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최대한 객관적으로 역사를 바라보아야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이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다고 열변을 토한다. 그런데 한국은 역사왜곡을 하지 않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역사교과서를 통해서 광개토대왕의 위대한 업적으로 고구려의 영토를 확대한 것을 강조하고 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영토 확장"이며, 위대한 업적이다. 그런데 반대로 그 영토확장에 연류되어서 고구려 군대에게 자신의 고향을 뺏긴 사람들에게도 위대한 업적이며 영토확장인가?! 자신의 고향을 뻇긴 사람들에게 광개토대왕은 침략자일 뿐이다. 


너무나 먼 과거의 일인가? 그렇다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행동은 어떠한가? 대한민국의 헌법은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고 하며 침략전쟁을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인들에게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침략 전쟁이었으며, 한국은 그 침략전쟁을 적극적으로 도운 또 다른 침략자이다.


일제가 한반도를 강제로 병합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침략행위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리고 일제의 전통을 이은 일본이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열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반대로 우리는 베트남에 얼마나 사과를 했는가? 우리는 자신의 역사를 얼마나 객관적으로 보고 있는가?


우리 입장에서의 고구려 영토 확장은 타인에게는 침략일 수 있다.

우리 입장에서의 베트남 전쟁 참전은 타인에게는 침략자가 늘어난 것일 수도 있다.


일본의 일제 침략 행위를 긍정하는 발언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은 헌법에도 명문화시켰듯이 침략전쟁을 부정하고 있으며, 대다수의 한국인은 침략 전쟁을 원하지도 않고 실행하지도 않을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일본의 일제 침략에 대해서 비판하려면, 우리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해야하지 않겠는가?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인가?


조선은 왜 한국의 역사일까요? 고구려는 왜 한국의 역사일까요? 당연히 한국의 역사인데 "왜?"라고 묻느냐고 화를 내시는 몇몇 분들이 보이는 군요. 그런데 화내시는 분들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현대 역사학의 입장에서 조선과 고구려의 역사가 한국의 역사인 이유는 엄청나게 간단합니다. 현재 한국이 조선과 고구려의 역사를 한국사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가장 큰 명문으로 문화적 공통성을 가장 크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경우에는 현재 한반도를 통치했다는 지리적인 배경적 명분도 강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명분일뿐입니다.


왜냐하면 현재역사학에서 기초적인 논리와 근거가 보장되는 한 개개인의 "역사관"을 존중해주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애매하다고요? 극단적인 예시를 최근 일본의 아베총리가 해주었습니다. "침략의 정의는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라고 하여서 한국인 뿐만이 아니라 중국인을 비롯한 관련 국가 국민들의 분노게이지를 높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정치를 떠나서 순수하게 학문적인 입장에서는 아베총리의 발언도 그 나름의 의의가 있습니다.


그나마 가장 객관적인 역사는 "A국이 B국을 공격하였다."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공격"이라는 단어 대신에 침략, 테러, 포위, 협박, 제압, 압박을 사용할 경우의 각각의 의미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런데 이런 단어는 어떤 기준으로 선택해야될까요? 학술적인 맹렬한 토론과 증거제시보다는 개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에 보다 의지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공격"을 한 것이지 "침략"을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저희가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야기하면서 "위대한 영토 확장"을 이야기하지만, 그 시대의 고구려 주변국들의 입장에서는 침략을 당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입니다[각주:1].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역사의 소유와 계승은 인문학의 한계상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판단으로 정해집니다. 그리고 그 개개인이 모여서 만든 단체, 사회, 국가의 판단으로 정해집니다. 그렇기에 고구려나 한국의 역사를 현재 한국에 모여살고 있는 사람들이 한국의 역사라고 한다면 한국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현재 중국에 모여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라고 생각한다면 역시나 중국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과 중국의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을 존중해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내 생각이 존중 받으려면 상대방의 생각도 존중해주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역사를 뻇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조금만 바꾸어 보시면 훨씬 더 넓은 역사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모든 인류의 역사는 나의 역사이다."라고 생각해보시면 어떻습니까? 당신은 이제 모든 인류의 역사를 소유하고 계십니다.



  1. 본 내용은 어디까지나 역사철학의 입장에서의 서술입니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에 대해서는 일본학계 내부에서도 비판이 강합니다. 다만 정치-외교적인 사항으로 인하여 단어가 변하는 것 뿐입니다. 후... [본문으로]
제 4절 : 영웅 아버지와 병신아들(2)
(지난회는영웅 아버지와 병신 아들(1) - 중국사는 장난감이다.)


수나라의 양식은 얼마나 풍부했었던 것일까? 천하를 50~60년동안 먹일 수 있는 분량이었다고 한다. 수나라가 38년만에 망했으니, 당나라는 날로 20년분의 양식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문헌통고(文献通考)에서는 이러한 수나라의 부를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어떤 나라도 수나라만큼 국고가 넘쳐흐르지 않았다(古今称国计之富者莫如隋)라고 말하고 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어떠한 나라도 수나라 정부만큼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누구도 수나라와 맞짱을 뜨지 못한다. 수나라야 말로 막강 돈지랄을 할 수 있는 나라였던 것이다.


3. 운하를 뚫었다.
수양제는 대운하를 뚫었다. 용제거(永济渠), 통제거(通济渠), 한구(邗沟), 강남하(江南河)로 분리해서 삽질을 시작했다. 낙양(洛阳)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탁군(涿郡)을 연결하고, 아래쪽으로는 여항(余杭)까지 도달한다. 참고로 미치도록 길다. 현재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긴 운하이니 말 다한 거 아닌가? 파나마 운하의 38배이고, 스위스운하의 20배에 달한다. 현존하는 최대길이의 운하를 수나라때 포크레인도 없이 만들었다. 지금 현대의 기술로도 한반도에 운하를 뚫는 것은 환경파괴는 둘째 치고 돈을 몇 조씩 넣어야 되는 상황에서 당시에는 어떠하였을까?



4. 도로 재정비....
이쯤 되면 우리는 진시황의 진(秦)나라가 떠오른다. 진나라도 만리장성 만들고[각주:1], 길을 새로 설비하면서 사람들을 부려먹다가 2대만에 망했었다. 수나라 역시 딸랑 2대만에 망하고 만다. 그러나 우리는 수양제를 욕만 해서는 안된다.


수양제는 분명히 폭군이지만, 멍청한 임금은 아니었다. 그가 한 일이 나쁘기만은 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을 무지막지 부려먹었던 운하공사를 보자. 대운하는 진시황의 만리장성과는 전혀 다르다. 만리장성은 지금이야 관광자원이 되어서 이민족들의 돈을 긁어 모으는 곳이며, 중화민족의 상징이니 머니 하고 있지만, 역대 대대로 만리장성이 제대로 북방민족을 막았던 적은 사실상 없다. 돈과 인력은 무지막지 투자를 해놓고 정작 방어능력은 제로에 가까웠던 것이다. 스타크레프트로 비유를 하면, 열심히 벙커를 지었지만, 정작 미사일터렛을 만들지 않아서 다크템플러가 은신해서 유유히 들어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러나 대운하는 전혀 다르다. 중국의 지형을 보면 대부분의 강들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그래서 강을 이용하면 동서간의 교류가 쉽게 일어날 수 있다. 문제는 남북간의 교류이다. 열심히 말을 타고 다각다각다각 갈 수밖에 없다. 머? 그냥 말타고 교류하면 안되냐고?

말을 타거나 짐마차를 끌고서 가지고 갈 수 있는 양은 매우 적다. 당신은 어디 이사갈 때 맨 몸으로 터덜터덜 가는가? 가구부터 시작해서 온갖 물품을 챙겨서 가야되는데, 육지로 이것들을 옮기려면 죽어나간다. 그런데 배로는 매우 쉽다. 특히 당시에 핵심적인 세금이었던 양식인 "쌀"은 부피도 부피지만, 무게가 어마어마한 것이다. 배를 통해서 운반하지 않으면 죽어난다. 못 믿겠으면 쌀 한가마를 지고 100KM만 가봐라[각주:2].


문제는 수양제가 돈지랄을 너무 했다는 것이다. 10권짜리 장편 소설을 쓴다고 보자. 그럼 자료수집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서도 이런저런 구상과 수정에 몇 달은 충분히 걸린다. 그런데 이런 장편소설을 일주일만에 써내라고 한 것이다. 아무리 1억을 준다고 해도 하면 미쳐버리거나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수양제가 딱 이꼬라지 였다.

수양제는 제위를 하고 나서 고구려을 3번 원정해서 대패하고, 수도를 옮기고, 법령을 강화하는 등등등 온갖 일들을 다 벌리고 다닌다. 문화사업이라던지 풍류따위는 즐기지 않는다. 과연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멍청한 상관이 아니고, 멍청하고 부지런한 상관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3차례의 고구려 공격을 보자. 고구려는 중국 동북의 지방정권이다[각주:3]. 지금 북한의 북부에 있었다. 이녀석은 700년동안이나 계속 반항하였는데, 처음 300년은 지금의 길림(吉林)에 있었고, 그 다음 300년은 평양(平壤)에 있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고구려를 중국의 정권이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한국의 정권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 됐고, 어찌되었든 한국인은 머든 뻇는다.[각주:4]

수양제의 3차 고구려 공격에 100여만의 대군을 투입했지만, 딸랑 2700명만이 돌아왔다. 고구려가 수나라를 상대한 전략은 러시아가 나폴레옹과 히틀러를 상대한 전략이었다. 하늘은 드럽게 많고, 땅은 넓은데 다 귀찮고 그냥 튀어!!!! 땅을 뻇으려면 뻇어라~~ 나는 튀련다의 정신으로 겨울까지 계속 후퇴만 한다. 승리의 기분도 처음뿐이지. 몇 달 동안 계속 걷기만 하고, 점점 겨울을 다가와서 추워지는데, 고향에 놔두고온 설미는 보고 싶고......근데 왜 이리 졸리지.....

이렇게 알아서 얼어 죽어주는 거다.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이제 쫒아가면서 사뿐히 즈려밟아주면 되는 것이다. 열받은 수양제이지만 나름 황제가 아니었던가? 육군만으로 안되면 수군까지 동원해주지! 그래서 쌈 싸먹겠다의 작전으로 나간다.

그러나 이때쯤 되면 말도 안되는 짓거리들에 동원된 백성들의 분노로 의한 봉기가 온갖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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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모든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과 환영합니다. 
본 글은 의역식 번역입니다.
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그냥 내가 처음부터 쓸까...-_- 이미 원문과는 상당한 거리가........
아무리 의역이라지만...이래도 되는걸까나;;;; 뼈대야 그대로 가고 있다만....



  1. 정확하게는 만리장성을 만든 것이 아니라, 진시황이 밟아 버린 나라들의 장성(연나라, 조나라등)과 자신의 장성을 이어서 만든 것이 만리장성이다. 한마디로 새로 만든게 아니라 좀 대규모의 보수공사라는 거... [본문으로]
  2. 한반도는 전혀 다르다. 한반도는 3면이 바다이다. 초등학생도 알 이 상식을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대운하 필요 없다. 그냥 바다을 통해도 전국 어디든지 간다. 그런데 굳이 대운하 삽질을 하시겠다는 그 분은....후.... [본문으로]
  3. 본인의 생각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원문 그대로 하였다. 이에 대해서 많은 생각이 있으시겠지만, 본인에게 어쩌고 저쩌고 하지 마라. 본인도 지방정권이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어떻게 공부하는지 알아두라고 그대로 번역한다. [본문으로]
  4. 다시 말하지만 원문 그대로 번역했다. -_-;; 하지만 이것이 유머로서 작용을 한다는 것은 중국을 분석하고자 하는 분들은 유심해서 볼 부분이다. [본문으로]
만두님이 방명록을 통해서 최근 역사스페셜에서 방송한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신라의 후예였다!"에 대해서 문의를 해주셨습니다. 저도 한때 역사스패셜을 좋아해서 역사을 너무나 좋아하게 되었던 만큼, 최근 역사스패셜이 주류의 의견보다는 소수의 의견이나 심지어 유사역사학의 해석쪽으로 향하며,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소재만을 내보내고 있었다고 걱정되고 있었습니다.

