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남진전략과 해양활동 연구
하지만 윤명철교수님도 논문에서 밝혔듯이, 해양에서의 일은 유물로 증명하기도 힘들고(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힘들다는 것입니다^^;;) 사료로 증명하자고 해도 애로사항이 꽃피우는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래도 한국의 앞으로 미래에 제일 중요시 해야될 것이 해군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해양성의 과거모습과 그 변천과정의 논문을 발표함으로 인하여 파생되는 국민정서의 변환에 높은 가치를 두고 싶습니다.
( 동아지중해 중핵조정론을 중심으로)
윤명철
1. 서론
2. 전기의 해양진출과 국가전략
3 광개토대왕의 해양활동과 국제전략
4 장수왕의 수도남천과 동아지중해 중핵조정론
5 결론
출처 : 고구려연구회
고구려(Koguryo)는 중국, 북방의 遊牧種族들, 한반도의 백제(Paekche)와 신라
(Shilla) 및 왜(Wa)의 세력이 마주치는 접점에 있었다. 또한 대륙과 해양을 공유
하였고, 중국지역 및 遼東(liaotung)지역 등과는 황해북부, 百濟와 황해중부 이북
을 경계로, 왜와는 동해를 가운데 두므로써 해양질서의 영향이 강했다. 필자는 이
러한 특성에 주목하여 東亞地中海(Eastasian-mediterranean-sea)개념을 모델로
설정하였다.
고구려는 이러한 특성을 살려 국가의 발전전략을 수립하고 실천하였으며, 국제
질서와 대외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는데 이용하였다. 특히 동서남북 동시
진출정책을 펼쳤으나, 특히 남진정책을 중요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인 특
성상 해양활동도 활발하였다. 그런데 남진정책과 해양활동은 깊은 상관관계를 맺
고 있었다.
고구려의 존속기간 내내 추진한 정책들은 몇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단계성을
지녔다. 일정한 시대, 특정한 왕의 정책으로 추진된 것이 아니다. 전기부터 장수왕
대까지 국내적 조건과 국제질서의 상황 속에서 장기정책으로 추진된 것이다. 특히
광개토대왕(King Kwanggaeto)은 국제질서의 재편과정 속에서 능동적인 대응전략
을 수립하기 위하여 본격적인 해양활동이 필요했다. 장수왕(King Changsu)은 수도
를 평양성(Pyungyang Castle)으로 이전하고, 남진정책을 과감하게 실천하여 한반도
의 패자가 되었다. 또한 경기만을 장악하여 황해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확보하고, 동
아지중해의 해양질서에 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고구려는 국제질서의 중심부에서 국
가의 장기전략으로서 해양활동과 남진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장수왕대의 성공으로
多重放射狀 外交가 전개되는 국제질서 속에서 동아지중해의 중핵(core)국가로서 조
정역할을 수행하였다.
1. 서론
고구려는 華北지방의 중국세력과 북방의 遊牧種族들, 한반도 중부 이남의 백제와 신라
및 왜의 세력이 마주치는 힘의 접점에 있었다. 또한 대륙과 해양을 공유하였고, 중국지
역 및 遼東지역 등과는 황해북부를, 百濟와는 황해중부 이북을 경계로, 왜와는 동해를 가
운데 두고 있어서 해양질서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필자는 이러한 특성에 주목하여 東亞
地中海(Eastasian-mediterranean-sea)개념을 모델로 설정하고,이와 관련된 글들을 발표
하고 있다.
고구려는 이러한 특성을 살려 다양한 국가의 발전전략을 수립하고 실천하였으며, 국제질
서와 대외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는데 이용하였다. 특히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동
서남북 동시진출정책을 펼쳤으나, 남진정책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
인 특성상 해양활동도 활발하였다. 그런데 남진정책과 해양활동은 매우 깊은 상관관계를
맺고 있었다.
본고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이 존속기간 내내 일관성을 지닌채 추진된 것으로 보며 어떠
한 단계와 과정을 거쳤으며, 주요한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해양활동과의 관련성 속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따라서 남진정책을 주로 국제정세와 관련하여 분석하였으며, 시대는 해
양과의 관련성이라는 본고의 주제와 논리의 전개상 전기, 광개토대왕기, 장수왕기의 3단
계로 나누었다.
2 전기의 해양진출과 국가전략
고구려는 해양과 남진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초기 단계부터 바다로의 진출을 꾸준히 모색하
였다. 大武神王 15년(32)에 후한과 긴장된 상태 속에서 好童은 낙랑을 쳐서 항복시켰
고 5년 후에 고구려는 樂浪을 멸망시켰다 그 후에 낙랑의 해양활동 능력을 수용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44년에는 後漢 光武帝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伐하
고, 그 땅을 取하여 군현으로 삼았다. 고구려가 낙랑을 점령하였며, 후한은 해양작전을
한 것이다. 이 후에 태조대왕은 서안평을 공격했다. 이것은 중원및 요동과 낙랑 등 남쪽의
중국세력의 연결을 끊어 협공위협을 감소시키고 낙랑세력을 구축하려는 것이었다. 특히 서
안평을 공격한 행위는 해양전략의 입장에서 볼 때 고구려의 황해연안 진출을 위하거나 중국
세력의 해양활동을 방해하기 위한 據點 確保의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요동에서는 公孫氏정권이 수립되었고, 그들은 樂浪郡의 일부를 분리해 帶方郡을 설치하였
다. 이 때 등장한 東川王은 군사전과 외교전을 병행하면서 변모하는 국제질서의 중심부로
진입하고자 하였다. 공손씨정권과 위,선비족 등의 군사적인 압력을 받고, 남으로는 낙랑 대
방군에 의해 배후를 위협당하고 있었다. 이 때 吳와의 외교관계는 국제적 지위를 상승시키
고,魏의 위협을 분산시키는 외교적 잇점이 있었다. 그런데 우연하게 맺어진 吳와 교섭하면서
해양활동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해양을 매개로 다국간의 이해관계가 격돌하는 동아지중해의
역학관계에 직접적으로 진입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고구려와 오는 정치적, 경제적인 이익을 위하여 교역을 활발하게 하였다. 吳에게 貂皮 1000
枚와 鷄皮 10具 등과 角弓 등 군수물자를 보냈다. 孫權은 衣服珍寶 등 사치품을 보냈
다. 고구려는 말 수백필을 주었으나 吳의 사신은 타고온 배가 적어 80필만 싣고 갔다.
고구려는 해양문화가 가장 발달한 吳와 관계를 맺음으로서 해양발전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 때 양국 간에 교섭이 이루어진 항구는 서안평이었다.
