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无我는 "내가 없다"는 뜻으로서 무아지경에서의 무아를 말한다. 불후不朽는 "영원함"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전세계의 인생에 대한 모든 철학토론은 "내가 없음"과 "영원함"이 얼마나 동일한 것인지에 있는듯 하다. "내가 없음"과 영원함"은 언뜻 보기에는 서로 충돌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내가 없기"에 비로서 "영원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을 모두 내가 있다고 느낀다. 사실 내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면 어떤 이도 대답하지 못한다. 먼 옛날 사람들은 편의와 필요에 의하여 "나"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사람들은 "나"를 실제로 존재하는 말로 생각하고 세계에 정말로 "나"가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다. 마치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늘"이라는 실체가 비를 뿌리고 있는 것이 아닌것과 같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 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나는 나의 생각을 알 수 있을 뿐이며 나의 생각은 결코 내가 아니다. 마치 나의 몸이 "나"가 아닌 것과 같다. 만약 나의 몸이 "나"라면 나의 손톱이나 머리카락은 내가 아닌 것일까? 만약 손톱이나 머리카락이 "나"가 아니라면 나의 사상과 생각이 어찌하여 "나"일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의식하는 일상의 모든 것은 단지 "나의 것"일 뿐이지 "나"가 아니다.


그럼 "나의 것"은 어떠한가? 자세하게 살펴보면 "나의 것"이라는 것도 결코 "나의 것"이 아니다. 일상용품부터 살펴보자.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은 "나의 것"인가? 옷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재료와 디자인이다. 그런데 옷의 재료나 디자인 모두가 내가 발명한 것도 아니고 내가 만든 것도 아니다. 옷의 재료는 이미 자연에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이 공장에서 방직기를 돌린 뒤에 세계 각국에 판매하고 있는 것을 살 뿐이다. 디자인 역시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유행에 따라서 만들어낸 것이다.

이 옷의 재료나 디자인은 나와는 관계가 없는데도 이 옷을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나의 것"이라는 말을 왜 하는 것일까? 내가 입고 사용하고 그 소유권이 나에게 있기에 나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 뿐이 아니던가? 구두 가게에 들어가보면 온갖 디자인과 재료의 구두가 전시되어 있다. 이 때까지는 이 구두와 나는 어떠한 관계도 없다. 내가 돈을 지불하고 구두를 신어야만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내가 없어도 방직공장의 천이나 신발가게의 구두 자체는 변함이 없다. 나를 초월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인데 나와 어떤 관련이 있겠는가?

같은 이유로 요리의 맛과 향이나 건축물의 재료나 디자인 혹은 교통수단등의 물질생활에 속하는 모든 것들이 이미 나와는 독립되어서 먼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나와는 관계 없이 존재하며 나와 같이 없어지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나의 것”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인가? 외부의 모든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너는 단지 그 속에 들어간 것 뿐이다. 너는 “나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너야말로 “그들의 것”이다.


