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 친척의 덕을 보다.

-- 사촌지간의 정

618년 수나라는 멸망하였다.

이때 왕박(王薄)이라고 부르는 한 농민은 <무향요동랑사가 无向辽东浪死歌>를 만들었고 대히트하였다. 마치 예전에 "DJ.DOC와 함께 춤을"을 할아버지부터 미취학아동까지 모두가 불렀던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무슨 뜻이냐고? "요동으로 가면 쳐 죽으니까 가지 마라"라는 아주 단순하면서 당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가사였다. 그 당시의 온갖 농민운동이나 그 외의 잡다한 난리들이 모두가 이놈의 무향요동랑사가로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난리부르스 속에서 강도(江都), 그러니까 지금의 양조우(扬州)에 있었던 황제를 호위해야될 금위군(禁卫军)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수양제(隋炀帝)는 때가 왔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의 허리띠를 풀러서 심복에게 주고, 목 졸라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혼자 죽을 용기는 없었나 보다.

그런데 수도가 장안인데 수양제는 왜 양주라는 중국의 남방에서 죽었을까? 사실 수양제 제위 18년 중에 13년을 양주에서 지냈었다. 아마 중국의 통일 왕조 중에서 남방에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황제일 것이다. 수양제가 자주 양주에 있었기에, 어떤 이는 대운하가 어디까지나 수양제가 양주에서 놀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건 아니다. 막말도 적당히 해야된다. 대운하는 기본적으로 남북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조역통로로서 필요했었다.

어찌되었든 수나라는 581-618년이라는 딸랑 39년만에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다.

당나라의 개국황제 이원(李渊)은 진양(晋阳)에서 군대를 일으켜서 618년에는 스스로 황제라고 선언한다. 그가 바로 당고조(唐高祖)이다. 그는 국호를 당(唐)으로 정했다. 또한 수도를 장안으로 지정하였다. 이원은 수양제의 사촌동생이다.  그 둘의 어머니가 서로 친자매로 무협지에 자주 나오는 독고(独孤)씨였다. 이원은 수나라 시대에 당국공(唐国公)으로 진양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가 군대를 거병해서 관중의 장안으로 들어간 이후에 수양제의 손자를 황제로 세우고 수공제(隋恭帝)라고 하였다. 그리고 수양제를 태상황(太上皇)으로 추존하였다. 그리고는 모두가 예상했듯이 섭정을 하면서 실권을 다 장악해버린다. 왜 황제가 되지 않고 귀찮게 섭정을 했냐고? 당시 이원의 거병 이유는 어디까지나 살해된 사촌형 수양제를 위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래서 일단은 수양제의 장례를 성대하여 치루었다. 또한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도 하나하나 처리하기 시작했다.


-- 친형제의 난

626년 이세민(李世民)이 즉위하였다. 당태종(唐太宗)이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놈의 이세님의 즉위과정은 용의 눈물이라는 드라마로 유명한 이씨왕조의 태종이 떠오른다. 친형제간의 피가 튀기는 참혹한 광경을 보고 있으면, 권력 앞에서는 어떤 확실한 것도 없다는 것을 세삼 깨닭게 된다. 이세민은 현무문지변(玄武门之变)이라는 친형제살육전을 벌인다.

이세민은 현무문지변을 통해서 친형인 이건성(李建成)과 친동생인 제왕(齐王) 이원길(李元吉)을 살포시 죽여버린다. 그리고 친아버지를 협박해서 황제의 자리에서 물어나게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더 아름다운 것은 이런 짓을 해놓고서는 역사서를 고쳐버린 것이다. 현재 당시의 역사에서는 이세민이 죽여버린 이건성과 이원길을 천하의 호로자식으로 써놓고 있다. 그런데 병신에 바보같은 녀석들이 어떻게 수 많은 전공을 세울 수 있었을까? 또한 어떻게 태자가 될 수 있었을까? 조금만 생각해봐도 헛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교을 기본 사상으로 간직한 동양의 역사책 서술에 대해서 알아보자. 황제가 무슨 말을 하던 옆에 있는 사관(史官)은 그것을 모두 기록을 한다. 당시에는 비록 지금의 녹음기나 카메라 같은 것이 없었지만, 사관은 조정에서 황제가 하는 모든 말을 기록을 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 황제의 실록(实录)이 된다. 조선왕조실록도 바로 이러한 기록들의 모음이다.

그러나 황제 자신은 결코 실록을 볼 수가 없다. 명(明)나라와 청(清)나라는 강력한 왕권국가였지만 어떠한 황제도 실록을 보지 않았고, 볼 수도 없었다. 사실 어차피 실록이라는 것 자체가 그 자신의 기록이었으니 굳이 볼 필요가 있겠는가? 아! 물론 어디까지나 조정에서 대신과 말하는 것들의 기록이다. 황제도 사생활은 필요하지 않겠는가? 또한 본다고 하더라도 결코 바꿀 수 없다.

그런데 이넘의 이세민은 실록을 보았을 뿐만이 아니라, 바꾸기까지 했던 것이다. 황제가 직접 나서서 "이건 별로야. 지워버려. 안 지워? 너 죽을래?" 라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런 일들은 종종 발생하고는 했었다.

유명한 일이 "최저가 제장공을 시해한 사건 - 崔杼擅弑齐庄公"이다. 최저가 제환공을 죽이고 사관에게 "아파서 죽었다"라고 기록하라고 했지만, 사관은 사실대로 "최저가 제환공을 시해하였다"라고 적어버린다. 최저가 열받아서 사관을 죽여버리지만, 그에게는 3명의 동생이 있었다. 그리고 3명의 동생 모두 차례대로 사관에 임명되어서 사실대로 쓰고서는 죽임을 당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명만이 "사실대로 쓰는 것은 사관의 의무입니다. 만약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목숨만을 바란다면 죽느니만 못합니다. 또한 제가 쓰지 않아도 누군가는 쓸 것입니다. 설사 다른 이가 쓰지 않아도 당신의 죄는 결코 덮어지지 않으면 천하인들이 모두 욕할 것입니다." 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자 결국 최저는 역사조작을 포기하였던 일화가 있다.

그런데 이세민 때의 사관은 누구인지 바꾸어버리고 만다. 사관으로서의 의무는 어디 갔냐? 븅.


이렇게 이세민의 등극은 친형제를 죽이고 일어났고, 그 사실을 숨기려고 하지는 말아야 될 역사조작까지 감행하였지만! 그는 단순한 악인은 아니었다. 그 뛰어난 능력을 좋은 곳에 쓰기도 한다.

수양제는 당태종(이세민)의 오촌 아저씨였다. 또한 그의 장인이기도 하였다. 당태종의 한 첩이 수양제의 딸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촌 아저씨이자 장인 어른인 사람이 어떻게 망했는지 두 눈 똑똑히 지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당태종은 수나라 멸망의 교훈을 깊이 새기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였다.

그래서 역대 최강의 부자 정부였다는 수나라는 중국 역사상 3번째의 통일을 이룩하고는 38년만에 망하고 말았다. 그나마 진시황의 진(秦)나라가 딸랑 15년이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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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먼가 전의 글과 문체가 상당히 다른 느낌이....끙...
이 글만 하는 것이 아니다보니 문제가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다.
아니;; 어차피 문체를 떠나서 글 내용 자체가 원문하고 점차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핵심이나 뼈대야 어차피 역사가 그게 그거니 같다만....음;;;;;;;
................................................
어차피 돈 받고 하는 것도 아닌걸.....
................
...
무엇보다 별로 덧글도 없고.....계속 해야되나...;;;
(라면서 덧글 유도+_+)




  1. 잘봤습니다. 2009.09.22 22:29

    ㅋ 무임승차좀 해보려 했더니...

