孫子曰:凡用兵之法,馳車千駟,革車千乘,帶甲十萬,千里饋糧,則內外之費,賓客之用,膠漆之材,車甲之奉,日費千金,然后十萬之師舉矣。

손자 가라사대 :
군대를 운용하게 되면 경전차 1000대와 중전차 1000대 그리고 병사 십만이 필요할뿐더러 그들을 위한 천리길의 먹거리 수송이 필요하다. 이렇게 밖으로 소비되는 돈 이외에도 외교전과 전차와 갑옷의 수리에 들어가는 비용이 막대하다. 이런 비용을 감당할 수 있어야만 10만군대를 일으킬 수 있다.


2. 전차병(사士)와 독립보병(병 徒, 兵)
최초로 출현한 병종은 당연히 보병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보병은 가장 기본적인 병종으로 남아 있다. 손자병법의 보병은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전차에 관련된 전차병이고, 다른 하나는 독립된 보병인 일반병사였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그리스와 로마의 병사가 바로 독립보병이다. 그들은 갑옷을 입고, 방패를 차고서는 긴 창으로 창날의 벽을 형성하였다. 당시의 농업민족은 선거권이 있는 공민만이 전사가 될 수 있었고, 그들은 모두 보병이었다. 기병은 북방의 게르만족을 고용하여서 유지하였다. 당시 로마인들은 말을 타고 전투를 하는 것은 겁쟁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북방유목민족이 남쪽으로 이동을 하면서 철저한 패배를 맛보게 되면서 기병의 중요성을 깨닭게 되지만 보병의 중요성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사와 병은 모두가 보병이다. 그러나 장기에서 사는 왕의 바로 곁에서 왕을 수호하지만, 병은 후퇴를 할 수 없고 특별한 공격력도 없는 허약한 존재인 것처럼 이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사는 전차병으로서 전차에 올라타서나 전차의 주위에 있던 갑옷을 입은 입은 보병을 의미한다. 그러나 병은 전차와 관련이 없이 갑옷을 착용하지 않은 보병이며 평시에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받지 않았다. 병사는 사실 전투를 보조하거나 전투물자를 운반하거나 음식을 만드는 등의 후방지원을 하던 인력이었다. 그러나 춘추시대 후기로 올 수록 병사의 숫자가 증가하였고, 독립적인 부대로 편성되기 시작하였다. 원래 비교적 신분이 낮았던 병사들이 정규병으로 편성되기 시작했고, 그들 역시 갑옷을 입기 시작하였다.

사실 현재에는 독립보병라는 말로 동일시 되는생 도徒와 졸卒은 사실 조금 달랐다. 도徒의 기본적인 뜻은 "걷는 사람步行也"이라는 의미이다. 군인은 걷고 또 걷는다. 졸卒는 의衣와 같은 의미로서 보급병이라고도 하고, 하급계층이 입는 옷에서 연유하였다고도 한다. 어찌되었든 군사학상에서는 도와 졸 모두가 비슷한 뜻으로 사용되거나 도졸徒卒라고 합쳐서 사용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졸은 단순히 하급병사를 의미할 뿐만이 아니라 군사편재단위를 나타낸다.

고대 군사의 편재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초기의 10인제와 후대의 100인제이다. 10인제는 정확하게 십오什伍제도로서 10명을 십什이며, 5명은 오伍라고 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서주시대부터 춘추시대 초기까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후대로 올 수록 병력의 숫자는 증가하였고 십오제도는 군대의 최하급 편성단위가 되었다. 100인제는 졸냥卒兩제도였다. 100명 단위를 졸이라고 말했고, 25명을 냥라고 하였다. 4개의 냥가 모여서 1개의 졸이 되는 것이다.

전차에는 전차에 타는 3명을 합쳐서 전차병은 총 75명이 동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독립보병 72명이 같이 행동하였다. 보급차에는 총 후방요원 25명이 배정되었는데,배식담당10명, 의복담당 5명, 사료담당 5명, 잡일담당 5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만약 전투요원만 생각한다면 75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후방요원까지 합친다면 정확하게 100인제가 되는 것이다. 100인제는 비교적 새로웠던 제도였다. 이런 100명에게는 한대의 전차가 주어졌는데 병력은 어떻게 배치되었을까? 조조의 신서新書에 따르면 아마도 전차를 중심으로 전후좌우에 배치되었으며 3냥(75인)이 실제로 전투를 담당하였고, 1냥(25인)은 후방에 위치하며 후방임무를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조조의 해석은 조금 다르다. 그는 사마법司馬法의 10인제를 근거로 치거(馳車)만을 말이 끄는 전차로 생각하였고 혁거(革車)을 소가 끄는 보급차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전차인 혁거에 전투요원 10명, 후방지원 5명이 같이 하였고, 보급차인 혁거에 보급요원 3명이 같이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는 1000대의 전차를 가지고 있어도 인원은 18000명에 불과하며, 10만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송나라의 장예張預는 조조의 해석을 사마법司馬法의 100인제로 재해석하였다. 장예는 치거는 공격전차이고 혁거는 수비전차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공격전차인 치거 3부대가 앞과 좌우에 있고, 후방에 수비전차인 혁거 1부대가 있으며, 각각의 부대는 25명이 배치되어있다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설명은 비교적 합당하나 이미 혁거가 소가 끄는 보급전차가 아니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가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아마도 실제로는 경전차인 치거 한 대가 전방에 위치하고, 중전차인 혁거 한 대가 후방에 위치했을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전차에는 좌우에 1냥(25명)씩 배치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보급차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보급차는 군대의 뒤쪽에서 따라오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나라의 군사제도는 관중管仲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보통 소융小戎이라고 불렀다. 소융은 전차의 또 다른 이름인데, 한 대의 소융에는 50명이 배당되었다. 이를 생각해 보았을 때 각각의 전차에는 50명씩 배치되어서 총 2대의 전차로 100인제가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3. 기마병
기마병은 전차보다 후대에 나타났다. 서아시아에서는 야수亚述 궁전 벽화를 놓고 보았을 때 약 기원전 800여년쯤에 처음 기병이 나타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조赵나라의 무령왕武灵王이 북방이민족의 옷을 입고 말을 타며 활을 쏘았다胡服骑射라는 말을 생각하면 기본적으로 전국시기 쯤 기병이 나타났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물론 혹자는 상나라시대에도 기병이 존재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아직 학문적으로 입증이 되었다고 하기는 매우 힘들다. 다만 흉노匈奴와 동호东胡가 모두 전국 말기에 몽골에서 시작되었으며, 조나라 역시 지금의 베이징 위쪽에 위치했던 국가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조나라가 북방민족에게 몸에 딱 붙어서 말을 타기 쉬운 복장과 말을 타고 화살을 쏘는 기술을 배웠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당시의 기병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기병이 결코 아니었다.

흔히 기병이라고 하면 삼국연의의 유비 삼형제와 여포가 말 위에서 싸우는 일기토전을 연상하고는 한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는 물론이고 삼국시대에도 그러한 기병싸움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설처럼 삼국시대에 일기토가 벌어졌다면 그들은 모두 말에서 굴러 떨어져서 부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등자가 존재하지 않았거나 단지 말을 탈 때 발을 디딜 수 있는 용도로 사용되는 한발 등자만이 존재하였다. 그렇기에 달리는 와중에 서로 칼을 겨누며 격투를 한다는 것은 말에서 떨어지겠다는 소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양발 등자는 사실상 몽골제국 초기에 완성이 된 것이다. 몽골이 대제국을 이룰 수 있었던 바탕에는 단순히 호전적인 성격과 공격적인 전략만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의 도움도 받았던 것이다.

원나라 시기 이전의 기병은 말을 타는 궁수의 개념이었다. 말을 타고 열심히 적에게 접근을 해서 말에서 내리거나 말을 안정적으로 정지를 시킨 이후 화살을 쏘고 적이 접근해오면 열심히 달려서 물러난 다음에 다시 화살을 쏘는 개념이었다. 그러하기에 장기에서도 말은 현란한 움직임을 보이면서도 멱이라고 하여서 일보 전진하는 자리에 장애물이 있으면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마병이라면 장애물을 뚫고 가야 할 것이지만 당시의 기마병은 궁병이었기에 멱에 걸려버리는 것이다.


본 글에 관련된 내용은 리링의 손자병법이란?을 참고해주십시오.
저는 여러분의 관심으로 번역을 한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전에 해 놓았는데 정신이 없어서 있는지도 몰랐군요. 너무 오래동안 글을 안 올려서 미완성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올려봅니다. 퇴고는 당연히 없었으니 알아서 봐주셔요. 저는 계속 졸업논문 작업을 하러 가겠습니다.

오탈자는 악몽이야.................

孫子曰:凡用兵之法,馳車千駟,革車千乘,帶甲十萬,千里饋糧,則內外之費,賓客之用,膠漆之材,車甲之奉,日費千金,然后十萬之師舉矣。

손자 가라사대 :
군대를 운용하게 되면 경전차 1000대와 중전차 1000대 그리고 병사 십만이 필요할뿐더러 그들을 위한 천리길의 먹거리 수송이 필요하다. 이렇게 밖으로 소비되는 돈 이외에도 외교전과 전차와 갑옷의 수리에 들어가는 비용이 막대하다. 이런 비용을 감당할 수 있어야만 10만군대를 일으킬 수 있다.

1. 차
장기에서 차를 빼앗기면 게임에 진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차가 얼마나 중요한지 쉽게 알 수 있다. 춘추시대에는 전차는 전쟁의 핵심중에 핵심이었다. 전차는 현대전의 탱크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 무게와 돌격력으로 적진을 밀어버리는 무기이다. 전차의 시작은 당연히 말을 사육하게 된 이후에나 가능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기원전 4000년전부터 말과 같이 했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기원전 2000년전에는 마차도 만들어졌으리라 생각되고 있다. 말의 사육과 마차의 발명은 전쟁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상나라시대의 군사책임자는 말马이라고 불렀고, 주나라에서는 군사책임자를 사마司马라고 불렀을 정도로 말을 중시하였다. 고대에 전쟁과 관련된 제사의 이름도 마제祃祭로서 말과 관련이 되어 있다.

