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5일 바이두와 북경대학교이 공동으로 설립한 중국인 검생행동 연구 센터에서는 <2007년 UCC 검색 행동 연구 보고>를 발표하였다.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네티즌들에게 가장 사랑받으며 가장 트래픽량은 많은 싸이트는 "감자왕"(혹은 투또우왕)으로 나타났다.

바이두가 발표한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현재 국내에서 전문적으로 UCC을 다루는 싸이트들은 많이 있으나, 해당 싸이트들의 트래픽량을 분석한 결과 중국 최초로 UCC싸이트를 만든 감자왕이 거의 독점적으로 시장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도한 알렉스의 데이타에 의하면 현재 중국의 UCC 싸이트중에서 감자왕이 시장의 54%을 점유하고 있으며, 매일 5500만회의 재생이 이루어지고 있다. 매일 감자왕은 4000만명의 네티즌을 수용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10억분의 재생시간을 기록하고 있다.

현재 바이두에서 "UCC"로 검색하는 네티즌이 매일 4만명정도로, "블로그" 키워드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 밖에 바이두의 데이타를 보면, 네티즌들은 지속적으로 감자왕, 아싸왕, 쿨왕등의 UCC 싸이트에 대한 관심이 계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특히 감자왕의 성장은 경의적이다. 비록 아싸왕이나, 쿨왕등의 성장률은 감자왕에 비하여 초라하지만 지속적인 ㅣ성장을 보이고 있다.

바이두의 검색 결과는 결국 네티즌들의 관심정도이며, 앞으로 더 많은 네티즌들이 UCC를 주목할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감자왕은 현재 판도라와 같은 재생 전의 짦은 광고을 보여주는 식의 광고모델을 채택하고 있으며, 감자왕의 사장님은 트래픽이 너무 많다는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후문이 있다. ...본인 IT는 어디까지나 취미로 남겨놓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저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욕심이 생기는 건 지금 내가 배고프기 때문일 것이다. 어무이...삶이 힘들어요.ㅠㅠ

浙江良渚发现4000年前古城价值直逼殷墟(图)

2007년 11월 29일 량주고성 북쪽 성벽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성벽의 절단면이다.

浙江良渚发现4000年前古城价值直逼殷墟(图)

2007年11月29日,량주고성의 북쪽성벽 절단면

浙江良渚发现4000年前古城价值直逼殷墟(图)

고대의 도로였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돌들이다. 대략 40-60미터의 폭이어서 당시에 얼마나 거대한 도로가 있었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浙江良渚发现4000年前古城价值直逼殷墟(图)

동쪽 성벽에 위치한 발굴지

 

절강성 고고학연구소를 어제 18개월 동안 발굴활동을 해오던 량주유적의 발굴보고를 하였다. 해당 량주 유적은 290만 평방미터의 4000년전의 최대크기의 성이다.(290만 정도면 대략 여의도 보다 조금 작은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무지막지하게 큰 크기인 것이다.) 북경대학교 고고학과 언원밍 교수는 량주 유적을 보면서 이렇게 평가했다.

"지금 현재 중국에서 발견된 동시대 고성중에서 가장 큽니다. 저는 이 성을 "중화제일성 中华第一城" 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군요."

원래 학계에서는 량주문화는 그다지 발달 되지 못한 문화라고 알고 있었는데, 해당 유적이 발굴됨으로 인하여 매우 발달된 기술과 문화를 가지고 있음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이 량주유적의 발견은 지난 세기의 하남 안양 은허 발견에 비견할 만한 중국 고고학 역사에 길이 남을 거대한 발견입니다.

 

해당 고성은 동서 1500-1700미터, 남북 1800-1900미터이며 남북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성벽의 남아 있는 부분은 대략 4미터정도의 높이이며, 폭이 40-60미터 정도 됩니다. 황토를 벽돌처럼 쌓아서 만들었으리라 생각되고 이습니다. 성벽에서 나온 도기 파편으로 고증해 보면 해당 고성은 량주문화 후기에 해당하는 약 4000년전에 만들어졌으리라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궁전터로 보이는 곳들과 제사용으로 쓰였으리라 생각되는 여러 구덩이들이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사항은 발굴보고서가 나오고서야 알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지금 현재 해당 고성으로 인하여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량주고성이 하나의 국가였냐 아니냐는 점입니다. 어제 엄원밍교수는 량주고성의 모습으로 보아서 이미 "국가" 시기에 돌입하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량주고성이 사실은 "량주고국"으로 이름 불려야 하며, 또 다른 연구가들은 예전의 하상주에 량주를 추가해야 되지 않나 생각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사실 이게 무엇이 중요하냐고 말하실 분들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솔직히 역사관련 전공자들이 아니면 별로 중요한 내용이 아닌듯 합니다만...해당 사항에 상상력을 붙이면 :

1)현재 환빠들이 주장하는 대쥬신같은것은 성립할 수 없게 되는 아주 간단한 반례가 될 수 있습니다.

2)홍산과 대비되는 중원 문화가 없었다는 점에서 현재 중국 문화의 시초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냐는 학설에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 동시에...잘못 이용되면 중국의 중화주의에 불을 붙일 수도 있을지 모르겠군요.

3) 오히려 환빠들이 주장하는 대쥬신이 성립될 "상상의" 기초가 될지도 모르는군요. 홍산을 북방계열의 문화로 보고, 량주를 남방계열의 문화로 설정하면 가능하긴 합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공상일 뿐이고요^^::

 

奥运十要十不要

올림픽해서 해야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10가지.

 

要保护奥运知识产权 不要买卖盗版制造假冒

올림픽의 저작권을 보호하자. 가짜 상품을 팔거나 사지 말자.

(....한마디로 올림픽으로 나라 차원에서 돈 벌어야 되니 닥치라는거--)

要遵守奥村保护条例 不要滥用奥运旗徽歌标

올림픽 보호 조례를 지키자. 올림픽 상징물들을 남용하지 말자.

要牢记交通安全法规 不要翻越护栏闯灯猛跑

교통 법규를 지키자. 무단 횡단이나 신호 위반을 하지 말자.

要服从指挥顺序而行 不要违章抢行拒绝疏导

지휘에 따라서 순서를 지키자. 새치기 하지 말자.

要美化市容保护环境 不要随地吐痰摆摊占道

환경보호를 하자. 아무데서나 침 뱉지 말자.

要珍惜首都文物设施 不要污损刻划乱贴广告

베이징의 시설을 아끼자. 아무데나 광고를 붙이지 말자.

要爱护体育场馆设施 不要寻衅滋事无理取闹

체육관 시설을 아끼자. 소란을 피우며 난리치지 말자.

要维护赛场安全秩序 不要乱扔杂物自带饮料

경기장의 안전질서를 준수하자. 아무데나 쓰레기를 버리고 음료수를 가지고 오지 말자.

要争做文明守法观众 不要赌球倒票妨碍安保

문명적이고 준법적인 관중이 되자. 도박을 하거나 위험한 행동을 하지 말자.

要提高奥运法律意识 不要违法违规影响全貌

올림픽 법률 의식을 높이자. 위법으로 인하여 이미지가 손상되지 않게 하자.

 

정확한 번역은 아닙니다. 사실 이런 구호를 정확하게 번역하는것이 더 이상한 것이겠죠. 그냥 거의 맘대로 뜻만 옮겨 적었습니다.  그 점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정확하게 다듬은것은 귀.찮.습.니.다. -_)

 

원래 내용으로 돌아와서 사실 제 주위의 중국사람들의 수준은 상당히 높습니다. 저처럼 중국에서 몇년을 보내서 썩을 대로 썩은 준법의식을 가진 사람보다 훨신 괜찮아 보이는 중국인을 만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 어디까지나 중국 최고의 엘리트 지식인들이 있는 곳에 있습니다. 북경대 학생과 교수들의 숫자는 전체 베이징 시민에 비하면 극소수들일뿐입니다.

대다수의 일반 시민들은 아직도 한숨이 나오는 수준입니다. 택시를 타면 택시기사가 목욕을 하지 않아서 나는 꼬랑내가 직격으로 코를 자극합니다. 길거리를 무단 횡단하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며, 러시아워때 사거리는 서로 가려는 차들로 인하여 레고 조립을 합니다. 한심하고 한심해서, 올림픽을 통해서 중국은 세계로부터 드럽게 욕먹을 것이라는 생각이 모락모락 나옵니다.

한국은 88올림픽때 극적으로 시민의식이 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중국은 베이징이 변한다고 해서 전국으로 파급되기에는 너무나 땅이 넓고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도 베이징이만이라도 변하기를 기대해 봅니다만...중국에서 오래 되었다면 오래 썩은 사람으로서 회의적인 생각들이 너무 많이 드는군요.

 

그리고 저넘의 놀라운 구호 작성능력은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작년에는 "8가지 영광과 치욕"이라는 제목으로 초딩스러운 내용을 만들더니, 이제는 "올림픽 10가지 해야될일 하지 말아야 할 일"로 구호를 만드니 말입니다. 그것도 전국가적으로 이런 구호를 배포한다는 것에 아직도 적응이 안되는군요. 아직 중국에서 덜 썩었나 봅니다. 혹시 모르죠. 한국 88 올림픽 전에도 저와 같은 구호가 있었는지도요. 단지 제가 어렸을 때라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지금 저런 구호들을 20년뒤에 중국사람들이 다시 본다면, 지금 제 느낌하고 비슷하려나요?

日本利用月亮女神数据制成月球立体动画(组图)

달여신에 장착된 지형카메라로 촬영된 달표면 사진(일본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

日本利用月亮女神数据制成月球立体动画(组图)

DYSON운화구의 3D화면. 줄들간의 거리는 1KM

日本利用月亮女神数据制成月球立体动画(组图)

日本利用月亮女神数据制成月球立体动画(组图)

 

일본 사람들도 중국 사람들의 달 사진 공개에 매우 자극을 받았나 봅니다.  일본의 우주 항공연구개발기구는 28일 홈페이지에 달 표면 "입체사진"을 공개했습니다. 해당 사진은 "달 여신"호에 장착된 카메라로 촬영한 것입니다.

해당 사진은 달 표면 북위 60에서 66도 사이을 촬영한 것으로 16KM x 180KM 정도를 촬영한 것입니다. 주요 목표는 운석구덩이인 "DYSON"입니다. 사질을 통해서 해당 운석구덩이에 또 다른 소형 운석구덩이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본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는 10미터의 분별력을 가진 지형카메라를 사용하여 촬영한 뒤에, 해당 데이타를 입체적으로 분석하여서 내 놓은 자료라는 점입니다. 이 자료를 통해서 달표면의 형성과정과 달기지 위치 선정에 도움이 될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일본 우주항공국개발 기구의 인터넷 주소는 http://www.jaxa.jp/ 입니다.

 

문제는 중국의 카메라는 분별력 120미터밖에 되지 못하는 반면, 일본은 10미터의 분별력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이 하지 못한(혹은 안한) 입체 구성까지 하였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서 대부분의 중국 사용자들은 일본의 기술력을 인정하자는 쪽으로 나가고 있지만, 몇몇 사람들은 중국 정부가 발표한 120미터보다 더 좋을 수 있다. 정보보호 차원에서 공개하지 않는 것이다라던지...혹은 일본의 기술은 외국의 것을 가지고 온 것 뿐이다라던지..같은 말을 하긴 합니다만...설득력이 좀 없어 보입니다.

 

역시 카메라는 일본과 독일입니다여! 으응?::::

캐논 G7 만세! -_-;;;

얼마나 중요하면 원쟈바오총리까지 올까요? ^^

중국인들에게는 매우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이 중국 최초의 달표면 사진이랍니다.

역시 같은 사진이고요^^

 

해당 사진은 중국의 창어 1호 인공위성에 탑제된 CCD 입체 카메라가 보내온 사진입니다. 해당 사진은 달 면의 동경 83도에서 동경 57도 사이와, 남위 70도에서 남위 54도 사이를 촬영한 사진이며, 폭은 280km x 460km 입니다. 창어 1호 위성은 10월 24일 서창위설발사대에서 무사히 발사되었으며, 8번의 궤도 변경을 통해서 11월 7일 정식 달궤도에 돌입하였습니다. 11월 20일부터 탐색 자료를 보내오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우주 탐사의 불이 붙을지 궁금하며, 또 중국 사람들이 은근히 들어내놓고?! 이야기 하는 중국인들이 직접 달에 발을 내려보는 것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달 착륙은 지금까지 미국사람들만이 하여서 음모론이라는 소리가 있던데, 이제 중국도 착륙을 하게 되면 이것도 음모론이라고 할지 궁금하군요.

 

개인적으로 밤에 별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런 뜬구름 잡는 내용(저에게 궤도변경이니 어쩌고니는;; 외계어보다 더 심각한 외계어입니다.)은 별로 성격에 안 맞는군요. 이런 위성을 발사할 기술이면, 대륙간탄도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는 점이나 만약  지구궤도 위성을 만드는 것이 데이타 회로 혹은 첩보용?!등등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현실성은 인정하지만...굳이굳이 화성이나 달나라니에 갈 필요가 있는 것인지 저 같은 문외한에게는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니 위진남북조시대에 중서성이 군사권을 장악했던지 아님 미서성이 장악을 했는지가 현실세계에 그리 직접적으로 중요해 보이지는 않는군요. 다 그런거겠죠...하하하;;;;

4세기의 거란을 보고 있으면 자꾸만 지금의 한반도 정세가 생각이 날 수밖에 없다.  당시 거란은 아직 완전한 통일이 되지 못한 상태에서 소속된 여러 부족끼리 서로간에도 싸웠다.(남한과 북한) 또한 당시 서북쪽에서는 누란이 투룩을 밀어내고 강력한 힘을 구사했고, 남서쪽으로는 북위가 으르렁 거렸으며, 동남쪽으로는 고구려가 자리잡고 있었다. 한마디로 강대한 3대 세력들의 완충지대로 활용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 한반도 정세가 딱 그렇지 아니한가?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이 서로서로 한반도을 하나의 완충지대로 놓고 서로 세력 싸움을 하고 있다.

 

그리고 553년 투룩의 공격으로 거란인들은 고구려로 피신을 하게 된다. 그리고 뒷날 수당군의 고구려 공격시 고구려의 총알받이가 되어서 4만명의 거란인이 죽고, 모두 흩어져 살게 된다. 개인적으로 중요시하는 것은 고구려는 어디까지나 거란을 총알받이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이 사실상 속해있는 미국-일본진영도 지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전쟁이 일어나면 한국이 총알받이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거의 명말한 거란은 훗날 다양한 문화의 중간에 있었던 지리적인 장점을 활용하여서, 다양한 문화를 흡수하고 그 중에서 좋은 것을 취하여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고구려의 유민, 중국지방에서 흘러온 유민, 그 외에 다양한 인종과 계층의 사람들을 포용하는 정책을 쓴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아?! 너 언제까지 자기 잘났다고 찌질될래? 이제 슬슬 자국민중심주의, 백의민족 쵝오!을 외치고 세계로 나오려므나...계속 그렇게 극단의 민족주의로 나아갈 것인가? 계속 그런식으로 나아가면 앞으로 있을 것은 멸망밖에 없을 것이오. 만약 포용정책으로 전환을 하면 밝은 미래?!가 기다릴 것이외다.

 

자기 문화만 잘났다고 찌질거리는 문화 중에서 오래간 문화는 없.다.

 

2007년 11월 25일 오스트리아에 신임 총리가 된 라드는 중국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76년 오스트리아 국립대학에서 중국어와 중국역사를 공부한 뒤에, 외교부에 들어가서 80년대 중후반기에 오스트리아 주중국 대사관에서 근무를 하였습니다. 올해 9월 6일 후진타오 중국 주석이 오스트리아를 방문하였을때에도 유창을 중국어를 선보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은 지금 현재 중국 복단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며, 또 다른 아들은 오스트리아 화교와 결혼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중국통이며, 중국와 매우 밀접한 인연을 맺고 있는 라드가 총리가 됨으로 인하여, 앞으로 EU와 중국과의 관계가 빠른 속도로 발전할 것으로 보입니다. 해당 뉴스는 중국의 대표적인 미디어와 포털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중국도 앞으로 EU와의 관계개선을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은 지금 미국과 연관이 없으면 당선이 되기 힘들다는 소리가 있었을 정도로 미국통들이 정권을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개인적인 예상으로는 앞으로 중국통들이 점차 성장하게 될 것이고, 미국과 중국의 대리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정치세력판도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혹자는 중국의 패권주의를 경계합니다. 물론 경계하기는 해야됩니다. 하지만 경계는 차선책일뿐입니다. 최선의 방법은 중국을 알고, 중국을 이.용.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특히 한국처럼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는 국가일 수록 더욱 미국외의 국가을 이용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조선 개화시기가 생각나고는 합니다. 중국파, 러시아파, 일본파가 서로 정권을 잡으려 싸우며 각자의 이상을 꿈꾸었던 그때와 지금과 그리 크게 차이가 없어보이는군요. 하긴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는 크게 변한 것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도 보이긴 합니다.

 

 

광개토대왕비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이다.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줄여서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높이는 6.39m로 윗면과 아랫면은 약간 넓고 중간부분이 약간 좁다. 아랫부분의 너비는 제1면이 1.48m, 제2면이 1.35m, 제3면이 2m, 제4면이 1.46m이다. 아래에 화강암의 받침대를 만들었는데 길이 3.35m, 너비 2.7m의 불규칙한 직4각형이고, 두께는 약 20cm이나 고르지 않다.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해 비면에 가로·세로의 선을 긋고 문자를 새겼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원문------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 □命駕,] 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 浮龜. 應聲卽爲]連 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 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 , [履]]龍頁昇天.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紹承基業. [遝]至十七世孫國 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二九登祚, 號爲永樂大王. 恩澤[洽]于皇天, 武威[振]被四海. 掃除□□,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有九, 寔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以示後世焉. 其詞曰.]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稗麗不□□[人], 躬率往討. 過富山[負]山, 至鹽水上, 破其三部洛六七百營, 牛馬群]羊, 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城, 力城, 北豊, 五備□, 遊觀土境, 田獵而還.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古利城, □]利城, 雜珍城, 奧利城, 勾牟城, 古[模]耶羅城, [頁]□□□□城, □而耶羅[城 ], [ ]城, 於[利]城, □□城, 豆奴城, 沸□□]利城, 彌鄒城, 也利城, 太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灰]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城, 林城,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穰]城, [曾]□[城], □□盧城, 仇天城, □□□□, □其國城.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歸穴]□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 永爲奴客. 太王恩赦□]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新[羅]城□城, 倭[寇大]潰.城□]#□□盡□□□安羅人戍兵[新]□□□□[其]□□□□□□□言]□□□□□□□□□□□□□□□□□□□□□□□□□□辭□□□□□□□□□□□□□潰]□□□□安羅人戍兵. 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 □[國 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僕]勾]□□□□朝貢.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石城□連船□□□, [王躬]率□□, [從]平穰]□□□鋒相遇. 王幢要截 刺, 倭寇潰敗. 斬煞無數.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師]□□合戰, 斬煞蕩盡. 所獲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不可稱數. 還破沙溝城, 婁城, □[住]城, □城, □□□□□]□城.卄年庚戌,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國駭□□□□□□□]□□王恩普覆. 於是旋還. 又其慕化隨官來者, 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社婁鴨盧, 肅斯舍[鴨盧], □□□]鴨盧. 凡所攻破城六十四, 村一千四百.守墓人烟戶. 賣句余民國烟二看烟三, 東海賈國烟三看烟五, 敦城]民四家盡爲看烟, 于城一家爲看烟, 碑利城二家爲國烟, 平穰城民國烟一看烟十, 連二家爲看烟, 俳婁]人國烟一看烟 三, 梁谷二家爲看烟, 梁城二家爲看烟, 安夫連卄二家爲看烟, [改]谷三家爲看烟, 新城三]家爲看烟, 南蘇城一家爲國烟. 新來韓穢, 沙水城國烟一看烟一, 牟婁城二家爲看烟, 豆比鴨岑韓五家爲]看烟, 勾牟客頭二家爲看烟, 求底韓一家爲看烟, 舍城韓穢國烟三看烟卄一, 古[模]耶羅城一家爲看烟,] [炅]古城國烟一看烟三, 客賢韓一家爲看烟, 阿旦城, 雜珍城合十家爲看烟, 巴奴城韓九家爲看烟, 臼模盧]城四家爲看烟, 各模盧城二家爲看烟, 牟水城三家爲看烟, 幹 利城國烟一看烟三, 彌[鄒*]城國烟一看烟,]# 七 也利城三家爲看烟, 豆奴城國烟一看烟二, 奧利城國烟一看烟八, 須鄒城國烟二看烟五, 百]殘南居韓國烟一看烟五, 太山韓城六家爲看烟, 農賣城國烟一看烟七, 閏奴城國烟二看烟卄二, 古牟婁]城國烟二看烟八, 城國烟一看烟八, 味城六家爲看烟, 就咨城五家爲看烟, 穰城卄四家爲看烟, 散那]城一家爲國烟, 那旦城一家爲看烟, 勾牟城一家爲看烟, 於利城八家爲看烟, 比利城三家爲看烟, 細城三]家爲看烟.國 上廣開土境好太王, 存時敎言, 祖王先王, 但敎取遠近舊民, 守墓掃, 吾慮舊民轉當羸劣.] 若吾萬年之後, 安守墓者, 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 令備 掃. 言敎如此, 是以如敎令, 取韓穢二百卄家. 慮]其不知法則, 復取舊民一百十家. 合新舊守墓戶, 國烟 看烟三百, 都合三百 家.自上祖先王以來, 墓上]不安石碑, 致使守墓人烟戶差錯. 唯國 上廣開土境好太王, 盡爲祖先王, 墓上立碑, 銘其烟戶, 不令差錯.] 又制, 守墓人, 自今以後, 不得更相轉賣, 雖有富足之者, 亦不得擅買, 其有違令, 賣者刑之, 買人制令守墓之.

 

출처 : http://mtcha.com.ne.kr/korea-term/goguryo/term9-goanggaitodaoang.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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蒙鞑备录(몽달비록)  (0) 2007.11.13

 

블로그 버스는 한국으로 따지면 이글루스와 매우 비슷한 느낌이 드는 중국의 블로그 서비스 제공 업체입니다. 해당 업체가 어느덧 5주년을 맞이하였군요. 사실 블로그 버스는 그 규모가 조금 작기는 하지만, 중국인들에게 매우 좋은 느낌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부에서 서로간의 교류도 많고 말이죠.

 

http://www.blogbus.com

 

재미있는 점은 5주년 기념 행사로 블로그 버스 이용자들 중에 10명만을 뽑아서 행사에 참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해당 이용자들에게는 교통비와 식비 및 숙소를 제공하는 것이죠. 그 외의 분들은 참가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한국 분들은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유롭게 참가하게 하면 될 것이지 왜 그렇게 하느냐고 말이죠.

 

중국은 넓습니다. 드럽게 넓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도 3~4시간은 거의 기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과 같이 자유롭고 편하게 전국의 사용자들이여 모여라! 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죠. 물론 각각의 성(이것만 해도 한국 크기보다 크답니다.)에서 번개가 모이기는 하지만, 이른바 전국 모임은 매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행사 참가인원을 제한하다보니, 행사가 개최되는 지방에 있는 블로거들에게도 참가를 제한하는 것이 당연하다싶이 되어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교통비나 기타 비용을 지원해 줄 사용자를 뽑는 것은 좋지만, 자유롭게 자비로 참가할 사용자를 신청 받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특히 돈이 많거나! 해당 지역에 사는 블로거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해 보입니다.

 

또한 반대로 한국의 상황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런 것 고민 하지 않고, 번개다! 이러면 부산에서도 KTX 타고 올라가서 참가해도 되는 한국의 상황은 분명히 중국에 비하여 매우 훌륭한 조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당 사항으로 인하여 사용자들과 운영자들간의 거리를 쉽게 좁힐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미 몇몇 기업들이 활용하고 있지만, 회사를 자유롭게 공개하고 사용자들이 올 수 있게 하는 방식은 한국과 같은 조건에서 행할 수 있는 매우 훌륭한 방식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장로 개념이 있습니다. 블로그 버스의 글들은 여러가지 카테고리로 분리되어있습니다. 그러한 각각의 카테고리에는 사용자들이 스스로 뽑은 사용자 대표가 있습니다. 장로는 해당 채널에서 문제가 발생하였을 경우나 의견을 운영자에게 전달할 경우 그 중간자 역할을 합니다.  사용자들의 참여나 사용자들과의 교류, 또 운영의 자율성등등을 생각하면 매우 배울만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글루스나 티스토리와 같은 블로그 서비스 업체 이외에도, 올블로그나 블로그코리와 같은 블로그메타 싸이트들도 위와 같은 방식을 배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정치와 같은 민감한 분야에 대해서는 한명의 장로가 아닌 숫자를 늘리는 방식을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긴 합니다만...이것은 응용일뿐 해당 방식 자체의 장점을 잘 생각해보시고 적용해 보는 것이 어떨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상 원나라시기의 결혼제도에 대해서 수업을 들으면서 심심해서 주절주절해본 바로였습니다. (해당 시기에는 아버지의 첩이나 형의 마눌님을 제 마눌로 만들려는 일이 많았죠. 혹은 동생이나 아들의 여자를 취하기도 했답니다. 수집혼이라는 것인데... 물론 원래 한족의 전통으로는 생각도 하지 못할 문제이지만 몽고족의 영향으로 사회에서 많이 벌어진 일이랍니다......또한 원나라의 법도 이미 결혼을 해버리고 아들딸까지 낳아버리면 굳이 둘을 헤어지게 못하였답니다. 이건 거의 머...일단 먹고(으응?!) 싸지르면(음;;) 만사 ok!라는 소리군요....후후후...로망이군요-_-?!;;  으응?!::: )



QQ拼音输入法

직접 사용해 보실 분은 : http://im.qq.com/qqpinyin/

혹자가 본인에게 중국 인터넷 시장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기업이 어디냐고 한다면, 본인은 망설이지 않고 QQ을 일순위로 놓을 것이다. 바이두도 근 60%을 차지하는 검색 서비스이지만, 아무리 그리하여도 QQ의 90%이상의 점유율을 따라올 수는 없다. 또한 매일 매일 쓰는 메신져와 보통은 거의 쓰지 않는 검색 서비스간의 영향력은 당연히 QQ가 더 높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번에 QQ에서 드.디.어. 중국어 입력기를 발표했다. 사실 그 동안 명색이 중국을 주름잡는 채팅 프로그램이면서 어째서 자기 만의 중국어 입력기가 없었는지 궁금하였는데 드디어 나온 것이다. 하지만 특별한 기능은 보이지 않는다. 빠른 입력이라던지 인터넷과의 데이타교환따구는 이미 예전부터 나온 기능이다. 사실 속도나 완성도를 보려면 직접 사용해야겠지만, 본인 이것저것 많이도 까는 QQ와는 조금 멀리 떨어지고 싶은 사람인지라 곧 올라올 중국 유져의 리뷰를 기다려 보도록 하겠다.

하지만 요즘 QQ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생전 처음 중국어 입력기를 내놓고, 조금 있으면 XXX도 서비스 하는 것들을 보아서는 QQ가 슬슬 마음을 독하게 먹고 기존의 채팅에 부속되어있었던 "포털"식 기능을 대폭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방법은 한국의 네이버와 비슷한 방향으로 갈 듯 하긴 한데...워낙에 중국의 어마어마한 사용자를 잡고 있는 QQ인지라 망하기도 어렵기는 하지만, 어설픈 네이버식 발전모델은 중국시장에서 그리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질듯 싶지 않다.

일단 지켜보자. 점유율 90%이상은 운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QQ의 다음 행보는 그 만큼이나 중국 IT의 현실을 보여주니까!
......근데 난 QQ가 네이버 만큼이나 싫다....으응?





致力于中华民族伟大复兴的大学生支农志愿者
就抵制“滥俗文化”和“黄奸毒文化”
我们是一群爱国、上进、理性、善良的中国当代大学生,我们勤读书、善思考、勇于实践,作为自觉参与新农村建设的大学生志愿者,我们正在以多种多样的下乡支农活动来证明自己是优秀大学生的代表。
由于对中国当前的文化现状有着切肤之痛,所以在您刚刚就任之际,我们就冒昧地向您提出关于贯彻党中央十七大精神,建设我国社会主义新文化的想法和建议。
中国自改革开放到2006年,国内生产总值平均年增长率高达9.7%。现在已经成为中等收入国家。党领导人民艰苦奋斗所取得的伟大成就有目共睹。国民在日渐富裕起来的同时,更期待十七大代表人民心声提出的中华民族的伟大复兴。
复兴之路,何其漫漫,与经济高速发展相比,我们在精神文化建设领域的发展不仅相当滞后,在信仰层面甚至有所倒退。如今,全方位的国际竞争日趋激烈,从军事到经济,再到社会制度,尤其是在作为制度基础的文化领域,国外强权势力更是加紧渗透,试图瓦解我们民族的精神信仰,兵不血刃地俘虏我们的年轻一代。有学者已经认定主导世界未来冲突的主要原因是文化差异。历史告诉我们,越是严酷的竞争就越需要强有力的民族精神作为支撑,没有精神和理想的支撑,中国人就会成为一盘散沙。纵看历史,丧邦旧事历历在目,辱国之耻恍如隔夜。
经济发展是我们这个时代的主旋律,为了“发展经济”这个中心目标,我们可以淡化世界政治差异,淡化意识形态,甚至也可以淡化民族文化差异。可不管我们如何自我淡化,以海盗文明崛起于世的西方人是被中华民族前赴后继百年御侮的不屈战斗赶走的,当然不会相信我们是温顺的羔羊,只要我们这个超大型大陆国家的领土还基本完整,只要我们这个超大型人口国家的综合国力不下降,中国就不可能不被人家视作最有威胁的竞争对手。
作为有尊严的主权国家我们有强大的军队守卫领土,但是,我们又用了什么来守卫我们的民族精神和文化家园?比起刀枪和大炮来说,文化的侵入更加可怕,西方强势文化夹杂着阴谋和垃圾如海啸般袭来,更有甚者,很多人还在有意无意地推波助澜,引狼入室。事实上国内的“滥俗文化”和“黄奸毒文化”已经堂而皇之,可我们在耗资于某些苍白刻板的指定动作之外,几乎没有足够的让大众感觉得到的有效的抵御之策!作为承上启下的青年学生,我们在文化安全方面从来没有令人感觉到如此担忧过。
我们并非恋旧保守之辈,我们也同样相信应该海纳四方之先进文化,相信百家争鸣的文化演进路径。但是,文化自由绝对不应该是“黄奸毒”文化的自由,绝对不是放纵精神糜烂而无所作为。看看我们的同龄人生活在怎样的文化氛围里?外来强势文化的渗透几乎无处不在:美国精神宣传片(好莱坞大片)、港台垃圾片、日本色情片、动画片等等,无不对我们青年人的世界观、价值观以及我们民族的文化和革命传统造成严重的侵蚀。近年来,直言“要做坏女人”的影视明星和用身体写作性小说的小丑竟然成为万人追捧的网络红人;风靡一时号称大众选出来的“超女”一年后竟然成了“脱女”;耗资上亿打造的豪华影片《无极》却被一个十几分钟的 “馒头血案”解构;号称引发诗坛革命的“梨花体”诗歌更是苍白无聊到极点。此外还有饮食文化,现在的青年群体,几乎都对“星巴克”、 “必胜客”这种在美国被称为垃圾食品的快餐文化吹捧尾随,追逐着“宝马车”、“CD香水”所带来的虚荣心的满足;甚至幼儿园的孩子都以麦当劳和肯德基为时尚、以日本动画人物为偶像。浅薄的韩剧占据了青年大部分的休闲时间,一个《大长今》就从中国卷走了150个亿的经济价值,同时它还得到了千千万万个中国 “韩迷”的朝拜,一时间“韩流”盛行,轻而易举地俘虏了我们这个社会的小知识分子精英阶层。也许不用如此上纲上线地看待韩国,但是我们实在无法把美国这样已经明确要全方位扼制中国发展的霸权帝国也幼稚地跪拜邀宠。事实上,以美国为代表的糜烂的资本文化,以巨额金钱配好莱坞大片开路,大有冲垮我们民族精神文化之态势。
我们这个社会对牟利本质的“滥俗文化”司空见惯倒也罢了,但对于有人甚至以推动“黄奸毒文化 ”为荣,却实在是“是可忍孰不可忍”。前有北大教授“做一天美国人”和“当兵要当美国兵”的数典忘祖,后有无聊艺人的媚日求荣寡鲜廉耻。最近更有导演拍出《色戒》这样的汉奸色情剧毒片,把抗战中牺牲的女英雄作践成婊子、交际花,而出卖民族利益的汉奸们却被立起了牌坊。如果《无极》还算作是滥俗娱乐片可以忍受,但是《色戒》则是把“黄奸毒”文化推倒了极端,五毒俱全,实在是打破了每一个还有血性的中国人能够忍受的精神和心理底线。这哪里是艺术?忘记了国仇家耻、丧失了民族尊严的任何人都应被国人唾弃,可像这样的“汉奸文艺”和倡导糜烂生活的影视文化,却登堂入室,已然泛滥成灾!
上述现象,可谓窥一斑而见全豹,不过是近年来的开门揖盗、致文化家园失守的必然结果而已。可是,为什么那些以中国人的税收滋养的文化单位如此轻而易举地就把精神文明领导权让给了居心叵测或媚外忘祖的人?难道我们就该听任其继续毒害我们的青年乃至子孙后代吗?
在这种弥漫整个社会的、毒害我们心灵的“滥俗文化”和“黄奸毒文化 ”风暴下,我们青年人的精神家园怎能不沦陷?大学作为育人育德,保存和传播人类良知的殿堂似乎也正在发挥相反的作用。曾有一项关于当代大学生精神面貌的调查显示,竟然有八成学生表示大学生活让人感到“郁闷”,校园自杀和刑事案件前所未有地此起彼伏。我们的教育基本上产业化了,教师大多成“知本家”了;于是,大学里羞于谈理想和追求,谈道德情操则几乎成了笑柄,似乎只有大谈赚钱时,才会得到别人的认同,有钱的所谓“成功人士”成了大学生的楷模,却完全不问所谓“成功人士”是不是于国家民族有益。革命告别了,理想也告别了,有志于呼应中央新农村建设号召、经常下乡支农的学生更是少得可怜。
其实,我们也曾经是这群茫然无知的青年人中的一部分,在校园里时常感到无所事事、郁闷烦躁、空虚无聊,只是偶然的机会,接触到那些自觉自愿去农村进行支农调研的同学,受到他们的事迹和精神的感染,我们才幡然醒悟,决意告别过去,走入农村去实践。党中央提出“三农问题重中之重”这几年来,我们多次到农村去开展支农活动,从事乡村文化重建、帮助农村建立合作组织。虽然我们在农村的生活是苦的,但是我们用汗水浇灌的成果是甜的;大学生志愿者可以把课堂上的理论真正落到实处,增强自己的实践能力;在帮助农民建立起文艺队、科技协会、图书室的同时,也找到了我们的存在价值,找到了我们的精神家园。在下乡过程中,我们有了自我反思自我改造的机会,我们终于认识到,一个人的成长只有在社会进步中才有可能,个人和社会是密不可分的。我们遵循“扶人先扶志”的原则,不仅仅让农民站了起来,我们自己也站了起来,我们在实践中也不断的反思我们的社会,反思我们的文化,最终找回了自己,找到了方向。可以说是真实的实践、理想的生活改变了我们的人生。但是如我们一样幸运的人有多少呢?更多人还是在懵懂无知中受到“黄奸毒”文化和消费主义文化的洗脑。我们实在不愿让同学,尤其是更多比我们年轻的中小学生再陷入这种“黄奸毒”文化的毒害中去。我们希望在整个社会层面开展一场“社会主义新文化”重建运动。幸运的是,我们的这些想法在十七大胡锦涛总书记的讲话中找到了最大支持。促使我们能够鼓起勇气给您写这封充满青年学子肺腑之言的信。
我们知道,仅仅一小群人觉醒,仅仅在小范围内讨论,作用还是微乎其微,所以,我们请求文化部门能够呼应党中央十七大精神,大力倡导社会主义新文化,救救那些还在受着愚弄的学生,救救还在被“黄奸毒文化”毒害的青年和孩子。
为此,我们要求:
一、尽快有效地遏止“滥俗文化”和“黄奸毒文化”这两种本质上反共反华反人类文化的泛滥趋势,从文化工作的多个层面采取积极措施保护儿童和青少年。一方面积极地推动和弘扬以劳动和劳动者为主旋律的社会主义新文化的核心价值观;另一方面,通过政策和立法扫荡垃圾文化和垃圾艺人,旗帜鲜明地开展对“滥俗文化”的文艺批评,尤其应该推进对“黄奸毒文化”及其代表的批判,坚决禁止其传播。
二、以实际资助和多种优惠政策推动各地进步青年自发地建立起群众性非官方的社会主义新文化建设和红色文化护卫志愿团体,发展这些志愿者组织,推进健康积极的文化活动来保卫能够支撑中华民族伟大复兴的社会主义新文化,以民间团体出面,低成本地抗衡“滥俗文化”和取代“黄奸毒文化”,并且以此作为载体,进一步动员全社会的文化进步力量奋起守卫我们民族的进步文化。
三、积极贯彻党的十七大重申的“三农问题重中之重”的指导思想和社会主义新农村建设的国家战略,坚决纠正各种文化艺术团体下乡中那些不正之风,查处其中的害群之马;同时,树立各地那些长期为农民服务的榜样。明确优惠政策,发现典型经验,推动在农村开展有利于和谐社会的传统道德文化的复兴,鼓励和资助具有民间特色的地方文化艺术形式多样化的活动。
我们相信,在文化部的指导和支持下,很多青年人会站出来为国家尽绵薄之力,抵制“滥俗文化”和“黄奸毒文化”,捍卫我们民族尊严,捍卫我们的精神家园,这应该是青年人义不容辞的责任。
此致
敬礼
大学生支农志愿者
2007-10-25
签名:
王 盼(对外经贸大学) 田武雄(北京大学)
徐红颖(中华女子学院) 张微(中华女子学院)
王晓杰(中华女子学院) 孟丽兰(中华女子学院)
李鹏波(中央财经大学) 杨郑君(北京航空航天大学)
杨 永(中央财经大学) 王健人(北京信息科技大学)
徐 硕(北京大学)


按照上述的逻辑,在中国学习中国的历史的我就是“韓奸”。。。

田武雄啊!徐硕啊!接受文化的融合而发展的层面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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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나이를 먹다보면 저도 모르게 정치를 알게 되고, 누구누구 십색볼펜이니 어떤 십장생이니 라는 말을 하게 된다. 물론 때로는 냉철한 비판을 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욕 부터 터져나오는 지라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이제 막 성인이 된 사람들은 어떨까? 어떻기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 이라고 요약될 것이다.


