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 276 277 僧道娶妻

승려와 도인들은 결혼을 할 수 없다.(예전에 결혼한 것은 냅둔다-_;;)

단 고급 승려는 황제에게 재고를 부탁할 수도 있다.

 

n 元史 刑法志

결혼을 파기되며, 승려자격이 몰수된다.

n 元典章 禮部六(和尚不許妻室)

n 元典章 禮部六(道官有妻妾歸俗)

n 唐 : 해당 법률이 아예 없다. 원조에 들어오면서 밀종이 유행하였고, 기존 중원의 불교단체들도 그것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해당 사건은 1) 이미 정혼자가 다른 남자에게 갈 수 없고. 2) 상중에 결혼을 할 수 없으며 3) 관리가 사건과 관련된 사람과 결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3)이었고, 이것이 가장 무거운 형벌이었다. 그러므로 해당 사건은 服内가 가장 큰 관건이었다.

 

의문 : 그런데 해당 사건의 관련자들은 몽고인으로 보이는데, 역시 상중에 결혼 할수 없었던 것인가? 물론 이름만 가지고 몽고인이라고 판단하기는 어려운 문제이긴 하다. 하지만 만약 몽고인이라고 가정한다면, 상중에 결혼하지 못하는 조항이 몽고인에게도 적용이 되었다고 가정한다면 몽고쪽에서도 해당 풍습이 있었다고 예측할 수 있다.

 

몽고인의 풍습중에 상중에 결혼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가? 할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수계혼이 성립하지 않는다. 아...어떻게 증명할가 머리 굴린 내가 바보다. 젠장-_ 깨닭고서 난 바보다라고 외쳐본다!!

 

    《三国志·乌桓鲜卑东夷传》注引《魏书》)而“父兄死,妻后母、执嫂;若无执嫂者,则己子以亲之次妻伯叔焉。死则归其故夫。”수계혼에 대한 자료

 

1) 해당 사례의 인물이 몽고인이라는 것을 입증(당연히 몽고인이 아니다.)

元史類編卷九 (文宗) 許蒙古色目人居喪守制 이 조항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문종정도에 몽고인이 많이 한화가 되었고, 수계혼도 안하고, 상중결혼도 안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법률적으로 구속하지는 않았던듯...

다른 사례

張大榮 - 居喪成親 도 역시 상중결혼이 문제가 된다. 당연히 몽고인이 아니다.

 

元典章 禮部
【禁治居喪飲宴】延祐元年七月十二日承奉江浙

行省剳付準中書省咨御史臺呈淮江南諸道行御史

臺咨備監察御史王奉訓呈伏以父母之喪三年天下

之通喪也死歛葬莫不有禮禮曰披髮徒跣居於倚

廬讓枕塊哭泣於世時□粥朝一溢米夕一溢米又曰

始死充於有窮既殯瞿瞿如有求而弗得既葬皇皇如

有望而弗至經曰食旨不甘聞樂不樂此孝子哀慼之

情既歛既葬以其時期而小祥又期大祥三年禫

霜露既降春雨既濡懷愴怵惕如將見之此子終身所

不忘豈拘於三年哉去吉日遠風俗日薄近年以來江

南尤甚父母之喪小歛未畢茹█飲酒略无顧忌至于

送殯管絃歌舞導引循柩焚葬之際張筵排宴不醉不

已泣血未乾享樂如此昊天之報其安在哉㒷言及此誠

可哀憫若不禁約深為未宜莫若今後除蒙古色目合

從本俗其餘人等居喪送殯不得飲宴動樂違者諸人

首告得實示衆斷罪所在官司申禁不嚴罪亦及之不

惟人子所有懲勤抑亦風俗少復淳古宜從憲臺剳付

各道禁治相應具呈照詳得此本臺看詳國家以風俗

為本人道以忠孝為先可以移忠可以事上忠孝既立

則人道修而風俗厚為治之至要也三年之喪古今通

制送終營葬人子大故車芻靈禮亦有之至若忘哀

作樂張筵群飲敗禮傷俗宜從合干部分定擬通行禁

止相應咨請照詳準此具呈照詳得此送據禮部呈

詳父母之恩昊天罔極終身而不能報聖人定立中制

以為三年之喪送終葬當盡其禮若居喪飲宴殯葬

又動樂聲實傷風化如準御史臺所言除古色目人

各從本俗外其餘人等禁治相應得此送禮部行移刑

部議擬去後今據禮部呈移準刑部關議得父母之喪

至於哀慼其居喪飲宴殯葬用樂皆非孝道除蒙古邑

目宜從本俗余並禁止敢有·    違犯治罪相

應關請照驗準此本部參詳如準刑部所擬遍行照會

相應具呈照詳都省咨請依上施行

해당 사료는 직접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상중에 술마시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에서 몽고족과 색목인은 제외된다. 다시 말해서 몽고족과 색목인은 전혀 다른 사상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추측하면 샤머니즘으로 인하여 부모님이 천당에 간다는 것 정도? 라마교의 혼례 사상에 대한 조사가 더 필요.

 

2) 다른 법률 조항에서 해당 사항이 있는지 조사 및 검토

元典章 刑部卷
【居喪為嫁娶者徒】至元七年十二月尚書户部契

勘父母之喪終身戚夫為婦天尚無再醮今隨処節

次申到有於父母及夫喪制中往往成婚致使詞訟繁

冗為无定例難便歸斷檢會到舊例居父母及夫喪而

嫁娶者徒三年各離之知而共為婚姻者各减三等省

部議得若不明諭禁約引訟不已寔是亂俗敗政以此

詳比及通行定奪以來定立格限渤海漢兒人等擬

自至元八年正月一日為始已前有居父母夫喪内嫁

娶者準已婚為定格後犯者依法斷罪聽離如此庶免

詞訟似望漸厚風俗呈奉尚書省移準中書省咨依準

施行

 

 

3) 몽고 풍습에 관한 고문중에서 상중 결혼에 대한 항목이 있는지 조사 및 검토

(상중에 결혼하는 경우가 있는지를 2차 논증으로 삼고, 최고로 좋은 것은 직접적인 항목!인데 없을듯-_)

 

4) 특히 샤머니즘쪽에서 상중 결혼에 대한 금기가 있는지 조사(이건 몽고뿐만 아니라, 한국, 중국, 일본 및 중앙아시아 각국의 풍습을 검토해봐야하는 짜증나고 힘든 작업이 될듯-_)

    狩猎民族常常因为猎物减少而深感不安,他们只能利用虚幻的巫术幻想去改变这种现状,从而获得某种心理平衡。我们在通古斯人的宗教仪式上看到,人们以象征的方式让内涵动物灵魂的象征物转生为新动物,从而达到增加动物数量,减轻心理负担的目的。萨满教代表动物灵魂并有复生能力的符号包括动物骨头、绒毛、动物眼睛等等。在仪式活动中,人们总是小心地收藏和处理它们,或防其不得转生,或怕它以灵魂力量伤害别人,总之要避免任何过失。在通古斯民族祭祀中,当作祭品的动物,像熊、鹿、猪、羊、鸡等,被吃掉后—它们的骨头一块也不能少地被收拢在一起,或风葬、或埋葬。安葬动物仪式的要求十分严格。兽骨安葬与野兽繁衍的关系密切,它的完好与否,涉及动物的绵延状况。这些内涵动物转生灵魂的兽骨、兽毛、兽皮、禽毛,象征他有许多动物神灵给予保护和辅助。在萨满经验中,由于魂骨被视作生命的再生之源,“归魂于骨”成为萨满法术中追求的主要目标。有的民族萨满死后要风葬,风化后捧拾其骨存放在小桦篓内,视为神灵。

 

在萨满教的古老信仰中,人们普遍畏惧死亡,不敢面对生命有限的现实。特别是当氏族部落重要人物去世之时,这个社会群体的常态生活面临着动摇和威胁。就是这时,氏族的丧葬仪式作为缓解人们精神危机的手段,及时地向人们传达出灵魂不死观念、灵魂再生的观念、以及重要人物的灵魂作为氏族祖先守护神的观念,于是给大家带来了某种超人间力量方面的信念和信心,从而减轻了内心的哀伤和社会的不安。关于氏族丧葬仪式,特别是萨满的丧葬仪式,在通古斯各个民族中普遍流行,成为氏族宗教仪式的重要种类。如鄂温克族的“尚德”仪式,满族的氏族萨满亡灵祭祀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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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通古斯语族民族的萨满教特点

孟慧英

 

七)丧上一词下一词与禁忌
    (白马)藏族的丧葬有火葬、土葬、悬棺葬、水葬等四种。
    1.西姜(zhugs sbyang)即火葬。据调查,文县白马河流域的(白马)藏族在清雍正以前均实行火葬。人死后,用绳子绑成屈膝蹲坐式,形似胎儿状,放进立式棺材内。请苯教巫师或阴阳先生择好出殡日期。死者在堂屋里停放几日, 主要以季节来定。(白马)藏区海拔在1500米~2500米之间,气候相对温和,夏秋死人在家不宜停放过长,冬春则可以适当长一些,一般在1~10天不等。40 岁以下男女病死或暴死后,尸体均不能抬进家门, 而在村头选一平地,将死者放进立式棺木内。富者从南坪上塘黑河、白河或平武等地请喇嘛或苯波巫师念经,贫者则请阴阳先生或道拜念经超度。出殡之日,亲戚及村中小伙子将棺木抬到火上一词下一词场,一路上锣鼓钹钗伴奏,死者家属哭声不断。妇女们中途返回。到了火葬场后,将棺木放在堆好的干薪上,苯波巫师或喇嘛或道拜或阴阳先生主持仪式。从棺顶点火。青烟直上云天,表示死者亡灵顺利升天;烟子不正、四处飘荡,表示亡灵未能升天,且游荡在村中,这样火葬结束后还得择吉日请喇嘛或苯波巫师念经超度。
    平武(白马)藏族火葬时间一般选在冬月至次年二月间进行。死者儿子或最亲的晚辈背尸至火葬场。南坪(白马)藏族则只对不满40岁及不正常死亡者施行火葬。火葬结束后,亲属及朋友抬些石头将尸骨围起来,砌成坟墓。平武(白马)藏族还在坟上插印有藏文超度亡灵咒语的布幡,男坟九杆,女坟七杆,以示引魂升天,不要扰乱死者家及村民的生活。
    2.得尔(dur)即土上一词下一词。到了雍正以后,该地实行改土归流, 改穿汉服,学说汉话, 一切照汉族行事,丧葬也开始实行土葬。文县(白马)藏族人死后,立即点上松明、自制的蜡烛和清油灯,然后尽快将死者的头发、胡须剃掉,再用净水将身体洗净,穿上准备好的寿衣。衣服不能少于三件,以绸缎或褐子为主,脚穿靴子。尸体平躺,四肢被捆住,头朝正堂,双脚对门(与当地汉族相反),脸上盖一张白纸。待死者娘家人赶到看过以后,再放入棺内。棺材一般在家停放三至五六天不等。这期间棺盖盖三分之二,留一条大缝,主要用来观察死者能否复活。死者头部的棺板叫“头档”,脚部的棺板称“脚档”。把死者放进棺木后,在脚档外侧摆白面馍头。若死者生前好酒,则将斟满酒的铜壶也置于此。在物品前面点上清油灯。死者亲戚均带一只雄鸡、纸和柏香等前来奔丧。出殡前晚上,所有来的亲戚要召开会议。死者子女要向亲戚们详细汇报死者患病的情况、子女是如何侍候的、死者有什么遗言等,死者的亲戚都要仔细聆听。汇报完后,亲戚代表讲话,总结死者一生的为人和功劳等。若子女生前未敬孝道,娘家人则在地上撒上黄豆或包谷,让子女们跪在上面,接受亲戚们的指教,以示惩罚。解放前不孝子女在丧场挨打也不乏其例,解放后则以批评教育为主。发丧的时辰由苯波巫师或阴阳先生来定,一般都是天不亮就发丧。人们点上火把,锣鼓钹钗伴奏。发丧的路线是约定俗成的。发丧所经过的人家都要在门前用麦麸、乔草点火,经过时各家主人都要站在自家门口。一旦经过,主人马上用脚或木棍捣毁火堆,意为死人将一切晦气都带走了。谁家死人都一样,所以死者家人是不会计较的。妇女中途返回。到了坟地,首先往坟坑里倒些热气腾腾的米汤,在坟坑里烧些纸、柏香,然后再将棺材放入坑内。棺材上面放一排棚木,再用土掩埋,上面栽些松树或柏树。最后用石头砌个坟门以便祭奠时烧纸、点蜡、焚香、富者还要立碑。
    南坪下塘,人死后把死人放进棺材里,抬到避风向阳的窝穴里,待其老伴死后,又将棺材敲锣打鼓抬回来放在堂屋,择好吉日同时发丧埋入墓穴,上一词下一词法同上,位置为男左女右。
    平武的(白马)藏族土葬除尸体仰身平躺埋葬外,还有屈肢土葬。掩埋后垒石成墓堆,有的也兴立碑,用汉字刻上死者的名子、生死日期以及立碑人名等。
    3.曲得尔(chu dur)即水葬。在(白马)藏区, 不满周岁的婴孩夭折后, 婴孩的父亲或母亲将孩子用布包上或装在背篓里,抛入河中,让河水冲走。较大一些的儿童死后,则在避背的水沟里挖一坑,将其埋葬。据说婴孩死后不会成为鬼魂,夭折后就会即刻消失。
    4.项若(phyang ro )即悬棺葬。解放初这种葬法在(白马)藏区还有过,现已不复存在。这一上一词下一词法一般针对死于麻风病和其他传染病者,还有30岁以下的年轻暴死者。棺材简陋,长方形,像火柴盒,因此又称“火匣子”。以上情况的死者,其尸体只能停放在村外几里地的地方。发丧时苯波巫师或阴阳先生要在棺内放小石磨作禳镇,防止死者鬼魂害人。身强力壮的抬尸人先要用柏香熏身,以示瘟疫不再介入,鬼魂不敢缠身,然后将“火匣子”快速抬到事先在土崖上挖好的洞穴中。“火匣子”头部朝西,脚部朝东,右侧裸露在外。悬棺放置处均为向阳的地方。据当地人讲,太阳的暴晒,不仅使尸体很快干枯,而且可杀死传染病菌。在文县铁楼乡入贡山村西三里处还能见到这种悬棺。
    5.泽木恰(vdzem cha)即禁忌:
    (1)不能从神柜前横过。在神柜前结束祭祀活动, 要面对神柜退出。因为神柜是祖先神灵的所在地。
    (2)主人或客人不能从火塘或铁三脚上跨过,必须绕过。 因为火塘是火神、灶神的居住地。
    (3)客人不能随意坐男主人的位置, 除非男主人将位置让于你,否则为不礼貌。
    (4)女人不能在山神庙或土主庙周围随意走动。 否则要保无事,少则3年,多则12年。如在规定期限内出现自然灾害等,村民会责怪你,还要请道拜、苯波巫师或阴阳先生安神,所花费用全由该家承担。
    (5)孕妇不能探望外伤病人,否则病人的伤病会加重, 她也会受人指责的。
    (6)要探望病人,病人家要先在门口撒上柴灰, 以示将邪气挡在门外, 探望者方可入内。
    (7)家人远道回家,家门口撒些柴灰,以示邪气不能带进家门。
    (8)晚上串门,要在门口大声咳一声,否则主人会不高兴, 因为鬼魂才会悄然而至。
    (9)妇女生孩子,任何男人不得入内。
    (10)孕妇不能吃兔肉,否则孩子会成豁口。
    (11)正月初一至初五不能将屋内垃圾及洗脸水倒出,而要将拉圾堆放于门后,将水洒在屋内,意为财不能外流。
    (12)正月初一至初四,不能将馍馍分开,将柴木折断,以示凡事都要完整。
    (13)腊月三十至正月初四,将背篓藏好,否则年内会遇到老虎。
    (14)腊月三十至正月初四,将绳子藏好,否则年内会处处碰到毒蛇。
    (15)在交易牛马等大牲畜时,不能用嘴讨价还价,卖买双方将手放在袖筒内捏指交易,否则牲畜会受到损害。
    (16)跳朝格时,不准入赘者和外族人跳,否则村中不安。
    (白马)藏族丧葬有土葬、火葬、水葬和悬棺葬四种。无论那种葬法,在藏族历史上都是有过的,现今主要为土葬。藏族第一至第七代藏王都是从“登天之绳”升上天空的,因此没有坟墓。天梯斩断后,第八代藏王开始实行土葬,因此土葬在整个藏区是比较普遍的。至于(白马)藏区的土葬与其他藏区土葬的区别,笔者认为主要在于(白马)藏区受相邻汉族的影响,结合了藏汉两个民族的葬法,因而形成了自身丧葬的特点。火葬是藏民族比较考究的一种葬法。像将死者捆绑成胎儿状,广大藏区的作法都一样,意为生死相联,生时何状,死时复此状。这很可能与佛教的轮回理论有关。水葬同样和其他藏区一样,一般是针对婴孩,而悬棺葬在藏区未曾听到。(白马)藏族的悬棺葬与我国南方的悬棺葬是不同的:(白马)藏区的悬棺葬只限于传染病死者和暴死者,所以一座土崖上最多也是一个,悬棺均在向阳的土崖上,最高也仅在四米左右;而南方的悬棺却都在高不可攀的石崖上,并且密密麻麻地放置着,可见这种葬法在当地是很普遍的。为此我认为:南方的悬棺葬很可能与人们希望灵魂早日升天有关,(白马)藏族的悬馆葬却是借助阳光杀掉传染病菌和暴死者的邪气,使活着的人健康快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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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马)藏族信仰习俗现状调查研究

杨冬燕

 

内蒙古阿拉善左旗信仰伊斯兰教的蒙古族穆斯林
王玉霞

    (2)丧葬:蒙古族的传统丧葬方式有土葬、野葬和火葬。土葬即人死后无论老年、壮年或幼童,均赤身装入白布袋里,在家放尸3至7天,诵经焚香。出灵时,尸体由窗户抬出。棺材置于墓穴中,以土埋葬。火葬较为普遍,野葬已不多见。蒙回严格遵守伊斯兰教速葬、土葬、薄葬的原则。当一个人濒危时,请伊玛目念讨白(“忏悔词”)向安拉祈求饶恕其一生的罪孽,家人提念清真言。去世后用清洁的水给尸体净身,用三丈六尺白布裹身,俗称穿“克凡”,当天或第二天埋葬。众人将尸体抬往墓地,由伊玛目带领众人举行殡礼入葬。

 

 

 

라마교 결혼 사상에 대한 조사 필요

 

 

 

중얼중얼 :

...아..내가 천재였으면 해당 자료들을 다 암기해서 따로 조사 안하고 그냥 툭툭 논증할 수 있을터인데--....이걸로 이번 학기 논문을 쓱쓱 할까나.....더 쉬운거 없나 몰라...다른 것이 생각이 안나...아..미치겠네.ㅠㅠ

열심히 쓰려다가 결국 말도 안되는 방향으로 빠져버린 레포트. 누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수 있는 코르치가 샤만킹이라는 사실을 마치 대단한 것마냥(그의 행적, 임명지, 우순노인과의 상관성등) 써놓은 다음에 이미 유명한 샤만킹 쿠쿠추와 비교를 해주고, 베키가 샤만킹의 몽고식 이름이라고 주장해보려고 발악중이다. 레포트를 쓸 때면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 이런 것을 증명해서 머하나라는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사실 위의 내용에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많이 집어넣으면 개인적으로 참 재미있어진다. 하지만 사료로서, 하다 못해서 현대 인류학과 민속학 혹은 종교학으로라도 간접적으로 증명이 안되는 사항을 내 상상대로 넣을 수는 없다. 하지만 추론적으로는 꽤나 그럴듯 하다고 생각된다. 한마디로 누구랑 누구가 사랑을 했을것 같은데, 흑백샤만 혹은 흑백적황샤만과 같은 논란이 되는 분류방법등등... 이런 것을 적으면 소설쓰고 있네라는 소리밖에 못 듣겠지.

 

상상의 나래보다는 어떻게든 관련 사료를 끌어모아서 예쁘게 포장할까 고민중인 바보 역사학도였습다. 크흑..ㅠㅠ

 

 

제 블로그에 자주 오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얼마전에 아버지를 모시고 산동을 갔다 왔고, 13일에는 일본으로 날라가서 3월말에는 오는 관계로 방학내내 천천히 할 수 있는 논문들을 13일 전까지 모두 다 끝내야디는 부담감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포스팅도 잘 못하고 있군요. 오히려 일본을 가면 더 자주 포스팅을 할 것 같은 이 왠지 모르게 짜증나는 예상은 멀까요?;;;

《周易参同契》

汉·魏伯阳

大易总叙章第一
乾坤者,易之门户,众卦之父母。坎离匡廓,运毂正轴,牝牡四卦,以为橐□(瀹去氵
加竹)。覆冒阴阳之道,尤工御者准绳墨,执衔辔,正规距,随轨辙,处中以制外,数在律
历纪。月节有五六,经纬奉日使,兼并为六十,刚柔有表里。朔旦屯直事,至暮蒙当受,昼
夜各一卦用之依次序。即未至晦爽,终则复更始,日月为期度,动静有早晚。春夏据内体,
从子到辰巳,秋冬当外用,自午讫戌亥。赏罚应春秋,昏明顺寒暑,爻辞有仁义,随时发喜
怒,如是应四时,五行得其理。

乾坤设位章第二
天地设位,而易行乎其中。天地者,乾坤之象也;设位者,列阴阳配合之位也;易谓坎
离者,乾坤二用。二用无爻位,周流行六虚,往来既不定,上下亦无常,幽潜沦匿,变化于
中,包囊万物,为道纪纲,以无制有,器用者空,故推消息,坎离没亡。言不苟造,论不虚
生,引验见效,校度神明,推论结字,原理为证。坎戊月精,离巳日光,日月为易,刚柔相
当,土旺四季,罗络始终,青赤黑白,各居一方,皆秉中宫,戊巳之功。

日月悬象章第三
易者,象也。悬象著明,莫大忽日月,穷神以知化,阳往则阴来,辐辏而轮转,出入更
卷舒。易有三百八十四爻,据爻摘符,符谓六十四卦。晦至朔旦,震来受符。当斯之际,天
地媾其精,日月相担持。雄阳播玄施,雌阴化黄包。混沌相交接,权舆树根基。经营养鄞
鄂,凝神以成躯。众夫蹈以出,蠕动莫不由。

圣人上观章第四
於是仲尼赞鸿蒙,乾坤德洞虚,稽古当元皇,关睢建始初,冠婚气相纽,元年乃芽滋。
圣人不虚生,上观显天符。天符有进退,屈伸以应时。故易统天心,复卦建始萌,长子继父
体,因母立兆基。消息应中律,升降据斗枢。三日出为爽,震庚受西方。八日兑受丁,上弦
平如绳。十五乾体就,盛满甲东方。蟾蜍与兔魄,日月(气)双明,蟾蜍视卦节,兔者吐生
光。七八道已讫曲折低下降,十六转受统,巽辛见平明,艮直于丙南,下弦二十三,坤乙三
十日,东北丧其朋。节尽相禅与,继体复生龙,壬癸配甲乙,乾坤括始终。七八数十五,九
六亦相应,四者合三十,阳(气)索灭藏。八卦布列曜,运移不失中,元精眇难睹,推度效
符证。居则观其象,准拟其形容,立表以为范,占候定吉凶,发号顺时令,勿失爻动时。上
察河文,下序地形流,中稽于人心,参合考三才。动则循卦节,静则因彖辞乾坤用施行,天
下然后治。(一本云,可得不慎乎,非是)

君臣御政章第五
御政之首,鼎新革故。管括微密,开舒布宝。要道魁柄,统化纲纽。爻象内动,吉凶外
起,五纬错顺,应时感动。四七乖戾,□(言多)离俯仰。文昌统录,诘责台辅百官有司,
各典所部。日合五行精,月受六律纪。五六三十度,度竟复更始。原始要终,存亡之绪,或
君骄佚,亢满违道;或臣邪佞,行不顺轨。弦望盈缩,乖变凶咎。执法刺讥,诘过贻主。辰
极受正,优游任下。明堂布政,国无害道。

炼己立基章第六
内以养己,安静虚无。原本隐明,内照形躯。闭塞其兑,筑固灵株。三光陆沉,温养子
珠,视之不见,近而易求。黄中渐通理,润泽达肌肤。初正则终修,干立未可持。一者以掩
蔽,世人莫知之。

明两知窍章第七
上德无为,不以察求。下德为之,其用不休。上闭则称有,下闭则称无。无者以奉上,
上有神德居。此两孔穴法,金气亦相胥。知白守黑,神明自来,白者金精,黑者水基。水者
道枢,去数名一。阴阳之始,玄含黄芽。五金之主,北方河车。故铅外黑,内怀金华,被褐
怀玉,外为狂夫。金为水母,母隐子胎。水为金子,子藏母胞。真人至妙,若有若无。仿佛
大渊,乍沉乍浮。退尔分布,各守境隅。采之类白,造之则朱。炼为表卫,白里真居。方圆
径寸,混而相拘。先天地生,巍巍尊高。旁有垣阙,状似蓬壶。环匝关闭,四通踟蹰。守御
密固,阏绝奸邪。曲阖相通,以戒不虞。可以无思,难以愁劳。神(气)满室,莫之能留。
守之者昌,失之者亡。动静休息,常与人俱。

明辨邪正章第八
是非历脏法,内观有所思,履行步斗宿,六甲以日辰。阴道厌九一,浊乱弄元胞。食气
鸣肠胃,吐正吸外邪。昼夜不卧寐,晦朔未尝休。身体日疲倦,恍惚状若痴。百脉鼎沸驰,
不得清澄居。累土立坛宇,朝暮敬祭祀。鬼神见形象,梦寐感慨之。心欢意喜悦,自谓必延
期,遽以夭命死,腐露其形骸。举措辄有违,悖逆失枢机。诸术甚众多,千条有万余,前却
违黄老,曲折戾九都。明者省厥旨,旷然知所由。勤而行之,夙夜不休。伏食三载,轻举远
游,跨火不焦,入水不濡,能存能亡,长乐无忧。道成德就,潜伏俟时。太乙乃召,移居中
洲,功满上升,膺籙受图。

龙虎两弦章第九
火计不虚作,演易以明之。偃月法炉鼎,白虎为熬枢;汞日为流珠,青龙与之俱。举东
以合西,魂魄自相拘。上弦兑数八,下弦艮亦八,两弦合其精,乾坤体乃成。二八应一斤,
易道正不倾。

金返归性章第十
金入于猛火,色不夺精光。自开辟以来,日月不亏明。金不失其重,日月形如常。金本
从月生,朔旦日受符。金返归其母,月晦日相包。隐藏其匡廓,沉浮于洞虚。金复其故性,
威光鼎乃□(火喜)。

二土全功章第十一
子午数合三,戊己号称五。三五既和谐,八石正纲纪。呼吸相含育,伫思为夫妇。黄土
金之父,流珠水之子。水以土为鬼,土镇水不起。朱雀为火精,执平调胜负。水盛火消灭,
俱死归厚土。三性即合会,本性共祖宗。巨胜尚延年,还丹可入口。金性不败朽,故为万物
宝。术士伏食之,寿命得长久。土游于四季,守界定规矩。金砂入五内,雾散若风雨。熏蒸
达四肢,颜色悦泽好。发白皆变黑,齿落生旧所。老翁复丁壮,耆妪成吒女。改形免世厄,
号之曰真人。

同类合体章第十二
胡粉投火中,色坏还为铅。冰雪得温汤,解释成太玄。金以砂为主,秉和于水银。变化
由其真,终始自相因。欲作伏食仙,宜以同类者,植禾当以谷,覆鸡用其卵。以类补自然,
物成易陶冶。鱼目岂为珠?蓬蒿不成□(木贾)。类同者相从,事乖不成宝。燕雀不生凤,
狐兔不乳马。水流不炎上,火动不润下。时间多学士,高妙负良材。邂逅不遭遇,耗火亡资
财。据按依文说,妄以言为之。端绪无因缘,度量失操持。□(扌寿)治羌石胆,云母及矾
磁。硫磺烧豫章,泥于相炼治。鼓下五石铜,以之为辅枢。杂性不同类,安肯同体居。千举
必万败,欲黠反成痴。稚年至白首,中道生狐疑。背道守迷路,出正入邪蹊。管窥不广见,
难以揆方来。

三圣前识章第十三
若夫至圣,不过伏羲,始画八卦,效法天地。文王帝之宗,结体演爻辞。夫子庶圣雄,
十翼以辅之。三君天所挺,迭兴更御时。优劣有步骤,功德不相殊。制作有所踵,推度审分
铢。有形易忖量,无兆难虑谋。作事令可法,为世定诗书。素无前识资,因师觉悟之。皓若
寒帷帐,嗔目登高台。火记六百篇,所趣等不殊。文字郑重说,世人不孰思。寻度其源流,
幽明本共居。窃为贤者谈,□(竭无立)敢轻为书?若遂结舌□(培土换口旁),绝道获罪
诛。写情著竹帛,又恐泄天符。犹豫增叹息,俯仰缀斯愚。陶冶有法度,未可悉陈敷。略述
其纲纪,枝条见扶疏。

金丹刀圭章第十四
以金为堤防,水入乃优游。金计有十五,水数亦如之。临炉定铢两,五分水有余。二者
以为真,金重如本初。其三遂不入,火二与之俱。三物相含受,变化状有神。下有太阳气,
伏蒸须臾间。先液而后凝,号曰黄□焉。岁月将欲讫,毁惟伤寿年。形体如灰土,状若明窗
尘。□(扌寿)治并合之,持入赤色门。固塞其际会,务令至完坚。炎火张于下,昼夜声正
勤。始文使可修,终意武乃陈。候视加谨慎,审察调寒温。周旋十二节,节尽更须亲。气索
命将绝,休死亡魄魂。色转更为紫,赫然成还丹。粉提以一丸,刀圭最为神。

水火情性章第十五
推演五行数,较约而不繁。举水以激火,奄然灭光明。日月相薄蚀,常在朔望间。水盛
坎侵阳,火衰离昼昏。阴阳相饮食,交感道自然。名者以定情,字者以性言。金来归性初,
乃得称还丹。吾不敢虚说,仿效圣人文。古记题龙虎,黄帝美金华。淮南炼秋石,玉阳加黄
芽。贤者能持行,不肖毋与俱。古今道由一,对谈吐所谋。学者加勉力,留念深思惟。至要
言甚露,昭昭不我欺。

阴阳精气章第十六
乾坤刚柔,配合相包。阳秉阴受,雌雄相须。须以造化,精气乃舒。坎离冠首,先映垂
敷。玄冥难测,不可画图。圣人揆度,参序元基。四者混沌,径入虚无。六十卦周,张布为
舆。龙马就驾,明君御时。和则随从,路平不邪。邪道险阻,倾危国家。

君子居室章第十七
君子居其室,出其言善,则千里之外应之。谓万乘之主,处九重之室,发号出令,顺阴
阳节。藏器俟时,勿违卦月。屯以子申,蒙用寅戍。余六十卦,各自有日。聊陈两象,未能
究悉。立意设刑,当仁施德,逆之者凶,顺之者吉。按历法令,至诚专密。谨候日辰,审查
消息。纤芥不正,悔吝为贼。二至改度,乖错委曲。隆冬大暑,盛夏霜雪。二分纵横,不应
漏刻。水旱相伐,风雨不节,蝗虫涌沸,群异旁出。天见其怪,山崩地裂。孝子用心,感动
皇极。近出己口,远流殊域。或以召祸,或以至福,或造太平,或造兵革。四者之来,由乎
胸臆。动静有常,奉其绳墨。四时顺宜,与(气)相得。刚柔断矣,不相涉入。五行守界,
不妄盈缩。易行周流,屈伸反覆。

晦朔合符章第十八
晦朔之间,合符行中。混沌鸿蒙,牝牡相从。滋液润泽,施化流通。天地神明,不可度
量。利用安身,隐形而藏。始于东北,箕斗之乡。旋而右转,呕轮吐萌。潜潭见象,发散精
光。昂毕之上,震为出徵。阳(气)造端,初九潜龙。阳以三立,阴以八通。三日震动,八
日兑行。九二见龙,和平有明。三五德就,乾体乃成。九三夕惕,亏折神符。盛衰渐革,终
还其初。巽继其统,固际操持。九四或跃,进退道危。艮主进止,不得逾时。二十三日,典
守弦期。九五飞龙,天位加嘉。六五坤承,结括终始。酝养众子,世为类母。上九亢龙,战
德于野,用九翩翩,为道规矩。阳数已讫,讫则复起。推情合性,转而相与。循环璇玑,升
降上下。周流六爻,难可察睹。故无常位,为易宗祖。

爻变功用章第十九
朔旦为复,阳□(气)始通。出入无疾,立表微刚。黄钟建子,兆乃滋彰。播施柔暖,
黎蒸得常。临炉施条,开路正光。光耀渐进,日以益长。丑之大侣,结正低昂。仰以成泰,
刚柔并隆。远游交接,小往大来。辐辏于银,运而趋时。渐历大壮,侠列卯门。榆荚堕落,
还归本根。刑德相负,昼夜始分。□(炔无火)阴以退,阳升而前。洗涤羽翮,振索宿尘。
乾健盛明,广被四邻。阳终于己,中而相干。媾始纪序,履霜最先。井底寒泉,午为蕤宾。
宾伏于阴,阴为主人。遁世去位,收敛其精。怀德俟时,栖迟昧冥。否塞不通,萌芽不生。
阴申阳屈,没阳姓名。观其权量,察众秋情。任畜微稚,老枯复荣。荠麦牙孽,因冒以生。
剥烂肢体,消减其形。化(气)既竭,亡失至神。道穷则返,归乎坤元。恒顺地理,承天布
宣。玄幽远眇,隔阂相连。应度育种,阴阳之元。廖廓恍惚,莫知其端。先迷失轨,后为主
君。无平不陂,道之自然。变易更盛,消息相因。终坤复始,如复连环。帝王承御,千载常
存。

养性立命章第二十
将欲养性,延命却期。审思后末,当虑其先。人所秉躯,体本一无。元精云布,因
(气)托初。阴阳为度,魂魄所居。阳神日魂,阴神月魄。魂之与魄,互为室宅。性主处
内,立置鄞鄂。情主营外,筑垣城郭。城郭完全,人物乃安。爰斯之时,情和乾坤。乾动而
直,(气)布精流;坤静而翕,为道舍庐。刚施而退,柔化以滋。九还七返,八归六居。男
白女赤,金火相拘。则水定火,五行之初。上善若水,清而无瑕。道之形象,真一难图。变
而分布,各自独居。类如鸡子,白黑相符,纵广一寸,以为始初。四肢五脏,筋骨乃俱。弥
历十月,脱出其胞。骨弱可卷,肉滑若铅。

二气感化章第二十一
阳燧以取火,非日不生光。方诸非星月,安能得水浆?二(气)玄且远,感化尚相通,
何况近存身?切在于心胸。阴阳配日月,水火为效徵。

关键三宝章第二十二
耳目口三宝,闭门无发通。真人潜深渊,浮游守规中,旋曲以视听,开阖皆合同,为己
之枢辖,动静不竭穷。离(气)内营卫,坎乃不用聪,兑合不以谈,希言顺鸿蒙,三者既关
键,缓体处空房。委志归虚无,无念以为常。证难以推移,心专不纵横,寝寐神相抱,觉悟
候存亡。颜色浸以润,骨节益坚强。排却众阴邪,然后立正阳。修之不辍体,庶(气)云雨
行。淫淫若春泽,液液象解冰,从头流达足,究竟复上升,往来洞无极,怫怫被容中。反者
道之验,弱者德之枘。耕耘宿秽污,细微得调畅。浊者清之路,昏久则昭明。

傍门无功章第二十三
世人好小术,不审道深浅。弃正从邪径,裕速阏不通。犹盲不任杖,聋者听宫商,没水
捕雉兔,登山索鱼龙,植麦裕获黍,运规以求方。竭力劳精神,终年无见功。裕知伏食法,
事约而不繁。

流珠金华章第二十四
太阳流珠,常欲去人。卒得金华,转而相因,化为白液,凝而至坚。金华先唱,有倾之
间,解化为水,马齿□(王阑)□(王干),阳乃往和,情性自然。迫促时阴,拘蓄禁门,
慈母养育,孝子报恩,严父施令,教敕子孙。五行错王,相据以生,火性销金,金伐木荣。
三五与一,天地至精,可以口诀,难以书传。子当右转,午乃车旋,卯酉界隔,主客二名。
龙呼于虎,虎吸于精,两相饮食,具相贪便,遂相衔咽,咀嚼相吞。荧惑守西,太白经天,
杀气所临,何有不倾。狸犬守鼠,鸟雀畏□(颤页换鸟),各有其功,何敢有声。不得其
理,难以妄言。竭殚家产,妻子饥贫,自古及今,好者亿人,汽不谐遇,希有能成。广求名
药,与道乖殊。

如审遭逢章第二十五
如审遭逢,睹其端绪。以类相况,揆物终始。五行相克,更为父母。母含滋液,父主秉
与,凝精流形,金石不朽。审专不泄,得为成道。立竿见影,呼谷传响。岂不灵哉!天地至
象。若以野葛一寸,巴豆一两,如喉辄僵,不得俯仰。当此之时,周文揲蓍,孔子占象,扁
鹊操针,巫咸扣鼓,安能令苏,复起驰走?

姹女黄芽章第二十六
河上姹女,灵而最神,得火则飞,不见埃尘,鬼隐龙匿,莫知所存。将欲制之,黄芽为
根。物为阴阳,违天背元,牝鸡自卵,其雏不全。夫何故乎?配合未连,三五不交,刚柔离
分。施化之精,天地自然,火动炎上,水流润下,非有师导,使其然也。资使统正,不可复
改。观夫雌雄交媾之时,刚柔相结而不可解,得其节符,非有工巧以制御之。男生而伏,女
偃其躯,秉乎胞胎,受(气)之初,非徒生时,著而见之,及其死也,亦复效之,此非父母
教令使然。本在交媾,定置始先。

男女相须章第二十七
坎男为月,离女为日,日以施德,月以舒光,月受日化,体不污伤。日失其契,阴侵其
明,晦朔薄蚀,掩冒相倾,日消其形,阴凌灾生。男女相胥,含土以滋,雌雄错杂,以类相
求。金化为水,水性周章,火化为土,水不得行。男动外施,女静内藏,溢度过节,为女所
拘。魄以钤魂,不得淫奢。不寒不暑,进退和时,各得其和,俱吐政符。

四者混沌章第二十八
丹砂木精,得金乃并,金水合处,木火为侣。四者混沌,列为龙虎,龙阳数奇,虎阴数
偶。肝青为父,肺白为母,肾黑为子,离赤为女,脾黄为祖,子午为始。三物一家,都归戊
己。

卯酉刑德章第二十九
刚柔迭兴,更历分布。龙西虎东,建纬卯酉,刑德并会,相见欢喜,刑主伏杀,德主生
起。二月榆落,魁临于卯,八月麦生,天罡据酉。子南午北,互为纲纪。一九之数,终而复
始。含元虚危,播精于子。

君子好逑章第三十
关关雎鸠,在河之洲,窈窕淑女,君子好逑。雄不独处,雌不孤居。玄武龟蛇,蟠虬相
扶,以明牝牡,意当相须。假使二女共室,颜色甚姝,苏秦通言,张仪合媒,发辩利舌,奋
舒美辞,推心调谐,合为夫妻,弊发腐齿,终不相知。若药物非种,名类不同,分刻参差,
失其纲纪,虽黄帝临炉,太公执火,八公□(扌寿)炼,淮南调合,立宇崇坛,玉为阶陛,
麟脯凤脂,把籍长跪,祷祝神祗,请哀诸鬼,沐浴斋戒,冀有所望,亦犹和胶补釜,以硇涂
疮,去冷加冰,除热用汤,飞龟舞蛇,愈见乖张。

圣贤伏炼章第三十一
惟昔圣贤,怀玄抱真,伏炼九鼎,化迹隐沦,含精养神,通德三光,津液腠理,筋骨致
坚,众邪辟除,正气长存,积累长久,变形而仙。忧悯后生,好道之伦,随傍风采,指画古
文,著为图集,开示后昆,露见枝条,隐藏本根,托号诸名,覆谬众文,学者得之,韫椟终
身。子继父业,孙踵祖先,传世迷惑,竟无见闻,随使宦者不仕,农夫失耘,商人弃货,志
士家贫。吾甚伤之,定录此文,字约易思,事省不繁,披列其条,核实可观,分两有数,因
而相循,故为乱辞,孔窍其门,智者审思,用意参焉。

法象成功章第三十二
法象莫大乎天地兮,玄沟数万里。河鼓临星纪兮,人民皆惊骇。晷影妄前却兮,九年被
凶咎。皇上览视之兮,王者退自改。关键有低昂兮,害(气)遂奔走。江淮之枯竭兮,水流
注于海。天地之雌雄兮,徘徊子与午。寅申阴阳祖兮,出入复终始。循斗而招摇兮,执衡定
元纪。升熬于甑山兮,炎火张设下。白虎导唱前兮,苍液和于后。朱雀翱翔戏兮,飞扬色五
彩;遭遇罗网施兮,压之不得举;嗷嗷声甚悲兮,婴儿之慕母;颠倒就汤镬兮摧折伤毛羽。
漏刻未过半兮,鱼鳞狎鬣起。五色象炫耀兮,变化无常主。沸□(橘木换氵)鼎沸驰兮,暴
涌不休止。接连重叠累兮,犬牙相错距。形似仲冬冰兮,□(王阑)□(王干)吐钟乳。崔
嵬而杂厕兮,交积相支柱。阴阳得其配兮,淡薄而相守。青龙处房六兮,春花震东卯。白虎
在昂七兮,秋芒兑西酉。朱雀在张二兮,正阳杂南午。三者具来朝兮,家属为亲侣。本之但
二物兮,末而为三五。三五并与一兮,都集归二所。治之如上科兮,日数亦取甫。先白而后
黄兮,赤黑达表里。名曰第一鼎兮,食如大黍米。自然之所为兮,非有邪伪道。山泽(气)
相蒸兮,兴云而为雨,泥竭遂成尘兮,火灭化为土。若檗染为黄兮,似蓝成绿组。皮革煮成
胶兮,麴□(蘖木换米)化为酒。同类易施工兮,非种难为巧。惟斯之妙术兮,审谛不诳
语。传于亿世后兮,昭然自可考。焕若星经汉兮,昺如水宗海。思之务令熟兮,反覆视上
下。千周粲彬彬兮,万遍将可睹。神明或告人兮,心灵乍自吾。探端索其绪兮,必得其门
户,入道无适莫兮,常传于贤者。

鼎器妙用章第三十三
圆三五,寸一分,口四八,两寸唇,长尺二,厚薄均。腹齐三,坐垂温。阴在上,阳下
奔。首尾武,中间文。始七十,终三旬,三百六,善调均。阴火白,黄芽铅。两七聚,辅翼
人。赡理脑,定玄升。子处中,得安存?来去游,不出门。渐成大,性情纯。却归一,还本
原。善爱敬,如君臣。至一周,甚辛勤。密防护,莫迷昏。途路远,复幽玄。若达此,会乾
坤。乃圭沾,净魄魂。得长生,居仙村。乐道者,寻其根。审五行,定铢分。谛思之,不须
论。深藏守,莫传文。御白鹤,驾龙鳞,游太虚,谒仙君,录天图,号真人。

补塞遗脱章第三十四
参同契者,敷陈梗概,不能纯一,泛滥而说,纤微未备,阙略仿佛。今更撰录,补塞遗
脱,润色幽深,钩援相逮,旨意等齐,所趋不悖,故复作此,命三相类,则大易之情性尽
矣。
乙「浮右」丁「文火」已物辛「世银」癸「真铅」五位相得三木二火五土四金一水甲
「沉左」丙「武火」戊药庚「世金」壬「真汞」而各有合
大易性情,各如其度。黄老用究,较而可御。炉火之事,真有所据。三道由一,俱出径
路。枝茎华叶,果实垂布,正在根株,不失其素。诚心所言,审而不误。象彼仲冬节,竹木
皆摧伤。佐阳诘贾旅,人君深自藏。象时顺节令,闭口不用谈。天道其浩广,太玄无形容,
虚寂不可睹,匡廓以消亡。谬误失事绪,言还自败伤。别序斯四象,以晓后生盲。

自叙启后章第三十五
会稽鄙夫,幽谷朽生,挟怀朴素,不乐权荣,栖迟僻陋,忽略利名,执守恬淡,希时安
宁,晏然闲居,乃撰斯文。歌叙大易,三圣遗言,察其旨趣,一统共论。勿在顺理,宣耀精
神。神化流通,四海和平。表以为历,万世可循。序以御政,行之不繁,引内养性,黄老自
然,含德之厚,归根返元。近在我心,不离己身,抱一毋舍,可以长存。配以伏食,雄雌设
陈。挺除武都,八石弃捐。审用成物,世俗所珍。罗列三条,枝茎相连。同出异名,皆由一
门。非徒累句,谐偶斯文,殆有其真,砾硌可观。使予敷伪,却被赘愆。命参同契,微览其
端,辞寡意大,后嗣宜尊。委时去害,依托丘山。循游寥廓,与鬼为邻。化形而仙,沦寂无
声。百世而下,遨游人间。敷陈羽翮,东西南倾。汤遭厄际,水旱隔并。柯叶萎黄,失其华
荣。吉人相乘负,安稳可长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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陈寅恪《天师道与海滨地域之关系》《金明馆丛稿初编》三联书店 2001年

陈寅恪(1890—1969),义宁(今修水县)人。清朝著名诗人陈三立的第三个儿子。夫人唐筲,是台湾巡抚唐景崧的孙女,也是一位女教师,从小就能背诵十三经,广泛阅读经、史、哲学典籍。中国现代历史学家、古典文学研究家、语言学家,中央研究院院士,代表作是《柳如是别传》。

중얼중얼 : ...왜 우리집은 어렸을 때부터 십삼경을 외우게 안했을까? 응응? 그때 외우라고 했으면 온갖 반항을 했을 터이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너무나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시간은 없고 고전을 읽을 시간을 없고 말이다. 그래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미래의 내 자식아. 넌 죽었다 -_-;;

 

 

내용 요약 :

1) 天师道는 산동반도 남부의 滨海의 도교에서 유래되었다.

