샨쟈오띠(三角地 삼각지)는 현재 북경대학교 100주년기념당 옆에 있는 모르는 분들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아주 조그마한 곳입니다. 삼각형으로 생겨서 샨쟈오띠라는 이름이 붙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샨쟈오띠에는 북경대의 열정이 살아숨쉬고 있었습니다.

이게 먼가?? 하시죠. 이해합니다. 현재의 샨쟈오띠 모습입니다. 과거에는...



이 샨쟈오띠는 위치상 숙소와 강의건물의 사이에 있어서 거의 매일 지나쳐다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곳에는 다양한 강의 소식이나 여러가지 일들에 대한 포스터들을 자유롭게 붙이고는 했습니다. 어두운 과거라면 문화대혁명의 초기 북경대학교에 붙었던 포스터가 바로 이곳에 걸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친 문화대혁명을 시작했다는 상처를 얻게 되었지요. 개혁개방의 시기가 되면서 자유로운 생각들과 무서울 정도의 정부비판이 샨쟈오띠에 실리게 됩니다. 그리고 천안문사건의 시작에도 바로 이 샨쨔오띠에 내걸린 포스터가 있었습니다.

과거의 모습입니다. 저도 이 시절을 경험했습니다. 사실 여기 뿐만이 아니라 위의 사진의 둘레 전부가 온갖 판넬과 포스터로 감싸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2007년 11월. 베이징 올림픽을 위해서 학교환경을 정비한다는 이유로 자유롭게 학생들이 포스터를 붙일 수 있던 공간은 철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측에 의해서 붙여지는 공간만이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샨쟈오띠에는 온갖 광고들이 붙어있기도 하였습니다. 난잡하다면 난잡하다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경대의 자유로운 열정을 상징하는 샨쟈오띠가 없어진 것에 대해서 "북경대의 열정은 죽었다"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또한 교내정비를 한다면서 샨쟈오띠를 없애놓고서는 기업들에게는 고액을 받고서 샨쟈오띠의 자리를 대여해주고 있는 현실에서 다시 한 번 북경대의 열정은 죽었다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모든 것은 핑계일뿐, 이래저래 골치 아픈 샨쟈오띠를 없애버린 것이지요.

그러나 비록 과거의 샨쨔오띠는 없어졌지만, 未名BBS라고 하는 학교내 BBS에서 샨쟈오띠보다 더욱 빠르고 강력하며, 더욱 강압적인 관리를 피해서 노력하며 북경대의 열정을 죽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요즘 좀 정신이 없어서 자주 글을 못 올리고 있습니다. 이거야 올리기로 약속했으니 쓱쓱;;
* 혹시 궁금하시거나 제가 쓰면 좋겠을 주제를 던져주시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굳이 써야되는 주제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머리 속에서는 안씨...안씨...안씨....만 반복되고 있습니다.(논문...싫어!!)

북경대학교의 유학생의 보금자리인 북경대 안의 UN 샤오위엔과 북경대의 3대 상징물인
북경대의 정신 보야탑(博雅塔) 북경대의 마음 웨이밍호(未名湖) 그리고 북경대의 머리 도서관을 소개했습니다. 이번에는 북경대를 오신 분들은 반드시 사진을 찍고 가는 북경대서문을 소개해보겠습니다.


북경대학교 서문은 원래 북경대학교의 문이 아닙니다. 1952년 북경대학교와 합쳐진 연경대학(燕京大学)의 문이었습니다. 연경대학교 졸업생들의 모금으로 만들어진 문입니다. 편액은 북경대학교 도서관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모택동(毛泽东)의 글씨입니다. 또한 문 앞에 당당하게 서 있는 두개의 돌사자(石狮)은 원명원(圆明园)의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북경대학교 서문은 도쿄대학교의 아카몬(红门)과 같이 북경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북경대학교에는 여러개의 문이 있습니다. 서문은 사실 정작 북경대학교 학생들은 그리 자주 이용하는 문은 아닙니다. 북경대학교 신입생들은 남문을 통해서 처음 북경대학교로 들어오게 됩니다. 또한 지하철역이 있는 동문은 가장 보편적인 문으로 생각되고는 합니다. 무엇보다 서남문이야 말로 북경대생들이 자주 출입하는 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문은 그 유려한 모습으로 인하여 수 많은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는 명소입니다.

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잠시 출입통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북경대학교는 전통적으로 외부에서 수업을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매우 관대합니다.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되는 모택동부터가 자유로운 북경대의 청강분위기에서 만들어진 인물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부인들이 학교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매우 반겼습니다.

그런데 2008년 6월부터 학생증과 신분증 검사를 통해서만 출입을 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 당시의 이유는 베이징 올림픽의 안전을 위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북경대의 교직원들과 학생들은 상당한 불만을 표시하였지만 일단은 협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올림픽이 끝나고, 주변의 다른 대학교들도 신분증 검사를 끝낸 지금(2009년 11월)까지도 북경대만은 계속 신분증 검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북경대학교의 자유로운 학풍을 방해하는 일이며, 교직원과 학생들의 불만도 한계에 달할 정도입니다. 정말 빨리 개방되었으면 합니다.

× 여행객들을 위해서 : 현재 북경대학교는 출입증 검사를 합니다. 북경대에 가실 때에는 반드시 여권을 지참해주시기 바랍니다. 입장을 하면서 이름과 여권번호를 공책에 적으시면 됩니다. 혹은 중국어 잘 모르는듯한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시면서 여권을 보여줘도 통과시켜주고는 합니다.

언제나 우글우글;;;







* 예약해놓아서 당연히 공개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안되서어 서둘러 공개-0-;;;

북경대의 정신 보야탑(博雅塔) 북경대의 마음 웨이밍호(未名湖) 에 이어서 마지막으로 북경대를 상징하는 3대 건축물이자 "북경대의 머리"인 북경대학교 도서관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도서관이라고 하니까 벌써부터 지루해보이지 않습니까? 되도록 야사위주로 재미있게 구성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북경대학교 도서관 홈페이지 http://www.lib.pku.edu.cn/portal/index.jsp


북경대 사진을 찍는 곳-_-;; 매일 관광객들이 바글바글;;;;



1. 북경대학교 도서관 간략역사
1898년 7월 청 정부에 의해서 경사대학당이 만들어졌을 때만 해도 소장하고 있던 책은 매우 적었고, 전문적으로 도서를 관리하는 기구도 없었다. 1900년 팔국연합국이 베이징[각주:1]을 공격했을 때 교사가 점거되었고, 도서도 많이 손실되었다. 1902년 1월 경사대학당이 다시 만들어지고 , 10월에 경사대학당 장서루(京师大学堂藏书楼)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는 중국의 초기 현대형도서관이었습니다.

베이샤탄 시절의 북경대학교


그 당시 각 지방의 도서를 수집하였고, 장서가들의 기부로 수 많은 책들이 모이게 됩니다. 동시에 훗날 합쳐지게 되는 연경대학교에서도 수 많은 재원을 투자해서 고서들을 모으게 됩니다. 이것은 현재 아시아 최다-최고 장서를 자랑하는 북경대학교 도서관의 초기 장서를 이루게 됩니다.비록 일본제국의 침략기간에도 어느 정도 손실을 당하고, 특히 중화민국이 타이완으로 가는 와중에서 최고급 고서들을 많이 가져가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형태상 이동이 어려운 도서들은 많이 유지됩니다.

연경대학교 도서관. 지금은 북경대학교 당안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어연수반 학생들이 자주 수업받는 으어원로우(俄文楼)의 맞은편에 있습니다.

서남연합대학 시절의


그리고 1962년 중화인민공화국의 대학개편을 맞이하여 북경대학교가 문과대학교로 향하게 됨으로서 연경대학교의 도서와 북경대학교의 도서 및 청화대학교의 고서들이 대량 북경대학교로 오게 됩니다. 다만 농업대학교쪽에서 농업관련 고서들을 가지고 가지만 이는 전체 장서에서는 일부분에 불과했습니다.

현재도 개장되어서 운영되고 있으며, 1998년 동로우가 신축되기 전까지의 북경대학교 도서관.



2. 북경대학교와 중국근현대사의 거물들.
북경대학교 도서관에서 일했던 인물들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일단 중국에 대해서 잘 모르는 한국분들도 알고 계시는 모택동(毛泽东)은 북경대학교 도서관에서 사서보조로 근무했습니다. 사실 말이 사서보조이지 사실상 알바급이나 될 만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북경대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모택동은 북경대학교의 대학자들의 수업을 마음대로 듣고, 북경대학교의 수 많은 도서를 읽었다는 것은 이미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모택동 사서보조 기념비-_;;

중국공산당창시자 이대(李大钊)


중국공산당의 창시자 이대쇠(李大钊)의 경우는 아예 북경대학교 도서관 관장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혹자는 모택동이 이대전과 직접 만났을 가능성에 대해서 궁금해하시는데, 당시의 이대전은 누구나 아는 대단한 거물이었고, 모택동은 단지 도서관 사서보조정도의 인물이었습니다. 모택동이 이대전의 강의를 들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둘이서 따로 이야기했다는 것은 훗날 모택동을 띄워주기 위한 선전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이 편액의 글씨가 등소평이 쓴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현재 중국을 통치하고 있는 중국공산당과 수 많은 인연이 있기에 문화대학명기의 그 혼란 속에서도 장서에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당시 불교석상의 목이 짤려나가고, 일부 고서적이 봉건주의의 유물이라며라고 불태워지기까지 했던 당시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등소평(邓小平)전 주석은 "북경대학교도서관(北京大学图书馆)" 편액을 써서 주게 됩니다. 쟝저민(江泽民)전 주석도 1992년에 바이니엔슈청(百年书城 백년서성 100년의 책의 성)이라는 글을 남기게 됩니다.


3. 자랑스러운 북경대학교 장서량
아시아 학교 도서관 중에 최다의 장서량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2005년까지 600여만책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150만책은 문과쪽 사람들은 눈물 붉히는 고서들입니다. 이 중에서 20만책은 5C~18C까지의 국보급 고적들입니다[각주:2].

하나하나가 보물인 서적들이 있는 고적실(古籍)입니다. 그나마 밖에 있는 책은 그리 비싸지않습니다. 안쪽 보관실에 있는 건....하악하악-0-


이 부분은 휘리릭 끊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책이 많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분야만을 찾아보기 때문에 별 의미는 없다고 봅니다. 저의 전공인 역사쪽에서는 북경대에만 있는 고적들이 쌓여 있고, 다른 도서관에 갈 필요 없이 북경대학교 도서관에서 사실상 대부분의 것을 처리 가능하기에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고적을 봐야되는 전공이 많은 것도 아니고......

과거 잡지 열람실입니다.(过刊阅览室) 여긴 그나마 깨끗한 곳이랍니다. 저는 전공상 자주 안 가지만 근현대사분들은...쯔쯔....


그래도 좋은 것은 현재 수 많은 전자서적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文渊阁四库全书에서 中国基本古籍库로 업데이트 되었고, 그 외에 영어권과 중국권의 수 많은 학위논문들 서비스와 연계가 되어 있어서 상당히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학교 밖에서도 프록시나 VPN등으로 접속할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학교안에 편하기에 저도 살기 힘든 기숙사에서 살고 있답니다.

북경대학교 도서관 홈페이지 http://www.lib.pku.edu.cn/portal/index.jsp



4. 현재의 북경대학교 도서관은?
현재 북경대학교 도서관은 1975년에 만들어져서 2005년에 보수를 한 시로우(西楼)와 1998년 중국의 유명한 사업가인 리즈청(李嘉诚) 선생님의 기부[각주:3]로 만들어진 똥로우(东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총 면적 53000평방미터입니다. 그러나 열람석은 4000여개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마다 자리 싸움으로 정신이 없습니다.

리즈청 선생님!!! 감사-0-!


개방시간은 평일에는 오전 8시부터 저녁 10시입니다. 주말에는 더욱 더 단축됩니다. 24시간 개방되어 있는 곳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중국의 본과 기숙사는 아직도 11시면 전기를 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대신 기숙사에 공부할 수 있는 곳이 있어서 그곳에서 밤에 공부를 할 수 있기는 합니다. 더욱 큰 문제는 사물함을 하루 동안만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만약 아침에 가지고 가서 열쇄로 사물함을 잠그고, 급한 일로 다음날 가게 되면 1층에서 끊어진 자물쇠와 내부 물건을 받게 됩니다[각주:4].

북경대도서관은 학생증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외부분들은 정문으로 들어가서 열람증을 발급받아야됩니다. 그러니 여행 온 분들은 그냥 안에 안 보셔도 무방합니다. -0-



闭架로서 대출종이를 주면 책을 줍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공개도서관보다 여기에서 책을 빌리는 경우가 많아서^^:::




인문과학공개열람실(人文社科区)입니다. 역시 제가 자주 가는 곳 중에 하나-0-;;


컴퓨터 열람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열람하는 것과 학교내에서 열람하는 것이 차이가 없기에....저의 경우 저기서 왠만하면 안합니다. -0-;;


새로 개장한 서로우 도서관의 전경입니다. 엣찌있죠? ^^:::

눈 내리던 어느 날-0-


북경대학교 도서관 전경입니다. 위치로 봐서 理校 옥상에서 찍는듯 합니다. 하지만 저곳은 학생들이 올라갈 수 없기에 저도 신기한 각도이군요.