솔직히 한국 정치판이 좀 복잡하고 꼬여있는가? 개인적으로 철새 정치인들 덕분에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며, 특별한 사상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닌, 그때 그때의 이득에 따라 이 말을 했다 저 말을 했다가 하니 복잡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점차 없어져 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준비했다. 내 주위에 얼마전부터 정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 모모 양이 생각하는 이번 대선에 대한 느낌이다. 짦지만...뒷끝이 너무 남는다...



한후보 이후보 이후보 어이고
야당후보 정후보 이후보 나원참
창조후보 문후보 그중의 압권은
선거법 이러고 있다~♬

출처 :
대한민국 대선은,후보들 이러고 있다~♬


.....머....지금 상황의 간결 요약버젼이다. (그나저나 저 운율은!?)


이관국제통계에 따르면 07년도 상반기 중국의 검색시장은 매우 빠른속도로 성장하였습니다. 현재 중국 시장의 총가치는 6.575억 인민폐이며, 바이두가 그 중 58.1%을 그 뒤를 구글이 22.8%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에 반하여 야후차이나는 11.6%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검색 서비스

점유율

百度 바이두

58.10%

谷歌(Google)

22.80%

雅虎中国 야후 차이나

11.60%

搜狗 소우고우

2.70%

中搜 중소우

2.40%

新浪 신랑

0.70%

网易 왕이

0.60%

출처 : 易观国际统计 2007.07.03


지민아빠님의 글에서 출처 불명의 중국쪽 통계를 보고 찾아보았습니다. 과연 구글이 20%을 넘었군요. 제 기억에도 슬슬 구글의 추격전이 벌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구글은 "반" 바이두 연맹을 만들어서 에드센스를 비롯한 수 많은 식구 감싸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이두는 예전부터 해오던 행위이고 말이죠. 그래서 서로 더 많은 기업을 끌어들이려 노력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국 시장의 경우 제 기억에 최근 검색 자체의 트래픽은 다음이 네이버를 살짝 뛰어넘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장의 변화가 슬슬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의 경우 2강(네이버, 다음)의 충돌이며, 어찌 보면 구글과 같은 "검색"만을 위한 서비스는 한국인의 입맛에 맞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중국의 바이두도 검색만을 위한 서비스에 가까우며,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포털처럼 이용하는 곳은 qq을 필두로 한 각각의 서비스들입니다. 중국은 각각의 서비스(UCC, 블로그, 싸이버쏘사이어티-싸이월드 같은것;; 용어가 생각이 안나는;;)등이 서로 각자 다른 회사에서 일등을 점유하고 있는 점이 다르기도 합니다. 한국은...한번 잡으면 독점?! -0-;;

재미있는 것은 한국의 네이버와 중국의 바이두의 대응 자세가 조금 다르다는 말입니다. 한국의 네이버가 "한국 사용자에게 최적화"되었다며 시스템 UI을 거론하는 반면, 중국의 바이두는 "바이두가 중국어를 더 잘 안다" 라는 말로 구글에 비하여 중국어의 검색이 더 뛰어나다고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몇몇 검색어의 경우 바이두에서 더 좋은 검색결과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앞으로 중국과 한국 시장 그리고 중국 한국 기업들이 뛰어들고 있는 일본시장에서의 판세 변화가 주목됩니다.


 

알리바바는 중국 최대의 인터넷 쇼핑몰입니다. 한국으로 따지면 다나와등과 같은 종류이죠. 거대한 중국 시장에서 중국 기업과 합작해서 밀고 들어온 아마존같은 국제적인 명성의 쇼핑몰을 가볍게 눌러버리고 중국 최대 최강의 쇼핑몰로 자리매김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아는 누님중에서 알리바바 지름신에 매일 시달리시는 분도 있는..;;;)

 

올해에 홍콩 주식시장에 상장을 하였을때, 과거 구글이나 바이두를 넘어서는 무려 100배가 넘는 폭등을 하여서 놀라움을 안겨준 적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올해 알리바바의 고위급 인사들은 때부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2002년에 실패했던 일에 다시 도전하려 하고 있습니다.

 

알리바바는 일본의 모회사와 합잡을 하여서 일본에 진출하려고 합니다. 위에서 말한 대로 2002년에도 진출한 적이 있지만 야후 저팬의 강력한 방어에 조용히 퇴각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조금 상황이 다를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이번 주식 상장으로 벌어들인 수 많은 현금들과 일본에서의 야후 저팬의 독주가 서서히 무너져 내려가는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이버그룹은 일본에 진출하였고 일정의 성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게임 분야에 한정된 것이고, 다음은 라이코스를 이용하여 미국 진출을 노리다가 실패하고, 다시 365로 중국 진출하려다가 죽을 쑤었습니다. 다음의 불운이라면 불운이겠고, 게임을 비롯하여 사용자의 접근을 쉽게 만드는 소스에 대한 무시때문이기도 합니다. 다나와도 들어왔는데, 어찌 되고 있나 모르겠네요. 재미있는 것은 게임 쪽만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IT가 단지 게임 산업으로 돈을 버는데 반하여(물론 게임 산업을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 인터넷 후진국이라는 중국은 다양한 아이템의 여러 기업들이 해외진출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잘 생각해봐야할 사항이 아닌가 싶습니다.

江統《徙戎論》

 

時關隴屢為氐羌所擾,孟觀西討,自擒氐帥齊萬年。統深惟四夷亂華,宜杜其萌,乃作徙戎論。其辭曰:
夫夷蠻戎狄,謂之四夷,九服之制,地在要荒。春秋之義,內諸夏而外夷狄。以其言語不通,贄幣不同,法俗詭異,種類乖殊;或居絕域之外,山河之表,崎嶇川谷阻險之地,與中國壤斷土隔,不相侵涉,賦役不及,正朔不加,故曰「天子有道,守在四夷」。禹平九土,而西戎即敘。其性氣貪婪,凶悍不仁,四夷之中,戎狄為甚。弱則畏服,強則侵叛。雖有賢聖之世,大德之君,咸未能以通化率導,而以恩德柔懷也。當其強也,以殷之高宗而憊於鬼方,有周文王而患昆夷、獫狁,高祖困於白登,孝文軍於霸上。及其弱也,周公來九譯之貢,中宗納單于之朝,以元成之微,而猶四夷賓服。此其已然之效也。

故匈奴求守邊塞,而侯應陳其不可;單于屈膝未央,望之議以不臣。是以有道之君牧夷狄也,惟以待之有備,禦之有常,雖稽顙執贄,而邊城不弛固守;為寇賊強暴,而兵甲不加遠征,期令境內獲安,疆埸不侵而已。[Baro1] 

及至周室失統,諸侯專征,以大兼小,轉相殘滅,封疆不固,而利害異心。戎狄乘間,得入中國。或招誘安撫,以為己用。故申繒之禍,顛覆宗周;襄公要秦,遽興姜戎。當春秋時,義渠、大荔居秦晉之域,陸渾、陰戎處伊洛之間,鄋瞞之屬害及濟東,侵入齊宋,陵虐邢衛,南夷與北狄交侵中國,不絕若線。齊桓攘之,存亡繼絕,北伐山戎,以開燕路。故仲尼稱管仲之力,嘉左衽之功。

逮至春秋之末,戰國方盛,楚吞蠻氏,晉翦陸渾,趙武胡服,開榆中之地,秦雄咸陽,滅義渠之等。始皇之并天下也,南兼百越,北走匈奴,五嶺長城,戎卒億計。雖師役煩殷,寇賊橫暴,然一世之功,戎虜奔卻,當時中國,無復四夷也。

漢興而都長安,關中之郡號曰三輔,禹貢雍州,宗周豐、鎬之舊也。及至王莽之敗,赤眉因之,西都荒毀,百姓流亡。建武中,以馬援領隴西太守,討叛羌,徙其餘種於關中,居馮翊、河東空地,而與華人雜處。數歲之後,族類蕃息,既恃其肥強,且苦漢人侵之。永初之元,騎都尉王弘使西域,發調羌氐,以為行衛。於是群羌奔駭,互相扇動,二州之戎,一時俱發,覆沒將守,屠破城邑。鄧騭之征,棄甲委兵,輿尸喪師,前後相繼,諸戎遂熾,至於南入蜀漢,東掠趙魏,唐突軹關,侵及河內。及遣北軍中候朱寵將五營士於孟津距羌,十年之中,夷夏俱斃,任尚、馬賢僅乃克之。此所以為害深重累年不定者,雖由禦者之無方,將非其才,亦豈不以寇發心腹,害起肘腋,疢篤難療,瘡大遲愈之故哉!

自此之後,餘燼不盡,小有際會,輒復侵叛。馬賢忸,終于覆敗;段熲臨衝,自西徂東。雍州之戎,常為國患,中世之寇,惟此為大。漢末之亂,關中殘滅。魏興之初,與蜀分隔,疆埸之戎,一彼一此。魏武皇帝令將軍夏侯妙才討叛氐阿貴、千萬等,後因拔棄漢中,遂徙武都之種於秦川,欲以弱寇強國,扞禦蜀虜。此蓋權宜之計,一時之勢,非所以為萬世之利也。今者當之,已受其弊矣。

夫關中土沃物豐,厥田上上,加以涇渭之流溉其舄鹵,鄭國、白渠灌浸相通,黍稷之饒,畝號一鍾,百姓謠詠其殷實,帝王之都每以為居,未聞戎狄宜在此土也。非我族類,其心必異,戎狄志態,不與華同。而因其衰弊,遷之畿服,士庶翫習,侮其輕弱,使其怨恨之氣毒於骨髓。至於蕃育眾盛,則坐生其心。以貪悍之性,挾憤怒之情,候隙乘便,輒為橫逆。而居封域之內,無障塞之隔,掩不備之人,收散野之積,故能為禍滋擾,暴害不測。此必然之勢,已驗之事也。

當今之宜,宜及兵威方盛,眾事未罷,徙馮翊、北地、新平、安定界內諸羌,著先零、罕幵、析支之地;徙扶風、始平、京兆之氐,出還隴右,著陰平、武都之界。廩其道路之糧,令足自致,各附本種,反其舊土,使屬國、撫夷就安集之。戎晉不雜,並得其所,上合往古即敘之義,下為盛世永久之規。縱有猾夏之心,風塵之警,則絕遠中國,隔閡山河,雖為寇暴,所害不廣。是以充國、子明能以數萬之眾制群羌之命,有征無戰,全軍獨克,雖有謀謨深計,廟勝遠圖,豈不以華夷異處,戎夏區別,要塞易守之故得成其功也哉!

難者曰:方今關中之禍,暴兵二載,征戍之勞,老師十萬,水旱之害,荐饑累荒,疫癘之災,札瘥夭昏。凶逆既戮,悔惡初附,且款且畏,咸懷危懼,百姓愁苦,異人同慮,望寧息之有期,若枯旱之思雨露,誠宜鎮之以安豫。而子方欲作役起徒,興功造事,使疲悴之眾,徙自猜之寇,以無穀之人,遷乏食之虜,恐勢盡力屈,緒業不卒,羌戎離散,心不可一,前害未及弭,而後變復橫出矣。

答曰:羌戎狡猾,擅相號署,攻城野戰,傷害牧守,連兵聚眾,載離寒暑矣。而今異類瓦解,同種土崩,老幼繫虜,丁壯降散,禽離獸迸,不能相一。子以此等為尚挾餘資,悔惡反善,懷我德惠而來柔附乎?將勢窮道盡,智力俱困,懼我兵誅以至於此乎?曰無有餘力,勢窮道盡故也。然則我能制其短長之命,而令其進退由己矣。夫樂其業者不易事,安其居者無遷志。方其自疑危懼,畏怖促遽,故可制以兵威,使之左右無違也。迨其死亡散流,離X未鳩,與關中之人,戶皆為讎,故可遐遷遠處,令其心不懷土也。夫聖賢之謀事也,為之於未有,理之於未亂,道不著而平,德不顯而成。其次則能轉禍為福,因敗為功,值困必濟,遇否能通。今子遭弊事之終而不圖更制之始,愛易轍之勤而得覆車之軌,何哉?且關中之人百餘萬口,率其少多,戎狄居半,處之與遷,必須口實。若有窮乏糝粒不繼者,故當傾關中之穀以全其生生之計,必無擠於溝壑而不為侵掠之害也。今我遷之,傳食而至,附其種族,自使相贍,而秦地之人得其半穀,此為濟行者以廩糧,遺居者以積倉,寬關中之逼,去盜賊之原,除旦夕之損,建終年之益。若憚暫舉之小勞,而忘永逸之弘策;惜日月之煩苦,而遺累世之寇敵,非所謂能開物成務,創業垂統,崇基拓跡,謀及子孫者也。

并州之胡,本實匈奴桀惡之寇也。漢宣之世,凍餒殘破,國內五裂,後合為二,呼韓邪遂衰弱孤危,不能自存,依阻塞下,委質柔服。建武中,南單于復來降附,遂令入塞,居於漠南,數世之後,亦輒叛戾,故何熙,梁慬戎車屢征。中平中,以黃巾賊起,發調其兵,部眾不從,而殺羌[Baro2] 。由是於彌扶羅求助於漢,以討其賊。仍值世喪亂,遂乘釁而作,鹵掠趙魏,寇至河南。建安中,又使右賢王去卑誘質呼廚泉,聽其部落散居六郡。 咸熙之際,以一部太強,分為三率。泰始之初,又增為四。於是劉猛內叛,連結外虜。近者郝散之變,發於穀遠。今五部之眾,戶至數萬,人口之盛,過於西戎。然其天性驍勇,弓馬便利,倍於氐羌。若有不虞風塵之慮,則并州之域,可為寒心。

滎陽句驪本居遼東塞外,正始中,幽州刺史毋丘儉伐其叛者,徙其餘種。始徙之時,戶落百數,子孫孳息,今以千計,數世之後,必至殷熾。今百姓失職,猶或亡叛,犬馬肥充,則有噬齧,況於夷狄,能不為變!但顧其微弱勢力不陳耳。

夫為邦者,患不在貧而在不均,憂不在寡而在不安。以四海之廣,士庶之富,豈須夷虜在內,然後取足哉!此等皆可申諭發遣,還其本域,慰彼羇旅懷土之思,釋我華夏纖介之憂。惠此中國,以綏四方,德施永世,於計為長。

帝不能用。未及十年,而夷狄亂華,時服其深識。

 

來自于中國國學網2006-4-11;

 

相關信息 :

江統(-310年),字應元(一說元世、德元),西晉陳留圉(今河南省杞縣南)人。元康九年(299年)太子洗馬(太子宮圖書管理官)江統於齊萬年事件之後,作〈徙戎論〉著稱於世。

 


 [Baro1]신하로 삼지 않고 연합만 해서 변방을 지키는 용병으로 사용

 [Baro2]Qu ...북방계 언어의 관직이름과 상관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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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명박후보를 반대합니다.
저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투.표.를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결코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명박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저는 아래의 공직선거법 조항을 알고 있습니다.
선거 180일 전부터 선거에 영향을 끼칠 목적으로 정당·후보자를 지지·반대하는 내용에 대해 게시 및 상영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한 악법입니다.



하고 싶은 말. 해야만 되는 말.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말을 무시하는 선거법 계속 지켜만 보시렵니까?

여러분 일어나야 될 때입니다. 시민의 저항권을 아시지 않습니까?
저희들 한두명이 모여서 만명, 십만명이 되면 저희 모두를 고발할 수 없습니다. 각자 자신의 정.상.적.인. 의사표시만 해주면 가능합니다.

각자 포스팅 하나씩만 하시면!
그 힘이 모여서 무엇인가 변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해당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무지막지하게 감정적으로 작성되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수능 잘 보셨습니까? 조금 냉소적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이런 제목을 보고 들어오신 수능생 여러분은 대부분이 수능을 못 봤다고 생각하실 분들인 것 같군요. 그런 분들에게 간략하게 말해드리겠습니다.

처음부터 중국에 올 생각도 없었으면서, 수능을 망치고 중국 대학에 들어가기 쉽다는 말에 현혹되어서 중국으로 오실 분들은 지금 당장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오신 분들의 99%가 여기서 적응하지 못하거나, 너무나 잘 적응하여서 매일 매일이 술을 물마시듯한답니다.

그런 이유로 어설프게 중국에서 대학가기 쉽다더라면서 오실 생각이면 예쁘게 포기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중국 교수님과 중국친구들에게 우다코우에서 맨날 술 먹고 싸움하는 한국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지 않군요.

xxx 니가 머가 잘났냐고 하신다면, 잘난 것 없이 중국으로 먼저 온 사람으로서의 말입니다.

아! 이 말을 안했군요.
중국 올때 모두가 독.하.게. 마.음.먹.고. 온답니다.
나.만.은. 다.르.다. 라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이런 폭력적이고 감정적인 이야기를 듣고도 계속 오실 생각이라면...
정말 독하게 잘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나저나 슬슬 북경대 qna가 바빠지겠군요. 정확히 이 시기부터 1월 사이에 가입자 수가 폭증을 하곤 하더군요. 으음...어차피 이젠 은퇴해서 다른 운영자가 알아서 하겠지만 말입니다. 하하하^^::



365블로그 링크(중국식 올블로그)에서 재미있는 행사를 시작했습니다. 중국어를 아시는 분은 직접 http://www.365bloglink.com/ 에 방문하시는 것을 추천해 드리며, 중국어를 모르시는 분을 위하여 해당 사항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오늘(11월 15일부터) 매일 매일 정해진 "태그"에 대해서 포스팅을 합니다. 해당 포스팅을 글로만 이루어져도 되고, 그림이어도 됩니다. 다시 말해서 정해진 격식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매일 최고의 작품으로 뽑힌 블로거는 1000원(한국13만원가량)의 상금은 받습니다. 총 30개의 중점 태그가 매일매일 정해질 계획이니, 총 상금 30000원(한국돈 350만원 가량)의 상당히 짭짭한 행사입니다.



참가를 유도하는 재미있는 방식입니다. 기존의 블로그독과 같은 광고모델을 행사 방식으로 응용한 것이군요. 참 재미있는 방식인 것은 맞지만, 상금이 너무 과도하게 많은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돈으로 13만원인데, 중국물가를 생각해서 1000원이면 나름 상당히 높은 수준의 상금입니다. 덕분에 화제가 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너무 높은 액수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차라리 1등은 500원 2등 두명을 뽑고 250씩 주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게 되는군요. 하지만 하나의 메타블로그의 홍보 모델로서 자리잡기에는 고전적이지만 재미있는 아이템이긴 합니다.

인터넷에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글쓰기 대회라고 할까요?

최근 주제로 정해지 것은 영화,여행,음식,공무원시험,부동산과 같은 주제이군요. 가장 평범하면서도 대중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중국의 사정상 정치관련 이야기가 나올리가 없다는 점에서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


해당 이벤트는 올블로그, 블로그코리아, 블로그테크등등의 중소기업?!에서는 실행하기 힘들겠지만, 다음 블로그 뉴스라던지 혹은 네이버 블로그 센터에서는 돈으로 밀어붙이기 용?!으로 사용할만 해보입니다.

이상을 이야기하여도, 현실에서 현금이 강력하죠.


추가 사항 : 생각해보니 소규모 메타싸이트에서도 해당 방법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군요. 현재 디씨와 같은 곳에서 행하는 방식과 같이, 몇몇 제품에 대한 리뷰를 메타싸이트에 기업이 의뢰를 해서 공개모집하는 방식입니다. 물론 상금을 걸고요. 이미 디씨와 같은 방식에 적응된 사람들에게는 나름 괜찮은 방식 같습니다. 라고 하지만 IT에 한정될 가능성이 농후한 것은 제 느낌이겠죠?!



추가로 블로그링크는 파워블로그 인터뷰라던지, 다음인사이드를 플로그인화한다던지(블로그링크가 다음의 중국지사이기에 불법카피가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이런저런 아이디어로 중국 시장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해당 사항은 한국의 일반 메타싸이트들에서 이미 실행하고 있는 것이니 따로 포스팅하지는 않겠습니다.




이것은 다른 생각입니다만...어느 싸이트던지 남녀간의 얄쌀쌀한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블로그를 통해서 결혼까지 하는 분들이 조금 더 많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직접적으로 말해서 블로그를 통해서 예전의 세이클럽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커플이 되고자 하는 솔로의 파괴력은 막.강.하.니.까.요. -_-;; (블로그 링크에서 소개된 파워 블로거가 여자인줄 알고 클릭했던 경험에서 나온 말입니다. 참고로 남자입니다. 쳇-_;;)



1. 다국어 체크(글자체는 MS 고딕)

Hello~ I am Baro

をたしわ 北京え いまし。

是北京大学历史系的研究生

그런겁니다. 라라라-_-;;;

 

2. 그림 넣기 체크

1) 하드

 sss

2) 웹

사용자 삽입 이미지

 

3. 전용기능

1. 표삽입

지도 교수님의 묘지명 수업..죽을거 같다;;
몽고사 수업. 그나마-_;;
인민대가서 수업듣고, 저녁에는 위진남북조.ㅠㅠ
수업없다! 하지만...내일 준비를 해야되는데...
자치통감 매주 3-_-;; 죽어야지;;;
러시아어...
러시아어.....휴일은 개뿔..주말이 제일 바빠.ㅠㅠ

 

2. 지도삽입

(너무 느려서 포기-_)

한국과 같은 고속 인터넷에서는 가능할지 모르나..

중국, 그것도 cdma 무선인터넷을 사용하는 본인은 불가능-_

 

 

본인처럼 인터넷 접속이 느리고 불안정한 사람에게는 꽤나 괜찮은 것 같다.

하지만 문제가 몇가지 보인다.

1) 아래쪽으로 자동으로 화면이 내려가지 않는다. 열심히 타자를 치다보면, 글이 안보인다.-_-;; 말로 설명하니 이상한데, 써보면 안다!  그래서 장문을 쓸 때는 좀 많이 귀찮아 보인다.

2) 태그가 입력이 불가능하다. 결국 나중에라도 홈페이지에 가서 태그를 달아주어야 된다. 좀 불편하다. 누가 TC용 태그 입력기를 개발해주지 않으려나? 이것을 보니 쉽게 플러그인을 개발할 수 있을것 같은데 말이다.(되긴 한다. 딱 하나만!)

태그 입력 가능하다! 태그 사이에 ","을 넣어주면 된다 -0-;;

얼마전에 "모든블로그"에서 대빵자리에 있는 "스카이"님과 msn으로 이야기를 하다가 중국 펀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습니다. 그 때 저는 그냥 감으로 "아마 연말정도 되면 떨어질껄요"라는 말을 했었습니다. 오늘 기사를 보다보니 정말 떨어졌더군요.

물론 그냥 감은 아니고 이런저런 중국쪽 뉴스를 보고서 내 놓은 판단이긴 합니다만, 어찌되었든 제가 금융전문가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역사! 그것도 소수민족사라는 현대 자본주의시장과는 전혀 상관없는 공부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감으로 말해보겠습니다.

올림픽은 그냥 행사가 아닙니다. 물론 아테네 올림픽은 적자네 어쩌네 하지만, 중국과 같이 치고 올라오는 국가에서는 올림픽이라는 행사를 한다는 자체가 어마어마한 인지도 상승을 가지고 오게 됩니다.앞으로 연말까지 중국 펀드는 살짝 떨어지기 시작할 것이고, 반등할 때 꼭 사는게 좋을 듯 합니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IT 관련으로 일이 있지만 생략하고-_


슬슬 떨어지는 중국 펀드가 나중에 되면 다시 오르기 시작할 것입니다. 제 판단으로는 몇몇 큰 손 분들이 수익율을 올리기 위해서 언론으로 작전을 하시는듯 한데, 아마 이렇게 떨어지다가 어느 기점에서 올라가기 시작할 것이고, 그것은 최소한 내년 11월 초까지는 지속적으로 상승할 것입니다.

딱 한가지 우발적인 상황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올림픽에서 신장의 독립단체가 테러행위를 하지 않는 이상!(티벳은 폭력적인 성향의 테러행위를 기본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중국 정부도 죽어라 이러한 테러에 대비하고 있으니 해당 사건이 터질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습니다.


금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중국에서 빈둥거리는 사람의 감으로 말합니다. 지금 떨어지는 중국 펀드가 오르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구매하는 것이 좋을듯 합니다. 또 해당 펀드는 내년 11월 정도까지 유지되는 것으로 하는 것이 좋을듯 합니다.




...어디까지나 감입니다. 감...하하하^^: (전 심심풀이로 주식을 가끔 보긴 합니다. 투자는 안합니다. 저에게 게임과 같은 것이라서 게임에 돈 투자하기 싫다는 느낌이랄까요? 누구 말대로 아직 어립니다. 하하하~ ....흐음...실제로 조금이지만 투자하는 동생한테만 슬쩍 말해야되는 정보인가?! 머..어차피 몇 분 오시지도 않는 블로그이니 상관없어 보입니다.)

분명히 감이라고 했는데 투자해서 손해보시고 저한테 돌 던지시면 미워요! -0-;




대체 예술사는 어떻게 먹어야 될까? 간단히 말해서 이건 대체 말인지 정말 모르겠다. 그림은 정확하게 유치원 수준에서 멈추었고, 붓글씨 고사하고 본인이 글씨도 알아보는 사람으로서 예술은 개뿔이 예술이냔 말이다.


예술사를 하려면, 일정 정도의 그림을 있는 감별력이 있어야 되겠지만, 본인은 없다. 고로 앞으로 이쪽은 돌아보지 않으련다. 무엇을 알아 먹어야 것이 아닌가!!


이것은 마치 장님에게 모나리자가 인류의 보물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圣武亲征录校注》  清·王国维校注


  《圣武亲征录》一书,乾隆间修《四库书》时,以其序述无法,词颇蹇涩,译语互异,未著于录,仅存其目于史部杂史类中。钱竹汀先生始表章其书,为之跋尾。道光以后,学者颇治辽金元三史及西北地理,此书亦渐重于世。张石洲、何愿船二先生始为之校勘,而何氏治之尤勤。其殁后,稿本流传京师。光绪朝士,若顺德李仲约侍郎、萍乡文道希学士、嘉兴沈子培先生,递有增益。岁在甲午,桐卢袁重黎太常刊之于芜湖,是为此书有刊本之始。顾张、何二家所据本,虽云出竹汀先生家,然辗转传钞,谬误百出。石洲仅得翁覃溪学士家藏本一校之,无大悬绝也。余前在海上,于嘉兴沈先生座上见其所校《说郛》本《亲征录》,为明弘治旧钞,与何本异同甚多。先生晚岁不甚谈元史事,然于《说郛》本犹郑重手校。未几,先生归道山,其校本遂不可见。比来京师,胶州柯凤孙学士为余言,元太祖初起时之十三翼,今本《亲征录》不具,《说郛》本独多一翼,乃益梦想《说郛》本。旋知其本藏江安傅君沅叔所。乙丑季冬,乃从沅叔借校。沅叔并言尚有万历抄《说郛》本,在武进陶氏。丙寅正月赴天津,复从陶氏假之,其佳处与傅本略同。又江南图书馆有汪鱼亭家钞本,亦移书影钞得之。合三本互校,知汪本与何氏祖本同出一源,而字句较胜,夺误亦较少;《说郛》本尤胜,实为今日最古最备之本。因思具录其异同,为校记以饷学者。顾是书有今本之误,有明钞本之误,有原本之误,三者非一一理董,犹未易遽读也。幸而此书之祖祢之《秘史》,与其兄弟之拉施特书,其子姓之《元史》及当时文献,尚可参验,因复取以比勘,存其异同,并略疏其事实,为《校注》一卷。昔吴县洪文卿侍郎译拉施特书,并为《秘史》及此《录》作注,而遗稿不传,其说略见《元史译文证补》中。武进屠敬山撰《蒙兀儿史记》,于是《录》探索尤勤。近复有仁和丁益甫考证地理,亦非无一二可采。兹复剟取其说,其有瑕颣,间加辨正,虽不敢视为定本,然视何氏校本,则差可读矣。当有元成宗之世,西域人拉施特撰《蒙古全史》,其《太祖纪》一种,除所载宗室世系及西域战事详于此《录》外,余大都与此《录》符同,故学者多谓此《录》出于蒙古《脱卜赤颜》。往读《元史·察罕传》言,仁宗命译《脱必赤颜》,名曰《圣武开天记》,及《纪年纂要》、《太宗平金始末》等书,俱付史馆云云。案明修《元史》,其太祖、太宗二《纪》,大半取材此《录》,而明《文渊阁书目》乃有《圣武开天记》而无《圣武亲征录》,颇疑《亲征录》即《开天记》,顾《开天记》译于仁宗时,而此《录》之成,确在世祖之世。今本癸亥年王孤部下有原注云:今爱不花驸马丞相白达达是也。考阎复《高唐忠献王碑》及《元史·阿剌兀思剔吉忽里传》,爱不花当中统之初已总军事。又,其子阔里吉思,成宗即位封高唐王,则爱不花之卒必在世祖时。而此《录》成时,爱不花尚存,则非察罕所译之《开天记》明矣。又此《录》虽冠以“圣武”之名,实兼备英、文之事。且太祖事止记岁名,而太宗事则详及月日,盖所取材本自不同。疑太祖朝事出《脱卜赤颜》,与《开天记》同源,太宗朝事则别取《平金始末》等书以益之。且作者于蒙古文字未能深造,证以《秘史》,踳驳不一而足,故仁宗朝复令察罕重译。今拉施特书幸存,而察罕书不传,殊令人有遗憾已。丙寅二月清明日,海宁王国维。

 
圣武亲征录校注

  《圣武亲征录》一卷 皇元
 
  〔右明钞《说郛》本标题如是,书题下有“皇元”字者,缘《说郛》中所收各书皆于本书下题唐厶厶撰、宋厶厶撰、或皇元厶厶撰。此《录》不知何人所撰,故但题皇元而缺其撰人姓名。后人移“皇元”二字于书名之上,殊非其旧,今行世本皆然,可知其皆出《说郛》本也。〕
 
  烈祖神元皇帝,
 
  〔《说郛》本“元”作“尧”,汪本作“先”,今从何本。《元史·祭祀志》:世祖至元三年,命平章赵璧等集议尊谥庙号,定为八室。烈祖神元皇帝第一室,太祖圣武皇帝第二室。〕
 