2) 한말부터 남북조까지의 많은 정치 사건들이 天师道종교집단과 연관이 있다.

黄巾起义,赵王伦之废位,孙恩之乱,刘邵之弑逆,魏太武之崇道

3) 남북조의 대표적인 天师道 가문

郎邪王氏,高平郗氏,会稽孔氏,义兴周氏,丹阳许氏,丹阳陶氏,吴兴沈氏

4) 종교와 서법과의 관계

5) 지역과 종교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야기

 

 

관심 내용 :

1)道教起源于燕齐之际

2)于吉,宫崇,张角,张道陵皆为滨海出身。

3)盖二种不同民族之接触,其关于武事之方面者,则多在交通阻塞之点,即山岭险要之地。其关于文化方面者,则多在交通便利之点,即海滨湾港之地。

4)并以见吾国政治革命,其兴起之时往往杂有宗教神秘性质。

 

 

중얼중얼 : 난 정말 천재가 싫다. 그것도 집안 환경으로 완벽하게 자라난 천재는 더 싫다. 그래서 난 천인취에가 싫다. 범재의 천재에 대한 질투는 언제나 이렇게 말도 안된다. 하지만 이것 해보면 어떨까 하면서 다른 자료 보고 있는데, 혹시나 하고 뒤져본 천인취에 논문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의 몇 백배를 뛰어넘는 내용과 고증이 나와버리면 사람이 안 질리고 어떻게 버티겠는가? 나는 단지 이럴 수 도 있지 않을까라고 맘대로 상상한 것을 50년도 전에 완벽하게 고증해 낸 사람. 이른바 大师이라는 사람의 그림자를 벗어나는 것은 무지막지하게 힘들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껴본다. 크흑...논문을 대체 멀 써야되는거야! ㅠㅠ

정혼을 한 상태에서 남자가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어떻게 해야될까?

273 定婚聞賤強娶

남자가 결혼비용을 내지 않으려 여자집에 쳐 들어가서 장인어른을 패고 강제로 데려와서 결혼할 경우에는 이혼이 가능하다.

n 元史 刑法志

n 元典章 刑部七 (定婚妻犯賤)

정혼녀가 딴 남자와 놀아날 경우. 남자는 결혼비용을 내지 않고 결혼을 할 수 있다.

n 元典章 刑法四

 

274 定婚夫為盜斷離

정혼을 한 다음에 남자가 살인죄를 저질렀다. 당연히 정혼을 취소할 수 있다.

n 通制條格 卷四 戶令 嫁娶 第六條(通制條格校注 73)

n 元史 刑法志

n 通制條格 卷四 戶令 嫁娶 第七條(通制條格校注 74)

那什么? --》 反問句

“不怕那什么?”

n 通制條格 卷四 戶令 嫁娶 第四條(通制條格校注 71)

唐律以后 :笞杖徒流死

徒流와 같은 경우 계속적인 나라에서 관리를 해주어야했기에, 최대한 줄였다. 하지만 몇몇 죄목에 대해서는(너무 낮으면 안되고 그렇다고 사형시키기에는 머한-_) 유형을 실시하였다.

원나라 시기의 多次盜竊,販賣私과 같은 몇몇 항목에 유형을 실시.

n 通制條格 卷四 戶令 嫁娶 第十七條 (通制條格校注 85)

n 大明令 戶令

본인이 원한다면 정혼을 파기할 수 있음.

기말 논문을 오도미교(五斗米教)을 쓴다는 명목으로 태평경(太平经)를 대충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사이에 도교의 심오한 내용이 아닌 이상한 부분만 찾고 있는 바로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태평경의 을 보면, 일남이녀(一男二女)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故令一男者當得二女,以象陰陽。陽數奇,陰數偶也。

예로부터 음양과 같이 한 남자는 두 여자를 거느린다. 양은 홀수이고, 음은 짝수이기 때문이다.

(王明《太平經合校》 卷三十五 一男二女法第四十二)


뒤쪽 문장은 타자가 치기 귀찮아서 계속 작성하지 않았지만, 여자가 2명보다 많으면 음이 너무 강해지고, 남자가 여러명이면 양이 너무 강해서 안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럼 여러명의 아내를 거느리는 왕은 어떻게 해석해야될까요? 이 경문에서는 왕은 하늘의 정신(天之精神)이기에 각각의 지방에서 한 명의 여자를 얻어야지, 그러지 아니하면 양기가 너무 강하여 가뭄이 든다고 합니다. 


그럼 태평교도, 곧 황건적은 일부다처제였던건가요? 한 명의 남자가 2명의 여자를 거느린다면 남녀의 생리적 구조를 보았을 때, 보다 빠른 번식?!이 가능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태평교도가 그렇게 죽어라 탄압을 당했어도 지속적으로 민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해당 사항은 사상적인 배경외에도 당시에 여성의 인구다 더 많아야된다는 현실적인 조건이 필요할 터인데, 이것의 경우 빈번한 전쟁으로 남자의 인구가 줄었으리라 맘대로 상상해 봅니다.그렇다면 여기서 한가지 상상이 가능합니다.(이게 중점입니다 -_)


당시에는 지금의 러시아처럼 남자가 여자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고, 남자는 능력이 없어도 편안하게 여자를 고.를.수. 있었지 않겠습니까? 아...행복한 나날들이었을거 같습니다. 있는 넘이 더한다고 여친님이 있음에도 이따구 글을 적어서 맞을짓 골라서 하는 바로였습니다.


아....역사를 공부하면 할 수록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마음이란...(먼산...)

(역시 모든 남자의 로망은 의자왕의 삼천궁녀가 아니겠는가?! 으응?::)


하라는 제대로 된 공부는 안하고 엉뚱한 상상이나 하고 있는 엉터리 역사학도였습니다. -_-;;


266 男婦配驅

어린 남자를 데릴사위로 보냈는데, 이 어린 남자를 노예로 삼았다. 이것은 위법이다.

n 元史 刑法志

268 侄女嫁驅

양민은 노예신분의 아내로 보내는 것은 범법.

271 冒娶良人配驅

1- 만약 상대방이 노예신분인 것을 알면서도 결혼하는 것은 인정했다. 문제는 결혼을 한 순간 둘 다 노예신분이 된다. 이러한 규정은 오직 원나라시기에만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신분을 알지 못하고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특히 노예들은 세금을 내지 않기에 이런 경우는 국가에서 원하지 않는 행위이다.

n 元典章 戶部四 奴婢不嫁良人

n 通制條格[Baro1] 卷三 戶令 良賤為婚 第二條(通制條格校注65, 元典章 戶部四 驅口不娶良人) --- 元史 卷一零三 刑法志二 戶婚

보통 양민여자가 노예남자에게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의 경우는 매우 희귀하다. 두 경우 모두 그의 자식도 노예가 된다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북방의 관원이나 군인들이 남방에서 결혼을 하고 북방으로 돌아와서 팔아버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금지하였다.

n 元典章 戶部四 良人不得嫁娶驅奴(通制條格校注66)

결혼 전에 (상대방이 노예인지 아닌지) 정확하게 알아보지 않고결혼을 한 경우 법률적으로 권리가 없다.

n 元典章 戶部四 逃驅妄冒良人為婚

만약 상대방이 노예인지 모르고 결혼을 했다가 이혼을 한 경우에는 그 자식은 양민으로 인정된다.

n 通制條格 卷三 戶令 良賤為婚 第一條 (通制條格校注64)

至元十四年(1277)
근 40년 동안 노예신분에서 도망쳤다가 걸렸어도 무조건 노예로 돌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그 자식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현재 해당 마눌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봐서 이미 죽었을 것이고, 그렇다고 그 자식들은 일단은 노예신분이 된 다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다시 양민으로 회복된다.

n 元典章 戶部四 (犯賤妻轉賣為驅)

복작함의 극치. 정리하기도 힘들다. 후…

재미있는 것은 아버지가 죽기 전에는 노예신분이라는 것이다. 효도를 추구하는 상황때문인가? 그런데 이러한 일시적인 노예신분에서 결혼을 하는 경우는 어떻게 처리해야될까?

n 唐 奴妻良人為妻

원해서 결혼하는 것도 금지한다. 또한 그 자식의 경우 만약 원해서 결혼한 경우는 노비이고, 만약 속은 경우에는 양민이다.

n 唐 雑戶官戶與良人為婚

만약 노비가 그 딸을 양민에게 결혼을 시키면, 딸도 주인의 재산이기에 도둑질법으로 다스렸다.

n 明 良賤為婚姻

당사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해당 사항은 무조건 이혼임.


[Baro1]같은 내용이 통제조격과 원전장에 있을 경우 통제조격이 더 자세한 경우가 많다.

이제 학기를 마감하면서 지정조격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습니다. 저라는 인간은 법률이나 정치사쪽으로는 절대 가지 말아야겠구나라는 결심을 하는 순간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무엇인가를 빠트린것 같은데...

 

왜! 지정 조격은 인터넷 버젼이 없는거지?

조선왕조 실록도 있고! 삼국사기도 있잖아!

 

책으로 출판되어 나왔다는 것은 이미 전산화작업은 다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단지 출판만 되어나오고 인터넷판으로는 없다니 무슨 이런 것이 다 있나!!!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으나, 어떻게든 연구비용을 출판을 통해서 보충해야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긴 하군요.

 

하지만...정말...나름 한국 학자 만으로 표점이나 주석도 좋다는 평가를 받으면서...마지막의 전산화로 된 인터넷 버젼이 없다는 것은 왜인지 조금 아쉬운 것은 사실입니다. 나중에 현대 한국어로 번역된 다음 인터넷 버젼이 공개될 것이라고 상상만 해봅니다.

264 休妻再和

安牘=提控暗渡

1) 이혼을 한 뒤에, 다시 결혼한 남자가 죽고, 원래의 남자와 다시 결혼하는 것을 금지

2) 里邊有服內問題,시간이 흘러서 별로 중시 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단지 위의 규정을 위한것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3) 당시대의 법률에서는 결혼한 뒤에 장애인이 된 부인과 이혼할 수 있었지만(惡疾很可能與廢癡), 원나라 시대에 들어와서 이 사항이 없어졌고, 이는 명대로 이어진다.

 

n 元史 刑法志

n 元典章 戶部四 離異買休妻例(通制條格校注 86)

至元四年以前的舊例肯定是金律

七出和三不去(除犯賤)

法司 : 법률문서 보관 관리

n 通制條格 卷四 戶令 嫁娶 第十八條(通制條格校注 85)

 

n 唐 妻無七出而出之(唐律疏議): 注意義絕的概念(比較狹義)

惡疾很可能與廢癡

無子的定義是妻到50歲

n 唐 義絕離之

n 明 岀妻 《大明令 戶令》

義絕 :《大清律輯注》與元代不同的概念

265 擅嫁匠妻

공인이 도망을 친 뒤에, 그 책임자가 공장의 아내를 돈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결혼을 시켰지만 이것은 위법이다. 하지만 당시에 공인들은 나라에서 관리를 했고, 그 관리가 엄격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n 元史 刑法志

n 通制條格 卷四 戶令 擅配匠妻(通制條格校注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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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ge Khan monument


http://www.culture.mn/mongolia.php?recordID=bilge-khan-monument


The steles contained in the memorial complexes dedicated to Kul-Tegin and Bilge Khan, in the Orkhon Valley, are among the most significant monuments of the Central Asian Turkic Empire. The deciphering of their runic texts has permitted an important number of other inscriptions in the "Orkhon Script"to be translated. The translations below are drawn from Thomson's original French rendition (A. Heikel: Inscriptions de l'Orkhon recueillies par l'expedition finnoise, 1890. Helsingfors, 1892).

 

STELE DEDICATED TO BILGE KHAN

Eastern Face

I who resemble the sky and who was appointed by the sky, Bilge kagan of the the Turks, (here is) what I declare to you: [On the death of?] my father, Bilge kagan of the Turks, [. . . .] the valiant nobles and the people of the Nine-Ogouz . . [. . . . .] sky of the Turks [. . . . .] I became kagan of [. . . . . . . .]. On my arrival, the nobles and the people of the Turks, who were morose as though they were about to die, changed and rejoiced, and reassuredly(?) raised their eyes. After having myself risen to the throne, I gave so many important laws [. . . . . . among the peoples] of the four corners of the world.

(The text immediately following this section is identical to lines 1-20 of Monument I; see . and notes .concerning minor variations.)

In my twenty-seventh year, I made an expedition against the Tanguts. I devastated the Tangut people, and I took their sons, their men(?), their horses and their goods. In my twenty-eighth year, I made an expedition against the Alti-Tshoub (the Six-Tshoub) and the Sogdak, and I devastated the people. An army of fifty thousand (five divisions of) Ong-toutouk(?) Chinese came. I fought near the sacred mount(?), and I annihilated this army. In my twenty<-ninth> year, there was a people of my race with the sacred name of Basmil. As they were not sending any caravans (of tribute), I made an expedition [. . . . .] . . . I brought back [. . .]. In my thirty-second year, I made an exhibition against the Chinese. I fought there against Tshatsha-sengun and an army of eighty thousand (eight divisions); I killed his army there. In my thirty-sixth year, the Tshik people along with the Kirghiz became (our) enemies. Crossing the Kem (the Enissei) I made an expedition against the Tshik; I fought at Eurpen and I vanquished their army [and submitted the] small [people . . .]. In my thirty-seventh year, I made an expedition against the Kirghiz . Crossing snow as high as our lances, I marched in climbing the wooded mountains of the Keugmen and founded as victor over the Kirghiz people; I fought against their kagan in the forest beyond, and I killed their kagan and submitted their people. In the same year, I marched against the Turghes crossing the wooded mountains of Altoun and the Irtysh river. I founded [as victor over the Turghes people]. The army of the kagan of the Turghes came like fire and tempest, and we fought at Boltshou(?); there I killed their kagan, their yabgou and their shad, and I asserviated their people. In my thirtieth year, I made an expedition against Bishbalik. I fought six times [. . . .] I killed many of their troops. Saying to themselves: 'What people are there within?', [. . . .] was (were) lost [. . .] came to call(?) (them). Thanks to them, Bishbalik escaped. In my thirty-first year, the Karlouk people became a valliant enemy, living in freedom without worries. I fought near the sacred source(?) of the Tamag. I killed the Karlouk people and submitted them there. In my [. .] year(?) [. . .] the entire(?) Karlouk people [reunited . . . I] killed (them). The Nine-Ogouz were my own people. As there was bouleversement in the sky and on the earth and that jealousy had stirred up their bile, they became our enemies. In one year I fought four times. First I fought near the town of Togou . Having crossed by swimming the Togla (Tola) River, their army [. . . . . .]. The second time, I fought near Ourgou (? Or Andargou?) and vanquished their army. [. . . . . . . . The third time] I fought [near the source of the Tshoush(i?)]. The Turkic people was collapsing with fatigue and was losing morale. I therefore let their army go, which had pushed us back in dispersing (us); but many of them were joined in meeting their deaths. Coming to a hand battle during the funeral of Tonga-tegin, I cut down there a man of the Tongra race, named Yilpagou(?). The fourth time, I fought at Ezghendi kadaz. There I conquered and defeated their army. [. . . . . In my . . year] when I had spent the winter at Amghi kourgan, there was frost followed by famine. In the springtime, I began a campaign against the Ogouz. The first army had set off marching, the second(?) army was at home. Three Ogouz armies came to attack us. Saying: 'They have come without horses (literally on foot) and week', they came to take us. One of their invading armies went pillaging the houses and buildings; another(?) came fighting. We were few in number and we were week, but the enemy(?) og[ouz? . . . . . .] as [. . the sky] gave us strength, I vanquished them and dispersed them. By the grace of the sky and as I was working, the Turkic people [also?] work(ed). If at the beginning I had not worked (executed) so much, in concert with my younger brother, the Turkic people would have been dead, would have been lost. O! nobles and Turkic people, think of it and know! The Ogouz people [. . . . . . .] So as not to send (? abandon?) [. . . .] I entered a campaign and devastated their houses and their buildings. The [Ogouz] people allied itself with the Nine-Tatars, and they came. Near Agou, I delivered two great battles; I devastated their army and submitted their people there. Having executed so much [. . . . . .] by the grace of the sky [. . . .] in my thirty-th[ird year . . . . . . .] the kagan who had taken up [. . .] the force . . . [. . .] fell in error. Neither the sky above nor the holy spirits of the earth and the water nor the happiness of [my uncle?] the kagan were of help to him. The Nine-Ogouz people abandoned its land and its water, and went towards China. Counting on rising them [. . . . . . . . . .] people [. . .] faillit [. . .] to the south, in China, their name and their reputation were lost, in this land they became my slaves. Because I myself had become kagan, I did not [. . . . .] the Turkic people; [that is how much] I executed to the profit of the institutions [. . . . .] reuniting [. . . . . . . . . .] there I fought and I vanquished their army. Some of them re-entered and re-became a people, others died. Then I marched en aval of the Selenge, and there I devastated their homes and their buildings in reprimanding their pillages(?). [. . . . .] escaped to the mountains. The Uighur Eltebers [fled?] by the hundreds towards the east [. . . . . . . . . .]. The Turkic people was hungry. I rose it up in taking these herds of horses. In my thirty-fourth year, the Ogouz fled and entered China. Angry, I set out marching [. . . . .]; there I took their sons and their men(?). Two Elteber peoples [. . . . . . . . . .]. The Tatabi people was submitted to the Chinese kagan. Seeing that no good news nor good requests(?) were coming from his missionaries, I made an expedition in the summer; I devastated the people and took their herds of horses [. . . . .] the army of [. . .] came, after having reassembled itself. They (we?) made halt in the forest of Kadirkan [. . . . . . . . . .] established in ther land and their water. In saying: 'March towards the south, against the Karlouk people', I sent Toudoun Yam(a) tar, and he went. [. . . . . . . . . .] the karlouk Eltebers were annihilated; his (their?) younger brother(s) [. . . . . . . . . . . .] their (his?) caravans did not hurry. Saying 'I want to reclaim them(?)', I set off marching. By fear he (they?) fled with (by?) two or three men(?). But the tiny people [exalted?], saying: 'My kagan has arrived'. [. . . . . . . . . .] I gave [. . .] horses(?). The small number of cavalry [. . . . . . . . . .].

South-Eastern Face

[. . . . .] marching with the army en amont I crossed, in seven days and nights, the arid desert, and having arrived at Tshorak . . . [. . . . . . . .] as far as [. .] Ketshin [. . . . . . . . . .].

Southern Face

[- -] the first day, I killed the chinese cavalry (which numbered) seventeen thousand men; the second day, I killed a large amount of their infantry. [- - - -] I made expeditions [. .] times. In my thirty-eighth year, in winter, I set out marching against the Kitai [- - in my thirty ninth] year, in spring, I set out marching against the Tatabi [- - -], I killed [- - and I took?] their sons, their men(?), their herds of horses, their goods [- - -] I annihilated their men(?) [- - - - - I] fought [- - - - -]. Having killed their brave men, I made their funeral ceremonies be held. In my fiftieth year, the Tatabi people [. . .] in Kitai [- - -] at the mountain of [- -] an army of forty thousand men, led by Kou-sengun, arrived. Near the mountain of Teunkes , I attacked them and I beat them. I [killed] thirty thousand men, t[en thousand men escaped? - - - - -] the Tatabi [- -] killed(?). My eldest son having died of illness, I conducted mourning(?) at Kou-sengun. For twenty-nine years I was shad, for twenty-nine(!) years I was kagan and I governed the empire. [For?] thirty-one [years . .] I brought so much benefit to my Turks, to my people. - Having done so much [my father the kagan] died in the year of the dog, in the tenth month, the thirty-sixth day. In the year of the pig, in the fifth month, the thirty-seventh day, I held the funeral ceremony. . . . [. . .] Lisun tai-sengun came to me at the head of five hundred men. They brought an infinity of perfumes, of [. . . . .], of gold and of silver. They brought musk(?) for the funeral and placed it, and they brought sandalwood . . [. . .]. All these peoples cut their hair and slit their ears [and their cheeks?]; they brought their good particular horses, their black zibelines and their blue squirrels without number, and deposited there a great quantity.

I who resembly the sky and who was instituted by the sky, Bilge kagan of the Turks, here is what I declare to you: On the arrival of my father Bilge kagan of the Turks, the illustrious nobles of the Turks, behind (from the west) the nobles of the Tardoush, preceeded by Kul-tshour, followed by the shapadit nobles, to the front (from the east) the nobles of the Teules, preceded by Apa-tarkan, followed by the shadapit nobles [. . . . . . . .] Taman-tarkan and Tonyokuk Bouilabaga-tarkan, followed by officers [. . . .] officers preceeded by Seveg-kul-irkiz, followed by officers, all these illustrious nombles [paid] homage(?) to my father the kagan [. . . . . . .] he . . . his nobles and his Turkic people . . [. . . .] nobles and Turkic peoples [. . . . .]. To myself as many [- - -].

Northern Face

(For the first eight lines of this inscription, see lines 1-11 of the Kul-Tegin Monument, Southern Face.)

As many peoples from the four corners of the world [my father] the kagan and my uncle he kagan after their arrival [had organised and constituted, as many] peoples [in the four corners of the world] I myself organised and constituted following my arrival by the grace of the sky . [. . . . . . .]. To the kagan of the Turghes I gave my daughter with great honours, and I gave to my son with great honours the daughter [of the kagan of the] Tur[ghes], and I gave with great [honours . . . . . . . . . . . . . . . .]. I made them lower their heads and bend their knees. By the grace of the sky above and the land below [I led] my people, who had seen nothing of it with their eyes nor heard with their ears, to the front, towards the rising sun, to the right, [towards noon ,] behind [towards the setting sun, to the left, towards midnight - -]. I procured for my Turks, for my people [from the Chinese?] their [red gold?], their white silver, their pieces of silk(?), their isigti(?) grain, their special horses and stallions, their black zibelines and blue squirrels, and I arranged it. I rendered [my people?] without worry. The sky above(?) [. . . .] powerful [. . . . . . . . . . . . . . . . . . . .] the nobles(?) and the people, [. .] bring them up, do not let them suffer, do not torment them [. . .] the Turkic nobles, my Turkic people [. . . . . . . . . .] on the part of(?) your kagan, these nobles [. . . . . . . . . .] Turkic people, [. .] you will see [. . .], you will [. .] to your home, you will be without worry [. . . . . .]. Then, from the kagan of the Chinese I sent for many sculptors. He did not reject my invitation, but sent interior sculptors (i.e., attached to his house). With their assistance I had erected separately the building (the temple), [I had cut] separately the sculptures in the interior and the exterior, [and I had the stone cut. The message which I have on my heart . . . . .] as far as your well-loved sons and your descendants(?), in seeing it, know this: the eternal stone [- - -].

Western Face 

[My father] Bilge kagan [who reigned] over [the Turks, having died?], I will cry for him [again?], when the summer returns, when the bridge (the vault) of the sky above is . . [. . .], and when the cerf flees[?] to the mountain. The stone of my father the kagan, it is myself the kagan who [- - - -].

South-Western Face

[- -] it is I Yolig-tegin who wrote the inscription of he kagan. All this, the building, the sculptures, the paintings [. . . . . . . .]. It is I, Yolig-tegin, cousin of the kagan, who, staying here for a month and four days, wrote and had sculpted [- - -].

 

 

Name

毗伽可汗 Bilge Khan or Bilgä Khağan 빌게 칸  (683 or 684~734) mean by "wise chieftain"

 

call by "The Orkhon script", "Old Turkic script", "Göktürk 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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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古代史文献阅读与研究(上)
中国古代史文献阅读与研究(下)

宋辽金史研究 张希清
周四7-9 文史110

唐宋妇女史研究  李志生
周三7-9 一教103  与邓小南合上

中国古代官僚等级制度研究  阎步克
周二3-4  二教510

学术规范与论文写作  荣新江
周四11-12  一教202  限70人

日本汉学名著研读   王  铿
周五3-4   一教113

唐代典志研读   王小甫
周二7-9  文史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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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二11-12  文史107

 

我打算选个学术规范与论文写作日本汉学名著研读 。总算为15学分,只剩下10学分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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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九〇〇年以来出土简帛一览

单育辰

来自 :http://www.bsm.org.cn/show_article.php?id=82

 

 

凡 例

一、本文收錄一九〇〇年至二〇〇五年十月間出土的隋之前有漢文文字的竹簡、木簡、竹牘、木牘、帛書,其他有漢文文字的木質出土材料如簽牌、削衣、謁、封泥匣等,亦酌情收入;
一、本文收錄出土簡帛按發現的時間先後排列,同時分開標明出土地點不同的簡帛;
一、本文收錄出土簡帛的體例爲:“出土時間”(出土時間不明者標明收繳或入藏時間)、“出土地點”(出土地點不明者標明收繳或入藏地點)、“出土簡帛的數量”、“出土簡帛的內容或名稱”、“發表出土簡帛材料的書、刊”;
一、簡牘出土時,多數已殘斷,本文多數情況下只能按出土簡牘時的考古編號標明,故“數量”後所附之“支”,絕大多數非指整簡之“支”;
一、本文“簡帛內容或名稱”系參考多家論著寫定,故有些名稱不能和發表出土簡帛材料的書、刊中論及的相一致;在名稱下標有     者表示出土簡帛原有篇題;
一、本文於“發表出土簡帛材料的書、刊”後無任何附加文字者,表明此書、刊已收錄了出土簡帛的全部釋文或圖版;若在“發表出土簡帛材料的書、刊”後標明“有介紹”或“有簡介”者,表明此書、刊未能收錄出土簡帛的全部釋文或圖版,或僅有出土簡帛情況的介紹性文字;
一、已公佈全部釋文或圖版的簡帛,本文只標明收錄出土簡帛全部釋文或圖版的書、刊,相關研究性著作概不收入;有些出土簡帛釋文或圖版爲多種書、刊完整收錄,本文儘量全面標明,因本文篇幅所限,不能全面標明的,選擇其中最重要的書、刊標明;
一、未公佈全部釋文或圖版的簡帛,本文儘量標明其出於何種考古發掘報告,若無考古發掘報告可引述,則擇要標明其出於何種論著、報紙、新聞;
一、本文的編成,參考了時賢的各種目錄、論著,限於篇幅及體例,恕不注明。

1901年 新疆古尼雅遺址(西晉)   50支   斯坦因第一次中亞考察獲
1、文書
Chinese documents from the sites of Dandan-Uilig, Niya and Endere, Ancient Khotan, 1vols, Oxford,1907(《古代和闐》第一卷後《丹丹烏裏克、尼雅、安得悅發現的漢文文書》);1985文物出版社《樓蘭尼雅出土文書》

1901年 新疆古樓蘭遺址(西域長史治所)(魏、西晉、前涼)   120支  斯文赫定第二次中亞考察獲
1、文書
Die Chinesischen Handschritfen und Sonstigen Kleinfunde Sven Hedin in Lou-lan, Stockholm, 1920(《斯文赫定在樓蘭發現的漢文寫本及零星物品》);1985文物出版社《樓蘭尼雅出土文書》;1999天地出版社《樓蘭漢文簡紙文書集成》

1906年 新疆古尼雅遺址(漢)  11支   斯坦因第二次中亞考察獲
1、文書
Les documents Chinois découverts par Aurel Stein dans les Sables du  Turkestan Oriental, Oxford,1913(《斯坦因在東突厥斯坦沙漠所獲漢文文書》);1985文物出版社《樓蘭尼雅出土文書》

1906年 新疆古樓蘭遺址(西域長史治所)(魏、西晉、前涼)  166支   斯坦因第二次中亞考察獲
1、文書
Les documents Chinois découverts par Aurel Stein dans les Sables du  Turkestan Oriental, Oxford,1913(《斯坦因在東突厥斯坦沙漠所獲漢文文書》);1931有正書局《漢晉西陲木簡彙編》,上海;1985文物出版社《樓蘭尼雅出土文書》;1999天地出版社《樓蘭漢文簡紙文書集成》

1907年 甘肅敦煌漢邊塞遺址(古敦煌郡玉門都尉、中部都尉、宜禾都尉)(兩漢)   709支(尚有近2000殘片未發表),帛書3件    斯坦因第二次中亞考察獲
1、文書
Les documents Chinois découverts par Aurel Stein dans les Sables du  Turkestan Oriental, Oxford,1913(《斯坦因在東突厥斯坦沙漠所獲漢文文書》);1931有正書局《漢晉西陲木簡彙編》,上海;1984文物出版社《疏勒河流域出土漢簡》;1990同朋舍《大英図書館蔵敦煌漢簡》,京都;1991年甘肅人民出版社《敦煌漢簡釋文》;1991中華書局《敦煌漢簡》

1909年 新疆古樓蘭遺址(西域長史治所)(魏、西晉、前涼)   4支   橘瑞超獲
1、文書
1915國華社《西域考古図譜》,東京;1985文物出版社《樓蘭尼雅出土文書》;1999天地出版社《樓蘭漢文簡紙文書集成》;1999學苑出版社《西域考古圖譜》

1914年 新疆古樓蘭遺址(西域長史治所)(魏、西晉、前涼)   60支  斯坦因第三次中亞考察獲
1、文書
1931有正書局《漢晉西陲木簡彙編》,上海;Les Documents Chinois de la troisième expédition de Sir Aurel Stein en Asie Centrale, London, 1953(《斯坦因第三次中亞考察所獲漢文文書》);1985文物出版社《樓蘭尼雅出土文書》;1993甘肅人民出版社《斯坦因第三次中亞探險所獲甘肅新疆出土漢文文書——未經馬斯伯樂刊佈的部分》又收入1支;1999天地出版社《樓蘭漢文簡紙文書集成》;2005上海辭書出版社《斯坦因第三次中亞考古所獲漢文文獻(非佛經部分)》

1915年 新疆吐魯番阿斯塔那六區一號前涼墓   木牘1枚  斯坦因第三次中亞考察獲
1、內容待考
Les Documents Chinois de la troisième expédition de Sir Aurel Stein en Asie Centrale, London, 1953(《斯坦因第三次中亞考察所獲漢文文書》);1997武漢大學出版社《斯坦因所獲吐魯番文書研究(修訂本)》;2005上海辭書出版社《斯坦因第三次中亞考古所獲漢文文獻(非佛經部分)》
1914~1915年 甘肅敦煌漢邊塞遺址(兩漢)(古敦煌郡中部都尉、宜禾都尉,酒泉郡西部都尉、北部都尉、東部都尉)   197支   斯坦因第三次中亞考察獲
1、文書
1931 有正書局《漢晉西陲木簡彙編》,上海;Les Documents Chinois de la troisième expédition de Sir Aurel Stein en Asie Centrale, London, 1953(《斯坦因第三次中亞考察所獲漢文文書》);1984文物出版社《疏勒河流域出土漢簡》;1990同朋舍《大英図書館蔵敦煌漢簡》,京都; 1991年甘肅人民出版社《敦煌漢簡釋文》;1991中華書局《敦煌漢簡》;1993甘肅人民出版社《斯坦因第三次中亞探險所獲甘肅新疆出土漢文文書—— 未經馬斯伯樂刊佈的部分》又收入4支;2005上海辭書出版社《斯坦因第三次中亞考古所獲漢文文獻(非佛經部分)》

1920年 甘肅敦煌漢邊塞小方盤城附近(兩漢)   17支     周炳南獲
1、文書
1990文物出版社《散見簡牘合集》;1991年甘肅人民出版社《敦煌漢簡釋文》;1991中華書局《敦煌漢簡》

1930年 新疆羅布泊默得沙爾漢邊塞遺址(兩漢)   71支    黃文弼獲
1、屯戍文書
1984文物出版社《疏勒河流域出土漢簡》;1989文物出版社《黃文弼歷史考古論集》;1998中央研究院歷史語言研究所專刊之九十九《居延漢簡補編》,臺北

1930~1931年 內蒙古額濟納河漢邊塞破城子A8、金關A32、地灣A33、大灣A35等地點(古居延都尉、肩水都尉)(兩漢)   10100支,帛書2件出於破城子,3件出於地灣
1、屯戍文書
1957 中央研究院歷史語言研究所專刊之二十一《居延漢簡·圖版之部》,臺北;1959科學出版社《居延漢簡甲編》;1960中央研究院歷史語言研究所專刊之四十《居延漢簡·考釋之部》,臺北;1980中華書局《居延漢簡甲乙編》;1987文物出版社《居延漢簡釋文合校》;1998中央研究院歷史語言研究所專刊之九十九《居延漢簡補編》,臺北,在《居延漢簡·圖版之部》、《居延漢簡·考釋之部》的基礎上,又收入1153支
附:裘善元舊藏居延漢簡歸屬:
(1)、臺北國家圖書館藏    30支    1959科學出版社《居延漢簡甲編》;1998中央研究院歷史語言研究所專刊之九十九《居延漢簡補編》,臺北
(2)、商承祚藏            6支     1959科學出版社《居延漢簡甲編》;1992《文物》第9期
(3)、中國國家博物館藏    6支     1959科學出版社《居延漢簡甲編》
(4)、南京博物院藏        1支     1959科學出版社《居延漢簡甲編》
(5)、上海博物院藏        1支     1959科學出版社《居延漢簡甲編》
(6)、香港金匱室藏        4支     1957《金匱論古綜合刊》第一期,香港
(7)、中國國家圖書館藏    2支     2005廣西師範大學出版社《簡帛研究二〇〇二、二〇〇三》

1931年 新疆古尼雅遺址(漢)   26支   斯坦因第四次中亞考察獲
1、文書
The British Library Journal, xxiv-1, Spring 1998(《大英圖書館館刊》);1998《敦煌吐魯番研究》第3卷;2001商務印書館《中國學術》第2輯

1931年 朝鮮平壤南井里東漢墓M116     1支
1、賵方
1934朝鮮古迹研究會《楽浪彩篋塚》,漢城;1972中央公論社《楽浪》,東京

1942年 湖南長沙子彈庫楚墓
1、楚帛書一件    1985中華書局《長沙子彈庫楚帛書研究》
2、商承祚舊藏十三殘片   1992《文物》第11期
3、其他帛書(美國賽克勒美術館藏)  1998廣西師範大學《李零自選集》有介紹

1944年 甘肅敦煌漢邊塞小方盤城附近(兩漢)   76支     夏鼐、閻文儒獲
1、屯戍文書
1948《歷史語言研究所集刊》第十九本;1961科學出版社《考古論文集》、1984文物出版社《疏勒河流域出土漢簡》;1991年甘肅人民出版社《敦煌漢簡釋文》;1998中央研究院歷史語言研究所專刊之九十九《居延漢簡補編》,臺北

1945年  甘肅武威南山剌麻灣(兩漢)    7支    夏鼐、閻文儒獲
1、屯戍文書
1998中央研究院歷史語言研究所專刊之九十九《居延漢簡補編》,臺北

1951年 湖南長沙五里牌楚墓M406   38支
1、遣策
1975《長沙發掘報告》;1995齊魯書社《戰國楚竹簡滙編》

1951~1952年 湖南長沙伍家嶺西漢墓M203   10支(僅1枚可識)
1、封泥匣
1975科學出版社《長沙發掘報告》

1951~1952年 湖南長沙徐家灣西漢(劉驕)墓M401   1支
1、有“被絝函”3字
1975科學出版社《長沙發掘報告》

1953年 湖南長沙仰天湖楚墓M167    42支
1、遣策  
1995齊魯書社《戰國楚竹簡滙編》;2000文物出版社《長沙楚墓》

1954年 湖南長沙楊家灣楚墓M569     72支
1、(內容待考)
1995齊魯書社《戰國楚竹簡滙編》;2000文物出版社《長沙楚墓》

1955年 湖北武昌任家灣六朝(鄭丑)墓     3支(僅一枚可識)
1、謁
1955《文物參考資料》第12期

1956年 河南陝縣劉家渠東漢墓M23    2枚
1、可見“□門一”三字
1957年《考古通訊》第4期

1957年 河南信陽長台關楚墓M1    148支
1、遣策
2、《墨子》佚篇或儒家著作
1986文物出版社《信陽楚墓》;1995齊魯書社《戰國楚竹簡彙編》

1957年 江蘇高郵邵家溝遺址(東漢) 1支
1、符簶
1960《考古》第10期

1959年 新疆巴楚縣脫庫孜沙來古城(漢?)
1959《文物》第7期有簡介

1959年 甘肅武威磨嘴子東漢墓M6 610支
1、《儀禮》(甲、乙、丙本)(或說爲慶氏或後氏本) 2、日忌雜占
1964文物出版社《武威漢簡》

1959年 甘肅武威磨嘴子東漢墓M15   1件帛書
1、鎮墓券
1964文物出版社《武威漢簡》

1959年 甘肅武威磨嘴子東漢墓M18 10支
1、王杖事例、詔書    
1960《考古》第9期;1964文物出版社《武威漢簡》

1962年 江蘇連雲港海州網疃莊焦山東漢墓   木牘2枚
1、衣物疏    
1963《考古》第6期有介紹

1963年 江蘇鹽城三羊墩東漢墓M1    木櫝1枚
1、衣物疏
1964《考古》第8期有介紹

1965年 湖北江陵望山楚(固)墓M1 207支
1、卜禱
1995中華書局《望山楚簡》;1995齊魯書社《戰國楚竹簡滙編》;1996文物出版社《江陵望山沙塚楚墓》

1965年 湖北江陵望山楚墓M2 66支
1、遣策
1995中華書局《望山楚簡》;1995齊魯書社《戰國楚竹簡滙編》;1996文物出版社《江陵望山沙塚楚墓》

1966—1969年 新疆吐魯番阿斯塔那西晉墓M53 1支
1、以練易棺交易文書
1972《文物》第1期

1971年 甘肅甘谷劉家坪東漢墓 23支
1、桓帝時有關宗室奏書、詔書
1984甘肅人民出版社《漢簡研究文集》

1972年 甘肅武威旱灘坡東漢墓 92支
1、醫藥書
1975文物出版社《武威漢代醫簡》

1972年 湖北雲夢大墳頭西漢墓M1 1支
1、衣物疏
1973《文物》第9期、1981文物出版社《文物資料叢刊》第4輯

1972年 山東臨沂銀雀山西漢墓M1 4942支及數千殘片
1、《孫子兵法》十三篇及五篇佚文(《吳問》、《四變》、《黃帝伐赤帝》、《地形二》、《見吳王》)1975文物出版社《銀雀山漢墓竹簡》(壹)(線裝本);1985文物出版社《銀雀山漢墓竹簡》(壹)(精裝本)
2、《孫臏兵法》(附下篇,爲《十陣》、《十問》、《略甲》、《客主人分》、《善者》、《五名五恭》、《兵失》、《將義》、《將德》、《將敗》、《將失》、《雄牝城》、《五度九奪》、《積疏》、《奇正》, 75年本有,85年本無)  1975文物出版社《銀雀山漢墓竹簡》(壹)(線裝本);1985文物出版社《銀雀山漢墓竹簡》(壹)(精裝本)
3、《尉繚子》  1975文物出版社《銀雀山漢墓竹簡》(壹)(線裝本);1985文物出版社《銀雀山漢墓竹簡》(壹)(精裝本)
4、《晏子》  1975文物出版社《銀雀山漢墓竹簡》(壹)(線裝本);1985文物出版社《銀雀山漢墓竹簡》(壹)(精裝本)
5、《六韜》  1975文物出版社《銀雀山漢墓竹簡》(壹)(線裝本);1985文物出版社《銀雀山漢墓竹簡》(壹)(精裝本)
6、《守法守令等十三篇》(《守法》、《要言》、《庫法》、《王兵》、《市法》、《守令》、《李法》、《王法》、《委法》、《田法》、《兵令》、《上篇》、《下篇》)  1975文物出版社《銀雀山漢墓竹簡》(壹)(線裝本);1985文物出版社《銀雀山漢墓竹簡》(壹)(精裝本)
7、《地典》
8、《唐勒》(《論馭賦》)
9、《十官》、《五議》、《務過》、《爲國之過》、《起師》等論政論兵類40餘篇
10、《曹氏陰陽》、《三十時》、《天地八風五行客主五音之居》等陰陽占候類10餘篇
11、算書、相狗方、作醬法等雜書
以上均見1985文物出版社《銀雀山漢簡釋文》,但此書所有竹簡皆未編綴

1972年 山東臨沂銀雀山西漢墓M2 32支
1、《漢元光元年曆譜》
1985文物出版社《銀雀山漢簡釋文》

1972年 湖南長沙馬王堆西漢(辛追)墓M1 361支
1、遣策
1973文物出版社《長沙馬王堆一號漢墓》;1980中華書局《文史》第10輯

1972年 內蒙古額濟納河漢邊塞遺址(兩漢)    21支     採集簡(具體出土地點不明)
1、屯戍文書
1990文物出版社《居延漢簡——甲渠候關與第四燧》;1994中華書局《居延新簡——甲渠候關》

1972~1974年 內蒙古額濟納河漢邊塞遺址(兩漢) 19637支
1、屯戍文書
出土地點:
1、肩水金關A32     11000餘支
2、甲渠候關A8      7933支
3、甲渠塞第四燧P1     195支
1990文物出版社《居延漢簡——甲渠候關與第四燧》;1994中華書局《居延新簡——甲渠候關》收錄1972-1982年間獲居延漢簡,共8409枚

1973年 湖北江陵藤店楚墓M1     24支
1、遣策
1973《文物》第9期有介紹

1973年 河北定州八角廊西漢(中山懷王劉脩)墓M40      約2500支
1、《論語》 1997文物出版社《定州漢墓竹簡論語》
2、《文子》 1995《文物》第12期
3、《六韜》(原名《太公》)  2001《文物》第5期
4、《儒家者言》 1981《文物》第2期
5、《保傅傳》
6、《哀公問五義》
7、《日書》
8、蕭望之等人奏議
9、《六安王朝五鳳二年正月起居記》
其他1981《文物》第8期有介紹

1973年 江蘇連雲港海州西漢(霍賀)墓    7枚木牘(僅1枚有字)
1、衣物疏
1974《考古》第3期

1973年 江蘇連雲港海州西漢(侍其)墓     2枚木牘
1、衣物疏(另一支漶漫不清)
1975《考古》第3期

1973年 湖北老河口五座墳西漢墓M3    約30支(5枚可見字迹)
1、遣策
1976《考古學報》第2期

1973年 湖北江陵鳳凰山西漢墓M8     175支
1、隨葬物清單
1976《文物》第6期

1973年 湖北江陵鳳凰山西漢墓M9     83支
1、安陸守丞文書  共3枚木牘    1974《文物》第6期
2、遣策     1974《文物》第6期有介紹

