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은 "사나이 대장부의 한 마디 말은 천금보다 무겁고 가치가 있다[각주:1]"는 말이다. 그런데 남아일언중첨금의 유래는 무엇일까? 


어제 성균관대학교 포럼에 참가해서 우연히 남아일언중천금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정작 한국쪽에서는 유래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없었고, 중국에서는 한국의 속담정도로 지정되고 있었다. 궁금한건 못 참는다. 찾는다-_-++





남아일언중천금의 의미적인 차원에서는 논어에 나오는 군자일언 사마난추(君子一言, 驷马难追)인 "군자가 한 번 말하면 네 필의 말이라도 따라잡기 어렵다"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각주:2].그러나 해당 어구에서는 "네 필의 말이라도 따라잡기 어렵다"라고 표현하고 있어서 "천금보다 무겁고 가치가 있다"와는 표현 방식이 다르다.


이에 중국기본고적고(中國基本古籍庫, [디지털인문학/DH_DB] - [DH리뷰] 중국기본고적고(中国基本古籍库))를 통해서 검색을 해본 결과 자치통감(資治通鑒)에 "장부일언허인, 천금불이(丈夫一言許人, 千金不易)"의 구절이 보인다. "사나이가 한번 약속을 하면 천금을 주어도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아마 자치통감에 나오는 위의 구절이 한국에 전파되면서 없어도 되는 "약속을 하다"가 빠지고, "천금에도 변화하지 않는다"가 "천금만큼 무겁다"로 변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실제 1905년의 매일신보(每日申報)에는 "一言이 重千金"이라는 표현이 나오며[각주:3], 1950년의 자유신문에서는 "丈夫一言重千金"이라고 하는 현재와 매우 유사한 표현이 출현한다[각주:4]. 대장부를 의미하는 "丈夫"가 현대로 오면서 "남아"로 변화하지 않았나 싶다.



참고로 위의 사항은 어렵게 검색을 한 것이 아니라, 중국쪽의 내용은 중국기본고적고(유료)을 이용하여 검색하였고, 한국쪽의 내용은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http://www.koreanhistory.or.kr/)을 통한 검색으로 알게 된 것이다. 추가적으로 세종말뭉치의 역사말뭉치 부분도 한 번 찾아보는 것이 좋겠지만, 귀찮으니까 패스하겠다.


이처럼 간단한 검색으로 많은 내용을 알 수 있다. 문제는 "男兒一言重千金"로 단순히 검색하는 것이 아니라, 예상되는 변형을 다양하게 시도해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어느 데이터베이스에서 해당 내용이 검색 가능한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능력을 배양하기 싫으면....그냥 무식하게 수백만권의 고전적을 뒤지면 된다. -0-!!!



  1. 다음 한국어 사전 : http://dic.daum.net/word/view.do?wordid=kkw000047087 [본문으로]
  2. 《论语·颜渊》君子一言, 驷马难追 [본문으로]
  3. http://www.mediagaon.or.kr/jsp/sch/mnews/gonews/SearchGoNewsCondition.jsp?id=MIN19210211u00_ITEM_003 [본문으로]
  4.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npfp_1950_03_25_v0002_0510 [본문으로]

모두가 최대한 객관적으로 역사를 바라보아야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이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다고 열변을 토한다. 그런데 한국은 역사왜곡을 하지 않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역사교과서를 통해서 광개토대왕의 위대한 업적으로 고구려의 영토를 확대한 것을 강조하고 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영토 확장"이며, 위대한 업적이다. 그런데 반대로 그 영토확장에 연류되어서 고구려 군대에게 자신의 고향을 뺏긴 사람들에게도 위대한 업적이며 영토확장인가?! 자신의 고향을 뻇긴 사람들에게 광개토대왕은 침략자일 뿐이다. 


너무나 먼 과거의 일인가? 그렇다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행동은 어떠한가? 대한민국의 헌법은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고 하며 침략전쟁을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인들에게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침략 전쟁이었으며, 한국은 그 침략전쟁을 적극적으로 도운 또 다른 침략자이다.


일제가 한반도를 강제로 병합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침략행위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리고 일제의 전통을 이은 일본이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열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반대로 우리는 베트남에 얼마나 사과를 했는가? 우리는 자신의 역사를 얼마나 객관적으로 보고 있는가?


우리 입장에서의 고구려 영토 확장은 타인에게는 침략일 수 있다.

우리 입장에서의 베트남 전쟁 참전은 타인에게는 침략자가 늘어난 것일 수도 있다.


일본의 일제 침략 행위를 긍정하는 발언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은 헌법에도 명문화시켰듯이 침략전쟁을 부정하고 있으며, 대다수의 한국인은 침략 전쟁을 원하지도 않고 실행하지도 않을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일본의 일제 침략에 대해서 비판하려면, 우리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해야하지 않겠는가?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인가?


조선은 왜 한국의 역사일까요? 고구려는 왜 한국의 역사일까요? 당연히 한국의 역사인데 "왜?"라고 묻느냐고 화를 내시는 몇몇 분들이 보이는 군요. 그런데 화내시는 분들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현대 역사학의 입장에서 조선과 고구려의 역사가 한국의 역사인 이유는 엄청나게 간단합니다. 현재 한국이 조선과 고구려의 역사를 한국사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가장 큰 명문으로 문화적 공통성을 가장 크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경우에는 현재 한반도를 통치했다는 지리적인 배경적 명분도 강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명분일뿐입니다.


왜냐하면 현재역사학에서 기초적인 논리와 근거가 보장되는 한 개개인의 "역사관"을 존중해주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애매하다고요? 극단적인 예시를 최근 일본의 아베총리가 해주었습니다. "침략의 정의는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라고 하여서 한국인 뿐만이 아니라 중국인을 비롯한 관련 국가 국민들의 분노게이지를 높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정치를 떠나서 순수하게 학문적인 입장에서는 아베총리의 발언도 그 나름의 의의가 있습니다.


그나마 가장 객관적인 역사는 "A국이 B국을 공격하였다."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공격"이라는 단어 대신에 침략, 테러, 포위, 협박, 제압, 압박을 사용할 경우의 각각의 의미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런데 이런 단어는 어떤 기준으로 선택해야될까요? 학술적인 맹렬한 토론과 증거제시보다는 개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에 보다 의지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공격"을 한 것이지 "침략"을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저희가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야기하면서 "위대한 영토 확장"을 이야기하지만, 그 시대의 고구려 주변국들의 입장에서는 침략을 당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입니다[각주:1].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역사의 소유와 계승은 인문학의 한계상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판단으로 정해집니다. 그리고 그 개개인이 모여서 만든 단체, 사회, 국가의 판단으로 정해집니다. 그렇기에 고구려나 한국의 역사를 현재 한국에 모여살고 있는 사람들이 한국의 역사라고 한다면 한국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현재 중국에 모여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라고 생각한다면 역시나 중국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과 중국의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을 존중해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내 생각이 존중 받으려면 상대방의 생각도 존중해주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역사를 뻇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조금만 바꾸어 보시면 훨씬 더 넓은 역사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모든 인류의 역사는 나의 역사이다."라고 생각해보시면 어떻습니까? 당신은 이제 모든 인류의 역사를 소유하고 계십니다.



  1. 본 내용은 어디까지나 역사철학의 입장에서의 서술입니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에 대해서는 일본학계 내부에서도 비판이 강합니다. 다만 정치-외교적인 사항으로 인하여 단어가 변하는 것 뿐입니다. 후... [본문으로]

한국의 남자들이 점차 약해지고 있다. 과거에는 거친남자들이 인기가 있었고, 지금도 "짐승돌"이라는 이름으로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지만, 현재 여자들이 원하는 남자는 어디까지나 "선비"나 "신사"와 같이 부드러운 남자이다. 그리고 남자들도 여자들의 취향대로 날이 갈 수록 부드러워지고 있다. "마눌님"이나 "여친님"이라며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해탈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이런 시대상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한반도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강한 여성들의 역사이다. 우리는 시대를 반영하는 문학작품 속에서 이러한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온달전을 생각해보자. 온달전은 바보인 온달이 엄친딸(공주+미모+능력)인 평강공주를 만나서 성공을 하게 된다. 만약 평강공주가 없었으면 온달은 그냥 동네바보형일 뿐이다.

고려시대의 단군신화를 살펴보자[각주:1]. 단군신화는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단군의 이야기보다는 단군의 어머니인 웅녀가 이야기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웅녀는 100일동안 쑥과 마늘만을 먹는 노력을 바탕으로 여자가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사람이 된 이후에는 댕대 최고의 지도자인 환웅에게 직접 프로포즈까지 하는 인물이다. 심지가 굳고 적극적인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기는 여성을 천시하는 유교가 지배했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작품에서는 강한여성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장님인 아버지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심청이나 비천한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높은 집안의 남자를 사로잡는 춘향이는 유교문화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는 강한여성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서양의 문학작품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한반도의 강한 여성상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우리도 익히 아는 서양의 작품에서 여성은 모두 약하고 소극적인 인물들이다. 신데렐라는 왕자님의 은총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존재이며, 백설공주는 난쟁이들에게 빌붙어 살다가 나중에는 왕자님에게 구출이 되는 하는 것 없는 보잘 것 없는 여성상이다. 그에 비하여 한반도의 여성들은 얼마나 적극적이고 강한가?!



그래서 결론이 머냐고? 한반도의 여성은 강하다. 괜히 개기다가 국물도 없다. 그냥 만사 포기하고 중국남자처럼 해탈하자. (중국의 새로운 삼종사덕(三從四德) - 약한 남자) 응?!




+....반쯤 농담으로 쓴 글이다....근데 농담이 농담이 아닌거 같다..-_


  1. 단군신화는 신라말기 고려초기에 생겨난 설화이다 [본문으로]
이글루스쪽에서는 최근 다시 한번 "환빠대전"이 발생한듯 하다. 솔직히 과거에는 이 블로그에서도 심심풀이 땅콩으로 소위 "환빠"들의 헛소리를 반박하거나 특정 사건에 대한 역사학도로서의 사견을 밝힌 적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최대한 무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1) 역사학도로서의 부담감.
차라리 본인이 역사전공이 아니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많은 관련 글을 써내려 갔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본인은 공개적으로 역사전공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기에 어떤 영역에 대해서 일반인보다 비교적 많이 아는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하기 위해서는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보지도 않고, 볼 필요도 없는 증거자료들을 레포트 작성하듯이 일일이 찾아서 나열해야한다. 물론 관련 논문이나 저작을 비롯한 학계의 흐름도 나열해주어야 한다.

만약 본인의 전공분야라면 비교적 쉽게?! 쓰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최소 수십편에 이르는 관련 논문과 저작을 읽어야 된다는 의무감이 생겨난다. 부담감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그럼 본인의 전공만 쓰면 되지 않냐고? 그쪽이야 말로 민감함의 극치를 달리는 지점이기에 부담스럽다. 본인의 전공은 북방민족사이며, 한중간의 민감한 사안인 고구려나 발해도 다룬다. 본인은 지도교수님의 생각에 동의하며 "역사는 어디까지나 역사로 보며, 고구려사는 어디까지나 고구려인들의 역사"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기에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는 짱깨로 매도되기 쉽상이다. 이런 부담감에 석사졸업논문도 중국인들에게도 생소한 소그드의 한반도 유입이라는 주제를 채택했다.


2) 환빠들의 사료적 문제.
흔히 "환빠"라고 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사료"이다. 어떤 역사관을 가지고 있더라도, 역사 연구에서 사료는 기본이다. 그 뼈대이다. 그 정수이다. 그런데 "환빠"라는 사람들은 이 사료부터가 엉터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료 반박은 어렵다고 그보다 어려운 것이 없고, 쉽다면 쉬운 부분이다. 물론 대부분의 환빠들의 헛소리는 간단하게 반박할 수 있는 수준이다. 왜냐하면 기본적인 고문 소양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동북아 고대사를 연구하면서 고문을 모른다는 것은 마치 더하기와 빼기를 못하면서 수학을 하겠다는 것과 그다지 다를바가 없다. 최근에는 수 많은 현대 한국어 번역판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접근성을 높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인의 역사적 소양을 높이기 위한 도구일 뿐이고, 연구자가 고문의 원문을 바탕으로 연구를 하지 않는 다는 것은 "나는 병신이다"라고 소리치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한자가 나오고, 해석이 나오면 그냥 그것이 맞다고 생각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환빠들의 근본적인 문제인 사료를 비판을 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환빠들이 "식민사관에 의해서 해석한 결과"라고 하면 그것을 믿어 버린다.  식민사관조차도 그나마 사료라는 기초라도 있었다. 환빠들은 고문을 아예 언급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소설을 전개하거나, 고문을 언급하더라도 원래 고문을 마음대로 변조한다.

원문 : "갑은 을나라를 침략하였다"
환빠식1 : "갑은 을나라에게 침공당하였다"
환빠식2 : "갑은 을나라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대체 어떤 "학문"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것을 허용하느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백날 설명해도 기본적으로 고문을 볼 수 없는 일반인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이는 결코 일반인들의 잘못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일반인들의 무지를 이용해 먹는 환빠들의 문제이다.


3) 환빠들의 논리적 문제.
환빠의 논리는 언제나 결국 "한국 만세!"다. 그리고 이를 비판하는 모든 이들은 "식민사학에 세뇌당한 병신들"이다. 처음에는 어이없어서 반박을 해주지만, 솔직히 이제는 언급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이다.

과거에는 분명히 식민사학이라는 것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과거일 뿐이다. 오히려 박정희 독재시절을 정점으로 독재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고자 "한민족"을 과도하게 부풀리고 선전하였다. 그 결과 어떠한 역사학적 증거도 없는 고조선의 세력범위가 당당하게 중고등학교 "국사"강의에 사용되고 있다. 아니 역사학적으로 엄격하게 따져서 "국사"라면 "대한민국사"를 공부해야지 그 이전을 공부하는 것은 합당하지도 않다.

역사학의 방법론은 이제는 세계 공통이다. 기본적으로 사료를 보고, 사료를 비판하고, 사료를 탐구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런 것도 없이 마냥 무조건 "식민사관"이라고 하면 어쩌란 말인가?! 하다 못해서 본인 스스로 "탈민족주의자" 혹은 "인간사관"이라고 몇 번을 말해도 "식민사관"이라고 근거 없이 매도하니 한숨 밖에 나오지 않는다.



솔직히 간략하게 말하면, 과거에는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해주고 싶다는 역사학도로서의 열정과 의무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냥 "니 맘대로 사세요~"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에휴...싸워서 머하랴. 사실 극소수를 제외하면 박정희식 우민정치의 희생량인걸.....


이런 글을 쓰는 것 자체가...어떻게 보면 아직 정열이 살아 있다는 것이겠지.......궁금하신 것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설명해드립니다. 환빠에 대한 비꼼이 좀 더 많아 지기는 하겠지만 말이죠.


2010년 11월 25일, 서안의 시엔양咸阳국제공항의 확장 공사장의 한 고묘에서 2400년전의 사골국이 발견되어서 주목을 끌고 있다.



서안은 여러 왕조의 수도였기에 한국의 경주처럼 땅을 파기만 하면 유물이 쏟아져 나온다는 지역이다. 그리고 이번에 발굴된 전국시대 진秦나라 무덤 역시 높이 5미터, 넓이 3미터로 진나라 왕급 무덤에서 300m정도 떨어진 부장묘급으로 청동정鼎과 청동종锺 및 청동받침용 칠기만이 남아 있는 그저 그런 무덤이었다[각주:1].

그런데 발견된 청동정 안에서 500ml정도의 액체를 발견하여 분석한 결과 닭과 유사한 동물의 뼈가 10개 이상 발견되었다. 문헌에 따르면 정은 고기를 끓이기 위한 기구였기에 발굴팀은 해당 액체를 우선 사골탕으로 판단하고 구체적으로 어떤 동물의 사골탕인지 분석을 하고 있다.  과거에 뼈가 들어가 있는 청동기가 발견된 적은 있었지만 이처럼 탕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중국고고학계 최초의 일이다.발굴팀은 2400여년전의 사골탕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것은 기후적으로 건조하며 묘가 완전히 밀봉되었으며 아직 도굴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기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상한 것은 건조해서 말라붙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오히려  액체상태로 보존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물론 밀봉된 상태에서 완전건조지역이 아닌 적당한 습도가 지속적으로 유지된다면......이론적으로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긁적....그리고 일단 사골탕이라고 번역하긴 했지만...차라리 "삼계탕"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1. 사실 이 정도가 그저그런이라고 말하는 자체가 무서운 것이지만-_ [본문으로]
신석시 시대 요하일대에는 찬란한 문화가 꽃을 피웠다. 그리고 지금 중국과 한국에서는 각자 요하문명이 자신의 것이라고 하면서 인터넷에서 설전을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중국의 주장만 있고, 한국에는 한국의 주장만 있다. 대중에 정보를 전달해야되는 신문에서는 민족감점만 일으키고 논리와 증거에 대해서는 제대로 제시하지 않고 있다.

1) 요하문명(홍산문화)은 무엇인가?
1980년대 랴오닝(遼寧)성 요하 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앞선 시대의 문명이 존재했었다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요하일대에는 기원전 7천년에 이미 독자적인 신석기 문화가 존재하였고, 기원전 3500~3000년쯤(홍산문화 후기)에는 이미 초기 국가형태가 갖추어졌다고 추정되고 있다.



2) 중국학계의 의견은?
중국학계는 발굴 초기에는 홍산문화의 주도세력이 동이족이나 예-맥족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발굴 후반기로 갈수록 중화민족의 시조라는 황제의 토템과 발굴유물이 일치한다고 주장하면서 황제와 연관을 시키려는 학자(레이광젼 雷广臻)들이 나타났다. 특히 곡옥에 대해서 용으로서의 상징성을 이야기하면서 중화의 시초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석은 아직 논쟁이 진행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황제는 전설상의 인물일 뿐이며, 중국의 형성에서 결코 황하문명뿐만이 아니라 여러 지역의 다양한 문화들이 서로 융합하여서 만들어졌다는 의견이 강한 만큼 해당 의견은 제대로 된 학설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겠다[각주:1].

중화제일용이라고 말하는 곡옥. 근데 용이려나...



3) 한국학계의 의견은?
한국학계에서는 요하문명에 대해서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소수의 곡옥이나 관련 유물과의 유사성을 근거로 홍산문화가 한반도문화의 원류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선문대 이형구 교수(고고학)는 중국의 ‘요하문명론’에 대응해 ‘발해문명론’까지 주창하고 있다.

그러나 곡옥이나 대응 유물은 매우 소수이며, 요하부터 한반도까지 이어지는 연결점이 없어서 확실한 증거로 사용되지는 못한다. 하다 못해서 동이족과 고조선의 연결지점은 고사하고, 고조선이 어느 정도의 정치체계로 발전했는지에 대해서도 아직 논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요하기원설은 근거가 매우 약한 설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각주:2].

무엇으로 보이는가? 용? 돼지?



4) 요하문명은 한국과 중국 모두의 것이다.
요하문명은 분명 신석기시대에 요하지역에서 발전했던 문명으로 보인다. 그럼 그렇게 발전한 문명이 현재의 중국대륙과 한반도 모두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은 당연하다고 본다. 오히려 "요하문명이 중국대륙에만 영향을 주었고, 중국대륙만이 그 영향을 이어 받았다!"라고 하거나 "요하문명은 한반도에만 영향을 주었고, 한반도만이 그 영향을 이어 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본인에게는 어처구니 없는 소리로 느껴진다. 마치 프랑스가 "로마의 영향은 프랑스만 받았다!!" 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요하문명이 한반도와 중국대륙 모두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렇기에 요하는 현재 한국과 중국 역사 모두의 기원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대체 무엇을 뺏고 말고 한단 말인가[각주:3]?

  1. 중국사학계는 다민족주의로 간다고 말을 하면서도 허구의 인물인 황제까지 끌어들여서 무리한 한족중심설로 가려는 일부 세력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행동은 스스로가 기본적인 논조라고 말하고 있는 다민족주의 정신에도 어긋나는 행위일뿐만이 아니라, 역사학과 고고학의 방법론에서도 어긋나는 행동이다. 하상주시대에도 다양한 "집단"들이 혼재하며 살아갔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계속 들어나고 있는 만큼 허구의 황제의 토템까지 도입을 하는 무리수보다는 황제의 토템 자체가 다양한 집단들의 토템이 융합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그러한 다양한 집단 중에 요하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본문으로]
  2. 한국사학계의 웃긴 점은 우리에게 영향을 받은 것은 한국에 융화되었고, 한국이 영향을 준 것에서는 찬란히 남아 있다고 이야기한다. 기마문명이니 요하문명이니 하면서 한반도가 영향을 받았고 우리안에 융화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반대로 일본에 전해진 것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융합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무시하며, 한국의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남들은 역사조작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정작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우리 모두가 고조선의 유물이 비파형동검이라고 교과서에서 배웠다. 그런데 이에 대한 증거는 층위나 지리적 위치가 "그.럴.것.같.다."라는 추측밖에는 없다. 그러면서 당당하게 교과서에 명시해놓았다. 이런 것이 역사조작이 아니고 무엇인가? [본문으로]
  3. 같은 논리로 동이나 고구려도 누구만의 것이 아니다. 동이자체가 통합된 집단이 아니었다는 것은 이젠 너무나 명확해 보이며, 동이의 범위를 보면 한반도와 중국대륙 모두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동이는 무조건 그냥 한국인의 조상이고, 절대 중국인의 조상이 아니다." 이건 대체 먼 논리인가? [본문으로]
"한민족韓民族" 어린 시절부터 너무나 많이 듣던 이야기이다. 그런데 "한민족"은 대체 언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 것일까? 흔히 알고 있듯이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부터 지금까지 계속 내려 온 말일까? 만사 귀찮은 분들을 위해서 결론만 이야기 하면 : 한민족이라는 말은 1948년 대한민국 이후에나 쓰이는 말이며, 그 실질적인 유래도 1889년 대한제국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80이 넘은 어르신들은 스스로를 한민족이 아닌 "조선인"으로 부르는 것을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한민족"이라고 부르는 것을 익숙하게 생각한다. 또한 한반도라고 부르는 것을 익숙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한국을 제외한 중국과 일본 그리고 북한은 모두가 조선반도라고 부르고 있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


한민족이라는 말은 보통 한인韩人으로 부른다. 한국의 교과서에서 한민족의 시작을 보통 고조선으로 놓고 있다. 그런데 고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이름은 어디까지나 조선朝鮮이었지 결코 한韩은 아니었다. 한은 보통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에서 나왔다고 이야기 되어진다. 문제는 그 이후에 한반도에 성립된 국가들이나 공동체에 대해서 스스로 어떻게 불렀고, 외부에서는 어떻게 불렀느냐이다.

그런데 근대에 이를 때까지 한韩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경우 조선朝鮮으로 통칭되었다. 통일신라나 고려사의 사료에서는 한韩이라는 용어가 사실상 등장하지 않으며, 중국쪽 사료에서도 오직 삼한인(三韩人)이라는 말만이 몇 군데서 인용이 될 뿐이다[각주:1]. 그런데 삼한인이라는 용어는 결코 한반도만을 지칭하지 않았으며, 한반도뿐만이 아니라 현재의 중국동북부를 통괄하여 부르는 광범위한 용어였다. 현재의 한韩과 같은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서유럽과 프랑스를 완전히 동일시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실수이다.

그런데 대한제국(大韓帝國, The Greater Korean Empire)이 1897년 성립은 한 이후에 중국쪽 사료에서 재미있는 변화가 보인다. 광서光緒대의 사료에는 대한제국의 사람들을 한인韓人 혹은 한국인민韓國人民으로 부르기 시작한다[각주:2]. 예를 들어서 안중근 의사의 이토히로부미을 죽인 일에 대해서 기록을 하면서 한인안중근韓人安重根 이라고 묘사를 한다[각주:3].

이는 중국의 청나라가 한국의 대한제국을 승인하는 의미에서 한국인민 혹은 한국인으로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중화민국와 관계가 깊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대한제국을 이어받았다고 하였기에 계속 적으로 한韓을 계속 사용했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대한제국을 멸망시켰기에 한韓을 인정할 필요가 없었고 계속 조선朝鮮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내부적으로 대한제국은 안전되고 튼튼한 정부도 아니었고 통치 기간도 짦았기에 정작 일반 민중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고 습관적으로 "조선朝鮮"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45년 일본제국이 패망을 하고 한반도에 통일된 정부가 세워져야 했지만 우리가 알고 있다 싶이 남북한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북한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조선朝鮮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리고 남한은 한韓의 용어를 사용하여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는 명분과 조선朝鮮는 차별화 되는 용어를 사용하는 정치성을 확보하게 된다[각주:4].

이처럼 한韓이라는 말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실질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대한제국부터일 뿐이다. 또한 현재 한국을 제외한 주변이 나라와 동포들은 조선朝鮮이 더욱 익숙한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한韓이라는 말을 계속 유지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생각을 한다면 앞으로 한민족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 과정에서 어떠한 용어로 스스로를 지칭할 것인가? 또한 공동체의 명분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외부에 설득력이 있는 용어는 무엇일까?  한민족韓民族보다는 조선족朝鮮族 혹은 조선사람朝鮮人이다. 민족주의가 아닌 세계주의의 입장에서 생각을 한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하나의 용어로 통일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먼 미래를 생각한다면 차라리 지금부터라도 한민족韓民族보다는 조선사람朝鮮人이나 조선족朝鮮族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물론 탈민족주의인 본인의 입장에서야 한민족이니 조선족이니 하는 말자체를 없애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말이다.


* 해당 글은 "동쪽의 아침햇살"님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 분의 생각을 제 방식대로 소화한 것입니다. 조금 더 기다리시면 저처럼 최소한의 자료로만 쓴 것이 아닌 빵빵한 사료를 바탕으로 한 논문을 보실 수 있으실듯 합니다.

  1. 송대《宋高僧傳》卷三十:"釋元表本三韓人也"; 원대《存復齋文集》卷五:"三韓人金生"; 명대 《瓊臺會稿》卷一:" [본문으로]
  2. 《東華續録(光緒朝)》光緒一百五十五:"中國人民在韓國者如有犯法之事,中國領事官按照中國律例審辦.韓國人民在中國者如有犯法之事,韓國領事官按照韓國律例審辦.中國人民性命財産在韓國者被韓國民人損傷,韓國官按照中國律例審辦.韓國民人性命財産在中國者被中國人民損傷,中國官按照中國律例審辦."; 《清史稿》志一百四十邦交六:“中國准韓國人民在圖們江北之墾地居住;四圖們江墾地之韓人,服從中國法權,歸中國地方官管轄及裁判,中國官吏於此等韓人與中國人一律待遇,所有納稅及其他一切行政上處分,亦同於中國人。五、韓人訴訟事件,由中國官吏按中國法律秉公辦理,日本領事或委員可任便到堂聽審,惟人命重案,則須先行知日領事到堂,如中國有不按法律判斷之處,日領事可請覆審。六、圖們江雜居區域內韓人之財產,中國地方官視同中國人民財產,一律保護。” [본문으로]
  3. 《清史稿》本紀二十五宣統皇帝本紀:“是月韓人安重根戕日本前朝鮮統監伊藤博文於哈爾濱。” [본문으로]
  4. 한민족이라는 말은 이처럼 정치적이다. 물론 아예 연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글쎄... [본문으로]
최근 민홍규 전 4대 국새제작단장의 600년 비전이 날조로 밝혀지면서 국새에 대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혹자는 한국의 무형문화재관리에 대해서 비판을 하고 있고, 혹자는 국새의 필요성 자체에 대해서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최재천의 시사큐비즘 :: 국새는 왜 필요할까) 그에 대해서 본인은 조금은 다른 생각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과 같은 어새를 국새의 기본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금으로 만든 어새는 극소수이다.


