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북쪽에서 남쪽을 치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중국고대의 모든 통일전쟁은 거의 대부분이 북방에 의한 남방통일이었다. 오직 명태조(明太祖)의 북벌만이 예외일 뿐이고, 이것 역시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 결과 몽골 원나라의 잔존세력을 소멸할 수가 없었고, 이후 명나라 역사에서 계속 골치거리로 남아 있게 되었다. 칭기즈칸의 자손들은 황태극(皇太极)에 의해서 마지막 몽골제국의 황제인 임단칸(林丹汗)이 패배하기 전까지 계속 칸의 자리에 있었다.

칭기즈칸에서 임단칸까지 482년, 35대의 칸을 배출하여 사실상 명나라와 계속 대치 상태에 있었고, 훗날 청나라가 된 후금(后金)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명조는 결국 원나라의 잔존세력을 멸망시키지 못한 것이다.

중국근대의 해방전쟁(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간의 전쟁)에서도 북쪽에서 시작하여 송화강(松花江)에서 해남도(海南岛)로 계속 내려오는 도강전투(渡江战役)를 생각해볼 수 있다. 역사상의 중국통일전쟁은 모두가 북에서 남으로 내려왔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 것이다.


이는 고대에는 북방의 경제가 발달하여서 남쪽의 야만인(남만 南蛮)을 공격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훗날 남쪽도 발전을 하게 되지만, 북방인들은 기마에 능하고, 전쟁수행능력이 뛰어난 반면에, 남방인들은 유들유들한 학자분위기였기에 승패는 거의 정해져 있었다. 또한 남방의 지형은 구릉지형[각주:1]으로서 쉽게 서로 간에 분리되어 독립하기 쉬웠다. 그에 비해서 북방의 지형은 평원으로서 쉽게 통일 될 수 있었고, 통일이 된 이후에는 내부을 결집하여 외부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렇게 북쪽에서 남쪽으로 공격하는 것이 쉬웠기에 수나라의 통일은 더욱 더 쉬웠고, 너무나 당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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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의역식 번역입니다.
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오늘 분량은 짦다.^^;;; 아싸리~ 아싸~~~~


  1. 남방의 지형은 한국의 산이 많은 지형이다. 그래서 산으로 숨어들어서 방어에 주력하면, 상대방을 공략할 수는 없지만, 방어를 하면서 스스로를 유지해갈 수는 있었다. [본문으로]
제 4장. 화려했던 당(唐)나라를 기리며...
1. 수(隋)의 위밍업

* 외할아버지 외손자의 황위를 빼앗다.

여러분들. 이제부터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강대했던 시기인 수당시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날 중화민족은 모두 56개이며, 한(汉)족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한족이 해외에서 모여 사는 곳인 ChinaTown은 "당나라 사람의 거리(당인가 唐人街)라고 불립니다. 다시 말해서 한(汉)나라와 당(唐)나라로 아직도 불려지고 있을 정도로 중국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두 왕조입니다. 한나라의 강력함은 이미 설명했었습니다. 그럼 당의 번영은 누가 그 기초를 만들었을까요? 바로 수나라입니다.

서기 581년 북주(北周)의 외척 양견(杨坚)은 나라 이름을 수(隋)로 하고 년호을 개황(开皇)이라고 하여 장안(长安 지금의 서안)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양견은 곧 수문제(隋文帝)입니다. 수문제는 북주의 외척이었지요. 외척이라는 것은 황제의 어머니나 아내의 가문, 혹은 태후나 황후의 가문을 말합니다. 양견은 북주 정제(静帝)의 외할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외손자를 몰아내고 자신이 스스로 황제가 된 것이지요.

황제를 빼앗긴 정제(静帝)의 할아버지인 북주의 선제(宣帝)는 아마도 양견의 딸과 억지로 결혼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외척에 의한 찬탈은 대부분 이런 식이죠.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도 황제의 외할아버지였었죠. 삼국연희로 유명한 조조(曹操)도 황제의 장인(아내의 아버지)이었지요. 비록 그는 황제자리를 뺏지 않지만, 그의 아들 조비(曹丕)에 의해서 매형의 자리를 뺏어서 황제가 됩니다. 북주의 선제와 같이 한헌제(献帝)도 원래의 황후를 없애버렸기에 억지로 조조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되죠.

