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학계에서 북방사학계을 장악하고 있는 북경대학교 사학과의 거의 모든 고대사 교수님들이 참가하고 있는 중국고대사 연구센터입니다. 현재 주 연구대상은 위진남북조시대와 돈황학입니다. 국가에서 중심연구센터로 선정되어있으며, 북경대의 북쪽의 조용한 곳에 연구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연구소내 자체 도서관에는 한국쪽 논문자료와 사료도 상당수 보유하고 있습니다.
주의 : 파이어폭스로 접속하면 완벽하게 어긋나게 나옵니다. -_;;;
바로의 중얼중얼
맨날 한국쪽 싸이트만 올렸더니, 문득 중국쪽 싸이트도 올리고 싶어졌습니다. 그리 많은 자료가 쌓여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수준있는 논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와 협조해서 진행하고 있는 작업들도 실시간으로 공개되고 있고요. 하.지.만. 역시 연구자들이 아니라면 별로 유용하지는 않을 듯 합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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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한국에서는 고구려사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언론매체가 조용히 있는 것 같지만 중국에서는 계획을 천천하고 조용히, 그리고 확실하게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학도이든 혹은 다른 일을 하고 있는 한국인이 대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중국인보다 더 정확하고 명확하게 고구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가장 기본적인 대비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고구려사에 대해서, 고구려라는 나라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신문기사에 나오는 것은 학계에서 이야기 되는 수 많은 이야기 중에 일부일 뿐입니다.
고구려사에 대해서 더욱 심도있고 자세하게 공부하시 싶으신 분들에게 고구려연구회 싸이트를 소개합니다. 이 싸이트를 아시는 분도 많이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아직 모르시는 분을 위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바로의 중얼중얼
요즘 알바때문에 개발새발이었던 포스트의 질이 한층 하락해버렸습니다. 토요일 알바가 끝나면 밀린 레포트 2개입니다. 이런 것을 보고 인생이라고 쓰고 삽질이라고 읽는다죠.ㅠㅠ
1. 서언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함으로써 우리민족 최초의 단일국가가 탄생하게된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 신라는 또 하나의 전쟁을 치루고서야 비로소 완전한 통일국가가 되었는 바, 이는 동맹국이었던 당나라와의 전쟁이었던 것이었다.
나·당동맹 체결 당시 당 태종은“백제의 영토와 평양 이남의 고구려 땅은 신라에게 준다”라고 김춘추에게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을 저버리고 막강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강대국의 위세로 멸망한 백제, 고구려와 같이 신라도 속국으로 삼고자 하는 당나라에 대하여 신라는 7년간의 대당전쟁에서 군사적 실력으로 당당하게 당나라 군사를 축출하고서야 자주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신라는 지상군뿐만 아니라 수군의 효과적인 작전으로 당나라 군대를 곤경에 빠트려 결국은 군사적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신라 수군이 이 전쟁에서 어떠한 활약을 통하여 전쟁의 승리에 기여했는가를 살펴보고, 현재의 우리 해군에게 주는
시사점을 도출해 보고자하는 것이다.
2.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 고구려의 멸망
가. 정세
고구려, 백제 두 나라와 적대관계로 국운을 걸고 싸우기가 어려워진 신라는 김춘추와 김법민 부자를 당에 보내어 나·당 군사동맹을 체결하는 데 성공하였다.
한편, 수에 이어 고구려를 정복하는 데 실패를 거듭한 당의 고종은 고구려에 대한 정복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 고종은 655년부터 고구려에 대한 침공을 시도하지만,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아무런 소득없이 회군하고 만다. 여기서 당은 신라의 요청에 따라 고구려보다 먼저 그 후방에 있는 백제를 공략하여 후방기지를 만들고 고립된 고구려를 전후에서 협공하자는 전략으로 변경하면서 신라와 연합작전을 전개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동북아의 국제정세는 고구려·백제·일본으로 이어지는 남·북연합세력과 신라·당으로 이루어진 동서세력의 대결 국면으로 돌입하게 된 것이다.
나. 백제의 멸망
당 고종은 660년에 소정방(蘇定方)을 총지휘관으로 임명하고 병력 13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정복할 것을 명령하였다. 소정방이 거느린 당군은 산동반도를 떠나 황해를 건넌 후 남하하여 6월에 아산만의 덕적도에 도착하여 신라의 왕자 법민이 인솔한 신라 전선 1백 척과 합류하였다. 나·당 양국의 지휘부는 여기서 백제 침공에 대한 연합작전 계획을 토의하여 결정하게 되었다. 즉 당군은 바다 길로 남하하여 백강(금강하류)으로 들어가고, 신라군은 육로로 백제의 동쪽 국경선을 돌파하여 사비성(부여)으로 진출하여 7월 10일 사비성에 대한 연합 공격전을 전개하기로 한 것이다.
소정방의 당군이 백강 입구인 기벌포(伎伐浦)에 이르렀으나, 의자왕은 그곳을 지키지 않고 수군으로 하여금 사비성 부근의 백강을 지키게 하고 육군에게는 그 강변에 진을 치게 하였다.
백제의 수군을 파하면서 백강을 거슬러 들어가 사비성 부근에 상륙한 소정방의 보병과 황산벌에서 개백의 5천 결사대를 격파하고 도착한 김유신의 5만 신라군이 도성에 육박함에 따라 백제군은 총력을 다하여 항전하 였으나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하고 말았다. 13일
사비성을 지키고 있던 왕자 융이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고, 18일에는 웅진성에서 왕과 태자도 모두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678년의 사직을 이어온 백제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다. 고구려의 멸망
신라와 당이 백제를 집중 공격한 것은 그 목적이 단순히 백제의 격멸에 있는 것이 아니고, 동방의 강자인 고구려를 격멸하기 위한 예비작전이었던 만큼, 백제를 격멸시킨 후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에 대한 침공을 계획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661년 4월 백제를 정복한 소정방의 원정군은 수륙양면으로 고구려를 향하여 출전하였다. 이에 부응하여 신라는 무열왕의 뒤를 이은 문무왕이 김유신 장군을 파견하여 당과 합동작전을 전개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조직적인 저항과 연합, 합동작전의 차질로 나·당 연
합군의 1차침공은 실패하고 말았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당 고종의 지시로 667년부터 당 수륙군의 본격적인 제2차 고구려 침략전이 시작되었다. 이때 신라의 김가실이 지휘하는 수군도 당의 수군과 같이 행동하였으며 또한 육상으로는 김인문 등이 신라 육군을 거느리고 북진하여 당의 이세적 군과 합류하여 연
합작전에 들어갔다. 이때 동원된 신라군은 총 20만 명이었다.
고구려군은 남·북으로 그리고 수·륙으로 우세한 나·당 연합군에게 제압 당한 후라 아무리 성이 견고한 도성이라 하지만 평양성 하나로는 버틸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양식과 무기가 떨어지고 부상자가 속출하니 성의 함락은 시간문제라고 본 고구려군은 백기를 들고 당에 항복함으로써 결국 668년 9월 12일에 평양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한반도와 만주일대를 호령하던 고구려는 28대 보장왕을 끝으로 705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3. 신라의 대당 해전
가. 배경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한반도내의 백제와 고구려의 고지를 놓고 당과 대결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당은 신라와 연합작전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한 다음에는 그 전공을 모두 자기네 것으로 돌리고 두 나라의 땅을 송두리채 자기들의 영지로 만들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까지 자기들의 지배하려 하였다. 당은 백제 점령지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고, 고구려 점령지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왕을 계림도독(鷄林都督)으로 임명하여, 결국은 신라도 멸망한 백제 및 고구려와 동등한 위치로 전락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여 삼국을 통일하는 데 당을 이용하였을 뿐이었기 때문에 당의 이러한 처사를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신라는 당에 대하여 부당성을 들어 항의하는 한편,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의 대당 저항운동을 사주하고 원조하였다. 그리고 당에서 그 뜻을 굽히지 않고 많은 병력을 출동하여 침략자로서 야욕을 들어냄에 따라, 신라는 본격적으로 해륙상의 병력을 출동하여 당군에 대한 소탕전을 전개하니 이제는 신라의 대당 전면전이 한반도 내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나. 전쟁 경과
1) 초기 전투
우선 신라는 백제지역의 당군을 공격하여 671년에는 사비성을 함락시켜서 웅진도독부를 축출하고 대신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였다. 이로서 신라는 백제 고토를 당의 군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 곳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당의 고종은 이를 문책하기 위하여 설인귀의 수군을 출동시켰는데, 신라의 수군과 백강 입구에서 조우하여 신라군에게 대패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 11년 10월 6일에 신라의 김당천 부대가 출동하여 당의 군량수송선 70여 척을 격파하고 적 수송부대 지휘관 랑장겸이대후를 비롯한 병사 100여 명을 사로잡았는데, 이 때 물에 빠져 죽은 당 수군의 수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옛 백제지역에서 고전중인 당군을 해상으로 지원하고자 한 설인귀의 계획은 큰 차질이 발생한 것이다.
우세한 군사력으로 신라를 제압하기로 한 당에서는 고간, 이근행 등이 지휘하는 육상부대들의 수만의 병력으로 임진강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신라의 수군은 육군과 협력하여 당의 침략군을 분쇄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게 된다, 즉, 673년 8월에는 대아찬 김철천이 왕명으로 병선 1백 척을 이끌고 서해에 수군 근거지를 설치함으로써 제해권을 장악하고 수륙병진을 기도하는 당 수군의 활동을 크게 위축시켰다. 이 조치는 당의 수군이 서해안을 통해 당 육군에 보급을 지원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2) 매소성 전투
이러는 동안 당은 신라에 대해 강·온양면의 방법으로 저항을 잠재우려 했으나, 신라 역시 현실주의에 입각하여 가급적 정면충돌을 피하고 화전양면 정책으로 대응하면서 실질적인 영토 확장을 추구하였다. 674년 당 고종은 최종적으로 유인궤를 총지휘관으로 한 10만 명의 대병을 출동시켜 대규모적인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신라 장군 문훈은 수륙군을 지휘하여 한강 하구 일대에서 설인귀가 지휘하는 당 수군을 맞아 싸워 크게 개가를 올렸다. 이 싸움에서 신라군은 적 병선 40척과 군마 1천 필을 노획하고 적병 1,40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 렸다.
그리고 신라군은 계속된 육상전투인 매소성(買肖城)전투에서 이근행이 지휘하는 20만 당군과 싸워 수만 명 사살, 군마 3만 마리와 3만 명분의 무기와 장비를 노획하는 등 적의 주력을 격파하는 혁혁한 전과를 얻음으로써 지상전에서도 승기를 잡게 되었다. 이어 신라군은 임
진강 근처에서 18차례의 전투 끝에 육지에서 당군을 완전히 후퇴시켰다.
육상전투의 결정적인 승기를 장악한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가 이길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십여 만의 당나라 대군에 필요로 하는 다량의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수군을 신라의 수군이 사전에 해전에서 격파함으로서 당군의 군수물자 결핍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즉 가장효과적인 수·륙합동작전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675년 9월에는 백수성에 육전대를 상륙시키기 위해 침공한 설인귀부대에 대하여 신라는 수·륙양면으로 공격하여 이를 물리쳤다. 육상에서는 신라장군 문호가 적의 상륙군을 격퇴했으며, 해상에서는 적선 40여척을 나포하고 적병 1,40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3) 기벌포(伎伐浦) 해전
거듭되는 패전에도 불구하고 당나라는 또다시 설인귀가 지휘하는 원정함대를 편성하여 676년 11월에 옛 백제지역으로 침공하였다. 침공 소식을 접한 신라는 사찬 김시득이 지휘하는 수군이 출동하였다.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설인귀가 지휘하는 당 수군과 조우하여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신라수군은 첫 교전에서는 패하였으나 곧 바로 전열을 가다듬고 기동전에 유리한 외해로 적을 유인하여 이후 무려 22회나 되는 끈질긴 접전을 치룬 끝에 대승을 거두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에 적병 4천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기벌포 해전의 승리는 나당전쟁에서 정규수군 간의 교전으로서 그 규모와 치열성에 있어서 가장 의미가 있는 해전으로서 신라수군이 외해에서 기동전을 전개할 수 있는 전투력과 전술적, 기술적 우세를 시위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당이 한반도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요동의 신성으로 옮기게 된 것은 이 기벌포 해전에서 패전한 데 기인한 것이다.
신라는 청천강 이남의 지역을 확보한 이후 당과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기 위하여 당에게 사과하는 외교 적 조치를 취하여 당의 체면을 세워 주는 한편, 당이 한반도에 간섭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명실공히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4. 결언
삼국 중에 제일 소국인 신라가 강국인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고 나아가 실력으로 당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하여 삼국을 통일함으로서 우리의 역사가 한민족 단일 국가로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백제는 해상방어를 소홀히 한 결과로 소정방군이 바로 수도인 사비성을 지향한 것이 백제에게는 결정적이었다. 여기서 백제 수군이 당군을 금강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방어전략을 구사했으면 이후의 백제 부흥군 운동 등의 활동으로 보아 상황은 크게 달라질 수 도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 또한 60여 년간에 걸처 수·당의 수륙병진의 피해를 번번히 겪으면서도 해상방위에 소홀히 한 결과, 국가 방어의 핵심인 수도 평양이 집중 공격을 당함에 따라 종국에는 나라를 잃는 데까지 이른다.
이에 비하여 신라는 당군과의 해륙상 연합작전을 가진 짧은 기간 중 수군의 활용에 대한 경험을 잘 살려 결국은 당의 수군을 물리치고 한반도의 통일을 이루는데 크게 이바지한 것이다. 즉 대당전역에서 신라의 수군은 육군과 협력하여 당군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 당의 수륙작전을 배워 이를 역이용함으로써 당군을 격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신라는 당의 상투수단인 상륙작전을 간파하고 또한 백제와 고구려의 실패를 교훈삼아 서해안의 해상방위 태세를 미리 강화하였으며, 또한 당의 군량수송선을 집중 차단함으로써 당의 육군이 어려움에 처하게 만들었다. 또한 필요시는 육군을 지원하여 상륙작전을 전개함으로써 한반도에서 당군을 축출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종국에는 당의 정규수군과 해상 결전에서 당당히 이를 물리침으로서 전쟁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국가인 우리나라는 해상으로부터의 침공에 매우 취약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것이다 . 나당전쟁에서 강대국의 침공을 물리치는데 신라 수군의 활약이 지대했다는 사실은 주변국의 해상 위협이 증가되고 있는 현재의 한국해군에 주는 시사점이 크다 할 것이다.
바로의 중얼중얼
내용은 중학교 수준만 있으면 모두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쉽습니다. 그냥 간단하게 교양을 늘린다는 생각으로 읽어보시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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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의 중얼중얼
이 싸이트는 전문적인 성격보다는 대중적인 성격이 훨씬 강한 싸이트입니다. 사실 전에 올렸던 두개의 싸이트는 어느정도 전문성을 띄고 있지만 이것은 대중성에 훨씬 가깝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나라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한번 가보시면 이런 저런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쌓여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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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이란 말 그대로 철이나 청동 같은 금속성 재료에 기록한 금문(金文)과 비석처럼 석재(石材)에 기록한 석문(石文)을 합하여 일컫는 말입니다. 이 금석문은 문헌사료가 부족한 시대의 역사를 연구할 때 오랜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유용한 자료입니다. 이러한 중요한 금석문 문화재는 시간이 지날 수록 비.바람에 마멸과 부식을 거듭하여 유실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렇게 사라져 가는 금석문 문화재를 국가적 차원에서 집대성하고 디지털화하여 훼손되어 가고 있는 금석문을 보존하고,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바로의 중얼중얼
이것도 홍보의 문제입니다. 이런 무료로 제공하는 훌륭한 싸이트가 있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른다는 것은 상당한 문제가 있는거 아닐까요? 물론 금석문은 좀 전문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한국디지탈문화의 강함을 느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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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싸이트에서는 많은 정보가 있지만, 특히 승정원일기의 디지털화는 특히 주목할만한 부분입니다. 승정원 일기는 조선시대 왕명을 출납하던 국왕 비서실의 일기. 1623년(인조 1)부터 1910년(융희 4)까지의 왕명 출납, 제반 행정사무, 의례적 사항을 기록한 일기로, 현존하는 우리 나라 최대 역사기록물이다. 총 3,243책. 필사본.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대개 41.2㎝×29.4㎝이다. 국보 제303호로 원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2001년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Memory of the World)으로 지정되었다. (저도 이것을 이용해서 레포트에 참고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중국땅에서 한국사료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행복이겠죠^^)
바로의 중얼중얼
역사관련에서 종사하거나 학업중이 아니라도 한번 가보셔서 승정원일기를 읽는것도 재미있답니다. 소설을 읽는다는 기분으로 읽는 것이죠. 그 외에도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동북공정에 대한 전문적인 이야기등을 비롯한 상당한 분량의 데이터베이스가 있습니다.
정부기관 산하에 있는 기관입니다. 여기서 문제점이 이런 싸이트를 많은 사람이 모른다는 것은, 다이나믹코리아의 홍보문제와 똑같이, 홍보가 제대로 안되니까 이런 유용한 싸이트를 사람들이 이용을 못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부야....정부야....
사학개론이라는 과목의 유명한 싸이코선생님이 이상야리꾸리한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주제도 자유. 쓰는 방법도 자유. 그렇다고 레포트도 아니고, 숙제 마감 기간까지 매 번 말이 변하는지라, 중국애들도 과연 이것을 어찌 해야되냐고 서로 물어보게 만들어 버리는 숙제입니다.
한루님이 낙랑에 대해서 자료를 찾으시길래, 저도 어차피 주제는 잡아야되니까 일단 도서관 가서 쓸어모아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수업은 저녁 9시까지 있었는지라 지금 피곤해서 쓰러지고 싶군요.
일단 마주잡이로 관련 자료 다 복사해서 뭉그러진 낙랑관련 논문들만 올리겠습니다. 낙랑만을 연구한 연구논문은 거의 없군요. 그냥 낙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논문을 일단 다 끌어모아버렸습니다. 일단 자고 일어나서 정리해야겠군요.(정말 쓰러질 것 같습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9시까지 쉬지 않는 삽질...ㅠㅠ)
마음속으로 하고 있는 생각이 어차피 자유주제라고 했겠다!!
그냥 막가파로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였던가? 그것을 주제로 만들어 버릴까 생각중입니다. 뭐... 중국에서는 이런 이야기자체가 없으니까 이런 설화를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도 있을거라는 환상에 빠져 있습니다. 일단 자자...ㅠㅠ
일어나서 다시 목록을 보니까...아무거나 마구잡이로 긁어오면 안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소용돌이 친다.ㅠㅠ
왕국위는 중국사학 근대화의 선두주자로서 대선생님의 칭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가 쓴 이 은주제도론은 중국정치와 문화의 변혁중에서 은나라와 상나라사이의 변혁만큼 거대한 것은 없었다는 주장이다. 그 근거로서 우리들에게도 상당히 익숙한 존존(尊尊), 친친(親親), 현현(賢賢), 남녀유별(男女有別)이 주나라때부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주장이 맞다 틀리다를 떠나서, 일단 이런 가정하에서 생각해서 중국 및 동아시아의 정치문화의 특색을 정의내리는 것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은과 주나라 사이의 변혁의 크기가 그리도 거대했다면, 은과 주가 각각 다른 문화환경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나라 일부 민족학자들이 주장하는 동이족의 고대중국지배론에도 힘을 실어줄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 모든것이 가정입니다.^^
바로의 중얼중얼
이 글은 한루님의 전공이 중국고대사중에서 춘추전국시대라고 하시길래, 한루님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한번 올려보았습니다. 물론 이미 보셨겠지만, 다른 분들도 읽어보면 재미있을듯 해서 올려보았습니다. 위 글의 중국어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끼신다면 정답입니다. 이건 현대중국어가 아니고 (그렇다고 고대중국어는 아니지만) 중국근대화시기의 글입니다. 중국어 공부하시는 분들도 저 글을 모두 번역하거나 독해해보신다면 중국어 실력이 놀라울 정도로 향상될거라고 생각합니다. 저 짜증을 다 독해하신다면 현대중국어가 훨씬 쉽게 다가올테니까요. ^^;;;
이우혁씨의 소설을 즐겨보았고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좋아하는 작가들 중에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우혁씨의 글 중에서 간과하고 있는 몇가지를 적어볼까 합니다. 글의 내용을 일단 읽고 제 글을 보는 것이 좋을듯 합니다.
중국은 어떻게 생겨먹었는가.. 퇴마록저자 씀
중국은 그 자체의 역사가 대단히 복잡하고 민족이 많이 섞여 있습니다. 거기에 '모화사상'이라는 중화민족 제일주의를 역사적으로 추구해 왔으며 필요하면 역사왜곡도 서슴치 않는 전통(공자의 '춘추필법')이 있습니다. 그때문에 중국의 역사관을 논리적, 물증적으로만 대항하려 한다면 대번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중국은 원래 6500개 이상의 민족 혹은 부족이 융합되어 만들어진 국가입니다. 더우기 중국사 중에서 5호 16국,금,요,원,청 등은 중국 원래 민족인 한(漢)족이 정복당해 만들어진 국가들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식민지배를 받았다기 보다는 아예 멸망하여 흡수 되었으나 많은 인구와 '문화적' 흡수를 통해 도리어 타민족을 흡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요는 한족국가인 송이 고전 끝에 멸망시킬 수 있었고, 금은 원에 의해 망했으며 원은 지나치게 넓게 확장된 영토 때문에 역시 한족 국가인 명에 의해 물러 났습니다. 허나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청'입니다. 금의 후예이자 여진족에 의해 세워진 청은 현재 중국지도가 되어 있는 영토의 판도를 최대로 넓힌 왕조입니다. 중국 한족은 북방을 점령 경략해본 역사가 없습니다. 번번히 참패만 했을 뿐입니다. 가령 한고조가 북방 선우족에게 패하여 공주를 볼모로 보냈다거나 명 조 토목보의 변 (오이랏트 족과 싸움에 명 황제가 친정했다가 50만이 전멸당하고 황제가 포로로 잡힘) 등 이었고 현재의 중국영토를 만들어준 것은 바로 청, 만주족의 만주팔기군이었습니다. 팔기군은 최초로 몽골의 본토를 점령했고 신강, 청해 등의 서북 영역을 개척했으며 원래 만주족이었으므로 만주 땅을 최초로 중국 영토로 편입시켰습니다. 즉 현재의 중국은 오랑캐라 멸시하던 만주족에 의한 어부지리로 지금의 넓은 땅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의 넓은 땅 중에서 중국인들이 원래 지녔던 땅은 지금 영토의 1/3에 불과했고 그 나머지는 대부분 이민족에 의해 얻어진 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더구나 한족은 소수민족 탄압에 가장 앞장선 나라입니다. 중국 문화혁명이 일어난 때부터 30년 만에 소수민족 3000족이 전멸했고 독자적인 언어 2000개가 사멸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소수민족 융화책을 쓰지만, 모조리 한족에 의한 흡수론을 주장할 뿐입니다. (특히 50년대 전혀 무력이 없는 티벳을 침공하여 강제 점령했지요. 그 때문에 달라이라마가 해외를 떠돌며 아직도 호소하는 겁니다.)
중국의 역사관은 이런 기조 하에서 파악해야 합니다. 중국은 현재 너무 넓고, 너무 많은 소수민족들이 섞여 삽니다. 이들이 만약 분열된 러시아에 자극받아 민족주의를 표방하거나 독립의 목소리를 낼 경우, 중국은 조각조각 찢어져 버리게 됩니다. 이를 위해 중국은 '우리에게 유리하면 역사를 고친다'는 춘추필법적인 사고를 받아들여 여러 민족을 묶어 생각할 수 있는 역사관이나 가치관을 만들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입니다. 우선 고국가 개념인데, 간단히 말해 중국의 사관은 한마디로 유래가 없는 엉터리입니다. '현재의 중국 땅에 있었던 나라는 전부 중국이다' 가 그들의 개념입니다. 그들의 근거인즉슨, '중국은 다수 민족이 섞여 혼화된 나라다. 그러므로 고대부터 어떤 부족이 어느땅에 살아왔다고 해도, 현재는 우리 중국에 섞여 있다. 그러므로 그곳에 전에 살던 사람도 중국인이라 볼 수 있고, 그 나라는 중국의 복속국이었다 볼 수 있다' 입니다.
한마디로 해괴망칙하죠? 그러나 중국 학자들은 이것을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입니다. 논리적 설득은 거의 통하지 않습니다. 아예 개념을 굳게 그렇게 잡기 때문에 쓸데없는 원론만 이야기하다가 그칠 뿐, 정상적인 논리방식으로는 설득이 불가합니다. 근본 개념을 원천적으로 다르게 잡은 마당이라 다른 대책이 필요한 것이지요. 이런 개념은 현재 이스라엘(2000년 떠돌다 팔레스타인에 와서 살던 사람 몰아내고 자기가 주인 노릇하지요? 그 역겨운 민족과 마찬가지 OO입니다.)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야만적인 사고방식이라 볼 수 밖에 없지요.
현재 문제가 되는 동북공정은 이런 기반하에 있습니다. 중국측에서 골치거리인 민족이 둘 있는데, 하나는 몽골이요, 하나는 우리 한국입니다. 왜냐? 그들의 역사에서 문제가 되었던 금, 요, 원, 청 중에서 흡수안되고 독립상태로 남은 것은 몽골족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차지한 만주(대단히 중요한 땅입니다. 중국이 넓다하지만 만주가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값진 땅입니다.) 를 과거에 경략하고 있던 것은 우리 민족이며 우리 민족은 한족에 흡수되지 않고 지금도 독자적인 국가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는 자칫 그들이 근간으로 삼고 자랑스레 떠벌리는 '아시아 제일, 나아가 세계제일'의 자존심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고, 본의 아니게 중국이 분열되게 만들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중국인, 모두가 중국역사'라고 수많은 종족을 하나로 흡수통합, 유지 하려는데, 목에 걸린 가시처럼 우리나라는 나름대로 살고 있으며, 역사 의식을 지니고 있으니 속이 터지는 것입니다. 그때문에 중국은 아예 고대사를 말살하려 시도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역사말살시도와 조금도 다를바가 없는 짓이며, 이는 솔직히 피만 안흘릴 뿐이지 전쟁 선포나 마찬가지입니다. 아울러 티벳을 무력 점령하고 있는 중국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정당화할 구실도 필요 하겠지요. 그러므로 이 티벳문제까지도 생각에 두며 나아가서는 분열되고 있는 러시아 지방의 점유도 염두에 두고 흉계를 꾸미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기에는 한심한 공염불이나 외우고 있는 우리 사학자들의 수준도 크게 힘을 실어주었을 것입니다. 중국이 힘들고 어렵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우리 역사를 내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고구려를 우리 민족사로 볼 수는 없다'라는 소리나 해대는 인간들을 교수라고 키우고, 그런 사람들이 목에 힘주고 다니는 세상입니다. 중국은 분명 필요성에 의해 동북공정을 내세우는 것이며, 이는 고구텽O「?관련된 것이 아닌, 아시아의 흡수, 통합을 목적으로 한 패권주의적 정책의 일환입니다. 근래 중국관계가 좀 좋아졌다지만 절대 방심해서는 안되며, 이는 거의 선전포고에 해당된다는 인식을 지녀야 합니다. 이대로 방치될 경우 고역사가 넘어가는 것 정도가 아니라 민족의 본질마저 중국 측에 파묻혀, 질식되고, 아시아에는 중국밖에 없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잘난 학자님들이 못한다면 국민선에라도 이런 것들을 인식하고 애쓰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중국의 현 점유지 우선의 그릇된 역사관과 어설픈 '통합주의'는 세계적인 추세에 정면으로 배격되는 것이며, 극히 위험하고 침략적인 사관입니다. 더구나 기본적 개념 자체를 혼돈 시켜 논리적이고 평화로운 진행 자체가 불가능하게 교묘하게 조작된 사관입니다. 학문적인 양심이나 그 기법을 적용하면 공염불만 하다가 결론을 못보게 만드는, 애초부터 조작된 논리적 함정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막기 위해서는 (제잘난 맛에 사시는) 사학자 들의 수준으로는 절대 불가능이라 봅니다. 다행히 많은 움직임이 있는데, 이런 것을 크게 성토하고, 민중의 힘으로 대처하여 국가적 대처를 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보입니다.
부디 이 글을 사방에 널리 알리고, 가능하면 영역이라도 해서 사방에 중국의 검은 속셈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중국을 성토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를 같이 사는 동반자로서 그런 자기만 살겠다는 주의 주장은 제발 좀 걷어치우고 모두가 평화롭게 살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혁 -
2004.08.02
8권 집필을 향해 매진해야겠지만, 오늘 답변도 참 많이 달았고 (80여개를... 내가 무슨 방통이나 법정이라고.. 그러고 보니 그들도 중국사람들... ) 좀 하수상한 기분이 들어 조금 씁니다.
요즘 축구나 동북공정 등으로 인해 그간의 반일, 반미감정 못지 않게 반중감정도 악화되어 가는 것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참, 전에 누군가 제 후배 한 명이 해 준 이야기가 있죠. 그 친구 미국 유학가서 들은 이야기라는데, 어느 미국인친구가 그랬다고 합디다.
