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无我는 "내가 없다"는 뜻으로서 무아지경에서의 무아를 말한다. 불후不朽는 "영원함"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전세계의 인생에 대한 모든 철학토론은 "내가 없음"과 "영원함"이 얼마나 동일한 것인지에 있는듯 하다. "내가 없음"과 영원함"은 언뜻 보기에는 서로 충돌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내가 없기"에 비로서 "영원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을 모두 내가 있다고 느낀다. 사실 내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면 어떤 이도 대답하지 못한다. 먼 옛날 사람들은 편의와 필요에 의하여 "나"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사람들은 "나"를 실제로 존재하는 말로 생각하고 세계에 정말로 "나"가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다. 마치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늘"이라는 실체가 비를 뿌리고 있는 것이 아닌것과 같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 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나는 나의 생각을 알 수 있을 뿐이며 나의 생각은 결코 내가 아니다. 마치 나의 몸이 "나"가 아닌 것과 같다. 만약 나의 몸이 "나"라면 나의 손톱이나 머리카락은 내가 아닌 것일까? 만약 손톱이나 머리카락이 "나"가 아니라면 나의 사상과 생각이 어찌하여 "나"일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의식하는 일상의 모든 것은 단지 "나의 것"일 뿐이지 "나"가 아니다.


그럼 "나의 것"은 어떠한가? 자세하게 살펴보면 "나의 것"이라는 것도 결코 "나의 것"이 아니다. 일상용품부터 살펴보자.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은 "나의 것"인가? 옷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재료와 디자인이다. 그런데 옷의 재료나 디자인 모두가 내가 발명한 것도 아니고 내가 만든 것도 아니다. 옷의 재료는 이미 자연에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이 공장에서 방직기를 돌린 뒤에 세계 각국에 판매하고 있는 것을 살 뿐이다. 디자인 역시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유행에 따라서 만들어낸 것이다.

이 옷의 재료나 디자인은 나와는 관계가 없는데도 이 옷을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나의 것"이라는 말을 왜 하는 것일까? 내가 입고 사용하고 그 소유권이 나에게 있기에 나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 뿐이 아니던가? 구두 가게에 들어가보면 온갖 디자인과 재료의 구두가 전시되어 있다. 이 때까지는 이 구두와 나는 어떠한 관계도 없다. 내가 돈을 지불하고 구두를 신어야만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내가 없어도 방직공장의 천이나 신발가게의 구두 자체는 변함이 없다. 나를 초월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인데 나와 어떤 관련이 있겠는가?

같은 이유로 요리의 맛과 향이나 건축물의 재료나 디자인 혹은 교통수단등의 물질생활에 속하는 모든 것들이 이미 나와는 독립되어서 먼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나와는 관계 없이 존재하며 나와 같이 없어지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나의 것”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인가? 외부의 모든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너는 단지 그 속에 들어간 것 뿐이다. 너는 “나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너야말로 “그들의 것”이다.