그 다음에는 나의 가족, 나의 학교, 나의 동네, 나의 국가라고 불리우는 집단사회생활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들은 모두 나의 것이라고 불린다. 사실 모두가 나의 것이 아니다. 가족만 놓고 살펴보자. 이전에는 대가족이였지만 지금은 핵가족이 되었다. 이전에는 일부다처제였지만 지금은 일부일처제이다. 이전에는 부모의 명령에 의하여 혼인을 하였지만 지금은 자유 연애시대이다. 이전에는 부모형제사촌오촌육촌등의 온갖 복잡한 관계가 형성이 되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변했다. 그런데 이 모든 변화가 나의 생각대로 변화한 것인가? 아니면 이미 그러한 가정이 있고 내가 그 속에 들어간 것일까? 위에서 말한 구두의 예와 같이 결코 내가 이러한 가정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주인이 될 수 있는가? 가족이든 신발이든 모두가 신발가게에서 사온 것과 같기에 너와 나는 주인이 될 수는 없다. 가족 제도에서 학교와 국가와 같은 모든 조직들도 어찌 내가 주인이 될 수 있고 어찌 내가 디자인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은 나보다 먼저 졵재하였고, 나를 초월하여 나의 외부에 존재하며 나와 같이 없어지지 아니한다. 세상은 오래 전부터 이러하였고, 그곳에 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신발에 신겨진 것이고, 이 가정에 태어나진 것이다. 나는 그들의 것이고, 그들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제는 나의 취미나 나의 신앙 혹은 나의 사상등과 같은 정신생활에 대해서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나는 오페라를 좋아한다. 나는 메이란팡(梅兰芳)의 경극을 좋아한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어찌 나의 취미일 수 있겠는가? 메이란팡의 노래라는 취미가 있었고, 내가 그곳에 들어간 것 뿐이다. 메이란팡의 노래는 마치 신발가게의 구두와 같이 나의 취미로 인하여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나의 취미가 없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내가 두보(杜甫)의 시를 좋아하거나 기독교도라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세상에는  두보의 시와 기독교의 신앙이 이미 존재하였고, 내가 그 속으로 들어가진 것 뿐이다. 어디 기독교는 나의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을 뿐이랴? 무엇이 기독교신앙이라고 말하기도 힘들다 . 당신이 만약 기독교 신앙을 자세히 분석을 하면 사실 기독교는 예수 이전에도 존재하였고, 예수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예수조차도 기독교를 나의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엄격하게 말하여 어떠한 한 사람의 사상도 “그의” 사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대체 어떤 사람이 홀로 “나의 사상”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엄격하게 말하여 이 하늘 아래 절대로 진정한 “나의 사상”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나의 것”도 없으며 “나”도 당연히 없다.


어떤 이는 인생은 연극과 같다고 한다. 이 말은 분명이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대본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 너는 무대의상을 입고 등장하여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연기하기만 하면 된다. 역할을 맡은 사람이 변하여도 공연은 대본대로 계속된다. 내가 이 세상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의식주부터 시작하여서 가정과 국가을 비롯하여 취미와 종교신앙이나 철학사상과 같은 모든 것들이 대본과 같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다양한 역할 중에서 한가지를 골라서 연기를 해야 된다. 그리고 내가 무대를 떠날 때 또 다른 역할로 변하면서 공연은 계속 된다. 당신은 무릇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인데, 어떻게 진지하게 "나"을 이야기 할 수 있는가? 당신이 말하는 모든 언어와 동작과 희로애락 모두를 어떻게 진지하게 "나"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기에 "연극의 인생관"은 "내가 없음"의 인생관과 비교적 근접해 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또 "영원함"을 말할 수 있는가? 이 모든 것은 위에서 말한 대로 "나"을 뛰어넘어서 "나"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영원함"이다. 그렇기에 만약 당신이 신발을 신기만 한다면 "영원한" 인생에 참가한 것이 아니다. 신발을 만드는 작업에 참가해야지만 비교적 "영원한 것"이다.


집에 사는 것보다 집을 만드는 것이 좋다. 연극을 보는 것보다 연극에서 연기를 하는 것만 못하며, 직접 각본과 음악에 참가하는 것이 더욱 좋다. 인생과 연극은 분명히 다르다. 인생은 배우인 동시에 제작자이기 때문이다. 한 편으로는 내가 존재하지도 않지만, 한 편으로는 영원토록 변함이 없다.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도 영혼이 계속 존재하기에 영혼 불멸 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중국의 선현들은 입덕입공입언(立德立功立言)이라고 하여 덕을 갈고 닦고, 공적을 쌓으며, 학술적으로 성공하는 것 을 영원 불멸한 3가지라고 말했다. 이 모든 것들은 모두가 사회공통의 것이고 보 잘 것 없이 조그마한 나와는 독립되어서 존재하며 객관적인 발전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죽은 자의 영혼이 바로 이곳에 의존하여 발현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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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오랜만입니다. 최대한 쉽게 의역으로 해보았습니다. 혹시 기다리신 분 있으신가요? ^^....대충 번역해 놓고 보니 좀 문제가 있는 표현들이 좀 있군요. 정식 출판이 아니니 그냥 넘기겠습니다. -_;;
예치(礼治 예로서 백성을 다르린다.)와 법치(法治 법으로서 백성을 다스린다.)는 중국정치사상사의 두 가지 큰 흐름이다. 거대한 농업국가인 중국의 상황을 인식하고, 중앙정부로서 거대한 국가를 통치해야되는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보편적이고 공평한 법률이 있어야지만 전국 각지를 통치할 수 있다. 그리고 농업사회는 비교적 안정적으로서 변화가 크지 않다. 이는 법률의 지속성과도 서로 맞아떨어진다.

