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의미의 출입국관리소는 국가기관에 의해서 국경에서의 출입행위를 감독관리하는 기관이다. 이 말은 출입국관리소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성립과 안정적인 유지 및 국가간의 무역을 위한 기본적인 경제조건과 교통조건이 선결 조건으로 필요하다. 이러한 조건들을 갖춘 시기는 과연 언제쯤일까? 서양사에 대해서는 무지하기에 중국대륙사를 중심을 이야기해보겠다.
 
무역을 하려면 무역이 가능할 정도의 경제력이 필요하다. 상나라에는 여유자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의 갑골문등에서는 "납공 纳贡"(제후가 왕에게 바치는 제물)이 나온다. 납공을 했다는 것은 일정한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행정기관의 존재여부는 명확하지 않다[각주:1].

관련된 실질적인 행정기관으로서의 존재는 주나라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주례(周礼-地官篇)에 따르면 关(관문할때의 관)이라는 기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사관(司关)으로 간략하게는 문지기이다. 장절(掌节)은 비자발급해주는 사람이었다. 실질적인 의미에서의 이 시기야 말로 출입국관리소의 출범이다. 실제로 중국학계에서도 이 시기를 출입국관리소의 시초로 보는 시각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혹자는 이에 대해서 주나라는 어디까지나 봉건제를 행하던 "하나의 국가"였고, 어디까지나 제후와 왕 사이에 벌어졌던 내부물자이동이기에 출입국관리소의 시작으로 이해하면 안된다고 한다. 아예 말이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의 국(国)의 유래를 생각하면 조금 황당한 반론이다. 왜냐하면 국은 성단위의 행정단위를 이야기한다. 더 간단하게는 그리스와 같은 도시국가였던 것이다.  비록 명목상으로 주왕이라는 최고통치자가 있었지만 실질적인 통치권은 매우 약하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역시나 현재 중국정부의 "하나의 중국"의 정신에 너무 영향을 받은듯 하다[각주:2].

혹자는 당시에 관은 어디까지나 사람을 막은 것이지 물자를 막았다고 보기 힘들기에 출입국관리소라고 하기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물자가 발이 달려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사람의 손을 통해야했기에 사람을 관리하는 것은 곧 물자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떠나서 고대사의 수 많은 기간동안 사람이 곧 재산이었다. 사람의 통행을 관리하는 것 자체가 곧 물자유통을 관리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각주:3].

춘추전국시대에 오면 당대의 다양한 사람들이 출입관리제도에 대해서 논의를 한다. 예를 들어서 춘추시대에는 관중은 "관세를 낮추고 상인을 대접하여 경제를 발전시키는 전략"이라는 지금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전략을 실제로 실행하여 대박이 난다[각주:4].  전국시대로 오면 상앙은 관세를 무겁게 하여 농업을 발전시켜야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실제 당시 상황에서 농업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농산물이라는 먹거리차원만이 아니라 농민들자체가 병사였던 시대이기에 농업의 발전은 곧 부국강병과 동일하였고, 이런 시스템을 교란시키는 상업을 막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상업을 억제는 경제원칙은 중국고대사를 관통하는 기본적인 법칙이 된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발전을 하고 농민이 곧 군사력이라는 법칙이 붕괴될수록 사회적 모순은 점차 커져만 가게 되었다.

핵심은 춘추전국시대에 다양한 출입관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정도면 무역이 어느 정도 성숙했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그렇기에 춘추전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없다. 어떠한 제도도 기본 없이 순식간에 성숙할 수는 없다. 다만 중국 출입국관리 발전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대로 넘어오면서 중국대륙은 통일체계를 이룬다. 그러나 초기에 국력은 매우 약하여 내부적인 통치력도 약하였고, 외부적으로는 흉노에게 처참하게 밀리고 불평등조약을 맺게 된다. 주기적인 흉노에 대한 조공을 하게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변방에 호시(胡市 북방계열과의 무역시장)을 정식으로 만들게 된다. 그 전에도 북방과의 무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이 시기에 정식으로 사료에 나타나게 된다[각주:5].  한무제때가 되면 북방공략에 나서게 되며 장건(张骞)의 노력으로 서역으로의 무역노선도 만들어지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대외무역이 활발한 시기는 매우 짦았으며  무역권한도 기본적으로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정부가 가지고 있었다.

위진남북국시대는 매우 혼란한 시기로 북방민족이 대거 중국대륙으로 들어오게 되며 자연스럽게 국제무역이 번성하게 된다. 특히 이 시기에 주목할 것은 "조공-책봉 朝贡-册封"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외교시스템적인 국제무역이다. 유교의 국제질서시스템을 명목상으로 이어가며, 겉으로 보기에는 조공을 바치면 일정한 벼슬을 내리고 있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을 보면 외교전략으로서 조공이라는 명목상의 물품을 바치고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 것을 내어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중국대륙이 혼란스러운 상황마다 벌어졌을 뿐만이 아니라, 평화시대에도 이른바 "평화비용"을 지불한다는 의미로 기본적으로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 바로 중국어 
중국어로 출입국 관리소는 海关(hai guan)입니다. 여기서 海는 바다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해(四海)는 구이(九夷), 팔적(八狄), 칠융(七戎), 육만(六蛮)과 같은 중국외부의 지역을 지칭합니다. 사실 사해의 밖에도 사황(四荒)이라던지 사극(四极)과 같은 지역 범위가 있지만, 지금은 중국외의 모든 지역을 가르킵니다[각주:6]. 관(关)은 위에서도 나왔지만 관문의 의미입니다.

정리하면 중국어의 海关은 중국외 지역과의 교류를 관리하는 관문이라는 의미입니다.