금나라쪽은 제 전공은 아닙니다. 제가 비록 북방민족사전공으로 막말로 통사로 이것저것 다 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역사학에도 세분화된 전공이 있고, 그 외의 사항에 대해서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그래도 명색이 북방민족사전공이고, 그래도 일반분들보다는 조금은 더 고문이나 방법론에 익숙하기에 써보겠습니다. 그냥 기본적인 역사학의 방법론을 이용해서 여러분들이 되도록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판해보겠습니다[각주:1].

* 어떤 분이 덧글로 실제로 보라고 해서 보고서 추가부분을 작성하였습니다. 기존의 것에는 수정도 필요없다고 생각됩니다. 차라리 안보는게 역사스페셜에 대해서 더 좋게 생각할 수 있었을듯 합니다.


* 잠깐 쓴소리 : 중원에서 최초로 한족을 밀어낸 금태조 아골타라는 설명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가? 화제성도 좋지만 남북조시대의 북조와 오호십육국은 한족을 밀어내지 않았다는 것인가? 보통 한족으로 알고 있는 수당도 선비(鲜卑)족이 통치계급이라고 말해지는데 이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것도 역사왜곡이다.[각주:2]


1) 금태조 아골타의 시조에 대한 사료.(그냥 뛰어넘어도 무방-_)

1- 金之始祖諱函普 初從高麗來 年已六十餘矣阿古廼好佛 留高麗不肯從曰 後世子孫必有能相聚者 吾不能去也 獨與弟保活里俱. 始祖居完顏部僕幹水之涯 保活里耶懶 其後胡十門以曷蘇館太祖自言 其祖兄弟三人相別而去 蓋自謂阿古廼之後 石土門迪古保活里之裔也 及太祖敗遼兵于境上獲耶律謝十乃使梁福幹答剌招諭渤海人曰 女直渤海本同一家 蓋其初皆勿吉之七部也 始祖至完顏部居久之 其部人嘗殺它族之人 由是兩族交惡鬨鬭不能解 完顏部人謂始祖曰 若能為部人解此怨 使兩族不相殺部 有賢女年六十而未嫁 當以相配仍為同部
[元] 脱脱撰《金史》[각주:3]卷一本紀第一

중요부분 해석 : 금의 시조는 함보(函普)로서 고려(高麗)에서 왔을 때 나이가 60여세였다.......동생인 보활리(保活里)만 같이 와서, 시조는 僕幹水연안의 완안부(完顏部)에 살았고, 그 동생은 耶懶에 살았다.......발해인에게 말하기를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가족이다. 처음 물길(勿吉)의 7부족중에 하나였다. 시조가 완연부로 와서 오래 살았는데...."

2- 女真酋長[각주:4]乃新羅人號完顏氏 完顏猶漢言王也 女真以其練事後隨以首領讓之兄弟三人一爲熟女真酋長號萬戶其一適他國  完顏年六十餘 女真妻之以女亦六十餘 生二子 其長即胡來也自此傳三人 至楊哥太師無子 以其姪阿骨打之弟 謚曰文烈者 爲子其後楊哥生子闥辣乃令文烈歸宗
[宋]洪皓[각주:5]撰 <松漠記聞>

중요부분 해석 : 여진의 추장은 신라인으로 완안씨라고 불렸다. 완안추장은 한나라 말로 왕이라는 말이다.

3- 是月生女眞完顔阿骨打稱皇帝更名旻國號金. 其俗如匈奴諸部落無城郭分居山野無文字以言語結繩爲約束. 土饒猪羊牛馬馬多駿或有一日千里者. 其人鷙勇. 爲兒能引弓射鳥鼠及壯無不控弦走馬習戰爲勁兵諸部各相雄長莫能統一. 其地西直契丹南直我境故嘗事契丹及我朝. 每來朝以麩金貂皮良馬爲贄我朝亦厚遺銀幣歲常如此. 或曰: “昔我平州僧今俊遁入女眞居阿之古村是謂金之先.” 或曰: “平州僧金幸之子克守初入女眞阿之古村娶女眞女生子曰古乙太師古乙生活羅太師.
《高丽史》卷14 世家

중요부분 해석 : 혹자는 "우리 평주(平州[각주:6])의 승려 금준(今俊)이 고려 도망쳐서 여진의 아지고촌(阿之古村)에 머물렀던 것이 그 금의 시조라고 한다" 혹자는 "평주의 승려 김행(金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서 여진 여자와 결혼을 해서 자손을 낳았고, 고을태사(古乙太師)라고 불렸다.  고을의 아들은 활로태사(活羅太師)라고 했다."

4- 김부(경순왕敬順王)가 비록 항복하여 고려왕이 합병하였으나 김부의 외손 완안아골타는 곧 권행의 후예로서 능히 중국을 갈라 다스려 백년동안 대를 이었으니... (동명해사록 [각주:7]1636년)

5- 만주원류고는 사료적 가치가 많이 떨어지기에 아예 언급도 하지 않겠습니다. (왜 떨어지냐는 분들은 위한 간단한 설명 : 해당 사건이 일어난 시기와 너무 떨어져 있으며, 만주원류고는 노골적으로 만주족만들기의 일환으로 벌어진 정치적인 역사서이기 때문입니다.)


2. 왜 아골타가 신라인의 후예인가?
1- 역사사료의 위험성.
이미 쉽게 풀어본 역사사료의 위험성과 환빠신라왕족은 흉노인인가?을 통해서 살짝 알려드렸다 싶이 모든 역사사료는 일단 의심부터 하고 들어가야된다. 특히 동방쪽에서 관방에 의해서 집필된 책들은 기본적으로 일정한 정치적 목적이 들어간다. 개인이 쓴 것도 어디까지나 그 개인의 인식적 한계가 들어가게 된다.

특히 시조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에서는 더욱 더 조심을 하여야 한다. 시조를 써놓은대로만 믿는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하고 사실과 다른 경우가 널리고 널렸다. 물론 그러한 시조를 써놓은 문제 자체에 대해서는 그 역사인식에 대한 또 다른 각도에서의 접근이 가능하지만, 시조라고 써 놓았다고 그 사람은 분명히 시조다! 라고 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한족의 시조는 염황(염제와 황제)라고 한다. 이들은 실존인물이라기보다는 당시의 모습을 투영하는 하나의 거울로서 생각을 해야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느 왕조의 시조라고 써놓은 것은 사실이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이 투영된 허구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이다.

2- "금사"와 "송막기문" 어느 것을 믿을 것인가?
위의 내용을 보면 아시겠지만, 금사에서는 함보가 고려에서 왔다고 하고, 송막기문에서는 신라에서 왔다고 쓰여져 있다. 참고로 중국사서에서 고구려와 고려는 모두가 高丽(고려)라고 쓴다. 다시 말해서 구별이 없다. 그렇다면 관방에서 만들어낸 고려설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송막기문에서 말하는 신라설을 믿을 것인가?

일단 각각이 책이 쓰여진 배경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아야한다. 보통 역사애호가들은 이 과정을 뛰어넘기 쉽상이다. 사료를 볼 때는 그 사료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

금사는 원나라에서 만들어진 역사서로서 금나라의 사료들이 풍부하였기에 비교적 잘 만든 정사로 평가를 받는다. 금나라에서는 스스로의 조상을 밝히기 위해서 직접 여진족 노인들에게 물어보고 다녔을 정도로 스스로의 역사사료 수집에 열정적이었다. 그리고 그 사료를 바탕으로 역사를 서술한 것이기에 거의 문제가 없다.

그에 비하여 송막기문은 어디까지나 송나라 사람이 금나라에 머무르면서 얻어들을 이야기로 쓰여진 책이다. 물론 송막기문은 금나라가 있을 당시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훌륭한 사료이지만, 개인의 자료수집능력의 한계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요즘의 "~카더라"통신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사도 역시 이와 같이 "~카더라"이며, 아예 대놓고 "혹자는 말하기를"이라고 하고 있다.

그래서  본인으로서는 금사를 기본으로 고려설을 채택하고자 한다.

3- 금사의 고려는 고구려인가? 궁예의 후고구려인가? 고려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나오는 고려는 고구려인가? 아니면 고려인가? 그것을 위해서는 숫자놀이를 해야된다. 함보는 아구타의 8대조이다. 아구타의 생존 연대 1068~1123으로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으면 함보는 대략 240년전에 생존했던 사람으로서 약 830년 전후반이 된다. 830년 전후반 통일신라중반기이자 발해 중반기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것이 668년이었고, 고려가 세워진 것은 918년. 금사가 만들어진 것은 1344년이었다.

추가 : 혹자는 조혼(일찍결혼함)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북방민족들의 특색을 간과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북방유목민족사회의 재미있는 모습중에 하나가 장남이 아닌 막내가 부모를 계승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그래서 계승주기는 더더욱 내려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간단한 예로 유명한 징기즈칸가문을 예로 보면 :

칭기즈칸(철목진) 1162~(1227)
토우레이(拖雷) 1193~1232(칭기즈칸의 4째아들)
멍거(蒙哥)        1208—1259(토우레이의 장남)
원세조(忽必烈) 1215~1294(토우레이의 차남)

칭기즈칸과 원세조는 할아버지와 손자로 53년차이가 나게 된다. 이렇게 주기가 25년차이가 나게 된다. 조혼이라고 하더라도 막내계승이나 여유시간을 주고, 아래쪽에서 언급했던 함보 자신이 나이를 먹어서 아이를 낳다는 것으로 20~30년을 추가하면 8대조 x 25년 + 20년 = 220년이 된다. 줄여도 200년차이가 된다. 그럼 줄여서 봐도 870년전후가 되므로 전체논리에는 문제가 없다고 본다.

또한 멍거와 원세조처럼 형제계승까지 생각을 하게 되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어찌되었든 줄어들지는 않는데 그것까지 필요 없으리라 생각되어서 패스.


* 이 부분에서 역사스패셜은 함보가 여진으로 들어온 시기를 신라말, 고려초로 잡고 있다. 이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셈법이다.  이해는 되지만 틀렸다고 생각된다(세대주기 20세, 아골타를 7대손으로 놓고, 막내계승따위 무시하면 가능-_). 아구타의 출생연대는 1068년이다. 그리고 신라말-고려초는 넓게 잡아서 900~1000년 사이이다. 8대가 160년 안에 일어나려면, 대략 20년을 한 세대로 잡아야 된다. 아무리 당시의 수명이 짦았다고 하더라도 이건 좀 심한 셈법이라고 본다. 짦게 잡아도 25년쯤으로 봐주는게 합당하다. 기록 자체에서도 함보의 나이가 많았음을 이야기하니 말이다. 한마디로 정말 아골타의 출생년도를 고려했는지 의문이다. [각주:8]

금사를 만드는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아골타의 9대 위의 조상이 현존하는 고려에서 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은 명확하다. 그렇다면 금사에서 말하는 고려는 고구려일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는 이미 668년에 멸망을 하였다. 그렇다면 함보는 굳이 따지자면 고구려의 후예라고 하는 편이 더 합당할 것이다. 신라의 후예라는 것과 고구려의 후예라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이다.

