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두님이 방명록을 통해서 최근 역사스페셜에서 방송한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신라의 후예였다!"에 대해서 문의를 해주셨습니다. 저도 한때 역사스패셜을 좋아해서 역사을 너무나 좋아하게 되었던 만큼, 최근 역사스패셜이 주류의 의견보다는 소수의 의견이나 심지어 유사역사학의 해석쪽으로 향하며,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소재만을 내보내고 있었다고 걱정되고 있었습니다.

금나라쪽은 제 전공은 아닙니다. 제가 비록 북방민족사전공으로 막말로 통사로 이것저것 다 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역사학에도 세분화된 전공이 있고, 그 외의 사항에 대해서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그래도 명색이 북방민족사전공이고, 그래도 일반분들보다는 조금은 더 고문이나 방법론에 익숙하기에 써보겠습니다. 그냥 기본적인 역사학의 방법론을 이용해서 여러분들이 되도록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판해보겠습니다[각주:1].

* 어떤 분이 덧글로 실제로 보라고 해서 보고서 추가부분을 작성하였습니다. 기존의 것에는 수정도 필요없다고 생각됩니다. 차라리 안보는게 역사스페셜에 대해서 더 좋게 생각할 수 있었을듯 합니다.


* 잠깐 쓴소리 : 중원에서 최초로 한족을 밀어낸 금태조 아골타라는 설명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가? 화제성도 좋지만 남북조시대의 북조와 오호십육국은 한족을 밀어내지 않았다는 것인가? 보통 한족으로 알고 있는 수당도 선비(鲜卑)족이 통치계급이라고 말해지는데 이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것도 역사왜곡이다.[각주:2]


1) 금태조 아골타의 시조에 대한 사료.(그냥 뛰어넘어도 무방-_)

1- 金之始祖諱函普 初從高麗來 年已六十餘矣阿古廼好佛 留高麗不肯從曰 後世子孫必有能相聚者 吾不能去也 獨與弟保活里俱. 始祖居完顏部僕幹水之涯 保活里耶懶 其後胡十門以曷蘇館太祖自言 其祖兄弟三人相別而去 蓋自謂阿古廼之後 石土門迪古保活里之裔也 及太祖敗遼兵于境上獲耶律謝十乃使梁福幹答剌招諭渤海人曰 女直渤海本同一家 蓋其初皆勿吉之七部也 始祖至完顏部居久之 其部人嘗殺它族之人 由是兩族交惡鬨鬭不能解 完顏部人謂始祖曰 若能為部人解此怨 使兩族不相殺部 有賢女年六十而未嫁 當以相配仍為同部
[元] 脱脱撰《金史》[각주:3]卷一本紀第一

중요부분 해석 : 금의 시조는 함보(函普)로서 고려(高麗)에서 왔을 때 나이가 60여세였다.......동생인 보활리(保活里)만 같이 와서, 시조는 僕幹水연안의 완안부(完顏部)에 살았고, 그 동생은 耶懶에 살았다.......발해인에게 말하기를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가족이다. 처음 물길(勿吉)의 7부족중에 하나였다. 시조가 완연부로 와서 오래 살았는데...."

2- 女真酋長[각주:4]乃新羅人號完顏氏 完顏猶漢言王也 女真以其練事後隨以首領讓之兄弟三人一爲熟女真酋長號萬戶其一適他國  完顏年六十餘 女真妻之以女亦六十餘 生二子 其長即胡來也自此傳三人 至楊哥太師無子 以其姪阿骨打之弟 謚曰文烈者 爲子其後楊哥生子闥辣乃令文烈歸宗
[宋]洪皓[각주:5]撰 <松漠記聞>

중요부분 해석 : 여진의 추장은 신라인으로 완안씨라고 불렸다. 완안추장은 한나라 말로 왕이라는 말이다.

3- 是月生女眞完顔阿骨打稱皇帝更名旻國號金. 其俗如匈奴諸部落無城郭分居山野無文字以言語結繩爲約束. 土饒猪羊牛馬馬多駿或有一日千里者. 其人鷙勇. 爲兒能引弓射鳥鼠及壯無不控弦走馬習戰爲勁兵諸部各相雄長莫能統一. 其地西直契丹南直我境故嘗事契丹及我朝. 每來朝以麩金貂皮良馬爲贄我朝亦厚遺銀幣歲常如此. 或曰: “昔我平州僧今俊遁入女眞居阿之古村是謂金之先.” 或曰: “平州僧金幸之子克守初入女眞阿之古村娶女眞女生子曰古乙太師古乙生活羅太師.
《高丽史》卷14 世家

중요부분 해석 : 혹자는 "우리 평주(平州[각주:6])의 승려 금준(今俊)이 고려 도망쳐서 여진의 아지고촌(阿之古村)에 머물렀던 것이 그 금의 시조라고 한다" 혹자는 "평주의 승려 김행(金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서 여진 여자와 결혼을 해서 자손을 낳았고, 고을태사(古乙太師)라고 불렸다.  고을의 아들은 활로태사(活羅太師)라고 했다."

4- 김부(경순왕敬順王)가 비록 항복하여 고려왕이 합병하였으나 김부의 외손 완안아골타는 곧 권행의 후예로서 능히 중국을 갈라 다스려 백년동안 대를 이었으니... (동명해사록 [각주:7]1636년)

5- 만주원류고는 사료적 가치가 많이 떨어지기에 아예 언급도 하지 않겠습니다. (왜 떨어지냐는 분들은 위한 간단한 설명 : 해당 사건이 일어난 시기와 너무 떨어져 있으며, 만주원류고는 노골적으로 만주족만들기의 일환으로 벌어진 정치적인 역사서이기 때문입니다.)


2. 왜 아골타가 신라인의 후예인가?
1- 역사사료의 위험성.
이미 쉽게 풀어본 역사사료의 위험성과 환빠신라왕족은 흉노인인가?을 통해서 살짝 알려드렸다 싶이 모든 역사사료는 일단 의심부터 하고 들어가야된다. 특히 동방쪽에서 관방에 의해서 집필된 책들은 기본적으로 일정한 정치적 목적이 들어간다. 개인이 쓴 것도 어디까지나 그 개인의 인식적 한계가 들어가게 된다.