일단 북경대학교 3대 상징물 부분도 끝났습니다. 다음은......북경대학교 서문이겠군요. 거기까지야 기본이겠고 그 다음을 무엇을 해야되는지 고민입니다. 흐음...........솔직히 그 다음들은 그게 그것들인 거라서....쩝....투표라도 해야되나-_;; 남문? 백주년기념당? 중국학생 기숙사? 逸夫楼? 红楼? 에드가스노우?? 중국고대사연구센타? 三角地? 三教?二教?一教?쩝....


  1. 당시에는 북평(北平) [본문으로]
  2.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이 중에서 한질만 훔쳐도 평생 놀고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3. 한국에도 비슷한 분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좀 더 많이졌으면 합니다. [본문으로]
  4. 전...두 번을 이것을 당하고 그 다음부터 도서관에서 아예 공부를 안합니다. -_-;; [본문으로]
북경대를 대표하는 3대 상징은 보야탑과 웨이밍호 그리고 도서관입니다. 저번에는 북경대의 정신 보야탑(博雅塔)을 소개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북경대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 웨이밍호(未名湖)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북경대의 정신 보야탑(博雅塔)에서 나오는 호수 자체가 웨이밍호랍니다.

* 웨이밍호(未名湖)의 작명시기는 1920년대입니다. 한국 외래어표기법에 의거하면 웨이밍호가 맞습니다. 많은 분들이 한국 한자 독음으로 미명호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틀린 것입니다.

제가 찍은 사진이지만..잘 찍었다~!


웨이밍호는 청왕조 원명원(圆明园)의 부속정원으로서 화곤(和珅)이라는 당대의 고관의 화원인 수춘원(淑春园)의 인공호수였습니다. 그 당시의 유적은 사실상 돌배(石舫)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현재는 돌로된 기초만이 남아 있는 이 돌배는 이화원에 남아 있는 돌배를 모방해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돌배의 의미를 생각하면 결코 복제해서는 안되는 죄입니다. 그래서 화곤도 권세가 추락할 당시에 돌배로 한 소리 듣게 됩니다. 나중에 이 돌배에서 술을 마시면 졸업을 못한다는 속설이 만들어질 정도로 분위기가 좋으면서 돈 없는 사람들이 올 만한 곳으로 나름 자리잡았지만 말이지요.

웨이밍호에 남아 있는 돌배

이화원의 돌배


돌배(石舫)의 의미는?
"물은 배를 띄우지만, 배를 뒤집을 수도 잇다..[각주:1]" 한번 쯤 들어보셨나요? 여기서 물이 비유하는 것은 일반백성들이고 배가 의미하는 것은 왕조입니다. 백성들은 왕조를 유지하는 근본이지만, 백성들은 그 왕조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백성들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것에 귀를 기울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럼 돌배를 만들어서 절대 침몰하지 않게 만들면 왕조도 영원히 가는거네? 그따위 생각으로 돌배를 만들게 됩니다. 딸랑딸랑 아부하는 실력은 우수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원래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병신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군요. 또 그 말에 혹한 황제도 똑같은 놈입니다[각주:2]

여기가 보통 사진을 찍는 포인트입니다. 웨이밍호 비석을 뒤로 보야탑이 보이는 최고의 앵글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훗날 북경대학교와 합쳐지는 연경대학(燕京大学)이 이곳에 학교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이름이 없었던 이 호수에 누군가 이름을 붙여주어야했습니다. 그래서 온갖 이름이 다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저도 감히 번역작업을 천천히 진행하고 있는 전묵(钱穆) 선생님이 웨이밍호(未名湖)라고 작명하셨습니다. "이름 없는 호수"라는 뜻입니다. 너무 아름다워서 감히 이름을 지을 수 없다는 뜻인 동시에 한명의 지식인으로서 명성보다는 이름 없어도 아름다운 호수를 본 받으라는 의미에서 만들었다고 합니다[각주:3].

* 제가 천천히 번역중인 전묵선생님의 글을 보시려면 호수 위의 한가로운 생각(湖上闲思录)

북서쪽변입니다. 저의 사진 실력일까요? 아님 원래 예쁜데 이것밖에 못 찍는 걸까요?


연경대학교가 북경대학교와 합쳐지고 문화대혁명의 시기가 지나는 그 모든 시간 속에서 미명호는 계속 북경대인들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공부로 지친 사람들은 이 곳으로 천천히 걸어와서 조용히 보야탑이 비치는 웨이밍호를 바라보고는 합니다. 이른 새벽 1KM 정도의 호수 주변을 돌면서 체력을 잃지 않으려 하는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웨이밍호 주변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조깅을 하는 느낌은 말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11시면 점등시간이 되어버리는 4명이서 동시에 같이 사는 북경대 본과 기숙사에서 연인과의 달콤한 시간을 보내기에는 이곳보다 좋은 곳은 없다고 감히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동물의 왕국"이라고 농담처럼 이야기하고는 하답니다. 반대로 그 연인과 헤어짐으로 슬픔에 잠길 때 위로해주는 찰랑거림이 있습니다. 사실 몇 년에 한 번씩 웨이밍호에서 자살사건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웨이밍호의 위로도 그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나 봅니다.

아렇듯 북대인이라면 그렇게 수 많은 추억들이 미명호에 있을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북대생들이 반쯤 장난으로 만든 "북대인이라면 꼭 해보아야될 일" 중에서 웨이밍호에서 수영해보기도 있었군요. 전 안해봤습니다. 피부가 안 좋아서...-_
 

겨울 웨이밍호에는 색다른 재미가 있습니다. 사진에 무엇인가가 보이시나요?

바로 스케이트를 탈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스케이트와 의자스케이트 두 종류가 있습니다. 개인이 스케이트를 타고 갈 수도 있고, 과거에는 난잡했지만 지금은 학교에서 거의 직접적으로 운영하는 대여하는 곳에서 빌려서 탈 수 있습니다.

제가 눈 오는 날 찍은 사진입니다. 열심히 수업 가는 길에 찍었던지라 앵글이 나이스하군요-_-!


웨이밍호에 대한 이야기는 이 쯤에서 접도록 하겠습니다. 웨이밍후 주변을 소개하려면 아직 멀고도 멀었습니다. 괜히 웨이밍후와 그 주변이 2001년에 "중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로 선정된 것이 아닙니다. 역사가 쉼 쉬는 주변 이야기는 다음부터 하나하나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은 타켓은 북경대 도서관이군요. 솔직히 제 느낌상으로는 제일 날로 먹을 만한 곳입니다. 소개하기 시작하면 복잡하겠지만, 어차피 여행객들은 안에 못 들어오니까 적당한 역사만 소개하고 은근한 자랑질만 해주면 되겠죠. 음하하하-_;;; 안쪽도 소개해야될까요? 별 것 없는데;;; 그냥 컴퓨터에 책...아..시스템 소개를 살짝 하면 되겠군요. 흐음...


  1. 水则载舟,亦能覆舟《荀子,哀公》 [본문으로]
  2. 그리고 대운하라는 돌배를 지으려는 어느 분....반성하세요. [본문으로]
  3. 하지만 지금은 중국 사람중에 이 "이름 없는 호수"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쿨럭.... [본문으로]
북경대를 소개 할 때 절대 빠져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저희들은 이것을 뒤섞여 엉망진창이다(一塌糊涂 yi ta hu tu)으로 말장난을 한 하나의 탑, 호수, 도서관(一塔湖图 yi ta hu tu)라고 합니다. 북경대의 정신인 보야탑과 마음인 미명호 그리고 지성의 북경대학교 도서관만은 꼭 보셔야 됩니다.

오늘은 우선 보야탑(博雅塔)의 역사부터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보야탑이 미명호로 쓰러지는 날이 바로 북경대학교가 망하는 날이라고...


보야탑의 북경대생들에 있어서의 가치를 알려면 북대인들이 반쯤 장난으로 하는 말을 알려드리는 것이 더 좋습니다. 조금은 과장되었고 황당하게 느껴지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보야탑은 북대인들의 영혼이 모여 있다.  북대인들의 지혜와 영기가 서려 있는 곳이다."
"미명호가 북대의 눈이라면, 보야탑은 북대의 이글거리는 눈동자이다."

눈 오던 어느 날 찍은


보야탑은 총 13층으로 높이가 27미터에 이릅니다. 내부는 비어있으며 나선형계단으로 꼭대기까지 연결이 됩니다. 매년 개교기념일이면 개방을 했다고 합니다.[각주:1] 올라가본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주변의 청화대학부터 멀리는 이화원까지 보이는 최고의 경치를 자랑한다고 합니다.

미명호를 끼고 찍은 사진. 미명호에 대해서는 다음편에....


1920년대, 당시에 현재의 북경대학교 부지는 추후 북경대학교와 합쳐지는 연경대학교(燕京大学)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록 하이디엔취가 조그마한 연못들로 이루어진 곳이며, 비교적 물이 풍부한 곳이었지만, 먹을 수 있는 물은 매우 적었습니다. 식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깊은 우물을 파서 지하수를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물을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음을 줄이기 위해서 건축물을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예쁜 건물은 사실 "거대 물펌프 뚜껑"이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사실 베이징을 비롯한 북방지역의 식수문제는 지금까지도 내려오는 고질병입니다. 사실 원래 황하가 지금과 같이 고정된 루트로만 가지 않고, 자주 범람하며 물길이 변하는 시대에는 오히려 괜찮았지만, 지금은 황하가 고정이 되었고 하북지역의 식수난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50년대부터 난수이베이띠아오(南水北调)공정을 계획해오고 있습니다. 가장 간단하게 해석을 하면
장강의 물을 베이징까지 올려보낸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평지지형에서 서로 물길을 뚫는 계획에 50년 이상을 연구하며 계획하고 있는 중국을 보면서[각주:2] 산지에 순식간에 물길을 뚫겠다는 대운하를 어떻게 봐야될지는 너무 명확해 보입니다.

어느 안개 낀 날에....


당시 연경대학교의 철학과 교수였던 보션꽝(博晨光)이 자신의 숙부인 보야(博雅)에게 돈을 지원 받게 됩니다. 그리고 1924년 7월에 드디어 "거대 물펌프 뚜껑"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단순한 뚜껑은 아니었습니다. 보야탑은 북주(北周)시대에 만들어진 통주(通州)의 열등탑(燃灯塔)을 모방하여 만들어졌습니다. 단순한 물펌프 뚜껑이 아니라, 연경대학의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어울리는 건축물을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결과 물펌프 뚜껑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건축물이 태어나게 됩니다.

특히 미명호에 살며시 비치는 보야탑을 벤치에 앉아서 조용히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터질 듯이 차 오름을 느끼고는 합니다. 여행을 오신 분들도 미명호 벤치에 앉아서 조용히 보야탑을 바라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북경대학생들의 영혼이 당신에게 다가 올 것입니다.




몸이 안 좋은데..........아무래도 신종인플루엔자가 맞는 것 같습니다. 예방접종을 맞으신 어느 분에게 옮겨 온 듯 합니다. 예방 접종이니 특별히 위험할 것은 없겠지만, 이것이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군요. 약속한 날이라 일단 어떻게든 써서 올리긴 하지만...헤롱헤롱...이군요.....헤롱헤롱...


  1. ....좋겠다. 졸업하기 전에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 볼까나-_ [본문으로]
  2. 물론 중간에 문화대혁명과 같은 온갖 곡절이 있었지만.... [본문으로]
[Podcast] 바로 중국어 운영에 대한 의견 받습니다.에서 이야기 한대로 중국와 관련 팟케스팅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팟케스팅에 생각보다 이런저런 준비물이 많이 필요하더군요. 그래서 천천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준비 과정을 다른 처음 팟케스팅을 준비하시는 분을 위해서 정리해보자 합니다.

많은 의견과 조언 부탁드립니다. 꾸벅--

1. 하드웨어 준비물
1.1. 마이크(필수) : 노트북 내장된 것은 음량이 작다. 그러나 소프트웨어로 소리 높이면 됨. 물론 좋은 마이크는 음질이 좋다. 그러나 돈 받고 파는것도 아니고 취미인데 그렇게할 필요가 있을까?
1.2. 아이폰(선택) : 노트북 앞에 아닌 곳에서 녹음하기 좋다. 앞으로 인터뷰 팟케스트도 열어볼까 생각중이다. 어디까지나 생각만 하고 있다. 귀찮다.
1.3. 노트북(필수) : 너무 당연하다고 할까?

2. 소프트웨어 준비물
2.1. Audition(필수) : 음악편집프로그램. 포토샵과 기본적으로 같으며 직관적으로 조작가능.
이 외에 원도우에서는 SoundForge가 있고, 맥에는 SoundStudio, Amadeus Pro, GarageBand, SoundTrack Pro가 있습니다.
2.2. PhotoShop(선택) : 팟케스트 아이콘을 만들기 위해서 설치.
2.3. iTune(필수?) : 워낙에 팟케스트에 최적화되어 있기에 필수

3. 바로 중국어 아이콘 : 의견 부탁드립니다. 저의 디자인센스로는 이것이 한계..;;

301 아이콘

길바닥 중국어



4. 바로 중국어 샘플 : 도움이 절실히 필요함!
4.1. 팟케스트로 넣었을 경우. - 오디어>팟케스트인데 파일찾기가 잘 안됌.
불가능. 파일찾기 버튼이 안 눌림. 에휴....

4.2. 파일첨부 > 오디오 삽입으로 넣었을 경우.



4.2.2. 다운로드 할 수 있게 만들기.