이에 대해서 역사스페셜은 이 두사료를 그냥 합쳐서 "고려에서 온 신라인"이라고 말해버린다. 이는 분명히 잘못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려가 고구려도 될 수 있다고 생각을 조금만 한다면 이런 식으로 단정지을 수 없다. 본인의 글을 잘 보면 알겠지만, 일정 부분이 되면 결국 "단정"이나 "확정"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역사 스패셜은 당당하게 해버린다. 이것은 다른 문제도 아니고 그냥 틀린 문제다.

추가 : 만약 25년으로 잡고 아골타가 8대라고 계산을 한다면 2대의 출생연도가 920년까지 내려올 수 있음으로 문장의 고려는 궁예의 후고구려가 될 수도 있다. (후고구려를 생각하지 못했었다. 죄송~ 그럼 문장에서 나오는 큰형이 불법에 빠졌다는 것도 궁예와 연결시켜서 상상해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후고구려라면 900년전후로 계산을 하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다. 물론 이 경우에는 신라인일 가능성은 낮아지며, 고구려 후예의 일파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늘어난다고 본다.

-- 《金史•高丽传》中说,“唐初,有粟末、黑水两部,皆臣属于高丽。" "당초, 속말, 흑수 두부족은 모두 고려(고구려)에 속해 있었다." 传 뒤의《赞》에서 :“金人本出之附于高丽者”。"금인은 본래 고려(고구려[각주:9])에 있던 자이다."

현재까지의 생각과 자료를 바탕으로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추론은 :
"함보는 고구려의 후예[각주:10]로서, 궁예의 후고구려에 있다가, 여진부족(완안부)으로 와서 현지인들과 결혼을 하고, 점차 여진화가 되었다. 혹은 여진으로 돌아갔다"



4- 송막기문과 고려사의 사료를 어찌 봐야되는가?
비록 본인 스스로 해당 사료를 채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료는 거짓말을 하지만 진실을 살짝살짝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신라인이나 고려인이라고 말한 부분에서는 일정한 역사전 진실이 같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당시 시대적 정황을 고려해서 볼 때, 신라말과 고려초의 혼란기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피해서 동북쪽으로 유입되었고, 금나라 성립되기 전에 그 같은 사람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선조에 대한 이야기에서 고구려-신라-고려의 다양한 계열의 사람들이 와서 혼재되어 있다고 추측해볼 수 있고, 사실에 비교적 근접하리라 생각된다.


5- 그.러.나. 금나라왕족이 정말 같은 "민족"일까?(이것이 핵심이다.)
핵심 중에 핵심이다. 고구려의 후예였던, 신라의 후예였던, 고려에서 간 사람이었던간에 그들을 같은 민족으로 보아야 하나? 혈연만 연결이 되면 당연히 같은 민족이냐는 사람들에게는 의문의 여지가 없이 같은 민족이다. 그러나 문화가 완전히 달랐다.

 "풍속이 흉노와 같아서 따로 성을 만들지 않고 산과 들에 흩어져 살았다. 문자가 없어서 끈을 묶어서 약속을 하였다"俗如匈奴諸部落無城郭分居山野無文字以言語結繩爲約束(고려사)라고 말했다는 것은 고려의 문화속와는 너무나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함보는 여진족과의 통혼을 하였고, 그의 후손들은 더욱 그러하여 사실상 여진인이 된 혼혈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의 예를 들어보면 중앙아시아로 가서 지금은 "고려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현재의 한국인과 외모도 다르고, 쓰는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데 같은 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에 대한 답은 서로 다르리라 생각된다. 정답은 없다. 그러나 이미 다른 문화에 동화가 된 상태에서는 다른 민족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합당하리라 생각한다.

또한 금나라의 지배계층이 고구려든 신라든 한민족의 선조 중에 하나라고 가정을 해도 역시 문제는 남아 있다. 금나라의 기본 민족 구성은 어디까지나 지도계층 역시 여진이 주류였다. 그런데 왕족만이 지도자라고 한국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는가? 이에 대해서는 아래 발해와의 관계 부분에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3. 금나라와 발해와의 관계
함 보를 시조로 둔 금황실은 발해인을 왕비로 맞는다. 금나라의 성군 세종의 어머니, 4대 황제 해릉왕의 어머니는 모두 발해 여인이었다. 또한 아골타는 발해인을 신뢰하여 발해유민 장호를 새로운 수도 북경 건설 책임자로 등용한다. 발해는 대제국을 경영해본 경험이 있었다. 금나라는 이런 발해의 경험을 이용하여 국가체제를 확장해나갔던 것이다.(역사스패셜)

*원래는 하나하나의 원문을 찾아서 대조를 해봐야지만, 환빠계열도 아니고 명색이 역사스패셜인데 이런 사실왜곡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무엇보다 귀찮아서....원문은 찾지 않도록 하겠다. 마음 착하신 분이 있으면 원문을 덧글로 달아주시길........이런다고 때릴꺼야? ^^::

위에서 본인이 해석한대로 고구려의 후예이고, 요동지역의 역사를 생각한다면 너무나 당연히 발해와의 연관관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역사스패셜은 발해를 "당연히" 한국의 역사로 생각하고 한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상당히 문제가 있는 생각이다.

발해는 신라의 수 많은 사료에도 나오듯이 신라자신이 같은 민족으로 보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발해의 상층부는 한국학계의 주류의견에 따라서 고구려의 유민이라고 하더라도, 하층민은 분명히 말갈계열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금나라는 그것이 더욱 심해져가서, 말갈의 후손인 여진들의 상층부 진출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대다수가 한국에서는 "다른 민족"으로 분리되는 말갈이나 여진인데, 이것을 같은 민족이 세운 국가로 볼 수 있는가?

만약 이것을 같은 민족이 세운 국가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통치계급만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역사관이다. 물론 이런 역사관 자체도 성립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대중"이 아닌 몇몇 "엘리트"에 편중된 역사관으로 비판을 받았었고, 만약 이 생각을 확대하면 일본제국에 통치를 당하던 시대는 한국의 역사에서 빠져야 된다. 통치계급이 "다른 민족"인 일본이었으니까 말이다. 스스로 모순이 일어나는 이런 생각이 과연 합당한가? 단 이곳에도 결론이나 확정은 없고, 있을 수도 없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서로 다른 생각들이니 말이다.

* 여진과 발해는 원래 한가족이다(女眞渤海同本一家 금사)을 이용해서 긴밀한 관계를 이야기하려는 사람도 있다. 분명 금나라의 형성과 발전 여진과 발해가 힘을 합쳤다는 점은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해당 기사의 앞뒤 내용을 살펴보면 조금 다른 각도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반복을 풀고 협력을 하기 위해서 숙신이라는 과거의 것을 끌어다가 같은 가족이라고 한 것이다. 만약 이런 논리에 박수를 보낸다면, 분명 다민족으로 이루어졌고, 수 많은 북방민족이 있었던 중국의 상고사도 그냥 싹다 염황자손의 나라가 된다고 인정해야된다는 말과 다를바가 없다. 한마디로 저런 역사를 가져다 붙인 것이 보이는 정치적인 말을 100% 믿는 것 자체는 문제이다.


4. 청황실의 성씨가 김씨
愛新覺羅(애신각라)을 만주어로 해석을 하면 금족(金族)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를 신라김씨와 연관을 시키는 것은 개그에 가깝다. 그냥 김씨면 다 같은 민족이고 혈연이라는 생각은 대체 어떻게 나온 것인지 궁금할 뿐이다.[각주:11]

* 애신각라에 대한 웃기는 떡밥 하나
아직도 많은 분들이 믿고 있는 떡밥 하나가 있다. 愛新覺羅를 해석해서 "신라를 사랑하고 깨우친다"정도로 이야기되는 웃기는 짓이다. 해당 말은 愛新覺羅을 愛覺新羅로 순서를 완전히 바꾸어서 고대한어를 "지 맘대로" "엉터리로" 해석하는 웃기는 짓거리다. 근거도 없이 이따구로 순서를 바꾸는 것은 코메디일 뿐이다.

김씨의 선조는 여러가지가 있다. 하나의 성씨가 하나의 선조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개그이다. 일단 유명한 것은 남흉노의 김일재이다. 그러나 송대만 해도 김씨는 이미 5개가 넘었다. (古今姓氏书辩证 P285) 또한 요동에 있던 여진의 지리적입장에서도 북방민족들의 영향을 받았고, 흉노계열을 높게 생각하여서 김씨성을 채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북방민족에게 있어서 금씨의 유래는 대장장이면서 동시에 샤먼이고 지도자였던 보편적인 문화와 연관을 하여서 나온 서로 다른 성씨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쉽게 말하면 세계 어디에서나 태양숭배나 새숭배 사상이 나타나지만, 이것은 인류의 집단적인 무의식 혹은 공통적인 경험으로 서로간의 교류가 없이도 나타나는 현상인 것과 같은 것이다.

얼마 전에 신라의 김씨와 흉노 김일제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라고 신라왕족은 흉노인인가?에서도 말한 바가 있다. 간단히 요약하면, 시조에 대한 서술을 그리 믿을 수 없으며, 송대에 지어진 古今姓氏书辩证에서도 서로 다르게 구별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청나라가 세워질 무렵이 되면 성씨가 같다고 같은 조상이라는 것은 허망한 환상이 되어버린다. 이미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대로 성씨를 만들고 사용해버렸기에 복잡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성씨를 가지고 같은 민족!이래버리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시대이다. 혹자는 만주원류고(满洲源流考)에 있는 몇가지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만주원류고 자체가 청나라에서 계획적으로 민족의식을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진 책이라는 것을 정말 모르고서 이야기하는 것일까?


5. 오십보 백보의 한국역사관과 중국역사관.
고 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금나라, 청나라로 이어지는 만주의 역사는 우리 민족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있다.한족의 영토,중원을 만주대륙에 합병하여 오늘의 중국을 완성한 여진족, 그들 선조가 신라인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국수주의적 우월감을 주장하자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반역사적인 동북공정 논리에 정면으로 대응하고 우리 역사를 지켜내어 향후 동아시아와 한반도 지역에 평화의 논리적 근거를 재확인하자는 것이다. (역사스패셜)

위의 글을 한마디로 대답을 하면 "미안하다. 웃기다." 가 되겠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반역사적이라는 말이 왜 나오는 것인지? 그러면서 동북아시아와 한반도 지역에 평화의 논리적 근거를 확인한다고? 거..참...