    권력을 탐하다보면 그럴수도 있는게 세상이치인데 당태종도 어지간히 자신이 부끄러웠나봅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폐위만 시키고 죽이지는 않았나 보군요.

  2. 시골 2009.09.25 18:19

    아마 친족들도 친이세민과 반이세민으로 갈등을 겪었겠죠..

    골육상잔의 이야기와 한편으로, 패밀리 비지니스로 환상의 팀플레이 보여주는 이야기 양쪽을 보면..

    참 이해관계라는 것이 여러가지로 작용하게 되는구나 싶습니다.

    전에 이세민 이야기의 후속으로도 느껴지 잘 보았습니다. ^^

  3. Favicon of http://www BlogIcon 킹파르사 2009.09.25 22:40

    원문도 재밎지만 번역또한 구수하게 잘 번역하셨네요 .
    이책은 번역해서 출판하면 베스트셀러가 될듯한데요..

제 4절 : 영웅 아버지와 병신아들(2)
(지난회는영웅 아버지와 병신 아들(1) - 중국사는 장난감이다.)


수나라의 양식은 얼마나 풍부했었던 것일까? 천하를 50~60년동안 먹일 수 있는 분량이었다고 한다. 수나라가 38년만에 망했으니, 당나라는 날로 20년분의 양식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문헌통고(文献通考)에서는 이러한 수나라의 부를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어떤 나라도 수나라만큼 국고가 넘쳐흐르지 않았다(古今称国计之富者莫如隋)라고 말하고 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어떠한 나라도 수나라 정부만큼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누구도 수나라와 맞짱을 뜨지 못한다. 수나라야 말로 막강 돈지랄을 할 수 있는 나라였던 것이다.


3. 운하를 뚫었다.
수양제는 대운하를 뚫었다. 용제거(永济渠), 통제거(通济渠), 한구(邗沟), 강남하(江南河)로 분리해서 삽질을 시작했다. 낙양(洛阳)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탁군(涿郡)을 연결하고, 아래쪽으로는 여항(余杭)까지 도달한다. 참고로 미치도록 길다. 현재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긴 운하이니 말 다한 거 아닌가? 파나마 운하의 38배이고, 스위스운하의 20배에 달한다. 현존하는 최대길이의 운하를 수나라때 포크레인도 없이 만들었다. 지금 현대의 기술로도 한반도에 운하를 뚫는 것은 환경파괴는 둘째 치고 돈을 몇 조씩 넣어야 되는 상황에서 당시에는 어떠하였을까?



4. 도로 재정비....
이쯤 되면 우리는 진시황의 진(秦)나라가 떠오른다. 진나라도 만리장성 만들고[각주:1], 길을 새로 설비하면서 사람들을 부려먹다가 2대만에 망했었다. 수나라 역시 딸랑 2대만에 망하고 만다. 그러나 우리는 수양제를 욕만 해서는 안된다.


수양제는 분명히 폭군이지만, 멍청한 임금은 아니었다. 그가 한 일이 나쁘기만은 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을 무지막지 부려먹었던 운하공사를 보자. 대운하는 진시황의 만리장성과는 전혀 다르다. 만리장성은 지금이야 관광자원이 되어서 이민족들의 돈을 긁어 모으는 곳이며, 중화민족의 상징이니 머니 하고 있지만, 역대 대대로 만리장성이 제대로 북방민족을 막았던 적은 사실상 없다. 돈과 인력은 무지막지 투자를 해놓고 정작 방어능력은 제로에 가까웠던 것이다. 스타크레프트로 비유를 하면, 열심히 벙커를 지었지만, 정작 미사일터렛을 만들지 않아서 다크템플러가 은신해서 유유히 들어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러나 대운하는 전혀 다르다. 중국의 지형을 보면 대부분의 강들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그래서 강을 이용하면 동서간의 교류가 쉽게 일어날 수 있다. 문제는 남북간의 교류이다. 열심히 말을 타고 다각다각다각 갈 수밖에 없다. 머? 그냥 말타고 교류하면 안되냐고?

말을 타거나 짐마차를 끌고서 가지고 갈 수 있는 양은 매우 적다. 당신은 어디 이사갈 때 맨 몸으로 터덜터덜 가는가? 가구부터 시작해서 온갖 물품을 챙겨서 가야되는데, 육지로 이것들을 옮기려면 죽어나간다. 그런데 배로는 매우 쉽다. 특히 당시에 핵심적인 세금이었던 양식인 "쌀"은 부피도 부피지만, 무게가 어마어마한 것이다. 배를 통해서 운반하지 않으면 죽어난다. 못 믿겠으면 쌀 한가마를 지고 100KM만 가봐라[각주:2].


문제는 수양제가 돈지랄을 너무 했다는 것이다. 10권짜리 장편 소설을 쓴다고 보자. 그럼 자료수집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서도 이런저런 구상과 수정에 몇 달은 충분히 걸린다. 그런데 이런 장편소설을 일주일만에 써내라고 한 것이다. 아무리 1억을 준다고 해도 하면 미쳐버리거나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수양제가 딱 이꼬라지 였다.

수양제는 제위를 하고 나서 고구려을 3번 원정해서 대패하고, 수도를 옮기고, 법령을 강화하는 등등등 온갖 일들을 다 벌리고 다닌다. 문화사업이라던지 풍류따위는 즐기지 않는다. 과연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멍청한 상관이 아니고, 멍청하고 부지런한 상관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3차례의 고구려 공격을 보자. 고구려는 중국 동북의 지방정권이다[각주:3]. 지금 북한의 북부에 있었다. 이녀석은 700년동안이나 계속 반항하였는데, 처음 300년은 지금의 길림(吉林)에 있었고, 그 다음 300년은 평양(平壤)에 있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고구려를 중국의 정권이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한국의 정권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 됐고, 어찌되었든 한국인은 머든 뻇는다.[각주:4]

수양제의 3차 고구려 공격에 100여만의 대군을 투입했지만, 딸랑 2700명만이 돌아왔다. 고구려가 수나라를 상대한 전략은 러시아가 나폴레옹과 히틀러를 상대한 전략이었다. 하늘은 드럽게 많고, 땅은 넓은데 다 귀찮고 그냥 튀어!!!! 땅을 뻇으려면 뻇어라~~ 나는 튀련다의 정신으로 겨울까지 계속 후퇴만 한다. 승리의 기분도 처음뿐이지. 몇 달 동안 계속 걷기만 하고, 점점 겨울을 다가와서 추워지는데, 고향에 놔두고온 설미는 보고 싶고......근데 왜 이리 졸리지.....

이렇게 알아서 얼어 죽어주는 거다.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이제 쫒아가면서 사뿐히 즈려밟아주면 되는 것이다. 열받은 수양제이지만 나름 황제가 아니었던가? 육군만으로 안되면 수군까지 동원해주지! 그래서 쌈 싸먹겠다의 작전으로 나간다.

그러나 이때쯤 되면 말도 안되는 짓거리들에 동원된 백성들의 분노로 의한 봉기가 온갖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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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의역식 번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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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내가 처음부터 쓸까...-_- 이미 원문과는 상당한 거리가........
아무리 의역이라지만...이래도 되는걸까나;;;; 뼈대야 그대로 가고 있다만....



