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포스트는 사실 역사관련자만이 쓸모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많은 역사를 좋아하는 애호가들을 위하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공부하는 분들중에서도 이런 싸이트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분들이 의외로 많더군요.


[역사싸이트] 북경대학교 중국고대사연구센터




싸이트로 가자~~!!

중국 사학계에서 북방사학계을 장악하고 있는 북경대학교 사학과의 거의 모든 고대사 교수님들이 참가하고 있는 중국고대사 연구센터입니다. 현재 주 연구대상은 위진남북조시대와 돈황학입니다. 국가에서 중심연구센터로 선정되어있으며, 북경대의 북쪽의 조용한 곳에 연구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연구소내 자체 도서관에는 한국쪽 논문자료와 사료도 상당수 보유하고 있습니다.



주의 : 파이어폭스로 접속하면 완벽하게 어긋나게 나옵니다. -_;;;


바로의 중얼중얼
맨날 한국쪽 싸이트만 올렸더니, 문득 중국쪽 싸이트도 올리고 싶어졌습니다. 그리 많은 자료가 쌓여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수준있는 논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와 협조해서 진행하고 있는 작업들도 실시간으로 공개되고 있고요. 하.지.만. 역시 연구자들이 아니라면 별로 유용하지는 않을 듯 합니다.-_-;;;
唐研究近年论著目录

整理:荣新江


중국과 일본, 그리고 서양에서 연구한 논문만 있군요. 왠지 무시당하는 듯한 한국논문들이군요. 당나라는 한반도와 교류도 많았으니까 연구도 많을 듯 한데 말이죠. 그냥 무시당하는 건가......

출처 : 北京大学中国史研究中心





바로의 중얼중얼
관련 연구자용입니다. 쓰실 분은 반드시 있으리라 믿습니다. 물론 저도 백업용으로 저장해두는 것이고요. 이넘의 감기는 언제쯤 괜찮아 질까? ㅠㅠ
吴简研究论著目录

罗新 整理



중국과 일본에서의 연구목록이 있습니다. 한국연구목록은 안타깝게도 없습니다.

출처 : 北京大学中国史研究中心





바로의 중얼중얼
이것 역시 관련연구자들만이 필요한 정보입니다. 제 자료수집용으로 올렸으니 이딴거 왜 올리냐는 질문은......(후다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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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포스트는 사실 역사관련자만이 쓸모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많은 역사를 좋아하는 애호가들을 위하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공부하는 분들중에서도 이런 싸이트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분들이 의외로 많더군요. 한국이 IT정보강국이라는 소리가 이런 싸이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역사싸이트] 고구려연구회



싸이트로 가자~~!!
요즘은 한국에서는 고구려사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언론매체가 조용히 있는 것 같지만 중국에서는 계획을 천천하고 조용히, 그리고 확실하게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학도이든 혹은 다른 일을 하고 있는 한국인이 대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중국인보다 더 정확하고 명확하게 고구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가장 기본적인 대비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고구려사에 대해서, 고구려라는 나라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신문기사에 나오는 것은 학계에서 이야기 되는 수 많은 이야기 중에 일부일 뿐입니다.

고구려사에 대해서 더욱 심도있고 자세하게 공부하시 싶으신 분들에게 고구려연구회 싸이트를 소개합니다. 이 싸이트를 아시는 분도 많이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아직 모르시는 분을 위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바로의 중얼중얼
요즘 알바때문에 개발새발이었던 포스트의 질이 한층 하락해버렸습니다. 토요일 알바가 끝나면 밀린 레포트 2개입니다. 이런 것을 보고 인생이라고 쓰고 삽질이라고 읽는다죠.ㅠㅠ
隋唐长安研究文献目录稿

荣新江 王 静 编


小引:隋大兴城和唐长安城是隋唐帝国的都城,是隋唐帝国政治、经济、宗教、文化等许多方面的活动中心。长安作为当时国际的大都会,也是东西方各国、各族民众生活、学习、经商、娱乐的空间舞台,因此,对隋唐长安的研究,是隋唐史研究的重要课题。由于长安的博大与牵涉的问题非常复杂,有关长安的研究虽然十分丰富,但非常分散。近二十年前,妹尾达彦先生已经编出很好的《唐代长安城关系论著目录稿》,并且做了分类。他的工作给予我们许多启发。我们在从事隋唐长安的研究过程中,陆续积累了一些有关的研究目录信息,本来只是为自己的研究提供索引,但随着材料的增多,目录越编越长,也不时提供给其他学者使用,并且在我们的“《两京新记》读书班”的读书过程中,发挥过一定的作用。在一些学界同仁的鼓动下,我们把这个目录稿本略加整理,发表于此,目的是提供给大家一个工具,同时也希望能够把这个目录进一步完善。与二十多年前相比,有关长安的论著已增加了不知多少倍,故此我们不敢遽然分类编排,作为初稿,为便于学者增补自己的大作,采用以作者姓名的字母顺序排序,此实不得已而为之,亦故意而为之者。

此目只限专门研究长安的论著,兼收部分相关的研究论著;只限隋唐长安的研究论著,兼收研究后代但涉及到隋唐者。我们尽力据原发表书刊编目,并注各篇论文页码,然有些旧书及海外论著难以寻觅,而新书亦层出不穷,故有些论文页码暂付阙如。编者自知学力不逮,此稿体例、内容均不完善,敬请读者方家批评补正。(2003年10月16日)

출처 : 北京大学中国史研究中心





바로의 중얼중얼
관련 연구자외에는 전.혀. 필요없는 자료라는 거 인정합니다. 그냥 자료 수집용으로 올려놓은 포스트입니다.(먼산~~)
신라의 대당(對唐)전쟁 시 해상전역

강정현(교수, 해군대학 전쟁사)


출처 : 대한민국해군




바로의 중얼중얼
내용은 중학교 수준만 있으면 모두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쉽습니다. 그냥 간단하게 교양을 늘린다는 생각으로 읽어보시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내일 부터 알바이건만, 오늘부터 전시장가서 삽질?!하고 왔습니다.
이런것이 인생?!
이런 포스트는 사실 역사관련자만이 쓸모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많은 역사를 좋아하는 애호가들을 위하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공부하는 분들중에서도 이런 싸이트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분들이 의외로 많더군요. 한국이 IT정보강국이라는 소리가 이런 싸이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역사싸이트] 디지털한국학



싸이트로 가자~~!!

