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학계에서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있었다라는 보도가 한국에 올라오고 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전에도 간혈적으로 알려지고는 하였었다. 그러나 본인 전공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기에 그냥 넘기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블로그를 방문해주시는 드라큘라님의 요청이 있어서 간략하게??! 서술해보려고 한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본인은 국적이나 민족은 개나 줘버리라고 말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학문은 어디까지나 최대한 객관적이 되어야된다고 굳게 믿으며 행동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각주:1].

보나마나 긴 장문의 글이 될 터이니 귀차니즘을 위한 요약본을 알려드리겠다.
진(秦)장성이 한반도까지 왔었는지 아니었는지는 현재로서는 확정하기가 힘들다. 몇 안되는 문헌자료는 쉽게 반론을 제시할 수 있으며, 비교적 정확하다고 볼 수 있는 북한에 남아 있다는 흔적도 어디까지나 북한의 발표만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중국이나 한국의 어느 학자도 아직 실측을 했다는 말이 없다. 고로 아직 확실한 근거로 받아들일 수 없다. 고로 어느 쪽이든 증거부족이다.

조금만 더 자세한 것을 원하지만, 별 이상야시꾸리한 사료와 논문내용을 보고 싶지 않으신 분아래쪽의 5. 만리장성 논란을 가장 쉽게 풀어보자. 로 곧장 가시면 된다.


1. 어느 시대의 만리장성인가?
만리장성이라고 하면 진시황이 만들어서 계속 내려온 것으로 보통 생각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결코 그러하지 않다. 만리장성은 진시황이 중국대륙을 통일하기 전에 조(趙)나라와 연(燕)나라에서 만들었던 성벽과 진(秦)나라의 장벽을 서로 연결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존에 있던 여러 성벽들을 연결시킨 것이다.

또한 진시황 이후 한무제 전까지는 장성이 유지되기는 하지만[각주:2], 한무제의 북방공략이나 그 뒤의 다양한 상황으로 인하여 장성은 사실상의 기능을 상실한다. 그리고 명(明)대에 와서야 다시 재축공되어서 청대까지 유지되었다. 그리고 명대나 청대의 장성의 동쪽끝은 분명히 산해관(山海关)으로 되어있다. 고로 현재에 남아 있는 만리장성 단지 명청대의 장성이며,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만리장성이 아니다.

현재의 문제는
진(秦)나라의 장성인 것이다.[각주:3]

그 외에 만리장성의 역할에 대한 해석도 문제로 남아 있다. 보통 만리장성은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을 갈라놓는 분기점이라고 알고 있다. 또한 외부의 세력을 막는 방벽으로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장성은 농경분기점 훨씬 위쪽에 존재하며, 만들어진 시기에도 커다란 목장울타리였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군사전략적으로 보아서 가느다란 선으로 방어하여 외부의 적을 막는 다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것인지는 마지노선의 예[각주:4]를 볼 것도 없이, 중국대륙의 역사 내내 제대로 북방민족을 막은 적이 없다는 것으로 확실히 증명된다고 하겠다. 이에 대한 잡설은 The Origins of the Great Wall을 참고하기 바란다.


2. 중국의 진(秦)장성에 대한 이야기들.
1- 중국 교과서에서의 진(秦)장성

因地形,用制塞 ,起临洮,至辽东,延袤万余里[각주:5] : 지형에 따라 험준한 곳에 요새를 세워 임조(临洮)에서부터 요동(辽东)까지 이르렀는데, 그 길이가 만여리였다.

중국교과서에서 보이는 진장성지도



2- 진(秦)장성에 대한 사료들
(1)《史記•蒙恬列傳[각주:6]》 :始皇二十六年,使蒙恬將三十萬眾北逐戎、狄,收河南,築長城,因地形用險制塞,起臨洮至遼東,延袤萬余里。
진시황 26년, 몽염을 시켜 30만명을 이끌고 북쪽에서 융과 적을 내쫒고, 하남을 회복하게 하였으며, 장성을 축조하게 하였다. 지형을 따라 험준한 곳에 요새를 세워 임조에서 요동에 까지 이르렀으며, 전체 길이가 만여리였다.<사기-몽염열전>

(2)《〈水經•河水〉注[각주:7]》 :始皇令太子扶蘇與蒙恬築長城,起自臨洮,至於碣石。
진시황은 태자 부소와 몽염을 시켜서 장성을 축조하게 하였다. 임조에서 시작하여 갈석에 이르렀다. <수경-하수주>

(3) 《通典•高句麗傳[각주:8]》 :碣石山,在漢樂浪郡遂城縣,長城起於此山。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었다.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한다.<통전-고구려전>

(4) 《史記•朝鮮列傳》:漢興,為其逺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為界。
한나라가 일어선 뒤 (조선?)이 멀고 지키기 어려웠음으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여 그 경계가 패수에 이르렀다.

(5) 《三國志•魏志•東夷傳[각주:9]》注 :“《魏略》曰:昔箕子之後朝鮮侯……。及秦並天下,使蒙恬築長城,到遼東。時朝鮮王否立,畏秦襲之,略服屬秦,不肯朝會。否死,其子準立。二十餘年而陳、項起,天下亂,燕、齊、趙民愁苦,稍稍亡往準,準乃置之於西方。及漢以盧綰為燕王,朝鮮與燕界于溴水。
<위략>에서 말하기를 : "기자의 후손인 조선후는..........진나라가 천하를 병합하고, 몽염으로 하여금 요동까지 장성을 쌓도록 하였다. 그 때 조선왕 부가 즉위하였는데, 진나라의 공격을 두려워 하여서, 전략적으로 진에 복속하는 척하였으나 조회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부가 죽은 뒤 그 아들 준이 즉위하였다. 20여년에 진승과 항우의 난이 일어나서 천하가 혼란스러웠고, 연과 제 그리고 조의 백성들은 고난를 걱정하여 점점 준에게 도망쳤고, 준은 그들은 서쪽에 배치하였다. 한나라가 노관을 연왕으로 삼자 조선은 연나라와 패수로 경계를 삼게 되었다.


3- 중국학자의 분석
3.1 담기양(譚其驤[각주:10])
《秦郡界址考[각주:11]》 에서 위의 (4)와 (5)을 근거로 장성이 수성현(지금의 평양서남지역)에서 시작하였다고 비정하였다. 비록 해당 기록이 한나라 초기의 기록이지만, 진나라때와 큰 차이가 없다고 보았다. 

중국역사지도집의 진영토(2권 10쪽)

연의 장성위치 (중국역사지도집 2권 42쪽)



3.2. 왕국량(王國良), 고힐강(顧頡剛), 사념해(史念海)
1930년 왕국량이 집필한 《中國長城沿革考》을 기초로 고힐강가 시작하여 사념해가 완성한 《中国疆域沿革史[각주:12]》에서는 위의 (1)과 (2)을 근거로 장성이 갈석에 있으며, 갈석은 현재의 조선평양남족이라고 주장하였다.

전국시대지도 (中国疆域沿革考 56~47)


진통일 지도 中国疆域沿革考 60-61


사념해는 담기양의 설과는 다르게 연나라 장성이 압록강을 넘어 청천강(평양근처)에 이르지 않고, 압록강까지만 그리고 있다. 이는 다른것이 아니고 연나라 장성이 압록강을 넘어서 청천강에 이른다는 문헌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진나라의 장성이 기존의 연장성을 연장-수리한 것인 점을 생각하면 담기양의 설도 논리적으로 타당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문헌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사념해는 담기양과 다르게 생각했다.

3.3. 현재의 연구상황[각주:13]
과거의 담기양이나 사념해는 어디까지나 문헌에 남아 있는 내용으로 추측을 하였지만, 그 뒤에 중국학자들은 고고학적 유물을 바탕으로 과거의 연구를 보강하고 있다. 특히 阎忠의 경우 조선사회과학원고고연구소(朝鮮社會科學院考古研究所)와 역사연구와 문화보존연구소(歷史研究和文化保存研究所)의 보고서를 기반으로 성벽유적에 대해서 토론하고 있다.