이런 중국정치를 객관적인 조건을 놓고 보면, 중국은 대단히 쉽게 법치의 길로 향할 수 있다. 통일되고 지속성이 강한 법율을 통해서 정치시스템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사상계는 오히려 예치를 소리 높여 외쳐오고 있었고, 법치를 배격하고 있었다. 특히 유가가 그러하였다. 이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예와 법을 비교하였을 때 예는 외면적으로 등급을 나누는 듯하다. 그러나 사실은 매우 평등하다. 법은 외면적으로 평등한듯하나, 사실은 등급을 나눈다. 예를 사람들을 자유로 인도하고, 법은 오히려 사람들의 행동을 제한하고 속박한다. 예를 일종의 사회성이고, 법은 정치성이다. 예가 사회에서의 정부로의 올라감이라면, 법은 정부로부터 사회로의 내려옴이다. 어찌되었든 예는 필연적으로 타자의 존재가 필요하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상대방에 대한 어느 정도의 존경을 필요로 한다. 법은 오직 법만을 논할 뿐이고 사람을 논하지 않는다. 살인을 한자는 죽어야 하며, 타인을 다치게 한자나 도둑질을 한자에게는 그 죄를 책임지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죄를 저지른 사람만을 고려한다. 그렇기에 예는 개인들의 상호간의 일이며, 법은 대중을 통치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예치의 정신은 사회 구성원 개개인에게 있으며, 개개인의 평등과 자유를 보장하여서 점차 풀어지고 가벼워진다.[각주:1] 법치의 정신은 국가정부에게 있으며, 권리를 중심으로 개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깍아내리며, 점차 강제적인 제재로 흘러간다.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예치를 주장하였기에 사회가 비교적 풀어져 있다. 이것은 자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자유가 많은 것이다. 정치는 오직 무의미한 구조물일뿐, 사회에 어떠한 강압이나 속박을 실행할 수 없었기에 정부 지도자들이 설정한 목표대로 나아갈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는 하였다[각주:2].


좀더 깊게 말을 하자면, 법은 인간의 권리를 보호하는 중요성을 가진다. 예는 인간의 감정[각주:3]을 인도하고 전달함에 중요성을 가진다. 권리는 물질적인 차원이며, 감정은 정신적[각주:4] 차원에 있다. 인류가 더불어 살아가는데 자신의 것에 대한 권리를 지킬 수 없다면 매우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고,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권리는 대립이고, 감정은 교류이다.  대립이기에 보호를 할 수 있고, 뺏을 수도 있다. 교류이기에 전달할 수 있고, 화합할 수 있다. 예는 언제나 부드럽고, 법은 언제나 딱딱하기 때문이다.

중국사회는 예를 으뜸으로 생각하는 풍토에 젖어 있어서, 모든 것에서 교감을 말하고, 화합을 주장하여 마치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약자는 그 속에서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얻게 된다. 그렇기에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간다. 가볍고 부드럽게 변화해간다. 만약 법을 으뜸으로 생각하는 사회라면,  법률은 비록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졌으나, 쌍방의 권리가 서로 충돌을 할 때가 문제이다. 갑을 보호할 수는 있을 지는 몰라도 동시에 을을 보호하지는 못한다. 만약 을이 자신의 권리를 계속 유지하기를 원하고, 법률로서 해결할 수가 없다면, 법률을 바꾸기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법률은 정부의 손에 있다. 그럼으로 법률을 바꾸기 위해서는 정부를 밀어내고 새로운 정부를 새우는 수 밖에 없다[각주:5].

