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절 : 영웅 아버지와 병신 아들
2. 영웅 아버지와 병신 아들

* 모범 근로자 수문제(隋文帝)

수문제의 위대한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중국 역사상의 황제들은 대부분 수 많은 첩들에게 둘러쌓여 있었지요.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수는 천왕(天王) 홍수전(洪秀全)이 아닐까 싶습니다. 백 명이 넘어서 이름이 아닌 번호만이 있었다고 하지요. 오늘은 001번에서 007번까지~ 내일은 230번부터 250번까지~[각주:1] 이런 복이 넘쳐흐르는 황제들 중에서 오직 2명의 황제만이 첩이 없었답니다. 바로 수문제(隋文帝)와 명효종(明孝宗)이죠.


명효종은 그가 태자였을 때부터 장황후와 사이가 매우 좋았습니다. 그래서 즉위를 하고서는 첩을 받지 않았던 것이지요[각주:2]. 그에 비해서 수문제가 첩들이 없었던 이유는 그가 너무 바빴기 때문입니다. 일벌래의 극치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언제나 정사를 생각하고, 매일매일 조회에 참석하거나 날을 세우고는 하였다" 만약 드라마에서처럼 황제가 매일 매일 조회에 참석한다면 아마 과로사를 할 것이 분명합니다.

매우 근면했다는 청나라 황제들도 10일에 한번씩만 조회를 했을 뿐입니다. 물론 황제에게는 매일 매일 처리해야될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군기대신(军机大臣)을 만나서 처리하였지요. 군기대신을 만나는 것은 지금으로 따지면 선생님이 학급반장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매일 매일 학급회의를 할 수는 없으니 일주일에 한번씩만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선생님은 학급반장을 만나서 일처리를 부탁하고 중요한 일들을 전달 받는 것이지요.

청나라때 조정의 조회는 궁전안에서 한 것이 아닙니다. 수 많은 대신을 궁전 안에 들여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궁전이 아닌 건청문(乾清门)과 어문(御门)에서 조회를 했습니다.  황제야 건청문의 굴 속에서 앉아 있으면 되지만, 대신들은 영하 30도의 추위에도 광장에서 대기를 해야했지요. 황제야 추우면 손난로나 모피를 입어서 곰탱이 같았고, 영상 30도의 더위에서는 햇빛 가리개와 부채가 동원이 되었지요.

사극을 보고 있으면 대신들이 궁전 안에 들어와서 조회를 합니다. 청나라 황제들의 정사는 모두가 양심전(养心殿)에서 이루어지는데, 그 좁은 장소에는 몇 명밖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잘해봐야 몇 명이 되지 않는 군기대신들이나 들어올 수 있었지요. 그래서 건륭(乾隆), 용정(雍正), 강희(康熙)들의 영명한 군주라는 사람들은 매일 매일 조회를 보고, 매일 밤샘을 하면서 조정의 일들을 처리하였지요. 또한 책을 보다가 밤을 새는 것도 부지기수이고, 그러면서도 다음날 곧장 조회를 보고는 했습니다. 참 대단하죠?


보통 황제가 조회에 나오는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빠릅니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았던, 4시면 기상을 하고는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컴퓨터도 없었고, 클럽도 없었습니다. 그냥 어두워지면 잤으니 저녁 8시 반이나 9시면 잠을 잤기 때문이지요. 황제 역시 해가 뜨면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쉬었습니다. 새벽 4~5시면 어둠을 헤지고 조회에 참석을 하여서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시간까지, 하루 종일 일처리를 했습니다.


"오품이상은 부름을 받으면 국정에 대해서 논하여야 한다. 五品以上,引之论事" 다시 말해서 오품 이상의 관직을 가지고 있는 자는 황제가 부르면 달려와서 국정에 대해서 의견을 발표해야된다는 소리입니다. 청나라에서는 4품 이상만이 황제를 볼 수 잇었습니다. 당시 중앙정부의 관원은 모두가 4품이상이었고, 지방에 있는 사람은 3품 이상이어야지만 황제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5품의 지부(知府)와 같은 지방관리는 황제를 못 만나는 것이지요. 3품의 보정사(布政司)나 안찰사(按察司)급은 되야지 만날 수 잇었습니다. 그런데 수문제는 그 당시 오품이상의 사람들을 불러서 국정에 대해서 논하게 하였습니다. 아마 청나라의 저글링때와 같은 관원숫자보다 적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당직을 서는 사람들과 같이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宿卫之士,传餐而食" 수문제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밥을 먹었습니다. 보통 황제들은 밥을 무조건 혼자 먹습니다. 절대 다른 사람과 같이 먹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밥 먹는 틈에 독살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오늘 황제가 황후를 불러서 같이 저녁을 먹는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 둘은 결코 같은 방에서 먹지 않습니다. 황제가 건청궁 서원각(乾清宫西暖阁)에 있다면 황후는 동원각(东暖阁)에 있게 됩니다. 이럴 때 만약 황제가 개고기찜을 먹고 맛있다고 생각되면, 황후에게 한 그릇을 보냅니다. 황후는 토 쏠리는 것 같아도 황제의 성은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고기 자체를 먹고 싶지 않아도 황제폐하의 성은에 감동의 도가니가 되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수문제는 여러 사람들과 같은 자리에서 같이 먹었습니다. 이 얼마나 효율을 중요시 하는 사람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수문제의 황후인 독고(独孤)씨도 역시 현명하다고 칭송되는데, 그를 더욱 더 열심히 일하도록 계속 기운을 북돋아 줍니다.


이런 수문제의 모습은 극도로 부패했던 남조의 진(陈)나라와 비교하면 더욱 놀랍습니다. 진나라의 군주 진숙보(陈叔宝)는 중국의 역사상 유명한 망국의 군주입니다. 당대의 유명한 시인 두목(杜牧)의 박진회(泊秦淮[각주:3])에서 나오는 후정화(后庭花)가 바로 진숙보가 즐겨 부르던 노래로 망국의 노래로 등극하였습니다.

수나라 군대가 진나라의 황궁으로 돌입할 때, 진숙보는 우물에 몸을 숨깁니다. 수나라 병사들은 그를 찾다가 우물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서는 말합니다. "지금 당장 안나오면 돌을 던지겠다고" 그러자 안쪽에서 "던지지 마요. 던지지 마. 우리 좀 끌어올려줘요." 그들을 끌어올리자 진숙보와 황후 그리고 귀비까지 3명이 엉켜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양광(杨广)이 그 귀비를 보고서는 자신이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수군의 대자 한금호(韩擒虎" "이년 때문에 진나라가 망한거야. 근데 이 년을 원한다고?" 단칼에 양광을 두동강 내버립니다. 괜히 여자 밝히다 죽은 양광에게 애도를....


수나라는 진나라를 명말시킨 이후에 공사를 시작합니다.

1. 장안과 낙양을 재건합니다.
수문제는 장안에 대흥성(大兴城)을 만들고, 수양제(隋炀帝)는 낙양에 동쪽 수도를 만듭니다. 이 둘을 합쳐서 양경(두 수도 两京)라고 하고, 서쪽 수도는 장안이며, 동쪽 수도는 낙양입니다.

