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統《徙戎論》

 

時關隴屢為氐羌所擾,孟觀西討,自擒氐帥齊萬年。統深惟四夷亂華,宜杜其萌,乃作徙戎論。其辭曰:
夫夷蠻戎狄,謂之四夷,九服之制,地在要荒。春秋之義,內諸夏而外夷狄。以其言語不通,贄幣不同,法俗詭異,種類乖殊;或居絕域之外,山河之表,崎嶇川谷阻險之地,與中國壤斷土隔,不相侵涉,賦役不及,正朔不加,故曰「天子有道,守在四夷」。禹平九土,而西戎即敘。其性氣貪婪,凶悍不仁,四夷之中,戎狄為甚。弱則畏服,強則侵叛。雖有賢聖之世,大德之君,咸未能以通化率導,而以恩德柔懷也。當其強也,以殷之高宗而憊於鬼方,有周文王而患昆夷、獫狁,高祖困於白登,孝文軍於霸上。及其弱也,周公來九譯之貢,中宗納單于之朝,以元成之微,而猶四夷賓服。此其已然之效也。

故匈奴求守邊塞,而侯應陳其不可;單于屈膝未央,望之議以不臣。是以有道之君牧夷狄也,惟以待之有備,禦之有常,雖稽顙執贄,而邊城不弛固守;為寇賊強暴,而兵甲不加遠征,期令境內獲安,疆埸不侵而已。[Baro1] 

及至周室失統,諸侯專征,以大兼小,轉相殘滅,封疆不固,而利害異心。戎狄乘間,得入中國。或招誘安撫,以為己用。故申繒之禍,顛覆宗周;襄公要秦,遽興姜戎。當春秋時,義渠、大荔居秦晉之域,陸渾、陰戎處伊洛之間,鄋瞞之屬害及濟東,侵入齊宋,陵虐邢衛,南夷與北狄交侵中國,不絕若線。齊桓攘之,存亡繼絕,北伐山戎,以開燕路。故仲尼稱管仲之力,嘉左衽之功。

逮至春秋之末,戰國方盛,楚吞蠻氏,晉翦陸渾,趙武胡服,開榆中之地,秦雄咸陽,滅義渠之等。始皇之并天下也,南兼百越,北走匈奴,五嶺長城,戎卒億計。雖師役煩殷,寇賊橫暴,然一世之功,戎虜奔卻,當時中國,無復四夷也。

漢興而都長安,關中之郡號曰三輔,禹貢雍州,宗周豐、鎬之舊也。及至王莽之敗,赤眉因之,西都荒毀,百姓流亡。建武中,以馬援領隴西太守,討叛羌,徙其餘種於關中,居馮翊、河東空地,而與華人雜處。數歲之後,族類蕃息,既恃其肥強,且苦漢人侵之。永初之元,騎都尉王弘使西域,發調羌氐,以為行衛。於是群羌奔駭,互相扇動,二州之戎,一時俱發,覆沒將守,屠破城邑。鄧騭之征,棄甲委兵,輿尸喪師,前後相繼,諸戎遂熾,至於南入蜀漢,東掠趙魏,唐突軹關,侵及河內。及遣北軍中候朱寵將五營士於孟津距羌,十年之中,夷夏俱斃,任尚、馬賢僅乃克之。此所以為害深重累年不定者,雖由禦者之無方,將非其才,亦豈不以寇發心腹,害起肘腋,疢篤難療,瘡大遲愈之故哉!

自此之後,餘燼不盡,小有際會,輒復侵叛。馬賢忸,終于覆敗;段熲臨衝,自西徂東。雍州之戎,常為國患,中世之寇,惟此為大。漢末之亂,關中殘滅。魏興之初,與蜀分隔,疆埸之戎,一彼一此。魏武皇帝令將軍夏侯妙才討叛氐阿貴、千萬等,後因拔棄漢中,遂徙武都之種於秦川,欲以弱寇強國,扞禦蜀虜。此蓋權宜之計,一時之勢,非所以為萬世之利也。今者當之,已受其弊矣。

夫關中土沃物豐,厥田上上,加以涇渭之流溉其舄鹵,鄭國、白渠灌浸相通,黍稷之饒,畝號一鍾,百姓謠詠其殷實,帝王之都每以為居,未聞戎狄宜在此土也。非我族類,其心必異,戎狄志態,不與華同。而因其衰弊,遷之畿服,士庶翫習,侮其輕弱,使其怨恨之氣毒於骨髓。至於蕃育眾盛,則坐生其心。以貪悍之性,挾憤怒之情,候隙乘便,輒為橫逆。而居封域之內,無障塞之隔,掩不備之人,收散野之積,故能為禍滋擾,暴害不測。此必然之勢,已驗之事也。