阎忠:《燕北长城考》,《社会科学战线》1995年第2期。


그는 북한의 보고서를 인용하여서 북한에 장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밝히고 있다. 북한의 보고서에서는 진나라가 아닌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성의 아래쪽에서 진나라의 유물을 발견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는 기존의 성벽의 기초 위에 훗날 다시 축공했음을 의미하며, 그 아래에 있는 진나라 유물은 기존의 성벽이 진나라의 장성일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큰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에 대해서는 아래쪽에서 다시 서술하도록 하겠다.

그 외의 고고학적 유물을 토대로한 연구로는 평양에서 출토되는 과(戈)[각주:14]와 동모(銅矛)을 근거로 해당 지역까지 장성이 뻗어있었던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각주:15].


4. 한국의 진(秦)장성에 대한 이야기들.
1- 매체보도.
진나라의 장성인지 연나라의 장성인지 명나라의 장성인지도 구별하지 않고, 어떠한 근거가 있는지도 제대로 말하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중국은 우리를 침범하는 나쁜넘이라고 규정하며, 신문기사의 객관성을 침해한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감정적인 어투로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바보스러운 신문이 대다수임. 정신 좀 차리지? ^^

2- 한국 학자들의 분석
2.1. 이병도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
遂安)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수성현에서 만리장성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맹랑한 설", 다시 말해서 말도 안되는 헛소리라고 일축하며 부정하고 있다[각주:16]. 잠시 우리의 위대한 환빠님들을 비웃어주자면... 최근 이덕일씨가 이병도의 설을 왜곡하여 "만리장성이 황해도 수안에서 시작되었다"라고 주장한듯이 쓰고 있다[각주:17]. 자네들이 이병도 싫어하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상대말을 이딴식으로 왜곡하냐? -_-

2.2. 윤내현[각주:18]
사료 (1)의 요동이 난하(灤河)의 동쪽이며, 사료 (2)의 갈석이 난하 하류의 창려현(昌黎縣)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결론적으로 한사군(漢四郡)가운데 낙랑군은 한반도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게 된다. 이 의견은 중국의 이건재(
李健才)에 의해서 반박[각주:19]당한다. 하지만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므로 일단 생략.

2.3. 그 외[각주:20].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음하하하;;; 혹시 그 외의 연구성과가 있으신 분은 알려주시기 바란다. 단. 환빠식의 원문사료나 고고학적 자료는 개무시하는 식의 논문은 무시하도록 하겠다.



5.
만리장성 논란을 가장 쉽게 풀어보자.
관련 전공자들은 위의 말만 들어도 어떤 상황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공자들이지 일반인은 그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최대한 쉬운 말로 현재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정리하도록 하겠다.

문제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5.1.
碣石(갈석)은 어디인가?
중국학자들은 갈석을 평양근처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현재 중국대륙에 남아 있는 갈석이라는 지명만 한군데가 아니다. 특히 현재의 하북성진황도시창려현(河北省秦皇岛市昌黎县)은 산해관과 근접한 지역인데 갈석이라고 불렸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갈석이 평양근처라고 말하기는 증거로서 합당하지 않으며, 현재에는 다만 방증으로 사용될 뿐이다.

쉽게 예를 들면 "산동"이라는 산의 동쪽에 있다는 지명이 한국에는 넘쳐흐른다. 전남에도 산동이라는 지명이 있고, 경북에도 있고, 경남에도 있다. 그런데 훗날 어떤 이가 산동이니 했으니 무조건 전남에 있는 산동이라고 하면 웃기지 않은가? 왜냐하면 경북이나 경남에 있는 산동일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현재 상황이 그렇다.


5.2. 漢樂浪郡遂城縣(한 낙랑군 수성현)은 어디인가?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냐는 문제 자체부터가 아직도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정확하게 말해서 서로 제대로 된 증거가 불충분하여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낙랑의 중심지라고 불리우는 평양이 현재 양측 학자 모두 출입이 사실상 불가능한 북한의 영토라는 점도 단단히 한 몫을 하고 있다.

그러니 낙랑군의 수성현이 어디인지는 더욱 더 논란이 될 수 밖에 없다. 고로 수성현을 증거로 삼기에는 부족하며, 역시 방증으로만 사용될 수 있을 뿐이다.

위의 산동의 예보다 한 술 더 뜨는 문제이다.


5.3. 浿水(패수)는 어디인가?
중국이든 한국이든 논문싸이트에서 "패수"라고 입력하고 내용들을 살펴보면 당신을 놀라거나 짜증을 낼 것이라고 장담한다. 각각 패수라고 말하는 곳들이 천차만별이다. 한강부터 시작해서 북쪽으로 청천강, 압록강, 요수등등등.......사실상 베이징과 서울사이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하천을 패수라고 각기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패수가 청천강이라는 중국 만리장성설의 증거는 휘청거릴 수 밖에 없다.

위의 산동의 예의 극대화라고 보면 된다.


5.4. 평양근처에서 발견되는 진나라 유물을 어떻게 해석해야되는가?
한반도에서는 서역의 유물까지 발견된다. 고대라고 움직임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활발한 무역활동 및 문화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로 몇 조각의 유물만으로 장성을 비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아예 유물에 "이곳에서 장성을 지었음"이라는 글자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유물로는 장성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역시 방증으로 사용될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서 한국인이 하회탈을 들고서 이탈리아에 갔다. 그리고 이탈리아 친구에게 선물을 해 주었다. 나중에 발견한 하회탈을 보고 한국의 영토가 이탈리아까지 있었다고 확정하는게 말이 되는가? 혹은 한국의 무기는 지금 계속 수출되고 있는데, 이것이 남아프리카에 수출되었다고 하자. 나중에 남아프리카쪽에서 그 무기를 발견하면 한국의 영토가 남아프리카에 이르렀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와 같은 것이다.


5.5 북한에 남아 있는 성벽유적을 어떻게 해석해야되는가?
이 논쟁의 핵심이 될 수 있는 북한에 남아 있는 성벽유적이다. 문제는 이넘의 성벽유적을 직접 시찰한 사람이 한국학자든 중국학자든 없.다.는.것.이.다[각주:21]. 단지 북한에서 일방적으로 발표한 보고서를 믿을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북한의 보고서는 그리 믿을 만한 수준이 아니다.

고고학적인 기술력 자체가 제대로 지표조사를 할 수 있을지 의심되는 수준이며, 단군묘를 비롯해서 체제유지를 위해서 누가봐도 "만들어낸 고고학적 자료"을 이야기하는 곳을 당신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본인으로서는 못하겠다.

이렇게 불안정한 "성벽유적"보고서를 바탕으로 작성된 글을 마냥 믿을 수는 없다.

쉽게 다시 설명하면 성벽유적 자체는 정말 강력한 유물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친구 중에 공부도 못하고 거짓말도 밥 먹듯이 하는 인간이 있다고 해보자. 그 녀석이 갑자기 "공룡의 화석"을 찾았다고 말을 한다. 그럼 일단 공룡이 먼지나 알런지 의심할 것이고, 설사 공룡의 화석을 안다고 생각하여도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것이다. 그래서 직접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지 않고, "구라지? 뻥까지마!"라고 할 것이다.


6. 결론
본인으로서는 지금의 증거로는 어떠한 판단을 할 수가 없다. 단지 만약 북한에 정말 성벽유적이 남아 있다면, 만리장성의 평양시작설은 상당히 강력하게 작용할 것이다. 반대로 북한에 성벽유적이 없다면 반대로 평양시작설은 대폭 약해질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 아무도 북한의 성벽유적을 조사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애국주의나 민족주의를 말하면서 "어디서 감히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왔느냐!"라고 하는 인간들은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건지? 혹은 공부라는 것을 하는 것인지 궁금할 뿐이다. 여러 증거들이 평양까지 왔다고 입증이 되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도록~" 평양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여러 증거들이 평양까지 온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침 튀기면서 말하지 않아도 평양까지 오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정신 좀 차리라고요^^

이 글에 대해서 원문사료나 증거 없는 "비난"은 상대하지 않겠습니다. 어디까지나 논리와 증거를 갖춘 "비판"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익명의 힘을 믿습니다. 그렇기에 익명의 강력한 힘을 악용하는 쓰레기들에게는 무시라는 최후의 수단을 쓸 수 밖에 없습니다.

