽고, 여자는 서로 강간하고, 경제는 개박살나고, 산업은 황무지가 되는 것을 "몇 번" 경혐해 봐야 EU 같은 조직이라도 만들어 질 수 있겠는가? 정말 그렇겠는가?


역사를 배우는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인간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것 같다.




오늘부터 드디어 한국어교사과정이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이래저래 바쁘고, 인터넷 연결이 힘들었습니다. 특히 저번 주말은 이사를 하느라 사실상 인터넷 접속을 아예 못했군요. 이제 메가패스를 설치했으니 조금 안정을 찾은 뒤....아마 2~3일 뒤부터 정상적으로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연대 한국어교사과정은 나름 재미있었습니다. 아직은 초입 단계인지라 실전테크닉은 별로 나오지 않고 한국어학에 대한 제반적인 사항으로 이번주 내내 머리 아플듯 합니다. 전문적으로 어학쪽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중국어를 공부했던 경험이 있으니 그럭저럭 이해가 되긴 합니다. (물론 그럭저럭 이해할려고 뇌수가 폭팔해서 흘러나오는듯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한국어교사과정의 반배정입니다. 별것 없이 그냥 가나다 순으로 배치했습니다. 그런데 맴버의 대부분이 중국과 관련이 있더군요. 현재 중국에 있는 사람만 저까지 4명. 전체 인원이 14명인데 현지 인원만 4명이면 말을 다 한 것이지요. 그 외에 중문학과 2명, 중국 어학연수 경험자가 5명이던가요...음.....저희 반만 이런것인지 궁금하더군요.

하지만 더욱 재미있었던것은 나름 82년생으로 노땅에 속한다고 생각해온 제가 여기서는 막내입니다. 음하하하!!!!! 막내입니다!!! 음하하하!!!!!!



내일 인텔에서 주최하는 블로거 파티에 갈 예정입니다. 한국에 와서 이런저런 블로거 모임에 참석을 할 기회가 많은 것은 좋지만, 정작 블로그에 소홀해지고 있군요. 조만간 재미있는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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契丹建国与回鹘文化的关系
王小甫
《中国社会科学》2004年第4期。正式发表时曾删去5000字,此处发布为作者提供的原稿全文

前言

一、阿保机的即位问题和降生神话

二、木叶山地望与“青牛白马”说

三、燔柴、祭东及其他

四、关于述律氏

结语

 

언어학에 대한 정확한 고증보다는 그럴듯한 말인듯 하다. 본인 언어학를 배우지 못하여서 정확하게 말을 못하겠다. 언어학 공부해야될듯 하다.

해당 논문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몇몇 부분에서는 억지로 북방민족 전통의 민속을 마니교에 부합시키려 하고 있다. 하지만 마니교 자체가 북방민족 전통을 포함하고 있으니 이 부분은 정말 조심해야할 것이다.

해당 논문이 여러방면으로 "상상"한 것은 고려해볼만한 글이지만, 정확한 역사적인 고증을 거치지 않은 추측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전통 사학과 민족학 연구와 합쳐져서 상당히 재미있다. 하지만 이러한 추측성 연구를 하면 위험하다.

이 글이 아닌 투르크와 마니교를 이야기하면서, 문화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사람들이 외부의 종교를 받아들이면서 이루어지는 정치적인 격변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회골 사람들을 거란이 받아들이면서 변화하게 된 것 중에서 종교적인 면(마니교)을 말하는 이 글은 가치가 있을 것이다. 관명과 같은 다른 회골적인 요소를 이미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 해왔지만, 마니교가 아보기의 건국과 사망 그리고 그의 처(회골)과의 관계 모든 곳에 연관이 있다는 것은 이 글이 처음이다. 

이 글은 요사 연구의 정론은 아니다. 그러기도 힘들다. 하지만 강력한 상상력을 이 내용에서 발견하기를 바란다. 특히 왕샤오푸선생님과 롱신지앙 선생님 방법의 차이이다. 롱신지앙 선생님은 정확한 증거가 없으면 논문으로 써내지 않는데 비하여 왕샤오푸 선생님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내용을 적는다. 후자의 방법은 직접적인 정론은 힘들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사학에서는 이처럼 다른 방법이 있다. 특히 민족사에서는 후자와 같은 상상력의 방법이 상당히 유행하고 있다. 이런 방법은 매우 위험하지만, 정확한 학문의 기초 아래서 이렇게 상상력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글의 문제점은 일본과 서양의 마니교와 관련된 내용을 많이 연구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건 이 글과 상관없는 이야기이지만....王小甫 선생님은 갑자기 터키로 날라버리신 罗新선생님(너무하세요..ㅠㅠ) 대신에 나의 본과졸업논문 지도교수님이셨는데(그뿐만이 아니라 석사입학시험 면접관이시기도... 이래저래 인연이 있으신데...)....원한은 잊지 않겠습니다.-_-+ 아무리 본과졸업논문이 대충 휘갈겨 쓰는 것이라고 해도 저 나름대로는 죽어라 쓴건데 그걸 대충 보고 통과시켜주신 덕분에 답변때 괴로웠습니다. 차라리 먼저 때려주시지 왜 그러셨나요? ㅠㅠ 흐흑....

 

 

前言

契丹是我国的一个古代民族,曾经建立辽朝(916-1125)。最迟在北魏初年,契丹之名已见于文献记载[1]。最早为契丹立传的是《魏书》,传云:“契丹国,在库莫奚东,异种同类,俱窜于松漠之间。登国中,国军大破之,遂逃迸,与库莫奚分背。经数十年,稍滋蔓,有部落,于和龙之北数百里,多为寇盗。”[2]北魏破奚、契丹事,据《魏书·库莫奚传》在太祖拓跋珪登国三年(388)[3]。当时所谓契丹国,只是史书记载不同部族或地域的一种说法,并非真的建立起了严格意义上的国家体制。契丹建立国家已是其见于史料记载五百多年以后,即公元916年耶律阿保机“上尊号曰大圣大明天皇帝,后曰应天大明地皇后,大赦,建元神册”[4],废除契丹可汗的选举制,确立皇权世袭制,正式建立起专制主义的国家。
契丹族活跃于历史舞台五百余年才正式建立国家,这在古代北方民族史上是一个比较特殊的现象。我国古代北方活跃过许多民族,少数得以建国者大都是乍起乍兴,如匈奴、突厥、女真等;更多的是未能建国,作为部族群体活动一段时期便从历史上消失,并入或融合进其他民族或国家中去了。契丹作为部族群体活动了五百余年而没有泯灭,其间屡仆屡起,几经辗转演变,最后竟然建立起了自己的国家,这一现象堪称奇迹,值得研究。有关契丹长期发展的历史,前人做过许多工作,其中不乏有真知灼见的学术成果[5]。社会发展史理论长期为我国学界奉为圭臬,因而很多学者都探讨过契丹社会发展的内部原因[6]。至于契丹勃兴的外部条件,日本学者松井等认为,契丹长期受到周围强大民族的压力,直到晚唐时期,由于草原上的回鹘汗国崩溃,唐朝也因藩乱民变而精疲力尽,这才给了契丹崛兴的机会[7]。然而,除了这些客观原因和条件之外,历史发展主观力量的变化也是非常重要的,有时甚至是起决定性的革命作用的因素。换言之,耶律阿保机凭什么能够超越前人,变革传统,化家为国,从而成为契丹人的民族英雄,这些也有必要作些研究。从这个视角观察,我发现在阿保机建立国家过程和契丹国家生活中都有回鹘文化因素发挥作用。
关于回鹘族人在契丹国家和社会生活中的地位和作用,前人已经作过很好的系统性研究[8]。可是,以光明崇拜为特征的回鹘摩尼教文化[9]对契丹社会发展的影响,迄今还很少人提及。因此,本人不揣谫陋,将管窥蠡测之见撰成此篇,权作引玉之砖,请专家批评赐正。

一、阿保机的即位问题和降生神话

有关耶律阿保机即位称帝的原因,史料中记载了两种不同的说法:一种认为阿保机即位是受契丹八部的推戴,因久不受代被迫退位,遂用暴力及诈术统一契丹而称帝[10];另一种则认为阿保机得位于前任遥辇氏痕德堇可汗的遗命禅让[11]。前辈学者杨志玖先生很早以前就研究了这两种说法,认为八部和推戴都不可信,迭剌部的耶律阿保机之所以能得遥辇氏禅让并进而称帝,主要是迭剌部尤其是耶律氏在契丹内部长期发展壮大的结果[12],所谓水到渠成、实至名归。杨先生的考证深入细致,令人信服。我想说的是,无论是以什么名义,权力转手异姓都是对旧有传统的破坏,建立帝制世袭更是对氏族社会的革命。鼎革之际,阿保机只有取得“正统”才能稳定社会、安抚人心,孤立并消灭反对者。在这方面,“君权神授”是传统文化中能够提供的有力武器。史料中有关阿保机受遗命得禅让的记载正好反映了这种情况:
《辽史·太祖纪》上:

(唐天祐三年,公元906年)十二月,痕德堇可汗殂,群臣奉遗命请立太祖。曷鲁等劝进。太祖三让,从之。

同书《耶律曷鲁传》:

会遥辇痕德堇可汗殁,群臣奉遗命请立太祖。太祖辞曰:“昔吾祖夷离堇雅里尝以不当立而辞,今若等复为是言,何欤?”曷鲁进曰:“曩吾祖之辞,遗命弗及,符瑞未见,第为国人所推戴耳。今先君言犹在耳,天人所与,若合符契。天不可逆,人不可拂,而君命不可违也。”太祖曰:“遗命固然,汝焉知天道?” 曷鲁曰:“闻于越之生也,神光属天,异香盈幄,梦受神诲,龙锡金佩。天道无私,必应有德。我国削弱,齮龁于邻部日久,以故生圣人以兴起之。可汗知天意,故有是命。且遥辇九营棋布,非无可立者;小大臣民属心于越,天也。昔者于越伯父释鲁尝曰:‘吾犹蛇,儿犹龙也。’天时人事,几不可失。”太祖犹未许。是夜,独召曷鲁责曰:“众以遗命迫我。汝不明吾心,而亦俯随耶?”曷鲁曰:“在昔夷离堇雅里虽推戴者众,辞之,而立阻午为可汗。相传十余世,君臣之分乱,纪纲之统隳。委质他国,若缀斿然。羽檄蜂午,民疲奔命。兴王之运,实在今日。应天顺人,以答顾命,不可失也。”太祖乃许。明日,即皇帝位,命曷鲁总军国事。

可见,要实现异姓革命,光有遗命、推戴还不够,还要有符瑞,以昭示“天道”,绥辑人心。耶律曷鲁当众宣扬符瑞彰显“天道”以劝进,因而成了阿保机称帝建国的第一功臣。《辽史》的编纂者把曷鲁本传列在紧接后妃、宗室之后的第一位,确实是有道理的。

1) 몽고밀사의 쿠르치가 생각이 나는군.

那么,曷鲁宣扬的这些符瑞是从哪里来的呢?这个能够产生圣人、超越世俗传统的“天道”究竟是什么呢?我研究之后,以为应该就是崇拜光明的摩尼教。让我们先来看一看耶律阿保机的降生神话,《辽史》里除了上述《耶律曷鲁传》的说法外,还有《太祖纪》的记载:

唐咸通十三年生。初,母梦日堕怀中,有娠。及生,室有神光异香,体如三岁儿,即能匍匐。祖母简献皇后异之,鞠为己子。常匿于别幕,涂其面,不令他人见。三月能行;晬而能言,知未然事。自谓左右若有神人翼卫。

我发现,有关阿保机降生的这些神话应该大都仿自摩尼降生和受启神话。
敦煌出土《摩尼光佛教法仪略》第一章《託化国主名号宗教》略云:“当欲出世,二耀(即日月。——引者)降灵,分光三体:亲受明尊清静教命,然后化诞,故云光明使者;精真洞惠,坚疑克辩,故曰具智法王;虚应灵圣,觉观究竟,故号摩尼光佛。光明所以彻内外,大慧所以极人天,无上所以位高尊。则老君託孕,太阳流其晶;释迦受胎,日轮叶其象。资灵本本,三圣亦何殊?摩尼光佛诞苏邻国跋帝王宫,金萨健种夫人满艳之所生也。自胸前化诞,卓世殊伦,神验九徵,灵瑞五应者,生非凡也。《观佛三昧海经》云:‘摩尼光佛出世时,常施光明,以做佛事。’《老子化佛经》云:‘我乘自然光明道气,飞入西挪玉界苏邻国中,示为太子。舍家入道,号为摩尼。’”[13]据说“摩尼在12岁时,便得到神的第一次启示,第二次则是在其24岁时。”[14]当摩尼开始传教时,“有许多人是抵制摩尼的,而有些人则是倾向于他,承认他是一位真正的先知。他们说道:‘也许有一个声音秘密地对他讲话吧?他所说的就是这声音对他的启示吧?……有一个面容出现在他梦里吗?他所讲的就是他所看见的吗?’(《科隆摩尼古卷》86,10-16)”[15]不难看出,阿保机降生神话中的主要情节,如“母梦日堕怀”(=“当欲出世,二耀降灵”、“自胸前化诞”等),“神光属天”(=“光明使者”、“光明所以彻内外”、“出世时常施光明”等),“晬而能言、知未然事”(=“精真洞惠,坚疑克辩”、“虚应灵圣,觉观究竟”),“梦受神诲”等都能在摩尼降生和受启神话中找到原本。

기본적으로 동의를 하지만, 이런 사실들은 다른 곳에서도 가져다 붙일 수 있지 않나?

阿保机降生神话中的另外几个情节也可以在摩尼教教义中找到依据。如:
“异香盈幄”,这应当是喻指摩尼教中拱绕明尊的五大神中的第一位——清静气[16]。五大神是指气、风、明、水、火这五种明亮的宇宙分子,都是摩尼教崇拜的对象。敦煌出土摩尼教《下部赞·叹明界文》有这样的赞颂:“宝树根茎及枝叶,上下通身并甘露,香气芬芳充世界,宝花相映常红素。彼国园苑广严净,奇特香气周园圃;瓦砾荆棘诸秽草,若言有者无是处”;“香气氛氲周世界,纯一无杂性命海,弥纶充遍无障碍,圣众游中香妙最。”[17]
“龙锡金佩”,当是喻指五大神中的第二位——妙风。风和气的区别在于,一个能听到声音,另一个能闻到气味。摩尼教《下部赞·叹明界文》里这样赞颂道:“妙风飘荡皆可悦,和畅周回遍十方,轻拂宝楼及宝阁,宝铃宝铎恒震响”;“讃呗妙音皆可悦,其声清美皆安静,上下齐同震妙响,周边伽蓝元不宁。其音演畅甚殊特,遍互歌杨述妙德。诸圣快乐皆究竟,常住恒安无疲极。”[18]
“左右若有神人”,这是摩尼教中的光明使者——拯救之神的形象之一。据研究,在摩尼教里,“耶稣、惠明使和大智甲构成了常被祈祷的三位一体”[19],而耶稣只是主神第三使的一个分身[20],惠明使则经常显示为女身[21],大智甲又叫瓦孟(Vahman),是所谓灵魂的引导者[22]。
吐鲁番高昌故城出土过一幅九世纪左右的摩尼教经文插图,“图左边的黑行字却包含有中古波斯语pdkr’i w?man一词,意为‘瓦孟图像’。从中亚的赞美诗中,我们得知瓦孟和摩尼教会有着一种密切而特殊的联系,他实际是代表了摩尼教会,是摩尼教主的化身。此图描绘全副武装的国王跪在高僧面前,我们把这位高僧设想为最高级的僧侣(或至少是一位较高级的主教),肯定是不会错的。国王和高僧互握右手,这在复杂的摩尼教象征手法中,也许和拯救的意义有关”;“停放在主教身上的灵魂是瓦孟(Vahman),即人格化了的教会精神,……作为灵魂的引导者,他把灵魂引到审判者面前,而审判者便是神本身。”[23]这幅“瓦孟图像”或者如研究者所定名的《国王图像》对我们理解阿保机降生神话中的“左右若有神人”这一情节很有帮助。因为,“在经常提及的摩尼教原始神话中,即使各段文字的意思不同,也能用同一幅图画来解喻”[24];而“审判之神(汉文摩尼教经谓‘平等王’。——译者)也可解释为个人自己的善行。这就显示了东亚摩尼教的特点。末日的审判和永恒的生活现在已经来临,已在进行。末日的事情已被部分地现世化、心理化、内在化了。国王的采用圣教就标志着他现在已经受到审判并被释罪了。”[25]显然,把阿保机神话为三位一体的拯救之神是因为此神在回鹘摩尼教中有拯救国王的事迹[26],借此形象可以暗示阿保机是得到拯救的国王。换言之,有此神迹就等于宣布阿保机是与生俱来的当然国王。
综上所述,阿保机降生神话的几乎所有情节都能在摩尼教神话和教义中得到印证。其实还不仅如此,在阿保机的一些重要举措乃至契丹习俗中我们也可以发现受摩尼教影响的痕迹。
我们已经看到,耶律曷鲁在当众讲完阿保机降生神话后接着就说:“天道无私,必应有德。我国削弱,齮龁于邻部日久,以故生圣人以兴起之。”在前述降生神话的背景下,这里所谓“圣人”很有可能是喻指摩尼教五大神中的第三位——明力。摩尼教《下部赞·叹明界文》:“金刚宝地极微妙,无量妙色相暉曜,诸圣安居无障碍,永离销散无忧恼。圣众严容甚奇特,光明相照体暉凝,将此百千日月明,彼圣毛端光尚胜。内外光明无暗影,妙体常暉千万种,游行胜誉金刚地,彼则无有毫厘重。”[27]由此可见,摩尼教的诸神、使者也都经常称作为圣[28]。试检《辽史》,阿保机也在多种场合被称为“圣”。如神册元年(916)他所上尊号为“大圣大明天皇帝”,而其受册之地称作“册圣林”[29]。《逆臣耶律辖底传》:“太祖将即位,让辖底,辖底曰:‘皇帝圣人,由天所命,臣岂敢当!’”[30]天赞三年(924)六月耶律阿保机当众预言自己的归宿,其中也有“圣主明王,万载一遇”,“良筹圣会,自有契于天人”[31]等语。还有阿保机的谥号,最初为升天皇帝,统和二十六年(1008)进谥圣元皇帝,重熙二十一年(1055)又加谥大圣大明神烈天皇帝[32]。
值得注意的是,阿保机称号里与“大圣”一道的还有“大明”,甚至“神烈”这样的字眼;而阿保机的回鹘皇后述律后的尊号则直接叫做“应天大明地皇后”,这就更增强了这些名号的摩尼教光明崇拜色彩。光明崇拜是摩尼教信仰的中心,其最高神称作“明尊”或“大明尊”,其理想世界称作“明界”或“光明界”、“光明王国”、“光明乐园”。摩尼教《下部赞·叹无上明尊偈文》:“我等常活明尊父,隐秘恒安大明处。高于人天自在者,不动国中俨然住。为自性故开惠门,令觉生缘涅磐路。巧示我等性命海,上方下界明暗祖”;“魔族永囚于暗狱,佛家踊跃归明界,各复本身妙庄严,串戴衣冠得常乐。”[33]同经《叹明界文》:“诸佛明使于中住,即是明尊安置处。光明普遍皆清净,常乐寂灭无动俎;彼受欢乐无烦恼,若言有苦无是处”;“无上光明世界中,圣众于中恒止住。彼诸世界及国土,金刚宝地彻下晖,无始时来今究竟,若言震动无是处”;“圣众齐心恒欢喜,演微妙音无停止,赞礼称杨无疲猒,普叹明尊善业威。”[34]
在这种情况下,可以认为,阿保机受禅即位第二年所建的“明王楼”[35],也有可能就是一个宫内的摩尼教礼拜场所。有意思的是,阿保机即位后的首次内乱就与这座明王楼有关。原来,阿保机虽然引用了相对先进的回鹘摩尼教文化从而得以名正言顺地取代遥辇氏,但契丹社会本身却还处在向文明社会发育的上升阶段,阿保机想以神化自己的办法改可汗世选为帝制世袭,损害了贵族传统的既得利益,于是首先引发了诸弟剌葛等人之乱。这场叛乱三起三伏,历时两年,其中有这样一个情节,《辽史·太祖纪》上略云:

