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은 국군의 날을 하루 앞둔 30일 울산 특수선 야드에서 박병택 구축함 인수단장(준장)을 비롯한 해군 및 국방품질관리소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전투함으로는 국내 최대규모인 4500t급 문무대왕함 인도식을 갖기로 했다.
문무대왕함은 길이 150m, 폭 17.4m, 높이 7.3m에 최대 29노트(시속 54km)의 속력을 낼 수 있으며 항속거리가 1만200km에 달한다.
이 구축함은 300명이 탑승하며 5인치포와 대함(對艦) 및 대공(對空) 유도탄 수직 발사대, 대함 유도탄 방어용 무기, 잠수함 공격용 어뢰, 해상작전 헬리콥터 등을 갖추고 있다.
대잠(對潛), 대지(對地), 전자전(電子戰) 수행능력까지 갖춘 이 구축함은 국내 최초로 전자파와 적외선, 소음 노출을 감소시키는 스텔스(Stealth) 기술을 적용, 생화학 및 방사선 무기로부터 승조원과 함정을 보호할 수 있다.
문무대왕함은 현대중공업이 지난 98년부터 건조하기 시작, 지난해 4월 진수식을 갖고 시범운항했다.
‘문무대왕’의 함명은 역사상 최초로 국토를 통일, 민족 통합과 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 “바다로 쳐들어오는 적을 물리치기 위해 동해바다에 묻히겠다”며 해중릉에 묻힌 문무대왕의 호국의지를 계승하기 위해 명명됐다.
<출처 : 대전일보>
등록일 2004.09.30
바로의 중얼중얼
해군이 KDX에 정말 독한마음을 먹고 있다. 언제나 육군에 밀려서 서러운 모습 많이 보이는 해군이 대양해군으로 발돋음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지금 KDX시리즈로 명명되고 있는 차세대 한국형 구축함사업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 (사실 구축함이라고 부르긴...쫌..) 자! 여기서 문제 한번 날리겠다.
"한국해군이 가장 위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필이 딱 오지 않는가?!
이.순.신.장.군.님.이다.
그런데 해군이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KDX-Ⅱ에서 함급을 "이순신급"이라고 정하고 1번함에 이순신장군함이라고 떠억하니 붙여놨었다. 당시 경악 속에서 허둥거릴 수 밖에 없었다.....
원래 이 KDX계획은 KDX3탄(영화시리즈냐-_) 까지 나올 계획으로 알고 있다. 이지스함 만드신단다.해군에 대해서 조금이라고 하시는 분은 이 계획이 얼마나 어이없는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독한맘 먹고 있는지 설명 안하셔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된다.이지스함은 그 돈지랄의 극치인 일본도 딸랑 4대 보유하고 있다. 이게 뭔데 그따구로 비싸냐고?! 간단히 말해서, 이론상으로는 어떠한 공격도 다 막을 수 있는 마법의 방패시스템이다. 그런데 이 시스템에 쳐다밖는 전자장비의 라이센스비용이 상상을 초월한다. 대충 10억달러~
하지만! 끝이 아니다. 이제 고대하시는 해군의 마지막 비장의 계획이 있다. 사실 KDX니 이지스함따위는 이 마지막 계획을 위한 사전 단계일 뿐이다. 그럼 그 마지막 계획이 무엇인고 하니..
항공모함
농담처럼 생각될지는 모르겠지만 농담이 아니다. 비록 계획상으로는 소형에 중고항모를 구입할 계획이라고는 하지만, 이넘의 항공모함의 군사적, 특히 정치적 특수성은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한다.
군사적
한국해군이 진정한 "대양해군"이 될 수 있다. 이른바 작전반경이 어마어마하게 증가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비행기가 있잖수~~) 항공모함 그 자체보다는 항모와 딸려 가게 될 호위함들.(여기서 KDX(구축함)과 이지스함이 필요한거다. 항모 혼자 딸라 보내면 침몰하는거 시간문제다) 그들이 모인 함대는 왠만한 단독작전이 가능하게 한다. 지구 바다의 어디서나...겠지만, 일단은 한반도 주위만을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항모가 있으면 육상에 있는 비행장이 폭격으로 싹다 파괴된다고 하더라도 바다에 있는 항모는 유유히 위치를 이동하니까 보다 안전할 수 있죠. 그것 말고도 일본이나 중국을 가상 적국으로 했을 시에는 항모의 위력은 몇 배로 증가하게 됩니다.
정치적
우리나라 주위에는 4대 강국이라고 할 수 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
그런데 씁씁한 것이 그들은 모두 항모를 운영중입니다. 자주국방이라는 말이 여기서 쓰이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비록 소형이라도 항모가 있다면, 국제정치에서 나름대로 힘이 있을 수 있는 것이죠. 에휴..
그래서 우리나라 최고의 항모이름은 당연히 "이순신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악스러운 일이 있나! 고작?! 구축함에 이순신장군님의 이름을 붙이고, 그 2번함에 문무대왕님의 이름을 붙이다니...(문무대왕님도 수중릉이라는 특수성으로 해군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는 분인데...)
그럼 대체 항모이름은 무엇으로 할 생각인가?!
심히 궁금해진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보시라^^
(...솔직히 이것에 대한 여러분들의 의견이 듣고 싶었다^^)
그래! 좋다! 한국이여! 한국해군이여!!
그대의 대양해군의 기치를 높게 펼쳐라!!!!
뱀다리 : 해군에서는 통역병모집 안하나? 하면 복무기간 3년이라도 반드시 할텐데....
(참고로 영어가 아니고, 중국어, 일본어를 말한다. 이건 일반병으로 지내다가 해당국가 방문시에만 통역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통역병이라고 하기에는 쫌...^^::)
Wiki는 언제 최초로 중국어권에 들어왔을까? 이것은 여러분들이 아직 한번도 탐구해 보지 않았던 화제이다. 나는 다만 내가 알고 있는 한도내에서의 중국내의 초기 Wiki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한다.
내가 아는 바로는, 최초의 Wiki는 비밀탐색소프트웨어작업실(索秘软件工作室)(Softme Studio)의 WebPM프로젝트의 세부항목이었던 jWiki이다. WebPM프로젝트(Project Management On Web)는 중문프리소프트웨어의 개발자, 사용자와 보급자들이 인터넷상에서 개방식관리장치환경을 만들기를 주요목표로 하고 있다. 그 중에서 Wiki세부프로젝트는 2001년 12월 27을 최초로 시작되었고, 2002년 01월 14일에 문을 닫았다. 듣기로는 이 단계에서 장호(浆糊)형님이 대단한 활약을 했다고 한다. 첫번째 단계가 끝난뒤 얼마되지 않아서, 그들은 다시 측정용 홈페이지 softme.org(현재 접속안됨)을 개발하여 그들의
Wiki시스템을 평가해보았다. 나는 전에 그 시스템에 등록했던 적이 있다. WebPM프로젝트는 개발그룹은 국내에서 비교적 초기의 XP사용자들이었다. jWiki프로젝트는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으며, 올해 7월 6일에 jWiki-v2.0.1-rc1판을 발표하였다.
내가 생각했을때 위의 경험자들과 교류를 통하여, 그들이 어떻게 Wiki를 생각하는지 들어보는것도 좋을거 같다.
내가 알기로 그 다음에 등장한 Wiki는 중루다잡원(中蟒大杂院)이었다. 그것은 2002년 5월달에 개통되었다. 중루다잡원은 비교적 재미있게도 중문타자프로그램을 구현하였다.
(이 부분에서 잠시 설명, 한국으로 예를 들면, 대충 완성형과 조합형에서 조합형으로 넘어갔다고 생각하는게 속편합니다.-_-; 사실 그것보다 복잡하지만..)
그 다음에는 중문위키백과사전(中文维基百科)이 2002년 10월 말에 개통되었고. 현재 제일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중국어권에서 가장 큰 Wiki페이지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무대Wiki(贸大Wiki, 무역관련인듯..)로 대략 2002년 11월초에 개통되었다.
정확한 시간은 조금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대체적으로 비슷할 것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계신분이 계십니까? 우리 한번 토론해 보자고요.