4.3. 포비딕을 이용했을 경우.
업로드에서 에러가 발생. 아예 파이어폭스가 꺼져버림.포비딕의 에러였음. 해결됐음
포비딕 rss 주소 http://nemo.podics.com/125775030893



너무 큼



4.4. odeo.com 시도중


해야할 일 : 조언이 필요합니다!!
5. 등록해야될 곳
5.1. iTune에 등록하기
팟 캐스트를 배우자! 제 1 탄 : ITunes Store에 팟캐스트를 등록하자

5.2. 그 외에 팟케스트 등록하는 곳 : 추천 부탁드립니다.
포딕스 http://podics.qrobo.com/

6. 케스팅 계획 세우기 [예상]
6.1. [길바닥] 욕하기(骂人)
6.2. [길바닥] 성 - 동사
6.3. [길바닥] 성 - 속어
6.4. [301] 你好

샤오위엔(勺园)은 북경대학교 외국인 기숙사로 쓰이고 있으며, 현재 북경대학교에 있는 외국인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고, 온갖 추억이 새겨져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정작 샤오위엔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잘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 모든 사진은 저에게 저작권이 있습니다.
* 마음대로 퍼가실 수는 있으나 출처명시는 꼭 해주시기 바랍니다.

봄의 샤오위엔, 올림픽이라고 하얀칠을 했다.



샤오위엔은 명말의 저명한 화가였던 미만종(米万钟1570~1631)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명말청초의 북방의 유명한 원림(园林)중에 하나였다. 샤오위엔이라는 이름은 "淀水滥觞一勺"에서 왔다. 시를 번역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것이지만, 억지로 번역을 한다면 "연못의 물이 술잔에 넘치도록 한 술(勺)을 뜨다" 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경대학교가 있는

《勺园修禊图》

곳의 환경을 알 필요가 있다. 지금 현재는 현대적인 모습으로 변했지만, 사실 현재 북경대학교가 있는 하이디엔취(海淀区)는 연못들이 곳곳에 있는 물천지였다. 곳곳에 크고 작은 연못들이 널려 있었다. 그런 곳에 별장을 지었다고 생각하시면 된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에 최초로 온 서방사절단이 바로 이 샤오위엔에 머물렀다는 점입니다. 건륭(乾隆)58년, 영국 조지2세가 보낸 마카트니(Macartney)는 처음에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나오는 열하(热河)에 있다가 원명원으로 돌아온 건륭제를 따라서 와서 바로 이 샤오위엔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 뒤로 집현원(集贤院)으로 개명하고 고관대신들의 휴식처나 외국 사절들을 접대하는 장소 혹은 고위급외국포로를 가두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이 샤오위엔은 1868년 원명원이 팔국연합군에 의해서 불태워질 때 같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2000년에 《勺园修禊图》을 기본으로하여 복원을 하였다. 북경대학교 차동차전용 서문에서 들어오면 왼쪽에 보이는 곳이 바로 복원된 샤오위엔이다. 그러나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으며, 오토바이등을 놔두거나 연인들의 비밀데이트 장소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현재의 샤오위엔은 1980년대 후반에 만들어져서 북경대학교로 오는 외국 학생들의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다[각주:1]. 현재까지도 대외한어교육의 대부분은 샤오위엔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유학생사무실도 샤오위엔에 남아 있다.

샤오위엔은 공공욕실로서 오전 6시부터 밤 12시까지 뜨거운 물이 나온다. 화장실도 공공화장실이며 매일 청소를 하고 있으나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하겠다. 빨래는 공용세탁기가 있으나 이미 오래되어서 너무 드럽고, 보통은 다른 학생들이 개인으로 혹은 공동으로 구입한 세탁기를 몰래 빌려쓰고는 한다. 물론 그런 세탁기들도 너무 많이 사용되어서 상당히 더럽다.

방은 2인 1실이 기본이며, 관리 선생님과 잘 말하면 혼자서 방을 사용할 수는 있다. 하지만 2명분의 방값을 내야하며, 현재 기숙사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왠만한 친분으로는 이렇게 하기 힘들다.무엇보다 현재 샤오위엔의 유학생 중에서 70%가 한국인이다. 그러다보니 샤오위엔 뒤쪽에 있는 식당도 한국식당이 자리잡고 있다. 그 동안 몇 번 주인이 변했지만 말이다.

샤오위엔 정문에 앉보지 않았던 북대생은 손~~!


샤오위엔의 정취라고 한다면 정문 입구일 것이다. 이 곳에서 자유롭게 앉아서 서로 이야기했던 기억들은 북경대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 쯤은 있는 추억이다. 이제는 시대의 흐름에 밀려서 새로운 기숙사가 들어왔고(북경대 新유학생기숙사 완전해부), 새로운 기숙사가 완전히 만들어지면 유학생들이 샤오위엔을 떠나야된다는 소리가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북경대에 있었던 사람들의 마음에 샤오위엔은 언제나 고향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올림픽이라고 하얀칠 하기 전의 사진이다.


눈 내리는 어느 날의 샤오위엔.

2008년 9월 신입생


2009년 9월 신입생



잡담 : ....약속한 날이어서 쓰기 싫은거 적당히 썻습니다. 사진이 들어가기 시작하니 짜증나는군요-_-;;;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전 사진 넣는 것을 극도록 싫어합니다. 이제 다음은 一塔湖图인데...이 부분의 사진은 최대한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1. 혹자는 과거에 샤오위엔이 중국석박사들의 기숙사로 사용되었다고 하지만, 본인의 조사 결과 그런 일은 없었다. [본문으로]
북경대학교에 사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이 무엇이라고 묻는다면 북경대학교가 제공하는 수 많은 자원들을 향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 많은 논문정보싸이트를 비롯하여 기본고적고에 이르는 막대한 자원들을 기숙사에서 편히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모든 것들을 밖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능한 VPN 서비스가 2008년부터 생겨났다. 그런데 아직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소개를 해본다. 다만 해당 서비스는 분명히 안전성이나 안정도에서 상당히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 이 점 유의하도록^^

북경대학교 VPN 주소 : https://124.205.79.5

요구사항
1) 북경대생이어야 함 : 북경대학교 인터넷ID와 암호가 필요하다.(ID는 학번이고, 암호는 각자 설정된 것. 입학을 하면 자동으로 학교인터넷에 가입이 된다. 간략히 말해서 인터넷 돈을 낼 필요는 없다)

2) 접속가능주소목록 : https://its.pku.edu.cn//oper/liebiao.jsp
기본적으로 教育网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다른 망에서도 접속 가능한 경우가 많으니 시도해보시길 바란다. 또한 回龙观지역과 中关村일대에는 북경대학교관련 기관이나 숙소가 있어서 IP을 열어둔 경우가 많다.

더 구체적인 설명은 https://its.pku.edu.cn/wlfw/vpn.jsp

VPN 서비스를 가장 간단히 말하면, 당신의 인터넷을 가상으로 학교 안으로 옮겨오는 것이다. 그럼 학교 안의 자원을 쉽게 활용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학교인터넷에 돈을 넣어놨다면, 그것을 통해서 외부 인터넷으로 나갈 수도 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나중에 되면 알것이다.--;;

해당 정보는 귀차니즘으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조용히 이 블로그를 보시는 쎵욱횽님을 위해서 서둘러 올려본다.....덧글 하나 정도는 좀 남겨주시길-_-;;;


북경대학교의 역사는 중국의 근현대사와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라고 하면 싫어하시는 분들이 많기에, 최대한 간단하게 흥미진진한 야사를 섞어가면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설명하지 않을 수 없는 중국근현대사가 있습니다.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 이름은 한국외래어표기법에 의거하여 1949년 이전에 출생한 사람들을 모두 한국어한자독음으로 표기하였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중국어발음이 더 편하긴 합니다만;;;;

* 나름 잘 써서 올렸는데, 티스토리가 Ddos 공격을 받다니..이 글은 이렇게 묻히겠구나~~~!!!


1) 경사대학당(京师大学堂)시절

1898년 청나라 광서제는 한참 무술변법운동(戊戌变法)이라는 개혁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영국처럼 왕조는 유지하면서 근대국가로 변화하겠다는 몸무림이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실천사항의 하나로 나름 근대적인 의미의 대학인 경사대학당을 7월4일 설립하게 된다. 그런 무술변법운동은 100일도 되지 않아 9월에 서태후의 모략으로 실패하게 된다. 이러자 경사대학교가 공중분해될 것은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그리고 1900년 8월 3일 서태후는 폐교을 시켜 버린다.

원래 자금성 동쪽, 왕푸징 바로 옆에 있었다.


그러나 이미 잠시간의 개혁을 경험한 중국내 여론의 압력으로 1902년 다시 경사대학교가 다시 만들어지게 되고, 12월 17일 드디어 입학식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중국의 유명한 당시의 신지식인 엄복(严复)교장선생님이 등장한다. 하지만 비록 신지식인인 엄복이 교장이 되었지만, 경사대학당은 어디까지나 서당적인 분위기가 강한 곳이었다. 학교에는 많은 유학자들이 있었다.

사실 북경대학교 마크에는 1989년 개교를 했다고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1902년에나 실질적으로 개교를 했다고 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게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처음 시작은 1989년이니 3년정도의 애교는 귀엽게 봐주시길.....^^;;


2) 북사탄(北沙滩) 북경대학

사람들은 현재의 북경대학교로 관광을 온다. 그러나 지금 현재의 북경대는 어디까지나 1952년 이후에 옮겨온 곳이며, 그 이전에는 연경대학부지였다. 그리고 이 당시 북경대학교 부지는 지금의 자금성의 오른쪽, 왕푸징의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이 곳은 북사탄이라고 불리던 곳으로서 한자를 아시는 분은 눈치 채셨을텐데 원래 모래밭이었던 곳에 북경대학교를 만든 것이다. 이 곳은 현재 북사탄 북경대학교 혹은 북경대학 홍루(붉은 건물이라는 뜻)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곳이 바로 예전 북경대학교 건물이다. 여행으로 자주 가는 왕푸징에서 도보로 5분거리에 있다. 한번 가보시는 것도 괜찮을 듯^^


각설하고! 1911년 국민당정부가 핵심이 된 중화민국이 생겨난다. 그리고 1912년 5월 경사대학당은 북경대학교로 개명을 한다. 그리고 1916년 12월 드디어 북경대학교의 영원한 교장선생님이라고 불리며, 현재 북경대학교의 정신적인 토대를 세운 채원배(蔡元培)교장선생님이 오신다.

채원배교장선생님!!!


채원배 교장선생님은 "학술은 자유로우며,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学术自由,兼容并包[각주:1])"라는 정말 옳은 말이지만 실질적으로 이루기 힘든 일을 이루어낸다. 이 말을 충실히 현실에 재현을 한 당시 북경대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고홍명 선생님.

아직까지도 그 힘을 보유하고 있던 유학자들과 자본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노쉰(鲁迅)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창시자인 이대조(李大钊)가 같은 학교에 있었다고 한다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가? 고홍명(辜鸿铭)이라는 분도 압권이다. 아버지는 말레이시아 화교이고 어머니는 영국인으로서 유럽에서 유학을 했다. 그는 어머니의 피로 서양인같은 높은 코를 가지고 있으면서, 중국전통옷을 입고서 학교를 노닐었던 것이다[각주:2]. 1918년부터 1919년 사이에 모택동(毛泽东)이 북경대학교 도서관 사서조수[각주:3]을 했다는 것 정도는 이제 놀라지도 않을 일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때만 해도 가장 강력한 힘은 유학자들에게 있었다. 전통의 힘은 그리 가볍지 않다. 그리고 자본주의파가 급속하게 성장을 해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이제 막 유입된 요즘말로 듣보잡에 불과했다. 그러나 채원배 교장선생님은 그 어떠한 학설이든 스스로의 논리가 성립을 한다면 받아주며, 외부의 압박에서 보호를 했던 것이다. 채원배 선생님이 현재까지 북대의 영원한 교장이라고 불리는 것은 괜히 그런것이 아니다. 그는 전설이다.

북경대학교는 이렇게 화려하게 꽃을 피어 간다. 그러나 1931년 일본제국의 중화민국 공략이 본격화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점차 일제의 침략이 노골적이 되어가면서 북경대학교 학생들은 반대시위등을 하게 되었고, 결국 1935년에는 129운동의 선두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대세를 바꾸지 못한다.

하지만 또 전설이 세워진다. 서남연합대학의 전설이....


3) 서남연합대학(西南联合大学)
1937년 소위 77사변이라고 불리우는 일제침략행위가 발생을 하고, 북경대학교와 청화대학교 그리고 남개대학교(南开大学)[각주:4]는 남쪽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그리고 챵샤(长沙)에서 서로 연합하여 서남연합대학(西南联合大学)라는 하나의 전설을 만들게 된다.

전설의


북경대학교의 불타는 정열과 청화대학교의 얼음같은 엄격함, 남개대학교의 끊임없는 노력정신이 뭉치게 된 것이다. 대충 생각을 해봐도 전설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들은 계속 되는 항일전쟁의 와중에서도 서로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미쳐서 수 많은 원사[각주:5]들을 배출하였다.