剌葛引其众至乙室堇淀,具天子旗鼓,将自立,皇太后阴遣人谕令避去。上以兵追之。剌葛遣其党寅底石引兵径趋行宫,焚其辎重、庐帐,纵兵大杀。皇后急遣蜀古鲁救之,仅得天子旗鼓而已。其党神速姑复劫西楼,焚明王楼。上至土河,北追剌葛,命北宰相迪里古为先锋进击之。剌葛奔溃,遗其所夺神帐于路,上见而拜奠之。

前辈学者研究这段历史,曾经指出:“可见神帐在契丹部众中,殆有相当的信仰。”[36]神帐究属何物不得而知,但从其得而复失的过程可以看出,与之相关的明王楼应该也是与信仰有关的建筑。剌葛同党焚明王楼之举表明,当时的文化之争确实与权位之争有着非常密切的联系。过了一年,阿保机就在明王楼的地基上建起了开皇殿[37],又过了一年多,他就上尊号、建元神册,正式建立起了世袭帝制国家。
本节最后还是想赘言一句,诚如前人所注意到的,“梦日入怀”或“感日而孕”是中国北方和东北民族常见的英雄降诞神话[38]。我的研究至少表明,契丹人如果也有过这种传统的神话,那到阿保机时代也已经与回鹘摩尼文化实现了完全的整合,与其他民族的类似神话不可同日而语了。

二、木叶山地望与“青牛白马”说

除了阿保机的降生神话外,一些重要的契丹习俗也显示受到了回鹘摩尼教文化的影响,其中之一就是木叶山祭祀。下面我们就来分析、研究一下有关记载。《辽史·地理志》一,上京道“永州”条略云:

永州,承天皇太后所建。太祖于此置南楼。东潢河,南土河,二水合流,故号永州。有木叶山,上建契丹始祖庙,奇首可汗在南庙,可敦在北庙,绘塑二圣并八子神像。相传有神人乘白马,自马盂山浮土河而东,有天女驾青牛车由平地松林泛潢河而下。至木叶山,二水合流,相遇为配偶,生八子。其后族属渐盛,分为八部。每行军及春秋时祭,必用白马青牛,示不忘本云。

这是见于文献有关木叶山祭祀以及所谓契丹始祖的最重要的一条材料。然而,最近的研究表明,由于多种原因,这条史料中提到的木叶山地望、奇首可汗音义等迄今未有的解,白马神人与青牛天女相遇配偶的故事也还是迷雾重重[39]。其实早就有人认为,“青牛白马”神话不能考实,不过是阿保机取代遥辇氏即位后,“畏惧其他部人不服,遂捏造‘神人’、‘天女’的故事,以示迭剌与回纥人的合作,完全是顺天应人,换句话说,这完全是上帝的安排。”[40]近年又有人提出“契丹族源传说借自回鹘”[41]。这些看法未必尽皆妥当,却为解开谜团提供了有益的视角。
我无意于否定契丹民族有自己的始祖传说和图腾崇拜,我只是想说,《辽史·地理志》记载的上述传说并非就是原本,而很可能是在阿保机时代与回鹘摩尼教文化进行了整合的结果。
首先,我注意到,木叶山并非契丹始祖奇首可汗的降诞之地,神人天女所生也非契丹始祖而是繁衍八子。《辽史·地理志》一,上京道“龙化州”条略云:

龙化州,本汉北安平县地。契丹始祖奇首可汗居此,称龙庭。太祖于此建东楼。天祐元年(904),增修东城,制度颇壮丽。十三年,太祖于城东金铃冈受尊号曰大圣大明天皇帝,建元神册。

而《太祖纪》上记载,耶律阿保机在称帝建国前三年(913)曾“登都庵(菴)山,抚其先奇首可汗遗迹,徘徊顾瞻而兴叹焉。”[42]可见,龙化州与都菴山大致就是同一个地方[43]。所以,《太祖纪》赞曰:“奇首生都菴山,徙潢河之滨。”[44]显然,真正的契丹始祖的功业应该是在其居地龙庭建立的,将其祠祭徙置潢河之滨永州的木叶山只是顺应阿保机称帝建国的需要。因此,木叶山名为始祖庙实际当另有所祭,“青牛白马”也非关奇首可汗而另有所指。
其次,我发现,与木叶山有关的重要名号都反映了同一地理特征。《辽史·国语解》:“永州,其地居潢河、土河二水之间,故名永州,盖以字从二、从水也。”[45]尽管如上引《辽史·地理志》所说,永州为辽圣宗时承天太后所建,得名稍晚,但当地的地理特征应该是早就形成了的[46]。《地理志》说“太祖于此置南楼”,但阿保机营建四楼之说受到了有关专家的强烈质疑[47],故且勿庸置论。除此而外,我认为,所谓契丹始祖的“奇首”一名,也可以从当地的地理特征加以理解。“奇首”一语在契丹语中究为何义,迄今未有的解。但换个角度看,“奇首”可以是回鹘语eki sub/ekki süw[48]的音译,其意正是二水或两河。回鹘语词的这种读法正好可以由摩尼教的传播途径得到解释,众所周知,在回鹘部落中传播摩尼教的主要是中亚的商业民族粟特人,而词首元音脱落正是粟特语的特点。最著名的例子就是祆教大神Ahura-Mazda,在粟特语里变成了Xurmazta,再经他们传到草原上,就成了至今仍留在蒙古及东北民族传统信仰中的霍尔穆斯达(Hormusda)天神[49]。诚如是,所谓契丹始祖的“奇首可汗”一名,应该也是在徙置潢河之滨以后得到的,换言之,也是阿保机时代据回鹘摩尼教义命名的。

중국에서는 물은 곧 강이지만, 북방에서는 두가지는 분리가 되는 개념이다.

另外一个有关的地名是所谓耶律氏的郡望——漆水。刘浦江先生就其地望作了很多考证工作,尽管未能断案,却提出了有益的推测:“被契丹人视为耶律氏郡望的‘漆水’,应该到契丹人早期的活动区域内去寻找。我觉得,漆水郡的得名之由,可能类似于女真完颜氏的郡望金源郡,金朝并没有一个称为金源郡的地方行政建制,这个郡望源于女真部的发祥之地按出虎水,漆水也应该是这样的一条河。如果做一个大胆的猜测,漆水也许是潢河或土河的别名,或者是它们的某一支流?”[50]可以说,刘先生的猜测近乎圆满成功,只要把“漆水”作为回鹘语词的译音,谜底即可解开。我认为,“漆水”与“奇首”一样,都是回鹘语eki sub/ekki süw一词的音译,只是用于不同场合选择了不同的译音用字而已。其义也是二水或两河,其地就在始祖庙所在的木叶山一带,即后来的永州。有了阿保机时代的一系列运作,这里作为耶律氏的郡望可说是名正言顺。
最后,木叶山一名本身也可以从上述同一视角加以考察。《新五代史·四夷附录契丹传》:“其居曰枭罗个没里。没里者,河也。”[51]我认为,“木叶”一语也有可能是契丹语“河水”一词的音译。我们可以比较一下这两种译音:没里,《广韵》音可拟测为mu?t l??;木叶,《广韵》音可拟测为muk j??p[52]。贾敬颜说:“没里,自是蒙古语的mure[n]”[53]。两种译音与原词读音相比较,唯叶字余母读音稍有距离,但也并非不可转通。例如,郭锡良《汉字古音手册》就把上古音“馀母改称余母,拟音依王力先生新近的意见改为?,是与?部位相当的边音。”[54] ?即日母。汉语上古声母舌头音端(t)、透(t’)、余(?)、定(d)、泥(n)、来(l)同类邻纽,泥(n)、日(?)则为准双声,都有可能发生音转[55]。虽然这是汉语上古音的情况,但在不同民族语音对译的时候,发生这种情况也是可能的。例如,蒙古语的“河”这个词,在蒙元早期的文献中就曾被音译作“木辇”[56],元初编写的《至元译语·地理门》中则音译作“木连”[57]。因此,以“木叶”音译蒙古语从而契丹语的muren“河”也是可以的。契丹语一般被认为是一种古蒙古语[58],而蒙古语“可数名词不带复数附加成分时数的范畴不确定,它既可以表示单数,也可以表示复数。”[59]因而,“木叶”也可以是契丹语两河、众水之意,与奇首、漆水这些回鹘语音译词意义全同,也与汉文永州的寓意一致。

由此可见,木叶山一名本身就指明了它的地望,就在前引《辽史·地理志》所明确记载的“东潢河,南土河,二水合流”之处,这是无可怀疑的。降至辽兴宗时代,这里甚至直接有了所谓“木叶山辽河神”,《辽史·礼志》一说:“兴宗先有事于菩萨堂及木叶山辽河神,然后行拜山仪”。问题在于,这里实际上并没有山[60],所以我以为这个“山”字应当另求别解。我注意到,《辽史·礼志》首列“祭山仪”,就是所谓木叶山祭祀,然而其中根本看不到山的影子。据《礼志》,祭山仪的主要活动有四项:祭奠天神、地祇牌位,绕行通过神门树,祭东(敬日崇东,详见下文),再奠于天神、地祇牌位[61]。整个祭祀活动以天神、地祇为起止,可以肯定完全是一次祭天活动,根本与山无关,也不是在山上进行的。考虑到传统礼典都是以吉礼祭天开始的这一特点[62],我也想作一大胆推测:所谓“祭山仪”就是契丹特色的祭天仪,而且所谓“山”就是汉语“天”字的音讹;木叶山就是木叶天,即在两河口祭天;再由其祭祀内容转指祭祀地点,这种做法和早先史料所见把祭祀胡天神的地方称作胡天[63]是一样的。契丹国初文物寡少,很多制度称谓都借自汉语而音讹,如敞稳/常衮=将军,详稳=相公,令稳=令公,敞史=长史,大石=太师,等等[64]。我想,祭山仪的名称也是这样产生的,木叶山更是以讹传讹。我用数据库软件遍检《辽史》,发现与木叶山有关的文字没有一处描写过它的山势,可见它根本就不是一座山,把它说成是山不过是后世文人由字面产生的联想而已。
我进一步怀疑木叶山的所谓祭山仪其实是一种整合了契丹祭天旧俗的摩尼教宗教仪式。如仪式中要“偶植二树,以为神门”[65],而“摩尼亦常以两种树来表达二宗的概念,一曰光明活树,二曰黑暗死树。……根据(吐鲁番)柏孜克里克发现的一幅摩尼教壁画,我们得知摩尼所说的生命树的形状,其花果繁盛,有三根树干,象征着光明王国所占的三个方向(即北方、东方和西方,详见下。——引者)。”[66]还有,从《辽史·礼志》的记载可以看出,祭山仪始终贯穿着敬日崇东的强烈意识,这很可能是摩尼教有关灵魂最终经由日宫回归光明天国教义的反映。那么所祭天神很可能就如“木叶山”这一名称所指示的——水之天神,喻指摩尼教五大神中的第四位——妙水,这里的地理特征最适合于显示对水的崇拜。摩尼教《下部赞·叹明界文》:“百川河海及泉源,命水湛然皆香妙,若入不漂及不溺,亦无暴水来损耗”;“彼界宝山亿万种,香烟涌出百万般,内外光明身清净,甘露充盈无边畔。泉源清流无间断,真甘露味无浑苦;圣众充饱无欠少,若有渴乏无是处。”[67]这位尊神也就是阿保机费尽心机迁来此处加以神话的始祖——奇首可汗。当然,阿保机神话始祖,根本在于神话自身。
天地同祭可能是契丹旧俗,但天神、地祇并列也可以在摩尼教神话里找到比附的依据。如前所述,在摩尼教里,耶稣、惠明使和大智甲构成了常被祈祷的三位一体,但耶稣只是主神第三使的一个分身,惠明使则经常显示为女身,大智甲即瓦孟(Vahman)既是灵魂的引导者,又可喻指得到拯救的国王。这一神话既可解说祭山仪中天神、地祇一神二相的问题,也可解说始祖传说中奇首可汗与可敦异性配偶的问题,更妙的是,还可以与阿保机降生神话(“左右若有神人”)联系起来,从神统和法统两个方面进一步强化阿保机的形象和地位。
理解所谓契丹始祖神话“青牛白马”说的关键在于,被阿保机神话了的始祖奇首可汗与所谓白马神人与青牛天女繁衍八子属于两个完全不同的层次范畴,阿保机的始祖是天神,而象征契丹族的“八部”[68]始祖即繁衍八子是凡人。我认为“青牛白马”并不是天神地祇,主要理由是:
1、据宋人王易《燕北录》记载,有“赤娘子者,番语谓之‘掠胡奥’,俗传是阴山七骑所得黄河中流下一妇人,因生其族类。其形木雕彩装,常时于木叶山庙内安置,每一新戎主行柴册礼时,于庙内取来做仪注,第三日送归本庙。”[69]诚如刘浦江先生所断言:“这个所谓的‘赤娘子’,显然就是青牛白马传说中驾青牛车泛潢河而下的天女。”[70]而同时木叶山庙内还有奇首可汗、可敦形象,可见所谓青牛天女并非地祇。查契丹“柴册仪”仪注中有“又置再生母后搜索之室”,而且开始也是仪式上唯一的偶像[71],赤娘子应即指此,寓意受册可汗在人间再生。
2、《辽史·太祖淳钦皇后述律氏传》(注意:这位就是耶律阿保机的回鹘皇后,详见下):“后简重果断,有雄略。尝至辽、土二河之会,有女子乘青牛车,仓卒避路,忽不见。未几,童谣曰:‘青牛妪,曾避路。’盖谚谓地祇为青牛妪云。太祖即位,群臣上尊号曰地皇后。”显然,童谣是一个谶语,暗示述律氏即始祖传说中的可敦、祭山仪中的地祇,连青牛妪(=赤娘子)见了她都要让路,因而做地皇后是天道使然。倘若青牛妪本身就是地祇,那她为什么要给述律氏让路,述律氏又算是那路尊神?可见,说“谚谓地祇为青牛妪”完全是后来的修史者不明究里,强作解人,节外生枝,徒然添乱。顺便说说,据研究,皇后在契丹语里称“忒里蹇”,尊称曰“耨斡么”,称“可敦”是突厥及回鹘的称呼[72]。这适为所谓奇首可汗、可敦名号产生于耶律阿保机娶回鹘人(摩尼教徒)为妻时代的说法添一佐证。
3、最不可理解的是契丹祭祀经常杀青牛白马作牺牲[73],如前引《辽史·地理志》所谓“每行军及春秋时祭,必用白马青牛,示不忘本”。台湾学者王民信早就指出:“杀青牛白马以祭祀,是一件不合常理的情形。青牛白马既有功于契丹氏族的创建,何以一定要杀之才能‘示不忘本’?按突厥民族自以‘出诸狼种’,故‘旗纛之上施金狼头……盖本狼生,志不忘本’。是突厥并未杀狼以祭祀。又满洲先世范察为鹊所救,亦未见满洲人射杀鹊以祭天,示不忘本。今契丹人刑有功于族人的青牛白马以祭天,实在是违背常理,更何况《通典》及两《唐书》均未载此故事。”[74]尽管古代北方及东北民族不乏以白马告祭的例子[75],但绝不因为它是象征始祖的图腾,更非因其代表天神。牺牲的本意是取悦祭祀对象,岂有专以祭祀对象的代表或象征作为牺牲之理?
总之,这种介于神、人之间,既与种落起源有关又须以牺牲献祭的方式予以否定的现象非同一般。由于与白马同时牺牲的还有青牛,因此有必要考虑整合了传统的其他文化因素。冯家升先生早年曾撰《契丹祀天以青牛白马之解释》,提出:“所谓一男子、一妇人,非若犹太之亚当、夏娃乎?”[76]可惜冯先生没有展开论述这一观点。其实,如果考虑到回鹘摩尼教文化的因素,将白马神人和青牛天女比作亚当、夏娃是最合适的一种解释方式。
据研究,摩尼教认为:为了阻止光明分子得到拯救,黑暗魔王造出一对恶魔来吞食其他动物,以收集其体内的光明分子加以禁锢;这对恶魔成为配偶,却按明使的形象生下一对肉身,这就是人类的始祖亚当和夏娃;亚当和夏娃肉体虽是黑暗物质构成,灵魂却是由光明分子组成的。摩尼认为,人类的身体就是一个小世界,里面既有光明分子,也有黑暗物质;黑暗物质为首的便是贪欲,它促使人类的生殖,以确保光明分子世代被人体禁锢不得拯救。无论如何,人类的繁殖过程便由亚当、夏娃开始了,于是使光明分子持续地被禁锢在人体之内。黑暗魔王的这一做法使拯救恢复光明的工作更为复杂困难,大明尊不得不派更多的天神明使来做拯救工作。由于人类是暗魔的子孙,而这些子孙的灵魂却是由光明分子组成的,这就形成了拯救人类灵魂的程序问题:拯救之神先将人的灵魂运到月宫去锻炼,锻炼纯净的灵魂再转到日宫去,最后回归光明王国。[77]
很明显,在这样的教义中,青牛白马作为种落始祖的象征用于向天神献祭,祈愿原罪得到解脱、灵魂得到拯救等等,真是再合适不过了。如果考虑到所诉求的拯救之神实际上是喻指阿保机的祖先从而阿保机本人,对始祖传说的这种宗教改造就更有意义:传说的父子关系变成了宗教的神人关系,世俗的统治问题变成了宗教的拯救问题。这种摩尼教教义比起那种以青牛白马为天神地祇,可汗和所有的契丹人一样都是神族后裔的说法,正在谋求即位和称帝的革命家耶律阿保机会选择哪一种呢?我想答案是不言而喻的。
本节最后想再为“青牛白马=亚当夏娃”说提供一条证据。前引宋人王易《燕北录》提到:“赤娘子者,番语谓之‘掠胡奥’,俗传是阴山七骑所得黄河中流下一妇人,因生其族类。”赤娘子已经刘浦江先生考证为青牛天女,此不赘述。“掠胡奥”自是传说始祖的名称,我怀疑起首的“掠”字可能是“椋”(读 liang)字形近致误, 椋胡奥即是当时对Adam Hawwah亚当夏娃的音译。如前所述,摩尼教是经中亚的粟特人传给回鹘人的,词首元音脱落是粟特语的特点;古代汉语d、l同类邻纽(发音部位相同而方法略有差异),可能发生音转,更何况是音译外来词,所以[A]dam Hawwah就被听成椋胡奥而被记了下来。因此,椋胡奥很可能是中国古代对西方传说人类始祖亚当夏娃的最早译名之一。这也从一个侧面证明文献记载的契丹始祖“青牛白马”说已经在阿保机时代与回鹘摩尼教实现了整合。