현재 우리는 말이라고 하면 유럽의 기사들이 두꺼운 철갑을 두르고 말을 타는 것을 연상하고는 한다. 그러나 고대에는 말을 타는 것이 아니라 영화 벤허에 나오는 것처럼 말로 수레를 끄는 전차를 위한 동물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세계 각 지역의 전차의 모습은 각기 조금씩 달랐다. 서아이사형 전차는 바퀴살의 숫자가 적었고, 가마가 바퀴의 앞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스-로마의 전차는 바퀴와 가마가 수직으로 되어 있지만, 바퀴가 작았고 가마가 낮았으며 서아시형처럼 바퀴살의 숫자가 적었다. 중국의 전차는 바퀴살이 많았으며, 바퀴와 가마가 수직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의 전차는 중앙아시아 전통의 마차의 흐름을 이어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소가 말보다 먼저 언제 사람에 의하여 가축으로 키워졌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정확한 시기나 바퀴가 언제 발명되었는지등은 아직까지도 고고학계의 뜨거운 화두이다. 라틴어계열에서는 일반적인 수레는 cart라고 불렀으며, 소가 끄는 말을 ox cart로 불렀다. 전쟁에 사용되는 마차에 대해서는 chariot라고 불러서 중시하였다. 마차의 기동력과 돌파력은 전쟁에서 매우 중요하였다.

중국에서 전차는 춘추전국시대에는 전쟁에서 없어서는 안 될 병기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전차는 넓은 평지를 제외한 지형에서는 기동성과 돌파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결정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기마궁병을 통한 빠른 이탈공격방식이 생겨나면서 전차의 지형적 제한성으로 인하여 진한시대를 기점으로 점차 줄어들었갔다.


1.1. 경전차와 중전차 (벌쳐와 시즈탱크)
손자는 전차를 치거(馳車) 혁거(革車)로 나누었다. 치거는 경전차로서 스타크레프트의 벌쳐라고 생각하면된다. 혁거는 반대로 중전차로서 스타크레프트의 시즈탱크라고 생각하면 된다. 경전차는 춘추전국시대의 서적에서는 그리 자주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중전차는 많은 고서에서 나오게 된다. 중전차가 경전차보다 먼저 탄생을 하였는데, 중전차가 혁거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전차을 피혁으로 감쌓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중전차는 경전차보다 훨씬 더 오래전에 탄생했으나 한대부터는 오히려 거의 출현하지 않게 된다. 송대 이후에다시 부활하는 것처럼 보이나 이것은 이름만 딴 것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 경전차는 기존의 중전차를 개조한 신형 전차로서 기동성이 훨씬 더 뛰어나서 공격용으로 좋았다. 그에 반하여 중전차는 움직임이 둔하여 방어용도로 효과적이었다. 마치 스타크레프트의 벌쳐와 시즈탱크을 연상하면 거의 다르지 않다.

조조는 손자병법에 주석을 달면서 경전차와 중전차를 각각 전차와 보급차(치중차 辎重車)라고 해석하였다. 조조의 이런 해석은 사마법일문(司馬法逸文)에서 유래하였다. 사마법에서는 치거를 전차로 해석였고, 혁거를 사람이 인력으로 끄는 병기, 의류, 양식등을 운반하는 치중차로 해석을 하였다. 그러나 현재 사료상에서 보이는 치거와 혁거 모두가 말이 끄는 차로서 사람이 탑승하였다.


1.2. 전차와 보급차 (말과 소의 차이)
고대의 수레는 동력에 따라서 마차와 우차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말이 끄는 수레이며, 후자는 소가 끄는 수레이다. 마차는 보통 4필의 말이 끄는 수레였으며 사람이 탑승할 뿐 화물을 운반하지는 않았으며 속도가 빨랐다. 위에서 말한 경전차와 중전차 모두가 마차에 속한다. 그에 반하여 우차는 한 두의 소가 끌었으며 사람을 태우지 않고 화물을 운반하고는 했으며 속도가 느렸다. 다음 구절에서 나오는 구우대차(丘牛大車)가 바로 소가 끄는 마차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작은 차小車와 큰 차大車로 이를 구별하였다.

논어에는 "큰 수레에 끌채가 없고  작은 수레에 끌채 끝이 없다[각주:1]"라고 하였다. 포함(包咸)은 주을 통해서 큰 차는 소가 끄는 차이며, 작은 차는 말이 끄는 차라고 해석하였다. 이를 형병(邢昺)은 고공기考工記을 인용하며 말이 끄는 수레는 단순히 전차만이 아니었고, 사냥뿐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사용되던 수레도 작은 수레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현재까지의 고고학 발굴에 따르면 마차는 상대 말기에 쓰였다고 할 수 있다. 우차의 상황은 아직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상나라 시대의 성인 언사상성(偃師商城) 유적에서 발견된 바퀴자국을 가지고 어떤 이는 마차에 의한 자국이라고 말을 하고 어떤 이는 우차에 의한 자국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의 청동기 기물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바로 서주시대 말기의 사동정師同鼎이다. 사동정에는 주나라와 유목민족간의 싸우미 서술되어 있다. 주나라의 군사장관을 사동師同이라고 불렀는데 이 글에서는 그가 획득한 물건들이 적혀 있다. 그 중에서 마차와 우차 모두가 눈에 띄인다. 이것은 당시에 전쟁에 마차와 우차가 모두 동원되었다는 중요한 근거이다.


1.3.전차부대의 수량과 전쟁의 규모.
"경전차 1000대와 중전차 1000대 그리고 병사 십만이 필요[각주:2]"라는 말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 전쟁에 동원된 전차와 병력의 수량을 생각해볼 수 있다. 국력에 따라서 시기에 따라서 다르기는 했으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당시에 중요시 하던 병력은 경전차, 중전차 그리고 병사 순서였다는 점이다. 지금 현재 핵무기의 보유를 최우선적으로 생각하고 그 다음에 미사일의 숫자, 전투기의 숫자등으로 전쟁 수행시 중요도를 고려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조무왕은 상나라를 정벌하면서 전차 300량과 전사 3000명을 동원하였다고 한다[각주:3]. 지금 전쟁을 생각하면 상당히 조그마한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춘추시대 제후국들은 각자 1000량의 전차만를 보유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서 노나라가 처음 곡부曲阜에 봉해진 이후 전차(革車) 천 대도 보유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제齊나라, 진秦나라, 진晉나라, 초楚나라등은 모두가 1000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러하여 "전차 천대의 국가千乘之國"라는 이름으로 불리고는 하였다[각주:4]. 그러나 실제 전쟁에 출동했던 전차는 몇 백대에 불과하였다고 생각된며, 800대가 동원된 전쟁이 최고 동원 수량이었다.예를 들어서 성복전쟁(城濮之戰)에서 진晉나라는 700대의 전차를 내보냈으며[각주:5] 안전쟁(鞍之戰)에서는 800대를 동원하였다.  애릉전쟁(艾陵之戰)에서는 제齊나라가 800대를 동원하였다[각주:6].자산子產이 진陳나라를 공격할 때에는 정鄭나라는 700대의 전차를 동원하였다.[각주:7]

당시에는 전차와 사병이 같이 다녔으며, 보통 10명을 단위로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한 대의 전차와 전사 10명이 같이 다니는 것이다. 당시의 강국에게 붙여졌던 "전차 천대의 국가"에서조차 전사 1만명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사마법일문(司馬法逸文)에서 규정한 것과 동일하다. 설사 평민병사(徒)을 합친다고 하더라도 3만에 불과하였다. 

서주의 군사제도에서 사(帥)가 군대내 최고위 관직이었다. 춘추시대에는 군軍이 최고위관직이었는데 주례에 따르면 왕은 6군을 거느리고, 대국은 3군을 거느리며 차국은 2군을 거느리고 소국은 1군을 거느린다고 되었다[각주:8]. 이를 통해서 우리는 "천대의 전차"와 "3군"이 대략적으로 동일한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춘추시대 군사제도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자주 진晉나라의 예시를 들고는 한다. 기원전 678년 진무공晉武公은 1군만을 거느리고 있었다[각주:9]. 기원전 661년에는 진헌공晉獻公이 상하 2군을 만들었다[각주:10].  기원전 632년에는 진문공晉文公은 이미 상중하 3군을 거느리고 있었고, 진경공晉景公은 6군을 거느렸다[각주:11]. 그 밖에 진나라에서는 성복전쟁(城濮之戰)이전에도 독립보병부대가 나타났었고, 성복전쟁(城濮之戰)이후에는 상중하 3행(三行)으로 증가하였다. 전차 3부대와 보병 3부대를 합치면 6군이 되며, 이는 천자의 군사제도와 비슷하다. 만약 주례周禮에 따라서 1군을 12500명이라고 한다면, 6군은 75000명이 된다. 그렇기에 춘추시대의 전쟁규모는 몇 만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가면서 전쟁의 규모는 날로 커져간다. 예를 들어서 진晉나라는 총 49개현縣을 통치하고 있었는데, 매 현에서 100대의 전차를 징발하여 총 4900대을 운용하였다[각주:12]. 초楚나라는 단지 진陳, 채蔡, 동불갱東不羹, 서불갱西不羹의 변두리 4개 현에서만 각각 1000대의 천자를 징발하여 총 4000대였던 것을 생각하면 막강한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사항을 통해서 손자가 말한 "전투전차 1000대와 수비전차 1000대 그리고 병사 십만"은 춘추시대 말기의 전쟁 규모를 반영하고 있다. 과거에 일부 학자들은 손자의 시기에 전차 2천대나 전사 10만명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이 당시의 수준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이 들어나고 있다. 손자는 당시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던 것이다.

