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대학교 역사과 刘浦江 선생님이 2015년 1월 7일 00시 경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대학교 시절에 들었던 刘浦江 선생님의 수업이 제가 석사를 민족사로 선택한 이유 중에 하나였는데......요즘 북경대 역사과의 부고가 많군요. 후......




북경대학교 미명호는 북경대학교 학생들에게 사랑의 두근거림과 이별의 씁쓸함 그리고 청춘의 열정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리고 미명호는 겨울이 되면 꽁꽁 얼어붙어서 스케이트 장으로 북경대 학생들에게 오락을 제공한다.


북경대학교 미명호. 잘 지내지?



상하이의 고층빌딩에서 대형화재가 일어나서 중국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는 가운데, 북경대학교에서는 북경시 화제안전대책센타(火灾防控中心) 사람들을 초대해서 근래에 일어난 대형화재사례를 알아보고 화재안전교육을 실시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서 상하이 고층빌딩화재가 얼마나 큰 충격으로 중국사회에 다가왔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본인의 이메일 주소가 아직도 북경대 역사과의 메일링리스트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나...졸업했다고!!! -_-;;


11월 10일, 영국 수상 캐머런이 북경대학교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캐머런은 중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주제로 강연을 하였는데, 강연 후 질의응답시간에 한 북경대 학생이 질문을 하였다.

"
서방 지도자들은  왜 매번 중국에 오기만 하면 우리에게 어떻게 민주를 해야되냐고 수업을 하는겁니까??"

카머런은 곤혹스러워 하며 대답하였다.

"이것은 강연입니다. 저는 이것이 수업이 아니길 희망합니다."

北大一学生在今天英国首相卡梅隆对他们演讲的时候,问他:为什么西方领导人总是来中国给我们上课教我们如何民主?卡梅隆尴尬回答:这是演讲,我希望这不是上课。(via @MalcolmMoore)

중국의 "미친놈" 북경대가 그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은 북경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어쩔 수 없이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북경대 졸업생으로서 슬프기는 하다. 특히 최근에는 북경대학교 교수가 학생의 "반 공산당, 반 사회주의"제보를 받은 일이 공개
(北大教授夏业良遭举报“反党反社会主义”)되어서 짜증나고 있었는데 말이다.

사실 교수를 학생이 "위험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신고하는 것은 과거부터도 계속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교수들은 학생들이 그러든 말든 수업중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각주:1]. 그러나 대부분 그냥 내부에서 적당히 넘기고 말았는데, 그랬던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공개적으로 해당 사실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천안문사건을 직접 경험한 세대가 현재 젊은 교수층을 형성하고 있기에 최후로 보루로 작용하겠지만...북경대의 "미친놈"정신은 역시나 이미 예전에 죽었다. 썅...

  1. 국관의 리량판은 외국인인 본인도 무서울 정도였지...지도교수샘은 그래도 공개적인 자리에서는-_-;;; [본문으로]
공중파 뉴스에서 중국의 한국유학생들이 논문대필로 대학교뿐만이 아니라 석박사학위 논문까지 통과를 해서 졸업을 한다는 보도를 하였다. 그리고 그 자료화면은 북경대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북경대에서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불리는 입장에서 조금 시간이 지났지만 한마디 안할 수가 없다.

출처 : http://maroniever.egloos.com/3308021


중국의 한국 유학생들 중에 대필로 기말레포트뿐만이 아니라 석박사논문을 제출하는 한심한 바보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본인도 그런 사람들의 리스트를 만들 자신이 있을 정도로 너무나 분명히 보이는 현실이다. 논문대필은 분명한 잘못이고 고쳐져야 한다.그리고 레포트와 논문대필을 뿌리뽑기 위하여 관련 업체에 대한 수사는 물론 관련 시스템을 만들어서 대필 여부를 현장의 선생님들이 쉽게 체크할 수 있도록 만들어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 한국의 한국학생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본인이 아는 한국대학교의 철학교수님이 계신다. 그 분은 암기를 해서 쓰는 일반적인 기말시험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을 가지고 있으시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거의 오픈북으로 기말시험을 보거나 레포트로 기말시험을 대체한다. 그런데 학생들의 기말레포트중에 내용이 완전히 동일한 2~3개의 기말레포트가 계속 나왔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인터넷에 수 많은 "레포트 싸이트"에서 동일한 내용을 그대로 다운로드 받아서 일말의 수정도 없이 그대로 제출하여서 생긴 일이라는 사실을 안 이후로 도덕경을 손으로 배껴오라는 것으로 하고 레포트를 없애버렸다.[각주:1].

석박사 학위논문쪽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2010년 6월 30일, 교과부에서는 한국에서 활개치고 있는 학위논문 대필업체를 수사의뢰하면서 한국의 학위논문 대필 행태를 뿌리뽑겠다고 하였다.  보도내용을 보면 석사학위 논문이 백만원수준이고 박사논문이 삼백만원정도라고 한다. 이 일은 현재 진행중이며 중국이 아닌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물론 이러한 레포트-논문 대필은 한국인 뿐만이 아니라 중국인, 일본인, 서양인들 모두에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에 한국의 공중파 뉴스에서 중국의 한국유학생을 타겟으로 잡고 레포트-논문 대필을 이야기한 행동은 어이가 없다.

뉴스거리를 위해서 이미지가 좋지 않은 중국유학을 희생량으로 삼는 행위는 기본적인 언론인으로서의 자질을 의심하게 한다. 또한 분명히 한국 대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레포트-논문 대필에 대해서 알고 있을 한국인들이 자신의 주위에서 벌어졌거나 본인 스스로가 한 행위를 망각한 채 중국의 한국유학생들만을 비난하는 행위는 후안무치한 행위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누워서 침뱉기"인 이런 짓거리를 그만 했으면 한다.  물론 해외에 있는 한국유학생은 단순한 학생이 아니라 한 명의 민간외교관이기에 더욱 더 주의해야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마치 중국의 한국유학생만이! 북경대의 한국유학생들만이 레포트-논문 대필을 한다는 듯한 이야기에는 비웃어 줄 수 밖에 없다. "니나 잘하세요~"



* 경험상 이런 내용을 쓰면 필자가 레포트-논문 대필을 했다고 매도하는 사람이 있을듯 해서 굳이 추가 설명한다. 본인은 머리가 나빠서 자신의 레포트나 논문은 무조건 자기의 힘으로 해야된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한다.  물론 언어상의 문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존재할 수 밖에 없기에 중요한 레포트나 논문은 중국친구들에게 마무리 교정을 부탁할 때도 있다. 대충 이 정도?  오히려 본인에게 대필해달라는 부탁이 들어왔었.........후.......아..근데 생각해보니 졸업했으니 이제 북대생이 아닌건가;;;;;; 넘...넘겨-_;;;

  1. ....처음에 2번인가 3번을 배껴오라고 했는데 어떤 인간들이 칼라복사의 잔머리를 보여주어서 "연필"로 써오라는 조항을 추가하였다 [본문으로]

2010년 5월 19일 오전 북경대학교에서는 중국 전 외교부 부장인 탕쟈쉬엔唐家璇의 연설이 있었다. 탕쟈쉬엔은 이 자리에서 천안함사태를 거론하며, 정확한 내용은 내일 발표를 두고 봐야하겠지만, 이번 천안함 사태는 한국의 6월 지방선거를 위한 음모일 가능성이 높다고 단정하였다. 그는 이번 사건은 한국측의 자체적인 좌초사고일 가능성이 높으며, 북한이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밝혔다.

탕쟈쉬엔의 이러한 반공개적인 언급은 중국정부내의 분위기를 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로서 한국의 소위 "천안함 외교"는 중국의 반대로 현재까지는 실패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설령 북한과의 연관이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중국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안보리문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문제에서 한국의 천안함 외교는 높은 벽을 만나게 될 것은 자명해보인다.

본인으로서는 증거부족과 정보부족으로 누구의 소행인지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는 없다[각주:1]. 다만 현실적인 외교에서 중국의 부정적인 태도는 분명 한국정부가 현재 원하고 있는 전략에 큰 장애물로 작용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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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졸업논문으로 계속 잠수해있습니다만, 해당 연설에 참가한 어느 분이 알려주었습니다. 최소한 저는 탕쟈쉬엔의 해당 발언을 보지 못하여서 정보제공차원에서 짦게 올려봅니다.

그럼 전 다시 누더기이자 쓰레기인 저의 논문으로...

  1. 화약성분이나 글씨체는 명확한 증거가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본다. [본문으로]
핵폐기물급 쓰레기 논문을 그나마 정화시켜보겠다고 방 안에 틀어박혀서 삽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는 지인이 찾아와서 유학생기숙사 밖에 경찰차들이 몰려들고 있다고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다. 논문으로 답답해진 마음과 쓸데 없이 온갖 일을 궁금해하는 습관으로 인하여 대체 어떤 일인지 알아보았다.

여러번의 모호한 대화들을 통해서 사실에 접근해갔다. 그런데 사건은 예상했던 것 만큼이나 컸다. 어떤 이가 유학생기숙사에서 죽었다. 그의 시체는 최소 3일 이상 방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본인과 같은 역사과 박사과정의 사람이었다.

그는 40 전후의 몽골의 어떤 대학교의 중문과 교수였다. 그는 본인과 같은 해에 진수생으로 북경대에 왔었고, 그대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특별히 친하지는 않았지만, 알고 지내던 지인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다시 여러번의 대화들 속에서 그가 자살을 했을 것 같다는 정황적 증거를 알아내게 되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방에서 홀로 자살을 선택하였다. 자살의 이유로는 외로움이나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 등등이 거론되겠지만, 사람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에는 원래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논문은 집어던져 버렸다.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변명이라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그냥 조용히 수긍하련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왜 이리 내 주위에는 자살 혹은 자살중독이 많은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다. 그렇게 가버리면 남은 사람들의 마음은 어떻게 되는지 신경쓰지 않는 이기주의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런 선택을 했겠냐고? 그런 썩어빠진 목숨을 버리는 용기로 다른 일을 했었으면 한다..다만 바쁘지도 않으면서 내성적인 성격으로 그와 자주 연락을 하지 않았던 본인을 조금은 자책해 본다. 후...


关于我校一蒙古国留学生死亡情况的通报
  2010年5月14日21点30分左右,北大勺园发现一蒙古国男性留学生在其住所死亡。
        报警后,海淀公安分局、北京市公安局有关部门及时到现场进行勘察。据警方披露,初步认定死者为自主割伤死亡。蒙古国驻华使馆也派专人来校了解情况。
        经核实,该生2007年9月进入我校攻读博士学位,已完成全部课程学习,处于自主研修阶段。
        接报后,学校高度重视,学校相关领导和国际合作部、保卫部、会议中心勺园管理部等单位负责人在第一时间赶赴现场。目前,学校已经成立了工作小组,积极协助 警方、外事部门开展善后工作。对该同学的不幸,我们表示深切的哀悼。
                      留学生办公室
                            2010年5月15日

대부분의 맴버가 국관이었던가? 중문과였던가???


이미 작년이 되어버린 2009년 국회문화제의 사진이 공개되어서 유학생사무실 복도 벽에 붙여졌습니다. 당시 음악상의 문제만 없었어도 완벽한 공연이 될 수 있었는데 참 아쉬움이 많이 남았던 공연이었습니다. 그러나 순식간에 달구어진 공연이었기에 후배님들 수고하셨습니다.

다만 태권도 시범은 의도는 좋지만 쓸데 없이 긴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과유불급이라고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합니다. 적당한 시간에 적당히 끝내주셨던 것이 더 좋지 않았나 싶습니다.

국제문화제보다 준비 자체가 즐거운 국제문화제.
현재 한국인학생회가 만들어진 계기를 마련해준 국제문화제.
중국대륙팀도 한 블럭부스를 쓰는데 혼자 2블럭을 부스로 쓰는 인원빨을 보여주는 국제문화제.

앞으로도 더욱 더 즐겁고 재미있는 공연과 전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 ...근데 이런 식으로 북경대 생활 이야기 올리는 건 어떤가요?........
중국에서 북경대나 청화대의 엘리트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인터넷에서 공표하여 유명해진 한 사람이 TV에까지 출연하게 되었다. 그녀의 자기중심적인 말에 중국의 네티즌들은 콧웃음을 치면서 비웃고 있다. 어떤일인지는 직접 보시기 바란다.

키는 176미터에서 183이면 됩니다.

반드시 북경대나 청화대의 경제학 석사이상이여야 합니다.

25-28세여야 하고요.

저는 9세부터 온갖 책들을 보기 시작하였고

20세에는 이미 정점에 도달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도 저보다 대단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보는 책들은

사회인문류로서

지음知音과 같은 잡지나(...심히 가쉽적인 이야기가 있는 잡지임-_-)

이야기마당(故事会)과 같은 것을 봅니다.(역시 심히 가쉽적이고 통속적인 잡지-_;;)

저늬 IQ와 능력으로 볼 때

앞으로 3백년간은

600년안에는!!

어떤 이도 저를 따라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중국네티즌들은 그녀의 외모부터 시작하여서 이기적이며 바보같은 그녀의 발언까지 모든 것을 비판 및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녀를 차별하지는 않습니다. 그녀에게도 북경대나 청화대의 경제학 석사이상과 결혼할 권리가 있고,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 주위에 있는 친구녀석들이 저런 발언을 공개적으로 할 수 있는 자기중심적이며 자존심이 강하면서 정작 제대로 아는 것도 없는 "바보"와 결혼을 할지에는 심히 의문이 드는군요.

...아..그러고 보니...저는 감히 그녀와 결혼할 수 없군요. 고작 북경대 역사학과 석사과정이니 말이죠.....허허...정말 저런 "바보"와 누가 결혼할지 심히 의문이 드는군요. 600년간 자신을 뛰어넘을 사람이 없는 대단하신 분이 왜 북경대나 청화대를 못 오셨는지도 궁금할 뿐입니다. 별...

북경대와 청화대는 중국에서 1등을 다투는 종합대학으로 한국에서도 많은 분들이 그 이름을 알고 있다. 그러다보니 북경대와 청화대에서 일어난 일들은 중국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게 된다. 그리고 최근 북경대와 청화대에서 각각 재미있는 섹스가쉽이 일어나서 한 번 소개해볼까 한다.