  1. 정확하게는 만리장성을 만든 것이 아니라, 진시황이 밟아 버린 나라들의 장성(연나라, 조나라등)과 자신의 장성을 이어서 만든 것이 만리장성이다. 한마디로 새로 만든게 아니라 좀 대규모의 보수공사라는 거... [본문으로]
  2. 한반도는 전혀 다르다. 한반도는 3면이 바다이다. 초등학생도 알 이 상식을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대운하 필요 없다. 그냥 바다을 통해도 전국 어디든지 간다. 그런데 굳이 대운하 삽질을 하시겠다는 그 분은....후.... [본문으로]
  3. 본인의 생각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원문 그대로 하였다. 이에 대해서 많은 생각이 있으시겠지만, 본인에게 어쩌고 저쩌고 하지 마라. 본인도 지방정권이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어떻게 공부하는지 알아두라고 그대로 번역한다. [본문으로]
  4. 다시 말하지만 원문 그대로 번역했다. -_-;; 하지만 이것이 유머로서 작용을 한다는 것은 중국을 분석하고자 하는 분들은 유심해서 볼 부분이다. [본문으로]
  1. 니말 2009.09.18 00:47

    글을 보니 만리장성이 제대로 북방민족을 막을 방어능력이 거의 제로라고 나오는데요...
    정말 만리장성이 쓸모가 없었나요???

    오삼계가 청나라 막고 있을 때는 나름 기능을 한 거 같은데요...

    • Favicon of https://www.ddokbaro.com BlogIcon 바로바로 2009.09.18 01:21 신고

      그 결론도 아시리라 봅니다. 오삼계는 청나라에게 길을 양보해주게 됩니다. 그리고 청나라는 중원을 장악하게 됩니다.

      사실 만리장성은 하나의 거대한 울타리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블로그 어딘가에 전에 작성해둔적이 있는데 지금은 찾기 귀찮군요^^::: 간단히 말해서 초기 최고의 전쟁 무기는 말을 사육하기 위한 방목장을 만들기 위함이었다고 생각되는 설이 있고, 전 그것을 지지합니다.

      진시황 이후로 생각을 해보아도 흉노를 막지 못하였고, 위진남북조도 그렇고, 오호십육국도 그렇고....요, 금, 원 중에서 하나도 못 막았고, 명나라가 들어와서도 원에 계속 괴로웠고, 결국 청까지;;;; 제대로 막은 경우가 거의 없군요.

      군사전략으로 생각해보아도, 선을 수비하는 것과 점을 공격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간단하게 나오는 결론이라고 봅니다. 만리장성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긴 띠를 이루어야되는데, 말을 타고 빠르게 한 점으로 공격을 집중시키면 무너트리는 거야 식은 죽 먹기죠^^

    • Favicon of http://www.xingxingchina.com BlogIcon 싱싱차이나 2009.09.18 01:36

      장성 자체가 거점 방어 기지로 제구실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은 아니죠.

      아마 중원 왕조들의 북방 민족에 대한 방어개념은 종심방어 개념이 아니라 긴 장성을 이용, 영토구분, 기마대의 기동력 둔화에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몽골의 칭기즈칸만 하더라도 팔달령 장성을 직접 공격하기 보다는 종심공격전술을 구사하지 않습니까? 일단의 병력을 팔달령에 대치시킨 다음 주력병력으로 우회하여 금의 심장부를 때리는^^

      게다가 바로님 말씀대로 무려 수천Km에 달하는 그 긴 구간에 병력을 고루 배치해 송곳처럼 찔러오는 북방 기마부대를 막는 것은 사실 너무나 비현실적이죠^^ㅋㅋ

      오삼계 같은 경우는 항복하지 않았다고 해서 당시 청나라가 그리 힘들었을 거라고 보여지지 않습니다. 그때까지 청나라의 입관을 저지한건 오삼계가 아니라 원숭환이었고 누르하치가 고집스럽게 종심공격 전략이 아닌 원숭환의 영원성 공격에 매달린 점 때문이니까요.^^

      제가 너무 단정적으로 쓴 것 같은데 제 개인적 생각입니다.^_^;;

  2. 이사람 2009.09.18 13:08

    역시 짱깨들은 고구려를 중국사라고 배우는구나 단군도 중국인이지 중국인들의 인식은 ㅋㅋㅋ 여기쥔장이 말했었지 중국인은 고구려를 중국사라고 대부분생각하지 않는다고 ㅋㅋㅋ

제 3절 : 영웅 아버지와 병신 아들
2. 영웅 아버지와 병신 아들

* 모범 근로자 수문제(隋文帝)

수문제의 위대한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중국 역사상의 황제들은 대부분 수 많은 첩들에게 둘러쌓여 있었지요.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수는 천왕(天王) 홍수전(洪秀全)이 아닐까 싶습니다. 백 명이 넘어서 이름이 아닌 번호만이 있었다고 하지요. 오늘은 001번에서 007번까지~ 내일은 230번부터 250번까지~[각주:1] 이런 복이 넘쳐흐르는 황제들 중에서 오직 2명의 황제만이 첩이 없었답니다. 바로 수문제(隋文帝)와 명효종(明孝宗)이죠.


명효종은 그가 태자였을 때부터 장황후와 사이가 매우 좋았습니다. 그래서 즉위를 하고서는 첩을 받지 않았던 것이지요[각주:2]. 그에 비해서 수문제가 첩들이 없었던 이유는 그가 너무 바빴기 때문입니다. 일벌래의 극치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언제나 정사를 생각하고, 매일매일 조회에 참석하거나 날을 세우고는 하였다" 만약 드라마에서처럼 황제가 매일 매일 조회에 참석한다면 아마 과로사를 할 것이 분명합니다.

매우 근면했다는 청나라 황제들도 10일에 한번씩만 조회를 했을 뿐입니다. 물론 황제에게는 매일 매일 처리해야될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군기대신(军机大臣)을 만나서 처리하였지요. 군기대신을 만나는 것은 지금으로 따지면 선생님이 학급반장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매일 매일 학급회의를 할 수는 없으니 일주일에 한번씩만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선생님은 학급반장을 만나서 일처리를 부탁하고 중요한 일들을 전달 받는 것이지요.

청나라때 조정의 조회는 궁전안에서 한 것이 아닙니다. 수 많은 대신을 궁전 안에 들여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궁전이 아닌 건청문(乾清门)과 어문(御门)에서 조회를 했습니다.  황제야 건청문의 굴 속에서 앉아 있으면 되지만, 대신들은 영하 30도의 추위에도 광장에서 대기를 해야했지요. 황제야 추우면 손난로나 모피를 입어서 곰탱이 같았고, 영상 30도의 더위에서는 햇빛 가리개와 부채가 동원이 되었지요.

사극을 보고 있으면 대신들이 궁전 안에 들어와서 조회를 합니다. 청나라 황제들의 정사는 모두가 양심전(养心殿)에서 이루어지는데, 그 좁은 장소에는 몇 명밖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잘해봐야 몇 명이 되지 않는 군기대신들이나 들어올 수 있었지요. 그래서 건륭(乾隆), 용정(雍正), 강희(康熙)들의 영명한 군주라는 사람들은 매일 매일 조회를 보고, 매일 밤샘을 하면서 조정의 일들을 처리하였지요. 또한 책을 보다가 밤을 새는 것도 부지기수이고, 그러면서도 다음날 곧장 조회를 보고는 했습니다. 참 대단하죠?


보통 황제가 조회에 나오는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빠릅니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았던, 4시면 기상을 하고는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컴퓨터도 없었고, 클럽도 없었습니다. 그냥 어두워지면 잤으니 저녁 8시 반이나 9시면 잠을 잤기 때문이지요. 황제 역시 해가 뜨면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쉬었습니다. 새벽 4~5시면 어둠을 헤지고 조회에 참석을 하여서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시간까지, 하루 종일 일처리를 했습니다.


