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불교전기문학지리자문시스템(佛教傳記文學地理資訊系統)

기관 : 법고불교학원(法鼓佛教學院)

주소 : http://dev.ddbc.edu.tw/biographies/gis/interface/


불교경전에서 등장하는 지리정보를 GIS을 이용하여 분석 및 시각화하였다. 불교경전을 읽다가 모르는 지명을 즉각적으로 지도에서 볼 수 있다.


바로 : 현재 한국의 고전적 디지털화에서 간과하고 있는 지리정보을 표시하기 위한 괜찮은 예시라고 할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하고 구현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서 짦게 써놨지만, 그런 사항일수록 무엇보다 중요하다.


* DH 리뷰는 DH스터디를 간략하게 요약한 내용입니다. DH스터디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진행되며 모든 분들의 참가를 환영합니다. DH스터디에 관한 문의 사항은 ddokbaro@gmail.com 으로 언제든지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름 : 불교자료표준DB(佛學規範資料庫, Buddhist Authority Database Project)

기관 : 법고불교학원(法鼓佛教學院)

주소 : http://authority.ddbc.edu.tw/


불교자료에 관한 시간, 지역, 인물에 대한 표준DB을 XML을 기본으로 제공한다


바로 : 본 자료는 단순히 불교자료의 표준뿐만이 아니라, 표준자료의 시간부분은 CHGIS의 기본시간축DB가 되는 등 다른 영역에서도 표준 자료로서 자리잡고 있다. 당연한듯한 이런 메타데이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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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연대에 대해서는 학계의 주류의견은 한명제(汉明帝)시대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三十三年,发诸尝逋亡人、赘婿、贾人略取陆梁地,为桂林、象郡、南海,以適遣戍。西北斥逐匈奴。自榆中并河以东,属之阴山,以为四十四县,城河上为塞。又使蒙恬渡河取高阙、阳山、北假中,筑亭障以逐戎人。徙谪,实之初县。禁不得祠。《史记-秦始皇本纪-卷六》”에 나오는“禁不得祠”에서 “不得”를 “佛陀”의 음역으로 해석하여, 진시황 이전에 이미 전래가 되어서 보편화 되었다고 판단하였다. 단순히 음역에서 그친 것 뿐만이 아니라 고고학 자료를 이용하여서 秦咸阳과 汉长安에 인도와 유럽으로 통하는 “Pre-실크로드”가 있었다고 판단하였다.

-- 韩伟(陕西省考古研究所)《秦始皇时代佛教已传入中国考》文博 2009年 第2期,P18~19


바로바로의 중얼중얼 :
秦始皇(BC 214년쯤) 부터 汉明帝(약 AD 60년쯤)까지의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불교전파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裴松《三国志》에 汉哀帝(BC2년)의 기록이 나오지만 삼국지 자체의 집필연도가 늦으므로 중간 과정의 증명이 될 수 없으며, 그 외의 사료가 전무하다는 것도 충분히 문제가 된다고 본다. 이는 진시황때에 넓게 퍼져있었고, 전쟁행위와 동등할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금불정책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한다. 물론 그렇다고 Pre-실크로드를 부정하지는 못한다. 수 많은 고고학적 유물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는 점을 보아서 분명히 실크로드 전에도 문명이 오고 가는 통로는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통로가 얼마나 활발하게 움직였느냐는 또 다른 문제로 생각된다.


보통 "종교"라고 불리는 것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가진다. 1) 숭배대상, 2) 교리(바이블), 3) 신자 및 교단, 4) 교단의 의식, 5) 행복조건과 충족에 대한 믿음이 있을 경우 이를 종교 혹은 종교집단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1) 숭배할 대상은 불교의 부처, 기독교의 예수, 유교의 공자. 2) 교리로서는 불교의 불경, 기독교의 성경, 유교의 사서삼경. 2) 신자 및 교단은 불교의 스님과 보살, 기독교의 목사와 신도, 유교의 양반과 양민 4) 교단 의식은 불교의 예불과 법회, 기독교의 예배, 유교의 제사 5) 행복의 충족에 대한 믿음이나 내세관은 불교는 해탈과 윤회, 기독교의 영혼구제와 천국, 유교의 정명 혹은 군자 및 "조상신"이 있다. (유교의 경우 내세관이 약한 것이 특히 문제가 되기는 한다.)