한국과 한국문화, 그리고 한국학!
디지털한국학은 이에 대한 수준높은 정보를 제공하는 인터넷 서비스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과 유니텔이 함께 개발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한국문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인터넷 상에서 만나게 될 커다란 만족이자 기쁨이 될 것입니다. 특히, 한국학 전문 연구자들에게는 한국학 관련 정보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세계 최대의 한국학 포털사이트로 기능할 것입니다.

바로의 중얼중얼
이 싸이트는 전문적인 성격보다는 대중적인 성격이 훨씬 강한 싸이트입니다. 사실 전에 올렸던 두개의 싸이트는 어느정도 전문성을 띄고 있지만 이것은 대중성에 훨씬 가깝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나라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한번 가보시면 이런 저런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쌓여있답니다^^
이런 포스트는 사실 역사관련자만이 쓸모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많은 역사를 좋아하는 애호가들을 위하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공부하는 분들중에서도 이런 싸이트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분들이 의외로 많더군요. 한국이 IT정보강국이라는 소리가 이런 싸이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역사싸이트]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한번 둘러보러 가자~!


금석문이란 말 그대로 철이나 청동 같은 금속성 재료에 기록한 금문(金文)과 비석처럼 석재(石材)에 기록한 석문(石文)을 합하여 일컫는 말입니다. 이 금석문은 문헌사료가 부족한 시대의 역사를 연구할 때 오랜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유용한 자료입니다. 이러한 중요한 금석문 문화재는 시간이 지날 수록 비.바람에 마멸과 부식을 거듭하여 유실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렇게 사라져 가는 금석문 문화재를 국가적 차원에서 집대성하고 디지털화하여 훼손되어 가고 있는 금석문을 보존하고,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바로의 중얼중얼
이것도 홍보의 문제입니다. 이런 무료로 제공하는 훌륭한 싸이트가 있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른다는 것은 상당한 문제가 있는거 아닐까요? 물론 금석문은 좀 전문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한국디지탈문화의 강함을 느껴보십시오^^
이런 포스트는 사실 역사관련자만이 쓸모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많은 역사를 좋아하는 애호가들을 위하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공부하는 분들중에서도 이런 싸이트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분들이 의외로 많더군요. 한국이 IT정보강국이라는 소리가 이런 싸이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직접 싸이트로~~!!

본 싸이트에서는 많은 정보가 있지만, 특히 승정원일기의 디지털화는 특히 주목할만한 부분입니다. 승정원 일기는 조선시대 왕명을 출납하던 국왕 비서실의 일기. 1623년(인조 1)부터 1910년(융희 4)까지의 왕명 출납, 제반 행정사무, 의례적 사항을 기록한 일기로, 현존하는 우리 나라 최대 역사기록물이다. 총 3,243책. 필사본.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대개 41.2㎝×29.4㎝이다. 국보 제303호로 원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2001년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Memory of the World)으로 지정되었다. (저도 이것을 이용해서 레포트에 참고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중국땅에서 한국사료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행복이겠죠^^)


바로의 중얼중얼
역사관련에서 종사하거나 학업중이 아니라도 한번 가보셔서 승정원일기를 읽는것도 재미있답니다. 소설을 읽는다는 기분으로 읽는 것이죠. 그 외에도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동북공정에 대한 전문적인 이야기등을 비롯한 상당한 분량의 데이터베이스가 있습니다.

정부기관 산하에 있는 기관입니다. 여기서 문제점이 이런 싸이트를 많은 사람이 모른다는 것은, 다이나믹코리아의 홍보문제와 똑같이, 홍보가 제대로 안되니까 이런 유용한 싸이트를 사람들이 이용을 못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부야....정부야....
사학개론이라는 과목의 유명한 싸이코선생님이 이상야리꾸리한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주제도 자유. 쓰는 방법도 자유. 그렇다고 레포트도 아니고, 숙제 마감 기간까지 매 번 말이 변하는지라, 중국애들도 과연 이것을 어찌 해야되냐고 서로 물어보게 만들어 버리는 숙제입니다.

한루님이 낙랑에 대해서 자료를 찾으시길래, 저도 어차피 주제는 잡아야되니까 일단 도서관 가서 쓸어모아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수업은 저녁 9시까지 있었는지라 지금 피곤해서 쓰러지고 싶군요.

일단 마주잡이로 관련 자료 다 복사해서 뭉그러진 낙랑관련 논문들만 올리겠습니다. 낙랑만을 연구한 연구논문은 거의 없군요. 그냥 낙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논문을 일단 다 끌어모아버렸습니다. 일단 자고 일어나서 정리해야겠군요.(정말 쓰러질 것 같습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9시까지 쉬지 않는 삽질...ㅠㅠ)






마음속으로 하고 있는 생각이 어차피 자유주제라고 했겠다!!
그냥 막가파로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였던가? 그것을 주제로 만들어 버릴까 생각중입니다. 뭐... 중국에서는 이런 이야기자체가 없으니까 이런 설화를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도 있을거라는 환상에 빠져 있습니다. 일단 자자...ㅠㅠ

일어나서 다시 목록을 보니까...아무거나 마구잡이로 긁어오면 안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소용돌이 친다.ㅠㅠ

그나마 건질만한 건 이정도인가.ㅠㅠ

殷周制度论(王国维)
은주제도론(왕국위)


왕국위는 중국사학 근대화의 선두주자로서 대선생님의 칭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가 쓴 이 은주제도론은 중국정치와 문화의 변혁중에서 은나라와 상나라사이의 변혁만큼 거대한 것은 없었다는 주장이다. 그 근거로서 우리들에게도 상당히 익숙한 존존(尊尊), 친친(親親), 현현(賢賢), 남녀유별(男女有別)이 주나라때부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주장이 맞다 틀리다를 떠나서, 일단 이런 가정하에서 생각해서 중국 및 동아시아의 정치문화의 특색을 정의내리는 것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은과 주나라 사이의 변혁의 크기가 그리도 거대했다면, 은과 주가 각각 다른 문화환경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나라 일부 민족학자들이 주장하는 동이족의 고대중국지배론에도 힘을 실어줄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 모든것이 가정입니다.^^




바로의 중얼중얼
이 글은 한루님의 전공이 중국고대사중에서 춘추전국시대라고 하시길래, 한루님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한번 올려보았습니다. 물론 이미 보셨겠지만, 다른 분들도 읽어보면 재미있을듯 해서 올려보았습니다. 위 글의 중국어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끼신다면 정답입니다. 이건 현대중국어가 아니고 (그렇다고 고대중국어는 아니지만) 중국근대화시기의 글입니다. 중국어 공부하시는 분들도 저 글을 모두 번역하거나 독해해보신다면 중국어 실력이 놀라울 정도로 향상될거라고 생각합니다. 저 짜증을 다 독해하신다면 현대중국어가 훨씬 쉽게 다가올테니까요. ^^;;;
이우혁씨의 소설을 즐겨보았고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좋아하는 작가들 중에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우혁씨의 글 중에서 간과하고 있는 몇가지를 적어볼까 합니다. 글의 내용을 일단 읽고 제 글을 보는 것이 좋을듯 합니다.