어새는 옥이 기본이다.


국새의 원형이 되는 황제가 사용하는 어새(御璽 혹은 보새寶璽)의 대부분은 결코 금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절대 다수의 어새는 옥玉으로 만들어졌다. 진시황의 진秦나라 이후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다는 어새의 이름 자체가 전국옥새(傳國玉璽[각주:1])로서 옥으로 만들어진 어새였고, 현재 중국고궁박물관에 보관중인 청대의 25개의 보새중에서 23개가 옥새이고, 단 한개만이 금으로 만든 보새라는 점[각주:2]을 인지하면 옥새가 보새의 기본임은 너무나 명확하다. 사실 어새나 보새를 검색해보면 "옥새의 높임말"이라고 나온다. 대체 무슨 말이 더 필요가 있는가?

왜 대부분의 보새는 옥으로 만들었을까? 그 대답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나와 있다. ‘옥의 아름다움은 다섯 가지 德(덕)을 갖추었다. 윤기가 흘러 온화한 것은 仁(인)의 덕이요. 무늬가 밖으로 흘러나와 속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義 (의)의 덕이요. 소리가 낭랑하여 멀리서도 들을 수 있는 것은 智(지)의 덕이요. 끊길지언정 굽혀지지 않는 것은 勇(용)의 덕이요. 날카로우면서도 남을 해치지 않는 것은 潔 (결)의 덕이다.[각주:3]” 설문해자뿐만이 아니라 수 없이 발견되는 다양한 옥으로 만든 고고학유물들은 전국시대 이전부터 얼마나 오래동안 옥이 사랑받아왔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 왜 국새를 금으로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했는지 본인은 도통 알 수가 없다. 조선시대에도 본인이 기억하기로 기본은 어디까지나 옥새였고, 고종황제의 보새도 어디까지나 은을 기본으로 한 금도금이었는데 말이다. 금으로 하면 삐까뻔쩍 있어 보인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을까? 전통만 생각하면 은으로 만들었어야 하는데?

옥새야 말로 국새의 기본이다.



어차피 현대기술은 이미 과거의 기술을 넘어섰다.

우리는 흔히 "현대 기술로는 재현해 낼 수 없는 고려 청자의 빛깔"이라는 소리를 언론을 통해서 자주 듣는다. 그러나 사실 현대의 기술은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의 빛깔을 충분히 구현해낼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학자나 관련인사들도 이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전통기술을 이어받고 있는 사람들의 밥그릇을 건드린다는 현실적인 문제부터 전통기술을 보호해야된다는 추상적인 문제들이 엮여 있기 때문이다[각주:4].

그러나 국새의 경우 이번 사태로 인하여 전통기술이 사실상 없어졌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최소한 금으로 만드는 어새에 대한 전통기술은 사실상 단절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의 밥그릇을 걱정하며, 어떤 전통기술을 보호한단 말인가? 차라리 현대기술을 총동원해서 국새를 만드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보인다.

아니면 나무로 만드는 건 어떤가? 단향목檀香木으로도 국새를 만들수도 있다.



다음 국새는 옥으로 만들자.

본인과 같은 보수주의에게[각주:5] 국새를 없애고 싸인으로 대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심정적인 거부감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한국의 대통령령은 아직 국새규정을 두고 있으며, 중요한 임명장에나 외교문서 등에 국새를 사용하게 되어 있고 국새의 사용에 문제 자체는 없지 않았는가? 그러나 깨지거나 전수된 전통기술이 없는 금으로 만든 국새를 계속 고집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행동이다.

그렇기에 국새를 새로 만든다면 전통이라는 의미에 부합하는 옥으로 만든 국새로 만들었으면 한다. 옥 세공 기술은 본인이 알기로 아직 한국에 전통기술 전수자가 있으며, 옥새야 말로 국새의 기본이기 때문이다[각주:6].




바로의 중얼중얼 : 본문의 전개와는 큰 상관없어서 놔두었던 문제를 간단하게 이야기해보렵니다. 국새의 종주국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정작 국새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이 있습니다. 사실 이건 와전된 이야기로서 현재 중국은 국새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단지 전통식으로 글자가 쓰여진 국새가 아니라 중국휘장(国徽)이 새겨진 도장을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완전한 전통식 국새라고 할 수는 없지만, 도장형식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국새를 사용 안한다고 하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또한 타이완도 중화민국시절의 옥으로 만들어진 국새를 계속 사용 중에 있습니다. 실생활에서 한국에 비하여서는 도장의 역할이 비교적 적지만 여전히 중시되고 귀하게 여기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것이 중국휘장~~ (사실 이건 도장형식으로 찍혀 나오는 효과를 보여주기 위함이고, 좀 더 화려하다-_)



흐음..오랜만에 그럭저럭 역사 관련 포스팅이었군요.(으응?;;;) 역시 이런 글은 괜히 이래저래 거의 많은 사람들이 신경도 쓰지 않는 짜잘한 것에 저도 모르게 신경을 쓰다보니 적당히 유머 번역하는 것이 몇 배는 더 속편합니다. 그래도 역사관련으로 궁금한 것은 물어봐주셔요......특히 환빠님들의 주옥같은 황당무계 글들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그 분들의 글들은 저를 즐겁게 해주거든요^^

  1. 전국옥새(傳國玉璽)은 중국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가 화씨지벽(和氏之璧)으로 만든 옥새이다.전국새(傳國璽)라고도 한다. 화씨지벽은 천하의 명옥(名玉)으로, 진나라 시황제가 이것을 손에 넣어 재상인 이사(李斯)로 하여금 수명어천, 기수영창(受命於天, 旣壽永昌:하늘에서 받은 명이여, 그 수명이 길이 번창하리라)'이라는 문구를 전서(篆書)로 새겨 도장을 만들게 하였다.전설에 따르면, 시황제가 배를 타고 동정호(洞庭湖) 어귀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힐 뻔하였다. 시황제가 황급히 옥새를 호수에 던지고는 신령께 빌자 물결이 잠잠해졌다. 8년 뒤 시황제의 사신이 밤에 화음(華陰) 지방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돌연히 어떤 사람이 나타나 사신의 길을 가로막고는 용왕이 돌아가셨기에 돌려준다며 옥새를 놓고 바람같이 사라졌다고 한다.이 옥새는 시황제의 손자인 자영이 함양(咸陽)을 함락시킨 유방(劉邦)에게 바쳤으며, 유방이 중국을 통일한 뒤 한(漢)나라 황제에게 대대로 전해졌다.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이 잠시 이 옥새를 빼앗았으나,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제(光武帝)가 되찾았다.옥새는 후한 말년의 혼란기에 유실되었다가 손견(孫堅)과 원술(元述)을 거쳐 조조(曹操)의 손에 들어갔다. 이후 위진남북조를 거쳐 수(隋)나라와 당(唐)나라, 후량(後梁)과 후당(後唐)까지 전해지다가 후당의 마지막 황제가 분신할 때 사라진 것으로 전한다. 이후 몇 차례 전국옥새를 찾았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모두 진품이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와 같이 전국옥새는 진시황제 이후로 천하를 제패하는 사람이 소유함으로써 황제나 황권(皇權)을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으며, 이를 차지하는 사람이 곧 천하를 차지하는 것으로 여겼다. -- 위키 [본문으로]
  2. 청나라가 돈이 없어서 옥으로 만들었겠는가?! 옥이 더욱 중요하였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물론 더 정확한 통계는 타이완고궁박물관에 소장중인 다른 보새도 합쳐야 겠지만, 안타깝게도 중국대륙에서는 타이완고궁박물관에 접속이 불가능하기에 정확한 수치는 미루어두겠다. 다만 타이완고궁박물관쪽을 합쳐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본문으로]
  3. 石之美。有五德:潤澤以溫,仁之方也;䚡理自外,可以知中,義之方也;其聲舒揚,尃以遠聞,智之方也;不橈而折,勇之方也;銳廉而不技,絜之方也。象三玉之連。丨,其貫也。凡玉之屬皆从玉。 [본문으로]
  4. 못 믿겠으면 주변의 복원쪽이나 고미술전공하는 "친.한."사람에게 진지하게 사적으로 질문을 해보길 바란다. [본문으로]
  5. 제가 보수주의라고 하면 제 주변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담하냐는 반응이긴 합니다. 그러나 전 분명히 보수주의입니다. 오히려 스스로 분명히 보수주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분명히 보수주의적인 생각으로 보수주의적인 행동을 했는데 진보주의로 보는 이넘의 한국사회가 더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본문으로]
  6. 금값이 하늘 높이 솓아오른 지금에 비용적으로 그마나 절약할 수 있다는 것도 이유 중에 하나이다. [본문으로]
중국에서 한국인들이 주원장을 고려인이라고 말한다는 대목을 발견하였다. 본인 처음에는 또 한국에 관련된 루머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실제로 서프라이즈라는 프로그램에서 주원장이 고려인이라는 방송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 주원장 고려인설이 뭔지 한 번 보자. 처음부터 결론을 내자면 "어이없음" 이다.

* 본 내용은 아쉽게도 "조선기문朝鮮紀聞"직접 보지 못하고 쓴 글이다[각주:1].





3월 7일 방송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실체를 놓고 한국과 중국의 학자간의 대립을 다뤘다.

1368년 명나라를 세운 초대황제 주원장은 이민족을 몰아내고 한족 중심의 문화를 세운 인물이다. 그는 미천한 거름뱅이에서 시작해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개인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일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주원장이 고려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역사학자 백린은 '조선기문'에 기록된 설화를 근거로 들었다. '조선기문'에는 명태조 주원장과 이름이 같은 남자가 등장한다. 주원장은 경상도 웅천의 주씨 노부부의 아들로 5살이 되던 해 고승을 따라 절에 들어갔다가 15세에 하산했으며 총명하고 민첩했다고 적혀있다. 또 한국 민간 전설집에는 주원장이 중국으로 건너가 나라를 세웠다는 얘기가 적혀있어 더욱 신빙성을 더했다.

반면 중국학자들은 역사학자 오함이 쓴 주원장의 전기 '주원장전'을 들어 이를 터무니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전기는 주원장이 중국 안휘성에서 태어났고 아버지 또한 중국인으로 적고 있다.

이를 반박하는 학자들은 주원장전은 조선기문에 실린 탄생 설화를 보고 만들었다고 했다. 주원장전의 발행시기는 조선기문이 발행된 뒤다. 두 책을 비교해 볼 때 주원장의 어린시절 매우 가난했다는 점과 주원장이 절로 들어갔다는 것, 그리고 주원장이 걸식하며 돌아다닌 시기가 비슷하다.

또 주원장의 주변에는 유독 고려인이 많았고 주원장의 심복인 주유도 고려인이어서 각별히 신임했다는 주장까지 더해져 주원장이 고려인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었다. 또 다른 학자는 주원장의 아들 영락제의 친모가 고려인일 가능성까지 제기한 상황이다. 아직까지 한국과 중국의 학자들은 이에 대해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논쟁을 벌이고 있다.

출처 :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고려인 논란, 韓中 역사학자 대립 논쟁


1) 대체 어디를 봐서 학자들의 공방이지?
조선기문朝鮮紀聞은 잘해봐야 2차사료이다. 1885년 일본인 鈴木信仁에 의하여 쓰여진 조선의 일들을 모아놓은 책[각주:2]이다. 주원장전朱元璋传는 2차사료조차 어림없다. 중국의 역사학자 吴晗[각주:3]에 의하여 1948년에 쓰여진 책이다. 이건 연구서라로 해야된다.

대체 어떤 "미친" 학자들이 2차사료도 안되는 것을 기본으로 공방을 펼친다는 것인가?[각주:4] 솔직히 이 부분부터가 벌써 어이없음이다. 역사학 관련 사람들은 본인이 위에서 적은 조선기문과 주원장전의 간략내용만 보아도 어이없어 할 것이라고 감히 장담한다.

가장 간단히 말해서 명사明史를 보면 주원장의 아버지가  钟离로 이동했다고 나와있다. 그리고  钟离는 현재 중국 안후이펑양安徽凤阳이다[각주:5]. 그리고 명사는 1739년에 완성되었다. 정식사료인 명사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명사보다도 100년이상 늦게 기록되었던 전설을 믿을 것인가? [각주:6]


2) 설화는 가치있는 사료이지만 믿을 수 없는 사료이다.
설화의 가치는 상당히 뛰어나다. 오히려 정사에서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는 일이 설화에 남아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설화만을 가지고 논문을 쓰는 학자는 없다. 왜냐하면 설화 그 자체는 많은 시간동안 온갖 변형을 거쳐왔기 때문에 그곳에서 뽑아내어서 "간접 증명"으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직접 증거로 사용하면 웃음거리가 되기 딱이다.

조선기문은 무려 일본인이 1885년에 출판한 책이다. 이미 주원장과 상당한 시기적인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조선인 자신이 아닌 일본인에 의해서 적혀진 내용이기에 그 정확성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부분에서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잘해봐야 2차사료일 뿐인 것이다. 그 외에 출처를 아직도 모르겠는 "민간설화집" 역시 동일하다.

논란이 된다는 말 자체가 어이가 없다. 논란이 되려면 1차사료정도는 있어야되는 것 아닌가?


3) 설사 주원장이 고려인이라고 하더라도!
그래 원하는대로 주원장이 고려인이라고 해보자. 그럼 주원장은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는 개같은 한반도"을 떠나서 "꿈을 이룰 수 있는 중국"으로 간 것이 된다. 이 점은 생각해보았는지 모르겠다. 무조건 "한국인" "한국인" "한국인"만을 말하다보니 이런 조그마한 것을 간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주원장이 고려인이라고 하자. 그래서? 조상이 당신 밥 먹여 주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가 역사학도의 입장에서 분명히 이야기를 하겠다. 정체성을 스스로 세우지 못하고 역사에 기대지마라. 설령 조상이 아무리 위대했어도 지금 현재 빌어먹는 거지꼴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역사라는 과거에서 교훈을 얻고 현재를 냉철하게 살피고 미래로 향하여 가는 것이다.

다시 묻겠다. 주원장이 고려인이라고 하자. 그래서??? 우리 모두 중국정령하자?!
정신 차려라. 이 내용 덕분에 중국에서의 반한정서가 왕창 상승하였다.


추가 : 혹시 주변에 중국인에게 말하고 싶은데 중국어가 안되는 경우 아래를 참고하셔요.

我身为在中国学古代史的的韩国人,向中国朋友道歉。

朱元璋为韩国人是由于不可靠的史料(朝鲜纪文)来推测的垃圾理论,是韩国的一部分极端民族主义者和国家主义者引起的一场大误 会,我已经通过博客向韩国朋友解释了,并且韩国历史学界不会依靠这些不可靠的史料来推定历史事实。再说这些都是一部分人造成的祸,世界上任何地方都存在着一些疯子,希望不要通过疯子来判断一个民族或者一个国家。

只是借这个机会向大家提醒一件事。民族主义和国家主义总是内涵着这些问题,而且这个问题不仅仅在韩国,中国跟日本也确实是存 在着。比如说,意大利面是中国发明或者把历代边疆的各个民族政权统统被列为地方政权等等的事情。

我希望大家尽量理性的摆脱这些民族主义和国家主义的束缚,不要老是纠缠着过去,要重视现实和未来。历史经验可以值得学习,只 是不要忘记学习历史经验的的目的。

  1. 직접 구해서 볼 수 있었으면 더 어처구니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본문으로]
  2. 제목; 朝鮮紀聞 바로가기 (새창). 저자; 鈴木信仁 編. 발행일; 1885. 발행기관; 愛善社.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본문으로]
  3. 심히 정치적인 사람이었고, 이 책을 연구서 수준도 안되게 보는 사람도 많다. 吴晗은 나중에 심히 유명해진다. 문화대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海瑞罢官》이라는 명작을 내놓는다. [본문으로]
  4. 조금 과장하긴 했고, 본인이 1차사료를 통한 공방을 구하지 못한 것일수도 있다....그래도 어이없어!!! [본문으로]
  5. 《明史》第一卷 本纪第一 太祖一 太祖开天行道肇纪立极大圣至神仁文义武俊德成功高皇帝,讳元璋,字国瑞,姓硃 氏。先世家沛,徙句容,再徙泗州。父世珍,始徙濠州之 钟离 。生四子,太祖其季也。 [본문으로]
  6. 위의 것만 적어놓으니 혼동하시는 분이 있어서... [본문으로]
현대적 의미의 출입국관리소는 국가기관에 의해서 국경에서의 출입행위를 감독관리하는 기관이다. 이 말은 출입국관리소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성립과 안정적인 유지 및 국가간의 무역을 위한 기본적인 경제조건과 교통조건이 선결 조건으로 필요하다. 이러한 조건들을 갖춘 시기는 과연 언제쯤일까? 서양사에 대해서는 무지하기에 중국대륙사를 중심을 이야기해보겠다.
 
무역을 하려면 무역이 가능할 정도의 경제력이 필요하다. 상나라에는 여유자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의 갑골문등에서는 "납공 纳贡"(제후가 왕에게 바치는 제물)이 나온다. 납공을 했다는 것은 일정한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행정기관의 존재여부는 명확하지 않다[각주:1].

관련된 실질적인 행정기관으로서의 존재는 주나라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주례(周礼-地官篇)에 따르면 关(관문할때의 관)이라는 기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사관(司关)으로 간략하게는 문지기이다. 장절(掌节)은 비자발급해주는 사람이었다. 실질적인 의미에서의 이 시기야 말로 출입국관리소의 출범이다. 실제로 중국학계에서도 이 시기를 출입국관리소의 시초로 보는 시각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혹자는 이에 대해서 주나라는 어디까지나 봉건제를 행하던 "하나의 국가"였고, 어디까지나 제후와 왕 사이에 벌어졌던 내부물자이동이기에 출입국관리소의 시작으로 이해하면 안된다고 한다. 아예 말이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의 국(国)의 유래를 생각하면 조금 황당한 반론이다. 왜냐하면 국은 성단위의 행정단위를 이야기한다. 더 간단하게는 그리스와 같은 도시국가였던 것이다.  비록 명목상으로 주왕이라는 최고통치자가 있었지만 실질적인 통치권은 매우 약하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역시나 현재 중국정부의 "하나의 중국"의 정신에 너무 영향을 받은듯 하다[각주:2].

혹자는 당시에 관은 어디까지나 사람을 막은 것이지 물자를 막았다고 보기 힘들기에 출입국관리소라고 하기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물자가 발이 달려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사람의 손을 통해야했기에 사람을 관리하는 것은 곧 물자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떠나서 고대사의 수 많은 기간동안 사람이 곧 재산이었다. 사람의 통행을 관리하는 것 자체가 곧 물자유통을 관리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각주:3].

춘추전국시대에 오면 당대의 다양한 사람들이 출입관리제도에 대해서 논의를 한다. 예를 들어서 춘추시대에는 관중은 "관세를 낮추고 상인을 대접하여 경제를 발전시키는 전략"이라는 지금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전략을 실제로 실행하여 대박이 난다[각주:4].  전국시대로 오면 상앙은 관세를 무겁게 하여 농업을 발전시켜야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실제 당시 상황에서 농업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농산물이라는 먹거리차원만이 아니라 농민들자체가 병사였던 시대이기에 농업의 발전은 곧 부국강병과 동일하였고, 이런 시스템을 교란시키는 상업을 막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상업을 억제는 경제원칙은 중국고대사를 관통하는 기본적인 법칙이 된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발전을 하고 농민이 곧 군사력이라는 법칙이 붕괴될수록 사회적 모순은 점차 커져만 가게 되었다.

핵심은 춘추전국시대에 다양한 출입관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정도면 무역이 어느 정도 성숙했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그렇기에 춘추전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없다. 어떠한 제도도 기본 없이 순식간에 성숙할 수는 없다. 다만 중국 출입국관리 발전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대로 넘어오면서 중국대륙은 통일체계를 이룬다. 그러나 초기에 국력은 매우 약하여 내부적인 통치력도 약하였고, 외부적으로는 흉노에게 처참하게 밀리고 불평등조약을 맺게 된다. 주기적인 흉노에 대한 조공을 하게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변방에 호시(胡市 북방계열과의 무역시장)을 정식으로 만들게 된다. 그 전에도 북방과의 무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이 시기에 정식으로 사료에 나타나게 된다[각주:5].  한무제때가 되면 북방공략에 나서게 되며 장건(张骞)의 노력으로 서역으로의 무역노선도 만들어지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대외무역이 활발한 시기는 매우 짦았으며  무역권한도 기본적으로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정부가 가지고 있었다.

위진남북국시대는 매우 혼란한 시기로 북방민족이 대거 중국대륙으로 들어오게 되며 자연스럽게 국제무역이 번성하게 된다. 특히 이 시기에 주목할 것은 "조공-책봉 朝贡-册封"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외교시스템적인 국제무역이다. 유교의 국제질서시스템을 명목상으로 이어가며, 겉으로 보기에는 조공을 바치면 일정한 벼슬을 내리고 있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을 보면 외교전략으로서 조공이라는 명목상의 물품을 바치고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 것을 내어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중국대륙이 혼란스러운 상황마다 벌어졌을 뿐만이 아니라, 평화시대에도 이른바 "평화비용"을 지불한다는 의미로 기본적으로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 바로 중국어 
중국어로 출입국 관리소는 海关(hai guan)입니다. 여기서 海는 바다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해(四海)는 구이(九夷), 팔적(八狄), 칠융(七戎), 육만(六蛮)과 같은 중국외부의 지역을 지칭합니다. 사실 사해의 밖에도 사황(四荒)이라던지 사극(四极)과 같은 지역 범위가 있지만, 지금은 중국외의 모든 지역을 가르킵니다[각주:6]. 관(关)은 위에서도 나왔지만 관문의 의미입니다.

정리하면 중국어의 海关은 중국외 지역과의 교류를 관리하는 관문이라는 의미입니다.

* 모종의 이유로 최대한 쉽고 간략하게 정리한 내용입니다. 문헌인용과 같은 기본적인 것도 귀찮아서 넘겼습니다. 전체적인 내용에는 큰 문제는 없습니다...아마도? 루루루루...머...읽는 분이 있기는 할런지~~

  1. 혹자는 孟子-梁惠王편에서 나오는 고사를 인용하고는 하지만 맹자 자체가 만들어진 시간이 늦기에 그리 신빙성은 없어보인다. [본문으로]
  2. 막말로 어용이라는 소리지요~ [본문으로]
  3. 사람들이 애써 무시하는데 노예제도가 폐지된지는 몇 백년도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그 전까지 사람도 "문건"였다. [본문으로]
  4. 공자도 역시 관세를 낮추는 정책을 이야기 했었다. [본문으로]
  5. 중국사에서는 몇몇은 이것을 가지고 화평을 맺었다고 하지만 실질적인 조약내용을 보면 누가봐도 한나라가 무릎을 꿇은 거다. [본문으로]
  6. 《尔雅·释地》 [본문으로]
저는 명확하게 말해서 한국학계 소속이 아닙니다. 대학교도 대학원도 해외에서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국학계와는 계속적인 연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부자이나 내부자로서 느끼는 한국학계는 정말 한숨이 나옵니다.


"한국학계에는 골동품상과 보따리상만이 있다. 시대가 지나가버린 골동품을 계속 우려먹거나 해외의 지식을 보따리로 싸들고 와서 풀어버릴 뿐이다."

어느 분[각주:1]이 말씀하신 한국학계의 현주소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지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그 시간동안 한국의 학계도 대학교통폐합을 비롯하여 다양한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내새끼" 시스템은 여전합니다. 그리고 학문 수준의 변화도 모르겠습니다[각주:2].

본인이 이 모든 시스템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만한 실력도 능력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더 학문에 대한 열망이 사라지는듯도 합니다. 석박사를 졸업하고 눈물겨운 삽질을 하고 있는 형-누나들을 보면서 열망이 생기는 것이 더 이상할지도 모르겠습니다[각주:3].


  1. 혹시나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한 말은 아닙니다. 누구인지는 일단 비밀로 하겠습니다. 알만한 분들은 다 아실것이라고 봅니다. [본문으로]
  2.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누군가의 사례를 골라서 비판을 해야되기에...그냥 넘기겠습니다. [본문으로]
  3. 현재 교수된 사람도 별로 없고, 교수가 되어도 자신의 전공과 일치되는 수업을 하는 경우는 더더욱 없습니다. [본문으로]
감히 한국은 너무나 자기중심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미 소위 글로벌 시대여서 세계와 같이 숨쉬는 와중에도 많은 한국분들이 아직도 자기중심적인면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 역사관에 대한 부분은 한번 디벼 볼까 합니다. 이 글은 어느 한 분을 특정지어 비판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제가 인용한 글은 한 분의 것이지만, 이런 생각은 제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으시더군요.


1. 한국의 자기중심적인 역사관 대입[각주:1]의 결과물
한국에서 많이 퍼져있는 논리중에서 중국은 영토중심의 역사서술이며, 중국의 역사에서는 다양한 이민족의 역사가 있기에 민족중심으로는 역사를 쓸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더 간단히 말해서 요, 금, 몽원, 청은 중국의 역사가 아니며 중국의 역사에서 빠져야 된다는 소리입니다.

중국이 왜 민족 중심으로 역사를 쓸수 없는지에 대한 모순이 여기서 발생한다.

1. 한족에 대한 역사 기술은 "원", "청", "요", "금"에 대한 기술을 할수가 없다.
2. China 는 "지나" 즉, 진나라인 이라는 뜻으로 "한족"은 "진"을 계승한 한의 후예라는 뜻이다. 즉, 한족의 역사기술은 동쪽으로는 만리장성에 영토가 제한된다.

다시말해 중국은 현재의 중국을 통합하여 관리할 수 있는 역사개념이 필요한데 이에 대한 접근이 공교롭게도 주변국과 문제를 일으킬수 밖에 없는 현재의 영토중심 역사관이다. 그러나 더 큰문제는 영토중심으로 기술하다보니 기존의 고서들과 역사적 충돌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이다.

"중화" 사고방식으로는 만리장성 밖에 어떠한 문명도 없어야 한다.

다시말해 오랑캐 부족국가만 존재해야 하는데 바로 오른편에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이 뚜렷한 문명의 족적을 남겨버렸다.

출처 : 중국과 만리장성에 대한 잡설중에서...


