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치(礼治 예로서 백성을 다르린다.)와 법치(法治 법으로서 백성을 다스린다.)는 중국정치사상사의 두 가지 큰 흐름이다. 거대한 농업국가인 중국의 상황을 인식하고, 중앙정부로서 거대한 국가를 통치해야되는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보편적이고 공평한 법률이 있어야지만 전국 각지를 통치할 수 있다. 그리고 농업사회는 비교적 안정적으로서 변화가 크지 않다. 이는 법률의 지속성과도 서로 맞아떨어진다.

이런 중국정치를 객관적인 조건을 놓고 보면, 중국은 대단히 쉽게 법치의 길로 향할 수 있다. 통일되고 지속성이 강한 법율을 통해서 정치시스템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사상계는 오히려 예치를 소리 높여 외쳐오고 있었고, 법치를 배격하고 있었다. 특히 유가가 그러하였다. 이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예와 법을 비교하였을 때 예는 외면적으로 등급을 나누는 듯하다. 그러나 사실은 매우 평등하다. 법은 외면적으로 평등한듯하나, 사실은 등급을 나눈다. 예를 사람들을 자유로 인도하고, 법은 오히려 사람들의 행동을 제한하고 속박한다. 예를 일종의 사회성이고, 법은 정치성이다. 예가 사회에서의 정부로의 올라감이라면, 법은 정부로부터 사회로의 내려옴이다. 어찌되었든 예는 필연적으로 타자의 존재가 필요하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상대방에 대한 어느 정도의 존경을 필요로 한다. 법은 오직 법만을 논할 뿐이고 사람을 논하지 않는다. 살인을 한자는 죽어야 하며, 타인을 다치게 한자나 도둑질을 한자에게는 그 죄를 책임지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죄를 저지른 사람만을 고려한다. 그렇기에 예는 개인들의 상호간의 일이며, 법은 대중을 통치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예치의 정신은 사회 구성원 개개인에게 있으며, 개개인의 평등과 자유를 보장하여서 점차 풀어지고 가벼워진다.[각주:1] 법치의 정신은 국가정부에게 있으며, 권리를 중심으로 개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깍아내리며, 점차 강제적인 제재로 흘러간다.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예치를 주장하였기에 사회가 비교적 풀어져 있다. 이것은 자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자유가 많은 것이다. 정치는 오직 무의미한 구조물일뿐, 사회에 어떠한 강압이나 속박을 실행할 수 없었기에 정부 지도자들이 설정한 목표대로 나아갈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는 하였다[각주:2].


좀더 깊게 말을 하자면, 법은 인간의 권리를 보호하는 중요성을 가진다. 예는 인간의 감정[각주:3]을 인도하고 전달함에 중요성을 가진다. 권리는 물질적인 차원이며, 감정은 정신적[각주:4] 차원에 있다. 인류가 더불어 살아가는데 자신의 것에 대한 권리를 지킬 수 없다면 매우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고,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권리는 대립이고, 감정은 교류이다.  대립이기에 보호를 할 수 있고, 뺏을 수도 있다. 교류이기에 전달할 수 있고, 화합할 수 있다. 예는 언제나 부드럽고, 법은 언제나 딱딱하기 때문이다.

중국사회는 예를 으뜸으로 생각하는 풍토에 젖어 있어서, 모든 것에서 교감을 말하고, 화합을 주장하여 마치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약자는 그 속에서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얻게 된다. 그렇기에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간다. 가볍고 부드럽게 변화해간다. 만약 법을 으뜸으로 생각하는 사회라면,  법률은 비록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졌으나, 쌍방의 권리가 서로 충돌을 할 때가 문제이다. 갑을 보호할 수는 있을 지는 몰라도 동시에 을을 보호하지는 못한다. 만약 을이 자신의 권리를 계속 유지하기를 원하고, 법률로서 해결할 수가 없다면, 법률을 바꾸기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법률은 정부의 손에 있다. 그럼으로 법률을 바꾸기 위해서는 정부를 밀어내고 새로운 정부를 새우는 수 밖에 없다[각주:5].

그래서 법을 으뜸으로 하는 사회는 발전을 해나아가는 중에 계속되는 혁명을 피할 수 없다. 예를 으뜸으로 생각하는 사회는 혁명을 할 수도 없고, 혁명이 필요하지도 않다. 그래서 법을 으뜸으로 생각하는 사회는 언제나 급변하고, 예를 으뜸으로 하는 사회는 급변할 수도 없고, 급변할 필요도 없다. 중국사회는 비교적 농촌경제를 기반으로 만들어졌기에, 원래부터 급격하게 변할 필요가 없었고, 거대한 통일정부 아래서의 급격한 변화는 이익보다 파생되는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중국인은 부드러운 예를 으뜸으로 생각하려 하지, 딱딱한 법을 으뜸으로 삼으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면에서 먼 미래를 바라보며 깊이 생각하였다고 볼 수 있다[각주:6].


