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내용은 項潔 編,《數位人文研究與技藝》,國立台灣大學出版中心, 2014年의 王汎森,數位人文學之可能性及限制 – 一個歷史學者的觀察을 읽고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정리한 내용이며, 왕판션 논문의 내용과 상이할 수도 있다.

 

왕판션은 디지털인문학의 장점을 디지털화와 데이터 처리 효율성, 교류와 교육 방법의 혁신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가능성으로 1) 데이터의 정량화를 통한 “무의 역사” 연구방법론의 확대 2) 인문 빅데이터 활용 3) GIS(지리정보시스템)을 통한 공간 사고력 향상을 거론하였다.


1. “무의 역사” 연구방법론은 방대한 사료의 공백을 통한 연구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서 곽말약(郭沫若)는 고문헌 진위 판별법에서 금문에 해당 고문헌 내용 출현하지 않는다면 위서로 판별할 수 있다고 하였다. 문제는 방대한 금문을 모두 살펴보고 해당 내용이 없다고 진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디지털인문학에서는 간단하게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소수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2. 인문 빅데이터는 방대한 사료와 빠른 데이터 처리를 기반으로 기존에 연구가 힘들었던 다점접 연구방법을 손쉽게 활용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서 유럽의 Mapping the Republic of Letters는 유럽 개몽시기의 문인들 간의 편지 데이터를 바탕으로 GIS 기술을 활용하여 프랑스의 사상이 영국으로 유입되었다고 단정할 수 있었다.


3. GIS(지리정보시스템)는 기존의 인문학자들이 사료에 매몰되어서 쉽게 간과하던 공간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고 향상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렇다면 왕판션이 생각하는 디지털인문학의 한계는 무엇인가?

1) 사료의 단편화로 시야가 좁아진다.

디지털인문학으로 인하여 그 동안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읽어야 되는 사료를 간단한 검색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24사에 대한 내용을 검색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은 결코 24사를 통독하는 것을 대체할 수 없다. 수 많은 사료 데이터에 대해서 단순한 검색어로 접근할 경우, 사료들의 특성을 간과하거나 선후관계에 대한 고찰이 부족해질 염려가 높다.


가장 좋은 것은 해당 사료들에 대해서 통독도 하고, 필요한 정보를 검색을 통해서 얻는 것이다. 그러나 방대한 사료를 모두 통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역사적 시야를 좁히는 것은 더더욱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양자를 어떻게 “적당히” 활용하느냐는 지속적인 문제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2) 발산과 수렴의 본질적 차이

인문학은 보통 특정 사건에서 문제의식을 느끼고 해당 문제의식에 대한 외연을 넓혀간다. 그런데 디지털인문학은 수 많은 데이터를 우선적으로 구축하고, 데이터를 활용하여 데이터를 구조화한다. 이 둘은 서로 상생할 수도 있지만, 상극이 될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왕판션은 이기론(理氣論)을 거론하며, 인문학은 이(理)로서 사물의 본질이고, 디지털인문학은 기(氣)로써 사물을 담는 그릇으로 비유한다. 이와 기는 서로 다르면서 서로 같은 존재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바로 : 왕판션이 지적한 디지털인문학의 한계를 매우 재미있게 보았다. 그런데 디지털인문학을 주장하는 본인도 원래 역사학도였고, 대충이나마 춘추삼전과 자치통감을 통독하였다. 이건 당연히 전통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시켜야되는 영역이며, 넓은 역사적 시각을 갖는 것은 역사 교육의 핵심 중에 핵심이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결국 방대한 사료의 바다에서 25사도 조그마한 일부분일 뿐이다. 결국 모든 사료를 읽는 것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인문학과 디지털인문학을 이기론과 비유한 부분이다. 정말 수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정반합...이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이글루스쪽에서는 최근 다시 한번 "환빠대전"이 발생한듯 하다. 솔직히 과거에는 이 블로그에서도 심심풀이 땅콩으로 소위 "환빠"들의 헛소리를 반박하거나 특정 사건에 대한 역사학도로서의 사견을 밝힌 적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최대한 무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1) 역사학도로서의 부담감.
차라리 본인이 역사전공이 아니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많은 관련 글을 써내려 갔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본인은 공개적으로 역사전공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기에 어떤 영역에 대해서 일반인보다 비교적 많이 아는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하기 위해서는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보지도 않고, 볼 필요도 없는 증거자료들을 레포트 작성하듯이 일일이 찾아서 나열해야한다. 물론 관련 논문이나 저작을 비롯한 학계의 흐름도 나열해주어야 한다.