서안평은 압록강하구에 있으며, 고구려가 황해로 나가는 유일한 出海口이다. 서안평은 중국
세력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한반도 남부의 小國들 및 일본열도의 일부세력과 중국
과의 교섭은 樂浪을 중간거점으로 삼았다.그런데 고구려가 성장하고서해안 연안으로 진출
하면서 沿岸 혹은 近海航路를 이용하는데 어려움이 생겼다. 때문에 낙랑보다는 그 아래에
대방군을 설치하여 고구려의 해상봉쇄와 저지를 피하고자 했다. 魏는 수군활동능력을 바탕
으로 중간에 고구려를 포위한 형국으로 황해북부항로를 장악하고 일본열도를 연결하는 광범
위한 영향권을 형성한 것이다.
고구려는 南과 西의 양 방면에서 중국세력이 압박을 가할 경우에는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
다. 그러므로 한군현의 잔재세력과 북쪽에 있는 위를 연결시켜주는 교통로인 육로와 해로를
중간에서 장악하므로써 상호교통을 막아야만 했다. 따라서 고구려가 당면한 외교 군사적 목
표는 遼東沿岸 혹은 近海航路의 해상권을 장악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西安平은
고구려의 생존이 걸린 지역이었다.233년 이후 237년까까지 吳의 孫權과 교섭할 때 서안평
유역은 고구려의 세력하에 있었다. 그런데 東川王이 242년에 서안평을 공격했고, 이어 위와
고구려의 전면전이 벌어졌다.
그런데 3세기 말 부터 국제관계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晋은 夫餘 馬韓 辰韓 등과 외교관계
를 맺었고고구려는 肅愼을 정벌하는 등 동북지방으로 진출하였다. 한편 북방에선 鮮
卑의 段氏 宇文氏 慕容氏 등이 등장하여 쟁패전을 벌였으며 高句麗와 晋 사이에서 복잡한
역학관계를 연출하였다.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는 중국세력이 요동지방을 중심으로 행정권
을 상실할 정도가 되었다.
이 때 고구려의 美川王은 한편으로는 요동을, 다른 한편으로는 남진정책을 취하는 남북동
시전략을 취했다. 304년에는 백제가 낙랑군의 西縣을 공격하여 탈취하였다. 역시 해안가까
히에서 작전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미천왕 3년(302)9월에 3만명의 군사로서
玄兎郡을 공격하고, 이때 사로잡은 8000명을 평양으로 옮겼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미천
왕은 마침내 12년(311)에 서안평을 점령한 후 완전히 서해안에 진출한다. 압록강의 하구
지역과 황해북부의 해상권, 황해북부의 연근해항로의 물목을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13년
(313)에 낙랑을 완전히 구축하고 2000여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그 다음해인 314년에는 대
방을 멸망시켰다. 대동강 하구 및 예성강유역의 일부를 영향권하에 넣었다. 이로서 고구려
는 황해중부이북의 해상권과 연근해항로를 완전하게 장악하였다.
樂浪 帶方이 멸망한 데에는 고구려가 중간교통로를 장악한 것이 효과적으로 작용했을 것이
다. 특히 311년에 西安平 지역을 수복하여 西韓灣과 황해북부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해상활
동이 가능했고, 이러한 해양상황의 변화가 낙랑 대방의 대중통로를 막아 약화와 멸망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낙랑 대방을 둘러싼 대결은 한반도 뿐만 아니라 倭까지 연결한 동아지중해 동방의 이익을
고수하려는 중국세력과 그것을 탈취하여 중국세력의 협공에서 벗어나며 교역상의 이익은 물
론 남부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고자 하는 고구려 간의 싸움이었다. 따라서 전 시대
에 발생했던 朝漢戰爭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영토팽창전보다는 교역권의 싸움, 그리고 해양
질서의 대결이란 성격이 강했다. 이 때 특이한 경험을 했던 美川王은 국제질서의 본질을 인
식하고, 해양질서의 중요성과 그것이 가지는 경제적인 잇점 등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통찰력
을 지녔다. 그는 남북 동시전략을 추진했고, 남진에 비중을 두어 고구려가 실제적으로 남쪽
에 뿌리를 내리는 토대를 만들었다.
전기에 추진된 해양활동은 주로 고구려 국가전략이라는 입장에서 서안평 쟁탈전과 남쪽의
낙랑 대방을 축출하는데 두어졌다. 그 결과 요동반도 이남의 海上權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낙랑과 대방이 가졌던 해양능력과 교역상의 이익을 흡수했다.이렇게 추진된 고구려의 남
진은 백제의 성장 및 북진과 서로 부딪혀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된다.
4세기는 북쪽은 五胡十六國시대, 남쪽은 東晋의 건국이라는 대혼란시기가 도래하여 東아
시아 전체에 질서의 변동, 즉 분열과 질서의 변동을 야기시켰다. 북부지역의 여러나라들
과 남부의 동진은 정치 외교 경제적인 입장에서 교섭을 하였는데, 이는 육지와 해양의
공유라는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북중국에서의 혼란은
황해북부의 해양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황해를 內海(inland- sea)로 중
국의 남북지방과 한반도의 국가들, 그리고 일본열도로 연결되던 東亞地中海 질서권
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약화ㄷ을 것이다. 5胡 16國시대에 남북이 대치상태에 들어갔을
때 海路는 외교교섭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고구려와 요동반도 남부의 연, 화북의 후조와 남방의 동진은 각각 해양을 통해서 외교
및 군사교섭을 추진하였다. 고구려와 後趙는 연을 견제하는 외교 군사관계를 맺고 있었
다. 330년에 고구려는 후조에 사신을 보내고 같은 해에 矢를 보내어 군수물자를 교
환했다.이 때 고구려는 이미 장악한 압록강하구 유역을 출발하여 중간의 燕을 피해서
해로를 이용해 山東지방으로 잠입한 것이다. 한편 336년 3월에 해로를 통해서 동진에
사신과 공물을 보냈다. 해양을 통한 사신왕래가 빈번했고, 해양은 적대국가의 국경을
피해서 교섭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338년에는 후조가 300척을 동원해서 고구려에게
곡식을 보급하였다.이처럼 4세기 전반에는 각 나라간에 역학관계가 해양을 매개로 복
잡하게 전개 되었다.