바로의 중얼중얼
근데...한국에는 위키가 언제 상륙했죠? 고수님들의 분석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제가 아는 위키라고는 "눈마새"밖에 없는지라...^^:::
그리고 한국최초의 블로그는.....좀 찾기 힘들겠죠? ^^:::
중국 축구의 약점은 무엇일까. 일단 몸싸움을 꺼린다. 또 패스가 원활히 이뤄지지 않는다. "중국 축구를 보면 모래알 같은 느낌이 든다. 조직력이 떨어지고 선수 개개인이 공을 차지하는 시간이 길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평이다. 한국 축구를 좋아하는 한 중국인은 "공을 몰 때 한국 선수는 우선 패스를 생각하는 것 같다. 반면 중국 선수는 갈 데까지 가 본 다음 더 이상 몰 여력이 없다고 판단될 때 비로소 패스할 곳을 찾는다"고 말했다.
- 중앙일보의 유광종기자님의 [다시 보는 중국 중국인] 9. 혼자 할 땐 짱 함께하면 꽝 중에서..
기자님의 본문내용은 상당히 훌륭하다. 그리고 내가 딴지를 거는 것은 그 본문의 내용중에 단지 한 마디일뿐이니, 유광종기자님을 뭐라고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중국축구는 몸싸움을 꺼린다고 유광종기자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전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나라의 축구나 잔반칙기술들이 있습니다. 상대 얼굴에 침뱉기나 옷살짝 잡아당기기 정도는 이미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그런데 이넘의 중국축구는 그 반칙기술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입니다. 잡고 늘어지기는 거의 필수옵션이고, 뒤에서 치기, 심판 안 볼때 복부가격등등...
이 정도는 애들 장난이란 말이지.
대체 애네들이 왜 그럴까? 하는 의문들은 제가 중국에 와서 경험한 두가지의 x같은 상황을 예로 들면 여러분들도 짐작하시리라 생각됩니다.
1. 축구수업시간에...
저희 학교는 무조건 운동을 4학점(한 학기에 1학점임)을 들어야합니다. 평소부터 축구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일단 축구를 선택했습니다.
여러가지 일이 있지만 이 이야기와 관련된 이야기만 하자면...
어느 하루, 드리블와 페인트에 대해서 선생님이 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드리블이 있고, 이런 페인트가 있다라고 설명하던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다 안되면 붙잡고 늘어지면 되는거야!!"
........어이 없는 얼굴로 변해버린 저였는데....
주위의 중국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끄떡 거리더군요.
이게 쉽게 나온것이 아니란 거지. <br />영제교육을 받아서 저렇게 되는것이지..+_+
2.학교축구시합
저희 학교에서는 매 학기에 학과대항으로 축구시합이 있습니다. 역시 참가를 했습니다. 나름대로 발이 빠른지라 열심히 오버랩핑을 번번히 시도했습니다. 그러다가 짜증나서 응룡타를 날려버릴뻔 했습니다.
오버랩핑하러 공도 없이 달려들어가는데 끝까지 뒤에서 잡아 당깁니다. 뒤에서 발로 제 다리를 거는건 일쌍다반사였지요. 팔꿈치로 명치도 맞아보고, 완벽한 빽태클에 당했는데 심판은 본척도 안하고.. 더 열받는건 제 팔을 잡길래 뿌리치고 달려가는데 심판이 "삐익~!".....
제가 밀었다는군요. 그넘은 제가 뿌리치니까 헐리우드액션(멀티)는 저리 가라는 듯이 무려 5바퀴를 뱅뱅 구르고 쓰러져 있더군요.-_-;;
이응룡선수의 심정이 절실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 게임있고서 한참뒤에 전설의 응룡타가 등장했습니다.)
저 두가지의 사례를 가지고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것은,
중국축구는 몸싸움을 꺼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반칙기술이 너무 환상적이라는 것이죠. 중국축구는 제대로 된 기술을 익히기 전에 반칙을 어떻게 하는지부터 배운답니다.(...+_+)
중국축구야. 평생 그렇게 하려므나, 그럼 너희는 절대 공한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리~~
바로의 중얼중얼
그런데 말입니다. 중국축구의 더욱 나이스한 면은 그넘들의 일명 拉拉队(라라대, 응원대)에 있답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인터넷에서 유언비어 같이 떠돌아 다녔던, 중국축구응원단의 진정한 모습을 확실히 까발려 드리겠습니다. 그 중에 반이 저의 실제경험이고 나머지 반이 저의 친구들의 경험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언비어나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경악의 그들의 응원행태. 집어보겠습니다.(으윽...pd수첩같다는...)
이 뜻깊은 시간을 맞이하여, 저는 당중앙과 국무원을 대표하여, 전국각민족인민과 각계인사들에게 명절인사를 올립니다. 홍콩특별행정구와 마카오특별행정구의 동포, 타이완동포 및 해외화교여러분들에게 친근한 문안인사를 드립니다. 이 자리에 출석해주신 각국의 친구여러분과 본국의현대화 건설에 관심과 지지를 보내주시는 세계의 친구여러분들에게 진실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바입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그 탄생을 알리며 중국역사발전의 신기원을 이룩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전세계에 장엄하게 선언하였다 : "중국인은 스스로 일어나서 중국인민 스스로의 권리를 얻었으며, 초유의 창조적 활력을 발산하였고, 고난과 나약함의 옛중국을 휘황찬란한 중국으로 변하였다. 종합국력의 상승에 따라, 인민생활의 개선과 국제교류의 확대, 중국의 국제지위의 현격한 향상은, 해내외중화자녀들에게 깊은 자신감을 싶어주었다!
55년동안 마오저동,떵샤오핑,쟝저민을 주요대표로 하는 중국공산당원들은 전국각민주인민을 이끌어 좌절뒤에 또 다시 좌절이 밀어닥치는 힘겨운 싸움을 하였으며, 세계가 놀라워하는 위대한 성과를 이루어내었다. 55년의 빛나는 과정은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결론을 일깨워주었다. : 반드시 중국공산당의 강력한 영도하에 우리나라의 진정한 모습을 알고 세계흐름속에 적응하여 독립자주적으로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이룩해낼 수 있다.
이번 세기의 첫 20년은, 우리나라에게는 반드시 굳건히 잡아야되는 중요전략기회의 시기이다. 우리는 자신감, 명료함과 용기를 가져야한다. 유리한 조건을 보며 미래에 대한 당당한 신념을 가져야한다. 충분한 준비로 미리 예상했거나 예상하지 못한 고난들을 극복해야한다. 앞으로 전진하며 강력하게 결집하여 계속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노선에서 전진하여야한다.
--- 우리는 발전을 행정의 최우선목표로 삼아야한다. 우리나라는 13억 인구의 개발도상국이며, 장기간 사회주의초보단계에 있었던 나라이다. 우리는 언제나 반드시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적인 방법으로 경제성장의 문제를 해결해야한다. 발전에는 새로운 생각이 필요하다. 과학발전관에 대한 확고한 수립이 필요하며, "오대총괄(五个统筹)"를 끈기있게 유지하여 새로운형태의 공업화노선을 향해야하며, 경제사회의 전면적이고 유연한 지속적인 발전을 이룩해야한다. ; 인간을 최우선으로하여 인민의 다양한 요구를 만족시키며, 전면적인 발전을 이루어내야한다.
(오대총괄(五个统筹) 이란? : 도시와 농촌의 발전, 지역발전, 경제사회발전, 인간과 자연의 조화된 발전, 국내발전과 대외개방을 각각 총괄한다는 개념으로, 지금 현재 중국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인 문제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다. 조금만 생각해봐라. 이렇게 하겠다는건 이렇게 안되고 있다는 말과 동일하다.)
--- 우리는 개혁개방을 끈질기에 유지해야한다. 개혁은 끝이 없으며, 개발은 세계을 향해있다. 개혁개방은 현대화건설의 전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경제시스템의 개혁, 정치시스템의 개혁과 기타방면의 개혁을 계속 실천하여, 모든 이로운 요소를 조절하고, 개방과 생산력을 발전시킬때, 사회공평과 정의가 실현될 것이며, 모든 노동자과 건설자가 모두 경제발전과 사회진보의 과일을 나누어가질 수 있을것이다. 대외개방을 확대하여, 경제세계화와 세계과학혁명의 새로운 형세에 적응하며, 당대인류문명의 훌륭한 성과를 배우고 참고하여야 한다. 개방을 통해서만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이 끊임없이 진보할 수 있다.
