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歌》《代记》和北魏国史 - 国史之狱的史学史考察

《拓跋史探》

田余庆


이 글을 읽는 이유

1) 티엔 선생님이 편하게 쓴 글이다.

2) 史风에 대한 이야기(정치의 역사에 대한 영향)에 대한 이야기 : 티엔선생님의 시대의 특수성

3) (60年代)三大才子 : 田余庆,剪伯赞,戚本禹 이 문장은 티엔선생님의 아름다운 글이 있다.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는 "늙었기에-_;;" 같은 말을 반복하고는 하는데, 이 글은 그렇지 않다. 이미 사료나 기타 증거로 할 수 없을때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모범적인 대답이 있다. 하지만 본인은 일단 사료나 기타 증거로 제대로 쓰는 것부터 잘 해야지 저런 경지를 바라보지. 으휴...


요약 :

이 글은 책의 맨 마지막 종합이다.

처음에 투르크의 역사를 서술한다. 이 글의 핵심은 투르크 역사는 원래 생각했던것과 다르게, 다양한 내부적인 정치권력투쟁(투르크의 외척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정치권력투쟁)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다. 선비와 오환으로 발전하게 된 투르크는, 특히 외척세력인 오환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이 건국을 하는 시기에는 외척(모후)의 세력이 너무나 강해서 정치적 권련 배분에 문제가 생긴다. 이런 상황에서는 외척세력을 없애버리는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적 전통이 생겨서,  원래의 모후를 다 죽여버리는 전통이 창조된다.

오환이 투르크의 초기발전에 끼친 영향은 처음으로 서술한 책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위서 역사서"에 어떻게 기술이 되는지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 한다. 특히 위서와 같은 경우 소수민족의 역사서 중에서 매우 상세하다. 그렇다면 魏收은 어떤 기준으로 이 글을 적었을까? 아마도 구전된 내용을 기준으로 작성이 된 것이것이다.

그 예로서 崔浩을 든다. 그는 역사서를 잘못?! 서술했다가 최강막강의 권력에서 밀려난다. 역사서를 쓰고 돌에 새겨넣어서 도로에 전시하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인터넷에 올린 것인데, 문제가 되어서 난리가 난다. 이 돌도 아무곳에 묻어버리는데( ...이거 발견하면 최고일터인데....)이 문제에 대해서 周一良선생님이 이론을 내놓는다. 수집혼으로 인하여 도광에게는 조카이자 친동생인 사람이 있었다. 혹시 이 사실을 적어놓은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서 외척에 대한 서술을 주의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어찌되었든 이러한 최호에 대한 처리가 이후의 북위의 역사 서술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래서 티엔선생님은 정치에 의한 역사간섭은 인류의 손해이자, 역사학자로서는 자신도 경험했던 괴로운 이야기이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代歌 --》 代记가 되는 이러한 과정에서 이상한것이, 왜 같은 내용인데 선비어 代歌는 가능하고 崔浩가 역사로 남기는 것은 왜 안되는 것일까? 여기에는 汉化의 문제도 포함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한화를 원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孝文帝는 반대하는 아들까지 죽이기까지 한다.) 중국 주변민족은 건국과 동시에 汉化라는 문제를 안게 된다. 자신의 것을 완전히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화를 안할 수도 없고...

우리가 기존에 한화를 이야기할때, 관료화라던지 복장과 같은 물질상의 것을 토론했다. 그런데 우리가 제대로 서술하지 않은 것이 당시 사람들의 정신상의 반응이다. 이 문장은 그러한 면에서 좋은 의견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서 댕기나 족발과 같은 것들은 중국사람들에게 이미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자신의 노인배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서양의 것을 받아들이는 과도기에 있기 떄문이다. 그러기에 서양인들이 이러한 댕기나 족발을 거론을 하면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이와 같이 북위초기 시대에도 이러하여서, 과거의 선비의 도덕관과 새로운 세대의 한족의 도덕관은 충돌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崔浩의 경우는 이 중간에서 희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과도기에 현재의 관점에 보아서 나쁜 과거의 것을 서술하지 않거나 모호하게 서술한다. 그리고 그래야 과도기의 고통이 적어진다. 상당히 슬픈 결론이다. 요즘 있는 티베트관련 중국인 시위와 같은 경우는 과거의 망령과 같은 무력탄압을 잊고, 없애고, 가리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생활을 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과도기가 슬프기만 한것은 아니고 기쁨도 있다. 하지만...후...

그리고 반대로 지금까지의 외래 민족이 중국에서 그러하였듯이 다음세대의 티베트인들은 이제 과도기를 지나서 중국을 추종하지 않을까? 머...지금까지의 역사적 예로는 그럴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의 독특한 문화가 점차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되지 않을까? 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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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구성호와 투르크문화에서 보면 서역의 이민족들은 쉽게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당말이 되면 샤만-불-불교의 3대 파벌로 나누어졌을 뿐이다. 만약 이민족들이 쉽게 다른 문화를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 아닐까? 혹은 당시 서역의 투르크가 일정정도의 문화를 보유한 것이라는 소리가 되는데,그렇다면 샤마니즘이나 불숭배도 문화라고 하면, 이러한 문화를 공유했던 북방이민족도 문화가 있다는 논리모순이 되어버린다.


한국의 족보에서는 여성을 서술하느냐 안하느냐?기억에는 하는것 같은데...으음...

내가 본 것은 근대의 족보이니 최소 조선시대 이전의 족보를 찾아봐야될듯.



中国北方民族与蒙古族祖源 1979年

중국학자중에서 북방민족의 대역사를 심도 있게 이야기한 몇 안되는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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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提要】流传于北魏宫掖与鲜卑贵族间的《代歌》,是拓跋族的民族史诗。道武帝时修撰的北魏早期历史《代记》,主要当是依据《代歌》。《魏书·序纪》大体是以《代记》为本。辑集《代歌》和修撰《代记》的重要人物是邓渊。由于邓渊冤死,崔浩死于国史之狱,北魏一代史学衰微,史官视修纂北魏前期历史为畏途。考察《序纪》的来历,可以看出拓跋族面对其民族早期历史的某些问题时陷入的痛苦与窘境。这是中古时期民族融合浪潮中值得重视的一个案例。
【关键词】北魏 代歌 代记 邓渊 崔浩

