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은 너무나 모호한 개념이며, 자연적이지도 않다. 우리가 말하는 선악이 "인문"의 개념이며, "자연"의 선악개념과는 모순되기 때문이다.

선악을 "자연"에 기대어 생각해보자. 자연에서 선한 행위란 자연의 흐름에 따르는 것이고, 악한 행위란 자연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생명을 죽이는 것은 자연의 흐름을 역행하는 행위이므로, 선한 행위가 아닌 악한 행위라고 쉽게 착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자연에서 생명을 죽이는 행위는 스스로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먹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살해도 선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생명이 바로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자연의 입장에서의 선악은 타인에 대한 살해라는 가장 기본적인 선악에 대한 기존관념조차 붕괴시킨다. 우리는 오직 인간이 만든 "인문"의 입장에서만 반박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인문학에서는 인간에 대한 살해는 악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인간을 제외한 생물에 대한 살해는 자연스러운 행위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문학은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지점에서 인문은 자연에게 있어서 가장 자연스러운 "선'을 부정하고 자연의 흐름을 역행하는 "악"이 된다. 

문제는 인간도 자연에 포함되어있다는 점이다. 자연의 규칙이 부정되고 파괴되면 인간도 같이 파괴된다. 인간은 인간을 인간이 만든 "인문"으로 파괴하고 있는 모양이 되어버린다. 인문학은 인간에게 모든 생물의 제왕이 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 힘이 커질 수록 인간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

우리는 날로 커지는 인문과 파괴되는 자연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할 것이다. 그 사이에서 조화를 찾는다는 말은 인문과 자연사이의 본질적인 모순을 보지 못한 보기 좋은 포장일 뿐이다.


우주는 크다. 이는 몇 권의 근대 천문학 책을 대충 봐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당신이 밤에 하늘을 올려다 본다면 몇 천, 몇 만의 별자리와 온 하늘을 채우고 있는 별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별과 별 사이의 거리는 놀라울 정도로 광활하다. 별들은 우주에서 대해에 떠 있는 몇 개의 범선이나 몇 마리의 비둘기와 비슷하다. 우리는 우주간에서 공허가 실제보다 압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록 여러 별들이 그 빛을 찬란하게 빛나고 있지만, 우리는 우주간의 어두움이 밝음보다 앞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주 속에는 태양이 있고, 태양 계에는 지구가 있고, 지구 위에는 만물중에는 생명이 있고, 생명 중에는 인류가 있다.  모든 우주속에서 인류의 너무나 작기만 하다. 예를 들어서 어두운 밤의 끝이 없는 광야에 조그마한 불빛이 있다. 그 불빛은 그의 주변 몇 미터만을 비출 뿐이고, 조금만 멀어지면 칠흑만이 있다. 어떤 것도 알 수가 없다. 인류의 모든 역사의 이 조그만 불꽃은 비유하자면 반딧불이다. 비록 반딧불은 천천히 앞으로 가고 있지만, 그의 불빛은 그의 좁은 뒤편을 비추고 있다. 인류의 시직은 단지 이미 있었던 것을 알 뿐이다. 몇몇 이미 있었던 일의 지식과 기억들로 앞으로 달려간다. 아무것도 모르는 미래로 달려간다.

당신이 만약 너무 자연계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마치 마치 어두움 밤에 광야를 가는 사람처럼, 계속 끝 없는 암흑을 바라보는 것이고, 곧 공포와 불안이 올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의 생명에 너무 관심을 기울인다. 한 사람의 생명도 자연이고,  공허가 실제을 이기고, 암흑이 광명을 이기는 것처럼 광활한 암흑 속에 있게 된다. 인류의 지혜는 굳이 공허에서 실제을 구하려 하고, 암흑 속에서 광명을 구한다. 이는 인류군체가 쌓아온 역사문화 속에서 찾는 것이다. 이러한 인류군체의 역사를 통해서 쌓인 문화유산을 우리는 인문(人文)이라 하며, 자연(自然)과 대립시킨다. 이것인 실제이고 광명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반딧불의 조그마한 불빛에 불과하다.

인류의 원래 생활중에서 쌓여진 어떤 역사문화유산은 어떻게 거대한 대자연인 우주와 맞서고 병립할 것인가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는 이럴수 밖에 없고, 이것이 소위 “인본주의”라고 불리는 생각이다. 중국의 전통적인 견해는 자연계는 하늘(天)이고, 인문계는 사람(人)이라고 했다. 중국인들은 한 편으로는 인문으로 자연에 맞섰다. 인문을 높게 쳐서 자연과 동등한 지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하늘과 사람이 하나임(天人合一 천일합일)을 말하면서 서로 통한다고 주장하였다. 바로 자연이 인문을 없애지 못하게 하고, 인문을 이용하여 자연을 이기게 할 생각이 없었다.

도가에도 하늘과 땅이 서로 이기지 못한다(天人不相勝)는 이론이 있다.(장자(莊子)를 참고) 그러나 도가는 역사문화의 군체가 이룬 일을 너무 무시했다. 하나 하나의 개인을 이야기 하면서 하늘은 많고, 인간은 적다. 한쪽은 높고 크고, 다른 쪽은 낮고 작은데 어떻게 하늘과 인간이 서로 이기지 못함인가! 그래서 순자는 장자가 하늘이 있음만을 알고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순자는 인류의 성악설을 주장하였다. 이것 역시 인류의 역사문화군체가 이룬 일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당신이 만약 한사람 한사람씩 분석을 한다면, 인류에게는 분명히 다양한 단점과 죄악들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하나 하나의 사람은 단지 자연의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만약 인류 전체의 역사문화 전체로 생각해 본다면, 인간 세상의 모든 선함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의 심성이 악하다고만 할 수 있는가? 서방의 기독교 역시 이처럼 하나 하나의 개인만을 중시하여, 역사문화가 쌓아온 것들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은 악하다고 하고, 또한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여 인생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을 막아버린다. 불교 역시 같은 경향성을 보인다. 역사문화가 쌓아온 것을 보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인생에 대해서 비관적일 수밖에 없어진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열반만을 말할 뿐이고, 인류전체의 역사문화의 무한한 쌓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근세 서방 사상은 중세 기독교의 속박에서 풀려나서 다시 고대의 그리스 관념을 회박하였다. 그리하여 인생을 긍정하게 되었지만, 너무나 개인을 중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인문학은 자연학을 따라잡지 못하게 되었고, 유물주의가 판을 치게 되었고,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다시 중세의 종교로 돌아가서 지금의 고통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하게 되었다. 사람의 일을 말해보자면, 앞으로의 나아갈 길은 개인주의를 희석시키고, 역사문화의 업적으로 눈을 돌려서 다시 한번 중국전통의 “하늘과 사람은 하나다”라는 오래된 전통을 이야기 해야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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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유물론을 이성적으로 분석하면 그리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인간은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유심론이 맞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그래서 내 놓은 천일합일. 자연과의 화합. 지금은 모두가 중시하는 것이 되었지만, 물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말로만 이야기 하지만...그는 약 50년전에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단지 앞으로 50년 뒤에도 인류가 나아갈 길도 자연과의 화합일까? 어리석은 나로서는 그것이 현재까지는 최선의 길로 여겨진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된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일뿐이고, 대자연은 인류에게 결코 패하지 않는다. 역사문화가 앞으로도 한참이 쌓이면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쳔무의 생각처럼 반딧불일 뿐이다. 솔직히 반딧불도 상당히 과장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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