2. "수, 당, 남북조의 북조의 대부분 및 오대십국의 대부분 역시 기술을 할 수 없다"
한국의 자기중심적인 역사관 대입으로 논리를 전개하여도 기본적인 사실 자체가 틀렸습니다. 시작부터가 문제가 있는 논리이지만 그래도 서술하려면 제대로 해야되지 않겠습니까?

남북조시대의 대부분의 북조왕조[각주:2]와 수나라 그리고 당나라 그리고 대부분의 오대십국[각주:3]은 기본적으로 북방민족을 주축으로 구성된 왕조이며, 왕실 역시 북방민족계열이라고 결론이 나왔습니다. 이들 역시 중국사의 영역에 포함되지 못하여야 합니다[각주:4]. 다시 말해서 :

"북조" "수나라" 당나라" "오대십국" "원", "청", "요", "금"에 대한 기술을 할수가 없다.

하지만 위의 논리는 그 시작부터가 틀렸기에 참이 될 수가 없습니다.


3. 중국의 역사관은 다민족역사관이다.
중국의 역사관은 다양한 민족의 역사가 모여서 현재의 중국의 역사를 구성한다는 "다민족 역사관"입니다. 이 부분을 간과하고 영토적역사관이라고 하면 순간 정신이 멍해집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자기중심적으로 한국의 역사관을 그대로 도입하는 짓이 여기서 일어납니다.

중국의 역사관은 다민족역사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국의 단일민족역사관을 그대로 도입합니다. 그러면서 "중국의 역사는 한족의 역사이다. 그리고 한족의 역사을 서술하자면 ""대부분의 북조" "수나라" 당나라" "대부분의 오대십국" "원", "청", "요", "금"에 대한 기술을 할수가 없다"따위의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의 역사관은 그 역사관으로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반대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중국이 자신의 역사관으로 한국사를 본다고 생각해봅시다. 충격을 더하기 위해서 위의 틀린 이론대로 중국의 역사관은 영토중심역사관이라고 합시다.

중국역사관을 영토중심사관이라고 보고 한국에 대입하면, 한국의 역사는 38선 이남으로 무조건적으로 한정이 됩니다. 대충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는 절대 한국사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하는 짓이냐고요? 먼 개소리냐고요? 중국의 역사는 한족의 역사라고 말했던 행동을 그대로 적용해본 것입니다.


4. 그럼 한국의 역사관이 틀렸는가?
역사관은 하나의 관점일 뿐입니다. 개인적으로 현재 한국의 단일민족 역사관은 현재까지 밝혀진 다양한 역사적 사료를 해석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역사관 자체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태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맞고 틀리고의 논란은 있을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다양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저를 보고 잘생겼다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판단일 뿐입니다.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릅니다. 저의 여친님은 저를 보고 잘생겼다라고 하시지만[각주:5], 어떤 분은 저를 보고 못 생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관도 이와 같다고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각주:6].

역사관은 이처럼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그 역사관이 합당한 바탕아래서 현재의 역사를 해석할 수 있다면 그 역사관은 학문적으로 존중받습니다. 중국의 다민족역사관도 한국의 단일민족역사관도 일정한 근거를 가지고 있고 역사를 해석하는데 유용한 "도구"이기에 모두 존중받아야됩니다.


5. 그래도 한국의 단일민족역사관은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보편적인 단일민족역사관은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합당한 바탕도 없고 현재의 역사를 제대로 해석하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연구로 소위 말하는 "한민족"은 다양한 혈연적인 요소로 형성되었다는 것이 기본입니다. 다시 말해서 단일민족사관에서 강조하는 혈연적인 관계는 부정당했습니다.

다만 현재 단일민족역사관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혈연이 아닌 "문화"적으로 순수하게 내려온 단일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다양한 문명교류와 접촉 그리고 변형의 예로서 문화 역시 계속 변했다는 몇가지 사례들로 그 근거가 약해집니다. 예를 들어서 한반도에 유입된 다양한 북방민족의 문화도 있겠고, 중국대륙에서 전해진 문화와 문명도 있겠고 일본과의 교류중에 역수입된 것들도 있겠고 사례들은 넘쳐납니다.

또한 현실문제에서 점차 세계화가 되어가면서 한국에 수 많은 "타민족"이 들어오는 과정에서 기존의 단일민족사관으로 형성된 민족주의[각주:7]는 심각한 배타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해외인력확보문제부터 시작하여서 2세들의 정체성에도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과 문제를 토대로 앞으로 "다민족역사관"을 채택해야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는 중국 혹은 미국이 다민족역사관이니 그것을 그대로 채택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필요"하며 역사 분석에도 "부합"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미 다민족 역사관을 도입한 국가들에게 생겨나는 문제점들도 신중히 관찰하고 같은 잘못를 반복하지는 말아야될 것입니다.


6. 그럼 중국의 다민족역사관은 문제가 없는가?
개인적으로 이론의 차원에서는 중국의 다민족역사관 자체는 현재까지는 큰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문제는 현실의 차원입니다. 다민족 역사관과 모순되는 "그래서 현재의 중화민족을 이루게 되었다"따위나 말로만의 "다민족"인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다민족역사관의 문제라기 보다는 중국정부 자체의 문제입니다.

물론 다민족역사관도 결코 완벽하지 않습니다. 민족을 어떻게 설정하느냐[각주:8]라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부터 시작해서 국가체계를 뛰어넘어있는 민족의 역사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까지 다양한 문제가 산적해 있습니다[각주:9]. 다만 제 생각에 현재까지는 가장 쓸만한 역사관이라는 것일뿐입니다.



* 최대한 쉽고 간략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근거를 많이 제시하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럭저럭 충분하게 제시했다고 봅니다. 제 블로그 자주 오는 분들이 민감한 글 쓰지 말라고 했.........

  1. 정확히는 일부 사람들의 자기중심적인 역사관 대입이라고 해야됩니다. [본문으로]
  2. 개인적으로는 모든 북조왕조라고 서술하고 싶으나, 몇몇 논쟁이 되는 부분이 없는 것이 아니라서....대부분으로 그냥 넘기기~ [본문으로]
  3. 이 역시 앞서의 북조왕조와 동일한 이유임. 개인적으로는 오호십육국의 [본문으로]
  4. 위에서 필자가 주장을 한 것은 어디까지나 진나라 이후의 "한족" 개념이었기에 그 전은 무시하였다. 하지만 은을 동이로 설정하고 타민족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본문으로]
  5. ...사실 맨날 못생겼다고...흑. [본문으로]
  6. 사실 학술적으로 이따위로 이야기했다가는 돌림빵맞기 딱 좋습니다. 이렇게 쉽게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일반분들에게는 이정도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본문으로]
  7. 단일민족사관과 민족주의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싸움이라고 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일단 사관을 우선시 했습니다. [본문으로]
  8. 혈연? 종교? 문화? 지역? 언어? 무엇으로 민족을 구분할까요? "종합적"이라는 말은 수 많은 분류가 있을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는 모호한 말입니다. [본문으로]
  9.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현실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체인 국가체계와 다민족간의 융화문제입니다. [본문으로]
중국학계에서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있었다라는 보도가 한국에 올라오고 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전에도 간혈적으로 알려지고는 하였었다. 그러나 본인 전공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기에 그냥 넘기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블로그를 방문해주시는 드라큘라님의 요청이 있어서 간략하게??! 서술해보려고 한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본인은 국적이나 민족은 개나 줘버리라고 말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학문은 어디까지나 최대한 객관적이 되어야된다고 굳게 믿으며 행동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각주:1].

보나마나 긴 장문의 글이 될 터이니 귀차니즘을 위한 요약본을 알려드리겠다.
진(秦)장성이 한반도까지 왔었는지 아니었는지는 현재로서는 확정하기가 힘들다. 몇 안되는 문헌자료는 쉽게 반론을 제시할 수 있으며, 비교적 정확하다고 볼 수 있는 북한에 남아 있다는 흔적도 어디까지나 북한의 발표만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중국이나 한국의 어느 학자도 아직 실측을 했다는 말이 없다. 고로 아직 확실한 근거로 받아들일 수 없다. 고로 어느 쪽이든 증거부족이다.

조금만 더 자세한 것을 원하지만, 별 이상야시꾸리한 사료와 논문내용을 보고 싶지 않으신 분아래쪽의 5. 만리장성 논란을 가장 쉽게 풀어보자. 로 곧장 가시면 된다.


1. 어느 시대의 만리장성인가?
만리장성이라고 하면 진시황이 만들어서 계속 내려온 것으로 보통 생각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결코 그러하지 않다. 만리장성은 진시황이 중국대륙을 통일하기 전에 조(趙)나라와 연(燕)나라에서 만들었던 성벽과 진(秦)나라의 장벽을 서로 연결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존에 있던 여러 성벽들을 연결시킨 것이다.

또한 진시황 이후 한무제 전까지는 장성이 유지되기는 하지만[각주:2], 한무제의 북방공략이나 그 뒤의 다양한 상황으로 인하여 장성은 사실상의 기능을 상실한다. 그리고 명(明)대에 와서야 다시 재축공되어서 청대까지 유지되었다. 그리고 명대나 청대의 장성의 동쪽끝은 분명히 산해관(山海关)으로 되어있다. 고로 현재에 남아 있는 만리장성 단지 명청대의 장성이며,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만리장성이 아니다.

현재의 문제는
진(秦)나라의 장성인 것이다.[각주:3]

그 외에 만리장성의 역할에 대한 해석도 문제로 남아 있다. 보통 만리장성은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을 갈라놓는 분기점이라고 알고 있다. 또한 외부의 세력을 막는 방벽으로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장성은 농경분기점 훨씬 위쪽에 존재하며, 만들어진 시기에도 커다란 목장울타리였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군사전략적으로 보아서 가느다란 선으로 방어하여 외부의 적을 막는 다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것인지는 마지노선의 예[각주:4]를 볼 것도 없이, 중국대륙의 역사 내내 제대로 북방민족을 막은 적이 없다는 것으로 확실히 증명된다고 하겠다. 이에 대한 잡설은 The Origins of the Great Wall을 참고하기 바란다.


2. 중국의 진(秦)장성에 대한 이야기들.
1- 중국 교과서에서의 진(秦)장성

因地形,用制塞 ,起临洮,至辽东,延袤万余里[각주:5] : 지형에 따라 험준한 곳에 요새를 세워 임조(临洮)에서부터 요동(辽东)까지 이르렀는데, 그 길이가 만여리였다.

중국교과서에서 보이는 진장성지도



2- 진(秦)장성에 대한 사료들
(1)《史記•蒙恬列傳[각주:6]》 :始皇二十六年,使蒙恬將三十萬眾北逐戎、狄,收河南,築長城,因地形用險制塞,起臨洮至遼東,延袤萬余里。
진시황 26년, 몽염을 시켜 30만명을 이끌고 북쪽에서 융과 적을 내쫒고, 하남을 회복하게 하였으며, 장성을 축조하게 하였다. 지형을 따라 험준한 곳에 요새를 세워 임조에서 요동에 까지 이르렀으며, 전체 길이가 만여리였다.<사기-몽염열전>

(2)《〈水經•河水〉注[각주:7]》 :始皇令太子扶蘇與蒙恬築長城,起自臨洮,至於碣石。
진시황은 태자 부소와 몽염을 시켜서 장성을 축조하게 하였다. 임조에서 시작하여 갈석에 이르렀다. <수경-하수주>

(3) 《通典•高句麗傳[각주:8]》 :碣石山,在漢樂浪郡遂城縣,長城起於此山。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었다.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한다.<통전-고구려전>

(4) 《史記•朝鮮列傳》:漢興,為其逺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為界。
한나라가 일어선 뒤 (조선?)이 멀고 지키기 어려웠음으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여 그 경계가 패수에 이르렀다.

(5) 《三國志•魏志•東夷傳[각주:9]》注 :“《魏略》曰:昔箕子之後朝鮮侯……。及秦並天下,使蒙恬築長城,到遼東。時朝鮮王否立,畏秦襲之,略服屬秦,不肯朝會。否死,其子準立。二十餘年而陳、項起,天下亂,燕、齊、趙民愁苦,稍稍亡往準,準乃置之於西方。及漢以盧綰為燕王,朝鮮與燕界于溴水。
<위략>에서 말하기를 : "기자의 후손인 조선후는..........진나라가 천하를 병합하고, 몽염으로 하여금 요동까지 장성을 쌓도록 하였다. 그 때 조선왕 부가 즉위하였는데, 진나라의 공격을 두려워 하여서, 전략적으로 진에 복속하는 척하였으나 조회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부가 죽은 뒤 그 아들 준이 즉위하였다. 20여년에 진승과 항우의 난이 일어나서 천하가 혼란스러웠고, 연과 제 그리고 조의 백성들은 고난를 걱정하여 점점 준에게 도망쳤고, 준은 그들은 서쪽에 배치하였다. 한나라가 노관을 연왕으로 삼자 조선은 연나라와 패수로 경계를 삼게 되었다.


3- 중국학자의 분석
3.1 담기양(譚其驤[각주:10])
《秦郡界址考[각주:11]》 에서 위의 (4)와 (5)을 근거로 장성이 수성현(지금의 평양서남지역)에서 시작하였다고 비정하였다. 비록 해당 기록이 한나라 초기의 기록이지만, 진나라때와 큰 차이가 없다고 보았다. 

중국역사지도집의 진영토(2권 10쪽)

연의 장성위치 (중국역사지도집 2권 42쪽)



3.2. 왕국량(王國良), 고힐강(顧頡剛), 사념해(史念海)
1930년 왕국량이 집필한 《中國長城沿革考》을 기초로 고힐강가 시작하여 사념해가 완성한 《中国疆域沿革史[각주:12]》에서는 위의 (1)과 (2)을 근거로 장성이 갈석에 있으며, 갈석은 현재의 조선평양남족이라고 주장하였다.

전국시대지도 (中国疆域沿革考 56~47)


진통일 지도 中国疆域沿革考 60-61


사념해는 담기양의 설과는 다르게 연나라 장성이 압록강을 넘어 청천강(평양근처)에 이르지 않고, 압록강까지만 그리고 있다. 이는 다른것이 아니고 연나라 장성이 압록강을 넘어서 청천강에 이른다는 문헌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진나라의 장성이 기존의 연장성을 연장-수리한 것인 점을 생각하면 담기양의 설도 논리적으로 타당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문헌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사념해는 담기양과 다르게 생각했다.

3.3. 현재의 연구상황[각주:13]
과거의 담기양이나 사념해는 어디까지나 문헌에 남아 있는 내용으로 추측을 하였지만, 그 뒤에 중국학자들은 고고학적 유물을 바탕으로 과거의 연구를 보강하고 있다. 특히 阎忠의 경우 조선사회과학원고고연구소(朝鮮社會科學院考古研究所)와 역사연구와 문화보존연구소(歷史研究和文化保存研究所)의 보고서를 기반으로 성벽유적에 대해서 토론하고 있다.

阎忠:《燕北长城考》,《社会科学战线》1995年第2期。


그는 북한의 보고서를 인용하여서 북한에 장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밝히고 있다. 북한의 보고서에서는 진나라가 아닌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성의 아래쪽에서 진나라의 유물을 발견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는 기존의 성벽의 기초 위에 훗날 다시 축공했음을 의미하며, 그 아래에 있는 진나라 유물은 기존의 성벽이 진나라의 장성일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큰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에 대해서는 아래쪽에서 다시 서술하도록 하겠다.

그 외의 고고학적 유물을 토대로한 연구로는 평양에서 출토되는 과(戈)[각주:14]와 동모(銅矛)을 근거로 해당 지역까지 장성이 뻗어있었던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각주:15].


4. 한국의 진(秦)장성에 대한 이야기들.
1- 매체보도.
진나라의 장성인지 연나라의 장성인지 명나라의 장성인지도 구별하지 않고, 어떠한 근거가 있는지도 제대로 말하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중국은 우리를 침범하는 나쁜넘이라고 규정하며, 신문기사의 객관성을 침해한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감정적인 어투로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바보스러운 신문이 대다수임. 정신 좀 차리지? ^^

2- 한국 학자들의 분석
2.1. 이병도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
遂安)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수성현에서 만리장성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맹랑한 설", 다시 말해서 말도 안되는 헛소리라고 일축하며 부정하고 있다[각주:16]. 잠시 우리의 위대한 환빠님들을 비웃어주자면... 최근 이덕일씨가 이병도의 설을 왜곡하여 "만리장성이 황해도 수안에서 시작되었다"라고 주장한듯이 쓰고 있다[각주:17]. 자네들이 이병도 싫어하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상대말을 이딴식으로 왜곡하냐? -_-

2.2. 윤내현[각주:18]
사료 (1)의 요동이 난하(灤河)의 동쪽이며, 사료 (2)의 갈석이 난하 하류의 창려현(昌黎縣)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결론적으로 한사군(漢四郡)가운데 낙랑군은 한반도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게 된다. 이 의견은 중국의 이건재(
李健才)에 의해서 반박[각주:19]당한다. 하지만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므로 일단 생략.

2.3. 그 외[각주:20].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음하하하;;; 혹시 그 외의 연구성과가 있으신 분은 알려주시기 바란다. 단. 환빠식의 원문사료나 고고학적 자료는 개무시하는 식의 논문은 무시하도록 하겠다.



5.
만리장성 논란을 가장 쉽게 풀어보자.
관련 전공자들은 위의 말만 들어도 어떤 상황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공자들이지 일반인은 그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최대한 쉬운 말로 현재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정리하도록 하겠다.

문제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5.1.
碣石(갈석)은 어디인가?
중국학자들은 갈석을 평양근처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현재 중국대륙에 남아 있는 갈석이라는 지명만 한군데가 아니다. 특히 현재의 하북성진황도시창려현(河北省秦皇岛市昌黎县)은 산해관과 근접한 지역인데 갈석이라고 불렸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갈석이 평양근처라고 말하기는 증거로서 합당하지 않으며, 현재에는 다만 방증으로 사용될 뿐이다.

쉽게 예를 들면 "산동"이라는 산의 동쪽에 있다는 지명이 한국에는 넘쳐흐른다. 전남에도 산동이라는 지명이 있고, 경북에도 있고, 경남에도 있다. 그런데 훗날 어떤 이가 산동이니 했으니 무조건 전남에 있는 산동이라고 하면 웃기지 않은가? 왜냐하면 경북이나 경남에 있는 산동일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현재 상황이 그렇다.


5.2. 漢樂浪郡遂城縣(한 낙랑군 수성현)은 어디인가?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냐는 문제 자체부터가 아직도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정확하게 말해서 서로 제대로 된 증거가 불충분하여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낙랑의 중심지라고 불리우는 평양이 현재 양측 학자 모두 출입이 사실상 불가능한 북한의 영토라는 점도 단단히 한 몫을 하고 있다.

그러니 낙랑군의 수성현이 어디인지는 더욱 더 논란이 될 수 밖에 없다. 고로 수성현을 증거로 삼기에는 부족하며, 역시 방증으로만 사용될 수 있을 뿐이다.

위의 산동의 예보다 한 술 더 뜨는 문제이다.


5.3. 浿水(패수)는 어디인가?
중국이든 한국이든 논문싸이트에서 "패수"라고 입력하고 내용들을 살펴보면 당신을 놀라거나 짜증을 낼 것이라고 장담한다. 각각 패수라고 말하는 곳들이 천차만별이다. 한강부터 시작해서 북쪽으로 청천강, 압록강, 요수등등등.......사실상 베이징과 서울사이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하천을 패수라고 각기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패수가 청천강이라는 중국 만리장성설의 증거는 휘청거릴 수 밖에 없다.

위의 산동의 예의 극대화라고 보면 된다.


5.4. 평양근처에서 발견되는 진나라 유물을 어떻게 해석해야되는가?
한반도에서는 서역의 유물까지 발견된다. 고대라고 움직임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활발한 무역활동 및 문화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로 몇 조각의 유물만으로 장성을 비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아예 유물에 "이곳에서 장성을 지었음"이라는 글자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유물로는 장성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역시 방증으로 사용될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서 한국인이 하회탈을 들고서 이탈리아에 갔다. 그리고 이탈리아 친구에게 선물을 해 주었다. 나중에 발견한 하회탈을 보고 한국의 영토가 이탈리아까지 있었다고 확정하는게 말이 되는가? 혹은 한국의 무기는 지금 계속 수출되고 있는데, 이것이 남아프리카에 수출되었다고 하자. 나중에 남아프리카쪽에서 그 무기를 발견하면 한국의 영토가 남아프리카에 이르렀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와 같은 것이다.


5.5 북한에 남아 있는 성벽유적을 어떻게 해석해야되는가?
이 논쟁의 핵심이 될 수 있는 북한에 남아 있는 성벽유적이다. 문제는 이넘의 성벽유적을 직접 시찰한 사람이 한국학자든 중국학자든 없.다.는.것.이.다[각주:21]. 단지 북한에서 일방적으로 발표한 보고서를 믿을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북한의 보고서는 그리 믿을 만한 수준이 아니다.

고고학적인 기술력 자체가 제대로 지표조사를 할 수 있을지 의심되는 수준이며, 단군묘를 비롯해서 체제유지를 위해서 누가봐도 "만들어낸 고고학적 자료"을 이야기하는 곳을 당신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본인으로서는 못하겠다.

이렇게 불안정한 "성벽유적"보고서를 바탕으로 작성된 글을 마냥 믿을 수는 없다.

쉽게 다시 설명하면 성벽유적 자체는 정말 강력한 유물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친구 중에 공부도 못하고 거짓말도 밥 먹듯이 하는 인간이 있다고 해보자. 그 녀석이 갑자기 "공룡의 화석"을 찾았다고 말을 한다. 그럼 일단 공룡이 먼지나 알런지 의심할 것이고, 설사 공룡의 화석을 안다고 생각하여도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것이다. 그래서 직접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지 않고, "구라지? 뻥까지마!"라고 할 것이다.


6. 결론
본인으로서는 지금의 증거로는 어떠한 판단을 할 수가 없다. 단지 만약 북한에 정말 성벽유적이 남아 있다면, 만리장성의 평양시작설은 상당히 강력하게 작용할 것이다. 반대로 북한에 성벽유적이 없다면 반대로 평양시작설은 대폭 약해질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 아무도 북한의 성벽유적을 조사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애국주의나 민족주의를 말하면서 "어디서 감히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왔느냐!"라고 하는 인간들은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건지? 혹은 공부라는 것을 하는 것인지 궁금할 뿐이다. 여러 증거들이 평양까지 왔다고 입증이 되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도록~" 평양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여러 증거들이 평양까지 온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침 튀기면서 말하지 않아도 평양까지 오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정신 좀 차리라고요^^

이 글에 대해서 원문사료나 증거 없는 "비난"은 상대하지 않겠습니다. 어디까지나 논리와 증거를 갖춘 "비판"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익명의 힘을 믿습니다. 그렇기에 익명의 강력한 힘을 악용하는 쓰레기들에게는 무시라는 최후의 수단을 쓸 수 밖에 없습니다.

자료협조를 해주신
劉表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저는 그 분의 자료를 되도록 쉽게 풀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감사감사!!! 그리고 이 블로그에 오는 역사관련 분들이여. 괜히 조용히 보지만 말고 언제든지 어떤 주제로든 글을 써서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제 블로그를 통해서 익명으로라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사랑해요^^::::


끝난 줄 알았는데.....밥 먹기전 눈에 들어온 조선일보가 문제였다.....
7. 명나라 장성도 문제라고?
(조선일보)중(中) "만리장성, 압록강까지다" 선언(기존보다 2500㎞ 늘려… 고구려 세력권 편입 의도… 韓·中 역사분쟁 재연될듯) 이라고 우리의 베이징 특파원 최유식 기자님이 올려주셨다. 본인 최유식 기자님에 대해서 참고참고 언급 안할려고 했는데...제발 기사 좀 제대로 써주었으면 한다. 중국 뉴스에 뜬 것을 제대로 조사도 안해보고 무조건 번역질해서 기사쓰면 좋으신가?

위의 내용은 중국의 "명나라 만리장성"이 압록강까지 닿았다고 중국에서 주장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의 최유식 기자님은 해당 단체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조사도 안한 것이 분명하며, 관련 논문들을 본 적도 없는 것이 거의 확실히 된다. 사실 여부에 대한 조사는 기자의 기본이 아니었던가? 아! 그리고 맨 처음에 언급했다싶이 연장성, 진장성, 한장성, 명장성, 청장성을 구별하지 않고 그냥 만리장성으로 해주고 있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니 넘기겠다^^

그리고 대체 명장성과 고구려가 먼 상관인가? 기사의 본분은 사실 전달이라는 것을 초년병시절에 배우기는 한 것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명장성이 압록강까지 갔다는 것은 90년대부터 있던 이야기다. 단지 어이가 없을 뿐이어서 학계에서도 그냥 씹고 있었을 뿐이지. 물론 자료 조사 안했을 우리의 최.유.식. 기자님은 모르고 있으셨겠지...^^

가장 간단히 요약해보겠다. 명장성이 압록강까지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국의 환빠와 거의 동일 선상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틀리지 않다고 보면 된다. 어느 나라나 어떻게든 역사를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부풀리고 축소하고 비틀어서 자위행위를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왠만하면 무시해주자.

1. 장성학회(长城学会)
최유식 기자님이 배끼신 기사의 원문(万里长城东端起点圆桌会议召开)을 보면 너무나 쉽게 보이듯이, 일련의 행사들은 어디까지나 관광지로 만들겠다는 삽질의 한 모습에 불과하다. 이정도는 충분히 아셨을 텐데 깨끗이 무시해준 최유식 기자님 만세!

그런데 본인은 장성학회가 머하는 곳인지 궁금해졌다. 中国长城网에서 장성학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름답고 화려하지 않은가? 그리고 본인의 경험적으로 학술활동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화려한 홈페이지 못 만든다. 찾아봐라. 이렇게 화려한 학술적으로 유명한 곳이 있는지. 그들의 활동을 살펴보면 제대로 된 학술활동은 보이지 않고, 단지 만리장성과 연결된 지방과의 관광사업으로 도배되어 있다.

이런 장성학회를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는 여러분들이 더 잘아시리라 본다.


2. 중국에서의 관련 논문

1.1. 《明长城东端起点——虎山关》[각주:22]나 《虎山长城》[각주:23]와 같은 사료없고, 논리도 없고, 증거도 없고, 인용도 없는 환빠들이 생각나는 놀라운 논문들이 산더미 -_-

1.2. 薛景平《辽宁境内明长城考察发掘的重大成果》《辽宁大学学报(哲学社会科学版》1995 : 무려 고고학 보고서이다. 그리고 건축복원도나 단면도 하나 없는 무려! 고고학 보고서이다. 본인 이따위 글을 무려 고고학 보고서로 인정해야되는 것으로 고민중이다. -_-;;;

1.3. 刁余文《长城虎山关》《上海集邮》1998/07 : 무려 사료인용이 있다. 그러나 주석따위는 가볍게 없고, 다 합쳐야 천자가 겨우 넘을 듯한 글이다. 그래도 그나마 "학술논문"으로 보인다...어디까지나 그나마이지만;;; 그래서 여기서 인용한 사료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3. 사료로서의 명장성 동쪽끝[각주:24]
2.1.《明史卷九十一志第六十七 兵三 邊防》: 东起鸭绿,西抵嘉峪, 绵亘万里, 分地守御
동쪽으로는 압록강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는 가욕에 이르는 곳을 만리에 걸쳐 서로 이어지게 각 지역별로 수비하였다.

