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과거의 글을 보았더니....이 당시만 하더라도 저는 어마어마한 민족주의자였군요. 2004년 이후에 6년이 지난 지금 저는 이런 글을 쓰는 사람들을 비웃고 있습니다. 과거의 저를 비웃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의 자신에 대한 반성 차원에서 글은 남겨두겠습니다.



검정색 글은 모두 원문을 번역한 글입니다.

제가 첨가한 글은 파란색으로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공부해야 할거 같습니다. 짱꼴라가 저러면 왜 틀렸는지 설명해 줘야 하니까여.... 또 공부...-_-;;




원문 출처: http://www.snweb.com/gb/gnd/2004/07/02/0702p014d001.php




장기간 잘못 읽어진 역사, 오늘날에 와서 중시되는 유산

고구려, 잃어버린 고대문명(사진 4장포함) {음…… 무슨 내용일까? 한국이 고구려를 언제 버렸나? 잃어버려? }

본지기자 송념신 {염신아, 니 메일주소 불러 볼래?}


  학자들이 생각하기에 고대동아시아 국가체제와 현제 서방의 개념에 의해 형성된 국가 관계는 완전히 서로다른 개념으로 억지로 끼워맞춘 것이다. 반드시 역사적, 과학적태도에 근거해서 고구려 고대문명을 다루어야 하며, 문제를 현대정치로 끌어들여서는 안된다. {음.. 왜곡의 시작인가? 그래 현대정치로 끌어들이면 안되지… 짱꼴라들 중국이 힘세지고 있다고 그거 믿고 까부는 주제에… 이 문제를 보면서 중국이 대국이 되더라도 미국과 별반 다를게 없을거 같은 생각이 드는 건 왤까?}

  7월1일, 중국 소주에서 거행된 제28회 세계유산위원회회의에서 중국이 신청한 고구려성과 왕릉, 고분은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이 유산의 등록성공은 특별한 의의가 있다. 오랫동안 소실되었고, 잘못이해된 옛나라 고구려를 새로운 모습으로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오에 한것이다. {그래, 역사 왜곡하니 자랑스럽니?}



  중국동북지역과 한반도북부를 가로지르는 고대 변방정권. {고구려가 왜 변방정권이냐? 그냥 한국도 화교국가라고 해버리지.어? 웃기네..}

  오늘날 중국학자들은 보통 생각하기를, 고구려는 서한에서 수당대까지 존재하였던 중국도북지방의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변방민족 정권이다. 동북지방은 일찍부터 고대 중앙정권의 관할구역이었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했을때 상나라의 후예 기자는 사랑들의 데리고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오늘날의 평양지방에 “조선”을 건립하여, 주나라의 한 지방정권이 된다. 학계에서는 보통 “기자조선”이라 칭한다. 서한 초기 위만의 연인(卫满的燕人)이라 함은 전쟁을 피해 이곳으로 와서 중원의 사람을 모아 통치권을 장악한 사람을 말한다. 학계에서는 이를 “위씨조선”이라 한다. 계속적으로 확장정책을 실행함에 기원전108년 위씨조선은 한무제에 통일되었고 서한이 관할지에 낙랑, 진번, 임둔, 현토4군을 설치하고 관리하였다. {웃기지마, 위씨조선이 중국이면 그냥 통일하면 끝이지 왜 사군을 설치하냐고… 사군이라고 해봤자 그냥 4개 작은 부락이었을 뿐이잔아.. 거봐 고조선이 중국이라는 말은 웃기지도 않는다… 참내..}

  기원전37년 동북변방민족 부여의 한 왕자는 사람들의 박해로 남쪽에서 현토군의 고구려현(지금 료녕성의 신빈현 동남부)으로 도피한다. 활을 잘 쏴 “주몽”으로 불리었던 왕은 이곳에서 초기의 고구려정권을 건립한다. 사서에는 “고려”라는 약자로 기록된다. <삼국지>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당시 고구려의 호적은 서한 현묘군 고구려현의 관리하에 있었다. 서기3년 고구려의 제2대 왕인 유리왕은 수도를 오늘날 길림성 집안시에있는 “국내성”으로 옮긴다. 이후 400여년간 고구려정권은 이곳을 수도로 삼는다.

