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씨가 결국 재보선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개인적인 느낌은 바보짓이라는 것 이다. 그는 이로서 다음 대선을 포기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왜 그러한가?

1) 고향의 반응은 안 좋다고...
본인의 친가는 전북에 있다. 본인이야 여기저기 이사를 하면서 살아서 고향 개념이 없지만, 이번에 할머니의 제사로 내려갔다 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쪽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는데, 엄청나게 간단하다.

"뽑아주기는 할거야. 근데 오지 말라는 거야"

뽑아주기야 당연히 뽑아 줄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대선을 노린다는 사람이!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면 어쩌냐는 것이다. 상당히 실망했다는 반응인 것이다. 물론 대선을 노리지 않고, 그냥 조용히 국회의원이나 하겠다면 말릴 생각이 없다. 그런데 다른 이야기를 들으니 그리 쉽지만은 않다.

2) 민주당 내부 갈등을 만들려고?
민주당 내부에서의 갈등이 있다고 한다. 정동영씨가 떠난 뒤에 정동영계열이 조금 무시를 당했나보다. 그로 인하여 조금의 갈등이 있었왔다고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도 오는 것이다. 이것도 한마디로 정의해주면...

"왠 재보선입니까? 그냥 당 지도부에 들어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어떻게 생각해보아도, 이는 정동영계열 챙기기라고만 하기에는 좀 그렇다. 단지 자신의 조그마한 이익을 너무 보고 있다. 국회의원이 작은 이익이냐고 물어본다면, 한 때 대권을 노렸고, 지금도 노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작은 이익이라고 해주겠다.

3) 결국 그는 대선을 할 그릇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정동영씨는 결국 온갖 눈치를 다 보고 있다. 그리고 조그마한 이익을 쫒고 있다. 그는 재보선 할까 말까? 라고 하면서 상당히 긴 시간을 여론눈치보기를 하였고, 그 목적은 끽해야 국회의원 자리와 당내 주도권 장악이다.

한심하도다. 국민의 뜻을 듣는 것과 눈치를 보는 것을 구별을 못하는구나.
큰 것과 작은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구나.


정동영씨. 그냥 원래 계획대로 중국으로 오십시오. 원래 계획이 중국 청화대에서 있으시려고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곳에 오셔서 한국의 국회에서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지중파"의 수를 늘리시는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최근 중국네티즌의 가장 큰 관심사는 한 90년대생의 인터넷을 통한 자살 생중계이다. 중국어를 하시는 분은 직접 (90后女孩网上直播自杀)로 검색하시면 된다. 제목을 통해서 대충 알 수 있다 싶이, 인터넷을 통해서 자신의 자살과정을 보여주었다. (죽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반하게 생겨서 왜 그러냐...후..

상당히 심각한 사진도 있음으로 일단 가리도록 하겠다.
굳이 보시겠다는 분은 말리지 않겠다.

* 아래의 사진 중 몇몇 사진은 티스토리측의 삭제요구로 인하여 문제가 된듯한 사진을 삭제했습니다. 남은 사진까지 문제삼으신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해당 사진은 제가 일단 가려둔 상태였고, 원하는 분만이 볼 수 있는 상태였음을 생각하면 "혐오물"이라는 약관에 위반되는지 애매하군요. 전 분명히 보도 차원에서 일단 모든 사진을 올렸고, 심각한 사진이 있다고 하여 사람들이 보는 것을 추천하지 않았습니다.

* 티스토리 주소 : 바로바로의 중얼중얼(http://www.ddokbaro.com)
* 비공개 포스트 : 자살도 생중계 시대 - 중국 90년생에 대하여(http://www.ddokbaro.com/1977)
* 비공개 일시 : 2009-03-17 22:50
* 조치 내용 : 포스트 비공개 전환
* 비공개 사유 : 위 포스트는 [혐오물 게재] 관련으로 포스트를 비공개 처리하였습니다.


일단 중국의 "90년대생"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될 듯 하다. 과거에도 이야기 했듯이 중국의 90년대생은 "삶의 목적이 없다"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중국이 이미 일정정도 발전한 시기에 외동으로 태어났다. 80년대생들은 어린시절 "못 살던" 중국을 기억하고 있는데 반하여, 90년대생들이 세상을 볼 때에는 이미 일정정도의 발전이 이루어져 있었다. 물질적으로는 온갖 것을 향유했던 것이다. 특히 집안에서 단 한명의 자식인지라, 온갖 "왜곡된" 사랑을 받고 자라나게 된다.

물론 90년대생들의 톡톡 튀는 생각들은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하지만 그 톡톡 튀는 생각들이 일정한 목적이나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무목적성 혹은 세상에 대한 반발...단지 심심해서로 나오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중국뿐만이 아니라 한국에도 있다. 마침 때를 같이 하여서 한국의 연예인 장자연씨의 자살 또한 이슈가 되어가고 있다. 장자연씨의 자살이 현재 중국 네티즌의 2번째 화제 검색어이니 말이다. (물론 이는 중국의 실명화을 위한 홍보와 연관이 있는듯 하지만 일단 정확하지 않으니 패스...)

