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와 결론

다신교에서 일신교로 발전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해를 한다. 일신교가 더욱 발달된 것이고, 더 훌륭하고, 다신교는 미신이나 저급 종교라고, 웃기는 소리다. 과학은 발전하면 더욱 좋아질지는 모른다.(사실 환경 오염이니 해서 역사적이나 지구 전체를 놓고 보았을때 과연 좋아진것인지 의문이 팍팍 들지만-_) 하지만 인간의 일에서 소위 말하는 발전이 더욱 훌.륭.한 것은 아니다.


이제부터는 "다신교에서 일신교가 나왔고, 현재는 다신교와 일신교가 동시에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제부터 말도 안되는 논증 시작 --
(왠만하면 보지 마시와요 -0-)


1. 다신교란?
지금까지 학자들이 추측하기로 인류의 최초의 종교적 형태는 다신교였다. 다신교는 여러명의 신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그리스 신화를 보면 여러명의 신들이 나온다. 물론 제우스가 대빵이긴 하지만 그의 아내 헤라한테 맨날 바가지를 긁힌다. 동양의 인도를 보자. 불교를 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관세음보살이 부처중에 대빵이라고 보통은 이야기 하지만 그 외에도 천수관음이니 머니 해서 부처님은 어려명이 있다.

성경에도 이러한 다신교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 중에서 모세의 십계명의 제 1조항은 유념할만하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라는 말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외에도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샤마니즘을 주류로 해서 세계의 종교는 기본적으로 다신교였다. 물론 몇몇 일신교 사상이 보이긴 하지만, 지금 말하는 것은 주류다. 그리고 유대교가 생겨나고, 기독교가 거기서 파생되고, 다시 이슬람이 파생된다. 그리고 자신들이 가장 위대한 종교라고 부르짖는다. 정말 그럴까?


2. 종교개혁 =  회귀
흔히 종교개혁을 말하면 마치 예전의 카톨릭은 매우 낙후되고 안 좋은 종교로 생각되어지고, 개신교는 훌륭하고 대단하게 보인다. 그런데 사실 개신교는 성경지상주의에 가깝다. 다시 말해서 오히려 탈속, 혹은 신에서의 멀어짐이 아니라, 더욱더 신에 밀착되고자 하는 노력이다.

흔히 나쁘게 말하는 면죄부. 이걸 다르게 해석하면 신의 대리인이지만 어디까지나 한 명의 인간인 교황이 신이나 할 수 있는 죄를 사할 수 있고, 그리고 사람들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돈을 모아서 죄를 사면 받을 수 있다는 소리다. 인간의 우주인 것이다.

하지만 개신교는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나선다. 개신교의 대부분의 교파들이 천명론, 다시 말해서 구원받을 사람은 이미 다 정해놨다는 이론을 보통 전개하고는 한다. 여기서 인간이 할 수 있는일은 없다. 어차피 신이 다 정해놓았다는 것 아니겠는가?

이것이 원리주의이고, 점차 세속화되는 종교에 대한 반발로 초기의 순수?!했던 상태로 돌아가자는 것이 소휘 종교개혁이다. 한 마디로 별로 발.전.이 아니다. 현실에 비유를 하면, 박정희때 한강다리 막 심고, 고속도로 뚫고, 빌딩 올리니 이렇게 발전하지 않았냐!? 지금 경제 문제는 박정희때처럼 마구마구 건설하면 된다라는 이명박을 연상하면 된다. 그는 개발 지상주의로 인하여 한강 다리 무너지고 마구잡이 건설로 회손된 자연과 문화유물은 생각도 안하는 거다! 그리고 그 당시와 지금의 상황이 다르다는 것도 인식하지 않고, 무조건 예전처럼 대공사(대운하) 만들자! 라고 말하는 거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본질이다.

다시 말해서 개신교는 인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보면 매우 어처구니 없는 종교이다. 인간은 자유가 없다. 다 신이 정해놓은 거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의 기본적인 양식인 개인의 자유라는 명제앞에서 가장 진보되었어야 할 개신교는 오히려 카톨릭만도 못하다. 차라리 카톨릭보다 몇 천년전에 만들어진 불교의 사상이, 개나 소나 모두가 다 부처가...다시 말해서 절대 신이! 될수가 있다, 가 훨씬 인간의 자유와 근접하다.


3. 실제 종교인의 숫자...
무엇보다 현재 마치 모든 사회가 일신교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환상일 뿐이다. 이슬람과 기독교가 일신교의 명맥을 유지한다면, 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 곳곳에서 아직도 유구히 남아있는 샤마니즘이 다신교의 대표주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인구만으로 따지면 일신교나 다신교나 숫자는 비등할 뿐이다.