본래 정치는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인류에게는 사회가 없을 수 없지만, 정치는 반드시 필요한 것만은 아니다[각주:7]. 인류는 사회를 위해서 정치가 있어야 하는 것일뿐, 정치를 위해서 사회가 있는 것이 아니다. 법율은 정치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렇기에 정치와 같은 한계점을 가지게 된다. 만약 최소한의 권력만 가지고 있는 정부가 있고, 정치가 사회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가벼운 사회가 있다면, 어찌 이상적이지 않을까? 이보다 더욱 이상적인 사회는 무정부의 사회가 아닐까? 이에 대해서는 일단 더이상 언급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중국의 예치사상의 최종적인 목표는 역시 위와 같은 이상을 향하고 있다. 최소한 정치를 사회에 동화시키려 하고 있고, 정부로 하여금 사회를 통치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 중국인들은 중국정부의 무능을 원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치를 거부하고 법치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중국인이 말하는 예치는 바로 정부의 무능이다. 많은 책임을 사회에 맡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풍속으로 하여금 법률을 대신하게 하려는 것이고, 교육을 하여금 행정[각주:8]을 대신하게 하려는 것이었고, 선생님으로 하여금 관리를 대신하려고 했다. 그리고 감정으로 하여금 권리와 이익을 대신하려고 하였다.


중국 도가 사상 역시 무정부주의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들은 넓은 영토의 수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사회에 대해서 부정적이며, 사람이 적은 조그마한 나라(小国寡民 소국과민)의 조그만 사회를 희망한다. 그들은 법을 반대하면서 동시에 예도 반대한다. 그들은 인류가 정치가 없이 있을 수는 있어도 사회가 없이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각주:9]. 그래서 도가는 예치를 반대하면서도 정부를 도무지 없애지 못하고 반대로 법치의 길로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도가사상과 법가사상은 같이 어울어지고는 하고, 도가가 예치 사상을 반대하는 물결이 일어난 이후에 법치 사상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사마천[각주:10]은 신불해와 한비자[각주:11]의 사상적인 원류가 노장에서 나왔다고 더욱 심화되었다고 한 것이다.[각주:12].


서방의 최근 무정부주의자들은 공산주의와 떨어지지 않고는 한다. 크로포트킨[각주:13] 역시 그러하였다. 만약 공산주의가 법치주의의 테두리에서 벌어진다면 반드시 계급투쟁을 외쳐야 한다. 반드시 무산계급이 무장하여 정권을 탈취하여야 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무산계급에 의해서 법이 만들어져 세워지게 된다. 그러나 이상적인 공산사회에 도달하게 된다면, 모두가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할 필요가 없어진다. 누구도 타인의 권리와 이익을 뺏을 필요가 없어진다. 법률의 최대효율 역시 존재하지 않고, 정부 역시 법률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어찌 무정부가 아니겠는가[각주:14]?

그리하여 인류는 무정부일 수 있으나 사회가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가 존재한다면 예치가 없을 수 없다. 그래서 유가는 도가보다 더 깊고 멀리 내다본 것이다. 크로포트킨도 중국의 도가보다 뛰어나다. 그는 위에서 말한 것을 이해하고 인류가 무정부 있수나 동시에 사회가 없을 수는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유가는 크로포트킨 보다 더 뛰어나다. 왜냐하면 사회에 예치정신을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예치정신으로 나아가면 정부에서 점차 무정부상태로 나아가게 된다. 오늘날 서방인들이 추구하려는 사회주의와 공산 주의 역시 포괄하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예기, 예운편>(《礼记·礼运篇》)에서 말하는 대동세계[각주:15]에 대한 이상추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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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모든 맞춤법과 번역에 대한 어떠한 비판과 환영합니다.  본 글은 의역식 번역입니다.
본 글은 출판을 위한 번역이 아니며, 오직 여러분들의 덧글로 힘을 받습니다. ^^

저 개인적으로 이 글은 그리 찬성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나름의 논리체계가 있고, 저와는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것이 오히려 스스로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에 번역을 해보았습니다. 당시의 시대 상황과 쳔무(전묵)선생님의 성향상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문제가 있는 글이라고 평가해 봅니다.

