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고고학, 고고학연구방법론 등의 총 12부문으로 구성될 예정인 "공공 고고학 프로젝트"는 고고학자 6명과 비고고학자 6명으로 책임그룹이 구성되고, 일반 참가자들이 7월 16일부터 자유롭게 각 종 세부 프로젝트에서 의견을 제시하여 2015년에 최종적으로 발전방향을 정하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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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 그룹의 방향성 제시는 권위가 있는 책임자들을 통한 대리 결정도 가능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나 다양한 의견과 토론 과정을 통해서 의견을 모으는 방안이다. 과거에는 일년에 1~2번 열리는 학회에서나 이런 열린 회의가 가능했지만! 지금은 시공간의 경계가 무너진 디지털의 시대이다. 미국은 물론 해외의 다양한 의견을 손쉽게 얻을 수 있다. 


다만 이런 것이 가능하려면 누구 앞에서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고,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어야 하는데 한국의 학회 분위기는 몇몇 학회를 제외하면 사실......머......



2010년 11월 25일, 서안의 시엔양咸阳국제공항의 확장 공사장의 한 고묘에서 2400년전의 사골국이 발견되어서 주목을 끌고 있다.



서안은 여러 왕조의 수도였기에 한국의 경주처럼 땅을 파기만 하면 유물이 쏟아져 나온다는 지역이다. 그리고 이번에 발굴된 전국시대 진秦나라 무덤 역시 높이 5미터, 넓이 3미터로 진나라 왕급 무덤에서 300m정도 떨어진 부장묘급으로 청동정鼎과 청동종锺 및 청동받침용 칠기만이 남아 있는 그저 그런 무덤이었다[각주:1].

그런데 발견된 청동정 안에서 500ml정도의 액체를 발견하여 분석한 결과 닭과 유사한 동물의 뼈가 10개 이상 발견되었다. 문헌에 따르면 정은 고기를 끓이기 위한 기구였기에 발굴팀은 해당 액체를 우선 사골탕으로 판단하고 구체적으로 어떤 동물의 사골탕인지 분석을 하고 있다.  과거에 뼈가 들어가 있는 청동기가 발견된 적은 있었지만 이처럼 탕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중국고고학계 최초의 일이다.발굴팀은 2400여년전의 사골탕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것은 기후적으로 건조하며 묘가 완전히 밀봉되었으며 아직 도굴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기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상한 것은 건조해서 말라붙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오히려  액체상태로 보존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물론 밀봉된 상태에서 완전건조지역이 아닌 적당한 습도가 지속적으로 유지된다면......이론적으로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긁적....그리고 일단 사골탕이라고 번역하긴 했지만...차라리 "삼계탕"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1. 사실 이 정도가 그저그런이라고 말하는 자체가 무서운 것이지만-_ [본문으로]
중국학계에서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있었다라는 보도가 한국에 올라오고 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전에도 간혈적으로 알려지고는 하였었다. 그러나 본인 전공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기에 그냥 넘기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블로그를 방문해주시는 드라큘라님의 요청이 있어서 간략하게??! 서술해보려고 한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본인은 국적이나 민족은 개나 줘버리라고 말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학문은 어디까지나 최대한 객관적이 되어야된다고 굳게 믿으며 행동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각주:1].

보나마나 긴 장문의 글이 될 터이니 귀차니즘을 위한 요약본을 알려드리겠다.
진(秦)장성이 한반도까지 왔었는지 아니었는지는 현재로서는 확정하기가 힘들다. 몇 안되는 문헌자료는 쉽게 반론을 제시할 수 있으며, 비교적 정확하다고 볼 수 있는 북한에 남아 있다는 흔적도 어디까지나 북한의 발표만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중국이나 한국의 어느 학자도 아직 실측을 했다는 말이 없다. 고로 아직 확실한 근거로 받아들일 수 없다. 고로 어느 쪽이든 증거부족이다.

조금만 더 자세한 것을 원하지만, 별 이상야시꾸리한 사료와 논문내용을 보고 싶지 않으신 분아래쪽의 5. 만리장성 논란을 가장 쉽게 풀어보자. 로 곧장 가시면 된다.


1. 어느 시대의 만리장성인가?
만리장성이라고 하면 진시황이 만들어서 계속 내려온 것으로 보통 생각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결코 그러하지 않다. 만리장성은 진시황이 중국대륙을 통일하기 전에 조(趙)나라와 연(燕)나라에서 만들었던 성벽과 진(秦)나라의 장벽을 서로 연결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존에 있던 여러 성벽들을 연결시킨 것이다.

또한 진시황 이후 한무제 전까지는 장성이 유지되기는 하지만[각주:2], 한무제의 북방공략이나 그 뒤의 다양한 상황으로 인하여 장성은 사실상의 기능을 상실한다. 그리고 명(明)대에 와서야 다시 재축공되어서 청대까지 유지되었다. 그리고 명대나 청대의 장성의 동쪽끝은 분명히 산해관(山海关)으로 되어있다. 고로 현재에 남아 있는 만리장성 단지 명청대의 장성이며,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만리장성이 아니다.