"오품이상은 부름을 받으면 국정에 대해서 논하여야 한다. 五品以上,引之论事" 다시 말해서 오품 이상의 관직을 가지고 있는 자는 황제가 부르면 달려와서 국정에 대해서 의견을 발표해야된다는 소리입니다. 청나라에서는 4품 이상만이 황제를 볼 수 잇었습니다. 당시 중앙정부의 관원은 모두가 4품이상이었고, 지방에 있는 사람은 3품 이상이어야지만 황제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5품의 지부(知府)와 같은 지방관리는 황제를 못 만나는 것이지요. 3품의 보정사(布政司)나 안찰사(按察司)급은 되야지 만날 수 잇었습니다. 그런데 수문제는 그 당시 오품이상의 사람들을 불러서 국정에 대해서 논하게 하였습니다. 아마 청나라의 저글링때와 같은 관원숫자보다 적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당직을 서는 사람들과 같이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宿卫之士,传餐而食" 수문제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밥을 먹었습니다. 보통 황제들은 밥을 무조건 혼자 먹습니다. 절대 다른 사람과 같이 먹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밥 먹는 틈에 독살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오늘 황제가 황후를 불러서 같이 저녁을 먹는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 둘은 결코 같은 방에서 먹지 않습니다. 황제가 건청궁 서원각(乾清宫西暖阁)에 있다면 황후는 동원각(东暖阁)에 있게 됩니다. 이럴 때 만약 황제가 개고기찜을 먹고 맛있다고 생각되면, 황후에게 한 그릇을 보냅니다. 황후는 토 쏠리는 것 같아도 황제의 성은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고기 자체를 먹고 싶지 않아도 황제폐하의 성은에 감동의 도가니가 되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수문제는 여러 사람들과 같은 자리에서 같이 먹었습니다. 이 얼마나 효율을 중요시 하는 사람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수문제의 황후인 독고(独孤)씨도 역시 현명하다고 칭송되는데, 그를 더욱 더 열심히 일하도록 계속 기운을 북돋아 줍니다.


이런 수문제의 모습은 극도로 부패했던 남조의 진(陈)나라와 비교하면 더욱 놀랍습니다. 진나라의 군주 진숙보(陈叔宝)는 중국의 역사상 유명한 망국의 군주입니다. 당대의 유명한 시인 두목(杜牧)의 박진회(泊秦淮[각주:3])에서 나오는 후정화(后庭花)가 바로 진숙보가 즐겨 부르던 노래로 망국의 노래로 등극하였습니다.

수나라 군대가 진나라의 황궁으로 돌입할 때, 진숙보는 우물에 몸을 숨깁니다. 수나라 병사들은 그를 찾다가 우물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서는 말합니다. "지금 당장 안나오면 돌을 던지겠다고" 그러자 안쪽에서 "던지지 마요. 던지지 마. 우리 좀 끌어올려줘요." 그들을 끌어올리자 진숙보와 황후 그리고 귀비까지 3명이 엉켜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양광(杨广)이 그 귀비를 보고서는 자신이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수군의 대자 한금호(韩擒虎" "이년 때문에 진나라가 망한거야. 근데 이 년을 원한다고?" 단칼에 양광을 두동강 내버립니다. 괜히 여자 밝히다 죽은 양광에게 애도를....


수나라는 진나라를 명말시킨 이후에 공사를 시작합니다.

1. 장안과 낙양을 재건합니다.
수문제는 장안에 대흥성(大兴城)을 만들고, 수양제(隋炀帝)는 낙양에 동쪽 수도를 만듭니다. 이 둘을 합쳐서 양경(두 수도 两京)라고 하고, 서쪽 수도는 장안이며, 동쪽 수도는 낙양입니다.

2. 전국에 창고를 건설합니다.
이 창고가 무식했냐면은 수나라의 한 양식창고는 함가창(含嘉仓)이라고 불리는데, 고고학자들이 이 함가창을 발굴하면서 대략적인 통계를 내었습니다. 함가창에는 총 259개의 식량 저장고가  있었는데, 한 저장고 안에서 이미 탄화된 곡식 약 300만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런 식량저장고가 259개가 있으니 얼마나 무식하게 곡식을 쌓아놓았는지 아시리라 봅니다. 그리고 이것이 끝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함가창 말고도 낙구창(洛口仓)이니 경낙창(京洛仓)등과 같은 곳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수나라의 양식 비축량은 무시무시할 정도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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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모든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과 환영합니다. 
본 글은 의역식 번역입니다.
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1. 백제 의자왕의 3000궁녀가 있지요. 하지만 해당 이야기는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조에 실려 있고 정확한 숫자는 없습니다. 이후 조선 초의 문신 김흔(金訢)이 〈낙화암〉이란 시에서 “삼천의 가무 모래에 몸을 맡겨 / 꽃 지고 옥 부서지듯 물 따라 가버렸네(三千歌舞委沙塵 / 紅殘玉碎隨水逝)”라고 읊은 것이 “3천”이라는 수효에 대한 첫 언급이니 실제로 3000명은 아닐것입니다. [본문으로]
  2. 사실 황제에게는 첩을 받아야되는 "의무"가 있습니다. 황제는 그 자손을 번창시켜야되는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3. 烟笼寒水月笼沙,夜泊秦淮近酒家,商女不知亡国恨,隔江犹唱后庭花; 중국인들에게는 워낙 유명한 것인데 한국인들에게는 좀 어색할듯 합니다. 두목이 당 말기 귀족들의 퇴폐적인 모습을 비판한 시입니다. [본문으로]
  1. 시골 2009.09.11 02:24

    원칙을 만들고, 실행권한이임하고, 부지런히 체크하며..
    그리고, 자기만이 할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한다... ^^

이제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모반계획을 계속 실행할 것인가? 아니면 중지할 것인가?

원래의 자리가 위태롭다면 황제라도 죽여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모든 것이 안정적으로 회복되었다. 모반을 일으킬만한 이유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될 것인가? 이연은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고민에 빠져버렸을 것이다.

핵심은 이미 모반계획을 세워버렸다는 것이다. 당시의 법률로 설령 모반 계획뿐이더라도 모반과 동일시 한다. 이것은 이연에게 있어서 모반을 일으키는 것은 이미 날라가버린 화살이오. 떠나버린 님이라는 이야기이다.

핵심 측근과의 반복되는 회의 끝에 나온 결국은 진행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었다.

역사의 갈림길은 이렇게 요상하게 결정 되어 버렸다.

어째서 그 많은 사람들이 황제가 이연을 죽일 것이라고 오판을 한 것일까? 어째서 그 많은 사람들이 모반계획에 참여했었던 것일까? 모든 사람들에게 모반의 이유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상황이었으면 이렇게 쉽게 모반을 일으킬 수 있을까?

역사의 변화에는 법칙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록 모두가 황제의 구체적인 결정에는 오판을 하였지만, 당시의 천하 정세를 놓고 본다면 그들의 판단이 옳았던 것이다. 당시의 천하가 요구하는 것은 수나라의 멸망이었다. 20세의 이세민이 수나라를 멸망시킬 생각이 들었고, 52세의 이연도 수연을 무너트릴 생각을 하였다. 유문정도 반란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덮고 싶었고, 배숙도 부귀공명을 누리고 싶었다.

지금에 돌아보면 이연은 정확한 판단을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정확한 판단은 "오판"에서 나온 것이었다. 역사의 매력이자 고민은 이런 곳에서 나오는 것이다.