2.2. 《明宪宗实录》: 成化十五年六月修筑东路自开原抵鸭绿江边墙[각주:25]
성화15년 6월, 개원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동쪽길의 벽을 수리-축공하였다


4. 사료분석
2.2.는 인터넷에서 원문 대조를 할 수 없기에 일단 넘기겠다. 문제가 되는 것은 2.1.에 있는 구절이다. 저것만 놓고 보면 장성이 압록강에서 가욕관까지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 쉽다. 그러나 원래 원문을 보면 살짝 어이가 없어진다.

元人北歸 屢謀興復 永樂遷都北平 三面近塞 正統以後 敵患日多 故終明之世 邊防甚重 東起鴨綠 西抵嘉峪 綿亙萬里 分地守禦

원사람들이 북쪽으로 돌아가고 여러차례 돌아올 것을 도모하였다. 연락은 북평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삼면이 변방과 가깝다 보니 정통 이후에는 방어에 고충이 심해졌다. 그래서 명나라가 망하기 전까지 변방의 방어를 매우 중시하였다. 동쪽으로는 압록강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는 가욕에 이르는 곳을 만리에 걸쳐 서로 이어지게 각 지역별로 수비하였다. (막번역임.)

해당 내용은 만리장성과 상관이 없으며, 어디까지나 명나라의 변경방어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런 내용을 가지고 압록강에서 시작했다고 하는 것은 신빙성이 상당히 약하다고 하겠다. 그 뿐만이 아니라 명사의 다른 부분을 보면[각주:26], 비록 압록강부터 가욕관까지라고 수비범위를 지정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현재의 베이징지역에 수비가 밀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명나라가 건국했지만, 몽원의 세력은 아직 몽골지역에 남아 있었으며, 명나라 중후반기까지 계속 골치거리가 된다. 또한 몽원은 어디까지나 청나라에 의해서 밀려나게 되고, 청나라의 세력이 요동을 중심으로 뻗어나가서 결국 명나라를 멸망시켜버리고 만다. 이 상황에서 요동지역에 명장성이 항시적으로 있었다는 것은 불가능이다. 단지 간혈적으로 명의 세력이 요동에 이르렀을지는 모르지만, 장성과 같이 반영구적인 방어기지를 세울 정도의 확장은 정황상 불가능하였다.

최소한 현재 중국의 교과서에서는 명장성이 어디까지나 산해관까지만 그려져 있을 뿐이다. 중국의 주류 의견이 아닌 것이다. 주변에 중국친구가 있다면 한 번 물어보라. 명장성의 동쪽 끝이 어디인지를....


양쪽에서도 비주류인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의 이야기를 한중 양국의 매체에서 서로 경쟁적으로 소개하면서 쓸데 없이 양측 모두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될까? 미디어는 팔리는 화제성보다는 사실에 대한 집착을 해야되는 것이 이상이 아니었나? 아무리 현실이 시궁창이어도 해도해도 너무한다 싶다.


  1. 고로 이 글은 한국측이나 중국측이나 어느 쪽에서도 욕 먹기 딱 좋은 글일 것이다. 후-_ [본문으로]
  2. 실질적으로는 방어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문에 있는 링크를 참고. [본문으로]
  3. 의외로 이 것을 모르는 분들이 있어서^^:: [본문으로]
  4. 프랑스가 독일을 상대로 만들어두었지만 독일이 우회기동하여 마지노선자체를 상대하지 않아서 바보스러운 방어전략으로 이름을 날렸음. [본문으로]
  5. 人民教育出版社歷史室編著:《中國古代史》全一冊,人民教育出版社,2007年3月第2版。(p22~p23) [본문으로]
  6. 한대(BC 2세기 중엽) 사마천의 기록. [본문으로]
  7. 위진남북조의 酈道元의 [본문으로]
  8. 당나라 두우(杜佑)의 기록. 《太康三年地記》, 《晋書•地理志》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음. [본문으로]
  9. 위진남북조의 배송지(裴松之)이 위략을 인용한 [본문으로]
  10. 중국의 유명 역사지리학자. 중국역사지도의 주편자. [본문으로]
  11. 《长水集》上,北京:人民出版社,1987年7月,第16页 [본문으로]
  12. 《中国疆域沿革考》,北京:商务印书馆,1999年7月,第68~69页 [본문으로]
  13. 阎忠:《燕北长城考》,《社会科学战线》1995年第2期。冯永谦:《辽东地区燕秦汉文化与古长城考》,《辽宁省本溪、丹东地区考古学术讨论会文集》,1985年。王德柱:《鸭绿江畔发现燕秦汉长城东段遗迹》,《中国文物报》1991年5月19日。李文信:《中国北部长城沿革考》,《社会科学辑刊》1979年创刊号。李殿福:《东北境内燕秦长城考》,《黑龙江文物丛刊》1982年第1期。刘子敏:《战国秦汉时期辽东郡东部边界考》,《社会科学战线》1996年第5期。冯永谦:《东北古长城考辨》,《东北亚历史与文化》,辽沈书社,1992年。 [본문으로]
  14. 곽말약(郭沫若)의 《금문총고(金文叢考)》 [본문으로]
  15. 25년상군수과(二十五年上郡守戈)가 진시황25년 진나라 상군에서 제작되었다는 점을 들어 평양에 진주했었다는 근거로 사용. 또 三年相邦呂不韋造, 上郡守……라는 글이 세겨져 있는 동모를 통해서도 이야기된다. 그 외에도 문양이나 기타 출토유물이 이야기되어진다. [본문으로]
  16.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년. [본문으로]
  17. 이덕일,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역사의아침, 2006년. [본문으로]
  18. 윤내현, <漢四郡의 樂浪郡과 平壤의 樂浪>, <<韓國學報>>41, 1985년. [본문으로]
  19. 《评汉乐浪郡在今辽河以西说》 [본문으로]
  20. 이성규, <중국군현으로서의 낙랑>, <<낙랑문화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7년.이병두, <낙랑군현 위치고>, <<한국학보>>55, 1989년. [본문으로]
  21. 북한과의 교류가 중요한 이유도 이것이다. 막말로 지금 상황에서 직접가서 본 사람이 큰 소리 칠 수 있으리라 본다 -_-;;; [본문으로]
  22. 张安阳《明长城东端起点——虎山关》《民主》 [본문으로]
  23. 栾德君《虎山长城》《满族文学》08/03 [본문으로]
  24. 조사하면서 알았는데, 한국의 환빠들은 참 순진한 수준이라고 보인다. 이쪽은 본문에 분명히 있다. 단지 앞 뒤 문장을 꼭 봐야되지만... [본문으로]
  25. (해당책은 인터넷에서 원문을 찾을 수가 없었음, 확인해야되는데 귀찮아서 패스. 어차피 말도 안되는걸 굳이 찾으려 할 필요 자체가 없음. [본문으로]
  26. 《明史》卷一百十三志八十七 明幅員綿邈東起鴨綠西抵嘉峪為邊者九千餘里成祖即北平建都碣石冀北扆山負海塞垣聯絡據乎要險居庸為京北門隸于昌平密邇薊州薊昌俱畿内要地故不稱鎮薊之稱鎭自嘉靖庚戍昌之稱鎮自嘉靖庚申皆世宗所建置... [본문으로]
시작하기 전에 이 말은 꼭 하고 싶습니다. 이 기사를 쓴 션양 연합뉴스의 박종국 특파원! 조금이라도 알아보시고 이 글을 작성한 것인지 심히 궁금합니다. 기사는 함부로 작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쓸 내용이 없다고 하더라도 적당히 흥미위주로 검증도 안된 것을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의 북방 역사학자 주쉐위안(朱學淵)은 대만에서 발행되는 '역사월간' 9월호 기고문을 통해 사르코지 대통령이 중국 북방민족인 여진족의 후손이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기원전 황하유역에 출현했던 '사오하오'족의 후예가 된다고 주장했다.

사르코지가 중국 북방민족의 후예? -在美 중국학자 "여진족 후손" 주장


한마디로 결론을 내리면 어이가 없다. 엉터리 방법론에 엉터리 논리로 일관하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대충 봐도 엉터리인 것을 기자가 무려 번역을 해서 기사로 보냈고, 그것이 인터넷에 올라왔다는 것이다.

1) 한국어부터 똑바로 쓰자!
"사오하오"는 한자로 少昊 이다. 한국어로는 "소호"라고 써야 옳다. 한국에서의 학술용어도 소호이며, 무엇보다 한국 외래어 표기 원칙에서 1919년 이전에는 한국 독음으로 읽어야 맞다. 기자라는 인간이 쓴 기사에서 기본적인 한국어 표현도 틀리고 있는 것이다. 소호씨라고 써주었으면 환빠분들이 출동해서 사르코지=소호=동이족=한국인의 웃기는 코메디를 완성해주었을지도 모르는데..쯔쯔...


2) 역사학자 주쉐위안???
해당 인물은 어디까지나 물리박사이다. 역사에 관련된 학문을 공부한 적이 없다. 물론 스스로 공부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는 역사학자를 말을 붙여주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가 채택하고 있는 방법론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국의 유사역사날조가(환빠들)이 연상된다. 근거도 없고, 증거도 없고, 적당히 그럴싸하게 포장한 것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더 문제일지도...


3) 헝가리인은 기본적으로 우랄인종이다.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무려 물리학자이면서 자칭 역사학자인 분이라서 인종학 혹은 유전학 또는 민족학이라고 불리는 쪽에 너무나 어두우신듯 하다.

소호족에서 분화되어 나온 여진족 후예라는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는 그냥 넘긴다. 대답할 기운도 없다. 참고로 이 분은 무려 진시황이 여진족의 후예라고 하시는 분이시다. 주석으로 그의 주장을 넣어놓을 터이니 심심하면 보도록 하자. 관련 전공자는 즐겁게 웃을 수 있을 것이다[각주:1].


4) 언어학이 장난감이냐?

위의 내용은 언어학, 특히 비교언어학이나 역사언어학의 기초과정만 들어봤어도 헛소리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수 있는 엉터리 방법이다. 그런데 그런 엉터리 방법은 환빠들도 무지막지 잘 사용하는 것이다. 이 기회에 잠시 길게 설명해볼까 한다.

사르코지 대통령 부친인 팰 사르코지(Pal Sarkozy)는 헝가리 귀족 출신으로, 그의 헝가리식 풀 네임인 '나기-보차이 사르코지 팰(Nagy-Bocsay Sarkozy Pal)'을 해석해보면 그가 기원전 황하 일대 중원(中原)에 출현했던 사오하오족에서 분화돼 나온 여진족 후예임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

   '나기(Nagy)'는 헝가리어로 '다(大)'를 뜻하고 '보츠(Bocs)'는 여진족의 성씨(姓氏)인 '푸차(浦察)'를 지칭하기 때문에 '나기-보츠(Nagy-Bocs)'는 고대 여진족의 촌락이었던 '다푸차(大浦察)'를 가리킨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무지 말이 되는 것 같지 않은가? 오오오!!! 진짜 이런가!!!! 라고 생각하신다면 당신은 언어학을 공부한 적이 없으신 분이시다. 위와 같은 식의 용어를 언어학 관련 전공자에게 물어본다면 하늘을 보며 탄식을 하거나 온갖 짜증을 다 내거나....당신을 팰 수도 있다 -_-

위와 같은 방식으로 유명한 것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중국어에서 包(bao)는 가방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영어에서는 모두가 알다 싶이 bag이다. o는 쉽게 g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중국어와 영어는 일정한 관계가 있다는 식의 논리가 전개되는데 기본적인 발상부터가 글러먹은 것이다. 가장 쉽게 말해서 宝(bao)는 treasure과 개뿔도 대입되지 않는다.

언어학에서는 기본적으로 한두개의 단어간의 관계조합만으로 언어간의 연관성을 설명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몇 십개, 몇 백개의 조합 속에서 규칙성과 연관관계를 찾아내는 것이다. 단! 문제가 되는 것은 "차용어"이다. 혼자만 발전하는 언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는 언제나 다른 언어와 교류를 하면서 발전해 간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다른 언어에 있는 단어나 문법등을 채용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한국어의 70%가 한자어인 것도 대륙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한국어가 발전해왔기 때문이다[각주:2]. 수 많은 차용어들이 유입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어와 같이 역사적으로 명확하게 확신할 수 있는 경우에도 많은 단어들에 대한 고증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서 사회라는 말은 흔히 중국대륙에서 왔다고 생각되기 쉽지만, 실제로는 일본제국시대에 만들어져서 전해진 것이다. 처음 일본에서 영어의 society을 번역하기 위하여 고민을 하다가 중국대륙 고대문헌에 있는 사회라는 단어를 연상했고, 이를 이용해서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뒤에 한반도와 중국대륙으로 퍼져나간 것이다. 이처험 한-중-일 각 나라의 문헌에 언제 사회라는 단어가 언제쯤 출현을 하였는지부터 조사해가면서 논증을 해야되는 문제이다.

이처럼 차용어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역사적인 증거를 제기해주어야 한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중국어의 가방과 영어의 가방의 발음이 같다고 해서 차용어라는 소리는 헛소리에 불과하며, 대단히 신중하고 꼼꼼한 논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에서는 꼼꼼하고 신중하게 논증한 사료자체가 없어서 왠만큼 인정 받는 차용어의 예시도 어디까지나 "설"로서 존재하며 새로운 자료가 나오면 언제든지 뒤짚어 질 수 있다.

그럼으로 위의 방법론 자체야 하나의 방법으로 존중할 수 있지만, 위의 방법론은 어디까지나 간접증거로서 제시를 해야할 수준에 불과하며, 그것이 절대 핵심 증명이 될 수 없다.


5) 찌질될 골수 반중을 위해서...
참고로 해당 내용은 중국의 대부분의 네티즌에 의해서도 까이고 있다. 물론 저런 글을 믿는 인간도 의외로 많이 있지만 말이다. 오히려 중국에서는 한자를 문자로 채택하고 있는 만큼 한국보다 고문에 대한 접근이 더 쉬워서 개소리가 그나마 적다. 이렇게 말하면 "중국 옹호냐?"라고 할터인데, 어디까지나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 해당 글에 대한 덧글에서 새로운 중국어 표현 하나를 발견하였다. "棒子病毒" 빵즈 바이러스이다. 빵즈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한국인에 대한 비하표현이다.....쓸데 없이 역사를 가지고 장난을 치거나 부풀리는 짓거리를 보며 "빵즈 바이러스"라고 하다니, 분명 문제가 있는 표현이고, 와전된 것이 많으니 이에 대한 교정이 필요하지만, 이런 생각이 있다는 것 자체가 한숨이 나온다. 후...




요즘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일(컴퓨터 2번 재설치 및 재세팅, 공증관련 업무?!들, 새학기 맞이 삽질등등)들로 바쁘기도 했고, 시간이 남는 틈틈히 새로 지른 아이폰(중국 아이폰 3G 구매 보고서)으로 삽질들을 하고 있었던지라 글을 올리지 않았더니 "유목민~~~"님이 위의 글을 추천해주셔서, 적당히 휘갈겨 보았습니다.(...다음부터는 직접 쓰셔서 보내주시면 익명으로 올려드리겠습니다.....직접 쓰시지...절 시험하신 겁니까!!....훗..이젠 아셨죠? 비루한 실력인거..ㅠㅠ..) 당분간은 좀 바쁜지라;;; 하나 하루에 글 하나나 올릴 수 있을런지......"중국사는 장난감이다"나 하루에 한 번정도 올릴듯 하고요. 머..특별히 원하시는 것 없죠?;;;

아. 그리고 밀린 덧글은 시간이 없어서^^ 나중에 몰아쳐서 대답하겠습니다.
지금은 정신이 없군요.

  1.  很早就有人说“秦”是戎狄。但说第一次统一中国就是外族的武功,中原百姓会觉得脸上无光。因此,历史多的是在谴责秦始皇的专制,却很少有人谈论秦部落的种属。            西周时,“秦”是一个西戎部落;其他西戎部落作乱时,它总是站在周王室一边。公元前七七一年,周幽王无道,怨臣申侯引犬戎伐周,杀幽王骊山下;周平王是靠秦襄公的护送,去洛阳避祸,从此东周才起了头。东周王室感激这番效忠,才将秦部落封为诸侯国。然而,这个迟到的诸侯国却又很有作为,它不断吸取中原先进文化,引进了商鞅这样的变法人才,移风易俗,富国强兵,战国时成为七强中的最强,最后一举统一了中国。            秦是一个游牧的部落,《史记·秦本纪》两处说到它的一个祖先的事迹,一说:“大费拜受,佐舜调驯鸟兽,鸟兽多驯服,是为柏翳。舜赐姓嬴氏。”又说:“[周]孝王曰:‘昔伯翳为舜主畜,畜多息,故有土,赐姓嬴。今其后世亦为朕息马,朕其分土为附庸。’”看来,秦部落善长畜牧养马,曾受到夏、周两代王室的重视;至于“赐姓”之说,只能姑妄听之了。            《后汉书·西羌传》说:“及昭王立,义渠王朝秦,遂与昭王母宣太后通,生二子。至[东周]王赧四十三年(昭王三十五年),宣太后诱杀义渠王于甘泉宫,因起兵灭之,始置陇西、北地、上郡焉。”这说的是秦宣后主持并吞邻族,顺便扯出了她年轻放浪的轶事。原来是“武王”在位四年故世,其异母幼弟“昭王立”;相邻的义渠部落酋长“朝秦”,竟与昭王的寡母宣后连生二子。昭王是秦始皇的曾祖父,在位五十三年,他即位时母亲宣后还很年轻。三十几年后她所杀的义渠王,当不会是过去的情人。 [본문으로]
  2. 이렇게 말하면 사대주의라고 하는 인간들이 있다.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고유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그건 사대주의가 아니고 반대로 대단하다는 칭찬이다. 에휴... [본문으로]
从民族史的角度来看,汉民族本身就是历史上众多民族相互融合的产物。实事求是地说,“凡历史种族皆为杂种。汉种为历史种族,则吾人研究中国历史,有得下一个公例:汉种为杂种。[각주:1]”在汉民族这一大家庭中,就有中亚粟特民族的成分。今天,但凡姓氏为康、安、米、史等诸性之人,都极有可能为粟特人之后裔,但今天无可争议都已成为汉民族之一员。
陈海涛,刘惠琴《来自文明十字路口的民族--唐代入华粟特人研究》商务印书馆,2006年,pp.1

날림번역 :
민족사의 각도에서 보아서 한민족(汉民族)은 본래 역사상의 수 많은 민족들이 서로 융합하여 만들어진 산물이다. 사실만을 논한다면 "역사상의 모든 종족은 모두 잡종이다. 한종 역시 역사상의 종족이며, 우리가 중국역사를 연구한다고 하였을 때, 반드시 다음의 규칙이 있다. : 한종은 잡종이다." 한민족(汉民族)이라는 대가족 속에서 바로 중앙아시아 소그드(粟特 sogdian)의 부분도 있다. 오늘날 강(康),안(安), 미(米), 사(史)등의 성을 쓰는 사람들은 거의 확실히 소그드인들의 후예들이다. 물론 지금이야 말할 것도 없이 한민족의 일부분이다.


1. 이것이 "중국" 혹은 중국의 "다민족 역사관"의 힘이다.
중국은 다양한 민족이 융합되어서 현재의 한민족을 이루고 있다고 설명한다. 사실 현재의 민족사 뿐만이 아니라 기본적인 역사관을 보았을 때 이는 참이다. 역사상의 어떠한 민족도 완전한 순수한 혹은 단일한 민족은 없다. 한국 사학계 역시 오래전부터 이와 같은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단일민족의 신화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도 염황자손(炎黄子孙 염제와 황제의 자손)이라는 식으로 단일민족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려고 하나, 현실적인 내부의 민족문제와 기본적으로 정해져 있는 다민족역사관으로 일정한 브레이크가 걸릴 수밖에 없다. 이와는 반대로 한국에서는 순수를 아직도 강조하고 있는 측면이 크다.

문제는 이러한 다민족 역사관은 상당한 포용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소위 말하는 한화(汉化)가 지금까지 비교적 성공리에 이루어져왔다고할 수도 있다. 다민족 역사관을 통하면 수 많은 탄력이 생긴다. 외부의 충격에 대해서도 상당히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고, 내부적인 문제도 나름 유연하게 처리할 수 있다.


2. 한국도 다민족 역사관을 채택해야 될 것이다.
한국도 이제는 그만 혈통민족사 혹은 문화민족사를 버리고, 다민족 역사관으로 가야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념적으로는 그럼으로 인하여 한국인들이 보다 자유로운 생각과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이미 다문화가정과 한국 거주 외국인들이 많아 지고 있고, 2050년이 되면 10명 중에 한 명이 외국인이 된다. 지금처럼 단일민족 역사관으로 가면 한국의 순혈민족주의와 외국인들 사이에서 충돌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빨리 다민족 역사관을 채택하여야지만 지리적인 위치상으로 쉽게 침략을 당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원활하게 다자간 외교와 무역을 할 수 있는 한국의 지리적 위치에 있어서 유연한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한 활발한 교류를 가능하게 한다.


3. 지금 쓰고 있는....

민족사의 각도에서 보아서 한민족(韩民族)은 본래 역사상의 수 많은 민족들이 서로 융합하여 만들어진 산물이다. 사실만을 논한다면"역사상의 모든 종족은 모두 잡종이다. 한종 역시 역사상의 종족이며, 우리가 한국역사를 연구한다고 하였을 때, 반드시 다음의규칙이 있다. : 한종은 잡종이다." 한민족(韩民族)이라는 대가족 속에서 바로 중앙아시아 소그드(粟特 sogdian)의 부분도있다. 오늘날 강(康),안(安), 미(米), 사(史)등의 성을 쓰는 사람들은 거의 확실히 소그드인들의 후예들이다. 물론 지금이야말할 것도 없이 한민족의 일부분이다.

한(汉)을 한(韩)으로 바꾸기만 하면 되는 이 간단해 보이는 것이...생각보다 힘들다....한국은 중국의 동시대에 비해서 사료가 너무 부족해!!! 크어어어어어!!!!! 머.그래도 몇몇 본적의 성씨는 빼도박도 못할 고증을 끝냈다만...역시 부족해...아직은 반박이나 증거부족이라고 할 가능성이...ㅠㅠ


  1. 冯承钧先生曾为《唐代华化蕃胡考》,原载《东方杂志《27卷17期,收入作者《西域南海史地考证论著汇辑》,中华书局1963年版,第133页。 [본문으로]

위의 지도는 클릭하면 확대되어서 크게 나옵니다. 잘 보이지 않는 분은 클릭!

왼쪽의 지도는 한국의 환단고기빠들이 환국 혹은 대쥬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영역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의 지도는 중국의 중화빠들이 만든 대중국 영역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저는 이 말을 꼭 하고 싶네요. "니들 대체 다른게 머냐? 웃기는 쉐리들 -_-"

둘 다 우리민족이 최고이고, 최고여야 된다는 발상에서 어떻게든 크게 만들려고 삽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차이를 나눈다면, 중국의 중화빠들은 미래의 영토나 여기서는 소개를 안했으나 몽골의 원나라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한국의 환빠들은 증거도 하나 없이 상고시대에 자신들 마음대로 환국이니 대쥬신따위의 영역을 만든 것이다.

환빠들도 슬슬 "미래의 대쥬신" 지도나 그려보는 것은 어떠한가? 중화빠들도 "상고시대의 대중화"을 그려보고 말이다. 그리고 환빠와 중화빠가 손 잡고 그냥 세계는 우리꺼~ 라고 하지? 둘이서 참~~ 잘 어울리는데 말이야^^


정리 : 어느 나라에나 스스로의 자존심을 스스로 세우지 못하고, 외부의 것에 의지하려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 정도가 지나치면 환빠나 중화빠 같은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들은 저런 길로 절대 가서는 안될 것이고,

상대국의 저런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 사람만으로 상대국을 평가하지 말고 그냥 "미친개에 물렸구나"라고 생각하면 된다.


덧 : 너무 시니컬하게 적은 듯하다. 나름 유머러스하게 쓰려고 계획했었는데 쓰다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만두님이 방명록을 통해서 최근 역사스페셜에서 방송한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신라의 후예였다!"에 대해서 문의를 해주셨습니다. 저도 한때 역사스패셜을 좋아해서 역사을 너무나 좋아하게 되었던 만큼, 최근 역사스패셜이 주류의 의견보다는 소수의 의견이나 심지어 유사역사학의 해석쪽으로 향하며,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소재만을 내보내고 있었다고 걱정되고 있었습니다.

금나라쪽은 제 전공은 아닙니다. 제가 비록 북방민족사전공으로 막말로 통사로 이것저것 다 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역사학에도 세분화된 전공이 있고, 그 외의 사항에 대해서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그래도 명색이 북방민족사전공이고, 그래도 일반분들보다는 조금은 더 고문이나 방법론에 익숙하기에 써보겠습니다. 그냥 기본적인 역사학의 방법론을 이용해서 여러분들이 되도록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판해보겠습니다[각주:1].

* 어떤 분이 덧글로 실제로 보라고 해서 보고서 추가부분을 작성하였습니다. 기존의 것에는 수정도 필요없다고 생각됩니다. 차라리 안보는게 역사스페셜에 대해서 더 좋게 생각할 수 있었을듯 합니다.


* 잠깐 쓴소리 : 중원에서 최초로 한족을 밀어낸 금태조 아골타라는 설명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가? 화제성도 좋지만 남북조시대의 북조와 오호십육국은 한족을 밀어내지 않았다는 것인가? 보통 한족으로 알고 있는 수당도 선비(鲜卑)족이 통치계급이라고 말해지는데 이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것도 역사왜곡이다.[각주:2]


1) 금태조 아골타의 시조에 대한 사료.(그냥 뛰어넘어도 무방-_)

1- 金之始祖諱函普 初從高麗來 年已六十餘矣阿古廼好佛 留高麗不肯從曰 後世子孫必有能相聚者 吾不能去也 獨與弟保活里俱. 始祖居完顏部僕幹水之涯 保活里耶懶 其後胡十門以曷蘇館太祖自言 其祖兄弟三人相別而去 蓋自謂阿古廼之後 石土門迪古保活里之裔也 及太祖敗遼兵于境上獲耶律謝十乃使梁福幹答剌招諭渤海人曰 女直渤海本同一家 蓋其初皆勿吉之七部也 始祖至完顏部居久之 其部人嘗殺它族之人 由是兩族交惡鬨鬭不能解 完顏部人謂始祖曰 若能為部人解此怨 使兩族不相殺部 有賢女年六十而未嫁 當以相配仍為同部
[元] 脱脱撰《金史》[각주:3]卷一本紀第一

중요부분 해석 : 금의 시조는 함보(函普)로서 고려(高麗)에서 왔을 때 나이가 60여세였다.......동생인 보활리(保活里)만 같이 와서, 시조는 僕幹水연안의 완안부(完顏部)에 살았고, 그 동생은 耶懶에 살았다.......발해인에게 말하기를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가족이다. 처음 물길(勿吉)의 7부족중에 하나였다. 시조가 완연부로 와서 오래 살았는데...."