1) 북경대의 "핸드폰이 꺼져있습니다" - 关机门
북경대에서도 이제는 MT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단 한국과는 다르게 1박코스가 아니라 하루코스일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런데 얼마 전 MT을 간 장소에서 한 남녀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같이 간 학생이 전화를 했지만 핸드폰은 꺼져 있을 뿐이었다. 서둘러 학교에 연락을 하고 경찰이 출동하여 학생들의 소재파악을 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날 남녀는 아무일 없이?! 돌아왔다. 경찰의 발표에 따르면 그들은 MT가 끝나고 주변에 있는 숙박업소에서 하루밤을 머물렀는데, 자신들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 휴대폰을 껐을 뿐이었다고 한다.

중국네티즌들은 이 이야기를 유머로 승화하였다. 같은 이야기를 수호전버젼, 홍로몽버젼, 사기버젼, 김용버젼, 이중텐버젼등으로 바꾸었다[각주:1].

2) 청화대의 "숙제를 위하여" - 作业门
청화대의 한 여학생이 C언어숙제를 끝내지 못해서 컴퓨터과 남자학생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그 보상은 섹스였다고 한다. 이 컴퓨터과 남학생은 여학생의 룸매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그런데 사건을 얼핏 알게 된 룸매가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 남자친구는 우선 여학생에게 사실확인을 요구했지만 부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컴퓨터과 남학생에게 물어보니 그런 사실이 있다고 털어놨다고 한다.

그 남자친구는 이 사실을 청화대학교 BBS에 폭로하였다. 사실 이 이야기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몇몇부분에서 모순점이 보인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네티즌들은 C언어숙제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야되냐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유머로 승화하여 자신이 C언어를 잘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상당히 속출하고 있다. 당연히 지금부터 C언어를 공부하러 간다고 남기는 사람도 많다.


원래 하나만 나타났으면 가쉽같은 것 소개하지 않았을 텐데, 두 사건이 일주일간격으로 동시에 터져 나오니 한번 이야기해보았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북경대와 청화대가 워낙에 유명하다보니 이 외에도 다른학교라면 묻혔을 만한 온갖 가쉽이 좀 많다. 심심한 분들은 한 번 찾아보아도 좋을 것이다.


바로의 중얼중얼 :
두 학교의 학생들은 나름 똑똑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가쉽도 적당한 이야기가 아니고 명확한 증거와 명쾌한 추리가 존재한다. 그래서 더 무서운 가쉽이 된다. 오죽했으면 북경대 가쉽 강호(北大八卦江湖)라고 할까....드라마 같은 가쉽의 여왕이 있고, 온갖 정보가 그녀에게 수집이 되어서 분석되어진다. 블로그에 올린 사진 한 장으로 온갖 제반 정보을 조합하여 추리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좋은 머리를 참 쓸데 없는데 쓴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조용한 은거생활을 즐기는(정말??) 본인까지도 가쉽이 있으니 말 다한거 아닌가-_-;;


  1. 개인적으로 이러한 유머방법은 한국도 배우면 재미있을듯하다. 나중에 한국의 쓸만한 사건이 일어나면 본인부터 시도해볼 생각이다. [본문으로]
북경대학교의 이름이 Peking Uni.라고 하면 놀라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Beijing Uni.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베이징 공항의 국제명도 PEK입니다. Peking의 앞자리 3개이지요. 왜 Beijing 이 아니고 Peking 일까요?



북경대학교의 영어 이름은 Peking University 입니다. 경극의 영어 이름 역시 Peking Opera이며, 한국에서도 유명한 베이징덕(베이징오리) 역시 영어 이름은 Peking Duck입니다. 베이징에 와 보셨거나 오실 계획인 분들은 비행기표를 유심히 봐주시기 바랍니다. 베이징의 국제번호는 PEK입니다. Peking의 앞자리 3글자인 것입니다.


현재의 북경은 중국발음인 베이징대로 Beijing이라고 표기하는데 위에서 언급한 것들은 왜 Peking이라고 표기할까요? 현재 사용되는 방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작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Beijing이라고 불리는 국제표기은 1958년 중국정부가 중국어 핀인방안을 발표하고 나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것[각주:1]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1982년 국제표준위원가 국제표준으로 인정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1841년부터 주중 영국대사관에서 근무하고 1883년 귀국해서 1888년부터 케임브리지에서 중국어를 가르쳤던 월마[각주:2]가 개발하고 길레스[각주:3]에 의해서 수정된 핀인법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어로는 威妥玛式拼音法라고 불리며 영어로는 Wade-Giles romanization라고 불리는 방법[각주:4]입니다. 그리고 웰마방식과 대동소이한 Postal Spelling System  邮政式拼音이 중화민국시절부터 공식적으로 채택이 된다. 기본적으로 웰마방식이 기반을 두고 있기에 그냥 웰마식 범주에 넣도록 하겠다[각주:5]

그래서 중국에서 1958년 이전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학교들이 월마가 개발한 국제핀인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청화대학교의 경우도 지금 핀인으로는 qinghua 가 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tsinghua라고 표기를 합니다. 그 외에도 모택동(毛泽东)을 Mao Ze-Dong이 아니라 Mao Tse-Tung이라고 부른다던지 주은래(周恩来)을 Zhou En-Lai가 아닌 Chow En-Lai로 부르고는 합니다.

北京을 월마의 방식대로 표기하면 Peking이 되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는 웰마의 방식을 기반으로 성립된 우체국식이 중화민국의 기본이 되면서 Peking이 되었습니다. 그 뒤에 Beijing으로 바꾸어야 되는데 관습처럼 아무도 바꾸지 않아서 Peking으로 굳어졌고, 앞으로도 변화할 것 같지 않습니다.


-- 한국에서의 한자 읽는 법에 대한 짦은 이야기[각주:6]
한국어에서의 중국고유명사 표기 기준은 1911 신해운동을 기준으로 그 전은 한국한자독음을 사용하고, 그 이후는 중국어독음을 사용하는 것으로 하였다.  그런데  현재 끝까지 한국어독법을 고집하시는 분들이 있다. 당신들이야 北京을 북경으로만 익혀왔으니 갑자기 베이징이라고 하면 어색하고 원래 뜻도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한자 자체를 잘 모르며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북경이나 베이징이나 하나의 발음일 뿐이다.

무엇보다 베이징을 북경이라고 한다고 한자를 추측할 수 있다고? 그럼 "화영산" 이것만 보고 한자를 추측해보시기 바란다. 뜻도 추측해 보시기 바란다. "정영화"라는 이름도 그렇다. 중국인 끼리도 이름을 물을 때, 무슨 한자인지 물어봐야되는데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독음만 보고서 한자를 알 수 있는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지식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 안타까운 것은 이해를 한다. 그러나 한국어 화자들에게 무엇이 더 좋은지 생각하지 않고, 규정된 표기법을 무시하는 방식의 접근은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덕천가강도 이미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인식되고 있다. 이미 동경보다 도쿄가 많이 쓰이고 있다. 일본과의 교류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과의 교류가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중국쪽의 발음도 익숙해질 것이다. 자연스러운 흐름을 억지로 막아봐야 소용없다.


  1. 웃기는 것은 현재의 핀인방법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북경대학교의 영어표기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_;;;; [본문으로]
  2. Thomas Wade [본문으로]
  3. H.A.Giles [본문으로]
  4. 혹자는 이것을 모르고 peking이 광동식 발음이라고 한다. 그것도 무려 중문과 교수이다.(그분을 생각해서 실명 언급은 해드리지 않겠다. 지금이라도 주장을 수정하시길 바란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사실을 알 수 있다. 교수라고 다 아는거 아니다. 정말 주의 또 주의하자. 참고로 해당 발음은 당시 베이징에서 사용되던 발음이다. [본문으로]
  5. 이 글은 논문이 아니다-_- 더 자세히 따지고 가면 최초의 표기자인 프랑스 선교사까지 가야되지만, 패스-_- [본문으로]
  6. 너가 한자를 몰라서 그런 말을 한다는 소리는 사절한다. 모르시는 분을 위해서 간략하게 쓰자면, 본인 중국에서 유학중이며, 전공은 고대사로 고문을 독해하여야 한다. [본문으로]

이 글은 대한민국 통일부와 민주노동당의 초대로 2009년 12월 10일부터 12일까지 한국의 동북아평화포럼에 참석해서 있었던 일을 적어놓은 것입니다. 사실 공선생님은 2000년부터 2001년 사이에 한국의 이화여대에서 재직하셨었습니다.

孔庆东 선생님은 현재 북경대학교 중문과 교수이며 소설가입니다. "북경대의 술취한 협객[각주:1]"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김용소설에 대한 강의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또한 무려 공자의 73대 직계후손이기도 합니다.

중국의 지식인의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쓴 글에 나오는 한국에 대한 평가와 내용은 상당히 중요하며, 여러분들도 한번 쯤 읽어보시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올려봅니다. 다만 본 글은 교류를 강조하기 위해서 현실의 문제적 현상들을 일부러 축소하는 경향이 보입니다.

又见韩国分外亲

    应大韩民国政府统一部和民主劳动党的邀请,中国民间学者代表团于2009年12月10日至12日赴韩国参加首届东北亚和平论坛。
    本人曾于2000年至2001年在韩国任教两年,2002年又曾赴韩开会。后来出版了《独立韩秋》和《匹马西风》两本一言难尽的奇书。时隔七载,再一次踏上这片热土,不禁感到分外亲切。
    当年本人所称赞的韩国的优点依然被保持,本人所批评的缺点正在被克服。随着两国人民交往的加深,韩国广大民众不再视中国为共产党统治下的恶魔国度,中国广 大民众也不再视韩国为只生产速成美女供未成年男性集体消费的芭比国家。把韩剧等同于韩国人民生活的中国傻帽正在越来越少,高呼着“此间乐,有白薯”而留恋 中国的韩国青年正越来越多,两国网友的网上吵架也越来越超越意识形态的分歧而演化成兄弟斗嘴……所有这一切都使得孔老师再次望见仁川的月尾岛时,顿觉当年 麦克阿瑟竟然把名字如此美丽的所在变成一个屠场,是何其的罪不可赦。
    又一次吃到正宗的韩国泡菜、韩国烧烤,又一次喝到正宗的韩国浊酒——马格力。想起我曾写下的诗句:“何当共饮马格力,却话汉城夜雨时。”到韩国的这天,恰好下着淅淅沥沥的小雨。似乎有一种曾经的女朋友嫁给一位老员外之后,请你到他们家去做客,非常亲切而又诡异的感觉。
    当天下午,我们去拜访了金大中总统的夫人李姬镐女士。李夫人出身于我所任教的梨花女大,陪伴金大中经过了多少生死风波。我最钦佩的三位韩国人——安重根、金大中、李昌镐,他们的英雄风采是中国人也少有的。
    晚上去拥有千年历史的承恩寺,拜访明尽禅师。禅师的堂上高悬四个大字:“但知不会”。我一见便明白了禅师的志向。几个回合的问答,禅师便说,我们仿佛早就 是知音了。同行的李希光院长,他的名字恰好与“明尽”意思相同,希光者,明尽也。此中大有鲁迅的味道。明尽禅师机锋玄妙,三言五语,便将基督教和西方文化 骂得狗屁不值。说到布什,禅师说:“不知道什么布什,只听说过狗屎。”且不论其思想立场,单以禅宗的智慧来看,想不到韩国还有这样的大师。而中国禅宗,今 天还剩下些什么?少林寺的师傅们,你们在做什么呢?各地佛学会的政协委员们,你们在做什么?你们为苦难中的中国工农大众做了多少真正的善事?你们逼迫得我 这样一个俗人自称“和尚”,你们为那些矿井下和锭子上的冤魂,做过一次法事吗?我不反对寺庙赚钱,也不反对酒色和尚,人家日本韩国的和尚也赚钱、也结婚, 但是人家关心人间疾苦,甚至不惜付出生命的代价,这才是我佛东来意,你们懂么?哦,我又激动了,我又不懂装懂了,还是“但知不会”吧。
    夜宿汝矣岛的列克星敦大酒店,网速极慢还收费,其他设施也落后了。窗外就是全球最大的邪教中心——纯福音教堂,俺在《独立韩秋》中写过的,牧师率领上千信徒为美军士兵祈祷,然后全体起立,发功治病,罗马教皇一定自愧弗如吧。
    次日,在韩国的国会议事堂举行论坛。跟中国雄伟壮丽、戒备森严的人民大会堂相比,韩国的“国会山”显得十分寒酸,我们拿着护照晃一晃就进去了。大厦的走廊 里乱七八糟,装修水平跟北大附中差不多。我的翻译是一名哈尔滨美女,忘了带胸卡,一个微笑,警察也就放行了。林东源理事长出席并讲话,李希光致辞,我和熊 蕾老师做了大会发言,云杉大姐做了讨论发言,均引起较大关注并获得相当高的评价。韩国学者的发言也都很认真务实。很多韩国朋友激动地说,没想到中国还有这 么多有良心的学者,我们还以为中国学者都是某某某那种美国鹦鹉呢。中午简单的工作餐,绝对不如领到工资的中国民工吃得好,所以饭后精精神神,一点也不困 倦。记者告诉我,韩国也有很多我的粉丝,其中懂中文者,常看我的博客。
    晚上接受《民主21世纪》的采访。孔和尚对很多媒体不屑一顾,不论中国美国日本韩国。我看媒体不论大小和左右,只看做人是否真诚。不真诚的,企图套俺的话 去混饭吃的,有时俺一生气,当场轰走。这晚的采访俺非常满意,进行了两个多小时,以致次日韩国朋友开玩笑说,孔老师爱上女记者了。
    第三天上午,去韩国最著名的进步大学——圣公会大学参加“知识分子的责任”座谈。这所大学我去过不止一次,跟那里的民主运动领袖白元淡女士熟识。这次又会 见了张暎硕处长和曹喜公(日字旁)所长等著名批判学者。担任翻译的女生来自成均馆大学,听到我的名字惊叫起来,原来也是我的粉丝。然后到63生命大厦午 餐,参加的还有两位美国的朝鲜问题专家。下午去韩国未来发展研究院,拜会卢武铉总统的顾问和统一部长李在祯。卢武铉总统因为公开宣布崇拜毛泽东,遭到韩国 反动派不遗余力的谋害。本来卢武铉时期的女总理韩明淑也要会见我们,但近日也被反动派构陷,只得取消了日程。
    满载着韩国劳动人民的深情厚谊,满载着半岛南北双方人民的统一梦想,我们匆匆赶回北京。论坛的组织者郑己烈教授和弟弟为我们送行,会议的圆满成功,令中韩朋友都非常高兴,郑教授的中文也越说越流畅了。
    在机场发生了一段小小的龃龉。安检人员发现了我和李希光院长的书包中各有一本英文的金正日传记,就如临大敌,一件一件地搜查我们的东西,包括俺穿过的袜子 内裤都打开看看。但又不敢公开挑衅,最后找了个借口,说我在机场刚买的一盒人参不能带,非要我办理托运。跟他们吵也没用,只好托运了。从法律上讲,韩国还 处在“战争状态”,这种紧张的敌意是可以理解的,如果在朝鲜,也可能发生同类的事情。安全不掌握在自己手里的日子,中国人民已经忘记60年了,所以让我们 理解我们的邻居吧。如果拿日本做个比较的话,日本人做事往往更有礼貌,就像马路对面咖啡店的小姐那样,隔着马路不断鞠躬致意,永不跟你吵架,让你感到愉 快,但你也永远不知道她的内心。而朝鲜和韩国,则是隔壁的一对兄弟邻居,有时跟你好成一团,有时又跟你打成一团,让人感到哭笑不得。这就是,又见韩国分外 亲,打断骨头连着筋啊。
    行程汇报到此,下面是本人在论坛上的讲话。