-- 우리는 민주법제건설에 힘을 기울여야한다. 민주가 없을때 사회주의도 없다. 사회주의민주를 확대하기 위하여, 민주의 제도화,규범화,프로그램화 및 인민의 참여보장를 이루어야한다. 보다 안정된 법제를 위하여, 법을 통해서 나라를 통치하며, 사회주의법제국가를 건설하여야한다. 사회이익의 조절, 사회모순의 해결, 사회안정의 유지를 통하여 사회주의의 화목한 사회를 건설하여야한다.
-- 우리는 문화건설에 힘을 기울여야한다. 문화는 민족정신의 상징이다. 문화의 힘은 민족생명력,창조력과 응집력중에 깊이 녹아들어있다. 선진문화의 전진방향에 맞추어, 민족정신의 교육과 홍보에 온 입을 기울이며, 교육과학문화사업을 발전시켜야하며, 사상도덕을 굳건히 하고, 새로운 중화문화의 빛나는 업적을 위하여 모두가 노력하여, 인민이 용기있게 전진할수있는 강력한 정신동력과 지식체계를 만들어야한다.
-- 우리는 오랜기간동안 힘든 싸움을 하여야한다. "일하면 흥하고, 놀면 망하리" 각계 지도자간부들은 반드시 앞장 서 고난의 투쟁을 하여야하며, 살지행동을 통해서 당과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합쳐, 수많은 군중을 인도하여, 전진중의 고난을 극복하여야 한다. 반부폐투쟁의 깊고 오랜 투쟁을 위하여, 부폐분자를 강력히 처단하여야한다. 종합적으로 체계적으로 제도상으로 또한 근본적으로 부폐현상을 억제 예방하여야한다.
-- 우리나라는 각 민족인민의 대결집을 공고히 하여야한다. 결집은 곧 힘며 결집은 곧 승리다. 사회주의현대화건설은 반드시 수 많은 공인, 농민과 지식분자들을 의지하여야하며, 이 모든것이 결집되었을때 결집의 힘이 생긴다. 각민족의 결립을 강조하여야한다. 우리당과 각민주당파, 각인민결집체의 결집을 강화하여야한다. 전체사회주의노동자, 사회주의사업의 건설자, 사회주의 애국자와 조국통일의 애국자들이 대결집하여야한다. 전국 각 민족이 결립되어일어난가면 우리의 사업은 영원히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오랜 고찰과 시대에 맞춘 마르크스주의 정당이다. 당의 영도를 개선하여야만, 중국특생의 사회주의건설의 근본적인 보장할 수 있다. 우리는 당의 16회4중전회의 정신을 관철하여, 전면적으로 당의 행적능력을 향상시키고, 인문군중과 혈육과 같이 친밀하게 지내며, 중국현대화건설을 책임지고 영도하는 위대한 사명을 완수하여야한다.
내빈여러분, 친구여러분, 동지여러분 :
중국은 평화발전노선을 견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전과 같이 평화, 발전, 합작의 기치를 내걸고, 독립자주의 평화외교정책을 추구하며, 세계각국과 우호협력을 통해서 같이 발전해나갈 것입니다. 중국은 영원히 패권을 추구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세계의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패권주의와 강권정치 및 어떤 형식의 테러리즘도 반대합니다. 우리는 세계평화을 통해서 스스로 발전하며, 또 스스로 발전하여 세계평화를 촉진할 것입니다.
홍콩, 마카오특별행정구역 과 타이완동포여러분, 우리는 혈육입니다. 우리들은 계속 "일국양제(一国两制-하나의 나라지만 다른 제도를 운용한다)""강인치강(港人治港-홍콩인이 홍콩을 지도한다)""오인치오(澳人治澳-마카오인이 마카오를 지도한다)"의 고도의 자치방침을 관절하여, 특별행정구역의 기본법 보장 및 홍콩,마카오의 장기번영과 안정을 보장할 것입니다. 우리는 "평화통일(和平统一)、일국양제(一国两制)"의 기본방침과 "팔항주장(八项主张-장저민이 제출한 주장으로 홍콩 마카오 타이완등에 대한 주장입니다. 전문이 너무 길어서 생략하겠습니다^^:: )을 관절하며, "타이완독립"분열세력을 강력히 반대하며, 결코 흔들리지 않는 국가주권과 영토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조국의 완전한 통일이라는 신성을 목표를 반드시 실현하며, 반드시 실현됩니다!!
내빈여러분, 친구여러분, 동지여러분 :
올해는 우리나라의 발전과 개혁의 성과가 선명한 한해였습니다. 국가의 거시적인 조절을 통해 개혁개방을 확대하였고, 경제생활중에서 발생한 모순들을 효과적으로 해결하였으며, 경제의 안정되고 빠른 발절을 이루어냈으며, 앞으로의 발전과 개혁에 훌륭한 기초를 마련하였습니다.
앞으로 45년뒤, 우리나라가 건국 100년을 맞때가 되면, 세계 총인구의 40%의 국가가 기본적으로 현대화를 이루게 되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이룰 것입니다. 이것은 중국인민이 인류발전사업에 대한 중대한 공헌이 될 것입니다. 미래를 살펴보면, 일은 많고, 길을 멀리만 합니다. 우리는 후진타오동지를 총서기로하는 당중앙의 영도하여, 등소평이론과 "삼대대표(三个代表-장저민이 만든건데, 중국쪽에 관심있는 분은 다 아시겠고, 관심없는 분에게야 별 상관없으니..생략^^)"중요사상의 위대한 깃발 아래, 당의 16대정신을 관철하여, 시대에 부끄럽지 않은, 전대의 위대한 업적에 부끄럽지 않게 합시다!
지금, 저는 건의합니다 :
중화인민공화국성립 55주년을 위하여
조국의 번영과 각민족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중국인민과 세계인민의 우정화 협력을 위하여
이 자리에 오신 내빈, 친구 동지. 여러분의 건강을 위하여
건배!!!
바로의 중얼중얼
백수처럼 이것 잡고 번역하고 있었군요.(으윽! 생각보다 양이 많아서 시간이 좀 걸렸다는.ㅠㅠ) 사실 한국인들이 봐야될 대목은 딸랑 이 부분입니다.
중국은 평화발전노선을 견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전과 같이 평화, 발전, 합작의 기치를 내걸고, 독립자주의 평화외교정책을 추구하며, 세계각국과 우호협력을 통해서 같이 발전해나갈 것입니다. 중국은 영원히 패권을 추구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세계의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패권주의와 강권정치 및 어떤 형식의 테러리즘도 반대합니다. 우리는 세계평화을 통해서 스스로 발전하며, 또 스스로 발전하여 세계평화를 촉진할 것입니다.
1)중국은 테러리즘을 반대해서 반대하는 것만은 아니다.
--> 중국에는 수 많은 소수민족들이 있으며, 특히 티벳과 위구르족들의 경우, 아직도 민족독립국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심하면 테러행위를 하고는 합니다. 테러행위는 민간인을 살상한다는 면에서는 나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독립투사라고 불리우는 많은 분들 중에서 테러리스트가 아닌 분들이 있었습니까?
김구선생님은 지금으로 따지면 알카에다의 빈라덴입니다. 수 많은 테러행위를 배후에서 지원하고 조정한 인물이죠. 안중근의사사의 하얼빈사건도 어떻게 보면 테러행위일뿐입니다. 물론 안중근 의사님은 자신이 전쟁포로라고 주장하였지만, 당시 일본에서는 범죄행위라고 했죠. 지금의 소수민족들은 어떨까요? 우리의 과거를 생각하고, 지금 중국 소수민족의 심정을 생각해보시라는 의미입니다. 힘은 없지만, 자신의 입장을 말해야겠고....방법은 테러밖에......
2) 중국은 영원히 패권을 추구하지 않을 거라고?!
패권이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헤게모니아. 신현실주의나 신자유주의 모두에서 기본이 되는 단위는 국가입니다. 그리고 국가의 패권추구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중국은 패권을 추구하지 않겠다고?! 웃기고 있네+_+ 우리는 이 말을 오히려 더욱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현재 중국이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주위국가의 경계심이 올라가자 이 말을 꺼내서 어떻게 분위기 조절해보겠다는 것입니다.
일단 타이완의 독립을 공공연하게 지지할 수는 없겠지만, 되도록이면 타이완독립쪽으로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 좋을듯 싶습니다. 어쩔 수 없이 통일쪽으로 가야된다면, 그 과정에서 한국과 북한의 통일의 완전한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어야할겁니다.
