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대학교 국제문화제가 열렸다. 올해로 무려 5회째이다. 매번 남들 한 부스에서 할 때, 2부스를 차지하는 한국부스. 하지만 내정하게 전체 인원수로 생각하면 2부스도 작은거다. 절대적으로 한국인 유학생이 많은 상황이니 말이다. 올해도 그럭저럭 흥행을 한듯 하다만..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북경대학교 팀블로그의 제 5회 국제 문화제에 그 후기 을 참고하시면 되겠고, 본인은 욕 한 바가지만 해줄려고 한다.



....국제문화제에서 중요한것은 한국 문화를 알리는 거다. 그치? 근데 위에 차례상이라고 차려놓은 꼬라지는 머냐? 특히 차례상과 같은 경우는 유교문화의 정수이며, 한국의 성균관대가 중국에 와서 공묘의 제사의례를 가르쳐 줄 정도이다. 본인이 유교를 좋아하냐고? 결코 아니다. 하지만 기왕 소개시킬려면 제대로 해야되지 않느냔 말이다.

제기가 없는 것은 둘째로 하고 홍동백서 같은 기본적인 사항도 안 지키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랴. 흑..ㅠㅠ 후배들아.....모르겠으면 철학과나 역사과 혹은 고고학과 석박사들에게 자문을 구해보렴...응? ㅠㅠ

아무리 중국에서 이런 제례에 대해서 많이 잃어버렸다고 하더라도, 북대가 자랑하는 문사철을 생각해봐라. 본과생은 모르는 사람은 많을지 모르겠지만, 문사철 석박사들은 중국친구들도 다 엉터리라는 것을 다 알아볼 것이란 말이다. ㅠㅠ

우리 기본은 하자?! 기본은?! 응??











막 말 북대는 북경대 후배들을 대상으로 제가 지금까지 시도해보지 않았던 문체를 실험한 글입니다. 한마디로 막말 문체이지요. 나름 개그요소도 넣어보려고 노력했지만 잘 될지 모르겠군요. 막말북대라는 제목 답게 북대에 대해서 쉽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온갖 이야기들을 막말로 쏟아낼 생각입니다. 수위는 막말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정도로 할 예정이며, 북대인들이 쉽게 이야기하지 못하지만 언젠인가는 이야기하고 생각해보아야할 민감한 문제들로 구성해보겠습니다. 북대에서 오래 굴렀고, 이미 욕도 영생까지는 아니지만 백년은 살 정도는 되니 이미지 생각 안하고 깔 수 있는 것 까겠습니다.

지금은 모두가 당연히 북경대 한국학생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근데 말이야. 학생회 생겨나기까지 얼마나 심한 산고를 겪었는지 니들도 알아야된다고 생각해. 솔직히 지금 남아 있는 사람 중에서 학생회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99%라고 생각해. 아니냐? 솔직히 아는 사람 손들어봐~! 읍찌?

1) 학생회 역사는 중간에 단절이 있어.
지금 학생회가 9대 학생회지? 그런데 내가 대3때 학생회가 생겼어. 그게 6대 학생회야. 그러니까 그게 2005년에 생겼어. 그럼 그 전에 5대는 대체 어디서 나온거냐고? 사실 6회 학생회 만들 때, 이걸 1대라고 해야될지 6대라고 해야될지 무지막지 고민했었어.

사실 이부분은 현재 남아있는 사람도 없고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어. 그나마 내가 이래저래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추론을 한거야. 대충 실제와 비슷하리라고 생각해. 안 비슷하면 어쩔건데? 나 떄릴거야?

사실 북대 학생회는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에 있었어. 아주아주 오래전에 말이야. 1992년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고,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많은 한국학생이 북대에 들어왔고 학생회를 만들었지. 아마 1993년에 학생회가 생겼다고 알고 있어. 그리고 5년동안 학생회가 있게 되지. 이 때의 학생회는 지금처럼 본과위주가 아니었다고 해. 그때에는 석박사생이 중심이었다고 해. 그리고 어찌어찌 유지하게 되지.

그러다가 샤오위엔 기숙사비를 왕창 올린다고 학교에서 통보를 한거야. 그래서 한국학생회에서 좀 강력하게 항의를 했나봐. 그랬더니 학교에서 한국학생회를 뭉개버렸지. 사실 뭉갠다고 해도 학교에서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일 뿐이지...실질적으로 망한것은 한심한 이전투구때문이야.