1973年 湖北江陵鳳凰山西漢(張偃)墓M10    176支
1、記陪葬物的木牘(牘背爲告地策)  2、記出錢人名的木牘   3、中販共侍約   4、記算錢    5、記芻稿    6、記田租的大竹簡     7、記穀物的大竹簡    8、鄭里廩簿等
1974《文物》第7期;1992中華書局《古文字論集》

1973年 湖南長沙馬王堆西漢(軑侯利豨)墓M3 竹簡木櫝608支、楬54枚
1、遣策     2004文物出版社《長沙馬王堆二、三號漢墓——第一卷:田野考古發掘報告》
2、木櫝6枚    2004文物出版社《長沙馬王堆二、三號漢墓——第一卷:田野考古發掘報告》
(1)、衣物疏    1994《文物》第6期
(2)、隨葬驗對木牘   1994《文物》第6期
3、《十問》、《合陰陽方》、《雜禁方》、《天下至道談》     1985文物出版社《馬王堆漢墓帛書》(肆)(精裝本)
帛書、帛圖     30件
1、《喪服圖》(《喪制圖》) 1992湖南出版社《馬王堆漢墓文物》
2、《城邑圖》(《園寢圖》)     1990文物出版社《中國古代地圖集(戰國—元)》
3、《卦象圖》(《符簶》、《雜占圖》) 1992湖南出版社《馬王堆漢墓文物》
4、《老子》(甲本)及卷後佚書(《五行》、《九主》、《明君》、《德聖》)  1980文物出版社《馬王堆漢墓帛書》(壹)(精裝本)
5、《老子》(乙本)及卷前佚書(《經法》、《經》(《十六經》)、《稱》、《道原》) 1980文物出版社《馬王堆漢墓帛書》(壹)(精裝本)
6、《周易》:
(1)、《易經》 1984《文物》第4期(名爲《六十四卦》);1992湖南出版社《馬王堆漢墓文物》;1998四川大學出版社《易學集成》第3卷《馬王堆帛書周易經傳釋文》
(2)、《系辭》 1992湖南出版社《馬王堆漢墓文物》;1995華夏出版社《國際易學研究》第1輯;1998四川大學出版社《易學集成》第3卷《馬王堆帛書周易經傳釋文》
(3)、《二三子問》、《衷》(《易之義》)、《要》 1993上海古籍出版社《道家文化研究》第3輯;1994湖南出版社《馬王堆漢墓研究文集》中有《二三子問》;1995華夏出版社《國際易學研究》第1輯;1998四川大學出版社《易學集成》第3卷《馬王堆帛書周易經傳釋文》
(4)、《繆和》、《昭力》 1995上海古籍出版社《道家文化研究》第6輯;1995華夏出版社《國際易學研究》第1輯;1998四川大學出版社《易學集成》第3卷《馬王堆帛書周易經傳釋文》
7、《相馬經》  1977《文物》8期
8、《春秋事語》     1983文物出版社《馬王堆漢墓帛書》(三)(精裝本)
9、《戰國縱橫家書》 1983文物出版社《馬王堆漢墓帛書》(三)(精裝本)
10、《足臂十一脈灸經》、《陰陽十一脈灸經》甲本、《脈法》、《陰陽脈死候》(後三書即《脈書》)、《五十二病方》      1985文物出版社《馬王堆漢墓帛書》(肆)(精裝本);1992湖南科技出版社《馬王堆古醫方考釋》;2004文物出版社《長沙馬王堆二、三號漢墓—— 第一卷:田野考古發掘報告》
11、《卻榖食氣》、《陰陽十一脈灸經》乙本、《導引圖》      1985文物出版社《馬王堆漢墓帛書》(肆)(精裝本);1992湖南科技出版社《馬王堆古醫方考釋》;2004文物出版社《長沙馬王堆二、三號漢墓——第一卷:田野考古發掘報告》
12、《養生方》、《雜療方》、《胎産書》(前附《人字圖》、《禹藏圖》)    1985文物出版社《馬王堆漢墓帛書》(肆)(精裝本);1992湖南科技出版社《馬王堆古醫方考釋》;2004文物出版社《長沙馬王堆二、三號漢墓——第一卷:田野考古發掘報告》
13、《刑德》(甲本)   2001臺灣古籍出版有限公司《馬王堆帛書<刑德>研究論稿》
14、《刑德》(乙本)   1992湖南出版社《馬王堆漢墓文物》;2001臺灣古籍出版有限公司《馬王堆帛書<刑德>研究論稿》
15、《刑德》(丙本)   2001臺灣古籍出版有限公司《馬王堆帛書<刑德>研究論稿》
16、《隸書陰陽五行》    1996法律出版社《簡帛研究》第2輯有介紹
17、《篆書陰陽五行》(《式法》)  2000《文物》第7期有介紹
18、《長沙南部地形圖》  1977文物出版社《古地圖》;1990文物出版社《中國古代地圖集(戰國—元)》
19、《駐軍圖》  1977文物出版社《古地圖》;1990文物出版社《中國古代地圖集(戰國—元)》
20、《出行占》  2003湖北教育出版社《簡帛數術文獻探論》有介紹
21、《木人占》  2004文物出版社《長沙馬王堆二、三號漢墓——第一卷:田野考古發掘報告》有介紹
22、《辟兵圖》(《太一將行圖》、《神祗圖》)  1992湖南出版社《馬王堆漢墓文物》
23、《五星占》  1978科學出版社《中國天文學史文集》第1輯;1996上海書店《馬王堆帛書藝術》;2004中山大學出版社《馬王堆天文書考釋》
24、《天文氣象雜占》  1980文物出版社《中國文物》第1期;1992湖南出版社《馬王堆漢墓文物》;2004中山大學出版社《馬王堆天文書考釋》
25、《宅位草圖》(《築城圖》)   2004文物出版社《長沙馬王堆二、三號漢墓——第一卷:田野考古發掘報告》有介紹
26、《府宅圖》(《小城圖》)   2004文物出版社《長沙馬王堆二、三號漢墓——第一卷:田野考古發掘報告》有介紹
27、《物則有刑圖》   2004文物出版社《長沙馬王堆二、三號漢墓——第一卷:田野考古發掘報告》有介紹
28、《宅形宅位吉凶圖》   2004文物出版社《長沙馬王堆二、三號漢墓——第一卷:田野考古發掘報告》有介紹

1974年 北京大葆台西漢(燕王劉旦)墓        1支
1、有“樵中格吳子運”6字
1989文物出版社《北京大葆台漢墓》

1974年 江西南昌東湖東晉(吳應)墓M1    6支
1、刺 2、衣物疏
1974《考古》第6期

1974年 江蘇盱眙東陽西漢墓M7     1支
1、祈禱書
1979《考古》第5期

1975年 湖北鳳凰山西漢墓M167     79支
1、遣策
1976《文物》第10期

1975年 湖北江陵鳳凰山西漢墓M168    67支
1、告地策   1975《文物》第9期
2、遣策
1993《考古學報》第4期

1975年 湖北江陵鳳凰山西漢墓M169      83支
1、遣策
1987《文物》第5期有簡介;1982《農業考古》第1期有簡介

1975年 湖北雲夢睡虎地秦墓M4       2支
1、役卒黑與驚之信
1976《文物》第9期;1981文物出版社《雲夢睡虎地秦墓》

1975年 湖北雲夢睡虎地秦墓M11        1155支及80殘片
1、《語書》 2、《爲吏之道》(末附魏律二條) 3、《秦律十八種》 4、《效律》 5、《秦律雜抄》 6、《法律答問》 7、《封診式》 8、《日書》甲、乙種 9、《編年記》
1978年文物出版社《睡虎地秦墓竹簡》(未收入《日書》甲、乙種);1981文物出版社《雲夢睡虎地秦墓》;1990文物出版社《睡虎地秦墓竹簡》

1976年 廣西貴縣羅泊灣西漢墓M1      木簡9支、木牘5枚、封泥匣5枚
1、《從器志》 2、《東陽田器志》 3、封檢等
1978《文物》第9期;1988文物出版社《廣西貴縣羅泊灣漢墓》

1976年 江蘇連雲港海州小礁山漢(戴盛)墓     木方1支
1、衣物券
1982《考古》第5期有簡介

1976年 內蒙古額濟納旗居延都尉三十井塞次東燧(兩漢)   173支
1、屯戍文書
1990文物出版社《居延新簡——甲渠候關與第四燧》;1994中華書局《居延新簡——甲渠候關》

1977年 甘肅玉門花海漢邊塞遺址     91支
1、武帝遺詔 2、簿籍、書信
1984甘肅人民出版社《漢簡研究文集》;1991年甘肅人民出版社《敦煌漢簡釋文》;1991中華書局《敦煌漢簡》

1977年 安徽阜陽雙古堆西漢(汝陰侯夏侯竈)墓     6000余支
1、《倉頡》 1983《文物》第2期
2、《詩經》 1984《文物》第8期;1988上海古籍出版社《阜陽漢簡詩經研究》
3、《周易》(占卜家之易) 2000三聯書店《道家文化研究》第18輯;2004上海古籍出版社《阜陽漢簡周易研究》
4、《莊子》 2000三聯書店《道家文化研究》第18輯
5、《年表》 1991黃山書社《文物研究》第7期有介紹
6、《大事記》
7、《作務員程》
8、《行氣》
9、《萬物》(舊題《雜方》)  1988《文物》第4期
10、《呂氏春秋》
11、《天文曆占》
12、《算術書》
13、《相狗》
14、《楚辭》及佚辭賦
15、《儒家者言》章題木牘      2000北京大學出版社《國學研究》第7卷;2004上海古籍出版社《阜陽漢簡周易研究》
16、《春秋事語》章題木牘及相關竹簡   2004上海古籍出版社《阜陽漢簡周易研究》
1978《文物》第8期有介紹;1998中華書局《出土文獻研究》第4輯有介紹;2004湖北教育出版社《長江流域出土簡牘與研究》有介紹

1978年 湖北江陵天星觀楚(邸陽君潘勝)墓M1     70餘支
1、卜禱 2、遣策
1982《考古學報》第1期有介紹

1978年 湖北隨州擂鼓墩曾侯乙墓M1     240支
1、遣策
1989文物出版社《曾侯乙墓》;1997藝文印書館《曾侯乙墓竹簡文字編》,臺北

1978年 江蘇連雲港花果山雲台西漢墓      13支及17殘片
1、封診式類 2、曆譜 3、日書 4、商業文書
1982《考古》第5期

1978年 安徽南陵麻橋公社東風大隊東吳墓M2    1枚木牘
1、衣物疏
1984《考古》第11期

1978年 安徽南陵麻橋公社東風大隊東吳墓M3    2枚木牘
1、衣物疏
1984《考古》第11期

1979年 青海大通上孫家寨西漢(馬良)墓M115     240支
1、軍事操練、編制等文書
1981《文物》第2期;1987《考古學集刊》第5集;1993文物出版社《上孫家寨漢晉墓》

1979年 江西南昌陽明路吳(高榮)墓     23支
1、木刺 2、遣策
1980《考古》第3期

1979年 甘肅敦煌馬圈灣漢邊塞遺址(兩漢)   1217支,帛書1件
1、屯戍文書
1991年甘肅人民出版社《敦煌漢簡釋文》;1991中華書局《敦煌漢簡》

1979年 新疆吐魯番阿斯塔那北涼(武宣王沮渠蒙遜夫人彭氏)墓M383 帛書1件
1、衣物疏
1994《文物》第9期

1979~1980年 江蘇高郵神居山西漢(廣陵王劉胥夫婦)墓M1、M2    數量不詳
1、內容不詳
1980年7月18日《人民日報》有簡介;2000南京出版社《江蘇考古五十年》有簡介

1980年 江蘇邗江胡場西漢(王奉世)墓M5    26支
1、簶(神靈名位櫝) 2、日記櫝 3、文告櫝 4、喪祭物品櫝 5、木簽 6、木觚
1981《文物》第11期

1980年 四川青川郝家坪秦墓M50     2支
1、秦武王二年丞相甘茂爲田律   1982《文物》第1期
2、另一片文甚漶漫

1980年 湖南臨澧九里楚墓M1   100余支
1、遣策 2、占卜
1995湖北教育出版社《楚系簡帛文字編》有簡介;1999文物出版社《新中國考古五十年》有簡介

1980年 新疆古樓蘭遺址(魏晉)    63支
1、屯戍文書
1988《文物》第7期;1999天地出版社《樓蘭漢文簡紙文書集成》

1980年 湖北鄂城水泥廠吳(史綽)墓M1     6支
1、名刺
1982《考古》第3期

1980年 陝西西安西漢長安未央宮遺址前殿A區F26    115支
1、記錄新莽瑞應文書
1996中國大百科全書出版社《漢長安城未央宮:1980—1989年考古發掘報告》;2004上海古籍出版社《出土文獻研究》第6輯

1980年 江蘇連雲港唐莊高高頂西漢墓    木牘1枚
1、衣物疏
1995《東南文化》第4期有介紹

1981年 湖北江陵九店楚墓M56     205支
1、農作物數量 2、日書雜占 3、卜禱
1995科學出版社《江陵九店東周墓》;2001中華書局《九店楚簡》

1981年收繳  甘肅武威磨嘴子東漢墓    26支    村民袁德禮發現
1、王杖詔書令
1984甘肅人民出版社《漢簡研究文集》

1981年 甘肅敦煌酥油土漢邊塞遺址(西漢)     76支
1、屯戍類文書
1984甘肅人民出版社《漢簡研究文集》;1991年甘肅人民出版社《敦煌漢簡釋文》;1991中華書局《敦煌漢簡》

1982年   湖北江陵馬山磚廠楚墓M1     1支
1、簽牌    
1982《文物》第10期;1985文物出版社《江陵馬山一號楚墓》

1982年 內蒙古額濟納河漢邊塞甲渠候關、甲渠第四燧遺址(兩漢)   87支
1、屯戍文書
1990文物出版社《居延新簡——甲渠候關與第四燧》;1994中華書局《居延新簡——甲渠候關》

1983~1984年 湖北江陵張家山西漢墓M247      1236支
1、《二年律令》
2、《奏讞書》 1993《文物》第8期(上)、1995《文物》第3期(下)
3、《蓋廬》
4、《脈書》 1989《文物》第7期
5、《引書》 1990《文物》第10期
6、《算數書》 2000《文物》第9期
7、曆譜
8、遣策
2001文物出版社《張家山漢墓竹簡(二四七號墓)》

1983~1984年 湖北江陵張家山西漢墓M249     約400支
1、日書
1985《文物》第1期有介紹

1983~1984年 湖北江陵張家山西漢墓M258     58支
1、曆譜
1985《文物》第1期有介紹

1983年 江蘇揚州平山養殖場西漢墓M3    3支
1、木楬題署
1987《文物》第1期

1983年 湖南常德德山夕陽坡楚墓M2     2支
1、賞賜歲祿文書
1987《求索》雜誌社《楚史與楚文化研究》;2001嶽麓書社《早期文明與楚文化研究》

1984年 甘肅武威五壩山西漢(田升寧)墓M3     1支
1、墓主冥告文書
1990文物出版社《散見簡牘合輯》;2004敦煌文藝出版社《簡牘(遙望星宿:甘肅考古文化叢書)》

1984年 安徽馬鞍山吳(朱然)墓    17支
1、刺 2、謁
1986《文物》第3期有介紹

1984年 江蘇儀征胥浦西漢(朱淩)墓M101    20支
1、先令券書 2、賻贈記錄 3、衣物券
1987《文物》第1期

1985年 甘肅武威旱灘坡前涼(姬瑜)墓M19     木牘5枚
1、拜官版    2003重慶出版社《河西簡牘》
2、衣物疏
1990文物出版社《散見簡牘合輯》

1985年 江蘇連雲港海州陶灣村西漢(西郭寶)墓    5支
1、衣物疏 2、謁
1988《東南文化》第2輯

1985年 湖北江陵毛家園西漢墓M1        74支
1、遣策 2、碟書(告地策)
1988文物出版社《中國考古學年鑒1987》有介紹

1985年 湖北江陵張家山西漢墓M327      300餘支
1、日書
1988文物出版社《中國考古學年鑒1987》有介紹;1992《文物》第9期有介紹

1986年 湖北江陵張家山西漢墓M336      829支
1、《功令》 2、《卻榖食氣》 3、《盜蹠》 4、宴享 5、七年質日 6、律令十五種 7、遣策
1988文物出版社《中國考古學年鑒1987》有介紹;1992《文物》第9期有介紹

1986年 湖北江陵秦家嘴楚墓M1     7支
1、卜禱 
1988《江漢考古》第2期有介紹

1986年 湖北江陵秦家嘴楚墓M13    18支
1、卜禱 
1988《江漢考古》第2期有介紹

1986年 湖北江陵秦家嘴楚墓M99    16支
1、卜禱 
1988《江漢考古》第2期有介紹

1986年 甘肅天水放馬灘秦墓M1     464支
1、《日書甲種》   1989甘肅人民出版社《秦漢簡牘論文集》
2、古地圖7幅    1989《文物》第2期;1990文物出版社《中國古代地圖集(戰國—元)》
3、《墓主記》     1989《文物》第2期
4、《日書乙種》   1989《文物》第2期有介紹

1986年 湖北江陵岳山秦墓M36    木牘2支
1、日書
2000《考古學報》第4期

1986年 甘肅金塔地灣城(A33)肩水候關漢遺址    1000余支
1999文物出版社《文物考古工作十年1979—1989》有簡介

1986年 甘肅高臺晉(常封)墓      1支
1、內容待考
1990文物出版社《散見簡牘合輯》

1986~1988年 甘肅敦煌漢邊塞遺址(兩漢)      137支
1、屯戍文書
1991年甘肅人民出版社《敦煌漢簡釋文》; 1991中華書局《敦煌漢簡》;1991《文物》第8期(以上三書收錄1986-1988年間于敦煌後坑墩、敦煌馬圈灣墩、敦煌小方盤城、敦煌臭墩子墩、敦煌小方盤城南第一烽燧、敦煌小方盤城南第二烽燧、敦煌鹽池灣墩、敦煌小月牙湖東墩、敦煌懸泉遺址、敦煌大坡墩10個地點採集的137枚漢簡);1996 法律出版社《簡帛研究》第1輯(此書收錄1979-1989年間于敦煌鹽池灣烽燧、敦煌後坑烽燧、敦煌馬圈灣烽燧、敦煌小方盤城南第一烽燧、敦煌小方盤城外、敦煌臭墩子烽燧、敦煌蘆草井烽燧(即上三書所收之敦煌小方盤城南第二烽燧)、敦煌小月牙湖東墩烽燧、敦煌後坑墩烽燧、敦煌人頭疙瘩遺址、敦煌條湖坡烽燧、敦煌懸泉置遺址12個地點採集的147支簡)

1987年 湖北荆門包山楚(邵)墓M2       279支
1、文書 有:集書、集書言、受期、疋獄、貸金、案例、所投 2、卜筮祭禱 3、遣策
1991文物出版社《包山楚簡》;1991文物出版社《包山楚墓》

1987年 湖南張家界古人堤遺址(東漢)    90支
1、漢律 2、醫方 3、官府文書 4、書信及謁 5、曆日 6、九九乘法表
2003《中國歷史文物》第2期

1987年 湖南慈利石板村楚墓M36       4557支
有《國語·吳語》、《逸周書·大武》、《管子·霸形》、《寧越子》等
1990《文物》第10期有介紹;2004文物出版社《新出簡帛研究》有介紹

1987年 河北盧龍范莊西漢(蔡文)墓     數量不詳
1、內容不詳
1989文物出版社《中國考古學年鑒1988》有介紹,1994年7月12日《中國文物報》有簡介

1989年 湖北江陵九店楚墓M621          127支
1、殘古書
1995科學出版社《江陵九店東周墓》;2001中華書局《九店楚簡》

1989年 湖北江陵雲夢龍崗秦墓M6     284支
1、秦律 2、木牘1枚 免辟死爲庶人文書(用於地下)
1994《考古學集刊》第8集;1995科學出版社《雲夢龍崗秦簡》;2001中華書局《龍崗秦簡》

1989年  甘肅武威旱灘坡東漢墓 16支
1、王杖令 2、關於盜、蟲災、火災之律令
1993《文物》第10期;2000敦煌文藝出版社《中國簡牘集成》第一輯

1990年 甘肅敦煌清水溝漢代烽燧遺址(西漢)     41支
1、地節元年曆譜 2、屯戍類簡   
1996法律出版社《簡帛研究》第2輯

1990年 湖北江陵高臺西漢墓M6     53支,14支有字
1、遣策
2000科學出版社《荊州高臺漢墓——宜黃公路荊州段田野考古報告之一》

1990年 湖北江陵高臺西漢墓M18          4支
1、封檢 2、告地書 3、名數 4、遣策
1993《文物》第8期;2000科學出版社《荊州高臺漢墓——宜黃公路荊州段田野考古報告之一》

1990年 湖北江陵揚家山西漢墓M135       75支
1、遣策
1993《文物》第8期有介紹

90年代初 江蘇連雲港海州南門磚廠新莽/東漢墓   1枚        項劍雲採集
1、謁
1996《文物》第8期

1990~1998年 甘肅安西長城烽燧遺址     近100枚
2004敦煌文藝出版社《簡牘(遙望星宿:甘肅考古文化叢書)》有簡介

1991年 湖北江陵雞公山楚墓M48     數量未詳
1、遣策
1992《江漢考古》第3期有簡介

1991年收繳 甘肅武威新華鄉(前涼)   木牘6枚
1991年12月22日《中國文物報》有簡介

1990~1992年 甘肅敦煌懸泉置遺址(兩漢)     23000余支,帛書10件
1、郵置、郵置道里、郵書 2、過所、乘傳 3、詔書、官府文書 4、律令、品、司法文書 5、簿籍 6、信劄 7、古籍
2000《文物》第5期有介紹、2001上海古籍出版社《敦煌懸泉漢簡釋粹》收入部份簡帛

1992年 湖北老河口戰國墓 兩座  10餘枚
1、遣策
1993法律出版社《簡帛研究》第1輯有簡介

1992年 湖北荊州沙市區蕭家草場西漢墓M26     35支
1、遣策
2001中華書局《關沮秦漢墓簡牘》

1992年 湖北江陵磚瓦廠楚墓M370        6支
1、司法文書
2001廣西師範大學出版社《簡帛研究二○○一》

1993年 新疆古尼雅遺址(漢)    2支
1、《倉頡》
1998《西域研究》第4期;2001商務印書館《中國學術》第2輯

1993年 湖北荊州沙市區關沮周家臺秦墓M30     382支
1、曆譜 其中一部分(《秦始皇三十四年曆譜》)見1999《文物》第6期
2、日書
3、《病方及其他》
2001中華書局《關沮秦漢墓簡牘》

1993年 湖北江陵王家臺秦墓M15   814支
1、《效律》 2、日書 3、《歸藏》
1995《文物》第1期有介紹;2004文物出版社《新出簡帛研究》有介紹

1993年 湖北黃岡黃州區曹家岡楚墓M5      7支
1、遣策
2000《考古學報》第2期

1993年 湖北鄂州濱湖西路東吳墓M1、M2   數量不詳
1、名刺 2、遣策
1997文物出版社《中國考古學年鑒1994》有介紹

1993年 湖北荊門郭店楚墓       805支
1、《老子》甲、乙、丙本 2、《太一生水》 3、《窮達以時》 4、《唐虞之道》 5、《尊德義》 6、《忠信之道》 7、《成之聞之》 8、《六德》 9、《性自命出》 10、《緇衣》 11、《五行》 12、《魯穆公問子思》 13、《語叢》(一、二、三、四)
1998文物出版社《郭店楚墓竹簡》
14、《語叢三》遺簡1支   2002年5月3日《中國文物報》

1993年 湖北江陵范家坡楚墓M27       1支
1995湖北教育出版社《楚系簡帛文字編》有簡介

1993年 湖南長沙望城坡古墳垸西漢長沙王后墓   100餘枚
1、簽牌
1997文物出版社《中國考古學年鑒1994》有介紹

1993年 江蘇東海尹灣東漢墓M2       1支
1、遣策
1997中華書局《尹灣漢墓簡牘》

1993年 江蘇東海尹灣東漢(師饒)墓M6        168支
1、《集簿》 2、《郡屬縣鄉吏員定簿》 3、《長吏遷除簿》 4、《吏員考績簿》 5、《武庫永始四年兵車器集薄》 6、《六甲陰陽書》 8、曆譜 9、遣策 11、謁 12、《元延二年起居記》 13、《行道吉凶》 14、《刑德行時》 15、《神烏賦》
1997中華書局《尹灣漢墓簡牘》

1994年入藏 上海博物館藏楚簡        1200餘支
其中 1、《孔子詩論》 2、《緇衣》 3、《性情論》(《性自命出》)    2001上海古籍出版社《上海博物館藏戰國楚竹書(一)》;
4、《民之父母》(《孔子閒居》) 5、《子羔》 6、《魯邦大旱》 7、《從政》(甲、乙) 8、《昔者君老》 9、《容成氏》    2002上海古籍出版社《上海博物館藏戰國楚竹書(二)》;
10、《周易》 11、《仲弓》 12、《恒先》 13、《彭祖》    2003上海古籍出版社《上海博物館藏戰國楚竹書(三)》;
14、《采風曲目》 15、《逸詩》 16、《昭王毀室·昭王與龔之》 17、《柬大王泊旱》 18、《內禮》 19、《相邦之道》 20、《曹沫之陳》    2004上海古籍出版社《上海博物館藏戰國楚竹書(四)》;
其他尚有《樂禮》、《武王踐阼》、《賦》、《子路》、《四帝二王》、《顔淵》、《樂書》等共80餘部書

1994年 河南新蔡葛陵楚(平夜君成)墓        1571支
1、祭禱 2、遣策
2003大象出版社《新蔡葛陵楚墓》

1996年 湖南長沙走馬樓平和堂吳井J22       140000餘支
1、其中2141支木簡    1999文物出版社《長沙走馬樓三國吳簡·嘉禾吏民田家莂》
2、其中10545支竹簡   2003文物出版社《長沙走馬樓三國吳簡·竹簡·壹》
其他1999《文物》第5期有介紹,內容大都爲券書、司法文書、長沙郡人名簿、名刺、官刺、賬簿

1996年 新疆古尼雅遺址(西晉)     9支     中日共同尼雅遺迹學術考察第八次調查
1、文書
1999《中日共同尼雅遺迹學術調查報告書》第二卷,京都

1997年 湖南長沙科文大廈古井J3、J4、J5、J18、J21、J25(東漢)   200餘支
1、官府文書 2、名刺 3、練字
2000文物出版社《中國考古學年鑒1998》有介紹

1997年 江西南昌火車站東晉(雷垓)墓M3      3支
1、衣物疏 2、名刺
2001《文物》第2期

1998年1月從英國收繳(據說入藏中國國家博物館) 2批漢簡
1998年8月26日《中國文物報》有簡介

1999年 湖南沅陵城關鎮虎溪山西漢(吳陽)墓M1   1336支
1、黃簿 2、日書(《閻氏五勝》) 3、《美食方》
2003《文物》第1期有介紹;2004文物出版社《新出簡帛研究》有介紹

1999年 甘肅敦煌小方盤城遺址    300餘枚
2004敦煌文藝出版社《簡牘(遙望星宿:甘肅考古文化叢書)》有簡介

1999~2002年 內蒙古額濟納旗居延遺址甲渠塞第7、9、14、16、17、18燧及察干川吉烽燧(漢)   500餘支
2005廣西師範大學出版社《額濟納漢簡》

2000年 湖北隨州孔家坡磚瓦廠西漢墓M8      785支
1、日書 2、曆譜 3、木牘(其中有告地策)
2001《文物》第9期有介紹;2004文物出版社《新出簡帛研究》有介紹

2000年 天津薊縣劉家壩鄉大安宅村古井(漢/魏)  木櫝1枚
1、道家方術文書
2000年9月24日《中國文物報》有簡介

2000年 甘肅武都琵琶鄉趙坪村漢簡    12枚
1、屯戍類簡
2003《文物》第4期

入藏年不詳 香港中文大學藏簡    共259支
1、書籍簡 楚 10支
2、日書簡 西漢 109支
3、奴婢廩食粟出入簿 西漢 69支
4、遣策 西漢
5、序寜簡 東漢 14支 1996《傳統文化與現代化》第6期
6、河堤簡 東漢 26支
7、松人解除木牘 前涼 1支
2001香港中文大學出版社《香港中文大學文物館藏簡牘》,香港

2001年 陝西西安南郊杜陵西漢墓M5   木櫝1枚
1、《日書·農事篇》  
2002《陝西歷史博物館館刊》第9輯,2005《收藏》第1期

2001年 甘肅高臺駱駝城前涼(胡運千)墓M5   木牘1枚
1、衣物疏
2003《考古》第6期

2002年 重慶雲陽舊縣坪漢遺址      20餘支,5支有字
1、記事等
2002年8月16日《中國文物報》有簡介

2002年 湖南龍山里耶鎮戰國古城J1   36000餘支
1、官署檔案
2003《文物》第1期有介紹

2002年 甘肅玉門花海畢家灘(前涼、西涼、後涼)墓    木牘9枚
1、衣物疏
2004文物出版社《中國考古學年鑒2003》有介紹

2002年 江蘇連雲港海州區雙龍村漢(淩惠平)墓         木牘1枚
1、衣物疏
2002年7月23日《新華每日電訊》有簡介

2002年 湖北棗陽九連墩楚墓M2      1000支
1、漆圖   
2003《考古》第7期有介紹

2002年 河南信陽長台關楚墓M7      數量未詳
1、遣策
2004《文物》3期有介紹

2002年 山東日照海曲西漢墓M106等墓      數量未詳
1、曆譜 2、遣策
2003年2月12日《中國文物報》有簡介;2003《文物世界》5期有簡介

2002年 江蘇泗陽大青墩西漢泗水王塚   數十枚木牘
1、遣策
2004文物出版社《中國考古學年鑒2003》有介紹

2002~2003年 湖北荊州岳橋岳家草場及印臺六座西漢墓    700餘支
1、文書 2、卒簿 3、曆譜 4、編年記等
2004文物出版社《中國考古學年鑒2003》有介紹

2003年 甘肅安西縣九墩灣漢代烽燧遺址        35支
2005文物出版社《中國考古學年鑒2004》有介紹

2003年 湖南長沙走馬樓湖南省供銷大廈西漢井J8    1萬餘支
2004年2月18日《中國文物報》有介紹

2003年 湖南郴州蘇仙橋下東門口龍門池古井J4(漢末三國)   500餘支,100餘支有字
2004年3月3日《光明日報》有簡介

2004年 湖南郴州蘇仙橋下東門口龍門池古井J10 (西晉)      700餘支
2004年3月3日《光明日報》有簡介

2004年 安徽天長安樂鎮漢墓    32枚木櫝
1、內容爲地理、醫藥、戶口、賬目
2005年6月15日《中國文物報》有介紹

2004年 江蘇南京皇冊庫遺址(吳~西晉)    40餘支
1、名刺、簽牌、米糧交納、道教符簶等
2005《書法叢刊》第3期有介紹

2004—2005年 廣東廣州南越國宮署遺址南越古井J264   100餘支
1、官署檔案
2005年7月20日《中國文物報》有介紹

此外,上海博物館(第二批楚簡)、湖北考古所、荊州博物館、甘肅考古所等單位亦有數量不詳藏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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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字迹無法辨識者

1975年 陝西咸陽馬泉西漢墓        3支
1979《考古》第2期有介紹

1978年 山東臨沂金雀山西漢(周寬等)墓M11、M13     8枚木牘
1、衣物疏
1984《文物》第11期有介紹

1983年 山東臨沂金雀山西漢墓M28     1枚木牘
1989《文物》第1期有介紹

1985年 江蘇儀征煙袋山西漢墓         26枚木牘
1、衣物疏
1987《考古學報》第4期有介紹

1989年 湖北江陵九店楚墓M411         2支
1995科學出版社《江陵九店東周墓》有介紹

1992年 河南洛陽淺井頭西漢墓CM1231    木牘1枚
1993《文物》第5期有介紹

위진남북조시대는 사대부들만이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시기였다. 하지만 그 시작이 되는 조조때만 해도 사대부들을 오히려 무시하고 오직 재능만을 통해서 인물을 뽑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점차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관직에 임명하게 된다. 왜 재능이 아닌 가문 중심으로 돌아왔을까?

다름이 아닌 부폐 문제 때문이었다. 명성이 있는 사대부 집안에서는 어릴 때부터 유교적인 사상을 교육(세뇌)시켰다. 그리고 유교적인 사상으로 인하여 도덕적인 관념이 매우 높아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사대부 가문에서 관직이 맡게 되면 거의 비리가 없는 반면에, 재능만으로 뽑혀온 하층 사대부나 평민들에게는 다양한 비리가 보인다. 물론 이러한 사대부 중심의 관직 임명은 나중에 엘리트 주의를 불러오게 되며, 나라가 약해지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모든 일은 어느 "적당히"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떠오른다.

 

지금 현재 한국에서는 모두가 돈을 이야기 한다. 모두가 능력을 이야기 한다. 도덕은 일단 뒤로 밀어두고 있다. 하지만 나라의 안정은 능력에서 오는 것보다 도덕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재능은 나라를 발전시킬지는 모르지만 지금 한국에게 필요한 것이 과연 나라의 발전일까? 아니면 나라의 안정일까?

물가가 오르고, 중산층이 무너지고, 집값이 오르며, 일자리가 없는 것은 나라의 안정과 연관이 있는 사항이라고 여겨지지 아니한가? 한국! 그 크기에 비하여 정말 많이 발전하였다. 일단 그 동안 너무나 빠르게 달려오면서 남겨놓은 숙제들을 풀어야 할 때이다.

 

한 사람으로서 돈에 미쳐 있는 한국 사회가 "적당히"을 하기를 바라며 도덕을 소리 높여 말해 본다.

百度国学

http://guoxue.baidu.com/

 

바이두 국학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중국에는 얼마나 많은 고문들이 있습니까? 철학쪽으로는 도덕경, 논어, 시경...역사쪽으로는 25사로 시작되어서 다양하게 분화되는 여러가지 고문들. 이러한 고문들에서 무엇인가를 찾을때 너무 불편하지 않았나요? 이제는 쉽게 검색하세요^^

바이두 국학은 2006년 1월부터 공개테스트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거의 완벽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완벽한 정확도는 바랄 수 없습니다. 검색을 하다보면 고문들의 오타가 보입니다. 또한 기본적으로 번체자가 아닌 간자체로 되어있다는 점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냥 번자체로 검색창에 입력해도 간자체로 자동 번역되니 간자체를 모르신다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사고전서"와 같은 곳에 접속하기 상황이 힘든 분들은, 특히 한국에 계셔서 중국의 서비스를 사용하기 힘드신 분들에게는 방대한 중국의 한문서적에서 원하는 단어를 쉽게 찾아내는 지름길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보통 학교의 사고전서나 요즘 나온 중국기본고적을 이용하지만 학교 밖에서 이용이 힘들때에는 바이두 국학에서 찾고는 합니다.

 

해당 사항은 중국관련 학문을 하시는 분들에게 매우 유용한 싸이트가 되리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북경대학교에서 최근 개발한 "중국기본고적"이라는 사고전서 3배에 달하는 무식한 데이타베이스가 한국으로 수출이 되기 전까지 매우 유용한 싸이트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 중국기본고적의 인스톨과정에서 "한국어" 선택항목이 있더군요. 아마 수출할 마음이 있거나, 이미 수출 계약이 되어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해당 중국기본고적은 이제 막 북경대학교에서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데이타베이스만 301G 였던가요-_ 상당히 괜찮은 시스템 같아 보이더군요.

湖南出土距今30万年以上的石制砍砸器[组图]

30만년전의 석기 제작도구

제작도구의 발견 지점.

 

12월 5일, 고고학자들의 현장 검증을 거쳐 중국 후난성 시앙탄현(湘潭县杨嘉桥镇蛟托村)에서 30만년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기제작도구(뗀석기 - 石制砍砸器)가 발견되었다. 이것으로 인하여 시앙강 유역의 인류 활동은 기존의 20만년전부터 시작되었다는 학설이 부정되고, 30만년전에 시작되었다는 학설이 떠오르게 되었다.

 

바로는 고고학을 잘 모른답니다. 石制砍砸器을 한국어로 뗀석기 제작도구라고 해야될거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네요. 어찌되었든 고석기 시대에 석기를 제작하는 도구입니다. 위에 보이는 단단한 돌에 다른 돌을 붙이쳐서 도구를 만드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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历史学系第四届研究生学术论坛

主办: 北京大学历史学系

承办: 北京大学历史学系研究生会

北京大学历史学系学生会

2007年12月9日

2007129

上午

800830 参加会议人员签到(静园二院历史学系)

830900 开幕式

主持人:历史学系研究生会主席王浩同学

历史学系学术委员会主席阎步克教授致辞

历史学系党委书记王春梅教授致辞

900945 李剑鸣教授主题学术报告:美国革命与民主问题

9451000 会议集体照(静园二院草坪),茶歇

10001200 第一时段分组报告与讨论

中午

12051330 午餐(吉野家工作餐)

下午

13301530 第二时段分组报告与讨论

15301545 茶歇

15451745 第三时段分组报告与讨论

17501810 闭幕式:

主持人:历史学系学生会主席谢婷同学

历史学系副系主任刘浦江教授总结发言

1830 晚宴(艺园二楼桌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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浙江良渚发现4000年前古城价值直逼殷墟(图)

2007년 11월 29일 량주고성 북쪽 성벽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성벽의 절단면이다.

浙江良渚发现4000年前古城价值直逼殷墟(图)

2007年11月29日,량주고성의 북쪽성벽 절단면

浙江良渚发现4000年前古城价值直逼殷墟(图)

고대의 도로였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돌들이다. 대략 40-60미터의 폭이어서 당시에 얼마나 거대한 도로가 있었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浙江良渚发现4000年前古城价值直逼殷墟(图)

동쪽 성벽에 위치한 발굴지

 

절강성 고고학연구소를 어제 18개월 동안 발굴활동을 해오던 량주유적의 발굴보고를 하였다. 해당 량주 유적은 290만 평방미터의 4000년전의 최대크기의 성이다.(290만 정도면 대략 여의도 보다 조금 작은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무지막지하게 큰 크기인 것이다.) 북경대학교 고고학과 언원밍 교수는 량주 유적을 보면서 이렇게 평가했다.

"지금 현재 중국에서 발견된 동시대 고성중에서 가장 큽니다. 저는 이 성을 "중화제일성 中华第一城" 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군요."

원래 학계에서는 량주문화는 그다지 발달 되지 못한 문화라고 알고 있었는데, 해당 유적이 발굴됨으로 인하여 매우 발달된 기술과 문화를 가지고 있음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이 량주유적의 발견은 지난 세기의 하남 안양 은허 발견에 비견할 만한 중국 고고학 역사에 길이 남을 거대한 발견입니다.

 

해당 고성은 동서 1500-1700미터, 남북 1800-1900미터이며 남북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성벽의 남아 있는 부분은 대략 4미터정도의 높이이며, 폭이 40-60미터 정도 됩니다. 황토를 벽돌처럼 쌓아서 만들었으리라 생각되고 이습니다. 성벽에서 나온 도기 파편으로 고증해 보면 해당 고성은 량주문화 후기에 해당하는 약 4000년전에 만들어졌으리라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궁전터로 보이는 곳들과 제사용으로 쓰였으리라 생각되는 여러 구덩이들이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사항은 발굴보고서가 나오고서야 알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지금 현재 해당 고성으로 인하여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량주고성이 하나의 국가였냐 아니냐는 점입니다. 어제 엄원밍교수는 량주고성의 모습으로 보아서 이미 "국가" 시기에 돌입하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량주고성이 사실은 "량주고국"으로 이름 불려야 하며, 또 다른 연구가들은 예전의 하상주에 량주를 추가해야 되지 않나 생각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사실 이게 무엇이 중요하냐고 말하실 분들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솔직히 역사관련 전공자들이 아니면 별로 중요한 내용이 아닌듯 합니다만...해당 사항에 상상력을 붙이면 :

1)현재 환빠들이 주장하는 대쥬신같은것은 성립할 수 없게 되는 아주 간단한 반례가 될 수 있습니다.

2)홍산과 대비되는 중원 문화가 없었다는 점에서 현재 중국 문화의 시초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냐는 학설에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 동시에...잘못 이용되면 중국의 중화주의에 불을 붙일 수도 있을지 모르겠군요.

3) 오히려 환빠들이 주장하는 대쥬신이 성립될 "상상의" 기초가 될지도 모르는군요. 홍산을 북방계열의 문화로 보고, 량주를 남방계열의 문화로 설정하면 가능하긴 합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공상일 뿐이고요^^::

4세기의 거란을 보고 있으면 자꾸만 지금의 한반도 정세가 생각이 날 수밖에 없다.  당시 거란은 아직 완전한 통일이 되지 못한 상태에서 소속된 여러 부족끼리 서로간에도 싸웠다.(남한과 북한) 또한 당시 서북쪽에서는 누란이 투룩을 밀어내고 강력한 힘을 구사했고, 남서쪽으로는 북위가 으르렁 거렸으며, 동남쪽으로는 고구려가 자리잡고 있었다. 한마디로 강대한 3대 세력들의 완충지대로 활용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 한반도 정세가 딱 그렇지 아니한가?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이 서로서로 한반도을 하나의 완충지대로 놓고 서로 세력 싸움을 하고 있다.

 

그리고 553년 투룩의 공격으로 거란인들은 고구려로 피신을 하게 된다. 그리고 뒷날 수당군의 고구려 공격시 고구려의 총알받이가 되어서 4만명의 거란인이 죽고, 모두 흩어져 살게 된다. 개인적으로 중요시하는 것은 고구려는 어디까지나 거란을 총알받이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이 사실상 속해있는 미국-일본진영도 지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전쟁이 일어나면 한국이 총알받이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거의 명말한 거란은 훗날 다양한 문화의 중간에 있었던 지리적인 장점을 활용하여서, 다양한 문화를 흡수하고 그 중에서 좋은 것을 취하여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고구려의 유민, 중국지방에서 흘러온 유민, 그 외에 다양한 인종과 계층의 사람들을 포용하는 정책을 쓴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아?! 너 언제까지 자기 잘났다고 찌질될래? 이제 슬슬 자국민중심주의, 백의민족 쵝오!을 외치고 세계로 나오려므나...계속 그렇게 극단의 민족주의로 나아갈 것인가? 계속 그런식으로 나아가면 앞으로 있을 것은 멸망밖에 없을 것이오. 만약 포용정책으로 전환을 하면 밝은 미래?!가 기다릴 것이외다.

 

자기 문화만 잘났다고 찌질거리는 문화 중에서 오래간 문화는 없.다.

