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실명제를 찬성하는 측 반대하는 측(정말 아무 생각 없이 썻다는 것이 들어나는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에서 가장 쉽게 이야기 하는 것이 "대체 무엇이 두려워서 익명의 가면 뒤로 숨느냐? 떳떳하다면 자신을 제대로 밝혀도 상관없지 않느냐?!"라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문제가 있는 발언으로 생각된다.

본인의 경우 About Me라는 공지를 통해서 스스로를 다 밝혀두고 있다. 본인이야 개인적으로 숨기지 않는 성향인지라 그런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본인의 모습이지. 이를 상대방에게 무조건적으로 강요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이 블로그에 자주 덧글을 다는 분들이 있다. 어떤 분은 자신의 주소를 남기고 있고, 어떤 분은 익명을 통해서 이야기 하신다. 문제가 되는 익명을 통해서 말씀을 하시는 분도 이해를 한다. 그 분은 스스로를 말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예를 들어서 본인의 친구나 아는 분들은 아무래도 대놓고 욕하거나 비판하기 곤란한 점이 있을 것이다. 이는 한국 문화의 절대적인 문제점이라고 생각하여 본인은 이를 부수고 싶지만 그렇다고 이미 현존하는 사람들의 생각까지 함부로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는 자신 스스로의 가치관이 있고, 성향이 있는 것이다.

왜 익명의 가면 뒤로 숨느냐고? 수줍음을 타는 성격인 것을 어찌하리오?! 한국의 사회 문화가 그런 것을 단순히 인터넷 탓만으로 돌리면 어쩌한다는 말이오? 왜 숨느냐고 하기 전에, 숨을 수 밖에 없는 한국의 보편적인 문화를 고칠 생각부터 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부언으로 중국조차 실명제(제한적 본인확인제 포함)을 아직도 실행 못 시키고 있다. 이제야 겨우겨우 실행하려고 준비중이다. 그렇다고 중국이 표현의 자유를 지금까지는 잘 지키고 있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실명제를 통해서 더욱 강력한 통제가 있을 것이라고 누구나 예상한다. 또한 개인적으로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구글은 분명히 중국에서 타협을 했다. 한국시장은 분명히 시장성이 없어서 타협을 하지 않은 면도 있다. 하지만 이는 결코 핵심이 아니다.

핵심은 결국 한국에서 얼마나 표현의 자유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IT 시장은 어디까지 매몰될 것이냐는 것이다. 한국의 시스템이 해외에서 성공을 하지 못하는 이유? 별거 없다. 해외에는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해도 당연하게 입력하는 바보들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IT 산업이 해외에서 말아먹을 수 밖에 없는 이유. 그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누구나가 각자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다. 설령 가족이나 친구 그리고 연인에게도 자신의 마지막 남은 가면은 벗지 못하고 본인의 모습을 감추는 겁쟁이들이다. 그래서 카타르시스(대리만족)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이다. 우리가 본연의 부끄러움과 두려움으로 차마 하지 못하는 가면벗기기를 소설, 영화, 연극등을 통해서 대리 만족감을 얻으려고 했었던 것은 아닐까?


출처 : <a href='http://blog.naver.com/gemini71/80001379661' target=_blank>호이의 있는그대로 </a>



1) 무한 카타리시스...
인터넷이라는 한 가지의 도구가 등장함으로서 우리의 대리만족의 범위가 극한으로 넓어지게 되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가면벗기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되어서 가면벗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인류의 역사가 흘러오는 동안에 인간이 처음으로 접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가면벗기"를 시도한 것이다. 물론 그 가면 벗기는 완전히 자신을 공개하고 행하는 가면 벗기가 아닌 익명성이 보장된 상태에서, 곧 다른 자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관음증(다른 사람의 가면벗기를 관찰)과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이다.


2) 아날로그로의 향수...
사람들은 이제 가면벗기를 시도하지만, 예전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이미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다. 그리고 영웅과 바보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무의식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하며 거부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점차 익명성과 반대되는 길로 접어들고 있다.

싸이월드의 일촌과 네이버 이웃이라는 개념은 인터넷의 익명성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실명성제도이다. 간단히 생각하여, 싸이월드에서는 서로가 실제 오프라인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끼리 온라인에서 재접촉을 하게 된다. 즉, 이미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을 온라인에서 만나게 되기에 그들은 결코 자신의 가면을 벗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가면벗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전통의 편안함에 행복할 수 있다.



3) 민족의 가면...
민족성 논란만큼이나 복잡하고 애매하며 혼란스러운 것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국이라는 지역적 문화적 특수성만을 가지고 생각해보기로 한다.