그리고 한국의 자살이 더욱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회에서 일정한 위치를 가진 사람의 자살은 아무것도 없는 90년대생의 자살에 비하여 그 문제가 당연히 더 크다. 이는 기존의 사회가 요구하는 소위 성공이라는 것이 실질적으로 개인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는 소리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한 사진을 올리는 행위의 경우에는...본인의 경우 별 새로운 느낌은 없다. 본인의 친구녀석들은 싸이코가 많고, 그 중에서 90년대에 이미 자신이 손목을 그은 사진을 홈페이지 메인 사진으로 올려서 본인이 무지막지 욕한 인간도 있으니 말이다.(그녀석..예쁘게 나오지 않았냐며-_-;; 스캐너 위에 랩을 쓰우고 해서 그렇다고 자랑질 하던 모습은 아직도 못 까먹는다.-_-+)

각설하고 본인은 자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게 삶이 무료한가? 그렇게 관심을 받고 싶은가? 하고 싶은 것 많은 본인으로서는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남은 삶을 인수받고 싶다. 대체 왜 자살하는가?! 엉?!

이 글은 티스토리의 개인 정보 유포 금지 및 명예훼손에 대한 안내에 대한 의견입니다.

이 공지는 조금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 공지는 조금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한 실명공개는 헌법에 있는 언론에 자유 조항으로 인하여 위법성에 조각이 됩니다. 쉽게 말하자면 실명 공개를 하고, 사실을 적시한다면 일단은 명예훼손이지만, 공공성이 목적이면 유죄가 아니게 됩니다.(이 부분을 명시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욕설을 한다면 문제이지만, 개인적인 의견이나 명확한 사실을 적시한다면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보입니다. 이 사실 역시 제대로 알려드리는게 좋을듯 합니다.

특히 블로그의 미디어성을 강조하는 티스토리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더욱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명을 직접적인 언급 뿐만이 아니라, 간접적으로도 언급하지 못한다는 것은 미디어성을 포기하겠다는 소리와 그리 다르게 보이지 않습니다.

단! 다시 말하지만 일방적인 욕설과 허위사실은 분명히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법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네티즌 스스로 조심해야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 알 수 없는 이유로 글이 날라가버렸더군요. 다시 올립니다.
해당 블로그는 여러 블로그를 관리하기 귀찮다는 이유로 쉬고 있습니다.

저의 블로그는 ddokbaro.com 입니다만...중국에서는 정상적인 접속이 불가능하군요.
아래 방법을 사용하시고, ddokbaro.tistory.com 으로 접속하시면 됩니다.



현재 중국에서 티스토리를 접속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접속 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이 방법을 알면서도 개인적으로만 다른 분들에게 알려드렸습니다. 일단 중국정부가 더욱 더 저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했고, 중국쪽에서는 어차피 제 블로그에 접속이 안되니까 말입니다.

중국에서야 이것에 접속할 수 없고 볼 수도 없겠지만 중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알려주시면 좋을듯 합니다. 참고로 이 방법 말고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만, 스스로의 블로그를 관리하는데에는 이 방법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C:\WINDOWS\system32\drivers\etc
폴더로 가보시면 "hosts" 라는 문서가 있습니다.
(비스타의 경우, 해당 문서를 바탕화면으로 복사한 뒤에 수정하고 다시 덮어쓰기는 것을 추천)

해당 문서를 노트장으로 열고
맨 아래에 아래같은 형식으로 추가

211.172.252.9 ddokbaro.tistory.com
211.172.252.9 pkukorea.tistory.com

앞에 붙어 있는 211.172.252.9 는 티스토리의 ip입니다. 그리고 뒤쪽에는 자신의 블로그 주소를 적어주시면 됩니다. 일단 티스토리에 있는 사실상 거의 모든 블로그가 위의 IP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2009년 3월 3일 기준 - 당분간은 변동이 없을 것입니다. 변동되었다고 하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제보 부탁드려요^^)

만약 티스토리 외에 다른 서비스의 IP을 알고 싶으시다면 :

ip 아는 법
원도우 시작 -> 실행 -> cmd
tracert ddokbaro.tistory.com

해당 방법은 티스토리 외에 중국정부에 의하여 접속이 막힌 모든 싸이트와 블로그에 사용 가능

인류가 자주 쓰는 말들 중에서는 그 뜻을 쉽게 말하기 곤란할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서 정신(精神)이 그러하다.