  讳也速该。
 
  〔下又作“叶速该”。《元朝秘史》作“也速该把阿秃儿”。〕
 
  初征塔塔儿部,
 
  〔塔塔儿即唐、五代时之达怛、达靼,辽之阻卜,金之阻幞也。详拙撰《鞑靼考》。〕
 
  获其部长帖木真斡怯、忽鲁不花辈,
 
  〔《说郛》本、汪本、何本,凡“斡”字皆讹为“幹”,今并从何校改正。《秘史》作“帖木真兀格、豁里不花”。〕
 
  还驻军跌里温盘陀山。
 
  〔《秘史》作“迭里温孛勒答黑山”,云在斡难河边。〕
 
  时我太祖圣武皇帝始生,
 
  〔何本无“始”字,从《说郛》本增。汪本作“姓”亦“始”之讹。〕
 
  右手握凝血。长而神异,以获帖木真,故命为上名。初族人泰赤乌部长别林,
 
  〔《说郛》本“长”作“居”,今从汪、何二本。《秘史》海都生三子,一名察剌孩领忽,察剌孩领忽生子名想昆必勒格,想昆必勒格生子名俺巴孩,就做了泰亦赤兀惕姓氏。此泰赤乌即泰亦赤兀惕,别林即想昆必勒格。想昆者,详稳之异译,乃官名,其本名实为必勒格别林,又必勒格之略。海都为太祖六世祖,则别林乃太祖高祖行也。〕
 
  旧无怨于我,后因其主阿丹可汗
 
  〔《说郛》本“丹”作“舟”,今从汪、何二本。某氏曰:“《秘史》(一),俺巴孩之后,为泰亦赤兀惕氏。俺巴孩为金人所虏,寄语其十子中之合答安太子,令其复仇。合答安太子即此阿丹可汗也。”桐庐袁氏刊何校本中,附光绪朝士校语,杂出顺德李仲约侍郎(文田)、萍乡文道希学士(廷式)、嘉兴沈子培先生(曾植)之手,今以无从识别,故浑称某氏云。〕
 
  二子塔儿忽台、忽邻拔都
 
  〔诸本“忽”作“不”(那珂通世云:“不,乃兀之讹”),从下文及《秘史》改。“忽邻”作“忍邻”,从李侍郎说改正。何校于“忍邻拔都”下云:“《秘史》作‘乞邻秃黑’。”维案:《秘史》“塔儿忽台乞邻秃黑”八字,乃一人之名,不得云“二子”。此当是塔儿忽台为一人,忽邻拔都为一人。下文有泰赤乌部长沆忽阿忽出、忽怜、忽都答儿。拉施特书:塔儿忽台同祖兄弟忽力儿把阿秃儿、盎库兀库楚,皆为泰亦赤兀部长。忽怜及忽力儿把阿秃儿即此忽邻拔都也。〕
 
  有憾,遂绝。烈祖早世时,上冲幼,
 
  〔《秘史》云“九岁”。拉施特书云“十三岁”。〕
 
  部众多归泰赤乌。上闻近侍脱端火儿真亦将叛,
 
  〔何氏云:“《秘史》有脱朵延吉儿帖,疑即此也。”〕
 
  自泣留之。脱端曰:“今清潭已涸,坚石已碎,留复何为!”遂去。上母月伦太后
 
  〔《元史·后妃表》:“烈祖宣懿皇后,讳月伦。”《秘史》作“诃额伦”。〕
 
  麾旗将兵,躬追叛者大半还。夙将察剌海背中枪
 
  〔何本“夙”作“部”,汪本作“俗”,今从《说郛》本。又,何本脱“背”字,《说郛》本作“皆”今从汪本。《秘史》云:“脱朵延吉儿帖又将察剌合老人脊背上刺了一枪。”〕
 
  创甚,上亲视劳慰。察剌海曰:“先君登遐,
 
  〔汪本作“自君登避”,何本作“自居登避”。何改“自先君登遐”,正与《说郛》本合,但多一“自”字耳。〕
 
  部人多叛。臣不胜忿,远追苦战,以致然也。”上感泣而出。时上麾下搠只塔儿马剌
 
  〔《秘史》作“拙赤塔儿马剌”。〕
 
  别居萨里河,
 
  〔《秘史》作“撒阿里客额儿”。客额儿,《秘史》蒙文旁注:“野甸。”译文则云“地面”,此《录》多译为“河川”字。此“撒阿里客额儿”与太祖征乃蛮时两次驻军之“撒阿里客额儿”同名异地。下文又有萨里川不鲁古崖,不鲁古崖即《秘史》之不峏罕山,在今斡难、克鲁伦两河发源处。《元史·太祖纪》:“崩于萨里川哈老徒之行宫”,今克鲁伦河上游之西有哈老台岭、哈老台河、哈老台泊,即哈老徒。是克鲁伦河源及其上游地并得称撒阿里客额儿,此萨里河即其地也。〕
 
  札答兰氏札木合
 
  〔《秘史》:“那怀孕的妇人,孛端察儿将做了他妻,生了一个儿子,唤作札只剌歹。后来札答剌的人氏,他便是他祖。札只剌歹的儿子名土古兀歹,土古兀歹的儿子名不里不勒赤鲁,不里不勒赤鲁的儿子名合剌合答安,合剌合答安的儿子名札木合,就做了札答阑姓氏。”〕
 
  部人秃台察儿
 
  〔《秘史》作“札木合弟绐察儿”。〕
 
  居玉律哥泉,
 
  〔《秘史》作“斡亦该不剌合”。近仁和丁谦〕
 
  以车臣部右翼左旗之乌兰滚布拉克当之,是也。举众来萨里河掠搠只牧马。搠只麾左右匿马群中,射杀之。札木合以是为隙,遂与泰赤乌、亦乞剌思
 
  〔《秘史》作“亦乞列思”。《元史·孛秃传》:“孛秃,亦乞列思氏。太祖尝潜遣术儿彻丹出使,至也儿古纳河。孛秃知其为帝所遣”云云,是亦乞列思部居今额儿古讷河左右。又《特薛禅传》:“太祖谕火忽曰:‘哈老温迤东,涂河、潢河之间,火儿赤纳庆州之地,与亦乞列思为邻,”云云,此恐太祖新赐之地,非其本土也。〕
 
  兀鲁吾、
 
  〔诸本“兀”作“元”,从何校改正。兀鲁吾即兀鲁兀惕也。《秘史》:篾年土敦子纳臣把阿秃儿生二子,一名兀鲁兀歹,一名忙忽台,就做了兀鲁兀惕、忙忽惕二姓氏。〕
 
  那也勤、
 
  〔诸本作“郡也勒”,据拉施特书,此处有那牙勤,则“郡也勒”当是“那也勤”之讹,今订正。《秘史》:篾年土敦第二子合臣,合臣的子名那牙乞歹,那牙乞歹因他性儿好装官人模样,就做了那牙勤姓氏。〕
 
  八鲁剌思、
 
  〔《秘史》:“篾年土敦第三子合出兀的子名巴鲁剌台,因他生的身子大,吃茶饭猛的上头,就做了巴鲁剌思姓氏。第四子合出剌之子亦吃茶饭猛,唤做大巴鲁剌、小巴鲁剌、额儿点图巴鲁剌、脱朵延巴鲁剌,将这四个名就做了姓氏。”〕
 
  霸邻诸部,
 
  〔《秘史》:“那妇人孛端察儿根前再生一子,名巴邻阿歹,后来做了巴阿邻姓氏的祖。那巴里阿歹的儿子名赤都忽勒孛阔。赤都忽勒孛阔娶妻的多,儿子多生了,因此上做了篾年巴阿邻姓氏。”〕
 
  合谋以众三万来战。
 
  〔《秘史》:“札木合领着他一种并十三部,共三万人。”案:上所记共六部。武进屠敬山(寄)据拉施特书,补豁罗剌思一部,又补翁吉剌、合答斤、撒勒只兀、朵儿边、塔塔儿五部,殆是也。〕
 
  上时驻军答兰版朱思之野,
 
  〔下文作“答兰班朱思”《秘史》卷四作“答兰巴泐主惕”,卷八蒙文作“答阑巴泐渚惕”,而译文作“巴泐渚纳”,盖涉巴泐渚纳海子而误也。考太祖于此地战败后,退入斡难河域之哲列捏地方,则其地当近斡难河。〕
 
  亦乞剌部人捏群之子
 
  〔诸本“乞”作“迄”,汪、何二本“群”作“辟”,万历钞《说郛》本作“郡”,弘治钞本及《元史类编》所引不误,今据以订正。何校云当作“群”,正与弘治钞本合。〕
 
  孛徒先在麾下,
 
  〔诸本“孛”作“字”,从《元史类编》所引改。孛徒,《元史》有传,字作“孛秃”。《秘史》(三):“一种亦乞列孙的人不图这里做女婿也来了。”“不图”亦即“孛徒”,其来正在答兰版朱思战役前,所谓“先在麾下”者也。〕
 
  至是自曲邻居山
 
  〔汪、何二本作“自是曲邻居山”,今从何校改正。《说郛》本作“王自是曲邻居山”,亦误。〕
 
  遣卜栾台、慕哥二人逾阿剌乌、秃剌乌二山来告变。
 
  〔诸本,“栾”作“奕”,今订正。《秘史》蒙文(四):“札木合军逾阿剌屼々惕土儿合兀的,时亦乞列思人木惕客脱塔黑、孛罗勒歹到成吉思所居古连勒古地面告变了。”《元史·孛秃传》:“札赤刺歹札木合、脱也等以兵三万入寇。孛秃闻之,遣波栾歹、磨里秃秃来告。”孛罗勒歹、波栾歹即此卜栾台,木惕客脱塔黑、摩里秃秃即此慕哥,阿剌屼屼惕土儿合兀的即此阿剌乌秃剌乌山,古连勒古即此曲邻居山。但此《录》译《秘史》颇误,不必强为之说。古连勒古地面,据《秘史》在桑沽儿河旁,即今僧库尔河。〕
 
  上集诸部戒严,凡十有三翼,
 
  〔汪、何二本作“凡有十三翼”,《说郛》本脱“十”字,《元史类编》引作“凡十有二翼”。〕
 
  月伦太后暨上昆弟为一翼;
 
  〔何本“一”作“三”,汪本脱此字,今从《说郛》本及《类编》所引改正。拉施特书:“谔伦额格并其族斡勒忽阑人为第一翼,帝及帝之子弟并其从人与各族之子弟为第二翼。”〕
 
  三哈初来之子奔塔出拔都、
 
  〔何本无“三”字,从《说郛》本、汪本增。拔都,《说郛》本作“拔相”,何本又讹为“板相”,今从何校改。三哈初来,即《秘史》之挦薛出列、拉施特书之撒姆哈准也。“三”字与“挦”字及“撒姆”二合音字,对音最切,断不可遗。《秘史》:“屯必乃薛禅生二子,一名合不勒合罕,一名挦薛出列。挦薛出列的子不(勒)帖出把阿秃儿。”此奔塔出拔都即不勒塔出把阿秃儿也。〕
 
  秃不哥逸敦、
 
  〔拉施特书:“三翼为撒姆哈准之后人布拉柱把阿秃儿,又有客拉亦特之分族人。”洪文卿侍郎(钧)云:“《录》中,秃不哥逸敦之名未见。‘客亦特’与‘哥逸敦’音近,恐《西域史》误以人名为部名。”屠敬山云:“秃不哥亦敦,当是秃不哥克烈亦敦之脱误,亦即《秘史》秃别干客烈亦惕之异文也。秃别干为客烈亦惕之分族,故旧史称肖乃台为秃伯怯烈氏。拉施特书之客拉亦特即客烈亦惕之异文。所谓分族,即指秃别干也。”二说并持之有故,兹两存之。〕
 
  木忽儿好兰统阿答儿斤、
 
  〔汪、河二本作“木儿忽好兰”,今从《说郛》本改。下文有“答儿斤”,木忽儿哈檀即是人也。《秘史》:“篾年土敦第五子合赤温的儿子名阿答儿乞歹,兄弟中间好间谍,就做了阿答儿斤姓氏。”〕
 
  察忽兰统火鲁剌诸部,
 
  〔诸本无“统”字,从洪侍郎说增。“火”,或作“大”,从汪本改。拉施特书作:“又阿答儿斤人将曰木忽儿忽阑,又火罗剌斯人将曰察鲁哈火鲁剌,今称郭尔罗斯。”《秘史》作“溪罗剌思”,《秘史》蒙文(四)有溪罗剌思察合安,疑即此察忽兰也。〕
 
  及鲜明昆那颜之子迭良统火力台不答安辈为一翼;
 
  〔拉施特书:“四翼为苏儿嘎图诺延之子得林赤并其弟火力台,并博歹阿特人。”案:拉氏《部族考》,博歹阿特氏中有火力台,则苏尔嘎图那颜亦当是博歹阿特人。屠敬山以晃溪坛氏之雪亦客秃当之,非也。博歹阿特即不答安。《秘史》:“篾年土敦第六子合阑歹的儿子争粥饭,无上下,因此就做了不答安姓氏。”〕
 
  札剌儿及阿哈部为一翼;
 
  〔拉施特书:“五、六翼为莎儿哈秃月儿乞之子薛撒别乞,并其从兄弟泰出及札剌亦人、莎儿哈秃人。”案:《秘史》,札剌亦儿人此时在太祖所者,有脱忽剌温兄弟三人,并薛扯朵抹黑之子阿儿孩合撒儿、巴剌二人。阿哈部未详。〕
 
  答里台、火察儿二人
 
  〔汪、何二本“里”作“圣”,《说郛》本作“圣”今订正。案:《秘史》,答里台斡赤斤为太祖季父,忽察儿为太祖仲父捏坤太子之子,故同在一翼。〕
 
  及朵忽兰、捏古思、火鲁罕、撒合夷、嫩真诸部为一翼;
 
  〔何本“朵忽兰”作“忽都兰”,“撒合夷嫩真诸部”作“撒合弟直部”,汪本亦脱“嫩”、“诸”二字,今并从《说郛》本改正。拉施特书:“九翼为答里台、斡赤斤及捏坤大石子、火察儿族人达鲁,并都黑剌特、努古思、火儿罕、撒哈夷特委神诸部。”案:此朵忽兰即都黑拉特,洪侍郎谓即《秘史》纳臣之子朵豁剌歹之后。捏古思即努古思,《秘史》作“捏兀歹”,不著其所自出。拉施特书谓海都子察剌孩领忽二子更都赤那及乌鲁克勤赤那之后,然后文此二族自为一翼,则拉氏谓努古思即赤那思,或未然也。火鲁罕,未详是人名?抑部族名?撒合夷,《秘史》作“撒合亦惕”。卷四蒙文有温真撒合亦惕,温真即此嫩真,但《秘史》旁注:“人名”。据此则部名也。〕
 
  忽都图忙纳儿之子蒙哥怯只儿哥为一翼;
 
  〔诸本“忽都”作“忽相”,今订正。《秘史》(一)合不勒合罕子有忽秃黑秃蒙古儿,卷四蒙文作“忽秃黑秃蒙列儿”,《元史·宗室世系表》作“忽都鲁咩聂儿”,即此忽都图忙纳儿也,然其子名不里孛阔,非蒙哥怯只儿哥。拉施特书,无此一翼,其第八翼为蒙格秃乞颜之子程克索特及其弟,皆为帝之从兄弟,又巴牙兀特人酋曰汪古儿。洪侍郎疑此蒙哥怯只儿哥即蒙格秃乞颜,然则此处上下并有脱文也。《秘史》蒙文(三):“蒙格秃乞颜的儿子翁古儿同敞失兀惕巴牙兀的两种人也来了。”拉氏书之程克索特当是程索克特之误,即《秘史》之敞失兀惕,拉氏误以部名为人名,又岐蒙格秃乞颜二子与汪古儿而二之,盖非。〕
 
  忽都剌可汗之子搠只可汗为一翼;
 
  〔忽都剌,汪、何二本作“忽兰脱”,《说郛》本作“忽相剌”,今订正。〕
 
  按坛为一翼;
 
  〔汪、何二本“坛”作“<土玄>,今从《说郛》本。拉施特书:“十翼为忽都剌合罕之子拙赤汗及其从人,十一翼为按坛亦忽都剌子。”《秘史》:“忽图剌忽罕生三子,一名拙赤,一名吉儿马兀,一名阿勒坛。”〕
 
  忽兰、脱端二人为一翼;
 
  〔何本脱“二人”二字,今从《说郛》本、汪本补。《秘史》合不勒合罕生七子,一名忽阑,一名脱朵延斡赤斤,即此忽兰、脱端二人也。拉施特书,无此二人,惟其第七翼为渥秃助忽都、朵端乞及其麾下。朵端乞与脱端声相近。〕
 
  共吉牙部、塔降吉拔都统雪干、札剌吾思为一翼;
 
  〔汪、何二本无此十九字,今从《说郛》本补。拔都,原作“拔相”,今订正。拉施特书:“十二翼为答忽把阿秃儿及晃火攸特人、速客特人。”答忽把阿秃儿即此塔降吉拔都,速客特即此雪干,惟晃火攸特与此札剌吾思音殊不类,所当阙疑。《秘史》蒙文(三):“速客客种者该、晃答豁儿的儿子速客该者温也来了。”晃火攸特疑即晃答豁儿之误,雪干疑即速客该者温。惟共吉牙部则他书从未见此部名,疑此文尚有讹阙也。〕
 
  建都赤纳、玉烈贞赤纳二部为一翼。
 
  〔何本作“疌相赤纳玉烈二都为一翼”。汪本“二都”作“二郎”,余同。《说郛》本作“达相赤纳、玉烈贞赤剌为一翼”,今从之。惟“吏”、“达”二字,皆“建”字之形讹,“剌”又“纳”之音讹。拉施特书:“第十三翼为更都赤那、乌鲁勤赤那之后努古思人”。《秘史》蒙文(九)雄狼之本语曰坚都赤那,知“达”、“疌”二字,皆“建”之讹也。此上十三翼中,仅得十翼,又与拉氏书互异,可以参观。〕
 
  军成,大战于答兰版朱思之野,
 
  〔汪、何二本无“成”字,据《说郛》本补。〕
 
  札木合败走。
 
  〔《秘史》谓是役太祖败。此盖讳之。〕
 
  彼军初越二山,半途为七十二灶,烹狼为食。
 
  〔《秘史》:“札木合将赤那思地面所有的大王,每将七十锅煮了。”蒙文则云:“赤那孙可兀的答阑脱豁惕不察勒合周。”案:蒙古语狼为赤那,子为可兀,则此句就字面译之,可云:将狼之子七十锅煮了。至拉施特书,以烹人属之太祖。时赤那思人方从太祖为十三翼之一,太祖决无自烹其属部之理,其诬盖不待辨矣。〕
 
  是时泰出乌部地广民众而内无统纪,其族照烈部与我近,
 
  〔《秘史》:“合必赤的母,从嫁来的妇人,孛端察儿做了妾,生了个儿子名沼兀烈歹,后来做了沼兀烈亦惕姓氏。”〕
 
  常猎斡禅札剌马思之野。
 
  〔汪、何二本“斡禅”作“幹幹”,今从《说郛》本。拉施特书作“乌者哲儿们山”,未详所在。〕
 
  上时亦猎围,陈隅相属既合。
 
  〔《说郛》本“隅”作“偶”。汪、何二本“既”下有“而”字,今从《说郛》本删。〕
 
  上曰:“可同宿于此乎?”彼曰:“猎骑四百,糗粮不具,已遣半还。”上曰:“命给助同宿者。”越明日,再合围。上宾之,使驱兽近彼陈,让多获以厌其心。彼众咸相语曰:
 
  〔汪、何二本“语”作“告”,今从《说郛》本。〕
 
  “泰赤乌与我虽兄弟,
 
  〔汪本无“与”字,何本作“虽我兄弟”。今从《说郛》本。《元史》同。〕
 
  常攘我车马,夺我饮食。厚恤我者其此人乎?”
 
  〔汪、何二本“厚”作“忧”,今从《说郛》本。〕
 
  大称羡而归。上因遣告之曰:“可来结盟否?”照烈之长玉烈拔都
 
  〔诸本“都”作“相”。何氏云:“通校前后文,‘拔相’皆‘拔都’之讹。”〕
 
  谋于族长马兀牙答纳。
 
  〔何本“兀”作“儿”,今从《说郛》本、汪本。〕
 
  对曰:“泰赤乌何恶于我?彼亦为兄弟,何遽降之?”不从。玉律拔都遂与塔海答鲁领所部来归。谓上曰:“如我属,将有无夫之妇、无牧之马而来,以泰赤乌长母之子讨杀我也。
 
  〔弘治钞《说郛》本、汪本“我”作“故”,今从万历钞本及何本。〕
 
  我担当弃亲从义而招之。”
 
  〔汪、何二本无“亲”字,“招”作“拈”,今从说郛本。〕
 
  上曰:“我方熟寐,摔发而悟之。兀坐掀髯而起之,
 
  〔汪、何二本下“之”字作“曰”,今从《说郛》本。〕
 
  汝之言我素心也。汝兵车所至,余悉力而助也。”既盟后,二人食言叛归。
 
  〔诸本此下有“少”字,何氏删。〕
 
  族人忽敦忽儿章
 
  〔诸本“敦”作“数”,据后文作“忽敦忽儿章”改。《秘史》蒙文卷四有泰亦赤兀人豁敦斡儿长,又卷五作“豁团斡儿昌”。〕
 
  怨塔海答鲁反侧,遂杀之。照烈部已亡矣,泰赤乌部众苦其长非法,相告曰:“太子
 
  〔原注:“谓太祖也。”〕
 
  衣人以己衣,乘人以己马,安民定国,必此人也。”
 
  〔何本“安”作“案”,今从《说郛》本、汪本。〕
 
  因悉来归。赤剌温拔都、
 
  〔汪、何二本作“赤老温拔相”,今从《说郛》本、何校改。〕
 
  哲别二人实泰赤乌族脱脱哥家人,亦来归。初,上尝为塔儿忽台所执,赤剌温拔都
 
  〔何本脱此三十二字,今从《说郛》本、汪本补。赤剌温,《秘史》作“赤老温”,“哲别”作“者别”,“脱脱哥”作“脱朵格”。拉施特书云:“哲别本在泰亦赤兀部长哈丹大石之子布答麾下。”与《秘史》及此《录》不同。〕
 
  父梭鲁罕失剌密释之,
 
  〔《秘史》作“锁儿罕失剌”。〕
 
  是以归我。哲别之来,实以力穷故也。
 
  〔汪、何二本“是以”作“是时”,今从《说郛》本。〕
 
  失力哥也不干
 
  〔失力哥,《秘史》作“失儿古额秃”,《元史·伯颜传》作“述律哥图也”。不干者,蒙古语谓老人。〕
 
  手执阿忽赤拔都、
 
  〔汪、何二本作“忽阿失拔相”,《说郛》本作“忽阿赤拔相”。案:拉施特书作“阿忽朱把阿秃儿”,则“忽阿”二字当乙转。阿忽赤拔都即《秘史》之泰亦赤兀敦阿兀出把阿秃儿也。〕
 
  塔儿忽台二人来至忽都浑野,复纵之去,止将己子乃牙、阿剌二人来归。
 
  〔诸本“牙”作“才”,今从何校订正。《秘史》“忽都浑”作“忽都忽”,“乃牙”作“纳牙”,“阿剌”作“阿剌黑”。又赤剌温、哲别、失力哥诸人来归,《秘史》并在鸡儿年灭泰赤乌后,此移于前。〕
 
  后搠只、鲁钞罕二人率朵郎吉札剌儿部,
 
  〔朵郎吉札剌儿,何氏本作“朵郎即利剌儿”,何校据《元史》改正,今从之。《说郛》本作“朵郎执吉剌儿”,汪本作“朵即吉利剌儿”,亦误。拉施特书:“札剌亦儿分族朵郎吉部长术只角儿海亦率所部至朵郎古特、辛古特之地,归于帝。”案:朵郎古特即《秘史》之帖列格秃,亦作帖列秃,《秘史》记太祖追撒察别乞、泰出,至帖列秃,后即记札剌亦儿人帖列格秃巴颜来归,即此事也。其文云:“帖列格秃巴颜有三子,教长子古温兀阿将他二子模合理、不合拜见太祖与了,又教第二子赤剌温孩亦赤将自己二子统格、合失拜见,又将第三子者卜客与了太祖弟合撒儿”云云,盖帖列格秃巴颜即以帖列格秃之地为名,而朵郎吉札剌儿氏又以帖列格秃巴颜之名为氏,然则搠只、鲁钞罕二人殆即古温兀阿兄弟。搠只,别作“拙赤”或“术赤”,蒙俗长、次子方有此名,殆即古温兀阿。鲁钞罕,拉施特书作“角儿海”,自是“钞鲁罕”之倒误,即赤剌温之异译也。〕
 
  及荽叶胜和率忙兀部亦来归。
 
  〔汪、何二本“叶”作“菜”,今从《说郛》本。案:荽叶,疑“委叶”之讹。《元史·畏答儿传》:“畏答儿,忙兀人。与兄畏翼俱事太祖时太畴强盛,畏翼率其属往归之,畏答儿力止之”云云,委叶胜和当是异翼也。〕
 
  日后,上同月伦太后暨哈撤儿、斡真那颜
 
  〔《元史·宗室世系表》:烈祖五子,次二搠只哈儿王,次四铁木哥斡赤斤,所谓皇大弟国王斡嗔那颜者也。搠只哈儿,《秘史》及《元史》纪传并作“哈撒儿”。〕
 
  诸昆弟族薛彻、大丑等,
 
  〔《说郛》本无“诸”字,何本无“族”字,今从汪本。《秘史》蒙文(三):“主儿乞种莎儿合秃主儿乞的儿子撒察别乞、泰出一圈子,由札木合处分离著来了。”撒察别乞即此薛彻,泰出即此大丑也。〕
 
  各以旄车载湩酪,
 
  〔原注:湩,音董,乳汁也。汪、何二本夺此注,从《说郛》本补。又,《说郛》本正文无“旄”字,今从汪、何二本。《元史·本纪》同。〕
 
  大会于斡难河林木间。会中,太后暨上为族人薛彻别吉
 
  〔诸本“为”作“谓”,从何校改。〕
 
  及其母忽儿真哈敦
 
  〔《秘史》作“忽兀儿臣合敦”。〕
 
  共置马湩一革囊,
 
  〔汪、何二本“马”作“酪”,今从《说郛》本。〕
 
  其次母野别该前独置一革囊。
 
  〔何本作“也别该”,今从《说郛》本、汪本。《秘史》作“额别该”。〕
 
  忽儿真哈敦怒曰:“今不尊我,而贵野别该乎?”遂笞主膳者失邱儿,
 
  〔《秘史》作“失乞兀儿”。〕
 
  泣曰:“盖以捏群太石、叶速该拔都二君去世,
 
  〔诸本作“捏辟太后叶速该命拔相”,今从何校更正。《秘史》:把儿坛把阿秃儿生四子,一名忙格秃乞颜,一名捏坤太子,一名也速该把阿秃儿,一名答里台斡赤斤。〕
 
  我专为他人所辱至此。”因大哭。是时别里古台那颜
 
  〔《元史·世系表》:烈祖五子,次五别里古台王。《秘史》作“别勒古台”。〕
 
  掌上乞烈思事,
 
  〔原注:“系禁外系马所”。〕
 
  亲御上马。
 
  〔诸本“御”作“摇”,今订正。〕
 
  播里掌薛彻别吉乞列思事。
 
  〔《秘史》:“忽秃黑秃蒙古儿生一子,名不里孛阔。”即此播里。〕
 
  播里从者因盗我马靷,别里古台执之。播里怒斫别里古台。背伤。左右欲斗,别里古台止之,
 
  〔何本“止”作“指”,今从《说郛》本、汪本。〕
 
  曰:“此仇汝等欲即报乎?我伤不甚也,姑待之,不可由我致隙。”其众不听,各执马乳橦,
 
  〔何本“乳橦”作“乱撞”,今从《说郛》本、汪本。〕
 
  斫木枝疾斗,我众胜之,乃,夺忽儿真、火里真二哈敦留麾下。
 
  〔汪、何二本“留”作“届”,今从《说郛》本。火里真,《秘史》作“豁里真”。〕
 
  后复议和,遣二哈敦归。行成之际,塔塔儿部长蔑兀真笑里徒
 
  〔《秘史》作“蔑古真薛兀勒图”。〕
 
  背金约,金主遣丞相完颜襄帅兵逐塔塔儿北走。上闻之,遂起近兵发自斡难河,迎讨之,仍谕月儿斤来助。
 
  〔汪本“仍”作“人”,何本作“又”,今从《说郛》本。〕
 
  月儿斤,
 
  〔《秘史》作“主儿勤”,《元史·世系表》作“岳里斤”,乃薛彻、大丑等一族之名。〕
 
  候六日不至,上以麾下兵,与战纳剌秃失图、忽剌秃失图之野,
 
  〔诸本“纳”作“纳”,据《元史类编》所引改。又《说郛》本及《类编》所引无“忽剌秃失图”五字,今据汪、何二本增。《秘史》蒙文(四):“塔塔儿在浯勒札河畔忽速秃失秃延、纳剌秃失秃延地面立了寨子。”是两地在今乌尔载河畔。又“忽剌秃”之“剌”,疑当作“速”。〕
 
  尽虏其车马粮饷,
 
  〔何本无“其”字,从《说郛》本、汪本补。〕
 
  杀蔑兀真笑里徒,又获大珠衾、银绷车各一。金兵回,金主因我灭塔塔儿,就拜上为察兀忽鲁,
 
  〔汪、何二本无“就”字,从《说郛》本增。察兀忽鲁,《秘史》作“札兀忽里”,华言百夫长也。“鲁”字下有原注六字曰:“若金移计使也”。某氏曰:“移计者,招讨之误。”《秘史》:“王京说太祖:‘归奏金主,再大的名分招讨官与你做者。’”此括其语意,然“札兀忽里”非“招讨使”也。原注盖微误。〕
 
  亦册克烈部长脱怜为王。
 
  〔诸本“王”作“主”,依何校改。克烈部长脱怜,《秘史》作“客烈亦敦脱斡邻勒”。案:此上无脱怜同伐塔塔儿事,当有缺文。又伐塔塔儿事,详《秘史》及《金史·内族襄传》〕
 
  时我众居哈连徒泽间,
 
  〔《秘史》作“合澧泐秃海子”,今克鲁伦河上游之西噶老台泊。〕
 
  为乃蛮部人所掠。
 
  〔何氏曰:“《元史,太祖纪》云:‘帝之麾下有为乃蛮部人所掠者,帝欲讨之,复遣六十人征兵于薛彻别吉。薛彻别吉以旧怨之故,杀其十人,去五十人衣而归之。’《秘史》则云:‘太祖落下的老小营在合澧泐秃海子边,被主儿乞将五十人剥了衣服,十人杀了。’二说虽不同,然其载薛彻别吉起衅则同。此书原本当亦载此事,与《本纪》同,为传写者脱去耳。”〕
 
  上怒曰:“曩者别里古台为彼所伤,
 
  〔何本“曩”作“昔”,今从《说郛》本、汪本。〕
 
  我舍衅议和而不听,今何乃乘敌势陵我!”因发兵于大川,至朵栾盘陀山,
 
  〔何本无“陀”字,今从《说郛》本、汪本增。栾,诸本作“奕”。案:拉施特书此处作:“引众越沙漠,至朵阑布勒答克之地。”朵阑布拉答克即《秘史》之朵罗安孛勒答兀,则“奕”为“栾”字之讹无疑。案:《秘史》(四)及《续集》(二)两见此山,皆系之于阔朵额阿拉,即与本《录》之只感忽卢曲雕阿兰、月忒哥忽阑异名同地。那珂博士曰:“阔朵额阿拉,蒙古语阿拉儿洲也,地在撒阿里客额儿东南克鲁伦河之洲,后成吉思汗设大斡儿朵之处也。”箭内博士以为当在桑沽儿河入克鲁伦河之处得之。〕
 
  大掠月儿斤部,
 
  〔汪、何二本“掠”作“掳”,今从《说郛》本。〕
 
  惟薛彻、大丑仅以妻孥数人脱走。上时居塔朵速之野,
 
  〔汪、何二本作“塔朵剌”,今从《说郛》本。《秘史》作“帖儿速地面”。〕
 
  有克烈部汪可汗弟札阿绀孛来归。
 
  〔“汪可汗”即克烈部长脱怜,《秘史》作“王罕”,“札阿绀孛”作“札合敢不”。时汪罕为乃蛮所逐,奔于西辽,故其弟来归。〕
 
  适蔑里乞部与我会战,
 
  〔篾里乞,《秘史》作“篾儿乞”,即《辽史·天祚纪》之“密儿纪”,《兵卫志》、《百官志》之“梅野急”也。其族居鄂尔昆河下游及色楞格河左右。〕
 
  上与札阿绀孛迎敌之,其众败走。是时,有土满土伯夷、董哀诸部,乃克烈败散之众,亦来降。
 
  〔《秘史》蒙文(五):“那里土绵秃别干、斡栾董合亦惕溃散了的客列亦惕也来投入了。”土绵秃别干即此士满土伯夷,斡栾董合亦惕即此董哀。土绵之言万也,斡栾之言多也,二部中小部甚多,又皆客亦列惕之分部,故又总结之曰“溃散了的客列亦惕”。此《录》用一“乃”字甚协。而《秘史》译文乃云:“又客列亦种及那秃别干、董哈等姓溃散的百姓亦来降。”区客列亦种与二部而二之,非也。
 
  拉施特书,此节之上有“帝时年四十”云云。以拉氏书所纪帝卒年上推之,则是岁当为金章宗明昌五年甲寅。洪侍郎曰:“完颜襄北伐,见《金史》当即塔塔儿之役。合纪传考之,乃是丙辰年事,在甲寅后二年。元初无史官,《太祖本纪》(谓拉氏书中之《太祖本纪》)为后来追忆著录,年分未尽可凭。”其说是也。又拉氏书纪年自乙卯始,本书则始自壬戌,二书同一蓝本,而此点相异,不知拉氏书自增入干支,抑系本书夺落也。附志于此,以谂读者。〕
 
  汪罕可汗始与叶速该可汗和好,相称按答。
 
  〔原注:“交物之友”。何本“交”作“变”,《说郛》本脱“物”字,今从汪本及《元史·太祖本纪》订正。〕
 
  所以然者,由初汪可汗之父忽儿札胡思杯禄可汗既卒,
 
  〔《秘史》作“忽儿察忽思不亦鲁罕”。〕
 
  汪可汗杀戮昆弟。其叔父菊儿可汗
 
  〔《秘史》作“古儿罕”。〕
 
  率兵与汪可汗战,逼汪可汗于哈剌温隘
 
  〔《秘史》蒙文(六):“王罕顺薛凉格河钻入哈剌温,狭处。”是其地当在今色棱格河流域。〕
 
  败之,仅以百余骑,奔叶速该可汗。叶速该可汗
 
  〔诸本无此五字,张石洲曰:“当重一句”。〕
 
  亲将兵逐菊儿可汗走西夏,复夺部众归之。汪可汗感德,遂盟按答。
 
  〔《元史类编》引作“遂请盟,称按答”。〕
 
  后汪可汗弟也力可哈剌者,
 
  〔《秘史》作“额儿客合剌”。〕
 
  以其多杀昆弟,叛归乃蛮部亦难赤可汗。
 
  〔《秘史》作“亦难察罕”。〕
 
  亦难赤可汗发兵伐汪可汗,尽夺克烈部众与也力可哈剌。汪可汗脱身,历走三城,
 
  〔《元史·太祖纪》:“汪罕走河西、回鹘、回回三国。”〕
 
  奔赴契丹主菊儿可汗。
 
  〔何氏原本作“菊儿”,何改“菊律”,《说郛》本、汪本亦作“菊律儿律”,一也。《秘史》作“合剌乞塔的古儿罕”。案:耶律大石自立为葛儿罕,后子孙世袭此号。何氏以乃蛮遗种屈出律当之,误也。〕
 