  고구려는 한의 현토군, 요동군 관할에 놓이고 지속적으로 자신을 신하라 칭하며 조공을 바쳤다. 역사상 이 정권은 흥망성쇠의 과정을 거친다. 왕망시대 흉노정벌에 징집되어 참가함에 도망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고구려왕의 말탄 신하(驺)는 왕망에 의해 유인되어 죽음을 당한다. 동한의 건립후, 고구려의 통치자는 다시 왕으로 책봉되고 계속해어 주위의 변방정권을 통일해 점점 강력해 진다. 위진남북조 후기에 이르러 중원에 전쟁이 발생하고 이게 고구려는 더욱 발전한다. 그때 고구려는 중원의 각왕을 신하라 명하여 조위와 막용선비정권에게 두번의 단멸성 공격을 받는다. 이후 고구려는 정책을 바꾸어 서쪽으로의 확장을 중지하고, 남쪽으로의 경영을 시작하며 한반도의 다른 두정권 백제와 신라를 통제한다. 서기427년 고구려는 다시 평양으로 천도한다.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가 제일 번성했을 때, 그영역이 동서로 이천리였고 남북으로 천리였다. 남쪽으로는 한반도 중부에 이르렀고 북으로는 길림중부, 동으로는 연길 동서로 요하에 이르렀다. {짜증나는 짱꼴라들 자기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저 중원이라는 말투와 아집에 짜증이난다. 그리고 정권이라는 애매한 용어로 고구려를 지칭하다니. 비겁한 자식들. 고구려는 엄연한 국가란 말이다. ㅋㅋㅋ 그리고 짱꼴라들 너희를 신하라 불렀다고? 그럼 너희 역사가 고구려 속국의 역사라는 말이네.}

  수당시기에 이르러 중원은 통일되어 가고 할거상태의 고구려를 수복하는 것이 두나라 황제의 공통된 바램이었다. 통일에 대한 요구로 당태종은 수문제와 양제의 여러차례의 실패후 무력으로 고구려를 통일하려 한다. 역사서는 기록하기를 당태종이 전쟁에 나가기전에 “이제 아홉바다가 평정되었고, 모퉁이 하나만 남았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고구려수복을 통일의 최후의 전쟁으로 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기644년부터 24년의 전쟁으로 고구려는 당나라와 한반도 남부의 신라정권의 연합에 의해 멸망하고,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한다. 설인귀를 검교안동도호로 임명하여 군대를 통합하고 지키게 한다. 이때부터 705년동한의 고구려는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다. {수복? 고구려를 수복해? 언제는 너희 나라였냐? 그리고 두나라의 황제? 황제가 둘이면 것두 황제라 부르냐? 그냥 두나라 왕이라고 적어. 그리고 고구려가 중국에 속하면 그냥 통일하면 되지 무슨 도호부를 설치하면서 군대를 주둔 시키고 지키라고 그래. 고구려 힘이 세니까 세력억제시키려고 도호부 설치한거 아니야. 통일의 완성이라고 한것도 고구려가 자꾸 침략하니까 세력억제를 해야 통일 완성이라고 본거구. 아씨 그리고 헛소리가 넘 많아서 다 대답하기도 귀찬네… }



  고구려 문화와 중원문화는 가까워서 구별하기 어렵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시려구 준비운동하시나?}

  길림성 고고학 연구소의 부가흔(傅佳欣) 연구원은 오랬동안 고구려 고고학연구를 했다. 그가 기자에게 소개하기를 고고학적 각도에서 볼때, 고구려의 문화는 낮은 수준에서 갑자기 발전한 것이라고 했다. 어떤 시기의 귀족무덤 안에서 많은 량의 도자기, 철기가 발견된다. 하지만 동시대 일반 백성의 무덤안에는 석기가 발견된다. 이것은 분명하게 외래문명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구려 고적의 2/3은 중국의 국경 안에 위치하는데 고구려 초기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천도후 문화특징은 더욱 중원화되어 가며 원래의 특징은 줄어든다. 이 모든 현상은 고구려의 문화는 중원문화의 빛 아래서 발전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게 또 헛소리를 하는군. 고구려 문화유적지 왜 개방 안하냐고. 역사왜곡 하기전에 들통나면 곤란하니까? 욕나와도 참자…}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방사지(中国边疆史地) 연구센터의 이대용연구원은 기자에게 말하길, “고구려 문화는 동북아시아 문화중에서 하나의 매우 찬란한 문화입니다. 벽화, 산성, 고분, 모두 대단합니다.” 그가 보기에 고구려와 중원의 각 왕조는 경제 문화적으로 밀접한 왕래를 유지했는데, 이것이 많은 부분에서 찬란한 고구려문화탄생에 영향을 끼쳤다. {인접 국가간의 문화교류는 당연한거 아니야? 일본이 한자쓴다고 중국 속국이라고는 왜 안하니?}