전쟁의 규모가 나왔으니 몇 가지 부언을 하고자 한다. 중국 고대 전쟁사 연구에서 전쟁 규모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8세기 이전의 유럽에서는 10만명 이상이 참여간 전쟁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대륙에서는 춘추시대부터 10만명이 동원된 전쟁이 일상적으로 벌어졌고, 시간이 흐를 수록 전쟁의 규모는 커져갔다. 당시에 쓰여진 다양한 서적에서는 "전차 만대의 황제과 전차 천대의 군주[각주:13]"이라는 기록되어 있어서 이를 증명한다. 전국초기의 상황은 아직 분명하지는 않으나, 춘추시대 후기와 비슷하리라 생각된다. 당시의 병력은 10만명 이하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서 진晉나라가 분리되어 성립된 위魏나라는 전국시대 초기의 최강국이었다. 명장 오기吳起는 위문후魏文侯와 위무후魏武侯을 모시며 그의 이상이 5만의 군사를 모아서 적을 멸망시키겠다[각주:14]"라고 했던 일을 보면 당시의 전쟁 규모가 비교적 적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국시대 중기를 넘어서 후기로 갈 수록 상황은 완전히 변한다. 기원전 303년부터 기원전 301년 제齊나라와 위魏나라 그리고 한韓나라가 초楚나라를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기원전 300년부터 기원전 296년 사이에 조趙나라는 중산中山국을 공격하여 멸말시킨다. 이 두차례의 전쟁 모두 20만명이 동원되었다. 당시에 7대국들은 몇 십만명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진秦나라는 심지어 백만명이 넘는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기원전 293년 이궐伊闕전쟁에서 진秦나라의 백기白起는 한韓나라와 위魏나라의 군대 24만명을 물리쳤다. 기원전 279년에는 언鄢전쟁에서 백기는 수공으로 성을 공격하여 물에 빠져 죽은 초楚나라 병사와 백성이 수십만이었다.  기원전 273년의 화양華陽전쟁에서 백기는 조趙나라와 위魏나라 군사 15만명을 죽였고, 기원전 260년의 장평長平전쟁에서는 항복한 조趙나라 군사 40만명을 생매장하였다. 언급한 4번의 전쟁만으로도 근 몇 백만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 현재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산동지방의 6개국의 병력은 진나라에 미치지 못하였고 약 50만정도의 병력만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전부를 합치면 약 400만명인 것이다. 당시의 인구는 지금만 하지 못하였지만 거대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사상자의 숫자도 거대하여 세계대전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중국에서 병법이 발달했던 원인이 된다.

병법이란 수 많은 피의 경험으로 얻어진 것이다.
 

본 글에 관련된 내용은 리링의 손자병법이란?을 참고해주십시오.
저는 여러분의 관심으로 번역을 한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제가 번역하면서 제일 짜증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실 일반 독자들에게는 생략해도 되는 출처와 원문들을 당연히 해야된다고 생각하면서 적어넣고, 그 뿐만이 아니라 지명과 인명과 같은 고유명사에 저도 모르게 한자를 다 넣어버린다는 점입니다. 이것만 안해도 절반 이하의 시간이 걸리겠지만......전 이미 세뇌되어서 별 수 없습니다. ㅠㅠ 그나마 최대한도로 줄인 것이 이정도랍니다.

다음에 해야되는 병사관련 부분도 좀 복잡한데..그래도 전차만 하리오~~~!
제일 짜증나는 것은 넘겼다~~~!!!





  1. 大車無輗,小車無軏(論語 為政) [본문으로]
  2. 馳車千駟,革車千乘,帶甲十萬 [본문으로]
  3. 革車三百兩,虎賁三千人<孟子 盡心下> [본문으로]
  4. 左傳 哀公十四年) [본문으로]
  5. 左傳 成公二年 [본문으로]
  6. 左傳 哀公十一年 [본문으로]
  7. 左傳 哀公二十五年 [본문으로]
  8. 王六軍,大國三軍,次國二軍,小國一軍 周禮·夏官·司馬 [본문으로]
  9. 左傳 莊公十六年 [본문으로]
  10. 左傳 閔公元年 [본문으로]
  11. 左傳 成公三年 [본문으로]
  12. 左傳 昭公五年 [본문으로]
  13. 萬乘之主,千乘之君(莊子,韓非子) [본문으로]
  14. 以五萬之眾,而為一死賊(吳子) [본문으로]
孫子曰:凡用兵之法,馳車千駟,革車千乘,帶甲十萬,千里饋糧,則內外之費,賓客之用,膠漆之材,車甲之奉,日費千金,然后十萬之師舉矣。

손자 가라사대 :
군대를 운용하게 되면 경전차 1000대와 중전차 1000대 그리고 병사 십만이 필요할뿐더러 그들을 위한 천리길의 먹거리 수송이 필요하다. 이렇게 밖으로 소비되는 돈 이외에도 외교전과 전차와 갑옷의 수리에 들어가는 비용이 막대하다. 이런 비용을 감당할 수 있어야만 10만군대를 일으킬 수 있다.

이번 장은 전쟁비용을 통해서 전쟁의 해악을 말하기 시작한다. <작전>편은 전쟁동원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실 전쟁동원, 즉 전쟁준비과정이 곧 작전이다. 전쟁이 시작하기 전에는 군대를 이동하고 보급망을 점검하는 등의 일련의 준비과정을 거치게 된다.  한국전쟁에서도 북한은 소련과 중국과의 막후협상뿐만이 아니라 병력이동등의 일련의 움직임을 보였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서 한국과 미국의 분석관들이 잘못 판단하여 한국전쟁 초기 낙동강까지 밀려나가게 되었던 것이었다.

0. 병법과 군법의 차이
초기 병법과 군법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었다. 고대에는 병법과 군법을 같이 묶어서 병서兵书라고 말하고는 하였다. 전국시대 이후에는 군법(군령)과 병법으로 분리되게 된다. 군법은 편제시스템을 말하게 되었고, 병법은 군법에서 벗어나서 대규모의 군대운영법을 지칭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군법에서 말하는 것은 군대를 모집하고 훈련시키며, 병법은 군대를 운용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병법의 핵심은 악비岳飞조차 언급하였다 싶이 "운용"에 있다. (运用之妙,存乎一心《宋史岳飞传》그렇기에 전국시대 이후의 병서들은 비록 군법류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나 모략이 그 내용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이제 고대의 실전병법의 세계로 떠나게 된다.  그 전에 당시의 군사지식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사실 춘추전국시대의 전쟁에 대해서는 사료와 유물을 통해서 모호하게 추정을 할 뿐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또한 지금과 같이 총과 비행기도 없었기에 조금은 생소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장기라는 전통놀이를 통해서 당시의 군대에 대해서 알아보록 해보겠다.

1. 장기의 역사
장기의 시초에 대해서는 중국설과 인도설 그리고 한국설이 존재한다.  일단 한국설은 북부여 이전에 한국에서 만들어졌으나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 장의 모양이 초와 한으로 변하여 한국전통의 민속놀이가 중국놀이로 왜곡되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제대로 된 증거가 없어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인도설의 경우 기원전 2000년전 무렵에 인도에서 시작이 되어서 동양에서는 장기로 변하였고, 서양에서는 체스가 되었다는 설로 있다. 중국설의 경우 춘추전국시대의 사료에도 장기가 언급이 되며 북주北周의 장기유물이 남아 있은 것으로 보아서 가능성이 가장 높다. 하지만 현대와 같은 방식의 장기는 송나라시대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장기에는 고대전쟁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

현재의 장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나 왕이다. 왕이 잡히면 승패가 나누어지게 된다. 그 다음으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바로 차车이다. 4방향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차를 잃게되면 이기기 힘들 정도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포炮로서 장거리 무기를 뜻한다. 그리고 말马은 독특한 움직임으로 상대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리고 사士은 왕의 주변에서 왕을 호위한다. 그리고 가장 많지만 쉽게 버려지는 졸卒과 병兵은 보병을 상징한다.


본 글에 관련된 내용은 리링의 손자병법이란?을 참고해주십시오.
저는 여러분의 관심으로 번역을 한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원문의 설명이 너무 난잡하고 길어서 새로운 방식으로 쓰려고 시도했다가 이런저런 일로 막혀 있습니다. 일단 해놓은 부분까지만 공개해봅니다. 이러면서 스스로에게 압력을!!! 꾸욱!!꾸욱!!!!
오늘은 손자병법의 두번째 편인 "작전作战"편을 보도록 합시다. 전에 말했다 싶이 고대 전쟁은 전쟁계획 - 야전 - 공선전으로 이루어집니다. 지난 시간의 전쟁계획에 이어서 이번에는 야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합시다.

우선 이번 편의 제목인 작전作战 의 뜻부터 알아보도록 합시다. 작作은 시작한다는 의미이며, 전战는 고대에 두가지 뜻이 있었습니다. 넓은 의미로는 전쟁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는 야전, 그 중에서도 특히나 서로 대열을 정비한 상태에서 벌어지는 야전을 말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국야国野제도가 이루어졌습니다. 국国은 도시이고 야野는 농촌입니다. 당시에는 도시와 농촌간에는 엄격한 분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현재 말하는 야전野战은 도시 외부의 시골이나 황야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말합니다. 도시를 공략하는 공선전 전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춘추시대의 야전은 누구의 소유도 아닌 양측의 변방지역에서 벌어졌습니다. 여러분이 알아두셔야 될 것이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명확한 국경"선"이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이 기술이 발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선으로서 국경을 나눌 수는 없었습니다. 단지 흘러가는 물이나 산맥을 기준으로 국경"면"을 나눌 수 밖에 없었습니다. 현재 한반도의 휴전선을 보통 38선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어마어마한 면적의 지역이 포함되는 지역임을 생각해보시면 비교적 쉽게 이해가 되시리라 봅니다.

그리고 양 국가의 군사들은 이러한 국경면에 모여서 서로 완전한 진형을 갖추고 난 뒤에야 전쟁이 시작됩니다.”皆阵曰战“ 만약 어느 한쪽이 진형을 다 갖추지 못하고 싸움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전쟁이 아닌 치사하고 더러운 행동이었습니다. 이렇게 양족의 진형이 완전히 갖추어지고 싸움이 벌어지다보니 변수가 있을 수가 없고, 그러다 보니 전쟁은 한번의 맞붙음으로 끝나고는 했습니다. 실제로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식사전에 적을 무찔렀다[각주:1]"라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아무리 전쟁이 길어진다고 해봐야 하루를 넘지 않았습니다. 길어봐야 하루를 넘지 않아서 해가 지면 철수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전쟁이 짦게 이루어지다 보니 설령 이동하는 시간을 합쳐도 한달도 되지 않는 시간에 모든 전쟁과정이 완성되었습니다.

춘추시대에 황하일대의 국가에게 있어서 야전이란 전차를 앞세운 전쟁을 말하였습니다. 보병은 전차부대에 포함되어 있었던 부속부대였습니다. 물론 전차전만이 당시의 모든 야전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춘추시대는 기본적으로 전차전이 핵심 중에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다 춘추시대 말기가 되면서 점차 보병부대의 영향력이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전국시대 말기가 되면 기병까지 출연하여 전차와 기병 그리고 보병이 혼합되어 싸우는 야전방식이 성립되게 됩니다.