부끄럽게도 얼마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국가"도 "종교"잖아?!

1) 국가는 국가 자신을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국가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국가가 어디까지나 국민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에 불과한 것임에도 말이다.

2) 국가는 헌법과 다양한 법률 및 세뇌교육을 통하여서 자신만의 교리를 만들었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그 교리 속에 있는 것이다. 진정한 모태신앙인 것이다. 국가를 바꿀 수 있다고? 물론이다. 종교도 바꿀 수 있다.

3) 국가는 국민이라는 신자와 정부라는 교단을 운영한다. 신자들은 정부의 통치체계에 지배받는다. 공무원들은 목사나 다른 종교의 지도자들처럼 신자(양)을 이끄는 양치기 노릇을 한다고 말을 하지만, 실제로 제대로 된 양치기는 별로 없다.

4) 국가는 국기에 대한 의례라는 사소한 것부터 시작하여 주민등록발급등과 같은 일련의 의식을 진행한다. 국민은 그 신도로 남아 있기 위하여 위에서 규정하는 의식을 충실히 따라야 하며, 만약 이를 거부한다면, 신도로 남아 있을 수 없다.

5) 국가는 역사를 이용하여 행복을 충족시킨다. 그들은 과거 국가를 지킨 인물들을 부곽시키면서, 당신도 이리 하면 역사에 기록되어 후세가 칭송할 것이라고 암묵적인 암시를 걸고 있다. 당신의 이름이 영원히 역사에 기록된다는 달콤한 유혹을 누가 그리 쉽게 뿌리칠 수 있을 것인가?

국가도 종교다. 지금 현재의 국민국가와 중세유럽의 천주교는 기본적으로 같은 성질의 것이다. 언제인가 국가체계가 사라진다면, 그 때의 역사가들은 지금의 국민국가 체계에 대해서 어떠한 평가를 내릴까? 혹시 우리가 지금 중세유럽을 평가하듯이 암흑기라고 하지는 않을까?

"他钵可汗의 불교 도입에 대해서"는 唐代九姓胡与突厥文化(蔡鸿生 中华书局 p147)에 나오는 글에 의문이 들어서 작성한 글이다. 木杆可汗의 동생인 他钵可汗(572-581)은 불교를 도입했다. 하지만 1기 투르크제국에서는 불교를 받아들인 다른 칸은 없었다. 그렇다면 他钵可汗은 어째서 불교를 받아들였을까?


우선 불교를 비롯한 종교의 전파는 두가지의 경우로 나눌 수 있다. 민간에 먼저 유포가 되고, 그 세력이 일정정도 이상이 되었을 때 압력을 받은 지도자가 해당 종교를 수용하는 경우이다. 기독교의 로마에서의 발전양상이 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지도자가 해당 종교를 "현실적 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런 종교가 지도자의 비호아래서 점차 민간에 유행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백제에서의 불교유입을 생각하면 비슷하다.

그렇다면 他钵可汗의 경우는 어떤 경우라고 판단해야될까? 他钵可汗이후에 해당 종교가 민간에 지속적으로 유지가 되는지 아닌지를 알아보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他钵可汗사후 불교는 순식간에 사멸한 것은 他钵可汗 개인적으로 해당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해석해야될 것이다.


문제는 他钵可汗은 왜 불교를 수용했을까? 蔡鸿生은 이에 대해서 부국강병을 원했던 他钵可汗와 불교를 받아들이므로서 突厥가 약화되기를 원했던 北齐왕의 현실적인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으로 해석한다. 북제와의 생각은 현실과 매우 비슷할 것이다. 그가 투르크에 전달한 열반경(涅磐经)의 내용을 보아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다. 문제는 他钵可汗의 입장이다.