一、《真人代歌》释名

读魏收书,留意到《乐志》所载《代歌》问题[1]。《乐志》谓“凡乐者乐其所自生,礼不忘其本。掖庭中歌《真人代歌》,上叙祖宗开基所由,下及君臣废兴之迹,凡一百五十章,昏晨歌之,时与丝竹合奏。郊庙宴飨亦用之。”我不懂音乐和音乐史,但是觉得代歌内容从“上叙祖宗开基所由,下及君臣废兴之迹”看来,应该就是拓跋史诗,很有史料价值,值得读史者探究。只是歌词散失殆尽,研究《代歌》本身已不可能,只好当作史学史上的一个话题来对待,看看能否发掘出一点有用的东西。
《乐志》所说的“时”,意指代歌进入北魏乐府之时。因为代歌本是鼓吹乐,马上奏之,只有入乐府后始“与丝竹合奏”,才能脱朔漠土风而登进于庙堂宴飨。北魏始设乐府,年代甚早。魏平中山,晋伶官乐器屡经转徙遗散之后而得留存者,多入代北,理当设官司理,但只是草创而已,乐工、器物、乐谱、歌词都远不完备。辑集代歌之事似乎与设乐府大体同时,有代歌之辑即有乐府。《乐志》叙代歌事于天兴元年至天兴六年(398—403)之间。以后拓跋破赫连,平凉州,通西域,所得稍广,乐府渐有规模。孝文帝务正音声,搜求古乐,乐府始盛。乐府音声审定,器物调适,歌词取舍,编撰次第诸事,魏初邓渊首居其功,以后续成者则有高允、高闾等人。
代歌,《隋书》卷14 《音乐志》未曾特别言及。但《隋书》卷32《经籍志》小学类有《国语真歌》十卷,无解释,姚振宗《考证》亦无说。我认为应当就是指代歌一百五十章。国语即鲜卑语,代歌是用汉字写鲜卑语音而成。至于真歌之名,下面再作解释。《经籍志》还有《国语御歌》十一卷,不知是否与代歌有关系。
《旧唐书》卷 29《音乐志》、《新唐书》卷22《礼乐志》都有代歌资料,又称北歌。这是由于两唐乐志在有关部分列叙四夷之乐,入代歌于其中的北狄乐中,故有北歌之名。北魏迁洛以后对于拓跋旧物都以代、以北为称,所以北歌、代歌同义。两唐乐志都说北歌是“燕魏之际鲜卑歌”。狭义地说,所谓“燕魏之际”,当以道武帝皇始元年(396)建天子旌旗、取并州、夺中山,至天兴元年(398)克邺、灭后燕、定都平城为基准,北歌辑集当在此时;而所谓“鲜卑歌”是总括此时鲜卑各部之乐而言,包括以拓跋为主的代歌在内。广义地说,它也可能泛指十六国至北魏后期的胡歌胡乐,在燕魏之间以至魏末较长的时间之内陆续辑成。魏志所叙大体符合狭义的要求。两唐志所叙燕魏之际鲜卑歌,在这两方面都显得混乱,只能从广义方面来理解。
两唐乐志都说北魏乐府代歌,到周、隋之世与西凉乐杂奏,原有的代歌一百五十章由于只有鲜卑音而无汉译,理解者越来越少,以至逐渐失传,至唐时只存五十三章,而名目可解者只有六章。两唐乐志录有六章名目,即“慕容可汗”、“吐谷浑”、“部落稽”、“钜鹿公主”、“白净王太子”、“企喻”。郭茂倩《乐府诗集》卷25《横吹曲词》录载了几章汉译歌词。从这几章汉译歌词看来,两唐乐志所说到的代歌内容与发展情况,大大超越了《魏书·乐志》所说的代歌,所叙可解者六章与《魏书》不能吻合,时代较晚,也不是道武帝先人有关事迹。证据如下。“部落稽”,十六国时称山胡,魏时只一见,称步落坚,在《北史·尔朱荣传》中;至于正式见到步落稽的称呼,已是北周之事了[2]。“钜鹿公主”,《旧唐书·音乐志》说似是姚苌时歌,其词华音,与北歌也不合。“企喻”,据《乐府诗集》卷25引《古今乐录》,其四曲之一是苻融诗,不涉及鲜卑。所有这些,与《魏书·乐志》所说代歌“祖宗开基”、“君臣废兴”的鲜卑史实都不是一回事。不过,旧志又说“其不可解者咸多可汗之词,此即后魏世所谓簸逻廻者是也。其曲亦多可汗之词”。此事在隋志中也有相应记载,可以确认为魏世之作。隋志谓“天兴初吏部郎邓彦海(渊)奏上庙乐,创制宫悬,而钟管不备,乐章既阙,杂以簸逻廻歌”。簸逻廻即是大角及其所奏,北狄鼓吹之乐,马上用之。所谓“不可解者多可汗之词”,似内容为历代鲜卑君主言语行事,这与魏志所谓 “祖宗开基”、“君臣废兴”或者可以合辙。
以上的资料和解析,使我理解到唐乐府中的北狄乐、鲜卑乐、代歌,是三个大小范围不一的名称。北魏代歌一百五十章,唐以前多半陆续散失,也有新章羼入,所以唐志所说的代歌已不全是北魏时的原貌了。所谓唐时尚存而又可解者六章,其中的“步落稽”一章属于大范围的北狄乐(步落稽族属来源主要是南匈奴),“慕容可汗”和“吐谷浑”二章属鲜卑乐范围。只有严格意义的代歌才是拓跋歌,但也不能完全排除其它鲜卑歌包含其中,因为拓跋在推寅(即追谥宣帝的所谓前推寅)时还曾是鲜卑檀石槐势力的一部分,称西部鲜卑。唐志成书,距代北拓跋年代已远,乐府歌词变化很大,最重要的是鲜卑语言已鲜为人知,所以难于区分乐府各部分来源演变,以至于对代歌的叙述混淆不清,产生了上列的矛盾。
也许还可以这样认定,代歌是经过拓跋君主有意筛选甚或部分改造的燕魏之际鲜卑歌。筛选是按照道武帝个人意志进行的,目的是用口碑资料中的拓跋(也不排除鲜卑它部如慕容等)传说,编成歌颂先人功烈的歌谣,于代人中广为传播,为道武帝的帝业制造舆论。《乐志》所说代歌中“祖宗开基”“君臣废兴”的具体内容,道武帝正需借鉴,是他在创业时期朝夕思虑的大问题。《魏书》卷24《崔玄伯传》说其时道武帝“历问故事于玄伯”。又说“太祖常引问古今旧事,王者制度,治世之则。玄伯陈古人制作之体,及明君贤臣,往代废兴之由,甚合上意。”道武帝满心关注的有关治道的掌故,崔玄伯等人所能提供的,只限于汉人典籍所载,非拓跋旧事,而拓跋开基废兴诸事,却正是代歌的核心内容,而为此目的替道武帝筛选辑集代歌的人,从文献查找,只能找到邓渊一人。只有邓渊一人,于天兴元年冬奉命定律吕,协音乐,这势必涉及代歌;也只有邓渊一人,几年以后又受诏撰修代记,这也势必要以代歌所涉为主要资料。两唐乐志都说代歌是“都代时命宫人朝夕歌之”,所歌又尽代人之事,因而有代歌之称,迁洛以后不一定还有此需要,而且鲜卑语音大多既被遗忘,代歌也不再具备原来的意义了。
我还想用拓跋人爱歌的风习,来加强代歌是拓跋史诗,是拓跋古史资料来源的看法。拓跋爱歌的风习是历史上早已形成的,到了平城和洛阳已有汉字可供使用的年代,这种风习仍然依旧。《序纪》说拓跋先人“世事远近,人相传授,如史官之记录焉。”所谓人相传授,当是有言有歌,基本上都是口述的拓跋历史资料。一个部族,一个部落,甚至一个家庭,都有这种口述传授的资料。北魏皇帝是爱歌的。太武帝神三年(430)行幸广宁温泉,作温泉之歌以纪其事,见《世祖纪》。他令乐府歌工历颂群臣,赞美“廉如道生,智如崔浩”,见《长孙道生传》。其它臣工当各有诗歌赞颂。《文明冯太后传》载,冯太后曾与孝文帝幸灵泉池,孝文帝率群臣上寿,“太后忻然作歌,帝亦和歌,遂命群臣各言其志,于是和歌者九十人”。耆宿之臣元丕(422—503)为烈帝翳槐后人,历仕太武、景穆、文成、献文、孝文、宣武六朝,以能言“国家旧事” [3]见重于时。《北史》卷15《元丕传》:“丕声气高朗,博记国事,飨宴之际,恒居座端,必抗音大言,叙列既往成败。”孝文帝说他“亲歌述志”,当然是又说又唱了[4]。
北魏墓志中也有一些歌唱家族史传的例证。永熙二年(533)元肃墓志,记肃父扶风王怡“道勋出世,列在歌谣”[5],这种赞颂歌谣可能是乐府歌工奉命所作,如赞长孙道生、崔浩之例;也可能是贵族家传自编之作。正光五年(524)元子直墓志,说到其家世业绩“故已播在民谣,详之众口”[6]。永熙三年(东魏天平元年,534)张瓘墓,自矜其家世“吟诵两穗”[7]。这些可吟可唱的歌谣,其内容大概相当于汉人大族的家传。还可注意的是,武定八年(550)穆子岩墓志赞美先人事迹说:“家图国史,可得详言”[8]。然则贵族家世记录除歌谣以外,还有家图相配。
有一种文化现象曾令我不得其解,就是当拓跋人已进入高速汉化轨道之后,拓跋皇族人物自记其先人名字,仍旧任意用汉字写鲜卑音,而不遵循官方规范,与今本《魏书》所见多异。这也是从墓志材料中看出来的。永平四年(511)元侔墓志志阴铭文,谓墓主的六世祖为昭成皇帝;五世祖为昭成第八子受久[9];高祖常山王遵[10],字勃兜;曾祖常山康王素连;祖河涧简公于德;父悝,字纯陁。案以墓志核对《北史》卷15《常山王遵传》及《魏书》15《常山王遵传》,名字异处甚多。一,受久,本传作寿鸠;二,遵,字勃兜,本传不载其字,元昭墓志[11]则作字兜;三,素连,本传作素,元昭墓志则作连;四,于德,本传作德;五,悝字纯陁,本传不载其字。
显然,墓志所见名字当是据家传歌谣,有真实性,为常所使用者;《魏书》则当据官府文书。北魏有宗正[12],宗室人员名字,宗正必有文书记录,是在官的正式名称,却并不被本人及家族重视,因而有如上歧异出现。从这里也可推知,直到魏末,拓跋人仍不重视汉字汉语,记事仍以歌谣为准,风习未改。前引元肃墓“道勋出世,列在歌谣”,歌谣作用甚过文字叙述。顺便论及,甚至连汉字拓跋作为国姓,也未被普遍认同,西魏北周恢复胡姓,民间写拓跋为 拔。北周武成二年(560)《合方邑子百数十人造像记》所刻邑子姓名中,拓跋全作 拔,共有十余人[13],初疑这是民间讹写,一方流俗。后见镌刻精美的北周大将军李贤墓志[14],拓跋也作 拔。李贤墓志立于公元569年,此时魏收《魏书》早已修成了。从这种文化现象推知,甚至到迁洛以后,拓跋人对其祖宗开基及先人事迹的记忆,恐怕还是靠歌谣传诵为主,而不是依赖汉字记述。
现在还是回头来讨论乐府代歌本身的问题。
代歌的来源、内容,姑且作了上述的探讨。在《魏书》、《旧唐书》里,代歌叫做“真人代歌”。《新唐书》叫“真人歌”,当系省称。只有《隋书·经籍志》称之为“国语真歌”。真歌之“真”和真人代歌之“真人”,不像是同一含义。这又是怎么一回事呢?
汉音所读真字,鲜卑语中是表明人物身份称谓的字眼。《南齐书》卷57《魏虏传》中说到此语,列举了称为真的人物职称身份语词甚多,近年所出北魏文成帝南巡碑、孝文帝时司马金龙及其妻墓表刻石、北魏诸多墓志铭,以及《周书》怡峰传、薛弁传,《北史·斛律金传》等处,所举人物职称身份中均带“羽真”[15]。其它墓志中也另有带真字之例[16]。但是真歌之真与人物身份之真,似乎看不出任何关系。所以,“真歌”很可能是隋志为图简便而形成的误写,而“真人歌”和“真人代歌”才是正式的名称。

人代歌名称,我认为与真人一词有密切关系。真人自来就是道家方士一类人物时常提及的称谓。王逸注《楚辞·九思》,以真人为仙人。《魏书·官氏志》天兴三年(400)“置仙人博士官,典煮鍊百药。”天兴是辑集代歌的年代,煮鍊百药又是供道武帝服用。可见代歌冠以真人二字作为正式名称,具有道武帝的时代特征。至于这与道教有无直接关系,可能另有文章可做,这里不细究了。
《魏书·天象志》皇始元年(396):“先是有大黄星出于昴、毕之分,五十余日,慕容氏太史丞王先[17]曰:‘有真人起于燕代之间,大兵锵锵,其锋不可当’。其冬十月,黄星又见,天下莫敌。”自注:“是岁六月,木犯哭星。木,人君也,君有哭泣之事。是月,太后贺氏崩。至秋,晋帝殂。”[18]《魏书·灵徵志》记天兴四年(401)吏上言昔句注老父谓某曰:“自今以后四十二年当有圣人出于北方。时当大乐,子孙永昌,吾不及见之。”某遇老父之年为二十二岁,当前燕元玺二年(353)。以此推之,后四十二年,正当道武帝破慕容宝之岁。这些资料都说明,道武帝之兴,曾经动员不少方术之士为他制造舆论,其中最起作用的,还是王先借天象所言“真人起于燕代之间”。
皇始元年对北魏道武帝说来是个极具意义的年份[19],王先所言的这一年天象所示,就是人间变化的朕兆,真人代歌正是从此后二年邓渊着手辑集的。用拓跋正朔记后燕慕容太史丞所见天象,所言人事与拓跋帝纪又若合符契,这明明是道武帝周围之人所编造的痕迹。“大兵锵锵,其势不可当”,正是指拓跋平并州、出幽冀之兵,起于燕代之间的真人只能是道武帝。恰恰在此时出现的真人代歌,所歌颂的不是道武帝又能是谁呢?所以北魏乐府昏晨演习代歌,就是为了歌颂开国之君道武帝,以及拓跋“祖宗开基”的功业。
这些就是我认为代歌的正式名称是真人代歌的理由。代歌是拓跋史诗,又是道武帝帝业的舆论工具。同时它也承载了拓跋部人的感情,因而获得了它在这个时代应有的价值。这种文化现象,值得研究拓跋史者重视。

