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삼국지라고 알고 있는 역사소설인 삼국연의를 봐도 그렇고, 실제 삼국지나 기타 여러 정사를 보아도 그렇고, 동탁은 상당한 악역으로 등장을 해. 사실 그가 행한 것에는 과거의 관점으로 봐서 상당한 악행들이 있긴 있어. 대표적으로 마음대로 황제를 갈아치운건 정말 아름다운~ 행동이지. 그런데 말이야. 그냥 동탁이 나쁜넘이라고만 하기에는 좀 불쌍해서....사실 욕 먹은 것으로 따지면 영생을 구가해야될 듯 해서 조금 칭찬 좀 해줄려고~~~

诏除公卿以下子弟为郎,以补宦官之职,侍于殿上。
바로 : 조서를 내려, 공경이하의 자제를 낭으로 삼고, 환관의 자리를 대신하여, 전상에서 일하게 하였다.

권중달 : 조서를 내려 공경 이하 사람들의 자제들에게 벼슬을 주어 낭으로 삼아 환관의 자리를 메우고 전각의 위에서 모시는 일을 하게 하였다.

董卓率诸公上书,追理陈蕃、窦武及诸党人,悉复其爵位,遣使吊祠,擢用其子孙。
바로 : 동탁은 여러 공들을 이끌고 상서를 하여, 진번과 두무 및 여러 당인들을 조사하여, 그 작위를 복원하고, 사자를 보내 조문하고, 그 자손을 기용하게 하였다.

권중달 : 동탁이 여러 공들을 인솔하여 편지를 올리니 진번과 두무, 그리고 모든 당일들을 다시 조사해여 그들의 작위를 모두 회복시켜 주었으며, 사자를 보내서 사당에 조문하고 그들의 자손을 발탁하여서 기용하였다.

자치통감 권 59

-- 원래는 제 해석본(해석이라고 해도 그냥 막번역한거지만...)만 올릴까 했는데...권중달님 것을 보니...제가 상당히 대중적이지 못하게 대충 번역한거 같아서 같이 올립니다.

동한시대의 정치사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라고 본인에게 말한다면, "환관과 외척이 황제를 중심으로 박터져라 주구장창 싸운 이야기"라고 하고 싶다. 그리고 핵심 키워드를 잡는다면 당연히 "환관"과 "외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환관들의 전횡이 심하여, 사대부들의 계속된 요구는 환곤들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계속되는 정치투쟁 속에서 "당인"으로 올려져서 자신뿐만이 아니라 그 자손까지 관직에 오를 수 없게 된 사람들을 복원시키는 문제였다.

위의 사료로 동탁이 동한시대내내 사대부들이 원했던 환관척격과 당인 복원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동탁은 사대부들의 오랜 숙원을 풀어준 은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탁은 시골 촌구석에서 올라온 뼈대도 없는 굴러먹던 개뼈다구여서 이런 사실들이 무시될 뿐이다. 우리 동탁도 잘한 짓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하자^^;;;

사실 다른 하나가 더 있는데, 태후압박과 같은 일을 통해서 외척세력을 눌러버렸다. 물론 그것이야 자신의 권력을 위한 성향이 강했으니..물론 위의 사대부의 숙원을 풀어준 것도 굳이 말하면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라고도 할 수 있겠다만......

그냥...동탁이 너무 가련해서 한번 써봤다. 여친 생기고...몇 일동안 글을 안 쓰기도 했고 말이야....사실 지금 중국 10대뉴스니, 중국 10대 유행어니 이것저것 적당히 쓸만한 것도 많은데 말이야. 레폿이나 하자.

江統《徙戎論》

 

時關隴屢為氐羌所擾,孟觀西討,自擒氐帥齊萬年。統深惟四夷亂華,宜杜其萌,乃作徙戎論。其辭曰:
夫夷蠻戎狄,謂之四夷,九服之制,地在要荒。春秋之義,內諸夏而外夷狄。以其言語不通,贄幣不同,法俗詭異,種類乖殊;或居絕域之外,山河之表,崎嶇川谷阻險之地,與中國壤斷土隔,不相侵涉,賦役不及,正朔不加,故曰「天子有道,守在四夷」。禹平九土,而西戎即敘。其性氣貪婪,凶悍不仁,四夷之中,戎狄為甚。弱則畏服,強則侵叛。雖有賢聖之世,大德之君,咸未能以通化率導,而以恩德柔懷也。當其強也,以殷之高宗而憊於鬼方,有周文王而患昆夷、獫狁,高祖困於白登,孝文軍於霸上。及其弱也,周公來九譯之貢,中宗納單于之朝,以元成之微,而猶四夷賓服。此其已然之效也。