  既而复叛之,涉畏吾儿、西夏诸城邑,中道粮绝,遗乳羊五头,以绳禁羊口,夺其乳为饮,刺橐驼血煮为食,困甚,
 
  〔何本重“食”字,今从《说郛》本、汪本删。
 
  拉施特书,系汪罕东归、在道困厄事于兔年之末,则其为乃蛮所逐至迟当在虎年春夏。缘《秘史》言王罕投入合剌乞塔种古儿皇帝处不及一年,又反出去,加以往反二万里,非二年间不能办也。〕
 
  仅至曲薛兀儿泽。
 
  〔《秘史》作“古泄儿海子”。屠敬山以唐努乌梁海之库苏古尔淖尔当之。对音虽合,然汪罕自畏吾儿、西夏来,不应过此所,当缺疑。〕
 
  上闻之,以其初与先君按答之故,
 
  〔何本无“与”字,从《说郛》本、汪本增。〕
 
  乃遣近侍塔海、雪也垓二人往招之来。
 
  〔《秘史》蒙文:“王罕行至古泄儿海,使塔孩把阿秃儿、速客该去迎。”译文夺“塔孩”一人。〕
 
  上自怯绿连河亲迎抚劳,安置军中,大赈给之。秋,上同汪可汗会于土兀剌河上黑林间,结为父子礼。是年冬,月儿斤部先脱走者薛彻、大丑,追至帖列徒之隘,灭之。
 
  〔帖列徒,《秘史》作“帖列秃”。又卷五、卷六有帖列格秃口子,乃克烈部西界,其地当在今土拉河迤西。
 
  此上,拉施特书系之龙年。〕
 
  次年秋,上发兵于哈剌哈河,伐蔑里乞部主脱脱,
 
  〔拉施特书:“蛇年,帝在霍拉思布拉思之地,率兵攻兀都亦特蔑儿乞。”洪侍郎云:“原文霍拉思布拉思在克鲁伦河近色棱嘎河之处。则此哈剌哈河当即会鄂尔昆河入色棱格河之哈拉河,非入贝尔湖之喀尔喀河,亦非入土剌河之喀老哈河也。霍拉思布拉思当谓哈拉河与布拉河中间之地。《秘史》兀都亦惕蔑儿乞脱黑脱阿,在不兀剌客额儿地面里有不兀剌客额儿,即今布拉河北之平原,故太祖发兵于哈拉、布拉两河间以伐之。姚燧《平章政事忙兀公神道》碑:‘哈剌斯、博罗斯、斡罗罕、薛连干,皆强宗也。’斡罗罕、薛连干即鄂尔昆、色楞格二河,则哈剌斯、博罗斯亦必指哈拉河及布拉河矣。拉氏所谓‘在克鲁伦河近色棱嘎河之处’者,正谓此地也。”〕
 
  战于莫察那山,
 
  〔《秘史》蒙文作“木鲁彻薛兀勒”,旁注:“地名。”拉施特书亦作“战于孟察之地”。下文云“木那义笑力之野”,亦即此地。〕
 
  遂掠兀都夷、蔑里乞二部,
 
  〔诸本“都”作“相”,从何校改。《秘史》:“兀都亦惕脱黑脱阿、兀洼思答亦儿兀孙、合阿台答儿麻剌三种蔑儿乞。”此役所伐之脱脱即兀都亦惕蔑儿乞部长,本文曰“遂”、曰“二部”,皆非也。〕
 
  收其众,尽以其所获给汪可汗。
 
  〔何本无“其”字,今从《说郛》本、汪本增。〕
 
  其后部众稍集,
 
  〔汪、何二本无“部”字,从《说郛》本增。〕
 
  不约我军,自侵蔑里乞,至捕兀剌川,
 
  〔汪、何二本无“捕”字,从《说郛》本增,下文作“不剌川”,《秘史》作“不兀剌客额儿”,今库伦北之布拉河也。〕
 
  杀脱脱之子土居思别吉,
 
  〔《秘史》作“脱古思别乞”。〕
 
  虏忽都台、察勒浑二哈敦,
 
  〔《秘史》蒙文:“要著他两女忽秃黑台、察阿仑。”拉施特书:“掠忽秃黑台、察勒浑二女。”不云哈敦。〕
 
  及招脱脱次子和都、赤剌温二人领部众而来
 
  〔和都,下文别作“火都”,《秘史》蒙文作“忽图”。〕
 
  所夺不以秋豪与我。脱脱奔巴儿忽真之隘。
 
  〔《秘史》作“巴儿忽真脱古木”,今俄属拜喀拉省尚有此地。
 
  此上,拉施特书系之蛇年。〕
 
  后上与汪可汗征杯禄可汗,至黑辛八石之野,
 
  〔《秘史》作“乞湿泐巴失海子”,今乌陇古河所潴之赫萨尔巴什泊也。〕
 
  尽虏其民。杯禄可汗先遣也的脱孛鲁
 
  〔《秘史》作“也迪土卜鲁黑”。〕
 
  领百骑为前锋,我军逼之,走据高山,其马鞍转坠,擒之。冬,上与乃蛮部将曲薛吾、撒八刺二人
 
  〔《秘史》作“可克薛兀撒卜剌黑”,乃一人非二人。〕
 
  遇于拜答剌边只儿之野。
 
  〔《秘史》作“巴亦答剌别勒赤”,拉施特书作“巴答剌海别勒赤列”,今科布多南之巴彦达尔克岭,殆是。屠敬山以赛因诺颜部右翼右末旗之拜达里克河当之,微嫌过东也。〕
 
  日暮,列陈对宿,期明日战。是夜,汪可汗多然火于所陈地,使人不疑,潜移众于哈薛兀里河上。
 
  〔《秘史》作“合剌泄兀勒”,李侍郎谓即今科布多札布干河南之哈剌泊。〕
 
  时札木合
 
  〔诸本无“合”字,从张石洲校增。〕
 
  在幕下,日出望见汪可汗立旗帜非旧处,驰往问之,曰:“王知众否?我昆弟如野鸟依人,终必飞去。余犹白翎雀也,
 
  〔汪、何二本“余犹”作“余皆”,《说郛》本作“余有”,“有”当作“犹”声之误也,今订正。〕
 
  栖息幕上,宁肯去乎?我尝言之矣。”部将曲怜拔都闻之,
 
  〔《秘史》蒙文作“兀卜赤黑台(姓)古邻把〕
 
  阿秃儿。”叹曰:“至爱昆弟之间,何为是言也?”和都、赤剌温因是亦叛汪可汗,归其父脱脱所居。上见汪可汗移去,曰:“此辈无乃异志乎?”即解陈去驻撒里川。
 
  〔《秘史》作“撒阿里客额儿”,此地在鄂尔昆河东,与前萨里河同名异地。〕
 
  汪可汗至土兀剌河,其子亦剌合鲜昆及札阿绀孛自也迭儿按台河
 
  〔《秘史》作“额垤儿阿勒台谷子”。〕
 
  来会父军。曲薛吾撒八剌乘其不备,虏其部众,又掠汪可汗所居边民牛马辎重而还。亦剌合、札阿绀孛仅以身免,奔告汪可汗。汪可汗命亦剌合将己兵往追之,且遣使来告曰:“乃蛮为不道,掳我人民,太子有良将四人,能假我雪怨复人民乎?”上释前憾,遂遣博尔术那颜、木华黎国王、博罗浑那颜、赤老温拔都四将,帅兵往救之。
 
  〔屠敬山曰:“《史》、《录》是役有孛罗忽勒、赤老温,通称四良将。今案:孛罗忽勒以丁巳年被掠,是时方称小儿,岂有未及三年即为有名之良将者?且此时锁儿罕失剌未降,其子赤老温安得先来事太祖?此《秘史》、《亲征录》之误,急宜订正者。”维案:屠说未尽,孛罗忽勒被掠在辰巳间,其时当已成童。《秘史》记壬戌秋太祖灭四种塔塔儿时,孛罗忽勒已自有妻。此役仅在壬戌前三年,岂有不能胜兵之理?至赤老温父子来归,在灭泰赤乌时。《秘史》本在此役之前,此书则赤老温父子来归在前,泰赤乌灭亡在后,二书乖异,无可折衷,要未可遽诋为谬误也。〕
 
  比我军至,亦剌合先与其将迪吉火力亦秃儿干、盏塔兀等二人
 
  〔亦秃儿干之干,汪本、何本作“于”,《说郛》本作“千”。案:下文有亦秃儿干,《秘史》作“亦秃儿坚”,今据改。“迪吉火力”与下文“汪古部长阿剌忽思的乞火力”下四字同音,当是官名,而亦秃儿干则人名也。盏塔兀,拉施特书作“约塔黑”。案:下文亦秃儿干为汪罕使于哈撒儿,则是役似未被擒。《元史》记此事无此二人,而有卜鲁忽一人,屠敬山谓“卜鲁忽”即“盏塔兀”之姓,理或然欤?〕
 
  追至忽剌河山。
 
  〔《秘史》作“忽剌安忽惕地面”。〕
 
  曲薛吾撒八剌迎敌,摛迪吉火力亦秃儿干、盏塔兀二人。流矢中亦剌合马胯,几为所获。须臾四将兵至,救亦剌合,大败其众,尽夺所掠归之汪可汗。汪可汗深感上德,谢曰:“曩以困乏,荷太子切切加意,今已亡之国,又夺归之,不知将何以报也。
 
  〔诸本无“不”字,从何校增。〕
 
  时闻脱脱复出八儿忽真隘,
 
  〔诸本作“入忽真隘”,从何校改。〕
 
  居统烈泽。
 
  〔屠敬山云:“即黑龙江南之达里泊。”〕
 
  上率兵复讨之,后上与弟哈撒儿讨乃蛮部,至忽兰盏侧山,大败之,尽杀诸部众,聚其尸焉。
 
  〔《说郛》本“尸”作“户”,何本“聚”作“取”,今从汪本。张德辉《纪行》:“由和林川之西北行一驿,过马头山,居者云:‘上有大马首,故名之。’自马头山之阴转而复西南行,过忽兰赤斤,乃奉部曲民匠种艺之所,有水曰塌米河注之。”自注:“忽兰赤斤,山名,以其形似红耳故也。”忽兰盏侧山,疑即忽兰赤斤。〕
 
  于时申号令还军,时见乃蛮势弱不足虑矣。
 
  〔何本“见”作“是”,今从《说郛》本、汪本。
 
  此上,拉施特书系之羊年。惟岁末讨脱脱及乃蛮二役,拉书不载。〕
 
  上会汪可汗于萨里河不鲁古崖,
 
  〔汪、何二本“古”作“告”,今从《说郛》本。不鲁古崖,屠敬山谓即《秘史》之不峏罕合勒敦山,在斡难、克鲁伦诸河之源。〕
 
  发兵征泰赤乌部,与其长沆忽、阿忽出、
 
  〔何本无“其”字,又“沆”作“流”,汪本亦作“流”,今从《说郛》本增改。《元史·太祖纪》有沆忽,《秘史》有阿兀出把阿秃儿,即此阿忽出,自是二人。拉施特书此处作“盎库兀库楚”,而前已有阿忽朱把阿秃儿,则似以“盎库兀库楚”为一人。〕
 
  忽怜、
 
  〔即前“忽怜拔都”〕
 
  忽都答儿别吉等
 
  〔汪、何二本无“别吉”二字,从《说郛》本增。《秘史》作“忽都兀答儿”。〕
 
  大战于斡难河上,败之。袭帖泥忽都、从息月哥察儿别吉、塔儿忽台希怜秃、忽都答儿,
 
  〔汪、何二本“从息”作“徒思”,“月哥”作“曰哥”,今姑从《说郛》本。塔儿忽台希怜秃,即《秘史》“塔儿忽台乞邻秃黑”。〕
 
  至月良兀秃剌思之野擒之,
 
  〔汪、何二本无“兀”字,从《说郛》本增。拉施特书作“恩古特秃剌思”。洪侍郎曰:“《录》作‘月良秃剌思’,窃意本名必是‘乌良兀特秃剌思’,译音皆未全也。”《说郛》本有‘兀’字,正与侍郎说合。〕
 
  沆忽、阿忽出、
 
  〔诸本作“阿忽兀出”,今据上文改。〕
 
  忽敦忽儿章走八儿忽真隘,忽怜奔乃蛮部。后哈答斤、散只兀、朵儿班、塔塔儿、弘吉刺诸部
 
  〔哈答斤、散只兀,《金史·宗浩传》作“合底忻、山只昆”,《秘史》作“合答斤、撒勒只兀惕”,其部落在今呼伦湖东。朵儿班,《秘史》作“朵儿边”,其部落在今贝尔湖东,皆太祖同族也。塔塔儿,居呼伦贝尔两湖间及克鲁伦河下游。弘吉剌,《辽史·天柞纪》作“王纪剌”,《金史·章宗纪》、《宗浩传》作“广吉剌”,《百官志》作“光吉剌”,其部落居额于古讷河及克鲁伦河下游。此五部皆在东方,故常合从。〕
 
  会盟尔阿雷泉上,
 
  〔《秘史》作“浯泐灰不剌合”,今乌珠穆沁左翼旗之乌尔浑河。〕
 
  腰斩白马为誓,欲袭我军及汪可汗。于是弘吉剌部长迭夷
 
  〔《元史·特薛禅传》:“特薛禅姓孛思忽儿,弘吉剌氏。本名特,因从太祖起兵有功,赐名薛禅,故兼称曰特薛禅。”此“迭夷”即“特”之对音。〕
 
  遣人来告。上闻之,遂与汪可汗发兵自虎图泽
 
  〔屠敬山以为即呼伦湖。于地望、地名均未协,疑即《秘史》之哈澧泐秃海子,今之哈老台泊也,前作“哈连徒泽”。〕
 
  逆战于杯亦烈川,
 
  〔《秘史》作“捕鱼儿海子”。今贝尔湖。〕
 
  大败之。冬,汪可汗分兵由怯绿连河,
 
  〔诸本无“怯”字,从何校补。〕
 
  指忽八海牙山,
 
  〔《秘史》作“忽巴海牙地面”。〕
 
  先发部众,后成列而进。其弟札阿绀孛以汪可汗反覆不常,遂谋于浑八力、
 
  〔《秘史》作“忽勒巴里”。〕
 
  按敦阿述、
 
  〔《秘史》作“阿勒屯阿倏黑”。〕
 
  燕火脱儿、
 
  〔《秘史》作“额勒忽秃儿”。〕
 
  延晃火儿,
 
  〔《秘史》无此人,拉施特书有。〕
 
  四人曰:“我兄无宁处之心,
 
  〔何本“宁”作“善”,汪本无此字,今从《说郛》本。〕
 
  屠绝兄弟,常附于契丹,
 
  〔据《秘史》,此下有缺文。然拉施特书亦如此。〕
 
  观其心性若此,终不能存我辈,亦不使国安矣。今何计处之?”按敦阿述泄是语于汪可汗,令执燕火脱儿及纳怜脱怜
 
  〔此四字,汪何二本作“怜纳”,何改“纳怜”,今从《说郛》本增。纳怜脱怜乃一人之名,《秘史》(九)察合安豁阿之子名纳邻脱斡邻,与此人同名。拉施特书作“纳邻脱忽鲁儿”,但此处有“延晃火儿”而无“纳邻脱忽鲁儿也”。〕
 
  二人至帐下,解其缚,谓燕火脱儿曰:“吾辈自西夏而来,道路饥困,相誓之语忘之乎?
 
  〔何本“相”作“想”,《说郛》本作“祖”,今从汪本改正。又,何本无“之”字,汪本无“乎”字,从《说郛》本增。〕
 
  我心非汝也。”唾其面。座上之人皆起唾之。按敦阿述曰:“余亦与此谋,不忍舍王,所以来告也。”汪可汗屡责札阿绀孛曰:“汝常怀臭肝者。”
 
  〔汪、何二本“臭肝”作“其奸”,《说郛》本作“臭奸”,当作“臭肝”。《秘史》蒙文(五)有“忽篾该赫里格额不里惕抽”一语,旁注:“怀著臭肝。”〕
 
  札阿绀孛不安,后与燕火脱儿、延晃火儿、纳怜脱怜太石等
 
  〔何本“纳邻太后”,汪本“纳怜脱怜太后”,今从《说郛》本。〕
 
  俱奔乃蛮。冬,汪可汗居于忽八海牙儿。上驻军于彻彻儿山,
 
  〔《秘史》作“扯克扯儿山”,亦作“扯克彻儿山”,据《秘史》,地在怯绿连河侧,而有翁吉剌塔塔儿人杂居,则当在河之下游也。〕
 
  起兵伐塔塔儿部长阿剌兀都儿、乞儿哈太石、察忽斤帖木儿等,
 
  〔何本无“乞儿”二字,今从《说郛》本、汪本增。《秘史》蒙文(五):“狗儿年,成吉思于答阑捏木儿格思地面,与察阿安塔塔儿、阿勒赤塔塔儿、都塔兀惕、阿鲁孩塔塔儿对阵。”与此《录》人名不合。拉施特书作“率兵攻蔑儿乞酋阿剌兀都儿、泰亦赤兀酋哈罕太石、塔塔儿二酋察忽儿(句)、开儿伯克。此“乞儿罕太石”疑是“哈罕太石”,“察忽斤帖木儿”疑即“察忽儿”,然部名又不同。案:此时太祖驻彻彻儿山,距塔塔儿近而距蔑儿乞甚远,又泰赤兀部亦已灭亡,当以此书为是。〕
 
  战于答兰捏木哥思之野,大败之。
 
  〔何本“思”作“儿”,今从《说郛》本、汪本。《秘史》作“答阑捏木儿格思”,其地据《秘史》(五),在今乌尔浑、色野集尔两河之北,又据卷六,在今喀尔喀河之南。屠敬山以“讷墨尔根河”当之,是也。〕
 
  时弘吉剌部亦来附,
 
  〔何本“来”作“未”,今从《说郛》本、汪本。〕
 
  上弟哈撒儿居别所,从其麾下哲不哥之计往掠之。
 
  〔哲不哥,《秘史》作“者卜客”〕
 
  上深切责。于是弘吉剌遂附札木合,
 
  〔此上,拉施特书系之猴年。〕
 
  与亦乞剌思、火罗剌思、
 
  〔诸本“火”作“大”,从张石洲校改。〕
 
  朵鲁班、塔塔儿、哈答斤、散只兀诸部,
 
  〔据《秘史》蒙文(四),此七部外尚有乃蛮、蔑儿乞、斡亦剌、泰亦赤兀四部,共十一部。〕
 
  会于键河,
 
  〔何本“揵”作“犍”,今从《说郛》本、汪本。《秘史》作“刊河”,今之根河入额尔古讷河者是也。〕
 
  共立札木合为局儿可汗,
 
  〔《秘史》作“古儿罕”。〕
 
  谋欲侵我,盟于秃律别儿河岸,
 
  〔何氏原本“律”作“津”,何据《元史·本纪》改,与《说郛》本、汪本正同。秃律别儿河,屠敬山谓即根河北之特勒布尔河,是也。〕
 
  为誓曰:“凡我同盟,于泄此谋者
 
  〔何本“盟”作“谋”,“谋”作“誓”,今从《说郛》本、汪本。〕
 
  如岸之摧、如林之伐。”言毕,同举足蹋岸,挥刀斫林,驰众驱马悉赴我军。有塔海哈者时在众中,上麾下照烈氏抄吾儿
 
  〔《元史》有传,作“召烈台抄兀儿”。〕
 
  与之亲,往视之,偶并驱,实不知有是谋。塔海哈以马鞭筑其肋,
 
  〔何本无“以”字,从《说郛》本、汪本增。〕
 
  抄吾儿顾塔海哈目之,抄吾儿悟,下马佯旋。
 
  〔何本“旋”作“卧”,《说郛》本、汪本作“施”,乃“旋”之讹。旋,小便也。《春秋传》曰:“夷射姑旋焉。”〕
 
  塔海哈因告之河上之盟曰:“事急矣,汝何往?”抄吾儿惊,
 
  〔《说郛》本此处作“抄兀儿”。〕
 
  即还遇火鲁剌氏也速该言其事,将赴上告之。也速该曰:“我长妇之子,
 
  〔汪、何二本“长妇”作“常妇”,《说郛》本作“长父”,今定作“长妇”。“长妇之子”与下“幼子”对文。〕
 
  与忽郎不花往来无旦夕,我左右只有幼子及家人火力台耳。”
 
  〔汪、何二本“火”作“大”,今从《说郛》本。秘史作“豁里歹”。〕
 
  因命与火力台誓而往,乘以苍驴白马,属之曰:“汝至彼,惟见上及太后
 
  〔汪、何二本无“太”字,从《说郛》本增。〕
 
  兼我婿哈撒儿
 
  〔诸本“撒”作“彻”,从何校改。拉施特书哈撒儿正妃豁罗剌思氏阿勒坛可敦,盖即也速该之女。〕
 
  则言之。苟泄于他人,愿断汝腰,裂汝背。”誓讫乃行,中道遇忽兰拔都、哈剌蔑力吉台军围,为其巡兵所执,
 
  〔何本“巡”作“游”,今从《说郛》本。汪本作“延”,亦“巡”之讹。〕
 
  以旧识得解。
 
  〔汪本作“以百识得解”,何本作“以百得解”,《说郛》本作“以旧识诚得解”,“诚”字衍。〕
 
  因赠以獭色全马,谓曰:“此马遁可脱身,追可及人,可乘而去。”既又遇毡车白帐之队
 
  〔何本“毡”作“髦”,今从《说郛》本、汪本。〕
 
  往札木合所者,队中人出追抄兀儿。抄兀儿乘马绝驰而脱,至上前,悉告前谋。上即起兵迎之,
 
  〔何本无“起”字,从《说郛》本、汪本增。〕
 
  战于海剌儿帖尼火罗罕之野,破之。
 
  〔海剌儿河,在今呼伦贝尔城北。帖尼火罗罕,今特诺克河西南流入海剌儿河。《元史·抄兀儿传》作“海剌儿阿带亦儿浑”。〕
 
  札木合遁走,弘吉剌部来降。
 
  〔此上,拉施特书系于鸡年。〕
 
  壬戌,
 
  〔原注:“宋理宗景定三年,金章宗泰和二年。”张石洲曰“壬戌乃宋宁宗嘉泰二年”,是也。〕
 
  发兵于兀鲁回失连真河,
 
  〔《秘史》作“兀勒灰失鲁格勒只惕”,即今乌尔浑河及色野集尔河。〕
 
  伐按赤塔塔儿、察罕塔塔儿。
 
  〔《秘史》作“阿勒赤塔塔儿、察罕塔塔儿”,此下有“都塔兀惕、阿鲁孩塔塔儿”,共四种。拉施特书与此《录》同。〕
 
  夏,顿兵避暑。比战,
 
  〔何本无此二字,从《说郛》本、汪本补。〕
 
  先誓众曰:“苟破敌逐北,见遗弃物,慎勿顾,军事毕共分之。”既战屡胜,族人按弹、
 
  〔前作“按坛”。〕
 
  火察儿、答力台
 
  〔前作“答里台”。〕
 
  三人背约,上命虎必来、
 
  〔《秘史》作“忽必来”。〕
 
  哲别二将尽夺其获,散军中。是秋,乃蛮杯禄可汗会蔑儿乞部长脱脱别吉、
 
  〔《秘史》(四)记此会与十一部立札木合为古儿罕为一事,其时蔑儿乞人与会者,为部长脱黑脱阿别乞之子忽秃,即此《录》之“和都”或“火都”,而此下又有“阿忽出、火都二部兵自乃蛮来”云云,则此处脱脱别吉下分明脱“子火都”三字。〕
 
  朵鲁班、塔塔儿、哈答斤、散只兀诸部暨阿忽出拔都、
 
  〔此即泰出乌部之“阿忽出”。拉施特书以为哈答斤人,非是。〕
 
  忽都花别吉
 
  〔《秘史》作“忽都合别乞”,乃斡亦剌部长。〕
 
  等,来犯我军及汪可汗。上先遣骑乘高觇望于捏干贵因都、
 
  〔《秘史》作“额捏坚归列秃”。〕
 
  彻彻儿、
 
  〔诸本不重“彻”字,《秘史》作“彻克彻列山”,今据增。〕
 
  赤忽儿黑诸山,
 
  〔《秘史》作“赤忽儿忽”,此三山均在克鲁伦河左右。〕
 
  有骑自赤忽儿黑山来
 
  〔诸本脱“忽儿”二字,从何校增。〕
 
  告乃蛮渐至,上与汪可汗自兀鲁回失连真河
 
  〔诸本“连”作“速”,从上文及何校改。移军入塞。汪可汗子亦剌合居北边,后至,据高岭方下营。杯禄可汗易之曰:“彼军漫散,俟其众聚,吾悉卷之。”〕
 
  时阿忽出、火都二部兵
 
  〔何本作“阿忽出大都一部”,无“兵”字,何校又改“大”为“拔”,今悉从《说郛》本订正。拉施特书亦云遣阿忽出及忽都为前锋。〕
 
  从乃蛮来,与前锋合。将战,遥望亦剌合军势不可动,遂还。亦剌合寻亦入塞,会我兵拟战,置辎重他所。上与汪可汗倚阿兰塞为壁,
 
  〔案:阿兰塞,不见于《秘史》。此《录》凡两见:其一此役,其一合兰真之役,彼文曰:“上止军于阿兰塞,急移辎重于失连真河上游,遣哲里麦为前锋,自莫运都儿山之阴行。汪可汗亦领兵自莫运都儿山阳,由忽剌阿卜鲁哈二山而来。时有太出、也迭儿二人者,因牧马见汪可汗军至,亟来告。上时移军合兰只之野”云云。洪侍郎以阿兰塞即为哈剌温只敦,屠敬山以为即兀惕乞牙,并谓在今克什克腾旗界内。案:阿兰塞以塞为名,自即金之外堡,当在临潢、庆州之北,不得在黑河、潢河以南。案《梦溪笔谈》,辽与北方部族以夜来山为界,今乌珠穆沁右翼旗之南有乌兰岭,其东北有衣兰布虎图山,其地正当辽、金庆州之北,金之外堡当沿此山脉置之,殆所谓阿兰塞也。其东北连山有盔腾岭、盔腾山,其下即此役战地,所谓阙亦坛之野也。稍西有哈奇尔河,则所谓合兰只之野。又西有三音温都山,即莫运都儿山也。又西有呼鲁呼尔河,又名巴鲁古尔河,即忽剌阿卜鲁哈也。而兀鲁回失连真河,又在其北三四百里间,故以乌兰岭东北一带连山为阿兰塞,则与此二役中所纪地名无一不合。此二役所以南择此地者,皆缘以寡敌众,欲依边堡为屏蔽故也。〕
 
  大战于阙亦坛之野。
 
  〔汪、何二本作“阙蛮坛”,今从《说郛》本。《元史》作“阙奕坛”,《秘史》作“阔亦田”,今札鲁特旗南有盔腾岭、盔腾山,即其地也。洪侍郎以苏尼特左翼旗东北之奎腾山、屠敬山以呼伦贝尔防城南之奎腾河当之,均非是。〕
 
  彼祭风,风忽反,为雪所迷,军乱填沟坠堑而还。
 
  〔何本“坠”下有“壑”字,今从《说郛》本、汪本删。〕
 
  时札木合从杯禄可汗来,
 
  〔汪、何二本“来”作“未”,今从《说郛》本。〕
 
  中道札木合引兵还,遇立己为可汗者,诸部悉讨掠之。
 
  〔何本无“己”字,“掠”作“掳”,今并从《说郛》本、汪本。〕
 
  冬,上出塞,驻于阿不札阙忒哥儿之山,
 
  〔汪、何二本作“阿不礼阙惑哥儿”,《说郛》本“礼”作“札”,《秘史》作“阿卜只阿阔迭格里”,则“惑”又“忒”之讹也。《秘史》(七):此时太祖正在帖篾延客额儿地面围猎,(中略)自围猎处回来,从阿(卜)只合阔迭格儿,起去至合(勒)合河斡儿讷兀地的客(勒)帖该下了。则阿(卜)只合阔迭格儿当在帖篾延与合勒合河之间,帖篾延即《元史·特薛禅传》之迭篾可儿,与可木儿温都儿(今虾模儿岭)、答儿脑儿(今达里泊)相近,则阿不只合阔迭格儿当在今乌珠穆沁旗界内也。〕
 
  汪可汗居于别里怯沙陀中。
 
  〔何本“于”作“族”,今从《说郛》本、汪本。别里怯沙陀,《秘史》作“别儿客额儿”,在者者额儿温都儿山阴。多桑云:“者者额儿温都儿山在克鲁伦河西、土拉河东。”屠敬山以土拉河南之策策山当之。〕
 
  是时上与太子术赤求聘汪可汗女抄儿伯姬,
 
  〔诸本脱“女”字,今增。抄儿伯姬,《秘史》作“察兀儿别乞”。〕
 
  汪可汗之孙秃撒合亦求上公主火阿真伯姬,
 
  〔《秘史》作“豁真别乞”,后适亦乞列思人孛徒。〕
 
  俱不谐,自是稍疏。札木合闻之,往说亦剌合曰:“吾按答
 
  〔原注:“渭太祖也。”诸本此注误入正文,从张石洲说改正。〕
 
  常遣使通信于乃蛮太阳可汗,时将不利于君,今若能加兵,我当从旁胁助。”
 
  〔何本无“当”字,今从《说郛》本、汪本补。胁,何改“协”。〕
 
  时亦剌合居别所,来会父汪可汗,上族人答力台斡赤斤、按弹火察儿、塔海忽剌海剌、
 
  〔何本无“海剌”二字,今从《说郛》本、汪本补。拉施特书作“图海忽剌海”。〕
 
  答儿斤、木忽儿哈檀、
 
  〔前云:木忽儿好兰统阿答儿斤。此“答儿斤”即“阿答儿斤”之略,即木忽儿哈檀之姓氏也。《秘史》此处无“答儿斤木忽儿哈檀”而有“合儿答乞歹”,合儿答乞歹当即阿儿答乞歹也。〕
 
  札木哈等背我,
 
  〔《秘史》记此事有礼木合、阿勒坛、忽察儿、合儿答乞歹、额不格真那牙勤、雪格额台、脱斡邻勒、合出温别乞,而无答力台斡赤斤、塔海忽剌海剌、木忽儿哈檀三人。〕
 
  迨且
 
  〔何氏云:此二字有误。〕
 
  说亦剌合说之曰:“吾等愿为效力,佐若讨月伦太后诸子。”
 
  〔《说郛》本“效”作“功”,何本作“校”,今从汪本。〕
 
  亦剌合信之,车帐相间,顿兵共谋,
 
  〔何本“间”作“问”,“顿”作“为”,今从《说郛》本、汪本。〕
 
  遣塞罕脱脱干
 
  〔《秘史》作“撒亦罕脱迭额”。〕
 
  言之于汪可汗。汪可汗曰:“札木合,巧言寡信人也,不足信。”亦剌合曰:“彼言者有口有舌,何为不信?”屡使人言之,汪可汗曰:“我禁汝,汝辈不从。吾身成立,实赖于彼。垂老遗骸,冀得安寝。
 
  〔《说郛》本、何本“冀”作“莫”,今从汪本。《元史·太祖纪》同。〕
 
  今喋喋不已,汝当能自为之,毋遗我忧。”既而有异志,悉烧我牧地。
 
  〔何本无“有”字,“地”作“也”,今并从《说郛》本、汪本。〕
 
  癸亥春,汪可汗为诈计曰:“彼前者尝求婚于我,我不从。
 
  〔何本不重“我”字,今从《说郛》本、汪本增。〕
 
  今宜许之,俟其来宴,定约,必擒之。”遂遣不花台乞察
 
  〔《秘史》作“不合台乞剌台”,乃太祖所遣赴宴之使,非汪可汗请太祖之使也。〕
 
  来请上。上率麾下十骑往赴之,
 
  〔汪、何二本不重“上”字,今从《说郛》本。〕
 
  宿于蔑里也赤哥帐中。
 
  〔诸本无“也赤”二字,今据下文增。蔑里也赤哥,《秘史》作“蒙力克额赤格”,《元史·循吏传》作“明里也赤哥”,即夙将察剌海之子。〕
 
  越明日,与蔑力也赤哥谋,
 
  〔汪、何二本作“蔑力池赤可”,《说郛》本作“蔑力池赤哥”,“池”当作“也”。〕
 
  使回汪可汗曰:“我牧群羸弱,方从思之,合命一人赴彼宴足矣。”既遣使,上即回。时汪可汗近侍也可察合阑者
 
  〔《秘史》作“也客扯连”,太祖从祖忽兰把秃儿之子。〕
 
  闻图上谋,归语其妻,因曰:“若有人言泄此于上,当如何哉?”
 