고구려는 황해북부에서 활동을 하는 한편 남진정책을 취하였다. 낙랑군이 멸망한 이후에
도 잔존토착세력들은 동진 등 남조세력들과 교섭하면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대방군의 옛 땅인 황해도 지역에서도 토착호족세력들은 東晋의 연호인 元興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들은 해양능력을 바탕으로 대외교역과 정치적 활동을 하는데 약간의 독자성
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이 지역의 정치적인 공백을 메꾸고, 대외교섭에서
발생하는 정치 외교 경제적 잇점을 확보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진출을 시도했다.고국원
왕은 334년(2년)에 평양성을 증축하였다. 343년(17년)에는 평양 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겼
다. 물론 이러한 남진정책은 국제질서를 재편하는데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또 북진하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서이며, 해양활동과 불가분의 관련이 있다.
그런데 백제는 해양활동 능력이 뛰어났다. 근초고왕은 북진정책을 취하면서 평양성을 공격
하므로써 남진해오는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이 결과로 경기만을 완전하게 內海化하고, 그
배후인 황해도 지방을 장악하였다. 이 시대 백제의 해양활동 능력은 왜와 관계하는데서
도 나타난다. {日本書紀} 神功紀 기사에 의하면 백제와 왜의 교섭은 近肖古王 20년
(366)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馬韓을 병합한 후에 백제는 남부지역의 海洋能力을
보강하여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宋書(488)에는 백제가 중국지역에 진출한 듯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南齊書(6세기 전반) 梁書(7세기 전반) 南史(7세기 전반) 등 남조의 사서
들에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백제가 대방지역을 확보할 경우에는 위가 전에 대방을 중간거점으로 일본열도에서
화북지방 까지 구축해놓은 황해연안 교역권을 차지할 수 있다. 때문에 백제는 1차적으로 대
방의 땅을 차지하고, 黃海中部海上權을 확보해야했다. 그러기 위해선 북방진출을 꾀해야 했
다. 결국 고구려의 남방진출 기도와 북방진출을 하는 백제 近肖古王의 의도는 정면충돌을
하였으며,이는 주로 경기만 쟁탈전의 양상을 띄웠다.
고구려는 한강북부의 雉壤지방을 선제공격하였으나 패하고, 오히려 平壤城 전투에서
고국원왕이 전사를 당하여 남진정책은 좌절되었다. 이 후에도 양국의 충돌은 산발적으로
계속되면서 공방전을 폈다.
백제는 평양성 전투에 승리하므로써 옛 帶方郡 地域의 일부를 탈취하였으며, 그들의 사
회 경제적인 능력과 함께 해양활동능력을 상당부분 흡수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경기
만은 중부의 모든 강이 몰려드는 곳으로서 河系網과 내륙수로를 통해서 중부지방을 통합
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이곳을 장악하면 중부해상권의 장악은 물론 그 주변, 즉 甕
津半島 長淵郡의 長山串 등 이북지역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百濟는 이후에 해양활동
권이 황해중부이북으로 확대되었으며,일본열도에서 제주도, 한반도 남부를 거쳐 북부까
지 항로로 이어지는 物流體系를 장악하였다. 외교적으로 고구려를 압박하였으며, 여러나라들
과 동시에 교섭을 하였다.
평양성을 공격한 다음 해인 372년 정월에 晉으로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같은 해 6월에는
東晋이 사신을 보내어 近肖古王을 鎭東將軍令 樂浪太守로 책봉하였다. 백제는 이때에
비로소 중국과 통교를 하고, 그 질서 속에 진입하였다. 이 후에도 양국의 관계는 빈번하
게 지속되었다. 이러한 관계를 '高句麗는 前秦과, 東南으로 新羅와 연맹하고, 이에 대응
하여 百濟는 前秦과 대립한 東晋과, 그리고 東으로는 日本과 연결하였다'고 표현하는 견
해도 있다. 이러한 연결이 실효성이 있는지는 물론 해양을 전제로 해야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고구려는 동진과 海路로 연결되고, 백제 등의 남부지역 역시 해양을 매개로만
연결되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에 경기만 유역의 북부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각각 해양방어체제를 구축하
여 본격적인 경기만 쟁탈전을 벌였다. 백제는 386년에 대대적인 관방시설을 설치하여, 靑
木嶺에서 북으로는 八坤城,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렀다. 그 후 고구려가 394년(광개토
왕 3)에 國南 7성을 축성한 것은 황해도 남부해안지대를 강화할 목적인 것으로 추측된
다.
평양성 패배 이후에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일단 실패로 돌아가고 황해중부의 해상권이 위축
되어갔다. 고구려는 일종의 소강상태를 이루면서 내치에 주력했다. 그러다가 廣開土大王이
19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결국 이 시기까지의 남진정책은 황해로의 출해구를 확보한 다
음에 낙랑 및 대방의 구축,남진의 교두보 확보 등 주로 국가정책의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3 廣開土大王의 해양활동과 국제전략
廣開土大王은 제19대 왕으로 즉위하여 22년의 在位期間에 政治 軍事를 중심으로 飛躍的
인 발전을 하였다. 그의 최대의 업적은 南과 北으로 軍事的인 진출을 하여 일시적으로
위축된 고구려의 국력과 영토를 팽창시켰으며, 또한 동아시아의 秩序再編 과정에서 능동
적인 대처를 통해서 高句麗의 國際的 位置를 크게 향상시킨 데 있다. 4세기 초에 동아시
아 國家間에 형성되었던 力學關係는 4세기 말에 들어오면서 변동을 일으키고 그에 따라
서 해양활동의 질에도 변화가 왔다. 5세기는 4세기의 변화를 기조로 하면서도 새로운 상
황과 변화의 실체가 분명히 드러난 시대였다. 고구려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지정학적
인 위치를 최대한 활용하여 국제질서의 중심부로 진입해야 했다.
廣開土大王은 軍事的 優位性을 활용한 强攻策을 구사하며 동서남북의 全方位征服
活動을 감행했다. 軍事戰 위주의 이러한 대외정책은 在位年間 지속적으로 감행되었다.
먼저 북방의 경우를 보면, 385년에 요동과 현토를 점령하였고, 燕에게 遼東地域을 침략당한
다. 그러나 402년, 404년에는 연을 공격하여 정벌하였다. 그리고 406년에는 후연이 3000여
리를 행군해와 木底城을 침입하였으나, 이를 물리치므로써 요하 이동지역을 다시 완전히 장
악하였다. 이는 고구려가 遼東半島와 西韓灣, 大同江 하구, 그리고 京畿灣을 잇는 黃海중부
이북의 東岸 海上路를 확보한 데서 의미가 있다. 요동만의 장악은 山東 등 아래 지역과의
해양활동에 유리하였다. 한편 광개토대왕은 410년 東夫餘를 친정하여 복속시켰고, 북부여의
고지도 영토로 완전히 편입시켰다.