더욱 요묘한 것은 황제 사절의 도착 시점이다. 만약 황제의 사절이 조금 늦게 왔다면 이연은 이미 기병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절은 매우 적절한 시점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연의 모반계획 자체는 발동을 했지만, 이연이 실제로 기병을 하기 전인 미묘한 시기에 도착을 한 것이다. 모반이라는 거대한 일에서 시간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만약 시간이 모자라서 창졸간에 군사를 일으킨다면 실패하기가 쉽다. 그렇다고 오래동안 기다린다면 모반계획이 세어나갈 수가 있다. 그런데 군사를 일으키려고 준비하던 중에 온 황제의 명령으로 인하여, 이연은 더욱 더 차분하게 모반을 준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훗날의 역사 기록에는 모두가 이연이 황제의 사절의 출현에 매우 감동하였다고 말해지고 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서 깊게 파고 들어갈 필요가 있다. 합리적인 추측은 황제의 사절이 이연의 모반을 미루었을 것이고, 이것은 모반이 더욱 성공적이게 만들었다. 이것은 이연의 진양모반의 첫번째 기적이었다. 하늘이 도와준다고밖에 설명되지 않은 기적이었다.


멍쉬엔슬(孟宪实)의 晋阳:梦开始的地方이 괜찮은 내용이어서, 직역식이 아닌 의역위주로 번역한 글입니다. 오역이나 오타에 대해서 강력한 비판을 부탁드립니다. 또한 저의 "귀차니즘"을 생각하면 어차피 덧글도 달리지 않아서 압력도 별로 없는 이런 종류의 글의 업데이트는 조금 느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덧글을 달아달라는 말을 참 아름답게 돌렸군요! 우훗-_)

  1. 시골 2008.08.11 11:01

    君臣有義 朋友有身

    꼭 상하관계가 아니더라도.. 꼭 친구관계가 아니더라도 이게 정말 중요하단걸 느끼게 하는군요..

    ====================================

    세조가 장난삼아 신숙주에게 술을 먹이고 그와 팔씨름을 하는데, 신숙주가 취기에 왕의 팔을 억지로 넘겨 버리자, 세조의 눈빛이 변하고, 이를 눈치챈 한명회가.. 신숙주의 하인에게 '평소 신숙주는 무슨일이 있어도 꼭 책을 보고 자는 버릇이 있는데 오늘밤에는 그러지 못하게 등불을 치워버려라' 라고 지시를 했는데...

    그날 밤 한명회의 예상대로, 세조가 보낸 첩자가 신숙주의 집을 염탐을 합니다.
    ( 조카를 죽이고 권좌에 오르고, 신하의 역심을 언제나 경계했던 차였으니.)
    다행히 하인이 한명회의 말을 따라서, 신숙주는 등불을 못찾고 밀려오는 취기에 그냥 자버려서, 무사히 넘어가게 되지만,
    만약 그날 불빛이 켜져 있었다면, 세조는 신숙주를 의심하기 시작했겠죠... (아시는 野史겠지만.. 그냥 한번더...^^;;;;;;)

    ps 오타발견해서 수정합니다. ㅡㅡ;;;

    • Favicon of http://ddokbaro.com BlogIcon 바로 2008.08.11 00:23

      중요하긴 한 개념입니다. 예전에는 말이죠. 지금은 서서히 이것을 무너트려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으음...전 공자가 죽어야 한국이 산다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쪽이랍니다.

      중국이 이번 개막식에서 공자의 논어를 등장시키면서 한껏 멋을 부렸지만, 그런 중국인들 보다 진정으로 공자의 사상을 이어받은 자는 분명히 한국입니다. 문제는 이넘의 공자의 사상이 과연 좋은 것인가에 의문이 든다는 것이지요. 후...

      공자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지배계층을 위한 논리이니까 말입니다....

    • 시골 2008.08.11 01:29

      음.. 제 현재 입장은...

      유교(혹은 유학)가 핵심적 정치철학이나 철저하게 지켜야할 사회규범이 돼어야 돼느냐..라면 저도 좀 갸웃해지고, 정치이념으로써 유학의 문제점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심리와 행동적 관점에서 유교나 성리학의 치밀함과 장점은 무시할수 없다고 봅니다.
      단순한 타도대상이나, 전체를 부정해야할 대상이라고 하기에는 말이죠...

      그래서 적었듯이 꼭 상하관계나 친구관계의 인간관계의 종속적 계념에서만 해당되는게 아니란 거죠..
      ===============================
      어쩌면 이 信義란 것이 무너진 결과가 저는 "문혁"중 일어난 잔학행위이고, 또, 일본의 연합적군이 아사마산장 농성사건 바로 앞에 자행한 무자비한 동료살해였다고 봅니다.

      또, 주은래도 사인방으로부터 儒 라며 타도의 대상이 되었으니.. 갖다 붙이기 따라서 유교라고 해버리는 오해를 범할수도 있겠죠. (타도의 대상으로 보든 숭배의 대상으로 보든) 왜냐하면, 어느 정도 인간의 여러가지 심리과정을 포함하고 있기때문에, 따지고 보면, 중첩되는 부분이 꽤 발생하죠.
      =====================
      당연한 얘기지만, 장점은 익히고, 단점은 알아서 경계해야겠죠.. 전면 부정의 대상은 아니란게 제 의견입니다.

      ps 1) 이미 그 시대에 있었던 '노장사상'이나, '법가', '묵가' '불교'에도 유교에 대한 비판이 나오고, 이후 근대 정치이론들과의 갈등을 통해 다양한 비판적 시각이 존재했잖습니까 ^^ , 개인적으론 좀 엉뚱하지만, 장자의 비판방향이 가장 흥미롭다고 봅니다.

    • Favicon of http://ddokbaro.com BlogIcon 바로 2008.08.11 01:51

      이런...제가 할말이 없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정론입니다. 전 단지..음..머라고 해야될까요...

      이 세상에서 무엇을 변화시키려면 둘 다 긍정하는 것보다 한쪽을 완전 부정해버리는 것이 훨씬 빠르니 그쪽으로 치우치는듯 합니다. 물론 그로 인하여 언급하신 다양한 부작용이 생겨나게 됩니다. 하지만 가끔 한국이 너무 답답해보여서 이렇게 저 하나의 개인이 그렇게 주장한다면 이런 극단적인 분자들의 목소리를 듣게 되고, 사람들이 중립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랍니다^^::

      물론 제일 좋은 것은 시골님처럼 그 속에 뛰어난 것을 얻고 문제있는 것을 고치는 방식이 제일 좋겠지요. 머...하하...전 그렇게 변화시키기에는 세계가 너무 빠르게 변화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젊음?!이라고 할까요? ^^::

반란은 매우 위험한 도박이다. 단지 이연의 생각만으로 결정되었을리는 없다. 이연의 심복들의 역할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이연의 심복중에서 3명의 인물을 주목하여야 한다.

우선 차남 이세민(李世民)이 있다. 이세민은 이연의 반란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인물이다. 이세민은 당시 20세 정도였으면 당국공 이연의 아들외에는 다른 어던 신분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부자가 합심해서 천하를 집어 삼킨다. 언제나 이연의 편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연이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은 당연히 이세민이었을 것이다. 이연과 이세민은 대략 몇가지 문제에서 공감을 하게 된다. 첫째. 이씨가 천하를 잡는다는 유언비어를 이용한다. 둘째, 황제가 이 기회에 이연을 죽일 가능성이 높고 판단된다. 셋째, 지금 황제는 멀리 강도(江都)에 있어서 관중(关中)이 비어있음으로 쉽게 군사를 일으킬 수 있는 기회이다.