특히 시조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에서는 더욱 더 조심을 하여야 한다. 시조를 써놓은대로만 믿는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하고 사실과 다른 경우가 널리고 널렸다. 물론 그러한 시조를 써놓은 문제 자체에 대해서는 그 역사인식에 대한 또 다른 각도에서의 접근이 가능하지만, 시조라고 써 놓았다고 그 사람은 분명히 시조다! 라고 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한족의 시조는 염황(염제와 황제)라고 한다. 이들은 실존인물이라기보다는 당시의 모습을 투영하는 하나의 거울로서 생각을 해야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느 왕조의 시조라고 써놓은 것은 사실이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이 투영된 허구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이다.

2- "금사"와 "송막기문" 어느 것을 믿을 것인가?
위의 내용을 보면 아시겠지만, 금사에서는 함보가 고려에서 왔다고 하고, 송막기문에서는 신라에서 왔다고 쓰여져 있다. 참고로 중국사서에서 고구려와 고려는 모두가 高丽(고려)라고 쓴다. 다시 말해서 구별이 없다. 그렇다면 관방에서 만들어낸 고려설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송막기문에서 말하는 신라설을 믿을 것인가?

일단 각각이 책이 쓰여진 배경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아야한다. 보통 역사애호가들은 이 과정을 뛰어넘기 쉽상이다. 사료를 볼 때는 그 사료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

금사는 원나라에서 만들어진 역사서로서 금나라의 사료들이 풍부하였기에 비교적 잘 만든 정사로 평가를 받는다. 금나라에서는 스스로의 조상을 밝히기 위해서 직접 여진족 노인들에게 물어보고 다녔을 정도로 스스로의 역사사료 수집에 열정적이었다. 그리고 그 사료를 바탕으로 역사를 서술한 것이기에 거의 문제가 없다.

그에 비하여 송막기문은 어디까지나 송나라 사람이 금나라에 머무르면서 얻어들을 이야기로 쓰여진 책이다. 물론 송막기문은 금나라가 있을 당시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훌륭한 사료이지만, 개인의 자료수집능력의 한계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요즘의 "~카더라"통신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사도 역시 이와 같이 "~카더라"이며, 아예 대놓고 "혹자는 말하기를"이라고 하고 있다.

그래서  본인으로서는 금사를 기본으로 고려설을 채택하고자 한다.

3- 금사의 고려는 고구려인가? 궁예의 후고구려인가? 고려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나오는 고려는 고구려인가? 아니면 고려인가? 그것을 위해서는 숫자놀이를 해야된다. 함보는 아구타의 8대조이다. 아구타의 생존 연대 1068~1123으로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으면 함보는 대략 240년전에 생존했던 사람으로서 약 830년 전후반이 된다. 830년 전후반 통일신라중반기이자 발해 중반기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것이 668년이었고, 고려가 세워진 것은 918년. 금사가 만들어진 것은 1344년이었다.

추가 : 혹자는 조혼(일찍결혼함)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북방민족들의 특색을 간과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북방유목민족사회의 재미있는 모습중에 하나가 장남이 아닌 막내가 부모를 계승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그래서 계승주기는 더더욱 내려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간단한 예로 유명한 징기즈칸가문을 예로 보면 :

칭기즈칸(철목진) 1162~(1227)
토우레이(拖雷) 1193~1232(칭기즈칸의 4째아들)
멍거(蒙哥)        1208—1259(토우레이의 장남)
원세조(忽必烈) 1215~1294(토우레이의 차남)

칭기즈칸과 원세조는 할아버지와 손자로 53년차이가 나게 된다. 이렇게 주기가 25년차이가 나게 된다. 조혼이라고 하더라도 막내계승이나 여유시간을 주고, 아래쪽에서 언급했던 함보 자신이 나이를 먹어서 아이를 낳다는 것으로 20~30년을 추가하면 8대조 x 25년 + 20년 = 220년이 된다. 줄여도 200년차이가 된다. 그럼 줄여서 봐도 870년전후가 되므로 전체논리에는 문제가 없다고 본다.

또한 멍거와 원세조처럼 형제계승까지 생각을 하게 되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어찌되었든 줄어들지는 않는데 그것까지 필요 없으리라 생각되어서 패스.


* 이 부분에서 역사스패셜은 함보가 여진으로 들어온 시기를 신라말, 고려초로 잡고 있다. 이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셈법이다.  이해는 되지만 틀렸다고 생각된다(세대주기 20세, 아골타를 7대손으로 놓고, 막내계승따위 무시하면 가능-_). 아구타의 출생연대는 1068년이다. 그리고 신라말-고려초는 넓게 잡아서 900~1000년 사이이다. 8대가 160년 안에 일어나려면, 대략 20년을 한 세대로 잡아야 된다. 아무리 당시의 수명이 짦았다고 하더라도 이건 좀 심한 셈법이라고 본다. 짦게 잡아도 25년쯤으로 봐주는게 합당하다. 기록 자체에서도 함보의 나이가 많았음을 이야기하니 말이다. 한마디로 정말 아골타의 출생년도를 고려했는지 의문이다. [각주:8]

금사를 만드는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아골타의 9대 위의 조상이 현존하는 고려에서 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은 명확하다. 그렇다면 금사에서 말하는 고려는 고구려일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는 이미 668년에 멸망을 하였다. 그렇다면 함보는 굳이 따지자면 고구려의 후예라고 하는 편이 더 합당할 것이다. 신라의 후예라는 것과 고구려의 후예라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이다.

이에 대해서 역사스페셜은 이 두사료를 그냥 합쳐서 "고려에서 온 신라인"이라고 말해버린다. 이는 분명히 잘못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려가 고구려도 될 수 있다고 생각을 조금만 한다면 이런 식으로 단정지을 수 없다. 본인의 글을 잘 보면 알겠지만, 일정 부분이 되면 결국 "단정"이나 "확정"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역사 스패셜은 당당하게 해버린다. 이것은 다른 문제도 아니고 그냥 틀린 문제다.

추가 : 만약 25년으로 잡고 아골타가 8대라고 계산을 한다면 2대의 출생연도가 920년까지 내려올 수 있음으로 문장의 고려는 궁예의 후고구려가 될 수도 있다. (후고구려를 생각하지 못했었다. 죄송~ 그럼 문장에서 나오는 큰형이 불법에 빠졌다는 것도 궁예와 연결시켜서 상상해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후고구려라면 900년전후로 계산을 하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다. 물론 이 경우에는 신라인일 가능성은 낮아지며, 고구려 후예의 일파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늘어난다고 본다.

