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때에는 손해가 곧 행복이다.


과거 돈 있는 사람들의 생일연회에서 가장 많이 공연된 것은 곽자의(郭子儀)의 이야기이다. 곽자의는 당(唐)황제들도 언제나 그를 공손히 대접하였다. 그는 관직이 높았을 뿐만이 아니라  그가 죽은 뒤에도 수 많은 자손들이 오랜 시간동안  부귀영화를 누렸다.

군주 곁에 있는 것은 호랑이 곁에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는데 곽자의같은 수십만 대군을 이끈 무장이 황제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고 이런 행복을 누렸다는 것은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곽자의가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비록 곽자의가 일개 무장에 불과하지만 황제접대학에 정통했기 때문이다.

사기(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곽자의는 자주 자신의 부하의 승진을 황제에게 신청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그의 요구를 완전히 무시하고는 했다. 곽자의의 아들들은 "곽가가 없었으면 황제의 성이 달랐을 것인데! 어찌 곽가의 체면을 이리도 무시하는가!!!"라며 화를 내었다.

그러나 곽자의만은 오히려 너무나 기뻐하였다. 황제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무장에 의한 반란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어떤 무장의 반란이 걱정이 된다면 그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곽가의의 요구를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은 황제가 곽가의를 완전히 믿고 있다는 것이니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황제는 권력은 어마어마하지만, 용기가 없는 졸장부이다. 비록 무한한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주위에 언제든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능력이 있는 모든 신하들은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그렇기에 곽자의가 자신의 추천이 통과되지 못할 것을 몰랐을까? 오히려 무리한 추천을 통하여 황제가 위엄을 발휘할 기회를 준 것이다.


당(唐)대의 대장군 혼감(渾瑊)도 황제에게 올린 보고서가 칭찬 일색이면 두려워하였고, 비평이 많으면 기뻐했다고 한다. 황제가 의심하고 말고는 그렇게나 중요한 것이다. 어떨 때는 손해가 곧 행복인 것이다.


욕을 한다는 것은 당신을 어렵게 보지 않고 자신의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몇 마디의 지적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상사가 당신에게 언제나 예의를 지키고 마땅히 지적해야 될 곳도 넘어가 버린다면 당신은 조심에 또 조심을 해야할 것이다.



어떤 이는 이런 도리를 알지 못하고 일말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고 한다. 진(陳)나라의 개국공신인 후안도(侯安都)는 체면을 위해서 억지로 황궁에서 가족연회를 열었다. 당시 황제는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 행동하였지만 기회를 잡아서 후안도를 죽여버렸다.


당현종(唐玄宗)의 심복인 대장군 왕모중(王毛仲) 역시 자신의 공로와 황제의 총신을 믿고서 어떠한 손해도 원하지 않았다. 한번은 그의 둘째 마누라가 아들을 낳자 100일도 지나지 않은 아이에게 관직을 달라고 하였다. 황제가 5품관직을 내려주었음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내 아들인데 3품관직정도는 받아야되지 않는가?!"라고 계속 졸랐다. 그리고 어떤 아부꾼 신하는 황제가 아직 윤허를 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3품관복을 벗어서 아이에게 덮어주었다. 황제도 "그 아이에게는 3품관리의 의복이 어울리는구나"라면서 결국 허락을 한다.


결국 어떻게 됐을 것 같은가? 그 뒤로 몇 달만에 왕씨가문은 몰락하고 왕모중 역시 자살을 강요당한다. 왕모중은 모반을 꿈꾸지도 않았고, 충성이 변하지도 않았지만 자신이 왜 죽는지도 모르고 끝을 맞이하였다.



당신이 설령 대신이고 대장군일지라도 천하에서 가장 체면을 필요로 하는 황제의 체면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라.


자신의 체면은 어떻게 하냐고? 체면을 지키고 싶은가? 죽고 싶은가?