일본이 항복을 하고 1946년 5월 베이징으로 돌아솨서 10월에 다시 북경대학교로 분리가 되었으며, 이 때 호적(胡适)교장선생님이 교장이 된다. 그리고 몇몇 잔잔한 개혁이 있었다. -0-;;


4) 하이디엔취(海淀区) 북경대학(현재)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고 호적교장선생님은 미국에 잠시 있다가 타이완(중화민국)으로 갔다. 그리고 1951년 6월 마인초(马寅初)가 교장선생님이 된다. 그리고 1952년 대대적인 중국의 대학개편작업이 있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북경대학교(공과는 청화대로) + 연경대학교(문과,이과,법과) + 청화대학교(문과,이과,법과)을 하게 된다. 북경대와 청화대는 무엇이 다른가? - 바로 북경대에서도 설명을 하였지만, 북경대는 문과대학이 아니라 문과와 이과 대학인 것이다. 그리고 이 때 지금의 위치로 이사를 오게 된다. 그때까지 현재의 북경대학교 부지는 연경(燕京大学)가 있었다. 핵무기를 개발하고, 반도체를 개발하는 등의 화려한 모습을 잠시 보이나

삼각지(三角地)에 문화대혁명의 포스터(大海报)가 붙은 것은 중요한 암흑기의 시작이었다...2007년에는 이 삼각지가 철거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중국의 또다른 암흑기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1960년 마인초교장선생님이 반동분자라는 이유로 해임되고, 1966년 문화대혁명이라는 암흑기가 도래한다. 이 부부은 진정한 암흑기라고 할 수 있다. 북경대학교 학생들은 문화대혁명의 구호에 충실히 따랐다. 아니 앞장서서 나섰다. 그리고 1978년 이전까지 학생이 교수를 공격하고 몰아내는 등의 온갖 난리가 벌어졌다. 그래서 현재도 1966년부터 1978년 사이에 졸업한 사람들 중 현재 북경대 교수가 된 사람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학문의 공백기를 가져왔다. 이 시기를 한마디로 정의하면...아.무.것.도. 없.다.


5) 개혁개방의 시기
1979년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1979년 학번들은 북경대와서 그 자유로움을 순식간에 회복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79학번부터 82학번 사이에 현재 북경대교수진이 많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그 당시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면서 현재의 북경대학교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1981년 중국 여자 배드민턴팀이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하자 북경대학생들을 뭉치자! 중화를 진흥시키자(团结起来,振兴中华)라는 구호를 외쳤고, 그 중에서 중화를 진흥시키자(振兴中华)는 현재도 북경대학교 구호중에 하나로 남아 있다.

퍼래이드를 하다가 갑자기 펼친 이 플랜카드는 순식간에 세계로 퍼져나갔다.


1984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35주년 천안문 퍼레이드에서 북경대학교 학생들이 "등소평짱[각주:6] 안녕하십니까?!(小平您好)라고 하며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은 것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1989년 같은 장소에서 그 유명한 "천안문 사태"가 일어난다.

중국의 민주화를 희망하는 많은 학생들이 주축이 되서 일어났던 천안문 사태는 북경대학교의 정신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자, 동시에 아픔을 알려주는 일이다. 현재 북경대학교의 교수 중에서는 이 시기 천안문 현장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은 그 당시의 정신을 계속 간직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당시의 아픔과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다.


....정말 짦게 한다고 했는데, 쓰는데만 1시간이 걸렸다..그런데 여기서도 하지 않고 넘겨버린 수 많은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면 믿으시겠는가?-_-;; 그리고 직업병 발동 안하다고 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이것저것 확실하게 하게 위해서 자료를 찾다니....ㅠㅠ  다음 편부터는 인물이나 건물의 이야기로 최대한 짦게 짦게 가이드처럼 가련다. 이렇게는-_-;; 너무 길어;;;;

  1. 《史记·司马相如列传》:“故驰骛乎兼容并包,而勤思乎参天贰地。” [본문으로]
  2. 지금 이런 분이 있어서 신기하게 볼 터인데...그 당시에;;; [본문으로]
  3. ...그러니까 사서도 아니고 거의 이름만 있는 알바같은 수준;;; [본문으로]
  4.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개대학교는 천진에 있는 대학으로서 지금도 중국대학순위 10위권에 들어가는 학교이다. 이 당시 군벌에 의한 대학교가 천진에 세워졌다. 그것이 바로 남개대학의 전신이다. [본문으로]
  5. 원사는 중국의 제도로 국가급의 학자에게 수여를 하는 일종의 명예직에 가깝다. 요즘은 원사를 마구 주어서 격이 떨어졌다는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만, 아무리 떨어져도 원사다라고 할까? [본문으로]
  6. 노무현 전대통령을 보고 "노짱"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본문으로]
Podcast라는 것이 있습니다. 가장 간단하게 말하면 개인 라디오 방송국입니다. RSS의 응용으로 여러분들은 보다 편안하게 MP3로 된 파일을 받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것 다 몰라도 그냥 제 블로그에 방문하셔서 MP3을 다운 받으셔서, 그냥 들으셔도 되고 MP3 플레이어나 휴대폰에 넣어서 들으셔도 됩니다.

제가 시간을 많이 낼 수는 없지만, 중국어 관련으로 팟케스트를 하나 해볼까 합니다. 그런데 저는 멀 해도 별 상관이 없기에 여러분들의 의견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덧글로 의견 부탁드립니다. 의견이 별로 없으면 삐뚜러질 겁니다.-_-

전체제목 : 바로 중국어 (이건 왠만하면 그냥 그대로 합니다.-0-)
길이 : 결코 10분은 넘지 않도록 할 것임[각주:1]


계획 1) 길바닥 중국어
시중의 책에서는 다룰 수가 없지만, 실전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말들이 있습니다. 다양한 욕부터 시작해서 요리주문하는 방법, KTV에서 아가씨들 고르는 용어들, 침대 위에서의 말들(어머..부끄*^^*) 이런 길바닥용 언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나갑니다[각주:2].

아마 일주일에 한 번 10분정도의 길이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개인적으로 좀 문제가 될 소지가 많은 내용이 있다고 봅니다. 안 그래도 온갖 루머가 있는 저인지라 이것까지 하면 나이스해질 것 같군요. 그래서 조금 주저스럽기도 합니다. 그래도 중국어 중급이상들에게는 상당히 유용한 내용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책을 백날 봐도 이런 길바닥 중국어는 나오지 않으니까 말이죠.


계획 2) 바로바로 HSK 중급강의
많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절대!! 제가 귀찮아서 그런건 아니고, 현재 신 HSK가 곧 생겨날 듯 한데, 정작 관련 모의문제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시직하기에는 무리가 있을듯 합니다[각주:3].

이것을 하려면 일주일에 최소 3번 이상, 한 번에 10분에서 20분 사이 왠만하면 30분 이상[각주:4]


계획 3) 바로바로 중국어 입문(짝퉁 중국어)
저는 301라는 중국어입문책만 마스터해도 일상회화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로 잘 만들어진 책이 301입니다. 그 301을 중심으로 그 동안 학원등에서 시간 끌기 우려먹기 용으로 질질 끄는 형식이 아닌 핵심만을 쪽쪽 빨아 드리는 방식으로 강의를 진행할까도 합니다[각주:5].

이것이라면 하루에 한문장씩 대략 3분이하로 단타로 나가던가, 일주일에 한번씩 10분에서 15분 사이의 분량으로 5문장에서 6문장 한세트인 한과씩 올리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 외에 인터넷중국어, 인터뷰로 배우는 중국어, 제2외국어 중국어, 외국인용 중국어등등. 여러분들이 상상하는 거의 모든 중국어 관련은 다 할 수는 있습니다. 아! 중국노래를 통한 중국어는 못합니다. 제가 워낙에 노래에 관심이 없어서 말이죠. 음하하하;;; 각설하고! 의견 부탁드립니다.

11월 6일(목) 00:00 까지만 의견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10분 이상의 의견이 없을시 이 프로젝트는 자동으로 붕괴됩니다. 10분 이상의 의견 중 가장 많은 것을 무조건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HSK 중급강의만은 왠만하면 참아주시길...현재 신 HSK도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태이고, 저도 논문을 써야되는지라....^^::

지금까지 1번 프로젝트 7표, 3번 프로젝트 6표, 총 13표
(이걸 어쩌나요;;; 10개가 되서 시작은 해야되는데...6:6 라니;;;)
1번이 앞서고 있음.

  1. (아시는 분은 아시지만; 저의 글 작성시간은 보통 10분아래...그 이상은 귀찮아서 왠만하면 쓰고 싶지 않음. 블로그는 어디까지나 머리 푸는 곳임-_-) [본문으로]
  2. 정용형은 이 부분을 강력하게 추천해주시더군요. 흠... [본문으로]
  3. 사실 신HSK라고 해도...기존의 것과 크게 변하지는 않지만...결국 제가 귀찮은 걸지도..그 이유는 이것의 연재주기를 보면 아십니다. [본문으로]
  4. ..........정말 하기 싫다-_-;; 누가 돈 주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만, 아니 이상에 이건 거의 무리입니다. 블로그는 어디까지나 취미. 전 원래 역사학도입니다;;; [본문으로]
  5. 그래도 어느 분은 제대로 해서 아예 출판까지 하라지만.......귀찮음. 그정도로 노력하고 싶은 생각은 없사옵나이다. 어디까지나 사회환원의 일종으로 하는 것이니까요.^^ [본문으로]
중국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잘 모르는 분들도 북경대와 청화대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준비했습니다. 중국 명문대학교인 북경대와 청화대는 어떻게 다를까요?

북경대 로고

청화대




1) "북경대 미친놈"들과 "청화대 책벌래"들.
북경대와 청화대의 특징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말입니다. 중국말로는 北大疯子,清华书呆子라고 표현을 합니다. 북경대생들은 비교적 사회참여를 열심히 합니다. 중국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에 거의 빠짐없이 참가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54운동, 문화대혁명, 천안문사건등등 중국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분들도 들어봤을 사건들에 북경대학생들을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그에 비하여 청화대학교는 큰 사회적인 이슈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다만 책만 열심히 팔 뿐입니다.

이런 분위기는 북경대와 청화대의 각기 다른 학풍에서 오게 됩니다. 북경대는 매우 자유롭습니다. 자신이 듣고 싶은 수업을 사실상 마음대로 들으면서 대학생활을 보내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북경대에서는 당연히 수강신청을 하지 않고도 마음대로 청강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자유로운 청강을 막는 선생님이 생기면, BBS에서 그 선생님에 대한 온갖 비판이 쏟아지게 됩니다. 청화대는 이와 반대로 모든 학과에서 이미 4년동안 들어야 되는 수업과 그 일정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자유롭게 풀어주다보니 애들이 좀 미치게 됩니다. 훗-_


2) 북경대는 국가를 위하여! 청화대는 나 자신부터!
그 뿐만이 아닙니다. 북경대의 모토는 "중화를 흥하게 하자! 振兴中华"입니다. 사회적인 참가를 강력하게 외치는 모토를 가지고 있으니 사회 참가는 당연한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청화대는 "나부터 시작하자 从我做起"라는 모토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맞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내실을 닦아서 자신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변화를 시킨다라는 정신도 틀렸다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변화는....아니 한국의 현대사의 민주화과정을 보아도 대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사회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는 저는 북경대생입니다^^::

물론 최근에는 북경대의 이런 적극적인 정신이 죽었다는 소리가 많이 있습니다. 중국정부와 온갖 충돌을 하고 불이익을 받다보니 조금은 이런 정신이 죽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재 교수님들 중에 천안문사건을 현장에서 경험한 사람들이 있는 이상, 이 학풍은 쉽게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3) 북경대는 유학당출신이고 청화대는 해외파출신.
북경대의 시작은 청말에 시작합니다. 나라에서 대학의 필요성을 느끼며, 청나라 광시(光绪)황제의 칙명으로 세워지게 됩니다. 이렇다보니 초기 대학에는 수 많은 유학자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상당히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고, 국가에 대한 생각이 강력한 학교인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청화대는 원래 해외로 내보낼 학생들을 키우는 학원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보다 자유로운 생각과 개인주의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왜 중국정부의 미움은 국가를 위한다는 북경대가 받고 있냐고요? 국가를 생각하는 방법은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이 아닙니다. 만약 맹목적인 충성이었다면 천안문사태에서 북경대가 나설리가 없었지요. 국가가 어디까지나 국민들이 더 잘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을 생각을 한다면, 국가보다는 일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다 더 좋은 나라를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4) 북경대는 기본을 청화대는 응용을!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착각이 북경대는 문과가 강력한 대학이고, 청화대는 이과가 강력한 대학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과 매우 다릅니다. 북경대에서 중국 최초의 핵무기가 만들어졌습니다. 문과에서 이런 것이 가능할까요?

북경대학교는 인문과 과학의 기초학문쪽에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문-철학-역사와 같은 순수인문계열이 막강한 것은 다들 아시리라 봅니다. 그리고 수학-화학-물리와 같은 순수이과계열도 강력합니다. 사회학쪽으로 보면, 법학의 경우 법리연구가 강하고, 예술학과도 미학쪽에 상당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공통점이 돈은 죽어라 못 버는 학과들이라는 점[각주:1]입니다.

그에 반하여 청화대는 (어디까지나 북경대생의 입장에서 조금 왜곡하면) 기본적으로 땅파고 벽돌 쌓는 학교입니다. 건축계열이나 컴퓨터계열과 같은 응용쪽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문학에서는 온갖 선생님들을 초빙하고 있으나 아직은 멀었고, 기초과학쪽에서도 아직은 북경대를 최고로 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응용과학이 돈은 무지막지 잘 법니다. 쪼들리는 북경대에서 건물 몇 개 주르륵 올리는 청화대를 보고 있으면 솔직히 부럽습니다.