2. 전국에 창고를 건설합니다.
이 창고가 무식했냐면은 수나라의 한 양식창고는 함가창(含嘉仓)이라고 불리는데, 고고학자들이 이 함가창을 발굴하면서 대략적인 통계를 내었습니다. 함가창에는 총 259개의 식량 저장고가  있었는데, 한 저장고 안에서 이미 탄화된 곡식 약 300만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런 식량저장고가 259개가 있으니 얼마나 무식하게 곡식을 쌓아놓았는지 아시리라 봅니다. 그리고 이것이 끝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함가창 말고도 낙구창(洛口仓)이니 경낙창(京洛仓)등과 같은 곳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수나라의 양식 비축량은 무시무시할 정도였을 것입니다.

또 다른 "중국사는 장난감이다" 를 보고 싶으신가요? 누르세요~

"중국사는 장난감이다."에 대해서 궁금하신 분은 위엔텅페이의 <중국사는 장난감이다>

본 글은 모든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과 환영합니다. 
본 글은 의역식 번역입니다.
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1. 백제 의자왕의 3000궁녀가 있지요. 하지만 해당 이야기는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조에 실려 있고 정확한 숫자는 없습니다. 이후 조선 초의 문신 김흔(金訢)이 〈낙화암〉이란 시에서 “삼천의 가무 모래에 몸을 맡겨 / 꽃 지고 옥 부서지듯 물 따라 가버렸네(三千歌舞委沙塵 / 紅殘玉碎隨水逝)”라고 읊은 것이 “3천”이라는 수효에 대한 첫 언급이니 실제로 3000명은 아닐것입니다. [본문으로]
  2. 사실 황제에게는 첩을 받아야되는 "의무"가 있습니다. 황제는 그 자손을 번창시켜야되는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3. 烟笼寒水月笼沙,夜泊秦淮近酒家,商女不知亡国恨,隔江犹唱后庭花; 중국인들에게는 워낙 유명한 것인데 한국인들에게는 좀 어색할듯 합니다. 두목이 당 말기 귀족들의 퇴폐적인 모습을 비판한 시입니다. [본문으로]
정확하게 말해서 현재 이미 정해둔 블로그 운영규칙을 정확하게 지키겠다는 소리입니다. 현재의 블로그 운영규칙의 2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2) 모든 사용자들에게 덧글을 쓸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비속어가 들어가 있는, 누가봐도 문제가 있는 덧글과 광고글이 아니라면 결코 덧글을 지우지 않는다. 특별히 오해를 하고 있는 덧글이나 급한 질문을 제외한 덧글에는 참고 대답하지 않는다. (본인 성격상 당연히 대답해야겠지만..) 안 그러면...이제 바빠지는 본인에게는 너무 부담이 된다. 이 부분 양해부탁드린다.

그러나 역시나 예상했던대로 본인의 성격상 결국은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일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비속어가 들어가 있는 모든 덧글, 상호 존중하지 않는  덧글, 본문과 상관이 없는 모든 덧글, 증거나 논리도 없이 무작정 틀렸다고 하는 모든 덧글등등에 대해서는 결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만약 제가 또 대답을 하면 여러분들이 정신차리고 대답하지 말라고 해주시기 바랍니다.

전 이제 가장 바쁜 시기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덧글이 소중하고, 인터넷을 통해서 만나는 인연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기에 지금까지 모든 덧글에 대해서 답글을 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중하고 좋은 인연이 있으면, 짜증나고 나쁜 인연도 있는 법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닭으며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미 제 블로그를 자주 오는 분들이 예전부터 "악플"에 대한 친절한 덧글을 그만두라고 해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식으로 똑같이 대접해서 시니컬하게 까버리는 답글을 달고 있었으나 이제 그것도 그만두도록 하겠습니다. 여친님의 표현대로 저 자신이 상당히 저질이고 한심해 보이니 말입니다. 그렇기에 최소한 내년 6월까지는 이 규칙을 유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대해서 오해를 하시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 프로필 사진 변경.
중국에 잠시 온 오빵으로부터 올해 초에 찍었던 사진을 넘겨받았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이른바 엽기사진이지만 그 중에 사진 하나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분들에게 문의를 해본 결과 "지금 것보다야 백배는 좋지"의 반응을 얻어냈습니다.(....먼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시면 지는 겁니다;;;;;)



................................................오랜만에 프로필 사진을 바꾸는 것이니 기분이 좀 이상하고 어색하군요. 그래도 딱딱한 표정의 사진보다는 웃는 사진으로 바꾸고 싶었습니다. 저 스스로가 웃는 걸 좋아하면서 블로그 사진은 너무 딱딱했었거든요^^:::

그리고 오빵에게는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해본다. 죽어! ^^;;;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 Alexander the Great)의 동방원정루트와 주요 전투를 정리한 지도입니다. 영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가 본 아마츄어계열의 역사지도 중에서 가장 공이 많이 들어간 지도로 생각됩니다. (본 지도는 제가 제작하지 않았습니다.)


(용량이 커서...그래봤자 3M지만....느린 인터넷 속도로 업이 안되는군요. 원문으로 가서 다운!)

원문링크 : Battles and Routes of Alexander the Great

지금까지 제가 본 고대역사지도 중에 가장 공이 들어갔다고 생각되는 지도입니다. 장소비정과 루트는 기본이고, 사진이나 과거 지도까지 예쁘게 들어가 있습니다. 정말 무한 삽질을 했다는 것이 느껴지는 지도입니다. 단지 몇몇 실제지도파일 링크는 현재 깨져 있습니다.

이 지도에 대한 피드백은 원문링크쪽에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원문링크가 있는 곳은 다양한 구글지도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단지 동양고대사나 중앙아시아 고대사쪽으로는 괜찮은 것들이 없어서 좀 많이 아쉽습니다. 저와 같은 경우 일일이 영어로 지명을 따로 달아주기가 귀.찮.기.에. 만들어도 저 곳에 올리기가 머하군요.(지명도 한글-한자를 넘나드는 인간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마셔요-0-)

구글어스를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구글 어스 홈페이지 : http://earth.google.com/intl/ko/

구글 어스는 구글에서 제공하는 무료소프트웨어입니다. 그 중에서 구글어스를 통해서 좌표나 선을 이용해서 자신만의 지도를 만들 수 있는 기능이 있습니다. 이러한 파일들은 KML으로 저장됩니다. 구글어스가 설치되어 있다면, KML 파일을 클릭만 하여도 자동으로 위의 화면이 나타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강력추천하는 소프트입니다. 특히 저 같은 비전공자?!가 아닌 한국에서 교통사나 역사지리 하는 분들이 구글어스를 이용해서 다양한 KML을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참고로 중국의 복단대와 미국의 하버드대는 현재 청대의 역사지도를 거의 완성하였고, 계속 앞시대로 나갈 계획입니다. 한국도 조선시대와 고려시대까지는 현재의 문헌으로도 나름 정확하게 복원이 가능하리라 봅니다.



명(明) 정화(鄭和)의 남해원정루트를 재현한 지도입니다. 영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정화의 함대는 동남아시아, 인도를 거쳐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까지 항해해서 가장 멀리간 지점은 아프리카 동해안의 마린티(현재 케냐의 마린티)였다고 합니다. (본 지도는 제가 제작하지 않았습니다.)