자료협조를 해주신
劉表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저는 그 분의 자료를 되도록 쉽게 풀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감사감사!!! 그리고 이 블로그에 오는 역사관련 분들이여. 괜히 조용히 보지만 말고 언제든지 어떤 주제로든 글을 써서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제 블로그를 통해서 익명으로라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사랑해요^^::::


끝난 줄 알았는데.....밥 먹기전 눈에 들어온 조선일보가 문제였다.....
7. 명나라 장성도 문제라고?
(조선일보)중(中) "만리장성, 압록강까지다" 선언(기존보다 2500㎞ 늘려… 고구려 세력권 편입 의도… 韓·中 역사분쟁 재연될듯) 이라고 우리의 베이징 특파원 최유식 기자님이 올려주셨다. 본인 최유식 기자님에 대해서 참고참고 언급 안할려고 했는데...제발 기사 좀 제대로 써주었으면 한다. 중국 뉴스에 뜬 것을 제대로 조사도 안해보고 무조건 번역질해서 기사쓰면 좋으신가?

위의 내용은 중국의 "명나라 만리장성"이 압록강까지 닿았다고 중국에서 주장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의 최유식 기자님은 해당 단체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조사도 안한 것이 분명하며, 관련 논문들을 본 적도 없는 것이 거의 확실히 된다. 사실 여부에 대한 조사는 기자의 기본이 아니었던가? 아! 그리고 맨 처음에 언급했다싶이 연장성, 진장성, 한장성, 명장성, 청장성을 구별하지 않고 그냥 만리장성으로 해주고 있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니 넘기겠다^^

그리고 대체 명장성과 고구려가 먼 상관인가? 기사의 본분은 사실 전달이라는 것을 초년병시절에 배우기는 한 것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명장성이 압록강까지 갔다는 것은 90년대부터 있던 이야기다. 단지 어이가 없을 뿐이어서 학계에서도 그냥 씹고 있었을 뿐이지. 물론 자료 조사 안했을 우리의 최.유.식. 기자님은 모르고 있으셨겠지...^^

가장 간단히 요약해보겠다. 명장성이 압록강까지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국의 환빠와 거의 동일 선상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틀리지 않다고 보면 된다. 어느 나라나 어떻게든 역사를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부풀리고 축소하고 비틀어서 자위행위를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왠만하면 무시해주자.

1. 장성학회(长城学会)
최유식 기자님이 배끼신 기사의 원문(万里长城东端起点圆桌会议召开)을 보면 너무나 쉽게 보이듯이, 일련의 행사들은 어디까지나 관광지로 만들겠다는 삽질의 한 모습에 불과하다. 이정도는 충분히 아셨을 텐데 깨끗이 무시해준 최유식 기자님 만세!

그런데 본인은 장성학회가 머하는 곳인지 궁금해졌다. 中国长城网에서 장성학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름답고 화려하지 않은가? 그리고 본인의 경험적으로 학술활동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화려한 홈페이지 못 만든다. 찾아봐라. 이렇게 화려한 학술적으로 유명한 곳이 있는지. 그들의 활동을 살펴보면 제대로 된 학술활동은 보이지 않고, 단지 만리장성과 연결된 지방과의 관광사업으로 도배되어 있다.

이런 장성학회를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는 여러분들이 더 잘아시리라 본다.


2. 중국에서의 관련 논문

1.1. 《明长城东端起点——虎山关》[각주:22]나 《虎山长城》[각주:23]와 같은 사료없고, 논리도 없고, 증거도 없고, 인용도 없는 환빠들이 생각나는 놀라운 논문들이 산더미 -_-

1.2. 薛景平《辽宁境内明长城考察发掘的重大成果》《辽宁大学学报(哲学社会科学版》1995 : 무려 고고학 보고서이다. 그리고 건축복원도나 단면도 하나 없는 무려! 고고학 보고서이다. 본인 이따위 글을 무려 고고학 보고서로 인정해야되는 것으로 고민중이다. -_-;;;

1.3. 刁余文《长城虎山关》《上海集邮》1998/07 : 무려 사료인용이 있다. 그러나 주석따위는 가볍게 없고, 다 합쳐야 천자가 겨우 넘을 듯한 글이다. 그래도 그나마 "학술논문"으로 보인다...어디까지나 그나마이지만;;; 그래서 여기서 인용한 사료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3. 사료로서의 명장성 동쪽끝[각주:24]
2.1.《明史卷九十一志第六十七 兵三 邊防》: 东起鸭绿,西抵嘉峪, 绵亘万里, 分地守御
동쪽으로는 압록강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는 가욕에 이르는 곳을 만리에 걸쳐 서로 이어지게 각 지역별로 수비하였다.

2.2. 《明宪宗实录》: 成化十五年六月修筑东路自开原抵鸭绿江边墙[각주:25]
성화15년 6월, 개원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동쪽길의 벽을 수리-축공하였다


4. 사료분석
2.2.는 인터넷에서 원문 대조를 할 수 없기에 일단 넘기겠다. 문제가 되는 것은 2.1.에 있는 구절이다. 저것만 놓고 보면 장성이 압록강에서 가욕관까지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 쉽다. 그러나 원래 원문을 보면 살짝 어이가 없어진다.

元人北歸 屢謀興復 永樂遷都北平 三面近塞 正統以後 敵患日多 故終明之世 邊防甚重 東起鴨綠 西抵嘉峪 綿亙萬里 分地守禦

원사람들이 북쪽으로 돌아가고 여러차례 돌아올 것을 도모하였다. 연락은 북평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삼면이 변방과 가깝다 보니 정통 이후에는 방어에 고충이 심해졌다. 그래서 명나라가 망하기 전까지 변방의 방어를 매우 중시하였다. 동쪽으로는 압록강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는 가욕에 이르는 곳을 만리에 걸쳐 서로 이어지게 각 지역별로 수비하였다. (막번역임.)

해당 내용은 만리장성과 상관이 없으며, 어디까지나 명나라의 변경방어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런 내용을 가지고 압록강에서 시작했다고 하는 것은 신빙성이 상당히 약하다고 하겠다. 그 뿐만이 아니라 명사의 다른 부분을 보면[각주:26], 비록 압록강부터 가욕관까지라고 수비범위를 지정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현재의 베이징지역에 수비가 밀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명나라가 건국했지만, 몽원의 세력은 아직 몽골지역에 남아 있었으며, 명나라 중후반기까지 계속 골치거리가 된다. 또한 몽원은 어디까지나 청나라에 의해서 밀려나게 되고, 청나라의 세력이 요동을 중심으로 뻗어나가서 결국 명나라를 멸망시켜버리고 만다. 이 상황에서 요동지역에 명장성이 항시적으로 있었다는 것은 불가능이다. 단지 간혈적으로 명의 세력이 요동에 이르렀을지는 모르지만, 장성과 같이 반영구적인 방어기지를 세울 정도의 확장은 정황상 불가능하였다.

최소한 현재 중국의 교과서에서는 명장성이 어디까지나 산해관까지만 그려져 있을 뿐이다. 중국의 주류 의견이 아닌 것이다. 주변에 중국친구가 있다면 한 번 물어보라. 명장성의 동쪽 끝이 어디인지를....


양쪽에서도 비주류인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의 이야기를 한중 양국의 매체에서 서로 경쟁적으로 소개하면서 쓸데 없이 양측 모두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될까? 미디어는 팔리는 화제성보다는 사실에 대한 집착을 해야되는 것이 이상이 아니었나? 아무리 현실이 시궁창이어도 해도해도 너무한다 싶다.