5) 중국정부의 미움을 받는 북경대와 사랑을 받는 청화대
대학교가 정부의 이쁨을 받으려면 학생이나 선생님들이 조용하면 됩니다. 문제는 이넘의 북경대의 미친넘정신과 애국정신이 합쳐지면 정부입장에서는 듣기 싫은 말들을 공개적으로 마구마구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과거의 북경대학교 BBS[각주:2]는 폐쇄당하고, 지금은 미명(未名)BBS가 운영되고 있으며, 이곳에서도 하루에도 다양한 글들이 삭제당하고 있습니다. 교수님들도 대놓고 정부를 비판해서 결국 신방과에서 짤리는 선생님이 나올 정도였습니다[각주:3].

다만 현재 정부의 요직에 북경대 출신들이 상당히 많다 보니 대놓고 까버릴 수 없을 뿐입니다. 그냥 예산을 잘 안주는 등의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미묘한 태클을 계속 걸고 있습니다[각주:4]. 그런데 청화대는 북경대보다 근 2배에 가까운 예산을 받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돈 잘버는데 정부에서 돈도 많이 주니 건물이 그렇게 마구마구 올라가고 기숙사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겠지요[각주:5].

그래서 최근에 북경대는 정부의 환심을 사려고 살짝쿵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몇십년 동안 해온 짓이 없어지지는 않지요. 제 생각에는 그냥 만사포기하고 북경대답게 사는 것이 좋을듯 합니다. 북경대가 예쁜짓 해봐야-_



흐으...이런 분위기로...괜찮겠지요? 다음 편은 야사를 기본으로 한 북경대 간략 역사...
쩝..호응 없으면....확 연재 안합니다.(협박) 왠만한 글 10분만에 대충 휘갈겨버리는 제가 무려 30분정도는 투자해서 글을 쓴다고요. (애원)............우웅....앙~(애교?;;;)

  1. 위에서 이야기한 그나마 응용에 가까운 핵폭탄도 사실 핵에너지연구이며...돈 안되고..반대로 돈만 먹는 학문입니다...쿨럭... [본문으로]
  2. 一塌糊涂 [본문으로]
  3. ...보호 못해준 북경대....죽어! -_-+ [본문으로]
  4. 그래도 왠만한 학교보다 훨신 많은 예산이긴 합니다만...) [본문으로]
  5. 아..잠시만요..눈물 좀..ㅠㅠ [본문으로]
알 사람들은 이미 아시다싶이 2009년 10월 13일 한빤(国家汉办)에서 새로운 HSK을 내놓았습니다. 이미 과거부터 현행의 HSK에 대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을 해왔고, 그 동안 몇몇의 테스트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10월 13일날 발표해놓고, 2010년에는 전면적으로 기존의 시험을 폐지한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충돌하는 2010년 시험일정 발표가 나와버렸습니다. 그것도 바로 어제(10월 28일) 발표된 따뜻한 2010년 중국내 HSK 시험일정입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될까요?

어이쿠-0-


http://www.hsk.org.cn/news/news20091028_c.html

기존의 HSK의 시험일정이 있고, 그 아래에 새로운 HSK 시험일정 몇개가 있습니다. 제가 잘 못 본 것인것 같아서 한빤의 공지를 다시 찾아봤습니다. (원문주소) 그러나 원문에서는 분명히 "2010년 1월 부터 새로운 HSK와 새로운 YCT을 전면적으로 실행하며, 기존의 HSK와 YCT을 대체한다. (2010年1月起新HSK和新YCT各级别将全面推出并取代原HSK和原YCT)"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HSK 이권싸움의 발현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제 공자학원의 이름이 찍히게 되는 어언학원의 입장에서 일단 그냥 기존대로 해버린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일단 지켜봐야겠습니다.


나중에 새로운 HSK 분석글을 올릴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HSK을 준비하는 분들에게는 이 말은 꼭 하고 싶습니다. 아직 시험예문조차 나오지 않아서 문제유형과 같은 구체적인 것을 말하기 힘드나, 그냥 기본대로만 공부하면 과거의 HSK와 차이가 없을 것임이 확실합니다.

그냥 착실히 공부하시면 됩니다. 변하는 건 없습니다.
(시험기술로 어떻게든 좋은 점수 받으려는 인간들에게는 좀 충격일 수도 있겠지만-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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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대학교 학생이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이 보게 되는 북경대 로고입니다. 그런데 정작 북경대생들조차 이 로고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또 그 뜻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일단 북경대의 상징인 로고부터 파고 들어가보겠습니다.

1980년대에 수정되어서 지금까지 사용중인



일단 1898년은 북경대가 만들어진 년도입니다. 이것은 다들 알고 계시죠? 그리고 외부를 두르고 있는 PEKING UNIVERSITY는 북경대학교의 영어이름입니다. 지금은 영어표기도 Beijing(베이징)이지만, 당시에는 베이징을 Peking 이라고 불렀기 떄문입니다. 덕분에 썰렁한 농담으로 Fuking University 라고 한답니다[각주:1].

그리고 핵심이 되는 것은 안에 쓰여진 글자입니다. 해당 글자는 일단 외면상으로는 北大(북대의 약칭)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북경대학교 학생 조차 여기까지만 알 뿐이지 그 안에 내포된 의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것이 처음 만들 때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최초의 북경대로고양식



북경대의 영원한 교장이신 1916년 12월 채원배(蔡元培) 교장님[각주:2]이 노쉰(鲁迅[각주:3])선생님에게 휘장(로고)을 만들어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노쉰선생님은 그 다음해인 1917년 8월 7일 위의 로고를 완성하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외부의 영어 이름도 없었고, 개교년도도 없었습니다만, 가운데의 마크만은 있었습니다. 당시 잠시 사용되다가 조용히 사용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다가 80년대에 위에서 보여드린 현대의 로고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 마크는 北大(북대)을 전자(篆字)로 써 놓은 것이며, 동시에 중요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마크를 잘 보시면 위의 北자는 두 명의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아래의 大자는 한 명의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아래에 있는 사람이 위의 두 사람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습니다. 지식인으로서 큰 사람이 되어 다른이를 짊어지고 나아가야 된다라는 의미입니다. 소위 글 좀 읽었다는 지식인들로서 깊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




* 뽀나스로 북경대 한국유학생회의 로고에 대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현재 북경대 한국인 학생회


현재 북경대 학생회의 로고입니다. 해당 로고는 2005년 학생회장이었던 윤종현의 제작요청에  웹팀팀장 김바로와 웹팀원 김영한의 손에서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각주:4] 원래 북경대한국유학생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몇몇 선배님들의 권력싸움으로 처참하게 망가지고, 우여곡절 끝에 새로 만들어진 학생회였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막말북대] 북대 학생회 탄생비화 - 선사시대 [막말북대]초기 임시회칙과 혼란의 시작 - 학생회 탄생비화을 참고) 로고따위야 당연히 없었습니다. 원래는 홍보팀에서 만들어야 정상이었으나, 당시 일단 컴퓨터와 관련만 있다면 온갖 일거리를 하던 웹팀에서 로고까지 만들게 되었습니다[각주:5].

로고의 내용을 분석을 하면 2005년은 저희 학생회가 새롭게 만들어진 년도입니다. 그리고 은근히 과거의 학생회를 부정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어서 논란이 되었으나, 웹팀팀장의 막무가네식 우기기로 통과했습니다[각주:6]



* 대충 이런 분위기로 "바로 북경대"을 진행할 생각입니다. 괜찮을까요?


  1. .....짱돌로 사람을 치면 피나요....아파요...제발. [본문으로]
  2. (1868~1940) 현재까지 남아있는 북경대의 기본 정신인 "사상은 자유로워야하며, 서로 다른 것들을 모두 감싸안아야한다."(思想自由,兼容并包)을 만드신 분입니다. 추후 이 시리즈를 전개하면서 죽어라 나올 분이기에 이정도로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3. (1881.9.25—1936.10.19) 중국의 유명한 사상가이며, 작가입니다. 아Q정전이나 공이지전등의 아직도 사늘하면서 뜨거운 애정이 느껴지는 글을 쓴 분이십니다. 사실 이런 소개가 필요조차 하지 않는 분이라고 봅니다. [본문으로]
  4. ...자기 이야기를 3자의 입장처럼 쓰려니 붉어져오는 이 얼굴을 어찌한단 말입니까;;; [본문으로]
  5. 사실 위의 로고는 저희가 만든 로고와 미묘하게 다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당시의 온갖 로고 안건들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6. [/footnote].

    가장 문제가 되었던 곳은 로고의 가운데에 배경으로 들어간 태극기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북경대 학생회의 일부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어떻게 한국의 국기를 북경대학교 마크의 배경에 넣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동안 다른 과의 로고들도 가운데의 마크는 건드리지 않고, 어디까지나 외부에 이름을 적어넣는 수준으로 끝나고 있는 와중에 태극기를 넣어버린 것은 분명히 파격적인 부분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통과를 시켜낸 당시 간부진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본 내용은 제가 깊이 개입된 부분이라서 오히려 쓰기가 민망해서 생략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작성하지 않으면 완전히 잊혀질 것이기에 써보았습니다. 나름 역사로 따지면 현장에 있었던 사람사람의 목소리이니 훗날 언젠가 사료적 가치가 있으리라 생각해봅니다[footnote].....막말로...쪽팔려...쪽팔려;;; [본문으로]
오늘은 북경대 제 6회 국제문화제의 날입니다. 이번의 테마는 언어입니다. 현재 북경대의 유학생중에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한국학생들도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이어서 실시간 중계를 하고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은 지금 빨리 보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 주소 :
http://www.oir.pku.edu.cn/ICF2009/

실시간 중계 주소 :
http://www.oir.pku.edu.cn/whj/tv3.htm


...솔직히 그리 재미있지는 않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말 재미 없습니다. 그래도 중간중간에 나오는 외국학생들의 공연은 상당히 볼 만 합니다. 한국학생들은 이번에 "연극"을 준비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잘 될런지-_


북경대학교. 중국에 별 관심 없는 중국인들도 알고 있는 중국의 명문대학교입니다. 그리고 중국 근현대사를 한 몸에 간직하고 있는 학교입니다. 거칠게 표현하면 북경대학교의 역사가 곧 중국 근현대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비참합니다.

북경대학교의 휘장은 누가 무슨 의미로 만들었을까요? 유학생기숙사인 샤오위엔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을까요? 모택동이 북경대도서관 사서였다면서요? 실제 북경대학교생들에게 물어봐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그래서 북경대에서 몇 년을 굴러다닌 사람으로서 간단하고 쉬운 북경대학교에 대한 소개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목은 "바로 북경대"라고 정했습니다. 연재는 일주일에 두 편씩, 화요일과 금요일에 올라옵니다. 내용은 북경대학교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핵심적인 부분만 쪽쪽 빨아서 적어놓도록 하겠습니다. 필체는 이 글과는 다르게 딱딱한 말투를 최대한 배제하고, 여행가이드의 말투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이로서 맨날 IT 관련 글만 올린다는 소리는 안 듣게 되겠군요. 사실 잠수상태의 번역프로젝트를 해도 되지만, 별 반응이 없는 것은 둘째치고, 전묵선생님의 글을 막 번역하기에는 글 자체도 어렵고 제가 심히 존경하는지라......나중에 시간이 될 때 나름의 정성을 들여서 다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해도해도 너무한다 싶었습니다. 역사과인것이 조금은 후회스러웠습니다. 책을 놔둘 곳이 없어서 침대에 쌓아두고 웅크리고 자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습니다. 쌓여 있는 책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잠을 깊게 잘 수 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참다참다 결국 책장 3개를 들여놨습니다.



책은 일단 밀어넣어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아직 정리가 필요합니다. 그래도 과거보다는 백배는 좋습니다. 제일 좋은 것은 과거의 난장판을 보여드리는 것이겠지만...안타깝게도 그 난장판 사진이 없군요. 그 때의 제 방을 아시는 분은 정말 "깔끔해"졌다라고 표현하셨습니다. 혹은 "그나마 사람이 살만해 졌다"라고 표현하는 분도 있군요. 그 당시의 방은 그냥 여기저기 책들이 널려 있었고, 룸메이트의 책장까지 제 책들이 침투해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하하;;

어찌되었든 이제는 좀 인간답게 살 수 있을 듯 합니다^^ 하지만 다른 곳에 있는 책들은 계속 그쪽에 있어야 될 듯 하군요. 여유공간이 좀 생겨서 그쪽에서 몇십권정도는 가지고 올 수 있을 줄 알았건만....

개인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것은 이런 책들의 난립을 보고도 제 방에 들어오고 싶다는 녀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녀석은 그나마 정리된 지금의 방이 아닌, 난장판의 과거의 방도 보았는데 말이지요. 음;;; 이해가 안됩니다;;;;;;




중국은 한국과는 다르게 매년 9월에 신입생이 입학을 합니다. 그리고 등록날이 되면 파릇파릇한 새네기들이 몰려들고는 합니다. 저는 이 모습을 지금까지 몇 번이나 보는 것인지 왠지 썩은 냄새 풀풀 풍기면서 사진 찍고 돌아다닌듯 합니다.

오늘 글은 특별히 무엇인가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니 그냥 제 감상만 살짝살짝 쓸 생각입니다.