원문링크 : The Voyages of Admiral Zheng He 1405-1433

해당 지도를 전에 소개해드린 해상실크로드가 부족한 12C 이전의 실크로드루트와 합치면 비교적 완벽한 실크로드 루트라고 할 수 있는 지도가 완성됩니다. 지도의 품질은 상당히 괜찮아보입니다. 보통 루트 하나만 표시하고 마는데, 예상 루트 여러가지를 다 표시해놓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제 전공이 아니라서 장소비정이 잘 되었는지 감이 전혀 안오기는 합니다. 하하^^:::

이 지도에 대한 피드백은 원문링크쪽에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원문링크가 있는 곳은 다양한 구글지도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단지 동양고대사나 중앙아시아 고대사쪽으로는 괜찮은 것들이 없어서 좀 많이 아쉽습니다. 저와 같은 경우 일일이 영어로 지명을 따로 달아주기가 귀.찮.기.에. 만들어도 저 곳에 올리기가 머하군요.(지명도 한글-한자를 넘나드는 인간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마셔요-0-)

구글어스를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구글 어스 홈페이지 : http://earth.google.com/intl/ko/

구글 어스는 구글에서 제공하는 무료소프트웨어입니다. 그 중에서 구글어스를 통해서 좌표나 선을 이용해서 자신만의 지도를 만들 수 있는 기능이 있습니다. 이러한 파일들은 KML으로 저장됩니다. 구글어스가 설치되어 있다면, KML 파일을 클릭만 하여도 자동으로 위의 화면이 나타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강력추천하는 소프트입니다. 특히 저 같은 비전공자?!가 아닌 한국에서 교통사나 역사지리 하는 분들이 구글어스를 이용해서 다양한 KML을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참고로 중국의 복단대와 미국의 하버드대는 현재 청대의 역사지도를 거의 완성하였고, 계속 앞시대로 나갈 계획입니다. 한국도 조선시대와 고려시대까지는 현재의 문헌으로도 나름 정확하게 복원이 가능하리라 봅니다.

현재 중국에서는 트위터접속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미 접속차단에 익숙한 많은 중국네티즌들은 여유롭게 차단을 뚫고 트위터에 접속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경찰이 와서 긴급체포을 당하기 직전까지 트위터를 하고, 나중에는 휴대폰으로 경찰서의 상활까지 중계를 한 경우까지 있었지요.

특히 중국어를 배우시는 분들은 해당 목록을 추가하시면, 아무래도 정부에 의해서 막힌 것을 뚫는 인간들이니만큼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실전 중국어를 보면서 중국어 공부를 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방송매체-사회운동가-IT 리더등의 중국인의 목소리를 실제로 들어보는건 어떨까요? ^^


https://spreadsheets.google.com/pub?key=tcPtOcMbGKQVNh1VuXrFDYQ&output=html

지금 현재도 계속 업데이트가 되고 있습니다. 굳이 모든 사람들을 다 추가하려고 하지 마시고, 간단한 이력을 보고 마음에 드는 분들을 하면서 점차 늘려가는 것을 추천해드립니다. 어차피 저 사람들끼리도 연결망이 있으니 자동적으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



오늘 트위터로 구본권기자님이 "한겨레 구본권입니다. 중국 인터넷실명제 얘기가 보도돼서요. 현지에서도 알고 있는 얘긴가요? 중국에선 우리나라처럼 전국민이 고유한 식별번호를 갖고 있나요? 공민증 번호?"라는 글을 보내주셨다. 요즘 논문을 쓰느라 IT에 관심을 거의 끊었지만, 이정도로 큰 일을 모르다니 나도 다 죽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소식은 전혀 사실무근이었다.

중국이 한국의 ‘인터넷 실명제’ 따라 하기에 나서면서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실명제 선두국가’로 소개되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지난 6일 베이징발로 중국이 지난달 초부터 사전예고 없이 시나, 소후, 넷이즈 등 주요 뉴스포털에서 댓글을 달거나 로그인을 할 때 이용자들의 실명과 신분증(공민증) 번호를 요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뉴욕 타임스>는 중국의 포털 편집책임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지난 7월 말 중국 국무원 신문판공실에서 비밀리에 내려온 지시에 따라 미등록 사용자가 로그인할 때 실명과 신분증 번호를 요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은 그동안 피시방 이용 때 실명 확인을 거치도록 하거나, 올해 초 항저우 시의회가 인터넷 실명제를 추진하다 반발로 중단한 적이 있을 뿐 전국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포털에 실명제를 적용한 적은 없다.

중국, ‘인터넷 실명제’ 한국 따라하기?


그래서 본인은 구본권 기자님에게 분명히 "중국인터넷실명제보도는 일본의 한 학회에서 중국의 학자들이 "실행할 시기가 되었다"라고 해서 실행하는 것처럼 보도가 되는듯 싶습니다. " "직접 뉴욕타임즈가 지적한 싸이트 중에 신랑쪽에 로그인해서 확인해봤습니다. 결론은.....뉴욕타임즈. 심히 잘못 쓴거 같습니다. 혹은 먼가 오해한듯 하군요."라고 보냈었다. 그런데도 이 기사를 내보내셨다.

구본권기자님. 저에게 확인을 하셨으면서 굳이 이 기사를 쓰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저에게 확인까지 하셨을 정도로 사실관계 확인을 게을리하지 않는 분이 사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아시고도 굳이 기사로 쓴 것은 심히 유감입니다.

현재 중국의 포털은 실명제를 실시하고 있지 않으며, 만약 실행을 한다면 본인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전할 것이다. 그리고 진정 실명제라면 이미 난리가 났어야 정상이고, 본인의 친구들 중에 특히 이런것에 민감한 녀석들이 알려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아직은 없다. 2006년부터 주구장창 실명제를 실행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네티즌의 반대는 둘째로 치고, 중국의 시스템으로는 아직 제대로 된 인터넷 실명제를 구현해낼 수 없어 보인다.


위의 지도는 클릭하면 확대되어서 크게 나옵니다. 잘 보이지 않는 분은 클릭!

왼쪽의 지도는 한국의 환단고기빠들이 환국 혹은 대쥬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영역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의 지도는 중국의 중화빠들이 만든 대중국 영역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저는 이 말을 꼭 하고 싶네요. "니들 대체 다른게 머냐? 웃기는 쉐리들 -_-"

둘 다 우리민족이 최고이고, 최고여야 된다는 발상에서 어떻게든 크게 만들려고 삽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차이를 나눈다면, 중국의 중화빠들은 미래의 영토나 여기서는 소개를 안했으나 몽골의 원나라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한국의 환빠들은 증거도 하나 없이 상고시대에 자신들 마음대로 환국이니 대쥬신따위의 영역을 만든 것이다.

환빠들도 슬슬 "미래의 대쥬신" 지도나 그려보는 것은 어떠한가? 중화빠들도 "상고시대의 대중화"을 그려보고 말이다. 그리고 환빠와 중화빠가 손 잡고 그냥 세계는 우리꺼~ 라고 하지? 둘이서 참~~ 잘 어울리는데 말이야^^


정리 : 어느 나라에나 스스로의 자존심을 스스로 세우지 못하고, 외부의 것에 의지하려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 정도가 지나치면 환빠나 중화빠 같은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들은 저런 길로 절대 가서는 안될 것이고,

상대국의 저런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 사람만으로 상대국을 평가하지 말고 그냥 "미친개에 물렸구나"라고 생각하면 된다.


