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말이지만 조정의 정책은 황제가 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연과 황제의 관계는 언급했다. 이연은 황제와 사촌지간이었다. 그들의 어머니들은 친 자매였고 그들의 외할아버지는 동일인물이었다. 바로 북주(北周)의 독고신(独孤信)이다. 이연의 어머니는 독고신의 4번째 딸이었다. 그리고 수양제의 어머니는 독고신의 7번째 딸이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이연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다. 7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작위를 승계하였는데, 이것은 최소한 그 전에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의 어머니는 그것보다 더 일찍 작고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연이 고아가 된 이후로, 그의 이모인 독고황후는 그를 많이 아낀다. 수문제(隋文帝) 양견 (杨坚)도 이연에게 우호적이었다. 황제와 황후 모두가 이연에게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혜택을 입었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수양제는 이연보다 2살이 어리다. 이연이 7살때 수양제는 5살이었다. 만약 황후이모가 자주 이연을 입궁시켰다면, 이연은 수양제와 어린시절부터 왕래가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현 황제와의 밀접한 관계는 다른 사람들이 보이게는 튼튼한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속을 살펴보면 이연은 자신과 황제의 관계를 그리 낙관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연은 사촌인 황제를 경계했다. 그것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우선 이연도 좋고 수양제도 좋다. 모두가 관농집단(关陇集团)의 후손들이었다. 이 집단의 특징은 모두가 알다 싶이 강력한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한 것이다. 한마디로 무인집단이다. 그리고 무인들은 보통 준마를 사랑한다. 병적으로 사랑한다. 이연과 수양제도 당연히 준마를 사랑했다. 한번은 이연이 한필의 준마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준마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자 이연의 부인 두(窦)씨는 이연에게 조언을 한다. "황제도 준마를 사랑하는데, 당신이 이 말을 황제에게 진상하지 않으면 황제는 당신의 관직을 깍아버릴 것입니다." 이연은 이 준마를 너무나 사랑해서, 부인의 조언을 계속 무시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묘한 일이 발생하였다. 이연의 관직이 오래동안 올라가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때에는 부인은 이미 작고한 이후였다. 그런에 이연은 아마도 무엇인가를 알아차린 것처럼, 준마를 수양제에게 바치는 것은 물론 황제를 위한 준마와 사냥개와 매등을 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곧장 효과를 봐서 그는 곧장 3품고급관에 올라가게 된다. 수당(隋唐)시대에는 3품이상이어야지 고급관원이었고 그 이하는 그저 그런 존재일 뿐이었다. 이연은 이때 완전히 깨닭게 된다. 자신이 말을 바치지 않았으면 황제는 절대 그를 3품관에 올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두번째 사건은 이연의 이미지때문이었다. 당시 점술가도 이연의 부귀를 점치엇다. <신당서 新唐书>에는 "3개의 유두가 있었다 体有三乳"라고 기록되어있다. 이것은 지금에 와서 보면 이상하지만 당시에는 신성한 상징으로 기록되어있다. 다만<수강가화 隋唐嘉话>에서는 이런 기록도 있다.  수양제는 자주 이연과 농담을 했다 "매번 조정회의에서 물어났때마다 양제는 그를 가지고 놀렸다 每朝谒退,炀帝皆有词谑" 정리하자면 이렇다. 황제는 자주 이연를 놀려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촌형인 이연은 감히 말대꾸를 할 수 없었다. "연회에서 양제는 사람들 앞에서 이연을 놀렸다. 이연은 이연의 얼굴 주름이 자글자글하여 할머니 같다고 했다. 이연은 분노하고 원망하여 즐겁지 않았다 后因赐宴,炀帝于众因戏神尧。神尧高颜面皱,帝目为阿婆面,神尧恚(hui)不乐"이 둘은 매우 친했을까? 친했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불평등하였다. 이연의 입장에서 그의 사촌동생에게 자신은 장난감이었을 뿐이었다.