중국은 어떻게 생겨먹었는가.. 퇴마록저자 씀







우선 고국가 개념인데, 간단히 말해 중국의 사관은 한마디로 유래가 없는 엉터리입니다. '현재의 중국 땅에 있었던 나라는 전부 중국이다' 가 그들의 개념입니다.그들의 근거인즉슨, '중국은 다수 민족이 섞여 혼화된 나라다. 그러므로 고대부터 어떤 부족이 어느땅에 살아왔다고 해도, 현재는 우리 중국에 섞여 있다. 그러므로 그곳에 전에 살던 사람도 중국인이라 볼 수 있고, 그 나라는 중국의 복속국이었다 볼 수 있다' 입니다.


이우혁님은 이 관념에 대해서 말도 안되는 비논리적 엉터리일뿐이다라고 일축하셨지만, 그것이 그렇게 쉽게 단정을 지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만약 이것을 일방적으로 허황된 개념이라고 말하였다면, 현재 한국이 주장하고 있는, "현재 한국민족을 형성케 한 성분들은 모두 한국사의 주체이며 그들이 활동한 공간은 모두 한국사의 무대, 즉 한국"이라는 개념도 말이 안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개념은 다민족국가론이라는 개념으로서 그것을 인정해주어야합니다. 논리가 아닌 가설이 논리적이다 비논리적이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만큼 바보짓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민족역사론의 한국도 똑같은 이유로 비판받아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논리가 그렇다면 한국의 논리는 "한국은 단일 민족이다. 그러므로 고대부터 어떤 땅에서 어떤 문화를 배경으로 살아왔다고 해도, 현재의 우리 한국에 섞여있다. 그러므로 현재 한국인을 이루는 모든 민족들의 역사는 모두 한국사이다." 이것은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지금 한국이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런 식의 주장입니다. 일단 한국이 단일민족이라는 가설부터가 논리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이 지금 한국인과 같은 공동체성격을 갖기 전의 역사까지 한국사로 가정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고구려를 우리 민족사로 볼 수는 없다'라는 소리나 해대는 인간들을 교수라고 키우고, 그런 사람들이 목에 힘주고 다니는 세상입니다.


그런 교수라는 사람은 김한규교수님인거 같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이우혁씨가 김한규교수님의 논문이나 책을 정말 읽어보았나라는 것입니다. 김한규교수님이 주장하는 것을 신문기사에서 저렇게 왜곡한 것을 가지고 그 모든 논리를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입니다.

김한규교수님의 주요논지를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교수님은 요동지방을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독립시키는 가설아래에서 모든 논지를 설파합니다. 요동 지방이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독립한다는 의미는 "고구려가 우리 민족사로 볼 수 없다"라는 가설과 동시에 "고구려는 또 중국사도 아니다."입니다. 고구려는 다만 "요동사"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에 대한 논증을 제시합니다만, 그 부분은 직접 보시는게 좋을듯 합니다. 김한규교수님의 <한중관계사 1,2> 대우학술총서와 <요동사> 문학과 지성사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김한규교수님의 주장은, 본인도 인정했다싶이, 민족사학이 날립하고 있는 한국에서도 무시당하고, 국립사학이 날뛰는 중국에서도 소외받는 어찌 보면 불우한 이론입니다. 하지만, 전 이 책을 보면서 그 논리에서 상당한 공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의 주장은 학술적으로 반박을 당해야지, 단지 민족감정으로 인하여 박해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은 학자로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을 뿐입니다.
요동을 별개의 역사공동체로 보고 한중관계사를 한국이라는 역사공동체와 중국이라는 역사공동체가 요동이라는 제3의 역사공동체를 환절로 하여 서로 교섭하고 관계한 역사로 규정하는 것은 한중관계사를 보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서술하기 위해 필자 나름의 시각과 관점을 제시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이러한 시각과 관점을 제시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한국과 중국학계의 많은 지식인들을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1994년 가을에 중국 상해에 체류하고 있던 중에, 중화인민공화국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로부터 해남도에서 열리는 중국학국제학술회의에 발표자로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논문 한편의 발표를 준비하였다가, 회의참석 직전에 갑자기 해남도행을 포기했던 경험이 있다. 사전에 우송받은 발표 요약문을 검토한 주최측이 발표를 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해 왔기 때문이다. 그 떄 주최측이 밝힌 요청의 이유는 <그 논문이 회의장에서 발표되면 한중우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김한규교수님의 <한중관계사>의 머리말중...



학문적인 양심이나 그 기법을 적용하면 공염불만 하다가 결론을 못보게 만드는, 애초부터 조작된 논리적 함정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막기 위해서는 (제잘난 맛에 사시는) 사학자 들의 수준으로는 절대 불가능이라 봅니다. 다행히 많은 움직임이 있는데, 이런 것을 크게 성토하고, 민중의 힘으로 대처하여 국가적 대처를 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보입니다.


저는 제 잘난 맛에 사는 사학자를 지망하고 있습니다. 민중의 힘으로 대처하며 국가적으로 대응해야된다는 것에서는 찬성을 하지만, 이우혁님은 제 잘난 맛에 사는 사학자의 학문적 양심을 무시하고 계시는 듯 합니다. 학자에게 학문적 양심이 없다면, 지금 여러분이 욕하고 계시는 동북공정에 참가한 중국측 학자들과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그들의 몇몇 학자들이 학문적 양심을 버린다고, 한국의 학자들이 학문적 양심을 버리고 정치를 위하여 진실을 왜곡해야 되는 것입니까?

학자가 학자이고, 나름대로 사회적으로 존경받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놈의 학문적 양심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현실적으로 당장 밥줄이 끊기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말해야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학자이고, 학문이 학문인 이유입니다.