정신은 물질(物質)과 대립된다. 먼저 물질의 뜻을 거칠게 표현해보자. 물질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피부와 손발로 만질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정신은 물질과 반대개념이다. 그렇다면 정신은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피부와 손발로 만질 수 없는, 오직 사람의 마음에 의한 감응과 경험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은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단지 인간의 마음에 의해서만 자신을 드러낸다고 한다. 이는 감응 당하는 것도 비물질이고, 감응하는 것도 비물질이다. 쉽게 말하자면, 그것은 단지 인간의 마음에서 생각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마음이란 사실 생각하는 것일 뿐이고, 사유하는 것은 사유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는 어떠한 물질적인 요소도 없다. 그리하여 볼 수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아래쪽에서 다시 자세하게 말하도록 하겠다.

생명과 물질은 반대된다. 물질은 지각이 없는 것이고, 생명은 지각이 있는 것이다. 사실 풀과 나무들도 지각이 있다. 단지 그들의 지각은 마취된 상태에 있을 뿐이다. 동물의 지각은 풀과 나무보다 선명하다. 마비 상태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다. 하지만 동물도 지각이 있을 뿐, 마음이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인류만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각은 외부에서 온 인상들로 생겨난다. 그에 반하여 마음은 자신 스스로 생각하여 성장한다. 그래서 동물은 지각 속에는 물질계만 있을 뿐이고, 정신계는 없다. 정신은 인류의 마음 속에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과 정신이라는 두 단어를 자주 혼용해서 쓰는 것이고, 이는 당연한 일이다.

인류의 마음은 어떻게 발달하는가? 인류 역시 최초에는 지각만이 있고, 마음이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인류는 동물과 같았다. 단지 외부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물질계를 받아들일 뿐이다. 그러나 외부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물질이 사라지면, 그러한 물질에 대한 지각도 사라지게 된다. 반드시 다른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을 그의 귀와 눈과 몸에 내놓아야지 다시금 새로운 지각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지각은 대체적으로 피동적이고, 어떠한 것도 남기지 않는다. 이러한 지각들이 인상이 되고 사라지지 않을 수 있어야 지각이 기억으로 전환 된다. 기억은 단지 그가 이전에 했던 지각을 지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외부에서 온 구체적인 물질로 인해서 생겨난 지각이 아니라, 이전의 지각을 다시 지각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기억이다. 기억의 기능은 인류 속에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인류의 기억이 발달함에 따라서 마음이 생겨났다. 묵경(墨經)에서는 "앎은 이어가는 것이다.(知,接也)"라고 하였다. 인간의 지각은 외부 물질계와의 접촉을 통해서 생겨났다. 그러나 지각은 인상이 되었고, 쌓여나갔다. 그리하여 마음의 지각은 점점 물질계와 떨어져서 독립하게 되었다. 이제는 물질계와의 접속 없이 스스로 지각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마음은 자기 자신을 지각할 수 있고, 지각은 남겨두었던 인상을 지각할 수 있었고, 이것이 곧 기억이다. 우리는 감히 인간정신현상의 시작이 바로 기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류는 또 어떻게 외부물질계의 지각이 만들어낸 인상을 남겨두어서 추억과 기념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중요한 도구 하나가 있다. 바로 언어와 문자이다. 언어의 기능은 외부에서 온 인상을 더욱 정확하게 식별하여 분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다양하게 만든다. 몇몇 고등동물들은 추억과 기념이 있다. 단지 모호하고, 분명하지 않고,  뚜렷하지 않아서 단순하고, 확대하지 못하고, 다양하지 못하다. 왜 그러한가? 바로 그들은 언어가 없기 때문에 외부 접촉을 통해 얻은 인상을 분별하여 분리하고 구조화 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당신에게 수 많은 일들과 물건들이 있는데, 만약 따로 기록할 수 없다면, 끝내는 모호해지고 잊어버리게 된다. 인류는 언어를 만듬으로서 외부에서 온 모든 인상들을 분류하고 구조화하여 하나 하나를 정한 소리로 불러서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물질의 이미지를 점차 지각 내부에 쌓아놓고 이미지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런 행동들은 점차 정신계로 향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지가 소리를 통해서 객관화된다고 할 수 있다. 문자는 언어의 부호화이다. 여러가지 부호로 이루어진 문자가 있음으로 하여 마음은 더더욱 멀리 나가게 된다. 인류는 소리(언어)을 통해서 인상을 배치하고, 다시 부호(문자)을 이용하여 소리를 대신하였다. 언어는 마음을 외부에서 식별할 수 있게 해주었고, 문자는 마음을 외부에 기억하게 하였다. 바꾸어 말하자면, 언어와 문자를 통해서 마음의 식별과 기억의 기능이 객관화되었다. 그래서 언어문자는 마음의 기능을 밖으로 폭로하고, 의지하게 하여 마음의 기능을 객관화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지각(마음의 기능의 초보단계)가 천천히 언어(문자 포함)를 만들게 되었고, 언어(문자 포함)로 인하여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말하게 된다. 마음이 곧 정신이며, 마음의 기능 역시 곧 정신이다.