-- 《金史•高丽传》中说,“唐初,有粟末、黑水两部,皆臣属于高丽。" "당초, 속말, 흑수 두부족은 모두 고려(고구려)에 속해 있었다." 传 뒤의《赞》에서 :“金人本出之附于高丽者”。"금인은 본래 고려(고구려[각주:9])에 있던 자이다."

현재까지의 생각과 자료를 바탕으로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추론은 :
"함보는 고구려의 후예[각주:10]로서, 궁예의 후고구려에 있다가, 여진부족(완안부)으로 와서 현지인들과 결혼을 하고, 점차 여진화가 되었다. 혹은 여진으로 돌아갔다"



4- 송막기문과 고려사의 사료를 어찌 봐야되는가?
비록 본인 스스로 해당 사료를 채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료는 거짓말을 하지만 진실을 살짝살짝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신라인이나 고려인이라고 말한 부분에서는 일정한 역사전 진실이 같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당시 시대적 정황을 고려해서 볼 때, 신라말과 고려초의 혼란기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피해서 동북쪽으로 유입되었고, 금나라 성립되기 전에 그 같은 사람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선조에 대한 이야기에서 고구려-신라-고려의 다양한 계열의 사람들이 와서 혼재되어 있다고 추측해볼 수 있고, 사실에 비교적 근접하리라 생각된다.


5- 그.러.나. 금나라왕족이 정말 같은 "민족"일까?(이것이 핵심이다.)
핵심 중에 핵심이다. 고구려의 후예였던, 신라의 후예였던, 고려에서 간 사람이었던간에 그들을 같은 민족으로 보아야 하나? 혈연만 연결이 되면 당연히 같은 민족이냐는 사람들에게는 의문의 여지가 없이 같은 민족이다. 그러나 문화가 완전히 달랐다.

 "풍속이 흉노와 같아서 따로 성을 만들지 않고 산과 들에 흩어져 살았다. 문자가 없어서 끈을 묶어서 약속을 하였다"俗如匈奴諸部落無城郭分居山野無文字以言語結繩爲約束(고려사)라고 말했다는 것은 고려의 문화속와는 너무나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함보는 여진족과의 통혼을 하였고, 그의 후손들은 더욱 그러하여 사실상 여진인이 된 혼혈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의 예를 들어보면 중앙아시아로 가서 지금은 "고려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현재의 한국인과 외모도 다르고, 쓰는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데 같은 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에 대한 답은 서로 다르리라 생각된다. 정답은 없다. 그러나 이미 다른 문화에 동화가 된 상태에서는 다른 민족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합당하리라 생각한다.

또한 금나라의 지배계층이 고구려든 신라든 한민족의 선조 중에 하나라고 가정을 해도 역시 문제는 남아 있다. 금나라의 기본 민족 구성은 어디까지나 지도계층 역시 여진이 주류였다. 그런데 왕족만이 지도자라고 한국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는가? 이에 대해서는 아래 발해와의 관계 부분에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3. 금나라와 발해와의 관계
함 보를 시조로 둔 금황실은 발해인을 왕비로 맞는다. 금나라의 성군 세종의 어머니, 4대 황제 해릉왕의 어머니는 모두 발해 여인이었다. 또한 아골타는 발해인을 신뢰하여 발해유민 장호를 새로운 수도 북경 건설 책임자로 등용한다. 발해는 대제국을 경영해본 경험이 있었다. 금나라는 이런 발해의 경험을 이용하여 국가체제를 확장해나갔던 것이다.(역사스패셜)

*원래는 하나하나의 원문을 찾아서 대조를 해봐야지만, 환빠계열도 아니고 명색이 역사스패셜인데 이런 사실왜곡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무엇보다 귀찮아서....원문은 찾지 않도록 하겠다. 마음 착하신 분이 있으면 원문을 덧글로 달아주시길........이런다고 때릴꺼야? ^^::

위에서 본인이 해석한대로 고구려의 후예이고, 요동지역의 역사를 생각한다면 너무나 당연히 발해와의 연관관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역사스패셜은 발해를 "당연히" 한국의 역사로 생각하고 한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상당히 문제가 있는 생각이다.

발해는 신라의 수 많은 사료에도 나오듯이 신라자신이 같은 민족으로 보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발해의 상층부는 한국학계의 주류의견에 따라서 고구려의 유민이라고 하더라도, 하층민은 분명히 말갈계열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금나라는 그것이 더욱 심해져가서, 말갈의 후손인 여진들의 상층부 진출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대다수가 한국에서는 "다른 민족"으로 분리되는 말갈이나 여진인데, 이것을 같은 민족이 세운 국가로 볼 수 있는가?

만약 이것을 같은 민족이 세운 국가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통치계급만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역사관이다. 물론 이런 역사관 자체도 성립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대중"이 아닌 몇몇 "엘리트"에 편중된 역사관으로 비판을 받았었고, 만약 이 생각을 확대하면 일본제국에 통치를 당하던 시대는 한국의 역사에서 빠져야 된다. 통치계급이 "다른 민족"인 일본이었으니까 말이다. 스스로 모순이 일어나는 이런 생각이 과연 합당한가? 단 이곳에도 결론이나 확정은 없고, 있을 수도 없다.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서로 다른 생각들이니 말이다.

* 여진과 발해는 원래 한가족이다(女眞渤海同本一家 금사)을 이용해서 긴밀한 관계를 이야기하려는 사람도 있다. 분명 금나라의 형성과 발전 여진과 발해가 힘을 합쳤다는 점은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해당 기사의 앞뒤 내용을 살펴보면 조금 다른 각도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반복을 풀고 협력을 하기 위해서 숙신이라는 과거의 것을 끌어다가 같은 가족이라고 한 것이다. 만약 이런 논리에 박수를 보낸다면, 분명 다민족으로 이루어졌고, 수 많은 북방민족이 있었던 중국의 상고사도 그냥 싹다 염황자손의 나라가 된다고 인정해야된다는 말과 다를바가 없다. 한마디로 저런 역사를 가져다 붙인 것이 보이는 정치적인 말을 100% 믿는 것 자체는 문제이다.


