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화려했던 당(唐)나라를 기리며...
1. 수(隋)의 위밍업

* 외할아버지 외손자의 황위를 빼앗다.

여러분들. 이제부터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강대했던 시기인 수당시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날 중화민족은 모두 56개이며, 한(汉)족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한족이 해외에서 모여 사는 곳인 ChinaTown은 "당나라 사람의 거리(당인가 唐人街)라고 불립니다. 다시 말해서 한(汉)나라와 당(唐)나라로 아직도 불려지고 있을 정도로 중국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두 왕조입니다. 한나라의 강력함은 이미 설명했었습니다. 그럼 당의 번영은 누가 그 기초를 만들었을까요? 바로 수나라입니다.

서기 581년 북주(北周)의 외척 양견(杨坚)은 나라 이름을 수(隋)로 하고 년호을 개황(开皇)이라고 하여 장안(长安 지금의 서안)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양견은 곧 수문제(隋文帝)입니다. 수문제는 북주의 외척이었지요. 외척이라는 것은 황제의 어머니나 아내의 가문, 혹은 태후나 황후의 가문을 말합니다. 양견은 북주 정제(静帝)의 외할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외손자를 몰아내고 자신이 스스로 황제가 된 것이지요.

황제를 빼앗긴 정제(静帝)의 할아버지인 북주의 선제(宣帝)는 아마도 양견의 딸과 억지로 결혼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외척에 의한 찬탈은 대부분 이런 식이죠.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도 황제의 외할아버지였었죠. 삼국연희로 유명한 조조(曹操)도 황제의 장인(아내의 아버지)이었지요. 비록 그는 황제자리를 뺏지 않지만, 그의 아들 조비(曹丕)에 의해서 매형의 자리를 뺏어서 황제가 됩니다. 북주의 선제와 같이 한헌제(献帝)도 원래의 황후를 없애버렸기에 억지로 조조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되죠.

앙견은 북주에서 수국공(隋国公)이었답니다. 그래서 나중에 수(隋)라고 이름을 붙이고 년호를 개황(号隋)이라 하며, 장안(长安)을 수도로 한 것이지요. 서기 589년, 앙견은 그의 둘째 아들을 진왕(晋王) 양광(杨广)에게 총병력 50여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중국 남부에 있던 진(陈)나라를 멸망시키게 하고 남북통일을 이루어냅니다. 진나라는 이름바 남북조시대에 송(宋)-제(齐)-양(梁)-진(陈)으로 넘어가는 남쪽 왕조의 마지막입니다. 남조의 천자는 풍류(风流)를 사랑했고, 단지 자강산을 굳게 지킬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남조의 정권의 황제는 자주 변하였고, 무력이 약한 서생들이었으니 결국 망하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연스럽게 수나라가 천하통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1. 여러 민족의 융합.
역사상 북방에서 남방을 통합하려고 노렸던 적은 몇 번이나 됩니다. 삼국시대에도 그랬고, 진나라때도 그랬고, 남북조시대에도 그러하였습니다. 가장 강력했던 것은 383년의 비수지전(淝水之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북방의 16국중에 전진(前秦)의 황제 부견(苻坚)이 90만 대군을 이끌고 동진을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20만도 안되는 동진에게 발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민족간에 첨여하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남쪽의 원래 북방에서 쫒겨온 사람들은 오랑캐들에게 통치 당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었습니다. 또 전진(前秦)은 저족(氐族)이 만든 국가인데 90여만 대군의 대부분은 한족(汉族)이었습니다. 저족의 전체 인구는 단지 몇십만에 불과했으니 말이죠. 한족들의 입장에서는 동진을 자신의 조국과 같이 보았으니, 누가 조국을 치기 원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비록 군대로 동원되었지만 그리 싸울 마음이 없었고 결국은 전쟁에서 실패하게 됩니다. [각주:1]

그런데 수나라가 천하통일을 할 쯤이 되면 상황이 변합니다. 수나라나 당나라 모두 비록 선비(鲜卑)인의 피가 흐르고 있지만, 남방쪽 사람들도 더이상 그들을 이민족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별 신경은 안 쓴 것이죠. 민족이 이미 융화가 된 것이지요. 북방은 이미 완전히 한화(한족에 동화됨 汉化)가 되어서 기존의 중원 왕조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각주:2].

이렇게 남쪽 사람들이 수나라를 이민족으로 보지 않았기에 양견은 날로 천하를 먹게 됩니다.


2. 북방 농업의 회복과 발전으로 경제적인 기반을 쌓음.
북방은 원래 남방보다 훨씬 더 농업이 발전해있었습니다. 비록 계속 되는 전쟁으로 황폐하게 되었지만, 수나라의 천하통일쯤이 되면 충분히 회복하고 발전해 있었습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오래된 말처럼 병력이 움직이기 전에 양식이 먼저 움직여야 됩니다. 전쟁은 어디까지나 돈싸움인 것이지요. 미국이 이렇게 죽이게 강력한 이유와 같은 것이랍니다. 전쟁에는 튼튼한 경제적 기초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이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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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모든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과 환영합니다. 
본 글은 의역식 번역입니다.
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깊이가 없다는 것이야 이미 소개했지만, 좀 문제가 많은 내용들이 있군요. 이건 머...제가 다시 쓰는게 더 속편하다고 느껴지기는 합니다. 그러나 저렇게 분석해서 안될 것도 없기에 그냥 냅두고 주석으로 너무 심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1. 이건 어떻게 수정하지도 못할 만큼 긴데, 좀 문제가 많아서 주석을 달겠습니다. 일반 백성에게 누가 통치하느냐는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당시의 비수지전의 패인으로 민족모순은 별로 언급이 안됩니다. 그것보다는 당시 전진의 전략-전술상의 문제와 동진의 방어전략 및 군사훈련이 좋았다고 평가합니다. [본문으로]
  2. 라는 것이 교과서급의 역사책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화보다는 오히려 중국 전체가 북방이민족들의 문화에 더 큰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최근 힘을 얻고 있습니다. 어느 한쪽에 동화가 된 것이 아닌! 서로서로 강력한 영향을 미친 것이지요. [본문으로]

北朝祭酒比南朝的祭酒更多,更强大。我怀疑,这是否祭酒和北方民俗传统的结合而出现?

。。。。먼저 사상을 바꾸고 나중에 습속이 변했다고 나온다. 그처럼 습속은 사상과는 다르게 매우 바꾸기 힘든 종류의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습속 혹은 제도가 변했거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해당 사상이 사상계에서 일정이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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