지도자는 바보가 아니다. 단지 불교를 받아들이면 부국강병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믿는건 어떤 현실적인 근거도 없다. 분명히 일정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오래동안 투르크 세계의 주류 종교인 샤마니즘도 부국강병을 이룩할 수 있다고 말하는 점에서는 동일하기 떄문이다.


혹시 他钵可汗은 투르크의 전통종교인 샤마니즘의 사제집단과의 일정한 충돌을 하였고, 불교를 이용하여 이러한 사제집단과의 알력싸움을 할 생각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는 이러한 알력싸움에서 패하게 되고(9년의 짦은 통치), 그의 뒤를 잇는 沙钵略可汗은 오히려 "从天生"이라는 샤머니즘적인 가치를 더욱 강조했던 것이 아닐까?




추가적인 사료 조사가 필요한 점

1) 他钵可汗의 사망이유

2) 他钵可汗과 샤만집단간의 충돌에 대한 증명사료

3) 他钵可汗 계승에 대한 문제가 없었나?





문제와 결론

다신교에서 일신교로 발전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해를 한다. 일신교가 더욱 발달된 것이고, 더 훌륭하고, 다신교는 미신이나 저급 종교라고, 웃기는 소리다. 과학은 발전하면 더욱 좋아질지는 모른다.(사실 환경 오염이니 해서 역사적이나 지구 전체를 놓고 보았을때 과연 좋아진것인지 의문이 팍팍 들지만-_) 하지만 인간의 일에서 소위 말하는 발전이 더욱 훌.륭.한 것은 아니다.


이제부터는 "다신교에서 일신교가 나왔고, 현재는 다신교와 일신교가 동시에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제부터 말도 안되는 논증 시작 --
(왠만하면 보지 마시와요 -0-)


1. 다신교란?
지금까지 학자들이 추측하기로 인류의 최초의 종교적 형태는 다신교였다. 다신교는 여러명의 신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그리스 신화를 보면 여러명의 신들이 나온다. 물론 제우스가 대빵이긴 하지만 그의 아내 헤라한테 맨날 바가지를 긁힌다. 동양의 인도를 보자. 불교를 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관세음보살이 부처중에 대빵이라고 보통은 이야기 하지만 그 외에도 천수관음이니 머니 해서 부처님은 어려명이 있다.

성경에도 이러한 다신교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 중에서 모세의 십계명의 제 1조항은 유념할만하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라는 말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외에도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샤마니즘을 주류로 해서 세계의 종교는 기본적으로 다신교였다. 물론 몇몇 일신교 사상이 보이긴 하지만, 지금 말하는 것은 주류다. 그리고 유대교가 생겨나고, 기독교가 거기서 파생되고, 다시 이슬람이 파생된다. 그리고 자신들이 가장 위대한 종교라고 부르짖는다. 정말 그럴까?


2. 종교개혁 =  회귀
흔히 종교개혁을 말하면 마치 예전의 카톨릭은 매우 낙후되고 안 좋은 종교로 생각되어지고, 개신교는 훌륭하고 대단하게 보인다. 그런데 사실 개신교는 성경지상주의에 가깝다. 다시 말해서 오히려 탈속, 혹은 신에서의 멀어짐이 아니라, 더욱더 신에 밀착되고자 하는 노력이다.

흔히 나쁘게 말하는 면죄부. 이걸 다르게 해석하면 신의 대리인이지만 어디까지나 한 명의 인간인 교황이 신이나 할 수 있는 죄를 사할 수 있고, 그리고 사람들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돈을 모아서 죄를 사면 받을 수 있다는 소리다. 인간의 우주인 것이다.

하지만 개신교는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나선다. 개신교의 대부분의 교파들이 천명론, 다시 말해서 구원받을 사람은 이미 다 정해놨다는 이론을 보통 전개하고는 한다. 여기서 인간이 할 수 있는일은 없다. 어차피 신이 다 정해놓았다는 것 아니겠는가?