과거에도 수차례 설명했지만, 한국의 민족역사관이나 중국의 다민족역사관 모두 문제가 있으며, 동시에 하나의 역사관으로서 존중받아야만 한다. 중국의 다민족역사관은 중국이라는 나라가 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져 생겨난 것이기에 역사적으로 합당한 면이 있다. 그러나 현재의 영토라는 가변적인 기준을 기반으로 하기에 수 많은 문제점과 충돌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한국의 민족역사관은 문제가 없는가? 민족이라는 공동체를 통해서 역사를 분석을 함으로서 지금까지의 통합과정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가능하지만, 반대로 민족이라는 영토보다도 더 가변적인 개념을 가지고 분석을 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한다. 한마디로 동북공정의 몇몇 가지 역사적인 사실 문제가 아닌 그 역사관 자체를 반역사적이라고 한다면 오십보백보의 한국 역사관도 반역사적일 뿐인 것이다[각주:12] : 결론만 말하면 동북공정은 아골타가 신라인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동북공정은 여러 민족이 융합되어서 현재의 중국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고, 아골타가 신라인이더라도 그것도 융화가 되었다고 하면 끝인 문제이다. 대체 머가 근본부터 흔들린다는건가? 동북공정을 근본부터 흔들려면 중국이 단일민족이었다는 증거를 제시해야된다. 기본적으로 동북공정도 이해를 못하고 있는데....(미안...다시 웃자.ㅋㅋㅋㅋ)



  1. 제가 중국이라는 한계로 직접 방송을 보지는 못하고, 역사스패셜 홈페이지에 있는 관련 내용만으로 비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 양해부탁드리고 실제 방송을 본 분을 자세한 내용 설명 혹은 비판 부탁드립니다. (너무 느려ㅠㅠ) [본문으로]
  2. 예시는 훨씬 더 많다. 하다못해서 진시황도 서융(西戎)과 혈연적인 연결이 있었다는 학설이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어쩔건데? [본문으로]
  3. 1343년에 시작되어 다음해 11월에 완성. 예상되는 참고 금나라 역사서 《太祖实录》《睿宗实录》《先朝实录》《归潜志》《壬辰杂编》 [본문으로]
  4. 판본에 따라서 "女眞之主" "여진의 임금" 이라고도 함. 같은 의미이고 조금 높여진 표현일 뿐임. [본문으로]
  5. 홍호(1088~1155) 1129년 금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15년동안 감금되어 있다가 돌아옴. (고려중기) [본문으로]
  6. 현재의 황해도 평산. [본문으로]
  7. 동명해사록(東溟海槎錄)은 한국고전번역원에 올려져 있으나, 현재 중국에서 고전번역원에 접속이 불가능해서 원문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일단 역사스패셜의 해석을 그대로 가져놓도록 하겠다. [본문으로]
  8. 조혼(일찍 결혼함)을 고려해야된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덧글참조) 그러나 그런식으로 해도 역사스페셜의 논리에서는 140년의 차이가 나야되며, 북방민족은 막내계승도 있었기에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본문으로]
  9. 이는 왕씨고려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인은 시기상으로 아직 왕씨고려가 건립되기 전이었고, 문맥상 위와 같은 고구려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본문으로]
  10. 고구려의 후예라는 것은 범칭이며 보통 한국에서 아직도 이민족이라고 생각하는 말갈이나 여진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 [본문으로]
  11. 이런 식으로 할 수 있다면, 본인 논문은 하루만에 다 쓸 수 있다. 성씨만으로 해서는 안되기에 온갖 방증자료 찾으려고 삽질하고 있는데...띱-_ [본문으로]
  12. [/footnote].

    그럼 제대로 된 역사관이 머냐고? 본인도 모르겠다. 그걸 알았으면 본인은 이미 위대한 역사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분위기 속에서는 어떠한 절대적인 역사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는 서로 다른 역사관들이 공존하게 된다.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것은 논쟁을 할 수 있으나 서로 생각과 해석이 다른 것은 어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간단한 예로 어떤 여자를 보고 그 여자의 가슴크기나 허리굵기를 알아보는 것은 사실자체에 대한 탐구이지만, 내게는 예쁘게 보이지만, 상대방에게는 못생겼다고 느껴질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런 상황에서 너도 예쁘게 봐야돼! 라고 하는 것은 바보짓 아닌가?

    굳이 본인의 생각을 짦게 말하자면, 한국도 이제 다민족역사관을 채택할 때가 되었다. 현재의 한국인이 단일민족의 순수혈통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확정된 "사실"이다. 다양한 민족들이 서로 융합되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방송에서는 단일민족을 이야기하면서 삽질을 해대고 있다. 그만 하자.


    6. 역사스페셜 제작진에게...
    역사학도의 길을 가고 있는 본인은 한때 역사스페셜의 팬이었다. 비록 중국으로 유학을 하러 온 이후에 인터넷의 속도때문에 자주 볼 수는 없었지만, 지금의 역사를 좋아하는 내가 있게 해준 것이 무엇이냐고 하면 그 중에서 분명히 역사스페셜이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최근 역사스페셜은 화제성을 따라서 움직이고,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노골적으로 묻어나오며, 학계에서도 소수의 의견을 전체의 의견처럼 이야기하는 듯한 분위기가 있어서 참으로 안타까울 수 밖에 없다.

    환빠들이 찌질되는 것이면 "지랄하고 있네~"라며 넘길 수 있다. 그러나 "역사스페셜"이다. 아직도 많은 역사 애호가들이 역사스페셜을 얼마나 높게 보는지는 스스로도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진심으로 걱정하는 한 명의 팬으로서 역사스페셜이 진정한 스페셜이 되기를 바란다.

    본 글은 성격상 쓸데 없는 욕설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글의 덧글에 대한 답글은 정상적인 덧글에만 달도록 하겠습니다. 비판은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그러나 근거도 없이 무조건 "너가 틀렸다"는 상대하지 않겠습니다.

    결국 제 성격으로 덧글에 대답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각(09/09/09 09:51) 이후로 엉터리 덧글이나 대답할 필요가 없는 덧글에 대한 대답은 없습니다.

    쓰다보니 아래쪽으로 갈 수록 귀차니즘에 친절한 설명을 못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수정하기도 귀찮고..... 의문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하하;;;;;;...근데 이거 다음뷰의 어떤 항목으로 보내야되려나;;; 왜 역사항목이 없는걸까?;;; 일단 "사회"로 보내본다.

    그나저나..기네;;; 이걸 다 보는 사람이 있긴 하려나;;;


    역사스폐셜을 보고 추가로 적습니다.
    (간단 감상 : 괜히 봤다. 역사스페셜. 해도해도 너무한다. 조금 많이 시니컬 할 겁니다.)


    이유립 : 이 사람을 무려 “역사학자”라고 불러주어야 하나? 알 사람은 안다. 이유립은 유사역사학자일뿐이다. 환빠들에게 신으로 불려지는 인물이거늘....그런 사람이 세운 사당에 아골타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본인 할 말이 없어진다. 역사스패셜. 이렇게 썩었더냐…

    가옥구조와 씨름 : 같은 환경에서 당연히 같은 모습의 가옥구조가 나온다. 또한 여진이 발해에 귀속해 있었다. 이것을 가지고 같은 민족이라고? 또한 씨름 또한 북방민족 전역에 있었던 것이다. 어쩌라고?

    중국학자도 인정했다? : 해당 학설은 중국에서 주.류.가. 아.니.다. 한국에서도 주.류.는. 아.니.다. 한 중국학자가 말하면 모든 중국학자가 인정한 것이 되는것인가? 본인 금사가 전공은 아니지만, 북방민족사 전공으로 어느 정도 흐름이나 주류는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한 중국학자가 말했다고 모든 중국학계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하는 분에게 과연 무엇이라고 말해주어야 할까?

    여진 스스로도 고려에서 나왔음을 인정하였다? : 우리의 조상이 대방에서 나왔으니....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겠습니다.. 我祖宗出自大邦 至于子孫義合歸附 今太師為雅束 亦以大邦為父母之國(《高麗史》世家卷十三高麗史十三)

    우선 이 글은 아골타가 아닌 그의 형이 작성한 글이며, 여진이 불리한 상태에서 어떻게든 아부를 떠는 모습이고, 해당 기록은 어디까지나 고려사에 적혀 있어서 고려의 마음대로 수정되어서 올라갔을 가능성도 있다. 한마디로 이런 정치적인 서신을 가지고 여진의 조상이 고려에서 왔다고 하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흉노와 한나라도 서로 형제지간이라고 했다. 그럼 이 둘도 같은 민족인가? 하하하...정치용어와 실제사실를 혼동하면 안된다. 아! 그러고 보니 터키랑 한국은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데 이것도 같은 민족이고~~~)

    악비의 일 : 송나라의 명장으로서 금나라를 막은 악비는 민족의 영웅이라고 불렸었다. 그러나 다민족역사관에서 이는 문제가 되기에 그것을 수정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한족중심사상이 남아 있고 그래서 몇몇 사람들이 반발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족중심사관에서 다민족사관으로 이행하는 단계인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동북공정이 허구라고 하는데 대체 왜??? 이해자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민족을 포용하려는 것에 박수를 보내야지..쯔쯔...

    아골타가 신라인 후손이라는 것은 동북공정은 근본부터 흔들린다고?[footnote]미안. 나 잠시만 웃고..ㅋㅋㅋㅋ 나 지금 빵~! 터져버렸어. ㅋㅋㅋㅋ [본문으로]
티스토리여서 덧글을 못달고, 트랙백도 못 거니 그냥 이렇게 간단하게 풀어야겠군요. 최근 고구려가 중국역사가 아닌 세가지 이유이라는 글을 올렸다. 해당 논지는 현재 국토를 중심으로 역사서술을 하는 원칙론에 대한 나름 괜찮은 반박이기는 하다. 국토중심의 서술은 과거의 개념을 억지로 끼워넣는 개념이 강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하지만!!

귀찮은 분을 위해서 결론부터 말하면 :
한국도 똑같다. 고구려가 왜 한국사인가? 그 주장도 억지이긴 마찬가지이다. 한국도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서 억지로 "만들어낸 민족의 개념"에 고구려를 때려 넣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몇 가지 오류를 지적하면 :
1) 해동삼국(海東三國:고구려, 백제, 신라)이라고 묶어서 불렀다고 같은 나라라고??;;; 그럼 동남아국가라고 몰아서 부르는 말레이시아나 태국 및 인도네시아들은 같은 민족이고 같은 역사인가? 지역적인 개념으로서의 이야기와 실제 역사적 관계를 동일시 하는 것은 대체 어떤 논리에서 나오는 것인가? 개념 정리부터 하시기를 ^^

2) 발해의 민족이 발해족이라;;;; 발해의 상층은 고구려유민이고 중하층은 말갈이다. 이것부터 명확하게 하고! 이 다음부터 문제가 된다. 상층 지배민족을 기준으로 그 국가를 정의하느냐? 아니면 중하층을 기본으로 지배하느냐의 문제이다. 보통 현재까지의 논리는 지배민족에 무게를 두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식이면 몽골점령시기나 일본제국시기는 한국 역사가 아닌가? 만약 발해의 상층이 고구려유민이라고 같은 전통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전체 한국사로는 모순적이 상황이 되게 된다. (본인 개인적으로는 당시에는 제대로 된 민족 개념자체가 없었다고 본다.)

3) 독자적인 연호와 천자의 개념은 상당히 중요하긴 하다. 하지만 그리 뛰어난 반박이론이 될 수는 없다. 중국에 얼마나 많은 자칭 천자와 연호가 있었을까? ^^::: 예를 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지의 위촉오는 각기 다른 민족인가? 연호와 천자의 개념은 분명히 실질적인 독립국이라는 의미로는 중요하다. 그리고 분명히 당시에는 조공-책봉관계라는 하나의 외교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의 역사관에서 이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역사관에서는 "정통"이라는 개념과 "반란"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점을 명심해주셨으면 좋겠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아니다. 단순히 해당 일을 가지고 반박을 하기는 ^^::::)


왜 고구려가 한국사인가?
반대로 고구려를 한국사에 넣을려고 삽질하는 것은 왜 생각하지 못하는가? 정말 묻고 싶다. 왜 고구려가 한국사인가? 위의 글에서는 어설프게 넘어가는 질문이 있다. "3. 고구려가 멸망한 뒤 고구려인은 대부분 중국에 속하게 되었다?" 여기서의 중국은 현재의 중국을 말한다. 실제 고구려 멸망이 후, 통일신라로 귀속되는 인구보다 현지에 남은 인구가 더 많다. 이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다 못해서 아직 확실한 설은 아니지만, 통일 신라로 귀속된 인구만큼이나 중국대륙 내부로 들어간 인구가 있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한국의 민족주의적 역사관으로는 설명하기 곤란한 지점이 아닐 수 없다. 발해사 역시 한국사로 인정된 것이 그리 오래 되지 않았으며, 고구려를 이었다는 거란이나 만주족들도 한국에서는 한민족만 역사에 넣는지라 무시한다. 차라리 중국의 다민족사가 이쪽에서는 더 설득력을 가진다.(물론 이것도 나름의 문제가 있다. 하지만 최소한 이런 사실에 대한 해석에서는 더 설득력을 가진다는 말이다.)