앙견은 북주에서 수국공(隋国公)이었답니다. 그래서 나중에 수(隋)라고 이름을 붙이고 년호를 개황(号隋)이라 하며, 장안(长安)을 수도로 한 것이지요. 서기 589년, 앙견은 그의 둘째 아들을 진왕(晋王) 양광(杨广)에게 총병력 50여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중국 남부에 있던 진(陈)나라를 멸망시키게 하고 남북통일을 이루어냅니다. 진나라는 이름바 남북조시대에 송(宋)-제(齐)-양(梁)-진(陈)으로 넘어가는 남쪽 왕조의 마지막입니다. 남조의 천자는 풍류(风流)를 사랑했고, 단지 자강산을 굳게 지킬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남조의 정권의 황제는 자주 변하였고, 무력이 약한 서생들이었으니 결국 망하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연스럽게 수나라가 천하통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1. 여러 민족의 융합.
역사상 북방에서 남방을 통합하려고 노렸던 적은 몇 번이나 됩니다. 삼국시대에도 그랬고, 진나라때도 그랬고, 남북조시대에도 그러하였습니다. 가장 강력했던 것은 383년의 비수지전(淝水之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북방의 16국중에 전진(前秦)의 황제 부견(苻坚)이 90만 대군을 이끌고 동진을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20만도 안되는 동진에게 발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민족간에 첨여하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남쪽의 원래 북방에서 쫒겨온 사람들은 오랑캐들에게 통치 당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었습니다. 또 전진(前秦)은 저족(氐族)이 만든 국가인데 90여만 대군의 대부분은 한족(汉族)이었습니다. 저족의 전체 인구는 단지 몇십만에 불과했으니 말이죠. 한족들의 입장에서는 동진을 자신의 조국과 같이 보았으니, 누가 조국을 치기 원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비록 군대로 동원되었지만 그리 싸울 마음이 없었고 결국은 전쟁에서 실패하게 됩니다. [각주:1]

그런데 수나라가 천하통일을 할 쯤이 되면 상황이 변합니다. 수나라나 당나라 모두 비록 선비(鲜卑)인의 피가 흐르고 있지만, 남방쪽 사람들도 더이상 그들을 이민족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별 신경은 안 쓴 것이죠. 민족이 이미 융화가 된 것이지요. 북방은 이미 완전히 한화(한족에 동화됨 汉化)가 되어서 기존의 중원 왕조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각주:2].

이렇게 남쪽 사람들이 수나라를 이민족으로 보지 않았기에 양견은 날로 천하를 먹게 됩니다.


2. 북방 농업의 회복과 발전으로 경제적인 기반을 쌓음.
북방은 원래 남방보다 훨씬 더 농업이 발전해있었습니다. 비록 계속 되는 전쟁으로 황폐하게 되었지만, 수나라의 천하통일쯤이 되면 충분히 회복하고 발전해 있었습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오래된 말처럼 병력이 움직이기 전에 양식이 먼저 움직여야 됩니다. 전쟁은 어디까지나 돈싸움인 것이지요. 미국이 이렇게 죽이게 강력한 이유와 같은 것이랍니다. 전쟁에는 튼튼한 경제적 기초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이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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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가 없다는 것이야 이미 소개했지만, 좀 문제가 많은 내용들이 있군요. 이건 머...제가 다시 쓰는게 더 속편하다고 느껴지기는 합니다. 그러나 저렇게 분석해서 안될 것도 없기에 그냥 냅두고 주석으로 너무 심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1. 이건 어떻게 수정하지도 못할 만큼 긴데, 좀 문제가 많아서 주석을 달겠습니다. 일반 백성에게 누가 통치하느냐는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당시의 비수지전의 패인으로 민족모순은 별로 언급이 안됩니다. 그것보다는 당시 전진의 전략-전술상의 문제와 동진의 방어전략 및 군사훈련이 좋았다고 평가합니다. [본문으로]
  2. 라는 것이 교과서급의 역사책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화보다는 오히려 중국 전체가 북방이민족들의 문화에 더 큰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최근 힘을 얻고 있습니다. 어느 한쪽에 동화가 된 것이 아닌! 서로서로 강력한 영향을 미친 것이지요. [본문으로]