4. 청황실의 성씨가 김씨
愛新覺羅(애신각라)을 만주어로 해석을 하면 금족(金族)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를 신라김씨와 연관을 시키는 것은 개그에 가깝다. 그냥 김씨면 다 같은 민족이고 혈연이라는 생각은 대체 어떻게 나온 것인지 궁금할 뿐이다.[각주:11]

* 애신각라에 대한 웃기는 떡밥 하나
아직도 많은 분들이 믿고 있는 떡밥 하나가 있다. 愛新覺羅를 해석해서 "신라를 사랑하고 깨우친다"정도로 이야기되는 웃기는 짓이다. 해당 말은 愛新覺羅을 愛覺新羅로 순서를 완전히 바꾸어서 고대한어를 "지 맘대로" "엉터리로" 해석하는 웃기는 짓거리다. 근거도 없이 이따구로 순서를 바꾸는 것은 코메디일 뿐이다.

김씨의 선조는 여러가지가 있다. 하나의 성씨가 하나의 선조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개그이다. 일단 유명한 것은 남흉노의 김일재이다. 그러나 송대만 해도 김씨는 이미 5개가 넘었다. (古今姓氏书辩证 P285) 또한 요동에 있던 여진의 지리적입장에서도 북방민족들의 영향을 받았고, 흉노계열을 높게 생각하여서 김씨성을 채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북방민족에게 있어서 금씨의 유래는 대장장이면서 동시에 샤먼이고 지도자였던 보편적인 문화와 연관을 하여서 나온 서로 다른 성씨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쉽게 말하면 세계 어디에서나 태양숭배나 새숭배 사상이 나타나지만, 이것은 인류의 집단적인 무의식 혹은 공통적인 경험으로 서로간의 교류가 없이도 나타나는 현상인 것과 같은 것이다.

얼마 전에 신라의 김씨와 흉노 김일제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라고 신라왕족은 흉노인인가?에서도 말한 바가 있다. 간단히 요약하면, 시조에 대한 서술을 그리 믿을 수 없으며, 송대에 지어진 古今姓氏书辩证에서도 서로 다르게 구별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청나라가 세워질 무렵이 되면 성씨가 같다고 같은 조상이라는 것은 허망한 환상이 되어버린다. 이미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대로 성씨를 만들고 사용해버렸기에 복잡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성씨를 가지고 같은 민족!이래버리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시대이다. 혹자는 만주원류고(满洲源流考)에 있는 몇가지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만주원류고 자체가 청나라에서 계획적으로 민족의식을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진 책이라는 것을 정말 모르고서 이야기하는 것일까?


5. 오십보 백보의 한국역사관과 중국역사관.
고 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금나라, 청나라로 이어지는 만주의 역사는 우리 민족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있다.한족의 영토,중원을 만주대륙에 합병하여 오늘의 중국을 완성한 여진족, 그들 선조가 신라인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국수주의적 우월감을 주장하자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반역사적인 동북공정 논리에 정면으로 대응하고 우리 역사를 지켜내어 향후 동아시아와 한반도 지역에 평화의 논리적 근거를 재확인하자는 것이다. (역사스패셜)

위의 글을 한마디로 대답을 하면 "미안하다. 웃기다." 가 되겠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반역사적이라는 말이 왜 나오는 것인지? 그러면서 동북아시아와 한반도 지역에 평화의 논리적 근거를 확인한다고? 거..참...

과거에도 수차례 설명했지만, 한국의 민족역사관이나 중국의 다민족역사관 모두 문제가 있으며, 동시에 하나의 역사관으로서 존중받아야만 한다. 중국의 다민족역사관은 중국이라는 나라가 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져 생겨난 것이기에 역사적으로 합당한 면이 있다. 그러나 현재의 영토라는 가변적인 기준을 기반으로 하기에 수 많은 문제점과 충돌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한국의 민족역사관은 문제가 없는가? 민족이라는 공동체를 통해서 역사를 분석을 함으로서 지금까지의 통합과정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가능하지만, 반대로 민족이라는 영토보다도 더 가변적인 개념을 가지고 분석을 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한다. 한마디로 동북공정의 몇몇 가지 역사적인 사실 문제가 아닌 그 역사관 자체를 반역사적이라고 한다면 오십보백보의 한국 역사관도 반역사적일 뿐인 것이다[각주:12] : 결론만 말하면 동북공정은 아골타가 신라인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동북공정은 여러 민족이 융합되어서 현재의 중국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고, 아골타가 신라인이더라도 그것도 융화가 되었다고 하면 끝인 문제이다. 대체 머가 근본부터 흔들린다는건가? 동북공정을 근본부터 흔들려면 중국이 단일민족이었다는 증거를 제시해야된다. 기본적으로 동북공정도 이해를 못하고 있는데....(미안...다시 웃자.ㅋㅋㅋㅋ)



  1. 제가 중국이라는 한계로 직접 방송을 보지는 못하고, 역사스패셜 홈페이지에 있는 관련 내용만으로 비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 양해부탁드리고 실제 방송을 본 분을 자세한 내용 설명 혹은 비판 부탁드립니다. (너무 느려ㅠㅠ) [본문으로]
  2. 예시는 훨씬 더 많다. 하다못해서 진시황도 서융(西戎)과 혈연적인 연결이 있었다는 학설이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어쩔건데? [본문으로]
  3. 1343년에 시작되어 다음해 11월에 완성. 예상되는 참고 금나라 역사서 《太祖实录》《睿宗实录》《先朝实录》《归潜志》《壬辰杂编》 [본문으로]
  4. 판본에 따라서 "女眞之主" "여진의 임금" 이라고도 함. 같은 의미이고 조금 높여진 표현일 뿐임. [본문으로]
  5. 홍호(1088~1155) 1129년 금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15년동안 감금되어 있다가 돌아옴. (고려중기) [본문으로]
  6. 현재의 황해도 평산. [본문으로]
  7. 동명해사록(東溟海槎錄)은 한국고전번역원에 올려져 있으나, 현재 중국에서 고전번역원에 접속이 불가능해서 원문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일단 역사스패셜의 해석을 그대로 가져놓도록 하겠다. [본문으로]
  8. 조혼(일찍 결혼함)을 고려해야된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덧글참조) 그러나 그런식으로 해도 역사스페셜의 논리에서는 140년의 차이가 나야되며, 북방민족은 막내계승도 있었기에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본문으로]
  9. 이는 왕씨고려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인은 시기상으로 아직 왕씨고려가 건립되기 전이었고, 문맥상 위와 같은 고구려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본문으로]
  10. 고구려의 후예라는 것은 범칭이며 보통 한국에서 아직도 이민족이라고 생각하는 말갈이나 여진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 [본문으로]
  11. 이런 식으로 할 수 있다면, 본인 논문은 하루만에 다 쓸 수 있다. 성씨만으로 해서는 안되기에 온갖 방증자료 찾으려고 삽질하고 있는데...띱-_ [본문으로]
  12. [/footnote].