그래서 법을 으뜸으로 하는 사회는 발전을 해나아가는 중에 계속되는 혁명을 피할 수 없다. 예를 으뜸으로 생각하는 사회는 혁명을 할 수도 없고, 혁명이 필요하지도 않다. 그래서 법을 으뜸으로 생각하는 사회는 언제나 급변하고, 예를 으뜸으로 하는 사회는 급변할 수도 없고, 급변할 필요도 없다. 중국사회는 비교적 농촌경제를 기반으로 만들어졌기에, 원래부터 급격하게 변할 필요가 없었고, 거대한 통일정부 아래서의 급격한 변화는 이익보다 파생되는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중국인은 부드러운 예를 으뜸으로 생각하려 하지, 딱딱한 법을 으뜸으로 삼으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면에서 먼 미래를 바라보며 깊이 생각하였다고 볼 수 있다[각주:6].


본래 정치는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인류에게는 사회가 없을 수 없지만, 정치는 반드시 필요한 것만은 아니다[각주:7]. 인류는 사회를 위해서 정치가 있어야 하는 것일뿐, 정치를 위해서 사회가 있는 것이 아니다. 법율은 정치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렇기에 정치와 같은 한계점을 가지게 된다. 만약 최소한의 권력만 가지고 있는 정부가 있고, 정치가 사회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가벼운 사회가 있다면, 어찌 이상적이지 않을까? 이보다 더욱 이상적인 사회는 무정부의 사회가 아닐까? 이에 대해서는 일단 더이상 언급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중국의 예치사상의 최종적인 목표는 역시 위와 같은 이상을 향하고 있다. 최소한 정치를 사회에 동화시키려 하고 있고, 정부로 하여금 사회를 통치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 중국인들은 중국정부의 무능을 원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치를 거부하고 법치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중국인이 말하는 예치는 바로 정부의 무능이다. 많은 책임을 사회에 맡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풍속으로 하여금 법률을 대신하게 하려는 것이고, 교육을 하여금 행정[각주:8]을 대신하게 하려는 것이었고, 선생님으로 하여금 관리를 대신하려고 했다. 그리고 감정으로 하여금 권리와 이익을 대신하려고 하였다.


중국 도가 사상 역시 무정부주의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들은 넓은 영토의 수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사회에 대해서 부정적이며, 사람이 적은 조그마한 나라(小国寡民 소국과민)의 조그만 사회를 희망한다. 그들은 법을 반대하면서 동시에 예도 반대한다. 그들은 인류가 정치가 없이 있을 수는 있어도 사회가 없이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각주:9]. 그래서 도가는 예치를 반대하면서도 정부를 도무지 없애지 못하고 반대로 법치의 길로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도가사상과 법가사상은 같이 어울어지고는 하고, 도가가 예치 사상을 반대하는 물결이 일어난 이후에 법치 사상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사마천[각주:10]은 신불해와 한비자[각주:11]의 사상적인 원류가 노장에서 나왔다고 더욱 심화되었다고 한 것이다.[각주:12].


서방의 최근 무정부주의자들은 공산주의와 떨어지지 않고는 한다. 크로포트킨[각주:13] 역시 그러하였다. 만약 공산주의가 법치주의의 테두리에서 벌어진다면 반드시 계급투쟁을 외쳐야 한다. 반드시 무산계급이 무장하여 정권을 탈취하여야 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무산계급에 의해서 법이 만들어져 세워지게 된다. 그러나 이상적인 공산사회에 도달하게 된다면, 모두가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할 필요가 없어진다. 누구도 타인의 권리와 이익을 뺏을 필요가 없어진다. 법률의 최대효율 역시 존재하지 않고, 정부 역시 법률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어찌 무정부가 아니겠는가[각주:14]?

그리하여 인류는 무정부일 수 있으나 사회가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가 존재한다면 예치가 없을 수 없다. 그래서 유가는 도가보다 더 깊고 멀리 내다본 것이다. 크로포트킨도 중국의 도가보다 뛰어나다. 그는 위에서 말한 것을 이해하고 인류가 무정부 있수나 동시에 사회가 없을 수는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유가는 크로포트킨 보다 더 뛰어나다. 왜냐하면 사회에 예치정신을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예치정신으로 나아가면 정부에서 점차 무정부상태로 나아가게 된다. 오늘날 서방인들이 추구하려는 사회주의와 공산 주의 역시 포괄하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예기, 예운편>(《礼记·礼运篇》)에서 말하는 대동세계[각주:15]에 대한 이상추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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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모든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과 환영합니다.  본 글은 의역식 번역입니다.
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저 개인적으로 이 글은 그리 찬성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나름의 논리체계가 있고, 저와는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것이 오히려 스스로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에 번역을 해보았습니다. 당시의 시대 상황과 쳔무(전묵)선생님의 성향상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문제가 있는 글이라고 평가해 봅니다.