  1. 고로 이 글은 한국측이나 중국측이나 어느 쪽에서도 욕 먹기 딱 좋은 글일 것이다. 후-_ [본문으로]
  2. 실질적으로는 방어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문에 있는 링크를 참고. [본문으로]
  3. 의외로 이 것을 모르는 분들이 있어서^^:: [본문으로]
  4. 프랑스가 독일을 상대로 만들어두었지만 독일이 우회기동하여 마지노선자체를 상대하지 않아서 바보스러운 방어전략으로 이름을 날렸음. [본문으로]
  5. 人民教育出版社歷史室編著:《中國古代史》全一冊,人民教育出版社,2007年3月第2版。(p22~p23) [본문으로]
  6. 한대(BC 2세기 중엽) 사마천의 기록. [본문으로]
  7. 위진남북조의 酈道元의 [본문으로]
  8. 당나라 두우(杜佑)의 기록. 《太康三年地記》, 《晋書•地理志》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음. [본문으로]
  9. 위진남북조의 배송지(裴松之)이 위략을 인용한 [본문으로]
  10. 중국의 유명 역사지리학자. 중국역사지도의 주편자. [본문으로]
  11. 《长水集》上,北京:人民出版社,1987年7月,第16页 [본문으로]
  12. 《中国疆域沿革考》,北京:商务印书馆,1999年7月,第68~69页 [본문으로]
  13. 阎忠:《燕北长城考》,《社会科学战线》1995年第2期。冯永谦:《辽东地区燕秦汉文化与古长城考》,《辽宁省本溪、丹东地区考古学术讨论会文集》,1985年。王德柱:《鸭绿江畔发现燕秦汉长城东段遗迹》,《中国文物报》1991年5月19日。李文信:《中国北部长城沿革考》,《社会科学辑刊》1979年创刊号。李殿福:《东北境内燕秦长城考》,《黑龙江文物丛刊》1982年第1期。刘子敏:《战国秦汉时期辽东郡东部边界考》,《社会科学战线》1996年第5期。冯永谦:《东北古长城考辨》,《东北亚历史与文化》,辽沈书社,1992年。 [본문으로]
  14. 곽말약(郭沫若)의 《금문총고(金文叢考)》 [본문으로]
  15. 25년상군수과(二十五年上郡守戈)가 진시황25년 진나라 상군에서 제작되었다는 점을 들어 평양에 진주했었다는 근거로 사용. 또 三年相邦呂不韋造, 上郡守……라는 글이 세겨져 있는 동모를 통해서도 이야기된다. 그 외에도 문양이나 기타 출토유물이 이야기되어진다. [본문으로]
  16.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년. [본문으로]
  17. 이덕일,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역사의아침, 2006년. [본문으로]
  18. 윤내현, <漢四郡의 樂浪郡과 平壤의 樂浪>, <<韓國學報>>41, 1985년. [본문으로]
  19. 《评汉乐浪郡在今辽河以西说》 [본문으로]
  20. 이성규, <중국군현으로서의 낙랑>, <<낙랑문화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7년.이병두, <낙랑군현 위치고>, <<한국학보>>55, 1989년. [본문으로]
  21. 북한과의 교류가 중요한 이유도 이것이다. 막말로 지금 상황에서 직접가서 본 사람이 큰 소리 칠 수 있으리라 본다 -_-;;; [본문으로]
  22. 张安阳《明长城东端起点——虎山关》《民主》 [본문으로]
  23. 栾德君《虎山长城》《满族文学》08/03 [본문으로]
  24. 조사하면서 알았는데, 한국의 환빠들은 참 순진한 수준이라고 보인다. 이쪽은 본문에 분명히 있다. 단지 앞 뒤 문장을 꼭 봐야되지만... [본문으로]
  25. (해당책은 인터넷에서 원문을 찾을 수가 없었음, 확인해야되는데 귀찮아서 패스. 어차피 말도 안되는걸 굳이 찾으려 할 필요 자체가 없음. [본문으로]
  26. 《明史》卷一百十三志八十七 明幅員綿邈東起鴨綠西抵嘉峪為邊者九千餘里成祖即北平建都碣石冀北扆山負海塞垣聯絡據乎要險居庸為京北門隸于昌平密邇薊州薊昌俱畿内要地故不稱鎮薊之稱鎭自嘉靖庚戍昌之稱鎮自嘉靖庚申皆世宗所建置... [본문으로]
현재 중국에서 티스토리를 접속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접속 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이 방법을 알면서도 개인적으로만 다른 분들에게 알려드렸습니다. 일단 중국정부가 더욱 더 저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했고, 중국쪽에서는 어차피 제 블로그에 접속이 안되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차단이 시간이 너무 지났군요. 물론 티스토리쪽에서도 해결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한달이 넘었군요. 그래서 그냥 블로그를 통해서 공개하겠습니다.

중국에서야 이것에 접속할 수 없고 볼 수도 없겠지만 중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알려주시면 좋을듯 합니다. 참고로 이 방법 말고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만, 스스로의 블로그를 관리하는데에는 이 방법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C:\WINDOWS\system32\drivers\etc
폴더로 가보시면 "hosts" 라는 문서가 있습니다.
해당 문서를 노트장으로 열고
맨 아래에 아래같은 형식으로 추가

211.172.252.9 ddokbaro.tistory.com
211.172.252.9  russiainfo.co.kr

앞에 붙어 있는 211.172.252.9 는 티스토리의 ip입니다. 그리고 뒤쪽에는 자신의 블로그 주소를 적어주시면 됩니다. 일단 티스토리에 있는 사실상 거의 모든 블로그가 위의 IP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2008년 10월 13일 기준 - 당분간은 변동이 없을 것입니다. 변동되었다고 하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제보 부탁드려요^^)

만약 티스토리 외에 다른 서비스의 IP을 알고 싶으시다면 :

ip 아는 법
원도우 시작 -> 실행 -> cmd
tracert ddokbaro.tistory.com
해당 방법은 출처만 명확히 하신다면 마음대로 퍼가셔도 됩니다.
....이렇게 계속 하면 더욱 더 중국정부에 사랑을 받을터인데..후....걱정입니다.
한국에서는 친중이라고 불리고, 중국에서는 반중이라고 불리는 이 아이러니란....


The Origins of the Great Wall

Nicola Di Cosmo - Institute for Advanced Study, Princeton (USA)


무지막지 간단한 요약

장성이 처음 세워질 때에는 어디까지나 중국 북방왕조에 의한 북방침략의 전진기지로서 작용하였다. 특히 과거의 최신식무기인 말의 사육을 할 수 있는 목장의 확보(지금으로 따지면 핵무기나 화학무기 제조공장밀집지대이다. 느낌이 팍팍 오지 않은가?) 오르도스로 유입되는 다양한 문화와 기술을 터득등을 목적으로 진, 조, 연은 장성을 정주민과 유목민의 분계선이 아닌 초원지역까지 끌고 올라갔다. 다시 말해서 장성의 처음 목적은 방어용이 아닌 공격용이었다.



개인적으로 놀랐다. 콜럼버스의 달걀이 바로 이런것이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구나.