인류에게 언어가 없었다면, 기억도 없었을 것이다. 기억 자체는 동물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인류의 고급기억과는 다르다. 당신이 기억을 할 때에, 그것은 분명 당신 마음의 “소리 없는 말”이다. 기억이 있음으로해서 사상이 있을 수 있다. 기억은 사상(思想)의 재료이다. 만약 당신의 마음속에 아무런 기억이 없다면, 당신은 어떤 재료를 이용해서 사상을 만들 것인가? 인류의 사상 역시 일종의 마음속의 “소리 없는 말이다” . 만약 언어가 없다면, 사상이 만들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상은 단지 “소리 없는 말”일 뿐이다. 다른 동물들은 말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상이 없기 때문이다. 인류는 말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사상이 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마음 속에서 사상을 만들고, 사상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언어와 문자를 통해서 표현한다. 그러나 넓은 시야로 그 시작을 생각한다면, 인류는 언어가 있음으로 해서 사상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상이 있음으로 해서 마음을 지각할 수 있게 되었다. 생리학에서의 마음은 단지 혈액의 움직임일 뿐이다. 생리학에서의 뇌는 지각과 기억의 중축이다. 이것은 모두 여기서 말하는 마음이 아니다. 생리학에서의 뇌는 진화하여 정신계의 마음을 만들었고, 이것의 최대 공로는 언어문자에 있다.

언어와 문자가 있음으로 해서, 인류는 지각은 서로 소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창고가 되었다. 인류의 협소한 마음이 거대하고 영원하게 되었다. 인간의 마음은 이미 그들의 머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이미 육체를 초월하여 외부에 존재한다. 가령 당신이 마음의 기능을 하늘에 있는 전기라고 한다면, 언어와 문자는 곧 전선과 축전기이다. 마음대로 돌아가니는 전기는 축전기와 전선이 있음으로 하여 큰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하나의 마음이 이처럼 거대하고 영원하며, 육체를 초월하고, 모든 인문이 발달해가는 것은 모두가 이 마음들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정신계를 보아야 한다.

이 정신계의 마음은 개인을 초월하였고, 또한 비물질적이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인류에게 언어와 문자가 생김으로 인하여, 한 사람이 외부의 다른 사람의 기억과 사상을 접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위에서 논한 것 처럼, 기억과 사상이 원래 언어와 문자에 기생하는 것이고, 언어와 문자가 발달함으로서 완성된 것이라고 본다면, 언어와 문자는 인류 공통의 것이다. 결코 내것 니것이라며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기억과 사상 역시 본질상 인류 공통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시 니 것 내 것을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인류의 뇌와 손은 생리방면의 것으로 물질에 속해있다. 그래서 너와 나를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생리적인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 본질상 예전부터 모두의 것이었고, 너와 나를 강제로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명확하게 말하자면, 마음은 여러가지 기억과 사상이 쌓인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여러 기억과 사상은 언어와 문자를 사용함에 따라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와 문자는 혼자만의 것이 아니한데, 어찌하여 마음이 나 혼자만의 것일 수 있겠는가? 단지 당신이 당신 사회에서 통용되는 언어와 문자를 안다면, 당신은 당신 사회의 다양한 기억과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두껍고 다양한 지식들은 역사가와 철학자들에 의해서 세심하게 다듬어 지는데 이는 일단 언급하지 않겠다. 글을 모르는 사람 역시 그가 말할 수만 있다면, 수 많은 그가 속한 사회의 다양한 기억들과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들은 자연적으로 그의 뇌 속에 가득차며, 그의 마음을 만든다. 만약 한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귀먹어리라서 결코 외부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그래서 그가 언어를 배울 수 없다면, 혹은 태어나자마자 장님이어서 인류가 발명한 다양한 문자와 부호들을 배울거나 사용할 수 없다고 하자. 이런 사람들은 단지 뇌만이 있을 뿐이다. 마음이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는 단지 지각이 있을 뿐이지, 기억과 사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설사 기억과 사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고급동물과 같을 뿐이다. 앞에서 말한대로 그는 단지 외부 물질계를 지각할 수 있을 뿐이며, 외부의 정신계와는 접촉할 수 없다. 인간의 영혼계와 접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하여 그는 단지 뇌만 있고, 마음은 없는 사람이다. 단지 동물처럼 정신생활을 접촉할 수 없는 사람이다. 위에서 말한 것 처럼, 우리의 정신은 결코 자연계에서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문사회의 유구한 역사를 통해서 온 것이다. 그러나 개인에게는 정신에서는 나의 객관적인 존재는 너무나 미약하다. 다른 말로 하여, 정신은 선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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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인 쳔무(钱穆)에 대하여 궁금하신 분은 쳔무(钱穆)는 누구인가?
본 글은 모든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과 환영합니다.  본 글은 의역식 번역입니다.
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와우~ 죽어라 길더군요. 아마 그의 문장 중에서 제일 긴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대충 40분 걸렸군요. 퇴고...일단 할 생각 없습니다. 모래 올릴 것을 미리 번역한 것인데, 과연 모래 올리기 전에 이 글을 퇴고할까요? 아님 그냥 올리려나요? 기대해 주셔요. (나름 퇴고했다 -_-;;)

인간의 모든 사상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하지만 언어가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의 사상은 어떻게 해야되는가? 역시 우리 모두의 것이다. 왜냐하면 번역이라는 서로 다른 언어를 연결해주는 통로가 있기 때문이다.