그 다음에는 나의 가족, 나의 학교, 나의 동네, 나의 국가라고 불리우는 집단사회생활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들은 모두 나의 것이라고 불린다. 사실 모두가 나의 것이 아니다. 가족만 놓고 살펴보자. 이전에는 대가족이였지만 지금은 핵가족이 되었다. 이전에는 일부다처제였지만 지금은 일부일처제이다. 이전에는 부모의 명령에 의하여 혼인을 하였지만 지금은 자유 연애시대이다. 이전에는 부모형제사촌오촌육촌등의 온갖 복잡한 관계가 형성이 되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변했다. 그런데 이 모든 변화가 나의 생각대로 변화한 것인가? 아니면 이미 그러한 가정이 있고 내가 그 속에 들어간 것일까? 위에서 말한 구두의 예와 같이 결코 내가 이러한 가정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주인이 될 수 있는가? 가족이든 신발이든 모두가 신발가게에서 사온 것과 같기에 너와 나는 주인이 될 수는 없다. 가족 제도에서 학교와 국가와 같은 모든 조직들도 어찌 내가 주인이 될 수 있고 어찌 내가 디자인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은 나보다 먼저 졵재하였고, 나를 초월하여 나의 외부에 존재하며 나와 같이 없어지지 아니한다. 세상은 오래 전부터 이러하였고, 그곳에 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신발에 신겨진 것이고, 이 가정에 태어나진 것이다. 나는 그들의 것이고, 그들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제는 나의 취미나 나의 신앙 혹은 나의 사상등과 같은 정신생활에 대해서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나는 오페라를 좋아한다. 나는 메이란팡(梅兰芳)의 경극을 좋아한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어찌 나의 취미일 수 있겠는가? 메이란팡의 노래라는 취미가 있었고, 내가 그곳에 들어간 것 뿐이다. 메이란팡의 노래는 마치 신발가게의 구두와 같이 나의 취미로 인하여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나의 취미가 없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내가 두보(杜甫)의 시를 좋아하거나 기독교도라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세상에는  두보의 시와 기독교의 신앙이 이미 존재하였고, 내가 그 속으로 들어가진 것 뿐이다. 어디 기독교는 나의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을 뿐이랴? 무엇이 기독교신앙이라고 말하기도 힘들다 . 당신이 만약 기독교 신앙을 자세히 분석을 하면 사실 기독교는 예수 이전에도 존재하였고, 예수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예수조차도 기독교를 나의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엄격하게 말하여 어떠한 한 사람의 사상도 “그의” 사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대체 어떤 사람이 홀로 “나의 사상”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엄격하게 말하여 이 하늘 아래 절대로 진정한 “나의 사상”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나의 것”도 없으며 “나”도 당연히 없다.


어떤 이는 인생은 연극과 같다고 한다. 이 말은 분명이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대본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 너는 무대의상을 입고 등장하여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연기하기만 하면 된다. 역할을 맡은 사람이 변하여도 공연은 대본대로 계속된다. 내가 이 세상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의식주부터 시작하여서 가정과 국가을 비롯하여 취미와 종교신앙이나 철학사상과 같은 모든 것들이 대본과 같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다양한 역할 중에서 한가지를 골라서 연기를 해야 된다. 그리고 내가 무대를 떠날 때 또 다른 역할로 변하면서 공연은 계속 된다. 당신은 무릇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인데, 어떻게 진지하게 "나"을 이야기 할 수 있는가? 당신이 말하는 모든 언어와 동작과 희로애락 모두를 어떻게 진지하게 "나"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기에 "연극의 인생관"은 "내가 없음"의 인생관과 비교적 근접해 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또 "영원함"을 말할 수 있는가? 이 모든 것은 위에서 말한 대로 "나"을 뛰어넘어서 "나"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영원함"이다. 그렇기에 만약 당신이 신발을 신기만 한다면 "영원한" 인생에 참가한 것이 아니다. 신발을 만드는 작업에 참가해야지만 비교적 "영원한 것"이다.