배울대로 배웠다는 석박사들이 한심하게 얼마나 대단한 권력이라고 학생회 권력을 가지려고 싸우다가 결국 학생회가 2개가 생겼대. 그리고 서로 자기가 정통이라고 빡빡 우기다가 둘 다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고 해. 대선배지만 이렇게 말해줄게. 병신들-_-

그래서 학생회가 쭈~욱 없었지. 그리고 각 과의 과대들만 있고 말이야.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2004년이 되었어. 그리고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하지. 제 1회 북경대학교 국제문화제가 열리게 돼.


2) 제 1회 북경대학교 국제문화제
북대 국제문화제는 다들 알지? 지금도 남들 부스의 2배 규모로 하고 있는 행사 말이야. 2004년의 제 1회때에는 이 국제문화제가 더 죽였어. 당시에 온갖 대사관에서 대사들과 영사들이 몰려왔지. 우리는 욕하고 그러지만 북대 나름 네임벨류가 있잖아.

그 때 활발하게 활동하던 한국인들이 모여서 국제문화제를 준비한거야. 당시에는 학생회고 머고 다 없었지. 그래도 활발한 사람들이 모였고, 그 중에서는 각 과 과대들도 다수 포함되어있었어. 서로 열심히 준비하다보니까 "우리 유학생회 부활시켜보자!"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지.

아! 비화를 살짝 이야기해주면, 당시의 국제문화제는 봄학기에 있었어.  지금은 가을학기에 하지? 왜냐면 2006년이었던가? 당시에 중일간에 감정싸움이 좀 심하게 번져서 일본쪽 전시를 하냐 마냐 했고, 다른 유학생회가 일본 안하면 할 이유가 없다고 해서 결국 가을로 미루어졌지. 그래서 지금도 가을에 하는거야.

어찌되었든 북경대학교 국제문화제가 큰 전환점이 되어서 전체 여론이 유학생회 부활로 돌아갔어. 근데 2004년에 이런 여론이 있었는데 정작 만들어진건 2005년 가을학기야. 촉 있는 사람들은 알거야. 예전에 학생회가 망한 바로 그 케이스와 그리 다르지 않은 좆같은 권력싸움이 일어난거지.


3) 제 1차 학생회준비위원회
국제문화제가 끝나자마자, 각 과의 과대들이 소집이 되서 전체 회의를 했어. 그런데 일단 모이기만 했을 뿐이야. 어떤 방법으로 만들 것인가나 구성원을 어떻게 할 것인가등등은 전혀 논의가 안되어 있었지. 그냥 국제문화제를 계기로 우리도 학생회 만들자라는 분위기만 있었어.

이제 과대들이 모여서 이제 학생회를 어떻게 만들 것이며, 어떤 식으로 다시 학교측이랑 학생들에게 인정을 받느냐 하는 것을 논의했지. 역시 핵심은 어떤 형태냐는 것이지. 그리고 여기서 의견이 처참하게 갈리게 돼. 핵심은 더러운 권력이지. 그리고 간단히 말하면 아래와 같은 선택이야.

직선제이냐? 아님 내각제이냐?
지금 학생회는 학생 스스로 학생회장을 뽑고 있지? 그게 직선제야. 한국의 대통령 선거지. 그리고 내각제는 일본의 정치시스템이야. 과대들이 투표를 해서 회장을 뽑자는거지. 어느 정치시스템이 정답인지는...사실 아무도 몰라. 일단 이야기 계속 할게.

내각파는 여기 모인 사람들이 각 과의 과대이니 만큼 현재 북대의 한국인들 중에서 가장 대표성을 가진 사람들이니 이 속에서 회장을 뽑자는 것이었고, 그 반대파는 과대들이 선관위의 역할을 하고 학생회장은 어디까지나 직접 투표를 통해서 뽑자는 것이었어. 솔직히 내각제도 말이 안되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알아? 그넘의 대통령 직선제를 실현시키려고 국민들은 온갖 삽질을 했었어. 왜냐하면 내각제는 쉽게 부폐하거든...막말로 과대면 과대지! 지들이 먼데 지들끼리 다 해먹겠다는거야? 지들끼리 샤바샤바해서,지들끼리 자리 나누어 먹고, 지들끼리 나중에 이력서에 나 한 자리 했소~ 라고 할려고?! (혹시 찌질거릴 사람을 대비해서 말해주겠는데, 나도 역사과 과대했었어. 그러니까 과대 안해봤으면서 그냥 닥쳐라는 말은 울트라 슈퍼 반사야. )