2- 女真酋長[각주:4]乃新羅人號完顏氏 完顏猶漢言王也 女真以其練事後隨以首領讓之兄弟三人一爲熟女真酋長號萬戶其一適他國  完顏年六十餘 女真妻之以女亦六十餘 生二子 其長即胡來也自此傳三人 至楊哥太師無子 以其姪阿骨打之弟 謚曰文烈者 爲子其後楊哥生子闥辣乃令文烈歸宗
[宋]洪皓[각주:5]撰 <松漠記聞>

중요부분 해석 : 여진의 추장은 신라인으로 완안씨라고 불렸다. 완안추장은 한나라 말로 왕이라는 말이다.

3- 是月生女眞完顔阿骨打稱皇帝更名旻國號金. 其俗如匈奴諸部落無城郭分居山野無文字以言語結繩爲約束. 土饒猪羊牛馬馬多駿或有一日千里者. 其人鷙勇. 爲兒能引弓射鳥鼠及壯無不控弦走馬習戰爲勁兵諸部各相雄長莫能統一. 其地西直契丹南直我境故嘗事契丹及我朝. 每來朝以麩金貂皮良馬爲贄我朝亦厚遺銀幣歲常如此. 或曰: “昔我平州僧今俊遁入女眞居阿之古村是謂金之先.” 或曰: “平州僧金幸之子克守初入女眞阿之古村娶女眞女生子曰古乙太師古乙生活羅太師.
《高丽史》卷14 世家

중요부분 해석 : 혹자는 "우리 평주(平州[각주:6])의 승려 금준(今俊)이 고려 도망쳐서 여진의 아지고촌(阿之古村)에 머물렀던 것이 그 금의 시조라고 한다" 혹자는 "평주의 승려 김행(金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서 여진 여자와 결혼을 해서 자손을 낳았고, 고을태사(古乙太師)라고 불렸다.  고을의 아들은 활로태사(活羅太師)라고 했다."

4- 김부(경순왕敬順王)가 비록 항복하여 고려왕이 합병하였으나 김부의 외손 완안아골타는 곧 권행의 후예로서 능히 중국을 갈라 다스려 백년동안 대를 이었으니... (동명해사록 [각주:7]1636년)

5- 만주원류고는 사료적 가치가 많이 떨어지기에 아예 언급도 하지 않겠습니다. (왜 떨어지냐는 분들은 위한 간단한 설명 : 해당 사건이 일어난 시기와 너무 떨어져 있으며, 만주원류고는 노골적으로 만주족만들기의 일환으로 벌어진 정치적인 역사서이기 때문입니다.)


2. 왜 아골타가 신라인의 후예인가?
1- 역사사료의 위험성.
이미 쉽게 풀어본 역사사료의 위험성과 환빠신라왕족은 흉노인인가?을 통해서 살짝 알려드렸다 싶이 모든 역사사료는 일단 의심부터 하고 들어가야된다. 특히 동방쪽에서 관방에 의해서 집필된 책들은 기본적으로 일정한 정치적 목적이 들어간다. 개인이 쓴 것도 어디까지나 그 개인의 인식적 한계가 들어가게 된다.

특히 시조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에서는 더욱 더 조심을 하여야 한다. 시조를 써놓은대로만 믿는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하고 사실과 다른 경우가 널리고 널렸다. 물론 그러한 시조를 써놓은 문제 자체에 대해서는 그 역사인식에 대한 또 다른 각도에서의 접근이 가능하지만, 시조라고 써 놓았다고 그 사람은 분명히 시조다! 라고 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한족의 시조는 염황(염제와 황제)라고 한다. 이들은 실존인물이라기보다는 당시의 모습을 투영하는 하나의 거울로서 생각을 해야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느 왕조의 시조라고 써놓은 것은 사실이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이 투영된 허구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이다.

2- "금사"와 "송막기문" 어느 것을 믿을 것인가?
위의 내용을 보면 아시겠지만, 금사에서는 함보가 고려에서 왔다고 하고, 송막기문에서는 신라에서 왔다고 쓰여져 있다. 참고로 중국사서에서 고구려와 고려는 모두가 高丽(고려)라고 쓴다. 다시 말해서 구별이 없다. 그렇다면 관방에서 만들어낸 고려설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송막기문에서 말하는 신라설을 믿을 것인가?

일단 각각이 책이 쓰여진 배경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아야한다. 보통 역사애호가들은 이 과정을 뛰어넘기 쉽상이다. 사료를 볼 때는 그 사료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

금사는 원나라에서 만들어진 역사서로서 금나라의 사료들이 풍부하였기에 비교적 잘 만든 정사로 평가를 받는다. 금나라에서는 스스로의 조상을 밝히기 위해서 직접 여진족 노인들에게 물어보고 다녔을 정도로 스스로의 역사사료 수집에 열정적이었다. 그리고 그 사료를 바탕으로 역사를 서술한 것이기에 거의 문제가 없다.

그에 비하여 송막기문은 어디까지나 송나라 사람이 금나라에 머무르면서 얻어들을 이야기로 쓰여진 책이다. 물론 송막기문은 금나라가 있을 당시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훌륭한 사료이지만, 개인의 자료수집능력의 한계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요즘의 "~카더라"통신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사도 역시 이와 같이 "~카더라"이며, 아예 대놓고 "혹자는 말하기를"이라고 하고 있다.

그래서  본인으로서는 금사를 기본으로 고려설을 채택하고자 한다.

3- 금사의 고려는 고구려인가? 궁예의 후고구려인가? 고려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나오는 고려는 고구려인가? 아니면 고려인가? 그것을 위해서는 숫자놀이를 해야된다. 함보는 아구타의 8대조이다. 아구타의 생존 연대 1068~1123으로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으면 함보는 대략 240년전에 생존했던 사람으로서 약 830년 전후반이 된다. 830년 전후반 통일신라중반기이자 발해 중반기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것이 668년이었고, 고려가 세워진 것은 918년. 금사가 만들어진 것은 1344년이었다.

추가 : 혹자는 조혼(일찍결혼함)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북방민족들의 특색을 간과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북방유목민족사회의 재미있는 모습중에 하나가 장남이 아닌 막내가 부모를 계승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그래서 계승주기는 더더욱 내려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간단한 예로 유명한 징기즈칸가문을 예로 보면 :

칭기즈칸(철목진) 1162~(1227)
토우레이(拖雷) 1193~1232(칭기즈칸의 4째아들)
멍거(蒙哥)        1208—1259(토우레이의 장남)
원세조(忽必烈) 1215~1294(토우레이의 차남)

칭기즈칸과 원세조는 할아버지와 손자로 53년차이가 나게 된다. 이렇게 주기가 25년차이가 나게 된다. 조혼이라고 하더라도 막내계승이나 여유시간을 주고, 아래쪽에서 언급했던 함보 자신이 나이를 먹어서 아이를 낳다는 것으로 20~30년을 추가하면 8대조 x 25년 + 20년 = 220년이 된다. 줄여도 200년차이가 된다. 그럼 줄여서 봐도 870년전후가 되므로 전체논리에는 문제가 없다고 본다.

또한 멍거와 원세조처럼 형제계승까지 생각을 하게 되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어찌되었든 줄어들지는 않는데 그것까지 필요 없으리라 생각되어서 패스.


* 이 부분에서 역사스패셜은 함보가 여진으로 들어온 시기를 신라말, 고려초로 잡고 있다. 이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셈법이다.  이해는 되지만 틀렸다고 생각된다(세대주기 20세, 아골타를 7대손으로 놓고, 막내계승따위 무시하면 가능-_). 아구타의 출생연대는 1068년이다. 그리고 신라말-고려초는 넓게 잡아서 900~1000년 사이이다. 8대가 160년 안에 일어나려면, 대략 20년을 한 세대로 잡아야 된다. 아무리 당시의 수명이 짦았다고 하더라도 이건 좀 심한 셈법이라고 본다. 짦게 잡아도 25년쯤으로 봐주는게 합당하다. 기록 자체에서도 함보의 나이가 많았음을 이야기하니 말이다. 한마디로 정말 아골타의 출생년도를 고려했는지 의문이다. [각주:8]

금사를 만드는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아골타의 9대 위의 조상이 현존하는 고려에서 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은 명확하다. 그렇다면 금사에서 말하는 고려는 고구려일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는 이미 668년에 멸망을 하였다. 그렇다면 함보는 굳이 따지자면 고구려의 후예라고 하는 편이 더 합당할 것이다. 신라의 후예라는 것과 고구려의 후예라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이다.

이에 대해서 역사스페셜은 이 두사료를 그냥 합쳐서 "고려에서 온 신라인"이라고 말해버린다. 이는 분명히 잘못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려가 고구려도 될 수 있다고 생각을 조금만 한다면 이런 식으로 단정지을 수 없다. 본인의 글을 잘 보면 알겠지만, 일정 부분이 되면 결국 "단정"이나 "확정"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역사 스패셜은 당당하게 해버린다. 이것은 다른 문제도 아니고 그냥 틀린 문제다.

추가 : 만약 25년으로 잡고 아골타가 8대라고 계산을 한다면 2대의 출생연도가 920년까지 내려올 수 있음으로 문장의 고려는 궁예의 후고구려가 될 수도 있다. (후고구려를 생각하지 못했었다. 죄송~ 그럼 문장에서 나오는 큰형이 불법에 빠졌다는 것도 궁예와 연결시켜서 상상해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후고구려라면 900년전후로 계산을 하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다. 물론 이 경우에는 신라인일 가능성은 낮아지며, 고구려 후예의 일파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늘어난다고 본다.

-- 《金史•高丽传》中说,“唐初,有粟末、黑水两部,皆臣属于高丽。" "당초, 속말, 흑수 두부족은 모두 고려(고구려)에 속해 있었다." 传 뒤의《赞》에서 :“金人本出之附于高丽者”。"금인은 본래 고려(고구려[각주:9])에 있던 자이다."

현재까지의 생각과 자료를 바탕으로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추론은 :
"함보는 고구려의 후예[각주:10]로서, 궁예의 후고구려에 있다가, 여진부족(완안부)으로 와서 현지인들과 결혼을 하고, 점차 여진화가 되었다. 혹은 여진으로 돌아갔다"



4- 송막기문과 고려사의 사료를 어찌 봐야되는가?
비록 본인 스스로 해당 사료를 채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료는 거짓말을 하지만 진실을 살짝살짝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신라인이나 고려인이라고 말한 부분에서는 일정한 역사전 진실이 같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당시 시대적 정황을 고려해서 볼 때, 신라말과 고려초의 혼란기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피해서 동북쪽으로 유입되었고, 금나라 성립되기 전에 그 같은 사람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선조에 대한 이야기에서 고구려-신라-고려의 다양한 계열의 사람들이 와서 혼재되어 있다고 추측해볼 수 있고, 사실에 비교적 근접하리라 생각된다.


5- 그.러.나. 금나라왕족이 정말 같은 "민족"일까?(이것이 핵심이다.)
핵심 중에 핵심이다. 고구려의 후예였던, 신라의 후예였던, 고려에서 간 사람이었던간에 그들을 같은 민족으로 보아야 하나? 혈연만 연결이 되면 당연히 같은 민족이냐는 사람들에게는 의문의 여지가 없이 같은 민족이다. 그러나 문화가 완전히 달랐다.

 "풍속이 흉노와 같아서 따로 성을 만들지 않고 산과 들에 흩어져 살았다. 문자가 없어서 끈을 묶어서 약속을 하였다"俗如匈奴諸部落無城郭分居山野無文字以言語結繩爲約束(고려사)라고 말했다는 것은 고려의 문화속와는 너무나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함보는 여진족과의 통혼을 하였고, 그의 후손들은 더욱 그러하여 사실상 여진인이 된 혼혈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의 예를 들어보면 중앙아시아로 가서 지금은 "고려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현재의 한국인과 외모도 다르고, 쓰는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데 같은 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에 대한 답은 서로 다르리라 생각된다. 정답은 없다. 그러나 이미 다른 문화에 동화가 된 상태에서는 다른 민족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합당하리라 생각한다.

또한 금나라의 지배계층이 고구려든 신라든 한민족의 선조 중에 하나라고 가정을 해도 역시 문제는 남아 있다. 금나라의 기본 민족 구성은 어디까지나 지도계층 역시 여진이 주류였다. 그런데 왕족만이 지도자라고 한국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는가? 이에 대해서는 아래 발해와의 관계 부분에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3. 금나라와 발해와의 관계
함 보를 시조로 둔 금황실은 발해인을 왕비로 맞는다. 금나라의 성군 세종의 어머니, 4대 황제 해릉왕의 어머니는 모두 발해 여인이었다. 또한 아골타는 발해인을 신뢰하여 발해유민 장호를 새로운 수도 북경 건설 책임자로 등용한다. 발해는 대제국을 경영해본 경험이 있었다. 금나라는 이런 발해의 경험을 이용하여 국가체제를 확장해나갔던 것이다.(역사스패셜)

*원래는 하나하나의 원문을 찾아서 대조를 해봐야지만, 환빠계열도 아니고 명색이 역사스패셜인데 이런 사실왜곡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무엇보다 귀찮아서....원문은 찾지 않도록 하겠다. 마음 착하신 분이 있으면 원문을 덧글로 달아주시길........이런다고 때릴꺼야? ^^::

위에서 본인이 해석한대로 고구려의 후예이고, 요동지역의 역사를 생각한다면 너무나 당연히 발해와의 연관관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역사스패셜은 발해를 "당연히" 한국의 역사로 생각하고 한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상당히 문제가 있는 생각이다.

발해는 신라의 수 많은 사료에도 나오듯이 신라자신이 같은 민족으로 보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발해의 상층부는 한국학계의 주류의견에 따라서 고구려의 유민이라고 하더라도, 하층민은 분명히 말갈계열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금나라는 그것이 더욱 심해져가서, 말갈의 후손인 여진들의 상층부 진출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대다수가 한국에서는 "다른 민족"으로 분리되는 말갈이나 여진인데, 이것을 같은 민족이 세운 국가로 볼 수 있는가?

만약 이것을 같은 민족이 세운 국가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통치계급만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역사관이다. 물론 이런 역사관 자체도 성립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대중"이 아닌 몇몇 "엘리트"에 편중된 역사관으로 비판을 받았었고, 만약 이 생각을 확대하면 일본제국에 통치를 당하던 시대는 한국의 역사에서 빠져야 된다. 통치계급이 "다른 민족"인 일본이었으니까 말이다. 스스로 모순이 일어나는 이런 생각이 과연 합당한가? 단 이곳에도 결론이나 확정은 없고, 있을 수도 없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서로 다른 생각들이니 말이다.

* 여진과 발해는 원래 한가족이다(女眞渤海同本一家 금사)을 이용해서 긴밀한 관계를 이야기하려는 사람도 있다. 분명 금나라의 형성과 발전 여진과 발해가 힘을 합쳤다는 점은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해당 기사의 앞뒤 내용을 살펴보면 조금 다른 각도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반복을 풀고 협력을 하기 위해서 숙신이라는 과거의 것을 끌어다가 같은 가족이라고 한 것이다. 만약 이런 논리에 박수를 보낸다면, 분명 다민족으로 이루어졌고, 수 많은 북방민족이 있었던 중국의 상고사도 그냥 싹다 염황자손의 나라가 된다고 인정해야된다는 말과 다를바가 없다. 한마디로 저런 역사를 가져다 붙인 것이 보이는 정치적인 말을 100% 믿는 것 자체는 문제이다.


4. 청황실의 성씨가 김씨
愛新覺羅(애신각라)을 만주어로 해석을 하면 금족(金族)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를 신라김씨와 연관을 시키는 것은 개그에 가깝다. 그냥 김씨면 다 같은 민족이고 혈연이라는 생각은 대체 어떻게 나온 것인지 궁금할 뿐이다.[각주:11]

* 애신각라에 대한 웃기는 떡밥 하나
아직도 많은 분들이 믿고 있는 떡밥 하나가 있다. 愛新覺羅를 해석해서 "신라를 사랑하고 깨우친다"정도로 이야기되는 웃기는 짓이다. 해당 말은 愛新覺羅을 愛覺新羅로 순서를 완전히 바꾸어서 고대한어를 "지 맘대로" "엉터리로" 해석하는 웃기는 짓거리다. 근거도 없이 이따구로 순서를 바꾸는 것은 코메디일 뿐이다.

김씨의 선조는 여러가지가 있다. 하나의 성씨가 하나의 선조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개그이다. 일단 유명한 것은 남흉노의 김일재이다. 그러나 송대만 해도 김씨는 이미 5개가 넘었다. (古今姓氏书辩证 P285) 또한 요동에 있던 여진의 지리적입장에서도 북방민족들의 영향을 받았고, 흉노계열을 높게 생각하여서 김씨성을 채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북방민족에게 있어서 금씨의 유래는 대장장이면서 동시에 샤먼이고 지도자였던 보편적인 문화와 연관을 하여서 나온 서로 다른 성씨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쉽게 말하면 세계 어디에서나 태양숭배나 새숭배 사상이 나타나지만, 이것은 인류의 집단적인 무의식 혹은 공통적인 경험으로 서로간의 교류가 없이도 나타나는 현상인 것과 같은 것이다.

얼마 전에 신라의 김씨와 흉노 김일제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라고 신라왕족은 흉노인인가?에서도 말한 바가 있다. 간단히 요약하면, 시조에 대한 서술을 그리 믿을 수 없으며, 송대에 지어진 古今姓氏书辩证에서도 서로 다르게 구별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청나라가 세워질 무렵이 되면 성씨가 같다고 같은 조상이라는 것은 허망한 환상이 되어버린다. 이미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대로 성씨를 만들고 사용해버렸기에 복잡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성씨를 가지고 같은 민족!이래버리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시대이다. 혹자는 만주원류고(满洲源流考)에 있는 몇가지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만주원류고 자체가 청나라에서 계획적으로 민족의식을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진 책이라는 것을 정말 모르고서 이야기하는 것일까?


5. 오십보 백보의 한국역사관과 중국역사관.
고 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금나라, 청나라로 이어지는 만주의 역사는 우리 민족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있다.한족의 영토,중원을 만주대륙에 합병하여 오늘의 중국을 완성한 여진족, 그들 선조가 신라인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국수주의적 우월감을 주장하자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반역사적인 동북공정 논리에 정면으로 대응하고 우리 역사를 지켜내어 향후 동아시아와 한반도 지역에 평화의 논리적 근거를 재확인하자는 것이다. (역사스패셜)

위의 글을 한마디로 대답을 하면 "미안하다. 웃기다." 가 되겠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반역사적이라는 말이 왜 나오는 것인지? 그러면서 동북아시아와 한반도 지역에 평화의 논리적 근거를 확인한다고? 거..참...

과거에도 수차례 설명했지만, 한국의 민족역사관이나 중국의 다민족역사관 모두 문제가 있으며, 동시에 하나의 역사관으로서 존중받아야만 한다. 중국의 다민족역사관은 중국이라는 나라가 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져 생겨난 것이기에 역사적으로 합당한 면이 있다. 그러나 현재의 영토라는 가변적인 기준을 기반으로 하기에 수 많은 문제점과 충돌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한국의 민족역사관은 문제가 없는가? 민족이라는 공동체를 통해서 역사를 분석을 함으로서 지금까지의 통합과정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가능하지만, 반대로 민족이라는 영토보다도 더 가변적인 개념을 가지고 분석을 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한다. 한마디로 동북공정의 몇몇 가지 역사적인 사실 문제가 아닌 그 역사관 자체를 반역사적이라고 한다면 오십보백보의 한국 역사관도 반역사적일 뿐인 것이다[각주:12] : 결론만 말하면 동북공정은 아골타가 신라인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동북공정은 여러 민족이 융합되어서 현재의 중국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고, 아골타가 신라인이더라도 그것도 융화가 되었다고 하면 끝인 문제이다. 대체 머가 근본부터 흔들린다는건가? 동북공정을 근본부터 흔들려면 중국이 단일민족이었다는 증거를 제시해야된다. 기본적으로 동북공정도 이해를 못하고 있는데....(미안...다시 웃자.ㅋㅋㅋㅋ)



  1. 제가 중국이라는 한계로 직접 방송을 보지는 못하고, 역사스패셜 홈페이지에 있는 관련 내용만으로 비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 양해부탁드리고 실제 방송을 본 분을 자세한 내용 설명 혹은 비판 부탁드립니다. (너무 느려ㅠㅠ) [본문으로]
  2. 예시는 훨씬 더 많다. 하다못해서 진시황도 서융(西戎)과 혈연적인 연결이 있었다는 학설이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어쩔건데? [본문으로]
  3. 1343년에 시작되어 다음해 11월에 완성. 예상되는 참고 금나라 역사서 《太祖实录》《睿宗实录》《先朝实录》《归潜志》《壬辰杂编》 [본문으로]
  4. 판본에 따라서 "女眞之主" "여진의 임금" 이라고도 함. 같은 의미이고 조금 높여진 표현일 뿐임. [본문으로]
  5. 홍호(1088~1155) 1129년 금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15년동안 감금되어 있다가 돌아옴. (고려중기) [본문으로]
  6. 현재의 황해도 평산. [본문으로]
  7. 동명해사록(東溟海槎錄)은 한국고전번역원에 올려져 있으나, 현재 중국에서 고전번역원에 접속이 불가능해서 원문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일단 역사스패셜의 해석을 그대로 가져놓도록 하겠다. [본문으로]
  8. 조혼(일찍 결혼함)을 고려해야된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덧글참조) 그러나 그런식으로 해도 역사스페셜의 논리에서는 140년의 차이가 나야되며, 북방민족은 막내계승도 있었기에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본문으로]
  9. 이는 왕씨고려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인은 시기상으로 아직 왕씨고려가 건립되기 전이었고, 문맥상 위와 같은 고구려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본문으로]
  10. 고구려의 후예라는 것은 범칭이며 보통 한국에서 아직도 이민족이라고 생각하는 말갈이나 여진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 [본문으로]
  11. 이런 식으로 할 수 있다면, 본인 논문은 하루만에 다 쓸 수 있다. 성씨만으로 해서는 안되기에 온갖 방증자료 찾으려고 삽질하고 있는데...띱-_ [본문으로]
  12. [/footnote].

    그럼 제대로 된 역사관이 머냐고? 본인도 모르겠다. 그걸 알았으면 본인은 이미 위대한 역사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분위기 속에서는 어떠한 절대적인 역사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는 서로 다른 역사관들이 공존하게 된다.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것은 논쟁을 할 수 있으나 서로 생각과 해석이 다른 것은 어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간단한 예로 어떤 여자를 보고 그 여자의 가슴크기나 허리굵기를 알아보는 것은 사실자체에 대한 탐구이지만, 내게는 예쁘게 보이지만, 상대방에게는 못생겼다고 느껴질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런 상황에서 너도 예쁘게 봐야돼! 라고 하는 것은 바보짓 아닌가?

    굳이 본인의 생각을 짦게 말하자면, 한국도 이제 다민족역사관을 채택할 때가 되었다. 현재의 한국인이 단일민족의 순수혈통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확정된 "사실"이다. 다양한 민족들이 서로 융합되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방송에서는 단일민족을 이야기하면서 삽질을 해대고 있다. 그만 하자.


    6. 역사스페셜 제작진에게...
    역사학도의 길을 가고 있는 본인은 한때 역사스페셜의 팬이었다. 비록 중국으로 유학을 하러 온 이후에 인터넷의 속도때문에 자주 볼 수는 없었지만, 지금의 역사를 좋아하는 내가 있게 해준 것이 무엇이냐고 하면 그 중에서 분명히 역사스페셜이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최근 역사스페셜은 화제성을 따라서 움직이고,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노골적으로 묻어나오며, 학계에서도 소수의 의견을 전체의 의견처럼 이야기하는 듯한 분위기가 있어서 참으로 안타까울 수 밖에 없다.

    환빠들이 찌질되는 것이면 "지랄하고 있네~"라며 넘길 수 있다. 그러나 "역사스페셜"이다. 아직도 많은 역사 애호가들이 역사스페셜을 얼마나 높게 보는지는 스스로도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진심으로 걱정하는 한 명의 팬으로서 역사스페셜이 진정한 스페셜이 되기를 바란다.

    본 글은 성격상 쓸데 없는 욕설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글의 덧글에 대한 답글은 정상적인 덧글에만 달도록 하겠습니다. 비판은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그러나 근거도 없이 무조건 "너가 틀렸다"는 상대하지 않겠습니다.

    결국 제 성격으로 덧글에 대답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각(09/09/09 09:51) 이후로 엉터리 덧글이나 대답할 필요가 없는 덧글에 대한 대답은 없습니다.

    쓰다보니 아래쪽으로 갈 수록 귀차니즘에 친절한 설명을 못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수정하기도 귀찮고..... 의문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하하;;;;;;...근데 이거 다음뷰의 어떤 항목으로 보내야되려나;;; 왜 역사항목이 없는걸까?;;; 일단 "사회"로 보내본다.

    그나저나..기네;;; 이걸 다 보는 사람이 있긴 하려나;;;


    역사스폐셜을 보고 추가로 적습니다.
    (간단 감상 : 괜히 봤다. 역사스페셜. 해도해도 너무한다. 조금 많이 시니컬 할 겁니다.)


    이유립 : 이 사람을 무려 “역사학자”라고 불러주어야 하나? 알 사람은 안다. 이유립은 유사역사학자일뿐이다. 환빠들에게 신으로 불려지는 인물이거늘....그런 사람이 세운 사당에 아골타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본인 할 말이 없어진다. 역사스패셜. 이렇게 썩었더냐…

    가옥구조와 씨름 : 같은 환경에서 당연히 같은 모습의 가옥구조가 나온다. 또한 여진이 발해에 귀속해 있었다. 이것을 가지고 같은 민족이라고? 또한 씨름 또한 북방민족 전역에 있었던 것이다. 어쩌라고?

    중국학자도 인정했다? : 해당 학설은 중국에서 주.류.가. 아.니.다. 한국에서도 주.류.는. 아.니.다. 한 중국학자가 말하면 모든 중국학자가 인정한 것이 되는것인가? 본인 금사가 전공은 아니지만, 북방민족사 전공으로 어느 정도 흐름이나 주류는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한 중국학자가 말했다고 모든 중국학계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하는 분에게 과연 무엇이라고 말해주어야 할까?