본 글에 관련된 내용은 역사에서 처세술을 배운다 : 황제접대학 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환영합니다. 
본 글은 한국인에 적합하도록 의역하였습니다.
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1. 2013.01.19 21:41

    곽자의는 ㅡ 대접하였다. 비문임

  2. 2013.01.19 21:46

    띄어쓰기 스트레스는 면제

 


멀어지면 근심하고, 가까워지면 고민이네

중국 고대 몇 천 년의 봉건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한번이라도 황제를 뵙기를 소망하였고, 황제가 하사한 성은이 넘치기를 원하였다. 만약 황제의 곁에 있게 된다면 가문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잠시만 잘 생각해보자. 군주 곁에 있는 것은 호랑이 곁에 있는 것과 같다. 황제의 권력은 분명 강력하여 그 반사이익을 누릴수 있다면 어마어마한 권세와 부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황제의 성격이 거지 같기 마련이기에 조금이라도 성격을 건드리면 큰일이 나고 만다.


그래서 황제와 자주 대면을 해야되는 사람들에게 "황제접대학"은 고위험 고수익의 필수과목이었다. 만약 황제를 잘 접대한다면 부귀영화가 굴러들어오게 되지만, 조금의 잘못이라도 있게 되면 목숨이 날아가기 마련이다. 부귀영화와 목숨이 달린 일인데 어찌 열심히 배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보통 황제와 멀어지면 나쁘고, 가까우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도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황제와 멀었을 때는 대접을 받아놓고서는 정작 황제의 곁으로 와서는 화를 당하고는 한다. 정말이냐고? 정말이다. 



예를 들어서 서한(西漢)의 가의(賈誼)는 능력이 출중한 인재였다. 그가 작성한 과진론(過秦論)은 그가 죽은 뒤에도 몇 십년간이나 정치-군사 형세를 좌지우지하였다. 물론 당시의 황제인 한무제(漢武帝)도 매일 매일 가의를 자신의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가의가 매번 황제를 볼 때마다 승진은 고사하고 병신꼴이 되어갔다. 한번은 어렵게 밤의 객잔에서 둘 만의 자리를 가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그에게 귀신이야기나 들려달라고 했으니 말이다. 답답해서 미칠 노릇이었을 것이다.



남북조시대의 북제(北齊)인 이덕림(李德林)도 괜찮은 예시가 될 것인다. 그는 문재가 뛰어날 뿐만이 아니라 군사적 재능도 있었다. 처음 북제(北齊)에서 관리를 하고 있을 때 훗날 중국을 통일한 당시 북주(北周)의 대신 양견(楊堅)은 언제나 그를 칭찬하면서 자신의 품으로 오기를 갈망하였다. 결국 이덕림은 양견의 수하로 들어오게 되고 천하를 통일하는데 크게 이바지 하게 된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양견은 천하가 통일이 되면 이덕림을 후대할 것이라고 공언 하여 천하의 부러움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덕림은 양견을 모시는 10년동안 월급은 한푼도 오르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결국에는 "공무원의 상업금지"이라는 명목으로 쫓겨나게 된다.



사실 그들도 나름 재수가 좋은 편이라고 해야될 것이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기 전에 자신은 한비자(韓非子)을 신하로 둘 수 있는 그릇이 아니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진시황은 한비자를 발탁하고서는 결국 옥에 가두고 죽여버렸다. 


황제를 제대로 접대하지 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상사를 잘 모시지 못해도 직장을 잃을 뿐이니 다행이라고 해야될까?



황제는 천하제일의 의심광일 뿐만이 아니라 자기만 아는 녀석이다. 무엇보다 천하에서 가장 탐욕스러운 인간이다. 어떤 물건이든 모두 그의 것이어야만 한다. 인재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가의나 한비자 혹은 이덕림 역시 자신의 품에 있지 않을 때에는 그들을 차지하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진짜 그들을 가지게 되면 의심병이 발동한다. 우선 "저녀석이 그렇게 잘났으면 난 먼데?"라는 질투심이 생겨난다. 그 다음으로 "저 녀석의 잘난 능력으로 지금은 나를 도와줄 수는 있지만, 결국 나를 해치려는 거 아냐?"라고 하는 두려움이 생겨난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황제 아래서 아무리 뛰어난 인재든 살아남기 힘들다.