원래 처음에는 직선제파가 우세했어. 그런데 몇몇 큰 과들이 주축이 되어서 내각제로 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했지. 그리고 설득과정에 나서게 돼.  어찌되었든 그래서 파가 완전히 갈려버린거야. 그 때 당시 3번째로 큰과였던 중문과 과대가 사고를 치지. 이녀석 강력하게 직선제를 주장했었는데, 분위기가 내각제로 가니까 설문지 돌려버린거야. 이녀석 주축으로 설문지를 몇 백부를 찍어서 3교와 1교 앞에서 조사를 한거지. 질문 내용을 함축하면 ".....이러저러해서 과대들끼리 학생회를 뽑아서 가자던데 님들 생각은 어떠삼?!" 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거야.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결과는 직선제파의 압도적인 우세. "학생회 니들끼리만 만들 생각하지마라 씨발"이라는 의견이 대략 85%정도였다고 해. 그리고 그 통계결과를 가지고 전체 회의에 나간거지. 그리고 게임 오버.  이제 직선제로 추진이 되어야되는데, 원래 내각제파들이 보이콧을 했는지..아님 다른 이유인지 몰라도 붕괴가 되어버려. 참 지랄맞을 일이지. 이게 2004년의 봄학기라는 짧은 시기에 벌어진 학생회 권력싸움의 1차전이야.

그리고 학생회 준비위원회 자체는 남아있게 돼. 하지만 원론적인 이야기만 나오지. 그리고 2005년 봄학기에 들어오면 내가 과대가 되고 간접적으로 듣는게 아니고 직접 준비위원회에 기어들어가게 되는데....그리고 또 다른 파란의 봄이 오게 돼. 2005년 제 2차 학생회권력싸움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해줄게. 이미 스크롤의 압박이잖아.

사실 다음 이야기는 실명까지 까발려서 이야기 할 생각이기 때문에 나도 신중을 기해야돼. 무엇보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직접 경험한 것들이기에 더욱 구체적으로 서술해야되기에 한템포 쉬었다가 갈게. 없는 이야기는 결코 지어내지는 않을거야. 하지만 실명이 거론해서 상세하게 적을 것이니 예상하건데 반응 재미있는걸?! 명예훼손이 걱정되냐고? 명예훼손은 사실을 공익을 위해서 서술할 때에는 상관없는 일이야. 내가 구라칠 것도 아니고, 이런 내용들은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는 공익이기에 상관없어. 아님 한번 싸워보자고, 화제가 되면 지들 이미지만 안 좋아지지.


이 이야기에서 후배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우리 더럽게 살지 말자. 나중에 이력서에 한 줄 들어갈 것을 위해서 개짓하지 말자는 말이야. 잊혀지겠지라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결코 잊혀지지 않아. 나같은 똘끼들이 다시 거론하고 사람들에게 알려주니까 말이야.

그리고 잊지마. 지금은 당연히 있는 한국학생회일지는 모르지만, 만들어지기까지 수 많은 고난을 거쳐야만 했어. 물론 이런다고 학생회를 까지 말라는 말은 아냐. 나만큼 학생회 까는 인간도 드물거야. 하지만 그 만큼 애정을 가지고 더 좋은 모습이 될 수 있게 도와달라는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중국에서는 구정을 춘지에(春节 춘절)이라고 부릅니다. 한국에서 매 구정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인하여 교통대란이 벌어지는 것처럼, 중국도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문제는 한국과는 비교가 안되는 중국의 어마어마한 인구입니다.

그리고 이번 구정에서는 특히 돌아가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특히 고향에서 도시로 올라왔지만, 경제위기로 인하여 발생한 대량의 실직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지라 예전에 비해서 더욱 심각한 교통대란이 있었고, 지금은 조금 괜찮아진 상황이라고 합니다. (어느 정도였냐고 하면 후진타오가 직접 사과를 했을 정도였습니다. 이는 예년보다 귀향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기도 했지만, 부폐가 더욱 심해져서 열차표 관련 직원들이 표를 대량으로 빼돌려서 암표상에게 팔아버렸기 때문인것도 있습니다)

문제는 한국정치판에서도 그렇듯이, 일가 식구가 모두 모인 자리에서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오게 되고, 그러다가 보면 일정한 "여론"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 동안 혼자만의 생각이라고 여겨지던 것을 일가 식구들에게 확인?!받으면서 더욱 큰 소리를 낼 수 있게 되거나, 혹은 일가 식구 중에서 정치쪽으로 관심 있는 사람이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는 등등...