"너희 한국 사람들, 참 대단하다. 중국, 미국, 일본 , 러시아 같은 강국들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참 자존심이 세구나. 너희 나라 사람 말고는 다 사람취급도 안하는 듯 하다. 중국인은 떼OO이나 짱깨, 일본인은 왜OO, 미국인은 양키, 양OO, 흑인은 깜둥이. 하나도 제대로 대우받는 민족이 없는 것 같다. 한국인 자존심은 정말 대단하다."
뭐 오래된 이야기라 글자 그대로 옮긴것은 아닐지 모르고, 그 이야기의 당사자 또한 현재 한국으로 돌아와 모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사람이라 틀렸으면 낯부끄럽지만, 좌우간 비슷한 내용임은 분명합니다.
우리 집사람과도 이런 이야기를 간혹 나눕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존심에 대해 제가 말하면, 우리 집사람은 우리나라 전반에 팽배한 '일등주의'에 대해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도 하죠.
할 수 없는 것 같다고요. 워낙이 제일 센 OO들 주변에서 살려면 일등이 아니고서는 아예 살 수 조차 없었을 테니, 자연스럽게 누가 먼저다 할 것없이 다 강해지고, 잘나지려고 애를 쓰는 것이지, 무슨 체제나 그런 문제를 넘어선 것 같다는 말이었습니다. 저도 상당히 공감가는 말 같았죠.
뭐 서두가 길었습니다만, 지난번에 동북공정에 대해 간단한 글을 올린 바 있으니, 제가 아는 중국 이야기를 좀 하렵니다. 좀 편하지만 여러방면으로요.
일단 역사적으로 볼 때 저는 중국은 우리의 잠재적국 제 1호라고 봅니다. 북한이 중간에 끼어 있어서 많이 완충된 듯 하고, 중국이 많이 개방되고 사람들도 오가고 사업도 벌이고 하여 아주 가까와진 것 처럼 생각하는 분들도 많은 듯 한데... 결코 그렇지는 않다고 봅니다.
물론 제가 중국인들에게 무슨 감정이 있거나. 중국인 전체를 매도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뭐 멀리 나가 삼국지의 영웅호걸들이나 경전들을 논할 것은 없고, 간단하게 천안문 사태때의 목숨을 내버리고 외치는 중국 젊은이들의 모습에서만도 저는 그들 전부를 싸잡아 미워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항상 그렇듯, 정치 체제와 그 위에 있는 집단입니다. 특히나 중국은 인구가 많고, 통제하기 어텽O截매?수가 많은 집단입니다. 더구나 그 통제방법이 '무조건 하나'라는 역사적 전통적 강제를 기반하고 있어서,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자본주의화 되고 우리와 다를 것이 거의 없는 나라'라는 것은 실로 무서운 착각이라는 것부터 말씀드리고 싶네요.
더구나 우리나라의 못믿을 정부조차 노골적인 친중노선을 (그 지긋지긋한.. 얼마나 국민들이 더 책임져야 하는지 모르지만 끝없이 되풀이 되는)말실수로 한 이후부터는 아예 중국이 우리를 아래로 보고 집단적 광기에 휘몰려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며 공격해오는 마당입니다.
원래 상대를 알고 우리를 알아야 백전불패이며 (이것도 중국에서 배운거긴 하네요. 손자병볍이니) 상대를 이기려면 상대의 약점을 찔러야 한다고 하죠.
제가 이번 기회에 많은 분들이 잘 알지 못하는 중국의 약점에 대해 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남의 꼬투리를 잡는 건 좋은 일이 아니지만, 이미 최소한도의 싸움이 시작된 마당에 가만히 있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지요.
1) 중국의 동북공정 이야기는 지난번에 간략히 드렸습니다. 이 동북공정이란 것에서 고구려 역사와 치우등의 우리 역사를 자기것으로 만들기가 파생되었으며, 그 근본을 깨닫지 못하고 다만 역사적으로나 문헌적으로만 접근하면 낭패를 볼 것이라는 이유도 간략히 적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들은 아직 분명 '집단주의 전제정치를 펴는 공산국가'입니다. 우리는 뭔가 하나 목적을 지니고 일을 하려해도 여론이나 국회나 기타 등등 논의가 많고 그 정당성등을 거치는 최소한의 절차나마 거치는 형식인데 반해 중국은 그렇지 앟습니다. 우리나라보다 더 큰 각 성마다 소위 인민들이 말하는 '지도자'들이 잇는데, 모든 것은 그 '지도자들'에 의해 정해집니다. 의회나 논의나 청문회나 하는 것은 다 정해진 이후에나 열리는 것이지, 그 지도자들간의 밀담에 의해 중국은 흘러가고, 또 반대여론이 용납되지 않고 한 번 정해지면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 몰아붙여지는 것입니다.
이번 축구에서 중국관중들이 노골적으로 한국의 욕을 하며 적의를 취하는 것, 많은 분들이 '중국OO들이 왜 그래? OOOO들' 이라 생각하고 말 겁니다. 허나 아닙니다. 최소한 제가 아는 바로, 중국 사람들은 그렇게 다른 나라에 대해 적의도 많지않고, 그런 투쟁심을 무조건 불태울만큼 악하지도 않습니다. 무언가 중국 내부에 전반적인 기운이 감도는 것을 보여주는 일례입니다.
아까 말했습니다. 중국은 지도자에 의해 결정된 것이 무조건 내려가 전 인민이 하나처럼 움직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아직까지 전제주의적인 국가라고요. '새롭게 자본주의로 발전해나가는 민주화의 길을 걷는 국가' 라고 믿는 분들은 망상부터 깨십시오. 그 이유는 뒤에 구체적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좌우간 중국 국민들이 그렇게 일사불란, 찍어낸 듯 한국에 대한 반감을 보이는 것은 국민들 개개인의 생각으로만 그리 되기에는 (죄송하지만) 아직 중국의 국민수준은 깨이지 못했습니다. 북경, 상해, 심양 등을 가보니 중국, 엄청나게 발전하여 한국 저리가라라고요? 중국 여행 하는 대부분의 분들은 그런 대도시만 돌고 오시죠. 조금만 지방으로 가 볼까요?
제가 글 때문에 가야만 했던 탁록이란 곳, 북경에서 1시간 반 거리에 있는, 중국 입장에서 보면 아주 가까이 있는 곳입니다. 북경에서 1시간 반 가면 되는 이 곳에는 차 보다 나귀가 훨씬 많고, 나귀 똥을 집안에서 길에 뿌렸다가 (사람이 지나가건 말건) 나중에 걷어 비료로 씁니다. 탁록시는 인구 30만이 넘고 헌원 호텔(헌원대복 이라 씁니다.)같은 제법 큰 호텔도 있는데, 6시가 되면 인적이 없어집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뭐랄까...'해지면 잔다'는 생각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놀이나 유흥이나 문화향유나 오락이나 하는 것은 뭐 참는 것이 아니라 아예 '머릿속에 없습니다.' 6시가 넘으면 호텔말고는 인구 30만이 넘는(강릉시의 3배 됩니다.) 도시 네거리에서 밥을 사먹을 곳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여행을 가면 알려지지 않은 뒷골목 이나 시장통 같은 곳을 어슬렁거리며 다니기에 이것은 참 충격적이었습니다. 저는 한자는 그냥 조금 압니다만 중국의 간자는 잘 모르죠. 허나 며칠 보다보니 저절로 눈에 들어와서 가이드(당원입니다.--; 외국인 접촉자는 다 다원이거나 당원에 준해야 합니다.)도 몰랐겠지만 대부분의 글들은 다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페인트로 벽에 써놓은 선전문구가 알고보니 '초등교육을 시키는 것은 국민의 의무이니 안지키면 벌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뭐 낙후한 면을 들어 욕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만난 대도시에서 살지 않는 보통 중국인들은, 최소한의 외부에 대한 소식과 자극을 모두 '당'이나 정해진 매체를 통해서만 흡수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아주 작은 일례입니다만. 치우천왕의 묘로 추정되는 곳의 묘지기 할아버지도 제가 담배 한대를 권하자 '중국담배를 피우겠다'며 사양하더군요. 뭐 애국심이라면 애국심일 수도 있지만, 중국사람들은 그만큼 배타적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서양인 같지는 않지만 쓰는 말이 다르고 외국인이 드러남을 보는 순간, 그들이 보이는 것은 신기함이나 뭐 그런 것이 아니라 경게심과 자기 마음 감추기...입니다. 솔직한 심정입니다.
닳고 닳은 도시사람들보다 시골로 갈수록 이런 것을 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시골로 갈수록 순박하고 인간본연의 태가 남는 그런 모습들이 많아져야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 아닐까요? 인종차별이 심하다는 미국에서도 동부 시골로 가면 사람들이 동양인을 신기해하며 와서 구경을 할 지언정(실화입니다. 설마 미국이? 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아주 즐거워하고 무엇이든 그 새로보는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중국은 왜 정반대일까요?
중국이 강한 전제로 아직 뭉쳐 있다는 작은 증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중국은 전에 동북공정 이야기를 쓰면서 적은 대로, 하나의 중국을 강하게 원하고 또 힘있는 중국을 원합니다. 다만 그 방법이 적대적이고 페쇄적인 방법을 취하고 있으며 이는 그들이 오래전부터 지녀온 모화사상 이나 중화제일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뭐 자기가 잘났다는데는 우리나라도 못지 않지 않으냐?' 하실 분들.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그들은 우리이웃입니다. 이웃이 친하게 지내야 좋은 것은 알지만, 이웃이 뭔가 좋지 않은 꿍꿍이를 가지고 잇으면 가장 겁나기도 합니다. 나는 이웃을 나와 똑같이 생각하는데, 이웃이 나를 '자기보다 아래. 예전에 우리 종살이한 OO' 이라 생각하고 나온다면, 그냥 좋은게 좋으니 웃으며 내킨김에 종살이 해줘야 합니까?
그들이 중화제일 사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것만이 크게 잡아서 52개로 분할되어 있는 중국의 많은 민족들을 통합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민족을 통합시켜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거대한 권력유지'에 다르지 않습니다. 중국이 현재 나은 것은 냉엄한 현재의 정세로 볼 때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크고, 가장 많기 때문에 중국의 끝발과 힘이 먹혀드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중국은 거대함을 유지해야만 하고, 혹여나 구 소련처럼 갈기갈기 분열되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온갖 치졸한 짓이나 탄압, 심지어는 피를 흘려서라도 막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웃에 대해 악한 감정이나 무조건적인 반감을 가지는 것도 좋지 않겠지만, 멍하니 뜨고 있다가 된서리를 맞는 바보가 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2. 중국이 말하는 하나의 중국은 과연 정말 인가?
중국은 하나의 중국을 추구합니다. 그래야 더 커지고, 힘을 누려서 세계제일의 중국을 이룰 수 있다 여기니까요. 자, 뭐 그렇다고 일단 해둡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생각을 해봅시다. 치우천왕을 넘기고, 고구려사를 넘기고, 간도를 넘기고 뭐 지금 우리와 상관없다 해봅시다.
중국이 우리 땅을 탐낸다면 어쩌겠습니까? 그런 일이 어떻게 있냐고요? 세상 일은 모릅니다. 현재 다른 나라의 영토를 탐내는 일은 상당히 바보같은 짓 혹은 모험적인 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다릅니다. 간단히 대만 문제를 보십시오. 중국이 대만에 대해 얼마나 신경 쓰고 있으며, 그를 합병시키기 위해 자칫하면 전쟁도 불사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를. 그리고 티벳을 보십시오.
직접 겪은 일화 하나 소개합니다. 천안문 광장 바로 앞에 자금성이 있고, 그 자금성 위 다락같은 곳이 '현 중국 최고의 명소이자 역사적 장소'입니다.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고 현지인들의 말입니다. 그장소를 보기 위해 매일 수백, 수천명이 지방에서부터 몇십시간씩 차를 타고 옵니다. 뭐 으리찬란한 것을 기대하는 분은 실망일지 모릅니다만 그 장소는 다름 아닌. 마오 쩌뚱(모택동)이 중국공산화를 선언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중국 탁록 부근 방문 당시, 중국 전체를 뒤흔들던 드라마가 있었으니 한류 열풍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마오쩌뚱의 '대장정' 이었습니다. 한류? 제가 다니던 지방에서는 콧배기도 보인적 없습니다. 중국 도시 3-4개를 보고 온 사람들이 꼭 중국을 다 보고 중국 전체가 어떻다고들 떠듭니다. 인구로 따지면 2-3%도 안될 것이니 우리나라 예를 들면 무슨 군산이나 이리(음 모욕하고자는 의도는 아닙니다만 인구수가 비슷한 듯 하여 에서 누가 좀 알려졌다고 한국 전체가 떠들썩!!! 하다는 소문 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좌우간 그 장소에 커다란 그림이 하나 있어서, 중국인들이 거의 반은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데, 그것이 무슨 오래된 고서화나 명화가 아니라, 마오쩌뚱과 많은 사람들을 그린 그림입니다. 그 그림은 '현 중국의 상징'이라며 현지인들은 자랑스럽게 말하는데, 그 그림에는 뜻이 잇습니다. 그 그림에서 마오를 제외한 사람은 다 각양각색의 복식을 하고 있는데 그들 숫자는 52명, 중국을 지배하는 민족의 수라고 말합니다. 중국인 관광객들은 자금성의 영화나 골동품을 보러 오는게 아니라, 바로 그 그림을 보러 몰텽O윱?것입니다! 그리고 마오의 바로 뒤(!)에 한복을 입은 여성이 있습니다. 바로 조선족입니다.
'중국내 소수민족 중에서 조선족의 지위와 영향력은 매우 높은 편'이라는 부가설명도 들었습니다. 중국은 인구 문제 때문에 무조건 1가구 1자녀이지만, 조선족등은 특혜를 받아 7년차 이상 터울을 두면 2자녀도 낳을 수 있고, 소수민족을 중국정부는 아낀다는 이야기도 반드시 따라붙습니다.
중국은 정말 소수민족을 아끼고, 중국인과 같이 대하며, 같이 공영하려 할까요?
1900년대 초까지 중국내 소수민족은 2000-4000여개였으며 통용언어만도 2000여개가 넘어서, '인류학의 보고'였습니다. 문화혁명이 끝나가던 1960년대말, 소수민족의 수는 200여개로 줄고 언어는 140개로 줄었습니다. 더구나 소수민족의 숫자는 정확한 연구결과는 없습니다만 1/200정도로 줄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동화가 아니라, '말살' 이었다는 점입니다.
가장 비근한 예로 티벳의 예를 들겠습니다. 중국과 맞닿아 있는 작은 국가의 예를 잘 보여줍니다. 무협지에는 '포달랍궁'으로 나오는 새외 세력..그러나 티벳은 건국 이래 수천년간 단 한번도 외국을 침공한 사례가 없습니다. (무협을 쓰면서 중원을 지킨다고 포달랍궁의 만행이나 학살 장면을 생각없이 쓰시는 분들... 티벳의 라마 분들의 정신적인 도를 한번이라도 접해보시고 그런 허무맹랑한 글을 쓰시길 바랍니다. 티벳인들의 관점에서는 석가모니나 관음보살, 성 요셉이나 막달라 마리아가 중원을 침공하여 학살을 한다는 글이나 진배없을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나라분들이... --; )
중국은 1959년 아무런 경고없이 티벳을 침공했고. 근거(?)라고는 그곳도 중국땅이라는 중화제일 사상 뿐이었습니다. 당시 티벳의 인구는 600만 정도였는데, 그중 140만이 1년 안에 학살 당했습니다. 제가 직접 중국인의 입을 통해 그 때의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너무나 마음 깊이 새겨진 말이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당시 티벳인들은 너무나 평화롭게 살고 남과 다투는 일이 없어서, '분노'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허나 중국군인들에게 동족이 학살당하는 것을 보자, 그들은 그때서야 '분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티벳의 달라이라마가 지금도 유랑하고 잇는 것은 아실 것입니다. 저도 퇴마록에 판첸라마를 등장시켰죠. 그런데 그때는 저도 잘 몰랐던 (죄송합니다) 것이었는데, 판첸라마에 얽힌 이야기를 이후에 조사했습니다. 1995년 판첸라마는 이미 몇년 전에 돌아가셔서, 겐둔 최끼 니마 라는 당시 6살의 아이가 판첸라마로 선택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장제민 정부는 이 아이를 정치범으로 몰아 감금했는데, 이후 이 아이는 사라졌습니다. (분명 살해당했을 것이라 하며, 외국 언론에서 한때 '세계 최연소 정치범'이라 떠들썩했습니다. 그저 한국에 태어난 죄로 그것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리고 장 쩌민이 직접 열성 공상당원(중국에서 당원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계급조건, 출신성분, 고시를 방불케하는 시험까지 봐야 합니다.)을 부모로 둔 아이를 판첸라마로 '임명'했습니다.
판첸라마와 달라이 라마의 존재는 티벳 국민들에게는 예수님이나 석가모니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것이 정치적으로 '임명'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에 중국이 욕심을 낸다면 (그 전조는 충분히 보이지만) 그냥 중국국민으로 살아도 된다고 여기실 분들도 계실지요? 티벳의 예는 바로 역사의교훈입니다. 중국이 우리나라 사람을 더 우대할지는 모르지만, 저는 그런 희박한 확률을 기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 - 남한 은 그렇지 않더라도 붕괴 위기에 잇는 북한에 중국이 욕심을 낼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해외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이런 이때 누가 막을 수 있을까요? 아니, 감히 말이나 한 마디 하겠습니까?
3> 인정하기 싫지만 중국은 두텽O?나라. 공포의 나라다.
중국 여행이 활발하고 노인들도 중국 관광을 막 다니는 이때 무슨 소리냐고 하실 분도 많겠죠. 그러나 이건 사실입니다. 뭐, 천안문 사태때 대학생을 탱크로 밀어버린 일을 보세요. 우리나라 광주사태도 그랬다고 하겠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믿지 못할 분이 게실지 모르지만 중국은 지금도 천안문 사태로 인해 사람들이 납치, 감금, 살해 당하고 있습니다. 저 변두리 농촌에서까지요. 장 쩌민 주석만 봐도 그렇습니다. 뿔테 안경을 낀 신사처럼 보이지만 (개인적 감정은 없습니다만) 영어가 되시는 분, 언론 사이트 찾아 보십시오. 세계 언론의 적 5위 안에 항상 들어왔으며 (외국 언론인 구금, 납치 구타 사례가 1년에 22건 이상- 타 외국 전체를 합한 것보다 많다 합니다.) 인권 탄압자로 역시 세계5위 안에 들어갑니다. 유엔 인권위가 몇차례가 열리려 하자 제 3세계국가를 협박하여 무산시키는 행위도 유명합니다. 이건 제가 장 쩌민 주석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사실만 옮기는 것입니다.
뭐 파룬궁(법륜궁) 사태라고 아실지 모르겟습니다. 법륜궁이란 기공수련을 하는 단체였는데, 어찌보면 사이비종교성도 잇다고 하고, 순수한 수련단체라고도 하고 정확히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파룬궁에 대해 장 쩌민이 가하는 압력과 탄압의 경지는 예술적입니다.
중국 내에서 이미 2000여명이 고문, 투옥, 살해된 것 외에 (밝혀진 것만) 개종(?)하지 않는 부모의 앞에서 유아를 살해하기도 하고, 믿지 못할 것은 외국에 있는 수련자나 운동가들까지도 국적관계없이 살해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나라에 있어도 법륜궁 수련을 하면, 중국 요원이 다가와서 암살하고 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못 믿엇는데, 미국에서도 그러한 협박, 살해, 납치가 끊이지 않아서 한 주정부에 특별법이 제정되기까지 했답니다.)
뭐 법륜궁의 정통성이나 이런 것 문제가 아니라, 중국 정부는 한마디로 중화제일, 모화사상에 근거하여 다른 민족이나 다른 사랑은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집단이라는 뜻이고 증거들입니다.
우리나라 정부도 참 엄청나다고들 말 많지만, 외국에서 암살(무슨 정적도 아니었는데 무차별로)을 하거나 저렇듯 눈에 보이는 탄압을 가할 단계는 지났습니다.
법륜궁 따위 뭐 별거냐... 저도 의아했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중국은 지금 미국은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하나의 중국... 내지는 큰 힘과 권력'을 추구하려고 돌진 중입니다. 만약 돌격이 이루어질 경우, 거기에 1차적으로 깨질 나라... --;;; 가 어디겠습니까?
고구려사나 동북공정을 목표로 삼은 것이 바로 그 1차 증거입니다. 중국 전체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반한 감정이 어디선가 싹터서 중국 전체가 흘러가는 것이 바로 그 2차 징후입니다.
그런데도 정쟁이나 일삼고 모자라서 아우성인 돈 행정수도에 퍼부을 생각이나 하며, 절대 극우 파OO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좌경에 치우친 국정을 주장하며 민생과 국민의 소리를 부르짖었으면서 연금문제나 외국 인권 문제 등에 대해서는 귀닫고 앉아 있는 양반들이 이 일에 관심이나 둘지 모르겠습니다.
그 분들이야 선거에서 이길 수만 있으면, 중국의 주가 되거나 미국의 주가 되거나 상관 없다 여길지도 모르죠.
여기서 마지막 결론입니다. 2002년 이래, 장 쩌민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인터넷입니다.
2002년, 북경 시내 한 피씨방에 불이 난 것을 계기로, 2000여개 업소가 강제 철거되었고, 이후 모든 인터넷 기기에는 아이피 추적장치가 달렸습니다. 완벽한 통제사회로 들어간 것입니다. 구글 검색은 제가 아는한 얼마전까지 금지 사이트로 지정되어 중국내 접속이 봉쇄되어 있었습니다.
중국이 제일 두텽O置求?것은 '분열된 중국'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무서워 해야 하는 것은 '하나로 뭉친 중국'입니다.
중국인들과 싸우고, 적대하지 마세요. 그들에게 잘 말하고, 그들을 일깨우십시오. '당신은 자유롭고 싶지 않나요?' 같은 노골적 대사는 하면 안됩니다. 무슨 이야기를 지어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반한 감정을 보여도 참으며 그들에게 왜 그런 것일까 물으세요. 그리고 우리나라 이야기를 하고, 여러분이 사는 이야기를 하고 (정치가 욕도 해도 됩니다. 욕할 자유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들과 다른 나라로 살지만, 친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세요.
민족적 대결구도야 말로 중국정부의 술책이며, 그들이 바라는 함정입니다.
저는 제 모국과 입장 때문에 중국정부를 싫어한다고 할 수 있지만, 중국인을 싫어하지도 중국인을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비록 중화제일 사상이나 오랑캐 운운하는 선민주의에 갇혀 있지만, 그들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많은 난관을 극복한, 우리와 다름 없는 슬기로운 사람들입니다. 떼OO 이니 짱께, 중꿔 식으로 욕하면서 섣부른 민족적 자만심을 돌출시키는 것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 또한 자유를 원하며, 천안문 사태와 같은 활동을 일으킬 정도로 의식있고 자각 있는 사람들입니다. 중국이 하나로 뭉쳐지려는 행동을 노골적을호 해나간다는 것은 역으로 중국 내의 분열되는 많은 소수의견들을 묵살하기가 그만큼 힘들어진다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정부가 못하고 국가가 못하면 여러분들부터라도 할 수 있습니다. 하다못해 게임에서 만나면 떼OO이라고 PK부터 걸어 때려죽이기보다는, 비록 경계심은 풀지 않더라도 우리부터 그들이 같은 사람이자 인간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의식을 공유해야 합니다.
비록 작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입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나라가 많을 수록, 우리가 미워하는 나라가 많을 수록 생각은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미워해야 하는 것은 분란과 투쟁을 선동하는 나라와 정부이며, 국가이지 그 나라의 개개인은 아닙니다. 그 어느때보다도 힘든 이 때에, 우리 좁쌀같은 민초들에게 남은 무기는 대화-(인터넷)밖에 없습니다.
섣불리 남의 욕이나 하고, 비판이나 하고, 흠집잡기, 편가르기, 장난이나 하고 다니는 사람은 그야말로 쓰레기 중의 쓰레기입니다. 정부가 못하고 답답하여 죽겟다는 분 너무도 많습니다. 뭐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큰 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인터넷을 씁시다. 순위권 놀이나 리플 놀이, 게임 들어가 사람죽이는 데에나 재미들리는 사이버 유*철같은 짓 하지 말고, 좀 더 넓은 세상도 볼 겸,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정보를 나눕시다. 영어공부도 될고, 정 안되면 널린게 번역기 입니다. 남을 설득하거나 무릎꿇리려 하지 말고, 그냥 들어주고, 그냥 편히 이야기합시다. 그게 최고 아닙니까?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이며, 가장 큰 일입니다.
좀 너무 일반적인 뒤끝으로 된 것 같지만... --;; 이만 줄입니다.
- 혁 -
우선 고국가 개념인데, 간단히 말해 중국의 사관은 한마디로 유래가 없는 엉터리입니다. '현재의 중국 땅에 있었던 나라는 전부 중국이다' 가 그들의 개념입니다.그들의 근거인즉슨, '중국은 다수 민족이 섞여 혼화된 나라다. 그러므로 고대부터 어떤 부족이 어느땅에 살아왔다고 해도, 현재는 우리 중국에 섞여 있다. 그러므로 그곳에 전에 살던 사람도 중국인이라 볼 수 있고, 그 나라는 중국의 복속국이었다 볼 수 있다' 입니다.
이우혁님은 이 관념에 대해서 말도 안되는 비논리적 엉터리일뿐이다라고 일축하셨지만, 그것이 그렇게 쉽게 단정을 지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만약 이것을 일방적으로 허황된 개념이라고 말하였다면, 현재 한국이 주장하고 있는, "현재 한국민족을 형성케 한 성분들은 모두 한국사의 주체이며 그들이 활동한 공간은 모두 한국사의 무대, 즉 한국"이라는 개념도 말이 안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개념은 다민족국가론이라는 개념으로서 그것을 인정해주어야합니다. 논리가 아닌 가설이 논리적이다 비논리적이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만큼 바보짓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민족역사론의 한국도 똑같은 이유로 비판받아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논리가 그렇다면 한국의 논리는 "한국은 단일 민족이다. 그러므로 고대부터 어떤 땅에서 어떤 문화를 배경으로 살아왔다고 해도, 현재의 우리 한국에 섞여있다. 그러므로 현재 한국인을 이루는 모든 민족들의 역사는 모두 한국사이다." 이것은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지금 한국이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런 식의 주장입니다. 일단 한국이 단일민족이라는 가설부터가 논리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이 지금 한국인과 같은 공동체성격을 갖기 전의 역사까지 한국사로 가정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고구려를 우리 민족사로 볼 수는 없다'라는 소리나 해대는 인간들을 교수라고 키우고, 그런 사람들이 목에 힘주고 다니는 세상입니다.
그런 교수라는 사람은 김한규교수님인거 같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이우혁씨가 김한규교수님의 논문이나 책을 정말 읽어보았나라는 것입니다. 김한규교수님이 주장하는 것을 신문기사에서 저렇게 왜곡한 것을 가지고 그 모든 논리를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입니다.
김한규교수님의 주요논지를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교수님은 요동지방을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독립시키는 가설아래에서 모든 논지를 설파합니다. 요동 지방이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독립한다는 의미는 "고구려가 우리 민족사로 볼 수 없다"라는 가설과 동시에 "고구려는 또 중국사도 아니다."입니다. 고구려는 다만 "요동사"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에 대한 논증을 제시합니다만, 그 부분은 직접 보시는게 좋을듯 합니다. 김한규교수님의 <한중관계사 1,2> 대우학술총서와 <요동사> 문학과 지성사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김한규교수님의 주장은, 본인도 인정했다싶이, 민족사학이 날립하고 있는 한국에서도 무시당하고, 국립사학이 날뛰는 중국에서도 소외받는 어찌 보면 불우한 이론입니다. 하지만, 전 이 책을 보면서 그 논리에서 상당한 공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의 주장은 학술적으로 반박을 당해야지, 단지 민족감정으로 인하여 박해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은 학자로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을 뿐입니다.
요동을 별개의 역사공동체로 보고 한중관계사를 한국이라는 역사공동체와 중국이라는 역사공동체가 요동이라는 제3의 역사공동체를 환절로 하여 서로 교섭하고 관계한 역사로 규정하는 것은 한중관계사를 보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서술하기 위해 필자 나름의 시각과 관점을 제시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이러한 시각과 관점을 제시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한국과 중국학계의 많은 지식인들을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1994년 가을에 중국 상해에 체류하고 있던 중에, 중화인민공화국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로부터 해남도에서 열리는 중국학국제학술회의에 발표자로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논문 한편의 발표를 준비하였다가, 회의참석 직전에 갑자기 해남도행을 포기했던 경험이 있다. 사전에 우송받은 발표 요약문을 검토한 주최측이 발표를 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해 왔기 때문이다. 그 떄 주최측이 밝힌 요청의 이유는 <그 논문이 회의장에서 발표되면 한중우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김한규교수님의 <한중관계사>의 머리말중...
학문적인 양심이나 그 기법을 적용하면 공염불만 하다가 결론을 못보게 만드는, 애초부터 조작된 논리적 함정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막기 위해서는 (제잘난 맛에 사시는) 사학자 들의 수준으로는 절대 불가능이라 봅니다. 다행히 많은 움직임이 있는데, 이런 것을 크게 성토하고, 민중의 힘으로 대처하여 국가적 대처를 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보입니다.