故匈奴求守邊塞,而侯應陳其不可;單于屈膝未央,望之議以不臣。是以有道之君牧夷狄也,惟以待之有備,禦之有常,雖稽顙執贄,而邊城不弛固守;為寇賊強暴,而兵甲不加遠征,期令境內獲安,疆埸不侵而已。[Baro1] 

及至周室失統,諸侯專征,以大兼小,轉相殘滅,封疆不固,而利害異心。戎狄乘間,得入中國。或招誘安撫,以為己用。故申繒之禍,顛覆宗周;襄公要秦,遽興姜戎。當春秋時,義渠、大荔居秦晉之域,陸渾、陰戎處伊洛之間,鄋瞞之屬害及濟東,侵入齊宋,陵虐邢衛,南夷與北狄交侵中國,不絕若線。齊桓攘之,存亡繼絕,北伐山戎,以開燕路。故仲尼稱管仲之力,嘉左衽之功。

逮至春秋之末,戰國方盛,楚吞蠻氏,晉翦陸渾,趙武胡服,開榆中之地,秦雄咸陽,滅義渠之等。始皇之并天下也,南兼百越,北走匈奴,五嶺長城,戎卒億計。雖師役煩殷,寇賊橫暴,然一世之功,戎虜奔卻,當時中國,無復四夷也。

漢興而都長安,關中之郡號曰三輔,禹貢雍州,宗周豐、鎬之舊也。及至王莽之敗,赤眉因之,西都荒毀,百姓流亡。建武中,以馬援領隴西太守,討叛羌,徙其餘種於關中,居馮翊、河東空地,而與華人雜處。數歲之後,族類蕃息,既恃其肥強,且苦漢人侵之。永初之元,騎都尉王弘使西域,發調羌氐,以為行衛。於是群羌奔駭,互相扇動,二州之戎,一時俱發,覆沒將守,屠破城邑。鄧騭之征,棄甲委兵,輿尸喪師,前後相繼,諸戎遂熾,至於南入蜀漢,東掠趙魏,唐突軹關,侵及河內。及遣北軍中候朱寵將五營士於孟津距羌,十年之中,夷夏俱斃,任尚、馬賢僅乃克之。此所以為害深重累年不定者,雖由禦者之無方,將非其才,亦豈不以寇發心腹,害起肘腋,疢篤難療,瘡大遲愈之故哉!

自此之後,餘燼不盡,小有際會,輒復侵叛。馬賢忸,終于覆敗;段熲臨衝,自西徂東。雍州之戎,常為國患,中世之寇,惟此為大。漢末之亂,關中殘滅。魏興之初,與蜀分隔,疆埸之戎,一彼一此。魏武皇帝令將軍夏侯妙才討叛氐阿貴、千萬等,後因拔棄漢中,遂徙武都之種於秦川,欲以弱寇強國,扞禦蜀虜。此蓋權宜之計,一時之勢,非所以為萬世之利也。今者當之,已受其弊矣。

夫關中土沃物豐,厥田上上,加以涇渭之流溉其舄鹵,鄭國、白渠灌浸相通,黍稷之饒,畝號一鍾,百姓謠詠其殷實,帝王之都每以為居,未聞戎狄宜在此土也。非我族類,其心必異,戎狄志態,不與華同。而因其衰弊,遷之畿服,士庶翫習,侮其輕弱,使其怨恨之氣毒於骨髓。至於蕃育眾盛,則坐生其心。以貪悍之性,挾憤怒之情,候隙乘便,輒為橫逆。而居封域之內,無障塞之隔,掩不備之人,收散野之積,故能為禍滋擾,暴害不測。此必然之勢,已驗之事也。

當今之宜,宜及兵威方盛,眾事未罷,徙馮翊、北地、新平、安定界內諸羌,著先零、罕幵、析支之地;徙扶風、始平、京兆之氐,出還隴右,著陰平、武都之界。廩其道路之糧,令足自致,各附本種,反其舊土,使屬國、撫夷就安集之。戎晉不雜,並得其所,上合往古即敘之義,下為盛世永久之規。縱有猾夏之心,風塵之警,則絕遠中國,隔閡山河,雖為寇暴,所害不廣。是以充國、子明能以數萬之眾制群羌之命,有征無戰,全軍獨克,雖有謀謨深計,廟勝遠圖,豈不以華夷異處,戎夏區別,要塞易守之故得成其功也哉!