* 모종의 이유로 최대한 쉽고 간략하게 정리한 내용입니다. 문헌인용과 같은 기본적인 것도 귀찮아서 넘겼습니다. 전체적인 내용에는 큰 문제는 없습니다...아마도? 루루루루...머...읽는 분이 있기는 할런지~~

  1. 혹자는 孟子-梁惠王편에서 나오는 고사를 인용하고는 하지만 맹자 자체가 만들어진 시간이 늦기에 그리 신빙성은 없어보인다. [본문으로]
  2. 막말로 어용이라는 소리지요~ [본문으로]
  3. 사람들이 애써 무시하는데 노예제도가 폐지된지는 몇 백년도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그 전까지 사람도 "문건"였다. [본문으로]
  4. 공자도 역시 관세를 낮추는 정책을 이야기 했었다. [본문으로]
  5. 중국사에서는 몇몇은 이것을 가지고 화평을 맺었다고 하지만 실질적인 조약내용을 보면 누가봐도 한나라가 무릎을 꿇은 거다. [본문으로]
  6. 《尔雅·释地》 [본문으로]
북경대학교의 역사는 중국의 근현대사와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라고 하면 싫어하시는 분들이 많기에, 최대한 간단하게 흥미진진한 야사를 섞어가면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설명하지 않을 수 없는 중국근현대사가 있습니다.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 이름은 한국외래어표기법에 의거하여 1949년 이전에 출생한 사람들을 모두 한국어한자독음으로 표기하였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중국어발음이 더 편하긴 합니다만;;;;

* 나름 잘 써서 올렸는데, 티스토리가 Ddos 공격을 받다니..이 글은 이렇게 묻히겠구나~~~!!!


1) 경사대학당(京师大学堂)시절

1898년 청나라 광서제는 한참 무술변법운동(戊戌变法)이라는 개혁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영국처럼 왕조는 유지하면서 근대국가로 변화하겠다는 몸무림이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실천사항의 하나로 나름 근대적인 의미의 대학인 경사대학당을 7월4일 설립하게 된다. 그런 무술변법운동은 100일도 되지 않아 9월에 서태후의 모략으로 실패하게 된다. 이러자 경사대학교가 공중분해될 것은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그리고 1900년 8월 3일 서태후는 폐교을 시켜 버린다.

원래 자금성 동쪽, 왕푸징 바로 옆에 있었다.


그러나 이미 잠시간의 개혁을 경험한 중국내 여론의 압력으로 1902년 다시 경사대학교가 다시 만들어지게 되고, 12월 17일 드디어 입학식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중국의 유명한 당시의 신지식인 엄복(严复)교장선생님이 등장한다. 하지만 비록 신지식인인 엄복이 교장이 되었지만, 경사대학당은 어디까지나 서당적인 분위기가 강한 곳이었다. 학교에는 많은 유학자들이 있었다.

사실 북경대학교 마크에는 1989년 개교를 했다고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1902년에나 실질적으로 개교를 했다고 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게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처음 시작은 1989년이니 3년정도의 애교는 귀엽게 봐주시길.....^^;;


2) 북사탄(北沙滩) 북경대학

사람들은 현재의 북경대학교로 관광을 온다. 그러나 지금 현재의 북경대는 어디까지나 1952년 이후에 옮겨온 곳이며, 그 이전에는 연경대학부지였다. 그리고 이 당시 북경대학교 부지는 지금의 자금성의 오른쪽, 왕푸징의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이 곳은 북사탄이라고 불리던 곳으로서 한자를 아시는 분은 눈치 채셨을텐데 원래 모래밭이었던 곳에 북경대학교를 만든 것이다. 이 곳은 현재 북사탄 북경대학교 혹은 북경대학 홍루(붉은 건물이라는 뜻)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곳이 바로 예전 북경대학교 건물이다. 여행으로 자주 가는 왕푸징에서 도보로 5분거리에 있다. 한번 가보시는 것도 괜찮을 듯^^


각설하고! 1911년 국민당정부가 핵심이 된 중화민국이 생겨난다. 그리고 1912년 5월 경사대학당은 북경대학교로 개명을 한다. 그리고 1916년 12월 드디어 북경대학교의 영원한 교장선생님이라고 불리며, 현재 북경대학교의 정신적인 토대를 세운 채원배(蔡元培)교장선생님이 오신다.

채원배교장선생님!!!


채원배 교장선생님은 "학술은 자유로우며,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学术自由,兼容并包[각주:1])"라는 정말 옳은 말이지만 실질적으로 이루기 힘든 일을 이루어낸다. 이 말을 충실히 현실에 재현을 한 당시 북경대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고홍명 선생님.

아직까지도 그 힘을 보유하고 있던 유학자들과 자본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노쉰(鲁迅)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창시자인 이대조(李大钊)가 같은 학교에 있었다고 한다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가? 고홍명(辜鸿铭)이라는 분도 압권이다. 아버지는 말레이시아 화교이고 어머니는 영국인으로서 유럽에서 유학을 했다. 그는 어머니의 피로 서양인같은 높은 코를 가지고 있으면서, 중국전통옷을 입고서 학교를 노닐었던 것이다[각주:2]. 1918년부터 1919년 사이에 모택동(毛泽东)이 북경대학교 도서관 사서조수[각주:3]을 했다는 것 정도는 이제 놀라지도 않을 일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때만 해도 가장 강력한 힘은 유학자들에게 있었다. 전통의 힘은 그리 가볍지 않다. 그리고 자본주의파가 급속하게 성장을 해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이제 막 유입된 요즘말로 듣보잡에 불과했다. 그러나 채원배 교장선생님은 그 어떠한 학설이든 스스로의 논리가 성립을 한다면 받아주며, 외부의 압박에서 보호를 했던 것이다. 채원배 선생님이 현재까지 북대의 영원한 교장이라고 불리는 것은 괜히 그런것이 아니다. 그는 전설이다.

북경대학교는 이렇게 화려하게 꽃을 피어 간다. 그러나 1931년 일본제국의 중화민국 공략이 본격화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점차 일제의 침략이 노골적이 되어가면서 북경대학교 학생들은 반대시위등을 하게 되었고, 결국 1935년에는 129운동의 선두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대세를 바꾸지 못한다.

하지만 또 전설이 세워진다. 서남연합대학의 전설이....


3) 서남연합대학(西南联合大学)
1937년 소위 77사변이라고 불리우는 일제침략행위가 발생을 하고, 북경대학교와 청화대학교 그리고 남개대학교(南开大学)[각주:4]는 남쪽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그리고 챵샤(长沙)에서 서로 연합하여 서남연합대학(西南联合大学)라는 하나의 전설을 만들게 된다.

전설의


북경대학교의 불타는 정열과 청화대학교의 얼음같은 엄격함, 남개대학교의 끊임없는 노력정신이 뭉치게 된 것이다. 대충 생각을 해봐도 전설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들은 계속 되는 항일전쟁의 와중에서도 서로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미쳐서 수 많은 원사[각주:5]들을 배출하였다.