반론을 하자면--


하지만 辛德勇의 해석에 의하면 由于秦昭襄王长城在关中北部地段,距离秦都咸阳较近,匈奴骑兵一旦突破秦人防线,很容易对国都造成威胁。后来汉初又沿用这道长城作为边塞。汉都长安与秦都咸阳仅渭河一水之隔,近在咫尺,二者与秦昭襄王长城的位置关系基本相当 이런 해석도 충분한 방어적인 요소가 필요했다 것의 근거가 아닐까? (수도방어의 목적)


등장하는 辛德勇의 글은 모두 张家山汉简所示汉初西北隅边境解析—附论秦昭襄王长城北端走向与九原云中两郡战略地位에서 인용한 것이다. 文史 - 关于高阙的文章

image

九原和云中,具有非同寻常的军事地理地位;特别是九原,不仅控制着黄河渡口,同时还控制着重要的战略通道直道,地位尤其重要。尽管在秦末丧失“河南地”以后,直道有一部分地段沦入匈奴骑兵出没之区,不能正常使用其一般的交通功能;①但若是需要采取重大军事行动,这条大通道显然依旧可以发挥无以替代的作用。因此,九原、云中两郡,各自保持单独的郡级建置,自然有利于强化治理,提升地位,以确保其能够发挥应有的战略作用。同时,让这样两个郡比肩并立,也可以令其相互牵制,更有利于朝廷的控制。(북방이민족외에 관중에서 동쪽 지역으로 군사작전을 할 경우의 작전로로서의 가능성)


장성의 정의 : 해당 시대의 주요 국가가 국방상의 이유로 장기적으로 통합적인 구조에 의하여 만들고 유지한 건축물.


If there is a single Chinese monument that people anywhere in the world are likely to have seen, heard of, or read about, this is the Great Wall (Fig. 1). Aside from its mythical proportions, the Great Wall has symbolic powers that transcend its historical and material existence. It has been depicted as a parting line between the known and the unknown and the physical line marking the frontiers of civilization, the inhospitable liminal universe which was the preserve of a demimonde of barbarians and transfrontiersmen, convicts and soldiers, crafty merchants and banished officials. In historical writings, the Great Wall has been presented as protection against invaders — the engineering product of a superior civilization erected against the tumultuous waves of its enemies — but also
as the symbol of unrestrained, vain, and arrogant tyranny, tangible product of the blood and tears of the toiling masses. Most recently the Great Wall has acquired yet another meaning, following new orientations in the politics of historical interpretation: a meeting point of cultural exchange, compared to a river that unites rather than divides, and brings different nationalities closer together. A malleable symbol adapted to political and cultural metaphors, gate to be crossed or drawbridge to be lifted, the Great Wall of China continues to be a testimony of China’s cultural, historical, and now national identity: a most patriotic artifact.


Owen Lattimore probably was the first Western scholar to see the Great Wall more as an economic and environmental than a cultural boundary between nomads and settled people (Lattimore 1937, 1940). Arthur Waldron in his excellent study restored its historical dimension, exploding some of its myths (that it could be seen from the moon, for instance) and focusing on its construction during the Ming dynasty, in the fifteenth century, when the Great Wall became the majestic monument we can see today (Waldron 1990). Yet although the Ming Great Wall is a relatively recent creation, the concept of a Great Wall, or more correctly ‘long walls’ (chang cheng) has been in existence for a much longer time, going back to the late fourth century BCE. As astonishing as the spatial dimension of the Great Wall is, covering several thousand miles, it is its temporal aspect that has been key to its success as a symbol of patriotism and national pride, a line in the sand between barbarians and Chinese drawn even before China’s imperial unification.

BCE = Before Common Era : 공용시대 이전 = 기원전 (미국인 룸메이트도 몰랐던 단어라는...--)


Yet once we begin to consider the Great Wall as a historical artifact rather than as symbol, we are bound to recognize an altogether different picture. As a defense structure, its record is abysmally bad. It never prevented invasions, and it was expensive to build and maintain. The monumental futility of the Great Wall as a military installation has been demonstrated in especially stark terms during the Ming period, when massive investments did not prevent China from being attacked by the Mongols and eventually conquered by another northern people, the Manchus. China’s strategic culture seems to have favored static defense, and this may be one reason for the long existence of various types of border fortifications, and the Ming construction of the Great Wall as we know it. But was this always the case? Did the Great Wall always serve as a defensive structure? These are some of the questions I had to ask as I became interested in the early phase of the history of the frontier between China and the steppe.

만리장성을 흔히 방어적인 구조물이며, 그러한 방어적인 능력조차 떨어지는 구조물이다. 하지만 효과가 떨어지면서 수 많은 경비가 들어가는 구조물을 유지할 필요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민족적인 상징으로서의 형상물이다. 그 다음으로는 장성이 방어적인 구조가 아닌 공격적인 구조를 가졌다는 생각이다.


The theory that the northern walls were erected to defend Chinese states from the nomads is well known and continues to carry much weight today. As we shall see in greater detail below, Sima Qian’s narrative account of the historical relations between China and the northern nomadic peoples in chapter 110 of his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Shiji, first century BCE) was based on the historical myth (an ‘invented tradition,’ some might say), according to which China and the north had been perennially at odds with one another, and that China had since the dawn of history suffered from nomadic invasions. This rationalization of what was in effect a late phenomenon, that is, the appearance of the strong unified nomadic empire of the Xiongnu, set the tone for the later Chinese understanding of relations with the north. According to this deeply rooted topos of Chinese historical thinking, which has been repeatedly asserted as recently as at the Symposium on the Great Wall held in 1994, China was weak and unable to oppose an adequate defense against the northern nomads, except for the Great Wall, which then became a symbol of resistance against all invaders (Waldron 1995). Concern for the historical ‘weakness’ of China visà-vis the nomads could not exist, of course, outside of a notion that regarded the nomads themselves as a positively aggressive, militarily superior enemy (as represented, for instance, in the Disney animated movie Mulan). As Sima Qian said, it was their innate nature to love war (Sima Qian 1993, p. 129).

Sima Qian=사마천=司马迁

Shiji = 사기 = 史记


The history of the northern frontier before the unification of China is obscure and often cast, in the earliest Chinese texts, in moralizing terms. The Chinese had already attained a high level of cultural sophistication, with music, rituals, moral norms, and especially writing. Those people who did not write, had different customs, and did not belong to the Chinese cultural and political sphere, were therefore regarded as uncivilized. Several passages can be extracted from the earliest historical documents which present the story of the relationship between Chinese and non-Chinese in terms of ‘civilized’ vs. ‘barbarians.’ Among the non- Chinese were, of course, northern peoples thought to be the ancestors of the warlike nomadic horsemen who were to become a major threat from the Han dynasty onwards. From the mid-eighth to the mid-sixth century BCE, Chinese states conducted a series of military campaigns in the north against peoples called Rong and Di. Sometimes these peoples retaliated but usually they were defeated, subjugated, incorporated, and eventually assimilated. This process was made easier by the understanding that certain rules of conduct in war (a code of honor, a sense of fair play) that were to be observed, at least theoretically, when the fighting occurred among Chinese polities, were no longer prescriptive in the case of foreign wars, where no trick or stratagem, no broken oath, no breach of loyalty carried a moral sanction or other undesired political consequences. Foreign peoples were conceived as resources, and their use as such was not only practiced by Chinese states, but also theorized.

Rong = 戎, Di = 氐


From the sparse textual evidence at our disposal we can see that the land and labor extracted from non-Chinese groups constituted a type of wealth often coveted by the Chinese states. Victories obtained against foreign peoples could serve the strategic purpose of intimidating potential enemies. Another doctrine — wrongly assumed to be pacifist — maintained that wars against foreigners had to be undertaken sparingly, because there was a risk that such ventures may weaken the state and expose it to attacks from other Chinese states. It was realpolitik, not moral values, that regulated the foreign relations between Chinese states and their neighbors. Generally
speaking, the political discourse about foreigners in pre-imperial China tends to justify expansion and conquest, which is exactly what happened. Looking closely at those statements that point to cultural differences, then, we find that such differences provide a political rationale that allowed for the expansion of Chinese polities.


