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시대 제(齊)나라 최저(崔杼)는 자신의 군주인 장공(莊公)을 죽였다. 그러자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태사, 太史)는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崔杼弒莊公)"라고 기록하였다. 그러자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최저는 사관을 죽여버린다.

그러자 사관의 동생이 사관의 직책을 이어 받아서 또 다시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崔杼弒莊公)"라고 기록한다. 최저는 다시 사관의 동생까지 죽여버린다. 그러나 3형제의 막내가 사관의 관직을 이어 받아서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崔杼弒莊公)"라고 했다. 최저는 결국 사관을 죽이는 것을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 최저가 3형제를 죽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나라로 오던 다른 나라의 사관도 최저가 막내를 죽이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간다.


한중일 삼국에 퍼져 있는 유가문화는 그 폐해로 인하여 수 많은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유가의 기록을 중시하는 문화 덕분에 한중일 삼국은 서양권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는 어마어마한 량의 과거 기록을 지금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록으로부터 역사를 배울 수 있다[각주:1].


국가기록원(國家記綠院, National Archives of Korea, NAK)은 기록 관련 주요 정책의 수립, 중요 기록물의 체계적 수집·보존과 다양한 기록 정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중앙 기록물 관리를 위해 설립된 대한민국 안전행정부 소속기관이다. 국가기록원은 과거의 사관(史官)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조선왕조실록이나 기타 수 많은 기록물들이 군주의 기침소리 조차 기록하는 책임의식의 사관 덕분에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국가기록원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록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함부로 기록이 사라졌다고 하는 사관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행동을 저질러 버렸다. (한계례 : 기록원, 암호도 안풀어 놓고 “대화록 없다” )


결국 NLL회의록은 기록을 자신의 목숨과 같이 다루어야 되는 국가기록원에 의해서 어처구니 없는 "실종"상태가 된 것이다. 국가기록원이 기록을 장난으로 취급한 것과 다름이 없다. 



사관 3형제는 절대권력자가 된 최저가 자신들을 죽일지라도 사실을 기록하는 것에 대해서 어떠한 양보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최저의 악명은 수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언급되고 있다. 그것이 역사다! 역사라고!!!


목숨을 걸고 기록을 하지는 못할 망정 멀쩡히 보전되는 기록을 없다고 하다니...분노를 넘어서 진한 슬픔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젠장...ㅠㅠ



  1. 가끔보면 정말 역사로부터 배우고 있는지 궁금하지만......상식적으로 그렇다-_-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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