북경대학교 유학생 신입생 등록날의 모습입니다. 나름 교장까지 방문해주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전 현 교장선생님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许전교장님이 좋아요^^


중국에서도 인플루엔자가 유행이고, 남부쪽에서는 휴교사태도 벌어지는지라 공안국쪽에서 의무적으로 검사를 하게 했다고 합니다.


정신없는 내부의 모습입니다. 돈내는 곳. 등록하는 곳. 숙사구하는 곳등등. 저희때만해도 이런것 없었고....의자도 없었는데....


다른 각도에서 좀 이른시간에 찍은 모습입니다. 그나마 좀 한가해보이죠? ^^


앞쪽에 있는 한국유학생회입니다. 한국유학생들의 연락번호를 받고 있답니다. 저기 오른쪽에 이마에 손을 올리고 계신 분이 학생회장님. 그러고 보니 최초의 여자 학생회장이구나;;;


이렇게 연락처를 적고 있습니다. 아유~~ 파릇파릇하고 어벙한 것들.


하지만 올해 역사과에 딸랑 8명의 후배에....더 중요한 것은 딸랑 2명만이 여자후배라는 점에서 심히 짜증을 일어나고 있습니다. 올해는 신입생 환영회 가지 말까. 우아아아아아앙!!!!! 또한 90년대생들이 이제 주축을 이루게 되니 풋풋한 모습이 있어야되는데.....무엇보다....어여쁜 후배......를.....못 봐서.....음....-_ 실망! 이라고 하면 안되려나;;; /먼산

북경대학교에 새로운 유학생 기숙사가 들어오는 것은 모두가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 온갖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는데, 오늘 현장을 방문하여 하나부터 끝까지 알아보았습니다. 그 동안 궁금했던 사항을 한 번에 풀어드리겠습니다.

돈 덩어리를 환영합니다로 보이는 건 나뿐일까나...



1. 현재 유학생 기숙사로 들어갈 수 있나요?
새로운 유학생 기숙사는 다 완공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단지 6호동만 완성이 되었으며, 약 240개의 침대가 준비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입주자격은 1년 이상 북경대에서 공부를 하는 자비 신입생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럼으로 반년이나 3개월의 단기어학연수는 입주할 수 없고, 재학생들 역시 입주할 수 없습니다. 또한 기숙사를 포함하는 장학금을 받는 사람들 역시 입주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나머지 기숙사가 완공되면 수용 가능 인원이 2000여명으로 늘어나기에 재학생도 받을 계획이라고 합니다. 이 경우도 장기위주로 받을 것으로 보이며, 장학금은 받지 않을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기숙사는 내년(2010년) 9월 이후에는 입주가 가능할 것이라고 합니다. 단지 현재 6호동 옆에서 거의 완성단계에 있는 4호동은 조금 일찍 받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 정확하게 결정된 사항은 없습니다.

확실히 신상은 다르다. 예쁘긴 하다.





2. 가장 중요한 방에 대한 정보들
A형은 방 2개에 거실 하나 그리고 화장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방 하나에 2명이 살게 됩니다.그러니 총 4명이서 사는 것입니다. 지금 샤오위엔 8호동 보다 조금 더 크지만, 한 방에 2명씩 살게 됨으로 사실상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줄고, 비용은 비싸지는 상황입니다.

A형 전경. 딱 봐도 좁아보이지 않는가?

창문 옆에서 자면 기분이 좋으려나. 아님 아침마다 괴로우려나.


정확하게 평수는 모든 것을 다 합쳐서 44평방미터이지만 한 크기가 약 14평방미터이고, 그것을 2명이서 나누어서 쓰는 것이기에 한 사람당 7평방미터밖에는 사용하지 못합니다. 사진으로 보셔도 비좁다는 느낌이 드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가구는 그래도 설계가 잘되어 있다. 하지만 상당히 부족해보인다.

겉보기는 예뻐보이나 실제 공부할때에는 그리 유용하지 않을 책상과 의자.


가구는 신상이라는 느낌이 팍팍 들고, 옷장은 나름 괜찮은 수준입니다. 그러나 책상과 의자가 상당히 문제가 심각합니다. 책상의 높이는 상당히 낮아서 공부하기 불편한 수준이고, 의자는 무슨 생각인지 색도 맞지 않는 야시장 의자입니다. 여기서 공부하는 것은 글렀습니다.

거실의 모습입니다. 4명이서 쓰기에는 너무 좁아보입니다. 솔직히 샤오위엔 6호동의 거실보다 더 작은 듯도 합니다.

대략적인 크기를 아시라고 모델역할을 해주신 삼국지의 유표님~~ 감사감사~


이 곳의 한 사람당 가격은 하루에 64위엔(약 만삼천원)이며, 한달(30일)로 계산을 하면 1920위엔(약 40만원)이나 됩니다. 그리고 방을 혼자서 쓸 수도 있으며, 이 경우 정확하게 2배 가격인 하루 128위엔을 내야 합니다. 아예 모르는 분을 위해서 잠시 설명을 드리자면, 샤오위엔勺园의 꾸린 1,2,3호동은 하루에 30위엔이어서 한달에 900위엔이며, 사실상 새로운 기숙사와 시설이 비슷하고 오히려 좋은 6,7,8호동은 한달에 1800위엔정도입니다.

화장실이다. 심히 비좁다. B형도 동일한 화장실이다.

4명이서 한 화장실을 쓰는 거나 공동화장실이나 머가 다른걸까?







B형은 방 하나에 화장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방 하나에 2명이 살게 됩니다. 방의 크기는 위에서 설명한 A형 방과 거의 비슷하고, 정확하게 말하면 조금 더 작습니다. 이 방의 크기가 샤오위엔의 1,2,3호동의 방의 크기와 거의 비슷합니다. 단지 폭이 좀 좁은 길죽한 모양입니다.

더 좁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가구배치를 이따구로 했을까? 차라리 2층 침대는 놔두지..후...

사람과의 비교를 위해서 희생해주신 삼국지의 유표님께 감사를...


정확하게 평수는 모든 것을 다 합쳐서 22평방미터이지만 한 크기가 화장실을 제외하면 실제 생활공간은 약 14평방미터이고, 그것을 2명이서 나누어서 쓰는 것이기에한 사람당 역시 7평방미터밖에는 사용하지 못합니다. 이곳도 사진으로 보시면 아시겠지만 비좁죠?

높이가 큰 것과 재질이 좋은 것은 마음에 드나 기본적으로 설계자체가 꾸려서 공부하기에는 에러.

의자에서는... 난 침묵하고 말았다. 허허허;;;;


가구는 기본적으로 A형과 동일합니다. 단지 가구 배치가 조금 다른 모습입니다만, 어차피 가구배치야 입주한 사람들이 마음대로 변동할 수 있기 때문에 별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구석에 쳐박혀 있는 책상이여. 일사광선 제대로 받으며 공부를?;;;

아... 한숨만이 나오는구나.


이 곳의 한 사람당 가격은 하루에 70위엔(약 만사천원)이며, 한달(30일)로 계산을 하면 2100위엔(약 42만원)이나됩니다. 그리고 이곳도 역시 방을 혼자 다 쓸 수 있습니다. 가격은 A형처럼 2배 가격인 하루 140위엔을 내야합니다.





3. 부대 시설
각 층의 양쪽에는 다용도실이 있어서, 빨래와 요리를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샤오위엔과 거의 비슷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샤오위엔과 비교해서 비교적 까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세탁기가 한 층에 4개밖에 없다는 것은 세탁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하이얼세탁기~~~

유료다. 가격은 그럭저럭.


세탁기는 한 층에 양측에 2대씩, 총 4대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무료가 아닌 유료입니다. 표준 세탁은 동전으로 3원을 넣어야 합니다. 그렇게 비싼 금액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역시 걱정이 되는 것은 이불빨래를 널을 수 있는 공간이 없고, 방도 비좁아서 특별히 세탁물을 놔둘 곳이 없으리라는 점입니다.

이 주장은 정말 부러웠다. 나 가정주부 다 된건가?

싱크대도 상당히 깔끔하고 좋았다^^ 잇힝~


상당히 마음에 드는 조리구역입니다. 다용도실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깔금하게 되어있어서 편안하게 요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귀차니즘에 시켜먹거나 학교식당에서 먹는 상황에서 한층에 2개씩 있는 요리구역은 충분해 보입니다.

안전을 위한 비상구의 모습입니다. 머...특별히 예쁜 것은 없군요.




지하 2층에는 식당이 있습니다. 아직 식당이 들어와 있지는 않으나 10월중순정도부터는 영업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방식은 학교식당식이 될 것으로 예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맛은 학교식당급에 가격은 몇 배 부르는건 아니겠지요?

예쁘지 않은가? 식당으로 가는 길이다. 참고로 기본 출입구층은 B1, 즉 지하1층이다. 계단 말고 엘레베이터도 당연히 있다.

아직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은 식당전경.





4) 총평
가능하면 신 기숙사로 들어가지 마시고, 왠만하면 샤오위엔(勺园)의 6,7,8호동을 들어가기를 강력추천합니다. 새로운 기숙사는 비용은 비싸고, 개인 공간을 줄어들었고, 공간배치도 엉터리이며, 법학과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경우에서 수업하는 교실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또한 내년 초까지는 계속 공사가 진행되기에 조용하지도 않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직원분은 친절하게 대응해주고 참 좋았으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기숙사보다 좋지도 않은 시설과 구조로 더 비싼 돈을 받는 것 때문에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없습니다.




5) 그 외의 사진들.

전설의 철문이 열린다~~ 두둥. 농담이고, 현재 이미 입주한 사람들도 있다.

요것이 6호동.


북경대학교 박사후(포스닥) 숙소.

현재 열심히 만들어지고 있는, 1,2,3,4,5호동. 참고로 가운데 있는 1호동은 유학생기숙사가 아닌 호텔임.


북경대학교의 유학생 기숙사인 勺园(샤오위엔 shaoyuan) 2호동의 4층에는 열람실이 있습니다. 사실 저 자신은 열람실에서 공부하기보다는 침대에 들어누워서 책을 보는 스타일입니다. 그러나 올해 베이징의 기온은 더위에 강한 저로서도 버티지 못할 정도였기에, 에어콘이 빵빵 나오는 이곳으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찍은 것입니다. 작업중의 자리는 지저분의 극치...)

비록 열람실이라도 저는 최적의 작업환경?!을 추구하기에 어느 사이에 아름다운?! 저만의 자리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더위가 가시면 다시 방으로 돌아가서 작업을 하겠지만, 그 전까지 있었던 추억의 자리로 이렇게 기록에 남겨둘까 합니다.


열람실로 들어오셔서 왼쪽 모서리에 저의 자리가 있습니다. 심심하면 음료수 들고 찾아오셔요.

반대쪽에서 보면 이렇게 배치가 되어있습니다. 나름 제 영역만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실 북경대 열람실에는 따로 전용자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맨날 죽치고 있는 사람들이 저처럼 만들어놓은 각자만의 공간이 몇몇 군데 있답니다.

자세히 보시면 파란색 인터넷 선이 연결된 것이 보이시죠? 잘 기억해두십시오. 나중에 설명 들어갑니다^^


사실 작업중에는 보조 키보드를 꺼내서 작업을 합니다. 안 그러면 손목이 아파요-0-;; 또 제가 노트북을 끄지 않다보니...열에 녹았는지 노트북의 키보드의 몇몇 버튼이 잘 안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보조키보드도 좀 작고 키감도 좋지 않아서, 대형크기의 키보드를 살까 생각중에 있습니다.

지저분해보인다고요? 사실 책은 치워놓은 거랍니다. 책까지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보시면 주위로 접근하기 싫으실지도....--


정면에서 찍은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듀얼모니터를 강력추천합니다. 그러니까 노트북 화면과 확장모니터 화면이 같은 것이 아니라, 이어지듯이 연결되는 듀얼모니터를 추천합니다. 이렇게 되면 작업을 할 시에 자료를 보기가 좋습니다.


바로 오른쪽에 있는 캐비넷의 한 줄을 제 전용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사실 여기 캐비넷은 슬슬 정리할때가 온것 같습니다. 이미 2년전에 졸업한 제 친구녀석의 책까지 아직 있더군요. 수북히 쌓여있는 포스트잇은 제가 이런저런 잡상이 떠올랐을때 적어두고, 일단 버려둔 거랍니다. 나중에 어떻게든 쓰이더군요--

요즘은 나름 몸도 생각해서 비타민에 홍삼정까지--



열람실 역사상 최초의 삽질입니다 음하하...기념으로 놔두기 위해서 따로 찍었습니다. 이 선은 인터넷 선입니다. 열람실에서는 유표형님이 가져다 둔 공유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공유기는 입구에서 오른쪽에 있으며, 무선은 지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선택한 자리는 왼쪽 끝자리. 그래서 바닥을 통해서 인터넷 선을 연결해버렸습니다. 제가 알기로 열람실 역사상 저 같이 한 인간은 없습니다. 음하하하;;;; 삐질...



사실 열람실에서 이렇게 자리를 잡는 것은 그리 잘하는 짓은 아닙니다. 다른 분의 공부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 미안한 마음에 저도 몇가지 물건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위에 사진에 있는 것은 음이온정화기. 나름 몇 만원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을 열람실에서 작동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기모기향 장비도 제가 가지고 온 것입니다. 쓰고 싶은 분은 마음대로 써주시기 바랍니다.