몇몇 분들이 한국의 정당을 중국어로 무엇이라 하는지 검색해서 들어오시더라.
그래서 마련한 간략한 중국어 시간!

한나라당 = 大国家党 da guo jia dang
친박연대 = 亲朴联盟 qin piao lian meng
민주당 = 民主党 min zu dang
민노당 = 民劳党 min lao dang
진보신당 = 进步新党 jin bu xin dang 
자민련 = 自民联 zi min lian


왜 한나라당을 대국가당이라 부르는지 묻지 말아주시와요. 저도 모릅니다. 과거에는 저도 韩国家党, 一国家党이라고 해야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말이죠. 친박연대로 연대가 아닌 "연맹"입니다. 이것이야 중국에서는 연대보다는 연맹이 더 익숙하니 이렇게 했다고 생각되는군요.

사실상 한나라당하고 친박연대을 제외하고는, 제가 언급하지 않은 다른 당들도 기본적으로 그냥 한자 그대로 쓴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문제는 한나라당과 친박연대입니다.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본인 미디어의 놀라운 소설쓰기에는 이제 더 이상 할말도 없을 뿐이다. 이는 중국과 한국 모두의 미디어 모두 동일하다. 어떤 일이든 "팔릴" 만한 것을 어떻게든 부풀린다. 이번 카인과 아벨이 반한정서를 일으켰다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이번 카인과 아벨에서 중국쪽에서 문제가 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자 주인공이 상하이 푸동공항에 도착한 이후, 상하이의 번화가를 찍지 않고, 오래되고 허물어진 낙후된 거리들을 찍고 있다는 것이나, 남자 주인공이 한국에서 가지고 온 약들로 중국의 빈곤한 사람들을 치료해준다거나와 같은 중국을 못사는 나라로 묘사하는 것이고, 중국의 감옥을 결투장처럼 묘사하는 것이다. 또한 상하이에서 납치당해서 몇 시간만에 갑자기 사막으로 가는 것은 기본적인 고증이고 머고 없는 짓이다.

죄송합니다. 중국에 소매치기가 너무 많아서요.

이런 일은 "카인과 아벨"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꽃 보다 남자" 에서도 마카오를 소매치기와 깡패들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에덴의 동쪽"의 여 주인공도 납치당하면서 "너희 중국사람들 뭘 하려는 거야"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중국의 좋지 않은 모습만 보여주는 것에 몇몇 네티즌들이 비판을 하는 것이다. 마치 007에서 한국을 논과 밭만이 있는 곳으로 묘사를 하고, 그에 대해서 네티즌들이 비판을 했던 것과 같은 모양이다.

이는 처음 한 블로거가 정리해서 쓴 내용이며, 이런 내용이 왕이(网易)에 올라왔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조그마한 일을 한국쪽 언론이 반한이라며 부풀린다. 왜 조그마한 일이라고 하느냐? 본인의 한국어 학생들도 보통 큰 일은 언급하고는 하는데, 이번 일은 언급조차 없으며, 본인 자신도 다른 분들이 남겨주신 덧글로 이 일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관련 기사를 몇 개 보지 못하였다.

중국이 무슨 미국인줄 아는가? 무법천지도 아니고 말이다 -_-;;;

가장 큰 문제는 반한의 정의 자체가 야시꾸리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아내의 유혹"이라는 드라마는 중국에서도 인기이다. (아..짜증난다.) 그런데 어떤 중국인이 아내의 유혹은 쓰레기 드라마라고 했다고 해보자. 그럼 반한인가? 하나의 한국 드라마가 쓰레기라고 한국 모든 것이 쓰레기 인가? 반대로 본인이 주성치의 장강7호를 보고서 맹렬하게 비판을 하였다. 그럼 중국영화는 다 쓰레기이고, 중국은 다 쓰레기 인가?