 

 

광개토대왕비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이다.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줄여서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높이는 6.39m로 윗면과 아랫면은 약간 넓고 중간부분이 약간 좁다. 아랫부분의 너비는 제1면이 1.48m, 제2면이 1.35m, 제3면이 2m, 제4면이 1.46m이다. 아래에 화강암의 받침대를 만들었는데 길이 3.35m, 너비 2.7m의 불규칙한 직4각형이고, 두께는 약 20cm이나 고르지 않다.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해 비면에 가로·세로의 선을 긋고 문자를 새겼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원문------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 □命駕,] 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 浮龜. 應聲卽爲]連 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 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 , [履]]龍頁昇天.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紹承基業. [遝]至十七世孫國 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二九登祚, 號爲永樂大王. 恩澤[洽]于皇天, 武威[振]被四海. 掃除□□,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有九, 寔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以示後世焉. 其詞曰.]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稗麗不□□[人], 躬率往討. 過富山[負]山, 至鹽水上, 破其三部洛六七百營, 牛馬群]羊, 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城, 力城, 北豊, 五備□, 遊觀土境, 田獵而還.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古利城, □]利城, 雜珍城, 奧利城, 勾牟城, 古[模]耶羅城, [頁]□□□□城, □而耶羅[城 ], [ ]城, 於[利]城, □□城, 豆奴城, 沸□□]利城, 彌鄒城, 也利城, 太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灰]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城, 林城,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穰]城, [曾]□[城], □□盧城, 仇天城, □□□□, □其國城.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歸穴]□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 永爲奴客. 太王恩赦□]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新[羅]城□城, 倭[寇大]潰.城□]#□□盡□□□安羅人戍兵[新]□□□□[其]□□□□□□□言]□□□□□□□□□□□□□□□□□□□□□□□□□□辭□□□□□□□□□□□□□潰]□□□□安羅人戍兵. 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 □[國 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僕]勾]□□□□朝貢.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石城□連船□□□, [王躬]率□□, [從]平穰]□□□鋒相遇. 王幢要截 刺, 倭寇潰敗. 斬煞無數.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師]□□合戰, 斬煞蕩盡. 所獲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不可稱數. 還破沙溝城, 婁城, □[住]城, □城, □□□□□]□城.卄年庚戌,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國駭□□□□□□□]□□王恩普覆. 於是旋還. 又其慕化隨官來者, 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社婁鴨盧, 肅斯舍[鴨盧], □□□]鴨盧. 凡所攻破城六十四, 村一千四百.守墓人烟戶. 賣句余民國烟二看烟三, 東海賈國烟三看烟五, 敦城]民四家盡爲看烟, 于城一家爲看烟, 碑利城二家爲國烟, 平穰城民國烟一看烟十, 連二家爲看烟, 俳婁]人國烟一看烟 三, 梁谷二家爲看烟, 梁城二家爲看烟, 安夫連卄二家爲看烟, [改]谷三家爲看烟, 新城三]家爲看烟, 南蘇城一家爲國烟. 新來韓穢, 沙水城國烟一看烟一, 牟婁城二家爲看烟, 豆比鴨岑韓五家爲]看烟, 勾牟客頭二家爲看烟, 求底韓一家爲看烟, 舍城韓穢國烟三看烟卄一, 古[模]耶羅城一家爲看烟,] [炅]古城國烟一看烟三, 客賢韓一家爲看烟, 阿旦城, 雜珍城合十家爲看烟, 巴奴城韓九家爲看烟, 臼模盧]城四家爲看烟, 各模盧城二家爲看烟, 牟水城三家爲看烟, 幹 利城國烟一看烟三, 彌[鄒*]城國烟一看烟,]# 七 也利城三家爲看烟, 豆奴城國烟一看烟二, 奧利城國烟一看烟八, 須鄒城國烟二看烟五, 百]殘南居韓國烟一看烟五, 太山韓城六家爲看烟, 農賣城國烟一看烟七, 閏奴城國烟二看烟卄二, 古牟婁]城國烟二看烟八, 城國烟一看烟八, 味城六家爲看烟, 就咨城五家爲看烟, 穰城卄四家爲看烟, 散那]城一家爲國烟, 那旦城一家爲看烟, 勾牟城一家爲看烟, 於利城八家爲看烟, 比利城三家爲看烟, 細城三]家爲看烟.國 上廣開土境好太王, 存時敎言, 祖王先王, 但敎取遠近舊民, 守墓掃, 吾慮舊民轉當羸劣.] 若吾萬年之後, 安守墓者, 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 令備 掃. 言敎如此, 是以如敎令, 取韓穢二百卄家. 慮]其不知法則, 復取舊民一百十家. 合新舊守墓戶, 國烟 看烟三百, 都合三百 家.自上祖先王以來, 墓上]不安石碑, 致使守墓人烟戶差錯. 唯國 上廣開土境好太王, 盡爲祖先王, 墓上立碑, 銘其烟戶, 不令差錯.] 又制, 守墓人, 自今以後, 不得更相轉賣, 雖有富足之者, 亦不得擅買, 其有違令, 賣者刑之, 買人制令守墓之.

 

출처 : http://mtcha.com.ne.kr/korea-term/goguryo/term9-goanggaitodaoang.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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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統《徙戎論》

 

時關隴屢為氐羌所擾,孟觀西討,自擒氐帥齊萬年。統深惟四夷亂華,宜杜其萌,乃作徙戎論。其辭曰:
夫夷蠻戎狄,謂之四夷,九服之制,地在要荒。春秋之義,內諸夏而外夷狄。以其言語不通,贄幣不同,法俗詭異,種類乖殊;或居絕域之外,山河之表,崎嶇川谷阻險之地,與中國壤斷土隔,不相侵涉,賦役不及,正朔不加,故曰「天子有道,守在四夷」。禹平九土,而西戎即敘。其性氣貪婪,凶悍不仁,四夷之中,戎狄為甚。弱則畏服,強則侵叛。雖有賢聖之世,大德之君,咸未能以通化率導,而以恩德柔懷也。當其強也,以殷之高宗而憊於鬼方,有周文王而患昆夷、獫狁,高祖困於白登,孝文軍於霸上。及其弱也,周公來九譯之貢,中宗納單于之朝,以元成之微,而猶四夷賓服。此其已然之效也。

故匈奴求守邊塞,而侯應陳其不可;單于屈膝未央,望之議以不臣。是以有道之君牧夷狄也,惟以待之有備,禦之有常,雖稽顙執贄,而邊城不弛固守;為寇賊強暴,而兵甲不加遠征,期令境內獲安,疆埸不侵而已。[Baro1] 

及至周室失統,諸侯專征,以大兼小,轉相殘滅,封疆不固,而利害異心。戎狄乘間,得入中國。或招誘安撫,以為己用。故申繒之禍,顛覆宗周;襄公要秦,遽興姜戎。當春秋時,義渠、大荔居秦晉之域,陸渾、陰戎處伊洛之間,鄋瞞之屬害及濟東,侵入齊宋,陵虐邢衛,南夷與北狄交侵中國,不絕若線。齊桓攘之,存亡繼絕,北伐山戎,以開燕路。故仲尼稱管仲之力,嘉左衽之功。

逮至春秋之末,戰國方盛,楚吞蠻氏,晉翦陸渾,趙武胡服,開榆中之地,秦雄咸陽,滅義渠之等。始皇之并天下也,南兼百越,北走匈奴,五嶺長城,戎卒億計。雖師役煩殷,寇賊橫暴,然一世之功,戎虜奔卻,當時中國,無復四夷也。

漢興而都長安,關中之郡號曰三輔,禹貢雍州,宗周豐、鎬之舊也。及至王莽之敗,赤眉因之,西都荒毀,百姓流亡。建武中,以馬援領隴西太守,討叛羌,徙其餘種於關中,居馮翊、河東空地,而與華人雜處。數歲之後,族類蕃息,既恃其肥強,且苦漢人侵之。永初之元,騎都尉王弘使西域,發調羌氐,以為行衛。於是群羌奔駭,互相扇動,二州之戎,一時俱發,覆沒將守,屠破城邑。鄧騭之征,棄甲委兵,輿尸喪師,前後相繼,諸戎遂熾,至於南入蜀漢,東掠趙魏,唐突軹關,侵及河內。及遣北軍中候朱寵將五營士於孟津距羌,十年之中,夷夏俱斃,任尚、馬賢僅乃克之。此所以為害深重累年不定者,雖由禦者之無方,將非其才,亦豈不以寇發心腹,害起肘腋,疢篤難療,瘡大遲愈之故哉!

自此之後,餘燼不盡,小有際會,輒復侵叛。馬賢忸,終于覆敗;段熲臨衝,自西徂東。雍州之戎,常為國患,中世之寇,惟此為大。漢末之亂,關中殘滅。魏興之初,與蜀分隔,疆埸之戎,一彼一此。魏武皇帝令將軍夏侯妙才討叛氐阿貴、千萬等,後因拔棄漢中,遂徙武都之種於秦川,欲以弱寇強國,扞禦蜀虜。此蓋權宜之計,一時之勢,非所以為萬世之利也。今者當之,已受其弊矣。

夫關中土沃物豐,厥田上上,加以涇渭之流溉其舄鹵,鄭國、白渠灌浸相通,黍稷之饒,畝號一鍾,百姓謠詠其殷實,帝王之都每以為居,未聞戎狄宜在此土也。非我族類,其心必異,戎狄志態,不與華同。而因其衰弊,遷之畿服,士庶翫習,侮其輕弱,使其怨恨之氣毒於骨髓。至於蕃育眾盛,則坐生其心。以貪悍之性,挾憤怒之情,候隙乘便,輒為橫逆。而居封域之內,無障塞之隔,掩不備之人,收散野之積,故能為禍滋擾,暴害不測。此必然之勢,已驗之事也。

當今之宜,宜及兵威方盛,眾事未罷,徙馮翊、北地、新平、安定界內諸羌,著先零、罕幵、析支之地;徙扶風、始平、京兆之氐,出還隴右,著陰平、武都之界。廩其道路之糧,令足自致,各附本種,反其舊土,使屬國、撫夷就安集之。戎晉不雜,並得其所,上合往古即敘之義,下為盛世永久之規。縱有猾夏之心,風塵之警,則絕遠中國,隔閡山河,雖為寇暴,所害不廣。是以充國、子明能以數萬之眾制群羌之命,有征無戰,全軍獨克,雖有謀謨深計,廟勝遠圖,豈不以華夷異處,戎夏區別,要塞易守之故得成其功也哉!

難者曰:方今關中之禍,暴兵二載,征戍之勞,老師十萬,水旱之害,荐饑累荒,疫癘之災,札瘥夭昏。凶逆既戮,悔惡初附,且款且畏,咸懷危懼,百姓愁苦,異人同慮,望寧息之有期,若枯旱之思雨露,誠宜鎮之以安豫。而子方欲作役起徒,興功造事,使疲悴之眾,徙自猜之寇,以無穀之人,遷乏食之虜,恐勢盡力屈,緒業不卒,羌戎離散,心不可一,前害未及弭,而後變復橫出矣。

答曰:羌戎狡猾,擅相號署,攻城野戰,傷害牧守,連兵聚眾,載離寒暑矣。而今異類瓦解,同種土崩,老幼繫虜,丁壯降散,禽離獸迸,不能相一。子以此等為尚挾餘資,悔惡反善,懷我德惠而來柔附乎?將勢窮道盡,智力俱困,懼我兵誅以至於此乎?曰無有餘力,勢窮道盡故也。然則我能制其短長之命,而令其進退由己矣。夫樂其業者不易事,安其居者無遷志。方其自疑危懼,畏怖促遽,故可制以兵威,使之左右無違也。迨其死亡散流,離X未鳩,與關中之人,戶皆為讎,故可遐遷遠處,令其心不懷土也。夫聖賢之謀事也,為之於未有,理之於未亂,道不著而平,德不顯而成。其次則能轉禍為福,因敗為功,值困必濟,遇否能通。今子遭弊事之終而不圖更制之始,愛易轍之勤而得覆車之軌,何哉?且關中之人百餘萬口,率其少多,戎狄居半,處之與遷,必須口實。若有窮乏糝粒不繼者,故當傾關中之穀以全其生生之計,必無擠於溝壑而不為侵掠之害也。今我遷之,傳食而至,附其種族,自使相贍,而秦地之人得其半穀,此為濟行者以廩糧,遺居者以積倉,寬關中之逼,去盜賊之原,除旦夕之損,建終年之益。若憚暫舉之小勞,而忘永逸之弘策;惜日月之煩苦,而遺累世之寇敵,非所謂能開物成務,創業垂統,崇基拓跡,謀及子孫者也。

并州之胡,本實匈奴桀惡之寇也。漢宣之世,凍餒殘破,國內五裂,後合為二,呼韓邪遂衰弱孤危,不能自存,依阻塞下,委質柔服。建武中,南單于復來降附,遂令入塞,居於漠南,數世之後,亦輒叛戾,故何熙,梁慬戎車屢征。中平中,以黃巾賊起,發調其兵,部眾不從,而殺羌[Baro2] 。由是於彌扶羅求助於漢,以討其賊。仍值世喪亂,遂乘釁而作,鹵掠趙魏,寇至河南。建安中,又使右賢王去卑誘質呼廚泉,聽其部落散居六郡。 咸熙之際,以一部太強,分為三率。泰始之初,又增為四。於是劉猛內叛,連結外虜。近者郝散之變,發於穀遠。今五部之眾,戶至數萬,人口之盛,過於西戎。然其天性驍勇,弓馬便利,倍於氐羌。若有不虞風塵之慮,則并州之域,可為寒心。

滎陽句驪本居遼東塞外,正始中,幽州刺史毋丘儉伐其叛者,徙其餘種。始徙之時,戶落百數,子孫孳息,今以千計,數世之後,必至殷熾。今百姓失職,猶或亡叛,犬馬肥充,則有噬齧,況於夷狄,能不為變!但顧其微弱勢力不陳耳。

夫為邦者,患不在貧而在不均,憂不在寡而在不安。以四海之廣,士庶之富,豈須夷虜在內,然後取足哉!此等皆可申諭發遣,還其本域,慰彼羇旅懷土之思,釋我華夏纖介之憂。惠此中國,以綏四方,德施永世,於計為長。

帝不能用。未及十年,而夷狄亂華,時服其深識。

 

來自于中國國學網2006-4-11;

 

相關信息 :

江統(-310年),字應元(一說元世、德元),西晉陳留圉(今河南省杞縣南)人。元康九年(299年)太子洗馬(太子宮圖書管理官)江統於齊萬年事件之後,作〈徙戎論〉著稱於世。

 


 [Baro1]신하로 삼지 않고 연합만 해서 변방을 지키는 용병으로 사용

 [Baro2]Qu ...북방계 언어의 관직이름과 상관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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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예술사는 어떻게 먹어야 될까? 간단히 말해서 이건 대체 말인지 정말 모르겠다. 그림은 정확하게 유치원 수준에서 멈추었고, 붓글씨 고사하고 본인이 글씨도 알아보는 사람으로서 예술은 개뿔이 예술이냔 말이다.


예술사를 하려면, 일정 정도의 그림을 있는 감별력이 있어야 되겠지만, 본인은 없다. 고로 앞으로 이쪽은 돌아보지 않으련다. 무엇을 알아 먹어야 것이 아닌가!!


이것은 마치 장님에게 모나리자가 인류의 보물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圣武亲征录校注》  清·王国维校注


  《圣武亲征录》一书,乾隆间修《四库书》时,以其序述无法,词颇蹇涩,译语互异,未著于录,仅存其目于史部杂史类中。钱竹汀先生始表章其书,为之跋尾。道光以后,学者颇治辽金元三史及西北地理,此书亦渐重于世。张石洲、何愿船二先生始为之校勘,而何氏治之尤勤。其殁后,稿本流传京师。光绪朝士,若顺德李仲约侍郎、萍乡文道希学士、嘉兴沈子培先生,递有增益。岁在甲午,桐卢袁重黎太常刊之于芜湖,是为此书有刊本之始。顾张、何二家所据本,虽云出竹汀先生家,然辗转传钞,谬误百出。石洲仅得翁覃溪学士家藏本一校之,无大悬绝也。余前在海上,于嘉兴沈先生座上见其所校《说郛》本《亲征录》,为明弘治旧钞,与何本异同甚多。先生晚岁不甚谈元史事,然于《说郛》本犹郑重手校。未几,先生归道山,其校本遂不可见。比来京师,胶州柯凤孙学士为余言,元太祖初起时之十三翼,今本《亲征录》不具,《说郛》本独多一翼,乃益梦想《说郛》本。旋知其本藏江安傅君沅叔所。乙丑季冬,乃从沅叔借校。沅叔并言尚有万历抄《说郛》本,在武进陶氏。丙寅正月赴天津,复从陶氏假之,其佳处与傅本略同。又江南图书馆有汪鱼亭家钞本,亦移书影钞得之。合三本互校,知汪本与何氏祖本同出一源,而字句较胜,夺误亦较少;《说郛》本尤胜,实为今日最古最备之本。因思具录其异同,为校记以饷学者。顾是书有今本之误,有明钞本之误,有原本之误,三者非一一理董,犹未易遽读也。幸而此书之祖祢之《秘史》,与其兄弟之拉施特书,其子姓之《元史》及当时文献,尚可参验,因复取以比勘,存其异同,并略疏其事实,为《校注》一卷。昔吴县洪文卿侍郎译拉施特书,并为《秘史》及此《录》作注,而遗稿不传,其说略见《元史译文证补》中。武进屠敬山撰《蒙兀儿史记》,于是《录》探索尤勤。近复有仁和丁益甫考证地理,亦非无一二可采。兹复剟取其说,其有瑕颣,间加辨正,虽不敢视为定本,然视何氏校本,则差可读矣。当有元成宗之世,西域人拉施特撰《蒙古全史》,其《太祖纪》一种,除所载宗室世系及西域战事详于此《录》外,余大都与此《录》符同,故学者多谓此《录》出于蒙古《脱卜赤颜》。往读《元史·察罕传》言,仁宗命译《脱必赤颜》,名曰《圣武开天记》,及《纪年纂要》、《太宗平金始末》等书,俱付史馆云云。案明修《元史》,其太祖、太宗二《纪》,大半取材此《录》,而明《文渊阁书目》乃有《圣武开天记》而无《圣武亲征录》,颇疑《亲征录》即《开天记》,顾《开天记》译于仁宗时,而此《录》之成,确在世祖之世。今本癸亥年王孤部下有原注云:今爱不花驸马丞相白达达是也。考阎复《高唐忠献王碑》及《元史·阿剌兀思剔吉忽里传》,爱不花当中统之初已总军事。又,其子阔里吉思,成宗即位封高唐王,则爱不花之卒必在世祖时。而此《录》成时,爱不花尚存,则非察罕所译之《开天记》明矣。又此《录》虽冠以“圣武”之名,实兼备英、文之事。且太祖事止记岁名,而太宗事则详及月日,盖所取材本自不同。疑太祖朝事出《脱卜赤颜》,与《开天记》同源,太宗朝事则别取《平金始末》等书以益之。且作者于蒙古文字未能深造,证以《秘史》,踳驳不一而足,故仁宗朝复令察罕重译。今拉施特书幸存,而察罕书不传,殊令人有遗憾已。丙寅二月清明日,海宁王国维。

 
圣武亲征录校注

  《圣武亲征录》一卷 皇元
 
  〔右明钞《说郛》本标题如是,书题下有“皇元”字者,缘《说郛》中所收各书皆于本书下题唐厶厶撰、宋厶厶撰、或皇元厶厶撰。此《录》不知何人所撰,故但题皇元而缺其撰人姓名。后人移“皇元”二字于书名之上,殊非其旧,今行世本皆然,可知其皆出《说郛》本也。〕
 
  烈祖神元皇帝,
 
  〔《说郛》本“元”作“尧”,汪本作“先”,今从何本。《元史·祭祀志》:世祖至元三年,命平章赵璧等集议尊谥庙号,定为八室。烈祖神元皇帝第一室,太祖圣武皇帝第二室。〕
 
  讳也速该。
 
  〔下又作“叶速该”。《元朝秘史》作“也速该把阿秃儿”。〕
 
  初征塔塔儿部,
 
  〔塔塔儿即唐、五代时之达怛、达靼,辽之阻卜,金之阻幞也。详拙撰《鞑靼考》。〕
 
  获其部长帖木真斡怯、忽鲁不花辈,
 
  〔《说郛》本、汪本、何本,凡“斡”字皆讹为“幹”,今并从何校改正。《秘史》作“帖木真兀格、豁里不花”。〕
 
  还驻军跌里温盘陀山。
 
  〔《秘史》作“迭里温孛勒答黑山”,云在斡难河边。〕
 
  时我太祖圣武皇帝始生,
 
  〔何本无“始”字,从《说郛》本增。汪本作“姓”亦“始”之讹。〕
 
  右手握凝血。长而神异,以获帖木真,故命为上名。初族人泰赤乌部长别林,
 
  〔《说郛》本“长”作“居”,今从汪、何二本。《秘史》海都生三子,一名察剌孩领忽,察剌孩领忽生子名想昆必勒格,想昆必勒格生子名俺巴孩,就做了泰亦赤兀惕姓氏。此泰赤乌即泰亦赤兀惕,别林即想昆必勒格。想昆者,详稳之异译,乃官名,其本名实为必勒格别林,又必勒格之略。海都为太祖六世祖,则别林乃太祖高祖行也。〕
 
  旧无怨于我,后因其主阿丹可汗
 
  〔《说郛》本“丹”作“舟”,今从汪、何二本。某氏曰:“《秘史》(一),俺巴孩之后,为泰亦赤兀惕氏。俺巴孩为金人所虏,寄语其十子中之合答安太子,令其复仇。合答安太子即此阿丹可汗也。”桐庐袁氏刊何校本中,附光绪朝士校语,杂出顺德李仲约侍郎(文田)、萍乡文道希学士(廷式)、嘉兴沈子培先生(曾植)之手,今以无从识别,故浑称某氏云。〕
 
  二子塔儿忽台、忽邻拔都
 
  〔诸本“忽”作“不”(那珂通世云:“不,乃兀之讹”),从下文及《秘史》改。“忽邻”作“忍邻”,从李侍郎说改正。何校于“忍邻拔都”下云:“《秘史》作‘乞邻秃黑’。”维案:《秘史》“塔儿忽台乞邻秃黑”八字,乃一人之名,不得云“二子”。此当是塔儿忽台为一人,忽邻拔都为一人。下文有泰赤乌部长沆忽阿忽出、忽怜、忽都答儿。拉施特书:塔儿忽台同祖兄弟忽力儿把阿秃儿、盎库兀库楚,皆为泰亦赤兀部长。忽怜及忽力儿把阿秃儿即此忽邻拔都也。〕
 
  有憾,遂绝。烈祖早世时,上冲幼,
 
  〔《秘史》云“九岁”。拉施特书云“十三岁”。〕
 
  部众多归泰赤乌。上闻近侍脱端火儿真亦将叛,
 
  〔何氏云:“《秘史》有脱朵延吉儿帖,疑即此也。”〕
 
  自泣留之。脱端曰:“今清潭已涸,坚石已碎,留复何为!”遂去。上母月伦太后
 
  〔《元史·后妃表》:“烈祖宣懿皇后,讳月伦。”《秘史》作“诃额伦”。〕
 
  麾旗将兵,躬追叛者大半还。夙将察剌海背中枪
 
  〔何本“夙”作“部”,汪本作“俗”,今从《说郛》本。又,何本脱“背”字,《说郛》本作“皆”今从汪本。《秘史》云:“脱朵延吉儿帖又将察剌合老人脊背上刺了一枪。”〕
 
  创甚,上亲视劳慰。察剌海曰:“先君登遐,
 
  〔汪本作“自君登避”,何本作“自居登避”。何改“自先君登遐”,正与《说郛》本合,但多一“自”字耳。〕
 
  部人多叛。臣不胜忿,远追苦战,以致然也。”上感泣而出。时上麾下搠只塔儿马剌
 
  〔《秘史》作“拙赤塔儿马剌”。〕
 
  别居萨里河,
 
  〔《秘史》作“撒阿里客额儿”。客额儿,《秘史》蒙文旁注:“野甸。”译文则云“地面”,此《录》多译为“河川”字。此“撒阿里客额儿”与太祖征乃蛮时两次驻军之“撒阿里客额儿”同名异地。下文又有萨里川不鲁古崖,不鲁古崖即《秘史》之不峏罕山,在今斡难、克鲁伦两河发源处。《元史·太祖纪》:“崩于萨里川哈老徒之行宫”,今克鲁伦河上游之西有哈老台岭、哈老台河、哈老台泊,即哈老徒。是克鲁伦河源及其上游地并得称撒阿里客额儿,此萨里河即其地也。〕
 
  札答兰氏札木合
 
  〔《秘史》:“那怀孕的妇人,孛端察儿将做了他妻,生了一个儿子,唤作札只剌歹。后来札答剌的人氏,他便是他祖。札只剌歹的儿子名土古兀歹,土古兀歹的儿子名不里不勒赤鲁,不里不勒赤鲁的儿子名合剌合答安,合剌合答安的儿子名札木合,就做了札答阑姓氏。”〕
 
  部人秃台察儿
 
  〔《秘史》作“札木合弟绐察儿”。〕
 
  居玉律哥泉,
 
  〔《秘史》作“斡亦该不剌合”。近仁和丁谦〕
 
  以车臣部右翼左旗之乌兰滚布拉克当之,是也。举众来萨里河掠搠只牧马。搠只麾左右匿马群中,射杀之。札木合以是为隙,遂与泰赤乌、亦乞剌思
 
  〔《秘史》作“亦乞列思”。《元史·孛秃传》:“孛秃,亦乞列思氏。太祖尝潜遣术儿彻丹出使,至也儿古纳河。孛秃知其为帝所遣”云云,是亦乞列思部居今额儿古讷河左右。又《特薛禅传》:“太祖谕火忽曰:‘哈老温迤东,涂河、潢河之间,火儿赤纳庆州之地,与亦乞列思为邻,”云云,此恐太祖新赐之地,非其本土也。〕
 
  兀鲁吾、
 
  〔诸本“兀”作“元”,从何校改正。兀鲁吾即兀鲁兀惕也。《秘史》:篾年土敦子纳臣把阿秃儿生二子,一名兀鲁兀歹,一名忙忽台,就做了兀鲁兀惕、忙忽惕二姓氏。〕
 
  那也勤、
 
  〔诸本作“郡也勒”,据拉施特书,此处有那牙勤,则“郡也勒”当是“那也勤”之讹,今订正。《秘史》:篾年土敦第二子合臣,合臣的子名那牙乞歹,那牙乞歹因他性儿好装官人模样,就做了那牙勤姓氏。〕
 
  八鲁剌思、
 
  〔《秘史》:“篾年土敦第三子合出兀的子名巴鲁剌台,因他生的身子大,吃茶饭猛的上头,就做了巴鲁剌思姓氏。第四子合出剌之子亦吃茶饭猛,唤做大巴鲁剌、小巴鲁剌、额儿点图巴鲁剌、脱朵延巴鲁剌,将这四个名就做了姓氏。”〕
 
  霸邻诸部,
 
  〔《秘史》:“那妇人孛端察儿根前再生一子,名巴邻阿歹,后来做了巴阿邻姓氏的祖。那巴里阿歹的儿子名赤都忽勒孛阔。赤都忽勒孛阔娶妻的多,儿子多生了,因此上做了篾年巴阿邻姓氏。”〕
 
  合谋以众三万来战。
 
  〔《秘史》:“札木合领着他一种并十三部,共三万人。”案:上所记共六部。武进屠敬山(寄)据拉施特书,补豁罗剌思一部,又补翁吉剌、合答斤、撒勒只兀、朵儿边、塔塔儿五部,殆是也。〕
 
  上时驻军答兰版朱思之野,
 
  〔下文作“答兰班朱思”《秘史》卷四作“答兰巴泐主惕”,卷八蒙文作“答阑巴泐渚惕”,而译文作“巴泐渚纳”,盖涉巴泐渚纳海子而误也。考太祖于此地战败后,退入斡难河域之哲列捏地方,则其地当近斡难河。〕
 
  亦乞剌部人捏群之子
 
  〔诸本“乞”作“迄”,汪、何二本“群”作“辟”,万历钞《说郛》本作“郡”,弘治钞本及《元史类编》所引不误,今据以订正。何校云当作“群”,正与弘治钞本合。〕
 
  孛徒先在麾下,
 
  〔诸本“孛”作“字”,从《元史类编》所引改。孛徒,《元史》有传,字作“孛秃”。《秘史》(三):“一种亦乞列孙的人不图这里做女婿也来了。”“不图”亦即“孛徒”,其来正在答兰版朱思战役前,所谓“先在麾下”者也。〕
 
  至是自曲邻居山
 
  〔汪、何二本作“自是曲邻居山”,今从何校改正。《说郛》本作“王自是曲邻居山”,亦误。〕
 
  遣卜栾台、慕哥二人逾阿剌乌、秃剌乌二山来告变。
 
  〔诸本,“栾”作“奕”,今订正。《秘史》蒙文(四):“札木合军逾阿剌屼々惕土儿合兀的,时亦乞列思人木惕客脱塔黑、孛罗勒歹到成吉思所居古连勒古地面告变了。”《元史·孛秃传》:“札赤刺歹札木合、脱也等以兵三万入寇。孛秃闻之,遣波栾歹、磨里秃秃来告。”孛罗勒歹、波栾歹即此卜栾台,木惕客脱塔黑、摩里秃秃即此慕哥,阿剌屼屼惕土儿合兀的即此阿剌乌秃剌乌山,古连勒古即此曲邻居山。但此《录》译《秘史》颇误,不必强为之说。古连勒古地面,据《秘史》在桑沽儿河旁,即今僧库尔河。〕
 
  上集诸部戒严,凡十有三翼,
 
  〔汪、何二本作“凡有十三翼”,《说郛》本脱“十”字,《元史类编》引作“凡十有二翼”。〕
 
  月伦太后暨上昆弟为一翼;
 
  〔何本“一”作“三”,汪本脱此字,今从《说郛》本及《类编》所引改正。拉施特书:“谔伦额格并其族斡勒忽阑人为第一翼,帝及帝之子弟并其从人与各族之子弟为第二翼。”〕
 
  三哈初来之子奔塔出拔都、
 
  〔何本无“三”字,从《说郛》本、汪本增。拔都,《说郛》本作“拔相”,何本又讹为“板相”,今从何校改。三哈初来,即《秘史》之挦薛出列、拉施特书之撒姆哈准也。“三”字与“挦”字及“撒姆”二合音字,对音最切,断不可遗。《秘史》:“屯必乃薛禅生二子,一名合不勒合罕,一名挦薛出列。挦薛出列的子不(勒)帖出把阿秃儿。”此奔塔出拔都即不勒塔出把阿秃儿也。〕
 
  秃不哥逸敦、
 
  〔拉施特书:“三翼为撒姆哈准之后人布拉柱把阿秃儿,又有客拉亦特之分族人。”洪文卿侍郎(钧)云:“《录》中,秃不哥逸敦之名未见。‘客亦特’与‘哥逸敦’音近,恐《西域史》误以人名为部名。”屠敬山云:“秃不哥亦敦,当是秃不哥克烈亦敦之脱误,亦即《秘史》秃别干客烈亦惕之异文也。秃别干为客烈亦惕之分族,故旧史称肖乃台为秃伯怯烈氏。拉施特书之客拉亦特即客烈亦惕之异文。所谓分族,即指秃别干也。”二说并持之有故,兹两存之。〕
 
  木忽儿好兰统阿答儿斤、
 
  〔汪、河二本作“木儿忽好兰”,今从《说郛》本改。下文有“答儿斤”,木忽儿哈檀即是人也。《秘史》:“篾年土敦第五子合赤温的儿子名阿答儿乞歹,兄弟中间好间谍,就做了阿答儿斤姓氏。”〕
 
  察忽兰统火鲁剌诸部,
 
  〔诸本无“统”字,从洪侍郎说增。“火”,或作“大”,从汪本改。拉施特书作:“又阿答儿斤人将曰木忽儿忽阑,又火罗剌斯人将曰察鲁哈火鲁剌,今称郭尔罗斯。”《秘史》作“溪罗剌思”,《秘史》蒙文(四)有溪罗剌思察合安,疑即此察忽兰也。〕
 
  及鲜明昆那颜之子迭良统火力台不答安辈为一翼;
 
  〔拉施特书:“四翼为苏儿嘎图诺延之子得林赤并其弟火力台,并博歹阿特人。”案:拉氏《部族考》,博歹阿特氏中有火力台,则苏尔嘎图那颜亦当是博歹阿特人。屠敬山以晃溪坛氏之雪亦客秃当之,非也。博歹阿特即不答安。《秘史》:“篾年土敦第六子合阑歹的儿子争粥饭,无上下,因此就做了不答安姓氏。”〕
 
  札剌儿及阿哈部为一翼;
 
  〔拉施特书:“五、六翼为莎儿哈秃月儿乞之子薛撒别乞,并其从兄弟泰出及札剌亦人、莎儿哈秃人。”案:《秘史》,札剌亦儿人此时在太祖所者,有脱忽剌温兄弟三人,并薛扯朵抹黑之子阿儿孩合撒儿、巴剌二人。阿哈部未详。〕
 
  答里台、火察儿二人
 
  〔汪、何二本“里”作“圣”,《说郛》本作“圣”今订正。案:《秘史》,答里台斡赤斤为太祖季父,忽察儿为太祖仲父捏坤太子之子,故同在一翼。〕
 
  及朵忽兰、捏古思、火鲁罕、撒合夷、嫩真诸部为一翼;
 
  〔何本“朵忽兰”作“忽都兰”,“撒合夷嫩真诸部”作“撒合弟直部”,汪本亦脱“嫩”、“诸”二字,今并从《说郛》本改正。拉施特书:“九翼为答里台、斡赤斤及捏坤大石子、火察儿族人达鲁,并都黑剌特、努古思、火儿罕、撒哈夷特委神诸部。”案:此朵忽兰即都黑拉特,洪侍郎谓即《秘史》纳臣之子朵豁剌歹之后。捏古思即努古思,《秘史》作“捏兀歹”,不著其所自出。拉施特书谓海都子察剌孩领忽二子更都赤那及乌鲁克勤赤那之后,然后文此二族自为一翼,则拉氏谓努古思即赤那思,或未然也。火鲁罕,未详是人名?抑部族名?撒合夷,《秘史》作“撒合亦惕”。卷四蒙文有温真撒合亦惕,温真即此嫩真,但《秘史》旁注:“人名”。据此则部名也。〕
 
  忽都图忙纳儿之子蒙哥怯只儿哥为一翼;
 
  〔诸本“忽都”作“忽相”,今订正。《秘史》(一)合不勒合罕子有忽秃黑秃蒙古儿,卷四蒙文作“忽秃黑秃蒙列儿”,《元史·宗室世系表》作“忽都鲁咩聂儿”,即此忽都图忙纳儿也,然其子名不里孛阔,非蒙哥怯只儿哥。拉施特书,无此一翼,其第八翼为蒙格秃乞颜之子程克索特及其弟,皆为帝之从兄弟,又巴牙兀特人酋曰汪古儿。洪侍郎疑此蒙哥怯只儿哥即蒙格秃乞颜,然则此处上下并有脱文也。《秘史》蒙文(三):“蒙格秃乞颜的儿子翁古儿同敞失兀惕巴牙兀的两种人也来了。”拉氏书之程克索特当是程索克特之误,即《秘史》之敞失兀惕,拉氏误以部名为人名,又岐蒙格秃乞颜二子与汪古儿而二之,盖非。〕
 
  忽都剌可汗之子搠只可汗为一翼;
 
  〔忽都剌,汪、何二本作“忽兰脱”,《说郛》本作“忽相剌”,今订正。〕
 
  按坛为一翼;
 
  〔汪、何二本“坛”作“<土玄>,今从《说郛》本。拉施特书:“十翼为忽都剌合罕之子拙赤汗及其从人,十一翼为按坛亦忽都剌子。”《秘史》:“忽图剌忽罕生三子,一名拙赤,一名吉儿马兀,一名阿勒坛。”〕
 
  忽兰、脱端二人为一翼;
 
  〔何本脱“二人”二字,今从《说郛》本、汪本补。《秘史》合不勒合罕生七子,一名忽阑,一名脱朵延斡赤斤,即此忽兰、脱端二人也。拉施特书,无此二人,惟其第七翼为渥秃助忽都、朵端乞及其麾下。朵端乞与脱端声相近。〕
 
  共吉牙部、塔降吉拔都统雪干、札剌吾思为一翼;
 
  〔汪、何二本无此十九字,今从《说郛》本补。拔都,原作“拔相”,今订正。拉施特书:“十二翼为答忽把阿秃儿及晃火攸特人、速客特人。”答忽把阿秃儿即此塔降吉拔都,速客特即此雪干,惟晃火攸特与此札剌吾思音殊不类,所当阙疑。《秘史》蒙文(三):“速客客种者该、晃答豁儿的儿子速客该者温也来了。”晃火攸特疑即晃答豁儿之误,雪干疑即速客该者温。惟共吉牙部则他书从未见此部名,疑此文尚有讹阙也。〕
 
  建都赤纳、玉烈贞赤纳二部为一翼。
 
  〔何本作“疌相赤纳玉烈二都为一翼”。汪本“二都”作“二郎”,余同。《说郛》本作“达相赤纳、玉烈贞赤剌为一翼”,今从之。惟“吏”、“达”二字,皆“建”字之形讹,“剌”又“纳”之音讹。拉施特书:“第十三翼为更都赤那、乌鲁勤赤那之后努古思人”。《秘史》蒙文(九)雄狼之本语曰坚都赤那,知“达”、“疌”二字,皆“建”之讹也。此上十三翼中,仅得十翼,又与拉氏书互异,可以参观。〕
 
  军成,大战于答兰版朱思之野,
 
  〔汪、何二本无“成”字,据《说郛》本补。〕
 
  札木合败走。
 
  〔《秘史》谓是役太祖败。此盖讳之。〕
 
  彼军初越二山,半途为七十二灶,烹狼为食。
 
  〔《秘史》:“札木合将赤那思地面所有的大王,每将七十锅煮了。”蒙文则云:“赤那孙可兀的答阑脱豁惕不察勒合周。”案:蒙古语狼为赤那,子为可兀,则此句就字面译之,可云:将狼之子七十锅煮了。至拉施特书,以烹人属之太祖。时赤那思人方从太祖为十三翼之一,太祖决无自烹其属部之理,其诬盖不待辨矣。〕
 
  是时泰出乌部地广民众而内无统纪,其族照烈部与我近,
 
  〔《秘史》:“合必赤的母,从嫁来的妇人,孛端察儿做了妾,生了个儿子名沼兀烈歹,后来做了沼兀烈亦惕姓氏。”〕
 
  常猎斡禅札剌马思之野。
 
  〔汪、何二本“斡禅”作“幹幹”,今从《说郛》本。拉施特书作“乌者哲儿们山”,未详所在。〕
 
  上时亦猎围,陈隅相属既合。
 
  〔《说郛》本“隅”作“偶”。汪、何二本“既”下有“而”字,今从《说郛》本删。〕
 
  上曰:“可同宿于此乎?”彼曰:“猎骑四百,糗粮不具,已遣半还。”上曰:“命给助同宿者。”越明日,再合围。上宾之,使驱兽近彼陈,让多获以厌其心。彼众咸相语曰:
 
  〔汪、何二本“语”作“告”,今从《说郛》本。〕
 
  “泰赤乌与我虽兄弟,
 
  〔汪本无“与”字,何本作“虽我兄弟”。今从《说郛》本。《元史》同。〕
 
  常攘我车马,夺我饮食。厚恤我者其此人乎?”
 