혹자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말할 지 모른다. 이 책을 보면 같은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있지 않냐고? 고대사서도 어디까지나 당시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어서 신중하게 해석해야된다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안다. 그리고 해당 사료는 엄밀하게 말해서 1차 사료도 아니다. 참고로 고구려 관련 논문에서 빠질 수 없는 위지동이전은 중국쪽 사료이다. 중국쪽 사료에 고구려 역사를 적었으니 그럼 고구려도 중국사겠네? ^^::

무엇보다 어디까지나 한국의 잣대인 "한족"에 의한 통치로 중국사를 보는 것은 웃기기까지 하다. 중국의 역사관은 어디까지나 다민족사이다. 결코 한족만의 중국사가 아니다. 그리고 한족만의 역사를 죽어도 할 수 없다.

솔직히 고구려사는 고구려사이다. 이것을 현재의 국사 개념에 억지로 넣을려고 하니까 서로 다른 역사관으로 인하여 충돌을 하는 것이다. 물론 개인의 역사관으로 스스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이다. 하지만 자신의 역사관만큼 상대방의 역사관도 존중을 해주어야할 것이다. (물론 역사관 존중과 역사적 사실이 다름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에서 배워서 고구려가 한국사이다라는 말이 아니라, 왜 한국사인지 스스로 생각해보고 불타오르던지 했으면 좋겠다. 20대 이상의 성인이면 다들 알겠지만, 초중고교과서는 어디까지나 기초교육이며, 현재 학계의 정설에 한참을 뒤떨어지거나 왜곡되는 내용이 있기 마련이다.

반드시 오해할 사람이 있었던지라 다시 말하지만 : 본인이 한국의 역사관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중국의 역사관에 찬성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를 좀 없애시기를 바란다. 본인은 둘 다 국사개념에 매몰되어 민족주의라는 통치기술에 훌륭하게 활용되는 아름다운! 역사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관모에서 신발에 이르기까지 북방민족들의 의복형태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고구려는 건국 때부터 중국과 접촉했으면서도 의복의 재료에서부터 형제들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고구려가 북방민족이나 중국과는 다른 고유한 문화를 굳게 지키고 있었다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우리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나타나는 이 고유한 복식문화의 요소들을, 단순히 고구려의 문화권이라는 차원을 넘어 고구려가 줄곧 추구하고 실현하고자 했던 고조선으로부터 이어진 한민족의 의식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벽화를 통해서 본 고구려의 옷차림문화 -중국 및 북방지역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
박선희(숭실대)


1) 처음 보고서 환빠인줄 알았는데, 나름 정식 논문이었다. 최소한 환빠처럼 고구려 대륙경영설을 주장하지는 않는구나. 기뻐해야되나? 

2) 고조선으로부터 이어진 한민족 의식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기본적으로 고조선의 의복에 대한 고증과 고구려 의복간의 비교가 있어야되는 것이 아닌가? 그것 없이 무조건 고조선으로부터 이어진 한민족 의식이라니....

3) 본인 복식사에 대해서 잘 모른다. 하지만 샤마니즘쪽으로 공부하다 보니 몇 가지는 알고 있는 지식이 있다. 깃털달린 모자(羽帽)와 같은 경우, 너무나 분명한 북방계열의 샤마니즘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근데 이건 왜 논문에서 고증을 하지 않는가? 유리한 것만 쓰고, 불리한 내용은 무시하는 것인가?


본인 중국에서 공부하다보니 한국의 역사계에 대해서 무지하다. 하지만 박선희씨는 숭실대의 교수라고 알고 있다. 교수님. 사학을 공부하고 있는 사학도로서 솔직히 말합니다. 이건 좀 심하신 것 아니십니까?

그리고 인접해 있는 문화는 서로간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서로간에 영향을 받으면서 서로가 점차 변해가는 것이다. 하다못해서 한족중심 사상의 중국에서도 북방민족의 의복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당연히 이야기하는데, 대체 박선희씨는 무슨 깡인지 모르겠다. 모르겠다. 본인 의복쪽에 무지 약하고, 별로 관심도 없는지라 더 이상 이야기를 하기는 힘드나...거..참;;;

참고로 임지현 교수는 요동사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는데, 요동사도 변경사주장과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중세에 형성된 상황을 그대로 고대에 적용했기 때문이다.

즉 고대에는 한반도와 만주지역이 한 문화권이었음에도 이를 억지로 분류해, '요동과 한국은 미분화상태였다'라는 말도 안되는 말을 하거나6세기에 형성되 대신라 이후 많이 쓰기기 시작한 '삼한(고구려, 백제, 신라를 의미하는, 한국인을 상징하는 말로서의 삼한)'이란 단어가 고대 삼한시대에서 부터 형성된것 처럼 착각하거나.고구려 이전과 이후에 상황이 너무 다른 것을 자세히 살피지 않아 '요동의 미약한 문화적 정체성은 한중문화교류에서 차지하는 요동의 역할을 도관이나 통로의 그것에 머무르게 했다'(요동사 p. 615)는 말을 하는등 중세에 형성된 시각을 그대로 고대에 투영해버렸다.

역사문의 밸틴님의 글 중에서...http://cafe.daum.net/alhc

본인 실력이 매우 떨어져서 당 카페같은 곳에서 감히 토론 같은 것을 못하고, 이렇게 뒷구멍에서 중얼중얼해보련다. 이렇게 조용한 변경의 글이 퍼질리도 없고 말이다^^

일단 본인도 요동사라는 개념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 현재 한국에 만연해 있는 극단적인 민족주의로서 주입된 국사개념의 고구려사에서 진정한 의미의 냉철한 역사적 의미로의 전환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만약 김한규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요동사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이것 역시 허구의 개념이고 아직은 명확하게 정의내리지 못했으며, 현실적인 정치와 외교 논리에서 무시당할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밸틴님이 지적하신 문제를 살펴보자. 개인적으로 억측과 가정 속에서 요동사를 비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논쟁을 할때 지양하여야 할 방법이지만!! 반문을 해보자면

"고대에 한반도와 만주지역이 한 "문화권"이었다는 증거는 대체 무엇인가?"

문화권이었다는 개념은 말 그대로 만들어진 개념이고, 개개인의 정의에 따라서 얼마던지 달라질 수 있는 개념이다. 기존의 국사에서야 "민족"이라는 허황되고 개념적일수밖에 없는 것을 절대적인 진리로서 이야기 했다. 이것도 틀렸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요동사를 비판하는 그 방법 그대로라면 역시나 비판받아야 되는 방법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한국호랑이라는 분이 임지현씨의 인터뷰를 올리고 이런 덧글을 달았군요. "임지현교수 인터뷰 내용입니다 한번 만나면 물어보고 싶군요 1000년전에 삼국사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하나로 보았는데 1000년후의 당신이 갑자기 1980년대생긴 변경사라는 개념을 적용하는게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는지요" 해당 인터뷰 내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그럼 제대로 개념이 형성된지가 300년도 안된다고 할 수 있고,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100년도 안된 "민족"이라는 잣대로 마음대로 모.든. 과거를 재단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것은 비꼬는 듯한 반문이지만....무엇보다 1000년. 아니 훨씬 전의 중국 사서들은 천하를 모두 중국의 아래로 보았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역사는 모두 어쩔 수 없는 현대사이기에 현대 개념을 적용시킬 수도 있습니다. 단지 그 개념이 절대적이지 않고, 현대에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해당 글은.....예전에 쓰다가 중간에 다른 일이 있어서 남겨둔 것인데.....으음...그냥 공개해버리겠습니다. 갑자기 완성하기 싫어진 글이라고 할까요? 사실 이런글은 공개하면 안되겠지만....


한국인이 중국에서 민족사를 공부하면서 절대 피해갈 수 없는 문제가 고구려 문제다. 대학교때부터 역사과라고 한국분들에게 이야기 하면, 처음 듣는 이야기가 "고구려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는 질문이니 말이다. 앞으로 어떻게 생각이 변할지 모르지만 지금 현재 내 자신의 고구려에 대한 역사관을 점검해 보는 것도 중요할듯 하다.(솔직한 마음으로는 최대한 고구려사를 건드리고 싶지 않은 것이 나의 마음이다. 한마디로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고구려사는 고구려의 역사다.
나의 고구려에 대한 생각의 핵심이다.
고구려는 한국의 것도 아니고, 중국의 것도 아니다.
고구려사를 단지 고구려인들의 역사로 볼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이든 중국이든, 한민족이든 중화민족이든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관은 민족이라는 가상적인 개념으로 구성되어있다.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만들어진 허구이기에 얼마든지 변동이 가능하다. 그리고 한국이든 한민족이든 언제인가는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도 동일하다. 중국은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하는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영토는 시간에 따라서 변한다. 절대적이지 않다. 이런 기준점이 될 수 없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세운 역사가 얼마나 사실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까?

물론 현재 역사학에서는 이미 "사실"이나 "진리"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과거의 사실을 완전히 재현해 내는 것은 불가능 하고, 현재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것일 뿐이고, 각각의 사람마다 다른 관점으로 돌아보게 되니 사실이라는 것은 없다고 한다. 한편으로 맞는 소리이다. 하지만 고구려라는 나라가 존재했었다는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이런 부정될 수 없는 몇몇 사실들을 위해서 계속 공부할 생각이다. (이 부분때문에 대학교때 정말 많이도 고민했었다. 학문은 무엇인가의 "진리"을 추구하는 것인데, 진리가 없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의문이 계속 들었었다.)

이렇게 적으면 많은 사람들이 고구려를 중국에 내주는 것이냐라는 소리를 한다. 그런데 나의 생각은 처음부터 고구려가 누구의 것도 아니다. 이 말은 고구려가 한국 것도 아니지만, 동시에 중국의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내주는게 아니라는 소리이다. 원래부터 자기것이 아니었는데 멀 내주고 말고를 한다는 말인가? 무엇보다 고구려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현재의 한국이든 중국이든 모두 자신들이 영향을 미친 후손들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지금 내 생각은 중국의 주류학계에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고구려가 망한 뒤의 역사적 연관성이다. 유명한 예로 고려는 고구려를 이어받았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이런 부분을 어떻게 처리하냐는 실질적인 문제가 남아있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차라리 소멸이라는 전재를 걸고 있는 김한규 교수님의 역사공동체론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역사공동체 자체도 어디까지나 가상적으로 설정된 개념이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핵심이 되는 역사공동의식이 구체적으로 어떤 요소로 실현되며 움직이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야기를 하기가 힘들다. 혹은 기존의 민족이라는 개념을 이용하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의 민족이라는 개념은 너무 복잡하게 꼬여있다.여기서 더욱 구체적인 생각은 아직 못하고 있다. 계속 고민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본인의 생각이 어떻게 변화할지는 잘 모르겠다.
단지 고구려사가 고구려의 역사라는 기본적인 틀 속에서 움직일 것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외교와 정치적으로는....
여기까지는 역사학적인 생각이었고, 이제 외교와 정치쪽을 보자. 지금 현재 유교제국주의라고 불려지는 중국의 모습은 아버지에게 중학교때부터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왔다. 분명히 고민해보아야 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서 일부 "관방학자"들이 정부의 뜻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은 분명히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역사를 학문이 아닌 외교와 정치적으로 이용할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일한 이유로 한국에서도 중국의 일부 "관방학자"들과 똑같이 받아치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 역시 역사를 외교와 정치에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아탑에만 머무르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지만, 학문이 너무 뛰어나가 노는 것도 문제가 있다.