남방의 경우는, 廣開土大王 2년(392) 7월에, 4萬의 군사로 백제를 공격하여 石峴 등
10縣을 함락하고 10월에는 백제의 關彌城을 함락시켰다. 또 大王 2, 3, 4년에도
백제와 수차례 전투를 벌리는 등 초기에는 주로 백제와의 전투에 임했다. 물론 이는
고국원왕 말년에 상실한 禮成江유역의 지배권을 탈환하려는 조치이다.
廣開土大王은 활동영역을 점차 넓혀 396년에는 다시 水軍을 투입하여 백제를 쳐서 58城
700餘 村을 탈취하는 戰果를 올렸다. 그리고 8년에는 帛愼을 치고, 또 신라와 연합하여
百濟 倭 聯合軍을 격파한다. 물론 이때 고구려군은 동아지중해의 역학관계상 일본열도로
진출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엄청난 정복활동(東討西略 南征北伐)을 통하여 고구려의
영토는 동서남북으로 팽창되고, 마침내 大帝國을 건설하였다.
廣開土大王의 이러한 전방위정책은 外交面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외교정책에도 비중을
두어 對象을 多樣하게 하므로써 북방세력들과도 외교관계를 맺었다. 大王 9년(400)에는
燕에 사신을 보냈으며, 大王 17년인 408년에는 北燕에 사신을 보낸다. 또 대왕 20년
인 410년에는 南燕으로 使臣과 供物을 보내고 그 댓가로 燕王은 답례품을 보내면서 양국
은 공존관계가 된다. 이같이 명멸하는 북방국가들을 대상으로 다양하고 和戰兩面政策
을 구사한 것은 自主的이며, 탄력성있는 외교였음을 확인시켜 준다.
한편 광개토대왕은 남부의 국가들과도 외교관계를 적극적으로 맺었다. 實聖王子를 인질
로 하는 不平等外交를 통해서 신라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하는 한편 신라와 연합하여 百
濟 伽耶 倭聯合軍을 공동작전으로 물리쳤다. 이것은 백제의 세력을 약화시킨다는 목적
외에도 신라에 대한 宗主權을 강화시키려는 목적이 작용했을 것이다.
377년(光武帝 太元 2)에 고구려와 신라가 東晋에 같이 가고 계속해서 고구려와 같이
前秦에 간다. 신라는 일찍부터 고구려에 의존하여 국제사회에 편입하였고, 고구려는 이
를 통하여 신라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목적은 해양
을 연결고리로 새롭게 부상하는 百濟와 倭의, 南部中心의 外交를 신라를 이용하여 제
어하려는 것이다.
이처럼 大王의 재위 22년간에 발생한 대외적인 군사 외교활동을 분석하면, 광개토대왕은
특정지역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 全方位 攻略을, 외교적으로는 全方位 外交를 펼쳤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릉비문에 따르면 남진정책으로 이해될 만큼 남쪽을 향한 외교활동
과 군사작전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남진정책을 펼친 한 배경으로서 농경지의 확보를 통한 생산력 증대를 들고 있다.또한 육
지의 영토확대나 전략적 거점의 확보라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동아시아
세계는 질서의 측면에서 長期持續性을 가진 외교전략을 토대로 정책집행들이 이루어졌다.
또한 해양이 중요한 활동무대로 등장했고, 남북조의 分立은 주변 각국들로 하여금 외교활동
의 통로로서 해양의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시켰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의 남진정책은 대외관
계의 측면, 특히 본고의 목적상 해양활동의 측면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남진정책은 한반도의 정세와 백제와의 구원으로 볼 때 선차적으로 남부전선을 안정시키고,
백제를 제압하는 일이 중요한 목표였을 것이다. 백제는 근초고왕의 팽창정책 이후 광개토대
왕의 즉위 직전인 389년 390년에도 연속적으로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침입하였다. 이러한
양측의 공방전은 백제의 북진의도가 존재하고, 그만큼 군사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광개토대왕은 백제에 대해 지속적이고 전면적인 공격을 단행했다. 元年에 漢水 以北을 점
령하고,關彌城을 공함하였다. 그리고 王 6년(396)에는 水軍을 거느리고 백제의 50餘 城 700
餘 村을 함락하여 대승을 거두었다.이 성들의 위치와 남방한계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
해가 있다. 陵碑文 永樂 6년조의 기사에 의하면 강화도 혹은 한강水系 하류지역의 한 지점
인 關彌城과 通津으로 추정되는 沸城, 인천지역으로 비정되는 彌鄒城, 南陽灣 지역 등을 점
령한 사실은 서해안의 해상권 장악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또한 위치가 밝혀진
성들의 다수가 해안 가까히에 위치한 사실과 고구려가 수군을 이용해 공격한 사실은 해
양활동과 관련하여 강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대왕 元年({三國史記})과 6년 丙申
條({陵碑文})의 백제공격은 백제의 해상세력을 약화 또는 궤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해
양활동을 둘러싼 양국간의 치열한 접전이었다는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구려는 水軍
을 동원하여 黃海 中部沿岸의 海上權 掌握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것이다.
당시 양국이 해양활동에 비중은 둔 사실은 해양방어체제와 대왕의 수군작전에 의해 알수
있다. 백제는 373년에 청목령에 성을 쌓아 방어체제를 재정비하였다. 즉 백제의 세
력권은 북상했으나, 국경은 동쪽은 북으로 水谷城(新溪), 중간에는 靑木嶺(開城)윗쪽
인 예성강, 그리고 서쪽은 경기만에 접해있는 황해도 남부지역으로 추정된다. 이어
고구려는 375년에 水谷城을 점령하고 백제는 반격을 가하지만 탈환하지 못한다.
고구려는 다시 376년에는 백제의 북변을 침공하였는데 아마도 수곡성 아래이면서
청목령 윗쪽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386년, 廣開土大王이 공격한 8월 이전인 봄에 백
제의 辰斯王은 靑木嶺에서 八坤城, 그리고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기 까지 長城을
축조한다.
황해도 지역, 특히 해안에 방어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당시 양국간에 벌어진 싸움
은 水谷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해안선에서 100km 이내의 내륙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양국은 군사전략상으로 해안활동이나 해상권 장악에 힘을 기울였을 것이다.
더구나 이 지역은 경제적 잇점이나 양국의 대외교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결국
해양전의 발발이 예상되고 있었고, 해양방어체제를 구축하여 양쪽 모두 준비를 하
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고구려가 394년(광개토왕 3)에 國南 7성을 축성하였다.