만약 본인의 전공분야라면 비교적 쉽게?! 쓰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최소 수십편에 이르는 관련 논문과 저작을 읽어야 된다는 의무감이 생겨난다. 부담감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그럼 본인의 전공만 쓰면 되지 않냐고? 그쪽이야 말로 민감함의 극치를 달리는 지점이기에 부담스럽다. 본인의 전공은 북방민족사이며, 한중간의 민감한 사안인 고구려나 발해도 다룬다. 본인은 지도교수님의 생각에 동의하며 "역사는 어디까지나 역사로 보며, 고구려사는 어디까지나 고구려인들의 역사"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기에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는 짱깨로 매도되기 쉽상이다. 이런 부담감에 석사졸업논문도 중국인들에게도 생소한 소그드의 한반도 유입이라는 주제를 채택했다.


2) 환빠들의 사료적 문제.
흔히 "환빠"라고 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사료"이다. 어떤 역사관을 가지고 있더라도, 역사 연구에서 사료는 기본이다. 그 뼈대이다. 그 정수이다. 그런데 "환빠"라는 사람들은 이 사료부터가 엉터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료 반박은 어렵다고 그보다 어려운 것이 없고, 쉽다면 쉬운 부분이다. 물론 대부분의 환빠들의 헛소리는 간단하게 반박할 수 있는 수준이다. 왜냐하면 기본적인 고문 소양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동북아 고대사를 연구하면서 고문을 모른다는 것은 마치 더하기와 빼기를 못하면서 수학을 하겠다는 것과 그다지 다를바가 없다. 최근에는 수 많은 현대 한국어 번역판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접근성을 높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인의 역사적 소양을 높이기 위한 도구일 뿐이고, 연구자가 고문의 원문을 바탕으로 연구를 하지 않는 다는 것은 "나는 병신이다"라고 소리치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한자가 나오고, 해석이 나오면 그냥 그것이 맞다고 생각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환빠들의 근본적인 문제인 사료를 비판을 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환빠들이 "식민사관에 의해서 해석한 결과"라고 하면 그것을 믿어 버린다.  식민사관조차도 그나마 사료라는 기초라도 있었다. 환빠들은 고문을 아예 언급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소설을 전개하거나, 고문을 언급하더라도 원래 고문을 마음대로 변조한다.

원문 : "갑은 을나라를 침략하였다"
환빠식1 : "갑은 을나라에게 침공당하였다"
환빠식2 : "갑은 을나라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대체 어떤 "학문"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것을 허용하느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백날 설명해도 기본적으로 고문을 볼 수 없는 일반인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이는 결코 일반인들의 잘못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일반인들의 무지를 이용해 먹는 환빠들의 문제이다.


3) 환빠들의 논리적 문제.
환빠의 논리는 언제나 결국 "한국 만세!"다. 그리고 이를 비판하는 모든 이들은 "식민사학에 세뇌당한 병신들"이다. 처음에는 어이없어서 반박을 해주지만, 솔직히 이제는 언급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이다.

과거에는 분명히 식민사학이라는 것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과거일 뿐이다. 오히려 박정희 독재시절을 정점으로 독재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고자 "한민족"을 과도하게 부풀리고 선전하였다. 그 결과 어떠한 역사학적 증거도 없는 고조선의 세력범위가 당당하게 중고등학교 "국사"강의에 사용되고 있다. 아니 역사학적으로 엄격하게 따져서 "국사"라면 "대한민국사"를 공부해야지 그 이전을 공부하는 것은 합당하지도 않다.

역사학의 방법론은 이제는 세계 공통이다. 기본적으로 사료를 보고, 사료를 비판하고, 사료를 탐구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런 것도 없이 마냥 무조건 "식민사관"이라고 하면 어쩌란 말인가?! 하다 못해서 본인 스스로 "탈민족주의자" 혹은 "인간사관"이라고 몇 번을 말해도 "식민사관"이라고 근거 없이 매도하니 한숨 밖에 나오지 않는다.