 

朝鲜核问题与中国的作用

 

           孔庆东

 

안녕하십니까!
各位尊敬的先生、女士:
    大家好!
    我是一名北京大学的普通教授,我从一个知识分子的角度,谈谈我对“朝鲜核问题与中国的作用”的看法。
    自从朝鲜试射核武器,全世界特别是东北亚地区就产生了一种“和平恐慌”。恐慌之下,各种情绪激动或者是激烈的言辞纷纷涌现。不希望这个世界上的核武器增 多,大概是人之常情,或者说是被洗脑之后的“人之常情”,所以从官方到民间,对朝鲜的不满与谴责,似乎占了上风。特别是在中国,这样的言论曾经是压倒性 的,以致误导了中国的外交政策。幸亏还有一些清醒的学者,坚持理性的良知,坚持公正的立场,才终于有了今天温家宝总理的访问朝鲜,以及即将启程的习近平副 主席对东亚几国的访问。
    当前世界的主流话语,是呼吁“和平”。世界各国领导人在各种外交场合,几乎众口一词地说:“和平与发展,是当今世界的主题。”但是我们清醒地看到,世界并 不和平,战火天天在燃烧,军事人员和无辜平民天天在死亡。那些呼吁和平的政治家里面,有一部分就是战争的参与者甚至是制造者。当和平仅仅成为一种口号或者 外交辞令的时候,这个世界,就是充满危机的。中国有句古诗:“杀人如草不闻声”。我曾经在韩国的公园里,看到韩国的老人用毛笔写下这句诗,我知道韩国人民 是懂得这句古诗的。在和平旗帜掩盖下的杀人,可能是更残暴、更兽性的。
    局部战争的参与者和制造者,往往以某个国家拥有了某种杀伤性武器,作为发动战争的口实,以此来欺骗本国民众,让他们相信战争的合法性。利用大众媒体所操纵 的不公正的“民主”程序,来实现少数利益集团的暴力诉求。在这种宣传的烟幕弹之下,人们经常忽略了,世界和平与否,从来就不依赖于武器的杀伤性和拥有数 量,而依赖于武器掌握在什么人的手中。武器是重要的,但更重要的是人。拥有先进武器的人或者国家,不能把和平的希望寄托在他人的武器落后上。世界历史的发 展告诉我们,和平有时候恰恰出现在“军事均衡”时期,而“军事失衡”可能恰恰是战争的契机。
    2009年所出现的朝鲜核问题,是朝鲜半岛政治紧张局势长期延续所促发的。我们应该设身处地,站在朝鲜半岛人民的处境中,去体会这种长期的紧张局势给人带 来的巨大压力,以及由此所产生的心情。对于朝鲜核问题的发生,和由此带来的政治震荡,中美俄日朝韩六方都有责任,不应该单向度谴责朝鲜一家,那样只会加剧 敌对和误解,甚至最终走向彻底的破裂。美国在这个问题上负有最大的责任,正是美国长期坚持的对朝鲜进行孤立、打击、封锁、丑化的立场和态势,使朝鲜在国际 环境中处于极度不利的位置,逼迫朝鲜要以最大的举措来保卫自己。其实,1964年中国成功爆炸了第一颗原子弹之前和之后,美国也是采用类似的立场来对待中 国的。想一想当时中国人民的心情,就不难理解今天朝鲜人民的心情。美国这种处理世界事务的方式,实际上推广了弱肉强食的丛林法则。其中包含着的潜台词是: 没有核武器者,就没有拥有核武器的权利;拥有核武器者,就自然拥有了这种权利。正是这个逻辑上的悖论,诱发着核武器的扩散。按照西方“天赋人权”的理念和 美国人民可以自由持有枪械的法规,每个地球上的人和国家都拥有使用某种武器自卫的神圣权利。至于使用与否,则决定于所受到的威胁大小和自身的能力。所以, 美国事后能够及时调整自己的外交口径,仍然主张以谈判解决问题,这一态度是值得赞赏的。
    应该看到,美国的态度其实是解决该问题的关键。美国是当今世界上最强大的国家,主观上积极插手全世界各个角落的事务,客观上也负有这样的责任和义务。世界 上所发生和正在进行的战争、冲突、流血、死亡,无一不与美国有关。其他任何国家,都不具备美国的实力和雄心。所以,美国必须反思自己的心态、策略,重新思 考怎样担负唯一超级大国的责任,为世界、也为美国人民赢得最大的和平与最大的尊敬。美国之外的其他各方,也应该面对现实,承担各自的责任和义务,共同协商 解决这一重大而严肃的问题。
    至于中国,由于中国与朝鲜从古代到现代的特殊历史渊源,决定了中国必须在朝鲜核问题上发挥独特的重要作用。各方对此必须有充分的认识,并予以高度尊重。企 图绕过中国,或者破坏中国与朝鲜的传统友谊来解决朝鲜核问题的想法,是不切实际的,甚至是怀有不可告人的目的的。中国与朝鲜的友好关系,是朝鲜半岛和平与 稳定的不可或缺的基础。动摇了这个基础,一切的“和平与发展”都有可能成为泡影。韩国和日本两国,对此尤其应该具有清醒的认识。中国和一些国家的部分民众 对此问题怀有糊涂看法,不能从大局考察,觉得这只是朝鲜半岛南北双方的事情。这是应该加以耐心说明和解释的。必须看到,东北亚已经持续半个多世纪的和平局 面,在非常大的程度上,是中国和朝鲜两国人民的友好纽带所维系的,这个局面使得东北亚各国都获得了良好的经济发展机遇和势头,不论从道义上讲还是从利益上 讲,我们都不应该单独把朝鲜排斥在这个机遇之外。解除朝鲜人民的压力,给予朝鲜宽松的发展空间,必将给东北亚各国都带来新的利益和福祉。
    当前世界的主流媒体话语,充斥着对朝鲜的妖魔化,充斥着冷战思维。大多数人民的消息来源,是美国等强权国家的宣传机器。这些消息和报道,大肆渲染朝鲜的贫 穷、落后、愚昧、专制,丑化朝鲜的执政党和领导人,对朝鲜的经济建设成就和人民福利的积极面、社会生活的健康面,视而不见或者是避而不谈。在某些地区,专 门出版妖魔化朝鲜的书籍,甚至成了一种职业。这种言论和现象的背后,弥漫着一种人性的高度冷漠,是对人类同胞的高度残忍。不论从儒家思想、道家思想,还是 从佛教、基督教的思想来看,这种话语都是极不友善的,是不把朝鲜人民当人看,甚至可以说就是战争的动员令。不改变这一非常不友善的态势,朝鲜半岛局势的缓 和将遥遥无期。假如世界上真的存在那样一个妖魔般的国度,那么一切的谈判又有什么意义?
    中国是长期遭受西方妖魔化的国家,这种妖魔化至今也还在继续和变种。我本人遇到很多外国朋友,认为我们中国的平民没有肉吃,没有水果吃,没有啤酒和电视, 身上藏着毒药,不能批评领导,动不动被共产党拉出去枪毙,如果对中国的某件事持肯定态度,就一定是共产党的特务等等。从这些认识和见解中,我们看到的是很 多西方民众信息渠道的狭窄和思维方式的可怜。深知这种妖魔化之苦之可笑的中国,在这一问题上,应该加强与美国的沟通,首先共同地正确面对朝鲜、平等面对朝 鲜,以善意换取善意,才能重启六方会谈,真正进入解决问题的实质性阶段。如果一方面坚持对朝鲜的污蔑和丑化,另一方面又要求朝鲜首先屈从大国的意志,那在 朝鲜人民面前,就必然是一副失去了道义的非常凶狠霸道的形象,任何执政党和领导人,都不会在没有尊严的情境下,单方面让步的。
    中国的另一个重要原则,应该是平行对待南北韩两国,在帮助南北韩加强经贸合作的同时,不以单纯的经贸视角来处理朝鲜半岛事务。自从1992年中国与韩国建 立了正常的外交关系以来,中韩之间的往来逐渐增多和加深,两国人民逐渐走出了妖魔化对方的泥潭,正在越来越多的方面相互理解、相互支持。在这个过程中,中 国对待朝鲜半岛南北两方,可能存在着畸轻畸重的失衡表现,有时候经济方面的考量,遮蔽了政治和文化方面的清晰视野。中国所展现的对于朝鲜的支持和友善力 度,有所弱化,这在一定程度上,刺激了朝鲜人民的心理。因此对于朝鲜核问题的出现,中国也是负有一定的间接责任的。中国应当一方面同等对待韩朝两国,另一 方面又要将半岛南北两方当做一个文化整体,合理而有层次地安排东北亚的外交布局。不要因为一个双边关系而影响另一个双边关系。中韩关系、中朝关系应该均衡 健康地同时发展,并以此促进韩朝关系的均衡健康发展。经济上和政治上实现了多方互利和相互信任,这才是最大的和平保障。
    世界上真正使用核武器的事实,只发生在一个国家拥有核武器的时段。自从多个国家拥有核武器之后,不但未发生过核武器的真正使用,连世界大战也没有发生过。 这当然不能说是“核武器保卫了和平”,但可以提醒我们,和平在更大的程度和更多的时间里,取决于“均衡”。汉字中的“和”字,本身就包含着“均衡”的意 思。
    东北亚同属一个经济文化圈,有着共同的文化背景和人文共识。但是由于漫长的近代史上遭受过严重的侵略和奴役,彼此之间不免存在着许多从观念到利益的分歧。 全世界的许多关键问题,都集中在东北亚。这使得政府之间的交流谈判,经常不够顺畅。历史上,东北亚人民之间的相互往来是有传统的,对于官方的各种交流也是 具有积极的推动和指路作用的。中国应该允许和促进更多的民间团体往来,把东北亚的和平,建立在人民之间的友好交往和文化认同之上,这是保证东方文明长久繁 荣、保证世界各地长久和平的根本大计。
    谢谢大家!

 


本期博客思考题:

1. 浊酒与清酒,有什么不同?
2. 与安重根齐名的另一位韩国民族英雄是谁?
3. 贫铀弹算不算核武器?


본 글은 중국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글 중에서 저의 마음대로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글입니다. 제가 전문을 다 번역을 하는 것이 좋겠지만, 시간관계상 상당히 힘이 드는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전문 번역을 하지는 못하지만, 중국어를 어느 정도 하는 분들이 중국을 이해하고 중국어 독해능력을 올리는데 도움이 되는 면을 생각하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제가 중국어 원문을 소개하고, 현재 중국어를 배우시거나 중국어능력이 일정 수준이상이 되면서 잠시 여유시간이 있는 분들이 번역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곧장 덧글로 번역을 올려주셔도 되고, ddokbaro@gmail.com 으로 보내주셔도 됩니다. 혹은 트랙백으로 달아주셔도 됩니다.

혹은 10분이 덧글로 번역을 요청해주시면 번역하도록 하겠습니다.......


  1. 北大醉侠 [본문으로]
배달음식이 많이 발전해서 배달의 민족이라고 농담이라고 하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가 발전하는 동시에 최저임금은 유지가 되면서 중국의 음식배달은 날이 갈 수록 번창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 같은 "귀차니스트"에게는 점점 더 좋은 환경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본 싸이트는 북경대학교 이과생이 만든 북경대 주변 배달가능 식당포털입니다. 사실 귀차니스트들 사이에서는 중국학생이든 한국학생이든 다들 자신만의 목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이제 인터넷을 통해서 통합을 한 것입니다.

본 싸이트는 아직 목록이 상당히 미미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목록의 반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해당 싸이트가 북대생들 사이에서 점차 퍼저나가고 있으니 조만간 여러 식당들이 추가되리라 생각합니다.

위의 싸이트에는 아직 추가가 되어 있지 않지만, 중국의 맥도널드와 KFC 모두 일정한 배송료(대략 6위엔)를 추가지불하면 배달을 해줍니다. 맥도널드의 경우 24시간 배달을 해주어서 저 같은 밤고양이족들에게는 행복하답니다. 그런데 전 사실 패스트푸드류를 좋아하지 않아서 알기만 하지 자주 시켜먹지는 않습니다.

맥도널드 4008-517-517  1번은 중문, 2번은 영어[각주:1].
KFC 4008-823-823 24시간이 아닌 것이 천추의 한.


방에서 나오지도 않으면서 배달 음식만으로 생활을 하고 싶어하는 모든 귀차니스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남들이 히키코모리라고 하지만, 저희는 그냥 귀차니스트일 뿐입니다..................아...정말 좋은 것 알려주고, 좋은 말 하는군요-_-!


  1. 1번은 전화를 받지 않을때도 있다. 그러나 2번은 무조건 받는다....그러니 왠만하면 2번으로 전화해서 영어연습이나 하기를..참고로 상대편은 중국알바이다. [본문으로]
심심해서 baidu에서 제 이름으로 검색을 했는데, 너무나 부끄러운 장기기보[각주:1]들과 제가 과거에 인터뷰했던 내용이 나오더군요. 사실 예전부터 해당 문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일부로 조금 감추고 있었습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해당 인터뷰에서 가장 재미있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부분들은 상당히 민.감.한. 내용들인지라 내용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이 좀 단편적으로 들어가 있어서 조금은 왜곡되어 있다는 느낌도 있지만, 그냥 자료 저장용으로 올려봅니다.