물론 위에서도 말했지만, 국민적인 지지가 없다면, 상대의 정치적 역사공세인 동북공정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해야될 일은 무엇일까요? 다른 것이 아니라 역사를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이우혁님은 "순위권 놀이나 리플 놀이, 게임 들어가 사람죽이는 데에나 재미들리는 사이버 유*철같은 짓 하지 말고, 좀 더 넓은 세상도 볼 겸,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정보를 나눕시다."라고 하셨지만, 그 정보를 나누기 전에 본인이 어느정도 기본이 되어있어야합니다. 여러분들 매번 고구려이야기가 나오면 화를 내시고, 짱깨짱꺠 라고 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그런 여러분들은 고구려에 관한 논문 단!한편이라도 읽어보셨나요? 전 중국에 있어서 동북공정에 관심이 많고, 중국인들에게 직접 몸으로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매번 화를 내더군요. 그런데 그들이 중국인과 하는 이야기의 한계는 뉴스보도에서 나오는 정도입니다. 사료적 이야기나 논증적 논리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니 단지 감정적이 될 뿐이죠.

알아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논문이라면 괜히 거부감이 드시나요? 사실 논문이라는 것이야 말로 제일 읽기가 쉽습니다. 읽기가 어렵다면 그것은 잘 못 쓴 논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도 보통은 10p정도 밖에 안 합니다. 일단 공부하는것이 어떨까요?


바로의 중얼중얼
이 외에도 저 글에서 몇가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많지만, 이미 너무 길어져서 더 길어졌다가는 돌 날라올거 같습니다.^^::

논문을 따로 구하기 힘드시다면, 제 블로그 왼쪽에 메뉴를 보시면 역사비웃기라고 있습니다. 그곳에 가시면 중국과 한국 논문이 있는데, 한국논문을 읽어보시는게 좋을거 같습니다.(중국논문은 그 요점만 제가 번역해 놓아서 본문의 논증부분은 중국어를 모르면 보시기가 애매해서 말이죠^^:: )
古代文化的发展阶段(고대문화의 발전단계)

把路(바로)


바로의 요약정리
본인이 쓴것을 번역할 생각을 하니, 정말 싫습니다!! 그냥 요약하겠습니다.^^::
이 레포트는 陈来(질래)선생님의 선진철학을 들으면서 작성했습니다. 질래선생님은 고대의 점복술이나 자연숭배, 샤먼등에서 유가가 생겨났다는 논지를 제출하고 있습니다.

김백현교수님의 말에 따르면, 질래라는 사람은 분명히 실력이 있지만, 화사족(华夏族)의 입장에서만 분석하고 있으며, 한국인과는 다르게 샤먼을 모르기 때문에(한국인들이야 무당의 굿판을 자주 보지만, 중국은 그런것이 미신탈피라는 공산주의이념으로 현재 남아있지 않습니다.) 신명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 철학교수님이 한국인이고, 거기에 유가쪽이 아닌 도가쪽이라는 것은 염두에 두시고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나중에 김백현교수님이 시도하고 있는 "신명에 대한 고찰"을 올리도록 하죠.)

이 레포트의 결론은 위에 다 나와있습니다.-_-;;
고대의 샤머니즘(종교)가 어떻게 철학으로 변했느냐라는 것을 설명하며 논증하고 있습니다.^^






바로의 중얼중얼
질래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심히 짜증났던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연구생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마져 없고, 단지 연구만 하던 분이십니다. 그런데 갑자기 본과생을 대상으로 수업을 했으니 수업방식이 너무 엽기적이었습니다. 분명 본인이 쓴 책을 가지고, 토씨하나 안 뺴고 읽고 있는 모습은 저를 경악속으로 빠져들게 했습니다.
.....유명하신 분이라서 일부러 무리해가면서 선택했건만...ㅠㅠ
마침 그 선생님 밑에서 박사를 마친 형님이 중국에 놀러오셨길래 물어보았습니다. 그 선생님 대체 왜 그러냐고!! 딱 한마디 하시더군요. "원.래.그.래." -_-;; 어찌하오리까..ㅠㅠ
中原王朝의 朝貢事例硏究

金 渭 顯(明知大)


출처 : 고구려연구회







뱀다리 : 한마디 하고 싶은것이 있습니다. 이른바 한국학계(역사학계든 다른 학계이든)에서 자행되고 있는 어이없는 행위에 대해서입니다.

왜? 그들은 한글을 이용할 생각을 안 할까요?
물론 몇몇의 역사용어들은 그 의미의 정확한 전달을 위해서 반드시 한자를 활용해야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結論"(결론)같은 말은 한글로 하여도 그 의미전달에 문제가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納貢와 같은 경우도 납공(納貢)와 같은 식으로 하여서, 비전문가들의 접근성을 높일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이런 관행들은 되도록 빨리 고쳐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면, 한자공부해라따구의 말을 하는 것들아. 나 중국땅에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생활이 한자이다. 한자 많이 쓰면 폼나보이냐? 딴 사람이 못 읽으면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냐? 웃기는 넘들.--> 잠시 흥분했음-_-;;)
疑古与新古的论争

把路


文献资料跟考古学资料之中,更有可靠性是什么?内部者跟外部者之中,更有正确的记述历是任方?中古史学当中的很多古书可不可以可靠呢?《史记》《左传》《诗经》可不可以当作历史研究的材料?通过疑古跟新古的论争,探讨上述的几个问题。

의고와 신고의 논쟁

바로(다시 말하지만 본명 맞습니다.-_-;;)

문헌자료와 고고학자료중에서 어느것이 더 근거로서 유용한가? 내부자와 외부자중에서 어느쪽이 역사서술에서 정확할까? 중국고대사의 수 많은 고서들은 근거로서 충분한가? <사기><좌전><시경>등은 역사역구의 재료가 될수 있는가? 의고와 신고의 논쟁을 통해서 생각해보도록 하자.









바로의 중얼중얼
2000자도 안되는 1시간만에 다 적어버린 심심파적식 레포트였습니다. 그리 큰 내용은 없습니다. 단지, 지금 현재 중국의 사학계의 학풍이 조금 무서워서, 그들이 문화패권주의로 나아가기 때문에, 그것을 경계하고 싶은 마음에서 적어내려간 것입니다^^
(볼 사람도 없는 이딴 글은 왜 올리는거야!!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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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 교수님의 논문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동아지중해(東亞地中海)(Eastasian-mediterranean-sea)라는 개념을 보았을 때, 상당히 인상에 선명한 낙인이 찍혀오더군요.^^ 원래부터 광대토왕급 구축함이니, 이순신급 구축함이니해서 KDX사업에 관심이 많았고, 해군을 상당히 좋아하는지라....^^::
하지만 윤명철교수님도 논문에서 밝혔듯이, 해양에서의 일은 유물로 증명하기도 힘들고(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힘들다는 것입니다^^;;) 사료로 증명하자고 해도 애로사항이 꽃피우는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래도 한국의 앞으로 미래에 제일 중요시 해야될 것이 해군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해양성의 과거모습과 그 변천과정의 논문을 발표함으로 인하여 파생되는 국민정서의 변환에 높은 가치를 두고 싶습니다.