현재의 문제는
진(秦)나라의 장성인 것이다.[각주:3]

그 외에 만리장성의 역할에 대한 해석도 문제로 남아 있다. 보통 만리장성은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을 갈라놓는 분기점이라고 알고 있다. 또한 외부의 세력을 막는 방벽으로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장성은 농경분기점 훨씬 위쪽에 존재하며, 만들어진 시기에도 커다란 목장울타리였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군사전략적으로 보아서 가느다란 선으로 방어하여 외부의 적을 막는 다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것인지는 마지노선의 예[각주:4]를 볼 것도 없이, 중국대륙의 역사 내내 제대로 북방민족을 막은 적이 없다는 것으로 확실히 증명된다고 하겠다. 이에 대한 잡설은 The Origins of the Great Wall을 참고하기 바란다.


2. 중국의 진(秦)장성에 대한 이야기들.
1- 중국 교과서에서의 진(秦)장성

因地形,用制塞 ,起临洮,至辽东,延袤万余里[각주:5] : 지형에 따라 험준한 곳에 요새를 세워 임조(临洮)에서부터 요동(辽东)까지 이르렀는데, 그 길이가 만여리였다.

중국교과서에서 보이는 진장성지도



2- 진(秦)장성에 대한 사료들
(1)《史記•蒙恬列傳[각주:6]》 :始皇二十六年,使蒙恬將三十萬眾北逐戎、狄,收河南,築長城,因地形用險制塞,起臨洮至遼東,延袤萬余里。
진시황 26년, 몽염을 시켜 30만명을 이끌고 북쪽에서 융과 적을 내쫒고, 하남을 회복하게 하였으며, 장성을 축조하게 하였다. 지형을 따라 험준한 곳에 요새를 세워 임조에서 요동에 까지 이르렀으며, 전체 길이가 만여리였다.<사기-몽염열전>

(2)《〈水經•河水〉注[각주:7]》 :始皇令太子扶蘇與蒙恬築長城,起自臨洮,至於碣石。
진시황은 태자 부소와 몽염을 시켜서 장성을 축조하게 하였다. 임조에서 시작하여 갈석에 이르렀다. <수경-하수주>

(3) 《通典•高句麗傳[각주:8]》 :碣石山,在漢樂浪郡遂城縣,長城起於此山。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었다.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한다.<통전-고구려전>

(4) 《史記•朝鮮列傳》:漢興,為其逺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為界。
한나라가 일어선 뒤 (조선?)이 멀고 지키기 어려웠음으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여 그 경계가 패수에 이르렀다.

(5) 《三國志•魏志•東夷傳[각주:9]》注 :“《魏略》曰:昔箕子之後朝鮮侯……。及秦並天下,使蒙恬築長城,到遼東。時朝鮮王否立,畏秦襲之,略服屬秦,不肯朝會。否死,其子準立。二十餘年而陳、項起,天下亂,燕、齊、趙民愁苦,稍稍亡往準,準乃置之於西方。及漢以盧綰為燕王,朝鮮與燕界于溴水。
<위략>에서 말하기를 : "기자의 후손인 조선후는..........진나라가 천하를 병합하고, 몽염으로 하여금 요동까지 장성을 쌓도록 하였다. 그 때 조선왕 부가 즉위하였는데, 진나라의 공격을 두려워 하여서, 전략적으로 진에 복속하는 척하였으나 조회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부가 죽은 뒤 그 아들 준이 즉위하였다. 20여년에 진승과 항우의 난이 일어나서 천하가 혼란스러웠고, 연과 제 그리고 조의 백성들은 고난를 걱정하여 점점 준에게 도망쳤고, 준은 그들은 서쪽에 배치하였다. 한나라가 노관을 연왕으로 삼자 조선은 연나라와 패수로 경계를 삼게 되었다.


3- 중국학자의 분석
3.1 담기양(譚其驤[각주:10])
《秦郡界址考[각주:11]》 에서 위의 (4)와 (5)을 근거로 장성이 수성현(지금의 평양서남지역)에서 시작하였다고 비정하였다. 비록 해당 기록이 한나라 초기의 기록이지만, 진나라때와 큰 차이가 없다고 보았다. 

중국역사지도집의 진영토(2권 10쪽)

연의 장성위치 (중국역사지도집 2권 42쪽)



3.2. 왕국량(王國良), 고힐강(顧頡剛), 사념해(史念海)
1930년 왕국량이 집필한 《中國長城沿革考》을 기초로 고힐강가 시작하여 사념해가 완성한 《中国疆域沿革史[각주:12]》에서는 위의 (1)과 (2)을 근거로 장성이 갈석에 있으며, 갈석은 현재의 조선평양남족이라고 주장하였다.