어차피 이렇게 올려도 알아 보는 분들은 극소수이니까요. 음하하하...참고로 해당 글은 번역할 생각 없습니다. 대신 제가 발언한 부분에 대해서는 밑줄을 그어놓았습니다. 참고하셔요 -0-

...그냥 느낌인데 왠지 누군가  제 부분만 따로 번역하시지 않을까......아닐거야...안돼-_-;;

汇率危机下的韩国留学生:最好的御寒是抱紧
作者:敖迎盈  包 琛

    “是有很多困难,最近都不在外面吃饭了,都在校内食堂。”
    社会学系06级的尹雄载来自韩国首都首尔,去年北京奥运会之后的韩元汇率跳水,让他至今仍心悸不已。“人民币兑韩元从奥运前的1:150很快变成了1:230,韩元几乎贬值了一半。”
    历史学系06级的金珉彻接口道,“我父母给我的生活费是每月60万韩元,以前差不多近四千块(人民币),而现在,只有两千多了。”
    来自韩国忠州的朴宣暎则表示:“我的生活费每月也就1500元人民币,因而消费习惯和他们不一样,最近也没有受到太大的影响。”服过兵役的朴宣暎显然更成熟、更精明一些。
    与完全依赖家人的本科生相比,韩籍研究生们在经济上更为独立一些。历史学系08级博士研究生李裕杓就一点儿也不为生活费发愁,他和燕园里的中国研究生一样,有北大的研究生奖学金和导师补助的双重支持。
    然而,与生活费相比,学费的增长更为惊人。李裕杓与记者算了一笔账:以北京大学本科留学费用为例,每年的学费为两万六千元,住宿费为一万到两万不等,以今天的汇率计,共计相当于八百到一千万韩元。作为参考的是,韩国三大传统名校之一——首尔大学的文科专业学费每年不到七百万韩元,而其他韩国大学的学费也与此相仿。
    “与从前不同,现在来中国读书,已经没有经济上的吸引力了”,李裕杓总结道,“但是,看好中国的发展、向往中国的文化而来中国留学的,还是有不少。更何况,经过十几年的发展,已在中国落地生根的韩商群体,也都倾向于把子女送进中国的大学。”
    同样来自历史学系的07级硕士金把路向我们介绍了韩国学生来北大留学的主要途径:一是通过北大的留学生入学考试,这往往是久居中国的韩国人所选择的;二是先进入北大的留学预科班,再进入北大;第三种是经由北大—庆熙大学的合作项目,在韩国学习一段时间后再转入北大。

    无论是哪一种,必要的汉语水平是留学生活学习得以顺利进行的基础。汉语的复杂性也确实给韩国留学生在学业上的表现带来了不少困难。“我也一直告诉班里的韩国学生,要多和中国同学接触,多锻炼自己的语言能力。”在校外一家留学辅导机构担任班主任的金把路说,“不过,没有办法,来华的大部分韩国学生,还是自己抱成团地度过这四年。这也不能完全怪他们,我就曾建议让韩国学生与中国学生住在一起。毕竟,留学,就是要增加交流,相互理解,建立友谊。”
    “如果住在一起,要熄灯,留学生受得了吗?”面对记者的发问,朴宣暎笑笑说:“我觉得熄灯很好,年轻人毕竟缺乏自制力。”
    “有些人认为韩国学生大声喧哗,衣着夸张,其实这是一种偏见。像我,就穿得很烂嘛。像我们这样的,你们都不会把我当成韩国人,对韩国人的整体评价就会有误差。”金把路大笑着说。
    谈及汇率危机对韩国学生来华留学的影响,金把路评价道:“一些韩国留学生从北大本科毕业后,进入韩企工作,表现并不出色,在韩国企业界留下了‘不过如此’ 的风评。这对今后的韩国学生在留学北大和留在韩国之间选择时有所影响。加上现在的韩元贬值,要是这种情况持续下去,来华留学的韩国人肯定会减少。”
    “北大肯定不会受到大的影响。但经济危机以后,整个韩国,从普通家庭到整个企业界,可能确实要重新评价来华留学的效果了。”金把路严肃地总结道,“然而,这对于北大来说,未必是件坏事。”
    李裕杓则认为,北大的学术水平是受到广泛尊重的,以自己所在的国际交流史专业为例,很多韩国的研究生非常希望能来中国学习深造。“即使在韩国,北大博士的重量,也并不逊于欧美学位。我就是通过参加05年的全国考研才得以进入北大的。”李裕杓骄傲地说。
    当问及未来打算时,朴宣暎说:“我当然希望留在中国了,中国发展更快,我尤其喜欢上海。但是从我们周围来看,留在中国的现在还是少数。”
    “虽然说中国发展很快,很有前途,可是我一年半后就毕业了,从经济上看,还是回韩国更实际一些。”金把路挠挠头,这正是他一直在考虑的问题。“将来到北大来留学的,肯定以在中国沉淀下来的韩商子女为多。他们经济上更依赖中国,对北大也更为了解,更为尊重。同时,他们居华日久,中文说的比我好很多,限制他们在学业和交流上发挥的语言因素也不存在了。”
 
출처 : 最好的御寒是抱紧-北京大学团委校报电子版《北大青年》报网
  1. ...2008년 국제마인드게임올림픽에 나갔던 그 기록들...젠장...국제대회라 삭제도 안되고 오히려 여기저기 퍼져나가 있어. 흑. [본문으로]
샨쟈오띠(三角地 삼각지)는 현재 북경대학교 100주년기념당 옆에 있는 모르는 분들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아주 조그마한 곳입니다. 삼각형으로 생겨서 샨쟈오띠라는 이름이 붙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샨쟈오띠에는 북경대의 열정이 살아숨쉬고 있었습니다.

이게 먼가?? 하시죠. 이해합니다. 현재의 샨쟈오띠 모습입니다. 과거에는...



이 샨쟈오띠는 위치상 숙소와 강의건물의 사이에 있어서 거의 매일 지나쳐다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곳에는 다양한 강의 소식이나 여러가지 일들에 대한 포스터들을 자유롭게 붙이고는 했습니다. 어두운 과거라면 문화대혁명의 초기 북경대학교에 붙었던 포스터가 바로 이곳에 걸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친 문화대혁명을 시작했다는 상처를 얻게 되었지요. 개혁개방의 시기가 되면서 자유로운 생각들과 무서울 정도의 정부비판이 샨쟈오띠에 실리게 됩니다. 그리고 천안문사건의 시작에도 바로 이 샨쨔오띠에 내걸린 포스터가 있었습니다.

과거의 모습입니다. 저도 이 시절을 경험했습니다. 사실 여기 뿐만이 아니라 위의 사진의 둘레 전부가 온갖 판넬과 포스터로 감싸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2007년 11월. 베이징 올림픽을 위해서 학교환경을 정비한다는 이유로 자유롭게 학생들이 포스터를 붙일 수 있던 공간은 철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측에 의해서 붙여지는 공간만이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샨쟈오띠에는 온갖 광고들이 붙어있기도 하였습니다. 난잡하다면 난잡하다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경대의 자유로운 열정을 상징하는 샨쟈오띠가 없어진 것에 대해서 "북경대의 열정은 죽었다"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또한 교내정비를 한다면서 샨쟈오띠를 없애놓고서는 기업들에게는 고액을 받고서 샨쟈오띠의 자리를 대여해주고 있는 현실에서 다시 한 번 북경대의 열정은 죽었다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모든 것은 핑계일뿐, 이래저래 골치 아픈 샨쟈오띠를 없애버린 것이지요.

그러나 비록 과거의 샨쨔오띠는 없어졌지만, 未名BBS라고 하는 학교내 BBS에서 샨쟈오띠보다 더욱 빠르고 강력하며, 더욱 강압적인 관리를 피해서 노력하며 북경대의 열정을 죽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요즘 좀 정신이 없어서 자주 글을 못 올리고 있습니다. 이거야 올리기로 약속했으니 쓱쓱;;
* 혹시 궁금하시거나 제가 쓰면 좋겠을 주제를 던져주시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굳이 써야되는 주제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머리 속에서는 안씨...안씨...안씨....만 반복되고 있습니다.(논문...싫어!!)

북경대학교의 유학생의 보금자리인 북경대 안의 UN 샤오위엔과 북경대의 3대 상징물인
북경대의 정신 보야탑(博雅塔) 북경대의 마음 웨이밍호(未名湖) 그리고 북경대의 머리 도서관을 소개했습니다. 이번에는 북경대를 오신 분들은 반드시 사진을 찍고 가는 북경대서문을 소개해보겠습니다.


북경대학교 서문은 원래 북경대학교의 문이 아닙니다. 1952년 북경대학교와 합쳐진 연경대학(燕京大学)의 문이었습니다. 연경대학교 졸업생들의 모금으로 만들어진 문입니다. 편액은 북경대학교 도서관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모택동(毛泽东)의 글씨입니다. 또한 문 앞에 당당하게 서 있는 두개의 돌사자(石狮)은 원명원(圆明园)의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북경대학교 서문은 도쿄대학교의 아카몬(红门)과 같이 북경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북경대학교에는 여러개의 문이 있습니다. 서문은 사실 정작 북경대학교 학생들은 그리 자주 이용하는 문은 아닙니다. 북경대학교 신입생들은 남문을 통해서 처음 북경대학교로 들어오게 됩니다. 또한 지하철역이 있는 동문은 가장 보편적인 문으로 생각되고는 합니다. 무엇보다 서남문이야 말로 북경대생들이 자주 출입하는 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문은 그 유려한 모습으로 인하여 수 많은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는 명소입니다.

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잠시 출입통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북경대학교는 전통적으로 외부에서 수업을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매우 관대합니다.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되는 모택동부터가 자유로운 북경대의 청강분위기에서 만들어진 인물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부인들이 학교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매우 반겼습니다.

그런데 2008년 6월부터 학생증과 신분증 검사를 통해서만 출입을 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 당시의 이유는 베이징 올림픽의 안전을 위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북경대의 교직원들과 학생들은 상당한 불만을 표시하였지만 일단은 협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올림픽이 끝나고, 주변의 다른 대학교들도 신분증 검사를 끝낸 지금(2009년 11월)까지도 북경대만은 계속 신분증 검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북경대학교의 자유로운 학풍을 방해하는 일이며, 교직원과 학생들의 불만도 한계에 달할 정도입니다. 정말 빨리 개방되었으면 합니다.

× 여행객들을 위해서 : 현재 북경대학교는 출입증 검사를 합니다. 북경대에 가실 때에는 반드시 여권을 지참해주시기 바랍니다. 입장을 하면서 이름과 여권번호를 공책에 적으시면 됩니다. 혹은 중국어 잘 모르는듯한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시면서 여권을 보여줘도 통과시켜주고는 합니다.

언제나 우글우글;;;







* 예약해놓아서 당연히 공개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안되서어 서둘러 공개-0-;;;

북경대의 정신 보야탑(博雅塔) 북경대의 마음 웨이밍호(未名湖) 에 이어서 마지막으로 북경대를 상징하는 3대 건축물이자 "북경대의 머리"인 북경대학교 도서관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도서관이라고 하니까 벌써부터 지루해보이지 않습니까? 되도록 야사위주로 재미있게 구성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북경대학교 도서관 홈페이지 http://www.lib.pku.edu.cn/portal/index.jsp


북경대 사진을 찍는 곳-_-;; 매일 관광객들이 바글바글;;;;



1. 북경대학교 도서관 간략역사
1898년 7월 청 정부에 의해서 경사대학당이 만들어졌을 때만 해도 소장하고 있던 책은 매우 적었고, 전문적으로 도서를 관리하는 기구도 없었다. 1900년 팔국연합국이 베이징[각주:1]을 공격했을 때 교사가 점거되었고, 도서도 많이 손실되었다. 1902년 1월 경사대학당이 다시 만들어지고 , 10월에 경사대학당 장서루(京师大学堂藏书楼)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는 중국의 초기 현대형도서관이었습니다.

베이샤탄 시절의 북경대학교


그 당시 각 지방의 도서를 수집하였고, 장서가들의 기부로 수 많은 책들이 모이게 됩니다. 동시에 훗날 합쳐지게 되는 연경대학교에서도 수 많은 재원을 투자해서 고서들을 모으게 됩니다. 이것은 현재 아시아 최다-최고 장서를 자랑하는 북경대학교 도서관의 초기 장서를 이루게 됩니다.비록 일본제국의 침략기간에도 어느 정도 손실을 당하고, 특히 중화민국이 타이완으로 가는 와중에서 최고급 고서들을 많이 가져가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형태상 이동이 어려운 도서들은 많이 유지됩니다.

연경대학교 도서관. 지금은 북경대학교 당안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어연수반 학생들이 자주 수업받는 으어원로우(俄文楼)의 맞은편에 있습니다.

서남연합대학 시절의


그리고 1962년 중화인민공화국의 대학개편을 맞이하여 북경대학교가 문과대학교로 향하게 됨으로서 연경대학교의 도서와 북경대학교의 도서 및 청화대학교의 고서들이 대량 북경대학교로 오게 됩니다. 다만 농업대학교쪽에서 농업관련 고서들을 가지고 가지만 이는 전체 장서에서는 일부분에 불과했습니다.

현재도 개장되어서 운영되고 있으며, 1998년 동로우가 신축되기 전까지의 북경대학교 도서관.



2. 북경대학교와 중국근현대사의 거물들.
북경대학교 도서관에서 일했던 인물들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일단 중국에 대해서 잘 모르는 한국분들도 알고 계시는 모택동(毛泽东)은 북경대학교 도서관에서 사서보조로 근무했습니다. 사실 말이 사서보조이지 사실상 알바급이나 될 만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북경대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모택동은 북경대학교의 대학자들의 수업을 마음대로 듣고, 북경대학교의 수 많은 도서를 읽었다는 것은 이미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모택동 사서보조 기념비-_;;

중국공산당창시자 이대(李大钊)


중국공산당의 창시자 이대쇠(李大钊)의 경우는 아예 북경대학교 도서관 관장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혹자는 모택동이 이대전과 직접 만났을 가능성에 대해서 궁금해하시는데, 당시의 이대전은 누구나 아는 대단한 거물이었고, 모택동은 단지 도서관 사서보조정도의 인물이었습니다. 모택동이 이대전의 강의를 들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둘이서 따로 이야기했다는 것은 훗날 모택동을 띄워주기 위한 선전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이 편액의 글씨가 등소평이 쓴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현재 중국을 통치하고 있는 중국공산당과 수 많은 인연이 있기에 문화대학명기의 그 혼란 속에서도 장서에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당시 불교석상의 목이 짤려나가고, 일부 고서적이 봉건주의의 유물이라며라고 불태워지기까지 했던 당시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등소평(邓小平)전 주석은 "북경대학교도서관(北京大学图书馆)" 편액을 써서 주게 됩니다. 쟝저민(江泽民)전 주석도 1992년에 바이니엔슈청(百年书城 백년서성 100년의 책의 성)이라는 글을 남기게 됩니다.