고구려의 남진전략과 해양활동 연구
( 동아지중해 중핵조정론을 중심으로)

윤명철

1. 서론
2. 전기의 해양진출과 국가전략
3 광개토대왕의 해양활동과 국제전략
4 장수왕의 수도남천과 동아지중해 중핵조정론
5 결론


출처 : 고구려연구회




중국에 있는 관계로 이런 책은 한국보다 빨리 입수하고 구할 수 있어서 조금 행복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03년도 10월판인데.......왜 전에 갔을때는 못 봤을꼬..-_;;)

몇 권 있던데, 제가 산것은 두권.

古代中国高句丽历史绪论
(고대중국고구려역사서론)
好太王碑一千五百八十年察
(광개토대왕비 1580년 고찰)


아직 제대로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논리는 너무 뻔할거 같다고 생각되는군요^^:: 같이 책 사러 갔던 넘이 한 말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습니다.
"형. 그거 사봤자 뻔한 말이야. 한국논문하고 다른점은 고구려가 지네거라는 거 밖에 더 있겠어?!"
.....할말 없습니다. 단지 전 그 지네거라고 우기는 논리가 궁금했을 뿐입니다. 그것도 잘못 인가요? ㅠㅠ



뱀꼬리 : 그나저나 중국책값이 많이 비싸졌습니다. 1년전만 해도 100원(한국돈 1,5000원) 들고 나가면 들기 버거울 정도로 살 수 있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100원으로는 책 3~4권이 한계군요.ㅠㅠ


뱀꼬리2 : 어느 기사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어느 교수님이 중국에서는 고구려를 박사전공한 학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민족사 혹은 변방사계열이 고구려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심도는 떨어질지 모르지만, 중국은 인원빨로 먹고 살기때문에...그래도 조심하는게 좋지 않을까요? ^^
미리...경고하겠습니다.
절대 가치가 없는 논문입니다.



왜냐하면-_ 제가 쓴것이기 때문이죠.정확하게 말하면 여기저기서 배껴서 조합했다는 말이 더 어울릴거 같군요. 지금은 모두가 다 아는 조공책봉관계의 실제성질에 관해서 적은 것 입니다. 중국쪽 논문에는 그런것이 없어서 거의 대부분을 한국, 일본쪽에서 건져왔습니다.

거기에 플러스 중국어판입니다^^::::

혹시나 중문과여서 작문숙제용 대체물이 필요하시다면 마음껏 써주세요.(대신 따뜻한 답글..^^) 뭐..일단 어법상으로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조그마한 부분은.....저도 몰라욧!!




책봉조공관계

-고구려를 중심으로

바로(본명 맞습니다.-_;;)


내용 요약 :
조공책봉제도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고대동아시아세계에서 있던 하나의 외교시스템이었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그거 명목상으로만 군주와 신하의 관계였지, 실질적으로는 다 지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았다.-_;;
고구려는 비록 조공을 보내고 책봉을 받았지만, 실질적으로 완전한 독립적인 국가행위(내정,외교등등)을 정상적으로 수행하였다. 고로 고구려를 중국의 지배범위안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옮지 않다.(많이 들은 말이죠? ^^)
참고로 이 가설은 일본에서 먼저 제출되었습니다.


본 글은 제가 감히 연구생과정을 듣는다면 반드시 그 밑으로 들어가고 싶은 엔부커선생님이 쓰신 글입니다.

일단 간략하게 엔부커선생님을 소개하자면, 26살까지 딴짓하다가^^:: 북대본과과정에 들어와서 10년만에 졸업하고, 그 뒤 10년만에 북대에서 정교수자리에 오른 황당한 인간입니다.(북대 역시 한국교수사회랑 비슷합니다.-_ 엔부커가 이상한겁니다.)
주전공분야는 위진남북조입니다. 기타외국어 구사가 8개국어였던가.-_-;;
같은 북대교수들도 고개를 설레설레 내두를 정도로 완벽한 정통파학자입니다.
(..그의 오로라를 느껴보면-_ 그 말밖에 안 나옵니다.)
현재 본과생수업 3개. 청화대초청강의1개. 연구생수업 2개, 국가상임정치위원회 역사지도담당까지 이미 한계인텐데 논문을 죽어라 많이도 씁니다. 수준이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제 박사졸업한지 14년인데, 책이 4권나왔습니다.
처음에는 동북무슨학술제단-->북경대-->삼리엔서점-->중화서국 이라는 완벽코스를 밟아버렸습니다.(참고설명 : 중국에서 책을 살때, 어느책을 사야될지 모르겠다고 하면, 두개의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사면 절.대. 후회없습니다. 중화서국과 상해고적. 그런데 상해고적은 역사문헌쪽을 주로 하기떄문에 학술적인것은 중화서국에서 거의 나옵니다. 오죽했으면, 중화서국에서 책 한권 나오면 학자인생에서 성공한거지-_; 따구의 말이 있겠습니까?!)

정말 슈퍼맨인 인간입니다. 단지 당뇨병이 있음에도 술을 작작마시고 담배도 죽어라 피는 인간이라는....쿨럭..-_;;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냥 중국어원문만 올려놓으면 이상할거 같아서 서론부분과 결론부분만이라도 번역해볼렵니다.
(사실-_ 중간은 다 고증부분이어서, 학자아니면 쓸모도 없습니다.)







北魏北齐“职人”初探
북위북제"직인" 초탐


──附论魏晋的“王官司徒吏”

----위진의"왕관사도사"


阎 步 克

엔부커


출처 : 北京大学中国史研究中心












양이 양인지라-_; 한번에 안들어가서 아래쪽에 이어서 계속-_;;
위쪽에 한번에 담을 수 없는 관계로 부득이하게 분리-_-;;
뭐..사실 이 글을 읽을 사람이 있기나 있을지..

이거 다 읽고 덧글에 감상문 쓰면 밥 사줍니다.