전국시대지도 (中国疆域沿革考 56~47)


진통일 지도 中国疆域沿革考 60-61


사념해는 담기양의 설과는 다르게 연나라 장성이 압록강을 넘어 청천강(평양근처)에 이르지 않고, 압록강까지만 그리고 있다. 이는 다른것이 아니고 연나라 장성이 압록강을 넘어서 청천강에 이른다는 문헌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진나라의 장성이 기존의 연장성을 연장-수리한 것인 점을 생각하면 담기양의 설도 논리적으로 타당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문헌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사념해는 담기양과 다르게 생각했다.

3.3. 현재의 연구상황[각주:13]
과거의 담기양이나 사념해는 어디까지나 문헌에 남아 있는 내용으로 추측을 하였지만, 그 뒤에 중국학자들은 고고학적 유물을 바탕으로 과거의 연구를 보강하고 있다. 특히 阎忠의 경우 조선사회과학원고고연구소(朝鮮社會科學院考古研究所)와 역사연구와 문화보존연구소(歷史研究和文化保存研究所)의 보고서를 기반으로 성벽유적에 대해서 토론하고 있다.

阎忠:《燕北长城考》,《社会科学战线》1995年第2期。


그는 북한의 보고서를 인용하여서 북한에 장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밝히고 있다. 북한의 보고서에서는 진나라가 아닌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성의 아래쪽에서 진나라의 유물을 발견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는 기존의 성벽의 기초 위에 훗날 다시 축공했음을 의미하며, 그 아래에 있는 진나라 유물은 기존의 성벽이 진나라의 장성일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큰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에 대해서는 아래쪽에서 다시 서술하도록 하겠다.

그 외의 고고학적 유물을 토대로한 연구로는 평양에서 출토되는 과(戈)[각주:14]와 동모(銅矛)을 근거로 해당 지역까지 장성이 뻗어있었던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각주:15].


4. 한국의 진(秦)장성에 대한 이야기들.
1- 매체보도.
진나라의 장성인지 연나라의 장성인지 명나라의 장성인지도 구별하지 않고, 어떠한 근거가 있는지도 제대로 말하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중국은 우리를 침범하는 나쁜넘이라고 규정하며, 신문기사의 객관성을 침해한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감정적인 어투로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바보스러운 신문이 대다수임. 정신 좀 차리지? ^^

2- 한국 학자들의 분석
2.1. 이병도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
遂安)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수성현에서 만리장성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맹랑한 설", 다시 말해서 말도 안되는 헛소리라고 일축하며 부정하고 있다[각주:16]. 잠시 우리의 위대한 환빠님들을 비웃어주자면... 최근 이덕일씨가 이병도의 설을 왜곡하여 "만리장성이 황해도 수안에서 시작되었다"라고 주장한듯이 쓰고 있다[각주:17]. 자네들이 이병도 싫어하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상대말을 이딴식으로 왜곡하냐? -_-

2.2. 윤내현[각주:18]
사료 (1)의 요동이 난하(灤河)의 동쪽이며, 사료 (2)의 갈석이 난하 하류의 창려현(昌黎縣)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결론적으로 한사군(漢四郡)가운데 낙랑군은 한반도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게 된다. 이 의견은 중국의 이건재(
李健才)에 의해서 반박[각주:19]당한다. 하지만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므로 일단 생략.

2.3. 그 외[각주:20].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음하하하;;; 혹시 그 외의 연구성과가 있으신 분은 알려주시기 바란다. 단. 환빠식의 원문사료나 고고학적 자료는 개무시하는 식의 논문은 무시하도록 하겠다.



5.
만리장성 논란을 가장 쉽게 풀어보자.
관련 전공자들은 위의 말만 들어도 어떤 상황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공자들이지 일반인은 그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최대한 쉬운 말로 현재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정리하도록 하겠다.

문제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5.1.
碣石(갈석)은 어디인가?
중국학자들은 갈석을 평양근처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현재 중국대륙에 남아 있는 갈석이라는 지명만 한군데가 아니다. 특히 현재의 하북성진황도시창려현(河北省秦皇岛市昌黎县)은 산해관과 근접한 지역인데 갈석이라고 불렸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갈석이 평양근처라고 말하기는 증거로서 합당하지 않으며, 현재에는 다만 방증으로 사용될 뿐이다.

쉽게 예를 들면 "산동"이라는 산의 동쪽에 있다는 지명이 한국에는 넘쳐흐른다. 전남에도 산동이라는 지명이 있고, 경북에도 있고, 경남에도 있다. 그런데 훗날 어떤 이가 산동이니 했으니 무조건 전남에 있는 산동이라고 하면 웃기지 않은가? 왜냐하면 경북이나 경남에 있는 산동일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현재 상황이 그렇다.


5.2. 漢樂浪郡遂城縣(한 낙랑군 수성현)은 어디인가?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냐는 문제 자체부터가 아직도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정확하게 말해서 서로 제대로 된 증거가 불충분하여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낙랑의 중심지라고 불리우는 평양이 현재 양측 학자 모두 출입이 사실상 불가능한 북한의 영토라는 점도 단단히 한 몫을 하고 있다.