솔직히 간략하게 말하면, 과거에는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해주고 싶다는 역사학도로서의 열정과 의무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냥 "니 맘대로 사세요~"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에휴...싸워서 머하랴. 사실 극소수를 제외하면 박정희식 우민정치의 희생량인걸.....


이런 글을 쓰는 것 자체가...어떻게 보면 아직 정열이 살아 있다는 것이겠지.......궁금하신 것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설명해드립니다. 환빠에 대한 비꼼이 좀 더 많아 지기는 하겠지만 말이죠.


胡新生《乡饮酒礼与食犬风俗 - 《仪礼》酒会用牲制度的地域特征和文化渊源》《文史哲》2009年第5期。

후신셩(胡新生)은 현재 산동대학교 역사문화학원교수로 계시는 나름 유명하신 학자분. 그런데 이런 민속학이나 인류학적인 논문을 쓰실 줄이야…^^:::

내용 요약 : <의례-향음주례>와 관련 사료에서 나오는 개고기를 먹는 연회는 춘추전국시대를 포함한 주나라의 예가 아니며, 산동지역에서 행해졌던 상나라의 예를 이어받은 특수한 예법이다.

1-  향음주례의 처음에만 딱딱한 예법이 있을 뿐, 뒤에서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것은 향음주례가 예법으로 다듬어지기 전의 원형을 나타내준다.

2-  주나라의 6대 희생품은 중요도순으로 말, 소, 양, 돼지, 개, 닭이고, 사계급이 먹었던 것이 개였던 만큼 그리 중요한 취급을 받지는 않았다.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흔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의례에는 개고기를 중요시한다.

3-  춘추시대에 노나라에서만 두 가지 장례풍속이 함께 있으며, 사료적으로 은나라의 후손이 노나라로 흘러들어왔다고 볼 수 있고, 주나라의 보편적인 희생품과는 다르며, 의례가 노나라를 본거지로 하는 공자와 그 제자들이 집필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향례에서 개고기가 예로까지 승격된 것은 노나라 및 인근지역의 특수한 모습이다.


솔직히 전공하고 그리 상관없는데 심심풀이로 읽은 글이라서 특별히 문제를 찾아가면서 읽지 않았다. 위의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지 않은가? 더 자세한 내용을 원하시는 분은 직접 찾아서 보시기를….재미있다^^ (…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역사학도로서의 즐거움은 아닐는지 살짝 고민;;)



역사학은 기본적으로 역사 사료를 해석하여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조선왕조실록이나 삼국사기에서 나오는 문장을 기본으로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떤 자세로 똥을 싸고, 어떤 정책을 통과시키려고 어떻게 싸움박질을 했는지 알아보는 학문이다. 한국은 삼국시대부터 중국의 유교사상이라는 모든 사항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정신을 가진 이념과 한자라는 문자가 전래된 덕분에 일찍부터 국가차원에서 역사를 기록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역사사료는 믿기가 힘들다. 왜곡과 과장은 기본이고 삭제도 심심하면 일어나기 때문이다. 왜 그러냐고? 남자들이 허풍을 치는 것 중에 한때 10대 1로 싸웠냐느니. 100대 1로 싸웠냐느니. 내가 툭 치니까 옥수수가 우르르 쏟아진다는 웃기지도 않은 헛소리가 생각나시는가? 아니면 군대에서 북한에 넘어갔다 왔냐느니, 태권V가 국회의사당이 열리며 출동한다느니 하는 이러한 헛소리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신라가 만반의 준비를 해서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처절하게 깨지고 돌아왔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허벌나게 쪽팔리는 일이다. 그럼 "우리가 고구려를 공격해서 깨지고 돌아왔다."라고는 절대 기록하지 않는다. 그냥 "우리가 고구려를 공격해서 1000명을 사로잡아서 돌아왔다."와 같이 서술해 버리는거다. 참~~~ 쉽죠?~~잉~

삭제도 비일비재하다. 당신이 피임을 잘못 해서 임신을 해버렸다. 혹은 임신을 시켜버렸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정말 친한 주위의 사람들 외에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낙태를 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물론 속도위반 소리를 들으며 결혼할 수도 있다.) 물론 먼 훗날에 자서전에 한 줄 정도 언급할 수도 있지만, 사실상 평생동안 마음 속 깊이 묻어두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이런 일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벌어진다.

