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의 조조는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조조가 대단한 도굴꾼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조조는 따로 "도굴부대[각주:1]"을 만들어서 전문적으로 도굴행위[각주:2]를 하였습니다. 도굴을 통해서 상당한 자금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도굴경험을 가진 조조이기에 자신의 무덤은 철저한 보안과 통제을 합니다.

조조는 자신의 관이 무덤으로 옮겨지[각주:3]는 날 성내의 모든 문을 열고 72개의 관을 동시에 사방팔방으로 움직이게 하였습니다[각주:4]. 그러다 보니 당대의 사람들도 대체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었고, 후대의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알아낼 수 없는 비밀이었습니다.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조조의 무덤은 미스테리로 남게 되었습니다.



조조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2009년 12월 27일에 정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무덤의 위치는 업성(邺城)의 서쪽으로 멀지 않은 지점[각주:5]에 있었습니다. 무려 조조의 무덤치고는 매우 조그마한 형태의 와석묘실입니다. 묘실은 전실과 후실로 나누어져 있으며 중간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실에는 동서로 이실이 존재하였습니다. 묘지는 최대 16미터의 깊이로 비교적 깊이 파여져 있었고, 묘도는 35미터, 폭은 9.6미터였습니다. 해당 묘는 몇 번의 도굴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요물품은 아직 남아 있어서 출토유물이 200여개를 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조의 당시 위치를 생각하였을 때에는 오히려 적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른쪽 가운데가 업성유적임.



이쯤에서 전문가들이 왜 이 묘를 조조의 묘라고 확정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1) 묘장의 규격이 한말 위진시기의 왕후급 묘장이며 이는 조조의 사망당시의 신분인 위왕(魏王)과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봉토가 되어 있지 않다고 하였는데[각주:6], 이 무덤 역시 봉토(封土)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조조의 무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고대 묘라고 하면 어마어마하게 큰 크기를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사실 상당히 조그마합니다. 진시황묘는 어디까지나 예외-_


2) 무덤내 기물과 벽화등이 당시의 년대와 일치합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조조의 무덤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그냥 시대가 일치한다는 것뿐입니다.

3) 묘지의 위치가 사료나 노잠(鲁潜) 기록과 일치[각주:7]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정확한 위치라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훗날 추정되는 위치이며, 상당히 넓은 지역이기에 정확한 증거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4) 조조 스스로 박장[각주:8]을 명한 기록[각주:9]이 있습니다. 해당 무덤의 기물 역시 왕급이라고 하기에는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조조의 무덤이라고 하기에는 정확한 증거가 아닙니다.

5) 무덤내 남성유골을 분석해본 결과 60세전후였습니다. 조조의 사망시 나이가 66세였던 것을 감안하면 근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조조의 무덤이 맞다면 이 유골은 바로 그 "조조"!! 인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도 정확한 증거는 아닙니다.

드디어 가장 정확한 증거입니다. 이것을 반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보입니다.

6) 무덤내에서 위무왕(魏武王)이라고 쓰여진[각주:10] 돌위패(石牌)와 돌배게(石枕)을 발견했습니다.조조의 생전에는 우선 위공(魏公)으로 봉해졌다 다시 위왕(魏王)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뒤에 시호(谥号)로 무왕(武王)에 봉해집니다. 그리고 이후 조조의 아들인 조비(曹丕)가 황제가 되면서 조조을 무황제(武皇帝)로 높이게 됩니다. 그런데 석비에 쓰여진 것은 바로 조조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에 불리던 무왕(武王)인 것입니다.

魏武王常所用格虎大戟 (이것으로 사실상 게임끝-0-)



어디까지나 소설인 삼국연의로 인하여[각주:11] 조조에 대한 이미지는 간웅이라는 느낌이 강하였습니다. 농담을 조금 넣어서 이야기하면, 조조의 능력치는 간웅의 수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지나치게 강력합니다. 전략-전술이야 조조까인 삼국연의를 통해서도 들어나고, 손자병법의 주석도 집필[각주:12]합니다. 그리고 당대의 시풍을 만드는 등의 문학쪽에도 뛰어났습니다. 물론 여자를 좀 많이 밝히긴 하였지만 그건 유비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어찌되었든 최근 한중일을 막론하고 점차 조조의 본모습을 찾으려는 노력들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노력과 성과들이 대부분이 일본에서는 창천항로, 한국에서는 고우영의 "삼국지"라는 만화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더 구체적인 사항은 관련 전공자들에게나 필요할 것이니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역사팬들이나 역사매니아들분에게는 충분하지 않나 싶습니다. 무엇보다 더 정확한 내용은 관련 보고서를 직접 봐야지 알 수 있을 듯 합니다[각주:13].