이것이 원리주의이고, 점차 세속화되는 종교에 대한 반발로 초기의 순수?!했던 상태로 돌아가자는 것이 소휘 종교개혁이다. 한 마디로 별로 발.전.이 아니다. 현실에 비유를 하면, 박정희때 한강다리 막 심고, 고속도로 뚫고, 빌딩 올리니 이렇게 발전하지 않았냐!? 지금 경제 문제는 박정희때처럼 마구마구 건설하면 된다라는 이명박을 연상하면 된다. 그는 개발 지상주의로 인하여 한강 다리 무너지고 마구잡이 건설로 회손된 자연과 문화유물은 생각도 안하는 거다! 그리고 그 당시와 지금의 상황이 다르다는 것도 인식하지 않고, 무조건 예전처럼 대공사(대운하) 만들자! 라고 말하는 거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본질이다.

다시 말해서 개신교는 인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보면 매우 어처구니 없는 종교이다. 인간은 자유가 없다. 다 신이 정해놓은 거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의 기본적인 양식인 개인의 자유라는 명제앞에서 가장 진보되었어야 할 개신교는 오히려 카톨릭만도 못하다. 차라리 카톨릭보다 몇 천년전에 만들어진 불교의 사상이, 개나 소나 모두가 다 부처가...다시 말해서 절대 신이! 될수가 있다, 가 훨씬 인간의 자유와 근접하다.


3. 실제 종교인의 숫자...
무엇보다 현재 마치 모든 사회가 일신교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환상일 뿐이다. 이슬람과 기독교가 일신교의 명맥을 유지한다면, 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 곳곳에서 아직도 유구히 남아있는 샤마니즘이 다신교의 대표주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인구만으로 따지면 일신교나 다신교나 숫자는 비등할 뿐이다.

그리고 유교를 종교로 보냐 마냐라는 논쟁이 있는데, 만약 종교로 놓고 본다면, 당연히 많은 조상신을 모시는 다.신.교.다. 이로 인하여 유교 문화권의 수 많은 인구가 다신교로 거의 기본적으로 고고싱이다. 유교가 종교가 아니더라도, 중국인들의 식당을 가면 왠만하면 보이는 관우상도 샤머니즘의 한 형태이다. 그로 인하여 중국인들은 살짝 다신교도로 포함시키기! -0-

단지 일신교는 다신교에 비하여 매우 강력하게 포교활동을 전개하기 마련이고, 이유는 무지 막지 간단하다 안 믿으면 지옥 가니까-- 내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이 지옥을 가게 해서 쓰겠는가?!, 그로 인하여 일신교의 숫자가 많다고 느껴지기 마련이지만, 사실 일신교도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

그럼 여기서 묻고 싶다. 사람들은 병신이라서 후진 다신교를 아직도 믿고 있는가?! 머...그럴 수도 있다. 가끔 보면 개인은 현명하지만 대중은 무식하다라는 말이 생각나고는 하지만, 특히 못 사는 사람들이 한나라당을 지지한다고 하는 꼴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 이지만--, 인간을 믿고! (믿기 싫지만...-_)


4. 발전 지상주의
발전이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사람의 심리이다. 하지만 발전은 반드시 좋지만은 않다. 지금 현재 이렇게 블로그질을 하고 컴퓨터를 쓰는 것이 과학의 발전때문이라고 한다. 확실히 예전보다 좋아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 생각하면, 이렇게 블로그질을 하고 위해서, 컴퓨터를 만드는 비용, 통신망을 구축하는 비용, 그리고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서 타들어가는 석유, 그리고 오염되는 자연을 생각하면, 과연 발전해서 좋기만 한건지 의심해 봐야하지 않을까?