그래서 몇몇 전문가들은 조심스럽게 2월달을 잘 넘겨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경제위기가 아직 중국내부에서 심각하게 퍼지지 않았고, 구정 얼마전에 (비록 구체적이지도 않고 그냥 이러이러한 것이다 정도의) 다양한 정책을 정부에서 내놓은 이상 큰 문제는 없을듯 보입니다. 하지만 수 많은 실업자들의 귀향은 다양한 문제을 일으킬 것으로 보이니, 이에 대해서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냥 재미있는 것은 Happy 牛 Year 이라는 말이 여기 저기 보입니다. (사실 이건 신정부터 있었는데 그 동안 이래저래 바빠서 이제야 소개합니다.) 해피뉴이얼이라는 것은 한국사람에게도 익숙한데 중간에 牛는 머냐고요?

2009년이 소의 해인데, 소는 중국어로 牛입니다. 그리고 牛에는 소라는 뜻말고도 "죽인다!" "좋다" 정도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很牛 hen niu"라고하면 "죽인다"정도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발음이 "니우"입니다. new 와 비슷하죠. 그래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행복한 죽이는 한해가 되기를 바라는 중국인들의 말장난이었습니다. 정말 죽이는 2009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죽겠는 2009년이 되면....울어야되나. 후...


한국왔습니다. 그런데 한참동안 인터넷을 못했습니다. 덕분에 왠만하면 하루에 하나씩 글을 올리려고 했는데, 상황이 힘들군요. 이번 연휴가 끝나면 제대로 글을 올리기 시작할 예정입니다. 사실 이것저것 다양한 일들이 그 동안 벌어졌더군요.

저도 모자란 실력이지만 한마디 하고 싶어지는 "재미"있는 사건들이 말이죠. 한국쪽이든 중국쪽이든 말이죠. 곧 돌아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18일날 한국 들어갑니다. 원래는 16일이나 17일정도에 갈 예정이었는데, 그날은 밤 9시 비행기밖에 없답니다. 문제는 그럼 12시가 넘어야 공항에서 나올 수 있는데, 이 때는 공항 버스가 없습니다. 고로 택시타고 서울까지 달려야되는 나이스한 모습이 펼쳐집니다. 젠장!

그래서 그냥 속편하게 18일로 예약했습니다. 금액은 2110원이더군요. 왠지 짜증납니다. 아니..상당히 짜증이 나는군요. 덕분에 이번 겨울에 형수님때문에 들어오시는 형님과 짝짝쿵하면서 오~~래 동안 놀거 같군요......젠장..ㅠㅠ

(그 형님 덕분에 근 1년반을 방치해두었던 롱저집을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흑...힘들어 죽겠습니다. 원래는 바닥 걸래질 할 아주머니을 모셔야되는데, 그 돈을 충당할 패트병 가격은 왕창 떨어졌고, 무엇보다 정작 대략 5군데 연락을 했는데 다들 오늘은 일손이 없다더군요. 젠장-_-.....형님 오시면 알아서 부르라고 해야될거 같습니다. -_.....................형님. 사랑해요;;;;)

이번 한국행은 별 목적 없습니다. 그냥 작년에는 일본 간다고 쌩깐-_;; 시골에 내려갔다 와야겠고, 졸업논문 주제발표 관련 자료를 위해서 국회도서관에서 죽어라 프린트질 할것?! 그리고 된다면 이스라엘에 꽁짜로?!::: 다녀오는 것 정도이군요.

그리고 여친이 생겼다만....러시아로 날라가시는지라...........러시아 가기 전에 잠깐 보기는 하겠지만, 사실상 다음학기나 되야 볼 듯 합니다. 에휴...훗-_- 이것이 김바로 인생-_-!;;;



중국에서는 티스토리 접속이 안 돼?에 덧글을 남기려고 했으나....제가 중국에 있어서 티스토리는 프록시로 접근 하다보니 덧글이 쓰여지지 않아서 그냥 트랙백으로 대체합니다. (사실 제 블로그 자체는 프록시가 아닌 다른 방법이긴 하지만-_ 다른 분 것 일일이 추가하기는 귀찮...)

머....예전에 글을 올린것 링크들로 대답을 대신 하겠습니다.