難者曰:方今關中之禍,暴兵二載,征戍之勞,老師十萬,水旱之害,荐饑累荒,疫癘之災,札瘥夭昏。凶逆既戮,悔惡初附,且款且畏,咸懷危懼,百姓愁苦,異人同慮,望寧息之有期,若枯旱之思雨露,誠宜鎮之以安豫。而子方欲作役起徒,興功造事,使疲悴之眾,徙自猜之寇,以無穀之人,遷乏食之虜,恐勢盡力屈,緒業不卒,羌戎離散,心不可一,前害未及弭,而後變復橫出矣。

答曰:羌戎狡猾,擅相號署,攻城野戰,傷害牧守,連兵聚眾,載離寒暑矣。而今異類瓦解,同種土崩,老幼繫虜,丁壯降散,禽離獸迸,不能相一。子以此等為尚挾餘資,悔惡反善,懷我德惠而來柔附乎?將勢窮道盡,智力俱困,懼我兵誅以至於此乎?曰無有餘力,勢窮道盡故也。然則我能制其短長之命,而令其進退由己矣。夫樂其業者不易事,安其居者無遷志。方其自疑危懼,畏怖促遽,故可制以兵威,使之左右無違也。迨其死亡散流,離X未鳩,與關中之人,戶皆為讎,故可遐遷遠處,令其心不懷土也。夫聖賢之謀事也,為之於未有,理之於未亂,道不著而平,德不顯而成。其次則能轉禍為福,因敗為功,值困必濟,遇否能通。今子遭弊事之終而不圖更制之始,愛易轍之勤而得覆車之軌,何哉?且關中之人百餘萬口,率其少多,戎狄居半,處之與遷,必須口實。若有窮乏糝粒不繼者,故當傾關中之穀以全其生生之計,必無擠於溝壑而不為侵掠之害也。今我遷之,傳食而至,附其種族,自使相贍,而秦地之人得其半穀,此為濟行者以廩糧,遺居者以積倉,寬關中之逼,去盜賊之原,除旦夕之損,建終年之益。若憚暫舉之小勞,而忘永逸之弘策;惜日月之煩苦,而遺累世之寇敵,非所謂能開物成務,創業垂統,崇基拓跡,謀及子孫者也。

并州之胡,本實匈奴桀惡之寇也。漢宣之世,凍餒殘破,國內五裂,後合為二,呼韓邪遂衰弱孤危,不能自存,依阻塞下,委質柔服。建武中,南單于復來降附,遂令入塞,居於漠南,數世之後,亦輒叛戾,故何熙,梁慬戎車屢征。中平中,以黃巾賊起,發調其兵,部眾不從,而殺羌[Baro2] 。由是於彌扶羅求助於漢,以討其賊。仍值世喪亂,遂乘釁而作,鹵掠趙魏,寇至河南。建安中,又使右賢王去卑誘質呼廚泉,聽其部落散居六郡。 咸熙之際,以一部太強,分為三率。泰始之初,又增為四。於是劉猛內叛,連結外虜。近者郝散之變,發於穀遠。今五部之眾,戶至數萬,人口之盛,過於西戎。然其天性驍勇,弓馬便利,倍於氐羌。若有不虞風塵之慮,則并州之域,可為寒心。

滎陽句驪本居遼東塞外,正始中,幽州刺史毋丘儉伐其叛者,徙其餘種。始徙之時,戶落百數,子孫孳息,今以千計,數世之後,必至殷熾。今百姓失職,猶或亡叛,犬馬肥充,則有噬齧,況於夷狄,能不為變!但顧其微弱勢力不陳耳。

夫為邦者,患不在貧而在不均,憂不在寡而在不安。以四海之廣,士庶之富,豈須夷虜在內,然後取足哉!此等皆可申諭發遣,還其本域,慰彼羇旅懷土之思,釋我華夏纖介之憂。惠此中國,以綏四方,德施永世,於計為長。

帝不能用。未及十年,而夷狄亂華,時服其深識。

 

來自于中國國學網2006-4-11;

 

相關信息 :

江統(-310年),字應元(一說元世、德元),西晉陳留圉(今河南省杞縣南)人。元康九年(299年)太子洗馬(太子宮圖書管理官)江統於齊萬年事件之後,作〈徙戎論〉著稱於世。

 


 [Baro1]신하로 삼지 않고 연합만 해서 변방을 지키는 용병으로 사용

 [Baro2]Qu ...북방계 언어의 관직이름과 상관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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