  이대용은 예를 들기를, 많은 고구려 무덤중 벽화무덤은 극히 진귀하다. 벽화의 내용으로 보면, 사회생활과 내가지 신(청룡, 백호, 주작, 현무), 장식도안등이 있는데 많은 것들이 중원의 건축물과 무덤에서 자주 나오는 내용이다. 이밖에 고구려벽화는 중원지역보다 발생시기가 조금 늦다. 이는 중원에서 변두리로 전해진 과정이라 하겠다. 그리고 고구려 멸망후, 이지역의 벽화무덤의 수는 줄어든다. {문화유적지 공개해서 공개적으로 연구하고 공식적으로 발표해야지. 자기들끼리 골방에서 일방적으로 그렇다고 하면 그게 믿기냐}

  이와 같이 고구려민족과 중원민족의 교류는 빈번했다. 이대용은 이를 전면적교류라고 명했다. 예를 들자면, 고구려와 중앙왕조의 사자왕래는 매우 밀접했고, 쌍방문화교류의 중요한 전달자 중의 하나였다. 예절과 의식제도, 종교, 역법등 분야에서 넓게 교류하였다. 고구려민족은 자기만의 언어가 있었는데 이미 소실되에 찾기 어려우나 그들이 한자로 기록하였기에 오늘날 학자들이 그에대해 깊이 연구를 진행중이다. 고구려정권에는 많은 한인이 존재했다. 이와같이 당왕조안에도 적지않은 고구려인이 요직에 위치하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안서절도사를 담당했던 고선지가 있다. {지금도 한국에 한인 많아. 음… 그렇담 지금 한국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중 일부게…. -_-;; 참자. 욕나온다… 그리고 고구려에서 사용했던 고구려말 말인데 알고시으면 영화 “황산벌”을 보라구. 고구려어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될테니까.}



  오랫동안 오해된 역사 {제목이 잘못 됐네. 역사를 왜곡하는 중국이 맞지.}

  고구려 멸망후, 대부분의 후예들이 중원으로 옮겨져 중원민족과 융화되었고, 소수의 사람들이 주변 각민족에 융화되어 갔으며, 왕족은 멸망했다. 모든 영역은 당나라에의해 관할되었으며, 훗날 일부를 동북지방정권 발해에게 분할해 주었고, 일부는 한반도 남부 신라에게 분할해 주었다. 이후 점점 중원전통사학의 틀에서 벗어났다. 송대이후, 중원은 고구려역사를 인식함에 혼란이 생겼으며 잘못 이해하게 된다. 청대에 이르러 동북지방은 황실 “용흥의 땅”이라는 것에 의해, 청은 이지역에 “봉금정책”을 실행하고, 소수의 역사가만이 이에대해 고찰, 연구를 진행한다. 1877년에 이르러 고구려왕 고안(염덕이라고도 하고, 호태왕이라고도 칭함)사적이 기록된 “호태왕비”가 발견되어, 천여년간 소실되었던 옛나라가 다시 인식되기 시작한다. {다시 인식되는 건 너희 한족들한테겠지. 혹시 고구려의 발전된 문화가 중국에 퍼졌다는, 중국에 불리한 유적이 발견된거 아니야? 고구려 유적지 한국에 공개하라고!!}

  길림성 고고학연구소 연구원 부가흔은 “매우 긴 시간동안 우리가 고구려 역사를 외국사로 본것은 실제로 오해일뿐이다”라고 말했다. 서기918년 고구려 멸망250년 후, 한반도에 “고려”라는 정권이 들어선다. 통치자의 성이 왕씨여서 고구려의 약칭인 고려와 구별하기위해서 학계에서는 “왕씨고려”라고 부른다. 비록 같은 이름을 베껴 사용했지만, 왕씨고려와 고씨고려는 아무런 계승관계도 없다. 왕씨고려는 935년 신라를 대신했고, 뒤날 백제가 멸망하고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을 통일한다. 1392년 대신 이성계가 왕을 폐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으며, 1393년 “조선합영등호주청”을 명에게 청했고, 명은 이성계에게 조선왕을 하사했다. 결국 왕씨 고려가 조선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씨조선 또는 이조라고 부른다. {이씨조선? 이조? 왕씨고려? 왕위하사? 오호~~ 그럴싸한데.}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방사지 연구센터 연구원 이대용은 예를 들어 말하길, 중원지역 역사상 많은 정권들이 “송”이라는 이름으로 출현했었는데, 이 정권간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왕씨고려와 고구려또한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왕씨고려는 신라를 직접적으로 계승한 것이며, 고구려는 당나라에 통일된 것이다. 그러나 사료가 부족하고 오도되는 등의 원인에 의해서, 송대이후 사서는 왕씨고려와 고씨고려를 혼동하고 있으며, <명사(明史)>는 심지어 이성계 책봉이 합리적임을 해석하는데 기자조선, 위씨조선, 한사군, 고구려를 모두 (이씨)조선사에 넣어 버린다. {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해서 한국역사는 모두다 중국사에 포함된다고 해버리지. 그리고 화교의 미국진출로 미국사도 중국사의 일부라고 해버리지 그러냐.}