하지만 위에서는 좀 문제가 있는 글들도 있군요. 차단이 심한건 사실이나 잘못된 정보는 아닌듯 합니다. 일단 티스토리는 분명히 중국쪽에서 티스토리 메인을 제외한 다른 ip 주소를 막은 것입니다. 현재 티스토리 관계자 분들이 어떻게든 뚫어보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전망이 그리 밝지는 않군요. 다만 티스토리는 (예전에 제가 당했던) 도메인+ip 동시차단이 아닌 ip만의 차단이니 만큼 다시 회복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위에 좀비님....중국에서 다음 접속은 전혀 문제 없습니다. 고로..그 후배님이 귀차니즘으로 핑계는 댄 것으로 생각되옵나이다 -_-;; 그리고 쉐아르님 소셜네트워크 성격의 싸이트를 다 차단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상당히 많은 SNS 서비스에 접속이 가능합니다. 유명 블로거들도 마음대로 차단하는 것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2008년 독일 세계 블로거대회의 중국어부분 수상자의 블로그가 폐쇄될뻔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_;;;

단지 해당 일은 9월달초에 벌어진 것인데--;; 좀 늦게 알아차리신듯 합니다. 쿨럭...
아래 글 말고도 잘 찾아보면 인터넷 관련 이야기가 좀 더 있을 겁니다. -0- 찾기 귀찮아서;;


벼락치가 완료했습니다. 원래 계획보다 2시간이나 늦어졌군요. 마지막에 "충주"녀석이 말썽을 피우는 바람에...-_-+ 정확하게 2시간내내 충주녀석하고 놀고 있었습니다. 후..이로서 이번 학기 레포트 완료했습니다. 완벽한 벼락치기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이넘의 벼락치기는 정말 그만 두어야겠습니다.

본문 딸랑 4500자. (주석이 1500자....후..) 이따구를 레폿이라고 내고 있어야되다니...물론 학술적인 창조성은 나름 있습니다. 아무도 연구해본적이 없는 곳을 건드렸으니까요. (그래서 몇 배나 힘들었습니다. 젠장..ㅠㅠ) 저도 나름 변명할 거리는 있습니다. 정말 이건 아무도 건드리지 않아서, 자료부터 혼자 알아서 씩씩하게 해야되었습니다. 나름 보람은 있었지만.....단순한 기말레포트 하겠다고 대략 5만자의 고문과 놀았던 전 멀까요? ㅠㅠ 아..레포트 쓸 때, 그 고문중에서 필요한 것만 쏙쏙 뽑아서 써서 그렇지..젠장...레포트 뒤에 묘비명이라도 가져다 붙일까..ㅠㅠ


내용은 대충 순흥 안씨, 태원 안씨, 충주 강씨, 충주 석씨가 소그드인임을 고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논리 구멍이 몇 군데 보이기도 하지만 대충 비스무리하게 마무리했습니다. 사실 안씨나 강(康)씨는 거의 90% 소그드라고 보면 됩니다. -_-;; 사료부족으로 인하여 광주안씨는 정확한 고증을 할 수 없었지만...솔직히 90% 소그드임이 확실합니다.

소그드가 머냐면...보통 서역의 상인민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중국대륙도 그렇고 한반도도 그렇고, 무관이나 문관으로 등극한 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물론 제가 볼때 이건 유가 사상에 입각한 동양의 사학이 일부러 상인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한국의 안씨와 강씨는 이 서역에서 온 상인들의 후손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음;;;

어쩌다가 살짝 살짝 안씨분들하고 강씨분들의 조상관련 덧글들을 봤는데, 순수 한국인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특히 어디서 감히 중국에서 왔다고 묻냐고 하는 덧글이 있었는데...죄송합니다. 중국도 아니고-_-;; 서역에서 왔습니다;;; 태원안씨의 경우는 빼도 박도 못하는 100%라고 생각되는군요. 이건 고증할 필요도 사실 없었습니다. "원나라때 중국태원에서 왔다"라는 사실로 사실상 게임 오버! 왜냐면 당시의 태원은 소그드인들의 집단거주지였다는 연구결과는 이미 쌓여있고~ 이쪽 계열에서는 그냥 상식처럼 되어가고 있고~~

피곤하군요. 오랜만에 밤샘했습니다. 어?? 제 생활은 원래 밤낮이 바뀌지 않았냐고요? 죄송합니다. 나름 다시 아침형..아니 새벽형 인간이 되었었는데..ㅠㅠ 이번 한방으로 주르륵 날라가버렸군요. 만쉐!! -_-;;;

이제 슬슬 준비하고 프린트 해서 선생님 편지함에 쳐박아놓고...자야겠습니다. 음하하하..ㅠㅠ 그나저나....다음 레포트에서는 본문보다 긴 주석을 시도해볼까나...-_-;; 주석주석~~ 헤롱헤롱~

그럼 잠에 취한 바로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휭휭휭~~~~
이제 한국갈 준비를 해야겠네요. 므흐흐흐흐흐....