역사쪽에서야 동북공정의 이야기로 시끄럽기는 하지만 여러분이 할 일은 중국 욕을 하는 것보다는 더욱 정확한 역사를 스스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중국인들이 뭐라고 하였을때, 사료까지 들어가면서 당당하게 반론할거 아닙니까?!
3) 중국이 적이냐고?!
글세요. 적인지 아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지금 현재 상당한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와의 위치적 관계나 역사적 관계를 통하여 생각해 보았을 때도 결코 놓쳐서는 안되는 시장입니다.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아군은 없습니다.
우리는 중국을 연구하여 현금보유량 세계최대라는 최강 스쿠루지 쫌쌩이 중국인들의 손에서 돈을 왕창왕창 긁어모아야죠!!
추석때문에 조금은 늦게 나온 32챕터가 나왔습니다.
좀비들의 강력한 능력으로 이미 추리되어나왔던 가설들이 맞아서 별로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던 모닝스타는 딸랑 하나!!팔리탐하고 라보태위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것도 설마 둘이 합쳐서 군령자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1)
제 2의 하늘누리의 존재 : 말리
세 번째 벽난로방이라는것이 말리의 존재였다니......
그것이 은하철도999의 합체열차처럼 하늘누리 옆에서 따라다녔다니..
2)
팔리탐+라보태위(팔태위)가 보낸 지원군이 원래는 사라티본부대였다니...
(그럼! 그 하늘치는 어디서 나타난거야! 우연?! 뭔가 이상해...)
3)
백화각의 냉동실 정체가 아라짓전사의 휴식처였고...
아라짓 전사가 나가들이었다니.....
엘시의 표현대로 "전통에 대한 공격 중 이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것은 없는 것 같다."
31화의 모닝스타들은 대부분의 좀비를 경악상태로 몰아넣어버렸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냥 좋게 좋게 모닝스타로 좀비들의 뒷통수만 쓰다듬어 줄 영도님이 아니었다.ㅠㅠ
일단 가장 간단하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몇개가 있다.
1) 칼리도 백작부인 : 라세가 직접 말했다. 아니란다.
2) 정우 : 라세가 언제 정우를 인질로 잡았지? 그건 아닌거 같은데..
3) 제국 : 인질이라고 해서 인간일 필요는 없다. 평소 엘시의 소원이 평화로운 제국
(그래야 자기가 고향으로 돌아가니...)
4) ............그 다음은 뭘까?
다만 "하지만 의혹을 해소하지 못한 엘시는 문이 닫힐 때까지 치천제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문장을 통해서 엘시자신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추측해볼뿐...(당연하잖아!!)
데라시는 이성적인 나가다. 바깥에 있는 하늘치의 등을 보고서 하늘누리의 모습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대신 대담하게도 이곳이 하늘누리가 아니라고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엘시는 아직까지도 하늘누리의 모습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려는 유혹을 떨치기 어려웠다. 사실 말리와 하늘누리는 닮은 점이라곤 없다. 하지만 하늘누리 외에는 그런 물체를 본 적이 없었던 엘시는 자꾸만 하늘누리와 말리를 비교하게 되었다.말리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엘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데라시가 옳다. 말리는 하늘누리와 다르다. 움직인다는 어처구니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하늘누리는 사람을 키우고 역사를 품을 수 있는도시였다. 말리는 그렇지 않다. --피마새 31챕터중..
사람을 키우고 역사를 품을 수 없다는 설명에 집중을 하자면, 건물이 없다고 하려고 했으나, 백화각 비슷한 곳도 있었고, 그리고 냉장고?!로 가는 길은 분명 건물내부였다. 그렇다면 대체 보통의 (하늘누리위의 도시가 보통이라고 말하긴 뭐하지만..) 도시와는 대체 뭐가 어떻게 다른 것일까?
근데 우리가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 원래 하늘치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는 단지 고대유적만이 있었다. 혹시 그 고대유적이 많이 남아있는?! 일리도 없는데....그럼 고대유적을 이용한 환상?! 이라면 각각 개인마다 달리보이는데 그것도 이상하고...
영도님 미워!!!!
말리라는 이름에서 발리를 생각한건....문제가 있을지도...
혹시 좀비를 말려죽인다는 의미로 말리?!
뱀다리 : 이젠 승천한 티나한이 하늘치부대를 이끌고 내려와서 슈퍼하늘치전함대전이 벌어지고 이라세오날과 정우가 서로 드레곤블레스를 날리며 케이건이 엘시였다고 하더라도!! 플러스 타이모랑 갈로텍이 합체해서 아실에게 뽀뽀를 해도.....
별로 놀라지 않을거 같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건지.....ㅠㅠ
근년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에서 2002년부터 막대한 인원과 예산을 투입하여 동북변강의 역사와 현장에 대한 연속 연구공정(東北工程)이라는 국가적 프로젝트를 5년계획으로 추진 중에 있다. 그 내용은 고구려를 비롯한 고조선, 발해 등 한국 고대사를 왜곡하여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공작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평양 천도 이전은 중국 역사이며 평양 천도 이후는 한국사라고 하였으나 이제는 고구려 역사 모두를 중국사로 주장하려고 한다. 그들은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결론을 내어놓고 억지로 이를 증명하려고 자기 주장에 맞는 사료만 나열하면서 附會하려고 한다. 그 내용을 보면 종족문제, 조공책봉문제, 영토계승문제 등을 들고 있다.
중국인들은 주변국가가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다 하여 모두 종주국과 복속국 관계이며, 중앙정권과 지방정권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역대 중원국가 중에는 주변 변방국에 奉表稱臣한 일도 있고, 또 形式은 조공관계가 아니더라도 내용적으로는 조공을 바친 예가 한두 번이 아니다.
본고에서는 중원왕조가 북방계 왕조에 대하여 奉表稱臣한 예와 이에 준하는 宗室公主許嫁, 物貨의 納貢등의 事實을 時代別 또는 分類別로 나누어 기술하려고 한다.
1. 조공의 의미
조공의 뜻을 우리말 사전에는 '전날 속국이 종주국에게 때맞추어 예물로 물건을 바치던 일'이라 하였고, 또 『國事大事典』에는 '종주국에게 때맞추어 예물로 물건을 바치는 일로 종주국에서는 이에 대한 답례로서 下賜, 賞賜란 뜻으로 많은 恩典을 가하여 보답하였다. 조공은 주로 동양사회에 있어서 중국을 중심으로 행하여졌는데 이것은 고대로부터 정치적 이상 즉 왕도사상에서 나온 대외정책의 한 형식으로 국가간의 공식적인 물품교환을 의미하는 일종의 관무역이라 할 것이다.'라 하였고, 『中文大事典』에서는, '諸侯或屬國定期朝拜天子, 貢獻方物, 謂之朝貢.'(제후 혹은 속국이 정기적으로 천자를 배알하고 방물을 바치는 것을 조공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자구해석에 불과하다. 그 실상은 明王愼德, 四夷咸賓이 아니라 약소국이 무력적 약세에 의하여 불가피하게 朝覲之禮를 이행하게 되었고 그 관례는 정치적 복속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국제정세에 따른 자국의 이해관계에서 출발한다는 이론이 설득력 있다 하겠다.
중국의 수 천년 역사의 전개과정에는 한 민족만이 중원을 지배하였던 것도 아니었고 주변 다른 민족도 여러 차례 중원의 주인이 되기도 하였다. 대개는 중원왕조의 주인은 한족이고 그 주변의 다른 민족은 조공이나 바치며 명맥을 유지 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중국의 서북, 북방, 동북의 유목민족과 반유목민족이 중원의 주인이 되기도 하고 혹은 공생관계 혹은 전쟁관계에서 여러 방면에 영향을 끼친 바 크며, 그 업적과 역사상의 지위는 한족 못지 않았다.
북방민족이 중원 일부 또는 전 지역에 왕조를 건설하여 한족왕조를 대신하여 중원을 통치하였다. 예컨대 북위, 요, 금, 원, 청이 바로 그들이다. 때로는 남북 대치상태에 있을 때에는 중원왕조가 북방민족에게 신사하기도 하고 혹은 형식상은 아니더라도 실질내용 면에서는 조공하였다고 할 수 있는 예들이 많았다.