저는 제 잘난 맛에 사는 사학자를 지망하고 있습니다. 민중의 힘으로 대처하며 국가적으로 대응해야된다는 것에서는 찬성을 하지만, 이우혁님은 제 잘난 맛에 사는 사학자의 학문적 양심을 무시하고 계시는 듯 합니다. 학자에게 학문적 양심이 없다면, 지금 여러분이 욕하고 계시는 동북공정에 참가한 중국측 학자들과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그들의 몇몇 학자들이 학문적 양심을 버린다고, 한국의 학자들이 학문적 양심을 버리고 정치를 위하여 진실을 왜곡해야 되는 것입니까?
학자가 학자이고, 나름대로 사회적으로 존경받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놈의 학문적 양심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현실적으로 당장 밥줄이 끊기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말해야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학자이고, 학문이 학문인 이유입니다.
물론 위에서도 말했지만, 국민적인 지지가 없다면, 상대의 정치적 역사공세인 동북공정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해야될 일은 무엇일까요? 다른 것이 아니라 역사를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이우혁님은 "순위권 놀이나 리플 놀이, 게임 들어가 사람죽이는 데에나 재미들리는 사이버 유*철같은 짓 하지 말고, 좀 더 넓은 세상도 볼 겸,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정보를 나눕시다."라고 하셨지만, 그 정보를 나누기 전에 본인이 어느정도 기본이 되어있어야합니다. 여러분들 매번 고구려이야기가 나오면 화를 내시고, 짱깨짱꺠 라고 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그런 여러분들은 고구려에 관한 논문 단!한편이라도 읽어보셨나요? 전 중국에 있어서 동북공정에 관심이 많고, 중국인들에게 직접 몸으로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매번 화를 내더군요. 그런데 그들이 중국인과 하는 이야기의 한계는 뉴스보도에서 나오는 정도입니다. 사료적 이야기나 논증적 논리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니 단지 감정적이 될 뿐이죠.
알아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논문이라면 괜히 거부감이 드시나요? 사실 논문이라는 것이야 말로 제일 읽기가 쉽습니다. 읽기가 어렵다면 그것은 잘 못 쓴 논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도 보통은 10p정도 밖에 안 합니다. 일단 공부하는것이 어떨까요?
바로의 중얼중얼
이 외에도 저 글에서 몇가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많지만, 이미 너무 길어져서 더 길어졌다가는 돌 날라올거 같습니다.^^::
논문을 따로 구하기 힘드시다면, 제 블로그 왼쪽에 메뉴를 보시면 역사비웃기라고 있습니다. 그곳에 가시면 중국과 한국 논문이 있는데, 한국논문을 읽어보시는게 좋을거 같습니다.(중국논문은 그 요점만 제가 번역해 놓아서 본문의 논증부분은 중국어를 모르면 보시기가 애매해서 말이죠^^:: )
바로의 요약정리
본인이 쓴것을 번역할 생각을 하니, 정말 싫습니다!! 그냥 요약하겠습니다.^^::
이 레포트는 陈来(질래)선생님의 선진철학을 들으면서 작성했습니다. 질래선생님은 고대의 점복술이나 자연숭배, 샤먼등에서 유가가 생겨났다는 논지를 제출하고 있습니다.
김백현교수님의 말에 따르면, 질래라는 사람은 분명히 실력이 있지만, 화사족(华夏族)의 입장에서만 분석하고 있으며, 한국인과는 다르게 샤먼을 모르기 때문에(한국인들이야 무당의 굿판을 자주 보지만, 중국은 그런것이 미신탈피라는 공산주의이념으로 현재 남아있지 않습니다.) 신명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 철학교수님이 한국인이고, 거기에 유가쪽이 아닌 도가쪽이라는 것은 염두에 두시고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나중에 김백현교수님이 시도하고 있는 "신명에 대한 고찰"을 올리도록 하죠.)
이 레포트의 결론은 위에 다 나와있습니다.-_-;; 고대의 샤머니즘(종교)가 어떻게 철학으로 변했느냐라는 것을 설명하며 논증하고 있습니다.^^
바로의 중얼중얼
질래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심히 짜증났던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연구생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마져 없고, 단지 연구만 하던 분이십니다. 그런데 갑자기 본과생을 대상으로 수업을 했으니 수업방식이 너무 엽기적이었습니다. 분명 본인이 쓴 책을 가지고, 토씨하나 안 뺴고 읽고 있는 모습은 저를 경악속으로 빠져들게 했습니다. .....유명하신 분이라서 일부러 무리해가면서 선택했건만...ㅠㅠ
마침 그 선생님 밑에서 박사를 마친 형님이 중국에 놀러오셨길래 물어보았습니다. 그 선생님 대체 왜 그러냐고!! 딱 한마디 하시더군요. "원.래.그.래." -_-;; 어찌하오리까..ㅠㅠ
근년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에서 2002년부터 막대한 인원과 예산을 투입하여 동북변강의 역사와 현장에 대한 연속 연구공정(東北工程)이라는 국가적 프로젝트를 5년계획으로 추진 중에 있다. 그 내용은 고구려를 비롯한 고조선, 발해 등 한국 고대사를 왜곡하여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공작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평양 천도 이전은 중국 역사이며 평양 천도 이후는 한국사라고 하였으나 이제는 고구려 역사 모두를 중국사로 주장하려고 한다. 그들은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결론을 내어놓고 억지로 이를 증명하려고 자기 주장에 맞는 사료만 나열하면서 附會하려고 한다. 그 내용을 보면 종족문제, 조공책봉문제, 영토계승문제 등을 들고 있다.
중국인들은 주변국가가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다 하여 모두 종주국과 복속국 관계이며, 중앙정권과 지방정권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역대 중원국가 중에는 주변 변방국에 奉表稱臣한 일도 있고, 또 形式은 조공관계가 아니더라도 내용적으로는 조공을 바친 예가 한두 번이 아니다.
본고에서는 중원왕조가 북방계 왕조에 대하여 奉表稱臣한 예와 이에 준하는 宗室公主許嫁, 物貨의 納貢등의 事實을 時代別 또는 分類別로 나누어 기술하려고 한다.
1. 조공의 의미
조공의 뜻을 우리말 사전에는 '전날 속국이 종주국에게 때맞추어 예물로 물건을 바치던 일'이라 하였고, 또 『國事大事典』에는 '종주국에게 때맞추어 예물로 물건을 바치는 일로 종주국에서는 이에 대한 답례로서 下賜, 賞賜란 뜻으로 많은 恩典을 가하여 보답하였다. 조공은 주로 동양사회에 있어서 중국을 중심으로 행하여졌는데 이것은 고대로부터 정치적 이상 즉 왕도사상에서 나온 대외정책의 한 형식으로 국가간의 공식적인 물품교환을 의미하는 일종의 관무역이라 할 것이다.'라 하였고, 『中文大事典』에서는, '諸侯或屬國定期朝拜天子, 貢獻方物, 謂之朝貢.'(제후 혹은 속국이 정기적으로 천자를 배알하고 방물을 바치는 것을 조공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자구해석에 불과하다. 그 실상은 明王愼德, 四夷咸賓이 아니라 약소국이 무력적 약세에 의하여 불가피하게 朝覲之禮를 이행하게 되었고 그 관례는 정치적 복속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국제정세에 따른 자국의 이해관계에서 출발한다는 이론이 설득력 있다 하겠다.
중국의 수 천년 역사의 전개과정에는 한 민족만이 중원을 지배하였던 것도 아니었고 주변 다른 민족도 여러 차례 중원의 주인이 되기도 하였다. 대개는 중원왕조의 주인은 한족이고 그 주변의 다른 민족은 조공이나 바치며 명맥을 유지 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중국의 서북, 북방, 동북의 유목민족과 반유목민족이 중원의 주인이 되기도 하고 혹은 공생관계 혹은 전쟁관계에서 여러 방면에 영향을 끼친 바 크며, 그 업적과 역사상의 지위는 한족 못지 않았다.
북방민족이 중원 일부 또는 전 지역에 왕조를 건설하여 한족왕조를 대신하여 중원을 통치하였다. 예컨대 북위, 요, 금, 원, 청이 바로 그들이다. 때로는 남북 대치상태에 있을 때에는 중원왕조가 북방민족에게 신사하기도 하고 혹은 형식상은 아니더라도 실질내용 면에서는 조공하였다고 할 수 있는 예들이 많았다.
2. 형식 및 실질조공
1) 漢帝國과 匈奴
한 고조 6년(BC 201년) 太原郡 31縣을 韓國으로 삼아 韓王 信을 옮기고 晉陽을 都邑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 해 9월 흉노가 韓王 信을 馬邑에서 포위하자 馬邑을 가지고 흉노에 항복하였다. 이에 한 고조는 그 다음 해(고조 7년, BC 200년) 겨울 고조 스스로 將이 되어 韓王 信을 銅 에서 격파하고 그 장수를 베었다. 信은 도망하여 흉노로 달아났다. 그 부하 장수 曼丘臣과 王黃이 옛 趙의 후예 趙利를 왕으로 삼아 信의 흩어진 병사를 수습하여 흉노와 같이 한에 거전하였다. 고조가 晉陽에서부터 여러 차례 전쟁을 하여 계속 승리하며 북으로 진격하였다. 樓煩에 이르렀을 때 큰 추위를 만나서 士卒의 20∼30%가 동상에 걸리게 되었다. 平城에 이르렀을 때에는 흉노에 포위되어 7일간이나 진퇴양난에 빠졌는데 陳平의 秘計를 써서 겨우 빠져 나왔다. 그 후 흉노의 세력에 무력대항은 불가능함을 깨닫고 화친을 제의하였다. 이후 양국은 흉노의 산발적인 도발도 있었지만 무제 즉위까지 대략 60년간은 무양하였다. 고조 9년(BC 198년) 劉敬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흉노와 화친하고 宗室女子를 冒頓에게 출가시키고 매년 일정수의 솜과 명주, 酒食을 보내고, 兄弟로 약속하였다. 모돈은 세력이 점점 강대하여져서 고조가 죽은 후에는 더욱 한을 경시하여 呂后에게 글을 보내어 求婚까지 하였다.
이러한 공주의 혼가는 고조이래 惠帝, 文帝, 景帝 때까지 이어졌으며 財貨도 계속 보내어 졌다. 이것은 비록 용어를 조공이라 하지 않았을 뿐 실질적으로는 조공이며 신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賈誼도
라 하여 한의 흉노에 대한 歲幣奉獻은 納貢으로 보았고 한과 흉노와의 관계는 上下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어쨌든 한과 흉노의 초기관계는 한이 흉노에 納貢하였지만 무제이후 한의 세력이 신장되면서 흉노가 한에 稱臣入朝하는 형국으로 바뀌었다.
2) 後晋과 契丹
後唐 明宗의 양자인 李從珂가 군사를 이끌고 京師에 들어가 스스로 帝位에 올라 廢帝가 되었다. 그는 명종의 사위인 石敬 과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淸泰 3년(936년) 폐제는 석경당을 天平節度使(지금 山東省 서북부를 다스림)로 옮기고 張敬達에게 군대를 이끌고 가서 부임을 재촉하게 하였다. 이때 석경당의 幕僚인 桑維翰이 석경당에게 명을 거역하고 군사를 일으키도록 권하고, 또 거란에 군사원조를 청하도록 건의하였다. 석경당은 이에 따라 거란 太宗에게 奉表稱臣하고 父禮로 섬기기를 청하면서 성공할 것 같으면 盧龍節度使區域과 雁關以北의 諸州를 거란에 주겠다고 약속하자 거란은 크게 기뻐하면서 仲秋때까지 기다렸다가 傾國赴援하겠다고 하였다. 935년(天顯 10년) 그해 9월 거란 태종(耶律德光)은 5만기를 이끌고 揚武谷에서 晉陽에 도착하였다. 그해 11월 晋陽 남쪽에 壇을 쌓고 石敬 을 皇帝로 삼고 나라 이름을 晉, 天福이라 改元하였다. 이에 대하여 『契丹國志』에는
이라 하여 그 卽位에 대한 情況을 자세히 전하고 있다.
진은 幽(지금의 大興縣), ( 縣), 瀛(河間縣), 莫(任邱縣), ( 縣), 檀(密雲縣), 順(順義縣), 新( 鹿縣), 爲(懷來縣), 儒(延慶縣), 武(宣化縣), 蔚(蔚縣), 雲(大同縣), 應(應縣), (朔縣 동쪽), 朔(朔縣) 16州를 거란에 할양하고, 매년 帛 30만필을 바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비록 한족이 세운 王朝는 아니더라도 중원에 건국한 황제로 거란에 대하여 ① 거란 태종을 父禮로 섬기고 ② 燕雲 16州를 거란에 할양하고, ③ 매년 帛 30만 필을 바치는 것으로 하였다. 이와 같은 일은 일찍이 역사상 없었던 일이다. 『契丹國志』에
이라 하였다. 후진 고조는 이렇게 성심성의껏 받들고 貢物도 끊임없이 바쳤다. 그러나 거란은 조금이라도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가차없이 사신을 보내어 문책하였다. 이러한 거란의 행위에 대하여 成德節度使 安重榮이 매우 부끄럽게 여기고 거란과 여러 차례 싸우기도 하였다. 天福7年(942년) 고조는 안중영을 사로잡아 죽이고 거란에 사죄하였으나 거란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걱정을 하다 죽었다.
후진은 형의 아들 石重貴를 계위시키고 고조의 崩御를 거란에 告哀할 때 奉表稱臣하자는 의견이었으나 景延廣이 稱孫은 하되 稱臣은 안 된다 하여 그대로 하였더니 거란 태종이 대노하여 남침하였다.
景延廣의 이론을 『契丹國志』에서 보면
이라 하여 出帝는 中國인이 세웠으니 稱臣奉表할 수 없고 稱孫이면 족하다 稱臣하지 않은 것으로 분노한다면 쳐들어 와라 우리의 10만 횡마검이 기다린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고조의 奉表稱臣은 인정하고 있었다 하겠다.
3) 南宋과 金
조공제도는 중국이 그 주변의 국가와의 사이에 지녀온 전통적 대외관계의 가장 특징적인 것이다. 전해종은 본질적 조공관계로 a) 경제적 관계(조공(歲幣•方物, 請求, 賜物, 免), b) 의례적 관계(封典, 告哀, 進賀, 陳慰, 賜除, 賻恤, 謝恩), c) 군사적 관계(중국 측 요청, 조선측 요청), d) 정치적 관계 및 기타(臣稱, 年號採用, 曆採用, 內政干涉, 陳奏, 倭政報告, 洋舶情形報告, 人質, 通婚, 기타)로 규정지었다. 한족왕조로써 북방민족왕조에 대하여 전형적인 조공을 바친 예는 바로 남종 고종이다.
靖康 2년(1127년) 정월 금은 欽宗을 金 陣營에 구금하고 금은을 요구하였다. 송은 京師를 수색하여 금 30여만 량, 은 700여만 량, 비단 100여만 필을 모았으나 금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 해 2월 徽宗과 諸王后妃들도 금진에 포로가 되었으며 4월에는 徽•欽宗 父子와 皇后, 太子, 親往, 妃嬪, 宗戚 및 諸臣 등 3,000여 명이 북으로 잡혀갔다. 뿐만 아니라 남녀 백성 중 강제로 끌려간 사람이 10여만 명에 달하였다 한다.
1127년(天會 5년) 금 태종은 徽宗•欽宗 父子를 강등시켜 서인으로 삼았다가 그 다음 해에는 上京(吉林 阿城縣 남쪽)으로 옮겼다. 그 다음 달에는 素服으로 太祖廟를 배알케 하고 徽宗을 昏德公, 欽宗을 重昏侯로 봉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 二帝는 韓州로 옮겨졌다.
한편 1127년(靖康 2년) 3월 금은 宋臣 張邦昌을 楚帝로 삼았었다. 그러나 금이 북으로 돌아가자 스스로 退位하고 天祐皇后(哲宗廢后孟氏)가 궁으로 들어와 垂簾聽政하였다. 그해 5월 康王(趙構 徽宗 第9子)이 南京(應天府 지금 河南 商邱縣)에서 卽位하니 이가 高宗이다. 開封에서 善戰하던 宗澤이 죽자 主和派 세력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금이 압박해오자 고종은 양자강을 건너 杭州(臨安府로 승격)로 옮겨 수도 건설을 준비하였으나 사태가 위급하게 돌아가자 越州(浙江 紹興縣)로 도망하였고, 또다시 明州(浙江 縣 동쪽)로 도망하였고, 금군이 臨安을 점령하고 동시에 浙江으로 추격해 오자 고종은 바다로 도망하였다. 1130년(建炎 4년) 고종은 溫州(浙江 永嘉縣)로 도망하였다. 금군이 물러난 후에 越州로 돌아왔다가 1138년(紹興8) 정식으로 임안에 수도를 정하였다.
이때 岳飛, 韓世忠, 張浚 등은 모두가 중원회복을 주장하였다. 그중에서도 岳飛는 고종의 신임도 상당하였다. 그는 누차 중원회복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중원회복에는 흥미가 없고 다만 和議에만 마음이 있었다. 그는 여러 차례 패전으로 금에 대한 두려움이 많아 쉽게 전쟁을 일으킬 수 없었다. 이외에도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한다.
첫째는, 主戰派의 구호대로 兩宮(徽宗•欽宗)을 모셔오고 疆土를 수복한다면 皇位問題가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므로 皇位를 위협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꼭 금과 화의하여 2帝를 귀환하지 못하게 하여야 했으며 둘째, 主戰派는 대부분이 무인들이기 때문에 전쟁에 승리하면 무인이 발호할 것이고 그러면 통제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고종은 화의를 주장하는 秦檜를 믿고 금과 화의코자 하였다. 여러 차례 사신의 내왕이 있은 후 드디어 1141년(紹興 11년) 11月에 화의가 성립되었다. 그 내용을 『宋史』에는
같은 내용을 시기적으로도 조금 달리 적고 있고 또 내용도 조금 달리 기술하고 있다. 이 화의 내용을 傅樂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① 宋은 金에 臣이라 칭하고 金에게 表를 바치며 金은 宋主를 皇帝로 冊封한다.
② 宋은 해마다 銀•絹 각 25만兩匹을 봄에 泗州(지금 安徽, 縣 동북)에서 교부한다. ③ 宋은 金主의 生辰과 正旦에 사신을 보내어 치하한다.
④ 金은 徽宗의 梓宮(紹興 5年에 徽宗은 崩御)과 韋太后(高宗의 生母)를 귀환시킨다.
⑤ 宋•金은 동으로 淮水, 서로는 大散關(지금의 陝西 寶鷄縣 서남)을 국계로 삼는다.
이 誓盟의 내용을 살펴보면 형식상으로나 내용상 완전한 주종간의 조공이었다.
3. 실질적 조공
1) 北宋과 契丹간의 淵盟約
송 태종이 979년(太平興國 4년) 정월 北漢을 親征하자 거란에서 북한을 도와주어서 실패로 끝나고 그 해 5월 송이 북한을 급습하여 멸망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燕•雲을 회복코자 거란을 정벌하였다. 東易州와 州를 함락하고 幽州에 이르러 10여 일이나 대치하였다. 거란이 耶律休哥를 보내 원조하자 송군은 高梁河에서 대패하였다. 태종도 流矢를 맞아 도망하여 겨우 생명을 보존하였다.
이 전투 이후 송•거란 국경에는 충돌이 그치지 않았다. 송 태종은 986년(雍熙 3년) 거란을 다시 정벌하였다. 이때 거란은 景宗이 崩하고 聖宗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으므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대거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결과는 岐溝關에서 耶律休哥에게 크게 패하였다. 이 전역 이후 거란은 보복정책을 취하여 송의 河北•河東에 군대를 보내어 여러 차례 침략을 하였다. 송은 두어 차례 和議를 청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하였다.
송은 997년(至道 3년) 태종이 崩하고 眞宗이 즉위하였다. 진종 즉위 초부터 主和論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004년(景德 元年) 거란 성종은 蕭太后의 뜻을 받들어 대거 송을 침입하여 전연에 바로 다다랐다. 전연은 首都 開封에서 불과 300리 밖에 되지 않는 곳이어서 진종은 물론 조야가 크게 놀랐다.
당시 재상 寇準과 畢士安이 親征을 주장하고 나서자 할 수없이 州로 나갔다. 송군의 사기는 크게 진작되었으나 진종은 줄곧 화의만 생각하고 있었다. 거란도 승승장구하였으나 전연에서 蕭撻覽이 궁노에 맞아 죽자 진격을 멈추고 물러났다. 그리고 곧 和議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누가 먼저 화의를 제의했는가는 사서마다 다르다. 『宋史』에는 그해 11월 甲戌에 王繼忠이 두어 차례 달려와서 請和를 상주하자 진종은 宰相들에게 이르기를
繼忠言契丹請和, 雖許之, 然河 已合, 且其情多詐, 不可不爲之備
라 하면서 거란에 대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거란이 먼저 和議를 청해 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遼史』에는 南院大王 耶律善補가 상주하기를 宋人이 사람을 보내어 왕계충에게 弓矢를 주고 몰래 和議를 청구하였습니다 하니 조서를 내려 계충에게 宋使와 만나서 화의를 허락하도록 하였다고 하니 송이 먼저 화의를 청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양국 간의 맹약은 그 해 12월 戊子에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遼史』에
宋遣李繼昌請和, 以太后爲叔母, 願歲輸銀十萬兩, 絹二十萬匹. 許之. 卽遣閤門使丁振持書報聘
이라 하였으며 『宋史』에는
遣監西京左藏庫李繼昌使契丹定和, 戒諸將勿出兵邀其歸路. …乙未, 契丹使丁振以誓書來.
라 하였다. 이 두 사료중 『遼史』에는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나 『宋史』에는 자세히 적시하지 않았다. 이는 더 없는 치욕으로 여겼기 때문이라 생각하였기에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契丹國志』에는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라 하였다. 결국 송은 ① 매년 비단 20만 필, 銀 10만 량을 거란에 보내고, ② 거란 성종은 송 진종을 형이라 호칭하는 화의가 성립되었다. 이것을 단연( 淵)의 盟이라 한다.
聖宗誓書에 의하면 歲幣는 軍旅의 費用을 돕는 것으로 명목을 정하였으며 統和 23年 10月癸卯부터 보내져서 매년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 兄弟로 呼稱하는 것은 關南誓書에 보인다.
이러한 양국관계는 대략 117년간(1005∼1121) 평화를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그 기간 계속 무양했던 것은 아니었다. 1041년(慶曆 元年) 12월 거란 興宗이 송이 關河를 設置하고 壕塹을 수리하고 하니 邊患이 있을까 두렵다는 말을 듣고 南樞密 蕭孝穆과 北樞密 蕭貫寧과 關南 10縣地를 취하려는 모의를 하고 蕭英과 劉六符를 송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해(1042) 정월 南院宣徽使 蕭特末, 翰林學士 劉六符를 송에 보내어 晉陽 및 瓦橋이남 10縣地를 취하겠다고 하고 또 군사를 일으켜 서하를 정벌한 것과 沿邊의 水澤을 넓히고 깊이 판 것과 兵戌을 늘인 이유를 물었다. 그 해 6월에 송의 富弼이 다녀가고 또 8월에 와서 歲幣銀絹을 增額토록 하는 것으로 매듭 지우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9월 北院樞密副使 耶律仁先과 漢人行宮副部署 劉六符가 송에 사신으로 가서 和議를 약속하였다. 이때 富弼이 興宗에게 송과 거란의 和議의 大意를 말하기를 가만히 앉아서 歲幣를 얻으면 利는 국가에 있고 신하에게 주지 않아도 되며, 송과 싸움을 한다면 利는 신하에게 있고 해는 국가에 돌아온다고 하자 흥종이 그 말에 감화되어 비로소 和好를 정하였다. 그 해 윤9월 耶律仁先이 사람을 보내어 보고하기를 송이 매년 은과 비단 10만량필을 증가하고 文書에 "貢"이라 하며 白溝에서 보내 준다고 하자 흥종이 기뻐하여 군신들과 잔치를 베풀었다. 文書에 獻이라 하느냐 納이라 하느냐를 두고 爭論을 벌린 듯 하나 결국 "貢"으로 귀착된 듯 하다. 이렇듯 무력의 강약에 의하며 부득이 매년 물화와 돈을 바친 것이라면 이는 조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 靖康年間 北宋과 金의 講和
1125년(宣化 7년) 금은 마침내 송을 침범하였다. 금군은 두 갈래로 남하하였다. 東路는 斡離不(宗望 金太祖의 子)이 지휘하였는데 平州를 거쳐 燕京으로 들어가고, 西路는 粘罕(宗翰)이 雲中(지금의 山西省 大同)으로부터 太原(지금의 山西省 太原)을 공격하였다. 太原을 지키던 童貫은 도망하고 知府 張孝純의 善防으로 금군이 더 나아가지 못하였다. 東路軍은 郭藥師의 항복을 받고 그를 선도로 하여 黃河를 건너게 되었다.
1126년(靖康 元年) 정월 금군이 開封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李綱의 善戰으로 쉽게 점거하지 못하였다. 사방의 援軍이 패하여 부득이 금과 강화하게 되었다. 和議를 청한 것이 어느 쪽이냐 하는데는 사료가 서로 엇갈린다. 『宋史』에는 靖康元年(1126년)정월 甲戌에 金人 吳孝民을 보내어 議和하였다고 하였고, 『金史』에는 天會4年(1126년)정월 甲戌 宋使 李절이 와서 謝罪하고 修好를 청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和議의 내용도 조금씩 달리하고 있다. 『金史』에는
라 하였다. 두 사료가 조금씩 다르게 기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금이 제의한 講和條約은 매우 가혹하였다. 그 요점은
① 송은 금 500만 량, 은 5000만 량, 表緞 100만 필, 소말 10,000두를 금에 주고,
② 金主를 伯父로 禮優할 것과
③ 송에 있는 燕•雲人을 돌려보내고,
④ 太原, 中山, 河間 三鎭을 할양하며,
⑤ 宰相과 親王을 인질로 한다.는 것이었다. 欽宗은 이를 수락하고 京師의 민간 소유 금 20만 량, 은 400만 량을 모아서 금에게 주고 張邦昌을 금 진영에 보내어 화의하자 斡離不은 포위를 풀고 북으로 돌아갔다.
이 화의의 내용도 비록 奉表稱臣은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내용적으로는 그 이상의 굴욕적인 것이라 하겠다.
3) 隆興年間 南宋과 金의 講和條約
1161년(紹興 31년) 금 海陵王이 스스로 60만군을 이끌고 淮水를 건너 南進하였다. 그때 金人들은 海陵王의 포악함에 분개하여 이 기회를 틈타 族弟 烏祿을 遼陽에서 옹립하여 世宗이 되었다. 海陵王은 이 소식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瓜州에서 신하에게 살해당하고 금군은 물러났다. 宋은 이 기회에 본토를 회복하고자 하여 淮北의 수개 주를 취하였으므로 위세가 진작되었다. 그러나 高宗은 帝位에 더 이상 미련이 없어서 太子 신에게 전위하고 스스로 太上皇이라 하였다. 太子가 즉위하니 곧 孝宗이다. 그는 즉위 후 중원을 회복하고 조종의 치욕을 씻을 생각을 하여 岳飛의 관직을 추가 복직하고 또 중외에 조서를 내려 조정의 잘못을 고치려 하는 등 상당한 희망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秦檜가 15년간이나 專橫하는 동안 忠臣과 良將은 거의 죽임을 당하고 士大夫들은 안정을 바라는 터라 失土回復은 쉽지 않았다.
孝宗 즉위 때 宋•金은 전쟁 중에 있었다. 그러나 금은 송이 稱臣하지 않는다 하여 大將 僕散忠義를 京에 보내어 전쟁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1163년(隆興 元年) 5월 張浚이 금을 공격하여 한때 성과가 있었으나 금군의 공격으로 소강상태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조신중 主和者 들이 張浚을 공격하여 효종도 할 수없이 그의 관직을 면하였다. 일반적으로 분위기가 舊疆回復보다 講和쪽으로 기울자 효종도 부득이 강화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내용에 대하여 『宋史』에는
① 金•宋은 叔姪間의 국가관계로 宋主가 金主를 叔父라고 부를 것
② 양국 왕래문서는 國書라 부를 것(이전의 양국문서는 君臣의 예로서 金主는 '下詔'라 하 고, 송은 奉表라 하였다.)
③ 송은 매년 은과 비단 각 5만냥필씩 감하고 歲貢을 歲幣라 고쳐 부를 것.
④ 쌍방의 疆界는 高宗 紹興 때와 같게 한다.
송이 이 和約에서 臣이라 부르지 않고 평등지위를 얻은 것이지만 이는 형식논리이고 여전히 물하증여와 숙질간의 국가라는 관계는 청산하지 못하였다.
4) 嘉定年間 南宋과 金의 講和條約
1204년(嘉泰4) 韓 胄는 금을 정벌하고자 결의하고 岳飛를 鄂王이라 追封하여 군사들을 격려하고 吳曦에게 명하여 蜀에서 군사를 훈련시켜 전쟁준비를 하였다. 그 다음해 송은 출병하여 금을 정벌하였는데 다소의 성과를 내었으나 宿州, 壽州 등지를 공격하다 패하였다. 더구나 吳曦마져 금에 항복하여버렸다.
