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의미의 출입국관리소는 국가기관에 의해서 국경에서의 출입행위를 감독관리하는 기관이다. 이 말은 출입국관리소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성립과 안정적인 유지 및 국가간의 무역을 위한 기본적인 경제조건과 교통조건이 선결 조건으로 필요하다. 이러한 조건들을 갖춘 시기는 과연 언제쯤일까? 서양사에 대해서는 무지하기에 중국대륙사를 중심을 이야기해보겠다.
 
무역을 하려면 무역이 가능할 정도의 경제력이 필요하다. 상나라에는 여유자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의 갑골문등에서는 "납공 纳贡"(제후가 왕에게 바치는 제물)이 나온다. 납공을 했다는 것은 일정한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행정기관의 존재여부는 명확하지 않다[각주:1].

관련된 실질적인 행정기관으로서의 존재는 주나라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주례(周礼-地官篇)에 따르면 关(관문할때의 관)이라는 기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사관(司关)으로 간략하게는 문지기이다. 장절(掌节)은 비자발급해주는 사람이었다. 실질적인 의미에서의 이 시기야 말로 출입국관리소의 출범이다. 실제로 중국학계에서도 이 시기를 출입국관리소의 시초로 보는 시각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혹자는 이에 대해서 주나라는 어디까지나 봉건제를 행하던 "하나의 국가"였고, 어디까지나 제후와 왕 사이에 벌어졌던 내부물자이동이기에 출입국관리소의 시작으로 이해하면 안된다고 한다. 아예 말이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의 국(国)의 유래를 생각하면 조금 황당한 반론이다. 왜냐하면 국은 성단위의 행정단위를 이야기한다. 더 간단하게는 그리스와 같은 도시국가였던 것이다.  비록 명목상으로 주왕이라는 최고통치자가 있었지만 실질적인 통치권은 매우 약하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역시나 현재 중국정부의 "하나의 중국"의 정신에 너무 영향을 받은듯 하다[각주:2].

혹자는 당시에 관은 어디까지나 사람을 막은 것이지 물자를 막았다고 보기 힘들기에 출입국관리소라고 하기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물자가 발이 달려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사람의 손을 통해야했기에 사람을 관리하는 것은 곧 물자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떠나서 고대사의 수 많은 기간동안 사람이 곧 재산이었다. 사람의 통행을 관리하는 것 자체가 곧 물자유통을 관리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각주:3].

춘추전국시대에 오면 당대의 다양한 사람들이 출입관리제도에 대해서 논의를 한다. 예를 들어서 춘추시대에는 관중은 "관세를 낮추고 상인을 대접하여 경제를 발전시키는 전략"이라는 지금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전략을 실제로 실행하여 대박이 난다[각주:4].  전국시대로 오면 상앙은 관세를 무겁게 하여 농업을 발전시켜야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실제 당시 상황에서 농업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농산물이라는 먹거리차원만이 아니라 농민들자체가 병사였던 시대이기에 농업의 발전은 곧 부국강병과 동일하였고, 이런 시스템을 교란시키는 상업을 막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상업을 억제는 경제원칙은 중국고대사를 관통하는 기본적인 법칙이 된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발전을 하고 농민이 곧 군사력이라는 법칙이 붕괴될수록 사회적 모순은 점차 커져만 가게 되었다.

핵심은 춘추전국시대에 다양한 출입관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정도면 무역이 어느 정도 성숙했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그렇기에 춘추전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없다. 어떠한 제도도 기본 없이 순식간에 성숙할 수는 없다. 다만 중국 출입국관리 발전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대로 넘어오면서 중국대륙은 통일체계를 이룬다. 그러나 초기에 국력은 매우 약하여 내부적인 통치력도 약하였고, 외부적으로는 흉노에게 처참하게 밀리고 불평등조약을 맺게 된다. 주기적인 흉노에 대한 조공을 하게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변방에 호시(胡市 북방계열과의 무역시장)을 정식으로 만들게 된다. 그 전에도 북방과의 무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이 시기에 정식으로 사료에 나타나게 된다[각주:5].  한무제때가 되면 북방공략에 나서게 되며 장건(张骞)의 노력으로 서역으로의 무역노선도 만들어지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대외무역이 활발한 시기는 매우 짦았으며  무역권한도 기본적으로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정부가 가지고 있었다.