    여진 스스로도 고려에서 나왔음을 인정하였다? : 우리의 조상이 대방에서 나왔으니....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겠습니다.. 我祖宗出自大邦 至于子孫義合歸附 今太師為雅束 亦以大邦為父母之國(《高麗史》世家卷十三高麗史十三)

    우선 이 글은 아골타가 아닌 그의 형이 작성한 글이며, 여진이 불리한 상태에서 어떻게든 아부를 떠는 모습이고, 해당 기록은 어디까지나 고려사에 적혀 있어서 고려의 마음대로 수정되어서 올라갔을 가능성도 있다. 한마디로 이런 정치적인 서신을 가지고 여진의 조상이 고려에서 왔다고 하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흉노와 한나라도 서로 형제지간이라고 했다. 그럼 이 둘도 같은 민족인가? 하하하...정치용어와 실제사실를 혼동하면 안된다. 아! 그러고 보니 터키랑 한국은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데 이것도 같은 민족이고~~~)

    악비의 일 : 송나라의 명장으로서 금나라를 막은 악비는 민족의 영웅이라고 불렸었다. 그러나 다민족역사관에서 이는 문제가 되기에 그것을 수정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한족중심사상이 남아 있고 그래서 몇몇 사람들이 반발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족중심사관에서 다민족사관으로 이행하는 단계인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동북공정이 허구라고 하는데 대체 왜??? 이해자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민족을 포용하려는 것에 박수를 보내야지..쯔쯔...

    아골타가 신라인 후손이라는 것은 동북공정은 근본부터 흔들린다고?[footnote]미안. 나 잠시만 웃고..ㅋㅋㅋㅋ 나 지금 빵~! 터져버렸어. ㅋㅋㅋㅋ [본문으로]

한민족의 형성은 민족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저와 같은 경우 민족이라는 개념은 좁게 잡기에 대한민국이 들어서고서 지금의 한국인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고 봅니다. 그럼 어째서 북한도 같은 민족으로 보느냐? 그것은 남한정부의 정치적인 목표로 인하여 통일을 원하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도 같은 민족이라는 안배가 필요했으리라 봅니다.

이것은 일본과 미국에 있는 2세들을 동포라고 하면서 중국에 있는 2세대들을 조선족이라고만 말하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외교적인 우방이었던 일본이나 미국의 이민자들은 동포라고 해주었으며, 그와는 반대로 적대국이었던 중국으로 간 사람들에 대해서는 동포가 아닌 중국의 용어 그대로 불렀던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이 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해석이며 생각입니다. 한민족을 비롯한 모든 민족은 해석에 따라서 그 형성의 근원을 완전히 달리 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선기원, 고려기원, 통일신라기원, 고조선기원등등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 말을 잘 생각해보면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고, 해석에 따라서 얼마든지 유동적으로 변하는 허위적인 개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歷史/역사잡담] - 언제부터 한민족이라고 불렸는가?


일단 결론부터 내리자면 본인도 모르겠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현재의 사료로는 해석불가능에 가깝다. 굳이 개인적인 판단을 하자면, 거칠게 말해서 신라왕족이 김일재의 후손이라는 것에는 부정적이고, 신라왕실에 흉노의 영향을 받은 동호계열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고 본다. 일단 현존하는 사료만을 토대로 이야기를 해보자. 

참고로 아래쪽의 글은 그리 정리가 되어있지 않다. 본인도 고민중이기에 마구잡이로 사료와 증거을 나열하고 해석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또한 머리속으로만 생각하고 쓰지 않는 부분도 있다. 이점 염두에 두고 보시기를.....

1- 大唐故金氏夫人墓銘
(화질이 너무 안 좋아.ㅠㅠ 화질 좋은 것이나 판독문있으신분? ㅠㅠ)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 하니,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世祖)시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서 온천하에 만연하니 이미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제<石+單>)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황제께서) 그를 발탁해 시중(侍中)과 상시(常侍)에 임명하고 투정후(투<禾+宅>亭侯)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京兆郡)에 정착하게 되니 이런 일은 사책에 기록되었다. 견주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몇 세대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한(漢)이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

문선왕(文宣王.공자의 시호)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에는 성실함과 신의가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독실하고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비록 오랑캐 모습을 했으나 그 도(道)를 역시 행하니, 지금 다시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듯 번성했다.

부인의 증조는 이름이 원득(原得)이시니 황실에서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추증되셨고, 할아버지는 성함이 충의(忠義)시니 한림대조(翰林待詔) 검교좌산기상시(檢校左散騎常侍) 소부감(少府監) 내중상사(內中尙使)라는 벼슬을 지내셨다. 아버지는 성함이 공량(公亮)이시니 한림대조 장작감승(將作監丞) 충내작판관(充內作判官)을 역임하셨다.

조부께서는 문무의 예리함에 여유가 있어 평자(平子.유명한 천문학자)를 궁구하여 관상(觀象)의 규모를 관찰하셨고, 공수자(公輸子.저명한 기술자)를 궁리하여 신과 같은 기술을 갖추셨다. 이에 기예로 천거받아 금문(金門.황실 혹은 조정)에 들어가 여섯 조정을 섬겨 봉록과 직위를 갖고서 처음부터 끝까지 훌륭한 삶을 살다 아름답게 마치셨다.[각주:1]

-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 번역 (원문 전문이나 쫌..ㅠㅠ)


위에서 나오는 김씨부인의 할아버지인 김충의는 신당서[각주:2]에서 명확하게 신라인으로 말해지고 있고, 시대도 거의 동일하고, 관직도 부합하여 사실상 동일인물로 판단된다. 또한 당시에는 아직 성씨제도가 제대로 도입되지 않았기에 성씨위조의 가능성도 별로 없다. 그럼으로 신라에서 온 김씨는 신라왕족의 김씨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신라왕족은 흉노의 후예일까?


2- 신라문무대왕릉비(新羅文武大王陵碑)
侯祭天之胤傅七葉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신라문무대왕릉비를 보면 위에서 나오는 신라왕가 흉노설의 원류를 볼 수 있다. 투후는 바로 흉노 김일재이며 제천지윤은 금인을 바치고 하늘의 제사를 하고 관직에 봉해져서 7대동안 내시로 있다.[각주:3]

그럼 이 것으로 신라왕가의 흉노설이 완벽해졌느냐? 이 증거로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문제는 고고학적으로 김일재가 어떻게 신라로 유입이 되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시에 신라로 무조건 찾아오는 것은 문제가 있고, 분명히 여러번 이동과 거주를 반복하면서 왔을 터인데 그런 흔적이 최소한 지금으로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1-2번 통합적 의문 : 문제의 핵심은 사료 증거가 오직 위의 두 비문뿐이고, 묘지명은 온갖 구라들의 조합이라는 것이 다. 조상이 아님에도 과거의 먼 옛날의 위대한 사람을 끌어와서 억지로 조상으로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혹자는 조상을 속일까라고 하지만, 만약 위로의 몇대 부분이라면 믿을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위의 비문의 "부인의 증조는 이름이 원득(原得)이시니 황실에서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추증되셨고, 할아버지는 성함이 충의(忠義)시니 한림대조(翰林待詔) 검교좌산기상시(檢校左散騎常侍) 소부감(少府監) 내중상사(內中尙使)라는 벼슬을 지내셨다. 아버지는 성함이 공량(公亮)이시니 한림대조 장작감승(將作監丞) 충내작판관(充內作判官)을 역임하셨다."와 같은 부분은 충분히 믿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조상이나 먼 과거의 조상이 쌩뚱맞게 나오는 경우. 구라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많이 언급을 하면 할 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런 이유로 본인은 위의 사료에서 처음부분에 조상이라고 하면서 몇 줄이나 나와버리는 흉노 김일재와 그 후손이 너무나 의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신라라는 당시의 명칭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계속 요동에 머물렀다고만 쓰여진 것은 그런 의심을 더욱 크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설령 김일재가 실제 조상이 아니더라도 신라왕실이 흉노의 김일재를 조상을 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두가지 가능성을 검토할 수 있다. 한가지는 신라에서 자생적으로 金씨 성이 만들어졌고, 훗날 중국땅에 김씨 성을 가진 유명한 사람이 있으니 따온 가능성[각주:4]과 실제로 흉노의 일파가 내려와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고, 그들이 중국에 있는 김일재를 보고 성을 가져다 붙였을 가능성이 있다.



3- 고인돌 유전자 친연성

최 근 고인골의 유전자 정보를 가지고 고대 인종들 간의 친연성을 찾아보려는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유라시아 지역의 흉노 무덤에서 발굴된 유골과 우리나라 고인골 간의 연관성을 추적한 결과는 놀라웠다. 인골들간의 상호관계를 실험한 결과 스키타이와 흉노, 신라가 하나의 그룹으로 묶인 것이다. (역사스페셜)

본인도 북방민족이 많이 넘어왔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위의 그래프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우선 신라와 흉노사이의 간격이 상당히 먼데 같은 그룹으로 묶는 것은 너무나 자의적이다. 연관관계가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나 흉노의 직접유입을 말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고로 이 자료는 잘해봐야 방증이고, 사실상 증거가 되지 못한다. (또한 중국북부의 동시기 인골들의 DNA나 다른 쪽의 DNA 분석과의 비교가 되어 있지 않다. 이는 분명히 문제가 된다.)



4- 김일제(金日磾)와 김알지(金閼智)의 연관성
저자의 신라어 해석 중 김알지를 '금(金) + 금(金)'이라고 본 것은 탁견으로 알지란 Alt(금)에 i가 첨가되어 구개음화(Alt+i 〉 Alji)가 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인용된 알씨(閼氏)는 몽골어 카톤(왕비)에 대비되는 흉노어 아씨(Assi)의 음역이다.(박원길 '새끼 중국인'들 득세하는 사학계에 '통쾌한 도발')


日의 고대 발음은 M이 포함된 "미"와 비슷했으리라 여겨지고 있다[각주:5]. 그래서 현재 중국에서도 김일재의 일만은 mi 로 발음되고 있다[각주:6]. 그리고 알지의 알의 고음은 이와 확연히 다르다[각주:7]. 문 제는 김일제의 일은 분명히 흉노어의 음역이지만, 알지의 알은 흉노어의 음역일 가능성의 증거자료가 부족하며, 설령 흉노어의 음역이라고 하여도 김일제와 김알지가 동인인물이라는 것은 무리가 있는 해석이고, 서로 연관이 있다고 하는 것도 언어의 전파성을 생각하면 하나의 설일뿐이다.

무엇보다 위의 해석은 언어학적으로 너무나 위험하다. 차용어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몇몇 단어만을 가지고 추론하기에는 현재까지 남겨진 고구려-신라-백제의 언어자료가 너무나 빈약하다. 고로 위의 말은 하나의 "설"로 존중 받을 만 하지만,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또한 위의 말을 완전히 믿는다고 가정하여도 문제는 남는다. 또한 김알지 신화는 탈해왕 때 나온 것인데, 탈해왕은 AD 57~80년 사이의 인물로 김일제의 후손이 왕망의 신나라에서 나온 시기가 23년 이후인데, 개인적으로 시기가 그리 맞지 않는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쪽의 7번 항목에서...



5- 무덤 양식
신라는 평지형 무덤이나 구릉형 무덤의 시기가 명확히 구분[각주:8]되고 또 평지형 무덤에서 출토되는 유물이 동방계열보다는 서방계열 유목민족의 유물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에서 그간 많은 학자들의 고뇌를 유발시킨 미스테리의 국가다. (박원길 '새끼 중국인'들 득세하는 사학계에 '통쾌한 도발')

황금 유물과 적석목곽분 그리고 새 토템 : 왕권을 강화하고 신라의 발전을 이룬 내물왕의 무덤을 경주 고분군들 중에서 가장 큰 황남대총으로 보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그런데 이 황남대총의 독특한 무덤 양식, 화려한 황금 유물들, 그리고 신라 김씨 왕족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설화에 등장하는 새. 이 세 가지는 모두 금을 숭배하고, 적석목곽분을 묘제로 사용하며, 새를 토템신으로 여기는 유목 민속의 풍습과 일치한다. 이를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봐야할 것일까?(역사스페셜)

새토템 자체는 북방민족뿐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 퍼져 있던 태양 숭배 사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니, 새토템으로 이 사실을 판단하기는 곤란하다. 무덤양식부분에서는 본인 지식의 한계로 위에서 나온 말을 따른다면, 흉노는 모르겠으나 북방민족의 유입은 확실시 된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북방민족이 흉노였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는 현재 유물 자체만으로는 판단 불가능이다.



6- 당대 사람들의 인식은 어떠하였을까?
(宋)鄧名世撰,王力平点校《古今姓氏书辩证》
出自匈奴休屠王,太子日磾,字翁子,是(汉)武帝。。。。。。帝以休屠作金人,为祭天主,因赐姓金氏。。。。。。。唐贞观所定益州蜀国郡三姓,一曰金氏。汾州河西郡四性,一曰金氏。又唐新罗国王姓金氏。。。。。。

일단 위의 책은 송대에 만들어진 중국에서는 가장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는 성씨고증책이다. 또한 현재 문제가 되는 당대와 가장 가까운 시대이기도 하다. 문제는 해당 책에서 김씨의 유래는 분명히 흉노 김일재(日磾)로 잡고 있지만, 신라의 왕족과는 완전히 분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신라의 왕씨인 김와 흉노의 김씨와는 서로 다른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당대에 수 많은 신라인들이 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료를 통해서 보면 흉노와 신라왕가가 서로 관련이 없다고 판단된다.



7- 흉노의 후예라고 가정했을 시.
1- 유입 시기의 문제
김일재가 BC134이니, 1대를 20년으로 잡으면 120년 이후, BC 14년이고, 1대를 25년으로 잡으면 AD24년이고, 1대를 30년으로 잡으면 AD 76년이 된다. 그럼 대략 왕망의 신나라[각주:9]가 망하고 나서 요동으로 갔다. 그리고 비문에는 안나오지만 다시 한반도로 갔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신라 탈해에서 김알지 신화가 나온다. 탄해왕의 재위기간은 보통 57~80년인데, 왕망의 신나라가 망하고 24년만에 원거주지와는 머나먼 곳에 와서 왕이 된다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물론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김일재 직계후손들의 유입가능성은 상당히 줄어든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직계가 아닌 방계 흉노들이 들어왔을 가능성인데, 개인적으로 이와 같은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본다. 그 이유는 신라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서방계 유물들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이론도 상당한 문제가 있다. 서방계 유물이 흉노계라고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신라는 인도쪽에서도 왔었다. 다시 말해서 인도를 경유한 서방계 유물일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냥 흉노라고 하지만, 그 안에는 수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 말도 서로 통하지 않을 정도의 사람들이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방계가 들어왔다고 그 영향력이나 흉노의 핵심과 얼마만큼의 영향력이 있는지 이야기하는 것 자체도 상당히 힘든 문제이다.

2- 고대 민족 이동에 대해.
고대의 민족 이동은 지금과 같이 4명 가족 정도가 비행기를 타고 이민을 가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거대한 씨족 사회로서 그 구성원이 모두 동시에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각주:10]. 그런 의미에서 김일재 후손이 신라로 유입된 것을 믿는 사람들은 김일재 유입 이전부터 신라에 일정한 근거지가 있었기에 그 후손들이 신라로 넘어온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신라가 상당한 국제화 사회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반대로 신라에 근거지가 없었기에 후손이 아예 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의 증거가 된다. 하지만 어느쪽인지는 판단불가.ㅠㅠ

3 - 그런데 흉노는 위프를 한것이냐?
흉노가 신라에 왔다. 대흥안링부터 시작해서 내려왔다고 하더라도, 요동과 한반도를 완전히 가로지르는 길이다. 또한 초원지대와는 다른 산악지대를 지나야 되는 코스이다. 그래. 흉노가 미쳐서 길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초원이 아닌 산악지대로 내려왔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중간에 흔적이 있어야 한다.

지금과 같이 한두명이 움직이던 시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별 영향력이 있을 수가 없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동반을 한 씨족-부락단위의 이전인 것이다. 그럼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흔적"이 발생해야된다. 문제는 흉노가 비행기를 타고 온 것처럼 고구려나 발해에는 어떤 흔적도 없고 오직 신라에만 서양식 유물이 있다.

사실 이 문제는 지금도 계속되는 한국사학계의 골치거리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배를 통해서 왔다는 것인데, 흉노는 기본적으로 유목민족이다. 그들이 갑자기 말을 버리고 배를 타야되는 이유에 대한 타당한 설명이 없다.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일단 본인이 생각하는 교류의 단계를 말해야될듯 하다. 1단계는 느슨한 교류로서 마치 소문이 퍼지듯이 느리게 주변 사람을 통해서 서서히 서로간의 정보가 교류되는 단계이다. 당연히 조금만 멀리 있는 정보는 전달 받는 것도 느리고 정확성도 적다. 2단계는 상업의 단계이다. 상업행위를 통해서 정교교류가 이루어진다. 3단계는 기술의 단계이다. 기술의 이전을 통해서 교류가 일어난다. 4단계는 결혼의 단계이다. 서로간의 결혼을 하면 상당한 교류가 발생한다. 특히 2세대는 그 교류의 결정체이다. 그러나 결혼은 알지 못하는 사람과는 하지 않기에 앞전의 단계가 선행되어야 한다. 5단계는 외교의 단계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각 일정한 집단체를 형성하고 있어야한다. 6단계는 전쟁의 단계이다. 이것보다 더욱 강렬한 교류는 없다.

그래서 신라로의 흉노의 직접적인 유입보다는 몇몇 기술자집단의 이주가 있지 않았나....생각되기는 하지만, 이 경우도 사실 위프설을 피할 수가 없다. 기술의 연결선이 없는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고구려인데....흠.......기술사쪽은 본인의 전공이 아니라서 일단 판단보류이다.


흉노인의 후예라고 한 것이 단지 자신들의 조상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었는지. 아니면 진정 후예인지는 지금으로서는 판단할 수 없다. 다른 증거 사료가 나오기 전까지는 일단 신라왕족이 흉노인의 후예라는 것은 판단 보류이며, 그 전까지는 흉노의 후예가 아니라고 판단할 것이다.




* 논문 쓰기 바쁜 녀석이 이거 머하는 짓이냐고? --;;
사실 본인 논문의 핵심은 소그드의 한반도 유입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라왕족이 흉노인가 아닌가는 상당히 중대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서 처용은 보통 춤과 괴기한 용모로 서역인으로 보는데, 만약 신라왕족이 흉노였고, 당시가 그리 국제화 사회였다면, 괴기한 용모라고 말할 정도는 되지 못한다는 둥. 혹은 최치원이 소그드의 대표적인 무용인 호선무를 향악이라고 해서 신라에서 오래동안 내려오는 춤으로 말했는데, 만약 신라왕족이 흉노라면 이거 골치아파진다는 것...

본인 논문은 신라왕족이 흉노든 아니든 큰 영향은...있기는 있지만, 없다고도 해야겠고.... 단지.....가장 큰 문제는.....어떻게 써야될지 갈피가;;; 참고로 본인은 소드그인의 유입을 말하는 것처럼 한국의 고대에 많은 이민족들이 유입되었을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단보류인것이다.


그 외에 관련 된 정보를 아시는 분은 언제든지 덧글로 제보부탁드려요^^

  1. 중국쪽에서는 해당 비문을 大唐故金氏夫人墓銘 라고 부르지 않는듯 하다.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봐도 없다. 그렇다고 논문준비하면서 중국쪽 금석문 하나하나 뒤지고 다닐 수도 없고;;; 그래서 본인으로서는 원문 자체를 보고 싶은데 구할 수가 없어서 답답하다. 혹시 있으신분??! [본문으로]
  2. [/footnote]와 구당서[footnote]新罗人金忠义以机巧进,至少府监,荫其子为两馆生......(旧唐书 卷一百五十八 列传第一百八) [본문으로]
  3. 이 비석 자체가 손상이 너무 크다. 그래서 다른 이야기를 볼 수 없으니...에휴... [본문으로]
  4. 혹자는 김일재는 단지 흉노일뿐인데, 실제조상이 아니라면 오랑캐따위를 가짜 선조로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나라는 실질적으로 활발한 다민족 사회였고, 김일재로 대변되는 남흉노는 명목상으로 한왕실과 형제관계로 같은 일가라는 명목이 있다. 고로 오랑캐를 왜?라는 의문은 합당하지 않다고 본다. [본문으로]
  5. 굴원이 빠져 죽었다는 물 이름이 汨罗인데, 우리발음으로는 멱라, 중국발음으로는 miluo, 日자에 m음가가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겠지~ (by 孟元文이라는 익명의 사나이 킥킥...) [본문으로]
  6. http://blog.yam.com/wenshi/article/19776020 [본문으로]
  7. 원래 일과 알의 언어학쪽 각각 학자들의 복원음을 올렸는데, 특수기호쪽인지라 충돌해버린다. 증거 패스. 궁금한 분은 http://www.eastling.org/OC/oldage.aspx 에서 직접 검색을. [본문으로]
  8. 이는 보통 통일신라 전후로 보는 견해가 주도적이다. 그럼으로 이 말을 여기서 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지 않을까? [본문으로]
  9. AD8~23 [본문으로]
  10. 물론 개개인이 움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파편적이고 큰 영향이 있을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 [본문으로]
아는 분이 MSN으로 "한국의 주류층은 민족주의인가요?"라는 질문을 해주셔서 그에 대한 답변으로 쓴 것입니다. 제가 논문관련 작업을 하다가 아무 생각없이 적당히 타자를 쳤는데, 솔직히 상당히 마음에 드는군요. 살짝 보충해서 올립니다. 역시 무의식의 힘은 강했습니다 ^^


한국에서 민족주의는 완전한 주류라고 봅니다. 단지 중국과는 좀 다른것이. 중국은 처음부터 다양한 민족이어서 중화민족이라는 새로운 민족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물론 이런 과정은 매우 불안하고 실패의 연속으로 보이지만, 최소한 중화민족의 개념만 포기하면 기본적으로 다민족을 인정하였기에 의외로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소수민족에 대한 명목상의 우혜보다는 실질적인 대우개선이 필요하지만 말이죠.

그에 비하여 한국의 경우 민족주의로 단일민족만 강조하다가, 점차 외국인노동자는 물론 국제결혼까지 증가하기에 기존의 단일민족관이 상당한 충격을 받게 되죠. 오히려 어떻게 보면 중국보다 더 나쁜 방식으로 민족끼리의 대결이 실현될 가능성이 더 높은 곳이라고 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민족끼리의 대결이라기 보다는 절대수가 "한민족"이 많으니 일방적인 억압과 탄압이 들어가겠고, 그에 반항으로 일어나는 폭력 그리고 파생될 국제사회에서의 고립.

그러지 않기를 바라며 빨리 민족주의...아니 최소한 단일민족주의는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솔직히 많이 불안하군요. 미국의 민족갈등이 한국에서 재현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으니까요.



 옛날 어떤 곳에 한 그루 교목(喬木)이 있었는데, 그 나무 아래에는 항상 천상의 선녀(仙女) 한 사람이 내려와 있었다. 선녀는 그 목신(木神)의 정기로 잉태하여 한 미남자를 낳았다. 목신의 아들이므로 그를 목(木) 도령이라고 불렀다.

 목 도령이 칠팔 세 되었을 때, 선녀가 천상으로 돌아가 버리자, 큰 비가 몇 달 동안 계속 내려 온 세상이 물바다가 되었다. 교목이 넘어지면서 목 도령에게,

 "어서 내 등에 올라타거라."

하였다. 목 도령은 그 나무를 타고 정처 없이 표류(漂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목 도령은 목신에게 부탁하여 홍수에 떠내려가는 개미 떼와 모기의 떼를 구출해 주었다. 개미 떼와 모기 떼를 싣고 지향 없이 가는 교목을 향하여 구원을 요청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 도령과 같은 연배의 남자였다. 목 도령이 이 사람을 구해 주려고 하였지만 교목은 반대하였다.

 "사람은 구하지 말아라."

고 하였다. 그러나 목 도령은 아버지인 교목에게 애원하여 그 남자를 구해 주었다. 그때에 교목은 말했다.

 "너의 애원을 못 이겨 구해 주었지만, 다음에 반드시 후회할 날이 있으리라."

 교목은 마침내 어느 조그만 섬에 표착(漂着)하게 되었다. 홍수로 인하여 모든 세상이 물에 잠겼으나 오직 이 높은 봉우리만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두 아이는 그 섬에 내렸다. 개미와 모기들은 목 도령에게 치사(致謝)하고 각각 제 갈 곳으로 가 버렸다.

두 아이는 그 섬에 단 하나 있는 일간 두옥(一間斗屋)을 발견하였다. 거기에는 한 노파와 두 처녀가 살고 있었다. 두 처녀는 또한 두 아이와 동년배였는데, 한 처녀는 노파의 친딸이었고 다른 처녀는 그 집의 수양딸이었다.

 비가 그치고 홍수는 물러갔으나, 산 아래 세상에는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노파의 집에서 사는 동안 두 쌍의 소년 소녀는 성년기에 이르렀다. 노파는 이들을 부부로 하여 세상에 인종(人種)을 퍼뜨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두 청년이 서로 수양딸을 취함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파는 고심하였다.

 하루는 구조된 청년이 친딸을 차지하기 위한 모략으로 노파에게 가만히 말하였다.

 "목 도령은 한 섬의 좁쌀을 모래밭에 흘리더라도, 순식간에 그 좁쌀을 모래 하나 섞이지 않게 도로 주워 내는 재주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재주는 좀처럼 친한 사람이 아니면 보이지 아니합니다."

 노파는 그 신기한 재주를 보고 싶어 목 도령에게 청하였다. 목 도령은 그런 재주가 없다고 사실대로 말하였다. 그러나, 노파는 다른 청년의 말을 믿고 목 도령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하며 크게 노(怒)하였다. 그래서 그 재주를 보여 주지 않으면 딸을 주지 않겠다고 하였다.

목 도령은 할 수 없이 한 섬의 좁쌀을 모래밭에 흩어 놓고 그것을 들여다 보며 탄식만 하고 있었다. 그 때 난데없이 개미 떼가 와서 좁쌀을 하나씩 입에 물어다가 원래의 섬에 넣었다. 순식간에 좁쌀은 모래 한 알 섞이지 않고 원래의 한 섬이 되었다.

 개미 떼는 저희 갈 곳으로 가고 저녁때가 되어 노파는 다른 청년을 데리고 모래밭에 나타났다. 노파는 감탄하면서 친딸을 목 도령에게 시집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다른 청년이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므로 노파는 한 계책을 세웠다. 어느 어두운 밤에 노파는 두 청년을 밖으로 내보내고 두 처녀를 동쪽과 서쪽의 두 방에 들어가게 하였다. 그리고 두 청년에게 서로 들어가고 싶은 방에 들어가서 배필을 취하라고 하였다.

 그때 한 마리의 모기가 목 도령의 귀 옆으로 지나가면서, '동쪽 방으로 들어가라.'고 하였다. 목 도령은 그 말대로 하여 노파의 친딸을 얻게 되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이 두 쌍의 부부의 자손이라고 한다.