이제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모반계획을 계속 실행할 것인가? 아니면 중지할 것인가?

원래의 자리가 위태롭다면 황제라도 죽여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모든 것이 안정적으로 회복되었다. 모반을 일으킬만한 이유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될 것인가? 이연은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고민에 빠져버렸을 것이다.

핵심은 이미 모반계획을 세워버렸다는 것이다. 당시의 법률로 설령 모반 계획뿐이더라도 모반과 동일시 한다. 이것은 이연에게 있어서 모반을 일으키는 것은 이미 날라가버린 화살이오. 떠나버린 님이라는 이야기이다.

핵심 측근과의 반복되는 회의 끝에 나온 결국은 진행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었다.

역사의 갈림길은 이렇게 요상하게 결정 되어 버렸다.

어째서 그 많은 사람들이 황제가 이연을 죽일 것이라고 오판을 한 것일까? 어째서 그 많은 사람들이 모반계획에 참여했었던 것일까? 모든 사람들에게 모반의 이유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상황이었으면 이렇게 쉽게 모반을 일으킬 수 있을까?

역사의 변화에는 법칙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록 모두가 황제의 구체적인 결정에는 오판을 하였지만, 당시의 천하 정세를 놓고 본다면 그들의 판단이 옳았던 것이다. 당시의 천하가 요구하는 것은 수나라의 멸망이었다. 20세의 이세민이 수나라를 멸망시킬 생각이 들었고, 52세의 이연도 수연을 무너트릴 생각을 하였다. 유문정도 반란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덮고 싶었고, 배숙도 부귀공명을 누리고 싶었다.

지금에 돌아보면 이연은 정확한 판단을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정확한 판단은 "오판"에서 나온 것이었다. 역사의 매력이자 고민은 이런 곳에서 나오는 것이다.

더욱 요묘한 것은 황제 사절의 도착 시점이다. 만약 황제의 사절이 조금 늦게 왔다면 이연은 이미 기병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절은 매우 적절한 시점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연의 모반계획 자체는 발동을 했지만, 이연이 실제로 기병을 하기 전인 미묘한 시기에 도착을 한 것이다. 모반이라는 거대한 일에서 시간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만약 시간이 모자라서 창졸간에 군사를 일으킨다면 실패하기가 쉽다. 그렇다고 오래동안 기다린다면 모반계획이 세어나갈 수가 있다. 그런데 군사를 일으키려고 준비하던 중에 온 황제의 명령으로 인하여, 이연은 더욱 더 차분하게 모반을 준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훗날의 역사 기록에는 모두가 이연이 황제의 사절의 출현에 매우 감동하였다고 말해지고 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서 깊게 파고 들어갈 필요가 있다. 합리적인 추측은 황제의 사절이 이연의 모반을 미루었을 것이고, 이것은 모반이 더욱 성공적이게 만들었다. 이것은 이연의 진양모반의 첫번째 기적이었다. 하늘이 도와준다고밖에 설명되지 않은 기적이었다.


멍쉬엔슬(孟宪实)의 晋阳:梦开始的地方이 괜찮은 내용이어서, 직역식이 아닌 의역위주로 번역한 글입니다. 오역이나 오타에 대해서 강력한 비판을 부탁드립니다. 또한 저의 "귀차니즘"을 생각하면 어차피 덧글도 달리지 않아서 압력도 별로 없는 이런 종류의 글의 업데이트는 조금 느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덧글을 달아달라는 말을 참 아름답게 돌렸군요! 우훗-_)

火锅馆取名“支那”引公愤



지나(支那)는 현재 중국을 비하하는 말이다. 정확하게는 일본에서 중국을 비하하기 위해서 쓰여지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중국의 한 음식점이 이름을 "지나"라고 정해버린 것이다. 중국 네티즌들은 발끈했다.