  〔何本“当如”作“赏我”,汪本作“当我”今从《说郛》本。〕
 
  其子亦剌罕
 
  〔《秘史》作“其妻阿剌黑亦惕”。案:太祖之女适汪古部者,亦名阿剌黑,则阿剌黑乃女子之名,《秘史》作“其妻”是也。〕
 
  止之曰:“此无据之言,恐他人以为实。”
 
  〔汪、何二本“之言”作“言之”,今从《说郛》本。〕
 
  也可察合阑牧马者乞失力,供马湩适至,
 
  〔《说郛》本“乞失力”作“乞失”,何本作“乞力失”,又,二本“失”下并有“月”字。《类编》引作“乞失力”,今从之。《秘史》作“乞失里黑”,《元史·哈剌哈孙传》作“启昔礼”,可证《太祖纪》作“乞力失”与何本同误。〕
 
  微有所闻,问其弟把带
 
  〔《秘史》作“巴歹”。〕
 
  曰:“适所议者何事?该知否?”把带曰:“不知。”察合阑次子纳怜
 
  〔《秘史》作“纳邻客延”。〕
 
  坐帐外方砺镞,闻之骂曰:“割舌者适我不言乎?今事已然,当禁谁口也。”把带谓乞失力曰:“我今知矣,可因赴上言之。”
 
  〔何本“因”作“同”,今从《说郛》本、汪本。〕
 
  遂入己帐话行止,有一羔杀之,拆所卧榻煮熟,夜驰见上告其谋曰:“汪可汗将图太子,其计定矣。”上闻之,止军于阿兰塞,急移辎重于失连真河上游,
 
  〔汪、何二本“游”作“急”,今从《说郛》本。〕
 
  遣折里麦为前锋,
 
  〔《秘史》:“行时,教者泐篾做后哨。”〕
 
  自莫运都儿山之阴行。
 
  〔自,万历本《说郛》本作“并”。莫运都儿,《秘史》蒙文作“卯危温都儿”,洪侍郎谓“即克什克腾旗西南四十三里之漠海恩都尔”,然其地偏南不当汪可汗进兵之路。丁氏谦谓:“卯危温都儿即乌珠穆沁右翼旗之三因温都山,蒙古语:卯,危歹也;三因,好也。后人恶其名恶,以美名易之。”其说言之成理,于地望亦合。〕
 
  汪可汗亦领兵自莫运都儿山阳,由忽剌阿卜鲁哈二山而来。
 
  〔诸本“阿”作“河”,今订正。忽剌阿卜鲁哈,《秘史》作“忽剌安不鲁合惕”,旁注:“地名”。案:今三因温都山西有呼鲁呼儿河,一名巴鲁古尔河,即所渭“忽剌安不鲁合惕”也。〕
 
  时有太出、也迭儿二人者,
 
  〔何本“时”字作“近侍”二字,今从《说郛》本、汪本。“太出、也迭儿”,《秘史》作“赤吉歹、牙的儿”。〕
 
  因牧马见汪可汗军至,亟来告。上时移军合兰只之野,
 
  〔《秘史》作“合剌合勒只惕”。今三音温都山东有哈奇尔河,殆即其地。〕
 
  未及为备,日衔山,即整兵出战。先败朱力斤部众,
 
  〔《秘史》作“只儿斤”。〕
 
  次败董哀部众,又败火力失烈门太石。众
 
  〔《秘史》作“豁里失力门太子”。〕
 
  进逼汪可汗护卫,其子亦剌合驰来冲阵,我军射之中颊,其势大挫,敛兵而退。上亦将兵至斡儿弩兀遣惑哥山冈,
 
  〔《秘史》作“斡儿讷<山厄>”,在喀尔喀河上。《秘史》蒙文作“斡儿讷(山名)屼因(的)客(勒)帖该(半)合打答(崖)”,此“遣惑哥”当作“遣忒哥”,即客(勒)帖该之异译。〕
 
  军凡四千六百骑,
 
  〔拉施特书同《秘史》作“二千六百骑”。〕
 
  沿哈勒合河顺进,
 
  〔《秘史》作“哈泐合河”,今喀尔喀河。〕
 
  分为两队,上亲将二千三百骑行河南岸,兀鲁吾、忙兀
 
  〔诸本作“忙儿”,依何校改。〕
 
  二部将二千三百骑行河北岸。上以弘吉剌部先为婚亲,遣使谓其长帖木哥阿蛮部曰:
 
  〔《秘史》(六):“合泐合河流入捕鱼儿海子处有帖儿格、阿蔑勒翁吉剌。”即《金史·宗浩传》之广吉剌部长忒里虎,亦即此帖木哥阿蛮也。末“部”字疑衍。〕
 
  “汝若来顺,则女子面容、
 
  〔何本“面”作“而”,今从《说郛》本、汪本。〕
 
  外甥资质俱在,不然则加兵于汝矣。”遂行至董哥泽脱儿合火儿合之地驻军。
 
  〔董哥泽,《秘史》蒙文作“统格豁罗罕”,即此脱儿合火儿合之异译,然则此处水名复出也。屠敬山谓呼伦贝尔防城南二百有董嘎得,喇萨河汇为董嘎淖尔,即此泽也。〕
 
  上遣使阿里海
 
  〔《秘史》作“阿儿垓合撒儿、速客该者温二人”。〕
 
  致责于汪可汗曰:“我今大军
 
  〔诸本“今”作“合”,今订正。〕
 
  驻董哥泽间,草盛马肥,与父汪可汗言之:
 
  〔汪、何二本无“父”字,从《说郛》本增。〕
 
  昔汝叔父菊儿可汗尝谓汝:‘我兄忽儿札忽思杯禄可汗之位不我与,自夺之。’汝又杀诸昆弟,诈言太帖木儿太石、不花帖木儿辈不知所存,
 
  〔汪本“太石”二字作“一后”字,何本作“及”,弘治钞《说郛》本作“太后”,并误,今从万历钞本订正。《秘史》作“台帖木儿太子”。〕
 
  是故菊律可汗逼汝哈剌温之隘。汝穷迫无计,仅以百骑来归我先君。
 
  〔《说郛》本“仅”作“遂”,今从汪本、何本。〕
 
  我先君率兵偕汝以雪前耻,而泰赤兀部兀都儿吾难、八哈只二人助兵几许不可知。
 
  〔泰赤兀部兀都儿,《说郛》本作“泰赤兀都元师儿”,何本作“泰赤兀都儿”,今从汪本。拉施特书“泰亦出兀人之兀都儿诺延、八哈只二人则率兵无多”,可以互证。《秘史》云:“使泰亦赤兀人忽难、巴合只二人领兵助汝,救汝百姓。”与此措辞又异。〕
 
  其时道经哈剌不花山谷之上,
 
  〔《说郛》本无“道经”二字,今从汪、何二本。又诸本“山”作“出”,今订正。〕
 
  又出阿不札不花哥兀之山,又逾秃烈坛秃零古
 
  〔《说郛》本、何本“逾”作“跻”,今从汪本。秃烈坛,与此《录》之“帖烈徒”、《秘史》之“帖列秃”音近。秃零古,拉施特书作“秃朗古特”,又与《秘史》之“帖列格秃”音近,“帖列秃”与“帖列格秃”本系一地,疑当时因译名未定,姑书此二名以待选择,后忘删去,如前“董哥泽脱儿合火儿”合之例也。〕
 
  盏速坛盏零古
 
  〔汪本、何本无下“盏”字,今从《说郛》本。拉施特书无此地,疑此六字乃后人记秃烈坛秃零古之异文而误复也。〕
 
  阙群隘、
 
  〔后文太宗庚寅年伐金,发自阙郡隘过川(《说郛》本、汪本,并同),即此阙群隘也。〕
 
  曲笑儿泽、
 
  〔即前“曲薛兀儿泽”。〕
 
  跋涉重险,始至其境。
 
  〔何本“始”作“使”,今从《说郛》本、汪本。〕
 
  适值彼凶年,得穷其国。
 
  〔汪本、何本此下有“枝”字,《说郛》本作“拔”,疑衍文。〕
 
  菊儿可汗闻之,避我于答剌速野。
 
  〔汪本、何本“答”作“塔”,今从《说郛》本。《秘史》作“忽儿班帖列速惕”,拉施特书同。〕
 
  我又逼之,仅以数十骑遁走河西之国,不复返矣。我先君尽以土地人民归于汝,由是结为按答,我因尊汝为父。
 
  〔汪本“因”作“过”,何本作“遂”,《说郛》本作“固”,乃“因”之讹,今订正。〕
 
  此我有造于汝一也。”又曰:“父汪可汗,汝其时如埋云中,如没日底。
 
  〔此谓汪可汗奔西辽事。拉施特书曰:“汝避居于日入之地,隐没于中。”意较明显。〕
 
  汝弟札阿绀孛居汉塞之间,我发声轰轰以呼之,
 
  〔何本无“轰以呼”三字,今从《说郛》本、汪本增。又二本“呼”作“乎”,今并订正。〕
 
  举帽隐隐而招之。
 
  〔何本此句上有“以手”二字,即上“以呼”之讹。〕
 
  彼其闻我呼,见我招,远来投归。我乃登山而望,倚庐而待其至。
 
  〔何本“庐”作“店”,今从《说郛》本、汪本。〕
 
  又为三部蔑力乞所逼,我以其远来肯令死之也?所以告杀兄诛弟,此谓谁?薛彻别吉我兄,
 
  〔汪本、何本作“薛彻别我弟”,《说郛》本作“薛彻别及我弟”,“及”当作“吉”,声之误也。拉施特书作“薛彻别吉我兄”,《元史》作“我兄薛彻别吉”,今据以订正。〕
 
  太丑乞鲁为我弟。
 
  〔何本无“我”字,从《说郛》本、汪本增。拉施特书作“泰出勒我弟”,少“乞”字音。案:《元史·本纪》云:“札阿绀孛为蔑里乞部人所逼,我请我兄薛彻别吉、我弟太丑往杀之。”而无“杀兄诛弟”之语,与此不同。〕
 
  是我有造于汝二也。”又曰:“父汪可汗,汝既出云中,显日底,来归于我,使汝饥不过日午,羸不过月望,所以然者何哉?我昔与兀都夷部战于哈丁黑山之西
 
  〔哈丁黑,《秘史》作“合迪黑里黑你鲁兀”,《元史》作“哈丁里”。〕
 
  木那义笑力之野,
 
  〔汪本作“木奴义力”,何本“义”讹“又”,《说郛》本作“木那又笑力”。案:《秘史》作“木鲁彻薛兀勒”,则当作“木那义笑力”,前作“莫那察山”。〕
 
  多获孳畜辎重,
 
  〔何本“孳”作“孽”,今从《说郛》本、汪本。〕
 
  悉以与汝。饥不过日午、羸不过月望者,实此之由也。是我有造于汝三也。”又曰:“父汪可汗,曩汝征灭里乞,陈于不剌川,
 
  〔前作“捕兀剌川”。〕
 
  遣使觇候部长脱脱,
 
  〔诸本“候”作“俟”,今订正。〕
 
  不待阵而先战,获忽都台、察鲁浑二哈敦,因招其二子火都、赤剌温,尽收兀都夷部。汝以怀此衅,故我秋豪不及。又汝与乃蛮战于拜塔剌边只儿之野。时火都、赤剌温
 
  〔“尽收”以下至此三十八字,汪、何二本全脱,今从《说郛》本增。又《说郛》本“与”作“子”,“塔”作“哈”,“时”作“是”,“都”作“部”,今并订正。〕
 
  合部叛归,汝又为曲薛兀撒八剌追袭,掠汝人民,
 
  〔诸本“掠”作“于”,今订正。〕
 
  使来告我。我遣四将领兵战败之,尽归所掠于汝。是我有造于汝四也。”又曰:“昔我出哈儿哈山谷,与君忽剌阿班答兀卓儿完忽奴之山相见时,
 
  〔汪、何二本“阿”作“河”,今从《说郛》本。《秘史》蒙文作“勺儿合勒忽讷忽剌阿讷屼惕。”孛勒答屼惕,谓勺儿合勒忽讷山系之红孤山也,勺儿合勒忽山即今土拉河南土谢图汗中右旗之卓尔郭尔山。〕
 
  于时不已言乎:‘譬如毒蛇之牙所伤,勿以动念。
 
  〔《说郛》本“勿”作“弗”,今从汪、何二本。〕
 
  吾二人唇齿相见,始可间离。’汝今以蛇伤而间我乎?
 
  〔《说郛》本、何本“汝”作“如”,今从汪本。〕
 
  唇齿相见而离我乎?父汪可汗,我时又如青鸡海鹘,
 
  〔《说郛》本“鸡”作“<鱼隹>,汪本作“雏”,今从何本。〕
 
  自赤忽儿黑山,
 
  〔何本无“忽”字,从《说郛》本、汪本增。〕
 
  飞越于杯儿之泽,搦斑脚鸽以归。君此谓谁?哈答斤、散只兀、弘吉剌诸部是也。
 
  〔汪、何二本“儿”作“而”,“君”作“若”,今从《说郛》本。又三本“飞”作“挥”,今从何校改正。杯儿泽,前作“杯亦烈川”。又案:此处有脱文数十字。拉施特书云:“我如鸷鸟,飞越捕鱼儿淖尔,擒灰色、蓝色足之鹤,以致于汝。此鹤为谁?朵儿奔、塔塔儿诸人是也。我又如蓝色足之鹰,越古阑淖尔,擒蓝色足之鹤,以致于汝。此鹤为谁?哈答斤、撒儿助特、弘吉剌诸人是也。”《元史·太祖纪》亦云:“我征朵鲁班、塔塔儿、哈答斤、散只兀、弘吉剌五部,如海东鸷鸟之于鸿雁,见无不获,获则必致于君。”与拉氏书文异事同,可知修《元史》时,所见之《亲征录》,尚未脱此一段也。拉氏书中之捕鱼儿淖尔,即此“杯儿泽”,今贝尔湖古阑淖尔即今呼伦湖。〕
 
  汝岂非假彼堵部之力而惊畏我耶?是我有造于汝五也。”又曰:“父汪可汗,汝何尝有造于我?我造汝者凡若此,与其惊畏我,何不使我众炀爨不息,
 
  〔何本“不息”作“而息”,今从《说郛》本、汪本。〕
 
  安榻而卧,使我痴子痴妇得宁寝乎!我犹汝子,势虽寡弱,不使汝有慕于他众也。
 
  〔汪、何二本无“众也”二字,从《说郛》本增。〕
 
  我虽愚,不使汝有慕于他贤也,譬如双轮去一,不能行也,徒使牛汗,纵之恐盗,系之实饿。又如双辕偶断其一,
 
  〔何本“辕”作“轮”,今从《说郛》本、汪本。《秘史》蒙文此处,亦以轮辕并言。〕
 
  牛愤破领,徒使跳跃不能前也。以我方车,独非一轮一辕乎?”
 
  〔诸本无“一辕”二字,今订补。〕
 
  凡此谕汪可汗也。时上族人火察儿、按弹在汪可汗军中,上因使谓之曰:“汝二人欲杀我,将弃之乎?瘗之乎?吾尝谓上辈八儿哈拔都二子薛彻、大丑
 
  〔《秘史》:“斡勤巴儿合的儿子名忽秃黑秃主儿乞,忽秃黑秃主儿乞生二子,一名薛扯别乞,一名台出。”是薛彻、大丑二人乃八儿哈之孙,非其子也。《秘史》蒙文此处云:“我向上辈巴儿坛把阿秃儿的儿子说,向撒察、台出两个说,他每也不肯做(旧释此处甚鹘突,今改释如此)。”拉施特书亦云:“我尝告把儿坛把阿秃儿之子及薛出别乞、泰出二人,岂可使斡难河之地无主?”与《秘史》合,是此书“八儿哈拔都”乃“巴儿坛拔都”之讹,而巴儿坛之子当时存者惟答里台一人,则此句实暗斥答里台,其与薛彻、大丑异其称谓者,为亲者讳耳!〕
 
  讵可使斡难河之地无主?累让为君而不听也。又谓火察儿曰:‘以汝捏群大石之子,
 
  〔汪、何二本“群”作“辟”,今从《说郛》本。〕
 
  吾族中当立。’汝又不听。又谓按弹曰:‘汝为忽都剌可汗之子,以而父尝为可汗,
 
  〔《说郛》本、何本“为”作“谓”,今从汪本。又何本此句无“可”字,从《说郛》本、汪本补。〕
 
  推位。’汝又不听。我悉曾让汝等,不我听,我之立,实汝等推也。吾所以不辞者,不欲使蒿莱生久居之地,
 
  〔汪本“生”作“正”,何本作“止”,今从《说郛》本。〕
 
  断木植通车之途,
 
  〔汪、何二本“植”作“阻”,今从《说郛》本。〕
 
  吾夙心也。假汝等为君,吾当前锋,俘获辎重亦归汝也。使我从诸君畋,我亦将驱兽迫崖,使汝得从便射也。”又谓按弹、火察儿曰:“三河之源,祖宗实兴,毋令他人居之。”又谓脱怜曰:
 
  〔何本无“曰”字,今从《说郛》本、汪本增。脱怜,《秘史》作“脱斡邻勒”。〕
 
  “吾弟,我以汝是高祖家奴、
 
  〔诸本“高”作“马”,从何校改。〕
 
  曾祖阍仆,故尊汝为弟也。汝祖塔塔
 
  〔《说郛》本、汪本作“诺答”,《秘史》作“斡黑答”。拉施特书作“秃克秃图”,与何本“塔塔”音合,今从何本。〕
 
  乃吾祖察剌合令忽、
 
  〔《秘史》作“察剌孩领忽”,太祖六世从祖。〕
 
  统必乃
 
  〔《秘史》作“屯必乃”,太祖高祖。〕
 
  二君所虏。塔塔生雪也哥,
 
  〔《秘史》作“速别该”。〕
 
  雪也哥生阔阔出黑儿思安,
 
  〔《秘史》作“阔阔出乞儿撒安”。〕
 
  阔阔出黑儿思安生折该晃脱合儿,
 
  〔《说郛》本、何本无首五字,从汪本增。汪、何二本“折该”作“折谈”,从《说郛》本改。折该晃脱合儿,《秘史》此处作“也该晃脱合儿”,拉施特书同。案:《秘史》蒙文(三)云:“速客客氏者该、晃塔豁儿的儿子速客该者温也来了。”又蒙文(四)有雪客额台、脱斡邻勒。雪客额台即速客客氏,是“速客该者温”与此“脱邻”并速客客氏。而此云“折该晃脱合儿生汝”,是二人又为同父兄弟,而速客该此时为太祖使者,脱怜在汪罕所。《秘史》(六)载此行速客该者温因他妻子在脱斡邻处,不曾回来,此亦“速客该”与“脱斡邻”同父之证。亦即《秘史》(三)之“者该晃塔豁儿”与卷六之“也该晃脱合儿”为一人之证也。《秘史》蒙文旁注与译文句读鹘突殊甚,因为疏通之如此。〕
 
  折该晃脱合儿生汝。
 
  〔何本无首四字,今从《说郛》本、汪本增。〕
 
  汝世为奴虏,谁之国土,汝可取之?纵得我国,按弹、火察儿必不与也。昔我等居汪可汗所,早起,我得饮王青钟马乳,
 
  〔屠敬山云:“钟当作湩。”案:蒙文《秘史》(六)青钟作阔阔充(充)字译音,旁注与译文并作“青钟”。然但云“青钟”而不云“马乳”,则于文不备,知“钟”亦“湩”之讹也。〕
 
  汝辈起,知我先饮而妒之耶?我今去矣,汝辈恣饭之。吾弟脱怜量汝能费几何也?”又谓按弹、火察儿曰:“汝善事吾父汪可汗,
 
  〔诸本“善”作“若”,今订正。〕
 
  勿使疑汝为察兀忽鲁
 
  〔原注谓:“太祖自称。前有注。”〕
 
  之族而累汝,即汪可汗交人易厌,
 
  〔诸本“易”作“马”,今从何校改。〕
 
  于我尚尔,况汝辈乎?纵然今夏,岂能到来冬矣?”又谓我父汪可汗曰:
 
  〔诸本“谓”作“为”,今订正。〕
 
  “可遣按敦阿述、运八力
 
  〔前作“浑八力”。〕
 
  二人来报,否则遣一人曰者。
 
  〔汪、何二本误合“曰者”二字为“暑”字,何校改正,与《说郛》本正合。〕
 
  吾军麾下忙纳儿拔都失破银鞍黑马在王所,
 
  〔汪、何二本无“军”字,《说郛》本作“浑”,今订正。又二本“破”作“彼”,今从《说郛》本。忙纳儿拔都,拉施特书作“木诃里把阿秃儿”。〕
 
  就持来。
 
  〔何本“就”作“龙”,今从《说郛》本、汪本。〕
 
  鲜昆按答,
 
  〔原注:“即王子亦剌合也。”汪、何二本“昆”作“晁”,何校改正,与《说郛》本正合。〕
 
  汝亦遣必力哥别吉、脱端二人来。
 
  〔《秘史》作“必勒格别乞、脱朵延”。〕
 
  否则遣一人。札木合按答暨阿赤失兰、
 
  〔《秘史》作“阿赤黑失仑”。〕
 
  阿剌不花、带亦儿、
 
  〔汪、何二本“儿”作“否”,今从《说郛》本改正。阿剌不花、带亦儿二人未见,《秘史》、扫施特书、《太祖纪》中亦无之,而《汪罕部族考》中有阿剌不花一人,带儿一人,正与此合。〕
 
  火察儿、按摊
 
  〔前作“按坛”、“按弹”。〕
 
  各遣二人来。如我东向,可于纳儿脱怜呼陈辎兀之源来会;
 
  〔诸本“于”作“与”,今订正。何本“辎”作“榴”,今从《说郛》本、汪本。拉施特书云:“使人之来,可以在捕鱼儿淖尔遇我。”与此地名互异。〕
 
  如我西向,
 
  〔汪、何二本无“我”字,今从《说郛》本。〕
 
  可出哈八剌汉答儿哈之山,
 
  〔今克鲁伦河南达里冈爱牧场之南,有山名哈剌莽奈哈必尔汉舍里,其东连山名都兰哈拉,即此“哈八剌汉答儿哈”也。〕
 
  顺忽儿班不花诸思河来会也。”
 
  〔何本无“会”字,今从《说郛》本、汪本增。忽儿班不花诸思,颇与“忽剌阿卜鲁哈”之名相近,此即呼鲁呼尔河,正在哈八剌汉答儿哈二山正东。〕
 
  汪可汗闻上前语曰:“惟我子裁之。”王子鲜昆谓其父曰:“彼何尝诚意待我为按答?
 
  〔汪、何二本“诚”作“实”,今从《说郛》本。〕
 
  特以觋视我耳!
 
  〔汪本“觋”作“现”,何本作“玩物”,今从《说郛》本。《秘史》云:“我行也几曾说是按答来,只说脱黑脱阿师公续著回回羊尾子行。”有此“觋”字,正直译“师公”一语。〕
 
  何尝称君为父,特以老奴视我耳!又何尝遣辨士驰御马以及我?
 
  〔《说郛》本、汪本“我”作“哉”,今从何本。〕
 
  彼能胜我,听取我国;若我胜彼,亦取其国也。”因戒其部将及别力哥别吉、脱端曰:
 
  〔何本无“及”字,从《说郛》本、汪本增。别力哥,前作“必力哥”。〕
 
  “备而釜,建而旗,秣而马,以需进也。”上既遣使于汪可汗,遂进兵掠虏弘吉剌别部溺儿斤以行,至班朱泥河,饮水誓众。
 
  〔溺儿斤,与上文“月儿斤”、《元史·太祖纪》‘要儿斤”、《世系表》“岳里斤”,声并相近。月儿斤,《秘史》作“主儿勤”,《女真秘史》亦作“主儿扯歹”,是“溺”与“主”声亦相通。据《秘史》(四)主儿勤者,勇敢无敌之义。故塞外诸种族多有此部名,蒙古有主儿勤,克烈部有只儿斤,此弘吉剌别部名溺儿斤亦取此义。班朱泥河,《秘史》作“巴泐渚讷海子”,洪侍郎曰:“俄图,斡难河北,俄罗斯界内有巴儿渚纳泊,俄音似巴勒赤诺泊,北有河曰图拉入音果达河。就俄图观之,河泊不相连属,或水涨时通入于河,或近地尚有小河,而图未载,故《史》、《录》以为河名。俄人游历至此,谓其地多林木,宜驻夏可避兵。蒙古人尚指此地为成吉思汗避难处也。”屠敬山曰:“新测黑龙江图,呼伦淖尔之西南有小泊絓之,名曰巴勒渚纳乌苏鄂模,义谓前水泊,其水自客鲁伦河下游支分,曰乌尔衮札尔玛河,潴为此泊。又自泊之东北溢出为班朱尼,亦曰巴勒渚纳,水注入呼伦淖尔。”据此二说,则今日中、俄两界各有海子名巴勒渚纳。而据《秘史》所记,则云:“有阿三名字的回回,有羯羊一千,白驼一个,顺着额洏古涅河易换貂鼠、青鼠,来至巴泐渚纳海子,饮羊时遇着成吉思”云云,然则阿三沿额洏古涅河来,始至巴泐渚纳海子。则此海子当在额尔古讷河下游,既不得在斡难河之北,亦不得在呼伦淖尔之西南。洪、屠所纪,均非此海子也。然观太祖驻董哥泽后,水草丰美,部众大集,其遣使致责汪可汗,即有问罪之意,不容于此时退往东北,驻于额尔古讷河下游。意《秘史》记阿三事,但谓其欲往额洏 古涅河,而非谓其已至彼河,但文不备耳。观《秘史》记太祖自巴泐渚纳起师,即径趋客鲁涟河。屠氏呼伦淖尔西南小泊之说,殊有当于人心,又与《元史·雪不台传》“班朱泥河,今龙居河”之说,可相印证也。〕
 
  时有亦乞列部人孛徒者,为火鲁剌部所逼败之,因遇上同盟。
 
  〔案:孛徒归帝,据此《录》及《秘史》并在答阑班朱思战役前。《秘史》:“成吉思至巴泐渚纳海子行住了,遇着豁罗剌思种搠斡思察罕,不曾厮杀,便投降了。”此处乃涉豁罗剌思人投降而误。〕
 
  是时上弟哈撒儿别居哈剌温只敦山,
 
  〔《秘史》蒙文作“合剌温踬都”,〕
 
  妻子为汪可汗所虏,止挟幼子脱虎走,粮绝,探鸟卵为食,来会于河滨。
 
  〔《秘史》:“成吉思弟合撒儿将他妻并三子也古、也松格、秃忽撇在王罕处,罄身领几个伴当走出来寻成吉思。寻至合剌温山,缘岭寻不见,乏了粮食,吃生牛皮筋。行至巴泐渚纳海子,寻见兄成吉思。”与此互异。〕
 
  上与汪可汗战于合兰真沙陀之后,
 
  〔合兰真沙陀,前作“合兰只之野”。汪、何二本“后”作“地”,今从《说郛》本。拉施特书亦作“后”。《元史·本纪》于哈撒儿来会后,乃云:“汪罕兵至,帝与战于哈兰真沙陀之地。”则其所据《亲征录》,已与汪、何二本同。《说郛》本此等处,真可谓一字千金矣。〕
 
  汪可汗居于只感忽卢之地。
 
  〔何本“卢”作“庐”,今从《说郛》本、汪本。“感”当作“忒”,“只忒忽卢”下作“曲雕阿兰”又作“月忒哥忽兰”。《秘史》作“阔朵额阿剌勒”,又作“阔迭兀阿剌勒”。《元史·太宗纪》作“库铁乌阿拉里”,又作“鈋铁鍏胡兰”;《宪宗纪》作“阔帖兀阿兰”,又作“月忒哥忽阑”;《明宗纪》作“阔朵杰阿拉伦”。蒙古语阿剌勒,水中岛也。《秘史续集》(二)称客鲁连之阔迭兀阿剌勒,则当是客鲁连河中之岛,后为太祖第一斡耳朵所在地。日本箭内博士谓此岛在蘖沽儿河入客鲁伦河处,殆近之。此岛本太祖所取月儿斤之地,时太祖东走,故汪可汗居之。〕
 
  时上麾下答力台斡真、
 
  〔前作“答力台斡赤斤”〕
 
  按弹折温、火察儿别乞、
 
  〔前作“按弹、火察儿”,折温、别乞,均其称号。〕
 
  札木合八怜、
 
  〔拉施特书作“浑八怜”,即前之“浑八力”、“运八力”也。〕
 
  梭哥台脱怜、
 
  〔拉施特书作“苏克该脱忽鲁儿”,屠敬山谓即速客该者温与脱怜二人。然《秘史》虽言速客该者温奉使落后,未必即依王罕。《秘史》蒙文自有雪格额台脱斡邻勒,盖缘与王罕同名,故加氏以别之。脱斡邻勒为速客客氏,详前注。〕
 
  塔海忽剌海等,
 
  〔汪、何二本“塔”上有“海”字,今从《说郛》本删。〕
 
  又忽都花部众
 
  〔汪、何二本“花”作“答”,今从《说郛》本。拉施特书作“忽都呼特”。〕
 
  在汪可汗所,相与谋害汪可汗,曰:“是不可依也。”将叛去。汪可汗觉其事,讨逐之。
 
  〔何本作“讨迎之”,《说郛》本作“讨遂之”,今从汪本。〕
 
  是时答力台斡真、八邻、撒合、夷嫩真诸部,
 
  〔何本“嫩”作“懒”,今从《说郛》本、汪本。〕
 
  稽颡来归。按弹折温、火察儿别吉、忽都花、
 
  〔诸本“都”作“相”,今从何校改。〕
 
  札木合奔乃蛮主泰阳可汗。
 
  〔何本“主”作“王”,今从《说郛》本、汪本。〕
 
  上移军自班朱河,秋,大会于斡难河源,进伐汪可汗。
 
  〔何本无此二十字,从《说郛》本、汪本增。拉施特书“是年秋,帝自巴尔渚纳起师,将自斡难河以攻汪罕”,正与此同。然据《秘史》则帝自巴泐渚纳起师,直趋客鲁涟河,无缘迂道至斡难河源。此与拉施特书,殆皆失之。〕
 
  上遣使哈柳答儿、抄儿寒
 
  〔诸本“寒”作“塞”,今订正。《秘史》作“沼兀里牙歹合里兀答儿、兀良合歹察兀儿罕”。〕
 
  二人往汪可汗所,假为上弟哈撒儿语谓之曰:“瞻望我兄遥遥勿及,
 
  〔诸本“勿”作“忽”,今订正。汪、何二本无“及”字,今从《说郛》本增。〕
 
  逐揵沙径,
 
  〔汪、何二本作“远揵涉径”,今从《说郛》本。〕
 
  不知所从。近闻我妻子在王所,我今蔽木枕块,藉壤仰星而卧,故虽有诸王
 
  〔汪、何二本“虽”作“强”,今从《说郛》本。〕
 
  苟从之,吾终归王父也。”汪可汗因遣使亦秃儿干
 
  〔《秘史》作“亦秃儿坚”。〕
 
  以煮漆器盛血与之盟。
 
  〔汪、何二本“以”作“我”,“漆”作“潦”,今从《说郛》本。〕
 
  哈柳答儿、抄儿寒二使将亦秃儿干来,上不与语,即送于哈撒儿所。
 
  〔汪、何二本“哈撒儿”作“哈儿抄儿”,今从《说郛》本。〕
 
  上因以二使为乡导,
 
  〔何本无“使为乡导”四字,《说郛》本、汪本并有,但“乡导”并作“乡尊”,今订正。〕
 
  领兵夜驰至彻彻儿运都山,
 
  〔《秘史》作“者折额儿温都儿山”,屠敬山谓即土拉河南之策策山。然策策山似稍嫌偏西,疑即今车臣汗部中翼右旗之卓朔尔山。〕
 
  出其不意,破汪可汗军,尽降克烈部众。汪可汗仅以子及数骑脱走,顾其左右谓其子亦剌合曰:“我父子相亲,其可绝而绝之乎?今由此缓颊儿绝矣。”至捏坤乌柳河,
 
  〔诸本“坤”作“辟”,今从何校改。《秘史》蒙文作“捏坤兀速”。〕
 
  为乃蛮部主太阳可汗之将火里速八赤、
 
  〔《秘史》作“豁里速别赤”〕
 
  帖迪沙二人所杀。亦剌合走西夏,过亦即纳城,
 
  〔《元史·地理志》有亦集乃路,今额鲁特额济纳旗牧地。〕
 
  至波黎吐蕃部,
 
  〔何氏云:“盖今布隆吉尔地。”〕
 
  即讨掠,欲居之。吐蕃收集部众逐之,散走西域曲先,
 
  〔诸本作“西城曰先”,今从何校改。拉施特书作“苦先”,正与何同。〕
 
  居彻儿哥思蛮之地,为黑邻赤哈剌者杀之。
 
  〔《元史·本纪》:“亦剌哈逃至龟兹国,龟兹国主以兵讨杀之。”拉施特书:“逃至和阗喀什噶尔近地,曰苦先古察儿喀思每,为哈剌赤部主克力赤哈剌获而杀之。”〕
 
  上既灭汪可汗,是冬大猎于帖麦该川,
 
  〔《秘史》作“帖篾延客额儿”。案:《元史·特薛禅传》:甲戌,太祖在迭篾可儿谕按陈曰:“可木儿温都儿、答儿脑儿、迭篾可儿之地,汝则居之。”迭蔑可儿即帖蔑延客额儿之略。又可木儿温都儿即今虾蟆儿岭,答儿脑儿即今达里泊,则迭蔑可儿亦当与二地相近。又案《太祖纪》:甲戌春驻跸中都北郊。六月帝避暑鱼儿泺(即达里泊,见后注)。乙亥五月,避暑桓州凉陉。至丙子春始书“还胪朐河行宫”,则甲、乙二岁帝未尝还漠北。其所驻之迭篾可儿,疑即在鱼儿泺之北,克烈部之南界,故太祖既灭汪可汗,即略地至此。屠敬山以喀尔喀河北之特默特尼沟当之,显与史传抵牾也(日本箭内博士谓《元史·世祖纪》之帖买和来,即此麦该川,其他与余说略同)。〕
 
  宣布号令,振旅归龙庭。
 
  〔龙庭,疑即阿不札阙忒哥儿,因太祖、汪可汗先后驻此,故以匈奴单于庭之名名之也。〕
 
  上春秋四十二。时乃蛮太阳可汗遣使月忽难
 
  〔《秘史》蒙文同。阎复《高唐忠献王碑》作“卓忽难”。〕
 
  谋于王孤部主阿剌忽思的乞火力,
 
  〔原注:“今爱不花驸马丞相白达达是也。”王孤,《秘史》、《元史》并作“汪古”。阿剌忽思的乞火力,《秘史》作“阿剌忽失的吉惕忽里”,《元史》作“阿剌兀思剔吉忽里”,乃爱不花之曾祖。〕
 
  曰:“近闻东方有称王者,日月在天,了然可知,
 
  〔汪本“可知”作“可之”,何本作“见之”,今从《说郛》本。〕
 
  世岂有二主哉?君能益我右翼,夺其弧矢。”阿剌忽思即遣使朵儿必塔失
 
  〔《秘史》作“脱儿必塔失”,但为乃蛮使名,而汪古之使乃名月忽难,正与此相反。阎复《高唐忠献王碑》与此《录》同。〕
 
  以是谋先告于上,后举族来归。我之与王孤部亲好者,由此也。甲子
 
  〔原注:“宋景定五年,金泰和四年。”张石洲曰:“当作宋嘉泰四年。”〕
 
  春,大会于帖木垓川,
 
  〔前作“帖麦该川”。〕
 
  议伐乃蛮。百官谋曰:“今畜牧疾瘦,
 
  〔何本“瘦”作“疫”,今从《说郛》本、汪本。〕
 
  待秋高马肥而后可进。”上弟斡赤斤那颜曰:“毋虑马瘦,我骑尚壮,今势已如此,其可缓乎?以吾料敌必取之。
 
  〔何本“取”作“败”,今从《说郛》本、汪本。〕
 
  苟战胜,使他日指此地尝擒太阳可汗,
 
  〔汪、何二本无“使”字,从《说郛》本增。〕
 
  当图此名。然胜负在天,必当进矣。”上弟别里古台那颜亦曰:“乃蛮欲夺王弧矢,若果为夺,则身将安之?彼恃国大马繁,
 
  〔汪、何二本无“恃”字,从《说郛》本增。〕
 
  恣为夸语。今我卒然入之,国虽大必逃散于山林,马虽繁必遗弃于原野,掩其不虞,夺其弓矢,岂难哉?”众称善。望日祭纛,诘朝进兵,伐乃蛮。秋,再会哈勒合河建;式该山,
 
  〔《秘史》作“客勒帖该合答(《秘史》客勒帖该,旁注:牛字。合答,帝旁注:崖字)”。拉施特书云:“乃蛮境外客勒忒该合答,滨哈剌河,地在乃蛮境外。”则此哈勒合河非入贝尔湖之喀尔喀河,而为入土拉河之喀老哈河也。《秘史》蒙文(七):“自阿(卜)只合阔帖格列,动着至合(勒)合(因)斡儿讷兀因客(勒)帖该合答下著。”案:此地即葬畏答儿之处,乃在喀尔喀河畔,离乃蛮境甚远。拉氏以为在乃蛮境外,非也。又《秘史》起兵代乃蛮在鼠年四月十六日,与此《录》云“秋”不同。〕
 
  先遣麾下虎必来、哲别二人为先锋。太阳可汗至自按台,
 
  〔《秘史》作“阿勒台”,今阿尔泰山。〕
 
  营于沆海山之哈只儿兀孙河,
 
  〔汪、何二本“沆”作“杭”,今从《说郛》本。《秘史》作“康孩”,今杭爱山。哈只儿兀孙,《秘史》作“合池儿兀速”今哈瑞河。〕
 
  引兵迎敌。我军至斡儿寒河,
 
  〔《说郛》本、何本“寒”作“塞”,今从汪本。《秘史》作“斡儿洹”,今鄂尔昆河。〕
 
  太阳可汗同蔑里乞部长脱脱、克烈部长札阿绀孛阿邻太石、斡亦剌部长忽都花别吉,
 
  〔汪、何二本“斡亦剌”作“猥剌”,今从《说郛》本。二本于后文亦作“斡亦剌”。〕
 
  及札木合、秃鲁班、塔塔儿、哈答斤、散只兀诸部相合。时我队中一白马带敝鞍,惊走突乃蛮军。太阳可汗与众谋曰:“彼军马羸,可尾而进,然待马稍轻健与之战也。”
 
  〔何本“轻”作“软”,今从《说郛》本、汪本。《秘史》云:“见说达达的马瘦,咱教百姓起了,越过金山,整搠军马,引诱着他行。比至金山,他瘦马乏了,我肥马正好。然后复回,与他厮杀可胜。”么道视此语,意极为明晰。〕
 
  骁将火力速八赤曰:“昔君父亦年可汗
 
  〔前作“亦难赤可汗”。〕
 
  勇战不回,士背马后,未尝使人见也,今何怯耶?
 