그러니 낙랑군의 수성현이 어디인지는 더욱 더 논란이 될 수 밖에 없다. 고로 수성현을 증거로 삼기에는 부족하며, 역시 방증으로만 사용될 수 있을 뿐이다.

위의 산동의 예보다 한 술 더 뜨는 문제이다.


5.3. 浿水(패수)는 어디인가?
중국이든 한국이든 논문싸이트에서 "패수"라고 입력하고 내용들을 살펴보면 당신을 놀라거나 짜증을 낼 것이라고 장담한다. 각각 패수라고 말하는 곳들이 천차만별이다. 한강부터 시작해서 북쪽으로 청천강, 압록강, 요수등등등.......사실상 베이징과 서울사이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하천을 패수라고 각기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패수가 청천강이라는 중국 만리장성설의 증거는 휘청거릴 수 밖에 없다.

위의 산동의 예의 극대화라고 보면 된다.


5.4. 평양근처에서 발견되는 진나라 유물을 어떻게 해석해야되는가?
한반도에서는 서역의 유물까지 발견된다. 고대라고 움직임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활발한 무역활동 및 문화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로 몇 조각의 유물만으로 장성을 비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아예 유물에 "이곳에서 장성을 지었음"이라는 글자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유물로는 장성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역시 방증으로 사용될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서 한국인이 하회탈을 들고서 이탈리아에 갔다. 그리고 이탈리아 친구에게 선물을 해 주었다. 나중에 발견한 하회탈을 보고 한국의 영토가 이탈리아까지 있었다고 확정하는게 말이 되는가? 혹은 한국의 무기는 지금 계속 수출되고 있는데, 이것이 남아프리카에 수출되었다고 하자. 나중에 남아프리카쪽에서 그 무기를 발견하면 한국의 영토가 남아프리카에 이르렀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와 같은 것이다.


5.5 북한에 남아 있는 성벽유적을 어떻게 해석해야되는가?
이 논쟁의 핵심이 될 수 있는 북한에 남아 있는 성벽유적이다. 문제는 이넘의 성벽유적을 직접 시찰한 사람이 한국학자든 중국학자든 없.다.는.것.이.다[각주:21]. 단지 북한에서 일방적으로 발표한 보고서를 믿을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북한의 보고서는 그리 믿을 만한 수준이 아니다.

고고학적인 기술력 자체가 제대로 지표조사를 할 수 있을지 의심되는 수준이며, 단군묘를 비롯해서 체제유지를 위해서 누가봐도 "만들어낸 고고학적 자료"을 이야기하는 곳을 당신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본인으로서는 못하겠다.

이렇게 불안정한 "성벽유적"보고서를 바탕으로 작성된 글을 마냥 믿을 수는 없다.

쉽게 다시 설명하면 성벽유적 자체는 정말 강력한 유물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친구 중에 공부도 못하고 거짓말도 밥 먹듯이 하는 인간이 있다고 해보자. 그 녀석이 갑자기 "공룡의 화석"을 찾았다고 말을 한다. 그럼 일단 공룡이 먼지나 알런지 의심할 것이고, 설사 공룡의 화석을 안다고 생각하여도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것이다. 그래서 직접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지 않고, "구라지? 뻥까지마!"라고 할 것이다.


6. 결론
본인으로서는 지금의 증거로는 어떠한 판단을 할 수가 없다. 단지 만약 북한에 정말 성벽유적이 남아 있다면, 만리장성의 평양시작설은 상당히 강력하게 작용할 것이다. 반대로 북한에 성벽유적이 없다면 반대로 평양시작설은 대폭 약해질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 아무도 북한의 성벽유적을 조사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애국주의나 민족주의를 말하면서 "어디서 감히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왔느냐!"라고 하는 인간들은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건지? 혹은 공부라는 것을 하는 것인지 궁금할 뿐이다. 여러 증거들이 평양까지 왔다고 입증이 되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도록~" 평양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여러 증거들이 평양까지 온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침 튀기면서 말하지 않아도 평양까지 오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정신 좀 차리라고요^^

이 글에 대해서 원문사료나 증거 없는 "비난"은 상대하지 않겠습니다. 어디까지나 논리와 증거를 갖춘 "비판"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익명의 힘을 믿습니다. 그렇기에 익명의 강력한 힘을 악용하는 쓰레기들에게는 무시라는 최후의 수단을 쓸 수 밖에 없습니다.