김바로 (본명 맞습니다.-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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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주소 : ddokbaro.com (바로바로의 중얼중얼 In China)

블로그 소개 : “바로바로의 중얼중얼”은 대학교 때부터 중국에서 계속 살고 있는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의 사회, 문화, IT에 대 한 이야기와 제가 공부중인 민족사에 대한 이야기를 올리고 있습니다. 저의 졸필을 의외로 사람들이 즐겨보신 덕분에 다음블로그뉴스 황 금펜을 비롯하여 중국과 역사 관련 블로그로 조그마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탐사 대원으로서의 각오!
민족 개념을 박살내고자 중국 북경대에서 민족사 석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사실 이번 일을 신청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제 자신의 공부가 부족한데 과연 짦은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것 을 느낄 수 있느냐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가자지구일이 발생하고서 마음을 굳혔습니다. 위험하다는 의미는 그 충돌이 가장 명확 하게 보인다는 말일 것입니다. 저는 그 충돌을 회피하지 않고 직접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충돌의 원인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 을 하고, 모두가 손을 잡고 웃을 수 있는 방법을 찾겠습니다.


이미 중국에서 유학중이며 유럽과 인도와 같은 비교적 안정적인 나라 뿐만이 아니라, 험하다는 신장위구르지역도 무작정 찾아가서 몇 달 동안 생존한 만큼 악바리 정신과 적응력은 분명히 있다고 장담합니다. 또한 블로그를 단순히 일기로뿐만이 아니라 제 자신의 생각을 남 들과 소통하고, 가능하다면 널리 알리는 효과적인 도구로서 사용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비록 문과 연구생의 썩은 체력은 저도  살짝 걱정이 되지만, 문과 연구생만의 색다른 시각은 탐사원으로서의 자격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관련내용 : http://b.media.daum.net/event/kaltour/index.html

레포트 하다가 그냥 심심해서 천추태후를 거론해 본다. 참고 서적도 없고, 그냥 레포트 쓰다가 정신을 좀 놓으려고 쓰는 것이니 막나갑니다. -_-

1. 거란은 바보가 아냐 -_-;;; 동물을 앞세워서 침략을 하다니??
본인이 무식해서 거란이 맹수들을 앞세워서 공격했다는 것은 본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다. 스페샬 보고서 이 부분에서 푸욱! 하고 뿜어버렸다. 나름 잘 나가다가 이런건 좀....자제요. 뒤쪽에 보면 유가들을 비판하는 부분이 있는데, 어찌 생각하는 것은 더도말고 덜도 말고 딱 유가의 색체일까나...북방기마민족은 그냥 다 야만인?! -0-;;

2. 외교의 천재 서희라...거란을 바보로 보나?
....애들 소꿉놀이도 아니고 말로만 상대를 농락하는게 가능할거라고 생각하는가? 거란이 바보도 아니고-_-;; 나름 송나라와의 외교에서 雲十六州 냠냠 먹은 거란이란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에 대해서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정신의 "고려시대의 정치변동과 대외정책" 이라는 책이다. 심심하면 한번 보도록...(머..이 책을 보면 서희는 외교의 천재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내정의 천재일지도-0-)

간단하게 말해서, 해당 조약으로 인하여 고려는 요동은 넘볼 수 없게 되었다. 성종이 조약을 맺지 않고 그냥 물러나려고 한 것은 소극적으로 보이지만, 아예 모든 조약을 맺지 않음으로서 다시 수복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것으로도 해석을 해볼 수 있건만-0-

3. 유학자들이 역사를 쓴것이 맞긴 하다만...
그 부분은 분명히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부분이다. 역사서를 쓴다는 것 자체가 유가의 영향이 강력하고, 집필진이 유가계열이니 당연히 정치에서 배제되었을 유학자들이 왜곡 시켰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유가이기에 사실을 과장할 수도 있지만, 아예 없는 사실을 집어 넣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야되지 않을까나?

그리고 유가들은 기본적으로 호국사상이고, 위에서도 말했지만 "중국" 이외의 다른 민족이나 문명은 다 야만인으로 보고, 본인이 알기로 태조(왕건)의 정치적 배경은 불교세력과 호족무장세력이고, 유가들은 그리 배려를 받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천추태후가 태조의 정신을 이어받았다라....음....머.