조건1 : 북경에 계셔야됩니다.-_;;
조건2 : 한국이시라면 겨울때까지 주린배를 잡고 있음이...-_
조건3 : 북경대 역사과넘들은 자격없습니다.-_-+++


이제부터 이쪽에는 주기적으로 중국과 한국의 역사관련 논문들이 올라올 것입니다. 중국논문을 한국어로 번역을 해야되나, 아니면 그냥 올릴까? 솔직히 고민 많이 했습니다.

결론은.....무리입니다.-_;;
학교생활에 찌든 저에게 일주일에 논문한편의 번역이라도 그건 과로사하겠다는 소리와 전혀 다를바가 없는것입니다.
(혹시 모르죠. 열화와 같은 성원에 번역할지도-_;; )

고구려사쪽이 많이 올라오기는 할 것이지만,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도 많이 올라올겁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위진남북조에 관심이 많아서 말이죠^^::.....사실-_ 그 시대가 그 시대이긴 합니다만...쿨럭..)

여기에 올라오는 글들은-_ 따로 역사에 굉장한 관심이 있거나, 역사학도가 아닌이상 다 읽는건...재미없음의 극치일겁니다. 저도 제 정보축적용으로 올리는 것이니^^::
조언해드리자면 보지 마십시오-_;;;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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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의 군사작전에 대하여 (수군을 중심으로)



尹明喆 (동국대 사학과 겸임교수)



1 .서언

2. 광개토대왕의 군사정책

4 關彌城 전투 검토

5 丙申年 전투 검토

5 맺음말


출처 : 고구려연구회

오랜만에 과거의 글을 보았더니....이 당시만 하더라도 저는 어마어마한 민족주의자였군요. 2004년 이후에 6년이 지난 지금 저는 이런 글을 쓰는 사람들을 비웃고 있습니다. 과거의 저를 비웃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의 자신에 대한 반성 차원에서 글은 남겨두겠습니다.



검정색 글은 모두 원문을 번역한 글입니다.

제가 첨가한 글은 파란색으로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공부해야 할거 같습니다. 짱꼴라가 저러면 왜 틀렸는지 설명해 줘야 하니까여.... 또 공부...-_-;;




원문 출처: http://www.snweb.com/gb/gnd/2004/07/02/0702p014d001.php




장기간 잘못 읽어진 역사, 오늘날에 와서 중시되는 유산

고구려, 잃어버린 고대문명(사진 4장포함) {음…… 무슨 내용일까? 한국이 고구려를 언제 버렸나? 잃어버려? }

본지기자 송념신 {염신아, 니 메일주소 불러 볼래?}


  학자들이 생각하기에 고대동아시아 국가체제와 현제 서방의 개념에 의해 형성된 국가 관계는 완전히 서로다른 개념으로 억지로 끼워맞춘 것이다. 반드시 역사적, 과학적태도에 근거해서 고구려 고대문명을 다루어야 하며, 문제를 현대정치로 끌어들여서는 안된다. {음.. 왜곡의 시작인가? 그래 현대정치로 끌어들이면 안되지… 짱꼴라들 중국이 힘세지고 있다고 그거 믿고 까부는 주제에… 이 문제를 보면서 중국이 대국이 되더라도 미국과 별반 다를게 없을거 같은 생각이 드는 건 왤까?}

  7월1일, 중국 소주에서 거행된 제28회 세계유산위원회회의에서 중국이 신청한 고구려성과 왕릉, 고분은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이 유산의 등록성공은 특별한 의의가 있다. 오랫동안 소실되었고, 잘못이해된 옛나라 고구려를 새로운 모습으로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오에 한것이다. {그래, 역사 왜곡하니 자랑스럽니?}



  중국동북지역과 한반도북부를 가로지르는 고대 변방정권. {고구려가 왜 변방정권이냐? 그냥 한국도 화교국가라고 해버리지.어? 웃기네..}

  오늘날 중국학자들은 보통 생각하기를, 고구려는 서한에서 수당대까지 존재하였던 중국도북지방의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변방민족 정권이다. 동북지방은 일찍부터 고대 중앙정권의 관할구역이었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했을때 상나라의 후예 기자는 사랑들의 데리고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오늘날의 평양지방에 “조선”을 건립하여, 주나라의 한 지방정권이 된다. 학계에서는 보통 “기자조선”이라 칭한다. 서한 초기 위만의 연인(卫满的燕人)이라 함은 전쟁을 피해 이곳으로 와서 중원의 사람을 모아 통치권을 장악한 사람을 말한다. 학계에서는 이를 “위씨조선”이라 한다. 계속적으로 확장정책을 실행함에 기원전108년 위씨조선은 한무제에 통일되었고 서한이 관할지에 낙랑, 진번, 임둔, 현토4군을 설치하고 관리하였다. {웃기지마, 위씨조선이 중국이면 그냥 통일하면 끝이지 왜 사군을 설치하냐고… 사군이라고 해봤자 그냥 4개 작은 부락이었을 뿐이잔아.. 거봐 고조선이 중국이라는 말은 웃기지도 않는다… 참내..}

  기원전37년 동북변방민족 부여의 한 왕자는 사람들의 박해로 남쪽에서 현토군의 고구려현(지금 료녕성의 신빈현 동남부)으로 도피한다. 활을 잘 쏴 “주몽”으로 불리었던 왕은 이곳에서 초기의 고구려정권을 건립한다. 사서에는 “고려”라는 약자로 기록된다. <삼국지>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당시 고구려의 호적은 서한 현묘군 고구려현의 관리하에 있었다. 서기3년 고구려의 제2대 왕인 유리왕은 수도를 오늘날 길림성 집안시에있는 “국내성”으로 옮긴다. 이후 400여년간 고구려정권은 이곳을 수도로 삼는다.