    그럼 제대로 된 역사관이 머냐고? 본인도 모르겠다. 그걸 알았으면 본인은 이미 위대한 역사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분위기 속에서는 어떠한 절대적인 역사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는 서로 다른 역사관들이 공존하게 된다.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것은 논쟁을 할 수 있으나 서로 생각과 해석이 다른 것은 어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간단한 예로 어떤 여자를 보고 그 여자의 가슴크기나 허리굵기를 알아보는 것은 사실자체에 대한 탐구이지만, 내게는 예쁘게 보이지만, 상대방에게는 못생겼다고 느껴질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런 상황에서 너도 예쁘게 봐야돼! 라고 하는 것은 바보짓 아닌가?

    굳이 본인의 생각을 짦게 말하자면, 한국도 이제 다민족역사관을 채택할 때가 되었다. 현재의 한국인이 단일민족의 순수혈통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확정된 "사실"이다. 다양한 민족들이 서로 융합되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방송에서는 단일민족을 이야기하면서 삽질을 해대고 있다. 그만 하자.


    6. 역사스페셜 제작진에게...
    역사학도의 길을 가고 있는 본인은 한때 역사스페셜의 팬이었다. 비록 중국으로 유학을 하러 온 이후에 인터넷의 속도때문에 자주 볼 수는 없었지만, 지금의 역사를 좋아하는 내가 있게 해준 것이 무엇이냐고 하면 그 중에서 분명히 역사스페셜이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최근 역사스페셜은 화제성을 따라서 움직이고,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노골적으로 묻어나오며, 학계에서도 소수의 의견을 전체의 의견처럼 이야기하는 듯한 분위기가 있어서 참으로 안타까울 수 밖에 없다.

    환빠들이 찌질되는 것이면 "지랄하고 있네~"라며 넘길 수 있다. 그러나 "역사스페셜"이다. 아직도 많은 역사 애호가들이 역사스페셜을 얼마나 높게 보는지는 스스로도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진심으로 걱정하는 한 명의 팬으로서 역사스페셜이 진정한 스페셜이 되기를 바란다.

    본 글은 성격상 쓸데 없는 욕설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글의 덧글에 대한 답글은 정상적인 덧글에만 달도록 하겠습니다. 비판은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그러나 근거도 없이 무조건 "너가 틀렸다"는 상대하지 않겠습니다.

    결국 제 성격으로 덧글에 대답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각(09/09/09 09:51) 이후로 엉터리 덧글이나 대답할 필요가 없는 덧글에 대한 대답은 없습니다.

    쓰다보니 아래쪽으로 갈 수록 귀차니즘에 친절한 설명을 못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수정하기도 귀찮고..... 의문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하하;;;;;;...근데 이거 다음뷰의 어떤 항목으로 보내야되려나;;; 왜 역사항목이 없는걸까?;;; 일단 "사회"로 보내본다.

    그나저나..기네;;; 이걸 다 보는 사람이 있긴 하려나;;;


    역사스폐셜을 보고 추가로 적습니다.
    (간단 감상 : 괜히 봤다. 역사스페셜. 해도해도 너무한다. 조금 많이 시니컬 할 겁니다.)


    이유립 : 이 사람을 무려 “역사학자”라고 불러주어야 하나? 알 사람은 안다. 이유립은 유사역사학자일뿐이다. 환빠들에게 신으로 불려지는 인물이거늘....그런 사람이 세운 사당에 아골타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본인 할 말이 없어진다. 역사스패셜. 이렇게 썩었더냐…

    가옥구조와 씨름 : 같은 환경에서 당연히 같은 모습의 가옥구조가 나온다. 또한 여진이 발해에 귀속해 있었다. 이것을 가지고 같은 민족이라고? 또한 씨름 또한 북방민족 전역에 있었던 것이다. 어쩌라고?

    중국학자도 인정했다? : 해당 학설은 중국에서 주.류.가. 아.니.다. 한국에서도 주.류.는. 아.니.다. 한 중국학자가 말하면 모든 중국학자가 인정한 것이 되는것인가? 본인 금사가 전공은 아니지만, 북방민족사 전공으로 어느 정도 흐름이나 주류는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한 중국학자가 말했다고 모든 중국학계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하는 분에게 과연 무엇이라고 말해주어야 할까?

    여진 스스로도 고려에서 나왔음을 인정하였다? : 우리의 조상이 대방에서 나왔으니....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겠습니다.. 我祖宗出自大邦 至于子孫義合歸附 今太師為雅束 亦以大邦為父母之國(《高麗史》世家卷十三高麗史十三)

    우선 이 글은 아골타가 아닌 그의 형이 작성한 글이며, 여진이 불리한 상태에서 어떻게든 아부를 떠는 모습이고, 해당 기록은 어디까지나 고려사에 적혀 있어서 고려의 마음대로 수정되어서 올라갔을 가능성도 있다. 한마디로 이런 정치적인 서신을 가지고 여진의 조상이 고려에서 왔다고 하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흉노와 한나라도 서로 형제지간이라고 했다. 그럼 이 둘도 같은 민족인가? 하하하...정치용어와 실제사실를 혼동하면 안된다. 아! 그러고 보니 터키랑 한국은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데 이것도 같은 민족이고~~~)

    악비의 일 : 송나라의 명장으로서 금나라를 막은 악비는 민족의 영웅이라고 불렸었다. 그러나 다민족역사관에서 이는 문제가 되기에 그것을 수정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한족중심사상이 남아 있고 그래서 몇몇 사람들이 반발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족중심사관에서 다민족사관으로 이행하는 단계인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동북공정이 허구라고 하는데 대체 왜??? 이해자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민족을 포용하려는 것에 박수를 보내야지..쯔쯔...