위진남북국시대는 매우 혼란한 시기로 북방민족이 대거 중국대륙으로 들어오게 되며 자연스럽게 국제무역이 번성하게 된다. 특히 이 시기에 주목할 것은 "조공-책봉 朝贡-册封"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외교시스템적인 국제무역이다. 유교의 국제질서시스템을 명목상으로 이어가며, 겉으로 보기에는 조공을 바치면 일정한 벼슬을 내리고 있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을 보면 외교전략으로서 조공이라는 명목상의 물품을 바치고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 것을 내어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중국대륙이 혼란스러운 상황마다 벌어졌을 뿐만이 아니라, 평화시대에도 이른바 "평화비용"을 지불한다는 의미로 기본적으로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 바로 중국어 
중국어로 출입국 관리소는 海关(hai guan)입니다. 여기서 海는 바다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해(四海)는 구이(九夷), 팔적(八狄), 칠융(七戎), 육만(六蛮)과 같은 중국외부의 지역을 지칭합니다. 사실 사해의 밖에도 사황(四荒)이라던지 사극(四极)과 같은 지역 범위가 있지만, 지금은 중국외의 모든 지역을 가르킵니다[각주:6]. 관(关)은 위에서도 나왔지만 관문의 의미입니다.

정리하면 중국어의 海关은 중국외 지역과의 교류를 관리하는 관문이라는 의미입니다.

* 모종의 이유로 최대한 쉽고 간략하게 정리한 내용입니다. 문헌인용과 같은 기본적인 것도 귀찮아서 넘겼습니다. 전체적인 내용에는 큰 문제는 없습니다...아마도? 루루루루...머...읽는 분이 있기는 할런지~~

  1. 혹자는 孟子-梁惠王편에서 나오는 고사를 인용하고는 하지만 맹자 자체가 만들어진 시간이 늦기에 그리 신빙성은 없어보인다. [본문으로]
  2. 막말로 어용이라는 소리지요~ [본문으로]
  3. 사람들이 애써 무시하는데 노예제도가 폐지된지는 몇 백년도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그 전까지 사람도 "문건"였다. [본문으로]
  4. 공자도 역시 관세를 낮추는 정책을 이야기 했었다. [본문으로]
  5. 중국사에서는 몇몇은 이것을 가지고 화평을 맺었다고 하지만 실질적인 조약내용을 보면 누가봐도 한나라가 무릎을 꿇은 거다. [본문으로]
  6. 《尔雅·释地》 [본문으로]

중국 블로거의 재미있는 글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목만 보고도 확 끌리는군요. 중국의 역대 왕조중에서 가장 높은 GDP을 기록한 왕조는 어디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이런 계산이 나왔을까요?  나름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가 아닐까요? (전체 문장은 상당히 길어서 제가 마음대로 축약 의역 번역을 할 예정입니다. 그러니 중국어를 아시는 분은 원문 링크로 직접 가셔서 보시기를 바랍니다. 원문 : 富甲天下的大宋王朝)

중국에서는 보통 당나라를 가장 발달한 시기로 보고 있다. 실제로 당나라는 중국의 역대 왕조중에서 (청나라를 제외하면) 가장 넓은 국토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부적으로 외부민족과 한민족이 서로 융합하여 문화적으로 가장 발달했던 때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경제상으로는 어디까지나 송나라가 가장 발달을 했다고 필자는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일단 송나라는 당나라의 다민족 융합의 유산을 고스란이 물려받아서 문화적으로도 강력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중국 역사상의 중대 발명의 반 이상이 송대에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서 중국의 4대 발명이라고 말해지는 것중에서 3개가 송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화약이나 나침판, 인쇄술, 종이돈, 방직혁명, 도기공업등등이 모두 송대에 이루어졌다. 물론 당대의 문화적융합과 기술적 융합의 유산을 완성시킨 것이지만, 그렇다고 송대를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무엇보다 필자는 송대의 GDP가 전 세계의 50%을 차지할 것도였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계산을 하면 이렇게 나올 수 있을까?