출처 : <a href=' http://www.mask.org/' target=_blank>하회동 탈박물관 </a><br />



한국이라는 곳의 전통문화는 효도와 충성으로 구성되어있고, 군대와 같이 계층적통치구조를 효과적으로 뒷받침하는 보조기구이다. 이런 전통문화 속에서 서민들은 "하회탈 마당"이라고 하는 놀이 형식으로 양반들의 부조리를 비웃으며 희화적으로 표현했었던 것이다.

물론 한민족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양한 나라의 가면들도 어느 정도의 사회비판의 기능이 있었던 것들도 있지만, 서양의 가면은 스스로 즐기기 위함의 기능이 상대적으로 많았으며, 중국의 가면도 그 사람으로 분장시킨다는 기능이 더 많을 뿐, 사회비판적 측면에서는 가면의 역활이 뛰어나게 발휘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한국에서 가면이라고 함은 샤먼사상의 영향으로 인한 귀신 혹은 영혼과의 대화를 위한 보조도구의 기능이 있으며, 우리는 가면을 신비롭게 바라보는 측면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특수한 문화양태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동시에 하회탈과 같이 생활같이 익숙하게도 받아들이는 모순적인 부분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통은 현대에도 인터넷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그 의지를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과거에 하회탈이 그러하였듯이 자신을 감춤으로 해서 더욱 강력하고 개방적으로 사회의 부조리를 비평하고 있다.


4) 자유와 책임의 경계에서...
문제는 익명성을 악용함으로 일어나는 일들이다. 펌이라는 형식을 빌린 저작권 도단도용행위, 아무렇게나 내뱉은 욕설과 비방,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마구잡이의 행동들은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다.

익명성을 발언의 자유를 극대화 시키는 도구라고 정의했을 때, 자유에 따르는 책임도 동등하게 지불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이 문제는 자유와 책임에 관한 오래된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지만, 여기서는 자유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있다. 라는 애매모호한 정의로만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익명성의 특성상 그에 따른 책임자를 색별해내기가 상당히 어렵다. 그런 이유로 책임을 강조하기 전의 책임자의 색별자체가 상당히 힘들고, 각각의 사용자들의 스스로 익명성의 책임을 지키고, 다른 사용자에게 전파해야된다라는 애매모호하고 책임성이 없는 대안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대안은 네티켓을 지키라는 말로서 그 생명력을 얻어왔고, 그 네티켓의 책임범위는 각각의 사용자가 서로 다른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다.

지금 현재에 이것에 대한 유일한 대안을 골라내는 것은 상당히 곤혹스럽다. 특히 인터넷처럼 성문법이 존재하지 않고, 모든 공공적 처벌이 관습법(...)에 의해서 시행되는 곳에서는 대안을 찾아내기가 더욱 힘들다.그렇다고 성문화 된 법을 만드는 것은 오히려 처음 시도된 스스로에 의한 가면벗기에 반작용만이 있을 뿐이다.

익명성을 보장한다는 기본 원칙 속에서 그 어두운 면을 어떻게 처리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지금 현재로서는 필요악의 개념을 이용하는 수 밖에 없어보인다.


5) 진정한 자유를 향해서...
인간은 인터넷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가면벗기를 시도하고 있다. 이런 행위의 결과로 인류가 더욱 안 좋은 쪽으로 향할지, 아니면 자신의 가면벗기를 완료하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해 줄 수 있을지는 아직 판단하기가 힘들다.

사람이 자신과 대등한 존재를 자신처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해요. 하지만 사람은 자신과 대등한 사람을 자신처럼 대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들은 자신과 대등한 상대를 죽여요.
- 이영도님의 <피를 마시는 새>중에서...

끝까지 확신을 잃지 말아야 되는 것은 인간이 악의보다 선의가 더 많다는 것이다. 그런 조그마한 차이를 믿고 언젠가 대등한 존재를 자신처럼 받아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길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은 필수요소이며, 가면 벗기를 그 과정의 일부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마지막 부끄러움이자 방패인 가면을 완전히 벗을 수 있을까? 나 자신조차도 많이 의심스럽다. 지구의 시계에서 고작 4초만은 차지하고 있다는 인류는 아직은 변화를 위한 활기와 용기가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다.



바로의 중얼중얼
익명성에 대한 단편적인 생각들을 정리했습니다. 조금 산만한 기운이 없지 않지만, 그냥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본인이 봐도 논리적인 헛점은 미루어두고, 일단 제대로 된 대안제시조차 못하고 얼버무린 것이 많군요. 죄송합니다.

이넘의 라틴어를 끝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집중해서 끝맺음을 하기 힘들군요. 다음주에는 삽질하러(알바하러) 가야 되서 조금은 괴롭습니다. 하루에 최소 한편은 계속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30일까지는 다 적어놓았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