3. 자랑스러운 북경대학교 장서량
아시아 학교 도서관 중에 최다의 장서량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2005년까지 600여만책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150만책은 문과쪽 사람들은 눈물 붉히는 고서들입니다. 이 중에서 20만책은 5C~18C까지의 국보급 고적들입니다[각주:2].

하나하나가 보물인 서적들이 있는 고적실(古籍)입니다. 그나마 밖에 있는 책은 그리 비싸지않습니다. 안쪽 보관실에 있는 건....하악하악-0-


이 부분은 휘리릭 끊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책이 많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분야만을 찾아보기 때문에 별 의미는 없다고 봅니다. 저의 전공인 역사쪽에서는 북경대에만 있는 고적들이 쌓여 있고, 다른 도서관에 갈 필요 없이 북경대학교 도서관에서 사실상 대부분의 것을 처리 가능하기에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고적을 봐야되는 전공이 많은 것도 아니고......

과거 잡지 열람실입니다.(过刊阅览室) 여긴 그나마 깨끗한 곳이랍니다. 저는 전공상 자주 안 가지만 근현대사분들은...쯔쯔....


그래도 좋은 것은 현재 수 많은 전자서적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文渊阁四库全书에서 中国基本古籍库로 업데이트 되었고, 그 외에 영어권과 중국권의 수 많은 학위논문들 서비스와 연계가 되어 있어서 상당히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학교 밖에서도 프록시나 VPN등으로 접속할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학교안에 편하기에 저도 살기 힘든 기숙사에서 살고 있답니다.

북경대학교 도서관 홈페이지 http://www.lib.pku.edu.cn/portal/index.jsp



4. 현재의 북경대학교 도서관은?
현재 북경대학교 도서관은 1975년에 만들어져서 2005년에 보수를 한 시로우(西楼)와 1998년 중국의 유명한 사업가인 리즈청(李嘉诚) 선생님의 기부[각주:3]로 만들어진 똥로우(东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총 면적 53000평방미터입니다. 그러나 열람석은 4000여개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마다 자리 싸움으로 정신이 없습니다.

리즈청 선생님!!! 감사-0-!


개방시간은 평일에는 오전 8시부터 저녁 10시입니다. 주말에는 더욱 더 단축됩니다. 24시간 개방되어 있는 곳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중국의 본과 기숙사는 아직도 11시면 전기를 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대신 기숙사에 공부할 수 있는 곳이 있어서 그곳에서 밤에 공부를 할 수 있기는 합니다. 더욱 큰 문제는 사물함을 하루 동안만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만약 아침에 가지고 가서 열쇄로 사물함을 잠그고, 급한 일로 다음날 가게 되면 1층에서 끊어진 자물쇠와 내부 물건을 받게 됩니다[각주:4].

북경대도서관은 학생증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외부분들은 정문으로 들어가서 열람증을 발급받아야됩니다. 그러니 여행 온 분들은 그냥 안에 안 보셔도 무방합니다. -0-



闭架로서 대출종이를 주면 책을 줍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공개도서관보다 여기에서 책을 빌리는 경우가 많아서^^:::




인문과학공개열람실(人文社科区)입니다. 역시 제가 자주 가는 곳 중에 하나-0-;;


컴퓨터 열람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열람하는 것과 학교내에서 열람하는 것이 차이가 없기에....저의 경우 저기서 왠만하면 안합니다. -0-;;


새로 개장한 서로우 도서관의 전경입니다. 엣찌있죠? ^^:::

눈 내리던 어느 날-0-


북경대학교 도서관 전경입니다. 위치로 봐서 理校 옥상에서 찍는듯 합니다. 하지만 저곳은 학생들이 올라갈 수 없기에 저도 신기한 각도이군요.


일단 북경대학교 3대 상징물 부분도 끝났습니다. 다음은......북경대학교 서문이겠군요. 거기까지야 기본이겠고 그 다음을 무엇을 해야되는지 고민입니다. 흐음...........솔직히 그 다음들은 그게 그것들인 거라서....쩝....투표라도 해야되나-_;; 남문? 백주년기념당? 중국학생 기숙사? 逸夫楼? 红楼? 에드가스노우?? 중국고대사연구센타? 三角地? 三教?二教?一教?쩝....


  1. 당시에는 북평(北平) [본문으로]
  2.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이 중에서 한질만 훔쳐도 평생 놀고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3. 한국에도 비슷한 분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좀 더 많이졌으면 합니다. [본문으로]
  4. 전...두 번을 이것을 당하고 그 다음부터 도서관에서 아예 공부를 안합니다. -_-;; [본문으로]
북경대를 소개 할 때 절대 빠져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저희들은 이것을 뒤섞여 엉망진창이다(一塌糊涂 yi ta hu tu)으로 말장난을 한 하나의 탑, 호수, 도서관(一塔湖图 yi ta hu tu)라고 합니다. 북경대의 정신인 보야탑과 마음인 미명호 그리고 지성의 북경대학교 도서관만은 꼭 보셔야 됩니다.

오늘은 우선 보야탑(博雅塔)의 역사부터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보야탑이 미명호로 쓰러지는 날이 바로 북경대학교가 망하는 날이라고...


보야탑의 북경대생들에 있어서의 가치를 알려면 북대인들이 반쯤 장난으로 하는 말을 알려드리는 것이 더 좋습니다. 조금은 과장되었고 황당하게 느껴지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보야탑은 북대인들의 영혼이 모여 있다.  북대인들의 지혜와 영기가 서려 있는 곳이다."
"미명호가 북대의 눈이라면, 보야탑은 북대의 이글거리는 눈동자이다."

눈 오던 어느 날 찍은


보야탑은 총 13층으로 높이가 27미터에 이릅니다. 내부는 비어있으며 나선형계단으로 꼭대기까지 연결이 됩니다. 매년 개교기념일이면 개방을 했다고 합니다.[각주:1] 올라가본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주변의 청화대학부터 멀리는 이화원까지 보이는 최고의 경치를 자랑한다고 합니다.

미명호를 끼고 찍은 사진. 미명호에 대해서는 다음편에....


1920년대, 당시에 현재의 북경대학교 부지는 추후 북경대학교와 합쳐지는 연경대학교(燕京大学)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록 하이디엔취가 조그마한 연못들로 이루어진 곳이며, 비교적 물이 풍부한 곳이었지만, 먹을 수 있는 물은 매우 적었습니다. 식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깊은 우물을 파서 지하수를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물을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음을 줄이기 위해서 건축물을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예쁜 건물은 사실 "거대 물펌프 뚜껑"이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사실 베이징을 비롯한 북방지역의 식수문제는 지금까지도 내려오는 고질병입니다. 사실 원래 황하가 지금과 같이 고정된 루트로만 가지 않고, 자주 범람하며 물길이 변하는 시대에는 오히려 괜찮았지만, 지금은 황하가 고정이 되었고 하북지역의 식수난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50년대부터 난수이베이띠아오(南水北调)공정을 계획해오고 있습니다. 가장 간단하게 해석을 하면
장강의 물을 베이징까지 올려보낸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평지지형에서 서로 물길을 뚫는 계획에 50년 이상을 연구하며 계획하고 있는 중국을 보면서[각주:2] 산지에 순식간에 물길을 뚫겠다는 대운하를 어떻게 봐야될지는 너무 명확해 보입니다.

어느 안개 낀 날에....


당시 연경대학교의 철학과 교수였던 보션꽝(博晨光)이 자신의 숙부인 보야(博雅)에게 돈을 지원 받게 됩니다. 그리고 1924년 7월에 드디어 "거대 물펌프 뚜껑"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단순한 뚜껑은 아니었습니다. 보야탑은 북주(北周)시대에 만들어진 통주(通州)의 열등탑(燃灯塔)을 모방하여 만들어졌습니다. 단순한 물펌프 뚜껑이 아니라, 연경대학의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어울리는 건축물을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결과 물펌프 뚜껑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건축물이 태어나게 됩니다.

특히 미명호에 살며시 비치는 보야탑을 벤치에 앉아서 조용히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터질 듯이 차 오름을 느끼고는 합니다. 여행을 오신 분들도 미명호 벤치에 앉아서 조용히 보야탑을 바라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북경대학생들의 영혼이 당신에게 다가 올 것입니다.




몸이 안 좋은데..........아무래도 신종인플루엔자가 맞는 것 같습니다. 예방접종을 맞으신 어느 분에게 옮겨 온 듯 합니다. 예방 접종이니 특별히 위험할 것은 없겠지만, 이것이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군요. 약속한 날이라 일단 어떻게든 써서 올리긴 하지만...헤롱헤롱...이군요.....헤롱헤롱...


  1. ....좋겠다. 졸업하기 전에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 볼까나-_ [본문으로]
  2. 물론 중간에 문화대혁명과 같은 온갖 곡절이 있었지만.... [본문으로]
샤오위엔(勺园)은 북경대학교 외국인 기숙사로 쓰이고 있으며, 현재 북경대학교에 있는 외국인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고, 온갖 추억이 새겨져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정작 샤오위엔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잘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 모든 사진은 저에게 저작권이 있습니다.
* 마음대로 퍼가실 수는 있으나 출처명시는 꼭 해주시기 바랍니다.

봄의 샤오위엔, 올림픽이라고 하얀칠을 했다.



샤오위엔은 명말의 저명한 화가였던 미만종(米万钟1570~1631)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명말청초의 북방의 유명한 원림(园林)중에 하나였다. 샤오위엔이라는 이름은 "淀水滥觞一勺"에서 왔다. 시를 번역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것이지만, 억지로 번역을 한다면 "연못의 물이 술잔에 넘치도록 한 술(勺)을 뜨다" 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경대학교가 있는

《勺园修禊图》

곳의 환경을 알 필요가 있다. 지금 현재는 현대적인 모습으로 변했지만, 사실 현재 북경대학교가 있는 하이디엔취(海淀区)는 연못들이 곳곳에 있는 물천지였다. 곳곳에 크고 작은 연못들이 널려 있었다. 그런 곳에 별장을 지었다고 생각하시면 된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에 최초로 온 서방사절단이 바로 이 샤오위엔에 머물렀다는 점입니다. 건륭(乾隆)58년, 영국 조지2세가 보낸 마카트니(Macartney)는 처음에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나오는 열하(热河)에 있다가 원명원으로 돌아온 건륭제를 따라서 와서 바로 이 샤오위엔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 뒤로 집현원(集贤院)으로 개명하고 고관대신들의 휴식처나 외국 사절들을 접대하는 장소 혹은 고위급외국포로를 가두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이 샤오위엔은 1868년 원명원이 팔국연합군에 의해서 불태워질 때 같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2000년에 《勺园修禊图》을 기본으로하여 복원을 하였다. 북경대학교 차동차전용 서문에서 들어오면 왼쪽에 보이는 곳이 바로 복원된 샤오위엔이다. 그러나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으며, 오토바이등을 놔두거나 연인들의 비밀데이트 장소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현재의 샤오위엔은 1980년대 후반에 만들어져서 북경대학교로 오는 외국 학생들의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다[각주:1]. 현재까지도 대외한어교육의 대부분은 샤오위엔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유학생사무실도 샤오위엔에 남아 있다.

샤오위엔은 공공욕실로서 오전 6시부터 밤 12시까지 뜨거운 물이 나온다. 화장실도 공공화장실이며 매일 청소를 하고 있으나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하겠다. 빨래는 공용세탁기가 있으나 이미 오래되어서 너무 드럽고, 보통은 다른 학생들이 개인으로 혹은 공동으로 구입한 세탁기를 몰래 빌려쓰고는 한다. 물론 그런 세탁기들도 너무 많이 사용되어서 상당히 더럽다.

방은 2인 1실이 기본이며, 관리 선생님과 잘 말하면 혼자서 방을 사용할 수는 있다. 하지만 2명분의 방값을 내야하며, 현재 기숙사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왠만한 친분으로는 이렇게 하기 힘들다.무엇보다 현재 샤오위엔의 유학생 중에서 70%가 한국인이다. 그러다보니 샤오위엔 뒤쪽에 있는 식당도 한국식당이 자리잡고 있다. 그 동안 몇 번 주인이 변했지만 말이다.

샤오위엔 정문에 앉보지 않았던 북대생은 손~~!


샤오위엔의 정취라고 한다면 정문 입구일 것이다. 이 곳에서 자유롭게 앉아서 서로 이야기했던 기억들은 북경대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 쯤은 있는 추억이다. 이제는 시대의 흐름에 밀려서 새로운 기숙사가 들어왔고(북경대 新유학생기숙사 완전해부), 새로운 기숙사가 완전히 만들어지면 유학생들이 샤오위엔을 떠나야된다는 소리가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북경대에 있었던 사람들의 마음에 샤오위엔은 언제나 고향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올림픽이라고 하얀칠 하기 전의 사진이다.


눈 내리는 어느 날의 샤오위엔.

2008년 9월 신입생


2009년 9월 신입생



잡담 : ....약속한 날이어서 쓰기 싫은거 적당히 썻습니다. 사진이 들어가기 시작하니 짜증나는군요-_-;;;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전 사진 넣는 것을 극도록 싫어합니다. 이제 다음은 一塔湖图인데...이 부분의 사진은 최대한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1. 혹자는 과거에 샤오위엔이 중국석박사들의 기숙사로 사용되었다고 하지만, 본인의 조사 결과 그런 일은 없었다. [본문으로]
북경대학교에 사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이 무엇이라고 묻는다면 북경대학교가 제공하는 수 많은 자원들을 향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 많은 논문정보싸이트를 비롯하여 기본고적고에 이르는 막대한 자원들을 기숙사에서 편히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모든 것들을 밖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능한 VPN 서비스가 2008년부터 생겨났다. 그런데 아직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소개를 해본다. 다만 해당 서비스는 분명히 안전성이나 안정도에서 상당히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 이 점 유의하도록^^

북경대학교 VPN 주소 : https://124.205.79.5

요구사항
1) 북경대생이어야 함 : 북경대학교 인터넷ID와 암호가 필요하다.(ID는 학번이고, 암호는 각자 설정된 것. 입학을 하면 자동으로 학교인터넷에 가입이 된다. 간략히 말해서 인터넷 돈을 낼 필요는 없다)

2) 접속가능주소목록 : https://its.pku.edu.cn//oper/liebiao.jsp
기본적으로 教育网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다른 망에서도 접속 가능한 경우가 많으니 시도해보시길 바란다. 또한 回龙观지역과 中关村일대에는 북경대학교관련 기관이나 숙소가 있어서 IP을 열어둔 경우가 많다.