이런 가운데 금의 僕散揆가 남하하여 淮南의 重鎭을 함락하고 곧바로 江北에 도달하였다. 이에 韓 胄는 스스로 실책을 후회하고 사신을 금군에 보내어 화의를 교섭하였으나 금은 한탁주의 首級을 요구하였다. 한탁주의 화의 내용을 『金史』에
宋韓 胄遣左司郎中王枏以書來乞和, 請稱伯, 復增歲幣, 軍錢, 誅蘇師旦函首以獻.
이라 하였다. 그러나 금군은 韓 胄의 首級을 요구하였다.
寧宗皇后 楊氏와 禮部侍郞 史彌遠이 평소 한탁주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차에 금이 한탁주의 수급을 요구하자 이에 寧宗에게 상주하여 한탁주의 수급을 금에 보내어 사죄하자고 하니 영종도 이를 받아들이었다. 이에 사미원이 密旨를 받아서 殿前司公事 夏震에게 명을 내려서 玉津園에서 주살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嘉定元年) 3월에 한탁주의 수급을 兩淮에 효수토록 詔書를 내렸다. 그리고 그해 3월 庚寅에 和議가 이루어 졌다. 그 내용은
① 靖康故事에 따라서 금•송의 帝室은 伯姪관계로 할것.
② 歲幣를 銀絹 각 30만량필로 증가할 것.
③ 송은 별도로 軍銀으로 300만량을 금에 주고 금이 점령한 淮陜지방을 송에 귀환시킬 것으로 하였다.
이 역시 명목보다 내용은 以小事大의 조공이라 하겠다.
4. 기 타
위의 두 범주(형식 및 실질조공, 실질 조공)에는 들지 않으나 이와 유사한 경우도 있었다.
隋末 북방의 군웅들이 모두 돌궐의 원조를 바랬으며 李淵도 거병 후 곧 劉文靜을 돌궐에 보내어 始畢可汗에게 稱臣하고 맹약을 맺었다. 이후 당이 세력이 커지면서 돌궐이 도리어 당에 칭신하게 되었다.
또 1146년(皇統 6년)의 경우 金 熙宗이 蒙古의 合不勒可汗을 정벌하려 하다가 도리어 패하여 부득이 和議하여 西平河 이북의 땅을 할양하여 주고 매년 소, 양, 쌀, 콩 등을 보내었다. 이 두 나라는 같은 북방계민족이지만 강약이 부동일때에는 이러한 질서로써 해결하였다.
南宋 理宗때에는 蒙古의 忽必烈이 長江을 건너 鄂州를 포위하자 宋 右丞相 賈似道가 몰래 宋京을 軍中에 보내어 蒙古에 稱臣하고, 江南을 경계로 삼고, 매년 은과 비단 각 20만냥필을 줄 것을 제의한 일도 있었다.
이것은 賈氏의 사적인 뜻이겠으나 관직이 우승상이였다면 전적으로 私意로 치부하기에는 문제가 있는 대목이다.
5. 結 論
어쨌든 奉表稱臣하고 朝貢을 바친 것은 북방민족이 중원 한족국가에 대한 의례정도로 이해하기 일수였다. 그러나 중원의 통치자가 북위, 요, 금, 원, 청일때도 있었고, 또 중원에 자리잡은 한족국가가 북방민족에게 稱臣하고 朝貢을 바친 예도 있었다. 혹은 형제나 숙질간의 관계로 맹약을 하면서 물화를 바치거나 영역을 떼어 주는 등 국가존립의 위기에 몰린적이 여러차례 있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한제국의 건국 초기에는 흉노의 세력에 밀려서 공주를 婚嫁시키는가 하면 재화도 정기적으로 보내었다. 그리고 후진은 그 건국부터 거란의 후원하에 이루어졌고 책봉도 거란 태종이 직접 하였을 뿐 아니라 군신관계, 부자관계로까지 발전되었었다.
남송 고종은 금에 대하여 奉表稱臣하며 매년 歲貢을 바치고 正旦에 사신을 보내어 치하는 등 군신의 예를 다하였다.
형식요건은 다 갖추지 않았어도 실질적으로 조공을 바친 예는 매우 많다. 우선 북송과 거란사이에 맺어진 淵盟約은 송이 매년 거란에 비단 20만필과 은 10만냥을 보내고, 거란 성종은 송 진종을 형이라 호칭하도록 서약하였다. 또 정강연간 북송과 금이 강화할 때에도 강화내용이 지극히 굴욕적이였다. 송은 수많은 물화를 금에 주고 金主를 백부로 대우하고 三鎭을 할양하고 재상과 친왕을 인질로 한다는 것이었다.
隆興年間에도 남송과 금사이에 강화조약을 맺었는데 이때도 역시 굴욕적이였다. 송주는 금주를 숙부로 부를 것, 송은 매년 歲幣를 금에 바칠 것으로 되어있다.
嘉定年間 남송과 금사이의 강화조약도 정강고사에 따라 금•송제실은 伯姪관계로 할 것, 歲幣를 은견 각 30만냥필로 할 것, 송은 별도록 軍銀 300만냥을 금에 줄 것 등이다.
이 밖에 당 고조 이연이 돌궐의 始畢可汗에게 칭신한 것이나, 금 희종이 몽고에 땅을 떼어 주고 가축과 곡물을 몽고에 매년 보낸 일이나, 賈似道가 몽고에 칭신하려던 일 등이 있다.
위의 예를 본다면 주종관계이던 조공관계이던 국가 세력의 강약에 의한 질서였지 군왕의 덕화에 감화되어 스스로 조공을 바치고 조근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
설령 주종관계가 성립되었더라도 시대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었으므로 성격규명도 달라야 할 것이다. 또한 宗藩관계라는 용어의 宗이 반드시 한족국가만이 아니였음도 알 수가 있다.
뱀다리 : 한마디 하고 싶은것이 있습니다. 이른바 한국학계(역사학계든 다른 학계이든)에서 자행되고 있는 어이없는 행위에 대해서입니다.
왜? 그들은 한글을 이용할 생각을 안 할까요?
물론 몇몇의 역사용어들은 그 의미의 정확한 전달을 위해서 반드시 한자를 활용해야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結論"(결론)같은 말은 한글로 하여도 그 의미전달에 문제가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納貢와 같은 경우도 납공(納貢)와 같은 식으로 하여서, 비전문가들의 접근성을 높일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이런 관행들은 되도록 빨리 고쳐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면, 한자공부해라따구의 말을 하는 것들아. 나 중국땅에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생활이 한자이다. 한자 많이 쓰면 폼나보이냐? 딴 사람이 못 읽으면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냐? 웃기는 넘들.--> 잠시 흥분했음-_-;;)
저는 신고와 의고의 논쟁을 정리하던중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는 지금 중국인이 아니지만 북경대학교역사과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런 특수한 상황하에서, 문화국외자의 입장에서, 결론을 내리자면, 지금 현재 중국사학계에서 유행하고 있는 신고학풍은 중화사상의 낙인이 찍혀 있는 상태로 중국의 문화패권주의로 변질되고 있는것이 아닐까요? 중국사학계는 과학적인 분석을 포기하고, 중국문화패권주의의 건설을 위하여 역사를 이용하고 있는것은 아닐까요?
다만, <좌전>이 없다면 어떻게 중국선진시대를 연구할 수 있을까요? 이런 개념속에서 생각한다면, 서방의 문헌무시풍조의 중요한 문제를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건의한다. 내부자는 가능한한 자신의 역사전통에 대한 객관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며, 외부자는 그 전통을 중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같은 중간자들의 노력도 필요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바로의 중얼중얼
2000자도 안되는 1시간만에 다 적어버린 심심파적식 레포트였습니다. 그리 큰 내용은 없습니다. 단지, 지금 현재 중국의 사학계의 학풍이 조금 무서워서, 그들이 문화패권주의로 나아가기 때문에, 그것을 경계하고 싶은 마음에서 적어내려간 것입니다^^ (볼 사람도 없는 이딴 글은 왜 올리는거야!! -_;;)
윤명철 교수님의 논문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동아지중해(東亞地中海)(Eastasian-mediterranean-sea)라는 개념을 보았을 때, 상당히 인상에 선명한 낙인이 찍혀오더군요.^^ 원래부터 광대토왕급 구축함이니, 이순신급 구축함이니해서 KDX사업에 관심이 많았고, 해군을 상당히 좋아하는지라....^^::
하지만 윤명철교수님도 논문에서 밝혔듯이, 해양에서의 일은 유물로 증명하기도 힘들고(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힘들다는 것입니다^^;;) 사료로 증명하자고 해도 애로사항이 꽃피우는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래도 한국의 앞으로 미래에 제일 중요시 해야될 것이 해군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해양성의 과거모습과 그 변천과정의 논문을 발표함으로 인하여 파생되는 국민정서의 변환에 높은 가치를 두고 싶습니다.
고구려(Koguryo)는 중국, 북방의 遊牧種族들, 한반도의 백제(Paekche)와 신라
(Shilla) 및 왜(Wa)의 세력이 마주치는 접점에 있었다. 또한 대륙과 해양을 공유
하였고, 중국지역 및 遼東(liaotung)지역 등과는 황해북부, 百濟와 황해중부 이북
을 경계로, 왜와는 동해를 가운데 두므로써 해양질서의 영향이 강했다. 필자는 이
러한 특성에 주목하여 東亞地中海(Eastasian-mediterranean-sea)개념을 모델로
설정하였다.
고구려는 이러한 특성을 살려 국가의 발전전략을 수립하고 실천하였으며, 국제
질서와 대외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는데 이용하였다. 특히 동서남북 동시
진출정책을 펼쳤으나, 특히 남진정책을 중요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인 특
성상 해양활동도 활발하였다. 그런데 남진정책과 해양활동은 깊은 상관관계를 맺
고 있었다.
고구려의 존속기간 내내 추진한 정책들은 몇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단계성을
지녔다. 일정한 시대, 특정한 왕의 정책으로 추진된 것이 아니다. 전기부터 장수왕
대까지 국내적 조건과 국제질서의 상황 속에서 장기정책으로 추진된 것이다. 특히
광개토대왕(King Kwanggaeto)은 국제질서의 재편과정 속에서 능동적인 대응전략
을 수립하기 위하여 본격적인 해양활동이 필요했다. 장수왕(King Changsu)은 수도
를 평양성(Pyungyang Castle)으로 이전하고, 남진정책을 과감하게 실천하여 한반도
의 패자가 되었다. 또한 경기만을 장악하여 황해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확보하고, 동
아지중해의 해양질서에 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고구려는 국제질서의 중심부에서 국
가의 장기전략으로서 해양활동과 남진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장수왕대의 성공으로
多重放射狀 外交가 전개되는 국제질서 속에서 동아지중해의 중핵(core)국가로서 조
정역할을 수행하였다.
1. 서론
고구려는 華北지방의 중국세력과 북방의 遊牧種族들, 한반도 중부 이남의 백제와 신라
및 왜의 세력이 마주치는 힘의 접점에 있었다. 또한 대륙과 해양을 공유하였고, 중국지
역 및 遼東지역 등과는 황해북부를, 百濟와는 황해중부 이북을 경계로, 왜와는 동해를 가
운데 두고 있어서 해양질서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필자는 이러한 특성에 주목하여 東亞
地中海(Eastasian-mediterranean-sea)개념을 모델로 설정하고,이와 관련된 글들을 발표
하고 있다.
고구려는 이러한 특성을 살려 다양한 국가의 발전전략을 수립하고 실천하였으며, 국제질
서와 대외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는데 이용하였다. 특히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동
서남북 동시진출정책을 펼쳤으나, 남진정책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
인 특성상 해양활동도 활발하였다. 그런데 남진정책과 해양활동은 매우 깊은 상관관계를
맺고 있었다.
본고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이 존속기간 내내 일관성을 지닌채 추진된 것으로 보며 어떠
한 단계와 과정을 거쳤으며, 주요한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해양활동과의 관련성 속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따라서 남진정책을 주로 국제정세와 관련하여 분석하였으며, 시대는 해
양과의 관련성이라는 본고의 주제와 논리의 전개상 전기, 광개토대왕기, 장수왕기의 3단
계로 나누었다.
2 전기의 해양진출과 국가전략
고구려는 해양과 남진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초기 단계부터 바다로의 진출을 꾸준히 모색하
였다. 大武神王 15년(32)에 후한과 긴장된 상태 속에서 好童은 낙랑을 쳐서 항복시켰
고 5년 후에 고구려는 樂浪을 멸망시켰다 그 후에 낙랑의 해양활동 능력을 수용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44년에는 後漢 光武帝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伐하
고, 그 땅을 取하여 군현으로 삼았다. 고구려가 낙랑을 점령하였며, 후한은 해양작전을
한 것이다. 이 후에 태조대왕은 서안평을 공격했다. 이것은 중원및 요동과 낙랑 등 남쪽의
중국세력의 연결을 끊어 협공위협을 감소시키고 낙랑세력을 구축하려는 것이었다. 특히 서
안평을 공격한 행위는 해양전략의 입장에서 볼 때 고구려의 황해연안 진출을 위하거나 중국
세력의 해양활동을 방해하기 위한 據點 確保의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요동에서는 公孫氏정권이 수립되었고, 그들은 樂浪郡의 일부를 분리해 帶方郡을 설치하였
다. 이 때 등장한 東川王은 군사전과 외교전을 병행하면서 변모하는 국제질서의 중심부로
진입하고자 하였다. 공손씨정권과 위,선비족 등의 군사적인 압력을 받고, 남으로는 낙랑 대
방군에 의해 배후를 위협당하고 있었다. 이 때 吳와의 외교관계는 국제적 지위를 상승시키
고,魏의 위협을 분산시키는 외교적 잇점이 있었다. 그런데 우연하게 맺어진 吳와 교섭하면서
해양활동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해양을 매개로 다국간의 이해관계가 격돌하는 동아지중해의
역학관계에 직접적으로 진입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고구려와 오는 정치적, 경제적인 이익을 위하여 교역을 활발하게 하였다. 吳에게 貂皮 1000
枚와 鷄皮 10具 등과 角弓 등 군수물자를 보냈다. 孫權은 衣服珍寶 등 사치품을 보냈
다. 고구려는 말 수백필을 주었으나 吳의 사신은 타고온 배가 적어 80필만 싣고 갔다.
고구려는 해양문화가 가장 발달한 吳와 관계를 맺음으로서 해양발전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 때 양국 간에 교섭이 이루어진 항구는 서안평이었다.
서안평은 압록강하구에 있으며, 고구려가 황해로 나가는 유일한 出海口이다. 서안평은 중국
세력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한반도 남부의 小國들 및 일본열도의 일부세력과 중국
과의 교섭은 樂浪을 중간거점으로 삼았다.그런데 고구려가 성장하고서해안 연안으로 진출
하면서 沿岸 혹은 近海航路를 이용하는데 어려움이 생겼다. 때문에 낙랑보다는 그 아래에
대방군을 설치하여 고구려의 해상봉쇄와 저지를 피하고자 했다. 魏는 수군활동능력을 바탕
으로 중간에 고구려를 포위한 형국으로 황해북부항로를 장악하고 일본열도를 연결하는 광범
위한 영향권을 형성한 것이다.
고구려는 南과 西의 양 방면에서 중국세력이 압박을 가할 경우에는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
다. 그러므로 한군현의 잔재세력과 북쪽에 있는 위를 연결시켜주는 교통로인 육로와 해로를
중간에서 장악하므로써 상호교통을 막아야만 했다. 따라서 고구려가 당면한 외교 군사적 목
표는 遼東沿岸 혹은 近海航路의 해상권을 장악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西安平은
고구려의 생존이 걸린 지역이었다.233년 이후 237년까까지 吳의 孫權과 교섭할 때 서안평
유역은 고구려의 세력하에 있었다. 그런데 東川王이 242년에 서안평을 공격했고, 이어 위와
고구려의 전면전이 벌어졌다.
그런데 3세기 말 부터 국제관계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晋은 夫餘 馬韓 辰韓 등과 외교관계
를 맺었고고구려는 肅愼을 정벌하는 등 동북지방으로 진출하였다. 한편 북방에선 鮮
卑의 段氏 宇文氏 慕容氏 등이 등장하여 쟁패전을 벌였으며 高句麗와 晋 사이에서 복잡한
역학관계를 연출하였다.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는 중국세력이 요동지방을 중심으로 행정권
을 상실할 정도가 되었다.
이 때 고구려의 美川王은 한편으로는 요동을, 다른 한편으로는 남진정책을 취하는 남북동
시전략을 취했다. 304년에는 백제가 낙랑군의 西縣을 공격하여 탈취하였다. 역시 해안가까
히에서 작전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미천왕 3년(302)9월에 3만명의 군사로서
玄兎郡을 공격하고, 이때 사로잡은 8000명을 평양으로 옮겼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미천
왕은 마침내 12년(311)에 서안평을 점령한 후 완전히 서해안에 진출한다. 압록강의 하구
지역과 황해북부의 해상권, 황해북부의 연근해항로의 물목을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13년
(313)에 낙랑을 완전히 구축하고 2000여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그 다음해인 314년에는 대
방을 멸망시켰다. 대동강 하구 및 예성강유역의 일부를 영향권하에 넣었다. 이로서 고구려
는 황해중부이북의 해상권과 연근해항로를 완전하게 장악하였다.
樂浪 帶方이 멸망한 데에는 고구려가 중간교통로를 장악한 것이 효과적으로 작용했을 것이
다. 특히 311년에 西安平 지역을 수복하여 西韓灣과 황해북부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해상활
동이 가능했고, 이러한 해양상황의 변화가 낙랑 대방의 대중통로를 막아 약화와 멸망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낙랑 대방을 둘러싼 대결은 한반도 뿐만 아니라 倭까지 연결한 동아지중해 동방의 이익을
고수하려는 중국세력과 그것을 탈취하여 중국세력의 협공에서 벗어나며 교역상의 이익은 물
론 남부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고자 하는 고구려 간의 싸움이었다. 따라서 전 시대
에 발생했던 朝漢戰爭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영토팽창전보다는 교역권의 싸움, 그리고 해양
질서의 대결이란 성격이 강했다. 이 때 특이한 경험을 했던 美川王은 국제질서의 본질을 인
식하고, 해양질서의 중요성과 그것이 가지는 경제적인 잇점 등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통찰력
을 지녔다. 그는 남북 동시전략을 추진했고, 남진에 비중을 두어 고구려가 실제적으로 남쪽
에 뿌리를 내리는 토대를 만들었다.
전기에 추진된 해양활동은 주로 고구려 국가전략이라는 입장에서 서안평 쟁탈전과 남쪽의
낙랑 대방을 축출하는데 두어졌다. 그 결과 요동반도 이남의 海上權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낙랑과 대방이 가졌던 해양능력과 교역상의 이익을 흡수했다.이렇게 추진된 고구려의 남
진은 백제의 성장 및 북진과 서로 부딪혀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된다.
4세기는 북쪽은 五胡十六國시대, 남쪽은 東晋의 건국이라는 대혼란시기가 도래하여 東아
시아 전체에 질서의 변동, 즉 분열과 질서의 변동을 야기시켰다. 북부지역의 여러나라들
과 남부의 동진은 정치 외교 경제적인 입장에서 교섭을 하였는데, 이는 육지와 해양의
공유라는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북중국에서의 혼란은
황해북부의 해양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황해를 內海(inland- sea)로 중
국의 남북지방과 한반도의 국가들, 그리고 일본열도로 연결되던 東亞地中海 질서권
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약화ㄷ을 것이다. 5胡 16國시대에 남북이 대치상태에 들어갔을
때 海路는 외교교섭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고구려와 요동반도 남부의 연, 화북의 후조와 남방의 동진은 각각 해양을 통해서 외교
및 군사교섭을 추진하였다. 고구려와 後趙는 연을 견제하는 외교 군사관계를 맺고 있었
다. 330년에 고구려는 후조에 사신을 보내고 같은 해에 矢를 보내어 군수물자를 교
환했다.이 때 고구려는 이미 장악한 압록강하구 유역을 출발하여 중간의 燕을 피해서
해로를 이용해 山東지방으로 잠입한 것이다. 한편 336년 3월에 해로를 통해서 동진에
사신과 공물을 보냈다. 해양을 통한 사신왕래가 빈번했고, 해양은 적대국가의 국경을
피해서 교섭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338년에는 후조가 300척을 동원해서 고구려에게
곡식을 보급하였다.이처럼 4세기 전반에는 각 나라간에 역학관계가 해양을 매개로 복
잡하게 전개 되었다.
고구려는 황해북부에서 활동을 하는 한편 남진정책을 취하였다. 낙랑군이 멸망한 이후에
도 잔존토착세력들은 동진 등 남조세력들과 교섭하면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대방군의 옛 땅인 황해도 지역에서도 토착호족세력들은 東晋의 연호인 元興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들은 해양능력을 바탕으로 대외교역과 정치적 활동을 하는데 약간의 독자성
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이 지역의 정치적인 공백을 메꾸고, 대외교섭에서
발생하는 정치 외교 경제적 잇점을 확보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진출을 시도했다.고국원
왕은 334년(2년)에 평양성을 증축하였다. 343년(17년)에는 평양 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겼
다. 물론 이러한 남진정책은 국제질서를 재편하는데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또 북진하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서이며, 해양활동과 불가분의 관련이 있다.
그런데 백제는 해양활동 능력이 뛰어났다. 근초고왕은 북진정책을 취하면서 평양성을 공격
하므로써 남진해오는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이 결과로 경기만을 완전하게 內海化하고, 그
배후인 황해도 지방을 장악하였다. 이 시대 백제의 해양활동 능력은 왜와 관계하는데서
도 나타난다. {日本書紀} 神功紀 기사에 의하면 백제와 왜의 교섭은 近肖古王 20년
(366)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馬韓을 병합한 후에 백제는 남부지역의 海洋能力을
보강하여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宋書(488)에는 백제가 중국지역에 진출한 듯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南齊書(6세기 전반) 梁書(7세기 전반) 南史(7세기 전반) 등 남조의 사서
들에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백제가 대방지역을 확보할 경우에는 위가 전에 대방을 중간거점으로 일본열도에서
화북지방 까지 구축해놓은 황해연안 교역권을 차지할 수 있다. 때문에 백제는 1차적으로 대
방의 땅을 차지하고, 黃海中部海上權을 확보해야했다. 그러기 위해선 북방진출을 꾀해야 했
다. 결국 고구려의 남방진출 기도와 북방진출을 하는 백제 近肖古王의 의도는 정면충돌을
하였으며,이는 주로 경기만 쟁탈전의 양상을 띄웠다.
고구려는 한강북부의 雉壤지방을 선제공격하였으나 패하고, 오히려 平壤城 전투에서
고국원왕이 전사를 당하여 남진정책은 좌절되었다. 이 후에도 양국의 충돌은 산발적으로
계속되면서 공방전을 폈다.
백제는 평양성 전투에 승리하므로써 옛 帶方郡 地域의 일부를 탈취하였으며, 그들의 사
회 경제적인 능력과 함께 해양활동능력을 상당부분 흡수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경기
만은 중부의 모든 강이 몰려드는 곳으로서 河系網과 내륙수로를 통해서 중부지방을 통합
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이곳을 장악하면 중부해상권의 장악은 물론 그 주변, 즉 甕
津半島 長淵郡의 長山串 등 이북지역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百濟는 이후에 해양활동
권이 황해중부이북으로 확대되었으며,일본열도에서 제주도, 한반도 남부를 거쳐 북부까
지 항로로 이어지는 物流體系를 장악하였다. 외교적으로 고구려를 압박하였으며, 여러나라들
과 동시에 교섭을 하였다.
평양성을 공격한 다음 해인 372년 정월에 晉으로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같은 해 6월에는
東晋이 사신을 보내어 近肖古王을 鎭東將軍令 樂浪太守로 책봉하였다. 백제는 이때에
비로소 중국과 통교를 하고, 그 질서 속에 진입하였다. 이 후에도 양국의 관계는 빈번하
게 지속되었다. 이러한 관계를 '高句麗는 前秦과, 東南으로 新羅와 연맹하고, 이에 대응
하여 百濟는 前秦과 대립한 東晋과, 그리고 東으로는 日本과 연결하였다'고 표현하는 견
해도 있다. 이러한 연결이 실효성이 있는지는 물론 해양을 전제로 해야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고구려는 동진과 海路로 연결되고, 백제 등의 남부지역 역시 해양을 매개로만
연결되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에 경기만 유역의 북부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각각 해양방어체제를 구축하
여 본격적인 경기만 쟁탈전을 벌였다. 백제는 386년에 대대적인 관방시설을 설치하여, 靑
木嶺에서 북으로는 八坤城,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렀다. 그 후 고구려가 394년(광개토
왕 3)에 國南 7성을 축성한 것은 황해도 남부해안지대를 강화할 목적인 것으로 추측된
다.
평양성 패배 이후에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일단 실패로 돌아가고 황해중부의 해상권이 위축
되어갔다. 고구려는 일종의 소강상태를 이루면서 내치에 주력했다. 그러다가 廣開土大王이
19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결국 이 시기까지의 남진정책은 황해로의 출해구를 확보한 다
음에 낙랑 및 대방의 구축,남진의 교두보 확보 등 주로 국가정책의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3 廣開土大王의 해양활동과 국제전략
廣開土大王은 제19대 왕으로 즉위하여 22년의 在位期間에 政治 軍事를 중심으로 飛躍的
인 발전을 하였다. 그의 최대의 업적은 南과 北으로 軍事的인 진출을 하여 일시적으로
위축된 고구려의 국력과 영토를 팽창시켰으며, 또한 동아시아의 秩序再編 과정에서 능동
적인 대처를 통해서 高句麗의 國際的 位置를 크게 향상시킨 데 있다. 4세기 초에 동아시
아 國家間에 형성되었던 力學關係는 4세기 말에 들어오면서 변동을 일으키고 그에 따라
서 해양활동의 질에도 변화가 왔다. 5세기는 4세기의 변화를 기조로 하면서도 새로운 상
황과 변화의 실체가 분명히 드러난 시대였다. 고구려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지정학적
인 위치를 최대한 활용하여 국제질서의 중심부로 진입해야 했다.
廣開土大王은 軍事的 優位性을 활용한 强攻策을 구사하며 동서남북의 全方位征服
活動을 감행했다. 軍事戰 위주의 이러한 대외정책은 在位年間 지속적으로 감행되었다.
먼저 북방의 경우를 보면, 385년에 요동과 현토를 점령하였고, 燕에게 遼東地域을 침략당한
다. 그러나 402년, 404년에는 연을 공격하여 정벌하였다. 그리고 406년에는 후연이 3000여
리를 행군해와 木底城을 침입하였으나, 이를 물리치므로써 요하 이동지역을 다시 완전히 장
악하였다. 이는 고구려가 遼東半島와 西韓灣, 大同江 하구, 그리고 京畿灣을 잇는 黃海중부
이북의 東岸 海上路를 확보한 데서 의미가 있다. 요동만의 장악은 山東 등 아래 지역과의
해양활동에 유리하였다. 한편 광개토대왕은 410년 東夫餘를 친정하여 복속시켰고, 북부여의
고지도 영토로 완전히 편입시켰다.
남방의 경우는, 廣開土大王 2년(392) 7월에, 4萬의 군사로 백제를 공격하여 石峴 등
10縣을 함락하고 10월에는 백제의 關彌城을 함락시켰다. 또 大王 2, 3, 4년에도
백제와 수차례 전투를 벌리는 등 초기에는 주로 백제와의 전투에 임했다. 물론 이는
고국원왕 말년에 상실한 禮成江유역의 지배권을 탈환하려는 조치이다.
廣開土大王은 활동영역을 점차 넓혀 396년에는 다시 水軍을 투입하여 백제를 쳐서 58城
700餘 村을 탈취하는 戰果를 올렸다. 그리고 8년에는 帛愼을 치고, 또 신라와 연합하여
百濟 倭 聯合軍을 격파한다. 물론 이때 고구려군은 동아지중해의 역학관계상 일본열도로
진출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엄청난 정복활동(東討西略 南征北伐)을 통하여 고구려의
영토는 동서남북으로 팽창되고, 마침내 大帝國을 건설하였다.
廣開土大王의 이러한 전방위정책은 外交面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외교정책에도 비중을
두어 對象을 多樣하게 하므로써 북방세력들과도 외교관계를 맺었다. 大王 9년(400)에는
燕에 사신을 보냈으며, 大王 17년인 408년에는 北燕에 사신을 보낸다. 또 대왕 20년
인 410년에는 南燕으로 使臣과 供物을 보내고 그 댓가로 燕王은 답례품을 보내면서 양국
은 공존관계가 된다. 이같이 명멸하는 북방국가들을 대상으로 다양하고 和戰兩面政策
을 구사한 것은 自主的이며, 탄력성있는 외교였음을 확인시켜 준다.
한편 광개토대왕은 남부의 국가들과도 외교관계를 적극적으로 맺었다. 實聖王子를 인질
로 하는 不平等外交를 통해서 신라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하는 한편 신라와 연합하여 百
濟 伽耶 倭聯合軍을 공동작전으로 물리쳤다. 이것은 백제의 세력을 약화시킨다는 목적
외에도 신라에 대한 宗主權을 강화시키려는 목적이 작용했을 것이다.