소동포(蘇東坡)는 가의가 주발(周勃)이 천평(陳平)과 같은 다른 공신들과 친하지 못해서 권력싸움에서 소외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틀렸다. 만약 황제의 마음에 일말의 틈이 없었다면 어떤 신하가 뭐라고 지껄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무엇보다 주발 역시 한무제의 눈 밖에 나서 옥에 갇히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오히려 가의가 주발과 친한 사이였다면 더욱 큰 일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황제의 입장에서는 "능력 있는 것들끼리 뭔 짓을 하려고 하려고 그렇게 친한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황제접대의 좋은 예인 사마상여(司馬相如)를 살펴보자. 사마상여 역시 처음에는 이덕림과 같은 처지였다. 발탁이 되기 전에는 황제가 직접 "왜 나에게는 이런 인재가 없느냐?"라고 해놓고 정작 정식으로 임용이 되자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자 사마상여는 직접 지방관리직을 신청하여 황제와 멀어진 뒤에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서는 다시 중앙으로 불려와서는 황제에게 태산에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큰 일을 건의해서 한무제(漢武帝)의 마음을 뒤 흔들어 놓는다. 그리고서는 빠르게 퇴직신청을 해서 자신의 집에서 떵떵거리고 산다.


이것이 바로 "멀어지면 근심하고, 가까워지면 고민이네"라는 원리이다. 사실 다 쓸데 없는 소리일수도 있다. 어떻게 황제의 의심을 받지 않느냐가 처세의 핵심이다!


본 글에 관련된 내용은 역사에서 처세술을 배운다 : 황제접대학 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본 글은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환영합니다. 
본 글은 한국인에 적합하도록 의역하였습니다.(퇴....고...따위...훗_-)
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1. 下午 2013.01.17 00:43

    很有意思。

  2. 2013.01.19 21:50

    쫓겨나게

황제접대학은 어떻게 상사와의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할 것인가에 관한 학문이다. 중국은 몇 천 년동안 절대적인 황제의 지배를 받아왔고, 그 속에서 상사와의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예술적이라고 할 수 있는 방법들이 쌓여 있다.

어떻게 이익을 취하고 해악을 피할 것인가?
어떤 시기에 주동적으로 나설 것이고 어떤 시기에 수동적으로 피할 것인가?
어떤 때에 현명할 것이고 어떤 때에 멍청한 척 할 것인가?
어떤 것을 쟁취하고 어떤 것을 양보할 것인가?

그런데 중국 역사는 일반인들이 직접적으로 소화하기에는 규모와 깊이에 질릴 수 밖에 없다. 그런 현대인들을 위해서 황제접대학에서는 일반인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이 자리를 빌어 여러분들에게 소개해볼까 한다.





목차 :
1. 들어가는 말
2. 황제접대학을 시작하며
3. 멀면 근심하고 가까우면 고민이네
4. 어떤 때는 손해가 곧 행복이다.
5. 要学会眼睛里揉沙子
6. 真的"胜棋"就麻烦了
7. 给皇帝一个偷懒的机会
8. 谁是"自己人"
9. 得给自己的脑袋找顶钢盔
10.别把皇靴供起来
11.有时候高官厚禄也能硬讨
12. 顶嘴未必就吃亏
13. 混蛋就得一直混蛋下去
14. 羊有时比狼更可怕
15. 有时候该"贪"就得"贪"
16. 泥菩萨有时砸不得
17. 有时候方术也得信
18. 没事别当偷窥狂
19. 树也不是小问题
20. 顶嘴是需要技巧的 
21. 天下有事再生事
22.  帽子太大戴着累 
23. 扯来虎皮做大旗
24. 要弄清皇帝为啥不用您
25. 应聘CEO 您可想清楚了
26. 撒娇前先照照镜子
27. 舍得孩子也未必套得住狼



작가소개 : 타오두안팡(陶短房)

본명은 타오용(陶勇)이며, 캐나다에 거주하는 대중작가이다. 과거 장기간 아프리카에 거주한 경험을 살려서 현재 종헝주간(縱橫周刊)의 아프리카 문제 연구원으로 있으며, 취미생활인 태평천국사 연구로 이름을 알렸다. 소설, 수필, 문화평론등 다양한 글을 출판하고 있다. 그는 분명 전문적인 역사 연구가는 아니다. 그렇기에 대중을 대상으로 한 간략하면서도 유익한 글을 쓰고 있다.




번역에 대한 이야기

본 글은 원문에 충실한 직역번역은 분명히 아닙니다. 제 마음대로 문장을 늘리거나 요약해놓았습니다. 하지만 그 원문의 뜻은 벗어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어디까지나 한국인들에게 보다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제가 생각하는 허용한도 안에서 최대한의 의역을 했습니다


중국어를 하실 수 있는 분은 从历史掌故说相处的艺术:皇帝公关学로 가셔서 원문으로 즐기시기를 추천드립니다.