二、《代歌》、《代记》及其与《魏书·序纪》关系的推测

《代歌》素材来源于拓跋部民的口耳传闻。按照民族学所示的通则,这类素材总是越积越多,能说能唱,但却是杂乱芜蔓,内容矛盾。把这些长期积累的素材裁剪整理,配以合适的乐声,提升为史诗般的《代歌》,是在道武帝创建帝业的短时间里完成的。留存于《代歌》中的内容以“祖宗开基”、“君臣废兴”诸事为主,是适应道武帝本人创业治国的要求,而《代歌》的这些主要内容又正是邓渊撰修《代记》的资料依据。道武帝时拓跋部的《代歌》和《代记》这两项重大文化成果,都与邓渊有密切关系。
在道武帝以前的漫长岁月里,拓跋部社会发展缓慢,基本上停滞在“言语约束,刻契记事”[20]状态,开拓帝业的道武帝自己,也是出自结绳的野蛮人。力微以来,拓跋与外界也有接触很多的时候,所接触者或者是自幽州西渐的乌桓人,或者是以代郡、雁门郡人居多的汉人。汉人与乌桓人文明程度较高,但数量比拓跋人少,不足以在较短的时间内对拓跋部起太大的带动作用。拓跋部内缺乏各项文明制度,与道武帝经营的事业极不适应。所以当皇始、天兴的几年中,随着军事形势的大发展,拓跋部在社会、政治、文化、经济诸方面都面临转轨的急迫要求。魏收书诸《志》中多有这几年间诸项制度建树更革记载,一般都依靠人数不多的汉士的帮助。汉士如燕凤、许谦、张衮、崔玄伯等人作用最大,但除崔玄伯以外,事绩以军事谋略、政治运作居多;至于涉及文化的诸多方面,则往往另有它人专任。如音乐、官制,由邓渊司其事,史事记注也是责在邓渊。邓渊“明解制度,多识旧事”[21],是一个知识型的人才,是帮助道武帝向文治迈步的重要人物之一。
邓渊,雍州安定人,祖、父历仕苻秦,渊随父在冀州。道武得冀,以渊为著作郎、吏部郎。天兴元年(398)入代,与吏部尚书崔玄伯“参定朝仪、律令、音乐;及军国文记诏策,多渊所为”。《魏书·太祖纪》天兴元年十一月改制诸事,首列邓渊典官制,主爵品,定律吕,协音乐[22],其中前二类详见《官氏志》,当是就皇始元年“始建曹省,备置百官,封拜五等”诸事而整齐之;后二类见于《乐志》,其中重要一项当为创制庙乐,辑集《代歌》。《乐志》在邓渊定律吕、协音乐之后连叙庙乐和《代歌》,可知《代歌》辑集功在邓渊是可以肯定的。北齐时祖珽曰:拓跋初有中原,“乐操土风,未移其俗”,意指唯有鼓角,未识其它。皇始元年(396)破慕容宝,“于中山获晋乐器,不知采用,皆委弃之。天兴初,吏部郎邓彦海(邓渊)奏上庙乐,创制宫悬,而钟管不备。乐章既阙,杂以簸逻廻歌……。”[23]这就是邓渊协音乐之事。
邓渊在文化上更重要的成就,是他在戎马倥偬之际受命修史。他“明解制度,多识旧事”,具有基本的修史条件;而道武帝又是深具历史感的人,在创业兴国阶段百事俱需史鉴,而拓跋旧事比起汉典来更容易为他所理解。邓渊“性贞素,言行可复”,这也是修史人选应具有的史德条件。道武帝的“军国文记诏策,多渊所为”,其中所谓“文记”当包括今昔史料记注在内。汉士中有意搜罗记录拓跋旧事,邓渊应是第一人。
《北史》卷56《魏收传》:“始,魏初邓彦海撰《代记》十余卷”云云,这是修魏史之始。《北齐书》卷37《魏收传》全同。《魏书·邓渊传》:“太祖诏邓渊撰《国记》,渊造十余卷,惟次年月起居行事而已,未有体例。”此时北魏开国伊始,国史记注暂时只能是大事编年,全书体例还谈不到。
邓渊正式受命修史之事,本传系于邓渊与崔玄伯参定朝仪诸事之下,中隔渊“从征平阳”及赐爵加官诸语。案道武征平阳,是天兴五年(402)七月事,见卷二《太祖纪》及卷九五《姚兴传》。所以邓渊奉诏撰修国记,当在从征平阳之后,距他天兴元年入代已有四年之久[24]。邓渊株连于和跋一案赐死,而和跋被刑在天赐四年(406)四月[25],所以他兼领史职时间可以确定在402年七月以后至406年四月以前,前后不足四年。史不载道武帝命崔玄伯监修,可见当时并不理解修史是个难题,没有由崔玄伯监修的必要。
邓渊撰史,规模只有十余卷[26],属草创性质,其基本情况,有关载籍所记都一样,只是书名微异。《北史》、《北齐书》称之为《代记》,《魏书·邓渊传》、《史通·古今正史》则作《国记》。前所言及的邓渊修史以“记”为称,即邓渊所典“文记诏策”之“记”。《史通·史官建置》:“书事记言,出自当时之简;勒成删定,归于后来之笔。”《代记》年代早,自然都是根据“当时之简”,准确地说是以当时口述传闻记录为“当时之简”,所以称之为“记”是准确的,《代记》应是原始名称。《魏书》以魏为统,是北魏国史,故改《代记》为《国记》,《史通》则以唐代所见魏收书为准,亦袭称《国记》。这种差异是比较好解释的[27]。
邓渊《代记》记事包括的年代究竟有多长,载籍所见并不明确。《魏书》48《高允传》:崔浩之狱以后“世祖召允,谓曰:‘《国书》(案指崔浩监修的国史)皆崔浩作不?’允对曰:‘《太祖记》,前著作郎邓渊所撰;《先帝记》(案指《太宗明元帝纪》)及《今记》(案指《世祖太武帝纪》),臣与浩同作……。”这里把邓渊所撰之史称作《太祖记》,举以与下述《先帝记》及《今记》并列,不是用邓渊书的本名。邓渊死在道武死前三年,其时还无太祖庙号,更不可能撰成完整的《太祖记》[28],一定是后人据邓渊所撰编年记事续有斟酌增删而成。但高允所称都是诸帝之“记”,说明邓渊书名本称为“记”,或《代记》,或《国记》,这也是一证。
高允所称的《太祖记》,是严格限于道武帝本人的事迹呢,还是包括了像其它国史那样于开国之君中追叙其族姓世系以及开国以前的历史内容?我想,按中国历来修史成法,应当是后者。以邓渊其人博学而又“多识旧事”的特点,以他辑集《代歌》所获知的拓跋史诗资料,他是可以把拓跋历史梗概整理成文字的。我确信北魏之时经汉士之手保存了一些拓跋祖先资料,供以后崔浩以至魏收修史使用。最早整理拓跋祖先资料的汉士从现有资料看来,只有邓渊。
《十七史商榷》卷66“追尊二十八帝”条,谓二十八帝中惟猗 、猗卢、郁律、翳槐、什翼犍名通于晋为可据,其余凡单名者与猗等不同,疑皆道武帝时所追撰。我觉得王鸣盛所列数人以外,还有非单名者,如力微、推寅、诘汾等,其中力微之名亦见于晋代文书,所以不能一概而论。但道武帝时其先祖之名有代歌可作根据,所以断定其先祖之名大部分是邓渊辑集代歌时从鲜卑音记录而来,则是可相信的。
《魏书》卷57《高祐传》孝文帝时秘书令高祐与丞李彪等奏曰:“惟圣朝创制上古,开基《长发》,自始均以后,至于成帝,其间世数久远,是以史弗能传。臣等疏漏,忝当史职,披览《国记》,窃有志焉。愚谓自王业始基,庶事草创,皇始以降,光宅中土,宜依迁、固大体,令事类相从,纪传区别,表志殊异,如此修缀,事可备尽。……著作郎已下,请取有才用者参造国书,如其得人,三年有成矣。”
高祐等所言,是一段简略但却比较准确的拓跋先祖历史,从“披览国记”主要即邓渊《代记》而来,其内容与以后编成的魏收《魏书·序纪》所见一致,颇可窥见《国记》、《序纪》的因缘。我们且取这两者加以比较:
一,“创制上古,开基《长发》”,说的就是《序纪》黄帝后人封大鲜卑山、统幽都之北这一拓跋远古传说,如同《诗·商颂·长发》所叙殷人发祥的史诗内容。
二,“始均以后至于成帝”,世数久远,史弗能传,说的就是《序纪》始均入仕尧世,其裔不交中夏,载籍无闻,以迄于成帝毛的历史。以后道武帝追尊拓跋二十八帝,自成帝毛始,可见毛已经是道武帝认为其祖先中可信的人物,而成帝毛“统国三十六,大姓九十九”之说,也为拓跋后人所认同了。
三,“王业始基,庶事草创”,说的是《序纪》自成帝毛至圣武帝诘汾共十四帝时期。毛既可以追封,自然就是王业之始。不过人物虽然可信,事迹却是不详。只有自幽都两度南移,“九难八阻”之说,大体有今知考古材料,参照地理方位,可作印证。高祐上奏之中对此未作解释,只用“庶事草创”一语带过,说明其时除了口耳传闻以外,能见到的刻木结绳资料,未必皆能准确解读。而口耳传闻的代歌,比刻木结绳所记,应当更为可靠,更为具体。这一类拓跋祖先史实,都经过邓渊记录整理,加上他记注的道武帝事迹,共同构成邓渊《代记》,后来就基本包含在由崔浩总揽的国史之中。崔浩国史除崔浩之狱已毁的一部分以外,余下的当即高祐所说的《国记》,有三十卷之多。这种种资料,应当就是《魏书·序纪》的蓝本。
神元帝力微以下,迄于376年代国之灭,还有十四帝,高祐似皆归入“庶事草创”阶段,未作描叙。大概邓渊、崔浩所记这段历史已较详备,编年差可,不必更张[29]。这就是后来魏收书的《序纪》范围。皇始以降,北魏立国,记事日繁,制度日备,所以高祐等建议国史宜纪传表志兼备,不可仍依编年之旧。后来魏收书的全书规模就是这样,其中必定有很大的继承关系,可惜今天已无从说起了。
邓渊《代记》虽被高允称作《太祖记》,当是兼具魏收书《序纪》的全部内容,这里还有一个证据。魏收书十二帝纪,其中《序纪》在目录中排列为“本纪第一”,《太祖道武帝纪》排列为“本纪第二”,可见《序纪》是自有系统的独立存在的一纪,在魏收书中地位重要,不是附