덧 : 너무 시니컬하게 적은 듯하다. 나름 유머러스하게 쓰려고 계획했었는데 쓰다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엔닌이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루트를 <入唐求法巡禮行記>을 토대로 재현한 지도입니다. 엔닌은 일본의 고승으로서 당나라에 불법을 공부하러 갔다가 돌아오면서 <입당구법순례행기>을 작성한다. 해당 글에는 장보고를 비롯한 당시의 동북아시아 국제정세와 해상무역에 대한 이야기가 풍부하게 담겨 있다.




본 지도는 몇몇 논문들을 참고로 재현되었다. 그러나 이 지도를 찍고서 해당 논문들은 현재 본인이 쓰는 논문들과 직접관계가 없어서 지워버렸다. 그리고 멍청한 본인은 그 논문들이 생각나지 않는다. 물론 찾으려면 찾을 수 있겠으나, 귀찮음에 패스한다. 음하하하;;;

이것 말고 다른 신라의 해상교통로도 있으나 일단 이것부터 올리고자 한다. 다른 것은 좀 문제가 많은 것들이 있어서 일단은 이것으로 만족해주시기 바란다. 혹시 역사시대 동북아시아의 교통로중에서 본인이 대신 찍어주었으면 하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덧글로 요청하시길 바란다. 엄격한 고증까지는 귀찮아서 못하지만,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해드릴 수 있다. ^^:::

구글어스를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구글 어스 홈페이지 : http://earth.google.com/intl/ko/

구글 어스는 구글에서 제공하는 무료소프트웨어입니다. 그 중에서 구글어스를 통해서 좌표나 선을 이용해서 자신만의 지도를 만들 수 있는 기능이 있습니다. 이러한 파일들은 KML으로 저장됩니다. 구글어스가 설치되어 있다면, KML 파일을 클릭만 하여도 자동으로 위의 화면이 나타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강력추천하는 소프트입니다. 특히 저 같은 비전공자?!가 아닌 한국에서 교통사나 역사지리 하는 분들이 구글어스를 이용해서 다양한 KML을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참고로 중국의 복단대와 미국의 하버드대는 현재 청대의 역사지도를 거의 완성하였고, 계속 앞시대로 나갈 계획입니다. 한국도 조선시대와 고려시대까지는 현재의 문헌으로도 나름 정확하게 복원이 가능하리라 봅니다.

만두님이 방명록을 통해서 최근 역사스페셜에서 방송한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신라의 후예였다!"에 대해서 문의를 해주셨습니다. 저도 한때 역사스패셜을 좋아해서 역사을 너무나 좋아하게 되었던 만큼, 최근 역사스패셜이 주류의 의견보다는 소수의 의견이나 심지어 유사역사학의 해석쪽으로 향하며,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소재만을 내보내고 있었다고 걱정되고 있었습니다.

금나라쪽은 제 전공은 아닙니다. 제가 비록 북방민족사전공으로 막말로 통사로 이것저것 다 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역사학에도 세분화된 전공이 있고, 그 외의 사항에 대해서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그래도 명색이 북방민족사전공이고, 그래도 일반분들보다는 조금은 더 고문이나 방법론에 익숙하기에 써보겠습니다. 그냥 기본적인 역사학의 방법론을 이용해서 여러분들이 되도록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판해보겠습니다[각주:1].

* 어떤 분이 덧글로 실제로 보라고 해서 보고서 추가부분을 작성하였습니다. 기존의 것에는 수정도 필요없다고 생각됩니다. 차라리 안보는게 역사스페셜에 대해서 더 좋게 생각할 수 있었을듯 합니다.


* 잠깐 쓴소리 : 중원에서 최초로 한족을 밀어낸 금태조 아골타라는 설명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가? 화제성도 좋지만 남북조시대의 북조와 오호십육국은 한족을 밀어내지 않았다는 것인가? 보통 한족으로 알고 있는 수당도 선비(鲜卑)족이 통치계급이라고 말해지는데 이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것도 역사왜곡이다.[각주:2]


1) 금태조 아골타의 시조에 대한 사료.(그냥 뛰어넘어도 무방-_)

1- 金之始祖諱函普 初從高麗來 年已六十餘矣阿古廼好佛 留高麗不肯從曰 後世子孫必有能相聚者 吾不能去也 獨與弟保活里俱. 始祖居完顏部僕幹水之涯 保活里耶懶 其後胡十門以曷蘇館太祖自言 其祖兄弟三人相別而去 蓋自謂阿古廼之後 石土門迪古保活里之裔也 及太祖敗遼兵于境上獲耶律謝十乃使梁福幹答剌招諭渤海人曰 女直渤海本同一家 蓋其初皆勿吉之七部也 始祖至完顏部居久之 其部人嘗殺它族之人 由是兩族交惡鬨鬭不能解 完顏部人謂始祖曰 若能為部人解此怨 使兩族不相殺部 有賢女年六十而未嫁 當以相配仍為同部
[元] 脱脱撰《金史》[각주:3]卷一本紀第一

중요부분 해석 : 금의 시조는 함보(函普)로서 고려(高麗)에서 왔을 때 나이가 60여세였다.......동생인 보활리(保活里)만 같이 와서, 시조는 僕幹水연안의 완안부(完顏部)에 살았고, 그 동생은 耶懶에 살았다.......발해인에게 말하기를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가족이다. 처음 물길(勿吉)의 7부족중에 하나였다. 시조가 완연부로 와서 오래 살았는데...."

2- 女真酋長[각주:4]乃新羅人號完顏氏 完顏猶漢言王也 女真以其練事後隨以首領讓之兄弟三人一爲熟女真酋長號萬戶其一適他國  完顏年六十餘 女真妻之以女亦六十餘 生二子 其長即胡來也自此傳三人 至楊哥太師無子 以其姪阿骨打之弟 謚曰文烈者 爲子其後楊哥生子闥辣乃令文烈歸宗
[宋]洪皓[각주:5]撰 <松漠記聞>

중요부분 해석 : 여진의 추장은 신라인으로 완안씨라고 불렸다. 완안추장은 한나라 말로 왕이라는 말이다.

3- 是月生女眞完顔阿骨打稱皇帝更名旻國號金. 其俗如匈奴諸部落無城郭分居山野無文字以言語結繩爲約束. 土饒猪羊牛馬馬多駿或有一日千里者. 其人鷙勇. 爲兒能引弓射鳥鼠及壯無不控弦走馬習戰爲勁兵諸部各相雄長莫能統一. 其地西直契丹南直我境故嘗事契丹及我朝. 每來朝以麩金貂皮良馬爲贄我朝亦厚遺銀幣歲常如此. 或曰: “昔我平州僧今俊遁入女眞居阿之古村是謂金之先.” 或曰: “平州僧金幸之子克守初入女眞阿之古村娶女眞女生子曰古乙太師古乙生活羅太師.
《高丽史》卷14 世家

중요부분 해석 : 혹자는 "우리 평주(平州[각주:6])의 승려 금준(今俊)이 고려 도망쳐서 여진의 아지고촌(阿之古村)에 머물렀던 것이 그 금의 시조라고 한다" 혹자는 "평주의 승려 김행(金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서 여진 여자와 결혼을 해서 자손을 낳았고, 고을태사(古乙太師)라고 불렸다.  고을의 아들은 활로태사(活羅太師)라고 했다."