두번째 인물은 배적(裴寂)이다. 배적은 이연의 죽마고우로서 태원에서 특수한 신분을 가지고 있다. 태원에는 진양궁(晋阳宫)이라는 수양제의 별궁(离宫)이 있었다. 이 별궁의 책임자가 바로 배적이었다. 배적은 어릴때 매우 가난했는데, 한번은 화약묘(华岳庙)를 지나면서 미래에 대해서 기도를 했다. 결과적으로 꿈에서 백발 노인을 만나서 30세이후에 뜻을 드높이게 되고 최고위직 관원이 되리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이 말을 계속 가슴 속에 담아둔다. 그의 직급으로 볼 때, 그가 최고위직 관원이 되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꿈을 이룰 수 있을까? 훗날 이연이 태원에 온 뒤로 배적의 야망을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연의 반란에 공신이 된다면 그가 최고위 관원이 되는 것은 꿈만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배적은 이연의 반란에서 중요인물이 되었다. 진양궁은 황제를 위하여 준비된 곳이고, 온갖 물자가 쌓여있고, 미녀들이 널려있는 곳이었다. 배적은 이연을 진양궁으로 불러서 연회를 배풀었고, 감히 궁녀로 하여금 이연을 받들게 했다. 그리고 배적은 이연의 반란을 부추기면서 말한다. "당국공아! 후딱 군대를 일으키자고요! 만약 황제가 이일을 알면 당신을 죽일 겁니다! "

제삼의 인물은 유문정(刘文静). 유문정은 진양현(晋阳县)의 현령이다. 그는 이연의 수하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문정이 이밀(李密)의 친척이라는 것이다. 조정의 지시에 따라서 그는 수감중이었다. 그런데 유문정과 이세민의 관계는 매우 밀접했다. 한번은 이세민인 한밤중에 유문경을 찾아갔고, 유문정은 이세민에게 천하의 형세에 대해서 분석해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은 이연의 반란이었다. 3만의 병력으로 곧장 장안으로 향한다면 천하를 장악할 수 있다는 전략이었다. 유문정이 이연의 반란을 부추긴 것은 분명히 자신을 위한 고려였다. 그와 이밀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수나라는 그를 결코 풀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반란의 길밖에 없었다.

반란은 기밀 중에서도 기밀이다. 이 3명의 심복 모사들뿐만이 아니라, 직접적인 무력행위자들도 있어야 했다. 예를 들어서 군사를 동원하려면 그 군사를 이끌 장군과 참모들이 필요하다. 하늘의 뜻인지 당시 이런 사람들은 이연의 주위에 널려 있었다. 역사서가 기록하기를 호걸들이라고 되어있는 많은 사람들은 수나라에게는 역적일 뿐이긴 하다.


어찌되었든 역시나 하늘의 뜻인가? 어찌하여 인간계의 풍운아들이 태원에 모두 모여있던 것인가?

어찌하여 야심가와 영웅이 모두 모여 있는 것이었던가?

수 많은 우연 속에서는 필연이 숨겨져 있는것일까?

이연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군사를 일으킬 직전, 갑자기 양주(扬州)에서 온 사자가 출연한다. 그는 황제의 명령을 가지고 있었다. 이연은 무죄로 석방하고 원래의 관직에 복귀한다.

이연의 판단은 철저하게 틀렸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멍쉬엔슬(孟宪实)의 晋阳:梦开始的地方이 괜찮은 내용이어서, 직역식이 아닌 의역위주로 번역한 글입니다. 오역이나 오타에 대해서 강력한 비판을 부탁드립니다. 또한 저의 "귀차니즘"을 생각하면 어차피 덧글도 달리지 않아서 압력도 별로 없는 이런 종류의 글의 업데이트는 조금 느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덧글을 달아달라는 말을 참 아름답게 돌렸군요! 우훗-_)

  1. 시골 2008.08.03 20:21

    황족의 입장에서 잠제적인 적인 형제친척들이야 말로 언젠가 타도해야 할 당사자였으니..

    수양제도 그렇고, 이세민도 그렇고...

    아무튼... 젊은 이세민의 활약을 기대해봅니다. ^^

    ======================

    • Favicon of http://ddokbaro.com BlogIcon Baro 2008.08.03 21:04

      하하^^::; 머..그렇기도 합니다만...
      이세민의 활약 기대해주셔요^^

 

당연한 말이지만 조정의 정책은 황제가 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연과 황제의 관계는 언급했다. 이연은 황제와 사촌지간이었다. 그들의 어머니들은 친 자매였고 그들의 외할아버지는 동일인물이었다. 바로 북주(北周)의 독고신(独孤信)이다. 이연의 어머니는 독고신의 4번째 딸이었다. 그리고 수양제의 어머니는 독고신의 7번째 딸이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이연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다. 7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작위를 승계하였는데, 이것은 최소한 그 전에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의 어머니는 그것보다 더 일찍 작고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연이 고아가 된 이후로, 그의 이모인 독고황후는 그를 많이 아낀다. 수문제(隋文帝) 양견 (杨坚)도 이연에게 우호적이었다. 황제와 황후 모두가 이연에게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혜택을 입었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수양제는 이연보다 2살이 어리다. 이연이 7살때 수양제는 5살이었다. 만약 황후이모가 자주 이연을 입궁시켰다면, 이연은 수양제와 어린시절부터 왕래가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현 황제와의 밀접한 관계는 다른 사람들이 보이게는 튼튼한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속을 살펴보면 이연은 자신과 황제의 관계를 그리 낙관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연은 사촌인 황제를 경계했다. 그것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우선 이연도 좋고 수양제도 좋다. 모두가 관농집단(关陇集团)의 후손들이었다. 이 집단의 특징은 모두가 알다 싶이 강력한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한 것이다. 한마디로 무인집단이다. 그리고 무인들은 보통 준마를 사랑한다. 병적으로 사랑한다. 이연과 수양제도 당연히 준마를 사랑했다. 한번은 이연이 한필의 준마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준마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자 이연의 부인 두(窦)씨는 이연에게 조언을 한다. "황제도 준마를 사랑하는데, 당신이 이 말을 황제에게 진상하지 않으면 황제는 당신의 관직을 깍아버릴 것입니다." 이연은 이 준마를 너무나 사랑해서, 부인의 조언을 계속 무시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묘한 일이 발생하였다. 이연의 관직이 오래동안 올라가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때에는 부인은 이미 작고한 이후였다. 그런에 이연은 아마도 무엇인가를 알아차린 것처럼, 준마를 수양제에게 바치는 것은 물론 황제를 위한 준마와 사냥개와 매등을 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곧장 효과를 봐서 그는 곧장 3품고급관에 올라가게 된다. 수당(隋唐)시대에는 3품이상이어야지 고급관원이었고 그 이하는 그저 그런 존재일 뿐이었다. 이연은 이때 완전히 깨닭게 된다. 자신이 말을 바치지 않았으면 황제는 절대 그를 3품관에 올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두번째 사건은 이연의 이미지때문이었다. 당시 점술가도 이연의 부귀를 점치엇다. <신당서 新唐书>에는 "3개의 유두가 있었다 体有三乳"라고 기록되어있다. 이것은 지금에 와서 보면 이상하지만 당시에는 신성한 상징으로 기록되어있다. 다만<수강가화 隋唐嘉话>에서는 이런 기록도 있다.  수양제는 자주 이연과 농담을 했다 "매번 조정회의에서 물어났때마다 양제는 그를 가지고 놀렸다 每朝谒退,炀帝皆有词谑" 정리하자면 이렇다. 황제는 자주 이연를 놀려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촌형인 이연은 감히 말대꾸를 할 수 없었다. "연회에서 양제는 사람들 앞에서 이연을 놀렸다. 이연은 이연의 얼굴 주름이 자글자글하여 할머니 같다고 했다. 이연은 분노하고 원망하여 즐겁지 않았다 后因赐宴,炀帝于众因戏神尧。神尧高颜面皱,帝目为阿婆面,神尧恚(hui)不乐"이 둘은 매우 친했을까? 친했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불평등하였다. 이연의 입장에서 그의 사촌동생에게 자신은 장난감이었을 뿐이었다.