带叙述性质。《序纪》列举的人物就是道武帝追尊的二十八帝[30]。二十八帝名字具在,世系清楚,间有大事可述,多少不等,而神元帝以后且有甲子纪年,可述大事较多。可见在邓渊书中,道武以前之事是独立成为段落的,以后就顺理成章地成为国史的前纪,也就是魏收书的《序纪》。
《序纪》应当主要就是根据《真人代歌》中“祖宗开基所由”,“君臣废兴之迹”的内容,经过邓渊《代记》的译释解读整理,才得以流传下来。《代歌》中的大事不被《代记》搜罗以致为后来《序纪》所遗的,恐怕不会很多。这也就是魏收书《序纪》在北魏史学史上极具价值的所在。根据这个事实,我认为《代歌》与《代记》同源,《代记》主要出于代歌。我还认定,辑集《代歌》、撰成《代记》的邓渊,也是《序纪》实际上的第一作者。
但是代歌是歌,代记是史,两者毕竟还有不同之处。代歌虽经筛选,难说没有一点违碍内容保存其中。但它不是直接叙事,不完全是真人真事的写实,又有音乐配制的影响和限制,所以是拓跋历史的升华。加以它用鲜卑语音,传播限于宫廷之内,汉人无从理解,所以它的内容稳定,未受政治非议。《代记》则不然,它首在实录,首在直笔,否则无以称史。正由于此,它容易受到挑剔,被当轴者疑忌,所以其作者邓渊就先于崔浩成为国史之狱的第一个牺牲者。不过邓渊人微,又值国初秩序初定,未至构成大狱,不像崔浩之狱那样引人注意,引人研究。
在思考邓渊《代记》撰写的多种细节时,我觉得邓渊之书不称《魏记》也值得一究。如前所论,邓渊撰史时间是在天兴五年至天赐四年(402—406)。据《太祖纪》,登国元年(386)元月道武帝即代王位,四月由代王改称魏王,而没有说明原因;天兴元年(398)六月经过朝臣议论,道武帝裁定国号不称代而称魏。这就是说,邓渊修国史之前已有两次明令改代为魏,而国史之名理应用国家正式名号[31],称为《魏记》才算合理,但事实并非如此。
拓跋先受晋封称代公、代王,后有实土,百余年孳生蕃息于代北之地,没有整体迁动。所以拓跋珪复国之后先称代王,符合习俗民情,是很自然的事。天兴元年(398)正式定国号称帝,经过朝议,群臣主张称代本无异议。只有崔玄伯以拓跋奄有中土,且将报聘江左为由,用旧邦维新之义,主张称魏。这很可能是崔玄伯揣度道武心意,以问作答。道武帝裁定以魏为称,并以魏帝名义昭告天地。但是代人习用旧称,而且反对向中土迁徙,连崔玄伯之子崔浩都是如此。官私称谓,都是代、魏兼用,到孝文帝迁洛之前,称代更为多见,称魏较少。何德章君《北魏国号与正统问题》[32]一文举例甚多,毋烦赘叙。所以国史以代为称而不曰魏,并不难于理解。何况邓渊于国初修史,所记尽代人代事,与整理《代歌》相近,如不称代而改称魏,反而不协于时了。
何文对于道武称魏的理由,已有论证。事实上当年曹操称魏的理由,拓跋也都考虑到了。何文留下两个他所不解的问题,一个是崔玄伯为什么以“慕容永亦进奉魏土”作为他所持称魏的理由之一,另一个是登国元年四月拓跋珪何以在甫称代王后数月即匆匆改称魏王。这两个问题是互相关联的。我现在把二者揉合在一起,试作回答。
拓跋珪复称代王,是前秦灭代十年以后的事。灭代的十年中,代北草原各部族部落经历了长期的混乱,刚复国的代王一时不可能把秩序恢复过来。其中拓跋珪最感困难的问题,是他的代王地位得不到普遍认同。与拓拔部最亲近的贺兰部和独孤部内,各自都有拥护的部落和反对的部落,拓跋珪随时要进行对反叛者的战争。最急迫的战争挑衅更是来自拓跋部内,因为拓拔部内并没有较稳定的君位传承制度,昭成帝以前,兄终弟及和父死子继总是交错出现,夹杂着残酷而复杂的斗争。拓跋珪是昭成帝的嫡孙,但珪父寔(献明帝)并未正式履位即死,昭成余子即献明诸弟存者尚多,按照兄终弟及的部族习俗,他们都有继承君位的权力。昭成幼子窟咄,是珪的季父,国灭时被掳徙长安,后因前秦之乱而随慕容永东迁并州闻喜、长子。慕容永称西燕,以窟咄为新兴太守。新兴,以地理位置言,与代北只有一山之隔;窟咄,以个人身份地位言,有继承已死的昭成帝而为代王的权力。而且他此时还有一定的实力。看来,他受慕容永命出为新兴太守,目的就是为了注视代北,相机进取。这种危殆形势,初即位的代王珪是不可能不觉察,不能不警惕的。
以《魏书》、《通鉴》等史籍互参,可以略见皇始元年正月拓跋珪即代王位以后的代北局势和代北周边局势是极为复杂多变的。皇始元年正月,可以看到三股势力同时活动。一,拓跋珪于牛川称代王;二,慕容垂在邺称帝,是为后燕;三,慕容永由长安东出,中途闻垂称帝而止驻河东闻喜,此处与邺皆为旧魏地。三足鼎立,都谋求前秦崩溃后并、幽、冀区域的统治权力。窟咄被委以新兴太守,独孤刘亢泥迎窟咄入代北与珪争位,都是此年春季的事。四月,珪由代王改称魏王;六月,慕容永遂称藩于后燕慕容垂。这暗示慕容永、慕容垂有可能联合共击拓跋珪。十月,慕容永进驻长子,是为西燕。长子和闻喜一样为旧魏之地。这表明拓跋周边彼此戒备的力量,全是驻在旧魏之地。拓跋珪其所以在此时匆忙改称魏王,意在表示代地魏地都应当由他统辖,既警告慕容永,也警告拓跋窟咄,不许插足其间,不得侵犯代北。至于慕容垂,他不能容忍自长安外奔的慕容永以及附属于永的拓跋窟咄染指幽、并。是冬,拓跋珪联络慕容垂大败入侵的拓跋窟咄,代北局势才得以初步稳定[33]。
慕容永等东来时颇有军力,但无退路。当慕容永求入冀、幽不成,北上代北受阻,只得龟缩于长子一隅,还不时受到后燕压力之时,处境是艰难的。所以可以理解,《太祖纪》登国七年(392)十二月所载“慕容永遣使朝贡”之事,就是西燕怵于后燕压力,求代为与国以图存的表示[34]。同时也可以理解,天兴元年(398)道武帝在邺再议国号时崔玄伯所说“慕容永亦进奉魏土”,所指即此。至于“进奉魏土”,虚词而已,并无实事。所谓魏土,即指闻喜、长子。崔玄伯所谓奄有中土,旧邦维新,也是此义,只是地面更广而已。
综观前后,皇始元年,拓跋窟咄随慕容永入闻喜,拓跋珪敏锐地感到来者不善,立即表示他自己是魏土之王,改国号曰魏;登国七年,慕容永遣使北魏,也许真有过愿以长子魏土“进奉”的口头表示;天兴元年,拓跋珪又获得了旧魏要地邺城。把这些资料合起来看,研究所谓代、魏之辩问题,岂不是多了一重思路吗?何文遗下他所不解的两个问题,到此是不是算解决了呢?
以上,由探索《代歌》、《代记》同源及其与《魏书·序纪》关系,进入到所谓代、魏之辩的疑难之点及其解决门路。从这里我又想到,正史中对本朝先世历史追溯能做到像《序纪》这样既相当久远又比较准确,还以其“得体”[35]而受到四库馆臣的称赞,是少见的。追根溯源,拓跋古史中的这一特异之处,不能不归于国初邓渊同时完成辑集史诗《代歌》和记注古史《代记》的开创性成就。