한마디로 유교제국주의를 언제나 경계하겠지만, 역사학을 단지 학문적으로만 대할려고 노력할 것이다. 무엇보다 학자라는 사람들의 양심을 믿을 것이고 그것을 배울 것이다.



뒤를 돌아보자....
환단고기를 완독한 것이 중학교 3학년 때쯤인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환단고기를 완독하고 관련 책들을 설렵하면서 지금 소위 말하는 "환빠"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면서 환단고기와 그 관련서적의 문제점을 알게 되었고 그냥 평범한 한국의 역사관으로 돌아가게 된다. 대신 환단고기는 나에게 역사에 대한 흥미를 주었다. 그리고 중국으로 오게 된다.

북경대학교 역사과에 들어와서도 한국의 일반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던 나는 몇몇 교수님들이 말하는 내용에 대해서 반발심같은 것이 일어났다. 그리고 중국 역사학의 문제를 열심히 성토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진 한국의 역사관은 과연 얼마나 옳은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관련서적을 열심히 보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였고 나온 결론이 지금의 나의 모습이다.

이러한 현재의 모습을 스스로 "중간자"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중국에서도 본인은 타자이며, 한국에서도 타자이다. 하지만 동시에 중국에도 속하며 한국에도 속하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얻을 수 있는 보통과는 다른 관점이라는 강점을 키워야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보통과는 다르기에 쉽게 파묻힐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약점이 처절하게 드러날 수 있는 고구려사는 왠만하면 피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반대로 본인이 고구려사를 제대로 한다면 정말 강력한 강점이 되겠지만, 그러기에는 넘어야 될 산들이 너무 많아 보인다. 후...역시 거란이나 투르크쪽으로 가는게 속 편할거 같다. 에휴...



본인 역사를 공부한다. 그리고 저 지도를 보는 순간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학문적인 가치는 0%에 가까운 쓰레기이다. 물론 한가지의 가설로서 존중 받을 수 있지만, 해당 가설의 증거가 너무나 부족하다.

 

고구려의 영토 표시가 지 마음대로다. 해당 영토 표기는 태왕사신기에서 봤던 그 영토 표기였다. 그것을 보면서도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했을까라는 생각을 했지만, 어디까지나 "판타지" 드라마라는 생각에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이건 뉴욕타임즈에 광고를 올려서 많은 외국사람들이 보는 지도인데 여기에다가 이런 말도 안되는 짓거리를 했다는 것이 이해가 안된다. 대충의 문제만 말해도...

 

1) 백제의 산동반도설 통치설은 한마디로 증거자료가 너무나 부족하다. 한마디로 학문적으로 인정 못 받는다.

2) 거란의 위치도 훨신 아래쪽이어야 한다. 아니 고구려의 위대함?!을 말하려면 차라리 거란이 고구려에 통합되어있어야 정상이다. 실제로 중국대륙의 왕조들과 고구려의 사이에서 방랑을 하며, 한때는 고구려에 통치를 받았고, 다른 때에는 중국대륙 정부의 통치를 받았다. 해당 위치도 요서쯤에 배치하는게 합리적이다. 물론 시대마다 달라지긴 하지만 말이다.

3) 후연은 아무리 약해졌어도 최소한 요서정도까지는 지배했었다. 그런데 해당 지도에는 베이징(북경)도 점령 못한 것으로 되어있다. 한마디로 어처구니가 없다.

 

이렇게 홍보를 하면 일반 대중에게는 알려질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의 객관적인 증거를 갖추어야 되는데, 이것은 너무나 허무맹랑하다. 당장 위대한 고구려를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중일을 제외하고는 고구려는 단지 타국의 역사일뿐이다. 우리가 로마의 문화가 유렵의 여러 국가에 내려온다고 간략하게 말하는 것처럼, 타국의 입장에서는 고구려가 명망한 뒤 현재 한중일 모두에게 일정정도의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서 이게 누구 역사란 말이 왜 나오는 것인가?

헛소리다. 민족주의에 사로 잡힌 오만이다.

고구려의 역사는 고구려의 역사일 뿐이다.

 

 

더 황당한 건 독도다. 대체 저 시기에 "독도"라는 지명이 어디있었냐?

기본적인 역사 지도의 역할도 못하는 쓰.레.기. 일 뿐이다.

미리 언급해 둘 것은 해당 내용은 어디까지나 일.부. 중국 네티즌들의 반한정서입니다. 생각 없는 반한 글을 보면 비판하는 중국인도 있음을 반.드.시. 알아두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중국 민족주의자들의 일부분을 소개하며, 그를 통해서 한국의 민족주의를 되돌아보려는 목적입니다. 해당 글을 보시고 외국인의 눈으로 한국의 민족주의는 어떻게 보일까 한번 되돌아서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中国统治朝鲜半岛长达1000年.

别以为把汉城改成首尔就可以摆脱中国的统治.

绝大多数韩国人体内都流着中国人的血.

可以说是MADE IN CHINA!!

 

중국은 1000년넘게 조선반도를 통치해왔다.

한성을 서울로 바꾸었다고 중국의 통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한국인들의 몸에는 중국인들의 피가 흐르고 있다.

쉽게 말해서 MADE IN CHINA 다.

 

이런 글을 중국 인터넷에 있는 반한글 중에서 하나를 뽑아왔을뿐 그 외에 다른 글도 많이 있습니다. (저 글은 제가 UCC를 돌아다니다가 마침 보인 글이기에 뽑아온 것입니다.) 저는 현재 중국 네티즌들은 한국에 대해서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친한파 : 한국의 경제발전을 배워야된다는 파로서, 특히 한국 드라마가 유행한 뒤에 많이 생겨났습니다. 중국에서는 哈韩(하한)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집니다. 해당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그리 강력한 글을 쓰지 않습니다. 단지 반한파들이 글을 쓰면 스스로를 돌아보라고 소리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친한파는 지금 글의 목적이 아니기에 이정도로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의 잠깐 중얼중얼 1

유일하게 반한파가 거의 없는 내용이 하나 있긴 있습니다. 축구죠. 혹시라도 반한파가 한국 축구를 욕하면...친한파가 아주 새콤하게 비꼬아 줍니다. "한번이라도 이기고서 이야기 하라고-_" 하지만 해당 일은 워낙에 중국 축구협회와 중국 대표선수들이 중국 축구팬들에게 욕을 먹어서 생기는 반사이익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 축협과 중국 대표선수들은 외국인인 제가 봐도 불쌍하게 욕 먹습니다.

 

 

2) 반한파 : 물론 중국인들의 마음 속에는 원래부터 한국을 무시하는...아니 조선족이 중국의 소수민족이고, 조선인민공화국을 형제국가로 생각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남한은 그들에게 있어서 50년도 지나지 않은 한국전쟁에서 적이었던 존재입니다. 이 3가지 사항이 모여서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다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친한파가 늘어나면서 더욱 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 저의 경험적 생각입니다. 현재 그들의 주요 까댐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까댐에 대한 대략의 내용을 적겠습니다.

 

바로의 잠깐 욕시간! (으응??::)

한국어에서 중국인은 짱깨, 일본인은 쪽바리 라고 욕합니다.

일본에서 한국인은 "조센징", 중국인은 "지나" 라고 욕합니다.

중국에서 일본인은 "소일본", 한국인은 "고려새끼" 라고 욕합니다.

 

 

(1) 고구려문제 : 사실 중국의 국사 교육으로는 고구려나 발해는 당연히 중국의 역사입니다. 물론 한국의 국사 교육으로는 한국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둘이 충돌을 했습니다. 사실 이것이 중국인들 사이에서 욕의 근원이 된 것은 한국에서 난리가 일어나고, 해당 사실이 와전되어서 일어난 일입니다. 사실 중국인과 한국인이 서로의 국사교육을 이해한다면 싸울일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현재 민족주의 교육이 벌어지는 양국가 모두에서 매우 힘든 일임은 분명합니다.

 

고구려 문제로 중국인들과 말할 일 있다면 제가 몇가지 조언을 드려도 될까요?

1. 왠만하면 이야기 안하시는게 좋습니다.

회피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실 그 중국인과 친하게 지내는 것 자체로 고구려 문제는 거의 자동적으로 해결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친한 사람의 나쁜말은 원래 하기 힘든 법입니다. 고구려는 한국땅이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면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울컥 합니다. 이렇게 한번 울컥한 사람 다시 중립?!으로 되돌리기 힘들더군요. 그냥 밥이나 혹은 술이나 한잔 하면 된답니다. 그럼 다른 사람의 앞에서는 저도 모르게 당신을 옹호하게 되죠.

 

2. 이야기 하시겠다면, 중국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시는게 좋을듯 합니다.

한국에서 고구려와 백제를 한국의 역사로 어릴때부터 배우듯이, 중국에서는 해당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배웁니다. 이것은 국사라는 것 자체의 문제이지만, 건너 뛰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중국인들의 머리 속에는 한국인들처럼 당연히 우리 역사 아냐?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앞에다 대고 고구려는 무조건 한국 것! 이라고 말하신다면 돌아오는 것은 분노뿐일 것입니다.

그냥 조용히 한국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라는 투로 설명해 주시는게 좋다고 생각됩니다. 한국인들은 어릴때부터 고구려가 한국 역사라고 배워왔다. 한국인들은 고구려를 자신들의 선조라고 생각한다. 한국인들은......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중국은 어쩌고 저쩌고"가 등장하지 말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특별히 반발할 대상이 없고, 그냥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합니다.

 

3. "고구려는 대한민국만의 것!" .......참아주셔요.

이렇게 해서 설득당한 중국인....제 미약한 경험으로는 본 적이 없군요. 반발을 하면 반발을 하죠. 정확하게 역사적인 배경으로 설명을 한다면 중국인의 것도 되고, 한국인의 것도 됩니다. 위의 말은 학술적이지도 않고, 단지 무지막지하게 감정적인 발언일 뿐이지요.

 

 

(2) 그 외 역사 문제 : 몇몇 한국 네티즌들이 얼마전에 스파게티는 중국이 원조다라는 기사에서 보인 반응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해당 사건때 한국 네티즌들은 "짱깨는 맨날 모든 것의 원조가 지네라고 지랄하네"정도의 반응을 보였다고 생각됩니다.(냉정하게 말해서 스파게티의 원조는 중국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면기술자체는 중국에서 이탈리아로 간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 면기술을 이탈리아에서 독창적으로 응용하여서 스파게티를 만들었죠.) 그리고 중국 네티즌들은 한국의 목판인쇄(무구정광)같은 문제나 단오절과 같은 문제를 가지고 거의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1. 무구정광과 같은 경우, 해당사항은 아직도 양국간에 논쟁거리입니다. 무구정관은 현재까지 발견된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물입니다. 문제는 무구정관의 낙양에서 인쇄된 것인가? 아니면 한국에서 인쇄되었느냐 입니다. 그리고 어느 쪽도 결.정.적.인 증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705(혹은 706)년 낙양인쇄설과 한국의 자체적으로 만들어서 751년 불국사 석가탑에 안치했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해결되기 힘들어 보입니다. 