三、燔柴、祭东及其他

我们看到,除了阿保机降生神话、契丹始祖神话之外,还有一些契丹的重要习俗如祭山仪——木叶山祭祀也受到了回鹘摩尼教文化的影响。因此,与这些习俗相关的一些礼仪、活动应该也会受到同样的影响,本节拟就此进一步加以探讨。
契丹有所谓“柴册仪”,《辽史·国语解》:“柴册,礼名。积薪为坛,受群臣玉册。礼毕,燔柴,祀天。阻午可汗制也。”这是相当于汉仪中“皇帝受册仪” 的契丹旧俗,看得出来,名为“阻午可汗制”,也已经与汉仪有所整合,故《礼志》注文:“又有《上契丹册仪》,以阻午可汗柴册礼合唐礼杂就之。”[78]我认为,这里的“燔柴”活动值得注意。燔柴意在告天,其意或可当唐礼之“燔燎”[79]。问题是,契丹燔柴经常单独进行,非如汉仪唐礼仅为仪注之一,如台湾学者王民信所揭示:“太祖六年,因诸弟迭剌、寅底石、安端等反,太祖引军南趋十七泺,燔柴;次年乱平,亦燔柴;太宗会同三年,率百僚谒太祖行宫,第三天即燔柴,礼毕,再祠于神帐。(这些)燔柴时因无‘上尊号’与‘即皇帝位’,与柴册礼的‘燔柴,祀天’似乎拉不上关系,不过,此一仪式必定很重要(则)属实(疑‘燔柴’时似应有祀天的仪式,纯粹是欢乐的庆祝活动)。”[80]所以,仅就燔柴这一行为而言,显然是一种对火的崇拜。
据《辽史·礼志》记载,契丹涉及拜火的礼仪均属吉仪,如爇节仪,“及帝崩,所置人户、府库、钱粟,穹庐中置小毡殿,帝及后妃皆铸金像纳焉。节辰、忌日、朔望,皆致祭于穹庐之前。又筑土为台,高丈余,置大盘于上,祭酒食撒于其中,焚之,国俗谓之爇节。”[81]据研究,爇节即俗所谓“烧饭”,其事辽、金、元三代相承[82]。显然,爇节或者说烧饭表现的也是一种对火的崇拜,它很可能源于更早的事火习俗,经过演变已经发展成隆重的礼仪。可以肯定,对火的礼敬并不表示对死人的崇拜,而主要是与灵魂升华的祈愿有关。有研究表明,在一些北亚民族的传统观念中,火神与死神是明显对立的,火神是生命的象征和代表者,因而是死神的对头[83]。
契丹也有火神,“岁除仪:初夕,敕使及夷离毕率执事郎君至殿前,以盐及羊膏置炉中燎之。巫及大巫以次赞祝火神讫,閤门使赞皇帝面火再拜。(原注:初,皇帝皆亲拜,至道宗始命夷离毕拜之。)”[84]这些列入国家礼典、由皇帝亲事的拜火行为,已经不是一般的传统民俗,而是反映系统宗教观念的祭祀活动。考虑到契丹建国的历史文化背景,我认为,契丹的所谓火神应该就是回鹘摩尼教的火神,即摩尼教五大神中的第五位——妙火。摩尼教《下部赞·普启赞文》:“又启五等光明佛,水火明力微妙风,并及净气柔和性,并是明尊力中力”;《叹明界文》:“光明妙火无可比,妙色清凉常暉曜,赫尒恒存不生灭,奇特暉光实难类。火体清虚无毒热,触入于中不烧煮,彼无灰烬及烟煤,若言焚燎无是处。”[85]
从《辽史·礼志》的记载来看,在契丹国俗的各种仪式上,多有巫及大巫参赞其事,如祭山仪,“太巫以酒酹牲”,祭东时“巫衣白衣,惕隐以素巾拜而冠之。巫三致辞,每致辞,皇帝、皇后一拜,在位者皆一拜”;瑟瑟仪,“巫以酒醴、黍稗荐植柳,祝之”;拜陵仪,“巫赞祝燔胙及时服,酹酒荐牲”;丧葬仪,“巫者袚除之。诘旦,发引,至祭所,凡五致奠。太巫祈禳”。这些巫和大巫显然是因为对有着浓厚宗教意味的仪式仪轨非常熟悉才得以参赞其事,所以我认为,他们很可能就是摩尼教的僧侣。之所以称之为巫,或因其本来就是巫师改宗摩尼,或因其行为举止在修史的文人看来有同巫术。
白衣素服也是摩尼教的显著特点之一。据研究,“尚白是摩尼教徒的一个特征。《摩尼光佛教法仪略》言摩尼‘串以素帔’,‘其居白座’,规定摩尼教信徒的前四个等级‘并素冠服’,即要穿白衣戴白帽;在高昌发现的摩尼教壁画所绘的摩尼教僧侣亦正是着白色冠服;宋代文献亦着意记载当时的摩尼教徒着白衣,称之为 ‘白衣道’、‘白衣师’等;阿拉伯阿拔斯朝时代(750-1250)国内的摩尼教徒亦均以白色‘无边沿帽’为标志。既然中国内地、高昌、阿拉伯国家等各地的摩尼教徒都尚白,这个习惯就不是到了中国或后来才有的,而应是一早就具有并传袭下来的特征。”[86]所以,《辽史·太祖纪》上记载,七年春正月“弟剌葛等乞降,上素服,乘赭白马”受之,也可以看作是阿保机宗奉摩尼的证据。契丹人也尚白,作为游牧民族尤其喜欢白马,除了前述经常与青牛一道用作牺牲的白马外,还有专门作为祭祀对象的白马神[87]。以白马为地名也有多处,如白马埚、白马淀[88]、白马泺[89]、白马山[90]等。《地理志》一记载,永州木叶山还有“兴王寺,有白衣观音像。太宗援石晋主中国,自潞州回,入幽州,幸大悲阁,指此像曰:‘我梦神人令送石郎为中国帝,即此也。’因移木叶山,建庙,春秋告赛,尊为家神。”[91]这与摩尼教明使女身和女选民(僧侣[92])多白衣形象的情况[93],很难说是偶然的巧合。可以说,契丹人传统尚白的心理,至少从阿保机时代起已经受到了摩尼教习俗的熏染。

아니 하얀말을 탄다고 다 마니교로 몰아붙이면 어쩌라는건가? 개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然而我们知道,如此尚白的契丹人却有一个重要的习俗——拜黑山,这是怎么回事呢?让我们先来看一下史料,《辽史·礼志》六“岁时杂仪”条:“冬至日,国俗,屠白羊、白马、白雁,各取血和酒,天子望拜黑山。黑山在境北,俗谓国人魂魄,其神司之,犹中国之岱宗云。每岁是日,五京进纸造人马万余事,祭山而焚之。俗甚严畏,非祭不敢近山。”[94]日人鸟居龙藏早对“犹中国之岱宗”的说法作过辩驳,以为契丹黑山信仰与早先的乌桓赤山信仰一样,同属东胡民族传统,俱为归依黄泉国思想的表现[95]。其实,尽管以色彩词汇作地名常用词是北方民族的习惯[96],可是汉语直译为“黑”的Qara这个词在其传统文化中还有特殊的含义。《伊斯兰百科全书》(新版)“黑汗王朝”(Ilek Khans or Qarakhanids)条援引德国东方学家普里查克(O. Pritsak)在其《Qara,突厥语缀字符研究》里的说法:“Qara字面的意思是‘黑’,但在早期突厥语里也用于指方向的原初点即北方,从而获得了 ‘首要的’、‘主要的’等含义。”[97]由此可见,用于专名的这个“黑”字即Qara(音译为“哈剌”或“喀喇”)常常并没有表颜色的用意,更不表明对黑色的喜尚,而只是用作修饰,以传统方式显示中心词的首要地位、伟大性质、崇高形象等,如喀喇昆仑=高大昆仑、哈剌契丹=伟大契丹、阿穆尔=大河[98],等等。因此,史料中关于“黑山在境北,俗谓国人魂魄,其神司之”的记载值得特别注意。
鸟居龙藏曾经实地考察当地古迹,认为黑山、黑岭(今内蒙古巴林右旗与西乌珠穆沁旗间大兴安岭)确实是契丹边界的最北位置[99]。但他认为“国人魂魄,其神司之”(所引《使辽录》为“云虏人死,魄归此山”)即是所谓“黄泉国”却令人难以苟同。关键在于他没有解释,如果真是契丹人精神世界中的魂魄归宿,那为什么一定要是北方?这个问题在“黄泉国”一类的神话里是找不到答案的。可能的解释是,东胡民族的习俗传说由乌桓的赤山变成契丹的黑山,并不仅仅是一种颜色的改变,而是崇拜方向和性质的改变;北方是天堂,这是契丹人从回鹘摩尼教中得到的观念。如前所述,“摩尼亦常以两种树来表达二宗的概念,一曰光明活树,二曰黑暗死树。……根据(吐鲁番)柏孜克里克发现的一幅摩尼教壁画,我们得知摩尼所说的生命树的形状,其花果繁盛,有三根树干,象征着光明王国所占的三个方向。”[100]这三个方向即北方、东方和西方。“照摩尼神话的基本说法,当初那个永恒的光明乐园,囊括了北方、东方和西方。仅有南方才为黑暗王国所据有。光明王国被大明尊所统治,居住着他所产生的神灵,这些神灵融洽地和他生活在一起。”[101]按照摩尼教教义,光明王国也是善良灵魂的最终归宿[102]。所以,契丹拜黑山,其实是以传统方式(黑=北方、首要、原初)表达对死后魂归最高天国的向往,而不是对命归黄泉的哀伤。

해당 마니교의 생명수에는 유라시아의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는데, 이것을 단지 마니교로 몰아붙이는것은 문제가 있지 않은가?

与此密切相关的就是契丹人的祭东即敬日崇东的习俗。如前所述,契丹祭山仪始终贯穿着敬日崇东的强烈意识,我认为这很可能是摩尼教有关灵魂最终经由日宫回归光明天国教义的反映。现在我们进一步对此作些分析。《辽史·国语解》:“祭东:国俗,凡祭皆东向,故曰祭东。”又有专门的“拜日仪:皇帝升露台,设褥,向日再拜,上香。门使通,阁使或副、应拜臣僚殿左右阶陪位,再拜。皇帝升坐。奏牓讫,北班起居毕,时相已下通名再拜,不出班,奏‘圣躬万福’,又再拜,各祗候。宣徽已下横班同。诸司、閤门、北面先奏事;余同。教坊与臣僚同。”[103]关于契丹敬日崇东的习俗,前人已经做过研究,主要的问题有两个:一是契丹人敬日崇东的原因,一是契丹人是否日月并祭兼拜[104]。
关于第一个问题,冯家升先生曾提出:“考敬日崇东之俗,不惟契丹人有之,凡内地北方人民,几莫不然。盖以彼等环境相同,故于风俗习惯,类多相似。塞北气候寒冷,人所共知。日升则温,日没则寒。一年之中,温暖之时较少。……为其如此,故人民常依地理之顺势,太阳出没,定其屋庐之方向。……里巷背阴向阳,亦犹门屋东开向日也。”[105]冯先生的意思是说,敬日崇东、门屋东开的习俗源于向阳取暖的生活需要,这可真是面壁虚构的奇谈!稍有一点北方生活经验的人都知道,屋室要向阳取暖只能是门窗朝南,朝东肯定是不行的。我现在的居室就是东西向(俗谓方向不正),冬天最需要阳光的时候却几乎整天都见不着太阳。所以,敬日崇东肯定和向阳取暖无关。既然这种习俗与实际生活需要无关,那就只好从精神生活方面去寻找原因。其实,冯家升先生已经发现突厥、回纥(回鹘)等古代民族也有敬日的习俗,惜因泥于陈说,以为“契丹贵日崇东,亦所固有,非必受突厥风俗之影响”[106],未能深究传播交流途径。我认为,契丹敬日习俗固未必受突厥影响,但完全可能受回鹘影响。因突厥汗国久亡,其“日火崇拜”为祆教习俗[107],重点在火不在日[108];而回鹘则以崇拜光明的摩尼教为国教,如前所述,按照摩尼教教义,人类灵魂得救的程序是:拯救之神先将人的灵魂运到月宫去锻炼,锻炼纯净的灵魂再转到日宫去,最后回归光明王国[109]。这应当就是契丹祭东、拜日乃至形成敬日崇东习俗的本意。