실제로 이 이야기를 최초로 올렸다고 알려진 블로거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아래의 한국 친구처럼 보이는 분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카인과 아벨"에 대해서 쓴 글일 뿐이지, 모든 한국 드라마나 한국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각각의 문화는 각각의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개인 역시 한국 드라마를 즐겨 봅니다. 저는 단지 어떤 부분 배워야될 점이고, 어떤 부분은 경계해야될 점인지 여러분들이 알기를 바랄 뿐입니다. 정치고 경제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어떻게 해도 유치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한가지를 묻고 싶습니다. 만약 한국을 나쁘게 묘사한 영상 작품이 한국에 상영을 한다면, 당신의 국민들은 단지 슬퍼만 해야될까요? 이것이 당신이 말하는 소위 자존심이 있는 것입니까? 아! 제가 깜빡하고 본문에 작성하지 않았는데, 이 드라마에서 가장 나쁘게 묘사된 것은 북한 입니다. 당신들의 동표이죠.

http://blog.163.com/bad-guy/blog/static/10710669220092103536349/

이 사람은 어디까지나 한국드라마 팬이다. 그런 사람이 상당히 차분하게 위의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된다. 한국 드라마 중국 팬이 중국을 너무 안 좋게만 묘사한다고 말하는 것이 반한정서를 논할 정도인가? 만약 이 사람의 글로서 반한정서가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반한정서는 해당 드라마를 본 사람들에 의하여 생각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디까지나 우선적으로는 한국 드라마 팬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팬들을 적으로 돌리는 한류?!가 언제까지 갈 것 같은가?

자신의 나라의 좋은 면을 너무나 보여주지 않고, 나쁜면만이 나오면 너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한류를 노린다는 한국의 업계에서는 특히 이를 의식하여야 한다. 상하이에는 분명히 아직 빈민촌이 있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서울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체적으로 상하이는 상당히 발전한 도시이다. 오히려 서울보다 더 발전했다고 감히 말할 수도 있는 곳이다. 차라리 상하이가 아닌 중국 농촌이 배경이었다면 중국 사람들도 비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상하이에서 몇 시간만에 사막으로 가는 것은 웃기지도 않는다. 이건 기본적인 고증 자체가 안된 것이다.

오히려 이런 이야기는 한류를 말하는 한국의 업계에서 조심하고, 반성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마치 그리 크지도 않은 이런 일을 가지고, 반한정서를 운운해가면서 스스로 반성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웃기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한국 드라마 팬인 중국 블로거가 쓴 글로 한국에 대한 악감정을 만들어서 팔아먹는 왕이를 비롯한 중국 미디어나! 그것을 가지고 와서 어떻게든 부풀려서 중국에 대한 악감정을 만들어서 팔아먹는 한국의 미디어나! 작작해라.

본인 "호수 위의 한가로운 생각"을 쓰게 된 것은 올해 봄부터 시작된 한 친구의 종용 때문이었다. 그래서 약 4개월 간 만지작 거려 30편의 문장을 책으로 엮었다. 사실 본인의 생활을 그렇게 한가롭지만은 않다. 그래도 언제나 태호(太湖)에서 유유히 자연과 하나됨이니, 어느 정도의 한가로움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인의 사상들은 이러한 한가로움 중에서 싹이 트고 자라났던 것이다. 사실 본인의 생각은 그렇게 현실적이지 않다. 이는 지금 현재의 실제 인생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도움을 줄 생각도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본인에게 현재의 실제 인생 속의 다양한 문제를 풀 수 있는 지혜나 능력이 있다고 도무지 생각하지 못하겠다. 그래서 이렇게 방관자처럼 한 구석에 서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한가로운 사유들을 펼칠 뿐이다. 본인은 이 20편의 문장으로 본인의 잡상이 모두 쓰여졌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단지 이 잡상을 3~4개월간의 한가로운 생활에서 만들어 한가롭게 기록한 것 뿐이다. 본인이 볼 때, 이 책을 보는 사람들은 3~4일 혹은 3~4시간내로 서둘러서 볼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만약 본인이 원고들을 오래 동안 발표하지 않고, 오래 동안 쌓아올려서 발표한다면, 독자들이 너무나 급하게 나의 <한가로운 생각>을 읽을까 두렵다.

속독은 "한가로운 생각"의 맛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먼저 30편의 문장을 발표하여 독자들의 급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앞으로 또 다시 한가로운 시간들이 주어진다면, 얇은 한 권 또 한권을 출판 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한가로이 독서할 수 있게 하고 싶다.