이는 황해도 남부해안지대를 강화할 목적인 것으로 추측된다.이 지방에는 배천 치
악산성, 연안 봉세산성, 해주 수양산성, 옹진 고성 등 고구려 산성들이 있고, 그외에
시대를 알 수 없는 산성들이 많이 있다. 대부분 해양방어체제의 성격을 지닌 성들
이다. 최창빈은 이 성들을 당시에 쌓은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전쟁이 해양질서와 관련이 깊음은 전쟁과정에서도 나타난다. 고구려가 수군활동을 했
다는 것은 오로지 廣開土大王 陵碑文에만 나타난다. 이 기사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대규모의 수군을 투입하여 백제의 58城과 700 村을 탈취하였다. 다른 해의 기사와
는 달리 步騎의 사용과, 해전발생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고 있다. 수군을 동반한
작전을 한것이다. 그런데 50여 城을 공파하고, 그것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병력과 운
송선이 상당히 많거나, 1 척당 승선인원이 대량인 큰 배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6년
조의 기사는 고구려가 해양활동 능력이 뛰어났으며 본격적인 수전과 대규모 군사작
전의 감행능력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陵碑文} 14年條에는 왜의 해양활동과의 밀접한 관련 가능성이나오고 있다. '王
幢', '王躬率往討'이란 문구로 보아 대왕이 親征을 했으며 倭와 百濟가 공동작전
을 감행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또한 '連船 □□□' 이라는 문구로 보아 왜와 백
제는 船을 이용해서 帶方界를 습격한 것이 된다. 결국은 백제가 主가 되고 왜를
從으로 하는 연합군이었다.
결국 대왕은 수도인 한성을 공멸하고 서해연안의 요충지들을 점령하고 파괴하였다. 이처럼
大王의 황해 서부해안지대 공격은 국내적이고 경제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전개된
국제관계를 볼 때 백제의 정벌과 남진정책은 동아시아의 질서재편이라는 巨視的인 관점과
정치 외교적인 측면을 동시에 갖고 행해졌다. 고구려는 외교권의 독점을 위해 백제를 한반
도 내에 가두어놓고, 포위전략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연결고리를 적극적으로 차단
해야 했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배후를 교란케하고 운신의 폭을 제한하기 위하여
신라를 不平等外交의 틀 속에 편입시켰다. 신라를 동맹세력으로 하여 동남방에서 백제의 후
방을 견제하도록 하는 외교전략의 일환으로 신라의 使行에 깊히 간여하였다.
또한 보병 기병 5만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였다.신라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가야
까지 세력권하에 넣으려는 의도이다. 이로서 왜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백제의 배후를 위협
할 수 있는 전략적 잇점을 확보한 것이다. 이때 남진한 고구려는 동해남부나 남해동부
해안을 통해서 일본열도에 갔을 가능성을 생각케 한다. 특히 {陵碑文} 14년조에서
나타난 왜의 帶方界 침입과 대왕이 王幢을 보내어 격퇴한 사실은 東亞地中海의 역
학관계상 고구려군의 渡倭 가능성을 높혀준다. 이렇게 광개토대왕의 백제 공격과 남진
정책으로 인하여 한반도의 역학관계는 고구려와 신라를 한편으로 하고, 百濟와 倭, 加耶를
다른 한편으로 하는 힘의 軸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 관계는 중국지역 등 다른 지역에서
형성된 국제질서와 복잡하게 얽혀버렸다.
廣開土大王은 국제전략의 입장에서 지정학적인 위치를 활용한 각 나라들 사이에서 자국중
심의 거대한 網을 구성하였다. 지정학적인 조건을 활용하여 전통적인 육지위주의 질서를 기
본으로, 새롭게 성장하는 해양적 질서를 수용하면서 복합적인 정책을 구사했다. 이 때 본격
적인 남진책은 추진해야할 과제였으며, 해양활동능력의 확대, 황해해상권 확보 등과 불가분
의 관계를 가졌다.
4. 長壽王의 수도남천과 동아지중해 중핵조정론
5세기 이전에 동아시아 세계는 1∼2개의 중심부가 확고한 자리를 잡고, 정치 군사 경제적
능력에 따라 周邊部, 反周邊部, 그리고 邊方으로 편성이 되었다. 질서와 역학관계는 중국을
核으로 국가적인 능력을 기본으로 거리나 자연조건 등 교섭의 교통조건에 따라 영향을 받는
형태이었다. 즉 주변부의 각국들은 중국지역 고구려 등의 中心圈과 직접관계를 맺기 보다는
인접한 국가를 통해서 간접적인 외교관계를 맺는 點에서 點으로 이어지는 線의 외교이었다.
그런데 5세기의 질서는 주변부에서 3 내지 4 정도의 核을 중심으로 동시에 전개하는 多重
혹은 '多核放射狀 外交'형태가 되었다. 즉 중국의 남 북조와 고구려를 중심축으로 각국들은
매개국가가 없이도 동시에 여러국가들과 직접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또 중심국들 사이에도
복합적인 외교관계가 형성되고 주변국들간에도 인접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에 직접
교섭을 맺었다.이러한 외교형태의 질적인 변화는 황해연안지역에서 두드러졌다. 전 시대에는
해양교통의 한계로 직접교섭이 힘들었으나 이젠 가능해진 것이다. 고구려는 多重放射狀 外
交의 틀 속에서 對中外交를 등거리외교의 형태로서 추진하기 시작했다.
북방에서는 北燕 柔然 庫莫奚 契丹 吐谷渾 北魏 등이 복합적으로 갈등을 일으키고 黃海
에서는 해양세력이 질서형성에 요인으로 등장했다. 북방의 柔然은 424년(송 元嘉元年)에 6만
기를 거느리고 북위를 쳐들어 왔고, 반대로 다음 해에는 북위가 유연을 정벌하였다. 그 과정
에서 유연은 송나라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북위의 배후를 압박하였으며, 공동의 군사작전까
지 도모했다. 그러나 남조와 북조의 대결은 군사전에서 점차 외교전으로 양상이 변화되었다.
서부지역의 吐谷渾 역시 등거리 외교를 하면서 국익을 취하였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外交질
서 속에서 장수왕은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중심국가로 성장시켜야 했다.
고구려는 남북조와 함께 동아질서의 三角軸을 이루고 있어서 국제역학관계를 조정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중국과 등거리외교를 추진하고, 백제계 세력을 외교적 군사적으로 제압하며,
이를 위해서는 해양활동세력을 봉쇄하는 일이 필요했다. 이제 외교가 동아질서의 재편에 중
요한 요인으로 등장하였다. 고구려는 북연의 문제 때문에 위와 충돌하였고, 송과 전투를 벌
이기도 하였으나 외교에 치중하여 활발한 교섭이 있었다. 대중관계가 중요해져 분열된
중국을 대상으로 남북조 동시등거리외교를 추진하여 남북조시대인 약 300년간 매우
빈번하게 교섭을 하였다.