세번째 사건은 한번의 조정회의에서 벌어진다. 당시 이연은 병으로 참석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수양제는 이연의 동향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이연의 생질(누이의 아들)이 있었다. "외삼촌은 병이 났습니다." 그는 황제가 이연의 안부를 묻고 위로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수양제가 관심을 가지는 방식은 매우 기묘했다. "병? 죽을것 같은가?" 이러한 어투는 분명히 이연의 죽음을 바라는 것 같았다. 이연은 훗날 이 이야기를 듣게 되고 더욱 더 황제를 경계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탐관오리처럼 연기하며 황제를 안심시키게 된다.

이러한 사건들에서 우리는 쉽게 이연과 수양제는 비록 사촌지간이고 불알친구이지만 이연은 언제나 두려워했고, 자신이 황제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그는 황제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까 언제나 전전긍긍하였다. "

그렇다면 투르크에게 패배한 일에 대해서 황제의 처리를 기다리는 현재의 상태에서 그는 자신과 황제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황제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걱정하게 된다. 더군다나 자신이 태원에서 죽는 것은 비국중에 비극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고? 왜냐하면 자신의 봉국의 원류인 지방이었기 때문이다. 천하영웅이 자신을 비웃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비관적인 생각들이 이어졌다. 이연은 황제에게 죽임을 당하느니 반란이나 일으켜보자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래야 한가닥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하늘이 도와준다면 더 천하도 잡을 수 있다.

그래서 이연은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멍쉬엔슬(孟宪实)의 晋阳:梦开始的地方이 괜찮은 내용이어서, 직역식이 아닌 의역위주로 번역한 글입니다. 오역이나 오타에 대해서 강력한 비판을 부탁드립니다. 또한 저의 "귀차니즘"을 생각하면 어차피 덧글도 달리지 않아서 압력도 별로 없는 이런 종류의 글의 업데이트는 조금 느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덧글을 달아달라는 말을 참 아름답게 돌렸군요! 우훗-_)

  1. 시골 2008.07.29 22:28

    이연과 수양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군요.. 이세민의 역활은 다루지 않는 것 같군요.
    ======================
    관농집단이란 표현은 역사상 언제부터 나왔나요?
    어감으로 봐서 근래에 붙어진것 같은데...

    • Favicon of http://ddokbaro.com BlogIcon Baro 2008.07.30 21:54

      이제 슬슬 이세민의 이야기도 나온답니다^^::

      관농집단은 위진남북조시대 말기부터 나타난 정치집단(혹은 귀족)집단입니다. 서위 북조 수 당이 관농집단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머...음....일단 현재 역사로는 한족집단이라고도 하지만, 정확하게는 한족의 문화를 일정정도 받아들이고 자신의 장점(특히 군사쪽)을 남긴 집단이라고 생각하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초기로 갈수록 야만인에 가깝다고 할까요? 나중에 가도 사실 한족이라고 하기에는 좀 이질적인 면이 많고요.

    • 시골 2008.07.31 21:24

      흠.. 그럼 위진남북조 시대의 옛문서에서도 이미 '관농집단' 이란 말이 나오는건가요?

      어감으로 보면 최근의 역사연구에서 붙여진 세력이름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음..

    • Favicon of http://ddokbaro.com BlogIcon Baro 2008.08.01 01:36

      아..개념은 예전에도 있었는데 물어보신것은 명사 자체의 출현이군요. 특정지어서 관농집단이라고 한 것은 저의 짦은 지식으로는 陈寅恪 선생님부터인듯합니다. 으음..최소한 소위 학문적으로 정립되고 연구된것은 陈寅恪 선생님부터라고 봐야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돌발 사건

그리고 한번의 우연한 사건이 모든 것을 변화시키게 된다.

역사가 드라마같이 느껴질 때가 바로 이럴 때이다.

한번의 오해가 역사의 물길을 돌연 잡아 비틀어버리기도 한다.

 

북방은 투르크(突厥)이 침입해 왔다. 이연은 북부의 마이군(马邑郡)으로 병사를 파견하고, 당지의 태수 왕공인(王恭仁)과 힘을 합쳐서 투르크를 막아내려 한다. 이때 이연의 군대는 왕군아(王君雅)가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수군은 패배를 하고 투르크는 승리의 나팔을 울리며 돌아가게 된다.

과연 이 전투로 얼마의 피해를 입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투르크가 대체 얼마나 위대한 전과를 이루었는지에 대한 기록 역시 없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이 주의한 것은 그러한 고증이 아니었다. 수군의 패배 처리는 역사의 새로운 도미노 현상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 전투의 책임은 누군가가 반드시 짊어져야 했다. 이것이 대대로 내려오던 통치의 정석이다. 수양제의 조정은 더 큰 실패나 군인들의 책임감을 묻기를 위해서 당연히 일정한 처벌이 필요하다. 그뿐만이 아니라 국법에조차 상벌을 철저히 할것을 명시하고 있었다.

그럼 이연에게 어떤 처분을 내렸는가?

우리가 이 일을 탐구할 때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역사에 남겨져 있는 기록은 매우 모호하다는 것이다.

<신당서 新唐书>의 <고조본기 高祖本纪>에 의하면 "양제가 관리을 파견하여 고조를 강도로 압송하게 했다. 고조는 두려워했다." (炀帝遣使者执高祖诣江都,高祖大惧。)

<자치통감 资治通鉴> 에 따르면 수양제는 이연과 왕공인이 적을 막지 못함을 들어 관리를 파견하여 강도로 압송하게 했다. 이연은 두려움에 떨었다."(帝以渊与王恭仁不能御寇,遣使者执诣江都,渊大惧。)

<대당창업기거주 大唐创业起居注> 에서는 수양제가 관리를 파견하엿고 "이연을 묶고 왕공인을 참수하였다"라고 적고 있다.(隋炀帝派使者前来,“系帝而斩仁恭。”)

비록 기록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위의 사실에서 전쟁실패의 책임자로서 이연이 조정의 어떠한 처벌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최후의 처벌은 대체 무었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하지가 않다. 일단 강도로 가서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라는 것 뿐이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연은 강도로 압속되어 황제의 다음 처분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의 핵심은 이연이 황제가 행할 처벌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했냐는 것이다. 그리고 이연은 이러한 판단을 바탕으로 어떠한 반응을 보였냐는 것이다.

이연은 어떻게 판단했을까? 그는 어떤 근거를 가지고 판단했을까?

 


멍쉬엔슬(孟宪实)의 晋阳:梦开始的地方이 괜찮은 내용이어서, 직역식이 아닌 의역위주로 번역한 글입니다. 오역이나 오타에 대해서 강력한 비판을 부탁드립니다. 또한 저의 "귀차니즘"을 생각하면 어차피 덧글도 달리지 않아서 압력도 별로 없는 이런 종류의 글의 업데이트는 조금 느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덧글을 달아달라는 말을 참 아름답게 돌렸군요! 우훗-_)

  1. 시골 2008.07.27 19:45

    왕공인과 이연의 관계는 상하관계인가요? 아님.. 행정과 군사같은 관계인가요?

    • Favicon of http://ddokbaro.com BlogIcon Baro 2008.07.27 19:59

      이연이 더 높은 상하관계인듯합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삼국시대부터 수당시대까지 한 지방통치자가 행정-군사를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연은 태원전체 지방의군사-행정 총 책임자였고, 왕공인은 그 중에서 马邑郡의 태수일뿐인듯 합니다.