집에 사는 것보다 집을 만드는 것이 좋다. 연극을 보는 것보다 연극에서 연기를 하는 것만 못하며, 직접 각본과 음악에 참가하는 것이 더욱 좋다. 인생과 연극은 분명히 다르다. 인생은 배우인 동시에 제작자이기 때문이다. 한 편으로는 내가 존재하지도 않지만, 한 편으로는 영원토록 변함이 없다.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도 영혼이 계속 존재하기에 영혼 불멸 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중국의 선현들은 입덕입공입언(立德立功立言)이라고 하여 덕을 갈고 닦고, 공적을 쌓으며, 학술적으로 성공하는 것 을 영원 불멸한 3가지라고 말했다. 이 모든 것들은 모두가 사회공통의 것이고 보 잘 것 없이 조그마한 나와는 독립되어서 존재하며 객관적인 발전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죽은 자의 영혼이 바로 이곳에 의존하여 발현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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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모든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과 환영합니다.  본 글은 의역식 번역입니다.
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오랜만입니다. 최대한 쉽게 의역으로 해보았습니다. 혹시 기다리신 분 있으신가요? ^^....대충 번역해 놓고 보니 좀 문제가 있는 표현들이 좀 있군요. 정식 출판이 아니니 그냥 넘기겠습니다. -_;;
자유는 서방사상의 핵심이다. 그러나 그들은 개인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타당성이 없는 말이다. 만약 너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에 의한 한계를 가진다면, 너는 자유롭지 못한것이다. 만약 타인의 자유가 너의 자유에 의한 한계를 지닌다면, 그는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그들이 내세우는 자유주의는 현재 흔들리고 있다. 상호간의 자유의 충돌에서 명확한 선을 그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유는 반대는 간섭이다. 이 하늘 아래 2개 이상의 사물이 존재한다면 그들 사이의 간섭은 결코 피할 수 없다. 하나의 간섭이 있으면 하나의 자유가 손해를 본다. 간섭이 늘어나면 자유가 줄어든다. 외부의 간섭에 대응은 3가지를 넘지 않는다. 하나는 강력한 힘을 사용한 억압이며, 두번째는 조화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굴복이다. 모든 사람들의 자유를 타인의 자유까지로 한정한 것은 조화를 추구한 것처럼 보인다. 안타깝게도 타인과 자신사이의 선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기에 조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

무한한 발전 역시 서방사상에서 요구하는 특징이다. 만약 무한대로 발전하여 자신의 자유를 쟁취하려고 한다면, 타인과 자신 사이에는 억압과 굴복이라는 두가지 선택밖에는 남지 않는다. 한 쪽에서는 억압을 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결코 굴복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억압과 굴복의 과정에서 투쟁이 생겨난다. 현실에서 끊임없이 간섭을 통해서 자유를 구하려 한다. 그렇기에 가장 자유를 사랑하는 것은 가장 간섭을 사랑한다는 말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것을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할 수 있을까?


"도는 같이 가며 서로 어긋나지 않고, 만물은 같이 자라며 서로 상처입히지 않는다."(道并行而不相悖,万物并育而不相害 - 中庸 ) 이것이 중국인의 생각이다. 그러나 어떤 존재과 다른 존재 사이에서 서로 간섭하지 않고 충돌하지 않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아니면 상호간의 간섭중에서 결국 이상적인 조화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일까? 자연에 대해서는 일단 접어두고, 우선 인간에 대해서만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세상에 오직 너 하나만이 있을 수는 없다. 너와 누군가가 이 세상에서 같이 살아간다면, 분명히 타인의 간섭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이것을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천지간에 오직 홀로 있어야만 진정한 자유를 향유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이 살아가면서 혼자만이 존재할 수 있을까? 나는 인간은 오직 마음 속에서만 혼자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찌하여 오직 인간의 마음 속에서만 혼자일 수 있느냐?

먼저 앎을 거론해 보겠다. 앎은 알게 됨(피동)과 알 수 있음(능동)이 서로 연결되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는 능동과 피동을 초월하여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또한 알게 됨과 알수 있음의 조화를 이루어 중도을 이루게 된다. 알 수 있음이 알게 됨에 접근한다. 다시 말해서 알게 됨이 알 수 있음에 대해서 간섭을 하게 된다. 그러나 만약 앎의 면에서 살펴보자면, 이러한 간섭은 결코 간섭을 받은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각주:1].

춥고 배고픈 사람은 물질 생활면에서 보았을 때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앎에서는 배고 고픈 것을 알게 되고, 추운 것은 알게 되는 것은 자유롭지 않다라고 말할 수 없다. 앎은 물질과 나의 대립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물질과 나의 대립의 조화로 생겨나기에 앎은 절대적며, 그리하여 자유롭다. 앎이 자유라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사실 당신이 모른다는 것도 앎이다. 지식의 정면과 반면 모두가 앎이며, 그래서 인간 내면의 앎은 절대적이며 자유롭다.