4- 김부(경순왕敬順王)가 비록 항복하여 고려왕이 합병하였으나 김부의 외손 완안아골타는 곧 권행의 후예로서 능히 중국을 갈라 다스려 백년동안 대를 이었으니... (동명해사록 [각주:7]1636년)

5- 만주원류고는 사료적 가치가 많이 떨어지기에 아예 언급도 하지 않겠습니다. (왜 떨어지냐는 분들은 위한 간단한 설명 : 해당 사건이 일어난 시기와 너무 떨어져 있으며, 만주원류고는 노골적으로 만주족만들기의 일환으로 벌어진 정치적인 역사서이기 때문입니다.)


2. 왜 아골타가 신라인의 후예인가?
1- 역사사료의 위험성.
이미 쉽게 풀어본 역사사료의 위험성과 환빠신라왕족은 흉노인인가?을 통해서 살짝 알려드렸다 싶이 모든 역사사료는 일단 의심부터 하고 들어가야된다. 특히 동방쪽에서 관방에 의해서 집필된 책들은 기본적으로 일정한 정치적 목적이 들어간다. 개인이 쓴 것도 어디까지나 그 개인의 인식적 한계가 들어가게 된다.

특히 시조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에서는 더욱 더 조심을 하여야 한다. 시조를 써놓은대로만 믿는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하고 사실과 다른 경우가 널리고 널렸다. 물론 그러한 시조를 써놓은 문제 자체에 대해서는 그 역사인식에 대한 또 다른 각도에서의 접근이 가능하지만, 시조라고 써 놓았다고 그 사람은 분명히 시조다! 라고 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한족의 시조는 염황(염제와 황제)라고 한다. 이들은 실존인물이라기보다는 당시의 모습을 투영하는 하나의 거울로서 생각을 해야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느 왕조의 시조라고 써놓은 것은 사실이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이 투영된 허구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이다.

2- "금사"와 "송막기문" 어느 것을 믿을 것인가?
위의 내용을 보면 아시겠지만, 금사에서는 함보가 고려에서 왔다고 하고, 송막기문에서는 신라에서 왔다고 쓰여져 있다. 참고로 중국사서에서 고구려와 고려는 모두가 高丽(고려)라고 쓴다. 다시 말해서 구별이 없다. 그렇다면 관방에서 만들어낸 고려설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송막기문에서 말하는 신라설을 믿을 것인가?

일단 각각이 책이 쓰여진 배경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아야한다. 보통 역사애호가들은 이 과정을 뛰어넘기 쉽상이다. 사료를 볼 때는 그 사료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

금사는 원나라에서 만들어진 역사서로서 금나라의 사료들이 풍부하였기에 비교적 잘 만든 정사로 평가를 받는다. 금나라에서는 스스로의 조상을 밝히기 위해서 직접 여진족 노인들에게 물어보고 다녔을 정도로 스스로의 역사사료 수집에 열정적이었다. 그리고 그 사료를 바탕으로 역사를 서술한 것이기에 거의 문제가 없다.

그에 비하여 송막기문은 어디까지나 송나라 사람이 금나라에 머무르면서 얻어들을 이야기로 쓰여진 책이다. 물론 송막기문은 금나라가 있을 당시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훌륭한 사료이지만, 개인의 자료수집능력의 한계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요즘의 "~카더라"통신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사도 역시 이와 같이 "~카더라"이며, 아예 대놓고 "혹자는 말하기를"이라고 하고 있다.

그래서  본인으로서는 금사를 기본으로 고려설을 채택하고자 한다.

3- 금사의 고려는 고구려인가? 궁예의 후고구려인가? 고려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나오는 고려는 고구려인가? 아니면 고려인가? 그것을 위해서는 숫자놀이를 해야된다. 함보는 아구타의 8대조이다. 아구타의 생존 연대 1068~1123으로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으면 함보는 대략 240년전에 생존했던 사람으로서 약 830년 전후반이 된다. 830년 전후반 통일신라중반기이자 발해 중반기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것이 668년이었고, 고려가 세워진 것은 918년. 금사가 만들어진 것은 1344년이었다.

추가 : 혹자는 조혼(일찍결혼함)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북방민족들의 특색을 간과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북방유목민족사회의 재미있는 모습중에 하나가 장남이 아닌 막내가 부모를 계승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그래서 계승주기는 더더욱 내려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간단한 예로 유명한 징기즈칸가문을 예로 보면 :

칭기즈칸(철목진) 1162~(1227)
토우레이(拖雷) 1193~1232(칭기즈칸의 4째아들)
멍거(蒙哥)        1208—1259(토우레이의 장남)
원세조(忽必烈) 1215~1294(토우레이의 차남)

칭기즈칸과 원세조는 할아버지와 손자로 53년차이가 나게 된다. 이렇게 주기가 25년차이가 나게 된다. 조혼이라고 하더라도 막내계승이나 여유시간을 주고, 아래쪽에서 언급했던 함보 자신이 나이를 먹어서 아이를 낳다는 것으로 20~30년을 추가하면 8대조 x 25년 + 20년 = 220년이 된다. 줄여도 200년차이가 된다. 그럼 줄여서 봐도 870년전후가 되므로 전체논리에는 문제가 없다고 본다.

또한 멍거와 원세조처럼 형제계승까지 생각을 하게 되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어찌되었든 줄어들지는 않는데 그것까지 필요 없으리라 생각되어서 패스.


* 이 부분에서 역사스패셜은 함보가 여진으로 들어온 시기를 신라말, 고려초로 잡고 있다. 이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셈법이다.  이해는 되지만 틀렸다고 생각된다(세대주기 20세, 아골타를 7대손으로 놓고, 막내계승따위 무시하면 가능-_). 아구타의 출생연대는 1068년이다. 그리고 신라말-고려초는 넓게 잡아서 900~1000년 사이이다. 8대가 160년 안에 일어나려면, 대략 20년을 한 세대로 잡아야 된다. 아무리 당시의 수명이 짦았다고 하더라도 이건 좀 심한 셈법이라고 본다. 짦게 잡아도 25년쯤으로 봐주는게 합당하다. 기록 자체에서도 함보의 나이가 많았음을 이야기하니 말이다. 한마디로 정말 아골타의 출생년도를 고려했는지 의문이다. [각주:8]

금사를 만드는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아골타의 9대 위의 조상이 현존하는 고려에서 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은 명확하다. 그렇다면 금사에서 말하는 고려는 고구려일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는 이미 668년에 멸망을 하였다. 그렇다면 함보는 굳이 따지자면 고구려의 후예라고 하는 편이 더 합당할 것이다. 신라의 후예라는 것과 고구려의 후예라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이다.

이에 대해서 역사스페셜은 이 두사료를 그냥 합쳐서 "고려에서 온 신라인"이라고 말해버린다. 이는 분명히 잘못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려가 고구려도 될 수 있다고 생각을 조금만 한다면 이런 식으로 단정지을 수 없다. 본인의 글을 잘 보면 알겠지만, 일정 부분이 되면 결국 "단정"이나 "확정"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역사 스패셜은 당당하게 해버린다. 이것은 다른 문제도 아니고 그냥 틀린 문제다.