2. 형식 및 실질조공
1) 漢帝國과 匈奴
한 고조 6년(BC 201년) 太原郡 31縣을 韓國으로 삼아 韓王 信을 옮기고 晉陽을 都邑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 해 9월 흉노가 韓王 信을 馬邑에서 포위하자 馬邑을 가지고 흉노에 항복하였다. 이에 한 고조는 그 다음 해(고조 7년, BC 200년) 겨울 고조 스스로 將이 되어 韓王 信을 銅 에서 격파하고 그 장수를 베었다. 信은 도망하여 흉노로 달아났다. 그 부하 장수 曼丘臣과 王黃이 옛 趙의 후예 趙利를 왕으로 삼아 信의 흩어진 병사를 수습하여 흉노와 같이 한에 거전하였다. 고조가 晉陽에서부터 여러 차례 전쟁을 하여 계속 승리하며 북으로 진격하였다. 樓煩에 이르렀을 때 큰 추위를 만나서 士卒의 20∼30%가 동상에 걸리게 되었다. 平城에 이르렀을 때에는 흉노에 포위되어 7일간이나 진퇴양난에 빠졌는데 陳平의 秘計를 써서 겨우 빠져 나왔다. 그 후 흉노의 세력에 무력대항은 불가능함을 깨닫고 화친을 제의하였다. 이후 양국은 흉노의 산발적인 도발도 있었지만 무제 즉위까지 대략 60년간은 무양하였다. 고조 9년(BC 198년) 劉敬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흉노와 화친하고 宗室女子를 冒頓에게 출가시키고 매년 일정수의 솜과 명주, 酒食을 보내고, 兄弟로 약속하였다. 모돈은 세력이 점점 강대하여져서 고조가 죽은 후에는 더욱 한을 경시하여 呂后에게 글을 보내어 求婚까지 하였다.
이러한 공주의 혼가는 고조이래 惠帝, 文帝, 景帝 때까지 이어졌으며 財貨도 계속 보내어 졌다. 이것은 비록 용어를 조공이라 하지 않았을 뿐 실질적으로는 조공이며 신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賈誼도
라 하여 한의 흉노에 대한 歲幣奉獻은 納貢으로 보았고 한과 흉노와의 관계는 上下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어쨌든 한과 흉노의 초기관계는 한이 흉노에 納貢하였지만 무제이후 한의 세력이 신장되면서 흉노가 한에 稱臣入朝하는 형국으로 바뀌었다.
2) 後晋과 契丹
後唐 明宗의 양자인 李從珂가 군사를 이끌고 京師에 들어가 스스로 帝位에 올라 廢帝가 되었다. 그는 명종의 사위인 石敬 과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淸泰 3년(936년) 폐제는 석경당을 天平節度使(지금 山東省 서북부를 다스림)로 옮기고 張敬達에게 군대를 이끌고 가서 부임을 재촉하게 하였다. 이때 석경당의 幕僚인 桑維翰이 석경당에게 명을 거역하고 군사를 일으키도록 권하고, 또 거란에 군사원조를 청하도록 건의하였다. 석경당은 이에 따라 거란 太宗에게 奉表稱臣하고 父禮로 섬기기를 청하면서 성공할 것 같으면 盧龍節度使區域과 雁關以北의 諸州를 거란에 주겠다고 약속하자 거란은 크게 기뻐하면서 仲秋때까지 기다렸다가 傾國赴援하겠다고 하였다. 935년(天顯 10년) 그해 9월 거란 태종(耶律德光)은 5만기를 이끌고 揚武谷에서 晉陽에 도착하였다. 그해 11월 晋陽 남쪽에 壇을 쌓고 石敬 을 皇帝로 삼고 나라 이름을 晉, 天福이라 改元하였다. 이에 대하여 『契丹國志』에는
이라 하여 그 卽位에 대한 情況을 자세히 전하고 있다.
진은 幽(지금의 大興縣), ( 縣), 瀛(河間縣), 莫(任邱縣), ( 縣), 檀(密雲縣), 順(順義縣), 新( 鹿縣), 爲(懷來縣), 儒(延慶縣), 武(宣化縣), 蔚(蔚縣), 雲(大同縣), 應(應縣), (朔縣 동쪽), 朔(朔縣) 16州를 거란에 할양하고, 매년 帛 30만필을 바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비록 한족이 세운 王朝는 아니더라도 중원에 건국한 황제로 거란에 대하여 ① 거란 태종을 父禮로 섬기고 ② 燕雲 16州를 거란에 할양하고, ③ 매년 帛 30만 필을 바치는 것으로 하였다. 이와 같은 일은 일찍이 역사상 없었던 일이다. 『契丹國志』에
이라 하였다. 후진 고조는 이렇게 성심성의껏 받들고 貢物도 끊임없이 바쳤다. 그러나 거란은 조금이라도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가차없이 사신을 보내어 문책하였다. 이러한 거란의 행위에 대하여 成德節度使 安重榮이 매우 부끄럽게 여기고 거란과 여러 차례 싸우기도 하였다. 天福7年(942년) 고조는 안중영을 사로잡아 죽이고 거란에 사죄하였으나 거란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걱정을 하다 죽었다.
후진은 형의 아들 石重貴를 계위시키고 고조의 崩御를 거란에 告哀할 때 奉表稱臣하자는 의견이었으나 景延廣이 稱孫은 하되 稱臣은 안 된다 하여 그대로 하였더니 거란 태종이 대노하여 남침하였다.
景延廣의 이론을 『契丹國志』에서 보면
이라 하여 出帝는 中國인이 세웠으니 稱臣奉表할 수 없고 稱孫이면 족하다 稱臣하지 않은 것으로 분노한다면 쳐들어 와라 우리의 10만 횡마검이 기다린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고조의 奉表稱臣은 인정하고 있었다 하겠다.
3) 南宋과 金
조공제도는 중국이 그 주변의 국가와의 사이에 지녀온 전통적 대외관계의 가장 특징적인 것이다. 전해종은 본질적 조공관계로 a) 경제적 관계(조공(歲幣•方物, 請求, 賜物, 免), b) 의례적 관계(封典, 告哀, 進賀, 陳慰, 賜除, 賻恤, 謝恩), c) 군사적 관계(중국 측 요청, 조선측 요청), d) 정치적 관계 및 기타(臣稱, 年號採用, 曆採用, 內政干涉, 陳奏, 倭政報告, 洋舶情形報告, 人質, 通婚, 기타)로 규정지었다. 한족왕조로써 북방민족왕조에 대하여 전형적인 조공을 바친 예는 바로 남종 고종이다.
靖康 2년(1127년) 정월 금은 欽宗을 金 陣營에 구금하고 금은을 요구하였다. 송은 京師를 수색하여 금 30여만 량, 은 700여만 량, 비단 100여만 필을 모았으나 금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 해 2월 徽宗과 諸王后妃들도 금진에 포로가 되었으며 4월에는 徽•欽宗 父子와 皇后, 太子, 親往, 妃嬪, 宗戚 및 諸臣 등 3,000여 명이 북으로 잡혀갔다. 뿐만 아니라 남녀 백성 중 강제로 끌려간 사람이 10여만 명에 달하였다 한다.
1127년(天會 5년) 금 태종은 徽宗•欽宗 父子를 강등시켜 서인으로 삼았다가 그 다음 해에는 上京(吉林 阿城縣 남쪽)으로 옮겼다. 그 다음 달에는 素服으로 太祖廟를 배알케 하고 徽宗을 昏德公, 欽宗을 重昏侯로 봉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 二帝는 韓州로 옮겨졌다.
한편 1127년(靖康 2년) 3월 금은 宋臣 張邦昌을 楚帝로 삼았었다. 그러나 금이 북으로 돌아가자 스스로 退位하고 天祐皇后(哲宗廢后孟氏)가 궁으로 들어와 垂簾聽政하였다. 그해 5월 康王(趙構 徽宗 第9子)이 南京(應天府 지금 河南 商邱縣)에서 卽位하니 이가 高宗이다. 開封에서 善戰하던 宗澤이 죽자 主和派 세력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금이 압박해오자 고종은 양자강을 건너 杭州(臨安府로 승격)로 옮겨 수도 건설을 준비하였으나 사태가 위급하게 돌아가자 越州(浙江 紹興縣)로 도망하였고, 또다시 明州(浙江 縣 동쪽)로 도망하였고, 금군이 臨安을 점령하고 동시에 浙江으로 추격해 오자 고종은 바다로 도망하였다. 1130년(建炎 4년) 고종은 溫州(浙江 永嘉縣)로 도망하였다. 금군이 물러난 후에 越州로 돌아왔다가 1138년(紹興8) 정식으로 임안에 수도를 정하였다.