출처 : http://www.ojirap.com/technote/read.cgi?board=sulhwa&y_number=9


해당 이야기는 손진태(孙晋泰)의 <조선민담집 朝鮮民譚集>, 동경 東京 향토연구사 鄕土硏究社, 1930에 수록되어 있다 손진태의 연구에 따르면 해당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삼국시대 오나라 三国时代 吴】강증회 康僧会가 집필한  <육도집경六度集經>에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해당 이야기에서는 나무가 모체로 등장하지 앟는 것으로 보았을 때, 나무 숭배 사상이 한반도에 존재하였다는 것에 대해서 일정이상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보인다.

사실 본인도 본과졸업논문으로 솟대(神竿)에 대해서 쓴 것과 같이 한반도에는 오래전 부터 우주나무에 대한 숭배가 분명히 이루어지고 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우주나무 숭배가 중국대륙에서 유입이 되었느냐. 아니면 북방계열을 통해서 유입이 되었느냐. 혹은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이냐는 문제가 남는다.

일단 나무도령(목도령)의 이야기는 육도집경의 이야기가 한국으로 전래되면서 한국의 토착문화에 녹아든 사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해당 불경이 이야기가 오나라에서 먼저 나무숭배사상이 있어서 변형이 된 후에 유입되었을 수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나라 사람이 집필을 하였다면 변형된 것을 집필했을 가능성이 높고, 중국대륙에서의 나무숭배는 하늘에 대한 숭배측면이 약하다는 것(본인 본과졸업논문에서 언급) 그러나 귀찮아서 구제적인 사례는 패스....어차피 이건 내 잡담인걸....하하하;;;)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솟대나 나무숭배가 북방민족을 통해서 전래되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한반도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났을 가능성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지금까지는 중앙아시아 일대에 더 오래된 나무숭배 사상의 흔적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북방민족으로부터의 유입이 더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정리하자면 목도령(나무도령)설화는 북방유목민족의 나무숭배사상의 영향 속에 있었던 한반도에 육도집경에 포함되어 있는 인도계(혹은 중국계)설화가 전래되면서 기존의 나무숭배사상과 융합이 되어서 만들어진 설화이다.


사실 여기서 글이 끝나야 정상이지만...
위의 글로서 말하고 싶은 것을 대놓고 말하면 다음과 같다.
한반도의 문화는 중국대륙의 문화외에도 북방유목계열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한마디로 다문화라는 소리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현대에 쓸데 없는 단일민족주의로 외부의 문화에 대한 탄력을 잃어버리지 말자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중국의 어떤 논문을 보다가 목도령 설화라는 것을 보고서야. 서둘러 위의 내용을 찾아보았다. 본인이 어릴 때에 저런 설화를 들은 기억이 없는데...혹시 어린 시절 목도령(나무도령) 설화를 들어보신분????

공자가 한국 사람이라는 분들이 있다. 중국을 이기고 싶은가? 그것보다 더욱 확실한 방법을 알려주겠다. 그러니 공자가 한국 사람이라는 헛소리는 그만 했으면 한다. 그래서 본 내용은 최대한 쉽고 간단하게 적었다. (그래서 더 자극적일수도...)


1. 공자는 한국 사람인가?
공자가 한국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보통 다음과 같은 논리를 가지고 이야기 한다.

공자가 태어났던 산동성 곡부는 당시에 동이(东夷)라는 사람들이 살던 곳이다. 한민족은 동이(东夷)의 후손이다. 고로 공자는 우리의 조상이다.

말이 되는 것 같은가? 미안하지만 위의 말은 억지에 불과하다. 명확하게 틀린 말이다.

1) 공자는 동이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당시의 산동성이 동이들이 모여살던 곳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는 말이지만, 정확하게는 당시의 동이와 화하족들이 같이 모여 살던 곳이다. 고로 동이라고 확정할 수 없다. 물론 화하족이었어도 동이라는 민족그룹의 문화적인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혹자는 공자의 족보를 따지며, 공자의 조상은 원래 은나라사람이었고, 송나라로 갔다가 다시 노라나로 왔기 때문에 공자가 동이족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 의견을 채택해서 공자가 당시의 동이였다고 가정을 해보자. 그래도 문제는 남아있다.


2) 당시의 동이와 나중의 동이는 다르다.
춘추전국시대의 동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폭넓은 개념이었다.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을 보면서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당시의 중국이라는 개념은 지역적으로는 매우 좁은 곳에 한정이 되어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산동성부터 시작해서 동북쪽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동이라고 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혹자는 동북쪽까지 가지도 않고, 잘해봐야 요서라고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동이의 개념은 변한다. 산동성의 경우 진시황의 진나라 통일 이후에 동이가 아닌 중국의 개념에 포함이 된다.

원래 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중국의 동쪽에 있는 이민족이라는 상대적인 개념이었기에, 중국이라는 것이 확장됨에 따라서 얼마든지 유동적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고조선을 운운하면서 한반도로 동이가 유입되었다고 말한다면, 중국으로도 그정도의 동이는 충분히 녹아들었다고 반박을 할 수 있는 것이다.


3) 동이는 하나의 민족이 아니었다.
지금은 보통 동이(东夷)라고 하지만 사실 동이는 구이(九夷)라고 불리기도 했다. 9종류의 동이(东夷)라고도 할 수 있고, 구의 뜻은 단순히 "9"가 아닌 "수 많은"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어떤 경우더라도 당시의 동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매우 다양했었다. 산동쪽의 동이와 동북쪽의 동이가 달랐던 것이다. 단순히 당시에 동쪽에 있다고 하여서 문화적으로도 연결점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그냥 동쪽의 이민족(东夷)으로 불렀던 것이다.

(참고로 전국시대의 초나라도 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현재의 중국 남부지역에 위치한 초나라에는 도가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노자도 있었다. 만약 공자가 동이라면 노자도 동이인가? 너무 거리가 머니까 왠지 거부감이 생기는가?)


4) 동이만이 한국인의 조상이 아니다.
한국은 동이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수 많은 민족들의 융합으로 생겨난 것이다. 이미 학계에서는 정리가 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민족주의적 세뇌에 의해서 아직도 단일민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벌어진 코메디인 것이다. 한국은 동이의 후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수 많은 민족의 후손인 것이다.

고로 "공자가 동이임으로 우리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코메디일 뿐이다.



2. 중국인들을 누르고 싶은가? 그 방법을 알려주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을 입닥치게 하고 싶은가? 공자를 이용해서 말이다. 그럼 쓸데 없이 공자가 한국인의 조상이니 머니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는 확실하고 중국인들이 반박도 하지 못하는 제대로 된 방법을 알려주겠다. 중국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면 된다.

"공자의 정신을 제대로 이어받고 있는 곳이 어디라고 생각합니까? 중국은 문화대혁명으로 과거의 것들을 잃어버렸지만, 한국은 아직도 다양한 문화유산들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공자에 대한 제사(석전대제) 역시 중국에서는 이미 그 방법을 몰라서 한국의 성균관(대)[각주:1]에서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효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으며 인의예지를 높게 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이야 말로 진정한 공자의 후손입니다."

조용히 위와 같이 말을 한다면 배웠다는 중국인일 수록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한다. 어떤 중국인들은 그 자리에서 열폭해서 헛소리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대로 논리적인 대답이 나올 수는 없다. 위에서 말한 것에서는 한마디 거짓이나 복잡함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현상이고 사실이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공자가 한국인과 핏줄로 이어졌는지가 아니다. 비록 예수에게는 자식이 없으나, 만약 예수의 자식이라도 살인을 하면 그것은 분명히 나쁜 것이고, 살인자의 자식이라도 선한 일을 행하면 칭찬 받아 마땅한 것이다.

단! 위의 말을 중국인들에게 한다면 당장은 무릎을 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점차 늘어간다면 과거의 것을 어떻게 지켜야한다는 의식이 생겨나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서 타이완쪽에 남아있는 과거의 것으로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다. 한마디로 당장의 날카로운 칼이지만, 중국인에게 깨닭음을 주는 말이다. 본인이야 한국이든 중국이든 옛것을 지키고, 그것을 바탕으로 전진해가기를 원하기에 위와 같은 말을 해주지만, 당신들이 그러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다.


3. 핏줄보다는 정신을 중요시 하여야 할 때.
본인은 특정종교를 믿지 않고 있다. 예수의 말도 옳은 부분이 있고, 부처의 말도 옳은 부분이 있고, 공자의 말도 옳은 부분이 있고, 노자의 말도 옳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사람들에 의해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말에 따라서 행동을 한다면, 종교를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성균관대 유학 동양학부쪽의 몇몇 분들은 공자를 우리 조상이라고 말하려고 힘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공자의 말씀을 배웠다는 분들이니 만큼 더욱 한심하게 생각한다. 공자가 주공을 꿈에서 만난 것은 주공이 그의 조상이어서 그랬던 것인가? 공자가 주공의 뜻을 이어받으려 한다고 말한 것은 조상이었기 때문인가?

중요한 것은 핏줄이 아닌 정신을 제대로 이어 받아서 제대로 행동을 하는 것이다.

* 참고로 본인은 공자가 한국에서 제대로 살아나던지. 아니면 완전히 죽어버려야된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공자의 말을 이어받는 인간이 없이 이상하게 왜곡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은 공자의 부활이 필요하다.을 참고.



공자에 대한 이야기이니 만큼 공자의 한마디 말로 끝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子曰, “周監於二代, 郁郁乎文哉! 吾從周 "공자가 말씀하시길 : 주나라는 하와 상 두 왕조를 거울 삼으니, 그 문화는 매우 찬란하구나!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

이를 본인이 현대적으로 바꾼다면. "한국인은 공자나 예수 혹은 다른 훌륭한 사람을 거울로 삼으니, 그 마음이 매우 찬란하구나."



추가--
잡담 : 이 글이 얼마나 무서운 중국현실 비판인지 아실 분은 아시리라 봅니다. 중국은 현재 무형유형의 전통자산을 잃어버렸고, 제대로 회복하려 노력도 안하고 있습니다. 또한 반대로 이 글이 얼마나 한국의 현재를 칭찬하고 있는 것인지 알 분은 아시리라 봅니다.

잡담2 : 한국이나 중국이나 옛것에 대한 쓸데 없는 집착을 하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실이며, 미래라는 것을 아셨으면 합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되었냐 혹은 우리 조상이 얼마나 위대하였느냐가 아니라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하면 위대해 질 수 있느냐에 대한 고민입니다.


  1. 추가 : 석전대제를 관장하는 기관은 성균관대가 아닌 성균관입니다. 그럼으로 성균관이라하겠습니다. 그러나 성균관대쪽과도 긴밀한 연관이 있으며, 많은 유교부분에서 성균관대의 역할이 컸기에 () 안에 대를 넣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역사학은 기본적으로 역사 사료를 해석하여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조선왕조실록이나 삼국사기에서 나오는 문장을 기본으로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떤 자세로 똥을 싸고, 어떤 정책을 통과시키려고 어떻게 싸움박질을 했는지 알아보는 학문이다. 한국은 삼국시대부터 중국의 유교사상이라는 모든 사항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정신을 가진 이념과 한자라는 문자가 전래된 덕분에 일찍부터 국가차원에서 역사를 기록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역사사료는 믿기가 힘들다. 왜곡과 과장은 기본이고 삭제도 심심하면 일어나기 때문이다. 왜 그러냐고? 남자들이 허풍을 치는 것 중에 한때 10대 1로 싸웠냐느니. 100대 1로 싸웠냐느니. 내가 툭 치니까 옥수수가 우르르 쏟아진다는 웃기지도 않은 헛소리가 생각나시는가? 아니면 군대에서 북한에 넘어갔다 왔냐느니, 태권V가 국회의사당이 열리며 출동한다느니 하는 이러한 헛소리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신라가 만반의 준비를 해서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처절하게 깨지고 돌아왔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허벌나게 쪽팔리는 일이다. 그럼 "우리가 고구려를 공격해서 깨지고 돌아왔다."라고는 절대 기록하지 않는다. 그냥 "우리가 고구려를 공격해서 1000명을 사로잡아서 돌아왔다."와 같이 서술해 버리는거다. 참~~~ 쉽죠?~~잉~

삭제도 비일비재하다. 당신이 피임을 잘못 해서 임신을 해버렸다. 혹은 임신을 시켜버렸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정말 친한 주위의 사람들 외에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낙태를 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물론 속도위반 소리를 들으며 결혼할 수도 있다.) 물론 먼 훗날에 자서전에 한 줄 정도 언급할 수도 있지만, 사실상 평생동안 마음 속 깊이 묻어두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이런 일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벌어진다.

예를 들어서 만약 고구려가 신라를 사실상 속국으로 데리고 있으면서 시도때도 없이 공물과 여자들을 요구했다고 하자. 모두가 알다 싶이 나중에 신라만이 살아남아서 신라 사람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게 된다. 김부식이 볼 때 위의 사실은 무지막지 쪽팔리다. 해결방법은? 그냥 해당 사실을 삼국사기에 쓰지 않으면 된다. 참~~~ 쉽죠?~~잉~

이렇게 문제가 많은 역사사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타임머신이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료와의 교차분석과 고고학 및 다양한 학과의 방법론을 동원해서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한마디로 머리가 빠개지는 듯한 괴로움이다. 역사자료가 가장 중요한데, 그것을 믿을 수가 없으니 짜증나지 않겠는가? 그나마 A라는 나라가 있었고, B라는 나라가 있었다 정도는 불변하지 않는 사실이고, 그 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기에 그런 "분명한" 사실들을 늘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가 과학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인문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부분이 분석이 아닌 해석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적인 역사사료조차 쓰지 않고,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펴고 소설을 쓰는 분들이 계시다. 이미 근대에 작성되었다고 "확정"된 환단고기를 기반으로 온갖 판타지를 쓰시는 분들이다. 본인 얼마 전 발해 관련 자료를 수집하다가 우연히 이병화의 "발해강역고(渤海疆域考)"을 다운받게 되었다. 그리고 주화입마에 빠져버렸다. 대체 어떤 고대사 역사논문에 역사사료를 하나도 인용하지 않을 수 있을까? 대체 그의 말이 어떻게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는가? 증거도 없이 그냥 그 사람이 써 놓은 것을 진리라고 생각해야되나? 그냥 자신의 말이 진리다라는 과대망상에 불과하다.

사료는 분명히 불안정하고 위험하다. 그러나 그런 사료조차 쓰지 않는 사이비들아.
................그만해라. 쫌....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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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 본인의 주변이 역사학도들이다보니 공자가 한국사람이라고 주장하는 바보들은 없다. 그런데...본인과 친하지는 않지만, 알기는 아는 한 사람이 이런 바보였다. 더 문제는 그 사람의 선배가 선진사(공자가 살던 시대) 전공이라는 것이다....그 사람은 대체 멀까?

덧2 : 여전히 논문주제발표 준비중.....핵심은 욕심을 버리는 것인데, 욕심에 나를 맡기고 있다.
역사가지고 장난질치는 인간들이 무지막지 많다. 최근 광화문 "광장"의 분수대 이름을 "12.23"이라고 하여 인터넷이 시끄럽다. 서울시 당국자의 말에 따르면 12는 이순신장군이 명랑대첩에서 12척의 배로 싸웠기 때문이고(해군사관학교의 "해전사"), 임진왜란 당시에 23전 23승을 이룩해서 "23"이라고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명랑대첩 당시의 선박수는 "13"척일 가능성이 높다. (관련 사료 알아서 찾아보시길. 이 글의 주제는 그것이 아니다.) 현재로서는 12척이라고 하자. 나중에 13척으로 확정이 되면, 이름을 "13.23"으로 할 것인가? 연구에 따라서 변할 수 있는 이름, 그것도 지금 현재 논란중인 것을 함부로 사용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또한 현 일본 "천왕"의 생일이 12.23일이다. 개인적으로 이순신 장군 자체야 대단하다고 보지만, 애국심이니 보국의식이니 하는 웃기는 짓을 홍보하는 이용도구로 변질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웃기는 건 그 "애국심의 상징" 바로 앞에 있는 분수의 이름이 현 일본 "천왕"의 생일이다. 장난하는건가? 예상하지 못하였고, 우연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문제가 있다면 수정하는 것이 합당해보인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골 때리는 것이 있어서 소개할까 한다. 해당 일을 논하는 아고라의 글에서 아래와 같은 고문들을 보았다. 그런데 보면 볼 수록 야시꾸리했다. 무려 난중일기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慶尙將卒 皆烏合之兵也 日日一斬卽軍令保全
경상도장졸은 모조리 오합지졸이라 하루 한놈 목을 쳐야 군률이 유지된다.

慶尙將卒 招集乃饋軍穀則默然食之 而戰鼓鳴卽皆夜半逃散也
경상도 장졸은 불러 모아 놓으면 평소에는 말없이 군량을 받아 먹다가도 일단 출진의 북이 울리면 죄다 야반에 도망하여 흩어지고 마는도다.

慶尙徒 剃頭倭裝 導倭賊侵寇忠淸全羅 殺傷擄掠放火劫姦 又甚於倭賊也 取老少婦女首及獻上倭將
경상도의 무리는 앞머리를 깎고 왜옷을 걸치고 왜적의 앞장서서 충청,전라지역에 침입하여 죽이고 뺏고 불지르고 강간함이 오히려 왜적보다 심한 바가 있다.

본인은 아직 난중일기를 정독해보지 않았다. 시대도 다르고 별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문들은 전공 덕분에 계속 접하게 되는데, 위의 글들은 고문이라고 하기에는 어색하다. 무엇이라고 말하라고 하면 해당 시대 전공이 아닌지라 명확하게 이야기 하기가 힘들지만 마치....여러 시대의 고문들에 나오는 단어들 적당히 뭉끄려서 몇몇 단어만 바꾸어놓은 기분이랄까? 무언가 불협화음인 기분??

그래서 직접 고문을 뒤져봤다. 아무리 찾아도 난중일기에는 위와 같은 구절은 나오지 않는다. (요즘은 왠만한 고문들은 전산화가 되어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물론 아직 안된 것도 많지만, 난중일기정도는-_-!) 그러다가 우연히 위키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 아주 간단하게 "해당 내용은 난중일기에 없는 내용이다."라고 적혀 있다.

제발 부탁하는데. 역사 가지고 장난질하지 마라. 엉터리로 만들어낸 고문 놔두고 해석해놓으면 사람들이 그냥 믿을 거 같냐?...믿을 거 같다. (씨벌...) 자신이 직접 확인하지 않는 이상 저런 내용을 믿지 않기를 바란다. 역사 가지고 장난질 하면서 쓸데 없는 지역감정을 만들 생각하지 마라. 제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 더 웃기지만, 본인은 서울에서 태어났고, 친가는 전북. 외가는 이북. 강원도에서 좀 살았고, 지금 여친님은 경남이다. 한가지만 묻자. 지역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리도 다르더냐? 웃기는 소리.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것이다. 지역 감정 만들지 말자.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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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전공으로서 그냥 분풀이 까대기. 독자들 생각 안하고, 그냥 제 맘대로 깝니다. 양해부탁-0-

1) 皆烏合之兵也
乌合之卒[각주:1] 라는 표현은 있지만, 乌合之兵이라는 표현은 본 기억 없다. 그렇게 힘들더냐? 그리고 그냥 "皆烏合也" 라고만 해도 된다. 왜 굳이 "之兵"을 붙여서 까댐을 당하니..쯔쯔...
 
2) 日日一斬卽軍令保全
....까대기도 싫다. 할려면 제대로 하던가. 너 한국어로 써놓고 그에 적당한 한자 고르고 다닌거지? 문법이나 머나 다 신경 안 썻지? -_-+  保全...후...보전 그대로 한자로 하면 고문이 되는 줄 아냐!!!!! 보전은 개인의 안위에 쓰인다. 후.....

3) 慶尙將卒 招集乃饋軍穀則默然食之
....아...까대려다가 내가 짜증나 죽겠다. 이건 대체 먼 말이냐. 饋軍穀 곡식을 축낸다고? 한자를 억지로 찾으니까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거야. 다음부터는 왠만하면 비슷한 문장 찾아서 변조하그라. 차라리 "耗粮" 이라고 하던지...후..."默然食之" 이건 조용히 먹는다는거냐? .............고문이 장난이냐!!! 고문을 쓰는데 누가 이렇게 같은 말 반복하냐! 앞에 같은 말 있잖아! 그 당시가 지금인줄 알아!!!

4) 而戰鼓鳴卽皆夜半逃散也
다른거 필요 없고, 전투북소리가 울리면 야밤에 도주한다라는 것이 말이 된다고 보냐? 전투북소리가 울리면 도망을 치던지. 아니면 전투가 이루어질 것 같으면 도망을 치던지....아..이거 까대고 있는 나까지 한심해지는 기분이야. 이건 고문을 떠나서 기본적인 상식부족인데.ㅠㅠ

굳이 고문으로 까대주면,  卽 이것을 아마 "~ 하면 곧"이라는 뜻을 넣고 싶어서 넣은거 같은데, 미안....나도 고문 쪼금은 봤는데 이따위로 쓰는거 못 봤어. "卽皆" 이거 두개가 같이 연결되서 나오는 것 자체가 신기하기도 하고-_-;; 고문은 최대한 압축이야. 시간도 최대한 압축하고, 사건의 앞뒤 관계로 설명을 하는거야. 그래서 고문해독이 어려운 거지.

그만 하자.......오랜만에 성격 나온다. 후.............정말 역사 가지고 장난치지 마!!!

  1. 《三国志·吴志·陈泰传》:“艾等以为王经精卒破衄于西,贼众大盛,乘胜之兵既不可当,而将军以乌合之卒,继败军之后,将士失气,陇右倾荡。” [본문으로]
[역사-歷史/역사잡담] - 동북공정 가지고 장난질 좀 그만하지? 에 달린 덧글에 대한 대답입니다.  쓰다보니 상당한 분량이어서...왠지 아까워서 따로 포스팅합니다^^:::

사학도님의 덧글 (접어두었습니다. 보실분은 아래쪽 클릭^^)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저와 생각이 다른 부분이 많으시군요.

1) 그래서 유물의 중국화의 증거는 무엇인가요?
님의 말은 모두가 정황을 이야기했을 뿐, 무엇이 어떻게 중국화가 되었는지 역시나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본문에서도 물어보았던, 증거와 증명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중국화"자체도 모호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대체 중국화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리고 좀 다른 말이지만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역사를 공부하셨으니 아시겠지만, 한반도의 초기국가는 중국화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은 기본적인 통념입니다. 그것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셨으면 하는군요. 물론 자체적인 문화도 있었고 그것이 발달되어진 모습도 보여집니다. 그리고 동북지역에서 중원지방으로 영향을 준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율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전 중원쪽에서 온 영향이 더 컸다고 밖에 판단할 수 없군요.


2) 유물의 복원과 보호 작업에 한국학자의 차단문제.
한국에서 발굴된 유물의 복원과 보호작업에는 한국학자만이 참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풍납토성의 경우도 한국학자만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국의 땅에서 자국의 학자들을 우선적으로 참가하게 하는 것은 한국에서도 이루어지는 관행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학자중에 동북공정을 비판한 학자도 제외되었다고 하는데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아는 동북공정 비판하는 분도 그쪽에 발을 담그고 있습니다. -_-;;

그리고 님이 예로 드신 러시아쪽 발굴 및 복원보호는 실제 상황을 조금 잘못 아시는 듯합니다. 그쪽의 발굴은 한국에서 대량의 자금을 투자(실제로는 돈퍼주기)을 해서 얻어낸 것입니다. 러사이의 입장에서도 돈을 얻기 위해서 허용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쪽으로는 아직 공식적인 이야기는 없지만, 몇몇 국가로는 유물의 유출까지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중국보다 더 큰 문제인 것입니다.(좀 다른 말입니다만, 동북공정 이야기가 한창 나올 때, 러시아쪽 발굴은 정부차원의 큰 지원을 받았습니다. 최근에는 동북공정에 대한 관심이 줄어서 그 지원이 줄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3) 광개토대왕비의 변조사실
말씀하신대로 석회덧칠로 인한 일정한 변형은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지금 언급하는 것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도 아실 겁니다. 어찌되었든 동북공정이 시작되기 전에 만들어진 수 많은 탁본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광개토대왕비에 수정을 가하는 것은 바보짓이라는 것에도 동의하실 겁니다.

해석 방법에 대해서는 저는 아직 중립적인 입장입니다. 한국도 어떻게든 한반도 경영에 일본이 참가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본문은 이와는 관계 없는 글이니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4) 사학도의 기본 자세에 대한 의문.
저로서는 이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사학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국가나 민족입니까? 아니면 역사적 사실입니까? 제가 볼 때 님은 국가와 민족을 우선시하여서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 태도는 님이 비판하시는 동북공정의 태도와 그리 다를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지도교수님이 하신 말씀을 인용하겠습니다. 참고로 중국교수님이십니다.
"학자에게는 국가가 없다. 학자는 진리만 다룰 뿐이다. 나의 역사인식에도 중국은 없다. 민족이라는 것은 ‘상상의 공동체’에 불과하다. 모든 역사에 나오는 민족은모두 ‘정치체’다. 모두 정치구조이자 이익집단이다. 민족관계를 다루면서 낭만적인 관계를 도출해내기는 어렵다. 핵심은 진상을밝히는 것이다. 진상을 밝혀야 문제가 해결된다."
다른 계열의 분이시라면 "단순한 역사문제가 아닙니다"라는 말을 수긍하였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사학도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역사적인 실체에 대한 접근보다 정치-외교적인 문제에 대해서 먼저 더 크게 다루시는듯 하여서 걱정이군요.


5) 정치-외교적 요소
님이 말씀하신 정치-외교적인 요소를 말하기 전에 제가 본문의 말미에도 거론했던 것을 말씀드려야 겠습니다. 한국정부는 동북공정이라는 것을 이용해서 국민들의 이목을 돌리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현재는 학계내에서도 나름의 비판이 이루어졌지만, 과거에는 프로젝트을 "만들기" 위해서 동북공정을 이용했던 면도 분명히 있습니다.(막말로 밥그릇 만들기였죠-_) 상대방만을 비판하지 않고, 스스로도 돌아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서 말씀드려보았습니다.

1- 서남북공정에 대하여
그 럼 중국쪽으로 시선을 돌려보겠습니다. 님은 서남공정과 서북공정을 통해서 묘족/티베트족/위구르족에 대한 역사를 왜곡했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왜곡이라는 말의 기준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또한 왜곡이 있었다면 그것이 중국의 학계에서 얼마나 받아들여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1) 왜곡이라는 것은?
흔히 왜곡이라고 하는 이유는 티베트족의 경우 당대부터 융합되기 시작했다고 하고, 위구르족도 한무제시기의 서역경영부터 연관시키고는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정부분의 사실입니다. 그리고 중국의 역사관은 다민족일국가설입니다. 그리고 그것 자체는 역사관으로 존중해야됩니다.(사학도시니 왜 그런지는 이해하시리라 봅니다.) 그리고 다민족일국가설에 입각하여서는 위와 같이 분석하는 것도 하나의 "해석"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속에서 역사적 사실 자체에 대한 문제는 지적해야됩니다. 저는 큰 틀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2)실제 중국학계의 상황
또 다른 문제는 중국의 사학계에서 서남이나 서북공정이 얼마나 받아들여지고 있느냐입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정확한 조사를 하지는 않았고, 제가 있는 학교가 좀 특별한 학교이기는 하지만, 그리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이를 받아들이는 쪽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다름" 속에서 학문이 발전하는 것이 아닐까요?

