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포트 하다가 그냥 심심해서 천추태후를 거론해 본다. 참고 서적도 없고, 그냥 레포트 쓰다가 정신을 좀 놓으려고 쓰는 것이니 막나갑니다. -_-

1. 거란은 바보가 아냐 -_-;;; 동물을 앞세워서 침략을 하다니??
본인이 무식해서 거란이 맹수들을 앞세워서 공격했다는 것은 본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다. 스페샬 보고서 이 부분에서 푸욱! 하고 뿜어버렸다. 나름 잘 나가다가 이런건 좀....자제요. 뒤쪽에 보면 유가들을 비판하는 부분이 있는데, 어찌 생각하는 것은 더도말고 덜도 말고 딱 유가의 색체일까나...북방기마민족은 그냥 다 야만인?! -0-;;

2. 외교의 천재 서희라...거란을 바보로 보나?
....애들 소꿉놀이도 아니고 말로만 상대를 농락하는게 가능할거라고 생각하는가? 거란이 바보도 아니고-_-;; 나름 송나라와의 외교에서 雲十六州 냠냠 먹은 거란이란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에 대해서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정신의 "고려시대의 정치변동과 대외정책" 이라는 책이다. 심심하면 한번 보도록...(머..이 책을 보면 서희는 외교의 천재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내정의 천재일지도-0-)

간단하게 말해서, 해당 조약으로 인하여 고려는 요동은 넘볼 수 없게 되었다. 성종이 조약을 맺지 않고 그냥 물러나려고 한 것은 소극적으로 보이지만, 아예 모든 조약을 맺지 않음으로서 다시 수복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것으로도 해석을 해볼 수 있건만-0-

3. 유학자들이 역사를 쓴것이 맞긴 하다만...
그 부분은 분명히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부분이다. 역사서를 쓴다는 것 자체가 유가의 영향이 강력하고, 집필진이 유가계열이니 당연히 정치에서 배제되었을 유학자들이 왜곡 시켰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유가이기에 사실을 과장할 수도 있지만, 아예 없는 사실을 집어 넣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야되지 않을까나?

그리고 유가들은 기본적으로 호국사상이고, 위에서도 말했지만 "중국" 이외의 다른 민족이나 문명은 다 야만인으로 보고, 본인이 알기로 태조(왕건)의 정치적 배경은 불교세력과 호족무장세력이고, 유가들은 그리 배려를 받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천추태후가 태조의 정신을 이어받았다라....음....머.

4. 그냥 "천추태후"로만 해서 나온 사료중 일부...
千秋太后皇甫氏,逼大良院君詢,爲僧,初洞州人金致陽,太后外族,性姦巧,嘗詐祝髮,出入千秋宮,頗有醜聲,成宗,杖配遠地,成宗,薨,召授閤門通事舍人,不數年, 貴寵無比,百官予奪,皆出其手,親黨布列,勢傾中外,起第至三百餘間,臺榭園池,窮極美麗,日夜與太后遊戲,無所畏忌,洞州立祠,額曰星宿寺,又於宮城西 北隅,立十王寺,其圖像,奇怪難狀,潛懷異志,以求陰助,凡器皿,皆銘其意,其鍾銘曰,當生東國之時,同修善種,後往西方之日,共證菩提,王,常欲黜之, 恐傷母志,不敢也,至是,太后生子,是私致陽所生也,與致陽,謀爲王後,忌大良君,强令出家,大良君,時年十二,後,寓居三角山神穴寺,太后潛遣人,謀害 者屢矣,寺有老僧,穴地室中,匿之,而上置臥榻,以防不測。

-- 高麗史節要 卷之 穆宗宣讓大王

천추태후(千秋太后) 황보씨(皇甫氏)가 대량군(大良君) 순(詢)을 핍박하여 중이 되게 하였다. 예전에 동주(洞州 황해 서흥군(瑞興郡)) 사람 김치양(金致陽)은 태후의 외족(外族)으로 성품이 간교하였다. 일찍이 머리를 깎고 중이라 하면서 남들을 속이고 천추태후의 궁에 드나들어 자못 추잡한 소문이 있었으므로 성종이 장형(杖刑)을 내리고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냈다. 그런데 성종이 훙하자 왕이 그를 불러다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에 임명하여, 몇 년 되기도 전에 귀하고 총애를 받는 것이 비할 데가 없었다. 백관에게 벼슬을 주고 빼앗는 일이 모두 그 손에서 결정되었으며, 친당(親黨)이 조정에 늘어서서 세력이 조야에 떨쳤다. 집을 지었는데 3백여 칸이나 되며, 누대와 정자ㆍ동산과 못이 극도로 화려하였다. 밤낮으로 태후와 놀고 희롱하여 아무런 두려움이나 꺼림이 없었다. 동주(洞州)에 절[祠]을 세워 이름을 성수사(星宿寺)라 하고, 또 궁성의 서북 모퉁이에 시왕사(十王寺)를 세웠는데, 그 그림의 형상이 기괴하여 형용하기 어려웠다. 몰래 딴 뜻을 품고 음조(陰助)를 구하여 모든 기명(器皿)에 그 뜻을 새겼다. 그 종(鐘)에 새기기를, “동국(東國)에 태어난 당세에는 태후와 같이 선종(善種)을 닦고, 서방(西方 극락세계)으로 가는 뒷날에는 태후와 함께 보리(菩提)를 증(證) 하리라." 하였다. 왕이 항상 이를 내쫓고자 하였으나,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 감히 내쫓지 못하였다. 이때에 와서 태후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치양과 관계하여 낳은 아이였다. 태후는 치양과 모의하여 왕의 후사로 삼으려 하였으나, 대량군(大良君)을 꺼려서 강제로 그를 출가하게 하니 대량군이 이때 나이 12세였다. 후에 삼각산(三角山) 신혈사(神穴寺)에 거처하였는데, 태후가 몰래 사람을 보내어 해치려고 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절의 늙은 중이 방 가운데를 파서 지하실을 만들어 대량군을 숨기고는 그 위에 침상을 놓아 예측할 수 없는 변고를 막았다.