추가 : 만약 25년으로 잡고 아골타가 8대라고 계산을 한다면 2대의 출생연도가 920년까지 내려올 수 있음으로 문장의 고려는 궁예의 후고구려가 될 수도 있다. (후고구려를 생각하지 못했었다. 죄송~ 그럼 문장에서 나오는 큰형이 불법에 빠졌다는 것도 궁예와 연결시켜서 상상해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후고구려라면 900년전후로 계산을 하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다. 물론 이 경우에는 신라인일 가능성은 낮아지며, 고구려 후예의 일파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늘어난다고 본다.

-- 《金史•高丽传》中说,“唐初,有粟末、黑水两部,皆臣属于高丽。" "당초, 속말, 흑수 두부족은 모두 고려(고구려)에 속해 있었다." 传 뒤의《赞》에서 :“金人本出之附于高丽者”。"금인은 본래 고려(고구려[각주:9])에 있던 자이다."

현재까지의 생각과 자료를 바탕으로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추론은 :
"함보는 고구려의 후예[각주:10]로서, 궁예의 후고구려에 있다가, 여진부족(완안부)으로 와서 현지인들과 결혼을 하고, 점차 여진화가 되었다. 혹은 여진으로 돌아갔다"



4- 송막기문과 고려사의 사료를 어찌 봐야되는가?
비록 본인 스스로 해당 사료를 채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료는 거짓말을 하지만 진실을 살짝살짝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신라인이나 고려인이라고 말한 부분에서는 일정한 역사전 진실이 같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당시 시대적 정황을 고려해서 볼 때, 신라말과 고려초의 혼란기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피해서 동북쪽으로 유입되었고, 금나라 성립되기 전에 그 같은 사람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선조에 대한 이야기에서 고구려-신라-고려의 다양한 계열의 사람들이 와서 혼재되어 있다고 추측해볼 수 있고, 사실에 비교적 근접하리라 생각된다.


5- 그.러.나. 금나라왕족이 정말 같은 "민족"일까?(이것이 핵심이다.)
핵심 중에 핵심이다. 고구려의 후예였던, 신라의 후예였던, 고려에서 간 사람이었던간에 그들을 같은 민족으로 보아야 하나? 혈연만 연결이 되면 당연히 같은 민족이냐는 사람들에게는 의문의 여지가 없이 같은 민족이다. 그러나 문화가 완전히 달랐다.

 "풍속이 흉노와 같아서 따로 성을 만들지 않고 산과 들에 흩어져 살았다. 문자가 없어서 끈을 묶어서 약속을 하였다"俗如匈奴諸部落無城郭分居山野無文字以言語結繩爲約束(고려사)라고 말했다는 것은 고려의 문화속와는 너무나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함보는 여진족과의 통혼을 하였고, 그의 후손들은 더욱 그러하여 사실상 여진인이 된 혼혈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의 예를 들어보면 중앙아시아로 가서 지금은 "고려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현재의 한국인과 외모도 다르고, 쓰는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데 같은 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에 대한 답은 서로 다르리라 생각된다. 정답은 없다. 그러나 이미 다른 문화에 동화가 된 상태에서는 다른 민족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합당하리라 생각한다.

또한 금나라의 지배계층이 고구려든 신라든 한민족의 선조 중에 하나라고 가정을 해도 역시 문제는 남아 있다. 금나라의 기본 민족 구성은 어디까지나 지도계층 역시 여진이 주류였다. 그런데 왕족만이 지도자라고 한국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는가? 이에 대해서는 아래 발해와의 관계 부분에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3. 금나라와 발해와의 관계
함 보를 시조로 둔 금황실은 발해인을 왕비로 맞는다. 금나라의 성군 세종의 어머니, 4대 황제 해릉왕의 어머니는 모두 발해 여인이었다. 또한 아골타는 발해인을 신뢰하여 발해유민 장호를 새로운 수도 북경 건설 책임자로 등용한다. 발해는 대제국을 경영해본 경험이 있었다. 금나라는 이런 발해의 경험을 이용하여 국가체제를 확장해나갔던 것이다.(역사스패셜)

*원래는 하나하나의 원문을 찾아서 대조를 해봐야지만, 환빠계열도 아니고 명색이 역사스패셜인데 이런 사실왜곡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무엇보다 귀찮아서....원문은 찾지 않도록 하겠다. 마음 착하신 분이 있으면 원문을 덧글로 달아주시길........이런다고 때릴꺼야? ^^::

위에서 본인이 해석한대로 고구려의 후예이고, 요동지역의 역사를 생각한다면 너무나 당연히 발해와의 연관관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역사스패셜은 발해를 "당연히" 한국의 역사로 생각하고 한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상당히 문제가 있는 생각이다.

발해는 신라의 수 많은 사료에도 나오듯이 신라자신이 같은 민족으로 보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발해의 상층부는 한국학계의 주류의견에 따라서 고구려의 유민이라고 하더라도, 하층민은 분명히 말갈계열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금나라는 그것이 더욱 심해져가서, 말갈의 후손인 여진들의 상층부 진출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대다수가 한국에서는 "다른 민족"으로 분리되는 말갈이나 여진인데, 이것을 같은 민족이 세운 국가로 볼 수 있는가?

만약 이것을 같은 민족이 세운 국가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통치계급만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역사관이다. 물론 이런 역사관 자체도 성립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대중"이 아닌 몇몇 "엘리트"에 편중된 역사관으로 비판을 받았었고, 만약 이 생각을 확대하면 일본제국에 통치를 당하던 시대는 한국의 역사에서 빠져야 된다. 통치계급이 "다른 민족"인 일본이었으니까 말이다. 스스로 모순이 일어나는 이런 생각이 과연 합당한가? 단 이곳에도 결론이나 확정은 없고, 있을 수도 없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서로 다른 생각들이니 말이다.

* 여진과 발해는 원래 한가족이다(女眞渤海同本一家 금사)을 이용해서 긴밀한 관계를 이야기하려는 사람도 있다. 분명 금나라의 형성과 발전 여진과 발해가 힘을 합쳤다는 점은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해당 기사의 앞뒤 내용을 살펴보면 조금 다른 각도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반복을 풀고 협력을 하기 위해서 숙신이라는 과거의 것을 끌어다가 같은 가족이라고 한 것이다. 만약 이런 논리에 박수를 보낸다면, 분명 다민족으로 이루어졌고, 수 많은 북방민족이 있었던 중국의 상고사도 그냥 싹다 염황자손의 나라가 된다고 인정해야된다는 말과 다를바가 없다. 한마디로 저런 역사를 가져다 붙인 것이 보이는 정치적인 말을 100% 믿는 것 자체는 문제이다.


4. 청황실의 성씨가 김씨
愛新覺羅(애신각라)을 만주어로 해석을 하면 금족(金族)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를 신라김씨와 연관을 시키는 것은 개그에 가깝다. 그냥 김씨면 다 같은 민족이고 혈연이라는 생각은 대체 어떻게 나온 것인지 궁금할 뿐이다.[각주:11]

* 애신각라에 대한 웃기는 떡밥 하나
아직도 많은 분들이 믿고 있는 떡밥 하나가 있다. 愛新覺羅를 해석해서 "신라를 사랑하고 깨우친다"정도로 이야기되는 웃기는 짓이다. 해당 말은 愛新覺羅을 愛覺新羅로 순서를 완전히 바꾸어서 고대한어를 "지 맘대로" "엉터리로" 해석하는 웃기는 짓거리다. 근거도 없이 이따구로 순서를 바꾸는 것은 코메디일 뿐이다.