이때 岳飛, 韓世忠, 張浚 등은 모두가 중원회복을 주장하였다. 그중에서도 岳飛는 고종의 신임도 상당하였다. 그는 누차 중원회복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중원회복에는 흥미가 없고 다만 和議에만 마음이 있었다. 그는 여러 차례 패전으로 금에 대한 두려움이 많아 쉽게 전쟁을 일으킬 수 없었다. 이외에도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한다.
첫째는, 主戰派의 구호대로 兩宮(徽宗•欽宗)을 모셔오고 疆土를 수복한다면 皇位問題가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므로 皇位를 위협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꼭 금과 화의하여 2帝를 귀환하지 못하게 하여야 했으며 둘째, 主戰派는 대부분이 무인들이기 때문에 전쟁에 승리하면 무인이 발호할 것이고 그러면 통제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고종은 화의를 주장하는 秦檜를 믿고 금과 화의코자 하였다. 여러 차례 사신의 내왕이 있은 후 드디어 1141년(紹興 11년) 11月에 화의가 성립되었다. 그 내용을 『宋史』에는
같은 내용을 시기적으로도 조금 달리 적고 있고 또 내용도 조금 달리 기술하고 있다. 이 화의 내용을 傅樂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① 宋은 金에 臣이라 칭하고 金에게 表를 바치며 金은 宋主를 皇帝로 冊封한다.
② 宋은 해마다 銀•絹 각 25만兩匹을 봄에 泗州(지금 安徽, 縣 동북)에서 교부한다. ③ 宋은 金主의 生辰과 正旦에 사신을 보내어 치하한다.
④ 金은 徽宗의 梓宮(紹興 5年에 徽宗은 崩御)과 韋太后(高宗의 生母)를 귀환시킨다.
⑤ 宋•金은 동으로 淮水, 서로는 大散關(지금의 陝西 寶鷄縣 서남)을 국계로 삼는다.
이 誓盟의 내용을 살펴보면 형식상으로나 내용상 완전한 주종간의 조공이었다.
3. 실질적 조공
1) 北宋과 契丹간의 淵盟約
송 태종이 979년(太平興國 4년) 정월 北漢을 親征하자 거란에서 북한을 도와주어서 실패로 끝나고 그 해 5월 송이 북한을 급습하여 멸망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燕•雲을 회복코자 거란을 정벌하였다. 東易州와 州를 함락하고 幽州에 이르러 10여 일이나 대치하였다. 거란이 耶律休哥를 보내 원조하자 송군은 高梁河에서 대패하였다. 태종도 流矢를 맞아 도망하여 겨우 생명을 보존하였다.
이 전투 이후 송•거란 국경에는 충돌이 그치지 않았다. 송 태종은 986년(雍熙 3년) 거란을 다시 정벌하였다. 이때 거란은 景宗이 崩하고 聖宗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으므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대거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결과는 岐溝關에서 耶律休哥에게 크게 패하였다. 이 전역 이후 거란은 보복정책을 취하여 송의 河北•河東에 군대를 보내어 여러 차례 침략을 하였다. 송은 두어 차례 和議를 청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하였다.
송은 997년(至道 3년) 태종이 崩하고 眞宗이 즉위하였다. 진종 즉위 초부터 主和論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004년(景德 元年) 거란 성종은 蕭太后의 뜻을 받들어 대거 송을 침입하여 전연에 바로 다다랐다. 전연은 首都 開封에서 불과 300리 밖에 되지 않는 곳이어서 진종은 물론 조야가 크게 놀랐다.
당시 재상 寇準과 畢士安이 親征을 주장하고 나서자 할 수없이 州로 나갔다. 송군의 사기는 크게 진작되었으나 진종은 줄곧 화의만 생각하고 있었다. 거란도 승승장구하였으나 전연에서 蕭撻覽이 궁노에 맞아 죽자 진격을 멈추고 물러났다. 그리고 곧 和議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누가 먼저 화의를 제의했는가는 사서마다 다르다. 『宋史』에는 그해 11월 甲戌에 王繼忠이 두어 차례 달려와서 請和를 상주하자 진종은 宰相들에게 이르기를
繼忠言契丹請和, 雖許之, 然河 已合, 且其情多詐, 不可不爲之備
라 하면서 거란에 대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거란이 먼저 和議를 청해 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遼史』에는 南院大王 耶律善補가 상주하기를 宋人이 사람을 보내어 왕계충에게 弓矢를 주고 몰래 和議를 청구하였습니다 하니 조서를 내려 계충에게 宋使와 만나서 화의를 허락하도록 하였다고 하니 송이 먼저 화의를 청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양국 간의 맹약은 그 해 12월 戊子에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遼史』에
宋遣李繼昌請和, 以太后爲叔母, 願歲輸銀十萬兩, 絹二十萬匹. 許之. 卽遣閤門使丁振持書報聘
이라 하였으며 『宋史』에는
遣監西京左藏庫李繼昌使契丹定和, 戒諸將勿出兵邀其歸路. …乙未, 契丹使丁振以誓書來.
라 하였다. 이 두 사료중 『遼史』에는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나 『宋史』에는 자세히 적시하지 않았다. 이는 더 없는 치욕으로 여겼기 때문이라 생각하였기에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契丹國志』에는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라 하였다. 결국 송은 ① 매년 비단 20만 필, 銀 10만 량을 거란에 보내고, ② 거란 성종은 송 진종을 형이라 호칭하는 화의가 성립되었다. 이것을 단연( 淵)의 盟이라 한다.
聖宗誓書에 의하면 歲幣는 軍旅의 費用을 돕는 것으로 명목을 정하였으며 統和 23年 10月癸卯부터 보내져서 매년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 兄弟로 呼稱하는 것은 關南誓書에 보인다.
이러한 양국관계는 대략 117년간(1005∼1121) 평화를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그 기간 계속 무양했던 것은 아니었다. 1041년(慶曆 元年) 12월 거란 興宗이 송이 關河를 設置하고 壕塹을 수리하고 하니 邊患이 있을까 두렵다는 말을 듣고 南樞密 蕭孝穆과 北樞密 蕭貫寧과 關南 10縣地를 취하려는 모의를 하고 蕭英과 劉六符를 송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해(1042) 정월 南院宣徽使 蕭特末, 翰林學士 劉六符를 송에 보내어 晉陽 및 瓦橋이남 10縣地를 취하겠다고 하고 또 군사를 일으켜 서하를 정벌한 것과 沿邊의 水澤을 넓히고 깊이 판 것과 兵戌을 늘인 이유를 물었다. 그 해 6월에 송의 富弼이 다녀가고 또 8월에 와서 歲幣銀絹을 增額토록 하는 것으로 매듭 지우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9월 北院樞密副使 耶律仁先과 漢人行宮副部署 劉六符가 송에 사신으로 가서 和議를 약속하였다. 이때 富弼이 興宗에게 송과 거란의 和議의 大意를 말하기를 가만히 앉아서 歲幣를 얻으면 利는 국가에 있고 신하에게 주지 않아도 되며, 송과 싸움을 한다면 利는 신하에게 있고 해는 국가에 돌아온다고 하자 흥종이 그 말에 감화되어 비로소 和好를 정하였다. 그 해 윤9월 耶律仁先이 사람을 보내어 보고하기를 송이 매년 은과 비단 10만량필을 증가하고 文書에 "貢"이라 하며 白溝에서 보내 준다고 하자 흥종이 기뻐하여 군신들과 잔치를 베풀었다. 文書에 獻이라 하느냐 納이라 하느냐를 두고 爭論을 벌린 듯 하나 결국 "貢"으로 귀착된 듯 하다. 이렇듯 무력의 강약에 의하며 부득이 매년 물화와 돈을 바친 것이라면 이는 조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 靖康年間 北宋과 金의 講和
1125년(宣化 7년) 금은 마침내 송을 침범하였다. 금군은 두 갈래로 남하하였다. 東路는 斡離不(宗望 金太祖의 子)이 지휘하였는데 平州를 거쳐 燕京으로 들어가고, 西路는 粘罕(宗翰)이 雲中(지금의 山西省 大同)으로부터 太原(지금의 山西省 太原)을 공격하였다. 太原을 지키던 童貫은 도망하고 知府 張孝純의 善防으로 금군이 더 나아가지 못하였다. 東路軍은 郭藥師의 항복을 받고 그를 선도로 하여 黃河를 건너게 되었다.