Especially in the Warring States period (5th-3rd century BCE) the Chinese political and economic spaces continued to expand even though the number of independent states vying for power dwindled. The general trend was towards the creation of larger and stronger states, which expanded not only by swallowing up other Chinese states but also by expanding into external areas. If we look at the northern frontier, this trend is clearly identifiable as the states of Zhao, Yan, and Qin kept expanding and growing both militarily and economically. Setbacks occurred, but the general impulse was towards becoming stronger, and alien peoples, not integrated in
Chinese civilization, were a reservoir relatively easy to tap into. From pastoral people the Chinese imported cattle and sheep, wool, leather, horses, and pelts. Moreover, at this time the frontier economy became monetarized through the use of metals, such as gold objects possibly used as currency, and especially bronze coins. Military requirements may have played a key role, since pack animals must have been needed in increasing numbers for transportation during military campaigns as armies became larger and larger. Horses become especially important from the late fourth century BCE with the adoption of mounted warfare by Chinese states. In sum, archaeological but also textual evidence suggest a historical context, on the eve of the building of the very first ‘great wall,’ in which the northern frontier zone appears to have been increasingly valuable, in economic and strategic terms, to northern Chinese states.

Warring States period = 战国时代


As we know, the First Emperor of Qin, the one who in 221 BCE emerged victorious from the struggle among the ‘Warring States’ and unified China, was not the one who first erected walls. He merely expanded and unified a network of fortifications which existed previously and had been established by the states of Qin in the northwest, Zhao in the north, and Yen in the northeast (see map, Fig. 2, for the various ‘walls’). Given that the conventional theory holds that the early walls were built to protect China from the nomads, historians have tried to explain why the nomads would raid, attack, or invade those lands we conventionally call ‘Chinese.’ Generally speaking, scholars have produced a number of theories more or less persuasive, and more or less supported by the sources. Some have sought to explain the nomads’ aggressiveness, for instance, with a model of omadicsedentary
relations according to which nomads need to acquire resources from their agriculturist neighbors, and would resort to war or trade to obtain them. Owen Lattimore himself saw relations across the frontier strongly determined by competing societies that differed dramatically in terms of environmental adaptation and economy. Chinese scholars have seen also in the ‘imbalance’ in the development of the productive forces on both sides of the ‘great wall’ the source of conflicts originated by the less developed side, the nomads. At any rate, all theories converge to agree that the ‘great wall’ was built as a response to nomadic aggression. To test the truth of this general apparently unshakeable belief we then should ask a most significant question: what does the evidence actually say?


 


Surprisingly, there is no textual evidence that allows us to establish a direct cause-effect relationship between nomadic attacks and the building of the walls. The evidence shows, on the contrary, that the building of walls does not follow nomads’ raids, but rather precedes them. If a linkage can be established in terms of mere chronological sequence, the construction of the walls should be regarded as the cause, not as the effect, of nomadic incursions. Secondly, archaeological evidence does not support the contention that the walls were protecting a sedentary population, even less that they were protecting a ‘Chinese’ sedentary population. In fact, the early walls did not mark an ecological boundary between steppe and sown, nor did they mark a boundary between a culturally Sinitic zone and an alien ‘barbarian’ region. For the most part, they were entirely within areas culturally and politically alien to China. These simple observations should already suffice to raise doubts as to the actual function of the earliest walls. More doubts are engendered as we delve deeper into the textual and archeological evidence.

1) 건축학상으로, 그리고 실제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싶이,  만리장성으로 인한 방어적 효과는 없다

2)방어적 효과를 위해서라면 만리장성 안쪽에 다수의 정주민이있어야 되었는데 오히려 적은 수의 정주민이 있다

单纯从军事防御角度看,这道新的防线足以御敌于国门之外,庇护都城的安全。但它远离关中的边防线,又带来军粮供给困难的问题。秦人和西汉朝廷解决这一地区边防军用粮共有三种办法:一是从内地调运;二是移民实边,开发当地粮食生产潜力;三是让驻军就地屯田,自食其力。

이 말을 바꾸면, 해당 지역은 농사를 하기에 힘든, 어디까지나 초원지역이었다는 소리이다. 곧 정주민과 유목민의 분계선의 역할을 했다는 말은 성립을 하기 힘들다.

《汉书》卷28下《地理志下》叙述赵国分野,谓赵国“西有太原、定襄、云中、五原、上党”,又云:“定襄、云中、五原,本戎狄地。”라는 말이 있듯이 원래는 북방유목민의 영토였다.

一是汉朝在关中不封授诸侯王国,在关中以外秦汉人习惯称之为“关东”或“山东”的东部地区,凡是沿边区域,包括实际并没有遭受多少外患,其实算不上“外接于胡、越”的渤海湾西岸地区,都被设为诸侯王封国,而频频遭受匈奴侵扰的云中郡和本文所推定的九原郡却不在其中,直接隶属于西汉朝廷.

그렇다면 매번 공격을 받는 지역을 왜 계속 지키려고 했던 것일까? 정말 방어적인 정책이었다면 이 지역을 포기하고 후퇴하는 것이 좋았을터인데 말이다. 전국-진-한에 이르도록 이 지역은 다양한 문화를 수용할 수 있고, 당시의 전략무기인 말을 사육할 수 있는 초원이 있던 지역이다. 그러므로 북방이민족은 목장을 원해서 계속 쳐들어내려오고, 반대로 중국왕조는 군사무기 공장-_;; 을 지키기 위해서 싸운 것은 아닐까?

그에대한 보충 자료로서 《管子·揆度》 桓公问管子曰:“吾闻海内玉币有七策,可得而闻乎?”管子对曰:“阴山之礝碈,一策也"와  桓公问于管子曰:“阴山之马具驾者千乘,马之平贾万也,金之平贾万也."

礝 : 古同“碝”,次于玉的美石。“碝”= 像玉的美石

어찌되었든 인산부근은 말과 보석?!이라는 두가지의 당대의 인기상품?!이 있었다. 차지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The idea and technology of such ‘long wall’ military installations is first found in central and southern China and associated with states such as Wei and Chu in the fifth century BCE. The ‘walls’ built along the northern frontier constituted an integrated system of man-made structures and natural barriers. The careful choice and use of topography enhanced greatly the effectiveness of these fortifications. This system, in addition to the ‘walls,’ included small as well as relatively large forts, beacon towers, look-out platforms, and watchtowers. Typically, the walls were made out of stamped earth and stones piled up in layers to form a rampart, usually on sloping terrain, so that the outer part would be higher than the inner part (Fig. 3, next page). Moreover, along the walls archaeologists have discovered, at regular or irregular intervals, mounds of stamped earth that are probably the remains of elevated platforms or towers. On higher ground, such as hilltops or even mountain peaks, small stone structures have been found, in the shape of platforms, which are assumed to have served as look-out posts or beacon towers. On the inner side of the wall, at varying distances, we find a number of additional constructions,
in the shape of square or rectangular enclosures, whose walls are often made of stone, believed to be forts garrisoned by soldiers.


In mountainous terrain along precipices and ravines or narrow gullies, the man-made structures may be limited to a few towers and gates blocking a mountain pass. Roads on the inner side of these walls served the purpose of connecting the various garrisons with strategically important locations. Beacon towers, also placed on the inner side of the walls, were probably used to communicate between the various stations, although the system of communication is unclear (Fig. 4). Undoubtedly a complex system of couriers, postal stations, and checkpoints must have been operating, and the sheer number of structures and their spatial extension suggest that the efficient use of these early ‘walls’ required an extensive military presence.


고대의 성은 전망대(파수대)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For instance, on top of the wall built by Qin, for its entire length, we find three to four mounds (raised platforms) per kilometer, amounting to a total of approximately 6,300 separate structures. Throughout the line of the walls, on the inner side, we encounter ruins of military installations. Citadels and forts are distributed at a distance of three to five kilometers from each other, and their internal area may vary from 3,500 m2 to 10,000 m2. They are generally walled, though forts built on steep ravines and gullies do not have walls, as the natural topography provided sufficient protection.