란용위이蓝永玮선생님은 <춘추시대의 보병[각주:2]>을 통해서 보병이 어떻게 중국의 전쟁방식에 혁명을 가지고 왔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쟁은 수렵행위와 동물사육 그리고 육식습관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중국병법의 발전은 주변민족들의 동물사육이 발전한 덕택에 이루어졌습니다. 예를 들어서 말과 전차 그리고 청동검등은 모두가 북방 초원지역에서 발명되어 전파된 것입니다. 전차나 기병 외에도 보병의 발전 역시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산지에서 유격전을 하는 이민족戎狄의 보병을 상대하기 위해서 독립보병부대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각주:3]. 수군 역시 오나라吴와 초나라楚에서 배워온 것입니다. 적은 최고의 스승인 것입니다.

중국초기의 전차전은 중전차전이었습니다. 전차의 속도가 빠른 점과 기동성이 강한 점 그리고 돌파력을 강점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차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을 정확하게 컨트롤 하기 어려워 전차가 뒤짚어질 때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지형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산지나 습지에서는 제대로 진군이 어려웠습니다. 어디까지나 넓게 펼쳐진 지역에서만 운용이 가능하였습니다.

야전과 공성전은 고대의 서적에서 같이 출현합니다. 그런데 고대인들의 발음습관으로 인하여 공성전-야전의 순서로 쓰여져 있습니다[각주:4]. 사실 시간 순서로 놓고 보았을 때에는 분명 야전이 먼저이며 그 뒤에야 공선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야전에서 패배한 측은 성으로 철수를 하게 되고, 승리한 측은 성을 공략하게 되는 것은 상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행동입니다. 이것이 야전과 공성전의 관계입니다. 이번 편에서는 야전을 위주로 설명을 하며, 다음 편에서 공선전이 등장하게 됩니다.

현대 군사용어에서 야전은 영어의 Field Operation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중국고문을 참고한 것입니다. 영어의 Field army는 야전군으로 Fieldwork는 야전공사로 Fieldpiece는 야전포로 Field hospital은 야전병원으로 각각 번역되었습니다. Field는 영어에서 숲과 건축물 이외의 빈 영역을 말하는 것임으로 중국 고어의 야전과 대략적으로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작전>편을 다섯 장으로 나누었습니다.
4.1. 전쟁비용
4.2. 정쟁손실
4.3. 적의 것으로 스스로를 이롭게 한다.
4.4. 속전속결
4.5. 장수는 스스로의 책임이 무거움을 알아야 된다.

처음 두 장은 전쟁의 해로움을 말하였고, 그 뒤의 두 장은 전쟁의 해로움을 벗어나는 대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종합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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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신 분 혹시 있으신가요? -0-;;;..........
.......이 도입부야 짦습니다. 다음 것을 하기 싫어서 밍기적밍기적.....핵심은 응원과 격려?!;;;

...사실 이 부분은 예전에 했지만...이 다음부분이..다음부분이.....ㅠㅠ

  1. 灭此而朝食《左传》成公二年 [본문으로]
  2. (蓝永玮《春秋时期的步兵》北京:中华书局 1979年) [본문으로]
  3. 晋侯作三行《左传》毁车而为行《左传》 [본문으로]
  4. 攻城野战《墨子 兼爱》 [본문으로]
夫未戰而廟算[각주:1]勝者,得算多也﹔未戰而廟算不勝者,得算少也。多算勝,少算不勝,而況無算乎!吾以此觀之,勝負見矣。

전쟁이 시작하기 전에 전쟁시뮬레이션을 하여서 승산이 더 많은 자가  승리할 확율이 더 높다. 전쟁이 시작하기 전에 전쟁시뮬레이션을 하여서 승산이 없는 자가 승리할 확율은 적다. 하물며 전쟁시뮬레이션을 아예 하지 않으면 어떠하겠는가! 군주는 이를 살피면 승패가 자연스럽게 보일 것이다.

1. 전쟁전에 해야될 일
원문에서는 전쟁계획을 전쟁 전에 해야될 것으로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작전을 짜고 전쟁을 발동해야한다.(先計而后戰)

1.1. 전쟁을 대비하며
국가는 언제나 전쟁을 대비하여야 한다. 그리고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해야될 일들이 산더미처럼 많다. 첫번째로 군사시스템을 만들어야 된다. 병사를 모집하고 무기와 군량을 모아야 한다. 이런 군사시스템을 두고 고대에는 군부軍賦라고 하였다. 두번째로 군사편재을 확립하여야 한다. 모집한 병사에게 합당한 위치를 부여하여야 한다. 그러하여야만 장군부터 군단장, 여단장, 중대장으로 내려가는 명령시스템을 확보할 수 있다. 세번째로 군사를 유지하여야 한다. 병사들의 의식주를 해결해야 될 뿐만이 아니라 퇴역병사에 대한 보장시스템도 만들어야 한다.

네번째로 명령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과 같은 무선시스템이 없었던 과거에는 깃발과 북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그렇기에 병사들이 깃발과 북소리의 명령에 익숙해지도록 충분한 훈련을 하여야 했다. 고대의 군사훈련은 보통 사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사냥은 일정한 목표물에 대해서 조직적인 움직임이 필요하기에 고대의 군사훈련으로는 매우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고대 유목민들의 전투력이 강했던 이유로 말의 보편적 사용을 거론하지만, 그 이상으로 일상생활에서의 조직적인 사냥으로 만들어진 최적화된 명령시스템을 꼽고는 한다. 이러한 행동들은 전쟁에 대비하여 일상적으로 하여야 하는 일이다.

1.2. 전쟁이 전야에 해야할 일
전쟁이 곧 발생할 무렵에는 우선 전쟁계획을 수립하여야 한다. 아군과 적군을 비교하여 승패를 예측하고 최적의 전략을 만들어야 한다. 두 번째로 승패에 대한 점을 보아야 한다. 거북이 등껍질등의 다양한 도구를 이용하여 전쟁의 결과를 예측해야 한다. 이러한 행동은 지금으로 보면 미신숭배로 여겨지지만 당시로서는 군대의 사기를 올릴 수 있는 일종의 심리작전이라고 할 수 있다. 세번째로 장수를 임명하고 전쟁계획에 대해서 충분히 숙지시켜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가의 무기고에서 고급군사장비를 꺼내어 병사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실제로 필요하지만 이 문장에서는 전쟁시뮬레이션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2. 묘산(廟筭)
묘산은 전쟁시뮬레이션이며 동시에 군사전략이다. 고대의 계책은 여러 계층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중에서 정치와 군사을 혼합한 계책을 최고로 친다. 예를 들어서 육도六韜에서는 정치와 군사를 한꺼번에 고려하는 계책을 음모陰謀아고 하였다. 그 다음이 군사전략만을 고려하는 것으로서 이를 권모權謀라고 하였다. 이 권모가 바로 묘산인 것이다. 그리고 실전에서의 군사운용인 전술에 대해서는 형세形式라고 하였다. <손자>의 모공謀攻편에도 보면 먼저 전략을 세우고, 외교전을 펼치고, 야전을 펼치고 그 다음에 공선전을 펼친다.(上兵伐謀,其次伐交,其次伐兵,其下攻城)라고 언급하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할 때에도 팬타곤에서 전쟁계획을 수립하고, 외교전을 펼쳐서 연합국의 지지를 얻는 순서를 따르고 있다.

고대인들은 전쟁시뮬레이션에서 승리하는 것은 묘승廟勝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묘승은 당연히 장군을 임명하고, 국경을 넘어서기 전에 이루어진다. 누구나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모든 승리는 조그마한 승리가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묘승은 바로 이상적인 대승리이며 첫걸음이다. 묘승이 있고나서야 그 다음 과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계획計편의 주제는 묘산이다. 전쟁계획을 세우는 것이 묘산의 본질이며, 전쟁시뮬레이션을 해보는 것은 묘산의 자연스러운 발현이다. 손자는 계획편의 마지막에서 다시 한번 묘산의 중요 성을 강조하고 있다.


본 글에 관련된 내용은 리링의 손자병법이란?을 참고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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짦다. 만쉐!! -0- 하지만 다음은 극악이라는 거.....-_- 여러분의 뜨거운 응원이 없으면 다음편이 언제나 올라올지는 저도 모릅니다. -_-;;;


  1. 묘산廟算이란 곧 묘산廟筭이며 전쟁계획 혹은 전쟁시뮬레이션을 말한다. [본문으로]
計利以聽,乃為之勢,以佐其外[각주:1]。勢者,因利而制權也。

위와 같이 계획상의 우세를 장수가 실현하면 이를 가지고 형세를 만들어서 원정에서 최상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다. 세勢란 계획된 우세를 바탕으로 적의 대응에 따라서 기민하게 조절하는 것이다.

兵者,詭道也。故能而示之不能,用而示之不用,近而示之遠,遠而示之近。利而誘之,亂而取之,實而備之,強而避之,怒而撓之,卑而驕之,佚而勞之,親而離之,攻其不備,出其不意。

병법이란 사기술이다. 능력이 있으면서도 능력이 없는 것처럼 하고, 필요하면서도 필요하지 않는 것처럼 하고, 가까운 곳을 노리면서도 먼 곳을 노리는듯 하고, 먼 곳을 노리면서 가까운 곳을 노리는듯 한다. 적이 이익을 노리면 유혹을 하고, 적의 내부가 혼란하면 공격한다. 적의 대비가 충실하면 철저하게 대비를 하고, 적이 강력하면 피한다. 적이 불같은 성격이면 짜증나게 만들어 이성을 잃게 하고, 적이 신중한 성격이라면 오만하게 만든다. 적이 쉬려하면 피로하게 하고, 적이 단합 되어 있으면 분열시킨다. 적이 대비하지 않는 곳은 공격하고, 적이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한다.

此兵家之勝,不可先傳也。

이러한 실전 병법은 너무 복잡하고 오묘하여 미리 결정하거나 가르칠수가 없다.