오랜만에 잡담글이었군요. 요즘 저는 이러고 살고 있습니다. 하하하^^:::

* 여친님께서는 이 글을 보시고는 포스팅할게 그리도 없었냐고.....방정맞게 왜 이런걸 자랑하냐고........하십니다....흑....자....자랑이라기 보다는.......나름 예쁘게 꾸며놔서 뿌듯함에 올린건데...올린건데......흐흑..방정 맞게...방정맞게...ㅠㅠ 미워!!!

죽을 거 같습니다. 그 동안 생활패턴을 밤에 자는 것으로 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이넘의 벼락치기 습관은 고쳐야되는데 아무리 해도 데드라인에서의 집중력만큼 평소에는 안나오는군요. 에휴..한심해라.

발표 주제는 신라와 당의 관제비교라고 할까요? 사실 내용은 개뿔도 없습니다. 이 수업 왜 신청했나 심히 의문입니다. 관제사에 관심도 없고, 전공도 아니고...그냥 들을 것이 없어서 신청했는데 발표만 2번에 레포트도 써야되니....에휴.....

피곤한데 발표는 12시 반. 남은 준비 시간 약 5시간. 일단 완성된 PPT...그러나...
제가 만든 PPT를 제가 못 알아먹겠습니다. 흑...발표할 내용 요약을 어느 정도는 해야겠습니다.
이넘의 역사쪽은 사료만 나열해대니 정작 생각같은 것을 PPT에 거의 안 담았더니....이딴 일이 벌어지는군요. 물론 제가 이쪽에 대한 이해도 개뿔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고딩 전부터 알던 진골이니 육두품이니 머니 하는게 실제 학문쪽에서는 상당히 난해한 문제군요. 큭..ㅠㅠ

담배 한대 피고 다시 한번 빠져 봐야겠군요. 근데 제목은 일단 신라와 당의 관제비교인데, 관제 비교는 개뿔. 제목만 거창하지 몇몇 사례만으로 엉렁뚱땅.....아싸...후...


등록금 : 1학기 8500元 * 2 = 17000元

집값 : 한국평수로 25평기준 1500元 * 12 = 18000元 = 2인 기준 /2=9000元

생활비 : 1500元 *12  = 18000元

합계 : 35500 元

2009년 5월 20일 기준으로 환율이 54 이므로 10000 : 54 = X : 35500

대략 6574000원이 나온다.

또한 1년에 한번씩 한국에 간다는 가정하에 왕복 비행기값 50만원을 추가(사실 더 싸다)

총 700만원의 결론이 뜬다.

라고 창춘에 계신 블로거분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장춘에서는 저 가격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베이징과 상하이에서는 결코 불가능에 가까운 금액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등록금 액수 자체도 훨씬 높습니다. 이것을 떠나서 베이징 오도구에는 1500원짜리 집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가장 싼 기숙사가 제가 살고 있는 한달에 900원입니다. 그리고 오도구에 산다면 위의 장춘쪽 블로거가 말한 집은 대략 한달 3000원은 기본으로 생각하시는 편이 좋겠군요.

생활비 1500원정도로 베이징에서 살려면 딱 저처럼만 살면 됩니다. 그리고 전 왜 그렇게 사냐고 주위 사람들이 불쌍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는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제가 말해놓고도 비참하지만 기본적으로 2000원은 있어야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참고로 전 술을 거의 마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셔봤자 가끔 방에서 마시는 맥주 한캔 정도일뿐입니다. 만약 술 한번 마시면 200원정도는 각오해야될 터이지요. -_

저 개인적으로 초기 비용까지 생각해서 처음 일년의 최소 비용을 1000만원은 잡는 것이 속편한 일입니다.(개인적으로는 최소 1500만원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이하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인생 피곤해질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리고 영양실조는 서비스로 따라붙게 될겁니다.

  2009 2008 2007 2006 2005 2004
法学院 6 11 9 11 12 9
光华管理学院 13 12 10 10 12 13
国际关系学院 20 20 22 22 21 20
经济学院 9 8 13 15 17 17
考古文博学院 1 1 1 1 1 6
历史学系 5 10 2 3 7 10
社会学系 15 10 5 9 9 8
新闻传播学院 11 12 10 7 7 14
艺术学院 7 4 2 3 5 6
哲学系 3 3 2 1 1  
政府管理学院 6 4 13 7 5 9
中国语言文学系 15 21 17 14 15 15


2009년 북경대학교 본과 입학생 내역이 나왔습니다. 올해도 이름을 공개하지 않는 짓을 하면서 불법입학을 부추기고 있다고 밖에 보이지 않는 “짓”을 했지만, 어찌되었던 대부분의 사람은 열심히 노력해서 들어오니 일단 넘기겠습니다. (불법질 하는 2~3명아. 죽어^^)

2004년부터 2009년까지 각 과의 입학자수입니다. 해당 수치는 예과반과 경희대반을 포함하지 않은 수치입니다. 또한 이과 계열은 일부러 배제하였습니다. 그쪽은 숫자가 너무 없고, 현재 북경대 한국학생회에 소속되어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기회를 빌어서 한가지만 알려드리면, 북경대학교 의학부는 위의 입학시험을 통해서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위의 수치만으로도 이것저것 재미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일단 국제관계는 여전히 거대학과이군요. 타학과에 대비해서 널널하게 좋은 학점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예비준비생들에게도 많이 전해진듯 합니다. 그에 비하여 중국어와는 2008년에 반짝하고서는 그 뒤로는 매우 쓸쓸 한 상태로군요. 하긴 역사학과 역시 올해는 딸랑 5명이 들어와서 매우 슬프답니다. 그에 비하여 참 재미있는 변화를 보이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사회학과의 경우 2007년에 입학자수가 대폭 줄었지만, 2008년의 10명에서 2009년의 15명으로 꾸준하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예술 학과 역시 소수에서 점차 그 숫자를 늘리고 있습니다. 그에 반하여 고고학과는 여전히 매번 1명만을 받고 있는 눈가에 눈물이 맺힐 듯한 가련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004년에는 신입생 하나 없던 철학과도 이제는 3명이나 뽑는데 말입니다.(하긴 뽑혀도 안 들어오더군요-_)

또한 재미있는 곳이 경제학과 입니다. 경제학과는 2006년 이래로 계속적으로 입학자수가 줄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과반과 경희대반을 통해서 경제학과로 가는 사람들의 숫자도 상당하기에 사실 큰 숫자 변동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상황에서는 단순한 중국어 실력비교에서는 당연히 뒤쳐질 수밖에 없는 예과반과 경희대반이 대거 합류함에 따라서 전체적인 레벨 저하가 예상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 수업시간에 심심해서 통계 한번 만들어본 바로였습니다. 각기 서로 다른 분석을 한 번 해보아요^^ (아래쪽은 그냥 서비스~ 서비스~)

축사 : 노옹래 (전 국회의원)

전성흥 :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전 현대중국학회 회장, 현 인민대 방문학자)

한국에서 사회과학의 중국학 계보에 대한 이야기(관심없다는…본인은 인문학ㅠㅠ)와 중국유학생들에게 하는 조언(넓은 중국을 돌아다니고 어쩌고…솔직히 뻔한 말.) 무엇보다 교수님이 말한 것 대부분이 사회과학쪽 것인지라 크게 공감되는 면은 없었다^^:::

바로 : 개인적으로 어쩔 수 없다고 본다. 본인과 같은 고민은 상당히 특수한 것이다. 한국을 “기반”으로 하여서 중국을 연구하는 것과는 다르게 중국에서 오래동안 있으면서 한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닌 이른바 중간자가 된 사람들의 고민은 너무나 특수하다. 교수님이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은 이미 많은 시간동안 자연스럽게 행해왔던 일이다. 넓은 중국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중국친구들이 있는 것. 문제는 그 다음이다. 존재적 기반에 대한 고민따위가 아니다. 진정한 중간자로서의 특수성을 어떻게 발현할 것인가?


중국에서의 정치 체험을 어떻게 할것인가?

교수님에 의하면 대화의 상대을 만나는 것.   바로 : 개인적으로  또다른 한 방법은 인터넷을 통한 사건분석이 더욱 더 정확할 것 같다. 마치 외부에서는 인터넷이 모두 통제되는 것으로 알지만, 실질적으로 찾아보면 의외로 쉽다^^:::

중국이 현재 H1N1 전염병(일명 돼지독감)에 대한 대응은 매우 강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멕시코에서 날라오는 비행기 차단에 감염의심환자를 외국에서 비판을 받을 정도의 감금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사천사람 중에서 발병이 확인되었습니다.

사실 이 발병환자가 의심환자였을 때부터 중국정부는 곧장 그가 탑승했던 5월 8일 NW029편과 9일 3U8882편에 탑승했던 사람들을 소집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특히 사실상 모든 휴대폰에 공고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렇게 강력하게 대응을 하다보니, 현재 중국에서는 해당 전염병에 대해서 그리 큰 공포는 없습니다. 물론 언론매체나 대중이나 모두가 큰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사스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입니다. 사스때와 같은 모두가 공포감에 외출을 자제하는 모습은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만간 다가오는 단오절 휴가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있다고 보입니다. 전염병은 그 병자체도 위험하지만, 그로 인한 공포로 마비되는 사회 시스템도 문제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매우 긍정적인?! 모습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까지 중국은 H1N1 바이러스의 확산 자체에는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특히 사스때와는 다른 국민들에 대한 홍보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전염병시 정부대응에 대한 신뢰감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중국은 아직 하층민에 대한 의료시스템에 제대로 정비가 되어 있지 않기에 언제 전염병이 확산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 봅니다.
천재들의 모임이라고 하는 북경대학교의 이면을 살펴보면 그 휭휭 돌아가는 머리를 가지고 쓸데 없는데 사용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가쉽이야기들은 북대 안에서 순식간에 나돌아 다니고는 합니다. 그리고 그냥 보통 수준의 가쉽이 아니랍니다.

예를 들어서 한 여자의 블로그에 꽃을 찍은 사진이 올라왔습니다. 그럼 평소 그녀의 앵글각도가 아니라는 판단부터 시작해서, 그녀의 카메라가 아니고 이건 XXX인데? 어? 그거 OO가 가지고 있는거잖아. 그녀석 저번에 어디 간다고 했는데? 오?! 감 잡았어 -_-;;

한마디로 잘 돌아가는 머리 참 쓸데 없는데서 굴리고 있습니다. 거참... 그리고 각 학과마다 가쉽걸이라고 하나요? 모든 가쉽의 총본산이 있답니다. 저희 역사과에도 있는데 그 누님에게 걸리면 뼈도 못 추린다죠?! -0-;;


사실 오늘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제가 오랜만에 가쉽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본과 이후로 처음이네요. 허허허;;; 이미 여친이 있는거 다 아니 그런쪽 가쉽은 아니랍니다. 단지..

저희 역사과의 석박사 담당 선생님이 석박사 연락부의 저에 대한 비고란에 韩国留学生 帅哥 라고 적어 놨다는 이야기가 좀 돌고 있답니다. 참고로 위의 내용을 해석하면 "한국유학생 멋진 남자"정도 된답니다. 음하하하하하-_-;;;
나는 중국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조기유학 과정을 거쳐 중국대학에 진학한 학생을 많이 보아왔다. 이들은 발음, 표현력 등에서 아무 어려움이 없을 정도의 중국어 실력을 자랑한다. 그러나 이런 유창한 중국어 실력을 갖췄음에도 수업을 따라가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학생이 많다. 이들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많은 부모가 아이의 중국유학을 결정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세계적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해서다.

2007년 5월 통계에 따르면 재중 한국 유학생 수는 5만7000명으로 2005년에 비해 15.3% 증가했다. 중국에 유학온 학생 3명 중 1명이 한국 유학생이다.

통 계에 포함돼 있지 않은 초·중·고 중국 조기 유학생 수는 2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 수를 합하면 8만명에 가까운 학생이 중국에 유학 중인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중국은 급변하고 있지만 교육의 본질은 큰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

한국과 중국은 국가체제가 전혀 다르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은 사상교육에 매우 심혈을 기울인다. 마르크스 사상,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 등 내용을 사상정치 과목뿐 아니라 역사과목에도 접목해 아이들에게 강하게 주입한다.

또 현재 우리나라에는 복귀학생에 대한 프로그램이 거의 없다. 부모동반 유학을 제외하고는 초·중등 학생의 해외유학이 모두 불법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외국과 한국의 커리큘럼이 달라서 학생들은 복귀 후에도 학습장애에 시달린다.

둘째, 부모는 자녀가 중국에서 중국 친구들을 사귀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중국어를 배우게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사실상 현지 학생과의 교류에서 문화체험을 하는 유학생은 매우 적다.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 반까지 이어지는 8시간 이상의 주입식 교육을 한국학생이 소화하기에는 무리다. 언어의 장벽을 넘지 못한 유학생은 수업이 부담스럽고, 결국 공부에 흥미를 잃게 된다.

중 국은 중학교까지만 의무교육이어서 고등학교는 진학시험을 치르고 커트라인에 따라 좋은 고등학교부터 일반 고등학교까지 배정된다. 아슬아슬하게 떨어진 학생은 그에 따른 금액을 내고 입학하기도 한다. 따라서 중학교 공부는 수능시험 못지않게 학생들에게 부담을 준다.