김씨의 선조는 여러가지가 있다. 하나의 성씨가 하나의 선조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개그이다. 일단 유명한 것은 남흉노의 김일재이다. 그러나 송대만 해도 김씨는 이미 5개가 넘었다. (古今姓氏书辩证 P285) 또한 요동에 있던 여진의 지리적입장에서도 북방민족들의 영향을 받았고, 흉노계열을 높게 생각하여서 김씨성을 채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북방민족에게 있어서 금씨의 유래는 대장장이면서 동시에 샤먼이고 지도자였던 보편적인 문화와 연관을 하여서 나온 서로 다른 성씨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쉽게 말하면 세계 어디에서나 태양숭배나 새숭배 사상이 나타나지만, 이것은 인류의 집단적인 무의식 혹은 공통적인 경험으로 서로간의 교류가 없이도 나타나는 현상인 것과 같은 것이다.

얼마 전에 신라의 김씨와 흉노 김일제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라고 신라왕족은 흉노인인가?에서도 말한 바가 있다. 간단히 요약하면, 시조에 대한 서술을 그리 믿을 수 없으며, 송대에 지어진 古今姓氏书辩证에서도 서로 다르게 구별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청나라가 세워질 무렵이 되면 성씨가 같다고 같은 조상이라는 것은 허망한 환상이 되어버린다. 이미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대로 성씨를 만들고 사용해버렸기에 복잡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성씨를 가지고 같은 민족!이래버리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시대이다. 혹자는 만주원류고(满洲源流考)에 있는 몇가지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만주원류고 자체가 청나라에서 계획적으로 민족의식을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진 책이라는 것을 정말 모르고서 이야기하는 것일까?


5. 오십보 백보의 한국역사관과 중국역사관.
고 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금나라, 청나라로 이어지는 만주의 역사는 우리 민족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있다.한족의 영토,중원을 만주대륙에 합병하여 오늘의 중국을 완성한 여진족, 그들 선조가 신라인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국수주의적 우월감을 주장하자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반역사적인 동북공정 논리에 정면으로 대응하고 우리 역사를 지켜내어 향후 동아시아와 한반도 지역에 평화의 논리적 근거를 재확인하자는 것이다. (역사스패셜)

위의 글을 한마디로 대답을 하면 "미안하다. 웃기다." 가 되겠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반역사적이라는 말이 왜 나오는 것인지? 그러면서 동북아시아와 한반도 지역에 평화의 논리적 근거를 확인한다고? 거..참...

과거에도 수차례 설명했지만, 한국의 민족역사관이나 중국의 다민족역사관 모두 문제가 있으며, 동시에 하나의 역사관으로서 존중받아야만 한다. 중국의 다민족역사관은 중국이라는 나라가 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져 생겨난 것이기에 역사적으로 합당한 면이 있다. 그러나 현재의 영토라는 가변적인 기준을 기반으로 하기에 수 많은 문제점과 충돌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한국의 민족역사관은 문제가 없는가? 민족이라는 공동체를 통해서 역사를 분석을 함으로서 지금까지의 통합과정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가능하지만, 반대로 민족이라는 영토보다도 더 가변적인 개념을 가지고 분석을 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한다. 한마디로 동북공정의 몇몇 가지 역사적인 사실 문제가 아닌 그 역사관 자체를 반역사적이라고 한다면 오십보백보의 한국 역사관도 반역사적일 뿐인 것이다[각주:12] : 결론만 말하면 동북공정은 아골타가 신라인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동북공정은 여러 민족이 융합되어서 현재의 중국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고, 아골타가 신라인이더라도 그것도 융화가 되었다고 하면 끝인 문제이다. 대체 머가 근본부터 흔들린다는건가? 동북공정을 근본부터 흔들려면 중국이 단일민족이었다는 증거를 제시해야된다. 기본적으로 동북공정도 이해를 못하고 있는데....(미안...다시 웃자.ㅋㅋㅋㅋ)



  1. 제가 중국이라는 한계로 직접 방송을 보지는 못하고, 역사스패셜 홈페이지에 있는 관련 내용만으로 비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 양해부탁드리고 실제 방송을 본 분을 자세한 내용 설명 혹은 비판 부탁드립니다. (너무 느려ㅠㅠ) [본문으로]
  2. 예시는 훨씬 더 많다. 하다못해서 진시황도 서융(西戎)과 혈연적인 연결이 있었다는 학설이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어쩔건데? [본문으로]
  3. 1343년에 시작되어 다음해 11월에 완성. 예상되는 참고 금나라 역사서 《太祖实录》《睿宗实录》《先朝实录》《归潜志》《壬辰杂编》 [본문으로]
  4. 판본에 따라서 "女眞之主" "여진의 임금" 이라고도 함. 같은 의미이고 조금 높여진 표현일 뿐임. [본문으로]
  5. 홍호(1088~1155) 1129년 금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15년동안 감금되어 있다가 돌아옴. (고려중기) [본문으로]
  6. 현재의 황해도 평산. [본문으로]
  7. 동명해사록(東溟海槎錄)은 한국고전번역원에 올려져 있으나, 현재 중국에서 고전번역원에 접속이 불가능해서 원문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일단 역사스패셜의 해석을 그대로 가져놓도록 하겠다. [본문으로]
  8. 조혼(일찍 결혼함)을 고려해야된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덧글참조) 그러나 그런식으로 해도 역사스페셜의 논리에서는 140년의 차이가 나야되며, 북방민족은 막내계승도 있었기에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본문으로]
  9. 이는 왕씨고려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인은 시기상으로 아직 왕씨고려가 건립되기 전이었고, 문맥상 위와 같은 고구려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본문으로]
  10. 고구려의 후예라는 것은 범칭이며 보통 한국에서 아직도 이민족이라고 생각하는 말갈이나 여진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 [본문으로]
  11. 이런 식으로 할 수 있다면, 본인 논문은 하루만에 다 쓸 수 있다. 성씨만으로 해서는 안되기에 온갖 방증자료 찾으려고 삽질하고 있는데...띱-_ [본문으로]
  12. [/footnote].

    그럼 제대로 된 역사관이 머냐고? 본인도 모르겠다. 그걸 알았으면 본인은 이미 위대한 역사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분위기 속에서는 어떠한 절대적인 역사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는 서로 다른 역사관들이 공존하게 된다.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것은 논쟁을 할 수 있으나 서로 생각과 해석이 다른 것은 어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간단한 예로 어떤 여자를 보고 그 여자의 가슴크기나 허리굵기를 알아보는 것은 사실자체에 대한 탐구이지만, 내게는 예쁘게 보이지만, 상대방에게는 못생겼다고 느껴질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런 상황에서 너도 예쁘게 봐야돼! 라고 하는 것은 바보짓 아닌가?

    굳이 본인의 생각을 짦게 말하자면, 한국도 이제 다민족역사관을 채택할 때가 되었다. 현재의 한국인이 단일민족의 순수혈통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확정된 "사실"이다. 다양한 민족들이 서로 융합되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방송에서는 단일민족을 이야기하면서 삽질을 해대고 있다. 그만 하자.