4. 그냥 "천추태후"로만 해서 나온 사료중 일부...
千秋太后皇甫氏,逼大良院君詢,爲僧,初洞州人金致陽,太后外族,性姦巧,嘗詐祝髮,出入千秋宮,頗有醜聲,成宗,杖配遠地,成宗,薨,召授閤門通事舍人,不數年, 貴寵無比,百官予奪,皆出其手,親黨布列,勢傾中外,起第至三百餘間,臺榭園池,窮極美麗,日夜與太后遊戲,無所畏忌,洞州立祠,額曰星宿寺,又於宮城西 北隅,立十王寺,其圖像,奇怪難狀,潛懷異志,以求陰助,凡器皿,皆銘其意,其鍾銘曰,當生東國之時,同修善種,後往西方之日,共證菩提,王,常欲黜之, 恐傷母志,不敢也,至是,太后生子,是私致陽所生也,與致陽,謀爲王後,忌大良君,强令出家,大良君,時年十二,後,寓居三角山神穴寺,太后潛遣人,謀害 者屢矣,寺有老僧,穴地室中,匿之,而上置臥榻,以防不測。

-- 高麗史節要 卷之 穆宗宣讓大王

천추태후(千秋太后) 황보씨(皇甫氏)가 대량군(大良君) 순(詢)을 핍박하여 중이 되게 하였다. 예전에 동주(洞州 황해 서흥군(瑞興郡)) 사람 김치양(金致陽)은 태후의 외족(外族)으로 성품이 간교하였다. 일찍이 머리를 깎고 중이라 하면서 남들을 속이고 천추태후의 궁에 드나들어 자못 추잡한 소문이 있었으므로 성종이 장형(杖刑)을 내리고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냈다. 그런데 성종이 훙하자 왕이 그를 불러다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에 임명하여, 몇 년 되기도 전에 귀하고 총애를 받는 것이 비할 데가 없었다. 백관에게 벼슬을 주고 빼앗는 일이 모두 그 손에서 결정되었으며, 친당(親黨)이 조정에 늘어서서 세력이 조야에 떨쳤다. 집을 지었는데 3백여 칸이나 되며, 누대와 정자ㆍ동산과 못이 극도로 화려하였다. 밤낮으로 태후와 놀고 희롱하여 아무런 두려움이나 꺼림이 없었다. 동주(洞州)에 절[祠]을 세워 이름을 성수사(星宿寺)라 하고, 또 궁성의 서북 모퉁이에 시왕사(十王寺)를 세웠는데, 그 그림의 형상이 기괴하여 형용하기 어려웠다. 몰래 딴 뜻을 품고 음조(陰助)를 구하여 모든 기명(器皿)에 그 뜻을 새겼다. 그 종(鐘)에 새기기를, “동국(東國)에 태어난 당세에는 태후와 같이 선종(善種)을 닦고, 서방(西方 극락세계)으로 가는 뒷날에는 태후와 함께 보리(菩提)를 증(證) 하리라." 하였다. 왕이 항상 이를 내쫓고자 하였으나,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 감히 내쫓지 못하였다. 이때에 와서 태후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치양과 관계하여 낳은 아이였다. 태후는 치양과 모의하여 왕의 후사로 삼으려 하였으나, 대량군(大良君)을 꺼려서 강제로 그를 출가하게 하니 대량군이 이때 나이 12세였다. 후에 삼각산(三角山) 신혈사(神穴寺)에 거처하였는데, 태후가 몰래 사람을 보내어 해치려고 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절의 늙은 중이 방 가운데를 파서 지하실을 만들어 대량군을 숨기고는 그 위에 침상을 놓아 예측할 수 없는 변고를 막았다.

○辛未,王,疾篤,召太子欽,屬以後事,俄而薨于重光殿,上諡元文,廟號顯宗,太子,卽位,居翼室,朝夕哀臨。
史臣崔冲,曰,傳稱天將興之,誰能廢之,千秋太后,自縱淫荒,潛圖傾奪,穆宗,知百姓之屬望,排千秋之惡黨,遠馳使命,以授神器,俾固本支,所謂天之將興,誰能廢之者,詎不信歟,然,以姨母貽孼,戎臣構逆,强隣伺釁,京闕俱燼,乘輿播遷,艱否極矣,反正之後,和戎結好,偃革修文,薄賦輕徭,登崇俊良,修政公平,內外底寧,農桑屢稔,可謂中興之主矣。
李齊賢曰,崔冲之言,世所謂命也,勾踐,嘗膽,雪恥會稽,小白,忘莒,遺患於齊,人君,恃有天命,縱欲敗度,雖得之,必失之,是故,君子,理思亂,安思危,愼終如始,以對天休,如顯宗,所謂吾無間然者乎。
甲戌,王,率群臣成服,百姓,玄冠素服。