三、国史狱事造成的史风问题

我留意考察邓渊之狱对北魏一朝修史的长远影响,是受到台湾青年学者陈识仁《北魏修史略论》[36]一文的启发。陈文看重邓渊之死是道武帝猜疑的结果;又提出崔浩国史之狱对北魏修史造成影响。这两点立意我都赞成,只是觉得两者之间似乎有某种关系,而陈文未曾措意。我现在进一步思考的是,第一,邓渊一介书生,不涉权势,要是真有什么事引起道武帝猜疑的话,最可能是修史中出现了敏感问题;第二,国史之狱影响北魏一百余年,历来把这笔帐从崔浩之狱算起,我看应以邓渊之狱为始。邓渊是受命修史的第一人,其狱事内容与崔浩基本一致,崔浩之狱正是邓渊之狱滥觞所及的结果。
《魏书》卷24《邓渊传》,渊从父弟晖坐和跋案,“太祖疑渊知情,遂赐渊死”。和跋[37],代人,世领部落[38],与拓跋部关系久远,随道武帝,以武功显。天兴元年(398)和跋以行台尚书镇邺;邓渊从弟晖为行台尚书郎,与和跋“厚善”。道武杀和跋,罪名是修虚誉,性奢淫。“修虚誉”云云,罪名空泛,可重可轻,毕竟不是犯上作乱一类死罪。邓渊是新附文臣,一直“谨于朝事,未尝忤旨”,史臣叹其“贞白干事,才业秉笔,祸非所罪,悲哉!”邓渊之死不但时人愍惜,道武本人也是“既而恨之”。由此可见邓渊之冤昭然在人耳目,但冤情底蕴却迄今无人探究。
《魏书》卷 125之二《天象志》,天赐四年(406)四月“诛定陵公和跋”。邓渊赐死当是紧接其后之事。邓渊《代记》记事,最晚当止于此年,下距道武帝之死还有三年半的时间。道武帝死于天赐六年(409)十月,年三十九,算是盛年之君。但他自幼多艰,历经波折,从复称代王到建立帝业,历二十四年之久,在政治上已到晚期,是嚆矢之末了。天兴五年(402)阳平之役获胜,道武帝驰骋疆埸生活从此结束,此后他思虑所及,多是“追思既往成败得失”,以及穷思如何跳出拓跋历史争位斗争的老路,实现帝位的平稳传承。这是一个非常棘手,很难决断的问题。道武晚年多猜疑忌妒,当与此有密切关系。而邓渊奉命修史,恰恰就在这个时候。
无力执政的道武帝,寄情校猎于新筑的犲山离宫,有时一年行幸三次之多,每次长达数月。他嗜服寒食散,药动颠狂不已。天灾变异使他恐惧,但更多的恐惧是政治性的事件。这种身心状态加重了他喜怒乖异,杀戮无节。邓渊之死也就是在道武帝这种心态下发生的。
据《官氏志》,天兴四年(401)九月“罢外兰台御史,总属内省”。可知邓渊天兴五年居馆职之时,是内省官员,修史事务,包括史实的搜求、翻译、斟酌、取舍,巨细无遗,都是在道武帝眼下进行。道武帝是一个深具历史感的人,对于拓跋旧事之可资借鉴者是非常留意的。崔玄伯对他谈论的许多汉典故事,虽然对他有启迪之处,但毕竟是隔了一层。而拓跋故事中本有许多可以资治者,道武帝更易理解,可以产生联想,直接利用。但这些保存于刻契结绳中的拓跋旧事,需要专门的人来解读;拓跋先人的口碑歌谣在史官中编辑使用,也先得翻译成汉文。所以《史通·史官建置》中说:“当代都之时,史臣每上奉王言,下询国俗,兼取工于翻译者,来直史曹。”邓渊供职史馆,必然也是“上奉王言”,即听取道武指授;“下询国俗”,即了解拓跋旧事,包括寻绎《代歌》,经过翻译由汉字记录,备国史采用。《邓渊传》史臣谓渊“才业秉笔”,这正是史臣的日常职分所在,也正是道武帝不时指授检核之处。道武帝喜怒乖常,史实中疑窦之生,全在乎他一念之萌,而史臣也许并未经意,它人更难理解。我推定邓渊死于修史之狱,就是从这里出发的。这是一场所谓腹诽之狱,一场不动声色的文字狱。它以诬枉之词定谳,后人不能确指原因,又不信坐和跋案的谰言,只能让它成为一樁不明不白的公案。邓渊人物不显,其死事又在国初,魏史中论及者少,后来又被更大的崔浩之狱遮掩,所以后世留意及此的人就少而又少了。
邓渊《代记》可能包含什么样的敏感问题,以至形成北魏头一樁国史之狱呢?据《邓渊传》,渊造《国记》(案当时的本名是《代记》)十余卷,“惟次年月起居行事而已,未有体例。”按史官修国史成例,这只是一种草创,后人谓之长编,今人所称初稿。刘知几之言曰:“书事记言,出自当时之简;勒成删定,归于后来之笔。然则当时草创者资乎博闻实录,若董狐、南史是也;后来经始者,贵乎儁识通才,若班固、陈寿是也。”邓渊之书显然只是史实排比的实录,以待后之儁识通才删定勒成,一般不会有雌黄褒贬。连所谓“当时之简”,也只是临时自鲜卑语翻译而成,并无现成简牍可用。如果此中出现口实,不过是译文中事实取舍而已。邓渊主持而成的译文中,不大可能有所谓“春秋笔法”问题,因为如前所说,邓渊贞白干事,未尝忤旨,亦无权势背景,遇到敏感问题,一定是小心处理,以避嫌忌。

而且,《代记》虽被称作《太祖记》,当包括拓跋先世事迹,相当于魏收书中的《序纪》;而真正的《太祖记》部分最多只记到天赐四年,并未完成。如果邓渊书被认定有问题,只能是出在拓跋先世和道武帝本人至天赐四年为止的这个时间段里,而此时间段内道武之史是当世之事,道武亲自过问,估计难产生嫌疑;而道武先人事迹,相当于魏收书的《序纪》部分,则其事其言已久历时日,滋生嫌疑的可能要多一点。现在就来看能否找到一些蛛丝马迹。
不少学者认为崔浩国史之狱所谓“备而不典”、“暴扬国恶”,是指国史所录的一些拓跋故事,在昔本为旧俗使然,无关风化,在今则不合常道,有悖人伦。史臣直笔招祸,最易在此方面产生。周一良先生《崔浩国史之狱》[39]判断献明帝死后贺后被其父昭成帝收娶,所以贺后先后所生既有献明帝之子,又有昭成帝之子,诸人行辈既为兄弟,又为叔侄。这在北俗中蒸报之事本无所嫌,如果《代歌》中有此等内容,也不一定会受到注意,可是记入《代记》,诸人行辈混乱所涉人伦问题就暴露出来了。我自己在考察北魏后宫子贵母死之制时,对此现象也有所发现,有所议论。国史所记这类本无足异的拓跋旧事,在道武帝成为专制帝王以后极易成为定罪口实,崔浩国史中的“不典”、“国恶”,的确可以从此得到解释。进一步说,这些口实,当以道武建国以前所传而迻译所得者居多,记载这些事的国史,并非崔浩新撰而是已有的邓渊《代记》。因为邓渊有《代歌》参考而崔浩则不可能有新的资料可据,不能凭空造成。我认为崔浩之狱滥觞于邓渊之狱,这是一个重要理据。至于在两次狱事中究竟是哪一个具体问题形成道武帝和太武帝的痛点,是否每次还有更为直接的兴狱的政治需要,由于资料缺乏,本文不拟探讨。
还有一个值得思索的现象,就是太武帝恢复史馆以后,修史之事与以前邓渊相比较,进展非常缓慢,似乎有某种障碍存在。案邓渊死在天赐四年(406),太武帝恢复史馆在神二年(429),其间二十余年国史“废而不述”;崔浩书成而大狱兴,在太平真君十一年(450),其间又是二十年有余,新纂成者除补足的《道武纪》以外,不过是《明元纪》、《太武纪》(未竣)而已。时日迁延太久,令人生疑。其中原由,我们先从太武帝修国史二诏试作分析。
据《崔浩传》,太武事功有成,神二年“诏集诸文人撰录国书,浩及弟览、高谠、邓颖、晁继、范亨、黄辅等共参著作,叙成《国书》三十卷。”此为前诏。太延五年(439)太武帝平凉州,完成了大功业,于是诏崔浩监修国史,大意说神后戎旗仍举,而“史阙其职,篇籍不著,每惧斯事之坠焉”。所以采取特别措施,“命公留台综理史务,述成此书,务从实录。”此为专门给崔浩之诏,我称之为后诏。二诏不同之处,一是后诏崔浩留台监秘书事,综理史务,并以中书侍郎高允、散骑侍郎张伟参著作,这就是专人专责,提高史臣档次,务期于成,而不是像前诏那样,诸人共参著作,崔浩只是参与者之一厕列其间而已;二是后诏提出特别的编纂要求,这就是“务从实录”,这是前诏所没有的。至于前诏所说“叙成《国书》三十卷”或是预期之词,实际上当时未曾完成而完成于后诏之后,所以后诏才说此前“史阙其职,篇籍不著”。
细审二诏,我认为修史难成,障碍在于史臣趑趄不前。太武帝前诏以一般事务看待修史之事,并未特予重视,对障碍也没有估计。趑趄不前的原因,我认为是邓渊史狱遗留下巨大影响,其中关键又是史臣不敢直笔实录。所以后诏才强调“务从实录”,实际上是太武帝亲自承诺不会重复出现邓渊史狱,以安史臣之心。
邓渊“祸非其罪”,必修史有所违碍,只是谁都不便明言。这是史臣寒心之事,是明元帝一朝史事“废而不述”,太武帝时仍然“篇籍不著”的真正原因。太武帝前诏所命史官,邓渊之子邓颖就在其中,这可能是太武帝故作无事的一种姿态,但事实上会产生负面影响。太武帝后诏正是针对此中问题,针对史臣缄口裹足,惟恐愆失心态而发。后诏特命有地位、有担当、有能力的大臣崔浩总监其事,也是表示有事可由崔浩负责,不致牵连史臣。一般说来,修史中是非得失的评骘,惶惶中的文士或可藏而不露,但是据实录文,文士逃避责任的余地很小。所以“务从实录”一语,加上崔浩总监,应当能释史臣重负,让他们安心著述。
崔浩本来是有德于太武帝的,太武帝得以早为储君,抚军监国,以至于为国副主,就是出于崔浩向明元帝的力荐。崔浩极富军国智谋,迭有大功,太武帝令歌工历颂群臣,有“智如崔浩”之颂。而且崔浩在朝谨敬避嫌,“以示不敢犯国”,甚至早在道武帝杀戮无节,左右力求逃隐之时,崔浩随侍左右,“独恭勤不怠,或终日不归”。他是邓渊之狱的目击者。所以用他综理史事,应该是最合适的人选,是推动史臣尽力著述的重要一步。他本人应该是深知太武帝对他的知遇之恩的。
崔浩不负所托,受命十年,国史告成。道武纪及拓跋先人追叙部分以邓渊《代记》为蓝本而有所加工,所谓“删定勒成之笔”,当出崔浩。邓渊死后道武纪所缺部分自然也由崔浩续成。太宗明元帝及世祖太武帝纪由崔浩、高允同撰。三纪的注疏高允居多,总裁在崔浩[40]。从后来崔浩罹大狱而高允无罪的情节看来,除了景穆极力保护高允以外,也许还有别的原因,例如所谓“备而不典”问题不出在太宗、世祖二纪,而出在崔浩续成太祖纪中;不出在各纪注疏而出在选材综理方面,等等。前有邓渊之狱,崔浩又蹈覆辙,我看只能从崔浩当真执行“务从实录”寻求解释。
崔浩总裁史事,首在破邓渊狱后史臣裹足局面,一切惟“务从实录”是崇,显示自己忠于太武帝的付托。而竞趋之士为了迎合崔浩,更以国史刊石立衢,“欲彰浩直笔之迹”。古来权势宠幸者于臣君相与之际,有时未达一间,酿成事端,自贻伊戚。智如崔浩,也不免忘乎所以,竟不思伴虎之谚。所以高允议论刊石诸事,“分寸之间,恐为崔浩万世之祸”。希君之旨以实录为依归,以直笔相标榜者,终于栽倒在直笔之下!人主的复杂心态使希旨者祸福无常,给史学造成祸害,问题不正是出在“分寸之间”吗?
古书所见,有一类智者以“揣摩之才”见长。赵国虞卿作《虞氏春秋》八篇[41]“以刺讥国家得失”,其中有“揣摩”一篇。隋代杨素称赞封伦善于揣摩,史臣称封“多揣摩之才”[42]。崔浩盖亦封伦之俦,揣摩人主之意而遭反噬,成为千古史坛话题。崔浩以直笔、实录获谴,不悖于史德。但他并不理解太武帝所言“务从实录”,除了有惩于邓渊狱事外,还有他的理解与需要。诚如《史通·序传》所说:“苟能隐己之短,称其所长,斯言不谬,即为实录。”“盛矜于己而厚辱于先”,那就难保不取祸了。当拓跋君主尚生活在名教以外之时,先人事迹无涉荣辱,无大违碍,而当皇权在握,礼法人伦成为衡量准则之时,所谓实录也就是另有尺寸了。如若不然,皇权就要裁剪史法,约束史家。这也是研究中国史学史的一个值得思考的问题。
实录之说始自刘向等人赞誉太史公书之“其言直,其事核,不虚美,不隐恶”,从此实录被尊崇为史德之首。至于著史冠实录之名,唐宋定实录之制,明清开实录之馆,历代相仍,有保存史料之功,但难说都能遵循太史公之所界定。刘知几以张俨《默记》、孙盛《晋阳秋》为例,“以验世途之多隘,知实录之难遇也”。[43]他感叹“古来唯闻以直笔见诛,不闻以曲词获罪” [44],这似乎就是暗指崔浩狱事。
史馆再开以后,直笔仍然是修国史中的大问题。孝文帝尝谓史官当“直书史实,无讳国恶”[45],但史官自有忖度,趋避在己,再也不会出现邓渊,更不会出现崔浩。韩显宗答孝文帝之问,自诩“直笔而无惧”[46],但实际上却无寸进。近一个世纪中史官备位,少有著述,崔光直云“但须记录时事,以待后人”[47];崔鸿撰《十六国春秋》,以其涉国初事,惧其言多失体,迟不敢行[48]。邓渊、崔浩事件阴影难消,国史之学难振。尔朱荣入洛后竟有山伟、綦儁等倡言“国书正应国人(案指代人)修缉,不宜委之余人”,以至二十余年中代人掌史事,一无所成。及至东魏魏收受修史之命,执政者所关注议论,忧心所在仍是直笔问题。他们自然知道不许直笔则无史可言,允许直笔又惧扇扬褒贬。高欢戏语魏收“我后世身名在卿手”;魏收言志,故意标榜“臣愿得直笔东观”[49]。高洋效法孝文帝之意,直言“好直笔,我终不作魏太武,诛史官”[50]。诛史官之始作俑者实际上是道武帝,此时其事已被人淡忘了。这些资料陈识仁的文章都已引用,无烦多说。只是附加一句话:修国史引出如此纷纭,历代少见,追根溯源,还是北魏史风造成,这种史风正是国史狱事不可避免的后果。
魏收著史,时过境迁,拓跋先人行事已失去敏感性,所以收书中得以保留一篇《序纪》,分量虽然不大,迄今仍为研究拓跋先人历史唯一重要资料,而且是基本上经得起验证的资料。经过邓渊、崔浩两案以后,《序纪》中的资料一定有不少磨合删削,在相当程度上已失去从鲜卑语迻译时的原始面貌。但是五胡诸载记之中,还不见有保存先人历史资料像《序纪》那样系统准确之例。只是自邓渊、崔浩以来百余年中史风污染,当途者既求誉于国史,又畏国史之毁;既不能不标榜直笔实录,又吹毛求疵于直笔实录之中。风气积久,洗之愈难。不止是帝王干预修史,连权势之辈都想利用国史巩固家族地位,多求史官为先人作佳传。这就是《史通·直书》所说史臣也只有“宁顺从以保吉,不违忤以受害。”魏收的一部《魏书》,虽不远于是非,但亦难免无疵,未行时已多纠纷,刊布后被指责为“秽史”,以至于历代学者屡起为魏收辨诬。在我看来,这也是北魏史风污染的一种后果。