자료협조를 해주신
劉表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저는 그 분의 자료를 되도록 쉽게 풀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감사감사!!! 그리고 이 블로그에 오는 역사관련 분들이여. 괜히 조용히 보지만 말고 언제든지 어떤 주제로든 글을 써서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제 블로그를 통해서 익명으로라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사랑해요^^::::


끝난 줄 알았는데.....밥 먹기전 눈에 들어온 조선일보가 문제였다.....
7. 명나라 장성도 문제라고?
(조선일보)중(中) "만리장성, 압록강까지다" 선언(기존보다 2500㎞ 늘려… 고구려 세력권 편입 의도… 韓·中 역사분쟁 재연될듯) 이라고 우리의 베이징 특파원 최유식 기자님이 올려주셨다. 본인 최유식 기자님에 대해서 참고참고 언급 안할려고 했는데...제발 기사 좀 제대로 써주었으면 한다. 중국 뉴스에 뜬 것을 제대로 조사도 안해보고 무조건 번역질해서 기사쓰면 좋으신가?

위의 내용은 중국의 "명나라 만리장성"이 압록강까지 닿았다고 중국에서 주장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의 최유식 기자님은 해당 단체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조사도 안한 것이 분명하며, 관련 논문들을 본 적도 없는 것이 거의 확실히 된다. 사실 여부에 대한 조사는 기자의 기본이 아니었던가? 아! 그리고 맨 처음에 언급했다싶이 연장성, 진장성, 한장성, 명장성, 청장성을 구별하지 않고 그냥 만리장성으로 해주고 있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니 넘기겠다^^

그리고 대체 명장성과 고구려가 먼 상관인가? 기사의 본분은 사실 전달이라는 것을 초년병시절에 배우기는 한 것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명장성이 압록강까지 갔다는 것은 90년대부터 있던 이야기다. 단지 어이가 없을 뿐이어서 학계에서도 그냥 씹고 있었을 뿐이지. 물론 자료 조사 안했을 우리의 최.유.식. 기자님은 모르고 있으셨겠지...^^

가장 간단히 요약해보겠다. 명장성이 압록강까지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국의 환빠와 거의 동일 선상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틀리지 않다고 보면 된다. 어느 나라나 어떻게든 역사를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부풀리고 축소하고 비틀어서 자위행위를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왠만하면 무시해주자.

1. 장성학회(长城学会)
최유식 기자님이 배끼신 기사의 원문(万里长城东端起点圆桌会议召开)을 보면 너무나 쉽게 보이듯이, 일련의 행사들은 어디까지나 관광지로 만들겠다는 삽질의 한 모습에 불과하다. 이정도는 충분히 아셨을 텐데 깨끗이 무시해준 최유식 기자님 만세!

그런데 본인은 장성학회가 머하는 곳인지 궁금해졌다. 中国长城网에서 장성학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름답고 화려하지 않은가? 그리고 본인의 경험적으로 학술활동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화려한 홈페이지 못 만든다. 찾아봐라. 이렇게 화려한 학술적으로 유명한 곳이 있는지. 그들의 활동을 살펴보면 제대로 된 학술활동은 보이지 않고, 단지 만리장성과 연결된 지방과의 관광사업으로 도배되어 있다.

이런 장성학회를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는 여러분들이 더 잘아시리라 본다.


2. 중국에서의 관련 논문

1.1. 《明长城东端起点——虎山关》[각주:22]나 《虎山长城》[각주:23]와 같은 사료없고, 논리도 없고, 증거도 없고, 인용도 없는 환빠들이 생각나는 놀라운 논문들이 산더미 -_-

1.2. 薛景平《辽宁境内明长城考察发掘的重大成果》《辽宁大学学报(哲学社会科学版》1995 : 무려 고고학 보고서이다. 그리고 건축복원도나 단면도 하나 없는 무려! 고고학 보고서이다. 본인 이따위 글을 무려 고고학 보고서로 인정해야되는 것으로 고민중이다. -_-;;;

1.3. 刁余文《长城虎山关》《上海集邮》1998/07 : 무려 사료인용이 있다. 그러나 주석따위는 가볍게 없고, 다 합쳐야 천자가 겨우 넘을 듯한 글이다. 그래도 그나마 "학술논문"으로 보인다...어디까지나 그나마이지만;;; 그래서 여기서 인용한 사료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3. 사료로서의 명장성 동쪽끝[각주:24]
2.1.《明史卷九十一志第六十七 兵三 邊防》: 东起鸭绿,西抵嘉峪, 绵亘万里, 分地守御
동쪽으로는 압록강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는 가욕에 이르는 곳을 만리에 걸쳐 서로 이어지게 각 지역별로 수비하였다.

2.2. 《明宪宗实录》: 成化十五年六月修筑东路自开原抵鸭绿江边墙[각주:25]
성화15년 6월, 개원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동쪽길의 벽을 수리-축공하였다


4. 사료분석
2.2.는 인터넷에서 원문 대조를 할 수 없기에 일단 넘기겠다. 문제가 되는 것은 2.1.에 있는 구절이다. 저것만 놓고 보면 장성이 압록강에서 가욕관까지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 쉽다. 그러나 원래 원문을 보면 살짝 어이가 없어진다.