  〔汪、何二本“厚”作“忧”,今从《说郛》本。〕
 
  大称羡而归。上因遣告之曰:“可来结盟否?”照烈之长玉烈拔都
 
  〔诸本“都”作“相”。何氏云:“通校前后文,‘拔相’皆‘拔都’之讹。”〕
 
  谋于族长马兀牙答纳。
 
  〔何本“兀”作“儿”,今从《说郛》本、汪本。〕
 
  对曰:“泰赤乌何恶于我?彼亦为兄弟,何遽降之?”不从。玉律拔都遂与塔海答鲁领所部来归。谓上曰:“如我属,将有无夫之妇、无牧之马而来,以泰赤乌长母之子讨杀我也。
 
  〔弘治钞《说郛》本、汪本“我”作“故”,今从万历钞本及何本。〕
 
  我担当弃亲从义而招之。”
 
  〔汪、何二本无“亲”字,“招”作“拈”,今从说郛本。〕
 
  上曰:“我方熟寐,摔发而悟之。兀坐掀髯而起之,
 
  〔汪、何二本下“之”字作“曰”,今从《说郛》本。〕
 
  汝之言我素心也。汝兵车所至,余悉力而助也。”既盟后,二人食言叛归。
 
  〔诸本此下有“少”字,何氏删。〕
 
  族人忽敦忽儿章
 
  〔诸本“敦”作“数”,据后文作“忽敦忽儿章”改。《秘史》蒙文卷四有泰亦赤兀人豁敦斡儿长,又卷五作“豁团斡儿昌”。〕
 
  怨塔海答鲁反侧,遂杀之。照烈部已亡矣,泰赤乌部众苦其长非法,相告曰:“太子
 
  〔原注:“谓太祖也。”〕
 
  衣人以己衣,乘人以己马,安民定国,必此人也。”
 
  〔何本“安”作“案”,今从《说郛》本、汪本。〕
 
  因悉来归。赤剌温拔都、
 
  〔汪、何二本作“赤老温拔相”,今从《说郛》本、何校改。〕
 
  哲别二人实泰赤乌族脱脱哥家人,亦来归。初,上尝为塔儿忽台所执,赤剌温拔都
 
  〔何本脱此三十二字,今从《说郛》本、汪本补。赤剌温,《秘史》作“赤老温”,“哲别”作“者别”,“脱脱哥”作“脱朵格”。拉施特书云:“哲别本在泰亦赤兀部长哈丹大石之子布答麾下。”与《秘史》及此《录》不同。〕
 
  父梭鲁罕失剌密释之,
 
  〔《秘史》作“锁儿罕失剌”。〕
 
  是以归我。哲别之来,实以力穷故也。
 
  〔汪、何二本“是以”作“是时”,今从《说郛》本。〕
 
  失力哥也不干
 
  〔失力哥,《秘史》作“失儿古额秃”,《元史·伯颜传》作“述律哥图也”。不干者,蒙古语谓老人。〕
 
  手执阿忽赤拔都、
 
  〔汪、何二本作“忽阿失拔相”,《说郛》本作“忽阿赤拔相”。案:拉施特书作“阿忽朱把阿秃儿”,则“忽阿”二字当乙转。阿忽赤拔都即《秘史》之泰亦赤兀敦阿兀出把阿秃儿也。〕
 
  塔儿忽台二人来至忽都浑野,复纵之去,止将己子乃牙、阿剌二人来归。
 
  〔诸本“牙”作“才”,今从何校订正。《秘史》“忽都浑”作“忽都忽”,“乃牙”作“纳牙”,“阿剌”作“阿剌黑”。又赤剌温、哲别、失力哥诸人来归,《秘史》并在鸡儿年灭泰赤乌后,此移于前。〕
 
  后搠只、鲁钞罕二人率朵郎吉札剌儿部,
 
  〔朵郎吉札剌儿,何氏本作“朵郎即利剌儿”,何校据《元史》改正,今从之。《说郛》本作“朵郎执吉剌儿”,汪本作“朵即吉利剌儿”,亦误。拉施特书:“札剌亦儿分族朵郎吉部长术只角儿海亦率所部至朵郎古特、辛古特之地,归于帝。”案:朵郎古特即《秘史》之帖列格秃,亦作帖列秃,《秘史》记太祖追撒察别乞、泰出,至帖列秃,后即记札剌亦儿人帖列格秃巴颜来归,即此事也。其文云:“帖列格秃巴颜有三子,教长子古温兀阿将他二子模合理、不合拜见太祖与了,又教第二子赤剌温孩亦赤将自己二子统格、合失拜见,又将第三子者卜客与了太祖弟合撒儿”云云,盖帖列格秃巴颜即以帖列格秃之地为名,而朵郎吉札剌儿氏又以帖列格秃巴颜之名为氏,然则搠只、鲁钞罕二人殆即古温兀阿兄弟。搠只,别作“拙赤”或“术赤”,蒙俗长、次子方有此名,殆即古温兀阿。鲁钞罕,拉施特书作“角儿海”,自是“钞鲁罕”之倒误,即赤剌温之异译也。〕
 
  及荽叶胜和率忙兀部亦来归。
 
  〔汪、何二本“叶”作“菜”,今从《说郛》本。案:荽叶,疑“委叶”之讹。《元史·畏答儿传》:“畏答儿,忙兀人。与兄畏翼俱事太祖时太畴强盛,畏翼率其属往归之,畏答儿力止之”云云,委叶胜和当是异翼也。〕
 
  日后,上同月伦太后暨哈撤儿、斡真那颜
 
  〔《元史·宗室世系表》:烈祖五子,次二搠只哈儿王,次四铁木哥斡赤斤,所谓皇大弟国王斡嗔那颜者也。搠只哈儿,《秘史》及《元史》纪传并作“哈撒儿”。〕
 
  诸昆弟族薛彻、大丑等,
 
  〔《说郛》本无“诸”字,何本无“族”字,今从汪本。《秘史》蒙文(三):“主儿乞种莎儿合秃主儿乞的儿子撒察别乞、泰出一圈子,由札木合处分离著来了。”撒察别乞即此薛彻,泰出即此大丑也。〕
 
  各以旄车载湩酪,
 
  〔原注:湩,音董,乳汁也。汪、何二本夺此注,从《说郛》本补。又,《说郛》本正文无“旄”字,今从汪、何二本。《元史·本纪》同。〕
 
  大会于斡难河林木间。会中,太后暨上为族人薛彻别吉
 
  〔诸本“为”作“谓”,从何校改。〕
 
  及其母忽儿真哈敦
 
  〔《秘史》作“忽兀儿臣合敦”。〕
 
  共置马湩一革囊,
 
  〔汪、何二本“马”作“酪”,今从《说郛》本。〕
 
  其次母野别该前独置一革囊。
 
  〔何本作“也别该”,今从《说郛》本、汪本。《秘史》作“额别该”。〕
 
  忽儿真哈敦怒曰:“今不尊我,而贵野别该乎?”遂笞主膳者失邱儿,
 
  〔《秘史》作“失乞兀儿”。〕
 
  泣曰:“盖以捏群太石、叶速该拔都二君去世,
 
  〔诸本作“捏辟太后叶速该命拔相”,今从何校更正。《秘史》:把儿坛把阿秃儿生四子,一名忙格秃乞颜,一名捏坤太子,一名也速该把阿秃儿,一名答里台斡赤斤。〕
 
  我专为他人所辱至此。”因大哭。是时别里古台那颜
 
  〔《元史·世系表》:烈祖五子,次五别里古台王。《秘史》作“别勒古台”。〕
 
  掌上乞烈思事,
 
  〔原注:“系禁外系马所”。〕
 
  亲御上马。
 
  〔诸本“御”作“摇”,今订正。〕
 
  播里掌薛彻别吉乞列思事。
 
  〔《秘史》:“忽秃黑秃蒙古儿生一子,名不里孛阔。”即此播里。〕
 
  播里从者因盗我马靷,别里古台执之。播里怒斫别里古台。背伤。左右欲斗,别里古台止之,
 
  〔何本“止”作“指”,今从《说郛》本、汪本。〕
 
  曰:“此仇汝等欲即报乎?我伤不甚也,姑待之,不可由我致隙。”其众不听,各执马乳橦,
 
  〔何本“乳橦”作“乱撞”,今从《说郛》本、汪本。〕
 
  斫木枝疾斗,我众胜之,乃,夺忽儿真、火里真二哈敦留麾下。
 
  〔汪、何二本“留”作“届”,今从《说郛》本。火里真,《秘史》作“豁里真”。〕
 
  后复议和,遣二哈敦归。行成之际,塔塔儿部长蔑兀真笑里徒
 
  〔《秘史》作“蔑古真薛兀勒图”。〕
 
  背金约,金主遣丞相完颜襄帅兵逐塔塔儿北走。上闻之,遂起近兵发自斡难河,迎讨之,仍谕月儿斤来助。
 
  〔汪本“仍”作“人”,何本作“又”,今从《说郛》本。〕
 
  月儿斤,
 
  〔《秘史》作“主儿勤”,《元史·世系表》作“岳里斤”,乃薛彻、大丑等一族之名。〕
 
  候六日不至,上以麾下兵,与战纳剌秃失图、忽剌秃失图之野,
 
  〔诸本“纳”作“纳”,据《元史类编》所引改。又《说郛》本及《类编》所引无“忽剌秃失图”五字,今据汪、何二本增。《秘史》蒙文(四):“塔塔儿在浯勒札河畔忽速秃失秃延、纳剌秃失秃延地面立了寨子。”是两地在今乌尔载河畔。又“忽剌秃”之“剌”,疑当作“速”。〕
 
  尽虏其车马粮饷,
 
  〔何本无“其”字,从《说郛》本、汪本补。〕
 
  杀蔑兀真笑里徒,又获大珠衾、银绷车各一。金兵回,金主因我灭塔塔儿,就拜上为察兀忽鲁,
 
  〔汪、何二本无“就”字,从《说郛》本增。察兀忽鲁,《秘史》作“札兀忽里”,华言百夫长也。“鲁”字下有原注六字曰:“若金移计使也”。某氏曰:“移计者,招讨之误。”《秘史》:“王京说太祖:‘归奏金主,再大的名分招讨官与你做者。’”此括其语意,然“札兀忽里”非“招讨使”也。原注盖微误。〕
 
  亦册克烈部长脱怜为王。
 
  〔诸本“王”作“主”,依何校改。克烈部长脱怜,《秘史》作“客烈亦敦脱斡邻勒”。案:此上无脱怜同伐塔塔儿事,当有缺文。又伐塔塔儿事,详《秘史》及《金史·内族襄传》〕
 
  时我众居哈连徒泽间,
 
  〔《秘史》作“合澧泐秃海子”,今克鲁伦河上游之西噶老台泊。〕
 
  为乃蛮部人所掠。
 
  〔何氏曰:“《元史,太祖纪》云:‘帝之麾下有为乃蛮部人所掠者,帝欲讨之,复遣六十人征兵于薛彻别吉。薛彻别吉以旧怨之故,杀其十人,去五十人衣而归之。’《秘史》则云:‘太祖落下的老小营在合澧泐秃海子边,被主儿乞将五十人剥了衣服,十人杀了。’二说虽不同,然其载薛彻别吉起衅则同。此书原本当亦载此事,与《本纪》同,为传写者脱去耳。”〕
 
  上怒曰:“曩者别里古台为彼所伤,
 
  〔何本“曩”作“昔”,今从《说郛》本、汪本。〕
 
  我舍衅议和而不听,今何乃乘敌势陵我!”因发兵于大川,至朵栾盘陀山,
 
  〔何本无“陀”字,今从《说郛》本、汪本增。栾,诸本作“奕”。案:拉施特书此处作:“引众越沙漠,至朵阑布勒答克之地。”朵阑布拉答克即《秘史》之朵罗安孛勒答兀,则“奕”为“栾”字之讹无疑。案:《秘史》(四)及《续集》(二)两见此山,皆系之于阔朵额阿拉,即与本《录》之只感忽卢曲雕阿兰、月忒哥忽阑异名同地。那珂博士曰:“阔朵额阿拉,蒙古语阿拉儿洲也,地在撒阿里客额儿东南克鲁伦河之洲,后成吉思汗设大斡儿朵之处也。”箭内博士以为当在桑沽儿河入克鲁伦河之处得之。〕
 
  大掠月儿斤部,
 
  〔汪、何二本“掠”作“掳”,今从《说郛》本。〕
 
  惟薛彻、大丑仅以妻孥数人脱走。上时居塔朵速之野,
 
  〔汪、何二本作“塔朵剌”,今从《说郛》本。《秘史》作“帖儿速地面”。〕
 
  有克烈部汪可汗弟札阿绀孛来归。
 
  〔“汪可汗”即克烈部长脱怜,《秘史》作“王罕”,“札阿绀孛”作“札合敢不”。时汪罕为乃蛮所逐,奔于西辽,故其弟来归。〕
 
  适蔑里乞部与我会战,
 
  〔篾里乞,《秘史》作“篾儿乞”,即《辽史·天祚纪》之“密儿纪”,《兵卫志》、《百官志》之“梅野急”也。其族居鄂尔昆河下游及色楞格河左右。〕
 
  上与札阿绀孛迎敌之,其众败走。是时,有土满土伯夷、董哀诸部,乃克烈败散之众,亦来降。
 
  〔《秘史》蒙文(五):“那里土绵秃别干、斡栾董合亦惕溃散了的客列亦惕也来投入了。”土绵秃别干即此士满土伯夷,斡栾董合亦惕即此董哀。土绵之言万也,斡栾之言多也,二部中小部甚多,又皆客亦列惕之分部,故又总结之曰“溃散了的客列亦惕”。此《录》用一“乃”字甚协。而《秘史》译文乃云:“又客列亦种及那秃别干、董哈等姓溃散的百姓亦来降。”区客列亦种与二部而二之,非也。
 
  拉施特书,此节之上有“帝时年四十”云云。以拉氏书所纪帝卒年上推之,则是岁当为金章宗明昌五年甲寅。洪侍郎曰:“完颜襄北伐,见《金史》当即塔塔儿之役。合纪传考之,乃是丙辰年事,在甲寅后二年。元初无史官,《太祖本纪》(谓拉氏书中之《太祖本纪》)为后来追忆著录,年分未尽可凭。”其说是也。又拉氏书纪年自乙卯始,本书则始自壬戌,二书同一蓝本,而此点相异,不知拉氏书自增入干支,抑系本书夺落也。附志于此,以谂读者。〕
 
  汪罕可汗始与叶速该可汗和好,相称按答。
 
  〔原注:“交物之友”。何本“交”作“变”,《说郛》本脱“物”字,今从汪本及《元史·太祖本纪》订正。〕
 
  所以然者,由初汪可汗之父忽儿札胡思杯禄可汗既卒,
 
  〔《秘史》作“忽儿察忽思不亦鲁罕”。〕
 
  汪可汗杀戮昆弟。其叔父菊儿可汗
 
  〔《秘史》作“古儿罕”。〕
 
  率兵与汪可汗战,逼汪可汗于哈剌温隘
 
  〔《秘史》蒙文(六):“王罕顺薛凉格河钻入哈剌温,狭处。”是其地当在今色棱格河流域。〕
 
  败之,仅以百余骑,奔叶速该可汗。叶速该可汗
 
  〔诸本无此五字,张石洲曰:“当重一句”。〕
 
  亲将兵逐菊儿可汗走西夏,复夺部众归之。汪可汗感德,遂盟按答。
 
  〔《元史类编》引作“遂请盟,称按答”。〕
 
  后汪可汗弟也力可哈剌者,
 
  〔《秘史》作“额儿客合剌”。〕
 
  以其多杀昆弟,叛归乃蛮部亦难赤可汗。
 
  〔《秘史》作“亦难察罕”。〕
 
  亦难赤可汗发兵伐汪可汗,尽夺克烈部众与也力可哈剌。汪可汗脱身,历走三城,
 
  〔《元史·太祖纪》:“汪罕走河西、回鹘、回回三国。”〕
 
  奔赴契丹主菊儿可汗。
 
  〔何氏原本作“菊儿”,何改“菊律”,《说郛》本、汪本亦作“菊律儿律”,一也。《秘史》作“合剌乞塔的古儿罕”。案:耶律大石自立为葛儿罕,后子孙世袭此号。何氏以乃蛮遗种屈出律当之,误也。〕
 
  既而复叛之,涉畏吾儿、西夏诸城邑,中道粮绝,遗乳羊五头,以绳禁羊口,夺其乳为饮,刺橐驼血煮为食,困甚,
 
  〔何本重“食”字,今从《说郛》本、汪本删。
 
  拉施特书,系汪罕东归、在道困厄事于兔年之末,则其为乃蛮所逐至迟当在虎年春夏。缘《秘史》言王罕投入合剌乞塔种古儿皇帝处不及一年,又反出去,加以往反二万里,非二年间不能办也。〕
 
  仅至曲薛兀儿泽。
 
  〔《秘史》作“古泄儿海子”。屠敬山以唐努乌梁海之库苏古尔淖尔当之。对音虽合,然汪罕自畏吾儿、西夏来,不应过此所,当缺疑。〕
 
  上闻之,以其初与先君按答之故,
 
  〔何本无“与”字,从《说郛》本、汪本增。〕
 
  乃遣近侍塔海、雪也垓二人往招之来。
 
  〔《秘史》蒙文:“王罕行至古泄儿海,使塔孩把阿秃儿、速客该去迎。”译文夺“塔孩”一人。〕
 
  上自怯绿连河亲迎抚劳,安置军中,大赈给之。秋,上同汪可汗会于土兀剌河上黑林间,结为父子礼。是年冬,月儿斤部先脱走者薛彻、大丑,追至帖列徒之隘,灭之。
 
  〔帖列徒,《秘史》作“帖列秃”。又卷五、卷六有帖列格秃口子,乃克烈部西界,其地当在今土拉河迤西。
 
  此上,拉施特书系之龙年。〕
 
  次年秋,上发兵于哈剌哈河,伐蔑里乞部主脱脱,
 
  〔拉施特书:“蛇年,帝在霍拉思布拉思之地,率兵攻兀都亦特蔑儿乞。”洪侍郎云:“原文霍拉思布拉思在克鲁伦河近色棱嘎河之处。则此哈剌哈河当即会鄂尔昆河入色棱格河之哈拉河,非入贝尔湖之喀尔喀河,亦非入土剌河之喀老哈河也。霍拉思布拉思当谓哈拉河与布拉河中间之地。《秘史》兀都亦惕蔑儿乞脱黑脱阿,在不兀剌客额儿地面里有不兀剌客额儿,即今布拉河北之平原,故太祖发兵于哈拉、布拉两河间以伐之。姚燧《平章政事忙兀公神道》碑:‘哈剌斯、博罗斯、斡罗罕、薛连干,皆强宗也。’斡罗罕、薛连干即鄂尔昆、色楞格二河,则哈剌斯、博罗斯亦必指哈拉河及布拉河矣。拉氏所谓‘在克鲁伦河近色棱嘎河之处’者,正谓此地也。”〕
 
  战于莫察那山,
 
  〔《秘史》蒙文作“木鲁彻薛兀勒”,旁注:“地名。”拉施特书亦作“战于孟察之地”。下文云“木那义笑力之野”,亦即此地。〕
 
  遂掠兀都夷、蔑里乞二部,
 
  〔诸本“都”作“相”,从何校改。《秘史》:“兀都亦惕脱黑脱阿、兀洼思答亦儿兀孙、合阿台答儿麻剌三种蔑儿乞。”此役所伐之脱脱即兀都亦惕蔑儿乞部长,本文曰“遂”、曰“二部”,皆非也。〕
 
  收其众,尽以其所获给汪可汗。
 
  〔何本无“其”字,今从《说郛》本、汪本增。〕
 
  其后部众稍集,
 
  〔汪、何二本无“部”字,从《说郛》本增。〕
 
  不约我军,自侵蔑里乞,至捕兀剌川,
 
  〔汪、何二本无“捕”字,从《说郛》本增,下文作“不剌川”,《秘史》作“不兀剌客额儿”,今库伦北之布拉河也。〕
 
  杀脱脱之子土居思别吉,
 
  〔《秘史》作“脱古思别乞”。〕
 
  虏忽都台、察勒浑二哈敦,
 
  〔《秘史》蒙文:“要著他两女忽秃黑台、察阿仑。”拉施特书:“掠忽秃黑台、察勒浑二女。”不云哈敦。〕
 
  及招脱脱次子和都、赤剌温二人领部众而来
 
  〔和都,下文别作“火都”,《秘史》蒙文作“忽图”。〕
 
  所夺不以秋豪与我。脱脱奔巴儿忽真之隘。
 
  〔《秘史》作“巴儿忽真脱古木”,今俄属拜喀拉省尚有此地。
 
  此上,拉施特书系之蛇年。〕
 
  后上与汪可汗征杯禄可汗,至黑辛八石之野,
 
  〔《秘史》作“乞湿泐巴失海子”,今乌陇古河所潴之赫萨尔巴什泊也。〕
 
  尽虏其民。杯禄可汗先遣也的脱孛鲁
 
  〔《秘史》作“也迪土卜鲁黑”。〕
 
  领百骑为前锋,我军逼之,走据高山,其马鞍转坠,擒之。冬,上与乃蛮部将曲薛吾、撒八刺二人
 
  〔《秘史》作“可克薛兀撒卜剌黑”,乃一人非二人。〕
 
  遇于拜答剌边只儿之野。
 
  〔《秘史》作“巴亦答剌别勒赤”,拉施特书作“巴答剌海别勒赤列”,今科布多南之巴彦达尔克岭,殆是。屠敬山以赛因诺颜部右翼右末旗之拜达里克河当之,微嫌过东也。〕
 
  日暮,列陈对宿,期明日战。是夜,汪可汗多然火于所陈地,使人不疑,潜移众于哈薛兀里河上。
 
  〔《秘史》作“合剌泄兀勒”,李侍郎谓即今科布多札布干河南之哈剌泊。〕
 
  时札木合
 
  〔诸本无“合”字,从张石洲校增。〕
 
  在幕下,日出望见汪可汗立旗帜非旧处,驰往问之,曰:“王知众否?我昆弟如野鸟依人,终必飞去。余犹白翎雀也,
 
  〔汪、何二本“余犹”作“余皆”,《说郛》本作“余有”,“有”当作“犹”声之误也,今订正。〕
 
  栖息幕上,宁肯去乎?我尝言之矣。”部将曲怜拔都闻之,
 
  〔《秘史》蒙文作“兀卜赤黑台(姓)古邻把〕
 
  阿秃儿。”叹曰:“至爱昆弟之间,何为是言也?”和都、赤剌温因是亦叛汪可汗,归其父脱脱所居。上见汪可汗移去,曰:“此辈无乃异志乎?”即解陈去驻撒里川。
 
  〔《秘史》作“撒阿里客额儿”,此地在鄂尔昆河东,与前萨里河同名异地。〕
 
  汪可汗至土兀剌河,其子亦剌合鲜昆及札阿绀孛自也迭儿按台河
 
  〔《秘史》作“额垤儿阿勒台谷子”。〕
 
  来会父军。曲薛吾撒八剌乘其不备,虏其部众,又掠汪可汗所居边民牛马辎重而还。亦剌合、札阿绀孛仅以身免,奔告汪可汗。汪可汗命亦剌合将己兵往追之,且遣使来告曰:“乃蛮为不道,掳我人民,太子有良将四人,能假我雪怨复人民乎?”上释前憾,遂遣博尔术那颜、木华黎国王、博罗浑那颜、赤老温拔都四将,帅兵往救之。
 
  〔屠敬山曰:“《史》、《录》是役有孛罗忽勒、赤老温,通称四良将。今案:孛罗忽勒以丁巳年被掠,是时方称小儿,岂有未及三年即为有名之良将者?且此时锁儿罕失剌未降,其子赤老温安得先来事太祖?此《秘史》、《亲征录》之误,急宜订正者。”维案:屠说未尽,孛罗忽勒被掠在辰巳间,其时当已成童。《秘史》记壬戌秋太祖灭四种塔塔儿时,孛罗忽勒已自有妻。此役仅在壬戌前三年,岂有不能胜兵之理?至赤老温父子来归,在灭泰赤乌时。《秘史》本在此役之前,此书则赤老温父子来归在前,泰赤乌灭亡在后,二书乖异,无可折衷,要未可遽诋为谬误也。〕
 
  比我军至,亦剌合先与其将迪吉火力亦秃儿干、盏塔兀等二人
 
  〔亦秃儿干之干,汪本、何本作“于”,《说郛》本作“千”。案:下文有亦秃儿干,《秘史》作“亦秃儿坚”,今据改。“迪吉火力”与下文“汪古部长阿剌忽思的乞火力”下四字同音,当是官名,而亦秃儿干则人名也。盏塔兀,拉施特书作“约塔黑”。案:下文亦秃儿干为汪罕使于哈撒儿,则是役似未被擒。《元史》记此事无此二人,而有卜鲁忽一人,屠敬山谓“卜鲁忽”即“盏塔兀”之姓,理或然欤?〕
 
  追至忽剌河山。
 
  〔《秘史》作“忽剌安忽惕地面”。〕
 
  曲薛吾撒八剌迎敌,摛迪吉火力亦秃儿干、盏塔兀二人。流矢中亦剌合马胯,几为所获。须臾四将兵至,救亦剌合,大败其众,尽夺所掠归之汪可汗。汪可汗深感上德,谢曰:“曩以困乏,荷太子切切加意,今已亡之国,又夺归之,不知将何以报也。
 
  〔诸本无“不”字,从何校增。〕
 
  时闻脱脱复出八儿忽真隘,
 
  〔诸本作“入忽真隘”,从何校改。〕
 
  居统烈泽。
 
  〔屠敬山云:“即黑龙江南之达里泊。”〕
 
  上率兵复讨之,后上与弟哈撒儿讨乃蛮部,至忽兰盏侧山,大败之,尽杀诸部众,聚其尸焉。
 
  〔《说郛》本“尸”作“户”,何本“聚”作“取”,今从汪本。张德辉《纪行》:“由和林川之西北行一驿,过马头山,居者云:‘上有大马首,故名之。’自马头山之阴转而复西南行,过忽兰赤斤,乃奉部曲民匠种艺之所,有水曰塌米河注之。”自注:“忽兰赤斤,山名,以其形似红耳故也。”忽兰盏侧山,疑即忽兰赤斤。〕
 
  于时申号令还军,时见乃蛮势弱不足虑矣。
 
  〔何本“见”作“是”,今从《说郛》本、汪本。
 
  此上,拉施特书系之羊年。惟岁末讨脱脱及乃蛮二役,拉书不载。〕
 
  上会汪可汗于萨里河不鲁古崖,
 
  〔汪、何二本“古”作“告”,今从《说郛》本。不鲁古崖,屠敬山谓即《秘史》之不峏罕合勒敦山,在斡难、克鲁伦诸河之源。〕
 
  发兵征泰赤乌部,与其长沆忽、阿忽出、
 
  〔何本无“其”字,又“沆”作“流”,汪本亦作“流”,今从《说郛》本增改。《元史·太祖纪》有沆忽,《秘史》有阿兀出把阿秃儿,即此阿忽出,自是二人。拉施特书此处作“盎库兀库楚”,而前已有阿忽朱把阿秃儿,则似以“盎库兀库楚”为一人。〕
 
  忽怜、
 
  〔即前“忽怜拔都”〕
 
  忽都答儿别吉等
 
  〔汪、何二本无“别吉”二字,从《说郛》本增。《秘史》作“忽都兀答儿”。〕
 
  大战于斡难河上,败之。袭帖泥忽都、从息月哥察儿别吉、塔儿忽台希怜秃、忽都答儿,
 
  〔汪、何二本“从息”作“徒思”,“月哥”作“曰哥”,今姑从《说郛》本。塔儿忽台希怜秃,即《秘史》“塔儿忽台乞邻秃黑”。〕
 
  至月良兀秃剌思之野擒之,
 
  〔汪、何二本无“兀”字,从《说郛》本增。拉施特书作“恩古特秃剌思”。洪侍郎曰:“《录》作‘月良秃剌思’,窃意本名必是‘乌良兀特秃剌思’,译音皆未全也。”《说郛》本有‘兀’字,正与侍郎说合。〕
 
  沆忽、阿忽出、
 
  〔诸本作“阿忽兀出”,今据上文改。〕
 
  忽敦忽儿章走八儿忽真隘,忽怜奔乃蛮部。后哈答斤、散只兀、朵儿班、塔塔儿、弘吉刺诸部
 
  〔哈答斤、散只兀,《金史·宗浩传》作“合底忻、山只昆”,《秘史》作“合答斤、撒勒只兀惕”,其部落在今呼伦湖东。朵儿班,《秘史》作“朵儿边”,其部落在今贝尔湖东,皆太祖同族也。塔塔儿,居呼伦贝尔两湖间及克鲁伦河下游。弘吉剌,《辽史·天柞纪》作“王纪剌”,《金史·章宗纪》、《宗浩传》作“广吉剌”,《百官志》作“光吉剌”,其部落居额于古讷河及克鲁伦河下游。此五部皆在东方,故常合从。〕
 
  会盟尔阿雷泉上,
 
  〔《秘史》作“浯泐灰不剌合”,今乌珠穆沁左翼旗之乌尔浑河。〕
 
  腰斩白马为誓,欲袭我军及汪可汗。于是弘吉剌部长迭夷
 
  〔《元史·特薛禅传》:“特薛禅姓孛思忽儿,弘吉剌氏。本名特,因从太祖起兵有功,赐名薛禅,故兼称曰特薛禅。”此“迭夷”即“特”之对音。〕
 
  遣人来告。上闻之,遂与汪可汗发兵自虎图泽
 
  〔屠敬山以为即呼伦湖。于地望、地名均未协,疑即《秘史》之哈澧泐秃海子,今之哈老台泊也,前作“哈连徒泽”。〕
 
  逆战于杯亦烈川,
 
  〔《秘史》作“捕鱼儿海子”。今贝尔湖。〕
 
  大败之。冬,汪可汗分兵由怯绿连河,
 
  〔诸本无“怯”字,从何校补。〕
 
  指忽八海牙山,
 
  〔《秘史》作“忽巴海牙地面”。〕
 
  先发部众,后成列而进。其弟札阿绀孛以汪可汗反覆不常,遂谋于浑八力、
 
  〔《秘史》作“忽勒巴里”。〕
 
  按敦阿述、
 
  〔《秘史》作“阿勒屯阿倏黑”。〕
 
  燕火脱儿、
 
  〔《秘史》作“额勒忽秃儿”。〕
 
  延晃火儿,
 
  〔《秘史》无此人,拉施特书有。〕
 
  四人曰:“我兄无宁处之心,
 
  〔何本“宁”作“善”,汪本无此字,今从《说郛》本。〕
 
  屠绝兄弟,常附于契丹,
 
  〔据《秘史》,此下有缺文。然拉施特书亦如此。〕
 
  观其心性若此,终不能存我辈,亦不使国安矣。今何计处之?”按敦阿述泄是语于汪可汗,令执燕火脱儿及纳怜脱怜
 
  〔此四字,汪何二本作“怜纳”,何改“纳怜”,今从《说郛》本增。纳怜脱怜乃一人之名,《秘史》(九)察合安豁阿之子名纳邻脱斡邻,与此人同名。拉施特书作“纳邻脱忽鲁儿”,但此处有“延晃火儿”而无“纳邻脱忽鲁儿也”。〕
 
  二人至帐下,解其缚,谓燕火脱儿曰:“吾辈自西夏而来,道路饥困,相誓之语忘之乎?
 
  〔何本“相”作“想”,《说郛》本作“祖”,今从汪本改正。又,何本无“之”字,汪本无“乎”字,从《说郛》本增。〕
 
  我心非汝也。”唾其面。座上之人皆起唾之。按敦阿述曰:“余亦与此谋,不忍舍王,所以来告也。”汪可汗屡责札阿绀孛曰:“汝常怀臭肝者。”
 
  〔汪、何二本“臭肝”作“其奸”,《说郛》本作“臭奸”,当作“臭肝”。《秘史》蒙文(五)有“忽篾该赫里格额不里惕抽”一语,旁注:“怀著臭肝。”〕
 
  札阿绀孛不安,后与燕火脱儿、延晃火儿、纳怜脱怜太石等
 
  〔何本“纳邻太后”,汪本“纳怜脱怜太后”,今从《说郛》本。〕
 
  俱奔乃蛮。冬,汪可汗居于忽八海牙儿。上驻军于彻彻儿山,
 
  〔《秘史》作“扯克扯儿山”,亦作“扯克彻儿山”,据《秘史》,地在怯绿连河侧,而有翁吉剌塔塔儿人杂居,则当在河之下游也。〕
 
  起兵伐塔塔儿部长阿剌兀都儿、乞儿哈太石、察忽斤帖木儿等,
 
  〔何本无“乞儿”二字,今从《说郛》本、汪本增。《秘史》蒙文(五):“狗儿年,成吉思于答阑捏木儿格思地面,与察阿安塔塔儿、阿勒赤塔塔儿、都塔兀惕、阿鲁孩塔塔儿对阵。”与此《录》人名不合。拉施特书作“率兵攻蔑儿乞酋阿剌兀都儿、泰亦赤兀酋哈罕太石、塔塔儿二酋察忽儿(句)、开儿伯克。此“乞儿罕太石”疑是“哈罕太石”,“察忽斤帖木儿”疑即“察忽儿”,然部名又不同。案:此时太祖驻彻彻儿山,距塔塔儿近而距蔑儿乞甚远,又泰赤兀部亦已灭亡,当以此书为是。〕
 
  战于答兰捏木哥思之野,大败之。
 
  〔何本“思”作“儿”,今从《说郛》本、汪本。《秘史》作“答阑捏木儿格思”,其地据《秘史》(五),在今乌尔浑、色野集尔两河之北,又据卷六,在今喀尔喀河之南。屠敬山以“讷墨尔根河”当之,是也。〕
 
  时弘吉剌部亦来附,
 
  〔何本“来”作“未”,今从《说郛》本、汪本。〕
 
  上弟哈撒儿居别所,从其麾下哲不哥之计往掠之。
 
  〔哲不哥,《秘史》作“者卜客”〕
 
  上深切责。于是弘吉剌遂附札木合,
 
  〔此上,拉施特书系之猴年。〕
 
  与亦乞剌思、火罗剌思、
 
  〔诸本“火”作“大”,从张石洲校改。〕
 
  朵鲁班、塔塔儿、哈答斤、散只兀诸部,
 
  〔据《秘史》蒙文(四),此七部外尚有乃蛮、蔑儿乞、斡亦剌、泰亦赤兀四部,共十一部。〕
 
  会于键河,
 
  〔何本“揵”作“犍”,今从《说郛》本、汪本。《秘史》作“刊河”,今之根河入额尔古讷河者是也。〕
 
  共立札木合为局儿可汗,
 
  〔《秘史》作“古儿罕”。〕
 
  谋欲侵我,盟于秃律别儿河岸,
 
  〔何氏原本“律”作“津”,何据《元史·本纪》改,与《说郛》本、汪本正同。秃律别儿河,屠敬山谓即根河北之特勒布尔河,是也。〕
 
  为誓曰:“凡我同盟,于泄此谋者
 
  〔何本“盟”作“谋”,“谋”作“誓”,今从《说郛》本、汪本。〕
 
  如岸之摧、如林之伐。”言毕,同举足蹋岸,挥刀斫林,驰众驱马悉赴我军。有塔海哈者时在众中,上麾下照烈氏抄吾儿
 
  〔《元史》有传,作“召烈台抄兀儿”。〕
 
  与之亲,往视之,偶并驱,实不知有是谋。塔海哈以马鞭筑其肋,
 
  〔何本无“以”字,从《说郛》本、汪本增。〕
 
  抄吾儿顾塔海哈目之,抄吾儿悟,下马佯旋。
 
  〔何本“旋”作“卧”,《说郛》本、汪本作“施”,乃“旋”之讹。旋,小便也。《春秋传》曰:“夷射姑旋焉。”〕
 
  塔海哈因告之河上之盟曰:“事急矣,汝何往?”抄吾儿惊,
 
  〔《说郛》本此处作“抄兀儿”。〕
 
  即还遇火鲁剌氏也速该言其事,将赴上告之。也速该曰:“我长妇之子,
 
  〔汪、何二本“长妇”作“常妇”,《说郛》本作“长父”,今定作“长妇”。“长妇之子”与下“幼子”对文。〕
 
  与忽郎不花往来无旦夕,我左右只有幼子及家人火力台耳。”
 
  〔汪、何二本“火”作“大”,今从《说郛》本。秘史作“豁里歹”。〕
 
  因命与火力台誓而往,乘以苍驴白马,属之曰:“汝至彼,惟见上及太后
 
  〔汪、何二本无“太”字,从《说郛》本增。〕
 
  兼我婿哈撒儿
 
  〔诸本“撒”作“彻”,从何校改。拉施特书哈撒儿正妃豁罗剌思氏阿勒坛可敦,盖即也速该之女。〕
 
  则言之。苟泄于他人,愿断汝腰,裂汝背。”誓讫乃行,中道遇忽兰拔都、哈剌蔑力吉台军围,为其巡兵所执,
 
  〔何本“巡”作“游”,今从《说郛》本。汪本作“延”,亦“巡”之讹。〕
 
  以旧识得解。
 
  〔汪本作“以百识得解”,何本作“以百得解”,《说郛》本作“以旧识诚得解”,“诚”字衍。〕
 
  因赠以獭色全马,谓曰:“此马遁可脱身,追可及人,可乘而去。”既又遇毡车白帐之队
 
  〔何本“毡”作“髦”,今从《说郛》本、汪本。〕
 
  往札木合所者,队中人出追抄兀儿。抄兀儿乘马绝驰而脱,至上前,悉告前谋。上即起兵迎之,
 
  〔何本无“起”字,从《说郛》本、汪本增。〕
 
  战于海剌儿帖尼火罗罕之野,破之。
 
  〔海剌儿河,在今呼伦贝尔城北。帖尼火罗罕,今特诺克河西南流入海剌儿河。《元史·抄兀儿传》作“海剌儿阿带亦儿浑”。〕
 
  札木合遁走,弘吉剌部来降。
 
  〔此上,拉施特书系于鸡年。〕
 
  壬戌,
 
  〔原注:“宋理宗景定三年,金章宗泰和二年。”张石洲曰“壬戌乃宋宁宗嘉泰二年”,是也。〕
 
  发兵于兀鲁回失连真河,
 
  〔《秘史》作“兀勒灰失鲁格勒只惕”,即今乌尔浑河及色野集尔河。〕
 
  伐按赤塔塔儿、察罕塔塔儿。
 
  〔《秘史》作“阿勒赤塔塔儿、察罕塔塔儿”,此下有“都塔兀惕、阿鲁孩塔塔儿”,共四种。拉施特书与此《录》同。〕
 
  夏,顿兵避暑。比战,
 
  〔何本无此二字,从《说郛》本、汪本补。〕
 
  先誓众曰:“苟破敌逐北,见遗弃物,慎勿顾,军事毕共分之。”既战屡胜,族人按弹、
 
  〔前作“按坛”。〕
 
  火察儿、答力台
 
  〔前作“答里台”。〕
 
  三人背约,上命虎必来、
 
  〔《秘史》作“忽必来”。〕
 
  哲别二将尽夺其获,散军中。是秋,乃蛮杯禄可汗会蔑儿乞部长脱脱别吉、
 
  〔《秘史》(四)记此会与十一部立札木合为古儿罕为一事,其时蔑儿乞人与会者,为部长脱黑脱阿别乞之子忽秃,即此《录》之“和都”或“火都”,而此下又有“阿忽出、火都二部兵自乃蛮来”云云,则此处脱脱别吉下分明脱“子火都”三字。〕
 
  朵鲁班、塔塔儿、哈答斤、散只兀诸部暨阿忽出拔都、
 
  〔此即泰出乌部之“阿忽出”。拉施特书以为哈答斤人,非是。〕
 
  忽都花别吉
 
  〔《秘史》作“忽都合别乞”,乃斡亦剌部长。〕
 
  等,来犯我军及汪可汗。上先遣骑乘高觇望于捏干贵因都、
 
  〔《秘史》作“额捏坚归列秃”。〕
 
  彻彻儿、
 
  〔诸本不重“彻”字,《秘史》作“彻克彻列山”,今据增。〕
 
  赤忽儿黑诸山,
 
  〔《秘史》作“赤忽儿忽”,此三山均在克鲁伦河左右。〕
 
  有骑自赤忽儿黑山来
 
  〔诸本脱“忽儿”二字,从何校增。〕
 
  告乃蛮渐至,上与汪可汗自兀鲁回失连真河
 
  〔诸本“连”作“速”,从上文及何校改。移军入塞。汪可汗子亦剌合居北边,后至,据高岭方下营。杯禄可汗易之曰:“彼军漫散,俟其众聚,吾悉卷之。”〕
 
  时阿忽出、火都二部兵
 
  〔何本作“阿忽出大都一部”,无“兵”字,何校又改“大”为“拔”,今悉从《说郛》本订正。拉施特书亦云遣阿忽出及忽都为前锋。〕
 
  从乃蛮来,与前锋合。将战,遥望亦剌合军势不可动,遂还。亦剌合寻亦入塞,会我兵拟战,置辎重他所。上与汪可汗倚阿兰塞为壁,
 
  〔案:阿兰塞,不见于《秘史》。此《录》凡两见:其一此役,其一合兰真之役,彼文曰:“上止军于阿兰塞,急移辎重于失连真河上游,遣哲里麦为前锋,自莫运都儿山之阴行。汪可汗亦领兵自莫运都儿山阳,由忽剌阿卜鲁哈二山而来。时有太出、也迭儿二人者,因牧马见汪可汗军至,亟来告。上时移军合兰只之野”云云。洪侍郎以阿兰塞即为哈剌温只敦,屠敬山以为即兀惕乞牙,并谓在今克什克腾旗界内。案:阿兰塞以塞为名,自即金之外堡,当在临潢、庆州之北,不得在黑河、潢河以南。案《梦溪笔谈》,辽与北方部族以夜来山为界,今乌珠穆沁右翼旗之南有乌兰岭,其东北有衣兰布虎图山,其地正当辽、金庆州之北,金之外堡当沿此山脉置之,殆所谓阿兰塞也。其东北连山有盔腾岭、盔腾山,其下即此役战地,所谓阙亦坛之野也。稍西有哈奇尔河,则所谓合兰只之野。又西有三音温都山,即莫运都儿山也。又西有呼鲁呼尔河,又名巴鲁古尔河,即忽剌阿卜鲁哈也。而兀鲁回失连真河,又在其北三四百里间,故以乌兰岭东北一带连山为阿兰塞,则与此二役中所纪地名无一不合。此二役所以南择此地者,皆缘以寡敌众,欲依边堡为屏蔽故也。〕
 
  大战于阙亦坛之野。
 
  〔汪、何二本作“阙蛮坛”,今从《说郛》本。《元史》作“阙奕坛”,《秘史》作“阔亦田”,今札鲁特旗南有盔腾岭、盔腾山,即其地也。洪侍郎以苏尼特左翼旗东北之奎腾山、屠敬山以呼伦贝尔防城南之奎腾河当之,均非是。〕
 
  彼祭风,风忽反,为雪所迷,军乱填沟坠堑而还。
 
  〔何本“坠”下有“壑”字,今从《说郛》本、汪本删。〕
 
  时札木合从杯禄可汗来,
 
  〔汪、何二本“来”作“未”,今从《说郛》本。〕
 
  中道札木合引兵还,遇立己为可汗者,诸部悉讨掠之。
 
  〔何本无“己”字,“掠”作“掳”,今并从《说郛》本、汪本。〕
 
  冬,上出塞,驻于阿不札阙忒哥儿之山,
 
  〔汪、何二本作“阿不礼阙惑哥儿”,《说郛》本“礼”作“札”,《秘史》作“阿卜只阿阔迭格里”,则“惑”又“忒”之讹也。《秘史》(七):此时太祖正在帖篾延客额儿地面围猎,(中略)自围猎处回来,从阿(卜)只合阔迭格儿,起去至合(勒)合河斡儿讷兀地的客(勒)帖该下了。则阿(卜)只合阔迭格儿当在帖篾延与合勒合河之间,帖篾延即《元史·特薛禅传》之迭篾可儿,与可木儿温都儿(今虾模儿岭)、答儿脑儿(今达里泊)相近,则阿不只合阔迭格儿当在今乌珠穆沁旗界内也。〕
 
  汪可汗居于别里怯沙陀中。
 
  〔何本“于”作“族”,今从《说郛》本、汪本。别里怯沙陀,《秘史》作“别儿客额儿”,在者者额儿温都儿山阴。多桑云:“者者额儿温都儿山在克鲁伦河西、土拉河东。”屠敬山以土拉河南之策策山当之。〕
 
  是时上与太子术赤求聘汪可汗女抄儿伯姬,
 
  〔诸本脱“女”字,今增。抄儿伯姬,《秘史》作“察兀儿别乞”。〕
 
  汪可汗之孙秃撒合亦求上公主火阿真伯姬,
 
  〔《秘史》作“豁真别乞”,后适亦乞列思人孛徒。〕
 
  俱不谐,自是稍疏。札木合闻之,往说亦剌合曰:“吾按答
 
  〔原注:“渭太祖也。”诸本此注误入正文,从张石洲说改正。〕
 
  常遣使通信于乃蛮太阳可汗,时将不利于君,今若能加兵,我当从旁胁助。”
 
  〔何本无“当”字,今从《说郛》本、汪本补。胁,何改“协”。〕
 
  时亦剌合居别所,来会父汪可汗,上族人答力台斡赤斤、按弹火察儿、塔海忽剌海剌、
 
  〔何本无“海剌”二字,今从《说郛》本、汪本补。拉施特书作“图海忽剌海”。〕
 
  答儿斤、木忽儿哈檀、
 
  〔前云:木忽儿好兰统阿答儿斤。此“答儿斤”即“阿答儿斤”之略,即木忽儿哈檀之姓氏也。《秘史》此处无“答儿斤木忽儿哈檀”而有“合儿答乞歹”,合儿答乞歹当即阿儿答乞歹也。〕
 
  札木哈等背我,
 
  〔《秘史》记此事有礼木合、阿勒坛、忽察儿、合儿答乞歹、额不格真那牙勤、雪格额台、脱斡邻勒、合出温别乞,而无答力台斡赤斤、塔海忽剌海剌、木忽儿哈檀三人。〕
 
  迨且
 
  〔何氏云:此二字有误。〕
 
  说亦剌合说之曰:“吾等愿为效力,佐若讨月伦太后诸子。”
 
  〔《说郛》本“效”作“功”,何本作“校”,今从汪本。〕
 
  亦剌合信之,车帐相间,顿兵共谋,
 
  〔何本“间”作“问”,“顿”作“为”,今从《说郛》本、汪本。〕
 
  遣塞罕脱脱干
 
  〔《秘史》作“撒亦罕脱迭额”。〕
 
  言之于汪可汗。汪可汗曰:“札木合,巧言寡信人也,不足信。”亦剌合曰:“彼言者有口有舌,何为不信?”屡使人言之,汪可汗曰:“我禁汝,汝辈不从。吾身成立,实赖于彼。垂老遗骸,冀得安寝。
 
  〔《说郛》本、何本“冀”作“莫”,今从汪本。《元史·太祖纪》同。〕
 
  今喋喋不已,汝当能自为之,毋遗我忧。”既而有异志,悉烧我牧地。
 
  〔何本无“有”字,“地”作“也”,今并从《说郛》本、汪本。〕
 
  癸亥春,汪可汗为诈计曰:“彼前者尝求婚于我,我不从。
 
  〔何本不重“我”字,今从《说郛》本、汪本增。〕
 
  今宜许之,俟其来宴,定约,必擒之。”遂遣不花台乞察
 
  〔《秘史》作“不合台乞剌台”,乃太祖所遣赴宴之使,非汪可汗请太祖之使也。〕
 
  来请上。上率麾下十骑往赴之,
 
  〔汪、何二本不重“上”字,今从《说郛》本。〕
 
  宿于蔑里也赤哥帐中。
 
  〔诸本无“也赤”二字,今据下文增。蔑里也赤哥,《秘史》作“蒙力克额赤格”,《元史·循吏传》作“明里也赤哥”,即夙将察剌海之子。〕
 
  越明日,与蔑力也赤哥谋,
 
  〔汪、何二本作“蔑力池赤可”,《说郛》本作“蔑力池赤哥”,“池”当作“也”。〕
 
  使回汪可汗曰:“我牧群羸弱,方从思之,合命一人赴彼宴足矣。”既遣使,上即回。时汪可汗近侍也可察合阑者
 
  〔《秘史》作“也客扯连”,太祖从祖忽兰把秃儿之子。〕
 
  闻图上谋,归语其妻,因曰:“若有人言泄此于上,当如何哉?”
 