일본이 항복을 하고 1946년 5월 베이징으로 돌아솨서 10월에 다시 북경대학교로 분리가 되었으며, 이 때 호적(胡适)교장선생님이 교장이 된다. 그리고 몇몇 잔잔한 개혁이 있었다. -0-;;


4) 하이디엔취(海淀区) 북경대학(현재)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고 호적교장선생님은 미국에 잠시 있다가 타이완(중화민국)으로 갔다. 그리고 1951년 6월 마인초(马寅初)가 교장선생님이 된다. 그리고 1952년 대대적인 중국의 대학개편작업이 있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북경대학교(공과는 청화대로) + 연경대학교(문과,이과,법과) + 청화대학교(문과,이과,법과)을 하게 된다. 북경대와 청화대는 무엇이 다른가? - 바로 북경대에서도 설명을 하였지만, 북경대는 문과대학이 아니라 문과와 이과 대학인 것이다. 그리고 이 때 지금의 위치로 이사를 오게 된다. 그때까지 현재의 북경대학교 부지는 연경(燕京大学)가 있었다. 핵무기를 개발하고, 반도체를 개발하는 등의 화려한 모습을 잠시 보이나

삼각지(三角地)에 문화대혁명의 포스터(大海报)가 붙은 것은 중요한 암흑기의 시작이었다...2007년에는 이 삼각지가 철거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중국의 또다른 암흑기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1960년 마인초교장선생님이 반동분자라는 이유로 해임되고, 1966년 문화대혁명이라는 암흑기가 도래한다. 이 부부은 진정한 암흑기라고 할 수 있다. 북경대학교 학생들은 문화대혁명의 구호에 충실히 따랐다. 아니 앞장서서 나섰다. 그리고 1978년 이전까지 학생이 교수를 공격하고 몰아내는 등의 온갖 난리가 벌어졌다. 그래서 현재도 1966년부터 1978년 사이에 졸업한 사람들 중 현재 북경대 교수가 된 사람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학문의 공백기를 가져왔다. 이 시기를 한마디로 정의하면...아.무.것.도. 없.다.


5) 개혁개방의 시기
1979년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1979년 학번들은 북경대와서 그 자유로움을 순식간에 회복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79학번부터 82학번 사이에 현재 북경대교수진이 많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그 당시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면서 현재의 북경대학교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1981년 중국 여자 배드민턴팀이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하자 북경대학생들을 뭉치자! 중화를 진흥시키자(团结起来,振兴中华)라는 구호를 외쳤고, 그 중에서 중화를 진흥시키자(振兴中华)는 현재도 북경대학교 구호중에 하나로 남아 있다.

퍼래이드를 하다가 갑자기 펼친 이 플랜카드는 순식간에 세계로 퍼져나갔다.


1984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35주년 천안문 퍼레이드에서 북경대학교 학생들이 "등소평짱[각주:6] 안녕하십니까?!(小平您好)라고 하며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은 것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1989년 같은 장소에서 그 유명한 "천안문 사태"가 일어난다.

중국의 민주화를 희망하는 많은 학생들이 주축이 되서 일어났던 천안문 사태는 북경대학교의 정신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자, 동시에 아픔을 알려주는 일이다. 현재 북경대학교의 교수 중에서는 이 시기 천안문 현장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은 그 당시의 정신을 계속 간직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당시의 아픔과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다.


....정말 짦게 한다고 했는데, 쓰는데만 1시간이 걸렸다..그런데 여기서도 하지 않고 넘겨버린 수 많은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면 믿으시겠는가?-_-;; 그리고 직업병 발동 안하다고 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이것저것 확실하게 하게 위해서 자료를 찾다니....ㅠㅠ  다음 편부터는 인물이나 건물의 이야기로 최대한 짦게 짦게 가이드처럼 가련다. 이렇게는-_-;; 너무 길어;;;;

  1. 《史记·司马相如列传》:“故驰骛乎兼容并包,而勤思乎参天贰地。” [본문으로]
  2. 지금 이런 분이 있어서 신기하게 볼 터인데...그 당시에;;; [본문으로]
  3. ...그러니까 사서도 아니고 거의 이름만 있는 알바같은 수준;;; [본문으로]
  4.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개대학교는 천진에 있는 대학으로서 지금도 중국대학순위 10위권에 들어가는 학교이다. 이 당시 군벌에 의한 대학교가 천진에 세워졌다. 그것이 바로 남개대학의 전신이다. [본문으로]
  5. 원사는 중국의 제도로 국가급의 학자에게 수여를 하는 일종의 명예직에 가깝다. 요즘은 원사를 마구 주어서 격이 떨어졌다는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만, 아무리 떨어져도 원사다라고 할까? [본문으로]
  6. 노무현 전대통령을 보고 "노짱"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본문으로]
  1. Favicon of http://sgoon.tistory.com BlogIcon Sgoon 2009.11.04 01:29

    오랜만에 재미있는 내용을 보는 듯 합니다^^

    • Favicon of https://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바로 2009.11.04 10:04 신고

      .....이런 글을 좋아하시는군요. 하지만 대부분의 분들은 이런 글을 싫어한답니다. 저 자신은 이런 글도 괜찮긴 한데....솔직히 제 블로그 방문자 분들....아니 제 자신의 글이 IT 부터 역사까지 온갖 것들이 다 있어서 무엇을 맞추기는 어렵군요...

      역시 그냥 키워드 "중국"으로 다방면으로 쓸 수 밖에요;;

    • Favicon of http://sgoon.tistory.com BlogIcon sgoon 2009.11.04 11:24

      저도 중국에 좀 있었다보니...저도 모르는걸 알게되면 재미가 있내요..ㅎㅎ 지루한 내용이긴하죠..ㅋㅋ

    • Favicon of https://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바로 2009.11.04 18:16 신고

      하하^^::::

  2. skqs 2009.11.05 03:37

    재밌습니다. 채원배 선생님 저 사진은 간만에 보는군요. 존경하는 분의 사진을 보니 기분이 좋네요.

    • Favicon of https://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바로 2009.11.05 09:45 신고

      채원배 교장선생님의 교육이념에는 정말 감탄합니다. 어떻게 보면 자유로운 사상가이고, 사실 어떻게보면 몽상가인데 말이죠^^:::

제 5장 : 친척의 덕을 보다.