본 글은 상업적인 목적으로 번역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재미있는 글을 여러분들과 나누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덧글로 힘을 주지 않으시면 귀차니즘으로 번역 때려칠지 모릅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반응 없어서 때려친 것이 좀 있습니다.(먼산)


본 내용은 원저작권은 타오두안팡에게 있으며, 상업적인 목적으로 번역할 생각이 없기에 따로 번역 허락을 받지 않았습니다. 추후 본 서적이 정식으로 출판이 되면 이 시리즈를 비공개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단, 번역물에 대한 저작권은 저에게 있습니다. 당 번역물을 가지고 가시려면 명확한 출처표기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1. 下雨 2013.01.15 22:08

    加油!

  2. Zuno 2013.01.16 09:22

    좋은 내용이 될 것 같습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힘내 주시길... ^^;

  3. laurie 2013.01.17 10:48

    꼭 읽어보고 싶으네요!! 기대하겟습니다

  4. 2013.01.19 23:34

    관계를
    맞춤법은 오타인 것으로 보이나 띄어쓰기는 오류패턴이 일정한 것으로 볼 때 틀렸다라 할 수 있겠으나 저 정도를 딴지거는 네티즌은 없을 것...

제 5장 : 친척의 덕을 보다.

-- 사촌지간의 정

618년 수나라는 멸망하였다.

이때 왕박(王薄)이라고 부르는 한 농민은 <무향요동랑사가 无向辽东浪死歌>를 만들었고 대히트하였다. 마치 예전에 "DJ.DOC와 함께 춤을"을 할아버지부터 미취학아동까지 모두가 불렀던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무슨 뜻이냐고? "요동으로 가면 쳐 죽으니까 가지 마라"라는 아주 단순하면서 당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가사였다. 그 당시의 온갖 농민운동이나 그 외의 잡다한 난리들이 모두가 이놈의 무향요동랑사가로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난리부르스 속에서 강도(江都), 그러니까 지금의 양조우(扬州)에 있었던 황제를 호위해야될 금위군(禁卫军)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수양제(隋炀帝)는 때가 왔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의 허리띠를 풀러서 심복에게 주고, 목 졸라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혼자 죽을 용기는 없었나 보다.

그런데 수도가 장안인데 수양제는 왜 양주라는 중국의 남방에서 죽었을까? 사실 수양제 제위 18년 중에 13년을 양주에서 지냈었다. 아마 중국의 통일 왕조 중에서 남방에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황제일 것이다. 수양제가 자주 양주에 있었기에, 어떤 이는 대운하가 어디까지나 수양제가 양주에서 놀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건 아니다. 막말도 적당히 해야된다. 대운하는 기본적으로 남북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조역통로로서 필요했었다.

어찌되었든 수나라는 581-618년이라는 딸랑 39년만에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다.

당나라의 개국황제 이원(李渊)은 진양(晋阳)에서 군대를 일으켜서 618년에는 스스로 황제라고 선언한다. 그가 바로 당고조(唐高祖)이다. 그는 국호를 당(唐)으로 정했다. 또한 수도를 장안으로 지정하였다. 이원은 수양제의 사촌동생이다.  그 둘의 어머니가 서로 친자매로 무협지에 자주 나오는 독고(独孤)씨였다. 이원은 수나라 시대에 당국공(唐国公)으로 진양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가 군대를 거병해서 관중의 장안으로 들어간 이후에 수양제의 손자를 황제로 세우고 수공제(隋恭帝)라고 하였다. 그리고 수양제를 태상황(太上皇)으로 추존하였다. 그리고는 모두가 예상했듯이 섭정을 하면서 실권을 다 장악해버린다. 왜 황제가 되지 않고 귀찮게 섭정을 했냐고? 당시 이원의 거병 이유는 어디까지나 살해된 사촌형 수양제를 위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래서 일단은 수양제의 장례를 성대하여 치루었다. 또한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도 하나하나 처리하기 시작했다.