當今之宜,宜及兵威方盛,眾事未罷,徙馮翊、北地、新平、安定界內諸羌,著先零、罕幵、析支之地;徙扶風、始平、京兆之氐,出還隴右,著陰平、武都之界。廩其道路之糧,令足自致,各附本種,反其舊土,使屬國、撫夷就安集之。戎晉不雜,並得其所,上合往古即敘之義,下為盛世永久之規。縱有猾夏之心,風塵之警,則絕遠中國,隔閡山河,雖為寇暴,所害不廣。是以充國、子明能以數萬之眾制群羌之命,有征無戰,全軍獨克,雖有謀謨深計,廟勝遠圖,豈不以華夷異處,戎夏區別,要塞易守之故得成其功也哉!

難者曰:方今關中之禍,暴兵二載,征戍之勞,老師十萬,水旱之害,荐饑累荒,疫癘之災,札瘥夭昏。凶逆既戮,悔惡初附,且款且畏,咸懷危懼,百姓愁苦,異人同慮,望寧息之有期,若枯旱之思雨露,誠宜鎮之以安豫。而子方欲作役起徒,興功造事,使疲悴之眾,徙自猜之寇,以無穀之人,遷乏食之虜,恐勢盡力屈,緒業不卒,羌戎離散,心不可一,前害未及弭,而後變復橫出矣。

答曰:羌戎狡猾,擅相號署,攻城野戰,傷害牧守,連兵聚眾,載離寒暑矣。而今異類瓦解,同種土崩,老幼繫虜,丁壯降散,禽離獸迸,不能相一。子以此等為尚挾餘資,悔惡反善,懷我德惠而來柔附乎?將勢窮道盡,智力俱困,懼我兵誅以至於此乎?曰無有餘力,勢窮道盡故也。然則我能制其短長之命,而令其進退由己矣。夫樂其業者不易事,安其居者無遷志。方其自疑危懼,畏怖促遽,故可制以兵威,使之左右無違也。迨其死亡散流,離X未鳩,與關中之人,戶皆為讎,故可遐遷遠處,令其心不懷土也。夫聖賢之謀事也,為之於未有,理之於未亂,道不著而平,德不顯而成。其次則能轉禍為福,因敗為功,值困必濟,遇否能通。今子遭弊事之終而不圖更制之始,愛易轍之勤而得覆車之軌,何哉?且關中之人百餘萬口,率其少多,戎狄居半,處之與遷,必須口實。若有窮乏糝粒不繼者,故當傾關中之穀以全其生生之計,必無擠於溝壑而不為侵掠之害也。今我遷之,傳食而至,附其種族,自使相贍,而秦地之人得其半穀,此為濟行者以廩糧,遺居者以積倉,寬關中之逼,去盜賊之原,除旦夕之損,建終年之益。若憚暫舉之小勞,而忘永逸之弘策;惜日月之煩苦,而遺累世之寇敵,非所謂能開物成務,創業垂統,崇基拓跡,謀及子孫者也。

并州之胡,本實匈奴桀惡之寇也。漢宣之世,凍餒殘破,國內五裂,後合為二,呼韓邪遂衰弱孤危,不能自存,依阻塞下,委質柔服。建武中,南單于復來降附,遂令入塞,居於漠南,數世之後,亦輒叛戾,故何熙,梁慬戎車屢征。中平中,以黃巾賊起,發調其兵,部眾不從,而殺羌[Baro2] 。由是於彌扶羅求助於漢,以討其賊。仍值世喪亂,遂乘釁而作,鹵掠趙魏,寇至河南。建安中,又使右賢王去卑誘質呼廚泉,聽其部落散居六郡。 咸熙之際,以一部太強,分為三率。泰始之初,又增為四。於是劉猛內叛,連結外虜。近者郝散之變,發於穀遠。今五部之眾,戶至數萬,人口之盛,過於西戎。然其天性驍勇,弓馬便利,倍於氐羌。若有不虞風塵之慮,則并州之域,可為寒心。

滎陽句驪本居遼東塞外,正始中,幽州刺史毋丘儉伐其叛者,徙其餘種。始徙之時,戶落百數,子孫孳息,今以千計,數世之後,必至殷熾。今百姓失職,猶或亡叛,犬馬肥充,則有噬齧,況於夷狄,能不為變!但顧其微弱勢力不陳耳。

夫為邦者,患不在貧而在不均,憂不在寡而在不安。以四海之廣,士庶之富,豈須夷虜在內,然後取足哉!此等皆可申諭發遣,還其本域,慰彼羇旅懷土之思,釋我華夏纖介之憂。惠此中國,以綏四方,德施永世,於計為長。