-- 사촌지간의 정

618년 수나라는 멸망하였다.

이때 왕박(王薄)이라고 부르는 한 농민은 <무향요동랑사가 无向辽东浪死歌>를 만들었고 대히트하였다. 마치 예전에 "DJ.DOC와 함께 춤을"을 할아버지부터 미취학아동까지 모두가 불렀던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무슨 뜻이냐고? "요동으로 가면 쳐 죽으니까 가지 마라"라는 아주 단순하면서 당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가사였다. 그 당시의 온갖 농민운동이나 그 외의 잡다한 난리들이 모두가 이놈의 무향요동랑사가로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난리부르스 속에서 강도(江都), 그러니까 지금의 양조우(扬州)에 있었던 황제를 호위해야될 금위군(禁卫军)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수양제(隋炀帝)는 때가 왔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의 허리띠를 풀러서 심복에게 주고, 목 졸라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혼자 죽을 용기는 없었나 보다.

그런데 수도가 장안인데 수양제는 왜 양주라는 중국의 남방에서 죽었을까? 사실 수양제 제위 18년 중에 13년을 양주에서 지냈었다. 아마 중국의 통일 왕조 중에서 남방에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황제일 것이다. 수양제가 자주 양주에 있었기에, 어떤 이는 대운하가 어디까지나 수양제가 양주에서 놀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건 아니다. 막말도 적당히 해야된다. 대운하는 기본적으로 남북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조역통로로서 필요했었다.

어찌되었든 수나라는 581-618년이라는 딸랑 39년만에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다.

당나라의 개국황제 이원(李渊)은 진양(晋阳)에서 군대를 일으켜서 618년에는 스스로 황제라고 선언한다. 그가 바로 당고조(唐高祖)이다. 그는 국호를 당(唐)으로 정했다. 또한 수도를 장안으로 지정하였다. 이원은 수양제의 사촌동생이다.  그 둘의 어머니가 서로 친자매로 무협지에 자주 나오는 독고(独孤)씨였다. 이원은 수나라 시대에 당국공(唐国公)으로 진양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가 군대를 거병해서 관중의 장안으로 들어간 이후에 수양제의 손자를 황제로 세우고 수공제(隋恭帝)라고 하였다. 그리고 수양제를 태상황(太上皇)으로 추존하였다. 그리고는 모두가 예상했듯이 섭정을 하면서 실권을 다 장악해버린다. 왜 황제가 되지 않고 귀찮게 섭정을 했냐고? 당시 이원의 거병 이유는 어디까지나 살해된 사촌형 수양제를 위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래서 일단은 수양제의 장례를 성대하여 치루었다. 또한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도 하나하나 처리하기 시작했다.


-- 친형제의 난

626년 이세민(李世民)이 즉위하였다. 당태종(唐太宗)이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놈의 이세님의 즉위과정은 용의 눈물이라는 드라마로 유명한 이씨왕조의 태종이 떠오른다. 친형제간의 피가 튀기는 참혹한 광경을 보고 있으면, 권력 앞에서는 어떤 확실한 것도 없다는 것을 세삼 깨닭게 된다. 이세민은 현무문지변(玄武门之变)이라는 친형제살육전을 벌인다.

이세민은 현무문지변을 통해서 친형인 이건성(李建成)과 친동생인 제왕(齐王) 이원길(李元吉)을 살포시 죽여버린다. 그리고 친아버지를 협박해서 황제의 자리에서 물어나게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더 아름다운 것은 이런 짓을 해놓고서는 역사서를 고쳐버린 것이다. 현재 당시의 역사에서는 이세민이 죽여버린 이건성과 이원길을 천하의 호로자식으로 써놓고 있다. 그런데 병신에 바보같은 녀석들이 어떻게 수 많은 전공을 세울 수 있었을까? 또한 어떻게 태자가 될 수 있었을까? 조금만 생각해봐도 헛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교을 기본 사상으로 간직한 동양의 역사책 서술에 대해서 알아보자. 황제가 무슨 말을 하던 옆에 있는 사관(史官)은 그것을 모두 기록을 한다. 당시에는 비록 지금의 녹음기나 카메라 같은 것이 없었지만, 사관은 조정에서 황제가 하는 모든 말을 기록을 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 황제의 실록(实录)이 된다. 조선왕조실록도 바로 이러한 기록들의 모음이다.

그러나 황제 자신은 결코 실록을 볼 수가 없다. 명(明)나라와 청(清)나라는 강력한 왕권국가였지만 어떠한 황제도 실록을 보지 않았고, 볼 수도 없었다. 사실 어차피 실록이라는 것 자체가 그 자신의 기록이었으니 굳이 볼 필요가 있겠는가? 아! 물론 어디까지나 조정에서 대신과 말하는 것들의 기록이다. 황제도 사생활은 필요하지 않겠는가? 또한 본다고 하더라도 결코 바꿀 수 없다.

그런데 이넘의 이세민은 실록을 보았을 뿐만이 아니라, 바꾸기까지 했던 것이다. 황제가 직접 나서서 "이건 별로야. 지워버려. 안 지워? 너 죽을래?" 라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런 일들은 종종 발생하고는 했었다.

유명한 일이 "최저가 제장공을 시해한 사건 - 崔杼擅弑齐庄公"이다. 최저가 제환공을 죽이고 사관에게 "아파서 죽었다"라고 기록하라고 했지만, 사관은 사실대로 "최저가 제환공을 시해하였다"라고 적어버린다. 최저가 열받아서 사관을 죽여버리지만, 그에게는 3명의 동생이 있었다. 그리고 3명의 동생 모두 차례대로 사관에 임명되어서 사실대로 쓰고서는 죽임을 당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명만이 "사실대로 쓰는 것은 사관의 의무입니다. 만약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목숨만을 바란다면 죽느니만 못합니다. 또한 제가 쓰지 않아도 누군가는 쓸 것입니다. 설사 다른 이가 쓰지 않아도 당신의 죄는 결코 덮어지지 않으면 천하인들이 모두 욕할 것입니다." 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자 결국 최저는 역사조작을 포기하였던 일화가 있다.

그런데 이세민 때의 사관은 누구인지 바꾸어버리고 만다. 사관으로서의 의무는 어디 갔냐? 븅.