1. 세勢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세"란 무엇인가? 뒤쪽의 "세勢“편에서 상세하게 다룰 것이기에 여기서는 간략하게 설명하도록 하겠다. <손자>안에서 형形와 세勢은 군사상의 형세形勢에 대한 중요한 개념이다. 이 둘은 서로 다르면서도 그 구분이 모호하다. 형세는 병력의 배치로 인하여 생겨난다. 그러나 손자에서는 형세를 두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형形은 고정된 상태고, 세勢는 움직이는 상태이다. 형은 볼 수 있고, 세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볼 수 없다는 말은 "정해놓은 틀이 없다"는 뜻이다. 형과 세의 관계는 악보와 음악연주와의 관계와 비슷하다. 우리가 바둑을 둘 때 겉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일 수 있다. 형으로서는 괜찮은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마가 잡혀버리는 적의 함정이 있다면 결코 접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것이 세이다. 스타크레프트에서 저그가 럴커를 잔뜩 심어두고서는 강제정지해 있다. 형으로는 그곳에서의 위험을 감지할 수 없다. 만약 사이언스베슬로 럴커가 심어져 있는 것을 모른다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세이다.  이처럼 볼 수 있는 것은 형이고 볼 수 없는 것이 세이다. 작전계획은 형이고, 실전운용은 세인 것이다.

조금만 더 세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본문에 나오는 "세勢란 계획된 우세를 바탕으로 적의 대응에 따라서 기민하게 조절하는 것이다.(勢者,因利而制權也)"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여기서 利(이익)이란 전에 말한 계획된 우세을 말한다. 權은 지금은 권력이라는 뜻으로 자주 쓰이고 있지만, 과거에는 "저울질을 하다"라는 뜻도 있었다. 다시 말해서 권이란 저울질을 하여 힘을 적절하게 분배하는 행동으로서 상황에 신속하게 대처하는 임기응변을 말한다. 이러한 변화는 적의 행동에 따라서 계속 변화하게 되며, 고정된 내용이 있을 수가 없다. 마치 스타크레프트에서 상대방의 테크트리에 따라서 전략을 변화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고정된 형과는 다른 가변적인 세의 본질이 바로 이것이다.


2. 병법은 속임수이다.(兵者,詭道也。)
속임수는 세勢의 특징일 뿐만이 아니라 병법兵의 특징이다. 병법에서는 속이는 것을 절대 기피하지 않는다兵不厭詐. 이 말을 중국전통군사사상의 정수이지만, 결코 중국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클라우제비츠는 전략이라는 말의 시초가 "속임수"에서 왔다고 밝히고 있다.

2.1. 귀족전쟁의 시대.
서방의 군사전통은 동양보다 귀족적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결코 귀족간의 결투처럼 페어플레이를 강조하는 고야한 행동이 아니다. 현재 미국등의 정치가들은 테러리스트들이 겁쟁이라고 비난을 한다. 왜 정정당당하게 나와서 전쟁을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할 수 있다. 테러리스트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자살테러를 하고 있는데 어떻게 겁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성경에서도 다윗은 골리앗을 상대로 투석기를 사용하였지 결코 정정당당하게 싸우지 않았다.

사실 병법의 시작 자체가 "병법이 속임수"라는 의식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약자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생존하여야 한다. 그렇기에 전술이 발전할 수 있었다. 도덕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 병법이란 항우가 배우고자 했던 만인적萬人敵였다. 만인적이란 결투도 아니고 패싸움도 아니다. 정치집단끼리의 목숨을 건 격렬한 투쟁이다. 이러한 예술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귀족전쟁의 전통이 없어져야만 한다. 도덕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사용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전쟁의 미학이 완성된다.

2.2. 귀족전쟁에서 진정한 전쟁으로..
중국의 귀족전쟁 전통은 비교적 일찍 붕괴된다. 기본적으로는 2000여년이 훌쩍 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의 병법들은 바로 이 춘추전국시대에 출현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좌전左傳>에서는 "양 측이 모두 진형을 갖추어야 전쟁이라고 한다.(皆陳曰戰)"라고 하고 있다. 만약 적이 진형을 다 갖추지 않았다면 "누구를 패배시켰다敗某師"이라고 할 뿐 전쟁이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 시대의 전쟁이란 양 측이 모두 진형을 완전히 갖추고 어떠한 속임수도 사용하지 않고, 서로간의 마음의 힘으로 승부를 가르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귀족전쟁이다.

특히 송양공(宋襄公)의 이야기는 귀족전쟁의 모범을 보여준다. 송양공은 상왕商王의 후예로서 오래된 귀족이었다. 당시 송宋과 초楚은홍수(泓水)(河南柘城西北)에서 전쟁을 하게 되었다. 초나라의 병사가 송나라에 비하여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초나라 병사들은 홍수를 건너고 있었다. 사마자어司馬子魚는 소양공에게 적이 강을 건너고 있을 때 공격을 하여야 한다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초나라 병사는 비록 강을 건넜지만 아직 진형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마자어는 다시 소양공에게 공격을 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소양공은 초나라의 군사가 완전한 진형을 만들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그 결과 소양공은 다리가 짤려나가 죽었고, 송나라 군대는 완전히 흩어지고 말았다. 송양공이 사마자어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군자는 다친자를 다시 다치게 하지 아니하고, 반백의 노인은 사로잡지 아니한다. 고대의 귀족전쟁에서는 적군을 험한 곳에서 괴롭히지 아니했다. 과인은 비록 망국의 후손이나 진격의 북도 치지 않았을 뿐더러 대열조차 정비하지 못한 적군을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다[각주:2]. 고대의 귀족전쟁의 규칙은 이처럼 상대방이 준비가 되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았고, 나이가 많거나 너무 어린 사람은 돌려보내고, 장사를 만나도 적의를 가지고 마주하면 안되며, 적이 만약 다쳤다면 치료를 해주고 돌려보냈던 것이다[각주:3]. 문학자들은 이를 두고 "중국의 돈키호테"라고하며, 모택동毛澤東은 이를 두고 "바보 돼지식의 인의도덕"이라고 풍자하였다.

사실 송양공과 사마자어는 논쟁은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귀족전쟁에서 전쟁예술로의 발전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2.3. 순자와 한비자
순자荀子는 임무군臨武君에서 조趙나라 효성왕孝成王에게 같은 문제로 호소한다. 순자가 생각하는 이상은 우순시대의 왕의 군대(王者之兵)이었고, 그 다음이 춘추시대의 제환공이나 진문공으로 대변되는 패자의 군대(霸者之兵)였다. 이것들은 모두 귀족전쟁을 대표하고 있다. 그렇기에 순자는 전국시대의 제나라齐国의 엘리트기병(技击)이나 위나라魏国의 엘리트보병武卒 혹은 진나라秦国의 엘리트 병사(锐士 엘리트 보병이자 엘리트 기병임)등과 같은 것들은 "깡패 군대盗兵“라고 생각하였다. 순자가 깡패군대를 강력하게 비판한 것은 오히려 당시에 점차 귀족전쟁에서 도덕을 던져버린 진정한 전쟁예술로의 변화를 말해준다.

한비자는 순자의 제자이다. 그러나 순자와는 정반대로 깡패군대라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그는 성복전투를 거론하며 전쟁의 본질을 환기시킨다. 성복전쟁(城濮之戰)은 기원전 632년에 일어난 진나라晉國와 초나라出國간의 대격전이다. 이 격전에서 진나라의 구범舅犯은 속임수를 쓸 것을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 옹계雍季는 정정당당한 전투를 주장한다. 진문공은 구범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열악했던 상황에서 초나라을 이기게 된다. 그런데 논공행상에서는 오히려 옹계가 구범보다 더 높은 대접을 받는다. 이에 대해서 구범은 평상시에는 예의에 충실한 군자로서 충성을 다하여야 하지만, 전쟁에서는 끊임없이 정당하지 않은 속임수를 써야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듯 춘추전국시대에는 기존에 내려오던 귀족전쟁의 규칙이 붕괴되고 있었다. 스스로 귀족전통을 무너트린 진시황에게 진승陈胜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각주:4] "라며 귀족전통에 대한 완전한 부정을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귀족 항우를 깡패출신 유방이 해하垓下에서 이기고 한汉나라의 황제가 됨으로서 귀족전통은 완전히 마침표를 찍게 된다.


3. 구체적인 실전용 사기술
<손자>에서는 속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한다.  군쟁軍爭편에서도 병법은 속이는 것으로 성립한다.(兵以詐立)라며 속이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송양공이 반대한 강을 건너고 있는 적을 공격하는 행위도 손자에서는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행동이 된다. 그 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병법에서도 기본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와 같이 사기술을 기본으로 한 군사전략은 군사학상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사기술詭道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들어가 보도록 하자. 형形은 보이는 것이고 세勢는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 둘은 결코 분리되어 서로 상관없는 것이 아니다. 형은 앞에 있는 것이고 세는 뒤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형이 있기에 세가 있고, 형 속에 세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능력이 없는 것처럼 하고, 필요하면서도 필요하지 않는 것처럼 하고, 가까운 곳을 노리면서도 먼 곳을 노리는듯 하고, 먼 곳을 노리면서 가까운 곳을 노리는듯 한다."에 대해서 모택동은 보여지는 형태示形이라고 하였다. 보여지는 형태는 가짜이지만 세를 내포하고 있다.