간단한 반박 :
1) 도가의 소국과민은 사회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본인도 도가가 단순히 무위자연이 아닌 상당한 고도의 통치술이라고 생각을 하나, 사회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사회 뿐만이 아니라 자연까지 포괄하는 진정한 의미에 무정부주의일수도 있다고 여긴다.
2) 도가가 통치사상이었을 때의 한초에는 약법삼장으로 법률이 간단했는데, 한무재 이후 유가가 떠오르면서 점차 법치적인 요소가 늘어났다. 한마디로 말하면 유가는 사실상 법가가 양의 탈을 쓰고 있는 통치술이다.
3) 유가가 다시 흥하고 있어서 소강(小康)이 이야기되어지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이야기 되는 것은 법치이다. 예치가 아니다.

역시 논문 막혔을 때 번역작업을 잠시 하면 머리가 풀린다랄까? ^^:::

  1.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도가의 "소요유 하게 된다." 혹은 "자유롭게 거닐게 된다"라고 하고 싶었으나, 전묵선생님의 원래 주장을 생각하였을 시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본문으로]
  2. 이와 같은 분석에는 개인적으로 완전히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중국은 결코 예치가 아니었고, 표면적으로만 예치를 말했을 뿐, 실질적으로는 법치였다고 판단한다. (이명박 대통령님이 친서민정책이라고 말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친대기업정책인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보다 쉽게 이해하시리라 본다.) [본문으로]
  3. 원문은 情感(정감)이며, 이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고, 보다 깊은 의미가 있으나, 현대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뜻으로는 감정이라고 생각된다. (더 좋은 단어가 생각나시는 분은 언제든지 덧글^^) [본문으로]
  4. 원문은 性灵(성령)이다. 이 나름대로의 철학적인 뜻이 있으나, 현대한국어로는 그냥 "정신"으로만 번역을 하였다. (보다 좋은 단어는 언제든지 환영^^) [본문으로]
  5. 이 글이 쓰여질 당시를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되지만, 삼권분립으로 입법-행정-사법이 각자 독립된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극단적인 발언에 가깝다. 단. 입법-행정-사법이 한 집단에 장악되어서 독재를 하는 상황이면 이는 타당하다. 혹자는 한국이 현재 독재라며 정권을 바꾸어야 된다는 과격한 말을 하지만, 한국은 현재 독재가 아니다. 비록 수 많은 문제가 있으나 그 모두가 국민이 뽑은 결과이다. [본문으로]
  6. 근대에 들어와서 서양법이 더욱 발전해서 사람들이 흔히 착각을 하지만, 중국의 법제도는 거의 완벽함에 가까울 정도였다. 이를 다시 말하자면 중국인은 결코 법을 멀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도 경국대전이라는 것이 있다. [본문으로]
  7. 현재에는 정치의 개념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든 행동으로 넓어졌고, 사회와 정치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란 "통치"계열의 좁은 의미의 정치를 말한다. 예를 들어서 우리의 생활 모든 것이 정치이지만, 국회를 보며 "정치권"이라고 말하는 것에서의 정치이다. [본문으로]
  8. 원문은 治权. 영어로 right of administration나 managing power정도의 의미. [본문으로]
  9. 본인이 가장 반대하는 부분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쪽 잡담에서... [본문으로]
  10. <사기>의 작가. 환관이 되면서까지도 아버지의 유지에 따라서 역사서를 편찬. [본문으로]
  11. 원문에서는 申韩이라고 언급된다. 신불해(申不害)와 한비자(韩非)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 [본문으로]
  12. 이 말이 나온 이유는 특히 <사기>의 한편이 《老庄申韩列传》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위는 노자, 장자, 신불해, 한비자의 앞글자를 따서 한꺼번에 모아 둔 것이다. 그러나 노자의 사상이 권과 세 법가에 영향을 주었을지 모르나, 노장사상 자체가 법가의 원류라고 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본다. [본문으로]
  13. Peter Kropotkin 정식 이름은 Pyotr Alekseyevich Kropotkin.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http://en.wikipedia.org/wiki/Peter_Kropotkin [본문으로]
  14. 본인도 이상은 공산주의이다. 그러나 20세기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의 처절한 실패를 통해서 배우지 못할 바보는 아니다. 인간은 욕심덩어리이다. 비록 선의가 있을지라도 욕심덩어리이다. 그것에 눈을 돌리는 공산주의가 바로 이 글에서 나오는 당시의 공산주의이다. [본문으로]
  15. 대동은 大同이다. 그 전 단계가 소강(小康)이다. 바로 현재 중국에서 기본적으로 완성했다는 그 소강이며, 중국은 앞으로 대동으로 나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본문으로]
자유는 서방사상의 핵심이다. 그러나 그들은 개인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타당성이 없는 말이다. 만약 너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에 의한 한계를 가진다면, 너는 자유롭지 못한것이다. 만약 타인의 자유가 너의 자유에 의한 한계를 지닌다면, 그는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그들이 내세우는 자유주의는 현재 흔들리고 있다. 상호간의 자유의 충돌에서 명확한 선을 그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유는 반대는 간섭이다. 이 하늘 아래 2개 이상의 사물이 존재한다면 그들 사이의 간섭은 결코 피할 수 없다. 하나의 간섭이 있으면 하나의 자유가 손해를 본다. 간섭이 늘어나면 자유가 줄어든다. 외부의 간섭에 대응은 3가지를 넘지 않는다. 하나는 강력한 힘을 사용한 억압이며, 두번째는 조화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굴복이다. 모든 사람들의 자유를 타인의 자유까지로 한정한 것은 조화를 추구한 것처럼 보인다. 안타깝게도 타인과 자신사이의 선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기에 조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