이렇게 이세민의 등극은 친형제를 죽이고 일어났고, 그 사실을 숨기려고 하지는 말아야 될 역사조작까지 감행하였지만! 그는 단순한 악인은 아니었다. 그 뛰어난 능력을 좋은 곳에 쓰기도 한다.

수양제는 당태종(이세민)의 오촌 아저씨였다. 또한 그의 장인이기도 하였다. 당태종의 한 첩이 수양제의 딸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촌 아저씨이자 장인 어른인 사람이 어떻게 망했는지 두 눈 똑똑히 지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당태종은 수나라 멸망의 교훈을 깊이 새기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였다.

그래서 역대 최강의 부자 정부였다는 수나라는 중국 역사상 3번째의 통일을 이룩하고는 38년만에 망하고 말았다. 그나마 진시황의 진(秦)나라가 딸랑 15년이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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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먼가 전의 글과 문체가 상당히 다른 느낌이....끙...
이 글만 하는 것이 아니다보니 문제가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다.
아니;; 어차피 문체를 떠나서 글 내용 자체가 원문하고 점차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핵심이나 뼈대야 어차피 역사가 그게 그거니 같다만....음;;;;;;;
................................................
어차피 돈 받고 하는 것도 아닌걸.....
................
...
무엇보다 별로 덧글도 없고.....계속 해야되나...;;;
(라면서 덧글 유도+_+)




  1. 잘봤습니다. 2009.09.22 22:29

    ㅋ 무임승차좀 해보려 했더니...

    권력을 탐하다보면 그럴수도 있는게 세상이치인데 당태종도 어지간히 자신이 부끄러웠나봅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폐위만 시키고 죽이지는 않았나 보군요.

  2. 시골 2009.09.25 18:19

    아마 친족들도 친이세민과 반이세민으로 갈등을 겪었겠죠..

    골육상잔의 이야기와 한편으로, 패밀리 비지니스로 환상의 팀플레이 보여주는 이야기 양쪽을 보면..

    참 이해관계라는 것이 여러가지로 작용하게 되는구나 싶습니다.

    전에 이세민 이야기의 후속으로도 느껴지 잘 보았습니다. ^^

  3. Favicon of http://www BlogIcon 킹파르사 2009.09.25 22:40

    원문도 재밎지만 번역또한 구수하게 잘 번역하셨네요 .
    이책은 번역해서 출판하면 베스트셀러가 될듯한데요..

제 4절 : 영웅 아버지와 병신아들(2)
(지난회는영웅 아버지와 병신 아들(1) - 중국사는 장난감이다.)


수나라의 양식은 얼마나 풍부했었던 것일까? 천하를 50~60년동안 먹일 수 있는 분량이었다고 한다. 수나라가 38년만에 망했으니, 당나라는 날로 20년분의 양식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문헌통고(文献通考)에서는 이러한 수나라의 부를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어떤 나라도 수나라만큼 국고가 넘쳐흐르지 않았다(古今称国计之富者莫如隋)라고 말하고 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어떠한 나라도 수나라 정부만큼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누구도 수나라와 맞짱을 뜨지 못한다. 수나라야 말로 막강 돈지랄을 할 수 있는 나라였던 것이다.


3. 운하를 뚫었다.
수양제는 대운하를 뚫었다. 용제거(永济渠), 통제거(通济渠), 한구(邗沟), 강남하(江南河)로 분리해서 삽질을 시작했다. 낙양(洛阳)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탁군(涿郡)을 연결하고, 아래쪽으로는 여항(余杭)까지 도달한다. 참고로 미치도록 길다. 현재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긴 운하이니 말 다한 거 아닌가? 파나마 운하의 38배이고, 스위스운하의 20배에 달한다. 현존하는 최대길이의 운하를 수나라때 포크레인도 없이 만들었다. 지금 현대의 기술로도 한반도에 운하를 뚫는 것은 환경파괴는 둘째 치고 돈을 몇 조씩 넣어야 되는 상황에서 당시에는 어떠하였을까?



4. 도로 재정비....
이쯤 되면 우리는 진시황의 진(秦)나라가 떠오른다. 진나라도 만리장성 만들고[각주:1], 길을 새로 설비하면서 사람들을 부려먹다가 2대만에 망했었다. 수나라 역시 딸랑 2대만에 망하고 만다. 그러나 우리는 수양제를 욕만 해서는 안된다.


수양제는 분명히 폭군이지만, 멍청한 임금은 아니었다. 그가 한 일이 나쁘기만은 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을 무지막지 부려먹었던 운하공사를 보자. 대운하는 진시황의 만리장성과는 전혀 다르다. 만리장성은 지금이야 관광자원이 되어서 이민족들의 돈을 긁어 모으는 곳이며, 중화민족의 상징이니 머니 하고 있지만, 역대 대대로 만리장성이 제대로 북방민족을 막았던 적은 사실상 없다. 돈과 인력은 무지막지 투자를 해놓고 정작 방어능력은 제로에 가까웠던 것이다. 스타크레프트로 비유를 하면, 열심히 벙커를 지었지만, 정작 미사일터렛을 만들지 않아서 다크템플러가 은신해서 유유히 들어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러나 대운하는 전혀 다르다. 중국의 지형을 보면 대부분의 강들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그래서 강을 이용하면 동서간의 교류가 쉽게 일어날 수 있다. 문제는 남북간의 교류이다. 열심히 말을 타고 다각다각다각 갈 수밖에 없다. 머? 그냥 말타고 교류하면 안되냐고?

말을 타거나 짐마차를 끌고서 가지고 갈 수 있는 양은 매우 적다. 당신은 어디 이사갈 때 맨 몸으로 터덜터덜 가는가? 가구부터 시작해서 온갖 물품을 챙겨서 가야되는데, 육지로 이것들을 옮기려면 죽어나간다. 그런데 배로는 매우 쉽다. 특히 당시에 핵심적인 세금이었던 양식인 "쌀"은 부피도 부피지만, 무게가 어마어마한 것이다. 배를 통해서 운반하지 않으면 죽어난다. 못 믿겠으면 쌀 한가마를 지고 100KM만 가봐라[각주:2].