    6. 역사스페셜 제작진에게...
    역사학도의 길을 가고 있는 본인은 한때 역사스페셜의 팬이었다. 비록 중국으로 유학을 하러 온 이후에 인터넷의 속도때문에 자주 볼 수는 없었지만, 지금의 역사를 좋아하는 내가 있게 해준 것이 무엇이냐고 하면 그 중에서 분명히 역사스페셜이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최근 역사스페셜은 화제성을 따라서 움직이고,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노골적으로 묻어나오며, 학계에서도 소수의 의견을 전체의 의견처럼 이야기하는 듯한 분위기가 있어서 참으로 안타까울 수 밖에 없다.

    환빠들이 찌질되는 것이면 "지랄하고 있네~"라며 넘길 수 있다. 그러나 "역사스페셜"이다. 아직도 많은 역사 애호가들이 역사스페셜을 얼마나 높게 보는지는 스스로도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진심으로 걱정하는 한 명의 팬으로서 역사스페셜이 진정한 스페셜이 되기를 바란다.

    본 글은 성격상 쓸데 없는 욕설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글의 덧글에 대한 답글은 정상적인 덧글에만 달도록 하겠습니다. 비판은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그러나 근거도 없이 무조건 "너가 틀렸다"는 상대하지 않겠습니다.

    결국 제 성격으로 덧글에 대답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각(09/09/09 09:51) 이후로 엉터리 덧글이나 대답할 필요가 없는 덧글에 대한 대답은 없습니다.

    쓰다보니 아래쪽으로 갈 수록 귀차니즘에 친절한 설명을 못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수정하기도 귀찮고..... 의문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하하;;;;;;...근데 이거 다음뷰의 어떤 항목으로 보내야되려나;;; 왜 역사항목이 없는걸까?;;; 일단 "사회"로 보내본다.

    그나저나..기네;;; 이걸 다 보는 사람이 있긴 하려나;;;


    역사스폐셜을 보고 추가로 적습니다.
    (간단 감상 : 괜히 봤다. 역사스페셜. 해도해도 너무한다. 조금 많이 시니컬 할 겁니다.)


    이유립 : 이 사람을 무려 “역사학자”라고 불러주어야 하나? 알 사람은 안다. 이유립은 유사역사학자일뿐이다. 환빠들에게 신으로 불려지는 인물이거늘....그런 사람이 세운 사당에 아골타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본인 할 말이 없어진다. 역사스패셜. 이렇게 썩었더냐…

    가옥구조와 씨름 : 같은 환경에서 당연히 같은 모습의 가옥구조가 나온다. 또한 여진이 발해에 귀속해 있었다. 이것을 가지고 같은 민족이라고? 또한 씨름 또한 북방민족 전역에 있었던 것이다. 어쩌라고?

    중국학자도 인정했다? : 해당 학설은 중국에서 주.류.가. 아.니.다. 한국에서도 주.류.는. 아.니.다. 한 중국학자가 말하면 모든 중국학자가 인정한 것이 되는것인가? 본인 금사가 전공은 아니지만, 북방민족사 전공으로 어느 정도 흐름이나 주류는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한 중국학자가 말했다고 모든 중국학계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하는 분에게 과연 무엇이라고 말해주어야 할까?

    여진 스스로도 고려에서 나왔음을 인정하였다? : 우리의 조상이 대방에서 나왔으니....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겠습니다.. 我祖宗出自大邦 至于子孫義合歸附 今太師為雅束 亦以大邦為父母之國(《高麗史》世家卷十三高麗史十三)

    우선 이 글은 아골타가 아닌 그의 형이 작성한 글이며, 여진이 불리한 상태에서 어떻게든 아부를 떠는 모습이고, 해당 기록은 어디까지나 고려사에 적혀 있어서 고려의 마음대로 수정되어서 올라갔을 가능성도 있다. 한마디로 이런 정치적인 서신을 가지고 여진의 조상이 고려에서 왔다고 하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흉노와 한나라도 서로 형제지간이라고 했다. 그럼 이 둘도 같은 민족인가? 하하하...정치용어와 실제사실를 혼동하면 안된다. 아! 그러고 보니 터키랑 한국은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데 이것도 같은 민족이고~~~)

    악비의 일 : 송나라의 명장으로서 금나라를 막은 악비는 민족의 영웅이라고 불렸었다. 그러나 다민족역사관에서 이는 문제가 되기에 그것을 수정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한족중심사상이 남아 있고 그래서 몇몇 사람들이 반발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족중심사관에서 다민족사관으로 이행하는 단계인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동북공정이 허구라고 하는데 대체 왜??? 이해자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민족을 포용하려는 것에 박수를 보내야지..쯔쯔...

    아골타가 신라인 후손이라는 것은 동북공정은 근본부터 흔들린다고?[footnote]미안. 나 잠시만 웃고..ㅋㅋㅋㅋ 나 지금 빵~! 터져버렸어. ㅋㅋㅋㅋ [본문으로]
그리고 북쪽에서 남쪽을 치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중국고대의 모든 통일전쟁은 거의 대부분이 북방에 의한 남방통일이었다. 오직 명태조(明太祖)의 북벌만이 예외일 뿐이고, 이것 역시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 결과 몽골 원나라의 잔존세력을 소멸할 수가 없었고, 이후 명나라 역사에서 계속 골치거리로 남아 있게 되었다. 칭기즈칸의 자손들은 황태극(皇太极)에 의해서 마지막 몽골제국의 황제인 임단칸(林丹汗)이 패배하기 전까지 계속 칸의 자리에 있었다.

칭기즈칸에서 임단칸까지 482년, 35대의 칸을 배출하여 사실상 명나라와 계속 대치 상태에 있었고, 훗날 청나라가 된 후금(后金)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명조는 결국 원나라의 잔존세력을 멸망시키지 못한 것이다.

중국근대의 해방전쟁(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간의 전쟁)에서도 북쪽에서 시작하여 송화강(松花江)에서 해남도(海南岛)로 계속 내려오는 도강전투(渡江战役)를 생각해볼 수 있다. 역사상의 중국통일전쟁은 모두가 북에서 남으로 내려왔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 것이다.


이는 고대에는 북방의 경제가 발달하여서 남쪽의 야만인(남만 南蛮)을 공격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훗날 남쪽도 발전을 하게 되지만, 북방인들은 기마에 능하고, 전쟁수행능력이 뛰어난 반면에, 남방인들은 유들유들한 학자분위기였기에 승패는 거의 정해져 있었다. 또한 남방의 지형은 구릉지형[각주:1]으로서 쉽게 서로 간에 분리되어 독립하기 쉬웠다. 그에 비해서 북방의 지형은 평원으로서 쉽게 통일 될 수 있었고, 통일이 된 이후에는 내부을 결집하여 외부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렇게 북쪽에서 남쪽으로 공격하는 것이 쉬웠기에 수나라의 통일은 더욱 더 쉬웠고, 너무나 당연하였다.


또 다른 "중국사는 장난감이다" 를 보고 싶으신가요? 누르세요~

"중국사는 장난감이다."에 대해서 궁금하신 분은 위엔텅페이의 <중국사는 장난감이다>

본 글은 모든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과 환영합니다. 
본 글은 의역식 번역입니다.
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오늘 분량은 짦다.^^;;; 아싸리~ 아싸~~~~


  1. 남방의 지형은 한국의 산이 많은 지형이다. 그래서 산으로 숨어들어서 방어에 주력하면, 상대방을 공략할 수는 없지만, 방어를 하면서 스스로를 유지해갈 수는 있었다. [본문으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