-- 高麗史節要 卷之三  顯宗元文大王

신미일에 왕의 병환이 위독하자 태자 흠(欽)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고 조금 후에 중광전(重光殿)에서 훙하였다. 시호를 원문(元文)이라 올리고 묘호를 현종(顯宗)이라 하였다. 태자가 즉위하여 익실(翼室)에 거처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슬피 울었다.
사신(史臣) 최충(崔冲)이 말하기를, “옛글에 일컫기를, '하늘이 장차 일으키려 하면 누가 능히 그를 폐 하리오.' 라고 하였다. 천추태후(千秋太后) 가 음란하고 방종하여 몰래 나라를 위태롭게 하여 왕위를 빼앗으려 하였는데, 목종께서 백성들이 현종의 촉망함을 알아 천추태후의 악당(惡黨)을 배제하고 멀리 사자를 빨리 보내 맞아와 왕위를 전하여 왕실이 튼튼하도록 하였으니, 이른바 '하늘이 장차 일으키려 하면 누가 능히 그를 폐하리오.' 하는 말을 어찌 믿지 아니하랴. 그러나 이모(姨母 천추태후)가 끼친 화근으로 인하여 병권(兵權)을 가진 신하[戎臣 강조(康兆)를 가리킴]가 반역을 일으키고, 강한 인국(隣國 거란)이 틈을 엿보아 침범하여 서울의 궁궐이 모두 잿더미가 되어 임금이 파천하니 불행이 극도에 달하였다. 반정(反正)한 뒤에는 오랑캐와 화호를 맺고, 전쟁을 멈추고 문덕(文德)을 닦으며, 부세를 가볍게 하고 요역을 가볍게 하며, 준수한 인재를 등용하고 정사를 공평하게 하여 서울과 지방이 평안하고 농업과 잠업이 자주 풍년이 들었으니 나라를 중흥시킨 왕이라 이를 수 있다." 하였다.
이제현이 말하기를, “최중의 말은 세상에서 이른바 천명(天命)이다. 구천(句踐)은 쓸개를 씹어 회계산(會稽山)의 치욕을 씻었고,소백(小白)은 거(莒)의 고난(苦難)을 잊었기 때문에 화환(禍患)을 제(齊) 나라에 남기었다. 왕이 천명만 믿고 욕심을 방종히 부려 법도를 파괴하면 비록 나라를 얻었을지라도 반드시 잃고 마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군자는 세상이 다스려질 때에 어지러워질까 생각하고 편안할 때에 위태로워질까 생각하여, 끝을 신중히 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여 천명에 보답하니, 현종과 같은 이는 공자가 이른바 '나는 그에게 불만이 없다.'는 것이다." 하였다.
신라를 자신들의 뿌리로 여긴 여진족이 그들의 원류를 찾고자, 중국의 역대 사서와 서적에서 만주와 한반도에 관련된 자료를 모두 뽑아서 유목민의 관점에서 일일이 고증하여 수록한 책이다. 1,777년 청(淸)의 건륭제의 지시에 의해 43명의 학자가 참여하여 부족ㆍ강역ㆍ산천ㆍ국속(國俗) 등 4개 부문으로 나누어 총 20권으로 편찬된 책이기에 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르는 역사서이자 문화사적 서적이라 볼 수 있다.

만주원류고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비중 있게 인용한 뒤로 우리의 상고사와 고대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번은 접하고 넘어가야 할 책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다른 각도로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즐겨 인용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두 가지 이유로 우리들의 주목을 받는다. 한민족과 같은 계열인 여진족의 청(淸)이 그들의 시각을 담아 고증하여 편찬했다는 점과 중국의 정통사서가 중국을 중심축으로 만주를 분절시켜 기술한 데 반해 만주가 중심이 되어 각 시대별로 사건 기사가 집대성되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의 이동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알라딘 중에서


본인 아직 이 책을 보지는 못했다. 원문으로는 몇 번 접해봤지만, 국역버젼은 그 동안 한국에 들어가지 못해서 접해보지는 못했다. 하지만....설명만으로 많은 것을 느끼게 하고 있고....개인적으로 좀 문제가 있는 해석이 아닌가 싶다.

만주원류고는 중국에서조차(서양학계도 그렇고) 자신들의 민족을 형성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허구의 역사서로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만주를 강조한 것은 당시에 한족에게 점차 융화되어가는 만주족을 위해서였고, 이로서 탄생된 만주족은 단순히 여진족뿐만이 아니라, 몽고족,한족, 조선족등 다양한 민족을 아우르게 된다.

...머...그냥 간단하게 말해서...(모든 역사서가 그게그거 이지만) 아주 분명한 목적하에 작성된 글이라는 것이다. 관방사학의 극치라는 것이지. 그런데 이것이 (특히 환빠들의) 입맛에 맞는다고 좋다고 하는건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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