1126년(靖康 元年) 정월 금군이 開封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李綱의 善戰으로 쉽게 점거하지 못하였다. 사방의 援軍이 패하여 부득이 금과 강화하게 되었다. 和議를 청한 것이 어느 쪽이냐 하는데는 사료가 서로 엇갈린다. 『宋史』에는 靖康元年(1126년)정월 甲戌에 金人 吳孝民을 보내어 議和하였다고 하였고, 『金史』에는 天會4年(1126년)정월 甲戌 宋使 李절이 와서 謝罪하고 修好를 청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和議의 내용도 조금씩 달리하고 있다. 『金史』에는
라 하였다. 두 사료가 조금씩 다르게 기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금이 제의한 講和條約은 매우 가혹하였다. 그 요점은
① 송은 금 500만 량, 은 5000만 량, 表緞 100만 필, 소말 10,000두를 금에 주고,
② 金主를 伯父로 禮優할 것과
③ 송에 있는 燕•雲人을 돌려보내고,
④ 太原, 中山, 河間 三鎭을 할양하며,
⑤ 宰相과 親王을 인질로 한다.는 것이었다. 欽宗은 이를 수락하고 京師의 민간 소유 금 20만 량, 은 400만 량을 모아서 금에게 주고 張邦昌을 금 진영에 보내어 화의하자 斡離不은 포위를 풀고 북으로 돌아갔다.
이 화의의 내용도 비록 奉表稱臣은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내용적으로는 그 이상의 굴욕적인 것이라 하겠다.
3) 隆興年間 南宋과 金의 講和條約
1161년(紹興 31년) 금 海陵王이 스스로 60만군을 이끌고 淮水를 건너 南進하였다. 그때 金人들은 海陵王의 포악함에 분개하여 이 기회를 틈타 族弟 烏祿을 遼陽에서 옹립하여 世宗이 되었다. 海陵王은 이 소식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瓜州에서 신하에게 살해당하고 금군은 물러났다. 宋은 이 기회에 본토를 회복하고자 하여 淮北의 수개 주를 취하였으므로 위세가 진작되었다. 그러나 高宗은 帝位에 더 이상 미련이 없어서 太子 신에게 전위하고 스스로 太上皇이라 하였다. 太子가 즉위하니 곧 孝宗이다. 그는 즉위 후 중원을 회복하고 조종의 치욕을 씻을 생각을 하여 岳飛의 관직을 추가 복직하고 또 중외에 조서를 내려 조정의 잘못을 고치려 하는 등 상당한 희망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秦檜가 15년간이나 專橫하는 동안 忠臣과 良將은 거의 죽임을 당하고 士大夫들은 안정을 바라는 터라 失土回復은 쉽지 않았다.
孝宗 즉위 때 宋•金은 전쟁 중에 있었다. 그러나 금은 송이 稱臣하지 않는다 하여 大將 僕散忠義를 京에 보내어 전쟁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1163년(隆興 元年) 5월 張浚이 금을 공격하여 한때 성과가 있었으나 금군의 공격으로 소강상태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조신중 主和者 들이 張浚을 공격하여 효종도 할 수없이 그의 관직을 면하였다. 일반적으로 분위기가 舊疆回復보다 講和쪽으로 기울자 효종도 부득이 강화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내용에 대하여 『宋史』에는
① 金•宋은 叔姪間의 국가관계로 宋主가 金主를 叔父라고 부를 것
② 양국 왕래문서는 國書라 부를 것(이전의 양국문서는 君臣의 예로서 金主는 '下詔'라 하 고, 송은 奉表라 하였다.)
③ 송은 매년 은과 비단 각 5만냥필씩 감하고 歲貢을 歲幣라 고쳐 부를 것.
④ 쌍방의 疆界는 高宗 紹興 때와 같게 한다.
송이 이 和約에서 臣이라 부르지 않고 평등지위를 얻은 것이지만 이는 형식논리이고 여전히 물하증여와 숙질간의 국가라는 관계는 청산하지 못하였다.
4) 嘉定年間 南宋과 金의 講和條約
1204년(嘉泰4) 韓 胄는 금을 정벌하고자 결의하고 岳飛를 鄂王이라 追封하여 군사들을 격려하고 吳曦에게 명하여 蜀에서 군사를 훈련시켜 전쟁준비를 하였다. 그 다음해 송은 출병하여 금을 정벌하였는데 다소의 성과를 내었으나 宿州, 壽州 등지를 공격하다 패하였다. 더구나 吳曦마져 금에 항복하여버렸다.
이런 가운데 금의 僕散揆가 남하하여 淮南의 重鎭을 함락하고 곧바로 江北에 도달하였다. 이에 韓 胄는 스스로 실책을 후회하고 사신을 금군에 보내어 화의를 교섭하였으나 금은 한탁주의 首級을 요구하였다. 한탁주의 화의 내용을 『金史』에
宋韓 胄遣左司郎中王枏以書來乞和, 請稱伯, 復增歲幣, 軍錢, 誅蘇師旦函首以獻.
이라 하였다. 그러나 금군은 韓 胄의 首級을 요구하였다.
寧宗皇后 楊氏와 禮部侍郞 史彌遠이 평소 한탁주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차에 금이 한탁주의 수급을 요구하자 이에 寧宗에게 상주하여 한탁주의 수급을 금에 보내어 사죄하자고 하니 영종도 이를 받아들이었다. 이에 사미원이 密旨를 받아서 殿前司公事 夏震에게 명을 내려서 玉津園에서 주살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嘉定元年) 3월에 한탁주의 수급을 兩淮에 효수토록 詔書를 내렸다. 그리고 그해 3월 庚寅에 和議가 이루어 졌다. 그 내용은
① 靖康故事에 따라서 금•송의 帝室은 伯姪관계로 할것.
② 歲幣를 銀絹 각 30만량필로 증가할 것.
③ 송은 별도로 軍銀으로 300만량을 금에 주고 금이 점령한 淮陜지방을 송에 귀환시킬 것으로 하였다.
이 역시 명목보다 내용은 以小事大의 조공이라 하겠다.
4. 기 타
위의 두 범주(형식 및 실질조공, 실질 조공)에는 들지 않으나 이와 유사한 경우도 있었다.
隋末 북방의 군웅들이 모두 돌궐의 원조를 바랬으며 李淵도 거병 후 곧 劉文靜을 돌궐에 보내어 始畢可汗에게 稱臣하고 맹약을 맺었다. 이후 당이 세력이 커지면서 돌궐이 도리어 당에 칭신하게 되었다.
또 1146년(皇統 6년)의 경우 金 熙宗이 蒙古의 合不勒可汗을 정벌하려 하다가 도리어 패하여 부득이 和議하여 西平河 이북의 땅을 할양하여 주고 매년 소, 양, 쌀, 콩 등을 보내었다. 이 두 나라는 같은 북방계민족이지만 강약이 부동일때에는 이러한 질서로써 해결하였다.
南宋 理宗때에는 蒙古의 忽必烈이 長江을 건너 鄂州를 포위하자 宋 右丞相 賈似道가 몰래 宋京을 軍中에 보내어 蒙古에 稱臣하고, 江南을 경계로 삼고, 매년 은과 비단 각 20만냥필을 줄 것을 제의한 일도 있었다.
이것은 賈氏의 사적인 뜻이겠으나 관직이 우승상이였다면 전적으로 私意로 치부하기에는 문제가 있는 대목이다.
5. 結 論
어쨌든 奉表稱臣하고 朝貢을 바친 것은 북방민족이 중원 한족국가에 대한 의례정도로 이해하기 일수였다. 그러나 중원의 통치자가 북위, 요, 금, 원, 청일때도 있었고, 또 중원에 자리잡은 한족국가가 북방민족에게 稱臣하고 朝貢을 바친 예도 있었다. 혹은 형제나 숙질간의 관계로 맹약을 하면서 물화를 바치거나 영역을 떼어 주는 등 국가존립의 위기에 몰린적이 여러차례 있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한제국의 건국 초기에는 흉노의 세력에 밀려서 공주를 婚嫁시키는가 하면 재화도 정기적으로 보내었다. 그리고 후진은 그 건국부터 거란의 후원하에 이루어졌고 책봉도 거란 태종이 직접 하였을 뿐 아니라 군신관계, 부자관계로까지 발전되었었다.
