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논문주제보고를 위해서 삽질중입니다. 저의 능력의 한계와 끊임없는 욕심들의 파도에 휘말려서 어디론가 표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패턴도 참 아름답게 변해버렸습니다.

8시 기상 및 식사. 9시 공부. 11시 운동 및 샤워. 12시 공부. 2시 식사. 다시 공부. 8시 식사. 다시 공부. 11시 식사. 다시 공부. 2시 취침.

상당히 아름다운 삶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공부만 죽도록 하니 미친 것이냐고요? 그것보다는 맨 처음 기상하는 8시가 저녁 8시인겁니다. 남들과는 정확하게 정 반대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것도 정확하게 12시간을 말이죠.

사실 전 밤에 집중이 안되는 스타일이기에 어쩔 수 없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런 생활은 폐인과 다를 바가 없기에, 20일에는 저녁까지 밤샘을 계획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녁 6시쯤에 너무 피곤해서 자버렸지만 말이죠. 그래도 나름 아침까지 잠들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잠들기 전에 든든하게 밥도 먹었고 말이죠.(음....잠자는 것이 무슨 운동도 아니고-_)

그러나!! 7시 43분. 한국에서 A의 전화. 9시 25분 다시 한국에서 B의 전화.
11시 24분. 인터넷에 들어오라는 어떤 분의 연락을 받은 중국에 있는 녀석의 전화.

위의 저 사람들이 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다들 나름 복잡한 용건이었다면? 사실 가장 큰 문제는 그 피곤한 와중에도 과거 어떤 누님 덕분에 길들여진 습관으로 순간 정신을 번쩍 차리고 전화를 받고, 용건 처리 후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는 것이다.


점차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지금! 울음이 나올 것만 같다.
역시 나는 낮의 세계와는 인연이 없는 것 같다.
밤의 나라 아그들아. 역시 나는 너희들을 떠날 수 없는가봐.ㅠㅠ



덧 : 논문주제보고서 진행사항.
참고서적목록 완성. 목차완성. 연구목적완성. 연구방법완성. 한반도쪽 연구성과...일단 완성(사실 한줄로 소그드 연구는 개뿔! 이라고 하고 싶었다. 한반도에 소그드가 도래했을 것이라고 정확하게 꼭 집어 쓴 논문 제로. 서역인과 소그드를 구별하고 있지도 않다. 동북쪽도 한국학계의 논문은 제로. 일본과 중국학자의 발해쪽 시론정도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한반도쪽은 억지로 서역교류쪽까지 밀어넣어서 써버렸다. 개인적으로는 역시나 다 지워버리고 개뿔도 없다라고 하고 싶다. )

 이제 가장 쉽고도 어려운 기존의 전체 소그드 연구정리만 하면 끝...이지만...어차피 본인 스스로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시 다 뜯어 고치고 어쩌고 하면서 다음주에나 완성되려나. (사실 논문주제보고서만 쓰는것도 아니고, 관련 사료도 계속 폭식하고 있다. 욕심을 버려야돼!!)


邑落有豪民民下户皆為奴僕(宋本-殿本)
邑落有豪民名下户皆為奴僕(汲古阁本)
(《三国志》卷30 魏书30 列传30 东夷传 扶余条)

위의 내용은 부여의 지배구조를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로 사용되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표점을 찍을 것인가인데, 개인적인 의견을 밝혀본다.

기존의 학설은 王-诸加-豪民-民=下户-奴僕로 파악한다. 하지만 이는 皆為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싶다. 皆為은 "앞의 사항이 모두 뒤와 같다"라는 의미로서 민이나 하호를 모두 노예로 파악해야 정확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 박경철은 당시의 자유민으로서의 민의 존재여부를 고도의 군사수행능력과 소정의 외교-행정능력은 물론 사법제도까지 운용하고 있는 국가로서 엄존하고 있었다는 이유로서 민의 존재여부를 강조한다. 그래서..

邑落有豪民, 民, 下户皆為奴僕

본인은 박경철의 견해에 대해서 심히 의문스럽다. 왜냐하면 이 역시 皆為와 연관시켜 보면 이상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皆為은 "앞의 다양한 항목들을" 통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철이와 순이는 모두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나는 모두 사람"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은 어디까지나 단수이고 복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인은 송호정의 의견이 더욱 사실에 근접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송호정은

汲古阁本판은 취해서 邑落有豪民, 名下户皆為奴僕 로 분석한다. 개인적으로 民은 어디까지나 名의 오기가 아닐까 생각된다.(이에 대해서는 차후 더욱 구체적으로 봐야겠지만.....名인 편이 더욱 문법에 맞는다고 할까?;;; 느낌;;;)

만약 이와 같을 시 박경철이 제시하는 부여 5만병력설을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 사실 간단하다고 본다. 비록 당시의 노예들은 어디까지나 전쟁지원만을 하였지만, 군대병력수는 때로는 전쟁지원분야의 병력까지 포함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의 사료에서의 병력은 쉽게 부풀려지거나 축소되고는 하기 때문이다.