무한한 발전 역시 서방사상에서 요구하는 특징이다. 만약 무한대로 발전하여 자신의 자유를 쟁취하려고 한다면, 타인과 자신 사이에는 억압과 굴복이라는 두가지 선택밖에는 남지 않는다. 한 쪽에서는 억압을 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결코 굴복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억압과 굴복의 과정에서 투쟁이 생겨난다. 현실에서 끊임없이 간섭을 통해서 자유를 구하려 한다. 그렇기에 가장 자유를 사랑하는 것은 가장 간섭을 사랑한다는 말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것을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할 수 있을까?


"도는 같이 가며 서로 어긋나지 않고, 만물은 같이 자라며 서로 상처입히지 않는다."(道并行而不相悖,万物并育而不相害 - 中庸 ) 이것이 중국인의 생각이다. 그러나 어떤 존재과 다른 존재 사이에서 서로 간섭하지 않고 충돌하지 않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아니면 상호간의 간섭중에서 결국 이상적인 조화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일까? 자연에 대해서는 일단 접어두고, 우선 인간에 대해서만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세상에 오직 너 하나만이 있을 수는 없다. 너와 누군가가 이 세상에서 같이 살아간다면, 분명히 타인의 간섭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이것을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천지간에 오직 홀로 있어야만 진정한 자유를 향유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이 살아가면서 혼자만이 존재할 수 있을까? 나는 인간은 오직 마음 속에서만 혼자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찌하여 오직 인간의 마음 속에서만 혼자일 수 있느냐?

먼저 앎을 거론해 보겠다. 앎은 알게 됨(피동)과 알 수 있음(능동)이 서로 연결되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는 능동과 피동을 초월하여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또한 알게 됨과 알수 있음의 조화를 이루어 중도을 이루게 된다. 알 수 있음이 알게 됨에 접근한다. 다시 말해서 알게 됨이 알 수 있음에 대해서 간섭을 하게 된다. 그러나 만약 앎의 면에서 살펴보자면, 이러한 간섭은 결코 간섭을 받은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각주:1].

춥고 배고픈 사람은 물질 생활면에서 보았을 때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앎에서는 배고 고픈 것을 알게 되고, 추운 것은 알게 되는 것은 자유롭지 않다라고 말할 수 없다. 앎은 물질과 나의 대립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물질과 나의 대립의 조화로 생겨나기에 앎은 절대적며, 그리하여 자유롭다. 앎이 자유라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사실 당신이 모른다는 것도 앎이다. 지식의 정면과 반면 모두가 앎이며, 그래서 인간 내면의 앎은 절대적이며 자유롭다.