남송 고종은 금에 대하여 奉表稱臣하며 매년 歲貢을 바치고 正旦에 사신을 보내어 치하는 등 군신의 예를 다하였다.
형식요건은 다 갖추지 않았어도 실질적으로 조공을 바친 예는 매우 많다. 우선 북송과 거란사이에 맺어진 淵盟約은 송이 매년 거란에 비단 20만필과 은 10만냥을 보내고, 거란 성종은 송 진종을 형이라 호칭하도록 서약하였다. 또 정강연간 북송과 금이 강화할 때에도 강화내용이 지극히 굴욕적이였다. 송은 수많은 물화를 금에 주고 金主를 백부로 대우하고 三鎭을 할양하고 재상과 친왕을 인질로 한다는 것이었다.
隆興年間에도 남송과 금사이에 강화조약을 맺었는데 이때도 역시 굴욕적이였다. 송주는 금주를 숙부로 부를 것, 송은 매년 歲幣를 금에 바칠 것으로 되어있다.
嘉定年間 남송과 금사이의 강화조약도 정강고사에 따라 금•송제실은 伯姪관계로 할 것, 歲幣를 은견 각 30만냥필로 할 것, 송은 별도록 軍銀 300만냥을 금에 줄 것 등이다.
이 밖에 당 고조 이연이 돌궐의 始畢可汗에게 칭신한 것이나, 금 희종이 몽고에 땅을 떼어 주고 가축과 곡물을 몽고에 매년 보낸 일이나, 賈似道가 몽고에 칭신하려던 일 등이 있다.
위의 예를 본다면 주종관계이던 조공관계이던 국가 세력의 강약에 의한 질서였지 군왕의 덕화에 감화되어 스스로 조공을 바치고 조근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
설령 주종관계가 성립되었더라도 시대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었으므로 성격규명도 달라야 할 것이다. 또한 宗藩관계라는 용어의 宗이 반드시 한족국가만이 아니였음도 알 수가 있다.
뱀다리 : 한마디 하고 싶은것이 있습니다. 이른바 한국학계(역사학계든 다른 학계이든)에서 자행되고 있는 어이없는 행위에 대해서입니다.
왜? 그들은 한글을 이용할 생각을 안 할까요?
물론 몇몇의 역사용어들은 그 의미의 정확한 전달을 위해서 반드시 한자를 활용해야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結論"(결론)같은 말은 한글로 하여도 그 의미전달에 문제가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納貢와 같은 경우도 납공(納貢)와 같은 식으로 하여서, 비전문가들의 접근성을 높일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이런 관행들은 되도록 빨리 고쳐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면, 한자공부해라따구의 말을 하는 것들아. 나 중국땅에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생활이 한자이다. 한자 많이 쓰면 폼나보이냐? 딴 사람이 못 읽으면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냐? 웃기는 넘들.--> 잠시 흥분했음-_-;;)
10월 1일은 중국의 국경절이다. 중국인민은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 100년넘는 인민혁명에서 위대한 승리를 하였다. 그리하여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식성립을 선포하였고, 중국역사상의 위대한 전환점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1949년 9월의 정협(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全国委员会,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전국위원회)1차1회회의상에서 10월 1일을 국경절로 정하였다.
바로의 중얼중얼 :
국경절은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새워진 날을 기념하려고 만든 날이다. 한국과의 차이점을 말하자면, 이들은 10월 1일부터 근 10일간을, 다시 말해서 10월 10일까지, 내리 공휴일이다. 그런데, 이런 명절이 두개 더 있으니, 그것은 구정연휴와 노동절이다. 중국에서는 보통 구정연휴때 시골로 내려가기 때문에, 국경절은 여행의 황금기이다.
추석(중추절)과 같은 경우, 국경절과 기간이 겹치거나 혹은 조금 빠른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월병(한국의 전통한과와 비슷한 과자)를 대충 사먹고 넘겨버린다.
특히 이번 국경절의 경우, 후진타오체계로 완전 이양된 후의 처음 맞이하는 국가행사인만큼 신중을 기하고 있다. 일단 이 기간만 되면, 맨 위에 사진에 보이는 천안문광장으로 출입하는 것은 엄청나게 힘들게 된다. 왜냐하면, 중국에 산재되어있는, 특히 티벳과 위구르, 소수민족들이 독립을 위하여 테러행위를 자행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저 천안문광장 주변에는 온갖 국가중요시설 및 요인들이 머물고 있다. 더도말고 반경 5km만 초토화되면 중국은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그 외에도 중국이 개혁개방을 외칠 수록 벌어지고 있는 빈부격차 역시 큰 문제점으로 이로 인한 범죄행위도 심히 문제시되고 있다.
중국은 지금 변하고 있다. 세계의 강대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수 많은 문제점들도 산재되어있다. 중국인들은 이 모든 고난을 이기고 당당하게 오성기를 휘날릴 수 있을까?
마오저동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발표한 장면
무식하게도 많이 모인다.
"中华人民共和国正式成立了!“
...이번에도 TV에서 마오저동의 이 말이 나오겠지...
뱀다리 : 한국인 유학생들은 저 기간에 뭐하냐고? 일단 왠만하면 여행다닌다. 10일연휴면 못 갈 곳이 없다.+_+ 물론 한국갔다 오는 넘들도 있다.그리고 저처럼 돈 없는 넘들은 그냥 북경에서 방콕을 하거나 알바찾아서 댕긴다....본인...돈만 충분했어도 여행가고 싶다!!!
저는 신고와 의고의 논쟁을 정리하던중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는 지금 중국인이 아니지만 북경대학교역사과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런 특수한 상황하에서, 문화국외자의 입장에서, 결론을 내리자면, 지금 현재 중국사학계에서 유행하고 있는 신고학풍은 중화사상의 낙인이 찍혀 있는 상태로 중국의 문화패권주의로 변질되고 있는것이 아닐까요? 중국사학계는 과학적인 분석을 포기하고, 중국문화패권주의의 건설을 위하여 역사를 이용하고 있는것은 아닐까요?
다만, <좌전>이 없다면 어떻게 중국선진시대를 연구할 수 있을까요? 이런 개념속에서 생각한다면, 서방의 문헌무시풍조의 중요한 문제를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건의한다. 내부자는 가능한한 자신의 역사전통에 대한 객관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며, 외부자는 그 전통을 중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같은 중간자들의 노력도 필요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바로의 중얼중얼
2000자도 안되는 1시간만에 다 적어버린 심심파적식 레포트였습니다. 그리 큰 내용은 없습니다. 단지, 지금 현재 중국의 사학계의 학풍이 조금 무서워서, 그들이 문화패권주의로 나아가기 때문에, 그것을 경계하고 싶은 마음에서 적어내려간 것입니다^^ (볼 사람도 없는 이딴 글은 왜 올리는거야!! -_;;)
xiaoxuan - Blog for 小玄子家
校园博客里人气越来越旺一点了!不过看的多了,评论交流的少了,看最新评论,还是有数的那几条。这似乎大大降低了博客的效用。我们博客的,就是要参与,每一个人都是博客的思想者。只有汇总我们的意思,从而产生一个总体的意义。
번역 : 학원블로그(블로그코리아같은 곳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에서의 새글 숫자는 많아졌지만! 보는 사람만 많지, 덧글을 다는 사람은 적습니다. 새로운 덧글은 몇개밖에 보이지 않는군요. 이것이 블로그의 효용을 줄이는거 같습니다. 우리 블로거들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한명 한명의 블로거들은 모두가 사상가(참여자)들입니다. 우리의 의견을 모여야 전체적인 의의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우리 의견이 모이고 모여야 진정한 블로그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것입니다.)
(역시 막가파 직역번역^^)
바로의 중얼중얼
이것을 보면서 "태터 멤버 답글달기 운동"이 생각난것은 우연일까요?
중국블로그나 한국블로그나 참여도의 문제는 존재하는거 같습니다.
저도 RSS로 구경만 하지 말고 답글달기를 생활화해야될거같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하루 기본 100명접속인 제 블로그는 대체 왜!
덧글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거죠? 슬퍼요 저... (...사실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지! 답글 달아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