이번에는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즐거운 다양한 감정에 사람들은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고는 한다. 사실 희노애락의 감정은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절대적으로 자유롭다. 앎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피동과 능동을 초월하여 독립해 있고, 피동과 능동을 초월하여 중립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쁨은 자유로운 기쁨이고, 화남은 자유로운 화남이다. 슬프고 즐거운 것도 모두 자유로운 슬픔이고 즐거움이다. 좋으면 좋다고 하고, 싫다면 싫다다고 한다. 외부에서의 좋음이 나를 간섭하여 좋아하게 만들어 나의 자유를 빼앗겼다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또한 외부의 싫음이 나를 간섭하여 싫게 만들어 나의 자유를 잃어버렸다라고 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너 자신이 좋기에 그것을 보고서 좋은 것이고, 너 자신이 싫기에 그것을 보고 싫은 것이다.

"그윽하고 정숙한 숙녀는 군자의 좋은 짝이로구"(窈窕淑女,君子好逑 - 《诗经》第一篇《诗经•关雎》[각주:2])나 역시 자유이고, "잠들지 못하는 것도"(辗转反侧《诗经·周南·关雎》[각주:3]) 역시 자유이다. "절박하게 원하는 것"(求之不得《诗·周南·关雎》)을 아는 것 역시 너의 마음 속의 자유이다. 얻고 얻지 못하는 것은 외부의 일이다[각주:4]. 외부의 일은 당연히 우리의 자유 속에 있지 않다. 그러나 절박하게 원하고 잠들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 속의 자유이다. 너의 마음 속의 희노애락을 포함한 모든 감정만을 놓고 본다면 당연히 자유이다.


위에서 말한 것 처럼, 자유는 내부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간섭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간에 어떠한 조화와 융합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마음의 앎과 감정은 모두 이미 밖과 안이 조화가 된 것이고, 물질과 나의 대립을 초월한 중립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과학, 예술, 문학, 종교, 도덕등에 속하는 것들은 모두 마음에서 살아있고, 앎과 감정의 연장선에 포함된다. 이것들은 모두 최대한 자유롭게 하여야 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최대한의 자유를 얻을 수도 없다. 그러나 외부의 사물의 간섭은 자주 자유를 초월하기도 한다. 물질자연부분에 관하여 앎은 곧 권리이다. 앎이 커질 수록, 권리도 커진다. 권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란 바로 외부의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 압력을 행사하고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자연물질계까지만 영향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이 권리는 인문사회에서는 모든 인류 자신에게 있는 것이기에 물질자연계와의 관계에서의 방법과 과정을 사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 물질자연계에서는 앎이 중심이다. 혹은 앎을 더욱 중요시한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인문사회에서는 감정이 중심이다. 혹은 감정을 더 중시한다고 할 수 있다. 깊은 앎과 진실된 감정은 모두가 일종의 권리이며, 모두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의 대로를 걸을 수 있게 해준다. 중국에서 오래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말을 소개할까 한다[각주:5]. 천왕께서는 현명하시니, 소의 죄는 죽어 마땅하옵나이다.(天王圣明,臣罪当诛(唐韩愈《羑里操》[각주:6]),이나 천하에 부모가 아닌 자가 없다(天下无不是的父母[각주:7]" 이 말은 사실이다. 일가친척이 화목하지 못하고 국가가 혼란하더라도, 충신이나 효자가 자유롭게 그 효와 충을 완성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인문역사상의 모든 예술, 문학, 종교, 도덕의 최고의 경지는 바로 일종의 마음의 자유를 발현시키는 것이다.


과학의 지식은 일종의 사물과 나 사이를 앏을 융합하여 외부로 발현시킨 무상의 자유이다. 예술,문학,철학, 도덕은 일종의 인간과 나 사이의 감정을 융합하여 외부로 발현한 무상의 자유이다. (사실 예술도 사물을 대산으로 하고, 과학도 인간을 대상으로 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괄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이 모든 것들이 안에서부터 발현되는 것이다. 정치상의 권력이나, 경제상의 재력은 모두 마음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외부의 사물 속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중요한 조건이 따라 붙는다. 만약 권력이나 재력과 같은 것에서 자유를 요구한다면, 얻을 수도 없거니와 타인에 대한 간섭이 될 것이다. 진정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것에 대해서는 냉담해야될 것이다.