377년(光武帝 太元 2)에 고구려와 신라가 東晋에 같이 가고 계속해서 고구려와 같이
前秦에 간다. 신라는 일찍부터 고구려에 의존하여 국제사회에 편입하였고, 고구려는 이
를 통하여 신라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목적은 해양
을 연결고리로 새롭게 부상하는 百濟와 倭의, 南部中心의 外交를 신라를 이용하여 제
어하려는 것이다.
이처럼 大王의 재위 22년간에 발생한 대외적인 군사 외교활동을 분석하면, 광개토대왕은
특정지역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 全方位 攻略을, 외교적으로는 全方位 外交를 펼쳤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릉비문에 따르면 남진정책으로 이해될 만큼 남쪽을 향한 외교활동
과 군사작전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남진정책을 펼친 한 배경으로서 농경지의 확보를 통한 생산력 증대를 들고 있다.또한 육
지의 영토확대나 전략적 거점의 확보라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동아시아
세계는 질서의 측면에서 長期持續性을 가진 외교전략을 토대로 정책집행들이 이루어졌다.
또한 해양이 중요한 활동무대로 등장했고, 남북조의 分立은 주변 각국들로 하여금 외교활동
의 통로로서 해양의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시켰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의 남진정책은 대외관
계의 측면, 특히 본고의 목적상 해양활동의 측면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남진정책은 한반도의 정세와 백제와의 구원으로 볼 때 선차적으로 남부전선을 안정시키고,
백제를 제압하는 일이 중요한 목표였을 것이다. 백제는 근초고왕의 팽창정책 이후 광개토대
왕의 즉위 직전인 389년 390년에도 연속적으로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침입하였다. 이러한
양측의 공방전은 백제의 북진의도가 존재하고, 그만큼 군사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광개토대왕은 백제에 대해 지속적이고 전면적인 공격을 단행했다. 元年에 漢水 以北을 점
령하고,關彌城을 공함하였다. 그리고 王 6년(396)에는 水軍을 거느리고 백제의 50餘 城 700
餘 村을 함락하여 대승을 거두었다.이 성들의 위치와 남방한계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
해가 있다. 陵碑文 永樂 6년조의 기사에 의하면 강화도 혹은 한강水系 하류지역의 한 지점
인 關彌城과 通津으로 추정되는 沸城, 인천지역으로 비정되는 彌鄒城, 南陽灣 지역 등을 점
령한 사실은 서해안의 해상권 장악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또한 위치가 밝혀진
성들의 다수가 해안 가까히에 위치한 사실과 고구려가 수군을 이용해 공격한 사실은 해
양활동과 관련하여 강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대왕 元年({三國史記})과 6년 丙申
條({陵碑文})의 백제공격은 백제의 해상세력을 약화 또는 궤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해
양활동을 둘러싼 양국간의 치열한 접전이었다는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구려는 水軍
을 동원하여 黃海 中部沿岸의 海上權 掌握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것이다.
당시 양국이 해양활동에 비중은 둔 사실은 해양방어체제와 대왕의 수군작전에 의해 알수
있다. 백제는 373년에 청목령에 성을 쌓아 방어체제를 재정비하였다. 즉 백제의 세
력권은 북상했으나, 국경은 동쪽은 북으로 水谷城(新溪), 중간에는 靑木嶺(開城)윗쪽
인 예성강, 그리고 서쪽은 경기만에 접해있는 황해도 남부지역으로 추정된다. 이어
고구려는 375년에 水谷城을 점령하고 백제는 반격을 가하지만 탈환하지 못한다.
고구려는 다시 376년에는 백제의 북변을 침공하였는데 아마도 수곡성 아래이면서
청목령 윗쪽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386년, 廣開土大王이 공격한 8월 이전인 봄에 백
제의 辰斯王은 靑木嶺에서 八坤城, 그리고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기 까지 長城을
축조한다.
황해도 지역, 특히 해안에 방어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당시 양국간에 벌어진 싸움
은 水谷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해안선에서 100km 이내의 내륙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양국은 군사전략상으로 해안활동이나 해상권 장악에 힘을 기울였을 것이다.
더구나 이 지역은 경제적 잇점이나 양국의 대외교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결국
해양전의 발발이 예상되고 있었고, 해양방어체제를 구축하여 양쪽 모두 준비를 하
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고구려가 394년(광개토왕 3)에 國南 7성을 축성하였다.
이는 황해도 남부해안지대를 강화할 목적인 것으로 추측된다.이 지방에는 배천 치
악산성, 연안 봉세산성, 해주 수양산성, 옹진 고성 등 고구려 산성들이 있고, 그외에
시대를 알 수 없는 산성들이 많이 있다. 대부분 해양방어체제의 성격을 지닌 성들
이다. 최창빈은 이 성들을 당시에 쌓은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전쟁이 해양질서와 관련이 깊음은 전쟁과정에서도 나타난다. 고구려가 수군활동을 했
다는 것은 오로지 廣開土大王 陵碑文에만 나타난다. 이 기사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대규모의 수군을 투입하여 백제의 58城과 700 村을 탈취하였다. 다른 해의 기사와
는 달리 步騎의 사용과, 해전발생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고 있다. 수군을 동반한
작전을 한것이다. 그런데 50여 城을 공파하고, 그것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병력과 운
송선이 상당히 많거나, 1 척당 승선인원이 대량인 큰 배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6년
조의 기사는 고구려가 해양활동 능력이 뛰어났으며 본격적인 수전과 대규모 군사작
전의 감행능력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陵碑文} 14年條에는 왜의 해양활동과의 밀접한 관련 가능성이나오고 있다. '王
幢', '王躬率往討'이란 문구로 보아 대왕이 親征을 했으며 倭와 百濟가 공동작전
을 감행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또한 '連船 □□□' 이라는 문구로 보아 왜와 백
제는 船을 이용해서 帶方界를 습격한 것이 된다. 결국은 백제가 主가 되고 왜를
從으로 하는 연합군이었다.
결국 대왕은 수도인 한성을 공멸하고 서해연안의 요충지들을 점령하고 파괴하였다. 이처럼
大王의 황해 서부해안지대 공격은 국내적이고 경제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전개된
국제관계를 볼 때 백제의 정벌과 남진정책은 동아시아의 질서재편이라는 巨視的인 관점과
정치 외교적인 측면을 동시에 갖고 행해졌다. 고구려는 외교권의 독점을 위해 백제를 한반
도 내에 가두어놓고, 포위전략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연결고리를 적극적으로 차단
해야 했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배후를 교란케하고 운신의 폭을 제한하기 위하여
신라를 不平等外交의 틀 속에 편입시켰다. 신라를 동맹세력으로 하여 동남방에서 백제의 후
방을 견제하도록 하는 외교전략의 일환으로 신라의 使行에 깊히 간여하였다.
또한 보병 기병 5만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였다.신라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가야
까지 세력권하에 넣으려는 의도이다. 이로서 왜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백제의 배후를 위협
할 수 있는 전략적 잇점을 확보한 것이다. 이때 남진한 고구려는 동해남부나 남해동부
해안을 통해서 일본열도에 갔을 가능성을 생각케 한다. 특히 {陵碑文} 14년조에서
나타난 왜의 帶方界 침입과 대왕이 王幢을 보내어 격퇴한 사실은 東亞地中海의 역
학관계상 고구려군의 渡倭 가능성을 높혀준다. 이렇게 광개토대왕의 백제 공격과 남진
정책으로 인하여 한반도의 역학관계는 고구려와 신라를 한편으로 하고, 百濟와 倭, 加耶를
다른 한편으로 하는 힘의 軸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 관계는 중국지역 등 다른 지역에서
형성된 국제질서와 복잡하게 얽혀버렸다.
廣開土大王은 국제전략의 입장에서 지정학적인 위치를 활용한 각 나라들 사이에서 자국중
심의 거대한 網을 구성하였다. 지정학적인 조건을 활용하여 전통적인 육지위주의 질서를 기
본으로, 새롭게 성장하는 해양적 질서를 수용하면서 복합적인 정책을 구사했다. 이 때 본격
적인 남진책은 추진해야할 과제였으며, 해양활동능력의 확대, 황해해상권 확보 등과 불가분
의 관계를 가졌다.
4. 長壽王의 수도남천과 동아지중해 중핵조정론
5세기 이전에 동아시아 세계는 1∼2개의 중심부가 확고한 자리를 잡고, 정치 군사 경제적
능력에 따라 周邊部, 反周邊部, 그리고 邊方으로 편성이 되었다. 질서와 역학관계는 중국을
核으로 국가적인 능력을 기본으로 거리나 자연조건 등 교섭의 교통조건에 따라 영향을 받는
형태이었다. 즉 주변부의 각국들은 중국지역 고구려 등의 中心圈과 직접관계를 맺기 보다는
인접한 국가를 통해서 간접적인 외교관계를 맺는 點에서 點으로 이어지는 線의 외교이었다.
그런데 5세기의 질서는 주변부에서 3 내지 4 정도의 核을 중심으로 동시에 전개하는 多重
혹은 '多核放射狀 外交'형태가 되었다. 즉 중국의 남 북조와 고구려를 중심축으로 각국들은
매개국가가 없이도 동시에 여러국가들과 직접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또 중심국들 사이에도
복합적인 외교관계가 형성되고 주변국들간에도 인접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에 직접
교섭을 맺었다.이러한 외교형태의 질적인 변화는 황해연안지역에서 두드러졌다. 전 시대에는
해양교통의 한계로 직접교섭이 힘들었으나 이젠 가능해진 것이다. 고구려는 多重放射狀 外
交의 틀 속에서 對中外交를 등거리외교의 형태로서 추진하기 시작했다.
북방에서는 北燕 柔然 庫莫奚 契丹 吐谷渾 北魏 등이 복합적으로 갈등을 일으키고 黃海
에서는 해양세력이 질서형성에 요인으로 등장했다. 북방의 柔然은 424년(송 元嘉元年)에 6만
기를 거느리고 북위를 쳐들어 왔고, 반대로 다음 해에는 북위가 유연을 정벌하였다. 그 과정
에서 유연은 송나라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북위의 배후를 압박하였으며, 공동의 군사작전까
지 도모했다. 그러나 남조와 북조의 대결은 군사전에서 점차 외교전으로 양상이 변화되었다.
서부지역의 吐谷渾 역시 등거리 외교를 하면서 국익을 취하였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外交질
서 속에서 장수왕은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중심국가로 성장시켜야 했다.
고구려는 남북조와 함께 동아질서의 三角軸을 이루고 있어서 국제역학관계를 조정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중국과 등거리외교를 추진하고, 백제계 세력을 외교적 군사적으로 제압하며,
이를 위해서는 해양활동세력을 봉쇄하는 일이 필요했다. 이제 외교가 동아질서의 재편에 중
요한 요인으로 등장하였다. 고구려는 북연의 문제 때문에 위와 충돌하였고, 송과 전투를 벌
이기도 하였으나 외교에 치중하여 활발한 교섭이 있었다. 대중관계가 중요해져 분열된
중국을 대상으로 남북조 동시등거리외교를 추진하여 남북조시대인 약 300년간 매우
빈번하게 교섭을 하였다.
고구려에게 北魏는 지리적으로 가깝고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으로 실질적인 도움을 교환할
수 있는 반면에 假想敵國이기도 했다. 남조는 북조를 견제하는 잇점이 있고, 지리적으로는
군사적 충돌이 생길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반면에 문화 경제적으로 유리한 존재이었다.
{宋書}, {南齊書}, {梁書} 등의 高句麗傳에는 배로 바다를 건너오는 사신의 왕래가 항상 있
었다고 되어 있다. 당시 사신들의 왕래는 公的貿易의 한 형태였다. 장수왕이 宋에게 군
사적으로 필요한 말 800필을 준 사실은 실제적인 교역이 이루어졋음을 알수 있다. 고구려와
남조의 교섭 중에는 기록이 안된 민간인들에 의한 경제교역 불교승려와 민간인들의 교류
도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와 남북조는 상호필요한 존재로서 각각 등거리외교가 이루어졌다. {南齊書}
에는 '--太祖 建元 3년 사신을 보내와 공물을 바쳤고, 배로 바다를 건너오는 사신의 왕래
가 항상 있었다. 그들은 위 오랑캐에게도 사신을 보냈다.'라는 기사가 있다. 고구려가 남북
조의 갈등을 등거리외교로 적절하게 이용한 기록도 있다. '그들은 (魏)오랑캐에게도 사신을
보냈지만 세력이 강성하여 南齊의 제어를 받지 않았다고 하였다.또한 ---平南參官 顔幼明
과 冗從僕射 劉思斅가 (魏)오랑캐에 사신으로 갔더니, 오랑캐의 元會에서 고구려의 사신과
나란히 앉게 하였다.…' 모두 고구려의 위상과 등거리외교의 실상을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물론 북위와 유연 등과의 갈등 또한 고구려의 등거리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주었다. 그
런데 이것은 활발한 해양활동이 토대가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한편 장수왕은 질서의 재편과정에서 백제 신라 가야 왜 등과도 위상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
다. 즉 백제 신라의 힘을 약화시켜야 했고, 倭를 견제해야 했다. 백제는 해양을 활용한 외교
전을 펼쳐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므로써 고구려 중심의 한반도 질서에 도전이 가능했고,
한편 南朝를 통해서 정치적인 압력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성장하는 백제
세력을 견제하고 북조의 위협을 약화시키려면 남조와 관계를 긴밀히 해야했다. 그런데 고구
려는 백제가 남조와 교섭을 한 것 보다는 더 활발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적어도 공적인 使
行의 경우는 고구려가 월등하게 많았던 것으로 나타난다.어쨋든 백제는 해양력을 바탕으
로 대외로 진출하면서 다시 강국이 되었고, 점점 더 일본의 고대국가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
하였다.
왜는 이 시기에 이르러 국제질서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加耶 高句麗
百濟 등이 왜와 교섭을 가졌으나 동아시아 전체질서 속이 아닌 일본열도 내의 각개세력과
한반도 내의 각국과의 개별적인 관계였으며 형태 또한 능동적이거나 대등한 정도는 아니
었다. 그런데 5세기로 오면서 倭는 동아시아 질서에 참여한다. 국제적인 고립과 일방적인 종
속성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백제 및 중국과의 교섭을 원했다. 왜왕 부(武)가 바친 上表文의
기록은왜가 백제의 선박을 이용했고, 고구려가 그 교섭을 방해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이렇게 倭는 국제질서, 특히 한반도의 질서재편작업에 능동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
다. 황해남부를 무대로 南朝, 倭, 百濟를 연결하는 해양질서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고구려
등을 겨냥한 대북압력이 될 수 있었다. 해양세력의 활동은 역사발전의 변수가 아니라 이젠
역학구도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위와 같이 5세기에 일어난 국제관계와 외교상의 질적인 변모는 동아시아 각국간에 해양적
질서를 바탕으로 等距離와 多重放射狀 형태를 특징으로 하는 全方位 外交가 시작되었다. 그
리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군사력의 개발과 해양문화의 발달,해양활동 영역의 확보가 필
연적으로 요구되었다. 이렇게 국제정세가 질적으로 변화해는 과정에 있었던 장수왕은 더욱
본격적으로 남진정책을 추진했었다.
長壽王은 국제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대외적으로 多重放射狀 外交를 전개
하고,그를 위한 제반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였는데, 그것은 남진정책과 首都의 南遷으
로 표면화된다. 앞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는 이미 해양과 남진의 중요성을 인
식하여 1단계로 압록강 하구의 진출과 황해로의 진출을 꾸준히 모색하였다. 2단계인 광
개토대왕 시대까지는 요동지방과 해양의 영향력 확대, 대동강 하구 장악, 경기만에 대한
일시적인 점령이었다. 그러나 3단계인 장수왕시대에 주어진 과제는 남진정책을 새롭게
나타난 東亞地中海의 질서 속에서 고구려의 입지와 위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정책이었다.
즉 꾸준히 추진해온 남진정책의 완성이었다.
장수왕은 대동강 유역을 다양한 세력들간의 불안정한 각축장이 아니라 남진정책을 완성시
키고 더욱 남진하는데 필수적인 교두보이자 전진거점으로서 지배해야 했다. 그리고 대외교
섭 통로인 경기만을 완전하게 장악해야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장수왕은 수도의 남천과
한강 이남으로의 적극적인 진출을 시도하였다. 수도남천의 배경과 의의는 내부적 요인 및
국제질서의 재편과정에 대한 능동적인 대응정책의 소산이다.
4세기 이후에 한동안 고구려와 백제는 평양과 이남지역을 중심으로 공방전을 벌였다. 양국
간에 국경선이 불분명했고, 중앙의 통제력이 덜 미쳤으며, 상대적으로 지방 토호세력들이 어
느정도의 독자성을 가진 채 성장했기 때문이다.이러한 현실은 중앙집권화와 강력한 대국
가건설을 추진하는 장수왕에게 남진정책의 명분과 필요성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수도의 남천에는 이러한 국내적 요인과 함께 당시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질서의 재편과정
속에서 국제적인 요인이 더 강했을 것이다. 이미 동아시아는 해양질서가 강력하게 작용하
고 있었으며, 해양외교와 군사활동이 빈번했다. 또한 각 나라들 사이에 전개된 외교활동의
구도는 多重放射狀 構造로 변모되었고, 군사활동 영역 역시 多重構造로 변화되었다. 따라서
신속하고 능동적인 외교교섭과 활발한 해양활동을 통하여 중핵조정 역할을 하려며는 首都의
南遷은 적극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또한 對百濟活動을 염두에 둘 때 황해해상권을 장악하고, 對中國外交를 독점하고 통제하는
일은 필수적이었다. 백제와 중국 남조지역은 해양교섭 과정에서 오고가는 항로가 달랐다. 갈
때는 황해중부에서 직접 횡단하다가 중국근해에 접근한 다음에 다시 남진하는 항로를 취했
을 것이다. 한편 남조에서 백제로 올 경우에는 해류의 흐름이 양자강의 바깥 바다에서 한반
도의 서남부 해역으로 이동하므로 봄에 부는 남풍계열의 바람을 이용해서 양자강 이남에서
황해남부를 직항한 다음에 한반도의 서해남부 해안으로 진입하는 항로를 사용했다. 고구려
는 백제의 對中 교섭거점이 변하고 교통로가 이동한데 따른 현실 속에서 황해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장악하는 일 뿐 만 아니라 정치 외교의 중심을 점차 남쪽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수도의 선정과 이동은 군사적 측면, 즉 전략적 가치로 보아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長壽王代에 들어와서 변모한 군사적 환경과 전선개념의 변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구
려의 戰線은 크게 3개 전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북부와 서부에 각각 북방종족과 한족이라
는 부담스러운 상대를 두고 거대한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양대전선은 때때로 혼동을
일으키고 하나로 겹쳐지는 경우도 있었다. 만주지역이 가진 地政學的인 위치로 인하여 야기
되는 혼란이었다.
國內城은 만주지역에 힘의 중심을 두기에 적합한 膨脹據點都市이며 주변의 소국가들을 병
합하는 초기 성장과정에서는 정복국가의 군사도시로서 적합했다. 그러나 점차 북과 서쪽의
강한 외압을 받았으며, 때로는 首都가 위협당하거나 점령당하는 사례까지 있었다. 國內城은
외교전에도 불리하였다. 외교의 주요 대상은 중국이었고, 북방은 기본적으로 진출과 침략의
적대적인 관계이었다. 따라서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는 육로교통의 어려움 때문에 해
로를 통한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국내성은 그에 부적합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동천왕때
이후에 수도를 천도하자는 논의와 시도가 여러번 있었으며, 재차 수도를 이전하는 현실적
인 필요성이 조성되는 상황 속에서 長壽王代의 5세기가 되었다.
장수왕은 首都의 남천을 통해서 전선과 수도와의 거리를 넓히고자 했다. 중국과는 육상전
뿐만 아니라 해상전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황해북부가 중국세력의
海上作戰圈안에 들어간 것은 이미 漢과 衛滿朝鮮과의 싸움에서 비롯된다. 後漢 光武帝의 낙
랑정벌과 魏明帝의 낙랑 대방 정벌은 해양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고구려의 낙랑 대방세력의
구축에도 해양활동이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더구나 중국세력의 해양능력이 확대되었으므로
해양전을 염두에 둘 경우에 고구려는 공격과 방어에 용이한 지점을 수도로 삼는 것이 필요
했다.
한편 남부전선은 북방이나 서부전선에 비하여 규모는 작으나 잦은 충돌이 발생하는 항상
긴장된 상태에 있었다. 高句麗는 한반도 내의 覇者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백제, 신라에
대한 꾸준한 압력과 함께 군사적으로 신속한 대응체제를 갖추어야 했다. 때문에 남방진출의
거점이나 전진기지를 국내성이나 국토북부에 두어서는 효과적인 진출을 할 수가 없었다. 남
쪽으로 수도를 전진배치하면서 압박을 강하게 하는 정책을 써야 했다.
그런데 남부전선의 전진배치 전략은 해양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고구려는 복구된 백제
의 해상작전능력을 제어하기 위한 해양작전반경의 확대가 필요했다. 수도를 옮긴 이후에 고
구려의 재공격이 이루어지고 영토가 서부해안의 牙山灣 유역까지 남하한 사실은 평양성 천
도배경과 해양활동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반증한다.결국 북방과 서방의 군사적 압박
을 완화하고, 외교전을 펼치며, 황해해상권을 확보하기 위하여는 수도의 남천이 필요했다.
백제와 신라를 제압하고, 그것의 성공을 위해서는 해상활동능력을 확대해야 한다.
한편 平壤지역은 내륙교통에 편리하므로 실질적인 중앙적 수도의 기능을 할 수가 있는데
육로교통과 내륙수로교통에도 적합한 곳이다. 평양을 중심으로 淸川江이 있고, 특히 남쪽으
로는 禮成江, 臨津江, 漢江이 하계망을 구성하면서 서해중부로 흘러들어가 경기만을 구성한
다. 따라서 서해중부 이북의 연안 해상권을 장악하면 사람과 물자의 수송체계 장악이 용
이하다.
그 외에 평양지역의 확보는 한강과 대동강으로 구분된 海岸活動圈을 하나로 통합하여 중부
이북을 완전히 활동영역으로 할 수 있게 된다. 강의 水路를 통해 바다와 內陸地方과의 연결
이 원활하여 교역에 활용할 수가 있다. 평양을 사신선 등의 발진기지로 함으로써 중국과의
교통, 특히 남조 교통로의 수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더구나 황해도 북부를 포함한 평양지역
은 중국문화, 요동문화, 한강이남문화와 심지어는 일본열도의 倭文化가 만나던 한반도 최
대의 국제문화 교차점이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국제적 발전을 위해서는 더없이 적합한 지역
이었다. 살펴본 대로 평양은 多重放射狀 外交 등 국제관계와 정책집행에 유리한 위치에 있
다. 평양성 천도는 해양활동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역으로 해양활동의 성장
은 고구려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끼쳤다.
결론적으로 장수왕의 수도남천과 남진정책은 백제, 신라를 겨냥한 영토팽창전의 성격이 아
니라 동아지중해의 세력재편 구도속에서 추진된 국가발전전략의 일환이었다. 역학관계의 중
핵에서 질서재편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륙은 물론 한반도 중부이북의 장악이 필
요했고, 해양활동능력의 강화 역시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남진정책과 수도의 남천은 시대적
욕구를 달성시켜줄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었다.
5 결론
고구려는 압록강의 중류지역에서 건국하였으나 지정학적인 조건과 존속기간 내내 전개된
주변의 국제정세로 인하여 동서남북으로 팽창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남진정책에 비중을
많이 두었으며, 해양활동도 활발하였다. 그런데 이 두가지 성격은 상호불가분의 연간성을 가
지고 있었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내륙국가의 한계를 극복할 목적으로 해양으로의 진출을 시도하ㅣ였으
며, 아울러 남진정책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본문에서 살펴본바아 같이 고구려의 이 정
책들은 몇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단계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일정한 시대, 특정
한 왕의 정책에 추진된 것이 아니라 존속기간 내내, 즉 장수왕이 남진을 완성하기까지 전
기부터 각 시대가 처한 국내적 조건과 국제질서의 상황 속에서 장기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다. 둘째, 첫 단계는 해양출구의 확보와 한군현세력의 축출이라는 국가정책의 수준이었
다. 두번째 단계는 광개토대왕이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속에서 능동적인 대응전략을 수
립하기위한 내부의 환경과 조건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본격적인 해양활동을 필요
로 했고, 이 능력이 국제질서를 변화시키는 주요한 인자로 등장하였다. 세번째 단계는 장수
왕 시대이다. 수도를 평양성으로 이전하고, 남진정책을 과감하게 실천하여 한반도의 패자가
되었다. 또한 경기만을 장악하여 황해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확보하면서 동아지중해의 해양
질서에 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고구려는 국제질서의 중심부에서 국가의 장기전략으로서 해
양활동과 남진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장수왕대의 성공으로 고구려는 다중방사상 외교가 전개
되는 국제질서 속에서 동아지중해의 중핵국가로서 조정역할을 수행하였다.
동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흥 313-06-257977
서울시 양천구 목 6동 목동 아파트 219-1405호
고구려의 남진전략과 해양활동 연구
( 동아지중해 중핵조정론을 중심으로)
윤명철 ( 동국대 사학과 교수)
고구려(Koguryo)는 중국, 북방의 遊牧種族들, 한반도의 백제(Paekche)와 신라
(Shilla) 및 왜(Wa)의 세력이 마주치는 접점에 있었다. 또한 대륙과 해양을 공유
하였고, 중국지역 및 遼東(liaotung)지역 등과는 황해북부, 百濟와 황해중부 이북
을 경계로, 왜와는 동해를 가운데 두므로써 해양질서의 영향이 강했다. 필자는 이
러한 특성에 주목하여 東亞地中海(Eastasian-mediterranean-sea)개념을 모델로
설정하였다.
고구려는 이러한 특성을 살려 국가의 발전전략을 수립하고 실천하였으며, 국제
질서와 대외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는데 이용하였다. 특히 동서남북 동시
진출정책을 펼쳤으나, 특히 남진정책을 중요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인 특
성상 해양활동도 활발하였다. 그런데 남진정책과 해양활동은 깊은 상관관계를 맺
고 있었다.
고구려의 존속기간 내내 추진한 정책들은 몇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단계성을
지녔다. 일정한 시대, 특정한 왕의 정책으로 추진된 것이 아니다. 전기부터 장수왕
대까지 국내적 조건과 국제질서의 상황 속에서 장기정책으로 추진된 것이다. 특히
광개토대왕(King Kwanggaeto)은 국제질서의 재편과정 속에서 능동적인 대응전략
을 수립하기 위하여 본격적인 해양활동이 필요했다. 장수왕(King Changsu)은 수도
를 평양성(Pyungyang Castle)으로 이전하고, 남진정책을 과감하게 실천하여 한반도
의 패자가 되었다. 또한 경기만을 장악하여 황해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확보하고, 동
아지중해의 해양질서에 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고구려는 국제질서의 중심부에서 국
가의 장기전략으로서 해양활동과 남진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장수왕대의 성공으로
多重放射狀 外交가 전개되는 국제질서 속에서 동아지중해의 중핵(core)국가로서 조
정역할을 수행하였다.
SUMMARY
Toward the south strategy and the Ocean Activity during
Koguryo kingdom
--The Eastasian-mediterranean-sea and the Core-Oriented
Arbitration--
Youn, Myung-chul
Department of History
DONGGUK UNIVERSITY
professorr
The Development of the East Asia with the Mediterranean-like characteristics
involved several-historical aspects including interrelationships on economic, cultural, and
socio-political dynamics. Subsequently the order of its land, and ocean interacted
simultaneously. The power-political dynamics of Kogury in the East Asia should be
regarded as a middle core, considering the oceanic aspects in this area.
First, the national activities and developments through the ocean may be verified in
context of historical facts and documents. It is, Therefore, natural that the inter-relation
ships between Kogury and its surrounding areas be studied complexly in general points
of view. The writer analyze the process and the occasion of the activity in early oceanic
period of Kogury in Ch. II. Kogury begined its activity in the ocean with the
negotiation with W (吳) dynasty of China and could be entered an international order
through this progress. The oceanic routes in this period were the variable- degreed
route of middle of the Yellow Sea and the port was Seoanpy ng(西安平). Kogury
occupied the Seoanpy ng, an important traffic route to expel the power of Han
(漢)dynasty of China(中國) from the Korean Peninsula and to command the maritime
power of the northern part of the Yellow Sea. Through these battles, the Seoanpy ng
was governed by Kogury and Lo-lang Commandary(樂浪郡) and Tai-fang Commandary
(帶方郡) were ruined.
The Kings who performed the activity in the ocean were King Kwanggaet'o(廣開
土大王) and King Changsu(長壽王). In the early stage of the 5th century, the traffic and
correspondence were developed by the development of the activity in the ocean and the
order in the ocean possessed the power of the diplomacy and the military. King
Kwanggaet'o extended the territory of Kogury and led international society through the
ex-defense strategy. To adopt swiftly for stability of the Southern battle and new order
of the ocean, King Kwanggaet'o tried the spread of the activity in the ocean. Namely,
in order to secure the initiative of the diplomacy and the military, he attacked the
mid-western seacoast of Paekche and secured the right of the ocean monopoly. The
battle of Kwanmi castle(關彌城) means Kogury 's attempts to secure a base of the
activity in the ocean of Paekche(百濟). A counterattack of Paekche was extended to
union of Kaya(加耶) and Wa(倭).