고구려에게 北魏는 지리적으로 가깝고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으로 실질적인 도움을 교환할
수 있는 반면에 假想敵國이기도 했다. 남조는 북조를 견제하는 잇점이 있고, 지리적으로는
군사적 충돌이 생길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반면에 문화 경제적으로 유리한 존재이었다.
{宋書}, {南齊書}, {梁書} 등의 高句麗傳에는 배로 바다를 건너오는 사신의 왕래가 항상 있
었다고 되어 있다. 당시 사신들의 왕래는 公的貿易의 한 형태였다. 장수왕이 宋에게 군
사적으로 필요한 말 800필을 준 사실은 실제적인 교역이 이루어졋음을 알수 있다. 고구려와
남조의 교섭 중에는 기록이 안된 민간인들에 의한 경제교역 불교승려와 민간인들의 교류
도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와 남북조는 상호필요한 존재로서 각각 등거리외교가 이루어졌다. {南齊書}
에는 '--太祖 建元 3년 사신을 보내와 공물을 바쳤고, 배로 바다를 건너오는 사신의 왕래
가 항상 있었다. 그들은 위 오랑캐에게도 사신을 보냈다.'라는 기사가 있다. 고구려가 남북
조의 갈등을 등거리외교로 적절하게 이용한 기록도 있다. '그들은 (魏)오랑캐에게도 사신을
보냈지만 세력이 강성하여 南齊의 제어를 받지 않았다고 하였다.또한 ---平南參官 顔幼明
과 冗從僕射 劉思斅가 (魏)오랑캐에 사신으로 갔더니, 오랑캐의 元會에서 고구려의 사신과
나란히 앉게 하였다.…' 모두 고구려의 위상과 등거리외교의 실상을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물론 북위와 유연 등과의 갈등 또한 고구려의 등거리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주었다. 그
런데 이것은 활발한 해양활동이 토대가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한편 장수왕은 질서의 재편과정에서 백제 신라 가야 왜 등과도 위상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
다. 즉 백제 신라의 힘을 약화시켜야 했고, 倭를 견제해야 했다. 백제는 해양을 활용한 외교
전을 펼쳐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므로써 고구려 중심의 한반도 질서에 도전이 가능했고,
한편 南朝를 통해서 정치적인 압력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성장하는 백제
세력을 견제하고 북조의 위협을 약화시키려면 남조와 관계를 긴밀히 해야했다. 그런데 고구
려는 백제가 남조와 교섭을 한 것 보다는 더 활발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적어도 공적인 使
行의 경우는 고구려가 월등하게 많았던 것으로 나타난다.어쨋든 백제는 해양력을 바탕으
로 대외로 진출하면서 다시 강국이 되었고, 점점 더 일본의 고대국가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
하였다.
왜는 이 시기에 이르러 국제질서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加耶 高句麗
百濟 등이 왜와 교섭을 가졌으나 동아시아 전체질서 속이 아닌 일본열도 내의 각개세력과
한반도 내의 각국과의 개별적인 관계였으며 형태 또한 능동적이거나 대등한 정도는 아니
었다. 그런데 5세기로 오면서 倭는 동아시아 질서에 참여한다. 국제적인 고립과 일방적인 종
속성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백제 및 중국과의 교섭을 원했다. 왜왕 부(武)가 바친 上表文의
기록은왜가 백제의 선박을 이용했고, 고구려가 그 교섭을 방해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이렇게 倭는 국제질서, 특히 한반도의 질서재편작업에 능동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
다. 황해남부를 무대로 南朝, 倭, 百濟를 연결하는 해양질서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고구려
등을 겨냥한 대북압력이 될 수 있었다. 해양세력의 활동은 역사발전의 변수가 아니라 이젠
역학구도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위와 같이 5세기에 일어난 국제관계와 외교상의 질적인 변모는 동아시아 각국간에 해양적
질서를 바탕으로 等距離와 多重放射狀 형태를 특징으로 하는 全方位 外交가 시작되었다. 그
리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군사력의 개발과 해양문화의 발달,해양활동 영역의 확보가 필
연적으로 요구되었다. 이렇게 국제정세가 질적으로 변화해는 과정에 있었던 장수왕은 더욱
본격적으로 남진정책을 추진했었다.
長壽王은 국제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대외적으로 多重放射狀 外交를 전개
하고,그를 위한 제반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였는데, 그것은 남진정책과 首都의 南遷으
로 표면화된다. 앞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는 이미 해양과 남진의 중요성을 인
식하여 1단계로 압록강 하구의 진출과 황해로의 진출을 꾸준히 모색하였다. 2단계인 광
개토대왕 시대까지는 요동지방과 해양의 영향력 확대, 대동강 하구 장악, 경기만에 대한
일시적인 점령이었다. 그러나 3단계인 장수왕시대에 주어진 과제는 남진정책을 새롭게
나타난 東亞地中海의 질서 속에서 고구려의 입지와 위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정책이었다.
즉 꾸준히 추진해온 남진정책의 완성이었다.
장수왕은 대동강 유역을 다양한 세력들간의 불안정한 각축장이 아니라 남진정책을 완성시
키고 더욱 남진하는데 필수적인 교두보이자 전진거점으로서 지배해야 했다. 그리고 대외교
섭 통로인 경기만을 완전하게 장악해야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장수왕은 수도의 남천과
한강 이남으로의 적극적인 진출을 시도하였다. 수도남천의 배경과 의의는 내부적 요인 및
국제질서의 재편과정에 대한 능동적인 대응정책의 소산이다.