行文既竟,还有几句赘语。近年我所作拓跋早期历史研究的几篇文章,某些环节找不到确证,因而有推测成分,论述难得周全准确,大体都随处注出了。本文也是如此。对邓渊狱事性质的判定,旁征颇有,但迄今找不到直接证明,而以下行文与此点关系较大。这在逻辑上是犯了“丐词”的毛病。我想,古史中有大量“待垦荒地”,由于直接资料缺乏,研究难于下手,历史的空白点难于填充,杂乱的现象难于作出说明。出于这种考虑,我把此文(以及其它相关文章)作为研究拓跋历史的一种思路,一种探寻,而不是作为确凿的结论奉献给读者,希望能起到一点从空白处、从杂乱中探索拓跋历史问题的促进作用。果能如此,此文本身即令言而不中,我觉得还是值得的。也许,这可以从“得鱼忘筌”、“得意忘言”之义来理解吧。

[1]拙著《北魏后宫子贵母死之制的形成和演变》曾出一长注解释“代歌”问题,但未细究。
[2]参唐长孺《魏晋杂胡考·步落稽》,《魏晋南北朝史论丛》。
[3]《魏书》卷108之三《礼志》三。
[4]阎步克教授见告,北魏的太常乐户,属杂户之一种,数量不少,可以视为拓跋朝野崇尚乐舞的佐证。我同意这个说法。
[5]赵超《汉魏南北朝墓誌彙编》(以下简称《汇编》),天津古籍出版社,1992年, 303页。元怡、元肃,景穆帝之后,《魏书》卷19下有传。本文所用赵超《汇编》资料,均分别与中州古籍出版社1989年版《北京图书馆藏中国历代石刻拓本汇编》第3、4、5、6册所刊拓本对勘。
[6]

FONT>《汇编》,150页。
[7]《汇编》,314 页。张瓘并非代人,大概是受代风影响而作此说,也可能只是自饰家世而已,并非真有可吟可唱的歌谣。案墓主此年七月死,正朔在北魏,十一月葬,已属东魏正朔了。
[8]《汇编》,381页。此墓志《北京图书馆藏中国历代石刻拓本汇编》未收。
[9]元侔墓志见《汇编》60页。据《北史》卷15,“昭成帝九子,庶长曰寔君,次曰献明帝寔,次曰秦王翰,次曰阏婆,次曰寿鸠,次曰纥根,次曰地干,次曰力真,次曰窟咄。”此受久即寿鸠,居第五,而墓志则谓为第八子。按罗振玉《丙寅稿》已注意到《魏书·宗室传》所载此世系与墓志有异。岑仲勉《元和姓纂四校记》(1994年整理本,中华书局,401页)亦略有说。又,《元和姓纂》引此世系中有名翰者,即秦王翰,《北史》作地干。
[10]《魏书》此卷据《北史》及它书补,而《北史》与今本《魏书》又有世系歧异处。点校本《魏书》校勘记据赵万里说,以此歧异处《北史》是而《魏书》非。
[11]元昭为昭成帝玄孙,志见赵超《汇编》页146。
[12]《魏书·官氏志》,宗正,六卿之一,第二品上。《汇编》140页元斌墓志,斌为景穆帝曾孙,官宗正丞,“器识闲雅,风韵高奇,澹尔自深,攸然独远”,完全是汉人名士气质。这样的知识分子拓跋人中还很少见。
[13]马长寿《碑铭所见前秦至隋初的关中部族》。页57—59,中华书局,1985。碑在陕西渭北下邽镇。
[14]据《原州古墓集成》,文物出版社,1999。
[15]近见日本学者松下宪一提交北朝史国际学术会议论文《北魏內朝制度考略》,所辑史籍及墓志中带有羽真号者有十六例。羽真一词迄今尚无确解。松下认为系北魏爵名以赐内附者。但上举各例多有于羽真之外另有爵名,而且还有皇族人物,则羽真之义毕竟难于确认。
[16]文成帝南巡碑尚有折纥真、斛洛真。另外,《汇编》267页比和真, 294页他莫汗真,365俟勤真,是否都是人物职称身份之词,不敢肯定。
[17]王先《魏书》只此一见。《晋书·苻坚载纪》记淝战中苻融陷寿春,执晋安丰太守王先。二王先年代相近,不知是否一人。
[18]《天象志》此卷魏收书亡,后人取张太素书补入,参点校本校勘记。此年天象志既记北事(贺太后崩),又记南事(晋帝殂),盖此时已开始有了南北两分认识,参见下注。
[19]《魏书·乐志》释皇始为开大始祖之业;《通鉴》胡注认为“南北之形”定于此年;正光二年杨氏墓志有“皇始之初,南北两分”之语(见赵万里《集释》及赵超《彙编》)。《天象志》(三)天兴元年(398)十二月“群臣上尊号,正元日,遂禋上帝于南郊。由是魏为北帝,而晋氏为南帝。案初上尊号是皇始元年事,即帝位在天兴元年,大抵北帝、南帝之形定于皇始,制度确定实施则在天兴。
[20]《魏书》111《刑罚志》。
[21]《魏书》24邓渊传。
[22]其下还列仪曹郎中董谧撰郊庙、社稷、朝觐、宴飨之议,三公郎中王德定律令、申科禁,太史令晁崇造浑仪、考天象。连同邓渊在内,都是当时各有专长的汉士。吏部尚书崔玄伯则总而裁之。
[23]《隋书》14《音乐志》中载北齐祖珽上书之言。
[24]陈识仁《北魏修史略论》(见《结网编》,台湾东大图书公司1998)237页文中,参考杨翼骧编《中国史学史资料编年(一)》(南开大学出版社,1987),断邓渊受命修史在天兴元年(398),似可酌。
[25]见《魏书·天象志》。事详后。
[26]《史通·古今正史》作十卷。
[27]《南齐书·魏虏传》谓平城“西三里刻石写五经及其国记”。此盖南人据传闻崔浩刻国史事,其国史亦称“国记”。称史书为记,《史记》、《东观汉记》都是例证。
[28]太武帝时,太祖这一庙号还是指平文帝;道武帝从烈祖之称改称太祖,是孝文帝太和十五年事。高允在太武帝时何得用太祖之号称呼道武帝?所以这整段文字都是经过后人改写的,不是太武帝时的原状。
[29]《魏书》卷62《李彪传》“自成帝以来至于太和,崔浩、高允著述《国书》,编年序录,如《春秋》之体,遗落时事,三无一存。彪与秘书令高祐始奏从迁、固之体,创为纪传表志之目焉。”修史人物不列邓渊,只能说明邓渊《代记》内容已被崔浩、高允之书吸收了。“三无一存”之说是笼统估计,以情理言,当是年代愈早,存者愈少。
[30] 参《十七史商榷》66“追尊二十八帝”条。《序纪》中只有二十七帝之名,是由于昭成帝之子、道武帝之父寔,未立早死,只附见于《序纪》昭成三十四年而未独立立目之故。
[31]例如《礼志》(一)天兴元年道武帝即帝位祭天地,理当用正式国号,故祝辞用“惟神祇其丕祚于魏室”之语。
[32]《历史研究》1992.3.何文着重分析拓跋力求争神州正统,改代为魏,守旧者则仍以代为称。称魏称代,何文举证甚多,文献墓铭均有。
[33]《通鉴》记永入长子即位在前,窟咄败亡在后,《本纪》记二事先后相反。实际上这大致是同时发生的事。
[34]代国无力助西燕抗衡后燕,西燕终于在394年为后燕所灭。
[35]《四库全书总目提要》史部《三国志》条。
[36]见《结网编》,台北市东大图书公司出版,1998。
[37]《魏书·官氏志》神元时内入诸姓有“素和氏,后改和氏”,和跋历代当世领素和部落。《元和姓纂》卷8去声十一暮,素和氏:“后魏有尚书素和跋。”
[38]和跋部落所驻,可以考知。《和跋传》太祖校猎豺山,“群臣佥言跋世居此土,祠冢犹存”。据《读史方舆纪要》卷40,豺山在善无,今山西右玉境,但有异说。
[39]见周著《魏晋南北朝史札记》,中华书局,1985。
[40]与高允同参考作的张伟,从其本传看,不但未罹刑罪,甚至未提及参预修史之事。大概张伟在后诏中虽有其名,而实际上未尝参与。
[41]《史记》卷76《虞卿列传》。《汉书》卷30 《艺文志》著录《虞氏春秋》十五篇,另有《虞氏微传》二篇。
[42]《旧唐书》卷3《封伦传》。
[43]《史通通释·直书》。
[44]《史通通释·曲笔》。参同书《疑古》引《孟子》和汉景帝、魏文帝之言。
[45]《魏书》卷7《高祖纪》(下)
[46]《魏书》卷60《韩麒麟传》附显宗传。
[47]《魏书》卷67《崔光传》附崔鸿传。
[48]同上。
[49]《北史》卷56《魏收传》。
[50]同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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胡宝国:读《拓跋史探》