 

2. 단오절과 같은 경우 : 단오라는 단어자체의 유래는 보통 중국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단오절은 우리것인데 왜 한국이 마음대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을 하느냐고 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한국이 등록한 것은 "강릉 단오"입니다. 강릉에서 단오날 벌어지는 제사를 문화유산으로 등록을 한 것이지 단오절을 등록한 것이 아니랍니다.

중국인들에게는 단오제가 아닌 단오절을 등록한 것이라고 말을 해주십시오. 그리고 한국에서는 단오제는 중국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하지만 강릉지방에 단오제가 정착을 하여 자신들만의 단오절 풍습을 만들었고, 그것이 강릉 단오제로 불리면서 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이유라고 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3) 공자의 경우 : 이유가 두가지가 있습니다. 1- 한국만큼 유교의 전통을 지키는 곳이 없다라는 말이 와전되어서 생겨난 말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실 유교의 전통...중국보다 한국이 더 많이 보존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문제는 2- 공자가 동이족이라는 분들입니다. 공자의 출생지가 노국이었고, 그곳은 환단고기을 믿는 분들에게는 동이족의 영역이었고, 그러므로 인하여 공자도 동이족이라는 이론에서 시작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아직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자가 동이족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분들은 중국분들에게 되물어보시면 됩니다. 어디서 나온 소리냐고? 왜 공자가 한국인이냐고 말이죠. 공자가 동이족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게는...제가 할말이 없습니다. 이유를 잘 설명해보셔요.

 

4) 한자의 경우 : 얼마전에 중국 신문에 보도된 사항입니다. 한국이 한자를 문화유산으로 신청했다는 사항입니다. 해당 사항은 완전한 오보로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열혈적인 국가 민족주의자들은 분명히 한자도 한국의 유산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증거나 논리가 빈약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딴지를 거는 중국인이 있으면 오보였다고 말해주면 됩니다. 길게 설명하려면 "한국에도 중국처럼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이 해당 사항을 주장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들만의 목소리일뿐이다."라고 말해주어도 되겠죠.

 

5) 백두산 or 장백산 : 이 부분에 와서는 더이상 할말도 없어집니다. 한국의 경우 백두산이라고 교육을 받아왔고, 중국의 경우 장백산이라고 교육을 받아 왔습니다. 서로 말이 안 통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한국정부는 중국지도에 백두산이라고 명시할 것을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정간섭이 되죠. 단지 자신들이 백두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이지요.

굳이 싸우고 싶으신 분들은 청나라 시기와 한국의 고대 문헌에는 분명히 백두산이라고 적혀 있다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특히 청나라와 대한제국이 국가분계선을 그을 당시에 분명히 백두산이라고 명기해있습니다. 단! 다른 청나라 기록이나 다른 중국 고대 문헌에 장백산이라고 적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로 같은 지역을 부르는 다른 지명이라고 말하는 것이 논리적이겠죠.

 

 

(3) 서울과 한성(首尔与汉城)

예전에는 서울은 한양이라고 불렸었죠. 중국에서는 汉城(한쳥)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앞자리의 한은 중국 한족할때 한입니다. 그러니 중국인들에게는 어느 정도 해당 지명에 대해서 "원래 중국것이라서 그래"라는 추측을 해 볼 수 있는 여지는 남긴 것이죠.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한강의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백제(百濟)가 동진(東晋)과교류하여 중국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한강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고쳐서 한수(漢水)라 불렀으며, 그 뒤부터는 옛 이름은 차츰 없어지고 마침내 한수(漢水) 또는 한강(漢江)으로만 불리워졌다. 한강(漢江)은 본래 우리말의 "한가람"에서 비롯된 말로 "한"은 "크다,넓다,길다"는 의미이며, "가람"은 강의 고어(古語)로 크고 넓은 강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경강(京江)이라고도 불렀다"

한성의 유래는 조금 복잡합니다. 어떤 이는 한사군에서 왔다고도 하고, 또 다른 어떤이는 한강에서 왔다고도 합니다. (저도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아시는 분은 좀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든 중국과 연관이 있는 것은 사실이며, 중국측에서 저런 오해를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서울시가 바꾸어냈습니다. 솔직히 어떻게 바꾼 것인지 구체적인 과정은 저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서울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맨 처음 번역한 중국네티즌의 글처럼 해당 일에 대해서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중국 사람이 많습니다. 내가 왜 서울이라고 불러야되느냐고 말이죠. 솔직히 저도 중국말을 할때는  汉城(한쳥)이 입에 붙어버려서 首尔(쇼우얼)이 아직 습관이 되지 못하고 있는데, 중국 사람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냥 저런 말을 보면 그냥 웃는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의 잠깐 중얼중얼 2

중국은 자기네 맘대로 지명 가져다 붙이기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중국인들의 발음에 맞추어진 방식이죠. 그리고 현지 발음은 사실상 신경 쓰지 않습니다. 위싱턴을 화셩뚠이라고 부르거나 베를린을 보린이라고 하는 것은 차라리 속편합니다. 일본과 한국의 (서울을 뺀) 모든 지명은 현재 중국어 한자 발음 그대로 지명을 읽습니다. 제가 궁금한건! 이런 상황에서 서울시 담당자는 어떻게 한청을 서울로 바꾸었을까요? 혹시나도 인연이 되서 담당자분을 만나면 술 한잔 사드리면서 내부 사정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인생 드라마였을 것같은 느낌이 팍팍 들어서 말입니다. 밤 새도록 말할 내용이 넘쳐 흐를듯합니다. 어디까지나 제 느낌이긴 하지만 말이죠.)

 

 

(4) 한글

한국이 자랑하는 문자 한글입니다. 저는 이제 할 줄아는 언어라고는 중국어밖에 없고, 그냥 문자와 발음만 아는 알파벳, 키릴문자, 일본 문자(히라가나+카타카나+일본식한자)를 놓고 보면 확실히 한글이 재미있는 글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글은 과학적일지 모르지만 한국어는 별로 과학적이지 않습니다.

한국인들이 자랑스럽게 말하곤 하는 모든 발음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명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한글은 가능하나 한국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한국어에는 권설음이라고 불리우는 영어로 따지면 "R" 발음이 없죠.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까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경우 조용히 한글과 한국어는 다른 것이라고 말해주면 된답니다.

 

바로의 잠깐 중얼중얼 3

얼마 전에 한글로 중국어 타자를 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나왔다고 합니다. 몇몇 한국 네티즌 분들은 중국을 점령해라고 하셨었지요. 그것도 중국 네티즌들에게 흘러들어가서 안 좋은 반응을 보인답니다. 그런 것을 응원하실려면 조용히 성공을 기원하는 것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긴 욕 할 사람들은 어차피 어떻게해도 욕하긴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해당 타자기를 한국식 한자와 독음을 다 아시는 어르신네들은 잘 사용하겠지만, 한국의 젊은 층과 중국 사용자들에게 다가가기에는 조금 힘들지 않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실제로 사용해 보지 못해서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비라는 중국 타자방식보다 빠를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잘해야 비슷한 수준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새로 입력법은 획기적으로 빨라야 하거나 쉬워야되는데 해당 타자기는 양쪽에 모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군요.

하지만 해당 자판기를 가지고 한국 문헌을 한국인이 입력한다면, 그 속도는 예전에 비해서 상당히 빠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미 되어있지만 조선왕조실록도 해당 입력기가 있었으면 훨신 빠르게 입력되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하지만 아직도 입력해야되고 입력할 수 있는 한국 고전들을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개발자분도 그것을 위해서 만드셨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왜 중국에 진출할 목표라는 홍보가 인터넷에서 되었는지 의문이군요.

 

 

(5) 그래도 반일정서 정도보다는...

위에서 몇가지 예시를 들었습니다. 저것 외에도 몇가지 더 있는 것 같은데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중국 네티즌들의 반한 정서가 예전에 비해서 조금 강력해 진 것도 사실입니다. 아마 드라마의 유입으로 한국에 대한 인지도가 올라감으로서 자동적으로 생기는 현상이라고도 생각됩니다. 안티도 인지도가 있어야 생기는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나름 긍정적인 면을 찾아봅니다.

사실 한국과 중국 네티즌의 감정의 골은 아직 그리 깊다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둘 모두에게는 최고의 민족주의적 적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이라는 목표가 그것입니다. 한국이든 중국이든 일본 이야기만 나오면 엔돌핀이 급속도로 전신을 순환하나 봅니다.

 

바로의 잠깐 번역!

해당 글은 중국 인터넷에 많이 퍼져 있는 글입니다. 일단 보시죠.

一韩国留学生说:我和你们(中国学生)打赌,在中国随处可见日本电器、手机、汽车,而在韩国街上你转上几天也不会看到一辆日本车--这就是日本不敢轻视韩国的理由日本松下有一位高官说过:即使我们不去拜靖国神社,韩国人也不会买我们的产品,但不管我们再怎样的去拜靖国神社,中国人照样会买我们的产品。一句让中国人从头凉到脚的话。每买一百元日货就会给日本政府送去5元钱,让日自卫队多造10颗子弹,多印8页反历史教科书。如果你买日本汽车,将来开上中国街头的日本坦克就是你造的,如果你买日本橱具,将来射穿同胞头颅的子弹就是你造的,如果你买日本电视音响,将来就会在战地喇叭中听到同胞被杀的哀鸣!请传给20个人,支持中国,抵制日货,就算没有回报,这也是你的义务!

한국 유학생이 말했다. "나랑 도박해볼래? 중국에서는 어디서나 일본 전자제품이나 자동차를 볼 수 있어. 하지만 한국의 거리에서 몇일을 돌아다녀도 일본차는 절대 볼 수 없지" 이것이 일본이 한국을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예전에 파나소닉의 한 고관이 말하였습니다. "설사 일본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아도, 한국인은 절대 일본 상품을 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야스쿠니를 가던 말던 중국인들은 우리 제품을 살 것이다." 참 등골이 서늘해지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매번 100원의 일본제품을 사는 순간 일본 정부에는 5원이 세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 자위대의 10개의 총탄을 제조할 비용이며, 8페이지의 역사 교과서를 인쇄할 비용입니다. 만약 당신이 일본 차를 산다면 미래에 중국 길거리에 있을 일본 탱크는 당신의 책임입니다. 만약 당신이 일본 주방제품을 산다면, 장래에 당신 동포의 머리를 뚫는 총탄은 당신의 책임입니다. 만약 일본 음향제품은 산다면, 미래의 전쟁터에서 동포들의 마지막 비명이 들을 것입니다! 해당 글을 20명에게 보여주십시오. 중국산을 지지하고, 일제를 몰라냈습니다. 어떠한 이익이 없을지라도, 이것은 당신의 의무입니다!

 

솔직히 위의 글을 보면 웃기기 그지 없습니다.  (자동차야 한국에서는 거의 국산차 쓰고 관세가 많아서 그렇지. 전자제품에서 일제가 널리고 널려있는데!) 하지만 지금도 저렇게 믿고 있는 중국인은 의외로 많답니다. 한국인들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일본제품을 쓰지 않는 줄 말이죠. 그럴땐 저는 저의 디카를 살포시 보여준답니다. 나의 사랑 캐논 G7!!! 아...이게 중요한게 아니고! 이미 자유시장경제인 상황에서 질이 더 좋다면 그것이 일본산이든 중국산이든 한국산이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음음...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적의 적은 친구라던가요? ^^

한국의 반일 감정은 중국의 반일 감정보다 약하다고 자평합니다. 중국의 어떤 기사던지 간에 일본에 대한 욕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어떨때 보면 심하다고 생각될 정도도 있습니다. 나름 머리 좀 돌아간다는 북경대학의 친구들도 일본 이야기만 나오면 이성을 안드로메다로 보내더군요. 그리고 가끔 이성으로 무장한 중국친구들은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는 합니다. 아마 어릴때부터 보던 반일영화와 드라마가 문제일 것이라고 말이죠.  중국은 항일전쟁 영상물가 매우 많습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다른 영상물이 거의 없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런 이유로 지금 현재 80년대 생들이 어릴때부터 보아 온 것은 일제에 저항하자! 일본은 나쁜놈! 인데 일본에 대한 좋은 감정이 있기도 힘들겠지요. 이것이 세뇌의 힘입니다. 한국인도 예외는 아닙니다. 저희의 일본에 대한 감정이 정치적인 목적에 의한 세뇌가 아닌지 고민해봐야하지 않을까요?