그리고 유교를 종교로 보냐 마냐라는 논쟁이 있는데, 만약 종교로 놓고 본다면, 당연히 많은 조상신을 모시는 다.신.교.다. 이로 인하여 유교 문화권의 수 많은 인구가 다신교로 거의 기본적으로 고고싱이다. 유교가 종교가 아니더라도, 중국인들의 식당을 가면 왠만하면 보이는 관우상도 샤머니즘의 한 형태이다. 그로 인하여 중국인들은 살짝 다신교도로 포함시키기! -0-

단지 일신교는 다신교에 비하여 매우 강력하게 포교활동을 전개하기 마련이고, 이유는 무지 막지 간단하다 안 믿으면 지옥 가니까-- 내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이 지옥을 가게 해서 쓰겠는가?!, 그로 인하여 일신교의 숫자가 많다고 느껴지기 마련이지만, 사실 일신교도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

그럼 여기서 묻고 싶다. 사람들은 병신이라서 후진 다신교를 아직도 믿고 있는가?! 머...그럴 수도 있다. 가끔 보면 개인은 현명하지만 대중은 무식하다라는 말이 생각나고는 하지만, 특히 못 사는 사람들이 한나라당을 지지한다고 하는 꼴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 이지만--, 인간을 믿고! (믿기 싫지만...-_)


4. 발전 지상주의
발전이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사람의 심리이다. 하지만 발전은 반드시 좋지만은 않다. 지금 현재 이렇게 블로그질을 하고 컴퓨터를 쓰는 것이 과학의 발전때문이라고 한다. 확실히 예전보다 좋아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 생각하면, 이렇게 블로그질을 하고 위해서, 컴퓨터를 만드는 비용, 통신망을 구축하는 비용, 그리고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서 타들어가는 석유, 그리고 오염되는 자연을 생각하면, 과연 발전해서 좋기만 한건지 의심해 봐야하지 않을까?


5. 사실은 말이다.....
2005년에 발표된 어떤 중국 학자의 글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몇 자 적어봤다. 그는 19세기의 서양 이론으로 샤머니즘은 Magic(마술)이란다. 종교가 아니란다. 그리고 그 논증 중에서 샤머니즘은 다신교여서 종교가 아니란다. 원시 종교란다. 그리고 종교는 무조건 일신교란다. 그럼 불교는 종교가 아니었던 건가....=_=;; 그리고 힌두교는?! =_=;;  거참....만약 50년전이었다면 통했을지도 모르겠지만....지금 시대에 와서 이런 구식 이론으로 들이대면 생각되는건...웃기고 자빠지고 있네라는 생각뿐이랄까?

명색이 교수라는 작자가...으휴..-_- 기왕 외국 사상을 들여다 오는 보따리 상을 하려면 최신 사상을 들여오던지 말이지...이건 예전 구식 이론을 들고 들어오니 어쩌란 건지 궁금할 따름이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샤마니즘의 긍정적인 면을 보기 시작한 풍조인데..이 작가는 멀 어쩌란 건지..

일개 학생인 내가 어처구니 없어할 글이면...으휴-_......
하긴 제목부터가....."샤머니즘의 본질을 종교가 아니라 무술이다"라니...종교 본질이야 영원한 과제이긴 하다만...누가 이거 토론하냐..요즘-_- 어차피 해답이 있을 수가 없는 문제인데 말이다.

그리고 말이다. 정말 잡담으로 적는 것이긴 하다만...정리 엉터리닷! 음하하하..--
어차피 나만 알아보면 되는거얏!! 음하하하;;;;  

자료정리용 포스트입니다. 신경 쓰지 마셔요. 우후~ -_-

솟대란 장대나 돌기둥 위에,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앉힌 신앙대상물을 일컫는다. 이런 솟대는 마을 사람들이 동계를 지낼 때에 마을의 안녕과 수호, 그리고 풍농을 위하여 마을 입구에 세운다. 솟대는 마을 입구에 홀로 세워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장승, 선돌, 탑(돌무덤), 신목 등과 함께 어울려서, 마을의 하위신으로 모셔진다. 특히 장승 옆에 세워져, 장승과 함께 위함을 받는다.