2- 한반도 주변의 정치역학
그럼 완전한 정치-외교쪽으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님 의 경우, 중국정부가 침략성을 가지고 북한을 호시탐탐 노린다는 투의 발언입니다. 물론 그런 위험성자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 중국정부는 서남-서북-동북에 대한 공정으로 소수민족의 분열을 막고자하는 것입니다. 또한 동북공정에서의 핵심은 조선족이라기 보다는 만주족에 더 집중되어있다고 판단됩니다. 그렇기에 님과 같은 침략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은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일단 님의 분석을 받아들여서 침략적인 성향의 전략으로 판단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가정을 해서 북한 정권의 붕괴를 상정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님은 지금 중국이라는 객체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반도의 역학관계에는 중국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반복되지만 결코 같지 않습니다. 분명 한반도는 군침이 도는 땅입니다. 그러나 현재에는 과거의 역사와는 다른 2개의 집단이 끼어들었습니다. 미국과 러시아가 한반도에 깊이 개입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중국이나 일본의 한 쪽이 강력해지면 한반도는 피해를 보기 딱 좋았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러시아의 개입으로 중국만의 욕심을 채우기는 매우 힘이 듭니다. 그리고 중국을 제외한 각국에서도 각기 다른 한반도 관련 논리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전쟁의 명분으로서의 역사왜곡은 언어도단입니다. 현대국가에서 인정하는 영토분쟁의 한계는 100년입니다. 그 이상의 것을 끌어오는 것은 명분이 없습니다.

고로 한국에서 "부풀려 진 것"보다 동북공정문제는 그리 심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국의 내부붕괴에 대해서 생각해야되는 문제라고 봅니다. 작년의 티베트, 올해의 위구르등 수 많은 민족문제가 일어나는 모습을 보시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리라 봅니다.


끝맺음 : 사학도라고 하시니 저도 긴 장문의 글을 적었습니다. 개인의 가치관을 제가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국가나 민족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서 역사적 실체 혹은 사실을 추구하는 것이 더 좋지 않나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강조해봅니다.
중국 정부가 최근 고구려 초기 420여년간의 도읍지로 알려진 압록강 주변 지안(集安) 일대 유적지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작업을 추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사실상 고구려 유적의 원형을 변형시켜 중국식화하는 작업인데, 심각한 원형 훼손 및 역사 왜곡이라는 논란을 촉발시킬 것으로 보인다.

임 부주석 등은 고구려 초기 도읍지였던 환도산성과 우산(禹山) 귀족묘지, 광개토호태왕비, 장군총 등을 방문하고 고구려 유적, 문화재 정비작업을 독려하는 한편 조속한 시일 내에 마무리 작업에 박차를 가해줄 것을 촉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사회과학원이 2002년 2월부터 동북공정을 추진한 이후, 지안현은 최근 고구려 유적 정비작업에 나섰다.

세계일보 외교소식통 "중국 정부 '동북공정' 마무리 단계로" 정승욱 선임기자

한마디로 제대로 조사를 하고 기사를 쓰기 바란다. 가장 간단한 질문 몇가지만 하자.

1) 유적에 대한 복원 작업은 당연하게 이루어져야 되는 것이 아닌가?
집안 지역의 유적은 외부에 노출된 시간이 오래되어서 상당히 상당히 훼손되어 있다. 광개토대왕비만해도 계속된 비바람에 노출이 되어서 상당히 훼손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에 보호장치를 했다. 그러자 한국의 일부 "인간"들이 한다는 말이 광개토 대왕비를 훼손했다는 말이었다.

웃기지도 않는다. 광개토대왕비가 막 발견이 되었다면 인정해 줄수도 있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비는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수 많은 탁본이 있다. 그런 탁본과 완전히 다르게 석비문을 왜곡해서 엉터리로 복원한다는 것은 미친짓이다. 중국정부도 바보는 아니다.

90년대에 집안일대를 가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중요한 문화유적이 전혀 보호되고 있지 않았다. 무덤군들에도 관광객들이 맘대로 올라가고 돌을 가지고 가고 난리도 아니었다. 이런 것을 가만히 놔두는것이 옳은가? 심각하게 훼손된 유적을 복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 해당 유적이 계속 풍화작용이나 다양한 요소로 망가지도록 내버려두어야 하는가? 그것이야말로 문제 아닌가?


2) "고구려 유적의 원형을 변형시켜 중국식화하는 작업"???
대놓고 물어보면 증거는 무엇인가?? 이런 기사를 보면 웃기는게 무조건 원형을 중국식화하는 작업이라고 하는데, 대체 무엇을 어떤 식으로 중국화하는지에 대해서 증거를 제시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중국식으로 변형 되었다는 증거가 대체 무엇인가?

예를 들어서 광개토대왕비. 몇몇 사람들은 광개토대왕비가 훼손되고 수정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이 알고 있는 범위내에서 증거를 제출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대체 어떤 문장이나 한자가 수정이 되었는지 본인에게 한 번 말해주었으면 한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광개토대왕비는 수 많은 탁본들이 이미 존재한다. 이것을 수정한다는 것은 바보짓에 가깝다. 그런데 훼손되었다고 주장한다. 증거도 없이....개인적으로 웃기다.

비록 가장 유명한 광개토대왕비를 기준으로 말했지만, 다른 유물들도 대부분이 한국과 일본 그리고 조선 학자들에 의해서 조사가 된 적이 있다. 한마디로 이미 관련 증거들이 있다. 이것을 훼손하고 중국화한다면 딱 걸린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중국사학계와 고고학계는 끝장이라고 보면 된다. 중국학계가 그렇게 바보일 것이라고 보는가??


3) 외래어 표기 원칙부터 제대로 알아라. "집안"이다.
지안(集安)은 현대중국어 발음일 뿐이다. 지안이라고 하면 안된다. 1919년 이후의 지명과 인명에 대해서는 지안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集安은 1919년 이전에도 한국의 역사에 포함된 지역이다.(최소한 한국의 역사관으로는 그렇다.)

그럼으로 집안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맞다. 만약 집안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지안이라고 표기한다면, 이는 한국과 집안이 상관이 없다고 스스로 인정해 버리는 것이다. 최소한 1919년 이후에나 연관이 생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독설을 하자면) 중국지명이라고 중국어 잘하는거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중국어 구사도 제대로 알고 하자.

스스로 중국정부의 동북공정으로 인하여 외국인에 대해서 왜곡된 정보를 준다고 하면서 스스로 "지안"이라고 해서 한국과는 아예 상관이 없다고 인정해 버리는건 무슨 웃기지도 않은 논리 모순이란 말인가?!


걱정하는 점 : 정부의 입장에서 국민들의 불만이 자신에게 향했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적"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적"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라는 "허구"을 이용하여 만든다. 지금 이 상태가 바로 그렇다. 제대로 된 증거도 없이 마냥 마음대로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발언들을 해대는 것이다. 대운하도 그렇고, 미디어법도 그렇고 증거가 없거나 왜곡시키는 것은 알아줘야겠다.-_-



본 글은 오마이 뉴스의 편견타파 릴레이로서 본인은 하민혁님의 편견타파 릴레이,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 2를 받아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편견타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그림을 참고하시기를...



 "중국 유학중인 역사학도"라는 짦은 단어 속에 얼마나 많은 오해와 편견들이 깊숙히 스며 들어 있는지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중국이라는 키워드도 그렇고, 유학이라는 키워드도 그러하며, 역사학도라는 키워드도 심각하다. 그리고 중국과 역사학이 합쳐지면 더 골치가 아파진다.  최대한 간단하게 서술해보도록 하겠다.

1) 역사학도
1- 역사학도가 모든 것을 알것이라는 착각을 버려!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 역사학도들은 "모든" 역사에 대해서 잘 알 것이라는 생각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본인의 경우 북방민족사를 전공으로 하고 있다. 그럼 모든 북방민족에 대해서 잘 아느냐? 그것도 아니다. 본인의 시대는 기본적으로 위진남북조시대이다. 그럼 위진남북조시대의 북방민족에 대해서는 잘 아느냐? 본인이 마음에 들어하는 것은 소그드이다. 결론적으로 본인의 경우 위진남북조시기의 북방민족 중에서 소그드에 대해서는 나름 잘 알고 있을 뿐이다.

이런 본인에게 남방민족을 물어보거나 몽골족에 대해서 물어보면 솔직히 곤란하다. 물론 이에 대한 지식이 아예 전무한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역사매니아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수준이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단지 그뿐이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해당 부분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역사 매니아들 보다 모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럼 일반적인 역사 매니아들과 다를 것이 없다고? 그렇다. 크게 다를 것은 없다. 단지 고대사 전공의 역사학도들은 "사료"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는다. 사료를 찾고, 사료를 분석하는 행위에 대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는 것이다. 그럼으로서 역사적인 분석시 사료를 인용함하여 보다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또한 설령 본인이 잘 모르던 부분이라도 이미 역사학의 방법론을 숙지하였기에 비교적 빠르게 접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대사 중에서도 변두리 학문인 북방민족을 하는 본인에게 중국현대사를 물어보시면 참 곤란하다. 물론 개인적인 흥미로 이것저것 잡다하게 알고야 있지만, 역사적인 분석 수준을 원하신다면 크게 실망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한다.


2- 동북공정이 중국 전체 일이라는 착각을 버려!
한국에서는 마치 모든 중국의 역사가들이 동북공정에 찬성을 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런 중국에서 북방민족사를 한다고 하면 "짱깨한테 배워봐야 뭐가 있겠어." 정도의 소리를 대놓고 하는 사람까지 있다. 상대를 분석하려면 일단 스스로를 돌아보았으면 한다.

현재 한국의 역사학계를 보라. 거칠게 묘사를 하자면 : 일단 정통이라고 하는 강단사학이 있다. 그리고 한민족 만세라면서 온갖 날조를 하는 엉터리 역사매니아들이 있고, 최근에는 뉴라이트라고 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만약 외국 사람들이 뉴라이트의 주장이 한국 역사학의 대표라고 한다면 어떤 느낌이신가?

예를 들어서 본인의 지도교수님 같은 경우는 "그러나 학자에게는 국가가 없다. 학자는진리만 다룰 뿐이다. 나의 역사인식에도 중국은 없다. 민족이라는 것은 ‘상상의 공동체’에 불과하다. 모든 역사에 나오는 민족은모두 ‘정치체’다. 모두 정치구조이자 이익집단이다. 민족관계를 다루면서 낭만적인 관계를 도출해내기는 어렵다. 핵심은 진상을밝히는 것이다. 진상을 밝혀야 문제가 해결된다."라고 대 놓고 말씀하시는 분이다. 이것이 동북공정을 지지하는 사람의 말로 보이는가?

물론 본인이 공부하는 북경대 역사과에도 동북공정의 이론이 맞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신다. 그러나 그것도 대부분 학문적인 접근에서 그에 동의하는 것일 뿐이다. 또한 동북공정을 한국에서는 온갖 음모의 결정체라고 생각하도록 미디어에서 "지랄"을 했는데, 사실 동북공정은 90년대에도 많은 한국 학자들이 이야기 하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난리가 났을까? 별거 없다. 싸가지 없게 말해서  몇몇 "학자"분들이 밥그릇을 늘리려고 한 것이다.

비록 역사학도에 불과한 본인이지만, 역사학자들을 쉽게 보지 마셨으면 한다. 어느 집단에나 문제가 있는 사람이 있듯이 역사학계에도 한국이든 중국이든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사실"을 위해서 노력하는 바보들이다.


3- 역사학도가 컴퓨터에 무지할 것이라는 착각을 버려!
사실 역사 말고 전체 문과에 대해서 컴퓨터에 약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다. 물론 컴퓨터 공학과에 비해서는 평균적으로 컴퓨터 실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본인의 경우에도 나름 중국의 IT계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역사학도인 것이다.

예를 들어서 중문과와 같은 언어학쪽 계열들은 경제학과 만큼이나 통계와 싸운다. 보고 있으면 정말 불쌍할 정도로 싸운다. 그쪽의 논문은 자료만 다 모으고 입력만 하면 끝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통계에 토를 한다.

역사학쪽도 이제 컴퓨터를 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온갖 고문들을 쌓아놓고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필요한 것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디지탈화 된 사료에서 검색어 입력만 하면 주르르륵~~~ 사료들이 쏟아져 나온다. 또한 중국에 있으면서도 한국에 있는 사료들을 인터넷을 통해서 열람하고 분석할 수 있다. 만약 이것을 하지 못하면 앞으로 살아남기 힘들어 질 것이다.

사실 인문학도가 IT관련 분야에 빠지는 것은 위에서 말한 실질적인 이유보다는 심리적인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고대사를 하면서 고문을 쏘아보고 있다보면 저도 모르게 그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최신중에 최신인 것들에 대한 욕구가 생겨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 유학
1- 유학하면 다 동거한다는 착각을 버려!
실제로 결혼중개회사에서 유학을 갔다 온 여자는 점수가 대폭 감점이 된다. 유학을 하면 당연히 동거를 했고, "깨끗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리를 잘도 지꺼리고 있다. 본인으로서는 웃기지도 않아 보인다.

일단 한국에 있으면 동거를 하지 않는가? 본인의 주변 사람들이 이상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잘들 동거하고 살아간다. 오히려 타지에서 학교를 다닐 경우 자취방을 얻어서 동거를 하는 경우를 참 많이도 보았다. 그에 반하여 해외에서는 해외라는 이유로 부모님들의 감독이 삼엄하다. 자신의 방이 없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대놓고 이야기 해서 같이 살면 집 전화는 못 쓰는것이 된다. 부모님이 언제 전화를 할 줄 알고 집전화를 쓸 수 있겠는가?

물론 동거는 아니지만, 해외에 나왔고 잠시 즐기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아무도 모르겠지라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많은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단기 유학생들에게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장기 유학생들은 워낙에 사회가 좁다보니 잘못하면 베이징 전체가 다 알 수 있는 경우까지 생기기에 오히려 자제하며 조용히 살아간다.


2- 돈이 많아서 유학한다는 착각을 버려!
유학이라고 하면 다들 집에 돈이 많을 것이라고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본인은 중국이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나마 별로 없다. 일본이나 미국에서 유학을 한다고 하면 돈이 많다고 생각하나 보다. 그 착각을 처절하게 깨주겠다.

본인도 일본 유학을 해본 적이 있다. 그리고 본인은 3개월 동안 총 30만엔(한국돈 400만원정도?)을 사용하였다. 숙소비와 밥값 그리고 학원비를 포함한 모든 비용이다.  일본 유학에 대해서 아시는 분이면 경악을 금하지 못할 액수일 것이다. 30만엔으로 어떻게 3개월을 살았다는거냐라고 시비를 거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히려 그 중 10만엔은 돌아오는 길에 책을 구매하려고 별 수 없이 집에 손을 벌린 돈이었고, 실제로는 20만엔으로 3개월을 살았던 것이다. 물가가 말도 안되게 비싼 곳이라도 본인이 아끼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

또한 일본의 경우 본인은 단기여서 눈물을 머금으며 알바를 하지 못하였지만, 알바를 한다면 최소 시간당 900엔정도로 하루에 2시간씩 일하면 일주일에 14시간. 그렇다면 만이천엔이다. 한달이면 대략 5만엔 정도(밥값을 생각하면 최소 7만엔정도-_)이다. 스스로의 생활을 하기에는 충분한 돈으로 보인다. 본인은 어디까지나 단기여서 그렇지. 장기간 거주를 하면 쓸데 없는 잡비가 많이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사정은 오히려 다르다. 이 곳에서 식당 알바를 한다는 것은 바보짓에 불과하다. 식당 한달 월급이 대략 1000위엔(이것도 안됌-_)이다. 한국돈으로 20만원 정도이다. 여행 가이드 알바를 하면 하루에 최소 500위엔(10만원)을 버는 상황에서 식당 알바를 하는 것은 바보짓에 불과하다. 그리고 여행 가이드나 통번역의 기회는 그리 쉽게 오지 않는다. 한마디로 안정적으로 알바를 할 수가 없다.

학비도 선진국들에는 장학금제도가 튼튼하게 마련되어 있고, 외국인에게도 거의 차별을 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은 외국인을 "지갑"으로 생각을 해서 처절하게 뽑아 먹는다. 그래서 차라리 중국에서 유학을 하는 것이 돈이 더 든다.ㅠㅠ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우리집은 한국에서 중산층은 되는 집이다. 나름 안정적이라고 자부해도 될 정도이다. 그러나 집안 마다 교육 방침이라는 것이 있다. 본인 중국에 처음 왔을 때 300달러만 주시더라. 기숙사 비로 180달러를 지불하고 남은 120달러로 남은 3개월을 보내는 기분은 참 아름다웠다. (일본에 갈 때는 나름 사치를 한 것이다.-_-;; 그 고통을 다시 겪고 싶지는 않았거든...ㅠㅠ)

유학이라고 돈 많은 녀석들이라는 착각은 버려라. 오늘도 스스로 요리해서 먹고, 최대한 밖에 나가지 않으며, 맥주 한 캔에 행복해 하는 불우한 유학생이 있다.ㅠㅠ


3- 졸업장을 돈으로 산다는 착각을 버려!
유학을 하면 졸업장을 돈으로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분명히 그런 "병신"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수의 사람들일 뿐이다. 마치 한국의 SKY도 돈을 주고 졸업장을 살 수 있고, 그러는 사람이 조금 있듯이 해외 역시 그러하다. 오히려 해외이기에 외국어로 논문을 쓰는 삽질을 해야되는 고통이 뒤 따른다.

이 부분은 길게 이야기할 게 없으니 짦게^^::


3) 중국
1- 중국의 물가가 싸다는 편견은 버려
중국의 물가가 싸다는 것은 중국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중국에서 식료품 가격은 분명히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싸다. 이곳에서는 삼겹살을 죽도록 먹어도 얼마 나오지도 않는다. 소고기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식료품 가격일 뿐이다.

중국의 공산품 가격은 이미 한국과 동일한 수준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식료품 가격이야 중국의 대부분 못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중국정부차원에서 강력하게 관리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버스가격이나 담배 가격 혹은 식료품 가격이 매우 싼 것이다. 그러나 공산품은 다르다. 중국의 상위 10%들의 소비 수준은 한국의 고위층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특히 상위 3%는 상상을 초월하는 갑부들인 것이다.

비록 10%이지만, 그 10%가 1억 3천만명이다. 한국의 인구의 3배 이상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소비에는 머뭇거림이 없다. 그렇기에 전자제품을 비롯한 상당히 많은 상품과 고급 레스토랑의 가격은 한국과 같거나 심지어 더 비싸기까지 하다. 단지 여행으로 와서 싼 음식을 먹고 싼 교통수단을 접했다고 중국의 물가가 싸다고 하는 것은 정말 몰라도 멀 모르는 것이다.


2- 몇 년전에 중국에서 본 것으로 중국을 판단할 수 있다는 착각을 버려!
중국에서 유학을 한다고 하면 "내가 3년전에 중국에 갔었는데 그 때는 어쩌고 저쩌고...." 하시는 분들이 있다. 개인적으로 심히 어이가 없다. 장기간 중국에 있는 유학생들도 방학 기간 잠시 한국에 갔다 오면 그 변화에 깜짝 깜짝 놀라고는 한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와서 경험한 것을 가지고 중국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본인이 처음 중국에 왔던 98년도에 북경대 주변은 그야 말로 시골이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나서 정식으로 유학을 왔을 때에 그곳은 이미 중관촌이라는 중국의 최대 IT 산업의 매카로 변해 있었다. 딱 3년이다. 그 3년 동안 정말 많은 것이 변화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도 몇 년전에 갔던 일을 가지고 중국을 논하고 싶은가? 허허...


3- 중국은 넓어. 정말 넓다고!!! 한국의 기준으로 생각하지 마!
한국인들이 해외로 나와야 되는 절대적인 이유가 이것이다. 한국에서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다. 초고속 열차로 2시간도 안되어서 도착하게 된다. 그런데 한국보다 빠른 초고속 열차가 있는 베이징부터 홍콩까지 걸리는 시간이 10시간이다. 아직도 그 크기가 짐작이 안되시나 보다. 비행기로 가보자. 인천에서 베이징까지 채 2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베이징에서 이번에 위구르 사태가 일어난 우루무치까지 대충 4시간. 국내에서 비행하는 것이 국외 비행보다 더 오래 걸리는 이런 사태는 중국에서는 자주 발생하는 일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초고속을 말하는 것이고, 베이징에서 우루무치까지 기차를 타고 간다면 44시간(약 2일)이 소비된다. 이것도 예전에 비해서 많이 빨라진 것이다. 2001년도만 하더라도 4박 5일이 걸렸다. 기차 안에서 2일 넘게 먹고 자고 싸는 것이 이해가 되시는가? 이것이 중국이다.

이처럼 땅이 넓다보니 각각의 지방마다 너무나 다르다. 상하이가 다르고 베이징이 다르다. 신장이 다르고 동북이 다르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한 곳만 다녀오고 나서 마치 중국 전문가라도 되는 양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많다. 본인도 나름 쓸데 없이 많이 돌아다녔다고 하지만, 어디에 가서 감히 "중국"을 안다고 말을 하지 못하겠다. 다만 중국의 몇몇 곳을 적당히 알 뿐이라고 대답할 뿐이다.

그러나 중국의 크기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치 한국에서 서울이나 부산이나 크게 다르지 않냐는 것처럼 중국을 논한다. 그 가까운 서울과 부산도 지역색이 있는데, 중국은 얼마나 더 심하겠는가?


4- 중국은 지방마다 말이 달라서 표준어를 공부해도 소용없다.
성용의 이번 영화 신주쿠사건에서조차 방언을 사용해서 모른다는 대사가 나왔다. 어차피 중국의 지방마다 말이 다르다면 중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만약 100년 전이라면 얼마든지 긍정을 해주었겠지만, 지금의 중국에서는 통하지 않는 말이다.

중국에서는 표준어만 사용하면 사실상 어느 지방을 가던지 문제가 없다. 물론 60이 넘은 늙은 층의 사람들은 표준어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 아래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상 표준어를 사용할 수 있다. 물론 한국의 사투리처럼 각자 독특한 성조와 발음이 있다. "니하오"을 어떤 지방에서는 "니홍"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이 사투리를 들어도 이상하다고 느끼며 가끔은 웃기기는 하지만 그 뜻은 알아들을 수 있다. 더구나 상대가 고의적으로 사투리를 쓰는 것도 아니고 표준어를 구사한다면.....사투리 발음이 좀 있다고 듣지 못하는 당신의 중국어 실력을 반성하라. "그거시 아니랑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것과 별 차이가 없으니 말이다.

릴레이 바통을 다음 분들에게 넘기겠습니다.
1) 湘來's 空間의 상래님.
현재 블로그코리아에서 일하고 있으며, 타이완 유학파 출신. 블로그바닥에 대한 편견보다는 타이완에 대한 한국인들의 편견에 대해서 서술해 주셨으면 합니다.(라며 은근히 압박-0-)

2) 골빈해커닷넷의 골빈해커님.
올블로그 부사장을 가장한 한량으로서 평소에 저와 중얼거리던 "독한" 말들이나, 당당하게 애플빠를 주장하시는 분이니 애플빠나 애플제품(아이폰?!)에 대한 편견들에 대한 글을 기대해봅니다.

3) 깜보's Story... (성인용품전문블로그) 의 깜보님.
이미 블로그 이름에서 모든 것이 나옵니다. 깜보님에게 성인용품 업계에 대한 편견을 들어보는 자리를 마련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지요?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연대에 대해서는 학계의 주류의견은 한명제(汉明帝)시대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三十三年,发诸尝逋亡人、赘婿、贾人略取陆梁地,为桂林、象郡、南海,以適遣戍。西北斥逐匈奴。自榆中并河以东,属之阴山,以为四十四县,城河上为塞。又使蒙恬渡河取高阙、阳山、北假中,筑亭障以逐戎人。徙谪,实之初县。禁不得祠。《史记-秦始皇本纪-卷六》”에 나오는“禁不得祠”에서 “不得”를 “佛陀”의 음역으로 해석하여, 진시황 이전에 이미 전래가 되어서 보편화 되었다고 판단하였다. 단순히 음역에서 그친 것 뿐만이 아니라 고고학 자료를 이용하여서 秦咸阳과 汉长安에 인도와 유럽으로 통하는 “Pre-실크로드”가 있었다고 판단하였다.

-- 韩伟(陕西省考古研究所)《秦始皇时代佛教已传入中国考》文博 2009年 第2期,P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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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始皇(BC 214년쯤) 부터 汉明帝(약 AD 60년쯤)까지의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불교전파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裴松《三国志》에 汉哀帝(BC2년)의 기록이 나오지만 삼국지 자체의 집필연도가 늦으므로 중간 과정의 증명이 될 수 없으며, 그 외의 사료가 전무하다는 것도 충분히 문제가 된다고 본다. 이는 진시황때에 넓게 퍼져있었고, 전쟁행위와 동등할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금불정책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한다. 물론 그렇다고 Pre-실크로드를 부정하지는 못한다. 수 많은 고고학적 유물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는 점을 보아서 분명히 실크로드 전에도 문명이 오고 가는 통로는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통로가 얼마나 활발하게 움직였느냐는 또 다른 문제로 생각된다.


노예제는 과연 경제적으로 낙후된 방식인가? 비록 남북전쟁을 통해서 미국에서 노비해방이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남북전쟁이 있지 않았더라도 노동자가 노비에 비하여 더욱 우수한 경제활동이 가능하여서 더 효율적인 경제시스템이 가능했음으로, 어차피 노비제가 없어졌을것이라는 정론으로 알려져 있다.(본 글은 수업필기노트이다. 내 맘대로의 정리-0-)

1) 농장주의 경영방식
1- 가족단위로 노비구매 (도망이 별로 없어짐)
(한국에서 가족단위의 매매 3: 개인 매매 7 )
2- 노비 도망에 대한 공동법률을 강화(농장주 간의 상호규제)
3- 유색인종을 노비로 사용하여서 차별화를 둠(붉은 낙인)
이로 인하여 실제로 노비도망이 그리 많지 않았음.

2) 생산성의 문제 – 실제로는 매년 생산성 증가
1-외부적인 요인 : 시장우호적(계속되는 면포 수요 증가)
2-선진 경영 기술의 도입 :
(1)성과급 지급(경쟁화)
(2) 노동분화(유소년층-청장년층-노년층을 구별하여 운영)

3) 노비 가격의 상승
만약 노비의 효율이 떨어지면 노비 가격도 떨어지겠지만, 노비의 가격은 계속적으로 상승.


그렇다면???
남북조시대에 북방민족에 대한 통치의 효율성에 대한 문제??
중국대륙에서 노예제에서 자유농민으로 넘어간 동력은 그럼 무엇인가??
(전국통일과 연관이 있는가? 시장의 확대로 인한 노동력의 필요??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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