또한 오영찬이 고고학적인 논증을 통하여 위의 사항을 논증하였으니 만큼 개인적으로 비록 부여전시기에 걸쳐서 송호정의 식대로의 분석이 효과적일지는 일말의 의심을 남겨둘 수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王-(诸加)-豪民-民=下户=奴僕 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나 싶다.



"他钵可汗의 불교 도입에 대해서"는 唐代九姓胡与突厥文化(蔡鸿生 中华书局 p147)에 나오는 글에 의문이 들어서 작성한 글이다. 木杆可汗의 동생인 他钵可汗(572-581)은 불교를 도입했다. 하지만 1기 투르크제국에서는 불교를 받아들인 다른 칸은 없었다. 그렇다면 他钵可汗은 어째서 불교를 받아들였을까?


우선 불교를 비롯한 종교의 전파는 두가지의 경우로 나눌 수 있다. 민간에 먼저 유포가 되고, 그 세력이 일정정도 이상이 되었을 때 압력을 받은 지도자가 해당 종교를 수용하는 경우이다. 기독교의 로마에서의 발전양상이 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지도자가 해당 종교를 "현실적 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런 종교가 지도자의 비호아래서 점차 민간에 유행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백제에서의 불교유입을 생각하면 비슷하다.

그렇다면 他钵可汗의 경우는 어떤 경우라고 판단해야될까? 他钵可汗이후에 해당 종교가 민간에 지속적으로 유지가 되는지 아닌지를 알아보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他钵可汗사후 불교는 순식간에 사멸한 것은 他钵可汗 개인적으로 해당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해석해야될 것이다.


문제는 他钵可汗은 왜 불교를 수용했을까? 蔡鸿生은 이에 대해서 부국강병을 원했던 他钵可汗와 불교를 받아들이므로서 突厥가 약화되기를 원했던 北齐왕의 현실적인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으로 해석한다. 북제와의 생각은 현실과 매우 비슷할 것이다. 그가 투르크에 전달한 열반경(涅磐经)의 내용을 보아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다. 문제는 他钵可汗의 입장이다.

지도자는 바보가 아니다. 단지 불교를 받아들이면 부국강병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믿는건 어떤 현실적인 근거도 없다. 분명히 일정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오래동안 투르크 세계의 주류 종교인 샤마니즘도 부국강병을 이룩할 수 있다고 말하는 점에서는 동일하기 떄문이다.


혹시 他钵可汗은 투르크의 전통종교인 샤마니즘의 사제집단과의 일정한 충돌을 하였고, 불교를 이용하여 이러한 사제집단과의 알력싸움을 할 생각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는 이러한 알력싸움에서 패하게 되고(9년의 짦은 통치), 그의 뒤를 잇는 沙钵略可汗은 오히려 "从天生"이라는 샤머니즘적인 가치를 더욱 강조했던 것이 아닐까?




추가적인 사료 조사가 필요한 점

1) 他钵可汗의 사망이유

2) 他钵可汗과 샤만집단간의 충돌에 대한 증명사료

3) 他钵可汗 계승에 대한 문제가 없었나?





해당 사건은 1) 이미 정혼자가 다른 남자에게 갈 수 없고. 2) 상중에 결혼을 할 수 없으며 3) 관리가 사건과 관련된 사람과 결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3)이었고, 이것이 가장 무거운 형벌이었다. 그러므로 해당 사건은 服内가 가장 큰 관건이었다.

 

의문 : 그런데 해당 사건의 관련자들은 몽고인으로 보이는데, 역시 상중에 결혼 할수 없었던 것인가? 물론 이름만 가지고 몽고인이라고 판단하기는 어려운 문제이긴 하다. 하지만 만약 몽고인이라고 가정한다면, 상중에 결혼하지 못하는 조항이 몽고인에게도 적용이 되었다고 가정한다면 몽고쪽에서도 해당 풍습이 있었다고 예측할 수 있다.

 

몽고인의 풍습중에 상중에 결혼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가? 할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수계혼이 성립하지 않는다. 아...어떻게 증명할가 머리 굴린 내가 바보다. 젠장-_ 깨닭고서 난 바보다라고 외쳐본다!!