반대. 그렇다면 마니교가 유입되기 훨씬 전의 고구려나 북방유목민족의 태양숭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关于第二个问题,《辽史》明确记载契丹日月并祭的有两次,见《圣宗纪》一:统和元年十二月“戊申,千龄节,祭日月,礼毕,百僚称贺”;《圣宗纪》二:统和四年十一月“癸未,祭日月,为驸马都尉(萧)勤德祈福。”明确记载不拜月的只有一条史料,即《兵卫志》上“兵制”条:“凡举兵,帝率蕃汉文武臣僚,以青牛白马祭告天地、日神,惟不拜月,分命近臣告太祖以下诸陵及木叶山神,乃诏诸道征兵。”举兵为特例,本不可据之以偏概全,但《礼志》有拜日仪而无专门的拜月仪又引起了疑虑。《辽史·礼制·考证》在引述《兵制》的记载以后指出:“则拜日之仪,有独拜日者,有兼拜月者。拜月之仪,志虽未载,其仪当与拜日等。”[110]冯家升先生则认为:“《志》无拜月仪者,不为所贵也。日月敬拜轻重之分,甚属显然,何得谓拜月与拜日等乎?”[111]查《辽史》,契丹用日月兼名之事颇多,如太宗天赞五年“八月丁酉,以大圣皇帝、皇后宴寝之所号日月宫,因建日月碑”;会同元年六月“癸巳,诏建日月四时堂,图写古帝王事于两庑。”保大元年“金兵望日月旗,知天祚在其下”。可见,说契丹兼拜日月应该是不会错的。但冯先生所说“日月敬拜轻重之分”可能也是有的。按照摩尼教的说法,“月之所以有十五天不太明亮,就是因为人间的灵魂在那里受锻炼,其中不纯洁的黑暗分子显露出来造成的。等到灵魂都炼得纯净时,就转到日宫去,而月宫由于空净而恢复了光明。这样的情形,每月又有十五天。”[112]这大概就是契丹日月兼拜同祭却又“敬日常胜于敬月”的原因。
于是我就想,天赞三年(924)六月耶律阿保机当众预言自己的归宿,最后说:“日月非遥,戒严是速”[113];祖州“内城,殿曰两明,奉安祖考御容;曰二仪,以白金铸太祖像;曰黑龙,曰清秘,……太祖陵凿山为殿,曰明殿。……门曰黑龙”[114],这些很可能都和摩尼教信仰有关。敦煌出土《摩尼教残经一》:“惑游心城,当知是师乐说日月光明宫殿,神通变化,具足威力;次于法中,专说诚信”;《下部赞》:“对日月宫,二光明殿,各三慈父,元堪赞誉”[115]。按照摩尼教教义,在拯救灵魂(光明分子)的道路上,“日宫里住着第三使、生命母和净风,而明使耶稣、惠明使和初人(先意)则住在月宫。”[116]
契丹有君基太一神,《辽史·国语解》:“君基太一神,福神名。其神所临之国,君能建极,孚于上下,则治化升平,民享多福。”太祖九年(915),“是岁,君基太一神数见,诏图其像。”所谓“君能建极”,显然是修史文人的望文生义之说。那么这位君基太一究竟是何方神圣呢?我认为,还是来自回鹘摩尼教的神明。据研究,“救世主耶稣居于月宫,在突厥文书中,它实际等于月宫。日神和月神(回鹘语Kün-ai-t?ngri)是中亚摩尼教广为崇拜的拯救之神。”[117]君基太一显然就是回鹘语Kün-ai-t?ngri刻意文饰的一种音译,本意为日月天神。在回鹘汗国时期可汗的尊号里,经常可以见到嵌有这种名号[118]。这里顺便说说,后来的宋朝崇奉道教,有所谓十神太一,其中君基太一、臣基太一、民基太一名号[119],很让人怀疑就是由契丹君基太一神名望文生义敷衍而成。诚如是,这也可算作传统文化交流整合的一个典型案例吧。
本节最后想就契丹葬俗谈几句。《北史·契丹传》:“父母死而悲哭者,以为不壮。但以其尸置于山树之上,经三年后,乃收其骨而焚之。”可见契丹人早期的丧葬制度,是一种天葬加火葬的形式[120]。然而《新唐书·北狄契丹传》却说:“风俗与突厥大抵略侔。死不墓,以马车载尸入山,置于树颠。子孙死,父母旦夕哭;父母死则否,亦无丧期。”显然,唐代的契丹受突厥日火崇拜的影响,一度摒弃了火葬习俗。可是,同是《新唐书》作者的欧阳修又在《新五代史·四夷契丹附录》里说:“父母死,以不哭为勇,载其尸深山,置大木上,后三岁往取其骨焚之”,乍看与《北史·契丹传》全同,但与《唐书》记载比较可知,五代时契丹葬俗不再受突厥影响,且在相当的层面上实行火葬[121]。契丹贵族火葬少见,但有两点值得注意:一是多用尸床、尸台而很少用棺[122],这很可能是一种裸葬的遗俗;二是早期很少以生前用品入葬,如祖州内城诸殿“各有太祖微时兵仗器物及服御皮毳之类,存之以示后嗣,使勿忘本”[123];“丧葬仪:圣宗崩,……太巫祈禳。皇族、外戚、大臣、诸京官以次致祭。乃以衣、弓矢、鞍勒、图画、马驼、仪卫等物皆燔之。至山陵,葬毕,上哀册。”[124]我怀疑这些可能都曾受到摩尼教的影响。陈垣先生曾引敦煌出土摩尼教经残卷说:“其残存第一行云:‘宿死尸,若有覆藏,还同破戒。’可知裸尸以葬,是摩尼法。”又引“廖刚《高峰文集》卷二《乞禁妖教札子》云:‘……(吃菜事魔)死则人执柴烧变,不用棺椁衣衾,无复丧葬祭祀之事。……’右所论未明指摩尼教,然云一切务减人道,唯摩尼教似之。”[125]
不过,契丹建国前自有本族习俗,圣宗后又盛行佛教,丧葬形式颇为复杂多样。有学者指出:契丹丧葬制度“如果与辽王朝建立之前相比较,其间有着明显的间断现象。这一情况,是否意味着唐代后期,契丹族的社会情况曾有过一个较短期的大变化,而史传失于记载呢?即使文献失载,为什么在考古发现中,也难为这种变化作证呢?”[126]或许,其原因就在于当时契丹改宗摩尼,风行裸葬、薄葬加火葬的缘故。究竟如何,当有待更多更为细致深入的研究工作。

四、关于述律氏

毋庸讳言,耶律阿保机的回鹘皇后述律氏是协助促成他即位称帝的重要人物,也是参与契丹建国的回鹘族的代表人物。据研究,契丹建国以前其部族一直实行部落对偶婚制[127]。迭剌部的耶律氏直到阿保机以前从未与回鹘人结成婚姻[128],阿保机突破氏族社会传统改娶回鹘人为妻[129],在传统社会强烈的政治婚姻背景之下,可以肯定此举有利用回鹘部族强大社会力量的企图[130]。关于回鹘人在契丹社会、政治生活中的重要作用,前人已有系统研究,本文这里只拟从文化的角度对述律氏的作用做些探讨。
《辽史·太祖淳钦皇后传》:“述律氏,讳平,小字月里朵,其先回鹘人糯思”。查《后妃传》,留有名讳的除了这位后来尊号为应天皇太后的述律氏,就只有那位著名的与宋朝订立了澶渊之盟的承天萧太后。所以我认为,这种名讳都是特例,很可能都是史臣文饰所加的汉化名称,就如耶律阿保机之讳亿[131]。述律氏小字月里朵,我推测就是回鹘语?rt的音译[132],意为火焰、光辉或光芒[133],不难看出,这一名称具有很强的摩尼教光明崇拜色彩。在吐鲁番高昌故城发现的摩尼教经书插图中,有一幅断代为八世纪末的“摩尼教女神和女选民”画,据研究者克林凯特说:“这位摩尼教救世主由两个女选民陪伴,是位女性,只可能是惠明使。她立于一个华丽、伸开的莲花宝座之上。其右手所捧的一件东西,也许可解释为莲花、还愿塔、圣骨盒,甚至也可能像勒柯克所说的,是个香炉”;“女神后边的两个女选民站在一个大莲花座上,就如我们在佛教图画上所看到的。女选民与光明女神之间乃有一种特殊的关系,这跃然可见。该女神也许就是光明的圣玛丽亚。”[134]惠明使是摩尼教的一位拯救女神,据其教义,她和耶稣、初人(先意)一起住在灵魂拯救的第一站——月宫里[135]。在摩尼教里,耶稣、惠明使和大智甲构成了常被祈祷的三位一体,但耶稣只是主神第三使的一个分身。如前所述,大智甲即瓦孟(Vahman)既是灵魂的引导者,又可喻指得到拯救的国王,因之可藉以神化耶律阿保机,那么,与之同时阿保机的配偶述律氏也就被神化成了惠明使。这一神话的妙处在于它既可以解说祭山仪中天神、地祇一神二相的问题,也可以解说始祖传说中奇首可汗与可敦异性配偶的问题,还可以藉之提高和加强阿保机的回鹘皇后述律氏在契丹国家政治生活中的地位。我想,这应该才是童谣“青牛妪,曾避路”的本意。如摩尼教《下部赞·叹无上明尊偈文》所言:“堪誉惠明是法王,能收我等离死错。照耀内外无不晓,令我等类同诸圣。”[136]于是,阿保机当上天皇帝,述律氏就成了地皇后;阿保机“上尊号曰大圣大明天皇帝,后曰应天大明地皇后。大赦,建元神册。”[137]
还有一件事也涉及到述律氏,即所谓“扶余之变”——阿保机之死。阿保机之死的最大问题在于,据《辽史·太祖纪》记载,他本人在死前三年就已公开预言了自己的死期,而且恰恰正是三年以后所谓“扶余之变”他神秘死亡的日期,这就不能不令人感到蹊跷。由于预言是公开宣布的,因而也不排除阿保机本人导演这出戏的可能,但无论编导这出戏的人是谁,这场演出幕后的文化原因值得深究。让我们先看看阿保机的预言:

(天赞三年,924)六月乙酉,召皇后、皇太子、大元帅及二宰相、诸部头等诏曰;“上天降监,惠及烝民。圣主明王,万载一遇。朕既上承天命,下统群生,每有征行,皆奉天意。是以机谋在己,取舍如神,国令既行,人情大附。舛讹归正,遐迩无愆。可谓大含溟海,安纳泰山矣!自我国之经营,为群方之父母。宪章斯在,胤嗣何忧?升降有期,去来在我。良筹圣会,自有契于天人;众国群王,岂可化其凡骨?三年之后,岁在丙戌,时值初秋,必有归处。然未终两事,岂负亲诚?日月非遥,戒严是速。”闻诏者皆惊惧,莫识其意。[138]

看得出来,这篇预言已经得到了史官文人的修饰,“宪章斯在,胤嗣何忧”完全是遗嘱用语,游离于全篇预言口气之外。无论如何,阿保机大义凛然、视死如归的宣言,还是让凡夫俗子感到惊惧,这种气概恐非宗教献身精神莫属。现在看来,“上天降监,惠及烝民。圣主明王,万载一遇。朕既上承天命,下统群生,每有征行,皆奉天意。是以机谋在己,取舍如神”,“升降有期,去来在我。良筹圣会,自有契于天人;众国群王,岂可化其凡骨”,“日月非遥,戒严是速”,这些都可以在摩尼教的灵魂拯救教义中找到依据(见前)。可以说,摩尼教就是阿保机的精神支柱。问题在于,谁是他的遗嘱执行人呢?答案只能是述律氏。真是:生彼之道,灭彼之门,一饮一啄,莫非前定。
据《辽史》记载,天显元年(926)秋七月,耶律阿保机灭渤海班师途中,“甲戌,次扶余府,上不豫。是夕,大星陨于幄前。辛巳平旦,子城上见黄龙缭绕,可长一里,光耀夺目,入于行宫。有紫黑气蔽天,踰日乃散。是日,上崩,年五十五。天赞三年上所谓‘丙戌秋初,必有归处’,至是乃验。壬午,皇后称制,权决军国事。”[139]关于这一事件的政治意义,陈述(玉书)先生已有研究[140],本文这里只做点文化分析。阿保机去世前,后唐使者姚坤适至行在,《旧五代史》记载:“坤至止三日,阿保机病伤寒。一夕,大星殒于其帐前,俄而卒于扶余城,时天成元年七月二十七日也。其妻述律氏自率众护其丧归西楼,坤亦从行,得报而还。”[141]两相比较可以看出,《辽史》的记载显然是有意回应阿保机的归宿预言。此时阿保机已经魂归天国,能做这种回应的只能是述律氏或她所授意之人。大星自然是天曜之一,据摩尼教教义,天曜众星是由部分受到黑暗污染的光明分子做成的[142],这适好用来喻指得到拯救的国王。“大星陨于幄前”就等于发布摩尼教的讣告。“子城上见黄龙缭绕,可长一里,光耀夺目,入于行宫”,这是用了摩尼教里关于 “光耀柱”的神话。据其教义,在第三宇宙阶段的拯救之神是第三使、惠明使、光耀柱和大智甲,主尊第三使住在日宫,惠明使住在月宫,大智甲是灵魂的引导和审判之神[143];“纯洁得救的灵魂凝聚成光耀柱(Column of Glory),这就是我们天上所见的银河。在摩尼的教义中,它既是神,又是灵魂到达月宫、日宫以至最后回归光明王国的道路。”[144]所以我们看到,阿保机死后最初的谥号为升天皇帝,“太祖所崩行宫在扶余城西南两河之间,后建升天殿于此,而以扶余为黄龙府云。”[145]至于“有紫黑气蔽天,踰日乃散”,自是喻指灵魂得救升天后遗弃的黑暗物质无疑[146]。当然,这些神话都是为了宣传之用,到底是想附会或掩饰怎样的实际情况,现有史料没有提供证据[147],我们就不得而知了。
《辽史·太祖淳钦皇后传》:“太祖崩,后称制,摄军国事。及葬,欲以身殉,亲戚百官力谏,因断右腕纳于柩。太宗即位,尊为皇太后。”《地理志》一“上京道临潢府”条:“太祖崩,应天皇后于义节寺断腕,置太祖陵。即寺建断腕楼,树碑焉。”关于述律断腕,《新五代史·四夷附录》二有较详细的记载:

述律为人多智而忍。阿保机死,悉召从行大将等妻,谓曰:“我今为寡妇矣,汝等岂宜有夫。”乃杀其大将百余人,曰:“可往从先帝。”左右有过者,多送木叶山,杀于阿保机墓隧中,曰:“为我见先帝于地下。”大将赵思温,本中国人也,以材勇为阿保机所宠,述律后以事怒之,使送木叶山,思温辞不肯行。述律曰:“尔,先帝亲信,安得不往见之?”思温对曰:“亲莫如后,后何不行?”述律曰:“我本欲从先帝于地下,以子幼,国中多故,未能也。然可断吾一臂以送之。”左右切谏之,乃断其一腕,而释思温不杀。

看来述律断腕确有其事。陈述(玉书)先生认为:“赵思温抗辩不从,述律反断己腕而释思温,亦为情理所不许,仍当别求解说。”[148]我以为,摩尼教神话或可为此作解。据其教义,各种摩尼教的神都是大明尊的分身,属于大明尊的一个部分,但又和大明尊有区别,他们的职能彼此也不相同[149];如前所述,耶稣、惠明使(女身=述律后)和大智甲(得救之王=阿保机)三位一体(即互为肢体)[150],断腕之举适可证成此说,阿保机尽可升天,述律氏神威不减;赵思温汉人,不知者不为罪,故可释而不杀,益增其事之神秘,人之神圣。
还有一些契丹习俗和传说也可以在摩尼教范围内得到解说,如所谓契丹初兴之主有所谓“喎呵”[151]者,很有可能就是摩尼教中的嗢末(Hormizd)神。但既然乾隆皇帝以之为“神道设教”的说法能够被学界接受[152],当然也不影响我们立论,所以就不在此深究细论了。

结 语

本文检讨了辽太祖耶律阿保机的降生神话、始祖神话以及一些重要的契丹习俗,发现它们大都能在摩尼降生神话及摩尼教教义和神话中找到原型或依据。我认为,在以摩尼教为国教的回鹘汗国崩溃,大批回鹘族人进入契丹社会并发挥重要作用的历史背景下,很难把这些神话传说的相符对应完全归之于偶然的巧合。
六十八年前,王日蔚先生在其《契丹与回鹘关系考》最后说:“至二者在文化之相互影响,则以材料缺乏,未能得其真相。……他日有材料时,当专篇论之也。”[153]更早,八十年前,陈垣先生作《摩尼教入中国考》,特别于第十四章《南宋摩尼复盛》后标出:“同时北朝辽、金、夏关于摩尼之史料,当亦不少,因摩尼固尝盛行北地。此节且待他时之发现。”[154]本文之作,或可稍平前辈之憾。不过,限于材料和学力,本人所探讨者只是不同宗教文化影响的蛛丝马迹,且经与旧有习俗的整合[155],并非是系统宗教的传播。如前辈学者冯承均先生所言:“间尝研究我国制度,分析其间固有及外来之成分,往往与类似固有制度之中,发现外国输入之事,特因习用已久,遂致主客不分”[156],本文所论,泰半仿此。本人以为,这种研究既有学术价值,也能提供现实借鉴意义。
九世纪中回鹘汗国崩溃给契丹传统社会带来了新的激励因素。回鹘族人进入契丹社会,给契丹部族注入了新鲜血液;回鹘所奉摩尼教的传入,则为契丹传统社会的飞跃与变革提供了新的精神武器。耶律阿保机即以结亲取得回鹘族人(很可能把持着商业)的支持,并藉其摩尼教神话自己,从而得以突破传统,实现革命,建立国家,实行帝制,成为契丹人的民族英雄。
宗教及文化交流往往与商业活动同时进行[157]。唐代后期,回鹘人(包括在回鹘汗国配为部落的粟特人即昭武九姓胡)实际上已经大量从事商业经营活动[158]。汗国崩溃以后,回鹘人并没有马上融入变成游牧的契丹人,他们在相当一段时期还作为不同的群体存在并有自己独特的文化。因此,回鹘商业文化对契丹社会发生飞跃变革的影响也值得专门研究。传统的说法认为契丹是农牧二元社会,然而,二元之间有赖商业联系,因而很可能是农、牧、商三元社会,即相当一段时期的汉人及渤海农业、契丹牧业、回鹘商业[159]三足鼎立。诚如是,基于“二元社会”说的一些理论如“征服王朝论”等就有必要重新探讨。