본인은 이 <한가로운 생각>을 통하여 고대의 선진제가들(유가,묵가, 도가, 법가)처럼 일가를 이루어서 세상에 뜻을 펼치고자 함이 아니다. 또한 송명의 이학자선생님들(정호, 정이, 주희, 육유, 왕양명)처럼 절학을 계승하거나 하나의 학파(道统)을 만들고자 함이 아니다. 본인은 결코 서방 유럽의 철학자들처럼 계통적이며 조직적일 뿐 만이 아니라 엄격하고 정밀하게 논리적인 진행을 통해서 하나의 객관적인 진리를 발견하고 우주와 인생의 비밀을 계시받기 위함이 아니다. 본인은 어디까지나 한가로운 생각을 한 것일 뿐이다. 본인은 첫 문장을 쓰고 있을 때, 결코 그 다음 문장을 생각하지 않았고, 두번째 문장을 쓰고 있을 때에는 처음 문장을 생각하거나 보충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본인이 한가로운 시간에 내키는대로 생각하고 쓴 것일 뿐이다. 어떻게 하리라는 것도 없으며, 단지 자연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본인은 이 <한가한 생각>을 쓰기 전에 본인을 종용한 친구는 이미 일정한 제한을 걸어왔다. 장편의 연속적인 글보다는 한 문장이 2~3천자를 넘지 않기를 원했다. 그리고 본인은 계속 그렇게 써내려갔다. 본인이 느끼기에 일정한 글자 수의 제한이 있는 것이 오히려 번잡하게 만들지 아니하였다. 마음 속에 무엇을 써야겠다고 미리 생각을 해버리면, 처음 펜을 잡을 때의 한가로움이 사라져버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2~3000자는 불현듯 흐르듯이 써버린다. 또한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동상처럼 반드시 어떠한 이론을 만들겠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어떤 때에는 위에서 길게 말하고, 아래쪽에서는 조금만 말한다. 또 어떤 때에는 위에서 조금 말하더니 아래쪽에서 길게 써버린다.

그리고 본인이 글을 적을 때에는 미리 어떤 제목을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복잡하고 심도있는 것도 3~4000자안에 있고, 간단하고 평범한 것도 3~4000자 안에 있다. 글을 다 쓰고 난 뒤, 문장 속 한두자를 뽑아 제목으로 걸어놓는 것이다. 어떤 내용은 앞의 글에서 다 말하지 못한 것을 다음 글에서 보충하기도 하고, 앞에서 말한 내용을 다시 중복하기도 한다. 어떤 글은 다른 글의 예시일 뿐일때도 있고, 어떤 것은 두 글 간에 모순이 있고, 충돌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떤 것은 더 많은 말을 해야되나 귀찮아 그대로 펜을 멈추어 버린 것도 있다.

이 문장들의 순서는 모두 쓰여진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고, 다시 재배치 하지 않았다. 중간의 한두편은 예전에 쓴 글도 있는데, 고문체여서 간략하게 고쳐 썼다. 어찌 되었든 이 모든 것은 본인 한 사람에 의하여 4개월동안 쓰여진 것이니 만큼 분명히 어떠한 체계가 있다. 이 체계에 대해서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겠다.

단지 독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한가로이 만들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그럼 모든 것이 이해되고 용서될 것이다.

본인을 종용하여 이 책을 쓰게 한 사람은 씨에요우위이(谢幼伟)이다. 그는 션 신문(申报)의 부간(副刊)인 쉬에진(学津)에 사용하기 위함이었는데, 본인이 원고를 시작하자 폐간되고 말았다. 본인이 흥미을 이끌어 내어서 결국 이 조그마한 책을 있게 한, 씨에선생의 종용에 이 자리를 빌어 감사 올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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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위의 한가로운 생각"에 대해서 궁금하신 분은 호수 위의 한가로운 생각(湖上闲思录)은?
작가인 쳔무(钱穆)에 대하여 궁금하신 분은 쳔무(钱穆)는 누구인가?
본 글은 모든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과 환영합니다.  본 글은 의역식 번역입니다.
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머...어떻게 보면 이 한가로운 생각중에서 가장 한가롭지 않고, 가장 어려운 문장들이라고 해도 될 듯 하다. 큭....사실 지금에야 말하지만 中国思想通俗讲话가 번역하기에는 더 쉽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연집이고, 또한 본인의 전공은 아니지만 살짝 발을 걸치고 있는 내용인지라....그런데 여친님의 최종 결정에서 이 글로 선택되었다. 흑...앞날이 끔찍해라.

번역에 대해서 아시는 분은 아시리오. 문학작품의 번역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흑..ㅠㅠ

돈의 생김새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들어 있는 책의 모양과 같습니다. 이것을 친하게 생각하기는 형과 같아서 돈의 별명을 "형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런 덕을 쌓지 않았는데도 높임을 받고, 세력을 갖지 않았는데도 뜨겁게 맞아주는데, 청와대와 국회로 들어가서 위태로워진 것을 안전하게 만들고, 죽을 것을 살게 하고, 귀한 사람이지만 천하게 부릴 수 있고 산것이지만 죽이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하여 싸움이 일어나도 돈이 아니면 이기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 틀어 박혀서 꽉 막혀 있어도 돈이 아니면 그것에서 빠져 나올 수 없으며, 원수를 졌어도 돈이 아니면 풀어지지 않고, 멋있는 소문도 돈이 아니면 드러나지 않습니다.

여의도에서 금뱃지를 달고 있는 사람들과 일을 처리하는 인사들은 우리 집 "돈 형님"을 사랑하여 모두가 주체를 못하고 형님의 손을 잡고, 형님을 끝까지 끌어안고 있습니다. 무릇 오늘날 사람들은 오직 돈뿐입니다.