 

    《三国志·乌桓鲜卑东夷传》注引《魏书》)而“父兄死,妻后母、执嫂;若无执嫂者,则己子以亲之次妻伯叔焉。死则归其故夫。”수계혼에 대한 자료

 

1) 해당 사례의 인물이 몽고인이라는 것을 입증(당연히 몽고인이 아니다.)

元史類編卷九 (文宗) 許蒙古色目人居喪守制 이 조항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문종정도에 몽고인이 많이 한화가 되었고, 수계혼도 안하고, 상중결혼도 안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법률적으로 구속하지는 않았던듯...

다른 사례

張大榮 - 居喪成親 도 역시 상중결혼이 문제가 된다. 당연히 몽고인이 아니다.

 

元典章 禮部
【禁治居喪飲宴】延祐元年七月十二日承奉江浙

行省剳付準中書省咨御史臺呈淮江南諸道行御史

臺咨備監察御史王奉訓呈伏以父母之喪三年天下

之通喪也死歛葬莫不有禮禮曰披髮徒跣居於倚

廬讓枕塊哭泣於世時□粥朝一溢米夕一溢米又曰

始死充於有窮既殯瞿瞿如有求而弗得既葬皇皇如

有望而弗至經曰食旨不甘聞樂不樂此孝子哀慼之

情既歛既葬以其時期而小祥又期大祥三年禫

霜露既降春雨既濡懷愴怵惕如將見之此子終身所

不忘豈拘於三年哉去吉日遠風俗日薄近年以來江

南尤甚父母之喪小歛未畢茹█飲酒略无顧忌至于

送殯管絃歌舞導引循柩焚葬之際張筵排宴不醉不

已泣血未乾享樂如此昊天之報其安在哉㒷言及此誠

可哀憫若不禁約深為未宜莫若今後除蒙古色目合

從本俗其餘人等居喪送殯不得飲宴動樂違者諸人

首告得實示衆斷罪所在官司申禁不嚴罪亦及之不

惟人子所有懲勤抑亦風俗少復淳古宜從憲臺剳付

各道禁治相應具呈照詳得此本臺看詳國家以風俗

為本人道以忠孝為先可以移忠可以事上忠孝既立

則人道修而風俗厚為治之至要也三年之喪古今通

制送終營葬人子大故車芻靈禮亦有之至若忘哀

作樂張筵群飲敗禮傷俗宜從合干部分定擬通行禁

止相應咨請照詳準此具呈照詳得此送據禮部呈

詳父母之恩昊天罔極終身而不能報聖人定立中制

以為三年之喪送終葬當盡其禮若居喪飲宴殯葬

又動樂聲實傷風化如準御史臺所言除古色目人

各從本俗外其餘人等禁治相應得此送禮部行移刑

部議擬去後今據禮部呈移準刑部關議得父母之喪

至於哀慼其居喪飲宴殯葬用樂皆非孝道除蒙古邑

目宜從本俗余並禁止敢有·    違犯治罪相

應關請照驗準此本部參詳如準刑部所擬遍行照會

相應具呈照詳都省咨請依上施行

해당 사료는 직접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상중에 술마시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에서 몽고족과 색목인은 제외된다. 다시 말해서 몽고족과 색목인은 전혀 다른 사상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추측하면 샤머니즘으로 인하여 부모님이 천당에 간다는 것 정도? 라마교의 혼례 사상에 대한 조사가 더 필요.

 

2) 다른 법률 조항에서 해당 사항이 있는지 조사 및 검토

元典章 刑部卷
【居喪為嫁娶者徒】至元七年十二月尚書户部契

勘父母之喪終身戚夫為婦天尚無再醮今隨処節

次申到有於父母及夫喪制中往往成婚致使詞訟繁

冗為无定例難便歸斷檢會到舊例居父母及夫喪而

嫁娶者徒三年各離之知而共為婚姻者各减三等省

部議得若不明諭禁約引訟不已寔是亂俗敗政以此

詳比及通行定奪以來定立格限渤海漢兒人等擬

自至元八年正月一日為始已前有居父母夫喪内嫁

娶者準已婚為定格後犯者依法斷罪聽離如此庶免

詞訟似望漸厚風俗呈奉尚書省移準中書省咨依準

施行

 

 

3) 몽고 풍습에 관한 고문중에서 상중 결혼에 대한 항목이 있는지 조사 및 검토

(상중에 결혼하는 경우가 있는지를 2차 논증으로 삼고, 최고로 좋은 것은 직접적인 항목!인데 없을듯-_)

 

4) 특히 샤머니즘쪽에서 상중 결혼에 대한 금기가 있는지 조사(이건 몽고뿐만 아니라, 한국, 중국, 일본 및 중앙아시아 각국의 풍습을 검토해봐야하는 짜증나고 힘든 작업이 될듯-_)