중국 전통 사상은 마치 마음과 감정부분에만 집중되어 있고, 앎의 자유에는 방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근대 서방에서 이야기 되었던 자유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각성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무절제하게 정치와 경제에도 적용이 되었다. 그 결과 수 많은 문제를 유발하게 되었다. 영국의 철학자 루소는 제 1차세계대전 때 창조적 충돌과 점유적 충돌을 구분하였다. 이것 역시 대략 위에서 언급한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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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모든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과 환영합니다.  본 글은 의역식 번역입니다.
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따깡을 만들다가 기분 풀이식으로 답답할 때마다 번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안 다듬었습니다.  출판할 것은 아니기에 굳이 다듬지는 않았습니다. 글에서의 문제는 덧글을 통해서 지적해주시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위의 글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일단 한 작업이기에 공개는 합니다만...에휴...)

이번 편은 제가 잠들기 전에 적당히 손에 집어서 적당히 펼쳐서 본 부분입니다. 볼 때에는 아무 생각없이 봤는데, 번역을 하면서 보니 온갖 고문들이 다 있었군요. 그것보다 문제는 문체 자체였습니다. 중국어의 특징을 극단적으로 살린 문장들이 많았습니다. 볼 때야 이것이 오히려 더 편하고 중국어의 맛을 느낄 수 있지만, 번역할 때는 극악이군요.  이정도 분량이면 30분에 끝내는 것이 당연한데, 몇 일 동안 몇 문장 하다가 다시 따깡 쓰고;;; 이렇게 했답니다.


  1. 잡담 : 이 부분은 도무지 원문을 제대로 "번역"했는지 스스로도 의심스럽다.-_;; 이 글을 보는 한국어 사용자들이 제대로 이해가 되셨는지 궁금하다. 끙... [본문으로]
  2. 여기서는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 감정을 표현하는데 활용되었다. [본문으로]
  3. 보통 님을 생각하거나 고민때문에 잠들지 못하는 것을 나타낸다. [본문으로]
  4. 잡담 : 이 글은 정말 중국인..그것도 일정한 교육을 받은 중국인을 위한 글이다....시경 연타로구나... [본문으로]
  5. 잡담 : ....지금까지 위에서 넘쳐 흐르는 시경같은 말은 오래된 말이 아니더냐!!! [본문으로]
  6. 주문왕이 은걸왕의 손에 잡혀 있을때, 주문왕의 심리가 걸왕이 자신을 해하려 하든 말든 자기 자신은 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고 해석한 것. (왠만하면 보충 해석 필요 없을 정도로 하려고 했건만..) [본문으로]
  7. [/footnote])와 같은 말들은 진실된 감정의 발현이다. 순임금(大舜)의 효도나 굴원의 충성은 결코 외부을 향한 굴복이 아니다. 마음의 감정이 밖으로 뻗어나간 무한한 자유이다. 외부의 간섭과 융화된 일종의 내재적인 자유인 것이다.