Turning to the evidence provided by textual sources, some caveats need to be borne in mind. The first concerns authorship, or rather the historical and cultural context from which the sources themselves originated. Explicit mention of wall building activity by the northern states is found in the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Shiji), authored by Sima Qian around the turn of the second century BCE, that is, over two hundred years after the first northern walls were built, and after about a century of wars between the nomadic empire of the Xiongnu and China. Sima Qian inscribed such a long and bloody confrontation in a historical pattern according to which China (variously indicated as Hua, Hsia, Zhongyuan, Zhongguo, or even ‘the land of caps and sashes’) and the nomads constituted two antithetic poles that had been at odds ever since the dawn of Chinese history. Within this pattern Sima Qian produced an ethnic genealogy, culminating with the Xiongnu, that held all the various ‘northern barbarians’ together as one coherent narrative unity. As a result he created a polarization between a unified north and a unified south and projected it into the past. Sima Qian also recorded names and events whose number and variety is in itself evidence of the political and ethnic complexity of the north. Hence, while it is essential to remember that the historical narrative of the northern frontier is, not, itself, neutral, one cannot use this argument simply to dismiss all that it reveals about China’s relations with the north during the Warring States period (for details, see Di Cosmo 2002, part IV).

사기를 적은 사마천의 역사적 배경을 주의하자. 사마천은 실제 장성이 처음 세워진 때로부터 200년정도가 지난뒤의 사람이다. 그동안 흉노라는 이름으로 북방이 통일되었고, 중국도 한왕조로 통일이 되어서 장성을 두고 남북의 대립구조가 만들어 진다. 하지만 사마천이 직접 적었듯이, 고대의 중국과 북방 모두에는 다양한 민족과 국가가 존립하고 있었다.


Moving then closer to the question of the Great Wall, we need to ask whether the Shiji, as our most important historical text, supports an interpretation according to which the walls were established as a military defense. Or, to put it differently: does the historical evidence show a connection between nomadic threats and wall-building? As for the state of Qin, the record says that its king Zhaoxiang (306-251 BCE) began to build walls on the north-western border after a military campaign into that territory, which was inhabited by a non-Chinese people called the Yiqu Rong. The pretext of Qin’s expansion is attributed to a ‘scandalous’ series of events. Apparently the king of these Yiqu Rong had illicit intercourse with the Queen Dowager of Qin, who bore him two sons. Having grown displeased with the king, the Queen Dowager later deceived and killed him, assembled an army, and then proceeded to attack and destroy the Yiqu. Having conquered the Rong, Qin also expanded to the north into the territory within the Yellow River’s great bend, today’s Ordos region. In this way Qin acquired extensive new lands, which became subject to military administration, or ‘commanderies.’ Only then Qin ‘built a Long Wall to guard against the Hu.’ (Hu was a generic term to indicate nomadic steppe peoples.) The state of Yan was located in the north-east. During the reign of King Zhao (311-279 BCE), a general who had served as a hostage among the nomads made a surprise attack against the Eastern Hu. He defeated them, and forced them to retreat ‘a thousand miles.’ Yan then ‘built “long walls”’ and established commanderies ‘in order to resist the nomads.’ But this ‘resistance’ followed a military expansion well into nomadic territory. The third northern state, Zhao, also had conflicts with steppe nomads. The Shiji tells us that King Wuling ‘in the north attacked the Lin Hu and the Loufan [both of them are generally understood to be nomadic peoples – NDiC]; built long walls, and made a barrier [stretching] from Dai along the foot of the Yin Mountains to Gaoque.’ Thus, Zhao created an advanced line of fortification, deep into today’s Inner Mongolia, encircling the Ordos steppe, then inhabited by pastoral nomads. I could find only one passage that refers explicitly to a state’s need to protect itself against the nomads without this being linked to a previous Chinese expansion. This is from a debate that took place in 307 BCE at the court of the same King Wuling of Zhao during which the king strove to persuade his advisors to adopt cavalry and follow the example set by the nomads. The king said, ‘Without mounted archers how can I protect the frontier against Yan, the Hu, Qin and Han?’ In the context of the debate, however, the nomads (that is, the hu people) were not the only threat to Zhao, and throughout the whole speech it is evident that the ‘protection’ argument was accompanied by an even more pronounced expansionist argument. In any case, unlike the adoption of cavalry, the building of walls is not mentioned in connection with the protection from nomads or any other enemy.

Zhaoxiang = 秦昭襄王 or 秦昭王

Yiqu Rong = 義渠戎王

hao = 昭

King Wuling = 赵武灵王

Lin Hu and the Loufan 林胡 楼烦

Dai 代

Yin Mountains 阴山

Gaoque 高阙

与本文所论问题相关的赵国西北方边境,形成于赵武灵王“胡服骑射”之后。《史记》卷110《匈奴列传》载:“秦昭王时,义渠戎王与宣太后乱,有二子。宣太后诈而杀义渠戎王于甘泉,遂起兵伐残义渠。于是秦有陇西、北地、上郡,筑长城以据胡。而赵武灵王亦变俗胡服,习骑射,北破林胡、楼烦,筑长城,自代并阴山下,至高阙为塞,而置云中、雁门、代郡。”这道“自代并阴山下,至高阙为塞”的长城,就是赵国在其西北方的边界


특히 장성이 처음 지어질 시기, 전국시대에는 북방이민족에 대한 특별한 경계의식이 없었고, 때로는 서로 힘을 합하고, 때로는 싸우는 관계였다. 이런 관계는 "중국"이라고 불리는 내부에서도 동일하게 벌어지던 일이었다.

据《史记》卷6《秦始皇本纪》记载,始皇三十二年,“乃使将军蒙恬,发兵三十万人,北击胡,略取河南地”。翌年,蒙恬取得成功,“西北斥逐匈奴”。于是“自榆中并河以东,属之阴山,以为三十四县,城河上为塞……徙谪,实之初县。”《史记》卷110《匈奴列传》记载同一事件,云蒙恬“北击胡,悉收河南地,因河为塞,筑四十四县城临河,徙谪戍以充之”。所谓“河南地”,应当是指由秦昭襄王长城向外推延,直至黄河岸边这一广阔区域

《汉书》卷52《韩安国传》相关记载原文为:“蒙恬为秦侵胡,辟数千里,以河为竟,累石为城,树榆为塞。”

--> 어디까지나 중국 북방 왕국이 공격적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료


This is the core evidential ground based on which scholars have argued that the northern walls had a defensive purpose, and had been erected as a protection against nomadic attacks. However, none of these statements says that walls were constructed as a result of, or as a response to, nomadic attacks on Chinese people. What they say is that the walls were built to ‘repel’ or ‘contain’ the nomads after the states had advanced deeply into their lands, had occupied their territory, and had set up military commanderies. The building of fortifications proceeded hand in hand with the acquisition of new territory, the transfer of troops to this region, and the
establishment of new administrative units. The states of Qin, Zhao and Yan needed to protect themselves from the nomads only after they had taken large portions of territory from them.

장성이 방어적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들의 발언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에 불과하다. 실제로 진, 조, 연이 이민족에 대한 방어가 필요해 진 것은 어느 정도 세력이 갖추어진 뒤였고, 장성은 그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Having examined the textual evidence, let us turn briefly to the archaeological context. The material culture of non-Chinese people in what has been called the Northern Zone is fairly well known. Archaeological excavations throughout the Great Wall region, reveal the presence of a large number of bronze objects, such as knives and swords, belt plaques, horse ornaments, and precious objects. Archaeologists and art historians have long recognized this as a fully separate cultural complex which developed continuously from at least to the second millennium BCE, and usually cite among its salient features a distinctive metallurgical production and stylistic idiom, in particular the ‘animal style,’ and connections with the greater Siberian and Central Asian ‘Scythian’ art. Some of the most precious objects, usually in gold, come from the Ordos region. The remains of the Chinese walls crop up for the most part in the middle of this area, across grassland plateaus and deserts or in rough mountainous country. Chinese Warring States coins, pottery shards, and lacquered objects have been found, but the Chinese presence here at this early time was limited only to sites connected with the wall fortifications themselves, showing that military colonies and troops were stationed in an otherwise ‘barbarian’ cultural environment. For sure the walls were not built between Chinese and nomads, but ran, from a Chinese viewpoint, through a remote territory inhabited by foreign peoples. Some of these peoples were incorporated within the perimeter of the walls, some remained outside.