○辛未,王,疾篤,召太子欽,屬以後事,俄而薨于重光殿,上諡元文,廟號顯宗,太子,卽位,居翼室,朝夕哀臨。
史臣崔冲,曰,傳稱天將興之,誰能廢之,千秋太后,自縱淫荒,潛圖傾奪,穆宗,知百姓之屬望,排千秋之惡黨,遠馳使命,以授神器,俾固本支,所謂天之將興,誰能廢之者,詎不信歟,然,以姨母貽孼,戎臣構逆,强隣伺釁,京闕俱燼,乘輿播遷,艱否極矣,反正之後,和戎結好,偃革修文,薄賦輕徭,登崇俊良,修政公平,內外底寧,農桑屢稔,可謂中興之主矣。
李齊賢曰,崔冲之言,世所謂命也,勾踐,嘗膽,雪恥會稽,小白,忘莒,遺患於齊,人君,恃有天命,縱欲敗度,雖得之,必失之,是故,君子,理思亂,安思危,愼終如始,以對天休,如顯宗,所謂吾無間然者乎。
甲戌,王,率群臣成服,百姓,玄冠素服。

-- 高麗史節要 卷之三  顯宗元文大王

신미일에 왕의 병환이 위독하자 태자 흠(欽)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고 조금 후에 중광전(重光殿)에서 훙하였다. 시호를 원문(元文)이라 올리고 묘호를 현종(顯宗)이라 하였다. 태자가 즉위하여 익실(翼室)에 거처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슬피 울었다.
사신(史臣) 최충(崔冲)이 말하기를, “옛글에 일컫기를, '하늘이 장차 일으키려 하면 누가 능히 그를 폐 하리오.' 라고 하였다. 천추태후(千秋太后) 가 음란하고 방종하여 몰래 나라를 위태롭게 하여 왕위를 빼앗으려 하였는데, 목종께서 백성들이 현종의 촉망함을 알아 천추태후의 악당(惡黨)을 배제하고 멀리 사자를 빨리 보내 맞아와 왕위를 전하여 왕실이 튼튼하도록 하였으니, 이른바 '하늘이 장차 일으키려 하면 누가 능히 그를 폐하리오.' 하는 말을 어찌 믿지 아니하랴. 그러나 이모(姨母 천추태후)가 끼친 화근으로 인하여 병권(兵權)을 가진 신하[戎臣 강조(康兆)를 가리킴]가 반역을 일으키고, 강한 인국(隣國 거란)이 틈을 엿보아 침범하여 서울의 궁궐이 모두 잿더미가 되어 임금이 파천하니 불행이 극도에 달하였다. 반정(反正)한 뒤에는 오랑캐와 화호를 맺고, 전쟁을 멈추고 문덕(文德)을 닦으며, 부세를 가볍게 하고 요역을 가볍게 하며, 준수한 인재를 등용하고 정사를 공평하게 하여 서울과 지방이 평안하고 농업과 잠업이 자주 풍년이 들었으니 나라를 중흥시킨 왕이라 이를 수 있다." 하였다.
이제현이 말하기를, “최중의 말은 세상에서 이른바 천명(天命)이다. 구천(句踐)은 쓸개를 씹어 회계산(會稽山)의 치욕을 씻었고,소백(小白)은 거(莒)의 고난(苦難)을 잊었기 때문에 화환(禍患)을 제(齊) 나라에 남기었다. 왕이 천명만 믿고 욕심을 방종히 부려 법도를 파괴하면 비록 나라를 얻었을지라도 반드시 잃고 마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군자는 세상이 다스려질 때에 어지러워질까 생각하고 편안할 때에 위태로워질까 생각하여, 끝을 신중히 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여 천명에 보답하니, 현종과 같은 이는 공자가 이른바 '나는 그에게 불만이 없다.'는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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