간단한 반박 :
1) 도가의 소국과민은 사회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본인도 도가가 단순히 무위자연이 아닌 상당한 고도의 통치술이라고 생각을 하나, 사회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사회 뿐만이 아니라 자연까지 포괄하는 진정한 의미에 무정부주의일수도 있다고 여긴다.
2) 도가가 통치사상이었을 때의 한초에는 약법삼장으로 법률이 간단했는데, 한무재 이후 유가가 떠오르면서 점차 법치적인 요소가 늘어났다. 한마디로 말하면 유가는 사실상 법가가 양의 탈을 쓰고 있는 통치술이다.
3) 유가가 다시 흥하고 있어서 소강(小康)이 이야기되어지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이야기 되는 것은 법치이다. 예치가 아니다.

역시 논문 막혔을 때 번역작업을 잠시 하면 머리가 풀린다랄까? ^^:::

  1.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도가의 "소요유 하게 된다." 혹은 "자유롭게 거닐게 된다"라고 하고 싶었으나, 전묵선생님의 원래 주장을 생각하였을 시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본문으로]
  2. 이와 같은 분석에는 개인적으로 완전히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중국은 결코 예치가 아니었고, 표면적으로만 예치를 말했을 뿐, 실질적으로는 법치였다고 판단한다. (이명박 대통령님이 친서민정책이라고 말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친대기업정책인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보다 쉽게 이해하시리라 본다.) [본문으로]
  3. 원문은 情感(정감)이며, 이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고, 보다 깊은 의미가 있으나, 현대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뜻으로는 감정이라고 생각된다. (더 좋은 단어가 생각나시는 분은 언제든지 덧글^^) [본문으로]
  4. 원문은 性灵(성령)이다. 이 나름대로의 철학적인 뜻이 있으나, 현대한국어로는 그냥 "정신"으로만 번역을 하였다. (보다 좋은 단어는 언제든지 환영^^) [본문으로]
  5. 이 글이 쓰여질 당시를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되지만, 삼권분립으로 입법-행정-사법이 각자 독립된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극단적인 발언에 가깝다. 단. 입법-행정-사법이 한 집단에 장악되어서 독재를 하는 상황이면 이는 타당하다. 혹자는 한국이 현재 독재라며 정권을 바꾸어야 된다는 과격한 말을 하지만, 한국은 현재 독재가 아니다. 비록 수 많은 문제가 있으나 그 모두가 국민이 뽑은 결과이다. [본문으로]
  6. 근대에 들어와서 서양법이 더욱 발전해서 사람들이 흔히 착각을 하지만, 중국의 법제도는 거의 완벽함에 가까울 정도였다. 이를 다시 말하자면 중국인은 결코 법을 멀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도 경국대전이라는 것이 있다. [본문으로]
  7. 현재에는 정치의 개념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든 행동으로 넓어졌고, 사회와 정치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란 "통치"계열의 좁은 의미의 정치를 말한다. 예를 들어서 우리의 생활 모든 것이 정치이지만, 국회를 보며 "정치권"이라고 말하는 것에서의 정치이다. [본문으로]
  8. 원문은 治权. 영어로 right of administration나 managing power정도의 의미. [본문으로]
  9. 본인이 가장 반대하는 부분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쪽 잡담에서... [본문으로]
  10. <사기>의 작가. 환관이 되면서까지도 아버지의 유지에 따라서 역사서를 편찬. [본문으로]
  11. 원문에서는 申韩이라고 언급된다. 신불해(申不害)와 한비자(韩非)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 [본문으로]
  12. 이 말이 나온 이유는 특히 <사기>의 한편이 《老庄申韩列传》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위는 노자, 장자, 신불해, 한비자의 앞글자를 따서 한꺼번에 모아 둔 것이다. 그러나 노자의 사상이 권과 세 법가에 영향을 주었을지 모르나, 노장사상 자체가 법가의 원류라고 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본다. [본문으로]
  13. Peter Kropotkin 정식 이름은 Pyotr Alekseyevich Kropotkin.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http://en.wikipedia.org/wiki/Peter_Kropotkin [본문으로]
  14. 본인도 이상은 공산주의이다. 그러나 20세기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의 처절한 실패를 통해서 배우지 못할 바보는 아니다. 인간은 욕심덩어리이다. 비록 선의가 있을지라도 욕심덩어리이다. 그것에 눈을 돌리는 공산주의가 바로 이 글에서 나오는 당시의 공산주의이다. [본문으로]
  15. 대동은 大同이다. 그 전 단계가 소강(小康)이다. 바로 현재 중국에서 기본적으로 완성했다는 그 소강이며, 중국은 앞으로 대동으로 나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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