세번째 사건은 한번의 조정회의에서 벌어진다. 당시 이연은 병으로 참석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수양제는 이연의 동향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이연의 생질(누이의 아들)이 있었다. "외삼촌은 병이 났습니다." 그는 황제가 이연의 안부를 묻고 위로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수양제가 관심을 가지는 방식은 매우 기묘했다. "병? 죽을것 같은가?" 이러한 어투는 분명히 이연의 죽음을 바라는 것 같았다. 이연은 훗날 이 이야기를 듣게 되고 더욱 더 황제를 경계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탐관오리처럼 연기하며 황제를 안심시키게 된다.

이러한 사건들에서 우리는 쉽게 이연과 수양제는 비록 사촌지간이고 불알친구이지만 이연은 언제나 두려워했고, 자신이 황제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그는 황제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까 언제나 전전긍긍하였다. "

그렇다면 투르크에게 패배한 일에 대해서 황제의 처리를 기다리는 현재의 상태에서 그는 자신과 황제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황제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걱정하게 된다. 더군다나 자신이 태원에서 죽는 것은 비국중에 비극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고? 왜냐하면 자신의 봉국의 원류인 지방이었기 때문이다. 천하영웅이 자신을 비웃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비관적인 생각들이 이어졌다. 이연은 황제에게 죽임을 당하느니 반란이나 일으켜보자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래야 한가닥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하늘이 도와준다면 더 천하도 잡을 수 있다.

그래서 이연은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멍쉬엔슬(孟宪实)의 晋阳:梦开始的地方이 괜찮은 내용이어서, 직역식이 아닌 의역위주로 번역한 글입니다. 오역이나 오타에 대해서 강력한 비판을 부탁드립니다. 또한 저의 "귀차니즘"을 생각하면 어차피 덧글도 달리지 않아서 압력도 별로 없는 이런 종류의 글의 업데이트는 조금 느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덧글을 달아달라는 말을 참 아름답게 돌렸군요! 우훗-_)

돌발 사건

그리고 한번의 우연한 사건이 모든 것을 변화시키게 된다.

역사가 드라마같이 느껴질 때가 바로 이럴 때이다.

한번의 오해가 역사의 물길을 돌연 잡아 비틀어버리기도 한다.

 

북방은 투르크(突厥)이 침입해 왔다. 이연은 북부의 마이군(马邑郡)으로 병사를 파견하고, 당지의 태수 왕공인(王恭仁)과 힘을 합쳐서 투르크를 막아내려 한다. 이때 이연의 군대는 왕군아(王君雅)가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수군은 패배를 하고 투르크는 승리의 나팔을 울리며 돌아가게 된다.

과연 이 전투로 얼마의 피해를 입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투르크가 대체 얼마나 위대한 전과를 이루었는지에 대한 기록 역시 없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이 주의한 것은 그러한 고증이 아니었다. 수군의 패배 처리는 역사의 새로운 도미노 현상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 전투의 책임은 누군가가 반드시 짊어져야 했다. 이것이 대대로 내려오던 통치의 정석이다. 수양제의 조정은 더 큰 실패나 군인들의 책임감을 묻기를 위해서 당연히 일정한 처벌이 필요하다. 그뿐만이 아니라 국법에조차 상벌을 철저히 할것을 명시하고 있었다.

그럼 이연에게 어떤 처분을 내렸는가?

우리가 이 일을 탐구할 때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역사에 남겨져 있는 기록은 매우 모호하다는 것이다.

<신당서 新唐书>의 <고조본기 高祖本纪>에 의하면 "양제가 관리을 파견하여 고조를 강도로 압송하게 했다. 고조는 두려워했다." (炀帝遣使者执高祖诣江都,高祖大惧。)

<자치통감 资治通鉴> 에 따르면 수양제는 이연과 왕공인이 적을 막지 못함을 들어 관리를 파견하여 강도로 압송하게 했다. 이연은 두려움에 떨었다."(帝以渊与王恭仁不能御寇,遣使者执诣江都,渊大惧。)