田余庆先生新作《拓跋史探》已于2003年3月由三联书店出版。全书24万字,主要讨论了三个方面的问题。第一,北魏子贵母死制度与离散部落的关系。第二,拓跋与乌桓共生的问题。第三,《代歌》、《代记》与《魏书》序纪的关系。我认为,其中第一部分是全书最为重要、最为精彩的部分。以下的讨论主要围绕这部分展开。 
关于北魏子贵母死这一现象,前人早已注意到。赵翼说:“立太子先杀其母之例,实自道武始也。”(《廿二史札记》卷一三“《魏书》纪传互异处”。)周一良先生说:“拓跋氏入中原前之旧制,凡其子立为太子者,母妃先赐死,至孝文帝母犹因此而被杀。但北方其他少数民族未闻有此风俗。且游牧部落亦不如封建王朝之易于发生母后专权之例,其来源尚待研究。”(《魏晋南北朝史札记》)韩国学者朴汉济对此提出过一个解释。他认为,子贵母死既非拓跋旧法,也非汉制,而是北魏胡汉体制中的特殊事物,其目的是为了加强皇权。(朴说见田书所引)这个解释是不错的。 
关于北魏离散部落,《魏书》中一共有三条记载。《魏书》卷一一三《官氏志》:“登国初,太祖散诸部落,始同为编民。”《魏书》卷一○三《高车传》:“太祖时,分散诸部,唯高车以类粗犷,不任使役,故得别为部落。”《魏书》卷八三上《贺讷传》:“其后离散诸部,分土定居,不听迁徙,其君长大人皆同编户。”对于道武帝离散部落,分土定居之举,研究者多从拓跋社会由部落联盟向国家转变这个大的时代背景下求得解释。这个解释也是不错的。 
总之,不论是子贵母死,还是离散部落,都是老问题了,而且也都有了不错的解释。不过事情常常是这样的,不错的解释往往对我们妨碍最大,因为它使得我们有理由停下来,不再进一步思考。田余庆先生的可贵之处却恰恰是不满足于此,而是按他惯常的思考习惯,在一般人停下来的地方继续穷追不舍。他指出:“拓跋鲜卑,相对于先后兴起的其他胡族说来,是一个发展缓慢的部族。东汉桓帝时拓跋南迁,‘统国三十六,大姓九十九’,群体庞大松散。汉末建安年间拓跋诘汾再次南迁,部落联盟更扩大了。《魏书·官氏志》所谓‘七族’、‘十姓’,是拓跋部落联盟新形成的核心,血统亲近,‘百世不婚’。拓跋部作为联盟领袖,其后妃必取之于七族、十姓以外的部落,其女子也必于七族、十姓以外择偶。因此,在一定的时间内,可能出现一些与拓跋部世代为婚的部族,形成于拓跋部的特殊关系;由于君权不张,拓跋后妃也就自然而然地居间起着联络作用,甚至有可能成为维系拓跋部落联盟的关键人物。”(24-25页)在本书的另一处,作者明确写道: “道武帝建国,并没有强大的外界敌人要去认真对付,真正棘手的倒是他的母族部落和妻族部落,甚至还有他自己的母、妻。这一现象令我恍然大悟,原来道武帝用战争手段”离散部落“,首当其冲的竟是母族贺兰和妻族独孤,这并不是偶然的现象。打破部落联盟的束缚,建立帝国,是此举直接的,急切的原因。至于更为根本的社会原因,如部落役使之类,在当时似乎是第二位的。……离散部落之举和子贵母死制度看似无涉,却是内蕴相通,后者是前者的后续措施。”(3页)至此我们看到,作者从他独特的思考角度出发,终于把本来属于皇室内部的子贵母死制度与看似毫不相干的离散部落问题结合了起来。两个问题的结合真可谓互相发明,相得益彰。如果没有联系到离散部落,关于子贵母死的问题实际上已经无话可说;如果没有联系到子贵母死,离散部落的问题就难以落到实处,而只能是国家形成理论的一个具体例证而已。 
诗歌语言中有所谓“陌生化”之说。一位诗人朋友曾就此向我解释说,“形式主义”批评家们提出过一个概念。他们认为文学,这里主要指诗歌,目的就是要把语言“陌生化”,也就是说,让语言能够给人以新的刺激,提供看待世界的新角度。借用这样一个概念,我们不妨说,田余庆先生也是把我们熟悉的问题陌生化了。在原本已经题无剩义之处开掘出了新的局面,提供了新的思考动力。不过我这里要强调的是,诗歌语言的“陌生化”是诗人的有意追求,而田余庆先生的“陌生化”却并非刻意为之,而只是他研究工作的客观结果而已。 
与陌生化的结果相反,对于熟悉他研究特点的人来说,作者在书中所使用的研究方法是一点也不陌生的。这个方法是什么呢?其实就是政治史的方法。我们知道,在《东晋门阀政治》一书中,作者曾研究了南方几大家族的政治关系,而在《拓跋史探》一书中,作者研究的则是北方几大部族的政治关系。这本书的各个部分总括起来说,实际上就是一部拓跋早期政治史。众所周知,年鉴学派重视长时段,而对于属于短时段的政治史则比较轻视,认为是“转瞬即逝的尘埃”。这个思想对我影响很大,所以在以前写的《读<东晋门阀政治>》一文中,较多地指出单纯政治史的缺陷。但是读了《拓跋史探》,我却感到政治史的方法也有它不容忽视的长处。政治史虽然不能解释一切,但从此入手,却也可以发现并解释民族史上的很多重要问题。具体到早期拓跋史,政治史的方法显得尤其必要。如果从传统的民族学的角度去研究,除非有更多的考古发现,否则已经没有多少可以利用的资料了,而一旦从政治史的角度切入,就会发现还有不少值得我们分析的素材。正是借助于政治史,作者才描绘出了一个早期拓跋族的隐约身影。由此,拓跋早期的历史不再只是一种部落→国家的理论概念的演进,而是变得具体了、生动了、活泼了。 
研究政治史,不只田余庆先生一人。但他的政治史研究却别具一格,颇有值得论说之处。我们知道,研究政治史,既可以依据政治学的某种理论框架展开,也可以不要这些框架。在我看来,田余庆先生属于后者。我们看作者在本书前言中的一段话:“五胡十六国这一破坏性特别突出的时代得以结束,归根结柢是五胡日趋融合,其主要部分终于陆续积淀在农业地区而被汉族文明逐渐同化之故,这可说是今天史界共识。但是,在这漫长过程行将结束而又尚未结束的时候,为什么是拓跋部而不是别的部族担当了促死催生的任务呢?”(1-2页)我们再看作者在《东晋门阀政治》中就“王与马共天下”说的一段话:“为什么江左会出现这种政治局面呢?总的说来,偏安江左是八王之乱和永嘉之乱的产物,而江左政权依赖于士族,则是门阀制度发展的结果。士族高门与晋元帝‘共天下’,归根到底可以从这里得到解释。但是这还不能说明为什么是琅邪王氏而不是别的高门士族与晋元帝‘共天下’的问题。”(3页)这两段话充分反映了他对历史的认识。这个认识简单地说就是:当时的事情必有当时的原因。由此,他自然不会满足于理论框架给出的解释,也不会满足于一般性的说明,而是一定要找出一个具体的历史原因。受这种认识的引导,他在本书中又有如下的一段话:“我不排除道武帝曾在某个时候发布过离散部落号令的可能,也不排除某些具有定居条件的部落俯首接受号令的可能,但不认为所谓离散部落主要就是如此而无其他更直接、更急迫的原因和具体的过程。”(62页)把问题具体化的思路会很自然地诱导出新的疑问:道武帝究竟是在什么时间?在什么地点?离散了哪些部落?道武帝母后究竟又是来自于哪些部落?回答了这几个问题,离散部落与子贵母死之间的关系就自然地呈现了出来。在解释历史现象时,研究者很容易急切地求助于“规律”、“趋势”来加以说明,他却反其道而行之,一再向“具体”索要答案。与众不同的思考方法使他更像是一位旷野中的孤独旅行者。在他不断的追问中,泛泛的解释愈来愈显得苍白无力,而我们原本熟悉的问题也终于变得陌生了。 
研究早期拓跋史,面临的最大困难是资料太少。作者虽然竭尽全力钩沉索隐,但很多地方还是不得不以推测来弥补资料的不足。这之中有的推测极有道理,给人以启发,但也有的推测难免令人生疑。 
在《<代歌><代记>与北魏国史》一文中,作者指出《魏书·乐志》中《真人代歌》“上叙祖宗开基所由,下及君臣废兴之迹”,应该就是拓跋史诗。根据有限的记载,作者进而推测,在当时替道武帝整理、辑集代歌者只能是汉族士人邓渊。以后邓渊又奉命修《代记》,《代歌》中的内容应是《代记》的主要资料依据。因此《代歌》、《代记》同源。邓渊之后,又有崔浩修国史。记录了早期拓跋史的《代记》基本包含在了崔浩的国史之中。这些资料以后又成为魏收《魏书·序纪》的蓝本。因此辑集《代歌》、撰成《代记》的邓渊应是《魏书·序纪》的第一作者。由此,作者就勾勒出了《代歌》→《代记》→ 崔浩国史→《魏书·序纪》这样一条史学发展线索。我认为这条线索不仅清晰而且很有道理。其中尤为可贵的是作者意识到《代歌》与《代记》之间可能的联系。《代歌》早已不存,根据有关的只言片语而注意到它的价值,并将其纳入史学史的发展线索中是很不容易的。 