더 구체적인 설명은 https://its.pku.edu.cn/wlfw/vpn.jsp

VPN 서비스를 가장 간단히 말하면, 당신의 인터넷을 가상으로 학교 안으로 옮겨오는 것이다. 그럼 학교 안의 자원을 쉽게 활용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학교인터넷에 돈을 넣어놨다면, 그것을 통해서 외부 인터넷으로 나갈 수도 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나중에 되면 알것이다.--;;

해당 정보는 귀차니즘으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조용히 이 블로그를 보시는 쎵욱횽님을 위해서 서둘러 올려본다.....덧글 하나 정도는 좀 남겨주시길-_-;;;


북경대학교의 역사는 중국의 근현대사와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라고 하면 싫어하시는 분들이 많기에, 최대한 간단하게 흥미진진한 야사를 섞어가면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설명하지 않을 수 없는 중국근현대사가 있습니다.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 이름은 한국외래어표기법에 의거하여 1949년 이전에 출생한 사람들을 모두 한국어한자독음으로 표기하였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중국어발음이 더 편하긴 합니다만;;;;

* 나름 잘 써서 올렸는데, 티스토리가 Ddos 공격을 받다니..이 글은 이렇게 묻히겠구나~~~!!!


1) 경사대학당(京师大学堂)시절

1898년 청나라 광서제는 한참 무술변법운동(戊戌变法)이라는 개혁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영국처럼 왕조는 유지하면서 근대국가로 변화하겠다는 몸무림이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실천사항의 하나로 나름 근대적인 의미의 대학인 경사대학당을 7월4일 설립하게 된다. 그런 무술변법운동은 100일도 되지 않아 9월에 서태후의 모략으로 실패하게 된다. 이러자 경사대학교가 공중분해될 것은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그리고 1900년 8월 3일 서태후는 폐교을 시켜 버린다.

원래 자금성 동쪽, 왕푸징 바로 옆에 있었다.


그러나 이미 잠시간의 개혁을 경험한 중국내 여론의 압력으로 1902년 다시 경사대학교가 다시 만들어지게 되고, 12월 17일 드디어 입학식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중국의 유명한 당시의 신지식인 엄복(严复)교장선생님이 등장한다. 하지만 비록 신지식인인 엄복이 교장이 되었지만, 경사대학당은 어디까지나 서당적인 분위기가 강한 곳이었다. 학교에는 많은 유학자들이 있었다.

사실 북경대학교 마크에는 1989년 개교를 했다고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1902년에나 실질적으로 개교를 했다고 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게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처음 시작은 1989년이니 3년정도의 애교는 귀엽게 봐주시길.....^^;;


2) 북사탄(北沙滩) 북경대학

사람들은 현재의 북경대학교로 관광을 온다. 그러나 지금 현재의 북경대는 어디까지나 1952년 이후에 옮겨온 곳이며, 그 이전에는 연경대학부지였다. 그리고 이 당시 북경대학교 부지는 지금의 자금성의 오른쪽, 왕푸징의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이 곳은 북사탄이라고 불리던 곳으로서 한자를 아시는 분은 눈치 채셨을텐데 원래 모래밭이었던 곳에 북경대학교를 만든 것이다. 이 곳은 현재 북사탄 북경대학교 혹은 북경대학 홍루(붉은 건물이라는 뜻)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곳이 바로 예전 북경대학교 건물이다. 여행으로 자주 가는 왕푸징에서 도보로 5분거리에 있다. 한번 가보시는 것도 괜찮을 듯^^


각설하고! 1911년 국민당정부가 핵심이 된 중화민국이 생겨난다. 그리고 1912년 5월 경사대학당은 북경대학교로 개명을 한다. 그리고 1916년 12월 드디어 북경대학교의 영원한 교장선생님이라고 불리며, 현재 북경대학교의 정신적인 토대를 세운 채원배(蔡元培)교장선생님이 오신다.

채원배교장선생님!!!


채원배 교장선생님은 "학술은 자유로우며,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学术自由,兼容并包[각주:1])"라는 정말 옳은 말이지만 실질적으로 이루기 힘든 일을 이루어낸다. 이 말을 충실히 현실에 재현을 한 당시 북경대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고홍명 선생님.

아직까지도 그 힘을 보유하고 있던 유학자들과 자본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노쉰(鲁迅)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창시자인 이대조(李大钊)가 같은 학교에 있었다고 한다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가? 고홍명(辜鸿铭)이라는 분도 압권이다. 아버지는 말레이시아 화교이고 어머니는 영국인으로서 유럽에서 유학을 했다. 그는 어머니의 피로 서양인같은 높은 코를 가지고 있으면서, 중국전통옷을 입고서 학교를 노닐었던 것이다[각주:2]. 1918년부터 1919년 사이에 모택동(毛泽东)이 북경대학교 도서관 사서조수[각주:3]을 했다는 것 정도는 이제 놀라지도 않을 일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때만 해도 가장 강력한 힘은 유학자들에게 있었다. 전통의 힘은 그리 가볍지 않다. 그리고 자본주의파가 급속하게 성장을 해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이제 막 유입된 요즘말로 듣보잡에 불과했다. 그러나 채원배 교장선생님은 그 어떠한 학설이든 스스로의 논리가 성립을 한다면 받아주며, 외부의 압박에서 보호를 했던 것이다. 채원배 선생님이 현재까지 북대의 영원한 교장이라고 불리는 것은 괜히 그런것이 아니다. 그는 전설이다.

북경대학교는 이렇게 화려하게 꽃을 피어 간다. 그러나 1931년 일본제국의 중화민국 공략이 본격화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점차 일제의 침략이 노골적이 되어가면서 북경대학교 학생들은 반대시위등을 하게 되었고, 결국 1935년에는 129운동의 선두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대세를 바꾸지 못한다.

하지만 또 전설이 세워진다. 서남연합대학의 전설이....


3) 서남연합대학(西南联合大学)
1937년 소위 77사변이라고 불리우는 일제침략행위가 발생을 하고, 북경대학교와 청화대학교 그리고 남개대학교(南开大学)[각주:4]는 남쪽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그리고 챵샤(长沙)에서 서로 연합하여 서남연합대학(西南联合大学)라는 하나의 전설을 만들게 된다.

전설의


북경대학교의 불타는 정열과 청화대학교의 얼음같은 엄격함, 남개대학교의 끊임없는 노력정신이 뭉치게 된 것이다. 대충 생각을 해봐도 전설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들은 계속 되는 항일전쟁의 와중에서도 서로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미쳐서 수 많은 원사[각주:5]들을 배출하였다.

일본이 항복을 하고 1946년 5월 베이징으로 돌아솨서 10월에 다시 북경대학교로 분리가 되었으며, 이 때 호적(胡适)교장선생님이 교장이 된다. 그리고 몇몇 잔잔한 개혁이 있었다. -0-;;


4) 하이디엔취(海淀区) 북경대학(현재)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고 호적교장선생님은 미국에 잠시 있다가 타이완(중화민국)으로 갔다. 그리고 1951년 6월 마인초(马寅初)가 교장선생님이 된다. 그리고 1952년 대대적인 중국의 대학개편작업이 있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북경대학교(공과는 청화대로) + 연경대학교(문과,이과,법과) + 청화대학교(문과,이과,법과)을 하게 된다. 북경대와 청화대는 무엇이 다른가? - 바로 북경대에서도 설명을 하였지만, 북경대는 문과대학이 아니라 문과와 이과 대학인 것이다. 그리고 이 때 지금의 위치로 이사를 오게 된다. 그때까지 현재의 북경대학교 부지는 연경(燕京大学)가 있었다. 핵무기를 개발하고, 반도체를 개발하는 등의 화려한 모습을 잠시 보이나

삼각지(三角地)에 문화대혁명의 포스터(大海报)가 붙은 것은 중요한 암흑기의 시작이었다...2007년에는 이 삼각지가 철거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중국의 또다른 암흑기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1960년 마인초교장선생님이 반동분자라는 이유로 해임되고, 1966년 문화대혁명이라는 암흑기가 도래한다. 이 부부은 진정한 암흑기라고 할 수 있다. 북경대학교 학생들은 문화대혁명의 구호에 충실히 따랐다. 아니 앞장서서 나섰다. 그리고 1978년 이전까지 학생이 교수를 공격하고 몰아내는 등의 온갖 난리가 벌어졌다. 그래서 현재도 1966년부터 1978년 사이에 졸업한 사람들 중 현재 북경대 교수가 된 사람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학문의 공백기를 가져왔다. 이 시기를 한마디로 정의하면...아.무.것.도. 없.다.


5) 개혁개방의 시기
1979년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1979년 학번들은 북경대와서 그 자유로움을 순식간에 회복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79학번부터 82학번 사이에 현재 북경대교수진이 많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그 당시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면서 현재의 북경대학교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1981년 중국 여자 배드민턴팀이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하자 북경대학생들을 뭉치자! 중화를 진흥시키자(团结起来,振兴中华)라는 구호를 외쳤고, 그 중에서 중화를 진흥시키자(振兴中华)는 현재도 북경대학교 구호중에 하나로 남아 있다.

퍼래이드를 하다가 갑자기 펼친 이 플랜카드는 순식간에 세계로 퍼져나갔다.


1984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35주년 천안문 퍼레이드에서 북경대학교 학생들이 "등소평짱[각주:6] 안녕하십니까?!(小平您好)라고 하며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은 것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1989년 같은 장소에서 그 유명한 "천안문 사태"가 일어난다.

중국의 민주화를 희망하는 많은 학생들이 주축이 되서 일어났던 천안문 사태는 북경대학교의 정신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자, 동시에 아픔을 알려주는 일이다. 현재 북경대학교의 교수 중에서는 이 시기 천안문 현장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은 그 당시의 정신을 계속 간직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당시의 아픔과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다.


....정말 짦게 한다고 했는데, 쓰는데만 1시간이 걸렸다..그런데 여기서도 하지 않고 넘겨버린 수 많은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면 믿으시겠는가?-_-;; 그리고 직업병 발동 안하다고 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이것저것 확실하게 하게 위해서 자료를 찾다니....ㅠㅠ  다음 편부터는 인물이나 건물의 이야기로 최대한 짦게 짦게 가이드처럼 가련다. 이렇게는-_-;; 너무 길어;;;;

  1. 《史记·司马相如列传》:“故驰骛乎兼容并包,而勤思乎参天贰地。” [본문으로]
  2. 지금 이런 분이 있어서 신기하게 볼 터인데...그 당시에;;; [본문으로]
  3. ...그러니까 사서도 아니고 거의 이름만 있는 알바같은 수준;;; [본문으로]
  4.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개대학교는 천진에 있는 대학으로서 지금도 중국대학순위 10위권에 들어가는 학교이다. 이 당시 군벌에 의한 대학교가 천진에 세워졌다. 그것이 바로 남개대학의 전신이다. [본문으로]
  5. 원사는 중국의 제도로 국가급의 학자에게 수여를 하는 일종의 명예직에 가깝다. 요즘은 원사를 마구 주어서 격이 떨어졌다는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만, 아무리 떨어져도 원사다라고 할까? [본문으로]
  6. 노무현 전대통령을 보고 "노짱"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본문으로]
중국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잘 모르는 분들도 북경대와 청화대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준비했습니다. 중국 명문대학교인 북경대와 청화대는 어떻게 다를까요?

북경대 로고

청화대




1) "북경대 미친놈"들과 "청화대 책벌래"들.
북경대와 청화대의 특징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말입니다. 중국말로는 北大疯子,清华书呆子라고 표현을 합니다. 북경대생들은 비교적 사회참여를 열심히 합니다. 중국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에 거의 빠짐없이 참가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54운동, 문화대혁명, 천안문사건등등 중국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분들도 들어봤을 사건들에 북경대학생들을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그에 비하여 청화대학교는 큰 사회적인 이슈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다만 책만 열심히 팔 뿐입니다.

이런 분위기는 북경대와 청화대의 각기 다른 학풍에서 오게 됩니다. 북경대는 매우 자유롭습니다. 자신이 듣고 싶은 수업을 사실상 마음대로 들으면서 대학생활을 보내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북경대에서는 당연히 수강신청을 하지 않고도 마음대로 청강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자유로운 청강을 막는 선생님이 생기면, BBS에서 그 선생님에 대한 온갖 비판이 쏟아지게 됩니다. 청화대는 이와 반대로 모든 학과에서 이미 4년동안 들어야 되는 수업과 그 일정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자유롭게 풀어주다보니 애들이 좀 미치게 됩니다. 훗-_


2) 북경대는 국가를 위하여! 청화대는 나 자신부터!
그 뿐만이 아닙니다. 북경대의 모토는 "중화를 흥하게 하자! 振兴中华"입니다. 사회적인 참가를 강력하게 외치는 모토를 가지고 있으니 사회 참가는 당연한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청화대는 "나부터 시작하자 从我做起"라는 모토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맞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내실을 닦아서 자신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변화를 시킨다라는 정신도 틀렸다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변화는....아니 한국의 현대사의 민주화과정을 보아도 대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사회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는 저는 북경대생입니다^^::

물론 최근에는 북경대의 이런 적극적인 정신이 죽었다는 소리가 많이 있습니다. 중국정부와 온갖 충돌을 하고 불이익을 받다보니 조금은 이런 정신이 죽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재 교수님들 중에 천안문사건을 현장에서 경험한 사람들이 있는 이상, 이 학풍은 쉽게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3) 북경대는 유학당출신이고 청화대는 해외파출신.
북경대의 시작은 청말에 시작합니다. 나라에서 대학의 필요성을 느끼며, 청나라 광시(光绪)황제의 칙명으로 세워지게 됩니다. 이렇다보니 초기 대학에는 수 많은 유학자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상당히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고, 국가에 대한 생각이 강력한 학교인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청화대는 원래 해외로 내보낼 학생들을 키우는 학원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보다 자유로운 생각과 개인주의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왜 중국정부의 미움은 국가를 위한다는 북경대가 받고 있냐고요? 국가를 생각하는 방법은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이 아닙니다. 만약 맹목적인 충성이었다면 천안문사태에서 북경대가 나설리가 없었지요. 국가가 어디까지나 국민들이 더 잘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을 생각을 한다면, 국가보다는 일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다 더 좋은 나라를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4) 북경대는 기본을 청화대는 응용을!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착각이 북경대는 문과가 강력한 대학이고, 청화대는 이과가 강력한 대학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과 매우 다릅니다. 북경대에서 중국 최초의 핵무기가 만들어졌습니다. 문과에서 이런 것이 가능할까요?