帝不能用。未及十年,而夷狄亂華,時服其深識。

 

來自于中國國學網2006-4-11;

 

相關信息 :

江統(-310年),字應元(一說元世、德元),西晉陳留圉(今河南省杞縣南)人。元康九年(299年)太子洗馬(太子宮圖書管理官)江統於齊萬年事件之後,作〈徙戎論〉著稱於世。

 


 [Baro1]신하로 삼지 않고 연합만 해서 변방을 지키는 용병으로 사용

 [Baro2]Qu ...북방계 언어의 관직이름과 상관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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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환乌桓과 같은 경우, 우환산乌桓山에서 시작하여 우군새외五军塞外, 연변십군沿边十郡(已经塞内), 사군(四郡)으로 점차 남쪽으로 진출한다. 그리고 점차 남쪽으로 가는 상황에서 문화와 정치 경제가 발전하게 된다. 특히나 우군새외에서 연변십군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급속적인 발전을 하게 한다. 그것은 기존의 시스템이 정비되지 않은 상황이 남쪽의 지식계층을 만나서 그들을 받아들이고 정비되는 과정을 통해서 발달한 것은 아닐까? 재미있는 것은 일정한 발전을 이루어냈음에도 지속적인 남하를 추구한다.


그런데 이러한 우환의 행동은 다른 북방민족에게서도 자주 나타난다. 흉노도 아래로 내려왔고, 몽고도 내려왔고, 청나라도 내려왔다. 더 좋은 땅을 원하는 것일까? 하긴 지금의 러시아도 부동항을 얻으려고 내려오고 싶어한다. 그리고! 고구려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서 고구려 역시 몇번의 수도 이전이 있었다.


그런데 이유가 애매하다. 정말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 남하한것인가? 약탈을 위해서 남하한 것인가? 아니면 한군데에 정착하지 못하는 방랑자 취향인가? 아니면 조금이라도 좋은 땅이 필요했던 것일까? 그리고 고구려 문제에서도 생각해 것이, 다른 북방민족과는 다르게 축성(성을 쌓는 기술) 상당히 발전시켜놓았는데, 성이라는 것이 보따리에 싸서 이사할 수도 없는 물건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동을 했다라….수도를….그것도 몇번이나

 

나중에 생각해보자…….잡상 같아도나중에 고증해보면 좋은 주제가 될지도….하지만 지금은 아냐아냐저거 고증하면 인간이 죽어나갈거야~~~



음하하..그래그래! 난 졸업논문 초고를 끝냈어! 이젠 쌩~~ 고생은 당분간 사양이야. 음하하하;;


변방사라고 부르고 민족사라고 읽는 수업을 듣다가 선생이 말한 내용이다. 정확한 고증은 수업인 관계로 되어있지는 않다. 하지만 재미있는 내용이라서 적어본다.


1)      전쟁

죽어라 싸운다. 끝까지 싸운다. 이유를 유목민족의 경제체계는 자체적인 생산으로만은 버티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지만 어찌하였든 싸운다!

2)      수렵

유목민족에게 수렵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몽고족의 원나라나 만주족의 청나라나 중국땅을 정복하고도 일정 기간에는 초원으로 돌아가서 수렵을 하였다. 또한 수렵이라는 행위가 사냥꾼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 참가하는 군사연습의 성격과 같은 지라. 결국 전쟁을 위한 준비라고 수도 있을 것이다.

3)      쿠리타이

후계자 문제를 비롯한 몽고의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던 쿠리타이는 사실상 전쟁회의였다고 있다. 전쟁이라고 달려가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회의와 정책 결정을 해야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몽고에게 중요했던 것은 전쟁전쟁전쟁이었다는 말인데 말이다..... 조금은 억측인듯 싶지만, 재미있는 의견이기도 하지 않나?


물론 이렇게 말하면 몽고의 문화무시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는 하다. 물론 그건 아니다. 단지 이렇게도 볼 수 있다는 것으로 생각하기를 바란다. 어떤 사람들은 인류가 사는 방식중에 북방 유목민들의 생활이야 말로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문명이라고 한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소박함을 간직하고 어쩌고 라면서 말이다. 머....그렇게 볼수도 있다.  끙;; 날이 갈수록 양비론쪽으로 변해가는 자신이 싫다.ㅠㅠ


흐음..王小甫 왕샤오푸가 신장 위구르쪽에서 와서 그런가? 다민족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 일부 중국인들이 한족을 중심으로만 생각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모습니다. 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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