    狩猎民族常常因为猎物减少而深感不安,他们只能利用虚幻的巫术幻想去改变这种现状,从而获得某种心理平衡。我们在通古斯人的宗教仪式上看到,人们以象征的方式让内涵动物灵魂的象征物转生为新动物,从而达到增加动物数量,减轻心理负担的目的。萨满教代表动物灵魂并有复生能力的符号包括动物骨头、绒毛、动物眼睛等等。在仪式活动中,人们总是小心地收藏和处理它们,或防其不得转生,或怕它以灵魂力量伤害别人,总之要避免任何过失。在通古斯民族祭祀中,当作祭品的动物,像熊、鹿、猪、羊、鸡等,被吃掉后—它们的骨头一块也不能少地被收拢在一起,或风葬、或埋葬。安葬动物仪式的要求十分严格。兽骨安葬与野兽繁衍的关系密切,它的完好与否,涉及动物的绵延状况。这些内涵动物转生灵魂的兽骨、兽毛、兽皮、禽毛,象征他有许多动物神灵给予保护和辅助。在萨满经验中,由于魂骨被视作生命的再生之源,“归魂于骨”成为萨满法术中追求的主要目标。有的民族萨满死后要风葬,风化后捧拾其骨存放在小桦篓内,视为神灵。

 

在萨满教的古老信仰中,人们普遍畏惧死亡,不敢面对生命有限的现实。特别是当氏族部落重要人物去世之时,这个社会群体的常态生活面临着动摇和威胁。就是这时,氏族的丧葬仪式作为缓解人们精神危机的手段,及时地向人们传达出灵魂不死观念、灵魂再生的观念、以及重要人物的灵魂作为氏族祖先守护神的观念,于是给大家带来了某种超人间力量方面的信念和信心,从而减轻了内心的哀伤和社会的不安。关于氏族丧葬仪式,特别是萨满的丧葬仪式,在通古斯各个民族中普遍流行,成为氏族宗教仪式的重要种类。如鄂温克族的“尚德”仪式,满族的氏族萨满亡灵祭祀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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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国通古斯语族民族的萨满教特点

孟慧英

 