<대당창업기거주 大唐创业起居注> 에서는 수양제가 관리를 파견하엿고 "이연을 묶고 왕공인을 참수하였다"라고 적고 있다.(隋炀帝派使者前来,“系帝而斩仁恭。”)

비록 기록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위의 사실에서 전쟁실패의 책임자로서 이연이 조정의 어떠한 처벌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최후의 처벌은 대체 무었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하지가 않다. 일단 강도로 가서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라는 것 뿐이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연은 강도로 압속되어 황제의 다음 처분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의 핵심은 이연이 황제가 행할 처벌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했냐는 것이다. 그리고 이연은 이러한 판단을 바탕으로 어떠한 반응을 보였냐는 것이다.

이연은 어떻게 판단했을까? 그는 어떤 근거를 가지고 판단했을까?

 


멍쉬엔슬(孟宪实)의 晋阳:梦开始的地方이 괜찮은 내용이어서, 직역식이 아닌 의역위주로 번역한 글입니다. 오역이나 오타에 대해서 강력한 비판을 부탁드립니다. 또한 저의 "귀차니즘"을 생각하면 어차피 덧글도 달리지 않아서 압력도 별로 없는 이런 종류의 글의 업데이트는 조금 느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덧글을 달아달라는 말을 참 아름답게 돌렸군요! 우훗-_)

"他钵可汗의 불교 도입에 대해서"는 唐代九姓胡与突厥文化(蔡鸿生 中华书局 p147)에 나오는 글에 의문이 들어서 작성한 글이다. 木杆可汗의 동생인 他钵可汗(572-581)은 불교를 도입했다. 하지만 1기 투르크제국에서는 불교를 받아들인 다른 칸은 없었다. 그렇다면 他钵可汗은 어째서 불교를 받아들였을까?


우선 불교를 비롯한 종교의 전파는 두가지의 경우로 나눌 수 있다. 민간에 먼저 유포가 되고, 그 세력이 일정정도 이상이 되었을 때 압력을 받은 지도자가 해당 종교를 수용하는 경우이다. 기독교의 로마에서의 발전양상이 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지도자가 해당 종교를 "현실적 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런 종교가 지도자의 비호아래서 점차 민간에 유행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백제에서의 불교유입을 생각하면 비슷하다.

그렇다면 他钵可汗의 경우는 어떤 경우라고 판단해야될까? 他钵可汗이후에 해당 종교가 민간에 지속적으로 유지가 되는지 아닌지를 알아보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他钵可汗사후 불교는 순식간에 사멸한 것은 他钵可汗 개인적으로 해당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해석해야될 것이다.


문제는 他钵可汗은 왜 불교를 수용했을까? 蔡鸿生은 이에 대해서 부국강병을 원했던 他钵可汗와 불교를 받아들이므로서 突厥가 약화되기를 원했던 北齐왕의 현실적인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으로 해석한다. 북제와의 생각은 현실과 매우 비슷할 것이다. 그가 투르크에 전달한 열반경(涅磐经)의 내용을 보아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다. 문제는 他钵可汗의 입장이다.

지도자는 바보가 아니다. 단지 불교를 받아들이면 부국강병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믿는건 어떤 현실적인 근거도 없다. 분명히 일정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오래동안 투르크 세계의 주류 종교인 샤마니즘도 부국강병을 이룩할 수 있다고 말하는 점에서는 동일하기 떄문이다.


혹시 他钵可汗은 투르크의 전통종교인 샤마니즘의 사제집단과의 일정한 충돌을 하였고, 불교를 이용하여 이러한 사제집단과의 알력싸움을 할 생각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는 이러한 알력싸움에서 패하게 되고(9년의 짦은 통치), 그의 뒤를 잇는 沙钵略可汗은 오히려 "从天生"이라는 샤머니즘적인 가치를 더욱 강조했던 것이 아닐까?




추가적인 사료 조사가 필요한 점

1) 他钵可汗의 사망이유

2) 他钵可汗과 샤만집단간의 충돌에 대한 증명사료

3) 他钵可汗 계승에 대한 문제가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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