4세기 이후에 한동안 고구려와 백제는 평양과 이남지역을 중심으로 공방전을 벌였다. 양국
간에 국경선이 불분명했고, 중앙의 통제력이 덜 미쳤으며, 상대적으로 지방 토호세력들이 어
느정도의 독자성을 가진 채 성장했기 때문이다.이러한 현실은 중앙집권화와 강력한 대국
가건설을 추진하는 장수왕에게 남진정책의 명분과 필요성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수도의 남천에는 이러한 국내적 요인과 함께 당시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질서의 재편과정
속에서 국제적인 요인이 더 강했을 것이다. 이미 동아시아는 해양질서가 강력하게 작용하
고 있었으며, 해양외교와 군사활동이 빈번했다. 또한 각 나라들 사이에 전개된 외교활동의
구도는 多重放射狀 構造로 변모되었고, 군사활동 영역 역시 多重構造로 변화되었다. 따라서
신속하고 능동적인 외교교섭과 활발한 해양활동을 통하여 중핵조정 역할을 하려며는 首都의
南遷은 적극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또한 對百濟活動을 염두에 둘 때 황해해상권을 장악하고, 對中國外交를 독점하고 통제하는
일은 필수적이었다. 백제와 중국 남조지역은 해양교섭 과정에서 오고가는 항로가 달랐다. 갈
때는 황해중부에서 직접 횡단하다가 중국근해에 접근한 다음에 다시 남진하는 항로를 취했
을 것이다. 한편 남조에서 백제로 올 경우에는 해류의 흐름이 양자강의 바깥 바다에서 한반
도의 서남부 해역으로 이동하므로 봄에 부는 남풍계열의 바람을 이용해서 양자강 이남에서
황해남부를 직항한 다음에 한반도의 서해남부 해안으로 진입하는 항로를 사용했다. 고구려
는 백제의 對中 교섭거점이 변하고 교통로가 이동한데 따른 현실 속에서 황해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장악하는 일 뿐 만 아니라 정치 외교의 중심을 점차 남쪽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수도의 선정과 이동은 군사적 측면, 즉 전략적 가치로 보아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長壽王代에 들어와서 변모한 군사적 환경과 전선개념의 변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구
려의 戰線은 크게 3개 전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북부와 서부에 각각 북방종족과 한족이라
는 부담스러운 상대를 두고 거대한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양대전선은 때때로 혼동을
일으키고 하나로 겹쳐지는 경우도 있었다. 만주지역이 가진 地政學的인 위치로 인하여 야기
되는 혼란이었다.
國內城은 만주지역에 힘의 중심을 두기에 적합한 膨脹據點都市이며 주변의 소국가들을 병
합하는 초기 성장과정에서는 정복국가의 군사도시로서 적합했다. 그러나 점차 북과 서쪽의
강한 외압을 받았으며, 때로는 首都가 위협당하거나 점령당하는 사례까지 있었다. 國內城은
외교전에도 불리하였다. 외교의 주요 대상은 중국이었고, 북방은 기본적으로 진출과 침략의
적대적인 관계이었다. 따라서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는 육로교통의 어려움 때문에 해
로를 통한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국내성은 그에 부적합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동천왕때
이후에 수도를 천도하자는 논의와 시도가 여러번 있었으며, 재차 수도를 이전하는 현실적
인 필요성이 조성되는 상황 속에서 長壽王代의 5세기가 되었다.
장수왕은 首都의 남천을 통해서 전선과 수도와의 거리를 넓히고자 했다. 중국과는 육상전
뿐만 아니라 해상전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황해북부가 중국세력의
海上作戰圈안에 들어간 것은 이미 漢과 衛滿朝鮮과의 싸움에서 비롯된다. 後漢 光武帝의 낙
랑정벌과 魏明帝의 낙랑 대방 정벌은 해양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고구려의 낙랑 대방세력의
구축에도 해양활동이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더구나 중국세력의 해양능력이 확대되었으므로
해양전을 염두에 둘 경우에 고구려는 공격과 방어에 용이한 지점을 수도로 삼는 것이 필요
했다.
한편 남부전선은 북방이나 서부전선에 비하여 규모는 작으나 잦은 충돌이 발생하는 항상
긴장된 상태에 있었다. 高句麗는 한반도 내의 覇者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백제, 신라에
대한 꾸준한 압력과 함께 군사적으로 신속한 대응체제를 갖추어야 했다. 때문에 남방진출의
거점이나 전진기지를 국내성이나 국토북부에 두어서는 효과적인 진출을 할 수가 없었다. 남
쪽으로 수도를 전진배치하면서 압박을 강하게 하는 정책을 써야 했다.
그런데 남부전선의 전진배치 전략은 해양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고구려는 복구된 백제
의 해상작전능력을 제어하기 위한 해양작전반경의 확대가 필요했다. 수도를 옮긴 이후에 고
구려의 재공격이 이루어지고 영토가 서부해안의 牙山灣 유역까지 남하한 사실은 평양성 천
도배경과 해양활동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반증한다.결국 북방과 서방의 군사적 압박
을 완화하고, 외교전을 펼치며, 황해해상권을 확보하기 위하여는 수도의 남천이 필요했다.
백제와 신라를 제압하고, 그것의 성공을 위해서는 해상활동능력을 확대해야 한다.
한편 平壤지역은 내륙교통에 편리하므로 실질적인 중앙적 수도의 기능을 할 수가 있는데
육로교통과 내륙수로교통에도 적합한 곳이다. 평양을 중심으로 淸川江이 있고, 특히 남쪽으
로는 禮成江, 臨津江, 漢江이 하계망을 구성하면서 서해중부로 흘러들어가 경기만을 구성한
다. 따라서 서해중부 이북의 연안 해상권을 장악하면 사람과 물자의 수송체계 장악이 용
이하다.
그 외에 평양지역의 확보는 한강과 대동강으로 구분된 海岸活動圈을 하나로 통합하여 중부
이북을 완전히 활동영역으로 할 수 있게 된다. 강의 水路를 통해 바다와 內陸地方과의 연결
이 원활하여 교역에 활용할 수가 있다. 평양을 사신선 등의 발진기지로 함으로써 중국과의
교통, 특히 남조 교통로의 수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더구나 황해도 북부를 포함한 평양지역
은 중국문화, 요동문화, 한강이남문화와 심지어는 일본열도의 倭文化가 만나던 한반도 최
대의 국제문화 교차점이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국제적 발전을 위해서는 더없이 적합한 지역
이었다. 살펴본 대로 평양은 多重放射狀 外交 등 국제관계와 정책집행에 유리한 위치에 있
다. 평양성 천도는 해양활동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역으로 해양활동의 성장
은 고구려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끼쳤다.
결론적으로 장수왕의 수도남천과 남진정책은 백제, 신라를 겨냥한 영토팽창전의 성격이 아
니라 동아지중해의 세력재편 구도속에서 추진된 국가발전전략의 일환이었다. 역학관계의 중
핵에서 질서재편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륙은 물론 한반도 중부이북의 장악이 필
요했고, 해양활동능력의 강화 역시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남진정책과 수도의 남천은 시대적
욕구를 달성시켜줄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었다.