  〔何本“当如”作“赏我”,汪本作“当我”今从《说郛》本。〕
 
  其子亦剌罕
 
  〔《秘史》作“其妻阿剌黑亦惕”。案:太祖之女适汪古部者,亦名阿剌黑,则阿剌黑乃女子之名,《秘史》作“其妻”是也。〕
 
  止之曰:“此无据之言,恐他人以为实。”
 
  〔汪、何二本“之言”作“言之”,今从《说郛》本。〕
 
  也可察合阑牧马者乞失力,供马湩适至,
 
  〔《说郛》本“乞失力”作“乞失”,何本作“乞力失”,又,二本“失”下并有“月”字。《类编》引作“乞失力”,今从之。《秘史》作“乞失里黑”,《元史·哈剌哈孙传》作“启昔礼”,可证《太祖纪》作“乞力失”与何本同误。〕
 
  微有所闻,问其弟把带
 
  〔《秘史》作“巴歹”。〕
 
  曰:“适所议者何事?该知否?”把带曰:“不知。”察合阑次子纳怜
 
  〔《秘史》作“纳邻客延”。〕
 
  坐帐外方砺镞,闻之骂曰:“割舌者适我不言乎?今事已然,当禁谁口也。”把带谓乞失力曰:“我今知矣,可因赴上言之。”
 
  〔何本“因”作“同”,今从《说郛》本、汪本。〕
 
  遂入己帐话行止,有一羔杀之,拆所卧榻煮熟,夜驰见上告其谋曰:“汪可汗将图太子,其计定矣。”上闻之,止军于阿兰塞,急移辎重于失连真河上游,
 
  〔汪、何二本“游”作“急”,今从《说郛》本。〕
 
  遣折里麦为前锋,
 
  〔《秘史》:“行时,教者泐篾做后哨。”〕
 
  自莫运都儿山之阴行。
 
  〔自,万历本《说郛》本作“并”。莫运都儿,《秘史》蒙文作“卯危温都儿”,洪侍郎谓“即克什克腾旗西南四十三里之漠海恩都尔”,然其地偏南不当汪可汗进兵之路。丁氏谦谓:“卯危温都儿即乌珠穆沁右翼旗之三因温都山,蒙古语:卯,危歹也;三因,好也。后人恶其名恶,以美名易之。”其说言之成理,于地望亦合。〕
 
  汪可汗亦领兵自莫运都儿山阳,由忽剌阿卜鲁哈二山而来。
 
  〔诸本“阿”作“河”,今订正。忽剌阿卜鲁哈,《秘史》作“忽剌安不鲁合惕”,旁注:“地名”。案:今三因温都山西有呼鲁呼儿河,一名巴鲁古尔河,即所渭“忽剌安不鲁合惕”也。〕
 
  时有太出、也迭儿二人者,
 
  〔何本“时”字作“近侍”二字,今从《说郛》本、汪本。“太出、也迭儿”,《秘史》作“赤吉歹、牙的儿”。〕
 
  因牧马见汪可汗军至,亟来告。上时移军合兰只之野,
 
  〔《秘史》作“合剌合勒只惕”。今三音温都山东有哈奇尔河,殆即其地。〕
 
  未及为备,日衔山,即整兵出战。先败朱力斤部众,
 
  〔《秘史》作“只儿斤”。〕
 
  次败董哀部众,又败火力失烈门太石。众
 
  〔《秘史》作“豁里失力门太子”。〕
 
  进逼汪可汗护卫,其子亦剌合驰来冲阵,我军射之中颊,其势大挫,敛兵而退。上亦将兵至斡儿弩兀遣惑哥山冈,
 
  〔《秘史》作“斡儿讷<山厄>”,在喀尔喀河上。《秘史》蒙文作“斡儿讷(山名)屼因(的)客(勒)帖该(半)合打答(崖)”,此“遣惑哥”当作“遣忒哥”,即客(勒)帖该之异译。〕
 
  军凡四千六百骑,
 
  〔拉施特书同《秘史》作“二千六百骑”。〕
 
  沿哈勒合河顺进,
 
  〔《秘史》作“哈泐合河”,今喀尔喀河。〕
 
  分为两队,上亲将二千三百骑行河南岸,兀鲁吾、忙兀
 
  〔诸本作“忙儿”,依何校改。〕
 
  二部将二千三百骑行河北岸。上以弘吉剌部先为婚亲,遣使谓其长帖木哥阿蛮部曰:
 
  〔《秘史》(六):“合泐合河流入捕鱼儿海子处有帖儿格、阿蔑勒翁吉剌。”即《金史·宗浩传》之广吉剌部长忒里虎,亦即此帖木哥阿蛮也。末“部”字疑衍。〕
 
  “汝若来顺,则女子面容、
 
  〔何本“面”作“而”,今从《说郛》本、汪本。〕
 
  外甥资质俱在,不然则加兵于汝矣。”遂行至董哥泽脱儿合火儿合之地驻军。
 
  〔董哥泽,《秘史》蒙文作“统格豁罗罕”,即此脱儿合火儿合之异译,然则此处水名复出也。屠敬山谓呼伦贝尔防城南二百有董嘎得,喇萨河汇为董嘎淖尔,即此泽也。〕
 
  上遣使阿里海
 
  〔《秘史》作“阿儿垓合撒儿、速客该者温二人”。〕
 
  致责于汪可汗曰:“我今大军
 
  〔诸本“今”作“合”,今订正。〕
 
  驻董哥泽间,草盛马肥,与父汪可汗言之:
 
  〔汪、何二本无“父”字,从《说郛》本增。〕
 
  昔汝叔父菊儿可汗尝谓汝:‘我兄忽儿札忽思杯禄可汗之位不我与,自夺之。’汝又杀诸昆弟,诈言太帖木儿太石、不花帖木儿辈不知所存,
 
  〔汪本“太石”二字作“一后”字,何本作“及”,弘治钞《说郛》本作“太后”,并误,今从万历钞本订正。《秘史》作“台帖木儿太子”。〕
 
  是故菊律可汗逼汝哈剌温之隘。汝穷迫无计,仅以百骑来归我先君。
 
  〔《说郛》本“仅”作“遂”,今从汪本、何本。〕
 
  我先君率兵偕汝以雪前耻,而泰赤兀部兀都儿吾难、八哈只二人助兵几许不可知。
 
  〔泰赤兀部兀都儿,《说郛》本作“泰赤兀都元师儿”,何本作“泰赤兀都儿”,今从汪本。拉施特书“泰亦出兀人之兀都儿诺延、八哈只二人则率兵无多”,可以互证。《秘史》云:“使泰亦赤兀人忽难、巴合只二人领兵助汝,救汝百姓。”与此措辞又异。〕
 
  其时道经哈剌不花山谷之上,
 
  〔《说郛》本无“道经”二字,今从汪、何二本。又诸本“山”作“出”,今订正。〕
 
  又出阿不札不花哥兀之山,又逾秃烈坛秃零古
 
  〔《说郛》本、何本“逾”作“跻”,今从汪本。秃烈坛,与此《录》之“帖烈徒”、《秘史》之“帖列秃”音近。秃零古,拉施特书作“秃朗古特”,又与《秘史》之“帖列格秃”音近,“帖列秃”与“帖列格秃”本系一地,疑当时因译名未定,姑书此二名以待选择,后忘删去,如前“董哥泽脱儿合火儿”合之例也。〕
 
  盏速坛盏零古
 
  〔汪本、何本无下“盏”字,今从《说郛》本。拉施特书无此地,疑此六字乃后人记秃烈坛秃零古之异文而误复也。〕
 
  阙群隘、
 
  〔后文太宗庚寅年伐金,发自阙郡隘过川(《说郛》本、汪本,并同),即此阙群隘也。〕
 
  曲笑儿泽、
 
  〔即前“曲薛兀儿泽”。〕
 
  跋涉重险,始至其境。
 
  〔何本“始”作“使”,今从《说郛》本、汪本。〕
 
  适值彼凶年,得穷其国。
 
  〔汪本、何本此下有“枝”字,《说郛》本作“拔”,疑衍文。〕
 
  菊儿可汗闻之,避我于答剌速野。
 
  〔汪本、何本“答”作“塔”,今从《说郛》本。《秘史》作“忽儿班帖列速惕”,拉施特书同。〕
 
  我又逼之,仅以数十骑遁走河西之国,不复返矣。我先君尽以土地人民归于汝,由是结为按答,我因尊汝为父。
 
  〔汪本“因”作“过”,何本作“遂”,《说郛》本作“固”,乃“因”之讹,今订正。〕
 
  此我有造于汝一也。”又曰:“父汪可汗,汝其时如埋云中,如没日底。
 
  〔此谓汪可汗奔西辽事。拉施特书曰:“汝避居于日入之地,隐没于中。”意较明显。〕
 
  汝弟札阿绀孛居汉塞之间,我发声轰轰以呼之,
 
  〔何本无“轰以呼”三字,今从《说郛》本、汪本增。又二本“呼”作“乎”,今并订正。〕
 
  举帽隐隐而招之。
 
  〔何本此句上有“以手”二字,即上“以呼”之讹。〕
 
  彼其闻我呼,见我招,远来投归。我乃登山而望,倚庐而待其至。
 
  〔何本“庐”作“店”,今从《说郛》本、汪本。〕
 
  又为三部蔑力乞所逼,我以其远来肯令死之也?所以告杀兄诛弟,此谓谁?薛彻别吉我兄,
 
  〔汪本、何本作“薛彻别我弟”,《说郛》本作“薛彻别及我弟”,“及”当作“吉”,声之误也。拉施特书作“薛彻别吉我兄”,《元史》作“我兄薛彻别吉”,今据以订正。〕
 
  太丑乞鲁为我弟。
 
  〔何本无“我”字,从《说郛》本、汪本增。拉施特书作“泰出勒我弟”,少“乞”字音。案:《元史·本纪》云:“札阿绀孛为蔑里乞部人所逼,我请我兄薛彻别吉、我弟太丑往杀之。”而无“杀兄诛弟”之语,与此不同。〕
 
  是我有造于汝二也。”又曰:“父汪可汗,汝既出云中,显日底,来归于我,使汝饥不过日午,羸不过月望,所以然者何哉?我昔与兀都夷部战于哈丁黑山之西
 
  〔哈丁黑,《秘史》作“合迪黑里黑你鲁兀”,《元史》作“哈丁里”。〕
 
  木那义笑力之野,
 
  〔汪本作“木奴义力”,何本“义”讹“又”,《说郛》本作“木那又笑力”。案:《秘史》作“木鲁彻薛兀勒”,则当作“木那义笑力”,前作“莫那察山”。〕
 
  多获孳畜辎重,
 
  〔何本“孳”作“孽”,今从《说郛》本、汪本。〕
 
  悉以与汝。饥不过日午、羸不过月望者,实此之由也。是我有造于汝三也。”又曰:“父汪可汗,曩汝征灭里乞,陈于不剌川,
 
  〔前作“捕兀剌川”。〕
 
  遣使觇候部长脱脱,
 
  〔诸本“候”作“俟”,今订正。〕
 
  不待阵而先战,获忽都台、察鲁浑二哈敦,因招其二子火都、赤剌温,尽收兀都夷部。汝以怀此衅,故我秋豪不及。又汝与乃蛮战于拜塔剌边只儿之野。时火都、赤剌温
 
  〔“尽收”以下至此三十八字,汪、何二本全脱,今从《说郛》本增。又《说郛》本“与”作“子”,“塔”作“哈”,“时”作“是”,“都”作“部”,今并订正。〕
 
  合部叛归,汝又为曲薛兀撒八剌追袭,掠汝人民,
 
  〔诸本“掠”作“于”,今订正。〕
 
  使来告我。我遣四将领兵战败之,尽归所掠于汝。是我有造于汝四也。”又曰:“昔我出哈儿哈山谷,与君忽剌阿班答兀卓儿完忽奴之山相见时,
 
  〔汪、何二本“阿”作“河”,今从《说郛》本。《秘史》蒙文作“勺儿合勒忽讷忽剌阿讷屼惕。”孛勒答屼惕,谓勺儿合勒忽讷山系之红孤山也,勺儿合勒忽山即今土拉河南土谢图汗中右旗之卓尔郭尔山。〕
 
  于时不已言乎:‘譬如毒蛇之牙所伤,勿以动念。
 
  〔《说郛》本“勿”作“弗”,今从汪、何二本。〕
 
  吾二人唇齿相见,始可间离。’汝今以蛇伤而间我乎?
 
  〔《说郛》本、何本“汝”作“如”,今从汪本。〕
 
  唇齿相见而离我乎?父汪可汗,我时又如青鸡海鹘,
 
  〔《说郛》本“鸡”作“<鱼隹>,汪本作“雏”,今从何本。〕
 
  自赤忽儿黑山,
 
  〔何本无“忽”字,从《说郛》本、汪本增。〕
 
  飞越于杯儿之泽,搦斑脚鸽以归。君此谓谁?哈答斤、散只兀、弘吉剌诸部是也。
 
  〔汪、何二本“儿”作“而”,“君”作“若”,今从《说郛》本。又三本“飞”作“挥”,今从何校改正。杯儿泽,前作“杯亦烈川”。又案:此处有脱文数十字。拉施特书云:“我如鸷鸟,飞越捕鱼儿淖尔,擒灰色、蓝色足之鹤,以致于汝。此鹤为谁?朵儿奔、塔塔儿诸人是也。我又如蓝色足之鹰,越古阑淖尔,擒蓝色足之鹤,以致于汝。此鹤为谁?哈答斤、撒儿助特、弘吉剌诸人是也。”《元史·太祖纪》亦云:“我征朵鲁班、塔塔儿、哈答斤、散只兀、弘吉剌五部,如海东鸷鸟之于鸿雁,见无不获,获则必致于君。”与拉氏书文异事同,可知修《元史》时,所见之《亲征录》,尚未脱此一段也。拉氏书中之捕鱼儿淖尔,即此“杯儿泽”,今贝尔湖古阑淖尔即今呼伦湖。〕
 
  汝岂非假彼堵部之力而惊畏我耶?是我有造于汝五也。”又曰:“父汪可汗,汝何尝有造于我?我造汝者凡若此,与其惊畏我,何不使我众炀爨不息,
 
  〔何本“不息”作“而息”,今从《说郛》本、汪本。〕
 
  安榻而卧,使我痴子痴妇得宁寝乎!我犹汝子,势虽寡弱,不使汝有慕于他众也。
 
  〔汪、何二本无“众也”二字,从《说郛》本增。〕
 
  我虽愚,不使汝有慕于他贤也,譬如双轮去一,不能行也,徒使牛汗,纵之恐盗,系之实饿。又如双辕偶断其一,
 
  〔何本“辕”作“轮”,今从《说郛》本、汪本。《秘史》蒙文此处,亦以轮辕并言。〕
 
  牛愤破领,徒使跳跃不能前也。以我方车,独非一轮一辕乎?”
 
  〔诸本无“一辕”二字,今订补。〕
 
  凡此谕汪可汗也。时上族人火察儿、按弹在汪可汗军中,上因使谓之曰:“汝二人欲杀我,将弃之乎?瘗之乎?吾尝谓上辈八儿哈拔都二子薛彻、大丑
 
  〔《秘史》:“斡勤巴儿合的儿子名忽秃黑秃主儿乞,忽秃黑秃主儿乞生二子,一名薛扯别乞,一名台出。”是薛彻、大丑二人乃八儿哈之孙,非其子也。《秘史》蒙文此处云:“我向上辈巴儿坛把阿秃儿的儿子说,向撒察、台出两个说,他每也不肯做(旧释此处甚鹘突,今改释如此)。”拉施特书亦云:“我尝告把儿坛把阿秃儿之子及薛出别乞、泰出二人,岂可使斡难河之地无主?”与《秘史》合,是此书“八儿哈拔都”乃“巴儿坛拔都”之讹,而巴儿坛之子当时存者惟答里台一人,则此句实暗斥答里台,其与薛彻、大丑异其称谓者,为亲者讳耳!〕
 
  讵可使斡难河之地无主?累让为君而不听也。又谓火察儿曰:‘以汝捏群大石之子,
 
  〔汪、何二本“群”作“辟”,今从《说郛》本。〕
 
  吾族中当立。’汝又不听。又谓按弹曰:‘汝为忽都剌可汗之子,以而父尝为可汗,
 
  〔《说郛》本、何本“为”作“谓”,今从汪本。又何本此句无“可”字,从《说郛》本、汪本补。〕
 
  推位。’汝又不听。我悉曾让汝等,不我听,我之立,实汝等推也。吾所以不辞者,不欲使蒿莱生久居之地,
 
  〔汪本“生”作“正”,何本作“止”,今从《说郛》本。〕
 
  断木植通车之途,
 
  〔汪、何二本“植”作“阻”,今从《说郛》本。〕
 
  吾夙心也。假汝等为君,吾当前锋,俘获辎重亦归汝也。使我从诸君畋,我亦将驱兽迫崖,使汝得从便射也。”又谓按弹、火察儿曰:“三河之源,祖宗实兴,毋令他人居之。”又谓脱怜曰:
 
  〔何本无“曰”字,今从《说郛》本、汪本增。脱怜,《秘史》作“脱斡邻勒”。〕
 
  “吾弟,我以汝是高祖家奴、
 
  〔诸本“高”作“马”,从何校改。〕
 
  曾祖阍仆,故尊汝为弟也。汝祖塔塔
 
  〔《说郛》本、汪本作“诺答”,《秘史》作“斡黑答”。拉施特书作“秃克秃图”,与何本“塔塔”音合,今从何本。〕
 
  乃吾祖察剌合令忽、
 
  〔《秘史》作“察剌孩领忽”,太祖六世从祖。〕
 
  统必乃
 
  〔《秘史》作“屯必乃”,太祖高祖。〕
 
  二君所虏。塔塔生雪也哥,
 
  〔《秘史》作“速别该”。〕
 
  雪也哥生阔阔出黑儿思安,
 
  〔《秘史》作“阔阔出乞儿撒安”。〕
 
  阔阔出黑儿思安生折该晃脱合儿,
 
  〔《说郛》本、何本无首五字,从汪本增。汪、何二本“折该”作“折谈”,从《说郛》本改。折该晃脱合儿,《秘史》此处作“也该晃脱合儿”,拉施特书同。案:《秘史》蒙文(三)云:“速客客氏者该、晃塔豁儿的儿子速客该者温也来了。”又蒙文(四)有雪客额台、脱斡邻勒。雪客额台即速客客氏,是“速客该者温”与此“脱邻”并速客客氏。而此云“折该晃脱合儿生汝”,是二人又为同父兄弟,而速客该此时为太祖使者,脱怜在汪罕所。《秘史》(六)载此行速客该者温因他妻子在脱斡邻处,不曾回来,此亦“速客该”与“脱斡邻”同父之证。亦即《秘史》(三)之“者该晃塔豁儿”与卷六之“也该晃脱合儿”为一人之证也。《秘史》蒙文旁注与译文句读鹘突殊甚,因为疏通之如此。〕
 
  折该晃脱合儿生汝。
 
  〔何本无首四字,今从《说郛》本、汪本增。〕
 
  汝世为奴虏,谁之国土,汝可取之?纵得我国,按弹、火察儿必不与也。昔我等居汪可汗所,早起,我得饮王青钟马乳,
 
  〔屠敬山云:“钟当作湩。”案:蒙文《秘史》(六)青钟作阔阔充(充)字译音,旁注与译文并作“青钟”。然但云“青钟”而不云“马乳”,则于文不备,知“钟”亦“湩”之讹也。〕
 
  汝辈起,知我先饮而妒之耶?我今去矣,汝辈恣饭之。吾弟脱怜量汝能费几何也?”又谓按弹、火察儿曰:“汝善事吾父汪可汗,
 
  〔诸本“善”作“若”,今订正。〕
 
  勿使疑汝为察兀忽鲁
 
  〔原注谓:“太祖自称。前有注。”〕
 
  之族而累汝,即汪可汗交人易厌,
 
  〔诸本“易”作“马”,今从何校改。〕
 
  于我尚尔,况汝辈乎?纵然今夏,岂能到来冬矣?”又谓我父汪可汗曰:
 
  〔诸本“谓”作“为”,今订正。〕
 
  “可遣按敦阿述、运八力
 
  〔前作“浑八力”。〕
 
  二人来报,否则遣一人曰者。
 
  〔汪、何二本误合“曰者”二字为“暑”字,何校改正,与《说郛》本正合。〕
 
  吾军麾下忙纳儿拔都失破银鞍黑马在王所,
 
  〔汪、何二本无“军”字,《说郛》本作“浑”,今订正。又二本“破”作“彼”,今从《说郛》本。忙纳儿拔都,拉施特书作“木诃里把阿秃儿”。〕
 
  就持来。
 
  〔何本“就”作“龙”,今从《说郛》本、汪本。〕
 
  鲜昆按答,
 
  〔原注:“即王子亦剌合也。”汪、何二本“昆”作“晁”,何校改正,与《说郛》本正合。〕
 
  汝亦遣必力哥别吉、脱端二人来。
 
  〔《秘史》作“必勒格别乞、脱朵延”。〕
 
  否则遣一人。札木合按答暨阿赤失兰、
 
  〔《秘史》作“阿赤黑失仑”。〕
 
  阿剌不花、带亦儿、
 
  〔汪、何二本“儿”作“否”,今从《说郛》本改正。阿剌不花、带亦儿二人未见,《秘史》、扫施特书、《太祖纪》中亦无之,而《汪罕部族考》中有阿剌不花一人,带儿一人,正与此合。〕
 
  火察儿、按摊
 
  〔前作“按坛”、“按弹”。〕
 
  各遣二人来。如我东向,可于纳儿脱怜呼陈辎兀之源来会;
 
  〔诸本“于”作“与”,今订正。何本“辎”作“榴”,今从《说郛》本、汪本。拉施特书云:“使人之来,可以在捕鱼儿淖尔遇我。”与此地名互异。〕
 
  如我西向,
 
  〔汪、何二本无“我”字,今从《说郛》本。〕
 
  可出哈八剌汉答儿哈之山,
 
  〔今克鲁伦河南达里冈爱牧场之南,有山名哈剌莽奈哈必尔汉舍里,其东连山名都兰哈拉,即此“哈八剌汉答儿哈”也。〕
 
  顺忽儿班不花诸思河来会也。”
 
  〔何本无“会”字,今从《说郛》本、汪本增。忽儿班不花诸思,颇与“忽剌阿卜鲁哈”之名相近,此即呼鲁呼尔河,正在哈八剌汉答儿哈二山正东。〕
 
  汪可汗闻上前语曰:“惟我子裁之。”王子鲜昆谓其父曰:“彼何尝诚意待我为按答?
 
  〔汪、何二本“诚”作“实”,今从《说郛》本。〕
 
  特以觋视我耳!
 
  〔汪本“觋”作“现”,何本作“玩物”,今从《说郛》本。《秘史》云:“我行也几曾说是按答来,只说脱黑脱阿师公续著回回羊尾子行。”有此“觋”字,正直译“师公”一语。〕
 
  何尝称君为父,特以老奴视我耳!又何尝遣辨士驰御马以及我?
 
  〔《说郛》本、汪本“我”作“哉”,今从何本。〕
 
  彼能胜我,听取我国;若我胜彼,亦取其国也。”因戒其部将及别力哥别吉、脱端曰:
 
  〔何本无“及”字,从《说郛》本、汪本增。别力哥,前作“必力哥”。〕
 
  “备而釜,建而旗,秣而马,以需进也。”上既遣使于汪可汗,遂进兵掠虏弘吉剌别部溺儿斤以行,至班朱泥河,饮水誓众。
 
  〔溺儿斤,与上文“月儿斤”、《元史·太祖纪》‘要儿斤”、《世系表》“岳里斤”,声并相近。月儿斤,《秘史》作“主儿勤”,《女真秘史》亦作“主儿扯歹”,是“溺”与“主”声亦相通。据《秘史》(四)主儿勤者,勇敢无敌之义。故塞外诸种族多有此部名,蒙古有主儿勤,克烈部有只儿斤,此弘吉剌别部名溺儿斤亦取此义。班朱泥河,《秘史》作“巴泐渚讷海子”,洪侍郎曰:“俄图,斡难河北,俄罗斯界内有巴儿渚纳泊,俄音似巴勒赤诺泊,北有河曰图拉入音果达河。就俄图观之,河泊不相连属,或水涨时通入于河,或近地尚有小河,而图未载,故《史》、《录》以为河名。俄人游历至此,谓其地多林木,宜驻夏可避兵。蒙古人尚指此地为成吉思汗避难处也。”屠敬山曰:“新测黑龙江图,呼伦淖尔之西南有小泊絓之,名曰巴勒渚纳乌苏鄂模,义谓前水泊,其水自客鲁伦河下游支分,曰乌尔衮札尔玛河,潴为此泊。又自泊之东北溢出为班朱尼,亦曰巴勒渚纳,水注入呼伦淖尔。”据此二说,则今日中、俄两界各有海子名巴勒渚纳。而据《秘史》所记,则云:“有阿三名字的回回,有羯羊一千,白驼一个,顺着额洏古涅河易换貂鼠、青鼠,来至巴泐渚纳海子,饮羊时遇着成吉思”云云,然则阿三沿额洏古涅河来,始至巴泐渚纳海子。则此海子当在额尔古讷河下游,既不得在斡难河之北,亦不得在呼伦淖尔之西南。洪、屠所纪,均非此海子也。然观太祖驻董哥泽后,水草丰美,部众大集,其遣使致责汪可汗,即有问罪之意,不容于此时退往东北,驻于额尔古讷河下游。意《秘史》记阿三事,但谓其欲往额洏 古涅河,而非谓其已至彼河,但文不备耳。观《秘史》记太祖自巴泐渚纳起师,即径趋客鲁涟河。屠氏呼伦淖尔西南小泊之说,殊有当于人心,又与《元史·雪不台传》“班朱泥河,今龙居河”之说,可相印证也。〕
 
  时有亦乞列部人孛徒者,为火鲁剌部所逼败之,因遇上同盟。
 
  〔案:孛徒归帝,据此《录》及《秘史》并在答阑班朱思战役前。《秘史》:“成吉思至巴泐渚纳海子行住了,遇着豁罗剌思种搠斡思察罕,不曾厮杀,便投降了。”此处乃涉豁罗剌思人投降而误。〕
 
  是时上弟哈撒儿别居哈剌温只敦山,
 
  〔《秘史》蒙文作“合剌温踬都”,〕
 
  妻子为汪可汗所虏,止挟幼子脱虎走,粮绝,探鸟卵为食,来会于河滨。
 
  〔《秘史》:“成吉思弟合撒儿将他妻并三子也古、也松格、秃忽撇在王罕处,罄身领几个伴当走出来寻成吉思。寻至合剌温山,缘岭寻不见,乏了粮食,吃生牛皮筋。行至巴泐渚纳海子,寻见兄成吉思。”与此互异。〕
 
  上与汪可汗战于合兰真沙陀之后,
 
  〔合兰真沙陀,前作“合兰只之野”。汪、何二本“后”作“地”,今从《说郛》本。拉施特书亦作“后”。《元史·本纪》于哈撒儿来会后,乃云:“汪罕兵至,帝与战于哈兰真沙陀之地。”则其所据《亲征录》,已与汪、何二本同。《说郛》本此等处,真可谓一字千金矣。〕
 
  汪可汗居于只感忽卢之地。
 
  〔何本“卢”作“庐”,今从《说郛》本、汪本。“感”当作“忒”,“只忒忽卢”下作“曲雕阿兰”又作“月忒哥忽兰”。《秘史》作“阔朵额阿剌勒”,又作“阔迭兀阿剌勒”。《元史·太宗纪》作“库铁乌阿拉里”,又作“鈋铁鍏胡兰”;《宪宗纪》作“阔帖兀阿兰”,又作“月忒哥忽阑”;《明宗纪》作“阔朵杰阿拉伦”。蒙古语阿剌勒,水中岛也。《秘史续集》(二)称客鲁连之阔迭兀阿剌勒,则当是客鲁连河中之岛,后为太祖第一斡耳朵所在地。日本箭内博士谓此岛在蘖沽儿河入客鲁伦河处,殆近之。此岛本太祖所取月儿斤之地,时太祖东走,故汪可汗居之。〕
 
  时上麾下答力台斡真、
 
  〔前作“答力台斡赤斤”〕
 
  按弹折温、火察儿别乞、
 
  〔前作“按弹、火察儿”,折温、别乞,均其称号。〕
 
  札木合八怜、
 
  〔拉施特书作“浑八怜”,即前之“浑八力”、“运八力”也。〕
 
  梭哥台脱怜、
 
  〔拉施特书作“苏克该脱忽鲁儿”,屠敬山谓即速客该者温与脱怜二人。然《秘史》虽言速客该者温奉使落后,未必即依王罕。《秘史》蒙文自有雪格额台脱斡邻勒,盖缘与王罕同名,故加氏以别之。脱斡邻勒为速客客氏,详前注。〕
 
  塔海忽剌海等,
 
  〔汪、何二本“塔”上有“海”字,今从《说郛》本删。〕
 
  又忽都花部众
 
  〔汪、何二本“花”作“答”,今从《说郛》本。拉施特书作“忽都呼特”。〕
 
  在汪可汗所,相与谋害汪可汗,曰:“是不可依也。”将叛去。汪可汗觉其事,讨逐之。
 
  〔何本作“讨迎之”,《说郛》本作“讨遂之”,今从汪本。〕
 
  是时答力台斡真、八邻、撒合、夷嫩真诸部,
 
  〔何本“嫩”作“懒”,今从《说郛》本、汪本。〕
 
  稽颡来归。按弹折温、火察儿别吉、忽都花、
 
  〔诸本“都”作“相”,今从何校改。〕
 
  札木合奔乃蛮主泰阳可汗。
 
  〔何本“主”作“王”,今从《说郛》本、汪本。〕
 
  上移军自班朱河,秋,大会于斡难河源,进伐汪可汗。
 
  〔何本无此二十字,从《说郛》本、汪本增。拉施特书“是年秋,帝自巴尔渚纳起师,将自斡难河以攻汪罕”,正与此同。然据《秘史》则帝自巴泐渚纳起师,直趋客鲁涟河,无缘迂道至斡难河源。此与拉施特书,殆皆失之。〕
 
  上遣使哈柳答儿、抄儿寒
 
  〔诸本“寒”作“塞”,今订正。《秘史》作“沼兀里牙歹合里兀答儿、兀良合歹察兀儿罕”。〕
 
  二人往汪可汗所,假为上弟哈撒儿语谓之曰:“瞻望我兄遥遥勿及,
 
  〔诸本“勿”作“忽”,今订正。汪、何二本无“及”字,今从《说郛》本增。〕
 
  逐揵沙径,
 
  〔汪、何二本作“远揵涉径”,今从《说郛》本。〕
 
  不知所从。近闻我妻子在王所,我今蔽木枕块,藉壤仰星而卧,故虽有诸王
 
  〔汪、何二本“虽”作“强”,今从《说郛》本。〕
 
  苟从之,吾终归王父也。”汪可汗因遣使亦秃儿干
 
  〔《秘史》作“亦秃儿坚”。〕
 
  以煮漆器盛血与之盟。
 
  〔汪、何二本“以”作“我”,“漆”作“潦”,今从《说郛》本。〕
 
  哈柳答儿、抄儿寒二使将亦秃儿干来,上不与语,即送于哈撒儿所。
 
  〔汪、何二本“哈撒儿”作“哈儿抄儿”,今从《说郛》本。〕
 
  上因以二使为乡导,
 
  〔何本无“使为乡导”四字,《说郛》本、汪本并有,但“乡导”并作“乡尊”,今订正。〕
 
  领兵夜驰至彻彻儿运都山,
 
  〔《秘史》作“者折额儿温都儿山”,屠敬山谓即土拉河南之策策山。然策策山似稍嫌偏西,疑即今车臣汗部中翼右旗之卓朔尔山。〕
 
  出其不意,破汪可汗军,尽降克烈部众。汪可汗仅以子及数骑脱走,顾其左右谓其子亦剌合曰:“我父子相亲,其可绝而绝之乎?今由此缓颊儿绝矣。”至捏坤乌柳河,
 
  〔诸本“坤”作“辟”,今从何校改。《秘史》蒙文作“捏坤兀速”。〕
 
  为乃蛮部主太阳可汗之将火里速八赤、
 
  〔《秘史》作“豁里速别赤”〕
 
  帖迪沙二人所杀。亦剌合走西夏,过亦即纳城,
 
  〔《元史·地理志》有亦集乃路,今额鲁特额济纳旗牧地。〕
 
  至波黎吐蕃部,
 
  〔何氏云:“盖今布隆吉尔地。”〕
 
  即讨掠,欲居之。吐蕃收集部众逐之,散走西域曲先,
 
  〔诸本作“西城曰先”,今从何校改。拉施特书作“苦先”,正与何同。〕
 
  居彻儿哥思蛮之地,为黑邻赤哈剌者杀之。
 
  〔《元史·本纪》:“亦剌哈逃至龟兹国,龟兹国主以兵讨杀之。”拉施特书:“逃至和阗喀什噶尔近地,曰苦先古察儿喀思每,为哈剌赤部主克力赤哈剌获而杀之。”〕
 
  上既灭汪可汗,是冬大猎于帖麦该川,
 
  〔《秘史》作“帖篾延客额儿”。案:《元史·特薛禅传》:甲戌,太祖在迭篾可儿谕按陈曰:“可木儿温都儿、答儿脑儿、迭篾可儿之地,汝则居之。”迭蔑可儿即帖蔑延客额儿之略。又可木儿温都儿即今虾蟆儿岭,答儿脑儿即今达里泊,则迭蔑可儿亦当与二地相近。又案《太祖纪》:甲戌春驻跸中都北郊。六月帝避暑鱼儿泺(即达里泊,见后注)。乙亥五月,避暑桓州凉陉。至丙子春始书“还胪朐河行宫”,则甲、乙二岁帝未尝还漠北。其所驻之迭篾可儿,疑即在鱼儿泺之北,克烈部之南界,故太祖既灭汪可汗,即略地至此。屠敬山以喀尔喀河北之特默特尼沟当之,显与史传抵牾也(日本箭内博士谓《元史·世祖纪》之帖买和来,即此麦该川,其他与余说略同)。〕
 
  宣布号令,振旅归龙庭。
 
  〔龙庭,疑即阿不札阙忒哥儿,因太祖、汪可汗先后驻此,故以匈奴单于庭之名名之也。〕
 
  上春秋四十二。时乃蛮太阳可汗遣使月忽难
 
  〔《秘史》蒙文同。阎复《高唐忠献王碑》作“卓忽难”。〕
 
  谋于王孤部主阿剌忽思的乞火力,
 
  〔原注:“今爱不花驸马丞相白达达是也。”王孤,《秘史》、《元史》并作“汪古”。阿剌忽思的乞火力,《秘史》作“阿剌忽失的吉惕忽里”,《元史》作“阿剌兀思剔吉忽里”,乃爱不花之曾祖。〕
 
  曰:“近闻东方有称王者,日月在天,了然可知,
 
  〔汪本“可知”作“可之”,何本作“见之”,今从《说郛》本。〕
 
  世岂有二主哉?君能益我右翼,夺其弧矢。”阿剌忽思即遣使朵儿必塔失
 
  〔《秘史》作“脱儿必塔失”,但为乃蛮使名,而汪古之使乃名月忽难,正与此相反。阎复《高唐忠献王碑》与此《录》同。〕
 
  以是谋先告于上,后举族来归。我之与王孤部亲好者,由此也。甲子
 
  〔原注:“宋景定五年,金泰和四年。”张石洲曰:“当作宋嘉泰四年。”〕
 
  春,大会于帖木垓川,
 
  〔前作“帖麦该川”。〕
 
  议伐乃蛮。百官谋曰:“今畜牧疾瘦,
 
  〔何本“瘦”作“疫”,今从《说郛》本、汪本。〕
 
  待秋高马肥而后可进。”上弟斡赤斤那颜曰:“毋虑马瘦,我骑尚壮,今势已如此,其可缓乎?以吾料敌必取之。
 
  〔何本“取”作“败”,今从《说郛》本、汪本。〕
 
  苟战胜,使他日指此地尝擒太阳可汗,
 
  〔汪、何二本无“使”字,从《说郛》本增。〕
 
  当图此名。然胜负在天,必当进矣。”上弟别里古台那颜亦曰:“乃蛮欲夺王弧矢,若果为夺,则身将安之?彼恃国大马繁,
 
  〔汪、何二本无“恃”字,从《说郛》本增。〕
 
  恣为夸语。今我卒然入之,国虽大必逃散于山林,马虽繁必遗弃于原野,掩其不虞,夺其弓矢,岂难哉?”众称善。望日祭纛,诘朝进兵,伐乃蛮。秋,再会哈勒合河建;式该山,
 
  〔《秘史》作“客勒帖该合答(《秘史》客勒帖该,旁注:牛字。合答,帝旁注:崖字)”。拉施特书云:“乃蛮境外客勒忒该合答,滨哈剌河,地在乃蛮境外。”则此哈勒合河非入贝尔湖之喀尔喀河,而为入土拉河之喀老哈河也。《秘史》蒙文(七):“自阿(卜)只合阔帖格列,动着至合(勒)合(因)斡儿讷兀因客(勒)帖该合答下著。”案:此地即葬畏答儿之处,乃在喀尔喀河畔,离乃蛮境甚远。拉氏以为在乃蛮境外,非也。又《秘史》起兵代乃蛮在鼠年四月十六日,与此《录》云“秋”不同。〕
 
  先遣麾下虎必来、哲别二人为先锋。太阳可汗至自按台,
 
  〔《秘史》作“阿勒台”,今阿尔泰山。〕
 
  营于沆海山之哈只儿兀孙河,
 
  〔汪、何二本“沆”作“杭”,今从《说郛》本。《秘史》作“康孩”,今杭爱山。哈只儿兀孙,《秘史》作“合池儿兀速”今哈瑞河。〕
 
  引兵迎敌。我军至斡儿寒河,
 
  〔《说郛》本、何本“寒”作“塞”,今从汪本。《秘史》作“斡儿洹”,今鄂尔昆河。〕
 
  太阳可汗同蔑里乞部长脱脱、克烈部长札阿绀孛阿邻太石、斡亦剌部长忽都花别吉,
 
  〔汪、何二本“斡亦剌”作“猥剌”,今从《说郛》本。二本于后文亦作“斡亦剌”。〕
 
  及札木合、秃鲁班、塔塔儿、哈答斤、散只兀诸部相合。时我队中一白马带敝鞍,惊走突乃蛮军。太阳可汗与众谋曰:“彼军马羸,可尾而进,然待马稍轻健与之战也。”
 
  〔何本“轻”作“软”,今从《说郛》本、汪本。《秘史》云:“见说达达的马瘦,咱教百姓起了,越过金山,整搠军马,引诱着他行。比至金山,他瘦马乏了,我肥马正好。然后复回,与他厮杀可胜。”么道视此语,意极为明晰。〕
 
  骁将火力速八赤曰:“昔君父亦年可汗
 
  〔前作“亦难赤可汗”。〕
 
  勇战不回,士背马后,未尝使人见也,今何怯耶?
 
  〔何本“耶”作“也”今从《说郛》本、汪本。〕
 
  果惧之,何不令菊儿八速来?”
 
  〔原注:“太阳可汗妻也。”《秘史》作“古儿别速”。〕
 
  太阳可汗因率众来敌。上以弟哈撒儿主中军,
 
  〔汪、何二本无“中”字,《说郛》本有,与《秘史》合。〕
 
  躬自指挥行陈。时札木合从太阳可汗来,
 
  〔《说郛》本、汪本“札木合”下有“日”字,今从何本删。〕
 
  望见上军容严整,
 
  〔《说郛》本“严整”二字作“严丽整饬”四字,今从汪、何二本删。〕
 
  谓左右曰:“汝等见按答举止英异乎?乃蛮语尝有言:‘虽驳革去皮,犹贪不舍’,岂能当之?”
 