元人北歸 屢謀興復 永樂遷都北平 三面近塞 正統以後 敵患日多 故終明之世 邊防甚重 東起鴨綠 西抵嘉峪 綿亙萬里 分地守禦

원사람들이 북쪽으로 돌아가고 여러차례 돌아올 것을 도모하였다. 연락은 북평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삼면이 변방과 가깝다 보니 정통 이후에는 방어에 고충이 심해졌다. 그래서 명나라가 망하기 전까지 변방의 방어를 매우 중시하였다. 동쪽으로는 압록강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는 가욕에 이르는 곳을 만리에 걸쳐 서로 이어지게 각 지역별로 수비하였다. (막번역임.)

해당 내용은 만리장성과 상관이 없으며, 어디까지나 명나라의 변경방어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런 내용을 가지고 압록강에서 시작했다고 하는 것은 신빙성이 상당히 약하다고 하겠다. 그 뿐만이 아니라 명사의 다른 부분을 보면[각주:26], 비록 압록강부터 가욕관까지라고 수비범위를 지정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현재의 베이징지역에 수비가 밀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명나라가 건국했지만, 몽원의 세력은 아직 몽골지역에 남아 있었으며, 명나라 중후반기까지 계속 골치거리가 된다. 또한 몽원은 어디까지나 청나라에 의해서 밀려나게 되고, 청나라의 세력이 요동을 중심으로 뻗어나가서 결국 명나라를 멸망시켜버리고 만다. 이 상황에서 요동지역에 명장성이 항시적으로 있었다는 것은 불가능이다. 단지 간혈적으로 명의 세력이 요동에 이르렀을지는 모르지만, 장성과 같이 반영구적인 방어기지를 세울 정도의 확장은 정황상 불가능하였다.

최소한 현재 중국의 교과서에서는 명장성이 어디까지나 산해관까지만 그려져 있을 뿐이다. 중국의 주류 의견이 아닌 것이다. 주변에 중국친구가 있다면 한 번 물어보라. 명장성의 동쪽 끝이 어디인지를....


양쪽에서도 비주류인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의 이야기를 한중 양국의 매체에서 서로 경쟁적으로 소개하면서 쓸데 없이 양측 모두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될까? 미디어는 팔리는 화제성보다는 사실에 대한 집착을 해야되는 것이 이상이 아니었나? 아무리 현실이 시궁창이어도 해도해도 너무한다 싶다.


  1. 고로 이 글은 한국측이나 중국측이나 어느 쪽에서도 욕 먹기 딱 좋은 글일 것이다. 후-_ [본문으로]
  2. 실질적으로는 방어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문에 있는 링크를 참고. [본문으로]
  3. 의외로 이 것을 모르는 분들이 있어서^^:: [본문으로]
  4. 프랑스가 독일을 상대로 만들어두었지만 독일이 우회기동하여 마지노선자체를 상대하지 않아서 바보스러운 방어전략으로 이름을 날렸음. [본문으로]
  5. 人民教育出版社歷史室編著:《中國古代史》全一冊,人民教育出版社,2007年3月第2版。(p22~p23) [본문으로]
  6. 한대(BC 2세기 중엽) 사마천의 기록. [본문으로]
  7. 위진남북조의 酈道元의 [본문으로]
  8. 당나라 두우(杜佑)의 기록. 《太康三年地記》, 《晋書•地理志》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음. [본문으로]
  9. 위진남북조의 배송지(裴松之)이 위략을 인용한 [본문으로]
  10. 중국의 유명 역사지리학자. 중국역사지도의 주편자. [본문으로]
  11. 《长水集》上,北京:人民出版社,1987年7月,第16页 [본문으로]
  12. 《中国疆域沿革考》,北京:商务印书馆,1999年7月,第68~69页 [본문으로]
  13. 阎忠:《燕北长城考》,《社会科学战线》1995年第2期。冯永谦:《辽东地区燕秦汉文化与古长城考》,《辽宁省本溪、丹东地区考古学术讨论会文集》,1985年。王德柱:《鸭绿江畔发现燕秦汉长城东段遗迹》,《中国文物报》1991年5月19日。李文信:《中国北部长城沿革考》,《社会科学辑刊》1979年创刊号。李殿福:《东北境内燕秦长城考》,《黑龙江文物丛刊》1982年第1期。刘子敏:《战国秦汉时期辽东郡东部边界考》,《社会科学战线》1996年第5期。冯永谦:《东北古长城考辨》,《东北亚历史与文化》,辽沈书社,1992年。 [본문으로]
  14. 곽말약(郭沫若)의 《금문총고(金文叢考)》 [본문으로]
  15. 25년상군수과(二十五年上郡守戈)가 진시황25년 진나라 상군에서 제작되었다는 점을 들어 평양에 진주했었다는 근거로 사용. 또 三年相邦呂不韋造, 上郡守……라는 글이 세겨져 있는 동모를 통해서도 이야기된다. 그 외에도 문양이나 기타 출토유물이 이야기되어진다. [본문으로]
  16.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년. [본문으로]
  17. 이덕일,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역사의아침, 2006년. [본문으로]
  18. 윤내현, <漢四郡의 樂浪郡과 平壤의 樂浪>, <<韓國學報>>41, 1985년. [본문으로]
  19. 《评汉乐浪郡在今辽河以西说》 [본문으로]
  20. 이성규, <중국군현으로서의 낙랑>, <<낙랑문화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7년.이병두, <낙랑군현 위치고>, <<한국학보>>55, 1989년. [본문으로]
  21. 북한과의 교류가 중요한 이유도 이것이다. 막말로 지금 상황에서 직접가서 본 사람이 큰 소리 칠 수 있으리라 본다 -_-;;; [본문으로]
  22. 张安阳《明长城东端起点——虎山关》《民主》 [본문으로]
  23. 栾德君《虎山长城》《满族文学》08/03 [본문으로]
  24. 조사하면서 알았는데, 한국의 환빠들은 참 순진한 수준이라고 보인다. 이쪽은 본문에 분명히 있다. 단지 앞 뒤 문장을 꼭 봐야되지만... [본문으로]
  25. (해당책은 인터넷에서 원문을 찾을 수가 없었음, 확인해야되는데 귀찮아서 패스. 어차피 말도 안되는걸 굳이 찾으려 할 필요 자체가 없음. [본문으로]
  26. 《明史》卷一百十三志八十七 明幅員綿邈東起鴨綠西抵嘉峪為邊者九千餘里成祖即北平建都碣石冀北扆山負海塞垣聯絡據乎要險居庸為京北門隸于昌平密邇薊州薊昌俱畿内要地故不稱鎮薊之稱鎭自嘉靖庚戍昌之稱鎮自嘉靖庚申皆世宗所建置... [본문으로]