주의 : 해당 수치는 어디까지나 원문의 필자가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수치에 가깝다. 정확한 수치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실제 당시의 수 많은 수치들이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 통설에 가깝기도 하며, 해당 필자가 선택한 세율이나 비율등등도 상당히 자의적인 경향이 있다. 그러니 이것을 하나의 정설로 보지는 말고 단지 하나의 썰~로 생각해주셨으면 한다. 중국에서는 당대를 높이 사고, 송나라를 무시하는 기본 여론이 있는데 반하여, 서양학계에서는 송나라를 더 높게 보는 경향이 많고, 본인이 추측하기로 원문의 필자는 서양학계쪽의 학설을 많이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나저나 저 수치들이 어떻게 계산되어나왔는지는 구체적인 말을 안해서 본인도 모르겠다. 혹시 아시는 분이 있으면 출처을 좀 알려주셨으면 한다. 본인의 예상으로는 아마도 사료의 수치를 고증한 "서양쪽 아날학파"계열의 논문쪽에서 나온것이 아닐까....도 생각만 해본다;; 아닐려나;;;

북송의 년간 세수는 1억600만관이었다. 1량황금이 10량백은이고, 10량 백은은 10관이다. 고로 1관은 5KG인 것이다. 현재 1KG의 황금이 19달러이니, 지금으로 계산을 하면 약 151억달러가 된다. 또한 당시의 세율은 대략 1/15였고, 농민들의 상업진출이 비교적 자유로웠다(호구제가 없었고, 기본 세금에 추가되는 세금도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전체 GDP는 대략 152 x 15 = 2280억 달러정도이다. 당시 북송의 인구는 대략 1억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한사람당 약 2280달러의 소득을 올리고 잇었다고 환산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일반적인 중국인들의 관념에서 송나라는 매우 약한 나라였다. 북방민족의 힘이 강성해져서 실제 국토면적도 그리 넓지 않았고, 심심하면 거란(요나라)니 여진(금나라)니 해서 죽어라 패배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런 좁은 국토와 약한 군사력에서 가장 GDP가 높았던 것이다.

실제로 명대의 매년 세수는 백은 1500만량정도였다. 대략적으로 1량백은이 1관동전과 같다고 하였을 때, 명조의 제수는 북송의 1/10이고, 남송의 1/6에 불과하다. 이미 남송이 멸망한지 30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오히려 더 낮은 세수를 보이고 있다. 청대의 세수는 약 3000-4000정도(咸丰年间)정도였다. 역시 송나라에 비하면 매우 작은 수준이다. 문제는 당시의 인구가 이미 3억정도여서 송대에 비하여 2~3배가 많았다는 점이다.

이렇게 세수가 많다는 것은 백성들에게서 다량의 세금을 긁어모은다는 것이고, 백성의 생활이 힘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송나라는 전국적인 농민봉기가 일어나지 않은 왕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당시 시대상황이 외부세력을 방어하기 위해서 뭉치자는 여론분위기가 조성되었던 이유도 있지만, 과연 그것 뿐일까?