  〔何本“耶”作“也”今从《说郛》本、汪本。〕
 
  果惧之,何不令菊儿八速来?”
 
  〔原注:“太阳可汗妻也。”《秘史》作“古儿别速”。〕
 
  太阳可汗因率众来敌。上以弟哈撒儿主中军,
 
  〔汪、何二本无“中”字,《说郛》本有,与《秘史》合。〕
 
  躬自指挥行陈。时札木合从太阳可汗来,
 
  〔《说郛》本、汪本“札木合”下有“日”字,今从何本删。〕
 
  望见上军容严整,
 
  〔《说郛》本“严整”二字作“严丽整饬”四字,今从汪、何二本删。〕
 
  谓左右曰:“汝等见按答举止英异乎?乃蛮语尝有言:‘虽驳革去皮,犹贪不舍’,岂能当之?”
 
  〔《说郛》本、汪本“去皮”作“奇计”,今从何本。案:此处文义晦涩,《元史·本纪》云:“乃蛮初举兵,视蒙古军若羖历羔儿,虽蹄皮亦不留。今我观其气势,殆非往时矣。”较此极明显。〕
 
  遂提本部兵走。是日,上与之大战,至晡,擒杀太阳可汗。乃蛮众溃,夜走绝阻,
 
  〔何本“阻”作“险”,今从《说郛》本、汪本。〕
 
  坠纳忽崖死者,不可胜计。
 
  〔《说郛》本、汪本“忽”下有“浑”字,何本无,与《秘史》合,今从之。又汪、何二本无“死”字,今从《说郛》本增。〕
 
  明日,余众悉降。于是朵鲁班、塔塔儿、哈答斤、散只兀诸部亦来降。冬,再征脱脱,至迭儿恶河源不剌纳矮胡之地,
 
  〔未详。〕
 
  兀花思蔑儿乞部长带儿兀孙
 
  〔汪、何二本作“带兀儿孙”,今从《说郛》本。《秘史》作“兀洼思蔑儿乞歹亦儿兀孙”,又作“答亦儿兀孙”。〕
 
  献女忽兰哈敦于上,率众来降。
 
  〔《蒙古源流》(三):“高丽察罕汗惧,进献高丽墨儿格特岱尔乌逊之女和兰郭斡。”墨尔格特即蔑儿乞,岱尔乌逊即带儿兀孙,和兰即忽兰,但误以为高丽人。《源流》之茫昧,往往如此。〕
 
  为彼力弱,散置军中,实羁縻之。
 
  〔此四字汪、何二本作“室坝之”三字,今从《说郛》本增订。〕
 
  其人不自安,复同叛,留复辎重。我大兵与战,
 
  〔汪、何二本无“大”字,从《说郛》本增。〕
 
  复夺之。上进军围蔑儿乞于泰寒塞,
 
  〔汪、何二本“寒”作“安”,今从《说郛》本,与《元史·本纪》合。《秘史》作“台合勒山寨”。〕
 
  尽降麦古丹、脱脱里掌斤、蔑儿乞诸部而还,
 
  〔何本不重“脱”字,“掌”作“孛”,今从《说郛》本、汪本增改。拉施特书作“尽取麦端、脱塔哈林哈俺诸众”,皆蔑儿乞人。〕
 
  部长脱脱挟其子
 
  〔汪、何二本空此字,从《说郛》本增。〕
 
  奔杯禄可汗。带儿兀孙既叛,率余众至薛良格河,
 
  〔《秘史》作“薛凉格河”。〕
 
  哈剌温隘筑室以居。上遣孛罗欢那颜,
 
  〔前作“博罗浑那颜”。〕
 
  及赤老温拔都弟闯拜二人,领右军讨平之。
 
  〔闯拜,《秘史》作“沈白”,又作“沈伯”。〕
 
  乙丑,征西夏,攻破力吉里寨,经落思城,大掠人民,多获橐驼而还。
 
  〔拉施特书记此役有“乞邻古撒城”而无“落思城”。〕
 
  丙寅,大会诸王百官于斡难河之源,建九游之白旗。
 
  〔《蒙鞑备录》成吉思之仪卫,建大纯白旗以为识认外,并无他旌幢,国王亦然。今国王止建一白旗,九尾中有黑月,出师则张之。〕
 
  共上尊号曰成吉思皇帝。复发兵征乃蛮杯禄可汗,猎于兀鲁塔山莎合水上,擒之。
 
  〔汪、何二本“猎”上有“飞”字,今从《说郛》本删。拉施特书作“不亦鲁黑猎飞鸟于兀鲁黑塔山下莎酌水上,兵至杀之”。似原本或当有“飞”字。兀鲁塔山,《秘史》作“兀鲁黑塔黑”,旁注:“地名”,今科布多城西北有乌鲁克衣堡,殆即其地。莎合水,《秘史》作“淄豁黑河”。李侍郎谓即科布多河上游之索果克河是也。〕
 
  是时,太阳可汗子屈出律可汗
 
  〔《秘史》作“古出鲁克”。〕
 
  与脱脱遁走,奔也儿的石河。
 
  〔《秘史》作“额儿的失河”。〕
 
  丁卯夏,顿兵。秋,再征西夏。冬,克斡罗孩城。
 
  〔《秘史》作“兀剌孩”,《元史·地理志》有兀剌海路,注云:“太祖四年,由黑水城北兀剌海西关口入河西,获西夏将高令公,克兀剌海城。”屠敬山曰:“故城在今蒙古阿拉善额鲁特西南之龙骨山,与甘州之删丹县接界,蒙古名阿拉克鄂拉。”〕
 
  先遣按弹、不兀剌二人使乞力吉思部。
 
  〔《秘史》作“乞儿吉思”,即唐之黠戛斯也。〕
 
  其长斡罗思亦难及阿里替也儿、野牒亦纳里部,亦遣亦力哥帖木儿、
 
  〔汪、何二本无“阿里替也儿”以下十九字,今从《说郛》本补。〕
 
  阿忒黑拉二人
 
  〔汪、何二本“黑”作“里”,今从《说郛》本。《秘史》蒙文(十)云:“拙赤至乞儿吉思地面,其官人也迪亦纳勒、阿勒迪额儿、斡列别克的斤也归附了。”此阿里替也儿即彼阿勒迪额儿,野牒亦纳里即也迪亦纳勒,也力哥帖木儿即斡列别克的斤,而此以前二人为部族名,后一人为使者名,与《秘史》异。拉施特书则云:“帝遣阿尔坛、布拉二人使于乞儿吉思,先至一部,受其降。继至一部,曰野牒鄂伦酋、曰斡罗思亦纳儿,二部酋盛礼款接,遣二使臣曰阿里克帖木儿、曰阿特黑剌黑,偕来献猎鸟。”又与《秘史》及此《录》俱异。〕
 
  偕我使来献白海青为好也。
 
  〔汪本“为好”作“为海”,何本作“名鹰”,今从《说郛》本。〕
 
  戊辰春,班师至自西夏,避暑于龙庭。冬,再征脱脱及曲出律可汗。
 
  〔前作“屈出律可汗”。〕
 
  时斡亦剌部长忽都花别吉不战而降,因用为乡导。至也儿的石河,尽讨蔑里乞部。脱脱中流矢而死。曲出律可汗仅以数人脱走,奔契丹主菊儿可汗。
 
  〔汪、何二本“儿”作“而”,今从《说郛》本。〕
 
  己巳春,畏吾儿国王亦都护
 
  〔亦都护王号,唐时突厥、回鹘并西域诸国皆有“叶护”,此“亦都护”,其遗语也。其人名巴而木阿而忒的斤,《元史》有传。〕
 
  闻上威名,遂杀契丹所置监国少监,欲求议和。上先遣按力不也奴、答儿拜二人使其国。
 
  〔汪、何二本作“按力也奴、答拜”,《说郛》本作“按力也奴、答儿拜”。案:此书后文作“案力不也奴、答儿班”,今据增一“不”字。拉施特书作“阿勒泼鱼土克、迭儿拜”,与后文合。《秘史》记亦都护使臣有阿惕乞剌黑、答儿伯二人,与此不同。〕
 
  亦都护大喜,待我礼甚厚,即遣其官别吉思、阿邻帖木儿二人入奏曰:“臣窃闻皇帝威名,
 
  〔汪、何二本“窃”作“国”,今从《说郛》本。〕
 
  故弃契丹旧好,方将遣使来通诚意,躬自效顺,岂料远辱天使降临下国,譬云开见日、冰泮得水,喜不胜矣。而今而后,当尽率部众,
 
  〔汪、何二本无“当”字,从《说郛》本增。〕
 
  为仆为子,竭犬马之劳也。”当是时,蔑力乞脱脱子火都、赤剌温、马札儿、秃薛干
 
  〔“火都”以下十一字,汪、何二本并脱,今从《说郛》本补。《说郛》本亦脱“火”字,又“札”作“礼别”,从《元史类编》所引增订。《元史·巴尔木阿而忒的斤传》同。拉施特书作“忽都、赤剌温、赤攸克呼、图罕蔑尔根”末二人与此异。〕
 
  以脱脱中流矢死,不能归全尸,遂取其头涉也儿的石河,将奔畏吾儿国,先遣别干者
 
  〔何本“先”上有“脱脱”二字,今从《说郛》本、汪本删。拉施特书“别干”作“哀不干”。〕
 
  使亦都护。亦都护杀之。四人至,与畏吾儿大战于崭河。
 
  〔崭河,《元史·巴尔木阿而忒的斤传》作“襜河”。〕
 
  亦都护先遣其官阿思兰斡乞、孛罗的斤、亦难海牙、仓赤四人
 
  〔拉施特书作“阿儿思兰兀喀、察鲁忽兀喀、孛拉的斤、亦纳儿乞牙、松赤”四人,此脱“察鲁忽兀喀”一人。《中州文表》(二十二)许有乏《阿塔海牙神道碑》:“考讳哈剌阿思兰都大,当太祖皇帝肇建区宇,国主邑都护发兵攻金,斩其长史。闻灭乞里有异,遣将命偕察鲁四人驰告行在,且具款诚。上曰:‘果如尔言,其告尔主以方物来。’对曰:‘皇帝幸生,活高昌。高昌身且不敢有,何有方物?’复命辇宝货、金织段以献。由是高昌内附,因留宿卫,从太祖南征,卒于柳城。”〕
 
  来告蔑力乞事。上曰:“亦都护果诚心戮力于我。”
 
  〔何本“戮”作“效”,今从《说郛》本、汪本。〕
 
  以其已有来献,寻遣安鲁不也奴、答儿班二人
 
  〔诸本“奴”作“女”,从上文改。〕
 
  复使其国。亦都护遣使奉珍宝方物为贡。
 
  庚午夏,上避暑龙庭。秋,复征西夏,入孛王庙。
 
  〔《说郛》本“庙”作“朝”,今姑从汪、何二本。〕
 
  其主失都儿忽出降,
 
  〔诸本“都”作“相”,今订正。案:是时西夏主为李安全,《秘史》蒙文《续集》(一)称为亦鲁忽不儿罕。又《续集》(二)将亦鲁忽不儿罕改名失都儿忽,时西夏国主为李睍也。此《录》乃称安全为失都儿忽,想《秘史》与此《录》必有一误。《蒙古源流》称西夏诸主为锡都尔固汗,与此《录》同。〕
 
  献女为好。
 
  〔《秘史》:“成吉思自那里征合申种,其主不儿罕降,将女子名察忽思献于成吉思。”
 
  案:此年事,拉施特书系于蛇年,《元史·本纪》系于己巳,《地理志》载“太祖四年,克兀剌海城”,亦与拉施特书合。疑此《录》原本庚午一年并无事实,后人乃割己巳年“夏避暑龙庭”以下为庚午事,此当据《元史》及拉氏书订正者。至《秘史》叙合申献女事于羊年伐金之后,则由行文之便,未可执以议此《录》及《元史》也。〕
 
  辛未春,上居怯绿连河。时西域哈剌鲁部主阿昔兰可汗,因忽必来那颜见上。
 
  〔诸本“必”下无“来”字,今从何校增。《秘史》“太祖命忽必来征合儿鲁兀惕种,其主阿儿思兰即投降了,来拜太祖”即此事也。哈剌鲁,即唐时葛逻禄,亦云葛禄。阿昔兰可汗,汉言师子王也。忽必来,前作“虎必来”。〕
 
  亦都护亦来朝,
 
  〔汪、何二本“护”下有“儿”字,今从《说郛》本删。〕
 
  奏曰:“陛下若恩顾臣,
 
  〔汪本“顾”作“愿”,何本作“赐”,今从《说郛》本。〕
 
  使远者悉闻,近者悉见,辍衮衣之余缕,
 
  〔何本“衮衣”作“口衮”,今从《说郛》本、汪本。〕
 
  摘金带之星装,诚愿在陛下四子之亚,竭其力也。”上说其言,使尚公主,仍叙弟五子。
 
  〔汪、何二本无“子”字,今从《说郛》本增。〕
 
  遣将脱忽察儿率骑二千,
 
  〔汪、何二本作“二十”,何改“三千”,《说郛》本作“二千”,与拉施特书合,今从之。〕
 
  出哨西边戎。秋,上始誓众南征,克大水泺。
 
  〔今察哈尔左翼正蓝旗牧地有大水淖{人小}。《口北三厅志》(二)“山川门大水泺”条云:“新河口外,白城子东,兴和城北,土人呼为伊克脑儿水,与昂古里乐相通。伊克,华言大;淖儿;华言水泺也。”〕
 
  又拔乌沙堡
 
  〔何本“又”作“以”,今从《说郛》本、汪本。〕
 
  及昌桓抚等州,大太子术赤、二太子察合台、三太子窝阔台
 
  〔原注:“太宗也。”此三字,诸本误入正文,今订正。又何本无“阔”字,从《说郛》本、汪本增。〕
 
  破云内、东胜、武、宣、宁、丰、靖等州。金人惧,弃西京。又遣哲别率兵取东京。
 
  〔《秘史》作“东昌”,乃声之误。〕
 
  哲别知其中坚,以众压城,
 
  〔汪、何二本“压”作“堕”,今从《说郛》本。〕
 
  即引退五百里。金人谓我军已还,不复设备。哲别戒军中一骑牵一马,一昼夜驰还,急攻,大掠之以归。
 
  〔诸本“急”作“忽”,今从何校改。〕
 
  上之将发抚州也,金人以招讨九斤、
 
  〔《元史》作“纥石烈九斤”,殆即纥石烈执中之音讹。然据《金史·卫绍王纪》及《独吉思忠传》,是役主帅为思忠,非执中也。〕
 
  监军万奴等
 
  〔何本“万”作“为”,今从《说郛》本、汪本。“万”字与“元”相似,《金史·卫绍王纪》“至宁元年八月,尚书右丞完颜元奴将兵备边”,乃在此二年后。〕
 
  领大军设备于野狐岭,又以参政胡沙
 
  〔《说郛》本作“忽沙”,今从汪、何二本。《金史·承裕传》:“承裕一名胡沙。大安三年,拜参知政事,与平章政事独吉思忠行省戍边。”〕
 
  率军为后继,契丹军师谓九斤曰:
 
  〔拉施特作“金将巴古失桑臣谓九斤曰”云云。〕
 
  “闻彼新破抚州,以所获物分赐军中,马牧于野,出不虞之际,宜速骑以掩之。”
 
  〔汪、何二本此下有“也”字,从《说郛》本删。〕
 
  九斤曰:“此危道也。不若马步俱进,为计万全。”上闻金兵至,
 
  〔汪、何二本“兵”作“马”,今从《说郛》本。〕
 
  进拒獾儿觜。
 
  〔何本“觜”上衍“唃”字,今从《说郛》本、汪本删。《秘史》作“抚州山觜”。〕
 
  九斤命麾下明安曰:“汝尝使北方,素识太祖皇帝。其往临阵
 
  〔何本“其”作“共”,今从《说郛》本、汪本。〕
 
  问以举兵之由,金国何怨于君,而有此举?若不然,即诟之。”明安来,如所教,俄策马来降。上命麾下缚之曰:
 
  〔何本无“曰”字,今从《说郛》本、汪本增。〕
 
  “俟吾战毕问之也。”遂与九斤战,大败之,其人马蹂躏死者不可胜计。因胜彼,复破胡沙于会合堡,
 
  〔《金史·卫绍王纪》、《完颜承裕传》并作“浍河堡”,《元史·太祖纪》作“会河川”。〕
 
  金人精锐尽没于此。上归诘明安曰:
 
  〔《说郛》本、何本“诘”作“语”,今从汪本。〕
 
  “我与汝无隙,何对众相辱?”对曰:“臣素有归志,恐其难见,故因如所教。不尔,何由瞻望天颜。”上善其言,命释之。
 
  壬申,破宣德府,
 
  〔案:金时,只称宣德州。至元世祖中统四年,改府。此追称之辞。〕
 
  至德兴府,失利引却。四太子也可那颜、
 
  〔《元史·祭祀志》:睿宗主题曰:“太上皇也可那颜,是四太子也。”可那颜七字连读。某氏以哈撒儿子也苦当之,非是。〕
 
  赤渠驸马
 
  〔赤渠,《元史·太祖纪》作“赤驹”,《太宗纪》作“赤苦”,《公主表》作“赤窟”,《秘史》作“赤古古列坚”,拉施特谓即弘吉剌氏按陈那颜之子。〕
 
  率兵尽克德兴境内诸堡而还。后金人复收之。
 
  〔案:此年事,拉施特书系之羊年,即辛未。而《元史》系之癸酉。案:拉氏书与《秘史》合,《元史》辛未年,亦有拔德兴府事,疑此《录》申年无事,后人割未年末事以补之也。〕
 
  癸酉秋,上复破之,遂进军至怀来。
 
  〔《说郛》本、何本无“来”字,今从汪本补。〕
 
  金帅高琪将兵与战。我军胜,追至北口。
 
  〔汪、何二本作“古北口”,今从《说郛》本删。《元史·本纪》亦无“古”字,此居庸北口,非古北口也。〕
 
  大败之,死者不可胜计。时金人堑山筑寨,悉力为备。上留怯台、薄察顿兵拒守,
 
  〔《元史·本纪》“怯台”作“可忒”,“薄察”作“薄刹”。拉施特书:“帝选弘吉剌特二将,曰喀台,曰布札。”〕
 
  遂将别众西行,
 
  〔诸本无“将”字,从张石洲校补。〕
 
  由紫荆口出。金主闻之,遣大将奥屯拒隘,勿使及平地。比其至,我众度关矣,乃命哲别率众攻居庸南口,出其不备,破之。进兵至北口,与怯台、薄察军合。既而又遣诸部精兵五千骑
 
  〔奥屯,那珂通世谓即乌古孙兀屯。案:《金史·忠义传》:“贞祐元年闰月,北京留守乌古孙兀屯以兵入卫中都。诏以兵万六千人守定兴,军败,兀屯战没。”那说是也。何本“精”作“数”,今从《说郛》本、汪本。〕
 
  令怯台、哈台二将围守中都。
 
  〔《秘史》(九十五)功臣中有合歹驸马,即此哈台也。汪、何二本“围”作“固”,《说郛》本作“因”,今从何校改。〕
 
  上自率兵攻涿、易二州,即日拔之。
 
  〔《说郛》本作“上自率兵攻涿州二,命日拔之。”今从汪、何二本。拉施特书:“帝自引兵攻涿州,二十日破之。”别无攻易州事,与《说郛》本合。然《说郛》本“命”字与“即”相似,当系“即”字之讹。则“州二”两字仍系“二州”之倒,又夺一“易”字也。此等处《亲征录》与拉氏书本自不同,不得援拉氏书为说。〕
 
  乃分军为三道,大太子、二太子、三太子为右军,循太行而南,
 
  〔《说郛》本、汪本“而”作“西”,今姑从何本。〕
 
  破保州、中山、邢、洛、
 
  〔《说郛》本作“治”,汪、何二本作“洛”,今从何校改。〕
 
  磁、相、辉、卫、怀、孟等州,弃真定、威州境,
 
  〔何本“真”作“其”,何校遂删“弃其”二字,今从《说郛》本、汪本。〕
 
  抵黄河,大掠平阳、太原而还;
 
  〔何本无“平阳、太原”四字,汪本无“阳太”二字,今从《说郛》本增。但《说郛》本、汪本此二句并错入下文,从何本及《元史·本纪》正。〕
 
  哈撒儿及斡陈那颜、
 
  〔诸本“陈”作“律”,今订正。斡陈那颜,前作“斡真那颜”,又作“斡赤斤那颜”。《元史·太祖纪》与此同。〕
 
  拙赤
 
  〔拉施特书原注云:“成吉思汗幼子。”案:拉氏书有太祖妃乃蛮氏,失其名,生子术儿赤,早卒。疑即此拙赤、也。《元史·食货志》有太祖第五子兀鲁赤太子。“兀”疑“术”之讹。《秘史续集》一,载:“成吉斯克中都后,命合撒儿领右手军,沿海自大宁经过女真还营。合撒儿同主儿扯歹、阿勒赤、脱仑扯儿必共去了。”其事虽在此后,然将帅未必易人。然则斡陈那颜即《秘史》之阿(勒)赤也,拙赤解、当即主儿扯歹。其人果为兀鲁兀部之术赤台,抑为成吉思之子术儿赤,则不可考。惟“薄刹”与“脱仑扯儿必”确非一人耳。〕
 
  薄刹、
 
  〔即上“薄察”。〕
 
  为左军,沿海破洙、沂等城而还。
 
  〔《元史》作“取蓟州、平、泺、辽西诸郡而还”。“洙、沂”疑“平、泺”之讹。〕
 
  上与四太子驭诸部军
 
  〔《说郛》本、汪本此下错入“抵黄河”至“为左军”二十七字。〕
 
  由中道,遂破深、莫、
 
  〔汪、何二本作“泺汉”,何改“深莫”,正与《说郛》本合。〕
 
  河间、清、沧、景、献、济南、滨、棣、益都等城,
 
  〔汪、何二本“河间”下有“开”字,今从《说郛》本删。〕
 
  弃东平、大名不攻,余皆望风而拔。下令北还,又遣木华黎回攻密州,拔之。上至中都,亦来合。
 
  〔诸本“都”作“相”,从何校改。
 
  此年事,拉施特书系之猴年。《元史·本纪》与此《录》同。〕
 
  甲戌,上驻营于中都北壬甸。
 
  〔《秘史》作“失剌客额儿”,华言黄甸,盖始讹为“王甸”,又转讹为“壬甸”耳。〕
 
  金丞相高琪与其主谋曰:“闻彼人马疲病,
 
  〔汪、何二本“疲”作.“瘦”,今从《说郛》本。〕
 
  乘此决战可乎?”丞相完颜福兴曰:“不可。
 
  〔《说郛》本、何本无此二字,今从汪本增。〕
 
  我军身在都城,家属多居诸路,其心向背未可知,战败必散。苟胜,亦思妻子而去。祖宗社稷安危在此举矣。今莫若遣使议和,待彼还军,
 
  〔汪本“彼”下有“若”字,何本有“吉”字,今从《说郛》本删。〕
 
  更为之计,如何?”金主然之,遣使求和,因献卫绍王公主,令福兴来送。上至野麻池而还。
 
  〔野麻池,拉施特书作“麻池”,《秘史》作“莫州、抚州山觜。”那珂博士(通世)曰:“当作抚州之莫州山觜,莫州即麻池之异译。”〕
 
  夏四月,金主南迁汴梁,留其太子守中都,以丞相完颜福兴、左相秦忠为辅。
 
  〔《金》《元》二史并作“参政抹捻尽忠”。〕
 
  金主行拒涿,契丹军在后。至良乡,金主疑之,欲夺其原给铠马还营。契丹众惊
 
  〔何本无“契丹”二字,今从《说郛》本、汪本增。〕
 
  遂杀主帅素温而叛,
 
  〔《说郛》本“素温”作“兖昆”,今从汪、何二本。拉施特书作“鲜衮”,即详稳之异译。〕
 
  共推斫答比涉儿、札剌儿为帅而还中都。
 
  〔汪、何二本“共”作“去”,今从《说郛》本。〕
 
  福兴闻变,军阻卢沟,勿令得渡。斫答遣裨将塔塔儿帅轻骑千人潜渡水,复背击守桥众,大破之,尽夺衣甲、器械、牧马之近桥者,
 
  〔《说郛》本作“相迎者”,今从汪、何二本。〕
 
  由是契丹军势渐振。先是耶律留哥以中国多故,据有东京、咸、平等郡,自称辽王。斫答比涉儿等遣使诣上行营纳款,又求好于辽王。时辽王亦来降,上命为元帅,令居广宁府。
 
  〔《元史·太祖纪》及《耶律留哥传》,留哥来朝事在乙亥。〕
 
  金主之南迁也,以招讨也奴为咸平等路宣抚,复移于阿必忽兰。
 
  〔《说郛》本无“必”字,今从汪、何二本。〕
 
  至是亦以众来降,仍遣子铁哥入侍。既而复叛,自称东夏王。
 
  〔案:“也奴”当作“万奴”,《太祖纪》:十年己亥冬十月,金宣抚蒲鲜万奴据辽东,僣称天王,国号大真。十一年,蒲鲜万奴降,以其子帖哥入侍,既而复叛,僣称东夏。事在甲戌后二年,此盖因斫答比涉儿事兼及留哥、万奴耳。拉施特书“也奴”作“秃珠大石”,他书未见。〕
 
  五月,金太子留福兴、秦忠守中都,亦走汴梁。上以契丹众将来归,遂命散只兀儿三木合拔都
 
  〔何本无“三”字,从《说郛》本、汪本增。散只兀儿,其氏三木合,其名《元史·本纪》作“三模合”。〕
 
  领契丹先锋将明安太保兄弟为乡导,引我军合之,至则与斫答等并力围中都。
 
  〔《说郛》本“围”作“图”。〕
 
  金主以检点庆寿、元帅李英
 
  〔何本作“季英”,何改“李”,正与《说郛》本、汪本合。〕
 
  运粮分道,还救中都,
 
  〔何本“中”作“东”,何改“中”,正与《说郛》本、汪本合。〕
 
  人赍粮三斗。
 
  〔何本作“赍粮人三斗”,今从《说郛》本、汪本。〕
 
  英自负以砺众。庆寿至涿州旋风寨,李英至霸州青戈,皆为我军所获。既绝其粮,中都人自相食,福兴自毒死,秦忠亦弃城走。明安太保人据之,遣使献捷。上时驻桓州,
 
  〔何本“时”作“自”,“州”作“丹”,今从《说郛》本、汪本。〕
 
  遂命忽都忽那颜
 
  〔《秘史》作“失吉刊忽都忽”。〕
 
  与雍古儿宝儿赤、
 
  〔汪、何二本“宝儿”作“宝光”,今从《说郛》本。雍古儿,《秘史》作“翁古儿”。宝儿赤,华言膳大也。〕
 
  阿儿海哈撒儿
 
  〔《秘史》作“阿儿孩合撒儿”。〕
 
  三人检视中都帑藏。时金留守哈答国和
 
  〔《秘史》作“合答”。〕
 
  奉金币为拜见之礼,
 
  〔何本“币”作“帑”,今从《说郛》本、汪本。〕
 
  雍古儿、哈撒儿受之,独忽都忽拒不受,将哈答等萃其物北来。
 
  〔汪、何二本无“等萃”二字,今从《说郛》本补。〕
 
  上问忽都忽曰:“哈答等尝与尔物乎?”对曰:“有之。未敢受之。”上问其故。对曰:“臣尝与哈答言,城未陷时,
 
  〔汪、何二本“城”字在“陷”下,今从《说郛》本。〕
 
  寸帛尺缕,皆金主之物。今既城陷,悉我君物矣。汝又安得窃我君物为私惠乎?”
 