2003-9-6完成于北大畅春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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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参王锺翰主编《中国民族史》,中国社会科学出版社,1994年,432页。
[2] [北齐]魏收撰《魏书》卷100《契丹传》,中华书局标点本(以下引正史均为此本),1984年,2223页。
[3]同上引《魏书》卷100,2222页。
[4] [元]脱脱等撰《辽史》卷1《太祖纪》上,10页。
[5]如陈述(玉书)《契丹社会经济史稿》,三联书店,1978年;同作者《契丹政治史稿》,人民出版社,1986年;蔡美彪《契丹的部落组织和国家的产生》,载《历史研究》1964年第5-6期;[日]松井等著《契丹勃兴史》,刘凤翥译、邢复礼校汉译本收在《民族史译文集》第10辑,中国社会科学院民族研究所, 1981年。
[6]近年国内有关契丹及辽朝历史的论著已经不少,比如,可以参考张正明《契丹史略》,中华书局,1979年;舒焚《辽史稿》,湖北人民出版社,1984年;杨若薇《契丹王朝政治军事制度研究》,中国社会科学出版社,1991年。
[7]参上引[日]松井等《契丹勃兴史》,2、27页。
[8]参王日蔚《契丹与回鹘关系考》,载《禹贡》卷4第8期(1935年12月);李符桐《回鹘与辽朝建国之关系》,台北文风出版社,1968年,后收入李符桐论著全集编委会编《李符桐论著全集》第二册,台湾学生书局印行,1992年,263-405页;王民信《契丹外戚集团的形成》,收在氏著《契丹史论丛》,台北学海出版社,1973年,73-87页。
[9]关于崇拜光明是摩尼教的主要特征和回鹘奉摩尼的情况,参林悟殊《摩尼教入华年代质疑》及《回鹘奉摩尼教的社会历史根源》,前文收在氏著《摩尼教及其东渐》,中华书局,1987年,58页,后文收在同书87-99页。
[10]见[宋] 欧阳修、宋祁撰《新唐书》卷219《北狄契丹传》,6173页;[宋]薛居正等撰《旧五代史》卷137《外国传》一,1827-8页;[宋]欧阳修撰《新五代史》卷72《四夷附录》一,886-7页;[宋]司马光编著、[元]胡三省音注《资治通鉴》(以下简称《通鉴》)卷266,后梁太祖开平元年(907)五月“契丹遣其臣袍笏梅老来通好”条,中华书局标点本(本文引《通鉴》均为此本),1982年,8676-9页。
[11]见《辽史》卷1《太祖纪》上,2-3页;同书卷73《耶律曷鲁传》,1220-1页。
[12]参杨志玖《阿保机即位考辨》,载《史语所集刊》17期,1948年4月。
[13]见上引林悟殊《摩尼教及其东渐》附录《〈摩尼光佛教法仪略〉释文》,230-1页。
[14] [德]克林凯特著、林悟殊译《古代摩尼教艺术》,中山大学出版社,1982年,22页。
[15]同上引《古代摩尼教艺术》,24页。
[16]本文这里用的是摩尼教所谓“五明子”即清静气、妙风、明力、妙水、妙火的名称,见前引《摩尼教及其东渐》15页。克林凯特在《古代摩尼教艺术》中说:“许多文书也言明尊为五大神,即五种明亮的宇宙分子——气、风、明、水、火所环绕。这五种分子和人类学的五个范畴,即推理、意志、智力、思想、理解等五个概念相联系。”(32页)显然,这五种明亮分子属于摩尼教崇拜的基本对象,故其名称大同小异,并无本质的区别。
[17]见前引《摩尼教及其东渐》附录《〈下部赞〉释文》,256页。
[18]见《摩尼教及其东渐》附录《〈下部赞〉释文》,256、258页。
[19]《古代摩尼教艺术》,97页。据克林凯特的说法,在吐鲁番高昌故城发现的七、八世纪摩尼教经书插图中,有一幅是在“建筑物的拱门上,画着三位一体的神,……其主神位于中央,较其他神为大。而且,主神的王冠上还另有一装饰,看来是一个带着同样王冠的较小人头。若如是,则暗示了拯救之神的分身理论。随伴的两个较小神像,其保存得最完好的一个也带着一顶与主神类似的王冠,但没有主神那一附加的装饰。我们可以推测,这里画的是摩尼教的拯救之神,也许就是第三宇宙阶段所创造的那批神。”(《古代摩尼教艺术》,88页。)而据摩尼教教义,大明尊在第三宇宙阶段唤出的拯救之神有第三使、惠明使、光耀柱(银河)以及大智甲(Great Nons),参前引《古代摩尼教艺术》35页。
[20]参上引《古代摩尼教艺术》,35-6、91-2页。
[21]参上引《古代摩尼教艺术》,97-8页。
[22]参上引《古代摩尼教艺术》,41、78-9、92页。
[23]《古代摩尼教艺术》,78-9页。
[24]《古代摩尼教艺术》,42页。
[25]《古代摩尼教艺术》,79页。
[26]克林凯特认为:“此处画的可能是762年信奉‘明教’的牟羽可汗,要不就是像牟羽可汗那样,与臣属一道奉摩尼教的另一位国王。”(《古代摩尼教艺术》,78页)
[27]见《摩尼教及其东渐》附录《〈下部赞〉释文》,254页。
[28]这类字眼在摩尼教经典里屡见不鲜,可参上引《摩尼教及其东渐》附录。
[29]《辽史》卷1《太祖纪》上,10页。
[30]《辽史》卷112《逆臣传》上,1498页。
[31]《辽史》卷2《太祖纪》下,19页。耶律阿保机的这篇预言充满神秘的谶语,尤其是预言了自己的死期,而且恰恰正是三年以后所谓“扶余之变”他神秘死亡的日期,这太令人疑惑了!总之,我感到,这篇预言的内容,它的产生,所谓“扶余之变”,甚至契丹灭渤海,都还有深藏未露的因素有待揭示,尤其是像契丹这样处于变革期的传统社会,异质文化的作用值得进一步研究。
[32]《辽史》卷2《太祖纪》下,23-4页。参刘凤翥《辽太祖尊号谥号考辨》,载《社会科学辑刊》1979年1期,收入孙进己等编《契丹史论著汇编》(上),235-6页。
[33]见前引《摩尼教及其东渐》附录,250-1页。
[34]见《摩尼教及其东渐》附录,253、254、257-8页。
[35]见《辽史》卷1《太祖纪》上,3页。
[36]见陈述《契丹政治史稿》,68页。
[37]见《辽史》卷1《太祖纪》上,10页。关于中国历史上开皇、始皇、皇始一类名号的意义,请参《通鉴》卷7,秦始皇二十六年(前221),“王初并天下”条, 234-5页;同书卷108,晋孝武帝太元二十一年(396),“魏群臣劝魏王珪称尊号”条胡注,3429页。有关研究参田余庆《北魏后宫子贵母死之制的形成和演变》,载《国学研究》第5卷,北京大学出版社,1998年,389页及402-3页注81。
[38]例如早在契丹之前,高句丽就有始祖之母感日而孕的传说,参《魏书》卷100《高句丽传》,2213页。
[39]参刘浦江《契丹族的历史记忆——以“青牛白马”说为中心》,收在《漆侠先生纪念文集》,河北大学出版社,2002年10月,157、160、164-5页。这里我要感谢刘先生惠赠大作,该文资料丰富,令我受益匪浅。
[40]见王民信《契丹古八部与大贺遥辇迭剌的关系》,收在前引《契丹史论丛》,47页。
[41]参杨富学《契丹族源传说借自回鹘论》,收入氏著《中国北方民族历史文化论稿》,甘肃人民出版社,2001年,144-55页。
[42]见《辽史》卷1《太祖纪》上,8页。
[43]参上引刘浦江《契丹族的历史记忆——以“青牛白马”说为中心》,160页。
[44]见《辽史》卷2《太祖纪》下,24页。
[45]《辽史》卷116《国语解》,1545页。
[46]据说有人认为,“木叶山的地理位置之所以众说纷纭,主要是因为一千多年来地貌的演变”,“至少在辽代前期,潢河和土河还属于黑龙江水系而不是辽河水系,辽代的潢河即今乌力吉木伦河,潢河与土河在阿鲁克尔沁旗东南交会后,东北注入松花江”(见前引刘浦江《契丹族的历史记忆——以“青牛白马”说为中心》165页转述)。这就是说,今天的松辽分水岭(吉林省长春—长岭—通榆一线)只是辽代后期以来一千来年地貌演变的结果,这不惟难以置信,简直是信口开河!
[47]参前引陈述《契丹社会经济史稿》附录《阿保机营建四楼说证误》,191-206页。
[48]前者见于八世纪的突厥文碑铭,参特勤《鄂尔浑突厥语语法》(T. Tekin, A Grammar of Orkhon Turkic)第四章《词汇表》,布鲁明顿:印第安纳大学出版,1968年,330、369页;后者见于十一世纪辞书,参马合木·喀什噶里《突厥语词汇》(Mahmud al-Kashqari, Compendium of the Turkic Dialects)第三册(索引),哈佛大学出版社,1985年,21、169页。
[49]参拙著《唐、吐蕃、大食政治关系史》,北京大学出版社,1995年,243-4、247页。
[50]见前引刘浦江《契丹族的历史记忆——以“青牛白马”说为中心》,171页。
[51]《新五代史》卷72,885-6页。
[52]参郭锡良《汉字古音手册》,北京大学出版社,1986年,26、36、83、107页。
[53]见贾敬颜遗著《东北古代民族古代地理丛考》,中国社会科学出版社、新西兰霍兰德出版有限公司,1994年,13页。
[54]见该书《例言》4-5页。
[55]参王力《同源字典》,商务印书馆,1982年,79-80页。
[56]如《刘郁〈西使记〉》,见王国维《古行记四种》叶八,收入《王国维遗书》第13册,上海古籍书店影印本。并请参谭其骧主编《中国历史地图集》第7册,中华地图学社,36-7页。
[57]参贾敬颜、朱风合辑《蒙古译语、女真译语汇编》,天津古籍出版社,1990年,2页。
[58]贾敬颜认为:“说契丹人讲的话是一种古蒙古语,一种颚音很重的古蒙古语,应该是令人信服的”,见氏撰《契丹文》,收在《中国民族古文字》,北京:中国民族古文字研究会,1982年,106-7页。
[59]见道布编著《蒙古语简志》,民族出版社,1983年,22页。
[60]参前引刘浦江《契丹族的历史记忆——以“青牛白马”说为中心》,164页。
[61]参《辽史》卷49《礼志》一,834-5页。
[62]《辽史·礼志》序:“今国史院有金陈大任《辽礼仪志》,皆其国俗之故,又有《辽朝杂礼》,汉仪为多。别得宣文阁所藏耶律俨《志》,视大任为加详。存其略,著于篇。”(834页)可见元修《辽史》,曾对契丹国俗和汉仪作了勘比整合。然而还不止此,同书《礼志》五《嘉仪》上“皇帝受册仪”后注:“又有《上契丹册仪》,以阻午可汗柴册礼合唐礼杂就之。”(859页)可见礼俗勘比整合在辽代当时已经开始。
[63] [唐]房玄龄等撰《晋书》卷107《石季龙载记》下:“龙骧孙伏都、刘铢等结羯士三千伏于胡天,亦欲诛(冉)闵等。”(2791页)《通鉴》卷98,晋穆帝永和五年(349)“赵主鉴使乐平王苞”条记此事,胡注云:“胡天盖石氏禁中署舍之名。”(3099页)并请参唐长孺《魏晋杂胡考》,收在氏著《魏晋南北朝史论丛》,三联书店,1978年,416-7页。
[64]参前引贾敬颜《契丹文》,99页。
[65]《辽史》卷49《礼志》一,834页。
[66]同前引林悟殊《摩尼教及其东渐》,14页。并请参《古代摩尼教艺术》,71-2页。契丹“再生仪”仪注有:“在再生室东南,倒植三岐木。”(《辽史》卷53 《礼志》六,879页)此三岐木或许就是摩尼教象征光明王国的三干树,再生与往生方向不同,故其倒植。我国的契丹考古发现过不少壁画,应该有希望把这种三干树识别出来。
[67]见《摩尼教及其东渐》,255、256页。
[68]契丹族并非只有八部,详参上引杨志玖《阿保机即位考辨》。因此,八部的说法只具传说的象征意义而难以做认真的历史考实。或者,这只是受鲜卑八部大人制度影响而产生的比附说法也未可知。有关的史料见《辽史》卷32《营卫志》中《部族》上,376-81页;最近的有关信息可参刘浦江《契丹族的历史记忆——以“青牛白马”说为中心》,160-62页。
[69]见罗炳良主编《中华野史》辽夏金元卷,泰山出版社,2000年,10页。
[70]刘浦江《契丹族的历史记忆——以“青牛白马”说为中心》,164页。
[71]参《辽史》卷49《礼志》一,836页。
[72]参前引王民信《契丹古八部与大贺遥辇迭剌的关系》,收在前引《契丹史论丛》,45页。
[73]冯家升对此有详细统计,参氏撰《契丹祀天之俗与其宗教神话风俗之关系》,收在《冯家升论著辑粹》,中华书局,1987年,51-7页。
[74]见前引王民信《契丹古八部与大贺遥辇迭剌的关系》,收在前引《契丹史论丛》,46页。
[75]参冯家升《契丹祀天之俗与其宗教神话风俗之关系》,同上引《冯家升论著辑粹》,68-9页。又,唐太宗初即位,与颉利可汗于便桥杀白马盟誓(两《唐书·突厥传》);苏定方伐百济,于江边杀白马祭祀(《(新增)东国舆地胜览》卷十八,忠清右道公州镇扶余县古迹)。[俄]E·N·杰烈维扬科《黑龙江沿岸的部落》也曾提到古代民族中的一些例子:“由于契丹人企图强占阿骨打亡兄的贈马,几乎引起了一场冲突。死去的撒改也曾以白色御马陪葬。假如我们还记得中国人和那乃人均以白色志丧、通古斯人皆以白马祭献林神的话,那么。上述最后这—情节则具有特殊的重要意义。……直到不久以前,在朝鲜还保留着这样一种习惯,送葬时在灵架上放有白马像。这是一种避邪符。在一些为开业举行的仪式中,马也是中心角色。马,特别是白马,也是一种祭祀用的动物[注239:U.V.约诺娃:《朝鲜人宗教仪式中的图腾崇拜残余》,155页]。”(林树山、姚凤译,吉林文史出版社, 1987 年,294页)
[76]见前引《冯家升论著辑粹》,63页。
[77]本段所转述摩尼教内容请参前引《古代摩尼教艺术》,36-7、43-4页;《摩尼教及其东渐》,17-8页。
[78]《辽史》卷52《礼志》五,859页。
[79]参《新唐书》卷12《礼乐志》二,323页;同书卷14《礼乐志》四,352页;同书卷21《礼乐志》十一,464页。
[80]见王民信《契丹的柴册仪与再生仪》,同前引《契丹史论丛》,95页。
[81]《辽史》卷49《礼志》一,838页。
[82]参陈述《契丹政治史稿》,45页。
[83]参前引[俄]杰烈维扬科《黑龙江沿岸的部落》,146页。
[84]《辽史》卷49《礼志》一,838页。
[85]《摩尼教及其东渐》,243、256-7页。
[86]《摩尼教及其东渐》,56页。
[87]参刘浦江《契丹族的历史记忆——以“青牛白马”说为中心》,160页。
[88]《辽史》卷18《兴宗纪》一,220页。
[89]《辽史》卷28《天祚皇帝纪》二,332页。
[90]《辽史》卷37《地理志》一,442页。
[91]《辽史》卷37《地理志》一,446页。
[92]摩尼教的信徒叫听众,僧侣叫选民,二者宗教地位不相等,参《古代摩尼教艺术》43-4页。
[93]参前引《古代摩尼教艺术》,56、70、86、93、94-5页。
[94]《辽史》卷53《礼志》六,879页。
[95]参[日]鸟居龙藏《契丹黑山黑岭考》,载《燕京学报》第28期(1930年12月),收入孙进己等编《契丹史论著汇编》(下),1101-5页。
[96]参[苏]穆尔札也夫著、郁浩译《中亚细亚(自然地理概要)》,商务印书馆,1959年,49页表3。
[97]参《伊斯兰百科全书》(Encyclopaedia of Islam, New Edition)第3卷,莱顿:E.J.Brill,1971年,1113页。
[98]参刘凤翥《“阿穆尔”源于契丹语的“黑水”说》,载《黑龙江文物丛刊》1984年1期,收入孙进己等编《契丹史论著汇编》(下),744页。
[99]参上引鸟居龙藏《契丹黑山黑岭考》,1113页。
[100]同前引林悟殊《摩尼教及其东渐》,14页。并请参《古代摩尼教艺术》,71-2页。契丹“再生仪”仪注有:“在再生室东南,倒植三岐木。”(《辽史》卷53 《礼志》六,879页)此三岐木或许就是摩尼教象征光明王国的三干树,再生与往生方向不同,故其倒植。我国的契丹考古发现过不少壁画,应该有希望把这种三干树识别出来。
[101]《古代摩尼教艺术》,32页,并请参同书71页引摩尼教《大力士经》。
[102]参前引《古代摩尼教艺术》,38、41-2、44页;《摩尼教及其东渐》,18页。按照传统的波斯宗教即祆教的观念,北方为群魔所居(参拙著《唐、吐蕃、大食政治关系史》,26页),摩尼教与此相反,或因为异端的缘故。但印度宗教也认为香巴拉Shambhala即理想天国在北方(见《格西曲札藏文词典(附汉文注释)》,民族出版社,1990年,877页),这很可能反映了早期印度伊朗民族由中亚迁徙分离时形成的文化分歧(参前引拙著243页)。据说西方语言的香格里拉Shangrila即源于香巴拉一语的梵文。藏传佛教也引入了这一传说。无论如何,该传说的基本要义是指信奉者的北方而不是其他任何地方,这一点应该是研究者十分留意的。
[103]《辽史》卷49《礼志》一,836页。
[104]参前引冯家升《太阳契丹考释》,收在《冯家升论著辑粹》,中华书局,1987年,39-49页。
[105]见上引冯家升《太阳契丹考释》,44-5页。
[106]参前引冯家升《太阳契丹考释》,47-8页。
[107]参拙著《唐、吐蕃、大食政治关系史》附录壹、贰,224-56页。
[108]参拙著《唐、吐蕃、大食政治关系史》,231页。
[109]参前引《古代摩尼教艺术》,38、41-2、44页;《摩尼教及其东渐》,18页。
[110]转引自冯家升《太阳契丹考释》,41页。
[111]冯家升《太阳契丹考释》,42页。
[112]《摩尼教及其东渐》,18页。
[113]《辽史》卷2《太祖纪》下,19页。
[114]《辽史》卷37《地理志》一“上京道祖州”条,442页。明殿为阿保机陵寝专名,有关研究参陈述《契丹政治史稿》,45-6页。
[115]《摩尼教及其东渐》,221、263页。
[116]《古代摩尼教艺术》35页,并请参考同书75页。
[117]《古代摩尼教艺术》,74页。
[118]参《古代摩尼教艺术》,82、96页。
[119]参《宋史》卷103《礼志》六,2508-9页。
[120]参贾洲杰《契丹丧葬制度研究》,载《内蒙古大学学报》1978年2期,收入孙进己等编《契丹史论著汇编》(下),589页。
[121]参贾洲杰《契丹丧葬制度研究》,592-3页。也有认为契丹火葬的原因是盛行佛教,但据研究那恐怕主要应是辽圣宗(982-1031)以后的事,参前引冯家升《契丹祀天之俗与其宗教神话风俗之关系》,58-62页。
[122]参贾洲杰《契丹丧葬制度研究》,591-2页。
[123]《辽史》卷37《地理志》一,“上京道祖州”条,442页。
[124]《辽史》卷50《礼志》二,“凶仪”条,839页。
[125]陈垣《摩尼教入中国考》,收入氏撰《陈垣学术论文集》第一集,中华书局,1980年,359、372页。
[126]贾洲杰《契丹丧葬制度研究》,592页。
[127]参前引刘浦江《契丹族的历史记忆——以“青牛白马”说为中心》,160-62页。
[128]《辽史》卷32《营卫志》中《部族》上:“涅里相阻午可汗,分三耶律为七,二审密为五,并前八部为二十部。三耶律:一曰大贺,二曰遥辇,三曰世里,即皇族也。二审密:一曰乙室已,二曰拔里,即国舅也。”可见无论契丹分部如何,迄遥辇部落联盟时期,耶律氏都未与回鹘述律氏结成婚姻。有关研究可参金毓黻《辽部族考》,转见于前引王民信《契丹外戚集团的形成》,74-5页。
[129]或许正是此举引发了契丹部落的重新组合,从而促使契丹婚姻由部落外婚转为部落内婚、氏族外婚。这个问题值得另作研究,已有的讨论可参前引刘浦江《契丹族的历史记忆——以“青牛白马”说为中心》,160-62页。
[130]回鹘人在契丹社会政治生活中所居重要地位由《辽史》的下述记载即可见一斑:太祖“四年秋七月戊子朔,以(述律)后兄萧敌鲁为北府宰相,后族为相自此始”(4页);“拜敌鲁北府宰相,世其官。”(1223页)
[131]参《新五代史》卷72《契丹附录》,890页。
[132]有关语音勘同可参拙著《唐、吐蕃、大食政治关系史》附录壹,225-6页。
[133]参前引特勤《鄂尔浑突厥语语法》(T. Tekin, A Grammar of Orkhon Turkic)第四章《词汇表》,364页。
[134]《古代摩尼教艺术》,98页。
[135]参《古代摩尼教艺术》,35、96-7页。
[136]《摩尼教及其东渐》,251页。
[137]《辽史》卷1《太祖纪》上,3、10页。
[138]《辽史》卷2《太祖纪》下,19页。
[139]《辽史》卷2《太祖纪》下,23页。
[140]参前引《契丹政治史稿》,69-71页。
[141]《旧五代史》卷137《外国传》一,1832页。
[142]参《古代摩尼教艺术》,34页;《摩尼教及其东渐》,16页。
[143]参《古代摩尼教艺术》,35、41、78-9页。
[144]《摩尼教及其东渐》,18页。
[145]《辽史》卷2《太祖纪》下,23-4页。
[146]参《古代摩尼教艺术》,37页;《摩尼教及其东渐》,19页。
[147]参《辽史》卷2《太祖纪》赞,24页;陈述(玉书)《契丹政治史稿》,70-71页。
[148]《契丹政治史稿》,70页。
[149]参《古代摩尼教艺术》,33页。
[150]参《古代摩尼教艺术》,88、97页。
[151]参陈述《契丹政治史稿》,47页;刘浦江《契丹族的历史记忆——以“青牛白马”说为中心》,166-7页。
[152]参刘浦江《契丹族的历史记忆——以“青牛白马”说为中心》,166页。
[153]王日蔚《契丹与回鹘关系考》,载《禹贡》卷4第8期(1935年12月)
[154]陈垣《摩尼教入中国考》,366页。
[155]参《古代摩尼教艺术》,29、47-9、79等页;《摩尼教及其东渐》,26页。
[156]冯承均《伯希和、沙畹撰〈摩尼教流行中国考〉译序》,氏译《西域南海史地考证译丛八编》,中华书局,1958年,43页。
[157]参季羡林《商人与佛教》,收在中国史学会编《第十六届国际历史科学大会中国学者论文集》,中华书局,1985年,91-207页;并请参拙著《唐、吐蕃、大食政治关系史》,250-52页。
[158]参《旧唐书》卷195《回纥传》,5207页以下;《新唐书》卷217上《回鹘传》上,6120页以下;陈寅恪《元白诗笺证稿》第五章《新乐府·阴山道》,上海古籍出版社,1982年,254-60页。
[159]参《摩尼教及其东渐》,91、93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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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京大学中国古代史研究中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 한국에 왔습니다. 그런데 더 많이 할 줄 알았던 포스팅은 오히려 더 못하게 되는군요. 왠지 모르게 슬프답니다. 현재 외할머니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데, 여기는 인터넷이 안됩니다. 다른 집의 무선인터넷이 "가끔"잡히는 지라 그것을 몰래 이용중에 있습니다. 당연히 무슨 글을 쓰기가 애매하죠.