  〔《说郛》本、汪本“去皮”作“奇计”,今从何本。案:此处文义晦涩,《元史·本纪》云:“乃蛮初举兵,视蒙古军若羖历羔儿,虽蹄皮亦不留。今我观其气势,殆非往时矣。”较此极明显。〕
 
  遂提本部兵走。是日,上与之大战,至晡,擒杀太阳可汗。乃蛮众溃,夜走绝阻,
 
  〔何本“阻”作“险”,今从《说郛》本、汪本。〕
 
  坠纳忽崖死者,不可胜计。
 
  〔《说郛》本、汪本“忽”下有“浑”字,何本无,与《秘史》合,今从之。又汪、何二本无“死”字,今从《说郛》本增。〕
 
  明日,余众悉降。于是朵鲁班、塔塔儿、哈答斤、散只兀诸部亦来降。冬,再征脱脱,至迭儿恶河源不剌纳矮胡之地,
 
  〔未详。〕
 
  兀花思蔑儿乞部长带儿兀孙
 
  〔汪、何二本作“带兀儿孙”,今从《说郛》本。《秘史》作“兀洼思蔑儿乞歹亦儿兀孙”,又作“答亦儿兀孙”。〕
 
  献女忽兰哈敦于上,率众来降。
 
  〔《蒙古源流》(三):“高丽察罕汗惧,进献高丽墨儿格特岱尔乌逊之女和兰郭斡。”墨尔格特即蔑儿乞,岱尔乌逊即带儿兀孙,和兰即忽兰,但误以为高丽人。《源流》之茫昧,往往如此。〕
 
  为彼力弱,散置军中,实羁縻之。
 
  〔此四字汪、何二本作“室坝之”三字,今从《说郛》本增订。〕
 
  其人不自安,复同叛,留复辎重。我大兵与战,
 
  〔汪、何二本无“大”字,从《说郛》本增。〕
 
  复夺之。上进军围蔑儿乞于泰寒塞,
 
  〔汪、何二本“寒”作“安”,今从《说郛》本,与《元史·本纪》合。《秘史》作“台合勒山寨”。〕
 
  尽降麦古丹、脱脱里掌斤、蔑儿乞诸部而还,
 
  〔何本不重“脱”字,“掌”作“孛”,今从《说郛》本、汪本增改。拉施特书作“尽取麦端、脱塔哈林哈俺诸众”,皆蔑儿乞人。〕
 
  部长脱脱挟其子
 
  〔汪、何二本空此字,从《说郛》本增。〕
 
  奔杯禄可汗。带儿兀孙既叛,率余众至薛良格河,
 
  〔《秘史》作“薛凉格河”。〕
 
  哈剌温隘筑室以居。上遣孛罗欢那颜,
 
  〔前作“博罗浑那颜”。〕
 
  及赤老温拔都弟闯拜二人,领右军讨平之。
 
  〔闯拜,《秘史》作“沈白”,又作“沈伯”。〕
 
  乙丑,征西夏,攻破力吉里寨,经落思城,大掠人民,多获橐驼而还。
 
  〔拉施特书记此役有“乞邻古撒城”而无“落思城”。〕
 
  丙寅,大会诸王百官于斡难河之源,建九游之白旗。
 
  〔《蒙鞑备录》成吉思之仪卫,建大纯白旗以为识认外,并无他旌幢,国王亦然。今国王止建一白旗,九尾中有黑月,出师则张之。〕
 
  共上尊号曰成吉思皇帝。复发兵征乃蛮杯禄可汗,猎于兀鲁塔山莎合水上,擒之。
 
  〔汪、何二本“猎”上有“飞”字,今从《说郛》本删。拉施特书作“不亦鲁黑猎飞鸟于兀鲁黑塔山下莎酌水上,兵至杀之”。似原本或当有“飞”字。兀鲁塔山,《秘史》作“兀鲁黑塔黑”,旁注:“地名”,今科布多城西北有乌鲁克衣堡,殆即其地。莎合水,《秘史》作“淄豁黑河”。李侍郎谓即科布多河上游之索果克河是也。〕
 
  是时,太阳可汗子屈出律可汗
 
  〔《秘史》作“古出鲁克”。〕
 
  与脱脱遁走,奔也儿的石河。
 
  〔《秘史》作“额儿的失河”。〕
 
  丁卯夏,顿兵。秋,再征西夏。冬,克斡罗孩城。
 
  〔《秘史》作“兀剌孩”,《元史·地理志》有兀剌海路,注云:“太祖四年,由黑水城北兀剌海西关口入河西,获西夏将高令公,克兀剌海城。”屠敬山曰:“故城在今蒙古阿拉善额鲁特西南之龙骨山,与甘州之删丹县接界,蒙古名阿拉克鄂拉。”〕
 
  先遣按弹、不兀剌二人使乞力吉思部。
 
  〔《秘史》作“乞儿吉思”,即唐之黠戛斯也。〕
 
  其长斡罗思亦难及阿里替也儿、野牒亦纳里部,亦遣亦力哥帖木儿、
 
  〔汪、何二本无“阿里替也儿”以下十九字,今从《说郛》本补。〕
 
  阿忒黑拉二人
 
  〔汪、何二本“黑”作“里”,今从《说郛》本。《秘史》蒙文(十)云:“拙赤至乞儿吉思地面,其官人也迪亦纳勒、阿勒迪额儿、斡列别克的斤也归附了。”此阿里替也儿即彼阿勒迪额儿,野牒亦纳里即也迪亦纳勒,也力哥帖木儿即斡列别克的斤,而此以前二人为部族名,后一人为使者名,与《秘史》异。拉施特书则云:“帝遣阿尔坛、布拉二人使于乞儿吉思,先至一部,受其降。继至一部,曰野牒鄂伦酋、曰斡罗思亦纳儿,二部酋盛礼款接,遣二使臣曰阿里克帖木儿、曰阿特黑剌黑,偕来献猎鸟。”又与《秘史》及此《录》俱异。〕
 
  偕我使来献白海青为好也。
 
  〔汪本“为好”作“为海”,何本作“名鹰”,今从《说郛》本。〕
 
  戊辰春,班师至自西夏,避暑于龙庭。冬,再征脱脱及曲出律可汗。
 
  〔前作“屈出律可汗”。〕
 
  时斡亦剌部长忽都花别吉不战而降,因用为乡导。至也儿的石河,尽讨蔑里乞部。脱脱中流矢而死。曲出律可汗仅以数人脱走,奔契丹主菊儿可汗。
 
  〔汪、何二本“儿”作“而”,今从《说郛》本。〕
 
  己巳春,畏吾儿国王亦都护
 
  〔亦都护王号,唐时突厥、回鹘并西域诸国皆有“叶护”,此“亦都护”,其遗语也。其人名巴而木阿而忒的斤,《元史》有传。〕
 
  闻上威名,遂杀契丹所置监国少监,欲求议和。上先遣按力不也奴、答儿拜二人使其国。
 
  〔汪、何二本作“按力也奴、答拜”,《说郛》本作“按力也奴、答儿拜”。案:此书后文作“案力不也奴、答儿班”,今据增一“不”字。拉施特书作“阿勒泼鱼土克、迭儿拜”,与后文合。《秘史》记亦都护使臣有阿惕乞剌黑、答儿伯二人,与此不同。〕
 
  亦都护大喜,待我礼甚厚,即遣其官别吉思、阿邻帖木儿二人入奏曰:“臣窃闻皇帝威名,
 
  〔汪、何二本“窃”作“国”,今从《说郛》本。〕
 
  故弃契丹旧好,方将遣使来通诚意,躬自效顺,岂料远辱天使降临下国,譬云开见日、冰泮得水,喜不胜矣。而今而后,当尽率部众,
 
  〔汪、何二本无“当”字,从《说郛》本增。〕
 
  为仆为子,竭犬马之劳也。”当是时,蔑力乞脱脱子火都、赤剌温、马札儿、秃薛干
 
  〔“火都”以下十一字,汪、何二本并脱,今从《说郛》本补。《说郛》本亦脱“火”字,又“札”作“礼别”,从《元史类编》所引增订。《元史·巴尔木阿而忒的斤传》同。拉施特书作“忽都、赤剌温、赤攸克呼、图罕蔑尔根”末二人与此异。〕
 
  以脱脱中流矢死,不能归全尸,遂取其头涉也儿的石河,将奔畏吾儿国,先遣别干者
 
  〔何本“先”上有“脱脱”二字,今从《说郛》本、汪本删。拉施特书“别干”作“哀不干”。〕
 
  使亦都护。亦都护杀之。四人至,与畏吾儿大战于崭河。
 
  〔崭河,《元史·巴尔木阿而忒的斤传》作“襜河”。〕
 
  亦都护先遣其官阿思兰斡乞、孛罗的斤、亦难海牙、仓赤四人
 
  〔拉施特书作“阿儿思兰兀喀、察鲁忽兀喀、孛拉的斤、亦纳儿乞牙、松赤”四人,此脱“察鲁忽兀喀”一人。《中州文表》(二十二)许有乏《阿塔海牙神道碑》:“考讳哈剌阿思兰都大,当太祖皇帝肇建区宇,国主邑都护发兵攻金,斩其长史。闻灭乞里有异,遣将命偕察鲁四人驰告行在,且具款诚。上曰:‘果如尔言,其告尔主以方物来。’对曰:‘皇帝幸生,活高昌。高昌身且不敢有,何有方物?’复命辇宝货、金织段以献。由是高昌内附,因留宿卫,从太祖南征,卒于柳城。”〕
 
  来告蔑力乞事。上曰:“亦都护果诚心戮力于我。”
 
  〔何本“戮”作“效”,今从《说郛》本、汪本。〕
 
  以其已有来献,寻遣安鲁不也奴、答儿班二人
 
  〔诸本“奴”作“女”,从上文改。〕
 
  复使其国。亦都护遣使奉珍宝方物为贡。
 
  庚午夏,上避暑龙庭。秋,复征西夏,入孛王庙。
 
  〔《说郛》本“庙”作“朝”,今姑从汪、何二本。〕
 
  其主失都儿忽出降,
 
  〔诸本“都”作“相”,今订正。案:是时西夏主为李安全,《秘史》蒙文《续集》(一)称为亦鲁忽不儿罕。又《续集》(二)将亦鲁忽不儿罕改名失都儿忽,时西夏国主为李睍也。此《录》乃称安全为失都儿忽,想《秘史》与此《录》必有一误。《蒙古源流》称西夏诸主为锡都尔固汗,与此《录》同。〕
 
  献女为好。
 
  〔《秘史》:“成吉思自那里征合申种,其主不儿罕降,将女子名察忽思献于成吉思。”
 
  案:此年事,拉施特书系于蛇年,《元史·本纪》系于己巳,《地理志》载“太祖四年,克兀剌海城”,亦与拉施特书合。疑此《录》原本庚午一年并无事实,后人乃割己巳年“夏避暑龙庭”以下为庚午事,此当据《元史》及拉氏书订正者。至《秘史》叙合申献女事于羊年伐金之后,则由行文之便,未可执以议此《录》及《元史》也。〕
 
  辛未春,上居怯绿连河。时西域哈剌鲁部主阿昔兰可汗,因忽必来那颜见上。
 
  〔诸本“必”下无“来”字,今从何校增。《秘史》“太祖命忽必来征合儿鲁兀惕种,其主阿儿思兰即投降了,来拜太祖”即此事也。哈剌鲁,即唐时葛逻禄,亦云葛禄。阿昔兰可汗,汉言师子王也。忽必来,前作“虎必来”。〕
 
  亦都护亦来朝,
 
  〔汪、何二本“护”下有“儿”字,今从《说郛》本删。〕
 
  奏曰:“陛下若恩顾臣,
 
  〔汪本“顾”作“愿”,何本作“赐”,今从《说郛》本。〕
 
  使远者悉闻,近者悉见,辍衮衣之余缕,
 
  〔何本“衮衣”作“口衮”,今从《说郛》本、汪本。〕
 
  摘金带之星装,诚愿在陛下四子之亚,竭其力也。”上说其言,使尚公主,仍叙弟五子。
 
  〔汪、何二本无“子”字,今从《说郛》本增。〕
 
  遣将脱忽察儿率骑二千,
 
  〔汪、何二本作“二十”,何改“三千”,《说郛》本作“二千”,与拉施特书合,今从之。〕
 
  出哨西边戎。秋,上始誓众南征,克大水泺。
 
  〔今察哈尔左翼正蓝旗牧地有大水淖{人小}。《口北三厅志》(二)“山川门大水泺”条云:“新河口外,白城子东,兴和城北,土人呼为伊克脑儿水,与昂古里乐相通。伊克,华言大;淖儿;华言水泺也。”〕
 
  又拔乌沙堡
 
  〔何本“又”作“以”,今从《说郛》本、汪本。〕
 
  及昌桓抚等州,大太子术赤、二太子察合台、三太子窝阔台
 
  〔原注:“太宗也。”此三字,诸本误入正文,今订正。又何本无“阔”字,从《说郛》本、汪本增。〕
 
  破云内、东胜、武、宣、宁、丰、靖等州。金人惧,弃西京。又遣哲别率兵取东京。
 
  〔《秘史》作“东昌”,乃声之误。〕
 
  哲别知其中坚,以众压城,
 
  〔汪、何二本“压”作“堕”,今从《说郛》本。〕
 
  即引退五百里。金人谓我军已还,不复设备。哲别戒军中一骑牵一马,一昼夜驰还,急攻,大掠之以归。
 
  〔诸本“急”作“忽”,今从何校改。〕
 
  上之将发抚州也,金人以招讨九斤、
 
  〔《元史》作“纥石烈九斤”,殆即纥石烈执中之音讹。然据《金史·卫绍王纪》及《独吉思忠传》,是役主帅为思忠,非执中也。〕
 
  监军万奴等
 
  〔何本“万”作“为”,今从《说郛》本、汪本。“万”字与“元”相似,《金史·卫绍王纪》“至宁元年八月,尚书右丞完颜元奴将兵备边”,乃在此二年后。〕
 
  领大军设备于野狐岭,又以参政胡沙
 
  〔《说郛》本作“忽沙”,今从汪、何二本。《金史·承裕传》:“承裕一名胡沙。大安三年,拜参知政事,与平章政事独吉思忠行省戍边。”〕
 
  率军为后继,契丹军师谓九斤曰:
 
  〔拉施特作“金将巴古失桑臣谓九斤曰”云云。〕
 
  “闻彼新破抚州,以所获物分赐军中,马牧于野,出不虞之际,宜速骑以掩之。”
 
  〔汪、何二本此下有“也”字,从《说郛》本删。〕
 
  九斤曰:“此危道也。不若马步俱进,为计万全。”上闻金兵至,
 
  〔汪、何二本“兵”作“马”,今从《说郛》本。〕
 
  进拒獾儿觜。
 
  〔何本“觜”上衍“唃”字,今从《说郛》本、汪本删。《秘史》作“抚州山觜”。〕
 
  九斤命麾下明安曰:“汝尝使北方,素识太祖皇帝。其往临阵
 
  〔何本“其”作“共”,今从《说郛》本、汪本。〕
 
  问以举兵之由,金国何怨于君,而有此举?若不然,即诟之。”明安来,如所教,俄策马来降。上命麾下缚之曰:
 
  〔何本无“曰”字,今从《说郛》本、汪本增。〕
 
  “俟吾战毕问之也。”遂与九斤战,大败之,其人马蹂躏死者不可胜计。因胜彼,复破胡沙于会合堡,
 
  〔《金史·卫绍王纪》、《完颜承裕传》并作“浍河堡”,《元史·太祖纪》作“会河川”。〕
 
  金人精锐尽没于此。上归诘明安曰:
 
  〔《说郛》本、何本“诘”作“语”,今从汪本。〕
 
  “我与汝无隙,何对众相辱?”对曰:“臣素有归志,恐其难见,故因如所教。不尔,何由瞻望天颜。”上善其言,命释之。
 
  壬申,破宣德府,
 
  〔案:金时,只称宣德州。至元世祖中统四年,改府。此追称之辞。〕
 
  至德兴府,失利引却。四太子也可那颜、
 
  〔《元史·祭祀志》:睿宗主题曰:“太上皇也可那颜,是四太子也。”可那颜七字连读。某氏以哈撒儿子也苦当之,非是。〕
 
  赤渠驸马
 
  〔赤渠,《元史·太祖纪》作“赤驹”,《太宗纪》作“赤苦”,《公主表》作“赤窟”,《秘史》作“赤古古列坚”,拉施特谓即弘吉剌氏按陈那颜之子。〕
 
  率兵尽克德兴境内诸堡而还。后金人复收之。
 
  〔案:此年事,拉施特书系之羊年,即辛未。而《元史》系之癸酉。案:拉氏书与《秘史》合,《元史》辛未年,亦有拔德兴府事,疑此《录》申年无事,后人割未年末事以补之也。〕
 
  癸酉秋,上复破之,遂进军至怀来。
 
  〔《说郛》本、何本无“来”字,今从汪本补。〕
 
  金帅高琪将兵与战。我军胜,追至北口。
 
  〔汪、何二本作“古北口”,今从《说郛》本删。《元史·本纪》亦无“古”字,此居庸北口,非古北口也。〕
 
  大败之,死者不可胜计。时金人堑山筑寨,悉力为备。上留怯台、薄察顿兵拒守,
 
  〔《元史·本纪》“怯台”作“可忒”,“薄察”作“薄刹”。拉施特书:“帝选弘吉剌特二将,曰喀台,曰布札。”〕
 
  遂将别众西行,
 
  〔诸本无“将”字,从张石洲校补。〕
 
  由紫荆口出。金主闻之,遣大将奥屯拒隘,勿使及平地。比其至,我众度关矣,乃命哲别率众攻居庸南口,出其不备,破之。进兵至北口,与怯台、薄察军合。既而又遣诸部精兵五千骑
 
  〔奥屯,那珂通世谓即乌古孙兀屯。案:《金史·忠义传》:“贞祐元年闰月,北京留守乌古孙兀屯以兵入卫中都。诏以兵万六千人守定兴,军败,兀屯战没。”那说是也。何本“精”作“数”,今从《说郛》本、汪本。〕
 
  令怯台、哈台二将围守中都。
 
  〔《秘史》(九十五)功臣中有合歹驸马,即此哈台也。汪、何二本“围”作“固”,《说郛》本作“因”,今从何校改。〕
 
  上自率兵攻涿、易二州,即日拔之。
 
  〔《说郛》本作“上自率兵攻涿州二,命日拔之。”今从汪、何二本。拉施特书:“帝自引兵攻涿州,二十日破之。”别无攻易州事,与《说郛》本合。然《说郛》本“命”字与“即”相似,当系“即”字之讹。则“州二”两字仍系“二州”之倒,又夺一“易”字也。此等处《亲征录》与拉氏书本自不同,不得援拉氏书为说。〕
 
  乃分军为三道,大太子、二太子、三太子为右军,循太行而南,
 
  〔《说郛》本、汪本“而”作“西”,今姑从何本。〕
 
  破保州、中山、邢、洛、
 
  〔《说郛》本作“治”,汪、何二本作“洛”,今从何校改。〕
 
  磁、相、辉、卫、怀、孟等州,弃真定、威州境,
 
  〔何本“真”作“其”,何校遂删“弃其”二字,今从《说郛》本、汪本。〕
 
  抵黄河,大掠平阳、太原而还;
 
  〔何本无“平阳、太原”四字,汪本无“阳太”二字,今从《说郛》本增。但《说郛》本、汪本此二句并错入下文,从何本及《元史·本纪》正。〕
 
  哈撒儿及斡陈那颜、
 
  〔诸本“陈”作“律”,今订正。斡陈那颜,前作“斡真那颜”,又作“斡赤斤那颜”。《元史·太祖纪》与此同。〕
 
  拙赤
 
  〔拉施特书原注云:“成吉思汗幼子。”案:拉氏书有太祖妃乃蛮氏,失其名,生子术儿赤,早卒。疑即此拙赤、也。《元史·食货志》有太祖第五子兀鲁赤太子。“兀”疑“术”之讹。《秘史续集》一,载:“成吉斯克中都后,命合撒儿领右手军,沿海自大宁经过女真还营。合撒儿同主儿扯歹、阿勒赤、脱仑扯儿必共去了。”其事虽在此后,然将帅未必易人。然则斡陈那颜即《秘史》之阿(勒)赤也,拙赤解、当即主儿扯歹。其人果为兀鲁兀部之术赤台,抑为成吉思之子术儿赤,则不可考。惟“薄刹”与“脱仑扯儿必”确非一人耳。〕
 
  薄刹、
 
  〔即上“薄察”。〕
 
  为左军,沿海破洙、沂等城而还。
 
  〔《元史》作“取蓟州、平、泺、辽西诸郡而还”。“洙、沂”疑“平、泺”之讹。〕
 
  上与四太子驭诸部军
 
  〔《说郛》本、汪本此下错入“抵黄河”至“为左军”二十七字。〕
 
  由中道,遂破深、莫、
 
  〔汪、何二本作“泺汉”,何改“深莫”,正与《说郛》本合。〕
 
  河间、清、沧、景、献、济南、滨、棣、益都等城,
 
  〔汪、何二本“河间”下有“开”字,今从《说郛》本删。〕
 
  弃东平、大名不攻,余皆望风而拔。下令北还,又遣木华黎回攻密州,拔之。上至中都,亦来合。
 
  〔诸本“都”作“相”,从何校改。
 
  此年事,拉施特书系之猴年。《元史·本纪》与此《录》同。〕
 
  甲戌,上驻营于中都北壬甸。
 
  〔《秘史》作“失剌客额儿”,华言黄甸,盖始讹为“王甸”,又转讹为“壬甸”耳。〕
 
  金丞相高琪与其主谋曰:“闻彼人马疲病,
 
  〔汪、何二本“疲”作.“瘦”,今从《说郛》本。〕
 
  乘此决战可乎?”丞相完颜福兴曰:“不可。
 
  〔《说郛》本、何本无此二字,今从汪本增。〕
 
  我军身在都城,家属多居诸路,其心向背未可知,战败必散。苟胜,亦思妻子而去。祖宗社稷安危在此举矣。今莫若遣使议和,待彼还军,
 
  〔汪本“彼”下有“若”字,何本有“吉”字,今从《说郛》本删。〕
 
  更为之计,如何?”金主然之,遣使求和,因献卫绍王公主,令福兴来送。上至野麻池而还。
 
  〔野麻池,拉施特书作“麻池”,《秘史》作“莫州、抚州山觜。”那珂博士(通世)曰:“当作抚州之莫州山觜,莫州即麻池之异译。”〕
 
  夏四月,金主南迁汴梁,留其太子守中都,以丞相完颜福兴、左相秦忠为辅。
 
  〔《金》《元》二史并作“参政抹捻尽忠”。〕
 
  金主行拒涿,契丹军在后。至良乡,金主疑之,欲夺其原给铠马还营。契丹众惊
 
  〔何本无“契丹”二字,今从《说郛》本、汪本增。〕
 
  遂杀主帅素温而叛,
 
  〔《说郛》本“素温”作“兖昆”,今从汪、何二本。拉施特书作“鲜衮”,即详稳之异译。〕
 
  共推斫答比涉儿、札剌儿为帅而还中都。
 
  〔汪、何二本“共”作“去”,今从《说郛》本。〕
 
  福兴闻变,军阻卢沟,勿令得渡。斫答遣裨将塔塔儿帅轻骑千人潜渡水,复背击守桥众,大破之,尽夺衣甲、器械、牧马之近桥者,
 
  〔《说郛》本作“相迎者”,今从汪、何二本。〕
 
  由是契丹军势渐振。先是耶律留哥以中国多故,据有东京、咸、平等郡,自称辽王。斫答比涉儿等遣使诣上行营纳款,又求好于辽王。时辽王亦来降,上命为元帅,令居广宁府。
 
  〔《元史·太祖纪》及《耶律留哥传》,留哥来朝事在乙亥。〕
 
  金主之南迁也,以招讨也奴为咸平等路宣抚,复移于阿必忽兰。
 
  〔《说郛》本无“必”字,今从汪、何二本。〕
 
  至是亦以众来降,仍遣子铁哥入侍。既而复叛,自称东夏王。
 
  〔案:“也奴”当作“万奴”,《太祖纪》:十年己亥冬十月,金宣抚蒲鲜万奴据辽东,僣称天王,国号大真。十一年,蒲鲜万奴降,以其子帖哥入侍,既而复叛,僣称东夏。事在甲戌后二年,此盖因斫答比涉儿事兼及留哥、万奴耳。拉施特书“也奴”作“秃珠大石”,他书未见。〕
 
  五月,金太子留福兴、秦忠守中都,亦走汴梁。上以契丹众将来归,遂命散只兀儿三木合拔都
 
  〔何本无“三”字,从《说郛》本、汪本增。散只兀儿,其氏三木合,其名《元史·本纪》作“三模合”。〕
 
  领契丹先锋将明安太保兄弟为乡导,引我军合之,至则与斫答等并力围中都。
 
  〔《说郛》本“围”作“图”。〕
 
  金主以检点庆寿、元帅李英
 
  〔何本作“季英”,何改“李”,正与《说郛》本、汪本合。〕
 
  运粮分道,还救中都,
 
  〔何本“中”作“东”,何改“中”,正与《说郛》本、汪本合。〕
 
  人赍粮三斗。
 
  〔何本作“赍粮人三斗”,今从《说郛》本、汪本。〕
 
  英自负以砺众。庆寿至涿州旋风寨,李英至霸州青戈,皆为我军所获。既绝其粮,中都人自相食,福兴自毒死,秦忠亦弃城走。明安太保人据之,遣使献捷。上时驻桓州,
 
  〔何本“时”作“自”,“州”作“丹”,今从《说郛》本、汪本。〕
 
  遂命忽都忽那颜
 
  〔《秘史》作“失吉刊忽都忽”。〕
 
  与雍古儿宝儿赤、
 
  〔汪、何二本“宝儿”作“宝光”,今从《说郛》本。雍古儿,《秘史》作“翁古儿”。宝儿赤,华言膳大也。〕
 
  阿儿海哈撒儿
 
  〔《秘史》作“阿儿孩合撒儿”。〕
 
  三人检视中都帑藏。时金留守哈答国和
 
  〔《秘史》作“合答”。〕
 
  奉金币为拜见之礼,
 
  〔何本“币”作“帑”,今从《说郛》本、汪本。〕
 
  雍古儿、哈撒儿受之,独忽都忽拒不受,将哈答等萃其物北来。
 
  〔汪、何二本无“等萃”二字,今从《说郛》本补。〕
 
  上问忽都忽曰:“哈答等尝与尔物乎?”对曰:“有之。未敢受之。”上问其故。对曰:“臣尝与哈答言,城未陷时,
 
  〔汪、何二本“城”字在“陷”下,今从《说郛》本。〕
 
  寸帛尺缕,皆金主之物。今既城陷,悉我君物矣。汝又安得窃我君物为私惠乎?”
 
  〔汪、何二本“私惠”作“和意”,《说郛》本作“何意”,今从何校改正。〕
 
  上甚佳之,
 
  〔何本“甚”作“正”,今从《说郛》本、汪本。〕
 
  以为知大体,而重责雍古儿、阿儿海哈撒儿等之不珍也。哈答因见其孙崇山而还。
 
  〔汪、何二本“崇”作“荣”,今从《说郛》本。此下汪、何二本并有错文,今悉从《说郛》本。〕
 
  时金通州元帅七斤率众来降,
 
  〔诸本“七斤”作“也斤”,今从何校改。《金史·宣宗纪》:贞祐三年(乙亥)正月了丑,右副元帅蒲察七斤降于大元。〕
 
  惟张复、张镮柄、众哥、也思元帅据守信安不下。
 
  〔汪、何二本“惟张”作“帷帐”,“镮”作“镬”,“元帅”作“瓦郎”,今并从《说郛》本改。某氏云:“张复即高阳公张甫,众哥即河间公移剌众家奴,张镬柄疑即张进,与甫同守信安。惟也思无考。”屠敬山以也思为杨寿之译音。右并见《金吏·移剌众家奴传》。〕
 
  上驻军鱼儿泺,
 
  〔今达里泊。《长春真人西游记》:“三月朔,出沙陀至鱼儿泺。”张德辉《纪行》:“过鱼儿泊。泊有二焉,周广百余里,中有陆道达于南北。泊之东涯有公主离宫。”案:张氏谓“泊有二”,正与今达里泊、冈爱泊形势同。又谓“中有陆道达于南北”又与今驿路出二泊之间者同。又谓“泊之东涯有公主离宫”,考《元史·特薛禅传》:甲戌,太祖在迭蔑可儿谕按陈曰:“可木儿温都儿、答儿脑儿、迭蔑可儿之地,汝则居之。”又,至元七年,斡罗陈万户及其妃囊加真公主请于朝曰:“本藩所受农土,在上都东北三百里答儿海子,实本藩驻夏之地,可建城邑以居。”帝从之,遂名其地为应昌云云。案:答儿脑儿、答儿海子,即达里泊,元时为弘吉剌氏分地。弘吉剌世尚公主,故有公主离宫。是鱼儿泺即今达里泊,更不容疑。又,《世祖纪》:中统元年六月,诏燕京、西京、北京三路宣抚使运米十万石,输开平府及抚州、沙井、靖州、鱼儿泺,以备军储。鱼儿泺与开平、抚州等连言,亦即达里泊之一证。近人乃或以《秘史》之捕鱼儿海子、今之贝尔湖当之,度以地望,殊不然也。又,此处鱼儿泺,拉施特书作“戈奥儿”,殆亦“冈爱”之异译。〕
 
  命三合拔都
 
  〔《元史·本纪》作“三哥拔都”,拉施特书作〕
 
  “撒木哈把阿秃儿”,即前散只兀儿三木合拔都。帅蒙古兵万骑,由西夏掠京兆,出潼关,破嵩、汝等郡,直趋汴梁。至杏花营,大掠河南。回至陕州,适河冰合,遂渡而北。金元帅邪答忽、监军斜烈以北京来降。
 
  〔诸本“邪”作“那”,今从何校改。邪答忽即寅答虎,其以北京来降,事详《元史·木华黎传》。拉施特书“撒木哈把阿秃儿自陕州渡黄河,趋西京。金二将守西京,曰寅答尔,曰罕撒儿撒烈,出城迎降”,与《元史》异。案:此《录》纪此事亦承上文,则自陕州北渡当至西京,无与北京事。或“北”本作“西”,后人改之与?〕
 
  上遣脱脱栾阇儿必
 
  〔《秘史》作“脱仑扯儿必”,又作“脱栾”。〕
 
  帅蒙古、契丹、汉军南征,降真定,破大名,至东平,阻水不克,大掠而还,金人复取之。
 
  〔案:此年事,拉施特书自“张复等守信安”以上系之鸡年,自“上驻鱼儿泺”以下系之犬年。《元史·本纪》则以中间陷中都一事系之乙亥,余略与此《录》同。《元史》是也,何校改从《元史》则又不必。盖此《录》虽用编年体,而于入中都一事则又由行文之便。终言之,未必定有错简。拉氏书与此《录》系年虽异,而次序则同,此其一证。至其系年之殊,则由彼书脱“猴年”字,故申、酉、戌三年事遂递上一年耳。〕
 
  乙亥,金右副元帅七斤以通州降。木华黎攻北京,金元帅寅答虎等以城降。金御史中丞李英等率师援中都,战于霸州,败之。中都留守完颜福兴仰药死,抹捻尽忠弃城走,明安入守之。诏史天倪南征,取平州。木华黎遣史进道攻广宁府,降之。是秋,取城邑凡八百六十有二。
 
  〔案:此节系明人羼入。盖乙亥事,此《录》以行文之便豫叙于甲戌,故此年无事。拉施特书亦无猪年事,其证也。后人取《元史·本纪》补之,不悟与上复重,且称名亦不合也(如秦忠作“抹捻尽忠”)。〕
 
  丙子,锦州帅张鲸以锦州、广宁等郡来降,俄而复叛,自号辽西王,改元大汉。上命木花里以左军讨平之。
 
  〔《元史·本纪》:九年甲戌,锦州张鲸杀其节度使,自立为临海王,遣使来降。十年乙亥,张鲸谋叛伏诛。鲸弟致遂据锦州,亻替号汉兴皇帝,改元兴龙。十一年丙子,张致陷兴中府,木华黎讨平之。《元史》以此事分系甲、乙、丙三年,此《录》则因记平锦州事,兼及其缘起耳。何本脱“俄而复叛”以下二十一字,今从《说郛》本、汪本补。〕
 
  丁丑上遣大将速不台拔都以铁裹车轮,征蔑儿乞部,与先遣征西前锋脱忽察儿二千骑合,
 
  〔汪、何二本“二千”作“三千”,今从《说郛》本。〕
 
  至崭河,
 
  〔《秘史》作“垂河”,今吹河也。〕
 
  遇其长,大战,尽灭蔑儿乞还。是岁,吐麻部主带都剌莎儿合
 
  〔汪、何二本“儿合”作“合儿”,今从《说郛》本。《秘史》作“豁里秃马惕官人歹都忽勒莎豁”。〕
 
  既附而叛。上命博罗浑那颜、都鲁伯
 
  〔《秘史》作“朵儿伯朵黑申”。〕
 
  二将讨平之,博罗浑那颜卒于彼。
 
  〔案:遣速不台征蔑儿乞事,《秘史》系于牛儿年,然在灭乃蛮之后,获札木合之前,则所谓“牛年”乃“乙丑”非“丁丑”也。至速不台杀蔑儿乞亡虏忽都等,及平吐麻部,《秘史》虽不著年岁,然皆系于伐金之前,疑此《录》误也。〕
 
  戊寅,封木华黎为国王,率王孤部万骑、
 
  〔诸本“孤”作“狐”,今从何校改。〕
 
  火朱勒部千骑、兀鲁部四千骑、
 
  〔兀鲁,前作“兀鲁吾”〕
 
  忙兀部将木哥汉札千骑、
 
  〔木哥汉札,《秘史》蒙文作“蒙可合勒札”,《元史·太宗纪》作“蒙古寒札”,《畏答儿传》作“忙哥”。〕
 
  弘吉剌部按赤那颜三千骑、
 
  〔前作“斡陈那颜”。《蒙鞑备录》:“按赤那邪见封尚书令,乃成吉思正后之弟,部下亦有骑军十余万。所统之人颇循法,鞑人自言随国王者皆恶,随尚书令者皆善也。”〕
 
  亦乞剌部孛徒二千骑、札剌儿部及带孙等二千骑,
 
  〔《蒙鞑备录》:“国王弟二人,长曰抹歌,见在成吉思处为护卫,次曰带孙郡王,每随侍焉。”带孙即札剌儿部长,“及”字疑衍。〕
 
  同北京诸部乌叶儿元帅、
 
  〔即吾也而,《元史》有传。〕
 
  秃花元帅
 
  〔即耶律秃花,《元史》有传。〕
 
  所将汉兵,及札剌儿所将契丹兵,
 
  〔诸本“札”作“北”。案:即甲戌年,契丹兵所推为帅之札剌儿也,今订正。〕
 
  南伐金国。
 
  〔何本“南”作“原”,今从《说郛》本、汪本。〕
 
  别遣哲别攻曲出律可汗,至撒里桓地克之。
 
  〔《辽史·天祚纪》:西辽仁宗次子直鲁古在位三十四年时,秋出猎,乃蛮王屈出律以伏兵八千擒之,而袭其位。此正其据西辽时也。撒里桓,《秘史》作“撒里黑昆”,徐星伯谓即今叶尔羌西八百里之色勒库勒是也。〕
 
  先,吐麻部叛,上遣征兵乞儿乞思部。
 
  〔何本无“乞思”二字,今从《说郛》本增。汪本作“乞儿乞儿部”,下“儿”字亦“思”之讹,前作“乞力吉斯”。〕
 
  不从,亦叛去。遂命大太子往讨之,
 
  〔汪、何二本“命”上有“先”字,下无“大”字,今从《说郛》本。〕
 
  以不花为前锋,
 
  〔不花,《秘史》作“不合”,木华黎之弟。〕
 
  追乞儿乞思,
 
  〔诸本无下“乞”字,今订补。〕
 
  至亦马儿河而还。
 
  〔亦马儿河,某氏以为今自乌梁海入俄境之阿穆哈河,屠敬山谓即叶密立河。〕
 
  大太子领兵涉谦河水,顺下,招降之,
 
  〔《元史·地理志·西北地附录》:“谦谦州,谦河经其中。”即《唐书·黠戛斯传》之剑河,今之克穆河也。〕
 
  因克乌思、憾哈纳思、帖良兀、克失的迷、火因亦儿干诸部。
 
  〔汪、何二本“因”作“困”,“乌”作“为”,“儿”作“而”,又无“纳”字,今从《说郛》本增改。《秘史》“乌思”作“兀儿速惕”,“憾哈纳思”作“合卜合纳思”,“帖良兀”作“田列克”,“克失的迷”作“客思的因”。《元史·西北地附录》:“乌思在谦河之北,撼合纳在乌思东。”拉施特书云:“谦河之东有兀儿速惕、帖良古惕、客思的迷三族,居拜喀勒湖西,与斡亦剌惕、吉儿吉思为邻”云云。〕
 
  火因亦儿干,
 
  〔《秘史》作“槐因亦儿坚”,义为林木中百姓。谓以上四部皆林木中百姓,非别有火因亦儿干一部也。
 
  《秘史》大太子征克儿克思及招降林木中百姓事系于兔儿年,远在辛未伐金之前,则此兔儿年乃“丁卯”非“己卯”也。此《录》系于己卯之前一年,疑撰人欲系此事于己卯,而未及厘正也。〕
 
  己卯,上总兵征西域。
 
  〔何本无此八字,今从《说郛》本、汪本增。〕
 
  庚辰,—亡至也儿的石河住夏。秋,进兵,所过城皆克。至斡脱罗儿城,
 
  〔《秘史》作“兀都剌儿”,《元史·本纪》别作“讹答剌”,《地理志》作“兀提剌儿”。耶律文正《西游录》:“苦盏西北五百里有讹打剌城。”〕
 
  上留二太子、三太子攻守,寻克之。
 
  辛巳,上与四太子进攻卜哈儿、薛迷思干等城,皆克之。
 
  〔何本“进”作“追”,今从《说郛》本、汪本。卜哈儿,《秘史》作“不合儿”,《元史》别作“蒲华”,今之布哈尔也。薛迷思干,《秘史》作“薛迷思加”,《元史·太祖纪》别作“寻斯干”,《地理志》作“撒麻耳干”,今名同。〕
 
  大太子又克养吉干、八儿真等城。
 
  〔八儿真,《元史·地理志》作“巴耳赤刊”。〕
 
  夏,上避暑于西域速里坛避暑之地,
 
  〔诸本“里”作“望”,今订正。速里坛下有原注曰:“西域可汗之称也。”何本“称”作“林”,今从《说郛》本、汪本。〕
 
  命忽都忽那颜为前锋。
 
  〔汪、何二本无下“忽”字,从《说郛》本增。〕
 
  秋,分遣大太子、三太子率右军攻玉龙杰赤城,
 
  〔诸本“玉”作“王”,今从何校改。《秘史》作“兀笼格赤”。《秘史》攻兀笼格赤者,为拙赤、察阿歹、斡歌歹三人,则此尚脱“二太子”三字。《西游录》:“蒲华之西有大河,西入于海。其西有玉里犍城,梭里檀母后所居,富庶又盛于蒲华。”〕
 
  以军集奏闻,上有旨曰:“军既集,可听三太子节制也。”于是上进兵,过铁门关,命四太子攻也里、泥沙兀儿等城。
 
  〔汪、何二本无“命”字,又城上有“处”字,今从《说郛》本增删。《秘史》“也里”作“亦鲁”,“泥沙兀儿”作“亦薛不儿”。《元史·地理志》作“乃沙不耳”。下作“匿察兀儿”,二城并在阿母河南。〕
 
  上亲克迭儿密城。
 
  〔《元史·地理志》作“忒耳迷”,即唐时怛密国,在今阿母河北。〕
 
  又破班勒纥城,
 
  〔《元史·地理志》作“巴里黑”,即唐时缚喝国,在阿母河南。〕
 
  围守塔里寒寨。
 
  〔汪、何二本“塔”作“哈”,今从《说郛》本。又,诸本无“寒”字,何校据《元史·本纪》增。塔里寒,《元史·地理志》作“塔里干”,《马哥·波罗行记》谓距班勒纥十二日程。〕
 
  冬,四太子又克马鲁察叶可、马卢、昔剌思等城,复进兵。
 
  壬午春,又克徒思、匿察兀儿等城。
 
  〔徒思,《元史·地理志》作“途思”。〕
 
  上以暑气方隆,遣使招四太子速还,因经木剌奚国,
 
  〔刘郁《西使记》作“木乃夷”。〕
 
  大掠之。渡搠搠兰河,
 
  〔何本不重“搠”字,今从《说郛》本、汪本。《元史》同《秘史》作“出黑扯连城”。〕
 
  克野里等城。
 
  〔前作“也里”。〕
 
  上方攻塔里寒寨,朝觐毕,并兵克之。三太子克玉龙杰赤城,大太子还营所。寨破后,二太子、三太子始来相觐。
 
  〔汪、何二本“始”作“姑”,今从《说郛》本。〕
 
  是夏,避暑于塔里寒寨高原。
 
  〔何本“寒”作“河”,今从《说郛》本、汪本。〕
 
  时西域速里坛札兰丁
 
  〔《秘史》作“札剌勒丁莎勒坛”。〕
 
  遁去,遂命哲别为先锋迫之,再遣速不台拔都为继,又遣脱忽察儿殿其后。哲别至蔑里可汗城,
 
  〔蔑里可汗,《秘史》作“罕篾力克”。〕
 
  不犯而过。速不台拔都亦如之。脱忽察儿至,与其外军战。蔑里可汗惧,弃城走。忽都忽那颜闻之,率兵进袭。时蔑里可汗与札阑丁合,就战,
 
  〔《说郛》本“就”作“既”,今从汪、何二本。〕
 
  我不利,遂遣使以闻。上自塔里寒寨率精锐亲击之,追及辛口连河,
 
  〔《说郛》本作“辛自连河”,汪、何二本作“辛自速河”,今从某氏校改正。《秘史》作“申沐涟”,今印度河。〕
 
  获蔑里可汗,屠其众。札阑丁脱身入河,泳水而遁。遂遣八剌那颜
 
  〔《秘史》作“巴剌”。〕
 
  将兵急迫之,不获。因大虏忻都人民之半而还。
 
  〔诸本“忻都”作“折相”,今从何校改正。〕
 
  癸未有,上兵循辛目连河而上,
 
  〔诸本“上”作“止”,今订正。〕
 
  命三太子循河而下,
 
  〔汪、何二本无“下”字,何增“南”字,并改“上”、“止”字为“北”,今从《说郛》本订正。〕
 
  至昔思丹城,
 
  〔汪、何二本“昔”上有“不”字,即上句“下”字之倒误,今从《说郛》本删。《秘史》作“昔思田”。〕
 
  欲攻之,遣使来禀命。上曰:“隆暑将及,宜别遣将攻之。”夏,上避暑于八鲁湾川,
 
  〔《秘史》作“巴鲁安客额儿”,屠敬山口:“在今阿富汗都城喀布尔东北。”〕
 
  候八剌那颜,因讨近敌,悉千之。八剌那颜军至,遂行至可温寨,三太子亦至。上既定西域,置达鲁花赤于各城,监治之。
 
  甲中,旋师住冬,避暑,且止且行。
 
  〔诸本“冬”作“各”,从何校改。〕
 
  乙酉春,上归国,自出师凡七年。
 
  〔案:此《录》自庚辰至甲申征西域事,皆后于事实一年。拉施特书及《元史·太祖纪》并与此同。知此《录》原本已如是矣。近柯氏《新元史》、屠氏《蒙兀儿史记》始行改正,然未备举改定之理由,今略举之。《元史·太祖纪》:十四年己卯,取讹答剌城;十五年庚辰春三月,帝克蒲华城;五月,克寻思于城。此于《亲征录》外别采他书,而据《亲征录》所书之取斡脱罗、卜哈儿、薛迷思干三事则各后一年,一也。《耶律楚材传》:“己卯夏六月,帝亲征回回国,驻跸也儿的石河。”而此《录》系于庚辰,二也。《湛然居士文集·上西征庚牛元历表》云:“庚辰,圣驾驻跸寻思千城。又,再过西域山城。”《驿诗序》云:“庚辰之冬,驰驿西域,过山城驿。”考山城驿在寻思干、蒲华之间,而此《录》二城之克乃在辛巳,三也。《雪楼先生文集·河东郡公伯德那神道碑》云:“公讳伯德那,西域班勒纥人。国初岁在庚辰,大兵西征,班勒纥平。”《元史·察罕传》亦云:“察罕,西域板勒纥人。父伯德那。庚辰岁,国兵下西域,举族来归。”而此《录》破班勒纥城亦在辛巳,四也。《西游记》记:“辛巳七月,帝将追算端汗,至印度。”而此《录》破札阑丁于辛目连河乃在乇辰,五也。又《西游记》太祖班师在壬午之秋,而此《录》乃在癸未,六也。据此六证,知自庚辰至甲中五年事,当各移上—年。〕
 
  是夏,避暑。秋,复总兵征西夏。
 
  〔《秘史》在狗儿年秋。〕
 
  丙戌春,至西夏。一岁间尽克其城,时上年六十五。
 
  〔诸本“五”作“矣”,从何校改。〕
 
  丁亥,灭其国以还。
 
  〔何氏曰:“此下有脱文,”〕
 
  太祖圣武皇帝升遐之后,太宗皇帝即大位以前,太亡皇帝时为太子。
 
  〔《元史·太祖纪》:“戊子,皂子拖雷监国。”〕
 
  戊子,避暑于轮思罕,
 
  〔《说郛》本“轮”作“输”,今姑从汪、何二本。〕
 
  金主遣使宋朝。太宗皇帝与太上皇共议,遣搠力蛮复征西域。
 
  〔汪、何二本无“遣”字,今从《说郛》本增。搠力蛮,《秘史》作“绰儿马罕”。〕
 
  秋,太宗皇帝自虎八会于先太祖皇帝之大宫。
 
  〔虎八,《元史·太宗纪》作“霍博”。大宫,谓太祖之大斡耳朵也。〕
 
  己丑八月二十四日,诸王、驸马、百官大会怯绿连河曲雕阿兰,
 
  〔《说郛》本无“怯绿连河”四字,今从汪、何二本增。曲雕阿兰,即《秘史》阔朵额阿拉,详前阿不札阙忒哥儿注。自沈子敦读“曲”字上属“怯绿连河”,张石洲诸君皆从之。实则当读“曲雕阿兰”,乃与《秘史》、《元史》及此《录》前后诸异译合也。〕
 
  共册太宗皇帝登极。太宗遂议征收金国,
 
  〔何本“收”作“牧”,今从《说郛》本、汪本。〕
 
  助贫乏,置仓戊,创驿站。命河北先附汉民赋调,命兀都撒罕主之,
 
  〔何本无“赋”字,今从《说郛》本、汪本增。又诸本“都”作“相”,从何校改。《元史·耶律楚材传》:“上雅重其言,置之左右,呼曰吾图撒合里而不名。吾图撒合里,盖国语长髯人也。”〕
 
  西域赋调命牙鲁瓦赤主之。
 
  〔《秘史》有姓忽鲁木石名牙剌洼赤的回回,自兀笼杰赤来见太祖。〕
 
  是年,西域亦思八剌纳城城主遣使来降,
 
  〔何本“亦”作“伊”,不重“城”字,今从《说郛》本、汪本改正。亦思八剌纳,即《秘史》之亦薛不儿,前作泥沙兀儿、匿察兀儿。〕
 
  又西域之西忻都及木剌夷国主躬来朝会。
 
  〔诸本“忻都”作“折相”,“木剌夷”作“不剌夷”,今从何校改。《元史·太宗纪》:“元年,印度国主、木罗夷国主来朝。”〕
 
  庚寅春,遣军将攻守京兆。
 
  〔何本无“军”、“守”二字,今从《说郛》本、汪本增。〕
 
  金主以步骑五万来援,败还,其城寻拔。秋七月,上与太上皇亲征金国,发自阙郡隘过川,
 
  〔何本“隘”作“隰”,今从《说郛》本、汪本。前太祖责汪罕书中有“阙群隘”。〕
 
  由官山
 
  〔汪、何二本“官”作“宫”,今从《说郛》本。〕
 
  铁门关、平阳南下,渡河攻凤翔。
 
  〔此铁门关,与西域之铁门关,同名异地。《元史·札八儿火者传》:“授黄河以北、铁门以南天下都达鲁花赤。”〕
 
  辛卯春,遂克凤翔,又克洛阳、河中数处城邑而还,避暑于官山,会诸王百官,分三道征收金国,期于来年正月毕集南京。是年秋八月二十四日,
 
  〔何本无“二”字,今从《说郛》本、汪本增。〕
 
  上至西京,
 
  〔汪、何二本无“上”字,今从《说郛》本增。〕
 
  执事之人各执名位,兀都撒罕中书令,黏合重山右丞相,镇海左丞相。
 
  〔张石洲曰:“《元史·太宗纪》:‘粘合重山为左丞相,镇海为右丞相。’何氏曰:‘《镇海传》亦作右丞相。’《中州名贤文表》(二十二)许有壬《丞相怯烈公神道碑》:‘始立中书省尚左,公为左丞相。继尚右,改右相。’又云:‘国史曰《脱必赤颜》,至秘也,非有功不纪,公名在焉。’今《秘史》无镇海名,而此《录》有之,知许所云《脱必赤颜》谓是《录》也。”〕
 