    고수(瞽瞍)나 초회왕(楚怀王)은 분명히 순임금과 굴원의 마음이 요구하는 것에 강력하게 간섭을 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순임금과 굴원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고수(瞽瞍)나 초회왕(楚怀王)을 압박하여 이기지도 않았다. 순임금과 굴원의 효와 충은 인간을 넘어서 중도에서 일원화된 일종의 감정의 완성적 표현이다. 노자가 말하기를 "일가친척이 화목하지 못하면 효도와 사랑이 있고, 국가가 혼란하면 충신이 있다.六亲不和有孝慈,国家昏乱有忠臣(道德经)[footnote] 만약 모두가 화목하게 잘 살고, 모두가 효를 행한다면 특별히 효자라고 할 사람은 없겠지요. 모두가 국가에 충성을 한다면 특별히 충신이 있을 수 없겠지요. 사실 굳이 주석을 다는 이유는 저는 전묵선생님의 해석이 틀린것은 아니지만, 이 글의 원뜻과는 좀 다르다고 생각되서입니다.^^:: [본문으로]
이 책은 중국의 위대한 학자 쳔무(钱穆)의 수필집이다. (쳔무에 대해 더 궁금하시면 쳔무(钱穆)는 누구인가?) 그는 역사학자였을 뿐만이 아니라, 철학자였고, 문학자였다. 무엇보다 당시의 시대의 풍랑 속에서 학자다움을 잃지 않은 위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책은 매우 얇다. 전체 글자수가 9만여자에 불과하다. 한국어로 번역을 하여도 잘해봐야 30만자가 되지 않을 아주 얇은 책이다. 하지만 그 글자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는 내용은 그렇게 얇지 않다. 이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우리도 같이 물결조차 없는 호수에서 한자에 10번 생각하고, 한 문장에 100번을 생각하면서 한가로이 날아오를 필요가 있다.

현재의 치열한 삶 속에서 무슨 말이냐고 할지 모르겠다. 과거 동양의 조상들은 관직에서는 유교의 딱딱하고 절제된 예법에 충실하였지만, 그가 퇴근한 뒤 혹은 퇴직한 뒤에는 도가에 빠져서 삶을 향유하였다. 자연과 노닐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로움과 한가로움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알지 아니한가?

이 책은 쳔무(钱穆)가 1948년 봄에 그의 고향인 쟝수(江苏) 우시(无锡)의 지앙난대학(江南大学 - 강남대학) 의 교수로 있으면서 남는 시간에 작성한 글이다. 본 책은 1960년 5월 홍콩련셩출판사(香港人生出版社 홍콩인생출판사)을 통해서 최초로 출판된다. 그리고 1980년 그의 나이 86세에 실질적으로 점차 눈이 멀어가는 상태에서 산민(三民书局 삼민서국)을 통해서 다시 한번 세상에 나타나게 된다.  본 번역에서 이용한 책은 싼리엔 출판사(三联书店)의 2005번 제 2판이다. (ISBN 번호 : 7-108-02242-7)

본 글의 번역은 본인이 추구하는 이상대로 최대한의 의역을 구사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한국인들이 번역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읽을 정도의 수준을 추구할 것이며, 원문에서 한국어적 표현에 적합하지 않은 중국어만의 표현일 경우, 원뜻을 최대한 해치지 않게 생략할 것이다. 무엇이라고 해야될까? 이 책을 완벽한 직역으로 번역하는 것은 마치 이 책의 핵심 자체를 거부하고 무시하는 것과 같다는 느낌이랄까? 이 책의 핵심이 머냐고? "한가로움~" (너 원래 의역파였잖아라고 하신다면 할 말이 없군요. 하하^^)

본 글에 대한 어떠한 번역과 맞춤법 상의 조언과 비판을 환영한다. 단, 근거도 없이 단지 자신과의 번역 원칙이나 가치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쏟아부어지는 비난이나 악플에는 방긋 썩소와 함께 그 분의 영혼을 위하여 옆차기를 날려겠다.

본 글의 번역은 출판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본 글은 어디까지나 특별한 사건만을 보도하는 미디어성 기사의 인기에 빠져있던 스스로를 반성하고, 진정한 중국을 보여줄 수 있는 내용을 소개하기 위해서이다.(그래도 정말 중요한 사건이나 내용은 소개할 예정이다.) 또한 그 동안 오랜 세월 번역일을 하지 않았던 본인이 앞으로 소개할 전공책을 번역하기 전의 몸풀기 과정이기도 하다. (솔직히 이정도 분량은 왠만하면 30분내로 끝이다. 잘난 척이 아니라 본인의 중한 번역속도은 좀 빠르다.-_-;;) 앞으로도 이런 대중성인 내용은 계속적으로 조금씩이나마 번역하면서, 한국의 학계에 도움이 될만한 중국의 학문적 성과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전환해 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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