바로의 "위대한 돈 형님"


원래 원문은 서진시대의 남양(南陽)의 노포(魯襃)란 사람이 만든 전신론(錢神論 돈은 신이다 이론-_-)이다. 작가는 이 글을 통해서 돈을 중시하는 당시 사람들을 풍자했는데, 본인이 살짝 패러디 한 것이다. 이 시대가 대충 299년인데 1700여년이 지났는데도 별 다를게 없어 보이는 건 대체....원문은 다음과 같음.

南陽魯襃 作錢神論 以譏之曰 錢之爲體有乾坤之象 親之如兄字曰 孔方 無德而尊 無埶而熱 排金門入紫闥 危可使安 死可使活 貴可使賤 生可使殺 是故忿爭非錢不勝 幽滯非錢不抜怨 讎非錢不解 令聞非錢不發 洛中朱衣當塗之士 愛我家兄皆無己已 執我之手 抱我終始 凡惟錢而已
资治通鉴 卷第八十三 晋卷
이 책은 중국의 위대한 학자 쳔무(钱穆)의 수필집이다. (쳔무에 대해 더 궁금하시면 쳔무(钱穆)는 누구인가?) 그는 역사학자였을 뿐만이 아니라, 철학자였고, 문학자였다. 무엇보다 당시의 시대의 풍랑 속에서 학자다움을 잃지 않은 위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책은 매우 얇다. 전체 글자수가 9만여자에 불과하다. 한국어로 번역을 하여도 잘해봐야 30만자가 되지 않을 아주 얇은 책이다. 하지만 그 글자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는 내용은 그렇게 얇지 않다. 이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우리도 같이 물결조차 없는 호수에서 한자에 10번 생각하고, 한 문장에 100번을 생각하면서 한가로이 날아오를 필요가 있다.

현재의 치열한 삶 속에서 무슨 말이냐고 할지 모르겠다. 과거 동양의 조상들은 관직에서는 유교의 딱딱하고 절제된 예법에 충실하였지만, 그가 퇴근한 뒤 혹은 퇴직한 뒤에는 도가에 빠져서 삶을 향유하였다. 자연과 노닐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로움과 한가로움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알지 아니한가?

이 책은 쳔무(钱穆)가 1948년 봄에 그의 고향인 쟝수(江苏) 우시(无锡)의 지앙난대학(江南大学 - 강남대학) 의 교수로 있으면서 남는 시간에 작성한 글이다. 본 책은 1960년 5월 홍콩련셩출판사(香港人生出版社 홍콩인생출판사)을 통해서 최초로 출판된다. 그리고 1980년 그의 나이 86세에 실질적으로 점차 눈이 멀어가는 상태에서 산민(三民书局 삼민서국)을 통해서 다시 한번 세상에 나타나게 된다.  본 번역에서 이용한 책은 싼리엔 출판사(三联书店)의 2005번 제 2판이다. (ISBN 번호 : 7-108-02242-7)

본 글의 번역은 본인이 추구하는 이상대로 최대한의 의역을 구사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한국인들이 번역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읽을 정도의 수준을 추구할 것이며, 원문에서 한국어적 표현에 적합하지 않은 중국어만의 표현일 경우, 원뜻을 최대한 해치지 않게 생략할 것이다. 무엇이라고 해야될까? 이 책을 완벽한 직역으로 번역하는 것은 마치 이 책의 핵심 자체를 거부하고 무시하는 것과 같다는 느낌이랄까? 이 책의 핵심이 머냐고? "한가로움~" (너 원래 의역파였잖아라고 하신다면 할 말이 없군요. 하하^^)

본 글에 대한 어떠한 번역과 맞춤법 상의 조언과 비판을 환영한다. 단, 근거도 없이 단지 자신과의 번역 원칙이나 가치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쏟아부어지는 비난이나 악플에는 방긋 썩소와 함께 그 분의 영혼을 위하여 옆차기를 날려겠다.

본 글의 번역은 출판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본 글은 어디까지나 특별한 사건만을 보도하는 미디어성 기사의 인기에 빠져있던 스스로를 반성하고, 진정한 중국을 보여줄 수 있는 내용을 소개하기 위해서이다.(그래도 정말 중요한 사건이나 내용은 소개할 예정이다.) 또한 그 동안 오랜 세월 번역일을 하지 않았던 본인이 앞으로 소개할 전공책을 번역하기 전의 몸풀기 과정이기도 하다. (솔직히 이정도 분량은 왠만하면 30분내로 끝이다. 잘난 척이 아니라 본인의 중한 번역속도은 좀 빠르다.-_-;;) 앞으로도 이런 대중성인 내용은 계속적으로 조금씩이나마 번역하면서, 한국의 학계에 도움이 될만한 중국의 학문적 성과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전환해 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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