七)丧上一词下一词与禁忌
    (白马)藏族的丧葬有火葬、土葬、悬棺葬、水葬等四种。
    1.西姜(zhugs sbyang)即火葬。据调查,文县白马河流域的(白马)藏族在清雍正以前均实行火葬。人死后,用绳子绑成屈膝蹲坐式,形似胎儿状,放进立式棺材内。请苯教巫师或阴阳先生择好出殡日期。死者在堂屋里停放几日, 主要以季节来定。(白马)藏区海拔在1500米~2500米之间,气候相对温和,夏秋死人在家不宜停放过长,冬春则可以适当长一些,一般在1~10天不等。40 岁以下男女病死或暴死后,尸体均不能抬进家门, 而在村头选一平地,将死者放进立式棺木内。富者从南坪上塘黑河、白河或平武等地请喇嘛或苯波巫师念经,贫者则请阴阳先生或道拜念经超度。出殡之日,亲戚及村中小伙子将棺木抬到火上一词下一词场,一路上锣鼓钹钗伴奏,死者家属哭声不断。妇女们中途返回。到了火葬场后,将棺木放在堆好的干薪上,苯波巫师或喇嘛或道拜或阴阳先生主持仪式。从棺顶点火。青烟直上云天,表示死者亡灵顺利升天;烟子不正、四处飘荡,表示亡灵未能升天,且游荡在村中,这样火葬结束后还得择吉日请喇嘛或苯波巫师念经超度。
    平武(白马)藏族火葬时间一般选在冬月至次年二月间进行。死者儿子或最亲的晚辈背尸至火葬场。南坪(白马)藏族则只对不满40岁及不正常死亡者施行火葬。火葬结束后,亲属及朋友抬些石头将尸骨围起来,砌成坟墓。平武(白马)藏族还在坟上插印有藏文超度亡灵咒语的布幡,男坟九杆,女坟七杆,以示引魂升天,不要扰乱死者家及村民的生活。
    2.得尔(dur)即土上一词下一词。到了雍正以后,该地实行改土归流, 改穿汉服,学说汉话, 一切照汉族行事,丧葬也开始实行土葬。文县(白马)藏族人死后,立即点上松明、自制的蜡烛和清油灯,然后尽快将死者的头发、胡须剃掉,再用净水将身体洗净,穿上准备好的寿衣。衣服不能少于三件,以绸缎或褐子为主,脚穿靴子。尸体平躺,四肢被捆住,头朝正堂,双脚对门(与当地汉族相反),脸上盖一张白纸。待死者娘家人赶到看过以后,再放入棺内。棺材一般在家停放三至五六天不等。这期间棺盖盖三分之二,留一条大缝,主要用来观察死者能否复活。死者头部的棺板叫“头档”,脚部的棺板称“脚档”。把死者放进棺木后,在脚档外侧摆白面馍头。若死者生前好酒,则将斟满酒的铜壶也置于此。在物品前面点上清油灯。死者亲戚均带一只雄鸡、纸和柏香等前来奔丧。出殡前晚上,所有来的亲戚要召开会议。死者子女要向亲戚们详细汇报死者患病的情况、子女是如何侍候的、死者有什么遗言等,死者的亲戚都要仔细聆听。汇报完后,亲戚代表讲话,总结死者一生的为人和功劳等。若子女生前未敬孝道,娘家人则在地上撒上黄豆或包谷,让子女们跪在上面,接受亲戚们的指教,以示惩罚。解放前不孝子女在丧场挨打也不乏其例,解放后则以批评教育为主。发丧的时辰由苯波巫师或阴阳先生来定,一般都是天不亮就发丧。人们点上火把,锣鼓钹钗伴奏。发丧的路线是约定俗成的。发丧所经过的人家都要在门前用麦麸、乔草点火,经过时各家主人都要站在自家门口。一旦经过,主人马上用脚或木棍捣毁火堆,意为死人将一切晦气都带走了。谁家死人都一样,所以死者家人是不会计较的。妇女中途返回。到了坟地,首先往坟坑里倒些热气腾腾的米汤,在坟坑里烧些纸、柏香,然后再将棺材放入坑内。棺材上面放一排棚木,再用土掩埋,上面栽些松树或柏树。最后用石头砌个坟门以便祭奠时烧纸、点蜡、焚香、富者还要立碑。
    南坪下塘,人死后把死人放进棺材里,抬到避风向阳的窝穴里,待其老伴死后,又将棺材敲锣打鼓抬回来放在堂屋,择好吉日同时发丧埋入墓穴,上一词下一词法同上,位置为男左女右。
    平武的(白马)藏族土葬除尸体仰身平躺埋葬外,还有屈肢土葬。掩埋后垒石成墓堆,有的也兴立碑,用汉字刻上死者的名子、生死日期以及立碑人名等。
    3.曲得尔(chu dur)即水葬。在(白马)藏区, 不满周岁的婴孩夭折后, 婴孩的父亲或母亲将孩子用布包上或装在背篓里,抛入河中,让河水冲走。较大一些的儿童死后,则在避背的水沟里挖一坑,将其埋葬。据说婴孩死后不会成为鬼魂,夭折后就会即刻消失。
    4.项若(phyang ro )即悬棺葬。解放初这种葬法在(白马)藏区还有过,现已不复存在。这一上一词下一词法一般针对死于麻风病和其他传染病者,还有30岁以下的年轻暴死者。棺材简陋,长方形,像火柴盒,因此又称“火匣子”。以上情况的死者,其尸体只能停放在村外几里地的地方。发丧时苯波巫师或阴阳先生要在棺内放小石磨作禳镇,防止死者鬼魂害人。身强力壮的抬尸人先要用柏香熏身,以示瘟疫不再介入,鬼魂不敢缠身,然后将“火匣子”快速抬到事先在土崖上挖好的洞穴中。“火匣子”头部朝西,脚部朝东,右侧裸露在外。悬棺放置处均为向阳的地方。据当地人讲,太阳的暴晒,不仅使尸体很快干枯,而且可杀死传染病菌。在文县铁楼乡入贡山村西三里处还能见到这种悬棺。
    5.泽木恰(vdzem cha)即禁忌:
    (1)不能从神柜前横过。在神柜前结束祭祀活动, 要面对神柜退出。因为神柜是祖先神灵的所在地。
    (2)主人或客人不能从火塘或铁三脚上跨过,必须绕过。 因为火塘是火神、灶神的居住地。
    (3)客人不能随意坐男主人的位置, 除非男主人将位置让于你,否则为不礼貌。
    (4)女人不能在山神庙或土主庙周围随意走动。 否则要保无事,少则3年,多则12年。如在规定期限内出现自然灾害等,村民会责怪你,还要请道拜、苯波巫师或阴阳先生安神,所花费用全由该家承担。
    (5)孕妇不能探望外伤病人,否则病人的伤病会加重, 她也会受人指责的。
    (6)要探望病人,病人家要先在门口撒上柴灰, 以示将邪气挡在门外, 探望者方可入内。
    (7)家人远道回家,家门口撒些柴灰,以示邪气不能带进家门。
    (8)晚上串门,要在门口大声咳一声,否则主人会不高兴, 因为鬼魂才会悄然而至。
    (9)妇女生孩子,任何男人不得入内。
    (10)孕妇不能吃兔肉,否则孩子会成豁口。
    (11)正月初一至初五不能将屋内垃圾及洗脸水倒出,而要将拉圾堆放于门后,将水洒在屋内,意为财不能外流。
    (12)正月初一至初四,不能将馍馍分开,将柴木折断,以示凡事都要完整。
    (13)腊月三十至正月初四,将背篓藏好,否则年内会遇到老虎。
    (14)腊月三十至正月初四,将绳子藏好,否则年内会处处碰到毒蛇。
    (15)在交易牛马等大牲畜时,不能用嘴讨价还价,卖买双方将手放在袖筒内捏指交易,否则牲畜会受到损害。
    (16)跳朝格时,不准入赘者和外族人跳,否则村中不安。
    (白马)藏族丧葬有土葬、火葬、水葬和悬棺葬四种。无论那种葬法,在藏族历史上都是有过的,现今主要为土葬。藏族第一至第七代藏王都是从“登天之绳”升上天空的,因此没有坟墓。天梯斩断后,第八代藏王开始实行土葬,因此土葬在整个藏区是比较普遍的。至于(白马)藏区的土葬与其他藏区土葬的区别,笔者认为主要在于(白马)藏区受相邻汉族的影响,结合了藏汉两个民族的葬法,因而形成了自身丧葬的特点。火葬是藏民族比较考究的一种葬法。像将死者捆绑成胎儿状,广大藏区的作法都一样,意为生死相联,生时何状,死时复此状。这很可能与佛教的轮回理论有关。水葬同样和其他藏区一样,一般是针对婴孩,而悬棺葬在藏区未曾听到。(白马)藏族的悬棺葬与我国南方的悬棺葬是不同的:(白马)藏区的悬棺葬只限于传染病死者和暴死者,所以一座土崖上最多也是一个,悬棺均在向阳的土崖上,最高也仅在四米左右;而南方的悬棺却都在高不可攀的石崖上,并且密密麻麻地放置着,可见这种葬法在当地是很普遍的。为此我认为:南方的悬棺葬很可能与人们希望灵魂早日升天有关,(白马)藏族的悬馆葬却是借助阳光杀掉传染病菌和暴死者的邪气,使活着的人健康快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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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马)藏族信仰习俗现状调查研究