그 뿐만 아니라 강릉에도 갔다 왔고, 촛불집회도 갔다 와야되고, 이사 준비도 해야되고, 친구들도 만나야되고....정신이 없네요. 아마 다음주정도나 되야 정상적인 포스팅이 가능할거 같습니다.


혹시라도 제 글을 기다리고 있었던 분들에게는 죄송합니다. 꾸벅--

组图:手脚残疾男子用舌头含针穿线为路人补衣

한 장애인 남자가 혀로 바느질을 해서 옷을 기워주고 있다.

组图:手脚残疾男子用舌头含针穿线为路人补衣



남도시보의 6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리우바오차이(刘宝财)라고 불리는 올해 30세의 손발에 모두 장애가 있는 장애인이 입으로 바느질을 해서 먹고 산지가 9년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가족들과 친지들이 맡긴 바느질을 했지만, 나중에는 기술이 늘어서 지금은 한 바늘로 21번을 꼬맬 수 있다고 한다. 지금은 길가에서 사람들에게 바느질을 해주고 있다. 또한 입 바느질에 대해서 세계 기네스북에 신청했다.

솔직담백하게 말해서, 입으로 얼마나 바느질을 잘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장애인임에도 이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을 보면 지금의 나는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지 되 돌아보게 된다.

http://news.qq.com/a/20080629/001216.htm

北京地铁今起全线启动安检 遇拥堵采取疏散预案

베이징시 교통부는 6월 29일부터 9월 20일까지 북경시 지하철에 대해서 안전검사를 실시한다고 선포하였다.

6月29日,安检人员在北京地铁长椿街站对乘坐地铁旅客进行安全检查。

북경지학철의 공공질서를 유지하고, 올림픽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하여 행해진 행사이다.


  


문제는 아침 7시부터 9시, 저녁 6시부터 8시 사이의 출퇴근시간과 공휴일에는 인력부족과 검사과정으로 인하여 난장판이 될수도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대비를 하고는 있지만 힘들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총, 군용장비과 같은 것은 당연하고, 폭죽도 당연히 안된다. 문제는 2kg 이상의 술과 같은 것도 진입이 불허된다. 한국에 있는 분들은 공항에서 하는 검사를 생각하시면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개인적으로 지하철에서 이런 검사를 한 것은 중국이 처음이 아니다. 인도쪽을 여행했을때에도 그곳에서는 지하철에서도 비슷한 검사를 했다)


본인이 이야기하였다 싶이 이번 올림픽에서의 테러문제는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한다면 모두가 즐기는 올림픽이 아니라 통제당하는 올림픽이라고 생각되어질 수도 있다. 어느 것이 정답일까?


http://news.qq.com/a/20080629/000576.htm

베이징시교통부는 7월 8일부터 10월 16일사이에 자동차와 행인사이에서 사고가 일어났을 경우, 행인 경상이며 차에 큰 손상이 없어서 움직을 수 있으면 빠르게 현장에서 벗어나서 교통흐름에 문제가 없게 만들어야 된다고 발표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200원(한국돈 3만원)의 벌금 고지를 하게 된다. 단! 무면허나 음주운전은 열외이다.

문제는 중국에서는 행인이 운전자가 도망가는 걱정해서 못 움직이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는 어떻게 해야될까? 특별한 규정이 없고, 운전자에게 200원의 벌금을 내라고 강요할 공산이 크다. 또한 운전자가 정말로 도망가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되느냐는 문제가 남아있다.

7월부터 이미 홀짝제의 실행으로 차량이 많이 줄어들터인데 이렇게까지해야되는것인지 본인으로서는 의문이다.


중국의 대규모 폭력시위 사진과 분석 에 대한 추가 정보입니다. 아직까지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유언비어인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 인터넷에서는 지속적으로 관련 내용이 삭제-차단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건이 이정도로 발전을 했다면 이미 숨기는 것이 불가능하고 일정정도의 처벌이 있을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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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개인적인 예상으로는 공직자에 대한 처벌도 있겠지만, 폭력행위를 한 시민들에 대한 처벌도 분명히 있을듯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한국을 돌아봐야합니다. 만약 한국에서도 사이드카나 기타 다른 수단으로 인한 인터넷 통제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현재 중국의 상황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막아야됩니다.

하지만 이 사진을 보고 "중국이 앞서 나간다" "우리도 저렇게 해야된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을 상당히 한심하게 보겠습니다. 촛불시위가 왜 일어났고, 왜 전국민의 공감과 지지를 얻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은 사람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폭력 증후가 보이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자체적으로 통제 가능한 수준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폭력지지로 넘어가는 순간...가장 간단하게 말해서 저부터가 촛불시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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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의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피씨방에서 놀다가 아버지에 걸려서 개처럼 기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는 약 200미터를 이렇게 기어갔다.

타이완 연합보의 28일 보도에 따르면 25일 타이베이에서 한 남학생이 두꺼운 끈에 묶여서 길 바닥에서 개처럼 기어서 200미터를 움직였다고 한다. 길을 가던 다른 사람들이 너무 심하다고 하자, 아버지는 "신경쓰지 말아" 라면서 그의 아들을 교육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자식이 피씨방에 빠져서 산다면 위와 같은 식의 "교육 방법"을 채택할 수 있을까? 당신의 자식이었으면 어떠했겠습니까?

중국 꾸이조우의 한 현에서 폭력시위가 발생했습니다. 이에 대한 기사는 중국, 살인사건 은폐에 항의 1만명 폭동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대강의 내용은 강간살해당한 여학생의 피의자가 현직 경찰 고위층의 가족이었고, 그래서 고의적으로 은폐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피해자 가족을 조폭을 동원해서 구타하였습니다.

현 재 중국인터넷은 뒤숭숭합니다. 특히 "很多网站都和谐了 많은 웹싸이트들이 화합을 했다"라는 중국특색의 용어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있습니다. 화합을 했다는 의미는 웹싸이트가 중국정부와 화합을 해서 관련 단어를 막아버리고 삭제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미 사건이 여기까지 발전을 했으니 더이상 숨기는 것은 불가능하고 신화사나 신랑 혹은 기타 웹싸이트에서 삭제당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중국정부가 통제를 포기하고 관련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로 민심을 잡을 계획인듯합니다.

이 번 행동에서 보여준 인터넷의 힘을 놀라울 정도입니다. 처음에 여론이 생겨나고 피해자 가족이 소식을 전한 곳도 인터넷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당국의 삭제신공에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로 복사되어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보이는 인터넷의 힘이 중국에서도 보이는 현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깊게 보아야될 점은 앞으로 중국정부가 이러한 인터넷에 대해서 어떤 정책을 실행하느냐일 것입니다. 더욱 단단하게 잡을까요? 아니면 점차 풀어줄까요?


물론 발생과정이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시위대가 방화와 폭력을 행사한것도 사실입니다. 어떻게 보면 폭동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일단 노코맨트하겠습니다. 그것이 중요한것이 아니라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추가 :
한국과의 차이점이라면 아직 시위문화가 발전하지 않은 중국이기에 상당한 폭력적으로 변하여 폭도를 연상시킬 정도이라는 점입니다. 걱정되서 하는 말인데 이것 가지고 짱꺠 어쩌고 찌질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해 당 사건은 단지 경찰에 대한 분노, 혹은 단일 사건에 대한 분노로 발생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동안 쌓여왔던 수 많은 경찰에 대한 분노는 물론이고, 현재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는 물가로 인한 경제적인 문제도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에 대한 중국정부의 대책을 주의깊게 보아야하겠지만, 이러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는 매우 힘들어 보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계속적으로 중국의 경제문제(빈부격차)나 부폐(이것도 경제문제라고 할수도 있습니다.)로 인한 내부분열이 일어날수도 있다고 해왔지만, 이렇게 빨리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올림픽이 시작하기도 전에 말이죠. 2008년은 중국은...참 재미있군요...한국의 2008년처럼 말이죠. 후...전 재미없는 생활이 좋습니다. 후...

해당 내용은 그 민감함이나 중요도를 생각하면 천천히 써야될 사항이지만, 일단 빠르게 전달한다는 생각으로 대충 휘갈겼습니다. 중국정부의 후속조치를 보고 천천히 분석해서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래쪽은 중국인터넷망에서 계속 삭제당하고 있는 사진들과 동영상입니다. 현재 중국 언론에서는 사진없이 단순히 정체불명이 반사회분자들이 해당일을 벌였다고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2008년 6월 28일 현장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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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师大女生宿舍四面楚歌 对面宾馆可偷拍(组图)


海师大女生宿舍四面楚歌 对面宾馆可偷拍(组图)



海师大女生宿舍四面楚歌 对面宾馆可偷拍(组图)



중국 하이사범대학에서 벌어진 여학생 도찰사건에 대해서 학교측이 책임을 부정하며, 여학생들에게 "평소에 옷을 더 입고 다녀라"라고 발언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반대쪽에 있는 남학생 숙소에서는 아직도 여학생숙소방향을 향한 사진촬영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길거리에서 야한 차림으로 지나가는 여성분을 주의깊게 살펴봐드립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살펴볼 정도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하지만 자신의 숙소라는 일상생활의 공간에서는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데 이를 도촬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图文-国家体育场鸟巢正式落成 主体育场终告竣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으로 쓰일 니야오차오(鸟巢 새둥지)가 6월 28일 완공을 하고 기념행사를 가졌습니다. 앞으로 이 경기장에서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과 폐회식이 열리며, 육상경기 및 축구 결승전이 열릴 예정입니다. 전체 면적은 25.8만평방미터이고, 좌석이 9.1만에 달합니다.

이정도의 정보는 일반 뉴스에서도 접하실 수 있으니 저는 "유언비어"을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이 새둥지에 대한 여러가지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이 공사 중간에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공사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주위에 사는 사람들은 어차피 매일매일 공사소리를 듣는데 무너져내리는 소리와 공사소리를 구별하지 못할 이유도 없고, 실제로 설계상의 어쩌고 하면서 잠시 공사가 중단되었던 적도 있다는 소리가 돌고 있습니다. 설계회사가 도산했다는 소리도 들리더군요.

한마디로 총체적인 부실공사라는 소리입니다. 특히 개막식때 수 많은 사람들이 입장하고 그 무게와 진동으로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라는 소리도 있습니다.특히 사천 지진에서 공공시설인 학교에 대한 부실공사가 떠오르면서 이러한 이야기는 더욱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유언비어는 베이징 올림픽에서 테러가 있을 것이라는 유언비어입니다. 작년에 상하이에서 발생했던 버스 폭팔 사건을 일반사람들은 테러로 이야기되고 있으며,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테러가 발생할 것이라는 소문이 흉흉합니다. 하다못해서 중국애들끼리도 베이징에 남지 않고 돌아간다는 소리를 하고 있으며, 남는 사람들에게는 "몸 조심해"라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 북경대의 경우 7월중순부터 외부인의 출입은 실질적으로 금지합니다. (혹시 관광을 생각하고 계시는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실제적으로 외국인도 무조건 여권(혹은 여권복사본)을 소지해야되며, 소지하지 않아서 잡혀 들어가는 일도 생기고 있습니다. 지하철에서도 공항과 같이 짐검사를 시작했으며, 간단한 예로 패트병에 든 물을 들고는 지하철을 탈 수 없습니다. 또한 경찰에 의해서 호구조사가 이루어지며, 북경 호구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연행되어 추방당하고 있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조만간 "베이징은 지금 비상시국"을 작성하여 거론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현재 글을 작성중인데 나름 진지하게 쓰려다 보니 고민스럽군요. 역시 글은 지금처럼 그냥 쓰윽~ 써 내려가야되는건데 말이죠....---> 니가 그러니 오타와 맞춤법 오류의 보물창고로 불리는거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유언비어입니다. 하지만 이런 유언비어는 베이징 올림픽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떤 면을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사회학적으로 유의미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실공사와 테러. 그것이 이번 불안의 핵심입니다.


덧붙여서 "주경기장이 너무 못생겼다"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외국계기업에서 설계한것을 모르고 중국이 한줄 아는 사람도 있군요. 이건 그냥 부록으로--

图文:浙江公安厅销毁价值上亿元毒品



중국 저지앙에서 6월 26일 "국제 마약금지의 날"을 맏이하여, 약 1억원(한국돈 150억상당)에 해당하는 280kg의 마약류를 소각했다고 한다. 여기서 궁금한 것. 과연 저 마약을 삥땅이 친 공안이 있을까 없을까? 훗-_-


http://news.qq.com/a/20080627/002379.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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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net Terror

 로버트 로드리게즈

 로즈 맥고완, 프레디 로드리게즈

 디멘션 필름스, 로드리게즈 인터내셔널 픽쳐스

 스폰지

미국

 

106분

공포, 드라마, 스릴러, 액션

2008.07.03

 http://blog.naver.com/planetterror

 

본인 내용을 조금이라도 설명하는 것을 네타로 파악한다. 고로 스토리에 대한 조금의 언급도 없을 것이다. 본인은 영화에 대해서 큰 관심은 없다. 그렇다고 완전히 피하지는 않는다. 기회가 되면 보고 기회가 안되면 못보는 것이지라고 생각하는 일반인이라는 소리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태터앤미디어(www.tattermedia.com)의 맴버라는 이유로 시사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스토리 평가는 네타의 요소가 있으므로 건너 뛰겠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진정한 리얼 3류 영화이다" 본인은 주성치를 좋아한다. 왜 갑자기 주성치냐고? 본인이 생각하기에 주성치는 진정한 3류 영화를 추구하는 영화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충분한 돈이 있음에도 영화를 너무나 3류처럼 찍어버린다. 개인적으로 최강의 3류영화는 쿵푸가 아니었나 싶다. 투자비도 충분히 받았음에도 화면도 깔끔함에도 너무나 3류틱하다. (물론 장강7호에 와서는 영 아니지만, 이 이야기의 주제가 아니므로 패스)

 

우리는 3류 영화를 보면서 욕을 한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라. 솔직히 예술영화라고 말하는 작품을 우리 일반인이 얼마나 이해를 할 수가 있는가? 무엇보다 영화가 왜 "예술"적이어야 하나? 우리는 돈을 쓰고 영화를 봐주는 것이다. 이해 못하고 잠만 쿨쿨 자는 예술 영화보다는 스트레스를 날릴 수 있는 3류 영화가 더 좋지 않을까?