  이대용이 생각하기에, 왕씨고려와 고씨고려는 창립년대가 아주 멀며, 주체민족도 다르며(왕씨고려의 주요민족은 신라, 백제의 “삼한(三韩)”인 일뿐, 고구려인이 아니다) 정권건립자또한 계승관계가 없고 통치지역도 다르다. 이 네가지는 이둘이 서로 계승관계가 없음을 보여준다. {ㅋㅋㅋㅋㅋ. 말한번 잘했다. 그렇게 보면 중국사라는 것은 아예 없네. 몽골에 정복당했다가, 여진에 정복당했다가 고대국가는 우리 동이족이 세운 나라였잖아.}



  중국은 큰힘을 쏟아 고구려 유산보호에 노력한다. {공개가 우선이 아닐까?}

  광서3년, 금석학을 취미로하는 청나라 관원한명이 우연으로 풀밭에서 “호태왕비”를 발견하여 비문을 해석하는데 열기를 일으킨다. 그러나 1941년까지 고구려역사를 계통연구작품 <동북통사(상편)>(金毓黻)한편만이 나타날 뿐이다. 건국후 중국은 고구려 유적에대한 발굴과 보호를 확대하고 있으며, 1961년 호태왕비등은 전국중점보호문물로 지정된다. {그만 훼손하고 공개해 주세요.}

  20세기 80년대 고구려역사에대한 연구가 점점 전개되었다. 2002년 국가문물국은 설계분야와 관계있는 조직을 만들어 일련의 보호규범계획 전문조항을 제작하고, 질서있고 효과있게 세계유산신청을 위한 필요기초를 닦았다. 그후 정부는 3억여원을 들여 환경정리, 문물보호, 발굴정리 업무를 시작했으며, 현대식 건물과 무덤조성에 대량의 기금을 사용하였다. 초기에 11개의 왕릉 유적을 정리하였으며, 2700여건의 문물을 출토하였고, 현재의 박물관도 보수하였다. 작년 기자가 집안을 방문할때 길림성과 통화지역에서 집안시까지 모두 협력하여 고구려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에 힘썼다. 집안시도 이미 여행업을 적극육성하여, 유산등록 성공후, 여행업을 인삼산업에 버금가는 둘째 중심산업으로 키울 계획을 세우고 있다. {유산 등록되었으니까 이제 돈벌어야지.}

  방문중 모든 학자들은 반드시 역사적, 과학적태도를 가지고 고구려 고대문명을 보아야 하며, 현대 정치로 문제를 가져와선 안된다고 하였다. 실지로 중화민족과 한민족의 역사는 반드시 강제로 구분하거나 나누어서는 안되고, 그러수도 없다. 북경대학 국제관계학원의 우군교수는 생각하기를 고대 동아시아 국가체제와 현재 서방개념에 의한 국가관계는 서로다른 개념이기때문에 억지로 적용시켜서는 안된다. 고대 조공제도에 의한 관계는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현제 국제법체계의 인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래 억지로 중국역사에 끼워 놓지 말라고.}



  세계유산에 등록된 항목 {중국이 등록한 한국의 문화유산 항목}

  고구려 도성3채: 오녀산성(요녕헝인), 국내성(길림집안), 완도산성(길림집안)
왕릉12채; 귀족무덤26채; 장군총1호부장무덤; 호태왕비1석.



사진 :


벽화<진식도> 고구려 귀족의 생활을 표현

장군총



호태왕비(20세기초 촬영)

호태왕비 탁본<br />




  <환구시보> (2004-07-02 제14반)


<출처 : 지누 북경유학생의 모임 http://cafe.daum.net/studentinbej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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