북경대학교는 인문과 과학의 기초학문쪽에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문-철학-역사와 같은 순수인문계열이 막강한 것은 다들 아시리라 봅니다. 그리고 수학-화학-물리와 같은 순수이과계열도 강력합니다. 사회학쪽으로 보면, 법학의 경우 법리연구가 강하고, 예술학과도 미학쪽에 상당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공통점이 돈은 죽어라 못 버는 학과들이라는 점[각주:1]입니다.

그에 반하여 청화대는 (어디까지나 북경대생의 입장에서 조금 왜곡하면) 기본적으로 땅파고 벽돌 쌓는 학교입니다. 건축계열이나 컴퓨터계열과 같은 응용쪽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문학에서는 온갖 선생님들을 초빙하고 있으나 아직은 멀었고, 기초과학쪽에서도 아직은 북경대를 최고로 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응용과학이 돈은 무지막지 잘 법니다. 쪼들리는 북경대에서 건물 몇 개 주르륵 올리는 청화대를 보고 있으면 솔직히 부럽습니다.


5) 중국정부의 미움을 받는 북경대와 사랑을 받는 청화대
대학교가 정부의 이쁨을 받으려면 학생이나 선생님들이 조용하면 됩니다. 문제는 이넘의 북경대의 미친넘정신과 애국정신이 합쳐지면 정부입장에서는 듣기 싫은 말들을 공개적으로 마구마구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과거의 북경대학교 BBS[각주:2]는 폐쇄당하고, 지금은 미명(未名)BBS가 운영되고 있으며, 이곳에서도 하루에도 다양한 글들이 삭제당하고 있습니다. 교수님들도 대놓고 정부를 비판해서 결국 신방과에서 짤리는 선생님이 나올 정도였습니다[각주:3].

다만 현재 정부의 요직에 북경대 출신들이 상당히 많다 보니 대놓고 까버릴 수 없을 뿐입니다. 그냥 예산을 잘 안주는 등의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미묘한 태클을 계속 걸고 있습니다[각주:4]. 그런데 청화대는 북경대보다 근 2배에 가까운 예산을 받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돈 잘버는데 정부에서 돈도 많이 주니 건물이 그렇게 마구마구 올라가고 기숙사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겠지요[각주:5].

그래서 최근에 북경대는 정부의 환심을 사려고 살짝쿵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몇십년 동안 해온 짓이 없어지지는 않지요. 제 생각에는 그냥 만사포기하고 북경대답게 사는 것이 좋을듯 합니다. 북경대가 예쁜짓 해봐야-_



흐으...이런 분위기로...괜찮겠지요? 다음 편은 야사를 기본으로 한 북경대 간략 역사...
쩝..호응 없으면....확 연재 안합니다.(협박) 왠만한 글 10분만에 대충 휘갈겨버리는 제가 무려 30분정도는 투자해서 글을 쓴다고요. (애원)............우웅....앙~(애교?;;;)

  1. 위에서 이야기한 그나마 응용에 가까운 핵폭탄도 사실 핵에너지연구이며...돈 안되고..반대로 돈만 먹는 학문입니다...쿨럭... [본문으로]
  2. 一塌糊涂 [본문으로]
  3. ...보호 못해준 북경대....죽어! -_-+ [본문으로]
  4. 그래도 왠만한 학교보다 훨신 많은 예산이긴 합니다만...) [본문으로]
  5. 아..잠시만요..눈물 좀..ㅠㅠ [본문으로]
북경대학교 학생이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이 보게 되는 북경대 로고입니다. 그런데 정작 북경대생들조차 이 로고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또 그 뜻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일단 북경대의 상징인 로고부터 파고 들어가보겠습니다.

1980년대에 수정되어서 지금까지 사용중인



일단 1898년은 북경대가 만들어진 년도입니다. 이것은 다들 알고 계시죠? 그리고 외부를 두르고 있는 PEKING UNIVERSITY는 북경대학교의 영어이름입니다. 지금은 영어표기도 Beijing(베이징)이지만, 당시에는 베이징을 Peking 이라고 불렀기 떄문입니다. 덕분에 썰렁한 농담으로 Fuking University 라고 한답니다[각주:1].

그리고 핵심이 되는 것은 안에 쓰여진 글자입니다. 해당 글자는 일단 외면상으로는 北大(북대의 약칭)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북경대학교 학생 조차 여기까지만 알 뿐이지 그 안에 내포된 의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것이 처음 만들 때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최초의 북경대로고양식



북경대의 영원한 교장이신 1916년 12월 채원배(蔡元培) 교장님[각주:2]이 노쉰(鲁迅[각주:3])선생님에게 휘장(로고)을 만들어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노쉰선생님은 그 다음해인 1917년 8월 7일 위의 로고를 완성하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외부의 영어 이름도 없었고, 개교년도도 없었습니다만, 가운데의 마크만은 있었습니다. 당시 잠시 사용되다가 조용히 사용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다가 80년대에 위에서 보여드린 현대의 로고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 마크는 北大(북대)을 전자(篆字)로 써 놓은 것이며, 동시에 중요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마크를 잘 보시면 위의 北자는 두 명의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아래의 大자는 한 명의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아래에 있는 사람이 위의 두 사람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습니다. 지식인으로서 큰 사람이 되어 다른이를 짊어지고 나아가야 된다라는 의미입니다. 소위 글 좀 읽었다는 지식인들로서 깊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




* 뽀나스로 북경대 한국유학생회의 로고에 대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현재 북경대 한국인 학생회


현재 북경대 학생회의 로고입니다. 해당 로고는 2005년 학생회장이었던 윤종현의 제작요청에  웹팀팀장 김바로와 웹팀원 김영한의 손에서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각주:4] 원래 북경대한국유학생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몇몇 선배님들의 권력싸움으로 처참하게 망가지고, 우여곡절 끝에 새로 만들어진 학생회였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막말북대] 북대 학생회 탄생비화 - 선사시대 [막말북대]초기 임시회칙과 혼란의 시작 - 학생회 탄생비화을 참고) 로고따위야 당연히 없었습니다. 원래는 홍보팀에서 만들어야 정상이었으나, 당시 일단 컴퓨터와 관련만 있다면 온갖 일거리를 하던 웹팀에서 로고까지 만들게 되었습니다[각주:5].

로고의 내용을 분석을 하면 2005년은 저희 학생회가 새롭게 만들어진 년도입니다. 그리고 은근히 과거의 학생회를 부정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어서 논란이 되었으나, 웹팀팀장의 막무가네식 우기기로 통과했습니다[각주:6]



* 대충 이런 분위기로 "바로 북경대"을 진행할 생각입니다. 괜찮을까요?


  1. .....짱돌로 사람을 치면 피나요....아파요...제발. [본문으로]
  2. (1868~1940) 현재까지 남아있는 북경대의 기본 정신인 "사상은 자유로워야하며, 서로 다른 것들을 모두 감싸안아야한다."(思想自由,兼容并包)을 만드신 분입니다. 추후 이 시리즈를 전개하면서 죽어라 나올 분이기에 이정도로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3. (1881.9.25—1936.10.19) 중국의 유명한 사상가이며, 작가입니다. 아Q정전이나 공이지전등의 아직도 사늘하면서 뜨거운 애정이 느껴지는 글을 쓴 분이십니다. 사실 이런 소개가 필요조차 하지 않는 분이라고 봅니다. [본문으로]
  4. ...자기 이야기를 3자의 입장처럼 쓰려니 붉어져오는 이 얼굴을 어찌한단 말입니까;;; [본문으로]
  5. 사실 위의 로고는 저희가 만든 로고와 미묘하게 다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당시의 온갖 로고 안건들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6. [/footnote].

    가장 문제가 되었던 곳은 로고의 가운데에 배경으로 들어간 태극기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북경대 학생회의 일부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어떻게 한국의 국기를 북경대학교 마크의 배경에 넣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동안 다른 과의 로고들도 가운데의 마크는 건드리지 않고, 어디까지나 외부에 이름을 적어넣는 수준으로 끝나고 있는 와중에 태극기를 넣어버린 것은 분명히 파격적인 부분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통과를 시켜낸 당시 간부진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본 내용은 제가 깊이 개입된 부분이라서 오히려 쓰기가 민망해서 생략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작성하지 않으면 완전히 잊혀질 것이기에 써보았습니다. 나름 역사로 따지면 현장에 있었던 사람사람의 목소리이니 훗날 언젠가 사료적 가치가 있으리라 생각해봅니다[footnote].....막말로...쪽팔려...쪽팔려;;; [본문으로]
오늘은 북경대 제 6회 국제문화제의 날입니다. 이번의 테마는 언어입니다. 현재 북경대의 유학생중에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한국학생들도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이어서 실시간 중계를 하고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은 지금 빨리 보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 주소 :
http://www.oir.pku.edu.cn/ICF2009/

실시간 중계 주소 :
http://www.oir.pku.edu.cn/whj/tv3.htm


...솔직히 그리 재미있지는 않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말 재미 없습니다. 그래도 중간중간에 나오는 외국학생들의 공연은 상당히 볼 만 합니다. 한국학생들은 이번에 "연극"을 준비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잘 될런지-_


북경대학교. 중국에 별 관심 없는 중국인들도 알고 있는 중국의 명문대학교입니다. 그리고 중국 근현대사를 한 몸에 간직하고 있는 학교입니다. 거칠게 표현하면 북경대학교의 역사가 곧 중국 근현대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비참합니다.

북경대학교의 휘장은 누가 무슨 의미로 만들었을까요? 유학생기숙사인 샤오위엔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을까요? 모택동이 북경대도서관 사서였다면서요? 실제 북경대학교생들에게 물어봐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그래서 북경대에서 몇 년을 굴러다닌 사람으로서 간단하고 쉬운 북경대학교에 대한 소개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목은 "바로 북경대"라고 정했습니다. 연재는 일주일에 두 편씩, 화요일과 금요일에 올라옵니다. 내용은 북경대학교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핵심적인 부분만 쪽쪽 빨아서 적어놓도록 하겠습니다. 필체는 이 글과는 다르게 딱딱한 말투를 최대한 배제하고, 여행가이드의 말투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이로서 맨날 IT 관련 글만 올린다는 소리는 안 듣게 되겠군요. 사실 잠수상태의 번역프로젝트를 해도 되지만, 별 반응이 없는 것은 둘째치고, 전묵선생님의 글을 막 번역하기에는 글 자체도 어렵고 제가 심히 존경하는지라......나중에 시간이 될 때 나름의 정성을 들여서 다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해도해도 너무한다 싶었습니다. 역사과인것이 조금은 후회스러웠습니다. 책을 놔둘 곳이 없어서 침대에 쌓아두고 웅크리고 자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습니다. 쌓여 있는 책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잠을 깊게 잘 수 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참다참다 결국 책장 3개를 들여놨습니다.



책은 일단 밀어넣어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아직 정리가 필요합니다. 그래도 과거보다는 백배는 좋습니다. 제일 좋은 것은 과거의 난장판을 보여드리는 것이겠지만...안타깝게도 그 난장판 사진이 없군요. 그 때의 제 방을 아시는 분은 정말 "깔끔해"졌다라고 표현하셨습니다. 혹은 "그나마 사람이 살만해 졌다"라고 표현하는 분도 있군요. 그 당시의 방은 그냥 여기저기 책들이 널려 있었고, 룸메이트의 책장까지 제 책들이 침투해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하하;;

어찌되었든 이제는 좀 인간답게 살 수 있을 듯 합니다^^ 하지만 다른 곳에 있는 책들은 계속 그쪽에 있어야 될 듯 하군요. 여유공간이 좀 생겨서 그쪽에서 몇십권정도는 가지고 올 수 있을 줄 알았건만....

개인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것은 이런 책들의 난립을 보고도 제 방에 들어오고 싶다는 녀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녀석은 그나마 정리된 지금의 방이 아닌, 난장판의 과거의 방도 보았는데 말이지요. 음;;; 이해가 안됩니다;;;;;;




중국은 한국과는 다르게 매년 9월에 신입생이 입학을 합니다. 그리고 등록날이 되면 파릇파릇한 새네기들이 몰려들고는 합니다. 저는 이 모습을 지금까지 몇 번이나 보는 것인지 왠지 썩은 냄새 풀풀 풍기면서 사진 찍고 돌아다닌듯 합니다.

오늘 글은 특별히 무엇인가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니 그냥 제 감상만 살짝살짝 쓸 생각입니다.

북경대학교 유학생 신입생 등록날의 모습입니다. 나름 교장까지 방문해주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전 현 교장선생님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许전교장님이 좋아요^^


중국에서도 인플루엔자가 유행이고, 남부쪽에서는 휴교사태도 벌어지는지라 공안국쪽에서 의무적으로 검사를 하게 했다고 합니다.


정신없는 내부의 모습입니다. 돈내는 곳. 등록하는 곳. 숙사구하는 곳등등. 저희때만해도 이런것 없었고....의자도 없었는데....


다른 각도에서 좀 이른시간에 찍은 모습입니다. 그나마 좀 한가해보이죠? ^^


앞쪽에 있는 한국유학생회입니다. 한국유학생들의 연락번호를 받고 있답니다. 저기 오른쪽에 이마에 손을 올리고 계신 분이 학생회장님. 그러고 보니 최초의 여자 학생회장이구나;;;


이렇게 연락처를 적고 있습니다. 아유~~ 파릇파릇하고 어벙한 것들.