3.1. 속이고 또 속여라.
적이 이익을 노리면 유혹을 하고, 적의 내부가 혼란하면 공격한다. 적의 대비가 충실하면 철저하게 대비를 하고, 적이 강력하면 피한다. 적이 불같은 성격이면 짜증나게 만들어 이성을 잃게 하고, 적이 신중한 성격이라면 오만하게 만든다. 적이 쉬려하면 피로하게 하고, 적이 단합 되어 있으면 분열시킨다. 적이 대비하지 않는 곳은 공격하고, 적이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한다. 이 말은 모택동의 16자구결을 연상하게 한다. 모택동은 국민당이라는 강적을 열악한 공산당으로 상대하면서 16자구결을 널리 알린다. 적이 공격하면 후퇴한다. 적이 주둔하면 괴롭힌다. 적이 피로하면 공격한다. 적이 후퇴하면 쫒느다[각주:5]" 사실 모택동의 이런 전략은 이미 춘추전국시대에 있었습니다. 오나라吳國는 초나라楚國을 상대하면서 "적이 대비하지 못했을 때 계속 소란스럽게 하여 적으로 하여금 실수를 하게 만든다[각주:6]" 라고 하여 게릴라전의 기본을 말하고 있다. 실제로 오나라는 전력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초나라를 무너트리게 된다. 마치 조그마한 모기가 끊임 없이 괴롭히며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3.2. 예상을 넘어서라.
적이 대비하지 않는 곳은 공격하고, 적이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한다.(攻其不備,出其不意). 곳곳에서 상대방이 생각하지 방식을 선택하고 변화시키면서 상대방을 흔드는 것이다. 전쟁이란 상대방을 괴롭히는 행동이다. 적이 불편해지는 모든 행동을 해주어야 한다. 그 핵심은 적이 생각하지 못하는 곳과 생각하지 못한 시간에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대비하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한" 부분은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4. 계산과 실전은 다르다.
손자는 마지막에 "이러한 실전 병법은 너무 복잡하고 오묘하여 미리 결정하거나 가르칠수가 없다.(此兵家之勝,不可先傳也。)"라고 하여서 구체적인 실전전술변화을 알려줄 수 없는 경험적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전쟁시뮬레이션은 어디까지나 계산일 뿐이다. 실전에서는 온갖 다양한 변수들이 등장하게 되며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이 중요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임기응변을 가르칠 수 없는 존재이다. 전쟁은 힘, 지례 그리고 의지의 종합격투기이며, 전장은 시시각각으로 다양하게 변한다. 한 순간의 생각이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 축구에 공은 둥글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전쟁 역시 절대적인 것은 존재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도박으로 비유하였다. 모택동도 전장에 스면 모든 볍먹을 잊어버린다라고 하였다.

군사학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실전과는 떨어져 있는 전략일 뿐이다. 진정 유용한 것은 가르칠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다. 오직 지도 위에서의 병사들의 움직임으로 일정한 원칙을 배울 뿐인 것이다. 설사 실전변화를 배운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몇가지 일정한 실전변화일 뿐이다.그렇기에 전략은 확정적이지만 실전은 불확정적이다. 우리가 무엇을 확정할 수 있을지는 다음 문장에서 나오게 된다. <손자>라는 책은 이처럼 예상할 수 없고 계속 변화하는 것들을 매우 중시한다. 그러면서도 우선 확실한 이론을 알려주고 그 다음에 실전변화를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다음 문장에서는 이번 편의 본질인 전략의 본질로 돌아와서 확실히 확정지을 수 있는 것을 확실하게 만든다.
 

본 글에 관련된 내용은 리링의 손자병법이란?을 참고해주십시오.
저는 여러분의 관심으로 번역을 한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학학!! 길었습니다. 그리고 번역은 점차 발번역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오타나 오역 혹은 엉터리 문장이나 이해가 안되는 문장들을 왕창 있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올리고 여러분들의 비판을 기대하겠습니다...절대 번역한 문장 다시 보면서 수정하기 귀찮은건 아닙니다...-_;; 설마...

다음 편은 짦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편은 무조건 나누어야 할 정도로 무지막지 깁니다. 고대의 병종들을 완전히 해부해 버립니다. 대충 2만자는 나올 듯 합니다.......에휴............ -_-;;

  1. 計利以聽이란 이 전에 나왔던 내용을 한번에 묶는 것으로서 그 의미는 계산상의 우세을 가질 뿐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현되게 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조건이 있어야지만 뒤쪽의 결과가 있다는 의미이다. 그럼 뒤쪽의 결과는 무엇일까? 바로 기세势이다. 우리는 기세를 통해서 원정에서의 작전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여기서 나오는 "밖外"는 "안内"와 비교되는 말이다. 안은 국내이며, 밖은 국외이다. 전쟁계획은 국내에서 수립되며, 전쟁은 국외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관자는 "계획을 반드시 안에서 결정하고, 그 다음에야 군대가 국경을 넘는다"(計必先定于內,然後兵出乎境)라고 말한 것이다. 군대가 일단 국경을 넘으면 자연적으로 실전에 투입되게 된다. 이럴 때에는 계획된 우세뿐만이 아니라 "기세"에도 의지하여야 한다. [본문으로]
  2. 君子不重傷 不擒二毛 古之爲軍也 不以阻隘也 寡人雖亡國之餘 不鼓不成列 [본문으로]
  3. 見其老幼, 奉歸勿傷。 雖遇壯者,不校勿敵。 敵若傷之, 醫藥歸之 [본문으로]
  4. 王侯将相,宁有种乎 [본문으로]
  5. 敵進我退,敵駐我擾,敵疲我打,敵退我追 (해당 발언에 대해서는 모택동이 만들었는지 아니면 주덕朱德가 만들었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문화대혁명으로 전통문화를 괴멸상태로 만든 모택동이 워낙에 고전을 좋아하였기에 모택동일 가능성도 충분히 높기에 그냥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6. 亟肆以罷之,多方以誤之 [본문으로]
故經之以五事,校之以計,而索其情[각주:1]:一曰道,二曰天,三曰地,四曰將,五曰法。道者,令民于上同意者也,可與之死,可與之生,而不詭也[각주:2];天者,陰陽、寒暑、時制也;地者,高下、遠近、險易、廣狹、死生也[각주:3];將者,智、信、仁、勇、嚴也;法者,曲制、官道、主用也。凡此五者,將莫不聞,知之者勝,不知之者不勝。

그러하기에 5가지 비교항목을 검토하고 7가지 실질비교내용을 헤아려서 적과 자신들의 현황을 파악하여야 한다. 5가지 비교항목은 각각 도리, 하늘, 땅, 장군, 법이다. 도리라는 것은 백성과 같이 하게 하는 것이다. 백성으로 하여금 같이 죽고 같이 살며 등을 돌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하늘은 음양의 변화와 기후의 영향 그리고 시기을 말한다. 땅은 높이, 거리, 기울기, 넓이 그리고 전술적위치치를 말한다. 장군은 지략, 믿음, 어질음, 용맹, 엄격함을 말한다. 법은 편제, 계급, 보급를 말한다. 무릇 위의 5가지 비교항목은 장수라면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를 아는 자는 승리할 것이오. 모르는 자는 승리하지 못할 것이다.

故校之以計,而索其情。曰:主孰有道?將孰有能?天地孰得?法令孰行?兵眾孰強?士卒孰練?賞罰孰明?吾以此知勝負矣。

7가지 실질비교내용을 헤아려서 적과 자신들의 현황을 파악하여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어느쪽의 도리가 더 마땅한가?","하늘과 땅의 상황은 어느 쪽에 더 유리한가?","어느 쪽 장군이 더 유능한가?","법령은 어느 쪽이 더 정비되어있나?","병졸은 어느 쪽은 더 강한가?","사병은 어느 쪽이 더 잘 훈련되어 있나?""신상필벌은 어느 쪽이 더 명확하게 행해지고 있는가?" 이며, 이것들을 통해 승패를 알 수 있다.

將聽吾計,用之必勝,留之;將不聽吾計,用之必敗,去之。
만약 장수가 임금의 계획대로 한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기에 계속 임용 할 것이고, 장수가 임금의 계획대로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패할 것이기에 자를 것이다.

0. 요약
이 번 편은 전략계획을 수립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핵심개념인 "다섯가지 비교항목과 일곱가지 실질비교내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5가지 비교항목(5事) 7가지 실질비교내용(7計)
 도리道 어느쪽의 도리가 더 마땅한가?
 하늘天 하늘과 땅의 상황은 어느 쪽에 더 유리한가?
 땅地 어느 쪽 장군이 더 유능한가?
 장군將 법령은 어느 쪽이 더 정비되어있나?
 법法 병졸은 어느 쪽은 더 강한가? 사병은 어느 쪽이 더 잘 훈련되어 있나? 신상필벌은 어느 쪽이 더 명확하게 행해지고 있는가?

1. 도리(道)
5가지 비교항목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도리이다. 도리란 민심을 얻는 것을 말한다. 예로부터 민심을 얻으면 천하를 얻고, 민심을 잃으면 천하를 잃는 다고 하였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정치의 핵심이다.


2.하늘과 땅
도리의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하늘과 땅이다. 제갈량에 대해서 "위로는 천문을 알고 아래로는 지리를 알고 있다(上知天文,下知地理)"라고 묘사되고는 한다. 제갈량은 하늘을 알고 딸을 알았기에 환상적인 전략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하늘과 땅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군사음양학(兵阴阳)을 안다는 것이다. 군사음양학은 수학을 군사학에 응용을 한 것이다. 현대의 군사학에서의 군사기상학과 군사지리학이 바로 고대의 군사음양학이다. <손자>에도 군사음양학이 등장하는데, 하늘에 대한 이야기는 <화공편>밖에 나오지 않는다. 땅에 대한 이야기는 <행군>, <지형>, <아홉가지 지형>등에서 자주 출현한다. 손자가 있었던 시대에는 아직 공군이 없었으며, 정확한 기상예보도 불가능하였다. 클라우제비츠시대에도 그러하였기에 이 둘 모두 땅을 중심으로 전략을 논하고 있다.

2.1. 하늘(天)
군사음양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점복술(式法)이었다. 점복술을 통해서 길흉을 점쳤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역법에 의한 기일 선택이었다. 지금도 결혼과 같은 행사에서 기일을 선택하는 것처럼 고대에도 전쟁을 일으키는 날을 중요하게 생각했었다. 그 외에도 별관측观星, 구름관측望云, 자연관찰省气, 바람관찰风角, 소리관찰五音, 새관찰鸟情등등을 통해서 점을 보는 일들이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강조를 하는 것은 "음양의 변화와 기후의 영향 그리고 계절"이었다. 죽간버젼에서는 "자연스러움과 군사오행(顺逆, 兵胜也)"라는 말이 있다. 이것 역시 군사음양학에 속한다. 자연스러움은 음양의 흐름에 적합한지를 알아보는 것이고, 군사오행은 오행의 상성상극을 군사학에 도입한 것이다.

2.1.1. 음양 陰陽
그렇다면 음양이란 무엇인가? 음양이란 어떤 구체적인 개념은 아니다. 흐리고 맑고, 춥고 따뜻한것과 같은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이다. 음양은 일종의 이분법적 표현이다. 중국의 수학, 계산 및 다양한 과학기술은 모두가 음양오행이론의 뼈대에서 나온 것으로서 서로 혼재되어 있다. 그러나 음양오행에는 바이블이라고 할 만한 서적은 있지 않다[각주:4].