문제는 수양제가 돈지랄을 너무 했다는 것이다. 10권짜리 장편 소설을 쓴다고 보자. 그럼 자료수집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서도 이런저런 구상과 수정에 몇 달은 충분히 걸린다. 그런데 이런 장편소설을 일주일만에 써내라고 한 것이다. 아무리 1억을 준다고 해도 하면 미쳐버리거나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수양제가 딱 이꼬라지 였다.

수양제는 제위를 하고 나서 고구려을 3번 원정해서 대패하고, 수도를 옮기고, 법령을 강화하는 등등등 온갖 일들을 다 벌리고 다닌다. 문화사업이라던지 풍류따위는 즐기지 않는다. 과연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멍청한 상관이 아니고, 멍청하고 부지런한 상관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3차례의 고구려 공격을 보자. 고구려는 중국 동북의 지방정권이다[각주:3]. 지금 북한의 북부에 있었다. 이녀석은 700년동안이나 계속 반항하였는데, 처음 300년은 지금의 길림(吉林)에 있었고, 그 다음 300년은 평양(平壤)에 있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고구려를 중국의 정권이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한국의 정권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 됐고, 어찌되었든 한국인은 머든 뻇는다.[각주:4]

수양제의 3차 고구려 공격에 100여만의 대군을 투입했지만, 딸랑 2700명만이 돌아왔다. 고구려가 수나라를 상대한 전략은 러시아가 나폴레옹과 히틀러를 상대한 전략이었다. 하늘은 드럽게 많고, 땅은 넓은데 다 귀찮고 그냥 튀어!!!! 땅을 뻇으려면 뻇어라~~ 나는 튀련다의 정신으로 겨울까지 계속 후퇴만 한다. 승리의 기분도 처음뿐이지. 몇 달 동안 계속 걷기만 하고, 점점 겨울을 다가와서 추워지는데, 고향에 놔두고온 설미는 보고 싶고......근데 왜 이리 졸리지.....

이렇게 알아서 얼어 죽어주는 거다.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이제 쫒아가면서 사뿐히 즈려밟아주면 되는 것이다. 열받은 수양제이지만 나름 황제가 아니었던가? 육군만으로 안되면 수군까지 동원해주지! 그래서 쌈 싸먹겠다의 작전으로 나간다.

그러나 이때쯤 되면 말도 안되는 짓거리들에 동원된 백성들의 분노로 의한 봉기가 온갖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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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내가 처음부터 쓸까...-_- 이미 원문과는 상당한 거리가........
아무리 의역이라지만...이래도 되는걸까나;;;; 뼈대야 그대로 가고 있다만....



  1. 정확하게는 만리장성을 만든 것이 아니라, 진시황이 밟아 버린 나라들의 장성(연나라, 조나라등)과 자신의 장성을 이어서 만든 것이 만리장성이다. 한마디로 새로 만든게 아니라 좀 대규모의 보수공사라는 거... [본문으로]
  2. 한반도는 전혀 다르다. 한반도는 3면이 바다이다. 초등학생도 알 이 상식을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대운하 필요 없다. 그냥 바다을 통해도 전국 어디든지 간다. 그런데 굳이 대운하 삽질을 하시겠다는 그 분은....후.... [본문으로]
  3. 본인의 생각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원문 그대로 하였다. 이에 대해서 많은 생각이 있으시겠지만, 본인에게 어쩌고 저쩌고 하지 마라. 본인도 지방정권이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어떻게 공부하는지 알아두라고 그대로 번역한다. [본문으로]
  4. 다시 말하지만 원문 그대로 번역했다. -_-;; 하지만 이것이 유머로서 작용을 한다는 것은 중국을 분석하고자 하는 분들은 유심해서 볼 부분이다. [본문으로]
  1. 니말 2009.09.18 00:47

    글을 보니 만리장성이 제대로 북방민족을 막을 방어능력이 거의 제로라고 나오는데요...
    정말 만리장성이 쓸모가 없었나요???

    오삼계가 청나라 막고 있을 때는 나름 기능을 한 거 같은데요...

    • Favicon of https://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바로 2009.09.18 01:21 신고

      그 결론도 아시리라 봅니다. 오삼계는 청나라에게 길을 양보해주게 됩니다. 그리고 청나라는 중원을 장악하게 됩니다.

      사실 만리장성은 하나의 거대한 울타리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블로그 어딘가에 전에 작성해둔적이 있는데 지금은 찾기 귀찮군요^^::: 간단히 말해서 초기 최고의 전쟁 무기는 말을 사육하기 위한 방목장을 만들기 위함이었다고 생각되는 설이 있고, 전 그것을 지지합니다.

      진시황 이후로 생각을 해보아도 흉노를 막지 못하였고, 위진남북조도 그렇고, 오호십육국도 그렇고....요, 금, 원 중에서 하나도 못 막았고, 명나라가 들어와서도 원에 계속 괴로웠고, 결국 청까지;;;; 제대로 막은 경우가 거의 없군요.

      군사전략으로 생각해보아도, 선을 수비하는 것과 점을 공격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간단하게 나오는 결론이라고 봅니다. 만리장성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긴 띠를 이루어야되는데, 말을 타고 빠르게 한 점으로 공격을 집중시키면 무너트리는 거야 식은 죽 먹기죠^^

    • Favicon of http://www.xingxingchina.com BlogIcon 싱싱차이나 2009.09.18 01:36

      장성 자체가 거점 방어 기지로 제구실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은 아니죠.

      아마 중원 왕조들의 북방 민족에 대한 방어개념은 종심방어 개념이 아니라 긴 장성을 이용, 영토구분, 기마대의 기동력 둔화에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몽골의 칭기즈칸만 하더라도 팔달령 장성을 직접 공격하기 보다는 종심공격전술을 구사하지 않습니까? 일단의 병력을 팔달령에 대치시킨 다음 주력병력으로 우회하여 금의 심장부를 때리는^^

      게다가 바로님 말씀대로 무려 수천Km에 달하는 그 긴 구간에 병력을 고루 배치해 송곳처럼 찔러오는 북방 기마부대를 막는 것은 사실 너무나 비현실적이죠^^ㅋㅋ

      오삼계 같은 경우는 항복하지 않았다고 해서 당시 청나라가 그리 힘들었을 거라고 보여지지 않습니다. 그때까지 청나라의 입관을 저지한건 오삼계가 아니라 원숭환이었고 누르하치가 고집스럽게 종심공격 전략이 아닌 원숭환의 영원성 공격에 매달린 점 때문이니까요.^^