하지만 올해 역사과에 딸랑 8명의 후배에....더 중요한 것은 딸랑 2명만이 여자후배라는 점에서 심히 짜증을 일어나고 있습니다. 올해는 신입생 환영회 가지 말까. 우아아아아아앙!!!!! 또한 90년대생들이 이제 주축을 이루게 되니 풋풋한 모습이 있어야되는데.....무엇보다....어여쁜 후배......를.....못 봐서.....음....-_ 실망! 이라고 하면 안되려나;;; /먼산

북경대학교에 새로운 유학생 기숙사가 들어오는 것은 모두가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 온갖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는데, 오늘 현장을 방문하여 하나부터 끝까지 알아보았습니다. 그 동안 궁금했던 사항을 한 번에 풀어드리겠습니다.

돈 덩어리를 환영합니다로 보이는 건 나뿐일까나...



1. 현재 유학생 기숙사로 들어갈 수 있나요?
새로운 유학생 기숙사는 다 완공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단지 6호동만 완성이 되었으며, 약 240개의 침대가 준비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입주자격은 1년 이상 북경대에서 공부를 하는 자비 신입생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럼으로 반년이나 3개월의 단기어학연수는 입주할 수 없고, 재학생들 역시 입주할 수 없습니다. 또한 기숙사를 포함하는 장학금을 받는 사람들 역시 입주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나머지 기숙사가 완공되면 수용 가능 인원이 2000여명으로 늘어나기에 재학생도 받을 계획이라고 합니다. 이 경우도 장기위주로 받을 것으로 보이며, 장학금은 받지 않을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기숙사는 내년(2010년) 9월 이후에는 입주가 가능할 것이라고 합니다. 단지 현재 6호동 옆에서 거의 완성단계에 있는 4호동은 조금 일찍 받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 정확하게 결정된 사항은 없습니다.

확실히 신상은 다르다. 예쁘긴 하다.





2. 가장 중요한 방에 대한 정보들
A형은 방 2개에 거실 하나 그리고 화장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방 하나에 2명이 살게 됩니다.그러니 총 4명이서 사는 것입니다. 지금 샤오위엔 8호동 보다 조금 더 크지만, 한 방에 2명씩 살게 됨으로 사실상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줄고, 비용은 비싸지는 상황입니다.

A형 전경. 딱 봐도 좁아보이지 않는가?

창문 옆에서 자면 기분이 좋으려나. 아님 아침마다 괴로우려나.


정확하게 평수는 모든 것을 다 합쳐서 44평방미터이지만 한 크기가 약 14평방미터이고, 그것을 2명이서 나누어서 쓰는 것이기에 한 사람당 7평방미터밖에는 사용하지 못합니다. 사진으로 보셔도 비좁다는 느낌이 드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가구는 그래도 설계가 잘되어 있다. 하지만 상당히 부족해보인다.

겉보기는 예뻐보이나 실제 공부할때에는 그리 유용하지 않을 책상과 의자.


가구는 신상이라는 느낌이 팍팍 들고, 옷장은 나름 괜찮은 수준입니다. 그러나 책상과 의자가 상당히 문제가 심각합니다. 책상의 높이는 상당히 낮아서 공부하기 불편한 수준이고, 의자는 무슨 생각인지 색도 맞지 않는 야시장 의자입니다. 여기서 공부하는 것은 글렀습니다.

거실의 모습입니다. 4명이서 쓰기에는 너무 좁아보입니다. 솔직히 샤오위엔 6호동의 거실보다 더 작은 듯도 합니다.

대략적인 크기를 아시라고 모델역할을 해주신 삼국지의 유표님~~ 감사감사~


이 곳의 한 사람당 가격은 하루에 64위엔(약 만삼천원)이며, 한달(30일)로 계산을 하면 1920위엔(약 40만원)이나 됩니다. 그리고 방을 혼자서 쓸 수도 있으며, 이 경우 정확하게 2배 가격인 하루 128위엔을 내야 합니다. 아예 모르는 분을 위해서 잠시 설명을 드리자면, 샤오위엔勺园의 꾸린 1,2,3호동은 하루에 30위엔이어서 한달에 900위엔이며, 사실상 새로운 기숙사와 시설이 비슷하고 오히려 좋은 6,7,8호동은 한달에 1800위엔정도입니다.

화장실이다. 심히 비좁다. B형도 동일한 화장실이다.

4명이서 한 화장실을 쓰는 거나 공동화장실이나 머가 다른걸까?







B형은 방 하나에 화장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방 하나에 2명이 살게 됩니다. 방의 크기는 위에서 설명한 A형 방과 거의 비슷하고, 정확하게 말하면 조금 더 작습니다. 이 방의 크기가 샤오위엔의 1,2,3호동의 방의 크기와 거의 비슷합니다. 단지 폭이 좀 좁은 길죽한 모양입니다.

더 좁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가구배치를 이따구로 했을까? 차라리 2층 침대는 놔두지..후...

사람과의 비교를 위해서 희생해주신 삼국지의 유표님께 감사를...


정확하게 평수는 모든 것을 다 합쳐서 22평방미터이지만 한 크기가 화장실을 제외하면 실제 생활공간은 약 14평방미터이고, 그것을 2명이서 나누어서 쓰는 것이기에한 사람당 역시 7평방미터밖에는 사용하지 못합니다. 이곳도 사진으로 보시면 아시겠지만 비좁죠?

높이가 큰 것과 재질이 좋은 것은 마음에 드나 기본적으로 설계자체가 꾸려서 공부하기에는 에러.

의자에서는... 난 침묵하고 말았다. 허허허;;;;


가구는 기본적으로 A형과 동일합니다. 단지 가구 배치가 조금 다른 모습입니다만, 어차피 가구배치야 입주한 사람들이 마음대로 변동할 수 있기 때문에 별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구석에 쳐박혀 있는 책상이여. 일사광선 제대로 받으며 공부를?;;;

아... 한숨만이 나오는구나.


이 곳의 한 사람당 가격은 하루에 70위엔(약 만사천원)이며, 한달(30일)로 계산을 하면 2100위엔(약 42만원)이나됩니다. 그리고 이곳도 역시 방을 혼자 다 쓸 수 있습니다. 가격은 A형처럼 2배 가격인 하루 140위엔을 내야합니다.





3. 부대 시설
각 층의 양쪽에는 다용도실이 있어서, 빨래와 요리를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샤오위엔과 거의 비슷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샤오위엔과 비교해서 비교적 까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세탁기가 한 층에 4개밖에 없다는 것은 세탁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하이얼세탁기~~~

유료다. 가격은 그럭저럭.


세탁기는 한 층에 양측에 2대씩, 총 4대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무료가 아닌 유료입니다. 표준 세탁은 동전으로 3원을 넣어야 합니다. 그렇게 비싼 금액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역시 걱정이 되는 것은 이불빨래를 널을 수 있는 공간이 없고, 방도 비좁아서 특별히 세탁물을 놔둘 곳이 없으리라는 점입니다.

이 주장은 정말 부러웠다. 나 가정주부 다 된건가?

싱크대도 상당히 깔끔하고 좋았다^^ 잇힝~


상당히 마음에 드는 조리구역입니다. 다용도실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깔금하게 되어있어서 편안하게 요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귀차니즘에 시켜먹거나 학교식당에서 먹는 상황에서 한층에 2개씩 있는 요리구역은 충분해 보입니다.

안전을 위한 비상구의 모습입니다. 머...특별히 예쁜 것은 없군요.




지하 2층에는 식당이 있습니다. 아직 식당이 들어와 있지는 않으나 10월중순정도부터는 영업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방식은 학교식당식이 될 것으로 예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맛은 학교식당급에 가격은 몇 배 부르는건 아니겠지요?

예쁘지 않은가? 식당으로 가는 길이다. 참고로 기본 출입구층은 B1, 즉 지하1층이다. 계단 말고 엘레베이터도 당연히 있다.

아직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은 식당전경.





4) 총평
가능하면 신 기숙사로 들어가지 마시고, 왠만하면 샤오위엔(勺园)의 6,7,8호동을 들어가기를 강력추천합니다. 새로운 기숙사는 비용은 비싸고, 개인 공간을 줄어들었고, 공간배치도 엉터리이며, 법학과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경우에서 수업하는 교실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또한 내년 초까지는 계속 공사가 진행되기에 조용하지도 않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직원분은 친절하게 대응해주고 참 좋았으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기숙사보다 좋지도 않은 시설과 구조로 더 비싼 돈을 받는 것 때문에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없습니다.




5) 그 외의 사진들.

전설의 철문이 열린다~~ 두둥. 농담이고, 현재 이미 입주한 사람들도 있다.

요것이 6호동.


북경대학교 박사후(포스닥) 숙소.

현재 열심히 만들어지고 있는, 1,2,3,4,5호동. 참고로 가운데 있는 1호동은 유학생기숙사가 아닌 호텔임.


북경대학교의 유학생 기숙사인 勺园(샤오위엔 shaoyuan) 2호동의 4층에는 열람실이 있습니다. 사실 저 자신은 열람실에서 공부하기보다는 침대에 들어누워서 책을 보는 스타일입니다. 그러나 올해 베이징의 기온은 더위에 강한 저로서도 버티지 못할 정도였기에, 에어콘이 빵빵 나오는 이곳으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찍은 것입니다. 작업중의 자리는 지저분의 극치...)

비록 열람실이라도 저는 최적의 작업환경?!을 추구하기에 어느 사이에 아름다운?! 저만의 자리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더위가 가시면 다시 방으로 돌아가서 작업을 하겠지만, 그 전까지 있었던 추억의 자리로 이렇게 기록에 남겨둘까 합니다.


열람실로 들어오셔서 왼쪽 모서리에 저의 자리가 있습니다. 심심하면 음료수 들고 찾아오셔요.

반대쪽에서 보면 이렇게 배치가 되어있습니다. 나름 제 영역만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실 북경대 열람실에는 따로 전용자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맨날 죽치고 있는 사람들이 저처럼 만들어놓은 각자만의 공간이 몇몇 군데 있답니다.

자세히 보시면 파란색 인터넷 선이 연결된 것이 보이시죠? 잘 기억해두십시오. 나중에 설명 들어갑니다^^


사실 작업중에는 보조 키보드를 꺼내서 작업을 합니다. 안 그러면 손목이 아파요-0-;; 또 제가 노트북을 끄지 않다보니...열에 녹았는지 노트북의 키보드의 몇몇 버튼이 잘 안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보조키보드도 좀 작고 키감도 좋지 않아서, 대형크기의 키보드를 살까 생각중에 있습니다.

지저분해보인다고요? 사실 책은 치워놓은 거랍니다. 책까지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보시면 주위로 접근하기 싫으실지도....--


정면에서 찍은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듀얼모니터를 강력추천합니다. 그러니까 노트북 화면과 확장모니터 화면이 같은 것이 아니라, 이어지듯이 연결되는 듀얼모니터를 추천합니다. 이렇게 되면 작업을 할 시에 자료를 보기가 좋습니다.


바로 오른쪽에 있는 캐비넷의 한 줄을 제 전용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사실 여기 캐비넷은 슬슬 정리할때가 온것 같습니다. 이미 2년전에 졸업한 제 친구녀석의 책까지 아직 있더군요. 수북히 쌓여있는 포스트잇은 제가 이런저런 잡상이 떠올랐을때 적어두고, 일단 버려둔 거랍니다. 나중에 어떻게든 쓰이더군요--

요즘은 나름 몸도 생각해서 비타민에 홍삼정까지--



열람실 역사상 최초의 삽질입니다 음하하...기념으로 놔두기 위해서 따로 찍었습니다. 이 선은 인터넷 선입니다. 열람실에서는 유표형님이 가져다 둔 공유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공유기는 입구에서 오른쪽에 있으며, 무선은 지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선택한 자리는 왼쪽 끝자리. 그래서 바닥을 통해서 인터넷 선을 연결해버렸습니다. 제가 알기로 열람실 역사상 저 같이 한 인간은 없습니다. 음하하하;;;; 삐질...



사실 열람실에서 이렇게 자리를 잡는 것은 그리 잘하는 짓은 아닙니다. 다른 분의 공부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 미안한 마음에 저도 몇가지 물건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위에 사진에 있는 것은 음이온정화기. 나름 몇 만원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을 열람실에서 작동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기모기향 장비도 제가 가지고 온 것입니다. 쓰고 싶은 분은 마음대로 써주시기 바랍니다.


오랜만에 잡담글이었군요. 요즘 저는 이러고 살고 있습니다. 하하하^^:::

* 여친님께서는 이 글을 보시고는 포스팅할게 그리도 없었냐고.....방정맞게 왜 이런걸 자랑하냐고........하십니다....흑....자....자랑이라기 보다는.......나름 예쁘게 꾸며놔서 뿌듯함에 올린건데...올린건데......흐흑..방정 맞게...방정맞게...ㅠㅠ 미워!!!

한국의 경우 서울대가 최고로 우뚝 서 있다. 고려대와 연세대가 많이 성장하였다고 하지만 서울대의 한국에서의 위상에는 아직 도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서울대의 학계독점과 같은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그에 반하여 중국은 조금 다른 상황이다.

한국에서는 북경대가 가장 유명하다. 하지만 현재 중국인들이 뽑고 있는 최고의 대학은 청화대이다. 그리고 그 뒤를 북경대가 바짝 쫒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상해의 복단대와 교통대학 역시 결코 청화대와 북경대에 밀리지 않는다. 최근에는 홍콩대학과 같은 홍콩쪽 대학들이 급격하게 떠오르고 있다. 이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를 하자면 "서울대 같은 절대강자가 없는 춘추전국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춘추전국시대 속에서 각 대학들은 경쟁력 향상을 위해서 죽도록 노력을 하고 있다. 이른바 긍정적인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쟁체계 속에서 각 대학은 설비는 물론이고, 교수와 학생들에 대해서도 다양한 정책을 통해서 발전하고 있다.

절대 강자 서울대 아래에서 제대로 된 경쟁이 안되고 있는 한국과 대학들의 춘추전국시대인 중국.
어느 것이 더 좋을지는 개개인마다 다른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의 예상으로는 춘추시대의 중국 대학들이 계속적으로 빠른 속도로 발전할 것으로 생각되기에 그들의 이런 모습이 부럽다.

쉽게 서울대 해체라는 말을 언급하지는 않겠다. 서울대의 형성은 그 역사가 깊은 만큼 해체도 실질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부의 일정한 완화정책은 계속 되어야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고등교육시스템의 미래가 너무나 암울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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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설을 하자면 : 한국 대부분의 대학의 생존자체가 문제인 상황에서 먼넘의 얼어죽을 경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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