이것은 마치 음식점 이름을 "조센징"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근데 사실 지나는 나쁜 뜻이 아니었다. 단지 중국을 부르는 통용사였을 뿐이다. 그런데 2차차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점차 그 뜻에 비하성 발언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60년대 이후로는 거의 확실히 비하의 의미가 들어가게 된다. 현재 일본에서 중국을 부르는 정식명칭은 中國이다. 支那라고 쓰면 비하의 의미이다.

이 기회에 한마디 하자면, 중국국명을 "당나라" 혹은 "지나"라고 부르는 한국 네티즌들이 있다. 욕을 해주고 싶다. 한국을 "조센징의 나라" "빵즈의 나라" "개한국"라고 부르면 좋겠는가? 상대를 존중하자. 그래야 존중 받을 수 있는 거다.


돌발 사건

그리고 한번의 우연한 사건이 모든 것을 변화시키게 된다.

역사가 드라마같이 느껴질 때가 바로 이럴 때이다.

한번의 오해가 역사의 물길을 돌연 잡아 비틀어버리기도 한다.

 

북방은 투르크(突厥)이 침입해 왔다. 이연은 북부의 마이군(马邑郡)으로 병사를 파견하고, 당지의 태수 왕공인(王恭仁)과 힘을 합쳐서 투르크를 막아내려 한다. 이때 이연의 군대는 왕군아(王君雅)가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수군은 패배를 하고 투르크는 승리의 나팔을 울리며 돌아가게 된다.

과연 이 전투로 얼마의 피해를 입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투르크가 대체 얼마나 위대한 전과를 이루었는지에 대한 기록 역시 없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이 주의한 것은 그러한 고증이 아니었다. 수군의 패배 처리는 역사의 새로운 도미노 현상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 전투의 책임은 누군가가 반드시 짊어져야 했다. 이것이 대대로 내려오던 통치의 정석이다. 수양제의 조정은 더 큰 실패나 군인들의 책임감을 묻기를 위해서 당연히 일정한 처벌이 필요하다. 그뿐만이 아니라 국법에조차 상벌을 철저히 할것을 명시하고 있었다.

그럼 이연에게 어떤 처분을 내렸는가?

우리가 이 일을 탐구할 때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역사에 남겨져 있는 기록은 매우 모호하다는 것이다.

<신당서 新唐书>의 <고조본기 高祖本纪>에 의하면 "양제가 관리을 파견하여 고조를 강도로 압송하게 했다. 고조는 두려워했다." (炀帝遣使者执高祖诣江都,高祖大惧。)

<자치통감 资治通鉴> 에 따르면 수양제는 이연과 왕공인이 적을 막지 못함을 들어 관리를 파견하여 강도로 압송하게 했다. 이연은 두려움에 떨었다."(帝以渊与王恭仁不能御寇,遣使者执诣江都,渊大惧。)

<대당창업기거주 大唐创业起居注> 에서는 수양제가 관리를 파견하엿고 "이연을 묶고 왕공인을 참수하였다"라고 적고 있다.(隋炀帝派使者前来,“系帝而斩仁恭。”)

비록 기록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위의 사실에서 전쟁실패의 책임자로서 이연이 조정의 어떠한 처벌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최후의 처벌은 대체 무었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하지가 않다. 일단 강도로 가서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라는 것 뿐이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연은 강도로 압속되어 황제의 다음 처분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의 핵심은 이연이 황제가 행할 처벌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했냐는 것이다. 그리고 이연은 이러한 판단을 바탕으로 어떠한 반응을 보였냐는 것이다.

이연은 어떻게 판단했을까? 그는 어떤 근거를 가지고 판단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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