예를 들어서 만약 고구려가 신라를 사실상 속국으로 데리고 있으면서 시도때도 없이 공물과 여자들을 요구했다고 하자. 모두가 알다 싶이 나중에 신라만이 살아남아서 신라 사람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게 된다. 김부식이 볼 때 위의 사실은 무지막지 쪽팔리다. 해결방법은? 그냥 해당 사실을 삼국사기에 쓰지 않으면 된다. 참~~~ 쉽죠?~~잉~

이렇게 문제가 많은 역사사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타임머신이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료와의 교차분석과 고고학 및 다양한 학과의 방법론을 동원해서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한마디로 머리가 빠개지는 듯한 괴로움이다. 역사자료가 가장 중요한데, 그것을 믿을 수가 없으니 짜증나지 않겠는가? 그나마 A라는 나라가 있었고, B라는 나라가 있었다 정도는 불변하지 않는 사실이고, 그 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기에 그런 "분명한" 사실들을 늘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가 과학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인문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부분이 분석이 아닌 해석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적인 역사사료조차 쓰지 않고,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펴고 소설을 쓰는 분들이 계시다. 이미 근대에 작성되었다고 "확정"된 환단고기를 기반으로 온갖 판타지를 쓰시는 분들이다. 본인 얼마 전 발해 관련 자료를 수집하다가 우연히 이병화의 "발해강역고(渤海疆域考)"을 다운받게 되었다. 그리고 주화입마에 빠져버렸다. 대체 어떤 고대사 역사논문에 역사사료를 하나도 인용하지 않을 수 있을까? 대체 그의 말이 어떻게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는가? 증거도 없이 그냥 그 사람이 써 놓은 것을 진리라고 생각해야되나? 그냥 자신의 말이 진리다라는 과대망상에 불과하다.

사료는 분명히 불안정하고 위험하다. 그러나 그런 사료조차 쓰지 않는 사이비들아.
................그만해라. 쫌....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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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 본인의 주변이 역사학도들이다보니 공자가 한국사람이라고 주장하는 바보들은 없다. 그런데...본인과 친하지는 않지만, 알기는 아는 한 사람이 이런 바보였다. 더 문제는 그 사람의 선배가 선진사(공자가 살던 시대) 전공이라는 것이다....그 사람은 대체 멀까?

덧2 : 여전히 논문주제발표 준비중.....핵심은 욕심을 버리는 것인데, 욕심에 나를 맡기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런 말들이 있다. “책을 고를 다른 것을 필요가 없고, 중화서국의 책을 사면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혹은 명색이 중국 최고의 대학교 북경대학교의 역사학과 선생님이 중화서국으로 책을 권을 냈다라면서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는 중화서국.

 

예를 들어서 역사학에서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24사를 구매할 생각이라면, 무조건 중화서국이라고 적혀 있는 책을 사면 된다. 그것이 가장 좋은 판본이라고 인정 받는 것이고, 석박사 논문에서도 위의 책에서 인용한 것을 기본으로 한다.

 

중화서국이 최근 24사의 교주본을 다시 개편해서 놓을 생각이어서, 북대 역사과의 교수님들 중에서 몇분이 차출?!되서 일을 하고 있다. 중화서국의 원칙은 “校异同,不校是非”라는 원칙으로 최대한 원본의 모습을 상하게 하지 않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한 권의 책에 당대 최고의 해당 역사학자, 한학자등을 총동원하는 중화서국을 어찌 믿을 수 없지 않은가?

 

본인도 책을 고를 자기도 모르게 출판사를 보게 된다. 중화서국에서 출판을 했다면, 자금 문제로 끙끙 거리면서도, 일단 사고 본다. 최소한 후회는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괜찮은 출판사가 없을까? 아니, 괜찮은 출판사는 있다. 하지만 출판사 이름만으로 독자로 하여금 모든 것을 믿고 책을 사게 만드는 출판사는 없는 것일까? 물론 중국은 거대한 인구로 인한 시장으로 인하여, 돈이 드럽게 안되는 전공 중에서도 전공 책을 출판하여도 기본적인 본전을 뽑는다지만, 왠지 모르게 많이 아쉽기만 하다.

 

본인에게 현재 한국의 괜찮은 출판사를 꼽으라면, 을유문화사와 대우학술총서시리즈밖에 거론할게 없다. 아쉽고도 아쉬운 일이다. 아마 본인의 지식이 짦은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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