5 결론
고구려는 압록강의 중류지역에서 건국하였으나 지정학적인 조건과 존속기간 내내 전개된
주변의 국제정세로 인하여 동서남북으로 팽창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남진정책에 비중을
많이 두었으며, 해양활동도 활발하였다. 그런데 이 두가지 성격은 상호불가분의 연간성을 가
지고 있었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내륙국가의 한계를 극복할 목적으로 해양으로의 진출을 시도하ㅣ였으
며, 아울러 남진정책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본문에서 살펴본바아 같이 고구려의 이 정
책들은 몇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단계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일정한 시대, 특정
한 왕의 정책에 추진된 것이 아니라 존속기간 내내, 즉 장수왕이 남진을 완성하기까지 전
기부터 각 시대가 처한 국내적 조건과 국제질서의 상황 속에서 장기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다. 둘째, 첫 단계는 해양출구의 확보와 한군현세력의 축출이라는 국가정책의 수준이었
다. 두번째 단계는 광개토대왕이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속에서 능동적인 대응전략을 수
립하기위한 내부의 환경과 조건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본격적인 해양활동을 필요
로 했고, 이 능력이 국제질서를 변화시키는 주요한 인자로 등장하였다. 세번째 단계는 장수
왕 시대이다. 수도를 평양성으로 이전하고, 남진정책을 과감하게 실천하여 한반도의 패자가
되었다. 또한 경기만을 장악하여 황해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확보하면서 동아지중해의 해양
질서에 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고구려는 국제질서의 중심부에서 국가의 장기전략으로서 해
양활동과 남진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장수왕대의 성공으로 고구려는 다중방사상 외교가 전개
되는 국제질서 속에서 동아지중해의 중핵국가로서 조정역할을 수행하였다.
동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흥 313-06-257977
서울시 양천구 목 6동 목동 아파트 219-1405호
고구려의 남진전략과 해양활동 연구
( 동아지중해 중핵조정론을 중심으로)
윤명철 ( 동국대 사학과 교수)
고구려(Koguryo)는 중국, 북방의 遊牧種族들, 한반도의 백제(Paekche)와 신라
(Shilla) 및 왜(Wa)의 세력이 마주치는 접점에 있었다. 또한 대륙과 해양을 공유
하였고, 중국지역 및 遼東(liaotung)지역 등과는 황해북부, 百濟와 황해중부 이북
을 경계로, 왜와는 동해를 가운데 두므로써 해양질서의 영향이 강했다. 필자는 이
러한 특성에 주목하여 東亞地中海(Eastasian-mediterranean-sea)개념을 모델로
설정하였다.
고구려는 이러한 특성을 살려 국가의 발전전략을 수립하고 실천하였으며, 국제
질서와 대외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는데 이용하였다. 특히 동서남북 동시
진출정책을 펼쳤으나, 특히 남진정책을 중요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인 특
성상 해양활동도 활발하였다. 그런데 남진정책과 해양활동은 깊은 상관관계를 맺
고 있었다.
고구려의 존속기간 내내 추진한 정책들은 몇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단계성을
지녔다. 일정한 시대, 특정한 왕의 정책으로 추진된 것이 아니다. 전기부터 장수왕
대까지 국내적 조건과 국제질서의 상황 속에서 장기정책으로 추진된 것이다. 특히
광개토대왕(King Kwanggaeto)은 국제질서의 재편과정 속에서 능동적인 대응전략
을 수립하기 위하여 본격적인 해양활동이 필요했다. 장수왕(King Changsu)은 수도
를 평양성(Pyungyang Castle)으로 이전하고, 남진정책을 과감하게 실천하여 한반도
의 패자가 되었다. 또한 경기만을 장악하여 황해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확보하고, 동
아지중해의 해양질서에 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고구려는 국제질서의 중심부에서 국
가의 장기전략으로서 해양활동과 남진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장수왕대의 성공으로
多重放射狀 外交가 전개되는 국제질서 속에서 동아지중해의 중핵(core)국가로서 조
정역할을 수행하였다.
SUMMARY
Toward the south strategy and the Ocean Activity during
Koguryo kingdom
--The Eastasian-mediterranean-sea and the Core-Oriented
Arbitration--
Youn, Myung-chul
Department of History
DONGGUK UNIVERSITY
professorr
The Development of the East Asia with the Mediterranean-like characteristics
involved several-historical aspects including interrelationships on economic, cultural, and
socio-political dynamics. Subsequently the order of its land, and ocean interacted
simultaneously. The power-political dynamics of Kogury in the East Asia should be
regarded as a middle core, considering the oceanic aspects in this area.
First, the national activities and developments through the ocean may be verified in
context of historical facts and documents. It is, Therefore, natural that the inter-relation
ships between Kogury and its surrounding areas be studied complexly in general points
of view. The writer analyze the process and the occasion of the activity in early oceanic
period of Kogury in Ch. II. Kogury begined its activity in the ocean with the
negotiation with W (吳) dynasty of China and could be entered an international order
through this progress. The oceanic routes in this period were the variable- degreed
route of middle of the Yellow Sea and the port was Seoanpy ng(西安平). Kogury
occupied the Seoanpy ng, an important traffic route to expel the power of Han
(漢)dynasty of China(中國) from the Korean Peninsula and to command the maritime
power of the northern part of the Yellow Sea. Through these battles, the Seoanpy ng
was governed by Kogury and Lo-lang Commandary(樂浪郡) and Tai-fang Commandary
(帶方郡) were ruined.
The Kings who performed the activity in the ocean were King Kwanggaet'o(廣開
土大王) and King Changsu(長壽王). In the early stage of the 5th century, the traffic and
correspondence were developed by the development of the activity in the ocean and the
order in the ocean possessed the power of the diplomacy and the military. King
Kwanggaet'o extended the territory of Kogury and led international society through the
ex-defense strategy. To adopt swiftly for stability of the Southern battle and new order
of the ocean, King Kwanggaet'o tried the spread of the activity in the ocean. Namely,
in order to secure the initiative of the diplomacy and the military, he attacked the
mid-western seacoast of Paekche and secured the right of the ocean monopoly. The
battle of Kwanmi castle(關彌城) means Kogury 's attempts to secure a base of the
activity in the ocean of Paekche(百濟). A counterattack of Paekche was extended to
union of Kaya(加耶) and Wa(倭).
There were happened the reorganization of order of the Korean Penisula generally
through the union made struggle against Kogury and Silla. In the early of 5th
Century, the international standing of Kogury rised after a triumph of Kogury in the
process of the reorganization of the international order.
Kogury policed to follow a stable and a leap simultaneously. To accomplish the
reorganization of the international order, Kogury transferred its Capital to P'y ngyang
Castle(平壤城) at the era of King Changsu. King Changsu changed a policy to adapt the
military environment. One is a change of conception of battle and the other is the
emphasis on captal's function reflecting on public security, diplomacy, economy and
culture and military affairs. P'y ngyang Castle was suit to follow the activity in the
ocean. Kogury had become an axle of multiple radiate diplomacy in the order of the
East Asia.