이번에는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즐거운 다양한 감정에 사람들은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고는 한다. 사실 희노애락의 감정은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절대적으로 자유롭다. 앎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피동과 능동을 초월하여 독립해 있고, 피동과 능동을 초월하여 중립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쁨은 자유로운 기쁨이고, 화남은 자유로운 화남이다. 슬프고 즐거운 것도 모두 자유로운 슬픔이고 즐거움이다. 좋으면 좋다고 하고, 싫다면 싫다다고 한다. 외부에서의 좋음이 나를 간섭하여 좋아하게 만들어 나의 자유를 빼앗겼다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또한 외부의 싫음이 나를 간섭하여 싫게 만들어 나의 자유를 잃어버렸다라고 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너 자신이 좋기에 그것을 보고서 좋은 것이고, 너 자신이 싫기에 그것을 보고 싫은 것이다.

"그윽하고 정숙한 숙녀는 군자의 좋은 짝이로구"(窈窕淑女,君子好逑 - 《诗经》第一篇《诗经•关雎》[각주:2])나 역시 자유이고, "잠들지 못하는 것도"(辗转反侧《诗经·周南·关雎》[각주:3]) 역시 자유이다. "절박하게 원하는 것"(求之不得《诗·周南·关雎》)을 아는 것 역시 너의 마음 속의 자유이다. 얻고 얻지 못하는 것은 외부의 일이다[각주:4]. 외부의 일은 당연히 우리의 자유 속에 있지 않다. 그러나 절박하게 원하고 잠들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 속의 자유이다. 너의 마음 속의 희노애락을 포함한 모든 감정만을 놓고 본다면 당연히 자유이다.


위에서 말한 것 처럼, 자유는 내부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간섭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간에 어떠한 조화와 융합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마음의 앎과 감정은 모두 이미 밖과 안이 조화가 된 것이고, 물질과 나의 대립을 초월한 중립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과학, 예술, 문학, 종교, 도덕등에 속하는 것들은 모두 마음에서 살아있고, 앎과 감정의 연장선에 포함된다. 이것들은 모두 최대한 자유롭게 하여야 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최대한의 자유를 얻을 수도 없다. 그러나 외부의 사물의 간섭은 자주 자유를 초월하기도 한다. 물질자연부분에 관하여 앎은 곧 권리이다. 앎이 커질 수록, 권리도 커진다. 권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란 바로 외부의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 압력을 행사하고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자연물질계까지만 영향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이 권리는 인문사회에서는 모든 인류 자신에게 있는 것이기에 물질자연계와의 관계에서의 방법과 과정을 사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 물질자연계에서는 앎이 중심이다. 혹은 앎을 더욱 중요시한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인문사회에서는 감정이 중심이다. 혹은 감정을 더 중시한다고 할 수 있다. 깊은 앎과 진실된 감정은 모두가 일종의 권리이며, 모두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의 대로를 걸을 수 있게 해준다. 중국에서 오래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말을 소개할까 한다[각주:5]. 천왕께서는 현명하시니, 소의 죄는 죽어 마땅하옵나이다.(天王圣明,臣罪当诛(唐韩愈《羑里操》[각주:6]),이나 천하에 부모가 아닌 자가 없다(天下无不是的父母[각주:7]" 이 말은 사실이다. 일가친척이 화목하지 못하고 국가가 혼란하더라도, 충신이나 효자가 자유롭게 그 효와 충을 완성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인문역사상의 모든 예술, 문학, 종교, 도덕의 최고의 경지는 바로 일종의 마음의 자유를 발현시키는 것이다.


과학의 지식은 일종의 사물과 나 사이를 앏을 융합하여 외부로 발현시킨 무상의 자유이다. 예술,문학,철학, 도덕은 일종의 인간과 나 사이의 감정을 융합하여 외부로 발현한 무상의 자유이다. (사실 예술도 사물을 대산으로 하고, 과학도 인간을 대상으로 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괄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이 모든 것들이 안에서부터 발현되는 것이다. 정치상의 권력이나, 경제상의 재력은 모두 마음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외부의 사물 속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중요한 조건이 따라 붙는다. 만약 권력이나 재력과 같은 것에서 자유를 요구한다면, 얻을 수도 없거니와 타인에 대한 간섭이 될 것이다. 진정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것에 대해서는 냉담해야될 것이다.