오르도스를 포함한 장성지역은 다양한 문화와 기술들이 서방으로부터 유입되던 지역이었다. 중국의 입장에서도 이를 받아들여야했다. 그러므로 장성은 중국과 유목민같에 세워진 것이 아니고, (중국의 관점에서는)  외국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지역으로 사용되었다.

If we wish to understand the early function of the walls, it is on the Chinese soldiers that we should concentrate, not on the Chinese farmers. Why were the soldiers stationed so far to the north, in alien territory? The only conclusion that the evidence would support, in my view, is that the walls’ and soldiers’ presence in the northern regions is consistent with a pattern of steady territorial growth by the states of Yan, Zhao, and Qin. They developed the system of long lines of fortifications to expand into the lands of nomadic or semi-nomadic peoples, and fence them off. Soldiers defended this territory against nomadic peoples possibly expelled from their pastures. This military push created a pressure on nomads that in turn led to a pattern of hostilities. The walls, in other words, were part and parcel with an overall expansionist strategy by Chinese northern states meant to support and protect their political and economic penetration into areas thus far alien to the Chinese world. This is consistent both with the general trend of relations between Chinese states and foreign peoples and with the political, economic and military imperatives facing the Warring States in the late fourth century BCE. It was at this time that northern Chinese states began to pay attention to cavalry and to develop mounted warfare, and the local pastoral people were surely more suited to this task than the sedentary Chinese. The walls were, in other words, part of a system designed to enclose and establish exclusive access to a precious reservoir of human and material resources at a time when the bitter struggle among Chinese states had become deadlier than ever, and every state was striving to exploit any means likely to increase its chances of survival. The walls were meant as a barrier not only against dispossessed nomads but also against competing Chinese states. As such, the origins of the Great Wall are closely linked to a military and political project that will eventually result in the imperial unification of China. Recognizing the historical origins of the Great Wall does nor diminish its symbolic power, but hopefully makes it less susceptible to a purely ideological interpretation.

오히려 장성의 초기 설립목적은 전국시대 북방국가들의 확장을 위한 전진기지와 같은 역할이다. 중국 정주민은 장성을 이용해서 유목민의 목장을 침략했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으로 나중에는 통일에 이르게 된다.




About the Author

Nicola Di Cosmo is Professor of East Asian History at the Institute for Advanced Study, School of Historical Studies (Princeton, N.J.). His main interests are in the history of frontier relations between China and Inner Asia, and in the social and political history of Mongols, Manchus, and other peoples of north and Central Asia. His books include: Ancient China and Its Enemies: The Rise of Nomadic Power in East Asian History (2002); Warfare in Inner Asian History (500—1800) (ed., 2002); A Documentary History of Manchu-Mongol Relations (1616-1626) (coauthored with Dalizhabu Bao, 2003); Political Frontiers, Ethnic Boundaries and Human Geographies in Chinese History (coedited with Don J. Wyatt, 2003); and The Diary of a Manchu Soldier in Seventeenth-Century China (2006).


원래 몽고어와 만주어를 배워서 박사 논문은 청대에 대한 논문이다. 그의 대부분의 논문이 기존의 것을 반대하는 주장을 펼친다. 그 근거가 되는 것은 보통 고고학자료이다. 문제는 그의 고문(중국어)능력이 비교적 높지 않은지라 논문에서 몇가지 문제가 나타난다. 이 점은 주의해서 원문을 참고할 필요가 있을듯 하다.

References
Di Cosmo 2002
Nicola Di Cosmo. Ancient China and Its Enemies: The Rise of Nomadic Power in East Asian Histor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Jagchid and Symons 1989
Sechin Jagchid and Van Jay Symons. Peace, War, and Trade Along the Great Wall: Nomadic-Chinese interaction through two millennia.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9.


Lattimore 1937
Lattimore, Owen. “Origins of the Great Wall of China: A Frontier Concept in Theory and Practice.” Geographical Review, 27/4 (1937): 529-549.

--> 구해서 보아야될듯. 장성의 유목경계설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Lattimore 1940
Lattimore, Owen. Inner Asian Frontiers of China. New York: American Geographical Society, 1940.


Sima Qian 1993
Sima Qian. “Shi Ji 110: The Accout of the Xiongnu.” In: Sima Qian,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Translated by Burton Watson. 2 vols. Rev. ed.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3, vol. 2, pp. 129-162. Note: the quotations above from Sima Qian are my own translations.


Waldron 1990
Waldron, Arthur. The Great Wall of China: from History to Myth.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  장성을 역사의 대상으로 연구를 한 책. 중요한 책. 대부분이 명장성의 정치부호와 현실중에서의 군사 그리고 그것이 현대의 신화로 변화가 된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역사인류학계열. 예를 들어서 인민폐 내에서의 장성을 거론하면서, 예전에는 장성은 나쁜 부호였는데 근현대로 넘어오면서 좋은 부호, 심지어는 국가의 상징이 되었다.


Waldron 1995
Waldron, Arthur. “Scholarship and Patriotic Education: The Great Wall Conference 1994.” The China Quarterly, 143 (1995): 844-850.


Xu 2001
Xu Pingfang. “The Archaeology of the Great Wall of the Qin and Han Dynasties.” Journal of East Asian Archaeology, 3/1-2 (2001): 259-281.



라티모어도 장성의 기원에 대해서 논문을 작성했는데, 지리적으로 분석하면서, 농업과 유목의 분계선으로 해석하였다. 이 논문은 매우 유명한데, 장성과 농업과 유목의 분계선을 포괄적으로 이야기 했기 때문이다. 맨처음으로 중국의 농목충돌의 입장에서 장성을 이야기했다.



위의 이론대로라면 새로 해석 가능한 것들.

秦至西汉前期,匈奴是中原王朝在北方最大的边患,因此它也是秦朝重点防范的对象。이것은 흉노, 즉 유목민의 입장에서 좋은 목장(하영지)을 차지하기 위한 공격이 아니었을까?

“蒙恬死,诸侯叛秦,中国扰乱,诸秦所徙適戍边者皆复去。于是匈奴得宽,复稍度河南,与中国界于故塞。”所谓“故塞”,也就是旧时的边塞。此处所说的“故塞”,究竟是怎样的地理涵义,容下文再行详细阐述。这里首先来看一下西汉初年汉王朝在这一带的边防情况。- 辛德勇

여기서의 故塞의 해석을 다시 할 수 있다. 장성선이 아니라 그 이전에 장성을 쌓기 전에 존재했던 선일 가능성은?


秦始皇统一六国之前,秦国的北方边界是秦昭襄王时期修筑的长城。这道长城经过学者们的研究和考察,除个别地段还需要进一步深入探讨之外,其总体走势大致已经清楚,一般认为,是由今甘肃岷县附近北行,至今甘肃临洮转而向东北蜿蜒延伸,斜贯今陇东、陕北的黄土高原,直至今内蒙古准格尔旗黄河岸边的十二连城附近。①

说详史念海:《黄河中游战国及秦时诸长城遗迹的探索》,《河山集》2集,北京:三联书店, 1981年,
第453—461页。彭曦:《战国秦长城考察与研究》,西安:西北大学出版社, 1990年,第1—235页。



반론의 가능성 - 폐기-_-;;

고대에는 식목의 북방한계선이 훨씬 높았다. 다시 말해서 해당 지역은 목장이 아닌 농장가능지역이었을 점에 대한 고증을 해볼 필요가 있다. ---》 이는 해당지역에 농사를 짓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으로 반론할 수 있으므로 통과



성 자체는 긴 구덩이(참호?!)가 발전된 형태이고, 초기의 형태는 홍수를 방어 혹은 동물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반포유적의 경우 참호로 보호되어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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