솟대 위의 새는 대개 오리라고 일컬어지며, 일부 지방에서는 까마귀라고도 부른다. 그밖에 기러기, 갈매기 , 따오기, 까치등으로 관념되지만, 철새류의 물새인 오리가 솟대의 새로서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그리고 새는 한 마리에서 세 마리까지 안히는 것이 가장 흔하지만, 드물게는 다섯 마리도 앉힌다. 현재는 솟대를 구성하는 두요소, 곧 장대와 새에 대하여, 구체적이고 분명한 의미를 부여하는 마을은 거의 없어서, 원래의 의미가 많이 퇴색된듯이 보인다. 그러나 솟대는 아마도 북아시아 샤마니즘의 문화권안에서, 세계나무와 물새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매우 오랜 역사성을 갖는 신앙대상물로 생각된다.

이러한 솟대가, 안정된 농경마을을 사회구성의 기초단위로 했던 한국의 역사속에서 마을의 안녕과 수호를 맡고, 농사의 성공을 보장하는 마을신의 하나로 변모해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솟대는 풍수지리사상과 과거 급제에 의한 입신양명의 풍조가 만연되어감에 따라서, 행주형 지세에 돛대로서 세우는 짐대와 급제를 기념하기 위한 화주대로도 분화 발전되어 갔던 것 같다.

물론 한국에는 솟대말고도, 여러 신앙상의 목적으로 높은 장대를 세우는 이른바 입간 민속이 있었왔다. 곧 서낭대, 영동대, 볏가리대 등이 있지만, 솟대와는 그 신아형태와 역할이 다른 것이다. 우선 솟대는 마을의 항구적인 신간으로서 마을 사람들의 신앙생활과 긴밀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솟대를 구성하는 장대와 새가 쇠퇴되기는 했지만 일정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다른 입간 민속과 구별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솟대는 전국적으로 매우 넓게 분포하며, 또한 북아시아 지역의 솟대신앙과도 그 관련성을 엿 볼 수 있어서, 솟대가 다만 근래의 한국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북아시아 샤마니즘 문화권의 공통된 문화요소로서 오랜 역사를 가졌음을 알 수 잇다. 특히 솟대는 문헌사료의 소도나 고고학 자료인 조식간두, 장대루겁등 과도 대비해 볼 수 있는 자료로서, 일찌기 국사학이나 고고학의 학문적 관심을 끌기도 했었다.

솟대가 언제부터 농경 마을의 신으로 모셔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북아시아의 솟대와는 달리, 농경 문화에 적합한 여러 다양한 형태와 기능으로 변모하면서, 농경 마을의 신앙체계에 통하보디어 갔던 것을 짐작할 뿐이다. 솟대의 장대에 왼새끼줄이나 묵선으로 용트림을 하거나, 장대 자체를 용트림한 나무나 물(시내나 개울)을 건넌 곳의 나무를 써서 우순풍조를 비는 것 등은 솟대와 농경문화와의 융합을 보여준다. 또한 철새류의 물새인 오리가 갖는 다양한 종교적 상징성이 마을의 사정과 관련한 간절한 의구에 따라서, 어떤 하나의 상징성만이 강조 확대되어 솟대의 기능 역시 다양해진 것으로 보인다. 곧 오리가 농사에 필요한 물을 가져다 준다거나 오리기가 물에서 놀며 잠수도 하는 새라서 홍수를 막기도 하고, 홍수속에서도 살아남게 한다든가, 또한 마을이 물속에 있는 것처럼 되어 화마가 얼씬거리지 않는다든가 하는 것등은, 오리가 갖는 종교적 상징성이 얼마나 다양하게 마을에 따라서 변이되는가에 대한 좋은 자료이다. 이밖에도 새의 모양이나 머리방향, 마리 수에 따라서도 많은 다양한 의미가 부여된다.

솟대는 원래 세계나무와 물새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고대적인 신앙 대상물로 여겨진다. 바로 이점 때문에 솟대는 다른 마을의 신앙대상물보다 더욱 심한 소멸 현상을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 솟대가 많이 없어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존속되는 것은 위에서 본대로, 솟대를 구성하는 장대와 새가 모두 농경문화에 알맞고 다양하게 변형되어 농경 마을의 신앙체계에 통합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처럼 솟대는 마을 신앙의 한부분을 구성하는 신앙대상물이지만, 그것이 지니는 역사성과 북아시아 솟대 신앙과의 관련성, 전국적인 분포와 농경 문화와의 다양한 융합현상, 농경 마을에서의 액막이와 풍농의 기능, 급제 솟대와 행주형 지세의 솟대 문계, 새(특히 오리와 까마귀)신앙의 의미 등을 고려하면, 솟대의 전반적인 성격과 시능을 발기히는 일은 한국의 역사나 문화의 한 단면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연구 주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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