중국 전통 사상은 마치 마음과 감정부분에만 집중되어 있고, 앎의 자유에는 방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근대 서방에서 이야기 되었던 자유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각성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무절제하게 정치와 경제에도 적용이 되었다. 그 결과 수 많은 문제를 유발하게 되었다. 영국의 철학자 루소는 제 1차세계대전 때 창조적 충돌과 점유적 충돌을 구분하였다. 이것 역시 대략 위에서 언급한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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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모든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과 환영합니다.  본 글은 의역식 번역입니다.
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따깡을 만들다가 기분 풀이식으로 답답할 때마다 번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안 다듬었습니다.  출판할 것은 아니기에 굳이 다듬지는 않았습니다. 글에서의 문제는 덧글을 통해서 지적해주시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위의 글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일단 한 작업이기에 공개는 합니다만...에휴...)

이번 편은 제가 잠들기 전에 적당히 손에 집어서 적당히 펼쳐서 본 부분입니다. 볼 때에는 아무 생각없이 봤는데, 번역을 하면서 보니 온갖 고문들이 다 있었군요. 그것보다 문제는 문체 자체였습니다. 중국어의 특징을 극단적으로 살린 문장들이 많았습니다. 볼 때야 이것이 오히려 더 편하고 중국어의 맛을 느낄 수 있지만, 번역할 때는 극악이군요.  이정도 분량이면 30분에 끝내는 것이 당연한데, 몇 일 동안 몇 문장 하다가 다시 따깡 쓰고;;; 이렇게 했답니다.


  1. 잡담 : 이 부분은 도무지 원문을 제대로 "번역"했는지 스스로도 의심스럽다.-_;; 이 글을 보는 한국어 사용자들이 제대로 이해가 되셨는지 궁금하다. 끙... [본문으로]
  2. 여기서는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 감정을 표현하는데 활용되었다. [본문으로]
  3. 보통 님을 생각하거나 고민때문에 잠들지 못하는 것을 나타낸다. [본문으로]
  4. 잡담 : 이 글은 정말 중국인..그것도 일정한 교육을 받은 중국인을 위한 글이다....시경 연타로구나... [본문으로]
  5. 잡담 : ....지금까지 위에서 넘쳐 흐르는 시경같은 말은 오래된 말이 아니더냐!!! [본문으로]
  6. 주문왕이 은걸왕의 손에 잡혀 있을때, 주문왕의 심리가 걸왕이 자신을 해하려 하든 말든 자기 자신은 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고 해석한 것. (왠만하면 보충 해석 필요 없을 정도로 하려고 했건만..) [본문으로]
  7. [/footnote])와 같은 말들은 진실된 감정의 발현이다. 순임금(大舜)의 효도나 굴원의 충성은 결코 외부을 향한 굴복이 아니다. 마음의 감정이 밖으로 뻗어나간 무한한 자유이다. 외부의 간섭과 융화된 일종의 내재적인 자유인 것이다.

    고수(瞽瞍)나 초회왕(楚怀王)은 분명히 순임금과 굴원의 마음이 요구하는 것에 강력하게 간섭을 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순임금과 굴원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고수(瞽瞍)나 초회왕(楚怀王)을 압박하여 이기지도 않았다. 순임금과 굴원의 효와 충은 인간을 넘어서 중도에서 일원화된 일종의 감정의 완성적 표현이다. 노자가 말하기를 "일가친척이 화목하지 못하면 효도와 사랑이 있고, 국가가 혼란하면 충신이 있다.六亲不和有孝慈,国家昏乱有忠臣(道德经)[footnote] 만약 모두가 화목하게 잘 살고, 모두가 효를 행한다면 특별히 효자라고 할 사람은 없겠지요. 모두가 국가에 충성을 한다면 특별히 충신이 있을 수 없겠지요. 사실 굳이 주석을 다는 이유는 저는 전묵선생님의 해석이 틀린것은 아니지만, 이 글의 원뜻과는 좀 다르다고 생각되서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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