  〔汪、何二本“私惠”作“和意”,《说郛》本作“何意”,今从何校改正。〕
 
  上甚佳之,
 
  〔何本“甚”作“正”,今从《说郛》本、汪本。〕
 
  以为知大体,而重责雍古儿、阿儿海哈撒儿等之不珍也。哈答因见其孙崇山而还。
 
  〔汪、何二本“崇”作“荣”,今从《说郛》本。此下汪、何二本并有错文,今悉从《说郛》本。〕
 
  时金通州元帅七斤率众来降,
 
  〔诸本“七斤”作“也斤”,今从何校改。《金史·宣宗纪》:贞祐三年(乙亥)正月了丑,右副元帅蒲察七斤降于大元。〕
 
  惟张复、张镮柄、众哥、也思元帅据守信安不下。
 
  〔汪、何二本“惟张”作“帷帐”,“镮”作“镬”,“元帅”作“瓦郎”,今并从《说郛》本改。某氏云:“张复即高阳公张甫,众哥即河间公移剌众家奴,张镬柄疑即张进,与甫同守信安。惟也思无考。”屠敬山以也思为杨寿之译音。右并见《金吏·移剌众家奴传》。〕
 
  上驻军鱼儿泺,
 
  〔今达里泊。《长春真人西游记》:“三月朔,出沙陀至鱼儿泺。”张德辉《纪行》:“过鱼儿泊。泊有二焉,周广百余里,中有陆道达于南北。泊之东涯有公主离宫。”案:张氏谓“泊有二”,正与今达里泊、冈爱泊形势同。又谓“中有陆道达于南北”又与今驿路出二泊之间者同。又谓“泊之东涯有公主离宫”,考《元史·特薛禅传》:甲戌,太祖在迭蔑可儿谕按陈曰:“可木儿温都儿、答儿脑儿、迭蔑可儿之地,汝则居之。”又,至元七年,斡罗陈万户及其妃囊加真公主请于朝曰:“本藩所受农土,在上都东北三百里答儿海子,实本藩驻夏之地,可建城邑以居。”帝从之,遂名其地为应昌云云。案:答儿脑儿、答儿海子,即达里泊,元时为弘吉剌氏分地。弘吉剌世尚公主,故有公主离宫。是鱼儿泺即今达里泊,更不容疑。又,《世祖纪》:中统元年六月,诏燕京、西京、北京三路宣抚使运米十万石,输开平府及抚州、沙井、靖州、鱼儿泺,以备军储。鱼儿泺与开平、抚州等连言,亦即达里泊之一证。近人乃或以《秘史》之捕鱼儿海子、今之贝尔湖当之,度以地望,殊不然也。又,此处鱼儿泺,拉施特书作“戈奥儿”,殆亦“冈爱”之异译。〕
 
  命三合拔都
 
  〔《元史·本纪》作“三哥拔都”,拉施特书作〕
 
  “撒木哈把阿秃儿”,即前散只兀儿三木合拔都。帅蒙古兵万骑,由西夏掠京兆,出潼关,破嵩、汝等郡,直趋汴梁。至杏花营,大掠河南。回至陕州,适河冰合,遂渡而北。金元帅邪答忽、监军斜烈以北京来降。
 
  〔诸本“邪”作“那”,今从何校改。邪答忽即寅答虎,其以北京来降,事详《元史·木华黎传》。拉施特书“撒木哈把阿秃儿自陕州渡黄河,趋西京。金二将守西京,曰寅答尔,曰罕撒儿撒烈,出城迎降”,与《元史》异。案:此《录》纪此事亦承上文,则自陕州北渡当至西京,无与北京事。或“北”本作“西”,后人改之与?〕
 
  上遣脱脱栾阇儿必
 
  〔《秘史》作“脱仑扯儿必”,又作“脱栾”。〕
 
  帅蒙古、契丹、汉军南征,降真定,破大名,至东平,阻水不克,大掠而还,金人复取之。
 
  〔案:此年事,拉施特书自“张复等守信安”以上系之鸡年,自“上驻鱼儿泺”以下系之犬年。《元史·本纪》则以中间陷中都一事系之乙亥,余略与此《录》同。《元史》是也,何校改从《元史》则又不必。盖此《录》虽用编年体,而于入中都一事则又由行文之便。终言之,未必定有错简。拉氏书与此《录》系年虽异,而次序则同,此其一证。至其系年之殊,则由彼书脱“猴年”字,故申、酉、戌三年事遂递上一年耳。〕
 
  乙亥,金右副元帅七斤以通州降。木华黎攻北京,金元帅寅答虎等以城降。金御史中丞李英等率师援中都,战于霸州,败之。中都留守完颜福兴仰药死,抹捻尽忠弃城走,明安入守之。诏史天倪南征,取平州。木华黎遣史进道攻广宁府,降之。是秋,取城邑凡八百六十有二。
 
  〔案:此节系明人羼入。盖乙亥事,此《录》以行文之便豫叙于甲戌,故此年无事。拉施特书亦无猪年事,其证也。后人取《元史·本纪》补之,不悟与上复重,且称名亦不合也(如秦忠作“抹捻尽忠”)。〕
 
  丙子,锦州帅张鲸以锦州、广宁等郡来降,俄而复叛,自号辽西王,改元大汉。上命木花里以左军讨平之。
 
  〔《元史·本纪》:九年甲戌,锦州张鲸杀其节度使,自立为临海王,遣使来降。十年乙亥,张鲸谋叛伏诛。鲸弟致遂据锦州,亻替号汉兴皇帝,改元兴龙。十一年丙子,张致陷兴中府,木华黎讨平之。《元史》以此事分系甲、乙、丙三年,此《录》则因记平锦州事,兼及其缘起耳。何本脱“俄而复叛”以下二十一字,今从《说郛》本、汪本补。〕
 
  丁丑上遣大将速不台拔都以铁裹车轮,征蔑儿乞部,与先遣征西前锋脱忽察儿二千骑合,
 
  〔汪、何二本“二千”作“三千”,今从《说郛》本。〕
 
  至崭河,
 
  〔《秘史》作“垂河”,今吹河也。〕
 
  遇其长,大战,尽灭蔑儿乞还。是岁,吐麻部主带都剌莎儿合
 
  〔汪、何二本“儿合”作“合儿”,今从《说郛》本。《秘史》作“豁里秃马惕官人歹都忽勒莎豁”。〕
 
  既附而叛。上命博罗浑那颜、都鲁伯
 
  〔《秘史》作“朵儿伯朵黑申”。〕
 
  二将讨平之,博罗浑那颜卒于彼。
 
  〔案:遣速不台征蔑儿乞事,《秘史》系于牛儿年,然在灭乃蛮之后,获札木合之前,则所谓“牛年”乃“乙丑”非“丁丑”也。至速不台杀蔑儿乞亡虏忽都等,及平吐麻部,《秘史》虽不著年岁,然皆系于伐金之前,疑此《录》误也。〕
 
  戊寅,封木华黎为国王,率王孤部万骑、
 
  〔诸本“孤”作“狐”,今从何校改。〕
 
  火朱勒部千骑、兀鲁部四千骑、
 
  〔兀鲁,前作“兀鲁吾”〕
 
  忙兀部将木哥汉札千骑、
 
  〔木哥汉札,《秘史》蒙文作“蒙可合勒札”,《元史·太宗纪》作“蒙古寒札”,《畏答儿传》作“忙哥”。〕
 
  弘吉剌部按赤那颜三千骑、
 
  〔前作“斡陈那颜”。《蒙鞑备录》:“按赤那邪见封尚书令,乃成吉思正后之弟,部下亦有骑军十余万。所统之人颇循法,鞑人自言随国王者皆恶,随尚书令者皆善也。”〕
 
  亦乞剌部孛徒二千骑、札剌儿部及带孙等二千骑,
 
  〔《蒙鞑备录》:“国王弟二人,长曰抹歌,见在成吉思处为护卫,次曰带孙郡王,每随侍焉。”带孙即札剌儿部长,“及”字疑衍。〕
 
  同北京诸部乌叶儿元帅、
 
  〔即吾也而,《元史》有传。〕
 
  秃花元帅
 
  〔即耶律秃花,《元史》有传。〕
 
  所将汉兵,及札剌儿所将契丹兵,
 
  〔诸本“札”作“北”。案:即甲戌年,契丹兵所推为帅之札剌儿也,今订正。〕
 
  南伐金国。
 
  〔何本“南”作“原”,今从《说郛》本、汪本。〕
 
  别遣哲别攻曲出律可汗,至撒里桓地克之。
 
  〔《辽史·天祚纪》:西辽仁宗次子直鲁古在位三十四年时,秋出猎,乃蛮王屈出律以伏兵八千擒之,而袭其位。此正其据西辽时也。撒里桓,《秘史》作“撒里黑昆”,徐星伯谓即今叶尔羌西八百里之色勒库勒是也。〕
 
  先,吐麻部叛,上遣征兵乞儿乞思部。
 
  〔何本无“乞思”二字,今从《说郛》本增。汪本作“乞儿乞儿部”,下“儿”字亦“思”之讹,前作“乞力吉斯”。〕
 
  不从,亦叛去。遂命大太子往讨之,
 
  〔汪、何二本“命”上有“先”字,下无“大”字,今从《说郛》本。〕
 
  以不花为前锋,
 
  〔不花,《秘史》作“不合”,木华黎之弟。〕
 
  追乞儿乞思,
 
  〔诸本无下“乞”字,今订补。〕
 
  至亦马儿河而还。
 
  〔亦马儿河,某氏以为今自乌梁海入俄境之阿穆哈河,屠敬山谓即叶密立河。〕
 
  大太子领兵涉谦河水,顺下,招降之,
 
  〔《元史·地理志·西北地附录》:“谦谦州,谦河经其中。”即《唐书·黠戛斯传》之剑河,今之克穆河也。〕
 
  因克乌思、憾哈纳思、帖良兀、克失的迷、火因亦儿干诸部。
 
  〔汪、何二本“因”作“困”,“乌”作“为”,“儿”作“而”,又无“纳”字,今从《说郛》本增改。《秘史》“乌思”作“兀儿速惕”,“憾哈纳思”作“合卜合纳思”,“帖良兀”作“田列克”,“克失的迷”作“客思的因”。《元史·西北地附录》:“乌思在谦河之北,撼合纳在乌思东。”拉施特书云:“谦河之东有兀儿速惕、帖良古惕、客思的迷三族,居拜喀勒湖西,与斡亦剌惕、吉儿吉思为邻”云云。〕
 
  火因亦儿干,
 
  〔《秘史》作“槐因亦儿坚”,义为林木中百姓。谓以上四部皆林木中百姓,非别有火因亦儿干一部也。
 
  《秘史》大太子征克儿克思及招降林木中百姓事系于兔儿年,远在辛未伐金之前,则此兔儿年乃“丁卯”非“己卯”也。此《录》系于己卯之前一年,疑撰人欲系此事于己卯,而未及厘正也。〕
 
  己卯,上总兵征西域。
 
  〔何本无此八字,今从《说郛》本、汪本增。〕
 
  庚辰,—亡至也儿的石河住夏。秋,进兵,所过城皆克。至斡脱罗儿城,
 
  〔《秘史》作“兀都剌儿”,《元史·本纪》别作“讹答剌”,《地理志》作“兀提剌儿”。耶律文正《西游录》:“苦盏西北五百里有讹打剌城。”〕
 
  上留二太子、三太子攻守,寻克之。
 
  辛巳,上与四太子进攻卜哈儿、薛迷思干等城,皆克之。
 
  〔何本“进”作“追”,今从《说郛》本、汪本。卜哈儿,《秘史》作“不合儿”,《元史》别作“蒲华”,今之布哈尔也。薛迷思干,《秘史》作“薛迷思加”,《元史·太祖纪》别作“寻斯干”,《地理志》作“撒麻耳干”,今名同。〕
 
  大太子又克养吉干、八儿真等城。
 
  〔八儿真,《元史·地理志》作“巴耳赤刊”。〕
 
  夏,上避暑于西域速里坛避暑之地,
 
  〔诸本“里”作“望”,今订正。速里坛下有原注曰:“西域可汗之称也。”何本“称”作“林”,今从《说郛》本、汪本。〕
 
  命忽都忽那颜为前锋。
 
  〔汪、何二本无下“忽”字,从《说郛》本增。〕
 
  秋,分遣大太子、三太子率右军攻玉龙杰赤城,
 
  〔诸本“玉”作“王”,今从何校改。《秘史》作“兀笼格赤”。《秘史》攻兀笼格赤者,为拙赤、察阿歹、斡歌歹三人,则此尚脱“二太子”三字。《西游录》:“蒲华之西有大河,西入于海。其西有玉里犍城,梭里檀母后所居,富庶又盛于蒲华。”〕
 
  以军集奏闻,上有旨曰:“军既集,可听三太子节制也。”于是上进兵,过铁门关,命四太子攻也里、泥沙兀儿等城。
 
  〔汪、何二本无“命”字,又城上有“处”字,今从《说郛》本增删。《秘史》“也里”作“亦鲁”,“泥沙兀儿”作“亦薛不儿”。《元史·地理志》作“乃沙不耳”。下作“匿察兀儿”,二城并在阿母河南。〕
 
  上亲克迭儿密城。
 
  〔《元史·地理志》作“忒耳迷”,即唐时怛密国,在今阿母河北。〕
 
  又破班勒纥城,
 
  〔《元史·地理志》作“巴里黑”,即唐时缚喝国,在阿母河南。〕
 
  围守塔里寒寨。
 
  〔汪、何二本“塔”作“哈”,今从《说郛》本。又,诸本无“寒”字,何校据《元史·本纪》增。塔里寒,《元史·地理志》作“塔里干”,《马哥·波罗行记》谓距班勒纥十二日程。〕
 
  冬,四太子又克马鲁察叶可、马卢、昔剌思等城,复进兵。
 
  壬午春,又克徒思、匿察兀儿等城。
 
  〔徒思,《元史·地理志》作“途思”。〕
 
  上以暑气方隆,遣使招四太子速还,因经木剌奚国,
 
  〔刘郁《西使记》作“木乃夷”。〕
 
  大掠之。渡搠搠兰河,
 
  〔何本不重“搠”字,今从《说郛》本、汪本。《元史》同《秘史》作“出黑扯连城”。〕
 
  克野里等城。
 
  〔前作“也里”。〕
 
  上方攻塔里寒寨,朝觐毕,并兵克之。三太子克玉龙杰赤城,大太子还营所。寨破后,二太子、三太子始来相觐。
 
  〔汪、何二本“始”作“姑”,今从《说郛》本。〕
 
  是夏,避暑于塔里寒寨高原。
 
  〔何本“寒”作“河”,今从《说郛》本、汪本。〕
 
  时西域速里坛札兰丁
 
  〔《秘史》作“札剌勒丁莎勒坛”。〕
 
  遁去,遂命哲别为先锋迫之,再遣速不台拔都为继,又遣脱忽察儿殿其后。哲别至蔑里可汗城,
 
  〔蔑里可汗,《秘史》作“罕篾力克”。〕
 
  不犯而过。速不台拔都亦如之。脱忽察儿至,与其外军战。蔑里可汗惧,弃城走。忽都忽那颜闻之,率兵进袭。时蔑里可汗与札阑丁合,就战,
 
  〔《说郛》本“就”作“既”,今从汪、何二本。〕
 
  我不利,遂遣使以闻。上自塔里寒寨率精锐亲击之,追及辛口连河,
 
  〔《说郛》本作“辛自连河”,汪、何二本作“辛自速河”,今从某氏校改正。《秘史》作“申沐涟”,今印度河。〕
 
  获蔑里可汗,屠其众。札阑丁脱身入河,泳水而遁。遂遣八剌那颜
 
  〔《秘史》作“巴剌”。〕
 
  将兵急迫之,不获。因大虏忻都人民之半而还。
 
  〔诸本“忻都”作“折相”,今从何校改正。〕
 
  癸未有,上兵循辛目连河而上,
 
  〔诸本“上”作“止”,今订正。〕
 
  命三太子循河而下,
 
  〔汪、何二本无“下”字,何增“南”字,并改“上”、“止”字为“北”,今从《说郛》本订正。〕
 
  至昔思丹城,
 
  〔汪、何二本“昔”上有“不”字,即上句“下”字之倒误,今从《说郛》本删。《秘史》作“昔思田”。〕
 
  欲攻之,遣使来禀命。上曰:“隆暑将及,宜别遣将攻之。”夏,上避暑于八鲁湾川,
 
  〔《秘史》作“巴鲁安客额儿”,屠敬山口:“在今阿富汗都城喀布尔东北。”〕
 
  候八剌那颜,因讨近敌,悉千之。八剌那颜军至,遂行至可温寨,三太子亦至。上既定西域,置达鲁花赤于各城,监治之。
 
  甲中,旋师住冬,避暑,且止且行。
 
  〔诸本“冬”作“各”,从何校改。〕
 
  乙酉春,上归国,自出师凡七年。
 
  〔案:此《录》自庚辰至甲申征西域事,皆后于事实一年。拉施特书及《元史·太祖纪》并与此同。知此《录》原本已如是矣。近柯氏《新元史》、屠氏《蒙兀儿史记》始行改正,然未备举改定之理由,今略举之。《元史·太祖纪》:十四年己卯,取讹答剌城;十五年庚辰春三月,帝克蒲华城;五月,克寻思于城。此于《亲征录》外别采他书,而据《亲征录》所书之取斡脱罗、卜哈儿、薛迷思干三事则各后一年,一也。《耶律楚材传》:“己卯夏六月,帝亲征回回国,驻跸也儿的石河。”而此《录》系于庚辰,二也。《湛然居士文集·上西征庚牛元历表》云:“庚辰,圣驾驻跸寻思千城。又,再过西域山城。”《驿诗序》云:“庚辰之冬,驰驿西域,过山城驿。”考山城驿在寻思干、蒲华之间,而此《录》二城之克乃在辛巳,三也。《雪楼先生文集·河东郡公伯德那神道碑》云:“公讳伯德那,西域班勒纥人。国初岁在庚辰,大兵西征,班勒纥平。”《元史·察罕传》亦云:“察罕,西域板勒纥人。父伯德那。庚辰岁,国兵下西域,举族来归。”而此《录》破班勒纥城亦在辛巳,四也。《西游记》记:“辛巳七月,帝将追算端汗,至印度。”而此《录》破札阑丁于辛目连河乃在乇辰,五也。又《西游记》太祖班师在壬午之秋,而此《录》乃在癸未,六也。据此六证,知自庚辰至甲中五年事,当各移上—年。〕
 
  是夏,避暑。秋,复总兵征西夏。
 
  〔《秘史》在狗儿年秋。〕
 
  丙戌春,至西夏。一岁间尽克其城,时上年六十五。
 
  〔诸本“五”作“矣”,从何校改。〕
 
  丁亥,灭其国以还。
 
  〔何氏曰:“此下有脱文,”〕
 
  太祖圣武皇帝升遐之后,太宗皇帝即大位以前,太亡皇帝时为太子。
 
  〔《元史·太祖纪》:“戊子,皂子拖雷监国。”〕
 
  戊子,避暑于轮思罕,
 
  〔《说郛》本“轮”作“输”,今姑从汪、何二本。〕
 
  金主遣使宋朝。太宗皇帝与太上皇共议,遣搠力蛮复征西域。
 
  〔汪、何二本无“遣”字,今从《说郛》本增。搠力蛮,《秘史》作“绰儿马罕”。〕
 
  秋,太宗皇帝自虎八会于先太祖皇帝之大宫。
 
  〔虎八,《元史·太宗纪》作“霍博”。大宫,谓太祖之大斡耳朵也。〕
 
  己丑八月二十四日,诸王、驸马、百官大会怯绿连河曲雕阿兰,
 
  〔《说郛》本无“怯绿连河”四字,今从汪、何二本增。曲雕阿兰,即《秘史》阔朵额阿拉,详前阿不札阙忒哥儿注。自沈子敦读“曲”字上属“怯绿连河”,张石洲诸君皆从之。实则当读“曲雕阿兰”,乃与《秘史》、《元史》及此《录》前后诸异译合也。〕
 
  共册太宗皇帝登极。太宗遂议征收金国,
 
  〔何本“收”作“牧”,今从《说郛》本、汪本。〕
 
  助贫乏,置仓戊,创驿站。命河北先附汉民赋调,命兀都撒罕主之,
 
  〔何本无“赋”字,今从《说郛》本、汪本增。又诸本“都”作“相”,从何校改。《元史·耶律楚材传》:“上雅重其言,置之左右,呼曰吾图撒合里而不名。吾图撒合里,盖国语长髯人也。”〕
 
  西域赋调命牙鲁瓦赤主之。
 
  〔《秘史》有姓忽鲁木石名牙剌洼赤的回回,自兀笼杰赤来见太祖。〕
 
  是年,西域亦思八剌纳城城主遣使来降,
 
  〔何本“亦”作“伊”,不重“城”字,今从《说郛》本、汪本改正。亦思八剌纳,即《秘史》之亦薛不儿,前作泥沙兀儿、匿察兀儿。〕
 
  又西域之西忻都及木剌夷国主躬来朝会。
 
  〔诸本“忻都”作“折相”,“木剌夷”作“不剌夷”,今从何校改。《元史·太宗纪》:“元年,印度国主、木罗夷国主来朝。”〕
 
  庚寅春,遣军将攻守京兆。
 
  〔何本无“军”、“守”二字,今从《说郛》本、汪本增。〕
 
  金主以步骑五万来援,败还,其城寻拔。秋七月,上与太上皇亲征金国,发自阙郡隘过川,
 
  〔何本“隘”作“隰”,今从《说郛》本、汪本。前太祖责汪罕书中有“阙群隘”。〕
 
  由官山
 
  〔汪、何二本“官”作“宫”,今从《说郛》本。〕
 
  铁门关、平阳南下,渡河攻凤翔。
 
  〔此铁门关,与西域之铁门关,同名异地。《元史·札八儿火者传》:“授黄河以北、铁门以南天下都达鲁花赤。”〕
 
  辛卯春,遂克凤翔,又克洛阳、河中数处城邑而还,避暑于官山,会诸王百官,分三道征收金国,期于来年正月毕集南京。是年秋八月二十四日,
 
  〔何本无“二”字,今从《说郛》本、汪本增。〕
 
  上至西京,
 
  〔汪、何二本无“上”字,今从《说郛》本增。〕
 
  执事之人各执名位,兀都撒罕中书令,黏合重山右丞相,镇海左丞相。
 
  〔张石洲曰:“《元史·太宗纪》:‘粘合重山为左丞相,镇海为右丞相。’何氏曰:‘《镇海传》亦作右丞相。’《中州名贤文表》(二十二)许有壬《丞相怯烈公神道碑》:‘始立中书省尚左,公为左丞相。继尚右,改右相。’又云:‘国史曰《脱必赤颜》,至秘也,非有功不纪,公名在焉。’今《秘史》无镇海名,而此《录》有之,知许所云《脱必赤颜》谓是《录》也。”〕
 
  自此始遣撒里塔、火儿赤
 
  〔汪、何二本“始”作“使”,“里”作“哈”,今从《说郛》本。撒里塔,《秘史》作“札剌亦儿歹”,《元史·太宗纪》作“撒礼塔”。〕
 
  征收高丽,克四十余城还。冬十月初三日,
 
  〔何本“十”作“中”,今从《说郛》本、汪本。〕
 
  上攻河中府。十二月初八日,克之。时有西夏人速哥者来告,黄河有白坡可渡,从其言。
 
  壬辰春正月初六日,大兵毕渡及获汉船七百余艘。太上皇遣将贵由乃来报集等军兵已渡汉江,
 
  〔何本无“乃来”、“等”三字,今从《说郛》本、汪本增。贵由乃,人名,亦作“夔曲涅”,《元史·睿宗传》:“乘骑浮渡汉水,遣夔曲涅率千骑驰白太宗。”亦作“魁欲那”,《郭德海传》:“德海导大将魁欲那拔都,假道汉中,历荆、襄而东。”《秘史·续集》(一)作“古亦古捏克把阿秃儿”,贵由乃、魁欲那、夔曲涅皆其略也。《金史·白撒传》有大元将回古乃,亦即此人。〕
 
  上亦遣使于太上皇,谕曰:“汝等与敌连战日久,
 
  〔‘何本无“谕”、“连”二字,今从《说郛》本、汪本增。〕
 
  可来合战。”上于正月十三日至郑州,守城马提控者以城降。
 
  〔何氏曰:“《本纪》作马伯坚。”〕
 
  太上皇既渡汉水,有金大将哈答麾下钦察者逃来,告哈答伏兵于邓西隘截等候。太上皇是夜会兵,明烛而进。哈答、移剌闻知,
 
  〔哈答、移剌,即完颜合达、移剌蒲阿二人,《金史》俱有传,此一举名,一举姓,盖当时蒙古人称之如此。〕
 
  入邓以避其锋。太上皇正月十五日至钧州,雪作。上遣大王口温不花、
 
  〔《元史·宗室世系表》:“别里古台大王子口温不花大王。”〕
 
  国王答思、
 
  〔《木华黎传》作“塔思”。〕
 
  将兵毕至。
 
  〔何本“兵毕”作“军兵”,今从《说郛》本、汪本。〕
 
  十六日,雪又大作。
 
  〔何本无“大”字,从《说郛》本、汪本增。是日,与哈答、移剌合战于三峰山,大败之,遂擒移剌。十七日,上行至,视战所,佳之。〕
 
  汪、何二本无“至”字,今从《说郛》本增。
 
  二十一日,克钧州。哈答匿于地穴,亦擒之。又克昌州、廓州、
 
  〔《说郛》本作“淳攵州”,汪本“淳阝州”。〕
 
  嵩州、曹州、陕州、洛阳、浚州、武州、易州、邓州、应州、寿州、遂州、禁州等,来降。
 
  〔何氏曰:《本纪》:“遂下商、虢、嵩、汝、陕、洛、许、郑、陈、颍、寿、睢、永等州。”考金时河南无昌、淳阝、易、应、遂、禁等州,疑“昌廓”即“商虢”之音讹,“应”即“颍”之音讹,“遂、禁”即“睢、永”之音讹,余未详。〕
 
  三月,上至南京,
 
  〔何本“三”作“上”,今从《说郛》本、汪本。〕
 
  令忽都忽攻之。上与太上皇北渡河,避暑于官山,速不歹拔都、
 
  〔前作“速不台”〕
 
  忒木歹火儿赤、
 
  〔汪、何二本“忒”作“惑”,今从《说郛》本。《秘史》蒙文《续集》(二)载太宗初领散班者,有帖木迭儿,即此忒木歹火儿赤也。〕
 
  贵由拔都、
 
  〔此即前“贵由乃”。〕
 
  塔察儿等
 
  〔何本无“察儿”二字,今从《说郛》本、汪本增。〕
 
  适与金战,
 
  〔汪、何二本“与金战”三字作一“遇”字,今从《说郛》本。〕
 
  金遣兄之子曹王入质。
 
  〔汪、何:二本“兄之”二字作“荆王守仁”四字,今从《说郛》本。〕
 
  我军遂退,留速不台拔都以兵三万镇守河南。秋七月,上遣唐庆使金促降,
 
  〔何本“促”作“保”,今从《说郛》本、汪本。〕
 
  因被杀。八月,金之参政完颜思烈、
 
  〔汪、何二本“思”作“忠”,今从《说郛》本。《金》、《元》二史并作“思烈”。〕
 
  恒山公武仙将兵二十万会救南京,
 
  〔汪、何二本“救”作“于”,今从《说郛》本。〕
 
  至郑州西合战。是年,高丽王复叛,再命撒儿答火儿赤征收。
 
  〔《说郛》本“儿”作“礼”,今从汪、何二本。〕
 
  九月,南京城中仓廪俱竭,金主帅兵六万北渡河,欲复东平、新卫二城。我师逐北,溃散尚干余人,复渡河南。
 
  〔何本“南”作“北”,今从《说郛》本、汪本。〕
 
  癸巳春正月二十三日,金主出南京,入归德。金人遂杀留守南京参政二人,
 
  〔何本“留守”二字在“南京”下,今从《说郛》本、汪本。〕
 
  开门诣速不台拔都降。四月,速不台拔都至青城,崔立又将金主母后、太子二人暨诸族人来献,遂入南京。六月,金主出归德府,入蔡州。塔察儿火儿赤统大军围守。是月十日,遣人入蔡催降弗应,
 
  〔汪、何二本“蔡”作“城”,“弗”作“勿”,今从《说郛》本。〕
 
  四面筑城攻之。八月,别遣按脱等
 
  〔《元史·太宗纪》作“阿同葛”。〕
 
  抄籍汉民七十三万有奇。十一月,南宋遣太尉孟珙等领兵五万运粮三十万石至蔡来助。分兵南面攻之,金人举沂、莱、海、濰等州来降。
 
  〔何本无“濰”字,今从《说郛》本增。汪本作“维”〕
 
  甲午春正月十日,
 
  〔诸本无“正”字,何氏据《元史·太宗纪》增。〕
 
  塔察儿火儿赤急攻,蔡城危逼,金主传位于族人承麟,遂缢焚而死。我军入蔡,获承麟杀之。金主遗体,南人争取而逃。平金之事如此。是年五月,于答兰答八思
 
  〔《元史·太宗纪》作“达兰达葩”,《双溪醉隐集》(五)《达兰河诗》注云:“河名也,在和林北百余里。”疑此是也。〕
 
  始建行宫,大会诸王、百官宣布宪章。是年,群臣奏言:
 
  〔汪、何二本作“曰”,今从《说郛》本。〕
 
  南宋虽称和好,反杀我使,
 
  〔《元史·太宗纪》:“三年,遣搠不平使宋假道,宋杀之。”〕
 
  侵犯我边,
 
  〔谓全子才袭汴、洛事。〕
 
  奉扬天命,往征其辜。”又遣忽都忽主治汉民,别遣塔海绀孛征蜀。
 
  〔《元史·太宗纪》作“达海甘卜”。〕
 
  乙未,建和林城宫殿。
 
  〔和林,今额尔德尼昭。详《长春真人西游记》注。〕
 
  遣曲出、忽都都伐宋,忽都忽籍到汉民一百一十一万有奇,
 
  〔《说郛》本脱“忽都都伐宋”五字,汪、何二本脱“伐宋忽都忽”五字,今订正。案:《元史·本纪》“皇于曲出及胡土虎伐宋”,胡土虎即忽都忽。而《察罕传》云:“皇子阔出、忽都秃伐宋。”《铁迈赤传》云:“又从皇子阔出、忽都、行省铁木答儿定河南。《阿剌罕传》:“岁乙未,从皇子阔出、忽都秃南征。”《脱欢传》:“父脱端:‘从皇广阔出、忽都秃略汴、宋、睢、宿等州。”忽都、忽都秃,即此忽都都。《元史·宗室世系表》所谓忽都睹大王(睿宗次子)者也。《太宗纪》作“胡土虎”乃误,以“忽都忽”当之,是。乙未年有曲出、忽都都南伐之役,此一事也。又,上年:“遣忽都忽主治汉民”,宋子贞《耶律公神道碑》:“甲午诏括户口,以大臣忽睹虎领之。丙申秋,忽睹虎以户口来。”此云“忽都忽籍到汉民”,此又一事也。《录》盖两记之,幸《说郛》本与汪、何二本所脱不同,得以推知其脱误耳。一十一万,汪本作“一十万”,何本作“二十万”,今从《说郛》本。〕
 
  遂分赐诸王城邑各有差。
 
  〔详《元史·本纪》。与“籍到汉民”事,并在次年。〕
 
  丙辰,大庆和林城宫。
 
  〔何本“大”作“入”,今从《说郛》本、汪本。〕
 
  冬十二月,赤曲、阙端等克西川。
 
  〔某氏云:“赤曲即曲出。”《元史·宗室世系表》:太宗皇帝七子,次二阔端太子,次三阔出太子。《元史·太宗纪》:八年丙申冬十月,阔端入成都,皇子曲出薨。此“赤曲”当作“曲出”,下又疑夺“薨”字。〕
 
  丁酉夏四月,筑扫邻城,
 
  〔《元史·地理志》:丁酉夏四月,筑扫邻城。治迦坚茶寒殿,在和林北七十余里。〕
 
  访汉儒选擢除本贯职位。
 
  〔《元史·太宗纪》:“命术虎乃、刘中试诸路儒士,中选者除本贯议事官,得四千三十人。”〕
 
  戊戌,筑秃思儿忽城。
 
  〔汪本无“忽”字,今从《说郛》本。《元史·本纪》作“图稣湖城”。《耶律希亮传》:“铸生希亮于和林南之凉楼,曰秃忽思。”即“秃思忽”之误倒。〕
 
  己亥。
 
  庚子春正月,命暗都剌合蛮主汉民财赋。
 
  〔《元史·本纪》:“以奥都剌合蛮充提领诸路课税所官。”〕
 
  辛丑春,高丽王遣子侄入贡。
 
  〔《元史·本纪》:“辛丑秋,高丽国王王以族子綧入质。”〕
 
  冬十月,命牙老瓦赤主管汉民。十一月初七日,至地名月忒哥忽阑,
 
  〔汪、何二本“忒”作“惑”,“阑”作“闻”,今从《说郛》本。前作“只感忽卢曲雕阿兰”,详前注。〕
 
  病,次日崩。寿至五十六。
 
  〔《说郛》本“六”作“止”,今从汪、何二本。《黑鞑事略》云“今鞑主兀窟丙午生”,则辛丑年五十六。《元史·太宗纪》同。〕
 
  在位一十三年。
 
  〔诸本“三”作“二”,从何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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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成吉思皇帝兄弟凡四人,成吉思居长;大皇弟久已阵亡;二皇弟名便古得那,现在国中;三皇弟名忒没葛真,所统多系自己人马,善战有功。成吉思有子甚多,长子比因破金国,攻打西京云中时阵亡;今第二子却为大太子,名约直;三太子名阿戴;四太子名天娄;五太子名龙孙,皆正后所生。其下又有十数人,乃庶生也。女七人,长公主曰阿其鳖拽,今嫁豹突驸马;二公主曰阿里黑百因,俗曰必姬夫人,曾嫁金国亡臣白四部,死,寡居,令领白鞑靼国事,日逐看经,有妇士数千人事之,凡征伐斩杀,皆自己出;三公主曰阿五,嫁尚书令国舅之子。余未知名。孙男甚众。
 
  元勋乃彼太师、国王没黑助者,小名也。中国人呼曰摩睺罗,彼诏诰则曰“谋合理”,南北之音,轻重所讹也。现封天下兵马大元帅,行省太师、国王。乃黑鞑靼人,十年以来东征西讨,威震夷夏,征伐大事,皆决于己,故曰“权皇帝”。衣服制度,全用天子礼。有兄曰计里歌那,自有千骑,不任事。弟二人,长曰抹歌,现在成吉思处为护卫,次曰带孙归王,每随侍焉。国王每戒所部将士如己兄弟,只以小名称之,不许呼他“国王”。止有一子名袍阿,美容仪,不肯剃婆焦,只裹巾帽,着窄服,能诸国语。其次曰兔花儿太傅国公,声名亚于摩睺罗。又有鹧博者,官亦穹,现随成吉思掌重兵。又其次曰按赤那邪,现封尚书令,乃成吉思正后之弟,部下亦有骑军十余万,所统之人颇循法。鞑人自言随国王者皆恶,随尚书令者皆善也。其次曰刘伯林者,乃燕地云内州人,先为金人统兵头目,奔降鞑主。有子甚勇,而鞑主忒没真长子战死,遂将长子之妃嫁伯林之子,同鞑人破燕京等处,甚有功。伯林昨已封王,近退闲于家,其了现为西京留守。又其次曰大葛相公,乃纪家人,现留守燕京。次曰札八者,乃回鹘人,已老,亦在燕京同任事。燕京等处有纸蝉儿元帅、史元帅、刘元帅等甚众,各有军马,皆听摩睺国王命令。
 
  首相脱合太师者,乃兔花太傅之兄,原女真人,极狡狯,兄弟皆归鞑主为将相。其次鞑人宰相乃卒埒夺合,又有女真七金宰相,余者未知名,率皆女真亡臣。向所传有白俭、李藻者为相,今止见一处有所题曰“白俭提兵至此”,今亦未知存亡。燕京现有移刺晋卿者,契丹人,登第,现为内翰掌文书。又有杨彪者,为吏部尚书。杨藻者,为彼北京留守。珙所见国王之前,有左右司二郎中,使人到,则二人通译其言语,乃金人旧太守,女真人也。
 
  鞑人生长鞍马间,人自习战,自春徂冬,旦旦逐猎,乃其生涯。故无步卒,悉是骑军,起兵数十万。略无文书,自元帅至千户、百户、牌子头传令而行。凡攻大城,先击小郡,掠其人民以供驱使,乃下令曰:“每一骑兵,必欲掠十人。”人足备,则每名需草或柴薪或土石若干。昼夜迫逐,缓者杀之。迫逐填塞濠堑立平,或供鹅洞炮座等用,不惜数万人。以此攻城,壁无不破者。城破,不问老幼、妍丑、贫富、逆顺,皆诛之,略不少恕。凡诸临敌不用命者,虽贵必诛。凡破城守有所得,则以分数均之。自上及下,虽多寡每留分,为成吉思皇帝献,余物则敷俵有差。宰相等在于沙漠不临戎者,亦有其数焉。凡征伐谋议,先定于三、四月间;行于诸国,又于重五宴会,共议今秋所向。各归其国,避暑牧养至八月,咸集于燕都,而后启行。
 
  鞑国地丰水草,宜羊马。其马初生一二年,即于草地苦骑而教之,却养三年,而后再乘骑。故教其初是以不蹄啮也。千马为群,寂无嘶鸣,下马不用控系,亦不走逸,性甚良善。日间未尝刍秣,惟至夜方始牧放之,随其草之青枯野牧之,至晓搭鞍乘骑,并未始与豆粟之类。凡出师人有数马,日轮一骑乘之,故马不困弊。
 
  鞑人地饶水草,宜羊马,其为生涯,止是饮马乳以塞饥渴。凡一牝马之乳,可饱三人。出入止饮马乳,或宰羊为粮。故彼国中有一马者,必有六七羊,谓如有百马者,必有六七百羊群也。如出征于中国,食羊尽,则射兔鹿野豕为食,故屯数十万之师,不举烟火。近年以来掠中国之人为奴婢,必米食而后饱,故乃掠米麦,而于紥寨处亦煮粥而食。彼国亦有一、二处出黑黍米,彼亦解为煮粥。
 