 

이 영화 한번 봐봐라. 특히 마음에 드는 이성과 이 영화를 보아라. 왜냐하면 무궁무진한 대화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말재주가 없는 사람에게 대화 내용이 자동으로 생긴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이득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쓰면 역시 네타가 되기에 패스한다. 정 의심이 되시면 이성과 보기 전에 혼자 먼저 보셔도 무방하다.

 

꿍시렁 꿍시렁...

본인 이 시사회가 광화문 옆이었기에 끝나고서 달려나갔다. 영화보고 촛불집회를 가서 영화이야기와 촛불이야기를 하면서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나름 재미있지 않을까? 참고로 본인은 혼자 영화보고, 혼자 촛불집회 참가했다. 흐흑...외롭다. ㅠㅠ

도촬당한 여자 숙소 전경

女生宿舍内换衣遭偷拍 数十张照片被上传

여학생이 옷 갈아입는 것이 도찰되었다.


海师大女生被偷拍续:学校悬赏2万找线索(图)

여학생 도찰범을 잡기 위하여 학교에 붙은 대자보

海师大女生被偷拍续:学校悬赏2万找线索(图)

학생들이 이 대자보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범인은 돌아온다는데 저 사진을 찍는 인간이 범인이 아닐까?


하이사범대학의 여대생 30여명을 도촬하고 인터넷에 사진을 올린 도찰범을 잡기 위해서 대자보를 붙었다. 무려 현상금 2만원(한국돈 약 350만원)이다. 우리 여기서 문제다. 30여명의 모든 도찰사진과 350만원을 고르라면 당신은 무엇을 고를것인가? 두둥--


http://news.qq.com/a/20080627/000054.htm


好莱坞“藏独明星”李察-基尔涉藏广告引激愤

티베트 독립에 관한 광고


好莱坞“藏独明星”李察-基尔涉藏广告引激愤

"티베트 독립지지 스타" 리차드기어가 인도 여배우에게 강제로 키스

好莱坞“藏独明星”李察-基尔涉藏广告引激愤

피아트 광고의 맨 마지막에 이런 맨트가 나온다 : 비범한 힘(The Power to be different)。


리차드 기어는 원래부터 티베트 독립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여서 문제가 많았다. 그런데 이번에 티베트 독립을 간접적으로 말하는 광고로 인하여 샤론스톤에 이어서 두번째 중국의 공적이 되었다.


“藏独明星”李察-基尔涉藏广告引激愤(图)

시간관계상 대충 발언한 내용들.

 

블로그의 미디어성

모님의 경우 이번에 동영상 조작의혹이 나왔습니다. 실제로 그 분이 의혹을 제출한 분은 아니지만 파워블로거의 재의혹 글에 답글로 "조작"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제가 이 문제에서 중점을 둔것은 조작 사실이 아닌, 소위 파워블로거들에 대해서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실을 반대로 생각 한다면 그만큼의 신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블로거도 기자와 같은 윤리사항 혹은 가이드라인조차 마련해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이러한 가이드라인이 역으로 자유로운 블로그 스피어의 분위기를 망칠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블로그의 종속성

블로그는 자유롭다고 하지만 일정정도의 소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다음블로그뉴스가 생겨난 이후에 벌어진 황금펜들의 권력남용이라고 불리는 밀어주기식 행동이나, 에드센스로 벌어진 스크랩이나 낚시 글의 범람을 분석해보면, "돈" 혹은 그에 상응하는 "명예"를 얻기 위한 행동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제가 직접 "다음 황금펜"인 몇몇 블로거들과 대화에서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명예와 돈을 위해서 글의 성격이 변하거나 자극적인 주제를 찾는 식으로, 다시 말해서 찌라시로 변화해가고 있는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고, 해결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디까지가 기자인가?

촛불 집회에서 많은 문제가 된 것이 인터넷 방송이나 블로거뉴스의 사람들을 미디어로 볼 것인가 말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본인은 파워블로거라는 용어 자체를 거부하지만, 앞으로 모든 사람들에게의 정보공개의 전단계, 혹은 과도기로서  "다음 황금펜이나 올블로그 탑100블로거등과 같이, 일정정도의 검증을 받은 사람에게는 기자증을 발급하는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꿍시렁...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뻔히 본인이 파워블로거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 반박했던 어느 회사 싸~~장님....ㅠㅠ 미워욧! -_- 라고는 하지만 이 말을 빼먹지 않았으면 참 좋았을테인데 말이죠. 흐흑...슬퍼..ㅠㅠ



http://www.allblog.net/selfpr/


나를 소개합니다!

올블로그에서 "미약하지만" 블로거끼리의 연결망을 위해서 만든 서비스입니다. 개인적으로 미투데이가 올블로그에 "초이식"이 되면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서비스는 대규모 서비스라기 보다는 티타임과 같이 쉬어가는 서비스입니다.

개인적으로 조금만 더 손을 보면 올블로그에서 놀 수 있는 장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서 대화방과 게시판의 중간자적인 역활을 할 수 있도록 대화방과 같은 구조로 서로 이야기하는 무한대 덧글처럼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올블로그는 상당한 사용자수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활발한 사용자수는 얼마나 많을까? 일반적인 싸이트에 비해서는 매우 높은 구조이지만, 본인의 눈에는 아직도 너무나 적어 보인다. 그런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면 어떻게 해야될런지 고민해봐야될 것 같다. 그리고 이번의 "조그마한" 새로운 서비스도 그 연장선상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한(韩寒)은 누구인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블로거라고 감히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작가이며, 레이서이기도 하고, 동시에 음악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본인과 같은 82년생입니다.(이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그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막강하다. 현재 중국에서 인터넷을 하면서 그를 모른다는 것은 마치 한국에서 인터넷을 하면서 아고라를 모르는 사람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이기에 이번에 샤론스톤에 대한 그의 발언에 대해서 인민일보라는 중국 최고의 신문에서 비평을 할 정도이다. 한국으로 따지면 본인이 어떤 발언을 했는데 그것이 조중동에서 평론을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는 작성하지 않도록 하겠다. 이 글이 말하고 싶은 주제도 아니고, 본인의 발언으로 인하여 선입관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서 알고 싶은 분은 http://blog.sina.com.cn/twocold 으로 가셔서 그의 글을 보시면 되겠다. 혹은http://baike.baidu.com/view/5972.htm 으로 가면 그의 약력이 작성되어있다. 아래쪽을 보면 그가 했던 유명한?! 말들이 적혀 있다.

 

본인이 주의한 것은 한국에 비해서 인터넷 문화가 발달하지 못하였다는 중국에서 이렇게 거대한 영향력의 블로거가 나올 수 있는 이유이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역시나 인구의 힘이다. 인터넷 보급율이 한국에 비해서 많이 떨어지지만 전체 인터넷 인구는 이미 미국을 뛰어넘어서 세계 1위가 되어버린 인구의 힘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 뿐일까?

 

1) 중국정부라는 요소

우리는 중국의 인터넷은 중국정부의 감독 아래서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감독하에서 움직인다는 것은 정부의 입맛에 맞는 발언을 하는 사람은 일정정도 키워줄 수 있다는 말로 대변된다. 위에서 그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글을 써내려가려면 별 수 없이 본인의 평가를 조금은 작성해야될 것 같다. 그의 성향은 온건한 국가주의자 혹은 민족주의자로 생각한다. 본인의 생각으로는 이것이 그가 아직 뛰어넘지 못한 지점이거나 중국인터넷을 이해하고 고의적으로 그런 성향을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그의 글은 분명히 중국정부에 대한 "사랑의 쓴소리"로 구성되어있다. 중국정부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언론자유의 상징으로 홍보될 수 잇을지도 모르겠다.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중국정부로서는 이미 풀뿌리 블로거들의 발언 하나하나를 통제할 수 없는 상태일수도 있다. 그래서 이렇게 자신들에게 크게 위협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 몰아주기 식으로 생각을 집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중국정부라는 요소를 제외하고 생각해보자.

 

2) 인터넷 논객들의 역사 

중국의 인터넷 문화의 발전 방향은 한국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나타낸다. 해당 분석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주관적인 생각이다.

한국의 소위 인터넷 논객의 역사는 텔넷(키텔, 하이텔, 나우누리)시절로 시작된다고 본다. 인터넷이 떠오르면서 대부분의 논객들이 초기에는 딴지로 간다. 하지만 소위 황우석사태로 인하여 그 사람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지게 되고, 그 중에 많은 수가 디씨로 흘러들어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끔 디씨를 보면 어처구니 없는 전문적인 발언들이 쏟아지고는 한다. 평소에 아햏햏 하던 인간들의 발언이라고 생각하기에는--) 하지만 디씨로만 유입된게 아니고 다른 여러가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어설픈 논객인 본인의 경우는 디씨와 성격이 맞지 않아서 블로그로 흘러갔다. 하지만 대다수는 블로그보다는 게시판과 같은 개인이 드러나지 않는 곳을 선호하게 된다. 요즘은 그 사람들이 아고라로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는듯 하다.

중국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중국에서 인터넷이 보급이 되던 때는 이미 세계에 인터넷이 보편화되기 시작하는 단계였다. 물론 초기의 논객들은 각각 학교의 BBS에서 토론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이러던 것이 티엔야(天涯)로 달려가게 된다. 티엔야의 구조를 한국에 비유를 하면 텔넷시스템이 인터넷으로 이식된 모습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혹은 일본의 2CH과 같은 모습?!정도로 비유한다면 정확하지는 않지만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익명성으로 토론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당시에 막 떠오르던 블로그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세력은 블로그차이나라는 곳을 통해서 뭉치게 된다. 또한 이런 블로그 그룹들에서는 소위 말하는 30대의 전문가 그룹이 많이 속하게 되고 평균적인 정보의 질이 점차 높아져간다.

물론 이러한 서술은 어디까지나 개략적인 부분만을 잡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국과 한국의 구체적인 차이가 보인다. 보편적으로 중국은 개인이 중심이 되는 블로그라는 기술에 논객들이 몰리는 반면, 한국은 게시판이라고 하는 일정정도의 익명성과 단체성이 있는 곳에 논객들이 몰린다는 점이다.

 

3) 결론 

이런 차이는 왜 발생한 것일까? 위에서 제거한 중국정부의 요소를 다시 도입해 보자. 중국은 언론통제를 받는 곳이다. 한국에서는 많은 블로거가 진보성향이고 모두가 다 같이 정부 비판을 하는 반면에, 중국에서의 정부비판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에 몇몇의 한정된 사람만이 하게 된다. 그럼으로 인하여 몇몇 블로거가 많은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집중성으로 인하여 영향력도 증가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런 현상의 문제점은 이미 일정정도의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영향력이 주어진다는 점이다. 사실 유명하지는 않지만 상당한 수준의 블로그들이 있다. 그런 블로그들은 (개인적으로는) 블로그차이나에 상당히 많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명성은 그리 높지 않다. 이런 것도 집중성으로 인한 폐해라고 생각된다.

 

4) 주절주절

개인적으로 게시판식과 블로그식은 각각의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둘 다 발전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블로그에만 집중해서 생각해본다면, 현재 중국은 몇몇 블로그에 집중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고, 이것은 단지 인터넷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문제이기에 쉽게 변화시키기 힘들듯 하다. 이것을 변화시키려면 중국 사회전반의 언론자유화를 이루어야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미 언론 자유화가 일정정도 되어있는 한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블로그를 출현시키려면 다양성에서 그 해결책을 찾아야되지 않나 싶다. 다양성은 별것이 아니다. 본인의 일상을 조금 더 차분하게 적어 올리는 것만으로 다양성이 자동적으로 생긴다고 생각한다. 본인도 그냥 중국에서 지내면서 평소에 생각하는 것을 올릴 뿐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다양성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본인 지금까지 시위에는 단 한번도 참가해본 적이 없다. 이번 촛불시위가 일어났어도, 중국에 있는지라 참석할 수가 없었다. 24일 한국에 와서 처음 2~3일은 조금은 쉬려고 했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촛빌집회에 착석하게 되었다.

많은 이야기가 필요가 있을까? 내가 받은 느낌은 슬픔뿐이었다.

몸싸움하다가 다친 시민들.
공황증을 보이는 전의경들.
그리고 이 둘 모두가 한국의 시민이다.
단지 그뿐이란 말이다. 서로가 서로일을 해야할 뿐이다. 하하...





광화문쪽에서 와이어를 묶으신 내근 경찰 아저씨. 잘 들어가셨나 모르겠습니다. 다시 볼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경찰이 시민과 얼굴을 볼 일이 없으면 없을 수록 제대로 돌아가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5시에 돌아오는 길에 뒤쪽에서 바닥에 누워서 잠을 청하던 전의경들의 모습. 그래. 니들이 대체 무슨 잘못이냐. 니들은 니들의 의무를 다 해야겠지. 대신 나도 내 의무를 다 해야되는 것이고 말이다. 후...


2004년 7월 26일. 지금은 비공개로 돌린 <공지사항>으로 이 블로그는 시작했다. 북경대학교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고, 그동안 사용해오던 노트와 다이어리를 대체할 용도로 시작한 블로그.


근 4년이 시간들.
글 1408개. 댓글 6626개. 트랙백 66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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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많은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있었던 많은 일들이 여기에 기록되었다. 초기의 생각들을 지금 돌아보면 매우 유치하다. 물론 지금의 이 글도 4년뒤에 보면 얼마나 한심할 것인가?! 그러나 그런 모습에 나는 기쁘다. 내가 계속 변화해가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의 이런 변화를 지켜봐주시는 여러분들. 저 한국에 들어가니 기회가 되면 만나요^^


이제 일년 반만에 한국에 들어간다. (그래봤자 9월에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지만...) 올림픽이라는 기간에 베이징에 있으면 조그마한 변화들을 알 수 있겠지만, 이미 중국에서 햇수로 7년을 보내왔던 나에게는 아예 그 기간을 떠나있음으로 볼 수 있는 큰 변화를 기대하고 있다.

나의 중국에 대한 관찰은 계속 된다. 그리고 동북아시아에 대한 관찰도 계속된다. 그것은 나의 꿈이기 때문이다. 동북아시아 대통합. 지금으로서는 현실성이 없는 헛소리같지만, 그래도 나는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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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그럼 휘리릭~~~
(일년 반만의 귀국인지라 어르신들하고 놀아야 되서...쿨럭...)

이 글은 한국블로그산업협회 주최하는 '비즈니스 블로그 서밋 2008'(http://www.bbakorea.org/5)의 일환으로 주최되는 "내가 추천하는 기업블로그와 그 이유"을 작성하면 무료로 참가가 가능(http://www.bbakorea.org/9) 하기에 나름 심혈을 기울여서 작성된 글입니다. 한국 기업블로그을 원하시는 것 같지만 주제를 확정하시지 않았기에 중국의 기업블로그 이야기를 해봅니다.


1 ) IT 기업 블로그 - 팬클럽을 거느린 기업블로그 "바이두"

바이두는 중국의 검색시장을 잡고 있는 IT계의 거물이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사용자들과 소통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기업이다. 무엇보다 신기한 것은 "바이두 팬클럽"이라는 "구글 팬클럽"과 같은 조직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후글님처럼 구글팬들이 구글에 대한 정보만을 전달하듯이, 바이두팬들은 바이두에 열광을 하고 바이두에 대한 정보를 공유한다.

한국의 거대 포탈이라고 하는 네이버와 다음에게 이러한 "팬클럽"이 존재하는가? 본인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팬클럽이 가능한 이유는 바이두의 기업블로그"망"을 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바이두는 공식블로그 외에도 CEO와 그 직원들 대부분이 블로그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블로그의 내용 중에는 아직 공식보도로 나오지 않은 정보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이 담겨져 있다. 팬클럽들은 이러한 내용들을 지켜보면서, 문제가 있다면 비판을 하고 마음에 드는 것을 열광적으로 찬성을 한다. 그럼으로 인하여 비판을 피드백을 할 수 있고, 고객들의 여론을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이와 다르다. 구체적인 예로 네이버 직원와 반네이버진영이 충돌을 하고 있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발생을 하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네이버직원 블로그의 반응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지점이 바이두와 전혀 다른 지점이다.

바이두 블로그라고 안티들이 없겠는가? 중국에서도 구글팬클럽이 주축이 되는 세력들은 상당히 강력한 안티 세력이다. 핵심은 바이두 공식 블로그나 연관블로그 어디에서도 "고객에 대한 배려"을 포기하지 않는다. 고객 중에서는 "사랑의 매"을 드는 사람도 있지만, 감정적으로 "바이두 꾸려! 버려!"라고 말하는 고객들도 있다. 그리고 바이두는 이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고, 감정적인 분들에 대해서도 "매너"을 잃지 않는다.

이제 유구히 내려오는 네이버 직원과 반네이버진영의 충돌을 되돌아보자.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다. 매우 건전하게 토론하는 경우도 있지만, 본인이 목격한 대부분은 원색적인 비난과 욕설이 오고가는 현장이었다. 이렇게 되면 반네이버진영은 더욱 더 인원이 늘어나고 안티의 강도가 더더욱 높이질 뿐이다.

한국의 IT 기업들도 이제 "직원들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만약 이러한 교육이 받기 싫은 직원은 처음부터 자신이 "직원"임을 밝히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밝혔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지어야 되는 때가 바로 지금과 미래의 기업환경이다.  

바이두 공식 블로그:  http://hi.baidu.com/baidu



2) 중소기업 블로그 - 쇼핑몰을 홍보하라! "알리바바"

알리바바는 한국에서도 이미 유명해진 인터넷 쇼핑몰이다.  그리고 "상인 블로그"을 운영중에 있으며 매우 호평을 받고 있다. 특히 이러한 "상인 블로그"의 대다수가 "중소기업"이기에, 그동안 한국에서 소홀했고, 문제로 제기가 많이 되었던 중소기업블로그의 한 모델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에서도 다나와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구체적인 방법은 블로그에 리뷰를 쓰고, 그 리뷰의 추천수나 조회수에 따라서 해당 블로거가 운영하는 쇼핑몰의 신용도 혹은 평가에 가산점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이는 모두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서 고객들은 해당 쇼핑몰에 대해서 신뢰를 얻을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상품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당연히 쇼핑몰의 매출도 올라가게 된다.