  自此始遣撒里塔、火儿赤
 
  〔汪、何二本“始”作“使”,“里”作“哈”,今从《说郛》本。撒里塔,《秘史》作“札剌亦儿歹”,《元史·太宗纪》作“撒礼塔”。〕
 
  征收高丽,克四十余城还。冬十月初三日,
 
  〔何本“十”作“中”,今从《说郛》本、汪本。〕
 
  上攻河中府。十二月初八日,克之。时有西夏人速哥者来告,黄河有白坡可渡,从其言。
 
  壬辰春正月初六日,大兵毕渡及获汉船七百余艘。太上皇遣将贵由乃来报集等军兵已渡汉江,
 
  〔何本无“乃来”、“等”三字,今从《说郛》本、汪本增。贵由乃,人名,亦作“夔曲涅”,《元史·睿宗传》:“乘骑浮渡汉水,遣夔曲涅率千骑驰白太宗。”亦作“魁欲那”,《郭德海传》:“德海导大将魁欲那拔都,假道汉中,历荆、襄而东。”《秘史·续集》(一)作“古亦古捏克把阿秃儿”,贵由乃、魁欲那、夔曲涅皆其略也。《金史·白撒传》有大元将回古乃,亦即此人。〕
 
  上亦遣使于太上皇,谕曰:“汝等与敌连战日久,
 
  〔‘何本无“谕”、“连”二字,今从《说郛》本、汪本增。〕
 
  可来合战。”上于正月十三日至郑州,守城马提控者以城降。
 
  〔何氏曰:“《本纪》作马伯坚。”〕
 
  太上皇既渡汉水,有金大将哈答麾下钦察者逃来,告哈答伏兵于邓西隘截等候。太上皇是夜会兵,明烛而进。哈答、移剌闻知,
 
  〔哈答、移剌,即完颜合达、移剌蒲阿二人,《金史》俱有传,此一举名,一举姓,盖当时蒙古人称之如此。〕
 
  入邓以避其锋。太上皇正月十五日至钧州,雪作。上遣大王口温不花、
 
  〔《元史·宗室世系表》:“别里古台大王子口温不花大王。”〕
 
  国王答思、
 
  〔《木华黎传》作“塔思”。〕
 
  将兵毕至。
 
  〔何本“兵毕”作“军兵”,今从《说郛》本、汪本。〕
 
  十六日,雪又大作。
 
  〔何本无“大”字,从《说郛》本、汪本增。是日,与哈答、移剌合战于三峰山,大败之,遂擒移剌。十七日,上行至,视战所,佳之。〕
 
  汪、何二本无“至”字,今从《说郛》本增。
 
  二十一日,克钧州。哈答匿于地穴,亦擒之。又克昌州、廓州、
 
  〔《说郛》本作“淳攵州”,汪本“淳阝州”。〕
 
  嵩州、曹州、陕州、洛阳、浚州、武州、易州、邓州、应州、寿州、遂州、禁州等,来降。
 
  〔何氏曰:《本纪》:“遂下商、虢、嵩、汝、陕、洛、许、郑、陈、颍、寿、睢、永等州。”考金时河南无昌、淳阝、易、应、遂、禁等州,疑“昌廓”即“商虢”之音讹,“应”即“颍”之音讹,“遂、禁”即“睢、永”之音讹,余未详。〕
 
  三月,上至南京,
 
  〔何本“三”作“上”,今从《说郛》本、汪本。〕
 
  令忽都忽攻之。上与太上皇北渡河,避暑于官山,速不歹拔都、
 
  〔前作“速不台”〕
 
  忒木歹火儿赤、
 
  〔汪、何二本“忒”作“惑”,今从《说郛》本。《秘史》蒙文《续集》(二)载太宗初领散班者,有帖木迭儿,即此忒木歹火儿赤也。〕
 
  贵由拔都、
 
  〔此即前“贵由乃”。〕
 
  塔察儿等
 
  〔何本无“察儿”二字,今从《说郛》本、汪本增。〕
 
  适与金战,
 
  〔汪、何二本“与金战”三字作一“遇”字,今从《说郛》本。〕
 
  金遣兄之子曹王入质。
 
  〔汪、何:二本“兄之”二字作“荆王守仁”四字,今从《说郛》本。〕
 
  我军遂退,留速不台拔都以兵三万镇守河南。秋七月,上遣唐庆使金促降,
 
  〔何本“促”作“保”,今从《说郛》本、汪本。〕
 
  因被杀。八月,金之参政完颜思烈、
 
  〔汪、何二本“思”作“忠”,今从《说郛》本。《金》、《元》二史并作“思烈”。〕
 
  恒山公武仙将兵二十万会救南京,
 
  〔汪、何二本“救”作“于”,今从《说郛》本。〕
 
  至郑州西合战。是年,高丽王复叛,再命撒儿答火儿赤征收。
 
  〔《说郛》本“儿”作“礼”,今从汪、何二本。〕
 
  九月,南京城中仓廪俱竭,金主帅兵六万北渡河,欲复东平、新卫二城。我师逐北,溃散尚干余人,复渡河南。
 
  〔何本“南”作“北”,今从《说郛》本、汪本。〕
 
  癸巳春正月二十三日,金主出南京,入归德。金人遂杀留守南京参政二人,
 
  〔何本“留守”二字在“南京”下,今从《说郛》本、汪本。〕
 
  开门诣速不台拔都降。四月,速不台拔都至青城,崔立又将金主母后、太子二人暨诸族人来献,遂入南京。六月,金主出归德府,入蔡州。塔察儿火儿赤统大军围守。是月十日,遣人入蔡催降弗应,
 
  〔汪、何二本“蔡”作“城”,“弗”作“勿”,今从《说郛》本。〕
 
  四面筑城攻之。八月,别遣按脱等
 
  〔《元史·太宗纪》作“阿同葛”。〕
 
  抄籍汉民七十三万有奇。十一月,南宋遣太尉孟珙等领兵五万运粮三十万石至蔡来助。分兵南面攻之,金人举沂、莱、海、濰等州来降。
 
  〔何本无“濰”字,今从《说郛》本增。汪本作“维”〕
 
  甲午春正月十日,
 
  〔诸本无“正”字,何氏据《元史·太宗纪》增。〕
 
  塔察儿火儿赤急攻,蔡城危逼,金主传位于族人承麟,遂缢焚而死。我军入蔡,获承麟杀之。金主遗体,南人争取而逃。平金之事如此。是年五月,于答兰答八思
 
  〔《元史·太宗纪》作“达兰达葩”,《双溪醉隐集》(五)《达兰河诗》注云:“河名也,在和林北百余里。”疑此是也。〕
 
  始建行宫,大会诸王、百官宣布宪章。是年,群臣奏言:
 
  〔汪、何二本作“曰”,今从《说郛》本。〕
 
  南宋虽称和好,反杀我使,
 
  〔《元史·太宗纪》:“三年,遣搠不平使宋假道,宋杀之。”〕
 
  侵犯我边,
 
  〔谓全子才袭汴、洛事。〕
 
  奉扬天命,往征其辜。”又遣忽都忽主治汉民,别遣塔海绀孛征蜀。
 
  〔《元史·太宗纪》作“达海甘卜”。〕
 
  乙未,建和林城宫殿。
 
  〔和林,今额尔德尼昭。详《长春真人西游记》注。〕
 
  遣曲出、忽都都伐宋,忽都忽籍到汉民一百一十一万有奇,
 
  〔《说郛》本脱“忽都都伐宋”五字,汪、何二本脱“伐宋忽都忽”五字,今订正。案:《元史·本纪》“皇于曲出及胡土虎伐宋”,胡土虎即忽都忽。而《察罕传》云:“皇子阔出、忽都秃伐宋。”《铁迈赤传》云:“又从皇子阔出、忽都、行省铁木答儿定河南。《阿剌罕传》:“岁乙未,从皇子阔出、忽都秃南征。”《脱欢传》:“父脱端:‘从皇广阔出、忽都秃略汴、宋、睢、宿等州。”忽都、忽都秃,即此忽都都。《元史·宗室世系表》所谓忽都睹大王(睿宗次子)者也。《太宗纪》作“胡土虎”乃误,以“忽都忽”当之,是。乙未年有曲出、忽都都南伐之役,此一事也。又,上年:“遣忽都忽主治汉民”,宋子贞《耶律公神道碑》:“甲午诏括户口,以大臣忽睹虎领之。丙申秋,忽睹虎以户口来。”此云“忽都忽籍到汉民”,此又一事也。《录》盖两记之,幸《说郛》本与汪、何二本所脱不同,得以推知其脱误耳。一十一万,汪本作“一十万”,何本作“二十万”,今从《说郛》本。〕
 
  遂分赐诸王城邑各有差。
 
  〔详《元史·本纪》。与“籍到汉民”事,并在次年。〕
 
  丙辰,大庆和林城宫。
 
  〔何本“大”作“入”,今从《说郛》本、汪本。〕
 
  冬十二月,赤曲、阙端等克西川。
 
  〔某氏云:“赤曲即曲出。”《元史·宗室世系表》:太宗皇帝七子,次二阔端太子,次三阔出太子。《元史·太宗纪》:八年丙申冬十月,阔端入成都,皇子曲出薨。此“赤曲”当作“曲出”,下又疑夺“薨”字。〕
 
  丁酉夏四月,筑扫邻城,
 
  〔《元史·地理志》:丁酉夏四月,筑扫邻城。治迦坚茶寒殿,在和林北七十余里。〕
 
  访汉儒选擢除本贯职位。
 
  〔《元史·太宗纪》:“命术虎乃、刘中试诸路儒士,中选者除本贯议事官,得四千三十人。”〕
 
  戊戌,筑秃思儿忽城。
 
  〔汪本无“忽”字,今从《说郛》本。《元史·本纪》作“图稣湖城”。《耶律希亮传》:“铸生希亮于和林南之凉楼,曰秃忽思。”即“秃思忽”之误倒。〕
 
  己亥。
 
  庚子春正月,命暗都剌合蛮主汉民财赋。
 
  〔《元史·本纪》:“以奥都剌合蛮充提领诸路课税所官。”〕
 
  辛丑春,高丽王遣子侄入贡。
 
  〔《元史·本纪》:“辛丑秋,高丽国王王以族子綧入质。”〕
 
  冬十月,命牙老瓦赤主管汉民。十一月初七日,至地名月忒哥忽阑,
 
  〔汪、何二本“忒”作“惑”,“阑”作“闻”,今从《说郛》本。前作“只感忽卢曲雕阿兰”,详前注。〕
 
  病,次日崩。寿至五十六。
 
  〔《说郛》本“六”作“止”,今从汪、何二本。《黑鞑事略》云“今鞑主兀窟丙午生”,则辛丑年五十六。《元史·太宗纪》同。〕
 
  在位一十三年。
 
  〔诸本“三”作“二”,从何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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蒙鞑备录 (宋)孟珙


  鞑靼始起,地处契丹之西北,族出于沙沱别种,故于历代无闻焉。其种有三,曰黑、曰白、曰生。所谓白鞑靼者,颜貌稍细,为人恭谨而孝,遇父母之丧,则嫠其面而哭。尝与之联辔,每见貌不丑恶,其腮有刀痕者,问曰:“白鞑靼否?”曰:“然。”凡掠中国子女,教成,却之。与人交,言有情。今彼部族之后,其国乃鞑主成吉思之公主必姬权管国事。近者入聘于我宋副使速不罕者,乃白鞑靼也。每联辔间,速不罕未尝不以好语相陪奉慰劳,且曰:“辛苦!无管待,千万勿怪。”所谓生鞑靼者,甚贫且拙,且无能为,但知乘马随众而己。今成吉思皇帝及将相大臣,皆黑鞑靼也。大抵鞑人身不甚长,最长者不过五尺二三,亦无肥厚者。其面横阔而上下有颧骨,眼无上纹,发须绝少,形状颇丑。惟今鞑主忒没真者,其身魁伟而广颡长髯,人物雄壮,所以异也。成吉思乃旧牌子头结娄之子,牌子头者,乃彼国十人之长也。今为创国之主,译曰“成吉思皇帝”,东征西讨,其国强大。
 
  今成吉思皇帝者,甲戌生。彼俗初无庚甲,今考据其言而书之,易于见彼齿岁也。其俗每以草青为一岁,人有问其岁,则曰“几草矣”。亦尝问彼月日,笑而答曰:“初不知之,亦不能记其春与秋也。”每见月圆为一月,见草青迟迟,方知是年有闰月也。成吉思少被金人虏为奴婢者十余年,方逃归,所以尽知金国事宜。其人英勇果决,有度量,能容众,敬天地,重信义,所传“忒没真”者,乃小名尔。初无姓氏,亦无名讳,近年以来有女真叛亡之臣为用,所以译曰“成吉思皇帝”。或曰“成吉思”者,乃译语“天赐”两字也。
 
  鞑国所邻,前有糺族,左右乃沙陀等诸部。旧有蒙古斯国,在金人伪天会间亦尝扰金虏为患,金虏尝与之战,后乃多与金帛和之。按李谅《征蒙记》曰:蒙人尝改元天兴,自称太祖元明皇帝。今鞑人甚朴野,略无制度,珙常讨究于彼,闻蒙已残灭久矣。盖北方之国,或方千里,或方百里,兴衰起灭无常。今鞑之始起,并无文书,凡发命令,遣使往来,止是刻指以记之,为使者虽一字不敢增损,彼国俗也。其俗既朴,则有回鹘为邻,每于两河博易贩卖于其国,迄今文书中自用于他国者,皆用回鹘字,如中国笛谱字也。今二年以来,因金国叛亡降附之臣无地容身,愿为彼用,始教之以文书。于金国往来,却用汉字。去年春,珙每见其所行文字,犹曰“大朝”,又称年号曰“兔儿年”、“龙儿年”,自去年方改曰“庚辰年”,今曰“辛巳年”是也。又慕蒙为雄国,故以国号曰“大蒙古国”,亦女真亡臣教之也。珙亲见其权皇帝摩睺国王,每自称曰“我鞑靼人”。凡彼大臣、元帅皆自称曰“我”,彼亦不知其为蒙,是何等名字,何为国号,何为年号。今所行文书,皆亡臣识字者,强解事以教之耳。《南迁录》载鞑有诏与金国,称“龙虎九年”,非也。以愚观之,更迟年岁,则金虏叛亡之臣必教之撰其诞日以为节,又必教之改年立号也。
 
  成吉思皇帝兄弟凡四人,成吉思居长;大皇弟久已阵亡;二皇弟名便古得那,现在国中;三皇弟名忒没葛真,所统多系自己人马,善战有功。成吉思有子甚多,长子比因破金国,攻打西京云中时阵亡;今第二子却为大太子,名约直;三太子名阿戴;四太子名天娄;五太子名龙孙,皆正后所生。其下又有十数人,乃庶生也。女七人,长公主曰阿其鳖拽,今嫁豹突驸马;二公主曰阿里黑百因,俗曰必姬夫人,曾嫁金国亡臣白四部,死,寡居,令领白鞑靼国事,日逐看经,有妇士数千人事之,凡征伐斩杀,皆自己出;三公主曰阿五,嫁尚书令国舅之子。余未知名。孙男甚众。
 
  元勋乃彼太师、国王没黑助者,小名也。中国人呼曰摩睺罗,彼诏诰则曰“谋合理”,南北之音,轻重所讹也。现封天下兵马大元帅,行省太师、国王。乃黑鞑靼人,十年以来东征西讨,威震夷夏,征伐大事,皆决于己,故曰“权皇帝”。衣服制度,全用天子礼。有兄曰计里歌那,自有千骑,不任事。弟二人,长曰抹歌,现在成吉思处为护卫,次曰带孙归王,每随侍焉。国王每戒所部将士如己兄弟,只以小名称之,不许呼他“国王”。止有一子名袍阿,美容仪,不肯剃婆焦,只裹巾帽,着窄服,能诸国语。其次曰兔花儿太傅国公,声名亚于摩睺罗。又有鹧博者,官亦穹,现随成吉思掌重兵。又其次曰按赤那邪,现封尚书令,乃成吉思正后之弟,部下亦有骑军十余万,所统之人颇循法。鞑人自言随国王者皆恶,随尚书令者皆善也。其次曰刘伯林者,乃燕地云内州人,先为金人统兵头目,奔降鞑主。有子甚勇,而鞑主忒没真长子战死,遂将长子之妃嫁伯林之子,同鞑人破燕京等处,甚有功。伯林昨已封王,近退闲于家,其了现为西京留守。又其次曰大葛相公,乃纪家人,现留守燕京。次曰札八者,乃回鹘人,已老,亦在燕京同任事。燕京等处有纸蝉儿元帅、史元帅、刘元帅等甚众,各有军马,皆听摩睺国王命令。
 
  首相脱合太师者,乃兔花太傅之兄,原女真人,极狡狯,兄弟皆归鞑主为将相。其次鞑人宰相乃卒埒夺合,又有女真七金宰相,余者未知名,率皆女真亡臣。向所传有白俭、李藻者为相,今止见一处有所题曰“白俭提兵至此”,今亦未知存亡。燕京现有移刺晋卿者,契丹人,登第,现为内翰掌文书。又有杨彪者,为吏部尚书。杨藻者,为彼北京留守。珙所见国王之前,有左右司二郎中,使人到,则二人通译其言语,乃金人旧太守,女真人也。
 
  鞑人生长鞍马间,人自习战,自春徂冬,旦旦逐猎,乃其生涯。故无步卒,悉是骑军,起兵数十万。略无文书,自元帅至千户、百户、牌子头传令而行。凡攻大城,先击小郡,掠其人民以供驱使,乃下令曰:“每一骑兵,必欲掠十人。”人足备,则每名需草或柴薪或土石若干。昼夜迫逐,缓者杀之。迫逐填塞濠堑立平,或供鹅洞炮座等用,不惜数万人。以此攻城,壁无不破者。城破,不问老幼、妍丑、贫富、逆顺,皆诛之,略不少恕。凡诸临敌不用命者,虽贵必诛。凡破城守有所得,则以分数均之。自上及下,虽多寡每留分,为成吉思皇帝献,余物则敷俵有差。宰相等在于沙漠不临戎者,亦有其数焉。凡征伐谋议,先定于三、四月间;行于诸国,又于重五宴会,共议今秋所向。各归其国,避暑牧养至八月,咸集于燕都,而后启行。
 
  鞑国地丰水草,宜羊马。其马初生一二年,即于草地苦骑而教之,却养三年,而后再乘骑。故教其初是以不蹄啮也。千马为群,寂无嘶鸣,下马不用控系,亦不走逸,性甚良善。日间未尝刍秣,惟至夜方始牧放之,随其草之青枯野牧之,至晓搭鞍乘骑,并未始与豆粟之类。凡出师人有数马,日轮一骑乘之,故马不困弊。
 
  鞑人地饶水草,宜羊马,其为生涯,止是饮马乳以塞饥渴。凡一牝马之乳,可饱三人。出入止饮马乳,或宰羊为粮。故彼国中有一马者,必有六七羊,谓如有百马者,必有六七百羊群也。如出征于中国,食羊尽,则射兔鹿野豕为食,故屯数十万之师,不举烟火。近年以来掠中国之人为奴婢,必米食而后饱,故乃掠米麦,而于紥寨处亦煮粥而食。彼国亦有一、二处出黑黍米,彼亦解为煮粥。
 
  鞑人在本国时,金虏大定间,燕京及契丹地有谣言云:“鞑靼去,赶得官家没去处”。葛酋雍宛转闻之,惊曰:“必是鞑人为我国患。”乃下令极于穷荒,出兵剿之,每三岁遣兵向北剿杀,谓之“减丁”,迄今中原人尽能记之曰:“二十年前,山东河北谁家不买鞑人为小奴婢,皆诸军掠来者。”今鞑人大臣,当时多有虏掠住于金国者,且其国每岁朝贡,则于塞外受其礼币而遣之,亦不令入境。鞑人逃遁沙漠,怨入骨髓。至伪章宗立,明昌年间不令杀戮,以是鞑人稍稍还本国,添丁长育。章宗又以为患,乃筑新长城在静州之北,以唐古糺人戍之。酋首因唐古糺叛,结即刺都糺、木典糺、咩糺、后典糺等俱叛,金人发兵平之,糺人散走,投于鞑人。且回鹘有田姓者,饶于财,商贩巨万,往来于山东河北,俱言民物繁庶,与糺同说茸达人治兵入寇。忒没真忿其欺凌,以此犯边,边州悉败死。燕虏谓鞑人曰:“我国如海,汝国如一掬沙,岂能动摇?”鞑人至今老幼皆能记此语。虏君臣因其陷西京,始大惊恐,乃竭国中精锐,以忽杀虎元帅统马步五十万迎击之,虏大败。又再刷山东河北等处及随驾护卫等人马三十万,令高琪为大元帅,再败。是以鞑人迫于燕京城下。是战也,罄金虏百年兵力,销折溃散殆尽,其国遂衰。后来凡围河北、山东、燕北诸州等处,虏皆不敢婴其锋。
 
  鞑人袭金虏之俗,亦置领录尚书令、左右相、左右平章等官,亦置太师、元帅等。所佩金牌,第一等贵臣,带两虎相向,曰“虎斗金牌”,用汉字曰“天赐成吉思皇帝圣旨,当便宜行事”。其次素金牌,曰“天赐成吉思皇帝圣旨疾”。又其次乃银牌,文与前同。如成吉思亦行诏敕等书,皆金虏叛臣教之遣发临民者。四曰宣差。逐州守臣皆曰节使。今在于左右,带弓矢执侍,骁勇者曰“护卫”。
 
  鞑人贱老而喜壮,其俗无私斗争。正月一日必拜天,重午亦然,此乃久住燕地,袭金人遗制,饮宴为乐也。摩睺国王每征伐来归,诸夫人连日各为主礼,具酒馔饮宴,在下者亦然。其俗多不洗手,而拿攫鱼肉,手有脂腻,则拭于衣袍上,其衣至损,不解浣濯。妇女往往以黄粉涂额,亦汉旧装传袭,迄今不改也。上至成吉思,下及国人,皆剃婆焦,如中国小儿留三搭头在囟门者,稍长则剪之,在两下者,总小角垂于肩上。
 
  成吉思之仪卫,建大纯白旗以为识认,外此并无他旌幢,惟伞亦用红黄为之。所坐乃金裹龙头胡床,国王者间有用银处,以此为别。其鞍马带上亦以黄金盘龙为饰,国王亦然。今国王止建一白旗,九尾,中有黑月,出师则张云。其下必元师方有一旗,国王止有一鼓,临阵则用之。鞍轿以木为之,极轻巧。弓必一石以上,箭用沙柳为笴。手刀甚轻薄而弯。
 
  彼奉使曰宣差,自皇帝或国王处来者,所过州县及管兵头目处,悉来尊敬。不问官之高卑,皆分庭抗礼,穿戟门,坐于州郡设厅之上,太守亲跪以效勤。宿于黄堂厅事之内,鼓吹旗帜妓乐,郊外送迎之。凡见马则换易,并一行人从悉可换马,谓之“乘铺马”,亦古乘传之意。近使臣到彼国王处,凡相见礼文甚简,言辞甚直,且曰:“你大宋好皇帝,好宰相”。大抵其性淳朴,有太古风。可恨金虏叛亡之臣教之,今乃凿混沌,破彼天真,教以奸计,为可恶也。
 
  凡占卜吉凶,进退杀伐,每用羊骨扇,以铁椎火椎之,看其兆坼以决大事,类龟卜也。凡饮酒,先酬之。其俗最敬天地,每事必称天,闻雷声则恐惧,不敢行师,曰“天叫”也。
 
  其俗出师不以贵贱,多带妻孥而行,自云用以管行李、衣服、钱物之类。其妇女专管张立毡帐,收御鞍马辎重、车驮等物事,极能走马。所衣如中国道服之类。凡诸酋之妻,则有顾姑冠,用铁丝结成,形如竹夫人,长三尺许,用红青锦绣或珠金饰之,其上又有杖一枝,用红青绒饰。又有文袖衣,如中国鹤氅,宽长曳地,行则两女奴拽之。男女杂坐,更相酬劝不禁。北使入于彼国,王者相见了,即命之以酒,同彼妻赖蛮公主,及诸侍姬称夫人者八人,皆共坐。凡诸饮宴,无不同席。所谓诸姬,皆灿白美色,四人乃金虏贵嫔之类,余四人乃鞑人。内四夫人者,甚姝丽,最有宠,皆胡服胡帽而已。
 
  国王出师,亦以女乐随行,率十七八美女,极慧黠,多以十四弦等弹大官乐等,四拍手为节,甚低,其舞甚异。鞑人之俗,主人执盘盏以劝客,客饮,若少留涓滴,则主人者更不接盏。见人饮尽,乃喜。如彼击鞠,止是二十来骑,不多用马者尔,恶其哄闹也。击罢,遣人来请我使人。至,彼乃曰:“今日打球,如何不来?”答曰:“不闻钧旨相请,故不敢来。”国王乃曰:“你来我国中,便是一家人,凡有宴聚打球,或打围出猎,你便来同戏,如何又要人来请唤?”因大笑而罚六杯。终日必大醉而罢。且每饮酒,其俗邻坐更相尝换,若以一手执杯,是令我尝一口,彼方敢饮。若以两手执杯,乃彼与我换杯,我当尽饮彼酒,却酌酒以酬之。以此易醉。凡见外客醉中喧哄失礼,或吐或卧,则大喜曰:“客醉,则与我一心无异也。”我使人相辞之日,国王戒伴使曰:“凡好城子多住几日,有好酒与吃,好茶饭与吃,好笛儿、鼓儿吹着打着。”所说“好城子”,乃好州县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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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학자들이 뽑은 중국에서 우수한 역사 학술지들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중국에서는 잡지를 우체국을 통해서 편하게 받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아직 한국으로의 배송은 안됩니다.)

문제는 아래의 잡지가 모두가 정규적인 학술잡지가 아니고, 몇몇 것은 비정규적인 학술 잡지라서 우체국을 이용해서 구매하지 못합니다. 참고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요 잡지들은 사실상 우체국을 통해서 배송이 된답니다.


序号

刊物名称

1

历史研究

2

中国史研究

3

中国社会科学

4

近代史研究

5

文史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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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考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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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华文史论丛

文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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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考古学报

12

唐研究

13

史学理论研究

北大史学

15

史学月刊

16

国学研究

17

北京大学学报(哲学社会科学版)

18

清史研究

19

史林

20

当代中国史研究

中国边疆史地研究

22

文史哲

23

考古与文物

24

南京大学学报(哲学人文社科版)

25

历史档案

26

抗日战争研究

文献

中国社会经济史研究

29

燕京学报

中国农史

31

中国学术

32

史学集刊

33

中国历史地理论丛



이처럼 사람들은 예측하지 못한 일, 갑작스럽게 발생한 일,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일에 대해 원인을 알고자 노력합니다. 그 원인을 알아야만 부정적인 상황 또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결국, 귀인은, '원인을 파악함으로써 그 상황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라는 통제감(Sense Of Control)을 얻기위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입니다.

그렇다면 예측하지 못했고, 갑작스럽게 발생했으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일에 대한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특 히 개인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위협적이고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라면 말입니다. 음모론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상황에서 제기되게 됩니다. 그 원인이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고, 실체에 대해 정확하게 모르는 경우 사람들의 귀인 욕구는 아주 강렬해져서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러다보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증명이나 추론보다는 그럴듯한 설명에 귀를 기울이게 되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상태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음모론의 대표적인 오류가 '대표성 발견법(Representativeness Heuristics)'입니다. '대표성 발견법'은 어떤 결정을 할 때 정보가 얼마나 정확한지를 따지기보다는 '얼마나 그럴듯한지'를 따지게 되는 오류입니다.

심리학으로 꿰뚫어본 역사, '누다심의 심리학 블로그' 중에서...

1차사료나 당시에 적은 글이 예전에는 대단하게 생각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1차사료는 모두가 사실이라고 생각되었었죠. 하지만 그러한 1차사료도 해당 글을 적은 사람의 생각이 들어갈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절대적인 사실일 수는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또한 1차사료가 인간의 삶의 일부분(보통은 정치에만) 편중되어있는 상황에서 정확한 "역사"를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현대 중국사를 예로 들면, 당나라와 송나라 이전의 시기의 사료는 매우 희귀하며, 이른바 당송이전의 위대한 학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모두가 추론법을 씁니다.

한마디로 음모론과 같은 오류인 "얼마나 그럴듯한지"에 대해서 따집니다. 물론 사료나 고고학적자료라는 것을 근거로 제시하며 추론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확한지 아닌지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미 역사가 진실이나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다시 한번 비참해 지는 것이죠.



하.지.만. 모든 학문이 그런것은 아닐까요? 여기서 말하는 심리학도 인간의 잠재의식을 기반으로 해서 성립된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정말 잠재의식이 있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정확하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단지 있을 가능성이 높을 뿐이죠.

귀인이라는 것을 알고 싶어하는 것. 곧 왜 이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하는 것은 모든 학문의 기본 속성입니다. 특히 인문학의 기본은 결국 인간이 무엇이냐에 대한 질문이지요. 이것은 인간의 기본 속성이고, 그것이 인간이 만든 학문도 당연히 이 속성을 가지고 있겠죠.

무엇보다 정확함을 따지는 것과 얼마나 그럴듯한가의 차이는 매우 미묘합니다. 왜냐하면 정확한 정답은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집단이 뒤에서 모든 일을 진행했다라는 음모론도 어떤 경우에는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음모론도 설득력이 있는 정황증거가 없으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말입니다. 단지 확고한 물적증거가 부족할 뿐이지만, 이러한 확고한 물적증거는 다른 학문에서 많고 적은 차이일뿐 100%의 정확도는 현존하는 어떤 학문도 제시하지 못합니다.이런 상황에서 대표적 발견법이라는 오류는 모든 학문이 이 같은 오류 속에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더 비참해 보이는 결론이 나옵니다. "모든 학문은 얼마나 정확한지" 따지지만, 그것의 정체는 '얼마나 그럴듯한가"의 다른 말일뿐이다.

모든 학문은 단지 음모론일 뿐이다.


.....감기에 걸려 있어서 그런지 우울함에 부정적 생각들의 폭팔이군요...

고구려를 뺏기면 안된다는 말을 합니다. 웃기는 소리입니다.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라고 해서, 한국의 역사가 아니라는 식의 생각이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르겠습니다.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이면서 한국의 역사일 수도 있습니다.혹은 중국만의 역사일수도 있고, 한국만의 역사일수도 있습니다. 또한 둘의 역사가 모두 아닐 수도 있습니다.

줄여서 요약 정리하면...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라고 한국의 역사가 아닌것은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뺏긴다"니?
대체 언제부터 고구려가 한국의 역사의 "것"이었답니까?

최근에 중화인민공화국 교과서에 고구려가 중국의 영토라고 하고, 한국의 교과서에는 예전부터 그랬으니까? 그런식이라면 이미 당이 고구려를 정복하고 고구려를 스스로의 영토라고 했고, 그것을 현재 한국인들이 선조라고 생각하는 신라가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사서에 기록이 되죠. 그럼 중국의 "것"이었던게 먼저인가요? ^^ 사실 이것도 헛소리입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건 당시 고구려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고구려의 역사는 고구려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고구려 사람들이 몇 천년뒤에 "나는 한민족이야!"라고 생각하셨겠쪄요~!?

라면 억지로 개그하는군요. 웃기지도 않지만요. 후..

KIM이라는 분의 장문의 덧글에 덧글을 달다가 우울해져서 외쳐봅니다.
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인지 한숨이 나올 뿐입니다.




신묘님의 그 땅에 산다고 모두 자국의 역사라고 한다면 인디언도 미국의 역사입니까?
http://sinaysi.tistory.com/4


---- 아래쪽은 제가 덧글로 단 사항입니다.
제 블로그에 트랙백을 걸으셨더군요. 와서 글 봤습니다. 죄송하지만, 위에서 말씀하신"그런 사실은 무엇이냐고 생각한다고 물으신다면 끝없는 진실의 탐구라고 하겠습니다. "라는 말만이 공감이 가는군요. 아마 역사학을 공부해보셨거나, 최소한 취미로라도 공부를 하셨던듯 싶군요. 하지만 위의 논리는 별로 끝없는 진실로의 탐구라고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님이 말씀하신 역사관은 흔히 "민족국가주의 역사관"이라고 불리는 것이며, 지금 현재 님이 지적하신 중국과 일본의 소수의 학자들의 "만행" 역시 이러한 민족국가주의 역사관에서 나오는 오류입니다. 다시 말해서 님의 말은 타자의 역사관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의 역사관만이 옳다고 외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세계에는 수 많은 역사관이 있습니다. 하나의 역사관만으로 과연 진실이라는 것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님이 말씀하신 것을 간단하게 반박해 드리겠습니다. "같은 민족이라고 누가 정했답니까? 그럼 고구려시기정도에 한반도로 건너온 섭씨나 제갈씨들은 한민족이 아닌가요? " 이것이 민족역사관의 문제점입니다. 민족이라는 것은 19세기 이후에나 만들어진 개념인데 그것을 고대에 고대로 반영해서 설명하려 하면 쉽게 벌어지는 것이죠. 언어가 같다고 같은 민족인가요? 아니면 혈연관계인가요? 아니면 종교인가요? 아니면 민속인가요? 아직도 어느 누구도 정확하게 답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현대 민족의 개념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고대로 "민족"의 개념을 소급해서 적용한다는 것은 사실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민족역사관에도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님처럼 민족역사관"만"이 옳다고 하는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역사관을 기초로 생각하시는 것은 좋지만, 그것의 장점과 단점을 냉정하게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두가지 수정사항이 있습니다. 한국의 지금까지의 역사관은 전혀 소극적이지 않았으며, 전혀 축소지향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특히나 군정시절에는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하여, 예전 정신문화연구원을 통해서 수 많은 역사적 부풀리기가 자행되어왔습니다. 그리고 90년대부터 수 많은 학자들이 이제 그 그늘에서 벗어나서 예전에 고증없이 무조건 "민족정신의 고취"라는 것을 빌미로 자행된 푸풀리기를 수정하려 노력하니 축소지향으로 느껴지시는지 모르겠군요.

남은 한가지는 일면 "환빠"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건 간단합니다. 이 분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그 분들은 정확한 근거가 없는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역사학외의 다른 모든 학문이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근거와 논증입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주요 근거로 채택하고 있는 "환단고기"는 역사학적으로 가치가 없는 책입니다. 이미 학자들의 연구가 있었고, 그 책은 19세기 말에 만들어진 책으로 확정되었습니다. 그 학자들이 사대주의이고 한국 역사를 축소하려고 한다라는 말은 안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학자들의 연구결과가 설득력이 있고,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지금 기억나는 예 중에서는 "경제"라는 단어와 "문화"라는 말의 사용이 있군요. 이 두 단어는 고대한어에 결코 등장하지 않습니다. 19세기에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단어입니다. 그런데 환단고기라는 책에는 이 두 단어의 사용이 조금 많이 있군요. 이 외에 수 많은 반례들이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0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런 환단고기를 근거로 거의 모든 말을 하는 일명 "환빠"들의 말도 당연히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근현대 한반도의 사상사나 민간설화차원에서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위의 문제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다른 이의 생각과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일이 아닐까요?


덧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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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난폭한 말을 하겠습니다.

1) 동북공정 문제 별거 없습니다. 역사관이 다른걸 어쩌란 말입니까?

2) 그리고 한국에서 동북공정 난리치는 교수님들. 먹고 살기 힘든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을 대표한다는 지식인들로서 적당히 체통을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고들 있지 않으십니까? 이건 논쟁할 건덕지가 안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3)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동북공정이 무슨 거대한 일인줄 아십니까? 박사를 지도할 자격도 없는 연구원들이 모여서 사바사바하는데가 그넘의 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소입니다. 어차피 그들 의견이 중국 역사학계의 주.류.도 아닌데 멀 그리 크게 부풀리는 건지...후..

4) 한국의 민족원류적 역사관이나 중국의 다국가일민족설이나 모두가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강점이 있죠.

5) 마지막으로 민족....이 정말 대단한 겁니까? 그럼 전 지.구.민.족.입니다.



제목에 대한 답변은 아래와 같습니다.
현재 미국이 채택하고 있는 것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미국이라는 나라를 이루어냈다는 역사관입니다. 당연히 그 다양한 사람 중에서 인디언이 들어가며, 고로 인디언도 미국의 역사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미국이 건립되기 전, 콜롬버스가 아직 아메리카 대륙에 오기 전의 인디언의 역사까지 미국의 역사로 포함되는 것일수도 있고, 혹은 영국과 프랑스에 의하여 식민지가 세워진 시기부터 일수도 있고, 혹은 아메리카 합중국이 세워진 때부터일수도 있고, 혹은 처음에 반미국적이던 인디언들이 결국 굴복하여 미국에 합류한 때일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각각의 역사관마다 다.른.겁.니.다.
무엇 하나가 단정적으로 틀.린.게. 아.닙.니.다.




문제와 결론

다신교에서 일신교로 발전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해를 한다. 일신교가 더욱 발달된 것이고, 더 훌륭하고, 다신교는 미신이나 저급 종교라고, 웃기는 소리다. 과학은 발전하면 더욱 좋아질지는 모른다.(사실 환경 오염이니 해서 역사적이나 지구 전체를 놓고 보았을때 과연 좋아진것인지 의문이 팍팍 들지만-_) 하지만 인간의 일에서 소위 말하는 발전이 더욱 훌.륭.한 것은 아니다.


이제부터는 "다신교에서 일신교가 나왔고, 현재는 다신교와 일신교가 동시에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제부터 말도 안되는 논증 시작 --
(왠만하면 보지 마시와요 -0-)


1. 다신교란?
지금까지 학자들이 추측하기로 인류의 최초의 종교적 형태는 다신교였다. 다신교는 여러명의 신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그리스 신화를 보면 여러명의 신들이 나온다. 물론 제우스가 대빵이긴 하지만 그의 아내 헤라한테 맨날 바가지를 긁힌다. 동양의 인도를 보자. 불교를 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관세음보살이 부처중에 대빵이라고 보통은 이야기 하지만 그 외에도 천수관음이니 머니 해서 부처님은 어려명이 있다.

성경에도 이러한 다신교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 중에서 모세의 십계명의 제 1조항은 유념할만하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라는 말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외에도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샤마니즘을 주류로 해서 세계의 종교는 기본적으로 다신교였다. 물론 몇몇 일신교 사상이 보이긴 하지만, 지금 말하는 것은 주류다. 그리고 유대교가 생겨나고, 기독교가 거기서 파생되고, 다시 이슬람이 파생된다. 그리고 자신들이 가장 위대한 종교라고 부르짖는다. 정말 그럴까?


2. 종교개혁 =  회귀
흔히 종교개혁을 말하면 마치 예전의 카톨릭은 매우 낙후되고 안 좋은 종교로 생각되어지고, 개신교는 훌륭하고 대단하게 보인다. 그런데 사실 개신교는 성경지상주의에 가깝다. 다시 말해서 오히려 탈속, 혹은 신에서의 멀어짐이 아니라, 더욱더 신에 밀착되고자 하는 노력이다.

흔히 나쁘게 말하는 면죄부. 이걸 다르게 해석하면 신의 대리인이지만 어디까지나 한 명의 인간인 교황이 신이나 할 수 있는 죄를 사할 수 있고, 그리고 사람들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돈을 모아서 죄를 사면 받을 수 있다는 소리다. 인간의 우주인 것이다.

하지만 개신교는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나선다. 개신교의 대부분의 교파들이 천명론, 다시 말해서 구원받을 사람은 이미 다 정해놨다는 이론을 보통 전개하고는 한다. 여기서 인간이 할 수 있는일은 없다. 어차피 신이 다 정해놓았다는 것 아니겠는가?

이것이 원리주의이고, 점차 세속화되는 종교에 대한 반발로 초기의 순수?!했던 상태로 돌아가자는 것이 소휘 종교개혁이다. 한 마디로 별로 발.전.이 아니다. 현실에 비유를 하면, 박정희때 한강다리 막 심고, 고속도로 뚫고, 빌딩 올리니 이렇게 발전하지 않았냐!? 지금 경제 문제는 박정희때처럼 마구마구 건설하면 된다라는 이명박을 연상하면 된다. 그는 개발 지상주의로 인하여 한강 다리 무너지고 마구잡이 건설로 회손된 자연과 문화유물은 생각도 안하는 거다! 그리고 그 당시와 지금의 상황이 다르다는 것도 인식하지 않고, 무조건 예전처럼 대공사(대운하) 만들자! 라고 말하는 거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본질이다.

다시 말해서 개신교는 인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보면 매우 어처구니 없는 종교이다. 인간은 자유가 없다. 다 신이 정해놓은 거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의 기본적인 양식인 개인의 자유라는 명제앞에서 가장 진보되었어야 할 개신교는 오히려 카톨릭만도 못하다. 차라리 카톨릭보다 몇 천년전에 만들어진 불교의 사상이, 개나 소나 모두가 다 부처가...다시 말해서 절대 신이! 될수가 있다, 가 훨씬 인간의 자유와 근접하다.


3. 실제 종교인의 숫자...
무엇보다 현재 마치 모든 사회가 일신교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환상일 뿐이다. 이슬람과 기독교가 일신교의 명맥을 유지한다면, 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 곳곳에서 아직도 유구히 남아있는 샤마니즘이 다신교의 대표주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인구만으로 따지면 일신교나 다신교나 숫자는 비등할 뿐이다.

그리고 유교를 종교로 보냐 마냐라는 논쟁이 있는데, 만약 종교로 놓고 본다면, 당연히 많은 조상신을 모시는 다.신.교.다. 이로 인하여 유교 문화권의 수 많은 인구가 다신교로 거의 기본적으로 고고싱이다. 유교가 종교가 아니더라도, 중국인들의 식당을 가면 왠만하면 보이는 관우상도 샤머니즘의 한 형태이다. 그로 인하여 중국인들은 살짝 다신교도로 포함시키기! -0-

단지 일신교는 다신교에 비하여 매우 강력하게 포교활동을 전개하기 마련이고, 이유는 무지 막지 간단하다 안 믿으면 지옥 가니까-- 내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이 지옥을 가게 해서 쓰겠는가?!, 그로 인하여 일신교의 숫자가 많다고 느껴지기 마련이지만, 사실 일신교도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

그럼 여기서 묻고 싶다. 사람들은 병신이라서 후진 다신교를 아직도 믿고 있는가?! 머...그럴 수도 있다. 가끔 보면 개인은 현명하지만 대중은 무식하다라는 말이 생각나고는 하지만, 특히 못 사는 사람들이 한나라당을 지지한다고 하는 꼴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 이지만--, 인간을 믿고! (믿기 싫지만...-_)


4. 발전 지상주의
발전이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사람의 심리이다. 하지만 발전은 반드시 좋지만은 않다. 지금 현재 이렇게 블로그질을 하고 컴퓨터를 쓰는 것이 과학의 발전때문이라고 한다. 확실히 예전보다 좋아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 생각하면, 이렇게 블로그질을 하고 위해서, 컴퓨터를 만드는 비용, 통신망을 구축하는 비용, 그리고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서 타들어가는 석유, 그리고 오염되는 자연을 생각하면, 과연 발전해서 좋기만 한건지 의심해 봐야하지 않을까?


5. 사실은 말이다.....
2005년에 발표된 어떤 중국 학자의 글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몇 자 적어봤다. 그는 19세기의 서양 이론으로 샤머니즘은 Magic(마술)이란다. 종교가 아니란다. 그리고 그 논증 중에서 샤머니즘은 다신교여서 종교가 아니란다. 원시 종교란다. 그리고 종교는 무조건 일신교란다. 그럼 불교는 종교가 아니었던 건가....=_=;; 그리고 힌두교는?! =_=;;  거참....만약 50년전이었다면 통했을지도 모르겠지만....지금 시대에 와서 이런 구식 이론으로 들이대면 생각되는건...웃기고 자빠지고 있네라는 생각뿐이랄까?

명색이 교수라는 작자가...으휴..-_- 기왕 외국 사상을 들여다 오는 보따리 상을 하려면 최신 사상을 들여오던지 말이지...이건 예전 구식 이론을 들고 들어오니 어쩌란 건지 궁금할 따름이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샤마니즘의 긍정적인 면을 보기 시작한 풍조인데..이 작가는 멀 어쩌란 건지..

일개 학생인 내가 어처구니 없어할 글이면...으휴-_......
하긴 제목부터가....."샤머니즘의 본질을 종교가 아니라 무술이다"라니...종교 본질이야 영원한 과제이긴 하다만...누가 이거 토론하냐..요즘-_- 어차피 해답이 있을 수가 없는 문제인데 말이다.

그리고 말이다. 정말 잡담으로 적는 것이긴 하다만...정리 엉터리닷! 음하하하..--
어차피 나만 알아보면 되는거얏!! 음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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