  鞑人在本国时,金虏大定间,燕京及契丹地有谣言云:“鞑靼去,赶得官家没去处”。葛酋雍宛转闻之,惊曰:“必是鞑人为我国患。”乃下令极于穷荒,出兵剿之,每三岁遣兵向北剿杀,谓之“减丁”,迄今中原人尽能记之曰:“二十年前,山东河北谁家不买鞑人为小奴婢,皆诸军掠来者。”今鞑人大臣,当时多有虏掠住于金国者,且其国每岁朝贡,则于塞外受其礼币而遣之,亦不令入境。鞑人逃遁沙漠,怨入骨髓。至伪章宗立,明昌年间不令杀戮,以是鞑人稍稍还本国,添丁长育。章宗又以为患,乃筑新长城在静州之北,以唐古糺人戍之。酋首因唐古糺叛,结即刺都糺、木典糺、咩糺、后典糺等俱叛,金人发兵平之,糺人散走,投于鞑人。且回鹘有田姓者,饶于财,商贩巨万,往来于山东河北,俱言民物繁庶,与糺同说茸达人治兵入寇。忒没真忿其欺凌,以此犯边,边州悉败死。燕虏谓鞑人曰:“我国如海,汝国如一掬沙,岂能动摇?”鞑人至今老幼皆能记此语。虏君臣因其陷西京,始大惊恐,乃竭国中精锐,以忽杀虎元帅统马步五十万迎击之,虏大败。又再刷山东河北等处及随驾护卫等人马三十万,令高琪为大元帅,再败。是以鞑人迫于燕京城下。是战也,罄金虏百年兵力,销折溃散殆尽,其国遂衰。后来凡围河北、山东、燕北诸州等处,虏皆不敢婴其锋。
 
  鞑人袭金虏之俗,亦置领录尚书令、左右相、左右平章等官,亦置太师、元帅等。所佩金牌,第一等贵臣,带两虎相向,曰“虎斗金牌”,用汉字曰“天赐成吉思皇帝圣旨,当便宜行事”。其次素金牌,曰“天赐成吉思皇帝圣旨疾”。又其次乃银牌,文与前同。如成吉思亦行诏敕等书,皆金虏叛臣教之遣发临民者。四曰宣差。逐州守臣皆曰节使。今在于左右,带弓矢执侍,骁勇者曰“护卫”。
 
  鞑人贱老而喜壮,其俗无私斗争。正月一日必拜天,重午亦然,此乃久住燕地,袭金人遗制,饮宴为乐也。摩睺国王每征伐来归,诸夫人连日各为主礼,具酒馔饮宴,在下者亦然。其俗多不洗手,而拿攫鱼肉,手有脂腻,则拭于衣袍上,其衣至损,不解浣濯。妇女往往以黄粉涂额,亦汉旧装传袭,迄今不改也。上至成吉思,下及国人,皆剃婆焦,如中国小儿留三搭头在囟门者,稍长则剪之,在两下者,总小角垂于肩上。
 
  成吉思之仪卫,建大纯白旗以为识认,外此并无他旌幢,惟伞亦用红黄为之。所坐乃金裹龙头胡床,国王者间有用银处,以此为别。其鞍马带上亦以黄金盘龙为饰,国王亦然。今国王止建一白旗,九尾,中有黑月,出师则张云。其下必元师方有一旗,国王止有一鼓,临阵则用之。鞍轿以木为之,极轻巧。弓必一石以上,箭用沙柳为笴。手刀甚轻薄而弯。
 
  彼奉使曰宣差,自皇帝或国王处来者,所过州县及管兵头目处,悉来尊敬。不问官之高卑,皆分庭抗礼,穿戟门,坐于州郡设厅之上,太守亲跪以效勤。宿于黄堂厅事之内,鼓吹旗帜妓乐,郊外送迎之。凡见马则换易,并一行人从悉可换马,谓之“乘铺马”,亦古乘传之意。近使臣到彼国王处,凡相见礼文甚简,言辞甚直,且曰:“你大宋好皇帝,好宰相”。大抵其性淳朴,有太古风。可恨金虏叛亡之臣教之,今乃凿混沌,破彼天真,教以奸计,为可恶也。
 
  凡占卜吉凶,进退杀伐,每用羊骨扇,以铁椎火椎之,看其兆坼以决大事,类龟卜也。凡饮酒,先酬之。其俗最敬天地,每事必称天,闻雷声则恐惧,不敢行师,曰“天叫”也。
 
  其俗出师不以贵贱,多带妻孥而行,自云用以管行李、衣服、钱物之类。其妇女专管张立毡帐,收御鞍马辎重、车驮等物事,极能走马。所衣如中国道服之类。凡诸酋之妻,则有顾姑冠,用铁丝结成,形如竹夫人,长三尺许,用红青锦绣或珠金饰之,其上又有杖一枝,用红青绒饰。又有文袖衣,如中国鹤氅,宽长曳地,行则两女奴拽之。男女杂坐,更相酬劝不禁。北使入于彼国,王者相见了,即命之以酒,同彼妻赖蛮公主,及诸侍姬称夫人者八人,皆共坐。凡诸饮宴,无不同席。所谓诸姬,皆灿白美色,四人乃金虏贵嫔之类,余四人乃鞑人。内四夫人者,甚姝丽,最有宠,皆胡服胡帽而已。
 
  国王出师,亦以女乐随行,率十七八美女,极慧黠,多以十四弦等弹大官乐等,四拍手为节,甚低,其舞甚异。鞑人之俗,主人执盘盏以劝客,客饮,若少留涓滴,则主人者更不接盏。见人饮尽,乃喜。如彼击鞠,止是二十来骑,不多用马者尔,恶其哄闹也。击罢,遣人来请我使人。至,彼乃曰:“今日打球,如何不来?”答曰:“不闻钧旨相请,故不敢来。”国王乃曰:“你来我国中,便是一家人,凡有宴聚打球,或打围出猎,你便来同戏,如何又要人来请唤?”因大笑而罚六杯。终日必大醉而罢。且每饮酒,其俗邻坐更相尝换,若以一手执杯,是令我尝一口,彼方敢饮。若以两手执杯,乃彼与我换杯,我当尽饮彼酒,却酌酒以酬之。以此易醉。凡见外客醉中喧哄失礼,或吐或卧,则大喜曰:“客醉,则与我一心无异也。”我使人相辞之日,国王戒伴使曰:“凡好城子多住几日,有好酒与吃,好茶饭与吃,好笛儿、鼓儿吹着打着。”所说“好城子”,乃好州县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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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젊은층의 소비문화가 문제시 된 것은 오래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급속도로 시장경제를 향하여 도약하고 있는 중국는 어떨까요? 중국 북경시 조양구 통계청이 100만명의 대학생 가정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를 근거로 하여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매달 8만원 이하의 돈을 쓰는 경우가 15%이며, 8만원에서 15만원사이가 60%로 대다수를 차지했습니다. 또한 15만원에서 25만원이 20%을 차지하였고, 매달 25만원이상이 5.5%에 달하였습니다. 중국의 물가가 한국에 비하여 약 1/4임을 생각한다면 현재 중국학생들이 받는 돈은 한국 대학생들이 받는 돈에 비하여 그리 부족해 보이지 않습니다. 평균적으로 보아도 약 60만원을 소비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제 중국이 낙후되었고, 못 산다는 편견을 버려야 될 때가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한달에 매우 적은 돈으로 생활하는 학생도 15%에 달하여서, 중국의 빈부격차가 날로 심해지고 있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줍니다.

대학생들은 매달 식비로 약 7만원을 쓰며, 이는 매달 생활비의 60%가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용돈은 주로 참고서나 옷을 사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저금 습관에 대해서는 단지 20%의 학생만이 저금을 하고 있으며, 30%에 달하는 학생들은 한번도 저금을 해 본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25%의 학생들은 여유돈이 없어서 저금을 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현재 중국이 급속도로 시장경제체계로 나아가면서 많은 사회적인 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젊은이들의 소비지향문화에 대한 비판이 많습니다. 그러나 현재 중국의 대다수들은 "절약"을 미덕으로 삼고 있습니다. 약 60%의 학생들이 절대적인 가치로 생각하고 있고, 20%의 학생들이 절약을 중시해야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절약의 대표적인 행동인 저금이 거의 없는 것과 절약을 강조하는 것은 모순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혹은 일반적인 한국인이 생각하는 절약과는 조금 다른 절약이 아닐런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니까! 얼마나 비싸더라고 꼭 사고 말겠어!"라는 생각은 중국학생의 60%가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나머지 40%는 이러한 소비형태를 찬성하지만 말입니다.

그 외에도 "옷이 날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 80%을 넘어서, 현재 중국 대학생들의 패션에 대한 관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즘 대학가를 주변으로 점차 옷을 잘 입기 시작하는 중국인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예전처럼 옷으로 한중일 삼국을 알아맞추기는 힘들어질 듯 합니다.


공부도 못하면서 장학금을 받아서 고뇌상태에 빠져 버렸습니다. 물론 나름 행복한 고민이지만, 쉽사리 결정하기는 힘들군요. 차라리 장학금이 없으면, 집에 철판을 깔고! "공부하는 거잖아!" 라고 말할 터인데 말입니다.


1) 일본 유학
일본어..해야된다. 언어에 가장 좋은 것은? 현지에 가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유학생활을 하는 내 입장에서 봐도 절대적 진리이다. 러시아어와 몽고어도 해야되지만, 겨울에 거기를 가는 것은 얼어죽자는 것이고....역시 일본이다!

라고 해도 지금 돈으로 가긴 힘들고, 한달과정은 별로고, 3달 과정은 학기랑 겹친다.


2) 컴퓨터
지금 쓰는 노트북은 이미 4년이나 된 노년의 노트북이다. 새로 사야된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 할 것인가? 본인 수업 필기를 컴퓨터로 하는 디지탈기기 팬에 가깝다. 그래서 타블렛이 요즘 너무나! 너무나! 땡긴다.

지금 쓰는 노년의 노트북도....한 반년은 더 버틸 수 있지 않을까?.....


3) 동남아 순회공연?!
본인 친구가 있다. 중국애다. 운남녀석이다. 본과 같이 나오고 지금 같은 선생님 밑에서 공부중이다. 이번 겨울에 동남아 한바퀴 돌고 싶다고 한다. 참고로 운남에서 동남아로 넘어가서 일하는 중국인들은 많아서, 이녀석 따라 가면 싼 값에 동남아 순회공연?!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노는 거다. 또한 남방소수민족에는 그리 관심이 없다.



어떤 것을 선택해야될까?

여러분이라면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ㅠㅠ


중얼중얼 : 사실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는다면, 집에서 돈을 받아서 일본으로 3달간 어학연수를 가고, 장학금 받은 돈으로 노트북을 장만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집에 그럴 돈이 있으려나...있어도 장학금으로 일본 가라고 할 터인데...후...



   
  본 글을 테니님의 기획 질문인 대선이 가까워져 갑니다. 만약에 귀하께서 대통령으로 선출이 되신다면 가장 먼저 하시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혹은 이루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대한 대답입니다.

 

중국에서는 황제의 이름을 황제의 사후 붙이고는 합니다. 그리고 보통 나라를 만든 왕을 고조(高祖)라고 합니다. 한고조인 유방이 대표적이겠죠. 무력으로 나라을 넓힌 왕을 보통 무제(武帝)라고 하고, 대표적으로는 한무제가 있겠군요. 그리고 문화를 발달시킨 왕을 보통 문제(文帝)라고 합니다. 제가 추구하는 지도자는 문제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등 많은 분야에서 다양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너무나 말이 많고 그것을 짦은 글로 표현하기란 사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의 생활과 보다 가까운 교육과 학문쪽으로만 언급하고 싶습니다.

 

교육과 학문은 현실적으로 당장은 쓸모가 없어 보이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을 키우는 것은 100년이 걸린다는 말처럼 교육의 중요성은 말로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무서울 정도의 경제 성장을 보인 것도 대한민국 사람들의 무서울 정도의 교육열에 의한 다양한 인재양성에 주요 원인을 두기도 합니다.

 

중국의 동북방에 거주하는 조선족들도 중국인들이 보기에도 무서울 정도의 교육열을 보여가며, 중국에서 시행되는 수능시험에서 고득점을 올리며, 동북지방 인재론을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무서운 교육열은 극악의 고액 과외라는 부작용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교육열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요구이며, 그로 인하여 젊은 세대는 자신들의 흥미보다는 부모가 시키는 일명 좋은직장으로 가기 위한 코스만을 위해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교육 :

1)       다양한 특수 중고등학교와 대학교 설립 지원.

교육 기회의 평등과 특수 학교는 언제나 반대항 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본인 주위에서 극단적인 좌파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기회의 평등을 우선시한다. 하지만 특수학교는 그런 기회의 평등을 해치는 문제가 아니다. 세상에는 정말 하늘이 부여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천부적인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 아니 우리 모두가 남들보다 잘하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누구는 노래를 부르고, 누군가는 수학을 잘한다.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어느 누군가는 언어를 쉽게 배운다. 각기 다른 존재를 같은 교육환경에 밀어 넣는 다는 것은 단지 낭비일 뿐이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부르는 사람들끼리 모아 놓고, 노래를 부르게 만들어야 하고, 언어에 재능이 있는 사람은 다양한 언어를 배울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카이스트와 같은 곳은 공과계열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 놓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파생하는 다른 문제도 있지만, 그러한 문제보다 긍정적인 면이 많다고 생각된다.

 

이런 특수학교가 많아지면, 많은 사람들이 교육의 평등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국가가 공교육 개념을 보다 넓게 적용하고, 해당 예산을 늘리는 것으로 해결되는 문제라고 생각된다. 음악학교와 공과학교의 학비가 같다면, 혹은 국가에서 전액을 지원해 준다면 자신의 소질과 흥미에 따라서 자유롭게 전공을 고르려는 풍토가 조성되지 않을까?

 

정리하면 중고등학교의 대학화이다. 물론 대학과는 다르게 중고등학교에서는 자신의 전공외 과목도 일정정도를 이수하게 만들어야된다. 그리고 변호사나 경제쪽으로의 몰림을 걱정하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그런 사태는 지금 대학교 입시에서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것은 교육평등의 문제가 아닌 개인 능력과 학생들의 취미와 소질보다 부모의 강압이 우위를 차지하는 사회분위기 때문이라고 하고 싶다.

 

2)       사학법을 더욱 강력히 개정

교육은 어디까지나 공적 개념이다. 그리고 어떤 학교도 공적인 집단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일그러진 예전 사학법으로 인하여 학교가 학생과 사회 구성원의 것이 아닌 해당 이사장의 사유재산이 되었다.

 

지금 사학법이 개정되었지만, 한나라당 의원의 강력한 반대로 넝마와 같은 상태로 전락하였다. 한나라당은 지금의 이런 넝마와 같은 사학법 역시 완화시켜야한다고 하지만 본인 생각으로는 더욱 강력하게 만들어야 된다.

 

학교 운영자금의 5% 책임지지 않고, 남은 돈은 국가의 지원과 학생의 학비로 충당을 하는 교육단체가 감사를 받을 외부 인사 없이 내부 인사들만으로 진행한 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인가?

 

기업이라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곳에서조차 투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조치가 이루어진다. 감사를 진행할 때도 당연히 외부인사를 일정 이상 배정하여야 한다. 그런데 공적 개념의 교육단체에서 기업보다 못한 행정절차나 해당 법규가 없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3)       해외 유학의 다양성과 비중 확대

해외 유학은 분명히 더욱 늘어나야 한다. 그리고 특히 미국으로 편중된 상황을 다양한 국가로 늘려나가야 한다.

 

대한민국은 특별한 땅도 없으며, 특별한 자원도 없다. 오직 인간만이 유일한 자원이다. 하나의 외국어는 단지 하나의 도구이지만, 도구의 파워는 의외로 막강하다. 그리고 해외유학은 단지 외국어의 습득보다 더욱 중요한 눈에 보이지 않는 소득이 있다. 바로 자신의 세계를 넓힐 있는 것이다.

 

문제는 현재 미국으로 집중된 유학코스이다. 물론 이제는 일본이나 중국으로의 유입이 많이 늘고 있지만, 아프리카나 중동 혹은 러시아와 같은 곳에는 매우 소수만이 진출을 하고 있다. 물론 시정적 수요가 부족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겠지만, 국가는 이러한 시장적 수요와는 다른 것을 생각해봐야하지 않을까?

 

국가는 지금 현재 시험을 통해서 해외로 내보내는 사람들을 대폭 늘려야 것이다. 연령도 중학교까지 낮추어야 하며, 해당 국가도 미국이나 중국과 같은 국가 외에 다양한 3세계 국가로 파견해야 것이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해외 인재 유출이라는 문제가 있다. 해외로 나간 인재들이 대한민국으로 돌아오기 싫어하며, 해당 나라(보통은 미국) 정착을 하는 것이다. 그럴까? 한국에 들어와서 비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전과 같은 애국심을 자극하여 돌아오게 하는 방법은 이미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학문쪽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4)       한국 전통 문화 교육의 확대

위에서 해외 유학이 중요하다고 놓고서 이건 무슨 정반대되는 말인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두개는 전혀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외국어의 가장 고급수준에 도달하려면, 자신의 모국어를 알아야 된다. 한국어 실력이 형편없는 사람이 외국어를 하는 경우를 본인은 본적이 없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적인 것을 알게 되면 세계적인 것도 쉽게 있게 된다. 본인이 한국이라는 울타리에만 빠져있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 이유로 해외 유학이 거의 필수라고 하는 것이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알아야, 다른 문화의 특징을 있는 것이다. 현실적인 예로 꾕가리나 장구와 같은 악기를 다루면, 해당 국가의 전통악기를 다루는 사람과 쉽게 친해질 있다.  오히려 더욱 쉽게 세계의 많은 사람들과 친해질 있는 장치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5)       현실적인 컴퓨터 교육

한국처럼 인터넷이 활발하고 모두가 자유롭게 인터넷을 이용하는 나라에서 무슨 인터넷 교육이냐는 소리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본인 주변에서 스스로 컴퓨터를 조립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하다 못해서 원도우를 설치하지 못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은 수에 속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드라이버가 무엇인지 모른다. 단지 게임에 빠져 있을 뿐이다.

 

앞으로 최소 100년은 인터넷이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코드일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인터넷과 컴퓨터 교육은 수준 이하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현실적인 면이 전혀 없다. 컴퓨터를 어떻게 조립하는지, 컴퓨터를 어떻게 설치하는지, 인터넷에서 원하는 자료를 어떻게 찾는지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알고 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이런 기술을 알려줄 사람도 없으며, 단지 년은 지난 프로그램으로 현실에서 쓸모가 없는 내용을 알려준다.

 

정말 컴퓨터와 인터넷에 대한 현실적인 교육이 절실하다. 이를 위해서는 해당 교사를 더욱 많이 뽑아야 것이며, 교육 과정 역시 더욱 자세하고 실용적으로 바꾸어야 것이다. 지금처럼 300타가 넘는 사람들에게 한메타자를 하라고 하는 것보다, 자신의 사진을 어떻게 포토샵으로 예쁘게 편집할 있는지 알려주는 것이 100배는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이상이 교육에 대한 생각이다. 물론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있겠지만, 본인이 생각하기에 중요한 문제와 해결책은 위와 같다고 있겠다.

 

 

학문 :

위에서 살짝 언급을 했지만, 해외 인재들이 한국으로 돌아오기 싫어할까? 예전이라면 대한민국을 내가 구해낸다라는 애국심에 의한 강압 있지만, 아직도 그러한 애국심에 의지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훨씬 많은 월급을 받으며 편안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를 있는데, 먹고 살기조차 불투명해 보이는 한국에 가야 하는 것일까?

 

1)       대규모 연구기지의 설립

물론 한국에는 이미 몇몇의 대규모 연구기지가 있다. 대덕연구기지와 같은 곳이다. 하지만 더욱 많은 연구 기지가 필요하다. 이공계열의 연구기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인문학의 대규모 연구기지는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인이 인문학을 하고 있지만, 인문학은 당장에 것이 없다. 칭기즈칸이 텅그리라는 샤머니즘의 사상 속에서 다양한 종교(기독교, 불교, 이슬람, 마니교) 받아들였다는 것이 지금 당장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러한 내용들이 모여서 현실에서 강력한 힘들 발휘한다는 것은 여러분도 것이다.

 

하지만 인문학의 대규모 연구기지는 없다. 이것은 매우 손실이다. 한국의 인구비례 박사생의 비율을 놀라울 정도이다. 하지만 실제로 박사 학위를 받은 , 돈을 벌어 먹고 곳이 마땅치 않다. 당장 현실에 유용하다는 이공계도 먹고 살기 힘들다는 현실에서 인문학은 말할 필요도 없다.

 

외국에 있으면 편안하게 취직해서 먹고 있는데, 굳이 한국으로 돌아와야 이유는 없다. 한국 정부는 보다 많은 연구 기지를 만들어서 인재들이 돌아와서 연구할 공간을 만들어주어야 함은 당연하다.

 

2)       연구원의 처우 개선

무엇보다 문제는 박사과정을 이수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교수가 되고 싶어하지, 연구원으로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교수가 되면 성공한 것이고, 연구원이 되면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교수라는 자리에 대한 명예적 요소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교수대비 연구원의 월급 수준이다. 연구원의 월급은 매우 낮다. 교수에 비해서 훨씬 적은 수준이다. 사실 교수보다도 전문 연구원들이 해당 분과에서 더욱 많은 논문을 제출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연구원들에 대한 처우는 비참하기까지 하다.

 

차라리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 돈을 있는 길이다. 그런데 6년을 공부를 하고서 대학 졸업자보다 적은 월급을 받는다면 어느 누가 즐거워 하겠는가? 처우 개선 분명히 필요한 현실이다.

 
 

3)       외국계 대학교들의 진출 유도

한국의 전통 학문이 죽는다라고들 한다. 웃기는 소리이다. 오히려 한국을 알릴 있는 기회이다. 외국계 대학교의 보다 앞선 교육 시스템을 배울 있으며, 한국의 현존하는 대학교의 시스템에 압력을 가할 있는 좋은 방법이다.

 

또한 다른 측면에서 외국계 대학교들이 진출을 해서 같이 들어오는 학자들은 한국에 보다 관심을 가질 밖에 없고, 관련 논문을 쓰게 된다. 그러한 한편 한편의 논문들이 모여서 한국을 알리는 것이다. 그것도 2 자료를 통해서 한국을 어설프고 모순되게 아는 것이 아닌 직접 보고 정확하게 알리는 것이다.

 

외국계 대학교 혹은 중고등학교의 진출은 필수적이며, 당연히 진행되어야 되는 사항이다.

 
 

4)       대학교 개혁

사실 이것은 계속 진행되고 있는 사항이다. 그것을 이어 나갈 뿐이다. 현재의 국공립대학교 통폐합과 같은 경우, 몇몇 교수들이 반대를 하고 있지만, 보다 종합적이고 전문적인 대학환경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되는 사항이라는 것은 이미 대체적인 공감을 얻고 있다.

 

외에 교수 임용을 더욱 강력하게 하고, 재임용 역시 학문적인 성과를 기반으로 하려 노력하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서 몇몇 문제가 일어나지만, 예전보다 훨씬 좋아지고 있다고 평가한다. 단지 지금 현재 부족한 것은 사학재단에 대한 개혁부분이다.

 

특히 한국에 많은 종교단체의 사학재단은 자신들의 종교적인 특색을 침해받기 싫다는 이유를 들어가면서 이러한 다양한 개혁제도에 불응을 하고 있다. 하지만 종교적인 특색과 운영의 투명성은 분명히 전혀 다른 개념이고, 사학재단에 대한 투명성 강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5)       학문과 기업간의 연결

학문. 특히 인문학의 경우 기업과 서로 연관이 되기 힘들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한국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스타크레프트의 기획자는 그리스 고대사를 전공한 박사학위소유자이다. 그는 스타크레프트 안에서 그리스 고대사의 요소요소를 재미있게 배치하였고, 모두가 아시다 싶이 스타크레프트는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른바 문화라는 콘텐츠가 중요시되고 있고, 이러한 문화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인문학과 문화라는 콘텐츠를 이용하는 기업간의 연결이 중요시 되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떤가? 학문은 아직도 상아탑에만 움크려 있다. 기업은 마땅한 인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정부에서 나서서 이러한 집단을 연결시켜 필요가 있지 않을까? 방법론은 현재 대기업에서 만드는 씽크탱크나 인재풀과 같은 방법을 정부가 도입을 해서 서로를 연결시켜 주면 많은 시너지 효과가 일어날 것이다.



한국은 이미 국가의 안정단계에 들어섰다고 생각한다. 이미 고조에 의해 이루어지는 안정화 정책이나, 무제에 의한 내부 문제의 외부적 발출 및 자기 역량의 확대의 시기를 지나서 문제가 추구해야되는 자기 성찰과 안정적인 발전을 모색해야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삽이 아닌 펜의 시대다. 


마지막으로 다른 분야에 대해서 간략한 생각만을 말해보면 :

정치 : 독일식 중선거구제 실행, 대통령 4년임기 연임제 도입

경제 : 족벌식 경영 타파,  IT 관련 업체에 대한 투자 확대

문화 : 언론개혁 가속화, 문화컨텐츠 사업에 대한 감세 정책

군사 : 모병제로 이행 지지,육군의 축소와 해군 공군능력의 향상 지지.

기타 : 선거법 개선.



이 글은 2007년 10월 31일일 작성되었으며,
해당 기획자 태니님의 요청에 따라서 2007년 11월 4일 공개가 되었습니다.


중국의 역사 학자들이 뽑은 중국에서 우수한 역사 학술지들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중국에서는 잡지를 우체국을 통해서 편하게 받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아직 한국으로의 배송은 안됩니다.)

문제는 아래의 잡지가 모두가 정규적인 학술잡지가 아니고, 몇몇 것은 비정규적인 학술 잡지라서 우체국을 이용해서 구매하지 못합니다. 참고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요 잡지들은 사실상 우체국을 통해서 배송이 된답니다.


序号

刊物名称

1

历史研究

2

中国史研究

3

中国社会科学

4

近代史研究

5

文史

6

世界历史

7

考古

8

中华文史论丛

文物

10

中国经济史研究

11

考古学报

12

唐研究

13

史学理论研究

北大史学

15

史学月刊

16

国学研究

17

北京大学学报(哲学社会科学版)

18

清史研究

19

史林

20

当代中国史研究

中国边疆史地研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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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아직까지 특정후보를 정해 놓고 있지는 않다.(명박이는 안된다라는 것은 있지만 말이다.) 나름 인터넷에서 뜨고 있는 문국현 후보를 주목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망이다.

포스가 없다. 이번 100분토론에서 그는 너무나 유약했다.

사실 내용 중에서 내가 공감을 하는 내용이 어느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였다. 정말 말솜씨가 없다. 물론 패널들도 문제가 있었다. 오죽 했으면 손석희씨가 "감정적이게 보이지 않은 단어를 쓰라"고 말을 했겠는가?! 하지만 그런 패널도 쉽게 받아 넘길 수 있는 포스가 너무나 부족하지 않나 싶다. 그리고 회피하려하는 모습이 중간중간에 보였다. 손석희씨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을 한 부분. 본인도 아직 이해가 되질 않는다.

말솜씨가 전부는 아니겠지만,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발표 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히 대통령으로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이 토론을 위해서 하루 종일 투자를 하셔서 연습을 하셨을텐데 이 정도면 분명히 문제가 있다.

바보같은 질문에 바보같은 답이었다..
나는 바보같은 질문에서 현명하게 대답할 사람을 원한다.
이번 토론은 바보같은 질문의 패널과 바보같은 답의 문국현이었을 뿐이다.
아! 그리고 유일하게 현명한 질문을 해주셨던 시민 논객분들이 있다.


갑자기 유시민이 너무나 그리워 진다.

유시민이 저 자리에 있었으면 속시원했을텐데 말이다...후...

나의 지지 후보는 아직도 정해지지 않았다.



베이징에서 유학을 오래 하면서 언제나 감기에 걸리는 기간이 있습니다. 어떻게 매번 대비한다고 해도 안되는군요. 이 기간은 저에게 베이징 최악의 기간입니다. 베이징에는 봄과 가을이 없기 때문입니다. 환절기 감기에 대비할래야 대비 할 수가 없습니다.



10월 중순이 되면 베이징은 순식간에 겨울 날씨로 접어듭니다. 그러나 국가가 정한 라지에이타(중앙난방)은 11월 15일부터 정식 가동을 하게 됩니다. 이제 남은 한달은 추위를 싫어하는 저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한달이 됩니다.

그리고 감기군과 독감군, 그리고 몸살군이 저에게 빈대를 붙어버립니다.


원수 같은 라이에이터

중국은 아직 중앙난방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점차 사라져가는 라지에이타이죠. 저의 고1시절에 서울고에서도 라이에이타였지만, 고2 겨울에는 가스열풍기로 바꾸었는데 중국 북경은 아직 멀었습니다. 또한 북경 정부가 아예 언제부터 운행이 가능한지 정해놓고 있습니다. 위반할 수가 없게 만들고 있죠.

최근에는 시험 운행의 명목으로 11월 초부터 운행하는 곳도 없지는 않으나, 이것도 몇몇 좋은 동네에 한정된 일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북대는 나름 좋은 곳인가 봅니다. 낮은 온도이지만 라이에이타에 열기가 있으니까 말이죠. (음하하!! 자랑질 입니다!! -0-) 하지만 많이 부족합니다.

잠깐 중국어
라지에이타 = 暖气(nuan qi 누안치)

그렇다면 라지에이타에서 물이 새면 무엇이라고 해야될까요?
물이 새다 =
水(lou shui 로우슈이)



그리고 3월 말부터 4월 말까지의 기간도 저에게는 공포입니다. 아직 날씨는 추워 죽겠는데, 라지에이터는 끊어져 있고, 감기군이 어김없이 쳐들어오게 됩니다. 하지만 갑자기 추워지는 것이 아니니 최악은 여전히 10월 중순부터 11월 중순까지의 기간입니다.


이미 유학생활만 햇수로 6년째이건만, 3일전부터 감기에 걸려서 헤롱헤롱 하고 있습니다....추우면 온도를 마음대로 올릴 수 있는 한국의 개별 난방이 그리워집니다. 아예 추워지면 상관이 없는데 이넘의 환절기는 언제나 저를 고통스럽게 하는군요.


저도 인기블로거의 한명이긴 하지만, 마음 속은 여전히 비주류 블로거인 상황에서 일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매우 재미있는 기획이라고 생각합니다. xxx님이 이번 기획을 아직 비밀로 해달라는 요청을 해오셔서 질문내용을 공개하지는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획의 내용이 아닌 기획 자체입니다. 제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100명의 올블로그 인기 블로거를 대상으로 한 설문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블로거들이 새로운 언론으로 등장을 하고, 일명 파워블로거들이 언론을 선도해나간다고 하지만 예전의 게시판 토론에 비해서 부족해 보입니다. 이유는 블로거들의 독립성이 너무나 강하고, 현재의 메타블로그가 효율적으로 해당 글을 사용자들에게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블로거들이 현재 이루어지는 주요 사건에 대해서 의견을 제출하게 만들 없을까요? 예를 들어서 이번 선거법에 대한 의견들을 보기 좋게 모을 있다면 파워는 분명히 상승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행동은 오히려 메타사이트들이 먼저 나서서 행해야되었던 일이 아닌가 라는 의문이 강력하게 들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한 비슷한 시도가 예전의 올블로그에 있었습니다. 이른바 트랙백 센터라는 것이었죠. 현재 다음의 블로그 센터와 매우 유사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참여가 있지 않았고, 어느 사이에 메뉴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당시에 올블의 머리가 크레커님과 이야기를 했었는데, 트랙백이라는 방법에 대해서 의문을 제시하시더군요. 사실 어느 정도 컴퓨터에 지식이 있는 분도, 그리고 나름 블로깅을 하시는 분들도 트랙백의 개념을 모르시고, 어떻게 써야되는지 모릅니다. 저도 그것에 대해서는 매우 공감을 합니다.

 
참여와 트랙백의 문제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1) 인기블로거들이 주축이 되는 시사메뉴.

인기 블로거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일정이상의 발언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신도라고 불릴 정도의 추종자들을 가지고 있고, 그의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습니다.(... 제외-_) 트랙백을 아는 것은 당연할 정도이며, 타자와 소통을 하려 노력합니다.

그렇다면 올블로그, 혹은 다른 메타싸이트들은 이러한 인기블로그의 뽑아서 블로거에게 성취감을 주는 것 뿐만 아니라, 그들을 “이용” 혹은 “활용”해서 과감하게 여론을 선도할 생각을 해야되지 않을까요? 최소한 블로거들의 생각과 말이 보다 강하게 전달되게 노력해야 되지 않을까요?


방법은 간단하게 말하면, 일정 주제에 대해서 해당 글을 올리는 파위 블로거들에게 메타싸이트차원에서 글을 요구하고, 그에 따라서 토론을 할 수 있는 마당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정 주제는 사회적으로 지금 현재 이야기 되고 있는 중요이슈이지요. 물론 해당 글의 파워 블로거는 해당 사건의 찬성, 반대, 중립의 3가지 모두가 존재하는 것이 이상적일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차라리 해당 글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블로거들 모두에게 메일을 보내는 것이 좋겠지요.(여기서 해당 태그 마스터와 순위권자들에게 메일을 보내는 방법이 좋지 않나 생각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방법론이고, 다른 여러가지 고민을 해봐야겠죠)

해당 글을 현재 올블로그의 올리고 많은 사용자들이 트랙백이나 덧글로 참여하게 만드는 것이죠.

 

2) 채널 모드

제가 한국에 있을 무렵(5년이 넘었네요-_)에도 그랬지만, 케이블을 통하면 음악전문 채널이라던지 정치전문 채널, 중국관련 채널, 드라마전문 채널, 다큐멘타리 전문채널과 같이 다양한 전문화된 채널이 존재합니다. 시스템은 현재 블로그코리아에서 실행되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고 있습니다. 제가 중국에서 느린 속도로 블코를 접속하기가 어렵지만 않았다면 좋았을듯 합니다.(정말 힘들답니다. 블코분들은 속도개선에 조금만 노력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올블로그는 블로그카페를 통해서 스스로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한 해결을 모색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양측 모두 사용자의 참여가 아직은 저조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사실 몇몇 특수한 블로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생활의 여러가지 이야기를 올립니다. 가끔은 정치이야기도 올리고, 가끔은 경제 이야기도 올리며, 가끔은 문화를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블로그의 강점이자 단점이지요.

 
그래서 이제는 모호한 분류가 아닌 해당 사건에 대한 분류로 전환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지금의 올블이 택하는 스스로 추가하는 탭방식이 아닌, 다음 미디어뉴스와 같은 잡지형식으로 출력되는 화면 만드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탭을 통해서 자신이 관련되고 즐겨 보는 내용을 쉽게 있지만...

밥만 먹고 살수는 없지 않습니까? 가끔은 짜장면도 먹어야지요.

 

 

그냥 이번 기획으로 소위 인기 블로거들이 대거 출동?!했고, 일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이용할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물론 세부사항은 각각의 메타싸이트를 운영하시는 분들이 고민하여야 사항이긴 합니다.

 

... 각각의 메타싸이트들은 정치적인 중립을 유지하는 것과 블로거들의 목소리를 보다 강하게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을 분리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설령 정치적인 중립을 잃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블로거 대부분의 목소리라면 그것을 억지로 중립상태로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이미 메타싸이트가 하나의 미디어 되었다는 것을 자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메타 싸이트는 이미 하나의 언론 매체입니다. 이상 예전과 같은 조그마한 동아리 모임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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