동북아시아 선사 및 고대사 연구의 방향 - 6점
이성규 외 지음/학연문화사


해당 책은 한권의 책이라기 보다는 각기 서로 다른 필자들의 시대가 비스무리한 글을 모아놓은 잡지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방법론이나 주제들이 상호간에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막말을 하면, 당시에 불던 "동북공정"로 인한 강렬한 돈벌기 기회를 위하여 급조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한권의 책이라는 통일성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 전체를 도매금으로 깍아버려서도 안 될 것이다. 이 책에서 보이는 논문들은 그 동안의 동북아시아 선사 및 고대사 연구를 잘 정리하고, 앞으로의 방향성을 제시해주고 있다. 제대로 책 전부를 정독해야겠지만, 본인이 관심있는 부분만 야금야금 파먹었다. 그래도 책 값 자체가 (예전 책이어서 그런지-_) 만원도 안되는 9000원이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 한두개를 위해서 구매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본인의 경우 아버지의 책을 낼름해서 가지고 왔다....-_;;;)


목록 :
중국 고문헌에 나타난 동북관 - 이성규
단군신화 연구의 여러 문제 - 신종원
부여사 연구의 제문제 - 박경철
고구려사 연구의 제문제 - 임기환
요령지역의 청동기문화와 지역간 교류관계 - 오장원
철기시대 전기의 중국 동북과 한반도의 금속기문화 - 이청규


낙랑군 연구 - 8점
오영찬 지음/사계절출판사


모두가 말한다. 이제는 학문분야끼리의 교류가 중요한 시기라고...역사학의 예를 들면, 고고학과의 연구교류는 빠질 수 없는 항목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떠한가? 고고학자들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이론이나 고문들을 역사학자들이 보면 "이건 뭐꼬?"라고 하고, 반대로 역사학자들이 고고학자들의 글을 인용하는 것을 보면서 고고학자들은 "머냐-_?"라고 한다. 연구교류를 통해서 타학문분과의 성과를 인용하는 것은 그만큼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낙랑군 연구는 개인적으로 매우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역사학과 고고학이 제대로 버무려져서 체계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다. 저자인 오영찬 학예연구관은 원래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서는 고고학계에서 일을 하였다. 그리고 그 경험이 강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박수~~!!

사실 이 책의 주제는 이미 책의 부제를 통해서 명시되어있다. 바로 고조선계와 한계의 종족융합을 통한 낙랑인의 형성이다. 낙랑군은 그 위치적 특성과 시대변화의 물결속에서 고조선계와 토착한계 및 새로운 한계간의 교류 속에서 독특한 단위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이 결론은 사료가 부족한 해당 시기의 문제를 고고학 성과의 대폭적인 수용으로서 해결하고 있다.