There were happened the reorganization of order of the Korean Penisula generally
through the union made struggle against Kogury and Silla. In the early of 5th
Century, the international standing of Kogury rised after a triumph of Kogury in the
process of the reorganization of the international order.
Kogury policed to follow a stable and a leap simultaneously. To accomplish the
reorganization of the international order, Kogury transferred its Capital to P'y ngyang
Castle(平壤城) at the era of King Changsu. King Changsu changed a policy to adapt the
military environment. One is a change of conception of battle and the other is the
emphasis on captal's function reflecting on public security, diplomacy, economy and
culture and military affairs. P'y ngyang Castle was suit to follow the activity in the
ocean. Kogury had become an axle of multiple radiate diplomacy in the order of the
East Asia.
아직 제대로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논리는 너무 뻔할거 같다고 생각되는군요^^:: 같이 책 사러 갔던 넘이 한 말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습니다. "형. 그거 사봤자 뻔한 말이야. 한국논문하고 다른점은 고구려가 지네거라는 거 밖에 더 있겠어?!"
.....할말 없습니다. 단지 전 그 지네거라고 우기는 논리가 궁금했을 뿐입니다. 그것도 잘못 인가요? ㅠㅠ
뱀꼬리 : 그나저나 중국책값이 많이 비싸졌습니다. 1년전만 해도 100원(한국돈 1,5000원) 들고 나가면 들기 버거울 정도로 살 수 있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100원으로는 책 3~4권이 한계군요.ㅠㅠ
뱀꼬리2 : 어느 기사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어느 교수님이 중국에서는 고구려를 박사전공한 학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민족사 혹은 변방사계열이 고구려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심도는 떨어질지 모르지만, 중국은 인원빨로 먹고 살기때문에...그래도 조심하는게 좋지 않을까요? ^^
왜냐하면-_ 제가 쓴것이기 때문이죠.정확하게 말하면 여기저기서 배껴서 조합했다는 말이 더 어울릴거 같군요. 지금은 모두가 다 아는 조공책봉관계의 실제성질에 관해서 적은 것 입니다. 중국쪽 논문에는 그런것이 없어서 거의 대부분을 한국, 일본쪽에서 건져왔습니다.
거기에 플러스 중국어판입니다^^::::
혹시나 중문과여서 작문숙제용 대체물이 필요하시다면 마음껏 써주세요.(대신 따뜻한 답글..^^) 뭐..일단 어법상으로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조그마한 부분은.....저도 몰라욧!!
책봉조공관계
-고구려를 중심으로
바로(본명 맞습니다.-_;;)
내용 요약 :
조공책봉제도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고대동아시아세계에서 있던 하나의 외교시스템이었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그거 명목상으로만 군주와 신하의 관계였지, 실질적으로는 다 지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았다.-_;;
고구려는 비록 조공을 보내고 책봉을 받았지만, 실질적으로 완전한 독립적인 국가행위(내정,외교등등)을 정상적으로 수행하였다. 고로 고구려를 중국의 지배범위안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옮지 않다.(많이 들은 말이죠? ^^)
참고로 이 가설은 일본에서 먼저 제출되었습니다.
본 글은 제가 감히 연구생과정을 듣는다면 반드시 그 밑으로 들어가고 싶은 엔부커선생님이 쓰신 글입니다.
일단 간략하게 엔부커선생님을 소개하자면, 26살까지 딴짓하다가^^:: 북대본과과정에 들어와서 10년만에 졸업하고, 그 뒤 10년만에 북대에서 정교수자리에 오른 황당한 인간입니다.(북대 역시 한국교수사회랑 비슷합니다.-_ 엔부커가 이상한겁니다.)
주전공분야는 위진남북조입니다. 기타외국어 구사가 8개국어였던가.-_-;;
같은 북대교수들도 고개를 설레설레 내두를 정도로 완벽한 정통파학자입니다.
(..그의 오로라를 느껴보면-_ 그 말밖에 안 나옵니다.)
현재 본과생수업 3개. 청화대초청강의1개. 연구생수업 2개, 국가상임정치위원회 역사지도담당까지 이미 한계인텐데 논문을 죽어라 많이도 씁니다. 수준이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제 박사졸업한지 14년인데, 책이 4권나왔습니다.
처음에는 동북무슨학술제단-->북경대-->삼리엔서점-->중화서국 이라는 완벽코스를 밟아버렸습니다.(참고설명 : 중국에서 책을 살때, 어느책을 사야될지 모르겠다고 하면, 두개의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사면 절.대. 후회없습니다. 중화서국과 상해고적. 그런데 상해고적은 역사문헌쪽을 주로 하기떄문에 학술적인것은 중화서국에서 거의 나옵니다. 오죽했으면, 중화서국에서 책 한권 나오면 학자인생에서 성공한거지-_; 따구의 말이 있겠습니까?!)
정말 슈퍼맨인 인간입니다. 단지 당뇨병이 있음에도 술을 작작마시고 담배도 죽어라 피는 인간이라는....쿨럭..-_;;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냥 중국어원문만 올려놓으면 이상할거 같아서 서론부분과 결론부분만이라도 번역해볼렵니다.
(사실-_ 중간은 다 고증부분이어서, 학자아니면 쓸모도 없습니다.)
북위와 북제의 사료 중에서 우리는 “직인(职人)”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의 신분에 대해서 학자들은 유외관(流外官), 곧 당대의 직장인(职掌人)과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로 보고 있다. 직인에 관한 사료는 매우 적고, 모두가 애매모호하다. 현재의 사료를 통해서는 직장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추론은 아직도 커다란 문제로 남아있다. 관련자료를 분석해서 내가 얻은 결론은, 일명 직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산가(散阶),산관(散官) 혹은 무실관(无实官)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이 사람들은 직사백관(职事百官)과 같이,관원들 중에서 큰 두 파벌를 이루고 있었다. 동시에, 위진 관리들 중에는 왕궁(王官)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들의 신분과 북조 직인의 차이는 많은 부분에서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직인과 왕궁의 존재는 당시의 관원들 중에서, 후선자(候选者)와 현임자(现任者)의 2종류의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직인과 왕궁의 고찰은 우리가 그 기간의 문관제도를 연구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 확실하다.
(솔직히 대충번역할 수밖에 없군요. 역사에서 쓰이는 고유명사를 하나하나 쉽게 설명할 능력은 미천한 저에겐 없답니다. ㅠㅠ)
종합하자면, 위진의 왕궁과 북위북제의 직인의 대다수는 후보(候补)한 사람들이었으며, 그 기간의 문관체계에서 대단히 중요한 지위에 있었다. 구조로 보았을 때,위진 남북조의 관리들은 후보자(候补者)와 직사관(职事官)이 있었으며, 공능으로 보면, 후보자는 상판직(相番直)과 사자(差使)의 역할을 맡았으며, 왕조정무에 반드시 필요한 일을 하였다. 이런 제도는 한대의 양서숙위(郎署宿卫)까지 거슬러 올라갔 수 있고, 아래로는 당대의 문무산관후선판(文武散官候选)의 리부(吏部),병부(兵部)의 제도를 볼 수 있다. 이전의 학자들은 이에 대한 논술이 적었다. 이 글을 초보적인 탐색을 통하며 더욱 더 심도 있는 연구가 진행되기를 바란다.
(간단요약 : 직인이라는 인간들이 있다. 이것들은 이른바 예비행정관으로서 일단은 명예직만 주다가(단, 전시(혹은 평시)에 일정한 나라에 대한 공헌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예 : 말의 공급, 쌀의 공급, 임시직) 필요시 예전의 공헌에 따라 실제 행정에 임용하였다.
생각해 볼 점 : 그렇다면, 조공책봉관계를 형성했던 당시 동아시아정세에서 고구려를 비롯한 동아시아국가에 내렸던 것도 명목상으로는 직인이었는데, 그런면이 어떻게 반영되었으며, 그 차이는 무엇인가?
....인데..-_; 졸업논문쓸때 한번 해볼까나..-_;; 위진쪽 자료가 워낙 없어서 무지막지하게 힘들텐데..ㅠㅠ)
엔부커 논문이 원래 그렇지만, 이건 역사용어?! 따로 하나하나 설명하기도 뭐하고, 그냥 여기까지 읽은 분들에게 일단 박수를!!!!
광개토대왕은 재위하는 동안 동서남북을 대상으로 전방위 정복활동을 하였고, 외교전을 펼쳐 고구려가 東亞地中海의 中核國家로 만드는 결정적인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의 생애와 업적 등에 관해서는 광개토대왕릉비와 관련하여 많은 연구가 있었고, 또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대왕의 활동과 정책을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거나 군사전에 능숙한 정복군주로, 혹은 명분의 실현 등으로 평가를 제한할 이유는 없다. 또한 백제 및 주변국가들과 맺은 정치 외교행위는 물론이고, 군사적인 행동도 국제적인 질서의 재편과정이라는 좀더 거시적인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군사작전과 행동을 한반도 내부에서 통상적으로 활용되던 보병적 관점의 전략 전술이 아니라, 기동성이 강한 기마군단을 활용하였고, 심지어는 수군작전도 병행한 총체적인 전략과 전술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대왕은 광개토대왕릉비문을 통해서 고구려가 수군을 보유하고 대외전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기록을 유일하게 남기고 있다. 병신년 조항은 '王躬率水軍 討伐殘國'에서 '水' 자리의 글자에 대해서 약간의 이론이 있음에도 대체적으로 수군으로 석문하고 있다. 따라서 대왕이 재위 년간에 시행한 수군작전의 분석을 통해서 고구려의 실체를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고구려가 국제질서의 전개과정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주도적인 역할과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하여 해양활동을 어떻게 추진했는가를 알 수 있다. 또한 광개토대왕이 북진정책과 동시에 추진해온 남진정책을 계승하면서 왜 해양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경기만의 전략적 가치를 인식했는지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공방전의 내용을 통해서 당시 고대국가들이 해양방어체제를 얼마나 중요시했고, 어떤 식으로 구축했는가를 확인하며 아울러 海洋力이 역사발전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가도 인식할 수 있다.
필자는 이 시대 고구려의 해양활동에 대하여 실체, 의미, 수군작전의 실상 및 해양방어체제에 대하여 글을 발표해왔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주제와 소재를 압축하여 광개토대왕릉비문에 기록된 丙申年의 수군작전을 중심으로 전략의 구체적인 실상을 이해하는데 주력하고 한다. 이를 위해서 광개토대왕의 군사정책 일반을 전쟁의 배경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 이어 병신년의 수군작전과 직접 관련이 있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관미성 전투의 실상과 위치에 대하여 살펴보고, 이어 병신년 전투의 전개과정과 수군의 진격로 및 그와 관련이 있는 해양방어체제를 규명해보고자 한다.
2 장. 광개토대왕의 군사정책
고구려는 초기에 만주 내부를 흐르는 鴨綠江·松花江·渾江 등 큰 강을 활용하는 江上水軍과 수상활동은 있었다.태조대왕 시대에는 황해로 나가는 出海口를 확보하려고 西安平을 공격하였다. 또한 초기부터 동해가에 있는 東濊·沃沮 등과 교섭하고 통제하에 두었던 사실은 해양활동 능력을 흡수했음을 의미한다. 3세기 전반인 동천왕때 강남에 있었던 손권의 吳나라와 황해를 종단하여 외교는 물론 軍馬와 貂皮를 수출하는 등 교역도 활발히 하였다. 특히 압록강 하구의 西安平을 점령하여 黃海로의 出路를 확보하였다.4 세기에 들어서서 美川王은 요동과 남진정책을 취하는 남북동시전략을 취했다. 3년(302)9월에 3 만 명의 군사로서 玄兎郡을 공격하고, 이때 사로잡은 8000명을 평양으로 옮겼다. 그리고 12년(311)에 서안평을 점령한 후에 완전히 서해안에 진출한다. 압록강의 하구지역과 황해북부의 해상권, 황해북부의 연근해항로의 물목을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13년(313)에 낙랑을 완전히 구축하고 2000여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다음해인 314년에는 대방을 멸망시켰다.낙랑과 대방이 가졌던 해양능력을 흡수했으며 대동강 하구 및 예성강 유역의 일부를 영향권 아래에 넣었다. 이로서 고구려는 명실공히 황해중부이북의 해상권과 연근해항로를 완전하게 장악하였다. 낙랑 대방을 둘러싼 대결은 한반도뿐 만 아니라 倭까지 연결한 동아지중해 동방의 이익을 고수하려는 중국세력과 중국세력의 협공에서 벗어나며 교역상의 이익은 물론 남부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고자 하는 고구려 사이의 싸움이었다. 따라서 기본구도 상으로는 朝漢戰爭과 유사하며, 영토 팽창전 보다는 교역권의 싸움, 그리고 해양질서의 대결이란 성격이 강했다. 특이한 성장과 경험을 했던 美川王은 국제질서의 본질을 인식하고, 해양질서의 중요성과 그것이 가지는 경제적인 잇점 등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통찰력을 지녔다. 그는 남북 동시전략을 추진했고, 남진에 비중을 두어 고구려가 실제적으로 남쪽에 뿌리를 내리는 토대를 만들었다. 이처럼 고구려가 전기에 추진한 해양활동은 주로 국가전략 및 국제관계의 추이 속에서 상황의 전개를 고려하면서 이루어졌다. 즉 황해로의 出海口를 확보한 다음에 낙랑 및 대방의 구축, 남진의 교두보 확보 등 주로 국가정책의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면 백제는 해양활동이 어떻게 발전하였으며, 국가의 발전과는 어떠한 함수관계를 맺고 있었을까? 또 고구려와 백제 양국은 왜 경기만에서 충돌을 하게 되었을까? 이러한 사실들을 해양질서의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백제는 지정학적 조건과 三韓의 경험 등 先占한 집단의 전통을 기반으로 일찍부터 해양활동의 능력을 가졌다. 沸流와 溫祖는 이전부터 사용되어온 연안 및 근해항로를 통해서 경기만으로 상륙한 다음, 현재의 인천 또는 서울 지역에 정착하였다. 특히 비류가 정착한 지역은 인천인 彌鄒忽로 추정하고 있고, 때문에 비류집단은 초기부터 해상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백제는 마한을 병합하면서, 해안가에 위치해 있었던 소국들이 지닌 해양활동능력과 범위도 흡수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古爾王 3년(236) 기사에서 西海大島 사냥은 해양활동에 대한 왕의 관심과 중요성을 표현하는 사건이다. 이러한 성황 속에서 4세기에 들어와 백제와 고구려의 팽팽한 대결로 한반도의 역학관계에도 변화가 발생했다.
낙랑과 대방의 잔재세력들은 해양능력을 가지고, 대외교역과 정치적 활동에 어느 정도의 독자성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는 이 지역의 정치적인 공백을 메꾸고, 대외교섭에서 발생하는 정치·외교·경제적인 잇점을 확보하기 위하여 진출을 시도했다.한편 백제는 북쪽으로는 樂浪·帶方 등과 대결하면서 성장하였으며, 304년에는 낙랑군의 西縣을 공격하여 탈취하였다. 한강유역의 거점을 확보하면서 한강수계와 서해중부 해안이 가진 경제·외교적인 잇점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4세기에 이르러 近肖古王이 등장하면서 화북지역과의 외교관계는 물론 교역망을 확충하려는 경제적 필요가 강했을 것이다. 대방지역을 확보하면 일본열도에서 화북지방까지 연결시키는 황해연안 교역권의 일부분을 차지할 수 있었다. 나아가 東晉은 建康(현 南京)에 수도가 있었으므로 대방과 樂浪이 사용하던 항로를 탈취하고, 황해중부항로를 사용하기 위한 해양교두보를 확보하는 일이 필요했다. 여기서 평양지역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원주의 法川里 등 한강유역과 그 水系에서 발견된 東晉系 陶磁器의 존재는 한강유역의 백제세력이 동진과 교섭하고, 교역을 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황해도의 황주지역에서는 백제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북진정책을 추진하면서 對高句麗戰을 과감히 수행하는 일이 근초고왕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였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 고국원왕의 남방진출 기도와 북방진출을 하는 백제 近肖古王의 의도는 황해중부에서 '해양영역의 확보와 탈취'라는 공동의 목표로 인하여 정면충돌을 하였으며, 이는 주로 경기만 쟁탈전의 양상을 띄웠다.
경기만은 해양으로 진출하는 출구이며, 동시에 바다에서 들어오는 입구로서 동아지중해에서 가장 의미있는 역학관계의 核이고, 실제로 힘의 충돌과 각축전이 벌어진 곳이다. 고대의 항해는 연안항해와 근해항해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경기만은 이른바 일본열도를 출발하여 압록강 하구와 遼東半島를 경유하여 山東까지 이어지는 남북연근해항로의 중간깃점이고, 동시에 한반도와 산동반도를 잇는 동서횡단항로와 마주치는 해양교통의 結節点으로서 한중교통의 요지로써 후대에도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경기만은 한반도 내부에서도 地政學的·地經學的·地文化的 입장에서 보아 필연적으로 각 국간의 질서와 힘이 충돌하는 현장이었다. 경기만은 平壤을 중심으로 淸川江이 있고, 특히 남쪽으로는 禮成江·臨津江·漢江이 河系網을 구성하면서 서해중부로 흘러 들어가 경기만을 구성한다. 특히 강화도 북부는 황해도 지역을 아우르며 개성과 이어진 예성강이 한강과 만나는 곳으로서 예성강뿐 만 아니라 延安郡 등을 통하면 載寧江과 연결되고, 대동강과도 이어질 수가 있다. 따라서 이곳을 장악하면 중부해상권의 장악은 물론 그 주변, 하계망과 內陸水路를 통해서 내륙통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 물류체계를 원활하게 하여 경제권을 형성할 수 있다. 이러한 전략적 잇점이 탁월한 경기만을 가운데 두고 양국간의 대결은 본격화되었다.
故國原王은 4년에 평양성을 증축하고, 13년에는 燕나라 慕容 의 침입을 받았을 때 東皇城에 머무른다. 369년에는 군사 2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였으나 雉壤전투에서 패배하였다. 371년에는 고국원왕이 평양성을 쳐들어온 근초고왕의 백제군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하였다. 그후 고구려와 백제는 경기만 북부지역과 해역을 놓고 대결을 시작되었고, 각 나라들은 존속기간 내내 생존을 걸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상륙작전 등 해양을 통한 침투를 시도하고, 해안선 근처에서 적극적인 공방전을 펼쳤다. 이렇게 경기만과 그 하계망들을 사이에 두고 격돌한 사실들은 지정학적인 조건과 전략상으로 보아 경기만 북부의 해상권 쟁탈적인 성격이 강했음을 알려준다. 특히 백제의 입장에서는 적 수군의 침입방어와 국토의 보존이라는 원론적인 목적 이외에 수도방어체제와 깊은 관련이 있고, 또한 외교통로 및 교역로를 보호한다는 다종의 의미를 가졌다.
경기만 유역의 북부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각각 해양방어체제를 구축하였다. 양국의 충돌은 주로 浿河(예성강)일대에서 벌어졌다. 백제는 漢水 以北으로 진출하고 한강유역을 개발할 목적으로 서해안의 관방시설을 확충했다. 373년에 청목령에 성을 쌓아 방어체제를 재정비하였다. 즉 백제의 세력권은 동쪽은 북으로 水谷城(新溪), 중간에는 靑木嶺(開城) 윗쪽인 예성강, 그리고 서쪽은 경기만에 접해있는 황해도 남부지역으로 추정된다. 고구려는 375년에 水谷城을 점령하고 백제는 반격을 가하지만 탈환하지 못한다. 다시 376년에는 백제의 북변을 침공하였는데 아마도 수곡성 아래이면서 청목령 윗쪽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386년 봄에 백제의 辰斯王은 靑木嶺에서 八坤城, 그리고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기까지 長城을 축조한다. 이렇게 해서 황해도 지역, 특히 해안에 방어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당시 양국간에 벌어진 싸움은 水谷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해안선에서 100km 이내의 내륙에서 이루어졌다. 결국 해양전의 발발이 예상되고 있었고, 해양방어체제를 구축하여 양쪽 모두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고구려와 백제가 황해중부의 해상권 확보와 해양활동을 놓고 격동적으로 갈등을 벌일 때 광개토대왕이 등극하였고, 그로 인하여 경기만은 역사적으로 질적인 변신을 했다.
廣開土大王은 제19대 왕으로 즉위하여 22년의 재위기간에 정치 군사를 중심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그의 최대의 업적은 남과 북으로 군사적인 진출을 하여 일시적으로 위축된 고구려의 국력과 영토를 팽창시켰으며, 또한 동아시아의 질서재편 과정에서 능동적인 대처를 통해서 고구려의 국제적 위치를 크게 향상시킨 데 있다. 4세기 초에 동아시아 국가 간에 형성되었던 역학관계는 4 세기 말에 들어오면서 변동을 일으키고 그에 따라서 해양활동의 질에도 변화가 왔다. 이때 廣開土大王은 군사적인 우위성을 활용하여 강공책을 구사하면서 동서남북의 전방위 정복활동을 감행했다. 군사전을 중시하는 대외정책은 재위년간 동안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대왕은 명멸하는 북방국가들을 대상으로 다양하고 화전양면정책을 구사한 것은 自主的이며, 탄력성있는 외교였음을 확인시켜 준다. 남방에서, 광개토대왕은 2년(392) 7월에 4만의 군사로 백제를 공격하여 石峴 등 10縣을 함락하고 10월에는 백제의 關彌城을 함락시켰다. 또 大王 2, 3, 4년에도 백제와 수 차례 전투를 벌리는 등 초기에는 주로 백제와의 전투에 임했다. 물론 이는 고국원왕 말년에 상실한 예성강 유역의 지배권을 탈환하려는 조치이다.광개토대왕은 활동영역을 점차 넓혀 396년에는 다시 水軍을 투입하여 백제를 쳐서 58城 700餘 村을 탈취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8년에는 帛愼을 치고, 또 신라와 연합하여 百濟 倭 聯合軍을 격파한다. 한편 외교관계를 적극적으로 맺었다.
대왕은 군사적으로 全方位 攻略을, 외교적으로는 全方位 外交를 펼쳤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릉비문의 기록을 근거로 삼는다면 남쪽을 향한 외교활동과 군사작전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남진정책을 펼친 한 배경으로서 농경지의 확보를 통한 생산력 증대를 들고 있다.또한 육지의 영토확대나 전략적 거점의 확보라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동아시아 세계는 질서의 측면에서 장기 지속성을 가진 외교전략을 토대로 정책집행들이 이루어졌다. 또한 해양이 중요한 활동무대로 등장했고, 남북조의 分立은 주변 각국들로 하여금 외교활동의 통로로서 해양의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시켰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의 남진정책은 대외관계의 측면, 특히 본고의 목적상 해양활동의 측면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남진정책은 한반도의 정세와 백제와의 구원으로 볼 때 선차적으로 남부전선을 안정시키고, 백제를 제압하는 일이 중요한 목표였을 것이다. 백제는 근초고왕의 팽창정책 이후에도 광개토대왕의 즉위하기 직전인 389년 390년에도 연속적으로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침입하였다. 이것은 백제의 북진의도가 존재하고, 그만큼 군사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3장 관미성 전투 검토
광개토대왕은 元年에 漢水 以北을 점령하고, 關彌城을 공함하면서 지속적이고 전면적인 공격을 단행했다. 그리하여 大王 17년(407)의 정벌 때까지 예성강 및 한강유역의 백제 활동영역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결국 광개토대왕은 수도인 한성의 攻滅과 더불어 西海沿岸의 요충지들을 점령하고 파괴하였다. 당시 전쟁이 해양질서와 관련이 있음은 첫째, 국내적이고 경제적인 측면과 국제적이면서 정치 외교적인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으며, 해양활동능력의 확대, 황해해상권 확보 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는 전쟁을 수행하는 전략과 전술에서도 수군작전 등 해양이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광개토대왕 시대에 이루어진 해양활동과 직접 간접으로 관계를 맺은 것은 광개토대왕릉비문에 기록된 辛卯年 조항, 丙申年 조항, 甲辰年 조항, 그리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원년조의 關彌城 공함 조항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 고구려가 주체가 되었으며, 직접 수군활동을 본격적으로 실시한 군사작전은 병신년간의 상황이다.
그런데 병신년 작전을 실시하기 위한 예비단계 혹은 과정으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이 관미성 전투이다. 더구나 관미성 전투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해양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수군작전의 가능성도 있다. 그러므로 먼저 관미성 전투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황해 중부해상과 對中國交通路를 고구려와 공유하면서 대치상태에 있는 상황에서 백제의 수군활동은 常時體制로 운영되는 것이 순리이다. 그렇다면 사료의 기록과 전쟁 과정을 고려할 때 관미성 같은 성은 해양활동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며, 동시에 수도를 방비하고, 외교와 교역을 보호하는 전략적 가치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또한 고구려의 해양위협을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기능을 위해 서해중부의 선대 등 수군력이 포진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몇 가지 조건을 고려한다면 백제의 북변 요충지이며, 고구려의 1차 공격목표가 되었고, 백제가 심혈을 기울여서 탈환하고자 했던 關彌城은 주목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고구려는 백제의 해양활동을 분쇄하고 경기만 등 漢水 以北의 해상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관미성의 함락과 필사적인 守城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 전투 이후인 병신년에 백제후방을 공격하는 일이 가능했고, 그것이 해안지대에 국한되어 있었음은 관미성의 전략적 기능을 잘 알려주고 있다.
관미성은 백제가 대외교섭을 추진하는 發進基地와 적군의 水路侵入을 방어하는 1차 關門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한강수계와 직접 연관되고 고구려의 해양접근을 광범위하게 차단하기에 적합한 요충지에 있어야 한다. 더우기 관미성이 백제수군활동의 본거지였고 수군이 전투에 참여했을 경우에는 양 국 간에 海戰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백제가 수군활동을 했고 전쟁에서 수전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광개토대왕릉비 14년 甲辰조에 나타난 왜의 대방계 침입 기사에서 추정할 수 있다. 이 때 왜군은 백제군을 주력으로 하면서 수군을 활용하여 공격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관미성을 공격했던 병력은 육군 외에 수군이 병력의 이동이란 보조차원을 넘어 전투에 참여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미성은 가능한 한 水系가 끝나거나 육지와 근접한 島嶼에 위치해야 타당하다.
관미성의 위치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한강수계와 이어진다는 조건에는 대부분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으나, 구체적인 지역에 관해서는 약간씩 차이가 있다. 기존의 주장들에 이의를 제기하며 주목을 받은 견해는 김윤우 尹日寧에 의하여 제기되었고, 타당성을 인정받는 烏(鰲)頭山城說이다. 윤일녕은 관미성의 위치를 고구려 수군이 기동한 禮成江- 西海(喬桐島 延安 및 江華一帶를 포함)-祖江- 臨江 漢江交會地點-漢江-麻浦 등을 잇는 수로상에 있다고 하면서 烏頭山城의 주위지역을 치밀하게 답사하여 그 곳이 삼국사기의 기록에 합당한 부분이 많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두산성은 임진강 하구를 이용하는 적을 방어하는 데에 적합한 지형이다. 반면에 예성강 하구를 통해서 내려오거나, 수군을 이용하여 경기만 이북지역에서 내려와 남진할 경우에는 전방의 防禦線으로서의 주요기능은 상실한다. 이미 적은 강화수로를 이용하여 진입하는 도중에 상륙하여 강화도와 김포반도의 상당한 지역을 점령한 후에 서울을 직접 공격할 수 있다. 뿐 만 아니라 강화도에서 안정적으로 교두보를 구축한 다음에 여러 방면에서 포위망을 좁혀가면서 전면적으로 한성을 공격할 수도 있다. 또한 예성강 이남과 임진강 사이의 내륙지역과 해안지방을 유기적으로 활용하는 방어망을 구축하기에 힘이 든다. 더구나 관미성 전투가 일어날 무렵에 국경선은 임진강이 아닌 예성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결국 오두산성이 관미성일 가능성은 없다.
한편 李丙燾는 喬桐島의 자연지리를 약술하고, 그곳을 관미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는 양국의 수군활동을 전제로 하는 설로서 타당성이 있으나, 관미성이 백제의 북변 방어진지로 구축된 것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경기만 전체를 군사적으로 총괄하고, 수군까지도 관리해야 하는 사령부를 설치할 조건으로서는 불리하다. 예성강 하구 남쪽지역에서 강화도와 교동도 사이로 들어오는 船團, 강화도와 황해도 사이의 수로로 들어오는 적을 방어하기에는 부적합하다. 그리고 江華水路와 한강하류를 따라서 海岸防禦施設이 미비할 경우에는 오히려 배후에서 공격받을 전략적 취약성이 높다. 손영종은 관미성을 개풍군의 백마산 부근으로 설정하고 있다.