5. 사실은 말이다.....
2005년에 발표된 어떤 중국 학자의 글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몇 자 적어봤다. 그는 19세기의 서양 이론으로 샤머니즘은 Magic(마술)이란다. 종교가 아니란다. 그리고 그 논증 중에서 샤머니즘은 다신교여서 종교가 아니란다. 원시 종교란다. 그리고 종교는 무조건 일신교란다. 그럼 불교는 종교가 아니었던 건가....=_=;; 그리고 힌두교는?! =_=;;  거참....만약 50년전이었다면 통했을지도 모르겠지만....지금 시대에 와서 이런 구식 이론으로 들이대면 생각되는건...웃기고 자빠지고 있네라는 생각뿐이랄까?

명색이 교수라는 작자가...으휴..-_- 기왕 외국 사상을 들여다 오는 보따리 상을 하려면 최신 사상을 들여오던지 말이지...이건 예전 구식 이론을 들고 들어오니 어쩌란 건지 궁금할 따름이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샤마니즘의 긍정적인 면을 보기 시작한 풍조인데..이 작가는 멀 어쩌란 건지..

일개 학생인 내가 어처구니 없어할 글이면...으휴-_......
하긴 제목부터가....."샤머니즘의 본질을 종교가 아니라 무술이다"라니...종교 본질이야 영원한 과제이긴 하다만...누가 이거 토론하냐..요즘-_- 어차피 해답이 있을 수가 없는 문제인데 말이다.

그리고 말이다. 정말 잡담으로 적는 것이긴 하다만...정리 엉터리닷! 음하하하..--
어차피 나만 알아보면 되는거얏!! 음하하하;;;;  

부제 : 요요 블로그에서 지나가던 님의 댓글을 보고...
http://chanme87.tistory.com/44#comment669372

본인은 종교를 공부한다. 그렇다고 철학과는 아니고 소수민족의 사상을 공부할 사람이다. 또한 어릴때부터 외가쪽은 불교와 인연이 깊은 집안이었고, 친가쪽은 개신교와 카톨릭이 있는 집안이었다. 거기에 아버지는 도가를 연구하시는 분이시다. 많은 종교 속에서 본인은 즐거이 노닐었다.


요요를 만나게 되고, 요요가 믿음이 강한 개신교 신자여서 서로 종교간의 문제로 싸우게 되었다. 지금 현재 내려진 결론은 한달에 한번 교회는 나가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요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한 종교를 믿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깊은 회의감을 가지고 있다.

본인이 요요가 믿는 개신교를 믿으려면 최소한 3가지의 거대한 관문을 넘어야 된다.



1. 신의 존재 증명
현재까지의 인간의 이성으로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계속 연역적 추리를 한다면, 다음과 같이 3가지 모델이 나오고는 한다. 우선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과 신은 존재하다라는 유신론이다. 그리고 그 유신론은 두가지로 분리되는데, 자연신과 인격신이다.

다 집어치우고 지금까지의 인간의 능력으로는 신을 존재를 증명할 수도 없고, 신의 부존재를 증명할 수도 없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본인의 현재 생각이 바로 위와 같다.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2. 인격신의 존재 증명

어려운거 같지만 사실 간단하다. 무신론은 절대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쉽게 이해된다. 자연신은 원시종교라고 불리는 곳에서 자주 말해지는 것으로서...예를 들어서 도교에서는 절대적인 진리를 "도"라고 말한다. 다른 말로는 카오스라고도 한다. 이 자연신의 특징은 인간을 특별히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존재하는 것이고, 자연, 우주, 혹은 세계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인격신은 보통 종교에서 말해지는 것이로서, 현재 세계의 3대 종교인 기독교, 이슬람, 불교와 같은 종교는 인격신 계열이다. 인격신의 특징은 "사람"을 다른 동식물과 다른 위치로 놔둔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 이것이 인격신의 가장 큰 특징이다.

물론 위의 분류는 엄밀하지 않고, 사람에 따라서 몇가지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략 위와 같다.