중국고대에는 장군들은 반드시 군사음양학을 배워야했다. 점복술은 전국시대부터 명청까지도 장군들의 필수과목이었다. 이러한 군사음양학에는 과학적인 면도 있고 미신적인 부분도 있다. 과거의 철학사나 사상사 연구자들은 손자를 보며 위대한 유물주의唯物主義자[각주:5]이며 미신적인 부분을 말하지 않았다고는 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손자는 비교적 현실적이어서 미신에 대해서는 비교적 조금 말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2.1.2. 시기時令
여기서 말하는 시기時令은 천지가 기운이 분리되어 계절로 나누어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시기는 두가지 방법으로 각기 세분화된다.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일년을 각기 90일로 나누고 그것을 더욱 세분화하여 24절기로 변화하는 방법은 지금도 자주 쓰이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방법은 오행(금속, 나무, 물, 불, 땅)으로 일년을 각기 72일씩 나누고 그것을 더욱 세분화하여 30절기로 변화하는 방법이 있다.    

2.2. 땅(地)
땅은 "사람이 없는  땅"과 "사람이 있는 땅"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사람이 없는 땅"은 객관적인 지형을 뜻하고, "사람이 있는 땅"은 전세에 따라서 변화하는 인문학적 지형을 뜻한다. 땅은 3차원으로 되어 있기에 멀고 가깝고, 넓고 좁고, 높고 낮을 뿐만이 아니라 기울기까지 있다. 전세는 여러 가지 분류가 있으나 크게는 "안전지역生地"과 "위험지역死地"으로 나눌 수 있다. <아홉가지 지형>에 따르면 위험구역은 죽을 각오로 싸우면 살아남고, 죽을 각오로 싸우지 않으면 죽는 곳이다. (疾戰則存, 不疾戰則亡)

하늘과 땅의 뒤쪽에는 사람의 일인 장군과 법이 설명된다.


4. 장군(将)
장군은 다섯가지 소질(오덕五德)로 비교하게 된다. 우선 지략智가 있어야 되며, 그 다음 믿음信이 있어야 되며, 그 다음에야 어질음仁이 필요하다. 병법은 서로의 지략을 겨루는 학문이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지략이다. 믿음도 중요하다. 믿음이 없으면 명령을 내려도 부하가 따르지 않게 된다. 장군과 부하간의 믿음이 있어야만 병법을 실제로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사마천도 이광李廣을 변호하면서 "그의 충실한 마음이 사대부들에게 신망을 얻었기 때문이다.(彼其忠實心 誠信於士大夫也)라고 하면서 좋은 장수의 그릇으로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나오는 것이 어질음仁과 용맹勇이다. 공자는 어진자는 반드시 용맹하지만 용맹한 사람은 반드시 어질지는 못하다.(仁者必有勇 勇者不必有仁)나 용맹하나 무례하면 난폭할뿐이다(勇而無禮則亂)라고 하여 용맹보다 어질음이 우선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할머니 어머니 혹은 부인들의 어짐은 진정한 어짐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들이대는 양아치의 용기도 진정한 용기라고 할 수 없다. 어짐이란 병사들을 자식처럼 사랑하여 병사들이 따르게 하는 것이다. 용맹은 적을 죽인 뒤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것이다. 적으로 하여금 공포심을 유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영晏嬰이 사마양저司馬穰苴을 평가하면서 "문文으로는 사람들이 따르게 하고, 무武로는 적을 두렵게 하였다(文能附眾,武能威敵). 이 바로 어짐과 용맹에 대한 가장 정확한 해석이다. 엄격함은 아래에서 설명할 법法와 관계가 있으며, 관리를 엄격하게 하고 신상필벌을 정확하게 하는 능력을 말한다.


5. 법(法)
법이이라는 것은 지금 현재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법률이 아니라 군대를 관리하는 방법을 묶어서 말하는 것이다. 이는 고대에 군법軍法라고 불렸다. 중국에서는 고대로부터 다양한 군법들이 존재해왔다. 예를 들어서 <사마법司馬法>와 같은 제나라의 오래된 군법이 존재했다. 군법은 매우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병사를 키우기 위해서는 천일이 필요하지만, 병사를 사용하는 것은 순간이다.(養兵千日,用兵一時)이라고 하였다싶이,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매우 힘들고 복잡한 일이다. 그렇기에 조직, 보급, 장비, 훈련등의 일체가 시스템적으로 정립이 되어야 하며, 이런 시스템을 군법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렇기에 군법이라고 하면 잘못한 병사에게 "목을 베라"라고 하는 신상필벌이나 규율적 요소외에도 다양한 군대시스템을 연상하여야 한다.

5.1. 편제 曲制
과거의 군대편제는 곡제(曲制)이라고 불렸다. 곡제는 관자와 같은 곳에서는 곡정曲政이라고도 하였고, 고대의 설명집에는 부곡部曲라고 설명되고는 하였다. 왜냐하면 한대의 군제가 부곡部曲로 이루어졌기 대문이었다. 곡은 200명을 묶어서 부르는 명칭이고, 부는 400명을 묶어서 부르는 명칭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여단과 사단과의 차이라고 생각하시면 된다. 그리고 이 부곡은 바로 춘추전국시대의 군사용어인 곡제曲制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곡제는 곡저曲折라고도 불렸는데, 진법의 요구대로 디자인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5.2 계급 官道
관도官道는 편제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개념으로서 계급제도를 말한다. 소대장이 소대를 이끌고, 중대장이 중대를 이끌고, 사단장이 사단을 이끄는 것과 같이 각 편제에 합당한 관직을 부여하는 제도가 필요한 것이다.

5.3. 보급 主用
주용( 主用)은 무기, 의류, 음식과 같은 것을 모두 포괄하는 말로서 지금으로 보면 보급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의 실질내용은 모두 3가지로서 "병졸은 어느 쪽은 더 강한가?", "사병은 어느 쪽이 더 잘 훈련되어 있나?", "신상필벌은 어느 쪽이 더 명확하게 행해지고 있는가?"이다. 군대의 실력은 명확한 편제와 계급를 통한 명확하고 빠른 명령전달과 그런 명령을 확실히 이행하기 위한 병사들의 훈련 및 보급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모든 시스템을 군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6. 이것들을 통해 승패를 알 수 있다.  吾以此知勝負矣。
지금까지 여기서 말한 5가지 비교항목을 통해서 7가지 실질비교내용은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전략요소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위에서 언급한 비교항목과 실질비교항목을 통해서 "승패를 알 수 있다" 이것이 전쟁계획이다. 그러나 전쟁계획은 단지 "이길 것을 아는 것 뿐"이며, 실질적인 승리라고 할 수 없다. 실질적으로 승리를 하려면 전장에 가서 "직접 전투에 참가를 해야지만 그 결과를 알 수 있다[각주:6]"

승리할 것을 아는 것에서 실제로 승리로 가려면 우선 좋은 계획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실제로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사람에 의해서 결정된다. 우선 우리편의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계획대로 자신의 역할을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각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계획은 종이에 불과한 것이다. 두번째로 적이 계획대로 움직여주는가이다. 열심히 땅을 파서 대규모 함정을 만들어놓아도 적이 그곳을 지나가지 않으면 말짱도루묵인 것이다. 실제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아군과 적군 모두 "전쟁의 미학"대로 움직여야 되는 것이다.


7. 만약 장수가 임금의 계획대로 한다면 將聽吾計
7.1. 將聽吾計에 대한 다양한 해석
將聽吾計의 해석은 고대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정해지지 못하고 있다. 그 말의 吾(나)와 將(장군)이 누군지에 대한 수 많은 해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7.1.1. 오왕吳王이 손자(나)의 계획을 듣는다면?!
첫번째 해석에서는 나는 손자이며 듣는 상대는 오왕이다. 그럼 將(장수)는 누구인가?  여기서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발생할 일을 말하는 "~한다면"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손자(나)의 계획을 오왕이 따른다면 나는 이곳에 남아서 군대를 지휘할 것이고, 만약 나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곳을 떠나겠다는 말이다.

7.1.2. 장수가 임금의 계획을 듣는다면?!
두번째 해석은 吾(나)는 군주이고, 將(장군)는 수하 장군이다. 군주의 계획을 장군이 따른다면 승리할 것이기에 계속 그 장군을 쓸 것이고, 만약 계획을 따르지 않는다면 패배할 것이기에 짤라버린다는 것이다.

7.1.3. 적 장군이 계획대로 행동한다면?!
세번째 해석에서는 將(장군)을 적장군으로 본다. 적 장군이 계획대로 움직여준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기에 남아서 적과 싸우지만, 만약 적이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빠르게 철수해야된다는 소리이다.

이 세 가지 해석은 모두 계획의 실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는 중간의 "장수가 임금의 계획을 듣는다면"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전쟁계획이 군사회의를 통해서 결정이 된 이후에 장군을 임명하게 된다. 그렇기에 그 장군이 군사회의를 통해서 결정된 전쟁계획을 충실히 이행하는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7.2. 계획에서 실전으로의 이행
이 말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계획에서 실전으로 넘어가는지 알 수 있다. 종이 위에서 전략을 논하는 것과 실전에서 군대를 움직이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연결점은 "이익계산"뿐만이 아니라 "명령을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 위에서 말했다 싶이 계획의 실현은 아군이 받아들여야 할 뿐만이 아니라, 적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익계산은 단순히 계산상의 우세를 나타낼 뿐이며, 이러한 우세가 반드시 승리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예를 들어서 미국은 온갖 최신식 무기로 도배가 되어있다. 그리고 전세계 모든 국가들이 미국무기들의 위력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전쟁에 도입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야 된다. 그 뿐만이 아니라 2차대전시의 미국은 대규모 폭격과 핵무기 위협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독일에 대해서는 대규모 폭격을 하였고, 일본에 대해서는 핵무기를 폭파시켰다. 이러한 방식이 성공을 함에 따라서 2차대전후 미국은 더욱 더 강력한 힘만을 믿었다. 그러나 전쟁을 하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들이다. 전쟁은 살아있는 인간과 인간이 싸우는 것이기에 단순한 힘뿐만이 아니라 의지와 지혜를 서로 다투는 행동이다. 그렇기에 힘만을 믿었던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하게 된다. 아무리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더라도 베트남인처럼 죽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며 괴롭힌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그리고 현대 대국들은 지구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전쟁계획만을 의지할 수는 없다. 만약 전쟁이 단순한 계획과 숫자만의 싸움이라면 전쟁시뮬레이션을 돌려서 결과를 보고, 상대방에게 전화를 하여서 그 결과를 알려주면 모든 일들이 처리가 되는 것이다. 클라우제비츠은 이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전쟁은 계산놀이가 아니기에 숫자를 늘어놓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인간의 역사 내내 수 많은 전쟁이 있었고, 그 중에서는 실력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싸워서 이긴 경우가 많다.  그것은 삼국총사령관을 빼앗을 수 있어도, 한 병사의 전투의지를 뺏을 수는 없다(三軍可奪帥也 匹夫不可奪志也)라는 말과 통한다. 물론 의지만으로 이길 수는 없다. 그렇기에 어떤 이는 계속 전투를 하게 되면 실력으로 상대방의 의지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의지는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마음으로 패배를 인정하게 하여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본 글에 관련된 내용은 리링의 손자병법이란?을 참고해주십시오.
저는 여러분의 관심으로 번역을 한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머...어떻게든 완성했습니다. 오탈자를 잘 봐주시고 덧글로 이야기해주십시오. (아마 좀 많을듯-_) 이것만 6000자군요. 다음 분량도 이정도 입니다. 그럼으로....귀찮아서 진짜 안해버릴지 모릅니다. 적절한 당근과 채찍 부탁드려요. -0-