    아골타가 신라인 후손이라는 것은 동북공정은 근본부터 흔들린다고?[footnote]미안. 나 잠시만 웃고..ㅋㅋㅋㅋ 나 지금 빵~! 터져버렸어. ㅋㅋㅋㅋ [본문으로]
일단 결론부터 내리자면 본인도 모르겠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현재의 사료로는 해석불가능에 가깝다. 굳이 개인적인 판단을 하자면, 거칠게 말해서 신라왕족이 김일재의 후손이라는 것에는 부정적이고, 신라왕실에 흉노의 영향을 받은 동호계열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고 본다. 일단 현존하는 사료만을 토대로 이야기를 해보자. 

참고로 아래쪽의 글은 그리 정리가 되어있지 않다. 본인도 고민중이기에 마구잡이로 사료와 증거을 나열하고 해석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또한 머리속으로만 생각하고 쓰지 않는 부분도 있다. 이점 염두에 두고 보시기를.....

1- 大唐故金氏夫人墓銘
(화질이 너무 안 좋아.ㅠㅠ 화질 좋은 것이나 판독문있으신분? ㅠㅠ)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 하니,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世祖)시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서 온천하에 만연하니 이미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제<石+單>)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황제께서) 그를 발탁해 시중(侍中)과 상시(常侍)에 임명하고 투정후(투<禾+宅>亭侯)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京兆郡)에 정착하게 되니 이런 일은 사책에 기록되었다. 견주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몇 세대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한(漢)이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

문선왕(文宣王.공자의 시호)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에는 성실함과 신의가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독실하고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비록 오랑캐 모습을 했으나 그 도(道)를 역시 행하니, 지금 다시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듯 번성했다.

부인의 증조는 이름이 원득(原得)이시니 황실에서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추증되셨고, 할아버지는 성함이 충의(忠義)시니 한림대조(翰林待詔) 검교좌산기상시(檢校左散騎常侍) 소부감(少府監) 내중상사(內中尙使)라는 벼슬을 지내셨다. 아버지는 성함이 공량(公亮)이시니 한림대조 장작감승(將作監丞) 충내작판관(充內作判官)을 역임하셨다.

조부께서는 문무의 예리함에 여유가 있어 평자(平子.유명한 천문학자)를 궁구하여 관상(觀象)의 규모를 관찰하셨고, 공수자(公輸子.저명한 기술자)를 궁리하여 신과 같은 기술을 갖추셨다. 이에 기예로 천거받아 금문(金門.황실 혹은 조정)에 들어가 여섯 조정을 섬겨 봉록과 직위를 갖고서 처음부터 끝까지 훌륭한 삶을 살다 아름답게 마치셨다.[각주:1]

-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 번역 (원문 전문이나 쫌..ㅠㅠ)


위에서 나오는 김씨부인의 할아버지인 김충의는 신당서[각주:2]에서 명확하게 신라인으로 말해지고 있고, 시대도 거의 동일하고, 관직도 부합하여 사실상 동일인물로 판단된다. 또한 당시에는 아직 성씨제도가 제대로 도입되지 않았기에 성씨위조의 가능성도 별로 없다. 그럼으로 신라에서 온 김씨는 신라왕족의 김씨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신라왕족은 흉노의 후예일까?


2- 신라문무대왕릉비(新羅文武大王陵碑)
侯祭天之胤傅七葉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신라문무대왕릉비를 보면 위에서 나오는 신라왕가 흉노설의 원류를 볼 수 있다. 투후는 바로 흉노 김일재이며 제천지윤은 금인을 바치고 하늘의 제사를 하고 관직에 봉해져서 7대동안 내시로 있다.[각주:3]

그럼 이 것으로 신라왕가의 흉노설이 완벽해졌느냐? 이 증거로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문제는 고고학적으로 김일재가 어떻게 신라로 유입이 되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시에 신라로 무조건 찾아오는 것은 문제가 있고, 분명히 여러번 이동과 거주를 반복하면서 왔을 터인데 그런 흔적이 최소한 지금으로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1-2번 통합적 의문 : 문제의 핵심은 사료 증거가 오직 위의 두 비문뿐이고, 묘지명은 온갖 구라들의 조합이라는 것이 다. 조상이 아님에도 과거의 먼 옛날의 위대한 사람을 끌어와서 억지로 조상으로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혹자는 조상을 속일까라고 하지만, 만약 위로의 몇대 부분이라면 믿을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위의 비문의 "부인의 증조는 이름이 원득(原得)이시니 황실에서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추증되셨고, 할아버지는 성함이 충의(忠義)시니 한림대조(翰林待詔) 검교좌산기상시(檢校左散騎常侍) 소부감(少府監) 내중상사(內中尙使)라는 벼슬을 지내셨다. 아버지는 성함이 공량(公亮)이시니 한림대조 장작감승(將作監丞) 충내작판관(充內作判官)을 역임하셨다."와 같은 부분은 충분히 믿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조상이나 먼 과거의 조상이 쌩뚱맞게 나오는 경우. 구라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많이 언급을 하면 할 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런 이유로 본인은 위의 사료에서 처음부분에 조상이라고 하면서 몇 줄이나 나와버리는 흉노 김일재와 그 후손이 너무나 의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신라라는 당시의 명칭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계속 요동에 머물렀다고만 쓰여진 것은 그런 의심을 더욱 크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설령 김일재가 실제 조상이 아니더라도 신라왕실이 흉노의 김일재를 조상을 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두가지 가능성을 검토할 수 있다. 한가지는 신라에서 자생적으로 金씨 성이 만들어졌고, 훗날 중국땅에 김씨 성을 가진 유명한 사람이 있으니 따온 가능성[각주:4]과 실제로 흉노의 일파가 내려와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고, 그들이 중국에 있는 김일재를 보고 성을 가져다 붙였을 가능성이 있다.



3- 고인돌 유전자 친연성

최 근 고인골의 유전자 정보를 가지고 고대 인종들 간의 친연성을 찾아보려는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유라시아 지역의 흉노 무덤에서 발굴된 유골과 우리나라 고인골 간의 연관성을 추적한 결과는 놀라웠다. 인골들간의 상호관계를 실험한 결과 스키타이와 흉노, 신라가 하나의 그룹으로 묶인 것이다. (역사스페셜)

본인도 북방민족이 많이 넘어왔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위의 그래프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우선 신라와 흉노사이의 간격이 상당히 먼데 같은 그룹으로 묶는 것은 너무나 자의적이다. 연관관계가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나 흉노의 직접유입을 말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고로 이 자료는 잘해봐야 방증이고, 사실상 증거가 되지 못한다. (또한 중국북부의 동시기 인골들의 DNA나 다른 쪽의 DNA 분석과의 비교가 되어 있지 않다. 이는 분명히 문제가 된다.)