  고구려는 한의 현토군, 요동군 관할에 놓이고 지속적으로 자신을 신하라 칭하며 조공을 바쳤다. 역사상 이 정권은 흥망성쇠의 과정을 거친다. 왕망시대 흉노정벌에 징집되어 참가함에 도망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고구려왕의 말탄 신하(驺)는 왕망에 의해 유인되어 죽음을 당한다. 동한의 건립후, 고구려의 통치자는 다시 왕으로 책봉되고 계속해어 주위의 변방정권을 통일해 점점 강력해 진다. 위진남북조 후기에 이르러 중원에 전쟁이 발생하고 이게 고구려는 더욱 발전한다. 그때 고구려는 중원의 각왕을 신하라 명하여 조위와 막용선비정권에게 두번의 단멸성 공격을 받는다. 이후 고구려는 정책을 바꾸어 서쪽으로의 확장을 중지하고, 남쪽으로의 경영을 시작하며 한반도의 다른 두정권 백제와 신라를 통제한다. 서기427년 고구려는 다시 평양으로 천도한다.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가 제일 번성했을 때, 그영역이 동서로 이천리였고 남북으로 천리였다. 남쪽으로는 한반도 중부에 이르렀고 북으로는 길림중부, 동으로는 연길 동서로 요하에 이르렀다. {짜증나는 짱꼴라들 자기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저 중원이라는 말투와 아집에 짜증이난다. 그리고 정권이라는 애매한 용어로 고구려를 지칭하다니. 비겁한 자식들. 고구려는 엄연한 국가란 말이다. ㅋㅋㅋ 그리고 짱꼴라들 너희를 신하라 불렀다고? 그럼 너희 역사가 고구려 속국의 역사라는 말이네.}

  수당시기에 이르러 중원은 통일되어 가고 할거상태의 고구려를 수복하는 것이 두나라 황제의 공통된 바램이었다. 통일에 대한 요구로 당태종은 수문제와 양제의 여러차례의 실패후 무력으로 고구려를 통일하려 한다. 역사서는 기록하기를 당태종이 전쟁에 나가기전에 “이제 아홉바다가 평정되었고, 모퉁이 하나만 남았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고구려수복을 통일의 최후의 전쟁으로 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기644년부터 24년의 전쟁으로 고구려는 당나라와 한반도 남부의 신라정권의 연합에 의해 멸망하고,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한다. 설인귀를 검교안동도호로 임명하여 군대를 통합하고 지키게 한다. 이때부터 705년동한의 고구려는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다. {수복? 고구려를 수복해? 언제는 너희 나라였냐? 그리고 두나라의 황제? 황제가 둘이면 것두 황제라 부르냐? 그냥 두나라 왕이라고 적어. 그리고 고구려가 중국에 속하면 그냥 통일하면 되지 무슨 도호부를 설치하면서 군대를 주둔 시키고 지키라고 그래. 고구려 힘이 세니까 세력억제시키려고 도호부 설치한거 아니야. 통일의 완성이라고 한것도 고구려가 자꾸 침략하니까 세력억제를 해야 통일 완성이라고 본거구. 아씨 그리고 헛소리가 넘 많아서 다 대답하기도 귀찬네… }



  고구려 문화와 중원문화는 가까워서 구별하기 어렵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시려구 준비운동하시나?}

  길림성 고고학 연구소의 부가흔(傅佳欣) 연구원은 오랬동안 고구려 고고학연구를 했다. 그가 기자에게 소개하기를 고고학적 각도에서 볼때, 고구려의 문화는 낮은 수준에서 갑자기 발전한 것이라고 했다. 어떤 시기의 귀족무덤 안에서 많은 량의 도자기, 철기가 발견된다. 하지만 동시대 일반 백성의 무덤안에는 석기가 발견된다. 이것은 분명하게 외래문명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구려 고적의 2/3은 중국의 국경 안에 위치하는데 고구려 초기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천도후 문화특징은 더욱 중원화되어 가며 원래의 특징은 줄어든다. 이 모든 현상은 고구려의 문화는 중원문화의 빛 아래서 발전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게 또 헛소리를 하는군. 고구려 문화유적지 왜 개방 안하냐고. 역사왜곡 하기전에 들통나면 곤란하니까? 욕나와도 참자…}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방사지(中国边疆史地) 연구센터의 이대용연구원은 기자에게 말하길, “고구려 문화는 동북아시아 문화중에서 하나의 매우 찬란한 문화입니다. 벽화, 산성, 고분, 모두 대단합니다.” 그가 보기에 고구려와 중원의 각 왕조는 경제 문화적으로 밀접한 왕래를 유지했는데, 이것이 많은 부분에서 찬란한 고구려문화탄생에 영향을 끼쳤다. {인접 국가간의 문화교류는 당연한거 아니야? 일본이 한자쓴다고 중국 속국이라고는 왜 안하니?}

  이대용은 예를 들기를, 많은 고구려 무덤중 벽화무덤은 극히 진귀하다. 벽화의 내용으로 보면, 사회생활과 내가지 신(청룡, 백호, 주작, 현무), 장식도안등이 있는데 많은 것들이 중원의 건축물과 무덤에서 자주 나오는 내용이다. 이밖에 고구려벽화는 중원지역보다 발생시기가 조금 늦다. 이는 중원에서 변두리로 전해진 과정이라 하겠다. 그리고 고구려 멸망후, 이지역의 벽화무덤의 수는 줄어든다. {문화유적지 공개해서 공개적으로 연구하고 공식적으로 발표해야지. 자기들끼리 골방에서 일방적으로 그렇다고 하면 그게 믿기냐}

  이와 같이 고구려민족과 중원민족의 교류는 빈번했다. 이대용은 이를 전면적교류라고 명했다. 예를 들자면, 고구려와 중앙왕조의 사자왕래는 매우 밀접했고, 쌍방문화교류의 중요한 전달자 중의 하나였다. 예절과 의식제도, 종교, 역법등 분야에서 넓게 교류하였다. 고구려민족은 자기만의 언어가 있었는데 이미 소실되에 찾기 어려우나 그들이 한자로 기록하였기에 오늘날 학자들이 그에대해 깊이 연구를 진행중이다. 고구려정권에는 많은 한인이 존재했다. 이와같이 당왕조안에도 적지않은 고구려인이 요직에 위치하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안서절도사를 담당했던 고선지가 있다. {지금도 한국에 한인 많아. 음… 그렇담 지금 한국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중 일부게…. -_-;; 참자. 욕나온다… 그리고 고구려에서 사용했던 고구려말 말인데 알고시으면 영화 “황산벌”을 보라구. 고구려어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될테니까.}