해당 시기의 전공자뿐만이 아니라, 전체 역사학도 혹은 고고학도들이 읽어보고, 그 방법론에 대해서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저번에 서안을 간다고 했는데, 제가 착각을 했습니다. 낙양입니다.-_-;;
현재 한국 고고학쪽 분들의 수행통역으로 업성(조조의 수도)을 찍고, 은허를 지나서 낙양에 입성했습니다. 내일 낙양을 돌고서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재미있는?! 것은 지금까지의 과정이 모두 "자동차"을 타고 이루어졌습니다. -0-;;;

이런 경험 처음이에요~~ 므흣-0-;;

어찌되었든 지금 호텔에서 무료로 방에서 인터넷을 연결 할 수 있게 해주어서 이렇게 오랜만에?! 인터넷의 세계에 들어왔답니다. 좀 있으면 저녁 먹으러 가야되서^^ 휭~~~

湖南出土距今30万年以上的石制砍砸器[组图]

30만년전의 석기 제작도구

제작도구의 발견 지점.

 

12월 5일, 고고학자들의 현장 검증을 거쳐 중국 후난성 시앙탄현(湘潭县杨嘉桥镇蛟托村)에서 30만년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기제작도구(뗀석기 - 石制砍砸器)가 발견되었다. 이것으로 인하여 시앙강 유역의 인류 활동은 기존의 20만년전부터 시작되었다는 학설이 부정되고, 30만년전에 시작되었다는 학설이 떠오르게 되었다.

 

바로는 고고학을 잘 모른답니다. 石制砍砸器을 한국어로 뗀석기 제작도구라고 해야될거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네요. 어찌되었든 고석기 시대에 석기를 제작하는 도구입니다. 위에 보이는 단단한 돌에 다른 돌을 붙이쳐서 도구를 만드는 것이죠.

浙江良渚发现4000年前古城价值直逼殷墟(图)

2007년 11월 29일 량주고성 북쪽 성벽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성벽의 절단면이다.

浙江良渚发现4000年前古城价值直逼殷墟(图)

2007年11月29日,량주고성의 북쪽성벽 절단면

浙江良渚发现4000年前古城价值直逼殷墟(图)

고대의 도로였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돌들이다. 대략 40-60미터의 폭이어서 당시에 얼마나 거대한 도로가 있었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浙江良渚发现4000年前古城价值直逼殷墟(图)

동쪽 성벽에 위치한 발굴지

 

절강성 고고학연구소를 어제 18개월 동안 발굴활동을 해오던 량주유적의 발굴보고를 하였다. 해당 량주 유적은 290만 평방미터의 4000년전의 최대크기의 성이다.(290만 정도면 대략 여의도 보다 조금 작은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무지막지하게 큰 크기인 것이다.) 북경대학교 고고학과 언원밍 교수는 량주 유적을 보면서 이렇게 평가했다.

"지금 현재 중국에서 발견된 동시대 고성중에서 가장 큽니다. 저는 이 성을 "중화제일성 中华第一城" 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군요."

원래 학계에서는 량주문화는 그다지 발달 되지 못한 문화라고 알고 있었는데, 해당 유적이 발굴됨으로 인하여 매우 발달된 기술과 문화를 가지고 있음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이 량주유적의 발견은 지난 세기의 하남 안양 은허 발견에 비견할 만한 중국 고고학 역사에 길이 남을 거대한 발견입니다.

 

해당 고성은 동서 1500-1700미터, 남북 1800-1900미터이며 남북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성벽의 남아 있는 부분은 대략 4미터정도의 높이이며, 폭이 40-60미터 정도 됩니다. 황토를 벽돌처럼 쌓아서 만들었으리라 생각되고 이습니다. 성벽에서 나온 도기 파편으로 고증해 보면 해당 고성은 량주문화 후기에 해당하는 약 4000년전에 만들어졌으리라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궁전터로 보이는 곳들과 제사용으로 쓰였으리라 생각되는 여러 구덩이들이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사항은 발굴보고서가 나오고서야 알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지금 현재 해당 고성으로 인하여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량주고성이 하나의 국가였냐 아니냐는 점입니다. 어제 엄원밍교수는 량주고성의 모습으로 보아서 이미 "국가" 시기에 돌입하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량주고성이 사실은 "량주고국"으로 이름 불려야 하며, 또 다른 연구가들은 예전의 하상주에 량주를 추가해야 되지 않나 생각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사실 이게 무엇이 중요하냐고 말하실 분들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솔직히 역사관련 전공자들이 아니면 별로 중요한 내용이 아닌듯 합니다만...해당 사항에 상상력을 붙이면 :

1)현재 환빠들이 주장하는 대쥬신같은것은 성립할 수 없게 되는 아주 간단한 반례가 될 수 있습니다.

2)홍산과 대비되는 중원 문화가 없었다는 점에서 현재 중국 문화의 시초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냐는 학설에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 동시에...잘못 이용되면 중국의 중화주의에 불을 붙일 수도 있을지 모르겠군요.

3) 오히려 환빠들이 주장하는 대쥬신이 성립될 "상상의" 기초가 될지도 모르는군요. 홍산을 북방계열의 문화로 보고, 량주를 남방계열의 문화로 설정하면 가능하긴 합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공상일 뿐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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