그리고 원문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전 철저한 의역을 추구합니다. 리링 선생님이 짦게 설명하고 말았지만 그대로 설명하면 일반독자들이 알아듣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상세히 늘여서 설명을 해놓았고, 일반인들이 알 필요도 없는 것들은 주석으로 처리해버렸습니다. 처음에 이런것까지 일반인 수준으로 쉽게 설명하려고 온갖 삽질하다가 포기했습니다. 솔직히 쓸데도 없어 보이고 말이죠. 무엇보다 적절한 한국형 예시를 생각하느라...더 힘들기도 하답니다. .....................예쁘게 봐주셔요.ㅠㅠ

  1. 다섯가지 비교 항목(五事)은 죽간에는 “비교항목事”이라는 한자가 없다. 그러나 현대버젼에서는 “비교항목事”이라는 한자를 넣어서 더욱 분명하게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을 통해서经之"이라는 말은 5가지 비교항목을 가지고 비교를 진행한다는 말이다. 7가지 실질비교내용을 校之以計부분은 죽간본에서는 效之以計라고 되어있다. 校과 效은 혼용해서 사용할 수 있다.(通假字) 예를 들어서 상추와 상치중에 상추가 맞지만 상치라고 해도 뜻은 전달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본문으로]
  2. 현대까지 내려오는 버젼을 보면 不畏危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보통 " 어떠한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도록"이라고 해석하고는 한다. 그러나 발견된 죽간본을 보면 不詭라고 되어있다. 이것은 "베신 하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보다 정확해 보인다. 왜냐하면 공자도 자고로 사람은 모두 죽지만, 백성의 믿지 않으면 국가가 유지될 수 없다.(自古皆有死,民无信不立)라고 하였고, 맹자도 하늘의 때는 땅의 이점보다 못하고, 땅의 이점은 사람들의 사람의 화목함만 못하다(天时不如地利,地利不如人和)라고 하여서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기에 "백성이 어떠한 위험에도 두렵지 않도록"보다는 "백성이 등을 돌리지 않도록"인 편이 합당하다. [본문으로]
  3. 현재 버젼에는 "높고 낮음高下"가 없지만 죽간본에는 있으며, 이부분에서는 죽간본이 더욱 범위가 넓다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
  4. 지금 현재로서는 隋나라 萧吉의 <五行大义>가 가장 참고할만하다고 본다 [본문으로]
  5. 유물론(唯物論)은 만물의 근원을 물질로 보는 이론이다. 유물론에서는 모든 정신 현상도 물질의 작용이나 그 산물이라고 이해한다. [본문으로]
  6. (나폴레옹) [본문으로]
孫子曰:
兵者,國之大事,死生之地,存亡之道,不可不察也。

손무孙武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군사(군대 또는 전쟁에 관련된 모든 일들)는 국가의 중대사이다. 병사들의 삶과 죽음이 결정되며, 국가의 존망까지도 결정되기에 자세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3.1.1. "손자 가라사대 孫子曰"
손자는 모든 편은 "손자 가라사대孫子曰"로 시작하고 있다. 이 부분은 보통 무시되기는 한다. 손자 말고도 공자, 노자, 순자등등의 이름을 보면 당시의 사람들은 "자"로 끝나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당시의 자子는 성인남성을 뜻하는 접미사였다. 지금의 "님"과 같은 상대방에 대한 예의로 붙이는 말이었던 것이다. 자子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상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춘추전국시대나 그리스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당시에 완벽한 직접적인 민주주의을 실시했다고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실제로는 철처한 신분제의 사회였다. 국인国人이라고 불리는 일반 사람들의 아래에는 평생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하층민 혹은 노예들이 있었다. 일반사람들은 제한적으로 국왕에게도 직접적으로 정책을 제안할 수 있었지만 하층민과 노예들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었다. 자子는 그런 국인들이라는 권력층에 붙이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子는 단순히 일반사람이라는 뜻만은 아니다. 마치 "아줌마"라는 말이 처음에는 결혼을 한 여성을 뜻하였지만, 지금은 악착같고 철면피 같은 결혼한 여성을 뜻하는 단어가 된 것과 반대로 자子는 점차 "선생님"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선생님에 대한 존경의 의미을 담아서 붙이는 칭호가 되었다. 손자 가라사대라는 말은 "손무孙武 선생님이 말씀하시길"라는 뜻이다.

춘추전국시대의 대부분의 언행을 기록한 문헌들은 모두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수업시간에 노트필기를 하는 것처럼 선생님이 말씀을 하시면 학생들이 열심히 필기를 했던 것이다. 다만 당시에는 필기를 할 수 있는 종이가 희귀하였기에 학생들은 필기를 하지 못하고 머리로 외울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선생님이 돌아가신 다음 학생들이 모여서 서로가 기억하는 것을 억지로 떠올리면서 선생님을 추모하며 글을 정리한 것이다.


3.1.2. 군사(군대 또는 전쟁에 관련된 모든 일들)는 국가의 중대사이다. 兵者,國之大事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군사(군대 또는 전쟁에 관련된 모든 일들)이 중요하다고 강조를 하고 있다. 처음부터 전쟁은 아이들의 소꼽놀이가 아니며 사람의 목숨이 달린 중요한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병兵은 본래 병기兵器을 말했다. 무기는 쓰는 사람은 병사들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병사을 뜻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기를 들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전쟁이기에 전쟁을 뜻하게도 되었다.

국가의 대사國之大事라는 말을 살펴보자. 춘추전국시대의 사람들에게 국가의 중대사는 두 가지가 있었다. 바로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와 지금 우리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군사이다.(国之大事,在祀与戎《左传》成公十三年) 제사는 조상님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조상의 가호를 받아서 혈맥이 더욱 발전하기 바라는 것이기에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군사는 국가의 안전을 지켜야 되는 일이기에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공자는 비록 군사를 공부하지 않았지만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먹거리를 풍족하게 하고 튼튼한 군대를 양성하고 백성의 믿음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足食,足兵,民信之矣《论语·颜渊》)이라고 하였다.(이런 의미에서 2009년 광우병사건은 바로 먹거리 문제를 잘못 처리하면 어떻게 되는지 절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조조도 <손자간략해설孙子略解>의 시작부분에 공자의 이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의 생각은 사실 조금 달랐다. 공자는 자공子贡과의 대화를 통해서 정치3대 항목중에서 믿음이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이 먹거리이고, 마지막이 군사라고 말하고 있다.  군대가 없으면 상대방의 침략에 죽을 수 밖에 없다. 먹거리가 없다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군대나 먹거리가 없어도 단지 죽을 뿐이다. 춘추전국시대에 사람의 죽음은 너무나 자주 발생하는 일이었고, 누구나 결국은 죽게 된다. 그렇기에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공자의 이런 생각은 중국의 현대화 과정에서 강조된 것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모두들 부국강병富国强兵을 부르짖었다. 부국이란 먹거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고, 강병이란 군사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특히 당시의 사람들은 군사문제의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생각하였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강력한 군대를 건설해야된다고 굳게 믿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비극이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싶이 춘추전국시대는 언제나 전쟁중이었던 시대였다. 그런데 내 손에 무기가 없으면 대체 어떻게 되겠는가? 특히 전국시대 말기로 갈 수록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렇기에 갈관자에서는 하늘과 땅과 사람(天地人)이 있는데, 하늘과 땅은 멀고 사람은 가깝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람 중에서도 군사가 가장 중요하다라고 하였다(人道先兵《鹖冠子·近迭》).
 

 3.1.3. 병사들의 삶과 죽음이 결정되며, 국가의 존망까지도 결정되기에 자세히 살피지 않을 수 없다(死生之地,存亡之道 不可不察也).

이 말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다만 나는 과거와는 조금 다른 해석을 했다.  삶과 죽음의 지역死生之地은 사는 지역과 죽음의 지역의 혼합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인 전장에서의 생사가 결정이 되고, 그 결과가 국가의 존망에 영향을 미친다는 논리구조라고 생각한다. 모든 군사행동은 정치의 연장선상이며 생사가 달린 문제이기에 당연히 "자세히 살피지 않을 수 없다不可不察也. "<손자>에서는 사령관은 사람의 생사를 결정하는 신(司命)이라고 말한다. 사령관은 아군의 생사를 결정할 뿐만이 아니라, 적의 생사조차 결정을 한다. 그렇기에 사령관은 조심 또 조심 할 수 밖에 없다.

<손자>의 처음은 이처럼 강력한 경고로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군사에 대한 다양한 경고는 <손자>에서 끊이지 않고 나오는 특징이다.


본 글에 관련된 내용은 리링의 손자병법이란?을 참고해주십시오.
저는 여러분의 관심으로 번역을 한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번 분량은 그마나 적다. 이 다음은 무지막지 길다. 그래서 아예 손대기 싫어질 정도로....
과연....다음 편은 언제쯤 올라올까?.....핵심은 여러분들의 관심?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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