杨冬燕

 

内蒙古阿拉善左旗信仰伊斯兰教的蒙古族穆斯林
王玉霞

    (2)丧葬:蒙古族的传统丧葬方式有土葬、野葬和火葬。土葬即人死后无论老年、壮年或幼童,均赤身装入白布袋里,在家放尸3至7天,诵经焚香。出灵时,尸体由窗户抬出。棺材置于墓穴中,以土埋葬。火葬较为普遍,野葬已不多见。蒙回严格遵守伊斯兰教速葬、土葬、薄葬的原则。当一个人濒危时,请伊玛目念讨白(“忏悔词”)向安拉祈求饶恕其一生的罪孽,家人提念清真言。去世后用清洁的水给尸体净身,用三丈六尺白布裹身,俗称穿“克凡”,当天或第二天埋葬。众人将尸体抬往墓地,由伊玛目带领众人举行殡礼入葬。

 

 

 

라마교 결혼 사상에 대한 조사 필요

 

 

 

중얼중얼 :

...아..내가 천재였으면 해당 자료들을 다 암기해서 따로 조사 안하고 그냥 툭툭 논증할 수 있을터인데--....이걸로 이번 학기 논문을 쓱쓱 할까나.....더 쉬운거 없나 몰라...다른 것이 생각이 안나...아..미치겠네.ㅠㅠ

열심히 쓰려다가 결국 말도 안되는 방향으로 빠져버린 레포트. 누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수 있는 코르치가 샤만킹이라는 사실을 마치 대단한 것마냥(그의 행적, 임명지, 우순노인과의 상관성등) 써놓은 다음에 이미 유명한 샤만킹 쿠쿠추와 비교를 해주고, 베키가 샤만킹의 몽고식 이름이라고 주장해보려고 발악중이다. 레포트를 쓸 때면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 이런 것을 증명해서 머하나라는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사실 위의 내용에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많이 집어넣으면 개인적으로 참 재미있어진다. 하지만 사료로서, 하다 못해서 현대 인류학과 민속학 혹은 종교학으로라도 간접적으로 증명이 안되는 사항을 내 상상대로 넣을 수는 없다. 하지만 추론적으로는 꽤나 그럴듯 하다고 생각된다. 한마디로 누구랑 누구가 사랑을 했을것 같은데, 흑백샤만 혹은 흑백적황샤만과 같은 논란이 되는 분류방법등등... 이런 것을 적으면 소설쓰고 있네라는 소리밖에 못 듣겠지.