4- 김일제(金日磾)와 김알지(金閼智)의 연관성
저자의 신라어 해석 중 김알지를 '금(金) + 금(金)'이라고 본 것은 탁견으로 알지란 Alt(금)에 i가 첨가되어 구개음화(Alt+i 〉 Alji)가 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인용된 알씨(閼氏)는 몽골어 카톤(왕비)에 대비되는 흉노어 아씨(Assi)의 음역이다.(박원길 '새끼 중국인'들 득세하는 사학계에 '통쾌한 도발')


日의 고대 발음은 M이 포함된 "미"와 비슷했으리라 여겨지고 있다[각주:5]. 그래서 현재 중국에서도 김일재의 일만은 mi 로 발음되고 있다[각주:6]. 그리고 알지의 알의 고음은 이와 확연히 다르다[각주:7]. 문 제는 김일제의 일은 분명히 흉노어의 음역이지만, 알지의 알은 흉노어의 음역일 가능성의 증거자료가 부족하며, 설령 흉노어의 음역이라고 하여도 김일제와 김알지가 동인인물이라는 것은 무리가 있는 해석이고, 서로 연관이 있다고 하는 것도 언어의 전파성을 생각하면 하나의 설일뿐이다.

무엇보다 위의 해석은 언어학적으로 너무나 위험하다. 차용어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몇몇 단어만을 가지고 추론하기에는 현재까지 남겨진 고구려-신라-백제의 언어자료가 너무나 빈약하다. 고로 위의 말은 하나의 "설"로 존중 받을 만 하지만,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또한 위의 말을 완전히 믿는다고 가정하여도 문제는 남는다. 또한 김알지 신화는 탈해왕 때 나온 것인데, 탈해왕은 AD 57~80년 사이의 인물로 김일제의 후손이 왕망의 신나라에서 나온 시기가 23년 이후인데, 개인적으로 시기가 그리 맞지 않는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쪽의 7번 항목에서...



5- 무덤 양식
신라는 평지형 무덤이나 구릉형 무덤의 시기가 명확히 구분[각주:8]되고 또 평지형 무덤에서 출토되는 유물이 동방계열보다는 서방계열 유목민족의 유물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에서 그간 많은 학자들의 고뇌를 유발시킨 미스테리의 국가다. (박원길 '새끼 중국인'들 득세하는 사학계에 '통쾌한 도발')

황금 유물과 적석목곽분 그리고 새 토템 : 왕권을 강화하고 신라의 발전을 이룬 내물왕의 무덤을 경주 고분군들 중에서 가장 큰 황남대총으로 보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그런데 이 황남대총의 독특한 무덤 양식, 화려한 황금 유물들, 그리고 신라 김씨 왕족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설화에 등장하는 새. 이 세 가지는 모두 금을 숭배하고, 적석목곽분을 묘제로 사용하며, 새를 토템신으로 여기는 유목 민속의 풍습과 일치한다. 이를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봐야할 것일까?(역사스페셜)

새토템 자체는 북방민족뿐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 퍼져 있던 태양 숭배 사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니, 새토템으로 이 사실을 판단하기는 곤란하다. 무덤양식부분에서는 본인 지식의 한계로 위에서 나온 말을 따른다면, 흉노는 모르겠으나 북방민족의 유입은 확실시 된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북방민족이 흉노였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는 현재 유물 자체만으로는 판단 불가능이다.



6- 당대 사람들의 인식은 어떠하였을까?
(宋)鄧名世撰,王力平点校《古今姓氏书辩证》
出自匈奴休屠王,太子日磾,字翁子,是(汉)武帝。。。。。。帝以休屠作金人,为祭天主,因赐姓金氏。。。。。。。唐贞观所定益州蜀国郡三姓,一曰金氏。汾州河西郡四性,一曰金氏。又唐新罗国王姓金氏。。。。。。

일단 위의 책은 송대에 만들어진 중국에서는 가장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는 성씨고증책이다. 또한 현재 문제가 되는 당대와 가장 가까운 시대이기도 하다. 문제는 해당 책에서 김씨의 유래는 분명히 흉노 김일재(日磾)로 잡고 있지만, 신라의 왕족과는 완전히 분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신라의 왕씨인 김와 흉노의 김씨와는 서로 다른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당대에 수 많은 신라인들이 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료를 통해서 보면 흉노와 신라왕가가 서로 관련이 없다고 판단된다.



7- 흉노의 후예라고 가정했을 시.
1- 유입 시기의 문제
김일재가 BC134이니, 1대를 20년으로 잡으면 120년 이후, BC 14년이고, 1대를 25년으로 잡으면 AD24년이고, 1대를 30년으로 잡으면 AD 76년이 된다. 그럼 대략 왕망의 신나라[각주:9]가 망하고 나서 요동으로 갔다. 그리고 비문에는 안나오지만 다시 한반도로 갔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신라 탈해에서 김알지 신화가 나온다. 탄해왕의 재위기간은 보통 57~80년인데, 왕망의 신나라가 망하고 24년만에 원거주지와는 머나먼 곳에 와서 왕이 된다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물론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김일재 직계후손들의 유입가능성은 상당히 줄어든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직계가 아닌 방계 흉노들이 들어왔을 가능성인데, 개인적으로 이와 같은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본다. 그 이유는 신라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서방계 유물들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이론도 상당한 문제가 있다. 서방계 유물이 흉노계라고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신라는 인도쪽에서도 왔었다. 다시 말해서 인도를 경유한 서방계 유물일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냥 흉노라고 하지만, 그 안에는 수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 말도 서로 통하지 않을 정도의 사람들이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방계가 들어왔다고 그 영향력이나 흉노의 핵심과 얼마만큼의 영향력이 있는지 이야기하는 것 자체도 상당히 힘든 문제이다.