* 사실 작년 가을에 통역알바로 업성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그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이런 발견이 있었다니 조금은 두근거리는군요. 그래도 해당 일은 어디까지나 고고학계열의 일이며, 역사계가 흥분할 만한 특별한 사료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도 삼국연의의 팬들이 널려있으니 관광자원으로 사용하기에는 정말 좋겠군요.

* 다음뷰 추천 좀 많이 눌러주셔요. 근 몇 달 동안 단 한번도 메인은 고사하고 베스트에도 못 갔군요. 아..베스트는 몇 개 갔군요. 죄송;;; 그래도 왠지 다음뷰로부터 버림 받은 기분이랄까요? ㅠㅠ 물론 다음뷰만으로 저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단지 최근에 쓴 글 중에 나름 메인감이 다른 포털에는 올라가기도 하는데, 다음뷰는 감감무소식이어서 말이죠^^:::  추가 : 역시나 버림받았지는도 모르겠습니다. 방문자수 대비 추천수나 추천수 자체가 얼마인데 베스트도 안되는군요. 진짜로 버림받은건가;;;;

* 루리웹에서 들어오는 링크가 있어서 가봤다가 완전 빵! 터졌습니다. "대륙의 툼레이더" - "암벽타다 막 떨어지는 조조." 센스 정말 최고이십니다!!!

해당 덧글에서 72총에 대한 이야기가 논란이 되더군요. 사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曹操殁后恐人发其冢,乃设疑冢七十二。”(南宋《舆地纪胜》) "조조는 죽은 뒤에 그 무덤을 다른이가 발견할 것을 두려워 하여서 72개의 가짜무덤을 만들었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말 그대로라면 72총은 사실이겠지요. 하지만 출처를 보시면 남송대에 쓰여진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대가 상당히 차이가 나니 왜곡이 되거나 과정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가짜 무덤을 만들고 여러개의 관을 내보내는 "페이크"을 사용했을 가능성 자체는 조조의 이력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를 서술하고 주석에서만 해당 사실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하였습니다.

(이 글은 되도록 일반분들을 위해서 쉽고 간단하게 쓰여졌습니다. 이 점 양해부탁드립니다. 그래도 관련 사료는 주석으로 처리해놓았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루리웹에서는 로그인해야 덧글을 달 수 있어서 그냥 여기다가 적어놓습니다....귀차니즘-_)

* 루리웹에서 이 무덤이 가짜 아니냐는 분들......할 말이 없습니다. 글자가 최근에 쓰는 한자가 아니냐는 부분에서는 멍해지고 말았습니다. 가짜 만들어내는 기술에서 시대에 맞는 한자를 만드는 것은 껌입니다. 재질까지도 어떻게든 처리 가능합니다. 최후에 문제가 되는 것은오히려 내용 그 자체인 것입니다[각주:14]. 대놓고 말해서 설령 가짜를 만들어도 일반인이 알아볼 수준의 것은 아닙니다[각주:15]. 그리고 해당 글씨체는 기본적으로 당대에 쓰던거 맞습니다.

가짜 조조 무덤  만들어서 뭐합니까? 관광자원이요? 그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다 걸리면 개쪽박 나게 됩니다. 안양시만의 문제가 아닌 중국전체 고고학계가 쪽박납니다. 조조무덤이 그 위험을 감수하고 가짜를 만들어낼 정도일까요?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지금의 증거들은 어디까지나 정식보고서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정확한 판단은 역시나 보류이긴 합니다[각주:16]. 그러나 발굴자나 관련 인사들의 이력을 보아서는 미치지 않고서는 가짜 만들어내지 않을 것입니다.