한편 江華島를 관미성으로 보는 설도 있다. 이 說은 강화도라는 지역을 선정한데서 1차적으로 타당성을 가진다. 강화도는 이러한 해양지리적인 잇점 때문에 백제의 수도인 한성이나 대방으로 出入하는 해양세력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검문소의 구실을 할 만한 지역이다. 백제의 10성과 관미성은 광개토대왕 원년에 고구려에게 넘어갔으며, 다음 해에 시도된 백제의 '관미성 탈환작전'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선의 내륙에선 백제의 공격이 浿河線까지 올라갔다. 이러한 사실들은 광개토대왕의 초년공격이 海岸線一帶와 海岸地帶에서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大王 6년에 이르러 비로소 고구려의 수군은 대대적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50여 성을 취하고 수도를 공략한다. 그 때 인천지역으로 비정되는 彌鄒城 등이 공함된 것은 그 이전까지, 즉 원년과 2년 전투에선 고구려의 공격대상이 아니었음을 반증한다. 따라서 관미성은 丙申條에 공취된 성 이외의 성이고, 해안지역이면서 방어적 성격을 지녀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곳은 강화도의 해안북부가 가장 적합하다.
필자는 강화도 북부의 봉천대가 있는 河陰山城을 주목한다. 이 지역은 강화도의 최북단이면서 제일 서쪽에 있고, 실질적으로 강화도와 황해도가 만나는 해역으로서 한강입구에 해당되고, 동시에 바다로 나가는 海口이다. 뿐만 아니라 황해도의 예성강과 경기도의 한강이 만나는 지점이다. 이른바 해륙교통의 결절점이다. 이러한 조건때문에 4세기 후반 내내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지 지역이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것이다. 이러한 전략적, 전술적인 유리함 때문에 이 지역과 교동도만 장악하면 경기도 황해도, 즉 경기만의 북부 전체를 장악할 수 있다. 그리고 경기만의 북부지역을 감싸고 있는 황해도의 개풍군 연백군 해주군 등 등 까지도 영향권 아래에 둘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와 백제가 예성강과 개성 등을 잇는 선에서 국경분쟁이 일어나고, 해양진출이 필요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이 지점에는 진출거점이며 해양방어의 요새로서 전력이 강한 산성의 구축이 필요하다.
그러면 관미성 전투에 고구려의 수군이 참여했을 경우에 수군의 발진기지는 어디였을까?
일단 현 평양성 이남지역은 제외된다. 平壤지역은 南浦灣 등의 良港이 있고, 大同江 水系로 인해 보급로 등 내륙과 연결하는 일이 원활하다. 지리적 조건을 보면, 장수산성 지역에서 나아 남쪽으로 내려오면 해주만과 연결된다. 해주만은 경기만의 일부로서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 황해중부의 큰 강이 모여드는 곳이며, 어떤 지역으로도 접근과 상륙이 가능하다. 분만 아니라 강령만 옹진반도의 옹진만, 장연군과 옹진군 사이의 대동만 과도 아주 가까운 거리로 연결된다. 더욱이 재령천을 거쳐서는 남포만과 연결되어 대동강과 만나고, 그 수로를 이용할 경우에 평양까지도 쉽게 물길로 연결된다. 또한 이 지역의 만은 모두가 해양교통의 요지임은 물론 깊숙한 만과 만을 감추어주는 섬들이 앞을 막아주고 있어 해양군사활동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그러니까 장수산성 지역은 황해도 중부 한복판에 있으면서 경기만은 물론 황해도 연안의 모든 만들을 연결시키면서 이 지역의 해상 활동권을 하나로 연결하고 동시에 장악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해양 전략적인 관점에서 보면 군사체제로서는 매우 유용한 지역이다. 이와 관련하여 손영종이 내세운 남평양설의 장수산성 지역은 의미가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에는 고구려의 水軍이 활동하기에 위험 가능성이 많았다. 故國原王이 평양성 전투에서 전사한 것을 보면(평양이 장수산성 지역이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평양지역은 백제의 영향력이 미칠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었고, 남포만과 대동만, 강령만, 옹진만, 해주만 등의 황해도 지역은 취약지구였다. 小獸林王 7년인 377년에 백제가 평양을 공격하고, 故國壤王 6년인 389년에 생긴 백제의 공격 등은 평양지역을 둘러싼 공방전이 계속됐고 전선이 불안정했음을 반증한다. 따라서 대규모 수군함대가 대동강 유역이나 그 이남 주변에서 發進할 가능성은 비교적 적다.
그러면 그 이북에서 적합한 해역을 찾을 경우에 청천강 하구와 압록강 하구는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압록강 유역은 수도인 국내성과 비교적 가까워서 兵力의 이동과 관리가 자유롭고, 對中交涉에 유리하다. 더우기 하구인 서한만에는 큰 섬들이 있어 선박의 정박과 수리, 그리고 造船에도 매우 유리한 조건이다. 반면에 主戰線인 경기만과는 너무 먼 거리에 있어서 군사작전의 신속성과 효율성이 떨어진다. 淸川江 유역은 西韓灣을 가로막는 여러 섬들이 있고, 만 밖에는 身彌島가 있어 방파제 구실을 한다. 또한 고구려가 반드시 확보해야 할 전략지구인 평양지구에서 가까우면서도 안전한 지역이므로 전략거점으로서 호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한 전략적으로 백제 북변과의 거리가 압록강 지역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짧다는 장점이 있다. 고구려가 기습공격을 감행할 경우, 장거리 이동을 한다는 것은 전략상의 차질을 가져온다. 관미성 전투가 20일이나 걸렸던 경험은 이미 전략을 수립하는 과정에서도 그 같은 난이성이 충분히 반영됐을 것이다. 그리고 수륙양면 작전을 감행할 경우에 육군과 수군의 이동속도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은 최대한 배제해야 하므로 수군의 발진기지는 가능한 한 전선과 가까운 곳이어야 합리적이다. 따라서 관미성을 공격하기 위한 발진기지는 청천강 유역이었으며, 중간거점으로서 비교적 안전성이 확보된 대동강 水系의 한 灣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결론적으로, 광개토대왕의 초기에 고구려의 수군작전은 남포만 이북이나 압록강 하구인 서한만을 주요한 發進基地로 하였고, 관미성 함락이후에는, 즉 大王 6년(丙申)조에 전개된 수로군이 공격할 때에는 甕津, 海州灣, 혹은 禮成江口를 최종발진기지로 하여 경기만에 집결한 다음에 그 전에 탈취한 關彌城을 중간거점으로 삼는 형태였다.
4장 병신년 작전 검토
광개토왕릉비문에는 '--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伐殘國軍至 南首攻取壹八城---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라고 하여 광개토대왕이 大王 6년(396)에 대규모의 水軍을 투입하여 백제의 58城과 700村을 탈취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다른 해의 기사와는 달리 步騎를 사용한 사실과 海戰이 발생한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水陸兩面作戰으로 공격을 했건, 군사를 운송했건 수군을 동반한 작전임은 틀림없다.
해양작전은 보병을 동원하여 면과 선 위에서 한정된 작전을 펼 수밖에 전과는 다른 특성들이 있다. 수군작전은 潛行性이 있다. 적군의 관측범위나 방어체제와는 무관하게 아군의 작전능력과 의도에 따라서 잠행한 다음에 적의 배후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다. 선단은 전방지대 멀리 우회한 다음에 후방 깊숙하게 상륙할 수 있다. 특히 야간작전을 즐겨 구사하면서 이른바 點의 작전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둘째, 機動性이 있다. 선단은 대규모의 병력을 거느리고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다. 기마군단 보다도 유리한 점은 야간에도 계속 움직일 수 있고, 전투의 주력인 병사들의 동력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보병의 기동성과는 전혀 비교의 대상이 안될 정도이다. 셋째, 反轉性을 갖고 있다. 즉 전투의 일반적인 흐름과 전세에 강한 변화 내지는 극적인 반전을 가져올 수 있다. 특히 원거리이동 후방 상륙작전은 수군작전의 백미로서 전세를 일거에 반전시킬 수 있는 최고의 전략이다.
광개토대왕은 당시의 상황과 경기만의 정치 외교적인 가치, 그리고 효율적인 전략과 전술을 고려하여 수륙양면작전을 전광석화처럼 실행하였다. 그런데 50여 城을 공파하고, 그것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兵力과 運送船이 상당히 많거나, 척 당 승선인원이 대량인 큰 배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6년 조의 기사는 고구려가 海洋活動 능력이 뛰어났으며, 본격적인 水戰과 대규모 군사작전의 감행능력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고구려 수군의 편제, 군사력, 수송을 포함한 해전능력은 구체적으로 알 길이 없다. 다만 당시의 상황과 해양전략의 특성, 몇몇 기록을 통하여 그 윤곽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 병신년 수군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대규모의 兵船과 군사가 집결되었던 발진장소와 지역은 어디였을까? 다수의 병력을 운송시키고, 전투에 필요한 군수품을 보급하고, 적재하는데 적합한 장소이어야 한다. 또한 良港의 조건을 갖추고 있고, 많은 선박들이 안전하게 정박하는 灣이 있으며, 목적지까지 최단시간 안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漢水 이북에서 이러한 조건을 비교적 갖춘 곳은 해주만과 예성강 하구 및 대동강 하구이다. 廣開土大王 元年의 전투로 인하여 漢水 이북의 10여 城을 점령하고 북변의 전략적 요충지인 관미성을 함락했다면, 이 시기에는 이미 예성강 이북 및 북부 경기만은 안전성이 확보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릉비문 14년조는 王健群 석문을 보면 '十四年 甲辰而 倭不軌 侵入帶方界 和通殘兵□石城□連船,□□□,王躬率往討 從平壤□□□鋒相遇 王幢要截 刺 倭寇潰敗 斬殺無數.'비문을 판독한 결과에 한계가 있음을 전제로 해석하면, 백제와 왜의 수군을 주력으로 하는 왜연합군은 대방계를 침입하였는데 이때 倭와 百濟 사이의 주도권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문장의 주어가 倭인 것으로 보아 적어도 비문 작성자는 倭를 주체로 인식하고 있다 王健群도 동일한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하지만 명분상으로도 왜의 침입과 역할을 강조했고, 수군을 동원한 대방계 습격이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역할 상으로는 왜가 주체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의 역학구도와 전황을 보아 기본적으로는 고구려와 백제의 대결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대방계는 예성강을 중심으로 한 황해도 지역으로 보고 있다. 이곳은 이 무렵에는 고구려로서는 어느 정도 안정성이 확보된 장소이며, 해안과 가까운 장소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수군활동과도 관련이 있었고, 병신년에 수군이 발진할 수 있는 지역일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고구려군은 병선과 군대를 어떤 방향으로 이동시켰을까?
광개토대왕은 일차적으로 백제의 북진을 저지해야 한다. 그리고 대외교통의 출해구를 막고, 황해중부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백제를 외교적으로 고립 상태에 빠뜨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양능력을 강화하고, 본격적인 남진정책의 예비단계를 충실하게 실천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기본목표는 경기만을 장악하고, 궁성을 함락시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백제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하여 대외교섭창구를 탈취하는 일이다. 이 목표를 완수하는 효율적인 전략이 바로 경기만 상륙작전과 한강수로 직공작전이다.
이러한 고구려의 기본목적과 당시의 전략전술 및 이 해에 점령한 성들의 위치를 고려하면 수군의 작전범위를 재구성할 수 있다. 陵碑文의 永樂 6 년 조에는 공파된 성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성들의 위치와 남방한계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대체적으로 이병도의 주장 이후에 천관우를 거쳐 이들 성들이 한수 이북에 있었으며, 수군의 작전반경범위는 임진강 유역 및 한강 하류지역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반면에 58성700촌의 위치를 보다 남쪽, 예를 들면 충청도 내륙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酒井改藏를 비롯하여 박성봉은 이들 성들의 다수가 해안 가까이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손영종은 충청도 지역을 중요시하여 396년에 수군을 동원하여 한강하류 이북뿐 아니라 그 이남지역에도 적지 않게 진출하였으며, 또 충청북도, 충청남도 일부지역에서도 군사작전을 벌였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물론 이 작전은 한강유역의 서부 및 이남의 해안지대에서 벌어졌다. 당시의 전략과 전황으로 보아 한강 이남을 공격하지 않고서는 백제의 해양능력을 약화시킬 수 없으며, 백제의 해안공격에 서부해안지대가 노출될 우려가 있다. 또한 한강 이남을 공취하지 못하고 水軍을 이용해 한강수계와 수도만을 점령하였을 경우에 백제수군의 공격으로 퇴로가 끊길 가능성이 많았다. 고구려는 394년(광개토왕 3)에 國南 7성을 축성하였는데,이는 황해도의 남부해안지대를 강화할 목적이면서 동시에 백제수군의 기습에 대한 고구려의 우려를 반영하고 있다. 이 지방에는 배천의 치악산성, 연안의 봉세산성, 해주의 수양산성, 옹진의 고성 등 고구려 산성들이 있고, 그 외에 시대를 알 수 없는 산성들이 많이 있다. 대부분 해양방어체제의 성격을 지닌 성들이다.
그런데 릉비문에 기록된 점령된 성 가운데에 비교적 정확하게 위치를 알 수 있으며 일치되는 성들이 沸城(통진), 阿旦城(아차산성), 彌鄒城(인천), 牟盧城(용인) 등이다. 나머지 기록된 성들은 이 주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성은 해양 전략적으로 보아 고구려군의 상륙지점 및 한성공격 방향에 아주 적합한 위치에 있다. 즉 백제가 구축한 해양방어체제의 한 부분들이었다. 그 시대는 이미 해양전이 전개됬고, 국가의 방어를 위해서는 해양방어체제를 구축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해양방어체제들은 일정한 시스템 속에서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있었다. 즉 일개 단위의 해양방어체제 속에서는 소규모의 전술적인 방어망 외에 전체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中心城이 있다. 이 성은 비교적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육지의 군사력과 공동작전을 펼 수 있는 지역에 있다. 중심성을 둘러싸고 규모가 작은 周邊城들이 포진해 있다. 해안 가까이에는 일종의 방어와 관측의 기능을 하는 前衛城들이 있다. 그리고 해안선과 섬에는 일종의 堡壘인 소규모 방어체제들이 있다. 그 외에 필자가 甕路라고 명명한 보조시설물들과 海岸烽燧들이 있다. 그런데 고대 해양방어체제들은 삼국이 교대로 점령하였으므로 역사적인 상황과 용도, 전략에 따라 존속되기도 하고 폐지되기도 하였다. 또한 보축과 개축이 이루어졌으므로 축성양식이 혼재해 있고, 발견되는 유물도 섞여 있으며, 심지어는 축성의 주체 및 시대에 대한 사실기록에도 혼란이 있다. 특히 경기만 지역은 백제 고구려 신라가 번갈아 가면서 점령을 했고, 특히 백제와 고구려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기 때문에 이러한 혼재현상이 심하다.
경기만 지역에 광범위하게 구축된 해양방어체제의 연구와 당시에 전개된 전황 및 국제질서, 그리고 릉비문에 기록된 몇 몇 성의 위치 등을 고려할 때 광개토대왕이 거느린 수군은 대략 3 개로를 택해서 상륙하여 백제의 전방지역과 한성을 공격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제 1로는 대동강 유역에서 출발하여 예성강 하구와 한강이 만나는 강화북부에서 한강하류를 거슬러 오면서 김포반도와 수도를 직공하는 것이다. 강화도는 古爾王 때 전렵을 한 서해대도이므로 백제의 세력권 아래에 놓여 있었다. 만약 관미성이 강화도에 있었다면 고구려는 이미 원년에 이 지역을 점령하여 통제권을 확보하였으므로 수군작전을 수립하기에 적합하다. 남북한강이 만나 최종적으로 흘러 들어가는 곳이 바로 강화도이다. 또한 연천, 파주 등 경기 이북을 흐르는 임진강이 김포반도에서 한강과 합쳐져 다시 내려오다가 바다와 만나는 곳도 강화도이다. 특히 황해도 지역을 아우르며 개성과 이어진 예성강이 한강과 만나는 곳도 강화도 북부이다. 예성강뿐 만 아니라 延安郡 등을 통하면 載寧江과 연결되고, 대동강과도 이어질 수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강화도로 직접·간접으로 이어진 한강의 河系網을 활용하면 한반도 중부 지역 전체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있다. 한강은 경기만을 통해서 해양으로 진출하는 출구이며, 동시에 바다에서 들어오는 입구이다. 백제는 한강하류의 河岸都市國家로서 출발하였고, 수도를 내륙 쪽으로 이동시킨 후에도 역시 한강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므로 고구려 수군의 한강수로직공은 한성을 공략하는데 가장 효율적이고, 기동성을 발휘할 수 있다.
한편 백제는 수도방어라는 차원에서 한강하류 방어체제를 구축해야할 필요성이 강한데, 이는 해양방어체제와 유기적인 시스템을 이루어야 한다. 백제는 責稽王 때에 한강강변방어체제를 쌓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의 책계왕은 대방을 공격하는 고구려를 저지하기 위해 구원군을 파견하였다. 그 후에 보복이 두려워 阿且城을 쌓고, 蛇城을 고쳐 쌓았다. 이 두 성은 현재 워커힐 뒷산의 아차산성과 건너편의 龜山토성 혹은 風納토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물론 수도성을 방어하기 위한 강변방어체제이다. 그 이외에 외곽이나 한강수로 입구 부근의 강변에도 방어제제를 구축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필자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강수계의 하류에는 시대가 불분명한 河岸防禦體制가 매우 발달되어 있다. 특히 한강과 면한 김포반도에는 산성은 물론 얕은 구릉 등을 이용한 방어시설들이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전략적인 환경과 백제의 방어체제를 고려하면서 제 1 로인 한강수로를 직공하기 위하여 주력군은 강화도에 상륙한 다음에 통과하여 김포반도의 북동쪽, 즉 한강 수로변으로 진입하고, 다른 군대는 직접 김포반도로 상륙하여 육로를 이용하여 한성으로 진격해야 한다. 이 때에 점령당한 성으로 릉비문에 나타난 沸城은 통진으로 추정된다. 한강 수로 주변의 즁요한 지점에 구축된 하안방어체제들 가운데에서 전략적 가치가 높고, 공격수군이 제일 먼저 돌파해야할 방어선이 童城山城 지역과 烏(鰲)頭山城 지역이다. 황해도의 내륙을 흘러 내려온 예성강과 남 북한강, 서해가 만나는 강화도 서북부를 통과하는 물길은 강화도와 김포반도 사이의 좁고 조류가 빠른 江華水路를 지나서 북상하는 물길과 만난다. 그 지점이 바로 현재 문수산이 있는 지역이다. 그 곳을 거슬러 올라가면 김포반도 쪽으로 애기봉과 祖江里가 있다. 이 좁은 물목은 한강의 양 안 간의 도강지점으로 사용되며, 수로로 직공하는 선단을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이 원년(392년) 10월에 실현한 관미성 점령 당시에도 주요한 전장이었을 것이다. 丙申年에 감행된 수군작전에서 김포북부는 당연히 공격범주에 들어가야 한다. 건너편인 현재 황해남도의 백마산성은 豊德, 延白, 교동도, 강화도 등이 둘러싸고 있는 禮成江 하구를 거쳐 한강 하구인 祖江으로 들어오는 물목을 지키던 중요한 강변 방어성이다. 둘레가 7,5km에 불과하나 건너편 강화 북부지역과 애기봉, 동성산 지역 등을 샅샅이 볼 수 있다. 강 양쪽의 산성들이 세트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손영종은 관미성을 이곳으로 비정한 사실은 이 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알려주고 있다.
東城山城은 김포시 霞城面의 童城山의 정상부(113m)를 감싼 석축 산성이다. {大東地志}에는 '通津 本百濟平淮押(一云 別史波衣)'라고 하였다. 동성은 본디 백제의 童子忽 또는 仇斯波衣幢山이라 불리우다가, 신라 경덕왕 16년 12월 童城으로 고쳐 長堤郡의 令縣으로 삼았다고 한다. {韓國의 城郭과 烽燧} 上에는 삼국시대 초기 유적이라 하고 백제시대의 성이라고 하였다.근래에 조사한 육사박물관보고서는 이 성이 백제성임을 시사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문에 나와있는 沸城을 이 성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동성산에서는 동북으로 성동리의 오두산성과 그 옆의 검단산 봉수대가 보인다. 뿐만 아니라 강변 방어체제답게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合水지점도 훤히 조망된다. 건너편에는 파주군 교하면의 深岳山(尋鶴山)이 있고, 현재 고양군일대의 들판과 한강변이 잘 조망된다. 이러한 지형 때문에 한강수로, 한강 건너의 평야지역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고, 동시에 공동작전을 수행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다. 그런데 동성산 아래이면서 건너편의 두 지역과 마주보면서 삼각점을 이루는 한강변인 楊澤里에서는 회백색 연질토기의 구연부 등 각종의 토기편들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건너편의 烏頭山城은 한강과 조강 임진강이 만나고 또한 曲陵川이 흘러드는 삼각 꼭지점에 해당하는 일종의 串城이다. 북쪽에서 돌출한 오두산(148m) 위에 쌓여져 있는 것으로 서울이나 개성의 입구를 지키는 요충지인데 석축의 길이가 약 500m 정도로 북문과 서문이 있다. 주변에서 붉은색 고구려계통의 기와가 수습되고 있다. 백제의 최전방 방어성이며 광개토대왕이 원년에 공격하여 점령한 관미성이라는 견해가 제기될 만큼 전술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金正浩를 비롯하여 근래에 尹日寧, 金侖禹가 주장하고 있다. 임진강 쪽 건너편인 성안지역과 함께 임진강 하구지역을 방어하고, 한강 쪽으로는 동성산과 함께 한강을 통해서 선박들이 오고가는 것을 관측하고 통제할 수 있다, 특히 임진강 수로를 이용하는 세력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강변방어체제이다. 하지만 몇 가지 한계가 있다. 이곳을 함락 당하면 한성까지는 거의 거칠 것 없이 적군이 진공해 들어올 수 있다. 일산의 고봉산성, 심악산성, 행주산성, 기타 한강변의 방어체제 등, 그리고 몇 개의 보루성들이 일시적으로 저지는 할 수 있겠지만 대군의 공격을 전면적으로 막아내기는 이미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최전방에 위치한 중심성의 기능을 수행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 지역을 통과해 상류로 더 거슬러오면 奉城山城과 深岳(尋鶴)山城이 한강 수로를 방어하고 있다. 봉성산성은 임진강과의 합수머리를 지나 안으로 들어오자면 남으로 오다가 동쪽으로 진행하는 좁은 길목의 강가 남쪽에 있다. 한강 건너편의 심악산성과 마주보며 함께 수로를 통과하는 적을 지키는 강변의 방어체제이다. 한강하류와 임진강을 통해서 한강수로를 직공 해 오는 선단을 관측하고, 차단하면서, 한편으로는 양 지역간의 도강을 저지하던 보루의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한편 그 뿐만 아니라 김포반도 내부에 있는 가현산 및 수안산, 양릉포성 등과 시인거리에 있으므로 서해의 경기만으로 접근하는 적을 방어하는데 공동으로 대응할 수 있다. 그 외에 김포에 있는 北城山城은 한강 바로 건너편에 있는 교하의 深岳山城, 일산의 高峰山城 등은 물론 선박들의 움직임을 샅샅이 관찰하고, 파악할 수 있다. 즉 검단 지역을 통해 들어온 적이 김포의 깊숙이 혹은 한강으로 붙는 것을 저지하고, 김포북단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통로를 차단하는 기능을 하는 강변방어체제이다. 이 지역을 지나면 강 양안의 주변지역에 있는 군소의 방어체제들을 공파하면서 전진해야 한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이며, 중심에 있으면서 전략적으로 가치가 높은 곳은 계양산성 지역이다. 桂陽山城은 부평의 계양산에 있는 석성이다. 富平은 {大東地志}에는 '本百濟主夫吐'였으나 新羅 景德王 16년에 長堤郡으로 바꾸었다. 라고 되어있다. 백제의 영토였으나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으며, {三國史記} 지리지 고구려편이나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主夫吐郡 으로 되어있다. 인천·서울·김포 등과 연결되는 중심에 있고, 바다와는 서쪽으로 14리밖에 안 된다. 이규보의『望海誌』에는 이 곳이 삼면이 물이라고 하였다.고 되어 있다. 지리적으로도 해양방어체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이다. 이 곳은 전망이 훌륭하여 仁州(인천)나 통진을 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또한 강서구의 開花山, 양천구 일대, 김포평야 일대가 보이고, 한강 너머로는 一山, 高陽, 幸州山城 등이 보이고, 마포구의 일대는 물론 북한산성도 보인다. 따라서 한강과 이 지역 해양방어체제의 중심성으로서 경기만의 광범위한 해안지역에서 한성을 향하여 진입하는 적을 방어하고, 해안 진성들을 지휘하는 중심에 위치해 있다. 이 성이 백제 및 고구려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 가를 더욱 조사할 필요성이 있다. 그 외에도 한강에는 현재 고양시의 멱절산 보루, 행주산성 및 강서구의 宮山토성 등을 비롯한 소규모 보루들, 그리고 상류 쪽으로도 더 많은 군소의 하안방어체제들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한강변에는 사람과 배가 건너다니는 나루들이 곳곳에 있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현재 김포시의 검암나루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甘岩津은 북쪽 8리에 있으며, 바로 고양 任意津의 小路이다. 라고 하였다. 양 지역 주민들에 따르면 강 건너 二山浦(巳浦임)와 연결되는 이 나루는 꽤 빈번하게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들 한강강변방어체제는 자연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도강지점이나 수군의 상륙지점을 막기에 효율적인 장소를 택하였으며,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면서 짝을 이루는 형태로 구축하였다. 또한 주변의 다른 방어체제와의 관계도 염두에 두었다. 그리고 강변에 설치하였던 한계로 인하여 대성이 아닌 전술적인 소성이나 보루의 형태가 많았다.
제 2로는 황해와 이어진 김포의 守安山 지역, 인천의 여러 지역 특히 孔村洞·한진·제물포·소래 등의 해안을 통해서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부평의 계양산성이나 문학산성으로 추정되는 인천의 미추성을 점령한다. 이는 백제의 중요한 대외교통로 끊어 고립시키려는 목적 외에 수군을 격멸하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 다음 전력을 강화시킨 다음에 현재의 서울 서부지역으로 진입하였을 것이다. 상륙군은 현재 김포의 서해안 지역인 대명, 검단의 오류동 등에 접안 한 다음에 인천지역에 상륙한 군대와 합세하거나 한강 수로를 직공해 올라오는 수군과 연합작전을 벌였을 것이다. 김포지역에는 역시 삼국시대의 축성한 것으로 여겨지는 해양방어체제들이 있었는데, 이는 대체적으로 한강강변방어체제의 가능을 겸하고있었다. 다만 수안산성, 계양산성 등은 인천지역의 해양방어체제와 더 깊은 연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다.
{廣開土大王陵碑文}에는 병신년에 점령한 성 가운데 미추성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 인천시 남구 문학동과 청학동의 경계인 문학산 위의 문학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仁川府邑誌}에는 '彌趨忽古城이라고 하였다. 문학산 근처에는 沸流井이 있었고, {仁川府邑誌} 墳墓條에 따르면 이 근처에 彌鄒王陵으로 전해진 고분이 있었다. 그렇다면 광개토왕군은 인천지역에 상륙한 것이 틀림없다.
인천만은 조수간만의 차가 매우 심한 곳으로서 약 8,2m에 달하기도 한다. 해안선의 굴곡이 매우 심한 리아스식 해안으로 되어 있다. 그런가하면 인천만의 안쪽에는 月尾島 芍藥島 등이 있고, 바깥에는 永宗島 靈興島 등 큰 섬이 있어 파도의 흐름을 안정시키고, 항구로서의 양호한 조건을 갖추게 한다. 반면에 물길이 매우 복잡하여 현지의 해양민들이 아니면 거의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인천은 외부세력이 들어오는 해구의 기능을 하였다.
고조선의 末王인 準王은 남천할 때 서해연안을 따라서 航進하다가 남부에 상륙하였는데, 그때 인천만은 반드시 거쳐야 한다. 백제가 점차 고대국가로 발전하고, 중국지역과 교섭할 때 인천지역은 교통로로서 중요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비류는 彌鄒忽에서 건국하였다.미추홀을 인천으로 비정한 것은 삼국사기의 지리지이다. 즉 邵城縣 本高句麗買召忽縣 景德王改名 今仁州(一云 慶原 買召一作彌鄒)이라 하였다. 그런데 본디 고구려였음을 밝히고 있다. {大東地志}에는 仁川은 本百濟買召忽(一云彌鄒忽國)라고 하여 본디 백제였다고 하여 삼국사기와는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미추홀인 인천지역은 백제의 영토였다가 후에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된 것이다.
백제는 초기부터 해양교셥을 활발하게 하였는데, 4세기에 들어와 근초고왕은 고구려전을 과감히 수행하여 북쪽으로 진출하였는데, 이는 황해중부 해상권 혹은 對中航路의 확보와도 관련이 있다. 이 시대에 바다를 건너 建康(현 南京)에 수도를 둔 동진과 교섭하였다. 그 때 사용한 주요한 항구는 항로나 해양환경으로 보아 2개 이상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는 강화도 지역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인천지역이다. 현재 인천시 남구의 玉蓮洞에 있는 凌虛臺밑인 한진(大津)이 백제인들이 중국을 향하여 배를 출발시켰다는 곳이었다.