-- 친형제의 난

626년 이세민(李世民)이 즉위하였다. 당태종(唐太宗)이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놈의 이세님의 즉위과정은 용의 눈물이라는 드라마로 유명한 이씨왕조의 태종이 떠오른다. 친형제간의 피가 튀기는 참혹한 광경을 보고 있으면, 권력 앞에서는 어떤 확실한 것도 없다는 것을 세삼 깨닭게 된다. 이세민은 현무문지변(玄武门之变)이라는 친형제살육전을 벌인다.

이세민은 현무문지변을 통해서 친형인 이건성(李建成)과 친동생인 제왕(齐王) 이원길(李元吉)을 살포시 죽여버린다. 그리고 친아버지를 협박해서 황제의 자리에서 물어나게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더 아름다운 것은 이런 짓을 해놓고서는 역사서를 고쳐버린 것이다. 현재 당시의 역사에서는 이세민이 죽여버린 이건성과 이원길을 천하의 호로자식으로 써놓고 있다. 그런데 병신에 바보같은 녀석들이 어떻게 수 많은 전공을 세울 수 있었을까? 또한 어떻게 태자가 될 수 있었을까? 조금만 생각해봐도 헛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교을 기본 사상으로 간직한 동양의 역사책 서술에 대해서 알아보자. 황제가 무슨 말을 하던 옆에 있는 사관(史官)은 그것을 모두 기록을 한다. 당시에는 비록 지금의 녹음기나 카메라 같은 것이 없었지만, 사관은 조정에서 황제가 하는 모든 말을 기록을 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 황제의 실록(实录)이 된다. 조선왕조실록도 바로 이러한 기록들의 모음이다.

그러나 황제 자신은 결코 실록을 볼 수가 없다. 명(明)나라와 청(清)나라는 강력한 왕권국가였지만 어떠한 황제도 실록을 보지 않았고, 볼 수도 없었다. 사실 어차피 실록이라는 것 자체가 그 자신의 기록이었으니 굳이 볼 필요가 있겠는가? 아! 물론 어디까지나 조정에서 대신과 말하는 것들의 기록이다. 황제도 사생활은 필요하지 않겠는가? 또한 본다고 하더라도 결코 바꿀 수 없다.

그런데 이넘의 이세민은 실록을 보았을 뿐만이 아니라, 바꾸기까지 했던 것이다. 황제가 직접 나서서 "이건 별로야. 지워버려. 안 지워? 너 죽을래?" 라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런 일들은 종종 발생하고는 했었다.

유명한 일이 "최저가 제장공을 시해한 사건 - 崔杼擅弑齐庄公"이다. 최저가 제환공을 죽이고 사관에게 "아파서 죽었다"라고 기록하라고 했지만, 사관은 사실대로 "최저가 제환공을 시해하였다"라고 적어버린다. 최저가 열받아서 사관을 죽여버리지만, 그에게는 3명의 동생이 있었다. 그리고 3명의 동생 모두 차례대로 사관에 임명되어서 사실대로 쓰고서는 죽임을 당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명만이 "사실대로 쓰는 것은 사관의 의무입니다. 만약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목숨만을 바란다면 죽느니만 못합니다. 또한 제가 쓰지 않아도 누군가는 쓸 것입니다. 설사 다른 이가 쓰지 않아도 당신의 죄는 결코 덮어지지 않으면 천하인들이 모두 욕할 것입니다." 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자 결국 최저는 역사조작을 포기하였던 일화가 있다.

그런데 이세민 때의 사관은 누구인지 바꾸어버리고 만다. 사관으로서의 의무는 어디 갔냐? 븅.


이렇게 이세민의 등극은 친형제를 죽이고 일어났고, 그 사실을 숨기려고 하지는 말아야 될 역사조작까지 감행하였지만! 그는 단순한 악인은 아니었다. 그 뛰어난 능력을 좋은 곳에 쓰기도 한다.

수양제는 당태종(이세민)의 오촌 아저씨였다. 또한 그의 장인이기도 하였다. 당태종의 한 첩이 수양제의 딸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촌 아저씨이자 장인 어른인 사람이 어떻게 망했는지 두 눈 똑똑히 지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당태종은 수나라 멸망의 교훈을 깊이 새기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였다.