설령 내가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신이 자연신일지 인격신일지 증명해야되는 또 다른 문제가 남게 되는 것이다. 본인 생각으로 신이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신은 인격신과 같이 "인간"이라는 하나의 개체에 많은 투자를 하시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자연신과 같이 거대한 흐름, 혹은 자연 그 자체와 같은 인간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는 존재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을 위주로 돌보는 신이라는 것은 참 매력이 없다고 할까? 신답지 않다고 할까? 신이 쪼잔하게 거대한 우주 전체를 안 돌보고, 인간을 위주로 돌본다니.....



3. 2항목의 인격신이 타 종교의 신이 아니라 기독교의 하나님이라는 것에 대한 증명.

본인이 어떻게서든 신이 존재한다고 증명하고(혹은 믿고) 그 신이 인격신이라는 것까지 증명하더라도(혹은 믿더라도) 아직 마지막 문제가 남아있다. 세상에 인격신은 너무나 많다. 인격신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

인격신의 목록은 대충 불러보면, 개신교, 천주교, 불교, 이슬람를 비롯한 원시종교라고 불리는 것을 제외한 거의 모든 종교가 인격신에 해당된다. 이 많은 인격신 중에서 무엇인 진정한 신이란 말인가? 그 모두가 신일 수도 있고, 모두가 아닐 수도 있다.



....사실 내가 종교를 믿지 못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할 지도 모른다.
이렇게 기독교를 믿고 안 믿고의 문제에 대해서 "쓸데 없이" 수 많은 논리체계와 잡상을 늘어 놓는 것 자체가 문제일지도 모른다. 본인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르는, 신과 같이 인간이 아직은 도달하지 못하는 "절대 진리"를 알고 싶기에, 어떤 한 군데에 매이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신이란 것은 절대 진리와 같을 수 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신이라는 것이 절대 진리가 아니고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그런 것을 절대적으로 믿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가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상징체계이기 때문이다. 혹은 인간의 생각 자체가 진리일 수도 있다. 그럼 이러한 상징체계도 진리리고....중얼중얼....

다시 말해서...본인은............잡생각이 너무 많다. -_-;;;

정확하게 말하면, 일신교중에서 가장 발달한 형태의 종교라고 한다. 사실 현재에 거대 종교중에서 가장 늦게 출현한 것이 이슬람이니 어찌보면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슬람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일신교라는 강력한 종교적 요소로 신도들에게 막강한 종교적 안도감을 주면서도, 신의 사도가 여러명이라는 것으로 다양한 다른 종교 요소를 받아들이고 있다.

더 자세히 풀어서 설명하자면, 일신교가 다신교보다 좋고, 더욱 종교적으로 발달한 형태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더욱 막강한 종교적 안도감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본인과 같은 경우 이 안도감이 역겨워서-_-;; 싫어하기는 하지만, 종교의 역할이 사람들을 선도하고 옳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 인도의 과정중에서 그 사람에게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고, 보호해 준다는 막강한 안도감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다신교도 지켜봐주고 있다는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신교의 신들은 전지전능하다고 하기 보다는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다.

또 이슬람은 과거 일신교와는 다르게 여러명의 신의 사도를 주창하였다. 한국에도 코란 한글판이 나와있으니 한번 보는 것이 좋겠지만, 코란은 예수를 신의 사도로 인정하고 있다(물론 기독교도들이 보면 열받을 것이다. 예수는 신의 아들이며, 곧 신이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 이론은 예수의 사후 300년이 지나서야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론이라는 점은 알아두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외에도 여러명의 사도들이 나타난다. 물론 이슬람이 마지막 자유를 압박하고 있는 점이 있는데 그것은, 무하마드가 곧 최후의 신의 사도이며, 그가 최후의 사도이니 당연히 그 다음에는 어떠한 신의 사도도 없다는 점이다. -_-;;

하긴 기독교와 비교해보면 위의 장점은 분명해 진다
......흐음......길게 쓰면 누군가에게 혼나서 패스-_-;;



머..개인적으로는 종교를 역겹게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 자체도 불교나 힌두교같은 다신교쪽에 더 마음이 가는 지라 일신교에 대해서 그리 좋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일단 일신교중에서는 가장 자유롭다는 이슬람이라는 말은.....어느정도 긍정해 볼 만 한듯하다.