이렇게 대외 교통로로서 중요한 인천지역에는 해양을 이용하여 대규모의 병력을 거느린 외부침입자가 상륙하기에 적합한 곳이 몇 군데 있다. 인천만에는 濟物浦,월미도, 永宗浦鎭 등 진과 토축의 고성이 있는데, 이 군사시설은 주안 등 내륙과 연결되면서 일련의 유기적인 방어체제를 구성하고 있었다. 삼국시대에도 그러한 군사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광개토대왕의 수군은 인천만의 여러 지역으로 상륙하여 해안방어체제들을 점령한 후에 彌鄒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고구려군은 이곳을 전지기지로 삼고 수도인 한성을 공격하였는데, 한성에 접근하는데는 몇 개의 군사통로가 있다.
하나는 인천시 延壽洞과 安山 사이의 만으로 진입하여 내륙으로 들어가는 蘇來浦口를 이용하는 길이다. 현재는 항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으나 소래산 바로 밑에까지 蛇川(대동여지도, 현지에서는 뱀내천으로 부름)이 이어졌다. 蘇定方이 상륙해서 '蘇來'라는 명칭을 얻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대외교통의 요지였고, 해양전략적인 요충지였다. 이곳에 상륙하면 安養 혹은 始興을 통과하여 한강 주변의 서울권으로 진입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인천만에서 朱安으로 상륙하여 시흥과 부천사이로 빠져나가 光明을 지나 한강 이남의 서부지역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을 제어하고 관리하는 기능을 하는 방어시설들이 문학산성을 비롯한 인천지역의 성들이다. 세 번째는 북부에 해당하는 통로로서 검단과 가까운 孔村洞 지역에 상륙하여 '장명이 고개'를 지나 현재의 강서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통로를 막기 위한 방어체제가 許岩山城, 桂陽山城, 지양산성, 新亭洞土城 등이다.
고구려군은 이러한 통로들을 동시에 활용하였거나, 전술적으로 필요한 정도로 선택하여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인천지역에서 서울로 진입할 수 있는 모든 통로를 관측하며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지휘할 수 있는 곳이 문학산성이다. 미추성으로 추정되는 문학산성은 해안 가까이 있으면서도 중앙에 있었으므로 삼국시대부터 인천지역 해양방어체제의 중심성으로서 군소 海岸防衛城과 주변에 부평의 桂陽山城 孔村洞의 許巖山城(시대불명), 黔壇의 노고산성(시대불명) 및 기타 永宗島 등 다른 섬방어체제를 거느렸다. 또한 해안방어 뿐 만 아니라 내륙을 방어하기 위한 전초성의 역할도 하였으며, 특히 공동작전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이는 한성에서 인천해안으로 통과하는 길목을 방어하는 역할을 한데서도 확인된다. 인천지역은 병신년 이후에 계속 고구려에 점령당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장수왕 시대부터는 한동안 고구려의 영토였다. {三國史記}에는 齊次巴衣縣, 買召忽縣을 각각 一云 彌鄒忽이라고 하였다.
제 3로는 비교적 원거리를 항해하여 안산만과 남양만 등으로 상륙한 후에 현재의 수원·용인·과천 등을 거쳐 한성의 배후를 기습하는 것이다.
남양은 조선시대에는 부의 서쪽 54리 되는 곳에 바다가 있었다. 바다 쪽으로 남양반도와 朝岩반도(현재 雨汀面)를 끼고 있어 경기도에서 가장 긴 해안선을 가지고 있으며, 남북이 좁고 동서 폭이 넓은 지형이다. 특히 남양반도는 해양교통을 고려할 때 경기만 중에서도 남쪽에 위치한 가장 중요하고 넓은 지역 가운데 하나이다. 내부에 몇 개의 작은 만과 串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안산만, 남쪽으로는 평택만이 있다. 삼국시대에는 중국을 오고가는 교통로로서 중요했고, 삼국이 접전을 벌였던 경기만의 남부에 속했다. 남양만은 이러한 지리적인 위치로 인하여 정치적으로는 물론 군사적,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때문에 성곽, 봉수 등 방어시설물이 많이 있으며, 그것을 축성한 나라와 시대 역시 다양하고 복잡하다. {東與備考}의 [新羅百濟高句麗肇造區域之圖]에 남양만은 현재 남양읍으로 들어가는 물길만을 가리키고 있다. 중요한 포구와 항로가 상임만이 아니고, 개죽포 일대가 도착 항구였음을 의미한다.
남양만 지역에는 많은 산성이 있는데, 특히 당성은 전략적으로 남양반도 전체, 안산 등의 지역, 남양 치소와 그 멀리 까지도 작전반경 속에 편입시켜 놓고 경기만 하단부의 해양방어체제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당성은 남양반도에서 가장 높고 험준하며 폭이 넓은 지역으로서 즉 포구의 진성(鎭城)이 아닌 남양반도의 中心城이며, 일종의 해양방어사령부의 역할을 한 곳이다. 唐城, 古唐城, 黨項城 등의 명칭으로 불리었다. 옛 지형을 보면 당성은 해안가에 있었으며, 남양반도의 전해안과 가장 짧은 거리로 연결되고, 어느 지역과도 한 번에 연결되는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바다와 4개의 만 안으로 들어오는 적을 방어할 수 있다. 그런가하면 전략적으로 남양반도 전체, 安山 등의 지역, 남양 치소와 그 멀리 까지도 작전반경 속에 편입시켜 놓고 경기만 하단부의 해양방어체제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당성은 해안군사 수비성으로서 몇 가지 한계도 있다. 성목쟁이 지역만 막히거나 점령당하면 완전히 포위가 될 수 있는 허점이 있다. 유일한 육로에 적이 있고, 바다에는 포위된 삼면에서 선단이 압박을 가하고, 군사 등을 상륙시켜 공격을 가한다면 방어에는 치명적으로 불리하다.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당성의 주변에는 크고 작은 성들과 길게 펼쳐진 장성, 소규모의 초소 등 방어시설이 축차시스템을 이루면서 포진하고 있다. 바깥바다에는 濟扶島가 있는데 해양 전략적인 위치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해안가에는 장성으로서 南陽長城이 있고, 청명산, 백곡리토성, 성목쟁이성 등이 연결되어 방어체제를 형성되었을 것이다. 백곡리성(白谷里城)이 있는 백곡리에는 백제 고분군이 있는데 4세기대의 것들이다. 때문에 이 지역의 성들이 삼국시대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외에 해안 전위성(浦·津城)들이 포진되어 있다.
고구려의 수군은 경기만의 제해권을 안정적으로 장악하고, 안산 인천지역을 남방에서 압박하며, 한성을 배후에서 공격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이 지역을 공격해야 했다. 이때 백제의 해양방어체제들은 상륙작전을 방어하는 작전을 펼쳤을 것이다. 당시의 전황으로 보아 고구려는 그 방어체제들을 공파한 후에 내륙으로 진격해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점령기간 동안에 고구려의 전략전술과 축성법, 그리고 남양반도에 대한 국가적 활용전략에 맞춰 해양방어체제들을 개축하거나 신축하였을 것이다. {新增東國與地勝覽} 南陽都護府 古跡條에는 이곳을 古唐城이라는 명칭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고구려 때 당의 학자 8인이 건너와 머물렀다.는 기록처럼 당성은 고구려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高麗史}에서 고구려의 당성군이라고 언급한 이후 {世宗實錄地理志}, {新增東國與地勝覽}에서 당성을 고구려의 영토로 기록하고 있다. 명칭도 당성현(唐城縣), 당성군(唐城郡)으로 되어있다. 한편 백제는 남양만을 빼앗기면서 해양활동은 물론 대중국 교통로를 잃어버려 정치 외교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경제적으로도 심한 손실을 입었을 것이다. 蓋鹵王의 죽음과 한성을 상실한 이후에 백제는 熊津으로 수도를 옮겼다.
고구려의 병신년 수군작전은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방향을 통해서 이루어지면서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왕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고, 경기만의 북쪽은 물론이고 남양, 서산, 당진 등 남부해안지대를 중심으로 상당한 기간동안 점령상태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릉비문에 기록된 50여 성은 山城 내지 治所 등 지역중심이었을 것이고, 700여 촌은 주변의 영농생산지였을 것이나 군사적, 정치적 요충지로서 海岸防衛와도 관련된 시설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398년에 阿莘王이 반격을 가하고 漢山北柵에 도달했다는 기사를보면 396년의 전투 때에 적어도 내륙지방은 한강선을 경계로 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또한 이렇게 전개된 상황 속에서 볼 때 이보다 5년 전에 벌어진 관미성 전투는 성 자체의 함락과 함께, 백제가 가진 황해중부의 수군활동을 무력화시킨 의미를 갖고 있다. 만약 관미성의 함락이 실패했었다면 6년에 발진한 고구려의 水軍은 백제의 해양방어망과 수군을 배후에 둔 상태에서 후방 깊숙한 해안으로 상륙할 수가 없었다.
경기만은 해상교통 및 한반도의 중부지역을 통합시키는 내륙수로교통의 요충지였으며, 백제의 해양활동 근거지였다. 고구려는 百濟를 韓半島 내에 가두어놓고, 포위전략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연결고리를 적극적으로 차단해야 했다. 때문에 水軍을 동원하여 경기만 쟁탈전 및 서해안의 해상권 장악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것이다. 병신년 전투 이후에 고구려는 일시적으로 백제를 외교적 고립상태에 빠뜨린다. 광개토대왕의 海洋封鎖를 통한 연결고리 차단전략이 현실성이 있음은 백제의 대외정책이 변화한 데에서도 나타난다. 고구려의 폭풍같은 공격에 대하여 백제는 계속해서 방어체제를 구축하였는데, 아신왕은 雙峴城을, 뒤를 이은 전지왕은 沙口城을 축성하였다. 물론 이러한 성들은 결국 고구려의 영토가 되버렸다.
5 맺음말
본고에서는 광개토대왕이 추진한 수군작전을 통하여 그 당시에 고구려를 중심으로 전개된 국제질서의 재편과정과 해양활동 전반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광개토대왕은 꾸준하게 추진되어온 남진정책을 계승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며, 기존의 경계선이 아닌 그 이남지역은 물론 해양이라는 새로운 역사영역을 확보하였다. 이는 기본적으로 북진해오는 백제의 예봉을 분쇄하고, 남진하여 영토를 확대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새롭게 재편되는 국제질서 속에서 경기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장악하여 황해중부 해상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키고, 아울러 백제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려는 거시적인 목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광개토대왕에 의해 추진된 남진정책 및 경기만 공격은 고구려의 북진정책 및 국제질서의 재편 전략과 유기적 관련을 맺으면서 추진된 것이다.
대왕은 공격 및 점령 대상이 해양과 관련이 있으므로 수군을 직접 간접으로 활용하였는데, 그 가운데에서 보다 확실한 작전은 병신년의 수군 공격이고, 아울러 이와 깊은 관련이 있는 관미성 전투이다. 백제의 최전방 방어선이며, 수군활동과 깊은 연관이 있는 관미성은 강화도 북부의 봉천산 지역으로 추정된다. 대왕은 해양활동을 활용한 본격적인 백제공격을 위하여 예비단계로서 난공불락의 관미성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이어 6년에 수군을 친히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이때 수군은 육군과 합동작전을 펼쳤으며, 상륙작전을 전개하였다. 공격의 기본복표, 해양작전의 특성, 경기만의 해양전략적 환경, 그리고 해양방어체제의 배치와 구조들을 고려할 때 고구려군은 경기만 전체를 대상으로 삼아 외곽포위작전을 펼쳤다. 수군은 3개 지역으로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다음에 해안의 중심지역을 점령하고 일부는 한성을 공격하여 대승리를 거두었다. 제 1로는 강화도에 상륙한 다음에 관미성을 선대의 출발기지로 삼아 한강수로를 직공하여 왕성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제 2로는 인천만을 중심으로 김포 소래 등의 해안지대에 상륙한 다음에 현재 문학산성으로 추정하는 미추성을 점령한 다음에 한성의 서부지역을 경유하여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다. 제 3로는 남양만을 중심으로 안산만 평택만 등의 해안으로 상륙한 다음에 당성 등 몇 개의 중심성을 근거지로 삼고 용인 등을 거쳐 한성의 배후에서 압박해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전개된 병신년 전투는 삼국시대 한반도 내부의 역학관계에 전환점을 마련하였으며, 고구려가 국제사회에서 외교적 발언권을 높이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전쟁에서 해양력이 직접 이용되고, 승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고구려는 이 후에 장수왕 시대에 들어와 427년에 수도를 평양지역으로 천도한 후에 다시 본격적으로 475년에 백제를 공격하여 한성을 점령하고 한강 중부지역을 완전하게 장악하였다. 고구려는 이러한 남진정책의 성공과 경기만의 장악을 토대로 동아지중해 중핵국가의 위치를 획득하고, 동아시아의 강국이 되었다.
오랜만에 과거의 글을 보았더니....이 당시만 하더라도 저는 어마어마한 민족주의자였군요. 2004년 이후에 6년이 지난 지금 저는 이런 글을 쓰는 사람들을 비웃고 있습니다. 과거의 저를 비웃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의 자신에 대한 반성 차원에서 글은 남겨두겠습니다.
검정색 글은 모두 원문을 번역한 글입니다.
제가 첨가한 글은 파란색으로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공부해야 할거 같습니다. 짱꼴라가 저러면 왜 틀렸는지 설명해 줘야 하니까여.... 또 공부...-_-;;
고구려, 잃어버린 고대문명(사진 4장포함) {음…… 무슨 내용일까? 한국이 고구려를 언제 버렸나? 잃어버려? }
본지기자 송념신 {염신아, 니 메일주소 불러 볼래?}
학자들이 생각하기에 고대동아시아 국가체제와 현제 서방의 개념에 의해 형성된 국가 관계는 완전히 서로다른 개념으로 억지로 끼워맞춘 것이다. 반드시 역사적, 과학적태도에 근거해서 고구려 고대문명을 다루어야 하며, 문제를 현대정치로 끌어들여서는 안된다. {음.. 왜곡의 시작인가? 그래 현대정치로 끌어들이면 안되지… 짱꼴라들 중국이 힘세지고 있다고 그거 믿고 까부는 주제에… 이 문제를 보면서 중국이 대국이 되더라도 미국과 별반 다를게 없을거 같은 생각이 드는 건 왤까?}
7월1일, 중국 소주에서 거행된 제28회 세계유산위원회회의에서 중국이 신청한 고구려성과 왕릉, 고분은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이 유산의 등록성공은 특별한 의의가 있다. 오랫동안 소실되었고, 잘못이해된 옛나라 고구려를 새로운 모습으로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오에 한것이다. {그래, 역사 왜곡하니 자랑스럽니?}
중국동북지역과 한반도북부를 가로지르는 고대 변방정권. {고구려가 왜 변방정권이냐? 그냥 한국도 화교국가라고 해버리지.어? 웃기네..}
오늘날 중국학자들은 보통 생각하기를, 고구려는 서한에서 수당대까지 존재하였던 중국도북지방의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변방민족 정권이다. 동북지방은 일찍부터 고대 중앙정권의 관할구역이었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했을때 상나라의 후예 기자는 사랑들의 데리고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오늘날의 평양지방에 “조선”을 건립하여, 주나라의 한 지방정권이 된다. 학계에서는 보통 “기자조선”이라 칭한다. 서한 초기 위만의 연인(卫满的燕人)이라 함은 전쟁을 피해 이곳으로 와서 중원의 사람을 모아 통치권을 장악한 사람을 말한다. 학계에서는 이를 “위씨조선”이라 한다. 계속적으로 확장정책을 실행함에 기원전108년 위씨조선은 한무제에 통일되었고 서한이 관할지에 낙랑, 진번, 임둔, 현토4군을 설치하고 관리하였다. {웃기지마, 위씨조선이 중국이면 그냥 통일하면 끝이지 왜 사군을 설치하냐고… 사군이라고 해봤자 그냥 4개 작은 부락이었을 뿐이잔아.. 거봐 고조선이 중국이라는 말은 웃기지도 않는다… 참내..}
기원전37년 동북변방민족 부여의 한 왕자는 사람들의 박해로 남쪽에서 현토군의 고구려현(지금 료녕성의 신빈현 동남부)으로 도피한다. 활을 잘 쏴 “주몽”으로 불리었던 왕은 이곳에서 초기의 고구려정권을 건립한다. 사서에는 “고려”라는 약자로 기록된다. <삼국지>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당시 고구려의 호적은 서한 현묘군 고구려현의 관리하에 있었다. 서기3년 고구려의 제2대 왕인 유리왕은 수도를 오늘날 길림성 집안시에있는 “국내성”으로 옮긴다. 이후 400여년간 고구려정권은 이곳을 수도로 삼는다.
고구려는 한의 현토군, 요동군 관할에 놓이고 지속적으로 자신을 신하라 칭하며 조공을 바쳤다. 역사상 이 정권은 흥망성쇠의 과정을 거친다. 왕망시대 흉노정벌에 징집되어 참가함에 도망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고구려왕의 말탄 신하(驺)는 왕망에 의해 유인되어 죽음을 당한다. 동한의 건립후, 고구려의 통치자는 다시 왕으로 책봉되고 계속해어 주위의 변방정권을 통일해 점점 강력해 진다. 위진남북조 후기에 이르러 중원에 전쟁이 발생하고 이게 고구려는 더욱 발전한다. 그때 고구려는 중원의 각왕을 신하라 명하여 조위와 막용선비정권에게 두번의 단멸성 공격을 받는다. 이후 고구려는 정책을 바꾸어 서쪽으로의 확장을 중지하고, 남쪽으로의 경영을 시작하며 한반도의 다른 두정권 백제와 신라를 통제한다. 서기427년 고구려는 다시 평양으로 천도한다.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가 제일 번성했을 때, 그영역이 동서로 이천리였고 남북으로 천리였다. 남쪽으로는 한반도 중부에 이르렀고 북으로는 길림중부, 동으로는 연길 동서로 요하에 이르렀다. {짜증나는 짱꼴라들 자기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저 중원이라는 말투와 아집에 짜증이난다. 그리고 정권이라는 애매한 용어로 고구려를 지칭하다니. 비겁한 자식들. 고구려는 엄연한 국가란 말이다. ㅋㅋㅋ 그리고 짱꼴라들 너희를 신하라 불렀다고? 그럼 너희 역사가 고구려 속국의 역사라는 말이네.}
수당시기에 이르러 중원은 통일되어 가고 할거상태의 고구려를 수복하는 것이 두나라 황제의 공통된 바램이었다. 통일에 대한 요구로 당태종은 수문제와 양제의 여러차례의 실패후 무력으로 고구려를 통일하려 한다. 역사서는 기록하기를 당태종이 전쟁에 나가기전에 “이제 아홉바다가 평정되었고, 모퉁이 하나만 남았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고구려수복을 통일의 최후의 전쟁으로 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기644년부터 24년의 전쟁으로 고구려는 당나라와 한반도 남부의 신라정권의 연합에 의해 멸망하고,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한다. 설인귀를 검교안동도호로 임명하여 군대를 통합하고 지키게 한다. 이때부터 705년동한의 고구려는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다. {수복? 고구려를 수복해? 언제는 너희 나라였냐? 그리고 두나라의 황제? 황제가 둘이면 것두 황제라 부르냐? 그냥 두나라 왕이라고 적어. 그리고 고구려가 중국에 속하면 그냥 통일하면 되지 무슨 도호부를 설치하면서 군대를 주둔 시키고 지키라고 그래. 고구려 힘이 세니까 세력억제시키려고 도호부 설치한거 아니야. 통일의 완성이라고 한것도 고구려가 자꾸 침략하니까 세력억제를 해야 통일 완성이라고 본거구. 아씨 그리고 헛소리가 넘 많아서 다 대답하기도 귀찬네… }
고구려 문화와 중원문화는 가까워서 구별하기 어렵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시려구 준비운동하시나?}
길림성 고고학 연구소의 부가흔(傅佳欣) 연구원은 오랬동안 고구려 고고학연구를 했다. 그가 기자에게 소개하기를 고고학적 각도에서 볼때, 고구려의 문화는 낮은 수준에서 갑자기 발전한 것이라고 했다. 어떤 시기의 귀족무덤 안에서 많은 량의 도자기, 철기가 발견된다. 하지만 동시대 일반 백성의 무덤안에는 석기가 발견된다. 이것은 분명하게 외래문명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구려 고적의 2/3은 중국의 국경 안에 위치하는데 고구려 초기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천도후 문화특징은 더욱 중원화되어 가며 원래의 특징은 줄어든다. 이 모든 현상은 고구려의 문화는 중원문화의 빛 아래서 발전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게 또 헛소리를 하는군. 고구려 문화유적지 왜 개방 안하냐고. 역사왜곡 하기전에 들통나면 곤란하니까? 욕나와도 참자…}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방사지(中国边疆史地) 연구센터의 이대용연구원은 기자에게 말하길, “고구려 문화는 동북아시아 문화중에서 하나의 매우 찬란한 문화입니다. 벽화, 산성, 고분, 모두 대단합니다.” 그가 보기에 고구려와 중원의 각 왕조는 경제 문화적으로 밀접한 왕래를 유지했는데, 이것이 많은 부분에서 찬란한 고구려문화탄생에 영향을 끼쳤다. {인접 국가간의 문화교류는 당연한거 아니야? 일본이 한자쓴다고 중국 속국이라고는 왜 안하니?}
이대용은 예를 들기를, 많은 고구려 무덤중 벽화무덤은 극히 진귀하다. 벽화의 내용으로 보면, 사회생활과 내가지 신(청룡, 백호, 주작, 현무), 장식도안등이 있는데 많은 것들이 중원의 건축물과 무덤에서 자주 나오는 내용이다. 이밖에 고구려벽화는 중원지역보다 발생시기가 조금 늦다. 이는 중원에서 변두리로 전해진 과정이라 하겠다. 그리고 고구려 멸망후, 이지역의 벽화무덤의 수는 줄어든다. {문화유적지 공개해서 공개적으로 연구하고 공식적으로 발표해야지. 자기들끼리 골방에서 일방적으로 그렇다고 하면 그게 믿기냐}
이와 같이 고구려민족과 중원민족의 교류는 빈번했다. 이대용은 이를 전면적교류라고 명했다. 예를 들자면, 고구려와 중앙왕조의 사자왕래는 매우 밀접했고, 쌍방문화교류의 중요한 전달자 중의 하나였다. 예절과 의식제도, 종교, 역법등 분야에서 넓게 교류하였다. 고구려민족은 자기만의 언어가 있었는데 이미 소실되에 찾기 어려우나 그들이 한자로 기록하였기에 오늘날 학자들이 그에대해 깊이 연구를 진행중이다. 고구려정권에는 많은 한인이 존재했다. 이와같이 당왕조안에도 적지않은 고구려인이 요직에 위치하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안서절도사를 담당했던 고선지가 있다. {지금도 한국에 한인 많아. 음… 그렇담 지금 한국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중 일부게…. -_-;; 참자. 욕나온다… 그리고 고구려에서 사용했던 고구려말 말인데 알고시으면 영화 “황산벌”을 보라구. 고구려어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될테니까.}
오랫동안 오해된 역사 {제목이 잘못 됐네. 역사를 왜곡하는 중국이 맞지.}
고구려 멸망후, 대부분의 후예들이 중원으로 옮겨져 중원민족과 융화되었고, 소수의 사람들이 주변 각민족에 융화되어 갔으며, 왕족은 멸망했다. 모든 영역은 당나라에의해 관할되었으며, 훗날 일부를 동북지방정권 발해에게 분할해 주었고, 일부는 한반도 남부 신라에게 분할해 주었다. 이후 점점 중원전통사학의 틀에서 벗어났다. 송대이후, 중원은 고구려역사를 인식함에 혼란이 생겼으며 잘못 이해하게 된다. 청대에 이르러 동북지방은 황실 “용흥의 땅”이라는 것에 의해, 청은 이지역에 “봉금정책”을 실행하고, 소수의 역사가만이 이에대해 고찰, 연구를 진행한다. 1877년에 이르러 고구려왕 고안(염덕이라고도 하고, 호태왕이라고도 칭함)사적이 기록된 “호태왕비”가 발견되어, 천여년간 소실되었던 옛나라가 다시 인식되기 시작한다. {다시 인식되는 건 너희 한족들한테겠지. 혹시 고구려의 발전된 문화가 중국에 퍼졌다는, 중국에 불리한 유적이 발견된거 아니야? 고구려 유적지 한국에 공개하라고!!}
길림성 고고학연구소 연구원 부가흔은 “매우 긴 시간동안 우리가 고구려 역사를 외국사로 본것은 실제로 오해일뿐이다”라고 말했다. 서기918년 고구려 멸망250년 후, 한반도에 “고려”라는 정권이 들어선다. 통치자의 성이 왕씨여서 고구려의 약칭인 고려와 구별하기위해서 학계에서는 “왕씨고려”라고 부른다. 비록 같은 이름을 베껴 사용했지만, 왕씨고려와 고씨고려는 아무런 계승관계도 없다. 왕씨고려는 935년 신라를 대신했고, 뒤날 백제가 멸망하고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을 통일한다. 1392년 대신 이성계가 왕을 폐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으며, 1393년 “조선합영등호주청”을 명에게 청했고, 명은 이성계에게 조선왕을 하사했다. 결국 왕씨 고려가 조선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씨조선 또는 이조라고 부른다. {이씨조선? 이조? 왕씨고려? 왕위하사? 오호~~ 그럴싸한데.}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방사지 연구센터 연구원 이대용은 예를 들어 말하길, 중원지역 역사상 많은 정권들이 “송”이라는 이름으로 출현했었는데, 이 정권간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왕씨고려와 고구려또한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왕씨고려는 신라를 직접적으로 계승한 것이며, 고구려는 당나라에 통일된 것이다. 그러나 사료가 부족하고 오도되는 등의 원인에 의해서, 송대이후 사서는 왕씨고려와 고씨고려를 혼동하고 있으며, <명사(明史)>는 심지어 이성계 책봉이 합리적임을 해석하는데 기자조선, 위씨조선, 한사군, 고구려를 모두 (이씨)조선사에 넣어 버린다. {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해서 한국역사는 모두다 중국사에 포함된다고 해버리지. 그리고 화교의 미국진출로 미국사도 중국사의 일부라고 해버리지 그러냐.}
이대용이 생각하기에, 왕씨고려와 고씨고려는 창립년대가 아주 멀며, 주체민족도 다르며(왕씨고려의 주요민족은 신라, 백제의 “삼한(三韩)”인 일뿐, 고구려인이 아니다) 정권건립자또한 계승관계가 없고 통치지역도 다르다. 이 네가지는 이둘이 서로 계승관계가 없음을 보여준다. {ㅋㅋㅋㅋㅋ. 말한번 잘했다. 그렇게 보면 중국사라는 것은 아예 없네. 몽골에 정복당했다가, 여진에 정복당했다가 고대국가는 우리 동이족이 세운 나라였잖아.}
중국은 큰힘을 쏟아 고구려 유산보호에 노력한다. {공개가 우선이 아닐까?}
광서3년, 금석학을 취미로하는 청나라 관원한명이 우연으로 풀밭에서 “호태왕비”를 발견하여 비문을 해석하는데 열기를 일으킨다. 그러나 1941년까지 고구려역사를 계통연구작품 <동북통사(상편)>(金毓黻)한편만이 나타날 뿐이다. 건국후 중국은 고구려 유적에대한 발굴과 보호를 확대하고 있으며, 1961년 호태왕비등은 전국중점보호문물로 지정된다. {그만 훼손하고 공개해 주세요.}
20세기 80년대 고구려역사에대한 연구가 점점 전개되었다. 2002년 국가문물국은 설계분야와 관계있는 조직을 만들어 일련의 보호규범계획 전문조항을 제작하고, 질서있고 효과있게 세계유산신청을 위한 필요기초를 닦았다. 그후 정부는 3억여원을 들여 환경정리, 문물보호, 발굴정리 업무를 시작했으며, 현대식 건물과 무덤조성에 대량의 기금을 사용하였다. 초기에 11개의 왕릉 유적을 정리하였으며, 2700여건의 문물을 출토하였고, 현재의 박물관도 보수하였다. 작년 기자가 집안을 방문할때 길림성과 통화지역에서 집안시까지 모두 협력하여 고구려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에 힘썼다. 집안시도 이미 여행업을 적극육성하여, 유산등록 성공후, 여행업을 인삼산업에 버금가는 둘째 중심산업으로 키울 계획을 세우고 있다. {유산 등록되었으니까 이제 돈벌어야지.}
방문중 모든 학자들은 반드시 역사적, 과학적태도를 가지고 고구려 고대문명을 보아야 하며, 현대 정치로 문제를 가져와선 안된다고 하였다. 실지로 중화민족과 한민족의 역사는 반드시 강제로 구분하거나 나누어서는 안되고, 그러수도 없다. 북경대학 국제관계학원의 우군교수는 생각하기를 고대 동아시아 국가체제와 현재 서방개념에 의한 국가관계는 서로다른 개념이기때문에 억지로 적용시켜서는 안된다. 고대 조공제도에 의한 관계는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현제 국제법체계의 인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래 억지로 중국역사에 끼워 놓지 말라고.}
세계유산에 등록된 항목 {중국이 등록한 한국의 문화유산 항목}
고구려 도성3채: 오녀산성(요녕헝인), 국내성(길림집안), 완도산성(길림집안)
왕릉12채; 귀족무덤26채; 장군총1호부장무덤; 호태왕비1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