이런 방식은 인터넷 서점에도 통용이 된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방법이 알라딘이나 YES24와 같은 곳에서 잘 사용된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폐쇄적이라고 생각된다. 외부블로그의 서평을 받아들이는 시스템적인 장치가 구비되어있지 않다고 본다. 사실 한 사람이 여러개의 블로그를 운영하기는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보통의 경우 똑같은 내용을 다음-네이버-야후-쇼핑몰등등에 올리고는 한다. 이것은 쓸데 없는 비용 낭비라는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이러한 시스템적인 장치는 정부의 차원에서 다양한 쇼핑몰들을 교육시켜서, 서로간의 연결이 자신의 밥그릇?을 뺏는 행위가 아니라 더 거대한 밥그릇?을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부의 차원에서 중소기업 블로그 만들기를 도와주고, 이러한 블로그들을 다양한 쇼핑몰에 연결시키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물론 정부의 역할뿐만 아니라 기존의 포털들의 자성의 목소리도 필요하다. 또 다시 네이버를 언급하게 된다. (왠지 죄송하다....) 예전부터 문제시되어오던 "네이버 블로그의 운영정책"을 수정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자신의 블로그에서 조금이라도 상업적인 행위를 못하게 만드는 정책이다. 예를 들어서 : 모모님은 네이버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고, 그 글들을 모아서 책을 냈다. 그리고 그 책에 대한 홍보글을 네이버 블로그에 올리자 블라인드 처리를 받았다. 왜냐하면 네이버 블로그에서는 상업적 홍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네이버의 입장에서 이러한 홍보방식을 통하면 포털을 통한 광고료가 줄어들것이라고 염려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단기간의 생각일 뿐이다. 기업들은 홍보가 필요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홍보를 하려고 할 것이다. 지금 현재까지는 네이버가 한국시장을 독점하고 있어서 기업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네이버로 오지만, 네이버 제국이 흔들리는 순간 그동안의 불만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며 이반을 하게 될 것이다. 조금의 수익이 먼저인가? 아니면 끈끈하게 연결되는 네티즌 민심이 중요한가? 선택은 네이버에게 있다고 할 것이다.

알리바바 상인블로그 메타 싸이트 : http://blog.china.alibaba.com/



3) 회장님 블로그 - 황밍(黄鸣)과 왕슬(王石)

본인 한국의 블로그 시장에 대한 정보가 어두운 것인지, 한국의 유명 대기업 회장이나 사장님들의 블로그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중국도 남방주말의 2006년 보도에 따르면 그리 많은 호응이 없지만, 소위 유명 블로거 중에서 상당수의 기업 회장들이 포진하고 있다.  (해당 내용은 IT 관련기업 회장을 일부러 제외하였다.)

구체적인 예를 한번 들어보겠다.

황밍(皇明)태양열그룹의 회장 황밍(黄鸣)

황밍은 황밍태양열그룹의 홈페이지에 자신의 블로그의 링크를 걸어두었다. 황밍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한다. 자신의 삶, 생각, 취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독일 월드컵 기간의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황밍은 브라질의 실패를 점치면서 호나우도를 거론한다. 그는 과거의 영광 때문에 호나우도를 어쩔 수 없이 대접한다고 말하면서 "우리 회사 내에도 뚱뚱한 호나우도가 있다"라고 말을 하였다. 그리고 이미 과거의 영광만 남은 뚱뚱한 호나우도가 기업의 발전에 발전이 되는 존재라고 말하였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를 많은 직원들에게 권유하고 있으며, 블로그를 통해서 직원들과 소통을 하고 있다. 물론 기업과 블로그는 분명히 다르다. 기업은 민주적인 조직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목표나 정책에 대한 의견을 듣는다는 것은 요즘 유행어가 된 "소통"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고객들에게 직접 황밍 회장과 소통을 할 기회를 준다는 점이다. 고객들은 황밍 회장의 생활을 보고, 그의 생활을 느끼면서 자연스럽게 친근함이 들 수밖에 없다. 이를 더 말해 무엇하리오.

황밍(黄鸣) 블로그 : http://blog.sina.com.cn/huangming


중국 부동산기업 완커(万科)의 회장이자 중국부동산협회 회장인 왕슬(王石)

왕슬은 매우 많은 네티즌 팬을 거느린 블로거이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등산과 같은 자신의 취미를 올렸고, 많은 네티즌들이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돈보다는 자신의 인생을 즐기는 사람으로 인식이 되었다.

문제는 이번 사천 지진때 자신의 회사원들에게 "직원들보고 10원이상 지원하지 말라"고 블로그를 통해서 이야기했고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부담이 되면 돈을 낼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지만, 모님의 표현을 빌리면 네티즌들에게 죽도록 공격당했다.그는 결국 사과를 하고 1억원(한국돈 150억)을 성금으로 지불하고 지진현장도 방문하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블로그를 함부로 하면 안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사건을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네티즌들이 그를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의미가 된다. 존경했기에 실망감이 더 큰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비록 말실수?!을 했지만, 그로 인한 네티즌들의 반응을 받아들여서 오히려 예전보다 더 큰 위명을 떨치고 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소통이 아닐까? 기업이 내는 수 많은 광고비를 생각하면 150억은 그리 큰 돈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말실수 안했으면 더 좋았을터이지만...

왕슬(王石) 블로그 : http://blog.sina.com.cn/wangshi

이제 한국의 상황으로 돌아와 보자. 한국의 어떤 기업 회장이 실제로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지 자문해보아야할 것이다. 기업 회장은 단순히 그 회사를 경영할 뿐만 아니라 그 회사의 이미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굳이 어려운 경제이야기나 민감한 정치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 독후감이나 자신의 취미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기에 "회장님 블로그"에 대한 관심이 필요할 때가 아닌가 싶다.




중얼중얼 :

본 내용은 중국의 블로그문화 중에서 기업블로그와 관련된 사항을 추려서 만든 것으로 매우 조잡하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그래도 보통때와는 다르게 무려 1시간 반을 투자해서 작성했다. 이로서 보통때 얼마나 날려 쓰는지 알 수 있고, 돈없는 학생이 12만원을 내지 않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겠다고 얼마나 발악하는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머...그런것이다...)

해당 글을 작성하는데 도움을 주신 JACK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본인 바로 어제 중국은 이미 사이드카 운영중 이라는 글을 올렸다. 지적했다 싶이 지금 현재 정부와 한나라당이 중국의 언론통제 정책을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의구심이 더욱 늘어나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 중국 UCC는 중국 정부와의 힘싸움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 UCC 싸이트에 강력 관리 시작.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다루었지만, 모르시는 분을 위해서 다시 한번 언급해보도록 하겠다.

중국정부는 3월 20일에 25개 동영상 UCC싸이트을 서비스 중지하였다. 또한 10개 싸이트에 대해서 경고 처분을 내렸다. 이것은 앞으로 중국 정부가 동영상 UCC에 대해서 더욱 강력하게 관리를 할 것이라는 의미이며, 특히 외국계 투자자들의 투자 심리를 꽁꽁 얼어붙게 하는 처사이다. 또한 티베트 사태와 무관하다고 하면 웃길 소리일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요즘들어서 "베이징 올림픽 저작권 문제"을 언급하며 다시 동영상 UCC싸이트에 대한 경고조치가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서 대부분의 중국인들도 이것은 과도한 탄압이라면서 반발을 하고 있다. 실제로 저작권법을 언급하며 UCC 싸이트에 경고를 보내지만, 실질적으로는 영상물로 슬슬 올라오기 시작하는 은근한 반정부영상물에 대한 경계라는 것이 중국쪽에서도 보편적인 인식이다. 그리고 예전에도 언급했지만 : "이런 중국 정부의 방침은 당장에는 언론의 통제용으로 유용하게 쓰일지는 모르나, 거시적으로 오히려 중국 정부의 목을 조이는 것이 아닐까 진심으로 중국 정부에 걱정의 눈빛을 던져본다. "


나는 지금 한국 정부에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눈빛을 던져본다. 왜냐하면 중국 정부의 행동도 겉으로는 "저작권 문제"을 운운하면서 사실은 언론에 대한 통제용이라고 모든 중국인들조차 입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똑같은 행보를 한국에서 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사이드카 사태가 발생하고, 대통령은 아직도 "신뢰없는 인터넷은 약아닌 독될수도"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대체 한나라당과 이명박 대통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읽을 수가 없다.

국민들을 바보로 아는 것 같다. 신뢰가 없는 글의 내용으로 네티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네티즌들은 누구보다도 의심병 환자들이다. "인증샷"이라던지 "링크"요구와 같은 것은 신뢰가 없는 내용에 대해서는 계속적으로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본인 역시 그렇게 의심하면서 인터넷을 본다. 그리고 블로그가 대안이 되는 것이 대부분의 블로거가 자신의 이력을 공개하거나 지속적으로 글을 올림으로 인하여 네티즌에게 신뢰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분들은 인터넷을 모른다. 후...



이대로 가면 염려가 되는 구체적인 예 :

1) 다음이 어느날 열리지 않을 것이다.

본인 지금 중국에서 자신의 블로그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농담같은가? 개인적으로는 다음보다는 올블로그(allblog.net)이 더 빨리 닫힐듯하다. 국회청문회에서 한나라당의 안티이명박의 결집지라는 위명을 떨쳤으니 말이다. 다음에 비해서 작은 올블로그가 시험케이스가 되기에는 딱일듯하다.


2) 촛불집회 실시간 방송같은 민감한 것은 서비스자에 의해서 차단될 것이다.

농담같은가? 중국은 이미 그러고 있다. 그리고 더 위험한 것은 처벌을 받을까봐 아프리카와 같은 서비스업체가 먼저 삭제신공으로 경고가 들어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될 것을 "사전검열"해버린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넘의 사전검열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3) 모든 덧글이 관리가 될 것이고, "위험분자"는 소환되어서 조사를 받을 것이다.

한국은 관리하기 더 편하다. 주민등록증이 있으니 추적하기도 쉽다. 그렇게 된다면 이제 사전검열은 이용자 자신부터 스스로 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작년 대선때 인터넷은 조용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체포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블로거들이 선거법위반이라는 명목으로 법정에 서야되었고, 지금도 그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중얼중얼 :

아프리카 사태가 단순히 저작권의 문제라고 판단하기에는 1) 시기가 미묘하다는 점. 2) 구속수사까지 하지 않다고 된다는 점. 3) 나우콤의 공지에 따르면 기술적으로 가능한 수단을 충분히 동원했다는 점을 들어서 심히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본인 역시 피디박스나 클럽박스 혹은 아프리카의 저작권상의 문제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불법행위에 서비스자가 가능한 기술적 처리를 했다면 IT 산업의 발전을 위해서 어느 정도 인정해주는 것이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올려주신 모모님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아직도 중국에서는 저의 블로그에 접속이 안되는군요. 후... 현재까지는 프록시로 접속을 해서 덧글을 보는 수준은 할 수 있습니다만, 속도나 안정성문제가 있군요. 그래서 이 글도 덧글에 답글을 달아드리지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조금 있으면 한국에 가니 그때는 마음대로 블로그를 할 수 있을듯 합니다.

한나라 당에서 무려 사이드카 제도를 도입할 예정이라고 한다. 사이드카란 무엇인가? 원래는 주식시장에서 쓰이는 말이다. 다른 신문을 인용하면 왜곡된 사실이라고 말할지 몰라서 우리의 조선일보의 기사를 인용하겠다.

사이드카’란 프로그램 매매호가 관리제도의 하나로 선물가격이 전날 종가에 비해 급등락을 보이면 시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용하는 제도다. 코스닥시장의 경우 스타지수선물중 전날 거래량이 가장 많은 선물종목(통상 최근월물)의 가격이 전날 종가보다 6% 이상 상승 또는 하락한 상태가 1분간 지속되면 발동되고 일단 발동되면 발동시부터 프로그램 매매호가의 효력이 5분간 정지된다. 유가증권시장의 코스피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코스피200선물은 다른 조건은 같지만 전날 종가대비 변동비율이 5%이상인 경우에 발동된다. 그러나 ’사이드카’는 발동 5분이 지나면 자동 해제되며 매매종료 40분전(오후 2시20분부터)부터는 발동될 수 없고 1일 1회로 발동횟수도 제한된다.  -  코스닥시장 발동된 '사이드카'란 중에서...


이것을 지금 현재의 인터넷 상황에 맞추어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한나라당이 인터넷 여론 흐름에 신속 대응하기 위해 증권시장의 사이드카와 같은 개념의 시스템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만약 광우병이나 대운하 혹은 그 외의 인터넷의 큰 여론흐름이 생길 경우, 사이드카를 발동한다. 그렇게 되면 해당 주제의 토론은 정지되며 일정시간이 지난 후에야 다시 토론을 할 수 있다. 특히 인터넷의 경우 주식과는 다르게 토론을 정지하기 위해서는 관련 키워드로 모든 인터넷망에서 동시에 금칙어로 지정하여야한다.
 
한나라당이 제대로 사이드카의 개념을 알고 있는지 의심스럽지만, 그 용어 자체를 생각한다면 위와 같다. 그리고 본인은 이런 제도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곳을 알고 있다. 중국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본인이 예전에 올린 중국의 인터넷 감시 시스템 - GFW 을 참고하시면 된다. 이번에는 이번 사태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부분만 다루도록 하겠다.

GFW는 Great Firewall of China의 약자입니다. 중국말로는 防火长城(만리장성 방어선) 이라고 불립니다. 해당 기능은 매우 간단합니다. 중국 정부의 의도와 맞지 않는 모든 인터넷 서비스를 중국 내의 연결망으로 접속할 수 없게 만듭니다. 한마디로 중국 정부에 찍히면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체를 할 수 없습니다. 아예 중국에서 인터넷을 하는 사용자들이 해당 싸이트에 접속자체를 할 수 없게 만드는 막강한 기능입니다.

중국의 내부 싸이트들 사이의 덧글이나 글들중에서 민감한 사항에 대한 글은 실시간으로 관리됩니다. 만약 해당 민감한 문제들에 대해서 해당 사업자가 빠르게 조치(보통은 삭제처리)을 하지 않는다면 중국에서 IT 장사하기는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중국 인터넷에서는 정치 이야기를 보기 매우매우 힘이 듭니다. 정치 이야기가 많다면 많은 한국의 상황하고는 대비되는 현상이지요. -  중국의 인터넷 감시 시스템 - GFW 중에서...

 
앞으로 사이드카가 법률에서는 인터넷에 실제로 적용이 된다면 위의 상황이 올수가 있다. 이해가 안된다고?

1)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다. 지금 이 블로그는 주인장인 나도 접속하지 못하는 블로그이다. 중국쪽에서는 이 블로그에 접속이 불가능하다. 블로그를 운영중에 있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의심되는 것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이유를 모른다.) 현재 접속을 할 수가 없다. 본인 뿐만이 아니라 중국에 있는 본인 친구들도 모두 본인의 블로그에 접속이 안되고 있는 상태이다. 본인의 글에 중국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국어도 아니고 한국어로 작성되었으며, 중국정부를 단순히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증거를 바탕으로 "사랑의" 비판을 하고 있다. 하지만 막혔다. (이 글은 본인이 아는 한국에 있는 분을 통해서 올리고 있다.)

이 일이 한국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날 우리가 알고 있던 수 많은 블로그에 접속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어느날 우리가 알고 있던 싸이트가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몇몇의 프록시와 같은 우회방법을 아는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가 정보와 차단되어버릴 것이다. 참 재미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2) 다른 예를 들어보겠다. 현재 Global Candles이라는 싸이트가 준비중이다. 해당 싸이트는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현재 상황을 외국에 알리기 위해서 자발적인 참여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서 서버자체를 미국에 마련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이드카와 같은 일의 발생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유감스럽게도 현실화되고 있다.
 
3) 무엇보다 구글도 중국에 무릎을 꿇었다. 구글은 작년 7월 중국정부의 ICP을 얻었다. ICP는 중국의 인터넷사업자 등록이다. 그리고 이에 등록하지 않으면 아예 중국쪽의 접속을 차단해버리고, 등록을 하면 중국의 말에 따라서 검색결과를 조정해야된다. 그리고 구글도 무릎을 꿇었다. 그에 반하여 아직도 버티고 있는 위키에 박수를 보낸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시절에 일어난 구글의 검색결과 조작은 "까르푸"와 "티벳사태"에 대한 중국어 검색에서 자의적으로 검색결과를 삭제하거나 아예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사람들이 안전하다고 문서와 동영상을 올리는 유투브도 사이드카가 생기면 결코 안전하지 않다.
 
본인 한나라당 사람들이 멍청해서 "사이드카"라는 것을 잘못 생각했기를 바란다.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아니라면 본인 끝까지 갈 것이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본인이 이번 촛불시위에서 가장 화가 난 이유는 무엇보다 언론의 자유를 막는 행위다.
 
 
 
-- 중국측 관계자분에게...

본인 해당 글을 올림으로 인하여 중국정부의 봉쇄가 계속적으로 풀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혹시 이 글을 보고 있는 중국관계자가 있으면 분명히 알아야될 것이다. 동아시아의 화합을 목표로 하고 있는 본인은 가만히 놔두어도 일정이상의 비판을 가하지 않고, 문제가 될만한 글을 일정이상 "감추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나온다면 본인 펜끝을 날카롭게 만들 수밖에 없다. 어차피 막아도 프록시를 통한 방법이나 기타 다른 방법으로 글을 올릴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본인이 소중히 생각하는 가치중에서 여론의 자유는 상당히 위쪽에 위치한다. 제발 부탁이다. 이쯤에서 그만 풀어주기를 바란다.

위에서 명시한대로 블로그가 막혀 있어서 여러분들의 덧글에 답변을 달아드리기 힘듭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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