그래서 역대 최강의 부자 정부였다는 수나라는 중국 역사상 3번째의 통일을 이룩하고는 38년만에 망하고 말았다. 그나마 진시황의 진(秦)나라가 딸랑 15년이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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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는 장난감이다."에 대해서 궁금하신 분은 위엔텅페이의 <중국사는 장난감이다>

본 글은 모든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과 환영합니다. 
본 글은 의역식 번역입니다.
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응??;; 먼가 전의 글과 문체가 상당히 다른 느낌이....끙...
이 글만 하는 것이 아니다보니 문제가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다.
아니;; 어차피 문체를 떠나서 글 내용 자체가 원문하고 점차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핵심이나 뼈대야 어차피 역사가 그게 그거니 같다만....음;;;;;;;
................................................
어차피 돈 받고 하는 것도 아닌걸.....
................
...
무엇보다 별로 덧글도 없고.....계속 해야되나...;;;
(라면서 덧글 유도+_+)




  1. 잘봤습니다. 2009.09.22 22:29

    ㅋ 무임승차좀 해보려 했더니...

    권력을 탐하다보면 그럴수도 있는게 세상이치인데 당태종도 어지간히 자신이 부끄러웠나봅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폐위만 시키고 죽이지는 않았나 보군요.

  2. 시골 2009.09.25 18:19

    아마 친족들도 친이세민과 반이세민으로 갈등을 겪었겠죠..

    골육상잔의 이야기와 한편으로, 패밀리 비지니스로 환상의 팀플레이 보여주는 이야기 양쪽을 보면..

    참 이해관계라는 것이 여러가지로 작용하게 되는구나 싶습니다.

    전에 이세민 이야기의 후속으로도 느껴지 잘 보았습니다. ^^

  3. Favicon of http://www BlogIcon 킹파르사 2009.09.25 22:40

    원문도 재밎지만 번역또한 구수하게 잘 번역하셨네요 .
    이책은 번역해서 출판하면 베스트셀러가 될듯한데요..

中国边疆地区史
A History of the Border Regions of China
北京大学历史系 王小甫
Wang Xiaofu, Peking University
  email:  xiaofuw@gmail.com, xiaofuw@pku.edu.cn


第一讲  中国历代疆域的变迁
第二讲  东北地区史
第三讲  北方地区史(上)  
第四讲  北方地区史(下)
第五讲  西北地区史(上,新疆)
第六讲  西北地区史(下,河西)
第七讲  西南地区史(上,西藏)
第八讲  西南地区史(下,云贵川边)
第九讲  华南地区史
第十讲  近代边疆民族问题


主要内容与演进线索:
第一讲 中国疆域变迁:“历史中国”——历代疆域变迁——近代失地

第二讲 东北:红山文化——肃慎靺鞨系:肃慎—挹娄—勿吉—靺鞨——渤海//——夫余濊貊系-高句丽//——【契丹-辽朝】——女真-金朝——【蒙古-元朝——明朝】——满族-清朝

第三、四讲 北方:匈奴突厥系/戎、东胡蒙古系/狄——匈奴——东胡:乌桓——鲜卑——柔然——突厥——唐朝(单于、安北都护)——〖回纥/回鹘〗——契丹-辽朝——蒙古-元朝——鞑靼-北元——俺答汗——清代蒙古(盟旗制度)

第五、六讲 西北-新疆:西域南北古今人群不同——汉唐之际南部绿洲:西域都护——西域长史——西戎校尉//北部草原:塞人——月氏——乌孙——高车——嚈哒//——西突厥——唐朝(安西、北庭都护)——吐蕃//回鹘——高昌回鹘//黑汗王朝——西辽——蒙古-察合台汗国——亦力把里——叶尔羌汗国——西蒙古(瓦剌/卫拉特/厄鲁特)-准噶尔汗国——清朝伊犁将军——新疆建省

第六讲 西北-河西:西羌——后秦——五凉——吐谷浑——党项-西夏——回回/东甘

第七讲 西南-西藏:吐蕃——古格/后弘期教派:宁玛、噶当、萨迦、噶举——蒙元时期:总制院/宣政院-萨迦法王——帕竹政权——格鲁派——明代:三大法王与五教王——活佛转世制度——明清之际蒙藏关系——五世达赖受册封——噶厦成立——驻藏大臣的权力和地位

第八讲 西南-云贵川边:西南夷——初郡——南中大姓和叟帅——两爨蛮(西爨白蛮、东爨乌蛮)——南诏——大理——元明清时代:建立行省,设置土司,改土归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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