 

상상의 나래보다는 어떻게든 관련 사료를 끌어모아서 예쁘게 포장할까 고민중인 바보 역사학도였습다. 크흑..ㅠㅠ

 

 

제 블로그에 자주 오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얼마전에 아버지를 모시고 산동을 갔다 왔고, 13일에는 일본으로 날라가서 3월말에는 오는 관계로 방학내내 천천히 할 수 있는 논문들을 13일 전까지 모두 다 끝내야디는 부담감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포스팅도 잘 못하고 있군요. 오히려 일본을 가면 더 자주 포스팅을 할 것 같은 이 왠지 모르게 짜증나는 예상은 멀까요?;;;

陈寅恪《天师道与海滨地域之关系》《金明馆丛稿初编》三联书店 2001年

陈寅恪(1890—1969),义宁(今修水县)人。清朝著名诗人陈三立的第三个儿子。夫人唐筲,是台湾巡抚唐景崧的孙女,也是一位女教师,从小就能背诵十三经,广泛阅读经、史、哲学典籍。中国现代历史学家、古典文学研究家、语言学家,中央研究院院士,代表作是《柳如是别传》。

중얼중얼 : ...왜 우리집은 어렸을 때부터 십삼경을 외우게 안했을까? 응응? 그때 외우라고 했으면 온갖 반항을 했을 터이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너무나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시간은 없고 고전을 읽을 시간을 없고 말이다. 그래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미래의 내 자식아. 넌 죽었다 -_-;;

 

 

내용 요약 :

1) 天师道는 산동반도 남부의 滨海의 도교에서 유래되었다.

2) 한말부터 남북조까지의 많은 정치 사건들이 天师道종교집단과 연관이 있다.

黄巾起义,赵王伦之废位,孙恩之乱,刘邵之弑逆,魏太武之崇道

3) 남북조의 대표적인 天师道 가문

郎邪王氏,高平郗氏,会稽孔氏,义兴周氏,丹阳许氏,丹阳陶氏,吴兴沈氏

4) 종교와 서법과의 관계

5) 지역과 종교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야기

 

 

관심 내용 :

1)道教起源于燕齐之际

2)于吉,宫崇,张角,张道陵皆为滨海出身。

3)盖二种不同民族之接触,其关于武事之方面者,则多在交通阻塞之点,即山岭险要之地。其关于文化方面者,则多在交通便利之点,即海滨湾港之地。

4)并以见吾国政治革命,其兴起之时往往杂有宗教神秘性质。

 

 

중얼중얼 : 난 정말 천재가 싫다. 그것도 집안 환경으로 완벽하게 자라난 천재는 더 싫다. 그래서 난 천인취에가 싫다. 범재의 천재에 대한 질투는 언제나 이렇게 말도 안된다. 하지만 이것 해보면 어떨까 하면서 다른 자료 보고 있는데, 혹시나 하고 뒤져본 천인취에 논문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의 몇 백배를 뛰어넘는 내용과 고증이 나와버리면 사람이 안 질리고 어떻게 버티겠는가? 나는 단지 이럴 수 도 있지 않을까라고 맘대로 상상한 것을 50년도 전에 완벽하게 고증해 낸 사람. 이른바 大师이라는 사람의 그림자를 벗어나는 것은 무지막지하게 힘들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껴본다. 크흑...논문을 대체 멀 써야되는거야! ㅠㅠ

中国古代史文献阅读与研究(上)
中国古代史文献阅读与研究(下)

宋辽金史研究 张希清
周四7-9 文史110

唐宋妇女史研究  李志生
周三7-9 一教103  与邓小南合上

中国古代官僚等级制度研究  阎步克
周二3-4  二教510

学术规范与论文写作  荣新江
周四11-12  一教202  限70人

日本汉学名著研读   王  铿
周五3-4   一教113

唐代典志研读   王小甫
周二7-9  文史106

古器物与古代社会生活   薄小莹
周二11-12  文史107

 

我打算选个学术规范与论文写作日本汉学名著研读 。总算为15学分,只剩下10学分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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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代文化的发展阶段(고대문화의 발전단계)

把路(바로)


바로의 요약정리
본인이 쓴것을 번역할 생각을 하니, 정말 싫습니다!! 그냥 요약하겠습니다.^^::
이 레포트는 陈来(질래)선생님의 선진철학을 들으면서 작성했습니다. 질래선생님은 고대의 점복술이나 자연숭배, 샤먼등에서 유가가 생겨났다는 논지를 제출하고 있습니다.