2- 고대 민족 이동에 대해.
고대의 민족 이동은 지금과 같이 4명 가족 정도가 비행기를 타고 이민을 가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거대한 씨족 사회로서 그 구성원이 모두 동시에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각주:10]. 그런 의미에서 김일재 후손이 신라로 유입된 것을 믿는 사람들은 김일재 유입 이전부터 신라에 일정한 근거지가 있었기에 그 후손들이 신라로 넘어온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신라가 상당한 국제화 사회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반대로 신라에 근거지가 없었기에 후손이 아예 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의 증거가 된다. 하지만 어느쪽인지는 판단불가.ㅠㅠ

3 - 그런데 흉노는 위프를 한것이냐?
흉노가 신라에 왔다. 대흥안링부터 시작해서 내려왔다고 하더라도, 요동과 한반도를 완전히 가로지르는 길이다. 또한 초원지대와는 다른 산악지대를 지나야 되는 코스이다. 그래. 흉노가 미쳐서 길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초원이 아닌 산악지대로 내려왔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중간에 흔적이 있어야 한다.

지금과 같이 한두명이 움직이던 시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별 영향력이 있을 수가 없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동반을 한 씨족-부락단위의 이전인 것이다. 그럼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흔적"이 발생해야된다. 문제는 흉노가 비행기를 타고 온 것처럼 고구려나 발해에는 어떤 흔적도 없고 오직 신라에만 서양식 유물이 있다.

사실 이 문제는 지금도 계속되는 한국사학계의 골치거리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배를 통해서 왔다는 것인데, 흉노는 기본적으로 유목민족이다. 그들이 갑자기 말을 버리고 배를 타야되는 이유에 대한 타당한 설명이 없다.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일단 본인이 생각하는 교류의 단계를 말해야될듯 하다. 1단계는 느슨한 교류로서 마치 소문이 퍼지듯이 느리게 주변 사람을 통해서 서서히 서로간의 정보가 교류되는 단계이다. 당연히 조금만 멀리 있는 정보는 전달 받는 것도 느리고 정확성도 적다. 2단계는 상업의 단계이다. 상업행위를 통해서 정교교류가 이루어진다. 3단계는 기술의 단계이다. 기술의 이전을 통해서 교류가 일어난다. 4단계는 결혼의 단계이다. 서로간의 결혼을 하면 상당한 교류가 발생한다. 특히 2세대는 그 교류의 결정체이다. 그러나 결혼은 알지 못하는 사람과는 하지 않기에 앞전의 단계가 선행되어야 한다. 5단계는 외교의 단계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각 일정한 집단체를 형성하고 있어야한다. 6단계는 전쟁의 단계이다. 이것보다 더욱 강렬한 교류는 없다.

그래서 신라로의 흉노의 직접적인 유입보다는 몇몇 기술자집단의 이주가 있지 않았나....생각되기는 하지만, 이 경우도 사실 위프설을 피할 수가 없다. 기술의 연결선이 없는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고구려인데....흠.......기술사쪽은 본인의 전공이 아니라서 일단 판단보류이다.


흉노인의 후예라고 한 것이 단지 자신들의 조상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었는지. 아니면 진정 후예인지는 지금으로서는 판단할 수 없다. 다른 증거 사료가 나오기 전까지는 일단 신라왕족이 흉노인의 후예라는 것은 판단 보류이며, 그 전까지는 흉노의 후예가 아니라고 판단할 것이다.




* 논문 쓰기 바쁜 녀석이 이거 머하는 짓이냐고? --;;
사실 본인 논문의 핵심은 소그드의 한반도 유입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라왕족이 흉노인가 아닌가는 상당히 중대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서 처용은 보통 춤과 괴기한 용모로 서역인으로 보는데, 만약 신라왕족이 흉노였고, 당시가 그리 국제화 사회였다면, 괴기한 용모라고 말할 정도는 되지 못한다는 둥. 혹은 최치원이 소그드의 대표적인 무용인 호선무를 향악이라고 해서 신라에서 오래동안 내려오는 춤으로 말했는데, 만약 신라왕족이 흉노라면 이거 골치아파진다는 것...

본인 논문은 신라왕족이 흉노든 아니든 큰 영향은...있기는 있지만, 없다고도 해야겠고.... 단지.....가장 큰 문제는.....어떻게 써야될지 갈피가;;; 참고로 본인은 소드그인의 유입을 말하는 것처럼 한국의 고대에 많은 이민족들이 유입되었을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단보류인것이다.


그 외에 관련 된 정보를 아시는 분은 언제든지 덧글로 제보부탁드려요^^

  1. 중국쪽에서는 해당 비문을 大唐故金氏夫人墓銘 라고 부르지 않는듯 하다.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봐도 없다. 그렇다고 논문준비하면서 중국쪽 금석문 하나하나 뒤지고 다닐 수도 없고;;; 그래서 본인으로서는 원문 자체를 보고 싶은데 구할 수가 없어서 답답하다. 혹시 있으신분??! [본문으로]
  2. [/footnote]와 구당서[footnote]新罗人金忠义以机巧进,至少府监,荫其子为两馆生......(旧唐书 卷一百五十八 列传第一百八) [본문으로]
  3. 이 비석 자체가 손상이 너무 크다. 그래서 다른 이야기를 볼 수 없으니...에휴... [본문으로]
  4. 혹자는 김일재는 단지 흉노일뿐인데, 실제조상이 아니라면 오랑캐따위를 가짜 선조로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나라는 실질적으로 활발한 다민족 사회였고, 김일재로 대변되는 남흉노는 명목상으로 한왕실과 형제관계로 같은 일가라는 명목이 있다. 고로 오랑캐를 왜?라는 의문은 합당하지 않다고 본다. [본문으로]
  5. 굴원이 빠져 죽었다는 물 이름이 汨罗인데, 우리발음으로는 멱라, 중국발음으로는 miluo, 日자에 m음가가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겠지~ (by 孟元文이라는 익명의 사나이 킥킥...) [본문으로]
  6. http://blog.yam.com/wenshi/article/19776020 [본문으로]
  7. 원래 일과 알의 언어학쪽 각각 학자들의 복원음을 올렸는데, 특수기호쪽인지라 충돌해버린다. 증거 패스. 궁금한 분은 http://www.eastling.org/OC/oldage.aspx 에서 직접 검색을. [본문으로]
  8. 이는 보통 통일신라 전후로 보는 견해가 주도적이다. 그럼으로 이 말을 여기서 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지 않을까? [본문으로]
  9. AD8~23 [본문으로]
  10. 물론 개개인이 움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파편적이고 큰 영향이 있을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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