조조에 관한 속담 한마디

중국에서 현재 사용되는 속담 중에 조조와 관련된 속담이 하나 있습니다. 说曹操,曹操到(조조를말하니 조조가 왔다 shuocaocao, caocaodao)입니다. 한국 속담으로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직책까지 있어서 총대장 发丘中郎将, 발굴대장 摸金校尉. [본문으로]
  2. “操别入砀,发梁孝王冢,破棺,收金宝数万斤,天子闻之哀泣” (唐欧阳询等撰《艺文类聚·宝玉部上》(卷八十三),转引《曹操别传》) [본문으로]
  3. 출빈(出殡) [본문으로]
  4. “曹操殁后恐人发其冢,乃设疑冢七十二。”(南宋《舆地纪胜》) - 해당 일에 대해서는 혹자는 후대에 만들어낸 일이라고도 합니다. 남송이니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사료이긴 합니다. 그러나 일정한 진실이 들어있다고 봅니다. 분명 페이크는 사용했을 거라고 충분히 추측할 수는 있다고 봅니다. 72는 그냥 숫자일 뿐입니다. [본문으로]
  5. 현재의 河南安阳县安丰乡西高穴村 [본문으로]
  6. "不封不树”《三国志·魏书》 [본문으로]
  7. “西门豹祠西原上”(《三国志·魏书·武帝纪》) [본문으로]
  8. 薄葬 금은보화를 많이 넣지 않고 검소하게 치루는 장례. [본문으로]
  9. “殓以时服”、“无藏金玉珍宝”《遗令》 [본문으로]
  10. 魏武王常所用格虎大戟 [본문으로]
  11. 삼국연의는 기본적으로 소설이며 유비빠입니다. 그러다 보니 유비의 적인 조조에 대해서는 당연히 조조까가 되었지요. [본문으로]
  12. 이에 관한 보고서을 쓴 친구녀석의 말에 따르면 간결하면서도 실전의 냄새가 물씬 나는 주석이라고 하는군요. [본문으로]
  13. 정식 보고서는 언제쯤 출판되려나....흐음.... [본문으로]
  14. 그래서 청화대에 있는 고문이 계속 가짜 아니냐고 하는 것입니다. 한자나 재질 자체가 다 확실하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_-;; [본문으로]
  15. 요즘 제대로 된 가짜는 전문가들도 알아보기 힘듭니다. 만약 이것이 가짜라면 한 성급 관련 인사들이 동원된 것인데 왠만해서는 "트릭"을 뚫기 어려울 것입니다. [본문으로]
  16. 중국네티즌쪽에서도 가짜가 아니냐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미치지 않고서는... [본문으로]

일 단 해당 글을 번역한 분에게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본인 이 책의 원문을 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중톈을 알기에 감히 단정해서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분명히 가치가 없거나 현저히 떨어질 것이다. 본인 왠만하면 책도 보지 않고 이렇게 악평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중톈은 우한대학교에서 "문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하문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이다. 그리고 "백년강단"이라는 티비 프로그램에 출연을 하여서 마치 삼국시대의 권위자처럼 불려지고 있다. 하지만 다 헛소리이다.


역사학계에서 본인이 들은 가장 이중톈에 대한 가장 우호적인 발언은 "원래 너무 많이 알아도 말을 못하고, 너무 몰르면 사람들에게 인정 받지 못하는데, 이중톈은 적당히 알아서 그렇게 말을 잘 할 수 있다니까."라는 발언이었고, 그나마 중립적인 발언이 "이중톈? 연예인이잖아." 이다. 보편적인 반응인 나쁜 반응은 말해 무엇하랴? 이런 반응이 나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스스로를 "학자"라고 말한다. 그것도 "역사 학자"라고 말한다. 역사학에서 보면 웃기고 환장할 노릇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문학을 연구한 사람이다. "삼국연의"라는 소.설.책.을 연구?!한 사람이다. 스스로는 정사 삼국지를 이용해서 보다 객관적으로 그 시대를 파해치려고 한다지만, 역사학을 하는 입장에서는...한마디로 어이가 없다. 이중톈은 그냥 티비의 상업성이 만들어 낸 "사기꾼"이다.

오 해가 없도록 말해두겠다. 본인 도올 김용옥씨를 존경한다. 그가 티비에서 강연하는 것을 손들고 환영한다. 티비에 자주 비친다고 학자가 아니라고 매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김용옥씨는 학계에서 이단아라는 소리를 듣지만, 최소한 학자가 아니라는 소리는 듣지 않는다. 그런데 이넘의 이중톈은 학자소리도 못듣는다.


남에게 들은 소리로만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본인 박물관에 관련된 티비프로그램을 녹화한다는 공문을 받은 역사과 주임선생님의 명령으로 중국친구들(역사과 석사들)과 녹화에 가게 된다. 역사학과 석사들 반은 미쳐가고, 반은 포기했던 그 모습이 머리에 아른거린다. 본인도 그 당시의 시간을 잊고 싶다. 그래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말들이 있다.

"삼국시대를 제외하고는 중국은 진한부터 지금까지 통일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삼국시대는 그만큼 중국의 역사에서 특별하다."

님아...남북조는 어디로 날라가고, 요금원도 어디론가 떠나보내는군요.


(문학쪽 관계자가 나왔을 때의 발언)"우리는 정사를 가지고 이야기 해야지. 왜 자꾸 삼국연의를 말합니까?"

...그래 말은 맞다. 근데 계속 삼국연의 이야기를 하십니까? 네???


좋다. 한 발 양보해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 책을 사보는 것은 좋다. 하지만 이중톈이 중국 사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라는 생각은 제발 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그는 그냥 일반인보다 조금 더 역사에 취.미.가. 있는 문학자일 뿐이다. 그리고 이 글의 번역자 분도 분명히 钱穆《中国历史政治得失》이라는 책을 아시리라 본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은 결국 钱穆의 짝퉁일뿐이라는 사실도 아실 것이라고 믿는다. 왜 이 책을 번역하였는지 정말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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