필자는 이 이유를 공업과 상업의 발달로 돌리고 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굳이 번역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단지 필자가 이러한 형태가 계속 진행이 되었다면 영국의 공업혁명에 비견되는 일도 벌어질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면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그럼 이렇게 강력했던 송나라의 경제는 어떤 이유로 무너진 것일까? 그리고 무너진 이후 몇 백년동안 다시 회복하기가 어려웠던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전쟁이다. 금나라가 흥했을 때(1207년)에는 인구가 768만명이었는데, 원나라가 금을 명말시켰을 때(1235년)에는 87만명만 이었다. 딸랑 28년이라는 시작동안 89%가 줄어든 것이다. 남송가정 16년(1223)에는 1267만명이었는데, 원나라가 송을 명말시킬 때에는 937만명으로 역시 26%가 줄어들었다. 또한 전쟁은 인구를 줄일 뿐만이 아니라, 산업설비들도 처참하게 파괴되기 마련이고, 기존의 경제 시스템(특히 신용이라는 부분)이 처참하게 망가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한국은 어떠할까? 이건 한국사 연구하시는 분이 한번 해보시기를 바란다. 본인은 어디까지나 북방유목민족사다. ...음하하하;;;; 개인적으로는 고려초중반이나....조선세종때가 가장 화려하지 않았을까 막연히 추측해본다.


바로의 중얼중얼 :
개인적으로 위와 같은 이유 외에도, 송나라 시대는 개방적인 무역을 하던 시대라는 점을 꼽고 싶다. 비록 당대와 같이 직접 서역(신장일대)을 지배하지는 못했지만, 당대에 확고해진 무역노선을 따라서 수 많은 소그드인 및 아랍인들이 중국으로 몰려와서 무역을 하였고, 장보고라는 한국 역사의 해상무역의 상징이라고 불리는 인물이 바로 중국의 송나라 시대에 생겨났다는 점도 충분히 생각해볼 점 당대에 장보고라는 한국의 해상무역의 인물이 개척한 항로가 실질적으로 중국 송나라 시기에 고려관등으로 그 상징성이 부각된 점은 생각해 볼 만 합니다. (추가 : 장보고의 활동 시대는 물론 중국의 당나라입니다. 한국으로 따지면 신라시대입니다. 당대의 유산을 넘겨받았다는 의미였고, 실제 장보고의 활동 자체와 상징성이 생겨나는 시기는 조금 다릅니다. 하지만 위의 사항을 정확하게 서술하지 못하여 잘못 이해되게 한 점은 어디까지나 저의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 - 위의 문장을 오해가 없이 고친다면 "장보고라는 한국 역사의 해상무역의 상징이라고 불리는 인물이 바로 중국 송나라 시대에 제대로 떠올랐다."라고 할 수 있....음..이것도 중의적일수 있겠군요. 냉정하게 말해서, 장보고라는 대표적인 인물을 어떻게든 송나라 시대와 연결시키려다보니 원래 문장자체가 억지로 상징성의 계승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임팩트가 약해서 적당히 뭉갠다는 것이 아름답게 되어버린거 같습니다. 그따위니 "한국 역사의 해상무역의 상징"따위의 이상한 구절이 등장해버립니다. "당대에 장보고라는 한국의 해상무역의 인물이 개척한 항로가 실질적으로 중국 송나라 시기에 고려관등으로 그 상징성이 부각된 점"라고 하면 좀 괜찮을지도 모르겠군요. 긴 변명일 뿐이군요. 제대로 서술하지 못한 것은 분명히  저의 책임이고 잘못입니다.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꾸벅-- 원문은 저의 잘못을 잊지 않기 위해서 취소선만 그어놓고 계속 남겨놓도록 하겠습니다. )

개방은 분명히 필요하다. 한국은 경제적으로는 (혹자는 지나칠 정도라고 말할 정도로) 개방을 하고 있다. 하지만 본인이 지적하고 싶은 것은 과연 정신적으로 얼마나 개방이 되었냐는 것이다. 실제 송대의 경제번영은 당대의 민족대융합의 유산을 이어받은 것이다. 자신과 다름을 인정하고 그 인정 속에서 서로 웃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배경이 있기에 활발한 국제무역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현재 한국인구의 10%가 국제가정이라고 한다. 이미 한국인만의 가정이 아닌 다국적가정이 한국에서도 상당히 많이 생겨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언제까지나 단일민족이라는 이미 처참하게 박살한 허망한 신화를 붙잡고 살아갈 것인가? 이제야 말로 다름을 인정할 수 있는 정신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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