 

 

 

바로바로의 중얼중얼....

이것을 보시고 모두 힘을 합쳐서 일본을 욕하자는 소리는 아닙니다. 저는 지금 제 능력껏 해당 사건의 원인과 와전 과정을 설명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응 과정도 말이죠. 이 글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의외로 이상하고 짜잘한 것이 와전되어서 이상하게 퍼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혹시 한국에 있는 중국과 일본에 대한 이야기도 위와 같은 이상한 와전의 결과는 아닐까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 사람도, 중국 사람도, 일본 사람도 모두가 하나의 분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서양인들이 보면 저희는 동양인일뿐이고, 동양인에서 보면 동북아에 사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리고 껑충 뛰어넘으면 저희는 한 명의 사람일 뿐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웃음 뿐입니다.

중국인을 만나면 웃으면서 이렇게 말해보셔요.

"니 하오!" 그 순간 또 하나의 사람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고구려를 뺏기면 안된다는 말을 합니다. 웃기는 소리입니다.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라고 해서, 한국의 역사가 아니라는 식의 생각이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르겠습니다.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이면서 한국의 역사일 수도 있습니다.혹은 중국만의 역사일수도 있고, 한국만의 역사일수도 있습니다. 또한 둘의 역사가 모두 아닐 수도 있습니다.

줄여서 요약 정리하면...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라고 한국의 역사가 아닌것은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뺏긴다"니?
대체 언제부터 고구려가 한국의 역사의 "것"이었답니까?

최근에 중화인민공화국 교과서에 고구려가 중국의 영토라고 하고, 한국의 교과서에는 예전부터 그랬으니까? 그런식이라면 이미 당이 고구려를 정복하고 고구려를 스스로의 영토라고 했고, 그것을 현재 한국인들이 선조라고 생각하는 신라가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사서에 기록이 되죠. 그럼 중국의 "것"이었던게 먼저인가요? ^^ 사실 이것도 헛소리입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건 당시 고구려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고구려의 역사는 고구려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고구려 사람들이 몇 천년뒤에 "나는 한민족이야!"라고 생각하셨겠쪄요~!?

라면 억지로 개그하는군요. 웃기지도 않지만요. 후..

KIM이라는 분의 장문의 덧글에 덧글을 달다가 우울해져서 외쳐봅니다.
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인지 한숨이 나올 뿐입니다.




우환乌桓과 같은 경우, 우환산乌桓山에서 시작하여 우군새외五军塞外, 연변십군沿边十郡(已经塞内), 사군(四郡)으로 점차 남쪽으로 진출한다. 그리고 점차 남쪽으로 가는 상황에서 문화와 정치 경제가 발전하게 된다. 특히나 우군새외에서 연변십군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급속적인 발전을 하게 한다. 그것은 기존의 시스템이 정비되지 않은 상황이 남쪽의 지식계층을 만나서 그들을 받아들이고 정비되는 과정을 통해서 발달한 것은 아닐까? 재미있는 것은 일정한 발전을 이루어냈음에도 지속적인 남하를 추구한다.


그런데 이러한 우환의 행동은 다른 북방민족에게서도 자주 나타난다. 흉노도 아래로 내려왔고, 몽고도 내려왔고, 청나라도 내려왔다. 더 좋은 땅을 원하는 것일까? 하긴 지금의 러시아도 부동항을 얻으려고 내려오고 싶어한다. 그리고! 고구려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서 고구려 역시 몇번의 수도 이전이 있었다.


그런데 이유가 애매하다. 정말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 남하한것인가? 약탈을 위해서 남하한 것인가? 아니면 한군데에 정착하지 못하는 방랑자 취향인가? 아니면 조금이라도 좋은 땅이 필요했던 것일까? 그리고 고구려 문제에서도 생각해 것이, 다른 북방민족과는 다르게 축성(성을 쌓는 기술) 상당히 발전시켜놓았는데, 성이라는 것이 보따리에 싸서 이사할 수도 없는 물건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동을 했다라….수도를….그것도 몇번이나

 

나중에 생각해보자…….잡상 같아도나중에 고증해보면 좋은 주제가 될지도….하지만 지금은 아냐아냐저거 고증하면 인간이 죽어나갈거야~~~



음하하..그래그래! 난 졸업논문 초고를 끝냈어! 이젠 쌩~~ 고생은 당분간 사양이야. 음하하하;;


요즘 또 언론에서 중국이 역사 왜곡을 한다고 난리법썩을 떨고 있고, 여론에 편승하여 자신이 애국자임을 만방에 알리려는 열혈 애국 네티즌들은 더욱더 열기를 내뿜고 있는 와중에 한마디 해야겠다. 역사 왜곡이라는 말은 지금 현재 중국에게는 안 통한다. 역사 왜곡이 아니기 떄문이다.

본인 북경대학교 역사학과에서 공부하고 있다. 이렇게 말해두면 "짱꺠 새끼들한테 배웠다고 옹호하냐? 세뇌됐군"따구의 소리가 나올거 같지만 할건 확실히 해야되니까 언급해 둔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본인 민족주의적 역사관에 대해서 대단이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라는 점을 미리 알려둔다. 자! 왜 역사 왜곡이 아닌지 썰을 풀어 보겠다. 재수없는 전문 용어 썡깐다.-_-


1. 역사관이 다른거다.

한국의 역사관은 무엇인지 아는가? 민족주의적 역사관이다. 지금 살고 있는 "한민족"이라고 불리우는 우리들의 조상이 세운 나라라고 여겨지는 것을 싹다 자신의 역사로 생각한다. 그래서 고조선, 고구려, 신라, 가야, 백제, 발해등등으로 내려오는 나라의 역사를 한국사라로 하고, 은주,춘추전국,진, 한으로 내려오는 역사를 중국역사로 정의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다들 이해가 되리라 본다.

근데 중국은 아니다. 중국은 지금 현재 중국 영토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를 지들 중국의 역사로 본다. 예를 들어서 원나라는 우리의 상식으로는 몽고족이 세운 나라지만, 중국의 역사관에서는 중국의 땅 위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중국의 역사다. 얼핏 이해가 안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틀렸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역사학에서 이거 틀린거 아니다-_- 정치 사회적인거 제외하고 엄격하게 역사 학문적인것으로만 따지면, 한국처럼 민족주의 역사관을 채택할 수 있는것이고, 중국처럼 지역주의 역사관을 택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것도 맞고 틀린 것이 아니다. 같고 다를 뿐이다.

한국이 중국의 행위를 역사 왜곡이라고 한다면, 중국도 똑같이 역사 왜곡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 둘다 학문의 영역을 떠나서 정치 외교의 구렁텅이에서 찌질대는 것이다.

정리. 중국 역사관으로 보면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가 중국거 맞다.



2. 백두산이냐? 장백산이냐?
이것 가지고 열을 토해내는 사람들 때문에 굳이 뻔한 말을 한다. 중국정부가 백두산을 "천"두산이라고 부르던 "일"두산이라고 부르던 "장태백"산이라고 부르던 한국 정부가 뭐라고 할 권리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백두산은 북조선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경계선에 위치해서 양쪽 국가 모두에 속하는 영토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위의 사항에 해당됨이 전혀 없는 별계의 국가일 뿐이다.

문제는 국제사회가 백두산이라고 채택하느냐? 아니면 장백산이라고 채택하느냐다. 마치 "동해"로 읽으냐? "일본해"로 읽느냐와 같은 논리인 것이다. 그리고 이 국제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다면, 각 국어로 된 인터넷 싸이트를 만들어서 직접 전세계 네티즌들에게 홍보를 해라. 물론 대한민국 정부에 압력을 가할 수 있다면 가하고 말이다. 서명운동과 같은 것이 효과적일것이다.

웃기는 건, 그동안 중국 유학생들이 중국에서 백두산을 장백산으로 부른다고 그렇게 말을 하고 말을 했건만 그것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호응도 없다가 갑자기 난리를 치는 분들이여...후...좋다 난리쳐라! 하지만!!!

리플로 중국 욕하는 것이 압박기제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실제적인 해결책 두가지 다 말했고, 그것을 스스로 실행하라. 난 애국심이 거의 남지 않아서 못하겠다. 난 말뿐이고 싶지는 않기 떄문이다. 하지만 리플로만 열정적인 애국자분들은 안 그럴거라고 생각한다. 잘해봐라.


3. 중국 학자와 한국 보도
한국 보도를 보다보면, 중국의 사학계가 합심을 해서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중국사로 만들려고 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웃기는 짜장짬뽕되겠다. 학자는 것들은 원래가 위에서 뭐라고 찌질되도 아닌건 아니라고 하는 것들이다. 내가 다니고 있는 북경대만 봐도, 위에서 언급한 역사관의 차이로 인해서 발해를 중국사로 보는 선생님과 아닌 선생님이 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누가 틀리고 누가 맞고는 없다. 제발 착각하지 마라.

중국의 학자중에서도 역사관의 차이로 인하여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사에 편입시키지 않으려는 세력이 있다. 그러니까 생각없이 보도만 대충 보고서 중국 내부 사정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주전자의 뚜겅을 열어버리지 말자. 신문이나 뉴스도 상업적으로 돈 받아 먹으려고 어느정도 자극적으로 기사를 편집해서 100%공정성을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언제나 잊지 말라는거다. 후...



4. 민족주의...
물론 중국의 이런 역사적 노림수가 정치 외교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며 그에 대한 영향을 어떤 것일지는 고민해봐야할 것이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내 현실이 싫다. 역사라는 학문은 왜 맨날 그 잘난 정치 외교에 이용당해 먹는가? 아니 마치 첩 처럼 따라다니면서 똥구녕을 핣아서 살아가는 건가?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 잘난 민족주의다. 내 민족만 잘난거다. 그런 민족의 민족국가. 난 무섭다.

앞으로 인간은 얼마나 서로 죽이지 않고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시간이 올까?
지금의 민족주의가 없어지면 다음은 어떤 사상이 우리을 분리시킬까?
아니 작금의 민족주의가 없어지기나 할까? ....후....


중국의 역사왜곡은 없다. 만약 중국의 역사관을 부정한다면, 중국도 역시 한국의 역사관을 부정하면 끝나는 일이다. 그리고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관은 붕괴시킬 수 없는 건 아니다...후..하지만 학문적으로 존재한다면 둘 다 하나의 가치관이면 철학이다. 그리고 그 각자의 존립의 근거는 모두가 있다. 단지 현실 정치와 외교가 끼어들기 시작하면 난리 부르스가 나기 시작하며, 역사라는 것을 역사 이상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과거에 대한 회상적인 사유와 감상으로 인하여 역사에 그 이상의 의의를 부여하고...후....더 이야기 하기도 싫다.

젠장할 역사학...정치 외교의 똥구녕이나 평생 핣아라...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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