      제가 너무 단정적으로 쓴 것 같은데 제 개인적 생각입니다.^_^;;

  2. 이사람 2009.09.18 13:08

    역시 짱깨들은 고구려를 중국사라고 배우는구나 단군도 중국인이지 중국인들의 인식은 ㅋㅋㅋ 여기쥔장이 말했었지 중국인은 고구려를 중국사라고 대부분생각하지 않는다고 ㅋㅋㅋ

제 3절 : 영웅 아버지와 병신 아들
2. 영웅 아버지와 병신 아들

* 모범 근로자 수문제(隋文帝)

수문제의 위대한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중국 역사상의 황제들은 대부분 수 많은 첩들에게 둘러쌓여 있었지요.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수는 천왕(天王) 홍수전(洪秀全)이 아닐까 싶습니다. 백 명이 넘어서 이름이 아닌 번호만이 있었다고 하지요. 오늘은 001번에서 007번까지~ 내일은 230번부터 250번까지~[각주:1] 이런 복이 넘쳐흐르는 황제들 중에서 오직 2명의 황제만이 첩이 없었답니다. 바로 수문제(隋文帝)와 명효종(明孝宗)이죠.


명효종은 그가 태자였을 때부터 장황후와 사이가 매우 좋았습니다. 그래서 즉위를 하고서는 첩을 받지 않았던 것이지요[각주:2]. 그에 비해서 수문제가 첩들이 없었던 이유는 그가 너무 바빴기 때문입니다. 일벌래의 극치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언제나 정사를 생각하고, 매일매일 조회에 참석하거나 날을 세우고는 하였다" 만약 드라마에서처럼 황제가 매일 매일 조회에 참석한다면 아마 과로사를 할 것이 분명합니다.

매우 근면했다는 청나라 황제들도 10일에 한번씩만 조회를 했을 뿐입니다. 물론 황제에게는 매일 매일 처리해야될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군기대신(军机大臣)을 만나서 처리하였지요. 군기대신을 만나는 것은 지금으로 따지면 선생님이 학급반장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매일 매일 학급회의를 할 수는 없으니 일주일에 한번씩만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선생님은 학급반장을 만나서 일처리를 부탁하고 중요한 일들을 전달 받는 것이지요.

청나라때 조정의 조회는 궁전안에서 한 것이 아닙니다. 수 많은 대신을 궁전 안에 들여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궁전이 아닌 건청문(乾清门)과 어문(御门)에서 조회를 했습니다.  황제야 건청문의 굴 속에서 앉아 있으면 되지만, 대신들은 영하 30도의 추위에도 광장에서 대기를 해야했지요. 황제야 추우면 손난로나 모피를 입어서 곰탱이 같았고, 영상 30도의 더위에서는 햇빛 가리개와 부채가 동원이 되었지요.

사극을 보고 있으면 대신들이 궁전 안에 들어와서 조회를 합니다. 청나라 황제들의 정사는 모두가 양심전(养心殿)에서 이루어지는데, 그 좁은 장소에는 몇 명밖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잘해봐야 몇 명이 되지 않는 군기대신들이나 들어올 수 있었지요. 그래서 건륭(乾隆), 용정(雍正), 강희(康熙)들의 영명한 군주라는 사람들은 매일 매일 조회를 보고, 매일 밤샘을 하면서 조정의 일들을 처리하였지요. 또한 책을 보다가 밤을 새는 것도 부지기수이고, 그러면서도 다음날 곧장 조회를 보고는 했습니다. 참 대단하죠?


보통 황제가 조회에 나오는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빠릅니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았던, 4시면 기상을 하고는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컴퓨터도 없었고, 클럽도 없었습니다. 그냥 어두워지면 잤으니 저녁 8시 반이나 9시면 잠을 잤기 때문이지요. 황제 역시 해가 뜨면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쉬었습니다. 새벽 4~5시면 어둠을 헤지고 조회에 참석을 하여서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시간까지, 하루 종일 일처리를 했습니다.


"오품이상은 부름을 받으면 국정에 대해서 논하여야 한다. 五品以上,引之论事" 다시 말해서 오품 이상의 관직을 가지고 있는 자는 황제가 부르면 달려와서 국정에 대해서 의견을 발표해야된다는 소리입니다. 청나라에서는 4품 이상만이 황제를 볼 수 잇었습니다. 당시 중앙정부의 관원은 모두가 4품이상이었고, 지방에 있는 사람은 3품 이상이어야지만 황제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5품의 지부(知府)와 같은 지방관리는 황제를 못 만나는 것이지요. 3품의 보정사(布政司)나 안찰사(按察司)급은 되야지 만날 수 잇었습니다. 그런데 수문제는 그 당시 오품이상의 사람들을 불러서 국정에 대해서 논하게 하였습니다. 아마 청나라의 저글링때와 같은 관원숫자보다 적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당직을 서는 사람들과 같이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宿卫之士,传餐而食" 수문제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밥을 먹었습니다. 보통 황제들은 밥을 무조건 혼자 먹습니다. 절대 다른 사람과 같이 먹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밥 먹는 틈에 독살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오늘 황제가 황후를 불러서 같이 저녁을 먹는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 둘은 결코 같은 방에서 먹지 않습니다. 황제가 건청궁 서원각(乾清宫西暖阁)에 있다면 황후는 동원각(东暖阁)에 있게 됩니다. 이럴 때 만약 황제가 개고기찜을 먹고 맛있다고 생각되면, 황후에게 한 그릇을 보냅니다. 황후는 토 쏠리는 것 같아도 황제의 성은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고기 자체를 먹고 싶지 않아도 황제폐하의 성은에 감동의 도가니가 되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수문제는 여러 사람들과 같은 자리에서 같이 먹었습니다. 이 얼마나 효율을 중요시 하는 사람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수문제의 황후인 독고(独孤)씨도 역시 현명하다고 칭송되는데, 그를 더욱 더 열심히 일하도록 계속 기운을 북돋아 줍니다.


이런 수문제의 모습은 극도로 부패했던 남조의 진(陈)나라와 비교하면 더욱 놀랍습니다. 진나라의 군주 진숙보(陈叔宝)는 중국의 역사상 유명한 망국의 군주입니다. 당대의 유명한 시인 두목(杜牧)의 박진회(泊秦淮[각주:3])에서 나오는 후정화(后庭花)가 바로 진숙보가 즐겨 부르던 노래로 망국의 노래로 등극하였습니다.