      물론 둘의 원칙상은 수평적인 관계일수도 있습니다. 태원은 일단 현급이라고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같은 현급이라도 차이가 있어서, 같은 구청장이라도 강남구청장을 최고로 치듯이 말이죠 -0-;;

      그외에 이연 자체가 황족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공"의 작위가 있음으로 서열상 당연히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전공 시대가 아니다 보니 정확히는 이야기 하기 힘들군요. 하하;;;;

당(唐)조의 황제는 기존의 황제와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특수한 이름으로 불리었다. 하늘칸(天可汗)이라고 하늘 지배자로 불리었다. 당조의 황자는 여러가지 옥쇄를 가지고 있었고, 그중에 전문적으로 국외에 보내는 편지에 이용했던 도장에는 "하늘칸의 도장 天可汗之印" 이라고 쓰여 있다.

당조의 꿈은 바로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渊)에게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는 정작 하늘칸을 얻지 못하였다.

수(隋)나라말기 고구려 공략으로 인하여 민심히 흉흉해지고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원은 그러한 수나라의 고위관리였을 뿐만이 아니라, 황제와 긴밀한 혈연관계을 맺고 있었다. 당시 아무도 당이 수나라를 이어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였고, 더군다나 이원이 반란을 일으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이연의 어머지는 수양제(隋炀帝)의 어머니와 친자매였다. 이연이 어려서 부모님을 잃자, 수양제의 어머니인 독고황후(独孤皇后)의 보살핌을 받게 된다. 이연은 아버지의 작위인 당국공(唐国公)을 어린나이게 이어받게 되었고, 그의 출세도 수문제(隋文帝)와 황후의 후광 속에서 탄탄대로를 달리게 된다. 또한 수양제와 이연은 아마도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자주 같이 뛰어놀면서 친분을 쌓았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러나 이연은 반란을 잃으겼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악을 했을 것이다.

대체 이연은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일까? 이연은 제왕 운명을 타고 나서? 이씨가 양씨를 대체한다는 유언비어때문에? 주위의 심복들이 부추겨서?


614년 태원으로 돌아가보자.

수나라는 몇 백년동안 분리되었던 중국을 통일하였다. 하지만 더욱 강대하기를 바랬던 수나라는 고구려를 공략하였고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의 거대 제국의 꿈은 날로 산산히 부서지기 시작했다.

617년의 중국은 수나라 붕괴의 전야였다. 전 국토의 산천이 불타고 민중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역사의 갈림길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누가 역사의 선택을 받을 것인가?


1. 꿈과 현실 - 이원

617년, 이연은 태원으로 파견을 나가서 잠시 머물렀었다. 당시의 관직은 태원지방의 제독(最高军政长官)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지방실력자로 성장한다. 그런데 이연이 속으로 가장 기뻐했던 것은 실제 권력이 아닌 어둠 속에서 생겨난 하나의 미묘한 생각이었다. 태원은 고대 전설 속 당요(唐尧)가 관장했던 지역이었다. 요는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천하를 다시르게 되었다. 천상천아 유아독존. 이연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작위도 당국공(唐国公)이었다. 당국공이 당요의 옛땅으로 온 것이다. 이것이 천명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아주아주 오래전, 어떤 사람이 이연의 관상을 본적이 있다. 그는 이연의 골상이 부귀하니 스스로를 아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 이연의 마음속에서는 어떤 꿈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연이 태원에 도착한 뒤, 그 꿈에서 깨어난 것은 아닐까? 이제는 꿈만이 아닌 현실로 실현시키고자 하는 충동을 느낀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런 꿈만으로 이연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일 것이다.


대업구년(大业九年) 바로 수양제가 고구려로 친정을 나갔을 때, 예부상서(礼部尚书) 양현감(杨玄感)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연은 양현감이 친지들을 온갖 이유를 가져다 붙이며 전선에서 돌아오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의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곧장 전선에 있는 황제에게 보고를 하게 된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 수양제는 이연의 충성에 감사하며, 전방주력부대를 돌리고, 다른쪽으로는 이원에게 홍화군(弘化郡)의 군사를 맡게 하고, 지관우주군사(知关右诸军事)에 임명한다. 이는 장안(长安)의 북방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이연이 처음으로 군사력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양현감의 반란중에 이연이 보여준 충성은 매우 깊어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두항(窦抗)은 이연 부인의 당형이었다. 또한 이연 본인과도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두항은 이연에게 이 기회를 이용하여 천하를 손에 넣으라고 조언을 한다. 그때 이연은 "문제를 일으킬 발언을 하지 마세요(无为祸始,何言之妄也。)"라고 대답한다. 당시의 법률을 생각하였을 때, 두항의 발언은 모반의 증거가 된다. 다시 말해서 이연은 이 사실을 보고해야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연은 비록 두항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정작 두항을 고발하지는 않는다.

이연은 당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야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이연이 태원에 도착하였다. 그는 조정세력의 대표가 되어 군대를 이끌고 각지의 폭동을 진압하였다. 그는 심지어 70발의 화살을 연달아 발사해서 70명을 죽인 기록이 있었고, 조직적이지 않은 군중들이 군대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이상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그의 야심과 꿈이 합쳐졌을까? 그가 진정 꿈을 위해서 노력을 시작했을까? 그의 일련의 모습을 보면 그러한 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사실 그는 아직 웅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지금 당장의 반란과 침입을 막는 것만을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속 됩니다.)



멍쉬엔슬(孟宪实)의 晋阳:梦开始的地方이 괜찮은 내용이어서, 직역식이 아닌 의역위주로 번역한 글입니다. 오역이나 오타에 대해서 강력한 비판을 부탁드립니다. 또한 저의 "귀차니즘"을 생각하면 어차피 덧글도 달리지 않아서 압력도 별로 없는 이런 종류의 글의 업데이트는 조금 느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덧글을 달아달라는 말을 참 아름답게 돌렸군요! 우훗-_)

  1. 시골 2008.07.26 18:43

    이원인가요? 이연인가요? ^^

    ========================
    반란이면, 12.12 사태때 장군들의 전화내용이 떠오르네요.
    초반에 파악이 안돼서 우왕좌왕하는 모습, 배신자의 거짓말, 쿠테타에 대항하는 군인의 비통함등... 그리고, 신군부 장교의 작전(쿠테타)성공통보.

    • Favicon of http://ddokbaro.com BlogIcon Baro 2008.07.26 19:50

      한국식 발음은 이연이 맞습니다. 중국발음이 yuan이어서 저도 모르게 이원이라고 했네요. 실수했습니다.-0- (중국식 발음으로 하면 리위엔이 되는군요. 지금 현재 배우는 언어학에서는 저같은 이런 잘못을 중간언어문제라고 하더군요. --;; )

    • 시골 2008.07.26 20:13

      ^^;;;;;

      그러고 보니 저도.. 일어 공부할때는..
      hwp 에서 한자입력할때 井 자를 '이' 란에서 찾는 실수를 한적이 있죠..

    • Favicon of http://ddokbaro.com BlogIcon Baro 2008.07.26 20:29

      ㅠㅠ 흐흑..ㅠㅠ
      처음부터 오역을 해버렸으니 계속 연재하고 싶은 마음이 확 깍이는군요. 흐흑..ㅠㅠ

    • 시골 2008.07.26 20:36

      헉.. 그런 뜻이 아니였는데... ㅡㅡ;;;;;
      그냥 누구나 할수 있는 작은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마음 깎이지 마시고, 뜻하신 데로 하시길...

    • Favicon of http://ddokbaro.com BlogIcon Baro 2008.07.26 21:38

      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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