与上述合理的推测相比,接下来的推测就不那么合理了。关于邓渊之死,史书中是有明确记载的。《魏书·邓渊传》载,渊从父弟晖坐和跋案,“太祖疑渊知情,遂赐渊死”。但作者不相信这条材料,反而认定邓渊与以后的崔浩一样,也是死于国史之狱。在毫无材料依据的情况下,作者为什么一定要做出这样的推测呢?我想,这或许是因为作者不自觉中已经被前面自己发现的《代歌》、《代记》的线索束缚住了。我们先来看崔浩国史之狱。崔浩因修史“备而不典”、“暴扬国恶”而遭祸。《通鉴》也说崔浩国史“书魏之先世,事皆详实,……北人无不忿恚。”。由此可知崔浩国史当是记录了一些有悖人伦、有伤风化的早期拓跋故事,因此惹怒了皇帝,引来杀身之祸。但是,崔浩所记拓跋早期历史是从哪里来的呢?根据《代歌》、《代记》线索,这些内容应该都是从邓渊所撰《代记》那里来的。既然如此,既然崔浩已经死于国史之狱,那么更早的邓渊能不死于国史之狱吗?看来,为了符合这个逻辑,作者只能让邓渊死于国史之狱了。 
更为值得商讨的问题还不是邓渊之死,而是关于离散部落的史料依据。根据作者的统计,贺兰部被离散的经过是这样的: 
第一次:据《资治通鉴》记载,北魏登国三年(388年)三月,“燕赵王麟击许谦,破之,谦奔西燕。遂废代郡,悉徙其民于龙城。”作者指出:“显然,慕容麟尽徙代郡民于龙城,当包括三十年前的前燕时期由贺赖头率领居于代郡平舒城的数万贺兰部民在内。”(67页) 
第二次:登国五年,道武帝与慕容麟合击贺兰、高车诸部于意幸山。稍后,铁弗刘卫辰又袭贺兰,贺兰部请降于拓跋,“遂徙讷部落及诸弟处之东界。”(70页) 
第三次:登国六年,贺讷兄弟内讧,后燕“兰汗破贺染干于牛都”,慕容麟“破贺讷于赤城,禽之,降其部落数万。燕主垂命麟归讷部落,徙染干于中山。”(70页) 
第四次:作者在叙述皇始三年贺讷之弟贺卢逃奔南燕后说:“至此,道武帝舅贺讷、贺染干、贺卢三人,只剩下贺讷一人,据《贺讷传》,此时贺讷已无所统领,而且后嗣无闻。道武舅氏中还有一个贺讷的从父兄贺悦,待道武‘诚至’有加,得到道武善遇。贺讷、贺悦的部民,自然也被强制离散,分土定居了。这是第四次离散贺兰部落,也就是现知的最后一次。”(70-71页) 
以上离散贺兰部事例中,第一次、第三次都是被慕容部离散的,真正被拓跋部离散的只有第二次、第四次。我们再看独孤部被离散的情况。 
第一次:《资治通鉴》登国二年记“燕王(慕容)垂立刘显弟可泥(亢泥)为乌桓王,以抚其众,徙八千余落于中山”。作者指出:“刘显八千余落徙中山,这是独孤部的主要部分第一次被强徙,是孤独部落离散之始。”(80页) 
第二次:刘亢泥降于慕容氏,《太祖纪》皇始元年(396年)六月“遣将军王建等三军讨(慕容)宝广宁太守刘亢泥,斩之。徙亢泥部落于平城。”作者指出:“这是《魏书》所见独孤部民第二次被强制迁徙。”(83页) 
独孤部被离散两次,一次是慕容氏所为,一次是拓跋氏所为,这与贺兰部被离散的情况类似。作者在59页曾分析说:“部落离散,就其实质说来,本来是部落发育的自然过程,它之所以在道武帝时比较集中地出现,却也是由于道武帝创建帝业的特别需要。这可以解释为什么离散部落只留下这几家外戚部落的个案,而大量的对道武帝帝业无害的部落却得以保存下来。”显然,作者十分关注、十分强调的是道武帝拓跋珪离散贺兰、独孤部落,而不是别人的离散行动。但是,根据他提供的事实,不论是对贺兰部还是对独孤部,离散部落的发动者都是不仅有拓跋氏,而且也有慕容氏。两家各占一半。既然如此,恐怕就不能把离散部落很特殊地仅仅看成是道武帝为打击外戚部落,“创建帝业的特别需要了”。应该说,作者也意识到了慕容氏在离散过程中所起的作用,所以在35页又补充说:“看来,贺兰部破败主要是拓跋部借慕容部之力,得利的是拓跋部。”这个补充其实没有太大用处。这里所谓“借慕容部之力”一说,给人的感觉似乎慕容氏只是前台的表演者,而拓跋氏才是幕后操纵者。如果真是这样,那么上述由慕容部发动的离散事例就不构成对本书观点的反证了,但遗憾的是,实际上并没有这样的材料可以证明。所谓 “得利的是拓跋部”云云,其实只是一种客观效果而已,并不能因此把慕容氏离散贺兰、独孤部归结为拓跋氏操纵的、有预谋的行动。 
这里还涉及到一个概念问题。究竟什么是离散部落?按书中多数场合的表述,所谓“离散部落”就是指强制迁徙部落。但十六国时期某个部族强制迁徙另一个部族从甲地到乙地是常有的事情。如果仅在此意义上来理解离散问题,那道武帝离散部落还有什么特殊意义好说呢?作者似乎也认识到这个问题需要解释,所以在 75页又说:“强徙部落自十六国以来就是常有的事,包含离散部落,但并非都离散。道武帝在完成帝业的过程中,从总体上意识到离散部落的深层意义,理解其必要性和可能性,因而采取更主动更连续更强烈的措施,不只是迁徙部落,而且还要离散部落。这是他与十六国君主的不同之处。”按这个表述,似乎强制迁徙部落又不等同于离散部落了。 
按我的理解,强制迁徙部落不等于离散部落。前引《官氏志》说:“登国初,太祖散诸部落,始同为编民。”《贺讷传》说:“其后离散诸部,分土定居,不听迁徙,其君长大人皆同编户。”按离散的结果既然是“同为编民”、“君长大人皆同编户”,因此所谓“离散”应该是指打破部落内部旧有社会等级结构而言的,唐长孺先生也是这样理解离散部落的,他说“部落的解散使贵族、人民都成为单独的编户。”(唐长孺:《拓跋国家的建立及其封建化》,载《魏晋南北朝史论丛》205页。)而所谓强制迁徙部落,即只是把某部落从甲地强制迁徙到乙地是不可能起到这种作用的。按作者上面的表述,似乎道武帝不只是迁徙部落,而且还离散了部落,但根据前面提到的有关贺兰、独孤部的史料,我们见到的还只是迁徙而不是离散。总之,如果我的理解不错,如果强制迁徙部落真的不等于道武帝登国年间的离散部落,那么本书所有有关于此的讨论就值得重新考虑了。 
写到这里,我不想再就作者的种种可疑推测说更多的话了,因为作者本人早就认识到了这个问题。他在前言中说:“我衰年涉入拓跋史题,颇感力不从心、步履维艰,更感到资料不足,结论难下。”他还说:“基于以上认识,我把本书所见主要作为窥探拓跋史的一种思路,而不一定是作为确切结论,奉献给读者,希望起到促进思考、共同探求的作用,以期尽可能把古史的这一模糊区域一点一点加以辨识。”凭借着几十年的研究经验,田先生当然知道要尽量避免过多推测,本书诸多推测实再是出于无奈,正所谓巧妇难为无米炊。史料的极度缺乏制约着每一个研究者。他已经竭尽全力了,尽管有些推测还需要再斟酌,但他毕竟已经给我们描述出了一个以前未曾见过的、精细的历史过程。这是我们要十分感谢他的。 
《汉书》卷六二《司马迁传》载,西汉刘向、扬雄“皆称迁有良史之材,服其善序事理,辨而不华,质而不俚,其文直,其事核,不虚美,不隐恶,故谓之实录。”本传又载司马迁语:“所以隐忍苟活,函粪土之中而不辞者,恨私心有所不尽,鄙没世而文采不表于后也。”“实录”之说、“文采”之说,正反映了史学的两个特点,一方面,史学是求真的学问,另一方面,史学也是展现史家思想、才华与魅力的手段。换言之,史学不仅是科学的,而且也是艺术的。从求真的角度看,我对《拓跋史探》多有疑惑;从展现史家个人才华与魅力的角度看,我又认为这是一部成功的著作。这种矛盾的态度或许就说明了这样一个浅显的道理:真与美有的时候并不能完全统一。 
(载《读书》2004年第6期,题目被编辑改为《在题无剩义之处追索》)
学术批评网(www.acriticism.com)转发 2005年11月2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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