수나라 군대가 진나라의 황궁으로 돌입할 때, 진숙보는 우물에 몸을 숨깁니다. 수나라 병사들은 그를 찾다가 우물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서는 말합니다. "지금 당장 안나오면 돌을 던지겠다고" 그러자 안쪽에서 "던지지 마요. 던지지 마. 우리 좀 끌어올려줘요." 그들을 끌어올리자 진숙보와 황후 그리고 귀비까지 3명이 엉켜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양광(杨广)이 그 귀비를 보고서는 자신이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수군의 대자 한금호(韩擒虎" "이년 때문에 진나라가 망한거야. 근데 이 년을 원한다고?" 단칼에 양광을 두동강 내버립니다. 괜히 여자 밝히다 죽은 양광에게 애도를....


수나라는 진나라를 명말시킨 이후에 공사를 시작합니다.

1. 장안과 낙양을 재건합니다.
수문제는 장안에 대흥성(大兴城)을 만들고, 수양제(隋炀帝)는 낙양에 동쪽 수도를 만듭니다. 이 둘을 합쳐서 양경(두 수도 两京)라고 하고, 서쪽 수도는 장안이며, 동쪽 수도는 낙양입니다.

2. 전국에 창고를 건설합니다.
이 창고가 무식했냐면은 수나라의 한 양식창고는 함가창(含嘉仓)이라고 불리는데, 고고학자들이 이 함가창을 발굴하면서 대략적인 통계를 내었습니다. 함가창에는 총 259개의 식량 저장고가  있었는데, 한 저장고 안에서 이미 탄화된 곡식 약 300만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런 식량저장고가 259개가 있으니 얼마나 무식하게 곡식을 쌓아놓았는지 아시리라 봅니다. 그리고 이것이 끝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함가창 말고도 낙구창(洛口仓)이니 경낙창(京洛仓)등과 같은 곳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수나라의 양식 비축량은 무시무시할 정도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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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백제 의자왕의 3000궁녀가 있지요. 하지만 해당 이야기는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조에 실려 있고 정확한 숫자는 없습니다. 이후 조선 초의 문신 김흔(金訢)이 〈낙화암〉이란 시에서 “삼천의 가무 모래에 몸을 맡겨 / 꽃 지고 옥 부서지듯 물 따라 가버렸네(三千歌舞委沙塵 / 紅殘玉碎隨水逝)”라고 읊은 것이 “3천”이라는 수효에 대한 첫 언급이니 실제로 3000명은 아닐것입니다. [본문으로]
  2. 사실 황제에게는 첩을 받아야되는 "의무"가 있습니다. 황제는 그 자손을 번창시켜야되는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3. 烟笼寒水月笼沙,夜泊秦淮近酒家,商女不知亡国恨,隔江犹唱后庭花; 중국인들에게는 워낙 유명한 것인데 한국인들에게는 좀 어색할듯 합니다. 두목이 당 말기 귀족들의 퇴폐적인 모습을 비판한 시입니다. [본문으로]
  1. 시골 2009.09.11 02:24

    원칙을 만들고, 실행권한이임하고, 부지런히 체크하며..
    그리고, 자기만이 할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한다... ^^

그리고 북쪽에서 남쪽을 치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중국고대의 모든 통일전쟁은 거의 대부분이 북방에 의한 남방통일이었다. 오직 명태조(明太祖)의 북벌만이 예외일 뿐이고, 이것 역시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 결과 몽골 원나라의 잔존세력을 소멸할 수가 없었고, 이후 명나라 역사에서 계속 골치거리로 남아 있게 되었다. 칭기즈칸의 자손들은 황태극(皇太极)에 의해서 마지막 몽골제국의 황제인 임단칸(林丹汗)이 패배하기 전까지 계속 칸의 자리에 있었다.

칭기즈칸에서 임단칸까지 482년, 35대의 칸을 배출하여 사실상 명나라와 계속 대치 상태에 있었고, 훗날 청나라가 된 후금(后金)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명조는 결국 원나라의 잔존세력을 멸망시키지 못한 것이다.

중국근대의 해방전쟁(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간의 전쟁)에서도 북쪽에서 시작하여 송화강(松花江)에서 해남도(海南岛)로 계속 내려오는 도강전투(渡江战役)를 생각해볼 수 있다. 역사상의 중국통일전쟁은 모두가 북에서 남으로 내려왔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 것이다.


이는 고대에는 북방의 경제가 발달하여서 남쪽의 야만인(남만 南蛮)을 공격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훗날 남쪽도 발전을 하게 되지만, 북방인들은 기마에 능하고, 전쟁수행능력이 뛰어난 반면에, 남방인들은 유들유들한 학자분위기였기에 승패는 거의 정해져 있었다. 또한 남방의 지형은 구릉지형[각주:1]으로서 쉽게 서로 간에 분리되어 독립하기 쉬웠다. 그에 비해서 북방의 지형은 평원으로서 쉽게 통일 될 수 있었고, 통일이 된 이후에는 내부을 결집하여 외부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렇게 북쪽에서 남쪽으로 공격하는 것이 쉬웠기에 수나라의 통일은 더욱 더 쉬웠고, 너무나 당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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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분량은 짦다.^^;;; 아싸리~ 아싸~~~~


  1. 남방의 지형은 한국의 산이 많은 지형이다. 그래서 산으로 숨어들어서 방어에 주력하면, 상대방을 공략할 수는 없지만, 방어를 하면서 스스로를 유지해갈 수는 있었다. [본문으로]
  1. 중국사는 장난감이다 2009.09.07 19:41

    그러고 보면 중국사는 대부분 북방 이민족에 의해 정복당한 역사군요. 그런 의미에서 '중국사는 장난감이다' 라고 하는 부분이 마음에 잘 와닿네요.

    • Favicon of https://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바로 2009.09.07 21:07 신고

      그런 의미에서의 장난감이 아닙니다. 장난감처럼 쉽게 다가가는 의미에서의 장난감입니다. 제 본문에 보면 "중국사는 장난감이다"에 대한 설명을 적어놓은 링크가 있습니다.

      제 글을 자세히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http://www.ddokbaro.com/2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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