더욱이 물가 차이만 보고 대부분 ‘중국유학이 그래도 미국유학보다는 싸다’고 하지만 사실상 중국의 한국 유학생 유치 목적은 경제적 수입이어서 돈을 요구하는 때가 종종 있다. 초등학교부터 중국에서 유학한 한 학생은 고등학교 때까지 매년 100만원에서 300만원 정도의 추가수업료를 냈다고 한다.

조기유학을 거쳐 대학을 졸업한 학생과 대학부터 중국에서 유학하기 시작한 학생을 비교해 봤을 때 발음이나 언어구사력에서 조기유학생이 월등하다. 그러나 취업의 문을 두드리는 과정에서는 똑같은 경쟁을 하게 된다.

글로벌 시대에 경쟁력 있는 인재는 단순히 중국어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전문 분야에 대한 탁월한 지식과 창조적인 사고력을 갖춘 인재다.

좁은 취업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언어만이라도’식의 무조건 보내기 유학보다 조기유학에서 얻을 것과 잃을 것을 미리 예상하고 아이의 적성에 맞는지를 아이와 함께 신중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베이징(중국)=김바로(베이징대학 역사학과) ddokbaro@gmail.com>

본 내용은 전자신문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서 들어왔다. 몸 건강 상태가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인생에는 감탄과 탄사를 보낼 수 밖에 없고, 존경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건강이 그리 좋지 않은 모습을 보니 조금 마음이 아팠다.

 

1) 남북문제

북한의 핵무기 보유에 대해서 반대한다. 9.18이나 6자회담의 성과대로 평화적인 해결을 하기 바란다. 그 중에서 6자회담의 의장국인 중국의 적극적인 행동을 촉구. 비록 최근 남북관계가 안 좋지만, 앞으로 평화적으로 되기를 바람.

동북아 안보평화체계확립을 촉구등등. 평소에 그가 말하던 내용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2) 한중간의 문화 협력에 대해서 아주 조금 말함.

뻔하디 뻔한 한중 교류 협력에 대한 이야기. 개인적으로 중국에서 오래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지긋지긋할 정도의 말임. 중국은 과거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었다. 잠시의 좌절이 있었지만 앞으로 다시 강대국이 될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강대국으로써의 책임을 다하길 바란다. 동북아시아 공동체가 형성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6자회담을 통해서 동북아시아가 안정되어야 할 것이다.

 

3) 질의 응답

1- 한반도의 평화문제에서 중국의 역할을 많이 강조하였는데, 반대로 한국의 역할을 무엇인지 궁금합니다.(중국 국제관계학생)

--- 한국은 육자회담 의장국으로 신임을 받고 있는 중국에 협력을 해서 앞으로 나가야 된다고 본다.

2- 김대중과 노무현이 말하던 햇빛 정책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도와주었다는 의견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중국 국제관계학생) -

-- 실제로 북한의 핵문제는 1983년부터 시작된 것이며, 햇빛 정책은 1900년대 말에나 실시된 것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하기 힘듭니다. 그리고 햇빛 정책은 북한을 국제사회에 공개적으로 나서게 하여서 오히려 큰 문제가 될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음. 또한 이러한 대화로 해결하는 것은 국제적인 환영을 받는 기본 원칙이라고 봄.

3- 현재 북경대에 1000명에 가까운 유학생이 있는데, 이 유학생들이 아시아 평화를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해야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아시아 평화에 대한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십니까? (한국 한국학생회 부회장 정원석)

--- 자기 주변부터 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유학생들은 중국학생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아시아 평화를 위해서 공동으로 노력하자고 다짐하고 거기에 대해서 토의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또한 우리는 인적교류의 확대를 통해서 한국과 중국 사람들이 서로 화해와 협력 속에 아시아를 위해서 노력했으면 합니다. 한국과 중국은 오랜 시간동안 서로 교류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한국 나름의 문화와 경제를 발전시켰습니다. 이제는 동북아시아를 볼 때 , 중국 러시아 북한 남한 일본 미국. 이 육자중에서 모두가 서로 협력을 해서 화해하고 나가야 됩니다. 누구는 배척하고 누구와는 협력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동북아시아의 안정적인 발전에서는 모두의 힘이 필요합니다. 서로간에 의견을 존중했으면 합니다.

육자는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그 힘의 중심은 중국입니다. 우리가 다 같이 모여서 세계에 공헌을 할 때 입니다. 과거의 강대국은 제국주의였습니다. 이제 강대국은 책임을 지는 강대국입니다. 이제 잘난 나라도 못 난 나라도 없습니다. 다 같이 하나님으로 내려 받은 천부인권을 위해서 노력해야 되며, 나는 중국이 위대한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이 일을 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4) 개인적인 느낌

한국사람들도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말을 모호하게 한다. 농담이 아니고 정말이다. 또한 계속 원고만 보면서 읽는 수준이며 원고도 똑 같은 부분을 2번 읽는 경우까지 있음. 개인적으로 너무 나이를 드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본인이 나름 상당히 존경하는 분이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동네할아버지들이 이제 더 이상 미래가 없어 과거만을 뜯으면서 이미 껍질만 남은 과거의 영광을 반복하는 수준으로 보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본인이 알기로 중국파라고 보기 힘들다. 중국에 대해서 그리 우호적인 입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위와 같은 발언을 한다는 것은 한국에 상당한 의식변화가 있다는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박수를 치면서 환영하는 바이다.

중국의 뒷구멍을 빨라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사실 그대로의 중국을 바라보자.

아. 그리고 번역한 분^^ 역시면 역시겠지만, 상당히 깔끔하셨다. 오! 마지막에 김대중 대통령이 번역자과 사회자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면서 박수를 쳐달라고 하셨다. 오-_-;;; 보통 번역자는 무시당하기 마련인데….감사하옵나이다.^^;; (제가 번역한 것은 아니지만요)

[막말북대] 북대 학생회 탄생비화 - 선사시대을 통해서, 2004년에 조직된 학생회 준비위원회가 어떻게 함몰되었는지 알려드렸다. 이번부터는 본인이 직접 참여한 2005년 학생회 준비위원회로 가보도록 하겠다.

2005년의 학생회 준비위원회는 임시 학생회장인 광화의 도진우씨를 중심으로 각 과의 학생회장들로 구성되어있었다. 05 준비위원회는 04년도의 실패를 참고하여서, 소속 맴버들이 출마를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한 상태였다.

국가를 처음 세울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일까? 본인은 이제 확실히 대답할 수 있다. 바로 헌법이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 헌법이 한 나라를 세울 당시에는 매우매우 중요하다. 헌법을 통해서 기초적인 모든 구조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회칙도 역시 동일하다.

제 1차 유학생회 회칙은 청화대학교 한국유학생회의 회칙 및 인민대학교 회칙을 참고하여, 당시 법학과 과대 이창욱씨가 초본을 만들었다. 이 초본에서 가장 중시한 것은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제 3장 회장 및 부회장, 제 5조 회장 3항 : 본회의 회장 및 부회장은 특정학과에서 연임할 수 없도록, 회장 및 부회장을 배출한 학과에서는 2년간 회장 또는 부회장에 입후보할 수 없다.

당시에는 특히 국관, 경제, 법학으로 대변되는 거대 학과들만의 전횡을 염려하였고, 그래서 최대한 돌아가면서 하게 하여, 권력의 집중을 막으려고 하였다.

제 3장 회장, 제 6조 회장의 임기 : 본 회 회장의 임기는 당선 후 3주일 후부터 다음 회장 선거 후 3주일까지 1년이며, 재임할 수 없다.

이 규정은 한국의 헌법과 동일하다. 물론 지금의 한국에서 헌법개정을 말하는 것과 동일한 폐해를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해서 훌륭한 지도자이면 연임할 수 있도록 해주어서, 길게 보아야 되는 정책을 실행하게 해야되는데 아예 재임을 막아버린 것이다. 물론 이것도 권력의 집중화를 걱정해서 만들어진 조항이다.

제 3장 회장, 제 7조 회장의 업무, 권한 및 의무 제 9항 : 본회의 회장은 재임기간 본회의 어떠한 단체의 대표를 겸임할 수 없다. 제 8조 부회장의 업무, 권한 및 의무 제 5조 : 본회의 부회장은 재임기간 본회의 어떠한 단체의 대표를 겸임할 수 없다.

이것 역시 권력의 집중과 편파행동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예를 들어서, 예술과 과대를 겸임하면서 회장을 하면 당연히 예술과에 대해서 더 지원하지 않느냐는 시비가 일기 쉽고, 혹은 패싱이나 소리하나 회장직을 하면서 학생회 회장직을 겸임한다면 똑같은 시비기 일어나기 쉽다. 이것도 역시 권력의 집중화를 염려한 것이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사항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학생회장의 권력의 크기를 견제하고, 한 과가 다 해먹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여기까지는 대다수의 의견이 일치하였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한 항목으로 인하여 편지풍파가 일어나게 된다. 단 한 줄로 인하여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그리고 그 난리 속에서 한 쪽을 대변하던 것은 본인이었다. 그럼으로 이 사건은 어느 정도 편파적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역사학도로서 최대한 냉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할 것이다.

제 6장 회장 및 부회장 선거, 제 14조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제 8항 : 본회의 선관위는 선거권, 피선거권이 없다.

그리고 이 조항에 대해서 당시 경제학과 과대였던 허철씨가 반대를 한다. 그의 발언이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해당 조항은 희생을 강요하는 조항이었다. 그렇다면 본인은 왜 이 조항을 집어넣을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을까? 그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들 상상해보도록 하고, 다음 이 시간에^^
(힌트를 드리면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말이 있던가?! ^^::)


개인적으로 한가지만 더 말하자면, 임시 학생회장이라서, 지금은 학생회 연표에 남지도 않고,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이제는 없는 임시 학생회장 도진우씨에게는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보낸다. 그는 사욕 없이 자신이 맡은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여서, 정식 학생회를 만들어낸 진정한 영웅이다. 진우야^^ 잘 지내지?


본 글은 북경대학교 팀블로그에 올린 글입니다.

经学校研究,根据考试成绩,决定以下同学参加北京大学2009年外国留学生本科生复试。

 

一、以下同学请于59日上午800开始参加复试

准考证号(尾数后三位):

1

22

117

240

339

465

553

2

23

136

268

395

487

677

4

30

150

305

399

488

702

11

42

189

309

421

493

718

19

93

198

335

454

533

 

 

13

34

108

140

176

237

257

15

59

116

151

211

241

260

16

62

122

161

213

250

261

17

88

135

162

214

254

264

33

104

139

163

215

256

267

 

二、以下同学请于59日上午950开始参加复试

准考证号(尾数后三位):

269

301

346

393

430

456

485

276

304

369

402

440

463

492

277

314

380

407

443

467

494

287

326

382

422

444

482

495

296

332

392

424

447

483

496

 

497

555

584

621

659

703

714

509

557

601

623

660

705

 

531

558

606

631

666

707

 

551

559

608

649

672

709

 

554

571

613

650

693

711

 

 

复试考场在北京大学校内,具体地点另行通知,请考生注意携带好准考证、本人护照,按规定时间到场,迟到者将取消面试资格。报名时尚未交齐报名材料的考生,复试时必须一并补齐,逾期将不再受理。

 

 

北京大学国际合作部

留学生办公室

2009427


올해도 합격자의 번호만 있고, 이름은 없다. 에휴...
그래도 시험장소에서 "나름" 조용했던 것을 행복하게 생각해야겠지...


저는 북경대학교 역사과 석사과정의 김바로라고 합니다. 아마 저를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작년에 북경대학교 입학시험. 그 속의 부끄러운 한국인. 을 쓴 사람입니다. 그 때 명예훼손 이야기도 나왔었죠. 그런데 올해 또 한번 고소한다고 하셔야 될듯 합니다.

제가 아는 정보로는, 작년하고 다르게 이번에는 북경대 한국유학생회 차원에서 입시학원들과 유학원과 접속을 하였습니다. 자제를 촉구하는 것은 물론 해결 방안까지 제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받아들일 생각을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어디 학생회가 우리가 하는 일을 방해하냐"라고 하셨다지요? 그 뿐만이 아니라 저를 언급하시면서 불러오라고 하셨다지요?

결론적으로 작년과 똑같이 제대로 허가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자리를 만들고, 마음대로 현수막을 걸어버릴 생각이라시지요? 좋습니다. 저도 제가 쓴 글의 책임을 짊어지어야 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제대로 이루어지길 바랬고, 뒤에서 나름의 노력을 했습니다만,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면 올해 시험 보는 장소에 가서, 여러분들이 하는 일을 그대로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이따위 일을 벌이냐고요? 전 북경대학교 본과 졸업생이자, 현재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 학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굳이 보통 분들이 쉽게 받아들이실 이유를 말하자면, 기자협회에 정식으로 등록된 "기자"로서 사회적인 문제를 공정하게 보도하기 위해서 입니다.

사실 기사만 쓸 생각을 한다면, 이렇게 글을 올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당일의 어처구니 없는 현장만 사진으로 찍어서 올리면 되겠지요. 하지만 전 그런 일 자체가 벌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솔직담백하게 공개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제발 지금 하려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경고합니다. 그리고  부탁드립니다.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셔서, 여러 학원들이 북경대 한국유학생회의 아래에서 다 같이 순순하게 응원하시기를 바랍니다. 북경대 입학시험은 당신들의 세력싸움이나 기싸움의 장소가 아닙니다. 학생들의 땀방울을 시험받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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