김백현교수님의 말에 따르면, 질래라는 사람은 분명히 실력이 있지만, 화사족(华夏族)의 입장에서만 분석하고 있으며, 한국인과는 다르게 샤먼을 모르기 때문에(한국인들이야 무당의 굿판을 자주 보지만, 중국은 그런것이 미신탈피라는 공산주의이념으로 현재 남아있지 않습니다.) 신명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 철학교수님이 한국인이고, 거기에 유가쪽이 아닌 도가쪽이라는 것은 염두에 두시고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나중에 김백현교수님이 시도하고 있는 "신명에 대한 고찰"을 올리도록 하죠.)

이 레포트의 결론은 위에 다 나와있습니다.-_-;;
고대의 샤머니즘(종교)가 어떻게 철학으로 변했느냐라는 것을 설명하며 논증하고 있습니다.^^






바로의 중얼중얼
질래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심히 짜증났던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연구생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마져 없고, 단지 연구만 하던 분이십니다. 그런데 갑자기 본과생을 대상으로 수업을 했으니 수업방식이 너무 엽기적이었습니다. 분명 본인이 쓴 책을 가지고, 토씨하나 안 뺴고 읽고 있는 모습은 저를 경악속으로 빠져들게 했습니다.
.....유명하신 분이라서 일부러 무리해가면서 선택했건만...ㅠㅠ
마침 그 선생님 밑에서 박사를 마친 형님이 중국에 놀러오셨길래 물어보았습니다. 그 선생님 대체 왜 그러냐고!! 딱 한마디 하시더군요. "원.래.그.래." -_-;; 어찌하오리까..ㅠㅠ
疑古与新古的论争

把路


文献资料跟考古学资料之中,更有可靠性是什么?内部者跟外部者之中,更有正确的记述历是任方?中古史学当中的很多古书可不可以可靠呢?《史记》《左传》《诗经》可不可以当作历史研究的材料?通过疑古跟新古的论争,探讨上述的几个问题。

의고와 신고의 논쟁

바로(다시 말하지만 본명 맞습니다.-_-;;)

문헌자료와 고고학자료중에서 어느것이 더 근거로서 유용한가? 내부자와 외부자중에서 어느쪽이 역사서술에서 정확할까? 중국고대사의 수 많은 고서들은 근거로서 충분한가? <사기><좌전><시경>등은 역사역구의 재료가 될수 있는가? 의고와 신고의 논쟁을 통해서 생각해보도록 하자.









바로의 중얼중얼
2000자도 안되는 1시간만에 다 적어버린 심심파적식 레포트였습니다. 그리 큰 내용은 없습니다. 단지, 지금 현재 중국의 사학계의 학풍이 조금 무서워서, 그들이 문화패권주의로 나아가기 때문에, 그것을 경계하고 싶은 마음에서 적어내려간 것입니다^^
(볼 사람도 없는 이딴 글은 왜 올리는거야!!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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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경고하겠습니다.
절대 가치가 없는 논문입니다.



왜냐하면-_ 제가 쓴것이기 때문이죠.정확하게 말하면 여기저기서 배껴서 조합했다는 말이 더 어울릴거 같군요. 지금은 모두가 다 아는 조공책봉관계의 실제성질에 관해서 적은 것 입니다. 중국쪽 논문에는 그런것이 없어서 거의 대부분을 한국, 일본쪽에서 건져왔습니다.

거기에 플러스 중국어판입니다^^::::

혹시나 중문과여서 작문숙제용 대체물이 필요하시다면 마음껏 써주세요.(대신 따뜻한 답글..^^) 뭐..일단 어법상으로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조그마한 부분은.....저도 몰라욧!!




책봉조공관계

-고구려를 중심으로

바로(본명 맞습니다.-_;;)


내용 요약 :
조공책봉제도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고대동아시아세계에서 있던 하나의 외교시스템이었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그거 명목상으로만 군주와 신하의 관계였지, 실질적으로는 다 지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았다.-_;;
고구려는 비록 조공을 보내고 책봉을 받았지만, 실질적으로 완전한 독립적인 국가행위(내정,외교등등)을 정상적으로 수행하였다. 고로 고구려를 중국의 지배범위안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옮지 않다.(많이 들은 말이죠? ^^)
참고로 이 가설은 일본에서 먼저 제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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