  오랫동안 오해된 역사 {제목이 잘못 됐네. 역사를 왜곡하는 중국이 맞지.}

  고구려 멸망후, 대부분의 후예들이 중원으로 옮겨져 중원민족과 융화되었고, 소수의 사람들이 주변 각민족에 융화되어 갔으며, 왕족은 멸망했다. 모든 영역은 당나라에의해 관할되었으며, 훗날 일부를 동북지방정권 발해에게 분할해 주었고, 일부는 한반도 남부 신라에게 분할해 주었다. 이후 점점 중원전통사학의 틀에서 벗어났다. 송대이후, 중원은 고구려역사를 인식함에 혼란이 생겼으며 잘못 이해하게 된다. 청대에 이르러 동북지방은 황실 “용흥의 땅”이라는 것에 의해, 청은 이지역에 “봉금정책”을 실행하고, 소수의 역사가만이 이에대해 고찰, 연구를 진행한다. 1877년에 이르러 고구려왕 고안(염덕이라고도 하고, 호태왕이라고도 칭함)사적이 기록된 “호태왕비”가 발견되어, 천여년간 소실되었던 옛나라가 다시 인식되기 시작한다. {다시 인식되는 건 너희 한족들한테겠지. 혹시 고구려의 발전된 문화가 중국에 퍼졌다는, 중국에 불리한 유적이 발견된거 아니야? 고구려 유적지 한국에 공개하라고!!}

  길림성 고고학연구소 연구원 부가흔은 “매우 긴 시간동안 우리가 고구려 역사를 외국사로 본것은 실제로 오해일뿐이다”라고 말했다. 서기918년 고구려 멸망250년 후, 한반도에 “고려”라는 정권이 들어선다. 통치자의 성이 왕씨여서 고구려의 약칭인 고려와 구별하기위해서 학계에서는 “왕씨고려”라고 부른다. 비록 같은 이름을 베껴 사용했지만, 왕씨고려와 고씨고려는 아무런 계승관계도 없다. 왕씨고려는 935년 신라를 대신했고, 뒤날 백제가 멸망하고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을 통일한다. 1392년 대신 이성계가 왕을 폐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으며, 1393년 “조선합영등호주청”을 명에게 청했고, 명은 이성계에게 조선왕을 하사했다. 결국 왕씨 고려가 조선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씨조선 또는 이조라고 부른다. {이씨조선? 이조? 왕씨고려? 왕위하사? 오호~~ 그럴싸한데.}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방사지 연구센터 연구원 이대용은 예를 들어 말하길, 중원지역 역사상 많은 정권들이 “송”이라는 이름으로 출현했었는데, 이 정권간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왕씨고려와 고구려또한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왕씨고려는 신라를 직접적으로 계승한 것이며, 고구려는 당나라에 통일된 것이다. 그러나 사료가 부족하고 오도되는 등의 원인에 의해서, 송대이후 사서는 왕씨고려와 고씨고려를 혼동하고 있으며, <명사(明史)>는 심지어 이성계 책봉이 합리적임을 해석하는데 기자조선, 위씨조선, 한사군, 고구려를 모두 (이씨)조선사에 넣어 버린다. {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해서 한국역사는 모두다 중국사에 포함된다고 해버리지. 그리고 화교의 미국진출로 미국사도 중국사의 일부라고 해버리지 그러냐.}

  이대용이 생각하기에, 왕씨고려와 고씨고려는 창립년대가 아주 멀며, 주체민족도 다르며(왕씨고려의 주요민족은 신라, 백제의 “삼한(三韩)”인 일뿐, 고구려인이 아니다) 정권건립자또한 계승관계가 없고 통치지역도 다르다. 이 네가지는 이둘이 서로 계승관계가 없음을 보여준다. {ㅋㅋㅋㅋㅋ. 말한번 잘했다. 그렇게 보면 중국사라는 것은 아예 없네. 몽골에 정복당했다가, 여진에 정복당했다가 고대국가는 우리 동이족이 세운 나라였잖아.}



  중국은 큰힘을 쏟아 고구려 유산보호에 노력한다. {공개가 우선이 아닐까?}

  광서3년, 금석학을 취미로하는 청나라 관원한명이 우연으로 풀밭에서 “호태왕비”를 발견하여 비문을 해석하는데 열기를 일으킨다. 그러나 1941년까지 고구려역사를 계통연구작품 <동북통사(상편)>(金毓黻)한편만이 나타날 뿐이다. 건국후 중국은 고구려 유적에대한 발굴과 보호를 확대하고 있으며, 1961년 호태왕비등은 전국중점보호문물로 지정된다. {그만 훼손하고 공개해 주세요.}

  20세기 80년대 고구려역사에대한 연구가 점점 전개되었다. 2002년 국가문물국은 설계분야와 관계있는 조직을 만들어 일련의 보호규범계획 전문조항을 제작하고, 질서있고 효과있게 세계유산신청을 위한 필요기초를 닦았다. 그후 정부는 3억여원을 들여 환경정리, 문물보호, 발굴정리 업무를 시작했으며, 현대식 건물과 무덤조성에 대량의 기금을 사용하였다. 초기에 11개의 왕릉 유적을 정리하였으며, 2700여건의 문물을 출토하였고, 현재의 박물관도 보수하였다. 작년 기자가 집안을 방문할때 길림성과 통화지역에서 집안시까지 모두 협력하여 고구려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에 힘썼다. 집안시도 이미 여행업을 적극육성하여, 유산등록 성공후, 여행업을 인삼산업에 버금가는 둘째 중심산업으로 키울 계획을 세우고 있다. {유산 등록되었으니까 이제 돈벌어야지.}

  방문중 모든 학자들은 반드시 역사적, 과학적태도를 가지고 고구려 고대문명을 보아야 하며, 현대 정치로 문제를 가져와선 안된다고 하였다. 실지로 중화민족과 한민족의 역사는 반드시 강제로 구분하거나 나누어서는 안되고, 그러수도 없다. 북경대학 국제관계학원의 우군교수는 생각하기를 고대 동아시아 국가체제와 현재 서방개념에 의한 국가관계는 서로다른 개념이기때문에 억지로 적용시켜서는 안된다. 고대 조공제도에 의한 관계는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현제 국제법체계의 인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래 억지로 중국역사에 끼워 놓지 말라고.}



  세계유산에 등록된 항목 {중국이 등록한 한국의 문화유산 항목}

  고구려 도성3채: 오녀산성(요녕헝인), 국내성(길림집안), 완도산성(길림집안)
왕릉12채; 귀족무덤26채; 장군총1호부장무덤; 호태왕비1석.



사진 :


벽화&lt;진식도&gt; 고구려 귀족의 생활을 표현

장군총



호태왕비(20세기초 촬영)

호태왕비 탁본&lt;br /&gt;




  <환구시보> (2004-07-02 제14반)


<출처 : 지누 북경유학생의 모임 http://cafe.daum.net/studentinbej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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