기독교의 포고는 무자비하고, 강압적이다. 그들은 반드시 하느님을 믿어야만 세상이 구원이 되고, 자신이 구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각자의 자유가 있고, 믿을 권리 만큼의 믿지 않을 권리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그들은 하느님에 나라에서 평안을 얻을 수 있다면서 설득하고, 협박한다. 그래도 믿지 아니한다면 포기해도 좋으련만, 그네들 식의 표현으로는 “그들도 같이 하느님의 영광과 기쁨을 누리기 위하여” 계속 된 회유를 한다.

 

미안하지만, 나를 설득시키지 못하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교회라는 곳을 좋아할 없다. 친가는 기독교에서 장로를 맡고 계신 분이 명이나 있고, 외가는 비구니 스님에 불교회화를 하시는 이모까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철학교수인 아버지의 철학과 도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온 나에게 하나의 종교를 믿으라는 것은 자신을 포기하라는 소리와 같다. 나에게는 이미 너무나 자연스러운 종교관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말은 이런 이야기를 때마다 인용하게 되는 아버지의 명언으로 요약된다. “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좋다고 생각하고, 부처님의 말씀도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을 믿는 자들을 믿지 않는다. ”

 

감정적인 부분을 떠나서, 이성적으로 나를 설득시켜주었으면 한다. 내가 교회보다 불교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지 하나 뿐이다. 교회에는 무조건적으로 비이성적으로 한가지 원리를 먼저 세뇌시키려 한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라는 절대적인 말이다. 말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그것을 증명하려는 어떠한 행위조차 없다. 단지 말일뿐이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묻는다.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해 보아라. 그리고 그를 믿는 자들이 행복한지 증명해 보아라. 무엇보다 영원히 평안한 천국이라는 곳을 증명해 보아라 말에 제대로 대답해 기독교 관계자는 아직 없었다. 그들은 언제나 같은 말을 뿐이다. 믿어라! 그래서 나는 교회보다 불교가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스님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보통 돌아오는 대답은 간단하다. “나도 몰라서 알려고 한다.”. 자신의 모름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와 모름을 긍정하고 그것을 이겨내려는 불교 중에서 내가 무엇을 좋아할 밖에 없는지는 너무나 간단하다.

 

만약 이성으로만 생각하지 말라고 하고, 감정으로 받아 들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대답해 주겠다. 내가 싫은 것을 어떻게 하나? 싫다. 싫다. 무조건 싫다. 감정적으로 전혀 받아 들여지지 않는다.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받는 다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과는 정반대로 생활하고 생각하는 모습에 이미 지쳐있다. 아닌 사람들도 있다고? 아무 종교도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너무나 따르는 사람도 있다. 어디까지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혹은 말씀을 인도하는 목사들의 대부분이 제대로 하는 모습부터 보여라. 그럼 믿고 따라 줄지도 모른다. 개판을 치면서 무슨 할말이 있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어찌 보면 쓸데 없을지도 모르는 이런 말들을 계속 줄줄 늘어놓는 나로서는, 종교를 믿는 다는 것은 맹신밖에 되지 않으며 그것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포기하는 바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행복하게 웃기만 하는 데에도 인생은 짦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너무나 힘들다.

 

교회는 나에게 감옥이다. 속에서 나는 고문을 받고 있다. 그들은 계속 외친다. “믿어라. 믿어라. 믿어라.” 하지만 죽이는 것이 빠를 것이다. 나는 믿지 아니한다. 무엇인가를 완벽하게 믿지 않는다. 맹신하지 않는다. 그것을 만들고 행하는 자, 모두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유롭고 싶다. 무엇보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고 하느님에게 빌고 싶지 않다. 나는 언제나 시험에 들고, 고뇌에 빠져서 속에서 웃으리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야 말로 현실이고 지옥이며, 천국인 것을

그네들의 말을 돌려주어야 겠다. "믿음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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